소설리스트

10화 (11/23)

10.

퇴원은 기분 좋은 일이었다. 비록 목발 신세에다 적어도 한두 달간은 재활치료를 받아야 했지만 지긋지긋한 소독약 냄새를 떠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았다.

존 리든은 한 손으로는 목발을, 다른 한 손으로는 커다란 바나나 다발을 들고 천천히 걸어 같은 층의 특실로 향했다. 퇴원하기 전 인사를 해 둘 곳이 있었다.

탕탕.

존 리든은 예의상 문을 한번 두드린 다음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훌쩍 열어 버렸다.

병실의 모습은 기대하던 것과는 조금 달랐다. 커다란 하얀 침대에 알렉산더 랜스키가 혼자 누워 있었다. 당연히 세스가 함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존 리든은 실망과 동시에 야릇한 안도를 느꼈다.

“여어, 병문안이다.”

존 리든은 바나나 다발을 알렉산더 랜스키의 얼굴을 향해 훌쩍 집어 던졌다. 한 손에는 깁스를, 다른 한 손에는 깁스 못지않은 두께의 붕대를 두르고 있던 그는 날아오는 바나나를 받지 못하고 고개만 틀어 피했다. 퍽 소리가 나며 바나나가 아슬아슬하게 베개를 때렸다.

“……맞았으면 고소했어.”

알렉산더 랜스키가 일그러진 얼굴로 인사를 받았다. 존 리든은 어깨를 으쓱하며 침대 곁으로 다가갔다.

“세스는?”

“네가 걔를 왜 찾아.”

“첫 남자의 권한이다.”

알렉산더 랜스키가 존 리든의 머리 쪽에 짧은 시선을 던졌다.

“검사를 한번 받아. 너도 몰랐던 결과가 나올 테니.”

“어떤 검사를 해도 너보다야 정상 수치겠지.”

존 리든은 붕대를 칭칭 두른 손을 눈으로 가리키며 보란 듯 혀를 찼다.

“어제는 뭐, 굉장했다며? 병원이 난리가 났던데. 오죽하면 내가 다 잠에서 깼겠냐.”

존 리든은 그새 친해진 간호사를 통해 어젯밤 응급실이 전쟁터가 된 사연을 들을 수 있었다. 환자 여덟이 실려 왔는데 그중 여섯은 거짓말을 조금 보태 시체가 되기 직전이었고 의식을 유지하고 있었던 것은 둘이 고작이었다. 피해자와 가해자가 자웅동체의 괴물처럼 한 몸에 단단히 얽혀 있는 끔찍한 사고였다. 패트롤카 다섯 대 분량의 경찰이 병원에 들이닥쳤고, 그에 못지않은 숫자의 변호사들도 호출되었다.

밤새도록 응급실이 단단히 통제되는 상황은 다음 날 아침이 되면서 싱겁게 막을 내렸다. 어찌 된 일인지 팽팽한 대치를 이루던 무리들이 아침이 되자 씻은 듯 한꺼번에 사라졌던 것이다.

존 리든은 그때서야 그 여덟 중에 세스와 랜스키가 끼어 있었다는 사실을 들을 수 있었다. 그뿐 아니라 병원에 실려 온 여덟 명 중 절반이 알 만한 인간들이었다. 끔찍한 상상이 뇌를 후벼 팠다. 무슨 일이 있을지 생각해 보는 것만으로도 몸 어딘가가 욱신욱신 저려 왔다.

아침 내내 안달복달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니던 존 리든은 세스의 상태가 다른 이들에 비하면 그나마 양호하다는 사실을 거듭 확인하고서야 괜찮은 얼굴이 되었다.

알렉산더 랜스키는 좀 더 심하게 다친 것 같았지만 그따위야 자신이 걱정해 줄 바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이제껏 의식도 못 차리고 있다는 다른 환자들에 비한다면 랜스키도 중상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무슨 일이었어?”

“그걸 네가 왜 물어.”

“세스가 네놈 새끼와 어울리다 다쳤잖아. 그걸 내가 신경 안 쓰면 누가 써? 어쩌다 그렇게 된 거냐니까?”

알렉산더 랜스키는 존 리든의 어깨 너머로 문을 한번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물었다. 진지한 얼굴을 보면 놀리려고 묻는 게 아니었다.

“네 다리는 언제 멀쩡해지는 건데?”

“……뭐야, 말 돌리는 거야?”

“그런 거 아니니까 대답이나 해. 걸어 다닐 만해?”

존 리든이 눈을 가늘게 늘였다. 알렉산더 랜스키의 표정이 평소와는 다르다는 것을, 그게 단순히 이마부터 눈썹 위까지 꿰맨 자국이 남아서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

“목발 짚고 있는 거 보면 몰라? 한 달은 재활이야.”

“……급한 대로 쓰려고 해도 도움이 안 되는군.”

존 리든이 버럭 핏대를 세웠다.

“지금 그거 일부러 하는 소리냐? 내가 왜 네놈 새끼한테 도움이 되어야 하는데?”

알렉산더 랜스키가 턱 끝으로 문을 가리켰다.

“저거부터 닫고 와. 밖에 듣는 사람 있는지 살펴보고.”

“……씨발, 내가 네 집에서 굴러다니는 메이드로 보여?”

“세스가 없을 때 해 둘 얘기야.”

“그게 무슨…… 젠장.”

결국 존 리든은 목발을 짚고 절뚝절뚝 걸어서 문을 닫은 다음 다시 절뚝절뚝 걸어왔다.

“무슨 소리를 하려고 사람을 이따위로 부려 먹어? 괜히 세스 핑계 댄 거라면 바나나가 아니라 목발로 맞을 각오해라.”

알렉산더 랜스키는 존 리든의 시비를 아무것도 아닌 듯 흘려보냈다. 여유가 없는 눈이었다. 평소의 그가 아닌 것 같아 존 리든은 괜히 침을 한번 삼켰다.

“왜 그래? 무슨 일이야?”

“헤이워드가 세스를 불러내서 다른 놈들하고 사진을 찍었어. 일로인에 뿌릴 생각으로.”

“……뭐?”

존 리든의 얼굴이 목발처럼 단단히 굳어 갔다. 혹은 바나나처럼 물컹하게 녹아 흘렀다. 차라리 머리가 이상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미친…… 뭘 어째? 그 씨발, 뭐…… 그게 무슨…… 대체 무슨 말을…….”

사람이 사람에게 그런 짓을 했다. 그저 학교에서 마주치는 밥맛없는 인간들이 할 법한 짓이 아닌, 그보다 훨씬 더 끔찍하고 잔인한 짓을. 사람이 사람에게 그런 짓을 할 수 있었다는 게 다 믿기지도 않았다. 그 대상이 세스였다는 것도 믿고 싶지 않았다. 무엇보다 저런 말을 내뱉는 알렉산더 랜스키의 표정이 너무 잠잠했다.

거짓말이었다. 자신도 이런데 그놈의 랜스키가 아무렇지 않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게라도 안도하고 싶은데 알렉산더 랜스키의 두 팔이 눈에 들어왔다.

거짓말이어야 했다. 하지만 알렉산더 랜스키가 저렇게 다쳐 있었다. 그놈의 왕자가.

“그게…… 진짜라고? 세스를…… 그러니까 그놈들이…….”

알렉산더 랜스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가 하려는 얘기는 지금부터였다.

“흥분하지 마. 그건 내가 어제 다 했어. 문제는 그게 아니야.”

“그게 씨팔, 무슨 개 같은 짓이야! 헤이워드 그건 씨팔, 사람이 맞긴 해? 미친, 그게……,”

“그만하랬지.”

존 리든의 뒤늦은 흥분을 내리누르려는 듯 알렉산더 랜스키의 고요는 한층 더 무거워졌다.

“세스의 전화가 계속 꺼져 있었어. 전화를 안 받은 게 아니라 아예 꺼져 있었다고. 그런데 갑자기 나한테 전화가 온 거야. 세스가 건 게 아니야. 세스 목소리는 들리지도 않았어. 대신 저들끼리 무슨 짓을 하는지 신나게 떠드는 말이 들려왔지. 친절하게도 장소까지 언급했어.”

“그…… 그게 무슨……?”

“나를 불러 낸 거야. 세스는 그저 핑계였어.”

……헤이워드도 핑계였겠지. 그냥 이용해 먹은 거야. 알렉산더 랜스키가 감정을 누르며 느리게 덧붙였다.

존 리든은 그가 무슨 얘기를 하는지 알아듣지 못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존 리든에게는 루이 랜스키 같은 미친 형이 없었다.

“왜…… 왜? 무슨 소리야, 그게?”

“그건 네가 알 것 없어. 대신 세스를 지켜봐. 가능한 한 떨어지지 마. 네 집에 데려가 재우든지 해.”

“씹, 그러니까 왜냐고!”

친구도 하지 말라며 이를 드러내던 알렉산더 랜스키가 하는 소리치고는 확실히 수상했다.

“세스가 왜……!”

“아직 안 끝났어.”

멀끔한 모습으로 그저 고요하기만 한 것 같았던 알렉산더 랜스키의 눈이 사실은 아주 어두운 상태였다는 것을 존 리든은 이제야 알아챘다.

“나는 오늘 집으로 들어가. 노친네가 와 있는 데다 내가 사고까지 치는 바람에 더는 못 움직여. 그래서 너한테라도 말해 두는 거야. 시원찮은 무릎 때문에 자신이 없으면 사람을 사서라도 세스를 지켜보게 해. 돈 쓴 건 나중에 챙겨 줄 테니까.”

알렉산더 랜스키가 내뱉는 말 한 마디 한 마디는 그가 자신과 얼마나 다른 사람인가를 깨닫게 했다. 부친이라는 절대 권력을 그토록 경계하는 모습도, 그래서 남자 친구를 드러내 놓고 지켜볼 수 없다는 것도, 사람을 따로 사라는 말도 모두 존 리든의 사고방식과 한참 거리가 멀었다.

“너희 집 경호원들은 다 어쩌고? 그 사람들을 이용할 수는 없어? 그래도 프로가 나을 거 아냐, 사람 지키는 일은.”

“안 돼.”

알렉산더 랜스키가 선을 긋듯 딱 잘라 말했다.

“그 사람들은 내 말만 듣는 게 아니니까.”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이런 상황에서라면 가장 믿지 못할 인간들이야.”

“이런 상황……?”

존 리든은 벌써 미쳐 버린 것 같은 머릿속을 억지로 다독였다. 생각을 해야 했다.

“하…… 하, 씨발. 그러니까 지금 너는 세스를 불러다 그렇게 만든 인간이 설마 네 집구석에 있을 거라고…… 그런 말을 하는 거야?”

“그 인간이라면.”

가장 가능성이 높은 것은 루이 랜스키였다. 부친이 배런트로 돌아오는 시기를 맞춰 정확히 일을 터트린 기막힌 악취미는 사이코 짓이 아니라고 할 수도 없었다.

“나를 노리는 거니까 세스만 이용하지 못하게 하면 돼. 눈 떼지 마.”

존 리든이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었다.

“하…… 씨발, 너는 뭐 내가…… 젠장, 너 같은 줄 아냐. 나는 그런 영화 같은 건 모르고 살았다고. 프로를 고용하라니, 그게 무슨 개소리야. 내 용돈이면 십 년은 모아야 될 텐데.”

“그럼 돈은 가능한 한 빨리 보내 줄게. 그 전까진 별수 없지. 네가 죽어라 보살피는 수밖에.”

“씨발, 너는 무슨 말을 그렇게 가볍게 해. 다른 사람도 아니고 세스 얘기를.”

“자신 없어?”

존 리든은 새삼스럽다는 표정으로 알렉산더 랜스키의 모습을 살폈다. 밀레나 헤이워드까지 여섯 명을 곤죽으로 만들어 놨다는 그는 저도 양 손등에 금이 간 상태였다. 한쪽은 피부 밖으로 뼈가 드러날 정도로 상했다고, 입원 기간 동안 얼굴을 익힌 간호사가 수선을 피우며 말해 주었다.

알렉산더 랜스키의 손등은 타격에 의해서 금이 간 게 아니었다. 스스로 내는 힘을 이기지 못해 그렇게 된 것이었다. 프로 격투가들이 훈련이나 경기 중에 종종 겪는 일이라고 했다. 미쳐 버린 아드레날린이 육체의 한계를 잊어버리고 날뛴 결과였다.

“……괴물 같은 새끼.”

모두가 그처럼 괴물이 될 수는 없었다. 헤이워드 패거리가 결코 용서할 수 없는 짓을 저질렀다고 해도, 그 대가로 사람을 제 주먹뼈가 부서질 만큼 두들겨 패는 짓은 할 수 없었다. 알렉산더 랜스키가 잘못된 것이었다. 그렇지만 존 리든은 그 잘못에 분노하는 게 아니라 자신이 그 잘못을 따라갈 수 없다는 것에 초조해하고 있었다.

세스는 아직 알렉산더 랜스키의 것이 아니었다. 자신이 포기하지 않고 있는데 그럴 수는 없었다. 그 역시 뭐라도 할 수 있어야 했다.

“알았어. 그렇게 할게.”

“그래.”

손을 움직일 수 있었으면 알렉산더 랜스키가 악수라도 하자고 나올 것 같았다. 그럴 리 없지 않냐며 존 리든이 혼자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데 조심스러운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들어가도 돼?”

세스였다. 존 리든은 목발로 절뚝대며 걸어가 문을 열어 주었다.

“……뭘 노크까지 하고 그래. 그냥 들어오면 되지.”

입이 엉뚱한 말을 먼저 하는 건 괜찮냐는 말 한 마디가 힘들어서였다. 세스는 여기저기 맞은 흔적이 역력한 모습으로, 얼굴만이라면 랜스키보다 더 많은 반창고를 붙인 채였다. 존 리든은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세스의 반창고를 건드렸다. 세스는 평소처럼 피하지도 거부하지도 않은 채 그저 얼굴만 찡그렸다.

“몸은 좀 어떠…… 아, 젠장.”

도무지 손이 떨어지질 않았다. 뗄 수가 없었다.

그가 병원 침대에 누워 하루 뒤의 퇴원을 기다리며 시시덕거리고 있을 무렵 세스는 듣기조차 괴로운 일을 겪었다. 죄책감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사나운 감정이 얼굴 거죽을 뚫을 기세로 자라났다. 아마도 저는 같은 상황에서라도 알렉산더 랜스키처럼 굴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를 이해할 수는 있었다.

“……젠장.”

존 리든이 어금니를 씹었다.

“왜 여기 있어?”

세스는 상처가 있으나 없으나 평소와 비슷한 표정으로 물었다. 평소라면 서운했을 세스의 둔감함이 오늘은 어쩐지 위로처럼 부드럽게 다가왔다.

“……병문안 온 거야. 저 바나나 보이지? 내가 들고 왔어.”

사실 바나나를 들고 온 것은 커트 애런슨이었다. 화해의 표시였다. 그가 세스를 때렸다는 사실을 안 존 리든이 커트 애런슨이라는 새 환자를 위해 옆 병실을 예약할 것처럼 요란하게 굴었던 사건에 대한 결과이기도 했다. 원래는 존 리든도 그의 턱을 갈기려고 들었지만 알렉산더 랜스키의 주먹이 상상 이상으로 매서웠다는 애런슨의 울먹임에 화를 한번 참았다. 애런슨은 그의 관대함에 감사하며 다음 날 바나나 한 다발을 사 왔다.

“응.”

존 리든에게 고개를 한번 끄덕인 세스는 조용한 걸음으로 알렉산더 랜스키에게 다가갔다. 그가 잘 들리지 않는 팔을 억지로 들어 올리자 세스는 자연스럽게 그의 팔 안에 고개를 묻었다.

그 꼴을 보고 있자니 좀 전과는 다른 종류의 화가 치솟기 시작했다.

“의사가 뭐래?”

알렉산더 랜스키가 묻자 세스가 답했다.

“나을 거래.”

“언제?”

“좀 지켜봐야 한대.”

“돌팔이 새끼.”

알렉산더 랜스키가 팔에 살짝 힘을 주자 세스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눈이 마주치자 그게 신호인 것처럼 세스가 상체를 길게 뻗어 알렉산더 랜스키의 이마에 생겨난 상처에 조심스러운 키스를 남겼다. 둘은 벌써 키스가 호흡만큼이나 익숙한 사이가 되어 버렸다. 그게 존 리든의 눈에도 보였다.

더는 못 참고 끼어들었다.

“그러다 상처 덧나. 하지 마.”

세스가 고개를 돌려 존 리든을 바라보다 눈을 치켜떴다.

“덧난다고?”

“응. 그런 짓은 하면 안 돼. 사람 입은 세균의 온상이잖아.”

“아,”

세스가 화들짝 놀란 사람처럼 몸을 뗐다. 알렉산더 랜스키가 존 리든을 노려보았다.

“입 다물어. 어디서 그런 개수작을.”

“수작은 무슨. 그건 의학 상식이야. 어릴 때 치과 자주 안 갔냐? 치과 의사가 만날 하는 소리잖아.”

저도 랜스키처럼 여유롭게 굴고 싶었지만 감정은 잘 숨겨지지 않았다.

“그놈의 과시욕은 이제 이가 갈린다. 참아 주는 것도 한두 번이지. 왜 번번이 사람 앞에 세워 놓고 발정이야?”

“머리가 이상한 놈 하나가 주제도 모르고 자꾸 넘보니까. 받으라는 검사는 안 받고.”

“씨발, 아무렴 내가 너보다 비정상이겠냐?”

“검사부터 받고 와서 다시 말해. 검사비는 내줄게.”

“하여간 말끝마다……. 매사 재수 없게 구는 것도 재주지.”

알렉산더 랜스키는 존 리든이 투덜대는 것을 쳐다보고 있던 세스를 툭 건드려 저를 돌아보게 만들었다.

“난 오늘 집에 들어가.”

“……난 내일까지 있으라던데.”

“넌 더 있어. 일주일 정도.”

“왜?”

“여기가 더 안전할 것 같으니까.”

알렉산더 랜스키는 붕대를 감아 놓은 손으로는 세스의 머리칼을 마음껏 만질 수 없어서 아쉽다는 표정을 지었다.

“호모 쿼터백도 일주일 더 있을 거야. 같은 병실 쓰게 해 놓을 거지만 친구랍시고 괜히 들러붙거든 바로 사람 불러.”

처음 듣는 얘기에 존 리든이 입을 턱 벌렸다.

“뭐……? 나는 오늘 퇴원인데?”

“일주일 더 있어.”

존 리든은 짜증을 내려다가 곧 마음을 고쳐먹었다. 그를 세스와 단둘이 두는 것은 알렉산더 랜스키가 결코 하지 않을 일 중 다섯 손가락 안에 꼽을 것이다. 그런데도 저렇게 나오는 것은 그가 말한 위험이 결코 우스갯소리가 아니라는 뜻이었다. 그 입에서 아쉬운 소리를 한다는 것부터가 그랬다. 분명 부탁인데 별로 아쉽게 들리지 않는 건 알렉산더 랜스키가 개새끼라는 증거일 뿐이었다.

자신도 뭐든 해야 했다. 부모님을 설득해야 한다는 것과 등교가 좀 더 귀찮아질 거라는 점은 마음에 걸렸지만 그런 것을 재고 따질 때가 아니었다. 세스를 지키는 일은 조건을 붙일 수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어쨌거나 세스와 단둘이 한 병실에서 일주일이나 보낼 수 있다는 건 꽤나 좋은 기회였다. 알렉산더 랜스키는 저 꼴이 났으니 시도 때도 없이 문병을 오거나 하지는 못할 것이다.

“뭐, 좋아. 그러지 뭐.”

존 리든이 절뚝이며 다가와 보란 듯 세스의 머리를 쓰다듬기 시작했다. 알렉산더 랜스키의 이마에 힘줄이 솟았다.

“손 안 떼?”

“내가 왜? 이 좋은 기회를?”

존 리든은 약을 올리는 것처럼 히죽이며 세스의 손을 쥐었다.

“병실로 돌아가자. 랜스키는 퇴원 준비라도 하게 내버려두고.”

“아……, 그럼 퇴원할 때까지 여기 있을래.”

예상하지 못했던 대답도 아니었고, 존 리든은 그럼 저도 내내 붙어 있겠다는 말로 약을 올릴 생각이었다. 그러나 알렉산더 랜스키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병실로 가. 쿼터백과 같이.”

“…….”

이해를 하지 못한 세스가 알렉산더 랜스키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주의를 주어야 할 시간이 됐다. 세스가 제 상태를 감추려 했던 것처럼 알렉산더 랜스키 역시 정신 나간 집구석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시시콜콜 늘어놔 세스가 겁을 집어먹기를 바라진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겁을 먹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퇴원 때문에 집에서 사람들이 올 거야. 너와 마주치게 놔두고 싶지 않아. 잘 숨어 있어.”

고개를 끄덕이던 세스는 잠시 망설이다 이렇게 물었다.

“그런데 왜 리든이 같이?”

“저 녀석하고 있는 게 싫어?”

“……아니, 그게 아니라.”

세스가 고개를 아래로 숙였다. 반창고가 여기저기 붙어 있는 뺨이 모를 이유로 조금씩 붉어지기 시작했다.

“그게 아니면.”

“이젠…… 질투, 안 해?”

“……뭐?”

며칠 전까지 세스는 난동에 가까운 질투를 부리던 알렉산더 랜스키를 향해 너도 처음 키스한 사람이 있잖아, 라고 말하는 게 고작이었다. 사람의 머릿속에 질투라는 감정이 있다는 것을 아예 모르는 것처럼 굴었던 세스가 이제는 질투를 이해했다.

“친구도 하지 말라고 했잖아. 그땐.”

알렉산더 랜스키는 계속 고개를 감추고 있는 세스를 보기 위해 상체를 버둥대다가 살점이 떨어져 나간 등짝의 상처가 쓸려 와 인상을 썼다.

“……그게 질투라는 건 이제 알아?”

“응.”

“왜?”

세스가 자꾸만 저를 보려는 알렉산더 랜스키의 시선을 피해서 턱을 삐딱하게 돌렸다.

“나도…… 싫어서.”

“뭐를?”

“너하고 다른 사람이 친한 게. ……마이아처럼.”

손을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건 생각보다 훨씬 더 불편하고 답답한 일이었다. 당장 뭔가를 어떻게 하고 싶은 마음과는 달리 다친 몸은 그렇게나 신속히 움직여 주지 않았다. 그래서 존 리든은 알렉산더 랜스키가 무슨 동작을 하기 전, 재빨리 세스를 끌어다 사이를 벌려 놓았다.

“이 개새끼야!”

알렉산더 랜스키가 버럭 욕설을 뱉어 냈다. 존 리든은 조금도 웃지 않는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너도 마찬가지였어. 무릎뼈를 박살 내 놓고는 내가 꼼짝 못 하는 사이에 세스를 가로채 갔잖아. 더는 안 봐줘, 나도.”

사실은 알렉산더 랜스키가 그를 봐줘야 했다. 존 리든은 더는 따라갈 수 없을까 봐 겁을 먹은 상태였다. 그만하라고, 이젠 나도 좀 앞서 가야겠다고, 존 리든은 필사적으로 마음을 비좁게 만들었다.

“세스는 내가 데려간다. 위험한 상황이라니 너도 어린애처럼 감정만 앞세우지 마. 지금이 속편하게 데이트나 하고 있을 때냐고. 철 좀 들어, 왕자님.”

존 리든은 정말로 세스를 돌려세웠다. 세스는 잘 숨어 있으라던 말에는 이견이 없는 상태라 순순히 존 리든을 따랐다. 알렉산더 랜스키가 신음 소리를 뱉어 냈다.

“저 개새끼……. 다 나으면 가만 안 둬.”

존 리든은 어쩐지 익숙한 욕설에 시큰대도록 턱을 비틀었다. 그도 그랬다. 손 놓고 있을 수밖에 없었을 때 알렉산더 랜스키한테 개새끼라는 욕을 수십 번도 더 했다.

“너도 개새끼고 나도 개새끼면 최소한 공통점은 하나 있는 거지.”

존 리든은 등을 돌린 채로 인사를 건넸다.

“오래오래 앓아라, 랜스키.”

존 리든에게 어깨가 붙들린 채 세스가 고개를 돌렸다.

“갈게.”

알렉산더 랜스키가 버럭 소리를 높였다.

“들러붙으면 바로 신고해!”

존 리든은 목발을 짚지 않은 팔로 보란 듯 세스의 어깨를 바싹 끌어당겼다. 그 상태로 랜스키의 병실을 떠났다.

알렉산더 랜스키는 두어 시간 후 저택으로 돌아갔다.

경찰도, 미디어도 없는 조용한 퇴원이었다.

* * *

이틀이 흘렀다.

“엄청나다. 진짜 아무 얘기도 없어.”

존 리든은 TV 채널을 끝까지 돌려도 그 어느 곳에서도 배런트 카운티에서 벌어진 폭행 사건을 다루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사건이 터진 하루 뒤 지역 방송사에서 짤막하게 보도한 뉴스가 전부였다. 그마저도 알렉산더 랜스키의 이름은 언급조차 되지 않았다.

뭔가를 기대했던 것도 아니었지만 그렇게 마음이 편하지도 않았다. 세스가 어떤 식으로든 위험할지 모른다는 경고도 여전히 속에서 돌멩이처럼 구르고 있었지만 이제는 그렇게 날카롭게 느껴지지도 않았다. 세상은 여전히 평화로웠다. 아무 일도 없었다고 믿어도 좋을 것만 같았다. 세스의 몸에 붙어 있는 반창고만이 그날의 유일한 흔적이었다.

침대에 얌전히 앉아 있던 세스가 고개를 돌렸다. 기척을 느낀 존 리든이 TV에서 눈을 떼고 돌아보자 눈이 마주쳤다.

“왜? 어디 아파?”

세스가 워낙 엄살을 부리지 않는 성격이라 더는 아프지 않은 것인지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아침에 반창고를 갈아 준 간호사의 말을 들어 보면 회복 속도에는 이상이 없다고 했다.

“어디 불편한 데라도 있어? 의사 불러 올까?”

“아니, 괜찮아.”

“근데 왜…… 아,”

존 리든이 세스의 곁으로 다가가 앉았다. 그의 커다란 손이 세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갑자기 걱정됐어?”

“……조금.”

“지금은 걱정한다고 뭐가 해결되는 것도 아니잖아. 그냥 좀 기다려 봐. 아직까지 잠잠한 거 보니 걱정할 일도 없을 것 같은데, 뭐. 이젠 외려 헤이워드가 더 불쌍…… 씨발, 이건 아니지. 실수야, 이 말은 잊어버려. 아무튼 너무 걱정하지 마.”

세스가 존 리든의 손바닥 아래서 고개를 끄덕였다. 문득 눈가에 키스가 하고 싶어졌지만 입술을 들이대면 세스는 벌떡 일어나 거리를 벌릴 것이다.

세스는 알렉산더 랜스키가 시킨 대로 들러붙을 때마다 신고를 하진 않았지만 나름의 선을 그어 놓고 있었다. 그럴 때마다 울적하다가도 결국은 그 선을 넘고 싶어 기분이 사나워지곤 했다. 첫사랑은 너무 복잡하고 어려웠다. 그래서 존 리든은 첫 실연까지 벌써부터 겪을 생각은 없었다. 아직은 첫사랑이었다.

“난 네가 더 걱정이다. 랜스키 놈은 걱정거리만 던져 주고 연락도 없으니. 아니, 전화도 못 하냐고. 고작 손등에 금 좀 간 거 가지고 엄살은.”

존 리든이 애꿎은 불평을 늘어놓자 세스가 그의 손바닥을 머리에 얹은 채로 고개를 들었다.

“이유가 있을 거야.”

“쳇, 그러니 욕하지 말란 소리야? 네가 이 꼴이 된 것도 따지고 보면 랜스키 탓 아냐. 내가 이런 소리도 못 해?”

“랜스키 때문이 아냐.”

세스는 단호했다. 그래서 좀 화가 났다.

“닥쳐, 그런 소리 하지 마. 랜스키 때문이 맞지 뭘 그래. 헤이워드가 사진을 찍어서 협박하니까 그거 돌려받으려고 나간 거라면서. 그까짓 사진이야 남들이 좀 보건 말건. 어차피 랜스키가 하도 사방팔방 티를 내고 다녀서 이젠 애들도 걔가 게이라는 걸 다 알고 있는데.”

“……애들이 아니야.”

“뭐가 아니라는 거야?”

“애들이 아니라 윌리엄 랜스키였어.”

“……그게 무슨 소리야?”

세스가 천천히 설명을 덧붙였다.

“제이 에드거가 전화했어. 나오지 않으면 윌리엄 랜스키한테 사진을 보내겠다고 했어. 나갈 수밖에 없었어.”

“……그, 시팔.”

존 리든이 불쑥 욕설을 뱉어 냈다.

아무리 생각해도 세스가 알렉산더 랜스키를 사랑하는 방식은 이해가 불가능했다. 강간을 해도 참고, 물건 취급을 해도 참고, 손을 뭉개 놔도 참고, 휴대전화를 박살 내도 참고, 그 모든 것을 친절이라고 표현했다. 알렉산더 랜스키를 이유로 눈먼 사람이 되었다.

그깟 사진 한 장 따위가 뭐라고.

아들이 게이였다는 사실에 슬퍼하는 것은 세상 모든 부모가 마찬가지일 것이다. 윌리엄 랜스키라고 해서 더 특별해야 할 이유 같은 건 없었다.

“지 아들이 게이로 태어난 걸 뭐 어쩌라고? 그건 윌리엄 랜스키도 언젠가는 알아야 할 일 아냐? 그걸 뭣 하러 네가 나서서 말리려고 들어? 그랬다고 그쪽에서 고마워나 할 것 같아?”

알렉산더 랜스키라고 해서 특별할 것도 없었다. 존 리든은 제발 세스가 그 사실을 깨닫길 바랐다.

“아니, 그래. 그렇다고 치자. 랜스키가 아웃팅 당하는 걸 말려야 했다고 쳐. 그런데 그 대가로 네가 이 꼴이 되면 안 되는 거잖아.”

알렉산더 랜스키는 세스가 핑계였다고 말했다. 제 집안의 누군가가 사고를 유도하기 위해서 세스를 그렇게 만들어 놨을 거라고. 그게 세스의 말과 묘하게 충돌하는 느낌이었다. 그 정도 일을 하는 집안이 게이라는 시시콜콜한 소문 하나에 예민하게 굴진 않을 것 같았다. 알렉산더 랜스키도 그걸 아니까 세스와 다니는 꼴을 거리낌 없이 드러냈을 것이다. 아무래도 세스가 뭔가를 착각하고 있는 듯했다.

“키스하는 사진 한 장 가지고 목숨 내놔야 하는 상대면 씨발, 그게 뭐야. 어디 무서워서 사람이 붙어 있겠냐?”

존 리든은 세스의 어깨를 붙들어 저를 똑바로 쳐다보게 만들었다.

“그러니까 헤어져. 아무리 생각해도 알렉산더 랜스키와는 엮이지 않는 게 답이야. 그런 미친 집구석은 너나 나 같은 평범한 인간은 감당 못 해. 당장 네 꼴을 봐. 대체 이게 뭐야.”

병원에서 일주일 더 있는 것은 괜찮았다. 잠이 잘 오지 않았지만 어쨌거나 세스를 곁에서 지켜보는 것도 괜찮았다. 다친 무릎이 답답할 뿐이었다. 이 정도는 괜찮았다.

괜찮지 않은 것은 알렉산더 랜스키였다. 단지 질투 때문이라고 하기엔 뭔가 부족했다. 저가 랜스키를 싫어한다는 이유로도 부족했다.

알렉산더 랜스키는 그냥 이기적인 개새끼였다. 이런 지경에 와서도 여전히 세스와 관계를 유지하려고 드는 걸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제 스스로 지켜 줄 수 없는 입장이라면 당연히 세스의 안전을 위해서도 놓아주는 게 맞았다. 이렇게 됐으니 사람을 사서 네가 대신 지켜, 그런 말로 표면만 납땜해 놓을 일이 아니었다.

“헤어져. 그게 다 무사한 길이야. 이런 일이 한 번만 있을 거라고 누가 장담하는데? 랜스키 때문에 매번 목숨 내걸고 살 수는 없잖아.”

세스가 눈으로 한숨을 쉬었다. 아주 길고 피곤한, 마치 오랜 세월 곪아 온 것 같은 그런 한숨이었다.

“랜스키 때문이 아니야.”

“왜 아닌데. 랜스키도 랜스키지만 너도 철 좀 들어. 이런 관계가 얼마나 오래 갈 수 있을 것 같아?”

“랜스키 때문이 아니야.”

반복되는 세스의 말은 고집이 아니었다. 알렉산더 랜스키라면 다 괜찮다는, 그런 눈먼 소리도 아니었다.

“랜스키가 아니라 나 때문이야.”

“……뭐?”

“랜스키는 나하고 있으면 안 돼. 윌리엄 랜스키는 나를 죽이려고 할 거야.”

“왜?”

세스의 말을 듣고 있자니 어쩐지 시야가 이상해졌다. 세스가 아주 낯설게 보였다. 조짐도 없이 겪었던 개기일식이 생각났다. 사물의 형태는 그대로였지만 색깔이 전부 상식에서 벗어나던 그때 같았다.

“너, 그게 대체 무슨 말이야?”

그 순간이었다.

똑똑.

닫혀 있던 병실 문을 누군가가 두들겼다.

느닷없이 병문안을 온 사람은 존 리든의 부모도, 세스의 양부도 아니었다. 존 리든은 모르고 세스만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할 얘기가 있어서 왔어.”

그렇게 말하며 병실에 들어서는 사람은 마이아 페레즈였다.

* * *

“자리 좀 비켜 주겠어?”

할 얘기가 있어 알렉산더 랜스키에게 연락했다가 세스가 병원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는 마이아 페레즈의 말에 존 리든은 어림도 없다는 듯 세스를 제 어깨로 감췄다.

“안 되겠는데요.”

존 리든은 처음 보는 사람이 여자라고 해도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세스를 아예 등 뒤로 감추듯 앞을 가로막고 앉아 마이아 페레즈의 동작 하나하나를 감시의 눈길로 노려보았다.

“중요한 얘기야.”

“그러니 더 있어야죠. 보다시피 얘가 저한테는 그쪽이 한다는 중요한 얘기보다 몇 배는 더 중요한 사람이라.”

“……”

마이아 페레즈는 존 리든에게서 고개를 돌려 세스를 한동안 응시했다. 곧이어 얼굴에 떠오르는 것은 날이 선 분노였다.

“그러니?”

세스는 잠시 생각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래서 마이아 페레즈는 이번에도 세스를 오해했다. 세스가 알렉산더의 사진을 더는 보지 않고 덮어 버렸던 그 순간처럼 속이 뒤틀린 마이아 페레즈가 본심을 내뱉었다.

“그럼 알렉스는 뭐야? 일부러 접근해서 좋아하게 만든 다음 이용하는 거야?”

그 말에 존 리든이 턱을 벌렸다.

“저기, 이보세요. 어디서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대답해. 일부러 그런 거야?”

마이아 페레즈는 존 리든을 밀치며 세스의 시선이 온전히 드러나게 했다. 존 리든이 다시 세스의 앞을 가로막았다.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말 못 들었어요? 세스가 랜스키를 이용해? 이 녀석은 랜스키가 저를 강간해도 아무 말 안 하고 있었는데? 이용해 먹는 게 대체 어느 쪽이야?”

마이아 페레즈는 잠시 존 리든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세차게 흔들고는 다시 세스에게 말했다.

“엄마가 매춘부라고 했지. 금발이고, 루마니아에서 왔다고.”

“뭐……, 지금 뭐라고?”

존 리든이 놀라 되묻는 사이 세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런 여자의 사진을 본 적이 있어. 랜스키가에서.”

이번에는 존 리든보다 세스가 더 놀랐다. 연한 갈색 눈이 착시현상처럼 순간 얼어붙은 것처럼 하얗게 보였다.

“어, 엄마를…… 요?”

“그 여자가 정말 네 엄마야?”

마이아 페레즈는 눈 한 번 깜박하지 않고 세스의 표정을 살폈다.

“엄마가 죽은 걸 랜스키가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거지?”

“…….”

“대답해, 어서.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면서도 알렉스와 애인이니 뭐니 떠들고 있었던 거야?”

“그게 무슨……,”

존 리든은 더 이상 어떻게 놀래야 좋을지 몰랐다. 지금 상황이 밑도 끝도 없이 엉망진창으로 치달아 가는 영화 같았다. 현실감이 하나도 없었는데 멈추지도 않고 계속 흘러갔다.

“대답해!”

마이아 페레즈의 재촉에 세스가 부자유스럽게 고개를 툭 떨어트렸다.

“……네.”

“제기랄!”

욕설을 내뱉은 마이아 페레즈가 별안간 손을 들어 세스의 뺨을 후려쳤다. 거센 마찰음이 울렸을 때는 이미 늦었다. 존 리든이 마이아 페레즈의 손목을 낚아챘다.

“이게 무슨 짓이야!”

그가 참지 못하고 마이아 페레즈를 떠밀었다. 마이아 페레즈는 벽으로 밀쳐지면서도 소리쳤다.

“왜 그랬어! 왜! 알렉스는 아무것도 모르는데!”

세스는 대답하지 않았고, 존 리든은 난잡한 혼란 속에서 세스의 말을 기다렸다. 무음의 공간을 억척스럽게 뒤흔드는 것은 마이아 페레즈뿐이었다.

“그 애를 망치고 싶었던 거야? 그게 네가 원하는 거야?”

“…….”

“어서 말해! 말해 보라고!”

세스는 거듭 고민한 뒤에야 입을 열었다. 사실을 말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으나 그걸 마이아 페레즈에게 말해도 되는 건지 확신이 서질 않았다. 그러나 알렉산더 랜스키에게 상처를 줬다는 이유로 저를 때린 걸 보면 말을 해도 될 것 같았다.

“……아니에요, 그런 거.”

단 한 번도 아니었다. 알렉산더 랜스키를 망치고 싶다는 생각 같은 건 그에게 없었다. 세상의 모든 것을 거꾸로 비추는 거울이 있다고 한다면, 알렉산더 랜스키는 제 얼굴을 비췄을 때 그 거울이 비춰 주는 모습이었다. 세스는 알렉산더 랜스키를 사랑했다. 그는 자신의 반대였으니까. 아무에게도 사랑받지 않는 그를 대신해서 알렉산더 랜스키는 세상 모든 것의 사랑을 받는 게 당연했다.

“그냥…… 더는 피하질 못했어요. 피하려고 했지만…… 잘 안 됐어요.”

“…….”

마이아 페레즈는 의심이 붉게 얼룩진 얼굴로 세스를 노려보았다. 그 말이 섣불리 믿기지 않았던 것은 이 모든 일이 현실보다는 영화와 좀 더 닮아 있어서일 것이다. 영화는 뚜렷한 악이 있으며 오해와 배신이 매일처럼 중첩되고 반복되는 곳이었으니까.

“엄마가 죽은 일하고는 상관없어요.”

마이아 페레즈는 세스의 이야기를 더 믿을 수도, 그렇다고 완전히 불신하는 것도 아닌 영역에서 멈춰 섰다. 존 리든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세스와 마이아 페레즈의 대화를 모두 부정하고 싶은, 그렇지만 그럴 수는 없는 곳에 있었다.

“알렉스가…… 그랬어. 이번 사고는 루이가 만들어 냈을 거라고.”

마이아 페레즈는 심호흡을 하며 아주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루이는 알렉스를 싫어해. 알렉스도 마찬가지지만. 루이는 알렉스를 망치기 위해서는 뭐든 할 수 있는 인간이야. 네가 누구라는 걸…… 내가 알고 있는 걸 루이도 알고 있는지는 나도 몰라. 가능한 한 모르길 바라지만, 그건 누구도 장담할 수 없어. 랜스키가에서 너에 대해 알아내길 원한다면 아마 모를 수는 없을 거라고 생각해. 나는 네 엄마가 왜 죽었는지 모르지만, 그리고 알고 싶지도 않지만 혹시라도 네가 그걸 안다는 걸 랜스키가에서 알게 된다면 너도 무사하진 않을 거라고 생각해.”

“……네. 알고 있어요.”

“그걸 알면서도 그랬어?”

“…….”

세스의 침묵에는 같은 대답이 들어 있었다. 도망치려고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는.

“그러면……, 그러니까 하는 말인데…….”

마이아 페레즈는 세스를 마치 낙타를 보는 것 같은 얼굴로 바라보았다. 사막의 열기가 산 채로 사람을 태우는 그곳에서 갈증에 미쳐 가는 인간들을 커다랗고 순하지만 무관심한 눈으로 응시하는 낙타를 보듯, 그렇게 뜨거운 원망이 어린 눈으로.

“떠나는 게 좋을 것 같아.”

“…….”

“너와 알렉스 둘 다를 위해서.”

세스는 침묵했다. 떠나는 것과 도망치는 게 혹시 다른 일일까 가늠했다.

“알렉스는…… 말은 하지 않아도 괴로워하는 것 같았어. 자기 때문에 네가 사고를 겪었다고 생각하니까. 만일 네게 또 무슨 일이 생기면…… 그건 알렉스한테 너무 가혹한 일이 될 거야. 알렉스는 아직 어려. 거만하고 이기적으로 보여도 아직 어리다고. 걘 내가 말도 없이 그만뒀다고 영양실조에 걸릴 때까지 밥도 안 먹었어. 크게 상처받을 거야. 그때보다 더.”

마이아 페레즈가 지니고 있는 단편적인 정보에 의하면 세스의 모친을 죽인 것은 벨체프라는 이름의 루마니아 마피아였고, 그를 움직인 것은 윌리엄 랜스키였다. 정확한 사실과는 차이가 있는 정보였지만 맥락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어쨌거나 윌리엄 랜스키가 세스의 모친이 죽기를 바란 건 사실이었다.

그 이유까진 몰랐다. 정말이지 알고 싶지도 않았다.

단지 마이아 페레즈는 알렉스가 상처 입기를 바라지 않을 뿐이었다. 가능하다면 세스 그린 역시.

조용히 마이아 페레즈의 얘기를 듣고 있던 세스가 툭 내뱉었다.

“도망치지 않겠다고 약속했어요.”

마이아 페레즈가 물었다.

“그 약속이 네겐 알렉스보다 소중해?”

“……아뇨.”

아주 어려울 것만 같은 대답은 사실은 그 반대였다. 세스에게 알렉산더 랜스키보다 소중한 것은 지금 이 세상에서는 없었다.

* * *

“다시 생각해 봐.”

“아냐. 그럴 거 없어.”

세스와 존 리든은 병원 정문 옆의 벤치에 앉아 마이아 페레즈가 주차장에서 차를 가지고 나오기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더 시간 끌 것 없이 이대로 곧장 머레이 힐의 집으로 가서 간단한 짐을 꾸리기로 했다. 집에는 양부가 있을 것이다. 그에게 동부의 기숙학교에 가겠다고 말한 뒤, 전학이 결정되는 날까지 마이아 페레즈의 집에서 묵기로 했다. 존 리든은 세스의 양부가 그런 소리를 해 놓았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무릎이 내내 욱신거렸다. 하다못해 다리라도 이 꼴이 아니기를 바라게 되는 순간이었다. 왜 그런지는 정확히 몰랐지만 불편한 다리가 문제 같았다. 목발은 자신의 한계에 대한 설명이었다.

존 리든은 제대로 움직일 수 없는 다리에 화가 났다. 자신에게 랜스키가와 맞설 힘이 없다는 것도, 하다못해 세스를 데리고 함께 도망칠 용기도 없다는 것에 화가 났다. 제 손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게 좌절스러웠다. 아직 그들은 너무 어렸다.

“윌리엄 랜스키는 왜 네 엄마를 죽인 거야?”

그래서 이런 것이라도 해야 했다. 세스가 안고 있는 과거의 짐이라도 나눠 받고 싶었다.

“너는 몰라도 되는 일이야.”

“아니, 알아야 돼.”

존 리든은 세스를 단단히 움켜쥐었다.

“말 안 하면 안 보내. 최소한 네가 왜 이런 식으로 가 버려야 하는지는 알아야 한다고. 말해.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꼭 들어야겠어.”

막무가내로 굴기로 마음먹으면 존 리든도 알렉산더 랜스키와 다를 바가 없었다. 세스는 그런 말을 하려다 그냥 한숨을 쉬었다.

“그건…… 게이라서.”

“뭐?”

사실 세스가 랜스키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네 살 무렵의 희미한 기억이 전부였다. 그마저도 약에 엉망으로 취한 모친이 제멋대로 내뱉은 소리에 불과했으니 정확한 사실이라고 하기에도 무리가 있었다.

“랜스키이긴 하지만 게이라서. 그래서 집안에서 자식 취급도 못 받는다고 했어. 아이를 가져 봤자 소용도 없다고.”

“그게 무슨 소리야, 대체? 어떤 랜스키가 게이라는 건데?”

“내 생부가.”

“……뭐?”

어깨를 붙든 존 리든의 손이 순간 굳어 저를 놓치는 것을 세스는 알았다.

예상했던 일이었다. 단지 세스의 상상 속에서 저런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사람은 존 리든이 아니라 언제나 알렉산더 랜스키였다.

“그래서 도망치는 거라고 했어. 랜스키는 무서우니까.”

세스가 아는 건 그뿐이었다. 하지만 그걸로 충분했다.

열아홉 살의 젊고 아름다웠던 모친은 희생양이었다. 시저 랜스키가 보그단 벨체프의 아들 중 하나와 관계를 맺으면서 벨체프는 랜스키 인더스트리의 최신 무기를 공짜나 다름없이 제공받았다. 한 일 년간은 황금기였다. 벨체프는 뉴욕 뒷골목의 시시껄렁한 다른 갱단들을 빠른 속도로 치워 버렸다. 랜스키 인더스트리 안에서는 둔하고 멍청한 폭군이었던 시저 랜스키가 뉴욕의 뒷골목에서는 진짜 왕족처럼 대우를 받았다. 서로가 행복하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횡령 사실이 드러나는 건 시간문제였고, 보그단 벨체프는 더 욕심을 부렸다. 아직은 뒷골목 포주에 불과한 벨체프에게 랜스키라는 이름은 아주 많은 걸 의미했다. 벨체프는 그 이름을 갖고 싶었다. 이름을 나눠 받는 방법은 단 하나였다. 시저 랜스키를 혼인 서약서에 묶는 것이었다. 윌리엄 랜스키가 동성 결혼을 허용할 리 없다는 걸 알기에 여자가 필요했다. 사랑에 눈이 먼 시저 랜스키는 벨체프의 아들이 하는 달콤한 말에 빠져 그 둘 사이에 벨체프의 매춘부를 하나 끼워 넣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상대가 여자라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었다. 윌리엄 랜스키는 절대 동유럽 출신의 가난한 포주를 상대할 마음이 없었다.

랜스키와 벨체프의, 처음부터 체급 차이가 너무 많이 났던 전쟁은 벨체프의 항복으로 끝이 났다. 뒤로 빼돌렸던 무기를 모두 돌려주고 양측의 관계를 모두 정리하는 의미로 벨체프는 매춘부를 없애야 했다.

매춘부는 가까스로 도망쳤다. 임신한 사실을 모른 채.

“그러니까 지금…… 너와 랜스키가 그런…… 아니, 네 성이 원래는 랜스키였다는 말을 하는 거야? 내가 제대로 들은 게…… 맞아?”

세스 그린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걸까.

존 리든에게 또다시 개기일식이 시작되었다. 분명히 이제는 이해한다고 생각했던, 보고 있노라면 사랑스럽고 안쓰러워 어쩔 줄 모르던 세스 그린은 삽시간에 겉모습을 제외한 모든 것이 다른 사람이 되어 버렸다.

“숨어서 살아야 한다고 했어. 랜스키가에서는 내가 태어난 걸 모른대. 그걸 알게 되면 죽을지도 모른다고 했어.”

“너는 그러고서도……,”

존 리든이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세스의 얼굴에 반창고가 붙어 있지 않았다면 한 대 쳤을지도 몰랐다.

“랜스키하고, 그런 사이가 된 거야?”

존 리든의 얼굴이 끔찍할 정도로 구겨졌다.

“그건 너무 비겁하잖아! 젠장, 랜스키가 아무리 개새끼라도 네가 말한 일은 진짜 모르고 있는 거잖아!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짓을 한 거야? 너도, 그 새끼도 큰일이 날 거라는 걸 알면서도 왜 그랬어! 네가 한 짓은 랜스키를 가지고 논 거야!”

“나는……,”

“네가 아무리 머리가 이상하다고 해도 이건 변명이 안 돼! 정말로 랜스키를 망가트릴 생각이 없었다는 게 맞아? 사실은 그걸 바랐던 게 아냐?”

“…….”

“대답해!”

도망치려고 했던 노력 같은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자신을 감추려던 노력 같은 것도 의미가 없었다. 거울을 붙이지 말았어야 했다. 주차장 벤치에 앉아 있지 말았어야 했다. 바라보지 말았어야 했다. 한곳에 있지 말았어야 했다. 존재하지 말았어야 했다.

하지만 세스는 태어났고, 죽지 않았고, 존재했다. 그래서 지금 알렉산더 랜스키를 사랑하고 있었다. 존 리든이 이해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나는 랜스키가…… 하지 말라는 걸 할 수 없었어. 하기도 싫었고.”

그러니 후회 같은 것도 의미가 없었다. 세스에게는 후회할 생각이 없었다.

“나 때문에 화내거나 다치거나 차를 망가트리거나 거울을 깨거나 하지 않기를 바랐어.”

그래서 여기까지 왔다.

“가지고 논 거 아니야.”

알렉산더 랜스키를 욕망한 적은 없었다. 그저 반년 동안 하루에 몇 분씩 그를 바라보는 시간이 계속 존재하기를, 혹은 어서 끝나 버리기를 소원했을 뿐이었다.

“랜스키한테는 말하지 말아 줘.”

세스가 그렇게 말하는 순간이었다.

끼이익!

그들이 앉은 벤치 앞에 차가 멈췄다. 마이아 페레즈가 끌기에는 너무 크고 너무 검다는 생각이 떠오르는 동안 차 문이 열리며 검은 수트를 입은 사람들이 내렸다.

“세스 그린?”

어쩐지 대답해서는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존 리든은 대답하지 못하도록 세스의 입을 막으려고 했다. 하지만 오히려 그게 신호가 되었다. 남자들이 신속하게 다가와 양쪽에서 세스를 붙들었다.

“이게 무슨 짓이야! 이거 놔!”

존 리든이 목발도 잊고 일어섰다. 수트를 입은 남자 중 하나가 망설임 없이 존 리든의 다리를 걷어찼다.

“윽!”

존 리든은 허무할 정도로 손쉽게 앞으로 고꾸라졌다. 그사이 남자들은 이런 일을 수백 번은 해 본 사람들처럼 저항하는 세스를 간단히 차 안에 밀어 넣었다.

“안 돼!”

존 리든의 비명을 무시하고, 세스 그린을 태운 크고 검은 차가 출발했다.

* * *

“…….”

여기가 어딘지 물을 필요도 없었다.

세스를 태운 차가 향한 곳은 랜스키 저택이었다. 그곳에서도 옆에 패닉 룸이 딸린 윌리엄 랜스키의 서재였다.

세스는 한눈에 윌리엄 랜스키를 알아보았다. 상상하던 것과 꼭 같았다. 크고 선명하며, 잔인하고 차갑게 생긴 사람이었다.

세스를 데려온 남자들이 그를 서재의 바닥에 앉혔다. 윌리엄 랜스키의 눈높이가 마치 제단 위 벽에 매달린 그리스도 상만큼이나 높아졌다. 누군가를 바라보는 행위가 눈높이에 따라서 지금처럼 고통스러워질 수도 있었다.

“길게 말은 안 하겠다.”

알렉산더 랜스키의 친부는 세스가 고통을 인지하도록 충분한 시간을 둔 다음 천천히 입을 열었다.

“듣기로는 험한 일을 당했다던데 요양원에 가는 게 어떻겠느냐. 그만큼의 보상은 하마.”

윌리엄 랜스키가 수표책을 꺼내 들었다. 슥슥, 만년필이 움직이는 소리만이 차분하게 울려 퍼졌다. 서명을 마치고 눈짓을 하자 수트를 입은 남자 하나가 다가와 수표를 받아 와 세스의 무릎 위에 떨어트렸다.

“네 양부와는 이미 얘기를 마쳤다. 너는 그저 수표를 받고 대기시켜 놓은 헬기에 타면 돼.”

랜스키가의 변호사들이 이틀에 걸쳐 짠 전략이었다.

가장 효과적인 것은 알렉산더 랜스키를 피해자로 만드는 일이었다. 그러기 위해서 상황은 비극적일수록 좋았다. 세스는 고작 타박상과 찰과상을 입은 게 아니라 목숨이 위태로울 만큼 위중한 상태가 되어야 했다. 사건 당시의 응급실 진료 기록은 모두 말끔히 손을 대어 놓았다. 증인도 넉넉히 매수했으며 윌리엄 랜스키는 배런트 카운티를 움직이는 사람들과 저녁 식사를 마쳐 놓았다.

세스는 멀리 떠나게 될 것이다. 윌리엄 랜스키는 막내아들의 격정적인 풋사랑이 짧게 시들지 않으리라는 것을 짐작했다. 사라지게 만드는 게 나았다. 그것은 윌리엄 랜스키가 그만큼 막내아들에게 애정을 갖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

세스는 물끄러미 수표를 바라보았다. 얼핏 눈에 들어오는 액수는 십만 달러였다. 그렇게 큰돈도, 적은 돈도 아니었다. 윌리엄 랜스키가 세스 그린을 생각할 때의 액수였다.

세스는 안도감을 느꼈다. 자신이 누구인지 알았다면 윌리엄 랜스키는 십만 달러짜리 수표를 내밀지도 않았을 것이다. 윌리엄 랜스키는 그가 누군지 모르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세스는 수표를 집어 들었다.

얌전히 챙겨 들고, 하라는 대로 하면 윌리엄 랜스키는 그에게 아무런 관심도 보이지 않을 것이다. 헬기를 타고 가야 하는 요양원이 어디건 간에 상관이 없었다. 어차피 떠날 작정이었으니 어디로 간들 똑같았다.

윌리엄 랜스키는 다시 검은 수트를 입은 남자에게 지시를 내렸다.

“데려가.”

“예.”

남자들이 다가와 세스를 일으켜 주었다. 세스는 손안에 수표를 움켜쥔 채로 일어서서 몸을 돌렸다.

덜컹, 소리를 내며 패닉 룸이 열린 것은 그 순간이었다.

“바보냐?”

“…….”

한 팔에 깁스를 하고 있는 알렉산더 랜스키가 패닉 룸 안에서 나타났다.

깁스를 하지 않은 팔에는 전화기를 들고 있었다. 수화기 너머에 누가 있는지 대충 알 것도 같았다. 존 리든이나 마이아 페레즈일 것이다. 생각이 맞는지 알렉산더 랜스키는 찾았어, 우리 집에 와 있네, 라고 말한 뒤 전화기를 툭 던져 버렸다.

윌리엄 랜스키는 불쾌한 얼굴이 되었고 검은 수트를 입은 남자들은 당황에 휩싸였다. 알렉산더 랜스키가 패닉 룸으로 숨어드는 것을 아무도 미리 알지 못했다는 것은 커다란 실수였다.

랜스키가의 보안 요원들이 자리에 멈춰 서서 윌리엄 랜스키의 다음 지시를 기다렸다. 그러나 윌리엄 랜스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알렉산더 랜스키가 침묵과 당혹 사이를 헤집고 걸어와 세스의 손에서 수표를 빼앗아 들었다.

“고작 십만 달러와 날 바꿔? 아무리 멍청해도 그렇지. 산수 실력이 엉망이잖아.”

알렉산더 랜스키는 구겨진 수표를 아무렇게나 던져 버렸다. 붕대가 감긴 손을 사용하며 인상을 좀 쓰긴 했으나 표정은 침착했다.

세스는 고작 십만 달러가 탐이 나 부친의 말을 따르려던 게 아니었을 것이다. 그 정도는 알았다. 분명 저 이상한 머리로 그를 위한다는 멍청한 핑계를 생각해 냈을 것이다.

알렉산더 랜스키는 세스를 붙든 채 부친을 향해 돌아섰다.

부자가 서로를 마주 보았다. 그들은 어려울 게 없는 사이였다. 속에 뭐가 들어 있는지 알기 위해 난감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알렉산더 랜스키는 부친이 제게 뭘 바라는지 언제나 알고 있었고, 부친은 그에게 무얼 바라는지 굳이 숨기지 않았다.

그래서 그도 감추려 들지 않았다.

“아버진 늙으셨잖아요. 그러니 연애 정도는 멋대로 하게 놔두세요. 어차피 제가 결혼 생각이 들 때가 되면 벌써 돌아가셨을 테니까.”

윌리엄 랜스키가 석상처럼 굳은 입술을 뗐다.

“그 꼴로 감옥에 들어가고 싶은 게냐.”

“사고 친 자식들을 빼돌리는 게 아버지 특기잖아요. 굳이 얘는 건드릴 것 없이요. 이번에는 뭐 그리 거창하게 나가세요. 형들이 친 사고에 비하면 별것도 아닌데.”

“그 사고방식이 문제야. 사고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그게.”

“제가 사람을 여섯이나 죽게 만들 뻔했다며 죄책감에 눌려 우울증 약이라도 먹기 바라세요? 그게 더 언짢으실 텐데요.”

“사고를 만들지 않았으면 언짢아할 일도 없었겠지.”

“그간 얌전히 살았어요. 한번은 겪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세요. 지금 넘어가 주시면 더 얌전해질게요.”

“건방지게 굴지 마라. 어디서 협상을 하려고 드는 게냐. 그런 짓은 내 돈이 없어도 살 수 있을 때나 해.”

“그럼 그럴까요?”

알렉산더 랜스키가 깁스를 한 팔로 윌리엄 랜스키와 그를 가로지른 책상을 쾅 내리쳤다. 세스의 얼굴이 창백히 질렸고, 그 얼굴만큼이나 하얀 석고 조각이 후드득 흘러내렸다. 알렉산더 랜스키는 금이 갔다는 팔뚝을 눈앞에서 움직여 보았다. 다 나은 건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지만 팔을 움직이는 얼굴에는 별다른 고통의 흔적이 떠오르지 않았다.

“한 푼 없이 나가라고 하면 그렇게 할게요. 별로 안 어려울 것 같거든요. 지금은.”

“…….”

일흔에 가까워지면서 회색으로 변해 버린 눈썹이 꿈틀거렸다. 한때는 지금 마주한 막내아들처럼 짙은 갈색이었다. 너무 닮은 두 사람은 어떤 상황에 있더라도 부자로 보일 것이다.

“들으셨다시피 제가 요새 좀 정신이 팔려서요. 이 녀석 때문에 사람을 여섯이나 죽이다 말았는데 그깟 돈 좀 못 쓴다고 아쉬울 것 같진 않아요.”

알렉산더 랜스키는 부친을 너무 몰아세우면 좋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어릴 때부터 그는 부친을 대하는 데 다른 형들보다 능숙했다. 어쩌면 그가 윌리엄 랜스키와 가장 닮아 있는 아들이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알렉산더 랜스키는 어느 지점에서 물러나는 기미를 보여야 할지 정확히 알았다.

“나이가 들면 또 모르죠. 그땐 돈이 더 좋아질지도. 그 정도는 아버지도 아시잖아요. 말리면 더 하고 싶어 하는 건 지금 나이에나 하는 짓이라는 걸.”

그러니 당분간은 내버려 두라는 소리였다. 당분간만. 그사이에 방법을 찾을 테니.

“……기어오르는 자식을 귀여워하리란 생각은 마라.”

“무릎으로 기는 자식도 사람 취급 안 하시잖아요.”

“한번 그래 본 적도 없지 않느냐.”

“그렇다는 걸 아니까요.”

윌리엄 랜스키는 아직 어리다고만 생각했던, 그래서 자라기만을 기다렸던 막내아들을 새삼스럽게 바라보았다. 막내아들에게는 위로 두 아들에게 없는 무언가가 있었다. 윌리엄 랜스키는 그 점에 가끔 화가 나다가도 결국은 똑같은 이유로 막내아들과 다른 아들들을 구분 짓는 자신을 깨닫곤 했다.

아마도 그것은 막내아들이 자신을 다루는 방식일 것이다. 막내아들은 능란했다. 또 다른 자신이 저를 다루는 것처럼.

“……졸업하기 전에는 안 된다.”

“좋아요. 그 정도라면.”

알렉산더 랜스키는 더는 대들지 않았다. 졸업이라면 반년이었다. 반년 정도라면 기다릴 수 있었다.

그 역시 세스를 잘 감춰 두고 싶었다. 해외의 요양원이라면 나쁠 것도 없었다.

알렉산더 랜스키는 루이 랜스키가 지금 돈이 없어 곤란한 지경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루이 랜스키를 캐기 위해 고용한 사립탐정은 별로 어려울 것도 없이 이틀 만에 그의 재정 상태에 관한 정보를 가져왔다. 위험한 돈을 끌어다 쓰고 있다는 것으로 보아 이미 구석까지 몰려 있는 듯했다. 세스를 찾아 해외까지 사람을 보낼 자금은 당분간 마련하지 못할 것이다. 세스가 무사하다는 것을 확인하는 순간부터 알렉산더 랜스키는 마음 놓고 루이를 괴롭혀 줄 생각이었다.

“고맙습니다, 아버지.”

알렉산더 랜스키는 가능한 한 애정처럼 보이는 것을 담아 인사를 했다. 고맙다는 말은 진심이라 윌리엄 랜스키는 어쩌면 흐뭇하게 웃었을지도 몰랐다.

느닷없는 불청객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 * *

“워, 이거 왜 이래? 아버지 좀 뵙겠다는데.”

서재로 들어오던 루이 랜스키의 앞이 가로막혔다. 손에는 방금 해결사로부터 도착한 두툼한 노란색 봉투를 들고 있었다.

배런트에 상주하는 경호원이 아니라 윌리엄 랜스키의 개인 보안 요원들이 반사적으로 루이 랜스키의 앞을 막아서며 지시를 기다렸다. 윌리엄 랜스키가 손을 들어 보이자 그때서야 가로막고 있던 길이 트였다. 윌리엄 랜스키가 아들들을 차별하는 방식은 이렇게도 드러났다.

“너는 또 무슨 일이냐.”

루이 랜스키는 한껏 뒤틀린 미소를 흘리며 부친의 곁으로 다가갔다.

“가족 모임이라면 저도 껴야지요. 저도 이 집 식구잖습니까.”

윌리엄 랜스키가 눈가를 찌푸렸다.

“그런 게 아니니 나가 봐.”

“서운하게 왜 이러세요.”

루이 랜스키는 손에 들고 있던 봉투를 윌리엄 랜스키에게 내밀었다.

“간만에 뵙는 기념으로 선물을 하나 준비했습니다. 보세요.”

순간 알렉산더 랜스키가 앞으로 나서며 책상 위에 오른 봉투를 가로챘다. 윌리엄 랜스키가 회색 눈썹을 꼬는 것으로 불쾌감을 드러내는 동안 루이 랜스키는 동생을 향해 혀를 찼다.

“버릇없이 굴지 마라, 동생아. 아버지 앞에서 이게 무슨 짓이야. 얌전히 돌려드려.”

“개수작 그만두고 꺼져.”

“쯧쯧……. 말버릇하곤. 어서 돌려드려. 아버지 선물이라잖아.”

알렉산더 랜스키가 뒷걸음질을 했다. 겁을 먹고 도망치려는 게 아니었다. 등 뒤로 세스를 감추기 위해서였다.

이상할 정도로 긴장이 끓어 넘쳤다. 온몸의 신경줄이 팽팽히 당겨지며 불안감을 호소했다. 루이 랜스키가 이 자리에 모습을 드러낸 시점이 너무 수상했다.

알렉산더 랜스키는 등 뒤로 손을 돌려 세스를 단단히 붙든 채 말했다.

“네가 무슨 짓을 했는지 내가 그걸 모를 거라고 생각했어?”

루이 랜스키는 자신이 할퀴어 놓은 동생을 마주 보며 거리낄 것 없는 미소를 지었다. 알렉산더 랜스키는 정확히 그가 원하던 표정을 짓고 서 있었다. 쾌감이 작은 벌레처럼 솟아올라 피부 위를 기어갔다.

“그게 무슨 소리야. 내가 무슨 짓을 했다니. 나야 널 걱정해서 네 남자 친구를 좀 살펴본 것뿐이야.”

“사진 하나 찾아내서는 동네 애들 부려서 지저분한 짓을 시킨 거겠지. 딱 네 수준이잖아.”

“생사람 잡기는. 내가 여섯이나 잡아 죽이라고 등 떠민 것도 아닌데.”

“무섭지 않아?”

알렉산더 랜스키가 저벅, 물렸던 걸음을 되돌렸다. 간격을 줄이는 그를 보며 루이 랜스키가 어깨를 한번 움찔거렸다.

“그러고도 내가, 안 무섭냐고. 설마 내가 널 가만 두고만 볼 거라고 생각했어? 거울을 볼 때마다 그때 그 눈깔이 뚫리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생각은 한 번도 안 해 봤어?”

“그게 무슨 말버릇이야. 아버지가 계신데.”

루이 랜스키가 불안하게 눈을 굴려 부친을 살폈다. 적당히 말려 줬으면 하는 바람이 담겨 있었지만 윌리엄 랜스키는 석상처럼 꼿꼿하게 앉아 있기만 했다.

언제나와 같았다. 부친은 형제들의 싸움을 말릴 생각도, 비틀어진 서열을 바로잡아 줄 생각도 없었다. 그건 전부 편애의 다른 이름이었다.

루이 랜스키는 이런 순간에 놓일 때마다 자신이 혐오스러워졌다. 정말로 자신은 이 집구석에서 몸집이 큰 벌레밖에 안 되는 것 같은 기분에서 헤어나올 수가 없었다.

“내가 죽이다 만 여섯 놈보다 사실 널 가장 먼저 죽이고 싶었다는 건 알고나 있어?”

루이 랜스키는 떨리는 턱을 감추기 위해 고개를 흔들며 알렉산더 랜스키가 가로챈 봉투를 가리켰다.

“그 안에 뭐가 들어 있는지는 알고서나 지껄이지?”

막냇동생이 아무리 무서울 게 없이 굴어도 이번 일에서 승리자는 그였다. 루이 랜스키는 충격을 받은 막냇동생이 흐느껴 우는 모습을 머릿속으로 그리며 부르르 등줄기를 떨었다.

“그 머리에서 나오는 거라면 수준 뻔하지. 굳이 안 봐도 되는 쓰레기야.”

“쓰레기라니. 아버지께 드리는 선물을.”

루이 랜스키가 부친을 끌어들였다.

“아버지는 궁금하지 않으세요? 제가 왜 이러는지?”

윌리엄 랜스키는 부정하지 않았다. 대신 궁금증을 이유로 다른 것들을 흘려보내지도 않았다.

“네가 한 짓이냐?”

루이 랜스키는 부친의 시선을 피하지 않은 채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긍정이 서툰 도취처럼 보이지 않기 위해 애썼다. 부친이 가장 경멸하는 것은 승리를 제대로 즐길 줄 모르는 어리석은 인간들이었다. 쉽사리 만족하고 작은 것에 기뻐하는, 한계가 분명한 인간들. 부친은 제 아들들이 그치지 않고 허기져 있기를 바랐다.

“……꼭 아셔야 할 일입니다. 우리 가족, 그 모두가. 랜스키의 핏줄이라면 하나 남김없이.”

유독 핏줄이라는 말에 힘을 주는 루이 랜스키를 쳐다보던 윌리엄 랜스키가 천천히 일어나 알렉산더 랜스키의 앞으로 다가왔다.

“이리 내.”

알렉산더 랜스키가 바스락 소리가 나게 봉투를 움켜쥐었다. 금이 간 손등이 욱신거리도록 세게 힘을 주었다. 그러나 무엇인지 모를 것이 들어 있는 봉투는 바스라지지 않았다. 지금 그로서는 이것이 사라지도록 만들 방법이 없었다.

“싫어요.”

두려웠다. 봉투 안에 무엇이 들어 있든 간에 그를 경직시켰다. 아무것도 걱정하지 말라고 잘도 지껄여 놓고 결국은 지켜 주지 못했다. 두 번 다시 그런 실수는 하고 싶지 않았다.

“이게 뭐든 아버지는 상관하지 마세요. 제가 처리할게요.”

알렉산더 랜스키는 처음으로 간절함을 담아 부친을 마주했다. 언제나 부정하고 의심했던, 심지어 이제는 상관조차 없어진 부친의 애정을 갈구했다. 당신이 내 아버지가 맞는다면 이번 한 번만 눈을 감아 달라고 빌었다.

“…….”

그러나 부친은 가장 간절한 순간에 애정을 거부했다. 윌리엄 랜스키는 저항하는 아들을 두고 옆으로 짧은 눈짓을 던졌다. 귀신같이 무음의 신호를 읽어 낸 개인 경호원들이 다가와 알렉산더 랜스키의 양팔을 뒤에서 붙들었다.

“하지 마! 놔! ……아버지!”

윌리엄 랜스키가 손을 뻗어 봉투를 앗아 갔다. 펄럭, 봉투가 열리고 그 안에 들어 있는 것들이 튀어나왔다.

사진과 서류 몇 장이었다. 그 자체로는 특별할 것이 없었다. 그러나 윌리엄 랜스키는 이전에 정확히 같은 장소에서 보았던 것과 똑같은 한 장의 사진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

윌리엄 랜스키의 표정에 깨어진 유리처럼 균열이 돋아났다.

윌리엄 랜스키는 손에 든 것들을 반으로 갈랐다. 또다시 반으로 갈랐다. 반의반으로 갈라진 것들이 통째로 다시 반이 되었다. 루이 랜스키가 위험한 돈으로 마련해 온 과거의 편린이 그렇게 또 다른 편린이 되어 침묵 속을 산개했다.

잘게 찢긴 종이들이 흩날림을 멈추자 윌리엄 랜스키는 몸을 돌려 책상으로 다가갔다. 거칠게 맨 아래 서랍을 잡아 뺀 그가 꺼내 든 것은 언제나 장전이 되어 있는 군용 피스톨이었다. 윌리엄 랜스키는 망설임 없이 안전장치를 풀었다.

누군가는 말려야 했다. 그러나 윌리엄 랜스키가 책상에서 일어나 걸어오는 동안 아무도 무언가를 입 밖으로 내보내지 않았다. 지금 그와 한 공간에 있는 이들은 모두 윌리엄 랜스키의 성격을 잘 아는 사람들이었다.

윌리엄 랜스키는 마침내 걸음을 멈춰 세웠다. 그가 쥔 피스톨의 총구가 향한 곳은 세스의 이마였다.

너무 큰 소리는 무음이 되기도 했다. 지금 랜스키가의 서재가 그랬다. 저마다 아주 시끄러운 반응들을 내고 있었지만, 그것들을 한데 모아 놓으니 그 어떤 것도 없이 침묵이 되어 버렸다. 침묵이 송곳이 되어 등줄기를 찍어 댔다.

세스는 아무런 말도 없이 이마를 차갑게 짓찧는 총구 너머 윌리엄 랜스키를 바라보았다.

“난 우연 같은 것은 믿지 않는다.”

“…….”

“네가 내 집에 나타난 건 절대 우연이 아니야. 네가 그 작은 몸뚱이로 내 아들에게 무얼 바랐건 그 또한 우연이 아니겠지.”

끼이익, 손가락이 방아쇠를 천천히 당기는 소리가 흘렀다.

알렉산더 랜스키는 지금이 현실이라는 것을 새롭게 자각했다. 날아드는 돌덩이 같은 의문들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부친이 찢어발긴 게 무엇인지, 왜 세스에게 총을 겨누고 있는지, 설마 윌리엄 랜스키가 사람을 시키는 대신 제 손으로 방아쇠를 당기려고 하는 게 맞는지, 수십 개의 의문이 날아와 등짝을 마구 두들겨 대는 것 같았지만 세스의 이마에 총구가 닿아 있는 지금은 현실이었다.

“그러지 마세요, 아버지!”

알렉산더 랜스키가 두 사람을 향해 달려가려고 했다. 그러나 경호원들이 그를 단단히 붙들었다. 알렉산더 랜스키는 얼굴이 시뻘게지도록 몸을 비틀며 소리를 질렀다.

“이거 놔! 하지 마세요, 아버지! 저까지 쏘실 게 아니라면 그만두세요! 그만두라고!”

윌리엄 랜스키는 아들을 돌아보지도 않았다.

“입 다물어라.”

“안 돼…… 미친, 이게 무슨 짓이야! 누굴 죽이려고 하는 거야!”

“무슨 짓을 해도 소용없다. 이건 진작 끝냈어야 할 일이야. 이건 여기 있어서는 안 돼.”

랜스키가의 이름을 첫째 아들이 더러운 포주의 이름으로 더럽히던 시기가 있었다. 남창들을 끼고 놀던 때부터 눈 밖에 난 첫째를 진작 내쫓지 않았던 게 후회스럽던 순간이었다.

루마니아 마피아는 정도를 몰랐고 지나치게 탐욕스러웠다. 윌리엄 랜스키가 일을 보고받았을 때는 이미 중동의 가장 큰 무기상들이 손을 털고 나섰을 때였다. 국방부에서는 고압적으로 그를 소환했다. 전용기를 타고 워싱턴으로 날아간 윌리엄 랜스키를 마중 나온 것은 평소처럼 국방부 장관이 아니라 그 비서의 비서쯤 되는 애송이였다. 그는 윌리엄 랜스키에게 조만간 랜스키 인더스트리 앞으로 수색 영장이 발부될 것이라고 말했다. 워싱턴에서는 벌써 감사팀이 꾸려진 상태였다. 윌리엄 랜스키는 그 길로 전용기를 돌려 뉴욕으로 날아갔다.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도 모르고 길길이 날뛰는 첫째 아들의 목구멍에 수면제를 쏟아붓고는 베네수엘라로 보내 버렸다.

베네수엘라에서 돌아오는 비행기는 그쪽 캠프의 엘리트 용병들을 태워 왔다. 루마니아 마피아의 씨를 말리기 위해서였다.

궁지에 몰린 벨체프가 먼저 손을 들고 나타났다. 지금껏 빼돌린 무기를 반납하고 문제가 된 매춘부를 제거하겠다고 했다. 협상을 받아들인 것은 윌리엄 랜스키가 자비로웠기 때문이 아니라 워싱턴의 감사팀이 출발했기 때문이었다. 윌리엄 랜스키는 그쯤에서 일을 마무리 지었다.

다만 의외의 문제가 생겼다. 벨체프의 매춘부는 죽지 않고 도망쳤다. 워싱턴과의 관계가 이전과 같았다면, 그래서 두 손이 묶여 있지 않은 상태라면 윌리엄 랜스키는 정말로 전쟁을 벌였을 것이다. 하지만 감사팀은 보는 눈들이 많다며 집요하게 굴었다. 벨체프가 마침내 도망친 매춘부의 행방을 찾아 시체를 확인시킨 건 그로부터 오 년이나 지난 뒤였다.

윌리엄 랜스키는 그 모든 분노와 굴욕을 고스란히 기억했다.

감히 뒷골목 포주 같은 천박한 것들이 제 앞에서 주제를 잊었다.

감히 그것들과 똑같은 값싼 몸뚱이가 그때와 똑같은 짓을 저지르고 있었다.

제 손으로 해결을 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지금 방아쇠를 당겨야 했다.

찢긴 등짝과 금이 간 팔뼈로 알렉산더 랜스키가 미친 듯이 몸을 뒤틀었다. 베테랑 보안요원들이 진땀을 흘리며 그를 붙잡고 늘어졌다.

“하지 마…… 하지 말라고! 걔가 뭘 잘못했다고 죽이기까지 하겠다는 건데!”

“태어나지도 말았어야 할 것이 살아 있었다. 이대로 내버려두면 더한 짓을 저지르겠지.”

윌리엄 랜스키의 말을 이해한 건 사랑받는 막내아들이 아니라 늘 눈 밖에 나 있던 둘째 아들이었다.

그 말은 세스가 살아 있으면 막내아들이 알지 않아도 좋을 과거를 알게 될 거라는 뜻이었다. 부친이 총을 꺼내 든 이유는 세스의 입을 막기 위해서였다.

루이 랜스키가 소리쳤다.

“멍청하긴. 그렇게나 머리가 안 돌아가? 아버지가 왜 저렇게까지 하시는지 모르겠어? 그건 다 네가 저딴 걸 남자 친구라고 끼고 다녔기 때문이잖아! 어디서 굴러들어 온 핏줄인 줄도 모르고!”

막냇동생을 향하는 시선이 붉었다. 루이 랜스키는 핏줄이 드러날 정도로 눈을 세게 치켜뜨고 있었다.

부친이 그를 배신했다. 그는 적어도 부친이 공평한 사람일 거라고 생각했다. 랜스키가의 세 형제는 모두 비틀려 있었다. 부친은 공평하게 그중 가장 덜 망가진 인간을 골라낼 것이라고 생각했다. 부친이 막내인 알렉산더를 편애하는 것은 알렉산더가 약삭빠르게 본성을 잘 감춘 결과일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아니었다.

막내 왕자가 사고를 쳤다. 사고라는 말로도 부족한, 부친이 도무지 허용할 수 없는 종류의 일이었다. 루이 랜스키는 부친이 이제 막내 왕자를 다른 형제들과 같은 위치로 끌어내릴 것이리라 믿었다. 하지만 부친은 실망스럽게도 증거를 감추는 쪽을 택했다. 부친은 공평한 게 아니었다. 부친의 편애는 평가에 의한 게 아니었다. 애초에 막내 왕자 하나만을 향해 있었다.

그래서 분노했다.

“저런 게 어디서 갑자기 뚝 떨어졌는지 궁금해 본 적은 없었어? 저 예쁜 얼굴을 낳아 준 게 누군지. 의외로 네가 너무도 잘 아는 인물이었는데 말이야. 이제껏 한집안에서……,”

“입 다물어!”

루이 랜스키의 말이 끝나기 전이었다.

탕!

먹먹한 폭음이 등골을 후려쳤다. 루이 랜스키는 다리가 저르르 떨리는 것을 느꼈다. 이유가 뭔지 알기도 전에 몸이 울컥 꺾이며 대리석 바닥 위로 엎어졌다.

“크…… 으아악!”

믿기지 않는 비명이 제 입을 뚫고 살갗 위를 기어갔다. 루이 랜스키는 부친이 세스를 겨누던 총구를 돌려 자신을 쏘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 날……! 나를 쏘……! 크학!”

미친 듯 비명을 지르며 불신을 토해 내는 루이 랜스키를 윌리엄 랜스키가 날 선 증오가 가득 찬 눈으로 쳐다보았다.

“한 마디도 하지 마라. 정말로 죽고 싶은 게 아니라면.”

“그…… 크흑……,”

루이 랜스키가 비명을 멈추자 안개 같은 피비린내만이 자욱하게 쌓여 사람들을 덮쳤다. 그것은 이내 광기로 돌변했다.

“……씨팔! 이거 놔!”

멈춘 듯 있던 알렉산더 랜스키가 저를 붙든 사람들을 떨구어 내고자 몸부림을 쳤다. 부친의 총은 그저 협박용이 아니었다. 부친은 둘째 아들을 쏴 버렸듯이 세스를 향해 방아쇠를 당길 수 있었다.

“대체 뭔데! 뭔데 이러냐고! 루이가 한 게 무슨 소리야! 대체 저게 뭔데…… 뭔데 이러냐고! 이게 다 무슨 소리야!”

그러나 그를 얽어맨 것들은 악몽처럼 도무지 뿌리칠 수가 없었고, 윌리엄 랜스키의 총구는 그사이 망설임 없이 세스의 이마를 향해 되돌아왔다.

“너는 이 일들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 해.”

“대가는 무슨……! 이거 놓으라고 해! 세스는 건드리지 마! ……도망쳐, 세스 그린! 그렇게 가만히 있지 마!”

“…….”

세스는 끝내 알렉산더 랜스키를 돌아보지 않았다. 돌아보고 싶지만 용기가 나지 않았다.

“사라지지 않겠다고 했잖아!”

하지만 세스는 사라지고 싶었다. 지금 이 순간, 알렉산더 랜스키가 아직 자신이 도망치려던 이유를 모르는 지금.

세스는 오른손을 들어 이마를 누르는 총신을 움켜쥐었다.

“쏘세요.”

세스의 작은 목소리는 거칠게 몸부림치는 알렉산더 랜스키를 뚝 멎게 만들었고, 총을 쥔 윌리엄 랜스키와 눈을 마주할 시간을 만들어 냈다.

마주 선 상태에서도 여전히 자신을 올려다보게 만드는 윌리엄 랜스키는 금박을 두른 그리스도 상을 연상하게 했다. 세심하게 주물한 가시면류관의 한가운데 진홍의 보석을 박아 넣은, 기도하는 자들을 위한 것이지만 정작 몸값은 터무니없이 비싼 부조리한 성상을.

한때는 랜스키라는 이름을 가진 남자가 제 인생을 주물한 신이라 믿었다. 그는 도망치다 죽는 삶을 모자에게 창조해 주었다. 그래서 그는 잔인하고 동시에 자비로웠다. 결국 자신이 선사한 삶을 자신의 손으로 거둬들일 것이다. 마치 신처럼, 혹은 부조리처럼.

“알기 전에 지금…… 사라지게 해 주세요.”

사라지지 마. 언젠가 마이아 페레즈의 아담한 응접실에서 알렉산더 랜스키가 말했다.

절대 사라지지 마. 이미 늦었으니까.

세스는 그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것이 후회스러웠다. 싫다고 대답했어야 했다.

나는 사라질 거야. 네가 나에 대한 전부를 알아 버리는 날이 온다면. 그래서 너도 나를 태어나지 않는 게 더 좋았을 거라는 눈으로 보게 되면. 나는 그 전에 사라질 거야.

그렇게 말해 두었다면 좋았을 것이다.

“세스 그린! 대체 왜 이러는 거야!”

알렉산더 랜스키가 소리를 질렀다. 세스는 끝끝내 그를 돌아보지 않았고 윌리엄 랜스키는 물러지려던 눈빛을 굳혔다. 방아쇠가 당겨지기까지 남은 시간은 아주 짧았다. 이대로 그는 영원히 입을 다물고 알렉산더 랜스키에게서 도망칠 수 있을 것이다.

“유전자 감식 결과야!”

그러나 루이 랜스키의 목소리가 안전히 달아나려던 세스의 발목을 잡아챘다.

“네가 남자 친구라고 부르던 저건 폭군이 싸지른 거라고!”

세스는 귓등을 타고 넘어오는 루이 랜스키의 음성을 듣지 않기 위해 소리를 질렀다.

“어서요! 어서 쏘세요!”

들리지 않았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알렉산더 랜스키도 듣지 못했을 것이다.

세스는 윌리엄 랜스키의 총알이 두개골을 쪼개며 파고드는 소리를 기다렸다. 그러나 대신해서 들려온 소리는 무언가가 뚝, 끊어지는 소리였고 툭, 부딪치는 소리였다.

세스가 눈을 떴다.

알렉산더 랜스키가 보였다.

어떻게 다가왔는지 몰랐다. 그러나 알렉산더 랜스키는 세스의 이마에 닿아 있는 총구를 밀어내고 부친의 자리를 대신했다.

“그게 정말이야?”

눈꺼풀에 총의 무게가 얹힌 것처럼 자꾸만 눈이 무거워졌다. 세스는 눈을 들어 알렉산더 랜스키를 바라보는 것을 포기한 채 그대로 눈을 감았다.

“…….”

입술이 떨렸다. 세스는 몰랐지만 온몸이 그렇게 떨리고 있었다.

무서웠다. 그렇게나 도망치고 싶었던 제 속의 가장 깊은 곳을 알렉산더 랜스키가 발가벗기고 있었다. 절망이 까맣게 머릿속을 뒤덮었다.

“눈 떠. 나 봐. 그게 정말이냐고 묻잖아.”

“…….”

세스는 눈을 감고 거울을 본다고 상상했다. 거울 속의 알렉산더 랜스키는 이쪽과 눈이 마주치는 일이 없이 산뜻하게 등을 돌렸다. 알렉산더 랜스키의 모습이 점점 작아지기 시작했다. 작고 작아져서 마침내 아주 작은 점 하나가 되었다.

실제로도 그랬으면 좋았을 것이다.

거울에는 아무런 흠도 남지 않을 테고 세스는 아주 작은 점 하나가 그 안에서 머물고 있다는 사실만을 기억했을 것이다.

거울 속에서 알렉산더 랜스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아직 충분할 만큼 작아지지 않았다.

“너는 알고 있었어?”

“응.”

“처음부터?”

“……응.”

그러나 계속 작아지고 있었다. 알렉산더 랜스키의 마지막 말은 속삭임처럼 들릴 정도로 아주 낮고 작았다.

“일부러 속였어?”

말하지 않았다. 대신 도망쳤다. 도망치려던 노력들이 소용없었을 뿐이었다.

아니, 유감이 아니었다. 세스는 아무것도 후회하지 않았다.

“……응.”

“왜?”

말할 수 없었다. 도망치는 것도 할 수 없었다. 그저 그랬을 뿐이었다. 그러니 아무것도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말하면…… 네가 날 싫어할까 봐.”

알렉산더 랜스키가 더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눈 떠. 나 봐.”

“응.”

세스는 힘겹게 눈꺼풀을 치켜올렸다. 작아지지도, 멀어지지도 않은 알렉산더 랜스키의 얼굴이 눈앞에 있었다.

“내가 널 싫어하지 않아서 기분 좋았어?”

“……응.”

“나는 어떨 것 같아?”

“그건…… 잘 몰라.”

“그래. 너는 애초에 다른 사람이 어떤지 잘 모르니까. 뇌가 이상하다고 했나? 잘 모르고, 관심도 없고, 집중도 못 하고. 뭐 하나 알아들어먹게 하려면 이쪽이 안절부절못해야 하고.”

“…….”

알렉산더 랜스키는 뼈에 금이 간 손으로 세스의 머리카락을 휘감아 이마가 온전히 드러나게 했다.

“뇌가 이상한 거야, 아니면 그냥 개 같은 거야?”

“나…… 난……,”

“내가 안달복달 매달리다가 널 강간하게 만들었잖아. 그럴 동안에도 너는 내내 우리가 한 핏줄인 걸 입 다물고 있었다는 거잖아. 그따위로 생겨먹은 머릿속은 대체 뭐가 들은 거야.”

알렉산더 랜스키는 저를 강간하지 않았다. 믿기지 않을 정도로 친절했다. 저를 사랑한다고 했다.

“나는…… 잘 몰라.”

알렉산더 랜스키가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있던 손을 놓고 잠시 허탈하게 웃었다.

“그런 걸 보면 핏줄이란 걸 안 믿을 수도 없겠네. 이 집구석은 다들 비정상으로 태어나니까. 그런데 그중에,”

웃음이 멎었다.

“네가 제일 이상해.”

마침내 거울 속의 알렉산더 랜스키가 점이 되었다.

퍼억!

느닷없는 발길질에 세스가 앞으로 고꾸라졌다. 알렉산더 랜스키는 뭔가를 씹는 사람처럼 입술을 꽉 다물고 쓰러진 세스를 걷어찼다. 살과 살이 부딪치는 소리가 운율을 띠었다. 뼈가 뼈와 만나는 소리가 리듬을 만들어 냈다. 고요가 가득 드리워진 어느 숨 막히는 공간을 음악과 가장 거리가 멀다고 느껴지는 운율과 리듬이 일정하게 채워 나갔다.

세스는 몸을 웅크리지도, 얼굴을 감싸지도 않았다. 언젠가는 이런 날이 올 수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알렉산더 랜스키가 단순히 이름 없는 일로인의 공식 남창을 대할 때처럼 그저 무심하거나 경멸하는 게 아니라, 지금처럼 뼛속까지 그의 존재를 증오할 수도 있는 날을.

세스의 내부에서 무언가가 소리를 내며 깨져 버렸다. 아마도 그가 처음 알렉산더 랜스키에게 키스했던 순간에 탄생했던 그것일 터였다. 아무것도 없던 내부에 생겨나 체온과도 비슷한 온도로 세스를 채우던 그것이 잘게 깨어져 버렸다.

“……흑,”

세스가 작은 신음을 흘려보냈다. 그리고 다시 이를 악물었다.

알렉산더 랜스키는 발길질을 멈추는 사이사이 의지와는 상관없이 끓어오르는 호흡을 잠깐씩 뱉어 내며 속삭였다.

괜찮아? 아직 맞을 만해?

…….

멍청하긴. 이 집구석에서 배다른 형제를 환영이라도 할 줄 알았어? 있는 자식들끼리도 서로를 못 죽여서 안달인데.

…….

아, 네가 원한 건 그런 게 아니었나. 그냥 더럽게 굴고 싶었던 거였어? 이놈이나 저놈이나 한데 뒹굴면 다 똑같다고 말하고 싶었던 거야?

…….

뭐라고 말 좀 해 봐. 그렇게나 이 집구석에 들어오고 싶었어?

이어지는 발끝이 긴 궤적을 그리고, 세스의 마른 몸이 풀썩 튀었다가 바닥에 기이한 각도를 그리며 다시 내려앉았다. 알렉산더 랜스키가 세스의 팔을 밟으며 몸을 숙였다. 우드득대는 잔인한 소리가 제 팔이 아닌 다른 차원에서 들려오는 것처럼 아득했다.

눈 감지 마. 나 봐.

알렉산더 랜스키는 세스의 머리칼을 움켜쥐고 머리를 들어 올려 시선을 맞췄다. 세스가 가물대는 눈을 뜨자 그는 그대로 세스의 머리를 바닥에 깔린 대리석에 처박았다.

넌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로 이 집에서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어.

찢긴 이마를 타고 흘러내린 피가 시선에 고였다. 세스가 엉망으로 부어터진 입술을 더듬거리며 열었다.

……아니…… 야.

뭐가 아니야?

랜스키……의 아, 아들……이 되고 싶……었던 게…… 아, 아니…… 야. 네, 네가…… 너처럼 되고 싶…… 었던 게 아니…… 야.

그럼?

알렉산더 랜스키라는 이름을 처음 듣는 순간.

억울하지도 분하지도 않았다. 그저 시선이 먼저 움직였다. 인간이 심장박동을 제 마음대로 조절할 수 없는 것처럼, 그저 시선을 멈출 수 없었다.

알렉산더 랜스키가 있는 곳은 세스의 반대편이었다. 매일 아침 눈을 떠야 하는 이유가 없는 이 세상의 반대편에서 그가 살고 있었다. 그 완벽한 세계가 그와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알렉산더 랜스키가 하루를 살면 세스는 하루를 죽었다. 그가 걸어가면 세스는 그 자리에 남았다. 그것은 뭔가 제 삶을 유지하는 균형추 같았다. 그가 온전하다면 저는 그 무엇이 되어도 괜찮았다.

눈이 따끔했다. 찢긴 살점 속으로 소금기가 느껴졌다. 손을 들어 문지르고 싶었지만 한 방울의 힘도 남아 있지 않았다. 세스는 붉어진 눈을 감지 않으려고 애쓰며 말했다.

“네가…… 내가 아니라……서…… 그래서…… 좋았…… 어.”

결국 눈이 감겼다.

거울 속에 남은 아주 작은 점 하나도 시야에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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