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의식이 돌아왔을 때 이마에 느껴지는 것은 차갑고 단단한 피스톨의 감촉이 아니었다. 누군가의 따뜻하고 건조한 손바닥이었다.
“……일어났어?”
세스는 눈을 깜박였다. 경련처럼 몇 번을 거푸 반복하고 나자 눈이 뜨였다.
“이번에는 정말로 일어난 거지?”
“……어디야?”
비좁은 시야가 답답했다. 세스는 잠시 후에 눈을 다 뜰 수가 없어서 그렇다는 것을 깨달았다.
“눈 뜰 때 조심해. 안와골이 조각났대. 수술을 열세 시간을 했어. 시력이 완전히 상하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지만 얼굴형은 좀 바뀔 수도 있다고 그러더라. 나중에 성형수술을 해야 할지도 모른대.”
답답한 시야 안으로 익숙한 얼굴이 들어왔다. 존 리든이었다.
“그럼 병원이야?”
“응. 얼굴만 문제가 아냐. 함부로 움직이지 마. 멀쩡한 데가 거의 없어. 늑골이 부러진 게 폐를 찔러서 큰일 날 뻔했다고 했어. 움직일 일 있으면 나한테 먼저 말해.”
“어떻게……?”
어떻게 병원에 왔냐는 물음일 것이다. 존 리든은 입술을 꾹 물었다.
“죽을 줄…… 알았는데. 왜 병원…….”
작게 이어지는 세스의 말을 들으며 존 리든은 대답 대신 오래도록 누워 있느라 더러워진 머리카락을 쓸어 주었다.
“내가 주워 왔어.”
“……?”
“랜스키가에서 널 갖다 버리던데. 그래서 내가 주워 왔어.”
존 리든의 말은 과장이 없는 사실이었다. 눈앞에서 세스가 납치당하고, 한 박자 늦게 차를 끌고 온 마이아 페레즈의 전화기로 알렉산더 랜스키에게 전화를 걸었다. 간신히 전화가 연결됐을 때 알렉산더 랜스키는 제 집 안에서 세스를 발견했다. 그는 별일 아닌 것처럼 얘기하고 곧 전화를 끊어 버렸지만 마이아 페레즈와 존 리든은 걱정을 멈추지 못하고 랜스키가로 차를 몰았다.
저택 안으로 들어가지는 못하고 경비원들이 더는 위협할 수 없는 지점에서 발을 구르고 있을 무렵, 알렉산더 랜스키에게서 전화가 왔다.
데려가. 내 눈에 안 보이게 치워.
알렉산더 랜스키의 말은 그게 전부였다. 전화가 뚝 끊긴 것과 동시에 검은 수트를 입은 남자들이 뭔가를 질질 끌고 나오는 것이 보였다.
피투성이가 된 세스였다. 그들은 숨을 쉬는지도 알 수 없는 세스를 정문 밖에 그대로 놓아둔 다음 다시 저택 안으로 사라졌다. 존 리든과 마이아 페레즈가 세스를 옮겨 와 병원으로 데려왔다.
세스가 급하게 수술실로 들어가는 동안 마이아 페레즈는 끝도 없이 알렉산더 랜스키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그는 단 한 번도 받지 않았다. 존 리든은 일로인의 학생 복지처에 전화를 걸어 상담교사 에밀리 고티의 전화번호를 알아냈다. 에밀리 고티는 다행히도 마이클 그린의 개인 휴대전화 번호를 알고 있었다. 막 공항에 도착해 가던 마이클 그린은 그로부터 세 시간 정도가 지나자 병원에 도착했다. 존 리든은 처음으로 마이클 그린의 얼굴을 보았다. 그리고 그 나이의 남자가 병원 바닥에 주저앉아 소리 내어 우는 모습도 처음 보았다.
내 잘못이야. 내 잘못이야, 맙소사.
마이클 그린이 윌리엄 랜스키와 세스의 거처를 두고 얘기를 나눴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존 리든은 그가 터트리는 죄책감을 이해하지 못했다.
수술이 끝날 때까지 알렉산더 랜스키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마이아 페레즈는 혹시 그마저 잘못된 게 아닌가 하는 걱정에 여러 통의 문자 메시지를 남겨 두었다. 세스가 눈을 떴다 다시 의식을 잃는 것을 반복하는 동안 마이아 페레즈는 알렉산더 랜스키의 휴대전화에서 더는 유효하지 않은 번호라는 안내가 흘러나오는 것을 듣고 있었다.
며칠 후 재판이 시작되었다.
아직도 눈을 뜨지 못하고 있는 세스의 병실 안에서 TV를 통해 재판 내용을 보도하는 방송을 지켜보던 존 리든은 알렉산더 랜스키가 밀레나 헤이워드를 비롯한 여섯 명을 폭행한 사건이 전혀 다른 무엇으로 뒤바뀌어 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재판 과정에서는 내내 세스 그린의 존재가 생략되어 버렸다. 마치 아무도 세스를 모르는 것만 같았다. 아무렇지도 않게 살아 있는 사람의 존재를 지워 버리는 랜스키가의 방식은 충격적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세스 그린은 누구의 관심도 받지 않을 수 있었다. 집요하고 철저한 랜스키가의 묵언은 나중에는 세스를 보호하기 위한 것처럼 여겨질 정도였다.
재판이 진행되어 가면서 가장 큰 가해자가 되어 버린 것은 일 년째 교제 중인 알렉산더 랜스키와 밀레나 헤이워드 사이를 용의주도한 거짓으로 갈라놓은 제이 에드거였다. 제이 에드거는 사건이 있었던 당일 이후로 행방이 계속 묘연한 상태였다. 배런트 카운티의 경찰들이 FBI와 협력하여 용의자 제이 에드거의 행방을 쫓는 데 최선을 다하고 있노라고 경찰청장이 기자회견을 통해 밝혔다.
존 리든은 세스의 병실을 지키며 이 모든 부조리를 받아들였다.
세스가 증인석에 올라 선서 아래 진실을 밝혀야 하는 날 같은 건 없어야 했다. 그가 어디서부터 어떻게 존재했는지에 대한 진실은 아는 사람이 적을수록 좋았다. 머리로는 아는 일이었다. 그러나 진통제 기운이 떨어지면 의식이 없는데도 신음으로 몸을 뒤트는 세스를 볼 때마다 부조리와 타협한 자신이 역겨웠다.
재판은 어이가 없을 정도로 싱겁게 끝났다. 검사는 항소하지 않았고 과도한 자기방어를 했던 알렉산더 랜스키는 기록에 남지 않는 약간의 지역 봉사 활동 외에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았다.
TV 화면을 통해 보이는 알렉산더 랜스키는 랜스키 왕족의 막내 왕자다운 모습이었다. 칼같이 말끔한 수트 선이 흐트러짐 없이 단정한 얼굴과 어우러져 사진 기자들에게 완벽한 피사체를 선사했다. 오직 존 리든만이 그 완벽한 피사체에서 역겨움을 느꼈다. 존 리든은 TV에서 알렉산더 랜스키를 보는 내내 그 얼굴을 치즈 그레이터에 갈아 버리는 상상을 했다.
세스는 그동안 내내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에 조용히 잠겨 있었다. 병원에서도 이렇다 할 해답을 내놓지 못했다. 뇌파와 바이탈 사인은 수술 이틀 후 안정화되었지만 조각처럼 굳은 눈꺼풀은 그렇지 않다고만 했다.
내내 병원과 학교를 오가던 존 리든은 기말 고사를 엉망으로 치르고 곧장 병실에 처박혔다. 가족들은 아버지의 여름휴가 기간에 맞춰 이오니아 섬으로 여행을 간다며 들떠 있었지만 존 리든은 방학 내내 세스의 병실에서 머물 계획이었다.
졸업을 반년 남겨 둔 알렉산더 랜스키는 재판이 끝난 이후로 일로인에서 볼 수 없었다. 무슨 짓을 했는지 영국의 대학으로 가게 됐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한 달이라는 시간이 그렇게 흘러갔다.
세스가 눈을 뜬 오늘 존 리든은 시키는 사람도 없는 기도를 했다. 감사합니다, 그 말 한마디가 전부인 기도를.
“어떻게 됐는지 궁금하지 않아?”
세스가 또다시 무의식 속에 잠들어 버리거나 할까 봐 존 리든은 열심히 말을 걸었다.
“제이 에드거만 빼놓으면 사건은 거의 다 해결이 됐어. 마음에는 안 들지만. 혹시 걱정할까 봐 하는 말인데 랜스키는 무사해. 영국으로 갈 거래.”
“……그래.”
눈 주위의 근육을 사용하는 게 불편해 자꾸만 눈꺼풀을 깜박대느라 의미 없이 고이는 눈물들을 존 리든이 거즈로 눌러 주었다.
“아프지?”
“잘 모르겠어.”
“진통제 양을 계속 조절했다고 의사가 그랬어. 의식이 돌아왔을 때 통증이 너무 많이 느껴지면 한꺼번에 쇼크가 올 수도 있다고. 불편하거나 아주 많이 아프거나 한 데는 없어?”
“괜찮아.”
“그래, 다행이다. 힘들면 억지로 눈 뜨지 말고 감고 있어. 대신 또 확 며칠씩 잠들어 버리지 말고. 그럴 때마다 놀라서 죽을 것 같았으니까.”
“알았어.”
소곤대는 존 리든의 음성 외에 병실 안은 그저 조용했다.
“음악이라도 틀어 줄까? 어제 애런슨이 왔다가 지 아이팟을 주고 갔어. 무슨 병실이 이렇게 조용하냐고 그러던데. 웃긴 놈이지. 병실은 당연히 조용해야 하는 거잖아.”
정확히 애런슨은 병실이 너무 조용해서 무덤 같다고 했다.
무덤이라는 말이 입에서 나오는 순간 존 리든은 울컥하는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애런슨을 후려갈겼다. 애런슨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정신 차려, 이 새끼야. 너도 지금 시체 같다고. 남창하고 사이좋게 손잡고 같이 죽기라도 할 작정이야? 존 리든은 애런슨을 두들겨 패면서 이 난데없는 소란에 세스가 깨어나길 바랐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때마침 도착한 마이아 페레즈가 둘을 말리지 않았다면 그대로 몸싸움으로 이어졌을 것이다. 애런슨이 말한 대로 존 리든은 세스와 같은 병실에 나란히 누웠을지도 몰랐다.
“아니.”
“……하긴, 애런슨 취향의 음악이면 여기가 병원이 아니라 나이트클럽처럼 되겠다.”
존 리든이 몸을 일으켰다. 이제 목발을 짚지 않고도 걸을 수는 있지만 아직까진 걸음에 불편한 표시가 남아 있었다. 그나마 병원에서 있는 시간이 많아 재활이 번거롭지는 않다는 게 다행이었다. 존 리든은 재활과 물리치료를 하루도 빼먹지 않았다. 심지어 의사가 일주일에 세 번으로 재활 시간을 정했지만 그 외에도 자발적으로 재활 병동을 찾았다. 몸 어딘가가 불편해 제대로 쫓아가지 못했던 순간의 무력감을 다시는 겪고 싶지 않았다.
“창문 열어 줄까? 안 답답해?”
이렇게 말하면서 존 리든은 벌써 창문을 열고 있었다. 구름을 두텁게 두르고 있는 창백한 달은 검은 하늘에 찍힌 희미한 얼룩으로 보였다.
잠시 서서 창밖을 바라보던 존 리든은 몸을 돌려 침대 옆으로 다가갔다.
“이따가 그린 씨가 오실 거야. 집에서 뭐 가져다달라고 할래?”
순간 세스의 방이 떠올랐다. 아무것도 없이 그저 하얗던 벽과 책상이. 세스가 애착을 가졌던 것은 오로지 알렉산더 랜스키뿐이었다는 생각이 들어 그 하얀 벽이 한층 더 공허하게 느껴졌다.
“없어.”
“아니면 내가 내일 가져다줄까? 병원에 혼자 있으면 되게 심심할 텐데.”
“괜찮아.”
어쩔 수 없이 존 리든의 눈동자에 날카로운 선이 돋아났다.
“……정말 괜찮아?”
세스가 대답 대신 물끄러미 그를 쳐다보았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해도 괜찮다는 말이 불안정한 시선 안에 담겨 있었다. 존 리든은 그것을 허락으로 알아듣고 잘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뗐다.
“……그날 이후로 한 번도 못 봤어. 연락할 방법도 없고. 집으로 찾아가도 물론 없다고 하고. 법원에도 가 봤지만 경호원들이 빈틈없이 싸고 돌아서 접근할 수가 없었어. 그래도 네가 해 달라고 하면,”
존 리든이 하고 싶었던 말은 알렉산더 랜스키였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내가 그 새끼를 네 눈앞에 데려다 놓을게. 말해 봐. 그렇게 할까?”
세스가 랜스키 저택으로 납치되었다가 피투성이가 되어 다시 나올 때까지, 그 집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무도 몰랐다. 존 리든은 궁금한 게 아니었다. 제 안에 둔탁한 상처인 양 웅크리고 있는 그 시간을 해소하고 싶은 것이었다.
알렉산더 랜스키와 세스는 공유해서는 안 될 것을 공유했다. 존 리든은 세스가 그 비밀을 숨기고 랜스키와 연인이 된 이유가 무서웠다. 존 리든이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해 고통스러워하는 사이 세스는 랜스키 저택으로 갔다. 그리고 살아 있다기보다는 죽어 가는 상태에 더 가까운 몸으로 돌아왔다. 그러자 세스 앞에서 이해 못 할 고통 따위는 아무런 의미가 없어져 버렸다. 존 리든은 비로소 세스를 이해했다. 애초에 단 하나밖에 중요하지 않은 사람도 있다는 것을.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그 집에서.”
세스가 눈을 감았다.
지금 이 순간 떠오르는 것은 많지 않았다. 구겨진 수표와 수표를 구겨 버리던 알렉산더 랜스키가 생각났다. 그는 그 순간에도 이 세상의 반대편에 있었다.
세스가 작게 웃었다. 세상의 반대편과 세상을 잇던 작은 거울이 사라졌다. 알렉산더 랜스키는 떠났다. 반년이나 일찍.
세스가 서 있는 이 세상은 다시금 원래대로 돌아왔다. 한 번 호흡할 때마다 죽음에 한 번 더 가까워지는 것만이 원칙인 세상으로.
세스는 다시금 매일 약을 먹고, 매일 부작용을 앓고, 매일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다가 가끔씩 충동적으로 자해를 하며 살아갈 것이다.
“들켰어.”
“……그,”
“랜스키가 알았어. 잔뜩 화가 났어.”
“그럼……,”
세스의 손이 잔뜩 부어 있는 눈가를 더듬었다.
“그건 들키지 않았으면…… 했는데.”
숨을 한 번 내쉴 때마다 몸이 앓는 소리가 심장 근처에서 들려왔다. 문득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난, 한 번도…… 그런데 왜…… 그렇게 말했는…… 데 왜 그걸…… 랜스키는…… 몰랐을…… 까…….”
눈물이 흘렀고, 세스가 어깨를 들썩였다. 그러다 곧 기침을 뱉어 내며 몸을 떨기 시작했다.
“울지 마.”
존 리든이 어디가 잘못될까 차마 끌어안지도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아주 조심스럽게 세스 위에 팔을 둘러 안는 시늉을 했다.
“그게 궁금한 거지?”
그렇게 물은 존 리든은 저 혼자 답을 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대답을 가져올게.”
“…….”
세스는 싫다거나 괜찮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래서 존 리든은 웃었다.
이제야 비로소 그가 해 줄 수 있는 일이 생겨났다. 첫사랑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제 시작인 기분이었다.
아주 느리고, 가끔은 고통스러울지도 모르는 시작이었지만.
* * *
MJ호텔의 한 층을 통째로 빌린 랜스키가의 파티는 소란으로 치달아 갔다. 오늘 파티에 초대받은 대부분의 아이들은 이렇게 호화로운 곳을 눈으로 직접 보기는 처음이었다. 얼떨떨한 기분은 곧 광기로 돌변했고 크고 작은 사고들로 이어졌다. 랜스키가의 경호원들은 또다시 테라스에서 1층의 수영장으로 곧장 다이빙 하려 드는 정신 나간 인간들이 없는지 감시하느라 눈이 빠질 지경이었다. 그렇게 건져 올린 아이들이 벌써 세 명이었다. 결국 파티는 수영장이 있는 야외 정원으로 장소를 옮겼다. 젖은 수트가 무겁게 몸을 감는 상황에서도 랜스키가의 경호원들은 음료수대와 음식들을 3층에서 1층으로 나르는 수고를 거들어야 했다.
따라서 경호원 중 누군가가 랜스키가의 막내 왕자가 일주일만 더 늦게 태어나거나, 아니면 그의 무죄 판결이 일주일만 더 늦게 선고되기를 바랐다고 해서 근무 태만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그저 날짜가 겹쳤을 뿐이다. 재판은 무사히 끝났고, 대학이 정해졌고, 생일 파티를 해야 할 무렵에 환송식까지 겹쳐 버렸을 뿐이다. 알렉산더 랜스키가 떠날 때까지 고작 일주일이 남아 있었다.
“잘 가라, 랜스키. 영국에 가서도 일로인을 잊지 말고. 일로인의 파티 정신을 영국에도 퍼트리고 와.”
잔뜩 흥이 오른 누군가가 비치 테이블 위로 뛰어올라 소리쳤다. 그는 칵테일 베이스로 사용하는 커다란 럼의 병마개를 뜯어 그 안에 마리화나 잎을 털어 넣었다.
“오늘의 파티를 있게 해 준 랜스키에게. 만세!”
“만세!”
비치 테이블을 둘러싼 아이들이 절반은 벗고, 절반은 젖은 상태로 깔깔대며 웃었다. 마리화나 잎과 술이 잘 섞이도록 요란한 동작으로 술병을 흔들어 댄 그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알렉산더 랜스키에게 외쳤다.
“어이, 랜스키! 받아라, 선물이야!”
훌쩍 날아간 술병이 바닥에 떨어지기 전 알렉산더 랜스키가 용케도 낚아채자 무리에서는 더 큰 소란이 터져 나왔다.
“마셔! 마셔!”
“달려, 랜스키! 달려!”
“전하, 미천한 백성들에게 화끈하게 사는 법을 가르쳐 주옵소서!”
벌써 술에 취해 표정이 풀려 있던 알렉산더 랜스키는 별 거부감 없이 뚜껑을 열었다. 그가 병을 거꾸로 들고 입술 위로 술을 흘려 붓자 축구장에 훌리건들이 몰렸을 때처럼 거센 함성이 울려 퍼졌다. 식물인간 판정을 받고 병원에 잠들어 있는 헤이워드를 대신한 것처럼 날씬한 몸매에 화사한 금발을 틀어 올린 누군가가 다가와 알렉산더 랜스키의 턱을 타고 흐르는 럼주를 핥아 마시자 파티는 손쓸 도리가 없는 곳으로 흘러갔다. 알렉산더 랜스키가 술병과 함께 비치 베드로 쓰러졌다. 킥킥 웃으며 달려드는 여자애들은 저들끼리 먼저 번호표를 뽑을 기세였다.
그러나 번호표 0번을 뽑은 것은 또 다른 밀레나 헤이워드가 아니라 갓 파티장에 도착한 존 리든이었다.
존 리든은 알콜과 마리화나의 냄새를 풍기며 반쯤 눈이 풀려 있던 알렉산더 랜스키의 멱살을 쥐고는 그대로 수영장에 처박았다.
풍덩!
꺄아아악!
왜 그래! 무슨 일이야!
리든이 왕자를 때렸어!
뭐라고? 리든이 파티에 왔어?
새로운 소란이 더해졌다.
존 리든은 남들이 떠들거나 말거나 수면 위로 떠오르는 알렉산더 랜스키를 다시 낚아채 이마를 들이받을 기세로 고개를 바싹 끌어왔다. 존 리든은 지금 그가 얼마나 한심하고 애처로운지에 대해서는 훈계할 마음이 없었다.
“긴말 안 해. 물어볼 게 있어 온 거니까 대답만 하면 놔줄게.”
알렉산더 랜스키는 제 멱살을 붙든 존 리든의 팔을 붙들었다. 알콜에 절어 있는 손은 조금도 사납지 않았다.
“꼭 그랬어야 했냐?”
“…….”
“그 녀석은…… 씨발, 온몸이 망가져서 평생 후유증을 안고 살아가야 된다는데 너는 꼭 그렇게까지 했어야 했냐고. 그 녀석은 제 입으로 단 한 번도 욕심 낸 적이 없다고 하는데 너는 왜 그랬어. 그 녀석은 네가 화내는 게 싫어서…… 네가 남의 차나 처박고 다니는 게 싫어서, 네가 걔 눈앞에서 이것저것 깨부수는 게 싫어서 더는 도망 못 쳤다는데 너는 왜 그랬냐고. 그 녀석은……! 그 녀석은 너만 행복하면 좋겠다고 했어. 그 녀석은 한 번도 너하고 엮이길 바란 적 없었다고! 내 차 타고 달아나려는 걸 네가 개짓거리로 억지로 붙잡아 갔던 거잖아! 그렇게 도망치던 녀석을 매번 징글징글하게 도로 붙잡아 가던 게 너였어! 그건 알고 있냐? 그런데도 그렇게 했어야 했어?”
“…….”
“대답하라고, 이 새끼야!”
첨벙!
존 리든은 알렉산더 랜스키의 머리를 다시 한번 물속으로 처박았다. 다시 물 위로 떠올랐을 때 알렉산더 랜스키의 얼굴은 온통 젖어 있었다. 머리카락을 타고 뚝뚝 흐르는 물이 턱선을 타고 흘러 다시 수영장과 섞여 버렸다.
얼굴이 온통 젖어 있었다.
“……알고 있어.”
“…….”
눈도 젖어 있었다.
“나도 알아.”
알렉산더 랜스키는 존 리든에게만 들릴 정도로 나직하게 말했다. 다음 순간 존 리든은 허탈하게 손을 놓았다. 알렉산더 랜스키가 허물어지듯이 수영장 바닥으로 내려갔다.
한발 늦게 랜스키가의 경호원들이 달려와 존 리든을 호텔 밖으로 끌어내고, 알렉산더 랜스키를 건져 올려 커다란 타월을 둘러 호텔 룸으로 데려갔을 때도 그는 계속 그렇게 물속에 깊이 잠겨 버린 표정이었다.
세스가 물었다.
“다녀왔어?”
“응.”
“뭐라고 했어?”
“알고 있대.”
“……. 그랬구나. 알고 있구나.”
“응. 그렇대.”
“……그럼 됐어.”
세스는 그 뒤로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존 리든 또한 그 이상의 말은 하지 않았다.
물속에서 끄집어 올렸던 랜스키의 얼굴을 타고 후드득 흘러내렸던 물의 정체를 도무지 알 수 없었다는 그런 말은.
* * *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마이클 그린은 머레이 힐의 집을 판 금액의 일부를 세스의 계좌에 넣어 주었다. 그가 세스를 위해 알아본 기숙학교는 비행기를 타고 다섯 시간을 이동해야 하는 곳에 있었다. 차로 한 시간 떨어져 있는 뉴욕보다는 덜 붐비지만 배런트보다 훨씬 많고 다양한 사람들이 사는 곳이었다.
하루의 시차를 두고 마이클 그린이 먼저 아시아로 떠났다. 그는 이전보다 훨씬 개운한 얼굴을 한 채 이제는 행복하라는 세스의 말에도 더는 울지 않았다.
빈 집에서의 마지막 하루를 혼자서 보내게 된 세스는 아무것도 없는 침대 위에 둥그렇게 앉아 있다가 문득 반달이 떠 있는 걸 보았다.
“아……. 오늘 하프 문이구나.”
세스는 창문을 열고 창턱에 몸을 기댔다. 선명한 상아색을 띠운 반쪽의 달이 또렷하게 지상을 마주 보고 있었다.
공연히 기분이 이상했다. 매 순간 한 발짝씩 조용히 죽음을 향해 낡아 가는 심장이 갑자기 쿵쿵 울리기 시작했다. 세스가 충동적으로 창턱에 올라 지붕으로 나가려는 순간 빨간색 지프가 시야에 들어왔다.
“안 자고 바람 쐬고 있었어?”
세스는 어정쩡하게 창문 밖으로 몸을 내민 상태로 지프에서 훌쩍 뛰어내려 저를 쳐다보는 존 리든과 마주했다.
“왜 왔어?”
“바다에 갈까? 오늘 하프 문이잖아. 그거 볼 수 있을지도 몰라.”
세스가 잠시 입을 다물고 있다가 느리게 다시 물었다.
“어떻게 알았어?”
“뭘?”
내가 지금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거.
세스는 말하지 않았지만 존 리든은 아니라는 말에 담긴 다른 말들을 쉽게 알아챘다. 병원에서 머무는 내내 그런 식이었다. 언제부턴가 그는 세스가 하는 짧은 말들을 마침표에 담긴 의미까지 어렵지 않게 알아들을 수 있게 되었다.
“내려와. 그렇다고 지붕에서 뛰어내리진 말고. 아직 무릎이 시원찮아서 받을 자신은 없어.”
“안 그래.”
세스는 천천히 계단을 걸어 내려가 1층의 현관문을 열었다. 존 리든은 제 무릎이 시원치 않아서라고 했지만 사실은 세스의 몸이 더 문제였다. 상처보다 더 깊은 후유증이 몸 이곳저곳에 남아 버렸다. 조각난 안와골은 모양을 다시 짜맞췄지만 날이 궂거나 컨디션이 좋지 않을 때는 사납게 통증을 일으켜 눈가에 경련을 만들어 냈다. 시력은 이전의 절반으로 떨어졌다. 상처가 난 폐 덕분에 과격한 심폐기능을 요구하는 운동은 평생 무리였다. 수영이나 육상에 취미가 없던 게 다행이었다. 의사의 말로는 평생토록 몸이 기억해야 하는 사고의 흔적이라고 했다. 알렉산더 랜스키는 그에게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상처를 남겨 놓았다.
문을 열자 존 리든이 닿을 듯 가까이 서 있었다.
“왜 이렇게 빨리 내려왔어?”
“아냐. 천천히 걸었어.”
“아니긴. 내가 그렇게 보고 싶었냐.”
“아닌,”
“시끄러워. 더 말하지 말고 손잡아.”
존 리든이 손을 내밀었다. 세스는 이전처럼 거절하는 대신 손을 잡고 그가 이끄는 대로 지프에 올랐다. 존 리든은 몸을 기울여 안전벨트를 단단히 매 주었다.
존 리든의 빨간 지프가 하프 문 베이를 향해 천천히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세스가 물었다.
“차 또 바꾼 거야?”
존 리든은 입을 한껏 벌리고 웃었다. 세스가 그런 사소한 일들을 먼저 물어보기 시작한 것은 최근의 일이었다. 그리고 세스가 그럴 때마다 존 리든은 조금씩 감동했다.
“아니. 사고 나기 전에 내가 끌던 거야.”
“저번에는 다른 차였잖아.”
“아아, 그거.”
존 리든이 웃다 말고 뺨 근육을 실룩거렸다.
“랜스키가 우리 집 포드를 망가트려 놓고 보상이랍시고 사 준 차 말이야?”
알렉산더 랜스키는 핑크색 폭스바겐을 보내왔다.
“하여간 그건 진짜 개새끼야. 지구 반대편으로 꺼진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해. 아니면 핑크색 비틀에 치여서 죽었을 테니까. 내가 감옥에 가더라도 그 새끼는 꼭 차로 받……, ……이런 얘기 하지 말까?”
세스는 전방을 응시한 채로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아직 아프지?”
“괜찮아.”
존 리든이 세스의 머리를 툭툭 쓰다듬었다.
“장하다.”
차는 그렇게 20분을 달렸다. 바다가 보이기 전부터 잔잔한 파도 소리가 먼저 들려왔다. 존 리든은 적당한 자리에 차를 세운 다음 먼저 차에서 내려 세스를 위해 문을 열어 주었다. 이제 그 정도는 괜찮다고, 깁스를 제거한 지도 한참 됐다고 말해도 존 리든은 항상 과하게 그를 보살폈다.
“달은 괜찮지만 날씨는 그리 맑지 않은 것 같은데. 비가 오려나?”
존 리든은 꾸물꾸물 움직이는 검은 밤하늘을 보며 말했다. 배런트 카운티에 비가 내리는 날은 드물었지만 한번 내리기 시작하면 태풍처럼 사나운 기세로 세차게 지면을 할퀴곤 했다.
“글쎄.”
세스가 손가락 끝으로 광대 주변을 더듬으며 존 리든을 따라 하늘을 쳐다보았다. 날이 궂으면 조각났던 눈가가 욱신거려 온다는 것을 알고 있는 존 리든이 걱정스레 물었다.
“아파?”
“아니. 별로.”
“그럼 비는 안 오겠다.”
두 사람은 세스의 걸음에 맞춰 천천히 하프 문 베이에 다가갔다.
검은 하늘에 상아색 달이 보석처럼 선명히 박혀 있었다. 수면이 잔뜩 높아진 파도가 땅을 향해 힘껏 달려왔다.
그러나 그림자와 더해져 하나가 된 둥근 달이 하늘과 바다를 동시에 채우는 하프 문 베이의 기적 같은 것은 없었다. 하프 문 베이의 기적을 처음 세상에 알렸던 이름 모를 사진가의 사진은 이제 더 이상 기적의 증거가 되지 못했다.
“그거 사실 포토샵 조작이었대. 오늘 기사 떴더라.”
존 리든이 약간 쓰게 웃으며 세스의 뒷머리칼을 만지작거렸다. 아주 조심스러운 그 손길은 위로 대신이었다.
“이제 여기는 진짜 재미없는 동네가 되겠네. 죽기 전에는 한번 볼 수 있을 줄 알고 사는 사람도 제법 있을 텐데. 그게 다 거짓말일지도 모른다니. 지금껏 제대로 본 사람이 있기나 한 건가.”
“…….”
세스는 아무런 말도 없이 조각난 채 걸려 있는 달을 들여다보았다. 수면 위에 끊어질 듯 위태롭게 드리워진 달그림자는 아주 고운 상아빛이었다.
“너도 보고 싶었어?”
세스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표정은 실망한 것 같은데.”
“아니야. 실망하지 않았어.”
세스의 말은 기적이 없어도 괜찮다는 뜻과는 약간의 거리가 있었다.
“원래 기적 같은 건 없어.”
“…….”
잠시 말이 끊겼다.
존 리든은 괜찮은 위로의 말을 고민하다 포기하고 세스를 따라 기적 없는 까맣고 건조한 하늘을 바라보았다.
“다리 안 아파? 좀 앉을까?”
세스가 딱히 거절을 하지 않자 존 리든 재빨리 겉옷을 벗었다.
“여기 앉아.”
“……네가 앉아.”
“앉아. 차가워. 너 아직은 감기 걸리면 안 돼. 그 폐로 기침할 거 생각해 봐라. 끔찍할걸.”
존 리든이 내내 우기는 바람에 세스는 결국 그가 벗어 준 옷 위에 앉았다. 존 리든이 난로를 대신하듯 세스의 곁에 바싹 붙어 앉았다.
“안 추워?”
“응.”
“안 심심해?”
“응.”
세스는 그 뒤로 기적과는 조금도 어울리지 않는 모양새로 밤하늘을 채우고 있는 반달을 바라보다 불쑥 입을 열었다.
“이젠 괜찮아.”
“……뭐가?”
“네가 나한테 이렇게 하지 않아도 된다고.”
“…….”
존 리든은 뭐라 말하기 어려운 표정으로 입을 뻐끔 벌렸다 닫았다.
할 수 없는 말들이 그 사이로 흘러나와 입김이 되어 흩어졌다. 내가 부담스러워? 내가 너한테는 아무것도 아냐? 너는 아직도 랜스키를 좋아하는 거야? 그런 말들은 인어공주가 가짜 마녀에게 다리를 팔아 사 온 불량품처럼 한번 내뱉으면 스스로 상처 입힐 것 같았다.
“나는 이제 다 잊고 열심히 살겠다는 그런 생각 같은 건 못 하지만…… 그래도 일부러 죽으려고 그러진 않아.”
“…….”
세스가 평소와는 달리 길게 하는 말은 고맙다는 인사 같기도 했고 미안하다는 사과 같기도 했다.
“네가 그랬잖아. 랜스키한테서 나쁜 점만 기억하라고. 그러면 잊기 쉬워질 거라고. ……그래서 해 봤어.”
존 리든은 잠자코 세스의 말을 기다렸다.
“나쁜 건 없었어.”
랜스키는 친절했어. 나한테 사랑한다고 해 줬어. 나는 그게 너무 좋았어.
세스가 사는 세상은 기적이 존재하지 않는 곳이었다. 알렉산더 랜스키가 떠나는 것은 이미 정해진 일이었다. 그저 잠깐만 쳐다보고 싶었을 뿐이었는데, 알렉산더 랜스키는 아주 많은 것을 남겼다. 대부분은 제 몸에 남은 흉터가 됐지만 그중에 나쁘다고 할 만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세스는 기적이 없다고 믿었지만 알렉산더 랜스키에 관한 건 어쩐지 전부 다 기적 같았다.
“상처는 내가 준 거야. 그러면 안 됐는데, 너무 좋아서.”
그래서 마침내 떠날 준비가 되었다. 하프 문 베이를, 기적은 없지만 기적을 바라는 사람들이 있던 이곳을.
“알았으니까 이제 괜찮아.”
“그렇다니까 나도 괜찮겠다.”
존 리든은 아마도 기적을 바라는 사람들 중 하나였을 것이다.
그는 아직도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알렉산더 랜스키가 사라졌으니 이제부터 다시 시작할 생각이었다.
“오늘 입학허가서 받았어. 네가 갈 학교에서. 엄마가 일주일을 우셨지만 결국 허락받았어. 나도 너하고 같이 갈 거야. 오늘 그 말 하려고 왔어.”
“…….”
세스가 사고 이후로 모양이 약간 달라진 눈을 커다랗게 떴다. 뭐라고 말하면 좋을지 모르겠다는 표정이 너무 선명해서 존 리든은 그 눈가에 입을 맞추고 싶었다.
“말려도 소용없어. 가기로 한 거니까.”
존 리든은 진학을 두고 치열하게 고민했던 시간에 대해 투정을 부릴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세스가 알고 있기를 바랐다.
“……왜?”
“너도 그랬잖아.”
너도 안 된다는 걸 알면서 랜스키를 사랑했잖아.
그러니까 나도 그렇게 하려고. 나는 네가 사랑받았어야 했던 시간만큼 너를 사랑할 거야.
존 리든이 헤아린 그 시간은 세스의 모친이 죽었다던 십육 년 전부터였다. 앞으로 십육 년 동안은 핑계나 대가 없이도 세스를 사랑할 작정이었다.
십육 년이 얼마나 긴 시간인지 지금으로서는 잘 가늠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존 리든은 목표가 생기면 일단 달려드는 성격이었다. 못 할 것도 없을 것 같았다. 그들은 아직 까마득히 젊었으니까.
존 리든은 고개를 숙여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세스의 입술에 키스했다. 세스는 입을 열어 주는 일도 없었지만 그를 밀어내는 일도 없이 조용히 입술의 움직임을 받아 주었다.
키스를 마친 존 리든이 말했다.
“사귀자, 우리.”
“…….”
세스가 한참의 시간을 두고 난 후에 조용히 대꾸했다.
“남자 친구 말고, 그냥 친구.”
“좋아. 남자 친구는 십육 년 뒤에 하면 돼.”
“왜 십육 년이야?”
“그땐 나도 떳떳하게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뭘?”
최선을 다해서, 죽도록 사랑했다고.
대답을 삼킨 존 리든이 대신 손을 내밀었다. 세스는 잠시 망설이다 그의 손에 손가락 끝을 댔다. 그 모습을 보던 존 리든이 귀밑을 솜사탕 색깔로 붉히며 말했다.
“사랑해, 세스 그린.”
두 사람은 달이 거의 사라질 무렵이 돼서야 하프 문 베이를 떠났다. 너무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손가락을 서로 살짝 부딪친 채.
* * *
“사랑한다는 말은 내가 먼저 했어.”
세스와 존 리든이 떠난 바닷가에 그림자가 하나 생겨났다. 흐려지는 달빛처럼 그림자 역시 금방이라도 사라질 듯 위태로워 보였다.
“한 번만 봐주는 거야. 환자라서.”
그림자는 모래 위에 새겨진 두 개의 발자국 중 어느 한 발자국만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그 옆에 발자국의 궤적을 따라 자신의 발자국을 새기기 시작했다.
“사라지지 마.”
그림자가 속삭이듯 낮게 중얼거렸다.
사라지지 마. 그러기엔 이미 늦었으니까.
하프 문 베이의 새벽 바다가 그림자의 등 뒤로 가느다란 파도를 한 줄기 몰고 왔다.
파도는 인간을 닮아 있었다.
발이 묶여 더는 다가가지 못하고 그저 주변을 어루만지다 사라지는 그런 인간을.
잠시 후 하프 문 베이에는 새벽 해가 떠오르고 반쪽 달은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
<하프 문 베이 1부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