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화 (14/23)

01.

올해의 인디언 서머는 유독 짧았다.

그 뒤로는 체감 기온이 뚝 떨어진 쌀쌀한 가을 날씨가 거짓말처럼 다가와 버렸다. 기온의 변화는 예고도 없이 너무 빨랐고, 그래서 머리는 몸보다 더 늦게 가을이 시작된 것을 알았다.

그리고 알아 버린 순간에는 이미 늦었다. 세스가 벌써 감기에 걸렸다. 존 리든은 운 좋게 늦은 시간까지 문을 열고 있는 드럭 스토어를 발견하고는 처방전이 필요 없는 해열제와 딸기 향 시럽에 가까운 물약을 샀다.

“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세요.”

점원의 인사를 어깨 너머로 흘려듣고 유리문을 열자 찬바람이 불어와 뺨을 긁었다. 존 리든은 알콜이 만들어 낸 둔탁한 시야가 갑자기 선명해지는 것을 느꼈다.

“……제기랄.”

작게 욕설을 뱉어 낸 존 리든은 두 블럭을 더 걸어 세스와 함께 살고 있는 아파트로 향했다.

달칵.

현관문의 문고리를 돌리며 존 리든은 세스가 지금쯤이면 잠이 들어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열과 약간의 진땀이 묻어 붉어진 얼굴로 간간이 마른기침을 내뱉다가 구겨진 시트에 몸을 감고 있을 것이라고.

그가 사 들고 온 해열제는 사실 별 소용이 없었다. 이런 약을 먹고 나을 감기였으면 아픈 줄도 몰랐을 것이다.

세스는 잠들어 있지 않았다.

안보다 밖이 더 환한 창가 자리에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현관을 열면 직선으로 시선이 닿는 위치라 존 리든은 세스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세스는 어디라도 다녀온 모양인지 목에 제법 두께가 있는 모직 스카프를 두르고 있었다. 그러나 그 아래 보이는 옷은 아직도 반팔이었다. 오래 입어서 소맷단이 말려 올려간 반팔은 세스에게도, 존 리든에게도 익숙했다.

세스는 벌써 여러 계절을 그 반팔 티셔츠와 함께 보냈다. 세스는 자기 자신을 돌보지 않는 만큼 자신이 무엇을 입고 있는지에 대해 관심이 없었다. 거리에 아무도 반팔을 입고 다니는 사람이 없을 때가 돼서야 작년 이맘 때 옷장에 처박아 두었던 긴팔 옷을 꺼내 들 것이다.

존 리든은 아직 알콜 맛이 남아 있는 혀를 찼다.

“제정신이냐? 그 꼴로 나갔다 왔어?”

세스가 서서히 고개를 돌렸다.

“응.”

오늘도 세스가 상냥하고 다정하게 어서 오라며 반겨 주는 일은 없었다. 존 리든은 그런 것들에 익숙해져 있었다.

“왜 그랬어. 오늘 하루는 얌전히 자고 있으랬잖아.”

“그랬어. 낮까진.”

“그런데?”

세스가 어두워서 더 하얗게 보이는 마른 손가락으로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심심했어.”

“……뭐?”

“그래서 TV를 봤어.”

존 리든이 대답 대신 얼굴을 구겼다. TV 채널이야 하루 종일 돌아가지만 최근 들어 뉴욕 거주자들이 가장 많이 접하는 채널은 아마도 그것일 것이다.

“재판, 졌다며.”

젠장. 존 리든이 고개를 틀어 묵직한 한숨을 내뱉었다.

“……하필이면. TV는 일 년에 한 번 틀까 말까 한 놈이.”

세스가 말하는 재판이란 존 리든이 뉴욕 지방 검사실의 부검사장이 되어 새 오피스로 옮기자마자 처음 맡았던 사건이었다.

23번가의 이탈리아 마피아 구역에서 일어난 세 건의 살인 사건으로, 마피아 간의 세력 다툼이 원인이라는 점에서는 별로 특이할 게 없었지만 시체가 전시된 충격적인 방식이 문제가 되어 요 몇 달 언론을 떠들썩하게 만들고 있었다. 거기에 범인을 기소했던 지방 검사장 존 리든도 한몫을 거들었다. 존 리든은 도축장에서 쓰는 전기톱을 들었던 당사자뿐 아니라 사건을 사주한 인물로 보그단 벨체프를 지목해 살인 교사로 함께 기소했다.

최근 20년 사이에 가장 빠른 속도로, 가장 무자비하고 더러운 방법으로 성장한 루마니아계 마피아 보스 벨체프가 정식으로 기소된 적은 처음이었다.

그 사실만으로도 언론은 들끓었고, 검찰 내부도 들끓었고, 뉴욕 경찰들도 들끓었다. 하지만 존 리든이 몇 달을 악착같이 매달렸어도 벨체프는 멋지게 꼬리를 말고 도망치는 데 성공했다. 총 12명의 증인을 내세웠지만 그중 절반은 재판이 진행되는 도중에 의문사를 당했고 살아남은 절반은 증언을 철회하거나 아니면 행방불명이 되어 버렸다. 존 리든이 패한 원인은 증거 부족이었다.

애초에 무모한 싸움이었다. 검사장은 제 손으로 부검사장에 임명한 존 리든이 새 책상에 앉자마자 기록한 요란 벅적한 패배를 두고 재판이 끝난 직후부터 신경질을 퍼부었다. 존 리든은 검사장이 소리 지르는 내내 느긋하게 법정을 빠져나갔던 벨체프의 등을 되새김질하며 전기톱을 익명으로 구매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했다. 아마 이 사건에 배정된 뉴욕 경찰의 절반쯤이 존 리든과 같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무모했다. 벨체프를 기소하는 순간부터 그 사실을 알았다. 하지만 멈출 수가 없었다. 십 년 전 그날, 갓 도축한 고깃덩이 같은 몰골로 랜스키가의 저택 밖에 버려지던 세스를 떠올리면 도무지 멈출 수가 없었다.

일주일에 두 번씩 여전히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는 세스는 이제 괜찮다고 했지만 그가 괜찮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누구라도 때려 부수고픈 기분이었다.

“…….”

존 리든은 또 한 번 혀를 찼다. 그가 성난 걸음으로 걸어와 이미 닫혀 있는 창문을 한 번 더 콱 닫았다.

“감기 걸린 놈이 왜 여기서 이러고 있어. 침대로 가.”

세스가 턱을 들어 올렸다. 눈썹 위, 아직도 희미해지지 않은 상처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왼쪽 눈이 경련하듯 파르르 떨려 왔다.

“네가 왜 그랬는지 알아.”

존 리든이 소리 나게 어금니를 씹었다.

“아니, 넌 몰라.”

“나 때문에 그런 거잖아.”

“아니야. 너한테 생색 한번 내려고 경력 다 팽개치고 일을 벌이진 않아. 그마저도 망쳐 버렸고. 쪽팔리니까 더는 얘기하지 마.”

“그러지 말라고 하고 싶었어. 벌써 늦었겠지만. 그래서 찾아갔어.”

꽉 물고 있는 어금니가 아파 왔다.

“……찾아가? 누굴? 어디를?”

“너를.”

세스의 말이 이어졌다.

“처음엔 그냥 법원으로 갔는데, 넌 이미 갔다고 해서 검사실로 찾아갔어. 거기에서도 네가 간 줄 알더라고. 집에 온 줄 알았는데 기다려도 네가 오지 않았어. 그래서 네가 자주 간다는 그 가게로 갔어.”

“…….”

어딘가로 씹어 삼켰던, 그래서 괜찮아졌을 거라고 생각했던 취기가 다시 한꺼번에 몰려왔다. 존 리든은 눈을 꾹 감았다.

“네가 섹스하는 걸 봤어.”

“…….”

빌어먹을.

그나마도 어둡던 공간이 한층 더 깜깜해졌다. 존 리든은 제 이빨 사이에서 으득대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을 몰랐다. 턱선이 빠듯하게 드러날 정도로 이를 물고 있다는 것도 몰랐다.

십 년.

벌써 십 년이었다. 세스와 그가 애인도 아니고 친구도 아닌 어중간한 경계에 서서 함께 기대 온 시간이 십 년째였다.

대부분의 시간 동안 존 리든은 세스를 사랑했다. 사랑이 욕망이고 미움이고 원망이고 해소되지 않는 욕구라면 그는 분명 세스 그린을 사랑했다. 세스가 결국 새로 옮긴 학교에 적응하지 못하고 재활원으로 갔을 때도, 오래도록 재활원에서 신음할 때도, 고교 중퇴자로 사회에 나와 무기력하게 방황할 때도 한결같이 사랑했다. 세스가 집 근처의 한 작은 식당에 파트타임 직장을 구했을 때는 눈물이 날 만큼 감격했다. 지금 세스가 반년이 넘도록 성실하게 앨공퀸 호텔 레스토랑의 웨이터로 일하고 있는 건 제 인생에서 가장 자랑스러운 일 중 하나였다.

그간 존 리든은 세스가 중간에 포기해 버린 학교를 졸업하고, 대학교를 나와 로스쿨을 마치고 곧장 변호사 자격증을 땄다. 이 년쯤 큼지막한 로펌에서 변호사로 일하다 그다음에는 뉴욕 지방 검사실에 자리를 얻었다. 그는 변호사가 아닌 검사가 되었다.

그건 아마도 세스 때문이었을 것이다. 벨체프나 랜스키 같은 인간들을 세스를 대신해 감옥에 처넣기 위해서.

아니, 세스는 핑계였을 것이다. 그가 하고 싶었다. 제 손으로 십 년 전 그때 하지 못한 일을 하고 싶었다. 십 년간 존 리든은 정신없이 살아왔고, 정신없이 세스 그린을 사랑했다. 뉴욕 지검의 최연소 부검사장이 된 그간의 기소 이력은 팔 할이 세스 그린을 사랑하기 때문이었다.

십 년을 그렇게 살았다. 십 년 동안 세스를 사랑하고 욕망하고 미워하고 원망하며 살아왔다. 가끔 오늘처럼 다른 누군가와 즉흥적으로 몸을 섞는 일도 있었다. 여자일 때도 있었고 남자일 때도 있었다. 그들은 대부분 곱고 매끄러운 검은 머리칼에 하얀 피부를 지니고 있었다.

존 리든은 당장 등을 돌려 도망치고 싶은 충동과 한참을 싸웠다.

재판에서 졌고, 벨체프는 등을 돌려 유유히 달아났다. 그때와 달라진 건 없었다. 알렉산더 랜스키는 죽지 않을 정도로 세스를 폭행한 뒤 유유히 등을 돌려 사라져 버렸다. 자신은 패배를 핑계 대고 아무나 붙들고 섹스를 했다.

그는 여전히 두 손이 묶인 듯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더욱 나쁜 것은 세스가 이 모든 걸 알아 버렸다는 사실이었다.

그때처럼 무능한 자신을. 십 년이 지났어도 달라진 건 하나도 없다는 것을.

십육 년 동안 이어져야 하는 인내를 바닥낸 채 아무와 섹스해 버리는 자신을. 그럼에도 여전히 세스 그린을 사랑하고 있는 자신을.

“……그랬냐.”

“응.”

“그거 참……. 씨발, 쪽팔리게.”

“…….”

세스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어려운 시선 뒤에 할 말이 생겨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존 리든이 먼저 입을 열었다.

“약 사 왔어.”

존 리든은 바지 주머니를 뒤적거려 해열제와 수상쩍은 물약을 꺼내 놓았다.

“나 씻고 나올게. 그 전까진 이 약 먹지 말고 있어. 분명히 넌 하루 종일 아무것도 안 먹었을 테니까. 수프라도 끓일 테니 그거 먹고 약 먹자.”

존 리든은 도망이라도 치듯 빠르게 등을 돌렸다. 그대로 욕실로 가 버리려는 그를 세스가 붙들었다. 옅은 갈색 눈동자가, 언제나 그를 어디로든 출렁이게 만드는 세스의 눈동자가 빤히 그를 올려다보았다. 숨이 멎는 기분이었다.

“……왜? 또 그런 소리 하게?”

“…….”

“이렇게 살지 말라느니, 약 같은 거 사 오지 말라느니, 병원비 같은 거 알아서 내겠다느니 하는 소리?”

“……,”

“입 다물어, 세스 그린.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 나도 아는데, 씨팔, 그렇다고 너한테 그런 소리 들어야 된다는 건 아냐. 재판에서 지고 기분 더러워서 술 좀 마셨어. 대충 너하고 비슷해 보이는 새끼 붙들어서 취했다는 핑계 대고 벗겨서 안에 쌌어. 처음도 아니고 가끔 그래. 네가 몰랐던 거야. 그러니까 너하고 나는 달라질 거 없어. 이제 좀 씻자.”

세스가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나 그를 붙든 손을 놓아주진 않았다. 존 리든은 그럴수록 초조해지는 손끝으로 이마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거칠게 잡아당겼다.

사실은 세스를 잡아당기고 싶었다. 세스의 머리칼 안에 손가락을 집어넣고 헝클이고 싶었다. 지난 십 년간 언제나 그래 왔다.

그가 원하는 건 위로 말고는 아무것도 없는 접촉이 아니었다. 십 년간 그가 지쳐 버린 만큼 지칠 때까지 세스의 몸 안에 사정하고 싶었다.

십 년이었다. 십 년밖에 되지 않았는데 그는 벌써 지쳐 있었다. 어느 날엔가는 더는 참지 못하고 저항하지 않는 세스에게 섹스를 요구할 것만 같았다. 세스는 거절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그렇듯이 넘쳐나는 욕구를 절제하지 못하고 거푸 신음하며 매달리는 짓도 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세스가 한참 후에야 입술을 뗐다.

“나는…… 네가 바라는 대로, 낫지 않아.”

존 리든은 피곤한 손짓으로 세스를 밀었다.

“그만하자니까.”

“아니. 너도 알아야 해. 나는 낫지 않아.”

존 리든은 입술을 실룩였다.

낫지 않는다니. 그럼 그간 내가 재활원과 정신과 의사한테 쏟아부은 돈은 대체 뭔데.

“나는 좀 이상하게 태어났어. 그건 절대로 낫지 않아. 나는 그냥……,”

“너는 그냥, 뭐?”

비틀린 입술 끝에서 냉기가 흘러나왔다. 무력한 세스는 그에게 애정과 애증의 대상이었지 비난의 대상은 아니었다. 어쩔 수 없다는 것은 존 리든도 충분히 알았다.

그러나 지금은 너무 지쳐 있었다. 그는 언제까지고 세스 그린을 사랑할 자신이 있었지만 그렇다고 언제나 다정할 순 없었다.

“이렇게 사나 저렇게 사나 똑같다고?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더 나을 것도 없고 그러니 그냥 대충 살다 죽겠다고? 그러니 더는 귀찮게 하지 말고 이제 그만 꺼지라고? 가서 다른 놈이나 찾으라고? 씨발, 너는 진짜…… 사람 등신 취급하지 마. 십 년 동안 내가 너한테 한 것들을 그렇게 쓰레기처럼 만들지 말라고. 이거 그만 놔.”

존 리든은 목에 핏대를 세우고 거친 말들을 쏟아냈다. 그리고 곧 후회했다. 존 리든이 험악해진 표정을 가리려는 것처럼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었다.

“……미안. 이렇게 말하려던 건 아니었는데. 나 좀 봐주라, 오늘은. 오늘은 내가 너무 힘들어.”

손바닥이 만들어 낸 작은 벽이 시야를 가렸다. 그 알량한 벽이 지금 이 순간에는 절실하기까지 했다. 존 리든은 표정을 감추고, 세스의 표정 역시 가린 채 비로소 솔직해졌다.

“대체 난 왜 이러냐. 나도 너한테 근사하고 잘난 인간이고 싶은데…… 씨발, 이도 저도 다 실패야. 다 잡아 처넣고 너한테 내가 한 거라고 말해 주고 싶었는데…… 십 년 전 일은 이제 와 어떻게 못 해도 지금이라면, 지금은 애가 아니니까. 젠장, 그런 마음으로 덤볐으니 졌지. 그래 놓고는 애먼 데다 화풀이나 하고……. 오늘은 네 얼굴 보기 너무 부끄러워. 나한테 너무 화가 나는데, 너한테 험한 소리나 하고 있는 꼴이 너무 쪽팔려. 미안해, 진짜. 미안하다. ……씨발, 여전히 나는 한심한 애새끼 같아. 한심해 죽겠네. 미안해서 돌아 버리겠다. 미안해.”

하프 문 베이를, 배런트 카운티를 벗어나는 순간부터 달라질 줄 알았다.

느리지만 차근히 세스가 안정을 되찾아 가고, 자신은 그를 사랑하고 언젠가는 그 역시 자신을 사랑하게 될 것이라 믿었다. 그건 그저 혼자만의 망상이었다.

“나 좀 봐주라. 더는 너한테 미안하게 만들지 마. 너무 괴롭다.”

존 리든은 눈가를 거칠게 문지르며 말했다. 그가 말을 마칠 때까지 조용히 지켜보던 세스가 입을 열었다.

“나는 낫지 않아.”

“…….”

고집은. 또 그 소린가.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더 나빠지지 않는 거야. 고티 선생도 그렇게 말했어. 안정을 유지하면 다른 사람들처럼 지낼 수 있다고. 그게 내가 해야 되는 일이라고. 나도 그렇게 생각해. 약을 먹고 상담을 받고 하는 건 모두 지금처럼 있으려고 하는 거야.”

지금처럼이라고.

지금이 대체 너한테는 어떤데?

존 리든은 그렇게 반문하고 싶었다. 그가 필사적으로 인내하고 버티고 간신히 이겨 내고 있는 이 지금을 세스는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그에게는 모든 것이 세스를 사랑하는 과정이었지만 세스에게는 무엇인지 그 역시 궁금했다.

“나한테는 지금이 최선이야.”

세스가 입술을 잘근 씹었다. 창을 통해 들어오는 외부의 조명에 눈이 익숙해지자 어둡기만 하던 집 안의 구석구석이 보였다. 존 리든은 달처럼 창백해 보이는 세스의 실루엣을 눈으로 더듬었다.

십 년 동안 세스는 거의 변한 게 없었다. 눈썹 위에 상처가 생겨난 것을 빼고, 세스는 여전히 마르고 위태로웠다. 지금이 최선이라는 말은 그래서 무의미하게 들렸다.

“너만…… 애쓰고 있는 게 아니라고. 나도 노력하고 있어. 지금처럼 있으려고.”

“…….”

세스가 숨을 훅 들이켰다. 눈가가 당기는지 눈썹 위 상처를 거칠게 문질러 댔다. 세스는 무언가 내키지 않는 행동을 할 때처럼 손을 내밀었다가 다시 쥐는 동작을 반복했다.

“나는 그때 죽어도 상관없었어. 그런데 지금은 아니야. 잘 살고 있다고 생각해. 매일 아침에 일어나서 씻고 음식을 먹어. 샤워를 하고 옷을 입어. 오후에는 일을 하고 밤에는 집으로 돌아와. 남들이 자는 시간에 잠을 자. 내가 더 이상 잘 살 수는 없어. 나는 괜찮아. 너와 있어서.”

“…….”

세스는 달라지지 않았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 존 리든은 지금에서야 알았다. 십 년 전 세스 그린의 삶을 회전시키던 것은 알렉산더 랜스키였다. 하지만 그를 잃고도 세스는 여전히 살아 있었다.

“나는 낫지 않아. 내가 달라져 봤자 그건 더 나빠진다는 얘기야. 나는 지금처럼 있을 거야. 지금이 나한테는 최선이야. 그런데…… 그런데 너는 그렇지 않아서 다른 사람이 필요한 거라면……,”

“그만.”

존 리든은 세스를 와락 끌어당겨 안았다. 저항이 없는 세스는 안기는 게 아니라 허물어지는 것 같았다.

세스가 계속해서 말했다. 속삭임은 그에게도 듣기 어려울 정도로 아주 작았다. 그리고 중간중간 끊어졌다.

“나한테는 이게 최선이야. 너하고, 이렇게 있는 게.”

존 리든은 세스가 이를 무는 소리를 들었다. 마치 울음을 참는 것처럼.

“그러니까 너하고 있는 게, 나한테는 제일 좋은……,”

“알았다니까.”

존 리든은 세스의 뒷머리를 움켜쥐었다. 틈이 벌어져 숨차게 들린 고개를 그가 입술로 덮었다.

숨 쉴 틈도 없는 키스였다. 십 년의 세월이 한꺼번에 포개지는 듯한 키스였다. 존 리든은 숨이 막힐 때까지 세스를 빨아들였다. 지금처럼, 지금만큼만. 그 말이 이렇듯 숨 막히게 들리는 까닭을 이제 알았다. 멈출 수가 없었다.

존 리든이 집어 삼킬 듯 뒤덮던 세스의 입술을 놓아준 것은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였다. 어디에선가 묵은 정액을 토해 냈던 페니스는 다시금 신선하게 부풀어 올랐다. 존 리든은 그에게도, 세스에게도 뚜렷이 느껴지는 욕망의 흔적을 애써 감추려 들지 않았다.

“너는 내가 이럴 거라는 걸 알잖아.”

세스가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그게…… 뭐?”

“너는 원하지 않잖아. 이런 식으로는.”

“그게 뭐?”

세스는 아니라고 하진 않았다. 존 리든이 그를 사랑하는 만큼 저도 사랑한다고는 말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상관없다고 했다.

존 리든이 세스의 턱을 붙들었다. 시선이 흔들림 없이 이어졌다.

“마음 없는데 섹스는 하고, 이유도 모르면서 받아들이고…… 그런 건 일로인에 있을 때와 똑같잖아.”

“달라.”

오래 걸릴 줄 알았던 대답은 의외로 빠르고 단호했다.

“지금 내가 괜찮은 건 너 때문이라고 생각해.”

그들은 여전히 친구와 애인의 모호한 경계 위에 서 있었다. 세스가 잘게 떨리는 손끝으로 그를 다시 붙들었다.

“너 때문이야. 네가 있어서.”

“……!”

존 리든이 다시 입술을 겹쳤다. 아플 정도로 거센 키스였다.

존 리든은 세스의 한계를 시험하듯 그를 사납게 밀어붙였다. 자신이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세스가 저를 어디까지 받아들이는지 몸으로 확인하려는 것처럼 덤벼들었다.

최선이라는 말은 사랑한다는 말과는 다를 것이다.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해 버리는 자신이 이상한 게 분명했다.

제기랄. 그래도 괜찮아.

존 리든은 허겁지겁 혀를 얽으며 스스로에게 중얼거렸다.

내가 최선이라잖아. 그럼 됐어.

더 큰 것을 바라지 않으면 되는 것이다. 지금 이 상태가 그들에게 있어 최선이자 전부라는 것을 받아들이면 되는 것이다.

존 리든은 세스를 침실로 이끌었다.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다른 공간에서 잠들던 세스가 온통 그의 체취가 묻어 있는 어지러운 시트 위에 누웠다. 부지런히 옷이 벗겨졌다. 스카프와 반팔 티셔츠가, 무릎과 밑단이 닳아 있는 진즈가, 마른 몸에 피부처럼 달라붙어 있는 사각의 브리프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온전히 알몸이 된 세스를 밖에서 들어오는 노랗고 파란 조명에 의지해 바라보던 존 리든이 침을 삼키며 제 옷을 벗었다. 한 개 두 개씩 풀어지던 와이셔츠의 단추는 결국 순서를 지키지 못하고 뜯겨 나갔다. 존 리든은 한 손으로 세스의 목덜미를 당겨 키스하며 다른 손으로는 바지의 버클을 풀었다. 다급한 손길로 제 옷을 잡아 찢을 것처럼 벗어 가던 존 리든이 다음 순간 아차, 하며 혀를 놓았다.

“왜……?”

이유를 묻는 세스의 눈썹 위 흉터에 존 리든이 뭉개듯 신음을 토했다. 그가 사과를 대신하듯 조심스럽고 부드럽게 입술을 눌렀다.

“미안. 씻고 올게.”

세스는 존 리든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챘다.

“난 괜찮아.”

“내가 안 괜찮아.”

존 리든이 뺨을 붉혔다. 다른 남자가 배출한 흔적이 남아 있는 속옷을 벗고도 당당할 수 있는 성격은 아니었다. 존 리든은 거세게 키스하던 방금 전과는 완연히 다른 목소리로 작게 중얼거렸다.

“저기…… 화내는 거, 아니지?”

“……안 내.”

“미안해.”

“화 안 내.”

존 리든은 잽싸게 세스의 눈가에 입을 맞췄다.

“깨끗이 닦아 내고 올게. 내가 잘못한 거지만…… 그래도 꼼짝하지 말고 기다려. 옷 다시 입으면 안 돼.”

세스가 자동 반사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존 리든은 다시 한번 그에게 키스했다. 한 번 더, 또 한 번 더. 입술이 살에 닿을 때 나는 소리가 성급하고도 다정하게 침실을 울렸다.

“금방 올게.”

그렇게 몇 번을 더 키스하고 나서야 존 리든은 후다닥 욕실로 뛰어갔다. 대충 물을 뿌리고 거품도 일어나지 않은 세정제로 몸을 씻어 낸 다음 다시 침실로 돌아왔을 때 세스는 같은 자세로 침대에 기대앉아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눈가가 따듯해져 왔다. 존 리든은 입술 새를 스며들어 오는 짠 맛을 핥으며 더는 망설임 없이 세스를 끌어안았다.

아파트 창문을 켜켜이 막아선 고층 빌딩의 묵직한 그림자에 가려 보이지는 않았지만 푸르스름한 밤에는 창백한 반쪽 달이 떠 있었다.

* * *

“좀 늦으셨네요.”

외부의 테라스가 보이도록 설계된 유리 벽을 투과하는 이른 오후의 햇살은 자칫 경직되어 보일 수도 있는 새하얀 공간을 화사하게 만들어 주었다. 딱딱하고 권위적인 데스크와 보기만 해도 무거운 각종 의학 서적 대신 푹신한 소파와 화분으로 채워진 이곳은 병원이라는 느낌은 거의 들지 않았다.

세스는 언제나처럼 삼인용 널찍한 소파가 아닌 그보다 약간 떨어져 있는 일인용 의자에 앉았고, 덕분에 의사와 정면으로 마주 보는 게 아니라 미묘하게 시선이 비껴가는 위치에서 이 여유로운 공간을 응시하게 되었다.

대신 세스의 맞은편에는 불투명한 유리가 벽처럼 공간을 구분 짓고 있었다. 아마도 환자의 상담 기록이나 차트, 혹은 의사 면허나 전문서 같은 진짜 병원에서 볼 수 있는 것들을 놓아두고 있을 것이다. 이 우아한 공간에서 유일하게 개방성이 결여된 곳이었지만 유리 벽이라 그런지 막혀 있는 게 아니라 가려 두고 있다는 느낌을 주었다.

어느 날 갑자기 누군가의 소개로 진료를 받을 수 있게 되었다면서 존 리든이 수선을 피우며 끌고 온 병원이었는데, 딱히 호불호가 없는 세스는 더 낫거나 못하다는 생각 없이 일 년이 넘도록 일주일에 두 번씩 방문을 하고 있었다.

목을 칭칭 둘러멘 스카프 사이로 세스가 턱을 움츠리며 미안하다는 말 대신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감기에 걸린 것 같은데. 괜찮아요? 상담을 미루지 그랬어요.”

편안한 바지에 넉넉한 니트를 세련된 감각으로 매치한 남자는 의사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는 첫 상담에서 자신을 정신과 의사가 아닌 또래의 친구처럼 여기라고 거듭 강조하는 바람에 세스를 잠시 당황하게 했다. 어지간해서는 한 달 이내로 예약을 잡기도 힘든 의사라며 존 리든이 수선을 피웠던 것에 비하면 엉뚱하고 소탈한 인상이었다.

“아니…… 괜찮아요.”

“목이 쉬었는데. 정말로요?”

세스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감기 때문이 아니라…… 하여간 괜찮아요.”

겉보기와는 달리 티모시 맥케이는 꽤 성공한 의사였다. 서른둘의 나이에 집필한 저서가 세 권이나 됐고, 그중 한 권은 동부의 의대 대여섯 곳에서 교재로 채택했을 정도였다.

그만큼 상담료도 비쌀 것이다. 처음 동부로 왔을 때 세스의 은행 계좌에는 양부가 남겨 준 이십만 달러가 고스란히 남아 있었지만, 삼 년이 넘도록 재활원을 들락거리자 그 돈도 모자랐다. 웨이터로 일하며 벌어 오는 돈은 아파트 임대료를 대기에도 턱없이 부족했다.

결국 그는 대부분의 생활을 존 리든에게 의지하고 있었다. 세스가 그 사실을 인지한 것은 꽤나 최근의 일이었다. 그는 지금도 일주일에 두 번 있는 한 시간짜리 면담이 얼마나 비쌀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닥터 맥케이는 열이 떨어지지 않아 희미하게 붉은 기운이 감도는 세스를 보며 싱긋 웃었다.

“감기가 아니라면. 과격한 섹스라도 즐겼어요?”

“…….”

처음에는 그게 농담인지 아니면 상담의 일부로 진지하게 묻는 것인지 잠시 헷갈렸다. 그러나 굳이 대답을 피할 것도 없어서 고개를 한번 끄덕였다.

어디선가 툭, 하는 소리가 들려온 듯했다. 세스가 소리를 좇아 두리번거리는 동안 맥케이의 얼굴색이 변했다.

“뭐라고요? 정말입니까?”

세스가 약간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대답하는 그보다 질문을 했던 의사의 얼굴색이 변하는 이유를 잘 알 수 없었다.

“네.”

“저런. 상대는요?”

“존.”

“아, 저런.”

닥터 맥케이의 안색이 한층 더 재미있게 변했다. 그가 다시 정신과 의사다운 매끄러운 표정을 회복한 것은 시간이 좀 지나서였다.

“으음……. 두 사람이 오랜 시간 동안 그저 친구라고 했던 것은 그린 씨였잖아요. 갑자기 관계가 진행된 이유가 따로 있나요? 이건 좀 급작스럽군요.”

세스는 대답을 하는 대신 눈가를 찌푸렸다. 눈썹 위의 흉터를 문지르는 것은 대답이 곤란할 때 대신하는 새로운 버릇이 되었다. 어떤 날은 그저 흔적이 된 줄 알았던 흉터가 새삼스럽게 아파 오기도 했다. 통증을 느낄 때마다 세스는 그 상처를 남긴 사람을 떠올렸다.

시간이 흐른 뒤 망설이는 듯 느린 대답이 들려왔다.

“존이 쭉 원했으니까.”

“네. 그건 충분히 짐작이 가는 얘기였죠. 중요한 건 그린 씨의 마음이지 않습니까. 이전까지는 친구 이상으로 발전할 생각이 없는 게 아니었나요?”

“그건…… 잘 모르겠어요.”

“계기가 있었을 텐데요. 그린 씨의 마음을 바꾸게 만든 계기가.”

“그건…… 아마도, 존이 재판에서 졌으니까.”

세스가 망설임을 거듭하다 답을 내놓자 맥케이가 즉각 되물었다.

“그렇다면 그 섹스는 위로였나요?”

이번에 세스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요.”

또 어디선가 툭,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세스는 반사적으로 얼굴을 찌푸렸지만 소리를 확인하려 들지는 않았다. 서둘러 말을 건넨 쪽은 맥케이였다.

“중간에 얘기가 생략된 것 같군요. 다시 묻죠. 존이 재판에서 졌다는 사실이 그린 씨에게는 어떤 의미가 있었습니까?”

“그냥 나는……. 그 재판은 나를 위한 거였어요. 나를 대신해서 뭔가를 갚아 주려고 했던 거예요. 존은 항상 다 끝났다는 내 말을 믿지 않았으니까. 십 년 전에 있던 사고…… 같은 것들이 제대로 마무리돼야 된다고 항상 말해요. 그런데 그건 나한테는…….”

세스는 간간이 생각을 정리하거나 기억을 억지로 되살리느라 매끈히 말을 잇지 못했다. 맥케이는 좀 전에 비해 한결 차분해진 태도로 그를 기다렸다.

“나한테는 이미 끝난 일이에요. 존이 그렇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는 얘기를 해 주고 싶었어요.”

“흐음. 이미 끝났다고 생각하는군요, 그린 씨는. 하지만 존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기에 계속 방법을 찾고 있는 것이고요.”

“맞아요.”

“존이 그럴 때 어떤 기분이 듭니까?”

“……미안했어요.”

“그렇다면 죄책감 때문에 보상처럼 그를 받아들일 생각이 든 건가요?”

“아니요.”

세스는 또다시 이상한 것을 바라보는 표정으로 닥터 맥케이를 응시했다. 왜 그가 자신이 존 리든과 했던 지난밤의 섹스에 자꾸만 의미를 붙이려고 드는지 알 수가 없었다.

“말했듯이, 나한테는 끝난 일이에요. 존이 그러는 건 별로 의미가 없어요. 나 때문에 하는 일이라는 생각은 들지만 존이 뭔가를 더 할 필요는 없어요.”

“왜 그런가요?”

“지금이 최선이니까.”

세스의 말은 어딘지 모르게 단호했다. 그게 아니면 안 된다는 식이었다. 맥케이는 비싼 상담료에 걸맞은 진지한 눈길로 세스를 살폈다.

“지금이 최선이라고요? 아닙니다. 그린 씨는 더 나아져야 해요. 정신과 상담이 매주 필요한 상황을 최선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어요.”

“나는 낫지 않아요.”

맥케이가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 않다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이제껏 다른 의사들은 그렇게 말했는데요.”

“일부 의사들은 그렇게 말하지요. 하지만 뇌에서 분비하는 신경물질의 유무가 개인의 인생 전체를 좌우할 수는 없습니다. 물론 뇌 손상이 있다면 영구적이긴 하지만 그린 씨의 경우에는 미약한 유전자좌의 변형이 있는 것으로, 고작해야 신경물질이 일반적인 수치에 비해 낮게 생성된다는 것뿐입니다. 세로토닌 분비가 활발한 사람도 우울증에 걸린 예시는 얼마든지 있어요. 제약회사들이 우울증 약을 팔아먹기 위해 정신과 의사들을 열심히 세뇌시키고 있긴 하지만 진실을 말하자면 약은 겉으로 드러나는 증세를 해결해 줄 뿐 병 자체를 치료하지는 않습니다. 그린 씨는 나을 수 있어요. 그게 내가 하는 연구이기도 하고요.”

상담을 통해서 반복적으로 얘기해 주긴 하지만 세스는 그 말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자신은 잘못되어 있고, 거기에는 이유가 필요했다. 자신이 알렉산더 랜스키를 사랑하고 그에게서 버림받은 데에는 이유가 필요했다. 이유가 없는 비극은 더 절망적이었다.

그것은 세스를 더 나빠지지 않게도 했지만 더 나아질 수 없게 만드는 방식이었다. 맥케이는 세스가 모든 것을 자신의 탓으로 받아들인 뒤 더 이상 화해나 해결을 바라지 않고 그 자리에 내버려 둔다는 것을 알았다. 그런 방식으로 세스는 자신을 안정시켰지만 동시에 계속 가라앉고 있기도 했다. 세스는 스스로 안전하다고 믿었다. 그러나 그 위태로운 불균형은 아주 순간일지라도 적절한 계기가 생겨나면 단번에 무너질 수 있었다.

존과의 관계에 안착하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그간 세스를 통해 들어온 존이라는 인물은 믿을 수 없으리만큼 헌신적이고 희생적으로 그를 돌보긴 했지만, 그것은 세스를 그 혼자 안전하다고 믿는 고치에 가둬 두는 역할을 했다.

세스는 평생 약을 먹고 지금처럼 아슬아슬하고 위태로운 안정 속에서 살 수 있었다. 하지만 더 적극적인 치료로 자신을 바꿀 수도 있었다. 맥케이는 세스가 고치를 벗어나도록 만들고 싶었다.

“그린 씨, 좀 더 생각을 해 봅시다. 존과 하는 섹스는 어땠나요? 기분이나 몸 상태나 생각나는 대로 말해 봐요.”

“그냥…….”

“그냥?”

“그냥 다 괜찮았어요.”

괜찮다는 말과 좋다는 말에는 차이가 있었다. 세스가 말하는 최선은 괜찮을 뿐, 좋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린 씨는 오늘 지각을 했잖습니까. 몸 상태도 좋지 않고요. 말을 할 때도 힘들죠? 그건 그린 씨가 섹스를 자기희생의 수단으로 삼기 때문이 아닐까요. 섹스는 욕구를 배출하고 그럼으로써 쾌감을 얻기 위해 하는 행위잖습니까. 몸을 다치거나 힘에 부치도록 만들면서까지 할 이유가 없다는 말입니다.”

세스가 스카프 안으로 좀 더 목을 움츠리며 혼잣말을 하듯 작게 말했다.

“하지만…… 존이 놔주지 않았는데.”

세 번째로 툭, 소리가 들려왔지만 이번에는 다들 신경 쓰지 않았다. 맥케이가 이제야 해명을 하듯 밖에서 누가 뭘 떨어트렸나 보다고 중얼댔지만 하지 않아도 별 상관없을 얘기였다.

“그게 문제라는 겁니다. 존을 위해서 희생하는 게 섹스의 목적이 아니니까요. 그런 관계는 오래 가지 않아요, 그린 씨.”

“…….”

“그런 관계는 정신과 의사가 아니라도 권하지 않을 겁니다.”

잠시 침묵하던 세스가 불쑥 말했다.

“괜찮아요, 그래도.”

“그린 씨,”

“존도 희생해요. 나만 하는 게 아니에요. 내가 하는 건 희생이라고 할 수도 없어요. 내가 해 주는 건 섹스가 전부인데.”

“양쪽 다 희생하는 거죠. 그래서 옳지 않다는 겁니다.”

“그러면 된 거 아닌가요.”

세스가 툭 내뱉은 대꾸가 맥케이의 말을 끊었다. 그답지 않게 기분이 좋지 않아 보였다.

“어쨌거나 같이 있잖아요. 나는 그거면 돼요.”

맥케이의 눈빛이 움찔 흔들렸다. 일 년이 넘는 상담에서 세스가 한 말이라고는 괜찮아요, 정도였다. 우울증의 원인이나 눈썹에 흉터를 남긴 사고에 대해 이야기하면서도 이미 끝난 일이라 괜찮다는 말이 전부였다. 세스가 그간 말하지 않았던 무언가를 엿본 기분이었다.

“존과 같이 있는 게, 그가 무얼 요구하든 들어주면서까지 같이 있는 게 그린 씨에게는 중요합니까?”

“…….”

세스는 대답하지 않았고 맥케이는 의사의 눈으로 세스를 살폈다.

“이유가 있겠군요. 꼭 존이어야 하는 이유가.”

세스가 눈을 치켜떴다. 가장 먼저 반응하는 것은 흉터였다. 세스는 파드득 경련이 이는 눈가를 손바닥으로 눌렀다.

“존을 연인으로 사랑하는 게 아니고…… 그렇다면 그와 같이 공유하고 있는 과거 때문인가요? 그린 씨는 다 괜찮다고 하지만 사실 과거에서 벗어날 준비가 안 된 게 아닙니까?”

“…….”

손바닥 아래의 얼굴에서는 아무 말도 새어 나오지 않았다.

“여전히 그린 씨에게 중요한 건 존과 함께했던 과거뿐입니까?”

“……그만두죠.”

세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맥케이가 시계를 가리켰다.

“아직 시간 남았는데요. 지금 나가셔도 남은 상담비는 환불해 드리지 않을 겁니다.”

“마음대로 하세요.”

맥케이는 상담 도중 자리를 박차고 나가려는 환자를 바라보는 의사와는 약간 동떨어진 표정으로 세스를 보았다. 걱정과 우려보다는 호기심을 못 참겠다는 그런 표정이었다.

“왜 그렇게 화를 내는 겁니까?”

“화내지 않아요. 더 말하기 싫은 거지.”

“그게 그거죠. 이제껏 상담하며 이런 적 없지 않습니까.”

“이제까지는 그런 질문 하지 않았으니까요.”

“여기서 환자는 그린 씨예요. 질문을 하는 건 의사인 나고, 무슨 질문을 할지는 내가 정하는 겁니다.”

“나는 대답 안 해요.”

“그린 씨.”

세스는 맥케이의 만류를 등으로 뿌리치며 성큼성큼 걸어가 문을 왈칵 열어 버렸다.

“그린 씨!”

쾅!

단호한 대답처럼 그 어떤 여지도 남기지 않고 문이 닫혔다.

“……쯧.”

닥터 맥케이가 혀를 찼다. 그러나 언짢은 기색이 아니었다. 오히려 언짢은 기운은 다른 곳에서 흘러나왔다.

“돌팔이 같으니.”

반투명의 유리 벽으로 구분된 방 안에서 누군가가 걸어 나왔다. 맥케이는 익히 알고 있었던 것처럼 새삼 놀라지 않았다. 대신 눈가를 가늘게 접으며 기분 나쁜 표시를 냈다.

“닥쳐. 몰래 숨어서 엿듣고 있던 주제에. 그럴 거라면 곱게 있기라도 하든가. 이번에는 또 뭘 못 참아서 때려 부수고 있었어? 소리가 날 때마다 내가 얼마나 당황했는지 알기나 해?”

그가 맥케이의 맞은편 일인용 소파에 앉아 등을 기댔다. 세스가 방금까지 앉아 있었던 그 자리였다. 부드럽게 몸을 감싸는 느낌 탓인지 그는 그대로 눈을 감았다.

소파에는 아직도 체온이 남아 있었다. 그는 손가락을 세워 사람의 피부를 더듬듯 팔걸이를 감싼 가죽 커버를 쓸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맥케이가 질린 표정을 지었다.

“변태 같으니. 사람도 아니고 짐승 가죽을 더듬으면서 뭘 그렇게 느끼는 거야. 그리고 몇 번을 말했지만 이거 범죄야. 이젠 좀 자중하는 게 어때? 내가 경찰이라도 불러야겠어?”

그는 눈을 감은 상태에서 중얼거리듯 작게 말했다.

“상담료 환불해.”

맥케이가 왈칵 목소리 톤을 높였다.

“미쳤냐. 내가 왜?”

“한 시간짜리 상담이 20분도 못 갔어. 환불해.”

“환자가 멋대로 뛰쳐나갔다고.”

“네가 무능한 돌팔이라는 소리잖아.”

맥케이가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별 개소리를 다 듣겠네. 너 같은 미친놈을 지금껏 다독여서 사람 구실하게 만들어 놓은 게 누군데 그런 소리야. 정신 감정서 다시 써 줄까? 갱신할 때 안 됐어?”

“아니면 남은 40분만큼 보충하든지.”

맥케이가 혀를 찼다.

“쯧쯧. 결국 그게 문제였네. 몰래 숨어서 훔쳐보는 것도 보는 거라고, 그 40분을 마저 못 봤다고. 그래서 남한테 돌팔이니 뭐니 화풀이를 해 대는 거지. 쯧쯧. 솔직하지 못하긴.”

“내일은 시간이 안 되니까 모레로 해.”

“시끄러워. 나한테 그런 의무까진 없어. 네가 번번이 옆방에 숨어들어 오는 것을 알면서도 경찰을 안 부른 게 어디야. 앞으로 한 번만 더 돌팔이니 뭐니 해 봐. 확 다 말해 버릴 테니까.”

이제껏 저 할 말만 하던 그가 잠깐 입매를 굳혔다.

“말한다고?”

맥케이가 눈을 흘겼다.

“왜. 차라리 누가 말해 줬으면 싶냐?”

“……아니.”

“진심이야?”

“아직은. 아직 아니야.”

“그럼 입 닥치고 있어.”

“…….”

그가 감았던 눈을 피곤한 듯 들어 올렸다. 거짓처럼 차고 반듯한 회색이었다. 맥케이는 저 회색 눈은 언제나 사기라고 생각했다. 저렇게 바닥까지 비칠 것처럼 맑은 눈은 사실 아무것도 보여 주지 않았다. 남자의 외모는 꼭 그 눈처럼 흠잡을 데가 없었지만 남자가 강박적으로 감추고 있는 내부는 폐허와 다를 게 없었다. 남자는 게이를 싫어하고 인간을 혐오했다. 그런 인간이 십 년째 한 인간을 사랑하는 중이었다.

모순은 설명되지 않는 것이었지만 이 남자를 설명하는 데 있어서 모순만큼 명확한 단어도 없었다.

“모레.”

지금도 그랬다. 그는 마치 재떨이에 담뱃재를 털듯 여상하게 내뱉었지만 사실 모레라는 두 글자에는 이미 날뛸 대로 날뛰어 흉측하게 일그러진 그리움이 가득 담겨 있었다.

“우기지 마. 내일도 모레도 예약 있어.”

“무슨 상관이야.”

그가 짧게 이를 드러내 보였다.

“내가 보고 싶다는데.”

자로 재어 만든 것처럼 희고 고른 치열이 협박 같았다. 맥케이는 잔뜩 인상을 쓰며 몸을 뒤로 젖혔다.

“너…… 어디 가서 그런 표정 짓지 마라. 정말로 미친 인간처럼 보이니까.”

“새삼.”

남자는 다시 팔걸이를 쓸었다. 베이지 톤의 가죽 위를 움직이는 손등에는 그의 매끄러운 외면과는 그리 잘 어울리지 않는 거친 흉터가 남아 있었다. 벌써 오래 전에 아물어 지금은 살갗이 되어 버린 흉터는 지금도 충분히 날카롭고 생생한 느낌이었다.

“스스로 미쳤다고 인정하는 거야?”

“그러니까 매주 성실히 정신과 의사를 만나지.”

맥케이가 혀를 찼다.

“매주 성실히 스토킹을 하는 게 아니고?”

“겸사겸사.”

남자는 소파에 등을 더욱 깊게 파묻었다. 그것은 이제 상담을 시작해도 좋다는 신호였다. 맥케이가 흐트러졌던 자세를 바로잡으며 말했다.

“그럼 시작한다, 랜스키.”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는 그는 알렉산더 L. 랜스키였다.

* * *

어쩌다 간혹 잠이 드는 순간, 자신은 어둠 속에 있었다.

눈앞에 세스가 있었다. 처음 봤을 때처럼 무슨 생각을 하는지 통 알 수 없는 표정이었고, 그는 그게 귀엽다고 생각했다.

“이리 와.”

세스가 다가왔다.

그는 자연스럽게 어깨를 끌어안았다. 익숙한 이 감촉이 좋았다. 피부에 닿는 뼈의 두께가, 부드러운 살갗의 쓸림이, 호흡에 섞여 들어오는 살내음이 좋았다. 누굴 안아도 이렇게 충족적인 기분은 느껴 보지 못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세스가 아닌 다른 인간을 이렇게 안을 일은 없을 테니까.

그가 세스의 턱선을 만지작거렸다. 이쯤이면 세스가 눈치를 채고 고개를 들어 올릴 때였다. 그는 키스가 하고 싶었다.

“왜?”

세스가 묵묵히 발끝만 쳐다보고 가만히 있자 결국 참다못한 그가 물었다. 세스는 대부분 느렸다. 가끔 드물게 눈치를 볼 때도 있었지만 어쩌다 잠깐이었다. 돌려 묻는 법이 없어야 알아듣는 성격이었다.

“또 뭐가 마음에 안 들어서 이러는 거야?”

한참 후에 세스가 말했다.

‘……아파.’

“어디가?”

‘전부.’

“봐 봐.”

그가 허리를 약간 젖혀서 세스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손가락 끝으로 턱을 조심스럽게 들어 올렸다. 그리고 다음 순간 자지러지게 놀랐다.

“뭐야! 얼굴이 왜 이래!”

제 입에서 비명이 터졌다. 세스의 얼굴은 온통 피투성이였다. 깨진 이마를 타고 흐르는 피가 꾸덕꾸덕 제 손등을 기어 왔다. 이어서 세스의 몸 전체가 무너지듯 흘러내렸다.

“누가 이랬어! 어떤 놈이야!”

길길이 날뛰었다. 분노가 부풀어 올라 머릿속이 그대로 터져 버릴 것 같았다. 시야가 노랗게 물들어 갔다.

“죽여 버릴 거야. 내가 죽여 버릴 거야. 너한테 이런 짓 한 인간은 내 손으로 죽여 버릴 거야. 알아들었어? 내가 죽여 버린다고. 죽여 버릴 거야.”

맹세를 하듯 몇 번을 되뇌었다. 죽여 버리겠다고. 전부 다. 아무도 네게 손을 대지 못하게 만들겠다고.

그사이 세스는 그의 품 안에서 흐느적거리며 녹아내리고 있었다. 당황한 그는 어쩔 줄 모르고 세스를 붙들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파삭대며 부서져 버렸다.

“안 돼!”

절망이 주위를 새카맣게 물들였다. 그는 무릎을 굽히고 앉아 어떻게든 부서져 버린 것들을 그러모으기 위해 필사적으로 양손을 움직였다. 두 팔은 소금물에 절인 듯 무겁고 한없이 무기력했다.

눈물이 흘러내렸다. 턱을 타고 흘러내린 눈물이 힘껏 깨문 입술에서 비어져 나오는 피와 섞였다. 툭툭, 세스의 잔해 위로 붉은 물이 떨어졌다.

‘뭐 해?’

누군가 물었다. 그가 고개를 들어 소리의 행방을 찾았다. 까마득히 먼 곳에서 세스가 묻고 있었다.

‘지금 뭐 하냐고.’

“너, 너…… 괜찮아? 괜찮아?”

세스가 평소처럼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죽여 버린다고 했잖아. 왜 그러고 있어?’

“뭐?”

‘날 이렇게 만든 사람을 죽여 버린다고 했잖아.’

그랬다.

‘그럼 어서 죽여.’

다만 누군지 모르고 있을 뿐이었다. 어서 찾아야 했다.

세스가 멍한 눈으로 그를 보다 작게 말했다.

‘그거 너잖아. 알렉산더 랜스키.’

‘아……,’

불현듯 깨달았다. 그는 흩어진 세스의 파편을 주워 모으느라 피투성이가 된 양손을 바라보았다. 사실 그 전부터 손은 피로 물들어 있었다. 세스를 부수느라.

“아아, 그랬지. 내가 그랬어.”

그가 완전히 쉬어 버린 음성으로 중얼거리며 손을 들어 올렸다. 언제부턴가 그는 부친의 오래된 군용 피스톨을 손에 쥐고 있었다.

“그래. 내가 그랬어.”

그는 지친 한숨을 토해 냈다. 붉어진 손가락을 방아쇠에 걸고 당겼다.

“내가.”

탕!

풀썩, 소리와 함께 그가 붉은 잔해 위로 쓰러졌다.

“……!”

알렉산더 랜스키가 진저리를 치며 눈을 떴다.

진땀이 배어 나온 피부가 끈적거렸다. 악몽이 할퀴고 간 몸은 온 신경이 잔뜩 곤두섰지만 머릿속은 안개처럼 혼탁했다. 고개를 돌려 탁상시계를 확인하니 새벽 3시 47분이었다. 그가 잠든 시간은 30분이 채 되지 않았다.

“하…….”

오늘의 수면은 이게 끝이었다. 더 이상 잠들기는 틀렸다. 꿈을 꾸고 나면 무슨 짓을 해도 더는 잠들지 못했다. 알콜과 섹스, 수면제 같은 것은 더 이상 도움이 되지 못했다.

벌써 몇 번째 죽었는지 이제는 감도 오지 않았다. 꿈은 늘 죽고 죽이기를 반복했다. 죽음은 무의식이 표상하는 가장 깊고 강한 폭력의 형태라고 학부 시절의 맥케이가 주절거리던 게 생각났다. 그때부터 맥케이는 그에게 정신과 의사가 필요하다는 잔소리를 멈추지 않았다.

알렉산더 랜스키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별로 도움은 안 되겠지만 샤워를 한 뒤 알콜을 들이켜면 이 끈적이는 악몽의 잔류감도, 수렁처럼 들러붙는 새벽 기운도 차츰 흐려져 갈 것이다.

-쏴 죽이는 거라면 몰라도 쏴 죽는 건 이해를 못 하겠다고? 그딴 식이니 자꾸만 그런 꿈을 꾸지. 넌 너 자신을 이해 못 하고 있어. 무의식과 의식의 대립 때문에 네가 자꾸만 삐걱대는 거야. 너는 아마도 자신을 쏴 죽이고 싶을 만큼 용납할 수 없는 뭔가를 저질렀을 거야. 그런데 그걸 인지하고 납득하는 정상적인 애도의 기간을 갖지 않은 거지. 그럼 사람은 멜랑콜리아를 겪게 된다고. 네 멜랑콜리아가 우울이 아닌 폭력의 양상으로 발현되는 건 네 상태가 그만큼 손쓸 도리 없다는 뜻이고.

취미로 심리학 서적을 몇 권 읽은 학부생이 지껄이는 헛소리를 성의껏 들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맥케이는 그때부터 자신은 21세기의 프로이트가 될 자질이 있었다며 지금까지도 그때 했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맥케이는 내내 끈질기게 우울의 근원을 캐물었다. 알렉산더 랜스키는 몇 년이나 지난 뒤에야 답을 들려주었다.

‘그 녀석을 버렸어. 대신 살려 냈지.’

그때는 그게 최선이었다고 믿었다. 세스를 살리기 위해서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고.

그러나 꿈은 반복적으로 찾아왔다. 한번 꾸고 나면 다시 잠들 수 없게 만드는 꿈을 알렉산더 랜스키는 거의 매일 반복했다. 그는 거의 매일 스스로를 죽였고, 죽었다. 꿈에서 겪는 매일의 죽음은 때로는 낮보다 생생했다. 가끔은 차라리 미치고 싶었다. 언젠가는 미쳐 버렸을 것이다. 다시 찾겠다는 그 언젠가의 이정표가 없었다면.

바보 자식.

사실은 원망을 하고 싶었다.

사이코가 유전자 감식 결과를 들이밀며 핏줄 운운하던 그때. 하얗게 질려 아무 말도 못 하던 세스를 보며 제일 먼저 해 주고 싶은 얘기였다.

왜 바보처럼 저에게 말하지 않았을까. 루이 랜스키보다 자신이 먼저 알았으면 어떻게든 그 전에 세스를 감출 방법을 찾았을 것이다.

하지만 부친의 총구는 너무 빨리 세스의 이마에 닿아 있었다. 세스의 체념 또한 너무 빨랐다. 세스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 제 존재를 없애 달라고 했다.

그때 알렉산더 랜스키가 느낀 것은 절망이었다.

사라지고 싶은 건가.

내가 여기 있는데도 너는 여전히 사라질 생각만 하는 건가.

그럼 나는 뭐야.

너 없이 혼자 남는 나는 어쩌라는 거야.

너도 날 사랑하잖아. 네가 먼저, 네가 더 많이 날 사랑하잖아. 세상 누구도 못 할 만큼 그렇게 나를 사랑하는 건 너잖아.

어째서 너는 나를 떠나려고 하는 거야. 어째서.

……정신을 차렸을 땐 죽을 만큼 분노하고 있었다. 제 손발 아래 엉망으로 망가지고 있는 세스를 보며 알렉산더 랜스키는 소리를 지를 수도, 울 수도 없었다.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부친은 세스를 죽이는 것을 망설일 인간이 아니었고 아직도 총구를 겨누고 있었다. 부친이 언제 방아쇠를 당길지 몰라 두려운 만큼 세스를 부수어야 했다.

괜찮아. 괜찮을 거야.

너만큼 나도 아플 거니까. 괜찮을 거야. 몸이 다친 건 언제라도 나을 거야.

대신 사라지지 마…….

뼈가 부러지는 느낌이 손끝을 타고 전달되었다. 세스는 가만히 눈을 감고 누워 있을 뿐 신음조차 없었다. 그대로 죽고 싶다는 말인 것 같아 두려웠다.

알 수가 없었다. 피 웅덩이 속에 피처럼 고여서 사랑해가 아닌 사랑했다는 과거형을 고백하는 세스를 향한 감정이 무엇인지. 이렇게나 사랑스러운데, 차라리 제 몸을 대신 부수고 싶을 정도로 소중한데 어째서 이토록 화가 나는지. 이제껏 세스가 그의 몸 안에 채워 놓던 감정들이 바싹 말라붙어 버렸다. 제 속에 귀를 대어 보면 바삭바삭 부스러지는 소리가 들릴 것 같았다.

맥케이가 이것을 상실이라 이름 붙여 주지 않았어도 그는 자신이 그날 무언가를 잃어버렸다는 것을 알았다. 그 무언가는 세스 하나가 아니었다. 세스와 함께 겪던 모든 감각들이 함께 증발해 버렸다.

내일 눈을 뜨고 싶게 만드는 기대감 같은 것. 혹은 오늘을 다시 꿈꾸고 싶게 만드는 만족감 같은 것. 이제껏 비어 있던 곳을 채워 부드럽게 만드는 것. 피로를 치유하는 고요한 수면 같은 것. 그래서 매일을 살고 싶도록 만드는 그런 것들이.

대신 그에게 남겨진 것은 매일같이 바싹 말라 가는 흉포한 갈증뿐이었다.

차라리 죽이는 게 나았을까.

그럼 나를 떠나지 않을 텐데.

같이 죽었어야 했을까.

그럼 영원히 잃어버릴까 무서워서 발발 떨지는 않을 텐데.

매일 잠이 들기 전 알렉산더 랜스키는 같은 갈등 속을 헤맸다.

죽여 버릴까. 같이 죽을까.

하지만 후회할 수는 없었다.

그날 이후로 그는 부친이 원하는 삶을 삶았다. 부친이 원하는 대학에서 원하는 교육을 받고 원하는 인물로 성장했다. 부친의 뜻대로 그는 일이 년 안에 랜스키 인더스트리의 새로운 얼굴이 될 예정이었다.

그 대가로 얻는 것은 랜스키 일가의 온전한 세대교체였다. 부친이 더 이상 어떠한 힘도 쥐고 있을 수 없도록, 질기게도 살아 있는 두 손위 형제가 어떤 방해도 할 수 없도록.

이제 고작해야 일이 년이었다. 그 안이라면 준비를 끝낼 수 있었다. 숨죽은 듯 고분고분했던 지난 시간들의 대가를 한꺼번에 계산해서 받아 낼 계획이었다. 그때 빼앗겼던 것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돌려받을 생각이었다.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세스가 사라지게 해 달라는 애원을 내뱉기 전으로. 그가 세스에게 폭력을 가할 이유가 생겨나기 이전으로. 이를테면 마이아 페레즈의 햇살이 따스한 응접실에서 작고 낡은 카우치에 부대껴 앉아 서로를 끌어안고 있던 시간 같은 때로.

“일이 년.”

이 찢을 듯한 불면의 밤도 일이 년만 더 견디면 되는 일이었다.

알렉산더 랜스키는 침대를 걷어차고 일어나 욕실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오늘따라 유독 기분이 엿 같은 것은 대낮부터 호모 쿼터백이 일을 냈다는 소리나 듣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손에 닿는 대로 뭐든 부수어 놓은 것을 알고 맥케이가 수준 낮은 빈정거림을 잔뜩 늘어놓은 것도 한몫 더했다.

“이놈이나 저놈이나.”

알렉산더 랜스키는 몸에 두르고 있던 나이트가운을 한 번에 벗어 방바닥에 내팽개쳤다. 십 년이나 참아 온 주제에 그깟 일이 년쯤 더 참으면 어때서 오늘 그런 말을 듣게 했던 건지, 존 리든에게 십 년이나 묵혀 두었던 울화가 치솟았다. 하여간 시키는 일은 뭐 하나 제대로 하는 게 없는 개새끼였다.

하지만 그만한 개새끼도 없었다.

알렉산더 랜스키는 두 사람이 함께 배런트 카운티를 떠나는 것을 지켜보았다. 세스의 등은 언제라도 부서질 것처럼 연약해 보였지만 그 옆에 있던 존 리든은 얼마든지 세스를 다시 붙잡아 줄 수 있을 것처럼 튼튼했다. 세스가 학교를 중퇴하고 재활원에 입원했던 시절에도, 그 이후의 공허한 방황에도 옆에서 지탱해 준 것은 존 리든이었다. 자신이 기껏해야 로스쿨 장학금이나 의심 가지 않을 정도로만 저렴하게 맨해튼의 아파트를 제공한 것과는 달리 존 리든은 세스의 전부를 보살폈다. 일 년 전부터 세스가 맥케이의 환자가 되도록 미끼를 잔뜩 풀어놓은 것은 그였지만 결국 세스를 맥케이에게 데려온 것은 존 리든이었다. 알렉산더 랜스키는 그 모든 게 빚이라고 생각했다. 언젠가는 반드시 속 시원히 되갚아 줘야 할, 이가 갈리는 빚이라고.

알몸이 된 알렉산더 랜스키가 욕실로 걸어갔다. 상처가 늘어난 만큼 잔근육이 더해진 나신은 학창 시절보다 강인하고 매끄러운 느낌이었다. 세스가 떠나고 남겨진 내부의 폐허 같은 것은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았다. 그렇게 보이기 위해서 알렉산더 랜스키는 매일 필사적으로 이를 물고 살았다.

그가 욕실의 문고리를 당기며 중얼거렸다.

“일이 년이라면.”

일이 년 후에는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랑했고, 미안하다는 말을.

미안했고, 지금도 사랑한다는 말을.

그가 막 욕실 문을 여는 순간이었다.

날카로운 전자음이 고막을 찔러 왔다. 아는 사람이 거의 없는 침실의 전화가 이런 시간에 울렸다는 것은 그리 좋은 의미가 아니었다. 알렉산더 랜스키는 몸을 돌려 침실을 가로질러 가 전화기의 버튼을 눌렀다.

“무슨 일이야.”

불필요한 것들을 모두 잘라 내고 본론을 묻는 그에게 들려오는 대답은 이러했다.

[지금 와 주셔야겠습니다.]

“어디로?”

[회장님이 별세하셨습니다.]

“…….”

새벽을 틈타 들이닥친 부친의 부고에 알렉산더 랜스키가 말을 잃었다.

일이 년이라는 시간 감각이 내부에서 엉망으로 헝클어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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