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화 (16/23)

03.

하프 문 베이의 기적을 알려 준 사람은 양부였다.

성을 물려준 마이클 그린이 아닌, 그의 파트너였던 양부. 그는 세스가 제 이름을 기억하기도 전에 죽었다. 세스가 아는 양부의 이름은 아빠였다.

-다음에는 너도 볼 수 있을 거야. 시간이 날 때마다 데리고 올게. 언젠가는 함께 기적을 눈으로 보자.

양부는 피곤이 가득했지만 선량한 얼굴로 웃으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세스는 저만큼이나 마른 손가락이 전해 오는 체온을 느끼며 아무 말 없이 물이 가득 찬 검은 바다를 바라보았다.

한 번도 보고 싶다는 말을 한 적은 없었지만 세스는 열심히 하프 문 베이의 기적을 기다렸다. 결국 졸음에 지쳐 양부의 팔에 기대 꾸벅꾸벅 졸기 일쑤였지만 양부가 죽기 전까지 둘은 함께 종종 만조의 바다를 찾았다.

가끔은 바람이 불어왔다. 그럴 때면 눈에서 눈물처럼 모래알이 서걱거렸다. 세스가 젖은 눈을 깜박이며 비비려고 하면 양부는 서둘러 작은 손을 붙잡아 말리며 눈가를 후후 불어 주었다.

밤바다는 세스가 이해할 수 없을 만큼 고독했고 서늘했다. 그래도 세스는 바다에 오는 일이 싫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언젠가는.

양부가 그렇게 약속했던 기적이, 번번이 깨져 버린 약속이 서글펐던 적은 없었다. 양부가 허망하게 죽고 나서야 세스는 자신이 고독하고 서늘한 만조의 바다를 좋아했다는 것과 이제 더 이상 그 바다에 데려갈 사람이 없다는 사실을 함께 깨달았다.

그러자 갑자기 그 고독함이 이해됐다.

세스는 양부의 장례식에서 여러 번의 공황발작을 일으켰고, 그래서 장례식을 망쳤으며 그 뒤로 계속 달처럼 쓴 하얀 알약을 반으로 쪼개 먹어야 했다.

* * *

“…….”

눈을 떴을 땐 눈가가 젖어 있었다. 눈 속에 모래알이 들어간 것처럼 따끔했다.

세스는 흐릿해진 시선을 한 바퀴 돌렸다. 처음 보는 곳이었다. 주춤 몸을 일으키려던 순간 마지막 기억이 돌아왔다. 강제로 떠밀린 차 안에서 호흡곤란을 일으켜 헐떡이다가 몇 번인가 구토를 했다.

세스가 반사적으로 고개를 내려 옷을 살폈다. 그는 오늘 아침 옷장에서 꺼내 입었던 것과 전혀 다른 옷을 입고 있었다. 얇고 포근한 감촉의, 제 몸에는 커서 헐렁하게 살갗을 미끄러지는 캐시미어 니트였다. 그마저도 상의만이었고 하의는 없이 헐렁한 사각 트렁크뿐이었다.

세스는 낯선 곳으로 끌려와 낯선 옷이 저도 모르는 새 입혀졌다는 사실에 먼저 당황해야 할지, 아니면 자신이 입고 있는 트렁크마저 처음 보는 것이라는 사실에 수치심을 느끼는 게 앞서야 할지 몰라 잠시 그대로 멎어 있었다.

“좀 더 누워 있어.”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많이 놀란 것 같은데.”

등 뒤에서 날아온 목소리는 부드럽게 목덜미를 감싸다가 피부 사이로 스며들었다. 그러자 의식을 잃던 순간의 마지막 기억이 온전해졌다. 쏟아지는 토사물을 받아 내고 호흡곤란을 일으킨 그에게 인공호흡을 해 주던 사람은 알렉산더 랜스키였다. 그건 꿈이 아니었다.

정말 너였네.

세스는 처음 그 목소리를 들었던 시간을 떠올렸다.

처음에는 그저 웃음이었다. 늘 의미 없이 희뿌옇던 공간을 꿰뚫고 선명하게 날아온 웃음이 한순간 귀를 사로잡았다.

등을 돌려 서자 무리에 둘러싸여 커다랗게 웃는 소년이 있었다.

선명한 게 처음으로 좋다고 느껴졌다. 애쓰지 않아도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게 처음으로 좋았다. 두 번째로 그 웃음소리를 들었을 땐 단숨에 남들과 구분 지을 수 있었다. 그건 이미 사랑에 가까웠다.

일 년이 넘는 시간 동안 혼자서 그를 사랑했고, 잠깐은 사랑받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게 다였다. 그는 잠깐의 사랑을 주고 이후에는 자비심 없이 제 사랑을 거두어 갔다.

세스는 고개를 돌린 채 주먹을 쥐었다. 정신을 잃기 전의 과도한 반응들이 한꺼번에 되살아날 것만 같아 천천히 숨을 골랐다.

아직 늦지 않았다. 지금 일어서서 등을 돌리지 않은 채 시선을 마주칠 일 없이 가 버릴 수 있다면.

늦지 않을 것이다.

“가야 해. 약속이 있어.”

“그런 건 잊어. 당분간은 어디도 못 가.”

알렉산더 랜스키의 목소리는 여전했다. 세스가 처음 사랑에 빠지던 순간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경계를 늦추면 마음이 정확히 그 순간으로 흘러가 버릴 것 같았다.

세스는 눈을 힘껏 감으며 작게 말했다.

“옷, 돌려줘.”

“돌려주면 뭐 하게?”

“갈 거야. 약속 있어.”

“안 된다고 했잖아. 당분간 여기 있어.”

세스는 안 된다는 이유를 묻지 않았다.

십 년이라는 시간은 퇴적층이 되었을 것이다. 알렉산더 랜스키는 그 가장 밑바닥에 고이 묻힌 화석이었다.

살아나지 마.

세스가 혼자 입술을 달싹였다.

그대로 그곳에 머물러 있어. 두 번 다시 내 세상을 뒤엎지 마.

지난 십 년은 아마도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재활원에 처박혀 매일 강제적으로 받아먹던 한 움큼의 약들이 고통을 기억에서 지웠을 것이다. 그 시절의 모든 것은 알렉산더 랜스키를 모르던 이전의 시간처럼 흐릿하고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일주일에 두세 차례씩 부지런히 면회를 오던 존 리든이 저를 붙들고 오열하던 순간이 부서진 파편처럼 가끔씩 머릿속 어딘가를 찌르는 게 그 시간의 전부였다.

“싫어.”

그는 알렉산더 랜스키가 준 고통을 이해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것도, 자신의 사랑이 그에게는 상처가 됐다는 것도, 그 무엇도 그날을 되돌릴 수 없다는 것도 이미 알고 있었다. 십 년에 걸쳐 세스는 그 사실을 납득하고 체념했다.

되돌릴 수 없었다. 그러니 되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갈게.”

세스가 몸을 일으켜 침대를 벗어났다. 침실에는 쓸데없는 가구 같은 것은 하나도 없었다. 동선이 어긋나는 것 없이 곧장 직선으로 문을 지나치자 마찬가지로 가구라고는 모던한 직사각형 형태의 가죽 소파 하나가 놓인 게 전부인 거실이 나타났다. 소파와 바닥을 제외하면 온통 회색 톤인 거실은 사막처럼 건조했다.

익숙하지 않은, 그래서 한눈에 출입구를 찾을 수 없는 넓은 곳이었다. 세스는 채광보다 조명이 더 밝은 삭막한 공간에서 눈을 찌푸렸다. 밝고 산뜻한 조명은 이곳이 지하라는 사실을 감추기 위한 장치였다.

“그 꼴로 나가려고? 너 지금 바지 안 입고 있어.”

놀리려는 것처럼 어딘가 간질대는 말이었다. 세스의 표정이 눈썹 위 흉터를 따라 일그러졌다.

“보내 줘.”

“싫은데.”

이제 그만 들려오길 바라는 선명한 목소리는 끊이지 않았다.

“애써 납치해 온 보람이 없잖아.”

세스는 시간이 몸속에서 엉키는 감각을 느꼈다. 알렉산더 랜스키는 십 년 전과 하나도 다르지 않았다. 그가 필사적으로 잊고 인내했던 것들이 알렉산더 랜스키에게는 아예 존재하지 않는 듯했다.

“보내 줘.”

고집스럽게 같은 말을 반복하는 세스의 등 뒤에 알렉산더 랜스키가 다가와 바싹 붙어 섰다. 목덜미에 와르륵 소름이 돋았다. 금방이라도 그가 자신을 낚아채 강제로 무언가를 할 것만 같았다. 그리고 저는 아무것도 거절할 수 없을 것이다.

십 년은 무의미했다. 알렉산더 랜스키는 등 뒤에 서 있는 것만으로 세스가 십 년간 우울증 약을 하나씩 쌓아 올린 빚은 자기방어의 벽을 허물고 있었다.

“한다는 말하고는. 다른 말 많잖아. 보고 싶었다든가, 그런 거.”

세스가 다시 눈을 감았다.

어째서 너는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걸까. 그렇게 태연하게.

“아니야. 보고 싶지 않았어.”

나는 어째서 미치지도 않는 걸까. 너를 등 뒤에 두고서도.

“……뭐라고?”

알렉산더 랜스키가 작게 중얼거렸다. 그 말을 내뱉으며 어처구니없다는 듯 미간을 찡그릴 모습이 머릿속에 선명하게 떠올랐다.

“일단 얼굴 보고 얘기해. 달아날 생각만 하지 말고. 이유도 없이 무턱대고 붙들어 온 거 아니니까.”

알렉산더 랜스키가 손을 뻗었다. 십 년 전과는 다르게 강압적이지도, 억지를 부리지도 않았다. 그답지 않게 조심스러워하는 듯했다. 망설이는 것도 같았다. 어쩌면 나름대로 미안해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어깨에 따듯한 체온이 닿는 순간 세스는 반사적으로 팔을 들어 있는 힘껏 휘둘렀다.

퍽!

팔꿈치가 어딘가에 맞았다. 알렉산더 랜스키가 얼굴을 한껏 찌푸렸다. 세스는 자신이 의도하지 않게 그의 얼굴을 갈겼다는 것을 알았다.

“……!”

때린 쪽이 오히려 한 대 맞은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세스는 희게 질린 눈으로 입술이 터진 알렉산더 랜스키를 더듬더듬 바라보다가 고개를 홱 돌렸다. 큼직한 니트가 살갗 위를 흐느끼듯 흘러내렸다.

그대로 달아났다. 거실을 가로질러 침실의 반대 방향으로 향했다. 몇 번인가 모서리를 부딪치고 몇 개인가의 문을 지나 세스는 마침내 외부로 향하는 문을 찾았다.

차갑고 단단한 금속제의 출입구는 문이되 문이 아니었다. 손잡이가 없었다. 또 다른 두꺼운 벽처럼 그저 매끈하기만 했다. 양손으로 밀어 보았지만 문은 꿈쩍하지 않았다.

어느샌가 뒤따라온 알렉산더 랜스키의 목소리가 귓가로 밀려들었다.

“패스워드를 입력해야 해. 들어올 때나 나갈 때나.”

그 목소리는 파도 같았다. 인간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밀려왔다 밀려갔다. 세스는 바다로 휘말려 가지 않도록 필사적으로 매달릴 것을 찾았다.

“패스워드가 뭔데.”

“내 지문.”

뒤에서 넘어온 손이 아무것도 없어 보이는 현관문에 손바닥을 대고 눌렀다. 손바닥을 따라 센서가 반응해 푸른빛이 도는 조명이 들어왔다가 사라졌다. 기잉, 전자음이 나고 이어서 문이 열렸다.

세스는 그대로 문을 밀치고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그러나 몇 걸음이 전부였다. 검은 수트를 입은 랜스키가의 경호원들이 자연스럽게 앞을 막아섰다. 모두 몇 명이나 되는지 한눈에 다 셀 수도 없었다.

“특별히 널 감시하거나 가둬 두려는 건 아니야. 여기가 안전가옥이라서 그래. 나갈 때나 들어올 때나 절차가 있어.”

알렉산더 랜스키가 뒤에서 세스의 팔을 잡아당겼다. 발이 안쪽으로 넘어가는 순간 두텁고 매끈한 금속제 문이 빠르게 닫혔다.

세스는 붙들린 팔을 뿌리치려 했고, 알렉산더 랜스키는 저항하는 그를 돌려세웠다. 마주하는 것을 피할 수 없게 된 세스가 눈을 질끈 감았다. 감은 눈꺼풀 위로 보일 리 없는 시선이 내려앉았다.

“눈 떠.”

“싫어.”

“안 뜨면 키스한다.”

세스가 흠칫 어깨를 떨며 눈을 떴다. 알렉산더 랜스키는 세스의 반응에 기묘한 표정을 지었다.

“여전히 농담 같은 건 잘 못 알아듣네.”

“……보내 줘.”

“농담 못 하는 것도 그렇고.”

“농담 아니야. 보내 줘.”

“묻는 게 먼저 아냐? 왜 네가 여기 있어야 하는지, 왜 갑자기 내가 불쑥 튀어나왔는지, 널 두고 왜 이런 소리를 하고 있는지.”

흉터에서 시작된 경련은 쉽게 멈추지 않았다. 세스는 파드득 떨려 오는 눈꺼풀을 손으로 누르며 흉터를 되새겼다. 이 흉터는 자신이 알렉산더 랜스키를 쳐다봤기에 만들어진 것이었다.

“아니야. 안 궁금해.”

“아닐 텐데.”

“보내 줘.”

“……고집은.”

알렉산더 랜스키는 피곤한 눈으로 세스를 응시했다. 피곤한, 그래서 보는 이쪽도 지쳐 버리고 마는 집요한 시선으로.

“화를 낼 거면 제대로 내. 방금 전처럼 한 대 치든가. 왜 그간 한 번도 보러 오지 않았냐고 울기라도 해. 뭐든 해 봐. 뭐든 들어 줄 테니까.”

“……. 그런 짓 안 해.”

“하라고. 그래야 나도 뭐든지 할 것 아냐.”

알렉산더 랜스키가 느리게 손을 뻗었다. 붙들기 위한 손짓과는 달랐다. 천천히, 마치 음률처럼 부드럽게 다가오는 손은 그들 사이에 가로놓인 십 년 깊이의 강을 건너기 위한 작은 배였다. 알렉산더 랜스키는 입매를 일그러트리며 세스의 흉터를 어루만졌다.

“……이런 게 생겼네.”

계속 느려지는 손짓에 체온이 묻어 왔다. 눈썹에 묻은 체온은 식지 않고 포개져 열기가 되었다. 뜨거운 손이 살갗을 문지르는 일은 애무에 더 가까웠다. 하지만 동시에 그 손이 한 짓에 대한 기억을 불러왔다.

뒤늦게 세스가 왈칵 소리를 질렀다.

“건드리지 마!”

세스가 거칠게 머리를 흔들었다. 포근하던 니트가 갑자기 올을 세워 피부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세스는 진저리를 치며 소매를 끌어 올렸다. 드러나는 맨살을 손톱이 마구 긁어 댔다. 몇 번인가 피부를 긁던 손톱이 아예 피부에 박혀 버렸다.

“하, 하아…….”

세스가 가슴을 들썩이며 숨을 몰아쉬었다. 세스의 반응을 지켜보는 알렉산더 랜스키의 회색 눈이 콘크리트 공간처럼 굳었다.

“손 떼.”

“건드리지…… 마…….”

“손 떼라고.”

“건, 건드리지…….”

“알았으니까 손 떼!”

세스는 피가 맺히기 시작하는 살점에 손톱을 박아 넣은 채 비틀댔고, 알렉산더 랜스키는 제 손을 잘라 낼 것만 같은 눈으로 쳐다보았다.

“설명이 필요해? 변명 같은 게?”

알렉산더 랜스키는 그 언젠가 거울을 깨부수듯 침묵을 부수었다.

“십 년 동안 한 번도 안 봤어. 네가 갔다는 학교에도, 네가 입원했다는 재활원에도 안 갔어. 네가 일한다는 식당에도 한 번 안 갔어. 하니까 되더라고. 어디 있는지 뻔히 아는데도 참을 수 있더라고. 그래서 한때는 이렇게 잊는 건가 싶었어. 그러면 더 좋을까 싶기도 했어. 피붙이라고 하자니 역겹고 애인이라고 하자니 그것도 답이 없었잖아. 내가 잊으면 네가 더 편해지지 않을까 생각도 해 봤어. 이 미친 집구석에 네가 발 들일 이유가 더는 없으면 그것도 괜찮겠더라고.”

말을 끊은 그가 목을 거칠게 긁는 웃음소리를 흘렸다.

“그런데 잊긴 뭘 잊어. 못 볼 동안은 내가 어딘가 미친 줄 알았는데, 지금 보니 그건 아무것도 아니잖아. 다시 보니 진짜 미치겠네. 심장이 펄펄 뛰는 게 발작이라도 일어나겠어. 떨려서 미칠 지경이야. 등신처럼 웃음만 나와. 너는 질색하고 겁을 먹는데, 그럴 수도 있다는 걸 아는데 나는 좋아.”

알렉산더 랜스키가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었다. 표정을 감추기 위해서라는 것을 세스는 알지 못했다.

“다시 보니까 좋아 죽을 것 같아. 웃음이 안 멈춰. 환장하겠군.”

양 어깨가 흔들렸다. 제 입으로 웃는다던 알렉산더 랜스키는 우는 듯 보이기도 했다.

그가 얼굴을 가린 손을 뗀 것은 시간이 한참 흐른 뒤였다.

“너는 어때?”

알렉산더 랜스키는 그렇게 우는 듯 웃는 얼굴로 물었다. 세스가 어쩌다 그를 떠올리며 웃지도, 울지도 않았던 것과는 정반대인 표정이었다.

“너를 다시 봐서…… 어떠냐고 묻는 거야?”

“그래.”

세스는 단단한 거울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현실에서는 넘어갈 수 없는 벽이 하나 그와 자신을 가로지르고 있으면 좋겠다고.

“존은 검사야. 검사가 됐어.”

세스는 대답 대신 다른 남자의 이름을 내뱉었다.

“이전처럼 네가 날 억지로 붙잡아 둘 수는 없어. 존이 그렇게 놔두지 않을 거야. 그만 보내 줘.”

“그게 네 대답이야?”

“그래.”

“리든이 너한테 뭔데?”

세스는 억지로 고개를 들어 알렉산더 랜스키를 마주 응시했다.

“……결혼할 거야.”

“…….”

잠시 무음의 시간이 생겨났다.

알렉산더 랜스키는 뭔가를 내뱉기에 앞서 침묵을 우선 만들기 위해 이를 물었다. 자신이 아닌 타인과의 섹스나 결혼을 입에 담는 세스를 전혀 예상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존 리든과 함께 떠나는 뒷모습을 지켜볼 때부터 그만한 각오는 했다.

하지만 각오는 어디까지나 각오에 불과했다. 직접 마주한 실체는 생각 이상으로 충격이었다.

“……무슨 놈의 어울리지도 않는 싸구려 반지를 끼고 있나 했더니 그게 그 개새끼가 준 거였네.”

우습게도 세스는 지금에서야 더 이상 반지를 끼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끼는 순간만 해도 족쇄처럼 무겁다고 생각했던 반지였다. 그러나 알렉산더 랜스키가 다시 언급하기 전까지는 반지가 사라진 것도 몰랐다.

“반지, 네가 가져갔어?”

“그딴 건 잊어. 내가 없을 때 있던 일이잖아. 다시 말 꺼낼 필요 없어.”

“돌려줘.”

“벌써 버렸어.”

“그럼 가서 주워 와.”

“싫어.”

“존이 가만있지 않을 거야.”

알렉산더 랜스키가 쓰게 웃었다. 그에겐 썼지만 남에겐 잔인하게 보이는 웃음이었다.

“변했네. 이젠 남 등 뒤로 숨을 줄도 알고. 그런 건 리든이 가르쳤어? 그 개새끼가 남의 걸 데려다가 어디서 이런 못된 버릇을 들여놓은 거야.”

“존은 개새끼가 아니야. 나도 네 게 아니야.”

“왜 개새끼가 아냐. 사람 목덜미를 그렇게 씹어 놨는데. 남의 걸 맡아 가지고 있으면서 어려운 줄 모르고.”

“네 게 아니라고!”

“그래?”

알렉산더 랜스키가 느슨하게 굽혔던 몸을 일으켰다. 눈빛이 달라지자 분위기가 돌변했다. 그는 전신을 팽팽하게 부풀리는 긴장감을 숨기지 않은 채 세스의 곁으로 다가왔다. 세스가 주춤 뒷걸음질을 치는 순간 그가 손을 뻗었다. 조심스러워하던 태도는 씻은 듯 사라지고 없었다. 그가 한 손으로 세스의 허리를 낚아채 거칠게 끌어당겼다.

“네가 내 게 아니야?”

“아냐. 이거 놔.”

“어떤지 볼까?”

뭐가 먼저였는지 알 수가 없었다. 알렉산더 랜스키가 자유로운 오른팔로 세스의 손목을 뒤로 꺾어 내리누르는 게 먼저였는지, 아니면 입술이 덮이는 게 먼저였는지. 불끈 달아오른 하체가 맞닿는 게 먼저였는지, 혹은 뜨거운 혀가 입 안을 파고드는 게 먼저였는지.

“……놔!”

세스는 언젠가처럼 입 안을 정복할 기세로 밀고 들어오는 알렉산더 랜스키의 혀를 질끈 물어 버렸다. 다행히도 입술이 떨어졌다.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에서 피가 배어 나왔다. 턱을 따라 목에 궤적을 남긴 피가 하얀 셔츠 깃 사이로 번졌다.

세스의 팔목을 꺾어서 붙들고 있는 알렉산더 랜스키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는 목울대를 움직여 입 안에 고이는 피를 삼킨 다음 천천히 입술을 뗐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되는 건가. 넌 도망치고 난 쫓아가고, 그런 짓들.”

그가 세스의 허리를 더 바싹 끌어당겼다. 묶인 두 손은 꿈쩍도 할 수가 없었다. 귓가에 입술이 닿아 왔다.

“좋아. 다시 하지 뭐. 그때 얼마나 걸렸지? 딱 일주일이었던 것 같은데. 네 몸은 그보다 더 빨랐고.”

알렉산더 랜스키는 세스가 저항하기를 기다렸다.

“난 그런 것도 반가워. 진짜 환장할 것처럼 좋아.”

그때도 그랬다. 도발하면 반응하는 세스가 열이 받기도 했지만 즐거웠다. 다른 인간들은 물이나 공기처럼 아무리 건드려도 묵묵하던 녀석이 그가 하는 작은 말 한 마디에 파드득 신경을 곤두세우는 게 기뻤다. 세스에게 유일한 건 자신이었다.

지금 세스가 하는 말은 거짓이었다.

“놔, 이거…… 놔!”

거짓일 것이다. 거짓이어야 했다.

그러나 세스는 도망치려 버둥대는 대신 울컥, 위에 담긴 것을 그의 어깨에 게워 냈다. 축축하게 젖어드는 어깨를 느끼며 알렉산더 랜스키가 표정을 굳혔다. 덩달아 세스의 허리를 붙든 팔도 굳어 버렸다. 세스가 자유로워진 양팔을 들어 그의 가슴을 떠밀었다.

손등으로 젖은 입술을 문지르며 세스가 흉이 진 눈가로 그를 노려보았다. 이전까진 본 적이 없던 흉터가 더해진 표정은 낯설었다. 알렉산더 랜스키가 이제껏 알던 세스의 표정들 중에서 일치하는 게 없었다.

제 입으로 멈추지 않아 환장하겠다던 웃음이, 지금에서야 흔적을 잃어 갔다.

세스가 젖은 입가를 손등으로 문지르며 말했다.

“난 네 게 아니야. 그런 적도 없었어. 넌 내가 누군지 몰랐을 때나 나를 좋아했던 거잖아. 우리 사이에 있던 건 다 거짓이야. 그렇게 말했던 건 너야.”

거짓이라고. 어째서.

“내가 잘못한 거야. 네가 화를 낸 것도 이해해. 그건…… 그건 어차피 그렇게 될 거였어. 나는…… 어쨌거나 끝나서 다행이라고 생각해. ……다 끝났어. 십 년 전에 끝난 일이야.”

끝났다고. 어째서.

“그러니까, 보내 줘.”

“네가……,”

네가 얘기하지 않았잖아. 그렇게나 중요한 얘기를.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등신처럼 시시덕거리기나 하다가 뒤통수를 처맞았잖아.

그땐 늦었어. 네가 노친네한테 차라리 쏴 죽이라는 소리나 내뱉던 그때는 늦었다고. 너무 늦어서 다른 방법을 찾을 새가 없었어.

나한테는 아무것도 끝이 아니었어. 우리가 헤어졌다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었어. 화가 나긴 했지. 넌 날 두고 죽겠다는 소리나 하고 있는데 화가 안 날 리가 없잖아.

죽지 않을 만큼 때렸어. 어디가 어떻게 망가진들 네가 살아 있는 것보다 더 중요하진 않았으니까. 네가 그때 노친네 손에 죽었으면 나도 죽었어. 하지만 어떻게든 살아 있잖아.

그게 왜 좋아할 일이 아냐. 네가 멀쩡히 서서 내 눈앞에 있는데. 평생 휠체어라도 타고 다녀야 할 줄 알았는데 멀쩡히 걷고 숨 쉬잖아. 얼굴뼈가 박살 났다니 이젠 좀 덜 예뻐 보일까 싶었는데 여전히 사람 환장하게 예쁘고.

나는 좋아서 죽을 것 같은데, 그게 왜. 너는 왜 그걸 몰라.

너는 왜……,

알렉산더 랜스키가 한꺼번에 튀어나오는 말을 전부 소화하지 못해 느리게 입술을 떼는 그 순간, 유감스럽게도 전화기가 울렸다.

“……개새끼. 시간을 골라도 하필.”

알렉산더 랜스키가 이를 갈았다. 누가 한 전화인지 짐작이 갔다. 언젠가는 한번 받아야 할 전화였지만 지금은 몹시 달갑지 않았다.

* * *

넓고 쾌적하지만 창문이 없는 회색 벽을 두르고 선 키친에서 에스프레소 머신이 작동을 멈췄을 때는 이미 전화가 끊어졌다. 벌써 세 번째 걸려 온 전화였다.

알렉산더 랜스키가 세스에게 갓 내린 커피를 내밀었다. 그 평범한 동작도 손이 닿지 않도록 예민하게 신경 쓰는 듯 보였다.

“마실래?”

“전화 안 받아?”

세스는 고개를 젓는 대신 물었다. 전화를 받아야겠다며 키친으로 그를 끌고 온 알렉산더 랜스키는 엉뚱하게도 커피를 만들었다.

“받을 거야.”

세스가 손대지 않은 잔을 도로 가져간 알렉산더 랜스키가 잔을 들어 입술을 댔다.

“끊어졌잖아.”

“다시 오겠지.”

몇 마디 안 되는 짧은 대화가 방금 전까지의 긴장을 잊은 듯 평연하게 흘렀고, 커피를 마시는 알렉산더 랜스키는 생각에 잠겨 눈썹을 모았다. 바 형태의 긴 식탁에 비스듬히 기대어 서서 하얀 잔을 움직이는 동작은 불특정다수에게 팔기 위해 공을 들여 연출한 장면처럼 이 순간과 잘 어울렸다. 아무리 많은 사람 사이에 섞여 있어도 단박에 눈길을 사로잡던 외모는 거의 변한 게 없었다.

그래서 거짓 같았다.

십 년의 공백은 이 건조한 공간에서 가루처럼 부서졌다. 세스는 그가 커피 대신 오렌지 주스를 따라와 입에 대 줄 것 같다는 착각에 자꾸만 눈썹을 찡그렸다. 신 맛이 싫다고 하면 아이 같다고 웃으면서 제 입술처럼 달콤한 걸 물려 줄 것 같았다.

네 번째로 전화가 울기 시작했다. 헐떡이는 신음 소리 같은 인공의 전자음이 귀를 괴롭혔다. 세스가 작게 인상을 쓰는 것을 보고 알렉산더 랜스키는 전화기를 들었다. 그러나 무슨 생각에서였는지 전화기를 식탁 위에 놓고 스크린을 밀었다. 스피커를 켜자마자 득달같은 욕설이 날아들었다.

[야 이 개새끼야!]

존 리든이었다. 알렉산더 랜스키는 커피 향이 묻은 입술로 비죽, 비틀린 웃음을 지었다.

“간만이야. 잘 지낸 모양인데.”

[잘 지내? 씨발, 내가 지금 너한테 안부인사 듣고 있게 생겼어? 이게 죽은 놈처럼 그간 낯짝 한번 안 내밀고 살더니 왜 갑자기 튀어나와서 이 지랄이야! 세스는 어디 있어! 어디로 데려갔어!]

수화기 너머의 존 리든이 듣는다면 펄쩍 뛸 일이었지만 알렉산더 랜스키는 그가 약간 반갑기도 했다. 어쩌면 그리웠을지도 몰랐다. 존 리든이 틀림없이 어느 한구석에 악착같이 들러붙어 있었던 과거가.

“옆에 있어. 그리고 너무 날뛰지 마. 시끄러워.”

[뭐? 지금 옆에…… 야, 세스! 거기 있어? 거짓말 아냐? 무사한 거야? 응?]

알렉산더 랜스키의 등 뒤에서 애매하게 비켜선 세스가 식탁 위의 전화기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응. 여기 있어.”

[저 미친 새끼가 무슨 짓 안 했어? 다친 데 없어?]

“응. 괜찮아.”

[씨발, 난 못 믿겠으니까 내 눈으로 봐야겠어. 거기가 어디야? 지금 당장 갈게!]

“난 여기가 어딘지 몰라.”

[몰라? 랜스키 바꿔! 그 자식한테 물어보게.]

세스가 잠자코 알렉산더 랜스키를 돌아보았다. 알렉산더 랜스키가 식탁을 향해 몸을 기울였다. 움직임이 작은 바람을 만들었다. 세스는 바람에 떠밀린 것처럼 고개를 틀었다.

그리운 것은 돌아오지 않았다. 돌아올 수 없어서 그리울 것이다.

[이 씨발놈아! 거기가 어디야!]

“안전가옥.”

[뭐? 안전가옥? 이 미친놈이 지금 뭐라는 거야! 네가 뭔데 세스를 그런 데다 가둬 놔! 당장 돌려보내! 아니, 거기가 어딘지 말해!]

알렉산더 랜스키가 반쯤 비운 커피 잔을 전화기 옆에 내려놓았다. 덜컥 하는 소리가 귀를 긁었던지 존 리든이 전화기 안에서 듣기 싫은 신음을 흘렸다.

“세스는 안 보내. 당분간은 여기 있을 거야.”

[뭐야? 이 새끼가 진짜! 지금 네가 하는 게 납치야! 중범죄라고!]

“두 번 말 안 해. 맥케이한테 내 번호를 알려 주라고 한 건 세스가 나와 있다는 사실 정도는 알려 줄 마음이 들어서야.”

[씨발, 진짜. 대단한 선심 쓰듯 말하네. 납치범 주제에.]

목격자이자 주요 참고인인 티모시 맥케이는 전화번호를 건네는 것 외에 별다른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도 알렉산더 랜스키가 느닷없이 세스를 납치해 간 이유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그 염병할 정신과 의사? 그렇지 않아도 공무집행 방해로 기소할 거야. 아니, 그보다 죄목이 더 더럽지. 대체 세스의 상담의가 왜 네놈을 알고 있는 거야! 내가 진짜 그 생각만 하면…… 씨팔, 하여간 세스나 내놔, 이 개새끼야! 경찰기동대라도 떠야 정신을 차릴 거냐!]

“납치라면 네 일도 아니잖아, 부검사장님. FBI 국장과 휴일마다 골프라도 치는 사이가 아니라면. 그리고 고작 번호 하나 가지고 여기가 어딘지 알아내진 못해.”

[닥쳐, 이 자식아! 넌 내가 아직도 부모 용돈이나 타서 쓰는 애새끼로 보여? 부검사장이 열받으면 무슨 짓까지 할 수 있는지 보여 줘?]

“네가 무슨 짓을 하건 간에 세스는 못 보내.”

[이 씨발놈이 진짜! 죽을 만큼 두들겨 패서 갖다 버릴 땐 언제고 이제 와 개수작이야? 네가 무슨 자격으로! 너 때문에 세스가 어디까지, 얼마나 망가졌는지 알기나 해!]

대답은 간단했다. 알렉산더 랜스키의 회색 눈이 세스의 흉터를 향했다. 자신이 만든 상처를 마주 보는 시선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다.

“알아.”

오히려 믿지 못하는 것은 듣는 쪽이었다.

[……뭐, 알아……?]

“전부 알고 있어. 하나도 빠짐없이.”

[…….]

잠시 주춤하던 전화기 저편에서 뭔가가 부딪쳐 깨지는 요란한 소리가 멀찍이 들려왔다. 이어서 존 리든은 애써 흥분을 억눌러 침착함을 가장했다.

[잘 들어, 랜스키. 봐주는 건 지금이 마지막이야. 예전에 그 잘나 빠진 돈으로 얼버무린 폭행 사건까지 다시 끌고 올 게 아니라면 세스는 돌려보내. 네가 납치해 간 사람 내 약혼자야.]

존 리든이 얘기하는 동안 세스를 떠나지 않은 알렉산더 랜스키의 회색 시선은 손을 대신해 흉터를 문지르고 있는 듯했다. 부드럽게 쓰다듬어 통증을 가져간 뒤 눈물 맛이 느껴지는 경건한 입맞춤을 그 위에 올려놓을 것 같았다.

누군가의 시선만으로도 사람은 통증을 느낄 수 있었다. 세스는 울렁대는 현기증을 느끼며 재차 고개를 돌렸다.

알렉산더 랜스키가 여전히 같은 대답을 던졌다.

“못 보내.”

[……이 개새끼가! 귓구멍이 망가졌냐!]

“결혼식이 아니라 장례식을 치르고 싶은 게 아니라면 그만 징징대.”

딱 잘라 말하는 냉정한 음성은 덩달아 존 리든까지 식혀 버렸다.

[뭐?]

“잘 들어. 아직은 일개 지방 검사실까지 갈 정보는 아니니까. 오늘 아침 시저 랜스키가 죽었어. 헬기를 타고 쿠바 영해를 날아가던 중에 미사일을 맞아 격추됐어. 미사일은 어느 쪽에도 등록이 안 된 밀수품이었고.”

“…….”

세스가 마른침을 삼켰다. 존 리든이 식어서 잘 움직이지 않는 혀를 억지로 굴려 소리를 만들었다. 아는 사람의 형이 암시장에서 팔린 미사일에 격추당했다는 부고 소식은 지독히도 현실감이 없었다.

[뭐…… 라는 거야. 그게 무슨 소리야.]

“윌리엄 랜스키가 죽은 지 이틀도 안 돼서 일어난 일이야. 부고 기사가 오늘 아침에야 실린 걸 감안하면 아주 발 빠른 짓이었고.”

[뭐야, 그럼…… 설마 아는 사람 소행이라는 거야?]

“아닐 수는 없어.”

[랜스키 왕족들이 계승권 전쟁이라도 일으키고 있다는 소리냐? 그게 세스와 무슨 상관인데! 네놈들 멋대로 그 미친 집구석 일에 끌어들이지 마!]

“계승권 전쟁?”

알렉산더 랜스키는 그 말이 우스웠던지 잠시 입매를 비틀었다. 하지만 그가 하려던 말은 이제 시작이었다.

“여기서 문제는 시저 랜스키의 유언장이 완성되지 않았다는 거야. 유산을 상속받을 권리는 남은 유족들에게 주어지는데 그중에는 윌리엄 랜스키의 유언장에서 배제된 빈털터리 상태의 루이 랜스키도 포함돼.”

[그게 계승권 전쟁이 아니면 뭐야? 아니면 밥그릇 싸움이라고 불러 줘?]

“따라서 시저 랜스키를 죽인 것은 루이 랜스키라고 보는 게 합리적이겠지. 그게 재산을 얻기 위한 유일한 방법일 테니까. 하지만 루이 랜스키가 유산을 받으려면 한 명을 더 죽여야 해. 상속권은 형제보다 친자에게 우선권이 있다는 건 너도 알 테고. 유감이지만 시저 랜스키에게는 친자가 한 명 살아 있어.”

[살인범을 신고하고 싶으면 경찰에 전화를 해! 세스는 끌어들이지 마. 그 더러운 돈 같은 건 알아서들 갈라 먹으면 되잖아.]

“상속권이 저한테 있는 줄도 모르고 노천카페에 앉아서 한가롭게 커피나 마시고 있는 시저 랜스키의 아들을 죽이는 데 걸리는 시간이 얼마나 될 것 같아? 장소는 뉴욕, 루이 랜스키가 어떤 인간과 손을 잡았는지 아무도 모르는 시점에서 전화 한 통으로 고용할 수 있는 살인 청부업자의 숫자가 세 자리를 넘어가는 곳이라면.”

알렉산더 랜스키가 옳았다. 남을 빈정거릴 여유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여유가 사라진 공간에는 더듬대는 침묵이 남아 흘렀다.

[……뭐, 뭐야 지금. 그러니까…… 지금 세스가……,]

“장담하는데 지금 세스가 여기서 나가면 너는 결혼식이 아니라 장례식을 알아봐야 할 거야. 내가 이곳이 어딘지 너한테 말을 해도 마찬가지야. 그건 내가 루이 랜스키를 처리할 때까지 세스는 이곳에서 나와 있어야 한다는 뜻이고. 여기까지가 내가 세스를 납치한 일에 대해 너한테 설명할 수 있는 이성적이고 적법한, 합리적 이유야.”

[씨발, 그게…….]

존 리든은 몇 번이고 숨을 몰아쉬었다. 그는 여전히 랜스키가와 얽혀서 일어나는 치외법권적인 일들에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유언장에서 저를 배제시킨 부친이 죽자마자 친형을 살해하고, 이어서 친형의 유산을 물려받을 그 아들을 죽이기 위해 프로 킬러를 고용하는 미친 인간이 이렇게나 가까이에서 살고 있었다.

존 리든이 이를 갈며 소리쳤다.

[다들 미쳤어. 랜스키 성을 달고 있는 것들은 다들 미쳤다고. 그중에서 네가 제일 미친놈이고. 그런 일이 있으면 경찰에 신고를 해! 신변 보호를 요청하면 되잖아! 증거가 있으면 나한테 넘겨. 내가 기소할 테니까.]

“경찰에 떠넘기고 가만히 있으라고? 내가 왜 그래야 하는데.”

[그야 씨팔, 너는 자격이 없으니까! 그새 까먹었어? 세스를 죽이려고 했던 건 네 사이코 둘째 형이 아니라 네가 먼저였어. 이제 와 네가 세스를 납치해 놓고 그게 세스를 구하기 위해서라고 둘러대도 당연히 못 믿어. 너도 랜스키야, 이 새끼야. 너도 그놈의 랜스키라고.]

그 어떤 일에도 세스의 목숨을 담보로 할 수는 없었다. 존 리든은 그래서 더더욱 알렉산더 랜스키를 믿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가 내뱉는 말이 모두 진심이라고 해도 세스를 맡겨 놓을 수는 없었다.

알렉산더 랜스키는 윌리엄 랜스키의 아들이었고, 시저 랜스키는 윌리엄 랜스키가 낳은 세 아들 중 하나였다. 그리고 세스 그린은 시저 랜스키의 친자였다. 이제 와 숨기려고도 하지 않는 그 근친의 관계는 그들이 더 이상 과거로 돌아갈 수 없다는 증거였다. 그런데도 존 리든은 알렉산더 랜스키를 믿을 수 없었다.

[상속권은 너한테도 있어. 그럼 너도 주요 용의자야. 네가 세스를 납치한 이유가 보호하기 위해서인지 아니면 죽여서 상속권을 넘겨받으려는 건지 누가 알아. 닥치고 세스 돌려보내. 내가 무슨 짓을 해서라도 지킬 테니까.]

존 리든의 반박 역시 이성적이고 합리적이었다. 그래서 알렉산더 랜스키에게는 세스를 납치해야 했던 이유가 하나 더 필요했다.

“그리고 지금부터는 비이성적이고 적법하지 않은 이유. 세스는 이제 돌려받겠어.”

출처가 불분명한 미사일은 또 있었다. 존 리든은 전화를 받고 헐레벌떡 달려온 5번가 경찰서에 미사일이 날아와 박혔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알렉산더 랜스키의 말은 선전포고였다.

[뭐……? 지금 뭐라고 했,]

“그 싸구려 반지도, 결혼도 더는 못 봐줘. 십 년이나 같이 사는 꼴을 눈감아 줬으면 너한테는 할 만큼 했어.”

[그게 무슨……!]

전화기 안쪽에서 충격을 받은 존 리든이 한차례 몸을 떠는 소리가 들려올 것만 같았다.

[그러니까 지금…… 너는 세스가…… 너하고 그런 관계가 될 거라고…… 그래도 된다고 생각하는 거야?]

“나는 한 번도 이 녀석과 헤어진 적 없어. 네가 몰랐을 뿐이야.”

[이 미친놈이…… 정신 차려! 세스는 네……!]

“내 조카지.”

조카라는 어울리지도 않는 단어를 내뱉으며 알렉산더 랜스키가 쓰게 웃었다.

“얘기했잖아. 비이성적이고 적법하지 않다고. 따지고 들지 마. 어차피 들을 생각도 없어.”

[이 미친 새끼야! 미치려거든 너 혼자 미쳐! 세스는 끌어들이지 마!]

“불가능해. 내가 미친 이유는 이 녀석 때문이라. 너도 알겠지만.”

[이, 이런 미친…… 미친 새끼가……. 네가 세스를 죽도록 팼던 게 그 때문이었……. 아냐, 아냐. 세스 그린! 거기 있는 거 맞지? 이딴 미친 소리는 들을 필요도 없어. 말도 안 된다는 거 알고 있지? 그렇지?]

존 리든이 숨 가쁘게 내뱉는 빠른 말은 몹시 절박하게 들렸다.

“……응.”

세스는 그의 절박함이 저를 대신하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알렉산더 랜스키는 미쳤다. 한 번도 헤어진 적이 없었다는 말이 그랬다. 그의 성이 랜스키라는 것을 알면서도 좋아했던 것은 자신이 비정상이라서 가능했던 일이었다. 알렉산더 랜스키가 자신처럼 비정상이 되어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세스가 파닥이는 왼쪽 눈가를 거칠게 문지르며 말했다.

“난 유산 같은 거 필요 없어. 준다고 해도 받고 싶지 않아.”

[그렇지?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 거지?]

“난 여기 있기 싫어. 유산도 싫고 랜스키와 연관되고 싶지 않아. 여기서 나가게 해 줘.”

[알았어. 그렇게 할게. 들었냐, 랜스키? 거기가 어딘지 말해. 내가 가는 동안 상속 포기 서류나 준비해 놔. 그 집구석이야 남아도는 게 변호사일 테니 그깟 서류 작성이야 오 분이면 되겠지. 세스 몫의 유산은 네가 알아서 해. 그리고 잊어. 전부.]

“…….”

알렉산더 랜스키는 침묵 상태로 세스에게 다가왔다. 어깨를 굳히며 고개를 피하는 세스를 스치듯 식탁 위의 전화기를 향해 몸을 구부린 알렉산더 랜스키가 말했다.

“지금부터 세 시간 안.”

[……뭐? 뭐라는 거야, 이 새끼야.]

“어디 가지 말고 네 사무실에 붙어 있어. 네 앞으로 뭘 보내 놨으니까.”

[뭔데? 폭탄이라도 보냈냐? 어디서 그런 개수작이야. 딴소리 말고 거기가 어딘지나……,]

“벨체프의 해외 계좌와 그 거래 내역. 불법 무기 거래와 마약 유통, 실소유 회사 내의 횡령, 탈세. 폭행, 뇌물 수수, 살인 교사. 그런 것들에 대한 증거. 제법 많아.”

[……뭐?]

알렉산더 랜스키가 줄줄이 내뱉는 것들은 존 리든이 지난 몇 달간 이를 악물고 달려들었으나 허망하게 사라지거나 혹은 빼앗기거나 했던 것이었다.

“거기에 루이 랜스키가 저지른 두 건의 살인 사건에 관한 것도 들어 있어. 네 관할은 아니지만 어떻게든 해 봐. 네가 벨체프와 루이 랜스키를 묶어서 시간을 벌어 놓을수록 내가 사이코를 찾는 게 쉬워져. 혼자서 이런 짓을 저지를 재주는 없으니까 분명 누군가와 손을 잡았을 거야. 벨체프일 수도 있고 러시아 쪽일 수도 있지. 아예 제3자일 가능성도 아주 없진 않아.”

[웃기지 마. 그런 수작질로 뭘 얻어 내려고? 벨체프를 아무리 잡고 싶어도 세스하고 바꿀 일은 없어.]

“필요 없다고 하면 그 증거들은 벨체프에게 보내겠어. 어떻게 할 건지는 네가 결정해. 거기서 계속 프로 살인 청부업자 손에서 사람을 지킬 수 있다는 망상에 빠져 있을 건지, 아니면 네 일이나 착실히 할 건지. 애초에 왜 검사가 된 건지나 생각해 봐. 벨체프가 증인을 여섯이나 잡아 죽이고 유유히 도망가는 꼴을 지켜보기 위해서는 아니었잖아.”

존 리든이 빠각 이를 갈았다.

[죽인다, 랜스키!]

“그럼 잘해 봐.”

그리고 알렉산더 랜스키는 통화 종료 버튼을 눌렀다. 세스가 전화기를 붙잡으려 하자 그 전에 알렉산더 랜스키가 전화기를 집어 들어 싱크대 속에 던져 버렸다. 세스가 왈칵 몸을 돌려 싱크대로 다가갔다. 알렉산더 랜스키는 등으로 세스를 가로막으며 물을 틀어 버렸다.

쏴아…….

수돗물이 소나기 같은 소리를 내며 쏟아졌다. 전화기는 곧 못 쓰게 될 것이다. 통화는 이것으로 끝이었다. 세스에게 남은 것은 이제 단절이었다.

세스가 눈을 치켜뜨고 쳐다보자 알렉산더 랜스키는 언젠가처럼 말했다.

“그런 눈 하지 마. 벌써부터 꼴리기는 싫으니까.”

노즐을 젖히느라 물기가 묻은 손으로 그가 세스의 눈을 가렸다. 그리고 세스가 몸부림을 치기 전에 세스의 눈을 덮은 제 손등 위에 잠깐 입술을 데었다 뗐다. 키스였지만 상대에게 닿지 않은, 그런 키스였다.

손을 치우자 다시 알렉산더 랜스키의 얼굴이 보였다. 세스는 닿지 않았던 키스의 감촉을 떠올리며 진저리를 쳤다. 그를 바라보는 알렉산더 랜스키의 표정이 물속에 잠긴 것처럼 변해 갔다.

“필요한 거 있으면 참지 말고 말해. 말했듯이, 너는 어디 못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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