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화 (17/23)

04.

밖에는 어둠이 깔리고 있을 시간이었다.

세스 그린은 창이 없는 침실에 앉아 보통의 방이라면 창이 있을 법한 빈 공간을 마주하고 있었다. 창문이 없는 대신 쾌적한 공기정화 시스템을 갖추고 있는 랜스키가의 안전가옥은 인간이 숨을 쉴 수 있는 진공의 공간 같았다.

나갈 수도, 들어갈 수도 없는 막힌 공간. 그런 주제에 아늑하기까지 했다. 세스는 한시라도 빨리 벗어나야 한다는 욕구를 계속 갉아먹는 아늑함에 막연한 공포를 느꼈다.

탁탁.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울린 것은 그때였다.

“들어간다.”

알렉산더 랜스키였다. 세스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그는 이미 문을 열고 들어오는 중이었다. 혼자가 아니었다. 옅지만 따듯한 냄새가 함께였다. 세스는 희미하게 풍겨 오는 라즈베리 냄새를 맡았다.

“뭐 하고 있었어?”

세스는 하얀 가루 같은 게 묻어 있는 알렉산더 랜스키의 앞머리에 잠시 시선을 주었다. 더 이상 바라보다가는 눈이 마주칠 것 같아 그만 고개를 돌렸다.

“나가고 싶어.”

“잘됐네. 나와. 저녁 먹자.”

“출근할 시간이 지났어. 무단결근으로 해고당할 거야.”

세스가 알렉산더 랜스키가 아닌 빈 공간을 향해 작게 중얼거렸다.

“반년이나 일한 곳인데. 나쁜 사람도 없고 보수도 좋아. 팁도 다른 데보다 많아. 이번 달 생활비를 내고 돈이 남으면 거기서 파는 와인을 한 병 사려고 했어. 되게 비싼 거야. 존이 좋아해. 매니저가 직원 할인가로 주겠다고 했어.”

세스가 하는 현실의 얘기는 알렉산더 랜스키에게는 묘하게 현실감이 없었다. 그는 학교를 졸업하고 가진 돈을 모두 재활원에서 써 버린 뒤 스스로 돈을 벌기 시작한 세스와 얘기를 나눠 본 일이 없었다.

세스가 남들처럼 돈을 벌고 있다는 사실이 낯설었다. 누군가에게 사 줄 와인 한 병의 값을 계산해 보고 있다는 게 이상했다.

“너는 이런 거, 모르지.”

세스는 제 앞머리를 조금 잡아당겼다. 뭔가가 묻어 있는 알렉산더 랜스키의 앞머리와 비슷한 위치를.

“짐 타벨이라고, 같이 일하는 사람이 있어. 귀엽게 생겼어. 하프 아시안이야. 가끔 내가 모르는 이상한 말을 해서 알아듣지 못할 때가 있어. 나는 루마니아어를 하나도 모르는데 걔는 아시아 말을 잘해. 타벨은 존을 마음에 들어 해. 잘생겼대. 전화번호를 물어본 적도 있어. 나도 존이 잘생겼다고는 생각하지만 타벨이 그렇게 말하는 걸 들으면 기분이 나빠. 그래서 존과 잤다고 말했어.”

세스가 약간 고개를 돌려 휘어진 시선으로 알렉산더 랜스키를 힐긋 곁눈질했다.

“나는 잘 살고 있어. 남들처럼은 못 해도 나한테는 지금이 최선이야. 나는 괜찮아. 앞으로도 괜찮을 거야. 그러려고 애쓰니까. 약도 계속 먹고 있고 매일 출근도 해. 네가 없으면, 나는 괜찮아.”

알렉산더 랜스키가 세스가 앉아 있는 침대를 향해 걸어왔다. 문이 열리며 그와 함께 들어온 따듯한 라즈베리 냄새는 이제 거의 흔적만 남았을 정도로 옅게 사라지고 있었다. 저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시선이 꼭 어딘가를 간질대는 것 같았다.

세스는 그가 머리카락을 흩뜨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속이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손이 닿을 만한 거리에 다가선 알렉산더 랜스키는 팬츠 주머니에 양손을 집어넣었다.

“입만 열면 사람 열받게 하는 건 여전하네. 그런데 그 말 하는 얼굴은 예뻐서 사람 환장하게 하는 것도 여전하고.”

“…….”

“나와. 밥 먹자.”

세스가 고개를 내려 제 무릎에 시선을 두었다.

“보내 줘.”

“내가 끌어내?”

지금 저를 보는 눈매가 이전처럼 한쪽만 손톱 모양으로 치켜 올라갔을 것이다. 보지 않아도 느껴지는 것들이 여전히 선명했다.

“하나 알아 둬. 지금 너한테 손대면 끌어내는 걸로 안 끝나.”

세스의 어깨가 저 혼자 움찔댔다.

“……강간이라도 하겠다는 소리야?”

알렉산더 랜스키가 잠깐 한숨을 쉬었다.

“여전하다니까. 어차피 하게 될 일을 왜 고집을 피워서 사람 속을 긁는데. 그래, 계속 버티면 지금 벗겨서 둘 다 사정 못 할 때까지 해 댈 거야. 그게 싫으면 네 발로 나와.”

“…….”

세스가 잠시 그를 노려보다 결국 몸을 일으켰다. 한숨이 한 번 더 들려왔다.

“대체 왜 이런 말이나 하게 만들……, 됐어. 나가기나 해.”

세스를 먼저 침실에서 나가게 한 알렉산더 랜스키가 침실 문을 단단히 닫아 버렸다. 사막 같은 거실을 지나 주방에 들어서자 이미 식탁 위에서 준비를 마친 음식들이 세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발 앞질러 간 알렉산더 랜스키가 의자를 빼 주었다.

“앉아.”

“…….”

세스가 머뭇대다 자리에 앉았다. 알렉산더 랜스키는 새하얀 냅킨을 펼쳐 세스의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세스가 다급히 허리를 뒤로 젖혔다. 무릎을 덮었던 냅킨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뭐…… 뭐 하는 거야.”

“스프 뜨거워. 너 먹을 때 곧잘 흘리잖아. 다시 앉아.”

“넌, 너는 이런……,”

“이런 게 뭐?”

알렉산더 랜스키는 바닥에 떨어진 냅킨을 줍는 대신 맞은편 자신의 자리에 놓여 있던 새 냅킨을 펼쳐 다시 세스의 무릎 위에 얹었다. 흔들림이 느껴지지 않는 숨결이 뺨에 닿을 듯 가까이 다가왔다. 식탁 위에는 달콤한 라즈베리 냄새가 가득했다. 어쩌면 알렉산더 랜스키는 이곳에 서서 라즈베리를 넣은 무언가를 만들고 있었을 것이다.

정말로 어울리지 않았다.

너하고 내가, 이러고 있으면 안 되는 거잖아.

“…….”

세스는 두 번째 냅킨을 꽉 움켜쥐고 있다가 이어서 그걸 바닥에 팽개쳤다. 알렉산더 랜스키가 어이없다는 듯 눈썹을 치켜떴다.

“왜 성질이야?”

“이상, 하잖아.”

“뭐가 이상해?”

알렉산더 랜스키는 싱크대 서랍을 열어 새 냅킨을 꺼내 왔다.

세스는 주먹을 움켜쥐고 알렉산더 랜스키에게 닿지 않기 위해 몸을 한껏 비틀었다.

“하지 마.”

“냅킨 하나 올려 두는 거야. 뭐 대단한 일이라고 이래?”

“하지 말라니까!”

세스가 목소리를 높이자 알렉산더 랜스키는 냅킨 위에 아예 제 손을 올려 버렸다. 하얀 천 한 장을 사이에 두고 허벅지와 손바닥이 닿았다. 허벅지가 뜨겁게 달궈진 오븐에라도 눌리는 기분이었다.

“밥 먹으라는 거야. 여기 얼마나 더 있어야 되는지 나도 장담 못 해. 내내 굶고 있을 건 없잖아.”

“손 치워.”

“그럼 얌전히 밥 먹어.”

“왜…… 대체 왜 이러는 거야.”

“너야말로 뭐가 마음에 안 들어서 이래? 고작해야 냅킨이야.”

고작 냅킨 한 장이 아니었다.

알렉산더 랜스키는 그 언젠가 호텔 스위트룸에서 아침을 먹여 주던 때처럼 굴고 있었다.

그날의 기억은 세스에게 행복의 형태와 가장 가까웠다. 재미난 놀이라도 하는 것처럼 그에게 밥을 먹이며 즐거워하던 알렉산더 랜스키가 보기 좋아서 배가 부른데도 참고 열심히 먹었다. 오렌지 향이 싫었지만 주스도 다 마셨다. 그가 화장실에서 토하는 것을 발견한 알렉산더 랜스키는 화를 냈지만, 그조차도 다정했다. 세스는 그가 제 몸에 묻은 토사물을 샤워기로 씻어 내던 이후를 기억했다. 미지근한 물의 온도가 너무 다정해서 살갗이 녹아 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는 안 되잖아. 이제는.

“이유도 없으면서 따지고 들지 마. 이런 일로 일일이 신경 곤두세우지 말고. 네가 뭐라도 떠들어 대는 건 좋지만 성질부리다 굶는 건 못 참아. 손 치운다. 냅킨은 그냥 놔둬. 내가 손 뗐다고 치워 버리면 알몸으로 밥 먹게 할 거야.”

말을 마친 알렉산더 랜스키는 허벅지를 누르던 손을 치웠다. 냅킨은 눈이 시게 희었지만 그 아래 피부는 화상이라도 입은 듯 벌겋게 달아올랐다.

세스와 냅킨이 모두 얌전히 있자 알렉산더 랜스키는 세스의 앞에 따듯한 김이 오르는 접시를 놓았다.

“먹어. 다 먹고 다른 거 줄게.”

“…….”

안 돼. 이런 건.

세스는 고집을 피우는 대신 스푼을 쥐었다. 따뜻한 수프에서 피어오르는 김이 욕실의 수증기 같았다.

더러워진 얼굴을 닦아 주는 손은 간지러울 정도로 조심스러웠다. 여기저기 거울의 잔해가 날카롭게 긁어 놓은 알렉산더 랜스키의 손등에서는 간간이 피가 흘렀다. 쏟아지는 물줄기에 섞여들어 가는 피를 보고 있자 불쑥 아까워졌다. 혀를 내밀어 핥았더니 알렉산더 랜스키는 시간이 없다고 욕설을 뱉으면서도 젖은 얼굴을 끌어당겨 연거푸 입을 맞췄다.

심장이 그렇게 세찬 존재감을 드러내며 박동하는 기관인지 처음으로 깨닫는 순간이었다.

그러니까, 안 돼.

돌아가면 안 돼. ……너도, 나도.

“먹을 테니 보내 줘.”

세스는 스푼으로 접시 안을 휘저으며 느리게 말했다.

“상속은 포기할게. 랜스키가의 어떤 것도 바라지 않아. 다 너한테 줄게. 나는 보내 줘.”

달칵.

알렉산더 랜스키가 소리 나게 스푼을 내려놓았다. 그는 세스와는 달리 아무것도 조각나지 않은 말끔하고 반듯한 얼굴이었다.

“그렇게는 못 해.”

“유산 때문인 거잖아. 안 받으면 되는 거잖아.”

“되긴 뭐가 돼. 사이코가 종이 한 장 믿고 널 가만 내버려둘 것 같아? 그런 일을 겪고서도 사이코가 어떤 인간인지 몰라?”

“그 사람은 네가 알아서 해.”

“지금 알아서 하고 있잖아. 사이코가 너한테 무슨 짓 못 하게.”

“아니잖아.”

“……뭐가 아닌데.”

“내가 걱정되는 거라면 그냥 존이 말한 대로 하면 되잖아. 존은 검사니까 경찰에 연줄도 있어. 나는 존하고 있으면 돼.”

“…….”

“네가 왜 이러는지 나는 잘 모르겠는데…… 유산 때문이라고 했으니까, 안 받겠다고. 나는 랜스키 가문하고 엮이지 않을 수 있다면 그 돈을 누가 가져가도 상관없어. 그건 네 마음대로 하고 나한테 더 이상 신경 쓰지 마.”

“잘, 몰라?”

아마도 그 말은 어떤 스위치를 누른 듯했다. 반듯한 이마 옆으로 혈관이 튀어나왔다.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고?”

알렉산더 랜스키가 식탁 위에 놓인 스푼을 쥐었다. 스푼이 손 안에서 구겨지듯 휘기 시작했다.

“신경을 쓰지 마?”

“……그래. 존이 알아서 할 거야.”

탕!

휘어진 스푼이 어딘가로 날아가 부딪쳤다. 알렉산더 랜스키는 투둑 불거져 나온 손가락 마디처럼 새하얘진 시선으로 세스를 노려보았다.

“그럴 수 있었으면 내가 널 십 년이나 다른 집 개새끼한테 맡겨 놓을 일도 없었어. 그 개새끼가 너한테 무슨 짓 할 줄 알면서도 내내 끙끙 지켜보고만 있을 일도 없었다고. 무슨 말인지 몰라?”

“…….”

세스는 모르는 얘기였다.

“노친네가 변덕을 부리지는 않을까, 나 몰래 뒤로 다른 수작을 부리진 않을까, 사이코나 폭군이 알게 되지 않을까, 더 꽁꽁 숨겨 놔야 했을까, 얼굴이라도 한번 보고 오면 무슨 사단이 일어날까…… 십 년을 아무것도 못 하고 발발 떨기만 했어. 그런 걸 안 들키려고 나도 너처럼 약이나 처먹고 살았어. 신경을 안 써도 되는 일이면 내가 왜 그랬는데.”

텅!

알렉산더 랜스키가 식탁을 밀치며 다가왔다. 거칠어진 공기가 걸음과 함께 와락 밀려들었다. 세스가 숨을 한번 삼키는 사이 알렉산더 랜스키는 그가 앉은 채로 의자를 잡아당겨 홱 방향을 돌려놓았다.

살이 닿지 않았다. 대신 시선이 부딪쳤다.

“네가 대답해 봐. 내가 왜 그랬는지.”

“…….”

세스는 할 수 없는 대답이었다.

그는 알렉산더 랜스키의 십 년을 몰랐다. 그를 마주 보며 십 년의 공백을 자꾸 잃어버리는 것처럼, 그 역시 자신 없이 십 년을 보냈다는 사실을 자꾸 잊어버렸다.

네가 왜.

너는 잘 살았어야 하잖아. 내가 사라졌으니까.

그러려고 나를 버렸잖아. 나한테 사랑한다고 했던 마음 같은 건 전부 잘라 버렸잖아.

그럼 나를 만나기 이전하고 똑같이 지냈어야 하잖아.

겉모습을 보면 그는 여전히 랜스키 왕국의 막내 왕자 같았다. 세스는 그가 자신이 모르는 곳에서 보내온 십 년을 짐작도 할 수 없었다.

“대답 못 하겠지. 그래, 헛소리하느니 차라리 입 다물고 있어. 밥이나 먹이게.”

알렉산더 랜스키는 세스가 아직도 느슨하게 쥐고 있는 스푼을 빼앗아 들었다. 스프를 휘저어 스푼에 담은 그가 작게 투덜거렸다.

“세 시간이나 끓인 건데. 젠장, 이런 건 말해 주기 전까지는 도통 모르지. 하여간 못된 버릇은 하나도 안 변했어. 두세 번씩 손 가는 것도 여전하고. 그래도 좋으니 미칠 노릇이지. 입 벌려.”

세스의 눈동자가 그의 눈에서 손으로, 다시 손에서 눈으로 옮겨 갔다.

“…….”

“벌리라니까.”

자동 반사처럼 입이 벌어졌다. 알렉산더 랜스키는 식힐 필요가 없는 스프에 한번 입김을 불어넣은 다음 그걸 입에 넣어 주었다.

“입 다물고 삼켜.”

두세 번씩 손이 가는 게 귀찮다는 식으로 말하던 것과는 달리 알렉산더 랜스키의 손길은 세심했다. 입가에 묻지 않게 조심스럽게 떠넘긴 스프가 한 방울 턱에 묻자 무릎 위의 냅킨을 집어 닦아 주기까지 했다.

“……안 삼켜?”

그래서 삼킬 수 없다는 것을 들켰다.

세스는 입 안에 든 음식을 삼킬 엄두를 내지 못했다. 알렉산더 랜스키가 세 시간이나 공을 들여 완성한 스프는 세스가 몰랐던 십 년의 일부가 뭉근히 녹아 있을 것이다.

이건 너무 따듯했다. 이걸 먹으면 제 머릿속 일부도 녹아 버릴지 몰랐다.

세스가 스프를 뱉기 위해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그러나 알렉산더 랜스키가 그걸 눈치채는 게 더 빨랐다.

재빨리 세스의 턱을 붙든 그가 코가 닿을 거리로 얼굴을 가져오며 말했다.

“삼켜. 삼킬 때까지 입 막고 있을 거니까.”

십 년 전에도 그는 지금과 똑같이 굴었다.

“…….”

“고집은.”

턱을 끌어당긴 알렉산더 랜스키가 세스의 입을 제 입술로 덮었다. 세스가 반사적으로 입 안에 든 것을 꿀꺽 삼키는 순간 알렉산더 랜스키가 별안간 욕설을 내뱉었다.

“빌어먹을.”

허리가 왈칵 당겨졌다. 무언가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다음 순간 뜨겁고 커다란 손이 뺨을 쥐었고, 이어서 입술이 삼켜졌다.

말캉한 살덩이는 이 순간 무기였다. 세스가 하루도 빠짐없이 약을 먹어 쌓아 올린 위태로운 방벽을 단숨에 반으로 가르고 짓쳐들어왔다.

뜨거운 혀가 살갗을 녹일 기세로 입 안을 달구었다. 한순간에 제어가 풀린 욕구가 거칠게 날뛰었다. 이 순간은 타액마저도 무기였다. 세 시간이나 뭉근히 끓어 향긋해진 마늘과 크림이 섞여 있는 타액은 도무지 멈추지 않을 것 같은 허기를 일깨웠다. 알렉산더 랜스키는 능숙한 사냥꾼처럼 사냥감의 뒷목을 물어 저항할 의지를 잃게 만들었다.

세스를 단단히 움켜잡은 알렉산더 랜스키는 더 이상 경계할 게 없었다. 속에 감추고 있던 것을 감추지 않고 쏟아부었다. 세스가 헐떡이며 신음을 흘릴 때까지 단단히 혀를 세워 목구멍 깊숙한 곳까지 들쑤시고 헤집었다. 입술이 닿는 곳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빨아들였다.

“하, 하아……,”

입술을 잠시 놓아주자 세스가 한꺼번에 숨을 쉬었다. 그를 보며 알렉산더 랜스키가 작게 소리 내어 웃었다. 하지만 그르렁대는 웃음은 아무리 해도 사람이 웃는 소리로는 들리지 않았다.

입술이 떨어진 시간은 아주 잠시였다. 아직 숨을 다 내쉬지도 않았는데 알렉산더 랜스키는 또다시 세스의 입술을 뒤덮었다. 그래도 일말의 여유가 생겼는지 좀 전보다는 덜 사나웠다. 이빨을 하나하나 더듬듯 혀끝으로 맛보며 타액이 고인 혀를 빨아들였다. 뒷덜미를 붙들고 있던 손이 니트를 걷어 올렸다. 한차례 피부를 쓸던 손이 트렁크의 밴드를 쓸었다. 세스가 오르르 어깨를 떨었다. 솜털처럼 세심한 작은 전율이 살갗에 피어났다.

알렉산더 랜스키의 손가락이 트렁크 안으로 밀고 들어오던 순간이었다.

“길어질 것 같은데 잠깐만 방해하면 안 되겠습니까?”

생각지도 못했던 방해가 두 사람을 멈추게 만들었다. 둘 다 누가 들어오는 기색을 조금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그게 무슨,”

알렉산더 랜스키가 울컥 소리를 치기 전에 세스가 그의 어깨를 홱 떠밀어 버렸다.

“……우욱!”

떠미는 힘은 버티면 그만이었지만 구토하는 꼴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위액이 섞여 묽어진 스프가 알렉산더 랜스키의 셔츠를 더럽혔다.

“…….”

알렉산더 랜스키는 순간 멍청하게 굳어 버렸다. 저 못지않게 정신을 잃고 달아오르던 세스가 갑자기 토사물을 뱉은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왜?”

대답처럼 세스가 어깨를 굽히고 한차례 더 구역질을 한 뒤 식탁에 기대섰다. 현기증이 나는 듯 비틀대는 세스를 향해 알렉산더 랜스키가 반사적으로 손을 뻗었다.

탁!

세스가 그의 손을 밀어냈다.

“손대지 마.”

눈이 희미하게 감겼다. 속눈썹이 가늘게 떨려 왔다.

“……토할 것 같아.”

토할 것 같기는. 벌써 토해 놓고서. ……제기랄.

알렉산더 랜스키는 아직도 제 입술 자국이 어지럽게 남아 있는 세스의 입가를 들여다보며 이를 질끈 물었다.

세스가 말보다 몸이 더 솔직하다는 것은 그가 가장 잘 아는 사실이었다. 저를 거부하는 게 진심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몇 번의 착오를 거듭한 끝에 비로소 희미한 공포가 되었다.

너하고 나는 다른 걸까.

내가 아무리 빌고 사정해도, 별 미친 짓을 다 해도 십 년은 너무 길었던 걸까.

“죄송합니다. 이젠 말해도 되겠습니까?”

예고도 없이 두 사람 사이를 가로질러 들어온 키 큰 남자가 다시 한번, 조금은 곤란한 목소리로 말했다.

* * *

알렉산더 랜스키는 화를 내지 않았다. 그것은 별로 방해할 생각이 없었던 장면을 본의 아니게 방해한 남자도 이미 알고 있었다. 애초에 기다릴 수 있는 일이라면 방해하지도 않았다. 서로에게 그만한 신뢰는 있었다. 케네스 로완이라는 이름의 그가 랜스키 인더스트리의 막내 왕자를 개인 보좌한 지도 벌써 오 년이 넘어가는 시점이었다.

두 사람이 처음 알게 된 곳은 옥스퍼드였다. 케네스 로완은 랜스키가의 장학재단을 통해 학업을 마친 케이스였는데, 어쩌다 알렉산더 랜스키가 자신을 개인 보좌관으로 골랐는지 지금까지도 정확한 이유를 모르고 있었다. 저보다 똑똑한 인간이라면 랜스키 장학재단만 해도 발에 치일 정도로 많았고, 저는 딱히 눈에 띄는 편도 아니었다.

어쨌거나 오 년이라는 긴 시간은 제법 두터운 신뢰를 쌓을 수 있는 기간이었다. 알렉산더 랜스키는 타인에게 틈을 보이는 사람이 아니었지만, 로완은 어떤 시점에서 그가 뒤집어쓴 단단한 껍질이 물러지는지 배웠다. 그건 세스라는 인물이 연관되는 때였다. 이를테면 제 모친에게 전화를 걸어서 비장의 라즈베리 파이 레시피를 알려 달라고 하는 식이었다. 로완은 알렉산더 랜스키가 시종일관 부드럽게 모친과 통화하는 와중에도 레시피를 주지 않으면 저를 자르겠다고 하는 말을 들어야 했다.

로완이 두 사람의 근친 관계를 알게 된 건 거의 처음부터였다. 세스라는 인물에 대해서 아는 게 거의 없는 탓이었는지, 아니면 물러진 껍질 안에서 간헐적으로 터져 나오던 탓인지 로완은 알렉산더 랜스키의 태도를 사랑이라고 생각했다.

사랑이 아니라면 무엇도 그를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로완은 알렉산더 랜스키가 어떤 형식으로든 제 사랑을 이루기를 바랐다. 법리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용인받을 관계는 아닐 테지만, 껍질이 물러진 그를 보고 있으면 어쩐지 그런 것들은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렇게 불타는 것을 함부로 끌 권리는 누구에도 없지 않을까.

어쩌면 알렉산더 랜스키가 저를 개인 보좌관으로 삼은 건 그런 사고방식 때문일지도 몰랐다.

“물건은 잘 배달되었습니다. 부검사장이 로비까지 내려와 기다리고 있다가 낚아채 갔다고 했습니다. 직후에 조사원으로 사이먼 컬리를 고용한 것 같습니다. 사이먼 컬리는 이제껏 지방 검사실과 일한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검사실 예산에서 부담하기엔 일당이 너무 높거든요. 존 리든이 개인적으로 고용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열심이네. 벨체프는 맡겨도 되겠어. 조사원하고 따로 연락해. 돈이 모자란다고 하면 이쪽에서 준다고 해. 맥케이는?”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의외로 뒤끝은 없던데요, 그 부검사장. 닥터가 좀 더 고생할 줄 알았습니다만.”

“좀스러운 인간은 아냐. 개새끼긴 하지만.”

케네스 로완은 웃음이 삐져나올 것 같아 잠시 헛기침을 했다. 그는 알렉산더 랜스키가 존 리든을 호모 쿼터백이라고 욕하는 소리를 가장 많이 들은 사람일 것이다.

“베네수엘라는?”

이쪽이 진짜 용건이었다. 케네스 로완의 표정이 순식간에 변했다.

“방금 연결이 됐습니다. 공격받은 게 맞습니다.”

“…….”

알렉산더 랜스키가 미간을 찌푸렸다. 시저 랜스키의 죽음을 접하자마자 베네수엘라의 캠프에 변고가 생겼음을 짐작한 이는 알렉산더 랜스키였다. 짐작은 틀리지 않았고, 그래서 랜스키 일가는 몹시 유감스럽고 위험한 상황에 직면했다.

“사용된 화력을 보면 러시아 마피아일 듯합니다. 루이 랜스키가 러시아와 손을 잡고 캠프의 정확한 위치를 흘렸을 겁니다. 시저 랜스키는 캠프를 버리고 달아나려던 것 같습니다. 쿠바 영해를 날아오던 것도 미국에 입국하려던 게 아니라 도주로가 그쪽으로 이어진 모양입니다.”

최악의 가정이 맞아든 셈이었다.

루이 랜스키는 윌리엄 랜스키의 사망을 접하자마자 시저 랜스키를 노렸다. 캠프 밖으로 나오지 않은 시저 랜스키를 없애려면 정교한 계획이 필요했는데, 루이 랜스키는 그러는 대신 아예 러시아 마피아한테 캠프를 팔아넘겼다. 그로써 적은 하나에서 둘이 됐고, 그만큼 까다로워졌다. 러시아 마피아라면 캠프에 숨겨 둔 무기나 인력을 맨해튼까지 밀수입해 올 수 있었다. 이미 합법적인 수준에서는 대응이 불가능한 전쟁이 시작된 셈이었다.

알렉산더 랜스키가 무슨 생각에선지 피식 웃었다.

“폭군이 얼마나 게으름을 피우고 있었는지 알겠군. 궁지에 몰린 사이코가 무슨 짓까지 할 수 있는지 생각도 안 해 보고 있었던 모양이야. 그렇다면 캠프는 완전히 넘어간 건가?”

“백퍼센트 확신은 안 됩니다. 연결이 된 쪽도 완전히 이쪽 편을 들기로 한 건지 신뢰할 수는 없습니다. 무엇보다 거긴 계속 무법지대였으니까요. 그간 적절히 통제가 됐던 것은 캠프를 맡고 있던 퍼넬 장군이 완벽하게 윌리엄 랜스키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윌리엄 랜스키가 죽고 러시아 마피아가 퍼넬 장군의 목을 따 버리자 분열된 겁니다. 캠프를 움직이는 건 돈입니다. 돈 준다는 사람에게 매달려야 하는데 그게 어떤 랜스키가 될지 아직 감이 안 올 겁니다.”

“러시아가 루이 랜스키한테 그렇게 많은 투자를 할 리 없어. 캠프를 대신 통제해 주는 게 아니라 아예 빼앗으려고 들 거야.”

“루이 랜스키는 버려진다는 말씀입니까?”

“모르지. 사이코라면 제 힘으로 어쩌지 못하는 장난감은 아예 러시아한테 줘 버리고 안전한 상속분만 원할 수도 있어.”

“그럼…… 캠프를 그냥 빼앗기는 게 아닙니까. 그것도 러시아 마피아에.”

“그럴 리가. 일이 그렇게 되면 워싱턴에서 움직이겠지.”

“아아…….”

케네스 로완이 동의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이다 돌연 눈매를 찌푸렸다.

“시저 랜스키가 죽은 사실을 워싱턴에서 아직 모를 리가요. 그런데 이제껏 연락이 없습니다. 외교 문제에는 나서지 않겠다는 뜻 아닐까요?”

“설마. 간을 보는 거겠지. 내가 먼저 연락하면 값을 후려칠 생각으로.”

“으음……. 그럼 어떻게 합니까?”

“기다려.”

“얼마나요?”

“연락할 때까지.”

“만일 너무 늦으면,”

알렉산더 랜스키는 별일 아니라는 듯 로완의 말을 끊었다.

“늦을 일 없어. 캠프가 러시아 마피아에 넘어가는 꼴을 못 보는 건 워싱턴이 더할 테니까.”

“뒤늦게 책임을 물을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회사 차원으로. 그럼 손해가 클 겁니다.”

“그 정도는 감수하겠어.”

하지만 케네스 로완은 말과는 달리 알렉산더 랜스키가 승산도 없는 일에 판돈을 거는 성격이 아니라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미리 생각을 해 두셨겠군요. 혹시 랭리가 움직일 걸 염두에 두고 계십니까?”

CIA국장과 윌리엄 랜스키는 꽤나 막역한 사이였다. 그간 캠프를 통해 진행된 CIA의 남미 쪽 작전은 한두 개가 아니었다. 캠프가 자리 잡은 뒤로 남미 쪽에서 미 본토로 밀수되는 코카인 양이 월등히 줄었다. 겉으로 드러나는 건 코카인뿐이었지만 그 뒤로는 암시장에서 거래되는 온갖 위험한 물건들이 더 있을 것이다. 사실상 캠프는 CIA의 일을 공식적이든 비공식적이든 거들었고, CIA는 그만큼 관련 예산을 절약해 톡톡히 재미를 보았을 것이다. 알렉산더 랜스키의 개인 보좌관이 회사 일을 전부 아는 건 아니었지만 로완은 윌리엄 랜스키가 진작 막내 왕자에게 랭리 쪽 네트워크를 넘겨주었을 것이라 예상했다.

“거기까지만 알고 있어.”

알렉산더 랜스키는 부정하진 않았지만 선을 그어 두었다. 로완은 자신의 위치를 가늠하고 곧 수긍했다.

“그런데 언제까지 안전가옥에 계실 겁니까? 여기는 아무래도 연락이 쉽지 않아서요. 보고를 하려면 직접 와야 하기도 하고.”

그 말에 알렉산더 랜스키가 힐긋 세스를 바라보았다. 세스 역시 그를 보았다. 서로를 확신하지 못하는 불안정한 시선이 잠깐 얽혔다 빠르게 뒤로 물러섰다.

“……저 녀석이 더 이상 토하지 않게 될 때까지.”

케네스 로완이 물끄러미 알렉산더 랜스키의 더러워진 셔츠를 바라보았다. 토사물을 입고 있으면서도 그는 전혀 불쾌해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심지어 갈아입을 생각도 못 하는 눈치였다. 케네스 로완처럼 가까이에서 오랫동안 보아온 사람이라면 지금 그가 평소와는 어딘지 모르게 다른 상태라는 것을 알아챌 수도 있을 것이다.

“의사라도 부를까요?”

“나중에. 호모 쿼터백이 바보가 아니라면 맥케이를 감시하고 있겠지.”

“아, 그렇겠군요. 닥터한테 언질을 줄까요?”

“모르고 있는 편이 더 안전해.”

“그렇게 말씀하시는 걸 보니 벌써 사람을 붙여 놓으신 모양이군요. 알겠습니다.”

케네스 로완이 고개를 한번 끄덕인 다음 걸음을 물렸다.

그러나 안전가옥을 떠나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그는 자신에게 세스 그린과 인사할 자격 정도는 있다고 생각했다. 키친에 라즈베리 파이 냄새가 떠도는 걸 보면 세스 그린은 그 파이를 먹었거나 아니면 곧 먹게 될 테니까. 그 파이에 담긴 작은 역사 정도는 알고 있었으면 했다.

“안녕하세요, 그린 씨. 처음 뵙겠습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진심이에요.”

알렉산더 랜스키와 얘기할 때와는 다르게 서글서글 웃는 얼굴로 저를 보는 낯선 사람의 호감은 세스에게 당혹감을 가져왔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랜스키가와 연관된 사람이 저에게 반갑다는 말을 하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

세스가 말이 없자 로완은 소개가 부족해서였을 거라고 생각하며 한 발을 더 다가갔다.

“저는…… 아, 이렇게 말하면 더 쉽겠군요. 오늘 알렉스가 구운 라즈베리 파이는 제 어머니가 굽는 법을 알려 주셨어요. 어머니가 그 레시피를 내놓지 않았으면 알렉스는 저를 해고했을 겁니다.”

세스는 반응하신 대신 어깨를 뒤로 젖혔다. 알렉산더 랜스키가 재빨리 곁으로 다가와 등으로 세스를 감추었다.

“엉뚱한 소리 하지 마.”

케네스 로완이 영문을 모르겠단 투로 눈을 깜박였다.

“……아, 예? 파이를 직접 만들었단 얘기는 비밀이었습니까?”

“치근대지 말라고.”

그게 대체 무슨 말이냐는 듯 로완이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치근댄다니요. 인사를 한 것뿐입니다. 그리고 인사가 필요한 사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이제 그린 씨는 알렉스와 함께 있는 거 아닙니까?”

로완이 너무 앞선 것만은 아니었다. 그가 본 것은 알렉산더 랜스키가 잡아먹을 것처럼 세스에게 키스하는 장면이었으니까. 그걸 연인이 아닌 다른 관계라고 해야 한다면 좀 억울할 것 같았다.

그런데 알렉산더 랜스키는 어쩐 일인지 소리 없이 이를 갈았다.

“……불편하게 만들지 마. 불안정하다는 거 알잖아.”

“아, 그렇죠. 알겠습니다.”

케네스 로완은 그쯤에서 물러섰다.

“그럴 의도는 없었습니다. 환영한다는 말을 하고 싶었습니다. 안전가옥이라 환영한다는 말은 좀 그렇지만 편히 지내세요.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 알려 주시고요.”

랜스키가의 밑도 끝도 없는 친절이야말로 세스를 불안하게 만드는 무엇이었다. 흉터가 있는 쪽 눈썹을 잔뜩 찡그린 세스가 불편한 호기심을 피할 의도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세스가 갑자기 움직이는 바람에 알렉산더 랜스키가 반사적으로 등을 돌렸다. 그러나 세스는 의자에서 일어나고 나서야 자신의 차림새가 이상하다는 사실을 새삼 알아차렸고, 그 자리에 있는 로완을 의식해 몸이 굳었다.

알렉산더 랜스키의 어깨 너머를 보고 있던 로완의 시선이 저절로 아래를 향했다. 변명을 하자면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 눈앞에 맨다리가 보였을 뿐이었다.

알렉산더 랜스키가 재빨리 세스를 팔로 감싼 다음 로완을 노려보았다.

“허벅지 그만 쳐다봐.”

케네스 로완은 억울했다.

“죄송합니다. 그게 아니라…… 저 게이 아닙니다.”

“무슨 상관이야. 일단 눈부터 돌려. 아냐, 당장 나가.”

알렉산더 랜스키에게 붙들려 있던 세스가 신경질적으로 그의 팔을 움켜쥐고 말했다.

“놔. 들어가게.”

“됐어. 로완이 갈 거야.”

세스가 알렉산더 랜스키의 팔을 힘껏 떼어 내며 소리쳤다.

“처음부터 네가 옷을 이렇게 입혀 놓지 않았으면 되잖아! 대체 바지는 왜 벗겨 놓은 거야!”

화를 내는 세스를 보며 알렉산더 랜스키가 당황했다. 케네스 로완은 지금처럼 당황한 알렉산더 랜스키의 표정을 처음 본다는 데 돈이라도 걸고 싶어졌다.

“그야 맞는 게 없…….”

바지는 맞는 게 없었다. 파자마 팬츠라도 입혀 놓을까 했지만 벗겨 놓은 쪽이 더 마음에 든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망설이다 보니 시간을 놓쳤다. 키친에서는 스프가 끓고 있었고, 맛있는 것을 먹이겠다는 욕심으로 주걱을 휘젓는 데 집중하고 있는 사이 세스가 깨어났다.

“거짓말하지 마.”

세스가 그를 홱 떠밀었다.

“비켜.”

평소보다 시끄러운 발걸음으로 세스가 거실을 가로질러 침실로 들어가 버렸다. 알렉산더 랜스키는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서 세스의 등을 쳐다보기만 했다.

“화가 났는데요.”

로완이 힐긋 눈치를 보다 말을 건넸다.

“……응.”

“따라가 보는 게 좋지 않을까요. 화가 많이 난 것 같은데.”

괜히 끼어든 것 같은 기분에 케네스 로완은 조금 미안해졌다. 세스가 심리적으로 불안정하고 대인 관계에 능숙하지 못하다는 걸 알면서도 초면에 너무 반가워했나 싶었다.

알렉산더 랜스키는 로완을 추궁하는 게 아니라 종잡을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조금.”

“예?”

“조금. 나중에.”

다른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던 로완이 알렉산더 랜스키를 돌아보며 눈을 끔벅댔다.

“알렉스답지 않은데요.”

“나다운 게 뭔데.”

“세스잖아요.”

더 애지중지해야 되지 않느냐는 뜻이었는데, 알렉산더 랜스키도 그 말을 부정하는 건 아니었다. 단지 지금 느껴지는 감정을 소화할 시간이 필요했다.

저를 밀쳐 내고 돌아서서 가는 세스의 뒷모습은 십 년 전보다 더 말라 보였다. 몸이 좀 닿았다고 계속 토하는 꼴을 보고 있자니 제 위가 대신 뭉개지는 듯했다. 그런데 단지 그것만은 아니었다.

“알렉스. 왜 웃는 겁니까?”

케네스 로완의 말에 알렉산더 랜스키는 좀 전보다 더 당황해서 입가를 손으로 쓸었다.

“내가 웃어?”

“네. 지금 웃고 있는데요.”

그거 아무래도 좀 이상하네요. 걱정을 해야 되는 게 아닙니까. 케네스 로완이 중얼거렸다.

“…….”

알렉산더 랜스키는 한참 만에 이유를 알아냈다.

세스가 화를 냈기 때문이었다. 세스가 이제껏 화를 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가 제이 에드거를 끌어들여 터무니없는 짓을 강제했을 때도 세스는 말없이 그가 준 억지를 받아들였다. 존 리든의 앞에서 구음을 시켰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화를 내고 소리를 지르고 감정을 터트리는 쪽은 언제나 자신이었다. 세스가 아니라.

“아……,”

알렉산더 랜스키가 손바닥으로 표정을 가렸다.

“왜 그러세요?”

“저 녀석이…… 화를 내서.”

“아니, 그러니까 이상한 거 아닙니까. 그린 씨는 화를 내는데 알렉스는 웃고 있잖아요.”

이상하단 얘기에 알렉산더 랜스키가 또 조금 웃었다. 케네스 로완은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는 세스가 화를 내고 있다는 게 기뻤다. 다 잊었으니 이미 끝난 일이라는 무덤덤한 고요에 비하면 어떤 식으로든 반응을 하는 게 나았다.

알렉산더 랜스키는 누가 보는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처럼 얼굴을 가리고서 웃었다. 토사물이 묻은 셔츠를 갈아입을 생각도 하지 않은 채.

* * *

“카페인이 필요해요, 부검사장님.”

존 리든은 검사보 아넷 비토가 벌써 같은 말을 세 번째 반복하고 있다는 걸 몰랐다.

“카페인이요. 안 피곤하세요?”

옆에서 정식 조사원 닉 나이먼이 거들고 나섰다. 존 리든이 거의 콧등까지 흘러내린 안경을 걷어 올릴 생각도 못 하고 있다는 걸 알자 아넷 비토가 사무실 문을 가리키며 목소리를 한 톤 올렸다.

“부검사장님, 그린 씨 오셨어요.”

“……. ……뭐?”

존 리든이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멍하니 고개를 들어 올리다가, 이어서 그린 씨가 누굴 말하는지를 깨닫고 책상을 박차고 일어나다가, 너무 서두르는 바람에 콧등에서 안경을 떨어트리고는 그것을 미처 피하지 못하고 우지끈 밟아 버렸다.

“앗, 저런.”

아넷 비토가 콧잔등을 찡그렸고 닉 나이먼은 혀를 찼다. 존 리든이 안경을 밟은 채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세스가 어디 있어?”

“…….”

“……음.”

미묘한 침묵이 이어지자 존 리든은 아넷 비토의 말이 장난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아넷 비토가 겸연쩍은 표정으로 작게 말했다.

“죄송해요. 너무 집중하시기에.”

“…….”

존 리든이 험악하게 인상을 구겼다. 퍽 낯선 일이라 아넷 비토와 닉 나이먼은 입을 꾹 다물었다.

존 리든은 뉴욕 지방 검사실의 수퍼스타였다. 큰 키에 잘 짜인 덩치, 짙은 금발에 선명한 푸른 눈은 그가 완벽히 수트를 갖춰 입고 있을 때나 아니면 와이셔츠 자락에 점심 때 먹은 프렌치프라이의 케첩 자국을 묻히고 있을 때나 등 뒤에 보이지 않는 조명을 켜고 다니는 것처럼 보이게 했다.

아넷 비토는 존 리든이 가장 섹시해 보일 때는 법정 안이라고 생각했다. 전액 장학생으로 컬럼비아 로스쿨을 졸업한 존 리든은 변호사 자격증을 따자마자 맨해튼을 대표하는 대형 로펌에 두둑한 연봉으로 스카우트되었다. 거기서 계속 변호사 노릇을 했어도 그는 십 년 뒤 뉴욕 법조계를 대표하는 얼굴이 됐을 것이다. 하지만 법정에서의 그를 보면 누구든 검사가 천직이라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가차 없이 정의롭고 어리석을 정도로 정직했다. 가끔 융통성이 없다는 얘기를 들을 때도 있었지만 타고난 머리가 좋아 그런 건 단점이 되지도 못했다.

사무실에 갓 들어온 검사보가 말도 안 되는 실수를 저지를 때도 존 리든은 어느 법대에서 이런 얼간이를 졸업시켰냐며 역정을 내는 대신 부드럽게 타이르는 끝내주는 인성도 함께 갖추었다. 더불어 한 줄기 햇살 같은 미소도 남겨 주었다. 그는 악인을 제외한 만인에게 공평하고 관대한, 말도 안 되는 히어로 같은 인간이었다.

존 리든을 둘러싼 그 모든 일 중에 가장 말이 안 되는 일은 그가 십 년씩이나 첫사랑 중이라는 것이었다.

학창 시절부터 함께했다는 첫사랑은 호텔 레스토랑의 웨이터였다. 듣기로는 약물 중독으로 재활원을 오래도록 들락거렸고, 하이스쿨 디플로마조차 없는 인간이라고 했다. 존 리든의 알량한 공무원 월급은 대부분 그 뒷바라지에 들어갔다. 중증의 우울증 환자라는 첫사랑의 병원비는 꽤나 비쌀 것이다. 존 리든에게 유망한 정신과 의사 티모시 맥케이를 소개시켜 준 판사실 서기가 은근슬쩍 흘린 말에 의하면 공직자 월급으로는 감당이 안 되는 수준이라고 했다. 그래서 존 리든에게 백만 단위의 가족 신탁 계좌가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소문이 잠깐 돌기도 했다. 뇌물 청탁 소문이 돌지 않은 것은 존 리든의 칼날 같은 도덕성에 감히 비리를 연관 짓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그런 상황에서 존 리든의 말 많고 탈 많은 첫사랑은 마침내 그의 프러포즈를 받아들일 때까지 오래도록 마음앓이를 시키기까지 했다. 어쩌다 술자리에서 알콜이 들어간 존 리든을 슬쩍 떠보면 그는 연인에 대한 언급 대신 씁쓸한 미소만 흘렸다. 아무리 봐도 행복감에 빠져 허우적대는 얼굴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때부터 존 리든의 첫사랑은 뉴욕 지방 검사실의 모든 이에게 공공의 적이 되어 버렸다.

대체 어떤 인간이기에 저 잘난 남자를 성에 안 찬다고 하는 걸까.

평생 콜드 케이스로 남을 일이라고 생각했다. 게이이자, 십 년간의 지고지순한 첫사랑을 이제껏 지켜 온 존 리든이 하루아침에 돌변해 자신에게 청혼한다 해도 아넷 비토는 냉큼 반지를 받아 낄 용의가 있었다. 아넷 비토뿐만 아니라 꽤 많은 사람이 그럴 터였다. 그렇기에 존 리든의 첫사랑을 향한 이유 없는 반감은 크고도 깊었다.

그러던 어느 날.

몇 달간 매달렸던 벨체프와의 재판에서 패하고 무적의 미스터 선샤인 존 리든이 그 햇살 같은 미소를 잃어버렸던 날.

소문의 첫사랑이 검사실에 등장했다. 그때는 아직 약혼이라는 말이 나오기 전이었다. 존 리든도 그를 언급할 때 그저 친구라거나 좋아하는 사람이라고만 했지 애인이라고 표현한 적은 없었다.

-세스 그린이라고 전해 주세요.

그는 아넷 비토가 이제껏 본 것 중 가장 결이 고운 검은 머리를 쓸어 넘기며 이렇게 말했다. 가는 손가락에 시선이 갔다. 그다음에는 색이 옅지만 선이 뚜렷한 입술에, 창백한 흰 피부에, 연한 갈색 눈에 시선이 갔다.

이 사람을 대체 뭐라고 표현하면 좋을까.

그저 마르고 창백한 남자였다. 뛰어난 미남이라고 하기엔 어딘가 부족했다. 통 신경을 쓰지 않은 듯한 차림새도, 표정이 한참 모자란 얼굴도 그랬다. 남자가 몸에 걸친 무채색은 딱히 인상적이랄 게 없었다.

그런데도 그는 보는 사람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나올 때까지 기다리겠다며 안내 데스크 옆 의자에 걸터앉은 그를 혼자 놔둬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거의 뛰듯이 사무실 건물을 헤집으며 존 리든을 찾았다. 존 리든이 말도 없이 사무실을 나가 버렸다는 얘기를 전해 듣고, 다시 그 얘기를 해 주기 위해 왔을 때는 어쩐지 너무 미안해서 입이 떨어지지 않을 지경이었다.

-미안해요. 벌써 가셨다는데요.

-아, 그런가요.

남자는 잠깐 사무실 쪽을 쳐다보더니 가볍게 머리를 저었다.

-알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남자는 등을 돌렸다. 그리고 사라졌다. 그가 엘리베이터에 타서 완전히 모습이 지워지는 순간에서야 아넷 비토는 왜 그런 이상한 감정이 느껴지는지 알 수 있었다.

굳이 숨 쉬지 않아도 될 것이 숨을 쉬고 걸어 다니는 느낌. 남자가 주는 인상은 그랬다. 혼자만 전혀 다른 세계에서 모든 것을 낯설어하는 사람 같았다. 남자가 울면 이유도 없이 따라서 울고 싶어질 것이다.

-아, 젠장. 저런 사람한테 반하다니. 부검사장님도 참 어려운 연애를 하네.

남자가 잠시 있었던 공간에 대고 아넷 비토가 중얼거렸다. 그러나 어쩐지 남자와 존 리든은 무척이나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적의 미스터 선샤인이 어째서 존재할 수 있는지도 알 것 같았다. 저 남자를 사랑하려면 무적이 아니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리고 사흘 뒤 존 리든은 사무실에 약혼이라는 대형 폭탄을 터트렸다. 아넷 비토는 혀끝에서 쌉쌀한 초콜릿 같은 맛을 느끼며 축하해 주었다. 존 리든의 약혼자를 직접 본 적이 없는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여전히 남자는 공공의 적이었지만, 행복이 넘쳐나다 못해 멍청해 보이기까지 하는 존 리든 앞에서 축하 말고는 해 줄 말이 없었다.

“……제기랄.”

존 리든이 거친 소리를 내며 부서진 안경을 집어 들었다. 아넷 비토는 미안한 마음에 자리에서 일어나 안경을 줍는 그를 거들었다.

“죄송해요. 안경 값은 제가 변상할게요.”

별일 아니라고 생각했다. 아넷 비토는 존 리든이 곧 싱겁게 웃으며 안경이 없어서 일을 못 하겠으니 내 일을 좀 대신 해 달라는 가벼운 농담을 건네리라 짐작했다.

그러나 존 리든은 거드는 손을 무시하며 날카롭게 말했다.

“됐어.”

“……아, 예?”

“다시는 그 녀석 가지고 장난치지 마. 다시는.”

“……예?”

존 리든은 대충 주워 모은 안경의 잔해를 근처의 쓰레기통에 처박았다. 이 시간까지 목을 죄고 있던 넥타이를 지금에서야 끌어 내리며 존 리든이 단순한 짜증이 아닌 진짜 화를 냈다.

“커피가 필요하다고? 갖다 줄게.”

아넷 비토와 닉 나이먼이 당황한 시선으로 서로를 돌아보았다.

“아, 저……. 아니에요. 제가 사 올게요.”

“됐어. 일이나 해.”

검사실의 미스터 선샤인이 험악하게 인상을 구긴 채 쿵쿵 매서운 발소리를 흩뿌리며 사라졌다.

“내가…… 내가 그렇게 잘못했어?”

아넷 비토가 참았던 숨을 터트리며 성을 냈다. 닉 나이먼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싸운 거 아냐?”

“뭐? 정말?”

“아니라면 왜 저렇게 성질을 내. 별거 아니었잖아. 안경이 망가진 건 좀 그렇지만 그래도 실수인데. 부검사장님은 원래 남의 실수엔 관대하다고.”

“으음…….”

아넷 비토가 심각해진 얼굴로 입술을 물었다. 닉 나이먼이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며 놀리다 손등을 한 대 얻어맞았다.

“하여간 무섭네. 미남이 졸지에 야수가 돼 버리는데.”

“그러게.”

한숨이 터져 나왔다.

“다음에 그 약혼자를 보면 절대, 절대로 헤어지지 말라고 해야겠다. 야수하고 일하고 싶진 않아.”

닉 나이먼이 한숨에 맞장구를 쳤다.

“절대 동감.”

벽에 걸린 시계가 밤 11시 52분을 가리키는 시간이었다.

* * *

매서운 바람이 목덜미를 세차게 긁고 나서야 존 리든은 이 시간까지 문을 연 카페를 가려면 두 블럭이나 걸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미 건물 밖으로 나와 버렸고, 와이셔츠 한 장짜리 차림새로는 감기가 걸릴지도 모를 만큼 싸늘한 날씨였다.

“젠장. 도로 올라가야 하나.”

별로 내키지가 않았다.

아넷 비토에게 유감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세스가 랜스키에게 붙들려 반쯤은 행방불명 상태인 지금 상황에서 그런 농담은 심장을 반 초간 멎게 만들었다. 누군가의 농담 하나에 심장이 꺼졌다 다시 솟구치는 느낌은 지나치게 충격적이었다.

그만큼 제정신이 아니라는 소리였다. 랜스키가 내던져 준 한 무더기의 일감이 이가 갈리면서도 한편으로는 고마울 정도였다.

하지만 USB에 담아서 건네도 되는 자료들을 굳이 종이 서류와 사진이라는 20세기적 방식으로 몇 상자씩이나 던져 준 심술에 대해서는 충분히 욕이 나왔다.

개새끼. 하여간 그건 하나도 안 변했어.

존 리든은 추위와 분노에 부르르 떨며 이를 갈았다.

개새끼. 하필이면 그런 개새끼가.

랜스키를 향한 분노는 그저 일을 핑계로, 당장은 방법이 없다는 핑계로 잠시 덮어 두었을 뿐이었다. 존 리든은 이 분노의 정체까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말하는 꼴을 들어 보니 랜스키는 세스를 포기한 게 아니었다. 혈연이 드러났다고 해서 이전까지의 관계를 바꿀 생각도 아닌 모양이었다.

씨발. 그러니까 개새끼지. 지 형제건 조카건 붙어먹어도 상관없다니.

존 리든은 이런 저속한 욕설까지 하게 만드는 랜스키에게 다시 화를 냈다.

씨발놈. 왜 사람을 이렇게 못나게 만들어.

분노의 정체는 불안감이었다. 존 리든은 언젠가 세스가 그에게 했던 말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나는 랜스키를 말릴 수 없었어. 그러기도 싫었고.

랜스키를 욕하려면 세스의 모순 또한 받아들일 수 없어야 한다. 하지만 존 리든은 이미 세스를 이해해 버렸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도 있다는 것을. 모친의 죽음에서 매 순간 필사적으로 달아나던 세스가 기어코 알렉산더 랜스키를 사랑할 수밖에 없었던 그런 순간이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을.

그래서 속이 울렁대는 것이다. 그 어쩔 수 없는 순간이 혹시라도 다시 어쩔 수 없게 될까 봐.

“씨발, 진짜. 신고나 해 버릴까.”

앞선 재판에서 증인을 여섯이나 죽게 만든 벨체프의 내부 끄나풀은 아직도 정체가 밝혀지지 않았다. 지금 알렉산더 랜스키가 떠밀어 버린 새로운 증거들로 추가 기소를 준비하는 인원이 최소한인 까닭도 그 때문이었다. 러시아 마피아나 랜스키 인더스트리에서 부리는 내부 정보 제공자가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경찰에 전화를 걸어 세스 그린과 알렉산더 랜스키의 안전가옥을 거론하는 순간, 벨체프나 러시아 마피아보다 더 빠르게 세스를 되찾을 확률은 얼마나 될까.

양자의 경쟁은 불가능했다. 뉴욕 경찰에게 세스는 그저 아는 사람과 함께 있는 성인 남자일 뿐이지만 마피아들에게는 천문학적 금액이 오가는 유례없을 비즈니스였다.

“좆같긴.”

존 리든은 살을 얼리는 것 같은 찬바람을 느끼며 차라리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지금 얼어붙지 않으면 끓다 못해 녹아 흘러 버릴 것이다. 와이셔츠의 깃을 세우고 그 사이로 목덜미를 움츠린 볼썽사나운 모습으로 존 리든은 24시간 영업을 하는 카페 겸 다이닝바를 향해 부지런히 걸었다.

끼이이이이익!

막 횡단보도를 건너려는 그의 앞을 검은 차 한 대가 막아섰다.

“……이건 뭐,”

당황해 어깨가 굳는 동안 뒷좌석의 검은 유리창이 스르륵 내려갔다.

“오랜만이군, 검사 양반.”

의미 없는 인사였다. 전혀 오랜만이 아니었으니까.

존 리든은 한순간 얼어서 이윽고 쩡 하는 소리를 내며 깨져 버릴 것 같은 표정으로 입술을 뗐다.

“……보그단 벨체프.”

이름을 부르는 게 아니라 이를 가는 것 같기도 했다.

벨체프는 그 나이치고는 희고 고른 이를 드러내며 활짝 웃었다.

“추워 보이는데 태워다 드릴까. 어디까지 가시지?”

“무슨 개수작이야.”

“아아, 수작은 아니고. 그저 할 얘기가 있는 게지. 얌전히 차를 타면 커피는 내가 사 드리지. 어떤가?”

존 리든이 커피를 사러 나왔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소리였다. 그것은 지금 존 리든의 사무실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도 안다는 뜻이었다. 존 리든은 화를 터트리는 대신 힘겹게 눌러 담았다.

“아아, 그래서 약이 바짝 올라 이 시간에 뭐가 빠져라 달려오셨다고? 왜, 기소 준비 중이라니까 이번에는 또 몇 놈이나 잡아 죽여야 되는지 감이 안 와? 미리 알려 줄까?”

벨체프는 웃음을 지우지 않았다.

“검사 양반은 아직 어려. 묵은 놈하고 싸울 땐 적당히 몸을 낮춰 주는 법도 알아 둬야지. 지금 내가 이 문 안짝에 뭘 쥐고 있는지 꼭 말을 해 줘야 하나?”

말을 마친 벨체프는 손에 쥐고 있다는 뭔가를 차 문에 두들겨 탕탕 소리를 냈다. 마피아들이 쥐고 다니는 것이라면 뻔했다. 길쭉한 소음기를 보란 듯 달아 놓은 45구경짜리 기관단총일 것이다.

“웃기시는군. 차체가 방탄일 텐데.”

“안에서 쏘는 건 다르지.”

벨체프가 다시 탕탕, 소리를 냈다. 안으로 꺼덕이는 턱짓이 두 번째 거절하는 순간 그대로 방아쇠를 당기겠다는 말로 들렸다.

“어서 타지. 날이 추워 그런지 나도 커피 한잔 생각이 간절한데.”

“…….”

아드득 이를 갈아 봤지만 그 이상은 소용이 없었다. 존 리든은 별수 없이 고개를 한번 끄덕였다. 그 순간 육중한 리무진의 문이 미끄러지듯 노련하게 열렸다.

존 리든은 목격자 하나 없는 어두운 거리에서 루마니아 마피아의 차에 올랐다.

* * *

하지만 생각과는 달랐다. 벨체프가 손에 쥐고 있던 것은 마피아가 즐겨 쓰는 기관단총이 아니었다. 존 리든은 뭔가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뭐야, 이건…….”

그것은 은박이 얇게 벗겨지고 있는 오래된 액자였다. 그 안에는 희끗하게 바래 가는 낡은 가족사진이 들어 있었다.

“특별히 검사 양반에게만 보여 드리는 게야. 뭐, 이제는 막역한 사이다 보니.”

차를 출발시킨 벨체프는 손에 쥔 액자를 존 리든에게 건네주었다. 엉겁결에 받아 들고 보니 겉으로 보이는 것만큼 아주 오래된 사진도 아니었다. 사진에는 세월의 때보다 손때가 더 많이 타 있을 뿐이었다.

“이게 뭔데?”

“일단 보고 나서 말하지. 사진의 여자아이, 꽤 예쁠 텐데.”

“국제결혼이라도 주선하려고? 관심 없어.”

“그러자니 나이 차이가 꽤 나지. 무엇보다 도의적으로도 옳지 않고.”

“마피아가 무슨 놈의 도의를 읊는데.”

벨체프는 빈정대는 존 리든에게 응수하는 대신 그의 손에 들린 액자를 쳐다보았다. 몹시 어울리지 않는 일이었지만, 잔인하고 더러운 마피아의 노회한 눈에 우수가 어렸다.

“내 질녀야. 가족 중에서는 유일한 여자애였지. 어릴 때부터 정말 예뻤어. 그리고 제일 똑똑했지. 형님이 돌아가신 뒤로는 내 친딸로 키웠네.”

벨체프는 별 재미도 없는 가족사를 들려주기 위해 존 리든을 초대한 것이 아니었다. 존 리든도 그것을 알았다. 다시 들여다본 가족사진 속의 유일한 여자가 어쩐지 낯이 익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으니까.

“모자가 정말로 닮았지. 특히 눈매가 많이 닮았을 거야. 어떤가. 알아보겠나?”

“…….”

벨체프가 친딸로 키웠다는 그 질녀는 세스의 모친이었다.

언젠가 아무것도 없는 세스의 정신병동 같은 침실에서 보았던 유일한 앨범에 꽂혀 있던 몇 장 안 되는 사진들과 똑같은 얼굴이었다.

“……하, 정말 미치겠네.”

존 리든은 액자를 던지듯 돌려주며 왈칵 더운 숨을 뿜어냈다. 아슬아슬하게 액자를 받아 든 벨체프가 조심하라며 핀잔을 주었다.

“그래서 어쩌라는 거야. 나더러 뭘 어쩌라는 거야.”

“진짜 적이 누군지 구분하라는 말일세. 이제 검사 양반은 우리 가족이기도 할 테니.”

“뭐……? 가족? 어디서 잘도 그런 말을 지껄여!”

다음 순간 존 리든은 참지 못하고 벨체프의 멱살을 쥐었다. 운전석 옆자리에 앉아 있던 벨체프의 부하가 즉시 총을 꺼내 들었다. 눈에 보이는 게 없었던 존 리든은 제 말마따나 노련하게 묵은 마피아의 목줄기를 흔들었고, 그 마피아는 손을 들어 쏘지 말라는 신호를 보냈다.

“친딸을 매춘부로 팔아넘기는 게 네놈이 말하는 가족이냐? 친딸이 몸 팔아 빼돌려 온 무기로 돈 좀 벌다가 일이 틀어지니까 약을 먹여서 뒷골목으로 내돌리는 게 가족이냐고! 그 딸이 아들을 낳았어! 그 아들은……! 돌봐 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 엄마의 시체를 삼 일 동안이나 지켜보고 있어야 했어! 그런 게 네놈들한테는 가족이야? 입이 달렸으면 얘길 해 봐!”

벨체프는 숨이 막혀 끅끅대면서도 말했다.

“살리려고…… 살기 위해 그런 거야.”

“웃기지 마! 결국 죽었잖아! 네 딸을 네 손으로 죽였잖아!”

“그런 게 아니야!”

벨체프는 무서운 힘으로 존 리든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덕분에 멱살을 쥐던 힘이 약간 늦춰졌다. 벨체프는 그보다 한참은 젊고 건장한 남자를 부들부들 떨게 만드는 악력보다 더 무서운 눈으로 존 리든을 응시했다.

“미국에 갓 도착했을 때 우리 가족은 아무것도 가진 게 없었어. 영리한 소니아가 아니었다면 평생 미국 땅에서 쓰레기나 치우다 죽을 팔자들이었지. 소니아는 이 나라에서 돈을 벌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누구보다 빠르게 알아차렸어. 고국에서 돈을 벌고 싶어 하는 여자들을 데려와 이 땅에 제공하는 게 가족 사업이 됐지. 소니아가 원한 일이야. 가족이 자리 잡는 데 가장 큰 힘이 되었다며 그런 기회를 주신 신께 감사했네. 모두들 소니아를 사랑했어. 그 아이가 없었다면 지금의 벨체프란 이름도 없었을 게야.”

세스의 나이 어린 모친은 세스와는 아주 다른 인물이었다. 벨체프의 멱살을 쥔 손이 계속 미끄러졌다. 오로지 손만 어딘가로 추락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그놈이,”

벨체프가 굵게 주름이 지기 시작한 입가를 일그러트렸다. 표정이 눈처럼 무섭게 변해 갔다.

“기어코 소니아를 죽이겠다고 나섰을 땐 도망치게 하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지. 최대한 숨어 지내도록, 언젠가는 다시 가족의 품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오래오래 숨을 죽이고 있어야 했어. 그밖에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네. 소니아가 더는 견디지 못하고 무너지는 것도 어떻게 막을 수가 없었어. 우리는 그저 복수를 맹세할 뿐이었지.”

그 무엇도 이유가 되지 못했다. 벨체프의 맹세에는 그 어떤 정의도 없었다. 딸을 가족으로서 지키고 싶다면 매춘 사업 같은 것은 하지 말았어야 했다. 시저 랜스키를 미끼 삼아 랜스키 인더스트리의 무기 사업에 침을 흘리지도 말아야 했다. 랜스키가는 거대하고 더러웠다. 벨체프는 그저 그보다 좀 더 작았을 뿐이었다. 더러운 건 마찬가지였다.

그 틈바구니에서 울 수 있는 자격을 가진 건 세스 하나였다.

“닥쳐. 변명도 안 되는 소리 더는 지껄이지 마. 더러운 사업을 이 땅에서 시작한 건 네놈이 먼저였잖아. 어디서 그런……,”

“그렇지, 검사 양반. 그 복수는 그저 나의 것이지. 하지만 소니아의 죽음을 이유로 소니아의 아들까지 끌어들이고 싶지는 않았다네. 나는 그저 그 아이가 잘 살기 바라는 마음이었어.”

“잘 살기를 바라? 하, 어디서 그런 개소릴……,”

“그 아이를 랜스키에게서 감춰 두었던 게 누구라고 생각하나. 소니아가 죽고 난 뒤에.”

소니아 벨체프가 죽고 난 뒤, 세스의 출생 신고서를 조작해 누구도 모르게 입양 기관으로 보냈던 인물은.

“왜 그렇게 소니아의 아이를 감춰 두었다고 생각하나. 랜스키에게 비굴한 거짓말을 해 가면서.”

존 리든이 침을 삼켰다. 세스도, 윌리엄 랜스키도 다는 알지 못했던 과거의 마지막 퍼즐이 맞춰지는 순간이었다.

벨체프는 존 리든의 손목을 놓고 그의 어깨를 짚었다. 단호한 손길에서 거센 악력이 느껴졌다.

“나는 또다시 내 가족이 랜스키라 불리는 것들에게 사라지는 꼴을 보고 있지 않을 게야.”

“…….”

“루이 랜스키가 손을 잡은 건 이쪽이 아니라 러시아지. 이쪽에게 총을 겨눠 봤자 이득을 보는 건 랜스키뿐이야. 랜스키의 자식 놈들이 무슨 짓을 하든, 소니아의 아들을 살리려면 타라소프와 랜스키를 제거해야 해. 이쪽은 타라소프를 맡지. 검사 양반은 랜스키를 맡아 주시게.”

마른침은 잘못 쪼개진 면도날처럼 혓바닥을 찔러 왔다.

“랜스키를 맡으라니, 그건,”

벨체프가 손짓을 했다. 그러자 조수석에 앉아 있던 부하가 무언가를 건넸다. 작은 상자였다. 벨체프는 상자를 통째로 존 리든에게 넘겨주었다.

“랜스키가 소니아에게 했던 짓이 모두 이 안에 담겨 있네.”

상자를 열어 보자 그 안에는 단단하게 생긴 USB 메모리가 들어 있었다. 알렉산더 랜스키의 심술과는 달랐다.

존 리든은 혀를 따갑게 하는 마른침을 억지로 삼키고 입을 열었다.

“살인을 교사한 윌리엄 랜스키는 죽었어. 시저 랜스키도 죽었고. 기소할 대상이 없다고.”

“소니아는 제법 많은 것을 알았어. 단순히 시저 랜스키와 놀아 주고만 있었던 게 아니야. 랜스키 놈들이 베네수엘라의 캠프를 통해 저지르는 탈세와 국외 무기 거래, 국방부 계약을 연장하기 위해 손을 썼던 불법 로비 같은 것들이 그 안에 담겨 있네. 워싱턴에 있는 높으신 양반들의 이름도 제법 있지.”

USB를 집어 들던 손이 움칫 흔들렸다.

“나는 검사 양반을 믿네.”

벨체프가 움켜쥐고 있던 존 리든의 어깨를 놓아주고는 제법 친밀한 태도로 제 손자국 위를 툭툭 두들겼다.

“자네가 소니아의 아들을 얼마나 아끼는지 알아. 간 크게 나를 기소했던 그 배짱도 높이 사지. 나는 검사 양반이 벨체프의 가족이 되는 데 조금도 부족하지 않은 인물이라 믿네.”

“마피아의 가족이 될 생각 같은 건 없어. 세스는……,”

“게다가 머리가 좋지, 검사 양반은. 젊은 랜스키가 괜히 기소를 부추긴 게 아니라는 건 알 게야. 검사 양반과 내가 서로 물고 물어뜯는 동안 젊은 랜스키는 소니아의 아들을 데리고 있겠지. 아직 덜 배운 건 젊은 랜스키도 마찬가지야. 제 애비처럼 되려면 멀었어. 그렇게 될 인물도 아니고. 제 욕심이나 부리고 앉았다가 타라소프 쪽은 손도 대 보지 못하고 자멸할걸세. 그렇게 되면 불쌍한 것은 오직 소니아의 아들뿐이지.”

존 리든은 과연 벨체프가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검사 양반이 랜스키를 맡아 준다면, 나는 소니아의 아들을 데려오겠네.”

벨체프의 은근한 말은 존 리든을 몸서리치게 만들었다.

“……뭐?”

“그게 소니아의 아들을, 내 아이를 살릴 유일한 방법이야. 타라소프가 젊은 랜스키를 찾아내기 전 내가 먼저 찾아서 데려오는 게지. 젊은 랜스키는 타라소프 같은 진짜 마피아를 맞상대할 힘이 없어. 제 애비가 남겨 준 돈으로 고용한 놈들은 수제 양복이나 챙겨 입은 멍청이들이지. 지금은 제법 잘 숨어 있는 것 같지만 타라소프는 멍청이가 아니야. 진짜 마피아가 무슨 짓을 할 수 있는지 젊은 랜스키는 아는 바가 없을 걸세. 한 번도 겪어 본 적이 없으니까.”

귓가를 뭉개듯 은밀히 치고 들어오는 벨체프의 나지막한 음성은 색깔이 있는 것처럼 검고 끈끈했다.

악마와 거래하는 기분이 이렇겠군.

존 리든은 계속 몸서리가 쳐지는 기분에 이를 질끈 물었다.

“시간은 지금도 흐르지. 러시아 놈들은 1초의 시간을 아까워하며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을 테고. 어떻게 할 텐가?”

벨체프의 말은 모두 진실 같았다. 손때가 탄 낡은 가족사진 속에서 대여섯 되는 남자들 사이에서 당당히 가운데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당차고 아름다운 소녀의 얼굴은 그 증거였다.

벨체프의 복수에는 정의 같은 것은 없었지만 진심은 있었다. 그는 진심으로 랜스키를 증오했다. 소니아는 그저 그런 매춘부가 아니라 벨체프 패밀리의 일원이었다. 세스를 살리겠다는 말도, 더는 랜스키의 손에 가족이 죽는 꼴을 보고 있지 않겠다는 말도 진실로 들렸다.

“랜스키를 붙들어 놓고 타라소프를 치면 벨체프의 사업은 지금보다 두세 배는 더 커지겠군.”

벨체프는 악마처럼 노련하게 웃었다.

“그야 모를 일이지. 허나 그렇게 된다면 소니아가 천국에서 기뻐할 게야.”

“세스는 어떻게 할 작정이지?”

“그 아이도 가족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때가 되었지. 그간은 내가 검사 양반 입장도 있고 해서 섣불리 나서지 못했네만.”

존 리든은 USB를 힘껏 움켜쥐었다. 손바닥을 찔러 오는 날카로움은 아무런 각성 효과도 일으키지 못했다.

“세스는…… 세스를 끌어들이지 마. 그 녀석은 이런 걸 감당 못 해.”

“그 아이는 가족이 생겼다는 것 말고는 이전까지처럼 착하고 성실한 삶을 살 게요, 검사 양반. 소니아의 아들마저 소니아처럼 잃을 수는 없어. 이건 가족을 걸고 하는 맹세야.”

랜스키냐, 아니면 벨체프냐.

그 어느 쪽도 완벽하지 않았다. 그래서 더는 망설일 수도 없었다. 랜스키의 몰락을 말하는 벨체프는 그 자체로 악마였다. 그보다 더 유혹적일 수 없었다.

이대로 벨체프를 물고 늘어지면 나머지 일은 알렉산더 랜스키가 이끄는 대로 끌려가는 수밖에 없었다. 정보는 제한적이었고, 세스의 행방은 여전히 제 손에 쥐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루이 랜스키와 손잡은 것은 자신이 아니라 타라소프라는 벨체프의 말을 믿는다면…… 결과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달았다.

존 리든은 눈을 감았다. 이 말 한마디를 내뱉기 위해 어금니가 다 갈리는 기분이었다.

“약속 지켜.”

벨체프가 존 리든을 보며 소리 없이 입을 벌려 웃었다.

“맹세하지.”

“내가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고 해서 우리가 무슨 사이가 되었다는 소리는 아니야. 세스가 무사히 돌아오면 항소도 진행할 거야. 범죄자와 가족이 될 생각은 없어.”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시게. 급한 일부터 처리해야지.”

“개수작 부리지 마. 변호사나 사 둬.”

잠시 후 차가 멈추고 존 리든이 차를 탔던 그 자리에서 내렸다. 그의 손에는 벨체프의 부하가 사 온 커피 세 잔이 아직도 뜨겁게 김이 오르는 채 들려 있었다.

탁!

책상 위에 세 잔의 커피를 올려놓은 존 리든이 말했다.

“지금까지 하던 건 다 접어. 벨체프는 관두고 다른 걸 물 거야. 시간은 빠를수록 좋아.”

자정이 넘은 사무실에서 이미 파김치가 되어 있던 아넷 비토와 닉 나이먼이 비명을 질렀다.

“예에?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아까 장난친 거 복수하시는 거죠? 진짜 재미없거든요?”

존 리든이 손에 꾹 쥐고 있던 USB를 내려놓았다. 탁, 소리가 나며 시선이 USB에 집중되었다.

“해야 해.”

핏줄이 돋기 시작한 두 쌍의 눈이 USB와 존 리든을 번갈아 오갔다.

“왜요? 대체 이게 뭔데요?”

존 리든은 조금도 웃지 않고 말했다.

“내 목숨.”

듣는 쪽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세스를 납치해 간 놈을 잡을 거야.”

“예에……?”

영문을 알 수 없었다. 그만큼 짐작할 수도 없던 얘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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