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화 (18/23)

05.

“잠들었어요.”

세스가 침실 문을 열고 나온 시각은 존 리든이 벨체프의 차에서 내린 시각과 비슷했다. 거실은 최소한의 조명만 밝힌 채 한껏 어두워진 상태였고, 세스는 소파에 등을 묻고 앉아 있는 케네스 로완이 그의 작은 발소리를 먼저 듣고 입을 연 일에 놀랐다.

케네스 로완의 목소리는 거실의 조명처럼 더 낮아질 수 없을 정도로 낮게 들려왔다.

“좀 자게 놔두는 게 어떨까요. 워낙 잠을 못 자는 편이라.”

“…….”

세스는 발소리를 죽여 소파 근처로 다가갔다. 이번에는 옷을 제대로 입은 채였다. 몇 시간 전에 로완이 세스가 처박혀 있던 침실로 사이즈가 맞는 바지를 가져다주었다. 알렉산더 랜스키가 지시한 일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다.

맞은편 길쭉한 소파에는 알렉산더 랜스키가 길게 뻗어 눈을 감고 있었다. 세스는 그가 깨어나지 않도록 목소리를 낮게 누르며 물었다.

“왜……,”

“불면증.”

케네스 로완은 세스의 짧은 말을 잘도 알아들었다.

세스가 눈을 깜박였다. 어딘가 이상한 구석이 있는 알렉산더 랜스키는 이전과는 다른 사람 같기도 했다. 감긴 눈꺼풀 선을 가만 들여다보았다. 생김새는 하나도 달라지지 않았다. 여전히 질리도록 더듬고 싶은 눈이었다.

케네스 로완은 꼼짝 않고 서서 그저 눈으로만 알렉산더 랜스키를 훑고 있는 세스에게 그가 몰랐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많이 자 봤자 서너 시간이에요. 닥터 맥케이가 정식으로 의사 면허를 따기 전까진 눈에 드러나지 않게 자기 몸을 망치는 짓은 다 했어요. 수면제를 먹고 좀 나아지는가 싶더니 그것도 잠시였죠. 이제는 술도, 약도 안 듣는 것 같아요.”

세스는 처음 듣는 얘기였다. 그의 삶에는 익숙한 일이었지만 알렉산더 랜스키에게도 그런 일이 생겨날 줄은 몰랐다.

잠깐 숨이 멎었다. 숨 쉴 수 없는 물속으로 자꾸만 끌려들어 가는 기분이었다.

“언제부터요?”

“십 년 전부터죠.”

그토록 당연한 것을 어째서 모르냐는 투였다.

“성격이 이러니까 당연히 앓는 소리 한번 안 했겠죠. 뭐가 잘못되어 있다는 걸 아무도 몰랐나 봐요. 어느 날 알렉스가 파티에 갔는데 누군가가 재미 삼아 총을 꺼냈대요. 알렉스가 총을 빼앗아 자기 머리를 쏘려고 했고요. 표정이 하도 태연해서 다들 정말로 쏠 거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더라고요. 알렉스가 취한 줄도 몰랐고요. 그 자리에 닥터가 없었다면, 물론 그때는 아직 닥터가 아니었지만, 어쩌면 알렉스는 자살로 생을 마감했을 거예요. 본인이 정말로 자살을 원했는지는 의문이지만.”

케네스 로완은 물처럼 파랗게 질려 가는 세스의 얼굴에 대고 조용히 덧붙였다.

“그 일이 있은 뒤 내가 고용됐어요. 처음에는 감시하는 역할이었는데 시간이 지나다 보니 개인 보좌가 됐어요. 그런데 뭐가 필요해요? 이 시간에 안 자고 나온 걸 보니 필요한 게 있는 모양인데.”

세스는 자신이 왜 거실로 나왔는지 이유를 잊고 있었다. 한참 생각을 더듬고 나서야 알 수 있었다. 허기를 느껴서였다.

“……배가 고파서.”

“잘됐네요.”

케네스 로완이 길쭉한 몸을 소리 하나 없이 일으켰다.

“그러지 않아도 거의 먹은 게 없다고 알렉스가 걱정을 많이 하던데. 내가 뭐라도 챙겨 줄게요. 키친으로 가죠.”

그가 먼저 거실을 가로질러 갔다. 세스는 케네스 로완의 등 뒤에서 조금 더 알렉산더 랜스키를 지켜보다 그를 따라 나섰다.

케네스 로완은 세스에게 식탁을 가리켰다.

“거기 앉아 계세요.”

그는 커다란 냉장고 문을 열고 능숙하게 안을 살피기 시작했다. 세스는 낯선 등이 시원스레 움직이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린 씨는 정말로 말이 없네요.”

케네스 로완이 고개를 돌려 말을 건넸다. 처음 듣는 얘기도 아니라 세스는 가만히 턱을 한번 끄덕였다.

“그래서 더 쳐다보고 싶나 봐요.”

케네스 로완은 뭔가를 이것저것 꺼내 양손에 나눠 들고 싱크대로 갔다.

“쳐다보면 그래도 뭐라고 말을 해 줄까 기대하게 되니까.”

싱겁게 웃고 돌아선 그는 식탁 위에 가벼운 토스트가 담긴 접시와 샐러드 볼을 내려놓았다.

“아, 맞다. 파이 먹겠어요?”

케네스 로완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냉장고에서 커다란 통을 꺼내 아무도 손을 대지 않은 채 고스란히 들어 있던 파이를 큼직한 조각으로 잘랐다. 싱크대 한 칸을 모두 차지한 오븐에 파이를 넣고 먹기 좋을 만큼 따듯하게 데워 그것을 세스에게 가져다주었다.

오늘 낮, 알렉산더 랜스키와 단둘이 있었을 때처럼 달콤한 라즈베리 냄새가 풍겨 왔다.

“알렉스가 만들었어요. 아시겠지만.”

“…….”

“하긴, 별로 안 어울리죠. 그런데 진짜 요리를 잘해요. 한동안 열심히 배웠어요. 물론 스스로 식사를 챙기려고 배운 건 아니고요.”

떠드는 사람은 케네스 로완 혼자였다. 그래도 그는 별로 개의치 않았다. 무기로 써도 될 만큼 튼튼해 보이는 포크를 가져다준 그는 세스의 맞은편에 느슨히 기대앉으며 계속 말을 이었다.

“그린 씨 때문이겠죠, 아마도. 식사를 잘 하지 못한다고 늘 걱정을 했으니까요.”

말을 마친 그는 세스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좀 전에 말했던 대로 대답을 기대하고 있던 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세스는 파이에서 흘러오는 터무니없이 달콤한 냄새에 정신을 빼앗긴 듯 보였다.

“가끔 알렉스를 보고 있으면 너무 위태로워 보여서 나까지 불안해질 때가 있었어요. 직업상 원래 개인적인 감정을 가지면 안 되는 건데. 뭐, 나나 닥터는 우리가 알렉스의 친구라고 생각하고 있으니까 걱정을 하는 거죠. 알렉스는 수면제도 자기 이름으로 처방받지 않아요. 자기 상태를 가족들 중 누가 알까 봐 극도로 신경을 써서 그래요. 닥터는 편집증이라고 했고요. 닥터 말로는 알렉스는 자신이 완벽하게 보이지 않으면, 그걸 누군가가 그린 씨와 연관 지을까 봐 긴장을 늦출 수 없는 것 같대요. 이 파이는 긴장을 한 번씩 늦추는 역할을 하지 않았을까 싶어요. 만드는 동안 그린 씨한테 먹여 줄 날을 생각하면서요.”

케네스 로완은 굳은 듯 멈춰 있는 세스의 손에 포크를 억지로 쥐어 주었다.

“그러니까 좀 드세요. 그리고 맛있다고 해 주세요. 그린 씨가 상상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알렉스는 늘 그린 씨를 생각했어요. 나는 알렉스가 그만 괴로워할 때도 된 것 같아요.”

“…….”

허기가 세차게 위를 긁어 왔다. 세스는 몸을 구부리고 신음을 참았다. 자칫 이 허기를 누구에게든 말할 것만 같았다.

“나는,”

십 년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매일매일 거르지 않고 먹어 온 약들은 소용이 없었다. 세스는 보워리 거리의 베드룸 두 개짜리 아파트를 억지로 머릿속에 그렸다. 그곳에 차곡차곡 쌓아 올린 일상을 떠올리려고 했다. 약을 먹으면 괜찮아지는, 그 이상 슬플 것도 괴로울 것도 없는 무던한 삶을.

그것을 구축하기 위해 존과 자신이 애쓴 나날들을 더듬었다. 어제만 해도 견고하게 느껴졌던 그것들이 지금은 형편없이 작고 연약하게만 느껴졌다. 마치 개미 같았다. 알렉산더 랜스키가 어쩌다 한번 밟으면 바스라지고 없을.

달칵.

포크가 접시 위로 떨어졌다. 세스가 양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나는 먹을 수 없어요.”

케네스 로완이 물었다.

“왜요?”

“너무 늦었으니까.”

눈가가 뜨거워졌다가 다시 차가워졌다. 세스는 손가락 사이를 타고 마른 틈을 적시는 차가운 온도를 느꼈다.

케네스 로완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세스가 알렉산더 랜스키를 더듬는 시선을 이미 알아차렸다. 그런 표정을 짓는 사람이 이제 와 늦었다고 말하는 것은 그저 핑계였다.

“그린 씨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뿐일지도 몰라요. 늦지 않았어요.”

“아니요.”

세스는 손을 치우고 고개를 들어 케네스 로완과 시선을 마주했다.

“늦었어요.”

세스는 잠든 알렉산더 랜스키를 바라보던 것과 비슷한 표정으로 접시 위에 오른 파이를 쳐다보았다. 랜스키가 그를 위해 만들었다는 파이는 그림책에서 보던 것처럼 생겼다. 아름답고, 따스하고, 떠올리기만 해도 그리운 무엇. 그것은 동화책 속 아름답고 용감한 왕자님처럼 현실과는 어긋나 있는 존재였다. 세스의 시선은 케네스 로완의 눈에도 안타까웠다.

“이건 먹을 수 없어요.”

세스는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이만 사라지고 싶었다. 이곳은 시간의 흐름을 헝클였다. 십 년이란 시간의 퇴적층이 아래부터 뒤집어져 과거와 현재를 엉망으로 뒤섞었다.

세스가 막 등을 돌리는 순간이었다.

“왜 먹을 수 없는데.”

언제 깨어나서 어디부터 듣고 있었는지 모를 알렉산더 랜스키가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어, 알렉스. 일어났어요?”

케네스 로완이 말을 건넸지만 그의 존재는 아예 없는 것처럼 공기 중에 희석되어 버렸다. 알렉산더 랜스키의 시야는 지금 이 순간 세스에게만 열려 있는 듯했다. 얼굴을 덮은 격렬한 감정이 지나치게 선명했다.

“대답해. 왜 먹을 수 없다는 거야. 라즈베리도 못 먹는다는 소리야? 언제부터 그랬는데.”

세스는 흉터가 있는 눈썹을 웅크렸다. 겁을 먹고 잔뜩 움츠러드는 무엇처럼. 그러다 결국 도망칠 준비를 하는 것처럼.

“……네가 만들어서.”

“뭐라는 거야.”

“네가 만들어서 못 먹어. 내 반지나 돌려줘. 어디다 버렸어?”

케네스 로완이 떨떠름한 얼굴로 두 사람을 번갈아 살폈다.

“부추기지 마세요, 그린 씨. 두 사람 다 이런 게 진심은 아니잖아요.”

알렉산더 랜스키가 성큼성큼 걸어 이쪽으로 다가왔다. 두어 걸음 만에 세스의 앞에 선 그는 이전까지의 조심스러운 태도가 소용없어지는 것은 아랑곳없이 세스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이번에는 토해도 안 놔줘. 뭐가 늦었다는 거야.”

“내 몸에 손대지 마. 토할 거야.”

“아까는 일부러 했다는 소리로 들리는데.”

“맞아. 일부러 그랬어. 반지 어디에 버렸어?”

알렉산더 랜스키는 늦지 않았다.

지금이어야 했던 이유가 있었다. 윌리엄 랜스키가 죽고 시저 랜스키가 살해당하고, 그래서 세스의 안전이 위태로운 지금이어야 했다. 그 이전이라면 그저 어설픈 위안밖에 되지 못할 짧은 재회였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지금이라면 온전히 함께할 수 있었다. 그는 조금도 늦지 않았다. 세스가 모르고 있을 뿐이었다.

“웃기지 마. 반지가 없어진 줄도 모르고 있던 녀석이 이제 와서 뭘 따지고 그래. 내가 먼저 얘기 안 꺼냈으면 죽을 때까지 몰랐을 걸 두고.”

“아니…… 아니야. 네가 잘못 아는 거야.”

알렉산더 랜스키가 개미 같은 저항을 비웃었다.

“내가 뭘 잘못 알고 있는데. 로완이 방해하기 전까지 너하고 내가 무슨 짓을 하고 있었는지 다시 알려 줄까?”

“그건……,”

“비켜.”

알렉산더 랜스키의 말은 두 사람 사이에 서서 불안한 듯 눈알을 굴리고 있는 케네스 로완을 향한 것이었다.

“알렉스, 왜 이러는 겁니까. 알렉스답지 않아요.”

“나다운 게 뭔데.”

한 손으로 로완을 밀친 알렉산더 랜스키가 세스의 허리를 붙들었다. 바싹 당겨진 하체가 서로 맞닿았다. 세스가 진저리를 치며 그를 밀어내려고 했다.

“놔.”

“예전부터 솔직한 건 몸밖에 없었지. 하나도 안 변했네. 짜증은 나는데 귀엽기도 하고.”

“뭐라는…… 거야. 놓으라니까.”

알렉산더 랜스키의 오른손이 눈썹 위의 흉터를 쓰다듬었다. 그 부드러운 접촉에 세스의 몸이 눈에 보일 정도로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안색이 창백했다. 보랏빛으로 변한 입술은 세스의 몸 상태가 정상적이지 않다는 걸 말해 주었다.

“알렉스……. 괜한 짓은 하지 마세요.”

로완이 말을 하지 않아도 알렉산더 랜스키 역시 세스의 반응이 달라진 걸 알고 있었다. 단지 무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상처를 쓰다듬는 눈빛이 열기에 감싸인 듯 흐려졌다.

“너는 왜 이래도 예쁜 거야.”

“놔…… 놔. 놓으라고. 너만……,”

알렉산더 랜스키가 세스를 홱 끌어당겨 파드득 튀는 것 같은 상처를 핥았다.

“하지 마!”

세스가 저를 밀어내기 위해 온몸에 힘을 주자 알렉산더 랜스키는 머리를 잡은 손을 내려 뒷목 전체를 움켜잡았다.

십 년은 없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세스는 그가 자신을 쥐던 방식을 하나도 잊지 않았다. 목덜미를 쥐면 팔다리에 힘이 풀렸다. 입술이 겹치면 혀가 알아서 길을 내어주었다. 그가 혀를 강하게 빨아들이면 저도 모를 신음이 끓어넘쳤다. 그가 하는 짓을 세스가 싫어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헐렁한 니트 아래를 파고든 손이 곧장 허리가 여유로운 팬츠 아래로 내려갔다.

“하윽, 안, 하지, ……하면 안,”

세스가 막힌 듯한 신음을 토해 냈다. 트렁크 밴드를 벌린 손이 엉덩이를 움켜쥐었다. 뒤는 돌아보지 않겠다는 것처럼 단호한 손끝이 다리 사이의 비좁은 구멍을 파고들었다. 동시에 발기한 성기가 앞섶을 거칠게 눌렀다.

“나는 단 한 번도 너를 포기한 적 없어.”

대답처럼 세스의 등이 거세게 떨려 왔다. 알렉산더 랜스키는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것 같은 몸을 단단히 받치며 세스의 귓바퀴에 입술을 눌렀다.

“한 번도 우리가 헤어졌다고 생각한 적 없어. 우리는 안 헤어져. 이제.”

“아…….”

로완이 고개를 저으며 뒤로 물러섰다. 거칠어 보여도 두 사람에게 저런 과정이 필요할지 모른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하지만 너무 늦었다.

“안, 아, 아니야!”

로완이 이곳에 있다는 걸 신경 쓰지 않는 사람은 알렉산더 랜스키뿐이었다. 세스의 흉터에 각인된 트라우마는 짐작보다 더 깊었다.

“아니, ……욱!”

흉터가 질식해 죽어 가는 새처럼 경련을 일으켰다. 세스는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를 구토를 했다. 게워 낼 게 없는 구토 소리는 몇 배나 더 괴롭게 들렸다.

“젠장…….”

알렉산더 랜스키가 얼굴을 처참하게 구기며 세스의 등을 두드려 주었다. 몇 번을 확인했지만 세스는 그와 같지 않았다. 시간이 더 필요한 일이었다.

“하지 마!”

구토가 잦아든 세스가 진저리를 치며 알렉산더 랜스키를 밀어냈다. 알렉산더 랜스키는 힘이 아니라 당황에 떠밀려 주춤 뒤로 물러났다. 세스가 눈을 질끈 감고 소리쳤다.

“누가 보잖아!”

“뭐……? 로완은 상관없,”

“남들이 알 거 아냐!”

창백한 얼굴에서 마지막 남은 핏기를 앗아 가는 것은 공포였다.

“너하고 내가 그랬다는 거…… 알게 될 거잖…… 욱!”

세스가 몸을 구부리더니 바닥을 손으로 짚고 위에 남은 것들을 쥐어짜 냈다. 알렉산더 랜스키는 굳은 채 세스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남들이 무슨 상관인데.

세스가 시큼한 위액이 묻은 입술을 손등으로 문지르다 띄엄띄엄,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목소리를 토해 냈다.

“……우리는 어차피 헤어질 거였어.”

그게 무슨 소리야.

누구 마음대로.

“너는…… 졸업, 할 거였잖아. 그리고 다른 데로 가야 했잖아. 그러니까…… 어차피 우리는 헤어졌을 거야.”

그게 무슨 소리야.

그걸 왜 네 멋대로 정해.

“나는 계속…… 계속 기다렸어. 네가 졸업하면 다시 안 볼 거라고…… 그래서 참았어. 그 전에 들키게 될 줄 몰랐지만 아니었어도 똑같았어.”

그게 무슨 소리야.

뭐가 똑같았다는 거야. 내가 널 어떻게 해야 했는데. 내가 왜 십 년을 참았어야 했는데.

“네가 날 때리고 그런 건 상관없어. 네가 화낼 거라는 건 나도 알았으니까. 나는…… 나는 그때 총에 맞았어도 괜찮았어. 나는…… 그냥, 그렇게라도 끝이 나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어.”

“그게 무슨…… 그게 어떻게 다행이야.”

한참 만에 내뱉은 알렉산더 랜스키의 음성은 성대에 가시가 돋친 사람이 내는 소리 같았다. 세스는 흉터가 생기던 그날처럼 유령 같은 얼굴을 들어 알렉산더 랜스키를 마주 보았다.

“우리는 그런 사이가 되면 안 됐으니까.”

“…….”

알렉산더 랜스키는 그걸 왜 네 멋대로 정해 버렸냐는 말을 끝내 뱉지 못했다.

“나는 존하고, 결혼할 거야.”

“…….”

십 년이나 매일 생각했으면 표정을 읽을 수도 있었다. 표정이 숨기는 그 안의 표정도 알아볼 수 있었다. 알렉산더 랜스키의 상상 속에서 세스는 단 한 번도 저런 표정을 짓지 않았다.

“어쩌면 네 말이 맞을지도 몰라. 나는 남을 좋아하는 게 뭔지도 잘 모르니까 존을 좋아하지 않는 걸 수도 있어. 그런데 존하고 있으면 나는 이상한 사람이 아니야.”

파드득 떨리던 흉터가 일그러지며 눈물이 흘렀다.

“약을 먹어야 하지만 이상하지 않아. 다른 사람들하고 비슷해. 직장도 있고 돈도 벌고 애인도 있어. 존을 애인이라고 해도 아무도 이상하다고 하지 않아. 존은…… 랜스키가 아니니까.”

이상하다고…… 내가. 너한테.

“나는…… 이상하게 살고 싶지 않아.”

아니었다. 세스는 자신이 남들과 같지 않다는 것을 아주 오래전에 깨달았다. 삶이 조용히 시드는 것 외에 그가 바라는 일은 없었다.

그 삶을 요란하게 뒤흔든 것은 알렉산더 랜스키였다. 세스는 시들길 바랐던 제 삶이 다시 피어나는 게 아니라 알렉산더 랜스키의 삶이 제 삶과 뒤섞여 비정상이 되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러면 안 되잖아.

너는 랜스키잖아. 네가 나 때문에 이상해지면 안 돼.

세스는 무엇도 감수할 수 있었다. 알렉산더 랜스키가 게이라는 소문이 나는 게 두려워 제이 에드거와 터무니없는 거래를 하려고 들었던 맹목성은 어디로도 사라지지 않았다.

이상하게 살고 싶지 않다는 말은 이상하게 살지 말라는 말이었다.

너는 랜스키니까.

너는 한때 내가 살던 지구를 회전시키던 사람이었으니까.

“나는 계속…… 이상하게 살았잖아. 이제 더는 그러기 싫어.”

“너는……,”

알렉산더 랜스키는 마치 사죄라도 하는 것처럼 제 발아래 엎드려 있는 세스를 내려다보았다. 안아서 일으켜 주고 싶었으나 몸이 움직이질 않았다.

그는 늦지 않았다. 늦은 것은 그가 아니었다. 애초에 늦거나 말거나 소용없는 일이었다.

“너한테는…… 그렇게 끝날 일이었어?”

세스는 아니라고 말해 주지 않았다.

“나는 정말로 아무 상관 없었는데.”

알렉산더 랜스키가 턱선을, 눈가를, 입매를 비틀었다. 곧이어 얼굴 전체가 비틀렸다.

알렉산더 랜스키는 뻣뻣하게 굳은 것 같은 몸을 억지로 움직이게 만들었다. 그는 팽팽히 당겨 고통스러운 근육의 저항을 느끼며 무릎을 굽혀 세스를 일으켰다.

“일어나.”

손이 젖은 눈가를 닦았다. 눈썹 위의 흉터가 잘못 내려앉은 반달 같았다. 흉이 진 왼쪽 눈가는 이전보다 아래로 조금 처진 모양새였다. 그 모든 게 제 눈에는 한 번도 예쁘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에게 세스는 단 한 번도 끝난 적이 없었다. 보낸 적도 없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사랑했다.

“울지 마. 보내 줄게.”

그래서 말할 수 있었다.

네가 끝을 원하면, 나는 끝을 주겠노라고.

알렉산더 랜스키는 세스를 끝까지 일으켜 준 다음 고개를 돌려 케네스 로완에게 말했다.

“유산상속, 집행하는 데 얼마나 걸리겠어?”

케네스 로완이 눈을 둥글게 떴다.

“시저 랜스키의 유산 말인가요? 그야 당장은……,”

“가능하도록 해 봐. 세스한테 가는 유산 전부를 내가 사들이는 걸로 해. 계좌는 본인 말고는 접근할 수 없는 걸로 만들고.”

케네스 로완은 그가 말하는 의미를 금세 알아들었다. 대부분 랜스키 인더스트리의 주식과 부동산, 신탁 계좌와 유가 증권 등으로 이루어진 시저 랜스키의 유산을 세스가 물려받은 다음 그 모든 걸 알렉산더 랜스키가 사들이면 세스에게는 유산이 아닌 현금만이 남았다. 그것으로 루이 랜스키는 무슨 짓을 해도 상속권 지분을 넘볼 수 없었다. 만일 루이 랜스키가 세스를 죽이더라도 세스의 유산이 될 그 막대한 계좌를 상속받는 것은 파트너인 존 리든이 될 것이다.

“정말…… 그러길 원하시는 겁니까.”

“아니.”

“그럼 좀 더 생각을 하고 결정을 내려도,”

“이 녀석이 원하니까. 더는 묻지 마.”

“……. ……알겠습니다.”

케네스 로완이 한숨을 뭉개며 고개를 끄덕였다.

“처리하고 오죠.”

끝내 아쉬움이 가득한 얼굴은 이대로 끝이냐고 묻는 듯했다.

그러나 세스도, 알렉산더 랜스키도 답을 하지 못했다.

* * *

안전가옥에 서재가 있다는 것은 이상할 것 같으면서도 이상하지 않았다. 자연광이 없다는 걸 빼고 알렉산더 랜스키의 안전가옥은 그저 안락하고 사치스러운 공간이었다.

세스는 잠드는 것을 포기하고 불을 켜지 않은 서재로 들어가 입구에 우두커니 섰다. 약을 달라고 해야 하나 갈등이 생겼지만 그런 사소한 일로 알렉산더 랜스키를 귀찮게 만들고 싶진 않았다.

아니, 어쩌면.

마주하기 무서운 건가.

세스는 좀 전에야 겨우 식은 눈가를 손끝으로 누르며 생각에 잠겼다.

-일어나. 보내 줄게.

그 말은 십 년 전처럼 뼈를 부수지는 않았지만 계속되는 둔통을 남겼다.

맞다가 정신을 잃을 때까지 저를 보라고 속삭이던 알렉산더 랜스키의 음성은 그래서 지금도 다정했다. 그건 보내 준다는 말의 정반대였으니까.

세스가 질끈 눈을 감았다.

아니야. 이게 맞는 거야.

네가 나를 보내 줬으니 나도 너를 보내 줘야 하는 거야.

이제 제 인생은 다시는 흔들리는 일 없이 존 리든의 곁에서 안정적으로 시들어 갈 것이다.

다시 눈을 뜬 세스가 벽을 더듬어 서재의 조명을 켰다.

“…….”

하지만 주위가 환해지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

두어 개 정도 되는 책장은 넉넉했지만 그 안에 꽂힌 책은 몇 권 되지 않았다. 책상 하나와 소파를 제외하고 나머지는 그저 빈 공간이었다. 한 면이 통째로 빈 회색 벽에는 달이 떠 있었다.

하프 문 베이의 반달이.

처음 하프 문 베이의 기적을 세상에 알렸다는 사진이 아무것도 없는 벽에 혼자 걸려 있었다.

파도 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이미 죽은 양부가 낮게 속삭였다.

-언젠간 너도 볼 수 있을 거야.

그날이, 오늘이었다.

세스는 숨을 죽이고 사진을 바라보았다. 포토샵 조작을 더했다는 사진은 기적처럼 아름다웠다. 아름답기에 기적 같았다. 현실이 아닌 기적으로만 존재할 수 있는 무엇.

“이 사진을 찍은 건 1991년도였어.”

어느 순간 등 뒤에서 날아드는 알렉산더 랜스키의 음성도 기적 같았다.

“하지만 얀 터낸토라는 사진작가가 실제로 이 광경을 본 건 1968년이야. 매년 하프 문 베이에 왔지만 그때 봤던 장면은 사진으로 찍을 수가 없었고. 그래서 사진을 손봤대. 그래도 살아 있을 때 포토샵이란 게 나와서 소원을 풀었다면서 웃더라고.”

세스는 등을 돌리지 않은 채 물었다.

“……죽었어?”

“음. 재작년에.”

“이 사진은……,”

“그 사람이 줬어. 사겠다고 했을 땐 통 말을 안 듣더니 죽고 난 뒤에야 넘겼어. 고집이 세더라. 그 성격에 잘도 사진 조작 같은 걸 했다고 말했더니 한 대 치더라고. 성격하고는.”

세스가 조심스럽게 사진작가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얀 터낸토.”

“그래, 터낸토.”

알렉산더 랜스키의 음성이 밤바다의 파도처럼 밀려왔다.

“죽었다던 양부 이름이 터낸토였지. 그리고 얀 터낸토도 네 이름을 알았어.”

얀 터낸토에게는 의절한 아들이 있었다. 아들의 이름은 맥스 터낸토였고, 그는 마이클 그린과 결혼해 세스를 입양했다. 죽기 전까지 그는 얀 터낸토의 존재를 세스에게 말한 적이 없었다. 얀 터낸토는 동성애를 인정하지 못하는 고집 센 구시대적 인물이었고, 맥스 터낸토는 그 고집으로 인한 상처를 세스에게까지 전해 주고 싶지 않았다. 다만 그는 얀 터낸토가 손을 댄 아름다운 사진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인터넷에서 그 사진을 찾아 세스에게 보여 주었다.

-여기는 기적이 일어나는 장소야.

그는 어쩌면 세스에게 기적을 보여 주고 싶었던 게 아니라 스스로 기적을 기다렸을지도 몰랐다. 매년 하프 문 베이에 사진을 찍으러 오는 완고한 부친과 재회하게 되는 기적을. 부친은 그와 화해하고 그는 부친을 용서하고, 세스는 마음을 좀먹던 상처를 잊고 모두가 더없이 행복해지기를.

“너를 만날 용기는 끝까지 안 난다고 했어. 아들이 소개시켜 주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고. 미안하다는 말은 무덤에 가서도 안 할 늙은이였어.”

알렉산더 랜스키가 소리를 낮춘 걸음으로 서재 안에 들어와 책장에 꽂힌 몇 권 안 되는 책들 중 하나를 뽑아 내밀었다. 오래된 화보였다. 얀 터낸토의 이름으로 출판된 책은 아주 오래전에 절판되어 지금은 기억하는 사람이 없었다.

“관심 있으면 한번 보라는 말밖에 못 했어.”

세스는 알렉산더 랜스키가 내미는 낡은 책을 주저하다 받아 들었다.

책은 대부분 바다에 관한 사진들이었다. 책을 펼치자 밤바다에서 흘러오는 서늘한 비린내가 날 것 같았다. 안개 냄새가 났다. 반달이 희미하게 책 위에 주저앉았다.

“이걸…….”

알렉산더 랜스키가 죽은 양부의 이름을 알고 있다는 것은 놀라웠다. 얀 터낸토를 찾아 오래도록 그를 만나 왔다는 것도 놀라웠다. 두 사람이 자신의 얘기를 했다는 게 가장 놀라웠다.

알렉산더 랜스키의 서재는 기적이 일어나는 장소가 되어 버렸다. 하프 문 베이의 반달 아래 맥스 터낸토가 세스의 손을 잡았다. 얀 터낸토가 반달을 쳐다보며 셔터를 눌렀다. 알렉산더 랜스키가 세스의 옆에 서서 그가 남긴 발자국 옆에 나란히 자신의 발자국을 찍었다.

기적은 만날 수 없었던 사람들을 한자리에 서 있게 했다. 1968년부터 1991년, 그리고 2004년에서 2014년에 이르렀던 어긋난 시차가 지금이라는 한 공간에 겹쳤다.

지난 십 년이 알렉산더 랜스키에게는 한 번도 이별이 아니었던 이유였다. 그는 기적이 이루어지는 공간을 만들어 그곳에서 내내 세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탁.

작은 소리와 함께 세스가 화보를 덮었다. 계속 펼치고 있으면 눈물이 묻을 것 같아서였다.

“……고마워.”

알렉산더 랜스키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이렇게 말했다.

“사랑해.”

책을 움켜쥔 세스의 손이 하얗게 굳었다.

“우린 안 헤어졌을 거야. 그런 일이 없었다면. 널 두고 나 혼자 떠나는 일은 없었어. 데려갔을 거야. 어디든.”

“그건…….”

……의미 없잖아.

“알고 있으라고.”

“…….”

“사랑했어. 다른 건 아무래도 좋을 만큼.”

화보를 쥔 손이 너무 떨려서 제 눈에도 이상했다. 세스는 자신이 참지 못하고 그에게 매달리고 있지 않나 의심했다. 혹은 그가 제 거짓을 알아차렸는지 걱정스러웠다.

“그럼 쉬어. 빨리 처리하라고는 했지만 시간이 걸려. 잠 안 자고 기다릴 필요 없어.”

“…….”

“아니면 여기 더 있을래? 마실 거라도 가져다줄게.”

다행이었다. 그러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세스는 고개를 들어 알렉산더 랜스키를 쳐다보았다. 괜찮다는 말을 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보다 앞서 사고가 발생했다.

콰앙!

폭음이 눈과 귀를 멀게 했다. 안전가옥이 흔들리고 있었다.

* * *

알렉산더 랜스키가 반사적으로 세스를 끌어당겨 품에 안는 순간, 와르르 무너지는 붕괴음이 연이어 들려왔다. 알렉산더 랜스키는 세스가 무사하다는 걸 확인한 뒤 서재를 뛰쳐나갔다.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뻥 뚫린 천장이었다.

연기가 피어오르는 검은 구멍 사이로 무장한 마피아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동시에 전장에서나 맡을 수 있는 강렬한 화약 냄새가 폐를 쥐어짰다. 알렉산더 랜스키는 재빨리 등을 돌려 서재 문을 쾅 닫았다. 세스가 한 걸음 늦게 달려왔지만 그는 아예 서재의 출입문을 잠가 버렸다. 안전가옥의 모든 방이 그렇듯이 출입문은 이중 구조였다. 평범해 보이는 나무 문 안에는 벽 안에 숨겨진 철문이 따로 있었다. 문을 잠갔다는 것은, 알렉산더 랜스키가 제 생체 정보로 서재를 아예 봉쇄했다는 말이었다.

마피아들은 출입구를 여는 대신 폭탄으로 천장을 뚫었다. 안전가옥의 정확한 위치를 알아내지 않고서야 불가능한 일이었다.

“……쥐새끼가 있었나. 랜스키 인더스트리에.”

천장에서 가장 나중에 내려온 사람은 색이 빠져 얼룩덜룩해진 갈색 머리를 한 노인이었다. 먼저 뛰어내린 마피아들이 손을 뻗어 노인을 부축했다.

알렉산더 랜스키는 노인의 얼굴을 알아보았다. 지금은 보기 흉하게 늙었지만 그가 받은 사진 속의 인물과 마찬가지로 야비한 인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노인은 보그단 벨체프였다.

알렉산더 랜스키는 희미하게나마 세스와 닮은 구석이 보이는 인간이 저렇게나 인상이 더러운 것도 희한한 노릇이라 생각하며 짧은 조소를 지었다.

“쥐새끼라……. 쥐새끼치고는 덩치가 너무 크지. 게다가 이름도 있고 말이야.”

보그단 벨체프는 알렉산더 랜스키를 제법 오래 알고 있었던 것처럼 말을 건넸다. 아마 알렉산더 랜스키가 그에 대해 알고 있는 것처럼 벨체프 역시 알렉산더 랜스키에 대해 제법 많은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

“사이코 짓이라고?”

벨체프가 히죽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집안 단속을 좀 해야겠어, 젊은 사장은. 그쪽 형이라는 자는 가격만 맞으면 지 애비 관짝까지 팔아치울 말종이던데.”

루이 랜스키에 관한 의견에는 동감이었다. 하지만 루마니아 마피아가 제 집안일을 이러쿵저러쿵 떠들어 대는 것은 충분히 불쾌했다.

“개소리는. 사이코는 안전가옥에 대해 아는 게 없어. 내가 여기 있다는 것도.”

“아, 그렇더라고. 대신 젊은 사장의 개인 보좌관이 누군지는 알던데.”

“뭐?”

때를 맞춘 듯 천장의 구멍에서 누가 아래로 떨어졌다. 엉망으로 얻어터진 채 의식을 잃은 케네스 로완이었다. 오른손의 손가락 네 개가 부러져 있었다.

“…….”

알렉산더 랜스키가 케네스 로완에게 닿았던 회색 눈을 치켜떴다.

“뭘 바라는데. 세스 몫의 유산이 탐나나? 하지만 늦었어. 그 녀석 몫은 내가 다 사들였어. 그 녀석을 죽여도 사이코에게 떨어질 유산은 한 푼도 없다고 전해.”

“랜스키가의 개밥그릇 싸움이야 내 알 바 아니고.”

보그단 벨체프가 뒤에 서 있는 마피아들에게 손짓을 했다. 그러나 그중 누군가가 기관단총을 건네주었다. 벨체프는 알렉산더 랜스키를 향해 총구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문 열어. 저 안에 있는 게 우리 애지?”

“우리 애?”

알렉산더 랜스키의 입술이 비틀렸다.

“내 귀가 잘못됐나……. 길거리에서 어떤 꼴로 살든 방치할 땐 언제고 유산을 상속받았다니까 이제 와서 가족 놀이라도 하려고?”

“말했지. 밥그릇 싸움이야 관심 없다고.”

타다다다다!

보그단 벨체프는 망설임 없이 알렉산더 랜스키가 서 있는 방향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연달은 발사음에 주위가 엉망이 되었다. 알렉산더 랜스키가 몸을 구부려 얼굴을 가렸다. 하지만 지금 사격은 그저 위협이었다.

“나는 우리 애한테 볼일이 있어. 문 열어.”

“싫어.”

“윌리엄 랜스키가 젊은 사장한테 너무 물렀던 모양이야. 총을 쥔 사람 앞에서는 성질머리 같은 건 죽여야 된다고 안 배웠나?”

벨체프가 휙 손짓을 하자 마피아들이 우르르 다가와 알렉산더 랜스키를 틀어쥐었다. 루마니아 마피아는 알렉산더 랜스키를 질질 끌어 벨체프 앞으로 데려갔다.

퍽!

벨체프가 손에 든 총으로 알렉산더 랜스키의 머리를 후려갈겼다.

“…….”

이마 쪽 얕은 살이 찢겨 피가 후드득 떨어졌다.

“오해는 말고. 나는 우리 애한테 해를 끼치려고 여기 온 게 아니야.”

알렉산더 랜스키가 피투성이가 된 얼굴을 들어 올려 보그단 벨체프를 응시했다.

“그럼 왜 온 건데.”

“젊은 사장을 지금 당장 안 죽이는 걸 보면 믿음이 가지 않나? 할 말이 있는 것뿐이야. 우리 애가 꼭 알아야 할 얘기지. 그간 윌리엄 랜스키의 눈치를 보느라 속 시원히 하지 못한 말이 있어.”

거짓말이었다.

그저 얘기가 하고 싶을 뿐이었다면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을 것이다. 십 년 동안 세스를 아예 모른 척하고 살아야 했던 건 알렉산더 랜스키였지 벨체프가 아니었다. 세스의 유산에 관심이 없다는 말은 그저 개소리였다. 나이 든 마피아가 롱 아일랜드 비치의 고급 주택가에서 폭탄을 터트리는 테러리스트 같은 짓을 저지르는 이유는 그만한 보상이 주어지기 때문이었다.

다만 개소리라고 무시할 수 없는 이유가 하나 있었다.

보그단 벨체프는 어쨌거나 세스의 모친을 알고 있는 자였다. 그가 만일 모친에 관해 할 말이 있다고 한다면 자신이 그 기회를 빼앗아 갈 수는 없었다.

“나한테 해, 그럼. 전해 줄 테니.”

“뭐라고 지껄이는 게야. 젊은 사장이 끼어들 이유가 없을 텐데?”

“너 따위가 알 이유는 아니고.”

“……한 번만 더 내게 그딴 식으로 지껄이면 눈깔을 파 주지.”

보그단 벨체프가 총을 들어 알렉산더 랜스키의 이마가 찢어진 곳을 총구로 후벼 파듯 눌렀다. 알렉산더 랜스키는 턱이 부서져라 이를 물고 신음을 참았다.

“이 집에 문제가 생기면 내 개인 보안 팀이 움직여. 시간은 그렇게 많지 않을 테니 할 얘기가 있거든 빨리 하고 꺼져.”

“그 보안 팀이라는 게 이 집 밖에서 서성대던 그 애송이들 수준이라면 와 봤자 같은데. 시체 개수나 늘리겠지.”

“……그래도 숫자가 꽤 되지.”

“…….”

노회한 마피아는 속으로 냉철히 시간을 계산했다. 지금이야 혼자 고립된 알렉산더 랜스키가 아무것도 못 하고 있겠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지금 잠깐일 뿐이었다. 랜스키가 투입할 수 있는 숫자에는 한계가 없었다. 무엇보다 벨체프에게는 다른 계획이 있었다.

“문을 열지 않으면 그 비싼 몸뚱이에 총알을 하나씩 박아 넣겠어.”

“해 보든가, 그럼.”

“…….”

유감스럽게도 협박이 통하지 않는 인간이 있었다. 보그단 벨체프는 알렉산더 랜스키가 그런 종류의 인간이라는 걸 냄새로 알았다. 윌리엄 랜스키가 막내아들을 편애한 건 그저 어려서가 아닌 모양이었다.

“나는 통 이해가 가지 않는데. 젊은 사장은 이미 가진 게 차고도 넘치지 않나? 윌리엄 랜스키가 첫째한테 넘긴 건 전체 재산의 지극히 일부라 들었는데 말이야. 고작 그것 때문에 목숨을 걸겠다는 겐가?”

알렉산더 랜스키는 이마에서부터 흘러내려 입술 선을 따라 입 안으로 들어온 피를 퉤 뱉어 냈다.

“네가 알 일이 아니라고 했지. 하여간 세스는 못 데려가.”

“총알이 박히면 생각이 달라지겠지.”

“안 달라져.”

알렉산더 랜스키가 입을 벌리자 피에 젖은 이가 드러났다. 언젠가 맥케이가 미친 사람처럼 보이니까 아무 때나 짓지 말라고 했던 그 표정이었다.

“사이코하고 얘기한 금액이 얼마야? 협상은 나하고 해. 그쪽이 빈털터리라는 건 알고 있잖아. 달라는 대로 주겠어. 대신 세스는 놔둬.”

“흐음. 통이 크시군. 우리 애가 받을 돈을 전부 달라고 해도 줄 텐가?”

“그래.”

둘 사이에 뭔가가 있는 것이다.

보그단 벨체프는 알렉산더 랜스키가 세스를 제 안전가옥으로 빼돌린 이유가 루이 랜스키에게 떨어질 몫을 가로채기 위해서라고 여겼다.

그런데 그게 아닌 모양이었다. 알렉산더 랜스키는 세스가 제 뭐라도 되는 양 굴고 있었다. 벨체프는 십 년 전 시저 랜스키의 사생아라는 게 밝혀진 세스가 랜스키가의 대저택에서 반시체가 되어 실려 나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 일을 주도한 게 알렉산더 랜스키라고 들었다. 같은 학교 동급생이었던 둘은 과연 무슨 사이였을까.

벨체프가 소리 없이 입술을 늘였다.

랜스키의 핏줄은 벨체프의 피에 이끌리기라도 하는 모양이었다. 저주라도 받은 것처럼.

“젊은 사장은 아직 모르는 모양이야.”

“뭐를.”

“우리 애 진짜 이름이 뭔지.”

“그건 또 무슨 개소리야.”

벨체프는 세스의 약혼자가 존 리든이라는 것도, 그들이 꽤 긴 시간을 함께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젊은 랜스키의 위치는 대체 어디일까.

“우리 애가 들어야 될 얘기가 그거야. 문을 열어. 랜스키의 돈은 필요 없어.”

“보청기를 바꿀 때가 된 것 같은데. 나한테 말하라고 했잖아.”

탕!

벨체프는 더 말하는 대신 총을 쏘았다. 일부러 그런 것처럼 어깨를 빗맞힌 총알이 살 타는 냄새를 피웠다.

“문 열어. 작작 지껄이고.”

알렉산더 랜스키가 피 흐르는 어깨를 움켜쥐고 벨체프를 마주 응시했다.

“바꿔. 전혀 안 들리는 것 같은데.”

“……. 내가 아무래도 너무 봐준 모양이지.”

벨체프가 눈짓을 하자 부하들이 알렉산더 랜스키의 오른팔을 틀어쥐어 서재를 가로막은 철문에 들이댔다. 알렉산더 랜스키가 어깨를 비틀었지만 곧장 뒤통수에 총구가 닿았다. 벨체프는 남에게 강제로 붙들린 오른손을 겨냥했다.

“손 하나가 통째로 날아갈 게야. 문 열어.”

알렉산더 랜스키가 피식 웃었다.

“이 손이 날아가면 문도 못 열어.”

“……생체인식인가 보지. 그럼 손을 자르면 되겠군.”

“지문만 가지고 되는 게 아니라서.”

벨체프가 이를 갈았다.

“그럼 손을 바꿔.”

벨체프의 조직원들이 문에 댄 손을 왼손으로 바꾸었다. 알렉산더 랜스키는 가만히 서서 벨체프를 마주 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얼굴은 보는 사람을 잠깐 망설이게 했다. 그는 손 하나 정도는 줘 버려도 된다는 사람 같기도 했고, 아예 다른 믿을 구석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손이 안 아깝다고……?”

“그래도 돼. 살려 보겠다고 내 손으로 때린 적도 있는데. 손 하나 날리는 건 차라리 낫지.”

“……하,”

보그단 벨체프가 이 가는 소리를 냈다. 알렉산더 랜스키가 정말로 저주에 걸려 버린 건지, 아니면 시간을 끌기 위해 이러는 건지 정확히 판단할 수는 없었지만 이대로 문을 열 수 없다는 건 확실했다. 그리고 그는 문을 열어야 했다.

“그럼 어디 한번 보지. 손이 날아가도 같은 말을 하나.”

벨체프의 눈짓을 따라 알렉산더 랜스키의 팔을 움켜쥔 조직원 둘이 손을 들어 올리게 만든 다음 단단히 자세를 고정했다.

끼릭, 손가락을 움직이는 소리가 무거운 공기를 잡아 찢었다.

그러나 벨체프는 방아쇠를 당기지 못했다. 그 순간 기계음이 지잉 울리고 요새처럼 닫혀 있던 문이 열렸다.

놀란 건 벨체프뿐만이 아니었다. 표정이나 몸짓을 보면 알렉산더 랜스키가 더욱 놀랐다.

“뭐 하는 거야! 다시 들어가!”

“……싫어.”

서재 문을 연 세스의 손은 손톱과 마디가 온통 상해 있었다. 알렉산더 랜스키가 제멋대로 서재 문을 닫은 뒤로 세스는 내내 문을 열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바보처럼 한참을 끙끙대고 나서야 문 옆에 작은 터치스크린이 있다는 걸 발견했다. 스크린을 건드리자 번호들이 떴고, 세스가 주춤 굳어 있는 사이 총성이 울렸다. 더는 망설일 수 없게 된 세스는 급하게 떠오르는 번호를 눌렀다. 제 생일 네 자리를 누르는 순간 정말로 문이 열렸다.

피투성이가 된 알렉산더 랜스키를 마주하자 피가 전부 뽑히는 기분이었다. 흉터가 있는 살갗이 멋대로 수축하며 시야를 어지럽혔다.

세스는 쓰러질 것 같은 발을 움직여 알렉산더 랜스키의 앞에 섰다. 알렉산더 랜스키가 기가 막힌 듯 웃었다.

“뭐 하는 거야. 안에 있으랬잖아.”

“소리가 들렸어.”

“무슨 소리.”

“나를 찾는 거잖아.”

나오는 법을 알았으니 다시 억지로 가둬 두는 건 이제 소용이 없었다. 세스는 제 발로 벨체프를 향해 걸어갔다. 알렉산더 랜스키가 막으려고 했지만 총알이 스친 어깨로 저를 붙들고 늘어지는 마피아 조직원 둘을 떼어 놓기란 무리였다.

“뭐든 하세요.”

벨체프의 앞에 선 세스가 말했다.

벨체프는 세스를 우리 애라며 다정하게 부르던 것과는 달리 복잡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너는 내가 누군지 알고 있느냐?”

“……네.”

세스는 단지 그의 이름을 아는 게 아니었다. 그가 늙기 전의 얼굴을 기억했다.

그가 검은 옷을 입고 있었다는 것을 기억했다. 모친은 바닥에 늘어진 채 입가로 하얀 거품을 흘렸다. 세스는 밖에서 발자국 소리를 듣고 옷장 안에서 나오질 못했다. 발자국 소리는 곧장 모친에게 이어졌다. 그는 팔에 꽂힌 주사를 뽑아내고 모친의 눈을 감겼다. 축 늘어진 몸을 안아 침대 위로 옮겼다.

그는 곧장 호텔 방을 떠나지 않았다. 세스는 저도 모르게 숨소리를 냈다. 그다음 순간 세스는 옷장 쪽으로 걸어온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고 생각했다.

남자는 한동안 옷장 앞에 서 있다 아무 짓도 하지 않고 떠났다. 세스는 양쪽 보폭이 다른 남자의 걸음이 온전히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았다.

남자는 보그단 벨체프였다.

“모친은. 모친의 진짜 이름도 알고 있나?”

“소니아.”

세스가 작게 달싹이듯 내뱉은 이름에 보그단 벨체프가 성을 더해 주었다.

“소니아 벨체프.”

“……?”

“그게 진짜 이름이다. 소니아는 벨체프의 핏줄이야. 네가 그렇듯이.”

“……뭐?”

어이없다는 반응은 알렉산더 랜스키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뭐라고, 지금?”

세스의 모친이 벨체프가 포주 노릇을 하던 매춘부 중 하나가 아니라 질녀였다는 사실은 그도 처음 알았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벨체프는 핏줄을 팔아먹다 못해 제 손으로 죽였다는 뜻이었다.

“그래 놓고 이제 와서 세스를 찾아……?”

피투성이 이마에 힘줄이 투둑 불거져 올라왔다. 모친의 성을 들은 뒤로 심해에 가라앉아 버린 것 같은 세스와는 달리 알렉산더 랜스키의 분노는 생생하게 전달되었다.

“그런 개소리를 하려고 이 녀석을 보자고 했어?”

“천만에.”

보그단 벨체프는 제법 자상하고 연민 어린 얼굴로 세스를 향해 말했다.

“소니아는 누구보다 벨체프다운 인물이었다. 랜스키 일가가 저를 죽이려 한다는 것을 알자 맨발로 도망쳤어. 거리에서 몸을 팔아 돈을 벌지언정 제 핏줄을 포기하지 않았다. 숨어야만 아이를 살릴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던 게야. 소니아는 비참하게 죽어 가는 순간에서야 내게 연락을 했다. 너는 네 모친의 피로 살아 있는 게다.”

“…….”

세스는 눈 한 번 깜박이지 않고 벨체프의 말을 들었다.

그러나 사실 벨체프가 하는 말은 반은 거짓이었다.

소니아 벨체프는 시저 랜스키의 아이를 임신했고, 그것은 랜스키 가문과 엮이길 바랐던 벨체프로서는 더 이상 바랄 수도 없는 행운이었다. 벨체프는 소니아의 임신 사실을 윌리엄 랜스키와의 협상에 써먹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시도를 해 보기도 전에 윌리엄 랜스키는 제 아들을 자금줄로 써먹은 루마니아 마피아의 핏줄을 없애기로 마음먹었다. 벨체프가 아들과 질녀의 목숨을 두고 갈등하는 사이, 소니아는 도망쳤다. 누구도 믿을 수 없었다. 시저 랜스키는 사촌의 애인이었고 숙부는 저보다는 아들의 목숨을 아까워했다. 가문의 이름에 결벽증적인 집착을 가지고 있던 윌리엄 랜스키는 매춘부가 낳은 아이에게 랜스키라는 성을 쓰게 하느니 그 전에 없애려고 들 인간이었다.

소니아는 아주 멀리 도망쳐 이름을 숨기고 위태로운 길거리 생활을 했다. 어떤 보호소에서도 한 달 이상 머물지 못했다. 강박증과 불안이 젊고 아름다운 육신을 좀먹었고, 몸을 팔아 얻는 약은 정신을 부패하게 만들었다.

세스가 알고 있는 모친은 늘 위태롭고 연약한 동시에 잔인한 사람이었다. 세스가 기억하는 건 저를 낳지 말았어야 했다는 원망과 끝 모를 방치였다. 어쩌다 모친이 폭력이라도 쓰면 차라리 반가웠다. 그건 자신이 존재하는 사실을 모친이 잊지 않았다는 말이었으니까.

“소니아가 그래야 했던 이유를 알기에 나는 네 존재를 감췄다. 랜스키의 눈을 피해 숨겨 두었지. 네가 지금 살아 있는 건 벨체프기 때문이야.”

세스가 심해어 같은 눈으로 물었다.

“그래…… 서요?”

“복수를 해야지.”

벨체프가 세스에게 총을 하나 내밀었다. 기관단총이 아닌 단순한 리볼버였다.

“네 손으로. 소니아를 죽인 랜스키의 아들을 쏘는 게다. 피는 피로 갚아야 마땅해.”

벨체프가의 진짜 비극은 모순적이게도 세스의 모친이 달아난 다음에 시작되었다. 시저 랜스키는 윌리엄 랜스키의 신임을 되돌리기 위해 제 손으로 진짜 애인이었던 벨체프의 아들을 쏘았다. 그 대가로 윌리엄 랜스키는 시저 랜스키를 베네수엘라의 캠프에 숨겨 두는 관용을 베풀었다.

벨체프는 좌절했지만 절망하지 않았다. 가문 간의 복수는 아무리 오랜 시간이 걸려도 이루어져야 했다. 벨체프의 피는 반드시 랜스키의 피를 이 땅에서 씻어 내야 했다.

“네가 젊은 랜스키와 무슨 짓을 했는지는 묻지 않겠다. 그건 소니아의 죽음을 몰랐을 때의 일일 테니. 저게 무슨 말을 지껄이든 믿지 마라. 랜스키의 피가 지금 제법 달게 느껴져도 근본은 변하지 않아. 벨체프가 있는 한 랜스키는 있을 수 없다. 무슨 말인지 알겠느냐?”

“…….”

세스는 심해어 같은 눈으로 보그단 벨체프를 바라보았다.

“네가 선택을 해야 해. 네 손으로 복수를 하지 않겠다면 너는 벨체프가 아니라 랜스키일 뿐이야.”

죽이거나 죽거나.

벨체프의 말은 그런 뜻이었다.

세스는 등 뒤의 알렉산더 랜스키를 힐긋 돌아보고는 까마득한 바다 속처럼 어두워진 눈을 한번 감았다 떴다.

“……할게요.”

“…….”

알렉산더 랜스키는 소리를 지르는 대신 눈을 감았다. 그는 세스의 전부를 이해하지 못했다. 세스는 그에게 항상 난해했다. 그렇게나 집착하고 집요하게 굴었지만 세스를 완전히 알 수는 없었다.

지금도 그는 저를 쏘겠다고 말하는 세스를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받아들일 수는 있었다. 세스에게 모친이란 건드릴 수 없는 성역일지도 몰랐다. 그러니 가족이 생긴 게 기꺼울 수도 있을 것이다.

별로 좋은 가족은 아닐 텐데. 네가 나를 대신해 고른 게 고작 그거라면 좀 서운한데.

알렉산더 랜스키가 쓰게 웃는 동안 벨체프가 물었다.

“총을 쏴 본 적 있느냐?”

“아니요.”

“거들어 주마.”

세스가 다시 등 뒤로 알렉산더 랜스키를 바라보았다.

“……네.”

알렉산더 랜스키는 비로소 눈을 뜨고 세스를 바라보았다. 그들의 재회는 처음부터 그가 십 년간 상상하던 모습에서 어긋나 있었다. 어쩌면 처음부터 무슨 짓을 해도 그때 제 손으로 망쳐 버린 관계는 되돌릴 방법이 없었던 것인지도 몰랐다.

알렉산더 랜스키가 세스를 향해 안심하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쏴. 괜찮아.”

“응.”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없이, 미안해도 어쩔 수 없다는 말 한마디도 없이 세스가 손가락을 움직였다. 세스를 단단히 움켜쥐고 있던 보그단 벨체프도 세스의 움직임을 느꼈다. 그는 마음을 놓고 세스의 검지에 겹쳐 놓은 제 손가락을 당겼다.

탕!

화약 냄새와 반동을 흩뿌리며 총알이 발사되었다. 반동이 더해진 총이 발사 직전에 크게 흔들리며 목표를 향하던 곧은 궤적을 벗어났다. 알렉산더 랜스키의 심장이 아닌 귓불을 스쳐 간 총알은 허무하게 반대편 벽에 틀어박혔다.

보그단 벨체프가 혀를 찼다. 그는 세스의 손을 놓고 다시 쥐었다. 제대로 총을 쥐게 할 생각이었다.

원래는 알렉산더 랜스키를 죽일 생각까진 없었다. 그건 루이 랜스키의 몫으로 남겨 둘 작정이었다. 안전가옥의 위치를 알렸으니 조만간 루이 랜스키가 들이닥칠 것이다. 벨체프는 루이 랜스키의 등장에 맞춰 안전가옥 주위에 설치해 둔 폭탄을 터트릴 계획이었다. 대부분의 증거는 폭탄과 함께 날아가겠지만 그 거머리 같은 부검사장이 달려들면 루이 랜스키와 알렉산더 랜스키가 한곳에 있었다는 것 정도는 알아챌 것이다. 두 형제가 상속권 다툼으로 서로의 목숨을 노리려다 한곳에서 죽었다는 비극적인 배덕의 이야기는 당분간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 것이다. 랜스키의 이름은 그렇게 흙탕물 속에서 뒹굴다가 사라질 것이다.

하지만 세스가 벨체프의 이름을 잇기로 했다면 그 증거로 알렉산더 랜스키를 시체로 만드는 것도 괜찮았다. 일이 모두 해결됐을 때면 세스는 유일한 상속인이 되어 랜스키가의 모든 재산을 한 푼 남김없이 받을 수 있었다. 이쪽은 조금도 손해 볼 게 없는 장사였다.

“총은 처음인 게로군. 어깨와 팔에 너무 힘을 줬다. 당연히 엉뚱한 곳을 쏠 수밖에 없어. 작은 총은 제대로 맞히기 힘들긴 하지만 그……,”

문득 벨체프가 말을 멈췄다. 다시 쥐어 주기 위해 손을 푸는 사이, 세스에게 들린 총은 방향을 바꾸어 그의 품속을 파고들었다. 세스는 어둑해진 눈을 부지런히 깜박이며 방아쇠를 당겼다. 그의 말대로 어깨와 팔에 너무 많은 힘을 주지 않은 채, 그러나 아무리 반동을 고려해도 도무지 표적을 벗어날 수 없던 이 짧은 거리에서.

탕!

“……,”

총알이 보그단 벨체프의 배를 꿰뚫었다. 그가 손을 크게 휘저었다.

“네가 지금……,”

손에 세스의 어깨가 걸렸다. 그는 세스의 어깨를 잡아 뜯을 것처럼 움켜쥐었다. 뻐금히 구멍이 뚫린 배에서 뭉클대며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보그단 벨체프가 총에 맞았다는 것을 부하들이 알아챘다. 그러나 그보다 알렉산더 랜스키가 아주 조금 더 빨랐다.

퍽!

그가 저를 붙들고 있던 조직원 하나의 목덜미를 팔꿈치로 쳤다. 부상을 당한 어깨는 제대로 힘을 낼 수 없었지만, 덕분에 상대도 방심하고 있었다는 이점이 있었다.

팔 하나가 자유로워지자마자 알렉산더 랜스키는 벽 어딘가를 손으로 눌렀다.

핏!

동시에 조명이 전부 꺼지며 지하는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완전한 암흑이 되었다.

“쏘지 마! 여기서는 다 죽어!”

“불은! 불은 어디서 켜는데!”

당황한 조직원들이 저들끼리 소리를 쳤다. 알렉산더 랜스키가 소리 없이 움직여 세스를 찾았다. 불이 꺼지기 전 머릿속으로 가늠해 두었던 거리에 정확히 세스가 있었다. 알렉산더 랜스키는 세스의 팔을 잡아 그가 왔던 방향으로 잡아끌었다.

암흑 속에서 한껏 예민해진 감각들이 몸에 길을 알려 주는 듯했다. 우왕좌왕하는 발자국들을 피해 벽을 짚어 더듬던 알렉산더 랜스키는 마침내 서재의 입구를 찾았다.

기잉! 쿵!

세스를 혼자 가뒀을 때처럼, 서재는 다시 침입이 불가능한 공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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