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
끼익!
차가 멎었다.
다행히도 세스의 부상은 경미했다. 병원 응급실에서는 몇 가지 검사를 마친 뒤 손에 난 상처에 연고를 바르라는 말을 할 뿐이었다. 존 리든은 치료를 마치자마자 세스를 차에 태워 집으로 향했다. 겉으로는 멀쩡해 보였던 알렉산더 랜스키는 사실 꽤나 중한 상태였던 듯, 응급실에 도착하자마자 어디론가 다시 실려가 버렸다.
“다 왔어.”
세스는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내려.”
“…….”
세스가 붕대를 감은 손으로 어눌하게 안전벨트를 풀었다.
조수석 문을 열면서도 세스는 아무 말도 없었다. 그게 공연히 더 머릿속을 달구었다. 존 리든은 다리 한쪽을 액셀러레이터 위에 올린 알렉산더 랜스키의 퍼스너를 내리고 그 사이로 혀를 가져다 대던 세스의 옆얼굴을 떠올렸다. 지금도 그때와 같았다. 다리는 멀쩡히 움직이고 있었지만 그는 여전히 무기력했다. 무엇도 할 수 없는 기분이었다.
“먼저 올라가 있어. 나는 좀…… 뭐 좀 사 가지고 갈게. 그래, 저녁에 먹을 거 포장해 갈게. 뭐 먹고 싶어?”
“괜찮아. 배 안 고파.”
“이따가는 먹어야 할 거 아냐. 중국 요리 괜찮아? 오렌지 치킨 좋아했지? 그거 사 갈게.”
“…….”
세스가 마지못한 듯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존 리든은 손을 뻗어 세스의 머리를 쓰다듬으려다가 제 풀에 놀라 손을 내렸다. 세스의 머리에 굳은 피가 엉겨 있어서는 아니었다. 지금 손을 대면 뭔가가 터져 나올 것 같아서였다.
“기다리고 있어. 다쳤으니까 어디 가지 말고. 침대에 꼼짝 말고 누워 있어. 금방 다녀올게.”
“…….”
말은 그렇게 하지만 사실 존 리든은 곧장 다시 세스를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그를 붙들고 다그치지 않고, 원망하지 않을 자신이 없었다. 배신감을 토하고 엉망진창으로 울어 버리지 않을 자신이 없었다.
“가서 씻는다고 상처에 물 닿게 하지 말고 그냥 누워만 있어. 내가 가서 씻겨 줄게.”
“……그래.”
세스가 차에서 내려 조수석 문을 닫았다. 하지만 존 리든은 세 블럭 떨어진 거리의 중국 식당으로 출발할 수가 없었다.
“씨팔, 저 개새끼가!”
갑자기 제 차 앞에 뛰어들어 개같이 주차를 한 길고 검은 차에서 알렉산더 랜스키가 내렸다.
굉장한 몰골이었다. 살점이 움푹 파인 어깨에서는 아직도 피가 흘렀다. 피로 흥건히 젖은 옷이 말도 못 하게 더러웠다. 얼굴은 여전히 피투성이였다. 응급실에 갔다더니 치료를 받기나 했는지 의심스러웠다. 병원이 아니라 관짝에서 기어 나온 몰골이었다. 어디가 어떻게, 얼마나 다쳤는지 본인도 다 모르고 있을 것이다. 저런 몰골로 허겁지겁 달려오는 걸 보자 정말로 미친 사람처럼 보였다.
“이 개새끼가! 여기가 어디라고 와!”
존 리든이 차에서 내려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알렉산더 랜스키는 존 리든이 냅다 집어 던진 욕설은 들리지 않는 것처럼 세스를 쳐다보았다.
“…….”
세스가 조용히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아파트 로비를 향해 걸어갔다. 알렉산더 랜스키가 그 뒤를 따랐다.
“씨발놈아! 거기 서!”
존 리든이 후다닥 달려가 세스의 어깨를 붙들었다. 보란 듯 세스를 당겨 안은 그가 알렉산더 랜스키를 향해 경고를 뱉어 냈다.
“거기서 더는 오지 마. 신고할 테니까.”
존 리든은 세스를 안은 채 몸을 돌려 아파트 로비의 문을 홱 잡아당겼다. 세스의 반대편 팔이 문에 스쳤다. 하마터면 세게 부딪칠 뻔했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그 정도의 사소한 배려도 지금은 너무 힘이 들었다.
세스를 잡아끌듯이 사나운 걸음으로 엘리베이터까지 간 존 리든은 열림 버튼을 연달아 눌러 댔다.
“씨팔. 더럽게도 안 오네.”
마침내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존 리든은 세스를 먼저 태운 뒤 자신도 올라 재빨리 닫힘 버튼을 눌렀다. 그러나 문이 완전히 닫히기 전 피 묻은 손이 끼어들어 강제로 문을 벌렸다.
알렉산더 랜스키였다.
“내려, 이 미친 새끼야.”
존 리든이 열림 버튼을 눌렀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면 그를 밀어낼 작정이었다. 알렉산더 랜스키는 힘으로 버티며 도로 닫힘 버튼을 눌렀다. 엘리베이터가 짜증스럽게 다시 문을 닫고 올라가기 시작했다.
“네가 왜 쫓아오는데!”
버럭 소리를 내지르는 존 리든을 향해 알렉산더 랜스키가 차분히 말했다.
“말했잖아. 세스는 돌려받겠다고.”
“개새끼. 지 조카를 두고 무슨 소리를 지껄이는 거야. 뇌가 썩었냐?”
“그래. 너도 알고 있는 대로.”
세스는 아무 말도 없었고, 그래서 흥분하는 사람은 저 혼자였다. 폭탄이 제 머릿속에서 터진 듯했다.
엘리베이터가 멎었다. 존 리든은 세스를 앞세워 내렸다. 세스의 뒷목에는 어지러운 입술 자국이 남아 있었다. 저절로 이가 갈렸다.
“개새끼가 진짜…….”
존 리든이 충동적으로 세스의 목을 와락 빨아들였다. 세스가 가만히 서서 끝나기를 기다리는 동안 절뚝이며 뒤를 쫓아온 알렉산더 랜스키가 말했다.
“들어갈 필요 없어.”
입술 아래 세스의 피부가 굳는 것을 존 리든은 느꼈다.
“리든에게는 내가 보상할게. 어떻게든 내가 해. 너는 오기만 해.”
“…….”
“돌아와.”
“나는……,”
세스는 몸을 돌리지 않고 현관문을 마주한 채 그저 입술만 벌렸다.
“존이 하라는 대로 할 거야.”
“그럴 필요 없어.”
“아냐, 있어.”
알렉산더 랜스키를 등 뒤에 두고, 세스가 심호흡을 했다. 아주 어려운 얘기를 할 때처럼.
“나는 이제껏 존 때문에 살았어. 존이 아니었다면 재활원에서 나오지도 못했을 거야. 존이 하라는 대로 하면 돼. 그럼 잘 지낼 수 있어. 너는 아니야. 너는 내 유일한 피붙이잖아. 너도 나도…… 더는 이상해지지 말아야 해. 거기서 같이 잔 건 실수였어. 그땐 죽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냥…… 그냥 생각을 제대로 못 했던 거야. 약을 안 먹어서 이상해진 걸 수도 있어. 하지만 너는 아니잖아. 넌 제대로 살아. 잊고 잘 살면 돼. 내가 너를 살리려고 다른 가족을 죽인 걸 후회하게 만들지 마.”
“세스 그린!”
“그만 가.”
세스가 현관문을 열었다. 누가 등을 떠밀지 않아도 스스로 알아서 집 안으로 들어갔다. 존 리든이 세스의 뒤를 따라 들어가며 쾅 소리 나게 현관문을 닫았다.
* * *
익숙한 아파트 안에 낯선 침묵이 생겨났다. 존 리든은 세스를 씻기고 재우고 싶었다. 얼마나 지치고 괴로웠을지 위로해 주고 싶었다. 피로 얼룩진 옷과 여기저기 쓸리고 까진 피부를 바라보면 제 마음부터 괴로워야 했다.
그런데 그 당연한 것이 쉽지 않았다.
“……반지는 어떻게 했어?”
현관문을 등지고 선 채로 존 리든이 불쑥 말을 꺼냈다. 세스는 소파까지 걸어갈 기운도 없는지 그 중간에 멈춰 서서 대꾸했다.
“랜스키가 버렸어.”
“미친 새끼.”
“미안해.”
존 리든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세스를 돌려세워 허리를 당겨 안았다. 여느 때처럼 다정한 포옹이 되길 원했지만 품 안의 세스는 온기가 거의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차가웠다.
세스는 말없이 서서 그가 하는 대로 가만히 있었다. 식은 체온은 맞닿은 피부를 따끔거리게 했다.
“왜 잔 거야? 다 알고 있잖아. 저 새끼도, 너도. 그리고 나도. 그래선 안 된다는 걸 다 알잖아.”
“미안해.”
“저 새끼가 또 강간이라도 한 거야? 그런 거였어?”
“……아니.”
“그런데 왜 잤어?”
“…….”
“대답해. 왜 그랬냐고 묻잖아.”
갓 상처 입은 것처럼 사나워지는 존 리든의 눈을 세스가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언제나 그런 식이었다. 세스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죽을 줄 알았어.”
“그게 무슨 소리야?”
“죽으면 아무도 모르니까.”
“…….”
존 리든은 한참 시간을 들인 후에야 세스의 말을 이해했다.
누군가 죽기 마지막에 가장 하고 싶은 일을 묻는다면 존 리든은 세스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듣는 일이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세스의 대답도 다르지 않았다. 그가 가장 원하는 일은 누구도 근친의 관계를 모르는 곳에서 알렉산더 랜스키를 사랑하는 일이었다. 존 리든이 고함을 질렀다.
“제기랄!”
뭔가가 터져 나왔다. 그가 주의 깊게 감춰서 날마다 조금씩 날카로운 모서리를 갈아 애써 둥글게 다듬던 무언가가 폭발해 버렸다. 존 리든은 세스의 얼굴을 끌어당겨 거칠게 입을 맞췄다. 딱지가 앉았던 입술이 터지며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알렉산더 랜스키가 남겨 놓았을 그 비린 흔적이 이성의 얇은 벽을 무너트렸다. 존 리든은 세스가 입고 있던, 처음 보는 니트의 목덜미 부근을 움켜쥐고는 단숨에 아래로 잡아당겨 버렸다. 얇고 포근한 니트는 섬뜩할 정도로 저항감 없이 뜯어져 바닥으로 떨어졌다.
“하자. 지금.”
존 리든이 이를 악물었을 때나 나올 것만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손은 이미 팬츠의 버클을 열고 있었다.
“지금?”
“그래.”
되묻는 세스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며 존 리든은 그가 거짓말에 능숙한 연인이었으면 어땠을까 상상했다. 하지만 세스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이틀이나 못 봤잖아. 이틀 내내 너한테 무슨 일 생겼을까 봐 걱정했어. 다시 보니 못 참겠어. 무슨 말인지 이해해? 나도 못 참겠다고.”
“그럼…… 괜찮아.”
그럼, 괜찮아.
세스가 존 리든에게 할 수 있는 가장 상냥한 말이었다.
존 리든은 세스의 바지를 못 보던 트렁크와 함께 끌어 내렸다. 세스는 손쉽게 알몸이 되어 타인과 나눴던 섹스의 흔적을 드러냈다. 피와 정액이 어설프게 닦인 다리 사이가 유독 희었다. 존 리든의 얼굴이 세스의 맨다리처럼 하얗게 질려 버렸다.
“씻고 올게.”
세스는 옷을 벗긴 뒤 멈칫 굳어 버린 존 리든에게 작게 말했다.
“더러울 거야.”
존 리든이 욕실을 향해 돌아서려는 세스의 손목을 잡았다.
“아냐. 괜찮아.”
“…….”
“지금 해.”
세스가 잠시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존 리든은 세스를 붙들어 키스하다 소파로 향했다. 알몸으로 소파에 누운 세스는 너무 창백해서 혼자만 붕 뜬 사진처럼 보였다.
“정말 괜찮아? 어디 아픈 데는 없어?”
존 리든은 알렉산더 랜스키의 흔적이 남은 곳을 집요하게 찾아 제 입술로 덮으며 물었다.
“괜찮아.”
무표정한 얼굴은 사실 괜찮지 않았다. 약혼자와 섹스를 하려는 사람이 저런 표정으로 있는 건 조금도 괜찮은 일이 아니었다.
“손가락 넣는다.”
“……응.”
내내 가만히 있던 세스가 존 리든이 살짝 부어 있는 아래에 손가락을 넣자 미세하게 허리를 비틀었다. 존 리든이 어금니를 꾹 물고 전립선을 찾아 안을 헤집었다. 마음이 급해서 그런지 오늘따라 어려웠다. 존 리든은 다른 손으로 세스의 허리를 끌어 내리며 엉덩이를 들게 만들었다. 손가락을 하나 더 늘려 거칠고 깊게 쑤셨다. 매끄럽고 부드러운 속살은 오늘따라 촉촉한 기분이었다. 존 리든이 손가락을 빠르게 움직이며 중얼거렸다.
“젖어 있어. 벌써 느껴서 그래?”
“…….”
대답이 없었다. 세스의 성기는 조금도 발기의 흔적을 보이지 않았다. 세스가 양팔을 제 얼굴 위에 올려놓고 표정을 감추었다.
“왜 그러는 거야.”
“…….”
느끼는 게 아니라면 뒤가 이만큼 젖었을 리가 없잖아.
존 리든이 기를 쓰고 자신을 속였다. 오늘따라 젖어 있는 데다 저항도 없는 세스의 안은 그들의 관계가 달라지지 않았다는 증거였다. 그렇게 믿기로 했다.
“그냥 넣어도 될 것 같아.”
존 리든은 손가락을 안에 넣은 채 벌렸다. 손가락을 따라 느리게 벌어지는 입구가 발긋했다.
“하, 얼굴은 왜 가려. 새삼 부끄러워?”
존 리든은 삽입할 생각으로 손가락을 뺐다. 다급히 퍼스너를 내리고 방금 전까지 세스의 안을 더듬던 손으로 페니스를 꺼내 훑었다.
“……?”
다음 순간 존 리든은 손마디와 손톱 사이에 묻어 있는 핏자국을 보았다.
“뭐?”
그가 다급히 세스의 다리를 벌렸다. 손가락으로 쑤석여 놓은 입구에서 가늘게 피가 흘렀다. 존 리든은 정신 나간 사람처럼 세스의 얼굴을 가린 팔뚝을 치웠다.
“피 나잖아! 왜 아프다고 안 했어!”
“…….”
입술을 깨물고 신음을 참던 세스가 잔뜩 일그러진 얼굴을 한 존 리든과 눈이 마주치자 눈동자를 옆으로 굴렸다.
“그냥 해도 돼. 괜찮아.”
“괜찮긴 뭐가 괜찮아! 아플 거 아냐!”
“하다 보면 괜찮아.”
“그게 대체 무슨 개소……, …….”
존 리든은 뭔가를 깨달았다. 어쩌면 끝내 깨닫고 싶지 않았던 것을.
“알고 있었어?”
안에 상처가 난 것을 세스는 알고 있었다.
“……응.”
“랜스키가, 그 개새끼가 이래 놓은 거야?”
“응.”
“너는 그래 놓고 괜찮다고…… 씨팔, 진짜!”
퍽!
존 리든이 견디지 못하고 소파의 등받이를 후려쳤다.
“너는 대체 왜 그러는 거야! 대체 왜!”
내부를 잠식한 고통이 너무 사나워서 스스로 통제할 수가 없었다.
존 리든은 이 고통을 다루는 법을 몰랐다. 십 년 전이라면 알았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스스로에게 약속했던 십육 년의 유예 기간 동안 존 리든은 그런 고통이 있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완전히 잊고 지내 왔다. 이제 와 받아들이자니 머리가 너무 굳어 버렸다. 십 년 동안 세스는 내내 그의 곁에 있었다.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 보지 않았다. 그가 항상 걱정했던 것은 자신이 세스를 포기하는 것이었지 세스가 그를 떠나는 것이 아니었다. 십 년이나 소식이 없던 알렉산더 랜스키가 뻔뻔하게도 근친상간의 주홍글씨를 감출 생각도 하지 않은 채 나타나 세스를 되받아 가는 일 따위 단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이 이렇게 형편없는 개새끼인지 알지 못했다. 분명히 뭐가 잘못됐다는 것을 알면서도 괜찮다는 말을 알량한 면죄부 삼아 섹스를 하려고 들었다. 이건 섹스가 아니었다. 이런 걸 부르는 말이 따로 있을 것이다.
“대체 왜…… 어떻게…….”
세스가 손을 내밀어 그의 팔을 조심스레 건드렸다. 차가워진 손가락이 약하게 피부 위에 느껴졌다. 세스는 그를 위로라도 하듯 쓰다듬고 있었다.
“미안해.”
그리고 미안하다고 했다.
그 말에 툭, 눈물이 떨어졌다. 존 리든은 양손을 바스라지도록 움켜쥐며 소리 질렀다.
“하, 씨발. 이게 뭐야. 이게 대체 뭐야…… 나는 왜 아닌 건데! 나는 왜 안 되는 거야!”
“미안해.”
“미안한데 왜 그랬어! 왜 그랬냐고!”
“미안해. 나는…… 너한테 뭐든 해 주고 싶었어. 내가 잘못했으니까.”
“잘못을 하지 마! 하지 말라고!”
“미안해.”
그때였다.
쾅!
현관문이 부서지며 열렸다.
아마도 제 어깨로 문을 들이받았을 알렉산더 랜스키가 비틀대며 두 사람의 아파트 안으로 들어섰다.
그는 한 사람은 알몸으로, 한 사람은 그보다 조금 덜 벗은 상태로 서로를 안고 있는 두 사람을 보며 놀라지 않았다. 대신 소파로 다가와 존 리든의 어깨를 잡아 비틀었다.
“화풀이를 할 거면 나한테 해.”
“뭐라는 거야, 이 개새끼가…….”
입술은 거의 파란색이 되어 피에 젖은 몰골을 한 알렉산더 랜스키를 보며 존 리든은 위가 튀어나올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저렇게 위태롭고 나약한 꼴을 하고서도 알렉산더 랜스키는 십 년 전 왕자라고 불리던 때와 똑같았다. 그 앞에서 시든 페니스를 꺼내 놓은 채 질질 짜고 있는 제 몰골은 정말 우스울 것이다.
“내가 그랬으니까 나한테 하라고. 뭘 어떻게 하든 다 받아 줄 테니까 나한테 해.”
그래서 화가 났다. 어째서 그는 이 한심한 꼴을 보고 웃지도 않는 걸까.
어째서 그가 미쳐 날뛰지 않을 수 있는지 궁금했다. 자신이 세스에게 무슨 짓을 하고 있었는지 보고 있으면서도.
대체 그와 세스가 무엇을 공유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왜 자신은 그럴 수 없는지도.
“……왜!”
퍼억!
존 리든은 상체를 일으키며 그 반동을 모아 알렉산더 랜스키를 후려쳤다. 이제는 왕자라는 별명으로는 불리지 않을 알렉산더 랜스키는 싱거울 정도로 쉽게 뒤로 나자빠졌다. 존 리든이 소파를 뛰어넘어 그에게 달려들었다. 바닥에 쓰러진 그를 올라타 닥치는 대로 주먹을 날렸다. 이미 여기저기 찢어지고 긁힌 상처를 매달고 있던 알렉산더 랜스키의 얼굴이 다시금 터져 나갔다.
“왜 너야! 왜 너냐고! 너는 안 되잖아! 너는 절대 안 되는 놈이잖아! 그런데 왜 너냐고! 내가 안 되는데, 그런데 어째서 너야! 어째서! ……너만은 아니어야 하잖아!”
알렉산더 랜스키는 세스를 흉내라도 내듯 조금의 저항도 없이 맞고 있었다. 대신 존 리든이 주먹질을 멈추고 가빠진 숨을 고르는 동안 부어터진 눈으로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
“나라서.”
“……뭐라고?”
“네 눈에는 내가 정상으로 보여? 네 말대로 나는 안 되는 사람이야. 세스도 나도 알아. 하지만 나는 기껏해야 안 된다는 이유만으로는 포기할 마음 없어. 그게 뭐라고.”
“그게…… 뭐라니. 이 미친……,”
알렉산더 랜스키가 찢어진 입술로 피식 웃었다. 웃음을 따라 핏방울이 튀었다.
“등신새끼. 너는 그때도 그랬지만 지금도 똑같아. 고지식하긴. 미친놈한테는 미친 방식이 따로 있어. 멀쩡한 네가 아무리 이해하려고 해도 안 되는 게. 그래서 세스는 내 거야. 네 게 아니라.”
그는 다시 왕자가 되었다. 십 년 전 그때처럼, 존 리든의 눈앞에서 빨간색 페라리에 세스를 태우고 사라지던 그때처럼.
리든가의 구식 포드를 들이받은 페라리는 형편없이 망가져 있었지만 알렉산더 랜스키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래서 더 왕자 같았다. 그는 거리낄 게 없었다. 세스가 제 연인이라는 사실을 70억 명이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도, 그중에서 단 한 명 세스만 받아들이면 나머지는 알 바 아니라고 할 인간이었다.
비로소 존 리든은 세스와 알렉산더 랜스키를 묶고 있는 틀을 이해했다. 제 것과는 규격이 맞지 않은 틀이었다. 세스는 그의 틀에서 얌전히 몸을 구기고 살았지만 그것은 네모반듯한 어항 안에 작은 물고기를 넣어 키우는 것과 비슷했다. 존 리든은 시간 맞춰 어항 속으로 항우울제를 넣어 주기만 하면 문제가 없을 줄 알았다. 하지만 세스는 물고기와 비슷해도 물고기가 아니었다. 아가미로 숨을 쉬며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인간의 언어로 말을 할 수 있었다. 그가 이제껏 모르는 척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사랑했다. 하지만 이루어지지 않을 수도 있었다.
사랑했다.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해서 모든 게 거짓이 되는 것도 아니었다.
존 리든이 어깨를 늘어트렸다. 멋대로 일그러지는 얼굴을 감추기 위해 팔을 들어 올리는 작은 행위가 벅찼다. 풀 죽은 어깨는 아무리 해도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존 리든은 뭔가를 더 해 볼 수도 없는 상태였다.
“……. 나 좀 패 줘.”
존 리든이 구겨진 종이 뭉치 같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이젠 끝내고 싶어. 나는 못 끝내겠으니까 그렇게 해서라도 끝내 줘. 네가 이겨 버려. 내가 다시는 덤빌 수도 없게.
“…….”
알렉산더 랜스키는 존 리든이 미처 다 하지 못한 말을 알아들었다. 바닥에 쓰러져 있던 그가 너덜대는 몸을 일으켜 존 리든을 향해 주먹을 날렸다.
퍼억!
그리고 곧장 턱이 돌아갔다. 존 리든은 얌전히 맞는 게 아니라 저도 손을 들었다. 둘이 한데 뒤엉켜 주먹질을 했다. 세스가 그만하라고 외쳐 댔지만 두 사람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이 순간이 한심해서 헛웃음이 나오던 것도 잠시였다. 나중에는 입에서 단내가 날 정도로 지쳐 버렸다. 헉헉 숨을 몰아쉬면서 간신히 주먹을 멈췄을 땐 거실이 완전히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하……,”
존 리든은 마지막 남은 힘을 쥐어짜 알렉산더 랜스키의 턱을 후려쳤다. 고개가 홱 꺾이며 알렉산더 랜스키가 몸을 크게 휘청였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더 이상 서 있을 수 없던 존 리든은 그대로 쓰러져 버렸다. 눈이 감겨 왔다. 이대로 눈을 감고 잠들어 버리고 싶었다. 가능한 한 오래.
하지만 알렉산더 랜스키는 아니었다. 존 리든보다 몇 배나 더 끔찍한 상태를 한 채 꼿꼿이 허리를 세우고 서 있었다. 계속 피를 흘리는 탓에 안색이 완전히 하얗게 변했지만 그런 얼굴로도 알렉산더 랜스키는 오만해 보였다. 그는 오기인지 집착인지, 그게 아니면 광기인지 모를 힘으로 반듯하게 서서 존 리든을 내려다보았다. 자세히 보면 무릎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어쨌거나 반듯하게 서 있었다. 보는 사람이 질려 버릴 정도였다.
그렇게 뒤엉켜 싸우면서도 알렉산더 랜스키는 존 리든이 때리는 것은 한 차례도 피하지 않았다. 주먹이 오는 대로 전부 맞아 주었다.
그래서 존 리든은 알았다. 자신이 졌다는 것을. 더는 어쩔 수도 없이 완전히 져 버렸다는 것을.
간신히 두 사람이 멈추자 세스가 소파에서 일어섰다. 세스는 말이 많은 편이 아니었지만 지금은 진심으로 할 말을 잃은 듯 보였다.
그는 알몸으로 서서 알렉산더 랜스키에게 문밖을 가리켰다.
“그만 가.”
냉정하진 않았지만 또렷한 목소리였다. 존 리든은 그게 꽤나 세스답다는 생각을 했다. 평소에는 고집도 없고 뭐든 상관없다는 식이었지만 한번 결정한 일은 뒤바꾸지 않았다.
그러니 지금도 진심일 것이다. 알렉산더 랜스키는 안 된다고 했으니 이대로 보낼 것이다. 제 곁에 남아 하자는 대로 하겠다고 했으니 곁에 있을 것이다.
세스는 자신이 살아왔던 것은 그가 곁에서 지켜 주었기 때문이라고 말했지만 존 리든은 그 반대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스스로 살아야겠다고 생각했으니 지금껏 살아왔을 것이다. 세스가 치열하고 고통스럽게 약에 의지해 버텨 왔던 시간들에서 위안을 얻은 것은 그였다. 이대로 계속 무사할 것이라고, 이대로 영원히 행복할 것이라고 우쭐해했던 것은 그였다. 빚은 그에게도 있었다. 알렉산더 랜스키나 세스만 있는 것이 아니라.
알렉산더 랜스키는 무슨 생각에선지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존 리든이나 그나 하도 엉망으로 두들겨 맞아서 원래의 생김새가 잘 드러나지도 않았다.
“밖에서 기다릴게. 나와.”
세스가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가.”
“올 때까지 기다릴 거야. 나와.”
“가.”
“기다린다니까.”
“가.”
“기다릴게.”
몇 번이나 같은 말을 남기고 알렉산더 랜스키가 사라졌다.
존 리든에게는 사라진 게 아니라 자리를 비켜 준 느낌이었다. 기다린다고 했으니 그 자리에 고스란히 서서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십 년을 기다렸으니 그 이상을 못 기다릴 것도 없을 것이다. 그게 평생이라고 해도 기다리고 있을 것 같았다.
* * *
“하아…….”
시간이 한차례 흘러갔다.
폭풍이 휩쓸고 지나간 듯한 아파트 거실에는 며칠 전 프러포즈를 주고받았지만 반지를 잃어버린 커플이 남아 있었다.
어느 정도 괜찮아진 존 리든은 앓는 소리를 힘겹게 삼키며 일어나 흐트러진 바지를 정리했다. 내내 이런 몰골로 있었다는 게 새삼 부끄러웠다.
“솔직하게 말해 줘. 혹시 아까 아팠어?”
존 리든이 주저하다 물었다. 세스가 그를 보고 있다 고개를 끄덕였다.
존 리든이 세스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 몇 걸음이 죽을 만큼 힘들었다. 세스의 앞에 선 그가 평소처럼 안는 게 아니라 위로를 구하듯 어깨에 이마를 댔다. 그대로는 눈물이 나올 것 같아 재빨리 고개를 들고 말했다.
“내가 하라는 대로 한다고 했지.”
“응.”
존 리든이 손을 들어 늘 그래 왔듯이 세스의 머리칼을 흩뜨렸다. 이 감촉은 다른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더라도 잊지 못할 것이다.
“키스해.”
“……그래.”
세스가 존 리든의 턱 아래를 붙잡아 가까이 끌어당긴 다음 그에게 키스했다. 이 입술도 잊지 못할 것이다.
“앞으로 하루에 한 번씩 전화해.”
“그럴게.”
“전화해서 사랑한다고 말해.”
“그렇게 할게.”
“꼭이야. 하루에 한 번이야. 매일. 내가 그만하라고 할 때까지. 알겠어?”
“응.”
대답을 듣고서야 눈물이 흘렀다. 존 리든은 얼굴을 세스에게 내밀었다.
“닦아 줘.”
세스가 손등으로 얼굴을 쓸어 주었다. 존 리든은 세스의 손을 붙들어 제 입술을 눌렀다. 더 붙들고 있으면 놓아줄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렇게 두들겨 맞았는데도 아직 힘이 남아 있는 것을 보면.
존 리든은 경련이 일어날 지경인 다리를 천천히 움직여 침실로 갔다. 세스가 주저하다 그를 뒤따라왔다. 존 리든은 옷장 문을 열어 세스가 편히 입을 수 있는 청바지와 티셔츠를 꺼냈다. 침대 옆의 서랍에서 새 브리프도 꺼냈다.
“이거 입자. 병원 가야 할 것 같아.”
세스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브리프를 잡으려는 것을 존 리든이 손을 붙들어 말렸다.
“기다려 봐. 내가 할게.”
“왜?”
그것은 거절을 되돌리는 게 아니라 왜 이런 일에 수고를 더하냐는 순수한 의문이었다. 존 리든은 세스의 화법에는 익숙했지만 가끔은 그가 보통의 연인처럼 다정하게 말해 주길 바랄 때도 있었다. 어쩌면 그저 보통의 다정한 연인을 원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해 주고 싶으니까. 넌 가만히 있어.”
존 리든은 속옷부터 차례대로 세스에게 옷을 입혀 주었다. 세스는 모를 것이다. 그가 자신을 돌보는 일을 대부분은 무척 즐거워했다는 것을. 청바지와 티셔츠마저 다 입힌 존 리든은 양말에 운동화까지 신겨 주었다. 세스는 다시 그럭저럭 말끔한 모습이 되었다.
“이제 가.”
존 리든은 세스에게서 완전히 손을 뗐다.
죽을 만큼 피곤하고 기절해 버리고 싶을 만큼 온몸이 아팠다. 세스를 보내고 나서 이틀 정도는 끙끙 소리를 내며 실컷 앓고 싶었다.
“혼자 가? 병원은 너도 가 봐야 할 것 같은데. 랜스키는 격투기를 했잖아. 어디가 잘못됐을지도 몰라.”
그 말에 존 리든은 지금까지 해 온 일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었다. 머리를 흩뜨리고, 키스를 받고, 전화할 것을 다짐받고, 알몸에 차례대로 옷을 입혀 주는 모든 일을.
하지만 엄두가 나지 않았다. 몸이 너무 아팠다. 세스의 말대로 어딘가 단단히 잘못됐을 것이다.
두들겨 맞길 잘했네.
존 리든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엄두가 안 날 정도로 몸이 아프다는 게 다행이었다. 아니라면 이 말을 하기가 정말로 힘들었을 것이다.
“내가 말한 대로 할 거라고 했지.”
세스가 이상하다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
“아까 그랬잖아.”
“가.”
“알았어. 다녀올게.”
“아니, 오지 마.”
아주 이상하다는 듯, 그렇게.
“……무슨 소리야?”
“나가서 랜스키한테 가. 병원은 그 녀석한테 데려가 달라고 해. 그런 말 안 해도 알아서 잘 하겠다만.”
“…….”
세스가 왼쪽 눈의 흉터를 일그러트렸다.
“왜……,”
질문은 어려운 듯 한참을 맴돌았지만 대답은 간단했다.
“널 사랑하니까.”
“…….”
“그런데 이제 그만 사랑하고 싶으니까.”
“…….”
“이만큼 했으면 된 것 같아. 할 만큼 했어.”
“그……,”
눈썹 위의 하얀 흉터가 파드득거렸다. 날아갈 준비를 하는 새처럼 보였다.
그저 흉터일 뿐인데.
존 리든은 그런 생각에 작게 미소 지었다.
나는 저 녀석이 그렇게나 예쁜 건가. 헤어지는 이 와중에도.
이만하면 저도 얼마쯤은 미친 것 같았다.
“가라. 가서 잘 살아. 나는 못 했던 걸 랜스키한테는 전부 해 달라고 해.”
“그건…… 아냐. 갑자기 왜 그러는 거야.”
“네가 그랬잖아. 내가 있으면 너는 괜찮다고. 그런데 틀렸어. 나도 너를 상처 입힐 수 있었어. 방금 전처럼. 그런데 그러긴 싫다. 넌 괜찮다고 하지만 내가 괜찮지 않아. 난 그런 관계는 싫어.”
“나, 나는…… 괜찮아. 정말로 괜찮아.”
“그런 건 랜스키한테 하라고 해. 나는 그놈하고 같지 않아. 같을 수도 없고.”
“같지 않아도…… 괜찮아.”
“아니, 그렇지 않아. 넌 괜찮다고 말하지만 사실 괜찮은 게 아니잖아. 네가 괜찮다고 해서 나도 괜찮은 줄 알았어. 하지만 아니었어. 그래 놓고도 여전히 괜찮다는 말을 믿을 만큼 나는 뻔뻔하지 못해. 그럴 수 있는 건 랜스키뿐이야. 네가 누구건, 어떻게 굴건, 무슨 말을 하건…… 전부 다 괜찮을 인간은 랜스키 하나야.”
할 말을 잃은 세스의 입이 물고기처럼 뻐끔 벌어졌다. 하지만 괜찮았다. 랜스키처럼 미친놈이라면 물고기한테도 사람 말을 가르쳐 놓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랜스키는 안 돼. 안 되는 거잖아.”
안 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가 알렉산더 랜스키라면.
“그 자식 말이 맞아. 네가 조카가 아닌 다른 뭐라고 해도 그 새끼는 신경 쓰지 않을 거야. 그러니까 너도 신경 쓰지 마. 가장 신경 쓰였던 놈이 지 입으로 아무것도 아니라는데 너만 신경 쓰고 있으면 그것도 억울하지. 괜찮아. 네가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신경 쓸 일이 생기면 다 그 자식한테 떠넘겨 버려.”
“…….”
“내가 하라는 대로 해서 잘 지낼 수 있었다고 했잖아. 그러니까 이번에도 믿어 봐.”
파득대던 흉터가 서서히 이완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매일 전화하는 거 잊지 말고. 내가 그만해도 된다고 할 때까지.”
마지막 말은 심술이었다. 그러나 전화는 꼭 받을 생각이었다. 고작해야 전화 한 통을 가지고 랜스키가 뭐라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 정도 빚은 받아 내도 괜찮았다.
“가, 이제.”
존 리든은 무언가를 잡고 싶은 것처럼 꿈틀대는 손을 애써 움켜쥐었다. 죽을 정도로 아팠다. 이제 그만 쓰러져 쉬고 싶었다. 온몸을 짓누르는 통증을 잊고, 깨끗이 낫고 싶었다.
“가, 이 자식아. 힘들어 죽겠어. 바닥에 누워서 이별하고 싶지 않아서 억지로 참는 거야. 눈치 없기는.”
“……. ……응.”
세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눈가가 뿌옇게 흐려져 있었다. 어쩌면 제 눈이 흐려져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고마워. ……고마웠어.”
“나도 알아. 고마우면 잊지 말고 전화해.”
“고마워.”
“사랑한다는 말도 잊지 말고. 하루 한 번.”
“고마워.”
세스가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며 돌아섰다. 침실 문을 지나며 세스가 한 번 더 뒤를 돌아보았다. 존 리든은 피곤한 듯 미소 지었다. 정말이지 너무 아팠다.
“안녕.”
“그래, 안녕.”
세스가 몸을 돌려 좀 전에 알렉산더 랜스키가 사라졌던 길을 똑같이 밟아 갔다.
세스가 사라지고 존 리든은 다시 바닥으로 허물어졌다. 일단 드러눕고 나니 도무지 다시 일어설 수가 없었다. 천장이 쏟아져 내릴 기세로 시야를 짓눌러 왔다. 눈에 눈물이 잔뜩 고였다. 존 리든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한 채 침실 바닥에 누워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
“씨팔. 진짜 이별이네.”
온몸이 아팠다. 실컷 울고 나면 개운해질 것도 같아 존 리든은 핑계를 대고 계속 울어 버렸다. 이별 직후의 눈물에는 십 년이라는 시간 동안 그가 흘리지 못하고 참아 왔던 해묵은 눈물도 섞여 있었다.
* * *
“하아, 하아…….”
숨이 찼다.
무턱대고 아파트를 벗어난 세스는 엘리베이터가 도착하는 시간을 기다리지 못하고 비상구를 뛰어 내려갔다.
존 리든이 등을 떠밀 때만 해도 확신이 없었는데, 막상 발을 움직이기 시작하니까 모든 생각이 사라졌다. 알렉산더 랜스키가 그새 너무 멀리 가 버리지 않았기를 바라는 마음밖에 없었다.
“하아, 하…….”
로비까지 내려오자 폐가 찢어질 것 같았다. 강도 높은 운동은 하지 말라는 의사의 말이 떠올랐지만 발이 멈추질 않았다. 심지어 알렉산더 랜스키를 찾으려면 어디로 가야 하는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는데도 마찬가지였다.
“어디……, …….”
하지만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로비의 유리문 너머 알렉산더 랜스키가 있었다. 존 리든이 주차 한번 개같이 했다던 그 자리에 차를 세워 두고 서 있었다.
“아…….”
유리문을 사이에 두고 눈이 마주쳤다.
세스는 저를 향해 크게 벌어지는 회색 눈을 보며 쉬지 않고 발을 움직였다.
덜컥, 문을 열고 걸어갔다. 표정만으로는 한달음에 달려올 것 같던 알렉산더 랜스키는 세스가 제 앞에 도착할 때까지 그 자리에 뿌리박힌 것처럼 서 있었다.
“많이 기다렸어?”
세스가 머뭇대다 물었다.
그 순간 알렉산더 랜스키가 주르륵 흘러내리듯 바닥에 주저앉았다.
“……젠장.”
알렉산더 랜스키가 바닥을 손으로 짚고 고개를 들었다. 세스가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잡아 줄까?”
“응.”
알렉산더 랜스키가 세스의 손을 쥐었다. 그러나 그 손을 잡고 일어서는 대신 확 끌어당겨 버렸다. 세스가 넘어지듯 그의 품에 안겼다. 퍽, 하고 이마가 어깨에 부딪쳤다.
“……아파.”
생각보다 더 많이 아픈 건지 눈에 눈물이 고였다. 세스가 이마를 떼지 못한 채 알렉산더 랜스키의 어깨를 짚었다. 눈물이 걷잡을 수 없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세스가 그를 꽉 움켜쥐고 울었다. 알렉산더 랜스키는 울지 말라고 하는 대신 느린 손길로 등을 쓸었다. 등줄기를 더듬는 손이 떨리고 있었다. 떨림이 피부 위로 녹아들었다. 그조차도 하나로 뒤섞였다.
“맥케이한테 전화해야겠어.”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 알렉산더 랜스키가 중얼거렸다.
“……왜?”
“꿈을 꾸는 것 같긴 한데 잠든 기억이 없어. 맥케이가 어느 날 내가 진짜로 미치면 꼭 그런 증상이 있을 거라고 했거든.”
세스가 작게 말했다.
“그 사람 별로야. 이상한 소리 잘해. 믿지 마.”
알렉산더 랜스키가 하하, 소리 내어 웃다가 불쑥 물었다.
“미치지 않았지?”
“아니야.”
“꿈꾸는 것도 아니고.”
“아니야.”
“정말 돌아온 거지?”
마지막 대답은 들리지 않았다. 알렉산더 랜스키는 대답을 기다리는 대신 직접 세스의 입술에 진실을 물었다. 따듯하다 못해 뜨겁게 느껴지는, 생생히 살아 있는 입술은 이 모든 게 현실이라고 말해 주었다.
두 남자가 인도에 주저앉아 키스를 하는 광경을 지나가는 사람들이 힐긋대며 쳐다보았다. 하지만 둘 중 누구도 그만두자는 말을 하지 않았다.
누가 쳐다보든 상관없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