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
“내가 아냐! 내가 아니라고!”
두 건의 살인 및 살인 교사로 현재 기소돼 라이커스 섬에 수감 중인 루이 랜스키는 필사적으로 무죄를 주장했다. 제이 에드거를 살해한 사실은 인정했다. 알렉산더 랜스키가 가져다준 증거는 이미 충분하고도 남았다. 사체마저 발견된 터라 도무지 피해 갈 수가 없었다.
루이 랜스키가 무죄를 주장하는 것은 시저 랜스키의 죽음이었다. 그는 시저 랜스키가 타고 가던 헬기에 미사일을 박아 넣은 것은 절대 자신이 시킨 짓이 아니었으며, 그가 손을 잡은 타라소프 측의 짓도 아니라고 거듭 강조했다. 물론 기소를 맡은 검사 측에서는 그의 말을 전혀 신뢰해 주지 않았다.
존 리든은 케케묵은 오물과 그것을 덮기 위한 독한 세제 냄새가 풍겨 오는 면회실에서 주황색 죄수복을 입은 루이 랜스키를 마주했다.
정말 안 닮았네.
보자마자 그런 생각이 들었다. 루이 랜스키는 막냇동생과 조금도 닮지 않았다. 그보다는 오히려 그가 얼마 전에 똑같은 감옥에 처박은 마약 딜러를 닮아 있었다. 더는 정상인으로 살 수 없는, 바닥까지 추락한 인간들에게는 신기하게도 비슷한 표정이 있었다.
“이제 됐어.”
존 리든은 다 피운 담배를 비벼 끄듯 산뜻한 동작으로 동행한 아넷 비토에게 손짓을 보냈다. 더 들을 것도 없으니 그만 접으라는 뜻이었다.
아넷 비토는 책상 위에 늘어져 있던 서류 몇 장을 미련 없는 태도로 집어 들었다.
“……뭐, 뭐야. 이렇게 끝이라고? 아니, 뭔가 있을 거 아냐! 협상이라든지 그런……!”
루이 랜스키가 몸이 달아 외쳤다.
“뭐든 물어봐! 아는 건 뭐든 말해 줄게! 타라소프가 그간 무슨 짓들을 해 왔는지 말해 줄 수 있어! 타라소프한테 돈을 빌려 쓰는 사람들, 내가 몇 명 알고 있어!”
존 리든이 냉정한 어조로 그의 말을 툭 끊었다.
“관심 없어. 당장은 너나 벨체프만으로도 정신없이 바빠. 어차피 타라소프는 끝났으니 그런 자잘한 것들은 기소할 가치도 없고.”
“뭐? 그런 게 어디 있어! 그런 게……,”
루이 랜스키는 오랜 중독 생활로 말라비틀어진 몸을 마구 흔들어 댔다.
“아, 아냐……. 아냐. 이게 아니야. 나, 난 그럼 계속 이렇게 있어야 된다는…… 그, 그런 소리야?”
이제 그에게는 랜스키라는 성을 가진 부친이 없었다. 부친이 남긴 유산이 천문학적이라고 해도 거기에 손을 댈 수 없는 루이 랜스키는 국선 변호사를 써야 할 것이다. 그간 모종의 이유로 그에게 자금을 제공했던 타라소프마저 감옥에 있는 이상 이백만 달러라는 보석금조차 낼 수 없었다.
루이 랜스키는 라이커스 교도소를 채운 보통의 범죄자들과 똑같은 인간이 되어 버렸다. 기소한 곳이 뉴욕주라는 점에서 사형이 선고될 일은 없겠지만 그가 다시 감옥 밖으로 나올 일은 없을 것이다. 그는 보통의 범죄자가 되어 버렸다. 그래서 루이 랜스키로서는 가장 끔찍한 존재가 되어 버렸다. 이제 무엇도 그를 랜스키 왕족의 둘째 왕자로 만들어 주지 못할 것이다.
사건은 그렇게 정리되고 있었다.
벨체프는 죽고 타라소프는 1급 살인미수 혐의로 기소되었다. 그밖에도 죄목은 많았다. 일일이 열거하기조차 번거로울 지경이었다. 루마니아 마피아 조직은 사실상 와해되었고 남은 세력은 수배령에 쫓기거나 밀수선을 탔다. NYPD와 FBI, 국세청과 이민국이 남은 잔당들에 대한 관할권을 놓고 2차 전쟁을 시작했다. 타라소프파마저 와해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뉴욕 지방 검사실은 날마다 시장실에서 직통으로 날아오는 격려 전화를 받고 있었다. 하루가 다르게 쏟아져 들어오는 사건과 증거들 속에서 세스 그린의 존재를 없는 척 덮어 버리는 것은 존 리든이 가장 공을 들인 일이었다. 세스는 벨체프를 죽였지만 검찰에서는 그를 살인죄로 기소하지 않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그 전에 알렉산더 랜스키의 변호사 군단은 진술서를 쓰기 위해 경찰서에 온 세스를 5분 만에 빼돌리는 마법을 발휘했다. 세스가 쓰다 만 진술서가 법정에서 증거로 채택되는 일도 없을 것이다.
여기까지가 겉으로 드러난 일이었다. 알렉산더 랜스키의 개인 보안 팀이 베네수엘라의 캠프를 깨끗이 날려 버린 일 같은 것은 어느 신문사에서도 다루지 않았다. CIA와 국방부에서 이 일에 미묘한 입장 차이를 보이는 백악관과 입을 맞추기 위해 꽤나 고생하고 있다는 것도, 랜스키 인더스트리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는 워싱턴의 고위 인사들 사이에서 연일 도청을 걱정해야 하는 비밀 통화가 오가고 있다는 것도 사람들은 알 수 없었다. 신문사들은 그저 시저 랜스키의 비극적이고도 요란한 사망 기사만으로도 연일 최고 발행 부수를 갱신했다.
그 여파로 랜스키 인더스트리는 계승권 전쟁이라는 부정적인 이미지에 이어서 국방부 사업과 관련한 몇 건의 불법 로비가 발각됨에 따라 진행 중인 프로젝트들을 취소하는 사태에 직면하는 등의 후폭풍에 휘말렸다. 무엇보다 윌리엄 랜스키라는 단단한 구심점을 잃어버린 상황에서 그를 대신할 인물이 너무 젊고 너무 눈에 띄는 게 문제였다. 주가는 큰 폭으로 하락했고 경쟁사들은 랜스키 인더스트리가 휘청이는 틈을 재빠르게 파고 들어왔다. 무기 시장에 이어 월가에도 파란이 일었다. 그 소란의 틈바구니에서 알렉산더 랜스키는 몇 가지 이유를 들어 대표직 취임을 거부하고 그저 대주주로 남았다. 대신 케네스 로완이라는 전혀 새로운 인물이 전면에 나섰다.
케네스 로완의 경력은 알렉산더 랜스키의 개인 보좌관이 전부였다. 주주들과 이사진의 반발이 제법 있었다고는 했지만 그리 오래 가진 않았다. 아무런 배경도 없는 그가 갑자기 랜스키 인더스트리라는 거대 기업의 수장이 된 것은 폭발이 있었던 롱 아일랜드의 저택에서 알렉산더 랜스키와 함께 구조되었던 사건이 큰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사실상 그는 알렉산더 랜스키의 대변인이었다.
앞으로도 당분간 미 전역을 시끄럽게 만들 이 사건은 화려한 유명세 속에서도 빠르게 정리가 되어 가는 중이었다. 루이 랜스키도 그렇게 정리될 것들 중 하나였다.
“오늘은 그 낯짝이 궁금해서 한번 찾아와 본 거야. 더불어 네놈이 아무리 비싼 변호사를 선임한다고 해도 헛수고일 거라는 말도 해 주려고. 너는 공식적으로 매장된 거야. 쓰레기처럼. 이제 네가 두 번 다시 세상 밖으로 드러날 일은 없어. 한번 매립된 쓰레기처럼 말이지. 내가 할 말은 이게 다야.”
존 리든은 몸을 일으켰다. 철제 의자가 밀리며 일으키는 끼걱 소리가 고막을 속 시원히 긁었다.
“가지.”
뒤이어 아넷 비토가 일어섰다. 루이 랜스키는 이대로 이곳에 매립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믿지 못했다. 그는 필사적으로 눈알을 굴리며 잘 움직이지 않는 머리를 쥐어짜 냈다. 무슨 말이든 해야 했다.
“자, 잠깐! 내가 진짜 범인을 알고 있어! 그, 그러니까…… 그건 그 자식이 했을 거야! 시저를 죽인 건 알렉산더일 거라고!”
“……뭐?”
간수를 부르려던 존 리든이 멈칫 어깨를 돌렸다. 루이 랜스키의 마른 얼굴에 화색이 번졌다.
“그, 그래! 분명히 그럴 거야. 그 자식이 아니라면 그런 짓을 저지를 인간이 없어! 지금도 보라고. 폭군이 죽어서 재산을 몽땅 가로챈 건 알렉산더란 말이야!”
“무슨 헛소리야, 그게.”
“그, 그게 맞잖아. 내가 시킨 게 아니래도! 나는 그저 타라소프가 말하는 대로 했을 뿐이야! 알렉산더나 나머지 것들을 죽이자고 한 건 타라소프였어!”
존 리든은 마치 발작이라도 하듯 눈을 좌우로 굴려 가며 닥치는 대로 말을 만들어 가는 루이 랜스키를 쳐다보았다. 뉴욕주 지방 검사실의 스타 검사 연대기를 새로 썼다는 존 리든의 날카로운 눈이 꼭 제 거짓을 조각조각 해부할 것 같아 루이 랜스키가 흠칫흠칫 몸을 떨었다.
“새, 생각해 보라고. 내, 내가 미사일 같은 걸 가지고 있을 리 없잖아. 타라소프도 그런 건 없었어. 그리고 나는 노친네가 죽은 것도 나중에야 알았단 말이야. 미사일이건 전투기건 마련할 시간도 없었어. 나는 빈털터린데 그런 걸 어디서 마련하느냔 말이야.”
시저 랜스키를 죽이는 데 사용했던 미사일에 관한 분석은 아직도 진행 중이었다. 알렉산더 랜스키가 고용한 전문가가 검찰 측에 보고서를 제공하기로 했다. 하지만 불필요한 일이었다. 쿠바 영해에서 벌어진 살인 사건은 애초에 이쪽에게 기소권이 없었다.
“나는 아니라고. 분명 알렉산더가 저지른 일이야. 내가 증언할게. 얼마든지 할게. 그러니까 협상을……, 어, 어떻게든 나를 여기서…….”
존 리든은 덜덜 흔들리는 루이 랜스키의 동공을 응시했다. 애석하게도 그에게 증인으로서의 가치는 별반 없었다. 설령 그의 증언을 바탕으로 알렉산더 랜스키를 기소하더라도 랜스키가의 비싼 변호사라면 누구든 증언석에 올라온 루이 랜스키를 만신창이로 만들어 놓을 것이다.
그리고 그럴 필요도 없었다. 다시 말하지만 그는 시저 랜스키의 살인 건으로 기소된 게 아니었다. 제이 에드거와 뉴욕주에 있는 다른 에스코트 서비스 업체의 고용인이 이쪽의 피해자였다.
“들을 필요도 없었던 얘기네.”
존 리든은 손을 들어 간수를 불렀다. 단독 면회실을 나서는 그의 등 뒤에서 루이 랜스키가 악을 써 댔다. 나는 아냐, 나는 아니라고! 분명 그 자식이 그랬어! 그 악마 같은 새끼가 어떠냐면……!
“…….”
존 리든은 그가 토해 내는 마지막 악다구니를 묵묵히 흘려 넘겼다. 루이 랜스키가 지껄이는 얘기를 들어 줄 사람은 이제 아무도 없었다.
끼잉, 텅.
마지막 보안 절차를 통과해서 빠져나온 라이커스 교도소는 거대한 잿빛 매립지처럼 보였다. 존 리든은 한번 힐긋 뒤를 돌아보고는 동행한 아넷 비토에게 말했다.
“먼저 차에 타고 있어. 담배 한 대 피우고 들어갈게.”
아넷 비토가 이상하다는 듯 미간을 찡그렸다.
“안 피우셨잖아요.”
“그렇게 됐어.”
존 리든이 쓰게 웃었다.
“무슨 일 있으세요? 기분 안 좋으신 거죠?”
아넷 비토는 존 리든이 담배를 꺼내 무는 것을 보면서도 차에 타지 않았다. 대신 조수석 쪽 문에 기대 그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존 리든은 매서운 시선에 부담을 느끼면서도 담배에 불을 붙였다.
“왜요? 다 잘된 거 아닌가요? 약혼자 분은 무사하시고, 자칫 까다로울 수 있는 조사 같은 건 전부 피해갔잖아요. 게다가 랜스키가의 상속자라니 어마어마한 부자가 됐을 테고. 아무리 생각해도 요새 부검사장님 기분이 그렇게 언짢은 이유를 잘 모르겠어요.”
존 리든은 고개를 옆으로 돌려 바람이 불어 가는 방향으로 대답 대신 담배 연기를 훅 뿜어냈다. 그가 꼭 담배 연기 같은 쓴 표정을 지었다.
“말 못 해.”
“왜 이러세요, 서운하게. 부검사장님 약혼자 분이 납치당하는 바람에 저도 거의 납치당하다시피 사무실에 억류당해 있으면서 일 거들었는데. 저한테 이러시면 안 된다고요.”
다시 또 한 번, 담배 연기가 흘러나왔다.
“그래도 말 못 해.”
“차암. 나쁘다.”
아넷 비토가 입술을 삐죽이며 안 좋은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먼저 차에 오르지 않았다. 어쩐지 눈을 뗄 수가 없어서였다. 무적의 미스터 선샤인은, 다른 의미로 무적이 되었다. 그 햇살 같던 남자가 이번 사건을 겪으면서 언젠가 우연히 보았던 약혼자의 꺼질 듯 공허하고 위태로운 분위기에 물이 들어 버렸다. 예전에는 그 든든한 가슴팍에 안기기를 바라게 되는 남자였는데, 이제는 왠지 안아 주고 싶은 남자가 되었다. 솔직히 조금 무서웠다. 아넷 비토는 약혼자가 있는 게이를 좋아하는 정신 나간 여자는 되지 않을 거라고 속으로 중얼대며 고개를 열심히 흔들었다.
“그래도 이상해 보여요.”
존 리든은 반쯤 태운 담배를 구두로 짓이겨 불씨를 껐다.
“뭐가?”
“그냥요. 오늘도 여기 오실 필요 없었는데. 상대측 변호사가 요청한 것도 아니고. 루이 랜스키는 이제 부검사장님 담당도 아니잖아요. 벨체프 건으로도 정신없으시면서. 쓸데없는 일은 안 하시는 주의 아니었어요? 그럴 시간 있으면 애인하고 데이트나 한 번 더 하겠다고 하셨잖아요, 예전에는.”
존 리든은 허리를 굽혀 담배꽁초를 집어 들었다. 그러다 무슨 생각에선지 그것을 라이커스의 담벼락을 향해 던져 버렸다. 존 리든이 못된 장난을 친 개구쟁이처럼 씨익 웃었다.
“그럴 필요가 없게 돼서.”
“……네?”
“약혼자가 날 버렸거든. 아니, 내가 버렸나.”
“뭐라고요?”
아넷 비토가 너무 흥분한 나머지 눈을 깜박거렸다.
“그게 무슨…… 아니, 진짜 그게 무슨? 무슨 소리예요?”
“들은 대로야. 헤어졌어.”
“말도 안 돼! 이번 사건으로 부검사장님이 얼마나 고생을 했는데! 그 약혼자는 그런 것도 몰랐대요? 아니, 어떻게 사람이 그럴 수가 있어요, 예?”
“감당이 안 됐어.”
존 리든이 시선을 비켜 운전석의 문을 열었다.
“내가, 그 녀석이. 그래서 보내 버렸어. 감당이 된다고 하는 사람한테.”
아넷 비토가 서둘러 조수석에 올랐다.
“그래도요! 아니, 감당이 안 됐으면 진작 안 됐지 왜 하필 이제 와서요! 그간 부검사장님이 알량한 공무원 월급 털어서 모셔 온 거 우리가 다 아는데! 아니, 그렇게 부자가 됐다면서 왜 이제 와서!”
그 말에 존 리든이 쓰게 웃었다.
“그게 꼭 그런 게 아니었더라고.”
“예?”
“로스쿨 장학금, 지금 사는 집, 소개받은 의사, 클리닉, 맞춤 양복집, 부검사장직 추천서. 그런 것들이 다 빚이었더라고.”
아넷 비토에게는 얼핏 알아듣기 어려운 얘기였다.
“빚이라뇨?”
“어쩐지. 월세가 말도 안 되게 싸더라니. 젠장, 전액 장학금이라고 했을 땐 내가 머리는 좋구나 싶었는데.”
존 리든이 하는 얘기는 알렉산더 랜스키가 십 년간 갚아 온 빚에 관한 것이었다. 심지어 맨해튼 은행에는 그도 모르는 제 명의의 신탁 기금도 있었다. 그 집요하고 짜증나는 방식에 대해 존 리든은 공소시효가 지나기 전에 꼭 명의 도용과 스토킹으로 고소하겠다고 다짐했다.
아넷 비토가 코웃음을 쳤다.
“머리 좋으신 거야 다들 알죠. 그렇게 비하하지 마세요. 부검사장님이 그러면 사무실 안에서 울 사람 많으니까.”
그래도 아넷 비토는 여전히 화가 났다. 제 사랑이 끝난 것도 아닌데 괜히 배신당한 기분이었다.
“어쨌거나 그 약혼자는 실수한 거예요. 후회나 하라고 해요.”
존 리든이 차를 출발시켰다. 후회라는 말을 듣자 핸들을 쥔 손등에서 울컥 힘줄이 돋아났다.
“아…… 그럴까?”
“당연히 그러겠죠.”
“그럼 돌아올까?”
“무슨 말씀이세요. 그런 사람을 왜 받아 줘요?”
“내가 가라고 했는데…… 그래도 영 아니다 싶으면 다시 돌아오라고 해도 될까?”
“받아 주지 말라니까요.”
존 리든이 또 한 번 웃었다. 어쩐지 자꾸만 안아 주고 싶게 만드는 그런 웃음을.
“돌아오면 그것도 괜찮겠는데.”
존 리든은 세스가 보워리의 아파트로 돌아오는 날을 상상해 보았다. 세스는 별로 표정 없는 얼굴로, 그러나 지치고 우울한 표시를 내며 제 방으로 들어갈 것이다. 그가 위로하는 말을 가만히 듣다가 시간에 맞춰 약을 먹을 것이다.
……그리고 10분도 못 돼서 알렉산더 랜스키가 미친 짐승처럼 날뛰며 들이닥칠 것이다.
갑자기 뒷목이 서늘해졌다.
“그럼 이번에는 내 아파트에 미사일이 처박히려나.”
“……네?”
존 리든이 고개를 털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잊어 줘.”
……설마 그런 짓까지 했으려고.
알렉산더 랜스키가 시저 랜스키의 헬기에 미사일을 처박은 것은 아닐 것이다. 아무리 미친 인간이라고 할지라도 그런 짓은 하지 않았다. 아닐 것이다. 마지막에 몰린 루이 랜스키가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멋대로 주워 삼킨 헛소리일 것이다.
“사무실로 돌아가는 거죠? 오늘도 야근이겠네요? 그럼 저녁이라도 사 주세요.”
아넷 비토가 점점 침몰해 들어가는 난해한 생각에서 그를 끄집어냈다.
“알았어.”
사실이 아닐 것이다. 존 리든은 이쯤에서 루이 랜스키가 한 말을 잊기로 했다.
* * *
전화는 어김없이 같은 시간에 왔다. 저녁 여덟 시. 평소라면 퇴근 후 집에 있을 시간이고, 아니면 저녁 식사 후 사무실에서 야근을 준비하고 있을 때였다.
오늘은 인근의 카페에서 커피를 주문하는 중이었다. 저녁 식사 후 아넷 비토는 그에게 커피를 부탁한 뒤 사무실로 올라갔으니 곧 도착할 닉 나이먼의 것까지 총 세 잔을 사야 했다. 마침 커피를 사려는 사람이 많아 줄이 길었다. 주문을 넣은 뒤 카운터 옆으로 비켜서서 유리창 밖의 시끄러운 거리를 쳐다보는데 전화가 왔다.
익숙한 착신음에 존 리든이 조금 복잡한 미소를 지으며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여보세요.”
[나야.]
“알고 있어. 저녁 먹었어?”
[응.]
“랜스키는?”
[옆에서 통화하는 거 보고 있어.]
여기까지는 근 한 달간 계속 반복돼 온 일상 같은 대화였다. 다음 얘기가 나오기까지는 시간이 좀 더 걸렸다.
[……재판은 잘돼 가?]
“같지 뭐. 그래도 이번 건은 증거가 워낙 확실해서 그렇게까지 힘들진 않아.”
[다행이다.]
“그래, 다행이지.”
존 리든은 세스와 함께 지냈던 십 년을 생각했다. 그중에서 그들이 실제 연인이었던 기간은 며칠 되지 않았지만 그때보다 지금이 더 가까워진 기분이 들었다.
“너는 어때? 오늘도 병원 다녀왔어?”
[어? 응.]
“병원에서는 뭐래?”
[병원 다시 바꿨어. 그 의사는 싫었는데, 알렉스가 하도 우겨서.]
세스는 이제 알렉산더 랜스키를 이름으로 불렀다. 며칠 전부터였다. 존 리든은 처음 이름을 들었을 땐 알렉스가 누구냐고 물어야 했다. 매일 전화를 할 때마다 세스에게는 조금씩 달라지는 일이 생겨났다.
“그 새끼는 뭐 그리 일일이 간섭이야. 지는 백수 주제에. 직장이나 다시 구하라고 해. 오죽 못났으면 지 할아버지가 창립주인 회사에서 잘려. 하여간 무능한 새끼.”
[너도 잘라 줄까?]
험담 중에 불쑥 알렉산더 랜스키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존 리든은 공공장소라는 것을 잊고 냅다 욕설을 내뱉었다.
“미친놈. 스토커 자식. 왜 남의 전화를 엿듣고 지랄이야.”
[어떤 비열한 새끼가 허락도 없이 유언비어나 퍼트리고 있으니까. 잘린 거 아냐. 내가 그만뒀어.]
“잘린 놈들 백이면 백 다 그 소리야. 부당해고 소송은 안 하냐? 아는 변호사 소개시켜 줄까?”
[닥쳐.]
존 리든은 즐겁지만은 않은 복잡한 웃음을 비죽 흘렸다.
“세스나 바꿔. 통화 방해하지 말고.”
[남 애인한테 미련 떨지 말고 온라인 데이팅 사이트라도 찾아봐. 원한다면 내 사진이라도 빌려줄 테니까.]
“닥쳐, 이 개새끼야. 아무렴 너보단 내가 잘생겼지.”
[최근 상담은 받아 봤어? 망상증이 생긴 것 같은데.]
존 리든이 더는 참지 못하고 으르렁거렸다.
“세스 바꿔. 이런 무익하고 무식한 대화는 더 이상 안 하겠어.”
[무능하긴. 직업이 검사라는 인간이 대화를 못 하겠다니.]
“바꿔, 이 새끼야! 너한테 전화하란 거 아니니까.”
뭐라고 툭탁대는 소리가 들려오더니 세스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저기, 너무 기분 나빠 하지 마. 알렉스가 요새 좀 이상해.]
“랜스키야 뭐 만날 미친놈이지. 새삼 기분 나쁠 것도 없어.”
[네 말대로 무직자가 된 게 스트레스인 것 같아. 상담을 좀 받게 하고 싶어.]
세스답지 않게 현실감이 물든 발언에 존 리든이 킥킥대고 웃었다. 웃음소리가 조금 컸던지 근처의 사람들이 그를 돌아보았다. 존 리든은 무안해진 얼굴로 슬쩍 고개를 돌렸다.
“꼭 받아라. 검사 결과가 충격적이어도 너무 걱정하지 말고. 원래부터 그랬을 가능성이 더 높잖아. 그런데 요새 그 자식이 좀 이상하게 굴어?”
[기분이 나쁠 때가 많아.]
“이유는 모르고?”
[그게 좀……. 아카데미에 등록한 뒤로 종종 그러는 것 같아.]
“음? 아카데미? 무슨? 랜스키가?”
[아니. 내가 등록했어. 사진 찍고 싶어서.]
“사진?”
[응.]
존 리든은 세스가 사진 찍는 일에 흥미를 갖고 있는 줄도 몰랐다. 매일 변화가 생긴다지만 이건 너무 낯설었다. 존 리든이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턱만 벌렸다.
[카메라가 생겼어. 할아버지가 남긴 거라 오래된 거지만. 다루는 법을 몰라서 한참 고생하다가…….]
뒤이어 이리 줘 봐, 하는 말이 들리더니 다시 알렉산더 랜스키가 등장했다.
[멋대로 감격하지 마. 남 애인 일에.]
“……개소리는.”
하지만 존 리든은 세스가 낯설어진 것과는 별개로 감격하는 중이었다.
뭔가를 하고 싶어 하는 세스가 놀라웠다. 그는 정말로 달라지는 중이었다. 안정이라는 틀에 고여 위태롭게 닳아 가던 세스의 삶이 다른 형태를 띠우고 스스로가 원하는 곳으로 흘러갈 수도 있게 되었다.
그것은 오래도록 그를 사랑하던 존 리든에게는 감동이었다. 가슴 한쪽이 저르르 떨려 왔다.
[처방전 끊은 지도 좀 됐어. 이젠 약도 거의 안 먹어.]
알렉산더 랜스키는 마치 자기과시를 하듯 뿌듯해하는 음성으로 말해 주었다. 그 말투는 짜증났지만 세스가 점차 나아지고 있다는 뜻을 담은 말은 반가웠다.
어쩐지 눈가가 뜨거워졌다. 존 리든은 손등으로 슬쩍 눈을 문질러 눈물을 감췄다.
“왜 네가 잘난 척이야. 세스가 애써서 나아진 거 가지고. 보나마나 요새 기분이 안 좋다는 게 세스가 아카데미에서 사람들 좀 만나고 다니니까 애가 타는 모양인데. 하여간 속 좁은 놈 같으니. 그러다 채이지. 다시 세스 바꿔.”
알렉산더 랜스키가 뭐라고 욕설을 중얼거렸지만 세스가 전화기를 가로챘는지 다시 세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존 리든은 그가 받은 감격을 숨기지 않고 들뜬 음성으로 물었다.
“만날래? 이번 주까지는 짬이 안 나니까 다음 주말 정도에. 카메라 들고 와. 나도 보여 줘. 사진 찍어 줄 수 있는 거야?”
[다음 주?]
그렇게 되묻는 말에 세스가 조금 곤란한 듯 고개를 젓는 모습이 눈에 그려지는 듯했다.
[미안. 다음 주는 안 돼. 어디 가기로 했어.]
“어디?”
[그라닥이라는 데.]
“뭐?”
존 리든은 세스가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보다 더 놀라 버렸다.
“거기가 어딘데?”
[유럽 어디라던데 나는 잘 몰라.]
“갑자기 거길 왜 가는데?”
약간 멀리서 알렉산더 랜스키가 혼자 가게 놔둘 리가 있겠냐고 버럭 소리를 지르는 게 들려왔다.
[응. 거기…… 할아버지가 남긴 화보에서 봤는데, 바다가 되게 예뻐. 나도 찍고 싶어서. 사실 사진을 좀 더 잘 찍게 되면 가 보고 싶다고 말했던 건데 알렉스가 마음대로 항공권을 예약해 버렸어. 전에 쓰던 전용기는 이제 못 쓴대. 새로 주문한 건 아직 더 있어야 탈 수 있대.]
“와…….”
눈물이 주책없게 흘러내렸다. 이번에는 숨길 수도 없었다. 이번 눈물은 꽤나 길었다.
“와……. 그거 진짜……,”
[…….]
세스가 잠시 그를 기다린 후에 말했다.
[울지 마. 그리고 고마워.]
확실히 세스는 달라졌다. 스스로 뭔가를 하고 싶다고 말하면서 지금 그가 울고 있다는 것도 알았다. 눈에 보이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세스를 달라지게 만들고 있는 사람이 알렉산더 랜스키라는 것도 알았다. 그래서 눈물이 더 멈추지 않았다. 존 리든은 한없이 감사하면서도, 그 감사함을 미워하는 모순된 감정에 심장이 짓눌리는 것 같았다. 젖은 한숨이 길게 흘러나왔다.
“잘…… 다녀와.”
[선물 사 올게.]
“그래. 잔뜩 사 와. 이제 너 부자잖아.”
세스가 작게 웃었다.
[알았어. 많이 사 올게.]
존 리든은 낮에 아넷 비토와 주고받았던 말을 떠올리며 한마디 덧붙였다.
“잘 있다가…… 돌아와.”
[그렇게 오래 있지는 않을 거야. 다녀와서는 만날 수 있어.]
“그래. 꼭 돌아와.”
[응.]
전화를 끊을 때가 됐다. 카운터의 점원이 주문한 커피가 나왔다며 그에게 눈짓을 던졌다.
“그만 가 봐야겠다.”
세스가 잠시 멈칫하다 곁에 있는 알렉산더 랜스키에게 저리 가라는 손짓을 했다. 매일 약속한 말을 해야 했다.
[응. 저……, 사랑해.]
“그래. 나도.”
분명히 알렉산더 랜스키가 옆에서 그 괴상한 짓은 언제 그만둘 생각이냐고 불만을 드러내고 있을 것이다. 존 리든은 아직 그만둘 생각이 없었다.
아직은, 아직은 안 되겠다고.
아직은 그가 약속했던 십육 년도 채 되지 않았다고.
혹시 알렉산더 랜스키가 직접 따져 물으면 존 리든은 시저 랜스키를 죽인 게 누군지 물어볼 결심을 했다.
“여기요. 드립 커피 두 잔에 유기농 소이 라테 한 잔.”
카운터 너머에서 약간 긴 검은 머리를 한 아시아계 남자가 존 리든에게 세 잔의 커피를 건넸다. 네 칸짜리 종이 캐리어에 담긴 커피를 받아 돌아서려는데 비어 있는 한 칸에 카페 직원이 작은 종지쪽지를 떨어트렸다.
“그리고 이건 내 전화번호요.”
“……?”
존 리든이 그를 쳐다보자 선명하고 짙은 동공을 지닌 남자가 씨익 웃었다.
“세스와 헤어진 거 알거든요. 같이 일했으니까. 그럼 지금 그쪽은 싱글이라는 소리잖아요.”
“아……?”
“짐 타벨. 난 그쪽 몇 번 본 적 있는데. 레스토랑으로 세스 데리러 왔을 때요. 그때 나하고 통화도 했잖아요.”
짐 타벨은 앨공퀸 호텔 레스토랑을 그만두고 뉴욕 지방 검사실 인근의 카페로 직장을 옮긴 세세한 이유 같은 것은 말해 주지 않았다. 존 리든이 먼저 묻는 일은 없겠지만 그래도 그건 우연이었다. 우연을 운명처럼 바꾸고 싶었던 기대감 같은 것은 아주 조금 있었지만.
“아?”
그는 세 번째로 바보 같은 소리나 내뱉고 있는 존 리든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잘 가고 다음에 또 와요. 그땐 내가 살게요. 전화라도 해 주면 더 좋고.”
인사를 마친 짐 타벨이 후다닥 돌아서서 한창 바쁜 카운터 안쪽으로 들어가 버렸다.
존 리든은 커피를 든 채 잠시 뒤통수를 긁적이다 몸을 돌렸다.
카페를 나와 횡단보도 앞에 서서 신호를 기다리며 서 있자 한참 쌀쌀해진 바람이 불어왔다. 따듯한 커피라도 쥐고 있을까 캐리어를 들어 올리는데 새삼 전화번호가 적힌 종이쪽지가 눈에 들어왔다.
“……이걸 어쩌지. 아는 사람이라는데.”
필요도 없고 원하지도 않지만 당장 버리기도 애매했다. 존 리든은 뒤통수를 멋쩍게 긁다가 신호를 한번 놓쳐 버렸다.
세스는 다음 주에 출국이었다. 한동안은 같은 하늘 아래 있지 못할 거라는 사실이 뺨에 와 닿는 바람을 좀 더 차갑게 만들었다. 가서도 매일 전화하라는 말을 깜박 잊고 하지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은 방금 받은 전화번호 생각을 까맣게 잊도록 만들었다.
* * *
“이제 와도 돼.”
세스는 전화를 끊고 뒤를 돌아보았다. 알렉산더 랜스키는 기다렸다는 듯 다가와 등 뒤에서 팔을 둘렀다. 코가 목과 옷깃 사이를 짓궂게, 한편으론 집요하게 파고들어 왔다.
“왜 자꾸 저리 가래? 기분 나쁘게.”
세스가 뒷목에 닿는 숨결이 간지러운 듯 어깨를 움츠리며 대꾸했다.
“기분 나빠 할 거잖아.”
“기분 나쁘다니까.”
“아니, 그거 말고.”
“그럼?”
“존한테, 그러는 거.”
알렉산더 랜스키가 목덜미의 연한 살을 살짝 이로 물었다.
“됐어. 괜찮으니까 앞으로 통화할 때 저리 가라고 하지 마. 그게 더 기분 나빠.”
세스가 조금 묘한 얼굴이 되어 그의 이마를 뒤로 밀었다.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고 나니 세스의 시선이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할 말이 있는데 하지는 않고 빤히 쳐다보는 게 못 견딜 만큼 사랑스러웠다. 알렉산더 랜스키가 세스의 콧등을 툭툭 두들겼다.
“왜?”
“엄청나게 기분 나빠 했잖아. 처음에는.”
“아아.”
알렉산더 랜스키가 다시 세스를 돌려서 좀 전에 하던 짓을 이었다. 코로 옷깃을 헤집으며 가끔씩 깨물다 핥는 애무를.
“그땐 약속한 걸 몰랐잖아. 했으니까 지켜야지.”
어느새 어깨까지 내려온 셔츠를 알렉산더 랜스키가 이로 물어 더 아래까지 끌어 내렸다. 날개뼈가 드러나자 참지 못하고 깨물어 버렸다. 세스가 미간을 찌푸리며 어깨를 한번 저었다.
“거짓말.”
“뭐가?”
“기분 안 나쁘다는 거, 거짓말이잖아.”
“물론 아주 괜찮은 것도 아냐. 참을 만하다는 거지.”
“웃기지 마. 지금도 깨물고 있으면서.”
“이건 그게 아니라……. 뭐야, 내가 깨무는 게 기분 나빠서 그러는 거 같아?”
“존하고 통화하고 나면 꼭 그러잖아.”
“아니라니까.”
그래서 알렉산더 랜스키는 깨무는 대신 잇자국을 혀로 쓸었다. 부드러운 혀가 느리게 살을 핥고 자국을 남겼다. 그럴 때마다 오르르 등이 떨렸다. 날개뼈는 세스의 성감대였다.
“화내는 거…… 아냐?”
세스가 숨을 쌕, 몰아쉬며 물었다.
“아냐.”
알렉산더 랜스키는 한 팔로 세스의 허리를 감으며 다른 손으로는 결국 셔츠를 벗겨 냈다. 허리를 감은 손이 느리게 바지 속으로 들어갔다. 세스가 움찔대며 허리를 살짝 들어 올렸다.
“이상해.”
“뭐가?”
“화낼 것 같은데. 화난 것 같기도 하고.”
알렉산더 랜스키는 꾸물대며 일어설 준비를 하는 부드러운 성기를 손바닥으로 쓸며 세스의 등에 대고 말했다.
“고작 그런 걸로 화 안 내.”
“고작이라고 하는 것도…… 흣, 이상해.”
“말했듯이 참을 만하다니까.”
간질이는 듯하던 가벼운 손길이 점점 노골적으로 변했다. 알렉산더 랜스키는 조금씩 젖어들기 시작하는 귀두를 핥고 싶다고 생각하며 혀로 입술을 축였다. 이럴 때는 손이 두 개밖에 되지 않는다는 게 짜증스러웠다. 더 많이, 더 빈틈없이 쓸고 더듬고 어루만지고 싶었다.
“네가 날 밀어내는 게 더 싫어.”
허벅지 안쪽을 더듬던 손을 돌려 입구를 슬쩍 누르자 세스가 깜짝 놀란 듯 허리를 퉁겼다.
“고작 그런 걸로 내가 화를 낼 거라고 생각하는 게 싫고.”
날개뼈를 누르던 손이 약간 거칠어졌다. 세스가 소리 없이 입을 벌렸다.
“리든한테 사랑한다는 소릴 앞으로 백 년쯤 더 해야 한다고 해도 당연히 참을 수 있어. 널 가진 사람이 전화로 그딴 소리나 듣고 있는 리든이 아니라 나니까.”
달칵, 버클이 풀렸다. 알렉산더 랜스키가 바지를 잡아 끌어 내렸다. 뒤집어 바로 눕히자 세스는 눈가를 찌푸린 채 달아오른 얼굴을 팔로 가렸다. 세스가 흘린 선액이 브리프에 작은 얼룩을 만들어 놓았다. 참을 수가 없었다. 알렉산더 랜스키는 잡아먹을 것처럼 입을 벌리며 얼룩을 빨았다. 타액이 더해진 얼룩이 커다란 원을 그리며 번져 나갔다.
“너는 내가 널 어디까지, 얼마나 사랑할 수 있는지 전혀 모르고 있어.”
갈라지고 탁해진 목소리로 알렉산더 랜스키는 사랑한다는 말을 했다. 그가 한 겹 남은 마지막 옷을 이로 물어 끌어 내렸다. 코 속으로 부드러운 살 냄새가 파고들었다. 그러자 이제는 이성과 양심이 갈라져 버렸다. 탐욕스럽게 밀려나온 혀가 허벅지에 들러붙었다. 이대로 세스를 전부 다 핥아먹고 싶었다.
“하읏…… 아, 알아. 나도.”
“아니, 몰라.”
뭔가를 보채는 것처럼 몸을 뒤트는 세스를 바라보며 알렉산더 랜스키가 붉게 달아오르기 시작한 눈으로 느리게 웃었다.
“사랑해.”
그는 세스의 한쪽 다리를 들어 무릎 뒤 우묵한 곳에 입을 맞췄다. 타액으로 젖어 번들대는 입술을 한 알렉산더 랜스키는 탕아처럼 음탕해 보이기도 했고, 반대로 기도 중인 성자인 양 경건해 보이기도 했다. 차고 무감한 회색 동공은 세스를 바라볼 때면 다시없을 강렬한 색처럼 보이기도 했다.
궤도를 새기듯 천천히 다리를 타고 미끄러져 내려온 입술이 성기를 물었다. 세스가 약한 신음을 흘리며 알렉산더 랜스키의 머리카락 사이에 손가락을 찔러 넣었다. 곧추선 성기를 핥아먹던 알렉산더 랜스키가 문득 움직임을 멈추고 말했다.
“사랑해.”
“아, 응……. 나, 나도…….”
“사랑해.”
그 뒤로 애무가 몰아치듯 이어졌다. 세스는 목이 쉬도록 헐떡이다가 머릿속까지 번지는 열락을 이기지 못하고 사정했다. 알렉산더 랜스키는 입 속에 뭉근히 번지는 뜨듯한 정액을 남김없이 삼켰다.
손등으로 젖은 입술을 문지르다 그가 또다시 말했다.
“사랑해.”
“나도.”
알렉산더 랜스키는 세스의 양 허벅지를 손으로 잡아 벌리게 했다. 그동안 세스가 몸을 일으켜 그의 옷을 벗겨 주었다. 알몸이 된 알렉산더 랜스키가 팽팽하게 일어선 성기를 준비가 된 몸속으로 천천히 밀어 넣었다.
“하읏…….”
“하아…….”
나직한 신음 소리와 함께 두 사람이 하나가 되었다.
두 사람의 몸이 포개진 넓은 가죽 소파의 뒤편 벽에는 얀 터낸토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사진 속에서는 반달과 그림자가 물 위에서 하나가 되어 있었다. 밤바다처럼 검은 가죽 소파 위에 엎드린 두 개의 하얀 나신이 둥글게 어우러졌다. 자아와 자아가 아닌 것, 타인과 타인이 아닌 것의 경계가 달무리처럼 어그러지다 서로를 섞어 버렸다.
“사랑해.”
“사랑해.”
하나가 된 두 사람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사랑을 고백했다. 그마저도 시차가 전혀 없이 한목소리가 되어 버렸다.
그 모든 게 기적이었다.
<하프 문 베이 2부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