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벌써 삼 주나 지났다.
기분이 내내 가라앉지 않는 것은 큰일이었다. 밤에 거의 잠을 자지 못하고 있었다. 아침이 다 되어서야 눈을 붙였다가 선잠이 들거나, 아니면 어쩌다 가끔 저녁까지 훌쩍 자거나 하는 식이었다. 세스는 진지하게 밤에 수면제를 먹을까 고민했다.
오늘은 자야지.
세스가 조금 간지럽게 느껴지는 눈가를 꾹 누르며 거듭 다짐했다.
오늘은 재워야 해.
세스는 침실에 딸린 욕실로 향했다. 맨해튼의 전경을 시원하게 내려다보게끔 커다란 창을 낸 욕실은 매번 들어설 때마다 세스를 민망하게 만들었다. 회색과 검은색이 섞인 대리석 욕조는 몹시 컸고, 두 사람이 함께 들어가도 넉넉했다. 그래서 지난 삼 주간 이곳에서 꽤 자주 섹스를 했다. 아무리 마주 보는 건물이 없다지만 그래도 밖이 훤히 보이는 투명한 유리 벽 안에서 섹스하는 건 여전히 부끄러웠다.
세스는 욕실로 들어가기 전 세면대와 거울이 있는 방에서 서랍을 열었다.
“약이 여기 있다고 한 것 같은데…….”
지난 삼 주간 시간이 될 때마다 생각하는 일이었지만 이 집은 쓸데없이 너무 넓었다. 원래도 개인 영역이 작은 세스는 이 넓은 집에서 행동반경이 더 좁아진 듯 보였다.
침실과 침실에 딸린 욕실, 거실까지. 딱 그 정도 동선 안에서만 움직였다.
“이 욕실이 아닌가.”
그리고 이 넓은 집은 일하는 사람들의 행동이 너무 민첩하고 은밀했다. 분명히 자신이 먹던 항우울제와 수면제 따위가 남아 있던 것 같은데 한 일주일 정도 손을 대지 않았다고 그새 약이 사라져 버렸다.
약병 대신 새 수건과 배스 가운이 말끔히 개켜져 들어찬 서랍장을 헤집던 세스가 시무룩해진 표정으로 흐트러진 수건을 하나씩 개기 시작했다.
역시나 없던 일로 만들기는 무리였다. 이 집의 고용인들은 하나같이 각 맞춰서 수건 접는 훈련이라도 받고 온 모양이었다.
세스가 좀처럼 똑같은 모양새로 만들 수 없는 수건을 들고 고군분투하는 사이 알렉산더 랜스키가 등 뒤에서 다가왔다.
“뭐 하는 거야?”
갑자기 티셔츠 아랫단을 파고들어 맨살을 슥 문지르는 손길에 화들짝 놀란 세스가 고개를 뒤로 확 젖혔다.
자칫 뒤통수에 코가 부딪쳐 코피라도 났을 상황이었지만 알렉산더 랜스키는 미리 알고 있던 것처럼 유연하게 사고를 피했다.
“……또 일부러 소리 안 나게 걸어왔지.”
한집에서 같이 살기 시작하면서 세스는 알렉산더 랜스키가 얼마나 규격 외의 사람인지 새삼 깨닫는 중이었다.
“그랬지.”
아주 의외의 것을 할 수 있었고, 또 상식적인 일은 의외로 하지 못했다. 발자국 소리를 죽이고 남의 등 뒤로 다가오는 일 같은 걸 굉장히 잘했고, 쓰레기통에 쓰레기를 버리는 일 같은 데에는 젬병이었다. 가끔은 바닥에 쓰레기가 떨어지면 저절로 사라진다고 믿는 게 아닌가 싶었다.
“왜 그러는 거야. 놀라잖아.”
“왜냐면,”
알렉산더 랜스키가 둥그런 뒤통수에 입술을 비비며 웃음기를 섞어 속삭였다.
“네가 놀라니까.”
세스의 목덜미와 귓불에 홍조가 피어났다.
“놀라니까 하지 말라는 건데.”
“놀라니까 하는 거야.”
“왜 사람을 놀라게 하는데.”
“모르는 척하긴.”
알렉산더 랜스키가 귓바퀴를 장난스럽게 깨물었다.
“놀라면 네가 엄청 귀엽게 굴잖아.”
“안 그래. 그냥 놀라는 거야.”
“일일이 놀라니까 귀엽다고.”
그리고 그는, 사실 별로 믿기지는 않았지만, 사소한 일에 일일이 의미를 부여하는 편이었다.
“놀라게 하니까 놀라는 거야.”
“매번 놀라면 매번 귀여운 게 당연하지.”
……예전에는 안 이랬던 것 같은데.
세스는 등 뒤에 알렉산더 랜스키를 매단 채 수건 몇 장을 마저 개서 서랍에 넣었다. 그사이 알렉산더 랜스키는 귓바퀴를 쪽쪽대다 목덜미를 핥아 대기 시작했다. 티셔츠 안쪽으로 들어온 손은 부지런히 양쪽 유두를 간질였다.
“아, 잠……,”
……깐. 오늘은 재워야 되는데.
삼 주간은 내내 이랬던 것 같았다. 둘 다 십 년 만의 크리스마스를 맞은 사람들처럼 들떠서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눈이 마주쳤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면 알몸이 돼서 뒤엉켜 있기 일쑤였다. 그렇게나 격하게 섹스를 하다 보면 체력이 닳아서 곯아떨어져야 할 것 같은데 둘 다 너무 들떠 있다 보니 오히려 더 잠을 못 잤다. 이전보다 식사는 더 잘 챙기고 있었지만 살이 조금 빠졌다. 알렉산더 랜스키도 마찬가지였다.
처음에는 뭘 생각하고 말 것도 없이 그저 곁에 있는 시간에 열중했지만, 삼 주나 지났으니 이젠 슬슬 다른 생활도 챙겨야 되지 않을까 싶었다.
“저기, 그만하면 안 돼?”
무엇보다 세스는 케네스 로완의 당부가 마음에 걸렸다.
그는 알렉산더 랜스키가 오래도록 불면증을 앓아 왔고, 혹시 잠든 와중에 예기치 않은 행동을 할 수도 있으니 잘 살펴봐야 한다고 했다.
지난 삼 주간 같은 침대를 쓰며 세스가 알게 된 건 저가 눈을 떴을 때는 알렉산더 랜스키도 항상 눈을 뜨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럼 대체 언제 잔다는 거야.
오늘은 꼭 자는 걸 확인해야 해.
“뭘 그만둬?”
알렉산더 랜스키가 싱긋 웃으며 손가락으로 굴리던 한쪽 유두를 잡아 살짝 비틀었다. 짜릿한 자극에 세스가 등을 움찔거렸다. 학습 효과란 놀라워서 자극이 시작되면 몸은 그 이상을 기대하며 달아올랐다.
“지금, 흣, 하는 거.”
“이걸 왜?”
“하아……. 자야 하니까.”
“아,”
알렉산더 랜스키가 뒷목을 지분대던 입술을 멈췄다.
“갑자기 왜 수건을 개고 있나 했더니 수면제 찾던 중이었어?”
사실은 수면제를 찾아서 그에게 먹이려고 했다. 너무 안 자는 것 같아 보여서.
셔츠 안으로 들어온 손이 쑥 빠져나갔다. 알렉산더 랜스키는 세스의 어깨를 붙잡아 그를 돌려 세웠다.
방금 전까지 세스처럼 열이 오르던 눈이 그새 진지해졌다.
“잠이 안 와? 못 자겠어?”
세스는 일단 알렉산더 랜스키의 반응을 먼저 생각했다.
로완이 따로 귀띔을 한 걸 보면 그는 제 상태를 별로 말하고 싶지 않은 건지도 몰랐다.
숨기려고 하는 건데 내가 안다고 하면 싫어하려나.
아무래도 그러지 않을까 싶었다. 자신도 그에게 별로 말하고 싶지 않은 이야기 정도는 있었으니까.
“아니면 섹스가 싫다는 소린가?”
알렉산더 랜스키가 심각한 얼굴로 세스의 손을 붙들었다. 손가락 끝을 잡은 그가 손가락 두 번째 마디에 입술을 붙이며 나직해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내가 너무 심하게 해 댔어?”
……심하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 아닐까.
처음 이틀 정도를 빼고 삼 주간은 섹스한 기억밖에 없는 기분이었다.
“조금은 그렇지.”
“…….”
가만히 있는 얼굴에서 눈썹만 홱 모양이 변하는 게 신기했다.
“하면 해 뜰 때까지 하고 그러잖아. 오늘은 그러지 말고 자자.”
“흠.”
미간이 못마땅하게 구겨졌다.
그 표정이 걱정이나 이해로 보이는 건 아마 자신이 그를 너무 사랑해서 그럴 것이다.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할 때 아프고 그랬어? 상처가 생겼나? ……그랬다면 말을 했을 텐데.”
사랑하니까 드러내고 싶지 않은 부분은 저에게도 있었다. 지난 삼 주간 섹스한 기억을 제외하고 가장 많은 기억은 빈번한 검진이었다. 실내에서 곧장 나갈 수 있는 외부에 헬기 착륙 시설이 갖춰진 어퍼 미드 타운의 펜트하우스에 살면 의사가 왕진을 왔다. 그리고 몹시 정중하고 신중한 손길로 남의 다리 사이를 꼼꼼하게도 진찰한 다음 환자가 민망해하는 사이 소리 없이 사라졌다.
세스는 그 의사가 티모시 맥케이가 아니라는 점에 조금 감사했다. 그였다면 두 번 다신 검진을 받지 않겠다고 고집을 피우다 기어코 싸웠을지도 몰랐다.
“그건 아냐.”
“아니어야지. 내가 얼마나 신경을 쓰는데.”
알렉산더 랜스키가 세스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끌어와 이마에 입술을 붙였다. 미련처럼 질척대는 키스였다.
“마음에는 안 들지만 하기 싫다면 봐줄게. 필요한 약은 수면제가 확실해?”
하기 싫은 건 아니고.
“……응.”
먹으려던 게 아니라 먹이려던 것이었지만 세스는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한발 물러서는 것처럼 자신도 그가 넘어오지 않길 바라는 영역으로는 가지 않는 게 맞았다.
알렉산더 랜스키와 사는 건 존 리든과 살 때와 몹시 달랐다.
세스가 몇 년간 존 리든과 살면서 그에 관해 아는 사실은 직장과 출퇴근 시간 정도였다. 세스는 그가 귀찮을 일이 없도록 만드는 데 온 신경을 쏟았다. 아침에 먹은 시리얼 그릇과 스푼을 바로 닦아서 쓴 적도 없는 것처럼 도로 제자리에 넣어 두는 식이었다. 항상 집 안을 더럽히지 않으려고 애를 썼고, 숨소리 외에는 별다른 소음도 만들지 않았다.
존 리든은 끝내 알아채지 못했지만 그건 세스가 그에게 지녔던 애정이었다.
하지만 알렉산더 랜스키와 사는 건 정반대였다. 애초에 둘 다 집 안에만 있느라 조용히 있는 건 아무런 의미도 없을뿐더러 알렉산더 랜스키는 세스가 움직일 때마다 집요하게 동선을 뒤쫓았다. 그리고 세스는 그와 관계된 모든 일을 전부 기억하려고 애를 썼다. 의도하는 게 아니라 저도 모르게 그러고 있었다.
“나가자. 약 줄게.”
“응.”
세스는 몸을 돌려 침실 쪽으로 나가려 했다.
“잠깐.”
그런데 알렉산더 랜스키가 허리를 붙들어 훌쩍 들어 올렸다.
“어?”
잠깐 놀라서 있자 그가 세스를 제 발등 위에 올라서게 했다.
그러자니 눈높이가 딱 맞아서 신기했다.
“왜 이래?”
“마음에 안 들어서.”
“뭐가?”
“모르는 척하지 마.”
그가 턱을 끌어당겨 입을 맞추게 했다. 고개를 젖혀야 하는 평소와는 달리 입술이 바로 닿아 그것도 신기했다. 세스는 그의 발등에 올라설 때의 자세를 기억에 담았다.
세스가 마주 닿은 입술의 감촉을 헤아리며 눈을 감자 알렉산더 랜스키가 입 속으로 혀를 미끄러트렸다. 입 안을 채우는 살덩이의 감촉이 황홀했다. 세스가 두 팔을 들어 알렉산더 랜스키의 목을 감았다. 그가 걸음을 내딛자 몸이 함께 움직였다.
그들은 키스를 하며, 동시에 걸었다.
세스는 이 자세와 속도도 함께 기억했다.
“하아…… 또 시간을 잘못 맞춘 모양이네요.”
침실을 나와 거실 반대편으로 향해 가던 중이었다. 세스는 등 뒤에서 들려오는 케네스 로완의 목소리를 듣고 천천히 입술을 뗐다.
“응.”
대답은 알렉산더 랜스키가 했다. 그는 뒤로 돌아가는 세스의 머리를 붙들어 한 번 더 소리 나게 입을 맞춘 다음 케네스 로완을 향해 노골적으로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그만 좀 오지 그래. 부르지도 않았는데. 그렇게 한가해?”
“하아…….”
로완이 한숨을 쉬었다.
제 일을 대신하라며 대표직을 떠맡겨 놓은 사람에게 예의상으로도 저러면 안 될 것 같았지만, 알렉산더 랜스키가 별로 상식적인 인간이 아니라는 건 이미 너무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게다가 정말로 그가 올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으면 현관문 옆에 늘어놓은 경호원 아무한테나 미리 얘기를 해 두면 될 일이었다.
“그렇게 나올 필요 없잖아요, 알렉스. 그리고 한가해서 온 게 아니라 일부러 시간을 내서 온 거라고요.”
“그러니까 왜 왔냐고.”
“닥터에게 부탁을 받아서요. 두 사람 다 상담을 삼 주나 거르지 않았습니까. 지난번 제가 왔을 때 이번 주는 상담 잊지 않겠다고 하지 않았어요?”
“아…… 그랬나?”
케네스 로완이 살짝 짜증을 냈다.
“뭐가 그랬나입니까, 정말. 다른 사람 얘기처럼. 알렉스야 그렇다 치고 그린 씨는 상담을 거를 시기가 아니잖아요.”
세스가 고개를 돌려 로완에게 변명을 하려고 했다.
“병원은 옮기는 게 나을 것 같,”
알렉산더 랜스키가 다시 재빨리 세스의 머리를 돌렸다.
초옥, 부드럽게 입술을 빠는 소리가 다정하고도 부적절했다.
“알렉스?”
“알,”
“방금 되게 예뻐서.”
알렉산더 랜스키의 대답에 그를 부르던 세스와 로완이 각자 다른 곳을 쳐다보았다. 다행히 로완은 알렉산더 랜스키가 불시에 툭툭 던져 주는 당황에 익숙한 편이었다.
“……뭐, 이해는 합니다. 십 년 만에 만났으니 오죽하겠어요. 하지만 그렇다고 걸을 때도 꼭 그렇게 붙어 있어야 하는 겁니까……. 그거 발등에 무리는 안 갑니까?”
“아,”
세스가 알렉산더 랜스키를 붙들었던 손을 놓았다. 제 발등에서 내려서는 세스를 알렉산더 랜스키가 아쉬운 듯 바라보았지만 억지로 계속 잡아 두진 않았다.
세스가 하는 일을 말리지 않는 건 그가 애정을 드러내는 방법 중 하나였다. 방금 전처럼 흐트러진 수건을 다시 개어 둔다거나, 어쩌다 떨어진 쓰레기를 얌전히 주워 쓰레기통에 잘 집어넣는 일 같은 걸 마칠 때까지 기다렸다. 십 년 전과 다르다면 다른 점이었는데, 종종 세스도 느낄 수 있었다. 말로 하진 않았지만 서로 어떤 점을 애쓰고 있는지 하나씩 천천히 알아 가는 중이었다.
“무리 안 가. 상담 받으라는 게 용건의 전부야?”
“설마요.”
“그럼?”
“벌써 삼 주나 됐잖아요. 아, 그러고 보니 당황해서 인사도 못 하고 있었네요. 잘 지냈어요, 그린 씨?”
갑자기 질문이 자신에게 돌아오자 세스가 눈을 한번 끔벅였다.
“……네. 그런 것 같아요. 로완 씨는요?”
“저는 아직 손이 불편한 데다 미친 듯이 바쁘다는 것 빼고는 괜찮습니다. 연봉이 엄청나게 올라서 어머니께서 몹시 기뻐하고 계세요. 그거 하나는 좋은 일이죠.”
케네스 로완은 친구라도 되는 것처럼 살뜰히 개인사를 늘어놓았다. 역시나 세스는 그의 접근법이 아직 낯설었다.
“손이 불편한 건 그때 벨체프의 마피아들이 저를 고문하면서 손가락을 하나씩 부러트려서 그렇고요. 이제야 말씀드리지만 그땐 정말 죄송했습니다, 그린 씨. 저는 절대 입을 열지 않으려고 했는데 그놈들이 어머니가 계신 곳을 알아 와서 협박하는 바람에…….”
안전가옥의 위치를 알린 게 로완이었지만 그렇다고 그를 비난할 수는 없었다. 꼭 그가 애처로운 눈짓을 하며 붕대를 칭칭 두른 오른손을 들어 보여서는 아니었다.
세스는 케네스 로완의 오른손을 차마 쳐다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미안할 일이 아닌 것 같은데요.”
“그럴 리가요. 그래서 어머니께서 음식을 보내셨어요. 제가 직접 들고 왔습니다. 손을 하나밖에 못 쓰니 어휴, 음식도 꽤 무겁더라고요.”
핑계도 이런 핑계가 없었다. 당분간 빈자리를 대신하는 것뿐이라고 해도 랜스키 인더스트리의 대표가 음식 배달을 할 만큼 한가한 직업은 아니었다.
“……쯧.”
알렉산더 랜스키는 세스의 머리통에 턱을 얹고 몹시 불만스러운 눈으로 케네스 로완을 쳐다보며 입 모양으로 말했다.
‘무슨 수작이야.’
로완이 그의 눈짓을 피해 세스를 쳐다보며 싱긋 웃었다.
“기왕 가져온 음식이니 저녁이라도 같이 들까요? 두 분 아직 식사 전이라고 보고받았습니다.”
세스가 또 눈을 끔벅했다. 물고기 같은 표정은 항우울제 복용량이 많이 줄어든 지금도 여전했다.
“그런 것도 보고를 하나요?”
“두 분 스케줄에 맞춰 고용인들의 스케줄이 정해지니까요.”
“아…….”
이 넓은 집이 늘 처음 봤을 때처럼 티끌 하나 없이 유지되는 이유였다. 정신없이 보냈던 삼 주간 몰랐던 일을 알게 된 세스가 뒤늦게 무안해 입을 다물었다.
알렉산더 랜스키가 로완을 노려보았다.
‘방해 말고 꺼져. 그런 얘길 왜 하는데.’
‘그래야 그린 씨가 미안해서 내 부탁을 거절하지 않을 거 아닙니까.’
눈짓으로 말을 마친 케네스 로완이 세스를 향해 사람 좋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주방으로 가죠. 음식은 그냥 놔두라고 했어요. 고용인들이 차려 놓으면 어머니가 보내온 음식이라는 실감이 나지 않을까 봐서요. 생색을 좀 내고 싶거든요.”
지난 삼 주간 케네스 로완은 적어도 사흘에 한 번씩은 찾아왔다. 그러나 세스와 얼굴을 맞대고 얘기를 나눈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대부분 옷을 제대로 입지 않고 있다는 이유였는데 원래도 잔걱정이 많은 그는 그럴수록 세스를 자신이 챙겨야겠다는 의무감으로 안달이 났다.
케네스 로완이 세스에게 주방을 손짓으로 가리켰다.
“그럼 저쪽으로…… 아,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주방이 어딘지는 알고 계시죠? 알렉스가 평소에 침실에 가둬 뒀을까 봐 걱정하는 건 아니고요…… 진짜 아니죠?”
세스는 불만스러운 얼굴로 팔짱을 끼고 선 알렉산더 랜스키와 붕대 감은 손으로 주방을 계속 가리키고 있는 케네스 로완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주방 쪽으로 걸음을 뗐다.
“그런 건 아니에요.”
“아이고, 다행입니다. 그래요. 아무리 알렉스라고 해도 그렇게까진 안 했겠죠.”
“그런데 주방을 가 보는 건 처음이긴 해요.”
“……네?”
“음식은 알렉스가 방으로 가져다주는 경우가 많아서요.”
“…….”
그건 가둬 두는 게 맞는 것 같은데요, 그린 씨…….
케네스 로완이 그런 의미를 담은 복잡한 눈빛으로 세스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의 뒤에서 내키지 않는 걸음으로 뒤따라오던 알렉산더 랜스키가 나란히 선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그만 쳐다봐.”
로완에게 하는 말이었다. 그가 헛웃음을 흘렸다.
“……알렉스, 사람을 가둬 두는 건 범죄입니다. 아시잖아요.”
“스토킹도 범죄지. 그만 쳐다보고, 참견도 그만해. 이 녀석한테 관심 갖지 마. 안 그래도 예쁜 거 아니까.”
“스토킹은 뭐가 스토킹이라는 겁니까. 이 불편한 몸으로 70세가 다 되어 가는 노모께서 손수 만드신 음식을 받아서 가져온 사람한테.”
“참견이 과하잖아.”
“과한 게 아니라 최소한인 거겠죠. 저는 그린 씨 얼굴을 보는 게 삼 주 만에 처음이란 말입니다. 비록 제가 피도 눈물도 없는 마피아에게 붙들려 온갖 고문을 당하다 안전가옥의 위치를 발설하긴 했지만 두 분이 제 병문안이라도 왔다면 한번 볼 수 있었겠네요.”
“병문안은 무슨. 입원도 안 했으면서.”
수술도 안 했다. 동유럽 마피아가 피도 눈물도 없긴 했지만 로완에게는 유독 마음이 약해졌는지 똑똑, 아주 깔끔하게 한 번씩만 부러트렸다고 했다.
“카드라도 보낼 수 있는 거 아닙니까? 내내 기다렸다고요. 저뿐만 아니라 70이 다 되어 가는 노모께서도요.”
케네스 로완의 모친은 올해 59세였다. 노모라는 말을 들으면 당장 아들 등짝을 두들겨 팰 만큼 젊고 건강한 나이였다.
“내일 보내라고 할게.”
“네? 아, 됐어요. 이제 와서 무슨. 다 나아 가는 마당에.”
내내 얘기를 듣고만 있던 세스가 고개를 돌려 붕대 감은 손을 쳐다보았다.
“다 나았어요?”
“삼 주나 됐으니……, 엇, 아니, 완전히 다 나은 건 아니고,”
케네스 로완이 순간 당황해 말을 헛삼키다가 허둥지둥 주방으로 달려갔다.
“제가 먼저 가서 차리고 있겠습니다!”
이 큰 집은 주방까지 동선도 꽤 길었다. 세스가 케네스 로완의 뒷모습을 응시한 채 옆을 더듬어 알렉산더 랜스키의 손을 찾아 쥐었다.
“다 나아서 다행이다. 나는 그때 로완 씨가 죽은 줄 알았어.”
알렉산더 랜스키가 소리 내어 웃었다. 그가 세스의 정수리에 입술을 파묻으며 작게 말했다.
“밥 먹으면서 그 얘기 꼭 해 줘.”
“죽은 줄 알았다는 말?”
“아니. 나아서 다행이라고. 로완은 못 들었잖아.”
“응. 알았어.”
알렉산더 랜스키는 이제 다친 손을 핑계 삼을 수 없게 된 케네스 로완이 어색하게 얼굴을 구기는 모습을 상상하며 계속 웃었다.
그러는 동안 세스는 그가 웃는 소리가 머릿속으로 스며드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기억하려고 애쓸 것도 없이 지금의 웃음도 전부 몸속에 쌓였다.
* * *
주방에는 케네스 로완 말고도 예고 없이 찾아온 사람이 한 명 더 있었다.
“안녕하세요, 그린 씨. 잘 지냈어요?”
그 역시 삼 주 만에 처음으로 마주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케네스 로완과는 달리 세스는 그가 별로 달갑지 않았다.
“……네.”
짧은 답을 끝으로 눈을 마주치는 일도 없자 닥터 맥케이가 손에 들고 있던 코르크 오프너를 붕붕 휘두르며 서운함을 토로했다.
“아니, 너무하는 거 아닙니까. 상담을 삼 주나 빼먹은 환자를 일부러 집까지 찾아오는 이런 헌신적인 의사가 흔한 것도 아닌데!”
알렉산더 랜스키가 세스에게 의자를 빼 주며 코웃음을 쳤고, 케네스 로완이 점잖게 맥케이를 말렸다.
“그건 좀 내려놓고 말해. 위험하잖아.”
“아……, 그러게.”
두 사람은 친구 같은 말투를 썼다. 옥스퍼드 시절 같은 칼리지 출신이라는 설명이 뒤따랐다.
“너도?”
세스는 식탁에 나란히 앉아 세 남자가 분주하게 주방을 오가며 음식을 차리는 것을 구경했다. 다들 손이 재빨라 세스가 끼어들 틈이 없었다.
“뭐가?”
알렉산더 랜스키는 세스의 앞에 그릇과 커트러리를 놓아 주다 말고 드러나는 옆머리에 키스했다.
“너도 같이 있었냐고. 두 사람처럼.”
“처음에만. 나중에 학교를 옮겼어.”
“왜?”
“전공을 바꾸느라.”
“왜 바꿨어?”
“경영학이 재미없어서.”
그가 재빨리 몸을 움직여 반대편 관자놀이에도 입술을 붙였다.
그걸 보고 있던 티모시 맥케이가 대놓고 혀를 찼다.
“쯧쯧……. 저건 강박증이야. 키스할 때도 비대칭을 못 참는 거지. 미완성인 기분이 드니까. 키스 마크를 남겨도 양쪽에 똑같이 찍어 놓을걸.”
알렉산더 랜스키가 맥케이를 향해 이를 드러냈다.
“너 잘렸다고 못 들었어? 세스가 너는 못 믿겠대.”
맥케이가 막 새로 뜯으려던 와인병을 내려놓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뭐라고? 어째서!”
“무능하니까.”
알렉산더 랜스키가 보란 듯 이번에는 세스의 이마 정중앙에 키스를 했다.
“그리고 강박증이 아니라 아까운 거야. 한 군데만 남겨 놓을 이유가 뭐야.”
“와…… 뻔뻔하긴. 정신과 의사 앞에서. 그게 강박증이다, 랜스키.”
“그럼 그런 걸로 하든가.”
“뭐? 이상한데. 왜 이리 쉽게 받아들여? 그렇게 겸허한 성격 아니잖아.”
“세스가 이유라면 억울할 게 없으니까.”
눈에 보이는 데 전부 키스하려고 안달이 나는 증세를 강박증이라고 한다면 그것도 틀린 얘기는 아닐 것이다. 티모시 맥케이는 이겼지만 하나도 안 기쁘다는 얼굴로 코르크 마개에 뾰족한 오프너 끝을 퍽퍽 찔러 댔다.
오리 구이를 오븐에 넣고 데우던 케네스 로완이 맥케이를 위로했다.
“아, 너는 이런 거 처음 보겠다. 괜찮아. 언젠가는 적응할 수 있게 돼.”
“……의사가 그러면 안 되는 거 아냐?”
“고칠 수도 없잖아.”
“…….”
이러다가 알렉산더 랜스키가 입술에도 키스할 것 같아 세스가 슬쩍 어깨를 물렸다. 두 사람 모두 친한 사이고 믿을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어도 아직은 어색했다.
시간이 지나면 차츰 나아질 것이다. 알렉산더 랜스키에 대해 아는 게 늘어 가는 만큼 두 사람들에게도 익숙해질 테니까.
세스는 조급하게 어색함을 지우려는 노력 대신 그냥 제 자리에 있기로 했다. 말로 하진 않았지만 알렉산더 랜스키는 세스가 짓는 표정을 보고 대강을 짐작했다.
그가 두 사람을 거드는 대신 그대로 세스의 옆자리에 앉았다.
“아직 멀었어? 떠들었더니 배고파.”
빈 접시 하나를 덜렁 놓고는 자리에 앉은 그를 두 친구가 노려보았다.
“그럼 와서 좀 거들든지.”
“맞아요. 그러다 벌받아요, 알렉스. 나는 손에 붕대를 감고도 일하는데.”
알렉산더 랜스키가 세스를 보며 씩 웃었다.
“나는 강박증 환자잖아. 다른 일은 못 해.”
티모시 맥케이가 입을 딱 벌렸다.
“와……. 이 정도일 줄은.”
케네스 로완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말 꺼낸 게 잘못이었네.”
세 사람을 한 번씩 쳐다보던 세스가 식탁 의자를 뒤로 빼며 말했다.
“그럼 내가 할게요.”
알렉산더 랜스키가 말리지 않아도 되는 일이었다. 로완과 맥케이가 재빨리 고개를 양옆으로 흔들었다.
“그린 씨는 앉아 계세요. 주방에 와 본 것도 처음이라고 했잖아요.”
“맞아요. 랜스키의 강박증 핑계보다야 그린 씨 쪽이 더…… 잠깐, 뭐라고? 주방을 처음 와 봐?”
“응. 알렉스가 내내 침실에 가둬 놓았던 모양이야.”
맥케이가 알렉산더 랜스키에게 와인병으로 삿대질을 했다.
“이 범죄자 새끼. 너 그러다 언젠간 진짜 감옥 간다.”
알렉산더 랜스키가 코웃음을 쳤다.
“가둬 놓긴 누가?”
“거짓말하지 마. 안 속아.”
세스가 거들었다.
“가둬 놓은 적 없어요.”
티모시 맥케이가 걱정과 공감을 가득 담아 세스를 안타깝게 응시했다.
“아직은 잘 모를 수도 있어요, 그린 씨. 하지만 그렇다고 좌절하면 안 됩니다. 그린 씨는 아직 젊고 더 건강하고 의욕적인 삶을 살 자격이 있어요.”
“건강에는 별로 이상이 없는데요.”
로완이 소리쳤다.
“무슨 말이에요! 살이 빠진 게 내 눈에도 보이는데! 정말로 살이 빠졌어요, 그린 씨. 그때보다 더요.”
“그건 요새 잠을 잘 못 자서……,”
맥케이가 펄쩍 뛰었다.
“왜 잠을 못 자는데요? 야, 랜스키. 솔직히 말해 봐. 무슨 짓을 하는데 그린 씨한테 수면장애가 생겼는데. 그거 다 네 탓 아냐?”
띵!
오븐에서 오리 구이가 다 데워졌다는 신호를 보냈다. 맥케이가 오븐을 열자 맛있는 냄새가 주방을 가득 채웠다. 보글보글 끓고 있는 소스 냄새까지 어우러지자 기분 좋은 허기가 입가에 맴돌았다.
“아……. 약을 찾던 게 그래서였어?”
알렉산더 랜스키가 인상을 쓰고 묻자 세스가 평소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말을 하지 그랬어.”
“네가……,”
목소리가 작아지는 것을 알렉산더 랜스키가 재빠르게 눈치챘다. 그가 고개를 기울여 세스의 입에 귀를 가져갔다.
“내가 뭐?”
세스는 코끝을 간질이는 짙은 갈색머리가 살갗에 남기는 감촉을 기억했다.
“……너무 늦게까지 하고 그래서. 거의 아침에 자잖아.”
“아,”
잠시 생각에 잠기던 알렉산더 랜스키가 곧 해결책을 내놓았다.
“그럼 이제 낮부터 하면 되겠네. 밤에는 자게.”
케네스 로완과 티모시 맥케이가 그 부적절한 말을 들어 버렸다.
“와…… 뭐라는 거야. 낮에는 내내 섹스하고, 밤에는 자겠다고? 그럼 그동안은 반대로 했다는 거야? 너, 그린 씨가 우울증 환자라는 자각은 있냐?”
“그러지 말고 차라리 두 분이 운동을 같이해요. 트레이너 고용할까요?”
세스가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묵묵히 민망함을 피하는 동안 알렉산더 랜스키가 두 친구를 뻔뻔하게 마주했다.
“아직 삼 주밖에 안 됐잖아.”
“삼 주밖에라니! 내가 오죽하면 몰래 찾아왔겠냐!”
“맞아요. 삼 주나 된 거죠. 저도 그만 원래 업무에 복귀하고 싶습니다. 이사진하고 싸우는 건 알렉스 일이잖아요. 나한테 떠미는 건 그만하세요, 진짜.”
알렉산더 랜스키는 그 정도 불평에 흔들리지 않았다.
십 년의 공백을 채우려면 삼 주는 턱없이 모자랐다. 지금도 가끔씩 세스가 곁에 있다는 게 실감이 나지 않을 때가 있었다. 세스가 시야에 들어오지 않을 때면 꼼짝 없이 파도에 잠긴 기분이 들기도 했다. 그냥 잠깐, 물거품 같은 꿈을 꾼 게 아닌가 싶었다.
강박증이 아니더라도 이 정도면 뭔가 다른 병명을 붙여야 할 것 같기도 했다.
하여간 삼 주는 말도 안 되게 짧았다. 그에게도 세스에게도 그보다 훨씬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둘 다 그만 떠들고 먹을 거나 가져다주면 좋겠는데. 배고프다고 했잖아.”
알렉산더 랜스키가 포크 끝으로 식탁을 툭툭 두들겼다.
맥케이가 얼굴을 붉혔다. 화가 나서였다.
“너 그렇게 살다 벌받는다, 랜스키. 이 세상에는 카르마라는 게 있어.”
“맞아요. 자기 일을 남한테 떠미는 사람은 지옥에 가서 그 일을 백배로 해야 한다는 성경 구절이 어딘가에 있을 거예요.”
“너희 둘하고 같은 학교 졸업장을 받았다는 게 수치스러워졌어.”
알렉산더 랜스키가 앉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눈이 마주치자 그는 텅 비어 있던 아주 큰 공간을 부지런히 채우려는 사람처럼 세스의 어딘가에 키스를 했다. 이번에는 귓바퀴였다.
“배고프지? 잠깐 기다려.”
오븐으로 다가간 그가 케네스 로완이 데워 놓은 오리 구이를 접시에 담아 소스를 뿌렸다. 서브용 포크와 나이프를 꺼내 식탁으로 돌아가는 동작이 자연스러웠다.
“아니, 데운 건 내가 다 했는데!”
로완이 허둥지둥 나머지 요리들을 그릇에 담았다. 맥케이가 좀 전부터 반 이상 열지 못하고 있는 코르크 마개를 부랴부랴 뽑아 들었다.
꽤나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저녁 식사가 모두 차려졌다. 손님들을 초대한 적이 없는 집주인들과 막무가내로 찾아온 손님들이 함께하는 저녁은 끝날 때까지 소란했다.
세스는 그를 제외한 세 사람들이 입을 열면 튀어나오는 지난 십 년간의 이야기들을 차근차근 들어 모두 기억했다.
밤까지 시간은 넉넉히 남아 있었고 이야기는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아마 앞으로도 종종 두 사람이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초대 없이 찾아오는 일이 있을 것이다.
두 사람이 함께 살기로 한 새 집의 한쪽 유리 벽으로 차츰 밤으로 변해 가는 맨해튼의 야경이 번져 왔다. 별이 거의 보이지 않는 도심의 까만 밤하늘을 채운 것은 어제보다 선명한 반달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