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오늘도 어김없이 저녁 여덟 시가 찾아왔다.
세스는 등 뒤에 딱 달라붙어 날개뼈를 입술로 지분대는 알렉산더 랜스키를 그냥 놔둔 채 침대 밖으로 손을 뻗었다.
“뭐 필요해?”
“아니. 전화 때문에.”
“전화는 왜?”
“여덟 시잖아.”
“……쳇.”
매일 저녁 여덟 시는 존 리든에게 전화를 걸기로 약속한 시간이었다. 알렉산더 랜스키는 못마땅한 혓소리를 내면서도 세스를 끌어안은 팔을 풀진 않았다.
“그럼 해.”
그리고 세스도 놓아달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이미 존 리든과 한 약속에 대해서는 두 사람도 합의를 마쳤다. 알렉산더 랜스키는 세스가 전화를 하는 일에 상관하지 않고, 대신 세스는 그에게 통화 내용을 감추지 않기로 했다.
그사이 시계는 여덟 시 정각에서 일 분이 되었다. 일 분이 지나자마자 세스가 협탁을 더듬어 찾아 든 전화가 숨 가쁘게 울리기 시작했다.
“아…… 존이다.”
“참을성도 없는 새끼.”
대뜸 흉을 보는 그를 쳐다보며 세스가 피식 웃자 알렉산더 랜스키가 세스를 시트로 덮어 버렸다.
[여보세요? ……세스 그린? 전화 받은 거 맞아?]
“어, 응……. 잠깐, 알렉스가 장난을 쳐서…… 아, 잠깐.”
[장난? 나하고 통화하는 시간에 하필? 장난이 아니라 심술이겠지. 하여간 좀스러운 새끼.]
존 리든이 알렉산더 랜스키를 흉보자 중간에 낀 세스가 또 잠깐 웃었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세스는 두 사람이 서로를 싫어하는 게 별로 진심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다는 몰라도 자신이 리든에게 느끼는 미안함이나 자그마한 애정을 알렉산더 랜스키도 가지고 있지 않을까 싶었다. 존 리든이 뉴욕주 검사장에 출마하겠다고 하면 알렉산더 랜스키는 가장 큰 후원금을 기부할지도 몰랐다.
“그런데 왜 오늘은 먼저 전화했어? 내가 하기로 했잖아.”
세스가 질문을 하자 수화기 너머의 존 리든이 소리 내어 웃었다.
[네가 나에 대해 뭔가 묻는다는 게 감격스러워. 이젠 막 궁금하기도 하고 그래?]
유감스럽게도 알렉산더 랜스키는 통화가 들릴 만큼 가까이 있었다. 그가 세스의 손에서 휴대전화를 가져가 침대 위에 내려놓고 스피커 버튼을 눌렀다.
“감격스러워하지 마. 남의 애인한테.”
[하, 누가 개새끼 아니랄까 봐 귀는 좋아서. 그걸 좀스럽게 옆에서 또 듣고 있냐?]
“미련도 그만 떨고. 널 위해서 하는 소리니까.”
[그만 짖어라, 응? 그렇잖아도 나는 개새끼가 싫단 말이다.]
“심각하면 그것도 병이니까 치료받든지. 치료비는 내줄 테니.”
[하루라도 돈 자랑을 안 하면 그 돈이 썩기라도 하냐? 닥치고 다시 세스 바꿔.]
“어차피 들리니까 그냥 말해.”
[아, 짜증나.]
존 리든이 투덜거리자 세스가 전화기를 들어 스피커를 껐다. 알렉산더 랜스키가 세스를 향해 콧등을 구기자 세스가 웃는 얼굴로 주름 잡힌 콧등을 매만졌다.
“이제 아냐. 얘기해.”
[스피커 껐어?]
“응.”
[몇 번을 말하지만 랜스키가 부리는 억지를 다 받아 줄 필요 없어. 같이 살아 줄 필요도 없고. 짜증나면 참지 말고 나와 버려.]
세스는 알았다는 말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존 리든의 눈에도 보이는 건 아니었지만 그는 어떻게든 세스가 보내는 신호를 알아들은 것 같았다.
[사진 배우는 건 어때? 재미있어?]
“이제 막 시작했어. 아직은 잘 몰라.”
[랜스키는 아직도 네가 뭐 배우는 거에 좀스럽게 싫은 소리 하고 그래?]
“그렇지 않아.”
오히려 반대라고 해야 했다. 세스가 사진 전문학교에 등록한 뒤로 맨해튼의 펜트하우스에는 카메라 방이 따로 생겼다. 현존하는 디지털 카메라와 진작 생산이 중단된 필름 카메라까지 전부 모아 둔 게 아닌가 싶은 방이었는데, 정작 세스는 아직 입문자용 카메라 하나만 겨우 다루고 있었다.
“가끔 좀, 짜증나.”
세스가 묘하게 한숨을 쉬었다.
존 리든이 수화기 안에서 눈을 번뜩였고, 돌아서서 앉은 세스의 등을 손가락으로 둥글게 간질이던 알렉산더 랜스키가 당황해 입을 벌렸다.
“뭐가?”
[뭐가?]
세스가 슬쩍 고개를 돌려 알렉산더 랜스키를 한번 쳐다보더니 다시 시선을 피했다.
“나보다 카메라를 더 잘 다루는 것 같아.”
[누가?]
“누가?”
[아……. 랜스키가?]
정답이었다.
세스가 수화기를 귀에 붙인 채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알렉산더 랜스키가 시트 위를 기어와 세스의 허리에 팔을 감았다. 어리광을 피우듯 세스의 옆구리에 얼굴을 댄 그가 작게 중얼거렸다.
“그게 아니라 기계를 잘 다루는 거야. 기계공학이 전공이라고 말 안 했어?”
“뭐?”
[뭐가 뭐야?]
처음 듣는 얘기에 세스가 눈을 끔벅거렸다. 오랜만에 왼쪽 눈썹이 조금 떨렸다.
“그랬…… 어?”
“그게 놀라워?”
“어, 좀.”
수화기 안에서 존 리든이 벌컥 화를 냈다.
[나 빼고 둘이 무슨 얘기 중이야! 지금 나하고 통화하는 시간인데.]
“아…… 미안. 알렉스가 기계공학을 전공했다는 얘기를 해서.”
[뭐? 랜스키가 기계공학? 뭐가 그래?]
“응. 이상한 거 맞지?”
[진짜 이상해.]
이번에는 알렉산더 랜스키가 짜증을 냈다.
“뭐가 이상한데. 왜 나 빼고 둘이서 똑같은 소리야.”
세스가 한쪽 팔을 들어 제 옆구리에 찰싹 들러붙어 있는 알렉산더 랜스키를 내려다보았다.
“이상해.”
“안 이상해.”
“이상한데.”
“안 이상하다니까.”
이번에는 다시 존 리든이 화를 낼 차례였다.
[그 새끼는 왜 하필 그렇게 이상한 얘기를 이 시간에 해서 통화를 방해해? 랜스키 좀 바꿔 봐. 아무래도 한마디 해야겠어.]
“미안해. 이젠 알렉스 얘기 안 할게.”
[아냐. 기왕 열받았으니까 한마디 하겠어. 다시는 방해하지 말라고 해야지. 바꿔 줘.]
세스가 난처한 눈으로 알렉산더 랜스키에게 물었다.
“존이 바꿔 달라는데……. 너한테 화낼 거래.”
알렉산더 랜스키가 피식 웃었다.
“전화에 대고 화내면 뭐 어쩔 건데. 이리 줘 봐.”
수화기를 넘겨받은 그가 세스의 옆구리에 덥석 입을 맞추고는 민첩하게 몸을 일으켰다.
“뭐야, 리든.”
하지만 존 리든의 볼일은 따로 있었다.
[할 말 있다, 새끼야. 세스 옆에 있어?]
“당연한 건 묻지 마.”
[그럼 얘기 안 들리게 네가 잘해. 오늘 루이 랜스키한테 누가 다녀갔어.]
갑자기 화제를 바꾼 존 리든이나, 그런 표시를 내지 않는 알렉산더 랜스키나 표정들이 비슷했다. 아무 일도 없다는 식이었다.
“너는 이사 생각 없어? 그 아파트 나올 때도 됐잖아. 방도 두 개고.”
[뭐라는 거야. 세스 방은 계속 비워 둘 건데. 변호사나 마피아는 아니고, 방명록에 남긴 이름을 보니까 기자 같아. 뭔가 캐내려고 하는 거 같은데, 그게 루이 랜스키에 관한 건 아니지 않겠어? 알아 두라고.]
“세스 방이 거기 왜 있어야 하는데. 자고 올 일 없으니까 그냥 이사 가.”
[기자들 입 다물게 만드는 건 네 특기잖아. 잘해 봐. 괜히 세스한테 불똥 튀는 일 없게 해라. 너도 알고 있겠지만 세스가 돌아온다고 하면 이번에는 절대 안 돌려보내.]
“망상은. 병원부터 가 봐. 알아들었으면 끊는다.”
[기자 이름은 캠벨이야. 피어스 캠벨.]
“미련 떨지 말래도.”
[개새끼.]
툭. 두 사람이 거의 동시에 전화를 끊었다.
“어? 끊었어?”
알렉산더 랜스키에게 손을 내밀던 세스가 뜬금없다는 얼굴을 했다.
“응. 할 말 더 있었어?”
“그건 아닌데. 리든이 그냥 끊었어?”
오늘은 사랑한다는 말을 아직 하지 않았다. 알렉산더 랜스키를 괴롭히듯 그 말을 꼭 고집하던 존 리든이 그대로 전화를 끊다니 좀 의외였다.
“그러게. 그 개새끼는 만날 듣다 보니 배가 불렀나. 주제도 모르긴.”
알렉산더 랜스키가 혀를 차면서 세스를 끌어안았다. 세스가 제 가슴팍에 파묻힌 머리를 내려다보다 손을 들어 쓰다듬기 시작했다.
“기분 나빴어?”
“별로. 이젠 적응했어.”
“리든한테 욕했잖아.”
“그거야 만날 하는 짓이고.”
맨 살갗에 대고 그가 웃어 대자 뜨겁고 습한 진동이 번져 왔다.
“배 안 고파? 뭐 먹을까?”
잠시 고민하던 세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먹었던 미트볼 만들어 줘.”
“알았어. 다른 건?”
“그거면 됐어.”
“그럼 씻고 옷 입어. 나는 먼저 나가서 만들고 있을게. 혼자 씻게 놔두는 건 싫은데 내가 같이 들어가면 식사가 너무 늦어져.”
“응. 괜찮아.”
세스가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는 짧은 시간 동안 알렉산더 랜스키는 맨 등에서부터 엉덩이 보조개까지 연달아 부지런히도 키스 자국을 남겼다.
세스가 욕실로 들어가는 것을 확인한 알렉산더 랜스키가 협탁 서랍을 열어 평소에는 잘 쓰지 않는 전화기를 켰다.
신호가 두 번 울리자 상대가 전화를 받았다. 알렉산더 랜스키가 얼굴 거죽 위로 흘러나오는 감정을 숨기지도 않고 말했다.
“피어스 캠벨.”
그가 짤막하게 이름 하나를 내뱉자 수화기 너머에서 소리 없는 당황이 들려왔다.
“내가 그 이름을 오늘 처음 듣는 이유를 말해 봐. 부검사장도 아는 일을.”
당황이 변명으로 이어졌다. 알렉산더 랜스키는 중간에 변명을 잘랐다.
“감시 붙여. 지금부터.”
대답은 빨랐다.
“세스는 절대 모르게 하고.”
한마디 덧붙인 알렉산더 랜스키가 그대로 전화를 끊어 다시 서랍에 넣었다.
맨몸을 일으킨 그가 가운을 걸쳤다. 아무 일 없는 듯 전화를 걸 때의 표정이 사라진 얼굴이 미트볼 레시피를 중얼대기 시작했다.
* * *
밀라노에 본점이 있는 사진 전문학교는 맨해튼 내에서도 꽤 평판이 좋았다. 오히려 등록금만 잘 내면 된다는 유럽에 비해 뉴욕 지점은 입학 절차가 깐깐하다는 말도 있었다. 고등학교 졸업장도 없는 세스가 입학할 수 있었던 것은 운이 좋아서가 아니라 애인이 알렉산더 랜스키라서였다.
하여간 세스는 일주일에 세 번 있는 수업을 따라가는 데 조금 애를 먹고 있었다. 초보자 코스인데도 벌써 사진 관련 지식이 상당한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조용히 강의실에 들어와 맨 뒷자리에 앉아 있다가 질문 한 번 없이 수업을 마치고 나갈 때마다 세스는 가끔씩 일로인에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오늘 수업이 모두 끝났다.
세스는 여느 때처럼 조용히 일어나 가방을 챙겨 들고 강의실을 빠져나갔다.
시간은 아직 이른 오후였고, 가을의 문턱에 들어선 맨해튼 섬은 유달리 청명한 계절감을 드러냈다. 세스는 이러다 알렉산더 랜스키가 사 준 수많은 카메라들을 제대로 한번 써 보지도 못하겠다는 걱정을 하며 길 건너편에 있는 자그마한 유기농 카페로 걸음을 옮겼다.
수업이 끝난 뒤 이곳에서 커피를 한잔 마시고, 그날 배운 내용을 훑어본 뒤 집으로 돌아가는 게 세스의 요즘 일과였다.
“아, 위스타드가 쓴 책이네요. 혹시 리드베리 학생이에요?”
세스가 탁자 위에 꺼내 든 ‘카메라의 구조와 이해’라는 책을 본 옆자리 누군가가 알은척을 했다.
세스는 마찬가지로 그쪽 탁자에 놓인 카메라와 반쯤 마신 라테를 발견했다.
“그런데요.”
“반갑네요. 나는 졸업생.”
세스는 낯선 사람을 상대하는 법에 여전히 낯선 터라 그냥 고개만 한번 끄덕였다.
“그 책 되게 거지같지 않아요? 카메라의 이해라면서 정작 사진 찍는 법에 대한 얘기는 하나도 없고 순 기계 얘기뿐이잖아요. 2차 대전 이후의 기계 역사서도 아니고.”
그 비슷한 생각을 했던 터라 이번에도 고개를 끄덕였다.
불쑥 시작되었던 대화가 거기서 끊겼다.
세스는 쌀쌀한 가을바람에 벌써 식어 가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책을 펼쳤다. 낯선 용어들과 복잡한 카메라 내부 그림이 춤을 추는 것 같았다.
“그런데 사진은 왜 공부해요?”
리드베리의 졸업생은 한가함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 같았다.
“……찍고 싶어서요.”
“뭐를?”
“…….”
거기까진 생각을 안 해 봤다.
사실 사진을 찍고 싶다는 생각도 막연한 충동과 비슷한 것이었다. 롱 아일랜드의 방공호 거실에 걸린 하프 문 베이의 사진을 봤을 때 불쑥 치솟아 오른 순간의 감동이 여전히 지워지지 않은 것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알렉산더 랜스키를 사랑하는 것 외에 뭔가 하고 싶은 일을 꼽으라고 한다면, 그렇게 제 눈에 아름답게 보이는 광경을 찍어서 남기는 일이었다. 가능하다면 찍어서 보여 주고 싶었다. 네가 처음으로 아름다운 세상을 보여 준 것처럼 나 역시 뭔가를 보여 주고 싶다고.
아마도 그게 전부일 것이다. 그래도 세스는 지금껏 꽤 열심이었다.
“바다.”
“바다?”
아직까지 그에게는 하프 문 베이를 찍은 얀 터낸토의 사진이 가장 아름다웠다.
“신기하네.”
세스는 왜냐고 되묻는 대신 고개를 들어 리드베리의 졸업생이라는 그를 응시했다.
어느샌가 그는 카메라를 손에 들고 있었다. 놀랄 틈도 없이 정면 얼굴이 찍혔다.
“사진을 찍는 것보다는 찍히는 게 더 어울리는 얼굴 같다는 생각 안 해 봤어요?”
“별로 찍히고 싶지 않은데요. 사진 지워 주세요.”
“아, 이거 필름 카메라예요. 아직 구분 못 하나 보네. 뭐, 학생이니까.”
그가 뻔뻔하게 웃으며 명함을 꺼내 세스의 책 사이에 끼웠다.
“이렇게 해요. 사흘 뒤에…… 아니, 내일 모레. 거기 적힌 전화번호로 전화하면 내가 인화까지 해서 줄게요.”
“…….”
세스의 미간이 구겨졌다. 남자를 다시 만나기는 싫었지만 제 사진을 남자가 갖고 있다는 것도 싫었다.
트라우마라고 부를 만큼 병적이진 않았지만 세스는 사진에 찍히는 게 썩 달갑지 않았다.
“전화하는 걸로 알게요.”
남자는 식은 라테를 훌쩍 마셔 버린 뒤 자리에서 일어섰다. 손때와 세월이 함께 묻은 남자의 카메라가 어깨에 매달려 대롱거렸다.
“…….”
세스는 흉터가 있는 눈썹을 찡그린 채 남자가 멋대로 꽂아 놓고 간 명함을 바라보았다. 프리랜서 사진가 겸 자유 기고가라는 글자 아래 피어스 캠벨이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 * *
“아, 집에 있었어? 오늘 어디 간다고 했잖아.”
집에 도착한 시간은 네 시 정도였다. 놀랍게도 알렉산더 랜스키가 집에 있었다. 아침에 볼일이 있다며 헬기를 타고 떠나는 걸 배웅했던 세스는 생각지도 못했던 이른 귀가가 새삼 반가웠다.
“멀리 가는 줄 알았는데.”
“급한 일이라고 했지 멀리 간다고는 안 했어.”
알렉산더 랜스키는 세스의 어깨에서 가방을 받아 들며 얼굴 여기저기에 키스했다. 왠지 존 리든이 그를 개새끼라고 부르는 이유를 알 것 같다는 생각이 조금 들었다.
“그런데 오늘 무슨 일 있었어?”
“아니. 왜?”
세스는 무슨 일이라는 데 카페에서 피어스 캠벨이라는 이름의 낯선 남자에게서 사진을 찍힌 일이 포함된다는 생각은 조금도 하지 못한 채 고개를 돌려 저도 그에게 키스했다.
“옷을 예쁘게 입어서.”
“응……?”
세스가 새삼스럽다는 듯 제 옷을 훑었다.
별 생각 없이 주워 입은 진즈와 니트가 전부인 차림새였다. 오늘은 좀 추운 것 같아서 모헤어로 된 머플러를 하나 더 둘렀다.
“저번에도 한번 입었잖아.”
세스는 늘 그렇듯이 제 모습에 별 관심이 없었다. 그나마 옷장에 걸어 두는 옷은 빠짐없이 한 번씩은 입어 보려는 게 다행이었다. 알렉산더 랜스키가 저를 위해 사 주는 것들을 성의 없이 방치해 두고 싶지 않다는 이유였다.
“알아. 그런데 오늘은 이상하게 더 예쁘네. 왜 그러지?”
“모르겠어.”
“요새 잘 먹여서 얼굴이 예뻐진 건가.”
“그런가……. 살이 좀 찐 것 같긴 해.”
“맞아. 벗겼을 때 더 보기 좋더라.”
두 사람이 비슷한 얼굴로 서로 고개를 끄덕였다. 세스는 그가 보기 좋다고 하니까 살을 좀 더 찌우도록 애써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어디 다녀온 거야?”
알렉산더 랜스키가 가방을 들지 않은 손으로 세스의 손을 쥐었다.
“보여 줄게.”
“음?”
“카메라 방에 놔뒀어.”
알렉산더 랜스키는 한쪽 면이 전부 유리로 된 거실을 지나 위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올라갔다. 아래층은 침실과 주방 등의 생활공간이었고, 아래층보다 천장이 한 뼘 정도 낮은 위층에는 서재와 카메라 방, 오디오실과 게스트 룸 같은 게 있었다.
“준비됐어?”
“응.”
알렉산더 랜스키가 웃는 얼굴로 손잡이를 돌려 방문을 열었다.
“이거야.”
“…….”
아침부터 그를 헬기까지 타게 만들었던 볼일치고는 조금 소박하다 싶은 상자 하나가 카메라 방 가운데를 차지한 책상 위에 얌전히 놓여 있었다.
“이게 뭔데?”
“열어 봐.”
알렉산더 랜스키가 손을 놓아주었다. 세스가 책상으로 다가가 처음 보는 상자를 열었다.
상자 안에 들어 있는 것은 작고 단단해 보이는 카메라였다. 가죽으로 만든 스트랩과 케이스는 모서리가 전부 닳아 있어서 세월을 짐작하게 했다. 셔터며 렌즈 캡도 손끝에 닳아 둥그스름하게 칠이 벗겨진 채였다.
렌즈 옆에 달린 조그마한 마운트 버튼을 보면 렌즈 교환식인 것 같았지만 다른 렌즈는 없었다. 카메라에 맞물린 납작한 단렌즈가 전부였다.
아마도 누군가가 오래도록 아껴 썼을 것 같은 카메라를 보고 있자니 묘하게 가슴이 울렁거렸다.
“어렵게 구했어. 여기저기 많이 떠돌았거든.”
세스가 선뜻 손을 대지 못하고 가만히 서 있기만 하자 알렉산더 랜스키가 카메라를 들어 세스의 손바닥에 직접 올려 주었다.
“여기, 보여?”
알렉산더 랜스키는 가죽 케이스의 밑면을 가리켰다. 시선이 손가락을 따라갔다.
“J. T.”
그리고 닳아서 희미해졌지만 여전히 읽을 수 있는 이니셜을 찾아냈다.
“영감이 쓰던 거야. 알제리 전쟁이 끝나고 사진을 찍으러 가고 싶었는데 여비가 없어서 카메라를 팔았대. 그때 영감이 가진 카메라가 두 대였는데, 개중에서 값을 더 잘 쳐 준다는 걸 팔았다고 했어. 그게 이거야.”
“너무…… 오래된 거잖아, 그럼.”
“그래서 찾는 데도 오래 걸렸어.”
“……나 주려고, 찾은 거야?”
“응.”
두 팔이 어깨를 감아 왔다. 이제는 익숙해진 안락함에 세스가 몸을 완전히 기댔다. 저절로 눈이 감겼다. 단단한 근육질 몸이 아니라 솜사탕에 감싸인 기분이었다. 십 년 전 누군가 자신에게 알렉산더 랜스키를 사랑하는 게 이런 것이라고 말했다면 한 조각도 믿지 않았을 것이다.
“고마워.”
“나도.”
십 년 전이라면 그를 사랑하는 게 날마다 정수리에 키스를 받는 거라는 생각은 한 번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 나는 아무것도 안 줬는데.”
“이런 걸로 버텼어.”
커다란 손이 뒤에서 제 이마를 쓸다 머리칼을 부드럽게 헝클였다.
“다시 만나기 전까지는 찾아야지, 하고. 할 일이 있으니까 좀 낫더라고. 결국 그 안에는 못 찾긴 했지만.”
“…….”
뒤통수에 닿은 입술이 느리게 움직였다. 세스는 그 느린 속도에 숨이 막히는 기분이었다. 카메라를 책상 위에 올려놓은 세스가 몸을 돌려 알렉산더 랜스키를 마주했다.
“나는 뭘 할 수 있어?”
“뭐가 하고 싶은데?”
“나도 뭐든 해 주고 싶어.”
알렉산더 랜스키가 세스의 머리를 둥글게 쓰다듬으며 씩 웃었다.
“아무거나. 다 좋아.”
“이젠 나도 돈 많다며. 다 해 줄 수 있어.”
“그래도 너보단 내가 많지.”
“내가 해 줄 수 있는 게 있을 거잖아.”
웃음이 짙어졌다.
“그런 거야 아주 많지.”
그가 세스를 훌쩍 들어 제 발등에 올렸다. 머리를 감싸 쥐고 입술을 붙이자 세스가 먼저 입을 벌리고 혀를 감아왔다.
불이 붙는 건 순간이었다.
카메라를 보면 필름부터 끼워 넣을 줄 알았는데.
알렉산더 랜스키는 손을 내려 진즈 위로 세스의 엉덩이를 쥐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키스부터 하네.
세스와 같이 살게 된 뒤로 거의 매 순간 하게 되는 생각이 있었다.
너는 대체, 어디까지 사랑스러워질 건데.
깊고 어두웠던 십 년의 공백 밑바닥에는 의심도 깔릴 만큼 깔려 있었다. 한때는 정신과 의사가 강박증이라 부르는 이 맹목적인 애정이 스스로를 속이는 허상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게 세스든 누구든 한 인간을 그렇게나 갈급할 수는 없지 않을까 싶었다.
이 감정은 십 년 동안 쌓아올린 자기방어일지도 몰랐고, 환각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마침내 손에 쥔 다음부터는 그 의심들이 우스울 지경이었다. 보고만 있어도 심장이 저 혼자 달리는 기분이었다. 달까지 달려간 다음 지구로 다시 되돌아와서도 여전히 팔팔할 것이다.
십 년 전 누군가가 그에게 사랑이 매일같이 상대에게 쏟아붓는 것이라고 했다면 들어 볼 생각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알았다. 사랑은 쏟아붓는 게 맞았다. 그렇지 않으면 매 순간 펄펄 뛰는 심장에서 쏟아져 나오는 것들을 도무지 감당할 수가 없을 테니까.
“키스만 하려고 했는데.”
잠깐 입술이 떨어지는 틈을 타서 알렉산더 랜스키가 속삭였다. 잔뜩 젖은 입술에는 서로의 타액이 묻어 실처럼 이어져 있었다.
“그럼 안 되겠는데. 그렇지?”
세스의 손이 제 퍼스너를 열고 그 안으로 기어들어 가던 중이었다. 그가 세스의 손목을 잡아 앞섶에 대고 누르며 젖은 입술로 뺨을 문질렀다.
“으, 응…….”
“어디서 할까? 여기서 할래?”
“아무 데서나……. 빨리.”
만족스러운 대답이었다. 알렉산더 랜스키가 웃는 얼굴로 세스의 진즈 버클을 풀었다. 무릎 아래에 걸린 진즈를 벗기기 쉽도록 세스가 발을 들어 주었다. 양말만 신은 맨다리에 헐렁한 니트가 늘어지는 모습도 썩 잘 어울렸다.
내 눈이 맛이 간 게 아니라 진짜 예쁘다니까.
알렉산더 랜스키가 세스의 뺨을 핥으며 한 손으로 제 버클을 풀었다. 책상 앞에 놓인 커다란 일인용 가죽 의자에 앉은 그가 세스의 다리를 벌려 제 허벅지에 올렸다.
세스가 울 것처럼 붉어진 눈을 하고 정신없이 입술을 붙여 왔다. 심장이 미친 인간처럼 펄떡거렸다.
나는 너를 어디까지 사랑할 수 있을까.
알렉산더 랜스키가 세스의 목덜미를 질근대며 곧추선 성기 두 개를 한 손으로 쥐었다. 잔뜩 달궈진 성기가 포개지며 줄줄 프리컴을 흘렸다. 세스가 그의 목을 양팔로 감고 허리를 들썩였다. 옆머리며 귓바퀴에 달라붙는 입술이 사랑스러웠다.
“하아, 읏……,”
세스가 손가락에 힘을 주어 옷깃을 잡아 당겼다. 허벅지가 단단해지는 게 느껴졌다. 알렉산더 랜스키가 고개를 들어 세스의 아랫입술을 물어 당겼다. 세스가 혀를 내밀어 그의 윗입술을 핥아 댔다. 프리컴이 발려 치덕치덕 소리를 내는 성기 두 개가 마찰열로 붉어졌다.
“하읏,”
세스가 잔뜩 달아오른 신음을 내뱉으며 몸을 한껏 뒤로 젖혔다. 세스의 성기를 쥐고 문지르던 손가락 새가 울컥 젖어들었다.
“벌써 갔어?”
“…….”
세스가 눈을 꽉 감고 고개를 겨우 끄덕였다. 알렉산더 랜스키는 발기가 풀려 서서히 말랑해지는 성기를 주무르며 몸을 더 바싹 끌어당겼다.
“나는 아직 아닌데.”
“흣, 여기서 그만할 거 아니, 잖아.”
“그렇긴 한데. 오늘따라 네가 유난히 빨리 느끼는 것 같아서.”
세스가 이를 질근 물고 갓 사정한 성기에 몰려드는 자극을 견뎠다.
“나도 좀, 그런 것, 같…….”
“안은 기가 막히겠는데.”
성욕으로 뒤덮인 회색 눈이 어둑해졌다. 알렉산더 랜스키가 입술을 양옆으로 늘이며 성기를 주무르던 손을 더 아래로 내렸다. 처음 앉혔을 때와 마찬가지로 양옆으로 벌어진 다리 사이에서 동그란 고환이 흔들렸다. 손바닥으로 고환을 넓게 쓸자 세스가 부르르 어깨를 떨었다. 가늘게 눈을 뜬 세스가 한 손을 알렉산더 랜스키의 어깨에 올린 채 다른 손으로는 그의 성기를 쥐어 훑었다. 팽팽하게 서 있던 성기가 부족함을 호소하며 꺼덕대다 세스의 손가락에 프리컴을 잔뜩 쏟아 냈다.
“이 방에 콘돔이 없어.”
알렉산더 랜스키가 정액이 발려 치덕이는 손가락 끝으로 엉덩이 사이의 입구를 벌렸다. 제 허벅지 위에 올린 세스의 허벅지에 잔경련처럼 자그마한 소름이 쭉 돌았다.
“어떡할까?”
“없이, 하자.”
“어제도 해서 괜찮으려나.”
살짝 벌어진 입구를 중지가 느리게 파고들었다. 잠깐 뜨였던 눈이 다시 꽉 감기고 제 성기를 위아래로 훑던 손이 멎었다.
“하, 부드러워. 벌써 조여 대.”
손가락을 넣자마자 내벽이 꾸물럭대며 손가락에 들러붙었다. 느리게, 끝까지 손가락을 집어넣은 그가 엉덩이를 토닥이며 두 번째 손가락을 넣었다.
“흐, 으…… 읏,”
세스가 허리를 들썩였다. 세스의 움직임에 맞춰 엉덩이에 들어간 손가락질도 난잡해졌다. 끝까지 넣었다가 천천히 내벽 전체를 만지듯 돌려 가며 빼는 과정이 몇 번 반복되자 안이 매끄럽게 젖어들었다. 손가락이 세 개로 늘어났다. 허리를 들썩이는 속도도, 구멍을 벌리는 속도도, 느끼는 지점을 자극하는 속도도, 달아오른 몸이 갈급증을 드러내는 속도도 계속 미친 것처럼 빨라졌다.
“지금, 넣어. 넣어 줘. 못 참겠어.”
너는 나를 언제까지 미치게 할까.
소용없는 질문이었지만 가끔은 궁금했다. 너를 향해 펄떡대는 심장은 고장이 난 걸까, 아닌 걸까. 병이 아니라 멀쩡한 건가. 강박증이니 뭐니 다 개소리일까. 남들도 이러려나. 사랑은 이런 걸까. 다들 이렇게 사랑하며 사는 걸까. 이러니까 사는 걸까.
“더 보채 봐.”
손가락을 뺀 그가 제 성기를 쥐어 귀두 끝으로 벌려 놓은 입구를 애태웠다.
“예뻐 죽겠으니까.”
“흣, 넣으, 라고.”
“키스해 줘.”
세스가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쳐다보았다. 흘겨보는 건지 넋이 나간 건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세스가 그의 목을 끌어안고 고개를 숙여 입술을 물었다. 따끔할 정도로 아랫입술을 깨무는 걸 보면 애가 탄다는 말 같았다.
“혀 넣어야지.”
알렉산더 랜스키가 입술이 물린 채 웃었다. 세스는 저가 만든 입술 자국을 부지런히 핥다가 그가 귀두 끝을 구멍에 살짝 걸치자 양 허벅지를 부르르 떨며 입 속에 혀를 밀어 넣었다.
하, 달아.
알렉산더 랜스키가 입 안으로 넘어온 혀를 힘껏 빨아들였다. 혀가 채운 게 입 속이 아니라 심장 어디일 것 같았다.
이러면 좀 잠잠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몸속이고 머릿속이고 펄펄 날뛰던 것들이.
알렉산더 랜스키가 탐욕스럽게 혀를 빨며 양손으로 세스의 엉덩이를 벌렸다.
벌려 놓은 구멍으로 성기가 들어갔다. 처음 넣을 때는 늘 그렇듯 빠듯했다. 꽉 찬 부피감이 성기를 압박하는 듯하다 세스가 흐느끼는 것 같은 소리를 내며 하체를 들썩대면 압박감은 곧 우물우물 조여 대는 감각으로 변했다.
알렉산더 랜스키가 여전히 애타게 혀를 빨아 삼키며 세스의 몸을 두 팔로 꽉 그러안았다. 세스도 그를 그렇게 마주 안았다. 잠깐 움직임을 멈춘 성기가 내벽에 끼인 채 더 부풀어 올랐다.
“하읏, 좀, 하…… 더,”
세스가 알렉산더 랜스키의 뒷머리를 잡아당기며 허리를 위아래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도 정신이 나가 세스의 허벅지를 누른 채 성기를 쳐올렸다.
퍽, 퍽, 퍽, 퍽!
온갖 체액이 섞인 성기와 내벽이 온갖 난잡한 소리를 흘렸다. 세스가 평소보다 빠르게 사정한 것처럼 그도 삽입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정했다.
“아, 사정했, 하…… 아읏,”
정액이 쏟아진 내벽이 다시 꾸물거렸다.
“오늘도 적당히 하긴 글렀네. 그렇지?”
알렉산더 랜스키가 잔뜩 구부러든 세스의 어깨에 대고 중얼거렸다. 큼지막한 니트를 벗겨 세스를 알몸으로 만든 그가 유두를 넓게 핥으며 방금 사정을 마친 성기를 안에서 다시 움직였다.
“읏, 좋아, 아…….”
“응. 나도 좋아. 죽을 것처럼.”
이를 지그시 물고 성기를 짓쳐 올리자 세스가 입을 벌려 소리 없는 신음을 한 움큼 토했다. 세스의 성기도 다시 일어나 맑은 물을 툭툭 떨어트렸다. 세스가 흘린 쾌감의 흔적이 셔츠 위에 얼룩을 그렸다. 표정이 적은 얼굴이 이 순간에는 온통 지금 느끼는 쾌락들을 드러냈다. 그걸 마주하는 알렉산더 랜스키의 얼굴도 떠오르는 욕망을 뱉어 냈다.
퍽!
아래를 쳐올리고 뭉개듯 끝을 비비면 내벽이 숨 쉴 틈 없이 꿈틀꿈틀 조여 들었다. 성기가 꽂힌 입구 옆으로 흰 거품처럼 된 정액이 느른하게 새어 나왔다. 다시 끝까지 쳐올려 성감이 뭉친 곳을 두들기면 세스가 허리를 부르르 떨며 흐느꼈다.
질퍽질퍽, 아래를 비벼 댈 때마다 더럽고 야한 소리가 났다. 세스가 줄줄 흘려 댄 선액으로 셔츠와 바지가 질척거렸다. 아예 허리를 붙들어 찍어 누르듯 움직였다. 퍽, 하고 성기가 안쪽에 박혀 들었다. 세스의 안이 경련을 하듯 꿈틀꿈틀 수축하다 울컥, 젖은 성기 끝으로 질펀한 물을 흘렸다.
“흑, 흐…… 하으, 흐…….”
세스가 그새 목이 쉰 것처럼 거칠어진 울음소리를 흘렸다. 쾌락에 절어 버린 눈동자가 젖은 속눈썹에 감싸여 꿈을 꾸는 듯 몽롱해졌다. 그는 그 장면을 하나도 놓치지 않으며 세스의 안에 사정했다.
“이렇게 많이 쌌네.”
셔츠 앞자락이 흥건히 젖어 있었다. 세스가 눈이 풀린 채 있다 뒤늦게 뺨을 붉혔다. 그가 삽입한 상태로 세스를 안고 의자에서 일어섰다.
“씻으러 가자.”
“……응.”
양말 안 발가락이 꾸물대는 것 같았다. 둘 다 욕실에 간다는 게 꼭 몸을 씻는다는 의미만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불같이 달아올랐던 오후가 느리게 저물어 갔다.
* * *
그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조부가 써 왔던 카메라는 만지는 게 조심스러웠다.
세스는 가을 해가 눈부시게 쏟아져 들어오는 단골 카페에 앉아 카메라 구조를 그린 삽화를 유심히 들여다보는 중이었다. 책 옆에 얌전히 올려놓은 카메라는 건드리지 않도록 애를 썼다. 잘못 건드리면 망가질 것 같아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게 아니었다.
“왜 전화 안 했어요?”
그래서 며칠 전 제 사진을 찍어 간 무례한 사진가가 다시 불쑥 등장했을 때는 평소보다 더 긴장했다.
세스가 미간을 찌푸리고 피어스 캠벨을 쳐다보았다.
“사진, 이제 흥미 없어요?”
“……네.”
남자가 제 사진을 가지고 있는 건 불쾌했지만 그렇다고 그를 만나 돌려받을 정도는 아니었다.
사진보다는 남자 자체가 더 불쾌했다.
“어려운 사람이었네.”
피어스 캠벨이 어깨를 으쓱여 보이고는 세스의 맞은편 의자를 멋대로 빼서 앉았다.
“그냥 가요. 더는 말 섞고 싶지 않으니까.”
피어스 캠벨은 그 말을 듣는 대신 얀 터낸토의 카메라를 가리켰다.
“왜 그런 골동품을 써요? 리드베리가 좀 고루한 편이긴 해도 신입생한테 이런 구닥다리를 쓰라고 하는 강사는 없을 텐데.”
역시 불쾌한 인간이었다.
세스는 입을 다물고 다시 책에 집중했다.
“책 봐도 소용없어요, 그건.”
세스는 입술 선을 구기다 책을 탁 덮었다. 남자는 계속 귀찮게 굴 것 같으니 그만 돌아갈 생각이었다.
“모델명이 XQ381 아닌가? 노보토폴 제품이고. 그건 구닥다리인 건 둘째 치고 만지기 힘들게 만들어 놨어요. 책에 나온 그림하고는 많이 다를 거예요. 당시로서는 첨단 기술을 다 때려 박았다지만 그러느라 정작 사용자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었거든요. 노보토폴에서 헝가리 공산정권 당시 스파이 무기를 만들던 기술자들을 고용했다는 얘기도 있었고. 뭐, 그러니 시장성도 없고 제대로 다룰 줄 아는 사진가들도 몇 없고. 겸사겸사 망한 거죠.”
“…….”
남자는 없는 빈틈을 찾아내는 재주가 있었다.
몸을 일으키려던 세스가 순간 멈칫대는 걸 놓치지 않는 눈썰미도 재빨랐다.
“그거 쓸 생각이라면 내가 도와줄 수 있는데. 어때요?”
“……뭐가 어떻다는 건데요.”
“일단 커피부터 사 줘요. 요 며칠 언제 전화가 오나 기다리다 아예 여기서 내내 죽치고 있었거든. 커피 값으로 한 사십 달러는 쓴 것 같은데 한 잔은 얻어먹고 싶지 않겠어요?”
세스는 차라리 사십 달러 현금을 줄까 고민했다. 피어스 캠벨은 그사이 모서리에 때가 탄 가죽 가방에서 가로 7인치 사이즈로 인화한 사진을 한 장 꺼내 들었다.
“이걸 보면 나한테 돈 주고 싶어질걸요.”
“…….”
내키지는 않았지만 피어스 캠벨이 내민 사진에 눈길이 닿았다. 그때 찍어 간 제 얼굴이었다.
잘난 척하는 대로 잘 찍은 사진이었다. 저도 모르는 새 급하게 찍은 거라고 생각하지 못할 만큼, 측광과 그림자의 조화가 한 얼굴 안에 조화롭게 어우러져 전문가가 전문 모델을 붙들고 세심하게 연출해 찍어 낸 작품 같았다.
“자기 얼굴인데 반할 것 같죠?”
피어스 캠벨이 장난스럽게 윙크를 하며 손가락으로 세스의 등 뒤 메뉴판을 가리켰다.
“나는 이 시간에는 라테를 마셔요. 시럽은 없이, 우유는 무지방으로.”
“…….”
세스는 남자와 사진을, 다시 남자와 카메라를 훑다 재킷 주머니에 넣어 가지고 다니는 카드를 꺼내 남자에게 내밀었다.
“뭐든 좋은 걸로 마셔요.”
“하,”
피어스 캠벨이 헛웃음을 짓다가 제 앞으로 밀려온 카드를 집어 들었다.
“뭐, 마시기만 하면 되죠. 잘 먹을게요.”
세스가 내민 까만 카드에는 소지자의 이름 대신 이니셜 두 개가 은으로 새겨져 있었다. A. R이라는 알파벳을 확인한 피어스 캠벨이 세스의 등 뒤에서 빙긋 웃었다.
* * *
“……그래, 나도 사랑해. 응.”
저녁 여덟 시 이 분에 통화가 끝났다.
존 리든은 늘 삼 분을 못 채우는 통화가 서운해 미지근한 전화기를 만지작대다 잔에 남은 술을 털어 넣었다.
오늘은 한 잔으로 마칠 생각이었다. 주머니를 뒤져 꺼내 든 십 달러짜리 지폐를 잔 밑에 끼워 넣고 돌아서려는 순간 누가 불쑥 말을 건네지 않았다면.
“부당 해고 건으로 고소하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다.”
“……?”
존 리든은 뭐 이런 등신이 다 있나 하는 얼굴로 귀갓길을 방해한 남자를 바라보았다. 입김을 훅 불자 술 냄새가 풍겨 왔다.
“변호사 사요.”
“다른 변호사는 승소 가능성이 없을 것 같아서 말입니다.”
술기운 때문인지 아니면 느닷없는 등장이 재미있어서인지 남자는 꽤 묘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짧게 자른 머리는 거칠었는데 둥그런 두상이 예쁘장했다. 체격은 다부져 보이지만 너무 큰 건 아니었다. 눈썹 위와 눈 바로 아래, 그리고 목덜미 쪽에 흉터가 있어 갱인가 싶었는데 말투는 의외로 점잖았다. 눈썹 위의 흉터가 하필이면 세스와 엇비슷한 자리에 있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다시 술이 당겼다.
존 리든은 십 달러짜리 지폐를 도로 주머니에 찔러 넣고 바텐더에게 빈 잔을 들어 보였다.
곧 빈 잔이 채워졌다.
남자는 답을 채근하거나 아니면 줄줄이 제 사연을 늘어놓는 대신 그 자리에 얌전히 서서 저를 보고 있었다.
“검사는 가능성 있고?”
모르는 사람이 얼굴을 알아보는 일은 별로 낯설지 않았다. 벨체프 기소 건으로 스타 검사가 된 그를 법원 근처 술집에서 누군가가 알은체하는 일은 종종 있었다. 뉴욕 검찰들이 모르는 사건이 있다며 두툼한 신문 기사 스크랩북을 들고 오는 사람도 한두 번 정도는 있었다.
“부검사장님이라면.”
존 리든이 그런 사람들을 매번 성실히 상대한 건 아니었다. 특히나 남자처럼 헛소리를 하는 부류라면 귀가 안 들리는 척하고 말았다.
그런데 남자의 얘기를 계속 듣는 이유는, 왠지 그 목소리가 어디서 한번 들어 본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탓이었다.
“검사는 부당 해고 소송 안 합니다.”
남자는 알고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상대가 알렉산더 랜스키라면 다르지 않겠습니까?”
“하……?”
존 리든은 남자의 목소리를 기억해 냈다.
“그, 뭐였지…… 어닝? 아니, 어글먼?”
남자가 다시 고개를 한번 끄덕였다.
“네. 전에 통화한 적 있었죠.”
저는 알렉산더 랜스키의 개인 보안 팀장입니다, 라고 하던 남자의 말이 완전히 떠올랐다.
존 리든이 옆자리 의자를 뺐다.
“일단 앉아 봐요. 얘기는 들어 줄 테니.”
미 해병대의 전쟁 영웅이자 CIA 소속 비밀 요원일지도 모른다는 젠슨 어글먼이 바 체어에 앉았다. 존 리든은 등받이가 없는 바 체어에 절도 있게 각을 잡고 앉는 젠슨 어글먼의 자세에 조금 감탄했다.
“그래서 잘렸다고?”
“네.”
젠슨 어글먼은 술에 약했다. 칵테일 두 모금에 전 고용주를 향한 불평과 불만을 가감 없이 토로했다.
“말이 안 되잖습니까. 자기가 가라고 해서 갔는데, 그랬다고 자르다니요. 안전가옥 위치를 흘린 건 내 팀이 아니라 랜스키 쪽 보좌관이었습니다.”
하지만 취했어도 절대 느슨하게 굽어드는 일이 없는 반듯한 등짝과 말투는 여전했다.
“그 개새끼가 그렇지 뭐.”
“억울해서라도 이대로는 못 그만두겠습니다. 복직하고 싶습니다.”
“그 개새끼하고 일하는 게 좋아서 그래요?”
“고용주에 대한 개별적 호감도와는 상관없이 근무 환경이 좋습니다.”
“흐음. 어떤데?”
“군대 같습니다. 대신 별 달았다고 무게 잡는 윗대가리들이 없죠.”
“아하.”
적당히 오른 취기에 슬슬 혀가 꼬이던 존 리든이 젠슨 어글먼의 어깨를 툭툭 두들겼다.
“그래도 자알 생각해 봐요. 고용주가 개새낀데. 근무 환경이 좋아 봤자 뭐 합니까.”
“제 잘못이 아닌 걸로 해고당한 걸 못 참겠습니다.”
“아, 그건 문제지. 좋아, 그럼 내가 고소는 대신 못 해 주겠고, 아, 고소하려면 옷 벗어야 되니까, 그러니까아, 전화는 한 통 해 줄게요.”
“기왕이면 법의 틀 안에서 먹힐 만한 협박을 해 주셨으면 합니다.”
“협박 좋네. 그 개새끼 잡는 건 내 일이지. 마침 개새끼가 나한테 빚진 것도 하나 있고.”
존 리든이 주섬주섬 수트 안주머니에서 전화기를 꺼내 들었다.
“부검사장님 전화는 곧장 연결됩니까?”
“내가 그 새끼한테 왜 곧장 전화를 합니까아.”
“그럼 어떻게 전화하실 겁니까?”
존 리든은 보란 듯 단축번호 1번을 눌렀다. 잠시 후 세스의 번호가 떠올랐다.
“나야. 아직 안 잤지?”
세스는 신호음이 네 번 울리고 나자 전화를 받았다.
존 리든이 거짓말처럼 술기운을 털어내고 아주 부드러워진 음성으로 말을 건넸다. 입가에 숨겨지지 않는 미소가 떠올랐다.
“아니, 그게 아니라…… 응, 그럼. 랜스키 옆에 있어? ……아, 그런 건 아니고. 그 개새끼가 최근에 누구를 부당 해고 했대. 나한테 와서 하소연하는데 너무 가엾더라고. 그래서…… 에이, 아냐. 그런 건 검사가 기소 안 해. 정말이야. 랜스키도 고소당하기 전에 미리 알아 두는 게 좋지.”
한참 상냥한 밀어를 주고받듯 전화기에 대고 속삭이던 존 리든이 다음 순간 말투를 바꿨다.
“이 씨발놈아. 세스를 데려갔으면 법은 지키고 살아야 될 거 아냐.”
젠슨 어글먼이 더 반듯하게 자세를 고쳤다. 속눈썹이 촘촘해 흉터가 있어도 예쁘장하게 느껴지는 눈이 긴장을 드러냈다.
“오죽했으면 나를 다 찾아와서…… 씨발, 그래서 어쩌라고. ……하, 개새끼. 짖는 건 잘해서……. 그래, 술 처먹었다. 어쩔래, 씨발놈아.”
이어지는 통화는 반이 욕설이었다. 젠슨 어글먼이 조심스럽게 얼굴을 찡그렸다. 상스러운 말이 듣기 편하지는 않은 듯했다.
“뭐? 무슨 경찰을 불…… 이 개새끼야, 내가 검사야! 경찰이 잡아 처넣은 놈 내가 기소해서 감옥 보내는 거라고!”
왠지 반은 욕설인 대화가 점점 유치해져 간다고 생각될 무렵 존 리든이 냅다 큰 소리로 외쳤다.
“아 씨발, 그러는 너는! 피어스 캠벨 이름을 알려 준 게 난데! 이 씨발놈이 빚진 게 누군데 당당하고 지랄이야! 내가 안 알려 줬으면 기사 떠도 벌써 떴…… 어어, 끊겼나? 이 개새끼가 왜 안 짖어? 끊겼…… 뭐? 설마 끊었어? 이런 씨발.”
퍽!
술김에 존 리든이 전화기를 홱 집어던졌다. 그 순간 잽싸게 몸을 날린 젠슨 어글먼이 무사히 전화기를 낚아챘다.
존 리든은 입을 벌리고 그 민첩한 행동에 감탄했다.
“와…… 굉장하다.”
“훈련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협박은 잘 먹혔습니까?”
“어, 그게……. 그 개새끼가 뭐라고 했냐면……,”
“뭐라던가요?”
“전화를 뚝 끊었……, 개새……,”
그리고 존 리든의 의식도 뚝 끊겼다. 그가 맥없이 픽 굴러떨어지려는 것을 젠슨 어글먼이 받아 냈다.
젠슨 어글먼은 갑자기 두 팔에 뚝 떨어진 덩치 큰 남자를 무거워하지도, 귀찮아하지도 않고 그대로 부축해 일으켰다. 그래도 존 리든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자 수트 주머니를 뒤져 술값을 꺼내 탁자 위에 놓은 다음 아예 제 어깨에 훌쩍 들어 걸쳤다.
귀갓길 러시아워가 시작된 맨해튼의 밤거리를 젠슨 어글먼이 익숙하다는 듯 걸어갔다. 그가 향하는 곳은 세스와 존 리든이 함께 살았던 보워리 거리의 아파트였다.
* * *
“리든은 조만간 재활원에 가야 할 것 같은데.”
알렉산더 랜스키가 전화기를 세스에게 돌려주며 말했다. 술주정을 들어 주기 귀찮아 중간에 멋대로 전화를 끊어 버린 표시 같은 것은 조금도 나지 않았다.
“취할 때까지 마시지는 않았는데. 이전에는.”
물론 걱정을 하는 표시도 없었다. 그래서 걱정은 세스가 했다.
“지금은 한창 미련 떨 시기니까 다르겠지.”
알렉산더 랜스키는 재활원이라는 말을 잘못 꺼냈다며 속으로 후회했다. 조만간 검찰에서 잘리고 노숙자가 되겠다고 말했으면 세스는 걱정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리 와.”
알렉산더 랜스키가 팔을 벌렸다. 세스가 팔 안으로 들어오자 그가 어깨를 휘감아 입술이 닿는 아무 곳에 키스했다. 오늘은 오른쪽 관자놀이였다.
“내일 검사장한테 전화할게. 검사장이 끊으라고 하면 끊겠지.”
“잊지 말고 꼭 해.”
“알았어.”
대칭을 맞추는 것처럼 왼쪽 같은 자리에도 키스를 한 알렉산더 랜스키가 세스의 눈가를 손끝으로 쓸었다. 흉터가 앉은 자리가 조금씩 떨리는 것 같았다.
“무슨 일 있어?”
“……별로.”
세스는 오늘 귀가가 늦었다.
학원에서 시간을 보냈다고 했다. 얀 터낸토의 카메라를 선물했을 때부터 세스가 내내 사진 관련 책을 덮지 않는 걸 알고 있었던 알렉산더 랜스키는 그 때문일 것이라고 짐작했다.
“공부가 어려워?”
“……응. 좀.”
“천천히 해. 별거 아니야. 사진은 죽을 때까지 찍으면 되잖아.”
“응.”
거실 소파에 앉아 벽에 걸린 하프 문 베이의 사진을 몇 시간이고 바라보는 것은 세스가 가끔 하던 일이었다.
지금도 그런 때일 것이다.
“더 있을 거지?”
“……응.”
“그럼 기다려. 따듯한 거라도 가져올게.”
“응.”
대답이 짧은 걸 보면 사진에 정신이 팔려 있는 모양이었다. 알렉산더 랜스키가 짧게 웃으며 세스를 다시 소파에 앉히고 주방으로 향했다. 쌀쌀한 가을밤에는 뱅쇼가 괜찮을 것이다.
와인을 붓고 과일을 써는 자그마한 소리가 주방에 울렸다.
하지만 세스는 평소처럼 사진에 정신이 팔린 게 아니었다. 사실 그는 오늘 좀 우울했다. 낮에 피어스 캠벨이 한 말 때문이었다.
-망가진 것 같은데.
한 시간가량 알렉산더 랜스키가 어렵게 찾은 노보토폴사의 카메라를 이리저리 살펴보다 그가 내린 결론이었다.
새로 필름을 끼워도 한 컷 이상 찍을 수가 없었다. 그다음부터는 셔터가 잘 눌러지지 않거나 셔터 막 쪽에서 이상한 소음이 들려왔다.
-셔터 문제일 수도 있고 크랭크나 스프라켓 문제일 수도 있어요. 자세한 건 뜯어 봐야 아는데, 너무 오래된 데다 동유럽 물건이라 제대로 다룰 줄 아는 기술자를 찾기 힘들 거예요.
더 나쁜 건 그 뒤였다.
-예전에 이 기종을 벼룩시장에서 산 사람이 있었는데, 같은 문제로 수리를 맡겼거든요. 수리해 준다는 데가 있었으니 운이 좋았죠. 그런데 아예 망가져서 왔어요. 너무 오래돼서 한번 뜯고 나니까 조립할 때 어디가 부러졌다나. 그래서 너덜너덜해진 걸 받아 왔더라고요. 차라리 손을 대지 않았으면 기념품으로 남겨 뒀을 텐데. 외관은 근사하니까.
그런 말을 듣고 카메라를 수리해 볼 용기는 없었다. 그러나 알렉산더 랜스키에게 네가 애써 찾아 준 카메라가 사실은 망가져 있었다는 말을 하고 싶지도 않았다.
아까워서 아껴 둔다고 거짓말을 해야 할 텐데, 그게 맞다는 걸 알면서도 어쩐지 기분이 무거웠다.
괜한 걸 줬다고 생각하면 어쩌지.
절대 그렇지 않은데.
제 사고방식이 그와 같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세스는 이번 일에 유독 감정이입을 했다. 만약 저가 애써 선물한 무언가가 쓸모없는 것이었다면 그때 기분은 말로 다 할 수 없을 것이다. 선물을 받은 알렉산더 랜스키가 아무리 괜찮다고 해도 스스로가 한심하게 여겨질 게 뻔했다.
너는 나와는 다르니까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을까. ……그래도 너한테 말하고 싶지 않아.
소파에 두 발을 올린 채 생각에 잠겨 있으려니 어깨에 포근한 담요가 내려앉았다.
“매일 봐도 안 질려?”
알렉산더 랜스키가 향긋한 김이 오르는 머그잔을 티 테이블에 놓아 주며 물었다.
“질릴 리가 없잖아.”
세스가 그를 빤히 바라보며 대꾸했다. 매일매일 마주하는 그였지만 질릴 일은 없었다. 그럴 수도 없을 것이다.
“……그런가. 하긴, 나도 그러니까.”
세스가 한 말을 알아들었다는 듯 알렉산더 랜스키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옆자리에 앉았다. 두 사람은 익숙한 자세로 서로에게 기댔다. 눈앞에 아무리 보아도 절대 질릴 수 없는 기적 같은 밤바다가 펼쳐졌다. 눈을 감으면 파도 소리가 들려올 것만 같았다.
“오늘 얘기 했나?”
“뭘?”
머그컵을 놓고 세스의 턱을 쥔 알렉산더 랜스키가 와인과 과일 향이 묻은 입술을 눈가에 붙였다.
“사랑한다고.”
“했어. 다섯 번.”
“그럼 또 들어.”
사랑해.
눈가에 대고 속삭이는 사랑한다는 말이 지구상에서 가장 부드러운 파도 소리처럼 들렸다.
역시 카메라가 고장 났다는 사실은 숨기고 싶었다.
* * *
“으…… 머리야.”
평소보다 늦잠을 잔 존 리든이 퉁퉁 부은 눈을 간신히 추켜 뜨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머릿속에 미사일이 날아와 쾅 박힌 게 아닌가 싶었다.
“토마토…… 토마토 주스.”
세스가 떠난 뒤로 존 리든은 거의 매일 술을 마셨다. 그때부터 아침 숙취에 토마토 주스가 좋다는 출처 없는 구글 검색 결과를 맹목적으로 신봉하고 있었다.
어젯밤 일의 대부분을 기억 속에서 깨끗하게 지운 채 존 리든이 트렁크만 걸친 차림새로 침대를 떠나 주방으로 걸어갔다.
냉장고 문을 열자 다른 건 하나도 없이 생수와 토마토 주스가 즐비하게 들어차 있었다. 존 리든은 넉넉한 토마토 주스를 흐뭇하게 바라보다가 한 병을 꺼내 뚜껑을 돌려 딴 뒤 그대로 입을 대고 마셨다.
꿀꺽꿀꺽꿀꺽…….
묵직한 1.7리터짜리 유리병을 한 손에 쥐고 고개를 뒤로 젖혀 시원하게 주스를 마시던 존 리든이 갑자기 유령이라도 본 사람처럼 눈을 크게 떴다.
꿀꺽꿀……
세스의 방문이 열리고 있었다.
그리고 누군가가 그 안에서 걸어 나왔다.
꿀……
……퍽, 쨍그랑!
토마토 주스 병이 손에서 바닥으로 떨어졌다. 존 리든이 후다닥 달려와 세스의 방에서 나온 사람을 와락 끌어안고 덥석 입술을 삼켰다.
“읍, 왜 이런,”
상대가 손을 들어 존 리든을 말리려고 했지만 그는 막무가내로 매달리듯 키스를 이었다. 숨이 가빠서 머리가 어지러워질 때까지 혀를 빨아 대던 존 리든이 마침내 상대를 놓아주었다.
“언제 온 거야?”
바보처럼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존 리든은 다짜고짜 상대를 꽉 끌어안고 울면서 말했다.
“왜 말도 안 하고 왔어. 심장마비 걸릴 뻔했잖아.”
“저기,”
“잘 왔어. 기다리길 잘했다. 잘 왔어. 진짜 잘…… 흑,”
끝내 말을 잇지 못하고 존 리든이 상대의 어깨에 대고 엉엉 울음을 터트렸다.
잠시 망설이던 손이 커다란 덩치로 아이처럼 우는 존 리든의 등을 어색하게 쓸어 넘겼다.
“……어제 일, 기억 안 납니까?”
“……!”
퍽!
세스의 목소리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린 존 리든이 소리가 날 정도로 거세게 상대를 밀어냈다.
“씹, 무슨…….”
숙취로 허옇게 뜬 얼굴이 빠르게 붉어졌다. 세스치고는 몸이 너무 탄탄한 것 같긴 했다. 그래도 키가 딱 그 정도라 알렉산더 랜스키가 운동이라도 열심히 하게 만든 줄 알았다.
하지만 그런 일은 없었고 지금 제 눈앞에 있는 사람은 세스가 아니라 젠슨 어글먼이었다.
“취해서 내가 데려왔는데 부검사장님이 자고 가라고 했습니다. 방이 하나 남는다면서. 그 방이 비어 있는 게 너무 싫다고 하면서요.”
“……하아.”
존 리든이 손바닥으로 얼굴을 거푸 쓸어내렸다. 수치스럽고 한심하고 끔찍했다.
“쓰레기가 된 기분이네.”
“과음하고 난 다음 날은 종종 그러니까요. 너무 자책 안 하셔도 됩니다.”
“예, 하여간…… 미안하게 됐습니다. 술이 덜 깬 것도 그렇고 이런 꼴 보인 것도 그렇고.”
“괜찮습니다.”
그가 세스라고 착각했던 젠슨 어글먼은 꼭 세스처럼 말을 했다. 그러나 의미가 다르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세스가 괜찮다는 것은 신경이 쓰이지 않는다는 말이었다. 젠슨 어글먼의 괜찮다는 그의 처지를 이해한다는 배려와 연민이었다.
상관도 없는 사람에게서 위로받는 기분은 입맛을 쓰게 만들었다.
“그럼 음…… 나는 출근해야 하니까 그쪽은 알아서,”
“당장은 못 갈 것 같습니다.”
존 리든이 애써 이 부끄러운 아침을 수습하려 드는데 젠슨 어글먼이 뜻밖의 말을 했다.
“나한테 뭐 다른 볼일이라도 있습니까?”
“네. 한 오 분만 있다가 아무 일 없으면 그냥 돌아가겠습니다. 그런데,”
“……그런데요?”
젠슨 어글먼이 고개를 끄덕이며 제 입술을 가리켰다.
“뭡니까. 먼저 키스했으니 뒤도 책임지라는 겁니까?”
“네.”
뭐지, 이건. 변태인가.
존 리든이 그런 생각을 하며 짜증을 삭힐지 터트릴지 고민하는 동안 젠슨 어글먼은 침착하게 손목을 들어 탱크가 깔고 지나가도 안 부서질 것처럼 튼튼하게 생긴 전자시계를 보며 시간을 계산했다.
존 리든이 얼굴을 구기다 머리를 홱 쓸어 넘겼다.
“이봐요. 나는 뭐 더 할 생각 없으니 서로 기분 상하기 전에 여기서 그만두,”
“오 분도 안 걸리네요.”
젠슨 어글먼이 시계를 향했던 고개를 들어 존 리든을 바라보았다.
“911에 전화 좀 걸어 주세요. 제 생각보다 심해질 것 같습니다.”
“뭐가…….”
안 물어도 알 것 같았다. 젠슨 어글먼의 단단해 보이던 입매가 부어오르는 게 제 눈에도 보였으니까.
“설마…… 알러지?”
“네.”
존 리든이 허둥지둥 전화기를 찾아 침실로 달려가는 사이 젠슨 어글먼이 거실 바닥에 드러누웠다. 입 안이 부어올라 숨을 헐떡이면서.
* * *
젠슨 어글먼이 존 리든과 함께 구급차에 오르는 시간, 알렉산더 랜스키는 전화를 받았다.
[노트북을 해킹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피어스 캠벨의 감시를 맡긴 사람이었다. 그 역시 CIA쪽 인물로, 보안 관련 경력은 차고도 넘칠 만큼 가지고 있었다.
“계속해.”
[딱히 다른 출처는 없는 것 같습니다. 가지고 있는 건 루이 랜스키 입에서 흘러나온 게 전부로 보입니다. 감옥 쪽에는 자서전을 쓰자며 접근한 모양입니다.]
“……멍청한 게 그런 말에 넘어갔군. 세스에 대한 것도 알아냈나?”
[거기까진 아직 모르겠습니다. 노트북에는 관련 내용이 없고 그린 씨에게 접근하는 모습도 아직은 없습니다.]
“사이코가 입 다물고 있을 리는 없으니까 언제라도 접근할 수 있다고 가정하고 움직여.”
[알겠습니다.]
툭.
통화를 끝낸 전화를 알렉산더 랜스키가 서랍 안에 떨어트렸다.
루이 랜스키를 너무 편한 곳에 놔둔 모양이었다. 환경을 바꿔 줄 때가 되었다.
몇 가지 선택지를 고민하는 얼굴은 불쾌한 게 아니라 평온해 보였다.
* * *
“그런데 그런 구닥다리는 대체 어디서 구했어요? 이건 동유럽에 가면 집시들이 길거리에 늘어놓고 파는 좌판에서나 어쩌다 구할 수 있을 텐데. 최근에 여행이라도 다녀왔나 보죠?”
세스는 오래도록 고민한 끝에 피어스 캠벨에게 전화를 했다. 알렉산더 랜스키에게는 비밀로 할 생각이었지만, 그렇다고 내내 이 상태로 처박아 두기는 싫었다.
그는 기다렸다는 듯 자신이 아는 카메라 수리점을 소개해 준다고 나섰다.
그래서 세스는 수업을 듣는 대신 지하철을 타고 퀸즈로 향했다. 뉴욕으로 온 지 십 년이나 됐지만 지하철을 길게 타고 맨해튼 섬 밖으로 나가 보는 건 처음이었다.
피어스 캠벨은 쓸데없이 사람을 기다리게 하지 않았다. 만나기로 한 장소에 정확히 시간 맞춰 나타났다.
“아뇨.”
“뭐가 아니라는 거예요?”
“여행.”
“그럼?”
피어스 캠벨의 질문은 알렉산더 랜스키가 이 카메라를 구하는 데 들였을 시간과 노력을 되짚어 보게 만들었다. 직접 동유럽의 벼룩시장을 헤집고 다니진 않았겠지만 그 비슷한 마음이지 않았을까.
“……애인이 찾아 줬어요.”
애인, 이라는 발음을 하며 세스는 그를 그렇게 부른 것도 처음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 준 게 아니라 찾아 줬다고요? 원래 가지고 있던 물건이에요?”
그렇게 불러도 되는 건가 하는 생각은 잠시였다. 그와 자신은 애인이 맞았다. 그게 아니라면 설명할 말이 없었다.
“할아버지 물건이었어요.”
“아……. 와, 그건 생각지도 못했네. 끝내주네요.”
피어스 캠벨이 나직하게 휘파람을 불었다. 세스는 그가 수선을 피우는 이유는 몰랐지만 어젯밤 그림자처럼 스며들던 우울이 조금 옅어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고치고 싶은 거구나. 아마도, 애인은 모르게. 그렇죠?”
“……네.”
모르는 사람이 자신의 기분을 알아주는 것도 처음 있는 일이었다.
세스가 이제껏 살면서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아마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말일 것이다. 그를 이해하려고 애쓰는 인간은 양부와 정신과 의사가 전부였다. 거기에 존 리든과 알렉산더 랜스키가 더해지자 그의 세계는 느린 속도로 변하기 시작했다.
피어스 캠벨은 세스가 그 변화를 의식하게 된 첫 계기였다.
자신은 나아지고 있었다. 다른 사람과 말을 하는 건 관심이 없을 뿐 이전처럼 어려운 게 아니었다. 알렉산더 랜스키를 사랑하는 자신은 내내 비정상일 줄 알았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세스가 작게 웃자 피어스 캠벨이 눈가를 미묘하게 움직였다.
“생각만 해도 좋은 겁니까?”
“네.”
“그것 참……. 부럽네요.”
세스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자신의 무언가를 남들이 부러워하는 경우도 처음인 것 같았지만 마냥 어색하지만은 않았다.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의 애인은 매일같이 차마 다 기억할 수도 없을 만큼 넘치게 애정을 퍼붓고 있었으니까.
“애인은 어떻게 만났어요?”
“…….”
질문이 계속 이어지자 세스가 피어스 캠벨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건 말하고 싶지 않은데요.”
피어스 캠벨이 당황한 얼굴로 입가를 쓸었다.
“어, 음. 갑자기 확 선을 긋네. 그 정도도 물어보면 안 되는 겁니까?”
“그냥 내가 말하고 싶지 않아요.”
“왜요? 아직 내가 못 미더워요? 나는 이렇게 시간을 내서 카메라 수리점까지 같이 가 주는데.”
“그건 고맙지만…… 그래도 말하고 싶진 않아요.”
“하, 엄청 단호하네. 서운하게.”
피어스 캠벨이 투덜대며 잠깐 느려졌던 걸음을 빨리했다.
“사실 전화가 와서 나는 좀 기대를 했단 말입니다. 뭐, 그렇다고 애인 뒤에서 무슨 짓을 하자는 그런 건 아니고…… 그냥 친해질 수도 있지 않나 싶어서.”
피어스 캠벨은 모르고 있었겠지만 세스는 의외로 인간관계에 철저한 편이었다. 알렉산더 랜스키를 신경 쓰게 만드는 제 인간관계는 존 리든 하나로 충분했다.
“아뇨. 그런 건 싫어요.”
“와……. 냉정하네.”
대화가 거기서 뚝 잘려 나갔다. 두 사람은 말없이 걸어서 아시아 타운 인근의 주택가로 들어섰다. 삭막한 느낌의 공용주택 지하층에 알록달록한 간판들이 드문드문 걸려 영업 중인 상점이라는 표시를 내고 있었다.
“여기예요.”
피어스 캠벨이 그중 가장 낡은 간판을 단 가게를 가리켰다. 초록색 타일을 붙인 계단을 세 칸 내려가야 되는 곳이었다. 영업 중이라는 글씨가 쓰인 붉은색 틴 보드는 색이 다 바래서 옅은 분홍색으로 보였다.
“들어가 봐요. 내가 소개해 줬다고 하면 그래도 좀 친절하게 대해 줄 거예요. 나는 밖에서 기다릴게요. 마침 전화할 데도 있고.”
세스가 별 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기다리지 않아도 괜찮아요. 데려와 준 거 사례할게요.”
“아, 그렇게 말하니까 기다리고 싶어졌어. 나도 그 카메라가 괜찮아졌는지는 알아야죠. 좀 이따 봐요.”
피어스 캠벨이 등을 훌쩍 돌려 멀어졌다. 세스는 윗부분에 낡은 종을 매달아 둔 출입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전화할 데가 있다던 피어스 캠벨의 말은 사실이었다. 세스가 가게 안으로 들어서는 것을 멀리서 지켜본 그가 휴대전화를 꺼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생각보다 어려울 것 같은데. 랜스키에 관해서는 아예 입을 딱 다물어. 말할 눈치가 아니야.”
[좀 잘 구슬려 보지 그래? 사람 꼬드기는 건 네 특기잖아. 그 실력 다 죽었어?]
“안 먹히는 걸 어쩌라고. 아무튼 나는 자신 없어. 방법을 바꿔야 될 것 같은데.”
[에이, 젠장. 그럼 협박으로 가야지, 뭐.]
“협박?”
[일단은 좀 더 해 보고, 영 안 될 것 같으면 협박하는 걸로 해. 내용은 정해 줄게.]
수상쩍은 통화가 그렇게 끝났다.
* * *
존 리든은 진료 중인 젠슨 어글먼을 기다리며 병원 복도를 서성였다. 사람이 너무 태연해 보여서 그렇게 심각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구급차를 몰고 온 응급요원이 난색을 표하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젠장.”
일단은 비서에게 전화를 해서 사고가 생겼다고 말을 해 두었다. 오후에 출근하거나, 아니면 아예 가지 못할 수도 있다고 했더니 비서는 검사장이 혹시 급성알콜중독 같은 걸로 쓰러졌는지 물었다며 걱정을 감추지 못했다.
존 리든은 자신이 이른 아침부터 술을 퍼마실 정도로 엉망진창은 아니라는 항변을 최종 선고에 임할 때처럼 엄숙하고 열정적으로 늘어놓고서야 전화를 끊을 수 있었다.
숙취가 남아 있는 머리가 지끈거렸다. 존 리든이 급한 대로 구겨 신고 나온 조깅용 운동화 끈을 고쳐 매고 있을 때 다시 전화가 울렸다.
“이건 또 누구야.”
결코 달갑지 않은 번호였다.
“씨발. 하필이면.”
따지고 보면 이 모든 사달은 알렉산더 랜스키 때문이었다. 그가 젠슨 어글먼을 부당 해고 하지만 않았어도 오늘 아침의 사건은 없었다.
존 리든은 통화 버튼을 누르고 대뜸 욕설을 뱉어냈다.
“다 너 때문이잖아, 이 개새끼야.”
사람을 불시에 기분 나쁘게 만드는 건 알렉산더 랜스키도 못지않았다.
[세스 어딨어?]
“뭐, 씨발놈아? 그걸 왜 나한테 물어?”
[너하고 있는 거 아냐?]
“세스가 나하고 있는데 네놈이 모를 리가 있겠냐? 엉?”
[그건 그렇지. 아니면 됐어.]
그렇게 전화가 끊겼다.
존 리든은 평소보다, 그러니까 알렉산더 랜스키가 자신과 세스의 통화를 가로채 헛소리를 내뱉을 때보다 훨씬 더 열이 받았다.
“이 개새끼가 저 할 말만 하고 끊어? 씨발, 나도 할 말 많은데!”
일단 부당 해고부터 따져야 했다. 젠슨 어글먼이 그런저런 이유로 환자가 됐으니 네놈이 책임지라는 말도 해야 했고, 피어스 캠벨이라는 기자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자신이 나설 일은 없는지도 물어야 했다.
존 리든이 번개처럼 손가락을 움직여 알렉산더 랜스키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그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개새끼네, 진짜. 세스한테 무슨 일이 있는지는 알려 줘야 될 거 아냐.”
존 리든이 화가 나서 씩씩대는데, 진료를 마친 젠슨 어글먼이 진료실에서 나왔다.
구급차를 타고 와서도 상태가 나아지는 데 제법 시간이 걸렸다. 의사 말에 의하면 그가 비상식적으로 건강한 체질이었기에 무사할 수 있었다고 했다.
토마토를 뭐 얼마나 먹었다고. 마신 건 난데.
그에게 알러지 반응이 일어나게 된 과정을 떠올리던 존 리든이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사람을 착각하고 키스한 거나 어린애처럼 엉엉 울었던 사실은 그렇게까지 부끄럽진 않았는데 젠슨 어글먼의 토마토 알러지는 이상하게도 너무 민망했다.
대체 얼마나 빨아 댔다는 거야……. 하, 얼굴을 못 보겠네.
“이젠 가도 된답니다. 기다리지 않아도 되는데 기다리셨네요. 하여간 감사합니다.”
일이 이렇게 된 데는 젠슨 어글먼의 책임도 약간은 있었다. 비상식적으로 건강한 몸처럼, 비상식적으로 침착했다. 토마토 알러지가 있으면 입술이 붓는 순간 온갖 난리를 쳤어야 되는 게 아닐까. 그 순간을 아무리 되짚어 봐도 이상한 사람이었다.
“그, 크흠, 다 나은 겁니까?”
“네. 일단은. 보통은 이렇게 심하지 않는데 그 주스가 더 문제가 된 것 같습니다. 주의할 걸 하나 더 알았으니 어떻게 보면 다행입니다.”
지금도 그랬다.
죽을 뻔하다 살아났는데 저렇게 침착하게 다행인 점을 꼽을 건 뭐야. 화를 내거나 뭐 그래야 되는 거 아냐?
“다행이라니 다행이네요. 그럼 제가 병원비라도,”
“방금 전화, 혹시 알렉스한테서 온 겁니까?”
“네. 병원비 제가 내겠습니다.”
“괜찮습니다. 아직 랜스키 인더스트리에서 의료보험을 내주고 있어서요. 제가 부담할 금액은 없습니다. 알렉스가 뭐라던가요?”
존 리든의 표정이 살짝 변했다.
뭐, 개인 부담금이 없어?
무슨 회사가 그런 보험을 들어 주고 그래. 검사 때려치우고 랜스키한테 빌붙을까.
“……세스가 어디 갔는지 모르는 것 같던데요.”
정작 존 리든은 별 걱정을 하지 않았다. 세스가 길을 못 찾는 어린애도 아니고, 어쩌다 집에 늦게 들어올 수도 있었다. 오늘은 학원을 가는 날이었으니 사람들하고 어울리고 있을 수도 있었다.
보나마나 그 개새끼가 괜히 지 혼자 안달하는 거겠지. 그러고도 남을 놈이니까.
이번에는 젠슨 어글먼의 눈빛이 달라졌다. 그는 방금 전까지 주사를 맞느라 약간 뻐근해진 오른팔을 이리저리 돌려보며 물었다.
“부검사장님은 뭐 아는 바가 있습니까? 그린 씨의 행방에 관해.”
“오늘은 학원 수업이 있는 날이니 학원에 있을 겁니다. 랜스키는 세스 일이라면 덮어 놓고 과장하는 구석이 있으니까 일단 나부터 긁어 댄 거고.”
“흠. 하지만 누가 루이 랜스키에게 접근했다고 하지 않 았습니까? 그린 씨의 행방이 묘연해진 것과 관계가 없겠습니까?”
“그런다고 기자 하나가 뭐 어쩐다고요. 랜스키가 세스한테 경호원 붙여 놓았을 거 아닙니까. 하다못해 운전기사라도. 아니면 추적 장치라도.”
“아니요.”
“……음?”
“제가 알기로는 없습니다. 저 역시 알렉스가 그렇게 말했을 때 많이 놀랐습니다. 사실 지금도 좀 믿기 어렵습니다.”
“아니, 왜 그랬답니까?”
“그린 씨가 싫다고 해서요.”
존 리든이 버럭 화를 냈다.
“세스가 싫어한다고 안 하고 말 일입니까, 그게?”
“저도 같은 의견을 알렉스에게 전했습니다. 소용이 없었다니 유감입니다.”
존 리든은 알렉산더 랜스키가 세스에게 저 셋 중 하나라도 해 놓았다면 그걸 가지고 개새끼니 뭐니 신나게 욕을 했을 것이다. 그런데 하지 않았다고 하니 욕을 하고 싶어졌다.
그 미친놈이. 왜 하필 그런 데서만 상식적인 척하고 지랄이야.
“그럼 음, 그쪽은 뭔가 방법이 있습니까?”
젠슨 어글먼이 복직의 냄새를 맡고 눈을 반짝였다.
“방법은 찾아봐야죠.”
왜 랜스키가에서 비싼 돈을 들여 해병대 출신의 전직 비밀 요원을 고용하는지 알 수 있었다. 비상식적인 튼튼한 육체와 침착한 자세는 더할 나위 없이 믿음직스러웠다.
“같이 갑시다.”
혹시라도 저는 필요 없다고 할까 봐 존 리든은 젠슨 어글먼의 소매를 꽉 붙들었다.
* * *
“애인 얘기 좀 해 봐요.”
카메라 수리점을 나온 세스는 근처의 비건 식당에 앉아 피어스 캠벨을 마주해야 했다. 수리점까지 동행해 준 사례였다. 세스는 현금을 내밀었지만 피어스 캠벨은 식사를 골랐다.
세스는 그나마 익숙한 음식처럼 보여서 주문한 버섯 튀김 샐러드에는 손도 대지 않은 채 향이 옅은 유기농 커피를 간간이 마셨다. 피어스 캠벨은 제 몫의 음식을 다 먹고 디저트를 추가로 주문한 뒤 계속 말을 붙였다.
“말하기 싫어요.”
“왜요. 애인한테 문제라도 있어요?”
“…….”
“괜찮아요. 그런 사람 많으니까. 잘해 줄 때는 잘해 주지만 술 먹으면 두들겨 패는 인간도 있고, 기껏 모아 둔 월세를 빼돌려서 도박판에 쏟아붓는 인간도 있고. 멀쩡한 얼굴로 바람피우는 인간들도 있고. 뭐 어때요. 그래도 좋은 거라면 어쩔 수 없죠.”
세스는 그런 일 없다며 발끈하는 대신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유기농 재배한 원두를 썼다는 라테는 맛이 없었다.
“내가 시켜 준 거나 먹고 꺼지길 바라는 눈친데, 그럼 오기가 생기죠. 디저트 다 먹을 때까지 말 안 해 주면 하나 더 주문할 겁니다.”
세스가 비로소 귀찮다는 듯 눈가를 찡그렸다.
“왜 자꾸 같은 걸 묻는 건데요.”
“대답을 안 해 주니까요.”
“차라리 다른 걸 물어요.”
“직업병이라서 안 돼요. 일단 물어본 건 답을 들어야 밤에 잠이 오거든요.”
“…….”
피곤한 사람이었다. 세스는 프리랜서 사진가이자 자유 기고가라던 그의 직업을 기억해 냈다.
세스가 더는 말이 없자 피어스 캠벨이 디저트로 나온 치즈 아이스크림을 스푼으로 푹푹 짓이겼다.
“진짜 말하기 힘든 사람이네. ……좋아요, 내가 졌습니다. 애인 얘기는 더는 안 물을게요. 카메라는 잘 고쳐졌어요?”
“살펴봐야 된다고 해서 맡기고 나왔어요.”
“흠. 얼마나 걸린답니까?”
“빠르면 사흘.”
“그때도 같이 가 줄 수 있는데.”
“됐습니다.”
“냉정하네요.”
세스는 그만 일어나겠다는 뜻으로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내 시계를 보았다. 그러다 열 몇 통의 부재중 통화를 보고 당황했다. 아직 수업 중인 시간이기도 했고, 수업 중에는 소리가 나지 않게 해 두는 편이라 전화를 할 줄은 몰랐다.
발신자는 전부 알렉산더 랜스키였다.
세스가 그대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신호음이 한 번도 채 지나기 전에 그가 전화를 받았다.
[어디야?]
“어, 그게…….”
[학원에 없는 거 아니까 그냥 말해. 데리러 갈게.]
카메라 얘기는 숨기고 싶었는데.
“아냐. 내가 갈게. 지금 갈 수 있어.”
[불안해서 그래. 어디라고?]
불안하다는 말은 다른 걸 전부 설명했다. 세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 식당이야. 밥 먹으려고 왔어. 이름이……,”
“비기너스 비건이요.”
피어스 캠벨이 불쑥 끼어들었다.
[비기너스? 알았어.]
용케도 그 소리가 들렸던지 알렉산더 랜스키가 전화를 끊었다. 세스가 전화기를 탁자에 올려놓고 미간을 찡그리는 것을 보고 피어스 캠벨이 물었다.
“애인이죠?”
“네.”
“통제광이겠네요. 구속하고 집착하고. 질리지 않아요?”
“……아닌데요.”
“뭐가 아니에요. 통화만 들어도 알겠는데. 다른 남자하고 있다니까 달려온다는 거 아닙니까?”
“연락이 안 돼서겠죠.”
“다른 남자하고 있었으니까 연락이 안 된 거라고 생각하는 거 아닙니까, 보통은.”
세스는 짜증을 내는 대신 계산서를 집어 들고 일어섰다. 피어스 캠벨이 당황해 되물었다.
“이렇게 가려고요? 애인 기다려야 되는 거 아니에요?”
“내가 알아서 해요.”
“해명할 일이 있으면 어떡하려고요. 같이 있다가 내가 아무 사이 아니라고 말해 줄게요.”
“그쪽이 해명할 일 없어요.”
피어스 캠벨이 계산서를 집은 세스의 팔을 붙들었다.
“아니, 나는 좀 걱정이 되는데. 애인 멀쩡한 사람 맞아요, 진짜? 이대로 가도 괜찮은 거예요?”
세스가 피어스 캠벨의 손을 홱 뿌리치는 순간이었다.
“여기 있었네.”
점심시간을 애매하게 지나 한적하던 식당 안에 익숙한 목소리가 번졌다.
세스가 고개를 돌렸다. 세상에서 제일 당연한 일처럼 알렉산더 랜스키가 이쪽으로 다가오는 중이었다.
“어……? 어떻게 알았어?”
“찾았어.”
그것도 당연한 일처럼 말했다.
“이건?”
알렉산더 랜스키가 턱으로 피어스 캠벨을 가리켰다. 피어스 캠벨이 입을 약간 벌렸다. 모욕적인 기분이 들었는데, 왠지 이 남자 앞에서는 모욕감을 느껴야 정상일 것 같은 기분도 들었다.
세스가 약간 머뭇대다 말했다. 아직 그는 카메라가 고장 난 사실을 숨기고 싶었다.
“학원 앞에서 알게 됐어. 졸업생이야.”
“어쩌다 퀸즈까지 왔어?”
“근처에 아는 카메라 가게가 있다고 해서.”
수리점이라는 말을 가게라는 애매한 단어로 고쳐 말하면서 눈동자가 조금씩 흔들렸다.
“……됐어, 그럼.”
알렉산더 랜스키가 피어스 캠벨에게 잠깐 닿았던 시선을 떼어냈다. 얼굴에는 아직 사나웠던 표정이 일부 남아 있었지만 손짓은 다정했다. 알렉산더 랜스키는 세스를 끌어당겨 늘 하는 대로 이마에 입술을 댔다.
“할 얘기 남았어? 기다릴까?”
“아니, 없어. 가도 돼.”
비로소 경직되어 있던 표정이 풀렸다. 알렉산더 랜스키가 손가락을 구부려 세스의 뺨을 쓸며 말했다.
“나가서 먼저 차에 타고 있어. 나는 여기 계산하고 나갈게.”
“나가면서 해도 되잖아.”
“같이 나가고 싶어?”
“응.”
“그럼 그러지 뭐.”
알렉산더 랜스키가 지갑을 꺼내 카드를 한 장 뽑았다.
툭, 까만색 신용카드가 덜 먹은 음식이 놓인 탁자로 떨어졌다.
“뭐든 해요, 그걸로. 여기 계산도 같이 해 주고. 며칠은 쓸 수 있게 해 놓을 테니까.”
“……무슨 뜻입니까?”
피어스 캠벨이 당혹스러운 눈으로 알렉산더 랜스키를 올려다보았다.
“세스하고 놀아 준 사례.”
말을 마친 알렉산더 랜스키가 세스와 함께 몸을 돌렸다.
여느 연인들처럼 다정해 보이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보며 피어스 캠벨이 헛웃음을 지었다.
“사례는 무슨. 접근할 생각을 말라는 거잖아.”
구속하고 집착하는 통제광에게 돈이 넘쳐나면 하는 짓의 수준이 다르게 느껴졌다.
“미친 인간이네.”
피어스 캠벨이 짜증을 내며 탁자 위에 떨어진 카드를 주워 들었다.
* * *
“화났어?”
식당 안에서는 잘 몰랐지만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알렉산더 랜스키가 타고 온 차는 랜스키가의 방탄 리무진이었다. 앞뒤로 경호 차량이 두 대씩 따라붙었다.
“왜 묻는데?”
“차가 많아서.”
그냥 데리러 왔다면 차가 이렇게 많을 필요가 없다는 건 세스도 아는 일이었다. 사실 학원에 세스를 데리러 갈 때만 해도 알렉산더 랜스키는 방탄 리무진 대신 개인 차량을 이용했다. 이쪽이나 저쪽이나 남들 눈에 띄는 건 마찬가지였지만 그래도 저울질을 하자면 리무진 쪽이 더 심했다.
“찾았다고 했잖아.”
상황은 세스가 학원에 없고, 말도 없이 수업을 빠졌으며 전화도 받지 않는다는 게 드러났을 때 달라졌다. 리든이라도 찾아온 건가 했는데 그것도 아니었다. 알렉산더 랜스키의 보안 팀이 나서야 했다. 따로 추적 장치를 달아 놓지 않은 일반 전화로는 대략적인 지역을 알 수 있었다. 마침 퀸즈로 들어서자 세스가 전화를 받았다. 보안 팀 입장에서는 이보다 더 다행일 수 없는 결론이었다.
“데리러 온다고 말 안 했잖아.”
“그냥 그러고 싶었어. 그래도 될 것 같기도 했고.”
“…….”
두 사람에게는 아직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남아 있었다. 세스는 함께 외출하는 일을 꺼려 했다. 두 사람의 관계가 견고한 것과는 상관없이 외부에 알려지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여겼다. 알렉산더 랜스키는 그럴 일은 없을 거라고 말했지만 세스는 불안을 놓지 못했다.
세스에게 두 사람의 관계는 외부와 단절된 공간 안에서만 허용되는 일이었다.
“앞으로는 그러지 마.”
세스가 공연히 알렉산더 랜스키의 옷자락을 툭툭 잡아당기며 말했다.
“너는 너무 눈에 띄니까…… 괜히 걱정이 돼서 그래. 누가 알아볼 수도 있잖아.”
“…….”
알렉산더 랜스키가 고개를 옆으로 돌려 옆자리에 앉은 세스를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쓰고도 복잡한 표정이었다.
“별일 없을 거라고 해도 안 믿을 거지?”
“응…….”
“됐어, 그럼. 나중에는 알겠지. 하라는 대로 할게.”
누가 알 수도 있을 가능성은 희박했다. 세스의 친부가 시저 랜스키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 중에 살아남은 이들은 존 리든이나 루이 랜스키가 고작이었다. 보그단 벨체프를 비롯해 벨체프라는 이름을 쓰는 직계들은 전부 죽었다. 미국 내에서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타라소프 역시 죽었다. 지병으로 인한 자연사가 사망 원인이었지만 사실은 CIA 측이 손을 썼다. 그리스 남단의 무인도에 위치한 타라소프의 여름 별장까지 침투 루트를 만들어 준 게 베네수엘라의 캠프였다.
아는 사람을 따지면 그랬고, 그 외의 증거는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세스의 출생증명서는 이미 세탁을 마쳤다. 세스 몫의 유산 역시 마찬가지였다. 알렉산더 랜스키가 대리인을 통해 사들인 뒤 전부 현금으로 바꾼 재산은 랜스키가와 연결점이 없었다.
윌리엄 랜스키가 살아 있을 때도 세스의 존재는 드러난 적이 없었다. 루이 랜스키가 고용한 해결사가 들쑤시지 않았다면 아무도 몰랐을 일이었다. 해결사는 루이 랜스키가 감옥에 가기 전 이미 살해당했다. 남은 대금을 청구하는 그가 귀찮았던 루이 랜스키가 타라소프에게 해결을 부탁했다고 했다.
그들의 관계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아, 최근에 하나 생겨났지. 사이코 때문에.
알렉산더 랜스키는 세스에게 여유를 부리는 일은 미루기로 했다. 일단은 루이 랜스키에게 접근했다는 기자를 해결해야 했다.
“화났어?”
그렇게 묻는 게 너무 세스다워서 알렉산더 랜스키가 짧게 웃었다.
“아냐.”
“나한테는 별일 아냐. 나는 괜찮아. 그런데 너는 그러면 안 되니까…… 그래서 신경 쓰는 거야.”
“알고 있어.”
십 년이 지나도 이런 모습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그걸 두고 불평을 할 수는 없었다. 제 맹목성은 세스에게서 비롯됐을 테니까.
“귀엽긴.”
그가 한 손을 들어 세스의 머리칼을 흩뜨렸다. 세스는 그가 손짓을 멈추길 가만히 기다렸다가 어깨에 이마를 기댔다. 그러자 머리칼을 만지던 손이 이제는 귓불을 만지작거렸다.
“너는 그냥 너 좋을 대로 있어. 뭐 더 하라고 안 할 테니까. 대신 전화는 잘 받아.”
“그거…… 음, 사람은 좀 그런데 다른 건 해도 돼.”
전화를 받지 못한 건 내심 미안해하고 있던 터였다. 세스가 말을 꺼내자 알렉산더 랜스키가 입매를 시원하게 벌려 웃었다.
“GPS칩도 괜찮아?”
“괜찮아.”
그가 세스의 손을 들어 손목에 입을 맞췄다.
“내일 하자, 그럼.”
“응.”
몸에 추적 장치를 심는 대화를 나누는 연인이 서로를 쳐다보며 달게 웃었다.
* * *
“젠장, 그럴 줄 알았어.”
세스와 통화를 마친 존 리든이 짜증스럽게 전화기를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하여간 그 개새끼는 성질이 급해서. 별일도 아닌 거 가지고 호들갑은.”
두 사람은 리드베리 학원 근처의 그 카페에 와 있었다. 방금 전까지 학원을 샅샅이 훑다가 이제야 한숨을 돌리는 중이었다.
덩달아 존 리든의 오후 출근도 없던 일이 되어 버렸다. 오늘은 그냥 이렇게 허무하게 날려 보내게 생겼다.
“복직도 물 건너갔겠네요. 안됐습니다. 고생했는데.”
존 리든은 그가 세스와 통화를 하는 사이 주문한 커피를 가져온 젠슨 어글먼에게 유감을 드러냈다.
“괜찮습니다. 물 건너가지 않았거든요.”
“음?”
젠슨 어글먼이 마쉬멜로우를 세 조각이나 얹은 핫 초콜릿을 후후 불며 말했다.
두상이 다 드러나게끔 짧게 자른 머리에 허리와 등을 쭉 펴고 앉아 군인인 표시는 다 내면서 핫 초콜릿을 후후 부는 남자라니. 뭔가 이상했다. 안 어울려야 될 것 같은 조합인데 보고 있으면 위화감 없이 잘 어울려서 그게 더 이상했다.
“세스는 별일 없이 돌아왔는데요.”
“그런데 뭔가 알아낸 것 같아서요.”
“뭐를요?”
“커피 받아 오면서요. 알렉스가 예전에 그린 씨가 커피를 너무 진하게 먹는다고 한 적이 있어요.”
“……음?”
“이 집은 보통 사이즈 컵에 에스프레소 샷을 네 개나 넣더라고요.”
“……. 그래서요?”
“마침 학원 앞이잖아요. 단골집일 것 같아서 물어봤죠. 금방 알더라고요. 그린 씨는 눈에 띄는 타입이니까.”
“아.”
존 리든은 한 박자 늦게 감탄을 드러냈다. 젠슨 어글먼은 눈썰미가 몹시 예리했다.
“지난번부터 같은 남자가 말을 걸었다고 했습니다.”
“남자? 어떤 새끼가 그랬답니까?”
“그건 아직 모릅니다. 인상착의를 들었으니 저는 라이커스로 가 보겠습니다.”
교도소 방문객은 전부 인적 사항과 영상을 남기게 되어 있었다.
“영장 있어야 보여 줄 겁니다.”
“아, 저는 정식 수사를 하는 게 아니라 괜찮습니다.”
……그렇지. 전직 스파이였으니까. 영장 없이 CCTV 영상을 보는 방법이야 수십 가지가 있을 것이다.
“같이 가는 게 낫지 않습니까?”
“아니요. 그럴 경우 저는 행동에 제약이 생기고, 부검사장님은 불법행위를 목격하게 될지도 모르니 서로 불필요한 일이죠. 여기서 헤어지는 게 좋겠습니다.”
그리고 성격도 참 깔끔했다.
존 리든은 짓궂은 우연처럼 세스와 똑같은 자리에 흉터가 있는, 그러나 세스와는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다른 남자에게서 시선을 돌려 커피 잔을 만지작거렸다.
“웬만하면 법은 지켜요.”
“들키지는 않을 겁니다. 저도 복직이 걸린 일이라서요.”
“…….”
“초콜릿 맛있네요. 잘 먹었습니다.”
사이즈 업까지 한 커다란 잔을 그새 깨끗하게 비운 젠슨 어글먼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 보겠습니다.”
“네, 그럼.”
서운할 정도로 깍듯한 인사를 던진 젠슨 어글먼이 카페를 떠났다.
존 리든에게는 어정쩡하게 비어 버린 오후가 남아 버렸다.
* * *
“엉덩이는 어때?”
집에 돌아와서 두 사람은 본격적으로 GPS칩을 심을 자리를 의논했다. 보통은 팔뚝이나 손등에 심는다고 했다. 세스는 어디든 상관없지 않을까 싶었지만 알렉산더 랜스키는 진지했다.
그가 브리프 위로 세스의 엉덩이를 여기저기 눌러 보며 위치를 가늠해 보았다.
“잘못 앉거나 하면 깨지려나.”
“칩이, 많이 커?”
진지한 고민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던 세스는 애써 성감을 참았다.
“아니. 작아. 칩을 심어도 아물고 나면 아무것도 못 느낄 거야.”
“그럼 어디든 상관없어.”
“그렇긴 한데, 그래도.”
알렉산더 랜스키는 필요한 일이긴 했지만 그래도 몸에 일부러 흠을 내는 게 내키지 않다는 말을 그렇게 했다.
“엉덩이가 가장 덜 아플 것 같은데 걱정이 된단 말이야. 내가 이 자세로 할 때……,”
말을 잠시 끊은 그가 브리프 위에 나이트가운을 걸친 세스를 제 허벅지 위에 올려놓았다. 허리를 붙든 손이 삽입을 했을 때처럼 세스를 들었다 다시 내려놓았다.
“세게 박기라도 하면 망가질지 몰라. 엉덩이를 만질 때도 마찬가지겠네. 힘대로 쥐었다가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알렉산더 랜스키가 손을 내려 아쉽다는 듯 세스의 엉덩이를 주물거렸다. 세스가 풀어져서 벌어지는 가운 자락을 조심스레 모았다. 자세가 야해서 조금 곤란했다.
“보통 팔에다 한다며.”
“팔은……. ……역시 안 돼.”
엉덩이를 주물대던 손 하나를 떼서 팔을 쥐어 본 알렉산더 랜스키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왜.”
“심을 데가 없잖아.”
“작다면서.”
“그래도.”
알렉산더 랜스키의 눈에는 세스의 팔이 여전히 너무 가늘었다. 제발 살 좀 쪘으면 좋겠는데 체질이 그런 건지 입이 너무 짧아서 그런 건지 5파운드 이상은 통 늘어나지 않았다.
“손등은?”
“더 안 돼.”
손가락이 쭉 고른 데다 핏줄이 적당히 서 있고 손톱은 넓고 둥근 손은 미형적으로는 흠 잡을 데 없었지만 역시나 살이 너무 없었다. 칩을 박는다니, 안 될 말이었다.
“허벅지는 괜찮으려나.”
알렉산더 랜스키가 가운 자락을 들어 허벅지를 드러나게 만들었다. 방금 전부터 곤란했던 세스가 미간을 찡그렸다.
“보통 하는 데다 하면 돼.”
“허벅지도 안 될 것 같아.”
알렉산더 랜스키가 허벅지를 주의 깊게 살피다 엉덩이를 만질 때처럼 주물러 댔다.
“이쪽은 살이 너무 없고, 이 안쪽은 내가 너무 자주 만지니까.”
허벅지 안쪽을 쓰다듬는 손은 역시나 곤란했다. 세스는 브리프가 조금씩 흘러나오는 프리컴으로 젖어 가는 걸 느꼈다.
……이제 그만하면 안 될까.
“무슨 상관이야.”
“신경 쓰여서 제대로 만질 수가 없잖아.”
“그럼 등이나 목에……,”
“등은 누워서 잘 때 배길지도 몰라. 목도 내가 늘 만지는 곳이라 안 돼.”
……어쩌라고. 네가 안 만지는 곳은 없어.
“발등은.”
그러자 알렉산더 랜스키는 생각이 났다는 듯 한쪽 다리의 무릎을 접게 해 발을 쥐었다.
“안 돼. 너는 매일 걷잖아. 항상 움직이는 부위라 무리가 갈 거야.”
……네가 의사는 아니잖아…….
“역시 팔 안쪽이 제일 나은가.”
발을 한참 매만지던 알렉산더 랜스키의 관심이 다시 팔로 돌아왔다. 그가 세스의 오른팔을 들어 겨드랑이에서 팔꿈치로 이어지는 안쪽 살을 입술로 물고 질근거렸다.
“여기도 안 내키는데.”
세스가 입술을 꾹 물고 있다 물었다.
“그럼 하지 말까?”
알렉산더 랜스키가 어이없다는 듯 눈썹을 찡그리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무슨 소리야. 당연히 해야지.”
“안 내킨다고 하니까.”
“해야 해. 이건 최소한이야. 나야 사람 붙여 놓는 게 백배쯤 마음 편하지만 네가 싫다고 하니까 양보하는 거야. 이 정도는 협조해.”
협조를 안 하는 사람이 나는 아닌 것 같은데…….
세스는 그 말을 할까 말까 고민하다가 그냥 알렉산더 랜스키의 머리를 꾹 안아 버렸다.
왠지 미안해져서 그럼 경호원을 붙여도 좋다고 말하려다가, 그래도 그럴 수는 없다는 생각에 마음을 굳게 먹고 고개를 흔들었다.
“나는 아무 데나 괜찮다니까.”
“그래. 그래서 지금 자리를 찾는 중이잖아. 머리 놔줘.”
왠지 더 살펴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세스는 잠깐 갈등하다 그를 흉내 내듯 얼굴을 쥐고 이마며 콧등에 입술을 붙였다. 하체가 슬금슬금 그에게 들러붙었다. 발기한 것을 그도 알았을 것이다.
“하, 뭐 하는 거야.”
왠지 모르게 불쾌한 대꾸가 들려왔다. 세스가 당황해 키스를 멈추고 그를 바라보았다. 인상을 가득 쓴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그렇게 하기 싫어? 적당히 몸으로 구슬려서 넘어가려는 속셈이야?”
“……아닌데.”
“젠장. 이렇게 애쓰고 있는데.”
그가 왜 화를 내는지 알 수가 없었다.
세스가 무안해진 얼굴로 알렉산더 랜스키를 쥐고 있던 손을 놓았다.
“하기 싫으면 안 해도 돼.”
“누가 하기 싫대.”
알렉산더 랜스키가 투덜대며 나이트가운을 등 뒤로 훌쩍 잡아당겼다. 여기저기 만져 대느라 거의 다 풀어져 있던 가운이 쉽게도 벗겨졌다. 그는 브리프 한 장만 걸친 차림새가 된 세스를 침대에 덥석 눕혔다. 오른손이 다짜고짜 브리프 안으로 파고들었다.
“네가 그걸 이용해 먹는 게 싫다는 거지.”
발기한 채 끝이 축축이 젖어 있던 성기가 쥐였다. 평소보다 거칠게 성기를 훑어 내리는 손짓이 빠르게 흥분을 일으켰다. 세스는 알렉산더 랜스키도 저 못지않게 빠르게 흥분했다는 것을 알아챘다.
“이용 안 해. 그리고 칩을 심는 건 이미 좋다고 했잖아.”
“하지만 싫잖아.”
“안 싫어. 작고 별로 아프지도 않아서 심어도 모른다며.”
“그렇긴 한데……,”
“싫어한 적 없어. 진짜야.”
코가 닿을 듯 말 듯, 얼굴을 바싹 마주한 알렉산더 랜스키가 혼자 고개를 갸웃대다 갑자기 혀를 내밀어 세스의 아랫입술을 핥았다. 간지럽고 부드러운 감촉에 세스가 입술을 늘여 웃었다. 그가 왜 화를 냈던 건지 이제는 알 것 같았다.
“싫은 건 내가 아니라 너 같아.”
“……젠장. 그런 것 같아.”
민망했던지 잠깐 시선을 돌린 알렉산더 랜스키가 돌연 키스를 시작했다. 성기를 직접 자극하며 거세게 혀를 빨아들이는 키스에 머릿속이 하얘졌다. 세스가 입을 한껏 벌리고 키스에 응했다. 어느샌가 브리프가 벗겨졌지만 벗기는 사람이나 벗겨지는 사람이나 인지하지 못했다.
“너는 왜 이렇게 예쁜 거야.”
그래도 그 말은 들었다.
세스가 그게 무슨 헛소리냐는 듯한 표정으로 알렉산더 랜스키를 바라보았다. 알렉산더 랜스키가 그걸 왜 못 알아듣느냐는 뻔뻔한 표정으로 응수했다.
협탁 서랍장을 열어 젤을 꺼낸 그가 손바닥에 한 움큼 쭉 짠 다음 남은 걸 대충 던져 버렸다.
“아프면 말해. 급해서 거칠지도 모르니까.”
젤을 치덕치덕 바른 손가락 끝 두 개가 조밀하게 다물린 주름을 헤집었다. 언제나처럼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 알렉산더 랜스키는 과도하게 제 몸을 아끼려 드는 경향이 있었다. 제 입으로 꼭 필요하다는 칩을 몸에 박는 게 싫어서 화를 내는 모순을 저지를 만큼.
“안, 아파.”
“그런데 왜 찡그려?”
“좋으, 흣, 니까.”
손가락 두 개가 안으로 파고들자 세스가 손등으로 눈을 가리고 하체를 들썩였다. 좋다는 말처럼 성기가 바짝 일어서 툭툭, 맑은 액체를 떨어트렸다. 알렉산더 랜스키가 그 광경을 만족스러운 얼굴로 바라보았다.
“그래도 아파지면 말해야 해. 숨기지 마.”
그가 세스의 다리를 잡아당겨 제 앞으로 끌어왔다. 손가락을 넣어 아래를 휘저으면서 그가 발기한 성기 아래쪽을 핥아먹기 시작했다.
“흐, 으…… 아읏, 거기…… 흑,”
세스가 고개를 이리저리 흔들며 흐느낌에 신음을 뒤섞어 토해 냈다.
아래가 꿈틀대며 손가락을 물어 대는 걸 두 사람 모두 알았다.
“거봐. 예쁘다니까.”
알렉산더 랜스키가 웃으면서 세스의 성기를 깊숙이 삼켰다. 그다음부터는 쾌감이 모든 걸 녹여 없애는 시간이 시작되었다.
* * *
결국 칩은 팔 안쪽에 심었다. 몇 시간의 고민은 부질없어지고 대신 격렬했던 섹스의 기억만 남겼다. 덕분에 팔뚝을 누르면 희미하게 느껴지는 칩의 감촉은 곤란한 연상 작용을 일으켰다.
지금도 습관처럼 팔 안쪽을 눌러 보던 세스는 칩을 시술한 그날 알렉산더 랜스키가 그 주변을 핥던 감각을 떠올리고 괜히 혼자 놀라 재빨리 손을 뗐다.
“왜 그렇게 놀래요?”
불쑥 귓바퀴를 때리는 음성에 세스가 홱 고개를 돌렸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피어스 캠벨이 등 뒤에 서 있었다.
“잘 지냈어요?”
눈이 마주치자 그는 손을 흔들어 보였다.
퀸즈의 카메라 수리점에서 카메라를 찾은 다음 지하철을 타고 맨해튼으로 돌아오는 길에 세스는 충동적으로 센트럴 파크 역에서 내렸다. 뭔가를 찍고 싶다는 마음에 공원 안쪽을 걷다 호수 앞에 멈춰 서서 뷰파인더에 눈을 대고 있는데 누가 말을 걸 줄은 몰랐다.
그것도 피어스 캠벨이.
“……미행했어요?”
피어스 캠벨이 손사래를 쳤다.
“미행이라니. 숨으려고 애쓴 적 없어요. 대놓고 따라가도 그린 씨는 모르던데요.”
자신이 평소 그렇게 부주의했나 싶어 세스가 혀를 찼다. 알렉산더 랜스키나 존 리든이 매번 잔소리를 할 만도 했다. 랜스키가의 사람에게 적이 많은 건 당연한 일이었는데 너무 생각이 없었다.
납치해서 몸값 같은 걸 요구할지도 모르잖아. 내가 애인이라는 걸 알면. 알렉스가 부자라는 건 다들 아니까.
언젠가 존 리든이 부자들을 대상으로 한 유괴 범죄가 아예 수익성 좋은 사업이 되는 것 같다고 어이없어 한 적이 있었다. 검사가 된 첫해 맡았던 사건 중 하나였는데 의욕적으로 덤벼든 것과는 별개로 관할이 FBI로 넘어가는 바람에 술을 먹고 하소연하듯 꺼내 든 얘기였다.
세스가 바짝 경계심을 세우며 주머니에 손을 넣어 전화기를 꺼냈다.
생각해 보니 이 남자에게 제 이름을 알려 준 적이 없었다. 그런데 남자는 방금 전 그린 씨라고 제 이름을 말했다. 저를 미리 알고 있었다는 의미였다.
“목적이 뭔데요.”
세스가 꺼내 든 건 전화기였지만 피어스 캠벨은 그게 총이라도 되는 것처럼 양손을 들어 보였다.
“그렇게 겁먹을 거 없어요. 그냥 얘기 좀 하자는 거니까.”
“그런 거였으면 몰래 따라오진 않았을 거잖아요.”
“그건 나도 이유가……. 아니, 젠장. 이러지 맙시다. 나는 그렇게 나쁜 사람이 아니에요. 납치범이나 뭐 그런 것도 아니고. 명함 준 대로 프리랜서 사진가란 말입니다. 진짜예요.”
세스는 피어스 캠벨이 하는 말을 들으며 통화 버튼을 누를 준비를 했다. 단축 번호 1번에 알렉산더 랜스키의 번호를 지정해 둔 건 자신이 올해 들어 한 일 중 가장 쓸모 있는 일이었다.
“일부러 접근했다는 거 알아요.”
“그건 그런데…… 젠장.”
피어스 캠벨이 돌연 한숨을 쉬었다.
사실 피어스 캠벨은 가명이었다. 그 이름으로 활동하는 기자는 여러 명이었고, 루이 랜스키 건을 물어 온 사람은 그가 아니었다. 가명은 일종의 간판이자 방패였다. 그들이 하는 일이 어쩌다 보니 폭로 대신 협박이 되는 경우가 더 많아진 탓이었다. 처음에는 여느 신입 기자들처럼 펜으로 세상을 바꾸고 싶다는 열정이 가득했다. 하지만 잘못 나간 기사 하나로 인해 소송에 휘말리고 직장에서 잘린 다음부터는 열정 따위 아침 시리얼에 함께 말아먹고 있었다.
돈 좀 있는 인사들의 뒤를 캐는 건 맞았다. 그러나 그걸 기사로 폭로하는 것보다는 캐는 척만 하는 게 더 돈이 된다는 걸 알아 버렸다.
자서전을 쓰겠다고 루이 랜스키를 구슬리자 그가 엄청난 얘기들을 쏟아 낸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일개 프리랜서 기고가가 덤벼들 일이 아니었다. 쿠바 영해에서 벌어진 시저 랜스키의 살인 건은 증거도 없었고, 미국에서 기소할 수도 없었다. 무엇보다 조카와 붙어먹기 위해 친형을 살해했다는 얘기는 너무 황당해서 인터넷에서도 먹히지 않을 것 같았다.
대신 피어스 캠벨들은 좀 더 안전하게 현금을 갈취할 수 있는 방법을 찾기로 했다.
근친상간 관계에서 뭐라도 증거를 건져 입막음용 돈을 요구하면 될 것 같았다. 알렉산더 랜스키를 직접 상대하는 건 무서우니 상대적으로 만만해 보이는 세스 그린을 대상으로 삼고 접근했다.
그런데 세스한테 직접 접근을 맡은 피어스 캠벨은 갈수록 이번 일이 내키지 않았다. 두 사람이 한 핏줄이라는 증거를 찾는 일도 요원하거니와 오히려 이 관계에서 세스 그린은 무고한 피해자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혹시 그는 유산이니 근친이니 하는 것은 하나도 모른 채 그저 알렉산더 랜스키에 묶여 있는 게 아닐까. 세스 그린은 랜스키 가문의 사람과는 전혀 동떨어진 삶을 사는 듯 보였다. 지하철을 타고 통학했고 낡은 카메라를 수리해서 쓰고 싶어 했다. 랜스키 인더스트리가 보유한 광학 기술이라면 직접 카메라 회사를 세울 수도 있을 텐데 그 사실도 통 모르고 있는 듯했다.
게다가 반응을 보면 그는 알렉산더 랜스키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알렉산더 랜스키가 전화 연락 좀 되지 않는다고 경호 차량을 줄줄 이끌고 나타나 미친 통제광처럼 굴던 것과는 반대였다.
어쩌면 알렉산더 랜스키가 그들이 근친 관계인 것을 숨기고 세스 그린을 이용하려는 것인지도 몰랐다. 시저 랜스키의 친자에게 상속된 자산을 독식할 수 있다면 그런 사기극은 얼마든지 벌일 수 있지 않을까.
“돌려줄 게 있어요.”
만약 그렇다면 피어스 캠벨은 세스 그린을 구해 주고 싶었다. 자신이 아무리 부자들을 갈취해서 먹고사는 삼류 인생이라고 해도 학대받는 사람을 못 본 체할 만큼 쓰레기는 아니었다. 그간 매번 돈만 뜯어낸 것은 아니었다. 기사로 낸 것도 몇 개 있었다. 그 기사들은 피어스 캠벨의 자부심이자 면죄부였다.
“그쪽 애인이 주고 갔잖아요. 비기너스에서.”
“…….”
세스는 피어스 캠벨이 내미는 까만 신용카드를 바라보았다.
“당신하고 놀아 준 사례라고 하면서요. 그런 말을 대놓고 하는데, 기분 안 상해요?”
세스가 눈을 깜박거렸다. 그래서 뭐 어떠냐는 뜻이었는데 알렉산더 랜스키나 존 리든은 의미를 쉽게 알아들었겠지만 피어스 캠벨은 아니었다.
“당신 애인 통제광 맞습니다. 전화 연락 좀 안 됐다고 그렇게 하는 인간은 드물어요. 다른 문제도 있지 않아요? 그 인간 폭력 쓴 적 있죠?”
“…….”
있긴 했다. 십 년 전에. 하지만 세스는 그걸 폭력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럴 줄 알았어요. 그런 사람이 하는 게 진짜 사랑이라고 생각하지 말아요. 상담부터 받아 보는 게 어때요? 내가 잘 아는 상담사가 있는데.”
세스는 좀 어이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할 말은 그게 다예요?”
“제발 진지하게 들어요. 나도 쉽게 이런 말 해 주는 게 아니란 말입니다. 하여간 그쪽 애인 같은 인간은,”
“뭐라고 하든 안 헤어져요.”
세스가 그쯤에서 잘 모르는 사람이 멋대로 내뱉는 헛소리를 잘랐다.
“카드는 그냥 버려요.”
세스가 휙 돌아서서 가려고 했다. 그 태도가 피어스 캠벨을 울컥하게 만들었다. 그가 이런 짓을 했다는 걸 알면 동업자가 별 개소리를 다 해 댈 것이다. 그걸 각오하고 좋은 일을 하려는 건데 저렇게 나오면 이쪽도 열이 받았다.
“헤어져야 되는 게 맞지 않아요? 근친이잖아요.”
“…….”
세스가 우뚝 멈춰 섰다.
“모르고 있었어요?”
“…….”
세스는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은 채 손에 쥔 전화기를 쳐다보았다. 핏기가 빠져나간 손끝처럼 머릿속도 새하얬다. 어떻게 하면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내가 기자라는 건 알 테고…… 기사 쓰기 전에 기회를 주는 거예요. 벗어나요, 그만.”
“…….”
영 대답이 없자 피어스 캠벨은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덧붙였다.
“기사는 이틀 뒤에 나갈 거예요. 그 전에 연락 주면 그 부분은 뺄게요. 대신 그린 씨가 다른 정보를 제공한다는 조건이에요.”
기사를 쓸 생각은 애초에 없었지만 어쨌거나 자신의 기사로 한 사람의 인생을 구할 수 있다면 그것도 기자의 본분이지 않을까 싶었다. 거듭 말하지만 그에게도 얄팍한 자부심 정도는 있었다.
“잘 생각해 봐요.”
피어스 캠벨은 끝내 뒤를 돌아보지 않는 세스의 등을 어쩐지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며 바라보다가 먼저 자리를 떴다.
* * *
안정제를 먹어야 할까…….
센트럴 파크를 벗어난 뒤로 세스는 불안을 지우지 못했다. 심장은 계속 쿵쿵 뛰고 식은땀이 났다.
어떻게 해야 되지.
내가 너를 지켜야 하는데. 나는 뭘 할 수 있지.
세스는 물을 틀고 이가 시리도록 찬물에 얼굴을 집어넣었다. 안정제는 좋지 않았다. 무기력하고 사고를 무디게 만들었다. 시간은 이틀이라고 했으니 그 안에 방법을 찾아야 했다.
세스는 부르르 떨리는 손으로 대리석 세면대를 꽉 움켜잡았다.
내가 뭔가를 해야 해.
어떻게든.
알렉스가 모르게.
할 수 있었다. 그를 위해서라면 뭐든지.
세스는 안정제를 삼켜 끝도 없이 잠들고 싶은 충동을 애써 참아 냈다.
* * *
세스가 욕실에 있는 동안 알렉산더 랜스키는 전화를 받았다. 새로운 보안 팀장이 건 전화였다.
[피어스 캠벨 쪽은 처리했습니다.]
“어떻게?”
별로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악성코드를 심어 노트북을 날려 버렸다. 얼치기 사기꾼들이 딴에는 조심한답시고 웹상에 자료를 백업해 두는 일은 하지 않아 다행이었다. 도청을 좀 해 보니 자료를 다 날렸다면서 패닉에 빠져 있었다. 루이 랜스키에게 다시 면회를 신청한 것도 확인했다. 하지만 루이 랜스키는 이미 정신병원으로 이감된 뒤였다. 고작 기자 명함으로는 이름도 들어 볼 수 없는 곳이었다.
[그래도 경고 정도는 해 두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변호사를 보내든가 해서요.]
“그건 좀 더 생각해 보고. 당분간 더 감시해.”
[알겠습니다.]
통화가 끝나고 알렉산더 랜스키가 전화를 아예 꺼 놓기 전이었다.
때를 맞춘 것처럼 새로 전화가 걸려왔다. 알렉산더 랜스키는 눈에 익은 번호를 알아보고 피식 웃었다.
“무슨 일이야.”
[알렉스, 잘 지냈어요?]
개인 보안 팀장과 통화하는 용도로 쓰는 전화는, 바꿔 말하면 통화하지 않을 때면 내내 꺼 둔다는 소리였다. 딱 시간을 맞춰 걸려온 전화는 새 보안 팀장이 그와 통화를 한 사실을 지금 전화 건 사람이 알아냈다는 뜻이었다.
“덕분에.”
그 사실이 별로 놀랍진 않았다. 젠슨 어글먼이라면 할 수 있는 일일 테니까.
[비록 해고당한 입장이지만 말은 감사합니다. 짐작했겠지만 새 보안 팀장은 모르는 정보가 있습니다.]
그럴 거라 생각했다. 젠슨 어글먼은 불필요한 짓은 하지 않았으니까. 협상거리가 없다면 굳이 전화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말해 봐.”
[아시겠지만 제 조건은 복직입니다.]
젠슨 어글먼은 이제껏 고용했던 보안 요원 중에서 가장 유능한 인물이었다. 안전가옥 위치가 드러나고 세스가 죽을 뻔한 일이 아니었다면 그를 자를 일도 없었다. 하지만 그때 남은 강박증과 트라우마는 쉽게 해소되진 않았다. 알렉산더 랜스키는 보안 팀을 갈아엎고 몇 배는 더 복잡하고 까다로워진 보안 규칙을 세웠다.
젠슨 어글먼이 유능한 것과 별개로, 그의 복직에는 확신이 필요했다.
“듣고 판단하겠어.”
젠슨 어글먼이 말했다.
[피어스 캠벨은 가명입니다. 회사 이름 같은 거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래서?”
[일인 기업은 아닙니다.]
“그런데.”
거기까지는 알렉산더 랜스키도 아는 일이었다.
[그중 금발이 하나 있는데, 이름은 잭 클레이고 리드베리에서 사진학을 수료했습니다.]
“……뭐?”
하지만 리드베리 출신의 잭 클레이는 모르고 있었다.
[게이입니다. 전 애인들을 보면 취향이 확고한 편이고요. 생로랑 모델 같은 마른 남자들을 좋아하던데요. 그리고 며칠 전에는 퀸즈의 식당에서 알렉스 명의의 카드를 긁었습니다.]
퍽!
알렉산더 랜스키가 서재 의자를 걷어차며 일어섰다.
“뭐라고?”
[원하시면 좀 더 알아보겠습니다.]
그 순간 복직이 결정되었다.
통화를 마친 젠슨 어글먼이 손으로 입을 가리고 헤헤 웃는 동안 알렉산더 랜스키는 이를 갈며 새 보안 팀장에게 강등 사실을 통보했다.
* * *
세스는 만 하루를 안정제를 먹지 않고 버텼다. 불안하긴 했지만 잠도 잤고 토하지도 않았다. 알렉산더 랜스키에게도 문제없이 보였는지 딱히 몸 상태를 묻거나 걱정하는 말을 하진 않았다.
응, 나아졌어.
안정제 없이 스스로 증상을 참아 낸 건 아주 간만의 일이었다. 세스는 이 일을 맥케이에게 얘기하고 싶어졌다. 마음에는 안 드는 인간이었지만 실력이 좋은 정신과 의사라는 말은 믿고 있었다. 그에게서 상태가 정말로 나아졌다는 확인을 받고 싶었다.
하지만 그 전에 할 일이 있었다.
나아졌으니까 할 수 있어.
세스는 옷을 갖춰 입고 방을 나왔다. 알렉산더 랜스키는 서재에 있었다. 서재로 가기 전 세스는 카메라 방에 들러 얼마 전 수리점에서 되찾아 온 할아버지의 카메라를 목에 걸었다.
똑똑.
그런 다음 서재 문을 두드렸다. 서재 문은 열려 있었지만 그가 뭔가를 하고 있는 공간을 함부로 침입하고 싶진 않았다.
“노크 안 해도 돼.”
알렉산더 랜스키는 모니터에 집중하고 있던 눈을 들어 올렸다. 그러나 세스의 차림새를 보더니 곧 표정이 언짢아졌다.
“어디 가게?”
“응. 사진 찍게.”
“같이 가, 그럼.”
“아냐. 혼자 가고 싶어.”
세스가 서둘러 고개를 저었다. 알렉산더 랜스키는 짜증은 나지만 그래도 귀여운 건 어쩔 수 없다는 식의 표정으로 세스를 집요하게 쳐다보며 말했다.
“방해 안 할 거야. 모르는 사람처럼 조용히 따라다니다 트럭에서 파는 핫도그 같은 거나 사 줄게.”
“서툴러서 싫어.”
아직은 사진 찍는 모습을 보여 주고 싶지 않다는 말이었다.
“뭘 그렇게 수줍어하는데. 그만 귀엽게 굴어.”
“혼자 갈 거야. 나오지 마.”
세스는 단호하게 주의를 주고 몸을 돌렸다. 알렉산더 랜스키가 후다닥 뒤따라 나왔다.
“뭐야. 키스도 안 해 주고 가?”
“그런다고 시간 끌면 따라 나올까 봐.”
“왜 그렇게 잘 아는 거야.”
세스가 한 팔로 그의 목을 휘감아 입술을 입술로 꾹 눌렀다. 그렇게 떨어지려는 입술을 알렉산더 랜스키가 확 물어 버리자 혀를 내밀어 입 속에 넣었다.
섹스의 전조 같은 질척하고 야한 키스가 길게 이어졌다.
“이런 키스를 하고 혼자 가겠다고? 그건 반칙 아냐?”
키스가 끝나자 알렉산더 랜스키가 유혹하듯 허리를 당겨 안으며 속삭였다.
세스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몸을 옆으로 돌려 알렉산더 랜스키의 팔을 빠져나왔다.
“혼자 갈 거야.”
“……너무하는데.”
“그래도 소용없어.”
세스가 걸음을 떼며 단호하게 말했다.
“올 때 핫도그 사 올게. 집 잘 보고 있어.”
“누굴 개 취급이야.”
“얌전히 있어.”
세스가 뛰듯이 아래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내려갔다.
“넘어져! 천천히 가.”
“따라오지 마.”
세스가 집을 나갔다. 알렉산더 랜스키가 서재로 돌아가 전화기를 들었다.
“차 대기시켜.”
개인 보안 팀장 젠슨 어글먼이 물었다.
[알렉스도 가는 겁니까?]
“그래.”
[알겠습니다. 그럼 올라가겠습니다.]
이틀 전 새로 짜인 보안 팀이 신속히 움직였다.
* * *
피어스 캠벨, 아니 잭 클레이와는 베이야드 거리에 있는 그의 아파트에서 만나기로 했다.
학원 근처의 카페로 하자는 걸 세스가 거절했다. 남들 눈에 띄지 않을 장소가 필요했다.
차이나타운 입구에서 한 모퉁이가 꺾어진 곳에 있는 아파트는 시끄럽고 이국적인 냄새가 났지만 고개를 돌리면 반대쪽에 아담한 공원이 있는 안락한 주택가였다.
세스는 일부러 아파트 건물에서 좀 떨어진 곳에 서 있다가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는 사람이 보이자 재빨리 뒤에 따라붙었다.
장갑과 모자를 썼다. 머플러로 얼굴도 감췄다. 일부러 챙겨 입은, 평소보다 두꺼운 재킷 안주머니에는 주방에서 몰래 가지고 나온 날카로운 과일용 나이프도 들어 있었다.
로비 안에 들어선 세스는 엘리베이터를 타지 않고 비상구 계단을 이용해 7층까지 올라갔다.
718호 앞에 도착한 세스가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똑똑.
일부러 조용하게 문을 두드렸다. 복도는 텅 비어 있었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고개를 내민 사람은 718호에 사는 잭 클레이 한 명뿐이었다.
“아, 왔어요? 시간 딱 맞춰서 왔네. 들어와요.”
“…….”
세스는 묵묵히 아파트 안으로 들어섰다. 잭 클레이의 아파트는 낡았지만 채광이 좋았다. 벽은 온통 누군가의 사진이 빼곡히 걸려 있었다.
“사진 구경할래요? 화보집도 많아요. 구하기 힘든 것도 꽤 있어요.”
그는 손님맞이라도 하려는 듯했다. 주방의 조리대 위에는 도마 위에 썰다 만 치즈와 과일이 놓여 있었고, 그 옆에는 미리 꺼내 둔 와인 잔이 있었다.
“와인부터 할래요? 시간은 좀 이르지만.”
세스는 대꾸 없이 조리대와 나란히 붙어 있는 식탁 의자를 빼서 앉았다. 턱으로 맞은편 의자를 가리키자 잭 클레이가 떨떠름해하다 와서 앉았다.
“괜히 긴장되네. 너무 그렇게 정색할 것 없어요. 나는 그린 씨를 도우려는 것뿐이니까. 들어 봐요. 나로서도 랜스키가를 상대하는 건 무섭거든요. 그런데도 그린 씨가 나아졌으면 하는 생각에……. 음……?”
세스는 그를 앉혀 놓고 손수건에 싸서 온 과도를 꺼내 식탁 올려놓았다. 잭 클레이가 바보처럼 입을 벌리고 세스를 쳐다보았다. 세스가 무슨 짓을 할지 통 감을 못 잡겠다는 얼굴이었다.
세스가 침착하게 말을 시작했다.
“꽤 날카로워요. 조사를 했다면 알겠지만 알렉스는 격투기를 익혔고요. 나한테도 호신술 몇 가지는 가르쳐 줬어요.”
거짓말이었다. 그러나 표정이 거의 없는 세스는 알렉산더 랜스키 앞에 있을 때가 아니라면 거짓말을 해도 잘 표시가 나지 않았다.
“사람 급소가 어디에 있는지도요.”
“아니, 잠깐…… 그러니까 지금 그 칼로 나를 찌르겠다고…… 그러는 겁니까?”
“내가 우울증이 있다는 것도 조사했어요? 어릴 때부터 그랬는데.”
“……뭐요?”
“누가 협박해서 상태가 나빠진 내가 약을 먹고 그 사람을 찔러도 감옥에는 가지 않는다는 뜻이에요.”
“…….”
잭 클레이의 안색이 급격히 달라졌다.
“무슨…… 왜 이러는 겁니까. 꼭 이럴 건 없잖아요. 내가 꼭……,”
“돈을 줄까도 생각해 봤어요. 그런데 그건 싫더라고요. 그 돈으로 변호사를 사는 게 더 마음 편할 것 같아서.”
익숙하지 않은 협박은 어설프기 마련이었고, 세스도 제 목소리가 떨린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묘하게도 그게 더 실제처럼 느껴졌다. 중증의 우울증 환자라는 고백은 세스를 살짝 정신 나간 인간으로 보이게 했다.
“고르세요. 기사를 쓸 건지, 아니면 접을 건지. 기사를 쓰지 않는다는 게 확실해지면 변호사 비용으로 쓰려고 했던 돈을 입금해 줄게요.”
잭 클레이가 납덩이처럼 무거워진 얼굴로 연거푸 헛웃음을 토했다.
“하……! 이런 사람이었어요?”
“이런 사람이라는 게 무슨 말인지 모르겠네요.”
“이렇게 칼 들고 사람 협박하는, 그런……,”
“그쪽도 했잖아요. 기사로 사람 협박하는 짓. 칼이라고 별로 다르진 않아요.”
세스가 식탁에 내려 둔 나이프를 쥐었다.
“어떻게 할래요?”
“…….”
세스는 잭 클레이가 대답을 할 때까지 한참을 같은 자세로 앉아 기다렸다. 잭 클레이는 세스가 정말로 미친 인간일 가능성과 동료가 마침 어제 날려먹은 노트북을 복구할 가능성 두 개를 놓고 저울질하다가 결국 세스가 원하는 답을 했다.
“……젠장. 알았어요. 포기할게요.”
사실 기사를 내는 건 불가능했다. 기사 내용이라고는 루이 랜스키의 입에서 흘러나온 얘기가 전부였는데, 그 루이 랜스키가 숨어 버렸다. 알렉산더 랜스키 쪽에서 손을 썼을 가능성이 높다는 소리였다. 피어스 캠벨들은 제 목숨을 걱정해야 할 처지였지, 누군가를 구해 줄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다.
잭 클레이는 자신에게 면죄부를 썼다.
세스 그린은 미친 인간이 맞는 것 같다고. 어쩌면 폭력적인 통제광일 거라고 생각했던 알렉산더 랜스키 쪽이 피해자일지도 모르겠다고.
진실이 어느 쪽이든 두 미친놈들끼리 알아서 할 문제였다.
* * *
세스는 다시 센트럴 파크 역에서 내렸다.
손에 쥔 카메라로 무언가를 찍고 싶었지만 셔터를 누르는 순간이 되면 망설여졌다.
얀 터낸토가 쓰던 헝가리제 카메라는 완전히 고칠 수 없었다. 헐거웠던 셔터는 손을 봤지만 필름을 감는 쪽에 생긴 문제는 고칠 수가 없었다. 수리공은 정확한 문제를 알 수도 없을뿐더러, 설령 안다고 해도 맞는 부품을 구할 수도 없다고 했다. 카메라에 심각하게 충격이 가는 바람에 안쪽에 흠집이 났을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필름에 상처가 생겼다. 찍을 수는 있지만 온전한 사진을 남기기는 어려웠다. 수리공이 말하길 새 필름을 끼우면 처음 한 장 정도만 건질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니까 세스는 지금 딱 한 장만 찍을 수 있는 카메라를 들고 있는 셈이었다. 필름을 새로 끼우면 다시 한 장을 더 찍을 수 있겠지만, 선택지가 단 하나라는 점은 기분이 묘했다.
만약 남은 필름도 단 한 통이라서 이 카메라로 찍을 수 있는 사진도 단 한 장뿐이라면 무얼 찍게 될까.
세스는 그런 생각을 하며 늦가을로 물든 쌀쌀한 공원을 무턱대고 걸었다.
그러다 빛이 가장 예쁜 시간이 찾아왔다. 이맘때쯤 해가 지기 전, 오후 네 시에서 다섯 시 사이의 어느 순간이었다.
세스가 렌즈 캡을 벗겨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카메라를 켜서 뷰파인더에 눈을 댔다. 지금 찍는 사진은 오늘 그가 찍을 수 있는 한 장의 사진이었다.
“…….”
뷰파인더에 눈을 댄 채 세스가 피사체를 찾아 주변을 훑었다. 그러다 무언가를 발견하고 셔터를 눌렀다.
찰칵.
생각보다 손가락이 먼저 움직였다. 셔터를 누르고 나서야 세스는 자신이 사진을 찍었다는 것을 알았다.
“아…….”
뷰파인더에서 눈을 떼고 난 다음, 그 이유를 알았다.
“왜 갑자기 돌아서고 그래. 아니면 안 들켰어.”
그에게 처음이자 마지막이자 유일한 피사체가 된 것은 알렉산더 랜스키였다.
“언제부터…… 따라왔어?”
“뭘 묻고 그래. 알면서.”
처음부터였을까. 그럼 자신이 사진을 찍으러 오기 전 누군가의 아파트를 먼저 들렀다는 것도 알고 있을까.
“지하철로 따라왔어?”
“응.”
“……안 어울려.”
“안 어울릴 건 또 뭐야.”
어느샌가 둘은 어깨를 나란히 했다.
“안 추워?”
세스가 야외를 걷기에는 썩 좋은 차림새 같진 않은 알렉산더 랜스키에게 제 머플러를 풀어 목을 감싸 주었다.
세스가 발꿈치를 들고 머플러를 매 줄 동안 알렉산더 랜스키는 어울리지 않게도 내내 수줍은 얼굴을 했다.
“화 안 내?”
“뭘?”
“따라다녔다고. 오지 말라고 했잖아.”
“그건…….”
세스가 닥터 맥케이에게 상담을 받을 때처럼 열심히 제 감정을 헤아렸다.
아무리 해도 화는 나지 않았다. 다만 조금 걱정이 됐다.
“그 사람은, 그러니까 바람피우거나 그런 건 아니고…….”
“알아. 누군지.”
수줍던 표정이 사라졌다. 알렉산더 랜스키는 세스를 보며 무서울 정도로 진지한 얼굴을 했다.
“기사는 안 쓸 거야. 어차피 기삿거리도 아니었고.”
“……알고, 있었어?”
“응.”
세스가 난처한 얼굴로 작게 물었다.
“내가 칼 훔쳐간 것도 알았어?”
“응.”
“……그랬구나.”
“응.”
세스가 허전해진 목을 버릇처럼 쓸다가 허탈한 한숨을 내쉬더니 무슨 생각에선지 작게 웃었다.
“혹시 그 사람 돈 줬어?”
“아니. 애초에 돈 쓸 일도 아니었어.”
여기에는 사실 세스가 모르는 일이 하나 있었다. 입막음을 대가로 돈을 준 건 아니었지만, 알렉산더 랜스키는 잭 클레이에게 거액의 수표를 건네긴 했다. 그가 찍은 세스의 사진 값이었다. 인화한 사진과 필름을 전부 포함한 값이었다. 하지만 잭 클레이가 멍청한 게 아니라면 그 돈을 단순히 사진 값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어쨌거나 그렇게 말하니 정말 별일이 아닌 모양이었다.
약을 먹지 않은 것도 잘한 일 같았고, 그쯤에서 끝낸 것도 잘된 일 같았다. 그가 진작 아는 일이었다고 생각하니 화가 나는 게 아니라 안도감이 느껴졌다. 걱정할 게 없다던 말은 정말이었다.
신발 밑에 바스락 밟히는 낙엽 소리가 경쾌했다.
장난을 치듯 낙엽을 툭툭 밟고 난 세스가 물었다.
“그럼 그 돈 내가 써도 돼?”
“무슨 돈?”
“기사 안 쓰는 게 확실해지면 돈 준다고 했거든. 안 보내도 되는 거면 내가 써도 돼?”
“그 돈이건 뭐건 그냥 쓰고 싶은 대로 써.”
알렉산더 랜스키가 손을 들어 세스의 머리를 부드럽게 헝클였다.
“그런데 어디에 쓰게?”
“필름을 사야 해서.”
“너나 나한테 필름이 비싸다는 얘길 하는 건 아닐 테고.”
“많이 사야 해서.”
“얼마나 많이?”
“하루에 막 수십 통씩 쓸지도 몰라.”
알렉산더 랜스키가 피식 웃었다.
“필름 회사라도 사 줄까?”
그 말도 사실일 것 같았다. 잠시 고민하던 세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중에. 지금은 말고.”
“알았어.”
알렉산더 랜스키는 지금은 아니라니까 내일쯤 사면 되겠다고 생각했다. 속으로 하는 생각까지는 알 수 없었지만 세스는 지금 그가 짓는 표정이 몹시 좋아 보인다고 생각했다.
저녁 해는 사진에만 마법을 거는 게 아니었다. 그가 아는 유일한 피사체에도 눈을 떼지 못하게 만드는 마법을 걸었다. 세스는 저물기 전 잠깐, 아주 따듯한 색을 품는 햇볕에 물들어 있는 알렉산더 랜스키를 홀린 듯 바라보았다.
그러다 문득 이유를 알게 되었다.
“그러고 보니까 우리 이러는 거 처음이지?”
서서히 노을로 변해 가는 해를 등지고, 공원 전체가 알록달록한 색으로 물들어 갔다. 오늘도 어제처럼 다양한 사람들이 공원에 나와 있었다. 키스를 나누는 연인들이나 유모차를 미는 부모, 혼자 책을 읽는 노인이나 조깅 코스를 달리는 사람들도 어느 순간에는 하던 일을 멈추고 밤이 되기 전 잠시 마법처럼 다채로워지는 저녁 해를 감상했다.
“같이 걷는 거?”
“밖에 나오는 거.”
이런 마법의 시간대에 서 있는 알렉산더 랜스키를 제 눈으로 보는 게 처음 있는 일이었다.
나는 늘 너를 숨겨야만 한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그러지 않아도 되는 일이었나 봐…….
세스가 쑥스러운 듯 목덜미를 붉히며 말했다.
“앞으로는 자주 나오자. 맛있다는 식당에도 가고 그러자.”
“하고 싶으면 뭐든 해.”
알렉산더 랜스키는 이전부터 그렇게 해도 됐을 거라는 말은 굳이 하지 않았다. 대신 방금 전 그들을 지나친 연인들처럼 세스의 어깨에 팔을 올리고 드러나는 귓가에 키스를 남겼다.
똑같은 자리에 키스를 되돌린 세스가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손을 마주잡은 두 사람이 다시 공원을 걸었다.
짧게 저문 가을해 뒤로 달이 떴다. 손을 잡은 두 사람이 달빛을 등지고 집으로 향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