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부-1. 서곡행 (1/24)

1부

1. 서곡행

3년 전 윤모난이 두 형을 전투에서 잃고 홀로 살아 돌아왔을 때 부모는 그를 외면했다. 그는 자신의 형들처럼 정식 결혼이나 사랑의 결과물이 아니었으니까.

윤모난의 아버지 남경 윤씨 가주는 훌륭한 종자를 뽑아내기 위해 한 이름 없는 여성과 교배하듯이 만나 그를 얻었다. 대대로 에스퍼만 배출한 가문에 가이드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열차표와 신분증 좀 보여주시겠습니까?”

역무원이 짐 가방을 들고 천천히 기차역 승강장으로 들어오는 남자를 잠시 붙잡았다. 검은색 잉크로 날짜와 좌석 번호가 찍힌 종이 티켓과 신분증을 확인하는 절차가 이어졌다.

“가이드시네요. 복귀하는 길이십니까?”

“네, 제 자리는 어느 쪽이죠?”

“1등석은 이쪽으로 출입하시면 됩니다.”

윤모난은 신분증을 받아 다시 주머니 안에 넣으며 머리를 감싸고 있던 코트의 모자를 뒤로 젖혔다. 그러자 분홍색으로 염색된 머리카락이 그의 반듯한 눈썹 위로 쏟아진다. 따듯한 숨은 겨울바람을 만나 하얀 김을 흩뿌렸다.

서곡(西谷)행 열차에 오르는 탑승객의 목적지는 모두 같다. 서곡에는 민간인 거주 구역이 없고 오직 ‘국가이능력기관’인 서곡센만이 자리하고 있었다. 윤모난의 목적지이기도 했다.

출발 직전 김을 뿜어대는 열차에는 칸마다 검은색 제복을 입은 사람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주변이 시끌시끌했다. 아마도 서곡센에 입소할 신입 대원들이 탑승객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윤모난은 객실이 있는 기차 복도에 들어서면서 두꺼운 코트부터 벗었다. 열차 안 공기가 훈훈해 추위는 금방 가셨다.

[3호차-B3]

목을 답답하게 죄어오는 정복의 금장 버튼까지 풀어낸 그는 방으로 분리된 1등석으로 향했다. 부드럽게 옆으로 밀리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4인용 좌석에는 아무도 앉아 있지 않았다.

무척 다행이었다. 그는 센터까지 최대한 조용히 가고 싶었으므로.

B3 좌석 위 선반에 짐 가방과 코트를 올려놓자마자 그는 주머니 안쪽에서 작은 술병부터 꺼냈다. 잠깐 사이에 정복 재킷도 갑갑하게 느껴져 벗어서 옆에 걸어버렸다. 그래도 갑갑함이 가시지 않아 셔츠의 단추를 몇 개 더 풀었다.

금욕적이고 절제된 디자인의 정복 안에 숨겨져 있던 창백한 피부가 파리하게 드러나고, 하얀 껍질로 감싸인 듯한 단단한 가슴 근육 위로 은제 목걸이 줄이 스쳐 철그렁댔다.

족쇄를 벗어 던진 윤모난은 자리에 앉아 호박색으로 빛나는 높은 도수의 액체를 여러 번 들이켰다. 그러자 훈기가 점점 돌고 추위에 질려 있던 피부도 겨우 생기가 도는 것처럼 제 색을 되찾았다.

“정말 감사합니다! 이렇게 자리를 업그레이드해주시고―!”

열차가 막 출발하기 직전, 들뜬 목소리와 함께 누군가 남자가 있는 객실 문을 밀며 들어왔다. 머리를 유리창에 기대 식히고 있던 윤모난도 살포시 눈을 떴다. 입구보다 낮은 위치에 갈색 머리 꽁무니가 보였다. 그 옆에 있는 사람은 아까 티켓을 확인한 역무원이다.

“덕분에 제가 팔자에도 없는 1등석을 다 타보네요. 감사합니다.”

“자리가 이중으로 예약된 건 저희 쪽 잘못인데요. 그럼 필요한 거 있으시면 또 부르세요. 감사합니다.”

“네! 그럼 안녕히 가세요.”

새로 등장한 청년은 역무원과 영양가 없는 감사 인사 퍼레이드를 이어갔다. 역무원이 떠나자 키 작은 동승객이 총총거리면서 안으로 들어와 짐을 선반 위에 올려놓고 꾸벅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저는 안범이라고 합니다! 그쪽도 입소식에 가는 길이세요?”

“…아니요. 나는,”

“아, 선배님이신가 봐요. 복귀하는 길이세요?”

“뭐…. 네.”

지나치게 붙임성이 좋고 참 밝은 친구다. 윤모난은 안범의 악수 제안에 얼떨결에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맞잡은 손이 먼지떨이인 양 위아래로 흔들린다.

“가는 길이 심심하지 않겠네요. 있죠, 저 엄청 운 좋았다니까요? 하필이면 제 좌석이 이중 부킹이 되는 바람에 좌석 업그레이드를 받았어요. 후하하하―!”

“…아, 그렇군요.”

금세 피곤이 내려앉았다. 윤모난의 동승객 안범이란 자는 막 건전지를 새로 갈아 끼운 싸구려 다람쥐 장난감 같았다. 한마디로 요란스러웠다.

아직 젖살이 올라붙은 발그레한 양 뺨을 가진 청년은 갓 시골에서 상경해 들떴는지 천진난만하기만 했다. 고요함을 원했던 사람에게는 최악의 동행이었다.

“선배님이라고 불러도 되나요? 어디서 오셨어요? 어느 소속이세요? 몇 년 차세요?”

“…….”

무슨 버튼을 누르면 질문을 쏟아내는 자판기 같다.

“아― 에구, 제가 너무 예의가 없었네요. 선배님 성함부터 여쭸어야 하는데.”

성함이 문제인가. 첫 만남에 집 주소까지 물어볼 기세로 질문 폭격을 던지는 사람치고는 예의를 너무 차리는 것 같은데. 윤모난은 정신이 혼미해졌다. 기차에 올라 빈속에 연거푸 독한 술을 들이켠 상태에서, 과도하게 시끄러운 다람쥐 장난감을 상대하려니 눈앞이 핑 돌았다.

성함은 개뿔….

“선배님 성함이….”

“아… 개똥 같… 입니다.”

“아… 개…똥…이… 선배님.”

한편 안범은 도무지 앞에 앉은 남자와 개똥이라는 이름을 매치시키지 못했다. 진정 그의 이름이 개똥이라면, 그건 천인공노할 일이 아닐까.

남자는 선이 굵은 미남이었다. 평균을 훨씬 웃도는 커다란 키에 다부지고 쭉 뻗은 몸은 완벽하리만치 균형 잡혀 있었고, 날카로운 선을 따라 자리한 섬세한 이목구비는 사납고 냉랭해 보였다.

감탄이 나올 만큼 잘생긴 얼굴이지만, 전체적으로 예민하고 우울한 느낌이었다. 그런 인상을 조금 중화시킨 것은 곱슬기 있는 분홍색 머리였는데, 정돈되지 않은 머리가 진한 눈썹을 가려주기 때문일 테다.

안범은 내심 감탄하면서도 아쉽다고 생각했다. 저런 미남자에게 왜 그의 부모는 개똥이란 이름을 붙였으며, 주변 사람들은 어찌 천연덕스럽게 그를 개똥이라 불렀을까. 하지만 부모가 주신 귀한 이름을 비웃는 것은 도리가 아니다.

어쩌면 그 개똥이라는 이름에는 어떤 숨겨진 숭고한 뜻이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옛날에는 병약한 자식에게 일부러 천한 이름을 붙이기도 했다던데.

“이름 멋지십니다!”

“…개똥이란 이름이 멋지다고…?”

“네. 한번 들으면 안 잊히는 이름이잖아요. 감히 누가 개똥이라는 이름을 기억 못하겠습니까? 대대손손 역사에 남을 이름 같아요.”

악의적이었던 윤모난의 말장난은 다람쥐 장난감의 과하게 긍정적인 뇌를 거치더니 이상한 결과를 낳았다. 안범이 얌전히 입을 다물기를 바랐던 그의 계획이 어긋나버린 것이다.

“그런데 성이 개씨고 이름이 똥이세요?”

“하….”

윤모난은 자기도 모르게 한숨을 푹 내쉬고 말았다. 저 성가신 장난감은 도통 꺼질 줄을 몰랐다. 내심 귀찮았던 그는 반 정도 남은 술을 다 비우고 잠이나 청할 작정으로 단숨에 들이켰다. 그러나 목구멍으로 제법 많은 양을 넘겼음에도 술은 여전히 줄어들 기미가 없었다. 의아한 표정으로 병을 확인하자 앞에서 기다렸다는 듯이 안범이 간섭을 해왔다.

“개똥 선배님과 만난 기념으로 저의 미천한 능력을 써보았습니다.”

“…능력이 현상 유지예요?”

“앗, 바로 알아보시네요. 후하하하, 네 맞습니다.”

말없이 안범의 맑은 눈을 보던 윤모난은 이내 시선을 돌렸다. 그러더니 무언가가 떠올랐는지 처음으로 입가에 작은 미소를 띠었다. 웃을 때는 더 잘생겼구나. 안범은 생각했다.

“이상한 우연이네요. 제 형도 능력이 현상 유지였는데.”

“엇, 정말요? 대단한 우연이에요! 형님이 어디 소속이신데요?”

“전투조…였죠.”

“우와, 현상 유지 능력자가 전투조 소속이라, 대단하시네요. 제 능력은 전투에는 별 쓰임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전투조 에스퍼에게는 드문 능력이긴 하죠. 그쪽도 전투조 지망이에요?”

아직 입소식을 치르지 않은 안범은 소속 배치를 받기 전이다. 윤모난의 질문에 안범은 좌우로 고개를 저으며 손까지 흔들었다.

“어휴― 전 약해빠져서 전투조는 못 가요. 능력 범위도 작고요. 전 복구 및 구호조에 가고 싶어요. 제 어릴 때부터 꿈이 구호조 에스퍼였어요.”

“그 꿈 참 좋네요.”

그러자 안범이 해맑게 웃었다. 그 티 없는 웃음에 윤모난은 지고 말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안범은 거슬리긴 하지만 심성이 나쁘진 않은 것 같았다. 게다가 둘째 형과 같은 능력이라니. 인연을 믿진 않지만 관심이 가는 건 사실이었다. 더불어 술이 떨어지지 않게 능력을 써준 점도 꽤 맘에 들고.

“그럼 선배님은 어떤 능력이세요? 형님분처럼 전투조 소속이세요?”

“전투조 소속 가이드예요.”

“어, 우왓! 가이드라고요? 정말? 저 가이드 처음 봬요. 진짜 거짓말 아니구. 제 주변에는 가이드가 없어서. 와아…. 가이드이시구나. 대박이다.”

안범은 감탄사를 뱉으며 눈을 초롱초롱 빛냈다. 동경 어린 눈빛을 마주하는 일은 이미 윤모난에겐 익숙한 것이었다.

신인류, 즉 ‘포스트’는 각자 가진 이능력은 다르지만 대개 ‘에스퍼’라 불린다. 그러나 같은 포스트 중에서도 ‘가이드’라 불리는 이능력자들이 따로 있었는데, 그 분류에서 알 수 있듯이 희귀한 취급을 받았다. 아주 소수이기도 하고, 가지고 있는 의미가 남달랐기 때문이다.

“저 어렸을 때 얼마나 가이드가 되고 싶었는지 아세요? 진짜 완전히 멋있잖아요. 교과서에 나오는, 대성전에서 활약하는 가이드 이야기를 읽고 얼마나 심장이 뛰던지. 역사 선생님이 가이드는 포스트의 수호자라고 했어요. 에스퍼들이 트랜스가 안 되도록 막아서 언젠간 이 전쟁을 끝낼 위대한….”

트랜스. 그게 가이드가 에스퍼와 달리 특별하게 취급받는 유일한 이유였다.

“안범 씨, 목소리가 너무 크네요.”

“…아, 죄송해요. 제가 너무 흥분해서. 그럼 전투조 소속이시면 직접 트랜스들 제거하시는 건가요?”

“네.”

“우와와… 지금까지 트랜스들 얼마나 죽이셨어요?”

“300…마리 정도.”

안범은 벌어진 입을 다물 줄을 몰랐다. 대단하신 분을 두고 이렇게 경망스럽게 떠들었다니. 개똥 선배님은 저 같은 한낱 미천한 인물과 함께 담소나 나누실 분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런데 막상 300마리가 넘는 트랜스들을 죽인 영웅은 아무런 감흥도 없는 표정이었다. 안범은 오히려 그런 모습이 더 멋있게 느껴졌다.

가이드인 것도 멋있는데 얼마나 능력이 대단하면 그 정도로 뛰어난 공적을 세웠을까. 감탄만 늘어놓던 안범에게 윤모난이 대뜸 물었다.

“그런데… 안범 씨는 이런 얘기 들어도 별로 안 무섭나 봐요?

“네? 뭐가요.”

“내가 죽인 트랜스들 중에는… 한때 동료였던 사람도 있어요. 포스트가 폭주하면 트랜스가 되는 거니까.”

“아….”

“그러니까. 안범 씨가 너무 운이 나빠서 혹시 트랜스가 된다면 내가 당신을 죽이러 갈 수도 있잖아.”

안범은 갑작스럽게 차가워진 그의 말투에 어색하게 침을 삼켰다. 자신이 너무 주접을 떨어서 선배님이 불쾌해지신 건가.

드르륵―

그때 1등석 객차 안의 냉기를 깨고 누군가 갑자기 들어왔다. 안범과 윤모난 모두 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저벅저벅 워커의 밑창이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가 건조하게 울려 퍼진다.

허락도 없이 안에 들어온 건 객실의 문을 가득 채울 만큼 장신의 남자였다. 검은색 머리칼을 한 톨의 흐트러짐도 없이 빗어 올리고, 정석대로 차려입은 제복으로 단단한 몸을 감싼 사내는 바로 눈썹 가까이에 손끝을 가져다 대며 딱딱하게 경례를 했다.

“전투 2부 7팀 소속 에스퍼 무구원입니다. 윤모난 선배님을 찾고 있습니다.”

사냥용 매의 발톱 끝처럼 날카로운 눈이 분홍색 머리를 한 윤모난에게로 향했다.

무구원이라.

윤모난은 그 성씨와 이름을 천천히 곱씹어보았다. 포스트의 나라 ‘반도’에서 무씨를 가진 족속들은 모두 북해(北海) 가문 출신이 아닌가. 어쩐지 귀에 익은 이름이다. 원이라는 돌림자를 따르는 걸 보니 북해 무씨 중에서도 직계일 텐데.

“여긴 윤모난이라는 분은 안 계신데…요. 이분은 성함이 개똥이시구, 저는 안범….”

“내가 윤모난인데.”

“네?”

윤모난은 술병을 간이 테이블에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나 사내를 마주했다. 평균보다 훨씬 큰 키인 자신과 눈높이가 엇비슷한 것을 보니 그도 보통 신장은 아니었다. 다만 흐트러짐 없이 정돈된 무구원에 비해 한껏 풀어진 윤모난의 차림새 덕분인지 둘은 참 대조적이었다.

이마 위로 흘러내리는 분홍색 머리칼을 뒤로 넘기면서 윤모난이 냉랭하게 물었다.

“이봐요, 사람을 찾았으면 무슨 용건인지부터 밝혀야지.”

“도움을 청할 일이 있습니다. 잠시 동행해주시겠습니까?”

“…처음 보는 사람을 이유 없이 따라가긴 싫은데.”

반말도 존댓말도 아닌, 남의 신경을 살살 긁는 말투가 거슬리는지 무구원은 안 그래도 딱딱한 얼굴에 인상을 쓰며 말했다.

“따라오시면 압니다. 관련 없는 외부인 앞에서는 밝힐 수 없는 사유라 양해 부탁드립니다.”

윤모난은 순간 눈을 가늘게 뜨며 미간을 좁혔다. 하여간 북해 무씨는 물론이고 이 나라에 있는 세력 가문 출신이란 놈들은 하나같이 저렇게 거만하기 짝이 없다. 자신의 가문인 남경 윤씨마저도 한미한 가문인 일반인들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으니.

이 나라에서 성씨와 가문은 곧 힘으로 직결된다. 반도는 다섯 가문들로 이루어진 평의회로 굴러가는 나라이기에, 그 구성원들이 기형적으로 권력을 독점할 수밖에 없었다.

그중에서도 무구원의 가문인 북해 무씨는 권력 위에 종교까지 얹어 위세가 대단한 집안이었다. 반도의 국교인 천경교(天鏡敎)를 믿는 다른 신자가 없는 건 아니었지만, 북해 출신 종교 원리주의자의 수는 압도적이었다. 그들은 북해 밖의 반도인들을 ‘외부인’이라 칭할 만큼 폐쇄적인 광신도 집단이었다.

“내가 여기 탄 건 어떻게 알았고?”

“…….”

“선배님이라며 예의 차리더니 말을 씹네.”

“따라오시죠.”

남경 윤씨와 북해 무씨 사이는 피바람이 불 정도는 아니었지만, 권력의 본성상 서로 견제하는 것이 일상이었다. 그런 무씨가 도움을 요청하다니. 윤모난은 께름칙한 기분에 문밖에서 버티고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막무가내인 행태를 보아하니 따라가기 전까지는 물러서지 않을 성싶다. 윤모난은 테이블 위의 술병을 들어 한 모금 들이켜면서 손끝으로 무구원의 단단한 가슴팍을 툭툭 쳤다.

“별일 아니면 넌 내 손에 죽습니다.”

“…….”

무구원은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윤모난의 데이터 속 무씨란 놈들은 대체로 딱딱한 밥맛들이었는데, 이놈도 융통성도 없고 재미도 모르는 목석임이 분명했다. 무씨 성을 가진 족속 중에 농담이라는 걸 하는 사람은 딱 한 사람 봤던가.

무구원은 윤모난을 1등석 칸의 긴 복도 끝에 있는 객실로 데려갔다. 문 앞에 도착하자 객실 안쪽에서는 단조롭게 무어라 중얼거리는 말소리가 나고 있었다. 문을 열다 말고 무구원이 뒤를 돌아보며 대뜸 말했다.

“이 일은 함구해주시죠.”

“뭘요?”

“앞으로 보게 되실 상황 말입니다.”

“그러니까 무슨….”

드르륵―

문을 열자 4인실의 기차 객실 안에는 시커먼 사내놈들이 가득 들어 있었다. 다들 하나같이 두 손을 모으고 창가에 앉은 남자를 향해 무릎을 꿇은 자세였다.

“어머니 신이시여, 고통에 처한 눈앞의 자녀를 살펴주소서―”

“다들 나가라.”

때아닌 기도회에 윤모난이 당황하자 창가에 앉은 남자가 바로 명령을 내렸다. 그러자 무씨 가문의 광신도 에스퍼들이 태엽에 감긴 인형인 듯 한 치의 오차도 없는 동작으로 객실을 빠져나간다.

“모난이 오랜만이구나.”

윤모난은 곧바로 자신이 여기에 불려 온 목적을 깨달았다. 무구원이란 이름이 어쩐지 낯설지 않더니 무정원의 동생이었구나. 그의 말마따나 무정원과는 꽤나 간만이었다.

무정원의 잿빛 눈동자가 박힌 눈이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자, 윤모난도 경계를 풀고 웃었다.

“복귀한다는 소식은 이미 들었다. 동생에게 너 좀 데려와달라 부탁했는데. 혹 불쾌했던 건 아니지? 무구원이 일일이 친절하게 설명했을 리 없어서 걱정이었어.”

“아니에요. 반가워요, 형. 그런데 형한테 또 동생이 있는 줄은 몰랐네요.”

“다른 동생들은 북해에 처박혀 나올 생각이 없고, 기관에 복무하는 건 저 녀석 하나야. 자, 앉아.”

그의 손짓에 따라 무정원의 건너편에 앉는 순간, 윤모난은 가슴을 칼로 찌르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무정원의 에너지 파동이 심상치 않았던 것이다. 무씨 광신도들이 그의 손을 잡고 줄줄 기도문을 외던 이유가 이거였나.

“형, 파동이….”

“가문에 일이 있어서 갔다가 돌아오는 길인데 이상하게 파동이 가라앉지 않아. 서곡에 도착하려면 네 시간이나 남았고. 조금 난처하게 됐다. 보안 때문에 다른 가이드를 부르기도 좀 그렇고.”

무정원은 얼굴에 미소를 띠고는 있지만 고통이 만만치 않은 듯 마냥 편해 보이지는 않았다. 트랜스로 변할 정도는 아니래도 어쨌건 파동을 가라앉히지 않으면 위험한 상황이었다.

무구원이 안범 앞에서 이유를 설명하지 않은 이유가 이거였군. 북해 무씨의 종손인 무정원이 이런 상태라는 정보가 외부에 새어나가 좋을 일이 없을 테니.

포스트 에스퍼들은 항상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으며 싸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의 적은 폭주 상태의 에스퍼, 즉 트랜스들이다. 그 괴물들을 반면교사 삼아 평생을 트랜스가 되지 않도록 자신을 경계해야 하는 것이 에스퍼의 숙명이었다.

그러니 안범의 말이 일정 부분 맞기는 하다. 과연 가이드는 에스퍼들의 수호자라 할 수 있었다. 그들의 파동을 잠재울 수 있는 건 가이드밖에 없으니.

“모난아, 나 좀 고쳐줄래.”

“…….”

하지만 그렇게 대단한 수호자인 가이드는 막상 망설이는 얼굴이었다.

3년 만이었다. 누군가를 가이딩한다는 것은. 진동하는 열차 위에 앉은 윤모난의 심장 깊숙한 곳이 불안하게 떨려왔다. 괜찮아. 다시 돌아온 이유가 있잖아. 정신보호센터 의사들도 내 정신병이 이제 관리 가능한 수준이라 했으니.

자기암시를 하면서도 윤모난은 불안한 눈으로 앞에 앉은 사람을 바라봤다. 두 형제는 머뭇거리는 자신을 말없이 주시하고 있었다. 한쪽은 차분한 기다림이었지만, 다른 한쪽 그러니까 무구원의 시선에서는 어쩐지 송곳 같은 날카로움이 느껴졌다.

제 형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데 미적거리고 있으니 답답하겠지.

그러나 윤모난도 눈앞의 사람을 외면할 생각은 없었다. 그게 무정원이라면 더. 무정원은 이능력 기관에 들어오기 전, 윤씨 형제와 함께 훈련 학교를 같이 다녔고 고향인 남경에도 종종 놀러 왔었다. 그는 다섯 살 어린 윤모난을 친동생처럼 대해주던 사람이다.

“형, 제가 3년 동안….”

“응, 안다. 요양한 뒤로 가이딩은 처음이겠지? 갑자기 부탁해서 미안하다.”

“…그래서 잘 안될 수도 있어요.”

“시도만 해줘. 임시방편이라도.”

윤모난은 마음을 굳히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두 손을 뻗어 무정원의 목덜미를 감싸고 제 이마를 그의 이마에 붙였다. 쭉 뻗은 콧날이 지그시 맞닿았다.

윤모난은 바짝 마른 아랫입술을 꾹 깨물면서 정신을 집중했다. 식은땀으로 축축해진 무정원의 이마 피부에서 미세한 기운이 느껴진다. 에스퍼의 에너지 파동은 혈관을 따라 억누르면 되는 것이라, 가이드의 능력이란 건 사실상 기의 흐름을 읽는 힘이었다.

몸에 흐르는 파동을 더 섬세하고 예민하게 느낄수록 이를 제어하는 것은 더 쉬워진다. 윤모난은 온 정신을 집중해 겨우 무정원의 동맥에서 피와 함께 흐르는 에너지의 뾰족한 감각을 읽어내는 데 성공했다.

“하아― 역시 3년 만이라 잘 안되니?”

“말하지 말아요. 소리도 파동이니까.”

윤모난은 눈에 보이지 않는 자신의 파동을 말초신경 끝단으로 흘려보내 무정원의 혈관을 에워쌌다. 예전 같았으면 금방 끝났을 일에 시간이 꽤나 걸렸다. 역시나 오랜만인 탓이었다. 하지만 끓는 물처럼 날뛰던 파동이 차츰 고요한 호수처럼 잔잔해지기 시작했다.

흔히 가이드의 능력은 과학의 영역이 아니라 신의 영역이라고들 한다. 온 인류가 파동 제어장치를 개발하는 데 매달렸지만 가이드를 대체하기란 불가능했다. 사람과 사람이 맞닿는 것을 제외하곤 트랜스로의 폭주를 막을 방도가 없었다.

무정원은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제 얼굴에 바짝 붙은 윤모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과거에 그는 천재라는 수식어를 달고 다니는 가이드였다. 단순히 에스퍼의 폭주를 잠재울 수 있는 수준을 뛰어넘어, 이능력을 제압하는 경지였기 때문이다. 한창때 윤모난이 어땠던가. 그는 문자 그대로 강했다. 전장에서 적들의 에너지를 일시에 제압하고 귀신같은 무력으로 트랜스들을 몰살시켰더랬다.

“됐어요.”

그런 천재가 한낱 평범한 가이드 수준이 돼버렸구나. 살을 붙이고 있어도 이렇게 애를 써야만 한다니. 전 국가적 손실이다. 무정원은 자신에게서 떨어지는 윤모난에게 손을 뻗어 땀으로 푹 젖은 분홍색 머리칼을 정리해주었다.

“우리 팀에 들어와라. 네 원래 기량으로 돌아갈 수 있게 도와주마.”

“형네 팀은 같은 가문 출신만 받잖아요.

“너만 예외로 치지.”

“…나처럼 미달인 놈을 데려갔다가 무슨 재앙을 당하려고요?”

윤모난은 무정원의 손을 제게서 떼어내면서 자조적으로 웃었다. 가이드가 희귀하긴 희귀한가 보다. 능력이 떨어져 친형제들을 죽게 한 놈한테도 영입 제안이 들어오는 걸 보니.

“우리 팀은 언제나 열려 있어. 언제든 생각 있으면 말해. 지금 애들은 내 성에 차질 않아서. 실적도 생각보다 저조하고.”

“명색이 최상위 정예 팀 대원들인데 평가가 박하네요. 형은 기준이 너무 높아요.”

“그래야 일에 그르침이 없는 법이거든.”

윤모난은 길게 한담을 나누기에는 어쩐지 피곤했다. 그러고 보니 무정원의 동생이란 놈은 지금까지 한마디도 없다.

무씨들은 형제들 간에도 서열이 엄격하다더니 형아가 무서워서 한마디도 못하나.

“그럼 내 동생 팀은 어때? 같은 전투조인데 마침 결원이 있어 인원 보충이 절실하다지.”

“형님.”

그제야 무구원이 한마디 짧게 내뱉는다. 무구원은 무정원과는 달리 숫기라곤 전혀 없는 놈인 듯싶었다. 대단한 형의 위세에 억눌리고 살았나. 윤모난은 갑자기 돌부처같이 경직된 무구원에게 묘한 흥미가 생겼다.

미남형 얼굴에 떡 벌어진 어깨. 탄탄한 뼈대와 근육은 옷을 갖춰 입었어도 쉽게 눈에 띄었다. 규율이 생활화된 듯 꼿꼿하고 바른 자세로 앉아 있는 무구원은 금욕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자세만 봐도 대충 상대의 기질이나 실력을 알 수 있는 법인데, 그의 몸은 장시간 훈련으로 다져진 이상적인 신체였다. 저 정도면 대련을 하며 주먹을 갈겨볼 맛이 날 것도 같았다.

“어쩌다가 인원 부족이에요? 에스퍼 대원들은 북해 가문에서만 찾아도 차고 넘칠 텐데.”

“아….”

윤모난의 질문에 무정원은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

“실은 무구원이 대원들과 불화가 좀 있어서.”

그게 뭔 대수라고?

포스트들은 능력에 따라 감정도 날뛰는 까닭에, 걸핏하면 주먹질을 하며 싸우곤 했다. 윤모난은 이번엔 무구원에게 물었다.

“뭐 주먹다짐이라도 했어요? 누굴 얼마나 때렸길래요?”

“…팀장을.”

팀장을 때렸다고? 이거 꼴통이네. 기껏해야 3년 차쯤 되었을 텐데. 에스퍼들이 아무리 날뛴다고 해도 기관에 속한 이상 무조건 팀장의 말에 복종해야 하거늘.

“세 명 정도….”

“네?”

“팀장 세 명, 팀원 다섯 명을 팼다. 그중 두 명은 혼수상태고.”

무정원은 웃을 일도 아닌데 웃음기를 띠면서 제 동생의 부끄러운 행적을 대신 낱낱이 고했다.

“그래서 무구원이 있는 2부 7팀에 지원자가 없다지. 현장 나가기도 전에 송장 되고 싶지 않다고.”

“허…. 때린 이유는요?”

“기도하는 시간을 방해한다고 그랬다더구나.”

무정원은 이제 살 만해졌는지 낮게 웃기 시작했다. 무구원은 그런 형의 웃음이 낯선 듯 그쪽을 조금 길게 바라보다 시선을 치웠다. 무표정한 로봇 같은 모습. 이상한 반응이었다.

“무구원네 팀도 후보에 넣어줘, 모난아. 인원 미달로 해체되기 직전이라. 너야 뭐 오라는 곳이 많을 거라 강요는 아니지만. 어디 생각한 곳은 있니.”

“아니요. 원래 형들하고 소속되어 있던 팀은 해체됐으니 가서 정해야겠죠.”

“…너희 형들은 어머니 신의 텃밭에서 안식을 취하고 있을 거다.”

으레 반도인들이 하듯이 천경교 경전에 있는 문구를 뱉는 무정원의 말투가 어딘가 삭막했다. 하지만 윤모난은 어머니 신이 계신 조에의 땅이니 뭐니 하는 내세 따위에 관심 없었다. 저 자신도 그랬듯이 죽은 형들은 신자가 아니었다. 그러니 아마도 무정원의 위로처럼 천경교의 어머니 신이 그들을 굽어살필 것 같지는 않았다.

천경교의 신도들은 삶을 죽음과 고통으로 가득 찬 곳이라 여기며, 마땅히 이를 긍정해야 생명력을 얻어 영혼의 승격을 이룰 수 있다고 믿는다. 이러한 믿음을 견지한 무씨 광신도들은 경전에 쓰인 말에 대한 일체의 다른 해석을 거부하고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외골수들이었다. 그런 탓에 엄격한 율법에 따라 삶을 살아간다.

…윤모난은 이걸 아주 엿 같다고 생각했다.

고통을 긍정하라는 교리는 곧 죽음을 두렵지 않게 하는 원동력이었다. 천경교는 이것을 이용해 수많은 포스트들을 사지에 투신하도록 세뇌시킨다. 이 때문에 반도 출신 포스트 능력자들의 평균 수명은 32세 정도였다. 숭고한 죽음을 자처하며 앞다투어 죽어나간 탓이다.

“그만 갈게요.”

윤모난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도저히 전도나 당할 기분은 아니었다. 무정원은 그의 짜증을 파악하고 부드럽게 웃더니 악수를 건넸다.

“곧 다시 보자. 이젠 센터에서 얼굴 자주 볼 수 있겠구나. 필요한 것이 있으면 언제든 말하고.”

“네, 뭐. 그런데 형은 왜 아직도 팀장이나 하면서 현장에서 고생해요? 형 정도면 더 높은 자리로 갈 수 있을 텐데요.”

“내 아들이 안전한 나라에서 살려면 아버지인 내가 고생해야지.”

아, 윤모난은 무심하게 뱉은 말을 바로 후회했다. 그러고 보니 이맘때가 무정원의 죽은 아내의 기일이 아니었던가. 북해에 일이 있어 다녀왔다더니 기일에 제를 올리고 오는 길이겠구나.

워낙 가족을 잃는 일이 흔한 세상에 사니 누군가의 상실마저 일일이 기억하는 건 힘에 부치는 일이다. 트랜스들한테 죽어나가는 사망자들의 수가 대성전 전보다 확연히 줄었다지만 말이다.

대성전은 몇백 년 전 트랜스와 포스트가 대대적으로 부딪힌 전쟁으로, 대부분의 물질 문명에 쇠퇴를 불러온 인류사의 큰 사건이었다. 애초에 포스트가 존재하는 이상 트랜스가 생겨나는 것은 필연이었고, 여전히 곳곳에서는 전투가 빈번하게 벌어지고 있었다.

“북해 무씨 16대 종손은 잘 자라고 있나요?”

“벌써 3살이다. 얼마 전에 능력이 발현했는데 컵에 있는 물을 얼리더군.”

“부전자전이네요. 아버지가 뛰어난 빙결 능력자이니 아들도 뛰어나겠죠.”

“너는 장가 안 가고?”

“뭐 하러요. 형들이 생전에 남기고 간 조카들이 남경 윤씨 대를 이을 텐데요.”

“너희 가문에서는 그렇게 생각 안 할 텐데.”

“서자에다 정신병까지 있는 놈한테 누가 딸을 시집보내겠어요. 저희 집은 저한테 관심도 없구요.”

자학이 섞인 말에 무정원은 안타까운 미소를 지었다. 윤모난은 꾸벅 인사를 하고 객실을 나왔으나, 뒤에 무구원이 그림자처럼 따라붙었다. 그게 3년 묵은 정신병자의 신경을 건드렸다.

“뭔데요?”

“오늘 일은 절대 발설하시면 안 됩니다. 약속해주십시오.”

이거 대체 뭐 하는 새끼지? 아까 똑같이 말했고 알았다고 했잖아? 사실 윤모난은 알았다고 한 적이 없지만 기억하지 못해 적반하장으로 인상을 구겼다.

“…이봐요. 무구원 후배님. 내가 네 형아를 고쳐줬으면 감사하다고 고개나 숙일 것이지. 왜 고장 난 카세트처럼 한 말 하고 또 하지?”

“가문의 일은 외부인에게 의탁하지 않는 것이 관례입니다. 이번 일은 예외 상황이니 상호 간의 협의가 필요합니다.”

“야.”

“네.”

“닥치고 비켜. 가는 길 막지 말고.”

그렇게 무구원의 어깨를 툭 밀치고 가려 했다. 갑작스레 커다란 손이 뻗어와 그의 손목을 홱 낚아챘다. 손을 빼려 했지만 상대방의 악력이 만만치 않다. 3년 정도 현직에서 물러나 정신보호센터에 있긴 했지만, 이런 말랑한 꼴통한테 무시당할 수준은 아니었던 윤모난은 심사가 제대로 뒤틀려버렸다.

…감히 에스퍼가 가이드를 막아서려 하다니. 과연 팀장 세 명에 팀원 다섯 명을 팬 또라이답구나.

먼저 싸움을 거는 사람에겐 자비를 베풀지 않는 것이 윤모난의 신조였다. 그는 맞닿은 피부를 통해 순식간에 무구원의 에너지 흐름을 차단시켰다. 순간 능력이 제어당하는 것을 느낀 무구원이 잡은 손의 힘을 약간 풀었다. 이를 놓치지 않고 재빨리 손을 빼낸 윤모난은 단단한 주먹으로 상대의 오른쪽 뺨을 갈겼다.

별로 힘을 싣지도 않았건만. 능력을 제어당한 무구원은 단번에 기차 칸 벽으로 내동댕이쳐졌다. 하지만 잠시 흐트러졌던 자세는 금방 균형을 찾았다. 윤모난은 매의 발톱처럼 날카로운 눈으로 자신을 노려보는 커다랗고 시커먼 사내에게 마지막으로 경고했다.

“안 꺼지면 확 따먹는다. 꺼져.”

“…….”

그 말이 치명타라도 된 건지 미세하게 움찔한 무구원이 입가에 맺힌 피를 손등으로 찍어내며 물러섰다. 그를 등지고 돌아서면서 윤모난은 괜히 눈썹 위쪽을 벅벅 긁었다.

…왜 확 따먹는다는 협박을 했지.

그냥 튀어나온 말인데 생각해보니 상황에 맞지 않는 협박인 듯하다. 하지만 매서운 가르침을 줘놓고 ‘미안, 따먹는다는 말은 실수’라고는 할 수 없지 않겠는가. 그래서 윤모난은 태연스럽게 다시 긴 복도를 걸어서 자신의 좌석이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선배님!”

“아….”

맞다. 다람쥐 장난감이 있었지. 서곡까지는 정말 조용히 가고 싶었는데.

객실 문을 닫고 걸음을 옮긴 윤모난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자리에 앉았다. 그러고선 주머니를 뒤져 작은 약통을 꺼내 알약 두 알을 술과 함께 삼켰다.

정신병자… 정신병자…. 약 먹을 시간이 지나서 무정원의 동생도 패고 따먹는다는 협박도 한 거구나.

“성함을 제대로 모르고 막 불러서 죄송해요. 아까 그 덩치 큰… 그분이 선배님 이름이 윤 뭐…라고 했는데. 다시 알려주세요!”

“…윤모난입니다.”

“윤씨라…. 설마 남경 윤씨세요?”

“…그냥 개똥이라 불러요. 그게 낫겠다.”

“별명인가요? 친한 사람들끼리만 부를 수 있는 그런 건가요? 선배님, 우리 친해진 건가요?”

이젠 모르겠다. 윤모난은 무구원 같은 타입은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팰 수 있었지만, 안범 같은 애들에겐 어쩐지 약했다. 심지어 저 초롱초롱한 눈이 무서울 지경이다. 대체 어디서 자라면 저렇게 크지.

안범은 상대가 별 대꾸가 없는데도 조잘조잘 잘도 떠들었다. 자신의 가족 구성원이라든가 고향의 특산물 같은 하등 쓸모없는 이야기뿐이다. 그러다가 이내 자신의 친구라면서 애착 인형까지 꺼내 소개시켜줬다. 너덜너덜하고 꼬질꼬질한 토끼 인형은 얼마나 주물러댔는지 겉 천이 다 해져 있었다.

“이건 제 애착 인형인데. 이름은 치치예요. 아버지가 사주셨던 건데….”

“저기 안범 씨.”

“네?”

“대체 몇 살인데… 아직까지 애착 인형이 있어요?”

“20살이용. 근데 선배님은 연세가 어찌….”

“연세는 노인네들한테나 묻고. 나랑 겨우 다섯 살 차이네.”

“엇― 대박. 저는 선배님의 공적이 하도 뛰어나시길래 더 나이 드셨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젊으시네요.”

“…저기, 나보다 어리다니 동생 같아서 하는 말인데. 치치인가 차차인가 하는 그거, 다른 대원들한테 들켰다간 조롱과 멸시를 당할 테니 숨기든지 버리든지 해요.”

“아… 저도 알아요. 성인이나 돼서… 유치한 거…. 근데 치치는 아빠가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주신 거라….”

젠장! 뭔 말만 하면 여기저기서 무덤에 묻힌 가족들 사연이 튀어나오니 무서워서 말을 할 수가 있나.

윤모난은 끄응, 하고 앓다가 이내 기절한 척 눈을 감았다. 들어주는 이가 없으면 그만 떠들겠지 싶었는데…. 안범은 대체 뭐 하는 놈인지 몰라도 필사적으로 자는 척하는 윤모난에게 두 시간 동안 치치에 얽힌 절절한 사연을 들려주었다.

중간에 윤모난은 정말로 몇 번이나 기절할 뻔했지만, 크흥, 하면서 코를 마시는 안범의 소리에 놀라 계속 깼다. 그러다 보니 서곡에 도착할 즈음에는 안범의 전기를 쓸 수 있을 정도로 그에 대해서 속속들이 알게 된 것이다. 이런 스트레스는 심각한 정신 질환을 앓고 있는 환자 윤모난에게 결코 좋은 일이 아니었다.

서곡역 안보용 게이트를 통해서 센터에 당도한 즈음에, 윤모난은 정말 한 놈만 걸려라 싶은 심정이었다. 작고 연약한 안범을 팰 수는 없었고 무구원처럼 단단한 샌드백이면 금상첨화였다.

“으악―! 치치야!”

그런데 재해와 같은 사건은 애먼 데서 줄줄이 터졌다. 먼저 구호조가 꿈이라던 안범이 돌연 입소식 이후 전투조에 배정받았다. 그 뒤로도 환장할 사건들은 계속해서 이어진다.

일단 윤모난은 화려한 경력에도 불구하고, 오랜 휴직과 정신 병력을 이유로 팀 자유 선택 권한을 박탈당했다. 그것까지는 괜찮다 친다고 하더라도, 하필 전투조 2부 7팀으로 배정받은 게 아닌가. 무정원 동생한테 팀장 셋, 팀원 다섯이 처맞았다는 바로 그 팀. 설상가상으로 여길 치치 형아인 안범과 함께 들어가는 불상사가 일어났다.

전투조에 배정받은 안범은 내내 싫다고 통곡하다가 윤모난과 한 팀이라는 걸 알곤 겨우 웃었다. 윤모난은 그 모습을 보며 억지로 입꼬리를 올렸다. 치치 형아에 광신도까지 저와 한 팀인 것도 환장하겠는데, 여기 팀장까지 맡으란다.

이유야 뻔했다. 에스퍼 팀장을 그 자리에 앉혀봤자 광신도 무구원이 또 식물인간이나 만들 테니, 가이드 팀장을 찾던 중 마침 소속 없는 가이드 윤모난이 낙점된 것이다.

그렇게 저녁 늦게쯤 윤모난은 누적된 피로를 가득 안고 소속 팀이 생활하는 생활관으로 향했다. 그동안 안범은 찔끔찔끔 울면서 연신 치치의 토끼 귀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래야 마음이 안정된다나. 그런데 심심풀이 땅콩으로 쓸 먹잇감을 노리고 있던 전투 2부 에스퍼 새끼들한테 그 꼴을 딱 걸렸다.

“으흑, 주세요! 그러지 마세요!! 선배님들!”

당연히 치치는 빼앗겼다.

치치는 축구공으로 쓰이며 여기저기 통통 날아다니고 있었다. 안범은 대성통곡하며 그런 치치를 쫓아 생활관 복도를 헐레벌떡 뛰어다녔다. 그 광경을 본 윤모난의 잘생긴 얼굴은 여러 날 물을 갈지 않은 꽃병의 꽃처럼 푹 시들어버렸다.

“개똥 선배… 치치… 으흑….”

“…하.”

오늘만 이게 벌써 몇 번이나 쉬는 한숨이지. 윤모난은 세는 것을 단념했다. 이왕 한 팀으로 뛰어야 하는 이상 안범에게 똑똑히 알려줄 필요가 있었다. 이런 유약한 정신머리론 첫 임무에 바로 죽을 게 뻔하다. 윤모난은 울보 다람쥐 장난감을 단단히 붙든 채 일단 진정시켰다. 그러고는 음절 하나하나에 힘을 주면서 똑똑히 말했다.

“안범 씨, 치치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이제 잊어요. 훈련에 집중하고 정신 똑바로 차려야 여기서 살아남을 수 있다고.”

윤모난은 안범의 어깨를 붙들고 그의 날뛰는 기운을 안정시켰다. 중간중간 안범이 치치가 있는 쪽을 쳐다봤지만, 가이딩에 꽤 효력이 있었는지 울음을 멈췄다. 그렇게 끝났으면 정말 괜찮은 하루였을 것 같기도 하다.

치치 축구가 한창 벌어진 복도 끝에서 누군가 갑자기 화르륵 불꽃을 태우며 소리를 빽 지르지만 않았다면.

“야, 이 시팔넘들아! 달밤에 왜 내 방 앞에서 지랄이야!”

그 소동의 주인공이 2부 7팀 팀원 목록 끝에 있었던 3년 차 에스퍼 경해국이란 사실을 깨닫기 전까지는, 진심으로 모든 것이 괜찮을 뻔했다.

동산 경씨, 경해국.

경씨의 거점인 동산은 산세가 험한 곳으로, 여기에 몰려 사는 인간들을 부르는 별칭이 하나 있었다. 바로 산적이다. 우악스럽고 호전적인데 머리를 굴릴 줄 모르는 경씨들은 반도 평의회의 다섯 가문 중 하나임에도 정치보다는 도끼 들고 나무토막이나 내려치는 게 더 잘 어울렸다.

윤모난은 팀장 열람 권한으로 보았던 경해국의 특이 사항을 떠올렸다. 산적이라 불리는 동산 경씨의 이름값이라도 하는 듯 적혀 있던 여섯 글자. ‘분노 조절 장애.’

“시발, 이 걸레 같은 인형은 뭐야?”

에스퍼 근무 1년 차 때 이놈은 뭔 일 때문인지 극히 분노했고, 제가 가진 화염 능력으로 왼쪽 각막을 태워버리는 자해를 저질렀단다. 그로 인해 한쪽 눈의 시력을 완전히 잃었다. 장애 때문에 거리 감각이 떨어진 경해국은 갈수록 포악해지더니, 현장에 나가 쓸데없는 방화를 저질렀고, 현재는 근신 중이었다.

그렇게 서곡센에 갇힌 경해국은 성질머리를 고치는 대신에, 같은 팀원인 무구원과 함께 팀원들을 때리고… 지긋지긋한 놈들의 터럭도 보기 싫다며 생활관에 불까지 질렀단다. 적폐 다섯 가문 출신이 아니었다면 당연히 불명예 제대감이었다.

‘…다시 휴가 신청하면 받아줄까.’

무구원, 안범, 경해국 이 세 명이 있는 팀의 팀장이라니. 어머니 신이 정말 있다면 이래선 안 되는 거였다. 전투에서 쌍둥이 형들을 잃은 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겪으며 3년간 정신보호센터에 장기 입원을 한 윤모난에게 이건 최악의 상황이었다.

복직을 하게 되면 능력이 허락하는 한 형들을 죽인 트랜스들을 죄다 죽이겠노라 다짐했었다. 그렇게 트랜스들을 최대한 죽인 다음 윤모난은 자살이나 할 생각이었다.

남경 윤씨니 가문이니 하는 쓸데없는 사슬의 무게를 지거나, 죽은 형들에 대한 죄책감이라는 유령엔 시달리고 싶지도 않았다. 삶은 그에게 고통이므로 죽음은 구원이고 낙원이다. 다만 지금으로서는 그 낙원은 유예되어야만 한다.

“야, 이 시발 새끼들아, 이 걸레 같은 인형은 뭐냐고? 씹, 어느 새끼 꺼야!”

“…경해국이다!”

“전투조 입소하는데 인형이나 들고 온 새끼 대가리 구이 한다. 당장 나와.”

오합지졸 전투조의 팀장 역할을 착실히 해내기 전까지는.

윤모난이 정신을 다잡는 사이, 치치 축구의 전반전은 허무하게 끝이 나버렸다. 경해국의 패악질을 본 다른 팀 에스퍼들이 창백해지더니 슬금슬금 피하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대신 경해국의 원맨쇼 치치 축구 후반전이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저러고 있다가 이번엔 각막이 아닌 이곳을 홀라당 다 태워버린다면? 저야 삶에 미련이 없으니 그렇다 쳐도…. 안범은 무슨 죄란 말인가. 아버지가 어부였는데, 안범이 다섯 살 때 바다 괴물로 변한 트랜스한테 사냥당해 돌아가셨다는데. 트랜스에게 잡아먹혀 시신도 못 거두고 가난해서 제대로 된 장례를 못 치른 것이 가슴에 사무친다는 애를 여기서 태워 죽일 수는 없었다.

가이드 윤모난의 3년 전 기량이었다면 당연히 직접 접촉 없이도 경해국을 제압하고 정신교육을 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약 때문에 능력이 많이 떨어져 접촉 없이는 가이딩이 불가능한 상태였다. 약을 먹지 않으면 일상생활을 할 수 없으니 선택을 해야 하는데, 당국에서는 그에게 약을 복용할 것을 권했다.

그래봤자 천재에서 범재로 떨어진 수준일 뿐이기는 해도, 가까이 가면 직화구이가 될 상황에서 경해국을 가이딩하는 것이 가능하겠는가.

눈깔이 뒤집힌 경해국은 치치를 발로 차더니 씩씩거리며 반대편 복도로 갔다. 괴물 새끼. 어떻게 지금까지 트랜스가 안 되고 버틴 거지. 윤모난은 엉엉 우는 안범의 뒷덜미와 널브러진 본인들의 짐을 양손으로 낚아채 단숨에 307호 문을 열고 들어갔다.

아까 경해국이 뛰쳐나온 전투 2부 7팀의 합숙소였다.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치치야―!”

치치치고 차차차고 한 번만 더 저 소리를 들었다간 머리털을 제 손으로 다 뽑아버릴 것 같았다. 그렇게 얼굴을 감싸고 한참을 절망에 빠져 있던 윤모난은 어느 순간 찾아온 기이한 적막에 고개를 들었다. 훌쩍거리는 울음소리가 더는 들리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호실 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순간 소름이 바짝 돋아 밖으로 뛰쳐나가니 대번에 상황이 눈에 들어왔다. 이제 앞으로 팀장 윤모난이 이끌어갈 2부 7팀의 팀원들 세 명이 그곳에 사이좋게 모여 있었던 것이다.

일단 분조장 경해국은 피를 흘리면서 복도에 엎어져 버둥거리고 있었다. 손끝에서 화륵화륵, 하며 불이 꺼졌다 켜졌다를 반복했다. 그 옆에는 아까 기차에서 본 무구원이 뺨에 커다란 멍을 단 채로 뚱하게 서 있었다.

여기까지 상황만 보자면 팀원 킬러 무구원이 경해국을 제압했다는 것이 타당한 설명일 것이다. 그런데 아니었다. 윤모난은 긴장한 걸음으로 여리고 작은 안범의 등 뒤로 다가가 그의 오른손에 들린 것을 천천히 빼앗았다.

“칼은 어디서 난 거예요.”

“으흑… 아버지 유품이에…요”

아무래도 안범이 전투조에 뽑힌 이유가 있었던 거 같다. 괴물 새끼 경해국을 사시미 칼 하나로 제압하다니. 심지어 정확히 옆구리에 치명상을 입혔다. 아무래도 안범의 아버지가 평범한 어부는 아니었을 것 같은데, 기억이 미화된 건 아닐까.

“뭘 보고 있어요? 일으켜.”

윤모난은 안범을 진정시키면서 무구원에게 딱딱하게 명령했다. 무구원은 깡통 로봇처럼 가만히 있을 때는 언제고 요전에 맞았던 매가 특효약이었는지 바로 움직였다. 곧이어 그가 손가락을 까닥거리자 경해국의 몸이 중력을 거스르고 일어났다.

이어서 안범의 사시미 칼 공격에 당한 상처도 점차 줄어들더니 사라졌다. 아무래도 에스퍼 무구원의 능력은 시간 역행인 듯했다.

무구원 덕에 목숨을 건져 멀쩡해진 경해국의 얼굴로 또 한 번 윤모난의 주먹이 날아가 꽂혔다. 분노가 특효약이었을까. 윤모난은 짧은 접촉으로도 경해국의 화염 능력을 임시로 봉쇄할 수 있었다.

“팀 회의 할 테니 다들 들어오세요.”

“…끄윽.”

경해국은 복도 바닥에 얼굴을 바짝 붙이더니 신음과 함께 피를 토했다. 윤모난은 옆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는 안범에게 물었다.

“치치는요?”

“…다 타버렸어요.”

그제야 안범의 다른 한쪽 손에 들린, 검게 타버린 천 조각이 눈에 들어온다. 윤모난은 고개를 돌려 무구원에게 또 한 번 명령했다.

“치치도 복구시키세요.”

“3분이 넘어가는 시간은 못 돌립니다. 제가 왔을 때는 이미 상황이 끝났습니다.”

무슨 역전 3분 카레냐. 3분밖에 시간을 못 돌린다면서 아까 경해국이 엎어져 있던 건 왜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던 거지. 팀원들이 서로 죽고 죽이는 광경이 즐거워서?

윤모난은 따질 기운도 없어 셋을 두고 먼저 307호로 들어왔다. 양옆으로 배치된 방 네 칸의 중앙에는 커다란 거실이 있었다. 윤모난은 아까 내다 던져둔 짐가방과 팀원 이력서를 대충 발로 치워 공간을 만들었다.

탁―

불을 켜고 거실 바닥에 앉으니 팀원 세 사람이 미적미적 합숙소 안으로 들어와 일렬로 자리에 앉는다. 하나같이 무지렁이 같은 놈들이었다. 윤모난은 미간을 손가락으로 꾹꾹 누르며 말했다.

“일단 서로 소개부터 하세요. 시작이 어쨌건 앞으로 서로 한 팀으로 일해야 하니까.”

기관에 있는 공무원 놈들은 고리타분한 벽창호들로서, 팀 내에서 대충 불미스러운 일이 있다고 해서 팀을 변경해주지 않는다. 그만두거나 심하게 다치거나 전사해야 팀원 변경이 이루어진다. 그도 그럴 것이 전투의 성패는 팀원 간 상성이 가장 중요하게 작용하기 때문에 각 포스트 능력자들이 가진 능력을 섬세하게 따진 뒤 서로 팀으로 매칭시켰던 것이다.

한데 모아놓고 보니 윤모난은 왜 기관이 자신을 이 팀의 팀장으로 넣었는지 알 것 같았다. 여기는 한마디로 폭주해서 트랜스로 변하기 딱 좋은 놈들이 포진한 팀 아닌가. 가이드가 없다면 이끌어갈 수 없을 터였다.

“저는 오늘부로 전투 2부 7팀의 팀장을 맡게 된 가이드 윤모난입니다. 안범 씨부터 자기소개하세요.”

“…저는… 으흑, 남도 바다가 고향인…… 으흐흑!”

“하… 이쪽은 남도 바다에서 올라온 신입 안범이구요. 나이는 20살, 능력은 현상 유지입니다. 사 남매 중에 장남이랍니다. 장남이라니 안 어울리죠? 저도 처음에는 못 믿었어요. 아버지는 어부셨다는데 제가 보니 어쩐지 아닌 것 같네요. 다섯 살 때 아버지가 트랜스의 공격으로 사망했고, 그 이후 집의 가장이랍니다. 아, 맞다. 어머니가 암이라고 하셨나?”

“…네.”

“네. 안범 씨 어머니가 많이 편찮으시다네요. 이런 가련한 소년 가장의 친구인 치치를 태웠으니, 경해국 씨 본인이 얼마나 잘못한 줄 알겠죠?”

윤모난은 아까 들은 안범의 기구한 사연을 모두 읊어주었다. 어쩐지 가이딩 공격을 받은 이후로 온순해진 경해국은 말없이 이를 듣고만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순서가 오자 어눌하게 말을 이어갔다. 아까 얻어터진 곳이 부어 발음이 새는 모양이었다.

“2부 7팀 3년… 챠 에스퍼 겨해국. 능력응 화염 생셩….”

“됐어. 그만해. 무구원 씨 하시죠.”

“2부 7팀 3년 차 에스퍼 무구원입니다. 능력은 시간 역행입니다. 크게는 차원부터, 작게는 좁은 범위의 사물이나 생명체의 시간을 돌릴 수 있습니다.”

“그렇군요.”

“저 소개 끝났으니 일어나도 되겠습니까.”

“…어딜? 지금 팀 회의 하겠다 했는데요.”

“기도할 시간입니다. 20시 20분부터 한 시간 동안 기도를 해야 합니다.”

무구원은 손목의 시계를 확인하더니 그렇게 말했다.

…이거 환장할 새끼네.

기도를 한답시고 팀장이 소집한 첫 회의를 박차고 나가겠다는 말인가. 윤모난의 주먹이 징징징 울고 있었다. 하지만 그도 무구원에게 종교는 도통 합의할 수 없는 사항이라는 걸 알았다. 기도 시간 침해한다고 팀장을 팬 놈이다.

“거실에서 해요, 그럼. 회의 내용 들으면서 하면 되겠네.”

무구원은 무표정한 얼굴로 한참 가만히 있다 방에서 경전과 매트를 가지고 나왔다. 그러고선 정말로 거실 한쪽 구석에 매트를 깔고 무릎을 꿇더니 경전을 머리맡에 펼친다. 곧이어 기도가 시작됐다. 무구원은 중얼중얼 기도문을 암송하며 이따금씩 바닥에 이마를 쿵쿵쿵 찧었다.

덩치가 산만 한 시커먼 녀석이 한쪽 구석에서 그러고 있으니 정신이 산만할 법도 한데, 윤모난은 꾸역꾸역 회의를 이어갔다.

“팀원들 프로필은 차차 파악할 건데. 한 가지가 걸리네요.”

“어머니 신이시여, 고통이 정신을 성장하게 하고. 새 힘을….”

“오늘 팀을 배정받고 팀 스코어를 확인했다가 놀랐습니다. 어떻게 된 건지 화염 방사기나 종교쟁이 중 한 명이 설명해주시죠.”

“…그 힘으로 폐허에서 창조자가….”

“어떻게 지랄을 해야, 팀 스코어가 마이너스 오천 점이 될 수 있지?”

순간 무구원의 기도 암송이 뚝 끊겼다.

“전투조 5부를 통틀어 팀 스코어 평균이 천 점대인데, 우리 팀은 거기서 육천 점이나 미달이네요?”

전투조 2부 7팀 첫 회의 분위기는 급속도로 싸늘해졌다. 마이너스 오천 점이라는 경악스러운 성적을 들키고 한참이 지나자 끊겼던 무구원의 기도도 계속 이어졌다. 하는 수 없이 윤모난은 부루퉁해 있는 경해국의 이마에 손을 대고 억눌렀던 그의 에너지를 해방시켜줬다. 능력이 해방되었으니 맞은 상처는 덜 아플 거고 금방 회복도 될 터였다.

“설명해요.”

“시팔, 공무원 새끼들이라는 것들이 그렇습디다. 뭐 사소하게 주먹 다툼 좀 할 수 있지 일일이 스코어를 깎더군요.”

“이게 다, 팀원 간의 주먹 다툼으로 깎인 점수라고?”

“…추가적으로 방화 몇 건, 으흠. 민간인 피해 몇 건… 그리고… 뭐더라, 켈룩… 아, 그… 여성 대원 숙소에….”

“설마 성범죄는 아니겠지.”

“여성 대원 숙소에… 실수로 방화를….”

…기승전 방화냐. 대체 뭐 하는 새끼야, 이거.

“동산 경씨의 체면이 있지 날 뭘로 보고… 성범죄라니 가당치도 않습니다. 자존심이 있지 절대 그런 파렴치한 짓 안 합니다! 저 옆의 저거 무씨는 거의 수도승이나 다름없고요.”

“일단 위에서는 팀 스코어가 마이너스인 상황에서는 절대 현장에 투입은 못 시킨답니다. 어차피 이제 막 새 팀이 꾸려졌으니 몇 달간은 합동 훈련을 해야 할 것 같네요. 그리고 경해국 씨, 당신은 심리 상담 계속 거부하다가 정말 퇴직당할 수 있어.”

“정신계 에스퍼 새끼가 자꾸 당신은 마음에 불이 많다느니 그런 헛소리를 지껄이는데, 아주 돌아버리겠다고요! 직접 당해보시든가.”

“상담이 싫다면 꾸준히 약 복용하세요. 물론 향정신성 약을 복용하면 지금보단 능력이 떨어지겠지만.”

“에잇 씹, 그런 약 먹는 거 들켰다간, 누가 저랑 같이 전장에 나가겠습니까!”

윤모난은 자신의 주머니 안에 있는 약통을 떠올리면서 속으로 비웃었다. 당장 본인이 정신병자와 함께 나가야 할 처지라는 걸 알면 펄펄 날뛸 게 뻔했다. 뭐 이미 무구원은 아까 대화를 통해 대충 눈치챘을 거고, 안범은 직접 알약을 먹는 걸 보긴 했지만.

“잔소리하기 싫으니 알아서 말 나오지 않게 관리하시죠. 아까처럼 또 한 번 폭주했다간 능력을 아예 없애버리겠습니다.”

“…….”

“왜 대답이 없지? 아, 아까 맞은 곳이 가려워졌구나. 긁어줘요?”

“…알겠습니다요.”

경해국은 성질을 꾹 누르면서 대답했다. 그런 경해국을 보던 안범은 까맣게 된 치치의 재를 보더니 동그랗고 커다란 눈을 꾸욱 감았다. 눈물을 참는 모양이었다.

“안범 씨는 적응 훈련부터 하시고. 현장 투입 시기는 전적으로 팀장인 제가 결정합니다.”

“…네, 팀장님.”

“오늘처럼 같은 팀원을 칼로 쑤신다거나 회를 뜬다거나. 그런 일은 앞으로 없었으면 좋겠네요. 팀 내에서는 무기 없는 맨손 격투만 허용합니다.”

“…네…. 끄읍…. 으흑….”

“치치 일은….”

“…괜…찮아요…. 어린…애 으흑, 도 아닌데요. 치…치는… 으흐흑….”

“하…. 됐어. 둘 다 그만 방으로 들어가세요.”

윤모난의 허락에 안범은 배정받은 방으로 휙 달려갔다. 아니나 다를까 쾅! 문을 닫는 소리에 이어 안에서 통곡 소리가 들려왔다. 그런데 경해국이 그런 안범의 행태를 보고 당연히 욕이나 할 줄 알았는데, 어쩐지 무안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가 저도 조용히 제 방으로 기어들어갔다.

이 난장판 속에서도 무구원은 꿋꿋하게 기도나 하고 있었다. 윤모난은 그를 기다려주기로 마음먹었다. 그사이에 무구원의 프로필이나 천천히 읽으면 될 듯했다. 증명사진보단 실물이 낫네. 윤모난은 바닥에 깊게 수그린 무구원의 날카로운 턱선을 보면서 그렇게 생각했다.

프로필을 보니 북해 무씨답게 내역은 깔끔했다. 사고 친 건 팀원을 때린 게 전부이고. 종교가 인생의 전부인 재미없는 놈이라 그런지, 다른 칸은 거의 정석대로 딱딱 채워져 있었다.

나이는 23살이네. 나보다 두 살이나 어리다고? 저 삭막하게 생긴 녀석이. 그러다가 프로필에 왜 적어 넣어야 하는지 모르는 취미/특기 항목에 있던 내용이 윤모난의 시선을 끌었다.

“무구원 씨, 단소 불기가 취미예요?”

“네.”

“…참, 고상한 취미네.”

다시 무구원은 눈을 감고 기도를 이어간다. 경전의 구절을 외우는 그 낮은 목소리가 딱히 귀에 거슬리지 않았다. 어쩐지 평화로운 느낌도 있었고. 하루 종일 사건 사고가 많아서 심신이 지쳐 있던 윤모난은 그 평화가 반갑기까지 했다.

그래서 거실 벽에 등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차분히 숨이 가라앉고 손에 들린 종이가 바스락거렸다. 그렇게 눈을 감은 채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윤모난은 문득 이상한 기분을 느끼고는 정신을 차렸다. 눈을 뜨니, 바로 앞에서 자신을 빤히 보고 있는 무구원이 시야 가득 들어찼다. 어느새 매트와 경전은 말끔히 정리되어 있었다.

“기도 끝났으면 깨우지, 뭐 하러 기다려?”

“하실 말씀 있으면 하시죠.”

“전 팀장들, 정말 기도 방해해서 때렸어요?”

“…이유가 중요합니까?”

“이제 내가 팀장이니 궁금해하는 게 당연하지 않을까?”

그 말에 잠깐 생각하던 무구원이 이내 대답했다.

“전 팀장은 현장에 나갔을 때 민간인 구출을 소홀히 했습니다.”

“그래서?”

“그 일로 아동 병원에 있던 아이들 수십 명이 죽었습니다.”

“…….”

“다른 팀원들, 팀장들을 때린 것도 대부분 그런 이유입니다.”

생각보다 무구원은 순진한 면이 있었다. 전투조에게는 당연히 1순위가 트랜스 살상이다. 구출은 구호조의 몫이기도 하고, 임무를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희생이 따르기도 한다.

…하지만.

“북해 밖에 있는 외부인들 목숨을 왜 그렇게 신경 써요?”

“전 목숨이 달린 문제를 영토에 따라 해석하지 않습니다. 그건 어머니 신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그래서 상관 명령에 불복종하고 하극상까지 벌였다? 종교 때문에?”

“전투조 전사들은 수많은 목숨을 해하는 만큼, 생명의 무게를 더 엄중히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무구원의 거침없는 대답을 들은 윤모난은 삐딱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비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럼 뭐 하러 상부에는 기도 문제로 싸웠다고 거짓말했지? 거짓말도 어머니 신의 가르침이 아닐 텐데요.”

“거짓말하지 않았습니다. 기도를 방해한 것도 맞거든요. 그게 두 번째 이유입니다.”

“일단, 알았어요. 이만 들어가세요. 뱀 나오니까 밤에 합숙소에서는 단소 불지 말고. 내가 수면을 방해받는 걸 아주 싫어하거든.”

뱀 나온다는 게 거짓말은 아니었다. 남경 윤씨의 별칭은 독사였으니까. 만약 무구원이 밤에 단소를 불어 윤모난의 수면을 방해했다간, 정말 독사가 튀어나올 거였다. 무구원은 별다른 반응 없이 약식 경례를 하더니 방이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그러다가 뭔가 깨달은 듯이 갑자기 몸을 돌린다.

“그 뱀이라는 게 팀장님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뭐?”

“여기, 문신이 있더군요.”

무구원은 제 가슴 쪽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벌어진 셔츠 틈 사이로 드러난 윤모난의 문신을 가리키는 거였다. 그제야 윤모난은 자신이 팀장 노릇에 정신이 팔려 과도하게 속살을 노출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선배님에 관해서 들은 바가 있습니다.”

“뭐라 하던데?”

“남경 윤씨 세 형제 중 막내를 축복받은 돌연변이라고 부른다죠. 직계 중에 유일한 가이드라고. 우애가 좋은 셋의 상반신에 모두 똑같은 독사 문신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얘기가 3년 동안 업데이트가 안 됐네. 남경 윤씨 막내 이제 저주받은 돌연변이라 불리거든.”

“형님들이 3년 전 전투에서 전사하셨다 들었습니다.”

“그건 반도 전체가 아는 소리고.”

“자랑스러울 일입니다. 형님들께선 어머니 신의 텃밭에서 팀장님을 기다리고 계실 겁니다.”

…저 광신도 십자군 새끼가. 무구원은 결국 단소 없이도 독사를 건드는 데 성공했다. 윤모난은 아까 안범에게서 빼앗은 사시미 칼을 들어 마룻바닥에 팍 꽂았다.

“신소리 말고 꺼져.”

“…….”

무구원은 느리게 눈을 깜빡거리더니 이내 방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갔다. 탁― 문마저 거슬리게 조용히 닫는 놈이다.

윤모난은 무구원의 프로필을 가방에 쑤셔 넣으며 방으로 향했다. 짐을 정리할 만한 기운까지는 없으므로 가방은 풀지 않고 한쪽 구석에 놓았다. 꽤 쾌적하고 넓은 팀장 전용 방은 기본적인 가구만이 간소히 갖춰져 있었다. 침대 시트가 조금 뻣뻣하긴 해도, 정신보호센터의 병실 침대에 비하면 깃털인 수준이다.

침대 위로 무거운 몸덩이를 엎드리자 시트와 가슴 근육 사이로 차가운 이물감이 느껴졌다. 윤모난은 긴 체인의 끝에 달린 펜던트를 만지작거리며 몸을 뒤집었다.

납작한 타원형 모양의 섬세한 세공을 거친 은제 목걸이. 가장자리에 있는 태엽을 건드리자, 펜던트의 중앙에서 작은 빛이 새어 나오더니 손을 따라 작은 분홍색 실뱀 하나가 스르르 기어 올라왔다. 실뱀은 이따금씩 노이즈를 내면서 반짝거렸다. 윤모난은 펜던트에서 나온 실뱀을 무의식적으로 손등과 손바닥에 번갈아 휘감았다.

‘…기분 엿 같네.’

첫날, 첫 시작이 전에 없이 무겁게 다가온다. 5년 전 훈련 학교를 졸업하고 센터에 입소했을 때만 해도 이렇지 않았다. 그저 안범처럼 어느 조에 배정될까 잔뜩 긴장했었고, 쌍둥이 형들은 기차를 타고 가는 내내 그런 자신을 놀리며 장난만 쳤다.

전투조가 되어 형들과 같은 팀에 배정을 받았을 때, 형들은 훌쩍 자라 커다란 동생을 안고 뛸 듯이 기뻐했다. 그런 그들이 첫 임무에 가기 전, 막내 윤모난에게 준 선물이 바로 이 목걸이었다. 환영 조작 능력자인 첫째 형은 이 세상에 없는 종인 작은 실뱀 환영을 만들었고, 현상 유지 능력자인 둘째 형은 이걸 펜던트에 넣고 오랫동안 볼 수 있도록 했다.

원래 독사는 남경 윤씨에게 그다지 달갑지 않은 별명이었다. 다른 이들의 적개심이 담겼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남경 윤씨 세 형제들은 그 별명을 개의치 않았고, 특히 윤모난의 형들은 오히려 맘에 든다며 문신으로까지 새겼다.

그런 형들을 사랑하는 어린 윤모난은 자신의 명치 부근에 똑같은 문신을 새겼다. 그들 옆에 나란히 서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형들은 그런 막냇동생을 보며 복잡한 표정을 짓더니 넌 가문에 매이지 말고 자유롭게 살라 했었다.

그런 동생마저 반도의 전사가 되자 형들은 형제들끼리 서로의 노년을 지켜볼 가능성이 별로 없음을 깨달았나 보다. 이제 항상 죽음이 그들 가까이에 있을 테니. 미리 유품처럼 동생에게 마지막 선물을 남겼다.

이 목걸이는 그런 의미였다. 동생에 대한 형들의 애정. 그들의 뛰어남, 재치, 찬란함, 젊음 그리고 치기까지. 윤모난은 그토록 빛나던 형들의 죽음을 방관한 죗값을 목에 걸고 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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