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내전
책임감 없는 행동이긴 하지만 전투조 2부 7팀의 새로운 팀장 윤모난은 3일간 방에서 나가지 않았다. 입소식 이후 일주일간은 오리엔테이션 기간이라, 비상 출동을 제외하고는 전 대원들이 서곡센터에 머무르며 훈련도 딱히 하지 않는다. 신입이 들어온 팀들에게는 적응기 비슷한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3일이나 방 안에서 아무런 기척도 느껴지지 않는다니. 2부 7팀 또라이들도 점차 굳게 닫힌 방문이 신경 쓰이는 듯 구시렁거렸다.
“시팔… 죽었나.”
“…….”
“그… 저 무씨. 저거 들어가봐야 하는 거 아니냐?”
“7시까지 4분 남았다. 지금은 자유 훈련 시간이야.”
“야, 어디 가냐! 새 팀장이 죽으면 상부에서 또 우리보고 죽였냐고 지랄할 텐데.”
무구원은 그 말에 경해국의 얼굴을 빤히 보았다. 그 시선에 지레 찔린 경해국이 빽, 하고 소리를 지른다.
“씹, 눈깔을 왜 그렇게 뜨는데! 내가 미친놈도 아니고 새 팀장을 갑자기 왜 죽여?”
“난 간다.”
“야. 무씨! 야!!”
무구원은 닫힌 방문을 흘긋 한 번 보더니 이내 합숙소를 나가버렸다. 경해국이 미쳐 날뛰려는 그때, 뒤에서 차박차박 멍청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잔뜩 부어 게슴츠레한 눈을 비비면서 잠옷을 입고 방에서 기어 나오는 안범이었다.
“야―! 찌찌 애비. 너 팀장이랑 친한 거 아니었어? 걱정도 안 되냐!”
“…치치예요. 그리고 저한테 말 걸지 마세요.”
안범은 경멸스러운 시선을 던진 뒤에 냉장고로 가서 물을 꺼냈다. 그리고 찬장에서 에너지 바 하나를 꺼내 윤모난의 방문 앞에 내려놓았다.
“제사상 차리냐고. 놔둬. 안 먹는데 왜 자꾸 가져다 놔?”
“…….”
“어쭈? 찌찌 애비, 선배 말을 막 씹지?”
“…할 말 있으면 칼로 해결 보죠. 저, 저도 안 참아요.”
경해국은 안범의 협박을 비웃으며 그 작은 머리를 검지로 통, 하고 튀겨 밀쳤다. 그러면서 손끝에 작은 화염을 만들었다.
“불 지르면… 나오겠지.”
안범은 바로 사색이 되어 경해국의 팔에 매달려 늘어졌다.
“팀장님이 한 말 뭘로 들으셨어요!? 팀 스코어 깎이면 안 된다고 했잖아요.”
“이거 안 놔? …쪼그만 게 왜 이렇게 힘이 세!”
“…자꾸 이러면 팀장님만 난처해진다구요!”
“놔! 너 진짜 뜨거운 맛 보고 싶냐!? 이게… 봐줬더니….”
그렇게 안범과 경해국이 한창 실랑이를 벌이는 순간, 끼이익― 하고 음울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서로 매달려 머리털을 쥐어뜯고 있던 둘은 방 안에서 미적미적 걸어 나오는 팀장의 모습을 발견했다.
3일간 물도 음식도 먹지 않고 틀어박혀 잔 탓에 다크서클이 덕지덕지 내려앉은 윤모난은 약간 어지러운 듯 휘청거렸다. 그는 팀원들에게 인사조차 건네지 않고 문 앞에 놓인 물부터 들이켰다. 그러고선 다시 문을 닫아버렸다.
경해국과 안범은 약속한 것처럼 문에 바짝 귀를 붙이고 소리를 확인했다. 안쪽에서 미세하게 샤워기에서 흐르는 물줄기 소리가 들리는 걸 보니, 아마도 씻는 모양이었다.
“…뭐야, 왜 저래? 주먹 날리던 패기는 어디 가고? 무슨… 젖은 빨래인 양.”
“어디 아프신 걸까요?”
“아프면 병동으로 가지 왜 저렇게 혼자 청승을 떨고 지랄이야. 그리고 너 팀장 주먹에 맞아봤어? 아플 수가 없는 사람인 거 같던데.”
“기다렸다가, 팀장님께 아침 먹으러 가자고 해야겠어요.”
안범은 걱정을 한가득 안은 표정으로 거실 한구석에 앉아 기다렸다. 그 모습을 본 경해국은 혀를 끌끌 차더니 현관문을 뻥 차고 나가버렸다. 대단한 성질머리였다. 2부 7팀 신입 안범이 지금껏 본 바로는 같은 팀원인 무구원과 경해국은 매일 아침 일찍 합숙소를 나가 밤늦게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식당에 가보면 다른 팀들은 같이 모여 밥도 먹고 서로 많이 친해진 것 같던데. 윤 팀장과 두 선배들의 방치로 신입 대원 안범은 만만치 않은 시작을 하게 된 것이다. 그간 안범은 식당에 가서 홀로 밥을 먹으며 꾸역꾸역 눈물을 흘렸다.
어떤 친절한 에스퍼 하나가 ‘왜 우세요?’라고 물었을 때 안범은 흐느끼면서 ‘혼자 밥 먹는 건 처음이에요’라고 대답했다. 그가 2부 7팀 소속임이 알려지고 나선 다른 팀 사람들도 안범을 슬슬 피하기 시작했다. 뒤에서 경해국과 무구원을 뒷담화하는 소리도 이따금씩 들리곤 했다.
그게 도축 살인마 2부 7팀 새끼들이 저 말랑말랑한 신입을 식물인간 만드는 데 얼마나 걸릴지 내기하는 대화라는 걸 엿들은 안범은 오들오들 떨었다. 그런 그에게 기댈 것은 오로지 기차에서 친해진 팀장 윤모난밖에 없는데, 그조차 두문불출이었으니 절망스러울 수밖에.
“…안범 씨.”
그때 다시 한번 윤모난이 방문을 열고 나타났다. 아까 야생의 상태로 나타났을 때보단 한결 깔끔해 보였지만, 미남의 얼굴에는 여전히 음울한 기색이 완연했다.
윤모난은 우울증에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겪는 자신보다 눈물이 더 많은 안범을 보면서 기분이 더 가라앉았지만, 동시에 이제 정신을 차려야겠다는 생각도 조금은 들었다. 3일간 약을 먹지 않았기에 기분은 최저치를 찍었다. 계속 잠만 오고 눈을 뜨고 있어도 멍했다. 꼼짝하기도 싫어서 밖에서 지랄을 떠는 소리가 나도 대꾸하지 않았다.
그러다 경해국이 불을 지른다는 소리를 듣자, 최저점인 팀 스코어가 생각났다. 만에 하나 이 팀이 해체된다면 그나마 할 일도 없어지게 된다. 전투에 나갈 수 없다면 자신은 정말 하등 쓸모없는 존재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그 생각으로 윤모난은 복용해야 하는 알약 두 알을 삼키고 일어났다.
“아침. 먹으러 가죠.”
“으흑… 네.”
윤모난은 대충 흰색 반소매 티셔츠에 청바지를 입고 위에 코트를 걸쳤다. 정복은 입소 당일에만 입고 평소에는 평상복이 더 편했다. 윤모난은 가방 속에서 항상 분신처럼 가지고 다니는 분홍색 플라스틱 슬리퍼를 꺼내 꿰어 신고 짝짝 끌며 합숙소를 나왔다.
안범은 금세 기분이 좋아졌는지 함께 걸으면서 코트의 모피 털을 슬며시 쓰다듬었다. 윤모난은 그런 안범을 보다가 3일 만에 피식 웃었다. 그렇게 식당으로 가는 길에 담배를 태울 정도의 기운은 차리게 되었다.
“오리엔테이션은 잘 받고 있어요?”
“네…. 하지만 전 훈련 학교 출신도 아니구 아직 모르는 게 많아요.”
“전투조 에스퍼 팔 할 이상이 훈련 학교 출신 아닌데 뭐.”
“그래도 경해국 선배님이랑 무구원 선배님도 다 훈련 학교 다녔는데… 이 팀에서는 저만….”
“동산과 북해와 달리, 남도에는 훈련 학교가 없잖아요.”
“어차피 있었어도 못 갔을 거예요. 성적도 안 되고… 학비 대기 힘들었을걸요.”
“내가 훈련시켜줄게. 그럼 1년 뒤에는 경해국 정도는 이길 수 있을 거야. 무구원은 좀 힘들지도.”
안범은 또 한 번 존경심이 가득 담긴 눈을 반짝 빛냈다. 윤모난은 안범의 트레이닝복 차림이 춥겠다는 생각뿐이었지만. 아직 겨울이라 기온이 영하 20도인데 외투도 안 입고 나오고. 다람쥐는 대체 뭔 정신이지. 어디 모자란가?
윤모난은 담배를 입에 물고선 남는 손으로 자신의 외투를 벗어 안범의 어깨에 덮어줬다. 그러자 반소매만 입고 있던 윤모난의 맨살이 찬 바람에 드러났다. 안범은 근육이 바짝 올라붙은 팔뚝을 보자마자 황송해하면서 손을 내저었다.
“팀장님 추우실 텐데요!”
“…난 별로 추위를 안 타요.”
…아닌 것 같은데. 털옷을 껴입고 다니는 걸 보면 추위 엄청 타는 거 같은데.
안범은 시무룩한 얼굴로 그의 친절을 받아들였다. 윤모난은 얼음장같이 찬 바람을 맞아도 추운 기색 하나도 없이 식당으로 가는 길에 담배를 세 개비나 태웠다.
그렇게 도착한 식당에서 윤모난은 두유 한 병을 집고선 자리에 앉았다. 된장국에 제육볶음, 산나물무침에 콩밥이 산더미처럼 쌓인 안범의 식판과는 확연히 대조적이었다. 윤모난은 그걸 보자마자 깜짝 놀랐다.
“그거… 다 먹을 수 있다고?”
“네? 아침이라 조금 퍼 온 건데… 저녁에는 이만큼 세 판 정도 먹어용.”
과연 건전지가 많이 필요한 다람쥐 인형이구나.
윤모난은 많이 먹으라며 격려를 잊지 않았다. 그렇게 안범의 푸드 파이팅을 구경하며 주변을 둘러보니 식당 분위기가 시끌시끌했다. 여긴 전투조 5부 대원들이 전부 드나드는 공용 식당이라 조금 정신이 없었다.
그러다가 식당 벽면에 달린 거대한 금색 부조 벽화가 문득 눈에 들어왔다. 중앙에는 천경교의 상징인 가시나무와 눈, 그리고 반도의 문양이 나란히 배치되어 있고, 하부에는 인간 군상들이 그 상징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들이 우러러보는 방향에는 이런 말이 적혀 있다.
‘우리는 왜 한때의 영웅들이 괴물이 되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 무지로부터 다시 소생하리라.’
“참 아이러니하죠.”
“에?”
“저 문장 말이에요.”
안범은 숟가락을 입에 물고 윤모난의 시선을 따라 식당 벽에 걸린 문장을 봤다.
“사실 현생 인류는 포스트 에스퍼들이 왜 트랜스라는 괴물이 되는지 밝혀내지 못했죠. 현 체제를 유지하려면 목숨을 갈아 넣어가며 죽고 죽일 수밖에. 그 무지를 감내하라는 말을 저렇게 식당에도 걸어놓다니. 밥 먹다 체할 거 같잖아.”
“…아.”
“안범 씨는 세뇌당하지 말라고. 항상 저 문장에 등을 돌려 앉고.”
안범은 오히려 윤모난 때문에 체할 거 같았다. 갑자기 아침 먹는데 무슨 소리지 싶었다. 저건 반도 어딜 가나 있는 흔한 조형물이고, 특히 위에 있는 글은 국가이능력기관의 설립 이념을 담은 말이라 곳곳에 쓰여 있는 것인데 뭐가 문젤까 생각했다.
선배님의 심오한 뜻을 자신의 머리통으로는 따라가지 못하는 건가. 설마 훈련이 이미 시작된 건가? 밥도 다 안 먹었는데….
안범이 눈치를 보며 숟가락을 내려놓자, 윤모난은 두유 뚜껑을 열어 안에 든 음료를 꿀꺽꿀꺽 마셨다.
“그러니까 싸움에 무모하게 끼어들지 말고. 안 죽는 거, 그게 최우선이에요. 특히 경해국과의 칼싸움은 자제하라고 했을 텐데.”
“죄송해요.”
“나한테 죄송할 건 없어. 밥 먹어. 많이 먹어. 먹고 훈련해야지.”
윤모난은 진지한 소리를 떠들 때는 언제고 갑자기 다정한 모드로 돌아왔다. 그렇게 간단히(?) 아침을 먹고 나오는 길에 둘은 식당 앞 대운동장에서 다른 팀원을 발견했다.
아침 일찍부터 광신도 무구원이 혹한 추위에 웃통을 깐 채로 혼자 트랙을 뺑뺑이 돌고 있었다.
“저거… 혹시 왕따인가?”
“네? 무구원 선배님이요?”
“응, 북해 무씨들은 같은 팀 아니라도 원래 같이 몰려다니며 훈련하는데. 자기 형 팀에 안 들어간 것도 그렇고.”
“아, 어제 식당에서 야식 먹으면서 누가 말하는 걸 들었는데. 저 선배님께서 북해 팀 배정을 거부하셨다던데요.”
“왜?”
“그 이유는 저도 모르겠어요.”
혈연 뒈지게 따지는 북해 무씨답지 않네.
윤모난은 천천히 대운동장으로 안범을 데리고 내려갔다. 그리고 안범에게 덮어주었던 코트를 벗기고 그를 트랙으로 떠밀었다. 안범이 의아한 표정으로 보자 윤모난이 천천히 발을 떼고 달리기 시작한다.
“뛰어.”
“네?”
“십자랑 같이 뛰자고.”
“십자요? 무구원 선배님이요?”
“응. 마인드가 완전히 중세 십자군이잖아.”
윤모난은 허벅지 근육을 움직여 무구원의 뒤를 쫓아가며 보조를 맞췄다.
“어이― 십자.”
그런 윤모난을 본 무구원이 굳은 얼굴로 멈춰 섰다. 흐트러진 무구원의 머리는 땀에 푹 젖어 있었다. 가슴과 복근 사이로 갈라진 미끈한 골짜기에 땀방울이 쭉 흐른다. 적당히 그을린 피부를 경계선으로 급격한 온도 차이 때문에 몸에서는 김이 피어올랐다. 무구원은 손등으로 턱에 맺힌 땀을 닦더니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십자, 우리도 같이 뛰어도 되죠?”
윤모난은 뻔뻔하게 물었다. 대번에 무구원은 자신에게 붙여진 별명의 뜻을 알아차렸다. 그의 얼굴이 불쾌한 듯 일그러졌다.
“…엄연히 다른 종교입니다. 천경교 신자를 그렇게 부르다니 신성모독이에요.”
“응, 알겠어. 마저 달려.”
“팀장님.”
“아, 알았다고. 이따 기도 시간에 당신 옆에서 같이 머리 찧으며 회개할게.”
독사는 먹잇감의 약점이 어디인지 정확하게 파악하고 이빨을 박아 넣는다. 윤모난은 독이 바짝 오른 뱀이었다.
무씨 형제가 돌아가며 형들 얘기를 한 까닭에 기분이 잡친 건 둘째 치고, 3일 동안 멘탈 붕괴를 겪었다. 감히 파동을 가라앉혀준 은인에게 이딴 대우를 했으니 저들이 믿는 어머니 신에 대한 신성모독쯤은 견뎌야 하는 거였다.
윤모난은 멀대같이 버티고 서서 김을 뿜어대는 십자를 가볍게 밀치고 약 올리듯 트랙을 달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무구원 이놈이 정말로 빡이 쳤는지 온 힘을 다해서 쫓아오는 것이 아닌가!
일단 윤모난은 향정신성 약을 복용하고 3년 동안 장기 입원을 했어도 우습게 볼 인물이 아니었다. 훈련 학교 시절에는 같은 나이 또래 에스퍼와 가이드를 통틀어 무력으로 못 이기는 사람이 없었다. 맨손 격투를 포함한 칼, 총 같은 무기도 귀신같이 다뤘으니, 신체 능력으로 서곡센터에서 그를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손에 꼽을 것이다.
“아하하― 조온나 느리네요.”
3일 만에 두유 하나만 마신 윤모난은 어디서 기운이 펄펄 나는지 무구원을 비웃기까지 했다. 여유롭게 텀블링을 선보인 윤모난의 도발은 훌륭하게 먹혔고, 평소 정적이던 무구원의 얼굴도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무구원은 팀장을 여럿 패본 경험이 있었다. 새 팀장이라고 못 때릴 건 없었다. 팀장 살해로 불명예 퇴직을 한다면 가문의 수치이니 할복하면 된다. 죽음 따위 두렵지 않다.
무구원은 바짝 다리에 힘을 줬다. 두드리면 된다. 정신과 육체를 쇠붙이처럼 두드리면 가진 능력을 뛰어넘을 수 있다. 운동장을 70바퀴나 돌며 지치고 피로해진 근육을 잠시 휴식할 때였지만, 그는 더 속력을 내며 몸을 몰아붙였다. 종아리 근육이 터지도록 힘을 주고 혈관을 따라 흐르는 에너지를 깨웠다. 그러자 곧 윤모난과의 거리가 긴박하게 좁혀졌다.
윤모난은 뒤에서 숨도 쉬지 않고 바짝 붙어 오는 무구원의 눈에서 살기를 느끼고 약간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 보니 저는 오늘 아침에 약을 복용한 탓에 100퍼센트 기량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까닥하면 십자한테 잡혀 두꺼운 경전에 맞아 머리가 으깨질 수도 있었다. 이럴 때는 정신부터 흔들어야 한다.
“나 잡으려면 엄마한테 기도 많이 해야 할걸?”
“…그만…하십시오!”
무구원은 엄청난 모욕을 당한 얼굴이었다. 그 모습에 윤모난은 계속 독을 주입하며 나대기 시작했다.
그들의 추격전이 11바퀴를 넘어갔을 때 무구원은 약간 휘청했다. 하지만 두드리면 된다는 생각으로 포기하지 않았다. 13바퀴째. 둘은 거의 한 걸음 정도의 간격으로 달리고 있었다. 무구원이 긴 팔을 뻗어 분홍 머리를 잡으려 하자, 윤모난은 매서운 뒷발차기로 그의 손을 걷어찼다.
그러자 무구원은 목표를 돌려 주먹으로 윤모난의 척추를 갈겼다. 징을 울리듯이 윤모난의 몸이 휘청였지만 균형을 잃지는 않았다. 다리는 계속해서 쉴 새 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가벼운 놀리기로 발발한 싸움이 죽고 죽이는 전투로 격화되기 직전이었다.
“우와. 쟤네 싸운다.”
“선배님…. 팀장님…!”
그사이에 식당을 나오던 다른 대원들이 모여들어 이 광경을 구경하고 있었다. 안범은 바들바들 떨면서 저 멀리 트랙에서 서로 발차기와 주먹을 주고받는 자신의 팀원들을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오, 잡았다. 아니 바로 놓치네. 와, 저 분홍 머리 대단하다. 발이 안 보이네.”
“너 저 사람 몰라? 윤모난이잖아. 2부 7팀 새로운 팀장으로 부임했다더라.”
“저 사람이 윤모난이라고? 휴직했다고 하지 않았나? 소문에는 3년 전에 형들 죽고 완전히 맛 갔다고 하던데.”
“어. 유명해. 형들이랑 같은 팀이었는데. 임무에 나가서 형들 포함 팀원들 다 죽고 혼자 살아 왔다지. 시체도 못 찾아서 남경에 빈 관을 묻었단다.”
“엑― 그런 새끼를 왜 팀장 자리에 앉혀? 뭘 믿고.”
안범은 뒤에서 떠드는 다른 팀 에스퍼 두 명을 돌아봤다.
“저희 팀장님입니다. 말씀 조심하세요!”
“뭐? 야, 너 엊그제 그 토끼 인형 가지고 운 놈 아니냐?”
“…….”
“맞네. 인형이나 가지고 들어온 폐급이라 떨거지 팀에 들어갔나 보네. 형 죽인 팀장에 방화범 경해국 그리고… 팀장 폭행범까지 잘 돌아간다.”
“…그 말 취소하세요.”
“너 2부 7팀 마이너스 오천 점인 거 센터에서 얼마나 웃음거리인 줄 알아? 여긴 철저하게 실력으로 대우받는 곳이야. 너희 같은 폐급들이 우리한테 비빌 주제가 못 된다고.”
안범은 그 순간 윤모난에게 맨손 격투를 허용받은 사실을 떠올렸다. 그래서 스프링처럼 튀어 올라 자신의 팀을 욕보인 다른 에스퍼의 대가리를 깨려 했다.
하지만 사시미 칼 없이 안범이 1년 차 이상인 전투조 에스퍼들의 상대가 될 리 없었다. 염력을 가지고 있던 에스퍼 하나가 단숨에 안범을 날려버린 것이다.
그러나 찬 바닥에 내동댕이쳐지기 직전에 누군가 안범의 저지 뒷덜미를 낚아챘다.
“시팔… 거 오천 점, 오천 점…. 엄청 지랄해대네.”
안범은 갑자기 나타난 경해국을 발견하곤 손을 홱 뿌리쳤다. 경해국은 개의치 않고 손마디를 우두둑 꺾으면서 무리에게 다가갔다.
“이 개새끼들, 너네 오늘 오천 대 맞을 줄 알아라.”
그렇게 미처 말릴 새도 없이 주먹싸움이 시작된 것이다. 안범은 한쪽에서 윤모난과 무구원 사이에 벌어진 내전과, 경해국과 다른 팀 사이의 전쟁 중에 어느 쪽에 개입해야 하는지 혼란스러웠다. 그러나 경해국의 참전에 뒷담화를 까던 다른 팀 에스퍼들의 지원군이 가세하자, 더 이상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우선 내전을 종식시켜야 한다. 수신제가 치국평천하라 하지 않았는가.
안범은 경해국을 버리고 트랙을 돌면서 서로 피가 터지도록 싸우고 있는 윤모난과 무구원을 향해 달려가며 손을 뻗었다. 그리고 손끝에 에너지를 모아 두 사람을 감싸는 무형의 막을 씌운다. 하지만 인간에게까지 현상 유지 능력을 십분 발휘하기엔 안범의 능력은 볼품없었다.
윤모난과 무구원은 슬로모션에 걸린 것처럼 움직이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무구원보다 윤모난을 향한 안범의 집착이 더 커서 그랬는지 능력 감도가 더 크게 작용했다. 그 간발의 차이로 무구원은 윤모난을 잡고 바닥에 쓰러트릴 수 있었다.
쿵!
윤모난은 거구의 남자가 만들어낸 검은 그림자가 덮쳐오는 것을 보며 바닥에 뒤통수를 대차게 찧었다. 축축하고 미끄덩거리는 육중한 몸에 깔리자 마치 건물 잔해에 묻힌 것처럼 충격이 전해졌다. 윤모난은 무의식적으로 숨을 쉬기 위해 입을 벌렸다. 그러자 입술 안으로 짭짤하고 끈적한 액체가 떨어진다.
“푸흑!”
“…하아… 하아….”
그건 땀과 피가 섞인 혼종의 액체였다. 무구원이 윤모난의 발차기에 당해 이마에 피를 흘리고 있었던 탓이다. 윤모난은 자신을 완전히 압박하고 위에 올라탄 사내의 몸에서 뼈를 찌르는 듯한 파동을 느꼈다.
…아, 이 새끼를 너무 몰아붙였구나. 어디 나사라도 하나 빠진 놈인지 무구원은 폭주 직전의 상태까지 몸을 혹사시킨 모양이다.
“하아… 취소… 하아… 하십시오.”
“야, 이 미친놈아! 안 놔!”
일단 접촉하고 있는 피부로 가이딩을 해서 무구원의 살기를 억누르려 했지만, 이상하게 잘되지 않았다. 윤모난은 낮게 욕지거리를 지껄였다. 이러다 무구원이 폭주라도 하게 되면 정말 큰일인데.
…단순한 피부 접촉으로 안 된다면 더 확실한 방법이 있지.
“오해하지 마. 십자, 너 살려주려고 이러는 거니까.”
“무슨….”
순간 윤모난은 목에 힘을 주고 고개를 올려 자신을 깔아뭉갠 남자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부딪쳤다. 첫맛은 비릿하고 짰다. 무구원의 몸이 바짝 굳자 조금 달아진 것 같기도 하고. 팔목의 압박감이 풀어지자 윤모난은 바로 무구원의 머리채를 잡고 폭력적으로 입술 틈새를 노렸다. 탄력 있는 혀로 아치형을 그려 무구원의 윗입술을 스쳤다.
마른하늘에 날벼락처럼 벌어진 이 상황에서 무구원은 자신도 모르게 입을 벌리고 말았다. 그러자 독사가 굴을 발견하고 안으로 바짝 파고드는 게 아닌가. 순간 독 맛을 제대로 본 무구원은 마비된 채로 자신의 입안에서 꿈틀거리는 그 기묘한 감촉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온몸에 아무런 감각이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맹독에 당한 듯이.
두 남자의 입술이 질척거리며 얽히는 동안, 가이딩이 서서히 효과를 내고 있었다. 윤모난은 입을 벌린 채 굳어 있는 무구원의 여린 점막을 혀로 핥는 것을 끝으로, 축축해진 입술을 떼어냈다. 무구원은 멍한 표정으로 뒤늦게 입술을 손으로 막더니 짧게 탄식했다.
“…이게 또 상관한테 주먹을 휘둘러?”
그다음으로 날아온 것은 갑작스러운 입맞춤만큼 폭력적인 윤모난의 주먹이었다. 온 힘을 제압당한 무구원은 그대로 트랙 위에서 기절했다. 무구원이 바닥에 쓰러지자 운동장을 둘러싼 모든 사람들이 하던 일을 멈추고 이 광경을 보고 있었다.
멱살을 붙들린 경해국의 손 위에 작은 불꽃만이 유일하게 율동했다.
* * *
“2부 7팀 싸움 났다며?”
“그냥 뭐 치정 싸움이던데.”
“에엑?”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안범과 경해국은 남들이 수군거리는 소리를 듣고도 나설 수가 없었다. 낯부끄러운 일이었다.
“옛날에도 윤모난, 저 사람 뭐 비슷한 사건 일으키지 않았나? 누가 짝사랑한다고 죽네 사네 난리 났었잖아.”
“아, 맞네. 나도 기억난다. 그때도 아마 남자였지?”
대체 어떻게 살았길래 저런 남세스러운 잡소문만 달고 다니는 걸까. 경해국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일단 그것보다도 어제 그 난리를 치고 무구원이 병동에 실려 갔는데 도통 깨질 않는 게 문제였다.
폭주 직전까지 몸을 혹사시킨 것도 있지만 정신적 충격을 너무 크게 받아서라는데, 누가 봐도 후자의 탓이 큰 것 같았다. 천경교는 결혼 이외의 성적 교합을 엄격히 금지한다. 금욕이 미덕인 종교를 따르는 놈이 사람들 앞에서 동성인 팀장에게 입술을 빼앗겼으니 멀쩡히 깨어나는 것이 기적이 아닐까.
무구원은 외간 여자와 한 자리에서 밥도 먹지 않는 인간이었다. 다행히 센터는 남녀 대원들의 생활 공간이나 훈련 공간이 엄격히 분리되어 있었고, 팀도 같은 성별들끼리만 꾸린다. 여자가 없으니 센터는 수도승 무구원이 도 닦기에는 최적의 장소인데, 내부에 지뢰가 있을 줄이야.
“곧 훈련 시간인데 여기서 뭐 해요?”
그 원흉인 팀장 윤모난이 마침 분홍 슬리퍼를 짝짝 끌며 다가왔다. 병동 복도 의자에 앉아 있던 두 사람은 반사적으로 윤모난의 시선을 슥 피해버렸다.
윤모난은 팀원들의 외면에도 별 반응 없이 담배에 불을 붙이더니, 연기를 빨아들이며 무구원의 병실 쪽을 봤다.
“무구원 씨는 깨어났나요?”
“…아뇨. 정신계 에스퍼가 확인했는데… 몸은 문제없는데 일어나는 걸 무의식에서 거부하는 것 같다고….”
안범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보고했다.
“너무 나약하다. 월말 팀원 평가 때 점수 좀 깎아야겠어.”
“윤 팀장 당신 때문에 애가 저렇게 혼수상태인데… 무슨…!”
“쪽팔려서 못 일어나는 걸 어쩌라고. 다 무구원 씨가 감당할 몫이지. 저라고 괜찮겠습니까? 저도 팀장으로서 체면이 있는데 그렇게 가이딩하는 모습을 서곡센터 전 대원들에게 보여주고 싶었을까요?”
“아니, 무슨 가이딩을… 그런 방식으로! 그냥 접촉만 해도 할 수 있잖습니까. 시팔….”
“잘 안 됐고. 정말 위험한 상황이었다니까. 내가 무구원 씨 입술이나 빨고 싶어서 그런 짓 했겠습니까?”
윤모난은 냉정하게 사실만 말했다. 모두 100퍼센트 사실이고 무구원에게 한 행동엔 일말의 사심도 들어 있지 않았다.
…뭐. 일단 무구원을 놀리려 한 것은 조금 잘못이라 할 수 있겠다, 팀장이 할 만한 행동은 아니니까. 하지만 윤모난 또한 억울한 면이 없진 않았다. 먼저 긁은 건 그쪽이고 자신은 돌려준 것뿐인데, 대수롭지 않은 일로 유난들이었다.
“경해국 당신은 곧 정신 상담 시간이니 거기로 가시고, 안범 씨는 신입 적응 훈련장에 가세요.”
“씹, 정신 상담은 팀장 당신이나 받지?”
“그건 알아서 하고 있으니 걱정 말고.”
경해국은 부릅뜬 눈으로 노려보다 자리를 박차고 가버렸다. 안범도 쭈뼛거리면서 인사를 하더니 곧 자리를 떠났다. 그렇게 혼자 남은 윤모난은 병실 창문 너머로 누워 있는 무구원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담배 한 대를 다 태워갈 즈음 누군가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윤모난은 누군지 예상한 듯 평온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형.”
동생이 그 난리를 쳤으니, 당연히 무정원의 귀에도 들어갔겠지.
무정원은 윤모난을 보고 반갑게 웃더니 그의 옆에 섰다. 팀원들에게 큰소리치기는 했지만 무정원에게까지 뻔뻔하게 굴 수는 없었다. 윤모난은 약간 난처한 척을 하기로 했다.
“소동이 있었다고?”
“…아, 네. 죄송해요. 형 동생인데. 어쩌다 보니.”
“죄송하다니 무슨. 별일도 아닌 것 같던데. 무구원이 좀… 유별나긴 하지 이런 일에.”
무정원의 말투는 부드러웠지만 어쩐지 싸늘한 냉기가 느껴졌다. 윤모난은 그걸 동생이 걱정돼서, 라고 생각했다.
“폭주하려 했던 건가?”
“네, 뭐.”
“음.”
“제가 너무 몰아붙였어요. 사실 제 기분이 너무 바닥이었는데, 형 동생이 운이 안 좋아 미친놈한테 걸린 거죠.”
“무구원 프로필은 확인해봤니?”
무정원이 갑자기 뜬금없는 이야기를 꺼냈다. 윤모난은 약간 의아함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무정원이 손에 낀 장갑을 느릿하게 벗더니, 윤모난이 들고 있던 담뱃갑에서 담배 하나를 가져가 입에 물었다. 윤모난은 그를 위해 라이터로 불을 붙여줬다. 연기를 한 모금 빨아들이는 무정원의 모습에서 망설이는 기색이 강하게 느껴지자 묘하게 신경이 집중되었다. 무정원은 잠깐 뜸을 들이며 뭔가를 한참 생각하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
“사실, 나에게는 저 녀석이 좀 아픈 손가락이야.”
“…….”
“너도 봤겠지만, 실력이 좀 애매해. 시간 역행 자체는 희귀한 능력인데 제한 시간도 짧고. 중요하게 쓰이기에는… 모자라지. 대상을 가리지 않고 쓰인대도 말이야.”
“실적은 나쁘지 않던데요.”
“몸으로 때우려는 거지. 이능력을 쓰는 데 자기도 한계를 느낄 테니.”
동생에 대한 무정원의 평가는 어쩐지 박했다.
“어릴 때 일이 있었다.”
“네?”
“너도 알겠지만 우리 가문에는 엄격한 규칙이 있어. 트랜스가 될 씨앗들을 극도로 경계하지. 단순히 경계할 뿐만 아니라, 어떤 결심을 행동으로 옮기기도 하고.”
…그 일이라면 반도에 있는 사람 모두가 공공연히 알고 있는 소문이었다.
북해 무씨 가문은 자신들의 가문에서 트랜스가 나오는 것을 극도로 혐오한 나머지, 갓 능력이 발현한 어린아이들에게 일종의 의식을 진행한다. 어머니 신께 그들의 몸 안에 트랜스의 씨앗이 있는지 물어보고 확인하는 의식인 것이다.
전근대적이고 비과학적이긴 하지만 북해 가문은 이 의식을 몇 세기 동안 이어왔다. 이 의식에서 씨앗이 있다고 판명당한 아이의 운명은 절망적이었다. 바구니에 아이를 가두고 북해의 차가운 바다에 던져버리는 것이다.
명백히 부조리한 학살이다.
“우리 형제 중에서는 무구원이 유일하게 그 의식을 통과하지 못했지.”
“네? 그럼….”
“그래. 무구원은 바다 깊숙한 곳에 던져졌다. 어릴 때는 지금보다 능력이 강했어. 몇 시간 전으로까지 역행할 수 있었으니. 그래서 물속에서 죽기 직전에 몇 번이나 제 몸의 시간을 돌려 살아남았던 거지. 장례를 치르기 위해 다시 건졌을 때는….”
뒤에 이어질 말은 더 듣지 않아도 속이 거북했다. 다섯 가문들이 저지르는 기행은 상식을 뛰어넘는 일이 많고, 남경 윤씨도 내부에서 온갖 일들이 벌어지곤 했다. 자신 또한 무구원과 다를 것 없는 부조리의 산물이었다.
그래서 쌍둥이 형들은 동생만이라도 그런 일에서 점차 멀어지기를 바랐다. 그러니 가문에 매이지 말라고 했겠지. 윤모난은 손안의 담뱃갑을 구기면서 어떠한 말도 하지 않기 위해 참았다. 무정원은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미소를 지으며 어깨를 토닥였다.
“그 이후로 무구원의 능력이 크게 제한되더구나. 아쉽지만 다행스러운 일이야. 애초에 그 안에 있는 씨앗을 틔우지 않기 위해서는… 물을 주지 말아야겠지.”
“…….”
“개인적인 이야기가 길어졌구나. 일정이 있어 잠깐 들르려 한 건데… 팀장인 네가 알아서 나쁠 건 없겠지. 오늘 한 대화는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네. 그럼요.”
무정원은 잠시 벗어두었던 검은색 가죽 장갑을 도로 끼더니, 윤모난의 아래턱에 손을 살짝 괴고 시선을 맞췄다.
“직무가 버겁지는 않고?”
“…아직까지는요.”
“형들이 자랑스러워하겠구나.”
차가운 가죽 장갑이 윤모난의 턱선을 슥 스치더니 떨어졌다. 무정원은 인사도 없이 돌아섰다. 그런 뒷모습을 보자 불현듯 무언가가 떠올랐다.
“형.”
“응?”
“그것 때문이에요? 설마 형이 절 이 팀에….”
“모난아.”
“네.”
“무구원은 너무 건드리지 마라. 쟨 딱히 건드려서 좋을 게 없으니까. 알겠니?”
“…형이 동생을 이렇게 아끼는 줄은 몰랐네요.”
“피는 무엇보다 중요하지. 신성하니까.”
무정원은 살랑살랑 손을 흔들더니 시야에서 사라졌다. 기묘한 대화였다. 땅속 깊이 묻혀 있던 윤모난의 아주 작은 죄책감을 건드리기에 충분할 만큼. 윤모난은 길지도 짧지도 않은 시간 동안 무구원의 병실 앞을 지키다가 자리를 떠났다.
* * *
“야, 찌찌 애비.”
“네.”
“팀장 또 방에 틀어박혀 하루 지났는데. 이번에도 3일 가려나.”
“…제가 어떻게 알아요.”
“씹, 팀 꼴 한번 잘 돌아간다.”
“그래도 무구원 선배님은 이틀 만에 일어나서 복귀하셨잖아요. 계속 방에 틀어박혀 기도만 하시긴 하지만.”
“내일이면 정식 훈련 일정 시작인데. 썅… 둘 다 괜찮은 거 맞아?”
경해국은 생전 안 하던 걱정까지 하게 만든 팀장 윤모난이 저주스러워 미칠 지경이었다. 팀장이라는 인간이 팀 분위기를 개좆같이 만들어놓고선 이럴 수는 없는 거다. 성질대로라면 확 불을 지르고 싶었는데. 무구원이 함부로 덤벼들었다가 저 꼴 난 걸 보니 미친개는 피하는 게 답이다 싶었다. 경해국은 전대미문의 미친놈을 마주하고 처음으로 제 분노를 다스리려 시도했다.
끼이익―
그때 기시감이 들 정도로 음울한 방문 소리가 들렸다. 다시 한번 야생의 윤모난이 퀭한 얼굴로 등장한 것이다. 경해국과 안범은 반사적으로 뒷걸음쳤다.
“아침, 먹읍시다.”
“아치임~? 지금 이 분위기에서 밥이 넘어가겠습니까?”
경해국은 다짐한 지 1분도 안 돼서 불소처럼 또 들이받을 준비를 했다. 그러건 말건, 윤모난은 머리나 벅벅 긁으며 터덜터덜 윗옷을 걸쳤다. 그리고 무구원의 방 앞으로 가서 뻥, 하고 방문을 걷어찬다.
“팀장 명령입니다. 앞으로 일주일에 세 번 이상 아침은 팀원 전체가 같이 먹겠습니다.”
무구원은 매트 위에 무릎을 꿇고 기도 중이었는데, 갑작스러운 윤모난의 패악질에도 별다른 반응을 하지 않았다. 그것도 의외인데 잠잠히 경전을 덮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닌가. 무구원이 조용히 윤모난을 따라 방에서 나오는 걸 본 경해국의 입이 떡 벌어졌다.
“야. 무씨, 너 머리 다쳤냐!”
“…….”
“나머지도 얼른 따라 나와요.”
무구원도 잠자코 따라나서는데 경해국이 무슨 수로 버티겠는가. 결국 2부 7팀은 아침 일찍부터 단란하게 식당으로 향했다. 그렇게 네 명이 서로 테이블을 마주하고 앉아 있으니 주변에서 온갖 시선이 날아와 꽂히는 것이 느껴졌다.
윤모난은 그걸 별로 신경 쓰지도 않고 그저 두유 한 병을 두고 멍이나 때리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 불편한 분위기를 조성하더니 그가 갑자기 정상인 행세를 하며 입을 뗐다.
“다들 아침 드세요. 먹으면서 앞으로 훈련 일정 공유하겠습니다.”
“훈련 일정 공유요? 어이, 팀장님. 팀 분위기가 이렇게 좆같은데 훈련이 되겠습니까? 그날 일부터 갈무리하시죠!”
경해국이 나서자 윤모난이 무언가 낯설다는 듯이 반문했다.
“그날 일?”
“네. 그날 일. 무씨하고 대운동장에서 벌인 짓거리 말입니다.”
“아… 난 또 뭐라고. 별일도 아닌 거 가지고.”
별일이 아니라고! 무구원의 꼴을 보면 별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 이틀간 방에서 나오지도 않고 대가리가 찢어져라 바닥에 머리를 찧고 기도를 하는 통에, 벽간 소음에 시달리고 있는 경해국은 속이 터질 것 같았다.
“어이, 십자. 그게 설마 첫 키스는 아니죠?”
그런데 저따위 질문이나 하다니. 경해국이 속으로만 비난하는 사이, 윤모난은 갑자기 흥미가 당겼는지 좌불상처럼 묵묵히 앉아 있는 무구원에게 멀끔한 얼굴을 들이댔다.
“첫 키스라고 하면 내가 책임지고.”
“…….”
“어때. 나한테 시집올래?”
“그만하십시오.”
무구원에게선 딱딱한 반응뿐이었다. 더는 장난에 농락당할 생각이 없는지 입을 꾹 다물고 만다. 기함하는 건 두 사람을 제외한 다른 이들뿐이었다. 윤모난은 시선을 돌려 경고하듯이 지레 목소리를 깔고 말했다.
“시집오기 싫다는데? 그러니까 없던 일로 하자.”
그 말 하나로 무구원과 윤모난 사이에 있었던 이상한 스캔들은 2부 7팀에서 없던 일이 되었다.
* * *
정식 훈련 일정이 시작된 첫날. 윤모난을 포함한 전투조 팀장들은 오전 회의를 마친 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고 있었다. 지하 깊숙한 곳까지 내려가는 지루한 시간을 못 견딘 몇몇이 윤모난에게 관심을 보였다.
“어이, 윤모난. 너 폐급들 맡았다고 소문이 자자하더라?”
팀장들 사이에서 윤모난은 유독 튀는 존재였다. 나이는 어렸고 초고속 승진에, 3년을 휴직했는데도 돌아와서 바로 팀장이 되었으니. 하지만 여긴 그의 10대와 20대 초반을 지켜본 선배들로 가득한 터라 윤모난은 어린애 취급 받기 십상이었다.
“뭐, 그렇게 됐어요.”
“거기 경해국이랑 무구원 개꼴통 새끼들이라고 유명해.”
“주먹으로 다스리면 착해지겠죠.”
“푸하하하. 너도 네 형들이랑 똑같다, 야.”
“…….”
“네 형들도 처음 팀장 맡았을 때, 너처럼 팀원들 패서 정신교육 시키는 걸로 유명했는데. 여기 맞은 애들 꽤 있어.”
이동 시간까지 추억이랍시고 죽은 형들 얘기를 들어야 한다니. 윤모난은 혀나 깨물고 딱 죽고 싶었다. 그때 뒤에 있던 선배 팀장 중 한 명이 불쑥 끼어들었다.
“윤모난, 정신병은 어때? 심각하더니. 다 나은 거냐? 일할 수는 있고?”
“…여기 정신병자 아닌 놈 있으면 손들어보세요.”
“하하―! 얘 진짜 말하는 거 웃긴다니까. 그것도 형들이랑 비슷하고.”
“여기 서강 주씨가 유독 많이 계셔서 하는 말인데. 남는 인재 좀 없어요? 이왕 정신계면 좋고…. 우리 팀에 심리 치료가 필요한 사람이 많아서.”
“…음.”
윤모난은 농담이 아니라, 진심으로 팀원을 한 명쯤 더 들이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새로운 팀원이 초반에 합류할수록 훈련 성과도 좋을 테니 되도록 일찍 구하고 싶었다. 다섯 가문 중 서강 주씨는 유독 예언계나 정신계 에스퍼가 많으니 우선 찔러나 보자 하는 심정이었다.
정신계 에스퍼가 필요한 이유는 단순했다. 3년 전, 만약 그때 정신계 에스퍼가 한 명이라도 있었다면 형들이나 다른 팀원들도 모두 죽지 않았을 테니까.
“정신계면 웬만한 애들은 다 치안조나 정보 수집조로 갔지. 서강 주씨에서 전투조 소속은 여기 있는 사람이 전부고.”
“아… 애들이나 좀 빨리빨리 낳아서 얼른 인원 공급 좀 하시죠.”
“장가도 안 간 놈이 할 소리냐.”
“진심으로 인재 좀 알아봐주세요. 구해주시는 사람한테는 이 미남 후배가 힘차게 한번 애교를 보여드리겠습니다.”
“웩.”
지하 62층. 2부 7팀의 팀 훈련실이 있는 곳에 엘리베이터가 섰다.
“가겠슴다.”
윤모난이 껄렁하게 인사를 하고 내리자 엘리베이터 안에 잠깐 침묵이 찾아왔다.
“…그, 뭐야. 주해영이가 19살 아니야? 가주님의 열네 번째 손자.”
“네, 내년에 입소하겠죠.”
“그놈이 들어가면 좋겠네. 정신계고 훈련 학교 성적도 괜찮잖아.”
“그렇네요. 참, 윤모난 저 새끼. 정신병만 아니면 얼굴도 반반하고 능력도 있으니 내 여동생하고 결혼시키면 딱인데.”
“딱 봐도 결혼 생각 없는 놈이야. 형들 결혼하는 것도 맘에 안 든다고 지 아버지한테 대들었다잖냐.”
“…남경 윤씨 직계는 거의 멸종이네요. 조카들은 어리고.”
“쟨 결국 가문에 기어들어가게 되어 있어. 반도에서 가문을 저버리고 살아남는 놈을 못 봤거든.”
이 중 제일 나이가 많은 (그래봤자 30대 초반인) 한 명이 대화 주제를 바꿨다.
“남경 윤씨 가주가 평의회 참석을 벌써 여러 번 미뤘다던데. 아는 거 있어?”
“그 구렁이가 밖에서 또 자식을 얻었다는 소문이 돌더라고요. 그거랑 관련 있지 않을까 싶은데.”
“또?”
“자식 중에 가이드를 얻으려고 혈안이 된 인간이잖아요.”
“저 집안도 난리네. 윤모난이 지 형들 죽기 전처럼 자유롭게 살기는 어렵겠어.”
윤모난은 제가 떠난 자리에서 서강 주씨들이 뒷말을 할 것을 알면서도, 한시가 바빠 신경 쓸 틈이 없었다. 곁눈질로 훈련 계획표를 확인하며 탈의실에서 훈련복으로 갈아입은 뒤 훈련장으로 가니 팀원들은 이미 아침 계획표에 따라 훈련 중이었다.
개별 훈련장 벽에는 항상 커다랗고 빨간 글씨로 현재 팀 스코어가 띄워져 있었다.
[-5432점.]
정확히 현 상태는 그랬다. 경해국과 무구원은 자신들이 만들어낸 저 대단한 작품을 머리 위에 두고도 훈련에 집중이 되나. 어딘가 초월한 경지인 것이 과연 폐급다웠다.
“일단 오늘 팀장 회의에서 난 결론은 마이너스 천 점 안으로 들어오면 팀 전체 투입을 결정한다고 합니다. 그전까지 현장은 팀장인 나하고 한 명만 나갈 수 있습니다. 그것도 정규가 아니라 비상 출동이라 거지 같은 일만 쭉쭉 맡게 될 것 같네요.”
까놓고 말해 신출인 안범과 근신 처분을 받은 경해국을 제외하면 결국 무구원과 윤모난 단둘이서 오붓하게 비상 출동을 나가게 될 거란 소리였다. 그 속뜻을 모를 리 없는 무구원은 대답 없이 바닥만 보고 있었다. 아무래도 마음의 상처가 큰 모양이었다.
“왜 대답들이 없어? 아직 훈련은 시작도 안 했는데.”
“네.”
바람 빠진 소리들. 그런 건 윤모난을 거슬리게 하지 못한다. 어차피 훈련을 받으면 저절로 억 소리가 날 테니.
“그럼 첫 번째 훈련은 가볍게 시작하겠습니다.”
윤모난은 훈련복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세 사람의 발 앞에 툭 던졌다. 그러자 와작 소리가 나면서 안에 든 것이 터진다.
…그것은 날달걀이었다.
안범은 깨진 달걀을 확인하고 난처한 얼굴로 팀장을 봤다.
“팀장님… 이건….”
“일주일 안에 이 달걀들을 완벽한 완숙란으로 만들어 오세요.”
“네?”
“…아니다. 반숙이 좋겠다.”
“시팔… 장난합니까, 지금? 무슨 초등학교 과제도 아니고.”
경해국은 어이없는 표정을 짓더니 대번에 이빨을 드러냈다. 하지만 윤모난은 지지 않고 이 훈련에 대해 설명했다.
“장난 아니야. 경해국 당신은 불로 달걀 달구고, 안범 씨는 경해국이 능력을 쓸 때마다 효력을 중화시켜서 온도를 조절해. 무구원은 실패하면 다시 날달걀로 바꾸는 거고. 셋이 합작해서 존경하는 팀장님을 위한 반숙을 만드는 겁니다. 자, 실시.”
윤모난은 그렇게 달걀 하나를 던져두고 돌아섰다. 무구원은 3분이 지나기 전에 달걀의 시간을 돌려 깨지기 전 상태로 만든 뒤, 손아귀에 살며시 쥐었다.
한편, 윤모난은 엘리베이터에 올라타 바로 다른 곳으로 향했다. 그에게는 예정된 훈련이 따로 있었다. 정신보호센터에서도 마냥 쉬지만은 않았지만, 어쨌건 현장에 나가기 전에 정신머리부터 다듬을 필요가 있다.
그때 손목에 찬 호출용 기기가 삐삑거리는 신호음을 냈다. 눌러서 확인하니 익숙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올라오고 있니? 기다리는 중이다.
“네.”
―그래.
용건은 간단했다. 무정원의 팀 훈련실이 있는 지하 12층에 도착해 안으로 들어가자 안에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돌아봤다. 모두 무정원의 정예 에스퍼들이었다.
“안녕하세요. 2부 7팀 팀장 가이드 윤모난입니다. 팀 훈련에 참여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예의 차릴 것 없어.”
무정원이 고갯짓을 하자, 그의 팀 에스퍼들이 정중하게 악수를 건넸다. 무정원을 포함해 여섯 명으로 돌아가는 이 팀은 전투조에서 톱 티어에 속하는 정예 팀이었다.
그런 그들에게만 허락된 훈련이 한 가지 있는데, 윤모난은 그것에 참여하기 위해 무정원에게 따로 부탁까지 했다. 바로 트랜스 사냥이었다. 그의 트라우마 치료를 위해선 꼭 필요한 훈련이었다.
“문 열어.”
무정원의 명령에 공간 이동 능력 에스퍼가 힘도 들이지 않고 허공에 문을 띄웠다. 그러자 기다리던 대원들이 차례로 걸어 들어갔다. 윤모난은 예의상 가장 마지막에 들어가려 했지만 무정원이 뒤에 서기를 자처하더니 귓가에 대고 낮게 속삭였다.
“실물은 오랜만이겠구나.”
“네.”
“오늘 사냥은 별로 힘들일 것도 없어. 비교적 쉬운 편일 거다.”
그들이 나온 곳은 겨울비가 무섭게 내리는 한 숲이었다. 영역에 들어서자마자 어디선가 쿵, 하는 소리가 불규칙하게 나면서 지면이 미세하게 진동했다. 무정원의 정예 팀원들은 프로그램된 로봇처럼 알아서 대형대로 숲 곳곳으로 사라졌다. 그에 비해 무정원은 여유로웠다.
“몰이꾼이 하나 몰아온다.”
“네. 느껴집니다.”
무정원은 몰이꾼인 자신의 팀원들이 이곳으로 데려올 사냥감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끼이이이이이….
4시 방향에서 날카로운 울음소리가 점점 이쪽으로 가까워지고 있었다. 타닥거리는 가벼운 발소리를 들으니 방금 쿵 소리를 냈던 커다란 트랜스는 아니다. 하지만 트랜스들은 단지 크기만으로는 그 위험도를 결정할 수 없으니 안심하기엔 일렀다.
“피해.”
간발의 차로 무정원이 윤모난의 어깨를 확 잡아끌었다. 그러자 전기 같은 광선이 간발의 차로 그의 뺨 옆을 스치고 지나갔다. 아무리 예전의 자신이 아니라곤 해도 이토록 둔하게 반응하다니. 윤모난은 어금니 안쪽을 콱 깨물면서 무정원의 손을 뿌리치고 광선이 날아온 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적도 이쪽의 기척을 느꼈을 것이다. 날카로운 광선이 추격하듯 날아오며 숲의 나무들이 우수수 쓰러진다. 윤모난은 달리면서도 최대한 트랜스의 파동을 읽으려 노력했다. 원거리에서 트랜스의 에너지를 임시로 제압해야 팀원 모두가 안전히 타깃에 접근하게 만들 수 있다.
하지만 계속해서 실패가 이어졌다. 파동은 읽었지만 가이딩의 사정거리가 닿지 않는 탓이었다. 역시 직접 접촉이 없다면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들던 찰나, 우뚝 윤모난의 발걸음이 멈춰 섰다.
먼 거리에 트랜스가 얼쩡거리고 있었다. 그것도 인간의 형태와 꽤 비슷한 트랜스가. 이미 자신이 인간이었다는 의식은 없을 테지만. 흰자 없는 검은 눈을 도록도록 굴리며 얼굴에 달린 구멍 곳곳에서는 타르 같은 검은 액체를 뿜어대고 있었다.
끼이이이이이…!
트랜스가 검은 아가리를 쩍 벌리더니 소름 끼치는 울음소리를 냈다. 트랜스의 초의식이 발현되는 순간이었다. 이놈들은 초의식을 통해 동족들 간에 텔레파시를 주고받을 수 있어서 하나를 죽여도 또 하나가 튀어나온다.
“혐오스러운 것들….”
어차피 알아듣지도 못할 테지만, 윤모난은 나지막이 욕설을 읊조렸다. 그리고 등 뒤에 메고 있던 저격용 총을 장전하고 사격 자세를 취했다. 먼 거리의 타깃은 엄지만 한 크기로 보였다. 트랜스를 즉시 사살하려면 머리를 파괴해야 했지만 훈련이므로 다리 관절을 맞히기로 했다.
탕―!
한 발이 적중하자 트랜스가 꿈틀대며 고성을 지르더니, 총알이 날아온 방향으로 기괴하게 달려오기 시작했다. 윤모난은 옆에 있는 굵은 나무를 밟고 단숨에 가지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트랜스가 가까워졌을 때 바로 그 어깨 위로 뛰어내렸다.
트랜스의 뱀 비늘 같은 차가운 피부가 끈적하게 달라붙자, 깊숙한 곳에서 역겨움이 치솟았다. 가이딩을 통한 트랜스 공격은 포스트의 능력을 제어하는 것과 원리는 똑같아도 드는 품의 차원이 달랐다. 윤모난의 한창때 실력으로도 찰나의 시간밖에 공격하지 못할 만큼 고도의 집중을 요하는 일이었다.
눈에서 광선을 뿜어대며 거세게 저항하는 트랜스에게 가이딩을 시도했지만, 지금의 상태로는 역부족이었는지 붙잡고 있던 중심이 크게 흔들렸다. 그 탓에 윤모난은 자세를 고정하지 못하고 바닥에 처박혔다.
그 잠깐의 틈을 놓지 않고 괴물이 입을 쩍 벌리면서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 적 앞에서 두려움을 보이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윤모난은 눈을 질끈 감아버리고 말았다. 눈앞의 트랜스 때문이 아니라, 기억 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끔찍한 풍경 때문이었다.
‘모난아.’
아득한 환청에 윤모난은 고개를 저었다. 과거, 무간, 미로, 형. 그를 점령하고 좀먹는 과거의 망령들이 순식간에 닥쳐왔다.
‘내 동생….’
감은 시야마저 아득해지던 윤모난은 어느새 괴물의 공격이 일시에 멈춘 것을 느끼곤 조심스레 주변을 살폈다. 추적추적 내리던 겨울비가 더 이상 내리지 않았다. 윤모난은 아까보다 더한 한기에 몸을 살짝 떨었다. 그 순간, 눈앞의 트랜스가 수많은 얼음송곳에 찔려 피를 쭉 뿜어대더니 뒤로 무너지듯 쓰러졌다.
탕― 탕― 탕―!
깔끔하고 군더더기 없는 세 번의 격발이었다. 꿈틀거리며 죽어가는 트랜스 뒤편으로 연기가 피어오르는 총구가 보였고, 트랜스 사냥에는 다소 이질적인 단정한 차림의 남자가 서서히 눈에 들어왔다. 윤모난은 전신의 경련을 가라앉히며 괜히 너스레를 떨었다.
“일부러 비 오는 날로 고른 거 아니에요? 형한테 너무 유리하잖아.”
“그렇게 됐나.”
민망함에 아무 말이나 하긴 했지만, 윤모난도 무정원이 미량의 액체만으로도 위력적인 빙결 능력을 보여주는 에스퍼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윤모난은 자리를 털고 일어나 방금 무정원이 잡은 사냥감을 확인했다.
“…인간형에 가깝네요. B급 트랜스는 되겠어요. 사냥터에 어느 정도까지 넣어놓은 거예요?”
“윤리적인 상한선은 C급까지지.”
포스트처럼 트랜스에게도 능력과 진화 정도에 따른 등급이 있다. 능력이 뛰어난 에스퍼일수록 폭주 시 고레벨의 트랜스가 된다. 높은 등급의 에스퍼가 귀한 만큼 전투에서 마주치는 트랜스들은 대부분 B급 이하였으나, 가끔가다 마주치는 A급 이상의 트랜스들은 인간과 비슷한 형태를 띄고 있었다.
윤모난은 살면서 S급 트랜스를 딱 한 번 마주한 적이 있었다. 창백한 얼굴에 붉은색 눈, 긴 머리를 늘어트린 트랜스는 생체 무기를 사용한 정신 교란 능력으로 현장에 있던 에스퍼들을 힘 하나 들이지 않고 눈뜬장님으로 만들었다.
“이 정도 등급에도 쩔쩔매다니 너답지 않구나, 모난아.”
“…능력이 잘 돌아오지 않네요. 뭐, 고장 난 머리통이 가장 문제겠지만.”
“계속 약을 복용하고 있니? 능력이 크게 제한될 텐데.”
“안 먹으면 아침에 눈 뜨기도 힘들어요.”
무정원은 훈련복에서 진흙을 털어내는 윤모난을 보면서 생각에 빠졌다. 천재적인 기량의 가이드인 윤모난을 줄곧 영입하고 싶었던 건 사실이지만, 3년간 정신보호센터에 처박혀 있던 사람을 바로 데려온다는 것은 여러모로 성가신 일이다. 방금도 트랜스를 보고 능력을 발휘하기 전에 먼저 브레이크가 걸렸다.
현재 윤모난의 몸과 정신은 무딘 칼날이나 다름없었다. 제대로 쓰기 위해서는 용광로에 넣고 다시 제련해야 한다. 수백, 수천 번을 두드려야 옛날 같은 폼을 갖추게 될 거였다. 그런 점에서 2부 7팀의 팀장 자리는 안성맞춤이었다. 거긴… 윤모난을 다시 녹이기에 제격인 용광로였다.
“접촉 없이는 가이딩을 못한다고?”
“…어쩔 때는 피부로 교감하는 것도 잘 안돼요.”
“네가 너무 억누르고 있는 건 아니고?”
“…….”
“향정신성 약은 포스트의 자율신경계에 영향을 미치니 장기 복용은 일을 방해할 거다.”
“알아요.”
“아니면 단기적인 대증요법도 있지.”
무정원의 손이 윤모난의 목뒤에 붙더니 쭉 선을 타고 올라온다. 주변은 적막하고, 두 사람 사이의 이런 면밀한 접촉을 지켜볼 이는 없었다. 단기적인 대증요법이라. 답은 하나였다.
“뭐, 누구 붙잡고 섹스라도 하고 다니라는 말이에요?”
윤모난은 자신을 만지는 손길에 응하며 발칙하게 물었다.
“제가 아무한테나 꼴리는 인간이 아니잖아요.”
“네 취향은 내가 잘 알지.”
“아… 왜 이러실까. 형 동생이랑 같은 팀인데 껄끄러워지기 싫어요.”
옛날이었다면 생각해볼 법한 제안이었다. 무정원과는 짧지만 인상적인 과거가 몇 번 있었으니. 하지만 예전처럼 무정원이랑 놀아났다간 따끔한 맛을 보게 될 수도 있었다. 순간 윤모난은 제 형과 뒹구는 팀장을 본 무구원이 경전을 든 채 충격받은 모습을 상상했다.
아마도 기도를 하면서 피가 터질 때까지 바닥에 대가리를 찧고 죽으려 할 텐데. 지금까지 지켜본 무구원은 무슨 가련한 개복치 같았다. 그런 녀석이 경악하는 모습을 보는 건 너무 재밌을 것 같지만, 감투를 쓰게 되니 이것도 족쇄라고 조금은 철이 든 생각이 들기도 하는 것이다.
“요즘 외로워요? 재혼이나 해요. 애인을 만들든가.”
무정원은 윤모난의 실없는 소리에 하하 웃더니, 비에 젖은 그 분홍 머리를 흩트렸다. 윤모난도 피식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미소 지었다.
무정원은 나쁜 사람은 아니다. 어딘가 음흉한 구석이 있기는 하지만, 때때로 그 속내를 날것 그대로 비치기도 한다.
윤모난은 그에게 아무런 감정이 없었고, 그래서 오히려 편한 관계라 생각했다. 서로 주고받을 것이 있으면 거래하듯이 하면 될 일이다. 쓸데없는 감정 따위에 얽히지 않는 그런 관계가 필요하다면 찾아갈 만한 유일한 인물이기도 했다. 뭐, 무정원은 아내가 죽고 미혼인 상태이니 양심에 찔릴 것도 없고.
“가자. 사냥은 이 정도로 해야겠다. 몰이꾼들한테도 사냥할 거리는 줘야지.”
윤모난은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에게 할당된 사냥감은 하나였으니 더는 폐를 끼칠 수 없었다.
아까 팀원들이 모여 있던 장소로 걸어가는 내내 무정원은 윤모난 주변의 빗줄기를 얼려 일부러 눈을 만들고 있었다. 아마도 비에 젖지 말라고 그런 듯싶었다.
“훈련도 아직 안 끝났는데 쓸데없이 능력 쓰지 마세요. 방전됩니다.”
“내가 비를 맞는 걸 싫어하거든.”
아무리 그라고 하더라도, 포스트인 이상 일상에서 소소한 일에 이능력을 남발할 정도로 만능의 신체를 가진 종이 아니다. 이능력은 쓰면 쓸수록 지치고 힘들어져서 포스트의 몸에 피로를 많이 가져다준다. 물론 무정원은 단련된 신체와 정신을 통해서 이 정도 일은 힘 하나 들이지 않고 하는 사람이었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었다.
대기 장소에 돌아오자, 공간 이동 능력을 가진 에스퍼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마도 오는 길에 무정원이 신호를 보낸 듯했다. 무정원은 황송하게도 훈련장까지 윤모난을 배웅했다.
“2주 뒤에나 봐야겠구나. 우리 팀은 내일 출동하게 돼서.”
“…조심하세요.”
“그래.”
무정원은 늘 인사가 짧았다. 그가 다시 사냥터로 돌아가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윤모난은 개인 훈련을 하기 위해 돌아섰다.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건 그것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