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 치치 사수 작전 (3/24)

3. 치치 사수 작전

정식 훈련에 들어간 지 나흘이 지났으나 2부 7팀은 여전히 큰 난항을 겪고 있었다. 팀장 윤모난은 이틀째 되는 날, 달걀을 확인하러 와서 경멸스러운 얼굴로 제 팀원들을 바라봤다.

‘이 정도도 못하다니 폐급이 맞는구나? 하루면 할 줄 알았는데.’

…라고 한마디 하더니 또 훈련장을 나가버린 뒤로 감감무소식이다. 경해국은 까맣게 태운 달걀을 벽에 던지고 훈련장 안의 기구를 때려 부쉈다. 안범은 망가진 수도꼭지처럼 엉엉 울었고, 무구원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분위기가 점점 최악으로 치닫는 가운데, 세 사람은 가마솥에 눌어붙은 누룽지라도 된 듯 침울한 기분마저 들었다.

남들한테 폐급 취급받는 건 몰라도 정신 나간 팀장한테 그 소리를 듣자니 명색이 3년 차 에스퍼인 무구원과 경해국의 자존심에도 스크래치가 났다. 마치 맹수의 발톱에 당한 것처럼 정신 차리기가 어려웠다.

무구원은 기도를 더 길게 하기 시작했고, 경해국은 훈련 시간이 아닐 땐 욕조에 얼음물을 붓고 들어가 있어야 겨우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이 절망적인 훈련을 완수하기 위해 오늘도 훈련장에 온 차였다.

“아니, 시팔 윤 팀장도 겨우 2년인가 근무하고 3년이나 휴직했다며? 현장 경력으로 치면… 무씨나 내가 더 긴 거 아니야? 근데 우리가 왜 고개를 숙여야 해?”

“팀장님 성적을 보기나 하고 지껄이는 소린가? 너나 나나 비교할 수준이 못 돼. 우리보다 짧게 근무했어도 무시할 실력이 아니다.”

무구원은 날달걀을 만지며 생각에 빠졌다. 자신 말고 주변에 관심이 없는 아웃사이더라 해도 경해국이 왜 윤모난을 기억 못하나 싶었다. 입소 동기인 경해국과 무구원은 분명 3년 전 윤모난과 마주친 적이 있었다.

둘은 신입 때부터 2부 7팀이었고, 배정받은 팀장의 인도에 따라 대운동장의 트랙에서 체력 훈련을 하곤 했다. 그리고 어느 날, 거기 윤모난이 있었다.

무구원은 혼자 트랙을 달리는 분홍 머리에 자연스럽게 눈길이 갔다. 반 바퀴를 돌아 저희와 가까운 지점을 돌 때 비로소 남자의 얼굴이 보였다. 촉촉한 땀을 흘리며 뛰는 윤모난의 입가에는 시원스러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 계속 달렸으니 몸이 지쳤을 텐데 더 박차를 가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아, 윤모난 저거 또 혼자 트랙 독차지하고 있네.”

“누군데요?”

옆에서 누군가 대신 물어보았다.

“남경 윤씨 막내 도련님이잖아. 축복받은 돌연변이 새끼.”

“유명해요?”

“괴물이야, 완전. 처음 나간 작전에서 지 혼자 트랜스 다섯을 죽였다니까.”

“뭐 에스퍼예요? 무슨 능력자인데요?”

“아니, 가이드야. 가이드인데 싸움을 귀신같이 해. 지 형들하고 대련하는 걸 한 번 본 적이 있는데, 셋 다 서로 샌드백 삼아 반나절을 싸우더라. 독한 것들.”

안줏거리 삼아 한담이나 나누는데, 구경하는 관객들을 발견한 윤모난이 멈추더니 손을 흔들며 다가왔다. 아마도 2부 7팀의 강 팀장과 꽤 아는 사이인 듯싶었다.

가까이서 본 윤모난은 땀에 젖어 마치 불건전한 잡지 모델 같았다. 하지만 퇴폐적인 분위기완 달리 눈빛은 맑고 얼굴에 근심이라곤 없어 보였다.

“강 선배, 신입들 데리고 나왔어요?”

“어.”

“둘 다 잘생겼네.”

“얼굴이 대수냐. 실력이 좋아야지.”

“하하, 그런가.”

무구원은 농담을 주고받으며 호쾌하게 웃는 윤모난을 조용히 지켜봤다. 과하게 잘생긴 건 오히려 그쪽이었다.

“너네 팀 오늘 출동 아니야? 휴식이나 하지 아침부터 왜 이렇게 힘 빼고 있어?”

“네, 벌써 두 팀이 출동했는데 전원 실종된 상태인가 봐요. 무간 중에서도 격전지예요.”

“…아유. 수고해라. 몸조심하고.”

“네, 감사합니다요.”

윤모난은 슥 다른 팀원들에게도 예의를 갖춰 묵례를 했다. 경해국은 정신이 산만해 그 광경을 못 봤고, 무구원은 눈썹 가까이에 손을 붙이고 경례를 했다. 그러자 윤모난이 씨익 웃더니 자기도 맞경례를 한다.

“못난아, 가자.”

그때 위에서 자신을 부르는 친근한 목소리에 윤모난은 바로 반응했다. 언덕 위를 확인한 그는 곧장 그곳으로 뛰어갔다.

언덕 위에서 윤모난을 기다리고 있던 두 남자들은 윤모난의 어깨에 팔을 두르더니 입고 있던 정복 소매로 땀을 닦아주었다. 그중에 한 남자가 흘긋 무구원이 있는 쪽을 돌아봤다. 미묘한 기색이 담긴 시선이었다.

“쟤 무정원이랑 좀 닮았네.”

“어?”

“저기 키 크고 검은 머리에 눈빛 매서운 놈. 무정원이랑 닮았잖아. 북해에서 왔나.”

윤모난은 무정원이라는 말에 다시 한번 그 신입의 얼굴을 확인하려 고개를 돌렸지만, 다른 하나가 확 몸을 기울여 방해했다.

“못난이, 너 아직도 무정원이랑 어울리는 거 아니지?”

“…결혼한 사람인데, 무슨. 잠깐 그런 걸 가지고.”

“그래. 무정원이랑은 엮이지 마라. 북해 놈들 하나같이 어마어마한 변태 새끼들이야. 우리 막내 뼛속까지 발라 먹을걸.”

“아! 진짜, 그런 소리 좀 하지 마라. 내 사생활에 신경 좀 끄시지.”

그것이 무구원이 기억하는 세 형제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그로부터 사흘 뒤, 윤모난은 모든 팀원들을 잃고 무간에서 홀로 살아 돌아왔다.

지금의 윤모난은 명백히 고장 난 사람이다. 부품이 안 맞아 삐걱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서로 맞물리지 않는 작은 장치들이 엇갈려 털거덕거리는 그 모습을 보다 보면 위태로움마저 느껴졌다.

그는 책임감도 없고 만사가 귀찮은 최악의 리더였으며, 기분에 따라 행동하는 한낱 양아치에 불과했다. 성실하고 매사가 적확하길 바라는 무구원이 딱 싫어하는 종류의 인간 군상이었다. 따먹겠다는 소리나 지껄여대질 않나, 갑자기 키스하질 않나. 하는 행동마다 불쾌하고 악의적이다.

무구원은 미친놈에겐 무관심으로 대응하기로 했다. 팀원으로서 팀장에게 바랄 것도 딱히 없고, 그가 내리는 지시에 그저 따르면 그만이다. 어차피 저런 사람은 자기 파괴적이기에 수명 또한 짧을 터였다.

생뚱맞게 날달걀을 반숙란으로 만들라는 취지는 이해했다. 억지로라도 팀워크를 만들기 위해서겠지. 2부 7팀은 작은 파도 한 번에 언제든 무너질 모래성이었으니까.

경해국은 능력 자체는 세지만 조절이 안 되는 시한폭탄이고, 안범은 수동적인 데다가 소극적이기까지 하다. 3분 역행밖에 안 되는 미미한 자신의 능력은 이 미션에 큰 제한 조건으로 작용한다. 일주일 만에 성공한다는 건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씹, 팀 훈련 시간인데 찌찌 애비 왜 안 오는 거야? 또 어디 틀어박혀서 질질 짜는 거 아니야?”

“그러게.”

무구원은 바로 시계를 확인했다. 안범이 팀 훈련 시간에 10분 이상 지각하고 있었다. 결코 용납 못할 일이다. 자신은 물론이고 광인 경해국마저 훈련 시간에는 늦은 법이 없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경해국이 날뛰기 시작했다. 손목에 있는 팀 간 호출기로 전화를 걸어도, 안범이 응답하지 않자 문을 뻥 걷어차고 뛰쳐나갔다. 찌찌에 이어 요단강 구경시켜준다고 악을 지르며 탈의실로 쳐들어갔지만, 그곳에 안범은 없었다.

안범이 쓰는 캐비닛 문짝을 뜯어 안을 확인하자 훌렁 벗어놓은 훈련복과 함께, 이상한 편지가 있었다.

팀장님, 선배님들께.

저 안범은 실력이 미천한 음식물 쓰레기로서 매사에 누를 끼치는 탓에 팀의 화근이 될 재앙의 불씨입니다. 저는 저에게 어울리지 않는 일을 그만두고 고향 남도에 돌아가기로 결정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안범 올림.

“아! 안범 이 새끼이이익!! 도망갔어!”

“…그만둘 거란 생각은 했다.”

“아니, 들어온 지 2주도 안 된 신입이 감히 말도 없이 내빼? 이거 완전 정신머리가 돌았구만.”

“생각보단 빠르네. 팀장님께 보고해야겠어.”

“시팔, 넌 윤 팀장이 안범 편애하는 거 모르냐? 얘 도망간 거 알았다간 우리 탓 할 텐데, 당장 앞에다 개작두를 대령할 인간이야, 그거.”

아직 윤모난이 팀 훈련장을 한바탕 뒤집어놓지 않은 걸 보면, 안범이 도망간 걸 모르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경해국은 손톱 끝을 신경질적으로 뜯더니 무구원에게 서곡역으로 가서 안범을 두들겨 패서라도 끌고 오자고 제안했다.

하지만 무구원은 그의 말에 회의적이었다.

“왜 그래야 하지? 전투조는 애초에 안범한테 어울리지 않은 직무가 맞다. 그만두는 게 최선이야.”

“무씨, 넌 뇌가 아이스크림으로 되어 있냐? 누가 안범 적성에 관심 있다니? 이러다 팀이 해체될 수도 있어. 근신 중인 나는 잘릴 수도 있다고.”

“…너야말로 이 임무에 어울리지 않을 수도 있다. 잘리면 동산에 가서 요양이나 하고 화나 다스려.”

“무씨 너 진짜…!”

“그럼 팀장님께 보고하러 간다. 어차피 안범이 없으니 이 훈련도 취소겠지.”

경해국이 악을 지르는 소리를 뒤통수에 달고서 무구원은 훈련실을 나왔다. 그리고 바로 팀장 개인 훈련실이 있는 층으로 향하는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윤모난이 이 시간에 개인 훈련을 한다는 건 이미 시간표로 알고 있었다.

해당 층에 도착해 복도를 따라 걷는데, 아니나 다를까 누군가 홀로 훈련하는 소리가 들렸다. 문에 달려 있는 창문을 통해서 얼핏 보니, 검은 도복을 입고 훈련용 더미에 발차기를 하는 윤모난이 시야에 들어왔다.

퍽― 퍽―

윤모난은 한껏 집중한 채 더미를 가격하고 있었다. 타격 하나하나가 빠르고 정확하며 무자비했다. 무구원이 노크를 하는 순간 가죽 더미가 푹 터져 안에서 내용물이 쏟아졌다. 윤모난이 홱 그를 돌아봤다.

“뭐죠? 십자, 지금 팀 훈련 시간 아니야? 왜 여기 있어요.”

십자 소리에 무구원의 진한 두 눈썹이 꿈틀거렸지만, 그는 본분을 다해 이곳에 온 이유를 설명했다.

“안범이 그만두겠다고 편지를 남기고 떠났습니다.”

“뭐?”

무구원은 안범이 쓴 편지를 그에게 건넸다. 말없이 장문의 편지를 읽은 윤모난은 탄식하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둘이 괴롭힌 건 아니고?”

“저희가 팀장님과 같은 줄 아십니까?”

“어쭈? 말하는 거 봐라.”

“…….”

“잡아 와야 해. 서곡역으로 갔을 테니 납치해 와.”

설마 윤모난이 경해국이랑 똑같은 말을 할 줄은 몰랐다. 하지만 무구원은 여전히 의문이었다.

“왜 그래야 합니까? 그만두는 건 어디까지나 안범의 자유입니다.”

“데려와.”

“임무를 팽개친 책임감 없는 팀원에게 신경 쓰고 싶지 않습니다.”

“가서… 6개월 뒤에 구호조로 부서 이동시켜줄 거라고 해. 그게 안범 씨 꿈이었어. 바로 해주기엔 내가 별로 힘이 없고.”

윤모난은 편지를 옆으로 날려버린 뒤 도복 주머니에서 담배와 라이터를 꺼내 불을 붙였다. 그는 조금 착잡한 표정이었다.

“아직 어리잖아. 가족이랑 떨어져서 향수병도 심할 테고. 경해국이 인형까지 태웠으니. 죽은 아버지가 준 선물이라더라. 말은 안 하지만 얼마나 힘들었겠어. 하지만 집안 사정도 안 좋고, 가장이라는데 고향에 가서 무슨 일을 해. 좆같아도 공무원이 최고지.”

무구원은 윤모난이 그렇게 말할 줄은 몰랐다. 윤모난이 안범을 편애한다는 말은 사실이었나.

“경해국은 장애 때문에 화를 조절하기 힘들 테니, 현상 유지 능력자인 안범 씨가 우리 팀에 있음 좋은데. 아쉽네요. 경해국 능력도 아쉽고, 저렇게 근신이나 하며 일을 쉬어야 할 사람이 아니란 말이지.”

“…….”

“왜 그렇게 봐요?”

윤모난은 중얼거리다 말고 무구원이 자신을 빤히 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또 장난기가 도져서는 갑자기 불건전한 의도가 다분한 시선을 던졌다. 이윽고 그는 담배의 씁쓸한 향이 묻은 손끝으로 무구원의 한쪽 볼을 장난스럽게 쥐더니 가볍게 흔들었다.

“팀장 말 들어야지. 얼른 데려와요 정 안 오겠다고 그러면, 내가 치치 다시 부활시켜준다고 꼬셔봐요. 아마 바로 말 들을 거야.”

“…치치요?”

“응, 그걸로 한번 빌어봐야지. 우릴 떠나지 말라고.”

로봇이라 강철로 되어 있을 것 같았던 무구원의 뺨은 생각보다 말랑해서 잡고 당겼다가 놓자 탄력을 내며 튕겨 나갔다. 손을 떼자 잠시 동안 붉은 자국이 남았다. 곧이어 윤모난이 넓은 가슴을 밀자 무구원은 맥없이 문밖으로 떠밀렸다.

문이 닫힌다. 명령은 이게 다였다. 무구원은 홀린 것처럼 자신이 다시 경해국을 데리러 아래로 내려가고 있다는 걸 깨닫고 뒤늦게 자괴감을 느꼈다. 어쨌건 팀장의 명령이니 서곡역으로 향할 수밖에.

하지만 안범을 데려오는 건 예상만큼 쉽지 않았다. 짐을 한가득 싸 들고 서곡역에서 얼쩡대던 안범을 짧은 추격전 끝에 손쉽게 잡은 것에는 성공했으나, 그의 고집이 꽤 대단해서 꿈쩍도 하지 않는 것 아닌가. 그러다 무구원은 최후의 보루로 치치의 부활 가능성을 이야기했다.

고집을 부릴 때는 언제고 안범은 어처구니없게도 즉각 자리에서 일어났다. 선배가 한 시간을 설득해도 꿈쩍도 안 하던 놈이 겨우 토끼 인형 살려준다는 말에 엉덩이를 떼는 것을 보고, 경해국은 혀를 끌끌 찼다.

우여곡절 끝에 2부 7팀 팀원들은 저녁이 다 되어서야 서곡센터로 다시 돌아왔다. 합숙소에 가보니 여전히 도복 차림인 윤모난이 기다리고 있었다.

“팀장님… 흐엉….”

“자, 울지 말고 치치 유골함 꺼내서 따라와요. 치안조 생활관으로 갑시다.”

“치안조요?”

“네, 치치를 살릴 명의가 거기 있거든.”

그 말과 함께 윤모난은 안범이 상자에 고이 모셔둔 치치의 재와 팀원 세 명을 치안조 생활관으로 데려갔다. 목적지는 치안조 1부 3팀 합숙소. 초인종을 누른 뒤 기다리자 안에서 덜컥 문이 열린다. 문을 연 치안조 팀원은 분홍 머리를 확인하자마자 약간 흠칫했다.

“한 팀장님, …전투조 윤모난… 선배 오셨는데요?”

“형, 용건이 있어서 왔어요.”

윤모난은 어울리지 않게 맨들맨들한 미소를 짓더니 정중하게 허락을 구했다. 그러자 안에서 들어오라는 소리가 들렸다. 2부 7팀 팀원들은 서로 눈치를 주고받으면서 윤모난과 함께 치안 3팀 합숙소로 같이 들어갔다.

그때 치안 3팀의 팀장 개인실 안에서 검은 사각팬티만 입은 남자가 배를 벅벅 긁으며 터벅터벅 걸어 나왔다. 호리호리한 몸에 현란한 문신을 빽빽하게 새기고, 백금발로 탈색한 그는 윤모난보다 두 배는 더 불량한 인상이었다.

“뭐냐? 핑키, 3년 만이네.”

“개인적인 부탁 좀 드리려고요. 형 능력이 좀 필요해서요.”

무구원과 경해국은 당연히 치안 3팀 한백호를 알고 있었다. 고섬 한씨의 차남인 한백호는 특유의 능력으로 매우 유명한 인물이었다. 바로 시간 역행 능력이다. 한백호는 생명체가 아닌, 무생물인 사물에 한해서 꽤 긴 시간 역행을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윤모난이 말하는 명의는 시간을 돌릴 수 있는 에스퍼 한백호였던 것이다.

“푸핫― 그래서 핑키 너네 팀원 인형을 되살리려고 여기까지 왔다는 거지? 푸하하하!”

“네.”

윤모난은 한백호에게 짧게 사정을 설명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경해국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옆에 있는 무구원을 툭툭 쳤다. 수군거리는 목소리에는 답지 않게 근심이 한가득이었다.

“야… 한백호를 윤 팀장이… 감당할 수 있으려나….”

“뭘.”

“저 사람 좀 이상하잖아.”

경해국은 이상야릇한 표정을 지을 뿐, 더 말을 하지 않았다. 그 와중에 윤모난은 한백호의 앞에 서서 ‘부탁드려요, 형’이라며 어울리지 않는 순진한 후배 행세나 하고 있었는데, 그게 무구원은 못내 거슬렸다. 자신도 시간 능력 에스퍼인데, 능력이 안 되어 구차하게 빌러 온 상황 자체가 견디기 힘들었다.

한백호는 윤모난이 담배에 불을 붙여주는 서비스까지 하고 나서야 치치를 거들떠보는 시늉을 했다. 하지만 치치가 탄 것이 2주가 다 되어간다는 소리에 곧 능청을 떨었다. 돌려야 하는 시간이 길수록 능력자에겐 부담이 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왜 너네 팀 개인적인 일에 능력을 써야 해?”

“이 은혜는 갚겠습니다.”

이 자괴감 오지는 비굴한 장면을 왜 보고 있어야 하는지. 윤모난을 제외한 2부 7팀 전원은 차마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아무리 미덥지 않은 팀장이라 할지라도 그가 무슨 비굴한 술집 종업원이라도 된 듯이 저러고 있는 걸 보니 어쩐지 화가 끓는다.

안범의 낯은 새하얗게 질렸고 그건 경해국도 마찬가지였다. 무구원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뚫어져라 윤모난을 보고 있었다. 한백호도 호락호락한 인간은 아니라 쉽게 넘어가줄 리 없었다. 그는 한참 뜸을 들이다가 약간 미묘한 웃음을 짓더니 마지막 제안을 했다.

“그럼… 핑키 네가 한번 재롱 좀 떨어봐라. 그럼 이 형이 생각 좀 해볼게.”

“한 팀장! 당신!!”

결국에는 못 참고 경해국이 나섰다. 하지만 그를 막아선 것은 차가운 얼굴의 윤모난이었다.

“가만히 있어요.”

윤모난은 이미 이곳에 오기 전에 이런 수모를 예상했다. 그는 비장한 몸짓으로 경해국을 밀치고, 옆에 서 있는 무구원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한껏 진지하고 낮은 목소리로 명령한다.

“십자, 숙소에 가서 단소 좀 가지고 와요.”

“…단소요?”

“어. 가져와. 당장.”

가타부타 윤모난이 설명해줄 것 같진 않고 그냥 한 말도 아닌 것 같아, 결국 무구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단소를 가지러 나섰다. 그사이에 경해국이 기어코 재롱을 떨어야겠냐며 따져 물었다.

“아니, 썅. 지금 앵벌이 하러 온 것도 아니고. 자괴감 들어서 못 보겠습니다. 이러려면 팀장 당신 혼자 와서 하든가. 왜 우리까지 데려와 이 꼴 보게 만듭니까?”

“그래야 당신들이 팀장 존경할 줄 알지.”

경해국은 붉으락푸르락하더니 거의 터질 거 같은 기세였다. 자존심 하나만으로 사는 남자의 전형이다. 그러건 말건 윤모난은 치안조 팀 냉장고로 가서 안에 든 소주병을 꺼냈다.

“형, 마실게요. 재롱 잘 떨려면 술이 좀 필요해서.”

“어― 그래라.”

윤모난은 새 소주병을 따서 안에 든 액체를 들이켰다. 그러자 안범이 견디지 못하고 무너진다.

“팀장님, 잘못했어요! 저 때문에 그러지 마세요!”

“아, 그만해. 늦었어요, 이미.”

“으흐흑… 그러지 마세요….”

“뭘 할 줄 알고 그러지 말래?”

소주 한 병을 다 비워갈 때쯤에 무구원이 굳은 얼굴로 자신의 단소를 가지고 돌아왔다. 단소를 받아 든 윤모난은 대뜸 이상한 걸 물었다.

“이거 중요한 물건이에요?”

“아니요. 그냥 기성품입니다.”

“사연이 있다거나, 누구 유품인 거 아니지?”

“아닙니다.”

“알았어.”

“핑키야, 나 지루해진다. 얼른 해라.”

한백호의 재촉에 윤모난은 아랫입술을 깨물더니 돌아설 때는 완연한 미소를 꾸며냈다. 그러더니 뭔 짓을 하려는지 몰라도 자신과 한백호만 남기고 모든 팀원들을 합숙소에서 나가라 했다.

그렇게 모두 눈치를 보며 나오는데, 치안 3팀 팀원들 표정도 좆같았다. 그들은 생활관 앞에 있는 등나무 벤치에 모였다. 슬쩍 본 치안 3팀의 숙소가 있는 베란다 창문은 어느새 커튼이 쳐져 있었다.

“…야, 치안조. 너네 한 팀장 진짜 또라이 아니냐? 아무리 그래도 팀장들끼리 저렇게 모욕 주는 게 맞아?”

“…….”

“시팔… 단소는 왜 가져다 달라고 한 거야? 그걸로 뭘 하게? 무구원, 너 뭐 아는 거 있어?”

“…아니.”

“하, 시팔. 미치겠네. 저 안에서 뭐 하는 거야? 대체.”

그때 조용한 생활관의 적막을 뚫고 어디선가 피리리, 하는 단소 소리가 미세하게 들렸다. 그와 함께 무구원의 얼굴도 약간 굳었다.

단소는 아무런 음률도 연주하고 있지 않았다. 그냥 삑삑 새된 소리만 냈는데, 그게 미묘하게 모두의 신경을 긁었다. 무구원은 아까 윤모난의 차림새가 벗기기 좋은 검은 도복이라는 것을 떠올리고 괜히 머리를 가로로 저었다.

“야! 너네 아는 거 있으면 말해! 니네 팀장 저기서 지금 뭐 하는지! 이 개새끼들아!”

“…저희도… 모릅니다.”

“너네, 찌찌만 되살리면 여기 싹 다 태워버릴 줄 알아. 알았어?”

“저희도 난처해요. 그러지 마세요.”

“어후―! 속 터져.”

경해국은 벤치 옆에 있는 쓰레기통을 발로 퍽 걷어찼다. 안범은 탈진할 것처럼 울어대기 시작했고, 무구원 역시 두통이 찾아와 벽에 기댔다.

그렇게 얼마나 기다렸을까. 무구원은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정확히 1시간 14분이 지날 즈음. 무거운 발소리가 들려 일제히 문 쪽을 확인하자, 치안조 합숙소 문을 열고 나오는 분홍 머리의 남자가 보였다.

그의 한 손에는 단소가, 다른 한 손에는 멀쩡해진 안범의 애착 인형 치치가 들려 있었다.

“팀장님―!”

“…자, 여기 치치.”

잠깐 사이에 뭘 하다 나온 건지 윤모난은 많이 지쳐 보였다. 그는 안범에게 치치를 안겨주고는 경해국이 쓰러트린 쓰레기통으로 가더니 단소를 그 위로 세게 내리쳐 두 동강 내버렸다.

“모두 돌아갑시다.”

“…….”

2부 7팀 팀원들은 아무런 말도 없이 팀장을 따라갔다. 전투조 생활관으로 향하는 와중에도 윤모난은 담배부터 꺼냈다. 하지만 담배에 불을 붙이려 라이터를 켜는 손이 미세하게 떨려 피울 수가 없었다. 결국 경해국이 제 능력을 써서 대신 불을 붙여줬다.

윤모난은 침을 꿀꺽 삼키면서 연신 담배를 빨더니 도착할 때쯤엔 약간 진정한 듯했다. 팀원들은 307호 거실에 나란히 서서 팀장의 말만 기다리고 있었다. 윤모난은 움직일 때마다 연신 불편해 보였고 파르르 떨기까지 했다. 안범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팀장님, 어디 불편하세요?”

“어? 괜찮아요. 오래간만에 재롱을 좀 떨었더니 쪽팔려서요.”

“죄송해요…. 그리구 감사합니다.”

“응. 그러니까 다음부터는 이런 일 없게 합시다. 내일부터 훈련도 다시 시작했으면 좋겠어요.”

“…네.”

“셋 다 더 집중하세요. 제가 준 기한은 이제 얼마 안 남았어요. 그럼 오늘은 이만 해산….”

한바탕 욕이나 늘어놓을 줄 알았는데 윤모난이 의외로 일찍 자리를 해산했다. 셋의 얼굴은 어두워졌다. 하지만 무슨 일이냐고 물을 자신은 없기에 안범과 경해국은 미적미적 방으로 들어가는 걸 택했다.

무구원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방으로 들어가려던 윤모난을 막아 세웠다.

“팀장님.”

“응?”

“어디 아프십니까?”

“아니.”

아니라니, 누가 봐도 어딘가 불편한 모습인데.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것도 아니고. 무구원은 묘한 기분에 젖어들었다.

어쨌든 윤모난도 2부 7팀의 구성원이다. 그가 정말로 팀워크를 바란다면 다른 팀원들에게 자신의 상태를 제대로 공유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아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제대로….”

그 순간 무구원의 손에 걸려 윤모난의 도복 상의가 뒤로 젖혀졌다. 그 덕분에 성글게 묶여 있던 도복 검은 띠가 풀려 상의가 벗겨졌고, 무구원의 얼굴도 굳어버렸다.

“팀장님!”

“왜?”

윤모난은 신경질을 내며 돌아봤다. 대체 뭐가 문제냐는 얼굴로.

하지만 분명 문제가 있었다. 검은 도복이라 몰랐는데 그의 등이 무슨 채찍을 맞은 것처럼 피떡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상처를 자세히 보니 얇고 단단한 둔기로 내려친 것 같았다.

무구원은 윤모난의 개인 방 문을 확 열어젖혔다. 말 한마디 없이 윤모난을 안으로 밀친 그는 곧 자신도 그 방에 들어갔다. 조금의 접촉에도 윤모난은 극심한 고통이 느껴지는지 어깨를 움츠렸다.

이미 도축한 고기도 이렇게 때릴 수는 없는 거였다. 너무도 가학적이고 악의적인 폭력의 흔적이었다.

“설명해주십시오.”

“아…. 한백호 그 사디스트가… 옛날에 나한테 좀 쌓인 게 많거든.”

“…….”

“특기는 없고, 단소라도 불어볼까 했는데. 내가 리코더는 좀 부는데 단소는 또 어렵더라. 그래서 단소로 맞은 거지 뭐.”

포스트의 건강한 육체가 이 지경이 되려면 대체 얼마나 맞아야 할까. 무구원은 말을 잇지 못했다. 대체 윤모난은 뭐 하는 인간이란 말인가. 그따위 너절한 인형을 구하기 위해 이렇게 몸을 혹사시키며 맞았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그것도 자신의 일도 아닌 남의 일에 말이다.

윤모난은 지친 몸 그대로 침대 위에 엎어졌다. 곧 무구원이 방을 나가 구급약 상자를 가지고 다시 돌아왔다. 그러더니 시키지도 않았는데 옆에 앉아 묵묵히 상처에 약을 바르기 시작한다.

윤모난은 고집 있는 그의 외골수적인 성격을 알기에 만류할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그냥 가만히 누워 눈만 깜빡거리고 있었다.

“와― 아파라.”

“가이드면서 회복 능력이 너무 더딘 거 아닙니까?”

“능력도 억제하라고 해서 맨몸으로 맞았지. 생각을 해봐, 십자. 내가 그렇게 연약해 보여?”

“…….”

“됐으니까 대충 발라요. 뭐야, 곧 기도 시간 아니야? 20시 20분 거의 다 됐네.”

윤모난의 말은 사실이었다. 무구원은 약간 당황한 얼굴로 손목시계를 확인하다가 이내 계속 약을 발랐다.

“조금 늦게 시작하면 됩니다.”

“아이고, 어머니 신이 노해서 벼락 내리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네. 그만하고 가시죠. 귀찮고… 그만 쉬고 싶은데.”

하지만 무구원은 꿋꿋이 약을 바르며 치료를 고집했다. 윤모난도 졌다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더니 등을 내주고선 침대에 얼굴을 붙인 채로 잠자코 있었다. 그렇게 잠깐 침묵이 이어지던 가운데 피떡이 된 상처에 드레싱을 하던 무구원이 못 참고 물었다.

“왜 이렇게까지 하셨습니까?”

“말했잖아요. 안범 씨가 우리 팀에 꼭 필요하다고. 안범을 붙잡으려면 치치를 살려야 하고, 그럼 한백호 그 사디스트한테 빌 수밖에 없지.”

“…안범을 때리거나 협박해서 잡을 수도 있었을 텐데요.”

“안범 때릴 데가 어디 있다고? 사람을 막 패면 돼?”

…이미 경해국과 자신에게는 주먹을 날린 사람치곤 너무 뻔뻔한 소리였다.

심지어 기차 안에서 윤모난에게 맞아서 생긴 얼굴의 멍은 이틀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았었다. 까놓고 말해 윤모난도 제 능력을 제어하고 주먹을 꽂았으니, 적게 때렸을 뿐 본인도 한백호와 다를 건 없었다. 심지어 확 따먹겠다는 저질 협박도 하지 않았는가.

무구원은 갑자기 그 불쾌한 말이 생각나서 확 얼굴을 찡그렸다.

“아― 경해국이랑 당신은 예외지. 당신들도 팀장 팀원 가리지 않고 많이 팼잖아? 힘의 논리에 찌든 당신들이 말로 해서 도통 들어먹어야 말이지. 개인별 맞춤형 과외를 해줄 수밖에.”

“…….”

“왜 그런 표정이야? 맞은 거 때문은 아닐 거고. 아….”

윤모난은 무구원의 생각을 대번에 읽고 실실 웃음을 흘렸다. 딱딱하게 굳은 그를 보고 또 장난기가 도진 것이다.

“왜? 내가, 십자 너 따먹겠다는 말 아직도 마음속에 담아두고 있어?”

무구원의 손이 멈칫했다. 정곡을 찔린 것도 찔린 거지만, 윤모난의 목소리에 웃음기가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눈앞의 이 미친 인간은 돌연 장난기를 가득 담고 온갖 경악스러운 짓거리를 자행해왔다. 갑자기 입을 맞추거나 볼살을 늘인다거나 하는 부적절한 스킨십 같은.

무구원은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하고 바짝 긴장했다. 아니나 다를까, 윤모난이 귀에 한 손을 괴고 그를 향해 몸을 돌려 누웠다.

“미안, 내 취향이 그래. 남자한테만 선다고.”

아…. 무구원은 일순 뒷덜미에서 확 불길이 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건 분노였다.

무구원도 나름 전장에서 수없이 피 묻히며 살아온 전사였다. 이런 농담에 수줍게 얼굴을 붉히는 맹탕일 리 없었다. 그렇다고 거기에 장단을 맞춰주고 싶지도 않다. 특히 그것이 자신을 향한 것이라면 더욱.

“아무나 따먹겠다 할 만큼 굶주렸으면, 한 팀장한테 맞는 거 대신 다른 식으로 부탁해보시지 그랬습니까?”

“뭐? 푸흡―”

최대한 악의를 가득 담아 비아냥거린 말에, 윤모난은 화를 내기는커녕 갑자기 웃기 시작했다. 그는 허리를 꺾으며 푸하하하 웃더니 침대를 주먹으로 퍽퍽 때리기까지 했다. 광기마저 느껴지는 그 모습에 무구원의 기세가 미세하게 꺾여 들었다.

휙―

윤모난은 그 긴 다리를 휘둘렀고, 무구원은 반사적으로 확 물러서면서 그것을 피했다. 하지만 곧이어 그는 침대에서 떨어져 오히려 벽에 몰리고 말았다. 반라의 윤모난은 침대에서 슥 일어서더니 벽 한구석에 몰린 무구원에게 느릿느릿 다가왔다.

간이 조명의 은은한 조명 아래에서 윤모난의 실루엣이 부드럽게 드러났다. 몸 이곳저곳에 할퀸 듯한 전투의 흔적들이 가득했다. 크고 작은 골짜기를 이루고 있는 근육들 위로 내려앉은 흉터들은 세월에 풍화된 것처럼 흐릿했다. 자연스럽게 상반신의 중심에 자리 잡은 문신에 눈길이 닿았다.

크고 작은 흉터를 둥지로 삼은 독사는 손을 쫙 펼친 정도의 크기였다. 정중앙에 똬리를 틀고 있는 독사는 문신임에도 꽤나 흉포해 보였다. 무구원은 어느새 자신에게 바짝 다가온 윤모난을 저지하기 위해 손을 뻗어 뱀을 가로막았다.

“뭐 하시는 겁니까.”

“내 취향이 한백호 같은 양아치는 아니거든. 보통은 범생이 같은 놈한테 끌려서….”

“…….”

“근묵자흑이란 말 들어봤어? 십자, 너까지 콱 물들이기 전에 나 도발하지 마.”

순간 윤모난의 몸을 가로막고 있는 무구원의 손이 손톱을 세우고 살결을 약간 파고들었다. 그리고 윤모난은 느꼈다. 무구원의 파동이 그 손톱처럼 미세하게 뾰족해졌다는 것을.

20시 23분.

무구원의 기도 시간이 3분 정도 넘어가는 때였다.

“…부적절한 농담 좀 그만하시죠.”

무구원은 여전히 윤모난의 몸 중심에 자신의 손을 지지한 채로 그렇게 말했다. 무감한 표정에 딱딱하고 건조한 말투였다. 겉으로 보이고 들리기에는 그랬다. 하지만 윤모난은 그에게서 느껴지는 작은 변화를 놓치지 않고 관찰했다. 무구원은 지금 긴장하고 있었다.

겉과 속이 다른 새끼.

그건 승부욕이 강하고 천성이 반골인 윤모난에게 제법 구미가 당기는 매력이었다. 윤모난은 문득 궁금해졌다. 눈앞의 광신도를 타락시키는 것은 무슨 맛일까.

맛.

윤모난은 자기도 모르게 혀끝으로 미세하게 아랫입술을 슥 훑었다. 어딘가 쓰면서도 강렬한 맛이 환각처럼 혀끝에 맴돌았다.

무구원은 키만 크고 전체적으로 삭막해 보이는 놈이었다. 수많은 살생과 폭력으로 다져진 근육에 비해 얼굴은 어딘가 순진한 느낌도 있었다. 옆으로 날카롭게 찢어진 눈만큼은 매서웠는데, 그에 비해 입술은 그린 듯한 곡선이라 아름다웠다.

그 미묘한 언밸런스가… 꽤나 청순했다. 윤모난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취향은 이런 점에서 정말 한결같다고. 무정원의 부드러워 보이는 껍질 안에 숨은 서늘함에 끌렸듯, 정반대이지만 무구원에게도 그런 의외의 매력이 있었다.

‘…이러다 사고 치겠네.’

그때 갑자기 머릿속의 경찰관이 경광등을 켰다. 윤모난 당신은 팀장입니다. 팀 내 성 추문은 징계감. 마이너스 오천 점…. 심지어 무구원은 잘못 건드렸다간 정조를 지킨다며 절벽에서 뛰어내릴 놈이 아닌가. 심지어 자신은 얼마 전 그를 핑계로 무정원의 제안까지 거절했다.

결국 윤모난이 먼저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러니까 십자, 기어오르지 말라고. 굶주렸다? 하늘 같은 팀장한테 말버릇하고는.”

“…설마 경해국이나 안범도 이런 식으로 길들이고 계십니까?”

무구원은 대뜸 이상한 걸 물었다. 윤모난은 못 들을 걸 들었다는 듯 왁 소리를 질렀다.

“야! 내가 경해국 앞에서 방뎅이 흔들어댄들 그 미친놈이 눈 한쪽이나 마저 태우지 가만히 있겠어?”

딱히. 분홍 머리 윤모난이 방뎅이를 흔들어댄다면, 경해국이라도 볼 것 같지 않나?

무구원은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입을 다물었다. 윤모난은 혀를 끌끌 차곤 침대 옆 탁상에서 술병을 가져와 뚜껑을 열었다. 술을 마시기 전부터 어쩐지 그의 몸은 조금 붉어져 있었다.

“안범은 길들이려고 내가 매까지 맞았고. 경해국은 안범보다 단순해서 어려울 것도 없어. 문제는 까다로운 당신이지.”

“그렇다면 팀장님의 저열한 농담 시리즈도 개인 맞춤형이군요.”

“푸흑―!”

목구멍으로 술을 넘기던 윤모난이 허공에 분수처럼 액체를 도로 뿜었다.

“이거 웃기는 놈이네.”

“팀장님이 유독 웃음이 헤프신 것 같습니다.”

그럴 리가. 지난 3년간 윤모난에게 웃음은 집 나간 난봉꾼 아버지 같은 것이었다. 정말 가끔 오는데, 올 때마다 집안을 들쑤시고 가서 제어가 안 된다. 그게 무구원 앞에서 유독 잘 터지네.

윤모난은 그제야 자신이 무구원 맞춤형으로 유독 짓궂은 장난기가 튀어나온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마 기차 안에서의 따먹는다는 협박도 그런 유의 짓궂음이었던 것 같다. 이런 악취미도 광기의 징후라는 것을, 윤모난도 실은 이미 알고 있었다.

“이제 기도나 하러 가세요. 오늘은 가서 꼴 보기 싫은 윤 팀장 얼른 뒈지게 해주세요, 하고 빌면 되겠네.”

“네.”

“정말 그렇게 빌 거야?”

“…제가 애입니까? 이만 가겠다구요.”

무구원은 흩어져 있는 붕대와 연고를 다시 깔끔하게 상자 안에 담아 정리하더니, 묵례를 하고선 등을 돌렸다. 예의범절 하나만은 기가 막힌 놈이다. 윤모난은 휘적휘적 방을 나서는 무구원을 보며 속으로 뇌까렸다.

무구원, 방금 너 진짜로 위험했어. 나 3년 만에 섰다고.

혼자 남은 윤모난은 눈가를 세게 비비면서 조소했다. 그냥 가라앉게 둘까 아니면 자위를 할까 생각하다가 이내 그만두기로 했다. 침대 위에 누워 차분하게 반성의 시간을 가져보기로 한다.

꼴린다고 적진 한가운데 맨몸으로 돌진할 수는 없지.

윤모난은 짐승의 교미 욕구와 다를 바 없는 성욕으로 인생을 조지는 건 싫었다. 단지 무구원이 팀원이어서가 아니라, 그를 둘러싼 모든 것이 복잡해질 미래가 눈에 선했다. 무구원을 따먹었다고 치자. 그놈이 자신의 처음을 가져갔다며 눈물을 흘리고 천경교의 교리에 따라 결혼이라도 요구한다면?

그 꼴을 상상한 윤모난은 또 한 번 웃었다. 형들이 살아 있어 이런 자신을 봤다면 진작 형들 말을 들었어야 한다며 잔소리를 잔뜩 퍼부었을 거다. ‘못난아, 북해랑은 절대 엮이지 말라고 했지?’

하지만 말은 그렇게 해도, 윤모난이 바라는 것이 있으면 빠르게 눈치채고 바로 충족시켜주려 했던 쪽은 오히려 그의 형들이었다. 이를테면 무제한적인 사탕 공급이라고나 할까. 무정원의 관계도 그런 식으로 성사된 면이 있었다.

형들은 훈련 학교에서 만난 그를 남경에 초대했고 18살의 윤모난에게로 데려왔다. 윤모난은 여름이면 집 뒤에 있는 호수에서 수영을 한 뒤, 맨몸에 셔츠 하나만 걸치고 책을 읽곤 했는데, 이를 모를 리 없는 쌍둥이 형들이 굳이 그곳까지 무정원을 끌고 온 것이다.

자신이 무정원에게 남색 취미를 발현시킨 건지는 모르지만 얼음을 녹인 건 확실했다. 무정원은 종교를 미덕으로 삼는 사람치고는 꽤나 쉽게 타락했다. 그런 면에서 무구원과는 다르다고 할 수 있었다.

‘약 먹자. 약 먹고 광명 찾자.’

급하게 입안에 약을 털어 넣으니 금세 기분이 가라앉았다. 바지 안도 어느새 잠잠해졌다. 그 애매하고 몽롱한 기분 그대로, 윤모난은 욱신거리는 등허리를 드러낸 채 엎어져 잠들었다.

다음 날.

2부 7팀의 주에 세 번 있는 아침 식사 시간. 이 행사에 꽤 적응한 네 사람은 함께 식당에 갔다. 윤모난은 항상 고르던 두유 대신에 가벼운 샐러드를 먹기로 결정했다. 아침을 많이 먹지 않는 세 사람, 그리고 모닝 푸드 파이터 안범은 각자 손에 다른 걸 들고 자리로 돌아왔다.

조용히 식사하려나 싶더니 그새 안범과 경해국 사이에 시비가 붙었다.

“어, 선배님 거기 제 자리예요.”

“뭐? 시팔 무슨 자리가 있어? 그냥 앉는 거지.”

“워, 원래 제가 항상 그 방향에 앉잖아요.”

“찌찌 애비, 너 이 새끼 정말 자꾸 그럴래? 어제 네놈 때문에 훈련도 하루 까먹었는데 이제 네 비위까지 맞춰줘야 하냐!”

“경해국 씨, 자리 비켜줘요. 나이 3살이나 더 먹고 양보해주면 되지, 아침부터 왜 난리야?”

보다 못한 윤모난이 중재하며 끼어들자, 경해국이 갑자기 퍽, 하고 식탁을 내려쳤다. 그러자 와장창, 하고 식탁 다리가 부러져 내려앉는다. 같은 줄에서 밥을 먹던 다른 팀 대원들만 난데없이 봉변을 당했다.

결국 경해국의 성질머리가 터진 것이다.

“썅! 지금 반숙은커녕 완숙도 못 만들어서 하루하루가 지옥인데 안범 눈치까지 봐야 합니까? 윤 팀장, 당신 안범 편애하는 거 내가 모를 줄 알아!”

“완숙도 못 만들었으면 찌그러져서 반성이나 할 것이지 어딜 감히 아침부터 팀장한테 대듭니까? 그리고 편애?”

“그래! 나 동산 경씨 경해국, 이런 부조리는 못 참습니다. 훈련도 좆같고. 찌찌 애비도 좆같고. 팀장 당신도 좆같다고.”

“부 조 리?”

윤모난은 망설일 것 없이 주먹을 장전했다. 팀장으로 발령 나고 처음으로 제안한 아침 식사 시간을 2주 만에 엉망으로 만든 경해국에게 진정한 부조리를 맛보여줄 참이었다.

경해국은 내려앉은 식탁을 밟고 올라서서 바로 가드를 올렸다. 들어올 테면 들어오라는 듯 매섭게 윤모난을 바라보던 그가 갑자기 쑥 위로 올라가더니…

“시팔, 깜짝이야!”

우렁차게 소리를 지르며 휘청였다. 옆에 서 있던 무구원이 시간을 돌려 식탁을 원상복구시킨 것이다. 그러고는 경해국에게 다가가 그를 도로 바닥에 내려오게 하더니 한마디 했다.

“경해국, 넌 팀장님 못 이긴다.”

“씨이… 내가 뒈지는 한이 있더라도 안범의 방자한 행태는 오늘로 끝내겠어.”

“아니… 아니…. 그게 아니라…!”

안범은 밥이 산더미처럼 쌓인 식판을 들고 안절부절못하다가 이내 말했다.

“그게 아니라, 팀장님이 저보고 벽화를 등지고 앉으라고….”

“뭐?”

“저기 벽에 걸려 있는 벽화요. 팀장님이 항상 등을 돌리고 앉으라고 하셨어요. 죄송합니다.”

그제야 경해국과 무구원은 시선을 돌려 안범이 가리킨 벽화를 봤다. 다시 돌아선 둘의 표정은 미묘했다. 경해국은 팔짱을 끼고 비스듬하게 선 윤모난을 황당하다는 눈으로 꼬나봤다.

“뭡니까?”

“뭐긴. 앉읍시다. 안범한테 자리 내주고 넌 내 옆에 와서 닥치고 아침이나 드세요.”

“썅!”

결국 경해국 대신 무구원이 윤모난의 옆으로 왔다. 모두 자리에 앉긴 했지만, 아침부터 난장을 피웠으니 주변의 시선이 집중되어 있었다. 안범은 하얗게 질려 부들부들 떨고, 경해국은 여전히 씩씩대는 중이었다.

결국 책임감을 느낀 윤모난이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 이곳을 보고 있는 전투조 대원들을 향해 햇살 같은 미소를 보여줬다.

“전우 여러분. 아침부터 소란을 피워 죄송합니다. 전투조 통틀어 꼴등을 차지하고 있는 마이너스 오천 점 2부 7팀을 이끌어가려다 보니 이래저래 부침이 많습니다. 그간 저희 팀원들의 행패에 얼마나 큰 불편을 겪으셨습니까. 저 윤모난, 팀장으로서 사과드립니다. 경해국과 무구원의 각종 방화 및 폭력 사태를 진압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 하겠습니다. 모두 아침 맛있게 드십시오.”

“무구원, 경해국 임자 만났네. 윤 팀장 아침부터 고생이 많다.”

“저 새끼들 1년 전에 생활관 불태운 팀 맞지?”

“경해국은 상관에게 복종해라! 서곡에서 팀 내 위계는 절대적이다!”

윤모난은 온 대원들의 응원을 받으며 주먹을 쥐었다. 그러더니 입으로 슈우웅 소리를 내며 팔에 리듬까지 실었다.

“꿍.”

또 한 번 대차게 얻어맞을 거라 생각한 경해국은 눈을 질끈 감았는데, 예상과 달리 자신의 이마를 지그시 눌러오는 가벼운 주먹에 놀라 고개를 쳐들었다. 웬일인지 윤모난은 경해국에게 가벼운 꿀밤만 먹이고 자리에 다시 앉았다. 심지어 깜찍한 효과음까지 함께. 그러더니 포크로 샐러드를 뒤적거릴 뿐이었다.

“저 안범 씨 편애 안 합니다. 경해국 당신, 애정결핍이야?”

“…….”

“가만가만, 이럴 때 또 부모님 돌아가신 스토리 나오던데.”

“경해국은 양친 모두 살아계십니다.”

무구원은 질린 표정으로 대신 대답했다. 이미 프로필로 가족 사항을 파악한 윤모난도 그걸 몰라서 한 말은 아니었다.

“그럼 자존심이구만. 마이너스 오천 점. 신경 안 쓴다고 하더니 어제 내가 한백호한테 치욕당하는 거 보니까 뭐 느끼는 게 있었어?”

“…씹, 지금 이거랑 그거랑 무슨 상관이….”

“방금 봤지? 사람들 다 우리 쳐다보는 거. 자존심 상한 거잖아. 우리가 꼴등이라는 것도, 폐급이라 불리는 것도. 분노 조절 안 되는 꼴통이지만 자존심 하나만은 일등인 당신이 안범한테 화풀이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지.”

경해국이 대놓고 안범을 싫어하는 것은 비단 치치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나약해 보이는 안범이 팀에 들어와 도움이 안 될까 봐 그게 화딱지가 났겠지. 어제의 탈주 사태에도 불구하고 여태까지 불 안 지르고 참은 것도 장족의 발전이라 할 수 있었다.

만약 윤모난이 수치를 감수하고 한백호에게 당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면, 경해국은 안범을 그냥 두고 넘어가지 않았을 것이다. 윤모난은 자신이 먼저 자존심을 버리고 얻어맞음으로써 그가 감히 자존심을 세우지 못하게 만들고자 했고, 작전은 제대로 먹혀들었다.

“경해국.”

“…….”

“내가 당신 복귀시켜줄 거야. 날 믿고 반숙부터 만들어.”

“…시발… 윤 팀장 당신 진짜….”

“어우, 듣기 싫어. 알았어, 당신도 편애해줄게.”

“…에?”

“와― 경해국 화이팅!”

윤모난은 경해국이 또 뭐라 하기 전에 대뜸 유치한 구호를 외쳤다. 텅 빈 눈으로 허접하게 쥔 주먹을 짤짤 흔드는 팀장을 본 세 팀원들은 벙찌고 말았다.

“아자 아자, 할 수 있다!”

“…그만하세요. 미치셨습니까?”

“경해국 당신을 이 윤 팀장이 응원합니다!”

“썅!”

그건 요전보다 조금 누그러진 썅이었다. 윤모난은 부산을 떨 때는 언제고, 돌연 또 정상인으로 돌아와 퍽 사무적으로 말했다.

“달걀 프로젝트 이틀 남았네요. 오늘도 힘냅시다.”

샐러드를 종이처럼 씹던 윤모난이 잊지 않고 일을 갈무리했다.

“그리고 안범 씨, 마음대로 탈주한 건 제대로 사과해요. 어쨌건 팀 전체에 폐를 끼친 건 사실이니까. 훈련 일정 하루 까먹었잖아.”

“네에….”

안범은 풀이 죽은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반으로 접어 깍듯이 사과했다.

“경 선배님, 무 선배님. 심려를 끼쳐 정말 죄송합니다. 다시는 이런 일 없도록 하겠습니다.”

그 사과 이후로 안범의 탈주 사건과 치치 사수 작전을 따져 묻는 일은 없었다. 2부 7팀에서 칼부림 및 폭력 없이 갈등 상황을 마무리한 첫 사건이었다.

그러한 처음이 미친 파장은 미세하지만 대단했다. 윤모난이 요구한 미션 종료 시간을 한 시간 앞두고, 2부 7팀은 팀 훈련실에 모였다.

톡― 윤모난은 팀원들이 건넨 달걀을 가볍게 안범의 이마에 두드려 깼다. 반으로 쪼개자 진한 노른자가 점성을 유지하면서 흔들린다. 완벽한 반숙. 윤모난은 팀원들이 일주일 동안 주물럭거린 달걀을 깨 입에 넣었다.

“음, 통과입니다.”

“우오와와―!”

안범은 참지 못하고 환호성을 질렀다. 무구원과 경해국은 별다른 반응 없이 팀 훈련장을 뽈뽈 뛰어다니는 다람쥐를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안 좋아?”

“…이게 뭐라고.”

경해국은 콧잔등이 찌그러질 때까지 문질러대며 투덜댔지만 나름 만족한 얼굴이었다. 피식 웃음을 지은 윤모난은 꼼꼼하게 짠 정식 훈련 일정표를 팀원들에게 나눠주었다. 개인별 맞춤 트레이닝과 시간표까지 짜인 6개월짜리 계획표였다.

“이제부터는 저도 팀 훈련에 참여하죠. 우리 팀은 앞으로 6개월간 기량을 올려 현장에 갈 겁니다. 그렇게 1년 뒤에는 마이너스 오천 점을 만회할 거구요.”

“…3년 동안 깎인 점수를 어떻게 1년 만에 만회하시겠다는 겁니까?”

“그럼 여기서 3년 더 대기하며 썩을까? 그건 팀장인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여러분은 제 말만 잘 들으세요.”

윤모난이 짠 계획표에는 사격, 총검술, 무술 같은 훈련이 대부분이었다. 이능력 수련은 간간이 있었는데, 이건 이능력 증진에 몰두하는 다른 팀들과는 확연히 다른 방향이었다. 윤모난은 그 부분에 관해서도 설명을 덧붙였다.

“이능력 수련은 기본적으로 장기전입니다. 실력을 올리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리니까. 일단 점수가 급한 우리 팀은 나를 중심으로 사격 위주 기본 전투 모형으로 가겠습니다. 가이드가 팀에 들어 있으니 써먹어야지.”

“현재 팀장님은 가이딩으로 트랜스 제압 사정거리가 얼마나 되십니까?”

“한창때는 3km. 하지만 지금은 접촉 없이는 불가능한 상태고.”

무구원은 눈썹을 찡그렸다. 원거리에서 3km까지 트랜스에게 가이딩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은 놀라웠다. 하지만 지금은 불가능해졌다니. 설마 기차 안에서 말했던 정신병 때문인가.

“솔직히 말하자면 난 지금 바닥을 친 상태거든. 하지만 원래대로 돌아갈 거고, 6개월 동안 죽을 만큼 노력할 겁니다. 그러니 모두 날 믿고 훈련에 따라주세요.”

“3년간 뭘 어쨌길래 능력이 떨어진 겁니까?”

경해국은 이해가 안 간다는 듯이 물었다. 그건 단지 경해국이 진심으로 몰라서 던진 무신경한 질문일 거다. 서곡센터에서 꽤 굴러먹은 사람들은 3년 전 윤모난이 겪은 참극을 대충은 알고 있으니까.

“아, 이건 정신적인 문제입니다.”

“뭐라구요?”

“3년 전에 격전지인 무간에서 사고가 있었어요. 우리 팀은 나를 포함해서 총 여섯 명이 있었는데, 나 혼자만 살아남고 다 전사했습니다.”

“정예 팀이 한 번에 몰살당했다구요?”

“적은 S급 정신계 트랜스. 전장에서 팀이 두 그룹으로 갈린 와중에 정신계 트랜스가 능력으로 먼저 팀원 세 명을 교란시켰습니다.”

“그럼….”

“팀장님이 팀원 두 명을 먼저 죽인 상황이었습니다. 막으려 했지만, 환영을 만들 수 있던 팀장님이 우리를 트랜스라고 착각해서 환영의 미로 속에 넣었죠. 미로에 들어간 건 저를 포함해서 세 명….”

“팀장님, 꼭 설명하시지 않아도….”

안범은 윤모난을 막으려 했다. 정확히 언급하진 않았지만 이건 윤모난과 그의 쌍둥이 형들이 당한 비극이었다. 하지만 윤모난은 건조하게 말을 이어갔다.

“미로에 갇혀 있을 때 정신계 트랜스가 사냥을 시작했습니다. 팀원 하나가 그렇게 또 죽었구요. 마지막에는 결국 셋만 남은 거죠. 미로 속에 둘, 그리고 밖에 하나. 절망에 빠진 나를 두고 마지막 팀원 한 명이 홀로 빠져나갔습니다. 그리고 곧 둘도 죽었습니다. 나 빼고 모두가.”

훈련장 안에는 적막이 내려앉았다.

“내가 기억하는 건 여기까지예요. 마지막 순간의 기억이 부분적으로 소실됐거든.”

윤모난은 주머니에서 약통을 꺼냈다. 나머지 세 명은 그가 알약을 물도 없이 삼키는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윤모난의 표정은 약을 먹기 전과 먹은 후가 별 차이가 없었다. 안범은 끔찍한 이야기에 고개를 숙이고 있었고, 무구원과 경해국도 얼어붙은 건 마찬가지였다.

“그러고 나서 트라우마로 머리가 망가졌습니다. 아예 능력을 쓸 수 없을 정도로. 정신보호센터에서 3년 요양 및 치료를 받았고, 지금은 반 정도 기량밖에 못 찾았어요. 이 약이 능력을 상당히 제어시키거든.”

“능력을 되찾을 방법은 있습니까?”

무구원이 무거운 목소리로 물었다.

“아, 글쎄? 근본적으로는 내 정신병을 고치는 게 방법이겠죠? 대증요법도 있고. 호르몬을 적절히 이용하면 단기적으로 능력이 증폭되긴 한다더군요.”

“우리 능력을 제어할 때는 꽤 잘됐잖습니까?”

“경해국 씨, 파동역학 수업 때 졸았나 봐요? 제어와 제압은 달라요. 에스퍼 능력을 제어하는 건 거센 물살 위에서 돛단배를 타는 정도예요. 흐름만 타면 쉽고 짧은 순간에도 가능하지. …하지만 제압하는 건 다릅니다. 그건 마치 끓는 물을 맨몸으로 식히는 것과 같거든. 포스트의 폭주를 막거나 트랜스를 상대하는 건 그런 맥락이에요. 더 큰 힘이 필요하죠.”

결국 윤모난이 짠 전투 모형은 가이드의 능력에 따라 성패가 갈리는 문제였다. 성공만 한다면 팀의 기량이 크게 향상될 테고, 그의 말대로 뒤떨어진 팀 스코어를 올리는 것도 어렵지 않을 터였다.

하지만 다시 말하면 장장 6개월이란 시간 동안 모든 팀원들이 전적으로 팀장 윤모난을 믿어야 가능한 일이었다. 당장에 성과가 보이지 않을, 심지어는 실패할 수도 있는 미래에 걸어야 하는 일종의 도박이었다. 이 도박판을 벌이기라도 하려면 근신을 당해 언제 잘릴지 모르는 경해국과 지독한 FM 인간 무구원을 설득해야 했다.

무구원은 눈앞의 사람이 계산적이고 치밀하고 비열한 한편 그만큼 절박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윤모난은 굳이 본인 개인사를 들먹이거나 일부러 남에게 망신을 당하는 식으로 2부 7팀의 정신을 단결시키려 하고 있었다.

“서곡센터에 그 향정신성 약 먹는 놈이 한둘이 아닌데. 꼭 사달을 내더라고. 씹, 못합니다. 정신병자한테 내 시간과 목숨을 맡기라고?”

경해국의 이런 반응은 지극히 당연했다.

“내가 왜 폭주할 걸 감수하면서도 그 약 안 먹는 줄 아십니까? 그 약은 고섬에 있는 한가 놈들 제약 회사에서 찍어내는 약이라구요. 조오오온나 수상하지. 일단 한백호부터 봐도 제정신이 아니잖아. 그 새끼 약물 중독자라는 소문이 자자합니다. 특히 그 향정신성 약은 중독성이 강하고 부작용도 많아가지고, 환청, 환각, 자살 충동, 자해, 전반적으로 사람이 폭력적이 된다구요.”

“음….”

경해국은 ‘윤 팀장 당신 패악질을 보니 이미 부작용을 겪는 것 같아’라고 눈빛으로 말하고 있었다. 역시나 예상한 반응이었다. 그리고 이건 팀장으로서 윤모난이 팀원의 신뢰를 받으려면 이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관문이기도 했다. 윤모난은 결심했다.

“내가 2주일에 한 번씩 제 정신 감정서를 팀 전체에 공개하겠다면? 물론 약 복용량도 점차 줄여갈 겁니다.”

“아니, 그걸로는 모자라지. 센터에 있는 정신계 에스퍼를 통해 뇌 의식 영상도 공유하십쇼.”

“경해국.”

의외로 무구원이 경해국을 말리고 나섰다.

“그건 개인 사생활이다.”

“무씨, 못 들었어? 우리 6개월 동안 뺑뺑이 칠 수도 있다고. 우리 팀장님이 맛 가셔서 사고 나면 너나 나나 어떻게 될까?”

“뇌 의식 영상은 무의식을 영상화하는 거라서 매우 사적인 자료이고 공개 의무가 없어. 기관에서도 개인에게 강제로 요구하지 않는다.”

“잠깐.”

윤모난은 무구원을 막아섰다.

“공유하겠습니다. 대신 그건 한 달마다. 매월 내 머리통 속 영화 관람, 약속하면 되는 거죠?”

“팀장님.”

“무구원 씨, 당신도 요구할 거 있으면 말하세요. 지금이 기회니까.”

“이미 센터와 기관에서 직무 수행 가능 여부 검사는 하셨을 텐데요. 테스트에서 통과하셨으니 팀장직을 맡고 계신 거구요.”

“응. 하지만 경해국 말이 맞아. 나와 같이 사선에 갈 사람은 당신들이야. 팀장인 나는 내 상태를 분명히 공유할 의무가 있어.”

“그럼 대화 끝이네! 팀장 당신이 뇌 의식 영상만 공유한다면, 까짓거 훈련 일정에 따르겠습니다.”

경해국이 응하자 윤모난은 나머지 팀원을 돌아보았다. 안범은 일찍이 동의했고, 무구원 역시 꽤 뜸을 들이다가 마지못해 수락하고 말았다.

훈련 시간이 끝나고 돌아가는 길, 무구원은 앞서 걸어가는 분홍 머리를 보며 생각에 빠졌다. 저 머리 안에 든 것이 무엇이든 예상보다 더 복잡하고 어두울 것이다. 자신의 가장 내밀한 면을 공개한다는 건 누구든 쉽지 않다. 그런 점에서 뇌 의식 영상 공개는 윤모난의 과한 희생이었다.

단지 팀장으로서의 책임감만은 아니겠지.

수치와 두려움이 없는 행동. 제어되지 않는 브레이크. 삐걱거리는 부품. 윤모난은 고장 났다. 그건 이전부터 계속 느껴오던 것이었다. 그런데 그것을 통찰해내고서도 무구원은 자신이 이 훈련 일정을 수락한 이유를 찾지 못했다.

윤모난은 정말 마술 피리를 불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팀 전체를 불구덩이로 끌고 들어갈….

“2부 7팀 윤모난 씨 앞으로 택배 왔는데요.”

“오, 마침 잘됐네. 타이밍 딱 맞춰 부탁한 택배가 오다니.”

생활관에 도착할 즈음 경비실에서 택배를 나눠주고 있었다. 윤모난은 생일 선물을 기다린 사람처럼 한달음에 달려가서 커다란 택배 상자를 받았다. 그에게 온 상자는 딱 보기에도 굉장히 수상했다. 취급 주의 스티커가 거의 포장지처럼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안범은 상자 귀퉁이에서 ‘맹독성 동물 취급 주의’라고 쓰여 있는 걸 보고 바짝 굳어버렸다.

“티… 팀장님. 이건.”

“자, 자, 올라가자고요. 올라가서 보여줄게.”

윤모난은 유난히 들떠 있었다. 그 모습이 묘하게 수상해서 2부 7팀 팀원들은 또다시 위기감을 느끼며 주춤주춤 뒤를 따랐다.

합숙소에 도착해서 상자를 열었을 때, 아니나 다를까 모두 기겁하고 말았다.

“으악―! 시팔, 뭐야 이게!!”

“팀장님, 이, 이게 뭐예요?”

“응? 자, 모두 인사하세요. 남경에서 먼 길 올라온 내 귀염둥이들.”

윤모난은 대단한 것을 자랑하듯이 택배 안에 들어 있던 커다란 유리 사육장을 척 들어 올려 보였다. 그 안에는 검은색 뱀 세 마리가 서로 엉켜 있었다.

생물 도감에 나오는, 해독약이 없는 것으로 유명한 남경의 독사들. 죄다 눈깔을 희번덕거리는 것이 바짝 독이 오른 놈들이었다. 겁도 없는 윤모난은 사육장 뚜껑을 열더니 쑥 손을 집어넣어 뱀 한 마리를 꺼내 보여줬다.

“얼른 인사하라니까. 내가 키우던 뱀인데, 얘 이름도 모난이야. 나랑 이름이 같다고.”

“이봐요, 윤 팀장님…. 설마, 우리 합숙소에서 그 흉측한 걸 키울 생각은 아니시겠죠?”

생각만 해도 몸서리쳐지는 일에 경해국이 웬일로 예의를 차리고선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러나 윤모난은 그의 희망을 박살이라도 내듯 당연한 걸 왜 묻냐는 식으로 답했다.

“흉측하다뇨? 이렇게 귀여운데 당연히 키우는 거지. 따로 이용할 데도 있고. 나 한백호한테 복수할 거거든. 거기에는 우리 모난이만 출격하고 나머지는 우리끼리 훈련에 쓸 거야.”

“뭐, 뭐… 뭐, 뭐라고요?”

“시발, 당신 진짜 미쳤어!? 한백호랑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그 흉악한 걸 풀어놓겠다는 거야! 사람 죽일 셈이야! 우리 훈련에 쓴다는 건 또 뭐고? 난 뱀이라면 딱 질색이라고!”

때아닌 독사의 출현으로 난리굿이 벌어진 사이에, 무구원은 바닥에 떨어져 있던 것을 주워 들었다. 그건 윤모난이 택배를 열 때 흘긋 눈길만 준, 고급스럽고 화려하게 만개한 분홍색 모란꽃이었다. 모란꽃 줄기에는 금실로 연결된 작은 메모지가 달려 있었는데, 거기에는 짧은 안부가 적혀 있었다.

도련님, 부탁하신 남경의 가족들을 보냅니다. 이건 조카들이 삼촌을 그리워하며 손수 딴 모란입니다. 항상 남경을 잊지 마세요.

모란. 이름이 그런 뜻이었구나. 무구원은 아름답고 싱싱한 분홍색 모란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윤모난의 머리 색과 비슷한 빛깔을 뿜어내는 꽃은 아름답고 우아했다. 독사를 핸들링하며 재미로 팀원들을 겁주고 있는 저 사악한 인간과는 도통 어울리지 않는 꽃이다.

“에비―!”

“우아악! 치워, 시발! 물릴 뻔했습니다!”

“끼야아악! 팀장님! 모난이가 팀장님을 물었습니다!!”

“어? 그렇네.”

순간 정지 화면처럼 모두가 얼어붙었다. 윤모난은 자신의 팔뚝 안쪽을 콱 물고 있는 뱀을 멍하게 내려다봤다. 딱딱한 근육에 예리한 이빨을 박아 넣은 독사는 딱 보기에도 윤모난의 몸속에 독을 주입하고 있었다.

“티… 팀장님?”

“어? 아, 괜찮습니다. 저는 독에 내성이 있어요. 우리 가문 사람들은 이 독사의 독에 죽지 않습니다.”

“…그럼 저희는 죽나요?”

“응, 물리면 바로 죽지. 귀엽게 생겼지만 얘네 꽤 독하다구요.”

윤모난은 팔뚝에서 뱀을 떼어내 다시 사육장 안에 넣었다. 어째 물린 사람보다 문 뱀이 더 기진맥진해 보인다. 사육장의 잠금장치를 꼼꼼히 채운 윤모난은 제 아래턱을 매만지며 뭔가를 생각하는 듯했다.

“모난이를 언제 출격시키는 게 좋을까요? 다들 의견 좀 내보시죠.”

“…제발 그만두십시오. 해독약도 없는 독사 아닙니까.”

무구원은 일단 윤모난을 만류해보기로 했다. 하지만 한백호에게 당한 상처를 보건대, 그가 물러설 일은 없을 듯했다. 이틀이 지난 지금도 움직일 때마다 약간 얼굴을 찌푸릴 정도였으니. 애초에 반대 의견은 들을 생각도 없었다는 듯, 윤모난은 일전에 안범에게 한백호의 동선을 알아 오라고 한 것을 보고받기 시작했다.

“하… 한배… 백호 팀장…님은 오후… 4시에 팀 훈련이… 끝나고… 두… 두 시간 동안 개인 훈련을 한다고….”

“안범 씨, 살인 모의는 처음이에요?”

“네….”

“긴장 마. 우리 모난이가 빠르고 깔끔하게 끝내줄 거니까. 증거도 안 남을 거라고.”

“이… 이것도 티… 팀 훈련 중… 하… 하나입니까?”

“그럼. 우선은 한백호 개인 훈련 시간에 해치워야겠네. 내일 당장 시행합시다. 무구원, 경해국 당신 둘은 내일 망이나 보세요.”

윤모난은 대답도 듣지 않고 사육장을 들어 올리더니 방으로 신나게 총총 들어갔다. 얼이 빠진 무구원은 들고 있던 꽃을 그에게 건네주려던 것도 잊고 멍청하게 서 있었다.

“찌찌 애비, 살인 그거 뭐 별거 아니야. 나도 옛날에 팀장 한번 죽이려고 했었어. 물론 난 저렇게 치사하고 비열한 방법을 선택하진 않았지만.”

“…….”

“예전 팀장 놈 잘 때 몰래 들어가 베개로 얼굴을 덮어놓고 칼로 찌르려 했지. 그런데 무씨가 말리더라고.”

“혼수상태로 합의를 본 거다.”

“참. 옛날 팀장은 정말로 죽일 놈이었어, 그치? 개잡놈의 자식, 지옥 불에서 영원히 람바다나 춰라.”

경해국은 뱀 소동에 근육이 놀란 것 같다며 관절을 우두둑 꺾으면서 스트레칭을 하기 시작했다. 안범은 눈치를 보다가 옆에서 경해국을 슬쩍슬쩍 따라 했다.

“무씨, 그래도 내일 네가 한 번 더 말려봐라. 윤 팀장 눈깔이 뱀보다 더 돌았던데, 사고라도 칠라.”

“글쎄.”

“글쎄라니? 너 뭐 아는 거 있냐? 진짜 한백호랑 윤 팀장이랑 무슨 일 있었던 건데? 아직도 약간 움직이는 게 불편해 보이더구만.”

“…일방적으로 맞은 모양이야. 엊그제 봤을 때 등이 아작이 났더군.”

“하? 역시… 한백호 그 새끼, 사람 패고 느끼는 걸로 유명해. 완전 변태 자식이라구.”

안범은 윤모난이 저 때문에 맞았다는 소식에 스트레칭을 멈추고 풀이 죽은 얼굴을 했다. 결국 그러다가 경해국에게 손가락 끝으로 딱밤까지 맞았다.

“야, 찌찌 애비. 양심에 찔리냐? 그럼 이 팀에 영원히 충성을 바쳐라. 혈서를 쓰란 말이야.”

“혈서요?”

“그래. 너 아까 팀장 하는 거 봤지? 자기 뇌 의식 영상까지 공유하는 거 봐라. 서곡에서는 그 정도 헌신은 필수야.”

“…그런데 팀장님이 말씀해주신 3년 전 그 일 말입니다, 이상해요.”

“뭐가?”

“저도 병법을 잘 모르긴 하지만요. 보통 전투조는 한 팀당 많아봤자 일곱 명 정도잖아요. 소규모 교전 수칙 제1조가 절대 팀과 떨어지지 마라, 인데… 어쩌다가 3년 전에는 두 갈래로 나뉘어 그런 참변을 당하셨을까요?”

“그건 나도 이상하다고 생각했지. 더불어 가이드가 있는 팀이 사정거리를 벗어났다니. 무간에서는 전면전이 대부분이라 포위도 쉽지 않은데 말이지.”

‘무간’은 포스트와 트랜스가 전쟁을 벌이는 전쟁터로, 몇 세기 전 포스트와 트랜스의 대성전이 끝난 직후에 생긴 공간이다. 포스트들이 일방적으로 밀리고 있었던 전쟁은 돌연변이처럼 태어난 가이드들 덕에 점점 평행 상태로 돌아섰고, 이에 트랜스들은 혼란스러운 듯 주춤거리기 시작했다.

대성전은 트랜스들이 다른 차원을 시뮬레이션하여 그곳으로 이주하면서 비로소 끝을 맺었다. 괴물들이 자신들의 터전으로 잠시 물러나면서 생긴 포스트가 사는 차원과 트랜스의 차원 사이의 경계가 무간이었다. 이름처럼 무간지옥 같은 곳이다. 국가이능력기관의 전투조들은 이 경계를 지키는 임무를 지닌다.

웬만한 나라의 땅 크기에 버금가는 그곳은 지금도 트랜스와 포스트들 간의 난전이 벌어지는 격전지였고, 반도에서는 오로지 서곡센터에만 무간으로 가는 게이트가 있었다.

“에라이, 모르겠다. 내가 3년간 무간에서 굴렀어도 S급 트랜스는 본 적이 없는데, 들을 때 머리털이 쭈뼛 서긴 하더군.”

“…팀장님이 말씀하신 그런 트랜스는 흔치 않은 거예요?”

“그럼. 그런 게 막 튀어나오는 줄 아냐? 트랜스의 등급 분포는 포스트랑 비슷해. 다 생물학이라고. 확률적으로 S급은 몇십만 명 중 한 명 정도야. A급도 죽이기 힘든데… S급은…. 찌찌 애비, 넌 B급 나와도 도망가야 할걸.”

“저 겁쟁이 아닙니다!”

“뱀 보고 오줌 쌀 뻔한 놈이 할 소리냐?”

“모난이한테 물릴까 봐 넘어질 뻔한 분께서 우습군요.”

“이게, 콱!”

“전 이만 들어갑니다.”

안범이 방으로 휙 도망가버리자 경해국은 우두둑 손마디를 꺾다가 쯧, 혀를 찼다. 그러더니 옆에 있는 무구원에게 넌지시 말을 걸었다.

“야, 무씨, 우린 뱀 사건에 끼어들지 말자. 내일 빠지자고.”

“…….”

“내가 왜 오늘 정신 감정서 외에 뇌 의식 영상까지 요구했는지 너도 알겠지?”

“그래.”

“팀장이 회까닥 돌아서 뭔 짓을 저지르더라도 증거가 있어야 우리가 빠져나갈 구멍이 있지. 시팔…. 팀장은 나가리 되어도 우리가 잘리면 안 돼.”

어느새 말소리가 낮아졌다.

“무구원, 우리한테는 목표가 있어. 윤 팀장과 상관없이, 그 목표를 잊지 말라고.”

“…6개월이야. 일단 6개월은 두고 봐.”

“그래, 6개월. 시팔―! 1년 뒤면 이 지긋지긋한 짓거리도 다 끝낸다!”

경해국은 껍질만 남은 택배 상자를 뻥 걷어차면서 씻으러 욕실로 들어갔다. 또 얼음물에 몸을 담그려는 모양이었다. 마지막까지 거실에 남아 있던 무구원은 조용히 방으로 들어갔다.

20시 20분. 방으로 들어가자마자 매트를 깐 무구원은 매일 하듯이 경전을 조심스럽게 펼치고 손끝을 이마에 가져갔다.

“조에의 텃밭을 돌보시는 어머니 신이시여, 저에게 시련과 고통을 긍정할 힘을 주소서.”

기도문 구절이 끝날 때마다 바닥에 이마를 세 번 찧는다. 그런 다음 옆에 놓여 있던 예리한 바늘을 꺼내 손끝을 찔러 피를 냈다. 무구원은 손끝에 맺힌 피를 혀끝으로 살짝 핥은 뒤에 계속 기도문을 암송했다. 그런 식으로 열 손가락에 모두 피를 낸다.

기억이 나는 어린 시절부터 그런 식으로 수없이 찔러온 손톱 밑 살은 까맣게 죽어 있었다. 신앙심의 증거였다. 아마 북해인들의 손가락은 다 같은 모양일 터였다.

시간에 맞춰 기도를 끝낸 뒤, 향을 피워 올리자 방 안 가득 알싸하고 진한 향이 가득 찬다. 침대에 걸터앉아 시계를 확인하니, 21시 30분을 넘어가는 시각이었다. 이 시간에는 보통 명상을 하거나 단소를 불었다.

다만 지금 명상을 할 기분은 아니고, 단소를 불었다간 진짜 독사한테 물려 생을 마감할 테니 무구원은 읽다 만 책이나 마저 읽기로 했다.

이 시대에는 더 이상 문학이 없다. 시와 소설은 모두 과거의 유산이고 골동품이었다. 채널이 하나밖에 없는 공영방송에서 틀어주는 프로그램들은 번식을 위한 섹스 장려 공익 광고 영상이나 스포츠 뉴스뿐. 살아남기 힘든 시대이니 모두가 최소한만을 하며 살아갈 수밖에.

그러니 팔자 좋게 몇백 년 전에나 쓰인 소설 양장본을 읽는 건 얼마나 사치스러운 일인가. 무구원은 그 사치를 건조한 삶에서 누리는 작은 향락으로 삼았다. 얼마 전부터는 20세기쯤에 쓰인 독일 소설을 읽기 시작했다.

“하….”

정신을 집중해보지만 전혀 읽히지 않는다. 무구원은 책을 몇 장 넘기다가 그만 덮었다. 정돈되어야 할 머릿속에 자꾸만 잡념이 밀려든다. 그는 아까 자신도 모르게 가지고 들어온 모란꽃을 보았다. 어머니 신을 위해 피워놓은 향불 앞에 가지런히 놓인 꽃은 너무 크고 화려해서 이곳의 분위기와 전혀 맞지 않았다.

이제는 작은 향락마저도 만족할 수 없게 되었구나. 한숨을 내쉰 무구원은 턱을 괴며 생각에 빠졌다. 주로 떠올리는 것은 오늘 겪은 일들과 과거, 또 과거…. 잡념은 3년 전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땀을 흘리며 트랙을 달리는 윤모난. 그때는 지금보다 머리가 조금 짧았었다. 반곱슬머리. 하얀 뒷덜미에 부드럽고 미세한 솜털이 있다. 흰색 반소매 티셔츠가 땀에 젖어 살갗이 비친다.

무구원은 점점 더 깊은 생각의 틈새로 빠져들었다. 자신의 커다란 손으로 굽이치는 분홍 머리칼을 쓸어 넘기는 상상을 했다.

머리카락이 손을 간지럽히도록 내버려두다 말고 갑자기 머리채를 바짝 잡는다. 윤모난이 자신의 아래에서 미약한 통증을 느끼고는 눈을 치켜뜬다. 그 음영 진 눈의 속눈썹에는 작은 눈물이 맺혀 있다.

똑똑.

“…어이, 십자.”

“…….”

“십자, 부탁이 있습니다.”

방금 내가 무슨 생각을….

무구원은 문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남자가 경찰이라도 된 듯 두 귀를 틀어막았다. 그러나 그는 윤모난이 예의를 밥 말아 먹은 양아치라는 것을 간과했다. 안에서 무구원이 대답하지 않자 늘 그러하듯이 그가 뻔뻔하게 문을 뻥 걷어차고 들어온 것이다.

“왜 귀를 막고 있어? 나 등에 약 좀 발라줘요. 손이 안 닿습니다.”

“…….”

“십자?”

무구원은 더러운 욕정에 순식간에 사로잡혀버린 스스로로 인해 자괴감을 느끼면서 속으로 뇌까렸다. 어머니 신이시여, 제발 저 마귀를 물러가게 해주소서.

하지만 애석하게도 신 대신 마귀 윤모난이 먼저 다가왔다. 그는 사정도 모르면서 바짝 붙어오더니 이마에 손을 갖다 댔다.

“왜 이렇게 뜨거워? 열나는데.”

윤모난은 아까 전만 해도 멀쩡하던 무구원이 갑자기 열기를 뿜어대며 몸을 움츠리는 까닭을 곧 알아챘다. 훈련복 바지의 솔기가 유독 두드러져 있었던 것이다. 비전투 상황이니 허벅지에 총을 숨기진 않았을 거였다.

아니, 오히려 전투 상황이라 해야 맞을까. 불룩 튀어나온 게 무슨 기관총 정도는 숨긴 것 같은데.

윤모난은 철면피 양아치였으므로, 같은 사내놈이 좆이나 세운다고 해서 ‘어이쿠, 지금 꼴리셨군요. 그럼 행복한 시간 가지십쇼. 저는 이만 자리를 피해드리겠습니다’ 하는 인간은 아니었다. 뭐 센터에 들어오면 장기간 근무를 해야 하니 성욕을 해소하는 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방 안에서 뭔가 하다가 꼴린 것 자체야 생리적인 반응이라 할 수 있는데, 문제는 이 광신도가 뭐에 꼴렸느냐 하는 것이다. 윤모난은 얄궂게도 그게 궁금했다. 무구원은 바짝 굳은 채 시선을 먼 곳으로 돌리고 있었다. 상관이 왔으면 거기도 겸손해질 만한데 수그러들 기미가 안 보였다. 하여간 위아래도 없는 놈.

“내 말 안 들려요? 약 발라달라니까.”

윤모난은 모르는 척 무구원의 손에 연고를 넘기고 윗도리를 벗은 뒤 돌아앉았다. 그 와중에도 그는 예리한 시선으로 방 안을 한번 쭉 훑었다. 그러다 윤모난의 눈길 끝으로 무구원이 읽다가 바닥에 내팽개친 책이 걸려들었다.

『황야의 이리』…. 헤르만 헤세라니. 포르노 잡지가 아니라, 이런 거 보다가 꼴린 건가? 과연 꼴통다웠다. 윤모난은 작게 실소를 터트렸다.

“…안범이나 경해국한테 해달라고 하십시오. 저는….”

“안범 씨는 자는 것 같고, 경해국은 얼음물에 들어간 거 같던데. 약 바르는 데 얼마나 걸린다고 그걸 기다립니까? 저번에 보니 십자가 꼼꼼히 잘 바르던데, 좀 부탁해.”

“…….”

무구원은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이내 상처를 감싸고 있던 거즈를 살살 떼어냈다. 최대한 아프지 않게 하려는 듯 손끝이 조심스러웠다. 언제는 안 하겠다고 버티더니 곧이어 아물지 못해 진물을 내며 벌어진 상처에 약을 바르기 시작했다.

“…들어오라는 말도 안 했는데, 막 밀고 들어오실 거면 대체 노크는 왜 하십니까?”

“나는 뇌 의식 영상까지 공개하는 마당에 여기 사생활이 어디 있어. 열받으니 당신들 사생활을 마음껏 침해해야겠거든.”

“꼭 그렇게까지 하지 않았어도 됐을 텐데요. 팀장님 말대로 경해국은 단순해서 회유하기 어렵진 않았을 겁니다.”

“그건 경해국을 설득하기 위해서가 아니야. 당신이 목적이지.”

“네?”

“내가 말했잖아. 당신 까다롭다고. 당신을 회유하려면 강경책을 쓸 수밖에. 이른바 살을 내주고 뼈를 취하는 전략이랄까.”

“…제가 뼈입니까?”

“뼈지. 그것도 가장 단단한 뼈.”

윤모난은 자신의 다리를 뻗어 무구원에게 보여줬다. 그의 손이 허벅지를 벌려 손으로 쓱 훑었다.

“사람의 뼈 중에서 가장 단단한 곳이 여기 대퇴골입니다. 넙다리뼈라고도 부르죠. 인간이 다른 동물들과 다르게 직립보행을 하려면 이 대퇴골의 강도가 아주 중요해요. 달리고 걷는 데 필수적인 기능을 하는 게 이 대퇴골이거든.”

“…무슨 말을 하고 싶으신 겁니까?”

“당신은 이 팀에서 다리가 되어야 해. 내가 걸으라면 걷고 달리라면 달리는 가장 강도 높은 뼈.”

윤모난은 어느새 다시 돌아와 무구원을 마주 보고 있었다. 그의 눈에서는 냉함과 장난기가 뒤섞여 혼돈을 만들고 있었다.

그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던 무구원은 욕망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오히려 더 벌떡 세워버린 상태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뭐 어쩐단 말인가. 그때 윤모난이 눈을 내리깔며 무구원의 사타구니 사이 음영을 바라보다가 다시 시선을 맞췄다.

“십자, 너 지금 꼴렸지?”

“…….”

“뭐라도 해줄까?”

마귀다. 윤모난은 마귀 새끼가 틀림없다. 눈앞에서 나른하게 붉은 입술을 핥으며 입맛을 다시는 마귀. 무구원은 아연해졌다. 이미 윤모난에게 약을 발라줬을 때부터 몸의 중심이 뜨거워지다 못해 고통스러운 지경이었다.

무구원이 대답이 없자 윤모난은 흐음, 하며 웃음을 지었다. 그러고서는 모르는 척 아까 무구원이 태워놓은 향불 옆에 놓인 모란꽃을 손가락에 휙 걸곤 가져와 감상한다. 순간 무구원은 아차 싶었다.

“…이게 왜 여기 있어?”

“중요해 보여서 드리려 했습니다.”

“그럼 왜 네 방에 가지고 들어왔는데.”

“…….”

“무구원.”

“네.”

“입술 벌려 봐.”

차가운 명령조의 말투에 무구원은 오히려 반사적으로 이를 앙다물고 턱에 힘을 줬다. 그러나 쓸데없는 반항이었다. 윤모난은 천천히 다가와, 붉고 축축한 혀끝으로 크림을 핥아 먹듯 무구원의 아랫입술부터 인중까지 쓱 핥았다. 비릿하고 간지러운 감촉에 무구원은 자기도 모르게 숨을 작게 내뱉고 말았다.

그러자 윤모난이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이빨을 세워 입술 껍질을 할퀴었다. 벌린 잇새로 우악스레 들어온 혀는 잇몸을 슥 훑었다. 함락 직전 성을 지키고 있는 가망 없는 문지기처럼 무구원은 그의 침입만큼은 막으려 애썼다.

그러건 말건 윤모난은 굳게 닫힌 성문을 두드렸다. 어느새 손이 지원병처럼 무구원의 탄탄한 허벅지 안쪽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망측한 손이 완전히 안쪽에 가닿기 전에 무구원은 숨을 들이마시며 몰아치는 자극을 틀어막으려 했다.

하지만 윤모난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관능적으로 고개를 돌려대는 그는 자신이 하는 행위에 완전히 심취한 듯이 보였다. 그 광경이 불길을 가라앉히는 데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생각에, 무구원은 차라리 눈을 감기로 했다.

어느새 윤모난은 무구원의 허벅지에 두 다리를 걸치고 올라와 앉아 있었다. 이를 꽉 물고 저항하는 남자를 살살 달래며 부드러운 입맞춤을 이어갔다. 무구원은 혼이 빨려 나가는 듯한 기분을 느끼면서 윤모난의 허리를 손으로 붙잡은 뒤에야 제게서 그를 가까스로 떼어냈다. 그렇게 떼어낸 윤모난은, 입술은 물론 코끝까지 타액으로 번들거렸다.

“…정말 왜 이러십니까! 미쳤습니까?”

“응. 나 진짜로 미쳤잖아.”

“하… 그만하시죠. 제발.”

“너무 겁먹지 마, 그냥 가이딩받는다고 생각해.”

무구원은 순간 정말 자신이 겁을 먹은 표정을 짓고 있나 거울을 보고 싶었다. 하지만 마주하고 있는 건 진짜로 겁대가리를 상실한 윤모난뿐이다. 그 와중에 윤모난이 허벅지 깊숙한 곳으로 손을 밀어 넣으며 속삭였다.

“빨아줄까?”

더는 방법이 없었다. 무구원은 윤모난의 허리에 걸치고 있던 손을 세워 황야의 이리처럼 등허리의 상처를 파고들었다.

“아―!”

아작 난 상처에 거친 손길이 가해지자 윤모난이 움찔대며 바로 허벅지에서 내려갔다. 물러서는 그 얼굴에서 묘하게 아이 같은 고집스러운 표정이 드러났다. 무구원은 경전과 함께 보관해두는 금제 바늘 함 뚜껑을 열어 대바늘을 꺼냈다.

푹― 그러더니 망설임 없이 그걸 손끝에 찔러 넣기 시작한다. 그 광경을 목도한 윤모난은 흥분이 훅 가라앉았다.

“뭐 합니까?”

“팀장님도 찌르십시오. 그리고 기도하세요.”

무구원의 눈깔은 완전히 돌아 있었다. 손가락에서 피가 줄줄 흘러내릴 때까지 바늘을 찔러대던 무구원은 성인 남자 손가락 길이 정도 되는 무시무시한 대바늘을 들고 윤모난에게 다가왔다.

시발, 지금 퇴마하냐? 무슨 오컬트 공포 영화도 아니고. 윤모난은 질색하며 바로 뒤로 물러섰지만, 기어코 바짝 다가온 무구원에게 손을 빼앗기고 말았다. 곧이어 오차 없는 솜씨에 의해, 바늘이 엄지 손톱 아래로 푹 들어갔다.

“으악―! 뭐 해! 이 십자군 새끼야!”

“…어머니 신이시여. 우리 안의 부정한 욕망을 모두 정화시켜주소서.”

“난 천경교 신자 아니라고! 이런 개짓거리는 너나 해라!”

바늘에 찔린 곳이 유독 얼얼해지기 시작한다. 천경교 신자들이 마조히스트처럼 찔러대는 바늘 끝엔 ‘청파’라는 식물로 만든 마취제가 묻어 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윤모난은 그 청파액이 설마 성적인 잡념 같은 걸 없애는 고자 만들기 약인가 싶어 창백해졌다. 북해에서만 난다는 이놈의 청파 때문에 북해 놈들이 죄다 광신도로 자랐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 와중에 무구원은 성실하게 윤모난의 오른손의 다섯 손가락을 완전히 조지고 있었다.

“꺼져! 시발!”

이렇게 맥없이 고자가 될 수 없었던 윤모난은 붙들리지 않은 주먹을 무작위로 휘둘렀다. 하지만 무구원은 머리통을 쾅쾅 얻어맞으면서도 돌부처처럼 꿈쩍도 안 했다. 계속되는 주먹질에 뇌진탕이 와 죽기 직전까지 멈추지 않을 성싶다. 유독 독한 바늘을 꺼냈는지는 몰라도 손목이 있는 데까지 다 저릿저릿했다.

독사한테 물려도 무서운 줄 모르던 윤모난은 광신도의 이 맹목적 행위에 그만 머릿속이 아득해져, 결국 포기하고 열 손가락을 다 내주고 말았다. 두 사람의 손에서 흐른 피가 후드득 떨어져 바닥에 점점이 찍혔다.

“이거… 저릿하고 감각 없는데. 독이야?”

“북해의 성지에서 자라는 ‘청파’라는 식물의 액입니다. 미세한 마취 효과가 있습니다. 잡념을 없앱니다.”

“와― 넌 진짜 미친놈이다. 하하― 당신 형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네?”

아. 너무 흥분한 나머지 하마터면 말실수를 할 뻔했다.

윤모난은 입을 꾹 다물었다. 별일도 아닌 걸로 이 지랄을 떨었는데 무정원 얘기까지 알았다간 이번엔 고추에 바늘을 찌를 놈이다. 본능적으로 아랫도리가 서늘해지는 것을 느낀 윤모난은 벽에 뒤통수를 기대며 말을 돌렸다.

“종교 말이야. 정원이 형은 그렇게 독실하지 않은 것 같다고.”

“그럴 리가요. 형님은 저희 형제들 중에서 가장 믿음이 강하신 분입니다.”

“…형이?”

“네, 북해의 차기 가주가 아니라면 성직자가 되었을 분입니다.”

윤모난은 머릿속에서 펼쳐지는 과거의 살색 풍경을 떠올리며 가까스로 웃음을 참았다. 손가락을 찔린 지 몇 분 지나지도 않았는데 또 음심이 도졌다. 무구원에게 제 형의 불경스러운 행위를 낱낱이 고해주고 그 표정을 보고 싶은 충동이 불쑥 치민 것이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또다시 기도를 올리는 무구원의 모습을 보자 싹 사라졌다.

“인제 그만 나가주시죠.”

“이런 십자, 당신 진짜 아무런 재미를 모르고 사는 인간이네요. 머리에 종교밖에 없나?”

“…오늘 같은 불미스러운 행위, 다시는 참지 않겠습니다.”

“뭐, 어쩌게. 상부에 보고라도 하게?”

“차라리 때리시죠. 이런 짓 하지 마시고. 저보고 다리가 되라 하셨습니까? 팀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하겠습니다. 하지만 팀장님과는 사적으로 전혀 얽히고 싶지 않습니다.”

“바보냐? 팀이 곧 나고, 내가 곧 팀이야. 무구원, 다리가 되라는 건 나한테 복종하라는 의미다. 당신은 복종할 줄을 몰라.”

복종. 그 말을 모르는 무구원은 팀장 세 명을 팼다. 지휘 체계가 엄격하고 상명하복이 필수인 전시 상황에서 언제든지 상관을 치받을 준비가 되어 있는 놈은 필요 없다.

무구원은 모든 것을 거스르는 놈이다. 제 가문에서 죽으라고 던진 바닷속에서도 모든 것을 거역하고 꾸역꾸역 살아남았다. 무구원이 아마도 북해에서 겉도는 건 그 이유가 가장 클 것이다.

무구원은 광신도고 북해인이고 틀에 맞게 살아가는 듯 보이지만 그것에 복종하지는 않는다. 교단과 가문이 선고한 죽음을 거역한 것만 봐도, 엄청난 아이러니 속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제어할 수 없는 성난 파도는 얼마나 위험한가. 무정원은 무구원을 건드리지 말라고 했지만 틀렸다. 저놈을 다스리려면 가장 먼저 복종을 가르쳐야 한다.

“그러니까, 내일 도망갈 생각 말고 경해국 끌고 와서 망봐. 뱀한테 물려 뒈지고 싶지 않으면.”

윤모난은 결심했다. 무구원에게 공백으로 남은 그 두 글자를 가르쳐주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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