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 복종의 훈련 (4/24)

4. 복종의 훈련

날이 밝고 오전에 있는 팀 훈련이 끝나자마자 무구원은 경해국과 함께 도망쳤다. 어젯밤 윤모난의 눈에서 번뜩이는 광기를 보고 경해국의 말이 옳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 일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 그들은 서곡센터 숲 경계까지 갔다.

그러나 이미 그들의 도주를 예상했던 악당 윤모난이 훈련복 주머니에 본인의 애착 독사를 넣고서 경계까지 추격했다. 탈주는 한 시간 만에 실패했다.

“제가 이 작전의 이름을 지었어요.”

“썅, 이름은 개뿔! 팀장 당신의 개인적인 복수에 가담하고 싶지 않다고 몇 번 말합니까!”

“개인적인 게 아니라 그건 팀 전체를 위한 희생이었습니다. 치치가 부활하지 않았다면 안범 씨는 남도로 내려갔을 거고. 당신 둘은 지금쯤 내 손에 죽어 향불 냄새나 맡고 있었을걸?”

“하, 내가 서곡에서 온갖 잡것들은 다 만나봤지만, 팀장님 당신 같은 독종은 처음입니다.”

경해국은 혀를 내두르며 이를 갈았다. 분노 조절 장애 경해국의 평가는 정확했다.

윤모난은 독종이다. 특히 피에 환장한 독종. 어쩌면 주머니 속 독사를 이용해 한백호를 저승으로 보내겠다는 결정은 독종에겐 평화스러운 축에 속할지도 모른다.

교살, 갱살, 격살, 구살, 낙살, 분살 등등 수많은 살해 방법 중에 독살이면 꽤 양반 아닌가.

“시팔, 좆같이 엮이게 생겼네. 작전 이름은 뭡니까?”

“작전명 메두사.”

“딱, 팀장님다운 이름입니다. 그 괴물 마귀랑 당신이랑 똑같으니. 하―!”

윤모난은 자신이 괴물 마귀라 불리건 말건 무구원과 경해국을 끌고 팀장 개인 훈련실이 있는 훈련동으로 갔다. 정문 앞에는 누가 봐도 살인을 모의하러 온 것처럼 덜덜덜 떨고 있는 안범이 기다리고 있었다. 윤모난은 안범까지 픽업한 뒤에 으슥한 곳으로 팀원들을 데리고 갔다.

“두 마리는 훈련용이니까 우리 모난이 혼자 외롭게 출격하게 되었네요. 한백호 모가지를 따는 것보단 이쪽이 뒤탈은 없을 겁니다.”

“…팀장니임, 어제부터 자꾸 독사가 훈련용이라는 건 대체 무… 무슨 뜻이세요?”

“아, 그건 나중에. 집중! 집중! 일단 타깃인 한백호는 시간 역행 능력을 가지고 있지만, 생물체에는 능력을 사용하지 못한다는 특이 사항이 있습니다. 그 말인즉 타깃은 모난이의 접근을 막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독사 정도야 한백호 실력이면 바로 죽일 수 있을 텐데요.”

“우리한테는 현상 유지 능력자인 안범 씨가 있잖아요.”

“에?”

안범은 자신이 지목당하자 화들짝 놀랐다.

“저번에 대운동장에서 무구원 씨랑 배를 맞추면서 보니까, 안범 씨 능력이 꽤 재밌더군요.”

“…썅, 그런 남세스러운 소리 좀 안 하면 안 됩니까? 없었던 일로 하자더니.”

옆에 있던 무구원도 대바늘로 윤모난의 입을 찔러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윤모난은 그러거나 말거나 자신보다 한참 작은 안범의 두 어깨를 감싸면서 믿음직스러운 표정을 짓고있었다.

“안범 씨의 현상 유지 능력이 애매한 탓에 인간한테는 완벽한 정지가 아니라, 슬로모션이 걸리던데. 모난이가 물 때까지 한백호를 잠시 잡아둘 수 있을까요?”

“그… 그러려면 제가 한백호 팀장님과 가까이에 있어야 합니다.”

“으음….”

윤모난은 안범의 턱 끝을 쥐고 이리저리 돌려보며 생각에 잠겼다. 하얀 얼굴을 감상하는 그 모습이 유독 불쾌하게 다가와 무구원은 얼굴을 굳혔다.

이어서 윤모난은 안범의 귓가에 바짝 붙어 무어라 속삭이기 시작했다. 은밀하게 지령을 전하는 모양이었다. 귀를 기울이던 안범의 앳된 얼굴이 점차 사색으로 변했지만 윤모난은 개의치 않는 듯 보였다.

“안범 씨는 되었을 거 같고. 나머지 둘은 양쪽 복도에서 대기하면서 망보고 있어요. 한백호네 팀원들이 접근한다거나 혹시 모를 불상사에 대비하는 예비 전력입니다. 안범 씨와 내가 먼저 현장에 진입합니다.”

“팀장님.”

무구원은 윤모난에게 다가갔다.

“정말 죽이실 겁니까?”

“…내 말 뭘로 들었어?”

“맞은 걸로 하는 복수치고는 과하지 않습니까.”

“복수에 경중이 어디 있어. 난 뺨 한 대를 맞아도 복수는 꼭 죽음으로 되돌려주는 사람이라.”

“야, 야. 무씨, 그만해라. 말려도 소용없어. 썅…. 안 들키게 조심이나 하자구.”

윤모난은 무구원을 비웃으며 휙 돌아 나갔다. 세 사람은 훈련동 계단으로 올라가는 분홍 머리의 뒤꽁무니를 미적미적 쫓아갔다.

한백호에게 가까워질수록 안범은 점점 긴장하는 바람에 작전이고 뭐고 다 망칠 것 같았다. 결국 코너에서 이를 딱딱거리고 있는 그를 윤모난이 일단 붙잡아 세웠다.

“안범 씨.”

“ㄴ… 네.”

“이리 와보세요.”

안범은 홀린 듯이 한 발자국 그의 앞으로 갔다. 윤모난은 몸을 숙여 안범을 끌어당기더니 입술 위로 진하게 뽀뽀를 했다. 그 갑작스러운 행동을 본 경해국이 슬슬 뒷걸음질 쳤다.

“미친, 팀원들 돌아가면서 입 맞추는 게 습관입니까!”

“…일을 그르치지 말자고. 응원 겸 가이딩.”

윤모난에게 가이딩을 목적으로 한 도둑 뽀뽀를 당한 안범이 얼굴을 화악 붉혔다. 어느새 떨림은 잦아들고 정수리에 돋아난 갈색 털이 바짝 섰다. 한켠에서는 무구원이 혐오와 불신을 가득 담은 눈빛으로 윤모난을 노려보고 있었다.

윤모난은 그런 무구원의 시선을 의아하게 생각했다. 가이드가 에스퍼를 가이딩할 때, 이런 접촉은 얼마든지 허용 가능한 범위에 있다. 설왕설래(舌往舌來)도 아닌 이 정도 입맞춤이야 인사로도 주고받을 수 있는 건데. 저 정도 결벽증이면 병이었다.

윤모난은 무구원의 눈에서 나오는 광선을 무시하면서 안범을 복도로 떠밀었다. 그리고 자신도 그 뒤를 따라가며 고개를 돌려 다른 둘을 향해 고갯짓을 했다. 위치로 가라는 신호였다. 경해국은 작게 욕을 지껄이며 약속된 장소로 갔다. 무구원도 말없이 지시에 따랐다.

안범과 윤모난 조는 한백호가 훈련 중인 개인 훈련실 앞으로 향했다. 윤모난은 의외로 정중하게 노크부터 했다.

“형, 모난이가 왔습니다.”

앙큼한 삼인칭을 가장한 그 중의적인 표현에 대기하던 경해국은 똥 씹은 얼굴을 했다. 이윽고 안에서 문이 열렸다. 한백호는 윤모난을 보자마자 비열하게 웃었다. 동시에 목까지 새긴 장미 문신이 꿈틀거렸다.

사실 객관적인 시선에서 보자면 한백호는 꽤 훤칠한 편이라 할 수 있었지만, 인상이 험악하고 어딘가 늘 위험한 분위기를 풍겼다. 약쟁이라는 소문에 딱 걸맞은 사람이다. 비릿한 미소를 지은 채 허스키한 목소리가 조롱조로 튀어나왔다.

“핑키, 매맛을 못 잊고 또 찾아왔냐.”

“훈련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작은 거는 왜 달고 왔어. 또 불에 탄 인형이라도 있나 보지?”

“드릴 말씀이 있어서 왔습니다.”

“…들어와.”

온갖 병장기가 벽에 걸려 있는 한백호의 개인 훈련실 안은 더운 열기와 땀 냄새로 가득했다. 바닥은 궤적을 그리며 하얗게 닳아 있었는데, 모두 치열한 수련의 흔적이었다. 안범은 경험이 없는 자신이 보기에도 한백호가 호락호락하지 않은 인물임을 알아챘다.

아마도 윤모난과 비등비등한 실력이 아닐까. 체격은 한백호가 조금 더 컸기 때문에 실제로 맞붙으면 어떨지는 확신이 가지는 않는다. 안범은 아까 전 윤모난이 전달한 지령을 떠올리며 마음을 굳게 먹었다.

“저희 팀 팀원들은 영 말랑말랑해서, 저랑 대련할 만한 상대가 없더라고요. 어떠세요, 훈련 겸?”

“푸하하하! 형들 뒤지고 핑키도 많이 달라졌네. 여기까지 와서 대련을 하자고 하고.”

“…그냥 놀자는 건 아니고. 얼마 전 위에서 명령서 내려와서 보니까 당분간 치안조 1부 3팀 백업으로 출동하라던데. 형이 요청했죠?”

“그래. 너네 팀 지금 서곡 자유 시장에 떨이로 나왔길래 내가 샀다. 다른 팀들도 좀 노리던데, 네 복귀 무대로 우리 팀 백업이면 나쁘지 않지.”

현재 2부 7팀은 마이너스 오천 점으로 인해 전투조이지만 정기 출동은 금지당했고, 치안조 백업으로 당분간 일해야 하는 처지였다. 비상 출동을 나가게 되어도 전투조 팀을 원조하겠거니 생각했던 윤모난은 당분간 치안조 출동에 배치된다는 소식에 열이 뻗쳤던 것이다.

심지어 시기상 한백호는 윤모난을 단소로 두들겨 팬 뒤, 곧바로 비상 출동 명단에 2부 7팀을 올린 셈이었다. 다른 경쟁자들에게 돈까지 쥐여주면서 자신의 팀을 대기 1순위로 올렸다 한다.

그건 물론 엿 같은 경쟁의식에 근거한 행동이었다. 한백호는 윤모난보다 2살 위지만, 둘은 항상 실적 면에서는 비등비등했다. 이런 경쟁은 훈련 학교 시절부터 이어왔었다. 한창때 선후배 관계인 두 사람의 실력에 대해서 학교에서는 내기가 붙을 정도였으니.

그러므로 한백호는 윤모난이 망가지고 나서 가장 많이 비웃었을 인물이다. 핑키라는 호칭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머리 색도 색이지만, 보통 애완용 뱀 먹이인 냉동 쥐를 핑키라고 한다. 한백호는 이제껏 불순한 의도로 윤모난을 핑키라고 불러온 것이다.

“치안조 지원으로 쌓을 수 있는 우리 팀 스코어는 전적으로 팀장인 형 재량에 달려 있겠죠.”

“그래. 너네 팀 마이너스 오천 점이라며? 어쩌냐.”

“저희 팀한테는 점수가 중요해서요. 미리 상의 좀 하죠.”

“야, 핑키 이 시발 놈아. 상의? 아직 출동은 나가지도 않았는데 어디서 매수질이야?”

한백호는 대번에 인상을 구기면서 윤모난을 위협하듯 다가왔다. 그러나 윤모난은 흔연히 웃을 뿐이었다.

“매수라니요. 애초에 제가 불리하지 않습니까. 저희랑 거래하시죠. 오늘 대련해서 제가 이기면 저희 팀 점수에 팍팍 인심 좀 팍팍 써주세요.”

“…지면 뭘 팔 건데. 거래잖아.”

“…….”

“미리 말하지만 너는 별로야. 넌 때려도 앵앵거리는 맛이 없거든.”

“그래서 제가 우리 팀 귀염둥이 데려왔잖아요. 안범 씨?”

팀장의 부름에 뒤에서 굳어 있던 안범이 용수철처럼 튀어나왔다. 가이딩을 받은 안범은 아까보다는 확실히 상태가 나았다. 다람쥐처럼 오밀조밀한 안범의 안면을 뜯어보던 한백호가 미끼를 물었다.

“능력이 뭐야?”

“혀… 현상 유지입니다.”

“신검에서 등급은 뭐 받았어?”

“…B급이요.”

아니다. 센터에 오기 전 안범은 C급으로 판정받았었다. 하지만 윤모난의 지시에 따라 등급을 한 단계 올려 대답한 것이다. 윤모난은 안범의 어깨에 손을 턱 올리면서 끼어들었다.

“현상 유지 B급이면, 형 약장사에도 크게 도움이 될 듯한데. 어떠세요?”

“어. 그런데 검사부터 해야지. 제품에 하자 있으면 안 되니까. 음, 핑키 너 바닥에 누워봐라.”

“네.”

“안범이랬나?”

“ㄴ… 네.”

“B급 현상 유지면 너네 팀장 뼈 정도는 안 부러지게 만들 수 있지?”

“네?”

안범은 예상치 못한 상황에 놀라 바닥에 누워 있는 윤모난을 봤다. 그러나 윤모난은 작게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자신을 믿고 작전을 이어가라는 신호이다.

“네. 할 수 있습니다.”

“그래? 그럼. 핑키 다리뼈 좀 네가 보호해봐라.”

한백호는 벽에 기대어 있던 쇠막대기를 가져오더니, 바로 윤모난의 정강이뼈에 조준하면서 대기했다. 한백호는 거짓말에 속아줄 정도로 쉽게 방심하는 인물이 아니었고, 윤모난이 무슨 수를 쓰지 못하도록 일단 다리를 아작 낼 셈이었던 것이다.

윤모난은 공격 시점을 전적으로 안범의 판단에 맡기겠다고 했다. 그 압박감에 안범은 진땀이 났다. 하지만 그 순간 윤모난이 아까 복도에서 자신의 귓가에 속삭였던 말이 계시처럼 떠올랐다.

“안범 씨, 모난이를 잘 부탁합니다. 모난이를 믿고 적이 등을 보일 때 주머니에 손을 넣으세요.”

안범은 자신의 주머니 안에 든 묵직한 생물의 느린 움직임을 느끼면서 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천천히 손을 뻗었다. 안범이 제 능력을 사용하려 하자, 한백호가 쇠막대기를 높게 치켜올렸다.

퍽―!

매서운 스윙과 함께 뭔가 우지끈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의아함을 느낀 한백호는 뒤를 돌았다. 윤모난의 현상 유지를 했어야 할 안범이 자신의 등에 손을 올리고 있었다.

한백호가 잠시 굳은 사이, 안범이 동작에 제한을 가하는 동시에 독사 모난이가 팔을 타고 그의 목으로 달려들었다. 한백호는 목을 움켜쥐고 맥없이 뒷걸음질 쳤고 아래에는 쇠막대기에 다리가 부서져 신음을 흘리는 윤모난이 있었다.

“…서… 선배…. 무 선배님!”

안범이 더듬더듬 소리를 치자 무구원이 쿵, 하고 문을 열고 나타났다. 단번에 상황을 파악한 무구원은 바닥에 쓰러진 윤모난의 다리를 바로 원상복구시켰다. 이번에 윤모난은 뼈를 주고 목숨을 쥘 작정이었나.

아무리 무구원이 원래대로 돌려놨다 쳐도 다리가 부러진 고통의 여운에 아직 시큰할 터였다. 그러나 윤모난은 바로 몸을 일으켜 한백호에게 달려들었다. 메두사의 얼굴을 본 적은 바짝 굳어 돌이 되어버렸다.

“형, 이제 진짜 거래 좀 해볼까요?”

한백호는 창백한 얼굴로 바닥을 주먹으로 쿵, 하고 치더니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윤모난은 대련이니 뭐니 핑계를 대면서 한백호를 방심하게 했고, 제 다리뼈를 내주고 적의 등 뒤에서 독사를 사용해 무력화시켰다.

이건 깡패들도 안 쓸 만큼 치사하고 야비한 수법이었다. 심지어 안범을 미끼로 삼다니. 깡패도 제 식구들은 챙기는 법인데. 무구원은 윤모난의 비열함에 치를 떨 수밖에 없었다. 그는 정정당당이라는 말에 빨간 펜으로 빗금을 쳤을 게 분명하다.

무구원은 말없이 손목에 찬 전자시계에 정확히 30분 타이머를 맞췄다. 온몸에 독이 퍼져 사망에 이르기까지의 시간이었다. 그 와중에도 윤모난은 착실히 한백호를 겁박하고 있었다.

“약팔이로 생계를 이어가는 집안에서 태어났으니, 이 독사가 어떤 의미인 줄 알죠?”

“…윤가 놈들이 암살용으로 기르는 뱀 새끼들 아니냐? 핑키 너네 집에서 그걸로 사람 여럿 죽였지.”

“해독약도 없고.”

“어. 그런데 독에 면역이 있는 가이드가 가이딩으로 해독할 수 있잖아.”

독이 퍼져 바닥에 드러누운 한백호는 느긋했다. 윤모난이 씨익 웃었다.

“비상 출동 3회에 팀 스코어 오백 점씩 필요합니다.”

“야, 핑키 장난해? 상부에서 개지랄 떨 건데 니네 팀한테 점수를 다 몰아달라?”

“윗대가리들한테 몰래 약 공급하면서 친분 꽤나 쌓았을 텐데요?”

무구원은 단번에 상황을 파악했다. 윤모난은 단소에 맞은 복수 따위를 하러 온 것이 아니라 폭력, 비리, 협박을 통해서 처참한 팀 스코어를 올릴 방법을 찾은 것이다.

한백호 팀은 치안조 중에서도 실적으로는 일등이었다. 업무 수행 평가에는 객관적 기준이 있기는 하지만 감독관들이 주관적으로 부여하는 추가 점수 항목이 있었고, 한백호네 팀은 거기서 점수를 많이 따기로 유명했다.

센터의 많은 대원들이 예술 점수냐고 비웃었지만, 출세 욕구가 강한 한백호는 물불 가리지 않고 자신의 팀을 일등으로 만드는 데 혈안이 된 인물이었기에 사소한 뒷말 따위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런데 그런 인간에게 고작 백업 전력인 2부 7팀이 3회당 오백 점씩 요구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었다. 누구라도 윤모난의 야비함과 날강도스러움에 몸을 떨 수밖에 없는 대목이다.

“너 내가 약속했다가 어기면 어쩌려고? 내가 여기서 살아나가면 너 처먹는 밥에 매번 약 타서 보내버릴 거거든.”

“거래하자니까요.”

“무슨 거래.”

“대련하러 왔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한 판 뜨시죠. 제가 이기면 점수 보장해주세요.”

갑자기 이렇게 정당한 길로 돌아온다고? 다 잡은 물고기를 다시 풀어주는 것도 아니고. 방금 전까지 윤모난을 비열하다고 속으로 비난했던 무구원조차 종잡을 수 없는 그의 행보에 머리가 멍해졌다.

치안조는 전투조와 달리 트랜스가 아닌 인간들도 잡아넣고 죽이는 임무에 투입된다. 한백호에게서 음침한 살기가 풍겨 나오는 건 그런 이유에서였다. 반도에서는 실상 제대로 된 재판을 받기도 전에, 치안조가 범죄자를 현장에서 즉결 처분하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그래.”

한백호는 눈에다 불을 활활 태우면서 응했다. 이로써 거래는 성사된 셈이다. 둘 다 아무리 비열한 인간들이라 해도 대련을 통해 정해진 결과에 승복하지 않는 건 전사인 포스트에게는 치욕이니까.

이제까지 경해국과 무구원이 팀장 셋, 팀원 다섯을 해치웠어도 크게 징계를 받지 않은 이유도 그런 것이었다. 서로 대련으로 겨뤘기에 도축 살인마라 불릴지언정, 그들의 행위는 반도의 도덕에서는 허용되는 범위에 있었던 것이다.

도덕은 집단의 습속에서 비롯된다. 선과 악을 나누는 기준도 집단의 합의에 따라 얼마든지 바뀐다. 반도에서 포스트의 힘은 신성한 것이고, 그들 사이의 힘겨루기는 그 신성을 빛내는 향연이다. 무구원은 바닥을 기어가고 있는 검은 뱀을 보면서 자신도 모르게 실없이 웃다가 아차 싶었다.

거래가 성사되자 윤모난은 한백호의 몸에 올라타서 가이딩부터 했다. 금세 해독된 한백호는 바닥에서 일어나 대련 자세를 취했다. 군더더기 없고 깔끔한 동작이었다.

“핑키, 난 너네 형들처럼 너 안 봐준다.”

“…….”

윤모난이 형들 얘기를 극도로 꺼린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여기 없을 것이다. 상대의 도발에도 윤모난은 공격 범위에 들어가지 않고 차분히 원을 돌고 있었다.

한백호가 아무리 뒷거래로 점수를 사고 온갖 추문을 달고 사는 인간이라 해도, 그 능력이 떨어지는 건 결코 아니었다. 한백호는 치안조답게 나이프 파이팅이나 핸드투핸드 컴뱃에 최적화된 무술을 수련해왔다. 주로 트랜스 사냥에 적합한 사격술을 연마하는 전투조들과 달리 치안조가 일대일 격투에서 막강한 건 그런 이유였다.

하지만 윤모난도 이런 대련에는 이골이 난 사람이었다. 그는 차분히 한 걸음 떨어진 거리에서 한백호의 몸 중심축을 한눈에 담았다. 곧이어 주먹이 바람을 가르며 날아온다. 자비 없이 꽂혀드는 한백호의 주먹은 그의 노련함을 증명하듯 패턴이 없었다.

퍽―!

처음 공격은 한백호가 먼저 성공했다. 특유의 빠른 속도를 이용해서 윤모난의 옆구리를 발등으로 가격한 것이다. 윤모난의 몸이 그 위력에 확연히 흔들렸다. 그 틈을 놓치지 않은 한백호가 벽까지 그를 몰아붙이며 끊임없이 킥과 펀치를 연달아 먹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이었다. 숨을 돌린 윤모난은 오른팔 요골의 비스듬한 단면을 사용해 주먹을 비껴 치면서 상대방의 공격 강도를 완화시켰다. 그러면서 다시 한백호 몸의 중심으로 파고들 틈을 노렸다.

읽을 수 없는 공격은 궤적을 관찰해가며 방어해야 한다. 매 동작에 집요하게 따라붙으며 무릎을 치켜올려 상대방의 공격을 방어하고 쳐낸다. 네 번의 수를 나눈 끝에 윤모난은 팔꿈치로 한백호의 쇄골을 강하게 타격하는 데 성공했다.

실로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광경이었다. 안범은 입을 벌리고 주먹이 바람을 가르는 소리만 들리는 두 사람의 대련을 관람하고 있었다. 가히 예술이었다. 무술은 단련해야 하는 기술이고 예술이란 말의 어원은 기술이었으니 예술이란 말이 적절했다.

끼익―

한백호의 발꿈치가 바닥에 끌리는 소리와 함께, 윤모난은 잡은 기세를 놓치기 전에 상대방의 목에 초크를 걸었다. 그러고는 똬리를 틀듯이 등에 바짝 달라붙어 팔 근육에 힘을 줬다.

죄임을 당한 한백호는 덫에 걸린 야생 동물처럼 저항했지만, 몇 초 만에 저항할 힘도 모두 잃고 말았다. 초크가 경동맥을 압박한 탓에 뇌로 가는 혈류를 차단해 잠깐 기절한 것이다. 윤모난은 한백호가 푹 수그러지자 놈을 놔줬다.

“…후와!”

안범이 안 했다면, 무구원이 와, 라고 감탄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윤모난은 바닥에 엎어진 한백호의 등에서 떨어지면서 멍한 표정으로 서 있는 두 사람에게 다가왔다.

“이제 점수는 꽤 확보했네요. 이 정도면 이 지랄 떨 만했죠?”

“…….”

“경해국!”

대뜸 윤모난이 밖에서 대기하고 있는 경해국을 불렀다. 경해국이 곧 문을 열고 나타나 바닥에 기절해 있는 한백호를 보고 귀찮은 듯이 물었다.

“시체 묻으라구요?”

“아직 안 죽였어. 한백호 이 새끼 기절해 있는 동안, 드잡이 좀 합시다. 넷이 같이 이 방 좀 뒤집시다.”

“이 방을요?”

“한백호가 숨겨놓은 약이 있을 거예요. 다 찾아요.”

때아닌 명령에 갑자기 세 사람은 한백호의 개인 훈련장을 뒤져야 하는 신세가 되었다. 그사이 윤모난은 주머니에 넣어 왔던 덕 테이프를 꺼낸 뒤 희열에 찬 얼굴로 한백호의 팔과 다리를 압박하며 순수하게 복수의 시간을 즐기기 시작했다.

온갖 병장기와 벽 틈새에서 찾은 크고 작은 약봉지는 모두 20개였다. 봉지에 든 알약을 합치면 거의 700개 정도는 되어 보였다. 이상한 약이다. 진한 붉은색의 약이 알알이 든 봉지에는 매직으로 ‘쓰레드’라는 단어가 휘갈겨져 있었다.

무구원이 약봉지를 살펴보려는 순간, 손목시계 타이머가 신호음을 내며 울렸다. 30분이 지나는 시간이었다.

“뭐야? 십자, 타이머는 왜 맞췄어?”

윤모난은 무구원의 손목에서 울리는 타이머를 보며 예리하게 물었다. 무구원은 타이머 알림을 끄면서 대답했다.

“구하려 했습니다.”

“뭐?”

“한 팀장을 병동으로 데려갈 생각이었습니다.”

“…날 배신할 생각을 했다 이거네. 속으로?”

윤모난은 팀원들이 찾아온 약봉지들을 주머니에 챙기고, 바닥에서 유유히 돌아다니고 있는 뱀도 도로 회수했다.

“일단 다들 나가죠.”

“쯧쯧. 넌 이제 뒈졌다, 무씨.”

“…….”

네 사람은 덕 테이프에 감겨 한 덩어리가 된 한백호를 바닥에 버려두고 훈련실을 나왔다. 다들 조용히 복도를 따라 걷는데 묘하게 윤모난에게서 냉기가 느껴졌다.

묵묵히 계단을 밟고 아래층으로 내려가려던 중에 윤모난이 갑자기 우뚝 섰다.

“경해국, 안범 두 사람은 자율 훈련 하러 가세요.”

“네.”

“무구원은 남아.”

“무씨, 그동안 즐거웠다. 장례식은 꼭 참석하마.”

경해국은 마지막 인사를 남긴 뒤에 안범을 질질 끌고 계단을 내려갔다. 그렇게 복도에 둘만 남게 되자, 윤모난도 무구원의 목덜미를 잡고 어디론가 끌고 갔다. 문을 열고 들어간 곳은 2부 7팀 윤모난 팀장의 개인 훈련실이라고 쓰여 있는 방이었다.

윤모난은 거구의 사내를 안에 집어넣고 들어가자마자 문을 잠갔다. 그러더니 불도 켜지 않고 블라인드가 쳐져서 컴컴한 방 안을 가로질러 무구원에게로 다가왔다.

벽을 따라 윤모난이 하루에 하나씩 해먹은, 볼품없이 터진 샌드백들이 늘어져 있었다. 무구원은 그 샌드백들의 무덤까지 거칠게 밀려났다.

“무구원, 감히 내 명령을 어기고 반란이나 모의하고 있었다고.”

“…비열한 살인에 가담하고 싶지 않았을 뿐입니다.”

“날 믿었어야지.”

“도저히 믿음이 가는 분이셔야 말이죠.”

“30분이 지났는데 내가 한백호 못 데려가게 막았으면 어쩌려고 그랬어?”

“…그래도 데려가려 했겠죠.”

“저 변태 새끼를 구하려고 네 팀장한테 덤빌 각오를 했다?”

무구원도 안다. 자신의 행동이 얼마나 모순적인지. 하지만 제게는 기준이 있었다. 정도를 벗어난 살인은 용납하지 않는다. 신성한 전투의 결과가 아닌, 상대방의 뒤에서 하는 독살이니 암살이니 하는 것들은 감히 용납할 수 없었다.

무구원은 정말로 윤모난이 한백호를 죽이려 했다고 생각했다. 오판이었을지언정 합당한 근거가 있는 판단이었다.

“너 진짜, 한번 부러져봐야겠구나.”

무구원은 어느새 자신의 팔을 타고 올라오는 모난이라는 이름을 가진 독사를 발견했다. 이어서 팔뚝의 혈관을 따라 고통이 퍼지기 시작한다. 동시에 윤모난은 주머니에 항상 가지고 다니는 향정신성 약통을 꺼냈다.

그러고는 정상 복용치를 훨씬 넘어가는 수준으로 손에 쏟아부어 입에 털어 넣고 씹어 먹기 시작한다. 그런 행동이 뭐를 뜻하는지 모를 리가 없다.

무구원은 해독약도 없는 뱀에 물려 눈앞에서 일부러 능력을 떨어트리는 약을 먹는 가이드에게 목숨을 구걸해야 하는 처지가 된 것이다. 윤모난은 정신 고문으로 무구원에게 복종이란 단어를 가르칠 방안을 생각해냈다.

“30분 타이머 맞춰.”

무구원은 묵묵히 손목에 찬 전자시계로 30분 타이머를 맞췄다. 그렇게 죽음까지 30분. 방 안의 두 사람은 상호 대치 상태에서 약속한 것처럼 입을 다물었다. 오후 시간이라 훈련실을 찾는 팀장들이 많은지, 문밖으로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소리만 들린다.

“아― 훈련하기 귀찮아 죽겠다. 이 땅개 짓도 언제까지 하려나. 삭신이 다 쑤시네.”

“팀장이면 뭐 하냐. 구르는 건 다른 놈들하고 마찬가진데. 정부에 한자리 좀 얻으면 편해질 텐데.”

“…반도에서 윤씨, 무씨, 경씨, 주씨, 한씨 출신 아니면 벼슬은 언감생심이지.”

“엿 같다. 평의회 적폐 새끼들.”

“그래도 죽으면 가족들한테 유족 연금이라도 나가잖냐.”

방 안이 워낙 조용했던 탓에 문밖에서 팀장 몇 명이 투덜거리는 소리가 그대로 넘어 들어왔다. 윤모난은 밖에서 하는 말소리를 듣고 조소하더니, 눈앞에 버티고 있는 남자에게 다시 시선을 고정했다.

“십자, 무슨 독립운동이라도 해요? 코피로 혈서도 쓸 수 있겠네.”

윤모난은 무구원의 코에서 흐르는 선혈을 발견하고 손으로 훔치면서 말했다. 어느 순간부터 무구원이 계속 코피를 쏟고 있었다. 아무래도 독으로 인한 증상은 아니었다.

“지금 시간을 몇 번이나 돌린 거죠? 지금이 몇 번째야?”

“…11번째입니다.”

“도망가려던 건 다 실패했고?”

“네.”

“모난이한테 물린 지 3분 다 되어가는데. 이제 당신 능력으로 살 수 있는 방법은 없네요.”

지금껏 무구원은 시간 자체를 11번이나 3분 전으로 돌렸다. 물린 부위만 시간 역행으로 되돌려봤자 뱀은 여전히 자신의 몸 위에서 돌아다닐 테고, 윤모난 또한 꼼수를 알아챌 게 분명했으니까. 하지만 시간을 아예 돌리기란 부분만 역행시키는 것보다 능력과 에너지를 크게 소모하는 짓이었다.

하지만 11번의 시도는 모두 수포로 돌아갔다. 윤모난의 3분 후 행동을 알고 있는 무구원이 압도적으로 유리한 게임이라 생각할 수 있겠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단 0.01초의 다른 선택이 다른 미래를 만든다. 모든 시도에서 윤모난은 각기 다른 방법으로 무구원을 제압했다. 무구원이 0.01초의 다른 선택을 할 때마다 다른 미래가 펼쳐졌지만 모두 윤모난에게 유리한 미래였던 것이다.

바꾼 미래에서 얻어맞고, 뱀한테 또 물리고…. 그런 짓을 11번이나 하고 나니 더 이상 능력을 사용하는 것도 힘들어졌다. 그렇게 3분이 지나고 사건의 임계점이 초과해버렸다. 그 사실을 모를 리 없는 윤모난은 시간을 확인하고 비시시 웃더니 다시 입을 다물었다.

뚝뚝 무구원의 코에서 흐른 피가 바닥으로 계속 떨어진다. 미동도 하지 않고 몇 분 더 버티기에 들어갔던 무구원이 문득 입을 열었다.

“…그동안 팀장님 때문에 시간을 돌린 것만 30번입니다.”

“…….”

“대부분 미래를 바꿀 수가 없더군요.”

시간을 역행한다는 것은 경우의 수를 계속해서 늘리는 일이다. 서류철에 계속 종이를 꿰어 넣는 것처럼 사건들을 계속 추가하는 것. 마음에 드는 페이지를 발견할 때까지 시간을 추가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무구원은 윤모난과 마주친 기차에서부터 벌써 여러 번 시간을 돌렸었다. ‘확 따먹는다’는 협박은 총 네 번을 되풀이해서 들었고, 대운동장에서의 가이딩을 빙자한 불쾌한 입맞춤도 일곱 번을 당했다. 상처를 치료하러 들어갔다가 근묵자흑이라는 소리를 들었을 때는 두 번, 바로 어젯밤 사건은 여섯 번이었다.

윤모난에게 도합 15번째 입술을 빼앗기면서, 무구원은 윤모난이 절대수라는 것을 깨달았다. 바둑 대국에서 선택의 여지가 없어 반드시 응해야 하는 수. 모든 경우의 수를 거부하고 시간의 페이지들을 하나로 관통하는 바늘 같은 사람. 윤모난은 무구원이 반드시 응해야 하는 수만 놓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래서 팀장님을 신뢰할 수가 없습니다. 하고자 하는 일을 무슨 짓을 해서라도 한다는 점에서 위험하구요.”

“종교 믿는 사람이 왜 그렇게 상상력이 없어?”

“뭐가 말입니까.”

“종교쟁이들은 그런 걸 운명이라고 하잖아.”

“…….”

“내가 운명이니까, 당신이 아무리 노력해도 바꿀 수 없는 거지.”

“운명은 어머니 신 단 한 분께만 주어졌습니다. 스스로 신을 자처하고 싶으신 겁니까?”

윤모난은 가볍게 무구원의 뺨을 밀었다.

“여기서 당신이 내 손에 죽는다면, 결국 내가 네 운명을 쥐고 있는 셈이지.”

“…죽으면 전 어머니 신의 텃밭으로 갑니다.”

“청승 떨지 말고.”

“고통을 긍정하면 생명의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얼씨구, 고통을 긍정하는 놈이 살려고 오늘 11번이나 시간을 돌렸어?”

“시간을 반복해본 사람이라면 알 겁니다. 이 자체가 고통이라는 걸요. 저는 다른 사람보다 더 긴 시간에 살고 있습니다.”

만약 천경교가 가르치는 대로 삶이 고통이라면, 시간 능력자인 무구원은 다른 이보다 몇 배나 더 큰 고통에 시달리는 셈이 된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한 번이겠지만, 사실 무구원은 11번이나 독사한테 물려야 했던 것처럼 말이다.

윤모난은 금세 지루해졌다. 고문받는 놈이 고통을 긍정하겠다는 것만큼 흥미가 떨어지는 경우도 없을 것이다. 바닥에 드러누워 30분을 보낸 다음에 무구원이 죽으면 경해국을 시켜 뒷산에 묻으라고 할 참이었다.

복종하지 않는 놈은 팀에 필요 없다.

“그럼 뒈져. 네가 바라던 대로 텃밭인지 어디로 보내줄 테니까.”

“…….”

윤모난은 바닥에 누워 하품이나 쩍쩍 하면서, 습관처럼 목에 걸린 목걸이를 만지작거렸다. 그 모습을 보던 무구원도 쓰러진 샌드백 더미에 반쯤 기대었다. 코피는 멈춘 듯했다. 포기의 징후였다.

그렇게 한참 더 시간이 흘렀다. 내내 눈을 감고 기대어 있던 윤모난이 문득 입을 열었다.

“너처럼 복종할 줄 모르는 놈이 있었어. 저 잘난 맛에 살던 놈이. 안범이 저번에 탈주하면서 편지에 뭐라고 썼더라. 아, 맞다. 팀의 화근이 될 재앙의 불씨, 딱 그거였지.”

무구원은 생각했다. 죽는 건 자신인데, 어쩐지 윤모난이 죽어가는 사람처럼 넋두리를 늘어놓기 시작한다고.

“그놈도 무간에 갔을 때 팀장 명령을 어기고 홀로 이탈했어. 그날 마주친 트랜스가 도저히 우리로서는 이길 수 없다는 걸 알았거든. 그래서 자신을 희생하는 한이 있더라도 붙잡아두려고 뛰어든 거야.”

“…팀장님의 형님께서 따라오셨던 거군요.”

“어. 둘째 형이 특히 나랑 비슷해. 쌍둥이지만 팀장인 첫째 형은 우리보다는 더 이성적이고…. 때리긴 많이 때렸어도 팀 내에서 존경받는 팀장이었는데, 그런 사람이 트랜스에게 정신이 교란당해 팀원들을 제 손으로 죽였다니. 비극이야, 그렇지?”

약을 기준치보다 많이 먹었으나 윤모난의 망가진 상태는 딱히 가망이 없어 보였다. 멍하게 누워 과거를 회상하는 남자의 눈에서 공허가 보인다.

“큰형한테는 나하고 둘째 형이 넙다리뼈였는데. 결국 팀 내에서 다리 두 개가 말을 듣지 않았으니 무너진 셈이야.”

“제가 한백호를 살리려 한 것이 팀장님 뜻을 거역한 게 되는 겁니까?”

“십자, 여기서 당신 생각은 필요 없어. 내 말은 내가 아무리 이상한 명령을 내려도 믿고 따라야 했다는 거야. 납득 못하겠더라도.”

“…….”

“내가 아동 병원에 있는 아이들을 구출하는 것 대신에 다른 곳에 가서 싸우라고 하더라도 당신은 따라야 해.”

“말 잘 듣는 개를 원하시는 겁니까?”

“아니, 당신은 팀장인 내가 죽으라면 죽을 수 있어?”

윤모난이 갑자기 몸을 일으키면서 물었다.

죽으라면 죽을 수 있냐고? 당연히 아니었기에 무구원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이어서 윤모난이 뺨을 좀 더 세게 쳤다.

“인마, 싫다고 해야지.”

“…복종하라더니 저랑 말장난하십니까?”

“여전히 내 말뜻이 뭔지 모르는구나. 똑똑한 놈이 실망이네.”

윤모난은 혀를 끌끌 찼다. 그러더니 무구원의 손을 가져가 손목의 시계를 확인했다. 25분이 지났다. 5분 정도 남은 것이다. 무구원은 생각보다 기개 하나는 대단한 놈이었다.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차분해 보이니.

“내가 너한테 바라는 복종이라는 건 말이야. 팀장이 아무리 양아치 같고 못 미더워도…”

“…….”

“그래도 믿는 거야.”

“뭘 말입니까?”

“내가 살길을 찾아줄 거라는 걸 믿어. 죽게 놔두지 않을 거란 걸 맹목적으로 믿으라고.”

윤모난은 무구원의 손에 깍지를 끼고 바짝 잡았다. 아주 미세한 에너지가 흘러들어오고 있었다. 향정신성 약을 먹고 많이 둔해져버린 윤모난의 가이딩 능력이 아주 느리고 미세하게 무구원을 해독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무구원은 가까이에서 윤모난을 보았다. 아까 이 고문을 시작할 때 그는 거의 10개가 넘는 약을 한 번에 먹었다. 모르긴 몰라도 능력을 쓰려면 상당히 힘에 부칠 게 분명했다. 하지만 날이 나간 도끼로 나무를 패는 것처럼 쉽지 않은 이 상황에서, 윤모난을 전적으로 믿어야 한다는 것밖에는 할 수 있는 게 없다.

그 순간 무구원은 윤모난이 의미하는 것의 한 단면을 보았다. 그가 말하는 복종이라는 것의 단면을.

가이드인 윤모난은 어둠 속에서 작은 성냥불을 들고 있는 인도자이다. 다른 한 손에는 칼을 들고 있다. 목에 칼을 겨누고선 다른 손에 있는 불을 보라고 한다. 어둠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그 작은 불만 보고 걸어야 한다. 목에 바짝 겨눠진 칼날의 두려움을 잊고.

“…살려주십시오.”

“계속 애원해봐.”

“팀장님, 살려주세요.”

만약 윤모난이 약간 삐끗하거나 아니면 약의 부작용으로 인해 생각보다 가이딩이 제대로 안 된다면, 진짜 죽을지도 몰랐다. 무구원은 시키는 대로 말하면서도 여전히 회의적이긴 했다. 자신은 오로지 단면만 보았을 뿐이니까. 눈앞의 사람을 100퍼센트 신뢰하는 것은 아니었다.

“살고 싶으면 윤모난 팀장님은 세계 제일 미남 천재라고 하세요.”

“…….”

“빨리! 응원해줘야 내가 힘내지.”

“…세계… 제일….”

“왜 안 해?”

“…못하겠습니다. 그냥 죽겠습니다.”

“하여튼.”

윤모난이 큭큭대며 웃기 시작했다. 그의 웃음소리에 무구원은 서로 접촉하고 있는 부분에서 더 뜨거운 열기를 느꼈다. 차마 완성하지 못한 응원이라도 윤모난이 많이 봐준 모양이다. 독으로 인해 뻐근하던 심장이 점차 정상으로 돌아오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렇게 무구원이 죽음이 아닌 생명의 징후를 느낄 동안, 윤모난이 도리어 코에서 피를 쏟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가이딩을 멈추진 않는다. 결국 두 사람은 나란히 마주한 채로 똑같이 피를 흘린 셈이다. 순간 광신도 무구원은 거기서 강한 상징성을 떠올렸다.

“무구원.”

“네.”

“형아 믿지?”

상징이고 나발이고, 별 거지 같은 대사에 무구원은 윤모난의 얼굴을 주먹으로 후려갈길까 잠시 고민했다. 눈치 빠른 윤모난은 그런 기색을 눈치챘는지 제 혀를 깨물더니 입을 다물었다. 윤모난의 코에서 흐르는 피는 턱을 타고 목까지 내려가 있었다.

무구원은 아까 윤모난이 그러했듯이 그 피를 손으로 훔쳤다. 그리고 피를 보는 순간 무언가 일렁임을 느꼈다.

“팀ㅈ….”

“30분 지났다.”

때맞춰 손목에서 띠띠띠 타이머가 울렸다. 윤모난은 알람에 맞춰 무구원에게서 떨어졌다. 무구원은 문득 자신이 느낀 상징이 강한 충동으로 변모하는 것을 깨닫고 머리가 멍해졌다.

…생애 처음으로 누군가를 욕망하게 된 것이다.

* * *

개인 맞춤형 과외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고문이라 불러야 할지 모르겠는 복종의 훈련 이후로 무구원은 윤모난을 최대한 피해 다니기로 했다. 팀 훈련 시간을 제외하고선 합숙소도 최대한 늦게 들어갔고, 윤모난이 팀 내 문화로 정착시킨 아침 식사도 거부하고 나가지 않았다.

그것 때문에 윤모난에게 꽤 많이 맞고 괴롭힘도 당했지만, 무구원은 그와 마주하는 것만큼은 최대한 피하고 싶었고… 그 고집을 부린 지 거의 한 달이 다 되어가는 시점에서는 윤모난도 결국 포기한 듯 보였다.

그럼에도 윤모난은 꾸준히 아침마다 무구원의 방문을 걷어차고 나타나 밥 먹으러 가자고 패악질을 부렸다. 하지만 무구원은 꿋꿋하게 버텼다. 이쯤 되니 윤모난을 포함한 2부 7팀의 팀원들은 무구원이 독사 고문을 당한 뒤로 단단히 삐졌다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사실 무구원은 팀장인 윤모난에게 난생처음으로 욕망을 느꼈고, 그 감정이 무엇이든 간에 원천 차단시키기 위해 자기암시와 종교의 힘을 빌려가며 꽤 애쓰고 있었다. 약혼한 여성도 아닌 동성 상관을 욕망하다니, 수도승 무구원은 매일 밤 대바늘로 자신의 손을 혹사시키고 자학하며 뜨거운 응어리를 삭이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서곡에서의 시간도 두 달이 다 되어갈 때쯤이었다.

“안범 씨, 격발한 뒤에 자꾸 몸이 앞으로 기울어지네. 자세에 유연성이 부족해요. 허리랑 팔에 너무 힘주지 말고 하체에 중심을 실어야지.”

전투조 2부 7팀은 윤모난이 짠 전투 모형에 따른 훈련 일정을 착실히 진행하는 중이었다. 안범은 주로 사격 훈련 위주로 연습했고, 왼쪽 눈이 안 보여 거리 감각이 떨어지는 경해국은 근거리 전투에 대비한 훈련을 받았다. 더불어 그는 화염 능력을 적절하게 조절하기 위해 윤모난에게 따로 이능력 관련 개인 훈련까지 받는 중이었다.

탕― 탕― 탕―

“십자 사격 자세 좀 보라고. 저렇게 하체에 중심을 실어야 몸이 흔들리지 않지.”

“무 선배님, 진짜 사격 천재 같으세요.”

“잘하긴 잘하네. 저 정도면 눈 가리고도 맞힐 정도인데…. 이틀 뒤에 한백호 팀이랑 작전 나가면 볼 만하겠어.”

윤모난은 진심으로 무구원의 인상적인 사격 실력에 감탄했다.

무구원은 반동이 크고 제어하기 어려운 묵직한 총도 잘 다뤘지만, 소구경 고속 탄을 쓰는 개량형 소총을 쥐여주니 거의 날아다니는 수준이었다. 아무래도 이력서에서 본, 꽤 인상적이었던 개인 성적은 모두 현장에서 사격으로 딴 듯싶었다.

새로운 팀 구성으로 인해 무구원은 거의 3개월 동안 출동이 없었고, 슬슬 몸이 근질거리고 있을 터였다.

“십자.”

“…네.”

“오늘은 대답 잘하네? 이따 우리 팀 단체 영화 관람 끝난 뒤에 한 시간 정도 둘이 회의해야 할 거 같은데요. 한백호네 팀에서 이번 출동 관련해서 서류를 넘겼는데, 같이 검토할 게 있어서.”

“알겠습니다.”

무구원은 짧게 대답한 다음 도로 사격을 시작했다. 옆에 있던 경해국이 웬 영화 관람? 하는 얼굴을 하다가 그제야 오늘이 윤모난 뇌 의식 영상을 보는 날이라는 것을 깨닫고 다가왔다.

윤모난이 그동안 두 번이나 정신 감정서를 공유했지만, 이미 알고 있는 증상 말고는 딱히 별다를 것도 없었기에, 경해국은 자신이 뇌 의식 영상을 공유하라고 강짜를 부린 것도 잊고 있던 눈치였다.

“그 영화 관람은 몇 시에 모입니까?”

“병동으로 5시까지 오시죠.”

“아, 저녁 먹고 보면 안 됩니까? 왜 애매한 시간에….”

윤모난은 짧게 한숨을 내쉬더니 그럼 저녁 먹고 7시에 모이라며 계획을 바꿨다. 대충 팀 훈련이 마무리되어가는 시간이었고, 윤모난은 볼 서류가 많다며 만사 귀찮은 얼굴로 이내 훈련실을 나가 사라졌다.

“야, 찌찌 애비. 한 시간만 더 하다 밥이나 땡기러 가자. 무씨, 너도 같이 갈 거지?”

“…그래.”

“선배님, 제발 저 한 번만 자세 좀 다시 알려주세요. …팀장님이 이번에 17m 사격 8점대로 못 맞히면 또 모난이 가지고 훈련한다고 협박하셨어요.”

“시팔… 윤 팀장 지독한 인간.”

경해국은 애 좀 봐주라며 무구원에게 안범을 떠밀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악당 윤모난은 뱀 귀신이라도 제대로 들렸는지, 사격 훈련을 제대로 시켜주겠다며 팀원 세 명의 목에 모난이를 포함한 남경의 독사 세 마리를 두르고 사격을 시키는 짓거리를 자행했다.

그로 인해 안범은 물론이고 경해국마저 밤에 자다가 악몽을 꾸는 지경이었는데. 이미 독 맛을 본 무구원은 독사가 무섭다기보다는 그날 복종의 훈련에서 느낀 감정과 기억으로 인해 괴로운 상황이었다.

결국 팀원들은 팀장이 만족할 정도의 사격 점수가 나오고 나서야, 뱀 지옥에서 탈출할 수 있었다. 경해국은 처음으로 폭력이 아니라 투서를 써서 악마 팀장을 고발하겠다는 정상적인 방식도 떠올렸으나, 투서를 넣는 고발함이 사실상 익명이 아니라 공개 망신인 점만 뼈저리게 깨달았다.

고발함에 넣은 지 반나절도 안 되어 윤모난이 투서를 가지고 훈련장에 난입했던 것이다.

“윤 팀장, 저거 투서 사건 때도 자기는 대인배니까 넘어가주겠다고 하더니. 파동 역학 따로 공부하라고 쪽지 시험까지 보면서 뒤끝 작렬이고. …저런 악질 또라이가 어떻게 지금까지 칼침을 안 맞은 거야?”

“팀장님한테… 감히 칼침을 놓을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요?”

“야. 안범 너 사시미 잘 다루잖아. 어떻게 못해?”

“저… 저요!? 팀장님이 좀 성격이 까다롭고 예민하시구, 혐오 동물로 사람을 겁박하고 때리는 정신 질환자이긴 하시지만. 입은 은혜가 있는데 제가 어찌….”

“언제든 결심이 서면 말만 해줘. 씹, 나도 팀장 담가버리는 데 참여할 거니까.”

“…무 선배님이 저격 총으로 사격하는 게 정확…. 아니, 아닙니다! 제가 무슨 말을! 경 선배니임, 조심하세요. 팀장님이 아무래도 우리 훈련실 안에 도청 장치 심어놓으신 것 같단 말이에요오. 우리가 욕하면 바로 아시더라구요.”

안범이 겁에 질려 오들오들 떨자, 경해국도 긴장했는지 훈련실 구석구석을 살피기 시작했다. 그들이 겪은 바에 따르면 윤모난은 훈련실은 물론이고 합숙소 방에다가 도청 장치를 심어놓았다고 해도 놀랍지 않은 인물이었다.

그렇게 속닥거리고 있던 두 사람은 갑작스레 싸해지는 기분에 고개를 번쩍 들었다. 무구원이 멍한 얼굴로 총구를 이쪽을 돌리고 있었다.

“뭐야! 시발, 깜짝이야.”

“…팀장님 얘기 그만해라.”

“미친, 썅! 왜 그 말을 총 겨누면서 하냐고! 그렇게 윤 팀장의 윤 자도 듣기 싫냐?”

“우리 중에서… 무 선배님이 가장 많이 당하긴 하셨어요.”

“무씨, 네 마음은 다 이해한다. 저놈 피골상접한 것 좀 봐라. 애가 두 달 동안 얼굴 꼴이 말이 아니게 됐네. 너 지금이라도 너희 형님 팀으로 가라. 너라도 이 지옥을 탈출하란 말이야!”

“…이만 간다.”

무구원은 그나마 있던 밥맛도 떨어졌다. 총을 내려놓고 경해국과 안범을 지나쳐 훈련실을 나섰다. 샤워실에 가서 한참을 찬물을 맞고 나서도 전혀 정신이 깨이지 않았다.

집중을 못한다는 건 큰 문제이다. 윤모난이 같은 공간 안에 있는 경우에는 특히 더 그랬으니, 단둘이 해야 하는 회의가 벌써부터 겁이 나기도 했다. 무구원은 처음으로 어머니 신께 물을 수 없는 문제에 봉착했고, 특히 기도를 하면 할수록 사그라들지 않는 생각에 회의감마저도 느꼈다.

윤모난에게 어떤 감정을 느꼈다는 것은 무구원이 지금껏 살아온 가치관을 무너뜨리는 일생일대의 사건이었다. 뻔뻔하고 능글맞은 양아치 호모 윤모난은 숨 쉴 틈도 없이 제 가치관들을 침해한다는 점에서 이미 거슬리는 수준을 넘었다. 옆집 사람이 친근한 미소로 방문하더니 냉장고에서 갑자기 음식을 꺼내 먹고 화장실에서 똥을 싸고 안방에 드러누운 수준이랄까.

무구원은 진지하게 자신이 그간 성욕을 과하게 억제했던 것은 아닐까 반성했다. 너무 억눌러온 탓에 약도 없이 분홍 머리 호모한테 꼴렸을 가능성도 있다. 무구원은 급기야 무정원에게 고농도 청파액을 부탁해 목구멍에 들이붓고 영원히 고자가 되는 방법을 떠올렸다.

그런 생각은 꽤 구체적인 결심이 되어 어느새 무정원의 팀 훈련실로 향하기에 이르렀다.

“…다른 방법도 있을 텐데, 모난아.”

긴 복도를 따라 걷는 와중에 익숙한 목소리와 이름이 들렸다. 이 차갑고 낮은 목소리는 무정원의 것이다. 무구원은 자신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고 어두운 복도 쪽을 봤다. 어디서 소리가 들리는지 정확하지 않았지만, 귀를 기울여야 들을 수 있었으니 방 안이거나 아니면 복도 끝인 듯했다.

“형, 제가 알아서 한다고 했잖아요.”

이번에는 윤모난이다. 목소리가 무정원만큼 가라앉아 있었다. 이어서 무정원이 한숨을 내쉬는 소리가 울려 퍼진다. 그 숨소리에 무구원은 돌아서서 가려던 것을 잊고 말았다.

“모난아, 넌 내가 아끼는 사람이다. 내가 도울 수 있는 게 있으면 도와주고 싶어.”

“…….”

“네 상태가 더 나빠지니 걱정이구나.”

순간 무구원은 충격을 받았다. 저게 자신이 알던 형님이 맞나?

자신보다 7살이 많은 큰형 무정원, 북해 무씨의 차기 가주가 될 그는 제 친동생들에게도 저런 식으로 말한 적 없었다. 무정원의 아래로는 모두 여섯 명의 동생이 있다. 남자 형제 네 명, 여자 동생 두 명은 모두 무정원을 그저 형이라기보다는 북해를 이끌 차기 가주이자 그들의 우두머리로 깍듯이 대했다.

무구원이 어린 시절, 무정원은 아픈 아버지 대신 동생들의 훈련 학교 성적을 점검하고 때에 따라 가혹한 체벌을 내리는 부모님보다도 무서운 형님이었다. 무구원이 국가이능력기관에 들어오게 된 것도 무정원이 명령한 진로였다. 말로는 자신의 뒤를 이어 국가에 봉사하라고 했지만, 동생은 차기 가주의 뜻을 파악했다.

씨앗의 의식을 통과하지 못한 이단자인 무구원을 북해에 살게 할 수 없다는 결정인 것이다. 무간에서 전사하든, 영원히 기관에서 복무하든 무구원은 비공식적으로 고향에서 사는 것을 금지당한 상태였다.

“알았어요.”

“일단 들어가서 더 얘기해보자.”

두 사람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무구원은 본능적으로 더 안쪽 벽에 몸을 숨겼다. 그런데 복도를 따라 걷는 발걸음 소리가 유독 늘어지더니 잠깐 멈췄다. 그리고 이내 고요가 이어진다. 두 사람은 무얼 하는지 복도 중앙에서 멈춰 선 채로 움직이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무구원.”

순간 벽에 숨어 있던 무구원의 뺨에 묘하게 찬기가 스치고 지나갔다. 무구원은 고개를 떨구고 무정원의 부름에 홀린 듯이 밖으로 나왔다. 두 사람의 시선이 날아와 꽂히는 것이 느껴진다. 무구원은 고개를 들어 가장 먼저 무정원 옆에 서 있는 윤모난을 봤다.

그는 약간 어두운 얼굴로 담배를 손에 든 채로 피우지 않고 그대로 태우고만 있었다. 서류 볼 것이 많다는 것은 핑계였고 이곳에 볼일이 있었던 거였다. 제 형과 여기서 무얼 하고 있었는지 모르지만 표정이 꽤 심각했다.

“무구원, 몰래 엿듣는 버릇은 너답지 않구나.”

무정원의 목소리에는 얼음이 끼어 있었다. 무구원이 시선을 피하듯 고개를 숙인 순간, 검은 가죽 장갑을 낀 무정원의 손이 그 얼굴을 거칠게 틀어잡는다.

“어딜 감히 시간을 돌릴 생각을 해?”

“…….”

“형.”

그때 윤모난이 갑자기 옆에서 끼어들었다. 두 형제의 시선을 한 번에 받으며 윤모난이 바닥에 다 타버린 담배를 아무렇게나 버리면서 말했다.

“뭘 그렇게 말을 길게 해요? 딱 세 대만 때려서 가르쳐줘요.”

윤모난의 입가에선 실실 웃음이 새고 있었다. 무구원, 이 싸가지 없는 놈, 너 잘 걸렸다. 오늘 한번 뒈져봐라. 딱 그런 표정이다.

“형네 동생 예의를 너무 밥 말아 먹었다구요. 팀장이 아침 먹으러 가자고 해도 무시, 말을 걸어도 무시. 무시, 무시, 개무시―”

아까의 심각한 기색은 어디 가고 능청이나 떨면서 무구원의 버르장머리를 싹 고쳐야 한다고 주장하는 그는 시종일관 흥미롭다는 기색이었으나 무구원은 마치 재수 없는 담임이 전화로 엄한 부모님에게 제 행적을 낱낱이 일러바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무정원은 그런 윤모난의 말을 듣고선 다시 무구원을 흘긋 보았다.

“저 말이 사실이니?”

한편 윤모난은 이 상황을 순전히 즐기고 있었는데 그건 뭔 말을 해도 방자한 태도를 고치지 않던 무구원이 큰형님 앞에서 긴장한 모습이 꽤 흥미로웠기 때문이었다.

두 형제는 이렇게 붙여놓으니 피를 나눈 사이답게 닮은 구석이 꽤 많았다. 그러나 좀 더 앳되고 아직 제련되지 않은 무구원은 때때로 감정이나 기분을 숨기지 못하는 면이 있었고, 지금도 고양이 앞의 쥐처럼 바짝 굳은 채였다. 형 손에 잡혀 언제 혼날까 겁먹은 모습이 평소 뚱하고 로봇 같던 면모와 달라 꽤 귀엽다는 생각도 든다.

“대답도 안 하는군. 이렇게 제멋대로인 적 없었는데.”

“죄송합니다.”

“대답을 대충 해서 한 대 더 맞아야겠다. 쯧쯧.”

이게 딱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옆에서 한마디 더 얹는 시누이가 더 얄미운 격이다. 무구원은 최선을 다해 불난 곳에다 부채질을 하는 윤모난의 모습을 보며 묘하게 배신감을 느꼈다. 한편으로는 무정원과 윤모난 사이에서 느껴지는 깊은 친밀함이 묘하게 낯설고 신경 쓰이기도 했다.

어쩐지 무정원은 친동생인 자신보다 윤모난과 더 가까워 보인다.

“형. 아니면 얼려버려요, 그냥.”

“…처분은 나중에 따로 하마.”

“아쉽네.”

처분은 나중에 한다고 했지만, 그건 말 그대로 처분이고 심문은 계속 이어졌다.

“무구원, 왜 숨어서 대화를 엿들었지?”

이 상황에서… 자신이 윤모난에게 꼴려 괴로운 나머지 후천적 고자가 되기 위해 고농도 청파액을 부탁하러 왔다는 소리를 누가 할 수 있을까. 얼굴에 철판 오천 겹을 깔았다고 해도 못할 말이다. 하지만 무구원은 거짓말에 재주가 없었다.

특히 무정원 앞에서 거짓말을 하면 바로 들켜서 더욱이 그랬다. 무구원은 맞는 게 두렵다기보다 여길 왜 왔는지 밝히는 게 더 두려워 점점 식은땀이 나기 시작했다.

“나 찾으러 왔지, 뭐. 아니에요? 형 만나러 간다고 얘기하고 나왔거든요.”

그때 얄미운 시누이가 뜬금없이 구세주로 나섰다. 윤모난은 능청스럽게 목덜미를 긁적거리면서 무구원 대신 거짓말을 해주기 시작했다.

“오늘 팀 스케줄이 많아서 나 찾으러 온 모양인데 보내줘요. 쥐새끼처럼 군 건 잘못이니까 나중에 처분하시고.”

“…그래?”

“네, 아직 어리잖아요. 무구원 그냥 애예요. 아기.”

그런 말은 윤모난식의 능청이었고, 다행히 두 형제 사이의 긴장도 조금은 완화되었다. 윤모난은 가만히 선, 190cm가 넘는 장신의 아기 무구원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무구원 씨, 저녁이나 먹으러 갑시다.”

“…네.”

“형, 다음에 마저 얘기해요. 오늘은 불청객이 있어서 안 될 것 같네.”

어쩐지 무구원은 자신에게 팔을 두르고 있는 사람도 이 자리를 피하고 싶어 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아마도 아까 단편적으로 들었던 심각한 대화가 이유인 듯하다. 아니나 다를까 무정원이 윤모난을 붙잡았다.

“모난아.”

“나중에 얘기해요, 형.”

무구원은 떠나기 전 형님에게 묵례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렇게 윤모난과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하고 엘리베이터에 타자 다시 침묵이 찾아왔다. 윤모난은 한쪽 손을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로 딴생각에 빠져 있었다.

뭔가 일이 있으니 무정원에게 상의한 듯한데…. 무구원은 그게 무엇일까 하는 궁금증보다는 어쩐지 연민이 들었다.

윤모난은 3년 전 일로 남경 윤씨에서 겉돌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정신 질환에 시달리고 있다. 힘들고 괴로운 일이 있어도 그의 곁에는 털어놓을 가족도 없는데, 그렇다고 친구가 있는 것 같지도 않다. 그 와중에 죽은 형들과 나이가 같은 무정원을 꽤 믿는 듯 보이지만 아무래도 경쟁 가문의 후계자이니 속내를 모두 털어놓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무구원은 종종 윤모난의 눈빛에서 상실을 발견했고, 그건 윤모난에게 느낀 욕망과 상관없이 그를 끌어당기는 중력이었다. 그걸 동질감이라 부를 수 있을까. 생각을 이어가던 중 윤모난이 대뜸 말문을 열었다.

“십자는 친형이랑 별로 안 친한가 봐요.”

“아무래도 북해의 차기 가주가 될 분이니까요.”

“다른 형제들하고도 안 친해요?”

“누이동생과는 꽤 친합니다. 다른 남자 형제들은 저랑 비슷하구요.”

“여동생이 몇 살인데?”

“21살이요.”

“…보고 싶겠네. 서곡에 있으면 1년에 겨우 한 번밖에 집에 못 가잖아.”

그 말엔 묘한 우울함이 묻어 있었다. 윤모난은 평소와는 달리 분위기가 가라앉아 있었고, 아까 능청을 떨며 농담을 할 때도 억지로 애쓴다는 느낌이 강했다. 두 사람은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약속하지도 않은 저녁을 먹기 위해 함께 식당 쪽으로 걸었다.

벌써 추운 겨울이 끝나고 초봄으로 접어들 즈음이지만, 위도가 높은 곳에 위치한 서곡은 여전히 꽤 추웠다. 윤모난은 별다른 말 없이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한 발자국 앞서 걸어가고 있었다. 무구원은 자신과 비슷한 높이에 있는 남자의 어깨 쪽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따라갔다.

그를 굳이 따라잡지 않은 건, 우울한 윤모난이 너무나도 낯설었기 때문이다. 무구원은 고민 끝에 머뭇거리며 물었다.

“곧 기일… 아닙니까?”

무구원이 신입으로 들어오고 딱 두 달 정도 흘렀을 때 윤모난을 만났고, 그날 세 형제가 무간으로 출전했다. 항상 시간을 곱씹어보는 것에 익숙한 무구원은 오늘로부터 일주일 뒤가 윤씨 형제의 기일이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응.”

“남경에 내려가셔야죠. 휴가 내실 겁니까?”

“아니.”

“…팀장이니 이틀 정도 휴가 내는 게 어렵진 않을 텐데요.”

“가봤자 빈 무덤에 향불이나 올리고 싫은 소리만 들을 텐데. 뭐.”

“기일을 챙기는 건 망자를 위해서가 아니라 남은 사람들을 위해서입니다. 상실을 계속 되새김질하는 건….”

“고통을 긍정하는 거라고?”

순간 윤모난이 표독스레 물으며 돌아봤다. 경전에 있던 구절을 인용하려던 무구원은 그에게 하려던 말을 빼앗기고 머쓱해졌다. 제대로 화난 윤모난의 표정과 마주했기 때문이다.

무구원은 1분 전으로 시간을 돌렸다.

“곧 기일 아닙니까?”

“응.”

“남경에 내려가셔야죠.”

“가봤자 빈 무덤에 향불이나 올리고 싫은 소리만 들을 텐데, 뭐.”

“…그럼.”

무구원은 마른 입술을 꾹 깨물면서 다음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망설였다. 막상 시간은 돌렸지만 내뱉을 말이 없어 침묵이 늘어졌다. 한 번 더 시간을 돌릴까 하다가 무구원은 그냥 평범한 말만 꺼내고 말았다.

“…저라면 그래도 갈 것 같습니다.”

“…….”

“아직은 애도와 슬픔을 충분히 누려야 할 때이니까요. 때를 놓치면 더 힘드실 겁니다.”

윤모난은 바꾸기 전의 시간에서처럼 뒤를 돌아봤다. 돌아선 그의 눈가는 약간 젖어 있지만 그다지 날 서 있지는 않았다.

“내가 알아서 할게. 왜 갑자기 남의 집 제사를 신경 써?”

역시 윤모난은 만만치 않았다. 이번에 그는 뒤를 쫓아오는 뚱한 표정의 남자를 위해 약간 속도를 늦췄고, 무구원은 걸음을 조금 더 빨리했다. 그렇게 나란히 걸으며 두 사람은 이틀 뒤 나갈 작전에 대해서 짧게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마치 방금까지의 일들과 대화는 없었단 듯이.

식당에 도착하자 마침 밥 먹으러 들어가던 경해국과 안범을 마주쳤다.

“어? 티… 팀장님.”

“십자가 자꾸 아침 식사를 빠지길래 내가 끌고 왔어요.”

“젠장, 또 뱀 가지고 협박하셨습니까?”

“아니, 미모로 꼬셨지.”

“…아휴, 네.”

윤모난이 식당 줄에 서 있는 사이 경해국과 안범이 달려와 몰래 무구원의 등을 주먹으로 퍽퍽 갈겨댔다.

“시팔, 무구원, 밥 좀 편하게 먹자! 윤 팀장 왜 데려왔어. 너 프락치냐?”

“…….”

“무 선배님… 밥이… 밥이 얼마나 중요한지 아세요? 특히 서곡 식당은 석식에 가장 맛있는 메뉴가 나옵니다. 오늘의 메뉴는 돈가스. 하지만 아무리 돈가스를 먹은들 체한다면 무슨 소용일까요!”

확실히 윤모난은 두 달이 되어가는 이 시점에서 착실하게 2부 7팀의 빌런이 된 듯했다. 팀장이 공공의 적이 되면서 2부 7팀 팀원들 사이의 동지애도 비교적 끈끈해졌는데, 윤모난의 독재 속에서 착실하게 피어난 건 그것만이 아니었다.

그간 윤모난은 귀신에 씐 사람처럼 아침부터 밤까지 팀원들을 굴려댔다. 매일같이 강도 높은 훈련이 이어졌고, 녹초가 된 팀원들은 밤늦게 합숙소에 돌아가 쓰러져 자는 것이 일상이었다. 그 덕에 모두 성과 하나만은 무서운 속도로 내고 있었다.

그 와중에 윤모난은 이 극악의 스케줄을 소화하면서도, 새벽에 잠을 줄이고 나가서 온갖 귀찮은 서류를 처리하고 개인 훈련까지 하고 오는 듯했다. 무구원은 입맛이 없어 대충 배식을 받아 이미 자리를 잡은 윤모난 앞에 앉았다.

“…팀장님은 그것만 드십니까?”

“어.”

무구원은 윤모난이 제대로 된 밥을 먹는 걸 본 적이 없었다. 아침은 두유로 때우는 게 다반사였고 가끔가다 점심으로 샌드위치, 저녁은 밥을 깨작거리며 먹거나 아예 거르는 일도 부지기수였다. 오늘은 착실하게 반찬을 다 담아는 왔지만 쥐똥만큼씩이었고, 그마저도 건드리지 않고 있었다.

“식사하시는 걸 제대로 본 적이 없는데요.”

“하아, 밥 타령도 지겹다고. 여기 밥은 싱겁고 별로 맛도 없어.”

안 먹는 게 단순히 입맛에 안 맞아서 편식하는 거였나. 남경의 음식은 확실히 간이 세다고는 하는데, 식당 밥은 이 정도면 꽤 맛있는 수준이고 간도 적절했다.

윤모난은 대놓고 먹기 싫단 얼굴로 반찬을 뒤적거리고만 있었다. 식사 예절이라고는 지나가던 개한테 던져준 듯한 모습에 무구원은 자기도 모르게 핀잔을 줬다.

“그렇게 드실 거면 차라리 안 드시는 게….”

“나도 먹기 싫은데, 아예 굶으면 근손실 난다구요.”

윤모난은 젓가락으로 휘적거리던 반찬에서 먹기 싫은 걸 발견한 모양인지 얼굴을 찌푸렸다.

“씨…. 대체 온갖 음식에 당근은 왜 처넣는 거야.”

“…….”

“된장국에 당근은 신선하네.”

오늘따라 기분이 별로인 윤모난은 된장국에 빠져 있는 주황색 야채에 화풀이나 하고 있었다. 무구원은 배식구 쪽을 한번 쓱 봤다. 경해국과 안범은 자리에 앉기 전에 최대한 밥을 편하게 먹겠다며, 구석에서 선 채로 밥을 빠르게 떠먹고 있었다.

무구원은 손을 뻗어 윤모난의 된장국에 동동 떠다니는 당근 하나를 건져 자신의 식판으로 가져갔다. 그러곤 이어서 나머지 당근들도 제 쪽으로 옮겼다. 운이 안 좋았는지 윤모난의 국에 유독 당근이 많았다.

“뭐야.”

윤모난은 얼굴을 찌푸리며 물었다.

“십자, 당근 좋아해요?”

“…네.”

아니, 무구원도 당근은 싫었다. 이상한 향이 나고 달짝지근한 주황색 이물질을 된장국에 넣을 생각 따위를 한 주방장의 머리통 뚜껑을 열어 그 안을 보고 싶을 만큼. 하지만 무구원은 어른이었고 모든 음식을 감사하며 먹는 것은 천경교 신도라면 기본이었다.

윤모난은 무구원이 당근을 좋아한다고 대답하자 얼굴이 활짝 폈다.

“그럼, 이제부터 십자가 나 먹기 싫은 당근 먹어주면 되겠다.”

“…주세요, 다.”

“혹시… 오이는 어떻게 생각해. 나 오이도 싫어하는데 얘도 좀 가져가.”

“…….”

“명령입니다.”

저 인간은 과연 처먹을 수 있는 게 있긴 한 건지. 무구원은 주먹을 말아 쥐며 내뱉을 뻔한 진실의 말을 꾹 참았다. 그렇게 쌀밥 옆에 차곡차곡 쌓인 윤모난 몫의 오이와 당근을 차분히 먹던 무구원이 문득 말문을 열었다.

“팀장님.”

“왜요.”

“…저희 형님과 많이 친하십니까?”

순간 윤모난의 눈가가 살짝 경련하는 모습을 포착한 무구원은 약간 의아해졌다.

“그건 왜… 물어?”

“물으면 안 됩니까? 제가 알면 안 되는 거라도 있습니까.”

어. 알면 안 되는 거 있지. 너네 형이랑 과거에 떡치는 사이였다는 거.

솔직히 그렇게 밝힌다고 해도 윤모난이 받을 피해는 별로 없었다. 다만 무정원의 위신을 위해 비밀로 할 뿐이다. 무정원은 북해의 차기 가주에 전투조 정예 팀의 수장이었고, 같은 팀장이라고 해도 사실상 직급도 더 높으니 영향력 자체가 비교도 안 됐다.

30살의 무정원은 다섯 가문의 후계자들 중에서도 군계일학이었다. 큰 걸림돌만 없다면 향후 반도 평의회는 그를 중심으로 돌아갈 거였다. 반도에서는 가장 뛰어난 인물인 것이다. 모범생인 윤모난의 큰형조차 훈련 학교 시절에는 항상 무정원에 밀려 만년 2등 신세였다.

원래 북해인들은 정치로 그다지 두각을 나타내는 집단은 아니었다. 하지만 천경교의 성지가 북해에 있고 국교이니만큼 그 신도들이 많아 전통적으로 북해 가문의 입김은 꽤 대단했다.

무정원은 그런 신도 집단의 절대적인 지지와 함께 탁월한 정치 감각까지 가지고 있었다. 그건 정부의 요직을 마다하고 센터에서 팀장이나 하면서 썩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전장에서 피를 묻히고 구르기를 자처하는 무정원은 그런 점에서 유독 다른 이들의 존경과 지지를 받았다. 무정원은 다섯 가문의 자식들이 쉽게 요직을 차지하며 목을 꼿꼿이 세우는 것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을 의식했던 것이다.

한편으로 그는 북해 출신 포스트들만 팀에 영입했고 소위 외부인들과는 꽤 거리를 두었다. 너무 친근해 보여도 무시당하기 십상이었으니까. 이러한 노력 덕에 서곡 내에서는 감히 무정원에게 말조차 붙이지 못하는 사람이 대다수였다. 무정원은 대중의 존경과 적개심 사이에서 균형을 탈 줄 아는 사람이었다.

“정원 형이 우리 형들이랑 훈련 학교 동창이잖아. 남경에도 몇 번 놀러 왔고.”

“그렇군요.”

“형이 좀 뭐랄까, 나랑 코드가 잘 맞는 면이 있거든.”

“무슨 코드 말입니까?”

한마디로 무정원은 딱 윤모난의 취향이었다. 그리고 무구원을 보면서 윤모난은 자신에게 북해 남자 페티시라도 있나 생각하던 차였다.

“웃음 코드.”

“…형님은 딱히 웃긴 분이 아닌데요.”

“내가 웃기면 잘 웃어주던데.”

“웃음이 많은 분도 아니구요.”

“나도 아는 걸 동생은 모르나 보네. 십자도 좀 웃으세요. 형처럼 예쁘게 웃으면 더 좋을 텐데.”

“…예쁘….”

무구원은 윤모난이 자신에 이어서 무정원에게까지 불손한 말을 하자, 머릿속 퓨즈가 나가버린 것만 같았다. 둘이 얼마나 친한 줄은 모르지만, 감히 북해의 차기 가주인 형님을 두고 예쁘다고 하다니. 북해에서 누가 저런 말을 했다간 바로 채찍형감이다.

당장 윤모난을 북해로 데려가 채찍을 때릴 수 없었던 무구원은 대신 오이와 당근을 집중적으로 입에 욱여넣었다.

“와― 십자, 당근하고 오이 엄청 좋아하나 보네. 안 줬으면 어쩔 뻔했어?”

“…아, 네.”

“나도 뭐 하나 물어볼게요. 오늘 우리 대화는 왜 엿들었던 겁니까?”

아.

무구원은 아차 싶었다. 무정원 얘길 괜히 꺼내선 아까 전의 민망했던 상황만 다시 상기시켜버린 것이다.

“형님께 볼일이 있어 갔는데, 우연히…. 왠지 심각하길래 끼어들면 안 될 것 같아서 그랬습니다.”

“그럼 그냥 돌아서 나갔어야지. 형 성격 몰라요? 위치상 세작이나 간자가 있을까 봐 항상 경계하잖아. 그쪽으로 예민한 사람인데 안 들킬 거라고 생각한 게 용하네.”

“네, 형님은 가족에게도 사생활을 밝히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시죠.”

평생 밝혀지지 말아야 할 무정원의 ‘사생활’ 중 큰 지분을 차지하고 있는 윤모난은 대충 맞장구를 치며 딴청을 피웠다. 때맞춰 이미 구석에서 식판 하나 분량을 해치우고 태연히 새 식판을 들고 온 경해국과 안범이 자리에 와서 앉는다.

“어우, 배고파. 줄이 너무 기네요. 얼른 먹어야지.”

“…입에 기름 묻었어. 닦기나 해, 이 자식들아.”

“어? 무 선배님 왜 식판에 오이랑 당근을 따로 골라놓으셨어요? 혹시 편식하십니까?”

“그러게, 십자 버릇이 너무 잘못 들었더라. 된장국에 들어간 당근 싫다고 저렇게 건져놨다니까. 쯧쯧.”

윤모난은 남에게 편식 누명을 씌우면서 뻔뻔하게 굴었다. 무구원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어차피 대들어봤자 더 큰 화만 입게 될 뿐이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경해국과 안범의 비난이 날아들었다.

“무씨, 까다롭다 까다롭다 하더만 키는 전봇대 같은 놈이 편식이라니! 얼른 처먹어, 이놈아! 찌찌 애비도 편식은 안 하더라.”

“…무 선배님, 요즘 정말 왜 이러십니까? 편식이라니요? 반도에서 채소와 식자재가 얼마나 귀한 줄 모르진 않으시죠? 제가 자란 남도에서는 당근 한 바구니에 청어 다섯 마리를 줘야 한다구요.”

“얘가 요즘 맛이 갔다니까. 상사인 팀장님이 불러도 개무시를 하지 않나. 아까는 팀원들을 총으로 쏘려고 하질 않나. 아침 식사도 안 나오고! 무씨 네놈이 이기적인 건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티임―워크으―라는 게 있는데 말이지. 어?”

간악한 윤모난의 개들이 뭐라고 짖어대건 무구원은 꿋꿋하게 밥만 먹었다.

“저, 저 무씨 표정 봐라. 뭐라 해도 뚱한 표정만 짓고. 로봇이 따로 없다.”

“무 선배님! 가끔 전 선배님이 너무 어렵습니다. 왜 뭐라 말을 해도 항상 무시하고 대꾸도 안 하세요?”

분명 경해국과 안범은 그간 윤모난에게 받은 스트레스를 무구원에게 풀고 있는 게 분명했다. 하지만 이런 비난에는 꽤 무딘 그는 끝까지 상대하지 않고서 귀공자처럼 바른 자세로 식판 위의 음식을 다 비웠다.

그렇게 저녁 식사를 마치고 넷이 식당을 나오는데 윤모난이 무구원의 옆에 바짝 붙더니 귓가에 입김을 후 불었다.

“잘 참았어요. 역시 십자는 내 다리라니까.”

어머니 신이시여! 순간 무구원은 윤모난의 얼굴을 들입다 갈겨버릴 뻔했다. 그는 얼른 몸을 떨어트리며 억눌린 목소리로 답했다.

“…다리가 아니라 방패겠죠.”

“내가 은원에 관해서만큼은 또 확실하지. 당근 먹어준 은혜는 꼭 갚겠습니다.”

“오이도 먹었습니다.”

“응? 아, 맞지. 알았어, 오이도 잊지 않을게.”

“참고로 저도 오이 정말 싫어합니다.”

머릿속이 뒤죽박죽인 무구원은 헛소리를 내뱉고선 도망치듯 휙 가버렸다. 윤모난은 그런 그의 뒷모습을 보다가 자기도 모르게 또 실없이 웃고 말았다. 뚱한 얼굴로 오이를 참고 먹던 무구원의 모습을 떠올리자 퍽 귀엽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복종의 훈련 이후로 무구원은 여전히 여러 번 짖기는 했지만 착실히 길이 들고 있었다. 안범과 경해국도 어쨌건 팀장인 자신을 믿고 훈련의 성과를 내가는 중이었다.

…나만 잘하면 되겠지.

어깨가 점점 무겁게 느껴졌다. 향정신성 약 복용량을 점차 줄여가고 있었지만, 정신머리는 더 들락날락하고 능력은 회복되지 않는다. 뇌 의식 영상 상영회를 위해 팀원들과 함께 병동으로 향하면서 마음이 점점 더 복잡해졌다.

“누워서 움직이지 마세요. 영상은 실시간으로 송출될 거고 시간은 윤리적 규정으로 인해 한 시간까지입니다.”

“네.”

“물론 규정상 영상 녹화도 금지합니다. 안심하세요.”

병동에 도착해 윤모난은 검사실로, 나머지 팀원 세 명은 따로 브라운관 TV가 있는 방에 들어갔다. 병동에 근무하는 정신계 에스퍼가 윤모난의 두피에 전극을 붙이고 관자놀이에 손가락을 댔다.

“뇌 의식 영상화해본 적 있으신가요?”

“네. 한 번.”

“대단하시네요. 저라면 팀원들한테 뭐가 되었든 제 머릿속은 보여주고 싶지 않을 것 같은데. 속으로 다섯까지 세시죠. 천천히 무의식 상태로 인도하겠습니다.”

윤모난은 속으로 다섯을 세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뇌 의식 영상은 한 개인의 무의식으로 가라앉은 꿈, 기억, 충동, 욕망들을 보여준다. 그건 기하학적이거나 상징적인 이미지 몽타주이기도 했고 안정된 사람의 경우 프랙털 구조를 띠기도 했다. 다만 정신이 불안정한 사람일수록 무의식을 뇌가 미처 단순화하지 못해서 영화처럼 사실적인 이미지로 나타난다.

한 시간이 흐른 뒤, 정신계 에스퍼가 윤모난의 의식을 깨웠다. 그는 부착해놓은 전극 장치들을 떼어내면서 주저하다가 말했다.

“저 윤 팀장님… 이걸 정말 한 달마다 팀원들에게 보여주실 겁니까?”

“좀 끔찍한가요?”

“네, 무서워서… 중간에 그만두고 싶었을 정도로요.”

“…….”

“직무를… 수행하기 어려우실 텐데요.”

“괜찮았는데 요즘 유독 그러네요. 딱 이맘때쯤에 안 좋은 일이 있었거든요.”

정신계 에스퍼는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더니 처방전을 적어서 내밀었다.

“약을 끊으실 때가 아닙니다. 정신이 또 붕괴되면 정신보호센터로 가셔야 해요.”

“그건 제가 알아서 합니다.”

“지금은 위험한 스펙트럼에 있다는 것만 알아두세요.”

“네, 감사합니다.”

윤모난은 검사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다음 뻑뻑해진 눈가를 비비면서 정신을 차리려 했다. 목에 이상한 갈증이 끓어서 검사실을 나오자마자 허겁지겁 담배부터 물었다.

그렇게 하얀 연기 사이로 복도에 서 있는 2부 7팀 팀원들이 보였다. 그들은 일제히 팀장을 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친 순간 안범이 복도에 있는 쓰레기통을 붙잡고 먹은 저녁을 다 토했다.

“거봐, 저녁 먹기 전에 보는 게 나았겠지?”

안범은 무어라 대답하려다 말고 한 번 더 토했다. 무구원과 경해국도 약간 충격받은 얼굴로 말없이 윤모난을 보고만 있었다.

한 시간 전, 팀원 세 명은 관람실 안에 있었다. 윤모난이 검사실에 들어간 지 얼마 안 되어 브라운관이 치지직거리더니 영상이 흘러나왔다. 처음 삼십 분은 끝도 없는 어둠만 이어졌다. 별다를 것 없는 검은 화면은 일렁이다가 흩어졌다가 다시 진해지기를 반복한다.

“…뭐야? 고장 났나?”

산만한 경해국이 고장을 의심하며 텔레비전 옆을 꽝꽝 두드렸다. 그런데 그 순간 화면에서 무언가 스치고 지나간다.

“잠깐. 그만해.”

무구원이 경해국을 말렸다. 화면 속 검은 연기가 점차 흩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드디어 나타난 장면은 비 내리는 풍경이다. 진득한 피로 이루어진 비가 폐허가 된 도시에 내리고 있었다. 회색 도시에 흩날리는 핏빛 비.

“…여기가 무간인가요? 선배님?”

“아니, 무간이랑 비슷하긴 한데. 여기는….”

경해국은 화면 속 도시에서 랜드마크를 발견하고 미간을 잔뜩 구겼다. 잿빛 도시의 한가운데 하얀 유리 정원이 있었던 것이다. 남경의 상징인 흰색의 유리 정원이 창백하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뭐야, 여기 남경인 것 같은데?”

“…그럼, 여기가 윤 팀장님 고향….”

툭―

도시의 하늘에서 무언가 떨어지기 시작한다. 세 사람은 그것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 눈을 가느다랗게 뜨며 화면에 집중했다.

“모난…이.”

안범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하늘에서 피와 함께 쏟아지는 것은 남경의 독사들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참수된 검은 독사의 머리들이 피와 함께 후드득 바닥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쏟아지고 또 쏟아지고 뱀들의 머리가 나뒹굴면서 지옥도가 펼쳐졌다.

화면을 가득 채운 그 끔찍한 광경에 안범은 눈을 질끈 감았다. 반면 경해국과 무구원은 눈 한 번 깜빡일 수조차 없었다. 남경의 유리 정원 꼭대기에 누군가 서 있었다. 너무 작게 보여 얼굴을 확인할 수 없었지만, 분홍 머리가 언뜻 보인다.

다음 화면에 그 형상의 정체가 드러났다. 누군가 그 분홍빛 머리를 손에 쥐고 있었고, 손과 머리는 주인이 따로였다. 잘린 머리의 주인이 누구인지는 바로 알 수 있었지만, 문제는 그 머리를 든 누군가였다.

“시팔, 안범 얼른 꺼…!”

경해국이 경악한 얼굴로 중얼거리자, 안범이 허겁지겁 텔레비전 전원 버튼을 눌렀다. 하지만 화면은 꺼지지 않았다. 윤모난의 잘린 머리를 쥔 남자는 창백한 얼굴로 화면 너머의 셋을 보면서 씨익 웃었다.

그러면서 중얼거린다. 뇌 의식 영상은 소리가 나지 않는다. 하지만 내용은 입 모양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무간에서 기다릴게.’

곧이어 뱀들의 피로 이루어진 파도가 화면을 덮쳤다. 밖으로 그게 넘어올 리 없는데도 안범은 뒷걸음질 치다가 의자에 머리를 부딪쳤다. 화면은 다시 검은색으로 돌아갔고, 시간이 끝날 때까지 다시 그 끔찍한 장면은 돌아오지 않았다.

검사 시간이 끝나고 창백해진 세 사람은 담배를 피우며 나오는 윤모난과 마주했다.

“…왜 말 안 하셨어요? 우리만 모르고 있었던 겁니까?”

무구원은 차가워진 얼굴을 쓸어내리며 윤모난에게 물었다. 윤모난은 담배 연기를 깊이 빨아들이더니 태연스레 경고 조로 말했다.

“…방금 본 건 극비입니다. 셋 다 외부에 발설하지 마세요. 말했다간 바로 남경에서 독사들을 보낼 테니까.”

“무간에서 트랜스로 변한 게 누구십니까. 팀장님의… 첫째 형님입니까 아니면 둘째 형님입니까.”

태우던 담배에서 후드득 회색 재가 떨어졌다. 무구원은 역시 통찰력이 좋다. 뇌 의식 영상에서 본 바를 바로 파악하다니 과연 똑똑한 놈이다. 어차피 윤모난도 숨길 생각은 없었다.

“죽은 둘째 형.”

‘죽은’에 강세를 준 대답이 주저함도 없이 바로 되돌아왔다. 충격은 쉽게 전염됐다.

“팀장 당신… 일부러 숨겼지.”

경해국은 바보 같은 질문을 했지만 무구원은 알 것 같았다. 숨기고 말고 할 것도 없이 이건 윤모난의 말대로 극비이고, 절대 새어나가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만약 윤모난이 남경 윤씨의 하나 남은 아들만 아니었다면, 이런 일을 겪은 사람을 전투조에 복귀시키는 미친 짓은 없었을 것이다.

무구원은 지금껏 남경 윤씨가 정신병에 걸려 망가진 윤모난을 버린 것이라 생각했다. 기차에서 만났을 때도 윤모난은 제 입으로 자신의 집이 그에겐 관심도 없다고 했었다.

하지만 남경 윤씨는 오히려 윤모난이 쥐고 있는 칼에 의존하고 있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윤모난의 둘째 형은 현상 유지 S급 포스트 에스퍼였고, 그가 폭주했다면 S급 트랜스가 되었을 거다.

3년간 그가 무간에서 얼마나 많은 포스트를 학살했겠는가.

그러니 윤모난이 해야 하는 것이다. 동생이 무간으로 가서 트랜스가 된 자신의 형을 죽여야 이 굴레가 끝이 난다. 남경 윤씨의 비극이 마무리되기 위해서 가이드 동생이 반드시 완수해야 할 숙명이었다.

“…일단 둘은 들어가요. 십자하고 난 이틀 뒤 출동을 위해서 회의를….”

“말씀해주십쇼, 네? 일부러 숨긴 거냐구요!”

“경해국.”

부르는 목소리가 전에 없이 냉랭했다.

“죽고 싶어?”

윤모난은 다 탄 담배를 쓰레기통에 던져버리곤 일갈했다.

“네가 원하는 대로 영상도 보여줬잖아. 그런데 내가 일부러 숨겼다? 아무리 무식해서 머리가 안 돌아간다지만, 상황 파악이 안 돼?”

“엿 같네…. 이런 인간의 뭘 믿고 내가 훈련 일정을 따르기로 했는지. 이딴 식이면 당신 백 프로 사고 쳐. 여기 있는 그 누구도 이제 당신 못 믿을걸? 형들 이야기만 나오면 과도하게 날이나 세우는 사람이 무간에 가서 트랜스를 잡겠다?”

“아직 약속한 시간은 더 남았어.”

“아니, 집어치워. 당신이 알아서 팀장직 내려놓고 떠나. 난 인정 못하니까! 시팔!”

순간 쓰레기통 안에서 화르륵 불길이 일었다. 요즘은 분노를 잘 조절한다고 해도 경해국은 한번 흥분하면 물불 안 가리는 인간이다. 각막을 태워 혼탁한 경해국의 왼눈에 화기가 비쳤다. 무구원이 바로 시간을 돌려 쓰레기통의 불을 잡는 사이, 또 다른 불길이 윤모난에게 달려들고 있었다.

“경해국!”

젠장.

첫날도 그랬듯이 경해국이 불을 지르고 날뛰면 윤모난이라도 통제가 불가능했다. 윤모난은 확 끼치는 불을 피해 가까이에 있던 안범을 보호하며 뒤로 밀쳤다.

“아무리 당신이 우릴 무시해도 유분수지. 당신 집안 비극 때문에 애먼 우리까지 다 뒈지러 가게 생겼는데 팀장을 그만두지 않는 이유가 뭐야! 우리가 무슨 소모품인 줄 알아!”

“경해국! 이 새끼야, 또 불 지르면 너 진짜 잘릴 수 있는 거 몰라?”

상습 방화범 경해국은 이미 눈에 보이는 게 없었다. 병동에 근무하는 에스퍼들이 창백한 얼굴로 튀어나와 복도에서 벌어진 소란을 보고 있었지만 누구 하나 감히 경해국을 말리려 나서지 못했다.

그사이 더욱 커진 불길에 안범의 앞머리가 타버렸고, 그걸 막다가 윤모난은 오른쪽 팔을 데었다. 스프링클러도 작동하지 않은 탓에 무구원은 계속 불이 붙은 곳의 시간을 되돌리면서 방제 활동에 나서고 있었으나, 워낙 경해국의 화염 능력이 센 탓에 불이 빠르게 번져 이마저도 쉽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경해국의 두 손에서 액체화된 화염이 마그마처럼 흐르기 시작했다. 윤모난마저도 그 광경을 보고 안색이 창백해졌다. 경해국의 분노 조절 장애는 그저 농담 삼아 넘길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고, 그걸 가벼이 생각한 윤모난의 판단 미스였다.

“이런 썅…! 안범, 무구원, 얼른 병동 사람들 데리고 나가!”

윤모난은 악을 질렀다.

뇌 의식 영상에서 본 이미지가 아마도 경해국 머릿속의 무언가를 건드린 것이 분명했다. 윤모난만큼 경해국도 치료받아야 하는 환자였고, 이건 정신병자들의 싸움이었다.

무구원도 이번만큼은 윤모난의 명령이 옳다고 생각했다. 그는 혼절 직전인 안범을 끌어당겨 불지옥의 반대편에 데려다 놓은 다음에 계단으로 내려갔다. 이미 경해국의 불 지랄을 본 병동 안 사람들도 대피하던 중이었다. 경해국의 방화의 위험성은 익히 알려져 있었다.

“진정하고 문명인답게 제발 이야기 좀 하자고!”

“…꺼져, 시발!”

“경해국!”

윤모난은 얼굴에 끼치는 뜨거운 화기를 느끼면서 눈을 질끈 감았다. 아무래도 틀렸다 싶다. 자신의 판단 미스로 결국 여기서 타 죽을 운명일지도. 경해국도 여기서 동귀어진하거나 영원히 잘리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윤모난은 열기에 타들어가는 훈련복 옷감을 보면서 마음을 먹었다. 일이 더 커지기 전에 무슨 짓을 해서라도 경해국과 접촉해 가이딩을 해야 한다. 이를 악물고 붉은색의 화염 속으로 뛰어 들어가자 온몸이 타는 고통이 닥친다.

한편 경해국은 윤모난이 자신에게 접근하려 불길로 들어오는 것을 보고 당황했다. 그가 반사적으로 주먹을 쥐자 손에서 흘러나오는 화염의 세기가 잠깐 줄어들었다.

지금까지 윤모난이 이능력 개인 훈련을 시키면서 경해국에게 가르치려 한 건 단 하나였다. 불의 규모를 제어하는 것.

“조절…해. 조절하라고! 미친놈아!

하지만 그건 불가능했다. 경해국은 평생 자신의 능력을 제대로 이겨본 적이 없었다. 어떨 때는 의도하지 않았는데도 손에서 불이 일기도 했다. 불은 일단 손을 떠나면 통제할 수 없다. 눈을 태웠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어느새 윤모난이 세 발자국 앞까지 다가왔다. 아무리 그라고 해도 이런 불길에 무사할 리 없다. 경해국은 본능적으로 뒷걸음질 쳤다.

“왜 와? 왜 오냐고, 시팔! 지금 제어 안 된단 말이야!”

“얼른 불 끄라고!”

“안 돼…. 이 정도를 끄는 건 한 번도 해본 적이….”

“악, 개자식! 넌 잡히면 뒈졌어!”

경해국도 이쯤 되니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온몸의 피가 팔팔 끓는 것 같았고 의식이 점차 흐려진다. 포스트의 이능력은 양날의 검이다. 위력적일지라도 제어하지 못하면 트랜스로 폭주하기 쉬웠다. 그 순간 경해국은 자신의 남은 한쪽 눈을 생각했다.

에스퍼 1년 차에 이런 식으로 제어가 안 되기 시작했을 때 직접 각막을 태워 트랜스가 되는 것을 스스로 막은 적이 있었다. 이제 그 치트키는 하나밖에 남아 있지 않았고. 오늘이 바로 그날이라면 이제 앞을 보는 건 마지막이 될 거였다.

“윽―!”

순간 탄 냄새가 훅 끼쳤다. 살과 머리의 단백질이 타들어가는 냄새. 경해국은 미친 속도로 재빠르게 복도 끝을 향해 달려갔고, 그 때문에 경해국과 접촉하려던 윤모난의 노력은 허사로 돌아가고 말았다. 복도는 이미 온통 화염에 휩싸여 있었다. 윤모난의 허망한 얼굴에서 경해국은 순간 체념 비슷한 것이 스치는 것을 목격했다.

경해국은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저 인간 자살할 생각이었구나. 무간으로 가면 트랜스가 된 형을 제 손으로 죽이고 자신도 죽을 생각이었어. 죽음에 대한 갈망과 충동은 이런 극한의 상황에서 사람을 쉬이 체념하게 만든다.

순간.

푸쉬이이이익―

천장에서 차가운 물줄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경해국은 얼음처럼 차가운 물에 다 젖은 뒤에야 퍼뜩 정신을 차리곤 점차 불의 규모를 줄여나갔다.

차가운 물은 윤모난의 정신도 돌아오게 한 모양이었다. 그는 천장에서 작동되는 스프링클러를 보면서 탄식했다.

“…하!”

“팀장님!”

무구원의 목소리였다. 돌아본 곳에는 그와 똑같이 무구원이 물에 흠뻑 젖은 채로 서 있었다. 1층에 있던 스프링클러 수도 밸브를 돌린 모양이다.

포스트들은 안전 수칙에 대한 감이 보통 인간보다 많이 떨어져, 모든 일을 이능력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자만심에 빠져 있었다. 이런 건물에 기본적으로 설치되어 있는 스프링클러의 수도 밸브를 잠가놓는 극악의 안전 불감증이 그 자만의 증거였다.

우왕좌왕하던 사람들 중에서 무구원만이 그 사실을 떠올리고 밸브를 찾아 작동시켰다. 해결사 무구원은 달려와 얼른 시간을 돌렸다. 하지만 지금 와서 건물이 3분 전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크게 나아질 리는 없었다.

“…뭐 해요. 십자? 이미 다 탔는데 능력은 왜… 아.”

윤모난은 무심코 자신의 팔을 내려다보곤 작게 탄성을 뱉었다. 무구원의 능력은 복도가 아니라 자신에게 쓰이고 있었다. 화상 때문에 엉망이 된 피부가 3분 전으로 돌아간 덕분에 가벼운 경상 정도만 입은 것이다.

그렇게 세 사람이 멀거니 서 있는 사이 아래층부터 시끄러운 소리가 올라왔다. 지금쯤 감독관들이 방화 소식을 듣고 몰려올 타이밍이었다.

“…둘은 안범 씨 데리고 먼저 합숙소로 가세요.”

“일이 이 지경이 됐으니 조사받아야 할 텐데요.”

“내가 알아서 할게, 경해국!”

지은 죄가 있는 경해국이 움찔거렸다. 윤모난은 그에게 뛰어가 거의 들이박듯이 입술을 겹쳤다. 능력을 제어하면서 혼까지 빨아들일 기세였다. 얼마나 세게 박았는지 다시 뗀 윤모난의 입술에서는 피가 주룩 흘렀다.

윤모난은 곧이어 경해국의 명치를 팔꿈치로 가격하고 뺨을 두 대 갈겼다.

“…합숙소에서 보자, 너. 무구원 씨, 데려가요.”

무구원은 달려가 찌그러져 있는 경해국을 끌어당겼다. 그리고 이전에 들었던 대사도 잊지 않고 날린다.

“그동안 즐거웠다, 경해국. 네 장례식엔 꼭 참석하지.”

“…끄윽… 개…자식.”

무구원이 끌려갈 때 했던 말을 다시 돌려받으면서, 경해국은 어깨에 짐짝처럼 실렸다. 두 사람이 병동을 나가고 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윤모난도 그곳을 나왔다. 아니나 다를까, 감독관들이 소식을 듣고 몰려와 있었다.

“2부 7팀…! 2부 7팀 맞습니까?”

“…네. 제가 그 2부 7팀 팀장입니다.”

“이게 몇 번째 방화인 줄 아십니까? 범인인 경해국은 어디 있습니까!”

“범인 여기 있잖아요.”

당연히 감독관들은 경해국이 또 불을 질렀겠거니 하던 차였는데, 윤모난이 범인을 자처하자 어안이 벙벙해졌다. 윤모난은 한숨을 내쉬면서 말했다.

“…제가 쓰레기통에 담뱃불을 버렸고 그게 번졌습니다. 방화한 건 접니다.”

“아, 그럼 일단… 조사실로 가시죠.”

“네.”

스스로 죄를 뒤집어쓴 윤모난이 조사받으러 간 지 몇 시간째, 2부 7팀의 합숙소에서 팀원들은 잠도 자지 않고 계속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새벽 1시가 되어서야 윤모난은 피곤한 얼굴로 합숙소에 기어들어왔다.

“팀장니임….”

안범은 재를 뒤집어쓴 몰골인 윤 팀장을 보고 울상을 지었다. 네 사람은 첫날처럼 합숙소 거실에 다 같이 앉았다. 한참 그렇게 침묵이 이어진다. 그 침묵을 깬 건 언제나처럼 윤모난이었다.

“내가… 겪어보니까 알겠네.”

“네?… 뭐… 뭐가요.”

“치치 말이야. 시발, 내가 불바다에서 치치랑 같은 처지가 되어보니 알겠어. 안범 씨, 당장 치치 데려오세요!”

“…저… 저의 친구는 왜….”

“얼른 데려와! 이제부터 치치도 우리 팀원으로 인정합니다.”

윤모난은 냉장고로 가서 소주병을 한 아름 들고 오더니 바닥에 내려놨다.

“회식하죠.”

정신병자 윤모난은 되는대로 지껄이는 듯했다. 그 광기에 팀원들은 몸을 사릴 수밖에. 안범이 미적미적 방으로 들어가 데려온 치치를 윤모난이 냉큼 빼앗아 자신의 옆자리에 앉혔다. 그러더니 먼저 소주병 다섯 개를 따서 각자 한 병씩 앞에 놓는다. 물론 치치도 포함해서.

“원래 운수가 좆같아서 안 풀리는 날에는… 이렇게 회식하고 푸는 겁니다.”

“…팀장님 조사는요?”

“길게 말 안 할게. 우리 팀 스코어 천 점이나 더 깎였어.”

마이너스 육천 점과 함께 지옥의 2부 7팀 회식의 막이 올랐다.

“천… 점이 더 깎였다니요? 그게… 무슨….”

“그럼 우리 이제 마이너스 육천 점입니까?”

윤모난은 안범과 무구원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마이너스 오천 점도 대단하지만, 육천 점은 정말 역사를 새로 쓰는 수준이다. 이대로라면 내년 새해에는 마이너스 1만 점도 노려볼 만했다.

윤모난은 말없이 앞에 놓인 강소주의 뚜껑을 비틀어 열고 벌컥벌컥 마셨다. 그러자 지금껏 한마디도 않던 경해국이 나섰다.

“제가 그만두고 말겠습니다, 시팔.”

“야!”

경해국의 나약한 소리에 소주 한 병을 원샷한 윤모난이 빈 병을 냅다 바닥에 내려쳤다. 주변으로 우수수 유리 조각이 튀자 분위기가 정전된 것처럼 조용해졌다.

“늦었어, 이 자식아! 지금까지 시말서만 세 시간 쓰다 왔다고. 그러니까 그냥 술이나 처먹어!”

“…팀장 당신 잘못이 없다고는 못하잖아? 하지만 내 잘못은 내가 책임질 거니까. 그만두겠다고!”

“이 새끼가…!”

“어어― 팀장님, 참으세요!”

안범이 몸을 던져 윤모난을 말렸다. 하지만 윤모난도 오늘 하루 너무 지쳤고, 경해국을 때릴 기운조차 없었다. 더 덤빌 힘이 없는 건 경해국도 마찬가지였다. 다시 한번 2부 7팀 전원은 바닥을 친 상태였다.

마이너스 오천 점일 때는 더 내려갈 데가 있나 생각했는데, 점수는 그저 아라비아 숫자이니 무한으로 마이너스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심지어 방화의 죄를 스스로 뒤집어쓴 윤모난은 감독관 새끼들한테 붙들려 억지로 약까지 먹었다. 아무리 팀장이라 해도 정신질환 병력이 있는 윤모난의 입지가 서곡에서 탄탄할 리 없었다. 아마 이런 작은 일조차도 남경 쪽에 흘러 들어갈 테고 일이 곤란해진 건 사실이었다.

한백호 팀 지원을 나가기로 한 것이 이틀 뒤인데, 대형 사고까지는 아니더라도 면이 안 서는 것 또한 문제이다. 아마도 내일부터 2부 7팀은 서곡센터의 웃음거리로 떠오를 것이다.

“…경해국… 제발 정신 상담 좀 받아. 나도 이 이상은 당신 보호 못해줘. 내 자리도 간당간당한다고…. 모르겠어?”

“경해국.”

잠자코 있던 무구원이 끼어들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뜻 모를 말을 뱉었다.

“너한테는 목적이 있다.”

“…….”

“1년은 견딘다고 했었지.”

“…썅.”

그런데 무구원의 말이 어떤 효력이 있었는지 몰라도 경해국의 마음의 벽을 무너뜨린 듯했다. 지금까지 당장 박차고 나갈 기세였던 놈이 말없이 주저앉아 병나발을 불기 시작한 것이다. 안범이 참지 못하고 물었다.

“무 선배님,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

“1년이라니요? 1년 뒤에… 무슨 일이 있나요?”

경해국은 그 와중에 벌써 소주를 두 병째 까고 있었다. 무구원이 다시 입을 다물어버리자 안범이 의아한 표정으로 제 선배들을 봤다. 그새 술을 죄다 목구멍으로 때려 부은 경해국이 쾅, 하고 병을 바닥에 내려놓곤 버럭 소리쳤다.

“시팔, 나 1년 뒤에 무사히 결혼해야 한다고!”

“…….”

“뭐?”

윤모난은 무슨 차에 깔린 비둘기 사체라도 본 얼굴로 반문했다. 윤모난의 반응을 본 경해국은 확 얼굴을 붉히더니 도로 말이 없어졌다. 그가 제 속내를 털어놓기로 한 듯하자 무구원이 옆에서 간단한 설명을 덧붙였다.

“경해국은 북해에 있는 제 누이와 약혼한 상태입니다.”

“…그 21살이라던 누이?”

“네.”

“뭐야, 그럼.”

“1년 뒤에 북해 지부로 전근 신청을 한답니다.”

그랬다. 경해국은 북해에 있는 예비 신부와 신혼살림을 차리기 위해 북해에 전근을 희망하고 있었다. 서곡이 아니면 합숙소 생활을 할 필요도 없고 가족이랑 살 수 있기 때문이다.

국가이능력기관이 각 거점에 지부를 두고 있긴 하지만, 기관의 중심은 결국 서곡이었다. 서곡에서 근무한다는 것 자체가 에스퍼에게는 큰 커리어인데, 경해국은 이를 포기하면서까지 자신의 고향도 아닌 북해에 가서 살기로 결심한 것이다.

경해국은 쪽팔린 건지 아니면 취한 건지 얼굴을 불그죽죽 붉히고 있었다. 그러더니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말했다.

“무씨 저놈도 북해 지부로 가고 싶어 해….”

“무 선배님은 왜요?”

“북해가 내 고향이니까.”

명료한 대답이었다. 반도인들은 모두 자신의 출신과 가문의 거점에 커다란 애착을 가지고 있었다. 고향에 한 번 가기도 힘들고 몇 년이 넘어가는 세월 동안 타지에서 썩어야 하는 서곡에서의 근무가 모두에게 달가운 것은 아니다.

심지어 무구원은 무정원의 명령으로 인해 근무지 이동 말고는 북해로 돌아갈 방법이 없었다. 경해국과 무구원은 그런 점에서 1년 정도 뒤에 북해에 갈 계획을 공유하고 있었고, 그간 잘 안 맞는 두 사람이 꽤 평화롭게 지냈던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그러니 정신병자 팀장이 트랜스가 된 제 형을 죽이러 사지에 뛰어들겠다니 경해국이 날뛴 것도 이해할 만했다. 3년 전 똑같은 급의 트랜스를 만나 정예인 윤모난의 옛 팀도 전멸한 상황에서 그건 죽으러 가자는 말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1년 뒤에… 내가 책임지고 둘 모두 북해로 보내주겠습니다. 안범 씨도 구호조로 부서 이동을 시켜줄 거구요.”

윤모난은 두통으로 욱신거리는 이마를 짚으면서 약속했다. 그 말에 기약은 없었으나 무거운 진심을 담았다. 어차피 그는 자신에게 일어난 비극에 팀원들을 끌어들일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어쨌건 자기 혼자라도 트랜스가 된 형을 구원하려면 무간에 가야 했다.

그래, 무간…. 무간에 꼭 가야 한다. 죽은 형이 거기서 기다리고 있고, 매일 밤 꿈속에 나와 자신을 부르고 있다.

“그럼 우리 팀은 1년 뒤면 해체되는 거예요? 저하고 선배님들이 다 가버리면 팀장님은요?”

“내가 뭐?”

“팀장님은… 서운하실 텐데.”

안범의 걱정은 실로 쓸데없었다. 그에게는 2부 7팀이 첫 근무 팀이고 남다른 의미겠지만, 팀 구성이 바뀌는 건 비일비재한 일이었다. 나머지 세 사람은 그런 일쯤은 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이 당연했다.

그럼에도 안범은 예정되어 있는 팀의 해체에 갑자기 결속감과 연대를 잃은 기분이 들었다. 괜스레 외롭고 서운한 마음이었다. 평소 같으면 안범의 그런 유아스러움에 습관처럼 타박이 나왔을 법도 한데, 왠지 분위기가 착 가라앉았다.

“하나도 안 서운하고. 자기 인생을 어떻게 살건 그건 서로 알아서 할 일입니다. 그런데 다들 알겠지만 계속 이렇게 점수가 나쁘면 전근 신청하기 어려워요.”

“전에도 힘들었지만 마이너스 육천 점은… 1년 안에 만회하기 정말 힘들 겁니다.”

“이럴수록 단결해야지.”

이 와중에도 윤모난은 패잔병 같은 낯의 팀원들 사이에서 홀로 의기양양한 승리자의 표정을 짓고 있었다. 가장 절망적인 상황에서 그의 저런 밑도 끝도 없는 자신감은 막연한 희망을 주는 이상한 마력을 발휘했다.

윤모난이 하고자 하면 무슨 짓을 해서라도 한다. 2부 7팀의 팀원들은 모두 그 사실을 똑똑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만큼 점수를 올리기 위해서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전략을 세워야지.”

“…무슨 전략 말입니까?”

“비열하고 비윤리적이고 비도덕적인 더러운 수법들.”

“…네?”

이미 한백호한테 독사를 들이대고 협박한 것보다 더 비열할 수가 있단 말인가?

이런 면에서 상상력이 부족한 무구원은 모르겠지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면 가능한 돌파구의 수는 무궁무진했다. 윤모난은 독사라 불리는 남경 윤씨의 막내아들이었고, 그건 그가 맘만 먹는다면 모럴 따위 얼마든지 벗어 던질 수 있는 피를 타고났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 점만 모두 합의해준다면 장담합니다. 점수는 올릴 수 있을 거예요.”

“…그 비열하고 비윤리적이고 비도덕적인 수법이 무엇인지 귀띔이라도 해주시죠.”

무구원의 질문에 윤모난이 눈알을 굴리면서 뜸을 들였다.

“글쎄, 차차 생각해보려 했지만…. 지금 생각나는 건 감독관들이랑 몇 번 자면 이천 점은 무난하게 올릴 수 있을 거 같은데.”

쨍그랑―!

생각지도 못한 정말 더러운 수법에 이번에는 무구원이 빈 소주병을 바닥에 내려쳤다. 윤모난은 영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제 옷에 떨어진 유리 조각들을 털어냈다.

“서곡 지부장인 할배랑 떡 한 번 치면 당장 내일이라도 플러스로 올라갈걸.”

“팀장님!”

“십자, 그런 결벽증도 당분간 참아.”

“얼마든지 정당한 방법으로 만회할 방법이 있을 겁니다.”

“나중에 십자가 팀장 되면 그렇게 하시든가요. 그리고 내가 이 한 몸 바쳐서 당신들이 조져놓은 점수 올려주겠다고 하면 감사하다고 절이나 할 것이지. 비난은.”

그건 솔직히 윤모난의 말이 맞았기에 무구원은 할 말이 없어졌다. 그런데 그때, 옆에서 안범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한마디를 얹었다.

“팀장님… 그런 걸레 같은 방법은 저도 싫습니다.”

“…….”

안범에게까지 걸레 소리를 듣다니. 기차에서부터 그의 요란스러움을 참아준 보람도 없이 걸레가 되어버린 윤모난은 옆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치치를 안으며 한탄했다.

“내 편은 하나도 없네요. 알았어. 몸 로비 하는 건 5순위 정도로 내리지 뭐.”

“…벌써부터 나머지 선택지들이 뭘까 두렵네요.”

“아무튼, 회식인데 왜 이렇게 다들 얼굴이 죽상입니까. 점수는 잊고 술이나 마시자고.”

하지만 절망스럽고 무거운 분위기는 도무지 다시 떠오를 기미가 안 보였다. 경해국은 아까 저지른 방화 사건으로 인해 계속 풀이 죽어 있었고, 윤모난도 흥이 나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윤모난은 치치를 머리 뒤에 베며 발라당 누웠다.

“십자, 단소 좀 불어봐. 특기라며. 분위기 좀 띄워보세요.”

“제가 기생입니까?”

“…시키면 바로 네, 하는 법이 없네. 내가 기어코 방뎅이 흔드는 꼴을 보고 싶어?”

솔직히 나머지 팀원들은 윤모난이 음악에 맞춰 엉덩이나 흔드는 걸 보고 싶지 않았다. 안범은 누워서 눈만 깜빡거리고 있는 자신의 팀장을 바라보다가 문득 호기심이 들었다. 재를 뒤집어쓰고도 저렇게 잘생긴 사람이라면 몸 로비로 점수를 따겠다는 말도 빈말은 아니었을 것이다. 사람 홀리는 짓에 재주가 있을 수도….

“팀장님은 연애 얼마나 해보셨어요?”

“뭐?”

“…그냥, 연애 많이 해보셨을 것 같습니다. 잘생기셔서.”

안범의 발칙한 질문에 무구원과 경해국조차 약간은 궁금한 얼굴로 윤모난을 봤다. 사석도 아니고 엄밀히 말하면 공적인 회식 자리인데 사생활을 물어보는 것 자체가 부적절하다고 할 수 있으나, 윤모난부터가 그런 사생활의 바운더리를 앞장서서 침범해온 주범이었다. 안범의 질문에 그가 곰곰이 생각해보더니 이내 대답했다.

“둘. 근데 둘 다 연애한 거라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네.”

“어…? 의외로.”

적다. 그건 안범, 경해국, 무구원이 공통적으로 생각했던 바였다. 윤모난은 딱히 오는 사람 안 막고 가는 사람도 안 막는 그런 바람둥이 타입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계속 입을 다물고 있던 경해국도 질문 행렬에 가담했다.

“사랑도 해보셨습니까?”

경해국은 오로지 약혼녀를 위해 고향을 떠나 북해에 정착할 마음을 먹은 로맨티시스트였고, 그건 매우 로맨티시스트다운 질문이었다. 윤모난은 약간 닭살 돋은 표정을 짓더니 답을 하지 않았다. 그것만으로도 모두 답을 들었다고 생각하던 차였다. 잠깐 생각에 잠겼던 윤모난이 이내 혼잣말처럼 중얼거린다.

“…지금껏 그런 생각 한 번도 해본 적 없는데. 글쎄, 한 사람은 그런 비슷한 거라 해야 하나.”

한숨처럼 내쉬는 숨에서 얼핏 달큼한 술 냄새를 풍겨대던 윤모난은 갑자기 추억에라도 젖어들었는지 조용해졌다.

한편 무구원은 그의 대답에서 근묵자흑을 들었던 그날 밤을 바로 떠올렸다. 자신의 취향이 남자라던 그의 고백 탓에 자연스레 윤모난이 연애한 상대가 누구인지 자기식대로 상상해보게 된다.

아마도 말랑말랑하거나 하얀, 말하자면 안범처럼 말갛고 예쁘장한 남자일 것 같았다. 커다란 키의 윤모난이 끌어당기면 품에 쏙 담길 것 같은 그런 타입 말이다.

지금까지 무구원은 자신을 향한 윤모난의 행동을 그저 저를 복종시키기 위한 장난 정도라 여겨왔다. 그러니 범생이 타입이니 뭐니 하는 것도 아마 거짓말일 가능성이 있었다. 평생을 광신도 틈바구니에서 사내로 자라 누군가에게 희롱이란 걸 당하리라 생각해본 적 없었던 무구원은 이미 몇 번을 당해놓고도 갈피를 잡지 못했다.

그러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윤모난은 자기 같은 놈이 들이대도 별로 따질 것 없이 받아줄 것 같다고.

아…. 어머니 신이시여.

무구원은 순간 제 뺨을 내려칠 뻔했다. 윤모난이 받아주고 말고 할 것에 관해서 왜 생각한단 말인가. 고농도 청파액이 아니라면 이런 불순한 생각에는 약도 없을 듯하다. 괜히 갈증을 느낀 무구원은 자기도 모르게 앞에 놓인 소주를 한 모금 들이켰다.

“십자도 술 마실 줄 알아?”

“어라…? 무씨 저거 술 마시는 건 처음 보는데.”

“술 못 마시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심경이 복잡했던 무구원은 어이없다는 투로 대꾸하고 말았다. 고삐 풀린 말처럼 연거푸 술을 들이켜며 병을 반쯤 비웠을 때였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주변이 시끌시끌했다. 뭐지? 잠깐 시간이 지났나? 생각하던 무구원은 자신의 손에 들려 있는 대나무 단소를 발견하고 눈을 조금 크게 떴다.

음?

“푸하하하하! 이게 뭐야!”

경망스러운 웃음소리가 멍한 정신을 들쑤셨다. 흐릿한 시야로 경해국과 윤모난이 옥신각신하는 모습이 들어왔다. 윤모난의 손에 들린 종이가 문제인 듯했다.

“푸흑. 나의 피앙세 자연 씨. 북해의 하늘 아래 무탈하게 잘 계십니까? 저는 하루하루 자연 씨의 얼굴이 선연하여… 이게 시발, 뭐야!”

“…썅! 왜, 왜 남의 편지를 읽고 그러십니까!”

“이게 무슨 연애편지냐고. 하하하!”

“…주, 주세요. 씨, 진짜.”

윤모난은 손을 휘저으며 달려드는 경해국을 깔고 앉은 다음, 아랫줄을 마저 읽어 내려갔다. 종이에 깨알같이 담긴 괴발개발 글씨체 중에 특히 눈에 띄는 구절이 있었다.

“밑에가 더 웃기네! 자연 씨, 감히 묻습니다. 자연 씨는 굳이 하나만 선택해야 한다면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얼어 죽는 것과 불에 타 죽는 것. 아, 골 때리네. 진짜. 크흡.”

“꺄하하하학!”

이번엔 바닥에 넘어져 배를 잡고 뒹구는 윤모난 옆에서 안범도 이미 토할 것처럼 웃고 있었다.

“넌 이걸 연애편지라고 썼냐?”

“…뭐… 뭐… 뭐…가, 뭐를….”

경해국은 얼굴을 붉히면서 말조차 잇지 못했다.

“애인한테 얼어 죽고 싶은지 타 죽는 게 좋은지는 왜 물어봐? 너 진짜 또라이야?”

“아니, 비유이지 않습니까. 비유법! 시팔, 마저 읽어보시죠. 저 경해국이 사랑의 불꽃으로… 그 구절 읽어보란 말입니다.”

“그건 토할 것 같아서 보자마자 눈 찌르고 싶었어. 다 좋은데 왜 죽는 거에 비유하냐고.”

“…에?”

“뭐지, 이 신선한 미친놈은. 설마 지금까지 편지 다 이딴 식으로 쓴 건 아니지?”

“…….”

윤모난의 핀잔에 경해국이 의심의 눈초리로 위아래를 쭉 훑다가 대번에 배를 내밀며 따졌다.

“팀장님이 사랑에 대해서 뭘 아신다고 조언입니까?”

“너보다는 무조건 나아.”

“어? 무 선배님, 정신 차리셨어요?”

그때 세 사람의 시선이 무구원에게 쏠렸다. 얼큰하게 취한 안범이 헤벌쭉 웃으며 말했다.

“선배님, 단소 연주 잘 들었습니다.”

“…뭐라고?”

무구원은 대답하면서 자신의 혀가 심하게 꼬여 있다는 걸 깨달았다. 놀림거리를 두고 가만히 있을 리 없는 윤모난이 옆에서 감상을 더했다.

“어이, 십자. 단소 연주 개같이 서글프던데?”

단소를 연주했다고? 기억도 안 나는데, 언제? 무구원은 당황해 몸을 일으키려다가 휘청이고 말았다.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당황하자 얼굴에 열기가 확 치솟고 머리가 핑 돈다.

무구원은 생전 처음 술을 먹고 만취한 상태였다.

“어어?”

눈앞이 흔들리고 요란한 분홍색이 시야에 확 번졌다. 쿠당탕, 하는 큰 소리와 함께 무구원이 앞으로 넘어졌다.

“역시 십자 취했네. 어쩐지 순순히 단소 분다고 하더라니.”

나머지 세 사람은 일으키려는 시도도 않고 그를 그냥 방치해두었다. 주거니 받거니 술자리가 계속 이어지면서 안범과 경해국도 꽤 술기운이 올랐는지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안범은 뇌 의식 영상을 보고 토했다가 빈속에 술을 몇 입 마셨고, 경해국은 홧김에 소주 두 병을 원샷한 상황이었다. 원래 술을 입에 달고 사는 윤모난만 멀쩡했을 뿐 극악의 스케줄을 소화하며 몸과 정신이 모두 지친 팀원들은 급속도로 취해 나가떨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에잇, 쓸모없는 놈들. 술도 못 마시고.”

팀원들의 용량 미달을 욕하며 윤모난은 나머지 병을 마저 비웠다. 경해국은 꽤 취했는데도 혼자 청승을 떨며 소주를 들이켜고 있었다. 그 꼴이 꽤 안쓰러워 보이는 것도 사실이고, 결혼 소식을 듣고 나니 윤모난도 어쩐지 마음이 무거웠다.

“경해국, 걱정 마. 팀원들 목숨까지 내놓게 하면서 내 일에 끌어들일 생각 없어. 나 혼자만이라도 무간으로 갈 수 있는 방법이 있었다면 그렇게 했을 거야. 무간에 간다고 해서 바로 마주칠 확률도 낮고….”

“…시팔, 됐습니다. 반도에 있는 놈들치고 그런 가슴 아픈 사연 하나 없는 인간 있답니까?”

“…….”

“전 말이죠. 아무리 정략결혼이라고 해도 말이죠…. 아십니까? 저는 동산 경씨에서도 직계가 아니라 방계입니다. 그러니 무구원의 누이와 저 같은 놈이 결혼한다는 것 자체가 말도 안 되는 일이죠.”

와… 술주정으로 듣는 개인사. 그것도 연애 얘기는 질색인데. 편지는 웃겼지만.

윤모난의 평소 성질 같으면 소주병으로 대가리나 깨고 ‘그런 건 네 일기에 적어라’라고 했겠지만, 오늘은 날이 날인 만큼 그냥 들어주기로 마음먹었다. 큰형은 그에게 누누이 말했었다. 넌 인내심이 부족하니 참고 수양하라고 말이다.

“음… 어, 그랬구나.”

“제 성질머리도 있고 그쪽에서도 반대 많이 했다고 합디다. 그런데 그녀가… 그녀만이 저를 선택했다구요.”

웩.

윤모난은 얼마 먹지도 않은 저녁을 다 토하고 싶었다. 머릿속에서 큰형이 회초리를 들고 다그친다. 못난아, 제발 참아라, 넌 팀장이다. 팀장의 역할에는 이런 거지 같은 일도 포함인 거야. 그렇게 윤모난이 꾹꾹 참는 줄도 모르고 경해국의 주정은 점입가경이었다.

“사랑하는 그녀를 위해서라도 저는 북해로 가야 합니다! 그런데… 제가 서곡에서 탈출하지 못하면 그녀도 절 버릴 거라구요!”

“야, 그만해, 이 새끼야.”

윤모난이 참다못해 주먹을 들었다. 그런데 옆에서 턱, 하고 가로막힌다. 시선을 내려서 보니 경해국의 사랑 타령을 듣고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있는 안범이 보였다.

“팀장니임… 경 선배님을… 내일이라도 북해로 보내주세요. 으허엉!”

“…….”

“제가 구호조 가는 거 포기할게요. 제가 팀장님 곁에 있을 테니까. 경 선배님만은 얼른 보내주세요, 흡.”

“왜 이래. 1년 뒤에 다 보내준다니까.”

윤모난은 자신에게 달라붙은 안범의 뒷덜미를 손날로 내려쳐 떼어냈다. 로맨티시스트 불꽃 남자 경해국도 똑같이 만들어주었다. 남의 술주정은 딱 질색이고 받아줄 기운도 없다.

어차피 이미 빵점짜리 팀장인데, 뭐.

담배를 찾아 입에 문 윤모난은 불을 붙이면서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팀원 세 명을 둘러보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런 자리도 오랜만이었다.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과거엔 이렇게 옛 팀원들과 새벽까지 합숙소에서 술을 마시며 이런저런 농담 따먹기를 하곤 했다. 형들뿐만 아니라, 팀원들 하나하나가 다 형제 같았다.

그러나 이제는 그들의 사진조차 남아 있지 않다. 3년 전 모두가 전사했을 때 윤모난이 단체 사진부터 태워버렸기 때문이다. 사진 속 젊은이들이 혼자만 살아남은 자신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원망하는 것 같아 견딜 수가 없었다.

윤모난, 얼른 와. 너도 여기서 우리와 함께 죽을 운명이었잖아.

유령인 그들은 항상 윤모난의 주위를 떠돌아다닌다. 3년 전에는 그런 그들을 따라가기 위해 가장 나약한 방법을 시도하기도 했었다. 유령들은 윤모난의 몸에 매달렸고 그 육중함을 견디지 못한 밧줄은 곧 끊어져버렸다.

“…팀장님.”

그때 한껏 풀어진 낮은 목소리가 우울한 상념을 막아 세웠다. 지금껏 바닥에 쓰러져 있던 무구원이 살포시 눈을 떴다. 그러더니 긴 팔을 뻗어 분홍색 머리를 쭉 끌어당긴다.

“왜. 십자.”

“머리는 왜 하필 분홍색이십니까.”

“분홍색 싫어?”

“…….”

“싫냐고.”

“머리가 분홍색이니까, 자꾸 눈에 띄지 않습니까.”

윤모난은 무구원의 술주정에 실없이 웃고 말았다. 이놈은 자기가 오늘 기도도 빼먹은 것을 알까? 무구원의 뒷덜미도 내려쳐서 기절시킬까 하다가 이내 그만두기로 했다.

이놈의 술주정은 꽤 귀여웠고 봐줄 만했기에. 그런 와중에 무구원은 꿈틀거리면서 커다란 몸을 움직이더니 감히 무릎을 베기까지 했다. 윤모난은 괜히 그에게 핀잔을 줬다.

“야, 인마, 꼬시지 마.”

“…뭘 꼬신다는 말입니까.”

“이거 웃기는 놈이네. 이런 게 꼬시는 거지.”

무구원이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고선 채근하듯이 한 번 더 윤모난의 앞머리를 쭉 끌어당겼다. 윤모난은 꺼들리는 머리에 약간 통증을 느끼면서 손목을 쥐어 가로막았다.

“왜 그래? 무구원, 꿈에 헤밍웨이라도 나왔어?”

“…….”

윤모난은 지난날부터 광신도 무구원의 성적 취향이 고리타분한 문학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그가 무얼 말하는지 알 턱이 없는 무구원은 눈을 깜빡거리다가 이내 천천히 감았다. 여전히 무릎에서는 내려가지 않은 상태였다. 그렇게 자는가 싶더니만 녀석이 낮게 중얼거린다.

“…를 황야의 이리 외에는 달리 부를 수 없게 되었다…. …군중 가운데 길 잃은 황야의 이리. 그 문제적 인물.”

“뭐?”

“경계심도 많고, 고독하며 야성적이면서 불안을 안은 채로 상실된 고향을 찾는 게 꼭….”

듣기 좋을 만큼 울림이 있는 낮은 목소리가 낭독한 것은 일전에 그가 읽던 소설의 한 구절이었다. 무구원의 입술을 끝맺지 못한 말을 입안에서 우물거렸다.

윤모난은 짧게 탄식하면서 옆에 있던 소주병을 쥐어 목 너머로 쓴 액체를 털어 넣었다. 솔직히 술을 먹고 판단력이 떨어진 상태에서 이놈에게 꼴리는 게 기준치를 넘어서 참기 힘든 수준까지 될까 봐 겁이 났다.

북해 무씨 형제 둘을 차례로 따먹는 것만큼 악취미도 없을 거다. 이런 충동이 정신병 증상이 아니라면 뭐란 말인가.

“헤밍웨이가 아니라… 헤르만 헤세입니다.”

“꺼져, 이놈아.”

윤모난은 참다못해 무구원의 단정한 얼굴을 쭉 밀었다.

“…꼭, 팀장님 같아서요.”

알아듣기 힘든 말을 중얼거리며 무구원은 꿋꿋하게 무릎에서 내려가지 않았다. 오히려 고개에 힘을 주며 버티더니 말을 기어코 끝맺었다.

“황야의 이리.”

순간 윤모난은 그를 당장 방으로 끌고 들어가 침대에 눕히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자신의 신변이 위험한지도 모르고 무구원은 눈을 끔뻑거리더니 이내 고른 숨을 내쉰다. 그 모습을 내려다보던 윤모난은 묵직해진 자신의 아래가 남자의 뺨을 꾹 누르는 외설적인 광경을 내내 감상하며 생각에 빠졌다.

띠 띠 띠 띠―

별안간 이 새벽에 울린 손목의 호출기가 겨우 그의 정신을 일깨웠다.

“정원 형.”

―지금, 내 개인 훈련실로 올래.

“아뇨. 지금은… 곤란….”

―기다리마.

무정원은 항상 용건만 짧게 전달하고 끝냈다. 윤모난은 깊게 한숨을 내쉬면서 시간을 확인했다. 새벽 2시. 세 술주정뱅이들은 일어날 기미도 없다. 윤모난은 무구원을 조심스럽게 바로 눕힌 뒤 창문 근처로 가서 담배 한 대를 태우면서 고민하다가 합숙소를 나왔다.

훈련동 엘리베이터를 타고 무정원의 개인 훈련실이 있는 층에 도착해 몇 발자국 내딛자마자 누군가 뒤에서 그를 확 끌어당겼다.

“재 냄새. 불장난이라도 했니.”

“…다 알면서 왜 물어요?”

“순순히 나온 걸 보니 이제 슬슬 버거워지는 모양이구나.”

가죽 장갑을 낀 무정원의 손의 차가운 감촉이 피부에 달라붙는다. 그 익숙한 촉감에 윤모난은 뒤로 손을 뻗어 무정원의 허벅지 안쪽을 쭉 훑으며 말했다.

“복도에서 할 건 아니죠?”

“훈련실.”

“샤워부터 할래요. 보다시피 꼴이 엉망이라.”

두 사람은 차분히 복도를 걸었다. 걸음을 옮기면서 무정원이 복도에 설치되어 있는 감시용 카메라 렌즈를 얼려 연달아 깨트렸다.

팀장 무정원의 개인 훈련실 문 앞에 도착하자 뒤에서 검은 손이 뻗어와 문을 열었다. 윤모난은 제집인 듯 그곳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러고는 타서 엉망이 된 옷을 하나씩 벗기 시작했다. 어둠 속에서 나신이 견고한 대리석처럼 창백한 빛을 띠었다.

은제 펜던트 줄이 근육에 스쳐 철그렁거리는 소리가 났다. 윤모난은 무정원이 있는 쪽으로 돌아서 약간은 사무적으로 무정원의 재킷을 벗긴 뒤 바지 벨트를 풀었다. 가죽 띠가 천을 스치고 바닥 아래로 떨어지고, 망설임 없는 손짓이 무정원의 바지 지퍼를 내렸다. 그 모습을 흥미롭게 보던 무정원이 물었다.

“샤워부터 한다며.”

“동시에 해요. 시간도 늦었고 피곤한데.”

무정원은 픽 웃었다. 팀장이 되더니 이런 일에 효율을 따지기 시작한다. 윤모난은 그의 검은 넥타이와 잿빛 셔츠마저 벗겼다. 옷을 벗기는 것도 꽤나 즐거운 전희였고, 무정원은 이를 착실히 즐기고 있었다.

윤모난이 손끝으로 피부를 쑥 훑자, 무정원은 가죽 장갑을 천천히 벗어 바닥에 던졌다. 그는 장갑만큼은 남이 건드리지 못하게 했고 또 누구에게나 장갑을 벗는 걸 보여주지도 않았다. 완벽한 몸을 가진 무정원의 손끝은 무구원처럼 종교적 관습으로 인해 까맣게 살이 죽어 있었다.

윤모난은 그 손을 보다가 이내 무구원에게 대바늘로 찔렸을 때의 섬뜩함을 상기했다. 평소와 달리 제 손끝에 고정된 시선을 발견한 무정원이 손을 치우고 윤모난의 등을 바짝 끌어당겼다.

“원래 시체 손 같다고 질색하더니. 뭘 그렇게 빤히 봐.”

“…내가 그랬어요?”

“그래. 완벽한 신체에 거슬리는 티끌이라고 그랬던가.”

“…….”

“모난이 넌 언제나 완벽주의자였지. 넌 완벽함에 강박이 있어.”

무정원의 말은 반만 맞는 소리였다. 오히려 윤모난은 완벽함과 추함 사이의 낙차에 주목하는 인물이었다. 완벽을 추구할 때마다 추함을 더욱 갈망한다. 이런 섹스는 추의 영역에 있고, 이건 앞으로의 일을 완벽하게 해나가려면 필요한 과정이었다.

“바쁘니까 한 시간 안에 완벽하게 해봐요. 그럼.”

팀장 개인 훈련실 안 샤워실. 조사받으면서 대충 처치는 했으나 백열등 아래에서 보는 윤모난의 몸에는 벌겋게 부어오른 화상 상처들이 이곳저곳에 있었다. 일반 인간이 아닌 포스트에게 이 정도 상처는 이틀이면 사라질 정도라, 윤모난은 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런데 무정원이 등 뒤에 바짝 붙어오더니 상처가 난 윤모난의 손을 쥐어 아직 차가운 물줄기에 댄다. 무정원의 손끝이 닿은 곳에서 시원함이 느껴지고, 쓰린 통증도 가라앉기 시작했다. 그가 능력을 써서 아주 미세한 정도로 상처 부위의 온도를 떨어트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다정하신 분이 아까 동생한테는 왜 그리 엄하게 구셨을까.”

“…너야말로 이런 상황에서 무구원 얘기나 하다니.”

무정원은 윤모난의 어깨에 턱을 걸치고 지그시 누르면서 실소했다. 윤모난의 생각에도 발가벗고 무구원 형과 달라붙어 있는 주제에 동생 얘기를 꺼내는 건 꽤 부적절하긴 했다. 이 같은 묘한 배덕감도 일종의 전희로써 훌륭하기는 했지만. 윤모난은 방금 전까지 제 무릎을 베고 책에서 읽은 글의 한 구절을 조용히 읊던 무구원을 떠올렸다.

무심코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쿡쿡거리면서 웃기 시작하자 무정원은 약간 의아한 표정을 짓더니 손끝으로 유두를 콱 조이며 물었다.

“왜 웃어.”

“…아하… 하― 그냥, 상황에 안 맞는 얘기인 거 아는데…. 무구원 형 친동생은 맞죠? 둘이 너무 달라서.”

“너 무구원이 마음에 드는 모양이구나.”

무정원은 차가운 손끝으로 꼭지를 슬쩍 굴리면서 흥미로운 듯이 물었다. 윤모난은 입을 벌려 샤워기에서 떨어지는 물을 받아 적시며 작게 숨을 내쉬었다. 물에 젖은 분홍색 머리카락이 뒤에 서 있던 무정원의 이마에 달라붙었다.

다년간의 경험으로 윤모난의 성감대를 정확히 알고 있는 무정원은 한 손으로 여유롭게 돌기를 건드리다가 이내 목선 안쪽을 뜨거운 혀로 핥았다.

“그래서… 날 타락시켰듯이 내 동생도 건드릴 생각이신가?”

“…하. 못할 것… 없죠.”

“음…. 네 놀이 상대는 나로 끝내고 내 순진한 동생은 가만뒀으면 하는데.”

“하…하, 저의 놀이 상대까지 자처하시다니. 형제애가 대단하네요.”

손놀림 몇 번에 바짝 선 젖꼭지를 무정원의 손바닥이 부드럽게 감싸오자, 윤모난은 재촉하듯이 뒤에 선 남자의 단단한 남근을 손끝으로 쓸어 올렸다. 뒤에서 부드럽게 목을 애무하는 무정원의 노련함도 느긋하게 즐기려면 하루 종일도 가능했으나, 오늘은 약속한 대로 한 시간 정도로 끝내야 했다.

윤모난은 몸을 돌려 벽에 등을 붙이고 무정원의 턱을 틀어쥐었다.

“뜸 들이지 말고 빨리 해요, 형.”

“…음.”

“형 동생 따먹을 생각 안 나도록 한번 미친 듯이 박아보세요.”

“사람들은….”

무정원은 약간 나른한 표정으로 윤모난의 가슴에서 복근으로 이어지는 계곡에서 손을 미끄러트리더니 이미 발기한 성기를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손의 압박감을 느낀 윤모난이 턱 안쪽에 약간 힘을 주자, 무정원은 물에 적셔져 붉고 촉촉해진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그 일 이후로 네가 변했다고 하는데.”

“…아.”

샤워기에서 물이 흘러 손이 위아래로 움직일 때마다 찰박거리는 소리가 샤워실 가득 울려 퍼졌다. 무정원은 가까이에서 경련하는 윤모난의 얼굴을 감상하며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글쎄, 내가 보기엔 넌 거의 변하지 않았어.”

“아, 읏…. 아.”

“왜? 모난아, 병원에서는 건드릴 만한 녀석이 없었니? 너답지 않게 쉽게 흥분하는구나.”

윤모난의 목울대가 기이하게 움직이면서 뒤로 꺾였다. 목덜미에 차가운 목소리가 질척이며 닿았다.

“응?”

“…시발, 형이 거기… 읏… 들어가봐요. 그 우울한 곳에서 섹스할 생각이 나나.”

“아, 그러면 3년 동안 앞은 물론이고 여기도 안 썼다는 거군?”

무정원의 손가락이 다리 틈을 벌리며 구멍을 지분거리자 윤모난이 으으, 하고 입술을 물었다.

“그럼 거의 처음 하는 거나 다름없겠는데?”

“형이 처음 같은 거에 연연하는 줄은 몰랐는데.”

“연연하진 않는다. 어차피 네 처음도 나였으니까. 대신에 오랜만에 추억을 되살려보자는 거지.”

윤모난은 약간 얼굴을 찡그리며 품에서 빠져나와 무정원을 밉지 않게 흘겼다. 그리곤 상대를 마주 본 채 한쪽 다리를 들어 적절한 위치에 있는 턱에 걸쳤다. 약간 높이가 있었으나 무술을 수련하는 신체의 유연함은 가장 안정적인 균형을 찾았다.

윤모난의 허벅지에 무정원의 발기한 물건이 닿았다.

“…그럼 처음 할 때처럼, 피 흘릴 때까지 박을 거예요?”

윤모난은 담배를 잡는 것처럼 손가락으로 그 기둥을 건드리면서 물기에 젖은 목소리로 물었다.

“네가 그때처럼 엉엉 우는 걸 보고 싶긴 해.”

무정원은 움직이던 손을 더 깊숙이 밀어 넣으며 짐짓 점잖은 말투로 말했다. 파괴적인 욕망이 덕지덕지 붙은 그 말에 윤모난은 웃었다.

“하지만 이젠 너한테 그럴 수 없지. 이건 불쌍한 너를 달래기 위한 위로니까.”

촘촘하게 다물어진 구멍을 뚫고 들어간 무정원은 부드럽게 손가락을 회전시키면서 그 안을 조금씩 비집고 들어갔다. 그러자 윤모난이 그에 반응하며 뒷머리를 끌어당겨 입술을 포개어온다.

감각이 죽은 손끝이 어둡고 촉촉한 구멍 안을 파고들 때마다 위에서는 똑같이 윤모난의 혀가 무정원의 입안을 헤집었다. 약간은 단단하지만 점막으로 이루어져 미끄럽고 미세한 굴곡이 느껴지는 안에서 혀가 얽힐 때마다 질척이는 소리가 났다.

내벽 안쪽 극점을 자극하자, 윤모난은 흐릿한 소리를 내면서 손목을 돌려 무정원의 성기를 손바닥으로 쥐었다. 꽤 센 악력으로 잡힌 무정원의 성기가 터질 듯이 부풀어 오르면서 꺼덕거리고 있었다.

동시에 무정원은 한 손을 윤모난이 기대어 있는 벽 위로 짚었다. 그리고 윤모난이 흔들어대는 예민한 곳에서 피어오르는 쾌감과 함께, 구멍 안을 헤집고 들어 찬 제 손에도 조금씩 율동을 줬다. 그러자 오래도록 정신병과 함께 닫혀 있던 깊숙한 곳에서부터 쾌감이 올라와 윤모난의 성기 끝을 적셨다.

윤모난이 고개를 움직여 그의 귓불을 약간 세게 깨물자, 무정원은 샤워기의 온수에서 피어오르는 김처럼 신음을 뱉었다. 무정원이 제 손과 혀에 흥분하기 시작하자 윤모난이 기회를 낚아채듯 그의 귀 끝을 빨아당겼다. 이윽고 입술을 떼자 피가 몰려 붉어진 귀 끝은 꽃잎을 매단 것처럼 보였다.

“…형.”

윤모난은 말을 완성하지 않았다. 대신에 제 안을 휘젓던 무정원의 손을 거두어 빼고 그의 골반을 더 바짝 끌어당긴다. 그러더니 손아귀 안에서 터질 듯이 발기해 있는 성기를 제 입구 안쪽으로 직접 가져다 댔다. 들어가기 좋게 벌어진 구멍은 남자의 큰 물건을 순식간에 반쯤 빨아들였다.

흡입하듯이 제 성기를 감싸오는 감각에 권위적이고 이성적이던 무정원마저 흐트러진 얼굴을 했다. 종교를 믿는 무정원은 이런 식으로 타락의 죄를 지을 때마다 가장 취약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윤모난은 그 얼굴을 감상하기 위해 턱을 들어 제게로 고정시켰다.

“하아, 형. 얼굴, 보여줘요.”

“하아….”

“읏, 그걸 봐야… 위로가 되죠.”

잿빛 눈동자 안에 자신의 하얀 얼굴이 연기처럼 피어오른다. 그 안에 담긴 남자는 으레 삽입의 도입부에 느껴지는 약간의 고통에 소리 없이 입술을 벌리고 신음했다. 윤모난의 오른쪽 무릎이 골반을 조이며 붙어오자, 무정원은 팔로 그의 다리를 감싸고 더 깊이 자신을 삽입시켰다.

“아, 너무… 오랜…만이라서 윽…!”

“하아… 이 자세는 원래 너한테 더 힘들긴 하지.”

“시발, 그냥 집어넣어요. 아파도 상관없으니까.”

“바른 말을 써야지… 모난아.”

때 아닌 훈계에 윤모난이 짜증스러운 표정을 짓더니 허리를 들썩였다. 그렇게 좁은 틈 안에 갇힌 무정원은 다리를 더 꽉 잡아오며 응했다. 희고 탄탄한 허벅다리에 진하고 붉은 손자국이 남을 때까지. 윤모난의 몸이 위아래로 움직이기 시작하자 물에 젖은 살결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샤워실 안에 천박하게 울려 퍼졌다.

물줄기 소리를 압도하는 마찰음이 움직임과 함께 더 커져갔다. 윤모난은 여전히 연약함에 물든 무정원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붉게 상기된 윤모난의 뺨 아래, 탐스러운 입술이 탐욕스럽게 익다 못해 터져버린 과일처럼 벌어졌다.

무정원은 어느새 주도권을 잃어버린 채 윤모난의 움직임 하나하나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그 와중에 샤워기에서 떨어지는 물은 깊게 삽입할 때마다 부풀었다가 꺼지는 윤모난의 복근 위로 떨어져 흐르고 있었다. 몸 안에 들어온 물건의 윤곽이 드러날 때마다 그의 명치 부근에 자리 잡은 뱀 문신의 대가리가 움찔거리는 착시마저도 일으켰다.

“아, 아, 하…읏…. 으, 미친…!”

“하윽.”

오랜만에 하는 섹스에 더 민감하게 느껴서일까. 윤모난은 교성을 뱉으며 뒤통수를 뒤로 젖히고 샤워실 벽에 짓이겼다. 흰 벽에 젖은 분홍색 머리가 한 올씩 달라붙었다가 떨어진다. 윤모난은 더 큰 쾌락을 갈구하며 손을 내려서 자신의 성기를 감싸 쥐었다.

그러자 아래서 삽입하는 움직임도 더 거세지더니 찰박거리던 소리가 퍽, 하는 마찰음으로 변했다. 무정원은 윤모난의 안쪽 어느 곳을 찔러야 흥분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오목하고 꺼칠한 그곳을 귀두에 불거진 갓이 긁고 지나가자 윤모난은 자기도 모르게 입맛을 다셨다. 이번에는 무정원이 윤모난의 목뒤를 고정시켰다.

“하아… 아윽, 읏… 아! 형, 빨리… 아… 더 빨리 읏….”

“아… 하아….”

무정원은 상대의 재촉에 그를 거칠게 벽에 완전히 붙였다. 그러자 발을 지지하던 턱과 멀어져 자유로워진 두 다리가 무정원의 탄탄한 엉덩이 위 근육을 조이며 감싸온다. 윤모난을 완전히 들어 올린 무정원은 그의 하중과 손힘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완전히 체중이 실려 깊게 삽입된 성기가 내벽을 쭉 긁다가 빠지더니, 다음 순간 압력을 주며 더 깊게 치고 들어온다. 안을 푹푹 찌르는 압박에 윤모난은 배 깊숙한 쪽이 파열되어 터질 것 같은 고통과 쾌락을 동시에 느꼈다.

“하윽, 익, 힉…!”

물줄기가 무정원의 두꺼운 허벅지를 적시며 계속 흘렀다. 무정원에게 반쯤 매달린 남자의 꽉 다물린 입술을 타고서도 투명한 눈물이 똑같이 흐르고 있었다. 무정원은 윤모난의 눈에 괴었다 흐르는 눈물을 혀로 핥았다. 그 와중에도 윤모난은 계속해서 자신의 중심에 압박을 주며 사정을 독려하고 있었다.

마찰되어 꺼덕거리던 윤모난의 커다랗고 붉고 빳빳한 성기에서 순간 흰 점액이 터져 손을 타고 흘렀다. 윤모난은 안에 든 액체를 다 빼기 전까지 무정원에게 착실히 박히면서도 손의 움직임을 멈추지 않았다.

이윽고 그의 턱 근육이 경련하고 온몸이 움찔댔다. 무정원이 추삽질을 조금이라도 세게 하면 바늘에 찔린 듯이 복근이 울렁거렸다. 윤모난이 절정에 다다랐다는 징조였다.

벽의 미끄러운 면을 오르락내리락하는 등의 마찰만큼 아래에서는 거친 좆질에 접합부가 벌겋게 부어올라 움찔거리며 안을 조이고 있었다. 그렇게 무정원의 성기가 구멍 안쪽을 집요하게 푹푹 쑤시자, 윤모난은 참지 못하고 주먹으로 옆 벽을 쾅, 하고 내려쳤다. 그렇게 깊게 삽입할 때마다 내려친 벽은 세 번만에 쭉 금이 갔다.

“다 부술 셈… 윽….”

“…아, 하악….”

“하아….”

무정원이 추삽질을 멈추고 두 손으로 윤모난의 엉덩이 살을 콱 움켜쥐었다. 딱히 안에 싸게 하려던 건 아니었지만, 입에 고인 뜨거운 침을 삼키는 것도 버거웠던 윤모난은 그가 하는 대로 내버려두었다. 그러자 깊게 처박히는 것과 동시에 골 안쪽에 무언가 가득 들어차는 기분이 느껴졌다. 눈앞에선 무정원이 어금니를 콱 깨물며 눈을 감았다.

그렇게 무정원이 안에 사정하는 동안 윤모난은 입안에 고여 있던 침을 주룩 흘렸다. 점도가 낮아 물처럼 흘러내린 타액은 샤워기 물에 슬며시 섞여들었다. 한바탕 체액을 쏟아낸 후에도 한참이나 몸을 겹친 채 숨을 몰아쉬던 두 사람은 크게 부풀어 올랐다 꺼지던 흉곽이 점차 안정되어갈 때쯤 몸을 떨어뜨렸다. 그제야 윤모난의 두 발도 바닥에 닿았다.

안에 고인 정액이 엉덩이골을 타고 찐득한 우유처럼 덩어리지며 바닥으로 툭툭 떨어졌다. 윤모난은 손등으로 섹스의 여운이 남은 입가와 눈가를 훔치며 실소를 터뜨렸다.

“…이러면 오래 씻어야 하잖아요. 한 시간이라니까.”

“네가 그렇게 시간에 쫓기는 줄 몰랐는데….”

무정원이 약간 장난기 섞인 얼굴로 웃는다. 그러자 윤모난이 눈알을 위로 굴리며 제 손가락 두 개를 입에 넣고 쭉 빨더니, 다리 하나를 올려 무정원이 등지고 있던 벽에 고정시키고 무릎을 굽혔다.

그리고 윤모난은 다시 삽입할 것 같은 자세로 방금까지 타인이 점거했던 그곳을 스스로 쑤시기 시작했다. 미세하게 찡그려지는 미간을 보던 무정원은 자신도 모르게 제 입술을 혀끝으로 훑었다.

“읏.”

손가락 두 개가 안을 헤집으며 고인 정액을 긁어내자 문이 닫혀 차마 빠져나오지 못했던 정액이 아래로 투두둑 쏟아졌다.

“많이도 쌌네.”

마치 핀잔을 주는 말투였다. 그러건 말건 무정원은 손가락을 집어삼키곤 희뿌연 체액을 묻힌 채 붉게 오므라든 윤모난의 그곳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더 긁어낼 것이 없자 윤모난은 천천히 제 아래에서 손을 빼고 정액으로 더럽혀진 손가락을 무정원의 가슴팍에 슥 닦았다.

“처음에 할 때는 직접 빼달라고 내게 애걸복걸했었는데. 어리고 순수했던 윤모난이 그립군.”

“형도 이제 나이 들었나 봐요. 자꾸 옛날 얘기를 하고….”

윤모난은 무정원을 뒤로 밀치고 정수리부터 다시 물을 적시며 옆에 놓인 비누를 집어 들었다. 그런 윤모난을 보던 무정원은 그의 손에서 비누를 빼앗아 분홍색 머리카락에 비비며 거품을 냈다. 두피를 부드럽게 누르는 손길에 모든 것을 맡겨버린 윤모난은 눈을 감고 물을 맞았다.

그렇게 하얀 거품이 머리칼을 감싸며 부풀어 오르다 흘러내리기 시작하자, 무정원은 적절히 물로 얼굴을 닦아주며 거품이 눈에 안 들어가도록 했다.

“지금 해봐. 능력이 어느 정도 돌아왔는지 궁금하구나.”

“…음.”

무정원의 말에 윤모난은 정신을 집중했다. 샤워기 소리와 아래서 하수구에 물이 꼴꼴꼴 내려가는 소리. 그리고 어디선가 나는 삐― 하는 작은 기계음. 나무 가구가 살짝 뒤틀리며 이따금씩 나는 소음. 그리고….

“문 앞에 누가 있는 것 같은데요.”

윤모난은 집중을 위해 감았던 눈을 뜨며 나지막이 말했다. 그러자 그의 머리를 감겨주던 남자의 동작이 정지한다.

“어디.”

“샤워실 바로 앞은 아니고 훈련실 문 바로 앞에 붙어 있네요. 30m 정도 되는 거리. 그사이에 벽은 두 개… 느껴지는 파동으로 볼 땐… 어라?”

“왜?”

“형은 여기 있어요. 북해의 차기 가주가 되실 분을 채신없이 발가벗고 나가게 할 순 없죠.”

윤모난은 대충 머리를 물에 헹궈내고 쭉 물기를 짠 다음 무정원을 남겨두고 조용히 샤워실을 나왔다. 대충 속옷을 입고 걸음을 떼자 물기를 닦지 않은 발걸음이 유독 음습하게 바닥에 달라붙었다. 윤모난은 벽에 바짝 붙어 가까이에 있는 파동을 읽었다.

왠지 모르지만 꽤 뾰족하게 느껴진다. 누구지?

그런 생각을 하는 와중에 문밖에서 미세하게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바로 반응하며 문을 박차고 뛰어나갔으나 복도 끝 어둠 속에서 계단을 내려가는 발걸음 소리만 조용히 울려 퍼졌다.

쫓아가는 대신에 윤모난은 상대방의 에너지가 물결처럼 공간을 타고 흐르는 가상의 표면에 거센 파동을 일으켰다. 그가 만들어낸 파동은 해일처럼 상대의 에너지를 압도하고 제압한다. 능력을 제압당한 에스퍼는 바로 추적하면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때 어느새 옷을 갖춰 입고 나타난 무정원이 나체로 서 있는 윤모난의 몸에 수건을 덮으며 여유로운 태도로 말했다.

“내가 알아볼게. 넌 마무리하고 들어가라.”

“…쥐새끼가 누구건 입막음 잘하세요. 들켜서 좋을 거 없잖아요.”

“그러지.”

윤모난은 상대를 쫓아 사라지는 무정원의 뒷모습을 보다가 수건으로 물기를 닦으며 돌아섰다.

<2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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