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권-5. 하명 (5/24)

5. 하명

이틀 뒤, 한백호의 팀 치안조 1부 3팀을 지원하기 위해 출동하기로 한 날의 아침이 밝았다. 서둘러 준비를 마치고 서곡센터 안에 있는 이동 승강장으로 향하면서 윤모난이 무구원에게 물었다.

“어제 하루 종일 숙취 때문에 고생하더니 오늘은 괜찮아요?”

“…네.”

“다행이네.”

“…저, 팀장님.”

“왜?”

“제가 그날 무슨 실수 했습니까?”

이런 질문은 전형적으로 술에 취해 무슨 실수를 하긴 한 것 같은데, 도통 그 내용은 기억이 나지 않을 때 하는 대사였다. 윤모난은 빤히 바라보기만 할 뿐 대답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런 행동이 무슨 오해를 불러일으켰는지, 무구원의 얼굴에 핏기가 싹 가신다.

“내가 그렇게 마음에 안 들면 말을 하지 그랬어, 십자.”

“…네?”

“내 머리 색 맘에 안 든다고 그러던데? 분홍색 싫어하나 봐.”

“…….”

그건 거짓말이었지만, 진실과 거짓을 가릴 수 있는 기억이 없는 무구원은 약간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은 한 번도 윤모난의 머리 색이 거슬린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엄청 튀기는 하지만 윤모난에게는 꽤 잘 어울리는데….

갸웃거리던 무구원은 그의 입가에 매달린 웃음기를 보고 그것이 장난임을 깨달았다.

“장난이시죠?”

“아니. 정말 당신이 그랬다니까.”

“입에 침이나 바르시죠.”

“발랐어. 만져서 확인해볼래?”

“…….”

그렇게 시답지 않은 농담을 나누며 걷다 보니 어느새 둘은 승강장이 있는 회색 돔 형태의 건물에 도착했다. 이미 서곡에 있는 각 조의 팀들이 예정된 출동을 위해 각각 모여든 탓에 건물 앞이 꽤 복잡했다.

국가이능력기관 서곡센터는 크게 다섯 개의 조로 편성되어 있다. 가장 규모가 큰 순서대로 나열하자면 전투조, 치안조, 정보 수집조, 복구 및 구호조, 연구조 순이다. 또, 서곡센터를 중심으로 반도의 거점 다섯 군데에 이보다 더 적은 규모의 지부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기관에서는 무간의 경계를 지키는 전투조의 위상이 가장 크다고 할 수 있겠으나, 사실상 반도 내부의 일에 가장 영향을 많이 미치는 집단은 바로 치안조였다. 치안조는 주로 테러, 폭동, 모략, 첩보 등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용의자들을 적발 및 체포하는 임무를 수행한다. 지금까지 윤모난과 무구원이 수행하던 임무와는 전혀 성격이 달랐던 것이다.

“한백호 개자식, 점수 안 주려고 출동 명령도 미루고 한 달 동안 모른 척하더니, 결국 개 잡스러운 일만 골라서 소환했네.”

“치안조 업무에 나가보신 적 있습니까?”

“아니. 하지만 무슨 일을 어떻게 하는지는 대충 알죠. 반도에서 치안조들은 비밀 경찰이나 다름없잖아. 겉으로는 국가 체제 유지를 위해 봉사한다지만, 사실상 평의회의 사상에 반대하는 반동분자들 색출해서 죽이는 게 목적이지.”

윤모난은 치안조가 출동할 때 입는 검은색 레인코트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물었다. 기다랗고 품이 넉넉한 레인코트는 전투조의 제복과 다른 분위기를 풍겼다. 천경교와 반도의 상징인 눈과 가시나무가 얽힌 마크 말고는 별다른 이름이나 직위가 새겨져 있지 않았다. 그 옷은 치안조 업무가 지닌 어두운 측면을 예시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승강장이 있는 건물 앞에 설치된 확성기에서는 인파들을 인도하는 단조로운 기계음만 계속 흘러나오고 있었다.

―무간으로 출정하는 전투조는 1번 승강장으로 집합하십시오.

―7번 승강장이 개문되었습니다. 부상자 수송을 위해 입구에 서 있는 대원들은 길을 터주시기 바랍니다.

―치안조 출정은 30분 정도 지연될 예정이니, 대기 부탁드립니다.

“1부 3팀이 늦네요.”

호출기로 연락해도 한백호가 응답하지 않자 무구원이 인상을 구겼다. 분명 아침 9시 30분까지 건물 앞에 모이기로 했는데 벌써 7분이나 지났다. 윤모난은 느긋하게 담배를 마저 피우며 말했다.

“아마 출정이 30분 지연된 거 이미 알고 있을 거야. 우리 엿 먹으라고 연락도 없이 늦게 올 셈인 거지.”

“…그런 치사한.”

“이번에 한백호가 텃세 꽤 부릴 텐데. 어쩌죠, 십자. 팀 스코어는 천 점이나 더 깎였으니 성질대로 팰 수도 없고.”

“…….”

“내가 왜 이런 말 하는지 알겠어?”

“네, 압니다.”

한백호가 무슨 지랄을 하건 성질 죽이라는 뜻이었다. 또 문제를 일으켰다간 마이너스 1만 점으로 떨어질 테니. 더욱이 한백호에게 이번 작전으로 오백 점이나 약속받은 상황에서 더욱 그랬다.

엿 같아도 참아야 한다. 오히려 무구원은 제 팀장이 더 우려되었다. 이번 작전에서는 엄연히 한백호가 지휘권을 가지고 있고, 윤모난은 팀장이라곤 해도 여기서는 다른 팀원들과 마찬가지인 입장이다. 지난번 일로 한백호는 윤모난을 향한 적개심을 숨기지 않을 게 뻔했다

“내가 말했지. 점수 올리려면 더럽고 비열하고 비도덕적인 일이라도 해야 한다고.”

“…….”

“이번 작전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든 간에, 그 말을 잊지 마세요. 알겠습니까?”

“…저는 이번 작전이 단순히 민간인 거주 지역에 숨어 있는 트랜스들을 적발하는 임무인 줄 알았는데요.”

“응, 아주 틀린 말은 아니지. 하지만 한백호가 일 처리 하는 방식이 당신 마음에 안 들 거야.”

한백호를 잘 아는 윤모난으로서는 이런 것에 대해 무구원에게 미리 당부해두는 편이 안전했다. 무간에 가서 괴물들을 죽이는 것도 거칠고 힘든 일이지만, 치안조의 작전에서는 어둡고 부조리한 일들이 자주 일어난다.

이런 판국에 치안조 전체 1위라는 성적은 그저 뒷공작만으로 쟁취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제아무리 비리투성이라도 목숨 날아가면 그만이니까. 그런 의미에서 한백호는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그의 손에 즉결 처형을 당한 사람들의 수는 정확히 밝혀진 바 없으나 그런 지표 없이도 그의 실적은 단연 눈에 띄었다.

이런저런 당부를 하며 기다리는 와중에 길목에서 전투조 제복을 입은 한 무리의 대원들이 열에 맞춰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선두에 서 있는 사람을 보자마자 무구원은 허리를 펴고 고개를 숙였다. 무정원이었다.

“형 팀도 오늘 출정이에요?”

“그래.”

무정원은 자신에게 묵례를 하고 있는 동생에게 힐끗 시선을 준 뒤에, 옆에 있는 윤모난을 향해 옅은 미소를 지었다. 바로 전날 새벽 정사를 치르긴 했지만 연인 사이는 아닌 둘은 평소대로 약간의 예의와 친근함을 섞어 짧게 대화를 나눴다.

“무구원.”

그런데 오늘의 무정원은 무구원에게 용건이 있는 듯했다.

“만난 김에 잠깐 대화 좀 할까.”

“네.”

“정원 님, 승강장이 방금 개문해서 기다릴 시간이….”

무정원의 북해 팀 소속 에스퍼 한 명이 곤란한 얼굴로 시간을 일러주려 하자, 검은 가죽 장갑을 낀 손이 채찍처럼 휘둘러졌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휘청거린 팀원은 바로 무릎을 꿇었다.

“감히.”

무정원은 잘못을 일일이 서술하지도 않았다. ‘감히’라는 그 두 글자만으로 모든 것을 말한 셈이다. 무정원이 손짓을 하자 그의 나머지 팀원들이 잘못을 저지른 팀원을 뒤로 끌어냈다.

“잠깐 둘만 얘기했으면 한다.”

무정원은 냉랭한 얼굴로 동생에게 명령했다. 무구원은 그를 따라 건물 뒤 한적한 곳으로 향했다. 단둘이 남게 되자 그의 뺨 위로 예고 없는 손찌검이 날아들었다. 잠시 중심을 잃었으나 무구원은 자세를 고쳐 섰다.

“네가 무슨 잘못을 했는지는 알겠지.”

“…네.”

“지난번 대화를 엿들었던 건 치지 않은 거다. 그건 나중에 따로 물을 테니까. 하지만….”

“…….”

“부리는 개가 상전에게 대드는데, 혈육인 너는 가만히 서 있고 내 손을 직접 더럽히게 하다니.”

“제가 감히 손을 대는 것도 부적절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머리 굴리지 마라.”

무정원은 차가운 눈으로 뻣뻣하게 서 있는 무구원을 훑어봤다. 그러더니 동생의 셔츠 깃을 무심한 손길로 툭툭 정리하고 흐트러진 넥타이를 다시 조여주었다.

“명심해. 넌 북해인이다.”

“네, 압니다.”

“병석에 계신 아버님께서 소천하실 날이 얼마 남지 않았어. 북해에 있는 형제들이 걱정이 많아.”

이런 식의 대화는 항상 한 방향으로 흘러간다는 것을 무구원은 이미 알고 있었다. 제 형님은 무언가를 명령할 때 평소보다 더 엄한 어투로 북해의 핏줄을 강조하니까.

아니나 다를까, 무정원이 동생의 목을 바짝 끌어당기더니 귓가에 나지막이 속삭였다.

“네가 할 일이 있다.”

“하명하십시오.”

“윤모난과 가까워져야 한다.”

순간 무구원이 눈을 크게 뜨며 고개를 돌리려 하자, 목을 감싼 손이 강한 악력으로 그를 붙들었다.

“너는 그 애가 믿고 아끼는 사람이 되어야 해.”

“…무슨 이유에서 그런 명령을 하시는지 여쭤봐도 됩니까?”

“북해를 위한 일이다.”

“정치적 이유입니까?”

“그래.”

가문을 위한 명령이라면 아마 단순히 2부 7팀의 성실한 팀원이 되라는 의미는 아닐 것이다. 무구원은 손 근육에 힘을 바짝 주었다. 평소라면 묻지도 않고 즉시 따르겠다고 했겠지만, 이번만은 바로 대답이 튀어나오지 않았다.

조용히 동생을 놓아준 무정원은 그의 얼굴에 얽힌 복잡한 기색을 살피다 낮게 경고했다.

“잊지 말아라. 북해 밖의 모든 이들은 외부인이라는 것을.”

“형님, 제 신념에 어긋나는 일까지 해야 한다면….”

“어머니 신께서는 모든 것을 굽어살피고 계시지. 우리의 고통과 고뇌, 그리고 삶을 이어나가기 위한 모든 투쟁까지 그분은 이해하신다.”

“…팀장님이 남경의 후계자가 될까 우려하시는 겁니까?”

“그래. 허나 독사 무리에서 자라 맹독을 가지고 있다고 한들, 사육장 안에 갇힌다면 그게 무슨 위력이 있겠니.”

“지금까지 본 바로는 팀장님은 평의회뿐 아니라 정치 자체에 관심이 없습니다.”

“그래, 지금은. 하지만 그 녀석이 마음을 바꿔 남경의 주인이라도 꿈꾸게 된다면 성가셔진다.”

결국 무정원은 가이드인 윤모난이 남경의 가주가 되었을 때 불러올 결과를 경계하고 있다는 말이었다. 지금으로서는 다섯 가문의 후계자들이 모두 에스퍼지만, 만에 하나 가이드가 평의회의 한자리를 차지한다면 그간 쌓아온 균형이 무너지게 된다. 역사가 이를 증명하고 있었다.

가이드는 반도를 대성전에서 이끈 인도자이자 상징적인 의미에서 에스퍼들의 수호자이다. 윤모난의 카리스마와 능력을 보건대 그가 권력을 탐한다면 향후 국내 정치 구도에 큰 영향을 미칠 것은 자명했다. 그리고 이런 세력 싸움은 무정원과 무구원의 아버지인 현 북해의 가주가 죽으면 바로 가시화될 것이다. 그의 병환과 재정 문제로 인해 북해는 이미 불리한 입장에 놓여 있었다.

무정원은 다 삭아버린 기둥이나마 사라진 때를 대비하려는 것이다. 모든 것은 오로지 북해를 위해서. 끝없이 펼쳐진, 얼지 않는 푸른 바다에 터를 잡고 살아가는 모든 북해인들을 위해서 말이다.

무구원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무정원은 그제야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대화를 마치고 돌아오자, 언제 도착한 건지 한백호네 팀과 윤모난이 서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무정원을 발견한 한백호가 그답지 않게 예의를 차리며 경직된 얼굴로 경례했다.

“…그래.”

한백호의 인사를 간단히 받아준 무정원은 자신의 팀을 데리고 바로 자리를 떴다. 그 뒷모습을 지켜보던 한백호가 표독스럽게 윤모난을 쏘아봤다.

“핑키, 넌 참… 항상 뒷배가 든든하단 말이지….”

“뭔 개소리예요.”

“묻긴 뭘 물어? 다 알면서.”

한백호의 도발에도 윤모난은 쉬이 넘어가주지 않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며 능청을 떨었다. 그런 그를 보던 무구원은 문득 가슴 한구석에 추를 매단 것처럼 마음이 무거워졌다. 불과 몇 분 전 무정원이 내린 명령을 계속 곱씹어보게 된다.

윤모난과 가까워져야 한다.

“십자―.”

마침내 다 모인 1부 3팀과 함께 이동하는 중에 윤모난이 무구원의 어깨에 팔을 걸쳐오며 웃었다.

“형아한테 많이 혼났어?”

“…아닙니다.”

“아니긴, 엉덩이라도 맞은 거야? 어디 보자. 내가 약 발라줄게.”

평소라면 ‘치우십시오’ 아니면 ‘미치셨습니까’라는 말을 이미 내질렀을 법한데, 능글맞게 달라붙어도 딴 데 정신이 팔렸는지 가만히 있는 무구원의 모습에 윤모난은 약간 의아해졌다.

“왜 그래?”

“…….”

“무구원?”

무구원은 대답 대신 느릿하게 팔을 떼어내면서 지그시 팔뚝을 쥐었다가 놓아주었다. 두 남자의 시선이 맞붙자 미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그 순간, 7번 승강장 쪽에서 길을 터달라는 아우성이 들렸다. 무간에서 오는 팀이었다.

“앞에 비켜주세요. 전사자를 이송하고 있습니다.”

흰 천에 덮인 전사자의 시체가 들것에 실려 내려오고 있었다. 혼잡하던 인파는 순식간에 두 갈래로 나뉘어 길을 텄다. 곧이어 같은 팀원들로 보이는 대원들이 울며 줄줄이 쫓아왔으나 사정을 봐줄 것도 없이 들것은 멈추지 않고 이동했다. 서곡 관리자 놈들은 전사자를 하도 많이 수송해서 사무적으로 일을 처리하는 면이 있었다.

이대로 시신을 데려간다면 팀원들은 함께 동고동락한 전우의 얼굴을 더는 보지 못할 것이다. 이를 모를 리 없는 전사자의 팀원들은 흰 천 바깥으로 나온 창백한 손을 겨우 부여잡으며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모든 이는 죽으면 어머니의 땅으로 돌아가야 한다. 망자들은 조에의 거름이 될 것이고, 그 거름으로 다시 생명이 태어날 것이다…. 으흑… 성원아… 텃밭에서 보자. 이제 고통은 끝이다….”

윤모난은 멍하니 그 광경을 보고 있었다. ‘고통은 끝이다’라는 말. 얼핏 들으면 산 자들이 죽은 자에게 건네는 위로 같지만, 사실은 그 반대다. 고통뿐인 생을 떠난 자는 얼마나 편안한가. 그러니 그건 어쭙잖은 위로 따위가 아니라 망자가 낙원으로 가면서 외치는 해방 선언일 테다.

무구원은 그 서글픈 행렬 대신 윤모난을 지켜봤다. 물에 잠기듯 빠르게 우울함에 젖었던 얼굴이 거짓말처럼 그 위로 가면을 확 덮어쓰며 평소대로 돌아오는 것 까지. 평소의 윤 팀장 같은 얼굴이지만 묘한 위화감이 들었다. 뭐라 한마디 하려던 참에, 한백호가 갑자기 끼어들었다.

“이번 작전에서 핑키 넌 내 아래다.”

“네.”

“내가 위, 넌 아래.”

“네.”

“내가 대장, 넌 졸병.”

“…….”

시발, 한백호 이 개새끼가.

평생 성질이란 것을 죽이고 살아본 적 없는 윤모난은 당장이라도 주먹을 휘두르고 싶었지만, 무구원에게 무슨 일이 있어도 참으라고 한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자신이 사고를 칠 수는 없었다. 한백호는 지난 대련에서의 패배를 어느새 까맣게 잊었는지 이번 작전에서 권위를 세워 이쪽을 깔아뭉갤 궁리만 하는 듯 보였다.

한백호는 치안조 1부 3팀의 팀원 네 명과, 윤모난과 무구원을 앞에 두고 간단한 작전 브리핑을 하기 시작했다.

“수도 제18구 공동 거주지에 트랜스가 잠입해 있다는 첩보가 뜬 상태다. 복잡한 거 없이 그 괴물 놈의 새끼들을 적발해서 죽이는 게 이번 임무다. 우리 팀은 두 개 조로 나뉘어 공동 거주지 1, 2, 3동을 뒤진다. 그리고 나머지 떨거지 두 명은 4동부터 10동까지. 오케이?”

“…다섯 명이 세 개 동을 뒤질 동안, 팀장님과 저 둘이서 일곱 개 동이나 조사하란 말입니까?”

무구원이 황당한 얼굴로 묻자, 한백호는 기다렸다는 듯이 이를 드러냈다.

“어이 시발, 핑키, 너네 애새끼 단속 안 하냐? 팀장이 브리핑 중인데 어디 떨거지가 말을 얹어.”

“이제 곧 나가야 하는데 그만하죠.”

윤모난이 귀찮은 얼굴로 대꾸했다. 그의 말대로 공연히 입씨름이나 하고 있을 타이밍은 아니었기에 한백호도 혀를 차며 물러섰다.

“핑키 저놈이 가이드이니까 일곱쯤은 금방 할 거 아니야. 이 북해 동태 새끼야.”

“알았어요. 우리가 그쪽 맡겠습니다.”

“적발하면 바로 사살해. 괜히 힘 빼지 말고.”

대개 이런 일의 내막은 뻔했다. 낮은 등급의 트랜스들은 능력도 거의 없고 위험도도 상대적으로 낮아 종종 가족들이 그들을 숨겨놓는 경우가 있었다. 당국에 신고하지 않고 트랜스를 은닉하는 건 반도에서 중죄 중의 중죄에 해당한다. 걸렸다간 가족 모두 수용소에 가거나 총살감이다.

하지만 트랜스가 된 가족을 신고한다는 건 당사자들에겐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신고당한 트랜스의 운명은 둘 중 하나로 정해지기 때문이다. 당국에 의해 바로 사살당하거나 트랜스 수용소로 포획당하는 것. 그나마 즉결 처분이 자비로운 처사일 정도로 수용소는 온갖 음험한 소문들로 가득 찬 곳이었고, 트랜스의 시체를 태우는 연기가 끊임없이 피어올라 365일 안개로 자욱했다.

윤모난은 아까 보았던 무간에서 돌아온 전사자와, 트랜스가 된 가족을 벽장 어딘가에 숨겨놓고서 벌벌 떨고 있을 누군가를 동시에 생각하고 있었다.

―치안조는 6번 승강장에서 대기하십시오.

“가자아―.”

한백호의 인도하에 소집된 인원은 6번 승강장으로 향했다. 승강장 업무를 담당하는 공간 이동 에스퍼가 출정 명령서를 확인하더니 능력을 일시적으로 증폭하는 기계에 손을 가져다 댔다. 그러자 파란 사각형 모양의 빛이 퍼지면서 문이 생겨났다. 기다리고 있던 모두가 한 명씩 열을 맞춰 그 안으로 들어갔다.

문을 통과하니 단조로운 풍경의 도시와 광활한 대로가 펼쳐졌다. 갓 출근 시간이 지난 시각임에도 길거리엔 행인들이 거의 없었다. 8차선 도로의 끝 쪽에서 한 아이가 신문 뭉치가 가득 실린 녹슨 자전거를 타고 페달을 밟으면서 지나가고 있었다.

“야. 신문!”

대뜸 한백호가 아이를 불러 세우더니 오늘 자 신문 한 부를 샀다. 그러고는 회색 갱지를 펼치고 읽으면서 여유를 부린다.

“이놈의 나라는 말이지― 신문이든 방송이든 떠드는 게 매일매일 똑같아. 재미가 없어.”

“…….”

“남경이 어쨌니. 서강에서 뭔 일이 났니.”

한백호는 길거리 광인처럼 혼자 큰 소리로 떠들더니 바닥에 침을 퉤 뱉었다. 그런 한백호를 본 뒤쪽 사람들은 질린 표정을 지었다. 치안조 1부 3팀 팀원들은 미친놈인 팀장에 비해서 하나같이 기가 죽어 있고 음침한 놈들로만 이루어져 있었다. 말수도 없고 소심해 보이기까지 했다. 어떻게 이런 녀석들만 끌어모았는지 신기할 정도로.

윤모난은 검은색 레인코트 깃을 목에 바짝 올리면서 오랜만에 오는 수도의 광경을 살폈다. 여긴 반도의 수도라고는 하지만 전쟁으로 인해 쑥대밭이 되었던 곳이라 새로 지어 올린 건물이 도시에 가득 들어차 있었다. 특색 없이 똑같은 색과 모양 일색이라 마치 성냥갑 같았다. 정기 운행을 하는 트램이 도시의 아침 공기를 뚫고 지나가고 있었는데, 승객들의 얼굴도 하나같이 음울했다.

반도는 워낙에 가문들의 영향력이 세다 보니, 수도는 그저 행정 도시 정도의 의미밖에는 없었다. 도시 인구의 대다수가 정부에 근무하는 공무원들과 그 가족이고, 그 외에는 평의회 정부 청사와 반도 훈련 학교 관계자들 정도뿐이었다. 이번 작전 지역인 18구는 마침 윤모난과 한백호가 다녔던 훈련 학교가 있는 구역이었다.

“학교 근처는 오랜만이네. 여기 근처에 맛있는 막걸릿집 있는데, 핑키 어때? 일은 일찍 끝내고 오랜만에 선후배 간의 우정이나 다시 다질 겸?”

“…안 될 거 없죠. 형이 돈 내면 갑니다.”

“오백 점이나 가져가면서 내가 돈까지 내야 하냐? 시―팔, 뱀 새끼 아니랄까 봐.”

날선 조소에 윤모난은 어깨를 으쓱했다. 시답잖은 대화를 하며 대로를 따라 걸은 지 10분 정도 되자, 이번 작전지인 공동 거주 지역의 회색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한눈에 봐도 가구 수가 어마어마한 대단지였다. 한백호가 왜 막걸리나 마시자며 능청을 떨었는지 알 만했다.

일찍은 개뿔! 작전이 끝날 때까지 일곱 개 동을 쎄 빠지게 돌아다니게 될 윤모난과 무구원을 조롱하고 싶었던 것이다.

“자. 그럼 고생하시고. 무슨 일 있으면 나한테 호출.”

“…….”

한백호는 킬킬거리더니 자기 팀원들을 데리고 단지 안쪽으로 가버렸다. 윤모난은 바로 그 뒤통수에 대고 욕을 날렸다.

“개 같은 놈.”

“…따로 흩어져서 시작하시죠.”

아까 전부터 한마디도 않던 무구원의 제안에 윤모난은 고개를 끄덕였다. 치안조의 이런 업무는 발바닥에 땀 날 때까지 돌아다니는 게 전부다. 탐문 및 심문 그리고 수색까지. 미리 사전 조사한 자료를 바탕으로 일일이 초인종을 눌러 수사해야 했으니 무구원과 구역을 나누는 편이 효율적이었다.

무구원에게 한 동을 맡긴 윤모난은 단지 중앙에 서서 정신을 집중했다. 공간의 평면에 온갖 에너지 파동들이 얽혀 있었다. 그 사이에서 느껴지는 아주 작은 위화감을 찾아야 했다. 방금 도착한 에스퍼들의 파동, 일반인 포스트들의 미약한 파동. 그리고 또….

없다.

느껴져야만 할 트랜스의 에너지 파동이 꼭 차단된 것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무정원과 자면서까지 능력을 활성화시킨 가이드 윤모난이 아무것도 포착하지 못한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었다. 벌써 트랜스를 다른 곳으로 이동시킨 건가?

그런 일도 아주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트랜스들은 초의식으로 동족들과 소통하는 생명체기에 모든 트랜스들은 본능적으로 트랜스가 사는 차원에 이끌리게 된다. 차원의 경계인 무간에서 마주치는 트랜스 중에서도 소수지만 이주 중인 이탈자들이 종종 있었다.

딩동―

“당국에서 나왔습니다. 문 좀 열어주시죠.”

윤모난은 제가 맡은 4동의 탐문 대상인 집부터 시작했다. 조금 기다리자 안에서 여자가 문을 연다. 검은 코트를 입은 분홍 머리의 남자를 본 새댁은 본능적으로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오전에 검은 옷을 입고 찾아오는 낯선 이는 대개 달갑지 않은 손님이라는 이유도 있겠지만, 실로 위압적인 윤모난의 커다란 키와 체격 때문이었다. 누구나 한 번쯤 힐긋 쳐다볼 만큼 잘생겼지만 창백한 얼굴에는 냉기가 돌아 왠지 모를 섬뜩함이 느껴졌다. 예의상 차린 미소는 오히려 무덤가에 세워진 조각상 같은 인상을 풍겨 절로 몸이 굳었다.

당국에서 조사를 나왔다는 것은 마음대로 이 집을 들쑤셔서 숟가락 개수까지 세어가겠다는 의미였다. 어린아이를 키우는 새댁은 얼른 한켠으로 비켜섰다. 이런 경우 ‘무슨 일이시죠?’라고 묻는 것조차 불경의 죄가 될 수 있음을 알기에.

“실례하겠습니다. 그럼.”

윤모난은 집에 들어서면서 신발을 벗었다. 18구는 딱히 부자 동네도 아니지만 빈민촌도 아니다. 정부 청사와 가까운 데 있고 방세가 합리적인 축에 속해 막 결혼한 젊은 부부들이 많이 살았다. 이 집도 그런 집 중의 하나인 듯했다. 아이가 두 명. 하나는 갓난쟁이고 하나는 막 다섯 살 정도 되었다던가.

아이는 거실에 깔린 흰 위에 내복 차림으로 앉아 있었다. 갑자기 집에 침입한 커다랗고 시커먼 남자를 올려다보던 아이는 작은 사각형 장난감을 품에 끌어안으며 코를 쭉 흘렸다.

“…경찰 아저씨다아.”

“응, 똑똑하네. 근데 그냥 경찰 아니고, 비밀 많은 경찰인데.”

“경찰 아저씨이.”

“아가, 조용히! 자, 얼른 방에 들어가자.”

새댁은 아이가 윤모난과 말을 트자 질색하며 얼른 안아 올렸다. 윤모난은 그 일련의 행동을 눈으로 끈질기게 좇았다. 아이를 방 안에 밀어 넣고 문을 꼭 닫은 새댁은 쭈뼛거리면서 앞치마를 만지작거리더니 물었다.

“호… 혹시, 저희한테 무슨 문제라도.”

“탐문 중입니다. 이 단지 내에 트랜스가 있다는 신고를 받아서요.”

“…저희 지… 집에요?”

“아니요. 그런데 자녀분은 단지 내부에 있는 유치원에 보내십니까?”

아이에 대한 질문을 던지자 새댁은 안절부절못하더니 이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요즘 원생들 중에 장기 결석을 하는 친구가 있을까요? 원래 부모들끼리는 서로 알 텐데요.”

“…따… 딱히, 제가 아는 집 중에서는 없어요.”

“협조 부탁드립니다. 아는 것 있으면 말씀해주세요.”

“…전… 정말, 정말 모릅니다.”

“경찰 아저씨이….”

그때 꼬맹이가 언제 방에서 나왔는지 윤모난의 코트 자락을 붙잡고 매달렸다. 하얗고 말랑한 젖살이 통통하게 오른 아이에게서 미세하게 에너지가 느껴졌다. 번쩍 안아 올리자 아이는 꺄르르 웃어대며 자신이 가지고 놀던 장난감을 내밀었다.

“아가야, 넌 능력이 뭐냐.”

“…분홍색.”

아이는 윤모난의 머리를 신기한 듯 만지작거렸다. 앞에서 아이의 엄마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신 대답했다.

“포스트지만 능력은 거… 거의 없는 거나 마찬가지예요.”

“음….”

계속 머리를 만지작거릴 뿐인 아이를 보며 윤모난은 생각에 빠졌다. 반도에서 포스트가 태어나는 경우는 인구의 27% 정도이다. 3분의 1 정도이지만 결코 과반수는 아니니 어딜 가나 포스트 아이를 가진 부모들끼리는 서로 안면을 트게 되는 법이다.

더욱이 윤모난이 가장 먼저 이 집을 골라 찾아온 건 첩보가 있었기 때문이다. 유치원 선생이 몰래 신고하기를, 장기 결석 중인 원생이 있다고 했다. 그리고 그 집과 이 집 부부가 서로 친하다는 것도 이미 파악한 상황이었다.

새댁은 거짓말을 하고 있다. 하지만 왜?

윤모난은 아이를 다시 내려놓고 엄마에게 떠밀었다. 그리고 큐브 장난감을 들어 공중으로 던졌다가 낚아챘다. 한 번 더 휙, 하고 던지고 잡는다.

“포스트 아이를 일반 가정에서 키우는 건 영 까다롭죠.”

휙, 그리고 탁.

큐브가 높은 곳까지 날았다가 되돌아왔다.

“아이들 좀 다시 방 안에 들여보내고 문 좀 꽉 닫을 수 있을까요?”

공손한 말투였지만 듣는 사람 입장에서는 전혀 그렇게 느껴지지 않았다. 윤모난의 지시를 순순히 따른 새댁은 문고리를 잡은 채로 그 앞에 섰다.

윤모난은 별안간 들고 있던 큐브를 흰 벽에 쾅 내려쳤다. 우수수 부서져 박살 난 조각들이 바닥으로 떨어지고, 갑자기 터진 큰 소리에 놀란 방 안의 아이들이 목이 찢어져라 울기 시작하면서 엄마를 찾는다. 동시에 여자는 주룩 방문 앞에 미끄러져 앉았다.

“어째서 일반 가정집에 이런 파동 탐색 방해 장치가 있는지 말씀해주시겠습니까?”

“우에에엥! 엄마아아아!”

“혹시 국가에 반하는 일에 개입하고 계십니까?”

“엄마아아아!”

여자는 입을 꾹 다문 채로 떨고 있었다. 윤모난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일단 아이부터 달래시죠. 놀라게 해서 죄송합니다.”

“…….”

“얼른요.”

“네.”

윤모난이 종용하자 새댁은 방 안에서 아이들을 달래고 핏기가 가신 얼굴로 다시 나왔다. 윤모난은 그녀가 스스로 털어놓기 전까지 더 묻지도 않았다.

“…포스트 아이들을 키우는 부모들끼리 예방 차원에서 구한… 물건이에요.”

“무슨 목적이죠?”

“요즘… 흉흉한 소문이 돌아서요. 당국에서… 이능력이 강한 포스트인 아이들을… 강제로 데려간다는….”

그런 말은 처음 듣는 소리였다. 윤모난은 미간을 좁히며 박살 난 장치의 내부를 꼼꼼히 살폈다.

“저는… 이제 어떻게 되나요?”

“어떻게 되긴요. 다시는 이런 물건 들고 있지 마세요. 정말 곤란해질 수 있습니다.”

“…네.”

“그러니 이제 사실대로 말씀해주시죠. 그 원생 집 부모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윤모난은 주머니에 큐브 안에 숨어 있던 작은 기계 부품을 챙기며 한 번 더 물었다. 그제서야 새댁은 자신이 아는 것에 대해 모두 털어놓기 시작했다.

그렇게 갓 탐문을 마치고 나오면서 윤모난은 팀 호출기로 무구원에게 연락했다.

―네, 팀장님.

“십자, 탐문하는 집에 은색 큐브 장난감이 있는지 살펴봐요.”

―알겠습니다.

“발견하면 수거하세요. 따로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책임을 묻진 말고.”

―그게 무슨 물건인데요?

“…파동 탐색을 방해하려는 장치 같은데. 자세한 건 서곡에 보내봐야 알겠지.”

―그런 물건이… 왜.

고도의 과학 기술 집약체인 이런 물건은 시중에 함부로 나돌아다닐 것이 아니었다. 아무리 정부에서 일한다고 해도 라디오나 듣고 브라운관 텔레비전을 보며 사는 민간인들이 파동에 개입하는 장치를 대체 어디서 구하겠는가. 아이에게 큐브를 준 새댁도 같은 포스트 부모들끼리 알음알음 구한 것일 뿐이고, 정확한 출처는 죽어도 모른다고 했다.

이런 장치가 단지 곳곳에 퍼져 있다면 아무리 윤모난이라고 해도 트랜스의 파동을 읽기란 어려웠다.

“젠장.”

일이 난처하게 되었다. 한백호에게 보고할 사항이긴 하나 그 인간 성격에 무슨 짓을 할지 뻔한데 선뜻 그럴 수가 없었다. 분명 이 장치를 가지고 있는 집들을 전부 들쑤시고 다니며 쑥대밭을 만들 테니.

새댁이 털어놓기를, 장기 결석을 하고 있는 원생네 집은 공동 거주지 2동 105호로, 아이가 두 달 전부터 유치원에도 안 나오고 부모도 두문불출이라 한다. 한백호 팀은 그 집 문짝부터 뜯고 들어가서 들쑤시고 있을 터였다.

하지만 바보가 아닌 이상 숨길 것이 있는 사람들이 치안조가 곧 들이닥칠 텐데 집에 잠자코 있을 리 없지. 그렇다고 해서 통행금지가 있는 새벽에 돌아다니기도 힘들 테고 트랜스를 이동시키는 것은 더 어렵다. 단지 안에 있다. 단지 어딘가에….

그때.

탕―!

이런 곳에서는 듣기 힘든 총소리가 울려 퍼졌다. 총탄이 낸 괴성은 음산하게 단지 전체를 울리더니 이내 두 번 더 반복되었다. 2동 방향이다. 벌써 한백호 팀에서 드잡이를 하는 모양이었다.

보통 거주지에서 이런 소리가 나면 호기심에 내다볼 법도 한데, 반도의 국민들은 이럴수록 나오면 안 된다는 것을 경험으로 터득하고 있었다. 단지 내에는 이미 개미 한 마리도 돌아다니지 않고 적막했다. 모두가 검은 제복을 입고 들어오는 사람들을 봤을 테니.

“팀장님.”

그때 한쪽에서 무구원이 손에 큐브를 든 채로 다가왔다.

“한백호 팀에서 쏜 총소리입니까?”

“…그럼. 그 막무가내들 아니면 누가 총을 쏴.”

“이거. 제가 간 집에도 있더군요.”

“혹시 십자도 당국에서 뭐 포스트 능력이 강한 아이들을 데려간다는 그런 소문 들어본 적 있어요?”

“아니요.”

“그런 소문이 왜 갑자기 돌았을까.”

반도의 정부는 결코 합리적이거나 민주적이지는 않았다. 전시 상황이라는 명분으로 국가가 국민을 통제하기는 했으나 포스트의 나라를 표방하고 포스트 인구가 곧 국력인 이곳에서 그들을 강제로 데려간다는 건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것도 아이들을.

그때 한백호한테서 호출이 왔다.

―야, 핑키…. 후… 2동 105호로 집합.

윤모난은 무구원을 데리고 2동 105호로 향했다. 예상대로 현관문째로 뜯어낸 모양인지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안에 들어가니 치안조 팀원들이 물건을 헤집고 안을 난장판으로 만들어놨다. 한백호가 벽에 낸 총탄 흔적이 보였다. 아마도 화풀이로 남의 집에 총을 갈긴 모양이다.

“여기서 뭐 느껴지냐?”

“아니요, 근처에 파동은 없습니다.”

“너 존나 웃긴다.”

한백호는 백금발의 머리를 느리게 쓸어 넘기더니 담배를 꺼내 물었다.

“파동은 없습니다…. 시발, 그게 다야?”

“뭐가요.”

“너 가이드시잖아요. 그런데 파동이 안 느껴지면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게 정상인데 왜 침착하냐고.”

“…신문은 사서 챙겨 보더니. 생각보다 소식이 느린가 봐요? 나 머리 고장 나서 능력 삐걱대는 거 몰라요?”

윤모난은 능청을 떨면서 대답했다. 그러자 한백호의 표정이 일그러진다.

“핑키. 시발, 너 떡 치고 돌아다녔으면서 어디서 발뺌이야?”

“…….”

“야, 이 새끼야. 니 떡 상대가 누구인지 여기서 말할까?”

윤모난은 한백호의 손에 들린 담배를 뺏어서 입에 물었다.

“말할 용기도 없으면서.”

한백호가 쾅, 하고 옆에 있던 의자를 발로 걷어찼다. 둘만 아는 얘기에 다른 이들은 눈치만 주고받았다. 한편 윤모난은 그제야 지난 새벽 무정원의 훈련실 앞에서 엿듣던 쥐새끼가 누군지 알게 되었다.

한백호가 자신이 무정원과 자서 당분간 능력을 회복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런데 거짓말을 했으니 이쪽 체면도 제법 구겨진 건 사실이지만.

“잘 돌아간다.”

“…….”

어쨌든 한백호가 지금까지 입을 다물고 있었다는 건 굳이 밝힐 생각은 없다는 뜻일 터였다, 물론 무정원과 모종의 대화를 했겠지만. 한백호는 윤모난의 옆에 서서 약간 굳어 있는 무구원을 보다가 비웃음을 흘렸다.

“똥개가 후각을 찾았으니… 냄새 맡는 건 어렵지 않겠지? 어떻게든 뒤져서 찾아.”

“파동이 안 느껴지는데 뭘 맡으란 건데요.”

“그건 너랑 저 북해 동태 새끼가 알아서 할 일이고. 우린 철수해서 근처에 있을 테니까 알아서 찾으라고.”

황당한 일이다. 여기 온 지 몇 시간도 안 되었는데 철수하겠다니? 한백호는 부서진 세간살이를 밟으며 킁, 하더니 괜히 옆에 있던 제 팀원의 뒤통수를 갈겼다. 난데없이 팀장에게 얻어맞은 팀원은 딸꾹질을 하다가 주머니에서 약통 하나를 꺼내 빨간 알약을 허겁지겁 목구멍으로 넘겼다.

한백호와 팀원들이 밖으로 나가자, 폐허 같은 집엔 무구원와 윤모난 단둘이 남게 되었다.

“결국 대증요법을 쓰신 겁니까.”

잠시간의 침묵을 깨고 무구원이 가장 먼저 던진 질문은 이것이었다. 한마디로 누군가와 잤냐는 말이다. 윤모난은 어쩐지 핏기가 가신 무구원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인상을 찌푸렸다.

“뭐? 그래, 그랬는데. 왜?”

“…….”

이 새끼는 왜 갑자기 소박맞은 표정이야?

되레 윤모난이 황당할 지경이었다. 경해국이 불을 질러 그 난리가 났는데 자신은 손도 못 쓰고 타 죽을 뻔했다. 첫날은 그렇다 쳐도 이런 일이 한 번 더 일어나니 식겁한 건 사실이다. 때마침 무정원이 도와주겠다고 했고 거절할 이유도 딱히 없는데 뭐 하러 더 뺀다는 말인가.

윤모난이 코트 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 넣으며 ‘뭔 상관?’이라 묻곤 집을 빠져나오려던 참이었다. 갑자기 등 뒤에서 무언가 박살 나는 굉음이 들렸다.

윤모난은 놀라서 바로 그쪽을 돌아봤다. 한백호가 총을 쐈던 벽이 어느새 무구원의 발아래에 너저분하게 부서져 있었다.

“…뭐야?”

윤모난이 약간 얼뜬 표정으로 묻자 무구원은 말없이 한 번 더 벽을 발로 찼다.

“십자?”

“…….”

무구원은 말없이 부서진 벽의 잔해 속에서 무언가를 끄집어냈다. 그의 손에 들린 것은 은색 큐브였다. 무구원이 큐브를 한 손으로 으스러뜨리는 순간 윤모난은 뼛속까지 깊게 찌르는 파동을 느꼈다.

“야.”

“…네.”

“너 화났냐, 지금?”

황당한 일이다. 큐브를 박살 내자마자 파동이 허공을 꿰뚫을 것처럼 치솟다니. 어이가 없는 나머지 윤모난은 하하, 하고 실없이 웃을 수밖에 없었다.

“왜? 내가 누구랑 잤다고 해서?”

“…….”

물으면서도 황당했지만, 무구원이 갑자기 화낼 일이라면 그것밖에 없었다. 무구원은 어금니 안쪽을 짓씹더니 고개를 푹 숙였다.

대체 뭔데? 지금 나랑 뭐 하자는 건데? 이 미친놈아. 윤모난은 묻고 싶었다.

“…팀장님은 아무나 상관없으신 겁니까?”

아.

입을 떡 벌린 윤모난은 그대로 넘어질 뻔했다. 이 새끼 지금 무슨 소리야. 무서워 죽겠네. 고작 입 두 번 맞췄을 뿐인데 아랫도리 단속이라도 하겠다는 건가? 윤모난은 무구원의 눈에서 잠깐이지만 번뜩이는 광기를 느꼈다.

“네가 무슨 상관이야?”

“그럼 저한테도….”

“당신한테 뭘? 키스 몇 번 가지고 내 마누라라도 된 줄 알았어?”

그렇게 묻는다면 이쪽도 억울했다. 일단 무구원은 지독한 호모인 윤모난이랑 결혼할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다만 이건 오늘 아침 무정원의 명령을 들으면서부터 가슴에 무언가 딱딱한 것이 걸린 것처럼 속이 계속 답답했던 탓일 뿐이다.

무언가 참기 힘들어 어떻게든 터뜨리고 싶었는데, 방금 한백호의 이야기를 듣자마자 견디지 못하고 펑 터져버린 것이다.

무구원은 화가 났다. 단순히 화가 났다는 말로는 표현이 안 될 정도였다. 그 와중에 머릿속에서는 착실히 윤모난이 미상의 남자와 엉켜 있는 모습이 상영되고 있었다. 윤모난은 그저 누가 들이대도 평균 이상이면 받아줬을 거고, 자신에게 했듯이 철저하게 그 행위를 즐겼을 것이다.

이제 무구원은 윤모난을 흠씬 패버리고 싶었다. 팀장 셋, 팀원 다섯을 팬 그의 피가 절절 끓기 시작했다.

“…십자. 너 고장 났어? 왜 이래…? 남이 섹스했다는 소리만 들어도 불결해 미치겠냐고.”

윤모난은 입을 사리물고 있는 장신의 남자 앞에서 슬쩍 눈치를 봤다. 아무래도 광신도를 잘못 건드렸다는 생각이 찾아들자, 어디서 꿀리지 않는 미친놈인 윤모난마저 괜스레 식은땀이 났다. 무구원에게서 느껴지는 파동이 어찌나 거센지 살이 떨릴 정도였다.

“진정해.”

“…….”

“알았어. 안 그럴게. 이제 아무랑도 안 잔다고… 능력이 필요해서 나도 어쩔 수 없었어.”

윤모난은 되는대로 말을 뱉어냈다. 솔직히 그럴 생각은 없었고 앞으로도 무정원을 착실히 이용할 생각이었지만. 어쨌건 이렇게라도 약속하지 않으면 이놈이 폭주할 수도 있다.

윤모난은 슬며시 손을 들어 무구원의 뺨에 가져다 댔다. 가이딩을 해서 점차 놈의 날뛰는 기운을 완화시키려 했는데 턱, 하고 손이 잡힌다.

“능력 때문이라면 제가 하겠습니다.”

“…뭐?”

무구원은 속으로 무정원의 명령을 주문처럼 되뇌었다. 윤모난과 가까워져야 한다. 단지 사이좋기만 한 동료 관계가 아니라….

“야, 십자.”

윤모난은 무구원의 날카로운 눈빛 안에서 휘몰아치는 소용돌이를 마주하며 가이딩으로 그를 가라앉혔다. 하지만 그러고 나니 날뛰는 파동도 어린 치기도 아닌, 이상한 진심만이 남는다. 그런 건 윤모난이 딱 질색하는 거였다.

이 광신도 놈이 내게 반하기라도 했단 말인가? 무정원도 꾀어냈으니 무구원이라고 아니란 법은 없었다. 그렇게 두 남자의 서로 다른 생각은 꼬이고 꼬여 이상한 모양을 만들고 있었다.

“아다 주제에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윤모난은 비웃음과 함께 무구원의 가슴팍을 툭 밀쳤다. 그런데 그런 윤모난의 손을 잡은 무구원이 팍 끌어당겨 얼굴을 잡는다. 그러더니 망설임 없이 입술을 겹쳐왔다.

“읍…!”

숨 쉬듯이 눈앞의 남자를 꼬셨던 건 맞지만 정말로 이럴 줄은 몰랐던 정신병자 윤모난은 기술이라고는 전혀 없는 정직한 뽀뽀를 당하며 상념에 빠졌다.

이놈을 어떻게 한다.

지금이라도 ‘나 너네 형이랑 지독하게 엮인 사이다’라고 밝히는 것이 광명 찾는 길일까 싶었다. 하지만 이미 북해에서는 큰 도움을 받고 있으니 너까지 더할 필요는 없다는 말을 들으면 이놈이 어떻게 나올는지. 본능적으로 그런 파국은 답이 아니라는 직감이 왔다.

윤모난은 제 입술을 깨물고 핥아대며 고양이 짓이나 하고 있는 무구원을 위해서 슬쩍 입술을 열어주었다. 무구원은 단 두 번의 경험으로 혀를 집어넣어야 하는 타이밍 정도는 배웠는지 제법 미끄럽게 입안으로 감겨 들어왔다. 턱 근육이 볼록 불거졌다가 다시 들어가는 그 광경을 보면서 윤모난은 딴생각에 빠져들었다.

‘…단지 안에 숨었다면 발각되지 않을 곳이 어딜까.’

순순히 혀를 받아주면서 트랜스가 어디에 숨어 있을지 고심했다. 한데 무구원 이놈은 지금 저희들이 일하는 중이란 걸 자각하곤 있는 걸까. 윤모난은 고개를 뭉근하게 돌리며 무구원의 윗입술을 약하게 빨아들였다.

‘…역시 지하밖에 없으려나.’

이런 대단지 건물의 지하에는 안 쓰는 공간이 있기 마련이다. 창고로 쓰이거나 비품을 넣어놓는, 음습하고 어두워서 사람들이 잘 찾지 않는 공간이어야 할 것이다. 무슨 소리가 나면 쉽게 들킬 테니 주변은 시끄러워야 하고.

보일러실?

윤모난은 예민한 청각을 통해서 벽과 바닥에 매설된 보일러 관에서 흐르는 물소리에 집중했다. 물론 무구원이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혀 놀음에는 적당히 반응하면서 말이다. 그는 눈을 감고 청각을 세밀하게 가다듬었다.

타액에 젖은 점막이 내는 물기 어린 소리 외에 뭔가 보일러 관을 따라 튕기는 소리가 들려온다. 관의 이음새가 열로 인해 팽창하면서 나는 미세한 소리였다. 신경 하나하나까지 온통 집중하느라 윤모난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팅― 팅― 팅― 끼이― 팅―

찾았다.

“하아….”

오랜만에 되찾은 능력을 쓴다는 쾌감에 젖어 윤모난은 작게 신음을 흘렸다. 그런데 그런 소리가 무구원의 무언가를 건드렸는지, 녀석이 더 거칠게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윤모난은 기술 없이 무작정 빨아대는 입술에서 아릿한 통증을 느끼며 인상을 구겼다.

이게 가만뒀더니, 여기서 자빠트릴 기세네.

결국 그는 두 손으로 무구원을 퍽 소리 나도록 밀쳤다. 윤모난은 손등으로 번들번들한 입가를 훔치며 콱 주먹을 쥐고 협박했다.

“이게, 어딜 감히…. 맞고 싶냐?”

“…팀장님도 저한테 똑같이 하시지 않았습니까.”

무구원은 약간 억울한 표정으로 투덜거렸다. 제 취향대로 차려진 밥상이 그러고 있으니, 솔직히 한입에 뚝딱 해치워 먹어버리고 싶은 충동도 일었다. 윤모난은 묘안이라도 떠올린 양 비시시 웃으며 능글맞게 말했다.

“아니, 여긴 문짝도 다 떨어졌고…. 다른 데로 가자고.”

“…네?”

“여기 지하가 있을걸, 아마? 보일러실 같은….”

순간 무구원의 얼굴에 떠오른 혐오감을 발견한 윤모난은 얼씨구 싶었다. 종교니 어머니 신이니 다 잊고선 팀장한테 혀나 집어넣은 놈이 지을 표정이냐, 그게. 윤모난은 결연한 얼굴로 무구원의 팔을 잡고 끌었다.

“얼른 가자. 얼른.”

“왜… 왜 이러십니까!”

“시발, 밑에 다 세워놓고선 왜 빼는 건데? 무구원!”

“팀장님!”

“아, 그렇게 당황하니까 더 꼴린다. 얼른 갑시다.”

윤모난은 멀대 같은 무구원을 끌어내어 억지로 아래층으로 향하는 비상계단으로 구겨 밀었다. 무구원은 마치 적국의 장수에게 끌려가는 성노예처럼 창백해졌다. 윤모난은 그 얼굴을 보자 정말로 꼴리기도 했다.

그렇게 서로 밀고 잡아당기면서 어두운 지하로 내려오자, 무구원의 저항도 차츰 잦아들었다. 그러더니 대뜸 진중한 목소리로 읊조린다.

“지금은 작전 중입니다.”

이제 와서 그게 생각났냐?

윤모난은 무구원의 뒤통수를 한 대 칠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막상 내려오니 보일러 소리가 더 커지기만 했을 뿐 이질적인 파동은 느껴지지 않았다. 축축하고 답답한 먼지 냄새가 가득한 지하 한구석의 철문을 밀고 들어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제야 윤모난이 무언가를 탐색하고 있음을 눈치챈 무구원도 상황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한백호는 아마 그렇게 생각할 거야. 여길 뒤져봐도 그저 그렇고 시시한 건수밖에 없다고 말이야.”

“…하지만 파동 탐색 방해 장치가 있다는 건 그저 그렇고 시시한 일이 아니죠.”

“맞아. 근데 뭘까? 이 이상한 기분은?”

윤모난은 창고에 쌓인 물건을 하나둘씩 내려놓으며 읊조렸다.

“왜 그런 물건이 갑자기 튀어나왔을까?”

파동을 감지하는 능력을 가진 존재는 이 세상에 가이드밖에 없다. 그런데 포스트 중에서도 아주 소수에 속하는 가이드를 방해하기 위해 이런 물건이 민간인들의 집에 놓여 있다니. 단순히 헛소문에 겁을 먹고 들인 물건이라 하기에는 평범하지 않았고, 그냥 무시하고 지나치기엔 찜찜한 구석이 있었다. 이런 괴담 같은 장치가 실제로 작동까지 하지 않는가.

윤모난은 창고에 가득 쌓여 있는 짐들을 대충 옆으로 치운 다음에 새로 회벽칠이 되어 있는 창고 벽을 손으로 쓸었다. 손을 가져다 대니 안에서 미세한 진동이 느껴진다. 탐색 방해 장치는 다행스럽게도 아주 완벽하지는 않아서, 아까 전 탐문 때도 아이를 안자마자 미세하게 에너지를 느낄 수 있을 정도로 근거리 접촉에서의 탐지를 방해하지는 못했다.

윤모난이 벽을 탐색하며 얼굴을 찌푸리자, 무구원이 물었다.

“이 벽 뒤입니까?”

“…응.”

하지만 어쩐지 윤모난이 머뭇거린다. 그는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로 안쪽에 있는 파동 방해 장치 부품을 계속 만지작거렸다.

“한백호 팀을 호출….”

“아니.”

윤모난은 옆에 아무렇게나 놓여 있던 연장 중 적당한 것을 하나 골라잡았다. 무거운 쇠망치 손잡이를 잡고 한 번 휘둘러 내려치자,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얼마 전에 막아놓은 듯한 벽이 와르르 무너졌다. 벽에 구멍이 뚫리자 안쪽에서 휘이이, 하는 센 바람이 불어온다. 쇠망치질 몇 번에 한 사람이 통과할 수 있을 정도의 입구가 생겼다.

안은 어두웠지만 바람이 드나드는 것을 보니 통로가 분명했다. 위이이잉, 하는 보일러 돌아가는 소리는 더 커졌다. 둘은 안으로 천천히 진입했다. 무구원이 지참하고 있던 작은 손전등을 켜자 깊은 곳으로 들어가는 갈림길 여러 개가 보였다.

“흩어져서 탐색할까요?”

“안 돼. 내 뒤에 붙어 있어.”

팀장의 단호한 명령에 무구원은 바로 홀스터에서 총을 꺼내 철컥하고 장전했다. 윤모난은 정신을 집중했다. 안으로 들어오자 미세한 파동이 더 복잡하게 얽혀 방향을 읽기 힘들었다. 무구원 또한 그 어려움을 알기에 숨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입구에서 그러고 있는 사이 어딘가에서 철벅이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윤모난은 이를 놓치지 않고 오른쪽 두 번째 통로를 골랐다. 하지만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안쪽에서는 뜨거운 바람만 세게 불었다. 수증기 같은 뿌연 안개가 통로 안을 자욱하게 둘러싼 탓에 손전등을 비춰도 시야 확보가 어려웠다.

윤모난은 미친 사람처럼 안을 계속 파고들며 앞으로 전진했다.

“멈춰….”

그렇게 한참을 가던 중에 윤모난이 뒤로 손을 뻗어 무구원을 막고 손전등을 뺏어 발아래를 비춘다. 까닥하면 굴러떨어져서 뇌진탕 걸릴 뻔 했다. 윤모난은 입에 손전등을 물고 아까 무구원이 가져온 큐브 하나를 아래로 휙 던졌다. 아래로 던진 큐브가 오래지 않아 바닥에 탕― 하고 부딪히는 소리를 냈다.

거의 3m 정도. 보통 사람에겐 뛰어내리기 위험한 높이겠지만, 윤모난은 주저하지 않고 아래로 몸을 날렸다. 아래에 착지하자 곧이어 무구원도 망설임 없이 따라왔다.

“십자, 내 등 뒤에서 절대 떨어지지 마세요. 그리고 내가 명령하면 당장 온 길로 돌아가서 한백호 팀을 불러오는 겁니다.”

“하지만….”

“내가 전에 당신한테 뭐랬었지?”

“…….”

“다리가 말을 안 들으면 우리 모두 죽는다고 했잖아.”

무구원은 마지못해 대답했다.

“네. 알겠습니다.”

축축한 습기가 들어찬 바닥을 밟으며 당도한 이곳은 웬 거대한 공간이었다. 손전등을 비추며 살펴보니 군데군데 기둥이 있는 게 면적이 제법 넓은 듯했다. 하지만 안을 빼곡히 감싸고 있는 안개 때문에 정확한 규모를 알기 힘들었다. 이대로라면 언제 어디서 뭐가 튀어나와도 대처하기가 어려웠다.

두 사람은 약속한 것처럼 등을 붙이고 주변을 경계했다. 그런데 무구원이 갑자기 뒤에서 흐읍, 하면서 숨을 크게 들이마시는 소리를 냈다. 그러더니 경직된 말투로 말했다.

“3분 뒤, 팀장님 기준 2시 방향에서 공격이 있습니다.”

“어떤 놈인데?”

“작습니다. 잘 안 보였구요.”

3분 전으로 시간을 돌린 무구원은 총을 이미 그 방향으로 겨누면서 말했다. 3분 전 트랜스가 윤모난에게로 달려들어, 어둠 속으로 순식간에 그를 끌고 들어갔다. 이미 시간은 벌어두었으니 좀 더 아래를 겨냥해 달려들기 전 머리를 쏘면 될 것이다.

“한 명이라도 끌려 들어가면 알지? 사격 중지하자고. 서로 벌집 만들지 말고.”

“네.”

무구원은 윤모난을 살짝 밀치고 그의 위치에 대신 섰다. 누가 공격받을지 말하지 않은 상태에서 그런 행동이 의미하는 바는 단 하나였다. 윤모난이 픽 웃으며 팔꿈치로 그의 가슴을 밀고는 트랜스가 달려올 방향으로 섰다.

“15초 뒤입니다.”

두 사람은 그때부터 속으로 함께 초를 셌다.

3, 2, 1.

예상대로 무릎 한참 아래에서 무언가 철벅거리며 빠르게 다가오더니 윤모난의 워커를 신은 발을 쭉 끌어당긴다. 둘 다 일제히 그곳으로 사격했지만, 머리를 맞히지 못해 아무 소용이 없었다. 결국 시야가 확보되지 않는 것이 문제였다.

트랜스가 어둠 속에서 발목을 거센 힘으로 잡아당기자 윤모난의 단단한 몸이 금세 균형을 잃었다. 그 순간 두 사람의 사격도 약속한 것처럼 멈췄다. 바닥에 옷자락이 길게 끌리는 소리가 들리자 무구원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팀장님!”

“시간 돌리지 마…!”

다급한 음성과 함께 뒤엉키면서 투덕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뭔가 둔탁한 충격음과 날렵한 인기척이 이어진다.

“팀장님!”

무구원이 허망하게 한 번 더 윤모난을 불렀지만, 대답이 없었다. 돌릴 수 있는 시간을 초과해버리면 정말 손을 쓸 수 없는데. 무구원은 손목시계로 초를 세며 계속 어둠을 향해 윤모난을 불렀다.

하지만 여전히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이젠 더는 지체할 수 없었다. 무구원이 시간을 돌리려 하는 찰나 턱, 하고 워커 굽 소리가 어둠을 울렸다. 그 소리는 바닥에 무언가를 질질 끄는 마찰음과 함께 무구원이 있는 쪽으로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드르르륵―

그때 무구원의 발에 어디선가 굴러온 손전등이 다시 닿았다. 주워서 전원 버튼을 누르니 저 멀리 분홍 머리와 함께 창백한 얼굴이 나타났다. 어둠 속에서 피를 뒤집어쓰고 한 손에는 택티컬 나이프를, 다른 손에는 방금 죽인 트랜스의 시체를 끌고 오는 윤모난. 그는 어둠에서 기어 나와 가까운 곳에 시체를 내려놓았다.

작은 크기의 트랜스 시체의 아가리에는 은색 큐브가 물려 있었다. 무구원이 그걸 발로 부스러뜨리자, 순간 윤모난은 주변에서 그들을 압도하는 듯한 트랜스의 파동을 느꼈다. 둘을 둘러싼 안개 속, 사방에 트랜스가 있었다.

“…십자.”

“네.”

“손전등 꺼. 난 정신병 때문에 트랜스가 보이면 제대로 못 싸워. 넌 내가 지켜줄 테니까, 믿고 손전등 꺼라.”

무구원은 두 번 묻지 않고 손전등을 껐다. 어둠이 내려앉자마자 날렵한 발걸음 소리가 또다시 공간을 울렸다. 시야가 차단된 이상 무구원이 할 수 있는 것은 없기에 온전히 파동을 읽을 수 있는 윤모난 혼자만의 싸움이었다.

“윽―!”

윤모난이 언젠가 그랬다. 자신을 믿으라고. 자신이 살길을 찾아줄 것이라 믿으라고 말이다. 이어지는 상황 속에서 무구원은 그 말이 허세가 아님을 깨달았다. 윤모난은 마치 괴물을 죽이기 위해 태어난 사람 같았다.

방아쇠를 연이어 당겨 뜯어놓은 시체의 머리에 확인 사살을 하는 소리를 들으면서, 무구원은 윤모난이 없었다면 이건 승산이 없었을 싸움임을 깨달았다. 연이어 달려든 일곱 마리의 트랜스. 어둠에 갇혀 총을 정확히 조준할 수 없다는 제약 조건에서 윤모난은 파동을 읽으며 총과 칼 한 자루씩으로 트랜스를 단숨에 몰살했다.

학살을 끝낸 그의 레인코트에 역겹고 끈적거리는 핏방울이 대롱대롱 맺혔다 떨어지는 소리가 이어졌다.

“십자, 손전등…. 하아, 줘봐요.”

“여기요.”

윤모난은 죽인 트랜스의 얼굴에 손전등을 비추면서 신원을 확인하려는 듯했다.

“어른 넷, 아이 셋.”

트랜스가 되기 전엔 모두 인간이었을 괴물들은 더 이상 인간임을 알 수 있는 표식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모두 하나같이 끔찍한 기형으로 태어난 짐승 같았다. 이들로부터 무사히 살아남았다고는 해도 웃으며 볼 수 있는 광경은 아니었다.

“다 여기 살았던 주민들인 것 같네. 등급은 E나 F.”

“왜 여기 모여 있었을까요.”

“글쎄.”

트랜스 중에 하나는 이상한 안개를 뿜는 이능력이 있었다. 그걸 죽이니 답답했던 안개가 사그라들어 안을 둘러볼 수 있었다. 손전등을 들어 비추자 굳게 닫힌 육중한 철문이 눈에 들어왔다. 잠긴 문고리에 여러 번 총을 쏘자, 쇠붙이가 팅팅 소리를 내며 끊어진다.

무거운 문이 끼이익 소리를 내며 열렸다. 갑자기 쏟아지는 한 줄기 빛. 긴 오르막 통로 끝에 반짝이는 햇살이 두 사람을 반긴다.

긴 계단을 따라 올라간 곳은 공동 거주지 건물 뒤쪽이었다. 정오의 햇살 아래 나타난 두 사람은 연쇄 살인마 같은 몰골이었다. 윤모난은 피가 엉겨 붙은 얼굴을 손으로 닦으려 했지만 똑같이 더러운 손바닥 탓에 물감처럼 뭉개지기만 했다.

“젠장… 젠장!”

과도한 신경질에 날이 한가득 서 있었다. 윤모난은 피가 못내 거슬리는지 욕지거리를 뱉으며 계속 얼굴을 문질렀다.

“씹, 거슬리게….”

그런 그를 보다 못한 무구원은 주변을 둘러보다가 화단에 설치되어 있는 수돗가로 그를 데려갔다. 피에 절은 손 때문에 미끄러운지 아니면 떨려서 그랬는지 윤모난은 수도꼭지를 제대로 돌리지도 못했다.

“흐으….”

어둠이 아닌 햇빛 아래서 보는 윤모난은 나약해 보이기까지 했다. 방금 전까지 트랜스를 도륙한 남자가 마약 중독자처럼 벌벌 떨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트라우마가 도진 모양이었다.

“오늘 약 드셨습니까?”

“…작전, 나오는데 안 먹었지.”

“기다리십시오.”

그 순간 1층에 사는 한 주부가 뒤 베란다 창문을 열다가 피를 뒤집어쓴 시커먼 남자 둘을 보고 빽 소리를 질렀다.

“저기, 수건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네? 네.”

무구원의 공손한 부탁에 공포에 질린 여자는 안에서 깨끗한 수건 두 개를 챙겨 창문 난간 밖으로 내밀었다. 무구원은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하곤 수도꼭지를 튼 다음 물에 적신 수건을 옆으로 건넸다. 화단 턱에 구겨져 앉아 있던 윤모난이 수건을 받아 들더니 말없이 얼굴과 머리를 닦기 시작한다.

피가 튀겨 더러워지는 것을 막기 위해 방수 재질로 제작한 치안조의 레인코트는 생각보다 꽤 편리했다. 벗어서 흐르는 물에 씻고 한 번 털어내니 금세 멀끔해졌던 것이다.

무구원은 자신도 가볍게 처리를 한 다음에 윤모난의 주머니를 뒤져 담뱃갑을 꺼냈다. 그러고는 한 대를 그의 입에 물린 뒤 라이터로 불을 붙여줬다. 멍하게 담배 한 모금을 빨아들이는 윤모난을 보던 무구원은 아까 수건을 빌린 집 창가로 돌아갔다.

“죄송합니다. 컵 한 개도 부탁드릴게요.”

컵을 받아 수돗물을 담은 다음 건네주자 윤모난은 한 손에 담배, 한 손에 물을 들고 번갈아서 들이켜더니 조금 진정한 듯했다. 그러더니 이내 나직이 중얼거렸다.

“어떤 놈 짓인지는 몰라도 말이지…. 저런 공간에 트랜스를 넣어놓았다는 건 아무래도 어딘가로 실어 나르려고 한 거 같은데.”

“저도 같은 생각을 하던 중입니다.”

“개인이 하기에는 너무 음침한 짓이잖아.”

무슨 목적이 있는지는 몰라도 분명 합법적이거나 정당한 일은 아닐 터였다. 무구원은 단지를 쭉 둘러보면서 침음하다가 제안했다.

“여기서 잠복하시죠.”

“휴, 그래.”

하지만 수상한 일을 벌인 범인들이 꼭 오늘 꼬리를 밟히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이미 치안조가 와서 여기를 온통 들쑤신 탓에 소문이 새어나갔을 테니.

고민 끝에 두 사람은 계획을 세웠다. 만약 이것이 철저히 숨기고 싶은 일이라면 치안조가 확실하게 철수했다 싶을 때 이곳을 비우러 나타날 것이다. 조급한 상황에 시간을 마냥 끌지도 않을 거고, 모습을 드러내기엔 하루 정도가 적당했다.

물고기를 유인하기 위해선 먼저 어장을 잠재워야 한다. 오늘은 흙탕물을 너무 많이 일으켰다.

둘은 미련 없이 철수하기로 했다. 공동 거주 단지 입구를 빠져나오자, 길거리에 오가는 행인들이 꽤 늘어났다. 모두가 한 번씩 흘긋거리면서 두 남자를 보고 지나간다. 특히 윤모난에게 머물렀다 가는 여자들의 시선이 많았다.

“한백호 팀에게 따로 언질하지 않은 건…. 큐브를 가진 사람들에게 피해가 갈까 봐 그러시는 겁니까?”

“그걸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딱 봐도 별생각 없고 심장도 콩알만 한 일반인이야. 한백호가 알아봐, 당장 끌어내서 단지 중앙에서 공개 처형 한다고 날뛰겠지.”

“의외네요.”

“뭐가?”

“…일에 관해서만큼은 도덕이니 윤리니 그런 건 집어치우신 줄 알았는데요.”

무구원의 말에 윤모난은 소금을 들이켠 표정을 지었다.

“무슨 내가 불쌍한 사람들 겁박 같은 거 하려고 그런 말 한 줄 알아? 그냥 서곡 지부장 할배랑 떡 치는 정도만 하겠다니까.”

마침 옆을 지나가던 젊은 여자 하나가 그 상스러운 말을 듣고 어머, 하고 놀라더니 걸음을 재촉해 가버렸다. 그렇게 하고 싶은 건 무구원도 마찬가지였다.

“왜… 팀장님은 모든 것을 그쪽으로 해결하려 하십니까?”

“안범 말대로 걸레라서 그런다. 왜?”

“그런 식으로 절 밀어내시려는 겁니까?”

“뭐?”

윤모난은 황당해졌다. 하도 지하에서 고생을 하는 바람에 잠깐 잊어버리고 말았다. 무구원 이놈이 오늘 얼마나 해괴한 짓거리를 했는지. 어디서 뇌 수술을 당하기라도 한 것처럼 갑자기 뻔뻔해진 무구원이 매의 발톱 끝처럼 날카로운 눈빛으로 어울리지도 않는 멘트까지 뱉었다.

“팀장님은 저를 무슨 숙맥으로 보시는군요.”

“…야, 십자! 정신 차려! 갑자기 무섭게 왜 이래? 언제는 손만 닿아도 기겁하더니, 돌았어? 충격 요법이 필요한 거면 내가 그냥 바지 까서 보여줄게, 여기서 보여줄 테니까. 얼른 정신 차리라고.”

윤모난은 코트의 허리띠를 풀고 바지춤을 붙들었다. 별안간 훤한 대낮에 길거리에서 스트립쇼라도 벌일 기세였다. 무구원이 입을 꾹 다물고 가만히 있자, 바지 지퍼를 내리려던 윤모난마저 움찔했다. 왜 안 말려?

“아 꼴통 새끼… 오늘 정말 너까지 왜 이래?”

“…….”

한편 무구원은 이게 무정원의 명령을 수행하려고 뱉어놓은 말인지, 아니면 자신의 충동의 산물인지 스스로도 헷갈리기 시작했다. 이전까지는 윤모난에게 꼴렸던 제 욕망들을 가문이니 종교니 하는 것으로 굳건하게 막고 외면해왔었다. 그런데 한번 둑이 터져버리니 그 모든 것들이 와르르 쏟아져버린다.

무정원의 명령이 신호탄이었고, 아까 들은 한백호의 말은 결정타였다. 어머니 신께서는 이런 고뇌도 다 굽어살피신다고? 그 말은 기필코 사실이어야 할 거다. 아니면 자신은 천경교의 지옥인 음지에서 영원히 추위에 떨어야 할 테니.

23년간 광신도로 살아온 무구원은 맹목적으로 무언가를 추구하는 것에 인이 박인 인간이었다. 지금껏 그가 추구하지 못했던 건 욕망밖에 없었다.

“일단 어디 들어가자구요. 여기서 이렇게 서서 기다릴 수도 없고.”

“네.”

윤모난은 바지 버클을 다시 채우고선 오늘 급작스레 돌아버린 무구원의 행동에 대한 이유를 찾기 위해 골몰했다. 일단 녀석을 어디 조용한 곳으로 데려가 차분히 커피라도 마시면서 심문할 셈이었다. 대로변에 줄지어 있는 상점 중에 녹색 간판이 달린 커피숍이 보였다.

윤모난은 무구원의 코트 깃을 잡아당겨 길을 건너 그곳으로 데려갔다. 딸랑― 유리문에 매달린 작은 종이 울리자 종업원이 친절한 얼굴로 다가온다.

“두 분이신가요? 자리는 어느 쪽으로….”

“저기 바에 앉을게요.”

창가 자리는 너무 눈에 띄니 실내에 있는 바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윤모난은 무구원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아주 쓰고 뜨거운 블랙커피 두 잔을 시켰다. 여자 종업원은 커피 잔을 앞에 내려놓고 포트를 들어 커피 두 잔을 따랐다. 설탕과 프림이 담긴 작은 용기도 내오면서 흘긋 윤모난을 구경하기도 했다.

탁―! 윤모난은 종업원이 자신을 감상하는지도 모르고 신경질적으로 바 테이블을 내려쳤다.

“얼른 말해봐요. 무슨 꿍꿍이인지.”

“제가 이러는 게 싫으신 거면….”

“그런 문제가 아니잖아. 왜 십자가 갑자기 내 수청을 들겠다고 하는지 궁금한 거라고.”

“…….”

솔직히 무구원은 자신이 섹스 스파이로는 빵점이라고 생각한다. 상대가 저렇게 의심하며 경악할 정도로 목석인 자신이 어떻게 그런 걸 하겠는가. 넙죽 ‘감사합니다’ 하는 사람이 오히려 더 이상할 거였다.

섹스 스파이라. 무정원은 정말로 자신에게 그런 걸 하라고 한 걸까? 그의 말은 암시적이었을 뿐, 정확히 그런 단어를 사용하지는 않았다.

대부분의 일에 냉철한 판단력과 통찰력을 가진 무구원은 이 일에 관해서만큼은 머리에 안개가 낀 것처럼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 타깃인 남자가 ‘왜 그러냐고, 왜?’ 학을 떼면서 멱살을 쥐고 흔들어도 대답할 말이 없었다.

“뭐 어디서 남경 윤씨 막내아들 꼬시라는 지령이라도 받았어요? 뭔데?”

“…….”

무심결에 정답을 맞힌 줄도 모르고 윤모난은 일체의 표정 변화가 없는 무구원을 답답하다는 듯 응시했다. 그렇게 한참 동안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눈싸움만 의미 없이 길어지자 그는 결국 두 손을 들었다. 이 고집불통 목석의 마음을 한낱 환자가 어찌 알겠는가.

윤모난은 뜨거운 커피에 사각 설탕을 연이어 네 개를 집어넣고 커피 스푼으로 슥슥 휘저었다. 당분으로 끈적이는 커피를 몇 모금 마셨더니 신경질과 긴장도 좀 죽는다. 사실 윤모난은 극단적인 맛을 즐기는 특이 입맛이었다. 간간한 건 도저히 못 참는다.

기껏 대답을 듣는 것을 포기하고 커피나 마시려고 했더니, 옆에서 무구원이 대뜸 차분한 목소리로 개소리를 지껄이는 게 아닌가.

“제가 팀장님을 좋아하는 것 같다면요?”

윤모난의 입에 물려 있던 커피 스푼이 그대로 떨어져 탱그르르, 하는 소음을 냈다. 그 거슬리는 소리에 커피숍 안에 있는 사람 모두가 일제히 두 남자를 주목했다.

“뭐?”

윤모난을 좋아한다. 이건 거짓말이지만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자연스럽게 뱉은 거짓말이라고 무구원은 자평했다. 물론 3년 전 대운동장 트랙을 달리는 모습을 봤을 때부터 왠지 모르지만 이따금씩 그 분홍 머리 생각을 한 건 사실이니 말이다.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 그를 3년 만에 기차 안에서 만났을 때는 솔직히 놀랐다.

갑자기 파동이 날뛰어 곤란에 처한 무정원이 이 기차 안에 윤모난이라는 가이드가 있을 테니 데려오라 명령했고, 그 특이한 이름을 곱씹으며 찾아간 객실 안에는 3년 전에 봤던 그 남자가 약간 마른 모습으로 널브러져 있었다.

실제로 그와 제대로 대화를 나눠본 것은 처음이었다. 윤모난은 예상외로 저열하고 상스러운 말을 뱉어댔고, 쓸데없는 폭력으로 저를 깔아뭉개려고까지 했다. 실망감이랄까. 그런 비슷한 기분을 느낀 것도 사실이다.

그러다 제 팀의 팀장으로 부임한 그와 함께하면서 감정은 롤러코스터를 탔다. 처음에는 실망했다가 또 언젠가는 듬직했고, 이상하게 굴 때는 단전에서부터 불쾌함이 올라왔다가도…

…어느새 빛나 보이는 순간이 있었다.

“날 좋아하신다?”

“…네.”

어느새 커피숍 안의 사람들은 시선을 돌리고 각기 제 할 일들을 하고 있었다. 윤모난은 아래턱을 긁적이더니 종업원에게 커피 스푼 하나를 새로 부탁했다. 그러더니 이미 찐득거리는 커피에 사각 설탕 하나를 더 집어넣었다. 무구원은 보기만 해도 어금니가 아렸다.

“알았어.”

“네?”

“알았다고. 십자 마음 잘 알았습니다.”

윤모난은 비릿하게 웃으면서 커피 잔을 천천히 들어 올려 한 모금 마신 뒤, 테이블 위에 은색 큐브를 올려놓고 만지작거리기만 했다. 그런 윤모난을 보면서 무구원이 조금 황당한 얼굴로 물었다.

“그게 다입니까?”

“뭐가?”

“더 하실 말 없으세요?”

“많지.”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정작 입은 열지 않는다. 윤모난은 은색 큐브를 손안에서 굴리면서 360도로 돌아가는 바 의자를 이리저리 돌려 허리 운동을 하는 둥 마는 둥 딴청을 피웠다. 그러다가 휙 한 바퀴 돌아 무구원의 벌어진 무릎 사이에 제 두 다리를 끼워 넣더니, 한쪽 무릎을 세워 무구원이 앉은 의자 위로 한쪽 발을 걸쳤다.

“이제 내 앞에 알짱거리지 마세요.”

윤모난은 경고하듯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워커가 제 중심을 짓밟을 기세로 가까이 붙은 걸 힐끔 내려다본 무구원은 눈을 들어 윤모난과 시선을 마주했다.

“일 이외의 사적인 대화도 금지.”

“…왜 그러시는지 여쭤봐도 됩니까?”

“1년 있다가 북해 지부로 가고 싶으시다며, 무구원?”

“…….”

“무사히 가고 싶으면 개수작 부리지 마.”

윤모난은 슥 발을 내려 다리를 원위치했다. 그러고는 다시 입을 다물어버렸다. 그 모습이 무구원의 눈엔 왠지 모르게 화난 것처럼 보였다. 어설픈 거짓말을 들키기라도 한 걸까. 무구원도 할 말이 없어졌다.

‘젠장, 무구원. 갑자기 이게 무슨 짓이야.’

당연한 거지만 윤모난은 바보가 아니다. 이 희한한 짓거리가 시작된 건 당장 오늘 아침부터였다. 무구원은 그의 형과 대화하고 온 이후로 내내 어딘가 똥 마려운 개새끼 표정이었으니 눈치를 못 채는 게 더 이상하지 않을까. 아마도 무정원에게 무슨 소리를 듣고 온 듯한데.

‘정말로 남경 윤씨 막내아들을 꼬시라고 한 건가?’

무정원이라면 가능하지. 일전에 무구원을 마음에 들어 하는 제 속내를 단번에 읽은 그가 아닌가. 이제는 자신에 이어서 제 동생까지 바쳐 무엇을 얻어 갈 셈인 걸까. 자신에게는 가져갈 것이 없다. 그 대단하다는 핏줄을 타고난 건 윤모난에게 자랑이 아니라 귀찮은 장애물이었다.

‘결국 남경 윤씨 차기 가주라도 노릴까 미리 경계하는 거겠지.’

그럴 생각은 추호도 없었으나, 무정원의 계획에 몸서리쳐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세월이 흘러 많은 것이 변한 것은 이해한다. 몸을 섞는 것조차 그의 계산속인 것도 모르고 응한 것 자체가 잘못이니 누굴 원망하겠는가. 무정원도 멍청한 동생이 반나절도 안 되어 거짓말을 들킬 줄은 몰랐을 거다.

다만 이 호랑말코 같은 반역자 무구원을 어떻게 처단할까. 여러 창의적인 생각이 든다. 감히 잘생기고 허우대 좋은 거만 믿고 태연히 자신을 속이려 하다니. 서곡으로 돌아가면 당장 독사 세 마리를 풀어 요절을 내도 시원찮을 판이었다.

‘이거 생각할수록 괘씸하고 열받네?’

갑자기 윤모난은 화가 머리끝까지 훅 끼쳤다. 더 같이 있다간 무구원의 멱살을 쥐고 짤짤짤 흔들면서 이 개놈의 자식 소리를 해대며 난리를 피울 것 같았다. 치미는 충동을 꾹 참으며 자리에서 일어난 윤모난은 주머니에서 대충 돈을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놨다.

“무구원, 내일 통금 시간이 끝나는 오전 5시에 단지 앞에서 봐.”

“…어디 가십니까?”

“사적인 대화 금지라 했냐, 안 했냐?”

윤모난은 가까스로 패고 싶은 걸 참으며 먼저 커피숍을 나와버렸다. 협박을 착실히 알아들은 무구원은 잡는 시도조차 안 했다. 커피숍을 나오면서 신경질적으로 담배를 문 윤모난은 유리창 너머로 이쪽을 보고 있는 무구원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따먹겠다고 하고, 여러 번 강압적으로 입술을 훔쳐 간 적은 있다만 감히 사내의 순정을 이용하여 꾀어낼 생각을 하다니. 그런 것까지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부류를 윤모난은 가장 혐오했다.

그냥 무구원이 섹스나 한번 하자고 했으면 적당히 응해줄 생각이었다. 난잡한 짓이나 실컷 한 다음에 뭐라 지껄이나 들어보며 적당히 즐겼을 것이다. 그런데 좋아한다? 이건 가도 너무 갔다. 윤모난은 지조 높은 선비 같던 무구원이 태연스레 거짓말을 하는 것을 듣고선 이 새끼도 결국 핏줄은 어쩔 수 없구나 싶었다.

더 이상 무씨 광신도 형제랑 엮이지 말아야지. 남경을 위해서라거나 양심의 가책이 느껴져서는 아니고, 다섯 가문 사이의 정치 놀음에 이용당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기 때문이었다.

무구원은 북해에 애착이 크니 몸을 바쳐서라도 무정원의 명령에 따르려 했을 거다. 그런 점에서 지금의 무구원은 과거의 자신을 떠오르게 한다. 가족의 일이라면 그저 고개를 끄덕였던 윤모난.

“못난아, 무정원이랑 친하게 지내볼래?”

과거 큰형은 어린 윤모난에게 이런 말을 했었다. 윤모난은 의심도 없이 순순히 그러겠다 대답하곤 이유를 묻지도 않았다. 그래서 어느 여름날 무정원이 남경에 왔을 때 윤모난은 망설임 없이 그에게 얽혀 들어갔다.

큰형은 막냇동생을 무정원과 붙여놓은 장본인이면서도 그런 일이 전혀 없는 척 굴었다. 둘의 사이를 내내 일언반구 말도 없이 지켜만 보던 그는, 그냥 어느 순간부터 윤모난에게 무정원과 더 이상 어울리지 말라고 했다. 그래서 놀아나기를 그만뒀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무정원은 곧 결혼을 해버렸다.

윤모난은 무심결에 큰형에게 물었던 어느 날을 떠올렸다.

“형.”

“왜?”

“정원 형 말이야…. 왜 친해지라고 한 거야? 내가 정원 형이랑 가까워져서 형이 이득을 봤어? 아니면 우리 집이?”

어른이 되어 완연해진 윤모난의 얼굴을 두 손이 감싸왔다. 그의 큰형은 무슨 아이 달래듯이 말했다.

“형은 그저 네가 심심해하길래 놀이 상대를 찾아준 것뿐이야.”

“…놀이 상대?”

“응, 모든 걸 정치랑 관련해서 생각하지 마라.”

“…….”

“넌 가문에 매이지 말고 자유롭게 살아야지.”

윤작, 이성적이고 바른 성격의 큰형은 막냇동생의 분홍 머리를 흐트러뜨리더니, 다시 읽고 있던 책을 잡았다. 그의 손에 잡힌 『햄릿』의 낡은 표지를 보며 윤모난은 머리만 긁적였다. 그저 놀이 상대라.

놀이 상대?

윤모난은 추억을 회상하다 말고 묘한 기시감이 들었다. 그런 생각을 방해하기라도 하려는 듯 소파 아래에 누운 채 짓궂게 웃던 둘째 형의 목소리가 뒤따라 귓가를 울렸다.

“왜? 정원이한테 마음 준 건 아니지? 우리 못난이.”

“…그럴 리가.”

과거 윤모난은 그 말을 비웃었다. 마음을 주다니. 무정원이 즐기는 상대로선 꽤 괜찮을지는 몰라도, 마음을 주니 마니 할 상대가 아니라는 것쯤은 당연한 것이 아닌가. 북해의 후계자가 남경 윤씨 막내아들이랑 한 이불 덮었다는 것만큼 파격적인 스캔들도 없을 것이다.

둘째 형은 스멀스멀 커다란 소파 위로 올라오더니 팔로 동생을 꾹 누르며 장난을 쳤다.

“아, 우리 못난이가 여동생이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씨―! 뭐, 정원 형한테 시집보내려고?”

“하하하하!”

“왜 웃어. 팔 저리 치워.”

“네가 여자였으면 네 배로 낳은 귀여운 조카들을 직접 볼 수 있잖아.”

“소름 돋는 소리 좀 하지 마!”

동생은 형의 척추를 주먹으로 퍽퍽 내려쳤다. 큰형인 작도 짓궂은 농담에 웃음을 터뜨렸다. 쌍둥이 아니랄까 봐 둘은 이상한 웃음 코드를 가졌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이란성이라 성격과 외모는 달랐지만 형들은 유독 같은 데서 웃었다.

“형, 진짜 정원이 형 말이야….”

“못난아, 형이 네 상대는 또 구해줄게. 됐지?”

“…….”

옛 추억에 빠져 있던 윤모난은 순간 걸음을 우뚝 멈췄다. 놀이 상대라는 말을 누구에게서 또 들었는지 떠올린 것이다. 얼마 전 샤워실에서 무정원이 그런 말을 했었다.

“그래서… 날 타락시켰듯이 내 동생도 건드릴 생각이신가?”

“…읏. 못할 것… 하, 없죠.”

“음…. 네 놀이 상대는 나로 끝내고 내 순진한 동생은 가만뒀으면 하는데.”

“하… 하, 저의 놀이 상대까지 자처하시다니. 형제애가 대단하네요.”

육성으로 욕이 튀어나왔다. 무정원은 다 알고 있었구나. 그러니 거리낌 없이 무구원에게도 이딴 짓을 시킨 건가.

그렇다면 결국 자업자득인 셈이었다. 이렇게 되면 무정원에게 화를 낼 명목도 없다. 이상하게도 윤모난의 분노는 무정원보다는 무구원에게로 향하긴 했지만 말이다. 꼬이고 꼬인 인연의 매듭은 풀어볼 재간도 없이 손안에서 엉켜버렸다.

물론 이런 경우 명령한 사람에게 분노를 쏟아야 하겠지만, 자신이 저지른 죄가 있는 윤모난은 그쪽이 아니라 그의 ‘순진한’ 동생에게 화살을 돌리고 있었다. 그 순진한 놈은 거짓말에는 쥐뿔도 재능이 없는 주제에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서 제게 좋아한다고 했다.

그 뻔뻔한 정수리 위로 뜨거운 커피를 끼얹으려다 겨우 참았다. 배신자 새끼.

입술을 짓씹으며 분노를 삭이던 윤모난은 붐비는 거리를 걷다가 우연히 어느 고서적을 파는 책방 앞에 섰다. 밖에다 오래 두어 관리를 안 한 건지, 칸마다 먼지가 내려앉은 선반에는 지난 시절 쓰인 여러 종류의 책들이 세월의 흔적을 드러내며 그대로 진열되어 있었다.

이 시대를 살아내기 바쁜 사람들은 그런 책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귀족이나 다름없는 집에서 태어나 여유작작 문화생활을 향유하는 배부른 돼지들만이 문학이니 뭐니 읽으며 시간을 때울 수 있다. 딱 무구원이나 자신 같은. 윤모난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창가에 놓여 있는 책의 목록을 눈으로 쓱 훑었다.

그러다가 자신이 지금 뭘 하고 있나 싶은 비참한 얼굴로 이내 그곳을 빠르게 지나쳐버렸다.

* * *

다음 날. 통금 시간이 끝나는 오전 5시, 공동 거주지 건물 앞. 무구원은 비 맞은 똥개처럼 처량한 모습으로 제 팀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곧이어 나타난 윤모난은 그에게 인사도 건네지 않고 차갑게 지시부터 내렸다.

“한 명은 어제 창고 안에서 대기. 한 명은 창고 바깥에서 잠복.”

“…제가 창고로 가겠습니다.”

“그러든가.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해.”

둘은 위치로 가기 위해 흩어졌다. 사람들이 하루를 시작하기에는 이른 시간. 3월의 새벽 하늘은 어스름하다. 놈들은 언제 올까. 윤모난은 건물 사이에 있는 좁은 틈에 몸을 숨기면서 창고로 이어지는 통로 쪽을 주시했다.

그놈들도 안달이 났을 것이다. 막 통금이 해제된 오전 5시는 출근 시간이라 하기엔 일렀지만 나다닌다고 해서 의심을 살 시간도 아니었다. 인구가 많은 도시에서 수상한 일을 꾸미기에 이만큼 적절한 때도 없을 것이다.

기다린 지 한 20분이 지났을까. 차 한 대가 배기음을 내며 단지 안으로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커다란 짐칸이 달린 대형 트럭이었다. 부릉, 하고 윤모난이 있는 곳을 지나치는 차체의 옆면에는 ‘기러기 장난감 회사’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큐브와 장난감 회사라. 저놈들이구나.

예상대로 트럭은 목적지인 통로 앞에 정차했다. 잠시 뒤에 운전석과 조수석에서 푸른색 유니폼을 입은 남자 두 명이 내리더니 주변을 경계하며 두리번거렸다. 윤모난은 바로 소음기를 부착한 총을 장전한 뒤 그들을 향해 겨눴다.

다리만 쏘면 심문하기엔 충분할 것이다. 남자 중 한 명이 창고가 있는 계단 아래로 내려갔다. 기회를 봐서 현장을 급습하려 했는데 남은 하나가 긴장을 풀지 않고 계속해서 주변을 탐색했다. 경계심이 과한 놈들이었다.

이윽고 아래서 철컹거리는 소리가 울렸다. 드디어 문을 여는 모양이다. 무구원은 어둠 속에 숨어 있을 테고. 한 놈 정도는 힘들이지 않고 잡을 수 있을 것이다. 윤모난은 정신을 집중하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주위 공기가 내려앉은 듯 고요했다. 지금인가?

“치안조 놈들이다!”

젠장, 무구원. 바로 들킨 거냐. 짜증과 함께 속으로 비난을 하려던 찰나, 윤모난은 본능적으로 이것이 그의 실수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치안조라니, 그렇다면….

그때 위에서 대기하고 있던 남자가 갑자기 손을 뻗더니 지하로 향했던 자신의 동료를 순식간에 공중으로 띄워 올렸다.

에스퍼다. 남자는 염동력을 쓰고 있었다. 단지 내에 여전히 숨겨져 있을 큐브 탓인지 파동을 느낄 수가 없어 범인 중에 포스트가 있을 가능성을 간과하고 말았다. 아래에서 총을 쏘는 소리가 들렸지만, 염동력으로 가로막힌 총탄은 찌그러져 바닥으로 튕겼다. 총탄처럼 작은 물체의 컨트롤이 가능한 것을 보니 등급깨나 높은 염동력자인 듯했다.

“가자!”

남자 둘이 다시 차에 올라타는 동안 죽도록 내달린 윤모난은 막 시동을 걸고 출발하려는 트럭의 짐칸 손잡이를 가까스로 붙잡았다. 그렇게 매달린 채로 뒤를 돌아보자 계단을 급히 달려 올라오는 무구원이 보였다.

윤모난은 입 모양으로 ‘따라와’라고 말했고, 무구원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차를 쫓을 만한 탈것을 찾기 시작했다. 그러는 사이 트럭은 전속력으로 단지를 빠져나갔다. 범인들은 차 뒤에 매달려 있던 윤모난을 아직 발견하지 못한 눈치였다.

차량 통행량이 별로 없어 단지 주변을 순식간에 벗어난 트럭은 빠르게 가속하면서 질주하기 시작했다. 윤모난은 한 손으로 무게를 지탱하며 턱 끝으로 호출기 버튼을 눌러 무구원에게 연락했다.

“무구원! 아직 출발 못한 거 아니지?”

―가고 있습니다.

“어떻게?”

―우유 배달부 오토바이를 빌렸습니다.

“수도 훈련 학교로 가는 대로로 꺾는다. 그쪽으로 와! 그 길로 가면 고가 도로 아래 터널이 있는데 거기로 가려는 모양이야.”

―네.

윤모난은 짐칸 상단의 튀어나온 부분을 잡고선 기어 올라가 그 위에 겨우 균형을 잡고 섰다. 도망치느라 바쁜 범인들은 추격하는 이가 없자 직진 코스만을 유지하며 달리고 있었다.

슬쩍 어깨 너머를 곁눈질하자 저 멀리, 우유 배달부의 오토바이를 탄 검은색 복장의 커다란 남자가 보였다. 무구원이다.

출력이 적은 오토바이로 미친 듯 내달리는 트럭을 따라잡는 건 불가능하지만, 혹여 부딪히기라도 한다면 최소한 중상이었다. 윤모난은 트럭을 멈추기로 결심했다. 그는 곧장 짐칸 위를 달려 그 반동으로 순식간에 조수석 유리창을 깨고 침입했다.

“이 새끼 ㅁ…”

탕―!

윤모난은 조수석에 앉은 남자 위로 제 몸을 구긴 채 운전자의 관자놀이에 대고 망설임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갑작스러운 습격에 미처 능력을 쓰지 못한 남자는 머리를 꿰뚫린 채로 즉사했다. 운전자가 사망하자 핸들이 핑그르르 돌며 차가 좌우로 급격하게 흔들렸다.

제 밑에 깔린 남자는 심문을 위해 살려둬야 했다. 윤모난은 남자의 어깨에 한 발 사격한 다음 허벅지에 차고 있던 나이프로 남자의 허벅지를 푹 찔렀다. 창백해진 남자는 신음을 흘리더니 윤모난의 멱살을 붙잡고 저항을 시도했다. 남자는 자신의 손에 쥐고 있던 총을 들어 윤모난을 쏘려 했으나 억센 무릎 아래로 손이 짓눌리는 바람에 실패했다.

그사이 트럭은 미친 들소처럼 질주하며 고가 도로 아래 있는 터널로 진입하고 있었다. 윤모난은 남자가 소지한 무기를 모두 창밖으로 던진 다음, 시체를 대충 옆으로 밀어두고 핸들을 거칠게 꺾었다. 그러자 차가 점차 서더니 터널 벽에 가볍게 쿵, 하고 부딪혔다.

윤모난은 운전석으로 넘어가 문을 확 열어젖히곤 시체를 밖으로 떠민 뒤 자신도 트럭에서 내렸다.

“나와.”

이미 어깨와 허벅지에 부상을 입은 범인은 식은땀을 흘리면서 윤모난을 노려봤다. 남자를 트럭에서 끌어내려던 차에 마침 무구원이 오토바이를 타고 도착했다.

“그 인간도 이능력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일단은 아무런 에너지도 느껴지지 않아. 큐브 때문이긴 하겠지만.”

윤모난은 부상당한 채 종잇장처럼 구겨져 있던 범인을 터널 구석에 던져놓고 총구를 겨눴다.

“니들 뭐 하는 놈들이야?”

“…….”

“무구원, 가서 짐칸 열어봐. 조심하고.”

“네.”

무구원은 트럭 뒤로 가서 잠금쇠를 풀고 짐칸 안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내부는 텅 비어 있었다. 짐칸이 비었다면 여기다 실을 것이 있었다는 뜻이고, 아마 지하에 있던 트랜스가 그들의 배송 품목일 터였다.

이대로라면 전부 아귀가 맞기는 하지만… 염동력을 가진 포스트가 끼어 있었다는 점이 찝찝했다. 그것도 제법 강한 이능력 소유자가. 아까부터 무언가를 자꾸 놓치는 기분이었다.

윤모난은 벽에 경고 사격을 두어 번 갈긴 뒤 남자를 심문했다.

“저 단지에다가 큐브를 돌린 것도 너희들이냐?”

“…….”

“입을 다무시겠다? 여기서 말하고 내 손에 죽는 게 더 나을 텐데. 치안조 조사실로 끌려가면…알잖아, 거긴 고문 기술자들이 많다는 거. 어차피 불게 될 거 더 아프기만 할 거라고.”

“…모든 이는….”

범인은 고통스러운 와중에도 숨을 몰아쉬며 무어라 중얼대고 있었다. 윤모난이 인상을 구기며 총을 더 바짝 들이대자, 남자가 일순간 초연한 표정을 짓더니 시선을 맞추며 말했다.

“…모든 이는 죽으면 어머니의 땅으로 돌아가야 한다. 망자들은 조에의 거름이 될 것이고, 그 거름으로 다시 생명이 태어날 것이다.”

“…….”

짐칸을 뒤지고 있던 무구원은 그 말을 듣자마자 동작을 멈췄다. 이건 천경교의 경전에 있는 구절이다. 남자는 천경교의 신자였던 것이다.

“…팀장….”

순간 섬뜩함이 등골을 슥 스치고 지나간다. 눈을 깜빡일 때마다 시야가 프레임처럼 늘어지면서 조각조각 나고 있었다. 트럭에서 뛰쳐나온 무구원이 윤모난에게 손을 뻗으려는 순간, 붙잡힌 남자에게서 피어오른 폭발이 순식간에 그 주변을 집어삼켰다.

쾅―!

폭탄의 여파에 무구원은 짐칸 안쪽으로 내동댕이쳐졌다. 벌떡 일어난 무구원은 바로 시간을 돌리려 했다. 하지만 몇 번을 시도해도 되지 않았다. 그는 자폭한 남자에게서 어떤 에너지도 느껴지지 않던 이유를 깨달았다.

남자는 가이드였다. 그가 죽기 전 온 힘을 동원하여 주변의 파동을 제어한 것이다.

“팀장님!”

짐칸의 사각형 화면으로 보는 바깥은 온통 시뻘건 불바다였다. 무구원은 허겁지겁 밖으로 달려 나갔다. 주위를 돌아봐도 불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있어야 할 사람의 흔적은 화마가 집어삼켜 보이지 않았다.

“팀장님?”

불길은 갈수록 거세지고 대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하지만 무구원은 포기하지 않고 계속 윤모난을 불렀다. 온 힘을 다해 제 능력을 써보려고 노력했지만, 범인에게 이미 제어당한 이능력은 잠긴 수도꼭지처럼 응하지 않았다. 이대로 3분이 지나버린다면 윤모난은….

무구원은 계속해서 봉쇄당한 자신의 에너지를 두드리기 위해 정신을 집중했다. 가진 한계를 초월하는 것은 누구나 가능하다. 두드리면 된다. 계속 두드리면…. 기도를 할 때처럼 무릎을 꿇고, 반응하지 않는 자신의 능력을 깨우기 위해 계속해서 신경을 자극하며 감각을 곤두세웠다. 지금껏 수련한 모든 명상법과 훈련법을 동원하여 시간을 돌리기 위해 몸부림쳤다.

어릴 때 자신의 능력은 이렇게 미미하지 않았다. 그 대단한 능력은 지금 자신 안에 잠들어 있다.

“…하.”

그러나 달라지는 건 없었다. 그의 능력은 얼어붙은 수면 아래의 심해처럼 깊고 어두운 곳에 잠겨 있었다. 무구원은 그 순간 3분이 지나버린 것을 감으로 알아차렸다. 멍하게 고개를 들어 불길을 바라보자, 살이 타는 매캐한 냄새가 후각 세포를 꿰뚫고 들어온다.

윤모난이 죽었다.

어이없게도 시간이 흐르고 그건 사실이 되었다. 바로 어제까지 각설탕 다섯 개가 든 커피를 마시며 한숨을 내쉬던 그가 불길에 있다. 무구원은 죽음이란 것을 두려워해본 적이 없었다. 모든 이들은 죽으면 어머니 신의 텃밭으로 가서 안식을 찾는다. 이 삶은 모두에게 고통이고 안식은 죽음 이후에나 찾아온다.

그런데 왜 이토록 허무한 기분이 들까. 아니, 허무하다기보다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기도….

“어이― 북해 동태 새끼.”

껄렁하고 허스키한 목소리. 무구원은 그 음성이 이토록 구세주같이 느껴지리라곤 전엔 미처 상상하지도 못했다. 이윽고 검은 세단 한 대가 무구원의 옆에 스르르 와서 섰다. 한백호는 조수석 창문을 내리며 망연자실한 무구원을 흥미롭게 구경하고 있었다.

“뭐냐. 핑키 죽었냐?”

“…….”

달칵― 차 문이 열리고 백금발의 남자가 내렸다. 무구원은 조용히 일어섰다.

“지금쯤 지들 형이랑 재회했겠네?”

한백호는 죽은 이를 마음껏 조롱할 셈인지 숨넘어갈 듯 웃어댔다. 무구원은 한쪽 주먹을 꽉 쥐면서 아랫턱에 힘을 줬다.

“핑키야! 그렇게 뒈지고 싶어 하더니, 정말로 뒈져보니까 어떠냐? 푸하하하!”

“…한 팀장님… 얼른….”

“얼른 뭐?”

“시간을 돌려주시죠. 폭탄의 시간을 돌리면… 팀장님을 구할 수 있지 않습니까.”

시간 능력은 항상 인과율의 법칙에 구속받는다. 죽음의 직접 원인인 사물의 시간을 돌리면 윤모난 역시 죽음으로부터 건져 올릴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이것도 시간이 더 흐르면 다른 요인들이 개입해서 점점 불확실해진다.

“그렇게 좋아하는 형들 곁으로 간 놈을 뭐 예쁘다고 다시 살려?”

“…농담하실 때가 아닙니다.”

“농다암―? 시발, 핑키 저 새끼 형들 뒤지고 따라 죽겠다고 목까지 여러 번 맸던 놈이야. 죽을 기회만 엿보던 새끼라고. 죽었으니 소원 성취잖아.”

한백호는 도리어 무구원을 위아래로 쭉 훑더니 뒤에 서 있던 트럭도 대충 살피며 말을 이었다.

“자, 핑키는 죽었고. 넌 현장에 구린 게 있는데도 감히 작전 지휘관인 나에게 그걸 숨겼고 말이지. 전시 상황에서 명령 불복종은 총살감인 거 알지?”

한백호의 말에 치안조 팀원들이 하나같이 총을 장전하더니 무구원에게 겨눴다.

“그 개미 소굴 같은 곳에서 뭘 찾았는지 똑바로 보고해.”

“…….”

사실대로 말한다면 윤모난의 말대로 이 단지 내에 큐브를 가진 민간인들은 모두 광장에서 처형당할 것이다.

“아, 이 꼴통 새끼. 웃기네. 야, 네 팀장님 별로 안 살리고 싶어?”

“…….”

무구원은 선택해야만 했다. 죄 없는 민간인 여러 명의 목숨과 윤모난 단 한 명의 목숨 둘 중 하나를.

하지만 그게 과연 고민해야 할 문제일까. 어찌 고작 한 사람의 목숨이 여러 명보다 무거울 수 있겠는가. 무구원은 고개를 아래로 툭 떨궜다. 그는 개인적 욕심보다는 대의를 먼저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아, 이거 열받게 하네. 핑키네 팀원 아니랄까 봐.”

“…….”

“북해, 핑키가 지옥 불에서 타버리도록 그냥 놔둘 거냐? 저 새끼는 지은 죄가 많아서 다이렉트로 지옥에 갔을걸.”

한백호는 빈정거리면서 뒤에 있던 자기 팀 에스퍼 한 명에게 손짓했다. 그러자 그의 팀원 중 하나가 바로 튀어나와 손으로 불길을 흡입하기 시작했다.

“우리 팀 청소기인데. 시신은 거두게 해주마.”

어쩐지 한백호는 윤모난과 비슷한 구석이 있었다. 극단적인 성격 하며 껄렁거리는 태도와 이런 식의 교묘한 심리전까지. 까맣게 타버린 주검을 보면 무구원이 꿈쩍할 거라 예상한 모양이었다.

그리고 모름지기 평범한 사람이라면 그런 광경에 무너지기 마련이다. 일명 청소기라는 에스퍼가 불을 빨아들이자 눈앞에 끔찍한 광경이 펼쳐졌다. 바닥에 흩어져 있는 까만 조각들이 눈을 찌르는 듯했지만 무구원은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어이, 이거 이래도 꼼짝도 안 하네. 핑키가 업보가 많은가 보다. 팀원이 팀장 살릴 궁리도 안 하는 걸 보니. 야! 이 새끼 수갑 채워서 데려가.”

“네.”

치안조 팀원들이 눈치를 보더니 슬금슬금 다가왔다. 결국 무구원은 수갑이 채워진 다음 억지로 차에 욱여넣어졌다.

“그냥 죽는 게 편하다니까. 이거 일 처리 하려면 존나 귀찮아지겠네.”

한백호는 말과는 달리 실실 웃고 있었다. 윤모난이 죽었다는 사실이 진심으로 통쾌한 듯했다. 현장 보존과 후처리를 위해 치안조 에스퍼들이 현장에 남아 있는 동안, 한백호는 조수석에 타더니 운전을 맡은 팀원에게 명령했다.

“가자. 고문하면 뭐라도 튀어나오겠지.”

“…한 팀장님이야말로 뒤끝이 너무 심하신 거 아닙니까?”

그때 무구원의 목울대가 움직이더니 되는대로 말이 튀어나왔다. 한백호가 곧바로 인상을 팍 구기며 뒤를 돌아봤다.

“설마 지난번 저희 팀장님과 있었던 일을 마음에 담아두고 계신 건 아니겠죠.”

“…뭐?”

“워낙 저희 팀장님이 뛰어나시니 한 팀장님께서 질투하시는 것도 당연합니다. 두 분이 훈련 학교에 다닐 때 선후배 관계인데도 성적으로 경쟁이 붙었다죠. 저도 익히 들었습니다.”

“야. 너 입 안 닥치냐?”

“명령하지 마시죠. 저는 치안조도 아니고 당신 팀원도 아니니까. 저는 제 상관의 명령에만 따릅니다.”

성질 더럽기가 걸레짝으로 빨아 쓰지도 못할 한백호는 이 허술한 도발에 바로 걸려들었다. 시린 총구를 무구원의 이마 한가운데에 들이대더니 이를 빠득빠득 가는 모양새가, 아무래도 제 팀원들 앞에서 윤모난과의 대련에 졌다는 걸 들키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무구원은 바로 먹잇감을 물었다.

“남경 독사의 독이 꽤 맵죠.”

“야!”

“독 맛을 보셨으니 두려워하시는 것도 이해됩니다.”

“누가 뭘 두려워해!”

“두렵지 않다면 동료를 살릴 수 있는데도 굳이 죽게 내버려두겠습니까?”

둘만 아는 얘기에 운전석에 앉은 치안조 팀원은 물론, 바깥에 있던 한백호의 팀원들도 흘끔거리며 무구원의 말에 주목하고 있었다. 이윽고 한백호가 어이없다는 듯 실소를 터뜨렸다.

“그래, 너흰 군법으로 다스린다."’

“…….”

“좆 같은 새끼들. 니넨 뒤졌어.”

문짝을 떼어낼 기세로 박차고 나간 한백호는 쌍욕과 함께 침을 탁 뱉더니 이윽고 능력을 쓰기 시작했다. 폭발의 흔적을 남기며 조각조각 난 폭탄이 다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고 있었다. 죽음의 원인인 사물의 시간을 돌리게 되면 죽은 자의 시간도 같이 돌아가기 마련이다.

사인을 없애면 죽음도 없던 일이 된다. 직접적인 인과관계에 따라 윤모난과 자폭 테러범은 흩어진 조각들로부터 부활한 것이다. 짧은 죽음에서 돌아온 윤모난은 대번에 주변 상황을 파악했다.

정신이 들자마자 그가 한 일은 가이드인 범인의 목에 망설임 없이 칼을 꽂아 넣는 것이었다. 막 죽음에서 돌아온 자가 영원히 쓰러지는 순간이었다.

윤모난은 분홍 머리를 뒤로 쓸어 넘기며 한백호에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생명의 은인인데 인사는 해야죠.”

“…….”

한백호는 비열하게 웃더니 뒷좌석에서 무구원을 끌어내 바닥에 꿇어앉혔다. 그러곤 무구원의 얼굴 위로 주먹을 세게 내리꽂았다. 가이드에게 능력을 제어당한 무구원의 얼굴이 옆으로 돌아가더니 찍 입에서 피가 터졌다.

허공을 가르고 한 번 더 주먹이 휘둘러진다. 하지만 이번엔 처음만큼 매섭지 않았다. 윤모난이 뒤에서 주머니에 손을 꽂아 넣은 채 한백호를 포함한 치안조 에스퍼들의 능력을 제어하고 있었던 것이다.

“왜 남의 새끼를 패고 지랄이에요.”

“…윤모난, 그만둬. 작전 중에 지금 무슨 짓이냐?”

한백호는 제대로 열이 받았는지, 핑키가 아닌 이름 석 자를 그대로 읊조리며 이를 갈았다. 윤모난은 그러건 말건 수갑이 채워진 무구원에게 다가와 평온하게 그를 일으켰다. 그러고서는 바로 범인에게 제압당한 능력부터 풀어줬다.

“이놈! 수갑 열쇠 내놔.”

그다음엔 칼 든 강도 같은 섬뜩한 얼굴로 무구원의 팔목에 수갑을 채운 에스퍼에게 다가가 협박을 날렸다. 저항도 없이 열쇠가 순순히 튀어나왔다. 지체 없이 수갑을 풀어낸 윤모난은 무구원의 손목을 잡고 그가 끌고 온 우유 배달부의 오토바이로 데려갔다. 그러더니 그를 뒤에 앉히고 자신은 앞에 앉았다. 출발을 준비하려는 듯 이것저것 만져보던 그가 살랑살랑 손을 흔들며 인사를 남겼다.

“우리는 갑니다. 서곡센터에서 봐요. 여러분.”

윤모난은 얼빠진 얼굴들을 뒤로하고 부릉부릉 오토바이에 시동을 걸더니 금세 터널을 빠져나갔다.

오토바이는 커다란 두 남자가 타기에는 꽤 작아서 누가 본다면 꽤 우스꽝스러운 광경일 터였다. 엉덩이를 겨우 걸친 무구원은 윤모난의 허리를 바짝 잡았다.

“사적인 접촉도 금지.”

찰싹, 하며 무구원의 손등에 불이 붙었다. 잡지 않으면 도로에 굴러떨어질 텐데 어쩌라는 건지. 무구원은 억울했지만 얌전히 손끝을 세워 윤모난의 옷깃만 살짝 잡았다. 두 사람은 잠시 동안 도로를 역주행하면서 내달렸다.

다른 차들이 오토바이를 향해 신경질적으로 클랙슨을 울려댔다. 아침 출근으로 인해 저기압인 반도의 운전자들에게서 쉴 새 없이 욕이 날아들었다.

“야, 이 미친놈들아, 뒤지고 싶냐! 정신머리 집에다 두고 왔어? 역주행이잖아!”

“이미 죽어보고 오는 길이다! 어이, 안 비켜!”

“출근하느라 가뜩이나 좆같은데, 아침부터 웬 또라이 새끼들이야? 네가 비켜!”

“공무집행 중이야!”

“짭새고 뭐고 꺼지라고! 얼른!”

“…….”

이 와중에 시민들과 싸우다니 윤모난은 역시 제정신이 아니었다. 무구원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죽어보니 어떠셨습니까. 그곳엔 뭐가 있던가요?”

“사적인 대화 금지.”

윤모난은 자신을 위협하는 차 운전자들에게 가운뎃손가락을 들이밀며 냉랭하게 답했다.

“어딜 감히 은근슬쩍 말을 걸어? 저기 어디서 내려줄 테니까 알아서 돌아가.”

“…오이, 먹어드리지 않았습니까.”

“뭐?”

윤모난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위험하게 운전 중에 뒤를 돌아봤다. 그러자 무구원이 윤모난의 허리에 두꺼운 팔을 걸치며 왠지 당당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뭘 잘못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제 그만 용서해주시죠. 오이 먹어드린 걸로 말입니다.”

“…….”

“사실 저 오이도 싫고 당근도 싫어합니다.”

“십자, 당신 뭘 잘못했는지 모르겠다면서 겨우 오이 몇 조각 대신 먹어준 걸로 용서를 구하겠다는 거야?”

“…팀장님 싫어하시는 오이랑 당근 계속 먹어드리겠습니다.”

와. 이 뻔뻔한 새끼 좀 보게. 윤모난은 환장할 것 같았다. 당장 뒤통수로 박치기를 해서 등에 달라붙어 있는 무구원을 밀어 도로 바닥에다가 떨어트리고 싶었다. 상관을 우습게 보고 마음까지 강탈하려 한 배신자 새끼가 저러는데 아주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윤모난은 얼른 시선을 앞으로 돌렸다. 절대 이대로 질 수는 없었다.

“무구원 씨는 어디 며칠 짱박혀 있다가 서곡으로 돌아오세요.”

“네?”

“…지금 돌아가면 한백호가 군법 재판에 넘긴다며 난리 칠 거니까, 어디 구석에 가서 꼭꼭 숨어 있으라고.”

“팀장님은 어쩌시게요?”

“뭘 어째. 난 지금 돌아가야지.”

돌아가도 별 방도가 없는 건 윤모난도 마찬가지였다. 무구원이 생각에 잠긴 사이 오토바이는 수도 중심에 있는 중앙역에 닿았다. 여기서 헤어진 다음 윤모난은 서곡으로 가는 기차를 탈 예정이었다. 오토바이를 주차장에 세운 두 사람은 천천히 광장을 가로질러 걸었다.

“팀장님, 며칠만 있으면 한백호도 결국 어쩌지 못할 겁니다. 군법 재판에 회부한다고 하더라도 저희 신분이 있으니 상부에서는 무마시키려 할 테죠.”

“…….”

“하지만 지금 돌아가시면 시시비비를 가리느라 고생만 할 겁니다. 어차피 우린 지원 인력이었으니 이번 일의 책임은 전적으로 한백호 팀에서 져야 합니다.”

“…그래서?”

“큐브를 찾은 건 우리고 열쇠를 쥐고 있는 것도 우리니까, 둘 모두 잠깐 잠적해서 한백호를 안달복달하게 만들죠.”

윤모난은 무슨 책사라도 된 것인 양, 술술술 전략을 늘어놓는 무구원을 가만히 응시했다. 솔직히 그의 말이 옳기는 했다. 한백호가 이번 일의 내막을 알기 위해서는 꽤나 시간이 들 것이다. 아무런 성과 없이 이 일을 마무리 짓는 것은 놈에게 큰 부담이 되겠지. 윤모난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며칠 뒤에 보자고. 십자도 알아서 잘 숨어 있고.”

“저기, 팀장님.”

“왜?”

무구원은 기차역을 보면서 무언가 생각난 듯이 불쑥 말을 꺼냈다.

“남경으로 가시죠.”

생각지도 못한 소리였다.

“이참에 형님들 기일을 챙기러 다녀오시는 건… 어떠십니까.”

윤모난은 얼떨떨한 시선으로 무구원을 바라보았다. 형들의 기일에 내려가야 한단 생각은 애당초 접어버렸는데, 무구원이 그걸 신경 쓰고 있었다니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더 아이러니한 것은 그 말을 듣자마자 미친 듯이 남경에 가고 싶어진 윤모난 자신이었다.

원래는 갈 생각도 없었고 갈 수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별안간 형들의 빈 무덤에 가서 향불이라도 올리고 싶어졌다. 판이 깔리자 이토록 새삼스럽게 간절해지다니 사람 마음이란 참 간사한 것이었다.

무구원은 그런 마음을 읽었는지 조용히 매표소로 가더니 남경으로 가는 기차표 한 장을 끊어 와 내밀었다.

“다녀오시죠. 휴가 신청서는 제가 전화로 부탁해놓겠습니다.”

“…그래.”

얼결에 기차표를 받아 든 윤모난은 다른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그저 멍해졌다. 아무래도 한 번 죽고 부활해서 그런가 머리 한구석이 더 망가져버린 모양이었다. 지금 남경에 간들 뭘 한다고 이 작은 기차표 한 장에 기분이 붕 뜨는 걸까. 무구원은 시간을 확인하더니 윤모난을 승강장까지 바래다주었다.

곧이어 남경행 기차가 들어오자 기다리던 승객들이 저마다 짐을 들고 기차에 올라탔다. 수도에서 남경까지는 일곱 시간 거리였다. 윤모난은 결국 형들 무덤에만 갔다가 집엔 들르지 않고 다시 서곡으로 복귀할 계획을 세웠다.

윤모난은 홀로 기차에 올라탔다. 그러자 무구원이 가볍게 묵례하며 그를 배웅했다. 하얀 김을 뿜어대는 기차는 곧 출발하기 직전이었다. 윤모난은 입구에 서서 자신을 배웅하는 무구원을 지켜봤다.

녀석을 어떻게 한다. 오이와 당근을 먹어줬으니 자신을 용서해달라는 그의 말이 왜 지금 이 순간 떠오르는지 모를 일이다. 열차 문이 닫히고 기차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하자, 무구원이 자리를 뜨려는 듯 뒤로 천천히 걸음을 떼었다. 그 순간, 윤모난은 충동적으로 문을 두드리면서 소리쳤다.

“무구원! 시간 돌려봐!”

바깥에서는 그 소리가 차단되어 잘 들리지 않았다. 무구원은 의아한 얼굴로 창문을 빤히 쳐다보았지만, 윤모난이 인상을 찌푸리며 뭐라 소리치고 있는 것만 보일 뿐 말을 알아들을 수는 없었다.

그 와중에 윤모난은 계속 유리창을 두드리며 시간을 돌리라고 외치고 있었다. 그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무구원의 뚱한 표정이 점점 멀어졌다. 윤모난은 손짓으로 동그라미를 그려 보이면서 뭔가를 전달하려 애쓰고 있었다.

시간을 돌리라는 건가?

무구원은 무언가 깨닫곤 3분 전으로 시간을 돌렸다. 3분 전으로 돌아온 과거이자 현재에서 분홍 머리의 남자는 아직 활짝 열린 문간에 서서 고민에 빠져 있었다.

무구원은 홀린 것처럼 두 발을 움직여 기차에 올라탔다. 별안간 뒤따라온 그를 본 윤모난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뒤로 물러선다.

“뭔데?”

“저도 같이 가겠습니다.”

“…당신이 왜?”

“그냥 그러고 싶습니다.”

이미 이전 시간대에서 윤모난이 왜 시간을 돌리라 했는지, 무구원은 그 답을 알 것 같았다. 윤모난은 그가 남경에 같이 가주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그 바람을 들어주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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