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 모란과 작약 (6/24)

6. 모란과 작약

기차표를 사지 않은 무구원은 검표 직원에게 푯값부터 냈다. 좌석에 앉자 짧은 시간 동안 너무 많은 일이 일어나서 그런지 바로 수마가 몰려들었다. 윤모난은 별다른 말 없이 눈을 감고 기절하듯 잠들었고, 어제 한숨도 못 잔 무구원도 벽에 머리를 기대자마자 잠에 빠졌다.

두 남자는 오후가 되어서야 잠에서 깼다. 남경에 도착하려면 두 시간 정도 더 남았을 즈음이었다.

“남경역 도착해서 경해국한테 전화부터 해야겠네.”

손목에 찬 호출기는 같은 기지국 안이 아니면 통신이 불가능했다. 사고를 치고 근무지를 이탈했으니 일단 연락을 하긴 해야 할 거였다. 무구원은 고개를 끄덕이곤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정신을 깨웠다.

그러고 보니 오늘 하루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무구원이 음식 카트를 끌고 다니며 간단한 간식거리를 파는 상인에게서 음료수와 빵을 샀다. 두 사람은 부스럭대며 비닐을 벗기고 꾸역꾸역 빵을 먹기 시작했다.

“남경에는 얼마 만에 가시는 겁니까?”

“3년 전 형들 장례식 때가 마지막이었지.”

“그렇군요.”

아무래도 사적인 대화 금지 제한령은 풀어진 모양이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조심할 필요가 있다. 무구원은 천천히 빵을 씹어 넘기며 말을 아꼈다. 그런데 윤모난이 조금 누그러진 어투로 물었다.

“십자는 남경이 처음이에요?”

“네. 딱히 가볼 일이 없었습니다.”

“지도상으로는 남경이 북해랑 가장 머니까 그렇긴 하겠네.”

“네.”

“무구원, 저기… 아까 말이야.”

무구원은 빵을 먹는 둥 마는 둥 하다가 고개를 들었다. 윤모난은 입가를 달싹이다가 이내 하려던 말을 꿀꺽 삼켰는지 그의 목울대가 일렁였다.

사실 잠든 사이 윤모난은 어떤 장면을 꿈에서 보았다. 자신이 무구원을 잡으려다가 기차가 출발해버린 순간을 말이다. 단순히 꿈이라기엔 어딘가 미심쩍었다. 혹시 시간을 돌린 걸까. 그러나 윤모난은 차마 묻지 못하고 어색하게 뒷머리만 벅벅 긁적였다.

“아무것도 아니야, 빵 안 먹을 거면 나 줘요. 배고파.”

“드십시오.”

무구원은 욕심쟁이 또래에게 장난감을 내주는 순진무구한 아이처럼 빵을 내밀었다. 그걸 빼앗아 한입 가득 먹으면서 윤모난은 저 배신자 거짓말쟁이를 한 번은 봐주기로 결심했다.

“그런데 아까 한백호랑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나 죽고서 꽤 시간 흐른 거 맞죠?”

“네, 37분이 지났었습니다.”

“알 만하네. 무구원 당신은 그 범인한테 순간적으로 능력을 제어당했을 거고. 한백호 그 사디스트가 37분 동안 엄청 괴롭혔겠구만.”

“…….”

“뭐라고 했어요? 어떻게 말했길래 그 자식이 날 살려준 건데?”

“…그냥, 되는대로 떠들었을 뿐입니다.”

솔직히 무구원은 아까 윤모난이 죽었을 때 얘기를 더 하고 싶지 않았다. 기꺼운 대화 주제도 아닐뿐더러, 지나고 보니 한백호가 지껄이던 소리들이 떠올라 괜스레 심경만 복잡해졌기에. 윤모난은 차라리 죽는 걸 더 원할 것이라는, 이전에도 죽은 사람들을 따라가려고 했었다는 것 말이다.

그건 거짓말 같지 않았다. 만약 죽음을 바라마지않는 사람이 아니었다면, 살아 돌아왔을 때 조금이라도 안도하거나 기뻐했을 것이다. 그러나 아까 전 죽음에서 건져 올린 윤모난의 얼굴에는 잠깐이지만 다른 표정이 스쳤었다. 왜 안식을 방해하느냐는 표정. 긴 단잠을 자고 있던 와중에 불현듯이 끌려 나왔다는 얼굴이었다.

“강한 염동력자 한 명에 가이드 한 명이라. 그냥 평범한 놈들은 아닌 것 같죠?”

“폭탄을 터트린 가이드는 팀장님처럼 먼 거리에서 제 능력을 제어했습니다. 그 정도라면 꽤 실력 좋은 능력자일 겁니다.”

“…음.”

윤모난은 빵 봉지를 내려놓고 턱에 손을 괸 채 고민에 잠겼다. 결국 그 가이드의 존재가 뜻하는 바는 하나였다.

“어이, 십자. 당신은 남들보다 훨씬 똑똑하니까 그놈의 의미가 뭔진 알거예요.”

“…네.”

무구원은 바로 목소리를 낮추며 기차 안을 슥 훑었다. 정복을 입은 건 두 사람밖에 없었고 승객들 대부분은 민간인이었다. 하지만 옷차림새만으로 모두의 신분을 확인할 수는 없으니 조심해서 나쁠 건 없었다. 그사이 윤모난은 기다란 손가락을 뻗어 테이블 위에 글자를 쓰기 시작했다.

유아 살해. 특수 관리. 기러기.

글자를 본 무구원이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가 자신도 손으로 글자를 써서 한 단어를 추가했다.

천경교.

“첫 단어부터 시작해봐요. 밖에서 나눌 수 있는 얘기는 그거밖에 없는 것 같네.”

“포스트 중에서 가이드가 소수인 이유는 출생 비율이 낮은 건 둘째치고 대대적으로 일어났던 유아 살해 때문이죠.”

“응.”

“대성전 한가운데에서 포스트 가이드의 등장은 전세를 확 뒤집을 정도였습니다. 간단한 유전적 원리만 이용한다면 20년 안에 가이드 군대를 만드는 것도 가능했을 겁니다. 그럼 휴전이 아닌 종전이 되었겠죠.”

“그래요, 하지만 괴물들은 다른 방식을 사용했지. 아이들을 죽인 거야. 전염병처럼 밤늦게 요람으로 찾아가 아이들을 학살했어.”

그 이후 모든 가이드들은 특수 관리 대상이 되었다. 대처가 뒤늦기는 했지만, 덕분에 살아남은 가이드들은 국가의 보호 아래 몇백 년 전 대성전의 전사가 되었다. 따라서 반도에서 가이드가 신분을 숨기고 범죄에 가담하기란 에스퍼에 비해 매우 어렵다. 이는 테이블 위에 무음으로 쓴 두 번째 단어와 논리적으로 대응했다.

아직은 잠정적인 추측이라 할 수 있겠지만, 범인들은 권력자들이 부리는 개일 확률이 높았다. 그리고 반도의 권력은 다섯 가문만이 쥐고 있으니 개 주인도 그들 중 하나일 것이다. 그러니 역시 ‘기러기 장난감 회사’라는 이름이 문제였다.

“함정일까요? 아니면 자기표현일까요.”

“모르지….”

남경에 독사가 있듯 기러기는 서강 주씨 가문의 상징이다. 서강 주씨는 정보 수집과 첩보에 탁월한 능력을 가진 집안으로, 그들만의 비밀스러운 연락망을 사용하여 반도에서 누구보다도 빠르게 정보를 전송하고 공유한다. 그러니 이 전대미문의 트랜스 운반 사건에 서강 주씨가 관여됐다고 해도 이상할 건 없었다.

어차피 오각형으로 줄다리기를 하는 이상, 서로가 아무리 구린 짓을 해도 이 구조 속에서 쉽게 문제를 제기할 순 없었다. 어느 한쪽의 균형이 뒤틀리는 순간 내란과 함께 반도는 무너질 테니. 그러니 그 트럭은 서강 주씨에게 누명을 씌우려는 누군가의 함정일 수도, 아니면 오히려 당당하게 이름을 내걸어서 목격자들의 입을 다물게 하려는 것일 수도 있었다.

“서쪽 강이 유독 아름다운 탓에 빛 좋은 하늘 아래에서 보면 마치 천 개의 거울이 반짝이는 것 같다지.”

“북쪽 바다보다는 작지만 확실한 건 서강도 만만치 않게 큽니다.”

“그래…. 지금으로서는 기러기들이 노닐 만하지.”

둘은 적당한 은유를 사용해 대화를 나눴다. 서강은 천경교 신자들이 북해 다음으로 많은 곳이다. 가이드가 폭탄을 터트리기 전 마지막으로 읊은 천경교 경전의 한 구절은 숭고한 죽음을 각오한 사람이 내뱉을 법한 말이었다. 어머니 신의 텃밭을 목전에 두고 거짓을 꾸미기는 쉽지 않을 것이었다.

이 정도까지 유추해낸 두 사람은 직감적으로 이 일이 조용히 덮일 것임을 깨달았다. 진범 검거는 차치하고 서강 주씨의 상징이 끼어들었으니 이 문제가 더 불거질 일은 없었다. 어쩌면 위정자들은 이미 이런 내용들을 파악했을지도 모른다.

지금으로서는 대충 이 사건이 잠잠해질 때까지만 잠적하면 된다. 정치 세가가 얽힌 사건이니 일은 빠르게 처리될 것이다. 윤모난은 질린 표정으로 좌석 등받이에 몸을 푹 기대면서 창밖을 봤다. 점차 눈에 익은 풍경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십자.”

“네.”

“혹시 몰라서 하는 말인데, 네 멋대로 날 따라온 거에 관해서 별말 안 했다고 해서 말이지. 당신을 용서하기로 한 건 아니거든?”

“…네.”

윤모난은 이미 내심 봐주기로 했으면서 마음에도 없는 이야기를 뱉었다.

“그러니까 조심해. 일단 오이랑 당근 먹어준 걸로 패고 싶은 건 애써 참아주는 상황이니까.”

“은원에 관해서 확실하다고 자부하시더니, 배포가 너무 작으신 것 아닙니까?”

“…이게. 마음이 딱 바뀌려 그러네.”

“…….”

“남경역 광장 한가운데에서 피살당하기 싫으면 닥쳐.”

“네.”

“원래 이렇게 뻔뻔한 놈이었나? 어제오늘 유독 새로워, 십자. 게이인 팀장한테 고백도 했고. 어머니 신께서 어떻게 생각하겠어? 말 잘 듣던 아들놈이 이렇게 타락해가지고서는 남자한테 달려드는데 말이야.”

“어머니 신께서는 우리의 고통과 고뇌를 모두 이해하십니다.”

무구원은 무심코 무정원이 자신에게 주문처럼 불어 넣은 그 말을 내뱉은 순간, 식도에 무언가 딱딱하게 걸린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윤모난에게 거짓말을 하고 또 대충 들킨 것 같은 이 시점에서 그 잘못을 정당화하는 이 말은 적절하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어머니 신은 이해하실 테지만, 윤모난과의 관계에 있어서만큼은 부적절했다.

그런데 이 순진한 광신도의 말을 들은 상대는 풉,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무구원이 믿는 종교가 이런 식으로 정당화는 데 이용되다니 커다란 모순이기 때문이다. 윤모난은 무구원에게 나 다 알고 있으니 그만두라 하려다가 그냥 입을 다물었다.

그건 순전히 흥미 때문이었다. 수도승 광신도 무구원이 제 가문을 위해 섹스 스파이를 자처하다니, 솔직히 꼴렸다. 저 녀석이 어디까지 각오했을지 궁금하기도 했고 말이다. 물론 윤모난은 이 일의 배후에 무정원이 있는 이상 무구원을 건드릴 생각은 접어두었다. 그냥 텔레비전 보듯 굿하고 주접떠는 거나 보며 즐겨볼까 싶었다.

“휴― 알았어. 십자가 그렇게까지 날 좋아한다니. 밀어내도 소용없고 화내도 소용없으니 나도 진지하게 생각해볼게요.”

“뭘… 진지하게….”

“솔직히 나도 필요할 때마다 파트너 찾는 것도 쉽지 않거든. 뭐 같은 팀 안에 파트너가 있으면 효율도 좋고 시간도 적게 들고 여러모로 편할 것 같긴 해.”

“네…?”

“그런데 말이죠. 십자가 이 몸의 대화에 대해서 잘 모르는 것 같아서 조심스럽단 말이지….”

윤모난은 무구원의 머리부터 발끝까지를 핥는 듯한 시선으로 쭉 훑어 내렸다. 무구원은 한기가 드는지 시선을 피해버렸다.

“십자, 당신 아다잖아?”

“…….”

“여자는 물론 남자랑 자본 적도 없잖아.”

“저기, 팀장님 제발 목소리 좀 낮춰주시겠습니까.”

무구원은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고개를 푹 숙였다. 사람이 수치심만으로 죽을 수 있었다면 이미 자신의 백골은 진토가 되었으리라. 그러건 말건 뻔뻔한 분홍 머리 호모는 발끝을 까닥까닥하면서 여전히 조금 큰 목소리로 말했다.

“혹시 네가 박히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

무구원은 ‘박히다’라는 단어의 뜻을 가만히 생각해보았다. 그것은 ‘박다’의 피동사로, 박는다는 것은 대상에 대고 무언가 두들겨 치는….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일까? 윤모난이 내 어디에 대고 뭘 박을 수 있단 말이지?

“뭘, 어디에… 박는….”

“어디다 뭘 박기는? 네 가랑이 사이에 구멍 있잖아.”

윤모난이 일부러 골라 엄선한 원색적인 단어에 무구원은 버벅거리더니 오작동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생각해봐. 있지?”

“…….”

새하얗게 비어버린 무구원의 뇌리에는 ‘어머니 신이시여’만 둥둥 떠다녔다.

“무서워서 그래? 괜찮아. 처음에는 쉽게 가자고. 그러라고 어머니 신께서는 너한테 입을 주셨으니까.”

“…입이요?”

“응.”

“설마….”

“응, 맞아. 설마는 무슨 설마야. 아까부터 멍청하게 굴기는. 당연히 내 좆을 네 입에….”

“팀장님!”

무구원은 커다란 손으로 윤모난의 입을 냅다 틀어막았다. 여기서 더 희롱당했다가는 창문을 깨고 기차에서 뛰어내릴 기세였다.

“제발 입 좀….”

“으으읍.”

“부탁입니다.”

한참 후에야 윤모난이 고개를 끄덕였다. 입을 다물겠다는 뜻이다. 그제야 안심하고 손을 떼어낸 무구원은 몸을 좀 떨어트리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치 시한부 선고를 받은 사람 같은 얼굴이다. 그 모습을 코앞에 둔 윤모난은 배꼽을 잡고 푸하하 웃고 싶었다. 몇 번이나 위기의 순간이 찾아와 가까스로 웃음을 참기 위해 입술을 꾹 깨물고 주먹을 쥐었다.

저런 놈이 무슨 섹스 스파이를 하겠다고 나섰는지 기가 찰 노릇이다. 기껏해야 무구원의 정직한 상상력은 입술 몇 번 맞추는 것까지가 한계일 텐데. 23살이나 처먹고 저런 순진무구한 얼굴을 하다니 솔직히 반칙이지. 윤모난은 자신이 몇 살 때부터 발랑 까진 인간이었는지 짚어보다가 그만두었다.

윤모난의 말에 흠씬 뚜드려 맞은 무구원은 남경역에 도착할 즈음이 돼서야 겨우 정신을 차렸다. 도착하니 시간은 오후 3시를 갓 넘겼다. 사람들로 붐비는 역을 가로질러 나오자 언덕 아래로 남경의 전경이 쭉 펼쳐졌다. 계획 도시인 수도와 다르게 크기와 생김새가 제각각인 건물들이 뒤엉켜 있는, 복잡하지만 아름다운 도시.

도시의 모든 도로가 교차하는 중심에는 남경의 상징인 하얀색 유리 정원이 있었다. 뇌 의식 영상에서 본 모습과 똑같았다. 무구원은 순간 핏빛 파도와 참수된 독사의 잔상이 실제 도시의 모습과 겹쳐 질끈 눈을 감았다.

그러나 그 생각을 떨쳐내고 마주한 유리 정원은 정교한 보석함처럼 아름다웠다.

“남경에 온 김에 관광도 할 겸 유리 정원이나 구경할까?”

“그것보단 경해국에게 전화부터 하시죠.”

“아, 그러네.”

남경역에 있는 공중전화 부스를 찾아 전화를 걸자, 대번에 경해국이 흥분한 목소리로 악을 쓴다.

―씹, 방금 한백호가 찾아와서 다 뒤집어엎고 갔는데 어디 계십니까! 대체!”

“십자랑 사랑의 도피 했으니까 찾지 마세요.”

―지금 장난이나 할 때입니까? 군법이니 뭐니 협박 오지게 하던데. 대체 무슨 일이냐구요.

“조금 견디면 잠잠해질 거야. 괜히 같이 성질부리지 말고. 안범 데리고 잘 있어. 금방 올라갈게.”

―올라간다니요? 수도에 있는 것도 아니란 겁니까?

“어라, 생각보다 머리 좋네. 우리 휴가 신청서 좀 대신 써서 내줘요. 훈련 빼먹지 말고.”

―팀장….

윤모난은 바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거의 일방적인 대화였기에 무구원은 자신이 전화를 할걸 그랬나 후회했다. 경해국 성질이라면 돌아가서 합숙소가 불에 안 타 있을 거라 보장하기 힘들 텐데. 최소한 문짝 하나는 부쉈을 거다.

남경역의 하얀색 돌계단을 천천히 내려오며 두 사람은 택시를 잡아탔다. 윤모난이 도착지를 일러주자, 택시 기사가 거긴 왜 가냐는 식의 질문을 하며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다. 윤모난이 말한 곳은 남경 윤씨의 가족 묘지가 있는 외곽이었기 때문이다. 그 주변 땅이 모두 남경 윤씨 저택 근처 부지였다.

“기일에 맞춰 가야 하는 거 아닐까요? 아직 이틀이나 남지 않았습니까.”

“그날은 안 돼. 가족들이랑 마주칠 수도 있고….”

“아….”

윤모난이 가족과 마주치는 걸 꺼린다는 것은 알았지만, 그 정확한 이유까진 모르니 무구원은 별다른 말을 더 얹지 않았다. 택시는 도심에서 20여 분을 달려 낮은 산등성이가 펼쳐진 길을 따라가다가 키가 높은 하얀 철문 앞에 섰다. 택시에서 내리자 향기롭고 달큼한 냄새가 후각을 마비시키듯이 진동했다.

아직 3월이라 개화 시기도 아니건만, 흰색 울타리 안으로 만발한 아까시나무꽃이 낮은 언덕 전체를 덮고 있었다. 산 전체에 희고 향기로운 장막을 씌워놓은 듯한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언덕 너머 저 멀리에는 커다란 흰색 저택이 있었다. 아마도 윤모난이 자란 집일 듯했다.

“이게 아까시나무이군요. 남경은 꽃으로 유명하죠.”

“처음 봐요?”

“북해는 기후가 춥고 척박해서 잎이 큰 꽃이 자라기 힘듭니다. 초봄인데 꽃이 가득한 걸 보니 신기하네요.”

“자연스럽게 핀 게 아니고 365일 개화하도록 관리하는 에스퍼들이 있거든. 그래서 추운 겨울에도 여기만 이렇게 꽃이 피어 있지.”

윤모난은 울타리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입구와는 반대 방향이었다.

“문으로 들어갔다간 관리인한테 들킬 테니까, 담을 탑시다. 그리고 해 지기 전에 나오죠…. 오래 머무르면 괜히 눈에 띌 테니까.”

“네.”

이곳에서는 완전한 이방인인 무구원은 윤모난의 말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한 15분여를 걸었는데도 울타리는 끝날 기미조차 안 보였다. 이윽고 길을 따라 자란 커다란 가로수 하나가 나타나자, 윤모난이 망설임 없이 나무를 타고 올라가 가지 끄트머리에서 휙 몸을 날렸다. 한두 번 담타기 해본 솜씨가 아니다.

금세 울타리 건너편에 도착한 윤모난을 따라 무구원도 똑같은 방법으로 담을 탔다. 도통 이런 식으로 어딘가를 침입해본 적 없는 무구원은 북해 가문인 자신이 남경 윤씨 부지에 이런 식으로 들어와도 괜찮은 건가 의구심이 들었다. 들키면 커다란 문제가 될 텐데.

“팀장님, 이렇게 들어가도 괜찮은 거 맞습니까?”

“당연히 안 되지. 잡히면 감옥으로 끌려갈걸. 남의 집 가족 묘지에 침입하는 게 괜찮을 리 있나.”

“…….”

“혹시 잡히면 신분은 숨기는 게 좋을 거예요. 그… 안범이라고 해. 무씨인 건 무조건 숨겨.”

“네, 알겠습니다.”

치안조 제복에는 명찰이 없어 다행이었다. 무구원은 괜히 왼쪽 가슴 언저리를 손으로 툭툭 털었다.

남경 윤씨의 가족 묘지는 계단식 언덕으로 조성되어 있었고 부지도 제법 컸다. 으레 묘지라는 장소는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풍기게 마련인데, 이곳은 향기로운 아까시나무가 만개해 있는 탓인지 한적하고 몽환적인 느낌마저 들었다.

묘지라기보다는 꼭 결혼식장 같았다. 언덕 아래로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나무에서 흰 꽃비가 우수수 내려 두 사람의 검은색 코트에 달라붙었다. 윤모난의 뒤를 쫓아가면서 무구원은 분홍 머리에 하얀 면사포처럼 얹힌 흰 꽃잎을 물끄러미 구경했다.

면사포라니. 이상한 상상임을 알면서도 무구원은 그 광경을 눈에 오래도록 담았다. 그러다 갑자기 우뚝 선 윤모난의 등에 부딪힐 뻔하고 나서야 그는 주춤하며 발걸음을 멈췄다. 앞서 걷던 윤모난이 입을 열었다.

“다 왔는데…. 여기서 잠깐 기다려요.”

“네.”

무구원은 대답과는 달리 기다리지 않고 윤모난이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도록 도로 언덕 아래 나무 그늘로 향했다. 무구원의 배려 덕에 온전히 혼자 남은 윤모난은 하얀색 묘비 두 개가 서 있는 봉긋한 봉분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곳의 주인인 두 무덤이 홀연히 그를 반긴다.

윤작. 큰형이다. 그 옆에 나란히 있는 비석에는 ‘윤약’이라는 이름이 한자로 새겨져 있었다.

동생이 모란이었다면 형들은 작약이었다. 그 이름의 친연성이 세 사람이 형제임을 알려주는 표식이었다. 윤모난은 말없이 묘비에 남은 그 표식을 천천히 손으로 쓸었다. 형들의 시신을 전장에서 거두어 오지 못한 동생은 빈 무덤 앞에서 이름을 쓰다듬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미안, 정신없이 오느라 형들 좋아하는 술 한 병도 못 사 왔네.”

윤모난이 홀로 애도하는 광경은 멀리서 기다리는 무구원의 눈에도 보였다. 뭐라 중얼거리다가 이따금 입가에 쓴웃음을 짓는 그의 모습을 무구원은 조용히 눈에 담았다. 서글프도록 일방적인 대화가 계속 이어지는 듯했지만, 말소리가 들리지 않고 사위가 고요해 마치 무성영화를 보는 것 같았다.

그는 죽은 형들의 무덤 앞에서 무엇을 말하고 또 무엇을 다시 다짐하고 있을까. 무구원이 보기에 윤모난의 영혼에는 이미 금이 가 있었다. 언제든 부서진다 해도 놀랍지 않은 상황에서 무서우리만치 담담했다. 그건 상실을 감내했기 때문이 아니라, 상실을 만성적인 병처럼 앓고 있기 때문일 거다.

윤모난은 항상 하는 습관대로 은색 펜던트의 태엽을 건드렸다. 펜던트에서 기어 나온 실뱀은 그의 손끝을 떠나 두 무덤을 유유히 산책하듯이 돌아다녔다. 윤모난은 멍한 얼굴로 한참이나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는 애도였다.

“갑시다.”

“벌써요?”

“벌써라니… 해가 졌는데. 무덤가에서 잘 건 아니잖아.”

무구원은 당황한 얼굴로 하늘을 봤다. 정말로 어느새 해가 져 있었다. 몇 시간이나 기다렸나 시간을 확인해보니 그새 두 시간이나 지났다. 윤모난의 얼굴을 슬쩍 확인해보니 조금 건조하고 가라앉아 보일 뿐, 평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시내로 돌아가서 밥이나 먹자구요. 배고파.”

“여기서 어떻게 돌아갑니까?”

“한 시간 정도 걸으면 작은 상점이 있는데, 거기서 택시를 부르면 돼.”

그곳은 윤모난이 어렸을 때 담을 타고 집을 빠져나가 담배를 사던 작은 상점이었다. 어둑어둑해진 묘지를 내려오며 빠져나갈 곳이 있나 살피는데, 희미하게 차 엔진 소리가 들렸다. 청각에 예민한 윤모난이 먼저 발걸음을 멈췄다.

“…젠장.”

“왜 그러십니까?”

“그 택시 기사가 아무래도 내 얼굴을 알아본 모양이야. 운이 나빴네.”

“들킨 겁니까?”

“응.”

쭉 뻗은 윤모난의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옮기자 정말로 묘지 주변에 차들이 몰려오고 있었다. 윤모난은 휙 돌아서서 무구원을 붙잡고 얼굴을 천천히 뜯어보더니 단정한 머리를 손으로 마구 풀어 헤치기 시작했다.

“왜요?”

“…당신은 지금부터 안범이야. 죽어도 안범이라고 우겨.”

“머리는 왜….”

“생긴 게 너무 북해 유전자잖아. 얼굴 좀 가려, 말도 아끼고. 알겠지?”

“저 감옥 가는 겁니까?”

무구원이 뚱한 얼굴로 묻자, 윤모난은 픽 웃음을 터트렸다. 미안하지만 그럴 확률이 높지. 북해 무씨들도 마찬가지지만, 남경 윤씨도 외부인들에 관해서는 가차 없기에. 게다가 가족 묘지에 담을 타고 들어온 건 최소 구금감이었다.

윤모난은 대답 없이 무구원을 끌고 천천히 묘지 정문으로 향했다. 올 때는 굳게 닫혀 있었던 철문이 활짝 열려 있었고 몰려든 검은 차들 가운데 키 큰 남자 하나가 꼿꼿하게 서 있었다. 주변에는 경호원으로 보이는 에스퍼들이 에워싸고 있었다.

“윤모난.”

차의 전조등이 일방적으로 윤모난과 무구원을 향해 있었던 탓에 꼭 취조실 같은 분위기가 되었다. 이름을 부른 남자의 목소리는 중후하면서도 어쩐지 은근했다. 무구원은 그 목소리가 라디오 연설문을 읽던 남경 윤씨의 가주와 같다는 것을 바로 깨달았다.

가주의 뒤에 있던 경호원들이 바로 튀어나와, 무구원을 양쪽에서 포박했다. 무구원은 반항하지 않고 순순히 따랐다.

“연락도 없이 돌아와 가족 묘지에 이방인까지 끌고 들어가다니…. 너답구나.”

“…….”

“데려가서 신원 확인해. 옷을 보니 서곡에서 온 것 같은데, 거칠게는 다루지 않으마.”

무구원은 오늘만 해도 두 번째로 수갑을 차고 어딘가로 끌려갈 위기에 처해버렸다. 그가 이곳에 온 것에 책임이 있는 윤모난은 바로 경호원들을 가로막으면서 자신의 아버지에게 말했다.

“이 사람 신원은 제가 보증합니다. 제 팀원이에요.”

“…팀원을 여기까지?”

“제 체면도 있는데 꼬치꼬치 물으시기는… 알았어요. 제 애인이에요.”

“…….”

“곧 형들 기일이라 시간 난 김에 온 겁니다. 애인이 따라오고 싶다고 해서….”

“그만.”

무구원은 윤모난의 애인이라는 신분을 얻게 되자 자신을 붙잡고 있는 경호원들의 족쇄가 약간 느슨해진 것을 느꼈다. 윤모난의 아버지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무구원을 쭉 훑어보더니 이내 경호원들에게 놔주라고 명령했다. 그러자 윤모난이 손을 뻗어 무구원을 확 자신의 옆구리로 끌어당겼다.

“그럼 이제 저랑 애인은 가보겠습니다.”

“둘 다 차에 타거라. 집으로 가자.”

“…아뇨, 저희는….”

“네 애인 예쁜 얼굴에 총알 자국 나기 전에 얼른 타. 두 번 말 안 한다.”

과연 윤모난의 아버지다웠다. 두 사람은 말버릇이 소름 끼치도록 비슷했다. 반항해볼 여력도 없이 무구원과 윤모난은 따로 준비된 차를 타고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 있는 남경 윤씨의 저택으로 가야 했다.

저택에 도착하자 이미 사용인들이 두 사람을 마중하기 위해 입구에 나와 있었다.

“누구시래요?”

“막내 도련님 애인이랍니다.”

“아, 어서 오세요!”

남경은 생각보다 개방적인 곳인 걸까. 모든 사람들이 바로 경계심을 풀고 남자 애인 따위를 손님으로 반겨주다니. 무구원은 외국에 온 것처럼 모든 게 낯설기만 했다.

“도련님! 이게 얼마 만이십니까.”

“잘들 있었어?”

다들 윤모난을 보고 기뻐하며 모여들었다. 반갑고 정다운 인사가 한없이 이어진다. 자신을 반기는 사람도 없을 거란 그의 말이 무색할 정도로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는 사람도 있었다.

일일이 인사를 나누고 서로 손을 맞붙잡으며 윤모난은 저택에서 일하는 사용인들과 꽤 길게 안부 인사를 나누었다. 그리고 그들은 누구 하나 빠짐없이 무구원에게도 공손하게 굴었다. 하나같이 거부감이라고는 전혀 없는 표정이었다. 거부감을 떠나서 뭐랄까, 익숙한 눈치였다.

“도련님 애인 잘생기셨네요. 서곡에서 만나신 겁니까?”

“어? 으응… 저기, 내 애인은 말하는 거 싫어하니까 너무 말 많이 걸지 마…. 안범! 얼른 따라와.”

“…네.”

허둥지둥 저택 문으로 들어가는데, 윤모난이 팔꿈치로 옆구리를 쿡쿡 찌르더니 주의를 줬다.

“십자, 너무 예의 차리면 가족들이 눈치챌 테니까. 연기 좀 잘해봐.”

“무슨… 연기를….”

“존댓말 하지 말라고. 형이라고 부르고 반말해. 알았지? 존대하니까 서로 안 친해 보이잖아.”

“…형이요?”

“싫어? 그럼 감옥 갈래?”

“알겠습니다. …형.”

무구원은 망설이면서 형이라는 말을 끝내 뭉개어 발음했다. 워낙 거짓말을 잘 못하는 녀석이라 걱정은 됐지만, 별수 없었다. 윤모난은 일단 무구원을 끌고 안으로 들어갔다.

이내 현관 복도에 들어서니 안에서 가벼운 발걸음 소리가 빠르게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코너를 돌며 나타난 남자아이 하나가 와락 달려들더니 윤모난의 한쪽 다리를 붙들었다.

“삼촌!”

아이의 목소리가 울먹울먹했다. 갑자기 나타난 아이를 보며 윤모난은 귀신이라도 본 듯 창백해지더니 이내 낯빛을 바꿔 몸을 숙였다. 윤모난을 그리워하며 모란을 꺾어 보냈던 그의 조카가 엉엉 울음을 터트렸다.

그런 조카를 말없이 안은 윤모난의 눈썹 끝도 한없이 내려가 있었다. 상황이 여의찮기는 했지만 윤모난 역시도 피붙이를 그리워했던 건 마찬가지였다. 아버지를 잃은 아이는 삼촌의 너른 어깨에 눈을 비비며 거세게 매달렸다. 윤모난의 커다란 손이 아이의 머리를 가볍게 흩트렸다.

“너무 커서 못 알아볼 뻔했다.”

“…삼촌, 이제 남경으로 아주 돌아온 거예요? 여기서 사는 거예요…?”

“…아니, 미안…. 잠깐 들른 거야. 미안해.”

윤모난은 아이를 안고 계속 미안하다는 말만 되뇌었다. 그가 조카를 달래는 사이 복도 끝에서 흰색 옷을 입은 여자 두 명이 작은 아이들을 팔에 안고 나타나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을 발견한 윤모난은 조카를 안은 채로 곧장 고개를 숙였다.

“형수님, 잘 계셨어요?”

작약의 부인들이었다. 그들은 나란히 시동생에게 묵례를 했다. 남편을 잃은 지 3년이 되어가는 아내들은 여전히 상복을 입은 채, 외간 남자인 무구원이 있는 근처에 오지 않고 거리를 유지했다. 아름다운 유령처럼 얼굴을 가린 윤모난의 형수들은 나이가 고만고만한 유아들의 손을 잡고 있었다.

“들어가세요, 도련님. 안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아이들은 제가 데리고 갈게요.”

“…네.”

“가자, 삼촌 괴롭히지 말고.”

“삼촌, 오늘 갈 거 아니죠? 나 안 자고 기다릴게…. 오늘 가지 마요. 응?”

“어, 삼촌 오늘 여기서 자고 갈 거야. 걱정하지 마.”

“응…. 약속… 꼭, 꼭….”

윤모난은 새끼손가락까지 걸며 약속한 뒤 아이를 내려놓았다. 그의 조카는 엄마의 손에 끌려 2층으로 올라가면서도 연신 불안한 듯이 두 사람이 서 있는 곳을 돌아봤다. 아이들이 올라가자 윤모난의 어깨가 유독 무거워 보였다.

아이는 나이를 보니 그의 첫 조카일 터였다. 나머지 조카들은 너무 어려 삼촌을 못 알아볼 테지만, 첫 조카는 유독 삼촌을 그리워한 듯했다.

무구원은 방금 본 아이에게서 핏줄의 끈끈함을 새삼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는 윤모난의 아들이라 해도 무방할 정도로 서로 닮아 있었다. 윤모난이 자신의 아버지를 빼닮았으니 사실 그 조카는 제 할아버지의 피를 그대로 물려받은 셈이겠지만.

아까 잠깐 보았던 남경 윤씨 가주는 윤모난의 나이 든 모습이라 해도 무리가 없을 정도였다. 윤모난은 서자임에도 의심할 여지 없이 윤씨의 피가 가장 진하게 흐르는 혈육 중 하나임이 분명했다. 순수 혈통인 형들보다 제 아버지를 더 많이 닮았다니 아이러니하긴 했다.

복도를 지나 안쪽 문을 밀고 들어가자 손님을 맞는 응접실이 나타났다. 벽 전체에 화려한 작약이 그려진 방 안에는 윤모난의 형수들처럼 얼굴을 가린 중년 여성 한 명과 아까 만났던 윤씨 가주가 외출복을 입은 상태로 소파에 앉아 있었다.

“네 애인은 왜 달고 들어온 거냐? 밖에서 기다리라고 할 것이지.”

“…금방 갈 거예요. 할 말 있으면 그냥 하세요.”

윤모난의 아버지 옆에 있는 그의 부인은 얼굴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손마디가 유독 앙상했다. 체격만 봐도 병든 사람임을 알 정도로 매가리가 없어 보였다.

금욕적이고 계급을 중시하는 분위기인 건 무구원의 집안도 마찬가지였지만 남자와 여자 형제들 간의 차별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이상하리만치 남경 윤씨 집안의 분위기는 가부장적인 듯 보였고, 그건 아까 느꼈던 개방적인 분위기와는 또 꽤 모순된 측면이 있었다. 같은 나라 안에 산다 해도 이렇듯 다섯 가문의 문화와 습성은 서로 독자적이면서 달랐다.

호적상 윤모난의 어머니인 가주의 부인은 간헐적으로 훌쩍거리면서 마른기침을 했다. 반면 그런 아내의 옆에 앉은 남자는 유독 건강하고 젊어 보여 마치 부인의 정기를 빨아 먹은 흡혈귀 같았다.

그는 밝은 등 아래에서 보니 누군가의 할아버지라 믿기 힘들 정도로 희끗한 머리 한 올조차 없었다. 그는 조금 예민해 보이는 중년의 미남이었고 담배를 꺼내 무는 동작조차 윤모난과 똑같았다. 윤모난과 그토록 닮은 누군가를 보는 건 무구원에게 다소 낯설게 다가왔다. 아들이 아버지를 닮는 것이 이상한 것도 아닌데.

윤씨 가주는 담배를 태우며 짧고 강압적인 어조로 용건을 말했다.

“작약의 기일까지 머물다가 가거라.”

“…잠깐 휴가 내고 온 거라서요. 바로 가야 합니다.”

“일이 문제가 아니라 집이 불편해서겠지. 집에 혼자 올 용기도 없어 애인이랍시고 사내놈까지 데려온 게냐? 집에 형수와 조카들이 있는데 부끄럽지도 않아?”

“그러니까, 제가 여기 있으면 다들 불편하시잖아요. 무엇보다 아버지, 어머니께서 제 얼굴만 보시면 가슴 미어지실 테니.”

“버릇없는 놈. 말하는 꼴 하고는.”

“돌아오지 말라고 한 건 아버지셨구요.”

3년 전 형들을 잃고 돌아왔을 때 장례식에서 윤모난의 아버지는 그렇게 말했다. 네가 조금이라도 책임감을 느낀다면 일이 해결될 때까지 남경에 돌아올 생각은 꿈도 꾸지 말라고. 그 이후로 윤모난은 가문과의 모든 인연을 끊었다. 그가 3년간 정신보호센터에 있는 동안 조카만이 꾸준히 편지를 써서 보냈으나 윤모난은 답장이나 전화 한 통 하지 않았다.

그런 과거가 있으니 윤모난으로서는 이 자리가 불편하기만 했다. 애초에 충동적으로 남경에 온 것 자체가 잘못이었다. 괜스레 잠깐 죽었던 경험이 마음을 약하게 만들어 잘못된 선택을 했다고 생각하니 윤모난은 자신의 나약함이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심지어 무구원까지 붙잡아 내려온 건 최악의 선택이었다.

“네 조카 편지에 답장 한 번 안 하더니, 기어코 아이를 울릴 셈이구나.”

“…….”

“아비를 잃은 아이한테 삼촌마저 빼앗으려는 거냐?”

아버지는 아들의 약점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으니 바로 양심을 쑤시고 들어왔다. 실제로 새끼손가락을 걸며 조카와 하루 자고 간다고 약속까지 했던 윤모난은 아이에게 상처를 안길 용기조차 없었다.

몇 번의 날 선 대화 끝에 윤모난이 마지못해 하루 머물겠다고 하자, 3년 만에 만나는 부자 사이의 대화는 그대로 끝나버렸다. 철저한 이방인조차 불편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이후 응접실을 나오자 나이 든 사용인 한 명이 두 사람을 저택의 서쪽으로 데려가며 중얼중얼 떠들었다. 말의 내용은 단순했지만, 대부분이 윤모난을 걱정하는 마음을 담고 있었다. 그제야 윤모난도 굳은 얼굴을 풀고 조금은 편한 기색으로 돌아갔다.

서쪽에는 윤모난이 어린 시절부터 쓰던 방이 있었는데, 그곳은 아까 응접실과는 조금 떨어진 곳이라 복도가 온통 조용했다. 이윽고 복도 끝 하얀색 문을 밀고 들어가자 주인을 떠나보내고 그 자리에서 호젓이 기다리고 있었던 방이 나타났다.

“손님은 손님방으로 모시겠습니다.”

“안 돼! 내 애인은 나랑 같이 방 쓸 거야. 신경 쓰지 말고 가. 우리 바쁘니까.”

“네? 아, 네. 도련님.”

사용인은 더 묻지도 않고 두 사람만 남기고 미련 없이 사라졌다. 윤모난은 방을 돌아보면서 단속하듯이 바로 뜻을 밝혔다.

“오해하지 마. 십자가 손님방에 혼자 자다가 이불에서 독사랑 재회할까 봐 그러는 거니까.”

“누가 제 이불에 독사를 넣습니까?”

“누구긴 누구야, 내 아버지시지. 그분이 뭐 개방적인 사람이라 남자 애인을 가만히 두고 보는 줄 알아? 남세스럽고 따지기 뭣하니까 그냥 가만히 있는 거지. 아버지는 애초에 내 취향을 혐오하는 사람이야. 번식 못하는 돼지 새끼라고 욕한 적도 있어.”

“…네?”

“우리 가주께서는 번식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분이거든. 근데 아들이 호모라서 결혼도 싫다 여자도 싫다 그러니까 얼마나 열이 받겠어? 당신한테 화풀이할 수도 있으니깐 여기 뜨기 전까지 내 옆에 찰싹 달라붙어 있어요.”

윤모난은 그렇게 말하더니 창가로 가서 덜컥거리며 창문을 열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바깥에서 못질을 해놓은 듯 창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게 아직도 못질로 막혀 있네. 지독하다 지독해….”

“왜 창문을 막아둔 겁니까?”

“14살 때, 내가 하도 밤에 빠져나가서 돌아다니니까 아버지가 직접 망치질해서 막은 거야. 내가 왜 우리 집에 오기 싫어하는지 알겠지?”

“그럼 설마 방문도… 잠겨 있네요.”

아니나 다를까 어느새 방문도 바깥에서 잠겨 있었다. 무구원이 당황하여 문고리를 몇 번 돌리자, 이 방에 둘을 데려온 사용인이 내시처럼 밖에서 냉큼 말소리를 냈다.

“뭐 필요한 거 있으세요, 도련님?”

“어― 아니야. 내 애인이 감금당하는 건 처음이라 무서워서 그래. 저녁이나 가져다줘.”

“네. 기다리세요. 내일 아침에 열어드릴 테니 애인분은 잠깐 참으세요.”

“응, 내가 잘 달래줄게.”

그렇게 두 사람은 꼼짝없이 같은 방에 갇혀 하룻밤을 보내야 하는 처지가 되어버렸다. 지난 며칠간 두 사람 사이에 오간 대화 내용을 생각했을 때 그건 결단코 기꺼운 일만은 아니었다. 무구원은 조금 착잡한 마음이었다.

“내 방 오랜만이네.”

반면에 윤모난은 감금당하는 상황에 과연 익숙한 듯 보였다. 제 방이니 어색한 게 더 이상하긴 하지만. 방은 지나치게 큰데다 갖출 건 다 갖추고 있어서인지 문이 안 열린다고 해도 그다지 답답하지는 않았다. 흰색 벽을 따라 나 있는 커다란 창문 앞에는 수많은 사진 액자들이 줄지어 놓여 있었다.

무구원은 자연스레 윤모난이 유년 시절을 보낸 방 안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방은 정기적으로 청소를 해놓았는지 먼지 한 톨도 없이 깨끗했고 이불과 커튼도 새것처럼 빳빳했지만, 방 전체에 담배의 씁쓸한 향이 흐리게 배어 있었다. 무구원은 방 안에서 줄담배를 피워댔을 어린 윤모난을 상상했다.

그런 독한 향은 이방인인 듯 방의 분위기와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그의 인생에서 많은 시간을 담았던 장소답지 않게… 주연배우와 동떨어진 무대 세트처럼 보인달까. 풀잎과 꽃잎 무늬가 새겨진 은색 카펫과 흰색으로 통일한 가구들은 손때가 묻긴 했지만 모두 지나치게 화려했다.

한마디로 동화책에 그려진 전형적인 공주님 방이었다. 이 방 안에 있으니 유독 윤모난의 분홍 머리가 우스꽝스러워 보일 정도였다. 딸을 가지고 싶었는데 아들이 태어나 아쉬웠던 부모가 억지로 아들을 딸처럼 키우려고 작정하고 꾸며놓은 방 같았다.

“…저기 팀장님.”

“쉿, 영감이 밖에서 엿들을 수 있으니까 방 안에서도 방심하지 마.”

“응, 형.”

막상 연기를 하기로 했으나 역시 형이라는 호칭은 어색했다. 그 어색함을 견디다 못한 윤모난이 얼굴을 찡그리더니 ‘왜?’ 하고 묻는다.

“…형의 성적 취향과 이 방… 인테리어… 무슨 상관이 있는 건지….”

“…….”

“제 누이 방도 이 정도는….”

“죽을래?”

“죄송… 아니 미안.”

“이거 웃기는 자식일세.”

무지와 편견 가득한 질문에 윤모난은 얼굴을 일그러트리더니 쾅, 하고 협탁을 내려쳤다. 금방이라도 협탁 다리가 부러져 내려앉을 만큼 위협적인 기세였다.

“내 방이 어때서! 그리고, 내가 남자 새끼들 좋아하는 거랑 방이랑은 왜 연관 짓는데?”

“솔직히 누가 이 방을 보더라도 의심할 것 같긴 합니… 한데.”

“이 방을 내가 꾸민 건 줄 알아? 여기 내 취향이 하나라도 있을 거 같냐고. 이건 어머니가 직접 꾸미신 거야. 어렸을 때부터 이 방은 쭉 이 꼴이었다고.”

“그럼 머리는 왜 분홍색인데?”

“분홍이 뭐 어때서. 시발, 남자는 분홍색 좋아하면 안 돼?”

윤모난은 무구원이 제 머리의 꼬락서니까지 물고 늘어지자 과도하게 신경질을 내며 주먹을 휘둘렀다. 무구원은 잽싸게 피하려다가 방 중앙에 있는 소파에 걸려 우당탕 넘어졌다. 그러자 그 틈새를 놓치지 않고 윤모난이 위로 올라타서 검은 머리를 쥐어뜯었다.

“개성이라고는 하나 없는 네 머리 색보단 분홍색이 백배는 낫다!”

“이렇게 폭력적으로 나오는 게 더 이상하게 보인다는 생각은 안 하십니까!”

“이게 오늘 봐줬더니 또 기어올라!”

“윽―.”

한창 투덕거리고 있는데 끼이이익, 하며 열린 문 사이에서 난감한 듯한 헛기침 소리가 났다. 190cm가 넘는 장신의 남자 두 명이 바닥에 뒤엉켜서 한 명이 다른 하나를 깔고 있는 모습은 아무리 개방적인 곳이어도 보여서 좋을 것 없었다.

쟁반에 저녁을 담아 온 사용인은 과하게 기침을 하면서 바닥에 밥을 내려놓고 바로 방을 나갔다. 그러더니 밖에서 음울한 목소리가 기어들어왔다.

“도련님…. 저는 내일 아침에 문 열러 다시 오겠습니다.”

“큰일 났다. 시발… 바로 아버지 귀에 들어가겠네. 너 때문에 오랜만에 집에 와서 섹스나 하는 미친놈 됐잖아.”

윤모난은 기어코 한 대를 쥐어박고 무구원의 몸에서 내려왔다. 그러더니만 바로 쟁반을 소파 앞 테이블에 내려놓고 바닥에 앉아 수저를 내밀었다.

“얼른 와서 먹어. 곧 쫓겨날 수도 있으니까. 배나 채워놓자고.”

“집에 애인 데려온 건 처음이세요?”

“…집이라기보다는 방이랄까. 내 애인들이랑 밀회를 즐기는 장소는 저 뒤쪽에 따로 있었지.”

“애인들…? 두 명이라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래, 짧게 만난 사람은 제외하고 길게 만난 사람이 두 명.”

“…….”

“먹어, 괜히 얼굴 구기지 말고. 더 알려고 해봤자 듣기 좋은 소리 없어.”

윤모난은 무구원의 손에 숟가락까지 쥐여주며 종용했다. 하루 종일 빵 하나를 먹고 그마저도 윤모난에게 반 넘긴 무구원은 쟁반에 차려진 간소한 저녁 식사를 꽤 맛있게 먹었다. 남경의 음식은 간이 좀 세다고 하더니 생각보다 맛있어서 윤모난이 왜 서곡 식당 밥에 투정을 부렸는지 이해가 갈 정도였다.

그릇을 깨끗하게 비운 두 사람은 번갈아 방에 딸린 욕실에서 씻고 나왔다. 푹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털어내며 무구원은 창가에 놓여 있는 사진 액자들을 천천히 구경했다. 액자에는 하나같이 삼 형제가 담겨 있었다.

쌍둥이 형들이 아직 갓난아이인 동생을 안고 있는 것부터 아이스크림콘을 들고 울먹이는 동생의 눈물을 닦아주는 형들, 그들이 동생의 그네를 밀어주는 모습까지 액자들을 따라 계속해서 이어졌다. 또 청소년이었을 앳된 모습의 윤모난이 교복을 입고 형들과 나란히 어깨동무를 한 사진도 있었다. 무구원은 그의 쌍둥이 형들인 작약의 얼굴을 자세히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무정원과 나이가 같은 작약은 사진 속에서 영원히 젊은 채로 찬란하게 웃고 있었다. 그건 윤모난도 마찬가지였다. 무구원은 지금껏 단 한 번도 윤모난이 그렇게 웃는 걸 본 적이 없었다. 물론 종종 웃기는 했지만, 그건 어딘가 갉아 먹힌 반쪽짜리 웃음이었을 뿐이다. 3년 전 대운동장에서 봤을 때는 밝은 미소를 엿보았던 것도 같지만, 이 사진들에서만큼 찬란하지는 않았다.

앞으로 윤모난이 사진 속 과거에서처럼 웃을 일이 있을까? 무구원은 막 욕실에서 나와 반바지만 입고서 물기를 닦는 남자를 쳐다봤다. 온몸에 가득한 흉터들과 상반신에 자리 잡은 독사 문신은 그가 독종임을 증명하고 있었다.

눈앞의 그는 무구원이 아는 인물이었으나 사진 속 웃는 윤모난은 무구원이 전혀 모르는 과거의 인물이었다. 어쩌면 영원히 알 수 없을지도 모를.

“사진 봐?”

“네.”

“우리 형들 잘생겼지.”

형들 사진 보는 걸 싫어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윤모난이 먼저 얘기를 꺼내며 다가왔다. 그는 머리에서 떨어진 물방울이 발아래 카펫을 푹 적실 때까지, 액자들을 쭉 둘러보면서 간단한 설명을 얹었다. 이건 언제 찍은 거다, 혹은 어떤 상황이었다 하는. 하지만 무구원의 시선을 끄는 사진은 따로 있었다.

“이건 언제 찍은 겁니까?”

“이거? 글쎄… 언제더라.”

그건 수많은 사진 중에 딱 하나, 윤모난 혼자 찍은 독사진이었다. 무구원이 액자를 가리키자 윤모난은 모르겠다는 얼굴을 했다. 정말로 언제 어쩌다가 찍은 건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얼굴을 보니 열여덟쯤인 것 같은데… 무슨 사진인지는 도통 떠오르지 않았다.

배경을 보아하니 남경의 집에서 찍힌 것이었다. 아마도 등을 돌리고 있다가 누가 뒤에서 부르자 고개만 돌렸나 보다. 그 순간 찰칵하고 순간을 포착한 덕에 약간은 무방비한 윤모난의 표정이 그대로 사진에 남은 듯했다.

부드러운 노을빛이 분홍색 곱슬머리를 투명하게 투과하고, 하얗고 기다란 다리가 쭉 뻗어 있었다. 뭐랄까 이루 말할 수 없는 성애적인 시선이 느껴지는 사진이었다. 사진의 주인공은 모르겠지만 생판 남이 보기에는 그런 느낌이 들었다. 윤모난은 이걸 누가 찍은 걸까 떠올리려 애썼지만 결국 기억하지 못했다.

“왜…?”

어느새 둘을 감싼 공기가 미묘하게 달라졌다. 옆에서 무구원의 시선을 느낀 윤모난은 고개를 돌려 그와 시선을 마주쳤다. 무구원은 무언가 말을 하려는 듯이 입을 달싹이다가 이내 그만뒀다. 막 씻고 나와 촉촉하게 불은 그 입술이 붙었다가 떨어지는 것을 보노라니 윤모난은 자연스레 입에 침이 살짝 고였다.

성욕을 느끼면 이런 식으로 식욕이 돌 때와 비슷하게 침이 고이는 제 버릇을 아는 윤모난은 위험신호에 즉각 반응하며 뒤로 물러섰다. 조금 이른 시간이긴 하지만 피곤하기도 하고 얼른 누워서 자면 될 것 같았다.

“피곤한데… 얼른 자자.”

“네.”

“여긴 내 방이니까 난 침대, 십자는 소파에서 자세요.”

막상 각자 자리로 가 잠을 청하려 하자 예상치 못한 문제가 하나 발생했다. 방 안에 있던 소파가 도저히 무구원이 누워서 잘 수 있을 만큼 크지 않다는 것이었다. 몇 번 몸을 접어보던 무구원은 투정이라곤 부릴 줄 모르는 아이처럼 이불도 없이 바닥에 누웠다. 그 처량한 광경을 보곤 악질 팀장 윤모난의 양심조차 반응하고 말았다.

“젠장, 여분 이불을 가져다 달라고 할 수도 없고. 그냥 이리 올라와. 서로 등 돌리고 자자고.”

“저는 이대로도 괜찮습니다.”

“뭘 괜찮아. 아직 초봄인데 어떻게 이불도 없이 맨바닥에서 자려고? 여긴 냉혈 인간들 소굴이라 온돌도 약해.”

무구원은 슬며시 일어나 베개를 들고 윤모난이 누워 있는 침대로 다가왔다. 그러더니 침대 끄트머리에서 등을 돌리고 누웠다. 확실히 박힐 준비 되었냐는 말이 겁났는지 이상한 시도를 하려는 계획은 접은 모양이었다. 이제 무구원의 신변과 정조만 위험할 뿐.

등 뒤에서 침을 줄줄 흘리고 있는 호모 팀장은 등을 돌리고 자자고 할 때는 언제고 무구원의 등과 뒤통수를 구경하며 눈을 깜빡이고 있었다. 명령대로 단 한 번의 뒤척임도 없이 착실하게 자세를 고정한 채로 잠을 청하는 무구원의 고지식한 뒷모습을 보며 윤모난은 소리 없이 웃었다.

왠지 또 장난기가 도진 윤모난은 기지개를 켜는 척 슬며시 무구원의 등허리를 살짝 건드렸다. 잘 잡힌 근육이 손길을 따라 움찔했다. 그런 식으로 몇 번 스치고 지나갔더니 커다란 몸이 슬금슬금 움직여 더 끝으로 간다.

윤모난은 이번엔 아예 팔을 들어 떡하니 무구원의 허리에 걸쳤다. 그러고는 굴곡이라고는 전혀 없는 딱딱한 허리선을 훑었다.

“팀장님.”

“응.”

“장난 그만 치시고 얼른 주무시죠.”

“십자, 좋아하는 사람하고 같은 침대에서 첫날밤 보내는 기분이 어때?”

“…….”

어쭈. 대답이 없어? 윤모난은 몸을 굴려 무구원에게 바짝 붙었다. 그러고선 일부러 그의 뒷덜미에 뜨거운 입김을 후 불어 넣으며 다시 한번 물었다.

“이참에 총각 딱지 떼줄까?”

“…….”

“내가 원래 그거 전문이거든.”

무구원은 괜히 윤모난을 한번 꼬셔보려다가 실패한 벌을 뼈저리게 받는 중이었다. 좋아한다느니 뭐 한다느니 그런 얘길 또 했다간 그가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고로 저런 말은 일종의 테스트일 것이고, 여기서 또 거짓말하면 당장 목이 졸릴 수도 있었다.

“죄송합니다.”

“뭐가 죄송해?”

무정원이 무슨 명령을 내렸는지, 자신이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털어놓을 수도 없는 노릇이라, 무구원은 사면초가 상태였다.

“제가 착각했던 것 같습니다.”

“…….”

윤모난이 뒤에서 미간을 좁혔다. 갑자기 고해성사식으로 대화가 흘러갈 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동안 팀장님과 있었던 일들 때문에 혼란스러웠고 저도 모르게 착각도 했던 겁니다. 제가 혹시 진짜로 팀장님을… 좋아….”

“알았어, 그만해. 나도 그만 놀릴게.”

“…정말입니다.”

뭐야, 무정원이 시킨 거 아닌가? 윤모난은 급기야 제 판단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무구원의 말은 꽤 진심 같았다. 거짓말을 잘하는 놈이라면 믿지 않았겠지만, 무구원은 세계 최고로 어설픈 거짓말쟁이에 가깝지 않은가.

물론 의뭉스러운 점이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윤모난은 어쩐지 자신이 과도하게 주변을 경계하고 의심하는 환경에서 자라 죄 없는 놈을 잡았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것이 정치적으로 흐르지는 않는다. 정치를 혐오하면서도 모든 것을 만사를 그런 방향으로 의심하는 건 윤모난에게 버리기 힘든 습관이었다.

생각해보면 그동안 줄기차게 무구원을 건드리고 꼬시고, 남경에 같이 와주길 바란 건 오히려 자신이었다. 이쯤 되니 그는 되레 제 마음을 의심해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왜 하필 무구원일까. 자신은 왜 같이 남경으로 가자고 그를 붙잡았으며, 왜 굳이 묘지까지 데려갔을까. 물론 처음부터 그럴 계획은 아니었지만 그를 가족들 앞에 보인데다가 굳이 굳이 어릴 때 사진에 관해 설명까지 해줬다. 왜 무구원만? 그건 소위 ‘애인’들에게는 허용하지 않았던 것들이기에 윤모난은 불현듯 스스로 자문할 수밖에 없었다.

“자라.”

그 말을 끝으로 눈을 감아버렸지만 답할 수 없는 질문이 끝내 이어져 윤모난은 밤새 뒤척였다. 그리고 그건 무구원도 마찬가지였다. 각자의 생각으로 밤이 깊어갔다.

새벽쯤이 되어서야 가까스로 잠이 든 무구원은 항상 깨는 시각에 맞춰 일어났다. 눈을 비비며 옆을 보니 윤모난이 분홍 까치집을 지은 채 이불을 걷어차며 자고 있었다. 험하게 자는 것이 습관인 듯 몸을 뒤트는 이상한 자세였다. 이렇게 무방비한 그의 모습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기에 꽤 생경한 기분이었다. 무구원은 윤모난이 걷어찬 이불을 끌어다 덮어주고 베개도 바르게 고정해주었다.

침대에서 내려와 문고리를 확인해보니 밤까지만 해도 굳게 잠겨 있던 문이 어느새 열려 있었다. 조용히 밖으로 나서자 문 앞에 콩알만 한 누군가가 기대어 앉아 있었다.

“…삼촌?”

어제 본 윤모난의 조카였다. 언제부터 기다린 건지, 방에 들어오지도 않고 문 앞에 앉아 있던 모양이었다. 아이는 오매불망 그리워했던 삼촌이 아닌 타인을 보자마자 약간 낯을 가리는 표정을 지었다.

“삼촌은 저 안에….”

“들어가도 돼요? 할아버지께서… 삼촌 방에 함부로 들어가면 안 된다고 그러셔서.”

“응, 그런데 삼촌은 아직 주무시고 계셔.”

허락이 떨어지자 아이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바로 방 안으로 뽀로로 달려 들어갔다. 그러곤바로 침대에 누워 있는 윤모난에게 가서 목을 꼬옥 끌어안는다. 갑작스러운 습격에 잠에서 깬 윤모난이 잠긴 목소리로 ‘뭐야?’ 하고 묻다가, 조카인 것을 깨닫곤 작은 몸을 두 팔로 감싸 안았다.

“삼촌이 뭐랬어. 자고 간다고 했잖아….”

“네!”

“원래 가야 하는데 우리 청연이가 눈에 밟혀서 못 갔어.”

“삼촌, 지난번에 내가 뱀들이랑 같이 보낸 모란 받았어요? 그거 내가 화원에서 삼촌 주려고 딴 건데….”

“응 받았어. 근데 보자마자 마음이 아프더라.”

“왜 마음이 아파요?”

“그걸 보니까, 청연이가 견딜 수 없이 보고 싶어서…. 그리고 미안해서.”

윤청연은 윤모난의 첫째 형이 낳은 7살짜리 조카였다. 아이는 원래 아빠처럼 쌍둥이로 태어났으나 쌍둥이 형은 심한 열감기를 앓다가 일찍 죽었다. 형이 죽은 지 몇 년 뒤 아버지마저 잃은 아이라 집안에서는 청연이 유독 아픈 손가락이었다.

윤모난이 서곡에 들어가기 전 갓난쟁이 때부터 업어 키워서 그런지, 1년에 한두 번 보는 아버지보다는 원래부터 제 삼촌을 더 좋아하던 아이였다. 아버지의 장례식 때도 청연은 삼촌의 옷자락에 매달려 계속 안아달라 보채기만 했었다. 어쩌면 청연에게는 제 삼촌이 더 아버지 같았는지도 모른다.

그래서인지 아이는 다행히 제 아비의 죽음에 큰 충격을 받진 않았지만, 삼촌이 정신보호센터에 들어가 연락을 끊었을 때는 크게 슬퍼했다. 항상 답장 없는 편지를 적어 보내는 것이 아이의 일상이었는데, 그걸 다 알면서도 외면해온 윤모난의 죄책감은 오죽했으랴.

“나 하루 종일 삼촌이랑 있을 거야. 아냐, 그냥 나도 서곡에 데려가주세요.”

“거긴 이상한 아저씨들이 많아. 우리 청연이가 살기에는 최악이야.”

“…음, 이상한 아저씨들?”

“응, 너 손에서 불 뿜는 아저씨 봤어? 너 같은 꼬맹이는 1초 만에 타버릴걸.”

윤모난은 아이를 예뻐할 줄은 알아도, 어떻게 대화해야 하는지는 전혀 모르는 사람 같았다. 그러건 말건 청연은 삼촌에게 딱 붙어 영원히 떨어지지 않을 기세로 뺨을 비비고 짧은 다리로 엉겨 붙으며 어리광을 부렸다.

“그래도 갈 거야. 나 삼촌이랑 살고 싶어요.”

“그러면 네 어머니가 얼마나 서운해하시겠어.”

“어머니는… 맨날 울고 아프기만 하세요. 아버지가 그립다고 매일 우세요.”

“…….”

“삼촌, 모난이랑 작약이는 잘 있어요? 보고 싶어…. 뱀들도 데려오지.”

“삼촌이 도로 남경에 보낼게. 청연이가 그동안 잘 보살핀 덕에 비늘이 반질반질하더라.”

“아니요. 삼촌이 데리고 있어요. 뱀들을 보내면 삼촌 외롭잖아요.”

윤모난은 아이를 안은 채로 침대에서 내려왔다.

“너 삼촌 애인한테 인사했어?”

“애인…?”

어린 조카에게까지 남자 애인 행세를 하는 건 좀 아니지 않나. 무구원은 죄책감에 눈을 질끈 감았다. 청연은 왜 저 멀대 같은 남자가 삼촌의 애인이라는 건지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공손히 인사했다. 그러더니 삼촌에게 바로 묻는다.

“왜 삼촌 애인은 남자예요?”

“어, 예전에 할아버지가 삼촌한테 번식 못하는 돼지라고 소리 지른 적 있었지? 그거 실은 삼촌이 남자를 좋아해서 그래.”

“…애한테 그런 얘기 좀 하지 마시죠.”

아무렇지도 않게 쏟아지는 비교육적인 언사에 참다못한 무구원이 나서서 그를 만류했다. 그러건 말건 윤모난은 제 조카의 머리를 쓸어 넘기면서 남자가 남자를 좋아하는 것에 관해 주절주절 떠들었다. 그 말을 들은 청연이 눈을 빛내며 선언했다.

“그럼 나도 삼촌 따라 남자 좋아할래요.”

“그래. 나중에 할아버지한테 가서 꼭 말해, 알았지?”

“…….”

저 정도 악취미면 악마도 도가 지나치다고 혀를 찰 법했다. 새벽부터 시작된 윤모난의 어린이를 위한 호모 교육 시간을 뒤로하고, 세 사람은 아침을 먹기 위해 부엌으로 향했다. 식사를 준비하느라 분주한 부엌 한구석에 있는 작은 테이블에 앉으니, 사용인들이 안절부절못하며 다가왔다.

“가주님께서 아침은 다 같이 식사하시겠다고 말씀하셨는데요.”

“아뇨, 우리 셋은 지금 여기서 먹을게요. 아버지 얼굴 보면 밥이 안 넘어가서 그래.”

“…그럼 청연 도련님이라도 보내셔요. 가주님께서 경을 치실 거예요.”

“싫어! 나 삼촌이랑 먹을 거야!”

“청연아, 삼촌이 뭐랬어? 다른 사람한테 버릇없이 굴지 말라 그랬지. 의자에 똑바로 앉고.”

아이는 조금 혼나긴 했으나 꿋꿋하게 고집을 부린 탓에 제 삼촌 그리고 삼촌의 애인과 함께 아침을 먹을 수 있었다. 다행히 그의 할아버지는 당장 이것을 꾸짖지는 않았으나 그건 아침을 먹고 나서 정원에 나가 있을 때 시작되었다.

마치 동성 부부와 그들의 자식인 것처럼 퍽 진보적인 모양새로 윤모난과 무구원이 청연을 데리고 나타나자 윤모난의 아버지는 바로 손자의 손을 낚아채며 혼부터 냈다.

“청연이 이놈, 아침부터 고집을 부렸다지.”

“…….”

“네 삼촌 방 근처는 가지도 말랬더니. 능력까지 써서 네 엄마랑 보모도 따돌리고 아침 일찍 도망갔다고 들었다. 어찌 된 게 네 삼촌이랑 하는 짓이 똑같아서 무서울 정도구나.”

“할아버지… 나도 삼촌처럼 남자 좋아할래요. 나도 남자 애인 가질 거예요.”

“윤모난!”

벼락같이 내리꽂히는 호통에 윤모난은 겨우 웃음을 참았다. 이 상황에서 웃음이 터지려고 한 건 그밖에 없었지만 말이다. 다들 청연의 폭탄선언을 듣고 충격에 빠진 가운데, 윤모난의 아버지는 아이를 뒤에 있는 사람에게 넘기고 머리를 짚으며 휘청거렸다.

“이 돼지 같은 놈…! 기어코 네 조카까지….”

“왜 하필 돼지예요? 돼지는 번식력이 좋은 동물인데.”

“분란만 만들려고 나타난 거냐? 너, 앞으로 애들 근처에는 얼씬도 할 생각 말아! 당장 꺼져라!”

“…안 그래도 가려고 했어요. 붙잡은 게 누구신데요. 가자, 안범.”

윤모난은 안범을 사칭한 무구원의 손을 끌어당기면서 온 길을 되돌아갔다. 꼭 이곳에서 쫓겨나려고 작정했던 사람 같았다. 그런데 다시 안으로 들어가려는 순간, 뒤에서 울음소리가 들리더니 청연이 사람들을 뿌리치고 그들을 향해 달려왔다. 윤모난은 그 광경을 외면하고 싶은 것처럼 뒤돌아보지 않다가, 아이가 헉헉거리며 달려와 달라붙자 결국 멈추고 말았다.

가야 하는데…. 아이는 짧은 사이에 미아라도 된 듯 엉엉 울면서 윤모난의 다리를 잡고 바닥에 엎어져 매달렸다.

“삼촌… 가지 마요…. 으흐… 하루만… 하루만 더… 으엉….”

아이는 차마 이틀을 있어달라 부탁하지도 못하고 ‘하루만’을 외면서 매달렸다. 무구원은 슬며시 윤모난의 얼굴을 힐끔거렸다. 또 툭 건들면 무너질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무구원이 그 대신 바닥에 엎어져 있는 청연을 일으키며 먼지를 툭툭 털어줬다.

“하룻밤만 더 있다 가시죠.”

“안 돼. 어제 여기서 잔 거 자체가 이미 실수야.”

“하루 더 있는다고 해서, 실수가 실수가 아니게 되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너, 너무 안일한 거 아니야…? 여기 오래 있어서 너나 나나 좋을 거 없어.”

“안일해서가 아니라… 팀장님께서도 지금 조카분이 눈에 밟히실 텐데 조금 위험을 감수해도 될 것 같아서요.”

“…….”

윤모난은 정원에서 이쪽을 보고 있는 제 아버지의 차가운 얼굴을 응시했다. 갑자기 휴가를 내고 여길 온 자신에게 그가 왜 왔냐는 추궁조차 하지 않는 건 아무래도 수상했다. 심지어 잠깐이지만 집에 머무르게끔 하면서 청연이를 대면할 수 있게 하다니. 무슨 일을 꾸미는 것이 분명했다. 그 위험성을 뻔히 알면서 더 머문다는 게 내키지 않았다.

애초에 아버지가 어제 청연을 들먹이며 자신을 여기 붙잡아두려고 했던 것 자체가 수상했다. 윤모난은 본능적으로 신경을 곤두세웠다. 여기 더 있다간 분명 후회하게 될 것이다. 조카 청연은 윤모난의 약점이고, 남경의 주인은 상대방의 약점을 노려 아가리로 무는 음흉한 독사이니까.

“젠장.”

하지만 결국 윤모난은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는 조카의 작은 손을 잡고 말았다.

“알았어. 하루만… 하루만 더 있을게.”

“삼초온!”

“진짜 딱 하루만이야. 삼촌 내일은 정말 가야 해. 이 세상에 죽여야 할 괴물들이 얼마나 많은데… 알지?”

“네, 하루만…. 더 안 조를 거예요.”

“그래, 눈물 닦아. 울지 말고.”

청연은 윤모난이 하루 더 있겠다고 하자 바로 기분이 나아진 듯 제 삼촌을 설득해준 무구원의 손까지 잡아주었다. 아이가 바로 친근하게 굴자 무구원은 왜 그토록 윤모난이 조카에게 꼼짝도 못하는지 알 것도 같았다. 타고나기를 귀여운 아이였다.

“삼촌 애인은 무슨 능력을 가졌어요?”

“난 시간을 돌릴 수 있어.”

“우와.”

“너는?”

대답 대신 아이는 허공에 손을 뻗었다. 그러자 잠시 뒤에 흰 고양이 하나가 나타났다. 고양이는 복도를 이리저리 뛰어다니다가, 이내 자신을 만들어낸 청연의 발목에 목덜미를 비비적거리며 애교를 피웠다.

“얘는 풀잎이에요. 나이가 너무 많아서 지난겨울에 죽었는데. 보고 싶을 때마다 불러서 봐요.”

“청연아.”

윤모난은 죽은 고양이의 환영을 보다가 부드럽게 조카를 불렀다.

“삼촌이 뭐랬어. 죽은 사람이나 동물들은 환영으로 만들면 안 된다고 했잖아.”

“네….”

청연은 윤작의 장례식 때 사람들이 너무 슬퍼하는 모습을 견딜 수 없었는지 갑자기 환영으로 제 아버지를 만들어내서 사람들을 기함하게 했다. 그때 윤모난은 아이를 품속에 끌어안으며 죽은 사람이나 동물은 환영으로 만들지 말라 당부했었다.

아이들은 그런 약속은 금세 까먹기 마련이다. 청연은 그 뒤로도 종종 보고 싶은 사람이나 동물들을 이런 식으로 불러냈다. 만질 수도 없고 대화를 나눌 수도 없는 환영일 뿐이지만. 청연이 불러낸 고양이가 이내 흩어져 사라지자 윤모난이 조카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었다.

“그리운 사람이 있으면 환영으로 불러내는 게 아니라, 청연이가 기억하면 되지.”

하지만 장례식장에서 조카가 만들어낸 큰형의 환영을 보고 무너지며 통곡한 건 다른 누구도 아닌 윤모난이었다. 지금도 그는 조카 청연을 통해서 형의 흔적을 쫓고 있었다.

오후 내내 청연과 시간을 보내고 저녁까지 먹은 윤모난과 무구원은 내일 아침 일찍 돌아갈 예정이었다. 아이를 엄마에게 보내고 방에 들어온 두 사람은 공동 주거지에서 수거한 파동 탐색 방해 장치를 두고 상의를 했다.

“이거, 이상하지 않아?”

“네?”

윤모난은 은색 큐브를 손안에서 굴리며 각각의 면을 들여다보았다.

“원래 큐브는 각 면이 다 다른 색인데, 이건 여섯 면 전부 색이 똑같으니까 이상하잖아.”

“듣고 보니 그렇네요. …애초에 장난감으로 만들어진 게 아니니까 그럴 수도요.”

“응.”

“이걸 연구조에 정식으로 의뢰하실 생각은 없으신 거죠?”

“어. 하지만… 모른 척하기엔 확실히 찝찝한 물건이야. 기러기들이 뿌린 건지 아니면 다른 누군가의 짓인지도 아직 모를 일이고.”

“개인적으로 알아보는 건 어떨까요.”

“그래, 지금으로서는 그 방법밖에 없겠지. 하지만 무구원….”

“네.”

“이 일을 파고드는 게 과연 옳은 선택일까.”

무구원은 생각지도 못한 질문이라는 듯이 미간을 좁혔다.

“이 일에 달린 목숨이 몇 개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래, 그러니까 그냥 묻어두는 게 그 목숨들 살리는 걸 수도 있잖아.”

“…팀장님이 걱정하시는 게 뭔지는 압니다. 하지만 알게 된 이상 못 본 척할 수는 없습니다. 이 장치가 어디에 얼마나 퍼져 있을지도 알 수 없는 노릇이구요.”

“…….”

“민간인 거주지에 트랜스 일곱 마리가 숨어 있었습니다. 만약 이 장치가 생각보다 많이 퍼져 있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생각해보십시오. 바로 옆집에 트랜스가 있다고 해도 알 수 없다면요?”

무구원은 애초에 다른 답이라고는 모르는 사람처럼 꽤 강경하게 말했다. 윤모난은 피식 웃었다. 머리가 좋은 놈이니 이 일에 얽힌 온갖 잡다한 문제를 모를 리 없을 텐데. 다른 사람의 목숨이 걸렸다는 생각에 이것저것 재지 않고 막무가내로 달려들다니 역시 순진했다.

그래, 이런 순진한 놈을 섹스 스파이로 의심하다니. 무구원에게는 과분한 의심일지도 몰랐다. 윤모난의 마음은 어느새 점점 아닌 쪽으로 기울어가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그렇게 믿고 싶었던 건지도. 취조하면 바로 알 수 있는 문제였지만 끝까지 묻지 않는 것만 해도 그랬다.

윤모난은 왠지 그런 식으로 무구원에게 실망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 또다시 왜 무구원에게만 그런 것인가 하는 질문이 마음속에 떠오르는 것이다. 윤모난은 수첩에 무언가를 적어 넣으며 큐브를 천천히 뜯어보는 그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말했다.

“알았어. 한번 알아보기나 하자.”

“네, 서곡으로 돌아가면 이 큐브를 알아볼 데가 있는지 찾아보겠습니다.”

“그래.”

“제 생각에는 서곡에 들어가자마자 서강 주씨 쪽에서 먼저 반응할 것 같습니다. 한백호 팀장이 군법 얘기를 꺼냈으니… 아마도 감찰부가 나설 듯하네요.”

“…감찰부?”

“현재 감찰부장이 서강 주씨입니다. 주현희 부장이요. 그쪽 반응을 보면 단서를 얻을 수 있을 것 같군요. 그런데… 주씨는….”

무구원은 무언가 더 얘기하려다가 마는 눈치였다. 윤모난은 말하지 않아도 그가 무얼 얘기하고자 했는지 알 것 같았다. 적절히 말을 돌릴 타이밍이었다.

“그래, 십자 당신은 가만 보니까 전투조보다는 치안조가 더 적성에 맞는 거 같네.”

윤모난의 말에 무구원은 수첩을 닫으며 덤덤하게 말했다.

“적성은… 생각해본 적이 없는데요. 저는 당연히 전투조에 들어와야 한다고 생각해서요.”

“왜?”

“형님께서 그렇게 명령하셨으니까요.”

“아, 십자는 형 말이라면 무조건 따르나 봐?”

그 충성스러운 대답에 다시 윤모난의 마음에 의심이 스멀스멀 곤두섰다.

“그러려고 합니다.”

“…따르면 따르는 거지, 그러려고 하는 건 또 뭐야?”

“결론적으로는 형님의 명령을 어기는 일들이 이상하게도 자주 일어나거든요.”

“그게 무슨 뜻이야?”

“보통 명령은 짧고 명료하죠. 듣는 입장에서는 그 짧은 문장을 주관적으로 해석하고 수행하게 되는데, 저는 종종 거기서 형님의 의도와는 반대로 선택해버리곤 합니다. 당시에는 명령을 따랐다고 생각했지만 따지고 보면 어긴 적이 몇 번 있었습니다.”

“하하…. 딱 당신답네.”

“저답다니요?”

“내가 보니까, 십자는 겉으로 보기에는 건조하고 단순한데, 사실 상상력이 과하달까? 생각이 많아 보여. 눈앞에 보이지 않는 이상을 좇으며 살아와서 그런가… 한마디로 고집도 세고 주관도 꽤 강한 거지.”

“팀장님이 누구한테 고집이 세다고 할 입장은… 아니실 텐데요. 만만치 않지 않습니까?”

“나랑은 달라. 나는 명령을 잘 따르는 쪽이지.”

윤모난은 무구원의 생각과는 완전히 상반된 해석을 내놓았다.

“난 반골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복종이 뼛속 깊이 새겨진 놈이야. 내가 하는 일탈들은 그냥 항상성을 유지하는 정도이지 주어진 체계를 완전히 깨지는 않아. 내가 왜 군인이 적성에 맞겠어? 죽이라고 하면 그냥 죽이는 게 나한테는 쉽거든. 간단하고.”

“…팀장님은 복종보다는 지휘가 더 적성에 맞아 보이시는데요.”

“복종의 메커니즘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으니 그럴 수밖에.”

무구원은 그간 팀장 윤모난의 행적들을 쭉 회상하면서, 그 말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훌륭한 지휘관은 복종의 메커니즘을 정확하게 파악한 사람이어야 한다. 물론 윤모난은 3년 전 무간에서 팀장의 명을 어긴 적이 있다. 그것은 곧장 재앙을 불러왔고, 그에게 트라우마를 남겼다. 그러니 그는 뼛속 깊이 새겼을 거다. 복종하지 않으면 죽음뿐이라는 것을.

“하지만 십자 당신은 나랑 정반대야. 천성이 복종할 줄 모르는 놈 같달까. 윗사람 입장에서는 당신 같은 부하가 제일 까다롭거든. 너무 똑똑하고 생각이 많아서 불안해. 사고 칠 것 같은 관상이야.”

“관상이요?”

“응, 십자 관상이 딱 그래.”

별안간 관상을 들먹거리자 신뢰도가 확 떨어졌다. 그런 생각조차도 무구원의 성격을 증명하는 것이긴 했지만.

“관상을 보시는 줄은 미처 몰랐는데요.”

“저 봐라, 또 은근히 비꼬는 거. 당신 말버릇 은근히 반항적인 거 알아?”

“…….”

“이런 말 들은 거 처음 아니지?”

“…네.”

“거봐, 관상은 다 과학이라고.”

무구원은 그저 머리만 긁적였다. 두 사람이 이런저런 얘기를 차분히 나누는 건 거의 처음이었다. 무구원과 윤모난은 시작부터 약간 어긋났었고, 윤모난의 횡포와 이런저런 이유로 근 한 달간은 무구원이 그를 피해 다니기도 했다.

작전을 나와서는 윤모난이 무구원을 의심하고 밀어냈으니 시답지 않은 생각들이나 잡담 같은 걸 나눌 새도 없었다. 둘 사이의 의심이 거두어지고 조카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나서야 두 사람은 처음으로 정상인답게 서로 말을 주고받으며 간간이 웃었다. 참 이상한 편안함이었다.

윤모난은 어느새 카펫 위에 팔을 베고 누운 채로 무구원이 제 어린 시절 얘기를 하는 것을 웃으며 들었다. 그사이에 사용인이 간식거리로 차와 다과를 넣어준 뒤 평소처럼 문을 잠갔다.

“어릴 땐 제가 책만 읽고 말이 없어서 다들 자폐를 의심했었습니다.”

“몇 살까지 말을 안 했길래?”

“일곱 살이요.”

“뭐?”

“일곱 살까지 한마디도 안 했습니다.”

윤모난은 허리까지 접어가며 웃었다. 또 집 나갔던 웃음이 오랜만에 돌아온 모양이었다. 일곱 살까지 말을 안 했다는 게 뭐가 그리 웃긴 건지는 모르겠지만. 무구원은 약간 쑥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말을 못한 건 아니고… 그냥 안 한 겁니다. 전부 알아듣기는 했습니다.”

“왜 안 한 건데?”

“그냥… 할 말이 없어서요.”

“끄흐흑… 미친놈….”

딱 청연이 나이의 어린 무구원이 입을 다물고 있었을 테니 주변 사람들이 얼마나 속이 터졌을까. 그걸 생각하니 웃겨서 견딜 수가 없었다.

“당신 이름이랑 너무 찰떡이잖아…. 푸하하―! 입이 없으니 할 말이 없었나 보다!”

“…그 말도 정말 많이 들었습니다. 이름을 잘못 지어서 그런 것 같다구요. 엄밀히 따지자면 한자는 다른데 말이죠.”

“십자 너 정말 웃겨. 내가 만난 사람 중에 제일 특이한 거 같아.”

무구원은 분홍 머리를 한 인간한테 특이하다는 소릴 들어도 괜찮은 건가 싶긴 했지만 그냥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윤모난이 웃는 걸 보는 게 꽤 나쁘지 않았기 때문이다.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얼굴보다는 이렇게 눈물을 찔끔거리며 웃는 게 더 보기 좋았다.

“특이하다는 소리는 처음 듣습니다.”

“진짜? 왜 사람들이 이 매력을 모르는 거지? 엄청 특이한데.”

“일곱 살까지 말을 안 했다는 게 매력…이 됩니까?”

“푸하하하!”

무구원은 다른 일에 관해서는 로봇처럼 굴면서, 어쩐지 인간적인 문제에 관해서는 어리벙벙했다. 이렇게 맹탕처럼 굴던 놈이 가끔가다 급발진할 때면 꼭 숭늉에 어울리지 않는 고춧가루를 탄 것 같았다.

윤모난은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으며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저놈의 매력에 답도 없이 끌리게 되어버렸다는 것을. 윤모난은 숭늉에 고춧가루를 탄 것 같은 이상한 인간에게 흥미를 느끼고 있었다.

누군가에게 이런 식의 관심이 향하는 것은 퍽 오랜만이었다. 윤모난은 기침까지 하며 웃다가 자신을 빤히 바라보던 무구원과 허공에서 시선이 부딪쳤다.

“왜?”

“팀장님은 어렸을 때 어떠셨습니까?”

“나야 그냥… 뭐, 거의 형들이 나를 키웠지. 어렸을 땐 작은 일에도 걸핏하면 울었다더라. 내 친척 중에 동갑인 여자애가 있는데 엄청 독한 애라 걔한테는 뭐만 하면 꼬집혔어.”

윤모난은 앞머리를 휙 까더니 이마에 난 희미한 흉터를 보여줬다.

“이것도 걔가 밀어서 다친 흉터야. 내 완벽한 얼굴에 유일한 티끌이지.”

“…….”

“왜?”

흉터에 달라붙은 고요한 시선에 짐짓 의아함을 느낀 윤모난이 물었다. 그러자 무언가 생각하고 있다 들키기라도 한 듯이 무구원이 얼빠진 얼굴로 대답했다.

“…딱히, 흉터가 있어도 이미 완벽한 얼굴인 것… 같아서요.”

“야, 무구원.”

“네?”

“너 그런 표정 좀 안 지으면 안 돼?”

윤모난의 말에 무구원은 더듬더듬 제 얼굴로 손을 가져다 댔다. 자신이 무슨 표정을 짓고 있었는지 확인이라도 해보려는 듯이. 그 멍청한 모습에 윤모난은 쿡쿡 웃다가, 눈썹 한쪽을 위로 올리며 궁금증을 내비치는 무구원의 아래턱을 한 손으로 감싸 끌어당겼다.

“…자꾸 꼬시는 표정 짓잖아.”

대체 언제 꼬셨다는 건지. 무구원은 물을 기회도 없이 저항도 못하고 아래로 끌려갔다. 종착지에는 입술이 있었다. 부드러운 살결이 지그시 맞닿아오자 무구원의 머릿속도 텅 비어버리고 말았다. 그는 윤모난의 머리를 부드럽게 받쳤다.

“꼬신 적… 없는…데요.”

“…거짓말하지 마, 이 새끼야.”

윤모난이 맞물려 있던 입술을 떼며 핀잔을 주자 몸이 쿵, 하고 뒤로 거칠게 밀쳐졌다. 설핏 눈앞이 흐려지고 머리가 핑 돌았다. 흥분해서 그런 건지 아니면 머리를 바닥에 부딪혀서 그런 건지 모르지만. 그새 윤모난은 무구원을 제 위로 끌어당기면서 더 깊숙하게 입을 맞췄다.

주변 공기가 한낮의 아지랑이처럼 흩어졌다. 숨을 길게 나눌수록 점점 시야가 흐려지고 공기가 희박한 것처럼 몽롱해졌다. 윤모난은 심한 갈증을 느끼며 몽롱해진 정신을 밀어내기 위해 꿈틀댔다.

“…무구원?”

그 순간 무구원이 푹 고개를 수그리고 윤모난의 어깨에 머리를 박은 채 몸을 늘어트렸다. 무겁게 기대오는 몸을 힘겹게 두드리자 반응이 전혀 없다. 그제야 윤모난의 시야에 사용인이 간식으로 먹으라며 다과와 함께 가져온 차가 들어왔다.

“…아, 젠장.”

하루 더 머물기로 한 결정이 결국 화를 불러왔구나.

곧이어 윤모난도 까무룩 정신을 잃고 말았다. 그렇게 두 남자가 서로 몸을 겹친 채로 누워 있은 지 얼마 안 되어 방문이 덜컥 열렸다. 대기하고 있던 경호원 네 명이 무구원을 끌어내 침대에 올려놓고 바닥에 있는 윤모난을 들어 올렸다.

그들의 뒤에는 남경 윤씨의 가주, 윤모난의 아버지가 있었다. 그는 차가운 얼굴로 제 아들의 얼굴을 뜯어보다가 이내 경호원들에게 명령했다.

“데려가. 이 방문은 다시 잠그고. 마지막 기회일 수도 있으니 일을 그르쳐서는 안 된다.”

“네.”

남자들은 윤모난을 데리고 방을 나와 저택의 북쪽으로 향했다. 사용인들이나 가족들이 전혀 사용하지 않는 방들이 있는 곳이다. 그중에 한 방문을 열고 들어가자 안에 있던 누군가가 화들짝 놀라며 일어났다.

“너희한테 큰 거 안 바란다.”

“…….”

“아이만 가져라. 반드시 가이드여야 한다.”

“…네, 가주님.”

남경 윤씨 가주는 그 명령만을 남긴 채로 다시 방을 나섰다. 쾅. 등 뒤로 문이 닫히고 철컥하는 선득한 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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