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덫
윤모난의 아버지, 남경 윤씨를 이끄는 가주 윤화신은 유독 비범한 인물로 평가받았다. 그는 한 살 차이 나는 제 형의 몫이었던 남경의 주인 자리를 고작 11살 때부터 선망했다. 21살 먹은 윤화신의 큰형이 어느 날 자다가 급사하자 주변 사람은 물론 그의 부모마저 둘째 아들을 의심할 정도로 그 타고난 권력욕이 대단했다. 그의 나이 겨우 20살이었다. 그가 독살로 제 형을 죽였다는 소문은 공공연히 퍼진 것이었다.
형이 죽자 윤화신은 돌연 남경 지부의 치안조에 들어간 뒤, 겉으로는 권력에 관심 없는 척하며 6년간 착실히 복무했다. 그러던 중 남경에 큰 홍수가 닥쳐 민심이 흉흉해졌고, 곳곳에서 크고 작은 소요 사태가 일어났다. 윤화신은 분란을 일으킨 시민 몇 명을 잡아들여 그 아이들까지 남경역 광장에서 공개적으로 처형했다.
대대적으로 앞에 나선 그는 곧장 남경 윤씨의 곡식 창고에 쌓아두었던 구휼미를 주민들에게 지급했다. 그 일을 계기로 윤화신이 제 형을 죽인 독사라는 비난은 쏙 들어간 것이다. 그는 이듬해 아버지의 뒤를 이어 윤씨 가주가 되었고 쌍둥이 아들인 작약을 얻었다.
그러나 이제 56세의 윤화신에게 호적상의 자식은 윤모난밖에 남지 않았다. 남경의 뒤를 이을 씨를 위해서라면 그는 무엇이든 할 용의가 있었다.
자신의 아들에게 수면제를 먹여놓고 여자와 함께 밀실로 밀어 넣은 지 몇 시간 후.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간 윤화신은 여전히 정신을 잃고 너절하게 쓰러져 있는 아들을 오만하게 내려다보았다.
“…내 성질 같아선 말이지, 쓸모없는 돼지 새끼인 네 얼굴에 흠집이라도 내서 비역질 따윈 못하도록 만들고 싶구나.”
윤화신은 구둣발로 아들의 뺨을 툭툭 치면서 읊조렸다.
“넌 쓸데없이 내 얼굴만 닮았지. 다른 건 전혀 닮지 않았으면서 말이야….”
“…….”
“널 얻었을 때 얼마나 기뻤는지 모를 거다. 하지만 나날이 실망이 크구나, 아들아. 실망이 커.”
“가주님.”
그때 경호원 한 명이 문을 통과해 들어왔다. 윤화신이 제 그림자처럼 부리는 경호 집단인 ‘화사(花蛇)’들 중 하나였다.
“마무리는 어떻게 할까요? 도련님이랑 같이 온 분은요?”
“…지 애인한테 생채기라도 냈다간 이놈이 어떻게 나올지 모른다. 깨어나서 감당이 안 될 테니 가만 놔둬. 어차피 목적은 이미 이뤘다.”
“네.”
“내일 이놈 일어나면 당장 집에서 쫓아내. 특히 청연이는 못 만나게 해라. 시들어버린 놈에게 정들여봤자 애 마음에 멍에만 지지.”
작약은 져버렸고 모란은 시들었다. 그러니 윤화신은 새로운 꽃밭을 일굴 생각이었다.
그의 손자인 윤청연은 장손이기는 하지만 영 마땅치 않다. 고집스러운 것이 제 삼촌을 너무 많이 닮기도 했고 한낱 에스퍼일 뿐이니. 윤화신은 다음 남경의 주인으로 가이드를 앉힐 원대한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다섯 가문 사이에서는 암묵적인 룰이 있다. 웬만해서는 가이드를 후계자에 세우지 않는 것. 권력의 균형이 깨지는 것은 불화의 불씨가 되겠지만, 달리 말한다면 더 큰 권력을 가져다줄 도화선이었다. 그런 점에서 작약이 져버리고 모란만 남은 이때, 모두가 남경을 주시하고 있을 것이었다.
윤화신은 윤모난을 몇 년간 허울뿐인 후계자로 만들어 미끼로 쓸 생각이었다. 어차피 시든 모란에게서 미래를 기대하기는 어려우니 그 씨앗이라도 얻겠다는 속셈이었다. 만약 그가 씨가 싹을 틔울 때까지 외부의 화살을 막아줄 방패막이쯤만 된다면 쓰임새는 다하는 것이었다.
윤모난과 똑 닮은 가이드만 얻을 수 있다면. 그 아이가 무사히 자랄 때까지 제 역할을 한다면 시든 모란이라도 종종 물을 줄 생각은 있었다.
“가주님, 이번에 수집한 정보에 따르면 북해가 심상치 않다더군요. 곧 큰 장례가 있을 것 같습니다.”
“정원이 그 젊은 놈이 동분서주하고 있겠군.”
“가문 안에서 재혼 얘기가 나온다고는 하는데, 천경교 성직자들이 재혼은 안 된다고 조언했다고 합니다.”
“…역시 무씨는 따분한 족속이야. 그 고리타분한 성직자 놈들에게 결혼 문제까지 맡기다니.”
“늦기 전에 화사들을 북해로 보내시죠.”
“…….”
“무정원은 자식이라고는 아들 하나이지 않습니까. 그가 서곡에 있을 때 작은 파도를 잠재우는 게 향후 편하실 겁니다.”
윤화신은 이미 오랫동안 이런 문제들을 고심해왔다. 특히 무정원을 중심으로 한 북해 세력은 그에게 있어 가장 거슬리는 상대였다. 무정원은 군계일학이지만 그를 이을 후계가 없다면 무슨 힘을 쓸 수 있을까. 윤화신은 담배를 꺼내 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올해 안으로 북해 어장은 다 정리해야겠다. 뱀들을 풀어서 어떻게든 처리해.”
“네.”
“벌써부터 안타깝군. 아직 젊은 놈이 올해 아버지에 이어 제 자식의 장례까지 치르게 되었어.”
“…….”
“반도에서 가족을 잃는 건 다반사이지.”
윤화신도 세 아들을 잃은 건 마찬가지였다. 한 명은 정말로 죽어버렸고 한 명은 괴물이 되었으며 남은 하나는 망가졌다. 모두가 죽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는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죽은 아들의 얼굴을 눈에 담은 뒤 미련 없이 돌아서서 방을 나갔다.
* * *
“무구원!”
다음 날 아침, 무구원은 제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눈을 번쩍 떴다.
낯선 하얀 창과 벽. 무구원은 졸린 머리로 빠르게 상황을 파악했다. 여긴 남경이었고, 안범으로 위장하고 있는 자신이 본명으로 불렸다는 건 위기 상황이라는 의미였다. 그는 바로 몸을 일으켰다. 복도를 달려와 문을 박차고 뛰어든 뛰어든 윤모난의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려 있었다.
“팀장님?”
“…하.”
그는 무구원이 무사한 걸 보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비틀거렸다. 어제 수면제를 탄 차를 마시고 쓰러진 것까지는 기억나는데 일어나니 북쪽 방에 홀로 누워 있었던 윤모난은 우선 함께 온 사람의 신변부터 걱정했다. 무구원은 겉보기에 위해를 입은 흔적은 없었지만 따지고 보면 그게 더 수상한 일이었다.
자신을 둘러싼 이상한 위화감을 본능적으로 감지한 윤모난의 머릿속에는 당장 집을 나가야 한다는 생각밖에는 들지 않았다. 무구원도 무언가 심상치 않음을 깨닫고 침대에서 내려와 옷부터 바로 꿰입었다.
두 사람은 바로 방을 나와 현관으로 향했다. 그들이 뛰쳐나올 것을 예상했다는 듯 문 앞에는 화사들이 깔려 있었다. 윤모난은 망설임 없이 달려가 화사 중 한 명의 다리를 걷어차 쓰러트렸다.
“아버지는 어디 계셔?”
“…조용히 가시죠. 가주님께선 바로 집을 떠나시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 개새끼들.”
“…….”
“간밤에 무슨 짓 했는지 당장 불어.”
하지만 가주의 명령에만 따르는 화사들이 죽기 직전까지 처맞는다고 한들 곧이곧대로 대답할 리 없었다. 결국 무구원은 윤모난이 정말로 사람을 죽이기 전에 말려야 했다. 그러나 윤모난은 이미 눈이 돌아선 제정신이 아니었다. 집 안을 휘휘 돌아보던 그는 무구원을 확 밀쳐버리곤 2층으로 뛰어 올라갔다.
“청연아!”
“도련님!”
집 안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말리는 사람들을 뿌리치며 청연의 방까지 달려간 윤모난은 안에서 굳게 잠긴 아이의 방문을 발로 걷어찼다. 하릴없이 열린 방 안에는 청연이 제 어머니의 품에 안겨 울고 있었다. 윤모난은 문 앞에서 아이에게 손을 뻗었다.
“청연아.”
“삼초온….”
“이리 와.”
“…….”
“얼른. 삼촌 이제 가야 해. 안아줘야지.”
아이는 이미 한바탕 고집을 부리고 여기 감금까지 되어 있었던 탓에 우느라 기진맥진해 보였다. 그런데도 청연은 제 어머니의 손길을 밀어내고 삼촌에게로 달려가 품에 안겼다.
윤모난은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당분간, 아니면 이제는 더 이상 제 어린 조카를 안아볼 수조차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차마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얘기는 꺼내지 못했다. 아이는 이미 놀란 상태였고, 윤모난은 그를 더 울리고 싶지 않았다.
“삼촌이 서곡에 돌아가면… 뱀들을 돌려보낼게. 이제 우리 청연이가 주인이니까. 삼촌 대신 잘 보살펴줘.”
“…삼촌, 이제 가는 거예요?”
“응.”
“언제 또 와요?”
“내년에 또 올 거야. 내년이면 우리 청연이가 학교에 들어가잖아. 삼촌이 입학식에 꼭 갈게. 알았지?”
“…삼촌, 나도 데려가면 안 돼요?”
“…….”
청연은 말 없는 삼촌의 얼굴을 꼭 끌어당기더니 입술을 맞췄다. 아이의 눈에서 방울방울 떨어진 눈물로 인해 금세 뺨이 축축해졌다.
“삼촌, 그리고 저도 편지 보내면 답장받고 싶어요.”
“…그래, 그것도 꼭 할게.”
청연에게 하는 모든 말들이 거짓이었다. 조카와 삼촌 사이는 이제 멀어져야만 했다. 서로가 서로의 약점이 될 것이 분명하다. 윤모난은 이번 일로 그것을 똑똑히 알게 되었다. 하지만 청연은 이를 이해하기에는 너무 어리다. 지금은 이렇게 약속해달라 울며 매달리지만 아이가 좀 더 자라면 삼촌의 매정함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윤모난은 청연을 부서질 듯이 끌어안았다가 놓아주었다.
“형수님, 부탁드려요. 청연이까지 제 할아버지한테 휘둘리지 않게… 가문에 매이지 않도록.”
“…도련님.”
“죄송합니다.”
“가끔은 편지에 답장해주세요. 아이가… 삼촌을 너무 그리워해요.”
“…….”
“아버지 얼굴을 제대로 본 것도 손에 꼽는 아이예요. 아시잖아요.”
윤모난은 꾸벅 묵례하곤 돌아서서 방을 나왔다. 아이가 몇 번 더 뒤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걸음은 한 번도 멈추지 않았다.
다시 1층으로 내려온 윤모난은 무구원을 끌어당겨 곧바로 대문으로 향했다. 대기해 있던 차를 지나쳤으나 둘을 잡는 사람은 없었다. 문은 기다렸다는 듯이 열렸고, 윤모난은 자신의 집에서 뱉어내지듯 쫓겨났다.
“…….”
방금 전까지 집 안을 뒤집어놓을 기세였던 윤모난은 밖으로 나와 길을 따라 걸으면서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한 걸음 뒤에서 걷고 있던 무구원은 얼마 전에도 윤모난의 등 뒤에서 이렇게 걸었던 어느 날을 생각했다. 그때와 마찬가지로 그는 화를 내는 것도 우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무너지기 직전일 뿐.
윤모난은 너무 많이 할퀴어져 생채기에서 피를 뚝뚝 흘리고 있었다. 마치 다리가 덫에 걸린 지 너무 오래되어 체념한 들짐승처럼. 문득 무구원은 한백호에게 윤모난을 살려달라고 한 선택을 후회했다. 그는 이곳에 있을 사람이 아니다. 무간으로 가 자신의 형들 옆에 있는 편이 그의 안식을 위한 것이었다. 연민의 감정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그렇게 생각했을 거다.
하지만 무구원은 동시에 떠올렸다. 그의 방 창가에 늘어선 사진 속에서 활짝 웃고 있던 윤모난을.
“팀장님.”
완전히 망가진 남자를 눈앞에 두고 그 미소를 떠올리다니 스스로 생각해도 이기적이었다. 그런데도 무구원은 그 소년 같은 미소가 조금 더 이어지기를 바랐다. 지난밤 윤모난이 평범한 대화에 웃었듯이, 조각난 윤모난의 과거 편린들이 슬며시 자신을 향할 때마다 그 순간이 계속되었으면 했다.
무구원은 자신이 오래도록 오늘을 기억하게 될 것임을 깨달았다. 그는 시간에 큰 의미를 두는 사람이었기에. 그러므로 용기 내어 윤모난을 불렀다. 윤모난이 순순히 뒤를 돌아보자, 무구원은 손을 뻗어 그 메마른 눈가를 닦았다.
“울지 마세요.”
당연히 닦아낼 눈물은 없었다. 윤모난은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
윤모난은 능청스레 그 말을 받아넘기는 것 대신 그를 지탱해온 것들에 대해 생각했다.
지옥 같은 삶에서 가끔 떠오르는 것들. 이를테면 조카 청연이 달려와 안길 때의 감촉. 팀원들이 성장해가는 모습을 볼 때 남몰래 느끼는 뿌듯함. 한밤중 숙소에 앉아 이런저런 얘기를 떠들 때 느끼는 편안함. 그리고 무구원이 엉뚱하게 굴 때 참지 못하고 튀어나오는 웃음. 오늘도 이런 사소함은 그를 현실로 끌어당기고 있었다.
“가자. 서곡으로.”
“네.”
남경역에서 서곡으로 가는 기차는 하루에 한 번밖에 없었다. 오후 3시 서곡행 기차를 기다리면서 윤모난은 근처 술집에 들러 독한 술을 연거푸 들이켰다. 냄새만 맡아도 취할 것 같은 도수 높은 술을 두 병째 비우고 나서야 그는 겨우 자리에서 일어섰다.
부축할 정도는 아니라지만 비틀거리며 기차에 올라탄 윤모난은 다른 사람에게 방해받고 싶지 않다며 검표 직원에게 일등석 칸의 4인 푯값을 몽땅 지불했다. 객실 미닫이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멀뚱하게 서 있던 무구원의 목덜미가 확 끌어당겨졌다. 기차는 아직 출발하지도 않은 때였다. 윤모난은 무구원의 목에 두 손을 걸고 나지막이 속삭였다.
“문 잠가.”
약간 늘어진 목소리가 명령을 늘어놓는다. 무구원은 문에 잠금 고리를 채우고 커튼을 쳐서 방 안을 외부와 완전히 차단했다. 아무런 거리낌도 두려움도 없이 명령을 따르는 그를 보며 윤모난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그렇게 서로를 말없이 보고 있는 사이에 덜컹거리면서 기차가 출발했다.
차가 움직이자 중심을 잃은 윤모난이 좌석 위로 풀썩 쓰러졌다. 그 김에 목덜미가 잡힌 무구원은 그의 허벅지 옆에 무릎을 걸치면서 몸을 숙이게 되었다. 무구원이 자연스레 고개를 숙이자 윤모난이 턱을 들어 입을 맞췄다.
이미 입은 여태껏 아쉽지 않을 만큼 맞대었다. 윤모난은 이로 입술 안 점막을 심술궂게 할퀴면서 보기와는 달리 부드러운 무구원의 뺨을 손으로 감싸 자신에게서 떨어트렸다.
“무구원, 너 나 불쌍하다고 생각하고 있지?”
“…….”
“그럼 네가 나 좀 위로해줘라.”
그 말에 무구원의 단정한 얼굴 위로 망설임이 스치고 지나갔다. 한참을 머뭇거린 끝에 무구원이 무언가 고백하듯이 털어놓았다.
“솔직히… 저번에 하신 말씀은 자신 없습니다.”
“뭐? 아…. 나한테 박힐 준비 되었냐고?”
“…혹시 반대도 선택지에 있습니까?”
허점을 훅 치고 들어오는 물음에 윤모난은 육성으로 엑, 하는 소리를 뱉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 협박은 무구원을 겁주려고 한 소리였으니 사실 윤모난에게 위치는 그다지 상관없었다. 섹스 초보 무구원의 입장을 생각하면…. 수컷으로 태어나 박는 쪽이 진화상 유리할 테니 양보하는 것이 도리겠지. 게다가 그 이후로 이 문제에 골몰했을 무구원을 생각하니 안쓰러운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윤모난은 완벽에 대한 강박이 있었다. 그건 섹스라고 해도 예외는 아니었다. 초짜인 무구원과 공공장소에서 일을 시도하는 건 완벽한 순간으로 이르는 데 적절하지 않았다. 이것도 엄연히 훈련이 필요한 일이고, 윤모난은 이런 방면에서 초심자를 훌륭하게 지도하는 데엔 도가 트여 있었다.
“좋아. 그런데 여긴 안 돼. 난 소리를 참는 편이 아니라서. 지금은 알딸딸하기도 하고.”
무구원이 잠긴 문을 슬쩍 보았다. 객실은 완전 방음이라 하기에는 무리가 있었고, 서곡행 열차는 공무원들이나 센터 소속 대원들로 항상 가득하니 당장 옆 칸에 아는 얼굴이 탔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었다. 만약 소리가 새어 나가 들키기라도 한다면 큰 망신이었다.
그때 윤모난이 무구원의 턱을 다시 제게로 끌어당기며 물었다.
“방법은 많아. 제안해도 될까?”
윤모난은 좌석 끝에 걸터앉으며 무구원을 바닥으로 툭 밀었다.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하는 독단적인 행동이 이미 제안이라기엔 어폐가 있었다. 그는 짙은 검은색 머리를 제 무릎이 있는 곳으로 밀어 넣은 뒤 그 날카로운 얼굴선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내가 양보할 가치가 있는지 증명해봐.”
“어떻게 말입니까?”
윤모난은 대답 대신 제 하반신을 고갯짓으로 가리켰다. 이 일에 관해서는 이미 설명한 바 있었다. 그는 충격으로 물든 무구원의 얼굴을 제 무릎 안쪽으로 바짝 당기고선 손가락을 뻗어 평소 아름답다고 생각했던 남자의 입술 사이를 파고들었다.
손가락이 입안을 부드럽게 헤집은 탓에 혀 아래로 촉촉하고 뜨끈한 침이 금방 고이기 시작했다. 무구원은 이 행동이 의미하는 바를 단번에 알아차렸다.
“할 수 있겠어?”
잠깐 머뭇거리던 무구원은 이내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어떻게 하는지 모릅니다.”
싫다는 게 아닌 모른다는 대답에 윤모난은 기가 찬 표정으로 웃었다. 이걸 어디서부터 어떻게 가르쳐야 할까. 방법도 모르는 놈의 입에 강제로 좆을 쑤셔 넣는 취미는 없었다. 조금 고민하던 윤모난은 몸을 일으켜 바닥에 꿇어앉은 무구원을 좌석에 도로 앉혔다. 그리곤 허벅지 사이로 자리를 잡으니 두 사람의 위치가 정반대로 바뀌었다.
윤모난은 총을 해체할 때처럼 빠르게 무구원의 코트 허리띠를 풀어 헤치고 바지 버클을 잡아당겼다.
“팀장님? 뭐… 하십니까?”
“쉿. 가르쳐줄게.”
지퍼를 내리고 안에 있던 검은색 브리프의 밴딩 부분을 끌어 내리려 하는 손끝을 무구원의 손이 가로막는다. 윤모난은 인상을 살짝 찌푸리며 물었다.
“싫어?”
“그게 아니라… 이건 너무 더러울 것 같습니다.”
“아, 걱정 마. 원래 섹스는 더러울수록 즐겁거든.”
“…지금은 제가 위로해드려야 하는 거 아닙니까?”
“그래, 그러니까 한 번에 잘 배워서 앞으로 날 많이 위로하라고.”
무구원은 낯선 여행지에서 길을 잃은 사람처럼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윤모난은 그의 손을 떼어내고 속옷 안으로 제 손을 쑥 집어넣었다. 안에 든 살덩이는 이미 딱딱해서 주무를 것조차 없었다. 우리 십자는 아다답게 발딱발딱 세우기도 잘하지. 윤모난은 제 입술을 혀로 핥아 적시면서 긴장해서 굳은 무구원에게 물었다.
“무구원, 나랑 여기 들어와서 저 문을 잠그고 커튼 칠 때 어디까지 예상했어?”
“…뭘… 말입니까?”
“네가 어디까지 타락할 거라 예상했느냐고?”
말과 함께 손으로 살덩이를 쥐자 무구원이 펄쩍 뛰며 몸을 물렸다. 윤모난이 다른 팔로 몸을 바싹 가두는 통에 도망칠 퇴로는 사라져버렸다. 하는 수 없이 무구원은 자신의 은밀한 곳을 침범한 손의 거센 악력에 움찔대며 대답했다.
“…전에 예상하던 것보다 한참 더요.”
“알았어.”
마침내 만족할 만한 대답이 나왔다. 윤모난은 손을 움직여 쥐고 있던 것을 속옷 밖으로 끄집어냈다. 두 사람 모두 옷을 입고 있는 상태에서 무구원은 아랫도리만 덜렁 내놓은 꼴이 되었다. 몰려드는 수치심을 감당하지 못한 무구원은 차라리 눈을 감기를 선택했다.
한편 윤모난은 호기롭게 나서긴 했으나 역시 미세한 두려움을 느꼈다. 지난번 옷 위로 슬쩍 가늠했던 것의 크기는 실제로 눈앞에 두고 보니 실로 위압적이었다. 그냥 입에 넣었다간 입가가 찢어질지도 모른다.
함께 타락하는 것 정도는 예상했지만, 부상까지는 미처 준비하지 못했던 윤모난은 슬슬 앞으로의 시간들이 걱정스러워졌다.
이런 흉기로 남을 쑤실 생각을 하다니 무구원 이놈은 양심도 없지. 입안에 고인 타액을 윤활제 삼아 윤모난은 뾰족한 혀로 기둥을 쓱 핥았다. 뜨거운 혀가 성기의 끝부터 끝까지 쓱 훑어 올렸다.
“읏…!”
생전 처음 느끼는 감각에 놀란 무구원은 눈을 번쩍 뜨고 말았다. 그리고 그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더욱더 원색적이고 적나라한 광경이었다. 윤모난의 흰 대리석 같은 얼굴에 붉고 파란 핏줄이 바짝 선 성기가 붙었다가 떨어지며, 그의 뺨과 턱선을 따라 불투명한 액체가 거미줄처럼 늘어졌다.
피부에 닿는 느낌보다도 그 시각적인 자극이 이루 말할 수 없이 노골적이어서 무구원은 차마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이미 습기를 더해 찰기를 머금은 성기는 물을 먹인 몽둥이 같아서, 이걸로 저 하얀 얼굴을 때리면 그대로 생채기가 날 것 같았다. 이런 가학적인 충동을 느낀 건 난생처음이었다.
무구원의 머릿속에서 어떤 폭력이 펼쳐지는지 상상하지도 못한 윤모난은 턱을 벌려 귀두 끝을 머금었다.
“아! 어머…ㄴㅣ”
뜨끈하고 축축한 점막이 성기를 감싸는 적나라한 감각에 휘말린 무구원의 입에서 나오면 안 될 말이 튀어 나갈 뻔했다가 겨우 삼켜졌다. 이런 일에 능수능란한 윤모난은 혀로 부드럽게 선단의 오목진 곳을 휘감으며 성기를 빨아들였다. 혀가 운동할 때마다 목구멍 안에서 계속해서 뜨거운 침이 흘러나와 입에 닿은 접합부가 금방 뜨거워진다.
“으읏… 팀장…님!”
“움?”
무구원이 못 참고 부르자 윤모난이 입 한가득 살덩이를 문 채로 눈을 치켜뜨며 응답했다. 하지만 그건 뭔가를 요구하기 위한 부름이 아니라, 신음이나 다름없는 소리였다. 이어서 윤모난의 볼이 푹 꺼지더니 입 안쪽에서 압력이 느껴졌다. 찰싹 달라붙으며 압박되는 그 느낌에 무구원은 저항하듯이 분홍 머리를 끄집어 당겼다.
앞머리가 꺼들려 매끈하게 드러난 윤모난의 이마가 앞뒤로 움직일 때마다 아래에서는 물기 어린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의 턱이 커다란 성기의 크기를 감당하지 못해 약간 경련하듯이 뻣뻣해졌다. 무구원이 손잡이처럼 제 머리채를 잡고 있는 사이 윤모난은 그의 두 무릎을 손으로 짚으며 상체를 들썩였다.
“아―! 잠깐….”
머리칼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갈수록 윤모난은 더 집요하게 굴었다. 성기 뿌리 깊숙한 곳까지 삼키며 흡입하는 솜씨가 난잡했다. 좆이 식도를 꽉 채웠다가 목젖을 긁으면서 왕복운동을 할 땐 컥컥 소리를 냈다.
어느새 안에 고였던 침들이 마찰을 이기지 못하고 입가와 뿌리를 타고 줄줄 흐르고 있었다. 윤모난은 숨이 막혀도 폐부에 압박이 심해지고 나서야 물었던 것을 놓았다. 마치 성기로 질식사라도 시도하려는지 그는 고통을 유도하는 식으로 펠라를 이어갔다.
그 행위에 오히려 놀란 건 처음 느껴보는 쾌감에 달떠 정신을 못 차리고 있던 무구원이었다. 숨이 막혀 빨갛게 달아오른 윤모난의 얼굴을 보고 당황한 무구원은 그의 입에서 살덩이를 곧바로 잡아 뺐다.
“쿨럭, 왜? 아직 안 쌌잖아.”
“…아니,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뭐 하긴, 크흠, 물건 내놓고 이제 와서 그건 왜 물어.”
“힘들면 그만하시죠.”
“이거 웃기는 놈이네.”
윤모난은 얼얼한 턱을 문지르며 입을 좌우로 이리저리 움직였다. 이빨을 약간 세워 선단 끝을 건드리고 작은 구멍에 혀를 집요하게 문질렀다. 뾰족한 혀끝이 요도구를 날름 핥자 순간 찌릿한 감각에 무구원이 놀라 입술을 깨물었다. 무릎 아래서 윤모난이 비시시 웃었다.
“불만 없으면 마저 한다.”
“아…. 잠깐. 아윽…!”
무구원이 말리건 말건 윤모난은 커다란 알사탕을 혀로 굴리듯이 귀두 끝을 감싸고 빨아들이다 성기를 다시 반쯤 입에 담았다. 턱이 조금 아프긴 해서 한 손으로 습기 찬 표면을 감싸 쥐어 운동하며 동시에 자극을 줬다. 손과 입이 합세해서 성감을 자극하자 무구원의 아랫배가 금방 묵직해졌다.
무구원은 이런 상황에서도 이상하게 상하관계를 생각하면 제 팀장의 입안에다가 사정하는 것만큼은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쓰잘데기 없는 상상과 잡념마저도 윤모난이 뜨거운 입으로 바짝 조여오자 연기처럼 흩어져버렸지만.
윤모난의 얼굴은 이미 용량을 초과하는 크기를 가득 담아 볼 바깥쪽으로 살이 늘어졌다 수축하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그 광경이 기괴하면서도 자극적이었다.
“읏…. 아…하 아….”
무구원의 숨이 점점 거칠고 불규칙해지기 시작했다. 윤모난에게 성욕의 고삐를 완전히 쥐여준 이후로, 그는 하반신부터 피어오르는 아찔한 쾌감에 속절없이 빠져들었다. 순간 번쩍이는 섬광 같은 것이 스치는 듯하자 무구원은 눈을 질끈 감았다. 긴장하느라 흘린 땀이 그의 날카로운 코끝을 스치고 뚝, 하고 떨어져 윤모난의 눈가에 맺혔다.
윤모난의 속눈썹에 엉겼던 땀방울이 광대의 곡선을 따라 주르륵 흐르는 광경을 보며 무구원은 그의 목 깊숙한 곳에 사정했다. 꿀럭거리며 터진 정액이 목구멍 깊은 곳을 치받는 기분을 느끼며 윤모난은 무릎을 잡은 손에 바짝 힘을 줬다. 디저트를 놓칠 수는 없었다. 솔직히 디저트라기에 정액은 달기보다 역겹지만.
윤모난은 목구멍에 꽤 많은 양의 정액이 넘어올 때 느껴지는 본능적인 구역감을 참으며 천천히 그걸 받아 삼켰다. 그러자 빠르게 정신을 차린 무구원이 경악하는 표정으로 얼른 얼굴을 잡아 끌어당겼다.
“진짜 삼키셨습니까?”
“응.”
윤모난은 입을 벌려 확인까지 시켜줬다. 그의 입가는 희뿌옇고 번들거리는 흔적이 뒤섞여 엉망이었다. 붉은 혀가 그 흔적까지 쓱 핥았다.
“뱉으시지, 그걸 왜….”
“내 맘이지.”
윤모난은 얼얼해진 턱을 무구원의 무릎에 꾹꾹 비비다가 그의 바지에 입술을 짓이기며 닦았다. 손수건 대신에 제 바지에 흔적을 남기며 얼굴을 비비는 그를 내려다보던 무구원은 그만 아연해졌다. 그사이 윤모난은 슬며시 기어 올라와 무구원의 허벅지에 올라탔다.
“내가 정말 널 따먹어버렸구나.”
윤모난은 장난처럼 무구원의 상기된 뺨에 쪽 입을 맞춘 다음 허벅지에서 내려가려 했다. 그러나 순간 몸이 옆으로 홱 기울었다. 무언가가 퍽, 하고 부딪혀오더니 명치에서 통증이 인다. 미간을 찡그린 윤모난은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뭘 하나 했는데, 무구원이 자신을 꽉 끌어안고 두 팔로 죄고 있었다.
“뭐 해?”
“…그냥.”
“설마 나 위로하는 거냐?”
“네.”
옷깃에 묻힌 낮은 목소리가 이 뜬금없는 행위의 목적을 알려주었다. 그 순간 윤모난에게서 허탈한 웃음이 터졌다.
“애야?”
“아니요.”
좀 전의 난잡한 구강성교를 오래전 일처럼 만들어버리는 아이처럼 순수한 포옹이었다. 무구원이 가슴 부근에 뜨거운 숨을 뱉자, 윤모난은 지레 머쓱해졌다. 술기운과 열로 머리가 핑 돌아 몸의 힘도 슬슬 빠지고 있었다.
“무구원. 너 지금 내 냄새 맡고 있지?”
“…….”
황당한 놈. 윤모난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슬며시 죄책감이 든 것도 사실이다. 방금 전의 행동에는 저 자신의 이기적인 의도가 섞여 있었기 때문이다. 윤모난은 남경에서의 일로 무구원에게 자신의 약점을 들긴 것이 내심 싫었다. 남에게 자신을 파고들 빌미를 주는 것만 같아서.
그를 취약한 상태로 몰아가 일그러진 얼굴이나 감상하면 기분이 조금 나아질 것 같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의 나약함을 어느 정도 상쇄하려고 했다. 윤모난이 원한 것은 그런 식의 악의적인 위로였다.
“…염병.”
그런데 위로랍시고 온 힘을 다해 끌어안고 있는 무구원을 보니 뒤늦게 묘한 후회가 밀려왔다. 윤모난은 무구원의 검은 머리카락을 내려다보며 혀를 찼다. 건드리지 말 걸 그랬나. 바보 같은 놈. 그러니까 동정할 사람을 동정했어야지.
“이거 놔.”
윤모난은 이성을 발휘해 무구원을 제게서 떨어트렸다. 말투가 뾰족해진 것을 느낀 상대는 말없이 떨어져 나갔다. 다시금 바라본 무구원의 얼굴은 뭐랄까. 참으로 단정하고 담백했다.
상식적인 표현들이 거세된 무구원의 얼굴을 보며 윤모난은 반복해 다짐했다. 오늘 일이 감정적으로 흘러가는 건 절대 안 된다고. 섹스는 섹스로 끝나야 한다.
* * *
서곡역에 도착하자 벌써 오후 늦은 시각이었다. 윤모난은 턱을 딱딱거리며 인상을 쓸 뿐, 내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센터에 가자마자 해결해야 할 일이 산더미였다. 최우선으로는 한백호와의 일전이 예고되어 있었다.
“십자, 당신은 먼저 합숙소로 돌아가. 난 바로 감찰부로 가야 하니까.”
“한백호와 대면하러 가시는 거면… 저도….”
“그쪽에서 팀장만 불렀으니까 나만 가야지. 들어가서 쉬어, 피곤할 텐데.”
“…네, 알겠습니다.”
무구원은 깍듯이 인사를 하면서 가타부타 말도 없이 합숙소로 가는 길로 사라졌다. 윤모난은 착잡한 한숨을 내쉬다가 사무동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예상대로 서곡에 도착하자마자 감찰부에서 귀신같이 호출이 왔다. 아마도 한백호가 가만히 있지만은 않았던 모양이다. 시간에 맞춰 사무동 건물에 들어서자 1층에서 껄렁대는 자세로 한백호가 기다리고 있었다.
“어이, 핑키.”
“잘 계셨어요?”
“시팔, 어디 박혀 있다가 나타난 거냐?”
“휴가 다녀왔는데요.”
한백호는 이를 갈다가 옆에 있던 화분을 툭 걷어찼다. 바로 주먹을 날리고 싶은데 겨우 참는 눈치였다. 임무의 성패와는 상관없이 누군가 자신을 물 먹였다는 사실 자체를 견디지 못하는 성격이니.
“정신보호센터에서 3년이면…, 고분고분해질 만도 한데…, 넌 참 쉽지가 않다.”
“…….”
“그렇게 매사 나대고 싶어서 못 견디겠으면 약이나 처먹어, 약. 착해지는 약 많잖아?”
귓가에서 쌔근거리는 목소리에는 비웃음과 광기, 분노가 뒤섞여 있었다. 윤모난은 고개만 쓰윽 돌려 소리 없이 웃었다.
“착해지는 게 어디 쉽나요.”
“약이 효과가 있어. 도와줄 테니 언제든 말해라. 너 고분고분하게 만드는 일이라면 기꺼이 나설 거니까.”
“아직은 제가 받아둔 양이 충분해서.”
두 사람은 시비를 두어 번 주고받곤 이내 떨어졌다. 사무동 로비에 있는 사람들이 흘끔거리며 한 번씩 시선을 던지고 있는 데다가 그들은 정해진 시간까지 감찰부로 가야 했다.
서곡센터 사무동은 서곡 지부장 아래 관리직 공무원들이 근무하는 곳이다. 주로 서곡에서 일하는 대원들을 관리, 감시, 지휘하는 역할을 한다. 현재 서곡센터의 지부장은 서강 주씨 중 한 명이 맡고 있는데, 바로 윤모난이 몸 로비의 대상으로 고려했던 할배였다. 물론 이 일은 몸 로비로 해결할 수 있는 사항은 아니다.
기러기들이 관련되어 있으니 위에서 어떻게 나올지 전혀 예상조차 할 수 없었다. 관리직들은 현 지부장에 충성하는 개들인데다 서강 주씨 출신들이 대부분이니 감찰부의 반응이 곧 서강 주씨의 뜻일 터였다.
4층 감찰부에 도착하자, 비서 한 명이 대기하고 있었다.
“전투조 2부 7팀 윤모난 팀장, 치안조 1부 3팀 한백호 팀장 맞습니까?”
“네.”
“402호 방으로 들어가시죠.”
안내에 따라 방 안으로 들어가자, 감찰부에서 나온 관리자 두 명과 서기 한 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여기서 중요한 인물은 바로 감찰부를 총괄하는 부장이었다. 방 안에 들어선 윤모난과 한백호는 그녀를 향해 일제히 경례를 했다.
“그래요.”
감찰부를 이끄는 부장 주현희. 남녀의 근무 장소가 엄격히 나뉘어 있는 서곡에서 그녀를 만난다는 건 그다지 기꺼운 일이 아니었다. 서른 중반의 부장 주현희는 서강 주씨 가주의 셋째 딸로, 모계를 중심으로 가계도가 정립된 주씨들 집안에서도 가장 냉철하기로 정평이 난 인물이었다.
짧은 단발머리를 귀 뒤로 넘기며 서류를 면밀히 살피던 주현희가 턱 끝으로 앉으라 지시했다.
“대충 상황 파악은 했습니다. 한백호 팀장, 이번 작전의 지휘관 맞습니까?”
“네.”
“윤모난 팀장은 팀원 무구원과 함께 지원 인력이구요?”
“네.”
“고발 내용이 뭡니까? 현장에서 지휘관에게 항명하고 근무지를 이탈했다고 하던데요.”
주현희는 이미 내용을 다 파악하고 있으면서도 펜대를 잡으며 재차 물었다. 윤모난이 대답했다.
“치안조 한백호 팀장의 명령대로 수도 제18구 공동 거주지 건물을 조사하던 와중에 신원 불명의 범인들과 맞닥뜨렸습니다. 추적 끝에 현장에서 범인 두 명 모두 사살 완료했습니다.”
“범인들은 어쩌다 추적하게 된 거죠?”
“공동 거주지에서 트랜스 파동이 잘 느껴지지 않아서 수상하게 여기고 탐문 중에 ‘우연히’ 마주쳤습니다.”
“무슨 근거로 그들을 수상하다고 판단한 겁니까?”
“지하에 트랜스를 숨겨두고 어디론가 이동시키려는 현장을 적발했습니다. 트랜스들은 모두 치안조에서 쫓던 거주민들이었구요.”
“…음.”
“범인은 두 명, 모두 포스트였습니다. 각각 염동력자와 가이드였죠.”
“현장에서 수거한 범인의 시신을 보니 두 사람 다 기관 데이터에는 없더군요. 혹시 짚이는 게 있습니까?”
“에스퍼 쪽은 그럴 수 있다고 쳐도 가이드가 등록되지 않았다는 것이 수상하다면 수상하겠죠.”
그 순간 주현희는 종이에 무언가를 적어 내려가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윤모난 팀장, 복귀한 지 두 달밖에 안 되었네요. 3년이나 건강 때문에 휴직했다고 들었습니다.”
“네.”
“혹시 당신의 병력이 이번 임무에 방해된 것은 없습니까?”
“그게 무슨 소리이시죠?”
“…당신이 현장에서 바로 사살한 그 가이드. 한백호 팀장이 살렸으니 데려와 심문하는 것이 마땅한데 마치 보복하듯이 사살했다죠. 목에 자상을 입혔다고 하던데요. 아닙니까?”
“…….”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와 우울증을 병력으로 가지고 있던데, 이 정도면 현장에서 판단력에 실수가 있었다는 게 합리적인 추론이 아닐까요?”
정신병 얘기는 예상치 못한 주제였다. 정신병자라는 걸 몇 번이고 확인받으려는 태도가 약간 거슬리긴 했지만, 어쩌면 그건 이 껄끄러운 상황에서 빠져나갈 황금 동아줄일지 몰랐다. 주현희는 지금 그에게 일부러 여지를 만들어주고 있었다. 방금도 ‘실수’라는 말을 강조하지 않았나.
“…생각해보니 그렇네요. 제가 과했습니다.”
윤모난으로서는 받아들이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녀의 의도가 무엇이건 간에 현재로선 그게 최선이었다.
“현장에서 불안정한 상태로 인해 저지른 규정에 어긋난 행동으로 작전을 방해한 것을 인정한다는 말인가요?”
“네, 그런데 방해라는 말은 너무 과한 듯합니다. 본의 아니게 지장을 주게 되어 대단히 송구함. … 뭐, 이 정도로 써주시죠.”
“…지금 뭐 하는 겁니까?”
대화의 흐름이 이상하게 흘러가자, 옆에 있던 한백호가 인상을 구기며 나섰다.
“어제 이야기한 내용과 다르지 않습니까! 무구원, 윤모난 이 두 놈이 분명 숨기는 게 있다고 제가….”
“한백호 팀장?”
“…….”
“본인 질문에만 답변하세요. 여긴 감찰부입니다.”
주현희 부장이 얇은 눈썹을 찡그리더니 냉랭하게 말했다. 그러자 약쟁이 한백호마저 바로 입을 다물었다. 이미 결론은 정해져 있음을 여기 있는 모두가 알고 있었다.
“윤모난 팀장은 본인의 규정 위반 행위를 인정하여 감봉 6개월, 같은 팀원인 무구원은 감봉 3개월 징계 조치하겠습니다. 또 이번 작전의 지휘자인 한백호 팀장이 제기한 군법 재판 회부는 별다른 혐의점이 없는 관계로 무효입니다.”
“…시발.”
“한백호 팀장, 말조심하지? 여기가 격 떨어지게 육두문자 남발할 곳으로 보여?”
주현희의 경고에도 한백호는 성질대로 의자를 쾅 걷어차더니 감찰실을 먼저 나가버렸다. 그런 한백호의 뒷모습을 보던 주현희가 혀를 끌끌 찼다.
“담배 가진 거 있어요?”
“여기요.”
대체 무슨 속셈이지. 윤모난은 마음속 한구석이 찜찜하면서도 순순히 주머니 속에 있던 담뱃갑과 라이터를 꺼내 내밀었다. 그 안에 함께 들어 있던 공동 거주지에서 수거한 은색 큐브의 차가운 표면이 피부 위를 언뜻 스치고 지나갔다.
투시 능력자인 주현희는 상대방의 주머니 속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담배를 입에 물었다. 불을 붙이고 잠시 후 그녀는 감찰부 직원들을 바깥으로 잠깐 내보냈다. 곧이어 그녀의 입매가 비틀리더니 잇새에서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윤모난 씨?”
“네.”
“그 주머니에 있는 거. 감당 못할 것 같으면 지금 나한테 내놓는 게 좋을 텐데요.”
주현희는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듯한 눈으로 윤모난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얼굴에서는 어떠한 생각도 읽히지 않았다. 이 일을 대충 적당한 선에서 무마해준 것은 고맙지만, 그 속내를 밝히지 않으니 굳이 응할 이유가 없었다.
“제 주머니 안은 제 소관이니 알아서 하겠습니다.”
“…그거 알아요? 남경 윤씨와 서강 주씨는 역사적으로 한 번도 각을 세운 적이 없다는 거. 기러기와 독사들은 항상 정치적 동반자였죠.”
“이 일에 과연 가문을 들먹이는 게 맞을까요?”
“이봐요, 지금 당신이 안 잘리고 거기 있는 건 다 가문 덕분이 아닌가? 당신이 윤씨라서 군법 재판에 안 간 거라구요. 그런데 가문을 들먹이는 게 맞냐는 소리가 나와요? 남경의 막내 도련님께서 병원 신세를 너무 오래 진 탓에 세상 돌아가는 일에 둔해지셨나?”
“…….”
“윤모난 씨, 괜히 지금까지 사이좋던 분위기 깨지 말고 알아서 잘 행동해요.”
주현희는 반쯤 태운 담배를 바로 앞 책상에 비벼 끄더니, 허공에 연기를 후, 하고 뿜어댔다.
“아쉽네요. 당신 형들은 당신만큼 둔하지는 않았는데 말이지.”
“…….”
“작약은 이해하고 있었죠. 기러기와 독사들이 상부상조하는 관계라는 것을.”
독사는 날개가 없고 기러기는 독이 없다. 그녀의 말마따나 남경과 서강은 역사적으로 꽤 오랫동안 상부상조하는 관계였다. 그런 점에서 서로의 치부는 가려주는 것이 상도덕에 맞는 일일 것이다. 주머니에 든 그 큐브의 의미가 정확히 무엇인지는 몰라도, 주현희의 말은 이것이 서강 주씨와 깊게 관련되어 있음을 암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더 이상의 추궁은 이어지지 않았다. 주현희는 그저 알아서 잘하라는 눈빛을 주더니 이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고리를 잡은 그녀는 읊조리듯 작게 한마디 던졌다.
“형들이 동생을 너무 아낀 탓에 삼 형제에게 모두 독이 되었어.”
이내 문이 닫히고 방 안에는 윤모난 혼자만이 남았다. 그는 타인에게 형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뒤늦게 바보가 된 기분이 들었다. 사랑하는 가족이었지만 그들을 완벽하게 알지 못했다는 깨달음 때문이다. 기억 속 작약의 일면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조각나기만 했다.
동생은 한때 모든 것을 형들과 공유하고 싶었다. 좋은 일뿐만 아니라 추악하고 힘든 일까지도. 하지만 형들은 그저 동생에게 가문에 매이지 말라 할 뿐이었다.
* * *
남경에 다녀오고 한 달이 지났다. 훈련이 궤도에 오르고 점차 날은 완연한 봄에 접어들고 있었다. 그즈음 2부 7팀의 화두는 안범의 첫 무간 견학이었다. 원래 서곡센터에 들어오는 신입들은 팀 훈련 외에 단체로 합동 훈련을 하는데, 견학을 목적으로 이즈음에 무간으로 가게 된다.
당연히 안범은 가기 싫었다. 훈련도 임무 중 하나이므로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지만, 사악한 선배들의 악의적인 농담이 그의 새가슴에 제대로 직격탄을 놓은 것이다. 안범의 무간 견학을 알자마자 경해국이 처음 뱉은 소리가 시작이었다.
“찌찌 애비 저놈 저거, 무간에 간다는 말 듣고 새벽에 얼마나 울어대는지, 열받아서 미쳐 돌아버리겠네. 뒈지면 좀 조용해질 텐데.”
“으허허헝… 경 선배님… 말이… 너무 심하잖아요.”
“하긴. 찌찌 애비는 무간에 처음 가는 건데 벌써 죽으면 괜히 찝찝하긴 하지.”
“네? 죽다니요.”
“아… 그 신입 단체 견학에서 말이지. 꼭 한두 명씩은 죽거나 실종되더라고.”
무구원도 평연한 얼굴로 합세했다.
“신입 때 내 동기 한 명도 실종됐었지. 착한 놈이었는데. 눈물이 너무 많았어.”
“어, 어 맞아. 나도 기억하지. 안범을 보니 그 녀석 얼굴이 떠오르더라.”
“으흐흑….”
안범은 그 이후로 줄곧 눈물 바람이었다. 그리고 그건 내내 이어져 무간 견학을 하루 앞둔 날까지 오게 되었는데, 기어코 일이 터지고야 말았다.
무구원과 경해국은 오후 일과가 끝나자마자 젖은 빨래처럼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는 안범을 끌고서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
“찌찌 애비 너 이 새끼! 팀 망신 그만 시키고 눈물 안 그쳐!”
“…으흑….”
“야, 무씨. 이 새끼 나무에 묶어. 죽어라 패고 기절시켜서 내일 실어 보내자.”
무구원, 경해국 두 사람은 자율 훈련을 하러 팀 훈련실로 가던 중에, 한창 교육을 받고 있어야 할 안범이 탈의실에 숨어 훌쩍거리며 우는 것을 발견했다. 당장 내일 출정인데 언제부터 이러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단체 훈련에서 도망쳤다는 걸 윤 팀장이 알게 되면 가만 안 있을 터였다. 그 성질을 아는지라 둘은 화가 나면서도 일단 안범을 끌어내 다시 신입 훈련장에 집어넣으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윤모난은 정말 팀 훈련실에 도청 장치를 설치했는지, 가는 길 중앙에 갑자기 나타나서 팀원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손에 들려 있는 바구니를 보건대 빨래를 하러 세탁실에 가던 중 갑자기 길을 틀어 다른 건물이 있는 이곳까지 온 것 같았다.
“…안범 씨?”
“…….”
“야, 무릎 꿇어. 이 빡대가리야.”
경해국은 무조건 안범에게 빌라고 할 셈이었다. 팀장은 안범이 징징거리는 것을 벌써 몇 주째 참아주고 있었고, 그 정도 시간이면 하해와 같은 인내심도 고갈 나기에는 충분했다. 윤모난이 빨래 바구니를 들고 그들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왔다.
“저 팀장님… 다시 안범을 훈련장에 보내려던 참입니다. 참으시죠.”
“…….”
무구원이 끼어들어 한마디 거드는 사이, 안범은 아스팔트 위에 쓰러져 끅끅거리며 눈물을 쏟아냈다. 모두가 그 참담한 광경을 보며 딱 한 가지 생각을 했다.
‘안범은 역시 전투조에 적합한 인재가 아니다.’
이렇게 무서워하는 놈을 무간에 억지로 밀어 넣는 게 과연 잘하는 짓일까? 경해국은 반쯤 농담이긴 했지만 가서 정말로 무슨 문제라도 생기면 제법 찝찝할 것 같았다.
어쨌건 2부 7팀의 막내는 거슬리는 성격이긴 해도 본성은 여린 놈이었다. 밥도 배 속에 거지가 있는 것처럼 먹고, 언젠가는 갑자기 급발진해서 칼을 휘두르지를 않나 때때로 버릇을 개나 주기는 했지만. 안범은 안범이다. 2부 7팀의 정신병자들 사이에서 톡톡히 막내 역할을 해오던 놈이 사회생활을 처음 시작하는데 다그치기만 해서는 안 될 듯했다.
“안범 씨, 오늘은 훈련 가지 마세요.”
“…에?”
윤모난의 입에서 갑자기 경쾌한 목소리가 흘러나오자 안범은 퉁퉁 부은 눈꺼풀을 힘겹게 밀어 올려 윤모난을 봤다.
“오늘은 그냥 우리 다 하루 쉽시다. 밀린 청소나 하고 빨래도 하러 가죠.”
“…전 예정된 훈련이 있는데요.”
역시나 무구원이 시계를 확인하며 초를 친다. 윤모난은 들고 있던 바구니로 그의 명치를 가격하며 명령했다.
“그냥 좀 푹 쉬자고.”
“…쉬자는 말씀을… 그렇게 강압적으로….”
윤모난은 뒷골목 깡패같이 인상을 구기며 무구원을 노려봤다. 감히 팀장에게 더 말을 얹을 사람은 없었다. 모두가 훈련이나 업무 처리로 바쁜 금요일 오후, 2부 7팀은 한가롭게 다 같이 빨래를 하게 되었다.
윤모난은 세탁실로 가는 내내 담배를 뻑뻑 피워대며, 재를 빨래 바구니 안에 다 떨어트리고 있었다. 또 뭐가 거슬리는지는 모르지만 누가 보기에도 제정신이 아닌 듯했다. 항상 신고 다니는 분홍색 슬리퍼는 또 얻다 가져다 놨는지 신발이 짝짝이였다.
무구원은 사실 한 달 내내 윤모난을 주시하고 있었다. 윤모난의 상태가 좋지 않아 보였기 때문이다. 자신을 은근히 피하는 데다 말수도 많이 없어졌다. 역시나 세탁실에 도착해서 보니 윤모난의 빨랫감 위는 폭탄 재가 눌어붙은 것처럼 엉망이었다. 그걸 그대로 세탁기에 집어넣는 모습을 본 무구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아니,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왜?”
윤모난은 가져온 세탁 세제를 탈탈탈 세탁기 안에다가 흩뿌리는 만행을 저지르며 반문했다. 무구원은 여전히 얼굴을 구긴 채 조곤조곤 말했다.
“재가 다 떨어져서 더러운데…. 그리고 빨래는 색깔 있는 것과 하얀 옷으로 분리해서 빨아야 합니다.”
“엑?”
그건 윤모난이 난생처음 듣는 잡설이었다. 안범과 경해국 또한 다른 세탁기에 색깔 구분 없이 빨 것들을 마구잡이로 집어넣으며 세제를 들이붓고 있었다. 무구원을 제외한 나머지 셋은 총 쏘고 사람 팰 줄만 알거나 제대로 배우지 못해 기본적인 생활 습관이 엉망이었다. 경해국은 워낙 산적 같은 놈이기에 그렇다 쳐도 윤모난마저 이럴 줄은 몰랐던 무구원은 색다른 의미로 충격을 받았다.
안범은 눈이 팅팅 부어서 빨래고 뭐고 자신이 세탁기에 안 들어가면 다행이었다. 무구원이 다시 세탁기 안의 옷들을 끄집어내려 하자 윤모난이 쾅, 하고 문을 닫아버렸다. 그러더니 전원 버튼을 꾹꾹 누른다.
“난 늘 이렇게 빨았는데 아무런 탈 없었어.”
“…….”
그제야 무구원은 눈앞의 남자를 제대로 천천히 뜯어 보았다. 윤모난은 한마디로 상당히 허술했다. 항상 신고 다니는 회색 양말은 자세히 보니 사실은 흰 양말이었는지 물이 들어 얼룩덜룩했다. 아무런 탈이 없다기엔 이미 그 양말에서는 하얀색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이런 건 생각지도 못한 충격이었다.
이제껏 윤모난에게 계속 눈을 떼지 않고 있었는데. 이제껏 흰 양말을 회색으로 만들어 신고 다니는데도 전혀 몰랐단 말인가? 이 지경으로 다니는데? 와중에 분홍색 슬리퍼의 나머지 한 짝은 대체 어디로 간 걸까.
“팀장님, 무씨 저거 결벽증인 거 모르십니까? 남자 놈이 까다롭게 어찌나 깔끔을 떠는지. 저 녀석 씻는 걸 보면 혀를 내두르실 겁니다.”
“…음, 그래? 빨래 돌아가는 사이에 다 같이 목욕이나 할래요?”
“좋죠.”
무구원은 조막만 한 목소리로 싫다고 했다가 또 한 대 맞을 뻔했다.
“안범 씨, 가죠. 목욕한 다음에 바나나 우유나 먹자고.”
“…팀장님.”
“응?”
“저… 내일….”
“일단 목욕부터 하고 나서. 그런 다음에 얘기합시다.”
‘내일 안 가면 안 될까요?’라고 할 용기조차 없는 안범의 말뜻을 모를 리 없을 텐데도, 윤모난은 그를 일단 토닥이고 달래주었다. 싫은 소리 하는 것 대신에 그는 회색 양말에 짝짝이 슬리퍼를 찍찍 끌며 팀원들을 공용 목욕탕으로 데려갔다.
센터 대원들을 위해 제공되는 공용 목욕탕은 텅텅 비어 있었다. 센터에 있는 그 누구도 이 시간에 목욕이나 할 정도로 한가로운 사람은 없으니 당연했다. 목욕탕 키를 받아 들어가자마자 윤모난이 바지와 티셔츠를 훌렁 벗어 바닥에 던지고 원시인처럼 바로 안으로 들어갔다.
무구원은 윤모난이 벗어둔 옷을 집어 개면서 오늘따라 그가 유독 거슬린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건 정말 이상했다. 얼마 전에는 윤모난을 보고 추잡한 욕망만 느꼈는데 말이다.
“팀장님, 어째 몸이 더 마르신 거 같습니다.”
“그래?”
“근육은 그대로인 것 같은데, 살이 좀 빠지셨는데요?”
경해국이 옆에서 윤모난의 나체를 들여다보며 말했다. 당연히 살이 빠질 수밖에. 제대로 식사를 챙겨 먹지도 않고 늘 밤을 새워가며 일을 하니 아무리 강철 체력이라고는 해도 버티는 게 더 신기할 지경이었다. 남경에서 돌아온 이후로 윤모난은 귀찮음이 늘었는지 평소보다 끼니를 더 대충 때우고 있었다.
곰곰이 따져보니 윤모난은 지독히도 우울할 때 저런 패턴을 보이곤 했다. 방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거나 음식을 먹지 않고 버티거나 하는 식으로. 극도로 만사를 귀찮아하고 기운도 없었다. 무구원은 자신이 지금껏 몰랐던 윤모난의 새로운 면을 발견한 것이 아니라, 이제야 그를 제대로 보기 시작했음을 깨달았다.
다른 팀원들은 윤모난의 회색 양말에 대해선 여전히 눈치조차 채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영원히 모를 것이다. 그의 회색 양말은 무구원의 눈에만 유독 띄었고, 그건 무구원이 단지 결벽증이라서가 아니라 그가 매 순간 윤모난을 주시하기 때문이었다.
“뜨거워….”
탕에 들어가기 전에 대충 샤워를 하고 머리에 거품을 그대로 묻힌 채로 온탕에 들어가려는 모습도 무구원에게만 보였다. 물이 묻은 손으로 머리의 거품을 닦아주는 것도 그의 몫이었다. 온탕에서 뜨겁다 뜨겁다 하면서도 나오지 않다가 축 늘어진 걸 구한 것도 무구원. 건져내서 차가운 물을 끼얹어준 것도 그였다.
기진맥진. 무구원은 힘이 빠져 평소처럼 씻지조차 못했다. 오로지 윤모난을 신경 쓰느라 온 정신이 팔렸다. 그는 왜 오늘 안범에게 훈련을 빠지고 쉬자고 했을까? 왜 온탕에서 뽀글거리다가 빠져 죽을 뻔했을까.
관계에 진전이 있다 한들 상대방의 인생이 티끌만큼도 나아지지 않았음을 목도하는 건 참 괴로운 일이었다. 그건 결국 자신이 그에게 아무런 의미도 되지 못했다는 뜻이기에.
“팀장님은 바나나 우유 안 드세요? 드시고 싶었던 거 아니에요?”
“난 별로 속이 안 좋아서. 근데 나 화상 입은 거 같아…. 왜 이렇게 피부가 따갑지.”
“그건… 아까 온탕에 너무 오래 들어가 계셔서 아닐까요?”
“내가?”
“네.”
안범은 바나나 우유를 빨대로 쭉 빨아 먹다가 차가운 플라스틱 표면을 윤모난의 팔에 대고 식혀줬다. 안범도 그가 평소와 같지 않다는 것을 알고 신경이 쓰이는 눈치였다. 아니, 사실 윤모난의 상태는 남경을 다녀온 이후로부터 쭉 안 좋았다.
목욕을 하던 중간에 무구원은 어딜 다녀온다며 잠깐 사라진 상태였고, 세 사람은 그를 기다리며 방금 말아둔 김밥처럼 탈의실 마루에 나란히 누워 있었다. 안범은 계속 성실하게 윤모난의 피부를 식히느라 애쓰고 있었다. 언제는 무간에 가기 무섭다고 잉잉 울더니 팀장이 걱정되어 잠깐 잊은 모양이다.
“안범 씨.”
“네….”
“내가 처음 무간에 갔을 때 형들이 나한테 이 목걸이를 줬거든.”
윤모난은 갑자기 제가 항상 걸고 다니는 은색 펜던트를 보여주며 말을 꺼냈다. 태엽을 건드리자 분홍색 실뱀 환영이 기어 나왔다. 그가 실뱀을 안범의 손등에 얹어주며 말을 이었다.
“이게 나한테 무슨 의미인 줄 알아요?”
“…아뇨.”
“형들이 그랬어. 이제 우리는 모두 전사가 되었으니 항상 마지막일 수 있다는 각오를 해야 한다고. 이건 형들이 미리 남긴 유품이에요. 살아남는 사람들만 간직할 수 있는 물건이지.”
“저같이 약한 사람이 거기서 어떻게 살아남아요…. 팀장님은 저보다 강하시잖아요. 능력도 세고… 가이드시고… 전….”
“뭐, 그건 사실이지. 내가 너무 천재긴 해.”
“…….”
“근데 천재보다는 범재들이 더 수명이 긴 법이야.”
윤모난은 제 목걸이를 벗어 안범에게 건넸다.
“이거 잠깐 맡길게요. 나한텐 엄청 중요한 물건인데… 이걸 맡긴다는 의미는 이해했죠?”
“야, 찌찌 애비. 팀장님이 널 편애하긴 하나 보다.”
옆에 잠자코 있던 경해국이 대신 말을 했다. 안범은 긴장한 얼굴로 몸을 일으키더니 펜던트를 받아들었다. 형들의 유품이 윤모난에게 무슨 의미인 줄 모른다면 바보일 것이다. 하루 종일 울어 발갛게 부어오른 안범의 눈가에 또 투명한 눈물이 맺혔다.
“팀장니임….”
“…아버지가 물려주신 사시미 잊지 말고 꼭 챙겨. 그것만 있으면 안범 씨는 걱정이 하나도 안 돼. 아마 지옥에 가도 살아남을걸.”
안범은 분홍 머리 정신병자 팀장에게 안겨 펑펑 울고 싶었다. 그런데 감동은 오래가지 못했다. 어딜 다녀온다던 무구원이 별안간 탈의실 문을 열며 들이닥쳤기 때문이다.
“안범, 경해국. 당장 팀장님 잡아.”
“에?”
“잡아!”
둘은 얼떨결에 양쪽에서 윤모난을 붙들었다. 그 즉시 무구원은 윤모난의 턱을 억지로 벌리며 무언가를 밀어 넣었다. 향정신성 약이었다.
“야! 이 새끼들아! 방금까지 감동적이었는데 무슨 짓이야!”
“팀장님! 약 드셔야 합니다! 며칠째 안 드시지 않았습니까!”
“이거 놔! 이 개새끼들… 으읍…!”
무구원은 식은땀을 흘리며 약을 혀뿌리 깊숙한 곳까지 밀어 넣고 안범이 먹던 바나나우유 뚜껑을 열어 억지로 들이부었다. 이대로라면 윤모난이 웃으며 방에 들어갔다가, 새벽에 혼자 목을 매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였다. 그간 3년 동안 아침 점심 저녁 두 알씩 먹어온 약을 며칠 동안이나 먹지 않았는데 제정신이 아닌 게 당연했다.
“싫어!”
“제발요, 팀장님 이것만…!”
강제로 약을 넘긴 윤모난은 헛구역질까지 하다가 약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자 분기탱천한 낯으로 주먹을 말아쥐었다. 그러더니 잠시 후, 벌떡 일어나 무구원을 패기 시작했다.
마구 얻어터지면서도 무구원은 갑자기 약을 끊는 건 위험하다며 꿋꿋하게 항변하고 있었다. 무구원은 무의미를 견디고 싶지 않았다. 윤모난의 인생에 어떤 식으로라도 개입하고 싶었고, 그러므로 당장 맞아 죽더라도 그에게 약을 먹여야 했다.
깨닫고 난 뒤에 그 전으로 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도저히 무구원은 깨달음 이전으로 돌아갈 수가 없었다.
“내가 약을 안 먹는 게 단지 우울해서 그런 줄 알아!”
“죄송합니다.”
무구원의 주도하에 팀원들에게 큰 고초를 당한 윤모난은 일단 넘겼다. 지금은 안범을 격려해야 할 때이고 팀워크를 위해서 성질을 죽여야 했다.
그러나 애써 내리눌렀던 분노는 세탁기에 넣어놓은 빨래를 찾으러 갔을 때 여지없이 터지고 말았다.
옷을 건조기에 넣으려 세탁기에서 꺼내 보니 분명 한꺼번에 넣어놨던 세탁물이 죄 분류되어 빨려있는 게 아닌가. 무구원 이놈은 성실함이 도가 지나쳐서 숙소에 약을 가지러 가는 김에, 기어코 잘 돌아가고 있는 팀장의 빨랫감을 도로 끄집어내 세탁물을 분류해 넣은 것이다. 그걸 발견하고 나서 윤모난은 결국 폭발했다.
세탁실 구석에 있는 마포 걸레의 대를 부숴 무구원에게 빠따 다섯 대를 가격하면서 윤모난은 이를 갈았다. 이 새끼 뭔데, 자꾸 이딴 식으로 내 생활에 간섭하지? 이런 건 결코 사소한 일이 아니었다.
약을 먹느니 마느니 챙기고 반찬을 골고루 먹으라며 잔소리하는 것. 머리의 거품을 닦아주고 세탁물을 대신 분류해주는 것. 이런 간섭을 하나씩 허용하게 되면 그 끝이 어떻게 되겠는가? 간섭쟁이들은 소극적인 간섭에 만족하지 못하는 법이다. 하나를 허용하면 둘을 간섭하려 들 것이고 결국 인생 전부를 침해하겠지.
발길질에 걷어차이던 무구원은 계속해서 로봇처럼 똑같은 대답만 외웠다.
“팀장님이, 윽, 걱정돼서 그랬습니다.”
“정기 검진 받으면서 알아서 관리하는 중이야! 복용량을 줄여야 내 기량을 올릴 수 있는데 날 억지로 붙들어서 약을 멕여?”
윤모난은 네가 내 마누라라도 되냐고 물으려다 옆에 안범과 경해국이 있어 참았다. 이미 둘은 다음 차례가 자신들일까 덜덜 떠느라 그렇게 말했다고 한들 별생각도 안 했을 테지만.
결국 무구원의 몸에 비해 한참 연약한 걸레 대가 두 동강이 나서야 폭력은 멈췄다. 옆에서 안범이 후, 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윤모난은 돌아가서 건조기에 빨래를 넣고 또 담배를 꺼내 물었다. 경해국이 간신처럼 불을 붙여주는 동안, 무구원이 몸을 툭툭 털며 일어나 덧붙였다.
“기량을 올릴 수 있는 방법은 이미 찾지 않았습니까.”
“야!”
콱, 저게. 윤모난은 죽어라 맞아도 뻔뻔하게 나오는 무구원 때문에 처음으로 누군가의 좆을 빨아줬던 걸 후회했다. 아무래도 무구원과 그 일에 대해서 상세한 협의가 필요할 것 같았다.
윤모난은 누구와도 특별한 관계를 바라지 않는다. 이유는 단순하다. 그런 한가함에 감길 여유는 없으니까. 무구원이 마음에 드는 것은 사실이고 저놈이랑 진도를 더 빼는 것도 생각해보았으나, 저놈이 이딴 식으로 나온다면 미련 없이 그만둘 일이었다.
무구원과의 관계가 무정원만큼 안정적이리라 착각했던 건 윤모난의 실책이었다. 무정원이 쉬웠던 건 자자고 해도 그래, 하고 그만 만나자 해도 그러자 했기 때문이다. 둘은 결코 연애 그 비스름한 것도 한 적 없었고, 가슴 설레며 상대를 생각하느라 잠을 설친 적도 없었다.
무정원 역시 잔소리를 몇 번 하기는 했으나 결코 이런 사사로운 것들에는 성가시게 굴지 않았다. 그러니 형을 빼닮은 무구원도 그럴 줄 알았다. 남경을 떠나면서 마음이 복잡했던 탓에 충동적으로 무구원과 선을 넘어버린 것이 원흉이었다. 씨알도 안 먹힐 헛소리를 한 것도 가볍게 넘겨버렸으니 자승자박인 셈이다.
“야, 무씨. 팀장님 말씀이 옳다. 왜 안 하던 간섭을 하고 그러냐. 알아서 하시게 둬.”
“…….”
“이거 진짜 이상하네. 원래 남한테는 관심 한 톨도 없는 놈이 갑자기 왜 그래? 너 설마 팀장님 좋아하냐?”
“야!”
무구원이 당장이라도 고개를 끄덕일까 봐 두려웠던 윤모난이 괜히 큰소리를 냈다. 그러고는 바로 무구원의 멱살을 낚아채 세탁실에서 끌고 나와 건물 뒤로 데려갔다. 지금 입을 맞춰놓지 않으면 무구원이 또 무슨 시한폭탄을 터뜨릴지 모른다. 이 새끼는 지독한 간섭쟁이에 광신도 또라이니까.
둘만 남게 되자 무구원은 일말의 죄송한 기색조차 꾸미지 않았다. 뚱하고 고집스러운 평소의 표정으로 돌아온 그는 오히려 더 당당해 보이기까지 했다.
“십자.”
“네.”
“…아니지?”
“뭐가 말입니까?”
“일단 네가 갑자기 급발진하면서 뭐, 좋아한다 어쩐다 말했던 거 내가 용서해준 지 얼마 되지도 않았어.”
“…….”
“너하고 나. 네가 무슨 상상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파트너 그 이상은 될 수 없거든? 알지?”
“압니다.”
“근데 왜 그래? 왜 갑자기 이상하게 굴어.”
“제가 뭘 이상하게 굴었다는 겁니까. 전 오히려 팀장님이 오버하신다고 생각하는데요.”
무구원은 붙들린 멱살에서 한 발짝 뒤로 떨어지며 대꾸했다.
“양말. 그거 원래 흰색이었지 않습니까. 빨래를 분류하지 않고 빨면 그렇게 됩니다. 여태까지 아무 문제 없었다는 건 팀장님 혼자만의 생각이죠.”
“…뭐?”
“식사를 골고루 안 하시는 것은 장기적으로 근력과 골밀도에 영향을 줘서 기량 향상에 방해가 됩니다.”
윤모난은 질린 얼굴로 한 발자국 물러섰다.
“약도 줄이겠다고 하셨지만, 제가 찾아보니 향정신성 약 장기 복용자가 갑자기 먹던 약을 끊는 건 오히려 부작용이….”
“무슨 부작용?”
“정신이 산만해지거나 감정 기복이 심해지는 것 등이 있습니다. 팀장님 지금 남경에서 돌아오신 이후로 계속 집중 못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것뿐만 아니라 복귀하시고 나서 방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았던 것도 수차례입니다.”
“…….”
“정신이 붕괴되면 정신보호센터로 돌아가란 권고가 내려올 겁니다.”
의외로 무구원의 말은 냉정하게 현 상태를 직시하라는 내용이었다. 이러면 윤모난의 입장에서도 할 말이 없었다. 무구원에게 남경에서 무너진 모습을 보여준 것도 사실이었고 자신이 위태로운 상태라는 것도 들켜버렸다.
무구원을 윽박질러 이를 묵인하게 만든다고 치자. 만약 자신이 안범과 경해국 앞에서까지 밝은 빛 아래 있는 트랜스를 보고 움츠러든다면 어떻게 될까? 윤모난이 고개를 수그리자 커다란 손이 목덜미를 감싸왔다. 무구원이 나지막이 말했다.
“팀장님께서 지금은 단결할 때라고 하셨죠.”
“…….”
“저는 그저 팀장님의 다리가 되려는 겁니다.”
“…그게 다라고? 단결을 위해서?”
“전 1년 뒤에 북해에 가고 싶습니다. 팀장님도 꼭 해야 할 일이 있으시죠. 그걸 이루기 위해선 마이너스 육천 점도 문제이고 발견한 큐브에 대한 것도 더 파헤쳐야 합니다.”
무구원의 말은 틀린 구석이 하나도 없었다. 근데 왜 이렇게 기분이 찝찝한 걸까. 머릿속이 복잡해진 윤모난이 조금 얌전해지자 무구원이 그의 뒷덜미를 엄지로 슬며시 건드렸다. 반곱슬인 남자의 뒷덜미엔 아이의 배내털처럼 부드러운 곱슬머리가 돋아 있었다. 무구원은 그 감촉을 느끼면서 분명한 목소리로 말했다.
“팀장님이 뛰라면 뛰고 멈추라면 멈추겠습니다.”
“…….”
“정말 그게 다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계속 간섭을 해야겠다고?”
“네.”
“팀을 위해서?”
무구원이 순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얼굴을 보니 윤모난도 도리가 없었다. 협의가 생각대로 된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머릿속이 복잡한 가운데 주관이 꽤 강한 그의 팀원은 역시나 자기 식대로 생각하고 있었다.
무구원은 윤모난의 다리가 되고 싶었다. 그가 가고 싶은 곳으로 그를 데려가기 위해 쉼 없이 움직이며 버티는 다리. 분홍색 슬리퍼 안에서 꿈지럭거리는 회색 양말을 바라보며 무구원은 깔끔하게 인정했다. 윤모난이 좋다고. 분홍색에 이상한 집착을 보이는 정신병자이자 상관인, 무엇보다 같은 남자인 윤모난을 좋아하게 된 것이다.
고향에 대한 애착이나 어머니 신에게 바치는 경외심과는 성격이 전혀 다른 감정이 무구원을 휘감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바보가 아니다. 윤모난이 자신과 똑같은 감정일 리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의 삶에는 이미 버거운 것들이 많으니까.
“알았어. 대신 약속해. 파트너 그 이상은 안 돼. 기대하지 마.”
“네, 약속합니다.”
“넌 내가 필요로 할 때만 다가와야 해. 싫으면 그만둬.”
“안 싫습니다.”
어떨 때는 애인이라 불린 적도 있건만, 파트너로 강등당한 지금으로서는 불만도 사치였다. 윤모난은 자신의 뒷덜미를 간질이고 있는 남자의 손을 떼어내며 뒤로 밀쳤다.
“한 번만 더 이런 걸로 신경 쓰게 하면 다리고 뭐고 작살낼 테니깐 조심해.”
“네, 알겠습니다.”
“들어가. 안범하고 경해국이 내가 너 죽일까 걱정하겠네.”
세탁실로 돌아온 무구원은 말없이 윤모난의 빨래를 반듯하게 개어서 정리했다. 그 꼴을 윤모난이 가만두는 것을 보고 안범과 경해국은 어련히 주먹으로 잘 다스렸겠거니 할 뿐이었다. 무엇보다 오늘은 안범을 달래는 게 우선이었다.
그 목적을 위해 2부 7팀은 오랜만에 함께 저녁 식사를 하기로 했다. 밥을 먹으며 무간에 가서 주의할 내용이나 경험자로서의 지식을 나누며 신입을 더 다독이려 한 것이다.
“무간에 가면 건물이 하늘에 달려 있다는데 정말입니까, 선배님?”
“그런 곳도 있고. 구역마다 달라.”
“찌찌 애비, 너 교육 시간에 졸았냐? 무간은 우리가 살고 있는 차원이랑 다르다. 지도 어딘가에 박혀 있는 영토가 아니니까 똑같은 물리 법칙이 작용하지 않는 거지. 그러니 여기저기 중력도 다르고 산소 농도도 조금씩 달라.”
훈련 학교에 가면 배우는 수업 내용이지만 예비 훈련소만 나온 안범은 이런 내용을 깊이 알 리 없었고, 모자란 부분을 쫓아가려면 시간이 더 필요한 건 사실이었다. 윤모난은 손을 뻗어 식탁에 원기둥을 그렸다.
“자, 이게 무간이에요.”
“캔 모양이네요.”
“엄밀히 말하면 도넛 모양에 가깝지. 중간이 뚫려 있거든. 우린 게이트를 통과해서 이 안으로 들어가는 겁니다.”
“그럼 트랜스가 사는 세계는 어디에 있어요?”
“그건 모르지. 포스트들은 모두 차원의 경계인 무간에만 가잖아.”
“아….”
“무지. 우리는 정말 무지하다니까.”
안범은 본능적으로 서곡 식당 벽에 걸려 있는 부조 벽화를 바라봤다.
우리는 왜 한때의 영웅들이 괴물이 되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 무지로부터 다시 소생하리라.
벽화 상단의 글귀를 한참 동안 보던 안범이 대뜸 말했다.
“제 동생들을 보니까요. 모든 사람은 다 무지한 채로 태어나는데, 금세 말을 배우고 걸어 다니더라구요. 그러니까 이 세상에 영원히 무지한 존재는 없는 거죠.”
“응?”
“팀장님, 우리는 무지로부터 얼마만큼 벗어났을까요? 시간이 더 흐르면 미래에는 더 이상 전쟁을 안 해도 되겠죠? 무지에서 완전히 벗어나면요.”
안범의 말은 때아닌 적막을 불러왔다. 모두가 전쟁의 비참함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지만, 현 상태에 모두 포로로 잡혀 있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어제, 오늘, 내일, 연이어 옆에 있는 가까운 포로들이 죽어나갈 것이다. 어쩌면 이 식탁에 앉은 네 사람도 1년 뒤에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것. 그게 전쟁의 현실이었다.
이럴 때 윤모난은 무지의 어둠 속에서 작은 성냥불이라도 켜기로 했다. 그건 가이드로 태어난 윤모난의 본성이었다.
“언제 올지 모르는 그날에 헛된 희망을 걸지 마. 우선은 내일 어떻게 할지부터 생각하자고.”
“…네.”
“안범 씨가 부담 가질까 봐 얘기 안 하려 했는데. 이번 훈련에서 안범 씨가 종합 성적 3위 안에 들면 팀 스코어를 꽤 받을 수 있는 거 알아요?”
“에헤이, 팀장님.”
아까 전만 해도 무간에 못 가겠다고 질질 울던 녀석에게 종합 순위 3위를 운운하며 부담을 주다니. 이러다가 내일 새벽 짐 싸 들고 남도에 가면 어쩌려는 걸까. 경해국이 다급하게 말렸지만 윤모난은 무슨 다른 수가 있는지 흔연한 미소를 머금은 채 안범의 식판에 제 밥을 가득 떠서 넘겨주었다.
“자, 안범 씨 말해봐요. 다른 팀 경쟁자 누가 있는지. 이름만 살짝 말해줘.”
“…예? 경쟁자요…?”
“다들 합의했잖아? 우리 모두 비열해지기로.”
아니나 다를까 오늘 훈련을 없앤 이유가 바로 이거였다. 윤모난은 안범의 경쟁자들을 미리 제거할 시간을 충분히 확보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잠시 후.
“이게 다야?”
“안범 성적이 생각보다 나쁘지는 않습니다. 신입 대원 전체 순위로는 15등 정도인데, 넉넉하게 20명을 데려왔습니다.”
무구원이 목록을 재차 확인하며 대답했다. 팀장의 명령하에 서곡 식당 앞에서 안범이 가리킨 신입 대원들을 으슥한 자재 창고로 집합시킨 참이었다. 제거 대상이 된 신입들이 다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눈치를 보는 가운데 윤모난이 바로 본론을 꺼냈다.
“안녕하세요. 모두 전투조 신입분들이시죠?”
다들 슬쩍 눈치를 보더니 그렇다고 대답을 한다. 경해국은 옆에서 뻔뻔하게 줄을 서라고 윽박지르며 험악한 분위기를 착실히 조성하고 있었다.
“내일 무간 견학을 간다고 들었습니다. 전투조 신입 대원들의 첫 임무인데 선배로서 응원을 해주지 않을 수가 없네요.”
“…저기, 윤모난 팀장님. 이게 무슨 일인지 정확히 설명해주시죠?”
신입 중에서 그나마 똘똘하게 생긴 놈이 따지듯이 물었다. 윤모난이 슬쩍 눈치를 주자, 행동대장 경해국이 바로 손에 불꽃을 만들어 켰다 끄기를 반복했다. 그러니 모두 입을 싹 다물었다. 2부 7팀이 저희들끼리 싸우다가 병동을 홀랑 태웠다는 건 서곡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자, 1번부터.”
무구원이 맨 앞에 서 있던 신입을 앞으로 밀치자 갓 스무 살인 대원이 어벙한 얼굴로 튀어나왔다. 윤모난은 망설임 없이 생초면인 신입의 얼굴을 끌어당겨 입에 진하게 뽀뽀를 했다.
“다음.”
그 이상한 짓거리는 몇 분간 계속되었다. 윤모난은 줄 세워놓은 신입에게 저마다 뽀뽀를 한 다음 옆으로 치우고 다음 사람을 끌어당겨 또 뽀뽀했다. 남들 눈에는 해괴한 변태 성욕자처럼 보이겠지만, 사실 윤모난은 그럴 때마다 신입들의 능력을 반 정도 제어하는 중이었다. 신입들은 아마 내일 능력을 쓸 수는 있더라도 평소 기량을 내지는 못할 것이다.
너무도 비열했다. 이 일에 가담하고 있는 무구원과 경해국마저 치사함에 몸서리를 쳤다. 안범에게 자세한 계획은 비밀로 하고 먼저 숙소로 돌려보낸 게 다행이다 싶을 정도로 차마 보기 힘든 광경이었다. 윤모난은 그렇게 20명의 어린 후배들에게 친히 뽀뽀를 해준 다음 손등으로 입술을 쓱 닦았다.
“돌아가서 자기 팀장한테 이를 사람 있을까?”
“…….”
“설마 선배가 응원 뽀뽀 좀 했다고 고자질을 한다거나… 쩨쩨하게 상부에 보고한다거나 할까 걱정돼서 그럽니다.”
윤모난은 아까 처음 모였을 때 질문을 던진 똘똘하게 생긴 신입의 어깨에 손을 걸치면서 말했다.
“여기서 있었던 일은 우리들끼리의 비밀로 하자고.”
“…네.”
“만약 오늘 일로 소문이 돈다? 그럼 제가 여기 이 우등생에게 정식으로 대련을 신청하겠습니다. 우등생이니까 내 대련 상대 정도는 하겠지.”
그건 네가 책임지고 다른 동기들이 입 터는 걸 막으라는 뜻이었다. 도축 살인마 2부 7팀의 명성을 익히 들었던 신입들은 하나같이 고개를 숙이고 벌벌 떨었다. 협박을 끝낸 뒤에 윤모난은 뽀뽀 모임을 빠르게 해산시켰다. 빠르게 도망치는 신입들을 보며 경해국은 떫은 표정을 지었다.
“와, 너무 비열해서 못 봐드리겠습니다. 대체 어디까지 추락하실 셈입니까? 이거 한 놈이라도 지 팀장한테 이르면 난리 날 텐데요.”
“괜찮아. 센터에서 신입을 받는 팀은 다 하위권 팀들이라, 어차피 팀장이라 해봤자 나처럼 권력도 뭣도 없는 놈들뿐이야.”
윤모난은 대수롭지 않게 받아쳤다.
“그런데 저렇게 이능력을 제어해도 되는 겁니까? 아무리 훈련이라도 무간으로 가는 것 아닙니까.”
“이능력을 제어해? 누가? 난 뽀뽀만 해준 것뿐이야. 순수하게 응원해준 거라고.”
“…개뿔, 그걸 누가 믿어요? 그리고 애초에 그게 우리 계획 아니었습니까?”
자신을 향해 가자미눈을 뜨고 있는 경해국에게 윤모난은 정말 억울하다는 듯이 사실을 알려줬다.
“뭐, 물론 내가 이능력을 제어했다고 믿게끔 암시를 걸기는 했지. 일종의 쇼랄까. 이능력은 정신에 큰 영향을 받거든. 단지 뽀뽀 좀 했을 뿐인데 다들 자신의 능력이 줄어들었다고 생각할걸. 사실은 그렇지 않아도 말이야. 내가 미쳤다고 진짜 그 짓을 했겠어?”
경해국은 입을 떡 벌렸다. 생각해보면 그게 더 치사하다는 걸 몰라서 하는 소린가 싶다. 그런데 옆에 서 있던 무구원이 무언가 걸리는 것이 있었는지 한마디 보탰다.
“…방금 팀장님이 협박하신 저 우등생은 동산 경씨 직계 중 막내입니다.”
“아, 진짜? 어쩌지, 경해국. 이거 문제 될까?”
동산 경씨 경해국은 얼굴을 찌푸리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마 같은 고추끼리 입 맞췄다고 하면 가문에 있는 꼰대들이 대가리나 갈기지, 뭐 우쭈쭈 하겠습니까?”
“좋았어. 팀을 위해서 같은 가문 출신까지 배반하다니. 경해국 당신 월말 평가 때 확실히 반영하겠어.”
“시팔, 좋아해야 하는 건지. 어쨌든 감사합니다요.”
이로써 막내를 무간에 보낼 준비는 모두 마쳤다. 경해국을 먼저 보내고 무구원과 윤모난은 따로 파동 탐색 방해 장치에 관해 상의하기로 했다. 지난날 감찰부에서 주현희와 나눈 대화를 건네 들은 바 있는 무구원은 고민에 빠진 듯했다.
“아무래도 기러기들도 이 문제를 알고 있는 것 같습니다.”
“맞아. 하지만 알면서도 주 부장이 아직까지 내 주머니에서 이걸 빼 가지는 않았단 말이지.”
윤모난은 은색 큐브를 손에서 천천히 굴렸다.
“나보고 알아서 잘 행동하라고 한 말이 무슨 뜻일까.”
“남경과 서강의 친분을 들먹이며 알아서 잘 행동하라고 했다는 건 경고인 동시에 부탁이겠죠. 남경 윤씨에서 팀장님의 위치가 그렇지 않습니까.”
“내 위치?”
“팀장님은 가문에 완전히 충성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버리지도 않으셨죠.”
조금 망설이는 듯했지만 정확한 말이었다. 그 애매한 위치에 있는 윤모난에게, 주현희가 먹히지도 않을 남경과 서강의 친분 그리고 작약을 들먹인 이유는 뭘까. 무구원은 제 머릿속에 얽힌 가설을 풀어놓았다.
“주현희 부장이 괜히 친분이라는 말을 꺼낸 건 아닐 겁니다. 그 말에 힌트가 있겠죠.”
“이 은색 큐브에 기러기들뿐만 아니라 윤씨들도 관련되어 있다는 말이겠지.”
“…네, 맞습니다.”
“남경이 개입한 문제라면 이 일을 파헤치는 건 내겐 독배인 셈이야.”
주현희 부장은 미리 경고하려 했던 걸까? 이건 정치 싸움에 끼어드는 것이라고. 생각할수록 자꾸만 얽히고설키는 단서들에 윤모난은 이마가 다 뜨끈해질 지경이었다.
“서강에서 나에게 무엇을 부탁하고자 한 걸까.”
“글쎄요.”
“역시 누군가 서강을 겨냥해 음모를 꾸미는 건가…? 누가?”
“만약 그런 문제라면 기러기들이 직접 나서서 처리하지는 못하는 상대겠죠. 가문들 간 세력 싸움의 일환일지도요.”
“그런데 서강에서는 내가 이 일을 파헤치도록 놔주면서 은근히 부탁하는 눈치라 이거지.”
이 경우 가능한 답은 두 가지였다.
“기러기들이 굳이 애매한 위치에 있는 나한테 부탁하는 이유라면….”
“서강과 남경 사이의 관계가 틀어졌거나. 아니면 같이 위험에 처했거나 둘 중 하나겠네요.”
두 가문이 서로를 향해 음모를 꾸미는지, 아니면 음모를 막아내는 동지인지 모를 일이다. 어쩌면 이 두 가지 모두 정답이 아닐 수도 있었다. 생각이 꼬리를 물기 시작하자 윤모난의 안면에 얼핏 피곤한 기색이 스쳤다.
“저기… 무구원… 이 일 말이야….”
“무슨 말씀 하실지 압니다. 하지만 제 뜻은 여전히 같습니다.”
무구원이 꽤 단호하게 말허리를 잘랐다. 이건 정치를 떠나서 민간인들의 목숨이 달린 사안이기도 하니 모른 척할 수 없다는 의지였다.
바늘로 찔러도 꿈쩍 안 할 것같이 단호한 그 태도에 윤모난은 복잡한 속을 차분히 가라앉혔다. 이 일에서 빠지자며 설득할 말을 고르고 고르는 와중, 무구원이 다짐하듯이 한 번 더 쐐기를 박았다.
“복잡한 건 위정자들의 머릿속일 뿐입니다. 우린 그저 정치적 판단을 하지 않고 단순히 처음의 목적대로 일을 조사하면 됩니다.”
“…그게 쉽냔 말이야.”
“서로 다른 생각만 안 한다면요.”
둘 모두 가문에서 아웃사이더인 것은 마찬가지이다. 그러니 정치적 판단을 개입시키지 않고 이 일을 조사할 적임자도 그들밖에는 없을 터다. 심지어 무구원은 정치를 떠나 순전히 선의에서 이 일에 끼어든 게 아닌가. 윤모난만 변심하지 않는다면 복잡한 미로일지라도 출구를 쉽게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결국 다짐해야 하는 건 자신뿐임을 아는 윤모난이 나지막이 긍정의 뜻을 내비쳤다. 하지만 대답을 한 이후에도 씁쓸한 여운은 계속 남는다. 왠지 모르게 감이 안 좋았다. 그래도 알아보긴 해야겠지….
“이 큐브를 맡길 사람은 좀 알아봤어?”
“네, 연구조에 있는 에스퍼 중 한 명인데 값만 충분히 치른다면 이런 일도 받아준다고 합니다.”
“그래? 그럼 내일 당장 만나볼 수 있지?”
“근데… 문제는….”
“문제?”
“여자입니다.”
때아닌 성별의 문제에 윤모난이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여자가 무슨 문제라는 거지. 말뜻을 이해하지 못한 윤모난을 향해 무구원의 설명이 따라붙었다.
“센터에서는 여성 대원들과 접촉하는 게 어렵지 않습니까.”
“아…, 글쎄. 일단 방법을 만들어볼게. 그건 어려운 거지 불가능한 게 아니니까. 정보나 좀 알려줘. 미리 뒷조사 좀 해보게. 혹시 모르니까.”
“알겠습니다.”
일단 대충 오늘 상의할 건 이 정도인 듯했다. 시간을 확인해보니 20시 20분이 되기 14분 전이었다.
“기도하러 가야 합니다.”
무구원은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말을 들은 윤모난의 눈썹이 대뜸 꿈틀거리더니, 바로 무구원의 두꺼운 허리를 기다란 두 다리로 감싼다.
“여기서 해.”
“경전과 바늘이 있어야 하는데요.”
“가지고 와. 십자 너 기도하는 거 보면서 자위나 하게.”
“…….”
무구원은 자신과 함께 온갖 타락의 죄는 다 저질렀으면서도, 아직까지 신성모독 하나만큼은 도저히 견딜 수 없었던 모양이다. 그는 불공불손한 신성모독자의 다리를 비틀 기세로 잡고 거세게 밀쳐냈다.
“싫습니다!”
“…아, 재미없어.”
뭐 이런 인간을 좋아하게 됐는지. 무구원은 오늘 기도 시간에는 어머니 신께 그걸 물어볼 셈이었다. 그런데 이 마귀는 쉬이 떨어지지 않고 착 들러붙어 유혹의 말을 쏟아냈다.
“난 십자가 기도하는 거 볼 때 엄청 꼴리더라.”
“…….”
“싫어?”
“팀장님, 저한테 종교는 매우 중요한 겁니다.”
윤모난은 눈알을 위로 데굴 굴리며 결국 무구원을 놔줬다. 갈 데까지 거의 다 가놓은 주제에 종교가 여전히 중요하다는 그 정신과 육신의 괴리를 정말 몰라서 저러나 싶다. 그런데 그때 회의실을 나가던 무구원이 갑자기 뒤를 돌아보았다.
“한 시간 뒤에 오겠습니다.”
그는 불쑥 모순의 말을 뱉더니 대답도 듣지 않고 문을 닫아버렸다. 무구원의 귓가에 윤모난이 폭소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 웃음을 꼬리처럼 달고 합숙소에 들어온 무구원은 평소대로 기도하기 시작했다.
그는 손끝을 바늘로 찌르면서 경전에 쓰인 기도문을 천천히 읽었다. 그러면서 왜 하필이면 윤모난인지 묻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하지만 어머니 신은 대답을 주지 않았다. 이제 타락한 신도라서 기도가 가닿지 않는 걸까. 무구원은 괜스레 손가락을 더 깊게 찌르면서 피를 많이 냈다. 피를 쏟으면 쏟을수록 마음속에 가라앉은 죄책감도 조금은 배출이 되지 않을까 기대하면서. 진정 그렇게 됐는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었다.
기도를 끝내고 나자 텅 비었던 무구원의 머릿속에 다시 윤모난이 가득 차올랐다. 바늘 함과 경전을 정리하고 방을 나오는데 이제 막 들어오던 경해국과 마주쳤다.
“무씨, 어디 가?”
“…죄지으러.”
“뭐어? 미친놈.”
무구원이 그대로 합숙소를 나가자, 경해국은 고개를 까닥거리며 방금 전 윤모난과 호출기로 통화했던 내용을 불쑥 떠올렸다. 왜 안 오느냐고 묻자 대뜸 전도당해야 하니까 찾지 말라는 생뚱맞은 대답이 돌아온 것이다.
‘뭘까… 이토록 정반대인 상황은. 어디서 종교 부흥회와 반종교 집회가 동시에 열리나.’
무구원은 그다지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걸음으로 다시 회의실로 향했다. 회의실 앞 복도에 막 도착해 잠시 숨을 고른 그가 문고리를 돌리기도 전에 문이 벌컥 열렸다. 문틈으로 쑥 튀어나온 팔은 무구원의 멱살을 콱 쥐고 안으로 끌어당겼다. 맥없이 사냥당한 무구원은 바짝 붙은 거리에서 닿아오는 따듯한 숨결을 느꼈다.
“기도 많이 했어?”
바짝 굳은 무구원이 대답할 틈도 없이 윤모난이 입술 틈으로 아래턱을 훑으면서 그 곡선을 탐닉했다. 무구원은 밀쳐지는 대로 슬슬 뒷걸음질하다가 손을 뻗어 회의실 불을 껐다. 방 안을 가로지르는 사이 피부 아래에서 뜨거운 열기가 치솟아 자극에 갈급해졌으나 이대로 책상 위에서 일을 치는 건 안 될 일이었다.
윤모난은 무구원의 거구를 책상 밑으로 냅다 쑤셔 넣었다. 자고로 군인에게 전장에서 몸을 엄폐할 장소 찾기란 기본 중의 기본이었다. 누군가 쿵 머리 박는 소리가 났으나 그 정도쯤이야 앞으로 지을 풍기문란죄로 충분히 낫게 할 수 있는 영역이니 무시했다.
무구원은 윤모난의 완력에 밀려 책상 아래로 거칠게 구겨지다가 손을 뻗어 상대의 뒷덜미를 낚아챘다. 그러곤 그를 바닥으로 밀어붙이며 삽시간에 위치를 바꾸면서도, 혹여 분홍색 뒤통수가 차가운 바닥에 세게 부딪히기라도 할까 제 손을 깔아 그를 감쌌다. 그런 다정한 행동에 아니나 다를까 윤모난의 입가가 약간 굳었다.
“무구원, 내가 한 말 잊지 마.”
“…….”
“나 때문에 상처받았다거나 마음이 바뀌었다거나, 나중 가서 그딴 말 하면 안 된다고.”
“네.”
거짓말을 못하는 무구원에게서 망설임 없는 대답이 튀어나왔다. 함께 뱉어진 숨이 델 듯이 뜨거웠다.
상처받거나 마음이 바뀔 일은 없다. 애당초 윤모난에게 아무런 기대를 하지 않으니 상처받을 것이 없었고, 그가 곁을 온전하게 내주지 않는다고 해서 자신의 마음이 손바닥 뒤집듯 바뀌지도 않는다. 그러한 무구원의 주관적이고 독선적인 해석을 전혀 알 리 없는 윤모난이 대견한 아이를 칭찬하듯이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 착하다.”
윤모난은 모든 일에는 완벽을 추구하면서 자신을 향한 연심 같은 건 제대로 마주하지 못하는 허술한 인간이었다. 그런 주제에 어쨌건 욕망을 채우는 일에 관해서는 숙련자였다.
윤모난이 손을 뻗어 무구원의 훈련복 지퍼를 아래로 내렸다. 지퍼 사이로 단단한 상체가 드러나자 윤모난은 고개를 들어 피부를 쓱 핥아 맛보았다. 역시나 달기보다 강하고 쓴 맛이었다. 혀끝에 감도는 맛을 음미하던 윤모난은 흐름에 따라 자신을 내맡기기로 했다. 지독한 간섭쟁이긴 하지만 무구원 정도면 몇 달 즐기기에는 딱…,
“억! 씨팔, 무구원.”
…이라고 여겼던 생각은 30분 뒤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쌍놈의 새끼야. 윤모난은 눈물을 찔끔대며 쌍욕을 삼켰다. 분명 자신은 무구원이 소지한 흉기의 부피를 고려하여 전희에 충실히 시간을 들였다. 모름지기 시간은 금인데도 혀가 얼얼할 때까지 서로 물고 빨고 하며 사치를 부렸단 말이다. 충분히 달아올랐다고 생각해 이제 삽입으로 즐겨보려고 했건만 도저히 무리였다.
“지금이라도 바꿔, 이 개자식아…. 아윽―!”
“하아, 죄송합니다. 읏… 팀장님.”
“윽. 아파! 아프다고 무식한 놈. 그냥 쑤셔 넣는다고 그게 들어가는 줄 알아!”
웬만한 부상은 다 당해봤어도, 저보다 아래인 팀원의 자지에 아랫도리가 반으로 갈라지는 하극상은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윤모난은 숨을 몰아쉬며 제 몸 위에서 난처하게 멈춘 무구원의 어깨를 바짝 잡고는 최대한 힘을 빼려 노력했다.
“으으, 천천히 해.”
“저도… 힘들어서… 이젠….”
하지만 두려움으로 인해 무릎이 바짝 서고 허벅지 안쪽 근육이 경련했다. 무구원이 제 흉기 같은 물건으로 몸을 비집고 들어오려 할 때마다 윽윽대는 소리가 저절로 튀어 나갔다. 딱딱하게 굳은 무구원은 위에서 오도 가도 못한 채로 그저 윤모난의 얼굴 이곳저곳에 의미 없이 입술을 찍어 눌렀다.
“더 정신 사나워. 하지 마.”
몇 번을 시도해 보던 끝에 결국 무구원은 진입을 포기하고 한 걸음 물러났다.
“안 될 것 같습니다.”
“…하.”
“팀장님?”
온몸이 식은땀으로 푹 젖었으나 윤모난은 그만두고 싶지 않았다. 아프긴 해도 쾌락에 대한 갈증이 더 컸다. 그건 무구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놈도 지금쯤 빨리 박아대고 싶은 생각에 미칠 지경이겠지. 윤모난은 단호한 목소리로 결단을 내렸다.
“때려.”
“네?”
윤모난은 무구원의 두껍고 큰 손을 자신의 뺨에 가져다 대며 굳게 결심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 다섯 대만 때려. 맞느라 정신을 놓으면 힘도 빠지겠지.”
“싫습니다!”
“…하.”
무구원이 사색이 되어 당장 책상 밖으로 몸을 일으키려 했다. 지금껏 자신에게 맞은 게 얼마인데, 복수할 기회를 줘도 저러는 게 윤모난의 눈에는 신기하긴 했다. 아까 바지를 벗기면서 보니 세탁실에서 맞은 빠따로 엉덩이가 보라색이 되었던데 말이다. 솔직히 그 엉덩이를 본 것이 이쪽이 군말 없이 박혀주기로 결심한 유일한 이유였다.
윤모난은 제 단단한 다리로 무구원의 골반을 옥죄며 그를 바짝 끌어당겼다.
“때려. 무구원.”
“…….”
“때리라고!”
결국 매서운 명령에 못 이긴 무구원이 손을 들었다. 두꺼운 매트를 방망이로 두드리는 듯한 둔탁한 소리와 함께 윤모난의 얼굴이 꺾이듯이 돌아갔다. 골통이 울리고 앞이 핑 돈다. 무구원이 얼어붙자 아래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또 명령을 내린다.
“네 대 더 때려. 정신이 확 나가네.”
“…싫습,”
“때려. 그리고 한 번에 박아.”
윤모난이 하도 험악하게 말하는 통에 무구원은 입술을 꾹 감쳐물었다. 이윽고 살이 부딪치는 험악한 소리가 연이어 네 번 더 울려 퍼졌다.
“아흑.”
얼굴을 맞은 고통 때문에 무구원의 성기가 삽입해 들어오는데도 하반신에는 아무런 감각이 없었다. 윤모난은 끙 앓는 소리를 내며 잠깐 늘어져 있다가 두 다리로 무구원의 허리를 감싸 당겼다. 그리고 일단 들어가기는 했으나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몰라 얼어붙은 무구원에게 지도하듯이 신호를 줬다.
“아파…. 천천히 움직여.”
“…네.”
그 와중에 엉망이 된 윤모난의 얼굴을 본 무구원은 혼란스러웠다. 처음이라 이게 옳은 건지 판단을 내릴 수도 없었다. 성교가 이토록 가학적인 행위인 줄은 몰랐다. 생각에 빠져 움직임이 더디자 위아래가 만신창이가 된 윤모난이 답답했는지 허릿짓에 맞춰 몸을 들썩였다. 그럴 때마다 명치 부근의 뱀 문신이 스르륵 움직이는 것 같았다.
지금 막 동정을 떼는 중인 무구원이 몸을 어떻게 맞춰나가야 상대가 쾌감을 느끼는지 알 리가 없었다. 윤모난은 느리게 반복 운동만 하고 있는 무구원의 아래에서 몸을 움직여서 자신이 느낄 수 있는 방향으로 그를 인도했다.
곧이어 턱이 들리고 은근한 숨소리가 서서히 튀어나온다. 맞으면서 받은 충격 때문인지 정신이 혼곤한 가운데, 드디어 미세한 쾌감이 몸속에서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윤모난은 고통에 질리도록 익숙한 탓에 거기서도 쾌락을 느낄 줄 아는 딱한 인간이었다.
“하아, 목. 목 핥아줘.”
아릿하고 욱신거리는 고통 속에서 그 작은 쾌감이 극대화되어 배 속을 두드렸다. 자신의 아래에서 입을 벌리며 명령하는 윤모난의 지시에 따라 무구원은 고개를 숙이고 내려갔다. 느슨하게 벌어진 턱 아래를 이로 살짝 물자 윤모난이 움찔 떨었다.
무구원은 입맞춤할 때를 떠올리며 혀로 윤모난의 피부 위를 덧그렸다. 살결을 이로 갉아 먹듯이 물자 그의 살냄새가 진하게 풍겼다. 무구원은 순간 아래로 피가 더 몰리는 것 같은 기분에 제 몸을 더 가까이 밀어붙였다. 그러자 까슬한 거웃이 윤모난의 회음부 쪽에 닿는 것이 느껴졌다.
“…으음, 움직여. 천천히…, 그렇지.”
“이렇…게요?”
“응.”
하지만 뿌리 끝까지 삽입해 들어간 안쪽은 너무 좁고 밭아서 성기를 꽉 문 채 놔주지 않을 것 같아 답답했다. 무구원은 본능적으로 하체를 움직였다. 굵은 기둥이 스치고 지나간 곳은 곧 찢어질 것처럼 살이 부풀어 올랐다. 그럴 때마다 무구원의 허리에 둘러져 있던 손이 바짝 손톱을 세워 살결을 파고들었다.
“아하하… 미친, 아윽.”
어느새 맞은 고통과 쾌감의 조합을 감미하던 윤모난의 입에서 조금씩 신음 소리가 샜다. 파고들 때 너무 아파서 그랬지, 안에 가득 들어찬 성기는 조금만 움직여도 민감하고 예민한 부분을 건드려 온몸의 솜털이 쭈뼛 섰다. 두 사람은 느리게 서로 몸을 움직였다. 서로의 몸이 충분히 적응해나가도록 처음 기술을 배울 때처럼 반복적이고 느린 동작이 이어졌다.
무구원은 작은 움직임에도 폭풍 같은 자극을 받고 있었다. 심장 부근이 쾅쾅 북을 치는 것처럼 박동하기도 했다. 그 덕에 아래에서 살을 붙이고 있는 윤모난은 몸이 절로 진동하는 듯한 기분을 느낄 정도였다. 그가 응원의 의미로 손을 뻗어 빨갛게 달아오른 뜨거운 귓가를 쓸어 넘겨주자 무구원이 움찔댔다.
“아, 흐으… 무구원….”
“하아… 네.”
“나 이 부러졌냐? 읏, 아. 입에서 피 맛 나.”
그 말과 함께 윤모난은 보란 듯이 입을 열어 안쪽을 보여줬다. 그러자 무구원이 홀린 듯 혀를 집어넣어 안쪽을 훑고는 침과 섞인 피를 빨아 마셨다. 정신없이 입술을 맞물리는 통에 젖먹이 아이처럼 꿀꺽거리는 소리마저 났다.
질척이는 키스가 오래도록 이어지더니 느리고 조심스럽기만 했던 허릿짓이 조금 더 빨라졌다. 피 맛이 무구원의 내면의 가학심을 부추겼는지, 성기가 터질 것처럼 단번에 안으로 삽입해 들어왔다.
그 순간 윤모난이 아래서 움찔대다가 얽히고 들어온 혀를 살짝 씹고 말았다. 무구원이 어떻게 허리를 움직여야 할지 드디어 깨달음을 얻은 모양이었다. 허리가 유연하게 율동하며 왕복운동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동작이 빨라질수록 이가 마구잡이로 부딪쳤다. 꼭 맞대고 있기 불가능해질 때쯤 윤모난이 먼저 입술을 뗐다. 그와 동시에 어이없게도 무구원에게서 성실한 대답이 돌아왔다.
“입안이 터져서… 피가 나는 겁니다.”
“아…이, 씹!”
이젠 아무래도 좋았다. 아래쪽에서 살결이 거세게 부딪치는 소리가 울리자 윤모난은 피로 번진 입술을 벌리며 헐떡였다. 보안을 위해 방음 처리가 된 회의실 덕에 마음껏 소리를 질러도 밖으로 새어 나갈 걱정은 안 해도 되니 다행이었다.
서로 교접한 부위가 체액과 땀으로 뒤엉켜 금세 미끈거리기 시작했다. 박는 속도를 올려도 더 이상 앓는 소리가 아닌 달뜬 교성이 터져 나오기 시작하자, 무구원은 윤모난의 머리를 끌어안고 허리를 빠르게 움직였다. 푹푹 자신을 찔러 들어오는 성기에 윤모난이 무구원의 품 안에서 움찔거렸다.
“아윽, 하, 씨발, 천…천히! 야, 구원아! 아!”
“하아… 하윽….”
속절없이 흔들리던 윤모난의 입에서 무심결에 구원아, 라는 말이 튀어 나가자 무구원이 더 거세게 몰아붙였다. 철근 같은 무구원의 골반에 부딪힌 부위가 아플 정도로 쑤셔지면서, 윤모난은 자신을 부서트릴 기세로 끌어안는 남자를 주먹으로 밀어냈다.
“숨… 허억… 윽, 숨 막혀! 아!”
“…아… 모난….”
“미친놈아, 숨….”
이렇게 깔린 상태에서는 몸을 뒤집기 쉽지 않다. 심지어 그 와중에 착실히 찔리며 압박되고 있는 내벽에서 폭력적으로 휘몰아치는 쾌감 때문에 정신을 놓을 지경이었다. 그건 무구원도 마찬가지였다. 제 품에서 남자가 바르작거리며 숨을 몰아쉴 때마다 안쪽 살이 쫀득하게 달라붙으며 성기를 빨아들인다.
극도의 쾌감과 함께 품 안의 윤모난을 부숴 터뜨리고 싶은 가학적인 욕망이 피부 아래에서 뾰족하게 전신을 찔러대고 있었다. 흐려진 이성 가운데 그는 설핏 정신이 들었다.
“힉.”
숨넘어가는 소리가 귀를 파고들었다. 퍽, 하고 가장 깊숙이 삽입하면서 무구원은 팔의 힘을 풀고 제 가슴에 얼굴이 짓이겨져 있던 윤모난을 확인했다. 어쩐지 몽롱해 보이는 그는 입을 벌리고 얕은 숨만 겨우 뱉었다. 두 사람은 틈도 없이 꽉 맞물린 채로 한동안 서로를 멍하니 보며 숨을 몰아쉬었다.
이어서 윤모난이 무구원을 뒤로 밀쳐내곤 그 몸을 타듯 위로 올라가 앉았다. 자세를 바꾸자 이미 맞물린 그곳이 더 압박되어 두 사람 모두 신음했다. 곧이어 윤모난이 입가에서 피와 타액을 닦아내고 허벅지로 버티며 천천히 허리를 움직였다.
“아…!”
“하아… 이제 너 위에서, 하지 마. 하아… 숨 막혀 죽는… 읏… 줄 알았다고.”
윤모난의 무릎이 바닥에 닿더니 이내 정강이를 무구원의 허벅지에 바짝 붙였다. 몸이 중력에 따라 오르락내리락할 때마다 끈적하고 뜨거운 내벽이 이완제처럼 좆을 촉촉하게 감쌌다. 자세를 바꾼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윤모난은 더 진한 쾌감으로 빠져들었다. 굳이 앞을 건드릴 필요도 없이 완벽하게 절정에 도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니, 어쩌면 자신의 기대를 뛰어넘을지도 모른다. 윤모난은 허벅지에 힘을 주며 완급을 조절했다. 오금이 벌벌 떨려서 책상에 손을 걸치고 버텨야만 했다.
“아! 읏, 하… 잇… 아아.”
“아윽….”
그 순간 매의 발톱이 사냥감을 낚아채듯 윤모난의 허리를 움켜쥔 무구원이 극점을 치대듯 허리를 쳐올렸다. 곧이어 살을 꽉 쥐어짜는 악력이 허릿살을 조이며 윤모난이 더 이상 움직이지 못하게 붙들었다. 파정이었다. 그의 몸 위에 올라타 있던 윤모난도 앞으로 고꾸라졌다.
희뿌연 액이 무구원의 배 위쪽으로 흘러내렸다. 윤모난도 어느새 사정한 모양이었다. 쇄골 부근을 꾹 누르고 있는 뾰족한 코 아래서 사정의 여운을 느끼고 있는 윤모난의 뜨거운 입김이 느껴졌다. 두 사람은 그렇게 몸을 겹친 채로 한참이나 가만히 있었다.
“너….”
“…네.”
숨을 고르던 윤모난이 몸도 일으키지 않은 채로 문득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약간 갈라져 있었다.
“아까 내 이름 불렀지.”
“…네.”
“내가 네 친구냐?”
“…전 친구와 이런 걸 하지 않습니다.”
“꼴통 새끼.”
윤모난은 욕을 읊조리며 무구원의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흐르지는 않았다. 1시 안에만 들어가면 되겠지.
“한 번 더 하자.”
본론을 꺼내자 무구원은 말 잘 듣는 순한 종놈처럼 고개를 주억거렸다. 여전히 빠져나올 생각이 없는 아래도 그새 반응을 했는지 배 속에서 도로 딱딱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윤모난은 매끈한 경주마에 탄 기수처럼 제 상체를 무구원의 몸에 붙였다. 두 사람은 그렇게 서로를 마주 본 채 잠시 말이 없었다.
무구원은 불현듯 아까 자신이 내려쳐 엉망이 된 윤모난의 뺨을 손가락으로 조심조심 쓸어내렸다. 내일이 되면 더 심하게 부어오를 것 같았다. 무구원의 단정한 얼굴에 안타까움이 내려앉았다.
“앞으로도 매번 이래야 합니까?”
“아니. 오늘은 처음이잖아. 하지만 맞는 것도 꽤 나쁘지는 않던데.”
그 와중에도 윤모난의 허리는 뭉근히 돌아가고 있었다. 이미 안에 사정한 탓에 순간순간 따끔한 통증이 밀려들기는 했지만, 움직이기에는 오히려 더 수월했다. 윤모난이 몸을 일으키자 그의 등 근육이 꿈틀거렸다. 무구원은 잠시 느꼈던 온기가 사라지는 것을 아쉬워하며 자신도 따라 몸을 일으켰다.
중력을 거스르며 올라와 다시 시선을 맞추자, 윤모난은 고개를 돌려 무구원의 목에 혀를 뭉갰다가 살점을 흡입했다. 그에게선 묘하게 세탁 세제에서 나는 정직하고 깨끗한 향이 났다. 코를 뭉개며 계속 같은 부위를 빨다가 유륜과 꼭지를 핥자 무구원이 참지 못하고 얕은 숨을 뱉었다.
“아, 무구원. 너한테서 존나 정직하고 깨끗한 냄새 나.”
“안 좋은 겁니까.”
“…아니, 엄청 꼴려.”
“…팀장님한테서는 담배 냄새 납니다.”
“엑?”
윤모난이 가슴을 애무하다가 얼굴을 뒤로 빼고 황당한 표정을 짓자, 그 틈을 타 무구원이 아래를 세게 치받으며 입술을 겹쳤다. 미처 예상치 못하고 찔러오는 감각에 엉망으로 치아가 얽혀 부딪치고 말았다.
“아―!”
“…그래서 누가 하아… 담배를 피우면 저도 모르게 보게 됩니다. 아, 팀장님인가 하구요.”
“아읏… 아!”
무구원은 그 진하고 씁쓸한 향으로 가득한 윤모난의 입안을 모두 핥아 먹을 기세로 혀를 움직였다. 불규칙한 교성을 뱉으며 입을 벌리고 있는 윤모난은 상대방이 하는 대로 그저 내버려뒀다. 탄탄한 엉덩이 근육을 콱 움켜쥐는 압박감에 안이 확 조여들었다.
윤모난의 두 다리가 벌어졌다가 움츠러들기를 반복하는 사이 무구원은 집요하게 따라붙으며 몸을 위아래로 쳐올리고 있었다. 이미 사정한 구멍에서 흘러나온 정액이 찐득하게 붙었다가 거미줄처럼 점성 있게 궤적을 그린다.
두 번째로 절정에 오른 윤모난은 갈비뼈 아래에서 숨이 북받쳐 오르는 것을 느끼며 돌연 눈물을 흘렸다. 그는 3년 전부터 유일하게 섹스 중에만 울곤 했다. 무구원이 밀어붙이던 것을 멈추고 손끝으로 물기를 찍어내며 말했다.
“울지 마세요.”
“…흠.”
좋아도 눈물이 난다는 걸 모르는 어리숙한 말에 윤모난은 그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무구원은 곱슬거리는 분홍 머리를 끌어당겨 제 어깨 너머로 넘기며 겹친 몸을 바투 안았다. 땀으로 잔뜩 젖은 등을 무구원의 커다랗고 따듯한 손이 아이를 달래듯 계속 쓸어내린다.
평소라면 허락하지 않을 행동이건만 쾌감에 휩싸인 상태에서는 아무래도 좋았다. 섹스는 불쑥불쑥 적나라하고 솔직한 순간들을 만들곤 했으니까. 지금껏 누군가와 섹스할 때마다 욕망에 휩싸여 취약해진 모습을 가학적으로 즐겨왔던 윤모난은 도리어 자신이 그 대상이 되어버렸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무구원의 몸 위에서 힘없이 들썩였다.
윤모난은 이러한 전위가 늘 관계를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이끈다는 것을 미처 떠올리지 못했다. 콘크리트 벽처럼 뻗대는 무구원과 몸을 섞으니 나약하고 충동적인 윤모난의 맨얼굴이 까발려지는 건 당연지사였다.
“으읏, 하아.”
“하….”
다시 바닥으로 쓰러진 둘은 바짝 붙은 채 쾌락을 좇으며 몸을 맞부딪쳤다. 얼마 지나지 않아 윤모난이 먼저 사정했고, 무구원도 뒤를 따랐다. 두 사람은 몸을 겹친 채로 떨어지지 않았다. 무구원이 그 나약하고 불안한 인간을 바짝 끌어안았지만 윤모난의 고개는 뒤로 떨어져 있었다.
“…한 번 더. 한 번 더 하고 싶어.”
윤모난은 그저 지독한 갈증과 허기를 느끼며 몽환적인 얼굴로 중얼거릴 뿐이었다. 그는 안범에게 펜던트를 주고 나서 허전하고 가벼워진 목 근처를 매만졌다. 항상 걸리던 목걸이 줄이 느껴지지 않아서일까, 오늘따라 유독 공허가 더 방망이질을 쳐댔다.
그때 무구원이 허전한 목선을 매만지는 그 손을 가져가 손등 위로 제 입술을 지그시 찍어 눌렀다. 그러고 나서 곧이어 윤모난의 빈 목선과 쇄골에도 똑같이 했다. 그는 윤모난을 완전히 눕힌 뒤 당장이라도 피부에서 튀어나와 달려들 것 같은 뱀 문신의 머리에다가도 입을 맞췄다.
마치 신성한 무언가에 대고 하듯이 조심스럽고 부드러운, 그런 입맞춤이었다. 윤모난이 아름답다고 평했던 그의 입술은 윤모난의 모든 곳에 입을 맞췄다. 푹 꺼져 들어가 근육으로 단단하기만 한 복근에 입술을 댔을 때쯤 윤모난이 한 번 더 중얼거렸다.
“배고파…. 한 번 더 하고 싶어.”
아무래도 윤모난이 느끼는 건 배고픔이 아니지 않을까. 알면서도 무구원은 자신에게로 뻗어오는 손을 감싸 쥐며 다시 몸을 겹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