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꽃들의 맹세
“…삭신이야.”
윤모난은 후들대는 다리를 두드리며 고통을 삼키듯 담배 연기를 빨아들였다. 어제 새벽 1시는 개뿔, 둘은 3시가 넘어서야 회의실을 나섰다. 피곤하기도 하고 몸 상태가 전반적으로 좋지 않았다. 막 동정을 탈출해 눈깔이 돌아버린 놈과 난잡하게 붙어먹은 대가였다.
자신보다는 훨씬 몸이 가뿐할 게 분명한 무구원은 합숙소로 돌아오자마자 어디선가 미지근한 물수건을 가져와 몸과 얼굴을 닦아주고 잠옷도 입혀주더니, 출처 모를 날계란 한 개를 윤모난에게 꿀떡꿀떡 먹이기까지 했다. 단백질을 보충해야 한다나.
하도 부산을 떨길래 발로 걷어차 쫓아내고 들어와 쓰러져 잠들었다. 오늘은 아침 일찍 안범을 배웅하러 가야 하는데, 역시나 몸 여기저기 비명을 질러댄다. 윤모난이 다 죽어가는 병자 꼴로 방에서 기어 나오자 다들 한마디씩 얹었다.
“어제 뭘 했길래. 얼굴이 그 모양입니까? 또 어디서 주먹질하고 싸우셨어요? 볼이 그냥 다 터졌는데요.”
“…그래. 싸웠다.”
윤모난은 더 묻지 말라는 듯 손을 휘적거렸다. 진통제와 근육 이완제를 먹어도 다리의 힘이 도통 돌아오지 않았다. 무구원은 괜히 ‘부축해드릴까요?’라고 물었다가 귀싸대기를 맞을 뻔하더니 더 다가오지 않았다.
안범은 긴장한 얼굴로 목에 걸린 펜던트만 계속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가마의 털이 바짝 선 걸 보니 떨고 있는 게 분명했다. 어쨌거나 자신은 팀장으로서 할 일은 해야 했다.
“안범 씨… 이리 와…. 뽀뽀… 뽀뽀해줄게.”
하도 목소리가 쉬고 떨려서 그런지 꼭 변태 할아버지가 희롱하는 것 같았다. 윤모난을 보며 눈을 부릅뜬 안범은 고개를 저었다.
“괜찮…습니다.”
“팀장님, 들어가시죠.”
“놔, 무구원.”
무구원의 만류에도 윤모난이 고집을 부린 덕분에 2부 7팀원 전체가 무간행 게이트가 있는 승강장 건물로 향했다. 이미 모여 있던 무리 가운데 어제 뽀뽀 모임에서 만난 20명이 창백한 얼굴로 2부 7팀이 오는 것을 보고 있었다. 윤모난은 얼굴을 찌푸리며 안범을 그 줄로 밀었다.
“걱정 마. 이 팀장님과 선배님들이 다 물밑 작업 해놨어.”
“찌찌 애비, 너 사시미는 잘 챙겼냐!”
“네, 네.”
“안범, 조심히 다녀와라.”
신입들의 출정은 총 일주일간의 여정이었다. 경험이 적은 만큼 격전지는 아니고 무간의 외곽으로 갈 것이니 위험한 건 없다. 안범은 줄 끝으로 가는가 싶더니 갑자기 뛰어와 윤모난을 확 끌어안았다.
“팀장니임….”
“윽…! 어, 아프니까 저기, 허리는 만지지 마.”
“펜던트… 꼭 제 목숨보다 귀하게 간직할게요. 돌아와서 드릴게요.”
“알았어.”
이게 바로 첫아이를 유치원에 처음 보낼 때 느끼는 뭉클함일까. 사실 감동보다는 통증에 시달리고 있었지만 윤모난은 안범의 등을 가볍게 토닥였다. 안범은 옆에 서 있는 경해국과 무구원까지 답삭답삭 끌어안는 만행을 저질렀다. 둘은 질색하면서 1초 정도 받아주다 안범의 작은 궁둥이를 발로 차 다시 줄로 밀어 넣었다.
“시팔, 남들 다 가는 거 가면서 영화를 찍고 가네. 찌찌 애비 저 새끼, 진짜 괜찮겠죠? 팀장님.”
“…괜찮을 거야. 인솔자가 다 실력자들이라서. 우리는 돌아가자. 또 울라.”
“네.”
그러면서도 셋은 계속 안범의 갈색 머리가 있는 곳을 몇 번씩이나 돌아봤다. 안범에게는 첫 임무이자 전투조 에스퍼로서의 첫걸음이었다. 이제 앞으로 수도 없이 무간으로 가겠지만 그의 인생에서 오늘은 특별한 순간이 될 것이다. 윤모난은 괜히 형들의 유품을 함께 들려 보낸 것이 아니었다. 그것이 안범을 보호하는 부적이 되기를 바랐다. 비록 미신이라 할지라도.
―무간으로 가는 신입 대원들은 2번 승강장에 대기하십시오.
안내 방송이 흘러나오자 신입들이 게이트로 밀려들어간다. 그 모습까지 보고 나오는 길에 윤모난의 시야로 무구원이 출정표가 적힌 전광판을 물끄러미 올려다보며 정신을 팔고 있는 모습이 들어왔다.
“뭐 봐?”
“아니요, 그냥.”
얼버무리는 말에 곁으로 가 확인해보니 며칠 전에 무간으로 출정한 무정원의 정예 팀인 5부 1팀이 오늘 오후에 귀환하는 모양이었다. 수도로 가는 날 여기서 마주쳤던 게 마지막인데, 곧 다시 대면해야 할 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윤모난은 별다른 의도 없이 여상하게 물었다.
“형아 걱정돼서?”
“…어디, 제가 걱정할 분입니까.”
“그런데 왜 그렇게 얼굴이 굳었어.”
무구원에게 걱정할 일은 따로 있었다. 사실 그는 무정원의 명령을 어느새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던 참이었다. 승강장 앞에서 무정원에게 윤모난과 가까워지라는 명령을 들은 게 먼 과거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어쩌다 보니 그 명령을 착실히 수행하고 있었다는 것이 참 아이러니했다.
“…팀장님.”
“응?”
“저 할 말이….”
“무씨! 훈련 시간이야. 얼른 가자!”
그때 마침 경해국이 시간을 확인하더니 무구원을 끌어당겼다.
“할 말은 나중에 하고 우선 훈련하러 가세요. 나도 일 있어서 가야 하니까.”
“…알겠습니다.”
묘하게 가라앉은 무구원의 모습에 신경이 쓰이기는 했으나 윤모난은 크게 의미를 두지 않았다. 팀장을 좆으로 쑤셔서 엉망진창으로 만들어놨는데 풀이 죽어야 마땅하지. 그리고 오늘 오전은 윤모난에게도 신경 쓰이는 일이 있으니 어차피 당장 달래줄 수도 없었다.
사실 오늘 아침 일찍 전보가 날아들었다. 남경에서 아버지가 올라온다는 소식이었다. 전보를 전달했다는 건 알아서 와서 대기하라는 뜻일 터였다. 순순히 따라야 하나 고민한 건 사실이지만, 지난번 남경에서의 일이 계속 마음에 걸려 부르는 대로 가기로 했다.
삐걱거리는 몸을 이끌고 도착한 사무동 주변에는 검은 옷을 입은 경호원들이 쭉 깔려 있었다. 서곡에서 근무하는 남경 윤씨 친척들도 모여 있었다. 모두 윤모난을 보자 대충 예의를 차리는 척하더니 저마다 불편한 얼굴로 수군거리기 바빴다.
“모난이도 왔네?”
윤모난의 사촌 형인 윤이화만이 그를 반기며 인사를 건넸다. 윤모난이 서곡에서 친척들과 마주치는 일은 웬만해서 피해온 덕에 서로 얼굴을 보는 것도 3년 만이었다.
“아버지는 갑자기 무슨 일이시래요. 여기까지.”
“음. 글쎄, 내가 알 리 있나…. 근데 너 왜 그러고 걷냐. 얼굴은 다 터졌고. 어디서 맞은거야?”
“하―. 전에 남경에 갔다가 아버지한테 뒤통수는 세게 한번 맞았죠.”
윤이화는 이미 알고 있었는지 그저 등을 두드려줄 뿐이었다. 윤씨들 사이에서 자신과 관련된 소문이 돈 모양이었다. 윤모난은 그건 알 바 없다는 듯 묻지 않고서 낮게 으르렁거렸다.
“화사 놈들만 보면 속이 치밀어 오르는데. 특히 아버지 옆에 있는 눈깔 째진 놈. 오늘은 팰 수 있을까….”
“…아서라. 서곡에서 집안싸움 일으키지 말고. 너 약은 먹었어? 건너뛰지 말고 꼬박꼬박 챙겨 먹어.”
윤이화는 손수 정신보호센터에 데려다주었던 제 사촌 동생이 걱정되는지 계속해서 걱정 어린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대화를 나누는 사이 윤화신이 탄 검은 승용차가 사무동 건물 앞에 멈춰 섰다. 윤모난을 제외한 모두가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이윽고 오늘 이 많은 인원을 모이게 한 주인공은 차에서 내리자마자 꼴이 엉망진창인 아들에게 냉랭한 시선을 던졌다.
“꼬락서니 하고는.”
“…….”
“내가 들어가서 나올 때까지 그대로 거기 서 있어.”
“네?”
“물어볼 것이 있으니 거기 있으란 말이다. 이 돼지 같은 놈아!”
그 말을 남긴 윤화신은 몸을 돌려 건물 안으로 사라졌다. 아무래도 서곡 지부장을 만나러 온 모양이었다. 이 많은 사람들이 모든 일과를 생략하고 꼼짝없이 자신들의 가주를 기다리는 신세로 전락했다. 그러나 이런 식의 기다림과 의전도 윤화신이 가문에 대한 충성을 시험하는 방식이었기에, 다들 자리에서 한 치도 움직이지 않고 긴장한 얼굴로 침이나 꼴깍 삼켰다.
‘성질 고약한 독재자 영감탱이.’
윤모난이 콧방귀를 뀌고 돌아가려 하자 모두가 나서서 그를 붙들었다. 네가 가면 우리가 죽은 목숨이라고 하도 통사정을 하는 통에 결국 가지 못했다. 이윽고 사람들을 세 시간여 기다리게 한 오만한 중년의 남자가 다시 정문에 나타났다. 그러더니 불만 가득한 얼굴의 아들에게 짧게 명령했다.
“차에 타라.”
“바쁜데요.”
“바쁘니까 타라는 거다.”
뒤에서 윤이화가 등을 떠미는 바람에, 윤모난은 통증에 몸을 움츠리며 결국 제 아버지와 뒷좌석에 나란히 앉았다. 딱히 문도 잠그지 않는 것을 보니 단지 대화를 나누기 위해 잠깐 타라고 한 듯했다.
“얼마 전에 수도에 작전을 나갔다가 문제를 일으켰다지.”
“…….”
“그 일로 기러기들이 시끄럽더구나. 우리 화원에까지 편지가 날아들었어.”
결국 그 일을 묻기 위해서였군. 윤모난은 픽 웃으면서 창밖에 서 있는 남경 윤씨들의 비굴한 안면들이나 구경했다. 윤화신 역시 아들에게 시선을 맞추지 않은 채로 말을 이어갔다.
“무슨 일인지 말해라.”
윤화신의 어조는 유난히도 냉랭했으나 그 말에는 무언가 걸리는 게 있었다. 그런 질문은 내막을 다 알고 있는 사람에게서 튀어나올 만한 말은 아니었던 것이다. 윤모난은 입꼬리를 비틀며 조소했다.
“별일 없었어요. 극성맞은 기러기들이 유난 떤 거겠죠.”
“…가문이 얽힌 문제에는 감정을 개입시키지 마라.”
일단은 말을 돌려야 한다. 말이 길어질수록 뱀 같은 아버지에게 또 휘말리게 될 테니. 생각을 마친 윤모난은 앞좌석을 발로 쾅 걷어차고서 옆으로 몸을 돌렸다.
“말씀드릴 테니 아버지께서도 무슨 꿍꿍이인지 말해주시죠.”
“…….”
“남경에 갔을 때 저한테 수면제 먹이셨잖아요?”
“아이가 있는 집에서 애인과 붙어먹으려 한다길래 참으라고 재운 것뿐이다.”
거짓말. 윤모난은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거짓말을 내뱉는 그 모습에 구역감을 느꼈다.
“친손자까지 미끼로 삼아 무슨 짓을 꾸미고 계신 겁니까. 죽은 형들한테 미안하지도 않으세요?”
“아이들은 이미 차고 넘쳐.”
“…뭐라구요?”
“윤씨 피를 가진 아이들은 많아. 작약의 자식이라고 특별할 건 없지.”
“특별하지 않다니요? 형들은 아버지의 후계자였어요. 이제 청연이가 아버지 후계자라구요.”
“쯧쯧.”
못마땅한 듯 혀를 차는 소리만 차 내부를 울렸다. 윤화신은 부어오른 아들의 뺨을 툭툭 건드리며 말했다.
“난 한 번도 작약을 내 후계자로 정한 적 없다.”
“…….”
“네 이름을 봐라. 꽃 중의 왕은 모란이지. 왜 서자인 네가 그 이름을 받게 되었는지 아직도 모르는 거냐? 작약도 다 아는 사실이었는데.”
“…그놈의 가이드가 그렇게 중요하세요?”
“네가 딸로 태어났다면 가둬놓고 가축처럼 애나 실컷 낳게 했겠지. 작약의 어미가 널 딸처럼 대우한 것도 그런 아쉬움이었을 거다. 마땅히 적자의 자리여야 할 것을 빼앗기니 싫었겠지.”
순간 치밀어 오르는 구역감을 참지 못한 윤모난이 차 문을 열어젖히고 바닥에 토를 했다. 차 안을 가득 채운 거짓말과 자신을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한 남자의 오만함에서 풍겨 나오는 악취에 구역질이 나서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밖에 서 있는 윤씨들은 굳은 얼굴로 그런 윤모난을 지켜볼 뿐, 누구 하나 나서는 사람은 없었다. 그들은 모두 창백하게 질린 윤모난이 아닌, 그 뒤에 탄 주인의 눈치를 보는 거였다. 그러자 설상가상으로 그의 등 뒤에서 사형선고가 떨어졌다.
“너를 내 후계자로 인정하마.”
“…….”
“1년 뒤에 남경으로 와라. 지금은 정세가 불안정한 시기라 서곡이 안전해. 꽃밭이 준비되면 남경 지부장 자리에 앉거라.”
여기 있는 모두가 그 소리를 들었다. 이건 공식적인 선포였고 되돌리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윤모난은 입가를 손등으로 훔치며 그대로 차 밖으로 나왔다. 그 오만한 어투가 뒤통수에 끈덕지게 달라붙는 것 같아 도망치듯 차 밖으로 기어 나오는 몰골이었다.
“시든 모란이라도 향만 간직하고 있다면 제 역할을 하겠지.”
“…….”
“화사들이 지금쯤 네 방을 다 뒤지고 있을 거다. 수도에서 뭘 주웠는지는 모르지만, 후계자이니 이제 가문의 뜻에 따라야지.”
“아니요.”
윤모난은 비틀거리며 답했다. 사촌 형인 윤이화가 부축해야 하나 싶어 몸을 잠깐 움직였지만 머뭇거리다가 그쳤고, 여전히 다들 두려운 얼굴로 제자리를 지켰다. 철저하게 학습된 그 비굴한 몰골을 보니 윤모난의 머릿속은 오히려 점점 차가워졌다.
“전 무간으로 갑니다.”
“…….”
“후계자고 나발이고 그런 건 아버지한테나 중요하죠.”
“너 감히…!”
“전 무간으로 가요…. 형이….”
“작약의 죽음이 3년간 우리 모두의 눈을 가렸다. 이제 더 이상 미적거릴 수는 없어.”
지금껏 윤모난이 자살하지 않은 이유는 빌어먹을 남경의 주인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무간에 가서 트랜스가 된 둘째 형을 구원하는 것. 그리고 형들을 그렇게 만든 정신계 트랜스를 찢어 죽이고 자신도 부서지는 것만이 그가 예정한 자신의 유일한 결말이자 생의 의지였다.
“…형들 얘긴 꺼내지 마셨어야죠.”
윤모난은 순식간에 사방에 있는 모든 남경 윤씨 에스퍼들의 능력을 제어했다. 방금 전까지 혈관을 따라 흐르던 힘이 불 꺼지듯 사라져버린 것을 느낀 모두가 당혹스러운 얼굴을 감추지 못했다. 이건 커다란 불경이다. 심지어 가주의 능력까지 제어하다니, 이건 그야말로 반역이었다.
그 와중에 윤모난은 화사 중에 꼭 족치고 싶었던 그놈을 눈으로 찾아냈다. 성큼대며 걸어간 그는 바로 화사의 정강이를 걷어차 다리뼈를 아작냈다. 화사가 신음조차 내지 않고 우그러들듯이 픽 쓰러졌다.
그는 윤화신이 가장 아끼는 곁이었고 화사 중에서도 우두머리였다. 윤모난은 워커를 신은 발로 그놈의 아래턱을 부서져라 압박하며 잔혹하게 읊조렸다.
“얌전히 있는 사람한테 독니를 세웠으니 이젠 다신 아무도 못 물게 만들어주지.”
화풀이라 해도 그만둘 이유도 말릴 사람도 없다. 곧이어 턱뼈가 어긋나는 소리와 함께 끔찍한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사무동 앞이 고문실로 변모하는 순간이었다. 제 아버지에게 잔혹한 피를 물려받은 윤모난이 한 사람의 턱을 부스러뜨리는 모습을 보며 다들 얼굴이 하얗게 질려버렸다.
그 잔혹함을 기꺼이 반기는 건 그 피를 물려준 장본인뿐이었다. 그의 입가에는 전에 없이 미소가 만연했다.
“재밌구나, 아들아.”
윤화신은 더없이 만족스럽다는 듯한 말투였다. 서자에다가 정신병자인 윤모난을 후계자로 앉히는 것은 혈통의 순수성을 중시하는 윤씨들이 납득하기 힘든 결정이었고, 그들의 주인 또한 이 부분을 마음에 걸려 했다. 그런데 급작스러운 후계자 발표에 당황스러워하는 그들의 앞에서 윤모난이 지금 제 성질을 못 이기고 자신의 능력을 친히 전시한 것이다.
이제 이 결정에 반기를 들 이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이 혼란한 시기에 모란의 강함이 어떤 의미인지 혈족 모두에게 그 스스로 납득시킨 것이나 다름없었다. 단 한 순간으로.
이 어리석은 놈. 이미 덫에 걸린 줄도 모르고.
“돌아가자. 집안일을 밖에서 너무 떠들었구나.”
결국엔 그 말도 능청일 뿐. 이 시간부로 반도 전체에 오늘의 공표가 다 전해질 것이다. 윤화신은 자신의 목적을 이뤘다. 그러므로 더는 이곳에 머무를 이유가 없었다.
* * *
“네가 후계자가 될 거라는 건 이미 예상한 바야.”
윤이화가 자판기에서 커피 하나를 뽑아 내밀었다. 예기치 못한 후계자 발표 이후 모두가 서로 눈치를 보며 흩어진 뒤 윤씨 삼 형제와 같이 자란 사촌 형만이 윤모난의 곁에 남았다.
“큰아버지께서 가주가 되신 이후로 가문의 모든 아이들에겐 꽃 이름이 붙었잖냐.”
“…….”
“작약이 태어나고 모두가 생각했지. 모란은 언제 태어날까. 꽃 중의 왕은 모란이니까.”
“…개소리.”
“개소리라. 큰아버지께서는 네가 태어나기도 전에 여자아이면 모란이라 짓고 남자아이면 모난이라 부르겠다 하셨지. 넌 처음부터 모란이었어.”
“…….”
“네 생모도 기억나.”
“나도 알아요. 가이드였고 능력이 대단했는데 출신이 좋지 않아서….”
“아니, 네 생모와 마주친 적 있거든.”
윤이화의 어린 시절 기억 속에서 남경의 하얀 저택 현관에 웬 임신부가 찾아온 어느 날을 떠올렸다. 이방인인 그녀는 집 안으로 들어오는 게 허락되지 않아 무거운 몸인데도 한참을 현관에 서 있어야 했다.
아직 어린 나이였던 윤이화와 작약 형제는 계단을 내려오다가 그녀를 발견했다. 처연하고 아름다운 얼굴에 이끌리듯이 그녀에게 다가간 둘째 윤약이 대뜸 물었다.
“누구세요?”
그녀는 별다른 기색 없이 대꾸했다. 아무도 아니라고. 배 속에 든 자신의 동생을 알 리 없었던 약이 손을 뻗어 슬쩍 그녀의 부른 배를 만졌다. 뒤따라온 작이 배에 올려진 동생의 손 위로 제 손을 겹쳤다.
“여기 뭐가 들었어요?”
“…도련님들의 동생이요.”
쾅! 소리와 함께 윤이화는 회상에서 돌아왔다. 옆에서 기다란 다리가 휴지통을 걷어찬 것이다. 손에 든 커피는 줄어들지 않은 채 그대로였다. 아직 입을 대지 않은 컵을 옆에 놓인 협탁 위로 내려놓자 성질을 부린 윤모난이 가져가 대신 한 입 마셨다. 윤이화는 탄식을 내뱉었다.
“알 만하다.”
“뭐가요?”
“…당연히 작약 그 녀석들은 너에게 이런 얘길 절대 하지 않았겠지. 넌 참….”
“…….”
“작약이 널 얼마나 아꼈던지…. 이런 일은 전혀 모르도록 오냐오냐 키웠어. 넌 형들의 보호 덕분에 더러운 꼴을 못 봤던 것뿐이야.”
윤모난의 손에 들려 있던 종이컵이 콰직 소리를 내며 구겨졌다. 안에 든 뜨거운 커피가 손으로 흘러넘쳐 바닥으로 뚝뚝 떨어진다. 윤모난이 그것을 바닥에 집어 던지면서 오래 참은 듯한 악을 질렀다.
“나도 알아요!”
“…….”
“나도 알아. 형들이 날 이런 일에서 멀어지게 하려고 얼마나 애썼는지. 억지로 아버지가 강요한 결혼까지 하면서….”
“…모난아, 지금 평의회에서 우리 가문의 사정이….”
“듣기 싫어요. 윤씨라면 지긋지긋하고 후계자가 될 생각도 없어요. 이 이상 저한테 강요한다면 자결하겠습니다.”
“모난아….”
“이제 가문 사람들하고 말 섞는 것도 지겨워요. 아버지한테 가서 그대로 전해요.”
기어코 윤모난은 자리를 박차고 떠나버렸다. 윤이화는 안타까운 마음에 한숨을 내쉬었다. 3년 전 정신보호센터에 데려다줄 때도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던 녀석이다. 어쩌면 그에게 일어난 비극은 배 속에 있을 때부터 시작된 게 아닐까.
그는 다시 과거로 돌아가 현관에 서 있던 윤모난의 생모와 작약의 만남을 떠올렸다. 그녀는 자신의 배를 만지는 작은 작약을 보다가 대뜸 창백한 얼굴로 웃었다. 그러더니 당부하듯이 낮게 읊조렸다.
“도련님들, 동생이 태어나면 무슨 일이 있어도 사랑해줘야 해요.”
평범한 말이지만 얼핏 광기가 서려 있는 그 눈빛으로 인해 어미의 사랑은 범상치 않은 경고가 되었다. 어린 작약은 그 광기에 눌리지 않고 천진한 얼굴로 그녀의 배에 자신의 뺨을 가만히 기대며 처음으로 동생을 불렀다.
“내 동생.”
이화와 작약이 그녀를 본 건 그날이 마지막이었다. 그녀가 사라진 자리에는 약속대로 아기가 생겼다. 쌍둥이인 작약은 요람 안에 누인 작고 하얀 아기를 보며 웃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어린 윤이화는 이유 모를 한기를 느끼며 부르르 떨었다. 어떠한 위화감이 들었던 것이다.
비슷한 감정을 또다시 느꼈던 것은 삼 형제가 훌쩍 자라 작약이 23살, 모란이 18살이 되는 해였다. 윤이화는 사촌 동생들의 갑작스러운 연락을 받고 남경의 하얀 저택으로 불려왔다. 저택의 현관을 지나 긴 복도를 걸어 삼 형제가 주로 기거하는 작은 응접실에 다다랐을 때 안에서는 나지막한 노랫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약의 목소리였다. 그가 음정 없이 거의 말하는 것처럼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말소리가 들리지 않아 무슨 노래인지 도통 알 수 없었다. 어딘가 기이하고 서글픈 곡조였다.
“…내 동생.”
문을 열고 들어가자 노래가 뚝 끊겼다. 그 안에서 작약은 항상 그랬듯이 막냇동생의 옆에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니 윤모난이 바닥에 얼굴을 파묻고 엎드린 채 깊이 잠들어 있었다. 밖에서 들은 노랫소리는 그를 위한 자장가였던 모양이다.
약이 동생의 뒷덜미에 얹고 있던 손을 떼어내며 윤이화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작도 손에 들고 있던 담배를 물고 천천히 돌아봤다. 윤이화를 부른 건 그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침입자를 보는 듯한 낯선 표정이 작약의 얼굴에 비쳤다가 사라졌다.
“작아, 날 불렀다고?”
긴장한 윤이화의 목소리가 조금 컸던 탓에 윤모난이 약간 뒤척였다. 그러자 옆에 있던 약이 입가에 손가락을 뻗어 가져갔다. 쉿. 동생의 잠을 방해하지 말라며.
작이 담배를 든 손끝으로 동생의 머리를 가만가만 건드리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화 형, 형이 해줄 일이 있어. 꽃들을 모아줬으면 해.”
“…꽃들을?”
“아주 은밀하게 시작해야 해.”
그 어느 평안하고 느긋한 오후. 아무것도 모른 채 잠들어 있는 윤모난 앞에서 쌍둥이인 작약은 갑자기 윤이화에게 자신들의 계획을 털어놓았다. 그 내용은 내내 옹송그리고 있었던 이화 배꽃을 전율케 하였다. 작약의 계획은 모든 윤씨 성을 가진 젊은 꽃을 한데 모아야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었다.
신중하고 느리게. 작약이 하려는 일은 처음 윤이화를 불렀을 때처럼 은밀하고 차분하게 진행되었다. 그러다 윤모난이 20살이 되어 서곡으로 들어왔을 때 계획은 갑작스럽게 급물살을 탔다. 그동안의 행적과는 달리 작약이 서두르기 시작한 것이다.
윤이화의 도움으로 작약 앞에 한데 모인 꽃들은 맹세했다. 남경의 가주 윤화신의 독재를 끝내고 남경에 새 주인을 세우자고.
남경 윤씨의 꽃들은 작약의 주도하에 내란을 모의했다. 윤화신의 독재를 끝내는 것. 물론 그 성공 여부는 작약에게 달려 있었다. 쌍둥이는 살부(殺父)를 약속했다. 주저 없이 아버지를 죽이겠노라고.
모든 꽃들이 그 자리에 있었다. 그러나 오직 꽃 중의 꽃인 윤모난만 없었다. 누군가 그 사실에 이의를 표명하자 작약은 흥미롭게 듣는 척하더니 퍽 상냥한 어조로 말했다.
“그러다가 내 모란에 흠집이라도 가면?”
부드러운 의문문이었지만 그것이 실현되었을 때 불러올 결과는 뻔했다. 모란에 흠집이 가면 작약이 용서하지 않는다. 모두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그건 가주인 윤화신의 가혹함에 억눌려 있던 꽃들에게는 본능적인 반응이었다. 아무도 작약에게는 반박할 수 없었다. 작약이 아니라면 누가 그들의 독재자를 죽일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모란을 향한 그 물음은 작약을 거슬리게 했다. 윤이화는 그날 또 한 번 쌍둥이 형제 앞으로 불려갔다. 약이 어린 시절 임신부의 배를 쓰다듬었듯이 사촌 형의 뺨을 매만지며 맹세를 강요했다.
“혹시 우리가 실패해도 모난이를 보호하겠다고 맹세해.”
“…그럴게.”
“아니. 말만으로는 안 돼. 우리가 없으면 형이 우리처럼 모난이를 사랑해줘야 해. 형도 기억하지?”
“…뭘?”
“내 동생을 낳은 여자가 우리에게 그랬잖아. 무슨 일이 있어도 그 애를 사랑해줘야 한다고. 형도 그 자리에 있었지.”
어린 나이에 스치듯이 마주쳤다고 한들, 윤모난의 생모와 그녀가 한 말을 잊기란 사실상 불가능했다. 그건 짧은 생에서 유독 인상적인 순간이었고 오래도록 이어질 일들의 서곡(序曲)이었으니까.
그 순간 윤이화는 작약의 두 눈에서 번뜩이는 광기를 목격했다. 그리고 동시에 누가 이 사촌들에게 저주를 걸었는지 알아챘다.
윤모난의 생모다. 그녀는 상냥한 부탁인 척 어린 작약의 귀에 저주를 불어 넣으러 온 마녀였다. 그 순간부터 이 형제는 자신의 동생만을 끔찍하게 사랑하게 되었으리라.
윤이화는 그 저주의 광경을 본 목격자로서 작약이 선택한 또 다른 저주의 대상이었다. 삼 형제간의 집착은 광기였고 독약이었다. 맹독을 품은 독사 두 마리는 자신의 아버지를 물어뜯을 계획까지 세웠다. 윤이화는 당시에도 그랬고 지금도 작약이 두려웠다. 그들이 품었던 집착에 대한 본능적인 두려움이었다.
“…너흰 결국 그 저주 때문에 죽은 거다, 작약.”
한숨처럼 뱉은 말과 함께 윤이화는 잠시 현실로 돌아왔다. 전신을 감싸는 한기에 주변을 휘휘 둘러보았지만 작약의 혼백일지언정 있을 리 없었다. 고작 기억일 뿐인 그들은 현재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그들은 죽음에 묻힌 과거였다. 작약은 죽었다. 독재를 끝내고 아버지를 죽이겠다고 한 그들의 맹세만 남아버린 셈이다.
“동생에 대한 집착 때문에 맹세를 완수하지 못하고 죽음을 자초하다니. 어리석은 것들.”
작약은 친아버지를 상대로는 내란을 모의하면서도 대외적으로는 그의 명령에 따라 가문의 적들을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제거했다. 그들에게 있어 집착과 증오의 대상은 각각 ‘모란’과 ‘모란을 해하는 모든 것’이었고, 작약은 제 동생 앞에서만 아름답게 피었을 뿐 윤모난을 제외한 모든 이들에게는 결코 그렇지 않았다.
그들은 한 쌍의 검은 독사였다. 수많은 목숨들이 그 독니에 쓰러졌다. 과거에 꽃들은 작약의 그런 잔혹함에 굴복했다. 오늘 그들이 윤모난의 강함에 굴복했듯이 말이다. 윤이화는 그제야 오늘 남경의 가주가 흘리듯이 한 말의 의미를 알아차렸다.
“작약의 죽음이 3년간 우리 모두의 눈을 가렸다. 이제 더 이상 미적거릴 수는 없어”
깨달음이 차갑게 식은 핏줄을 타고 흘렀다. 동시에 어떤 해방감이 윤이화의 온몸 가득 따스하게 퍼졌다.
3년이다. 장장 3년 동안 모든 꽃들은 작약의 망령에 시달리고 있었다. 작약의 죽음과 함께 꽃들의 맹세는 실패한 약속이 되었다. 그 누구도 그 계획들을 실행할 만한 의지와 능력이 없었던 탓이다.
그러나 애초에 그것이 함정이었다. 작약은 애초에 자신들이 아니면 이 일을 완수할 수 없다고 꽃들을 세뇌시켰을 뿐이다. 작약이 죽으면 꽃들의 맹세도 없는 일이 될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맹세는 여전히 유효하다. 주체가 바뀌었을 뿐.
윤모난.
작약이 왜 그토록 이 모든 계획에서 윤모난을 배제하고자 노력했겠는가. 윤이화는 꽃들의 맹세가 있었던 날 쌍둥이가 자신에게 저주를 건 이유를 이제야 깨달았다. 작약은 알고 있었구나.
만약 그들이 꽃들의 맹세를 완수하지 못하면 이 살부에 대한 맹세가 끔찍하게 사랑하는 막냇동생의 몫이 될 것임을.
아, 이 교활하고 지독한 내 사촌 아우들. 너희는 참으로 큰아버지 윤화신의 핏줄이로구나. 윤이화는 거리낌 없이 제 부모를 숙청한 남경 윤씨의 가주를 떠올리며 통탄했다. 윤화신이 왜 지금 와서 후계자 발표를 했겠는가. 윤모난은 배 속에 있을 때부터 무엇이 될 운명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모란은 독재자의 후계자가 되거나 아니면 내란을 성공시킬 칼이 될 존재였다.
“…아니야.”
갑자기 찾아온 깨달음에도 불구하고 오래도록 학습된 비굴함과 공포감에 윤이화는 얼굴을 숙이며 벌벌 떨었다. 무서웠다. 생전 작약의 잔혹함은 두려웠으나, 믿을 만한 방패이기도 했다. 그 방패가 사라진 지금 자신의 형제를 죽인 큰아버지 윤화신의 송곳 같은 시선이 자신에게 닿을까 너무도 두려웠다.
이제 곧 4월이다. 꽃이 가장 만개할 시기에 남경에는 매년 정치 목적의 숙청이 일어난다. 애매한 잘못도 자칫하면 크게 부풀려진다. 윤화신은 혈족의 머릿수가 너무 늘어난다 싶으면 손가락질 한 번으로 목을 매달곤 했다. 그의 쓸모없는 사생아들까지도 마찬가지였다.
모란은 홀로 그저 고고하게 피어난 꽃이 아니다. 그는 자신의 어머니, 형, 동생, 누나, 숙부, 고모, 사촌들의 피를 양분으로 자라났고, 윤화신이 가장 공들여 키운 꽃이었다. 비굴하고 나약한 얼굴을 하던 윤이화의 눈에 일순 광분이 서렸다.
‘가문을 외면하겠다고? 왜 너만 손에 피를 묻히려 하지 않는 건데?’
이제 윤모난을 포함한 우리 모두가 작약이 사라진 현실을 직시해야 할 때였다. 윤화신을 죽여야 한다.
* * *
매번 똑같은 악몽을 꾼다.
남경의 유리 정원. 참수된 독사들의 머리가 비처럼 우수수 내린다. 썩둑 썰려 떨어져 나간 독사들의 살덩이가 튕겨 오르다가 도로 땅에 처박힌다. 그 잔해들에서 흘러나온 피는 서서히 남경을 집어삼킨다. 피의 홍수 속에서 고고하게 빛나는 하얀 유리 정원 꼭대기에, 나의 형이 있다.
강하고 영민하며 아름다운 내 형.
형은 잘린 내 머리를 들고 있다. 마치 메두사의 머리를 든 영웅 페르세우스처럼. 내가 아이기스 방패처럼 그를 적들로부터 보호해주었으면. 형을 모든 죽음과 고통으로부터 멀리 떨어트려놨으면.
형의 빈 무덤을 파헤쳐서 땅속 깊은 곳에 자리 잡은 그의 죽음을 꺼내 삼키고 싶었다. 형은 부활하고 나는 죽는다. 슬퍼하는 건 형이고 대답하지 않는 건 나이다. 꾸역꾸역 살아가야 하는 건 형이고 편안하게 흙에서 썩는 건 나이다.
나약해서 미안해, 형. 그날 무간에서 죽은 게 형이 아니라 나였으면 해서.
‘…내 동생.’
형은 내 머리를 감싸 쥐었다. 그리고 말했다. 내 생각은 전제부터 잘못되었다고.
‘모난아, 형은 아직 죽지 않았어. 여기서 너를 기다리고 있거든.’
아니, 형은 죽었어. 나는 참다못해 항변했다. 그렇게 사는 건 사는 게 아니야. 형은 이미 죽은 거야. 어느새 괴물이 된 형의 동공 없는 흰색 눈알이 동생의 얼굴을 보고 있었다. 비죽 찢긴 입가에서 이윽고 알 수 없는 말들이 쏟아져 나왔다.
‘…우리 모난이가 얼른 미로에서 나와야 할 텐데.’
의미 모를 말만 하는 형 앞에서 나는 정신 나간 사람처럼 그의 죽음만을 외웠다.
‘…형은 죽은 거야. 거기 있는 건 형이 아니야.’
‘…….’
‘형?’
‘무간에서 기다릴게.’
끼이이이이이이이―
고막을 찌르는 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으레 트랜스들이 내는 기이한 비명이다. 그 소리가 내 영웅인 형의 입가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비명을 지르던 형은 피의 바닷속으로 내 머리를 툭 던져버렸다. 데구루루 굴러간 내 머리가 유리 정원의 표면에 튕기면서 덩달아 비명을 질렀다.
형과 나의 괴성이 겹치자 어느 것이 누구의 비명인지 모를 정도로 사방을 울렸다. 피에 처박혀 입안 가득 밀려들어오는 비릿함에 눈을 질끈 감았다. 입안으로 계속해서 피가 몰려든다. 꿀꺽꿀꺽 뱀의 피를 다 마시지 않으면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이 피를 모두 마시지 않으면 여기서 나갈 수가 없다.
“…….”
퍼뜩 눈을 뜬 건 꿈속에서 피를 모두 마신 직후였다. 막 잠에서 깬 윤모난은 눈만 부릅뜨고 한참을 있었다. 비명을 지른 것도 꿈이고 벌벌 떨었던 것도 꿈이었다. 지독한 악몽의 징후로 온몸이 축축하게 땀으로 젖었을 뿐 자신은 그저 시체처럼 자고 있었던 것이다.
현실감각이 바로 돌아오지 않아 꽤 오래 멍하니 넋을 놓고 있었다. 불쾌했던 가족 모임 이후 유일하게 곁에 남은 사촌 형과는 형들 얘기를 했다. 그 이후 방으로 돌아와 무작정 입안으로 약을 쏟아 넣었던 것 같은데….
윤모난은 자신이 무슨 약을 먹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침대 옆 협탁 서랍을 열어보았다. 안에는 일전에 한백호의 훈련실에서 수거한 붉은색의 수많은 알약들과 처방받은 향정신성 약이 함께 뒤섞여 있었다. 어느 쪽이건 양이 넘치게 많았으므로 무엇을 먹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결국 그는 별 소득 없이 서랍을 다시 닫았다.
상체를 일으킨 윤모난은 허전한 목덜미를 매만졌다. 5년 넘게 목에 걸려 있었던 펜던트가 없는 빈자리는 생각보다 컸다.
‘생각을 정리해야 한다.’
윤모난은 정신을 가다듬으며 스스로에게 긴요한 명령을 내렸다. 그러지 않으면 휩쓸려버릴 것이다. 아버지는 포기를 모르는 간교한 뱀이니까. 생각을 정리하자. 쓸모없고 나약한 인간. 생각을 정리해.
하지만 머릿속은 뿌연 안개로 가득 차 있었다. 생각의 회로는 음습한 늪처럼 고약한 악취를 풍기며 고여 있을 뿐 앞으로 나갈 길을 보여주지 않았다. 병신 같은 놈. 정신병자 새끼. 스스로를 다그치고 또 다그쳐도 나약한 정신은 깨지 않았다. 어느새 벽이 다시 허물어지고 있음을 직감하고 있었다.
서곡에서 돌아온 이후로부터 줄곧 그랬다. 정신이 무너지고 있다. 그 사실을 인지하고 나니 윤모난은 두려운 나머지 조금 떨었다. 그는 자신이 지난 3년 동안 그토록 벗어나려고 했던 그때로 다시 돌아가고 있음을 직감했다.
“…형.”
나약한 인간이니 의지할 대상을 찾을 수밖에. 그리고 그것은 윤모난이 가진 비극의 근원이었다. 그는 의존적인 인간이었다. 형들이 없는 현실을 못 견뎌 미쳐버릴 만큼.
침대 밑에 손을 넣어 더듬으니 권총이 잡혔다. 항상 그 자리에 숨겨놓는 물건이었다. 윤모난은 탄창을 확인하곤 총구를 바로 턱 밑에 가져갔다. 차가운 금속과 턱뼈가 맞붙자마자 날뛰던 심장박동이 슬슬 잦아들기 시작했다. 땀으로 미끄러운 손가락이 방아쇠 위에 닿으며 달칵거렸다.
생각을 정리해라. 윤모난은 스스로를 인질 삼아 총으로 위협하며 명령했다. 이것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면 차라리 죽는 게 나아. 생각을 정리해.
“…열, 아홉….”
숫자를 카운트하며 잡념이 끼어들 틈을 어떻게든 틀어막았다. 이대로 십 초 안에 진정하지 않으면 곧장 방아쇠를 당겨버릴 심산이었다. 쉭쉭 몰아쉬던 숨소리가 점차 가라앉았다. 터질 듯이 뛰던 심장도 이제 잠잠해졌다.
“셋, 둘….”
하나. 방아쇠 위를 배회하던 검지가 움찔거리고, 동시에 윤모난이 천천히 눈을 떴다.
‘아버지는 날 진정으로 후계자로 삼을 생각이 아니다.’
자신을 향한 지독한 경멸과 실망이 그 근거이다. 윤모난은 턱에서 서서히 권총을 떨어트렸다. 그러곤 권총을 가까운 곳에 아무렇게나 던져둔 뒤, 셔츠 윗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내 한 개비 물었다. 불을 붙이고 연기를 흡입했다.
자신을 향한 아버지의 경멸과 실망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명확하다. 처음부터 부자 관계가 엇나갔던 것도 아닐뿐더러, 훈련 학교 시절에는 방학 때만 집에 돌아와 마주칠 일이 거의 없으니 그에게 유난히 미움받을 일도 없었다. 아버지는 아들이 학교에서 마음에 드는 남자애와 처음 입을 맞춘 것도, 그 이후로 그런 일들이 잦았다는 것도 절대 몰랐을 것이다.
모든 것은 무정원이 남경에 왔던 어느 여름부터 시작되었다. 작약은 그를 데려오며 동생에게 친하게 지내라 말했고, 무정원이 머무르는 한 달 동안 아버지가 윤모난의 성적 취향을 알게 된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번식도 못할 돼지 새끼.”
그 이후로 윤모난은 아버지에게 번식도 못할 거세된 돼지가 되었다. 그 상대가 무정원이었기에 그의 분노는 오로지 아들에게만 향했다. 윤모난도 그 분노의 원인을 이젠 정확히 알았다. 윤화신은 자신이 공들여 키운 모란이 북해의 후계자와 놀아나자 신뢰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후계자가 되기 위해 태어났던 한 인간의 운명은 거기서 달라졌다. 윤모난은 깊숙하게 연기를 빨아들이면서 자조했다. 형들이 무정원을 자신의 놀이 상대로 데려온 이유가 너무 뻔하지 않은가. 그는 모란을 후계로 세우겠다는 아버지의 집착을 거세하기 위해 엄선된 패였다.
무정원과의 만남을 시작으로 윤모난은 보란 듯이 아버지 앞에서 남색가임을 숨기지 않았다. 형들은 단 사탕을 쥐여주듯이 계속해서 동생을 부추기고 충동질했다. 대신에 그들은 가이드의 혈통을 가진 형수들과 결혼했다.
조카들이 하나씩 태어날 때마다 윤모난은 모든 족쇄에서 점점 멀어졌다. 형들은 동생더러 가문에 매이지 말라고 할 뿐 다른 말은 전혀 하지 않았기에 윤모난은 여전히 형들의 의도에 대해서는 대부분 알지 못한다. 그들이 자신 대신 배양기 같은 노릇을 하며 지켜주었다고 이제야 어렴풋이 짐작할 뿐.
작약은 수수께끼였다. 여전히 윤곽만 보일 뿐 지금에 이르러서도 자세한 내막까진 드러내지 않는 수수께끼.
“작약의 죽음이 3년간 우리 모두의 눈을 가렸다. 이제 더 이상 미적거릴 수는 없어.”
윤모난은 오늘 아버지가 남겼던 그 한마디를 곱씹었다. 우리 모두의 눈을 가렸다니 대체 뭐로부터 말인가?
급작스러운 후계자 선정의 동기는 단지 형들의 죽음뿐만은 아닐 터였다. 3년이나 지난 일 때문에 갑자기 일이 진행될 이유는 없다. 어떤 예상치 못한 변수의 등장이 그를 움직였을 것이다. 게다가 아버지는 본래 충동적인 인간이 아니니 우연히 습득한 큐브가 원인이 되진 않았을 것이다. 그럼 과연 무엇이 가짜 후계자 계획을 실행하게 만들었을까.
가짜 후계자를 세운 동기는 몰라도 이유는 뻔하다. 적을 교란시킬 미끼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모종의 적이 존재하고 그들을 반드시 현혹해야 한다면 상황이 대충 설명된다. 하지만 막상 적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대답할 말이 없었다.
“하…. 후보가 너무 많은데.”
윤모난은 빈정거렸다. 지금껏 아버지는 손에 피를 너무 많이 묻혔다. 친아들인 자신마저도 혐오하는 인간이 아니던가.
띠띠띠띠.
한참 생각하던 중에 갑자기 손목에 찬 호출기에서 신호음이 울렸다. 호출기에 떠오른 익숙한 번호를 발견한 윤모난은 조금 망설이다가 버튼을 눌렀다.
“소식 참 빠르네요.”
―축 늘어진 목소리구나.
오후에 귀환하여 조금 피로한 듯한 무정원의 목소리도 덩달아 가라앉아 있었다.
“용건이 뭐예요.”
―지금쯤 혼란스러워 하고 있을 것 같아서. 네가 또 어리석은 선택을 할까 걱정이 되더군.
“내가 없으면 형이나 다른 가문에서는 반가운 일일 텐데요. 제가 후계자가 되면 다들 골치 아프잖아요.”
―그런 얘기 하려고 전화한 건 아닌데. 그저 네가 걱정돼서 전화했을 뿐이야.
무정원의 목소리는 얼핏 다정하게 들렸다. 항상 그렇듯이. 윤모난은 잠시간 말없이 눈을 깜빡이다가 물었다.
“형, 궁금한 게 있어요.”
―그래.
“예전에 처음 남경에 왔을 때 우리 형들이… 왜 그랬는지 형도 알고 있었던 거죠?”
―아, 작약이 날 너한테 데려간 걸 말하는 거구나. 의외의 질문인데? …음, 그래. 그때도 작약의 의도는 대충 알고 있었지.
“저희 형들이 왜 형을 골랐는지는 저도 이제 깨달았지만, 형은 왜 따랐던 거예요?”
호출기 너머로 침묵이 이어졌다. 무정원이 지금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지 전혀 예상되지 않았다. 꽤 오래 지속된 침묵 끝에 무정원의 나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유는 없어.
“…….”
―그냥 호수에서 널 본 그때, 끌렸거든.
예상치 못한 답변이었지만 곧이곧대로 믿을 만한 건 아니었다. 웃음기를 담은 무정원의 목소리가 호출기에서 이어졌다.
―나도 그때 어렸잖니. 네 형들의 술수를 알면서도 넘어갈 만큼 철이 없었던 거지.
“낭만적이기도 하셔라.”
―그렇게 비꼬다니 조금 상처인데? 나는 진심이었는데 말이다.
우리가 진심을 운운할 사이나 되었던가. 윤모난은 낭만적인 말 한마디 주고받은 적 없던 지난 관계의 본질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오히려 진심이라면…. 생각의 꼬리를 쫓던 윤모난은 순간 충동적으로 입을 떼고 말았다.
“그래서 형 동생에게 날 꼬셔보라고 시킨 거예요?”
―꼬시다니? 난 그저 가까워지라고 했을 뿐인데. 너도 알잖아. 무구원의 결벽증 말이다.
“…….”
―아…. 무구원이 내 예상을 뛰어넘은 모양이구나.
농담을 나눈 것도 아닌데 부드러운 웃음소리가 이어지다가 끝내 무정원이 말했다.
―화풀이하진 마라. 걔는 생각보다 순진하거든.
똑똑. 그때 정직한 노크 소리가 방문을 두드렸다. 안 봐도 그 순진한 놈일 게 뻔했다. 윤모난은 인사도 하지 않고 통화를 종료했다. 노크에 대답이 없자 의아하다는 듯 단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팀장님.”
윤모난은 잠시 침묵하다가 침대 위에 놓인 권총을 만지작거리며 대답했다.
“응. 들어와.”
한편 오늘 일에 대해서 전혀 아는 바가 없는 무구원은 일과를 끝낸 뒤에 윤모난의 상태를 확인하려고 들른 참이었다. 방주인의 허락을 받고 안으로 들어가자 침대 위에 그가 있었다. 입에 물린 흰 담배에서 독한 연기가 피어오르더니 공기 중으로 부서진다. 항상 그렇듯 윤모난은 아무 표정도 없이 창백한 안색이었다.
털실처럼 내려온 분홍색 잔머리를 뒤로 쓸어 넘긴 윤모난이 두 눈에 조금 탁한 기운을 담고 무구원을 빤히 바라봤다. 방 안도 그의 기분처럼 축 가라앉아 있었다. 음울한 공간 속에서 무구원은 자신도 모르게 조금 머뭇거렸다. 용건을 밝히지 않고 서 있는 그를 보던 윤모난이 먼저 물었다.
“왜.”
“…몸은 괜찮으십니까?”
“아니.”
담배 연기 너머로 상대를 주시하던 윤모난은 조금 차가운 말투로 대답했다. 그러다가 재떨이에 담배를 아무렇게나 비벼 끄더니 묻는다.
“왜. 걱정돼서 또 간섭하러 왔어?”
“무슨 일 있으십니까?”
“응, 조금 신경 쓰이는 일이 있었거든.”
“무슨….”
“집안일이야. 당신은 알 것 없고.”
재떨이를 침대 아래 내려놓은 윤모난은 목덜미를 문지르면서 조금 피곤한 표정을 지었다.
“할 말 없으면 가. 피곤해서 자려던 참이거든.”
“어디 아프신 거면 진통제 좀 가져다드릴까요?”
“아니, 자면 괜찮아져. 신경 쓰지 마.”
윤모난은 침대 위에 다시 몸을 누인 뒤 등을 돌리고 눈을 감았다. 금방이라도 기절하듯 잘 기세였다. 방해하지 말고 가라는 뜻을 분명히 전한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이마로 차가운 손이 파고들었다. 감았던 눈을 뜨자 까맣게 죽은 손끝이 보인다. 뜨거운 이마를 짚어본 무구원이 평소처럼 건조한 말투로 말했다.
“열이 있네요.”
“…무구원. 너 참….”
결국 어이없는 웃음이 터졌다. 웃겨서 그런 건 아니었다. 뒤이어 깊은 한숨도 내쉬어졌으니까. 얼굴을 돌려서 손을 떼어내려고 했는데도 차가운 손이 끈질기게 쫓아왔다.
“…참 지독하다.”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그 말에 이마 위에 얹힌 손이 약간 멈칫했다. 무구원은 이유를 물으려 했지만 더할 나위 없이 매몰찬 축객령이 그를 막았다.
“그냥 가라. 건들지 말고.”
그 한마디를 끝으로 윤모난이 자려는 듯이 도로 눈을 감았다. 더 버티고 있을 도리가 없었던 무구원은 바닥에 떨어진 이불을 주워 그에게 덮어주려 했다.
그러던 중 이불 끄트머리에 걸려 있던 무언가가 덜컹하고 떨어지는 소리를 냈다. 침대 아래 아무렇게나 던져져 있던 권총에 무구원의 시선이 조용히 달라붙었다.
“정말 괜찮으신 거 맞습니까?”
“…야, 내가 그만 나가라고 했지?”
“팀장님, 저 좀 보시죠.”
신경질을 내도 무구원이 나갈 기색 없이 고집스럽게 버티고 있자, 윤모난이 확 이불을 젖히며 몸을 돌렸다. 돌아선 그의 얼굴은 조금 묘했다.
“싫은 소리 하게 만들지 말고 꺼져.”
이 정도면 더는 건드리지 않는 것이 옳다. 한참을 망설인 끝에 무구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나갈 때까지 지켜보고 있던 윤모난은 방문이 닫히자마자 연거푸 마른세수를 했다.
기가 찬다. 그러니까 지금 저 새끼가 하는 말과 행동이 다 무정원이 시킨 짓이란 말이지. 무구원에 대해서 얼마나 큰 착각을 하고 있었던 걸까. 매사 순진하고 서툰 줄 알았더니 생각보다 섹스 스파이가 천직인 모양이었다.
“뭐 저런 새끼가 다 있어.”
괘씸했다. 괘씸함뿐 아니라 뭐라 말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이 밀려들었다. 나는 왜 저 새끼한테 아무런 말도 안 했을까. 아까 방 안으로 들어와서 이마를 짚어줬을 때 평소 성질 같았으면 이미 손목뼈를 작살냈어야 했다. 하지만 오히려 상대를 피한 쪽은 자신이었다.
아예 눈치채지 못했더라면 자괴감이 조금은 덜했을지도 모른다. 분명한 신호들을 무시하고 아니겠지, 하며 방심한 것은 결국 자신의 결정이었다. 증거가 부족하거나 아니면 무구원이 특출나게 그를 잘 속였기 때문은 아니다. 그냥 윤모난이 언젠가부터 무구원을 믿어버린 것이 문제인 것이다.
“제가 뭘 잘못했는지 모르지만 용서해주시죠. 오이 먹어드린 걸로 말입니다.”
“…….”
“사실 저 오이도 싫고 당근도 싫어합니다.”
수도에서 목숨을 구해서 나오는 길에 무구원이 그렇게 뻔뻔스럽게 굴었었다. 그 뻔뻔함을 용인하고 용서해주기로 한 것도 자신이었다. 윤모난은 그때부터 묘하게 단추를 잘못 끼웠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무구원을 남경에 데려간 충동적인 결정도 그 어긋나기 시작한 무언가의 징조였던 것이다.
“젠장.”
악몽을 꾸고 기분이 우울한 늪 깊숙이 처박혀 있던 와중에 무구원이 제게 거짓말하고 있다는 것까지 알게 되었다.
그런데 무구원이 방문을 열고 들어와 이마에 열이 있다며 손을 짚어줬을 때.
그때 윤모난은 문득 울고 싶어졌다. 그 기만적인 행동에 위로받았기 때문이다. 기분이 최악을 달릴 때마다 무구원이 자꾸만 위로가 된다. 그건 저 순진한 줄로만 알았던 놈이 너무나 능숙하게 자신을 속이고 있는데도 모른 척해주고 싶은 충동이 들 정도로 달콤했다.
윤모난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은 이 일로 그에게 화를 내지 못할 거라는 것을. 그리고 그 사실 자체가 지금까지는 깨닫지 못했던 감정의 시작이라는 것을 말이다.
* * *
“정원 님, 윤모난에게 왜 그 사실을 바로 말씀하신 겁니까?”
옆에 있던 수족 중 하나가 윤모난과의 통화를 끝내고 생각에 잠겨 있던 무정원에게 물었다. 무정원의 정예 팀이 사용하는 회의실. 그의 수석 보좌인 북해 에스퍼 몇 명과 함께 무정원은 회의 중이었다. 영사기에서 나가는 빛과 대비되는 어둠 속에 잠겨 있던 무정원이 벽에 맺힌 상을 보며 여상한 말투로 말했다.
“거짓으로 꾸며낸 덫은 딱히 위력이 없거든. 사냥감이 토끼 정도면 몰라도 범을 잡으려면 이 정도 위험은 감수해야지.”
“감수하기에는 다소 큰 듯합니다. 윤모난이 어떻게 나올지 모르는데요.”
“반대로 말하면 시험해보기에 좋은 기회이기도 하지.”
방금 통화에서 윤모난이 무구원에 대해서 물었던 것은 의외였다. 후계자 발표로 제정신이 아닌 와중에 물어본 것이 겨우 무구원이라니. 조금 놀라긴 했지만 생각보다 이르게 시험을 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었다.
“모난이가 지금껏 무구원을 꽤 특별하게 대해왔거든. 남경에 데려갔다는 소식을 듣고 그런 생각이 들었다. 무구원이 내 기대를 뛰어넘었을 수도 있겠구나, 하는….”
치안조 임무를 하러 떠나던 날, 자신의 명령에 무구원은 망연하게 얼굴을 굳혔다. 바로 표정 관리를 하기는 했지만 당혹감과 함께 스쳐 지나간 잠깐의 열망을 무정원은 놓치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보며 그는 직감했다. 어쩌면 이 덫이 꽤 위력적일 수도 있겠구나 하고. 과연 미끼가 진심인 얼굴을 하고 있으니 사냥감을 꾀어볼 만했다.
하지만 호랑이 사냥이란 것이 그리 쉬운 일이겠는가. 심지어 이번 사냥은 호랑이 가죽을 얻자는 게 아니고 그를 생포하려는 목적이었다. 향후에 길들이는 단계까지 생각하면 너무 가혹해선 안 되는 법이지. 그러니 사냥감이 미끼의 진심에 반응하기만 한다면 눈속임은 쉬울 거다.
“오늘 밤 무구원이 무사하다면 반쯤은 성공했다고 볼 수 있지. 사실은 그게 가장 어려운 거다. 사람 마음을 확인한다는 게 쉽지 않거든. 이 단계를 지나야 다음으로 넘어갈 수 있다.”
“그 둘 사이가 깊어질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보좌 중 하나가 조금 웃음기를 띠고 말했다.
“무구원의 결벽증이야 정원 님께서도 아실 텐데요. 게다가 그쪽으로 별다른 재능을 보였던 것도 아니잖습니까.”
회의실에 가벼운 웃음들이 터져 나왔다. 무정원은 검은 장갑을 낀 손끝으로 탁상을 툭툭 두드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 녀석은 내 동생인데 농담거리로 삼다니. 조금 불쾌하군.”
그 말에 일순 정적이 찾아왔다.
사실 북해 내에서 무구원이 조롱의 대상이 된 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천경교 원리주의자들이 대부분인 북해에서는 씨앗의 의식을 통과하지 못했는데도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이단으로 취급받기 때문이다. 현 가주가 병석에 오래 누워 있었던 탓에 제 아들의 방출을 공식적으로 명령하지 않았다 뿐이지 무구원은 늘 북해에서 환영받지 못했다.
그건 무정원이 무구원을 대하는 방식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북해 팀에 들어오는 것뿐만 아니라 공식적인 방문을 제외하곤 본가에 오는 것도 금지했다. 무정원은 천경교 신도들을 중심으로 자신의 지지 세력을 집결하는 데 온 힘을 쏟고 있었기에, 천경교의 교리를 거스른 동생을 안고 갈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자신의 혈족을 조롱하는 것을 용납하는 인물은 아니었다. 무구원의 존재가 조금 까다롭기는 하지만 어쨌건 그는 무정원의 친동생이다. 이런 식으로 위아래가 뒤섞이게 되면 무정원 자신을 향한 충성도 쉽사리 느슨해지는 법이었다.
“지위 고하를 따지자면 엄밀히 말해서 무구원은 너희의 윗사람인데 말이야.”
“…저희가 경솔했습니다.”
“자, 이제 내 동생 얘기는 그만하고 윤모난에 관해서나 말해볼까.”
무정원은 담배를 빼 물며 벽 쪽으로 몸을 돌렸다. 이윽고 정지되어 있던 화면이 재생되고 앉아 있는 이들에게는 익숙한 장면들이 이어졌다. 남경의 유리 정원. 참수된 독사들. 피. 그리고 윤모난의 머리를 들고 있는….
화면이 정지되고 난 뒤 가뜩이나 조용하던 회의실의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몇 번을 돌려봐도 충격적인 영상이었다. 무정원마저도 조금은 놀랐으니까. 설마하니 한때는 벗이었던 윤약의 얼굴을 이렇게 다시 보게 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한 탓이다.
“…윤약이 트랜스가 되다니. 모난이가 그렇게 정신 못 차렸던 이유를 알 만하군.”
지금 재생되고 있는 것은 윤모난이 지난날 자신의 팀원들을 위해 공유했던 뇌 의식 영상이었다. 규정상 녹화나 외부 반출이 안 된다던 병동 에스퍼의 말과 달리 그 화면은 버젓이 무정원의 앞에서 틀어지고 있었다.
작약의 죽음과 트랜스화에 관해서는 암암리에 소문이 돈 적 있었다. 하지만 사건의 진상을 알고 있을 남경 윤씨들이 모두 입을 다물었기에 그 누구도 사실을 확인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 그 장면을 직접 목격한 동생 윤모난의 트라우마가 직접적인 증거가 되어 지금 그 사실을 증명하고 있었다. 무정원은 자신의 보좌인들에게 물었다.
“이걸 어떻게 써먹을지 상의해보도록 하지. 저것과 관련해서 다른 기록이 있나?”
“화면에 나온 윤모난의 뇌 의식 영상에 따라, 윤약이 정말 트랜스로 발현했다는 가정하에 면밀히 조사해보았습니다만… 지금까지 무간에서 현상 유지 S급 트랜스와 교전한 사례는 보고되지 않았습니다. 저 괴물이 어디에 어떻게 박혀 있는지도 모를 일이고요.”
“옷장 속의 괴물이군. 저걸 바깥으로 튀어나오게 할 방법은?”
다들 별다른 수를 궁리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그렇게 무정원의 담배가 필터까지 다 타들어갈 때쯤 한 보좌인이 의견을 냈다.
“괴물이 꼭 옷장 밖으로 나와야 할 필요가 있습니까…? 옷장 안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다들 벌벌 떨 텐데요.”
“무슨 의미지?”
“저 괴물이 저래 봬도 윤화신의 친아들 아닙니까. 괴물이 되어도 그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만일 아들이 죄를 지으면… 사람들이 그 죄를 누구한테 묻겠습니까.”
“논리적 오류가 있군. 방금 전까지는 옷장 밖으로 괴물을 꺼낼 필요가 없다고 하지 않았나?”
“저 괴물을 이용하려면 몇 가지 사건과 말이면 충분합니다. 지금까지 윤화신은 약이 트랜스가 된 사실을 숨겨왔습니다. 그런데 그 괴물이 된 아들이… 무간에서 대원들을 죽인다면요? 아니, 그 괴물이 죽였다고 사람들이 생각하게 된다면 말입니다.”
그 괴물이 꼭 나타날 필요는 없다. 이 시나리오에는 죽은 사람과 말만 있으면 되니까. 치밀하게 짜인 판 위로 약간의 쇼만 더해주면 사람들은 모두 옷장 속에 괴물이 있다며 무서워할 것이다.
“신입 대원들이 지금 무간에 견학을 가 있습니다.”
“…….”
“다 죽인다면… 증거가 될 일도 없죠. 물론 목격자 한 명은 남겨야겠지만요. 이왕이면 말이 잘 통하는 사람이 좋을 겁니다.”
자리에 있는 모두가 침묵했다. 개중에는 조금 긴장했는지 꿀꺽 침을 삼키는 사람도 있었다.
“…그중에는 북해 출신도 있을 텐데.”
누군가 조금 머뭇거리면서 말하자, 의견을 낸 남자가 대답했다.
“북해 출신이라면 고통을 마땅히 긍정할 줄도 알겠지.”
무정원은 손끝으로 느리게 책상 표면을 두들겼다. 이윽고 그는 결정을 내렸다.
“…바로 출정할 수 있는 명령서를 써주지. 너희 세 명이면 족할 거다.”
지목받은 셋은 고개를 숙이며 명을 받들었다. 하명 받은 일에 대해서는 한 번도 실패한 적이 없었던 수족들이었다. 이런 일은 손 하나 까딱이는 것만큼 쉬웠다. 무간에서는 항상 사람들이 죽어나가니까. 장갑 낀 손을 내려다보는 무정원의 입꼬리가 비릿하게 뒤틀렸다.
“이렇게 또 죄를 짓게 되다니. 어머니 신께 또 용서를 구해야겠군.”
하지만 그는 누구보다도 어머니께 가장 사랑받는 아들이었다. 지금까지 늘 그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