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 양철 심장 (9/24)

9. 양철 심장

다음 날 무구원은 새벽 일찍 방을 나섰다. 어젯밤 침대 아래에서 총을 발견한 뒤부터 한숨도 자지 못했기에 러닝이라도 해서 복잡한 생각들을 가라앉힐 생각이었다. 거실로 나오니 굳게 닫혀 있는 윤모난의 방문에 절로 시선이 갔다. 문을 벌컥 열고 안을 확인하고 싶은 충동도 들었으나 이내 그만두기로 했다.

윤모난은 줄곧 자신에게 복종을 요구해왔다. 그건 특정한 행동 방식만을 따르라는 명령이었고, 그의 말에 따르면 자신은 고작 주인을 기다리는 개와 같은 신세나 마찬가지였다. 그의 삶에 깊이 개입해서도, 그어놓은 선을 넘어서도 안 된다. 다행히 무구원은 자신의 본분을 지키는 일에 평생을 바쳐왔고 그에 따라 행동하는 데엔 익숙했다.

현관에 앉아 운동화 끈을 조금 길게 고쳐 묶고 있는데, 저쪽에서 문이 열리고 내내 걱정했던 사람이 곧이어 등장했다. 우연히 방을 나서다 무구원을 발견한 윤모난이 먼저 물었다.

“이 새벽에 뭐 해?”

“조금 뛰려고요.”

딱히 궁금해서 질문한 건 아니었는지 윤모난은 대꾸 없이 거실을 가로질러 냉장고 쪽으로 향했다. 물 한 병을 꺼내 마시는 모습은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무구원은 조금 고민하다가 윤모난에게 물었다.

“열은 좀 괜찮으십니까?”

“응.”

대화가 묘하게 붕 뜬다. 말과 말 사이가 건조하게 쩍쩍 벌어져 있어 그 틈새로 뭔가 더 말을 붙이기 무안할 정도로. 하는 수 없이 이만 일어서 나가려는데, 윤모난이 불쑥 등 뒤로 다가왔다.

“이거.”

내민 손에는 큐브가 있었다. 고개를 돌려 확인하고 건네받으니 윤모난이 입가에 맺힌 물방울을 손등으로 쓱 닦으면서 말했다.

“당신이 가지고 있어. 어제 잃어버릴 뻔했거든.”

“네, 알겠습니다.”

“전에 당신이 말했던 그 연구조 에스퍼. 만나러 갈 방법 생각해뒀으니까 오후에 가자. 훈련 끝나고 여성 대원 구역으로 가는 초소 앞에서 만나.”

윤화신의 화사들로부터 귀신같이 사수한 큐브를 무구원에게 넘기면서 윤모난은 짧게 용건만 전달했다. 어제의 불상사를 알 리 없는 무구원은 화근이 된 큐브를 얌전히 챙겨 넣었다. 그러자 윤모난도 돌아서서 다시 방 안으로 들어간다. 씻고 나갈 준비를 하려는 모양이었다.

…무슨 일이지. 궁금증이 들었으나 어쩐지 물어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무구원이 그 의문을 해결하게 된 건 결국 다른 사람을 통해서였다. 사건은 합동 훈련 시간에 발생했다.

“잠깐 휴식.”

3년 차 대원들의 정기 합동 훈련 시간은 주에 한 번 있다. 평소에는 출정이다 뭐다 해서 훈련이 축소되거나 인원이 적은 경우가 많은데, 오늘따라 유독 출정하는 팀이 적은지 훈련 시간이 길어져 중간에 휴식 시간이 주어졌던 참이었다.

어제 남경의 후계자와 관련된 이슈가 있었으므로 저마다 몰려들어 한마디씩 떠들어댄 것도 예삿일은 아니었다. 잡담을 나눌 만큼 친한 동기가 없는 무구원과 경해국만 몰랐을 뿐. 이유는 간단하다. 아무래도 2부 7팀 꼴통 둘이 대련할 때마다 동기들 팔다리 하나씩은 분질렀던 경력 때문일 것이었다.

힘으로 그들과 겨룰 수 없었던 나머지 동기들은 그들을 철저하게 따돌리는 방법을 선택했다. 뭐 거창한 따돌림은 아니고 전혀 없는 사람 취급할 뿐이었다. 딱히 그런 태도들이 신경 쓰인 적도 없었는데, 오늘따라 분위기가 조금 묘했다. 둔한 경해국마저 감지할 정도로.

“아, 시팔. 저 새끼들 왜 저렇게 흘끔거리면서 쳐다봐?”

대련장 바닥에 구겨져 누워 있던 경해국이 상체를 일으켰다. 헐렁한 도복 바지에 한쪽 팔을 반 정도 집어넣고 한 손에는 담배를 든 불량한 자세였다. 경해국은 만사에 무심한 주제에 성질머리의 뇌관이 가끔가다 특이한 방식으로 터지고는 했다.

특이하다는 건 딱히 종잡을 수도, 예측할 수도 없다는 뜻이다. 어제는 가벼이 넘기나 싶어도 다음 날이면 더 작은 일에 화를 낸다. 그간 윤모난에게 여러 방식으로 경고를 받아온 탓에 성질을 조금 죽인 감은 있었지만, 팀장이 없으면 말짱 도루묵이었다. 경해국이 도복 바지에서 팔을 빼며 벌떡 일어났다.

“씨팔, 이 개새끼들아! 바퀴벌레처럼 그만 속닥거려라. 할 말 있으면 와서 하든가. 거슬리게 지들끼리 바글바글대고 지랄이네. 모여서 뭐 맛있는 거 처먹냐? 나도 먹자.”

하도 오래 싸움을 안 해서 온몸이 근질대기도 했던 경해국이 대뜸 욕을 박으며 다가가자, 주변의 시선이 사방으로 흩어진다.

“저 가스통 새끼, 또 시작이다…. 야, 가자.”

“어딜 가.”

경해국은 잽싸게 흩어지던 동기 중 한 명의 목덜미를 붙잡았다.

“야, 왜 봤냐고.”

“뭐… 뭐가?”

“씹, 네가 나를 수줍은 짝사랑 상대 보듯이 꼬나봤잖아. 토 나오게 말이야.”

“내가 언제?”

“그럼 무구원이냐? 짝사랑 상대가 저쪽이었어?”

무구원은 경해국이 겁 많은 동기를 협박하며 앞뒤로 짤짤짤 흔드는 광경을 구경하고만 있었다. 딱히 경해국의 취미 생활에 끼어들고 싶은 마음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곧이어 동기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너네 아직도 몰라?”

“뭐가?”

“아니, 2부 7팀 팀장 말이야.”

“뭐. 우리 팀장? 분홍 머리?”

“…그래. 너네 팀장이 또 누가 있어…. 어제 오전에 남경의 윤화신이 서곡에 왔다잖아.”

익숙한 이름에 무구원의 시선이 동기에게 바로 고정되었다. 이윽고 그가 떠도는 소문, 아니 사실에 대해 털어놓았다. 어제 윤화신이 윤모난을 후계자로 삼겠다고 선언했는데, 좁디좁은 서곡센터에 소문 쫙 깔린 지가 언젠데 그걸 아직도 몰랐냐는 핀잔은 덤이었다.

“…이제 너네 팀장이 후계자 되면 2부 7팀은 어떻게 되는 거야?”

“어떻게 되다니, 시팔, 뭔 뜻이여?”

“아… 아니, 무구원은 북해고 넌 동산이잖아. 남경의 후계자가 왜 다른 가문 출신들이 있는 팀의 팀장을 맡아.”

“아하, 고게 궁금해서 바퀴벌레 같은 놈들이 더듬이를 더듬더듬 세웠구만. 이것들….”

경해국은 대답 대신 그 요망한 더듬이를 뽑아주겠다며 가여운 동기의 머리를 한 움큼 뽑아낸 다음 발로 엉덩이를 차서 쫓아버렸다. 그리고 손안에 나뒹구는 동기의 머리카락을 바닥에다 탁탁 털면서 자리에 돌아와 앉는다.

“난 또 뭐라고. 씹, 나 욕하는 줄 알았네. 아, 심심해.”

바로 흥미가 떨어져버린 경해국과는 다르게 무구원은 조금 심각해졌다. 이거였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어젯밤부터 계속 날 서 있었던 윤모난이 떠올랐다. 그 와중에 경해국은 별 대수롭지 않다는 말투로 말했다.

“잘됐네.”

“뭐가?”

“윤 팀장, 이제 우리 끌고 무간으로 간다고 안 할 테니 다행이잖아.”

경해국은 시답지도 않다는 듯이 담배 필터를 잘근잘근 씹으면서 중얼거렸다.

“너도 알고 나도 알고 찌찌 애비도 아는 사실이지만 말이야. 팀장… 머리통이 조금 맛이 갔잖냐. 지금껏 내가 말을 안 해서 그렇지, 우리가 무슨 자살 특공대도 아니고 무간에 가면 뻔하잖아. 그 무모한 성격 때문에 우리 다 뒤질 수도 있다고.”

“…….”

“그런데 후계자가 되셨다니까 이제 그런 계획도 쫑이지. 난 좋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숙소 가는 길에 선물로 팀장 좋아하는 소주 한 박스나 사서 줘야겠네.”

좋은 일이라고? 무구원의 미간이 구겨졌다. 윤모난의 반응이야 뻔했다. 당연히 후계자 자리에는 관심도 없을 테고 오히려 그 자리는 그에겐 불행일 뿐이다. 남경에 갔을 때 느꼈던 가족들의 적대감. 큰형의 죽음. 그리고 트랜스가 된 작은형까지. 모든 것이 복잡한 거미줄처럼 얽혀 있었지만 윤모난이 바라는 것은 단순했다.

오로지 무간에 가서 괴물이 된 형을 구원하는 것. 무구원이 그다음을 예상하는 것은 딱히 어렵지 않았다. 윤모난에게 그다음은 없다. 그가 살고자 하는 미래는 딱 거기까지일 테니까. 윤모난은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이지만 정해진 시간을 살아간다는 점에서 파악하기 어려운 유형은 아니었다.

그런데 이런 일들이 자꾸만 불쑥불쑥 그의 목적에 끼어든다. 주변만을 탓할 수도 없을 거다. 윤모난은 그런 운명을 타고난 사람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윤모난에겐 주변의 욕망들이 그를 향해 몽땅 휩쓸려가는 경향이 있으니까.

순간 무구원은 견딜 수 없이 자신의 뺨을 내려치고 싶어졌다. 자신을 이용해 각자의 욕망을 채우려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윤모난이 얼마나 외로웠을까.

…자신마저. 무구원 자신마저 사실관계의 시작을 그런 식으로 망쳤다. 이젠 무엇 하나 돌이킬 수 없는 지경까지 이르렀을지 모르는데, 자신은 아직 선택을 미루고 있었다. 윤모난과 가문, 둘 중 하나를 선택하지 않고 욕심만 키워오지 않았는가.

“우리 사촌이 윤모난 팀장이랑 동기인데, 예전에 자살 시도하고 난리도 아니었대. 다른 남경 출신들도 착잡한가 봐. 형들이 죽어서 없어진 자리를 서자가 꿰찼다고.”

“와, 사실은 그런 척만 한 거 아니야? 솔직히 이복형제끼리 무슨 정이 그렇게 도타워서 따라 죽으려고까지 하냐. 아니 진심이라고 해도 좀 징그럽지.”

무구원이 자괴감에 빠진 사이, 다시 슬금슬금 돌아온 대원들의 가십은 윤모난의 정신 병력과 자살 시도 그리고 출신까지 망라하고 있었다. 경해국과 무구원이 딱히 더 반응하지 않자 윤모난을 씹어도 된다고 생각했는지 낮추던 목소리들이 조금 대범해진 것이다.

“윤 팀장 인기 많네. 머리 색 바꿔야 하는 거 아니냐? 이제 신분도 있는데 삥끄는 솔직히 경망스럽지.”

경해국은 악의 없이 평소대로 빈정댈 뿐이었다. 하지만 그 한마디가 자책과 후회로 복잡하던 무구원의 뇌를 단숨에 비워버렸다.

…바꾸다니. 그 누구도 윤모난에게 그런 걸 요구할 권리는 없다. 그가 고집스럽게 유지하고 있는 어떤 성질들은 윤모난 그 자체이고 그건 누구도 침해할 수 없는 그만의 영역이었다.

그 사람이 그 사람답게 존재하는 것.

윤모난은 당연히 그 단순한 것을 바랄 권리가 있다. 그러한 생각이 들자 순간 무구원은 저쪽에서 윤모난을 단 몇 단어로 규정하는 말들을 견딜 수 없어졌다.

“엥? 야, 무씨, 어디 가. 뭐야? 저 새끼들 때리게?”

물어볼 것도 없었다. 무구원이 안심하고 떠들고 있던 동기들에게 다가가고 있었던 것이다. 긴 다리를 성큼성큼 옮겨 눈 깜짝할 사이에 한 놈의 멱살을 추켜올리는 모습을 봤을 때 경해국은 얼이 빠지고 말았다.

무구원이 대련에서 사람 몇 명을 조지긴 했어도 실생활에서 함부로 주먹을 휘두르는 놈은 아니다. 옛 팀장을 혼수상태로 만들었을 때는 참회의 의미로 몇 달간 꼬박꼬박 병문안을 갔던 또라이 중의 상또라이긴 하지만 상식에서 벗어나는 부류는 아니었다.

다혈질인 경해국과 그가 그동안 별 탈 없이 지내왔던 건 그들이 사돈이 될 사이기도 했지만 무구원이 별로 도발에 넘어가는 성격이 아닌 덕이기도 했다. 그랬던 무구원이 윤모난이 오고 나선 정신을 좀 빼놓고 산다 싶더니, 이젠 팀장 욕 몇 마디에 발끈해서 먼저 싸움을 걸고 있었다.

“무씨, 너 사춘기냐? 너무 때리지는 마. 팀 스코어 깎인다고… 나처럼 겁만 줘.”

경해국은 혹 이쪽에 불똥이 튈까 말리는 척만 했다. 말없이 동기의 멱살을 쥔 무구원의 표정은 평소와 다를 것 없어 보였지만 매서운 눈빛이 꼭 사람을 쏘아 죽일 기세였다. 도대체 뭐가 거슬려서 안 하던 시비까지 거나 싶은 생각도 잠깐, 정신 차렸을 땐 무구원이 기어코 주먹을 날리고 있었다. 다른 곳도 아니고 입만 집중해서 후려치는 모습에 경해국은 뒤통수를 긁적였다.

주둥이 조심하라는 경고라도 하는 건가. 의심은 더 이어지지 못했다. 자신의 동기를 구하려 다른 대원들이 달려드는 광경을 보면서 자신도 자리에서 일어나야 했기 때문이다. 휴식 시간은 순식간에 패싸움으로 변질되고 말았다.

* * *

센터에서 대원들 간의 패싸움은 종종 사소하게 벌어지는 이벤트이지만 어찌 되었건 그냥 넘어가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오늘 이 사건도 결국 각 팀원의 팀장들을 호출하는 결과를 불러왔고 당연히 거기에는 2부 7팀 팀장도 포함이었다.

윤모난이 감찰부에 도착했을 때 본 광경은 가관이었다. 얼굴이 피떡이 된 십여 명의 다른 대원들 사이에서 뽀얀 얼굴을 한 경해국과 무구원. 누가 봐도 일방적인 폭력이다. 감찰실에 들어서자마자 윤모난은 경해국의 머리부터 퍽 갈겼다.

“경해국, 또 시작이냐?”

“아니…. 무슨, 시팔! 무구원이 시작한 겁니다. 이번엔 나 아니에요! 저는 무구원이 맞을까 봐 낀 겁니다.”

“…뭐?”

믿었던 모범생에게 배신을 당했다. 윤모난의 시야에 바른 자세로 앉아 있는 무구원이 들어왔다. 너무 후련해 보이는 얼굴이어서 그 이유를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뭔데, 무구원? 왜 싸운 거야.”

“…….”

다가올 재앙이 두렵지도 않은지 또 고고한 독립투사처럼 버티는 무구원을 앞에 두고 윤모난은 머리를 신경질적으로 쓸어 넘겼다. 치미는 화를 가라앉히려 감찰부에 제출한 경위서를 받아 읽고 난 뒤, 분노는 곧 황당함으로 변해버렸다. 폭행 사유를 적으라고 주어진 A4용지 위에 단지 ‘모독’이라는 두 글자만이 적혀 있었던 것이다.

“…모독? 신성모독이냐? 쟤네가 뭐 어머니 신이라도 욕했어?”

황당함이 묻어나는 질문에 경해국마저도 사유서를 들여다보더니 얼굴을 찌푸렸다. 아무래도 무구원이 그렇게 적었던 건 몰랐던 눈치이다.

“아니… 저놈들이 팀장님 뒷담화 좀 까던데. 무씨, 너 진짜 그것 때문에 싸운 거였냐?”

여전히 무구원은 대답이 없었다. 이 황당한 광경에 감찰부에 있던 십여 명의 피떡들과 다른 팀장들이 묘한 시선으로 여길 주목하고 있었다. 모두 2부 7팀이 의리와 의협심으로 폭력을 행사했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는 눈치였다.

사실 그건 다른 사람들의 오해이긴 했다. 경해국은 옷차림이 마음에 안 든다는 걸로도 남에게 시비를 걸어대는 인간이었지만, 무구원은 알량한 의리 같은 걸로 주먹을 쓰는 법이 없지 않았나.

무구원에게는 일종의 원칙이 있었다. 그는 자신의 정의에서 벗어난 일은 용납하지 않는다. 팀장 세 명, 팀원 다섯 명을 때렸을 때도 무구원은 원칙이 어긋났으니 목숨으로 갚으라며 대련을 신청했다.

전 팀장은 무간의 차원에 균열이 생겨 수도 일부가 함락되었을 때 약자인 아이들을 구출하지 않았다. 그 결과 아동 병원 하나가 통째로 무너져 내려 수많은 사상자를 냈다. 그런 건 반도에서는 흔하다면 흔한 비극이라고 할 수 있었기에, 뇌물과 비리가 만연한 서곡센터에서는 당시 팀장에게 미미한 처벌을 내렸다. 그러나 무구원은 바로 팀 훈련 날 팀장의 잘못된 결정에 동조한 팀원 대다수에게 대련을 신청했다.

팀원 대다수를 은퇴의 길을 밟게 한 그 죽음의 대련 이후로 도축 살인마라는 꺼림칙한 별명은 얻게 되었으나 어찌 됐건 그건 원칙에 따른 폭력이자 자력으로 행한 징벌이었다. 물론 그 누구도 무구원에게 그러라고 하지 않았고 실상 그에게 그런 자격이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당시 무구원은 대련에서 과도한 폭력의 이유를 묻는 감찰부에 신성모독이라는 어설픈 핑계를 댔다. 광신도, 종교 원리주의자, 원칙주의자 같은 무시무시한 단어들로 똘똘 뭉친 그의 머릿속은 가끔 범인(凡人)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 있었다.

“뭐야, 무구원. 여기 상처 났네. 다쳤어?”

무구원의 단정한 얼굴에 미세하게 긁힌 상처를 발견한 윤모난은 미간을 찌푸렸다. 누군가 살기 위해 손을 휘젓다가 손톱으로 할퀸 모양이다. 그런데 지금껏 그 어떤 말에도 대꾸하지 않고 버티던 무구원이 그 말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런데 그 순간 반대쪽 뺨으로 매서운 손이 날아들었다. 쫙―! 무구원의 얼굴이 홱 돌아갈 정도의 위력에 감찰부 안의 모두가 움찔 떨었다.

“별일도 아닌 걸로 바쁜 사람을 오라 가라 해? 누가 내 뒷담화 단속해달라고 했냐.”

“…….”

“야이 씨, 이 새끼야. 죄송하다고 안 해?”

윤모난이 또 손을 위로 치켜들자 마지못한 사죄의 말이 튀어나왔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기어코 윤모난은 뺨 한 대를 더 내려쳤다. 고통에는 꽤 무딘 무구원마저 골통이 흔들리는 느낌에 눈을 깊게 감았다가 떴다. 방금 윤모난이 감정을 못 참고 폭발시킨 이 폭력은 단순히 오늘 패싸움으로 인한 것만은 아니었다.

그건 기만에 대한 징벌이었다. 윤모난이 가장 혐오하는 짓을 한 상대에게 내릴 수 있는 가장 약한 처벌이기도 했다. 무구원은 자의든 타의든 간에 자신을 이용하려고 했다. 심지어는 그 짓을 꽤 잘해서 마음을 흔들고 있었다. 그러면서 섹스 파트너 이상은 될 수 없다며 선을 그었던 윤모난을 우습게 만들었다.

윤모난이 보기에 무구원은 여전히 가문과 자신을 두고 저울질하는 중이었다. 형 말이라면 넙죽 기고 보는 광신도에게 그것이 얼마나 큰 혼란일지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자신을 선택지 취급하는 것에는 괘씸죄가 따라붙었다.

누군 감정이 뒤죽박죽 얽혀서 정신없어 죽겠는데, 여전히 무구원은 진실을 털어놓지 않았다. 무정원의 명령을 받았다고.

윤모난은 바보가 된 기분이었다. 그어놓은 선을 넘은 것은 자신이고 무구원은 오히려 그 선을 착실하게 지키고 있는 쪽이었다.

“죄송합니다. 팀원들 관리에 더 신경 쓰겠습니다.”

윤모난은 바로 돌아서서 맞은 사람들에게 고개 숙여 사과했다. 팀장이라면 당연히 해야 하는 행동이었다. 뒷담화를 하는 동기들을 흠씬 두드려 패면서 무구원의 죄책감이나 마음 한구석은 조금 편해졌을지언정, 그건 사실 윤모난을 위한 것이 아니다. 오로지 무구원 자신의 마음만 편해지는 일이니까.

그래서 윤모난은 흔쾌히 허리를 숙일 생각이었다. 이것도 일종의 복수라면 복수였다. 무구원이 쉽게 죄책감을 덜게 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어떤 감정이든 무거운 추가 되어 그의 마음에 매달리도록 만들 셈이었다. 저 무감각한 로봇의 양철 심장도 양심에 찔리는 고통이란 걸 느껴봐야 한다.

“윤 팀장, 뭘 그렇게까지 사과해. 이제 위치도 있는데 이러면 오히려 우리가 부담스럽지….”

제 팀원들이 피떡이 되든 말든 능청과 아부를 떠는 다른 팀 팀장의 말에, 윤모난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좋은 일 있다며? 후에 큰일을 할 사람이 이런 작은 일에 허리를 숙여도 되겠어? 뭐 대원들 간의 싸움이야 흔한데.”

“그 건과 오늘 일은 무관한 듯하네요. 언급하시는 이유도 모르겠고요. 아무튼 사과드립니다.”

윤모난의 냉랭한 반응에 먹히지도 않을 이야기를 하던 팀장도 입을 다물었다. 감찰부에서 경해국과 무구원에게 내려진 징계를 협상할 때도 그 냉철함은 여지없이 발휘되었다. 징계 수위를 두고 감찰부 관리자와 윤모난은 꽤 오래 입씨름을 해야 했다.

“일방적인 폭력이라니요? 우리 팀원이 시작한 건 사실이어도 엄연한 쌍방 폭행입니다. 쪽수도 우리 팀원들이 더 적었구요.”

“…2부 7팀 둘은 거의 생채기도 나지 않았잖아요. 저쪽은 다들 중상이고요. 대체 어디가 쌍방입니까.”

“생채기가 없긴요. 무구원 대원의 얼굴을 누가 흉하게 긁어놨던데, 긁어놓은 얼굴의 가치를 생각하면 중범죄 아닙니까.”

윤모난은 귀찮은 얼굴로 대충대충 말하면서도 듣는 사람들의 입장을 다 난처하게 만들고 있었다.

“중…범죄요?”

“고려청자 같은 얼굴에 흠집을 냈으니 중범죄 맞잖아요.”

“…윤 팀장님 진심이십니까?”

그렇게 묻고 싶은 건 뒤에서 듣고 있던 경해국과 무구원도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본인은 그 고려청자한테 강스파이크를 두 대나 날려놓고서 뻔뻔하게 할 소리는 더더욱 아니었다.

“얼굴 말고 볼 건 없는 놈인데 여자 친구가 밤낮으로 울기라도 하면 어쩝니까. 팀장으로서 면목도 없고… 가벼운 징계로 끝내시죠. 이미 경해국은 근신 중이고, 무구원은 감봉도 받은 상태이구요.”

“…무씨, 너 여자 친구 있었냐.”

“…아니.”

경해국이 슬쩍 무구원에게 물었으나. 물으나 마나 한 일이었다. 가족이 아니면 여자 쪽으로는 고개도 안 돌리는 놈이 무슨 여자 친구가 있겠는가.

“시팔…. 그래, 있을 리가 없지. 고려청자? 시팔….”

“…….”

뻔뻔한 팀장이 갖은 사기와 능청을 떤 덕분에 결국 징계는 시말서 정도로 끝났다. 감찰부 쪽에서도 알았으니 헛소리하지 말고 대충 꺼지라는 뜻인 것 같았다. 어차피 징계로 점철된 인생이었으므로 대단한 것도 아니었다.

“좆같네.”

문제아 두 명을 데리고 사무동 건물을 나오자마자 윤모난은 담배를 물며 쌍욕부터 뱉었다.

“좆같은 새끼들한테 고개나 숙이고…. 야!”

뒤에서 처분을 기다리고 있던 무구원과 경해국에게로 대뜸 매서운 호령이 떨어졌다. 경해국은 오늘 윤모난의 손에 죽는다면 자신이 미리 써놓은 유서가 무사히 사랑하는 약혼자 무자연과 부모님께 잘 전달되기만을 바라고 있었다. 그 정도로 윤모난은 눈알에 핏대가 빨갛게 서 있어서 건드리면 꽝, 터질 폭탄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의 생각과는 달리, 윤모난이 뻑뻑 피워댄 탓에 순식간에 짧아진 담배 필터를 송곳니로 콱 깨물며 뱉은 건 영 다른 소리였다.

“오늘 나랑 갈 데 있으니까 둘 다 따라와.”

“…네?”

“두 번 말하게 하지 마.”

“네.”

무구원은 대답하면서도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오늘 저녁에 분명히 여성 구역에 있는 연구조 에스퍼에게 큐브를 의뢰하기 위해 접촉하기로 했었다. 그런데 그 일이라면 경해국도 따라나서라고 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일과 시간도 거의 끝났는데 갑자기 어디를 가야 한다니 황당한 건 경해국도 마찬가지였다.

“어딜 가야 하는데요?”

“가면서 말해줄 거니까 그냥 따라와.”

“그… 저는 정신 상담… 받으러 가야 하는데요….”

어딘가 꺼림칙했던 경해국이 정신 상담 핑계를 댔지만 윤모난은 같은 정신병자 주제에 유세 떨지 말라며 으름장을 놓았다. 결국 경해국은 한 시간 뒤에 여성 대원 구역으로 가는 초소 쪽으로 오라는 명령을 듣고 발길을 돌렸다. 경해국이 사라지고 둘만 남자 분위기는 금방 어색해졌다.

“팀장님.”

결국 무구원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왜.”

“어제 있었던 일 이제야 듣게 되었습니다. 묻고 싶은 게 있는데… 혹시 남경에서 그때, 제가 하루 더 있자고 한 게….”

“무구원, 지금 나한테 할 말이 그것밖에 없어?”

어느새 인적 없이 외진 길에 접어든 두 사람은 걸음을 멈추고 서로를 봤다. 윤모난은 점점 신경이 곤두섰다.

하고 많은 말 중에 겨우 꺼낸 게 그거라니. 무구원이 신경 써야 하는 건 남경 문제가 아니라 자신이 한 거짓말이었다. 남경에 갔을 때 조카의 눈물 바람을 외면하고 돌아가려 마음먹은 자신을 설득한 그 일이 뭐가 그리 대단해서.

“무슨… 말씀 이신지.”

답을 알려주는 대신 윤모난은 눈앞의 무뚝뚝한 로봇에게 마지막으로 기회를 줬다. 말할 기회를. 하지만 무구원에게서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무구원은 맹목적으로 자신의 가문과 종교만을 사랑하라 배웠을 테니.

“…그래, 끝까지 말하지 마. 그래야 무구원 너답지.”

그리고 그 단순한 맹목성은 윤모난이 가장 경계하면서도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끌리는 것이었다. 저녁이 지나 어둑어둑해진 시간, 윤모난은 무구원을 끌고 나무가 우거진 어둠 속으로, 직면해야 하는 모든 진실을 가리는 무지의 영역으로 끌어당겼다.

그리고 거친 입맞춤으로 총명한 말들을 가려버렸다. 집요하고 거칠게 입술이 여린 살갗 깊숙이 파고들자 차마 뱉지 못하고 입안에서만 맴돌던 서로의 말들은 거친 입맞춤에 의해 흩어졌다. 여린 살갗 깊숙이 집요한 혀가 파고들자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 같았다.

막무가내로 밀려들어오는 축축한 혀의 감각에 무구원은 알 수 없는 모욕감을 느꼈다. 고개를 돌려 피하려 하자, 윤모난은 순순히 떨어져 나가는 대신에 맞아서 부어오른 뺨을 뜨거운 혀로 핥아 올렸다. 어둠 속에서 음산한 목소리가 경고하듯 읊조렸다.

“파트너 하겠다며, 거부하는 거야?”

“…….”

“그런 표정은 전혀 꼴리지가 않는데.”

무구원은 어둠 속에서 겨우 윤곽만 드러난 윤모난의 얼굴을 보며 불안함을 느꼈다. 무언가 심각하게 어긋나고 있음을 깨달은 것이다. 그건 자신의 신변보다는 윤모난에 대한 불안이었다. 그의 상태가 더 삐걱거리고 있었다.

미세하게 가 있던 금이 점차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커져가고 있다. 남경에 다녀온 이후로 유독 걷잡을 수 없는 느낌이었다. 순간 무구원은 가슴 깊숙한 곳에서 저릿한 통증을 느꼈다. 제 짝사랑 상대가 미쳐가고 있는데, 자신은 망연히 지켜보는 것밖엔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좌절감 때문에. 고작 윤모난을 욕하는 사람을 때려 화풀이하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못한다는 게….

“또 머리 굴리지?”

윤모난이 다른 생각에 빠져 있는 무구원의 짧은 뒷머리를 바짝 움켜쥐었다. 뾰족하게 드러난 아래턱에 코끝이 닿자 무구원이 미간 사이를 좁히며 한숨처럼 말했다.

“…왜 이러시는지 말로 설명해주시면 저도 알아듣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안 하셔도요.”

“…….”

“단지 팀장님의 성적 흥분을 위해 이러시는 거라면 참겠지만 말입니다.”

무구원의 말은 바로 비웃음으로 반박당했다.

“아니, 별로. 흥분한 건 오히려 너 같은데?”

한편 윤모난은 가학심과 피학심에 동시에 사로잡혀 있었다. 자신의 마음을 어렴풋이 깨달은 지금, 상대를 몰아붙이는 것으로 그 두 감정을 해소해야만 했다.

물론 이 감정에 대해 서로 터놓고 대화를 한다는 선택지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윤모난은 말랑한 감정 따위는 부인하고 싶었다. 그건 자기혐오와 자괴감을 불러일으키는 약점의 상징이고, 무엇보다 윤모난이라는 존재 그 자체를 철저하게 부정하는 것이기에.

사랑 없이 ‘만들어진’ 사람에게 그런 감정은 찾아올 때마다 자신이 철저하게 부정당하는 기분을 동반한다.

“팀장님.”

“그만해달라고 울면서 빌면 그만두고.”

“…제가 오늘 팀장님 일에 괜히 나서서 이러시는 겁니까?”

“아니, 틀렸어.”

“…….”

“틀렸으니까 혼나야겠다, 눈물 쏙 빠질 때까지.”

틀렸다니. 무구원이 혼란에 빠진 가운데 윤모난의 눈빛은 점점 변하고 있었다.

“울어본 적 있어? 무구원?”

“…….”

“영 로봇 같잖아. 크게 웃지도 않고 울지도 않고. 태어났을 때도 안 울었을 것 같은데…. 맞다, 7살이 될 때까지 한마디도 안 했댔지. 그럼 소리 질러본 적도 없어? 아프거나 슬플 땐 어떻게 했지?”

“…그게 왜 궁금하십니까.”

“너한테도 감정이란 게 있는지 궁금해서 묻는 거야. 오늘 다른 인간들 팰 때 무슨 생각 했어? 화났어?”

또 한 번 맥락을 알 수 없는 대화였지만, 무구원의 생각은 말의 틈새를 파고들었다. 윤모난은 오늘 패싸움의 원인을 신경 쓰고 있는 것이겠지. 어제 허락 없이 이마를 만지며 열을 체크했을 때 뱉은 지독하다는 말도 아마 같은 맥락에서 기인했을 것이다.

윤모난은 지금 왜 자꾸 ‘선을 넘는’ 행동을 하느냐고 묻는 것이다. 한낱 파트너 자리에 만족하겠다 약속해놓고 허용되지 않는 감정을 품었다는 사실을 들켜버렸다. 윤모난이 질색하고 귀찮다고 말했던 그런 감정들 말이다.

“화났었냐고 묻잖아.”

“네….”

“왜?”

“전 팀장님의 다리이니까요.”

그래서 지금으로서는 이 묘한 거짓말만이 유일한 답 같았다. 이것만이 유일하게 허락된 발화일 테다.

“그럼 내가 어떻게 하든 납득할 거야?”

“…….”

“거짓말하긴.”

예상치 못한 부정에 무구원은 정말로 어설픈 거짓말을 들킨 아이처럼 눈을 크게 뜨며 윤모난을 바라봤다. 윤모난의 입가엔 작은 비웃음마저도 사라져 있었다. 굳게 다물렸던 입술 사이를 독사 같은 혀가 찢고 나오더니 무구원의 목덜미를 탐닉하듯 훑어 올렸다. 혀가 지나간 곳 위로 까득거리는 소리와 함께 살갗을 찢는 알싸한 통증이 올라왔다.

“아윽―!”

“거짓말을 실감 나게 하려면 말이지. 눈물이라도 흘렸어야지.”

“뭐, 하시는…!”

“울어보라고, 이 새끼야.”

살점 깊숙한 곳에 딱딱한 이가 푹 파고들었다. 무구원은 고통으로 얼굴을 일그러트리면서도 가만히 굳어 있을 뿐이었다. 잠시 후 이가 떨어져 나가자 목덜미에서 뜨거운 피가 주룩 흘렀다. 윤모난이 놓치지 않고 그 선혈을 쭉 빨아 마셨다. 가학적인 행동 안에 노골적으로 뒤섞인 성적인 의도에 무구원은 더더욱 머리가 복잡했다. 자신의 말이 왜 오히려 윤모난을 자극했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윤모난은 이번엔 무구원의 아랫도리를 거칠게 움켜쥐며 방금 상처를 낸 목덜미 아래에 다시 한번 이를 박아 넣었다. 본능적인 두려움과 압박이 등줄기를 쓱 타고 올랐다. 무구원은 단단히 버티고 선 그를 밀어내봤지만 꿈쩍도 안 했다.

“…팀장,님!”

“울었어?”

“…….”

“여기서 벗겨야 울래?”

윤모난은 마음먹으면 정말 그렇게 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무구원에겐 그를 이길 능력이 없었다. 그만하라는 말이 목젖까지 치밀어 오르는 그때, 버클이 거칠게 풀리더니 껍질이 벗겨지듯 지퍼가 내려갔다.

“팀장님… 여기 밖입니다.”

“난 상관없어.”

미치광이의 논리 앞에선 겨우 짜낸 이성의 말조차 힘을 잃었다. 윤모난은 무구원의 팔을 뒤로 꺾어 나무 기둥에 거칠게 밀어붙이며 완전히 제압시켰다. 무력감과 수치심을 주는 자세도 그렇지만, 이로써 확실해진 게 있었다. 이전에 회의실에서 했던 섹스와는 달리 이번 행위는 철저한 복종 훈련의 일환이었다.

그렇다면 윤모난은 고통이든 성적 쾌감이든 수단을 막론하고 써먹으면서 복종을 받아내려 할 것이다. 무구원이 반항할 의지를 잃은 것은 그 깨달음 때문이었다. 거친 나무 기둥에 얼굴이 짓이겨지고, 곧 등 뒤에서 압박하던 윤모난의 손이 속옷 안으로 순식간에 파고들었다.

늘 참는 것에 익숙한 무구원은 본능적으로 제 입술부터 이로 콱 짓씹었다. 윤모난의 거친 손이 살덩이를 위로 훑어 올리자 압박된 자세에서 꼬리뼈 쪽이 절로 움찔거렸다. 아마도 제 몸이 그렇게 경련할 때마다 윤모난은 손아귀에서 생명이 펄떡거리는 쾌감을 얻고 있을 터였다.

완전히 상대를 통제하고 쥐었다는 만족감을 얻었는지 윤모난의 입가에서 뜨거운 숨이 뱉어졌다. 그 숨이 이미 빨갛게 달아오른 무구원의 귓바퀴를 달궈서 익혀버릴 것 같았다. 손길이 닿는 곳마다 서늘하고 또 뜨거웠다.

“구원아, 울어.”

“으…!”

윤모난이 ‘구원아’라고 부르는 건 두 번째였다. 좋아하는 사람이 자신을 그렇게 부르는 것을 무구원은 견딜 수가 없었다. 이 당황스러운 상황에서도 그는 철저하게 흥분하고 윤모난을 원했다. 밀어붙여져서 일방적인 수음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마주 보고 그의 몸 안에 파고들고 싶었다.

하지만 무구원은 그 또한 윤모난이 허락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욕망을 참느라 핏줄이 굵게 선 주먹을 펴서 제 눈가를 가렸다. 여지없이 들려오는 비웃음과 함께 거친 손이 압박을 가했다. 직접 봤을 때 윤모난이 질린 표정을 짓기도 했던 성기가 샅샅이 농락당하는 와중에도 ‘울어봐’라는 명령이 날아들었다.

힘이 들어간 허리가 굽혀질 때마다 뒤에서 무릎이 파고들어 계속 자세를 고정시키는 탓에 묶여서 당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과도한 쾌감을 느끼려 할 때면 여지없이 악력이 센 남자의 손이 단속이라도 하듯 귀두 끝을 꽉 조였다. 종내에는 참느라 꽉 물었던 입술이 이에 베일 것 같기도 했다.

꽉 물린 잇새에서도 조금씩 신음이 새어 나갔다. 고장 난 수도꼭지처럼 아무리 잠가도 찔끔찔끔 흐르는 것을 막지 못하고 무구원은 윤모난의 요구 앞에 개같이 바짝 엎드리기 일보 직전이었다. 이미 척척하게 흘러나온 쿠퍼액을 윤활제 삼아 상하 운동을 하던 손이 여린 살갗을 건드릴 때 무구원은 겨우 ‘…그만’이라며 애원했다.

“그만하라고…?”

순간 자극을 가하던 손짓이 멈췄다. 거칠게 자극하던 수음에 뚝뚝 물을 흘리던 성기가 그 잠깐의 멈춤에도 아쉬워하며 꺼덕였다.

“또 거짓말하네. 그만두고 싶은 게 아니라 나한테 쑤셔 박고 싶은 거잖아.”

“…….”

“내가 너한테 올라타서 울었으면 하는 거잖아. 왜 나만 울어야 해?”

빈정거림이 아니라 어딘가 진심이 섞인 그 말에 무구원이 뒤를 돌아보려 했지만, 윤모난은 자신을 보지 못하도록 그를 팔로 압박했다.

“…내가 정신병자라 쉬워 보였어?”

“팀장님….”

“생각보다는 쉬울지도 모르지. 그러니까 너부터 울면서 빌어봐. 응해줄 테니까.”

윤모난이 다시 붉게 달아오른 성기를 손으로 감싸 쥐자 무구원은 불에 덴 듯이 잘게 경련했다. 불안과 절망, 그리고 충실하게 피어오르는 열락이 무구원의 정신을 혼곤하게 뒤흔들었다.시야가 뿌예지고 실언이라도 할 것 같아 무구원은 기도할 때처럼 나무에 이마를 쿵쿵 찧으며 저항했다.

그러자 윤모난의 다른 손이 찢어지기 직전인 이마를 감싸며 뻣뻣한 고개를 자신에게로 돌렸다. 축축한 혀가 다가와 핏방울이 맺힌 입술을 달래듯이 훑으면서 입 안쪽의 부드러운 점막을 토닥인다. 방금 전까지 매를 들었던 엄마가 마무리로 아이를 안아주듯이 사뭇 다정한 제스처였다.

김이 날 정도로 체온이 높아진 무구원은 토닥임을 받자마자 해갈하듯 목 뿌리 있는 곳이 시큰해짐을 느꼈다. 긴장했던 근육이 이완되며 몸에 힘이 풀렸다. 윤모난의 손이 호되게 벌만 받던 성기 끝을 부드럽게 문지르자 입에서 짧게 감탄사가 뱉어졌다. 사정감과 함께 더는 참을 수 없는 말이 튀어 나갔다.

“…합니다.”

결국 작게 말꼬리를 뱉어내고야 말았다. 숨길 수 없는 감정이 눈물 대신 터져 나옴과 동시에 윤모난의 손에서 무구원은 사정했다.

“제가 팀장님을 좋아합니다.”

끈적거리는 액체가 손을 타고 흘러내렸다. 아직 잔열이 남은 얼굴에 흐리멍덩한 검은 눈이 자신을 돌아보는 그 순간, 윤모난은 덫에 걸려버렸다는 느낌을 받았다. 무구원의 한껏 풀어진 얼굴이 견딜 수 없이 보기 좋았다. 윤모난은 자기부정과 혐오 사이로 파고드는 간지러움이 낯설었다.

이런 거였구나. 무정원이 원하던 것이. 미끼가 진심인 얼굴을 하고 있으니 속절없이 당할 수밖에. 하지만 이토록 무기력하게 당하는 건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나 너네 형이랑도 잤어.”

“…….”

“예전부터 계속. 서곡에 돌아와서도 그랬고.”

윤모난이 손을 놓고 뒤로 물러섰을 때 그에게 완전히 기대어 있던 무구원이 살짝 비틀거렸다. 항상 단정하던 머리가 땀에 젖은 이마에 달라붙고 옷은 여기저기 구김이 간 흐트러진 모습으로. 기차에서의 첫 대면과는 상당히 다른 지금의 무구원은 윤모난의 작품이었다.

상대에게 미친 부정적인 영향력의 정도로만 봤을 때 당장 커다란 위기를 맞은 쪽은 오히려 무구원이라고 하는 게 옳을지도 모른다. 윤모난이 착실했던 광신도 모범생을 타락 신자로 만들어 진창에 처박았으니까. 만약 그를 이대로 놔둔다면 무구원은 망가질 것이었다. 윤모난은 조금 서글퍼졌다.

“내가 예전에 어디까지 타락할 각오가 됐냐고 물은 적 있었지. 이런 것도 각오했어?”

“…….”

무구원은 대답할 수가 없었다. 줄곧 본능적으로 느꼈던 어긋남과 균열의 실체를 맞닥뜨리는 순간이었다. 계속 거짓말을 하지 않으면 윤모난의 곁에 있을 수 없다. 어설펐던 지금까지와는 달리 더 잘해야만 했다. 윤모난은 진실을 바라지만 사랑은 원하지 않는다. 복종을 명령하지만 걱정은 쓰레기통에 처박는다. 변해야 하는 건 자신이었다. 혀뿌리를 감았던 금언의 밧줄이 풀려서는 안 됐다.

다행히 무구원에게는 기회가 있었다. 시간을 돌려 고백을 철회할 기회가. 있었던 일은 그냥 없었던 일로 만들면 된다. 윤모난의 얼굴이 저렇게 비참하게 일그러지지 않도록 돌려놓으면 될 일이었다.

무구원의 호흡 한 번에 비참한 3분의 시간들은 뭉텅이로 잘려 나갔다. 다시 한번 윤모난의 손에 사정하면서 무구원은 이번엔 입을 열지 않았다. 좋아한다고 하지 않았다. 대신 모든 것이 끝났을 때 먼저 몸을 떨어트렸다. 그리고 옷차림을 다시 정돈한 뒤 제 셔츠를 벗어 더러워진 윤모난의 손을 닦았다.

“죄송합니다.”

단정한 자세의 묵례와 함께 약간 쉰 목소리가 때아닌 사죄를 전했다. 무구원은 윤모난의 손 위로 가지고 있던 큐브를 쥐여주곤 그를 지나쳐 먼저 어둠 속을 빠져나갔다.

* * *

경해국이 한 시간짜리 정신 상담을 마치고 약속 장소로 갔을 때 만난 건 윤모난뿐이었다. 좋지 않은 표정으로 담배를 태우던 윤모난은 설명 없이 경해국을 끌고 무작정 초소 쪽으로 갔다.

재킷 안쪽에서 빨간색의 두껍고 광택 있는 종이를 꺼내 초소 경비 담당에게 건네자 금남의 구역으로 가는 문이 손쉽게 열린다. 한두 번 드나든 솜씨가 아닌 듯 윤모난은 망설임 없이 철문 안쪽으로 발을 내디뎠다. 다급하게 경해국이 브레이크를 걸었다.

“팀장님! 뭡니까? 여긴… 들어가면 안 되는데… 무씨 그놈은 어디 갔구요?”

“무구원은… 도망갔어. 그러니까 너나 잘 쫓아와.”

“뭘… 아니… 여긴 들어가면 안 된다구요!”

경해국은 무작정 철문 안으로 자신을 끌고 가는 팀장에게 간언했지만 들어먹질 않았다. 이렇게 슈퍼 드나들듯이 여성 대원 구역에 함부로 들어갔다간 잘릴 수도 있다. 자기야 남경의 후계자니까 여기서 걸리면 배 째라 드러누우면 어떻게든 되겠지만 자신은 아니었다. 백번 양보해 다른 건 다 따라도 이것만은 찝찝하고 싫었다.

초소 문을 통과해서 울타리를 타고 쭉 오른쪽으로 가던 중에 경해국은 더는 안 되겠다 싶었는지 윤모난의 손목을 콱 붙잡았다.

“시팔…! 들켰다간 우린 바로 잘리고 난 파혼당한다구요!”

“안 들켜. 걱정 마.”

“…정말입니까?”

“어. 들킬 일 없어. 정확히는 이쪽에 통로가 있어서 가는 거지, 다른 곳에는 안 들어가. 예전에도 여러 번 다닌 길이야. 서곡에서는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곳인데, 경해국 당신 왕따야?”

서곡 왕따인 경해국은 생전 처음 들어보는 이야기였다. 윤모난은 적당히 핑계를 섞어가며 그를 어르고 달랬다. 비밀 임무를 맡은 게 있는데, 그 일을 해결하기 위해선 이런 식으로밖에 접촉할 수밖에 없다며.

윤모난이 지금 향하는 곳은 서곡센터 안에 있는 일종의 비밀 사교 클럽이었다. 이 사교 클럽은 다섯 가문의 망나니 자제들, 특히 내놓은 자식들이 모여 만든 일종의 놀자판이었는데, 당연히 윤모난도 예전에 종종 드나든 적 있었다.

“서곡에서 이 클럽만 통하면 못할 게 없어. 예를 들면 센터를 잠깐 나가는 것도 가능하거든.”

막다른 벽에 있는 벙커의 지하로 내려갔을 때, 경해국은 ‘센터를 나가는 것도 가능하다’의 말뜻을 이해했다. 낡은 문을 두드리자, 문에 달린 작은 창으로 누군가가 안쪽에서 확인한 뒤 푸른 빛 안으로 그들을 끌어당긴 것이다.

반도에서 공간 이동 능력을 사적으로 이용하는 것은 매우 엄격하게 제한되어 있었다. 공간계 에스퍼들은 무간으로 가는 차원을 열 수 있는 유일한 능력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사소한 일에 능력을 남발하다니 아무래도 불법적인 냄새가 진동했다.

“…비밀 임무는 개뿔. 여기 완전 구린내 나는데. 대체 어디로 온 겁니까? 위치가 어디예요?”

“정확히는 나도 모르지. 이 안쪽에서는 서곡으로 가는 문 말고는 아예 문이 없거든.”

“그럼 공간계 에스퍼가 없으면 시팔… 이 찜통에 불이 나도 도망갈 구석도 없겠네요.”

“어. 그러니까 제발 불은 내지 말아주라.”

무사히 연구조 에스퍼와 접선해야 하니까 말이다. 게다가 이 찜통에서 문제를 일으켜서 좋을 건 하나도 없었다. 특히 윤모난은 때가 때이니만큼 행동을 들키지 않는 것이 중요했다. 요즘은 특히 자신에게 시선이 쏠려 있는 시기가 아닌가.

길고 어두운 통로 안으로 들어갈수록 귓전을 때리는 요란한 음악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코너를 돌아 두꺼운 문을 열었을 때는 붉은 조명과 함께 사이키가 요란하게 돌아가는 난장판이 펼쳐졌다. 그 안은 수많은 사람으로 뒤엉켜 하나의 검은 덩어리가 움직이는 것 같았다. 뿌연 담배 연기와 매캐한 공기가 가득 찬 클럽에서 윤모난은 인파를 가르며 경해국을 데리고 안쪽으로 향했다.

“경해국.”

“예!”

“두리번거리지 마.”

그러나 경해국은 이런 데 와본 적도 없었고, 어떻게 놀아야 하는 줄도 몰랐다. 비트와 함께 쿵쿵 울리는 진동과 점멸하는 조명에 정신이 나가기 직전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윤모난의 튀는 분홍색 머리가 여기서도 여지없이 빛을 발휘해서 플로어에 있는 사람들의 시선이 따라붙는 것이 느껴졌다.

윤모난은 무표정한 얼굴로 플로어를 지나 한쪽 계단으로 향했다. 아래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난간이 있는 2층으로 가자 벽을 따라 놓인 소파에서 흐느적거리는 인간들이 있었다. 가장 안쪽의 커다란 가죽 소파에 앉아 있던 무리가 복도를 따라 오는 윤모난을 발견하고 마시던 술잔을 내려놓았다.

“이게 누구야, 윤모난이잖아?”

“누나 오랜만이에요.”

“뭐야, 놀러 왔니?”

“네, 여기 혹시 김동희라는 연구조 에스퍼가 있을까요?”

윤모난과 대화를 튼 건 검은색 원피스를 입은, 이 사교 클럽의 현 주인이었다. 그녀는 절대 기억력을 가진 에스퍼였기에 윤모난의 옆에 선 경해국의 신분도 단번에 알아봤다. 여자는 ‘김동희’라는 에스퍼의 행방을 묻는 윤모난의 말을 듣고서도 능청을 떨었다.

“웬일로 모난이가 여자를 찾아 여기까지 왔을까?”

“아… 그게, 어쩌다가 첫눈에 반해버렸는데… 한번 꼬셔보려고요. 어디 있는지 알 수 있을까요.”

말도 안 될 정도로 성의 없는 핑계에 테이블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웃음을 터트렸다. 그 와중에 윤모난 뒤에 서 있던 경해국은 소파 끝에 앉아 있던 대원 한 명이 자신의 엉덩이를 빤히 쳐다보는 것에 몸서리치며 윤모난에게 바짝 붙었다. 이어서 클럽의 주인은 새로운 흥밋거리를 놓치지 않으려는 듯이 빈 유리잔 두 개를 마련해 얼음과 함께 위스키를 부어 건넸다.

“첫눈에 반했다고? 어쩌다 그랬는지 얘기 좀 해봐. 그럼 알려줄게.”

“…간지럽고 설레는 이야기라서 술맛 다 떨어지실 텐데.”

“여기서는 나 안 통하면 아무도 못 만나는 거 알지? 네가 말하는 그 짝사랑 상대 말이야. 어떻게 알아 왔는지는 모르지만. 쉽게 만날 수 있는 사람이 아니거든.”

그녀는 윤모난이 모종의 이유에서 연구조 에스퍼와 만나려 한다는 것을 모를 리 없었다. 여긴 듣는 귀가 많으니 짝사랑 핑계를 댔다는 것도. 다만 심심하던 차에 딱 맞춰 윤모난이 귀여운 경씨까지 데리고 등장했으니 이 흥취를 놓칠 이유가 없었다.

예전에 윤모난이 몇 번 형들인 작약을 따라 이 클럽에 놀러 온 적은 있었다만, 작약이 동생의 목줄을 어찌나 바짝 잡고 있었던지 막냇동생에게 접근하는 사람들을 교묘하게 통제했던 탓에 형들의 감시 없이 윤모난과 대화를 하는 것도 처음이었다. 당시의 윤모난은 적당히 가볍고 제멋대로인, 말 잘 듣는 남경의 개로 보였다.

작약이 제게 목줄을 채워놓았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앞마당이 제 세상 전부인 줄 아는 유순하고 귀여운 개. 아마 형들이 뒤에서 섹스할 상대까지 하나하나 통제했다는 건 지금도 모를 거였다. 기형적인 형제애를 제삼자의 입장에서 본 그녀는 작약이 죽고 난 지금의 윤모난이 궁금했다.

“그렇게 계속 버티고 서 있을 거니? 아, 지금도 형들 허락 없으면 이런 자리에 안 앉아?”

형들 얘기에 윤모난의 눈썹 끝이 약간 꿈틀댔다.

“좀 앉아봐. 이왕이면 내 무릎에 앉아서 곱슬거리는 털도 만지게 해주면 좋고.”

“얘도 귀엽네. 몇 살이야?”

소파 끝에서 아까 전부터 경해국을 노리고 있던 여자가 물었다. 조금 날 선 대화에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던 경해국은 자신도 모르게 대답을 해버렸다.

“23살이요. 왜요.”

“눈은 왜 애꾸야? 야성적이다. 야.”

“…트랜스로 폭주할 것 같아서 태웠는데요.”

그 정직하고 직선적인 대답에 자리에 앉은 모두가 소리 높여 웃었다.

“쟤 마음에 든다. 너무 귀여워.”

“누나들 이놈은 약혼한 몸이니까 좀 봐주세요.”

경해국에게까지 마수가 뻗치는 사이 여유를 되찾은 윤모난은 한숨을 푹 내쉬며 자리에 앉았다.

“전 임자 없으니까 털을 쓰다듬든, 엉덩이를 만지든 상관없는데. 내가 찾는 사람은 오늘 안에 꼭 만났으면 하는데….”

“그건 너 하기에 달렸지, 모난아.”

“그럼 누나한테만 말해줄게요. 됐죠?”

이윽고 여자에게 바짝 붙어 앉은 윤모난이 고개를 돌려 그녀의 귓가에 무언가를 속삭이기 시작했다. 윤모난이 막아준 덕분에 경해국은 무리 없이 여자들과 조금 떨어진 곳에 앉을 수 있었다. 대체 왜 자신을 데려왔는지 모르겠지만, 썩 보기 좋은 광경은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무씨 그놈이 왔으면 여길 정화한답시고 성수를 뿌리고 기도를 한 뒤에 사탄 마귀를 퇴치하겠다 난리 블루스를 피웠을 텐데. 대체 무슨 비밀 임무길래 팀원들을 이 퇴폐한 곳까지 끌고 오려 한 건지. 그마저도 무씨 이놈은 냄새를 맡고 도망쳤고.

경해국은 콜라 캔 하나를 따서 꿀꺽 넘기면서 윤모난을 감시하기 위해 그쪽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윤모난은 여자의 귓가에 뭔가를 꽤 길게 말하고 있었는데, 이따금 청자의 입가에서는 깔깔거리는 웃음이 터졌다. 팔을 여자의 어깨에 두르고 몸을 바짝 붙인 윤모난은 말하다 보니 뭔가 동하기라도 했는지 열심히도 설명하고 있었다.

‘저러고 있으니 참 인간이 가벼워 보이네. 제비도 아니고, 쯧쯧.’

경해국은 간간이 말하다 말고 목을 축이기 위해 술을 들이켜는 윤모난을 보며 혀를 찼다. 자고로 사내라면 아랫도리 함부로 놀리지 말고 무릇 한 여자에게 순정을 바쳐야 하거늘. 윤모난은 그런 순정에 농약을 뿌릴 법한 인간이다. 경해국은 안타까워졌다. 사랑의 아름다움을 모르는 이는 얼마나 불쌍한가. 때아닌 동정심이 피어올랐다.

실제로 한 시간 전쯤 무구원의 순정에 농약을 뿌린 윤모난은 요구받은 대로 자신의 절절한 짝사랑 이야기를 끝냈다. 꽤 긴 이야기를 들은 그녀가 묘한 기운을 담은 눈빛으로 물었다.

“어머, 모난아. 그런 짓을 해놓고 상대가 네 마음을 받아주길 바라?”

“…음, 그런가요?”

“너 미쳤다고 하더니 정말로 제정신이 아니구나. 아무래도 집안 내력이려나?”

“…….”

“그런 짓을 당하고도 상대가 널 좋아한다면. 그놈도 미쳤다고 보는 게 맞을 텐데. 아, 맞다. 남자가 아니라 여자랬나?”

음역대가 높은 웃음소리가 찌르듯 깔깔깔 울려 퍼졌다. 윤모난은 어깨를 으쓱대며 말했다.

“하긴요, 저한테 로맨스는 무슨.”

“상대가 널 좋아한다고 하면 인정할 준비는 되어 있고? 그냥 고백하지 마. 너처럼 이기적인 애는 외사랑밖에 못하거든.”

“아…, 여기 연애 상담 하러 온 거 아닌데.”

“무슨 소리야? 내가 바보인 줄 아니? 사실은 연구조 에스퍼인지 뭔지보다는 그 누구를 더 신경 쓰는 거 같은데. 아니야?”

대놓고 지금까지의 연막을 걷어버리는 그 말에 윤모난의 얼굴에 맺혀 있던 서비스용 웃음이 싹 사라졌다.

“누나, 짜증 나는 말은 이제 집어치우고 약속이나 지켜요. 장단 맞춰주고 싶은데 오늘은 제가 컨디션이 별로라.”

싸가지 없는 놈. 하여간 윤씨는 불쾌한 족속들이야. 여자는 손목의 호출기 화면을 툭툭 건드린 다음 어딘가로 신호를 전송했다. 고개를 까닥여 슬쩍 위치를 알려주자 윤모난이 미련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경해국도 따라나서려 했지만 어깨를 꾹 눌리며 저지당했다.

“아니, 당신은 여기서 놀고 있어. 그러라고 데려온 거니까.”

“네에?”

“있어. 금방 올 거야.”

일행이 자리에 있어야 잠깐 자리를 비운 게 크게 눈에 띄지 않는다. 이 안에 누가 있는지 모르는 상황에서는 이런 식의 눈속임밖에는 답이 없었다. 윤모난은 경해국을 놔두고 미로처럼 얽힌 복도로 들어갔다. 코너마다 여기서 일하는 가드들이 지키고 있었는데 이미 연락을 받았는지 무리 없이 들여보내줬다.

용도를 알 수 없는 수많은 회색 문 중의 하나가 방문자를 위해 열려 있었다. 윤모난은 직감적으로 그곳으로 들어가 바로 문을 닫았다.

방에 들어가자마자 연구조 에스퍼 김동희로 추정되는 여자가 등을 돌린 채로 앉아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여긴 불법적인 의뢰를 받으면 사용하는 일종의 작업실인 듯 보였다. 복잡한 기계 장치와 부품이 널려 있는 방 안에서 무언가를 하고 있던 김동희가 이쪽을 확인하지도 않고 웬 종이부터 꺼내 내밀었다.

“기밀 유지를 위한 협의 사항과 의뢰 가격에 대한 종이예요.”

“가격은 상관없습니다. 이거 무슨 물건인지 좀 알아봐주실 수 있나요?”

윤모난은 주머니에서 은색 큐브를 꺼내 내밀었다. 큐브를 받은 김동희가 동그란 안경알을 손끝으로 쓱 올리면서, 유심히 물건을 살폈다.

“이게 뭐죠? 큐브?”

“전원이 켜지면 주변 파동을 감지할 수가 없는 걸로 봐선 파동 탐색 방해 장치 같더군요.”

“아…, 이런 형태는 처음 보는데요.”

김동희는 이제야 관심이 생기는지 큐브와 윤모난을 번갈아 보더니 물었다.

“이게 뭔지 정확히 알아보고 싶다는 거죠?”

“네.”

“알았어요. 두고 가세요.”

“그게 답니까?”

“뭐가요?”

“무슨 물건인지도 모르는데 아무런 경계도 없이 맡는다 싶어서 그럽니다.”

윤모난의 말에 김동희는 그제야 작은 손전등을 들어 꼼꼼히 큐브를 확인했다. 그녀의 시야에 부품 안에 새겨져 있는 일련번호가 들어왔다.

“전 심부름꾼이에요. 물건이 뭔지는 어차피 본진으로 보내야 알 수 있는 거고요. 뭐 의뢰는 핵폭탄도 받기야 받을 수 있으니까 이런 장난감 정도야….”

“아, 본진이 아니고 심부름꾼이시군요.”

윤모난이 연구실 안쪽을 유심히 둘러보는 가운데 김동희가 자신의 능력으로 큐브를 공중에 띄워 해체했다. 그러곤 다시 조립하더니 귀찮다는 듯 쏘아붙였다.

“물건 의뢰하러 왔어요, 아니면 취조하러 온 거예요?”

“아닙니다. 시간은 얼마나 걸릴까요?”

“의뢰가 밀려서 꽤 걸릴 거예요. 기다리세요.”

김동희가 주머니에서 호출기 하나를 꺼내 내밀었다. 그건 흔히 팀원들 간에 교신을 위해 쓰는 호출기와 같은 것이었다. 약간의 조작을 거쳐 위장용으로 만든 듯했다.

“이걸로 연락드릴게요. 제때 연락이나 받으세요.”

다시 방을 나왔을 때는 채 10분도 지나지 않은 시각이었다. 생각보다 의뢰 조건은 까다롭지 않았다. 조금 수상하긴 하지만 사교 클럽 안에서 벌어지는 일이라면 비밀이 새어나갈 걱정은 안 해도 되겠지.

윤모난은 다시 자리로 돌아가기로 했다. 복도를 따라 쭉 이어진 회색의 용도 모를 방들을 지나치는데, 반대편 끝의 방문 하나가 벌컥 열렸다. 얼굴을 보이지 않으려 무심코 고개를 돌렸지만 실패한 듯했다.

“모난아?”

사촌 형 윤이화였다. 눈이 마주쳐 별수 없이 다가간 윤모난은 방 안쪽 공간 안에 가득 앉아 있는 무리를 발견하자마자 얼굴을 굳혔다. 남경 윤씨의 꽃들이 웬일인지 방 안에 모두 모여 있었던 것이다.

이상한 때와 장소에서 벌어진 모임이었다. 방 안에 있던 꽃들의 시선이 모란에게 쏟아졌다. 얼핏 들여다본 방 안에는 상석인 두 자리를 비워두고 십여 명의 꽃들이 있었다. 누군가가 부재한 두 자리에 윤모난의 시선이 닿았다. 자연스레 형들이 떠올랐다. 그 연쇄적인 연상은 곧 확신이 되었다.

사촌 형 윤이화가 방 안으로 초대한 것이다. 다시는 가문 사람들과 말도 섞지 않겠다고 소리치고 떠난 것이 바로 얼마 전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또 무더기로 가족들과 마주치게 되다니. 나올 얘기들이 너무 뻔해서 상대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아니요. 내가 있어야 할 자리가 아닌 것 같은데요.”

“모난아, 부탁이야. 이렇게 마주칠 거라고는 우리 모두 예상치 못한 건 사실이지만, 이렇게 만났는데 대화 좀 하자.”

“이제 봄인데 다들 몸조심 좀 하죠. 아버지가 봄마다 피를 보려 혈안이 되어 있는데, 이런 모임은 위험할 텐데요.”

“…….”

윤이화의 안색이 금방 창백해졌다. 안에 있던 꽃들 중에서도 바로 낯빛을 굳히고 동요하는 사람이 몇 보였다. 남경의 가주 윤화신의 독재와 폭압에서 자란 꽃들은 가주의 이름만 들어도 벌벌 떨었다. 여기서 그의 손에 제 부모나 형제를 잃지 않은 행운아는 몇 없었다. 그런데 그 수많은 겁쟁이들 틈에서 누군가 크게 혀를 차며 웃었다.

“윤모난! 우리 걱정이나 하고 역시 넌 팔자가 좋구나.”

쾅―! 한 여자가 빈자리에 놓여 있던 의자 두 개를 옆으로 걷어차며 다가왔다.

“도화야.”

윤이화는 바로 나서서 그녀를 저지했다. 자리에서 일어난 여자는 윤이화의 동생이자, 마찬가지로 윤모난과는 사촌지간인 윤도화였다. 윤모난과 같은 해에 태어난 그녀는 여러모로 제 사촌과는 상극이었다. 양친을 모두 큰아버지 손에 잃은 윤도화는 윤모난과 달리 이전부터 꽃들의 맹세에 가담했었다.

생전에 작약은 윤도화를 보며 복사꽃이 배꽃보다는 향이 짙다고 평가했었다. 아직 어렸으나 그녀의 심지나 행동력을 크게 평가한 말이었다. 그에 걸맞게 윤도화는 제 오빠와 달리 작약에게 비굴하게 굴지도 않았고, 윤모난에 대한 반감을 숨기지도 않았다. 그냥 어렸을 때부터 그녀는 윤모난을 싫어했다.

윤모난이 어린 시절 아이스크림을 작은 혀로 핥고 있으면, 작약의 눈을 피해 몰래 숨어들어 아이스크림을 빼앗아 바닥에 엎어버리고 곱슬머리를 잡아당겨 울리곤 했다. 아직 어리고 심약했던 윤모난이 ‘왜 나만 괴롭히냐’며 엉엉 울었을 때, 그녀는 눈에 불을 켜며 응수했었다.

“나약해빠진 얼굴 보기 싫어!”

무엇이 나약하다는 것인지 사촌의 심술은 도통 헤아릴 길이 없었다. 어린 윤모난은 엉엉 울기만 했다. 작약 역시도 도화 그것은 우리도 다루기 어렵다고 말한 적 있었다.

윤도화가 씩씩거리며 나서자 윤이화가 말리면서 진땀을 뺐다. 제 여동생의 성질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그로서는 그녀가 이 황금 같은 기회를 날려버릴까 봐 걱정이 된 것이다.

윤모난과 꽃들을 어떻게 만나게 할지 머리를 쥐어짜던 차에 이런 우연한 만남은 운명이 아닌 것으로 해석하기가 더 어려웠다. 이곳에서 윤모난을 본 순간 윤이화는 역시 하늘이 꽃들을 돕는다고 생각했다.

“저, 저 나약한 면상. 저런 게 후계자는 무슨…!”

“도화, 너는 그 성질머리 여전하네. 걱정 마. 난 갈 테니까. 이제 집안일은 상관 안 해.”

그 말에 더 흥분한 윤도화가 어렸을 때처럼 뒤통수를 때리려 주먹을 콱 쥐고 덤벼들었다.

“정신머리 빠진 놈, 그럼 이름도 버려! 감히 모란을 가져갔으면서 그딴 소리만 하는 것도 지겨워!”

“…….”

“역시 넌 꽃들의 믿음을 받을 수 없는 놈이야.”

“…꽃들?”

윤모난이 의아한 얼굴로 묻자 윤도화가 입을 다문 채 뒤로 물러났다.

꽃들은 남경 윤씨의 젊은 세대를 지칭하는 말이다. 이 방 안에 있는 것도 그 꽃들뿐이었다. 이 이상한 모임도 그렇지만, 윤도화가 남경 윤씨 전체가 아니라 굳이 꽃들이라고 특정한 이유가 있을 거였다.

하지만…. 그 이유를 굳이 알아야 하나?

“모난아, 넌 어찌 됐건 이제 후계자야. 우리가 부르면 응해야 하는 책임이 있다.”

윤이화가 말 같지도 않은 말로 설득을 하려 하자, 안에서 꽃들이 수군거렸다. 이 방 안에서 자신을 후계자로 인정하는 사람은 없다는 것을 모르지 않는 윤모난은 유독 불거진 눈썹뼈 근처를 꾹꾹 눌렀다.

“후계자고 뭐고 관심 없는데 무슨 책임. 그렇게 후계자 타령 하고 싶으면 우리 아버지한테서 청연이나 좀 구해줘요. 집안 꼴이 개 같아서 애 망칠까 봐 밤에 잠도 안 오니까요.”

“넌 청연이가 걱정되긴 하니?”

꽃들 중 한 명이 말꼬리를 잡고 따지듯이 물었다.

“널 친아버지처럼 생각하는 애가 보내는 편지에 답장 한 통 안 쓴다더니. 청연이가 가족 모임 때마다 널 얼마나 찾는 줄 알아?”

“…작약이 널 어떻게 대했는데. 네가 그러면 형들에게도 배신이야!”

“이복형제라 이거지. 이쁘다 해도 친조카가 아니니까….”

때로는 생판 남보다 가족이 더 가슴 아픈 말을 내뱉는다. 윤모난이 어떻게 살았는지 관심도 없었고 서자라고 무시하던 그들이 이젠 자신의 모든 울분과 답답함을 그에게 쏟아낼 궁리만 하고 있었다. 사촌인 윤도화만큼은 한결같이 윤모난을 싫어했으므로 그녀의 적의는 일관적이기라도 했다.

“네가 이런 식으로 굴면 윤화신이 가장 먼저 청연이부터 죽일걸? 제 손자라고 못 죽이실까?”

“…….”

태도를 바꿔 뱀 떼처럼 달려드는 가족들을 참을 수 없어 귀를 틀어막고 가려고 했던 윤모난은 그 말에 걸음을 멈췄다. 도를 한참 지나친 말에 방 안의 분위기는 물을 끼얹은 것처럼 조용해졌다. 윤모난은 방 한가운데로 다시 돌아왔다. 이윽고 원탁 테이블에 바짝 다가온 그에게서 음산한 경고가 흘러나왔다.

“청연이한테 작은 흠집이라도 내면 가족이고 뭐고 상관없이 가만 안 둘 거예요. 내 앞에서 청연이를 함부로 들먹이는 것도 마찬가지고.”

“…….”

“저는 남경 윤씨한테서 원하는 게 없습니다. 이런 나한테 청연이까지 들먹이면서 자꾸 뭔가를 뜯어내려고 하면 나도 곤란해요.”

윤화신과 작약 그리고 모란까지. 잔혹함의 유전자를 담은 피는 항상 상식이나 정상의 선을 넘는다. 빈말 아닌 협박에 다들 침묵하는 가운데 다시 한번 윤도화가 혀를 찼다.

“협박하는 꼴이 어쩌면 사촌 오라버니들이랑 똑같은지. 작약은 너 같은 새끼를 지킨답시고 우리에게 맹세했어! 넌 뭐 할 건데? 윤모난. 넌 청연이를 위해 뭘 할 수 있냐고.”

“…나를 지켜? 맹세? 그게 무슨 말이야.”

“윤모난! 이 멍청하고 아둔한 새끼야! 망가져서 쓸모없는 놈아. 왜 몰라? 왜 너만 모르냐고. 힘든 일은 우리한테 다 맡겨두고 너만 고고하고 혼자 잘났지? 우리 모두가 고통에 빠져 허덕이는 동안 죽은 형들 붙잡고 질질 짜면서 병원 침대에 누워만 있었잖아!”

윤도화가 멱살을 쥐며 밀어붙였다.

“네 조카를 살리고 싶어? 그럼 남을 죽일 게 아니라 너 자신을 죽이면 돼! 네 존재 자체가 청연이한테는 위험이니까!”

“…….”

“아, 넌 못하지? 흑흑, 트랜스가 된 약이 형이 무간에 있으니까 형이 눈 감기 전에는 죽지도 못하겠어, 이거 아냐. 너 3년 전에도 일부러 안 죽었지! 다 쇼였던 거 아니냐고!”

“그만, 그만해 도화야. 너무 몰아붙이지 마라!”

보다 못한 윤이화가 나서서 또 말렸으나 윤도화는 물러서지 않았다. 제 부모를 죽인 인간의 피를 받은 새끼가 지금으로서는 유일한 희망이라는 비참함을 어떻게 토해내야 할까.

작약을 골랐던 것은 그들이 강해서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제 혈족을 마음대로 짓밟은 윤화신을 제 아들의 손에 죽게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반쪽짜리 모란만이 남은 지금, 꽃들은 억지로라도 그 선택지를 받아들여야만 했다.

이윽고 조용히 당하고만 있던 윤모난이 고개를 들었다.

“…방법이 있어?”

“뭐?”

“청연이가 살 방법 말이야…. 나만 죽으면 된다고? 글쎄.”

청연이는 미래이다. 남경의 미래가 아니라, 윤모난이 유일하게 꿈꿀 수 있는 미래. 그 아이만은 무사하게 자라 가문에 매이지 않고 제 삶을 살아야 했다.

“이 모임… 뭐야? 무슨 목적을 위한 모임이지?”

“…들으면 너도 가담해야 해.”

윤이화의 말에 윤모난에게서 픽 웃음이 터졌다.

“가담…? 그런 건 구린 짓 할 때나 쓰는 단어지.”

“…….”

“도화, 넌 대체 무슨 생각으로 나한테 죽으라고 하는 거지? 지금 내가 죽으면 청연이가 산다? 멍청하긴. 내가 아니면 누가 청연이를 지킬까…. 너? 여기서 그 애 목을 조를 사람이 있다면 네가 첫 번째일걸.”

윤모난은 그녀의 손을 비틀어 제게서 떼어냈다.

“무슨 모임인지 궁금하지도 않고 가담할 생각은 더더욱 없지만. 형들이랑 청연이 얘기를 꺼낸 이상 무시할 수는 없지.”

“…남경 윤씨한테서 원하는 게 없으시다며?”

다른 분위기를 타기 시작한 대화에 일순간 윤이화의 얼굴에 희열이 떠올랐다. 윤모난은 방 안의 사람들을 쭉 시선으로 훑으며 담배를 꺼내 물었다.

“괜히 피 보고 싶지 않으면 똑바로 말해, 윤도화.”

“얼마든지. 지금까지 우리가 흘린 피눈물에 비하면 이쯤이야.”

“피눈물….”

윤모난은 입에 고였다가 목으로 넘어가지 않는 그 말을 되새겼다.

“과연 다들 아버지를 지독하게도 혐오하니 목적을 추론하기가 딱히 어렵진 않군.”

“…어렵고 쉽고의 문제가 아니야. 윤모난, 너만 너무 늦었다는 게 문제지.”

“그래서 뭐? 반란이라도 도모해?”

“…….”

운명은 윤모난을 이곳으로 이끌었다. 옆에서 말없이 서 있던 윤이화는 눈을 꾹 감으면서 생각했다. 작약이 자신에게 내린 저주를. 그리고 그런 작약이 죽어 없어진 현 상황을. 작약은 죽었다. 우리 모두의 눈을 가린 장막을 걷어내고 앞으로 가야 한다.

“모난아, 생전에 작약이… 우리에게 맹세했다.”

“무엇을.”

“큰아버지를… 아니 윤화신을 죽여 독재를 끝내겠다고.”

“형들이 왜? 아버질 죽여서 무얼 얻으려고.”

윤이화는 인생에서 가장 큰 모험을 감수하기로 했다. 아니면 저주로 인해 이쪽이 죽는다.

“우리… 모두의 자유. 특히 너의 자유를.”

또다. 윤모난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작게 혀를 찼다. 또 자신만 몰랐던 형들의 일이었다. 지독한 소외감과 외로움. 형들과 함께 있을 땐 느끼지 못했던 것이 그들의 죽음 이후로 계속해서 찾아들었다. 그걸 원망하는 것조차 괴로운 까닭은 그들이 그런 방식으로 동생을 사랑했음을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른다는 건 비참하기만 한 일이다. 전에 의심하지 않았던 것들까지 송두리째 의심 선상에 올려놓는다. 대체 형들은 왜 그토록 필사적이었을까. 나를 위해서라고? 윤모난은 딱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랬다면 형들이야말로 잘못 생각했다는 결론밖에는 나지 않는다.

“형, 요점이 뭐예요?”

머리가 아팠다. 형들 생각은 하면 할수록 미로에서 헤매는 것 같은 기분을 안겨준다. 마침내 윤이화가 대답했다.

“모난이 네가 형들의 의지를 이어서 우리와 뜻만 함께한다면… 우리 모두 자유를 얻을 수 있다.”

“내가 함께하면…, 이라.”

“그래.”

“내게 무슨 책임이 있어서요?”

윤이화의 말은 어딘가 교묘한 구석이 있었다. 작약이 생전에 한 맹세를 지키지 못하고 죽었으니 모란에게도 책임이 있다는 말. 얼핏 들으면 타당한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윤모난은 작약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왜 책임이 없어? 넌 윤화신의 아들이야! 우리 가족들을 죽인 그 괴물의 피를 받았다고. 아버지가 지은 죄에서 아들이 자유롭다고 생각해?”

윤도화가 분개해 따져 물었다. 과연 반감과 혐오감이 대단했다. 아마 여기 앉아 있는 모든 꽃들의 심정도 그럴 거였다. 윤화신의 통치 기간 동안 온갖 살인, 폭력, 강간 같은 혐오스러운 범죄가 그의 지시에 따라 남경 내부에서 벌어졌다. 부모에게서 자식을 빼앗고, 자식 앞에서 부모를 죽이는 것이 흔한 이야기일 정도로.

그 결과 남경 윤씨들의 가슴속 깊이 쌓인 울분이 업화가 되어 윤화신 일가 전부에게 쏟아진다고 해도 놀랄 일은 아니었다. 이미 그들의 우두머리부터가 형을 독살하여 그 자리에 오른 인물이니 골육상잔의 비극 따위에는 조금 무감해질 법했다.

윤화신의 죗값을 다 치르기 전까지는 연좌의 논리 앞에서 작약과 모란은 자유로울 수 없었다. 울분을 화로 키워낸 꽃들을 잠재우기 위해선 윤화신 일가의 피가 필요했으니, 만약 작약이 꽃들에게 맹세하지 않았다면 삼 형제는 어디선가 누군가에게 이미 죽었을지도 몰랐다.

“복수는 하고 싶지만 직접 할 배포는 없나 보군.”

하지만 윤모난은 그런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도, 대의에 대한 생각도 딱히 없었다. 오히려 그런 것들은 굶주린 짐승처럼 자신을 먹이로 노릴 뿐이다.

“그럼 직접들 하지 그래. 말릴 생각은 없어. 아버지만으로 분이 안 풀리면 나까지 죽여 없애든가.”

“그다음은…? 그 복수가 과연 너로 끝날 것 같아?”

“그게 협박이나 된다고 생각해? 날 설득할 수 있을까? 내가 마음만 먹으면 오늘 여기 있는 사람 그 누구도 저 문을 못 나가게 할 수 있어.”

“…….”

“꽃들이란 꽃들은 다 죽여버리면… 청연이는 건드리지 못하겠지.”

현재로서는 가장 빠르고 깔끔한 방법이기도 했다. 위험 요소인 꽃들을 모두 죽이면 윤화신의 독재야 계속되겠지만, 청연이는 살 수 있었다. 제 친족을 죽이는 비정한 방식을 택하는 데 따르는 윤리적인 문제도 윤모난에게는 걸림돌이 아니었다. 애초에 그에게 가족이란 것부터가 모호한 범주였고, 더 나아가 독재를 그만두게 해야 한다는 당위조차도 없었다.

독재자 한 명이 사라진다고 해도 그 자리에 또 다른 독재자가 앉지 않으리란 법은 없다. 결국 이 모든 것은 윤씨들 내부의 밥그릇 싸움이고 윤씨들이 서로 피를 흘리는 동안, 남경은 다른 시민들의 소박한 삶으로 이어져나갈 것이다.

윤모난은 꽃들이 하려는 일에는 반란이나 혁명 같은 거창한 명칭보다는, 사적인 복수가 더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결국 모두 욕심의 발로일 터였다.

“다시 똑같은 대화를 하고 싶으면 피를 보겠다는 각오로 만나자고.”

그 말을 마지막으로 윤모난은 방을 나섰다.

“푸하하하하―!”

윤모난이 박차고 나간 이후 얼어붙은 분위기를 깬 것은 윤도화의 웃음소리였다. 그녀가 못 참겠다는 듯이 꺽꺽대며 웃는 동안 모두가 낭패인 표정을 지었다. 한참을 책상을 쾅쾅 치며 웃던 윤도화가 눈물이 맺힌 눈가를 닦아냈다.

“이제 보니 모란이야말로 윤화신의 제대로 된 핏줄이잖아? 빌어먹을 놈.”

“…도화야, 웃을 일이 아니야.”

“왜 안 웃겨? 지금 저 미친놈한테 건 오빠 도박이 다 휴지 조각이 됐는데 웃을 수밖에.”

윤이화는 윤모난이 나간 자리를 보며 생각에 빠져 침음했다. 이 자리에 있는 다른 꽃들이 각각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내가 뭐랬어? 오빠. 윤모난은 허울만 윤씨이지, 남경이 불바다가 되어도 관심도 안 가질 놈이라니까.”

“윤이화, 이제 어쩔 거냐? 윤모난이 저렇게 우리 계획을 알았는데 그냥 보내도 돼?”

“누가 쟤를 입막음할 수 있는데? 아까 하는 소리 못 들었어?”

“막지 않으면?”

“…저건 13살 때부터 혼자 트랜스를 죽이던 돌연변이 새끼야…. 여기 있는 사람들이 다 달려들어도 저건 못 죽인다고.”

모두 눈에 띄게 안절부절못하며 입에서 나오는 대로 주절거렸다. 이 자리의 주최자인 윤이화가 상황을 정리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아니, 아예 그르친 것 같지는 않아.”

“무슨 소리야?”

“정말 우리를 막으려고 마음먹었으면 떠날 이유가 없지. 심지어 중간에는 자리를 피할 수 있었는데도 가지 않았어. 그건 여지가 있다는 뜻이다.”

“오빠, 지금은 그런 여지에 기대서 판단할 때가 아니야.”

“그건 도화 말이 맞아, 이화야. 남경평야의 쌀값이 폭등해서 반도 내에서 불만이 많아. 쌀 비축분을 두고 평의회가 난리라더군…. 상황이 좋지 않다.”

다른 꽃의 말마따나 상황이 좋지 않게 흘러가고 있긴 했다. 요즘 윤화신이 무얼 하려는지 다른 가문들과 날을 세우면서까지 쌀값을 올리고 있었다. 현재 평의회 의장을 맡은 한씨가 이 일을 중재하기 위해 소환장을 보냈지만, 윤화신이 갖가지 핑계를 대며 평의회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니, 반도 안에서 남경에 대한 반감이 치솟고 있었다.

까딱하면 표면 장력으로 유지되던 권력의 균형이 넘치기라도 한다면? 반도 내각이 수립된 지 몇 세기 동안 가문들 간의 싸움이 없었던 것도 아니고, 지금의 다섯 가문 체제는 백여 년가량 이어졌을 뿐이다. 어쩌면 다시 한번 판이 뒤집힐 주기가 가까워지고 있는지도 몰랐다.

“남경이 무너진다면 이 싸움에 무슨 의미가 있어?”

누군가의 물음에 모든 꽃들이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인다. 윤모난과는 달리 그들에게 남경은 윤씨들만의 영토이고 거점이다. 일조량이 풍부하고 농산물 수확량이 많아 이런 세상에서도 굶주릴 걱정이 없고, 항구도시를 끼고 있는 덕에 물자 수송으로 큰돈을 끌어모으는 도시가 바로 남경이었다.

당장 영토 북쪽 끝에 위치한 북해와 비교해도 굶주리는 사람의 수가 확연히 차이가 났다. 그런 점에서 쌀값은 아주 민감한 문제였다. 남의 목숨을 인질 삼아 제 배를 불리는 행태를 참고 넘길 가문은 없으니까. 상황이 급변해서 그 땅을 빼앗고자 누군가 덤벼드는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으리란 법은 없다.

“특히 북해의 가주가 오늘내일하는 상황에서, 무정원이 그 자리에 앉는다면 이 상황부터 정리하려고 할걸. 윤화신이 북해 가문에 얼마나 많은 차관을 빌려줬는데… 이상기후 때문에 북해의 부동항이 얼어붙은 횟수만 여러 번이라 지금 재정적으로 불안한 상태라 하더군.”

“이 와중에 쌀값을 올렸으니, 무정원이 가만히 있지 않겠어.”

“이미 북해 쪽에선 건조된 선박들부터 처분해서 빚을 청산하겠다고 했다지. 아무리 그래도 북해는 천경교 신자가 많아서 건드려서 좋을 것 하나 없는데…. 대체 윤화신 그 인간은!”

윤도화는 답답함에 책상을 쾅 내려쳤다.

“무정원의 심경을 거스르면 정말 걷잡을 수 없어져.”

“윤화신은 무정원과 타협할 생각이 없어. 오히려 기를 눌러 싹을 밟아 없앨 생각만 하지…. 윤화신이 가주인 이상 남경과 북해의 관계는 돌이킬 수 없다. 무엇보다 윤화신은. 무정원의… 아내를….”

윤화신이 자신에 대한 충성을 증명하라는 뜻으로 작약에게 내린 살인 목록에는 무정원의 아내가 있었다. 천경교 교리는 재혼을 허용하지 않기에, 무정원의 세력을 누르기 위해서 더 새끼를 치지 못하게 해야 한다는 계산이었다. 절대로 실패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기에 윤화신은 작약을 보낸 것이다.

“그때는 그저 무정원도 후계자일 뿐이었으니 어쩌지 못했다지만, 무정원이 가주가 되면….”

“우리 모두를 가만두지 않을 거야…. 윤화신도 그걸 대비하려고 하는 거겠지.”

작약은 꽃들에게 이 사실을 미리 알려주며 경고했었다. 그 더러운 살인을 고백하면서도 작약은 무감한 표정이었다. 윤이화는 약이 트랜스가 된 건 그 업보라고 생각했다. 물론 작도 지옥 불에서 타고 있을 터였다.

“윤화신의 죽음으로 남경과 북해의 관계를 바로잡지 않으면, 몇 년 안에 내란이 일어날 거다.”

“다른 가문, 서강은 남경과 한편이고…. 고섬은 알다시피 북해와 가깝지. 나머지는 동산인데… 경씨들은 이런 일에 절대 개입하지 않아.”

“견우야, 북해랑 경씨 사이에 혼인 관계가 있나?”

구석에 앉아 있던 나팔꽃, 윤견우가 기억을 되짚으며 대답했다.

“세 쌍 정도. 아, 최근엔 무정원의 여동생이 동산 경씨의 방계 중 한 명이랑 약혼했다더군.”

“직계는 아니라지만… 좋진 않네.”

“아직 그쪽은 신경 쓰지 않아도 돼. 경씨는 정치적 중립에서 벗어나는 것을 꺼리니까. 일단 1순위는 윤화신이야. 윤화신을 제거해서 내전만은 막아야 한다.”

하지만 그것이야말로 가장 어려운 일이었다. 윤이화는 주먹을 꾹 말아 쥐며 말했다.

“내가…. 모난이를 한 번 더 설득해볼게. 다들 사무동 앞에서 봤겠지만, 모난이 능력이 많이 회복된 것 같아. 지금으로서는 모란의 힘을 빌려서 암살하는 것밖에 답이 없어. 반란군을 일으키면 외부에서 끼어들 테니….”

“오빠가 어떻게 그 새끼를 설득할 건데?”

“…도화야.”

“걜 대화로 움직일 수 있을 것 같아? 구석으로 몰아넣지 않으면 꿈쩍도 안 할걸.”

윤이화는 괴로운 듯 얼굴을 감싸 쥐었다. 윤모난을 잘못 건드렸다간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그는 작약만큼이나 쉽게 볼 사람이 아니니까. 윤이화는 어떻게든 명분으로 윤모난을 설득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동생인 윤도화의 생각은 달랐다. 그녀는 다루기 힘든 칼일수록 상처를 감수하고서라도 휘둘러야만 한다고 보았다. 작약이 죽은 이상 구석에 몰린 건 꽃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비웃음을 띤 채로 오빠에게 물었다.

“오빠는 아직도 그렇게 작약이 무서워?”

“…다들 몰라.”

“뭐가?”

“작약의 진짜 모습을 말이야.”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곳곳에서 조금 긴장된 웃음이 터졌다. 그러나 다들 윤이화의 말을 쉬이 넘기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어쨌건 그 두려움을 인정하고 싶지는 않은 눈치였지만.

“이화야, 작약은 죽었어. 뭐 모란을 건드렸다가 트랜스가 된 윤약이 너 자는 침대에라도 찾아올까 봐? 대체 뭐가 두려워?”

“…….”

“트랜스가 되면 어차피 이전에 있었던 일은 기억도 못해. 포스트랑은 소통 자체를 못한다고. 윤약의 앞에 윤모난을 데려가도 제 동생인 줄 못 알아보고 공격할 거다.”

윤도화가 그 말에 철없이 또 푸하하 웃었다. 그런 희극이 또 없을 거라며 깔깔대는 동생의 모습을 보아도 윤이화의 긴장은 쉬이 풀리지 않았다.

“자꾸 뭔가 놓친 게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정말 작약이 우리를 믿었다고 생각해?”

“…….”

“만약 그렇다면 너희는 모두 작약을 제대로 보지 못한 거다.”

뚝, 하고 웃음을 그친 윤도화는 어금니를 뿌득 갈았다. 그리고 여전히 작약에게 벌벌 떠는 자신의 친오빠를 바라보며 다시 한번 다짐했다. 그 일가의 갓난쟁이까지 모두 죽여 없애는 한이 있더라도 이 저주의 고리를 끊어내야겠다고.

윤모난이 하지 않겠다면 그렇게 하도록 만들면 될 일이다. 집에 불을 지르면 쥐새끼도 버티지 못하고 튀어나오는 법이니.

* * *

윤모난은 미로 같은 사교 클럽의 복도를 빠져나가고 있었다. 올 때와 다르게 조금 길을 헤맨 탓에 시간이 꽤 걸렸다. 역시나 돌아간 자리에는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터지기 직전인 경해국이 있었다. 그는 잠깐 다녀오겠다 해놓고선 자신을 외간 여자들 사이에 던져두고 사라졌던 윤모난에게 따지려 들고자 했으나, 윤모난은 이를 무시하고선 이만 나가자는 신호를 보냈다.

“모난이 그만 가게? 볼일 끝났으면 좀 더 놀다 가지.”

“…….”

“어머, 모난아. 차였나 봐? 거봐― 고백하지 말라니까.”

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못 견디게 거슬렸다. 윤모난은 경해국과 함께 다시 온 계단을 밟고 아래로 내려갔다. 온 길을 되돌아가려면 사람들이 뒤엉켜 있는 댄스 플로어를 지나는 고행이 필수적이었다. 둘은 정신없는 음악과 뒤섞인 군중을 겨우 헤치며 횡단했다.

그 와중에도 경해국이 뭐라 욕이 섞인 고함을 질렀지만, 윤모난의 먹먹해진 귀까지 도달하지 못했다. 감각을 자극하는 소음과 조명이 기생충처럼 몸속으로 파고드는 기분이었다.

머리 위에서 빨간색 사이키 조명이 빙빙 돌았다. 그것이 섬광처럼 터졌다가 부서지며 점멸하고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쿵쿵거리는 진동이 발아래를 두드린다. 마치 호흡하는 커다란 괴물의 몸통을 밟은 것처럼.

깜빡.

일순간 느리게 조명이 깜빡였다. 빨간 조명을 피처럼 뒤집어쓴 사람들이 순간의 암흑 속으로 매몰되었다. 윤모난의 눈꺼풀이 잠깐의 암흑을 틈타 내려앉았다가 파르르 떨며 올라갔다. 그러자 붉은빛이 여지없이 눈을 찌르며 파고든다. 마치 바늘이 눈알로 쏟아지는 느낌에 고개가 거칠게 돌아갔다.

깜빡.

눈앞에 번지는 붉은 빛. 땀 냄새와 매캐한 담배 냄새를 뚫고 비린내가 비강에 훅 끼쳤다. 후각을 자극하는 뜨겁고 걸쭉한 순도 높은 피 냄새가 콧등 안쪽에서 부글부글 끓는다. 혀 안쪽이 뻣뻣해지고 반사적으로 구역감이 치밀어 올랐다.

“…님!”

이유 모를 둔통과 함께 횡격막이 북 가죽처럼 팽팽해졌다가 훅 꺼졌다. 윤모난은 심한 구역감을 참느라 균형감각을 잃고, 옆에서 춤을 추는 누군가가 부딪혀오는 줄도 모르고 휘청였다. 그렇게 다른 몸들에 차였을 땐 절로 헉 소리가 튀어 나갔다.

쿵, 하고 몸이 바닥으로 처박히자, 기다렸다는 듯이 춤추는 사람들의 발이 몸을 잘근잘근 짓밟을 기세로 쏟아졌다. 이 모든 과정들이 그의 눈에는 늘어진 필름처럼 보였다. 그렇게 열광과 환락에 휩싸인 사람들 사이에서 그는 순식간에 발아래 어두운 늪 속으로 빨려 들어간 것이다.

“ㅇ… 팀장!”

팔이 거세게 붙들렸다. 땅 깊은 곳에서 끌어올려지는 것 같은 기묘한 압박감에 꺼져가던 정신이 확 돌아왔다.

‘윤 팀장님!’

“…어.”

윤모난은 자신을 끌어당긴 사람에게 겨우 대답할 수 있었다.

‘팀장님!’

“…그만.”

그쪽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살려주세요!’

“…뭐?”

‘살려… 살려주세요!’

“무슨 말이야…. 살려달라니?”

이윽고 윤모난은 깨달았다. 누군가가 살려달라고 부르짖는 대상은 자신이 아니다. 미끈거리는 손이 손등을 긁으며 떨어지자 끔찍한 소리가 이어졌다. 윤모난은 그쪽으로 달려가려 했지만, 강한 힘이 뒤에서 자신을 강하게 끌어당겼다.

‘전… 죽기 싫어…요.’

‘모난아.’

‘…….’

등 뒤에서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의 주인을 쫓아 고개가 돌아갔다. 그 순간 누군가의 손이 윤모난의 뺨을 감쌌다. 그리고 이어지는 다정한 목소리.

‘…늦었어. 못 구할 거야.’

‘…….’

‘…여기 있어. 내가 나갈게.’

‘형, 큰형이….’

‘알아.’

‘형….’

‘작이 만든 미로를 나가는 방법은 내가 잘 알잖아. 내가 가서 형을 데려올게.’

과거. 무간. 미로. 그리고 작약. 우울과 함께 깊이 봉쇄되어 있던 과거가 문을 열고 윤모난을 빨아들였다.

지금껏 윤모난은 이 마지막 순간을 단편적으로밖에 기억하지 못했다. 그의 팀은 무간에서 정신계 트랜스에게 교란당했고, 치기 어렸던 윤모난은 무리에서 이탈했다. 대책 없는 동생을 쫓아온 것은 그의 둘째 형, 윤약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전투가 시작됐을 때, 공격은 떨어져 있던 첫째인 윤작의 그룹에 먼저 쏟아졌다.

무간에서는 몸을 엄폐할 만한 적당한 곳이 없기에, 윤작이 폭주를 감수하면서 능력을 증폭시켜 미로를 만들었다. 하지만 괴물은 미로에 들어올 필요도 없었다. 이미 교란당한 팀원들 하나하나가 괴물의 꼭두각시였기에. 지금껏 나눴던 전우애와 추억들의 마지막은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비극이었다.

‘형?’

미로를 나간 둘째 형이 돌아오지 않는다. 남은 건 자신뿐이었다. 나가야 했지만 윤모난은 방법을 몰랐다. 어쩌면 영원히 큰형이 만든 미로 속에 갇혀 있어야 할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엄습했다. 예전에 형들이 미로를 빠져나가는 방법이라고 알려준 건 모두 수수께끼 같은 말뿐이었다.

“큰형은 환영 능력자고 난 그 환영을 유지시키는 능력자야. 우리가 쌍둥이로 태어난 데는 이유가 있겠지.”

언젠가 윤약은 자신이 선물한 펜던트를 만지작거리며 동생에게 말했다.

“모난아, 환영을 깨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해야 할 건 현혹되지 않는 거야. 눈앞에 보이는 것들은 모르는 사이에 우리 모두를 속이지. 무지의 어둠 속에선 환영이 더 밝게 보이는 법이거든.”

그는 더 아리송한 비유를 붙였다.

“…무대 위의 연극이라 생각하면 돼. 무지한 사람은 어둠이 가라앉은 객석의 관객이고.”

“…….”

“가고 싶은 곳으로 가기 위해서는 자리에서 일어나 등을 돌릴 결심을 해야 해. 환영을 외면하고.”

윤모난은 자신이 어떻게 미로를 나갔고. 큰형은 어떻게 죽었는지. 작은형은 어떻게 괴물이 되었는지 기억하지 못했다. 사랑하는 형들의 마지막을 송두리째 잊어버리고 만 것이다. 그렇게 아무것도 모르고 무지한 상태로 3년이 흘렀다.

윤모난은 여전히 환영 속에서 헤매고 있었다. 미로를 나가는 법을 아직 깨닫지 못한 채로. 여전히 객석에 앉아 죽은 이의 환영을 붙들며 살고 있었다.

“시발, 시발, 시발, 시발!”

그 순간 쿵, 하고 환상이 흔들렸다. 누군가 윤모난이 갇혀 있던 곳을 계속 두드리며 침입하려 하고 있었다. 갑작스럽게 끼쳐 오는 격통에 윤모난은 무심결에 눈을 감고 고개를 수그렸다. 옆에서 누가 주먹으로 머리를 사정없이 갈기고 있었던 것이다.

“씹, 제비짓 하러 이런 데 왔다가 사람들한테 깔려 뒈지면 얼마나 개죽음입니까! 일어나세요!”

“…윽.”

윤모난은 자신의 머리통을 후려갈기며 깨우고 있는 경해국의 손을 가로막으며 신음했다. 경해국의 도움으로 압사당하는 건 겨우 면했는지 어느새 바깥이었다. 정신을 혼란스럽게 하던 음악과 진동은 멀리 사라지고 사방이 고요했다. 그러나 어쩐지 안에서 맡았던 피 냄새만은 잔상처럼 달라붙었는지 사라지지 않았다.

대뜸 경해국이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건넸다. 산적 같은 그의 소지품이라기엔 어딘가 말랑한 구석이 있는 흰색 손수건. 그 모퉁이에 수놓인 작은 솔잎은 동산 경씨의 상징이었다.

“코에서 피 나요.”

“…당신이 웬 손수건.”

“제 그녀가 선물한 겁니다. 닦으십쇼.”

“애인이 선물한 건데 피 묻으면 안 되지. 됐어.”

윤모난은 대신 옷소매로 얼굴을 닦았다. 어딜 부딪치거나 다쳐서 난 피는 아니고 정신을 잃다 뇌에 과부하가 걸린 모양이었다. 그 모습을 본 경해국은 두 번 권하는 일 없이 손수건을 집어넣더니 웬일로 부축해주는 친절까지 베풀었다. 돌아가는 내내 슬며시 눈치를 보는 것도 경해국답지 않았다.

“아까 저 안에서는 갑자기 왜 그런 겁니까? 그것도 뭐… 정신병의 증상… 그런 거예요?”

“글쎄. 내가 어떻게 했는데?”

윤모난은 제가 안에서 어쩌다가 정신을 놓치고, 어떻게 나왔는지 전혀 기억이 없었다. 갑자기 과거의 늪에 빨려들었다가 나온 뒤로는 팔다리가 무겁고 몸이 축축 늘어지기만 할 뿐.

“별건 아니고, 무슨 간질 발작 일으키는 줄 알고…. 놀라 자빠질 뻔했습니다.”

“엄청 추했겠네.”

“뭐…. 얼굴짝이 훤칠해서 그런지 쬐끔 추하고 맙디다.”

“그래? 잘생겨서 다행이다.”

시답지 않은 농담에도 웃는 사람은 없었다. 단순한 경해국의 머릿속도 오늘 패싸움부터 해서 복잡해 터져나가기 직전이었다. 이쯤 되니 타인에게 도통 관심이 없는 그조차 질문을 삼킬 수 없었다.

“남경의 후계자인지 뭔지… 그거 진짜로 하시는 겁니까?”

“아니.”

“왜 안 하시는 건지 물어봐도 됩니까?”

“…뭔 이유가 있어. 하기 싫으니까 안 하는 거지.”

주저하며 물어본 질문에 대한 답 치고는 조금 싱거웠다. 하지만 그거 말고 다른 여타 이유를 붙일 것도 없었다.

“뭐, 자알 생각하셨습니다. 그 자리에 앉아봤자, 평의회 다섯 가문들 복작거리는 틈바구니에 끼어서 뭐 제대로 된 삶이나 살겠습니까? 스트레스로 3년 안에 발기부전에 탈모 올걸요? 아무리 얼굴짝이 반반해도 탈모는 안 될 일이죠.”

“…….”

“바깥으로는 트랜스랑 전쟁을 벌이고 안으로는 정치니 파벌이니 하며 서로 암살이나 하고 죽어라 싸우고. 그런 건 저기 북해 무씨 대장 그런 사람 아니면 못해요. 팀장님은 일단 맛도 많이 갔고… 사람이 폭력적이라 누굴 다스릴 그릇은 못 되십니다.”

“…….”

“아까 보니까 제비가 천직인 것 같던데, 유흥이나 즐기고 사세요. 인생 복잡하게 살 거 뭐 있습니까?

조언인지 모욕인지 모를 헛소리를 윤모난이 참아주는 줄도 모르고 경해국이 말에 피치를 올렸다.

“잘난 성씨 달고 태어나 더 잘 먹고 안락한 곳에서 잠도 잘 잤으니 배부른 소리라고 할 수는 있지만요, 뻑 하면 사람 죽는 이런 환경에서 어떻게 제정신으로 살겠습니까? 팀장님이 미친 것도 이해가 갑니다.”

“…그 미쳤다는 말은 빼면 안 되나?”

“어우, 경씨 안에서만 20대에 자살한 사람이 셋입니다. 약 없으면 못 버티는 인간도 태반이구요. 저 무씨도 좀 보십쇼. 저놈도 저거 종교 없었으면 못 버텼을 놈이지, 저게.”

“왜 또 무구원까지 끌어들여?”

“…아니, 말 나온 김에 하나만 말합시다. 무씨 좀 그만 때리라구요. 저놈이 종교에 머리가 절여져서 앉은자리에 풀 한 포기 안 날 인간이긴 하지만요, 그래도 팀장님을 꽤 생각하고 따르는 거 같은데 안범한테 하듯이 좀 잘해주면 어디 덧납니까.”

뜬금없이 무구원 얘기를 한다 싶더니 왜 갑자기 또 안범 편애 의혹을 꺼내고 난리인지. 윤모난은 계속 코 안쪽에서 흘러내리는 피를 소매로 틀어막으며 대답하지 않았다.

“무씨 저놈… 북해에서도 왕따, 서곡에서도 왕따. 아주 그냥 왕따로 점철된 인생입니다.”

경해국이 보기에 무구원은 가족 복이 지지리도 없는 놈이었다. 어머니는 일찍 돌아가셨댔고, 아버지인 북해의 가주는 병환으로 드러누워서 골골대느라 정신이 없다. 형은 매사 동생에게 엄격하게만 굴었는데, 그로 인해 로봇 같은 인간으로 커버린 게 분명했다. 경해국은 무구원을 대변하여 설명을 줄줄이 덧붙였다.

“무씨 인상 더러운 거 아시죠?”

“…뭐. 띠껍게 생기긴 했지.”

“시력이 안 좋아서 항상 눈에 바짝 힘주니까 인상이 그따위가 된 겁니다. 안경을 써야 하는데 그것도 제 형님이 안 된다고 해서 안 쓴다네요. 전사가 그딴 걸 쓰는 게 나약해 보인다는 거죠. 지랄, 몰래 쓰면 될 걸 그거 하나 못하고 쯧쯧.”

“…사격은 잘하더만 무슨.”

“시간까지 돌려가면서 남들 한 번 연습할 때 그놈은 열 번이 넘게 연습하니 당연히 잘하죠.”

“그런데 이 대화의 목적이 뭐야? 경해국 너도 어디서 지령받았어? 내가 잘해주든 말든… 무구원은 신경도 안 쓰는데.”

“아뇨. 뭐, 그냥 해본 말입니다. 그러게요. 시팔… 내가 왜 무씨 편을 들고 앉았지? 젠장.”

경해국의 말은 이상하긴 하지만 효력이 있었다. 윤모난도 무구원이 딱한 놈이기는 하다는 데 고개를 끄덕였다. 엄격한 규율만 있는 광신도 집안에서 그가 제대로 사랑이나 한번 받았겠는가. 평범하게 살았다면 지금보다는 그의 상황이 여러모로 훨씬 나았을 것이다.

대화를 마치고 합숙소로 돌아가면서 윤모난은 상상했다. 전혀 다른 집에서 태어난 무구원은 과연 어떻게 살았을까 하고. 책 읽는 걸 좋아하는 것 같으니 의외로 서점 주인 같은 것이 어울릴 것 같았다. 키가 커서 책 선반에 머리를 몇 번 부딪칠 것 같다만. 어쩐지 평범하게 여자와 만나 결혼을 할 것 같기도 했다.

뭣보다 무구원은 제 아이에게는 잘할 것 같았다. 의외로 다정한 구석도 있긴 하니까. 사실 그런 건 멀리 있는 꿈이 아니라 무구원이 마음만 먹으면 마땅히 기대할 수 있는 삶이 아니던가. 윤모난은 갑자기 자신을 잠식한 씁쓸한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로봇한테 서점 주인이 가당키나 해?”

“네?”

“아니야.”

평범한 삶. 그런 것을 상상하는 건 윤모난에게는 낯선 일이었다.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살고, 가고 싶은 곳으로 마음껏 갈 수 있는 평범한 삶이라. 아마 그건 아침에 일어나 정해진 일과를 보내고 끼니를 때우는, 그런 하루하루를 밟아 꾸준히 이어나가는 생일 터였다.

삶이 무겁지 않다는 건 어떤 기분이었나.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윤모난에게 삶은 그냥 살아지는 것이 아니었다. 걸음을 떼는 것조차 버거운 그에게 하루를 산다는 것은 아주 작은 기능 하나까지도 수동인 구닥다리 기계를 돌리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방으로 돌아와 혼자 남은 윤모난은 녹슨 기계를 돌려 무구원과의 일을 가만히 되새겨보았다.

“…내가 정신병자라 쉬워 보였어?”

“팀장님….”

“생각보다는 쉬울지도 모르지. 그러니까 너부터 울면서 빌어봐. 응해줄 테니까.”

무구원은 ‘죄송합니다’라고 했다. 뭐가 죄송하다는 건지 정확히 알지 못해도 자신이 원한 대답은 그게 아니었다.

그렇다고 무구원이 모든 사실을 털어놓고 무슨 선택이라도 하기를 바랐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만약 그랬다면 본능적으로 벽을 세웠을 자신을 스스로가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망할… 무구원….”

너는 날 속이는 주제에 남들이 내 욕 하는 건 못 견디겠다는 거냐? 뒈지게 모순적이잖아, 이상한 새끼. 윤모난은 그런 모순에 마음 한구석이 말랑말랑해지는 기분을 도무지 견딜 수가 없었다. 무정원이 덫에 놔둔 미끼를 물어도 제대로 물어버렸으니 어떻게든 저항하긴 해야 할 텐데, 이 한 몸 건사하기 힘든 상황에서 청연이 말고 다른 약점까지 지고 가기엔 부담이 너무 컸다.

아버지나 꽃들, 그리고 무정원까지 모두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라면 이용해먹을 수 있는 건 모두 이용하려고 할 거였다. 이에 대비하기 위해선 자신이 어느 때보다 냉철하고 명민한 상태여야 했다. 그러려면 약을 먹는다든가 치료를 받는다든가….

“망할… 약….”

하지만 약을 먹을 수는 없다. 향정신성 약은 양날의 검이다. 약해지지 않으려면 먹어야 하는데 그걸 먹으면 아무것도 못하게 되니 결국엔 약해지는 것이나 다름없으니까. 윤모난은 자신이 언제부터 이런 생각으로 약을 빼먹었는지 정확히 기억나지도 않았다.

이러다 상태가 더 나빠지면 오늘처럼 갑자기 정신을 잃는 일이 더 잦아질 터였다. 뒤엉켜버린 감정의 흐름은 항상 예기치 못한 파도처럼 자신을 휩쓸어가니까. 오늘이 딱 그렇다. 타이밍을 지지리도 못 맞춘 무구원에게 화풀이까지 했는데도 나아지지 않으니 어김없이 또 우울에 삼켜지게 생겼다.

“죄송합니다.”

그 말을 내뱉을 때 무구원의 표정이 어땠는지 윤모난은 똑똑히 보았다. 예전에도 다른 이에게서 그런 비슷한 표정을 한 번 본 적이 있었다. 남경에서 장례식이 끝난 뒤 형들을 따라 죽기로 마음을 먹었을 때였다. 뭘 눈치라도 챈 건지 청연이가 내내 달라붙으며 유달리 어리광을 부리고 툭하면 제 아버지의 환영을 불러내는 바람에 심적으로 견딜 수 없는 상황이었다.

윤모난은 돌아가려는 길에 조금 매정하게 아이를 떼어놓았다. 늘 다정하던 삼촌이 영원히 떠나버릴 것같이 굴자 아이는 아버지가 죽었을 때보다 더 목을 놓아 울었다. 그 광경을 망연하게 지켜보고 있는 삼촌에게 아이가 말했다.

“삼촌, 청연이가 더 착하게 있을게요. 미워하지 마세요.”

그리고 아까 봤던 무구원의 표정이 딱 그랬다. 젠장! 윤모난은 육성으로 욕을 내뱉으며 자괴감에 사로잡혔다. 지금 무슨 생각 하냐고 물어보기라도 할 걸 그랬다는 후회가 밀려온 탓이다.

아니, 대화를 한다고 달라질 건 없지. 윤모난은 또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무구원이 무정원의 명령을 받았다는 건 사실이잖아. 하지만 정신병자인 자신의 생각이 이성적이거나 옳은 방향으로 흐르는가에 대해서는 스스로도 확신이 없었다. 상처 입은 어린애 같은 표정을 짓다니 무구원답지 않아 더 신경이 쓰인다. 경해국의 편들어주기가 어느 정도 영향을 끼쳤는지도 모르는 일이고.

한참 머리를 벅벅 긁어대던 윤모난은 협탁 제일 아래 서랍을 열었다. 거기엔 일전에 넣어두었던 책 한 권이 들어 있었다. 예전에 한백호 팀과 수도에 작전을 나갔을 때 우연히 보았던 고서점에서 산 것이다. 무구원으로 인해 화가 머리끝까지 난 상태로 한참 걸어가다, 지나친 길을 다시 돌아가 책 한 권을 샀었다.

“…다음엔 약이라도 먹고… 얘기하자.”

중얼거리는 다짐은 책 표지에 내려앉은 먼지처럼 훅 불면 날아가버릴 것 같았다. 책은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 닫힌 서랍 속에 갇혔다.

* * *

무구원은 소화하지 못한 질문들을 가득 안은 채로 자신의 형 앞에 서 있었다. 검은 가죽 장갑으로 감싸인 손끝을 책상에 느릿하게 두드리는 무정원 주변으로 오늘따라 텅 빈 자리가 유달리 눈에 띄었다.

좀처럼 무정원의 곁을 비우는 일이 없는 수족들이 오늘은 무슨 일인지 부재했다. 사냥꾼인 주인을 위한 충실한 몰이꾼들이니 임무 수행차 또 어디로 출타 중이겠지만, 묘하게 신경이 쓰였다.

“무슨 할 말이 있어서 갑자기 보자고 한 거 아니니.”

평소 목적 없는 접견을 허락하지 않는 무정원은 무작정 찾아와놓고 묵언수행 중인 자신의 동생을 기다려줄 참을성이 없는 모양이었다. 이윽고 무구원이 결심한 듯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정치… 말입니다.”

“그래.”

“형님께서 계획하시는 일이 무엇인지 감히 여쭤봐도 됩니까?”

뜬금없는 질문에도 무정원의 표정에는 일말의 변화조차 없었다. 그저 평소대로 냉정을 유지하며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듯한 시선으로 바라볼 뿐. 마침내 그가 몰랐다는 듯이 대답했다.

“아, 모난이 얘길 하는 거군.”

“…형님께서 일전에 제게 하명하실 때 이 모든 일이 북해를 위한… 것이라고 하셨죠.”

“음, 언제부터 네가 이런 일에 일일이 설명을 요구했지?”

조금 나무라는 듯한 어투에 무구원은 본능적으로 긴장하고 말았다. 뼛속까지 새겨진 서열로 인한 어쩔 수 없는 반응이었다. 무정원은 그런 동생의 모습을 보자마자 설핏 웃음을 지었다.

“네가 언제부터 설명을 요구했냐고 묻잖아. 감히 그런 발칙한 생각을 하게 된 계기가 있나?”

“…도통 이해가 안 돼서 그럽니다.”

“이해? 이게 이해를 요구하는 일인가. 그저 윤모난과 가까워지라는 그 명령이 그렇게 어렵니.”

처음부터 이 명령에는 의심쩍은 구석이 있었지만, 이해할 수 없는 일은 아니었다. 반도에서 가문들 간의 세력 견제야 일상이고, 후계자가 된 윤모난의 현 상황을 생각해보면 무정원의 명령도 당연한 견제일 터였다. 다만 무구원이 의문인 것은 그런 게 아니었다.

“…왜 하필 저입니까? 윤 팀장님은… 형님과….”

차마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해 멈추자 또 침묵이 찾아왔다. 비참함이랄지 황당함이랄지 무구원은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문제에 직면한 기분이었다. 단순히 과거부터 얽힌 둘의 관계나 북해 차기 가주의 일탈 행위로 인한 것이 아니다. 그런 충격은 몇 시간이면 해소되는 거니까.

문제는 왜 자신이 여기 끼어들어야만 했냐는 것이다. 그렇게 혼란에 휩싸인 무구원의 앞에서 갑자기 작게 웃음이 터졌다. 도통 평정을 잃는 법이 없는 무정원이 웃음을 참지 못하고 터트린 것이다.

“모난이가 그런 얘기까지 한 건가? 참, 다루기 어렵다고는 생각했지만 도통 예상하질 못하겠단 말이지. 그래, 그게 모난이지. 어찌나 사람을 당황스럽게 만드는지, 처음 만났을 때도 그랬어.”

“…….”

“충동적이고 극단적이지만… 정이 많아서 항상 문제랄까.”

무정원은 혼란스러운 무구원의 표정을 보면서 대충 맥락을 파악했다. 윤모난이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무구원에겐 털어놓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저 적당히 화풀이하는 선에서 건드린 모양인데. 그게 자신과의 관계를 폭로하는 방식이라니. 예상치 못한 한 방법이다.

그러나 영 수확이 없는 것은 아니다. 무구원의 목덜미에 난 상처와 잇자국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무정원은 웃음을 삼켰다. 무구원 저놈이 숙맥인 줄 알았는데 꽤 일을 잘 수행한 모양이었다. 솔직히 기대 이상이었다.

“넌 모르겠지만 윤씨 형제들과 난 인연이 꽤 길어. 작약은 뭐랄까, 제 아버지를 닮아 독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단 말이지. 세 부자가 하나같이 모난이에 대한 관심이 크다는 점에서도 공통점이 있었고. 하지만 모난이는….”

“팀장님은 그런 유의 관심을 원하지 않았겠죠. 지금도 아마 후계자가 될 생각이 없을 겁니다.”

“그래. 하지만 자신의 이름보다 성이 우선인 삶을 살아야 하는 사람이 뭘 원하고 원치 않고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아. 모난이는 그런 운명을 타고난 사람이고, 그 녀석이 남경을 이끄는 건 우리한테 매우 곤란한 일이다.”

“윤 팀장님이 가이드라서입니까?”

“아니, 윤모난이 윤모난이기 때문이야. 마음만 먹으면 의회 건물 안에 들어와 모든 에스퍼들의 능력을 제압하고 짓밟을 수 있는 능력을 가졌으니까.”

“…….”

“그런 위험 분자가… 윤씨 성까지 달고 태어났어. 이 문제를 가볍게 생각한다면 넌 우리 가문의 일원으로서 자격이 없다.”

무구원은 대신 항변했다.

“그 모든 일이 염려되어서 막으시려는 거라면, 팀장님을 가만 놔두는 게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그게 네가 생각하는 바람직한 정치적 판단인가?”

“…….”

“아니면 애초에 정치적 판단 따위 고려하지 않은 선택인가? 순전히 네가 그러고 싶어서 가만히 놔두라는 거라면….”

“…그러면 안 됩니까?”

무구원이 형의 말을 자른 건 난생처음이었다. 자신을 향한 그의 삐뚠 생각을 눈치챈 무정원은 바로 불쾌한 기색을 내비쳤다.

“네가 내 명령을 받아 행동했다는 것을 알면, 모난이가 널 가만히 둘 것 같니.”

“…….”

“그 녀석은 이용당하는 걸 가장 싫어하거든. 태어나길 그렇게 태어나서 그런지 그런 기만은 도저히 못 견디더란 말이지. 아예 모르면 몰랐지 다 알고 난 뒤에는 절대 참지 않을 거다.”

무정원에게 있어서는 무구원과 윤모난의 생각이 너무 일치하는 것도 위험 요소였다. 특히 무구원은 겉으론 마냥 순종적으로 보여도 제 주관에 따라 행동하는 경우가 왕왕 있었기에, 오히려 윤모난보다 더 다루기 힘든 부분도 있었다. 또 둘의 관계가 통제를 벗어나게 되면 나중에 가서 무구원이 명령에 불복종할 수도 있다.

무정원은 한참 어린 동생을 다독이듯이 생전 내지 않았던 상냥한 말투로 말했다.

“일단은 그렇게 모난이한테 정신 못 차리는 척해. 지금으로서는 나쁘지 않지. 다만 윤모난이 갑자기 총으로 머리를 쏴서 자살하거나 아니면 또 정신보호센터에 들어가는 불상사만 막으면 돼.”

“…….”

“그렇게 서로 사이좋게 지내.”

그래야 필요할 때 윤모난을 이용할 수 있으니까. 그에게서 작약의 유령을 떨쳐내지 않으면 모든 일이 허사가 된다. 그를 과거에서 끌어내지 않으면 그저 남경 하나만을 가지는 정도의 소소한 성취만으로 만족해야 할 거다.

하지만 무정원은 그것만으론 만족할 수 없었다. 그가 원하는 건 남경 그 이상이었다. 지금까지 참아온 것들을 생각하면 남경만으로는 부족하니까.

“이제 알겠습니다.”

갑자기 무구원이 뜻 모를 수긍을 하며 자리에서 먼저 일어났다.

“형님께선 단지 윤 팀장님을 경계하는 게 문제가 아니었네요. 팀장님 개인에게 구체적으로 무언가를 원하고 계시군요.”

“뭐라고?”

“형님께서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계속 생각해봤습니다. 아마 첫 번째로는 남경이 목적이시겠죠. 저희 가문은 재정적으로 한계에 다다랐고 남경은 다섯 가문 중에서 가장 부유하니 타개책이 필요하셨을 겁니다.”

“…….”

“그다음은 무엇입니까?”

순간 내내 여유를 유지하고 있던 무정원의 표정이 눈에 띌 정도로 굳어버렸다.

“이미 남경을 취할 방법은 생각해두셨겠죠. 물밑 작업도 어느 정도 진행되었을 거구요. 하지만 이 일은 팀장님이 당장 죽지 않게 막아야 하는 것과는 상관이 없지 않습니까.”

왜냐하면 단지 남경을 가지려는 것이 목적이라면 윤모난이 죽는 것이 무조건 이득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계획대로 하고 난 뒤, 남경 윤씨가 무너지고 난 뒤의 일이다. 평소 이런 문제에선 멀리 떨어져 있던 무구원이 갑자기 핵심을 지적하자 무정원으로서도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체 남경 말고 형님이 원하시는 게 뭡니까? 윤 팀장님을 통해서 뭘 취하려고 하시기에 ….”

발칙한 질문이 내려앉기 무섭게 무정원의 주먹이 쾅, 하고 책상으로 떨어졌다. 손이 닿은 곳을 시작으로 서서히 냉기가 퍼지기 시작했다. 무구원이 대놓고 의중을 떠보며 제 생각을 말하는 건 처음이다. 그리고 그건 결코 좋지 않았다.

북해의 차기 지도자로서 무정원의 원칙은 단순했다.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그냥 넘어가는 일이 없어야 한다는 것.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으면 반드시 해결하고 지나가야 한다. 기우이겠지 하면서 넘기는 일이 나중에 가서는 커다란 화근이 될 수 있음을 무정원은 알고 있었다.

안다고 생각했던 것일수록 더더욱 경계하고 면밀하게 파악해야 한다. 그리고 무구원은 지금껏 그가 ‘안다고’ 생각했던 인물의 범주에 있었다. 그 범주에만 있으면 누구나 바둑알처럼 의도에 맞게 판 위로 놓을 수 있다.

그런데 바둑알이 아주 사소하게나마 반항하기 시작했다. 감히 자신이 놓인 자리에 의문을 가지고 대국을 두는 사람에게 묻는다. 무정원이 참을 수 없는 건 바로 그런 거였다.

“…자꾸 이런 일이 반복되는군. 처음엔 대화를 엿듣더니 얼마 전에는 내가 명령한 것에 감히 이유를 물었었지. 그런데 지금은 날 떠보려고까지 해?”

“벌은 내리시는 대로 받겠습니다.”

말만 듣자면 아주 순종적이기 그지없지만 기실 그렇지 않다. 그 말은 아무리 벌을 내려도 뜻을 굽히지 않겠다는 뜻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그건 무구원이 할 수 있는 최악의 사고방식이었다. 이어지는 회의에 며칠간 내리 잠을 자지 못해 신경이 과민한 무정원 주변의 공기가 삽시간에 얼어붙었다.

이런 건 그냥 넘어갈 게 아니라 초장에 저런 사고방식 자체를 꺾어놓아야 하는 일이다. 무구원은 씨앗의 의식 이후 이단이라는 오명이 붙은 채 목숨만 부지하고 살았지만, 신앙심이 매우 깊은 탓에 종교에 있어서는 순종적이기도 했다. 지금까진 꽤나 모범생이었으니 작은 교훈을 남겨주는 것도 나쁘지 않을 터였다.

“어머니 신의 가르침을 생각해봐라.”

“…윽.”

“고통을 긍정하는 것의 시작은 자신의 한계에 대한 순응이야.”

바른 자세를 유지하고 있던 무구원의 몸이 크게 뒤흔들렸다. 무정원에게서 뻗어 나온 냉기가 피부를 뚫고 빠르게 심장까지 파고들었다. 숨이 턱 막히고 목구멍 너머로 얼음덩어리를 삼킨 것 같은 고통이 전신을 파고든다. 무정원은 태연히 의자 등받이에 기대어 천경교의 가르침을 전달했다.

“넌 아직까지 순응하는 법을 익히지 못했어. 네 나태한 몸과 정신을 직접 두드려주지.”

무구원이 신음도 못 내고 바닥으로 고꾸라지자, 서릿발 같은 음성이 바짝 쫓아왔다.

“네가 어머니 신의 길에서 벗어날까 걱정이 되는구나. 그 길을 걷는 데 있어 네 주관 따위는 필요 없는데 말이야.”

“…….”

“한때의 방종이야 용서받을 수 있지만 그 이상은 이단이야.”

무정원의 말에는 그런 위력이 있었다. 그가 이단이라 선고하면 이단이 된다. 그의 권력 자체가 천경교를 기반으로 선 것이기에 그에게는 그럴 권한이 있기 때문이다. 지금 북해에서 무정원의 위에 있는 사람은 현 북해의 가주뿐이었으나, 병석에 누워 죽을 날만을 기다리는 그는 이제 북해의 가주라기보다는 그저 무정원의 아버지였다. 이미 그 자리는 무정원이 앉아 있는 거나 다름없었으므로.

무정원은 아슬아슬한 정도로 동생의 체온을 떨어트리면서 그를 점점 한계로 몰고 갔다. 하지만 바닥에 쓰러진 무구원은 경련하며 몸을 한 번 뒤틀었을 뿐 끈질기게 버티고 있었다.

“더 했다간 아예 폐가 망가져 다시는 뛰지 못할 텐데. 너도 알다시피 체온이 떨어진 상태에서는 이능력도 잘 발휘되지 않지.”

“…처분…하시는… 대로….”

더듬더듬 이어진 말에 무정원은 눈에 보이게 얼굴을 구겼다. 이윽고 손에서 흘러나온 냉기가 거둬졌다. 찬기가 남은 손을 턱에 괴며 무정원은 천천히 몸을 일으키는 동생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내가 이 문제를 조금 가벼이 생각했나 보군. 네가 이런 고집을 부릴 것도 예상했어야 했나.”

“…….”

“하지만 네 감정은 모두 착각일 뿐이다.”

무구원은 항상 무정원 앞에서는 아무것도 숨길 수 없었고, 그것은 지금도 그랬다. 그에게는 자신의 속마음 하나하나까지 읽히고 철저하게 분석당한다. 무정원이 무서운 건 이런 이유였다.

“가이드의 가이딩에는 참 묘한 구석이 있지. 포스트 종의 혈액을 매질로 해서 에너지를 파동으로 좌우하는 이능력이라니. 가이드가 딱히 의도하지 않아도 에스퍼가 그 옆에 있으면 여러 가지 신체적인 영향을 받게 된다고 하더군.”

무정원의 잿빛 눈동자가 낮게 가라앉았다. 잠깐의 상념에 잠긴 얼굴이었다.

“예를 들면 감정이 불같이 일기도 하는데…. 어찌 보면 그건 당연한 거다. 생물학적으로 가이딩의 원리가 그런 거니까.”

“…….”

“그런 점에서 지금 네가 느끼는 감정은 내가 만들어준 거나 다름없어.”

마치 기계에 특정 값을 입력해서 예상한 결과가 나오도록 설계한 감정이라고, 무정원은 말했다.

“모난이가 서곡으로 돌아오던 첫날, 내가 그 녀석에게 선택권을 줬지. 우리 팀에 들어올지 아니면 2부 7팀으로 들어갈지 말이야.”

그 말에 무구원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생각해보니 형님은 그날 이상하게도 자신의 팀과 2부 7팀이라는 두 가지 선택지만 윤모난에게 내놓았다. 처음부터 그 외의 다른 길은 없다는 듯이.

“만약 모난이가 우리 팀에 들어왔다면 너와 엮일 일이 있었을까?”

“왜 하필이면 저까지 선택지에 넣으신 겁니까?”

“하필이면? 뭘 착각하는군. 서곡에 마침 이런 일을 맡길 동생이 너뿐이라 편의에 따라 고른 것뿐이지. 별다른 뜻이 있겠니.”

“전 애초에 그럴 마음이….”

“그랬겠지. 윤모난이 마술피리를 불어 순진한 널 꾀어낸 거니까. 그래서 네가 지금 혼란스러운 것도 착각이라는 거다. 착각하는 거야 뭐 그럴 수 있다지만 알고는 있어야지.”

무정원은 무구원의 상태가 아직 일을 그르치는 정도는 아니라고 판단했다. 충실한 신도임에도 불구하고 늘 이단이라는 의심을 받으며 살아온 무구원은 ‘진짜’라는 기준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가 자신이 생각하는 정의에 집착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그런 기제 때문이었다. 무구원에게 진정성이 얼마나 중요한 문제인지, 그건 형인 무정원만 아는 것이었다.

그가 현재 느끼고 빠져들어 있는 감정이 가짜라는 것을 알게 되면 무구원도 태도를 바꿀 터였다. 사실은 너희 두 사람의 관계가 아주 특별한 것이 아니라고. 무정원 자신 또한 한때 착각했으나 가이드와 에스퍼의 관계란 그 한계를 벗어나기 어렵다고 말해줄 심산이었다.

“하지만 그 착각에 중독되면 곤란해. 마술피리의 우화가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거든. 윤모난의 인생만 돌이켜봐도 그래.”

남경의 모란과 작약의 우애가 가이드와 에스퍼의 관계를 암시하는 한 편의 비극적 우화나 다름없지 않은가.

무정원은 훈련 학교 시절, 작약의 다섯 살 어린 막냇동생이 궁금했었다. 기숙사 생활이 필수라 고향에 있는 동생을 만날 수 없던 작약이 하루에 한 번씩 그 동생에게 두꺼운 편지를 써서 보냈기 때문이다. 무정원의 눈에 그건 일방적인 연서나 다름없었다.

처음에는 그 모난이라는 동생이 여동생이라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대화를 하던 중에 무정원이 무심코 ‘너희 누이’라고 하자 작약은 박장대소했다. 윤약이 그의 말을 정정해주면서 그제야 윤모난에 대해서 조금이나마 듣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작약은 마치 경계심 많은 맹수처럼 그들의 동생을 향한 더 이상의 관심을 허용하진 않았다. 무정원은 그게 조금 우습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동생들이 차고 넘치는 그에게는 그런 형제애가 조금 유별나 보였던 까닭이다. 그러다가 시간이 훌쩍 지나 무정원은 우연히 남경으로 초대받았고 그렇게 윤모난을 만나게 된 것이다.

실제로 본 윤모난은 상당히 스스럼없고 정해놓은 선이라는 것이 없는 녀석이었다. 딱 작약의 동생다웠다. 우연을 가장했지만 당시의 무정원은 이 만남이 작약의 의도임을 모르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윤모난과의 관계에 있어 무정원은 생애 처음으로 반 충동적인 결정들을 했다.

“형, 결혼 얘기 나온다면서요? 그럼 이제 이 관계도 끝이네. 재밌었어요.”

이후 조금은 칼같이 끝난 관계이기는 했지만 무정원으로서도 나쁘지 않은 마무리였다. 그 삼 형제를 보면서 깨달은 바가 있었기 때문이다.

작약과 모란의 형제애는 대단히 병적이었다. 가이드인 모란과 달리, 에스퍼인 작약에게는 막냇동생을 향한 중독자와 비슷한 집착이 있었다. 빈틈없던 그들의 판단에 자꾸 실수가 생기기 시작한 것은 확실히 윤모난이 서곡에 들어오면서부터였다. 그리고 무정원은 그런 일련의 과정을 보며 깨달았다. 너무 오래 착각을 현실로 받아들이고 살면 결국 삶은 망가지게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반도에서 가이드를 경외시하는 것에는 이런 요인들이 함축되어 있다. 무정원은 사사로운 생각에서 빠져나오며 말을 이었다.

“모든 에스퍼에게 가이드란 괴물이 되지 않도록 인도하는 존재이지. 그렇기에 반대로 생각하면 항상 우리의 한계를 시험하는 상대이기도 해.”

그 말에 무구원은 저절로 윤모난에게 품었던 모든 감정들을 돌이켜볼 수밖에 없었다. 윤모난은 평화롭던 자신의 세계를 흔들고 오랜 가치관을 뿌리 뽑았다. 꼭 갑자기 닥친 재앙처럼. 이런 감정 앞에서 무구원은 한없는 무기력함을 느꼈다. 아무리 기도를 하고 바늘로 손을 찔러대도 저항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윤모난의 과거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따라오는 상처들…. 무구원은 이런 게 모두 처음이었기에 무엇이 옳고 그른지 판단할 수 없었고, 그사이 윤모난은 무구원을 완전히 휘저어놨다.

“네가 지금 이러는 건 당연한 일이다. 오늘의 불충도 다 그런 이유이지. 네 자유의지가 아니야.”

무정원은 짐짓 말투를 누그러트렸다. 자유의지가 아니라면 진짜도 아니다. 애초에 무정원이 짜놓은 바둑판 안에 들어가 계획대로 마술피리의 꾐에 빠졌다. 윤모난이 특별해서가 아니라, 당연한 인과관계에 따라 만들어진 감정이라고, 무구원에게 가르쳐야만 했다.

“모난이에게 개인적인 원한은 없어. 내가 원한을 가진 건 윤화신과 작약이지, 넌 모르겠지만 먼저 시작한 건 그들이거든. 정치는 작용과 반작용일 뿐이야.”

어쩌면 무정원의 명분은 냉정하리만치 타당한 부분도 있었다.

“설마 이런 얘기를 듣고도 가문과 한때의 착각 따위를 저울질하진 않겠지.”

장갑을 낀 손이 무구원의 어깨에 살포시 내려앉았다. 그러자 내내 숙이고 있던 무구원의 고개가 위로 올라왔다. 무정원은 여전히 서슬 퍼런 날붙이 같은 눈빛으로 동생의 눈을 주시하며 말했다.

“잊지 말아야지. 네 오랜 짝사랑 상대는 고향이라는 것을.”

그것은 가감 없는 사실이었다. 여태껏 무구원에게 고향은 근원적인 공간이었으니 말이다. 그에게 북해란 선택이 아닌 운명으로 엮였으며 항상 목말라 있던 무언가였다.

자신에게 결핍된 무언가를 갈구해온 무구원에게 다른 것은 필요 없을 거라고, 무정원은 자신했다. 이렇게 그의 오랜 짝사랑을 일깨워주기만 하면 될 테니.

<3권에서 계속>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