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구원
며칠간 윤모난은 끔찍한 두통과 무기력증에 시달렸다. 팔다리에 모래주머니를 달아놓은 것처럼 몸이 무거워서 뒤척이는 것마저도 힘겨웠다. 모든 일을 외면하고 방에 틀어박혀 있고 싶었으나 할 일이 산더미였다.
2부 7팀 전체가 출정에 제약이 있어 온갖 서류 작업이며 교관까지 윤모난이 떠맡았고, 월요일 아침에는 1년 차 가이드 대원들을 대상으로 하는 강의도 있었다.
“약….”
지난번 다짐이 무색하게 윤모난은 여전히 약을 거르는 중이었다. 그러므로 무구원과도 며칠째 대화 단절이다. 서로가 서로를 피했으므로 딱히 약을 먹는다고 해서 대화가 되었으리란 보장도 없었지만.
아침 7시를 조금 넘긴 시각, 윤모난은 거의 기다시피 느릿느릿 움직여 방문을 밀고 밖으로 나갔다. 지금쯤이면 무구원이나 경해국은 구보를 하기 위해 나가고도 남을 시간이었다. 합숙소 안은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 냉장고로 가서 물 한 병을 꺼내 든 윤모난은 뚜껑을 열고 벌컥벌컥 마셨다. 건조하게 말라붙어 있던 목구멍이 금세 해갈되며 정신도 조금 깨고 두통도 조금은 가라앉았다.
씻는 것도 힘이 들어서 평소보다 시간이 많이 걸린 탓에 합숙소를 빠져나와 훈련동에 가는 것도 늦어졌다. 다행히 시간을 넉넉하게 둔 탓에 강의에 지각하는 것만은 겨우 면했다. 지각이야 한두 번 있을 수 있는 일이라 해도, 윤모난은 자신이 그 정도로 고장 나지 않기를 바랐다.
“…포스트 에스퍼가 에너지 부하에 걸리지 않고 자신의 이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파형의 평균값은 이 정도입니다.”
윤모난은 칠판에 함수식을 적으며 옆에 간략한 그래프를 그려 넣었다.
“한곗값은 이 정도. 에너지의 항상성을 유지하려면 이 파동이 완만한 곡선을 그리게 해야 하죠.”
칠판 위로 곡선이 그려지는 사이, 손가락에는 하얀 분필의 분진이 가득 묻었다. 손끝을 따라 허옇게 흩날리는 모습이 마치 화장하고 남은 뼛가루 같았다.
…뼛가루라니. 문득 든 생각을 꾹 눌러 잠재우며 돌아서자 1년 차 가이드들의 동태 눈깔들이 보인다. 손을 탁탁 털어대니 졸고 있던 몇 명이 깜짝 놀라 눈을 번쩍 떴다.
“내 강의가 졸립니까?”
당연히 대답하는 용자는 없었지만 다들 시선을 피했다. 실제로 윤모난의 강의는 천연 수면제였기에. 윤모난은 자신이 파동역학 학위를 딸 때 들은 전공 교수의 단골 멘트가 제 입버릇이 될 줄은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때야 당연히 전투조의 대원으로서 무간에 갈 줄로만 알았지, 훗날 이런 선생질이나 하게 될 줄은 어찌 예상이나 했을까.
팀 스코어를 올려준다고만 안 했어도 수락하지 않았을 텐데. 대체 전생에 무슨 죄를 지어서 숨 쉬는 것도 버거운 우울증 환자가 동태 눈깔들이나 가르쳐야 하는 건지. 윤모난은 분필을 내려놓으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졸리면 쪽지 시험 봐야겠네요.”
그 말에 쾅, 하고 누군가 책상을 내려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교실의 모든 시선이 그쪽으로 쏠린 가운데 맨 뒷좌석에 앉아 있던 경해국이 주먹을 부들대고 있는 꼴이 눈에 들어왔다.
그가 왜 1년 차 가이드들의 틈바구니에 끼어 이런 졸린 강의를 듣고 있느냐 하면.
이능력을 조절하는 데 심각한 문제가 있어 병동에 불을 지른 그에게 윤모난이 팀장 직권으로 명령했기 때문이다. 동태 눈깔 중에서도 발군의 상동태인 경해국은 ‘이론 없는 실천’의 현신으로서, 새내기 가이드들이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표본이었다. 그들에게 가이드로서 사명감을 고취하는 장본인이랄까.
“진짜, 3일에 한 번씩 쪽지 시험이라니… 사탄도 그렇게는 안 하겠습니다. 여기가 학교도 아니고 이건 그냥 대원들 교육의 일환 아닙니까?”
“…맞아요.”
여기저기서 동의하는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하지만 늘 적당히라는 것을 모르고 살았던 완벽주의자 윤모난은 쪽지 시험이 왜 그토록 싫은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매일 보는 것도 아니고, 이왕 하는 거라면 제대로 배워놓는 게 좋은 거 아닌가.
여기 있는 모두가 자신처럼 학위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 가르치는 내용은 훈련 학교 6학년 고급반 수준이면 이해하는 정도였다.
“그럼 이번 쪽지 시험 난도를 좀 하향하겠습니다. 가이딩의 파동이 간섭을 일으키는 생체 분자의 목록을 주관식으로….”
“우우―!”
“…경해국… 저게…. 이건 초등학생도 아는 수준이잖아!”
“씨… 어느 나라 초등학생이 그따위 걸 압니까!”
다들 ‘맞아’ 하며 격하게 맞장구를 쳤다.
“다들 대가리에 해파리만 들었습니까? 바로 전에 강의한 내용인데.”
“아까 먹은 밥도 아직 소화 안 된 것 같은데 그걸 어떻게 기억합니까? 그리고 정식 교관은 아니라지만 위치도 있으신 분이 대가리가 뭡니까, 대가리가. 후배들 앞에서 채신머리없게요.”
오늘따라 경해국이 신경을 박박 긁는다. 지금껏 억지로 파동역학을 공부하라고 다그친 것을 이참에 복수하려는 모양이었다. 일대일이라면 해볼 만한데, 경해국의 선동에 다른 놈들까지 합세하면서 슬슬 이쪽이 밀리고 있었다.
윤모난은 시험지로 쓰려고 가져온 백지의 끄트머리를 손으로 구기면서 화를 참았다. 생각보다 해볼 만하다고 생각한 건지 이제껏 장구만 치던 경해국이 기어코 꽹과리까지 울려대기 시작했다.
“거… 이제 봄인데 우리 팀장… 아니 교관님 첫사랑 얘기나 해주시죠.”
“저… 미친놈이….”
여기서 주먹을 쓰는 것이야말로 정말 채신머리없는 짓이다. 윤모난은 부글부글 끓는 속을 애써 참으며 칠판에 가득 적혀 있던 온갖 수학 공식들을 모두 지웠다. 저런 허접쓰레기 얘기 따위를 할 생각은 당연히 없고, 어찌 됐건 수업은 진행해야 하는 관계로 머리를 조금 굴리기로 했다.
“사랑이라… 알다시피 가이딩이 영향을 미치는 생체 분자에는 호르몬이 있죠. 특정한 감정이나 행위를 유도하는 것도 이론적으로 가능하다는 뜻입니다. 이 경우 발생할 수 있는 윤리적 문제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오늘은 쪽지 시험이 아니라, 토론으로 점수를 매기겠습니다.”
예상대로 몇 명이 금방 답을 했다. 뭐든 사랑이나 연애라는 주제만 끼어들면 관심이 생기고 저마다 의견이 있기 마련이다. 윤모난은 교탁 옆 의자에 앉아 명단을 들고 수준에 따라 점수를 체크했다.
“당연히 상대에게 가이딩으로 그런 감정을 불러일으키면 윤리적으로 문제가 있죠. 정상적인 관계가 아닐뿐더러 순전한 자기 의지의 발로가 아니잖아요.”
“정상적으로 사랑에 빠지는 게 대체 뭘까요? 사랑이라는 건 어느 정도 의지를 벗어난 게 아닌가.”
“그럼 사랑에 빠지는 묘약 같은 걸 먹여서 상대가 날 좋아하게 만드는 것도 문제가 없다는 말인가요?”
“가이딩은 묘약이랑 다르죠. 가이딩은 상호 교감으로 발생하는 거잖아요. 예를 들면 성적인 매력을 가진 사람에게 누구나 가슴이 뛰듯이. 생물학적으로 가이드의 능력은 타고난 것이고 특정 감정을 유도하는 것도 가이드가 선천적으로 가진 요소인데 비윤리적이라 할 순 없죠.”
토론은 금세 달아올라 과열 양상을 보였다. 경해국도 한마디 얹었다.
“그 사랑이라는 것은… 과학의 영역으로 설명할 수 없는….”
“아니, 선배님. 사랑도 결국 호르몬의 작용인 거 모르세요? 이거야말로 초등학생도 아는 건데.”
“뭐?”
“와- 진짜 무식하다….”
“저기 서로 비난은 하지 마세요. 그건 토론하는 태도가 아닙니다.”
윤모난은 적당히 말을 자른 뒤 태도 점수를 깎았다. 펄펄 뛸 줄 알았던 경해국은 호르몬이니 뭐니 그런 건 전혀 몰랐는지 충격을 받은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윤모난에겐 그 모습이 더 충격적이었다. 강의가 끝난 뒤에 축 처져 있는 경해국에게 다가간 윤모난은 응원하는 의미로 등을 두드려주었다.
“후배들한테 개망신당하지 말고 가만히 있지 그랬어.”
“아니, 팀장님 진짜입니까? 그럼 호르몬인지 뭔지 없어지면 우리 자연 씨도 저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게 된다는 겁니까?”
“그럼 무슨 요정이 와서 방망이 흔들어서 사랑에 빠지게 하는 줄 알았냐?”
“…젠장, 젠장!”
“그게 그렇게 충격이야? 내가 더 충격인데, 지금…. 어허.”
경해국은 여전히 심오한 호르몬의 세계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윤모난은 이마를 긁적이면서 쪽지 시험을 좀 줄여보겠다고 하며 그를 달랬다. 팀 스코어를 위해 개 같은 동태 눈깔들을 참고 있는데, 또 이놈이 홱 돌아서 불이라도 지르면 스코어고 자시고 그냥 거기 뛰어드는 것밖에는 답이 없었다.
“걱정 마. 당연히 사랑은 호르몬에 작용을 받기는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니까.”
가이딩과 호르몬만으로 만사형통이라면 윤모난이 이렇게 오래 우울증에 빠질 이유도 없었다. 망가진 머리를 그렇게 뚝딱 고칠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런 건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사랑도 마찬가지였다.
가이드가 의도적으로 누군가의 가슴을 뛰게 만들 수는 있어도 그런 두근거림을 사랑이라 정의할 수는 없다. 그것을 포함한 일련의 과정과 시간들을 사랑이라고 정의하는 것은 항상 당사자의 자유의지에 달려 있으므로. 만약 누군가를 보며 가슴이 두근거릴 때 그것을 가벼운 심장병 증상으로 여긴다면 사랑이라고 할 수 없지 않은가.
“그렇게 그 자연 씨가 좋아? 얼굴도 몇 번 못 봤다며?”
“횟수가 중요합니까? 저는 처음 봤을 때부터 알았습니다. 하긴 팀장님이 사랑이 뭔지 알 리가 없죠.”
“…호르몬도 모르는 너보다는 낫겠지.”
“팀장님처럼 가벼운 사람이 어떻게 알겠습니까? 천재 제비이시니, 뭐… 여자는 수없이 갈아치우셨겠지요. 필시 애인은 두 명이랬지만 짧게 만난 여자들은 세지도 않은 거죠?”
“…….”
“우리 어머니 말씀이 잘생긴 놈들은 얼굴값 한다고 합디다.”
“놈?”
“그, 팀장님은 여자 엄청 후리고 다니게 생겼어요. 순정이라고는 티끌도 없는… 악! 씨… 진짜, 아픕니다!”
결국 경해국은 여자가 아닌 남자를 엄청 후리고 다녔던 윤모난의 주먹에 맞아 뒤통수에 커다란 혹을 얻어야 했다. 윤모난은 경해국의 감정이야말로 확실히 호르몬으로 인한 착각일 확률이 높다고 생각했다. 경해국은 단순하니 그런 감정에 사랑이라고 이름 붙였을 테고.
둘은 열심히 투덕거리며 훈련 동 앞의 길을 천천히 걸었다. 봄이 한창 무르익은 지금은 사람이 말랑말랑해지는 계절이긴 했다. 이런 아름다운 때에도 만성적인 우울을 겪는 환자의 심장은 거의 굳어 있긴 하지만.
이미 죽어 있는 것이나 다름없는 윤모난은 서곡센터 곳곳에 하얗게 피어오른 꽃나무들을 천천히 구경했다. 형들의 무덤을 뽀얗게 덮은 향기로운 꽃잎과 비슷하게 생긴 꽃잎들이 살아 있는 망자의 머리에도 소복하게 쌓였다.
“어라, 무씨!”
옆에서 경해국이 앞서가던 무구원을 불렀을 때, 저절로 그쪽을 향해 따라 돌아간 분홍 머리에서 꽃잎이 살랑이며 흩어졌다. 길을 걸어가던 무구원이 뚱한 얼굴로 뒤돌아봤다. 순간 가슴 한쪽이 욱신거리면서 새삼스럽게 심장 박동이 느껴졌다. 불편하고 불쾌하고 숨이 차는 기분이 밀려오자 윤모난은 숨을 후 내쉬었다.
“어디 가냐?”
“훈련.”
경해국의 질문에 짧게 대답한 무구원은 뒤에 서 있는 윤모난을 흘끔 바라보았다. 윤모난은 어딘가 불편한지 안 그래도 창백한 안색이 더 파리해져 있었다. 무구원은 경해국을 지나쳐서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서 가만히 있는 그에게 다가갔다.
“팀장님.”
그날 그 파탄의 밤 이후로 이야기를 나누는 건 며칠 만이다. 윤모난이 약을 먹고 다시 대화해보기로 한 결심을 꽤 오래 미룬 탓이다. 한 걸음 앞까지 다가온 무구원은 윤모난의 넓은 어깨에 붙은 꽃잎을 조심스럽게 떼어내며 의외의 질문을 했다.
마치 그날 밤의 일은 생각도 안 난다는 듯,
“오늘은 약 드셨습니까?”
이따위 질문이나 해댄다.
“…아니. 그런 건 왜 물어?”
윤모난은 바로 방어적으로 반응했다. 그러나 그 뚱한 얼굴은 그저 지그시 시선을 마주해올 뿐이다.
불안한 상태로 무구원을 대했다가 매번 안 좋은 대처만 골라서 했던 윤모난은 결국 양심의 가책을 참지 못하고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약통을 꺼냈다. 무구원의 시선이 전혀 줄어들지 않은 약의 개수를 세고 있는 동안 그는 급히 약통을 털어 알약 두 알을 꺼내 바로 삼켰다.
“자, 약 먹었어요. 저 이제 가도 될까요, 이 새끼야?”
“저기… 팀장님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할 말이 있는 건 윤모난도 마찬가지였다.
“…뭐, 그래.”
경해국을 먼저 보내고 두 사람은 자판기 옆 벤치에 자리를 잡았다. 무구원은 시키지도 않았는데 자판기에서 가장 단 커피를 뽑아서 내밀었다. 얼떨결에 받아 든 커피는 혀끝이 아릴 만큼 달았고, 딱 윤모난이 좋아하는 맛이긴 했다. 먹은 것도 없는 빈속에 당분이 금방 싸르르 스며들었다.
“…어, 큐브 말이야. 그거 내가 그날 연구조 에스퍼한테 의뢰했어. 알아보고 연락 준대.”
“네.”
생각도 못한 단답에 윤모난은 조금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오랜만에 약을 먹어 조금 돌아온 정신이 지난번 무구원을 다그친 일을 계속 상기시키고 있었다. 그날은 정말 제정신이 아니었던 것이 분명하다. 쌓였던 스트레스가 폭발해 그 이후에는 클럽 안에서 발작까지 일으켰으니.
어찌 됐건 사과부터 하자. 약 기운에 힘입어 윤모난은 결심했다.
“무구원, 그날 있잖아. 너한테 억지로 그런 건….”
“팀장님이 왜 그러셨는지 압니다. 제가 그날 선을 넘었습니다.”
“…어?”
“죄송합니다.”
갑자기 사과할 순서를 빼앗겨버린 윤모난은 멋쩍은 표정으로 뺨 한쪽을 긁적였다. 이런 대화를 하고 싶었던 건 아니었다. 사과를 한 뒤 무구원에게 둘 사이에 있었던 일은 없는 일로 하고 다시 예전처럼 팀장과 팀원 사이로 돌아가자고 제안하려 했을 뿐. 윤모난은 자신이 정말 돌아버리기 전에 무구원과 거리를 벌리고 싶었다.
또 그렇게 하면 거짓말도 그만두게 할 수 있으니 화가 날 일도 없을 테니까. 이제는 그 화라는 것마저 약간은 모호해진 부분도 있었지만. 하지만 무구원은 오래 생각한 듯 걸리는 것 없이 말을 이었다.
“다시는 그럴 일 없을 겁니다. 팀장님께 거슬리는 일 없도록 하겠습니다.”
“…이 관계를 이어가자는 뜻이야?”
“제가 아니면 팀장님도 결국 다른 상대를 찾으실 거 아닙니까.”
무구원의 말이 맞긴 했다. 현재로서는 약을 끊을 수도 없고 여기서 더 약해져선 안 될 때이기 때문이다. 특히 지난번 사교 클럽에서 꽃들과 마주한 뒤로 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언제든 청연이를 비롯한 제 조카들이 위험해질 수 있는데, 만일의 상황에서 자신의 힘이 모자라 구해주지 못한다면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렇다고 무구원이 말대로 새로운 상대를 찾자니 그럴 여유도 기운도 없었다. 하지만 이런 방향은 결코 좋다고 할 수 없었다. 더 이상 필요 여하를 떠난 일이기도 하다. 속절없이 밀려드는 감정들은 약 기운과 상관없이 윤모난의 가슴 한쪽을 들끓게 만들고 있었다.
“넌 계속 그렇게 하고 싶어? 그게 네 선택이야?”
윤모난은 여전히 자신을 속이려 애쓰고 있는 놈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며 재차 물었다.
“그게 정말 네가 원하는 거야? 무구원.”
그렇게 물으면서 윤모난은 내심 바랐다. ‘아니요, 제가 원하는 건 아니었습니다’라고 대답하기를. 하지만 그 기대를 박살 내며 무구원이 선선히 ‘네’라고 대답한다. 윤모난의 눈썹이 들썩이듯 위로 치켜 올라갔다.
“내가 왜 네가 원하는 대로 해줘야 하는데? 어설프기 그지없어 편리하다는 조건 말고는 네가 딱히 기술이 대단한 것도 아니고.”
“…….”
“날 대단히 즐겁게 해주는 것도 아니잖아?”
벤치에 석상처럼 앉아 있던 무구원은 흔들림 없는 시선으로 윤모난을 바라보다 고저 없이 건조한 말투로 대답했다.
“팀장님께서 즐거울 수 있도록 어디서 배워 오기라도 할까요.”
“…왜? 아예 타락한 거 본격적으로 기술이라도 키워보려고?”
“필요하다면요.”
“필요? 그걸 필요로 하는 게 대체 누구지? 나는 아닌 거 같은데.”
따져 묻는 말에 무구원은 납득이 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왜 화를 내십니까?”
“뭐?”
“저번부터 제게 화내시는 이유가 궁금해서 그럽니다. 말씀해주시면 고치겠습니다.”
퍽 사무적인 질문에 말문이 턱 막힌 건 오히려 윤모난이었다. 무슨 거래를 하듯이 구는 너의 이런 면이 거슬려서 견딜 수 없다고 어떻게 말할까. 하지만 애초에 무구원과의 관계는 무정원이라는 제삼자를 빼고 생각해도, 처음부터 거래 비슷하게 시작한 것이라 자신에겐 그런 말 할 수 있는 자격조차 없었다.
“이젠 내 머릿속까지 들여다보려고? 주제넘긴.”
무구원의 날카로운 눈이 무방비하게 풀렸다. 또 그 꼴 보기 싫은 표정이다. 윤모난은 망설임 없이 뒤돌아섰다. 일방적으로 마무리 지은 대화는 그가 죄 없는 나무 허리를 한번 휘갈겨서 기어코 부러트리며 완전히 끝나버렸다.
그러나 윤모난은 쩍 소리를 내며 옆으로 쓰러진 꽃나무가 바닥에 내동댕이쳐지는 광경만으론 만족할 수 없었다. 그의 안을 가득 채우는 폭력을 당장 휘둘러야 했다. 윤모난은 곧장 개인 훈련실로 올라가서 두꺼운 샌드백을 무구원 대신 사정없이 팼다.
정신을 차렸을 땐 사방이 안에서 터져 흘러나온 모래투성이였다. 윤모난은 처량 맞게 그곳에 한참이나 엎어져 있었다.
“죽일까. 그럼 괜찮아질까.”
혼잣말로 무구원의 목숨을 쥐었다가 이내 탁, 하고 놓는다. 하지만 그는 마음대로 되지 않는 놈이 아니던가. 다리가 되겠다니 개뿔. 저렇게 제멋대로인 다리는 재앙이다. 빨간 구두를 신은 소녀의 우화만 생각해봐도 그렇다. 구두를 신은 다리가 마음대로 움직여 시도 때도 없이 춤을 추다가 결국 발목이 잘리지 않았는가.
약을 먹든 안 먹든 어찌 됐건 파탄이었다. 무구원은 별다른 의도 없이도 제 속을 마구잡이로 뒤집어놨다. 분명 자신 또한 그에게 마찬가지여야 했다. 윤모난은 대화 내내 흐트러짐 없었던 무구원의 태도를 떠올렸다. 어찌 그리 맹목적일 만큼 올곧은지.
자신이 억지로 몰아붙였는데도 저렇게 와서 죄송하다고 하며 여전히 관계를 유지하겠다니. 목적을 위해서라면 더한 고문도 참겠지. 그러니 무구원은 대응책이 폭력뿐인 사람에겐 최악의 적수였다. 저렇게 고통을 잘 참는 바퀴벌레인 줄 알았다면 애초에 건드리지도 않았을 거다. 까다로워도 너무 까다로운 적이었다.
“바늘로 손가락 찌를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허공으로 한숨을 내던지며 윤모난은 다시 바닥에 엎어졌다. 한참을 그대로 널브러져 있는 사이 어느새 땅거미가 내려앉아 방 안도 점점 어둠에 물들어갔다.
그러다 부스스한 몰골로 일어난 건 훈련실 문밖에서 기척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것마저도 둔해진 감각으로 인해 한참이 지나서야 겨우 알아차렸다.
“누구야.”
문을 열고 들어오는 누군가를 확인하자 윤모난의 얼굴도 져버린 해만큼이나 차갑게 식어버렸다.
“이미 경고했을 텐데요. 왜 자꾸 날 귀찮게 못해서 안달이에요.”
“모난아, 난 사과하려고 온 거야. 그날 미안했다.”
윤이화는 머뭇거리며 잔뜩 흩어진 모래 위에 가져온 술병을 내려놓았다. 조금 미심쩍은 표정이 그 술병에 꽂혔지만 나가라는 말은 없었다. 윤모난은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린 채 한참을 앉아 있었다.
“예전에는 작약과 함께 넷이 서곡에 있을 때 이렇게 술도 자주 마셨었지…. 그때가 생각나서. 아직도 술 좋아하지?”
“…난 양주보단 소주가 좋아요. 위스키는 형들이나 좋아하지.”
윤모난은 그러면서도 사촌 형이 가져온 술병을 끌어와 뚜껑을 땄다. 나란히 앉은 두 사람은 말없이 연거푸 술병만 들이켰다. 그사이 윤이화는 꽤 마음고생을 했는지 예전보다 초췌해 보였다.
“모난아, 도화가 그날 너한테 한 말 너무 마음에 담아두지 마.”
“늘 호시탐탐 내 목만 노리는 애인데요, 뭘. 도화는 항상 날 싫어했으니 놀랄 것도 아니고.”
“…네 눈에 난 도화보다는 우유부단해 보이겠지?”
윤모난은 술을 한 모금 더 넘기고는 여상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형, 하려면 제대로 해요.”
“뭐가?”
“그런 식으로 굴면 내일이라도 목이 잘려서 남경역 광장에 나뒹굴게 될걸요. 꽃들인지 뭔지 모아다가 정말로 복수가 하고 싶다면… 나 같은 놈을 끌어들일 생각은 말아야죠. 변수가 너무 많잖아.”
“…우리가 어떻게 하든 너는 상관없다는 말처럼 들리네.”
“나한테 무슨 자격이 있다고… 하고 싶은 대로 하세요.”
그 말에 윤이화가 고개를 떨구며 쓴웃음을 지었다. 만류도 동조도 아닌 저런 태도는 무관심에서만 나올 수 있는 것이었다. 자신은 이 일과는 털끝만큼도 관계없다는 데서 비롯하는 방관. 결국 윤모난에게 꽃들의 맹세이니 뭐니 휴지 조각보다 의미가 없다는 증거였다.
윤이화는 자신의 사촌 동생이 자유를 간절히 원한다고 생각했었다. 내내 굴레를 진 삶을 살아왔으니까. 하지만 사실 그는 그런 자유조차도 꿈꾸지 않고 있었다. 바라는 것이 없는 사람에게 어떻게 내일을 도모하자고 할 수 있겠는가.
“도화가 청연이 얘기를 꺼낸 게 그냥 한 말은 아니야. 작약이 살아 있었다면 꿈도 못 꿨겠지만… 지금은 꽃들의 행동 하나하나를 다 통제할 수 없고, 누가 홧김에 일이라도 저지르면….”
“형, 내가 수없이 전장에 나가면서도 어떻게 끈질기게 살아 돌아왔는지 알아요?”
“글쎄.”
“전장에서는 철저하게 전쟁의 논리를 따르는 것, 그거 하나면 되거든요. 거기서는 우리 모두 이름 없는 사물일 뿐이고, 가치를 저울질할 수 없죠.”
윤모난은 윤이화가 앉은 곳과 자신이 앉은 곳 사이에 쌓인 모래 위로 쭉 선을 그었다.
“거기서 중요한 건 오직 적이냐, 아군이냐 뿐이에요.”
“…우리를 네 적으로 돌리겠다면 넌 큰아버지의 편이라는 거냐?”
“그럴 리가요. 이건 꽃들과 아버지 사이의 전쟁이지 제 전쟁은 아니에요. 난 그걸 시작하길 바라지도 않고.”
“만약… 큰아버지가 죽고… 아이들은 망명할 수 있게 해준다면?”
“그건 대가 없이 요구할 수 없는 문제일 텐데요?”
전쟁 상황에서 호의만으로 건네는 제안이 있을 리 없었다. 윤이화는 내리 침묵하다가 자신의 요구 사항을 입 밖으로 무겁게 떨어트렸다.
“암살.”
“…제가 지금까지 한 말 뭘로 들었어요?”
“아니, 모난아. 대의명분이 필요한 반란이 아니라, 암살을 말하는 거다. 아무런 명분 없이… 저지른 사고 같은 거 말이야.”
“아, 정신병에 걸린 서자가 날뛰어 아버지를 죽인 그런 가정 비극을 말씀하시는 건가?”
“아이들과 네 형수들 목숨은 보장하마. 그렇게 되면 그 누구도 안 다치고 무사할 수 있어. 죽는 건 큰아버지뿐이겠지.”
술병의 목 부분을 쥐고 있던 윤모난의 손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아버지를 죽이면 바로 사형이다. 체포당해 감옥으로 잡혀 들어가면 빌어먹을 무간이고 뭐고 다 못 가게 된다.
“사후 처리는 걱정하지 않아도 돼. 잡히기 전에 내가 널 무간으로 보내줄 테니까.”
무간으로 가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필요하다. 무간으로 향하는 좌표와 공간계 에스퍼. 무간의 좌표는 한 시간마다 바뀌는 보안 암호로 보호되고 있으며 센터 소속 공간계 에스퍼들만이 접근할 수 있기에, 공간계 에스퍼의 도움 없이 무간에 갈 수는 없기 때문이다.
또한 무간으로 가는 문을 열기 위해선 서곡 승강장의 인식 패드에 그들이 직접 손을 대고 자신의 생체 정보를 읽혀야 한다. 설상가상으로 기밀 유지를 위해 정신계 에스퍼들이 좌표를 암기할까 해당 기억을 지우고 있으니 무간을 둘러싸고 이중 삼중의 잠금이 되어 있는 셈이었다. 결국 개인이 사적인 이유로 센터의 철통 보안을 뚫고서 무간으로 향하기란 불가능하다고 봐도 무방했다.
하지만 윤이화는 공간계 에스퍼로 서곡 승강장에 배치되어 있었다. 그 말인즉, 윤모난의 무간행에 그가 든든한 뒷배가 되어줄 수 있다는 뜻이었다. 윤모난은 내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나지막이 물었다.
“…그러다 상관없는 사람들까지 휘말릴 수 있는데, 나더러 일부러 독배를 마셔라?”
“너네 팀을 말하는 거라면 이쪽이 오히려 더 빠른 길이라고 생각 안 해? 네가 혼자 무간으로 간다면… 우리 집안의 비극에 다른 사람이 휘말리는 건 막을 수 있을 텐데.”
“…….”
“팀원들까지 휘말리는 건 지금의 너한테는 부담이잖아.”
윤이화의 입에서 팀 얘기가 나올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팀원들을 모두 무간으로 끌고 가 개죽음을 당하게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자신이 사고라도 치면 그들의 앞날이 불분명해지는 것도 사실이다. 윤모난은 오직 그 때문에 당장 서곡 승강장에 뛰어 들어가 무간으로 가지 않고 참는 중이었다.
팀원들이 원하는 곳으로 가 평범한 삶을 누릴 수 있게 하려면 미래를 위한 기반을 쌓아야 한다.
우습지만 팀 스코어라든가, 소소하게 경해국의 심리 상담을 챙기고 대원들에게 파동역학을 가르친다든가 하는. 안범이 구호조에 갈 수 있도록 계속 팀원 평가에 내용을 적고, 무구원이 북해로 갈 수 있도록… 젠장, 그 새끼는 알 바 없고.
“구미가 당기기는 하네요. 안 그래도 요즘 다 환멸 나던 참인데.”
“…그럼.”
“하지만 형, 그놈들 살길은 팀장인 내가 만들어줘요. 그것마저 걸고 거래할 만큼 내가 최악은 아니거든.”
늘 온화하고 순종적인 인상이던 윤이화의 표정이 일순간 변했다.
“그렇게 자신이 있어, 모난아?”
그는 명백하게 윤모난의 자신감을 비웃고 있었다. 당연한 사실을 왜 모르냐는 듯이 말이다. 사촌 형 윤이화는 3년 전 윤모난이 어땠는지 옆에서 똑똑히 지켜본 인물이다. 제대로 걷지도 못해 바닥을 기고 있던 그를 정신보호센터에 넣은 것도 윤이화였다. 그러니 목격자인 그의 말에는 타당한 부분이 있었다.
“넌 3년 전에 무간에서 네 형들뿐만 아니라, 같은 팀원들도 구하지 못했잖아.”
“…….”
“그렇게 자신감 넘치면서 왜 모두 못 살린 건데?”
그러나 타당하다고 해서 아프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꺼져요. 형.”
잇새 사이로 독기를 가득 품은 경고가 흘러나갔다. 윤이화는 금방이라도 자신을 향해 날아들 기세인 윤모난의 주먹을 보면서 몸을 뒤로 물렸다. 그의 얼굴은 언제 잔인한 말을 했냐는 듯 평연하고 유순한 인상으로 돌아와 있었다.
“천천히 생각해봐, 모난아. 우리는 이 일에 모든 것을 걸었다.”
그 말을 끝으로 윤이화는 방을 나섰다. 그의 뒷모습에 고정됐던 시선은 다시 흐트러진 모래 위 선으로 떨어졌다.
선이 흐려져 있었다. 누구의 편에도 서지 않겠다고 했지만, 허울뿐인 말임을 윤모난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만약 정말로 상관하지 않았다면 꽃들을 죽이거나 그들을 막기 위해 아버지에게 반란 모의 사실을 알렸을 것이다.
하지만 생전에 형들이 꽃들의 일에 깊이 관여한 탓에 윤모난은 의식적으로 그들의 계획을 방관하고 있었다. 그 일은 작약이 원했던 거였으니까. 그것에서 이미 피아의 구분은 의미 없어진 셈이었다.
윤모난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일 안범이 무간에서 돌아올 테고 일상은 여전히 빠르게 흘러가고 있었다. 팀원들과의 약속 시간이 점점 가까워지는데 자신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여전히 바닥을 기고 있었다.
* * *
“…오늘은 비 오겠네.”
다음 날은 날씨가 우중충했다. 공기가 묘하게 습하고 비 냄새가 나더니 유독 몸이 더 무거웠다. 겨우 몸을 일으켜 먹어야 하는 약 두 알을 삼키니 주변 공기가 뭉개져버린다. 약을 먹으면 감각이 매우 둔해지므로 온도의 변화도 잘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다. 가이드로서 최악의 핸디캡인 이걸 매 순간 피부로 느껴야 한다는 것도 불행이라면 큰 불행이었다.
그러나 오늘도 제대로 살아내야 했다. 오늘은 안범을 마중하는 날이니까. 그 생각으로 윤모난은 오전 팀 훈련을 마치고 서류 작업까지 조금 빠르게 끝냈다. 그러곤 정말 큰맘을 먹고 오랜만에 나머지 팀원들에게 같이 점심을 먹자고 청하기까지 했다.
“찌찌 애비 요놈이 종합 순위 3위 안에 들었을까요?”
“…글쎄.”
“글쎄라니요? 그 뽀뽀 쇼까지 감행하시고선. 이제 뭐, 팀 스코어는 신경도 안 쓰십니까?”
윤모난은 식판 위에 올라온 오이무침을 젓가락으로 뒤적거리며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속으로 속삭였다. 개 같은 오이.
“언제는 팀 스코어 1년 안에 다 만회하게 해주신다더니. 지금쯤 무슨 변화라도 있어야 아닙니까!”
“…밥 먹을 땐 가만히 좀 둬라. 나도 밥 좀 먹자.”
“아까부터 뒤적거리기만 하고 한 개도 안 드시면서 뭘….”
오늘따라 못난 팀장을 향한 구시렁거림이 쏟아지고 지랄이었다. 성질머리를 꾹꾹 눌러 참는 윤모난을 가만히 보고 있던 무구원이 갑자기 손을 뻗어 윤모난의 식판 위 오이를 젓가락으로 집어 갔다.
그렇게 하나, 둘… 그는 천천히 식판 위 오이를 모두 가져가 차분히 먹기 시작했고, 그런 무구원을 보는 윤모난의 얼굴은 어이가 없다 못해 퓨즈가 끊겨 보였다.
“…오이 싫다며.”
“이미 약속드리지 않았습니까.”
“무슨 약속.”
“일전에 제가 잘못한 거 용서해주시는 대신에 싫어하시는 거 먹어드리겠다고 했습니다.”
“…….”
윤모난에게 그 말은 그때 용서하기로 했으면서 왜 자신을 괴롭히냐고 추궁하는 것처럼 들렸다. 한마디로 저 혼자 양심에 찔렸다는 말이다. 젠장, 밥 먹는데 이놈이나 저놈이나 사람 들쑤시는 말이나 하고. 윤모난은 짜증이 솟구쳐 젓가락을 식판 위로 던졌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경해국이 옆에서 개처럼 물어뜯었다.
“밥 다 드셨으면 이제 말해도 됩니까? 우리 진짜로 어떻게 되는 겁니까? 팀장님만 믿으라고 하더니 팀 스코어는 거의 제자리걸음이고. 지금까지 팀장님이 시키는 거 거의 다 하지 않았습니까. 그 졸리는 수업도 듣고….”
“병동에 불이나 지른 주제에… 팀 스코어를 운운해? 경해국 당신은 양심이란 게 있어?”
“…아니. 뭐… 제 잘못이 없다는 게 아니고… 팀장님이 하도 자신만만하시길래 이쯤이면 뭔 변화라도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해서요.”
“너희들 정신머리 개조하는 데 생각보다 시간이 너무 많이 잡아먹혔어. 약속한 거 안 잊었으니까 구태여 상기시킬 필요 없어.”
뭐만 해보려고 하면 사고가 나고 하는 일마다 되지 않으니, 솔직히 윤모난마저 낭패감이 들던 몇 달이었다. 치안조 팀에 지원을 나갔다가 그 사고를 치고 난 뒤엔 한백호가 일부러 출정권을 쥐고서는 실행하지 않아 근신이나 다름없이 서곡에 박혀 있어야 했다.
복수라면 지독한 복수다. 윤모난이 제일 못 견디는 게 이런 거라는 것을 한백호가 모를 리 없었다. 게다가 경해국은 여전히 근신. 무구원은 감봉에 패싸움까지 했다. 안범은 뭐… 안범이고.
“제발 사고나 더 치지 마. 셋 다.”
“팀장님?”
윤모난은 분홍색 머리칼을 쥐어뜯으며 얼굴을 한껏 구겼다. 오늘따라 유난히 피로하고 지친다. 약 기운마저 오늘은 별로 도움이 안 되고. 가서 샌드백이나 패야겠다.
“간다. 너네 팀장 머리 터져나갈 것 같으니까 부르지 마라.”
깊은 한숨을 내쉬며 윤모난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팀원 둘의 묘한 시선이 따라붙었다. 먼저 식당을 나와서 담배를 물고 있는데 무구원이 어느샌가 뒤에서 달려와 어깨를 잡았다.
“팀장님, 무슨 문제 있습니까?”
“…무슨 문제 있습니까? 야, 무구원. 그걸 질문이라고 해?”
“…….”
“시발, 내가 언제 오이 먹어달라고 했어? 왜 네 마음대로 가져가, 이 새끼야.”
“…네?”
“내가 오늘은 먹고 싶을 수도 있잖아. 예전에 약속했다고 해도 오늘은 먹을 수도 있는 건데 왜 마음대로 가져가냐고.”
맥락을 알 수 없는 오이 타령에 무구원이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이 와중에 윤모난은 마침 잘 걸렸다는 듯 미친 사람처럼 날뛰면서 소리를 질렀다.
“대답해! 너 진짜 로봇이야? 뭘 에에? 이러고 있어.”
“…죄송…합니다…?”
“이… 미친놈….”
윤모난은 퍽퍽한 무언가를 먹다가 얹힌 사람처럼 제 가슴을 쾅쾅 때렸다. 더는 대화하기도 싫어서 휙 돌아서서 가는데, 무구원이 또 눈치 없이 졸졸 따라오는 것이 아닌가. 윤모난의 입에서 또 한 번 흉흉한 경고가 튀어 나갔다.
“따라오지 마. 진짜 죽여버린다. 난 경고했어.”
윤모난은 다리를 잽싸게 놀려 전속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피하는 건지 아니면 도망가는 건지 그 자신도 알 수 없었으나 일단은 필사적으로 달음박질쳤다. 하지만 무구원은 쉽사리 포기할 기세가 아니었다.
“팀장님!”
“씹… 너 뭔데!”
뒤에서 연신 팀장님을 외치며 따라오는 무구원을 본 윤모난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버렸다. 그는 식당 앞 언덕 아래 대운동장 트랙으로 빠르게 내려갔다. 익숙하고 푹신한 트랙이 발에 착착 감기면서 다리에 더 힘을 주자 속도가 올라붙는다. 뒤에서 사냥개가 쫓아와도 이렇게 빨리 달리지는 않을 터였다.
“꺼져, 무구원!”
“또 왜 그러시는지 말씀 좀 해주십시오! 오늘 약 드셨습니까?”
“저게 무슨 날 정신병자 취급만 하고…! 뭐만 하면 약 타령이야!”
“팀장님 거기 서보십시오!”
무구원도 허벅지에 힘을 바짝 주고 계속해서 발을 놀렸다. 하지만 최선을 다해 달리고 있는 윤모난을 따라잡기란 결코 쉽지 않았다. 그는 온 힘을 다해 달려 추격자에게서 멀어지고 있었다. 어찌나 빠른지 분홍 머리가 잔상처럼 휘날리고 다리는 보이지도 않는다.
무구원이 두 걸음 정도로 겨우겨우 따라붙어 손을 뻗자, 윤모난이 감히 손도 대지 말라는 듯이 상체만 갑자기 휙 틀어서 단단한 주먹으로 얼굴을 갈겼다. 퍽, 하고 뒤로 나가떨어질 뻔한 무구원은 몸의 흐트러진 중심을 빠르게 잡으며 좁힌 거리를 더는 벌리지 않았다.
그러곤 주먹으로 갈겼으니 그가 적당히 떨어질 거라 생각하고 방심한 윤모난의 뒷머리를 얼떨결에 낚아채는 데 성공했다.
“아! 내 머리…! 이 새끼가!”
“어…?”
팔꿈치에 명치 두 방을 얻어맞으며 떨어진 손을 펼치니 분홍색 머리카락이 한가득이었다. 뽑은 터럭으로 분홍색 목도리를 뜰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무구원이 제 손에 한 움큼 뜯긴 머리를 보며 멍해진 가운데, 뒤통수를 부여잡고 씩씩대던 윤모난이 그에게 냅다 달려들었다.
순식간에 트랙 바닥으로 몸이 깔린 무구원은 자신에게로 정신없이 쏟아지는 주먹을 팔로 겨우 방어하며 신음했다. 윤모난은 광분에 휩싸여 소리쳤다. 눈깔이 완전히 돌아 있었다.
“꼴랑 오이 먹어준 거 가지고 용서해달라고? 뭘 용서해! 반성도 안 하면서?”
“…윽!”
“무구원 너랑 나랑 오늘 진짜 끝장을 보자.”
듣기만 해도 섬뜩해지는 경고였다. 빈말이 아니었는지 이윽고 윤모난이 정말 죽일 기세로 무구원을 사정없이 패기 시작했다. 이전에는 과연 많이 봐준 것이었는지 내려꽂히는 주먹이 살 떨릴 정도로 날카롭고 매서웠다. 맨손으로도 트랜스를 찢었던 괴물에게 인간의 육체는 그에 비하면 한주먹거리도 안 됐다.
이유도 모르고 시작한 싸움은 이전에 돌았던 소문처럼 치정 싸움 비슷한 것이 되었다. 그렇게 날아오는 주먹에 맞으며 방어하기만 급급하던 무구원도 순간 울컥 화가 치밀었다. 더는 싫었다. 자신도 몰릴 만큼 몰렸다.
“대체 저보고 어쩌라고…!”
무구원은 항변하며 고개를 돌려 빠르게 꽂혀오는 주먹을 피하려다 저도 모르게 시간을 몇 초 뒤로 돌려버렸다. 그리고 시간을 돌린 덕분에 찾은 빈틈을 파고들어 윤모난의 팔목을 잡아 순식간에 깔린 자세에서 빠져나왔다.
…처음으로, 무구원은 시간을 돌려 방어를 성공해낸 것이다. 생각 없이 무자비하게 주먹만 갈기고 있던 윤모난도 터무니없이 놓친 사냥감을 당황한 얼굴로 쳐다봤다. 곧이어 그는 절대 놓치지 않겠다는 듯 바로 무구원의 목을 두꺼운 팔뚝으로 죄며 달라붙었다.
“죽어!”
순간 기도가 막혀 컥컥거리던 무구원은 살기 위해 손에 잡히는 상대의 옷가지를 틀어쥐고 단숨에 엎어쳤다. 휙, 하고 중심축을 넘어 몸이 넘어간 윤모난을 향해 무구원이 곧장 주먹을 날렸다. 가까스로 윤모난이 공격을 피하자 그가 있던 자리에 땅이 푹, 하고 파이면서 흙먼지가 피어올랐다.
“하아… 살리든지 죽이든지… 마음대로 하십시오…. 저도… 오늘 끝장을 보겠습니다.”
숨 한 번을 내쉬기도 전에 무구원은 비어 있는 윤모난의 허리를 들이받았다. 두 사람의 몸이 겹쳐져 나가떨어지자마자 윤모난이 무구원의 왼쪽 팔을 뒤로 꺾었다. 뼈가 으스러지는 고통에 입술을 찢어져라 악문 무구원은 더 이상 가만히 당하고 있을 순 없었다. 그는 무릎을 바짝 세워 남자라면 절로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는 윤모난의 급소에 정강이로 타격을 가했다.
그러자 윤모난이 억 소리를 내며 팔을 꺾던 손의 힘을 풀었다. 때를 놓치지 않고 무구원은 상대의 발목에 정강이를 걸고 몸을 굴려 뒤집은 다음 단단한 그의 발목을 확 꺾었다. 달걀껍데기가 으스러지는 소리와 함께 발목이 90도로 돌아가자 윤모난의 날개뼈가 움찔 튀었다.
“우와…. 쟤네 싸운다!”
“썅, 이게 무슨 일이야.”
서곡 식당에서 대원들이 튀어나와 대운동장의 참상을 지켜보는 사이 경해국은 낭패인 얼굴로 뒤통수만 긁적거렸다. 방금 전까지 더 사고 치지 말라며 경고하고 나간 팀장이 팀원이랑 저러고 있다.
“오. 저러다 죽는 거 아니냐…? 목 졸리고 있는데….”
“시팔, 무씨….”
“아니다 빠져나왔다. 윽―! 엄청 아프겠네. 피 봐. 오, 갈비뼈 부러졌겠는데?”
“시팔, 윤 팀장….”
말리려 해도 도저히 끼어들 엄두가 안 나는 처참한 싸움이었다. 철천지원수도 저렇지는 않을 텐데 진짜 서로 죽일 작정으로 싸우는 사람들 같았다. 지금껏 서로 쌓인 게 많았는지 보통 살벌한 게 아니었다.
“뭐 구경났어? 우리 팀 싸우는 거 처음 보냐! 일상이니까 다들 꺼져. 이 개새끼들아!”
“…야, 가자. 경해국도 저기 껴서 싸우고 싶나 보다.”
경해국은 악을 질러 바퀴벌레처럼 모인 인파를 흩어지게 한 다음, 망설임 없이 발길을 돌렸다. 저기서 싸우는 두 사람은 기억하는지 모르겠지만 곧 있으면 안범이 올 시간이었다. 일단 둘 중 누가 죽든지 안범은 누구라도 마중을 나가야 그놈 우는소리는 안 듣겠거니 싶었다.
한편 안범이고 뭐고 까맣게 잊어버린 무구원과 윤모난의 얼굴에서는 붉은 피가 뚝뚝 떨어졌다. 어깨뼈가 나간 무구원은 비틀거리면서 뒤로 나가떨어졌다. 윤모난 역시 캑캑거리다가 피가래를 트랙 위에 툭 뱉었다. 힉, 하고 숨을 들이켜는데 갈비뼈 부근에서 불안한 통증이 밀려온다.
더 움직였다간 아예 부러져서 낭패일 거다. 윤모난은 그제야 더 반격하기를 포기하고 트랙 위에 꾸부러져서 누웠다. 상태가 안 좋은 건 무구원도 마찬가지였고, 정신이라도 차리고 있는 윤모난과 달리 그는 눈을 가물거리면서 숨이 넘어가기 직전이었다. 그러면서도 할 말이 있는지 계속 중얼거렸다.
“…대체… 저보고… 윽, 하…. 어쩌라는, 하아… 겁니까.”
거의 빈사 상태인 무구원은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는 듯했다. 아마도 눈앞에 주마등이 빠르게 스쳐 지나가고 있는 모양이었다.
“…아하는 것도… 안 된다고… 하셨으면서….”
“…하아… 꺼져. 안 들려….”
“하아… 저 …트 아닙니다.”
“…윽….”
“…저, 도… 상처받습니다.”
무구원은 주문처럼 그 말을 중얼거리면서 천천히 눈을 감았다. 하루 종일 우중충했던 하늘이 기어코 비를 터뜨린 탓에 쏟아지는 물방울이 얼굴 위로 핏물을 튀기며 흘러 내려갔다. 그 와중에 윤모난도 정신을 놓고 기절한 지 오래였다. 들을 사람이 없는데도 무구원은 허공에 대고 되뇌었다.
“팀장님… 저 로봇 아닙니다.”
결국 중상을 입은 두 사람은 병동으로 바로 실려 갔다. 무구원은 일단 윤모난이 고려청자 아니냐며 능청을 떨었던 얼굴뼈에는 금이 갔고 어깨는 골절에 팔꿈치 아래 뼈가 으스러졌다. 이 외에 기타 골절과 타박상은 덤이었다. 상태를 본 병동 에스퍼가 트럭에 치였냐며 의심할 정도였다.
윤모난의 경우, 예상대로 갈비뼈에 금이 갔고 발목이 돌아갔지만 무구원만큼 심각하진 않았다. 대신에 에스퍼들이 신경안정제를 과다 투약한 탓에 내리 이틀을 잠에 빠져 있어야 했다. 하지만 약 기운이 가시자마자 바로 눈을 떴다.
“…무슨 꿈이야. 이게.”
정신을 차리자마자 윤모난은 당혹감에 휩싸였다. 자는 동안 내내 꾼 이상한 꿈 때문이다. 평소에 꾸는 악몽도 아닐뿐더러 이상한 현실감마저 띤 장면이 고장 난 비디오처럼 끊임없이 재생되는 그런 꿈.
몸을 좀 움직이려는데 옆 침대에서 깁스 덩어리가 되어 의식이 혼곤한 무구원이 눈에 띄었다. 설마하니 이 지경이 되어서까지 또 싸울까 싶어 한 병실 안에 넣어놓은 것 같은데, 객관적으로 봐도 너무 안일한 대처였다. 까닥하면 무구원은 죽을 뻔했다. 윤모난이 능력까지는 쓰지 않은 덕에 겨우 목숨을 부지한 것뿐.
그렇다고 윤모난이 그를 봐준 것이냐 하면 딱히 그것도 아니었다. 가벼운 투덕거림이 아니라 개같이 싸우는 상황에서 봐준다는 생각을 할 틈도 없거니와, 애초에 윤모난의 사전에 싸움 상대를 봐준다는 건 없기에.
“…하, 시발. 참 끈질기네, 무구원.”
무구원을 죽어라 패며 트랙 바닥을 구른 것이 마지막 기억이다. 성질대로 주먹을 날려댔으니 무구원이 죽지는 않더라도 최소 식물인간은 되었을 거라 예상하던 차였다. 그러나 간헐적으로 뒤척이며 손가락을 움직이는 것을 보아하니 중상을 입은 것일 뿐 결국 일어날 모양이었다. 이상하게 내구성이 좋은 놈이었다.
“…진심으로 죽일 생각이었는데.”
윤모난은 남이 들었으면 섬찟할 말을 읊조리면서, 몸을 옆으로 돌려 옆 침대 방향으로 고정했다. 붕대와 거즈로 뒤덮인 무구원의 얼굴은 시커먼 멍과 피딱지로 뒤덮여 엉망이었다. 그 꼴을 보자니 배 속 깊은 곳이 불쾌하게 들끓었다.
방금 꾼 꿈으로 인한 묘한 기분 위로 무구원의 상처와 부상들이 겹쳐 쿡쿡 눈알을 찔러오는 것 같았다. 내가 정말 죽일 생각이었나? 저 자신도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의심은 의심을 불러일으키고 그것은 곧 자괴감으로 이어졌다. 윤모난은 침대에서 몸을 발딱 일으켰다.
“어어? 더 누워계셔야 하는데요.”
마침 병실을 체크하러 온 간호사가 손등에서 링거용 바늘을 뜯어내고 있는 윤모난을 보고 기함했다. 하지만 그럴 생각은 없었다. 본능적으로 무구원과 떨어져 있어야 할 것 같다는 생각만이 든 탓이다.
누가 만류하든 말든 고집을 부려 병실에서 나온 윤모난은 휘적휘적 걸으며 꿈을 곱씹었다. 그가 이렇게 예민하게 반응하는 이유는 거기서도 무구원이 나왔기 때문이었다.
“…내가 정신병자라 쉬워 보였어?”
“팀장님….”
“생각보다는 쉬울지도 모르지. 그러니까 너부터 울면서 빌어봐. 응해줄 테니까.”
동기들과 패싸움을 했던 날의 무구원. 어두운 숲. 몸을 더듬고 억압하던 자신의 손. 그리고 울라는 다그침까지. 여기까지는 윤모난도 알고 있는 거였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에 울음처럼 무구원이 뱉어낸 한마디는 제겐 없는 기억이었다.
“제가 팀장님을 좋아합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도.
“나 너네 형이랑도 잤어.”
묘한 일이었다. 앞에 있었던 일까지는 자신의 기억과 똑같았지만 뒷말은 난생처음 들었기 때문이다. 그냥 개꿈이겠거니 하고 넘기기엔 어딘가 찝찝한 구석이 있어 마음이 불편했다. 자꾸만 왠지 모를 기시감이 들었다. 마치 정말로 그런 일이 있었던 것처럼.
생각해보면 이전에도 비슷한 꿈을 꾼 적이 있었다. 수도 중앙역에서 남경으로 가는 기차에 올라탔을 때 꿨던 꿈 말이다. 무구원이 당장 옆자리에 있는데도 그를 놓쳐버렸던 그 순간은 기분 나쁠 정도로 생생했다.
이 묘한 일들의 인과관계를 따지는 건 논리적 비약이 아니었다. 윤모난은 합숙소로 향하던 걸음을 돌려 도서관으로 향했다. 무구원과 자신 사이에 불확실한 변수가 또 늘어나는 건 견딜 수 없었다.
윤모난은 도서관에 도착하자마자 곧장 사서에게 가 물었다.
“연구 도서 좀 신청할 수 있을까요? 시간 역행 능력에 관한 논문 목록 좀 보고 싶은데요.”
“네, 잠시만 기다리세요.”
사서는 마우스 클릭 몇 번으로 논문 목록 문서를 열었다. 목록을 바삐 훑던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어디론가 향했다. 잠시 후, 사서는 책상에 논문 및 학술지 한 묶음을 내려놓았다.
“시간 능력에 관해서는 논문이 나온 게 별로 없네요. 이게 다입니다.”
그럴 만도 했다. 시간 역행 능력은 포스트의 이능력 중에서도 희귀한 축에 속하고, 보유자가 별로 없는 탓에 연구하기 까다로운 분야이니까. 대다수 포스트의 이능력이 물질의 분자 구조를 변형하는 쪽인 것과는 달리, 시공간 능력자들은 차원을 바꿔버릴 수 있으므로 관측이 까다로운 영역이었다.
윤모난은 열람실의 빈 책상으로 가 책들을 내려놓은 뒤 천천히 논문 제목들을 쭉 확인했다. 공간 이동이나 변형, 창조 등의 능력을 다룬 논문들은 그 제목도 직관적인 경우가 많은 반면, 시간 능력은 논리로만 이해하긴 어려운 구석이 있어서인지 희한한 것들이 많았다.
“…시간 역행… 횡단, 장애, 조작… 시간의 유령.”
별 소득 없이 하나둘 넘겨보던 중, 윤모난은 마침내 한 학술지에서 흥미를 끄는 논문을 발견했다.
「포스트의 초의식 소통과 존재론: 시간의 유령 경험에 관하여」라…. 많이 읽힐 것 같은 제목은 결코 아니다.
아마도 이 논문을 쓴 사람은 초의식을 포스트에게 적용했다는 점에서 학자들에게 많은 공격을 당했을 것이다. 초의식은 괴물인 트랜스가 자기 동료들과 소통하는 방식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신인류인 포스트들은 트랜스의 동물성을 자신의 고도화된 인지능력과 구분하고 싶어 하는 경향이 있었다.
윤모난은 논문 초록부터 꼼꼼하게 확인한 뒤 차례로 본문을 읽어 내려갔다.
…시간의 유령은 시간 능력자만이 기억하는 차원의 시간에서 온다. 있었지만 없는 일이기도 한 시간은 차원의 틈에 잠겨 있다가 이따금씩 모습을 드러낸다. 시간 능력자가 눈앞의 사람과 교감하고 있을 때 그 유령이 슬며시 흘러들어와 돌리기 전 시간의 잔상들을 불어 넣는다.
사건(P)가 발생한 우주(A)가 있다고 가정하자. 시간 능력자가 시간을 돌리면, 능력자 본인은 P가 발생하지 않은 우주(B)로 이동한다. 이때 P는 완전히 소멸해버리는 것이 아니라 A와 B 사이에 잠겨 있다가 꿈과 환각 등의 형태로 갑작스럽게 모습을 드러낸다. 본 연구는 이 현상을 ‘시간의 유령’이라 명명했다.…
…시간의 유령 경험자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경험자의 대부분이 시간 능력자의 밀접한 교감 대상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논문은 거의 과학 철학에 가까웠지만, 자신에게 계속해서 일어난 이상 현상을 납득하기에는 전혀 무리가 없었다. 이 시간의 유령 이론에 따르면, 한마디로 꿈에서 본 것은 실제로 일어난 사건일 확률이 높았다. 단지 무구원이 시간을 돌렸기에 없던 일이 되었을 뿐.
기이한 꿈의 정체가 특별히 놀랍지는 않았다. 다만 윤모난의 마음에 걸린 것은 꿈의 내용이었다. 그는 꿈속에서 보았던 무구원의 말과 표정을 곱씹다가 저도 모르게 종이 가장자리를 구겨버렸다.
“하… 무구원.”
그 고백이 과연 진심이었을까? 연기나 거짓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시간을 돌렸다고 해서 사건 P가 숨겨진 진실이라고 확신하는 것이야말로 비약이었다. 만에 하나 무구원의 말이 모두 사실이라고 해도 그와 자신 사이에서 달라질 게 있을 리도 만무했다.
“윤모난 이 병신 같은 새끼야.”
자학하는 목소리에는 낭패감이 묻어 있었다. 담배가 당기는 만큼 자기 혐오도 커졌다. 버릇처럼 하던 생각은 오늘따라 더 스스로를 좀먹었다. 자신의 얄팍함에 질려버린 윤모난은 자리에서 일어나 도서관을 나오자마자 담배부터 꺼내 물었다.
“상처 주고 죽도록 팼으면서… 뭘.”
그는 한숨과 함께 끝까지 타들어간 담배를 아무렇게나 비벼 끄고선 그대로 버렸다. 불씨처럼 확 타올랐던 생각은 어느새 까맣게 재가 되어 그 자리에 남았다. 윤모난은 그나마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것 중에 가장 쉬운 선택지를 고르기로 했다. 고백은 모르는 척하고 죽을 만큼 팬 거는 사과하자.
마음을 정리한 뒤 관리동으로 향하려는데 센터 안이 소란스러웠다. 분위기가 뭔가 이상했다. 관리동에 대원들이 바글바글 모여 있었던 것이다. 자기네끼리 시끄럽게 속닥거리던 이들은 갑자기 길목에 윤모난이 나타나자 일순 입을 다물었다.
“…….”
모두가 약속이라도 한 듯 혼란스러운 시선으로 윤모난을 응시하고 있었다.
* * *
무구원이 겨우 정신을 차린 것은 꽤 시간이 흐른 뒤였다. 어느 오후 그는 문득 눈을 뜨고 주변부터 확인했다. 오른쪽 침대는 커튼으로 가려져 있었고, 왼쪽 침대는 텅 빈 채였다. 어떻게 된 건지 현실감이 돌아오는 데 조금 시간이 걸렸다.
병동 에스퍼가 상태를 체크할 때가 되어서야 무구원은 겨우 물었다.
“…저희 팀장님은요?”
그것이 그가 2주 만에 일어나 처음 뱉은 말이었다. 에스퍼에게선 윤모난은 며칠 만에 퇴원했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것도 제 발로 멀쩡히 걸어 나갔단다. 마음 한구석에선 다행이라 생각하면서도 애초에 상대가 안 되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통감할 수밖에 없었다.
그걸 몰랐던 것도 아닌데 죽을 각오로 덤벼든 것이 애초에 무모한 짓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에는 모든 것이 지긋지긋하고 윤모난이 미웠다. 동시에 그만큼 스스로가 싫어지기도 했지만. 자신과 상대를 동시에 혐오하는 이런 감정에는 어떤 이름을 붙여야 할까.
이런 쪽에 경험이 없는 무구원이 생각하기에도 이런 짝사랑은 정상이 아니었다. 차라리 이렇게 다쳐 일상에서 윤모난을 마주치지 않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는 멍청한 생각까지 할 정도로. 자학에 가까운 생각에 빠져 허우적거리던 중, 윤모난이 오후 늦게 갑자기 병실에 나타났다.
“일어났다는 소식 듣고 최대한 빨리 오려고 했는데, 이런저런 일이 많네. 요즘따라….”
윤모난은 ‘가벼운’ 부상의 여파인지 약간 절뚝거리면서 문을 닫고 들어왔다. 그러곤 오른쪽 침대의 커튼 안을 한 번 확인하더니 바로 무구원의 침대 옆으로 와서 앉았다. 물 흐르듯 자연스럽기 그지없는 방문에 의문을 가진 무구원의 시선이 쭉 따라붙었다.
그 시선을 느낀 것인지 윤모난이 ‘뭘 봐?’ 하는 식으로 고개를 까닥였다. 그러곤 뭔가 생각났다는 듯 대뜸 여상한 말투로 물었다.
“밥 먹었어?”
지극히도 평범한 안부 인사였다. 그러나 딱히 그것을 지적할 마음이 들지 않은 무구원도 평범하게 대답했다.
“아까 오전에 일어나서 미음 먹었습니다.”
“아픈 데는 없고?”
“따지자면 온몸이 다 아픕니다. 특히 얼굴이요.”
“아.”
“팀장님은요?”
“약간 삐끗했어. 깁스하라는데 그냥 귀찮아서 빼버렸고.”
“…….”
귀찮다고 마땅히 받아야 할 처치를 거부하다니. 무구원은 뭐라 할까 고민하다가 이내 그만두었다. 사지가 부러져 지옥에 떨어진다고 한들 부득부득 기어 나올 사내가 아니던가. 걱정해야 하는 건 그의 정신 쪽이지 몸은 아니었다.
그런데 순간 그 속마음을 듣기라도 한 것처럼 윤모난이 돌연 주머니에서 약통을 꺼내 두 알을 물도 없이 삼키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나머지 걱정도 해결해버렸다.
“약… 잘 챙겨 드시고 계셨군요.”
“어, 너 패는 바람에 이틀에 한 번씩 상부에 상태 보고해야 해. 약 안 먹으면 잘릴 수도 있단다.”
윤모난에게 향정신성 약을 꾸준히 복용하는 게 어떤 의미인지 잘 아는 무구원은 우려부터 표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럼 능력은 쓰기 힘들 텐데요.”
“뭐, 그렇지.”
“그래도 괜찮으십니까?”
“아니. 그러니까 십자 네가 빨리 나아야지.”
“네?”
예상치 못한 말에 무구원은 얼뜨기처럼 반문해버렸다. 그럴 수밖에. 이런 유의 얘긴 요즘 들어 윤모난이 유독 민감해하는 주제가 아니던가. 숲속에서 억지로 밀어붙인 것도 그렇고, 싸우기 전날 대화를 나눌 때도 버럭 화를 냈었다.
두 남자의 사이가 심각하게 꼬여버리기 시작한 것은 서로 다른 생각을 품고 몸을 섞었기 때문이었다. 이 문제를 외면할 수 없었던 무구원은 윤모난의 심리적 맥락을 따라갈 수도 없었거니와 마음만 더욱 복잡해졌다.
그때 옆에서 손이 뻗어와 그늘진 무구원의 얼굴을 치켜올렸다.
“지금 여기서 해도 좋고. 너 허리랑 다리는 안 다쳤지?”
“…….”
“농담이야. 인마, 표정 풀어.”
“놓으십시오.”
“그렇게 얼빠진 표정 하지 말라고 농담 좀 했다. 화내지 마. 그럼 이만 난 간다.”
무구원은 턱을 약간 비틀어 윤모난의 손에서 빠져나왔다. 지금으로서는 그와 더 이상 대화하고 싶지 않았다. 육체적인 타격은 그나마 견딜 수 있는 영역이었으나 심리 싸움은 유독 버티기가 힘들었다. 냉랭한 반응을 본 윤모난은 머쓱하게 웃더니 말없이 병실을 나가 사라졌다.
윤모난은 다음 날 저녁 늦게 갑자기 또 찾아왔다. 처음처럼 병실 문을 열고 냅다 들이닥친 그는 어제처럼 옆 침대를 확인하더니 대뜸 무구원에게 무언가를 불쑥 내밀었다.
“…경전은 왜 가져오셨습니까?”
“기도하고 싶을 거 같아서.”
“…….”
“나 세심하지?”
윤모난이 갑자기 왜 저러는지는 모르지만 기도하고 싶다고 생각한 건 사실이었다. 다만 이런 걸 세심하다고 해야 할지는 판단할 수 없어, 무구원은 대충 예의를 차려 꾸벅 묵례로만 답했다.
경전이 있으면 시간 보내기가 수월하고 고통을 긍정하는 데는 기도만 한 게 없다. 얼마나 침상에 누워 있어야 하는지는 모르지만 이렇게 시간을 보내는 것이 꽤 지루하던 차였으니 다행이었다.
무구원은 옆에 윤모난을 두고서 말없이 독서에 빠져들었다. 한참이나 경전 책장을 넘기던 무구원은 이제 그만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윤모난에게 불쑥 한 가지 부탁을 얹었다.
“내일 오실 때는 제 방에 있는 책 몇 권만 가져다주실 수 있습니까?”
“나 내일 온다고 말 안 했는데?”
“…그럼 됐습니다.”
“농담~ 내일 가져다줄게.”
사람을 때려놓고 왜 시답잖은 농담을 하는지 참 모를 일이었다. 어찌 됐건 다음 날 오전, 윤모난은 커다란 친절을 베풀어 책을 한 아름 가져다주었다. 이번에도 옆 침대를 확인하더니 협탁에 가져온 책을 차곡차곡 내려놓곤 주머니에서 불쑥 사과 두 알을 꺼냈다.
“사과 먹을래?”
“…깎을 줄은 아십니까?”
“칼로 하는 건 다 잘할걸.”
하지만 윤모난은 칼로 괴물을 쑤실 줄만 알았는지, 그의 손에 들린 사과는 어느새 잔뜩 난도질당해 해괴한 몰골로 변해가고 있었다. 다친 손을 쓸 수 없어 그 광경을 안타깝게 지켜만 보던 무구원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과육의 반을 도려내버린 윤모난은 손에 들린 ‘사과였던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그것을 통째로 무구원의 입에 물려주었다.
엉겁결에 토끼처럼 받아먹은 무구원은 이것이 껍질인지 과육인지 잠깐 고민에 빠졌다. 아삭아삭 씹히며 단맛이 도는 것을 보니 과육인가.
“책 대충 골라서 가져왔는데. 이거면 돼?”
목록을 대충 훑어본 무구원이 고개를 끄덕이자, 윤모난은 남은 사과 반 토막에 푹 칼을 꽂아 넣고 ‘또 올게’라는 말과 함께 사라졌다.
그날 오후에 무구원은 윤모난이 가져다준 책더미를 뒤적거리다가 낯선 책 한 권을 발견했다. 예전에 읽어본 적 있는 것이긴 하지만 그의 것은 아니었다.
어디서 끼어든 건지 도통 알 수 없는 책을 펼쳐 한 장씩 넘겨보던 중, 어딘가 찢긴 부분에 손끝이 탁 걸렸다. 이런 책의 가치를 생각하면 퍽 안타까운 일이라 어느 부분이 비었는지 확인해보려는데 마침 윤모난이 등장했다.
옆 침대를 또 한 번 확인하고 나서 곁에 다가와 뭔가를 슥 내미는 그를 보고 무구원이 의아한 듯 물었다.
“또… 뭡니까?”
“안경.”
“…….”
“전에 시켰는데 오후에 왔더라고. 신검 때 시력 받아놓은 게 있길래, 그걸로 맞췄으니까 써.”
깁스하지 않은 손에 가죽으로 된 안경 케이스가 쥐어졌다. 한참이나 그것을 쳐다보기만 하던 무구원이 마침내 케이스를 열어 안을 확인했다. 빈말이 아니었는지 정말로 안경 하나가 들어 있었다.
선물을 받고 뭐라 반응이 없는 그를 보던 윤모난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러고서는 대신 안경을 꺼내 엉망이 된 무구원의 얼굴 위로 얹어준다. 콧잔등에 어정쩡하게 안경을 쓴 모습이 퍽 우스웠는지 피식하고 웃음이 잇따랐다.
“샌님 같네, 무구원. 아주 잘 어울려.”
“…….”
하지만 무구원에게서는 여전히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그저 항상 동요하는 법이 없는 새카만 두 눈동자의 동공이 약간 조여들었을 뿐. 그 건조한 모습을 보면서 능청을 부리는 것도 슬슬 겸연쩍었던 윤모난의 입가가 약간 굳더니 곧 미소가 사라졌다.
잠시 외면했던 자신의 다짐을 상기한 윤모난은 살짝 잡고 있던 안경다리에서 바로 손을 뗐다. 그런데 그 순간, 무구원이 대뜸 제게서 멀어지는 손을 아픈 손으로 낚아채듯이 잡았다.
“야, 너 손!”
“가실 겁니까?”
무구원은 아픈 손 따위 아랑곳하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
“응? 그래야지. 네 상태 확인하려고 잠깐 들른 거야.”
“잠깐만 더 있다가 가시죠.”
무구원이 좀처럼 무언가를 부탁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한참 고민하던 윤모난은 천진한 시선을 견디지 못하고 이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시종일관 가면처럼 그의 본심을 가리고 있던 능글맞은 표정도 어느새 휘발되었는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윤모난은 무구원에게 잡힌 손을 천천히 빼며 약간 괴로운 듯이 읊조렸다.
“알았어, 새끼야, 제발 그런 표정 좀 짓지 마라.”
“무슨 표정이요?”
“아니야, 아무것도.”
의자를 끌어당겨 자리를 잡고 앉은 윤모난은 괜히 남은 사과 한 알이나 가져가 다시 깎아보기로 했다. 이번엔 공들여 깎는 모양인지 집중할 때 미간을 모으는 그 특유의 표정이 무구원의 시선을 끌었다.
어둠이 내려앉은 병실, 탁상 등의 불빛이 내려앉은 남자의 얼굴은 뾰족한 기색이 사라져 한결 부드러워 보였다. 이 모습을 보면 그가 남의 목숨을 쉬이 농락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상상하기 어려웠다.
“시발, 엿 같네. 뭔 놈의 사과 깎는 게 사람 쑤시는 것보다 힘들어.”
“한쪽 손으로 사과를 잡고 천천히 굴리면서 깎으면 됩니다.”
“그래?”
“…생전 이런 거 안 해보셨나 봅니다.”
“우리 집은 이런 거 남자가 했다간 고추 떨어지는 줄 알아서 안 한 거지. 나도 배우면 해.”
윤모난은 어설프게 깎이는 사과에 더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노라니 무구원은 심장이 또 불쾌하게 뛰기 시작해 순간 착잡해졌다. 형님의 말대로 이 모든 것이 착각이라면, 이 만성적인 격통은 언제쯤 끝나게 되는 걸까.
“에라, 못하겠다. 나중에 참한 마누라 하나 얻으면 깎으라고 해야지.”
나중에? 참한 마누라를 얻어? 생각이 잠깐 멈췄다. 윤모난이 언제부터 그런 걸 바랐나 생각하며, 무구원은 푹푹 파여 나간 사과의 단면에 시선을 고정했다.
“사과 먹고 싶냐? 왜 그렇게 봐?”
“…나중에.”
“응?”
“나중이라는 시간도 생각하고 계신 겁니까?”
“무슨…. 아, 그냥 한 소리인데… 나중이라면….”
“1년 뒤입니까?”
“뭐… 1년 뒤는… 그렇지.”
“3년 뒤는요?”
“3년? 뭐… 음.”
“그럼 10년 뒤는요.”
“…….”
대답이 더는 이어지지 않았다. 1년이나 3년에는 그나마 응답하던 윤모난이 10년 뒤라는 먼 시간에는 답을 내놓지 못했다. 대신에 그는 깎은 사과를 무구원의 입에 물리곤 핀잔을 줬다.
“누가 10년 뒤에 어떻게 사나 생각하고 살아?”
“…살아 계시긴 할 겁니까?”
“갑자기? 지금 나랑 그런 얘기를 하자고?”
“다른 할 얘기가 있습니까?”
무구원의 말은 그냥 들으면 그런 듯했지만 세세하게 반박할 바가 많았다. 하지만 윤모난은 오늘만큼은 이 녀석의 장단에 맞춰주기로 마음 먹었다.
“글쎄, 모르겠네.”
“…….”
“10년 뒤가 어떨지 내가 어떻게 알아.”
하지만 당장 할 수 있는 건 그런 무책임한 대답이 전부였다. 부상이 다 낫지도 않은 채로 업무에 시달렸는지 윤모난은 꽤나 지쳐 보였다. 그는 벽에 머리통을 기대며 오히려 반문했다.
“그럼 넌? 10년 뒤에 넌 어떻게 살고 있을 것 같아?”
“저도 글쎄요.”
“원하는 대로 고향으로 돌아가서 평범하게 살고 있으려나. 어때? 무구원, 자식은 낳을 거야?”
“항상 아이를 바라기는 했습니다.”
“왜?”
“…아이에게 무조건적인 사랑이라는 것을 주고 싶어서요.”
“무조건적인 사랑이라…? 하긴 모든 부모가 그런 사랑을 줄 수 있는 건 아니지.”
자조 섞인 웃음이 윤모난의 입가에 내려앉았다. 그 원인을 모르지 않는 둘 사이에 또 침묵이 잠깐 흘렀다.
“…그런 사랑은 어떻게 주는 건데? 아이가 어떤 존재이건 상관없이 사랑해주는 건가?”
“일단은 그렇겠지요. 그 아이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게 해주고, 가지고 싶은 것도 다 가지게 해줄 것 같습니다. 가고 싶다면 어디든 데려가구요.”
“이런, 무구원. 그러다 애 망쳐. 버릇없어진다고…. 난 청연이가 눈에 넣어도 안 아플 만큼 예뻐도 혼낼 때는 제대로 혼냈거든. 그래야 해.”
“버릇없는 아이가 되어도 상관없습니다.”
무구원의 육아 계획은 아무리 생각해도 묘하게 어그러진 것 같았다. 평생 규칙에 얽매인 삶을 살아왔으니 엄한 아버지가 될 것 같은 놈이, 아이가 버릇없이 자랄 만큼 무한정 퍼주기만 할 예정이라니.
한편으로 윤모난은 그 제멋대로인 아이가 얼마나 고집스러운 제 아버지를 닮았을까 하는 생각에 잠깐 빠졌다. 주변의 모든 빛을 다 빨아들일 것처럼 짙은 검은색 눈동자와 머리 색을 물려받은 아이는 어떤 모습일까. 왠지 모르지만 딸일 것 같다. 무구원의 무릎에 앉아 책을 읽는 새침데기려나.
윤모난은 한길로 샌 그 상상을 떠올리며 피식 웃었다. 그건 자연스러운 모습이었다. 10년 뒤 무구원의 평범한 삶 속에 녹아들어 있을 그의 또 다른 가족들이란. 그가 진정으로 사랑을 줄 수 있는 사람들이 그의 곁에 있겠지. 그 가능한 미래에 괜스레 심술이 난 윤모난의 상상은 딴 길로 새어 나갔다.
10년 뒤 무구원의 곁에는 그가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는 가족들이 있겠지. 그의 평범한 삶에 녹아들어 자연스럽게 함께할 터였다. 그 실현 가능성이 큰 미래에 윤모난은 괜스레 심술이 났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방금 그 말은 나한텐 다르게 들리는데.”
“네?”
“네가 무조건적인 사랑을 주고 싶은 게 아니라, 그런 사랑을 받고 싶다는 소리 같거든.”
윤모난은 뻑뻑한 눈가를 문지르며 주절거렸다. 스스로가 듣기에도 비겁한 말이었다.
“아이는 부모의 몸에서 갈라져 나온 거잖아. 그러니까 자식에 대한 부모의 무조건적인 사랑은 결국 자신을 향한 사랑인 거지.”
“…그렇습니까?”
“반박은 안 하네.”
“듣다 보니 맞는 말 같아서요.”
“그래서 10년 뒤면 너도 누군가에게 그런 사랑을 받아볼 수 있을 것 같아?”
무심코 던진 말에 무구원의 표정이 순간 딱딱해졌다. 그의 얼굴은 확연히 차갑게 식었으나 이윽고 평소의 표정으로 돌아왔다.
차마 자신이 무구원에게 그런 미묘하면서도 큰 변화를 만들어낼 줄 몰랐던 윤모난은 당황하고 말았다. 잔잔한 호수에 무심코 돌을 던진 못된 아이가 된 듯한 기분을 느낀 탓이다. 이놈의 모난 성격은 방심하면 튀어나온다. 역시 아이에게는 이름을 잘 붙여야 해. 윤모난은 자책하며 애먼 곳으로 화살을 돌렸다.
“기분 나쁘냐?”
“…이럴 때마다 팀장님은 꼭 거울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무구원이 깁스한 팔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말했다.
“자신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으면서, 앞에 선 제 모습만 속속들이 비추시니까요.”
“…….”
“그래서 저 자신도 알지 못했던 걸 자꾸 들키는 것 같아서….”
“그래서 불쾌해?”
“네, 불쾌하고 불안하고 두렵고… 화가 납니다.”
너도 그런 걸 느낀다고? 윤모난은 몰래 동질감을 느끼고 말았다. 그래. 서로를 향한 이 마음은 정말이지 불쾌하고 기분 나빴다. 그러니 마주하기보단 무시하는 게 나을 터였다.
“거울 같은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좋아하기 힘든 타입인 건 사실이지.”
“네, 맞습니다.”
바로 긍정한 것도 그렇고 너무나 정직한 대답이었다. 윤모난의 얼굴에 찰나 쓰디쓴 표정이 스쳤을 만큼. 하지만 무구원은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속을 후벼 팠다.
“좋아하기도 힘들지만, 선악의 잣대로 보자면 확실히 악한 쪽에 속하는 분이시죠.”
“…나도 알아.”
“굳이 따지자면 악당에 가까우시니까요. 폭력 외에는 다른 방법을 모르는….”
“…쌍방 폭행이잖아…. 나도 다리 삐끗했어.”
“아마도 죽으면 어머니 신의 텃밭보다는 지옥에 가실 확률이 높습니다. 지금이라도 천경교를 믿고… 어머니 신의 가르침에 따르지 않으면….”
“야, 십자!”
참다못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윤모난은 멈칫 굳어버리고 말았다. 내내 뚱한 표정을 짓고 있던 무구원의 입가에 슬며시 떠오른 미소가 보였기 때문이다. 그런 웃음은 처음 보았기에 윤모난은 조금 벙찌고 말았다. 항상 아름답다고 생각했던 무구원의 입술이 호선을 그리며 입꼬리가 보기 좋게 올라가 있었다.
아프지도 않은지 찢기고 터져 딱지가 올라앉은 입매를 끌어당겨 웃던 무구원은 이내 자신을 빤히 보는 윤모난에게 시선을 되돌려주었다. 여전히 희미한 미소를 머금은 채로. 어느새 목덜미가 달아오른 윤모난이 벽 쪽으로 고개를 돌려 눈을 피하자 무구원이 물었다.
“지옥은 두려우십니까?”
“…그렇다기엔 이미 내 삶이 지옥이라서. 실제 지옥에 가도 지금보다는 더 편안할 것 같은데.”
“…….”
“그리고 내가 다시 만나고 싶은 사람들은 텃밭이니 그런 데 갈 만한 사람들이 못 되거든. 아마도 지옥에 갔을 텐데… 만나려면 나도 같은 곳에 가야지.”
“기도를 열심히 하면 모두 텃밭에 갈 수 있습니다. 그럼 거기서 보고 싶은 사람도 만나겠지요.”
무구원의 뜬금없는 전도에 평소에 종교라면 치를 떠는 윤모난은 그 제안을 진지하게 생각하지도 않았다.
“기도는 무슨…. 장난하냐. 됐어. 그리고 애초에 나 같은 불신자가 갑자기 기도한다고 그게 돼?”
“하긴, 그렇겠네요.”
“거봐.”
“그럼 제가 대신 해드릴까요? 어렵지 않습니다.”
“뭐? 야, 됐….”
거절이 끝나기도 전에 조금은 느린 말소리가 나지막이 이어졌다. 기도의 첫머리가 막을 새도 없이 들이밀어진 것이다.
“조에의 텃밭을 돌보시는 어머니 신이시여.”
“무구원.”
“이 사람에게 시련과 고통을 긍정할 힘을 주소서. 그의 길에 어둠이 닿지 못하도록, …육신을 방패로 삼아주시고.”
눈을 감고 고개를 숙인 무구원이 자신의 손가락을 이마에 가져가 세 번 두드리며 기도를 이어갔다. 기도는 짧았지만 결코 그 무게가 가볍지는 않았다.
“그가 살도록 강요받는 삶이 아니라 살아가는 삶을 살게 해주소서. 마침내 죽음과 마주쳤을 때 고통을 긍정할 수 있도록… 그리하여 어머니의 텃밭에서 그를 기다리는 사람들과 만날 수 있도록…. 이 사람을….”
“…….”
“이 불신자도 구원받을 수 있게 해주십시오.”
그런데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진 건 바로 그때였다. 기도를 끝내며 고개를 쳐들자 한껏 상기된 윤모난의 얼굴이 무구원의 시야에 들어왔다. 비틀린 입가가 파르르 떨리고, 그의 두 눈은 왈칵 눈물을 쏟아낼 것처럼 충혈되어 있었다. 매사 슬픔을 겉으로 표현해본 적이 없는, 항상 사막 같았던 윤모난의 얼굴이 촉촉한 물기에 점차 젖어들어가고 있었다.
떨리는 입술이 약간 벌어졌다가 닫히기를 반복한다. 무언가 습관처럼 말을 뱉으려다가 마는 듯이. 터뜨리지 않고는 참을 수 없는 말을 꾹꾹 눌러 삼키는 그의 아래턱이 따라서 미세하게 경련했다. 그러나 잠깐 지나간 비구름은 결국 비를 내리지는 못했다. 다만 윤모난은 진정하는 데 꽤 시간을 소요했다.
이윽고 몇 분이 지나자 그는 늘 그렇듯이 산 망자의 버석한 얼굴로 다시 돌아왔다. 윤모난은 조금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불신자도 구원받으려면 그런 기도가 얼마나 더 필요할까?”
“…매일 해야겠죠.”
“대단한 한 방으로는 안 되나? 듣고 보니까 좀 절실해지는데. 너 독실하잖아.”
“그렇게 절실하시다면… 제가 어차피 매일 기도를 하니까 팀장님 몫도 하겠습니다.”
“…하.”
구원아.
뒷말을 통째로 삼키면서 윤모난은 마른 눈가를 세게 비벼댔다. 미칠 것 같았다. 무구원에겐 안 그래도 미친놈을 더 돌아버리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이상한 감정이 자꾸만 숨을 벅차게 만들며 가슴께를 계속 두드려댄다. 지독한 간섭쟁이에 거짓말쟁이 스파이인 무구원처럼 성가시게.
“…네 이름… 정말….”
윤모난은 결국 그 성가심에 지고 말았다. 그의 이름 석 자에서 성을 떼어 이름 두 자를 곱씹으며 그는 구원을 마침내 제 삶으로 한 발자국 들였다. 이제는 부인하는 것도 힘겨웠다. 완전한 항복이었다.
무구원은 항상 정해진 시간에 취침했다 일어나는 생활이 몸에 배어서 그런지, 늦은 밤이 되자 조용히 눈을 감고 잠들었다. 부상으로 몸이 불편할 텐데 자면서도 숨소리도 안 내고 흐트러짐 없이 누워 있었다. 어쩌다 보니 그의 자는 모습을 내리 구경하게 된 윤모난은 새벽 내내 의자에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이렇게 나란히 엉망이 되어보니 그제야 윤모난은 왜 자신이 무구원을 바라보기 시작했는지 알 것 같았다. 그들은 둘 다 어느 부분이 결여된 존재들이라는 점에서 동류였다. 그러나 무구원은….
이 녀석은 살아남는 유의 인간이다.
그는 북해의 차가운 바다에 던져져 죽지 않기 위해 시간을 돌렸던 그때부터 끈질기게 살아남은 사람이었다. 무구원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죽음에 지지 않는다. 독사에 물려도 의지를 굽히지 않으며 쉽게 죽음의 안락함을 선택하지 않는다.
그의 종교가 말하는 대로 삶은 고통임을 알면서도 그 고통 속에서 살아가려 한다. 그래서 무구원은 누군가에게 도저히 상실이란 것을 안겨줄 수가 없는 사람이기도 했다.
“결국 거짓말도 네가 살아남으려는 방법 중 하나였겠지.”
무슨 일을 당해도 살아남을 사람을 바라보는 것이… 얼마나 기묘한 안도감을 주는 일인지. 윤모난은 옆으로 손을 뻗어 침대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는 무구원의 손에 손끝을 댔다.
“그래, 한번 계속 속여봐. 나약함이 네 목숨을 구해주진 않으니까.”
윤모난은 겨우 자리에서 일어나선 옆 침대로 향했다. 조용히 커튼을 걷고 침대에 누운 환자를 한 번, 그리고 생체 신호를 한 번 확인했다. 혼수상태에 빠진 둘 중 한 명은 멀쩡히 일어났지만, 이쪽 침대의 사람에게서는 여전히 아무런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온갖 장치들을 주렁주렁 매단 채로 치치와 함께 깊이 잠든 안범을 보며 윤모난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하지만 난 아무래도 자격이 없는 것 같다.”
그러고는 몸을 숙여 침대 아래에 떨어져 있는 펜던트를 주웠다. 아마도 병동 에스퍼들이 오며 가며 건드리다 떨어진 모양이었다. 윤모난은 안범이 무간에 가기 전에 맡겼던 은제 펜던트를 그의 손에 다시 올려놓았다.
“이 지경을 만들어놓고 기대해서는 안 되는 거지.”
혼수상태에서 막 깨어난 무구원에게는 일부러 알리지 않았지만 그동안 많은 일이 있었다.
신입 대원들이 무간에서 돌아오던 날, 서곡센터 전체에 갑작스러운 비상이 걸렸다. 무간에서 전사한 신입 대원들의 시신들이 끊임없이 들것에 실려 나왔다. 서곡으로 생환한 대원은 출정 인원의 반의반도 채 되지 못했고, 안범 또한 들것에 실린 채로 서곡으로 돌아왔다.
안범의 사인을 확인하기 위해 부검실로 보내지던 중, 그에게서 기적처럼 생명의 징후가 발견됐다. 그 이후로 안범은 쭉 혼수상태로 병동에 누워 있었다. 이 모든 사실을 윤모난은 깨어나 관리동으로 불려 가고 나서야 알았다. 책임감 없는 팀장이 같은 팀원을 반송장으로 만들어놓고 자신도 쓰러져 있던 사이, 팀의 막내가 이 지경이 된 것이다.
무너지지 않으려고 아무리 노력해도 이런 일들이 쓰나미처럼 닥쳐온다. 빛을 떠나면 모두 어둠인 것처럼, 무구원의 기도 아래 잠시나마 따스했던 윤모난의 세계는 금세 음지로 잠겼다.
안범의 앳되고 파리한 얼굴 위에 새겨진 크고 작은 흉터들. 이것들은 영원히 그가 달고 살아야 할 것이었다. 무간에 가기 전날 두려워 우는 이 녀석의 등을 떠민 건 윤모난 자신이었다. 큰소리 안 내고 다독였지만 기저에는 어쩔 수 없다고 냉정히 생각하면서 그를 사지로 내몰았다.
“저같이 약한 사람이 거기서 어떻게 살아남아요…. 팀장님은 저보다 강하시잖아요. 능력도 세고… 가이드시고… 전….”
“뭐, 그건 사실이지. 내가 너무 천재긴 해.”
“…….”
“근데 천재보다는 범재들이 더 수명이 긴 법이야.”
천재보다 범재들이 더 수명이 길어? 다 헛소리였다.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세뇌나 다름없는 개소리를 훈계처럼 떠벌렸다. 무간에 가기 전날 안범이 한 말이 떠올랐다.
“팀장님, 우리는 무지로부터 얼마만큼 벗어났을까요? 시간이 더 흐르면 미래에는 더 이상 전쟁을 안 해도 되겠죠? 무지에서 완전히 벗어나면요.”
안범은 목숨을 빼앗는 자리가 아니라 구하는 자리에 있어야 했다. 만약 자신이 더 나은 팀장이었다면. 무지하지 않고 제대로 된 사람이 그를 이끌었다면.
윤모난은 자학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촌 형 윤이화가 무슨 자신감으로 팀원들 목숨까지 구제해줄 것이냐 따져 물었을 때 왜 대답하지 못했는지는 스스로가 더 잘 알고 있었다. 지금의 자신은 나약하고 쓸모없고 모두에게 화만 될 뿐이니까. 3년 전 구차하게 살아나와 목숨을 부지하고 사는 잉여의 존재. 그것이 자신이었다.
윤모난은 안범의 이불을 끌어당겨 목까지 꼼꼼하게 덮어준 뒤 병실을 나왔다. 복도를 지나가는데 부검을 앞둔 냉동 시신들이 대기 중인 보관실이 죽 이어졌다. 그 앞에는 저마다 윤모난만큼 비참한 얼굴을 하고 있는 다른 팀 대원들이 몇몇 서 있었다. 그들을 지나쳐 가는 분홍색 뒤통수에 비참하고 슬픈 시선이 쭉 따라붙었다.
윤모난은 수십 구의 시신들이 담긴 그 끔찍한 복도를 느린 걸음으로 걸었다. 어제도 그랬고 그저께도 거쳐왔던 통과의례였다. 그렇게 합숙소로 와서도 줄담배를 태우며 한숨도 자지 않은 윤모난은 밤을 새우고 새벽 일찍 열린 전투조 팀장 회의에 참석했다.
윤모난이 회의실로 들어가자 실내 분위기는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얼어붙었다.
“윤모난 팀장, 안범 대원의 상태는 어떻습니까?”
“아무 변화 없습니다. 검사 결과에 따르면 의식이 깊게 가라앉아 정체되어 있다고 하더군요.”
희생자가 발생한 팀의 팀장들만 모인 회의실 안은 여럿이 계속 담배를 피워댄 탓에 마치 너구리 굴 같았다. 윤모난도 그러했듯이 다들 며칠간 뜬눈으로 밤을 새운 모습이었다. 전투조 신입 대원들이 두 명만 남고 모두 사망했으니 잠을 잘 수 있을 리 없었다.
“무간으로 간 조사단이 다른 생존자나… 아니면… 전사자 시신이라도 발견 못했답니까?”
몇 달 전 윤모난과 엘리베이터에서 사이좋게 농담을 나눈 서강 주씨 팀장 중 한 명이 관리자에게 물었다. 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모두 희망 없는 소식뿐이었다.
“무간에서 트랜스와 교전 시에 전사자 시신이 온전한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지금 벌써 일주일 넘게 시간이 흘렀고….”
“지옥에 갈 괴물 새끼들….”
아무리 산전수전 다 겪은 전투조 팀장들이라지만 갓 20살이 된 신입 대원들이 괴물의 먹잇감이 되어 시신도 없이 흩어졌다는 사실은 견디기 힘들었다. 개중에는 계속해서 기도문을 중얼거리는 팀장도 있었다. 2부 7팀 팻말이 적힌 자리 뒤에 앉아 있는 윤모난의 심정도 그들과 다르지 않았다.
“조사단을 백번 파견해봤자 소용없을 겁니다. 무간은 포스트가 완전히 파악하지 못한 차원이고 인간의 기술이 닿을 수 있는 곳도 아니지 않습니까.”
“증거 역시 남아 있지 않을 겁니다.”
다른 팀장들이 저마다 의견을 냈고 모두 옳은 말이었다. 무간은 전장이라 증거가 보존되어 있을 만한 장소가 아니다. 포스트들에게 그곳은 지켜야 하는 영토라기보다 방어선의 의미가 더 크다. 무간은 끊임없이 죽음을 담는 밑 빠진 독이자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허공이었다.
하지만 기실 차원의 경계를 뚫고 괴물들이 우리의 삶으로 쏟아져 내리지 않도록 죽고 또 죽어야 하는 것이 포스트 전사들의 운명이다. 그러므로 거기서 몇 명이 죽었건 수십수만 명이 죽었건 사실상 숫자는 의미가 없었다. 이번 사건도 대규모의… 이른 죽음일 뿐이었다. 빠르든 늦든 거기서 죽은 대원의 절반 이상이 어차피 10년 안에 무간에서 죽었을 테니까.
“지금으로서는 생존자의 증언밖엔 답이 없군요.”
“한 명이 지금 조사실에서 증언하고 있다죠. 그 생존자가….”
“한백형 대원입니다.”
“고섬 한씨 사람이 이 학살의 최후 생존자군.”
엄밀히 말해서 한백형이라는 그 신입 대원이 최후의 생존자는 아니었다. 안범도 있었으니까. 하지만 언제 깨어날지 몰라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는 안범을 크게 신경 쓰는 사람은 없었다. 모두의 관심은 그 한백형 대원의 증언에 쏠려 있었다. 그 이유는 명백했다.
“그게 사실입니까? …생존자가 무간에서 S급 현상 유지 트랜스와 마주쳤다고 했다면서요.”
누군가의 질문에 다시 회의장 안의 분위기가 싸해졌다. 굳이 고개를 들어 확인하지 않아도 윤모난은 자신에게로 날아드는 가시 같은 시선을 모르지 않았다. 그는 말없이 새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이곤 한 모금 빨아들였다. 떨리는 입가가 연기 사이로 부서지듯 사라지기를 바라면서.
“지금껏 보고되지도 않았던 S급 현상 유지 트랜스가 갑자기 무간에? …그 괴물들이 새끼를 쳤을 리도 없고.”
“…지난 10년간 무간에서 전사한 S급 현상 유지 포스트 에스퍼가 몇 명이죠?”
이윽고 물을 필요도 없이 모두가 아는 답이 돌아왔다.
“한 명…입니다.”
전사자들을 기리는 제단에서 향불을 받고 있어야 할 윤약. 그는 100년 만에 처음 태어난 현상 유지 능력의 S급 에스퍼였고, 그 능력으로 전투조 대원으로 봉사한 몇 안 되는 인물이다.
그는 윤화신의 둘째 아들이자 악명 높은 남경의 독사들 중 하나였고, 무엇보다 이 자리에 앉아 있는 윤모난의 형이었다. 이 동생은 3년 전에 무간에서 피를 뒤집어쓰고 살아 돌아와 뭐라고 보고했던가.
“윤약 대원은 전사하지 않았습니까?”
모든 대원이 전사했다고 했었다. 3년 전 윤작이 팀장으로 이끌었던 전투조 정예 팀은 이번처럼 증언 가능한 생존자 한 명을 남기고 전멸했다. 그 생존자는 살아 돌아와 제대로 된 증언이 가능해질 때까지 내내 발작을 일으키고 정신을 잃었었다.
병동에서만 두 번이나 자살 시도를 했고 겨우 살려내 증언이 가능해진 정도가 되었을 때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모두 ‘죽었다’고 답했다. 적어도 서곡에 있는 모든 이들은 물론이거니와 반도에 있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렇게 알았다.
“윤모난 팀장. 윤약 대원은 전사한 것이 맞습니까?”
“…….”
둘째 형은 죽었다. 윤모난은 믿었다. 무간에 있는 괴물은 형이 아니라 환상일 뿐이라고. 형체가 사라지고 메아리만 남은 유령처럼. 강하고 영민하며 아름다운 형의 모습은, 영웅으로서의 그는 자신이 지켜줘야 했다.
추하고 끔찍하게 잘린 괴물의 머리가 방패가 되었듯이. 그를 영웅으로 남을 수 있게 하려면 대신 동생이 괴물이 되어야 했다. 윤모난은 믿었다. 말로써 형을 죽여 그를 살린 것이라고.
“…잘 모르겠습니다.”
“윤모난 팀장… 사람이 죽었어! 그런 괴물이 있다는 사실을 모두에게 숨겼다면 이게 그냥 넘어갈 수 있는 문제 같아?”
윤모난이 고개를 떨구자 다른 팀장들이 광분하기 시작했다.
“갓 20살인 애들이 떼로 죽었는데 모르겠다? 당신 제정신이야!”
“…….”
방 안에 있는 모두가 충격받은 듯이 제각각 반응을 보였다. 내내 떠돌던 흉흉한 소문들이 기정사실화되는 분위기였다. 윤모난은 손마디가 뼈처럼 하얗게 질릴 정도로 주먹을 꽉 쥐었다. 상황이 과열되자 개중에서 조금 이성적이고 조심성 많은 팀장 하나가 중재하려 시도하기는 했다.
“아직 조사 중입니다. 다들 진정하세요. 조사가 끝나기 전까지는 어떠한 것도 확신할 수 없습니다.”
“김 팀장님은 2부 7팀 팀장 반응 보고도 그런 소릴 하십니까?”
“젠장, 이건 최고평의회에서 논의할 사항이야!”
“최고평의회라니요? 군법으로 처벌해야죠! 윤모난 가이드의 고의적인 정보 누락입니다!”
“겨우 군법? 남경 전체가 도의적인 책임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만에 하나 이 일이 사실이라면 반도 전체가 시끄러워지겠지.”
날카로운 시선들이 입을 굳게 다물고 있는 윤모난에게로 칼날처럼 떨어졌다. 반도에서는 가족이나 혈연이 매우 중요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만큼 연좌제라는 죄목을 피하는 것이 어렵다. 아버지의 죄는 그 자식에게로 대물림되고 형이 진 죄는 동생이 물을 것이다. 이윽고 내내 침묵하던 윤모난이 겨우 대답했다.
“제가 책임질 일이 있으면 책임지겠습니다. 하지만 윤약 대원에 관해서는 대답할 수 없습니다.”
그 말에 사방에서 탄식과 분노가 터져 나왔다. 팀장 회의는 오래 진행되지 않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윤모난의 반응을 거의 자백이나 다름없는 것으로 보았다. 그가 형의 트랜스화를 은폐한 탓에 S급 트랜스를 사전에 방어하지 못했고, 그 결과 죄 없는 신입들이 죽었다는 결론이었다.
윤모난을 둘러싼 추문이 불길처럼 번지면서 서곡뿐만 아니라 반도 전체가 술렁였다. 기관에서는 3년 전 고의적인 정보 누락이 있었는지 집중적으로 물었으나, 윤모난은 묵묵부답으로 일관했다. 상황이 상황인 만큼 그의 침묵보다는 한백형이라는 생존자의 증언에 더 무게가 실리는 추세가 되어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조사가 이어지는 동안 윤모난은 남경이나 제 팀원들에게 조사 내용을 전혀 공유하지 않았다. 당연히 가문의 입장 역시 그의 고려 사항이 아니었기에 남경에서도 한바탕 난리가 났다. 결국 남경의 가주인 윤화신이 내리 연락을 무시하는 후계자를 대면하러 서곡까지 찾아올 정도로 상황이 악화됐다.
“한심한 놈. 네가 지금 얼마나 위험한 덫에 걸려들었는지 모르는구나.”
“아버지도 형이 그 대원들을 죽였다고 생각하세요?”
노발대발하는 아버지를 앞에 둔 아들은 그 ‘덫’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건 본질을 가리는 말이었다. 중요한 건 따로 있었다.
“그게 약이건 아니건 상관없어! 더 이상 사실이 문제가 아니야.”
“어째서 문제가 아니라는 거예요. 아버지.”
“무간에서 신입들을 죽인 게 약이 아니라 해도 우리가 책임을 지게 될 거란 말이다. 방심하다 당한 건 그렇다 쳐도 마땅한 대응책을 준비해야지!”
“…대응책이라면 제가 모든 책임을 지는 거겠죠. 책임질 일이 있으면 그렇게 하면 되고, 아니라면 사실을 밝히면 될 일입니다.”
“사실을 밝혀? 뭐 탐정 놀이라도 하겠다는 거냐? 이건 정치 싸움이야. 너도 이젠 가문의 입장을 생각해야 할 것 아니냐!”
“그런 식이라면 저는 더 할 말 없어요.”
“윤모난, 너….”
“돌아가세요.”
정신 나간 듯한 말만 하는 아들의 모습에 윤화신은 할 말을 잃었다.
“너 이 중요한 시기에 또 정신 줄을 놓으려는 거냐?
“…….”
“네 미친 소리도 이젠 질렸다. 어느 때보다 정신을 차려야 하는 이 때에…. 난 너를 후계자로 발표했어. 그 발표 직후에 이런 일이 생겼는데 맥도 못 추고 당하다니. 예상보다 더 모자란 놈인 걸 진즉 알았어야 했는데.”
경멸조의 비난이 마구 날아들었다. 아버지와 마주할 때면 으레 느끼는 피곤함에 윤모난은 다시 한번 입장을 분명히 했다. 서곡에 있는 조사관들이나 아버지에게나 답은 늘 똑같았다.
“저는 아무 답도 주지 않을 겁니다.”
“조사 결과가 어떻든 상관없어! 다른 가문에서 이 일을 이용하려 이미 움직이고 있으니까!”
어쩌면 아버지의 말이 맞을 터였다. 이번 일은 입을 다문다고 해서 그냥 넘어갈 수 있는 규모가 아니었다. 보여주기식이든 뭐든 간에 책임을 물을 누군가를 재판장으로 끌어낼 거고 그건 남경의 후계자일 자신일 확률이 높았다. 윤모난도 이를 모르지 않았다. 그저 모든 것이 귀찮고 지칠 뿐.
“제발 아무것도 하지 말고 가만히 있어라. 네가 또 정신 놓고 날뛰면 너뿐만 아니라 남경 전체가 위험해져.”
“…….”
“하…! 이런 놈도 아들이랍시고 후계자 자리에 앉혀 제구실하게 해야 한다니.”
“그만 가세요.”
윤모난은 자신의 아버지를 보며 문득 궁금해졌다. 당신 몸의 절반을 갈라 탄생한 자식을 이렇게나 경멸할 수 있는 것인지. 제게 흐르는 뜨거운 피와 단단한 뼈의 반은 분명 그에게서 물려받았음에도 말이다. 무조건적인 사랑은 바란 적도 없는 윤모난에게, 아버지는 조건 있는 사랑조차 주지 않았다.
먼저 복도로 나오자 죄지은 얼굴로 가주를 기다리던 윤씨들의 시선이 따라붙었다. 봄이 지나면서 숙청당한 꽃들의 빈자리가 간간이 눈에 띄었다. 일렬로 선 줄 끝에 서 있던 윤이화가 굽힌 허리를 펴더니 윤모난을 빤히 쳐다보았다.
겉보기에는 순한 인상을 가진 그의 얼굴에 얼핏 매서움이 스쳤다. ‘내 제안은 고려하고 있는 거니?’라고 묻는 듯했다. 윤모난은 주어를 밝히지 않은 채 육성으로 답했다.
“다들 지금이라도 휘말리기 싫으면 꼬리 말고 남경으로 꺼져.”
그렇게 가문 사람들을 등지고 걸어 나오며 윤모난은 생각했다. 가문의 도움을 받아 이 일을 해결할 생각은 없었다. 그냥 버텨내면 될 일이다. 지금껏 하루하루 자신이 살아왔듯이. 무구원의 말대로 자신은 영웅보다는 악당에 가까운 사람이니까. 메두사처럼 죽음 이후에나 값어치를 할 테니 그것만 기다리면 된다.
건물 바깥으로 나오니 한바탕 늦은 봄비가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이 비가 그치면 사람을 말랑거리게 만들었던 봄은 씻겨가고 사람을 지치게 하는 계절이 시작된다.
이번 여름은 지겨우리만치 더울 것 같았다.
* * *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이번 여름은 초장부터 더위의 기세가 꽤 요란했다. 사람을 지치게 만드는 계절 한가운데에서 무간에서 죽은 희생자들에 대한 추도식이 뒤늦게 열렸다. 조사가 이어지며 미뤄졌던 추도식을 더 연기하는 것이 민심에 영향을 미칠까 저어한 평의회의 판단이 있었다.
독실한 천경교 신자이자 북해의 후계자, 또 한편으로는 신성한 힘을 가진 포스트 전사라는 상징성을 가진 사람이 추도식의 연설을 맡은 것은 당연했다. 무정원이었다. 날씨가 여름에 접어들어 연단 아래 선 모두가 땀을 삐질삐질 흘리는 가운데, 그가 단상에 나타났다.
진회색의 대리석으로 지어 올린 삭막한 평의회당의 연단에 북해의 후계자가 서다니 퍽 이례적인 일이었다. 본래 최고평의회에 속한 가주들은 모두 암살 위협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터라 얼굴이나 가족의 실물을 공개하는 것은 꺼렸다.
따라서 국가적 행사가 있을 때는 각자 라디오로 연설을 할지언정 텔레비전에는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무정원이 오랜 관례를 깨고 방송사 카메라 앞에 모습을 드러내 추도문을 읽기로 한 것이다.
“…그리하여 어머니 신께서 이 젊은 영웅들을 품에 안으셨으니, 그들의 희생은 우리 모두의 귀감이 되어 영원히 기억될 것입니다.”
마지막 문장을 읽는 무정원의 얼굴을 방송사 카메라가 놓치지 않고 화면에 담았다. 낭독을 마친 다음 그는 연단에서 내려와 제단으로 향했다. 향불들이 어지러이 얽힌 제단 주변에는 회색 안개가 끼어 있었다. 향을 올리고 그 앞에 무릎을 꿇은 남자에게서는 이 모든 일의 배후가 아닌, 그저 권위 있는 북해의 후계자로서의 면모만이 드러났다.
그렇게 추도식이 끝난 뒤 차로 향하는 길까지 무정원 주변의 분위기는 엄숙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런 분위기를 단숨에 전환한 것은 무정원을 기다리고 있던 어느 순수한 존재였다.
“…아빠.”
무정원은 자신에게로 안겨오는 작은 아이에게 손을 뻗었다. 요즘은 어딜 가든 아이를 데리고 다니려 노력하던 그였다. 아버지의 품에 안긴 아이는 손가락을 쭉쭉 빨며 심각한 표정의 주변 사람들을 보다가 겁이 났는지 단단한 어깨에 파고들었다.
“무서웠구나.”
아이를 다독이다가 무정원은 작은 이마에 손을 얹어 열을 쟀다.
“아빠가 왔는지는 어떻게 알았니.”
“아빠 냄새….”
아이가 귀여운 소리를 하자 절로 주변에서 웃음소리가 났다. 그러자 곧바로 차가운 호령이 따라붙었다.
“아직 애도 중인데 웃음소리를 내다니.”
“죄송합니다.”
“아빠아.”
아이는 차갑게 돌변한 제 아버지의 표정을 보지 못했는지 어리광을 부렸다. 이마가 뜨거운 걸 보니 또 열이 오른 모양이었다. 무정원은 아이를 안고 차 뒷좌석에 앉았다.
“이런, 우리 아기가 열이 있구나. 얼른 돌아가자.”
“얼음. 아빠….”
“응. 그래.”
기운 없이 보채는 아이를 위해 무정원은 손끝에서 얼음 결정을 만들어 열을 식혀주었다. 무정원의 작은 아들은 곧이어 품 안에서 색색대기 시작했다.
“정원 님.”
“…그래.”
“서곡에서 윤모난의 조사가 지지부진한 모양입니다. 아무래도 생존자의 증언으로는 처벌까지는….”
“음… 모난이가 꽤 버티며 방어하고 있다지.”
“네, 태도를 전혀 바꾸지 않고 있습니다. 다만 직무 정지는 부당하다며 항의한 탓에 업무는 평소대로 하는 모양입니다.”
“그래?”
심각한 내용을 상의하면서도 무정원은 내내 아들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무정원의 보좌진, 즉 무간 사건을 계획한 당사자들 중 한 명인 몰이꾼이 남경 윤씨들의 동향을 정리한 보고서를 뒷좌석으로 전달했다.
“어차피 서곡에서의 조사는 곧 마무리될 겁니다. 조사 결과가 중요한 것은 아니겠지요. 윤약이 트랜스가 되어 무간에서 신입 대원들을 학살했다는 소문이 반도 전체에 퍼진 상황에서는 말입니다.”
“내가 소문이나 키워 흉한 소리나 듣자고 이 일을 시작한 건 아닐 텐데.”
“네, 알고 있습니다. 윤화신의 동향도 놓치지 않고 파악하는 중입니다.”
“남경 내부는 어떻다지?”
“어수선하다고 합니다. 남경 지부는 물론이고 화사들까지 거리에서 수상한 사람이 있으면 잡아 바로 처형한다고 하더군요.”
비린내 나는 뱀 굴이 동요하고 있군. 무정원은 아들의 작은 귀를 감싸 막으며 말했다.
“남경에 처박혀 있는 뱀을 끌어내려면 윤모난을 재판장까지 데려가야 한다.”
“…확실한 증거를 만들기 위해 계획대로 진행하고 있습니다.”
“음, 이번 생존자 중 한 명은 어떤 상황이지?”
“하명하시는 대로 작업 실행 예정입니다. 제거할까요?”
무정원은 사람의 목숨을 쥔 바로 그 손으로 아들의 귀를 더 단단히 가리며 말했다.
“그래, 시작해.”
“윤모난이 재판에 끌려 나오면 윤화신이 과연 아들의 목숨을 구명하려고 나설까요? 소문으로는 자식을 유난히 예뻐하는 아버지는 아니라던데요.”
“자식의 목숨에 초연한 아버지가 어디 있겠나.”
그 말과 함께 무정원의 시선이 그의 하나뿐인 자식의 뺨을 부드럽게 감쌌다. 제 아들 사랑만은 끔찍한 상관을 아는 몰이꾼은 말실수를 했다는 듯이 난처한 기색을 내비쳤다.
“도련님 일은….”
“됐어. 아직까진 모난이가 꽤 버티고 있으니 말을 듣게 만들려면 적당히 무너뜨려놔야 할 거다.”
“물론입니다.”
일은 차근차근 진행되고 있었다. 물론 예상치 못하게 터져 나오는 변수들이야 있지만 말이다. 이 모든 일은 오랜 시간 동안 준비해서 드디어 실행하는 단계에 이르렀으니 모든 것이 손 하나 까닥하는 정도로 쉬울 것이다. 무정원은 한 치의 조급함도 없는 기색으로 차분히 명령을 내렸다.
“이번 일은 실수 없이 진행해라. 남경이 쌀값에 장난을 쳐서 군비를 비축했을 테니 윤화신이 갑자기 군대라도 일으키면 성가셔지니까.”
갑자기 군대를 일으킨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전면전으로 가게 되면 재정이 불리한 쪽이 지기 마련이다. 굳이 무정원이 무력 충돌이 아닌 정치 전쟁을 선택한 이유이기도 하다. 연환계를 통해 남경 내부를 교란시키고 적장의 목이 비는 때를 기다린다.
혼수모어(混水摸魚). 물을 탁하게 만들어 물고기를 잡는다. 그것이 바로 무정원이 남경을 취할 전략이었다.
무정원이 주관한 추도식이 방송으로 나간 뒤, 세간의 이목은 남경과 윤모난에게 쏠렸다. 묵묵부답으로 일관하고 있는 윤모난이 제 형이 트랜스가 된 사실을 숨겨 오늘날 이 사달을 일으켰다는 소문은 정치 세가에 대한 반감과 맞물려 큰 분노로 번지고 있었다.
문제는 윤모난이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온갖 비난과 사회적 타살에 가까운 모욕들을 별로 개의치 않는다는 것이다. 사실상 어렸을 때부터 서자인 그에게 은근한 모욕은 일상이었다. 가끔 윤모난은 모욕이라는 자양분을 받고 자라 자신의 목숨이 이토록 끈질긴 것은 아닌가 생각해본 적도 있었다.
“완전히 잊고 있었네.”
그러니 몇 달 전 사교 클럽에서 김동희라는 연구조 에스퍼에게 맡긴 은색 큐브를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던 게 당연했다. 윤모난은 여전히 아무런 울림이 없는 호출기를 툭툭 건드리다가 생각에 잠겼다.
시간이 꽤 흘렀는데도 그쪽에서는 따로 연락이 없다. 그 직후에 계속 문제가 터져 다시 클럽에 찾아가는 것도 쉽지 않았다. 윤모난은 자리에서 일어나 무구원의 방으로 향했다.
“무구원.”
또 노크 없이 방문을 벌컥 열고 들어간 윤모난은, 늘 그렇듯이 바닥에 엎드려서 기도를 하고 있는 무구원을 발견하고서는 아차 싶었다. 시계를 굳이 보지 않은 탓에 지금이 기도하는 시간인 줄 생각도 못했다. 무구원은 검지에 대바늘을 찔러 넣다 말고 상체를 일으켜 대답했다.
“네.”
“아, 기도해라. 미안.”
“무슨 일이십니까?”
“급한 거 아니야. 마저 하던 거 해.”
“팀장님, 하실 말씀 있으시면 지금 하시죠. 저번처럼 저만 모르게 숨기지 마시구요.”
“…아.”
윤모난의 입이 꾹 다물렸다. 일단 그에게는 무구원이 병동에 누워 있는 동안 안범 얘기를 하지 않은 죄가 있었다. 심지어 한 병실에서 옆 침대에 내내 같이 누워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러다가 퇴원할 때쯤 안범과 윤모난의 일을 모두 알게 된 무구원은 조금 크게 화를 냈다.
“다른 일을 말 안 하시는 건 이해합니다. 하지만 이건 팀의 일인데 어떻게 숨기실 수 있습니까?”
그가 그렇게 소리치며 화내는 것은 정말 처음 본 터라 윤모난마저 크게 당황했다. 너무도 당황한 탓에 ‘미안’이라고 사과까지 해버렸다. 그 광경을 본 경해국이 경악하며 비난했다.
“시팔, 애를 무슨 반 불구를 만들어놓고…. 설마 지금 처음으로 사과하시는 건 아니겠죠?”
“…….”
“미안하다. 무구원. 때린 것도 미안하고…. 말 안 한 것도… 미안해.”
“그만두십시오. 어차피 또 독단적으로 결정하실 테죠.”
그렇게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몸으로 돌아서 가버리는 무구원의 뒷모습을 황망히 바라보던 윤모난은 어찌나 무안한지 얼굴을 들 수 없었다. 미안하다고 사과까지 하고 나니 쉽게 죄인의 마음이 되는 것 같기도 하고. 물론 심성이 뒤틀린 윤모난이 뻔뻔하게 ‘쌍방 폭행이잖아!’ 항변하기는 했지만.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사과를 주고받는다고 나아질 문제가 아니었다. 실상 둘 사이에는 말하지 않고 그저 쌓아둔 탓에 해결점을 찾지 못하고 뒤엉킨 마음만이 산재하기 때문이다.
무구원은 가문의 이익을 위해 윤모난을 (비)의도적으로 유혹하고 거짓말을 한 섹스 스파이였고, 여전히 그 사실을 (들킨 줄도 모르고) 숨기고 있었다. 한편 윤모난은 온갖 폭력과 폭언, 화풀이로 무구원에게 중상을 입혔으며, 심지어 섹스 스파이 공격은 과거 그의 업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무구원!”
윤모난은 절뚝대면서 걸음을 옮기는 무구원을 쫓아갔다. 지금은 그에게 져줘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 어쩌면 사람을 반죽음에 이를 정도로 패면서까지 극단적으로 부인하고 싶었던 마음을 인정하는 과정을 보낸 뒤로 윤모난에게 조금은 양심이라는 것이 솟아난 걸지도 몰랐다.
윤모난은 어엿하게 자신의 삶으로 걸어 들어온 구원이 다시 튕겨 나갈까 봐 냅다 팔목을 붙들었다.
“나 능력 써야 해.”
“…….”
그 말에 돌아보는 무구원의 표정이 묘했다. 경악과 황당함, 그리고 알 수 없는 무언가가 뒤섞여 있었다. 윤모난은 급한 대로 변명하며 상황을 수습했다.
“…안범한테 가이딩이 미세하게나마 효과가 있는 것 같아서… 여기서 내 능력이 조금이라도 더 회복되면 안범이….”
“알겠습니다.”
“어? 어…. 그래. 알았다고?”
능력이니 뭐니 했지만 까놓고 말해 막 중상에서 겨우 회복한 사람한테 네 좆이 필요하다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무구원은 겨우 화를 누그러뜨리는가 싶더니 머슴처럼 뒤를 쫓아왔다. 윤모난은 이 충동적인 결정에 그를 팀 회의실로 데려갈 때까지도 혼란스러웠다. ‘시발, 시발, 시발’을 속으로 연신 외치면서.
회의실로 들어와 문을 닫고 블라인드를 친 다음에도 윤모난은 처음 동정을 떼는 청년처럼 긴장하며 속으로 ‘이게… 아닌데…’만 되뇌었다. 바지를 벗을 때도 ‘이게 아닌데… 이러면 안 되는데…’ 하고 자책했다. 옷을 벗은 무구원의 온몸이 푸르딩딩한 멍에 뒤덮여 있는 걸 보았을 때도 ‘역시 이건 아니다’라며 혀를 찼다.
하지만 무구원의 얼굴에 비치는 열기를 스치듯이 보는 그 순간 머릿속에선 ‘이게 아닌데…’가 ‘음, 한 번은 괜찮지 않을까’로 변했고, 오랜만에 몸을 섞으며 생생하게 타오르는 감각들과 여전히 어설픈 무구원의 약한 얼굴 탓에 결국 ‘안 돼, 돼, 돼… 돼’라고 생각해버렸던 것이다.
그 이후로 부인과 납득, 그리고 자기 합리화가 부단히도 이어졌다. 두 사람은 벌집이 된 서곡 한가운데에서 언어를 잊은 사람들처럼 몸의 대화만 나누게 된 것이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여름 한가운데였고, 오늘 역시 그런 날들 중 하루였다.
“아, 정말 나중에 얘기해도 돼. 심각한 일 아니야.”
“…하.”
무구원은 기대도 안 한다는 듯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러고서는 평소 버릇이 든 대로 윗옷의 지퍼를 내리고 웃통을 훌렁 벗는 게 아닌가. 그 광경에 윤모난이 뜨악하며 물었다.
“뭐 해?”
‘능력 필요해서 오신 거 아닙니까?’라고 되묻는 무구원의 착잡한 얼굴을 보고서야, 드디어 윤모난의 머리에 브레이크가 걸렸다. 떡을 쳐도 너무 친 탓에 이놈이 아무래도 자동 섹스 머신이 된 듯했다.
“…아니. 난… 그게 아니라….”
“네?”
생각해보면 무구원에겐 어딘가 조금 뻔뻔한 구석이 있었다. 처음에는 감정 표현에 서툴고 무뎌서 그런 줄 알았더니, 그는 이런 상황에서도 수치심이란 것을 딱히 모르는 것처럼 굴었다. 당황하고 놀라던 이전과 달리 이제는 기도 중간에 웃통을 훌렁 까는 불경한 짓거리까지 저지르다니. 이게 천경교 교리상 맞는 건지, 오히려 무신론자인 윤모난의 뇌 속만 복잡해졌다.
“다시 입어. 기도 끝나고 얘기해.”
“아…. 네, 그러십시오.”
무구원은 주섬주섬 옷을 도로 주워 입더니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매트 위에 올라가서 기도를 재개했다. 그 모습을 경악하며 지켜보던 윤모난은 얼른 방을 나섰다. 기도 시간이건 뭐건 한때는 옆에서 꼴린다며 자위까지 하려 했던 변태를 수그러들게 만들다니. 실로 대단한 자식이다.
윤모난이 방으로 돌아와 엉킨 분홍 머리를 벅벅 긁는 사이에, 무구원이 착실히 기도를 끝마친 뒤 찾아왔다. 그리고 방문을 닫자마자 또 웃통을 벗었다. 윤모난은 그 꼴을 보고 버럭 소리를 쳤다.
“너 자꾸 왜 이래? 그런 거 아니라니까!”
“…팀장님이 그럴 때만 저를 찾으셨잖습니까.”
“뭐? 내가 언제? 무슨 소리야, 이 새끼야!”
핏대를 세우며 반박하는 게 민망할 만큼 지난 세 달간은 확실히 그랬다. 윤모난은 호통을 치느라 살짝 갈라진 목을 가다듬으며 좋아하는 상대에게 중요한 건 하나도 말하지 않고 변태짓만 했던 과거에 대한 참회의 시간을 가졌다. 이대로는 안 된다.
“앉아봐, 무구원. 오늘은 우리 얘기 좀 하자.”
“…정말입니까?”
무구원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 그러면서도 100% 믿는 건 아니었는지 옷을 입지는 않았다. 스트레스와 우울에 빠져 섹스 중독자가 되어버린 타겟 때문에 십분 대기조로 전락한 서글픈 섹스 스파이를 보며 윤모난은 욕을 씹어 삼켰다.
“저도 실은 팀장님과 대화하고 싶었습니다.”
“…무슨?”
“조사….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지 여쭤보고 싶은데 도통 말씀을 안 하셔서요.”
“미안, 그건 별로 말하고 싶지 않다.”
윤모난이 바로 낯빛을 바꾸자 지난 석 달간 그래왔듯이 무구원은 바로 입을 닫았다. 그 모습이 윤모난의 눈에 좋아 보였냐 하면 당연히 아니었다. 언제부터 이 녀석이 하고 싶은 말을 참았던가. 특히 지금은 하고 싶은 말이 넘쳐흐를 텐데 말이다.
여전히 윤모난이 무정원을 경계하는 이상, 이 문제는 까다로울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삶에 한 발자국 들어온 무구원의 나머지 한 발은 여전히 자신의 가문에 걸쳐진 것을 모르지 않기 때문이다. 의심과 미움, 분노를 넘어서 이제는 그의 생존 방식을 받아들이기로 한 지도 꽤 됐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쪽에서 정보를 주느냐 하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육체적 관계를 이어오면서도 감정적인 교류를 거의 하지 않은 건 그런 이유였다. 서로가 서로를 착취하는 관계처럼 보이지만, 사실상 얻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는 그런 허울뿐인 관계. 지금으로서는 그게 최선이었다. 윤모난은 조사가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무구원의 엉뚱한 모습을 볼 기회가 줄어드는 것 같아 아쉽다는 한심한 생각이나 했다.
“큐브 얘기 하려던 거였어. 기억이나 하는지는 모르지만, 그때 연구조 에스퍼한테 호출기를 받아서 연락을 기다리고 있었거든.”
“당연히 안 잊었습니다. 그간 팀장님께서 다른 말씀이 없으시기에. 그리고 팀장님이 이런 문제까지 신경 쓰시기에는 상황이 상황인지라.”
“그래, 그러니까 이거 네가 가지고 있어. 혹시 모르니까.”
혹시 모른다는 단서를 붙이는 말에 무구원의 미간이 미세하게 좁아들었다. 또 질문은 많으나 애써 삼키는 표정이다. 윤모난은 그 모습을 코앞에서 보면서도 부러 외면했다. 지금은 큐브 얘기에만 초점을 맞추고 싶었다.
“큐브. 나한테는 꽤 귀찮은 문제였는데, 생각해보니까 그런 건 처음이더라고.”
“뭐가 말입니까?”
“이거저거 다 떠나서 순수하게 뭔가를 해결하려고 드는 거.”
그에게 큐브는 숨겨져 있는 수수께끼 말고도 무구원에 대한 믿음을 상징하는 물건이었다. 이 큐브를 통해서 그의 선한 의도를 믿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윤모난이 구린내 나는 이 똥통 속에서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건 그것뿐이었다.
“그러니까 포기하지 말자고. 언제 그 연구조 에스퍼 쪽에서 연락이 올지는 모르지만, 연락 오면 같이 가자. 같이 가서 알아보고 그다음을 결정하고… 그런 다음에 또 어떻게 할지 상의해.”
“…….”
무구원은 말없이 건네받은 호출기를 자신의 시계 위에 찼다. 서랍 안에 두고 간간이 확인만 한 자신과 다르게 잠깐이라도 놓치지 않으려는 것일 테다.
“이게 할 말이었다, 꼴통 새끼야.”
“네.”
“또 무슨 말이 하고 싶었는데? 대화하고 싶다며.”
물론 조사랑 관련된 내용이랑 온갖 암울한 소리는 빼고, 라며 단서를 붙였다. 그러자 무구원이 느리게 눈을 깜빡이더니 이내 조금은 텅 빈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팀장님께 하고 싶은 말이 정말 많았는데, 저도 모르겠네요.”
“모르겠을 때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도 방법이야.”
하지만 무구원은 그것이 옳은지에 관해서는 확신이 없는 모습이었다. 그저 낱알을 세듯이 속으로 가만히 할 말을 고르고 있을 터였다. 윤모난은 이 고민 많은 남자의 아래턱을 부드럽게 쥐어 자신의 쪽으로 돌렸다.
“말이 어려우면, 대신에 하고 싶은 행동을 하든가.”
윤모난의 말에 무언가 저 나름의 답이라도 받은 듯, 날이 서 있던 무구원의 눈빛이 일순 풀어졌다. 그러더니 약간은 얼떨결에 그의 잇새에서 중얼거림이 새어 나온다.
“그럼… 주세요.”
“뭐?”
윤모난은 방금 들은 것이 맞는지 확인하는 차원에서 재차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무구원의 얼굴이 사제의 앞에서 고해하는 신도처럼 경건하고 단정했기 때문이다. 낮은 목소리가 기도문을 읊듯이 부드럽게 이어졌다.
“팀장님 키스해 주세요.”
첨가물 하나 없는 정직한 요구였다. 아무래도 무구원은 섹스 스파이가 천직인 것이 아닐까, 그런 얼빠진 생각이 윤모난의 이성을 허물어뜨렸다. 무구한 밤하늘처럼 유유히 빛나고 있는 무구원의 까만 눈이 참으로 무해해 보였기 때문이다.
생각을 마무리하며 윤모난은 무구원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그리고 그의 입가에 자신의 입술을 가볍게 찍었다. 예상외로 조심스러운 그 행동에 무구원은 마치 처음 키스를 받는 사람처럼 긴장한 듯 보였다. 윤모난은 그렇게 한참을 그의 부드러운 뺨에 자신의 입술을 문지르다가 돌연 나지막이 속삭였다.
“오늘은 정말… 대화만 하려고 했는데. 젠장. 바지 벗어, 무구원.”
“네.”
이럴 때조차 명령을 받드는 것처럼 정직하게 대답한다. 윤모난은 그런 모습에 발기하는 자신이 단단히 미쳤다고 생각하며 재빨리 바지를 무릎까지 끌어 내렸다. 그리고 침대 아래서 꾸물거리며 벗은 옷을 단정하게 개고 있는 무구원의 머리칼을 쥐어 거칠게 끌어당겼다.
“하…. 그놈의 옷 개기는 빼놓는 법이 없지!”
덕분에 정돈된 옷들을 발로 슥 차버리며 엉망을 만드는 건 윤모난의 새로운 취미가 되었다. 오늘도 발에 차여 처참하게 구겨지는 옷들을 보며 경직되는 무구원의 얼굴을 구경하는 것도. 윤모난은 제 위로 올라탄 무구원의 목덜미에 코를 깊숙이 박으며 숨을 들이마셨다.
늘 그렇듯이 그에게선 향긋한 세제 냄새가 났다. 깨끗한 빨래에서만 나는 기분 좋은 냄새. 어쩐지 달큼하고 포근한. 혀를 뭉근하게 놀려 살갗을 꾹 눌러 입속으로 빨아들이면 그 냄새가 딸려 삼켜질 것 같았다.
“…팀장님. 제 냄새 맡고 계십니까?”
“어, 깨끗한 냄새 나서 좋거든.”
“팀장님도 빨래할 때 제발 섬유유연제 좀 쓰십시오. 그리고 매일 까먹고 세탁기에 빨래를 방치하시던데 그러다 곰팡이 생깁니다.”
“닥쳐.”
진짜 곰팡이 같은 게 누군데 빨래 타령인지. 윤모난은 건방진 입을 단속하기 위해 손을 아래로 미끄러뜨려 뜨거운 살덩이를 꽉 틀어쥐었다.
“…좆 발딱 세우고서 빨래 얘기 하는 인간은 무구원 너밖에 없을 거다.”
그러자 무구원은 저 자신의 우스움을 안다는 듯이 희미하게 웃었다. 언젠가 한번 웃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이렇게 간간이 웃는다, 이 로봇 같던 놈이. 윤모난의 손가락이 은근히 살갗을 문지르자 무구원의 입가에서 짧은 숨이 튀어나왔다.
“잠시만요.”
가벼운 전희에 반응하던 무구원이 문득 손을 겹쳐오며 자극하는 손길을 막았다. 윤모난이 ‘왜?’ 하고 채 묻기도 전에 그가 갑자기 상체를 수그리더니 윤모난의 옆구리 위쪽 살을 함빡 물었다. 묘한 간지러움에 살짝 뒤틀리는 몸을 기다란 손가락이 겨드랑이 아래쪽으로 들어와 옥죄었다.
뜨거운 혀가 쭉 올라와 뱀 문신의 대가리를 핥고 지나갔다. 그러자 여러 갈래의 계곡으로 갈라진 단단한 복근이 위로 튀며 움찔댄다. 검은 뱀의 비늘을 따라 혀로 쭉 선을 그리던 무구원이 문득 엉뚱한 소리를 했다.
“이러니까 꼭 뱀을 핥는 것 같아서 기분이 이상합니다.”
“미친놈.”
“…물론 진짜 뱀보다는 더 뜨겁고 부드럽지만요.”
뱀을 정말 핥아본 적도 없을 텐데 말은 청산유수다. 윤모난이 한숨을 내쉬는 틈을 타 무구원이 그의 한쪽 허벅지를 단단히 받치고 들어 올렸다. 산으로 솟아난 무릎 근처에서 간지러운 숨이 느껴진다. 무구원이 그 경건한 수도승 같은 얼굴을 살결 위로 음란하게 비비고 있었다.
허벅지 안쪽으로 그의 단단한 턱과 부드러운 입술이 스치고 지나가자 윤모난은 참지 못하고 신음을 흘렸다. 그러자 무구원이 기민하게 반응하며 물었다.
“이러면 좋으세요?”
“어.”
살갗과 마찰해서인지 유독 붉어진 무구원의 입술에 윤모난은 입맛을 다셨다. 한 부위에 끈적한 시선이 닿은 것을 놓치지 않은 무구원은 위로 올라와 촉촉해진 입술을 고이 가져다 바쳤다.
이쯤 되니 윤모난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무구원은 지금껏 그가 가르쳐본 이들 중에 가장 성실한 학생이었다. 선생의 반응을 토씨 하나 놓치지 않고 기억하는 것을 보건대, 아무래도 혼자 있을 때 일지 따위를 적으며 복기라도 하는 게 분명하다.
무구원은 음담패설을 하는 방법도 몰랐고 전희 단계에서는 유독 조용했다. 하는 중간에도 숨소리나 낮은 신음만 낼 뿐 섹스를 할 때 요란하게 구는 타입은 아니었다. 윤모난에게 그건 마치 밤늦게 조용한 박물관에 들어와 대리석과 섹스하는 듯한 비현실적인 상상마저 불러일으켰다.
그사이 성실한 학생은 차근차근 학습한 단계를 밟아갔다. 무구원은 이전에 배운 대로 다시 내려간 뒤 무게 때문에 살짝 기울어 꺼덕거리는 좆을 입에 물었다. 성기가 입안 점막과 맞닿자 윤모난의 복부 근육이 핏줄이 불거진 채 움찔댔다.
“야, 잠깐…. 천천히 해. 오늘따라 왜 이렇게 집요하게….”
처음부터 입에 압력을 줘 세차게 핥아 올리는 것을 견디지 못하고, 윤모난은 벌어진 무구원의 턱을 잡아 뺐다. 즐기는 건 좋지만 초장부터 정신 빼는 모습을 보이고 싶진 않았다.
그러나 무구원은 날이라도 잡았는지 문 것을 도저히 놓으려 들지 않았다. 꽤 집요한 구석이 있는 녀석의 성격은 이런 식으로 의외의 순간에 터지곤 했다. 처음 할 때도 자신을 압사시키려고 하는 건가 싶을 정도로 꽉 끌어안아 숨도 못 쉬게 만들지 않았던가.
이 새끼가 위아래도 없이 지 상관을 맘대로 하려고 하다니. 윤모난은 발로 무구원의 어깨를 밀었다. 물고 있던 귀두가 빠지며 벌어진 입술에서 압력 그대로 뻑, 하는 소리가 났다. 그러자 무구원이 사탕을 뺏긴 애처럼 얼굴을 허벅지 안쪽에 문지른다.
“넣을 때마다 아파하시니까, 오늘은 먼저 사정하게 해드리려고 했는데요.”
“그래. …아프긴 하지.”
하지만 삽입이 항상 아프기만 한 건 아니었다. 고통과 쾌락의 차이는 습자지 한 장 정도이니까. 더욱이 무구원과 할 때마다 그 습자지는 푹 젖어들어 숭숭 구멍이 날 때가 더 많았다.
“팀장님이 아파하시는 게 싫습니다.”
무구원의 대답은 어리광처럼 들리기까지 해서, 윤모난은 이젠 제가 미쳤나 보다 생각하며 헛숨을 쉬었다.
무구원은 섹스 중에 상대가 아파하는 건지 느끼는 건지 반응을 잘 구분하지 못했다. 윤모난이 신음을 조금이라도 더 크게 뱉으면 바로 멈추고 ‘아프세요?’라는 생뚱맞은 질문이나 하곤 했다. 그럴 때마다 윤모난은 무구원의 머리통을 주먹으로 퍽퍽 갈기며, ‘그냥 해, 멍청아. 멈추지 말고!’라며 호통을 쳤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이상하게도 자신이 아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저놈의 순수한 바람을 무시하기가 어려웠다.
“그래, 이러다 밤새울 것도 아니고… 해.”
두 손 두 발 다 든 대답에 무구원은 순진하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중간에 멈춘 행위를 재개했다. 그가 딱히 펠라티오에 소질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아름다운 입술이 좆을 물고 있는 모습은 그것만으로도 절경이라 윤모난은 아래로 자꾸만 피가 몰렸다.
그는 빨갛게 벌어진 무구원의 입술 사이로 자신의 물건이 출납하는 것을 보는 것이 나쁘지 않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아니, 솔직히 좋았다. 그대로 무구원의 입속에 사정할 만큼. 윤모난은 길게 숨을 내쉬며 무구원이 행여나 입을 빼지 않도록 그의 머리통을 바투 잡았다.
“하아, 전부 삼켜.”
꿀떡, 하는 소리가 대답을 대신했다. 축축한 혀가 더 빨아 먹을 게 없는 성기의 뿌리 근처를 훑다가 탄력 좋은 음낭을 스쳤다. 방금 가벼운 절정에 이르렀으면서도 모자랐던 윤모난은 제 손가락을 무구원이 잠시 점령하고 있는 사타구니로 미끄러트렸다.
뜨거운 혀끝이 찾아온 손가락을 촉촉하게 적셨다. 오래지 않아 흠뻑 젖은 손으로 좁은 틈을 비집고 들어가자 어제도 관계를 가진 탓에 조금 풀려 있던 구멍이 경계 없이 열렸다. 좁게 벌어진 사이로 무구원의 날숨이 들어오는 바람에 이루 말할 수 없는 간지러움이 안을 훑고 지나가기도 했다.
“무구원.”
윤모난은 저도 모르게 간절한 목소리를 토해냈다.
“박아줘.”
그러자 다리 안쪽 살을 갉작이고 있던 무구원이 상체를 일으켜 위로 올라왔다. 이어서 손가락이 빠져나간 자리로 아까부터 뻣뻣하다 못해 검붉게 변한 채 끝에서 물을 흘리고 있는 무구원의 성기가 조급하게 침입했다.
“으으― 윽!”
어쩔 수 없는 생리적인 고통에 윤모난이 크게 신음했다. 하지만 곧이어 커다란 손이 벌어진 입을 틀어막았다.
“경해국이… 읏, 방에, 있습니다.”
“으…. 너도 니 좆에 박히면… 그딴 소리 못할 거다.”
“팀장님, 소리… 조금만….”
“경해국이 알건 말건, 시팔, 무슨 상관이야….”
욕을 섞어가며 앓는 윤모난을 보며 무구원은 조금 난처해졌다. 하지만 그에게는 그간의 경험을 통해 배운 몇 가지 방책이 있었다. 소리도 막고 윤모난도 만족시키는 방법이.
무구원은 옆에 있던 베개 하나를 조심스럽게 집어 들었다. 미세한 웃음과 기대감이 섞인 표정이 윤모난의 얼굴에 스쳤다가 곧 묻혔다. 무구원은 마치 부드러운 구름을 얹듯 윤모난의 얼굴 위에 베개를 올려놓고 조금만 힘을 가해 적당히 압박하듯 틈새를 막았다.
숨을 아예 못 쉴 정도가 아닌데도 얼굴이 가려지자마자 팔뚝을 잡은 손이 세게 조여왔다. 조이는 건 아래도 마찬가지라 무구원 역시 입술을 꾹 물었다. 동시에 아래서 퍽, 하고 살갗이 맞부딪친다.
“으읍!”
베개 아래에서 억눌린 울음소리 같은 것이 둔탁하게 울렸다. 무구원은 내내 참다가 삽입해서인지 따듯하게 조여오는 자극을 견디지 못하고 자신도 베개에 얼굴을 처박으며 짧게 신음을 냈다. 베개 하나를 두고 두 사람의 몸이 거칠게 마찰했다.
윤모난은 앞이 보이지 않았지만, 무구원의 어깨에 올려둔 다리가 뜨거운 귓바퀴에 스칠 때마다 이 녀석이 얼마나 흥분했는지 알 수 있었다. 무구원은 뜨거운 석탄처럼 체온이 달궈지고 나면 자제력을 잃고 날뛰며 끝까지 몰아붙이곤 했다.
커다란 성기가 굴곡진 내벽의 끄트머리까지 빠져나갔다가 콱 처박힐 때마다 윤모난은 열에 녹아 흐드러지는 치즈 뭉텅이처럼 온몸이 흘러내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흐물흐물 녹아버려 이젠 박히는 느낌마저 흩어져갔다.
때맞춰 무구원이 얼굴을 가린 베개를 치우고 삽입한 그대로 윤모난의 몸을 뒤집었다. 팔을 뒤로 끌어당겨 상체를 세운 뒤 침대 헤드로 밀어붙이자 둔부를 가르고 성기가 더 깊게 파고들었다.
“아…! 읏, 무구원, 너무 흥분하지 마. 내가 만족할 때까지 참아.”
“저도, 아직입니다.”
서로 쾌락을 재화로 거래하는 느낌도 설핏 들었지만, 두 사람은 이 순간에 깊이 몰입한 상태였다. 무구원은 땀으로 미끈거리는 윤모난의 등에 이마를 대고 그르렁거리는 소리를 냈다. 베개에 오래 눌려 있었던 탓에 얼굴이 빨갛고 축축해진 윤모난의 입에서 흐느끼는 신음 소리가 튀어나왔다. 물기가 생겨 더 적나라해진 마찰음과 두 남자의 숨소리가 어지러이 뒤섞였다.
이윽고 무구원이 윤모난의 뒷덜미에 까슬한 눈썹을 비비면서 사정했다. 윤모난의 성기 역시 정액을 토해냈다. 깊숙이 이어져 있는 탓인지 보기 좋을 정도로 근육질인 엉덩이가 열에 말랑해져 무구원의 단단한 하체에 가감 없이 짓눌렸다.
여전히 사정의 여운에 잠긴 무구원은 새삼스럽게 약간 허리를 뒤로 물려 이음새를 가만히 내려다봤다. 보기 좋은 선홍색으로 달아오른 곳이 꾸물꾸물 정액을 뱉어내며 여전히 성기를 물고 있었다. 벅차오른 숨을 가다듬고 나서야 무구원의 감상 시간을 발견한 윤모난은 손을 뻗어 흉곽을 밀어냈다.
“뭘 보고 있어? 다 했으면 얼른 빼.”
“…….”
“미친… 이게, 왜 또. 야!”
뺄 틈도 없이 또 안에서 부피를 키운 무구원을 보며 윤모난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그가 다시 허리를 움직여 몸속을 푹 파고들자, 순간 꼬리뼈 부근이 찌릿하게 신호를 보내 저도 모르게 앓는 소리가 났다.
“나 일 있어. 오늘은 한 번만… 아, 윽. 씹새끼야….”
“하윽― 죄송합니다.”
“대답은 잘한다… 바로 그렇게… 쑤셔댈 거면서.”
딱히 체력이 달리는 것은 아니었으나 요즘 너무 많은 일이 몰아치는 터라 적절하게 안배할 필요가 있었다. 무구원은 한번 고삐가 풀리면 위아래고 뭐고 가릴 것 없이 집요하게 달려들기 때문에 이러다간 밤새 대줘야 할 판이었다. 윤모난은 무의식적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구원아.”
“하아… 네.”
“한 시간 줄게. 네 팀장 완전히 가게 만들어봐. 할 수 있어?”
무구원은 대답하지 않고 등 위로 지그시 몸을 내리깔았다. 뿌리까지 더 깊숙이 들어차는 성기의 부피감을 느끼며 윤모난이 피식 웃었다. 이쯤 되면 무구원이 자신의 본분은 잊어버린 게 분명했다. 이렇게 자신의 욕구를 충실하게 밀어붙이는 섹스 스파이가 어디 있단 말인가.
윤모난은 평소의 담백한 모습과 이렇게 튀어나오는 의외성 사이의 낙차에 철저하게 흥분하는 자신도 답이 없다고 생각하며 순순히 아래로 깔려 들어갔다.
“팀장, 님.”
“…으, 아윽.”
무구원은 아무래도 오늘 집요함의 끝을 달리려는 것 같았다. 아래를 흉포하게 점거하며 깊게 쑤시는 동시에, 그는 윤모난의 귓전에 제 입술을 가져다 붙이고 나른한 목소리로 하나만을 외었다.
“…팀장님.”
스무 번은 넘게 되뇌었을 그 호칭은 사정하는 순간에도 흐트러짐 하나 없이 점차 분명해지기만 할 뿐이었다. 결국 무구원은 한 시간 안에 제 팀장을 완전히 가도록 만들었다. 질척이는 섹스의 여운이 서서히 가시기 시작하자 윤모난은 점차 이성을 되찾았다.
“야, 야… 네 방 가서 자. 여기에 머리 뉘지 말고.”
힘이 빠진 손으로 자신을 등 뒤에서 끌어안고 있는 무구원을 툭툭 건드렸지만 반응이 없었다.
“야, 무구원… 여기서 자지 말라니까?”
“…….”
“이게… 그렇게 죽어라 팀장님만 외치더니 진짜 죽었냐고.”
섹스할 때를 제외하고 필요 이상의 접촉을 하지 않는 것은 둘 사이의 암묵적인 룰이었다. 후희를 길게 하지도 않았다. 짐승들처럼 사정하고 나면 더 할지 말지 결정한 뒤 후자인 경우 미련 없이 떨어졌다. 당연히 나란히 누워 잠을 자본 적도 없었다.
몇 개월 전, 남경에서 한방을 쓴 이후로 의식적으로 윤모난이 그런 상황을 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자신을 마치 연인처럼 끌어안고 얕은 숨을 몰아쉬며 잠든 무구원을 윤모난은 조금 착잡한 심정으로 바라봤다.
미지근해진 땀과 온갖 액체로 번들거리는 찝찝한 두 몸은 마치 외로운 조각들 같았다. 이렇게 맞닿아 있어도 아귀가 딱 맞물리지 않아 모서리에 찔리는 조각들. 이렇게 맞붙을 때마다 으레 단념했던 격통들이 생생하게 살아나는 걸 보니 무구원은 좆이 아니라 다른 걸로도 자신을 찌르는 게 분명하다고, 윤모난은 생각했다.
“…왜 안 하던 짓을 하고 그래.”
윤모난은 제 허리를 감싼 손가락을 하나씩 펴서 떨어트렸다. 요새 간간이 출정하느라 바빴던 탓인지 무구원은 잠깐 사이에 깊게 잠이 든 모양이었다. 윤모난은 족쇄 같은 그의 팔에서 빠져나오다가 축축해진 침대 아래로 퍽 떨어졌다. 그 소리가 제법 컸던 탓에 무구원이 깼나 싶어 확인하는 머리가 침대 아래서 통, 하고 튀어나왔다.
하지만 무구원은 여전히 곤하게 자고 있었다. 윤모난은 더러워진 침대 시트를 잡아 빼 바닥으로 던진 다음 깨끗한 시트로 무구원을 대충 둘둘 말았다. 그리고 누에고치가 된 무구원을 침대 위에 두고 잠깐 구경하던 그는 저도 모르게 팔을 뻗어 무구원의 머리카락을 슬쩍 건드렸다.
손에 걸리는 법도 없이 부드러운 생머리였다. 윤모난은 그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까만 머리칼을 한참 만지작거렸다. 그러기도 잠시, 윤모난은 이내 아래 던져둔 속옷을 집어 들었다. 대충 옷을 입은 다음 조용히 방을 나오니 새벽 2시였다.
큰일이 없다면 밤에는 늘 안범을 확인하러 갔으니 오늘도 빼먹을 수 없었다. 잠깐 다녀오면 되겠지 싶어 늦었지만 합숙소를 나서기로 했다.
모두가 자는 시각, 병동은 한산해서 오히려 병문안 가기에는 편했다. 괜히 귀찮게 따라붙는 시선도 없고. 아마 당직을 서는 에스퍼도 늘 그랬듯이 이 시간쯤이면 꾸벅꾸벅 졸고 있을 거였다.
“…….”
조용히 병동 현관에 들어서는 순간, 윤모난의 감각이 바짝 곤두섰다. 이상한 위화감과 함께 주변의 공기가 숨통을 짓누르는 것처럼 조여들었다. 일상에서는 느껴본 적 없는 긴장감에 윤모난은 본능적으로 병동 현관을 들어서면서 발걸음 소리를 줄였다.
“잠시만요.”
그런데 이제껏 통행을 막은 적 없던 경비가 이방인을 발견하고 허겁지겁 달려왔다.
“전투조 2부 7팀 안범 대원 면회 때문에 왔습니다.”
“오늘은 새벽 면회 금지입니다.”
“…왜요?”
“병동 감시 카메라가 고장이라 고치는 동안 환자 보호를 위해서 출입을 금하기로 했습니다.”
“알겠습니다.”
윤모난은 하는 수 없이 되돌아 나왔다. 병동 안팎은 풀벌레 우는 소리 외에는 아주 고요했다. 고개를 들어 위층 창문들을 쭉 훑어보니 군데군데 탁상 등이 켜져 있기는 해도 대부분 자는 시간이라 딱히 눈에 띄는 구석은 없었다.
느리게 층수를 가늠하던 그의 시선이 7층에서 멎었다.
“…돌아가지 뭐.”
윤모난은 느긋하게 담배에 불을 붙이며 바로 걸음을 돌렸다. 목적지는 병동 건물 뒤였다. 윤모난은 두 번의 도움닫기로 건물 2층 창문틀을 잡았다. 힘들이지 않고 턱으로 올라선 다음, 윤모난은 머금었던 담배 연기를 훅 뿜어내며 배수관을 타고 올라갔다. 잠시 후 7층 언저리에 도착한 그는 배수관 옆의 창문을 열어 비어 있는 병실로 들어섰다.
발자국 소리를 줄이고 문에 가까이 서니 지척에서 파동이 읽혔다. 7층에 누워 있는 환자들의 파동은 거의 꺼져가는 것처럼 약하므로 수상한 방문자를 찾기란 낱알 사이에 돌멩이를 골라내는 것만큼 어렵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익숙한 병동 근무 에스퍼와 환자들의 파동 말고 특별히 감지되는 것은 없었다.
윤모난은 다 탄 담배를 버린 뒤에 병실 문을 약간 열어 복도를 확인했다. 조용하다. 창백한 백열등이 비추고 있는 복도의 시퍼런 공기에 낯선 기운과 긴장감이 감돌았다.
자신을 제외한 다른 누군가가 이곳에 있을 수 있는 상황에서 별다른 에너지 파동이 느껴지지 않는 것은 좋은 징조가 아니었다. 상대가 가이드이거나 아니면 에스퍼 중에서도 파동을 숨기는 특수 훈련을 받았다는 뜻이니까. 후자일 경우 더 위험하다.
‘설마… 아버지인가.’
문득 머릿속에 가능한 후보가 몇몇 떠올랐다. 아버지인 윤화신의 화사들이 그런 훈련을 받지 않던가. 상황이 상황인 만큼 안범이 일어났을 경우 남경에 불리한 진술을 할까 봐 미리 손을 쓰려고 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증언자가 한 명인 것과 두 명인 것은 큰 차이니까.
윤모난은 어금니를 부서져라 사리물었다. 생각을 길게 할 여유는 없다.
미약하게나마 안범의 에너지가 느껴졌다. 윤모난의 시선이 빈 병실 안을 쭉 훑었다. 소지하고 있는 무기가 없는데 상대방이 총이라도 가지고 있으면 낭패였다. 근접전이 벌어질 경우를 생각해서 예리한 날붙이 같은 살상 무기가 있으면 좋겠지만 병실 안에 그런 것이 있을까.
윤모난은 병실 안 침대 옆에 아무렇게나 나뒹구는 링거 줄 하나를 발견했다. 폴리염화비닐 소재의 링거 줄은 꽤 질기므로 교살하는 데 그만이다. 줄을 분리하고 나니 플라스틱치고는 꽤 뾰족한 도입침이 눈에 띄었다. 윤모난은 만약의 상황에 대비해 그것을 주머니 속에 챙겼다.
“가볼까.”
윤모난의 목소리는 마치 무감정한 사냥꾼 같았다. 그는 복도를 지나 안범이 있는 병실로 향했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쉭쉭거리는 가습기 소리만 조용히 울렸다. 커튼이 쳐져 시야 확보가 안 된다는 것을 감안해도 불이 꺼진 병실 안은 칠흑처럼 캄캄했다.
침대 옆으로 다가간 윤모난은 안범의 얼굴 위로 손을 가져다 댔다. 여린 피부에 눌린 자국이 나 있었고 발에는 침대 아래로 떨어진 베개가 차였다.
“나와.”
확인을 마친 뒤에 어둠을 향해 조용한 경고를 내보냈다. 그 순간 옆 침대 커튼 뒤에 숨어 있던 누군가가 다급한 발소리를 내더니 창문 쪽으로 달려간다. 이윽고 어둠을 틈타 혼수상태인 환자를 죽이러 온 남자가 창밖으로 뛰어내리기 전에 윤모난이 그의 목을 링거 줄로 휘감았다.
“윽―!”
팽팽해진 줄에 목이 졸린 남자가 일순간 숨을 들이켰다. 상대는 무기를 가지고 있을 거란 우려대로 이미 소음기가 부착된 권총의 총구가 윤모난의 허리를 조준했다. 그 일발을 가볍게 피한 윤모난은 몸을 가까이 붙여 더 거세게 놈의 목을 졸랐다.
“어디서 보냈어?”
“…끄으윽!”
“이런, 죽기 전에 말할 기회는 줘야지.”
링거 줄을 조금 느슨하게 해주자 힉, 하고 숨을 들이쉰 남자는 처지는 기색도 없이 바로 허벅지에 꽂혀 있던 나이프를 꺼내 휘둘렀다. 낭비가 없고 깔끔한 동작이다. 이 정도면 살상에는 특화된 전문가였다.
윤모난은 매섭게 날아오는 칼을 휙휙 피하다가 상대의 정강이를 걷어찬 다음, 다리 높이로 내려온 머리통을 가격했다.
“말하기 싫어?”
“…….”
상대도 힘의 차이를 체감한 듯 절망적인 얼굴을 하더니, 윤모난의 등 뒤로 누워 있는 안범을 확인했다. 그의 시선을 윤모난도 놓치지 않았다.
“어… 아주 충성스러운 개였구나. 이 와중에 완수하지 못한 명령이나 걱정하고.”
“…….”
“그렇다면 더욱이 곱게 돌려보낼 수는 없겠네.”
윤모난은 긴 다리를 휘둘러 남자의 배를 걷어찼다. 공격을 막아내며 뒤로 주춤하던 남자의 몸뚱이가 창문틀까지 밀렸다. 손이 걷어차여 쥐고 있던 칼까지 떨어트리자 낭패감이 남자의 얼굴에 비친다. 몰릴 때까지 몰린 그가 창문 너머로 휙 몸을 던지자, 아래층 유리창이 와장창 깨지는 소리가 바로 이어졌다.
윤모난은 바로 창틀을 잡고 몸을 날려 반동으로 남자가 깨어놓은 6층 창문으로 진입했다. 이미 복도로 도망친 남자를 쫓으며 일각을 다투는 추격전이 이어졌다. 복도 끝에 있는 계단 아래로 두 남자의 발소리가 북소리처럼 쿵쾅댔다. 병동 건물 뒤쪽으로 향하는 비상구를 열고 도망친 남자는 건물 뒤에 있는 어둑한 밤의 산으로 허겁지겁 달려갔다.
피식자에게 어둠은 몸을 숨길 수 있는 최적의 조건이지만, 기민해진 맹수가 상대인 이상 그런 건 기대할 수 없다. 무성하게 우거진 풀을 헤치며 겁에 질린 초식동물처럼 도망치는 상대의 뒤를 윤모난이 천천히 밟았다. 차라리 죽이는 게 더 쉬운데 목적을 알아내기 위해 굳이 추격하기는 하지만….
‘충성스러운 개이니 어디서 보냈든 잡혀도 말은 안 하겠지….’
윤모난은 남자가 자신의 능력 범위를 벗어나기 직전에 에너지 파동을 분출하여 두 발에 족쇄를 채웠다. 멀리 가진 못했을 테니 풀에 남긴 체취를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 얼마 지나지 않아 풀숲에서 떨고 있는 남자를 발견했을 때 윤모난은 미리 챙겨둔 도입침을 꺼냈다.
“이 여름에 땀 빼게 하지 말고 그냥 말하지 그래.”
음산한 추격자의 경고에 남자의 두 눈에 절망과 함께 포기가 스쳤다. 식은땀을 흘리고 있는 놈의 멱살을 추켜올려 목덜미에 침 끝을 가져다 댄 윤모난은 한 치의 자비도 찾아볼 수 없는 서늘한 어조로 물었다.
“마지막이야.”
“…너한테 말하느니 차라리 죽음을 선택한다.”
“멍청한 놈은 아니라 이건가. 어차피 말해도 죽는 건 마찬가지니까.”
다음 순간 남자의 목에 뾰족한 침이 푹 파고들었다. 분수처럼 흩뿌려지는 피를 가벼이 피한 윤모난은 순식간에 목숨을 빼앗긴 시체를 물건처럼 휙 던졌다. 어차피 충실한 개라면 고문을 당한다 해도 차라리 죽음을 선택하지 주인의 이름은 털어놓지 않을 것이었다.
윤모난은 피를 뿜어대며 꿈틀거리는 시체를 두고 미련 없이 돌아섰다. 산비탈을 내려와 병동으로 다시 돌아가자 아까 자신을 막아 세웠던 경비가 흠칫 놀라며 일어섰다. 피한다고 피했지만 손과 얼굴에 피가 조금 튄 모양이었다.
“아직도 면회 금지입니까?”
“…….”
대답은 듣지도 않고 윤모난은 다시 병동의 7층으로 향했다. 병실로 들어와 벽에 달린 스위치를 켜자 어둠에 갇혀 있던 방 안이 금세 환해졌다. 그는 안범의 상태부터 확인했다.
“거봐, 이 펜던트 하고 있으면 살 수 있다니까.”
윤모난은 안범에게 걸어놓은 자신의 은제 펜던트를 툭툭 건드리며 말했다. 범인은 시끄러운 살인을 할 계획은 아니었는지 이 새벽에 몰래 기어들어와 그를 베개로 질식시켜 죽이려 했다. 부적의 힘이 작용한 건지는 모르지만 어찌 됐건 안범은 또 한 번 목숨을 건진 셈이었다.
하지만 오늘 같은 일이 또 벌어지지 않으리라고는 장담하지 못한다. 윤모난은 안범의 연한 갈색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은 다음, 그의 얼굴 옆에 치치를 바짝 붙여주었다.
“야. 치치, 너도 팀원이니까 네 친구는 지켰어야지.”
토끼 인형 치치의 너절하고 꼬질꼬질한 얼굴이 ‘좆 까. 윤모난, 그건 팀장인 네 책임이잖아!’라고 항변하는 듯했다. 보풀이 잔뜩 일어난 치치의 뾰족한 코를 꾹 눌러 비난을 차단한 뒤, 윤모난은 침대 아래 떨어져 있는 베개를 주워 들었다. 살인 도구가 될 뻔했던 물건이니 한번 확인해야 했다.
“음….”
윤모난은 베개에 얼굴을 푹 파묻고 냄새를 들이켰다. 포근한 안범의 체향이 아닌 코를 파고드는 낯선 향기에 감각을 집중했다. 특히 범인이 얼굴을 짓누를 때 가장 세게 눌렀을 한쪽 면에 한참 얼굴을 묻고 있던 윤모난의 몸이 약간 굳었다.
맡아본 적 있는 냄새가 비강 깊숙이 빨려 들어왔기 때문이다.
“…….”
청파액이었다. 알싸하면서도 쾌청한, 잊을 수 없는 냄새. 윤모난에겐 익숙한 향일 수밖에 없었다. 무정원의 흉한 손끝에서 맡았고, 똑같이 검은 무구원의 손끝에서도 늘 느꼈던 서늘한 그 향이니까.
천경교 원리주의자인 북해 신도들만이 청파액을 바른 바늘로 손을 찌르는 고리타분하고 피학적인 기도를 즐긴다. 먹에 담근 듯 까맣게 죽은 북해인들의 손끝에서는 항상 이런 알싸하고 서늘한 식물의 냄새가 난다.
청파, 바늘, 기도, 북해, 천경교…. 이 모든 단서가 귀결되는 인물은 하나였다.
‘정원 형이라고?’
하지만 왜? 여전히 상황은 의문투성이였지만, 윤모난은 우선 병실을 빠져나와 당직 중인 에스퍼를 찾아가 보안을 강화해달라고 요청했다. 그 또한 이번 일의 동조자일 수 있으니 약간의 협박을 첨가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당장 안범의 병실을 사람이 많은 아래층으로 옮기고 삼십 분마다 체크해달라는 요구도 덧붙였다.
병동 에스퍼가 그게 무슨 말이냐고 따지며 왈왈 짖어댔지만, 불행하게도 윤모난에겐 여유가 없었다. 에스퍼는 순식간에 자신의 머리 바로 옆 벽에 살벌하게 꽂힌 주먹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더 길게 말할 필요도 없었다.
“내 팀원 털끝 하나 다치면 가만 안 둬.”
“…알겠습니다.”
뒤처리까지 마친 윤모난은 합숙소로 향했다. 생각에 잠긴 채로 무구원이 누에고치가 되어 잠들어 있을 방으로 향하려던 그는 방문 앞에서 잠깐 걸음을 멈췄다. 안에서 무슨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네, 알겠습니다.”
나지막이 흐르는 중저음. 무구원 특유의 목소리는 쉽게 구별할 수 있었다. 그는 누군가와 통화 중인 듯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
주로 상대 쪽에서 말을 하는지 무구원은 대답하는 것 외에는 길게 말하지 않았다. 윤모난이 밖에서 듣고 있다는 건 모르는 듯했다. 마지막에는 한참 침묵이 이어지다가 무구원이 무겁게 대답했다.
“무슨 말인지 이해합니다. 제가 조심해야 한다는 것도 압니다, 형님.”
윤모난은 걸음을 뒤로 물렸다. 또 무정원이었다. 이 새벽에 무구원은 무정원과 통화하고 있었다. 윤모난은 베개 섬유에 배어 있던 청파액의 알싸한 향을 곱씹으며 통화가 끝날 때까지 밖에서 기다렸다.
안에서 좀 더 말소리가 이어지다가 이내 고요한 침묵이 찾아온 것을 보니 통화는 끝난 듯했다. 윤모난은 방으로 들어가지 않고 거실 창 근처에 서서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물었다. 그러나 불을 붙이지는 않았다. 담배가 피우고 싶어 목구멍에서 갈증이 확 끓는데도 꾹 참았다.
“…결국 이런 거였나.”
지금껏 윤모난은 무간에서 일어난 참사를 북해나 무정원과 연관 지어 생각해본 적 없었다. 그러다 오늘 갑자기 이 모든 일에 다른 내막이 있을 가능성과 맞닥뜨린 것이다. 지금껏 둔하기만 했던 윤모난의 이성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무간 사건이 그저 ‘불의의 사고’일 뿐이라면, 오늘 같은 일은 벌어질 수 없었다. 사고라고 해도 이를 이용하려는 누군가가 개입했을 확률이 높다.
애초에 서곡센터 안에서 안범을 죽이려 한 시도 자체가 대담한 행동이었다. 들켜도 상관없고, 들키게 되어도 또 다른 계획이 있다는 오만함이 느껴졌다. 그리고 아마 그 정도의 계획을 세우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개입마저 바둑판의 한 수로 읽고 있을 것이다.
두 손에 말라붙은 검붉은 피 부스러기들을 툭툭 무감정하게 털어내면서 윤모난은 생각을 이어갔다.
그를 두려워하고 경계해야 할까? 하지만 무엇을 위해서? 아버지처럼 모두를 의심하고 몰아세우는 건 지키고 싶고 가지고 싶은 것이 많은 사람이나 하는 것이다. 반면에 자신은 제 목숨마저 온전히 제 것이라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런 점에서 윤모난은 누군가의 생각대로 파멸을 끌어들이는 자석에 가까웠다.
“참, 이 짓도 지치네….”
이토록 파멸이 바짝 쫓아오는데 무기력증이 극치를 달했다. 오히려 무슨 일이 벌어질 거라면 차라리 빨리 벌어졌으면 할 정도로. 윤모난은 지독한 우울증 환자였다. 이대로 파멸에 가장 먼저 잡아먹힌다고 해도 놀랄 일이 아니었다.
“다들 지치지도 않나.”
솔직히 말하자면 윤모난은 무구원이 무슨 내용으로 통화를 했든 상관없었다. 그가 자신이 아니라 나라를 팔아먹었다고 한들 무슨 대수겠냐 싶다. 이렇게 무딘 믿음으로라도 위안 삼지 않으면 당장 기력이 쭉 빠져버릴 것 같았다.
잠시 후, 패잔병처럼 처져 있던 윤모난의 등 뒤에서 끼익하고 방문이 밀리는 소리가 났다.
“어디 다녀오셨습니까?”
무구원이 방문을 열고 나타났다. 멍하니 그를 돌아본 윤모난은 바로 담배에 불부터 붙였다. 그리고 나란히 옆에 와 서는 무구원에게 대답했다.
“안범 면회. 오늘 낮에 못 가서.”
“저도 경해국과 함께 낮에 갔었는데 상태에 변화가 없더군요.”
“조금 시간이 걸릴 거라는 얘긴 들었잖아.”
“안범 가족에게 매일 연락하신다면서요.”
“응, 동생들 착하더라. 걱정 많이 하던데 가족 면회가 안 된다니까 소식이라도 꼬박꼬박 전해야지.”
후, 하고 한숨과 함께 담배 연기를 뿜어낸 윤모난이 지나가는 말처럼 가벼이 물었다.
“전화하는 것 같던데.”
“네, 형님께 전화가 와서요.”
“이 새벽에?”
딱히 의도가 섞인 질문은 아니었다. 대답을 기대했던 것도 아니었다. 무구원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해주기 전까진 그랬다.
“아버지께서 위독하셔서 아침 일찍 북해로 오라는 연락이었습니다.”
“많이 위독하시대?”
“아마도 돌아가시겠죠.”
아버지의 죽음을 말하는 것치고는 지독히도 건조하고 무감한 말투였다. 그러나 윤모난은 어쩐지 고장 난 로봇 같은 무구원의 반응에서 옅은 슬픔의 흔적을 맡았다. 의심이 사라진 자리에 아무래도 다른 것들이 끼어드는 모양이었다.
“놀랐겠네. 그래, 다녀와. 여긴 걱정하지 말고.”
“…오래 편찮으셨으니 딱히 놀란 건 아닙니다. 근 1년간은 거의 의식을 놓으시기도 했구요. 그렇게 오래 편찮으셨던 분께는 오히려 어머니 신의 텃밭으로 가는 것이 축복이겠지요.”
“하지만 가족과 이별하는 건 종교와 상관없이 슬픈 일이잖아.”
사실 자신의 감정보다 종교적 믿음을 우선으로 삼는 무구원에게 그 말은 크게 와닿지 않았다. 윤모난과 무구원, 이 둘은 서로 죽음을 받아들이는 방식이 근본적으로 달랐다. 처음 기차에서 만났을 때 나눈 대화부터 그랬다. 무구원은 윤모난의 지리멸렬하며 긴 애도 과정을 한 번도 가벼이 생각해본 적 없었지만 그렇다고 공감한 적도 없었다.
어쩌면 자신도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그의 심정을 조금이라도 이해해볼 수 있지 않을까 했었다. 하지만 소식을 직접 전달받은 뒤에도 조금 무거운 마음밖에 들지 않는 것을 보니 어쩌면 그런 슬픔은 영원히 이해 불가능한 영역인가 보다, 라고 무구원은 생각할 뿐이었다.
“…별로 슬프지 않다면 제가 이상한 걸까요?”
그 물음에 윤모난이 고개를 돌려 무구원과 시선을 맞췄다. 그는 왜 자신에겐 느껴지는 이 옅은 슬픔의 향기를 당사자는 모를까 싶었다.
“슬픔을 억누르기만 하는 건 확실히 이상하지.”
“하지만 어머니 신께서는….”
“개소리하지 말고 이리 와봐, 자식아.”
무구원이 왜 이 모양 이 꼴이 되었는지 그 이유를 알아차린 건 어쩌면 자신이 처음인 듯했다. 윤모난은 무감각한 로봇같이 서 있는 무구원의 머리를 제 어깨에 기대게 하고 투박한 손길로 툭툭 등을 두드렸다.
“너 혹시 슬퍼하는 방법을 몰라서 그러냐?”
무구원은 묵묵부답이었다. 침묵은 되레 긍정처럼 느껴졌다.
“무구원 너, 어렸을 때부터 아무한테도 어리광 부려본 적 없지?”
“…….”
“아이들은 걸핏하면 울고 슬퍼하잖아. 먹던 과자만 빼앗겨도 세상 잃은 것처럼 울지. 그게 다 어리광 같아도 인생살이 훈련 과정이야. 그러니까―”
윤모난은 자신의 지론을 이어갔다.
“이렇게 토닥여지면 저 안에서 몰랐던 슬픔이 새어 나오거든? 어렸을 때 어른들이 해줬어야 하는 건데 넌 그 단계를 다 뛰어넘었다니까, 내가 등 두드려줄게.”
“…뭐 하시는 겁니까?”
“지랄하지 말고. 토닥토닥. 이 듬직한 팀장님의 어깨에서 울어봐.”
무구원은 결코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울고 싶지는 않았다. 오히려 예전에 이런 식으로 윤모난이 자신을 울리려고 했던 일만 떠오를 뿐. 이 남자가 그 모순을 깨닫고 있는지나 모를 일이다. 무구원은 그 뻔뻔함을 애써 밀어냈다.
“팀장님 걱정이나 하시죠. 등을 두들겨 맞아야 하는 건 팀장님 아닙니까.”
“두들겨 맞다니. 토닥토닥이라니까? 그리고 내 걱정 할 게 뭐가 있어?”
앞으로 닥칠 고난들을 의미한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윤모난은 모른 척만 했다. 무구원이 이대로 아버지 장례식에 가면, 서곡에는 꽤 시간이 지난 뒤에야 돌아올 수 있었다. 이 새벽이 가기 전에 대화다운 대화를 해야 하지만 윤모난은 끝내 고개를 저었다. 하지 말라며.
“지금 네가 나 걱정할 때냐?”
“…제발 약 꼬박꼬박 드시고 식사도 거르지 마십시오. 옷은 색을 분리해서 세탁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세제 너무 들이붓는 건 안 좋습니다.”
“이러니까 무슨 장기 외박 하는 마누라 같네. 소름 끼친다. 가라.”
윤모난이 그렇게 밀어내는 통에 끝내 두 사람은 긴말 대신 짧고 단순한 작별 인사만을 나눠야 했다. 두 사람에겐 그것이 최선이었다. 간단한 집을 챙겨 합숙소를 나서는 무구원을 윤모난이 배웅해주었다.
“무구원.”
“네.”
“조심히 다녀와.”
“네, 팀장님.”
하지만 이게 정말로 최선이었을까. 무구원은 확신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