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옷장 속의 괴물
파멸은 사냥감을 쫓는 데 시간을 길게 두지 않았다. 그것이 당도했을 때, 윤모난은 직감했다. 무구원이 아버지의 임종을 지키러 북해로 간 지 딱 일주일 만에.
예정되어 있는 마지막 조사를 받으러 가던 윤모난은 관리동에 들어서자마자 치안조 에스퍼들과 맞닥뜨렸고, 조용히 동행할 것을 요구받았다. 뭐라 대응하기도 전에 수갑이 채워졌고, 순식간에 원래의 목적지인 위층 조사실이 아닌 지하로 끌려가게 된 것이다.
“무슨 일인지 설명 좀 해주시죠?”
윤모난은 자신의 목에 채워지는 장치를 확인하고서는 느슨한 말투로 물었다. 이건 포스트들을 구금할 때 쓰는 특수 기계로, 착용한 채 능력을 쓰면 고압 전류가 흘러나와 바로 즉사할 수도 있었다. 범죄의 유력 용의자나 실형을 선고받은 경우가 아니라면 이런 치욕스러운 것을 착용해야 할 이유가 없다.
그러니 슬슬 윤모난도 자신의 운명을 예감하게 된 것이다. 감찰부가 아닌 치안조에 의한 체포, 그리고 그들이 고문실로 쓰는 이 지하실.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사지 성한 채 다시 1층으로 돌아가기는 어려울 터였다.
곧이어 궁금증은 쉽게 풀렸다. 자신의 앞으로 던져진 사진을 본 윤모난의 입에서 깨달음과 함께 웃음이 터졌다. 제게 씌운 혐의는 살인이구나.
“설마 내가 이 사람을 죽였다는 겁니까?”
사진 속 끔찍한 사체는 윤모난이 저지른 살인이 아니었다. 무정원의 끄나풀일 확률이 높은 북해에서 온 놈을 죽이긴 했지만, 사진 속 얼굴은 영 생소했다.
하지만 사체의 목덜미에 박혀 있는 링거 줄의 도입침을 보고선 윤모난은 그제야 자신이 걸려든 덫의 윤곽을 그릴 수 있었다. 이거였나, 벌어질 일이. 치안조 에스퍼들이 이윽고 심문을 시작했다.
“윤모난, 무간 사건의 유일한 생존자인 한백형 대원을 살인한 것을 시인하나?”
“…내가 죽인 건 다른 사람인데 착오가 있네요.”
감탄할 수밖에 없는 완벽한 덫이다. 설마하니 자신이 얼마 전에 죽인 놈이 무간 사건의 생존자로 둔갑할지는 꿈에도 몰랐다. 이것 하나로 무간 사건과 생존자 살인을 모두 시인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절묘한 수였다.
그날, 그 남자는 북해의 몰이꾼이 확실했다. 어둠으로 인해 착각이라도 했다면 모르겠지만, 귀신같이 파동을 읽는 가이드가 그런 착각을 할 리 없었다. 누군가가 윤모난의 살해 방식을 그대로 재현하여 원래 시체가 있던 곳에 한백형을 데려다 놓았다면 설명이 된다. 이 가여운 생존자는 결국 윤모난의 손에 죽어버린 게 된 것이다.
어쩌면 안범의 살인 미수부터가 교묘한 술책이었을 수도 있다. 윤모난은 덫을 설계한 사람에게 박수라도 쳐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수갑을 찬 탓에 할 수 없었지만.
“살인 도구로 쓰인 흉기에서 당신 지문이 나왔어. 사망 추정 시각인 그날 새벽에 당신을 봤다는 목격자도 있었고. 그날 병동에는 왜 갔지?”
“제 팀원이 의식을 잃고 누워 있어 항상 하던 대로 면회를 갔을 뿐입니다.”
“한백형 대원이 병동에 있다는 사실은 어떻게 알았나?”
전혀 몰랐던 사실이다. 윤모난은 그 생존자에 대한 일말의 관심도 없었으니까. 얼굴도 모르는 생판 남이 그날 병동에 있는지 없는지를 무슨 수로 알았겠는가. 그러나 이런 사소한 걸 하나하나 따질 여유는 없었다. 그저 윤모난은 담담하게 다음 순서를 물었다.
“앞으로 예정된 일이나 읊어봐요. 내 입에서 끌어낼 말이 한두 개가 아닐 텐데. 미리 뭐가 있는지 좀 들어보고 나도 생각이란 걸 좀 해보게.”
“…이 새끼가!”
퍽―! 매서운 타격과 함께 휙, 하고 고개가 꺾인다. 치안조가 자백을 끌어내는 방식은 뻔했다. 사람을 한계로 몰아세우는 폭력과 고문. 이제 시작이었다. 윤모난은 뻣뻣한 턱을 위아래로 늘이면서 자신을 때린 남자를 향해 훈계했다.
“애들도 아니고. 좀 간지럽히는 걸로 원하는 말을 끌어낼 수 있을 것 같아? 경험이 별로 없나 보지.”
“얼른 묻는 말에 대답이나 해! 한백형 왜 죽였어?”
얼굴 위로 주먹이 사정없이 내다 꽂혔다. 그래도 여전히 대답이 없자 의자에 앉힌 채로 거센 발길질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치안조 대원은 언젠가부터 의미 없는 질문조차 하지 않았다. 군홧발에 밀려 바닥으로 쓰러진 윤모난 역시 콱콱 밟히면서도 신음 한 번 내지 않았다.
한 시간 정도 혀를 내두를 만큼 지독한 폭력이 자행된 끝에 먼저 나가떨어진 것은 치안조 쪽이었다. 겉옷을 벗고 셔츠 소매를 걷어 올리면서까지 발과 손을 놀리던 심문자가 헉헉 숨을 몰아쉬며 뒤로 물러선다. 질린다는 표정이었다.
“하…. 독한 새끼.”
앞으로 받을 고문을 예상하면 지금이 가장 견딜 만한 정도이겠지. 윤모난은 입에 한가득 고인 피를 툭, 하고 바닥에 뱉었다. 피로 척척해진 얼굴 위로 사진 뭉텅이가 팍 던져졌다.
“트랜스가 된 네 형이 일으킨 학살을 덮으려고 죽였나?”
“…….”
“왜 죽였어? 말해!”
“아, 결국 그것부터… 시작이구만.”
다음은 뭘까. 네, 제가 죽였습니다. 그다음은 아버지인 윤화신이 시켰다인가? 위기를 맞은 남경 전체가 이 일을 도모했고, 이참에 나라를 뒤집을 내란이라도 꾸미고 있었다는 각본이겠지. 남경의 허울뿐인 후계자인 윤모난이 모든 걸 꾸몄다고.
“하하하….”
한바탕 희극이었다. 정말로. 배 속 깊은 곳에서부터 웃음이 올라와 멈출 수가 없었다. 인간들이란 제 밥그릇 지키기에 혈안이 되어 있구나. 윤모난이 몸을 굴려가며 웃기 시작하자 심문을 담당한 치안조 에스퍼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 독종 새끼. 바로 인정할 거라고는 기대도 안 했다.”
“…하하하하!”
광기 어린 웃음소리가 음습하고 어두운 고문실 안을 찌를 듯이 울려댔다. 그러자 지친 기색이 완연했던 치안조 에스퍼가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물며 옆에 서 있던 팀원에게 명령했다.
“…모셔 와. 안 되겠다.”
“네.”
팀원이 명령을 받고 나간 사이에, 치안조 에스퍼는 담뱃재를 윤모난의 앞에 툭툭 털어내며 걱정하는 투로 회유하기 시작했다.
“어이, 윤모난, 그냥 지금 말하지 그래. 너도 알잖아. 지금은 그냥 애들 장난 수준이란 거….”
“…….”
“아무리 네가 대단하다고 해도 치안조 고문을 받고 나서 무사히 살아나갈 수 있을 거 같아?”
이미 물은 엎어진 지 오래인데 견디는 것 말고 할 수 있는 게 있나. 윤모난은 대답했다.
“그건 두고 봐야 아는 거고.”
“쯧!”
멍청하다며 혀를 차는 소리를 신호로 고문실의 문이 열리고 누군가 안으로 들어왔다. 저벅저벅 워커 발이 차갑게 시멘트 바닥을 울리며 점차 가까워진다. 이윽고 멈춘 발끝이 툭, 하고 윤모난을 뺨을 들어 올렸다. 익숙한 허스키한 목소리가 음침하게 윤모난을 불렀다.
“핑키, 오랜만이다?”
두둑, 목 근육을 비트는 남자의 목덜미에 새겨진 장미에 바짝 가시가 서 있었다. 윤모난은 한백호에게 대답 대신 쉰 웃음을 지어 보이며 응답했다.
“형.”
응? 하고 여상하게 대답하며 한백호는 윤모난의 피에 절은 셔츠부터 벗기기 시작했다. 단추들이 사방으로 튕겨 나가며 구석으로 굴러갔다.
“핑키야, 잘생긴 얼굴 이게 뭐야. 형 속상하게.”
독살스러운 말이었다. 한백호는 소매를 걷은 다음, 단단하고 두꺼운 팔을 휘둘러 순식간에 분홍색 머리채를 잡고 거칠게 잡아당겼다. 두피에 홧홧한 고통을 느끼며 질질 끌려간 곳에는 욕조가 하나 있었다. 지금까지 실컷 팼으니…. 본격적인 고문이 시작되려는 모양이었다.
퍼뜩 튀어 오르는 등을 자비 없이 차가운 손이 꾹 누르며 머리를 얼음물에 처넣었다. 저항하듯 물장구치는 소리가 요란했다. 조적식 욕조에 처박힌 분홍 머리가 한백호의 손길에 마구 흔들린다. 찬물이 팔꿈치를 다 적실 때까지 윤모난의 머리를 바닥까지 처박은 한백호가 즐거운 듯이 달랬다.
“자, 숨 쉬어. 숨 쉬자.”
“프흡! 커억…!”
욕조 턱에 목이 꽉 눌렸던 탓에 고개가 추켜올려지자마자 거친 숨이 튀어 나갔다. 한백호는 입에 삐뚜름하게 담배를 물고 얼음물 때문에 발갛게 달아오른 윤모난의 얼굴을 확인했다. 그리고 다시 안으로 처박는다.
“핑키야! 형님 손 시리다. 얼른얼른 협조 좀 하자.”
벌써 몇 시간 이상 이어진 물고문이었다. 여기 잡혀 온 지 대충 하루 정도는 지난 듯했다. 덩달아 잠도 자지 않고 긴 시간 혹독한 고문을 가한 한백호는 전혀 지치지도 않는 기색이었다. 고문을 견디는 윤모난을 보며 도리어 점점 희열에 차는지 강도를 미세하게 조절하며 차츰 올려갔다.
얼굴을 얼음물에다 푹 집어넣고 체온이 떨어지면 열이 오를 때까지 가죽 몽둥이로 패는 과정이 반복됐다. 그 짓을 다섯 번 넘게 계속하던 참이었다. 옆에서는 한백호의 팀원들이 얼음을 계속 욕조 안에 들이붓고 있었다. 피가 섞인 물은 윤모난의 머리처럼 핑크빛이 감돌았다.
“응? 우리 애들 쉬지도 못하고 이게 뭐야?”
“끄흑….”
다시 얼굴이 위로 들어 올려졌다. 이 잔혹한 고문을 당하면서도 정신을 잃지 않는 윤모난의 얼굴을 보며 한백호는 재미있어 미치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윽고 윤모난은 욕조 앞에 내동댕이쳐졌다. 한백호는 윤모난의 상체 위로 올라가 무릎을 굽혔다.
“야. 핑키.”
“…….”
“견딜 만하냐?”
“뭐… 쉬는, 시간이에요? 쉬는 시간도 있고, 아직까지는요.”
“씨, 이 새끼 웃겨 죽겠네. 야, 이거 바지 벗겨.”
한백호의 명령이 떨어지자 다른 팀원들이 즉시 달려들어 피로 붉게 물든 바지를 벗겨냈다. 상체만큼이나 하얗게 질리다 못해 푸르게 변한 하반신이 온갖 상처들과 함께 드러났다.
윤모난은 사냥당한 짐승처럼 발가벗겨진 채로 차가운 시멘트 바닥 위에서 숨만 겨우 내쉬었다. 이럴 때라도 숨을 돌려야 다음을 견딜 만했다. 그런데 욕조로 다시 머리를 집어넣는 대신 무언가 차가운 것이 부어오른 뺨 위로 닿았다. 한백호가 톱날이 박혀 있는 주머니칼을 꺼내 옆면으로 윤모난의 얼굴을 툭툭 친 것이다.
“이렇게 설렁설렁 했다간 시간 많이 걸리겠다, 그치?”
“형이 사람 패면서 질질 싸는 사디스트라는 건 아는데…. 어쩌죠…. 내가 별로 이쪽으로는 형을 즐겁게 못해줘서.”
“내가 싸는 걸 걱정할 게 아니라 네 안위를 걱정해야지, 핑키야. 형이 너무 답답하잖아.”
윤모난의 얼굴 주변에서 느린 춤을 추던 칼날은 쭉 내려가 명치 부근에 닿았다. 한백호는 윤모난의 복근 위쪽에서 사납게 눈을 치켜뜨고 있는 검은 독사를 보면서 얼굴을 쓰게 구겼다. 그와는 개인적인 악연이 있는 뱀이었다.
“요거. 항상 거슬렸거든? 형이 도려내줄게.”
섬뜩한 예고와 함께 칼날이 순식간에 문신이 있는 곳을 파고들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뱀의 머리가 있는 피부를 중점적으로 노렸다. 거칠게 찢어진 피부는 순식간에 문신과 함께 훼손됐다.
윤모난의 두 다리는 처음 칼날이 파고들 때 조금 버둥거렸다가 이내 생살을 찢고 헤집는 끔찍한 고통에도 미세하게 경련할 뿐 크게 움직이지 않았다. 한백호는 칼로 문신을 다 헤집어놓은 뒤, 피와 살점이 지저분하게 엉킨 칼날을 보며 물었다.
“우리 집안 애 죽인 거… 그거 누가 시킨 거야? 요 뱀 우두머리이지?”
“…….”
“남의 집 애를 건드렸을 때는 이 정도 각오는 했어야지.”
칼로 난자당한 곳부터 허리를 타고 뜨거운 피가 흘러내리며 차가운 피부를 데웠다. 윤모난은 형들과 나란히 새겼던 문신이 감히 훼손될 거라 상상해본 적 없었다. 윤모난은 이를 꽉 물었다.
“누가 시켰는지 떠올리게 시간 좀 줄까?”
“…….”
“자, 그럼 쉬는 시간!”
명랑하게 외치는 소리와 함께 한백호가 칼을 가죽 칼집에 도로 넣고 일어났다. 그리고 바닥에 발가벗겨진 채로 초주검이 되어 있는 윤모난을 두고 밖으로 나갔다. 시간이 정확히 얼마나 흘렀는지 모를 정도로 이어지는 고문에 다른 생각을 할 여유는 없었다. 하지만 윤모난은 한 가지 다짐만은 분명히 했다.
이곳에서 나간다면 언젠가 한백호의 모가지를 잘라버리겠다고. 문신의 머리를 난도질한 그의 상징적인 행위를 실재 그 자체로 돌려주리라. 윤모난은 고문 내내 바짝 쥐고 있던 정신의 고삐를 스르르 놓아주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육체적인 고통은 그다지 두렵지 않다. 하지만 한백호는 이렇게 피 맛을 보는 것에만 그치지 않을 거였기에 윤모난에게도 충전이 필요했다.
다시 일어났을 때는 여전히 찬 바닥에 누운 그대로였다. 마침 문 너머로 쿵쿵거리는 발소리가 가까워지더니 빤질빤질한 얼굴의 한백호가 등장했다. 그가 방을 가로질러 다가와 축 늘어진 윤모난을 일으키며 뺨을 짝짝 갈겼다.
“후배가 돼서는 형이 오는 데 버릇없이 누워 있고.”
“…….”
“자, 한백형은 왜 죽였어? 누가 시켰어? 너네 집?”
“…좆 까요, 형.”
“그렇지! 이렇게 말을 안 들어야 우리 핑키지.”
대답하지 않았는데 저렇게 만족하며 웃는 건, 그가 이 지독한 고문 그 자체를 순수하게 즐기고 있기 때문일 거다. 그런 점에서 지금의 윤모난은 못된 아이의 손에 들린 서글픈 장난감 신세나 다름없었다. 머리가 잘리고 팔이 뽑혀도 되는 사물 그 자체였다.
한백호는 잔뜩 뒤엉킨 머리채를 끌고 윤모난을 벽에 밀어붙여 세웠다. 그러곤 팀원이 건네주는 쇠 파이프를 들고 무릎 있는 곳에 바짝 붙이며 준비 자세를 잡았다.
“저번에는 다리 부러져도 잘 참더라?”
“…이게 복수예요? 고문이에요?”
“대국적인 의미에서는 고문이고, 개인적으로는 복수지. 이 꽉 물어, 새끼야.”
쇠 파이프가 한쪽 다리를 갈기자마자, 우두둑하고 뼈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다리뼈는 신체 중에서도 가장 강하고 밀도 높은 뼈이다. 이곳이 힘을 잃으면 온몸의 중심이 무너진다. 윤모난이 앞으로 쓰러지려 하자, 옆에 있던 팀원들이 다가와 양팔을 붙잡았다. 한백호는 부러 손으로 입가를 가리며 감탄하는 척했다.
“독한 놈. 신음도 안 내네.”
“…….”
“그럼 다리 하나 더?”
대답을 듣지도 않고 한백호는 파이프를 휘둘러 나머지 다리도 두 동강 냈다. 중심을 아예 잃어버린 몸이 옆에서 붙드는데도 아래로 처졌다. 의지와는 상관없이 엄청난 고통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자, 욕조 앞으로 다시 기어가.”
“아흐…. 윽.”
다리가 부러져 설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윤모난은 그것조차 잊은 채로 무릎을 세우려 했다가 앞으로 고꾸라졌다. 퍽―! 바닥에 머리를 부딪치고 나서야 그의 시야가 캄캄해졌다. 정신을 잃은 것이다.
윤모난의 의식을 되돌리려 뺨을 사정없이 갈겼는데도 반응이 없자, 한백호는 제 팀원들에게 이만 놓아주라고 했다. 아래로 처박혀 쓰러진 윤모난은 갓 도축한 고기처럼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위에서 죽이는 건 안 된다고 했으니까…. 일단은 놔뒀다가 다시 시작하자.”
“네.”
한백호는 피 묻은 쇠 파이프를 도로 넘겨주면서 방을 나섰다. 복도를 나오는 길에 마침 손목에 찬 호출기에서 신호가 왔다.
“네, 한백호입니다.”
―진전은 있나?
“장례 준비로 바쁘실 텐데, 뭐 여기까지 신경 쓰시고. 여긴 제가 알아서 할 테니까 걱정 마시죠.”
―죽이면 안 돼.
“예…. 뭐.”
―너무 망가뜨려도 안 되고, 적당히 기운만 빼놔야 한다.
“알아서 합니다. 지금은 시작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요. 적당히 두드려준 정도….”
한백호에게 통화를 건 상대, 북해에서 장례 준비 중인 무정원은 수화기 너머에서 잠깐 침묵하더니 이윽고 말을 이었다.
―너무 흥분하지 말고 정도는 지켜. 고문할 방법은 많을 텐데.
“일일이 간섭이 너무 심하시네요? 제가 당신 따까리는 아니잖습니까?”
―내가 거래한 건 네가 아니라 너희 집안이야. 위아래는 구분해.
그건 사실이었다. 한백호는 고섬 한씨 안에서는 그저 휘두르는 칼날일 뿐이었고, 칼을 휘두르는 주체는 따로 있었다. 가주인 아버지의 명령을 받아 행동하는 그가 무정원의 명령을 거역하긴 어려웠다. 또한 이제 북해는 무정원의 차지가 아니던가.
한백호는 결국 빈정거림인지 복종인지 모를 대답을 뱉었다. 간단한 용건이 목적인 통화가 끊기자마자, 그는 허공에 대고 쌍욕을 퍼부었다. 그리고 바로 옆에 있는 제 팀원에게 명령했다.
“야, 시발…. 일단 핑키 다리 부러진 거 치료해줘라. 앞으로 일주일은 굶기면서 몇 시간 간격으로 적당히만 패고.”
“네.”
“그, 핑키네 팀원 그 누구지. 경씨 그놈이 아직도 귀찮게 굴고 있어?”
“네, 관리동에 찾아와서 계속 묻는 모양인데…. 일단은 윤모난이 여기 있는 건 모를 겁니다.”
“그래. 경씨는 산적들이 해결하겠지.”
그 이후 일주일의 시간이 더 흘렀다. 윤모난은 다리를 치료받았으나 고문실에서 나가지는 못했다. 자백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밥을 굶기면서 적당히 몇 시간 간격으로 패는’ 방법으로는 그에게서 거짓 자백을 끌어낼 수 없었다.
담당 치안조 에스퍼들이 진행 상황을 난처한 얼굴로 보고하자 한백호는 바짝 흥분한 얼굴로 일주일 만에 고문실로 향했다. 고문에는 천부적인 재능이 있는 그가 드디어 좋은 방법을 찾았기 때문이다.
곰팡냄새와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음습한 지하 복도를 지나 한백호는 윤모난이 갇혀 있는 그 건너편 방으로 향했다. 방 한 면을 가득 채운 매직미러 너머에는 일주일 만에 얼굴이 많이 상한 윤모난이 의자에 억지로 앉아 있었다.
“자, 시작하자.”
통신기로 윤모난과 함께 있는 팀원에게로 지시가 전달되자, 누군가 윤모난의 굳게 닫힌 입술을 비집고 웬 약을 집어넣었다. 억지로 물을 부어 삼키게 한 다음, 같은 방식으로 약을 두 알 더 먹였다. 저항도 못하고 목구멍으로 약을 넘긴 윤모난은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자신만을 비추고 있는 거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너머에서는 여전히 기세가 꺾이지 않은 그를 한백호가 흥미롭게 지켜볼 뿐이었다. 곧이어 오늘의 고문이 시작됐다. 한백호가 특별하게 맞춤으로 준비한 시간이었다.
“그 환영 능력자 에스퍼 들여보내.”
“네.”
“미리 영상 보여줬지?”
“네, 디테일까지 재현할 수 있도록 반복해서 시청하게 했습니다.”
한백호의 입가가 만족스럽게 찢어졌다. 윤모난이 있는 방 안으로 환영 능력자 에스퍼가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이제는 사람이 들락날락하는 것에 일일이 반응하지도 않게 된 윤모난은 멍하니 거울만 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그런 상태를 유지하는 것도 잠깐이었다. 갑자기 끔찍한 비명 소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게 지독히 맞아도 앓는 소리나 조금 흘리던 독종의 입에서 생전 들어본 적 없는 소리가 비집고 나왔다. 솜털이 올올이 일어설 만큼 고통에 찬 비명을 음악 감상이라도 하듯 청취하던 한백호가 희열에 차 외쳤다.
“빙고!”
그 반응에 옆에 있던 팀원 한 명의 낯이 굳었다. 한백호의 반응도 끔찍하지만, 찢어질 듯한 남자의 비명이 상상 이상으로 끔찍해 제정신으로 도저히 견딜 수 없었다. 한백호의 팀원은 식은땀을 줄줄 흘려대다가 주머니에서 윤모난이 삼킨 것과 똑같은 알약을 꺼내 입에 욱여넣었다.
고문실 안, 윤모난은 온몸에 창이 수백 개가 관통한 사람처럼 소리치고 있었다. 그의 눈앞에 구현된 환영은 바로 트랜스가 된 그의 형이었다. 괴물이 된 윤약이 윤모난에게 검은 그림자를 드리웠다. 윤모난에게서는 마치 커다란 짐승이 내는 것 같은 소리에 섞여 드문드문 ‘형…’ 하는 발음이 뭉개져 들려왔다.
윤모난을 위해 그가 그토록 두려워하는 괴물을 환영으로 만들어낸 에스퍼 본인마저도 견디기 어려웠는지 손을 떨었다. 발작하는 윤모난의 모습이 그다지도 처참했다. 이미 심히 손상된 그의 신체가 뒤틀리며 기괴하게 꺾일 때까지 윤모난은 몸부림치고 또 쳤다.
무정원이 한백호에게 전해준 윤모난의 뇌 의식 영상 속 괴물의 환영은 악몽에서 했던 행동들을 반복했다. 악몽이, 메아리가, 윤모난의 옷장 속 괴물이 현실로 튀어나오는 순간이었다. 두려움에 휩싸인 윤모난은 부러져서 낫지도 않은 발을 쿵쿵 아래로 쳐내며 몸부림치다가 옆으로 픽 쓰러졌다.
“으으… 아아악! 아악!”
숨이 넘어가는 단말마의 비명이었다. 정신을 반쯤 놓은 윤모난이 마구잡이로 에너지를 방출하는 탓에 목에 찬 구금 장치가 지지직 소리를 내며 전류를 흘려보냈다. 살갗이 타는 냄새와 함께 연기가 피어올랐다.
정신을 반쯤 잃은 윤모난은 바닥에 쓰러진 채로 몸을 떨었다. 끊길 듯 이어지는 가느다란 목소리가 멈추지 않고 형을 찾았다.
“…ㅎ, 형.”
그사이 고문실로 건너간 한백호는 항상 강인하고 아름답던 몸이 처참하게 축 늘어진 광경을 미술품 감상하듯 훑어보았다. 형들이 죽은 직후를 제외하면 윤모난은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그런 그의 얼굴에 눈물과 체액이 엉망으로 번져 있었다. 장관이었다.
“깨워.”
차가운 목소리가 명령했다.
“죽은 거 아니지? 그럼 깨워. 마저 해야지. 이제 막 시작했는데.”
그러나 평균 이하 정도의 동정심을 가지고 있는 치안조 팀원들마저 바로 나서지 못했다.
“팀장님, 저러다가 정신이라도 완전히 나가면….”
제 팀원에게도 무자비한 상관은 손을 들어 바로 얼굴을 갈겼다. 한백호는 긴말하지 않았다.
“깨워. 다시 한다.”
“…네.”
“으으….”
괴물의 환영은 순식간에 윤모난을 3년 전으로 되돌려놨다. 그의 인생은 둘로 나뉜다. 형들이 죽기 전과 죽은 후.
“형.”
혹독한 세상으로부터 윤모난을 보호하는 막은 형들이었다. 작약은 윤모난에겐 어머니 대신이자 어머니 그 자체였다. 혹독한 세계는 아버지의 얼굴을 하고 아버지의 언어로 늘 그를 호되게 다그쳤다. 윤모난에게 위안을 주는 것은 오로지 작약이 구사하는 어머니의 언어와 그들의 존재 그자체였다.
그러니 작약은 몸의 절반을 가르지 않고도 진정으로 윤모난을 낳은 존재들이었다. 이 지독한 혈연이 그들 사이의 고리였다.
* * *
“이 정신 빠진 놈! 이 돼지 같은 놈아! 감히 내 눈을 속이고 하다못해 남자 새끼들이랑 더러운 짓거리를 벌여?”
“…….”
“네 가문 네 위치, 네 의무까지 다 집어 던질 셈이냐? 이 더러운 자식!”
아버지의 폭언이 아들에게 쏟아졌다. 뺨에 연이어 매서운 손길이 날아들었다. 얼마나 자비가 없는지 입가가 터져 피가 주룩 흘렀다. 어린 윤모난의 키는 이미 훌쩍 자라 아버지를 능가했지만 얼굴은 아직 앳되었다. 그는 아버지의 모욕적인 언어를 고스란히 뒤집어썼다.
이유는 간단했다. 비역질을 하다 아버지에게 정통으로 들킨 탓이다. 그 점에 대해서는 윤모난도 아들로서 민망할 따름이었다. 안타깝게도 번식에 큰 장애가 있는 성적 취향을 가졌으니, 번식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아버지의 분노는 당연했다. 하지만….
“난 번식기 돼지처럼 애 만들기 싫어요.”
“너…!”
“묶어놓고 신부한테 날 강간하라고 하지 않는 이상, 나한테 손주 얻기는 힘들걸요?”
끔찍한 가정을 늘어놓은 윤모난은 돌아서서 서재를 나왔다. 뒤로 온갖 집기며 물건들이 던져지고 깨지는 소리가 이어졌다. 요즘따라 매번 이런 식이었다. 아버지는 원래도 다정하진 않았지만, 노골적인 모욕을 준 적은 없었다. 그런데 이번 여름 무정원이 남경에 왔다 간 이후로는 계속 저 상태였다.
윤모난은 터진 입가를 손등으로 꾹 찍다가 끝내 푸스스 웃었다. 이런 막장 인생이 있나? 남자와 섹스하다 걸려서 아버지에게 두들겨 맞고 욕을 들었는데도 웃기기만 했다. 솔직히 조금 후련했다. 방 창문에 못질을 하고 온갖 간섭과 강요를 하던 아버지가 저렇게 날뛸 줄이야.
왠지 모르게 후련한 마음으로 윤모난은 마당 뒤로 향했다. 이대로 몰래 집을 빠져나가 밖에서 옴팡지게 놀다 며칠 뒤에나 들어올 생각이었다.
“못난아!”
젠장, 형들이다. 윤모난은 개구멍이 있는 숲으로 가려다가 2층에서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걸음을 멈춰 섰다. 수풀 안에 몸을 숨기며 슬쩍 보니 2층 창문턱에 걸려 있는 네 개의 긴 다리가 보였다.
“안 돼!”
뭘 안 된다는 거지? 고개를 갸우뚱하며 윤모난은 수풀에 더 깊숙이 몸을 숨겼다.
“못난아, 안 돼! 얼른 이리 와!”
“…….”
가만히 생각해보니 무슨 사고 치는 개를 말리려고 주인들이 지레 내지르는 대사와 비슷하다. 생각이 그쪽으로 흐르자 열이 솟구친 윤모난은 수풀 밖으로 튀어 나가며 고래고래 소리쳤다.
“나 개 아니야!”
그러자 머리 위에서 키들키들 웃는 소리가 난다. 약이 2층 창문에서 아래 잔디밭으로 훌쩍 뛰어내렸다. 그리고 씩씩거리는 윤모난에게 달려들어 단숨에 잡아 메친다. 등이 푹신한 잔디에 처박히자 아니나 다를까 장난처럼 주먹이 날아왔다. 이런 식으로 대련하며 노는 건 셋의 어린 시절부터 이어져온 것이었다.
“하지 마, 형. 나 나가려던 참이야.”
“형들 오랜만에 집에 왔는데 어딜 또 나가. 자, 얼른 일어나서 자세 잡아.”
“…싫어.”
그러자 동생을 다시 넘어뜨리곤 초크를 걸던 약이 힘을 풀었다. 얼핏 윤모난의 목소리에 울분이 담겼기 때문이다. 형들은 거친 구석이 있으면서도 이런 식으로 동생이 우는소리를 내면 언제 그랬냐는 듯 걱정하는 얼굴을 했다. 커다란 손이 윤모난의 하얀 얼굴을 감쌌다.
동생의 상처 난 입가를 손으로 꾹 눌러 확인한 윤약의 얼굴이 바로 굳었다. 그는 동생이 다치는 걸 병적으로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형, 나 아파.”
윤모난은 괜히 그의 옆구리에 파고들었다. 하지만 약은 여전히 굳은 얼굴로 동생의 턱을 잡고 이리저리 얼굴을 살폈다.
“서재 쪽이 시끄럽더니 이거였군.”
“위로해줘.”
윤모난은 그저 약의 손바닥에 얼굴을 문지르며 어리광을 피웠다. 얼굴을 다 살핀 약이 이내 손을 떨어트리더니 윗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물다가 중얼거렸다.
“…죽여버릴까?”
“누굴?”
“너한테 흠집 내는 인간들.”
음. 뭐라 반응해야 할지 몰라 윤모난은 턱을 긁적였다.
“아버지를 죽이겠다고?”
“…….”
“그건 너무 간 거 아니야? 패륜이잖아.”
“…모난아, 아버지는… 널….”
“약아.”
또 가까운 잔디에서 둔탁한 소리가 났다. 보다 못한 작이 뛰어 내려온 것이다. 그는 둘째의 뺨을 가볍게 밀며 짐짓 엄한 표정을 지었다.
“말조심해. 형이 널 그렇게 가르쳤어?”
“…겨우 3분 먼저 태어났으면서. 가르치긴 뭘 가르쳐?”
윤작은 예민하게 반응하는 둘째 동생을 다정한 어투로 다독였다.
“표정 관리도 잘하라니까.”
“어쩌라고. 이렇게 웃으면 돼?”
약이 눈은 전혀 웃지 않은 채로 입가만 찢어서 기괴한 웃음을 꾸며내 보였다. 누가 보기에도 이상한 표정인데도 작은 그만하면 괜찮다는 듯이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윤약은 제 쌍둥이를 뒤로 팍 밀쳐버리곤 막냇동생을 일으켜 세웠다.
“다음부터는 아버지와 마주칠 일 있으면 그냥 피해. 괜히 말싸움에 말려들지 말고. 요즘 그분이 신경통이 도졌는지 광분하며 날뛰시는지라, 아들이건 뭐건 눈 밖에 나면 모가지를 쑹덩 자를 기세더군.”
“내가 알아서 할게.”
“모난이 넌 알아서 못해. 그러니 형들이 시키는 대로 해라.”
그 말에 동생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오후 내내 강압적인 아버지와 있다 온 윤모난의 심사가 뒤틀린 것이다.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해. 나도 이제 다 컸어. 왜 사사건건 다 간섭하려 그래? 형들 좀 과한 거 알아?”
흰 담배 연기를 뿜어대던 약이 슬쩍 자신의 쌍둥이 형에게 시선을 던졌다. 막내를 제외한 두 형제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가 이내 흩어진다. 얼마 있다가 작이 윤모난의 분홍 머리를 흩뜨리며 말했다.
“왜 그런 말을 해? 형들 서운하게.”
“맞아, 못난아. 서운해. 우리가 너 비료 주고 물 주고 잡초들 솎아내면서 얼마나 공들여 키웠는데.”
순간 윤모난은 조금 숨 막힌다는 생각을 했다. 사랑하는 형들이지만 태생이 자유분방한 그에게 이런 사랑도 속박이라면 속박이었다. 평소에는 조금 답답하다 생각하고 말았겠지만, 오늘따라 정말로 속이 뒤틀렸다. 윤모난은 머리 위에 얹힌 작의 손을 툭 쳐내며 눈을 매섭게 치켜떴다.
“형, 나는 형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약하지 않아.”
“당연히 알지. 형들도. 우리 모난이가…”
“나도 형들처럼 문신하고 싶어.”
“…뭐?”
“여기 똑같은 곳에.”
작약은 황당하다는 표정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껏 형들은 동생의 모든 요구를 다 들어주면서도 그들과 똑같은 문신을 새기는 것만은 반대해왔다. 대신에 그들은 남경의 독사 세 마리를 산 채로 붙잡아 사육장 안에 넣어주면서 이걸로 만족하라 했었다.
윤모난은 셋 중에서도 유독 제 손을 많이 물며 길들여지지 않는 세 번째 뱀에게 자신의 이름을 붙이면서도 씩씩거렸다. 기분이 아주 개 같았다. 이런 뱀 따위가 아니라 문신을 요구했던 건데. 열받아서 몇 번이나 뱀 대가리를 돌로 으깨버리려 하다가도 참은 것은 형들의 선물이기 때문이었다.
윤모난은 불만이었다곤 하지만, 어쨌든 그렇게 넘겼는데도 갑자기 또 문신 타령이니 작약으로서는 황당할 수밖에 없었다. 윤작이 조금은 무게를 담은 목소리로 물었다.
“모난아, 그 문신을 새긴다는 건 가문에 영원히 종속된다는 의미야. 나중에 어떻게 되든 벗겨낼 수 없는 표식이지.”
그걸 윤모난이라고 모를 리 없었다. 작약은 윤화신의 칼날이 되어 모란에게 튈 핏물까지 자신들에게 묻히겠단 각오로 그 문신을 새겼다. 독사는 남경 윤씨를 부르는 멸칭이다. 작약은 그 모욕을 제 몸에 새기면서 스스로 가문에 종속된 존재가 되고자 한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하면서까지 지키려 한 동생이 순진하게도 똑같은 것을 제 몸에 새기겠다니 어불성설이었다. 하지만 윤모난은 물러서지 않고 도리어 힘주어 말했다.
“알아. 그래도 할래.”
“넌 가문에 매이지 말라고 했잖아.”
“나한테 가문은 형들이야. 형들 빼고는 아무도 의미 없어. 그러니까 새길래….”
“…….”
“그 문신 나까지 새기면 의미가 바뀌는 게 되잖아. 복종이 아니라 우리 삼 형제만 의미하는 걸로. 그렇게 결속될 수 있다면 나중에 서로 떨어져 있어도 덜 힘들지 않을까.”
“떨어져…?”
“응, 나중에 우리 모두 자유로워지면 말이야.”
결국 그건 형들에게서 조금 자유로워지고 싶다는 뜻이었다. 동생의 교묘한 논리를 알아챈 약이 건조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자 말없이 생각에 잠겨 있던 작이 이내 답을 내어놓았다.
“그래, 그럼 그렇게 해.”
“어? 진짜?”
“뭐? 윤작, 너 진심이야?”
다 태운 담배꽁초를 바닥에 버리며 약이 불쾌한 기색을 내비쳤다. 그가 작을 형이 아닌 이름으로 부르는 건 부정적인 의미였다. 약은 자리를 떠나려는 작을 불러 세우며 따졌다.
“대체 무슨 생각인데?”
“방법이 있어? 모난이가 저렇게 말하는데.”
“형들, 내가 사랑하는 거 알지?”
“…….”
윤모난의 외침에 쌍둥이의 무표정한 얼굴이 동시에 돌아갔다. 참으로 순진한 동생이었다. 그때 윤작의 입가가 들썩이며 작은 속삭임이 흘러나왔다. 윤모난에게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소리였다.
“인정해야지, 약아. 우리 막냇동생의 가족 사랑은 우리가 그 애한테 주는 것만큼 크지 않아.”
그 말에 윤약이 날카로운 시선으로 윤작을 쏘아봤다.
“그래서?”
“그러니 언젠가 우릴 떠나리라는 것도 대비해야지. 그것도 우리 책임이잖아? 동생을 사랑하니까.”
“…….”
“혹시라도 그날이 오면 울지 말고. 마음 굳게 먹어.”
“형, 너는… 진짜 재수 없는 새끼야.”
“약아.”
약은 아름다운 얼굴에 자리 잡은 판판한 미간에 주름을 가득 새기고는 다시 동생에게 돌아갔다. 하지만 작의 말이 옳았다. 이건 다른 방법이 없는 문제가 아니던가. 현관에 서 있던 여자가 속삭였던 말이 두 사람에겐 여전히 생생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제 형제를 사랑해줘야 한다는, 그 저주에 걸린 건 슬프게도 작약뿐이었다. 내리사랑이란 건 그런 것이었다.
가문에 매이지 말라는 말. 그건 작약이 동생에게 늘 당부한 것이었지만 동생에게 가문은 곧 형들이었다. 그러니 사실 그들은 자신도 모르게 동생을 품 안에서 떠나보낼 순간을 앞당긴 셈이었다.
“모난아, 다시 생각해. 형이… 너 원하는 다른 거….”
두 뺨을 붙잡고 설득하는 말이 한참이나 이어졌지만, 도리질 치는 분홍 머리가 오늘따라 고집을 부려댔다. 윤약은 결국 동생의 고집을 꺾지 못했다. 형들은 허무할 정도로 동생에게 약했으니까.
결국 그날 이후 윤모난은 형들을 따라 명치 부근에 문신을 새겼고, 작약은 윤이화를 부르기로 했다.
* * *
“핑키야, 정신 차려야지. 얼른 자백을 해야 이 짓도 끝날 거 아니니?”
한백호는 윤모난을 물속에서 끄집어내 바닥에 패대기쳤다. 흠뻑 젖은 입가에서 쿨쩍, 하고 핏덩어리가 튀어나와 수면 위로 촥 흩어졌다. 윤모난이 훑고 간 공간마다 피범벅이었다.
이미 며칠에 걸친 정신 고문으로 윤모난은 정신이 흐릿해진 상황이었다. 한백호가 먹인 약이 상황에 조금 순응하게 만들었기에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이미 모든 끈을 놓고 자아마저도 잃어버렸을 거였다.
그 약은 모든 것을 둔감하게 만드는 측면이 있었다. 형들과 집 마당에서 대화를 나누었던 장면이 현실처럼 다가왔다가 금방 멀어져버려, 윤모난은 저 자신이 지금 어디 있는지조차 확신할 수 없었다.
정신을 차려보기 위해 눈이라도 부릅뜨면 발가벗겨진 몸에 고약한 폭력이 내리꽂혔다. 지독한 고문에 윤모난은 손끝까지 퉁퉁 부어 몸이 제 몸이 아닌 것 같았다.
가혹한 폭력은 처음엔 사람의 시간을 빼앗는다. 하지만 더 무서운 것은 공간마저 앗아간다는 것이다. 발 딛고 있는 곳이 푹 꺼진 구덩이 같은 허공으로 변모해버리는 감각. 고문하는 자와 고문받는 자의 공간은 다르다. 고문받는 자의 공간은 컴컴한 허공이다.
“…자백 안 해? 그럼 다시 너네 형이나 불러볼까?”
그 소리에 내내 허공을 가르며 앞뒤로 흔들리고 있던 윤모난의 고개가 멈췄다. 한백호의 말이 몸 구석구석을 난도질했다. 말만 들었는데도 허공에서 괴물이 튀어나와 날카로운 손톱으로 온몸을 촌열해놓는다. 협박만으로 몸을 움츠렸다는 것은… 명백히 의지가 꺾였다는 것을 증명했다.
윤모난은 완전히 뭉개져서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문신을 보면서 오롯이 느꼈다. 아슬아슬하게 삶을 지탱하고 있던 의지가 전부 무너지는 느낌을.
“자백…할게요.”
그러니 이젠 그만 죽어야 할 거 같았다. 버티는 것도, 구원이고 다 집어치우고. 견딜 만큼 견딘 뒤에 내리는 항복 선언이었다.
한편 한백호는 일순 그 어떤 가학적 행위를 할 때보다도 더 큰 희열과 함께 성적 흥분마저 느꼈다. 엉망이 된 윤모난에게서 ‘자백’이라는 말이 새어 나오자,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지퍼를 내린 뒤에 뻐근한 아랫도리를 쥐어짜 시체나 다름없는 사람에다 대고 자위를 했다.
윤모난은 가느다란 시선으로 그 광경을 멍하니 지켜보기만 했다. 이내 자신의 얼굴 위로 더러운 체액이 튀겨 오는데도 꼼짝하지 않았다. 한바탕 벌어졌던 고문을 자위로 마무리한 한백호가 지퍼를 추켜올리면서 손을 슥슥 손수건에 닦았다.
“생각보다 더 즐거웠다. 야, 자백서 가져와라―.”
“네!”
“핑키, 네가 연필 들 힘도 없을 것 같아 내용은 우리가 다 써놨어. 지장만 찍어라.”
복잡할 것 없이 이미 작성된 종이에 윤모난은 시키는 대로 지문을 꾹 눌러 찍었다. 정말로 그게 끝이었다. 그 단순한 행위 하나로 그는 지옥 같던 고문실에서 빠져나올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송해. 핑키야, 바이 바이. 지옥에서 보자.”
오랜만에 지하에서 나오자 뜨거운 여름 햇살이 가시처럼 두 눈에 푹 파고들었다. 양팔을 붙들린 채 걸어가던 윤모난은 고통에 눈을 찌푸렸다. 남이 보면 한없이 굼뜬 반응이었을 거다.
그렇게 짐 덩이처럼 차에 실려 윤모난이 도착한 곳은 임시 구치소의 독방이었다. 피의자 신분의 포스트들이 형을 선고받을 때까지 수용되는 곳이었다. 가혹했던 고문에 비하자면 독방 생활은 비교적 안락한 편이었으나 윤모난은 간헐적인 발작으로 인해 신경안정제를 계속 맞아야 했다.
여름의 끝 무렵까지 윤모난은 기름같이 절절 끓는 악몽에 온몸이 튀겨지는 고통을 삼키며 보냈다. 그쯤 됐을 때는 이미 한계치를 넘은 신경안정제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비명을 지를 때를 제외하고는 윤모난이 죽은 것처럼 꼼짝도 하지 않자, 교도관들이 혹여 그가 사망했는지 체크하기도 했다. 당연히 생명 연명을 위한 최소한의 식사도 삼키지 못했기 때문에 유동식까지 억지로 주입당하면서 윤모난은 겨우 목숨을 이어갔다.
“모난아.”
어느 날 밤, 자신을 부르는 귀에 익은 목소리에도 반응하지 못할 정도로 윤모난은 망가진 상태였다. 얇은 모포 위에 누워 얕은 숨만 쉬고 있는 그의 곁에 누군가 서 있었다. 한 달이 넘어 대충 아물기 시작한 얼굴의 상처 위로 차가운 가죽 장갑의 감촉이 닿았다.
“모난아?”
지긋한 목소리가 자신을 끊임없이 부르자 윤모난의 눈동자에 초점이 돌아왔다. 한순간도 선명한 적 없었던 것처럼 탁한 그의 눈동자 가득 무정원의 권위적인 얼굴이 들어왔다. 걱정과 연민을 얼굴에 가득 띤 모습으로.
하지만 윤모난은 새벽마다 비명을 지르느라 쉰 목소리로도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지친 듯이 가물거리는 눈꺼풀이 무겁게 내려갔다 올라가기를 반복했다.
“아프니.”
아프냐고? 딱히. 어느 순간까지는 아팠던 것 같은데, 고통에 몸부림친 것도 먼 옛일 같았다. 고문실에서의 일 이후로 모든 기억과 감각은 멀어진 지 오래였다. 윤모난은 사물처럼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무정원은 그런 그의 분홍 머리를 다정히 쓸어 넘겼다.
“도와줄까?”
“…….”
“모난아, 내가 널 도와줄 수 있다.”
“…….”
“북해로 전향해라. 내게 복종하고 내가 하라는 대로 해.”
전향이라는 단어에 이제껏 내내 반응이 없던 윤모난의 동공이 잠깐 뚜렷해졌다. 그 변화를 놓치지 않은 무정원은 달콤한 초콜릿을 입에 밀어 넣듯이 부드럽게 종용했다.
“승낙해.”
“…….”
“전향해서 내 명령에 따른다면 네가 가고 싶은 곳에 가게 해주마.”
그 순간 윤모난의 고개가 좌우로 약간 흔들렸다. 그러자 내내 다정스레 굴던 무정원의 얼굴색이 차갑게 변했다.
“이러면 곤란한데. 내가 네 유일한 동아줄이거든. 반도에 있는 모두가 너한테 등을 돌렸어. 심지어 네 아버지마저. 이 세상에 네 편은 아무도 없다는 말이야.”
하지만 윤모난에게선 더 이상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침묵이 곧 답이라는 뜻이었다. 무정원은 미련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게 몸을 돌려 독방을 나가는 그의 등 뒤에서 희미하게 ‘형’ 하고 부르는 소리가 났다. 그 한마디를 뱉는데도 목소리가 사방으로 흩어져 희미했다. 무정원은 입가에 다정한 미소를 띠며 돌아섰다.
“응?”
“내 잘못이든… 형들이 한 잘못이든…. 내가 다 죽음으로 갚을 거니까… 다른 사람들은…”
“모난아.”
무정원이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이 말을 끊었다. 윤모난을 조금은 애처롭게 여기는 것처럼 보였다.
“슬프게도 말이다. 누가 무슨 죄를 지었는지는 나한테 중요하지 않아. 넌 그렇게 생각하겠지. 너희 집안에서 한 일들을 내가 대갚음하려 이러는 거라고. 그런 측면이 없다고 부정하지는 않겠어. 하지만 복수만이 내 동기는 아니다.”
“그럼….”
“이건 생존의 문제다. 난 무리들의 우두머리이고 내 아이의 아버지야. 내 아이가 안전하게 살아가려면, 이런 고생도 감수해야 한다는 뜻이지.”
그건 몇 달 전 무정원과 기차에서 만났을 때 그가 했던 말과 같았다. 윤모난은 둔해진 머리로도 무정원이 이 일을 오랫동안 계획해왔음을 깨달았다. 무정원은 무릎을 살짝 굽히곤 분홍색 머리카락을 천천히 이마 너머로 넘겨주며 속삭였다.
“전향해라. 내가 네 형들 대신 널 보살펴줄 거다. 너하고 나, 그래도 과거의 인연이 있으니 이 이상 심하게 하고 싶지는 않아.”
“…….”
“모난이 넌 나한테….”
“형…. 나한테 뭘 원하는지 모르지만… 포섭할 상대를 잘못 골랐어요. 협상은 조금이라도 살고자 하는 의지가 있는 사람과 해야죠.”
윤모난의 말에 무정원은 생각에 잠긴 듯했다.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은 계속해서 멈추지 않은 채로. 그는 딱히 곤란해하거나 조급해하지는 않는 모습이었다.
“…네가 몇 달간 서곡에서 잘 지냈다고 생각했는데 말이지.”
어느새 그의 입가에는 냉소가 맺혀 있었다. 무정원은 윤모난이란 사람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사람의 천성은 잘 변하지 않는다. 그는 천성이 가이드였다. 한 길 캄캄한 어둠 속에서도 작은 불을 밝힐 줄 아는.
그건 바로 윤모난을 이제껏 살게 만든 생명력 그 자체였다. 여러 번 삶을 놓으려 노력했지만 윤모난의 천성이 그걸 용납하지 않았다. 자신은 지금껏 그걸 역이용했을 뿐이다. 최악의 성적을 가진 2부 7팀 그리고 무구원까지. 그 모든 것은 끈덕진 미련이 되어 윤모난을 살게 만들어야 했다. 하지만 결국 그것도 충분하지 않았던 걸까.
“…포기하면 안 되지. 모난아, 그러라고 네 형들이 죽은 건 아니잖니.”
무정원의 눈앞에는 이미 죽은 것과 다름없는 시체의 몰골만 있었다. 그런 윤모난의 얼굴을 가죽 장갑을 낀 손이 부드럽게 끌어당겼다.
“모든 일이 끝나면 어머니 신의 텃밭에서 평온을 찾을 수 있을 거다. 내가 기도해주마. 그러니 지금의 고통은 모두 긍정해야 해.”
말의 끝에 뺨에 가벼운 입맞춤이 닿았다. 장난같이 입을 맞춘 무정원이 입꼬리를 올리며 나지막이 말했다.
“그때까진 죽지 마라, 모난아.”
마지막 인사를 끝으로 무정원은 독방을 나왔다. 그의 권력을 보여주듯 아무런 제지 없이 구치소의 철문이 그를 향해 활짝 열렸다. 정문을 빠져나오자 습한 여름의 밤공기가 그를 반겼다. 무정원은 담뱃갑에서 흰 담배 하나를 꺼내 물었다. 연기가 습기 사이로 춤을 추며 일렁이는 사이, 보좌관이 다가와 그의 귓가에 무어라 속삭였다.
“가주님, 이동하실 시간입니다.”
오늘은 남경 윤씨들과 연이어 약속이 잡혀 있는 참이었다. 공간 이동 능력이 있는 에스퍼가 만들어준 길을 통과한 무정원은 사교 클럽의 내부로 향했다. 신선한 밤공기와 확연히 대조되는 퀴퀴한 실내 공기가 답답하게 조여들었다.
이 사교 클럽은 생전에 작약이 꽃들의 집회 장소로 사용했던 곳이다. 이제는 오합지졸만 남은 그곳엔 독한 꽃향기뿐이지만.
“오셨군요.”
가장 상석을 비워두고 앉아 있던 윤이화가 자리에서 일어나 쭈뼛대며 악수를 건네자 무정원이 손을 맞잡았다.
“그간 아버님 장례를 치르느라 만남이 다소 늦었네요.”
“북해의 가주께서 돌아가신 일에 유감을 표하는 바입니다. 새로운 가주가 되셨으니 바쁘시겠지요.”
“감사합니다.”
“정원 님의 뜻은 충분히 전달받았습니다.”
“네, 상 중에도 일을 소홀히 하지는 않았으니 여기 있는 꽃들도 만족할 겁니다.”
윤모난이 고문실에 갇혀 지옥 같은 시간을 보내는 동안, 무정원은 아버지를 텃밭으로 보낸 후 가주 자리에 앉게 되었다. 꽤 오랫동안 차근차근 권력 이양이 이어진 탓에 별다른 것은 없었지만, 어찌 되었건 이번 일은 가주로서 무정원이 처음 행하는 것이었다.
무정원은 남경의 꽃들과 잠시 손을 잡고서 공동의 적을 쳐내기로 결사했다. 장기적으로 봤을 때 이 연합이 오래가진 않겠지만, 단기적으로는 서로가 서로에게 필요한 것을 줄 수 있었다.
꽃들이 남경의 기밀을 몰래 제공하여 내부에서 흙탕물을 일으키면, 무정원이 외부에서 최고평의회 의원들과 나머지 가주들의 의견을 모아 남경의 문제를 처리한다. 안과 밖에서 이렇게 동시에 공격한다면 제아무리 윤화신이라도 버티기 힘들 터였다. 하지만 그들의 계획에서 가장 중요한 도화선은 따로 있었다.
“모난이는 좀 어떤가요?”
윤이화가 머뭇거리며 질문하자 무정원은 여상히 답했다.
“아, 다행히 망가지지는 않았습니다. 물론 기세가 아주 꺾인 건 아니지만 오히려 다행일지도요. 우리의 계획대로 움직이려면 완전히 고장 나선 안 될 일이니까요.”
“…혹시 윤모난이 복수하겠다 난리라도 치면….”
“걱정하지 마시죠. 복수라는 것도 다 삶의 의지가 있을 때나 가능한 일 아닙니까.”
양측 모두 심중 깊숙한 곳에 본뜻을 숨긴 채로 대화를 이어갔다. 북해와 꽃들이 임시로 손을 잡긴 하였으나 윤화신이 죽은 다음에는 남경을 두고 또 싸움이 벌어질 공산이 컸다.
하지만 윤화신에 의해 구석에 구석까지 몰린 꽃들은 상황을 따질 처지가 아니었다. 그런 점에서 대세는 어느새 무정원 쪽으로 기울어진 거나 다름없었다. 복수에 눈이 멀어 자멸이나 다름없는 길을 선택한 꽃들을 보며 무정원은 속으로 계산을 마쳤다.
작약은 걸출한 인물이었지만 이미 죽었고 모란도 제구실을 못하게 되었으니, 남경에는 더 이상 인재가 없다. 인재가 없는 곳에서는 미래도 바랄 수 없다. 무정원은 남경의 멸망이 머지않았음을 확신했다.
“그럼 서로 터놓고 앞으로의 계획이나 공유해볼까요?”
옆에서 내내 오라비와 무정원을 지켜보던 윤도화가 끼어들었다. 무정원은 자연스럽게 상석에 앉았다. 이를 약간 불쾌하게 여기는 기색인 꽃들도 있었으나 부러 지적하는 사람은 없었다. 모두 자리에 앉자 윤도화가 윤화신의 거취에 대해 입을 열었다.
“윤화신 그 잡놈의 새끼가 윤모난의 재판에 참석하겠다고 하더군요.”
더 얘기해보라는 듯 무정원의 손끝이 불규칙적으로 책상을 두드렸다.
“그 새끼를 남경 밖으로 끌어낼 수 있는 건 그때밖에 없을 겁니다. 놈을 잡아 죽일 유일한 기회지요. 윤화신이 남경에 처박혀 있으면 불가능하니까.”
“하지만 경호가 삼엄할 텐데요.”
“제 목숨 하나만은 끔찍하게 여기는 괴물이니까요.”
“그래서요?”
“…하지만 아들과 대면할 때도 경호원들을 세워두진 않겠죠?”
윤도화의 말에 책상을 두드리던 무정원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암살 시점은 정해졌다. 재판 당일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칼을 쥘 사람이었다.
“모난이가 암살을 결행하게 만들 방법은요?”
구치소에서 나눈 대화만 생각하면 쉽지 않다. 지금껏 무정원은 윤모난의 약점을 쥐려 부단히 노력했지만 계속 실패했다. 진짜 약점은 그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 하나 때문에 꽃들과 물밑 협상에 나선 것이다.
“사람한테는 다 약점이 있는 법이랍니다. 윤모난의 약점은 남경에 있어요. 그놈의 친조카 말입니다.”
드디어 윤도화의 입에서 정답이 나왔다. 무정원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봤다. 짐짓 난처한 얼굴을 하면서.
“…아이를 죽이는 건 어머니 신의 뜻에 어긋나는데요.”
무정원의 말에 윤도화가 불편한 표정을 짓더니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 한참 침묵을 유지하던 그녀의 입매가 비틀리더니 곧 능청 섞인 말을 늘어놓았다.
“죽이다니요. 저희도 사촌 조카한테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다만 인질로 삼아 윤모난이 말을 듣게 하자는 거죠.”
“…도화야.”
모두가 이 계획에 찬성하는 눈치는 아니었는지, 오라비인 윤이화가 동생을 만류하는 척했다. 무정원은 방 안에 미묘하게 흐르는 분위기를 감지하고 고삐를 바짝 조이기로 했다.
“모난이를 결심하게 하려면 여지가 있어야 할 겁니다.”
“그건… 어떻게?”
“마침 제 동생이 윤모난의 충실한 팀원으로 있으니, 그 녀석이 그 일을 맡으면 좋을 것 같군요.”
이어서 계획이 차근차근 정리되었다. 윤이화가 윤모난을 다시 한번 찾아가 꽃들의 요구 사항을 전달할 것이다. 즉, 윤화신의 암살을 요구한다.
그 일을 행하기 위해서는 윤모난의 조카들이 인질이 되어야 했다. 하지만 윤모난은 일이 성사되어도 꽃들이 조카들을 살려줄 거라 믿지 않을 터였다. 그런 점에서 무구원이 필요했다.
무구원이 윤이화에 이어 다음 차례로 들어가 조카들을 구해 오겠다고 약속한다면. 아무리 윤모난이라 해도 희망을 내버리긴 어려울 거다. 그에게는 무구원만이 유일하게 믿고 그의 조카들을 맡길 사람일 것이기 때문이다.
이건 윤모난에게 있어 조카 청연의 목숨을 구할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자 버릴 수 없는 기회였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의 아버지를 죽이게 될 것이고, 아버지는 끝내 아들의 손에 죽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