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 푸른 연꽃 (12/24)

12. 푸른 연꽃

무구원이 아버지의 장례식을 마치고 서곡센터로 돌아온 건 가을 무렵이 되어서였다. 제 오래된 짝사랑인 고향에 다녀온 무구원은 돌아오고 나서야, 여름 내내 윤모난의 행방이 묘연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치안조 개새끼들…!”

경해국은 쑥대밭이 된 합숙소를 보며 바닥에 흩어진 물건을 걷어찼다. 치안조가 갑자기 들이닥쳐 윤모난이 살인 혐의를 인정했다며 온갖 것들을 다 들쑤셔 가져가버린 직후였다. 막 합숙소에 온 무구원도 그 광경을 보고 얼굴을 굳혔다.

“시팔! 개 같네. 사람을 갑자기 끌고 가놓고선, 살인이라니 무슨 소리야?”

“…….”

무구원은 말없이 주먹을 말아 쥐었다. 윤모난의 살인 혐의는 조금 당황스러웠다. 무간 사건에 이어 살인이라니…. 물론 2부 7팀은 모두 윤모난의 입을 통해 그의 둘째 형이 트랜스가 되었다는 사실을 직접 확인받은 적 있었다.

그래서 죄 없는 신입 대원들이 죽은 이 비극적인 사건을 그가 책임지는 것이… 조금은 부당하다고는 여기면서도 어쩔 도리가 없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윤모난이 그 입막음을 위해 살인했다는 것만큼은 납득하기 힘들었다.

애초에 그가 켕기는 게 있어 형의 일을 숨기고자 했다면 팀원들에게 뇌 의식 영상도 공유하지 않았을 거였다. 아무래도 앞뒤가 맞질 않는다.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는 이 문제를 풀기 위해 며칠 동안 무구원은 끈질기게 무정원에게 접견을 요청했으나 매번 거절당한 상태였다. 고집스럽게 버텨보았지만 그에게선 아버지의 애도 기간인데 가문 밖의 일로 소란을 일으키지 말란 경고만 돌아왔다.

동산 경씨 측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한쪽 편을 들지 않기로 유명한 경씨라고는 하지만 직계 중 어린 아들이 죽었다. 생때같은 아들의 죽음에 초연할 부모는 없었다. 동산도 이미 남경에게 등을 돌린 건 마찬가지였다. 경해국은 주저하듯 무구원에게 물었다.

“무씨, 너 정말 윤 팀장이 한백형인지 뭔지 죽였다는 거 믿냐?”

“아니.”

무구원은 망설이지도 않고 대답했다.

“시팔, 그렇지? 윤 팀장이 아무리 물불 안 가리는 인간이라고 해도 눈앞의 위험을 피하자고 죄 없는 사람을 죽이는 인간 말종은 아니란 말이지….”

“그날 새벽에 팀장님과 대화했지만 별다른 기미는 없었어.”

무구원은 그날의 기억을 더듬어가며 말했다. 그러니까 아버지가 위급하다는 소식을 듣고 방을 나서다가 윤모난과 마주쳤던 날 말이다. 그는 위로와 함께 시답지 않은 농담까지 건네며 등을 토닥여주기도 했다. 그건… 비열한 살인자의 행동이 아니었다.

“팀장님이 가기 전에 다른 언질은 없었고?”

무구원의 질문에 경해국은 한참이나 머리를 긁적이더니 대답했다.

“글쎄에…. 좀 이상하긴 했지. 무씨 너 북해로 가고 나서 그사이에는 안범 병실에만 거의 붙어 있었고… 앞으로 6개월 치 훈련 일정표도 만들어주더라고. 씹, 맞다. 안범 저렇게 계속 누워 있으면 집에서 걱정할 거라고 나한테 쟤네 집에 주기적으로 연락하라고도 시키던데….”

“…팀장님도 이 일을 어느 정도 예상했다는 건가?”

“그렇네. 와! 그러면서 우리한테는 한마디도 안 하고…. 젠장… 팀장이 뭐 저래? 음흉한 인간….”

“다른 건… 다른 건 없어?”

“몰라, 시팔…. 나도 이런 일 생길 줄 알았겠냐? 윤 팀장한테 내가 언제부터 관심 가졌다고.”

“…….”

혹시 모를 단서라도 찾기 위해 무구원은 이미 쑥대밭이 된 윤모난의 방 물건을 뒤적거렸다. 하지만 웬만한 건 치안조에서 털어 가 딱히 눈에 띄는 것은 없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찬찬히 살피던 그가 엎어진 책상 서랍 아래 깔린 종이 한 장을 발견하기 전까지는.

누렇게 닳은 질감이 유달리 익숙했다. 무구원은 바닥에 놓여 있던 그 낱장을 주워 들었다. 어디서 찢겼는지 단면이 울퉁불퉁한 종이 위 활자들이 기억 속 익숙한 구절들을 단숨에 끄집어냈다.

스완의 사랑은 과연 병이었다….

무구원은 이것이 병동에 있었을 때 윤모난이 가져다준 책 속에 끼어 있던 낯선 책의 한 부분임을 바로 알아차렸다. 그는 종이에 적힌 첫 문장부터 시작하여 천천히 아래 구절을 읽어 내려갔다. 이렇게 따로 찢기지 않았다면 그저 소설의 한 부분이었을 구절이 글자 하나하나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왜….”

그 장을 모두 읽은 끝에 무구원은 스스로 질문했다. 왜 하필 윤모난이 이 부분만 찢어 책을 선물한 걸까? 그는 본능적으로 자신이 한 번도 닿아본 적 없는 그의 진심을 잠깐 엿본 것 같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혼란스럽기만 했다. 그동안 윤모난이 했던 모든 말과 행동은 이 종이 속 활자들과 앞뒤가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구원은 천천히 자신이 지나친 윤모난의 말들을 상기해보았다.

“…내가 정신병자라 쉬워 보였어? 생각보다는 쉬울지도 모르지. 그러니까 너부터 울면서 빌어봐. 응해줄 테니까.”

“…이 관계를 이어가자는 뜻이야? 넌 계속 그렇게 하고 싶어? 그게 네 선택이야?”

“꼴랑 오이 먹어준 거 가지고 용서해달라고? 뭘 용서해! 반성도 안 하면서?”

“무구원 너, 어렸을 때부터 아무한테도 어리광 부려본 적 없지?”

“그래서 10년 뒤면 너도 누군가에게 그런 사랑을 받아볼 수 있을 것 같아?”

그 순간, 뒤늦은 깨달음이 구원의 심장을 스치고 지나갔다.

선택, 용서, 어리광…. 어쩌면 윤모난은 자신의 거짓말을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그걸 모른 척하고 심지어 계속 받아주고 있었다면…? 윤모난은 이런 기만을 용납하는 사람이 아니다. 하지만 그는 의심의 칼을 거두고, 대신에….

“지랄하지 말고. 토닥토닥. 이 듬직한 팀장님의 어깨에서 울어봐.”

믿기로 한 것이다. 무딘 믿음, 파멸이 뒤를 바짝 쫓고 있는 와중에 가장 위험한 행동을 윤모난이 하고 있었다. 그가 그렇게 한 이유는 어쩌면…. 무구원은 차마 답을 이어가지 못한 채로 첫 문장을 되풀이해서 읽었다.

“스완의 사랑은 가히 병이었다….”

활자 하나하나가 온 피부에 진득하게 달라붙으며 둔한 머리를 두드렸다. 끝내 무구원은 무거운 고개를 들었다.

“경해국, 나 아무래도… 다시….”

“야! 무씨!”

그때 마침 밖에 있던 경해국이 방 안으로 헐레벌떡 달려 들어왔다.

“야! 안범 깨어났대! 얼른 나와, 얼른!”

“뭐?”

“병동에서 방금 연락 왔어. 얼타지 말고 얼른 가자고, 이 새끼야!”

두 사람은 당장 병동으로 달려갔다. 단숨에 2층에 있는 안범의 병실 문을 열어젖히고 들어가자 그곳에 안범이 있었다. 여전히 복잡한 장치를 매달고는 있지만, 내내 눈을 감고 자기만 했던 녀석이 희미하게나마 눈을 뜨고 이쪽을 보고 있었다. 경해국과 무구원은 천천히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야… 찌…. 아니, 안범.”

“…….”

“이 새끼야, 너 여기 어딘 줄 알아? 정신 들어?”

아직 말할 수 있는 상태는 아닌지 안범은 손끝을 겨우 까닥하기만 했다. 그런데 그때였다.

쾅!

경해국이 대뜸 돌아서 선 벽에 콱 주먹을 박아 넣더니 그렇게 한참을 멈춰 있었다. 병실 안에 있던 모든 사람이 왜 저러나 싶어 다 주목하고 있는데, 경해국의 어깨가 조금씩 떨려왔다. 무구원은 얼굴을 찌푸리며 경해국의 어깨를 밀었다.

“경해국… 우는 건 아니겠지.”

“씨팔, 닥쳐!!!”

“…….”

언제는 못 잡아먹어 안달이더니 꽤 마음이 쓰인 모양이었다. 안범이 누워 있던 몇 달 동안 꼬박꼬박 병문안을 가며 신경을 쓰는 것부터 그답지 않았지만 말이다. 경해국은 멋쩍은 듯 눈가를 붉히며 악을 질렀다.

“안범은 내 동생이랑 동갑이란 말이다!”

“…….”

“감정도 없는 로봇 새끼! 썅, 이 와중에도 태연스러운 무씨 네놈이 더 이상해!”

“알았다.”

경해국이 감정에 젖어 있도록 놔두고, 무구원은 병동 에스퍼한테 상태를 물었다.

“이제 겨우 의식을 회복한 것뿐이고 평소대로 돌아올 수 있을지는 더 지켜봐야 할 겁니다.”

“말을 하려면 얼마나 걸릴 것 같습니까.”

“모르죠. 지금은 자극에 반응하는 것일 뿐이니까 상태를 더 지켜봐야죠. 그… 동료분 잘 달래시구요. 일단 의식을 차렸으니 상황은 희망적이에요.”

“감사합니다.”

꾸벅 인사하는 무구원의 뒤로 경해국은 여전히 눈물을 삼키고 있었다. 꽤 시간이 지나고 나자 그는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안범이 또 정신을 놓지 않게끔 시도했다.

“안범! 내 말 들려? 씹, 선배가 부르는데 눈을 바짝 떠야지! …그래! 이 새끼야. 내 말 알아들으면 손 한 번 까딱해.”

“…이제 막 깨어났는데 가만히 둬라, 경해국.”

“계속 이렇게 불러야 또 의식을 안 놓지. 뭘 모르면 꺼져, 무씨.”

“그럼 난 안범이 일어났다고 가족한테 전달하고 올게.”

“그래.”

그렇게 안범은 깨어나고도 일주일간은 제대로 된 반응을 하지 못했다. 하지만 꽤 빠르게 상태가 좋아져 일주일이 넘어가는 시점에서는 경해국이 시키는 대로 손을 움직여 간단한 의사소통 정도는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무구원과 경해국은 안범을 옆에 두고 윤모난에 대한 얘기를 간략하게 상의한 적 있었다. 그런데 그 순간 안범의 손끝이 연이어 침대를 두드렸다. 처음엔 우연인가 싶어 넘어갔지만, 또 윤모난의 얘기가 나오자 똑같은 반응을 보였다. 그제야 두 사람은 그것이 신호임을 알아차렸다.

“윤 팀장님 보고 싶냐?”

경해국이 묻자 안범이 손을 한 번 툭, 하고 두드렸다. 그렇다는 뜻이었다. 아픈 놈에게 윤모난의 일을 그대로 전할 수 없었던 경해국은 조금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팀장님… 그 … 지금 임무 때문에 나가 계셔…. 참어, 이놈아.”

그런데 안범이 툭툭 두 번 침대를 두드린다. 그 얘기가 아니란 거다.

“뭐야? 왜 그래?”

안범은 계속 침대를 두드려댔지만, 이것만으로는 복잡한 의사소통은 불가능했다. 그렇게 깨어난 지 몇 주가 훨씬 넘어가는 시점에 안범은 짤막한 몇 마디를 토막으로 겨우 뱉어낼 수 있었다. 그것도 바짝 귀를 기울여야 겨우 들을 수 있는 소리였다.

“뭐라고?”

“팀…자…니ㅁ….”

“차근차근 다시 말해봐라, 안범.”

무구원은 차분히 안범을 다독였다. 하지만 성질이 급한 경해국은 안범이 환자라는 것도 잊고 뭐? 뭐? 하고 큰 소리로 물으며 채근했다. 다음 날 상황은 더 나아져서 안범은 겨우 문장에 가까운 말을 뱉었다.

“팀…자…님… 무….”

“…응, 팀장님 뭐?”

“무…사…하….”

“그래, 무사. 뭐?”

“세요…?”

팀장님은 무사하냐고? 겨우 몇 주간 이어진 퍼즐을 완성한 경해국과 무구원은 얼빠진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아니 내내 혼수상태였던 놈이 갑자기 윤모난의 안부는 왜 묻는단 말인가? 그가 지금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를 텐데 말이다. 하지만 긴 대화를 이어가려면 시간이 더 걸릴 것 같았다.

그러던 와중에 무구원은 안범의 면회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생각지도 못한 연락을 받았다. 그동안 접견을 거부하기만 했던 무정원에게서 호출이 온 것이다. 회의실로 오라는 말에 그는 주저하지 않고 달려갔다. 무정원이라면 윤모난이 어디에 어떻게 있는지 알 것이고… 어쩌면 만날 수 있게 해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을 안고서.

“무구원입니다.”

그렇게 찾아간 회의실에서 자신의 신분을 밝힌 뒤에야 안에서 문이 열렸다. 회의실 안에는 장례식 이후로 오랜만에 보는 무정원이 보좌진 몇 명과 함께 앉아 있었다. 무정원은 새 가주가 된 이후로 서곡에서의 업무를 마무리하는 일로 바빴다. 동생을 본 무정원은 검은 장갑을 낀 손으로 피곤한 듯 미간을 꾹꾹 누르며 한껏 풀어진 말투로 물었다.

“그간 계속 접견을 신청했다지?”

“네.”

“너한테 쓸 시간이 많지는 않으니 용건이나 말해라.”

“…저희 팀장님은 지금 어디 계십니까?”

앞뒤를 다 자른 무구원의 질문에 무정원의 얼굴에 피곤한 기색이 가시고 금세 냉기가 서렸다. 무정원은 짐짓 차가운 표정으로 동생을 바라보며 물었다.

“모난이가 보고 싶은 모양이구나.”

“…….”

“그래?”

무구원은 긍정의 뜻으로 예의도 잊고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건네받은 서류를 살펴보던 무정원이 예상과 다르게 바로 윤모난의 행방을 알려줬다.

“모난이는 지금 구치소에 있다.”

“…계속 그곳에… 있었단 말입니까?”

“계속은 아니고, 처음엔 치안조 고문실에 있다가 자백한 이후에 거기로 이감된 거다.”

“자백이라니… 무슨. 그럼 팀장님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무정원은 서류를 책상 위로 휙 던졌다. 그리고 여전히 별일 아니라는 듯이 무심한 말투로 대답했다.

“아무래도 사형이 선고될 예정 같더군.”

윤모난의 죽음을 예고하는 말은 순간 무구원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하지만 충격은 잠깐이었고 통렬한 깨달음이 온몸의 피를 모두 증발시켰다. 무정원의 태연자약한 태도. 자신의 반응을 살피는 은근한 눈빛.

무구원은 윤모난이 덫에 걸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북해뿐만 아니라 반도의 모든 정치가들이 각오하고 남경을 겨냥하고 있었다. 그는 차가워진 손으로 얼굴을 몇 번이나 쓸어내린 끝에 물었다.

“…대체 무슨 짓을 저지르고 계신 겁니까?”

“무슨 짓? 그 말은 거슬리는군.”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주변에 있던 보좌진들의 시선이 무구원에게 날아와 꽂혔다. 의자를 덜컹거리며 몸을 일으킨 몰이꾼 중 한 명이 무구원의 어깨를 붙잡았다. 하지만 무구원은 손이 닿는 것조차 불쾌하다는 듯 쳐내며 낮은 목소리로 경고했다.

“내 몸에 손대지 마.”

“…그만하시죠. 저희는 가주님을 경호하려는 겁니다.”

“내가 형님께 무슨 위해라도 끼친다는 건가?”

몰이꾼은 대답 없이 무정원 쪽을 바라봤다. 주인의 허락을 기다리는 사냥개답게 다음 행동에 허락을 구하는 거였다. 하지만 무정원이 손을 저으며 물러설 것을 명했다.

“이 난리를 치는데 무슨 소리를 하는지 들어나 보지.”

“죄 없는 사람을 죽게 만드시려고, 그동안 북해를 위한다는 명분을 운운하셨던 겁니까?”

“왜 지금 와서 이러는지 도통 이해할 수 없군. 너도 내 명령에 따르고 있는 줄 알았는데.”

“이런 일인 줄 알았다면 그러지 않았을 겁니다.”

그러자 무정원이 무슨 말을 하냐는 표정으로 반박했다.

“이런 일인지 몰랐다? 아니, 너도 일이 이 지경까지 될 수 있다는 걸 알았을 거다. 그동안 네게 생각할 기회는 많았어. 넌 가문과 윤모난 중에서 결국 가문을 선택한 거다.”

“…제 선택이었다는 거 압니다. 하지만 죄가 없는 사람에게 이런 누명까지 쓰게 하는 데엔 결코 동의한 적 없습니다.”

“죄가 없다? 윤모난의 형이 괴물이 되어 무간에서 전사들을 죽였어. 언제는 목숨의 가치를 저울질하지 않겠다더니 그새 네 정의마저 버린 거냐?”

“…그건.”

“윤모난이 이 사실을 미리 모두에게 경고했다면 그런 비극이 일어났을까?”

모든 행동들은 연쇄작용을 일으킨다. 윤모난이 둘째 형의 일을 숨기지 않았다면 무정원이 그것을 이용할 수도 없었다. 그런 점에서 무간에서 죽은 목숨들은 무정원의 칼에 희생당한 것이긴 하지만, 실상 윤모난에게도 부분적으로 책임이 있었다.

그건 악취를 풍기는 무정원의 기만과는 별개의 진실이었다. 확실한 건 무간에서 죽은 신입들이 무고한 희생자라는 것뿐이다. 윤모난도 이를 알기에 자신이 모두 안고 책임지려 한 것일 터였다.

하지만 그런 모든 사정과 상관없이, 무구원에겐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 있었다.

“…죽게 할 수 없습니다.”

그 한마디는 그냥 쉬이 꺼낸 것이 아니었다. 그건 가문의 뜻을 저버리겠다는 의미였고, 지금껏 누구 한 명의 목숨만을 유달리 무겁게 생각하지 않았던 무구원의 원칙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는 신호였다.

“팀장님이 무슨 짓을 저지르셨든 죽게 놔둘 수는 없어요.”

물론 윤모난은 삶보다는 죽음에 더 가까운 사람이었다. 늘 죽음을 언급하고, 죽음을 열망했다. 그러므로 무구원도 그의 완전한 죽음을 상상해보지 않은 건 아니었다. 이 세상에서 그의 존재 자체가 말소되는 것. 그 완전한 상실에 대해서 말이다.

하지만 때가 닥쳐오자 무구원은 깨달았다. 사실 자신은 윤모난을 삶으로… 이 지옥 같은 삶으로 끌어오고 싶다고. 이기적인 마음이 그것을 원한다. 말로는 그를 가고 싶은 곳에 데려다주는 다리가 되겠다고 했었다. 실제로 그렇게 하려고도 했다.

그런데 지금은 다리인 자신이 몽땅 부러져서라도 아무 데도 못 가게 그를 잡아두고 싶었다. 불구가 될지언정, 여기서 더 엉망이 된다고 해도 윤모난이 살아 있으면 했다. 그가 가고 싶은 곳에 가지 못하도록 막고 싶은 추악한 욕망이 배 속 깊이 들끓었다.

이 욕망은 아마도 현재 그가 지독히 앓고 있는 병의 증상일 테다. 왜냐하면… 그의 사랑은 가히 병이었으니까. 무구원은 고개를 들었다.

“살릴 수 있는 방법을 말씀해주십시오. 그 방법이 무엇이든 따르겠습니다.”

“무구원.”

무정원의 얼굴에는 미세한 변화조차 없었다. 모든 것을 예상했다는 듯이 담담한 얼굴이다. 하지만 무구원은 그 얼굴에서 답을 얻고 그 앞에 무릎 꿇었다.

“복종하겠습니다.”

애초에 무정원은 무조건적인 복종을 바란 거다. 가문이나 윤모난을 선택할 문제가 아니라 무구원이 자신의 발아래 엎드리기만을 기다렸다. 무구원에게는 처음부터 그 어떤 선택도 허용되지 않았던 거다.

“가주님께 복종하고 시키는 대로 하겠습니다.”

“아니.”

하지만 무정원은 그리 쉽게 정답을 내주는 사람은 아니었다.

“아직은 아니야.”

“…….”

“먼저 모난이를 보고 와라. 그런 다음에 다시 맹세해.”

그 말에 무구원의 창백한 얼굴에 복잡미묘한 감정이 번졌다. 희망, 절망, 의구심이 뒤섞인 소용돌이가 스치고 지나가는 그 얼굴은, 그래도 무정원이 보기에 예전보다는 훨씬 더 순종적이었다.

* * *

윤모난은 시공간을 모두 강탈당한 채였다. 한백호가 가한 고문은 그의 악몽을 상처 겉면을 까뒤집듯이 모두 꺼내버렸다. 이제 악몽은 현실이 되었다. 윤모난은 형과 단둘이 있었다.

“…끄윽.”

윤모난은 찬 시멘트 바닥에 얼굴을 짓이기며 신음했다. 혹독한 겨울바람을 맞는 앙상한 나무처럼 온몸이 경련과 떨림으로 흔들린다. 바닥에서 천장까지 가득 채운 괴물의 그림자가 그를 뒤덮고 있었다.

“형… 끅… 으흑….”

신음과 함께 눈물이 계속 쏟아져 내렸다. 상처 딱지가 뒤덮인 발이 바닥을 긁으며 끽끽 소음을 냈다. 악몽으로부터 도망쳐보려는 무력한 시도였다.

“…제발….”

아물 틈 없는 상처가 다시 터져나가도록 머리를 바닥에 찧으며 윤모난은 호소했다. 토막 나버린 언어로 애처롭게 애원했다. 찢어진 머리가 붉은 피로 젖었고, 파리한 얼굴을 타고 턱 끝에는 핏방울이 대롱대롱 맺혔다.

“으으윽… 으윽.”

‘내 동생.’

괴물이 동생을 불렀다. 마치 고통에 몸부림치는 동생을 달래주려는 것처럼. 하지만 동생은 그 모습에 비명을 지르며 뒹굴었다. 괴물은 자신에게 닿지도 않았는데 마치 염산이 피부에 닿은 듯 끔찍함을 느꼈기 때문이다.

순식간에 엄청난 공포 속에 갇힌 윤모난은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목젖 부근이 콱 막히고 혀가 온통 부어 입안을 가득 메웠다. 윤모난은 꺽꺽대며 손발만 바르작거렸다. 뒤틀리고 경련하는 몸은 기괴하게 꺾이며 발작했다. 그러자 괴물이 더 이상 다가오지 않고 멈췄다.

“싫어…. 형, 부탁이야….”

겨우겨우 소리를 짜서 괴물에게 애원했다.

“이제 그만….”

더 이상 악몽이 현실인 삶에서 살고 싶지 않았다. 윤모난은 바닥을 친 삶을 포기하고 싶었다. 원하는 건 그거 하나였다.

“죽여줘…. 형.”

그 하나뿐인 소원을 간절히 소리 내어 말했다. 부디 그렇게 해줬으면 싶었다. 그 누구도 구원해주거나 그 누구에게도 구원받지 않도록.

감히 그리 쉽게 바랄 수 없는 것을 윤모난은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다. 그저 괴물이 단숨에 제 머리와 몸을 찢어내기를, 자신의 목이 뜨거운 피를 뿜어대며 떨어지기를 바랐다. 피조차 괴물이 모두 마셔 삼켜버려 티끌 하나 남지 않기를 소원했다.

그러면 자신을 옭아매는 굴레는 아무것도 없을 거다. 상실도, 아픔도 없다. 그렇게 죽음은 마침내 고통 없는 세계를 선사할지도 모른다.

정말 그럴까? 그 기대에 침잠하려는 그 순간, 익숙한 목소리가 물었다. 과거, 무간, 미로, 형. 몇 가지 단어만으로 형을 귀환시키는 건 어렵지 않았다. 형은 말했다.

“모난아, 환영을 깨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해야 할 건 현혹되지 않는 거야. 눈앞에 보이는 것들은 모르는 사이에 우리 모두를 속이지. 무지의 어둠 속에선 환영이 더 밝게 보이는 법이거든.”

“…돌보시는 어머니 신이시여.”

형의 목소리 틈으로 갑자기 다른 음성이 끼어들었다. 점차 분명해지는 소리를 따라가려 하자 그것은 윤모난을 통과하며 지나가버렸다. 약은 누군가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 있는 동생을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모난아, 사실 너는….”

“조에의 텃밭을 돌보시는 어머니 신이시여. 이 사람에게 시련과 고통을 긍정할 힘을 주소서….”

조용히 기도문을 암송하는 소리가 약의 말을 집어삼켰다.

그것은 윤모난을 시련만 있는 삶으로 돌아오라 종용하고 있었다. 고통을 긍정하는 것은 고통을 받는 삶을 인정한다는 뜻이니까. 죽음의 안락함을 허용하지 않는 그 부름에 윤모난은 고개를 저었다. 거부하고 싶었다.

하지만 듣기 좋은 낮은 목소리가 고문으로 빼앗겼던 윤모난의 시간을 주인에게로 돌려놓았다. 시간은 조금씩 흐르며 그를 다시 삶으로 끌어당겼다.

“이 불신자도 구원받을 수 있게 해주십시오.”

“…원아.”

윤모난은 결국 입 밖으로 그 이름을 뱉을 수밖에 없었다. 성을 떼면 우스울 정도로 의미가 바로 전해지는 이름. 흐려진 기억 속에서 확연히 뚜렷해지는 얼굴을 떠올리며, 윤모난은 밭은 숨과 함께 한 음절씩 쪼개어 그를 불렀다. 한 글자마다 무거워지는 그 이름을.

“구원아.”

“네, 팀장님.”

“…….”

“접니다.”

하지만 윤모난은 이름을 부르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시체처럼 차가운 몸을 무구원이 주저 없이 먼저 끌어안았다. 이로써 무구원도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상실의 고통을. 그건 작열감과 비슷할 것이다.

지난 시절 자신이 눈에 담았던 생생한 색채를 띤 윤모난을 감히 그리기에도 죄스러웠다. 우리에 갇혀 상처 입고 신음하는 맹수에게서 푸른 초원을 떠올리는 게 부조리한 것처럼.

무구원은 항상 그늘에 서 있는 자신과 달리 윤모난은 빛나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에게 끌린 것이라 생각했었다. 그래서 이 마음이 허황된 빛에 이끌린 착각이라 생각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바닥으로 내던져진 윤모난을 보고서 마침내 알게 되었다. 자신은 사실 그의 어둠에 이끌렸다는 것을. 무구원은 발 딛기조차 꺼려지는 그의 어두운 심연에 동질감을 느꼈다. 하루하루 사는 것이 생존을 향한 투쟁인 삶. 온갖 가시와 덩굴, 더러운 해충이 가득한 바닥에 처박힌 삶.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낸 그 삶은 자신의 것과 무척 닮았다.

이로써 무구원은 선택했다. 윤모난을. 이건 착각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새로운 사랑이다. 모두 엉망이 되고 나서야 한심한 저울질을 끝내고 선택한 사랑이다.

“팀장님, 제가 거짓말을 했습니다.”

“…….”

“제가 팀장님을 속였습니다. 그런데….”

“…하지… 마.”

고해성사의 순간, 내내 품 안에서 떨기만 하던 윤모난에게서 희미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게, 네가 사는… 방법이니까.”

“팀장님… 하지만….”

“무구원…. 넌.”

윤모난은 잠시 말을 멈췄다. 쉰 목소리로 한마디 뱉는 것도 고통스러운지 한참이나 숨을 가다듬고 침을 삼킨다. 그러다가 힘이 빠진 손을 들어 자신의 다리를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넌 다리라고 했잖아.”

언젠가 윤모난은 무구원에게 팀의 두 다리가 돼라 했고, 뒤이어 팀은 곧 자신이라 했었다. 지금 곱씹자니 그 말은 일방적인 복종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이 사람은 악몽에 몸을 담근 채로도 여전히 그 다리의 살길을 만들어주려고만 하니까.

“…그러니까 부러지지 마.”

“…….”

“꺾이지 마. 죽는 게 아니라… 사는 길을 선택해.”

“팀장님.”

“후회하지 말고…. 그렇게 해. 그건 나를 위한 것이기도 하니까. 나에겐 가고 싶은 곳이 있어.”

그가 가고 싶은 곳…. 그건 자신의 이기심과는 정반대에 위치한 곳이다. 무구원은 비참한 마음으로 고개를 떨궜다. 정말로 할 수만 있다면 그에게 기꺼이 복종하고 싶었다. 어둠 속에서 작은 성냥불을 밝힌 채 다른 한 손에는 칼을 든 이 남자에게.

목에다 칼을 겨누면서도 다른 손에 있는 불을 보라고 하던 윤모난의 가르침을 따라, 그 작은 불빛만 보며 걷고 싶다. 목에 바짝 겨눠진 칼의 두려움을 잊고. 하지만 윤모난이 어둠에 있기를 자처한다면….

그렇다면 어둠을 벗어나는 것이 제게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그래, 이제 맹세할 준비가 된 거냐?

무정원과 다시 만났을 때, 무구원은 답을 정했다. 그간 꼴통 소리 들어온 값이라도 하려는 건지, 윤모난의 가르침이 무색하게도 그는 칼에 달려들기로 했다. 사는 길이 아니라 죽는 길을 향해.

“시키는 대로 따르겠습니다. 결정했습니다.”

냉랭한 표정의 무정원에게서 앞으로 자신이 해야 할 일들을 하명받으며 무구원의 표정은 점차 식어갔다.

내용은 하나같이 끔찍했다. 이대로라면 이미 바닥에 처박힌 윤모난에게 앞으로 가혹한 일만 펼쳐질 것이다. 그건 그가 가고 싶은 곳이 아니다. 무구원은 운명의 포로 신세가 되어버린 윤모난을 떠올리며 그의 예정된 죽음을 속으로 곱씹고 또 곱씹었다.

그렇게 모두 조각내고 삼킨 뒤에는 하나도 빠짐없이 소화시켜 자신의 이기심을 밀어냈다. 오로지 윤모난을 위해서.

“…넌 어렸을 때부터 은근히 반항적이었지.”

무정원은 무릎을 꿇은 무구원을 내려다보며 불쑥 다른 얘기를 꺼냈다. 이에 무구원은 고개를 들어 담담하게 대답했다.

“씨앗의 의식을 통과하지 못했으니…. 전 집안의 수치라는 거 압니다.”

“그래, 그런데도 넌 살기를 선택하지 않았니.”

하루하루 사는 것이 수치인 삶. 무구원은 홀로 집착스럽게 삶에 정박하고 있었다. 온갖 가시와 덩굴, 더러운 해충이 가득한 바닥에서 숨 쉬는 법을 깨우치면서. 그러니 무구원은 윤모난을 사랑할 수밖에 없었던 거다.

“그래도 믿으란 말이야.”

“뭘 말입니까?”

“내가 살길을 찾아줄 거라는 걸 믿어. 죽게 놔두지 않을 거란 걸 맹목적으로 믿으라고.”

자신에게 살라고 한 사람은 윤모난이 유일했기에. 자신이 그에게서 받은 위안을 조금이라도 돌려줄 수 있다면, 수치를 견디는 것은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이번 일이 끝나면… 네 쓰임에 대해서는 조금 다르게 판단해봐야겠다.”

차가운 가을비에 잠겨 있는 어둑한 구치소의 풍광이 펼쳐진 가운데, 무정원이 동생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그러고서 그는 옆에서 우산을 받치는 보좌진과 함께 이 비참한 곳을 빠져나갔다. 마침내 혼자 남은 무구원은 자신을 덮쳐오는 차가운 빗방울을 맞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구원은 손목에 찬 시계로 시간을 확인했다. 20시 20분, 기도해야 할 시각이었다. 그는 겹겹이 쌓인, 저 높고 차가운 벽 너머에 있을 사람을 생각하며 외벽에 손을 얹었다. 그렇게 온몸을 두드리는 비를 맞으며 천천히 오늘의 기도를 시작했다.

“…그의 길에 어둠이 닿지 못하도록, 저의 육신을 대신 방패로 삼아주시고….”

무구원은 그렇게 한 시간의 기도를 오로지 윤모난을 위해 썼다.

* * *

뺨에 닿는 차가운 공기. 늦된 계절의 냄새가 코끝을 스치고 지나갔다. 윤모난은 손 한 뼘 크기의 작은 창문에서 새어 나오는 빛을 맞으며 독방 한가운데 서 있었다.

“…가을이 끝났네.”

윤모난은 허공에다 대고 말을 건넸다.

“난 추운 건 질색인데….”

뒤에서 철컹하는 소리가 났다. 교도관들이 독방 문을 열고 멍하니 중얼대는 윤모난을 불렀다.

“나오시죠.”

계절이 바뀌고 처음으로 독방을 나오면서 가장 먼저 든 생각은 담배 한 대만 피웠으면 좋겠다는 거였다. 수송 차량에 실려 자리에 앉으면서 윤모난은 우중충한 구치소의 풍경을 마지막으로 눈에 담았다.

차가 정문을 빠져나올 때쯤, 출소하는 사람을 기다리는 가족들이 벽에 옹기종기 붙어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개중에는 벽 너머에 있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손을 대고 기도하는 사람도 있었다.

저 모습을 보니 윤모난에게도 문득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다.

그건 정말 이상했다. 악몽 같은 지난 몇 개월간 윤모난은 좀처럼 무구원을 떠올려본 적 없었기에. 고문 후유증으로 인해 정신이 오락가락하던 그는 구치소에서의 시간을 띄엄띄엄 기억할 뿐이었고, 무구원이 자신을 찾아왔다는 건 몰랐다.

무구원.

갑자기 떠오른 남자를 생각하며 윤모난은 조용히 입에 그 이름을 담아보았다. 이름 석 자가 입에 겉도는 느낌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좀 이상한 이름이다. 윤모난은 차창 밖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남은 알아들을 수 없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수송 차량은 어느새 수도에 있는 고등법원에 진입했고, 차에서 내린 윤모난은 임시 구금실로 향했다. 그는 앞으로 다가올 일에 대해 미리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 건 기대라든가 두려움이라든가, 그런 구체적인 감정이 있을 때만 가능했기에. 윤모난은 그저 사물이나 진배없이 타인의 손에 이끌려 이곳저곳을 옮겨 다닐 뿐이었다.

촘촘히 잡힌 공판이 며칠 내리 이어졌다. 윤모난은 자백한 내용이 맞냐고 물어오면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아버지가 선임해준 변호사들이 그러지 말라며 만류하고 온갖 애를 썼지만, 윤모난은 늘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이쯤 되니 아버지도 각자도생하는 길을 선택한 것 같았다. 어차피 윤모난은 후계자 발표니 뭐니 하는 것들이 자신을 이런 일의 총알받이로 쓰려던 계획임을 모르지 않았다. 각자의 의도와는 다르게 흘러가긴 했어도 결국 윤모난은 그토록 거부했던 남경의 후계자, 뭐 그 비슷한 노릇을 하게 되었다.

재판이 이어지면서 이전보다는 면회가 좀 더 수월해졌는지 그를 찾아오는 사람도 간혹 있었다. 가장 먼저 찾아온 이는 윤이화였다. 그는 면회실 책상 앞에 멍하니 앉은 사촌 동생을 향해서 떠듬거리며 준비해온 대로 통보했다.

“모난아, 네 손으로 결행하지 않으면 네 조카들의 목숨은 보장할 수 없어.”

“…….”

“우린 더 이상 너희 일가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기로 결심했다.”

“…….”

“선고 기일 날, 큰아버지가 남경을 나올 거야. 그러면 큰아버지가 마지막으로 독대를 신청할 텐데, 그때가 우리가 너에게 주는 마지막 기회야. 네가 암살만 성공하면 아이들은 놓아줄 거다.”

그러나 조카들의 목숨이 걸린 이 심각한 이야기에도 윤모난에게서는 어떠한 반응도 없었다. 이런 그를 본 윤이화도 당황하며 쩔쩔매기 시작했다.

“모난아, 네 조카 앞날도 생각해야지. 청연이 말이다.”

“…거짓말.”

“무슨…?”

“내가 아버지를 죽여도 너희가 조카들을 놓아줄 리 없어. 난 바보가 아니야.”

“…….”

“몇 달 전 똑같은 얘기를 하면서는 형수들 목숨까지 살려주겠다고 했었지. 그런데 오늘은 조카들 얘기밖에 하지 않는군…. 어쭙잖게 계산기 두드리지 말고 당장 꺼져.”

지독한 고문에도 잘 벼린 단도 같은 그 날카로운 눈빛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조카들의 이야기가 나오자 윤모난은 서슬 퍼런 시선으로 윤이화를 훑었다. 윤이화는 움찔거리면서 침을 꿀꺽 삼켰다. 이런 반응을 예상하긴 했지만 등골이 서늘해지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네가 암살에 성공하면 아이들은 놓아줄 거다. 그것 외에 방법은 없어.”

“…꺼져요.”

윤이화는 계획대로 더 설득하려 시도하지 않고 다시 한번 요구 사항을 강조하며 자리를 떠났다.

윤모난은 여지도 없는 희망에 매달리고 싶진 않았다. 항상 말이 바뀌는 놈들에게 그런 것을 기대하는 것은 비참한 일이었다. 희망? 왜 그런 것을 굳이 바라겠는가. 조카들은 윤모난이 유일하게 기대할 수 있었던 미래였지만 그에게는 당장 내일을 지켜낼 힘도 없었다.

“…하.”

윤모난은 사촌 형이 나가자마자 무너지는 마음을 겨우 가다듬었다. 자신이 발버둥 치면 칠수록 더 상황은 나빠지기만 할 거다. 모두가 윤화신 일가를 제외하고 손을 잡은 것 같은 이 상황에서 결국 수많은 목숨들을 구명할 길은 없었다.

윤모난은 몸을 조금 회복하면서 이성적인 판단이란 것을 약간은 할 수 있게 되었다. 돌아가는 일이 뻔했다. 한백형이라는 생존자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한백호의 반응. 북해로 전향하라는 무정원의 요구와 오늘 윤이화의 말까지. 자신의 목숨이 곧 쫑 날 예정이듯이 윤화신 일가의 운명도 정해진 것이다.

그래서 다음 면회자들이 오기 전까지 그는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고 있었다.

“…팀장님.”

익숙한 얼굴을 한 두 사람이 면회실로 들어왔을 때 윤모난은 오랜만에 눈에 띄는 반응을 했다. 내내 모든 희망을 건조시키고 말라가던 그의 눈에 잠깐이지만 따스한 빛이 서렸다. 면회실 안으로 들어오는 그의 팀원들은 이 절망의 구렁텅이 속에서도 실낱같은 무언가를 잠깐 빛나게 했던 것이다.

“안범 씨.”

윤모난은 그가 책임지지 못했던 사람의 이름을 무겁게 불렀다.

“깨어났구나.”

“…팀장님… 으흑…. 팀장… 으허엉….”

“다행이네.”

안범은 들어오자마자 눈물을 왕창 터뜨렸다. 아직 몸이 불편한지 휠체어를 탔는데도 몸을 일으켜 윤모난에게 매달려서 울었다.

“무사하…셔서 다행이에요…. 제가… 얼마나… 얼마나… 팀장님을… 걱정했는데….”

“…….”

“다시는 못 보는 줄 알고…. 팀장님 소식을 듣구. 으흑….”

“휠체어… 계속 타야 한대?”

“아니요, 으허어엉!”

“그럼 됐어.”

윤모난은 자신에게 매달리는 안범의 등을 천천히 두드리며 그를 달랬다.

“미안. 가기 싫다고 했을 때 보내지 말았어야 했는데….”

안범은 울면서도 그 말에 도리질을 쳤다.

“저… 팀장님 덕분에 산 거예요.”

“…있잖아. 무간에서….”

“뭐 물어보시려는지 알아요. 그런데 그때 일은 전혀 기억이 안 나요…. 저도 정말… 답답한데… 아무리 노력해도… 기억이 안 나서. 뇌 의식 영상도 하고 정신계 에스퍼를 통해서 최면도 했는데… 도저히.”

윤모난은 죄책감과 미안함으로 번진 안범의 얼굴을 보면서 쓴 표정을 지었다. 그런 얘기를 물으려 한 게 아니라 그는 자신의 형이 한 일을 사과하려고 했던 거였다. 그런데 기억이 안 난다니 어쩌면 다행이었다. 기억의 굴레를 지고 살아온 윤모난은 과거가 얼마나 현재를 망가뜨릴 수 있는지 뼈저리게 알고 있었다.

“아니, 끔찍한 기억은 잊는 게 나아.”

“죄송해요.”

“절대 그런 소리는 하지 마.”

“그리고… 팀장님한테 이거… 이거 드리려고.”

“…그래, 이것도 잊고 있었네.”

안범은 울면서 자신의 목에 걸린 펜던트를 벗어주었다. 윤모난은 멍하니 그 물건을 받았다. 차갑고 묵직한 물건을 손에서 한참 굴려보던 그가 잠깐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고 나서 그는 펜던트를 목에 걸었다.

“야! 안범, 그만 좀 해라. 너보다 더 몰골이 엉망인 사람을 붙잡고 뭐 하는 거냐?”

지금껏 말없이 눈물의 재회를 지켜보던 경해국이 안범을 떼어내어 휠체어에 도로 앉혔다. 안범은 도통 진정하지 못하고 꺽꺽대며 울고만 있었다. 에휴, 하고 한숨을 내쉰 경해국이 의자에 앉더니 불편한 표정으로 계속 힐끔거렸다.

“어째… 얼굴이… 너무 상해서… 놀랐습니다.”

“…팀은 어떻게 됐어?”

“어찌 되긴요. 아직은 유지되고 있지만, 곧 해체되겠죠.”

“너희 셋은 그럼 어떻게 되는 거야?”

“모릅니다. 씹, 지금 그게 중요합니까?”

하지만 윤모난은 그 말을 듣고 생각했다. 너희 셋을 제외하고 당장 중요한 게 무엇일까. 곧 죽어 없어질 사람을 붙들고 우는 건 그다지 중요한 일이 아니다. 앞으로 살아가야 할 사람들이 어떻게 살지 더 중요할 뿐.

“안범 데리고 그만 가.”

“…네? 잠깐만요. 겨우 면회 허락받은 건데…. 아니, 그보다 무구원이….”

그 순간 경해국의 입에서 튀어나온 그 이름 석 자와 함께 면회실의 문이 열렸다. 문과 마주 보는 자리에 앉은 윤모난을 향해 시선이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저벅저벅 발소리로 적막한 면회실을 울리며 등장한 무구원은 인사도 없이 말했다.

“팀장님하고 단둘이 대화 나눠야 하니 자리 좀 비켜줘.”

웬일인지 경해국과 안범은 딱히 별다른 말 없이 바로 면회실을 나갔다. 그렇게 자리에 앉은 무구원은 바깥에서 뽑아 왔는지 책상 위에 종이컵부터 올려놓았다. 그리고 품 안에서 뜯지도 않은 새 담뱃갑과 라이터도 건넸다.

“담배 피우고 싶으실 것 같아서요.”

“그래, 고맙다.”

하지만 윤모난은 담배보다 무구원이 뽑아 온 자판기 커피를 먼저 가져갔다. 이가 몽땅 뽑힐 것같이 단 커피를 한 모금 힘들게 넘기자, 목구멍 안쪽에서 싸르르한 단맛이 퍼지며 입안에 침이 가득 고였다.

커피를 쭉 다 들이켤 때까지 무구원은 별다른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저 윤모난의 상태를 확인하는 듯 몸 구석구석을 찬찬히 훑어볼 뿐이었다. 그러다 이내 비장하게 말문을 열었다.

“팀장님.”

“응.”

“부탁이 있습니다.”

“무슨 부탁.”

“팀장님의 조카들을 제가 구할 수 있도록 허락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빈 종이컵을 만지작거리던 윤모난의 손이 순간 멈칫했다.

“안 돼. 넌 여기 끼어들지 마.”

빈틈없이 단호한 거절이 떨어졌다. 하지만 무구원은 이미 결심을 마쳤는지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저를 못 믿어서 그러십니까?”

“뭐?”

“그런 불신이 당연하겠죠.”

갑자기 무구원은 담담하게 자신의 죄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팀장님의 현재 상황, 무간 사건과 별개로 정치적 음모입니다. 저희 가문이 계획했고 저는 그동안… 거기에 동조해 왔습니다.”

“......”

“그렇게 가문의 뜻에 따라 팀장님을 속였고, 이렇게 될 때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팀장님께서 절 못 믿는 건 당연합니다.”

아니야, 무구원. 널 못 믿어서가 아니라 내 비극에 너까지 끌어들이고 싶지 않아서 그래. 윤모난은 하고 싶은 말을 삼키면서 고개를 떨궜다. 무구원을 어떻게 단념시킬 수 있을지 생각해야 했다. 어쩌면 믿지 않는다고 하는 게 지금으로서는 가장 먹히는 말일지도 몰랐다.

“…어, 그래. 맞아. 너 못 믿는다. 난 한번 나를 기만한 놈은 절대 믿지 않거든. 게다가 넌 가문의 뜻을 거스를 수 없는 놈이야.”

그 말에 무구원의 얼굴이 순식간에 고통스럽게 변했다. 윤모난의 말이 그를 찌른 건 아니었다. 단지 그가 구치소에서 정신을 반쯤 잃고 있었을 때 자신과 한 대화를 하나도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수치스럽지만…. 그게 제가 살아남은 방식이었습니다. …가문을 선택했던 게 아니라 그저 관성이 붙은 대로 행동했던 거죠. 그게 저란 인간이니까요.”

그래서 무구원은 윤모난이 자신에게 해준 말을 그대로 읊었다. 한 치의 부끄러움도 없는 척 연기하면서. 오히려 그의 말에 상대방의 얼굴이 당혹스럽게 변했다. 시선을 마주치지 못하고 한참 마른세수만 하던 윤모난이 주저하며 물었다.

“이미 너네 형이 나한테 전향하라고 요구했었어. …설마 너도 그걸 원하는 거야? 무정원이 날 설득하라고 한 건가. 그게 네가 사는 길이라서…?”

“아니요.”

“그럼?”

“그게 팀장님이 사는 길이라서 이러는 겁니다. 아니면 팀장님은 사형장에서 허무하게 죽게 될 겁니다.”

아직 재판 결과는 나오지도 않았다. 하지만 자신의 운명을 예감하고 있는 윤모난은 그 말에 놀라지도 않았다. 담담히 죽을 예정이던 그의 눈빛은 또 한 번 그런 말을 하는 듯 보였다. 그게 사실 내가 원하는 거라고.

“조카들을 구할 때까지만 사십시오.”

윤모난의 죽음을 유예시킬 수 있는 것은 단 하나. 그의 조카들밖에 없었다. 무구원은 그가 하루라도 더 살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자신의 이기심과 윤모난의 바람 사이에서 합의점을 찾기로 했다. 이왕 이기적으로 굴겠다 다짐한 김에 무구원은 바로 통보하듯이 말했다.

“이미 경해국과 안범에게도 얘기했습니다.”

“뭐라고? 너 지금…. 야, 무구원!”

“죄송합니다. 하지만 둘 다 제 계획에 따르겠다고 했습니다. 제 가문 때문에 저를 못 믿으시겠다면 그 둘이라도 믿으세요.”

“너 미쳤어? 경해국이랑 안범은 왜 끌어들여? 내가 왜 이러고 있는지 정말 몰라서 그래?”

“죄송하지만 저는 팀장님의 방식에 동의 못하겠습니다. 일이 터질 때마다 팀장님은 저희에게 어떠한 언질도 주지 않으셨죠. 그렇게 해서 부채감을 주고 싶으셨던 거라면 성공하셨습니다.”

“…이게.”

당당한 무구원의 태도에 윤모난은 또다시 할 말을 잃었다. 뭐라 할 틈도 없이 허락을 종용하는 요구가 사냥개처럼 집요하게 쫓아왔다.

“허락해주십시오.”

“너희가 내 가족까지 떠맡을 이유는 없어. 이건 내 개인적인 일이야. 간섭하지 마라.”

간섭하지 마. 이건 윤모난이 지난 몇 달간 자신의 이마에 붙이고 줄기차게 외쳐왔던 표어였다. 하지만 간섭은 무구원이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는 방식이기도 했다.

“그래서요?”

“뭐?”

“간섭 좀 하면 어떻습니까?

“…….”

“팀장님은 원래 남들은 다 챙기면서 본인 일에만 소홀하시죠. 전에 짐 정리 하면서 보니까 양말이 온통 회색이더군요.”

“…양말… 뭐라고…?”

“대체 어떻게 했길래 흰 양말을 온통 회색으로 만든 겁니까. 황당합니다.”

갑자기 심각한 얘기를 하다가 웬 양말 타령인가 싶었는데, 그 얘기를 하는 무구원의 얼굴이 금이 간 것처럼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윤모난은 입을 다문 채로 무구원의 타령을 받아낼 수밖에 없었다. 대부분 황당해서 동의할 수도 없는 내용이고 지금 대화와 무슨 상관인지도 모르겠으나 그는 아무 말도 꺼낼 수 없었다.

“사과도 혼자 못 깎고… 빨래도 제대로 못하고… 옆에서 챙기지 않으면 약 먹는 것도 잊는 사람이, 내 개인적인 일에 참견하지 말라구요?”

“…….”

“항상 신는 분홍 슬리퍼는 툭하면 잃어버려서 매번 새로 사고 나중에 발견하면 쌓아놓으시는 것도 이상합니다. 현관에만 분홍색 슬리퍼가 열 켤레가 넘더군요.”

“그만해… 이 미친놈아. 내 일지라도 작성했냐?”

“팀장님은 심각한 정신병자입니다.”

“야.”

“그러니까 도움을 받으셔야 합니다!”

“…너 왜 소리를… 지르고….”

“얼른 허락하세요!”

무구원은 오작동을 일으킨 로봇처럼 점점 열을 올리더니 이내 소리까지 쳤다.

“얼른 허락해주시죠! 어차피 사형당하는 마당에 뭘 망설이시는 겁니까?”

“그만….”

“얼른 허락한다고 말하세요! 그 전까지는 절대 안 갑니다!”

“…알았어. 그만해. 그만하라고! 무구원!”

끝내 큰소리가 나자 고성을 지르던 무구원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평소대로 돌아왔다. 파도가 모래를 휩쓸어가듯 흥분이 사라진 얼굴로 담담히 말하는 모습에 기가 막혔다. 자신의 정신병이 저놈에게 옮아버린 걸까, 아니면 원래 저런 놈인 걸까. 윤모난은 황당한 생각에 빠졌다.

“팀장님은 팀장님이 해야 할 일을 하시면 됩니다. 선고 기일 저녁에 무슨 일이 있어도 가족들을 구해 오겠습니다.”

“…하.”

“그럼 그때 뵙겠습니다.”

“무구원!”

윤모난은 냉큼 자리에서 일어나 꾸벅 묵례를 하는 무구원을 놓칠세라 얼른 그를 불러 세웠다. 하지만 무구원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에 기다란 팔을 뻗어와 손끝으로 윤모난의 마른 턱선을 쭉 훑기만 했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지그시 맞붙었다.

“가겠습니다. 밥 좀 많이 드세요. 얼굴이 너무 안 좋습니다. 편식하지 마시구요. 편식하시면 남긴 음식 나중에 지옥 가서 다 드셔야 합니다.”

마지막까지 황당한 소리였다. 이내 손이 떨어지더니 무구원이 돌아서서 방을 나갔다. 온기가 남은 제 얼굴을 감싸 쥐던 윤모난이 어느새 닫힌 면회실 문에 대고 꽥 소리쳤다.

“언제는 지옥 안 가게 기도해준다며!”

한편 무구원은 복도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경해국, 안범과 마주쳤다. 둘 다 약간 불편한 얼굴인 것이 안에서 고성이 오간 것을 들은 모양이다. 안범이 쭈뼛대며 물었다.

“무 선배님… 팀장님은요?”

“바로 허락하셨다.”

“에? 아닌 것 같은데. 화내신 거 아니죠?”

“아니. 그러라고 하셨다.”

“그럼 들어가서 제가… 확인….”

“안 돼.”

무구원은 안범의 휠체어를 복도 끝으로 쭉 밀어버리며 저지했다. 그 꼴을 본 경해국이 똥 씹은 얼굴을 하며 속삭였다.

“야… 무씨, 다 좋은데. 이거, 네 독단으로 결정할 일은 아닌 거 알지?”

“알아.”

“죄 없는 아이들 구하는 일이라고 해서 참여하는 거야. 미워도 팀장이긴 팀장이니까 끼어든 거라고.”

“나도 그래.”

“이거 너네 무씨 대장이 알면 우리 모두… 죽는 거 아니냐? 아니, 죽는 건 괜찮은데. 내 결혼에 재 뿌리면 네 목숨으로 갚아야 할 거다.”

“…경해국, 원래 내 누이는 형님보다는 나와 더 가깝다. 내가 한마디 하면 자연이가 너와 결혼을 재고하는 것도 예삿일은 아니지.”

“뭐어?”

“그러니까 쓸데없는 걱정은 말란 소리야.”

그 말을 끝으로 자신을 지나쳐 가버리는 무구원의 뒤꽁무니를 쫓으며 경해국은 ‘그게 정말이냐’며 재차 물었다. 2부 7팀의 팀원들은 법원을 빠져나오며 다시 한번 그들의 계획을 정리했다.

그건 무정원도 꽃들의 계획도 아닌, 2부 7팀의 계획이었다. 무구원이 만들고 경해국이 입맛에 맞게 조금 수정한 뒤, 안범이 수긍한 이 계획에 그들은 ‘모란 사수 작전’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무슨 작전이든 이름을 붙이던 팀장의 버릇을 그대로 따른 것이다.

법원 거리를 빠져나와 커피숍으로 들어온 세 사람은 둘러앉아 휴가계를 쓴 다음 우체국으로 가서 부쳤다. 경해국은 여전히 착잡한 표정이었다.

“이거 정말 가능할까? 존나 무모하잖어.”

“…무모한 방법밖에는… 지금으로서는 답이 없어.”

“윤 팀장이 결국 아버지를 죽여야 성공하는 계획인데…. 이 부분이 아무래도 걸린다, 무씨.”

“우리 팀장님… 으흑… 아까 보니까 진짜 안 좋아 보이던데…. 또 이상해지시면 어떡해요….”

무구원은 말을 줄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윤화신까지 구제할 방법은 없었다. 어찌 됐건 윤모난과 그의 조카들을 모두 구출하려면 윤화신이 죽어야 했다. 그래야 그의 죽음을 바라는 나머지 사람들이 움직일 테니.

“팀장님이 결행하지 않으면 인질들이 위험해질 거다. 이미 남경 내부에서 팀장님 가족을 향한 반감이 심하다더군. 그들은 무고한 아이들까지 가차 없이 죽이겠지.”

“…그래. 그 부분은 어쩔 수 없다면, 뭐.”

“그럼 팀장님 구출한 다음에는 정말로 무간으로 가게 하실 거예요? 무 선배님… 팀장님 그냥… 우리가 숨겨드리면….”

이것도 더 이상 논의하지 않기로 한 말이기에 무구원은 일축했다.

“그걸 팀장님이 바라셔.”

“아무리 그래도… 그건 팀장님을 구하는 게 아니라… 죽이는 거잖아요.”

그 말에 무구원은 냉랭한 시선을 안범에게 던졌다.

“눈물 그쳐. 감정에 빠질 여유는 없다. 작은 실수라도 생기면 치명적이야.”

무구원이 냉랭하게 말하자, 안범은 히끅거리면서도 꾸역꾸역 터져 나오는 울음을 눌러 참았다. 경해국이 멋쩍은 표정으로 안범을 달랬다.

“야, 안범. 그래, 눈물 참아라. 무구원 요즘 빡 돌아서 나도 대하기 힘들어, 인마.”

“…끄읍.”

“다들 눈에 띄지 말고 숨어 있으면서 준비해. 난 잠깐 형님을 뵈어야 해.”

무구원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경해국이 따라나섰다.

“무씨!”

“왜?”

“너… 몸조심해라. 그냥 하는 말 아니야. 씨, 네 형님한테 들키면 넌 진짜 죽은 목숨이잖아. 너 이단 선고받고 화형당하면 우리 자연 씨 마음이 어떻겠어?”

“대체 뭐가 걱정이지?”

“뭐?”

“내 계획은 형님의 명령과 한 치도 다른 게 없어. 그분 뜻대로 하는 건데 내가 위험할 게 뭐가 있어.”

“너 그 말 진심이냐? 네가 멋대로 이렇게 일을 진행하는 것 자체가 거역이라고!”

“…난 간다.”

무구원은 그 말만 남기고 복잡한 거리의 인파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그런 무구원을 보는 안범과 경해국의 마음도 무거웠다.

얼마 전 안범이 겨우 의사소통이 가능해지고 어색하게나마 걸을 수 있게 되었을 때, 무구원은 대뜸 팀장님을 구해야겠다며 계획을 세워 내밀었다. 무구원이 갑자기 왜 이러나 싶었던 둘은 윤모난이 처한 상황을 모두 듣고선 납득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사실 오늘 면회실에서 윤모난을 보는데… 말은 안 했지만 참담한 심정이었다. 거기 앉아 있는 병자는 윤모난이 아니었다. 2부 7팀이 기억하는 그가 아닌 다른 사람 같았다.

그래서 무모한 짓임을 알면서도 바람 앞 촛불처럼 죽을 날만 받아놓고 기다리는 윤모난을 구하기로 한 것이다. 심지어 윤모난이 그토록 가고 싶어 했던 무간으로 그를 밀어 넣는 것까지.

“경 선배님, 걱정되세요?”

“그럼 걱정되지, 안 돼?”

“…저… 계속 든 생각인데요, 선배님.”

안범이 휠체어 손잡이 부분을 손끝으로 쭉쭉 문지르며 뜸을 들였다.

“뭐?”

“무 선배님 말이에요. 아, 아닙니다.”

“야! 너 환자라고 내가 못 때릴 줄 알아? 말하다가 끊지 말고 해!”

“…아니요. 저, 무 선배님이 팀장님 좋아하는 거 아닐까요?”

“뭐어?”

때아닌 안범의 말에 경해국은 마시고 있던 주스를 푸흡, 하고 뿜어냈다. 입으로 폭탄을 터뜨려놓고 안범은 도리어 안절부절못하며 주변 눈치를 봤다.

“제가 그런 눈치 하나는 귀신같이 빠른데요오…. 아무래도 무 선배님이… 팀장님을 좋아하는 거 같아서요.”

“…너, 찌찌 애비. 남자끼리는 결혼 못하는 거 알지?”

“에?”

“결혼도 못하는 남자들끼리 어떻게 서로 좋아해?”

“…선배님, 진심이세요?”

“아니 고추 달린 것들끼리 어떻게 그게 가능하겠냐고. 무슨 진심이냐고 물어, 너 빡대가리야?”

“…….”

“자고로 사랑이라는 것은 여자하고 남자가…!”

“에휴, 됐습니다요.”

안범은 더 듣기 싫다는 듯 귀를 막으며 소리를 차단했다. 경해국이 무슨 호로몽인지 뭔지 요상한 얘기까지 하는 통에 더 들을 수 없었다. 애초에 지금 와서 중요한 이야기는 이게 아니었다.

그 둘 사이가 어떻든 안범에게 윤모난은 또 다르게 각별했다. 그는 자신의 첫 팀장님이자 서곡에서 처음으로 친해진 사람이었다. 때로는 혐오 동물로 사람을 겁박하는 정신 질환자이기는 했지만, 자신의 목숨을 두 번이나 살려준 은인이기도 했다.

무간으로 가기 전 건네받은 부적이 마력을 발휘하여 자신을 살렸고. 그리고 혼수상태로 누워 있을 때도 그가 자신을 구했다. 그즈음에 안범은 의식이 깨지 않았을 뿐 주변 소리는 거의 들을 수 있었다. 그래서 그날 밤 신원 미상의 남자가 자신을 죽이려 했던 것과 윤모난이 그런 그를 쫓아갔다는 것도 모두 인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안 것이다. 그에게 씌워진 한백형 살인이라는 혐의가 누명이라는 것을. 안범은 외면할 수 없었다. 윤모난은 그런 것을 외면하도록 자신을 가르치지 않았으니까. 아무리 무지렁이 겁쟁이라지만 안범은 배운 건 절대 까먹지 않는 사람이었다.

며칠 뒤, 선고 기일 당일. 새벽부터 반도 전체가 술렁였다. 모두가 이 희대의 살인마가 과연 사형을 선고받을까 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하지만 그 당사자인 윤모난은 오히려 조금 평화로운 아침을 맞았다. 딱히 별다를 것 없는 하루의 시작이었다. 법원으로 가는 길에 윤모난은 형들의 유품인 펜던트와 줄을 분리해서 위 포켓에 넣었다. 교도관이 그 모습을 보았지만 무슨 언질을 받은 건지 딱히 제지하거나 빼앗지 않았다.

판결은 오후 늦게 되어서 날 예정이었다. 그간 다방면으로 노력은 했으나 당사자가 의지가 없는 탓에 아무런 성과를 내지 못한 뚱뚱한 변호사 집단은 땀만 뻘뻘 흘려댔다.

“…그리하여 피고 윤모난에게 법정 최고형인 사형을 구형한다.”

최고평의회 의원이 30퍼센트 이상인 배심원단이 결정문을 전달하자 판사가 의사봉을 두드리며 구형했다. 모든 것이 순조롭고 물 흐르듯이 당연했다. 판결 결과에 놀라는 사람도 없었고, 막 사형을 구형받은 당사자마저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았다.

미어터지는 방청석에서 법정화를 그리는 화가는 피고인석에 앉은 초연한 모습의 미남을 화폭에 그려 넣으며 이 그림이 신문에 실리면 난리 좀 나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곧 사형이 집행될 죄수인 윤모난이 인도에 따라 몸을 일으켰을 때 철없는 사람들은 몸을 일으키며 관심을 가졌다.

이곳저곳에 상흔이 남은 남자는 초췌하기는 했지만, 여전히 그 본연의 기운을 잃지 않은 듯했다. 사이코패스 정신병자라는 소문과 다르게 그의 얼굴에는 완고해 보이는 의지가 묻어 있었으며 태도에 흐트러짐도 없었다.

“도련님, 가주님께서 마지막으로 면회를 청하셨습니다.”

법원을 벗어나기 전에 예상한 대로 윤화신의 화사 중 한 명이 윤모난에게 찾아왔다. 비리와 뇌물이 만연한 곳답게 교도관은 사형수가 아버지와 마지막 대화를 할 수 있도록 감시 없이 떨어져 있는 방까지 제공해주었다.

그렇게 그곳으로, 예정된 가정 비극이 벌어질 장소로 들어가면서 윤모난은 손에 찬 수갑에서 잠깐 해방되었다. 모든 것이 완벽했다. 이미 준비된 무대로 오늘의 주인공 윤모난이 걸어 들어갔다. 방 안으로 들어가자 아버지인 윤화신이 있었다.

“아버지.”

“…….”

“오셨어요?”

“기어코 여기까지 왔구나, 기어코.”

“방청석에서는 안 보여서 혹시 안 오셨나 했거든요.”

“거길 내가 왜 가서 앉아! 뭐 보기 좋은 광경이라고…. 이 못난 녀석… 내가 가만히만 있으라고 그렇게 경고했는데….”

윤화신은 그사이 이리저리 시달렸는지 짧은 새에 유달리 노쇠해 보였다. 봄에 봤을 때만 해도 무구원이 놀랄 정도로 건강과 젊음을 유지하고 있던 사람답지 않았다. 무정원이 평의회 의원들과 다른 가문들의 뜻을 모아 남경을 집중적으로 공격한 탓에 윤화신은 정치적으로 궁지에 몰려 있었다.

윤모난이 죽였다고 누명을 쓴, 무간에서 죽은 신입 대원들의 명단에는 고섬 한씨 이외에 주씨와 경씨 가문 아이들도 있었다. 동산 경씨의 가주가 막내아들의 복수를 결정한 뒤로 남경과 오랜 동맹 관계인 서강 주씨도 곧이어 같은 결정을 했다.

그동안 윤화신이 쌀값을 올려가며 군비나 축적하고 있었던 탓에 쌓였던 분노가 층층이 더해진 셈이었다.

“청연이는 잘 있어요?”

“누가 보면 네 아들이라도 되는 줄 알겠구나.”

“그때… 그렇게 집에서 나오지 않았으면 좋았을 텐데. 많이 괴로웠어요.”

윤모난은 후회했다. 그날 청연이를 그렇게 본 것이 마지막일 줄 알았다면 더 나은 삼촌 노릇을 했을 거였다. 아이의 편지에 답장을 보내고 전화도 자주 해주며 안심시킬걸. 그때는 정을 떼게끔 하는 것이 옳은 일인 줄 알았다. 자신이 청연을 멀리하면 모두 무사할 줄로만 알았다.

“아버지가 욕심만 부리지 않았다면 모두가 좀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었을 텐데요.”

“배부른 소리를 하는구나. 뭐만 하면 전부 내 탓이지. 아들이랍시고 낳아둔 셋이 다 날 적대시했어! 네 형들은 겉으로는 충성하는 척하면서 배 속엔 독을 품고 날 대했다. 멍청한 것들. 너 역시 쓸모없고 나약한 탓에 이 지경이 된 거야.”

“…….”

“차라리 너보단 네 형들이 나았다. 내 자식이어도 무서운 놈들이긴 했지만, 작약은 너처럼 넋 놓고 있진 않았어.”

아버지는 하나 남은 아들에게 모진 말만 쏟아냈다.

“내 진짜 자식은 결국 작약이야. 넌 서자일 뿐이지. 네가 태어났을 때 기뻐했던 것도 이제는 부끄럽구나. 너 때문에 나는 아들을 둘이나 잃었는데… 가문까지 위험에 처했어.”

끝내 아무런 대꾸가 없는 윤모난을 향해 윤화신은 판사가 내렸던 사형 선고를 한 번 더 내렸다.

“네놈에게 더는 기대 없어. 가문을 위해 조용히 죽어라.”

윤화신이 청산가리가 든 통을 윤모난의 발치로 휙 던지자, 비극을 감상하러 온 무대 아래 관객들이 숨을 죽였다. 모두가 숨죽여 클라이맥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과연 어떻게 반응할까. 모든 시선이 윤모난에게로 쏟아진다.

“네가 그토록 바라던 거 아니냐? 네 손으로 죽는 거. 그걸로 실행하거라.”

“그 얘기가 마지막으로 하려던 말이셨어요?”

“…뭐?”

“저는 혹시나 싶었어요.”

윤모난은 발치에 떨어진 청산가리 용액이 든 병을 주워 들었다.

“그래도 마지막이니까. 오늘은 다른 소리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아버지는 그런 걸 기대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걸 제가 잊은 거죠.”

“하, 참 어이가 없구나. 포옹이라도 하며 죽지 말라며 울기라도 해야 해? 난 남경의 주인이야. 냉정하다고 손가락질받을지라도 본분을 지키려면 사사로운 감정에 휘둘리지 말아야 하지.”

“…….”

“네가 제대로 된 땅에 묻히기라도 바란다면 그걸로 죽어 사라져라. 청연이가 네 묘소에 찾아가기라도 바란다면! 그리고 남경은 내가 지킬 거다. 군사를 일으켜 모조리 죽이는 한이 있더라도 그놈들에게는 땅 한 뼘도 내줄 수 없어!”

아들과 아버지의 마지막 대화의 결론은 결국 그거였다. 지독한 독재자인 아버지는 결국 자식이 아니라 그가 가진 땅만을 사랑했던 것이다. 혈육에게는 결코 주지 않던 그 무조건적인 사랑을 윤화신은 남경에게만 주었다.

“내 할 말은 이걸로 끝이다.”

윤화신이 문가로 향했다. 관객의 시선이 대뜸 사나워졌다. 윤모난이 행동하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객석에서 긴장감이 팽배해졌다. 이에 부응하기 위해 윤모난은 위 포켓에서 형들의 유품을 꺼내, 이미 펜던트와 분리해둔 목걸이의 체인을 손에 감았다.

그리고 자신에게서 등을 돌리고 가는 아버지를 향해 파동을 뻗쳤다. 순간 목에 찬 구금 장치가 파지직 소리를 내며 연기를 피워 올렸다. 하지만 윤모난은 이것을 찼을 때 자신이 어느 정도 선까지 능력을 사용할 수 있는지를 이미 계산해놓은 상태였다.

피부가 불에 덴 것처럼 고통스러웠으나 참을 만했다. 그는 에스퍼인 윤화신의 혈관을 따라 흐르는 모든 에너지를 일시에 꺼트리고 봉쇄했다. 능력을 잃은 방심한 독재자 따위, 그저 평범한 늙은이일 뿐이었다. 윤화신이 흠칫 굳은 얼굴로 섰다.

“화….”

그가 바깥에 있는 화사들을 부르기 전에 뒤에서 체인이 휙 목을 감쌌다. 체인이 꾸우우욱 목살을 파고들며 죄이자 윤화신은 퍼뜩 뛰면서 저항하기 시작했지만, 패륜아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절 아들로 치지 않는다고 하셨으니… 저도 죄책감 가지지 않을게요.”

“으으으으!”

“지옥에 먼저 가 계세요. 가주님.”

절정에 치달으면서 모두가 긴장 가득한 숨을 삼켰다. 남경의 독재자는 결국 올가미가 된 체인의 구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곧이어 몸을 늘어뜨렸다. 악명을 떨쳤던 윤화신의 말로는 너무나도 허무했으나 본디 죽음이란 모두에게 같은 법이었다.

장황한 죽음은 없다. 모두가 이 순간만큼은 평등하다. 죽음을 맞이한 몸은 그대로 푹 고꾸라지고 체온이 서서히 식어간다. 몇 시간 동안은 사후경직이 일어나고, 오랜 시간이 흐르면 육신은 그 주변으로 흔적도 없이 흩어지며 모든 세상이 그것을 파먹고 갉아낸다.

윤화신도 그렇게 될 것이다. 윤모난은 손에서 체인을 풀어내며 그를 내려다보았다. 악력 때문에 덩달아 체인이 파고든 그의 손에서도 피가 뚝뚝 흘렀다. 아버지를 죽인 패륜아의 기분은 평소와 다를 것 없었다. 그토록 자신만만하던 남경의 가주가 사형수보다 일찍 죽은 것이 조금 우스울 뿐.

“…이제 형들하고 만나실 수 있겠네요. 형들도 할 말이 많겠죠.”

객석에서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졌다. 하지만 윤모난은 모든 찬사와 함성에 등을 돌리고 독재자의 시신을 넘어 문을 열었다. 복도에 서 있던 화사들이 두 손에 피를 흘리고 있는 그를 발견하고 놀란 표정을 짓더니 이윽고 바닥에 쓰러진 그들의 가주를 발견했다.

“어느 뱀이 주인이 죽었는데도 충성스러운지 볼까.”

하지만 상황을 빠르게 파악한 화사들 중에 감히 죽은 주인을 위해 덤벼드는 충견은 없었다. 모두가 경악한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이내 복도가 소란스러워졌다. 윤모난은 소리를 치며 달려오는 교도관들에게 붙들려 바닥으로 처박히면서 마음껏 비굴한 놈들을 비웃었다.

“하하하―!”

이토록 가벼운 충성이나 받자고 왜 그렇게 노력했는지 모를 일이다. 도저히 아버지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급작스럽게 벌어진 살인에 당황한 교도관들이 우왕좌왕하며 윤모난을 끌어당겼다. 다른 경찰들이 현장으로 몰려가는 동안 범인 수송을 맡은 교도관들이 사형수를 엘리베이터로 데려갔다.

교도관들은 일어날 사태에 대해 미리 언질은 받았으나 실제 상황이 닥치자 당황한 듯 허겁지겁 행동했다. 아무렇게나 손을 뻗어 엘리베이터 버튼을 꾹꾹 누르더니 문이 열리기가 무섭게 윤모난을 거칠게 안으로 밀어 넣었다.

“…결국 형 말대로 됐네. 그렇지?”

그 와중에도 윤모난은 계속 웃으며 허공에다 대고 쉼 없이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 광기에 질린 교도관들은 닫힘 버튼을 연타하며 문을 닫으려고 했다. 그런데 그때 철컹하고 문에 쇠붙이가 부딪치는 소리가 울려 퍼지며 상황을 중단시켰다.

“뭐야!”

“어어, 저도 내려갑니다. 태워주세요.”

익숙한 앳된 목소리, 안범이다. 갑자기 엘리베이터를 타려는 안범을 보고 교도관들은 신경질적으로 외쳤다.

“계단으로 내려가세요!”

“보면 모르세요? 휠체어 타지 않았습니까! 아니, 공무원 사회가 아무리 썩었다고는 해도 보행이 불편한 저 같은 약자를 차별하시는 겁니까? 이거 이거 완전히 응망이구만, 응망이야.”

“…타세요. 이쪽은 보지 마시고 문에 가까이 붙으십시오.”

“감사합니다. 후하하.”

안범은 냉큼 휠체어 바퀴를 움직여 안으로 들어왔다. 그 광경을 모두 지켜본 윤모난은 어느새 웃음을 뚝 멈춘 상황이었다. 왜 여기서 갑자기 안범이 튀어나온 걸까. 왜 하필 지금…. 한편 안범은 휠체어에 앉아 문 쪽에 시선을 고정하다가 대뜸 주절대기 시작했다.

“저도 공직에 몸담은 사람으로서 교도관님들께 한마디만 하겠습니다.”

“…뭐야?”

“다들 꽉 잡으세요!”

그 순간 쿵, 하는 진동과 함께 불길한 폭발음이 그들이 탄 엘리베이터 천장 위쪽에서 울렸다. 예고는 들었으나 모두가 미처 준비하지 못한 사이 엘리베이터가 순식간에 아래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이대로라면 아래로 떨어져 전원 사망이었다.

“으아아악!”

모두의 비명이 뒤섞인 가운데 심장이 덜컹 내려앉은 윤모난은 손을 뻗어 휠체어를 탄 안범부터 제 몸으로 감싸 안았다. 안범은 자신을 보호하려는 윤모난을 향해 조용히 읊조렸다. 그 맑은 갈색 눈동자에 두려움은 전혀 읽히지 않았다.

“팀장님, 저를 믿으세요.”

“…….”

안범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의 작은 몸에서 뻗어 나오는 거센 에너지를 윤모난은 느낄 수 있었다. 그의 현상 유지 능력이 엘리베이터가 바닥으로 처박히기 직전에 추락을 막았다. 엉망으로 뒤엉킨 사람들이 끄윽, 하는 소리를 내며 하나둘씩 일어나는 가운데 불길한 쇳소리가 들렸다.

철컹철컹. 안범이 휠체어 옆에 걸어놓은 자신의 사시미칼을 꺼내 교도관들에게 겨누며 인상을 험하게 구겼다. 휙휙 칼날이 매섭게 공기를 반으로 가르는 그 모습에 모두 사색이 됐다.

“이얍, 덤벼!”

“…….”

공무집행방해죄까지는 몰라도 안범이 교도관을 죽이는 것만은 막아야 했다. 윤모난이 사시미칼을 빼앗으려던 그 순간, 1층에서 한참 아래 어두운 지하로 떨어진 엘리베이터의 문이 끼이이익 소리를 내며 열렸다.

“오, 찌찌 애비. 잘했어.”

경해국이었다. 그를 보자마자 상황 파악을 마친 윤모난은 휠체어를 밀고 엘리베이터 밖으로 나갔다. 당황한 얼굴로 그들을 쫓아 나오려는 교도관들의 발 앞으로 불길이 확 치솟아 올랐다. 세 사람은 미리 봐둔 법원 지하실을 빠져나와 1층 뒷문으로 향했다. 무전으로 소식을 들은 경찰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꺼져, 꺼져, 꺼져!”

“으악!”

경해국은 훅훅 손에서 불길을 뿜어내 뒤쫓아 오는 무리를 막아섰다. 경해국은 안범의 휠체어를 넘겨받아 빠르게 몰며 윤모난을 주차장으로 데려갔다.

“이거 타고 먼저 가시죠. 저희도 뒤따라갈 겁니다!”

경해국이 세워둔 모터바이크의 열쇠를 넘기자 윤모난이 안범을 보며 물었다.

“…어쩌려고?”

“저희도 쫓아간다니까요!”

“안범은 휠체어 탔잖아!”

“알아서 합니다. 얼른 가세요. 썅, 이러다 잡히겠습니다!”

재촉에 못이긴 윤모난이 바이크에 올라탔다. 그러곤 시동을 걸고 기어를 조작한 뒤 몰려드는 사람들 사이를 뚫고 단숨에 법원 후문을 빠져나갔다. 순식간에 멀어지는 분홍색 머리를 보며 경해국이 감탄했다.

“와, 보이지도 않는구만. 무씨 말이 맞네. 윤 팀장 바이크 잘 모네.”

“선배니임! 얼른 가요!”

“어? 어… 그래.”

경해국과 안범은 서로 시선을 마주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거동이 불편한 안범을 데리고 이동하기란 쉽지 않기에 따로 고안해낸 방법이 있었다. 곧이어 두 사람이 법원 정문 앞 한가운데에 나타났다.

“아이고오! 여기 도와주세요. 제 동생이… 우리 범이가…!”

“무슨 일이세요?”

“불한당 같은 놈들이 보행 약자인 제 동생을… 막 밀치고… 아이고….”

법원 경비들이 놀란 얼굴로 가짜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경해국과 안범을 소란스러운 인파로부터 떨어트렸다. 안범은 ‘형, 나 다리 아파…’ 하며 가련한 동생을 연기하고 있었다.

“괜찮으세요?”

“우리 범이 병원에 가봐야 할 거 같은데… 무슨 사달이 났는지 막 불이 나고… 무서워서….”

“저희가 도와드리겠습니다. 경비들이 다니는 통로로 안내해드릴게요. 괜찮으세요?”

“아유, 감사합니다.”

말끝에 ‘모자란 놈들, 쯧쯧’을 겨우 말하지 않고 버틴 경해국은 정의로운 경비의 도움으로 무사히 안범을 데리고 법원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둘은 미리 밖에 주차해놓은 차에 탔다. 차가 출발하자 안범이 호출기로 무구원에게 전화부터 걸었다.

“모란 사수 완료! 모란 사수 완료!”

―추적은?

“우리가 뒤따라가며 처리할 겁니다! 여긴 걱정하지 마시고 무 선배님도 조심하세요.”

―…혹시 모르니까 이따 도착하면 팀장님 절대 밖에 못 나가게 해. 위험해.

“알아요. 알아!”

―그리고 팀장님 식사부터 하시게 해.

그 말을 끝으로 뚝, 하고 통화가 끊겼다. 경해국이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으며 허공에 쌍욕을 뱉었다.

“무씨 저 또라이 새끼는 뭔 밥 귀신이 붙었나. 윤 팀장 입에 밥 들어가는 걸 저렇게 신경 쓰냐? 미친놈.”

“…그건 사랑…. 아휴, 아닙니다….”

“찌찌 애비, 팀장님 현재 위치는 어디야? 어디로 향하고 있어?”

“6구로 향하는 대로를 타고 계시네요. 뒤에 꼬리가 붙을 테니까 얼른 밟으세요, 선배님!”

“그래, 가보자구.”

미리 바이크에 부착해놓은 GPS 추적 장치가 화면에 윤모난의 현재 위치를 띄웠다. 경해국은 차들 사이를 휙휙 가로질러 단숨에 그 위치까지 차를 몰았다. 예상대로 바이크를 타고 달리는 윤모난의 뒤로 출동한 경찰차들이 바짝 추격하고 있었다. 경해국이 안범에게 신호를 주자 안범이 고개를 끄덕였다.

발을 액셀에 올린 채 경해국은 안범에게 핸들을 넘기고 운전석 창문 밖으로 손을 뻗었다. 이윽고 그의 손에서 아까 법원에서보다 더 큰 화염이 치솟았다. 불덩이들은 순식간에 윤모난을 뒤쫓는 경찰차를 향해 쏟아졌다.

“악! 선배님 조심하세요! 다른 차들한테는 닿으면 안 됩니다!”

“알아!”

“지금도… 으악! 위험했습니다.”

“젠장….”

경해국은 당황했다. 여기서 더 능력을 썼다간 지금보다 제어가 되지 않을 텐데, 그랬다간 시민들이 휘말릴 수도 있다. 무고한 희생자들을 내면서 윤모난을 구한다는 건 어불성설이었다.

제 힘을 적재적소에 쓰지 않으면 큰일이었다. 경해국은 위기 상황이 코앞에 닥쳐서야 팀장의 가르침을 생각해보려 했지만 도통 감이 안 잡혔다.

“시팔! 수업 내내 괴랄한 수학 공식 같은 것만 죄 가르쳐줬는데… 어떻게 쓰라고! 그게 뭔 마법 주문은 아니잖아.”

“반숙란 만들 때 성공하지 않았습니까? 선배님, 그때 정확하게 온도랑 위치를 조절하셨잖아요!”

“그거랑 이거랑 같냐! 그땐 무구원도 있었잖아! 그리고 난 눈 한쪽이 안 보여서 거리 감각이 떨어진단 말이야!”

“팀장님이 그동안 가르쳐주신 걸 생각해보세요. 어떻게 하셨는지.”

“미친…!”

하는 수 없이 경해국은 윤모난의 가르침을 다시 천천히 되새겼다. 먼저 자신의 혈관 속에 뜨겁게 흐르는 에너지의 근원을 찾는다. 포스트의 파동은 모두 고유한 주기를 가진다. 정신을 집중하면 자신의 맥이 뛰는 것을 느낄 수 있듯이 파동도 마찬가지다.

“…포스트 에스퍼가 에너지 부하에 걸리지 않고 자신의 이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파형의 평균값은 이 정도입니다.”

윤모난은 졸린 파동역학을 강의하면서 칠판에 이상한 꾸불렁 글씨를 적어 넣었더랬다. 그리고 뭐라고 했더라. 경해국은 다음에 이어졌던 말을 잠시간 곱씹었다.

“한곗값은 이 정도. 에너지의 항상성을 유지하려면, 이 파동이 완만한 곡선을 그리게 해야 하죠.”

분필이 곡선을 부드럽게 그려냈다. 윤모난이 그림으로 보여준 그 곡선을 경해국은 머릿속으로 상상하며 자신의 고유한 파동에 대입시켰다. 그는 지난 경험으로 자신의 폭주 기점을 정확히 알고 있었기에 어렵지 않게 자신만의 완만한 곡선을 찾을 수 있었다.

그것이 바로 그가 완벽한 항상성을 유지할 수 있는 공식이었다.

경해국은 머릿속으로 이미지를 그려가며 거기에 맞게끔 에너지를 깨웠다. 그러자 손에서 서서히 불꽃이 감도는 것이 느껴진다. 단 한 번도 이런 식으로 손에 불이 착 달라붙는 감각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마치 어릴 때부터 가지고 놀았던 친숙한 공처럼 불덩이가 위로 통, 하고 튀어 올랐다가 손에 안착했다. 그걸 잡아서 날리면….

“어? 됐어요, 경 선배님. 하나 날렸어요!”

“…뭐?”

“또 해보세요. 얼른요!”

경해국은 힘들이지 않고 두 번째도 성공했다. 아무리 던져도 불꽃은 더 커지지도 않았고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튀지도 않았다. 놀랍게도 그는 능력을 제어하고 있었다.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다음부턴 일사천리였다. 경해국은 불꽃으로 추격해오는 차량의 바퀴를 맞히고 상황에 맞게 휙휙 던져 진입하는 다른 차량을 울타리처럼 막아 세우기도 했다. 이윽고 자신의 뒤에서 벌어지는 불난리를 발견한 윤모난이 알 수 없는 표정을 한 채로 돌아보는 게 보였다. 안범은 옆에서 환호성을 내질렀다.

하지만 너무 빠른 환호였을까. 잠깐 삐끗한 경해국의 손에서 튀어 나간 불덩이가 바이크 후미에 바짝 붙어 있던 경찰차의 앞바퀴를 잘못 겨냥하고 말았다.

이어서 쾅, 하고 불길한 굉음이 터졌다. 순간 폭발의 반동으로 경찰차가 휙 돌더니 단숨에 윤모난을 덮치기 일보 직전이었다.

“팀장님!”

“팀장님!”

팀원들의 외침에 뒤를 확인한 윤모난이 인상을 찌푸리더니 바이크의 핸들을 놓았다. 순식간에 그의 몸이 허공으로 튀어 올랐다. 윤모난은 유연한 낙법을 구사하며 도로 위에 안착했다.

“팀장님! 타세요!”

“잠깐.”

윤모난은 부서질 듯 아픈 무릎을 매만지며 도로를 거슬러 가더니 막 뒤집힌 경찰차에서 사람을 끄집어냈다.

“팀장님! 얼른요.”

“기다려.”

그렇게 차가 터지기 직전에 경찰관들을 안에서 모두 꺼낸 다음에야 윤모난은 차에 올라탔다. 경해국은 핸들을 꺾어 차선을 변경한 뒤 단숨에 우회전했다. 사이드미러로 확인하니 쫓아오는 꼬리들은 더 없었다.

그 이후에 차는 수월하게 6구에서 8구에 위치한 주택가로 향했다. 모든 추격을 따돌리고 멈춰 선 세 사람은 내려서 서로를 확인하고 윤모난의 구금 장치부터 해결했다. 경해국이 이음새에 열을 주자 목에서 장치가 떨어져 나갔다. 화상흔이 목덜미에 남아 붉은 목줄을 한 것 같은 모양새가 끔찍하긴 했지만.

“다친 데는 없어?”

“팀장님은요? 목에… 상처가 깊어서 얼른 치료해야겠어요.”

“괜찮아, 이 정도는. 조카들은?”

윤모난은 내내 묻고 싶었던 듯 조카들의 안위를 물었다.

“걱정 마세요. 무 선배님이 데리러 가셨어요. 여기서 기다리라고 하셨어요.”

“무구원은 어디에 있는데?”

“어… 방금 통화한 거 봐서는 아직 수도에 계신 것 같아요.”

순간 어두워진 윤모난의 얼굴을 본 안범은 쩔쩔매며 절대 잘못될 일 없다며 누차 강조했다. 그럼에도 직접 가보고 싶은 눈치인 그를 억지로 끌고, 셋은 8구의 소박한 동네에 위치한 양옥집으로 향했다. 퍽, 하고 대문을 걷어차고 들어간 경해국이 대뜸 소리쳤다.

“할머니! 나야, 해국이.”

“여기가 어디야?”

“경 선배님 외할머니댁이요. 저희 둘은 계속 여기 있었어요.”

“나 왔다니까!”

이윽고 나이 23살이나 처먹고 버르장머리가 하나도 없는 손자의 패악질을 들은 노인이 안쪽에서 나타났다.

“네 할머니 귀 안 먹었어, 이놈아! 어디 갔다가 이제 들어와?”

“여기, 손님 또 데려왔어. 그 …우리 팀장님이셔.”

“뭐어? 팀장님? 아니, 넌 귀한 손님을 데려올 거면 미리 말을 해야지! 갑자기 깡패처럼 대문이나 차고 들어오고!”

칠순이 넘어 보이는 노인은 철없는 손자의 등짝을 퍽퍽 때려가며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너는 이놈아, 나이를 먹었으면 철이 좀 들어야지!”

“그만해! 시팔, 뭔 노인네가 왜 이렇게 힘이 세?”

“노인네? 이 빌어먹을 자식이….”

그녀는 곧이어 마당에 세워놓은 나무 막대기를 장팔사모처럼 휘둘러댔다. 휙휙 외할머니의 공격을 피하던 경해국이 이윽고 수세에 밀려 흠씬 사랑의 매를 맞았다. 저렇게 팔팔하고 기강이 잡힌 외할머니를 두고 왜 경해국이 저 지경이 되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이윽고 손자를 다 팬 뒤에 노인은 윤모난에게 다가와 허리를 굽히며 인사했다.

“아이고, 우리 해국이 팀장님이 이 누추한 곳까지… 다….”

“할머님, 전 경해국이랑 나이 차도 별로 안 나고… 그냥 손자 친구 정도로 생각하시면 됩니다.”

“아이고, 나이도 젊은 분이 벌써 팀장에 앉으시고. 대단한 선생님이신가 보네요.”

“할매, 헛소리하지 말고 밥 줘. 손자 배고파!”

“저 저… 망할 놈이….”

노인은 막무가내인 손자가 그렇게 밉지만은 않은지, 셋을 안으로 데려가 이내 뚝딱 저녁 밥상을 차려주었다. 지금도 여전히 할머니에게 등짝을 맞으며 그릇을 나르는 경해국의 모습은 꽤 생경했다. 그렇게 부엌 쪽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있는 윤모난을 발견한 안범이 물었다.

“팀장님, 왜 그러세요? 배고프세요?”

“아니… 안범 씨 남도에 있는 집도 이런 분위기겠지?”

“네? 뭐… 그렇지요. 저희 집은 동생들이 많아서 더 시끄럽긴 하지만요. 아닌가? 여기가 더 시끄럽나. 그런데 그건 왜 물으세요?”

“그냥 부러워서, 경해국이.”

아, 안범은 그제야 그늘이 내려앉은 남자의 얼굴을 발견하고 가슴 한켠이 무거워졌다. 윤모난은 오늘 아버지를 제 손으로 죽이지 않았던가. 아무리 미운 사람이라고 해도… 제 혈육을 죽인 것이니 심정이 말이 아닐 거다. 안범은 꾸물꾸물 손을 움직여 윤모난의 손등을 툭툭 두드렸다. 그를 위로해주고 싶었다.

“팀장님, 팀장님한테는… 남은 가족이… 으흐흑!”

그런데 말을 끝마치지도 못했는데 또 바보 같은 눈물이 쏟아지려고 했다. 그런 안범에게 시선을 돌린 윤모난은 약간 겸연쩍은 표정을 지었다.

“아니, 우리 범이가 왜 또 울어?”

장아찌가 한가득 담긴 접시를 들고 오던 노인이 놀라 물었다. 경해국의 외할머니 집에 잠깐 머무르는 사이 안범은 친손자보다 더 그녀의 귀여움을 받고 있었다. 그런 안범이 ‘팀장님이 너무 불쌍해요’라며 통곡하자 집안 분위기가 벌써 초상집 같았다.

그러건 말건 경해국은 숟가락을 들고 밥을 먹기 시작했고, 안범도 울다 말고 숟가락으로 한가득 밥을 떠 입에 꾸역꾸역 넣었다.

“팀장님도 얼른 드세요. 입맛에 맞을지 모르겠네. 노인네가 한 반찬이라….”

“아… 아닙니다. 감사히 먹겠습니다.”

윤모난은 감사 인사를 한 뒤에 젓가락을 들었다. 그런데 고문의 후유증으로 미세한 손가락질을 할 수 없는 오른손이 순간 젓가락을 놓치고 말았다. 모두가 그 광경을 빤히 보다가 약속이나 한 듯이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윤모난이 숟가락을 잡으며 멋쩍게 말했다.

“…와, 맛있겠다.”

“팀장님, 이것도 드세요!”

안범이 얼른 말을 끊고 가장 맛있는 고기반찬을 집어 윤모난의 밥 위에 올려주었다. 무구원이 팀장님 밥부터 잘 먹이라며 신신당부한 것을 잊지 않은 것이다.

“많이 드세요. 팀장님은 식사를 너무 간소하게 하세요.”

“응.”

윤모난은 모래처럼 입안을 할퀴는 쌀알들을 천천히 씹어 삼켰다. 하지만 버틸 수 있는 건 잠시뿐이었다. 윤모난의 상태가 전반적으로 안 좋았다.

저녁을 먹은 뒤 경해국의 외조모는 그의 얼굴이 너무 안 좋아 보인다며 이부자리를 펴줬다. 경해국조차 나서서 좀 쉬라고 난리인 탓에 윤모난은 결국 이불을 덮고 누웠다. 그렇게 그가 잠자리에 든 것을 확인한 뒤, 경해국과 안범은 몰래 마당 앞에서 모였다.

“찌찌 애비, 너 팀장 잘 지켜봐. 알았어? 혹시 모르니까 시야에서 놓치면 안 돼.”

“네에.”

“우리 할머니가 저래 봬도 장정 한 여덟은 거뜬하게 해치우거든? 그러니까 걱정 말고 있어.”

경해국은 이쯤에서 다른 계획을 실행하러 떠나야 했다. 정부 청사에 근무하는 공간계 에스퍼 한 명을 납치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데려와서 설득한(?) 다음에 윤모난을 서곡 승강장으로 몰래 데려가 무간으로 보내기로 한 것이다. 물론 조카들의 무사 귀환 이후에 말이다.

그러면 모든 것이 끝이었다. 가장 험난할 것으로 예상했던 단계인 모란 사수는 무사히 마쳤으니 앞으로의 일만 착착 진행하면 된다. 경해국은 미리 알아둔 공간계 에스퍼의 외모와 동선을 확인하면서 대문을 나섰다. 골목 어귀까지 배웅을 나온 안범이 꾹 눌러놨던 걱정을 조심스레 꺼내놓았다.

“…무 선배님, 정말 괜찮으시겠죠? 선배님 가문에서 알면 위험할 수도 있다면서요.”

“걱정할 거 없다니까. 넌 무씨에 대해서 몰라.”

“네?”

“무씨 그놈… 범생이 같아 보여도 완전 미친놈이야. 팀장 셋에 팀원 다섯 때린 거 보면 몰라? 우리 예전 팀장이 정말 쌍놈이었거등. 지 때문에 죄 없는 애들이 죽었는데 작전이 성공했다며 그날 당일 술 파티나 벌였으니.”

“그래서요?”

“그래서요는 뭐가 그래서요야. 무구원이 결국 대련하자고 한 다음에 팀장을 두들겨 팬 거지. 팀장한테 동조한 팀원들까지 전부 뼈를 다 부러트렸다니까. 도축 살인마라는 별명이 괜히 생긴 게 아니다. 나중에 관리자들이 수습하러 왔을 때 무구원 그놈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피를 뒤집어쓰고 있어서 다들 기함했었지.”

시신인지 부상자인지 구분이 안 될 만큼 다져진 옛 2부 7팀 팀원들 가운데 서 있는 무구원. 그게 과연 절경이었다며 경해국이 덧붙였다. 더 골 때렸던 것은 무구원이 들것에 실려 나가는 부상자들에게 일일이 안녕을 기원하며 기도를 해줬다는 것이다.

절묘한 솜씨로 죽이진 않고 혼수상태로 만든 덕분에 과거 2부 7팀은 죽지 않고 줄줄이 사직서 내거나 전근 신청을 해 서곡에서 도망쳤다. 경해국마저 혀를 내두른 사건이었다.

“그 무씨 꼴통을 두 번이나 병원 신세 지게 한 윤 팀장도 대―애단하신 양반이지. 뭔 우리 팀은 이렇게 부침이 많은지. 아무래도 합숙소에 수맥이 흐르는 것 같어. 일 끝나면 굿이나 한판 하자구.”

“그랬다가 무 선배님이 미신 행위 한다고 때리면 어쩌시려구요.”

“젠장, 천경교는 지나 믿지 우리가 믿냐? 암튼 난 다녀온다.”

경해국은 안범을 향해 손을 흔들어 보이며 골목 쪽으로 사라졌다.

* * *

무구원은 북해의 몰이꾼들 사이에 서 있었다. 특색 없이 하나같이 무표정한 사람들 가운데 유독 진한 먹색의 눈동자는 아무런 사심도 담지 않은 것처럼 평연했다. 무구원은 다른 사람들처럼 신호에 맞춰 바닥에 무릎을 구부리고 머리를 조아렸다. 이내 바닥에 이마가 닿았다가 떨어졌다.

열에 맞춰 몸을 숙였다가 일어나는 몸짓들이 검은 파도를 일으켰다. 엄숙하게 기도문을 읊고 있는 무정원의 낮은 목소리가 소음의 전부였다. 세 번째로 일어나야 할 시점에서 무구원은 반 박자 느리게 몸을 일으켰다. 그가 있는 자리만 이가 나간 것처럼 빠졌다가 채워진다.

“우리 모두는 고통과 시련 앞에서 자아를 잃기 마련이다. 고통은 우리가 세계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통을 긍정하여 정신을 성장하게 하고 새 힘을 얻어야 한다. 그 힘은 폐허에서 창조자가 될 수 있는 권능이다. 창조자는 생명력이 가득한 조에의 땅에서 싹을 틔운다.”

“…조에에 계신 어머니 신이시여.”

21시 18분.

기도가 시작된 지 58분이 흘렀다. 무구원은 시선을 한 번 손목시계에 뒀다가 다시 앞에서 경전을 낭송하는 무정원에게 돌렸다. 어깨에 짊어진 사람이 많은 무정원의 뒷모습은 거대한 성벽 같았다.

이윽고 한 시간의 기도가 끝난 뒤, 무구원은 정리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나 앞으로 향했다. 자신에게로 다가오는 무구원을 본 무정원은 주머니에 넣어둔 검은 장갑을 도로 꼈다.

“모난이는?”

무정원이 물었다.

“무사히 빠져나와서 은신해 있는 중입니다.”

“…별다른 기색은 없고?”

“네, 조카들을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이곳은 수도에 있는 북해 가문의 별장이었다. 가주가 평의회에 참석하거나 근처에 일이 있을 때 쓰는 부관인데, 무정원이 이리로 가문의 몰이꾼들을 집합시켜놓은 상태였다. 오늘 낮 윤화신의 죽음 이후로 혹시 모르는 소요 사태를 막기 위해서 대기하는 중인 것이다. 모두가 바라던 대로 윤화신의 암살은 성공했으나 아직 축배를 들기에는 일렀다.

무정원은 모두에게 서둘러 승리에 도취하는 것을 경계하라고 당부했다. 윤화신이 죽었다고는 하지만 아직 남경이 완전히 그의 손에 떨어진 것은 아니다. 이제 또 하나의 단계를 넘었을 뿐이고, 다음으로 가기 위해서는 윤모난이 필요했다.

“무구원, 네가 자신했었지. 모난이를 전향시킬 수 있다고.”

“팀장님의 약점은 가족입니다. 일전에 보니 조카를 특히 예뻐하더군요. 목숨도 내놓을 정도로요.”

“몰이꾼 몇 명을 붙여줄 테니 남경으로 가거라.”

“인원은 최소화했으면 합니다. 인질들을 구출하기 위해서는 굳이 꽃들의 심기까지 거스를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그래, 꽃들이 아무리 오합지졸이라고 하지만 돌아가는 상황을 보니 언제든 말을 바꿀 수도 있겠더군. 이 일은 절대 그르치면 안 되니 가장 효율이 좋은 녀석들로 붙여주지.”

잠깐 침묵하던 무구원은 이내 알겠다고 대답했다. 검은 장갑을 낀 손이 손짓하자 무리들 중 몇 명이 일어나 그림자처럼 뒤에 따라붙었다. 이 일을 도와주라고 사람을 붙인 거라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을 감시하는 목적도 있음을, 무구원은 모르지 않았다. 그들은 일제히 묵례를 한 뒤에 방 안을 빠져나왔다.

“이동하겠습니다.”

무리 중 공간계 에스퍼 한 명이 나섰다. 그가 손을 뻗자 복도 한가운데 검은 화면 같은 통로가 나타났다. 무구원이 가장 먼저 그 어둠으로 발을 뻗었다. 문을 통과해서 나오자마자 익숙한 광경과 함께 차가운 겨울 공기가 느껴진다. 그 사이로 맡아지는 진한 아까시나무의 향. 멀리 떨어져 있어도 절로 남경을 떠올리게 하는 향기였다.

무구원은 이미 와본 적이 있었던 언덕 위의 하얀 저택을 올려다보았다. 대문은 방문자를 환영하듯 활짝 열려 있었다. 자갈이 깔린 길을 밟으며 북해의 일원들은 막힘없이 그곳으로 향했다.

저택 안을 지켜야 할 경호원들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이토록 무방비한 것을 보니 안이 어떤 상황일지 대충 예상이 갔다. 역시나 현관에 도착하자 저택 내부는 폐가처럼 캄캄했다. 창문도 모두 열리거나 깨져 있고 바깥으로 문서나 가구 같은 것들이 내동댕이쳐 있는 것을 보아하니, 꽃들이 이미 훑고 지나간 것 같았다.

“저택 안이 조용한데 어떻게 할까요?”

몰이꾼 중 한 명이 무구원에게 물었다.

“아이들은 여기 있다고 했어. 들어가서 찾아야지.”

“네.”

“아이는 총 세 명이야. 동쪽 복도 2층에 아이 방이 있으니 그곳으로 가자.”

꽃들은 청연을 포함한 윤모난의 세 조카들을 윤화신이 남경을 떠나자마자 저택에 감금해놓았을 거다. 그리고 암살이 성공한 이후에 인질들의 안부는 확인된 바 없다. 무정원과 꽃들은 윤화신의 암살이 목적이었지 인질의 생존 여부에 대해서는 상의한 바 없었다. 그리고 이제 아이들은 그저 윤모난을 움직이기 위한 수단일 뿐.

꽃들도 무구원이 남경으로 와 아이들을 데려가려 하는 건 모르고 있을 터였다. 현관을 통과하자 저택 안은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 안은 바깥에서 본 것보다 더 난장판이었다. 온갖 물건이 깨부수어져 있었고, 바닥에는 핏자국도 심심치 않게 있었다. 그 모든 광경을 무감하게 지켜보던 북해의 몰이꾼들은 천천히 2층으로 향하는 계단으로 올라섰다.

“아이들이 놀랄 수 있으니 너흰 잠깐 물러서 있어.”

“네.”

무구원은 아이들 방문이 보이자마자 뒤에 있는 몰이꾼들에게 명령했다. 그리고 재킷 안쪽에서 리볼버 한 자루를 꺼내 허리 뒤로 숨기며 문고리를 돌려 열었다. 끼이익― 음산한 소리를 내며 열린 방 안은 어둡고 공기도 차가웠다. 발밑으로 푹신한 카펫의 감촉이 느껴지고 몇 걸음 더 걷자 물렁한 인형이나 나무 장난감 같은 것이 발에 차였다.

“윤청연.”

안쪽에선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무구원은 윤모난의 조카 이름을 부르며 천천히 어둠에 잠긴 방 안을 둘러보았다. 그렇게 방 불을 켜려고 돌아서려는 그때 어디선가 미세하게 긁는 소리가 났다. 이를 놓치지 않고 무구원이 돌아섰다.

“청연아, 삼촌한테 데려다주려고 왔다.”

그 말에 긁는 소리가 좀 더 분명해졌다. 소리의 방향을 쫓아 방을 둘러보던 무구원은 그것이 한쪽에 있는 커다란 벽장 안에서 나는 것을 깨달았다. 문이 쇠사슬로 막혀 있어 풀어내고 문을 열자 안에 들어 있던 누군가가 와락 무구원에게 달려들었다. 따듯하고 작은 숨이 배에 닿는다.

“…청연이구나. 다시 봐서 반갑다. 나 기억하니.”

“…삼촌… 애인이요….”

청연의 작은 몸은 연약한 새처럼 떨리고 있었다. 벽장 안을 보니 어린아이 두 명이 더 있었다. 엄마를 찾으며 불안해서 울었을 어린아이들의 상태는 생각보다 괜찮아 보였으나 무구원은 혹여 몰라 질문했다.

“동생들은 괜찮은 거니.”

“제가… 돌보고 있었어요. 어머니가… 밖에 나오지 말고 동생들 잘 보살펴주라고 하셔서….”

“응.”

“삼촌… 삼촌 보고 싶어요.”

“이제 가자.”

무구원은 안으로 들어가 작은 아이 한 명은 등에, 한 명은 앞에 안고서 청연의 손을 잡았다. 아이들을 주렁주렁 달고 오는 무구원을 발견한 몰이꾼들이 작은 조카들을 넘겨받았다.

“저기… 모난이랑 작약이도… 데려갈래요.”

그때, 내내 의젓하게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던 청연이 잡은 손을 당기며 말했다. 의아한 표정으로 되묻자 아이가 다시 분명하게 요구 사항을 전달했다.

“삼촌이 키우는 뱀이요. 모난이랑 작약이도 데려가야 해요. 제 방에 있어요.”

“…너희는 먼저 현관 밖에 내려가 있어. 난 아이랑 들렀다 갈 테니.”

무구원은 따지지 않고 청연의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 먼저 몰이꾼들을 내려보냈다. 그렇게 두 사람은 복도 모퉁이를 돌아 더 안쪽에 있는 아이의 방으로 향했다. 굳게 닫혀 있는 문을 열고 들어간 청연이 바로 사육장으로 달려갔다. 그런데 이제껏 그토록 의젓하던 작은 아이의 몸이 일순간 굳는 것이 뒤에 있던 무구원의 시야에 들어왔다.

“…….”

뒷걸음질 치는 아이의 곁으로 다가가 서니 사육장 안의 사정을 단번에 확인할 수 있었다. 무구원은 커다란 손으로 얼른 아이의 눈을 가렸다. 곧바로 손바닥에서 뜨거운 물기가 느껴졌다.

“…내 뱀들…. 삼촌이… 나보고 잘 돌보라고… 했는데….”

“가자. 여긴 위험해.”

토막 나 있는 뱀의 몸뚱이를 더 보지 못하도록 무구원은 얼른 아이를 안아 올렸다. 청연은 작은 몸을 버둥거리면서 목소리를 높였다.

“싫어…! 삼촌이… 삼촌이 아끼는 뱀들이란 말이에요!! 묻어줄 거야!!”

“…안 돼! 가야 해.”

“싫어, 묻어줘야 해! 묘지에 묻어줘야 한단 말이야!”

“청연아…!”

아이는 이윽고 소리치며 울기 시작했다. 작고 힘없는 주먹이 어른의 단단한 몸을 치며 바르작댄다. 그런 청연을 놓칠세라 품에 꼭 끌어안은 무구원은 서둘러 방을 빠져나왔다. 평소 같았으면 아이의 마음을 가라앉히려 했겠지만 아무래도 불길했다.

그리고 그런 예감은 적중하고 말았다. 모퉁이를 돌아 나오는데 복도 끝에 검은 인영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청연아, 그깟 징그러운 뱀이 뭐라고. 넌 참… 네 삼촌을 닮았다니까.”

무구원은 상대를 발견하고 우뚝 섰다. 깔깔 웃는 음역대 높은 여자의 목소리. 독이 가득 서려 있는 섬뜩한 음성이다. 청연은 바로 그녀를 알아보고 약간 반가운 듯이 불렀다.

“도화 고모.”

“그래, 청연아. 고모야, 이리로 오련.”

“…안 돼. 가지 마.”

무구원은 청연의 어깨를 더 바짝 잡으며 경계했다. 윤화신 일가에 반감이 강한 꽃들은 모두 경계 대상이었다. 이제 그들은 윤모난과 같은 편이 아니며 아이들에게는 더 그렇다. 윤도화는 늘씬한 다리를 뻗어 천천히 그들을 향해 다가왔다.

“뭡니까.”

“뭐긴 뭐야? 저 아이의 당고모이지. 넌 뭐야, 누군데 청연이를 데려가는 거지. 옷을 보니까 북해네?”

“…….”

“왜 윤모난이 아니라 네가 온 거냐고, 너 뭔데.”

“말할 이유 없습니다.”

윤도화란 여자는 결코 느낌이 좋지 않은 사람이었다. 윤모난 얘기를 꺼낸 것을 보아하니 아이들을 미끼로 삼아 그를 기다리고 있었을 거다. 그녀는 확실하게 피를 볼 작정을 한 것이다. 무구원은 총의 그립 부분을 꽉 쥐었다.

“싸우려고?”

웃음기 서린 목소리가 조롱조로 물었다. 상대 쪽에서도 철컥하고 총을 장전했다. 무구원은 품 안의 청연을 난처한 눈빛으로 내려다봤다. 아이가 총을 맞을 수 있는 상황에서 함부로 총격전을 하는 건 위험했다.

“내가 기다린 건 당신이 아니야. 청연이 내려놓고 꺼져.”

“…….”

“청연아? 고모한테 오라니까!”

무구원은 품 안에서 혼란스러운 얼굴로 제 옷깃을 쥔 청연을 내려다보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아이가 다쳐서는 안 된다.

“안 그러면 어차피 조카는 두 명 더 남았으니 여기서 그냥 둘 다 쏴버릴까?”

섬뜩한 협박에 무구원은 침착하게 생각했다. 싸움이 불가피하다면 청연을 여기서 멀리 떨어트려놓는 것도 방법이다. 무구원은 포기한 척 아이를 윤도화에게로 떠밀었다. 자신에게로 비틀거리며 한 발자국씩 다가오는 청연을 보던 윤도화의 입가가 비틀리며 양옆으로 주욱 찢어졌다.

윤도화가 청연에게 손을 뻗자 무구원은 망설임 없이 그녀의 어깨 너머를 조준하고 방아쇠를 당겼다. 애먼 곳을 향한 총구를 이미 알아차린 윤도화는 놀란 표정조차 짓지 않았다.

“뭐야? 웬 허공에 총질? 북해 너 미쳤니?”

“…….”

비웃음을 받을 새도 없이 무구원은 빠르게 시간을 돌렸다. 능력의 범위를 벽에 박힌 총알로 한정했다. 그러자 직진 궤적을 그리며 앞으로 향했던 총알이 튀어 나간 속도만큼 뒤로 역행하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반대 방향으로 날아간 총알은 청연을 잡기 위해 몸을 약간 틀었던 윤도화의 어깨를 피할 틈도 없이 관통했다.

허공으로 피가 흩뿌려졌다. 윤도화가 어깨를 감싸 쥐며 몸을 수그리자 청연도 놀라 주저앉았다. 조금씩 피로 젖어드는 어깨를 바라보던 윤도화가 어금니 안쪽을 씹더니 이내 재밌다는 듯이 웃는다.

“하하, 당신 시간 능력자였어?”

“…청연아, 눈 감아라.”

아이 앞에서 가족을 죽일 순 없다. 무구원은 윤도화의 이마 중앙에 방금 전의 격발로 뜨거운 총구를 들이댔다. 그런데도 여유로운 태도를 유지하며 쇠붙이에 이마를 은근히 문질러대던 윤도화가 물었다.

“그럼 난 무슨 능력일까?”

그 말과 칼날이 살갗을 찢고 근육을 파고드는 생생한 음이 이어졌다. 이어서 무구원은 허리 부근을 움켜쥐며 뒤로 물러섰다.

“…도망가.”

그는 휘청이면서도 다급하게 청연을 뒤로 밀었지만, 두려움에 굳어버린 아이는 무구원의 옷자락을 꾹 쥐고만 있었다.

“도화 고모는 가이드라 삼촌 말고는 못 이겨요.”

“청연이 말이 맞아, 북해. 남경 윤씨 중에서는 윤모난 말고도 가이드가 하나 더 있답니다.”

“…….”

“참 부조리해. 같은 가이드로 태어난 서자 새끼는 잠깐이지만 후계자까지 됐는데 난 이렇게 애들 죽이는 백정짓이나 해야 하고. 뭐, 더러운 개들 밑에 깔려 개새끼나 낳아야 할 운명 아닌 걸 다행으로 여겨야 되나?”

윤도화는 무구원과 접촉했을 때 그의 능력을 완전히 봉쇄시킨 모양이었다. 윤모난만큼은 아니라도 그녀 역시 꽤 능력이 강한 가이드임이 분명했다. 에스퍼의 이능력을 억제하는 건 가이드라고 해서 다 할 수 있는 건 아니니까. 무구원은 자신에게 매달려 있는 청연을 제 몸으로 가렸다. 아이의 하얀 얼굴에 물감처럼 피가 묻었다.

“…아이는 해칠 필요 없지 않습니까.”

“그래, 아이가 무슨 죄가 있나 싶겠지. 어쩌겠어? 나도 마음은 아프지만 윤화신의 피를 받은 것들은 숨 쉬는 것도 거슬려서 말이야. 윤모난이 왔으면 일거양득이지만 어쩔 수 없지. 그 자식은 마지막으로 남겨둘 수밖에.”

그때 총소리를 듣고 아래층에서 대기하고 있던 북해의 몰이꾼들이 뒤에서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무구원은 칼날이 깊숙이 파고들어 내장이 쏟아질 것 같은 허리를 꽉 틀어막았다. 이윽고 뒤에서 몰이꾼 중 한 명이 손에서 전류를 뻗어 윤도화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복도가 번쩍이는 불빛과 함께 집기가 이리저리 튀고 부서지는 소리로 가득 찼다. 윤도화는 여유롭게 공격을 피하며 사정거리 안으로 빠르게 파고들었다.

몰이꾼들과 윤도화 사이에 싸움이 시작되자 무구원은 청연의 손을 끌고 다른 쪽 복도로 달려갔다. 정신없는 총소리와 고통에 찬 신음이 등 뒤를 바짝 쫓아오는 와중에 자신이 벌 수 있는 시간은 아주 잠깐일 터였다. 서쪽 복도 끝 어두운 계단으로 향한 두 사람은 1층으로 내려가서, 끝없이 늘어진 문들 중 하나를 열어 안으로 몸부터 숨겼다.

“창문으로 나가자.”

어두운 방, 무구원은 한쪽 벽에 위치한 창문으로 청연을 데려갔다. 창문틀에 뻗는 손에 차여 무언가 쨍그랑하며 쏟아졌다. 그것을 확인할 겨를도 없이 창틀을 열려고 힘을 주는데 꿈쩍도 하지 않는다. 이상한 기시감에 당황한 무구원의 시야에 그제야 바닥에 떨어진 물건이 눈에 들어왔다.

액자였다. 윤모난의 유일한 독사진이 들어 있는.

일전에 유독 자신의 시선을 끌었던, 윤모난의 무방비한 모습 위로 깨진 유리 조각이 흩어져 있었다. 여긴 윤모난의 방이다. 창문은 열리지 않는다. 무구원은 창문을 따라 놓인 액자들을 옆으로 밀쳐내며 청연에게 말했다.

“…창문을 깨야 하니까 물러서 있어.”

“피….”

“응?”

“삼촌 애인… 피 나요.”

그제야 무구원은 심상치 않을 만큼 피를 쏟고 있는 제 허리를 확인했다. 능력도 봉쇄당했는데 이런 부상을 입은 채로 청연을 무사히 구출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

무구원은 방 안에 있던 의자 하나를 힘겹게 들어 올려 족쇄처럼 잠겨 있던 창을 깼다. 그리고 침대에서 베개와 이불을 끌어와 깨진 유리 위에 깔아놓은 뒤 청연을 창틀 위로 올리며 당부했다.

“청연아, 네 능력이 필요하다.”

“네.”

“이 방에 너랑 똑같이 생긴 환영을 만들어줘. 저쪽 침대 뒤에.”

“네, 할 수 있어요.”

“그리고 넌 이 길로 뛰어서 아버지 무덤이 있는 곳으로 가라. 찾을 수 있겠어?”

“산에 지름길이 있어요. 가봐서 알아요. 거기로 가면 돼요.”

“그래, 거기 가서 숨어 있어. 누가 불러도 절대 대답하지 말아야 해…. 일단 가 있으면 내가 금방 따라갈게.”

“네!”

청연은 의지가 강한 아이였다. 겁에 질린 상황에서도 작은 손을 뻗어 무구원의 말대로 자신과 똑같이 생긴 가짜 청연을 만들어냈다. 아마 몇 분 정도는 눈속임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아이는 일전에도 어머니와 유모를 따돌리기 위해 자신을 방 안에 만들어놓고 이곳저곳을 쏘다녔던 개구쟁이였다.

무구원은 창문 너머로 아이를 넘겨 보냈다. 그렇게 뒷산 지름길이 있는 곳으로 달려가는 청연을 보며 돌아섰다. 방문 너머 발걸음 소리가 그새 가까워지고 있었다. 가이드인 윤도화를 환영만으로는 확실히 속일 수 없다. 결국 기습밖에는 답이 없을 것이다.

그는 총을 고쳐 잡은 뒤에 문을 등지고 옆으로 섰다. 상식적으로 이런 몸 상태로 저 여자를 이기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러나 아직 희망은 있었다. 에너지를 봉쇄당했다는 것은 역으로 생각하면 상대가 제 파동을 읽을 수 없다는 뜻이었다. 단 한 번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습격하면 된다.

무구원은 숨을 죽이고 문이 열리기만을 기다렸다. 옆방을 확인하는 소리가 들렸으니 이제 이쪽을 열 차례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끼이이익 문고리가 돌아가며 추격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무구원은 주저하지 않고 방아쇠를 당겼다. 탕―! 회심의 일발이었다.

* * *

“팀장님?”

“…끄윽.”

“팀장님, 괜찮으세요?”

가뜩이나 흰 안범의 얼굴이 더욱 창백해졌다. 경해국의 당부대로 윤모난을 시간마다 확인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그의 상태가 급변했던 것이다. 온몸이 식은땀으로 흠뻑 젖은 윤모난의 몸이 뒤틀리듯이 경련하고 있었다. 흔들어 깨우려 시도해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혀, 혀 깨물 수 있으니까.”

아픈 어머니를 간병했었던 안범은 고통에 신음하는 사람을 대하는 것에 익숙했다. 그는 윤모난의 셔츠 단추를 풀어주고 입에 가제 수건을 입에 물린 다음 얼음장처럼 차가운 몸을 계속 주물렀다. 그렇게 능숙하게 처치하면서도 안범의 눈에서는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형… 끄으윽….”

“팀장님….”

“…조금만 더…. 제발….”

“조금만 참으세요. 이제 무 선배님이 조카들 데리고 올 거예요. 이제 곧이에요. 곧….”

“제발….”

“괜찮아요. 다 괜찮을 거예요. 무 선배님만 믿으세요.”

안범은 따뜻한 물에 수건을 적셔 식은땀으로 젖은 윤모난의 얼굴을 닦으며 ‘무 선배님만 믿으라’고 되뇌었다. 그에게 윤모난은 첫 만남에서부터 내심 감탄했을 만큼 용맹하고 단단한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짧은 사이에 이런 상태가 되다니.

안범은 휠체어에 앉은 채 침대 위로 허리를 숙여 작은 자신의 품으로 윤모난을 안았다. 얼굴은 이미 눈물 범벅이었다.

“팀장님, 괜찮아요. 여기예요. 여기가 삶이에요. 돌아오세요.”

“…으.”

“가지 말고 돌아오세요. 여기로.”

“…….”

“죽지 마세요….”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두 사람의 눈물과 땀으로 젖은 안범의 연한 갈색 머리카락을 무언가가 툭, 하고 건드렸다. 팔 하나 드는 것마저 힘겨워 보이는 윤모난의 손끝이 그에게 닿은 것이다.

“…약.”

힘없는 목소리가 약을 찾았다. 약을 먹는다는 것이 윤모난에게는 희미한 삶의 의지를 확인하는 일이라는 것을 안범은 모르지 않았다. 다행히 무구원이 미리 주고 간 약통이 있었다. 안범은 약 두 알을 손바닥에 쏟아낸 다음 부르튼 윤모난의 입 사이로 넣었다.

베갯머리 위에 자리끼로 떠놓은 물도 조심스럽게 먹였다. 그러자 약효가 빠르게 도는지 잠시 후 윤모난의 몸이 점차 이완되며 축 늘어졌다. 안범은 그를 다시 자리에 눕히고 이불을 덮어주었다.

“주무세요, 팀장님.”

“…응.”

하지만 대답을 하고서도 윤모난은 혼탁한 눈빛으로 허공을 바라볼 뿐 눈을 감지 않았다. 눈을 감으면 시작되는 악몽 탓에 도저히 잘 수가 없었다. 이를 알 리 없는 안범은 윤모난의 눈꺼풀을 손으로 덮으며 자야 한다고 계속 설득했다. 윤모난은 눈이 무겁게 덮인 채로 입을 열었다.

“…서곡으로 돌아가면 겨울쯤에는 구호조로 갈 수 있을 거야. 내가 미리 손써놨어. 이번 일만 아니었다면 더 빨리 갔을 텐데… 조금만 참아.”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에요. 얼른 주무세요.”

“경해국이랑 무구원도… 북해로 가게 될 거니까 돌아가기 전까지 너네 셋은 더 문제 일으키면 안 돼. 내 말 무슨 뜻인지 알겠어? …날 어떻게 무간으로 보내겠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서곡으로 날 데려가면 너희에게 책임을 물을 거다. 섣부른 행동 하지 마.”

“서… 섣부른 행동을 하다니요. 팀장님, 그런 일 없어요. 일단은 아무 걱정하지 마시라니까요!”

서투른 안범의 거짓말에 윤모난은 작게 숨을 내뱉었다. 역시 무리한 계획을 세워두고선 일단 밀어붙일 생각이었겠지. 안범은 부산스럽게 굴며 아니라는 말만 세 번 이상을 했다. 하지만 윤모난으로서는 아까 마당에서 경해국과 속닥거리는 걸 들어버린 이상 모른 척할 수는 없었다.

“내 조카들이 오면…. 거기까지야, 너네 도움을 받는 건. 경해국이 납치해 올 사람은 얼른 돌려보내.”

윤모난의 단호한 말을 못 들은 척 안범은 서둘러 방에서 빠져나왔다. 왠지 모르게 초조해진 채 휠체어 바퀴를 밀며 마당으로 나가는데, 마침 밖에서 인기척이 났다. 쾅! 하고 대문을 걷어차고 등장한 경해국이 바닥에다 무언가 꿈틀거리는 자루를 내려다 놓았다. 그들이 납치하기로 한 공간계 에스퍼일 터였다.

“납치 성공!”

“경 선배님, 큰일 났어요! 팀장님이 다 눈치채셨어요오오!”

안범은 사색이 되어 외쳤다. 이후에 사정을 전해 들은 경해국은 얼굴을 찌푸리며 뒤통수를 벅벅 긁었다.

“젠장, 조용히 돌려보내라구? 안 될 텐데….”

“네?”

자루를 풀어 안에 있는 사람을 확인한 안범이 입을 떡 벌렸다.

“경 선배님, 너무 많이 때리셨잖아요!”

“썅, 저항이 생각보다 세서 어쩔 수 없었다고. 주변에 들킬 것 같기도 하고 곧 통금 시간인데…. 어째, 패는 것밖에 답 없잖아.”

“이 상태로 능력을 쓸 수 있는 건 맞아요?”

“아, 몰라.”

경해국이 밧줄 하나를 가져와 죄 없는 에스퍼의 몸을 꽁꽁 묶어 지하로 데려가기 위해 어깨에 둘러멨다. 안범도 들킬세라 얼른 도왔다. 그러고 있는 사이에 현관문이 열리며 윤모난이 나타났다.

“내려놔.”

안범과 경해국은 도둑질을 들킨 아이처럼 몸이 굳었다.

“얼른 돌려보내.”

“엑? 이 사람을 얼마나 힘들게 데려왔는지 아십니까? 그리고 무씨, 그놈이 지랄할 겁니다.”

“너네 다 잘릴 수도 있어. 탈주범 방조도 모자라 납치범까지 될 셈이야? 경해국, 너 북해 안 갈 거야?”

“이미 저지른 일에 빠꾸는 없습니다!”

“백번 양보해서 경해국, 무구원 너네는 몰라도 안범 앞날은 생각해야지!”

그때 경해국과 윤모난 사이의 말싸움을 듣기만 하던 안범이 갑자기 손을 번쩍 들었다. 두 사람의 칼날 같은 시선이 날아와 꽂히자, 안범이 더듬거리면서도 제 의견을 표명했다.

“제 앞날은… 제가 알아서 합니다.”

“…뭐?”

“팀장님, 제 앞날은 제가 결정할 거예요. 시… 신경 쓰지 마세요!”

“너 구호조 가고 싶다며? 잘려도 돼?”

“가고 싶으면… 제 능력으로 갈 거예요. 저 어린애 아닙니다. 저도 어른입니다!”

“아직 애착 인형이나 가지고 다니면서 무슨 어른이야! 안범, 넌 아직 어리고, 그런 널 돌보는 건 팀장인 내 책임이야. 그러니까….”

그 순간, 안범이 휠체어 바퀴를 움직여 윤모난을 지나쳐선 집 안으로 사라졌다. 대화 중에 갑자기 도망친 안범의 뒷모습을 허망하게 보고 있는데, 이윽고 안범이 무릎에 무언가를 얹은 채로 나왔다. 치치였다.

“…제가 어른이란 걸 증명하면 되죠?”

“뭐야, 이건 왜 여기까지 가지고 왔어?”

“제가 가는 곳에는… 항상 치치도 갑니다. 하지만… 경 선배님, 치치를 태워주세요!”

“…….”

“저 이제 어린애 아니에요. 끄윽…. 애… 애착 인형 필요 없다구요!”

“미쳤구나, 미쳤어.”

윤모난은 맥을 놓은 것 같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 와중에도 안범은 경해국에게 치치를 들이밀며 의지를 관철하고 있었다.

“제가 제 일은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는 거 증명할 테니까, 팀장님도 이젠 저한테 뭐라 하지 마세요!”

“찌찌 애… 아니 안범. 너 진심이야? 나 진짜 태워버린다. 무씨 없어서 되돌릴 수도 없어.”

“…하세요.”

참으로 결연한 각오였다. 그렇게 윤모난이 미처 말리기도 전에 불길이 화르륵 타올랐다. 순식간에 불길 안에 가둬진 치치의 꼬질꼬질한 털이 타는 냄새가 주변으로 퍼졌다. 말씨름을 멈춘 세 사람은 넋을 놓고 멍하니 그 광경을 쳐다보았다.

이 무슨 분신을 통한 의지의 표현일까. 안범은 안간힘을 다해 눈물을 꾹 참으며 재가 되어가는 치치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착잡한 마음에 윤모난이 연거푸 마른세수를 하며 심란한 얼굴로 물었다.

“안범 씨, 치치는 아버지 유품이잖아. 이렇게까지 할 가치가 있어?”

“아뇨, 치치는 어린 저예요, 팀장님.”

안범은 물기가 가득 담긴 눈으로 윤모난을 올려다봤다. 불빛이 비쳐 갈색 눈동자가 호박색으로 반짝인다. 그는 힘주어 다시 말했다.

“치치는 제 나약함이었습니다. 치치를 태웠으니 저도 이제 팀장님처럼 강해질 겁니다.”

“…….”

“이제 다시는 두렵다고 울지 않을 거예요.”

아니, 눈물을 흘리는 것은 부끄러워할 일이 아니다. 그건 감정에 솔직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자기표현이니까. 하지만 윤모난은 부러 더 말하지 않았다. 자신이 어제보다 더 나아졌음을 증명하는 건 흘리는 눈물의 양이 아니라 오늘의 선택일 것이다. 그는 안범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그럼 죄 없는 사람은 보내.”

“…네?”

“네가 선택해, 안범.”

윤모난은 더 강요하지 않고 다시 집 안으로 돌아갔다. 그런 그의 뒷모습을 보던 경해국과 안범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쳤다가 자신들이 납치해 온 공간계 에스퍼에게로 떨어졌다. 이윽고 경해국이 나지막이 욕을 지껄였다.

“시팔.”

치치는 완전히 연소되어 마당 한가운데 검은 잿더미로 변해버린 상태였다. 20년 가까이 자신의 곁을 지킨 인형의 마지막을 지켜보던 안범이 이윽고 입을 열었다.

“선배님, 팀장님 말이 맞는 것 같아요. 돌려보내요.”

“…그래. 윤 팀장이 저렇게 나오는데 뭔 수가 있겠냐.”

“그게 아니라, 공간계 에스퍼가 없으면 팀장님도 무간에 못 가시잖아요.”

“뭐?”

안범은 돌연 생각이 바뀐 듯 눈을 반짝 빛내며 말했다.

“갈 방법이 없으면 팀장님도 무간에 안 가실 테고. 그럼 더 오래 살 수 있는 건데… 왜 그 생각을 지금껏 못했죠?”

“야, 안범. 너 무씨가 했던 말….”

“팀장님도 무간에 안 가시려는 거예요! 그러니까 저희한테 이 사람을 돌려보내라고 한 거죠. 제 말이 맞죠? 왜냐하면… 왜냐하면 이제 조카들도 올 테고… 그리고.”

무 선배님도 있으니까! 안범은 윤모난이 생각을 바꿨을 가능성을 생각하느라 점점 흥분했지만, 경해국은 도저히 그 비약에 가까운 생각을 따라가지 못했다. 안범은 신나는 얼굴로 납치해 온 남자의 몸에서 밧줄을 끌렀다.

“경 선배님? 뭐 하세요. 이분 얼른 보내야죠.”

“…이게 뭔 소린지…. 뭐 일단 알았다.”

복잡한 생각 따위 하기 싫었기에 경해국은 결국 납치해 온 보람도 없이 남자를 도로 둘러멨다. 그리고 적당한 장소에 데려다 놓기 위해 다시 대문을 나섰다. 한참 시간을 들여 인질을 돌려보내고 오자, 벌써 통금 시간이 끝나는 새벽 5시였다. 개미 한 마리 없는 새벽의 거리에 통금 해제를 알리는 사이렌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밤새 잠들어 있던 도시를 깨우는 요란하고 폭력적인 소음이었다. 경해국은 오는 길에 생전 처음으로 가판대에서 조간신문 한 부를 샀다. 신문 1면을 장식한 건 당연히 어제의 사건이었다.

「서자가 자신의 아버지를 죽이다」라는 헤드라인 아래의 깨알 같은 글씨들을 대충 읽어보니 예상한 대로 평소 자신의 출신을 비관한 정신병자 서자가 사형을 선고받은 뒤, 홧김에 자신의 아버지이자 남경의 가주인 윤화신을 죽였다는 내용이 설명되어 있었다.

기사의 마무리에는 남경의 가주인 윤화신의 비리와 독재를 고발하는 내용이 암시적이면서도 노골적으로 쓰여 있었다. 신문은 그의 죽음을 남경에 피를 뿌린 독재자의 말로라며 다소 강한 어조로 비판했다. 완벽한 몰락이었다. 경해국은 쩝, 하고 쓴 입맛을 다시며 신문을 접어 휴지통에 던져버렸다.

“무간에 안 가도… 이 지경인데 어떻게 사느냐고, 씨….”

결국 살아남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가 문제이다. 둔한 경해국의 머리로 생각해도 이제 반도에서 윤모난이 살아갈 방법은 없다. 애초에 살 의지가 별로 있는 사람도 아니지 않은가.

만에 하나라도 무구원이 조카들을 구하는 데 실패라도 한다면…. 경해국은 고개를 내저었다. 설마 그 정도로 일이 꼬일까 싶었기에 초를 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 * *

비척비척 한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워커 안에 고인 피가 철벅거리는 소리가 났다. 벌써 날이 밝은 지 한참이 되었다. 무구원은 기계처럼 다리를 움직여 밤사이에 촉촉해진 흙에 남아 있는 청연의 작은 발자국을 쫓았다. 겨우 윤도화를 따돌리기는 했지만 무거운 몸이 얼마나 더 거리를 벌릴 수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었다.

더 절망적인 상황, 더 엉망인 상황에서도 살아남은 그였다. 무구원은 끊임없이 피를 뿜어대는 하복부를 손으로 꾹 압박했다. 하지만 이미 피를 많이 흘린 탓인지 시야가 자꾸 희뿌옇게 번진다. 지름길 양옆으로 우거진 수풀과 나무가 진동하며 흔들리는 것처럼 보였다. 순간 세상이 뒤집히는 듯 어지러운 느낌에 발을 헛디딘 몸이 옆으로 무너졌다.

겨우 나뭇가지를 붙들어 아래로 굴러떨어지는 것만은 면한 무구원은 힘이 빠지려 하는 무릎을 굽혀 다시 땅을 밟고 몸을 지지해 일으켰다. 다리는 쉼 없이 앞으로 앞으로 나아갔다. 청연의 발자국은 무사히 가족 묘지로 향해 있었다. 아이의 발자취에 힘을 얻어 조금 속도를 붙이자 금세 어두운 숲길 너머로 하얀색의 익숙한 풍경이 보인다.

무구원은 익숙한 길을 밟아 일전에 윤모난과 왔던 길로 올라갔다. 작약의 빈 무덤이 있는 곳으로. 바닥에 흩어진 아까시나무꽃이 그를 위한 길을 밝히고 있었다. 여기라는 듯이. 흰색의 순결한 꽃길 위로 붉은 피를 뿌리면서 무구원은 땅만 보고 달렸다.

이윽고 예전에 윤모난을 기다렸던 나무가 있는 곳까지 당도했다. 사위가 조용하다. 거칠게 몰아쉬는 그의 숨만이 유일하게 이곳을 울렸다.

언덕을 마저 올라가기 전에 무릎이 꺾였다. 밤새 차갑게 얼어붙어 베일 것처럼 거친 풀이 뺨에 닿았다. 그러자 땅만 보고 걷느라 일전에는 보지 못했던 것이 눈에 띄었다. 작약의 빈 무덤 앞에 누군가 서 있었다.

“…팀장님.”

윤모난이다. 그가 검은 코트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묘지의 석상처럼 우두커니 서서 먼 곳을 보고 있었다. 그게 윤모난일 리 없는데도, 실혈로 인해 정상적인 판단을 하지 못하는 무구원은 정말로 그가 여기에 온 것이라 착각했다.

그럼 된 거다. 그가 왔다면… 청연도 무사할 거다. 착각을 위안 삼으려는 정신이 안심하고 눈을 감으라 무구원을 부추기고 있었다. 하지만….

“구원아.”

“…….”

“넌 꺾이지 마. 죽는 게 아니라 사는 길을 선택해.”

언젠가 들었던 그 말에 무구원은 서로 달라붙을 것처럼 무거운 눈꺼풀을 힘겹게 들어 올렸다. 오른쪽 귀에서 흐르는 검은 피가 얼굴을 가로질렀다. 무구원은 둔해져가는 정신을 깨우치며 생각했다.

여기 윤모난이 있을 리 없다. 청연은 자신이 구해야 한다.

무릎을 굽혀 일어서려 여러 번 시도한 끝에 겨우 몸을 일으킬 수 있었다. 그는 한 걸음 한 걸음 디디며 언덕을 올라갔다. 빈 무덤 앞에 다다르자 한 가지 목적만을 위해 겨우 버티던 다리가 결국 꺾이며 무너졌다.

작의 묘비 앞에 흰 아까시나무 꽃잎이 소복하게 모여 있었다. 무구원은 홀린 듯이 손을 뻗었다. 그런데 보드랍고 가벼워야 할 꽃잎 대신 얼음장처럼 차가운 무언가가 대신 손에 닿는다.

“…….”

그제야 희끄무레했던 아이의 형체가 뚜렷해진다. 무구원은 손을 옮겨 아이의 숨부터 확인했다. 사위는 계속 조용했다. 차갑게 굳은 무구원의 곁으로 윤모난의 환영이 다가왔다. 환영은 일전에 봤던 풀잎이라는 죽은 고양이처럼 청연의 주변을 유령처럼 부유했다.

손을 뻗어 아이를 만지려고 하기도 했지만 몸을 통과하기만 할 뿐 품어주지는 못한다. 조카가 마지막으로 만들어낸 삼촌의 모습은 남경에서 마지막으로 봤을 때처럼 검은색 치안조 코트를 입고 있었다. 그게 결국 삼촌과 조카의 마지막 만남이 되어버린 것이다.

“청연아, 삼촌이 뭐랬어. 죽은 사람이나 동물들은 환영으로 만들면 안 된다고 했잖아.”

“…네.”

복도에서 윤모난이 조카에게 부드럽게 일렀더랬다. 청연이 불러낸 흰 고양이가 주변을 맴돌다가 사라지고, 청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윤모난이 슬픈 얼굴로 말했었다.

“그리운 사람이 있으면 환영으로 불러내는 게 아니라, 청연이가 기억하면 되지.”

하지만 누군가를 너무 그리워하면 때로는 그저 기억하는 것만으로는 모자라지 않을까. 흰 아까시나무를 등지고 서 있는 윤모난의 환영은 웃고 있지만 슬퍼 보였다. 순수하게 청연의 주관이 만들어낸 삼촌의 모습이란 그런 거였다.

무구원은 잠든 것처럼 누워 있는 청연에게로 손을 뻗었다. 아직 온기가 미처 식지 않았다. 시간을 돌리면 된다. 그러면 아이를 살릴 수 있다. 내가 가진 한계를 뛰어넘는다면. 이전에도 스스로의 목숨을 살렸듯이 청연의 목숨도 어쩌면…. 무구원은 자신의 온 정신을 집중했다.

어린 시절 차가운 바다에 빠졌을 때처럼 몸 깊숙한 곳의 에너지를 깨우려 했다. 반응하지 않으면 더 세게 두드리면 된다. 한계를 넘으려는 시도에 신경이 터져나가려는 듯 온몸이 바늘에 찔리는 것처럼 아팠다.

시간을 돌리는 건 물길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과 같다. 능력을 쓸 때면 거센 물길을 거스르는 것처럼 몸이 쪼개지는 고통이 늘 동반된다. 그건 시간 능력자의 고질병이었다. 시간의 물결이 느리게 무구원을 스치고 있었다.

하지만 보통 사람은 느낄 수도 없는 0.003초의 느린 시간만을 겨우겨우 돌렸는데도 가혹한 시간의 물결은 그마저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 그를 향해 쏟아졌다. 흰 꽃잎 위로 핏방울이 점점이 떨어진다. 청연이 만든 환영이 무구원을 바라보고 있었다. 환영도 점점 흐려지고 있었다. 무구원은 울컥하고 튀어나오는 기침을 참지 못하고 바닥에 토해냈다.

절망의 끝에서 손에 잡히는 잔디를 꽉 그러쥐었다. 청연을 살리지 못한다면 윤모난에게 영원히 비난받게 될 것이다.

“그렇게 애를 쓰고서도 못 구했네.”

순간 무구원의 처절한 노력을 비웃는 목소리가 들렸다. 이미 반쯤 정신을 잃은 무구원은 그것이 윤모난이 말하는 거라고 착각했다. 하지만 사실 그건 여자의 목소리였다. 윤도화와 윤이화 남매가 자박자박 잔디를 밟으며 다가왔다.

윤이화는 아이의 생사에 대해서는 이미 알고 있었던 듯 비릿한 눈매로 둘을 바라보았다. 무구원은 그제야 자신이 저택에서 붙들려 있는 사이에 이 남자가 직접 어린 혈육을 죽였음을 직감했다.

“북해에서 온 모난이네 팀원이군. 북해 가주의 동생이고 말이야. 시간 역행 능력이 있다던데 성가신 일은 없겠지?”

오라비의 염려에 윤도화가 비시시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걱정할 일은 없을 거란 뜻이었다. 그러자 윤이화가 냉정한 얼굴로 청연을 확인하며 중얼거렸다.

“…청연이를 보면 모난이도 못 견디고 자살할 거야. 이대로 둘을 모난이 있는 곳으로 돌려보내 직접 보여줘야 해.”

그 말에 생각만 해도 속이 시원하다는 듯이 깔깔 웃는 여자의 웃음소리가 조용한 묘지를 스산하게 울렸다. 무구원이 숨을 쉬지 않는 아이를 제 품에 꽉 끌어안는 것과 동시에 공간계 능력자인 윤이화가 능력을 썼다.

“당신이 모난이에게 청연이를 데려가도록 해.”

조카 청연의 죽음은 윤모난을 죽일 칼이다. 이 상황이 그를 무너트릴 것을 알고 있음에도 무구원은 그것을 전달하기 위해 윤모난에게로 가야 했다.

그가 정신을 차렸을 땐 어느새 수도였다. 그 이후부터는 본능적으로 다리를 움직였던 것 같다. 아이를 삼촌에게 데려다줘야 한다는 생각 하나로.

골목 안쪽으로 파란 대문이 보였다. 차갑게 식은 작은 몸이 품속에서 계속 늘어져 한 걸음씩 걸을 때마다 늪에 빠지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무구원은 아이를 한시라도 빨리 삼촌의 품에 안겨주기 위해 머뭇거리지 않고 발걸음을 옮겼다.

마침내 대문 안으로 들어가자 마당 가운데 익숙한 분홍 머리가 눈에 들어왔다. 종착지에 다다르자 모든 순간들이 늘어지는 것처럼 보였다. 앞이 뿌옇게 번지고 식은땀마저 너무 차갑게 느껴져 감각신경들이 비명을 지르는 것 같았다.

“…ㄴ 돼요! 팀장님!”

누군가의 고함에 무구원은 떨궜던 고개를 들었다. 품에 청연이 없었다. 허전한 손을 허망하게 내려다보는 사이에 휘청이던 몸이 거센 힘으로 끌어 올려졌다. 무구원은 그제야 윤모난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청연이가… 왜 숨을 안 쉬어?”

도통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윤모난이 물어온다. 그 질문도 겨우 한 듯 입가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무구원은 멍해졌다. 저 입가에 미소를 짓게 만들어주고 싶었는데.

“내가 약 먹어서 안 느껴지는 거지? 무구원, 말해봐.”

“…제가, 못 구했습니다. 막지도 못했고…. 시간도 못 돌렸습니다.”

“그래서?”

“다 제 잘못입니다.”

순간 말릴 틈도 없이 주먹이 얼굴로 날아왔다. 경해국과 안범이 달려와 양쪽에서 윤모난을 붙들었지만 소용없었다. 그는 악을 쓰듯 절규했다.

“…희망을 주지 말았어야지!”

“팀장님… 그만, 무 선배님도 많이 다치셨어요!”

“…왜 날 살려서… 이걸 보게 만들어…. 왜, 왜….”

윤모난은 충격에 빠져 비틀거렸다. 이어서 그는 경해국의 외조모 손에 들려 있던 청연을 데려갔다. 하지만 아이의 손길은 삼촌의 어깨를 감아오지 않는다. 그렇게 보고 싶었던 삼촌을 보았는데도 웃어주지 않았다. 그저 침묵뿐이었다.

미련한 삼촌은 핏기 없는 손을 쥐어 제 뺨에 붙이며 애타는 목소리로 사랑하는 조카를 불렀다.

“…청연아.”

아이의 뺨 위로 윤모난은 뜨거운 눈가를 비비면서 부르고 또 불렀다.

“청연아, 삼촌이야.”

조카의 목숨을 살리려고 아버지의 피를 묻힌 손이 머리칼과 식은 뺨을 하염없이 쓸어내렸다. 하지만 아이는 죽었다. 윤모난의 유일한 미래였던 청연이 죽었다.

“청연아.”

몸 전체가 들썩일 만큼 떨고 있는 윤모난을, 마당에 있는 나머지 사람들은 한마디도 얹지 못한 채로 지켜보기만 했다.

“…삼촌이 너한테서 멀어지면 다 괜찮을 줄 알았어…. 미안해. 미안해. 미안해….”

차디찬 아이의 몸을 어루만지고 어쩔 줄 몰라 하면서 윤모난은 계속 닿지 않을 사과만 읊조렸다.

과거, 무간, 미로, 작약… 그리고 청연. 모든 죽음들이 그에게로 쏟아져 내린다. 삶을 이어가면 이어갈수록 과거, 무간, 미로, 작약, 그리고 청연의 다음에 끊임없이 무언가가 추가될 것만 같았다.

오늘 하루를 견딘다고 해서 내일 웃을 수 있을까. 오늘의 상실을 감내하고 내일을 사는 것이 의미가 있는가?

“…….”

윤모난은 멍하니 허공을 봤다. 그러고 보니 아까 전부터 형이 보이지 않는다. 분명히 늘 주변에 머물며 말을 건넸는데…. 고문을 당했을 때도, 구치소에 있을 때도…. 그리고 아버지를 죽일 때도. 늘 무간에서 자신을 기다린다고 했었다.

“어디 가십니까? 안 됩니다!”

경해국이 손을 뻗어 말리려고 하자 윤모난이 돌아보며 중얼거렸다.

“…형이 없을 때 가야 해. 아니면 또 형이 쫓아올 거다. 지금이… 아니면… 안 돼.”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에 경해국이 얼굴을 굳히고 입을 다물었다. 모두가 심각한 얼굴로 그 광경을 보는 사이에 윤모난은 청연을 안고 무구원을 지나쳐 대문 밖으로 향했다. 여기까지 온 것만 해도 기적이라 할 수 있을 만큼 엉망이 된 무구원이 다급하게 그를 붙잡았다.

“왜?”

“…팀장님.”

“왜?”

“…안 가시면 안 됩니까?”

“내가 왜 여기 있어야 하는데?”

그건 ‘내가 왜 살아야 하는데?’와도 같은 의미였다. 그 질문에 무구원은 할 수 있는 대답이 없었다. 지금 할 수 있는 진부한 말들은 모두 기만일 뿐이니까. 무구원은 그래도 대답하고 싶었다. 그에게 삶의 의지를 조금이라도 일깨워주고 싶었다.

하지만 윤모난은 미련 없는 얼굴로 무구원을 뿌리쳤다. 아무도 그를 붙잡을 수 없었다. 허무하게 무구원이 그를 놓쳐버리자 뒤에 서 있던 경해국의 조모가 호통을 친다.

“해국아, 네가 얼른 따라가! 정신을 완전 놔버린 것 같은데 니들마저 이러고 있으면 어째!”

“…할머니.”

“이놈아, 포기하려는 사람이 있으면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사람도 있어야지! 너네도 포기하려고 하면 어떡해!”

노인의 호통에 정신이 돌아왔는지 경해국이 나섰다.

“무씨, 내가 안범이랑 쫓아가볼게. 저러다 윤 팀장 큰일 난다.”

“…….”

하지만 무구원은 멍하니 서서 계속 윤모난이 사라진 쪽을 볼 뿐 대답하지 않았다. 경해국은 외조모에게 무구원의 상처 치료를 부탁하고 안범의 휠체어를 끌고 대문 밖으로 향했다. 하지만 그새 윤모난은 어딘가로 사라져서 보이지 않았다.

“경 선배님, 저기로 가봐요!”

“…젠장! 개새끼들…. 어린아이까지….”

경해국은 살인마들에 대한 비난을 중얼거리며 안범을 데리고 길목까지 나갔다. 비극은 비극이지만 저 시한폭탄을 그대로 둘 수는 없었다. 어떻게든 붙잡아서 아이를 제대로 보내주게 하고, 그 뒤를 꾀해야지 저런 감정적인 상태는 위험했다. 더욱이 윤모난은 정신도 불안정하고 고문과 수감 생활로 몸 상태도 좋지 않았다.

“안범, 네가 어떻게든 윤 팀장 설득해야 해! 알았어?”

“…팀장님.”

안범은 울먹거렸다. 운명이 너무나도 가혹하다는 생각에 남인 자신조차 견딜 수 없는데, 어떻게 감히 그를 설득한단 말인가. 대체 어떤 명목으로, 어떤 말로 그를 살게 할 수 있을까. 더욱이 불행은 눈덩이처럼 한 번 탄력을 받으면 금세 몸집을 불리기 마련이었다.

그 순간. 쿵―! 하고 발아래서 대지가 진동하며 울렸다. 두 사람은 충격을 완화하기 위해 몸을 움츠렸다가 본능적으로 충격이 전해진 쪽을 돌아봤다. 몇 킬로 안에서 폭탄이 터진 듯한 진동이었다.

“뭐….”

쿵―! 순간 한 번 더 땅이 울리며 디디고 선 아스팔트에 쭉 금이 갔다. 온몸으로 충격이 그대로 전달될 정도로 센 진동이었다. 그 순간 안범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이건 익숙한 무언가의 전조였다.

“이건….”

“안범!”

이 전조를 모를 리 없는 경해국이 재빨리 안범을 등에 둘러업고 달리기 시작했다. 길거리를 내달리는 두 사람의 반대 방향으로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달려가고 있었다. 역행하는 인파 속에 갇힌 둘은 고개를 빼고 일제히 하늘을 바라봤다.

“무간에 균열이 났다!”

누군가 외치는 소리에 맞춰, 비상경보가 요란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쿵―! 아까보다 더 거세진 진동에 맞춰 여기저기서 비명이 터졌다. 둘은 겨우 사람들을 헤치고 도로로 나갔다. 도시의 고층 빌딩 사이로 초록색 빛무리가 얽혀 있었다. 사색이 된 안범이 등 뒤에서 외쳤다.

“경 선배님! 사람들이요. 사람들부터 대피시켜야 해요. 여기로 트랜스가 몰려올 거예요.”

“나도 알아! 젠장… 너 할 수 있어?”

“저기 차 보닛 위에 저 좀 올려주세요! 여기서 저지해요! 곧 전투조가 올 테니까 사람들 대피할 때까지만 버티면 될 거예요!”

경해국은 안범의 말대로 그를 도로 위에 선 차 보닛 위에 올렸다. 마음의 준비를 길게 할 시간도 없었다. 전방에서 익숙한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끼이이이이이이―!!

트랜스들이 동족들을 부르는 신호였다. 마치 철판을 바늘로 긁어내는 듯한, 듣기만 해도 오금이 저릿한 소리였다. 피를 부르는 소리였고 전투조에게는 전쟁의 신호탄이었다. 저 끝에서 벌써부터 까만 무언가가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재앙이 닥쳐온다.

“이 개새끼들, 왜 하필 오늘이야?”

경해국은 손끝에서 화염을 흘려보냈다. 상황이 상황인 만큼 세기를 조절할 필요는 없었다. 최대한을 발휘해도 역부족일 테니까. 장벽처럼 치솟은 불길이 길을 가로막자 자극받은 트랜스들이 더 크게 울기 시작했다.

경해국은 혀를 크게 차며 주위를 살폈다. 이 정도 범위의 불을 유지하는 건 10분이 최대였다. 그 안에 무슨 수를 써야만 했다.

“경 선배님! 하늘에서도 날아옵니다! 지상은 제가 맡을게요!”

안범이 화염 위로 투명한 막을 씌웠다. 에너지를 쓰지 않아도 불이 유지되자 경해국이 장막을 뛰어넘어 하늘에서 날아드는 트랜스를 때맞춰 물리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이렇게 튀어나오는 트랜스가 늘어난다면 둘이선 역부족이었다.

탕―!

그때 뒤에서 총성과 함께 빌딩 사이에 숨은 사람을 향해 아가리를 쩍 벌리던 트랜스의 머리가 퍽, 하고 터졌다. 머리가 반쯤 날아가고도 뇌수를 질질 흘리며 꿈틀대던 트랜스가 날카로운 손톱을 휘둘러대자, 또 한 번의 격발음과 함께 손의 한가운데가 터져나갔다. 그 소리에 경해국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소리쳤다.

“무씨! 너 왜 나와? 배 터져 뒈지고 싶냐!”

그 말이 끝나자마자 경해국이 뭔가에 맞아 뒤로 튕겨 나갔다. 상태를 확인할 틈도 없이 무구원은 보닛 위에 앉은 안범을 끌어당겨 뒤로 숨겼다. 안범은 말을 듣지 않는 자신의 다리를 퍽퍽 두드리며 탄식했다.

“무 선배님, 생각보다 트랜스 수가 많은 것 같아요. 왜 하필이면… 오늘….”

차원에 균열이 나는 사고는 심심치 않게 일어나는 일이지만, 안범의 말대로 왜 하필이면 오늘이냐 싶었다. 세 사람은 소지하고 있는 무기도 많지 않았다.

청연을 구하러 갈 때 무구원이 소지하고 있던 글록의 장탄은 각각 17발짜리였고, 가지고 있던 두 자루 중에서 이미 8발 이상을 소모했다. 무구원은 탄창이 비교적 가득 찬 글록을 안범에게 넘겨줬다.

“괴물에게 먹히거나 괴물이 될 것 같으면 한 발은 써야 하니 아껴둬.”

“…….”

안범은 의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경해국은 알아서 분신할 테니 총은 필요 없겠지.”

“앗! 맞다. 경 선배님!”

그제야 안범이 경해국이 생각난 듯이 그가 날아간 쪽으로 외쳤다. 저 멀리서 ‘씨팔, 팀워크도 없는 새끼들!’이라며 욕지거리가 들려오는 걸 보니 무사한 것 같았다. 무구원은 안범을 어깨 위로 둘러메고 경해국이 있는 곳까지 달려갔다.

“젠장… 이러다 팀원 전체가 제사상 받게 생겼네….”

경해국은 팔이 부러졌는지 얼굴을 찌푸리며 신음했다. 세 사람 모두 심각한 부상을 당해 움직이기 힘든 상황이었고, 이대로라면 모두 죽을 판이었다. 결국 이능력이 고갈될 때까지 어떻게든 버티며 전투조가 투입되기를 기다리자고 생각했던 것도 잠시였다.

조금이라도 버틸 수 있을 거란 짐작은 오산이었다. 균열을 비집고 한눈에 보기에도 심상치 않은 수의 트랜스가 쏟아져 나온 것이다. 그 광경을 멍하니 보던 경해국이 ‘좆 됐네’라며 상황을 한마디로 축약했다. 전방 3km가 온통 적이었다.

한편 반대쪽에서 윤모난은 청연을 안고 그저 달리고 있었다. 한번 부러져 엉성하게 치료를 받은 두 다리는 전처럼 말을 듣지 않아 좀처럼 속도를 내기 어려웠다. 결국 몸뚱어리마저도 약해진 것이다.

나약하고 쓸모없는 자신이 이 어린 목숨까지 죽게 만들었다. 그 생각에 황폐하고 텅 빈 가슴이 북을 치듯 진동한다. 윤모난은 계속해서 그 한마디를 뇌까렸다. 청연을 죽인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나다.

“…….”

예리한 단도가 온몸을 난도질하고 찢어발기는 느낌이었다. 깨달음은 톱날이 되어 감각을 파고들었다. 자신은 살인마다. 피를 묻히고 또 묻히다 못해… 이 아이의 피까지 손에 묻히고 말았다. 품속의 작은 몸은 죄책감의 무게가 더해져 들 수 없을 정도로 육중해졌다.

이제 아이는 웃지 않을 것이다. 삼촌이라 자신을 불러주지도 못한다. 창문 너머로 삼촌이 오지 않는 길을 볼 일도 없으며, 죽은 고양이가 그리워 환영으로 부르지도 못한다. 한때는 이 아이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차고 위안이 된 적이 있었다.

윤모난은 청연을 잃고 나서야 깨달았다. 무간에 가겠다는 개 같은 욕심을 부릴 것이 아니라, 청연의 곁을 지켜줬어야 했다는 것을. 정신병원이 아니라 응당 이 아이의 옆에 있었어야 했음을.

‘모난아.’

동생을 부르는 나긋한 목소리를 따라 시선을 돌리자 골목 끝에 어두운 그림자가 있었다. 악몽에서, 옷장 밖으로 튀어나온 괴물이 절망을 따라 여기까지 쫓아온 거다.

전신에서 핏기가 싹 가시는 것 같았다. 겨우 형에게서 벗어나 도망가려던 참이었다. 하지만 그런 노력을 비웃듯 형은 또다시 나타났다. 그렇게 윤모난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청연을 계속 제 품에 묻고 또 묻었다. 아이를 놓칠까 봐 부대끼며 고개를 저었다.

“…아냐. 형, 지금은 아니야. 지금은… 청연이를 묻어줘야 해. 형… 제발….”

‘이리 와.’

“형! 청연이가 죽었어. 청연이가 죽었다니까? 안 보여?”

‘불쌍한 내 동생….’

“…왜 하필 지금이야. 이런 순간까지 나타나야 했어?”

‘모난아.’

윤모난은 악을 질렀다.

“이제 그만해!! 제발! 제발 나 좀 놔줘…. 제발 나한테서 떨어져! 이만하면 됐잖아…. 3년이나 시달렸으면 된 거잖아. 내가 어쩌길 바라? 응? 내가 어떻게 할까. …날 원망해! 그래! 나 때문에 다 죽었어…. 그리고 청연이도… 나 때문에….”

비명은 모든 것을 삼켜버렸다. 눈앞의 환영도 현실도 모두 어두운 심연으로 매몰시켜버린다. 분절된 말의 조각들을 횡설수설 쏟아내며 윤모난은 흐느꼈다.

“…애초에… 난 잘못 만들어진 거야…. 난 태어난 게 아니라 만들어진 거잖아. 그때부터 무슨 하자가 있었던 게 분명해. 미안, 형…. 그게 맞아. 나는… 어딘가 망가진 거야. 태어날 때부터…. 그래서 다 엉망으로만 만들어…. 아무리 발버둥 쳐도… 안 되는 거겠지.”

괴물을 앞에 두고 윤모난은 자기 고백을 늘어놓았다. 뜨거운 눈물이 하염없이 청연의 차가운 얼굴로 쏟아졌다. 아이의 오목한 눈가에 눈물이 괴었다 뺨을 타고 흘러내린다. 마치 아이가 되살아나서 눈물을 흘리는 것 같았다.

넋을 놓고 그 모습을 보던 윤모난은 더 절망에 빠졌다. 몸을 흔들며 소리치는 윤모난을 본 괴물이 어둠을 그의 발치까지 드리웠다.

‘모난아, 사실 너는….’

괴물의 뒷말은 찢어질 듯 울려대는 사이렌의 소리에 묻혔다. 하지만 내이 깊숙이 슬픔이 들어찬 윤모난에게는 모두 먹먹하게 들릴 뿐이었다. 형의 목소리도, 사이렌 소리에 섞인 사람들의 비명도. 쿵쿵거리는 진동도.

윤모난은 금방 꺾일 것 같은 다리를 움직여 앞으로 기어갔다. 거리 감각을 잃고 비척비척 큰 길가로 나오자 사방이 혼돈이었다.

모두가 피를 흘리며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바짝 다가온 죽음 앞에서 일그러진 얼굴들에는 체념과 절망, 공포가 뒤섞여 있었다. 절망이 담긴 공기는 뼈가 시리도록 날카롭고 차가웠다.

그러나 이 실제적인 혼돈에서 윤모난은 오히려 이루 말할 수 없는 평안을 느꼈다. 비로소 자신의 안과 밖의 풍경이 같아졌기 때문이다. 황폐해진 도시를 가로질러 그는 초록색의 빛무리를 등지고 천천히 걸었다. 옆에서 누군가 피를 흘리며 소리를 지르는 모습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살려주세요….”

혼돈을 그의 안식처 삼아 윤모난은 말없이 계속 앞으로 갔다.

“제발… 우리 아이 좀 살려주세요.”

흐느끼는 여자의 목소리. 윤모난은 천천히 흐린 시야를 죄여 자신을 가로막는 여자를 바라봤다. 폐허가 된 거리에 자신처럼 절망에 빠진 여자가 있었다. 뜨거운 눈물을 차가운 아이의 피부에 흘리는 엄마였다. 상실을 품에 가득 안은 채로. 그녀가 이미 죽은 아이를 살려달라고 허공에다 대고 애원하고 있었다.

“…우리 아이 좀 제발 살려….”

쿵!

또 한 번 지반이 뒤흔들렸다. 그 진동과 함께 폐부 깊숙이 울컥 핏물이 터졌다. 쿨럭하는 기침과 함께 윤모난은 몸을 굽혀 피를 바닥에 토했다. 트랜스의 파동이다. 온 전신을 찌를 만큼 매서운 파동이 약해진 몸을 창처럼 관통하고 있었다.

가물거리는 정신을 차리며 고개를 들자 아이를 잃은 엄마가 허공에 시선을 매단 채로 얼어붙어 있었다. 이윽고 멍하니 중얼거리는 그녀의 시선 끝에는 형의 그림자가 있었다.

“…괴물이… 우리 아이를 죽였어요.”

윤모난은 몸을 일으켰다. 그녀의 시선이 이어진 곳에 우글거리는 검은 연기들이 마구 뒤엉켜 있었다. 그곳이다. 모든 괴물들의 안식처. 찢어진 틈새로 죽음의 냄새가 훅 끼친다. 살이 떨릴 만치 진한 피비린내였다.

“…….”

그 순간 저절로 이끌린 듯이 다리가 움직였다. 어느새 윤모난은 가려던 곳과 반대로 향하고 있었다. 청연을 묻어주려면 저기로 가면 안 된다. 하지만 가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정신 차려, 윤모난. 청연이의 죽음만 생각해.’

마음속 나약함이 외쳤다. 품 안에 있는 청연의 몫에 더해서 윤모난을 매섭게 다그친다. 넌 누군가를 구해낼 힘도 자격도 없다고, 아이의 시체나 보며 절망이나 하라고. 지난 3년간 그러했듯이.

또 저 멀리 형이 보였다. 윤모난은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그와 정면으로 마주했다. 환상일 것이 분명한 형이 괴물의 약점인 목을 내놓으며 무기력하게 자신을 보고 있었다.

이리 와, 모난아. 네가 그토록 바라던 결말이 여기에 있어.

“경 선배님! 어떻게든 전투조가 올 때까지 버텨야 해요. 일단 무 선배님이랑 제가….”

중심부로 가자 익숙한 사람 셋이 보였다. 상황을 보니 셋 다 부상이 심했다. 수세에 몰린 가운데 2부 7팀은 윤모난이 다가오고 있는 것조차 모르고 있었다. 안범은 두려움에 경해국의 옷깃을 꽉 틀어쥐었다. 그들을 본 윤모난의 머리가 일순 차갑게 식었다.

“…기다려.”

순간 익숙한 목소리에 2부 7팀 팀원들의 고개가 한 방향으로 돌아갔다. 청연을 품에 안은 윤모난이 푹푹 파여 엉망이 된 도로를 밟으며 유유히 걸어오고 있었다. 윤모난을 발견한 안범의 얼굴에 희망이 번졌다.

“팀장님!”

“너흰 여기 있어.”

그렇게 팀원들에게 가까이 온 윤모난은 청연을 무구원에게 안겨줬다. 그러면서도 그의 시선은 기이한 초록색 빛과 괴물의 검은 그림자 떼에 고정되어 있었다. 홀린 듯이 그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윤모난이 입을 달싹였다.

“몸으로 가두고 안아줘. 청연이 육신에 흠집 하나 가서는 안 돼. 그건 할 수 있겠지, 무구원?”

“물론입니다.”

“아이는 남경에 묻어줘라. 다른 조카들도…. 형들 무덤 옆에. 꼭.”

윤모난은 청연의 머리를 한 번 더 쓰다듬으며 아쉬운 작별 인사를 했다. 뺨에 입술을 맞추며 아이를 달래듯이 귓가에 속삭였다.

“삼촌도 곧 따라갈 거야. 하지만 지금은… 할 일이 있어…. 미안하다, 청연아.”

윤모난의 마지막 인사말에 무구원이 비틀대며 몸을 일으켰다.

“팀장님…. 저도 같이 가고 싶습니다.”

하지만 냉랭한 목소리가 그를 가로막는다. 윤모난은 텅 빈 눈으로 무구원을 봤다.

“…네가 왜? 어리석은 짓 하지 마라.”

“전 선택했습니다.”

둘만 알아들을 수 있는 말과 함께 두 사람은 오늘 처음 제대로 서로의 얼굴을 마주했다. 무구원은 전에 없이 확신에 차 있었지만, 마주해오는 사람의 얼굴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윤모난의 표정을 보며 무구원은 깨달았다.

윤모난에게도 언젠가 자신을 향하는 마음이 있었으나 그것이 그의 삶의 의지는 되지 못했다는 걸. 자신은 결국 윤모난에게 무의미로 남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무구원은 후회하기 전에 말하고자 했다.

“늦은 건 알지만… 전 선택했습니다.”

하지만 윤모난은 표정 변화 없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분명한 이성으로 그를 거절하고 있었다.

“다시 선택해. 존재하지 않을 미래에 현재를 투자하는 건 어리석은 짓이야.”

그의 말마따나 무구원도 그렇게 생각한 적이 있었다. 윤모난에게서는 아무런 미래를 기대할 수 없다고. 10년 뒤를 기약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해서는 안 된다며 마음을 다잡으려 했다.

“북해로 돌아가라, 구원아.”

“…….”

“네가 사랑할 수 있는 미래는 거기에 있어.”

미래? 아니, 시간은 그런 식으로 흐르지 않는다. 현재는 과거를 관류하여 순식간에 미래로 흐른다. 그러니 미래를 보기 위해서는 눈앞을 제대로 보면 된다. 무구원의 눈앞에는 윤모난이 있다. 그는 무구원이 선택한 미래이자 과거, 현재인 모든 시간이었다.

“오늘 여기서 죽지 말고 미래로 걸어가. 내가 너희를 살릴 거야.”

그 시간이 자신에게서 돌아서서 멀어져간다. 고독한 이리가 다시 황야로 돌아가듯이. 윤모난은 그의 고독과 야성, 불안, 향수, 고향 속으로 떠나려 마음먹은 것이다.

무구원은 그저 망연히 거기에 있었다. 시간을 모두 빼앗긴 그의 검은 눈동자에 윤모난의 뒷모습만 가득 고여 있었다. 툭 치면 흘렀을지도 모른다.

이윽고 균열의 가까운 곳까지 당도한 윤모난에게서 무언가 섬광 같은 것이 뻗어져 나와 주변을 에워싸며 하얗게 물들였다. 괴물들은 본능적으로 가이드를 집중 공격하기 위해 윤모난에게로 몰려들었다.

그 모습을 본 무구원이 쫓아가려고 하자 뒤에서 경해국이 붙잡았다. 돌아보니 안범도 옷자락을 꽉 쥐며 고개를 도리도리 젓는다.

“으흑… 따라…가지… 마세요….”

무구원은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차마 볼 용기가 없어 안범의 맑은 눈동자를 거울삼아 윤모난이 빛무리 사이로 괴물 떼를 몰고 사라지는 것을 겨우 확인했을 뿐이다. 괴물의 찢어지는 비명 뒤에 숨어 안범은 결국 소리를 지르며 울었다.

“팀장님―!”

경해국은 안범을 끌어당기면서 다음 순간을 준비했다. 균열이 닫히면 열릴 때만큼 커다란 충격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거센 바람이 불어닥쳤다. 지상에 있는 모든 것을 휩쓸어갈 만큼 거친 압력을 버티며 무구원은 청연을 품에 꽉 가뒀다.

그리고 그 순간. 무구원의 팔목에 항상 채워져 있던, 시계에 쭉 금이 가며 정확한 박자로 움직이던 시계 침이 멈춰 섰다. 그렇게 구원의 시간이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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