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 인터미션 : 「스완의 사랑」 (13/24)

13. 인터미션 : 「스완의 사랑」

무구원은 늘 시간을 놓치는 법이 없었다.

새벽 5시에 기상. 정확히 20분 샤워 및 정비. 30분간 간단하게 아침 기도. 10분 여유를 두었다가 오전 6시쯤 합숙소를 나가서 한 시간가량 기초 체력을 키우기 위한 러닝까지.

센터에 들어와 3년간 한 번도 이 루틴은 바뀐 적이 없었다. 혼자 러닝을 한 뒤에는 식당에 가서 간단하게 아침 식사를 챙겼다. 각 일과에는 정확히 할당된 시간이 있고 무구원은 이를 어기는 것을 끔찍하게 싫어했다. 새 팀장이 오기 전까지 모든 시간은 한 번도 틀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다.

“십자―”

늘 하던 것처럼 대운동장을 달리고 있던 무구원은 자신을 친근하게 부르는 소리에 두 다리를 멈췄다. 아무리 항의해도 저놈의 불경한 별명은 도저히 그만두지를 않는다.

언덕 위에서 자신을 부르는 남자를 보며 그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자신의 반응을 즐기는 변태를 자극해봤자 소득이 있을 리 없었다. 윤모난의 주변에는 하품을 찍, 하며 졸린 눈에서 눈곱을 떼고 있는 안범과 경해국이 있었다.

“아침 먹으러 갑시다.”

마찬가지로 부스스한 몰골의 윤모난이 아침을 먹자고 불렀다. 무구원은 준비해둔 수건으로 땀을 닦은 뒤에 훈련복을 단정하게 정돈하고 언덕을 올라갔다. 가까이 가자 삐죽삐죽 까치집이 된 윤모난의 분홍 머리가 바로 눈에 들어왔다.

왜 빗질을 안 하는 걸까? 윤모난은 깔끔한 걸 싫어하는 사람인가? 무구원이 까치집에 눈을 떼지 못하고 있는 사이, 경해국과 안범은 아침 메뉴를 두고 떠들고 있었다.

“경 선배님, 제가 식당 아주머니랑 친해져서 저만 슬쩍 들었는데 말입니다. 오늘 아침은 소불고기래요.”

“뭐어? 진짜? 다른 팀 돼지 새끼들이 다 처먹기 전에 얼른 가자.”

“저느은… 세 판 먹을래요!”

“세 판으로 되겄냐? 찌찌 애비, 다섯 판 먹어라. 한번 본때를 보여주자고.”

안범이 결연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서 둘은 고기를 빼앗길까 서둘러 식당으로 달려갔다. 그 꼴을 보고 윤모난이 소리쳤다.

“걸신이 들렸나…. 뛰지 마. 넘어져, 이놈들아!”

하나 마나 한 잔소리였다. 경해국과 안범이 바람같이 사라지자마자 무구원은 기다렸다는 듯 손을 뻗어 윤모난의 엉킨 머리를 쓸어 넘겼다. 아까부터 신경이 쓰여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뭐야?”

갑작스럽게 치고 들어오자 당황한 윤모난의 눈썹이 대뜸 사나워졌다. 무구원은 오늘따라 유독 곱슬거리는 분홍 머리를 손빗으로 슥슥 정리했다. 이러니 잘생기고 반듯한 이마가 훤히 드러나서 확실히 더 보기 좋다.

“팀장님 빗질 좀 하시죠. 몇 초 걸리지도 않는데….”

“뭐, 십자 너처럼 범생이 머리 하라고?”

윤모난이 제 머리에 대고 5 대 5 가르마를 갈라서 바짝 붙이며 놀려댔다. 그런 가르마를 한 적 없는데도 무구원의 개성 없는 머리를 놀리려는 것이다. 하지만 놀라운 건 그런 바보 같은 가르마를 갈라도 윤모난에겐 제법 어울렸다는 것이다.

대머리만 아니면 저런 얼굴에는 무슨 머리를 해도 괜찮을 것 같긴 한데. 애초에 분홍 머리가 저렇게 잘 어울리는 것부터 얼굴 덕을 톡톡히 보고 있는 거겠지. 무구원은 인물 하나는 타고났다고 내심 감탄했다.

“나 어때?”

“글쎄요.”

“별로야? 거봐, 난 분홍색 머리라서 이런 스타일은 잘 안 어울린다니까.”

그러는 와중에 갑자기 자신에게 얼굴을 바짝 들이대며 묻는 윤모난 때문에 무구원의 귓가만 뜨겁게 달아올랐다. 무구원은 얼른 시선을 내리깔며 몸을 뒤로 뺐다. 그러자 윤모난이 잃어버리고 새로 사고 또 찾기를 반복하는 분홍 슬리퍼가 시야에 들어왔다. 지금 신고 있는 것이 아마 ver. 29일 듯싶다.

달아오른 귓가를 들키지 않기를 바랐던 무구원은 그의 주위를 돌리기 위해 아무 질문이나 던졌다.

“…슬리퍼 또 사셨습니까?”

“응, 어디 갔는지 또 없어졌더라고.”

“대체 왜 분홍색을 그렇게 좋아하세요?”

“응?”

“분홍색에 집착하시는 이유가 궁금해서요.”

“그럼 맨날 검은 옷 입고 다니는 너는 검은색에 심하게 집착하는 거냐?”

윤모난은 피식 웃으며 맞받아쳤다. 무구원은 가만히 자신이 가진 물건들을 쭉 돌이켜 생각해보았다. 과연 그 말은 일리가 있었다. 자신의 물건 역시 윤모난의 분홍색만큼이나 검은색 일색이긴 마찬가지였다.

“뭐, 내가 분홍색을 좋아하는 건 사실이지. 하지만 집착한 적은 없다고.”

“…….”

“그런데 내가 왜 분홍색을 좋아할까아….”

장난기 담긴 목소리가 생각에 잠긴 듯 말꼬리를 늘이다가 이윽고 답을 내놓는다.

“분홍색이 섹시하잖아.”

“…….”

“섹시한 남자한테는 역시 분홍색이지.”

실없는 대답만큼이나 윤모난은 조금 남세스러운 구석이 많은 사내였다. 그런 이상한 사람을 두고 흥분하는 자신도 답 없지만. 무구원은 얼른 밥이나 먹고 정신 차려야겠다고 생각하며 그를 앞질러 갔다. 그때 뒤에서 윤모난이 장난스럽게 어깨에 달려들더니 갑자기 앙, 하고 귓불을 살짝 깨물었다.

“십자 귀도 분홍색!”

“…팀장님!”

펄쩍 뛰어오른 무구원이 몸서리치며 소리쳤다. 그러나 끈덕지게 떨어지지 않고 등에 찰싹 달라붙은 윤모난은 푸하하하 웃기 시작했다. 염치라고는 개나 준 철면피 변태 마귀가 따로 없었다. 무구원이 몸을 수그리자 변태 마귀의 손이 맘대로 훈련복 안으로 들어오더니 간지럼을 입히듯 거칠게 희롱하기 시작했다.

성적인 것보다는 놀리려는 의도가 다분한 행위였다. 어금니를 꽉 사리물며 참아내는 무구원을 향해 윤모난은 으흐흐흐, 하며 음흉한 웃음을 지었다. 심지어 바지에 손을 넣어 엉덩이를 주무르기까지 했다. 도대체 아침 댓바람부터 이게 무슨 짓인가 싶었다.

“하지… 마십…! 윽, 팀장…님!”

“팀장니임, 거기서 둘이 뭐 하세요? 얼른 오세요. 소불고기 다 떨어져용….”

그때 구세주인 안범이 불쑥 나타나 윤모난을 불렀다.

“어.”

드디어 마귀가 웃음을 뚝 그친다. 윤모난은 태연스레 바지 안에서 손을 빼고 분홍 슬리퍼를 쫙쫙 끌며 식당 안으로 가버렸다. 그 모습을 보며 무구원은 바닥을 주먹으로 쾅쾅 내려쳤다. 아랫도리가 그새 뻐근해져서 일어날 수가 없었다. 주춤주춤 어쩌지도 못하고 길 한가운데 앉아 있으려니, 아침을 먹으러 가던 대원들의 묘한 시선이 날아와 꽂혔다.

미신을 믿는 건 이단 행위이지만…. 기도가 안 먹히면 굿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래야 저 인간을 떼어놓고 평소의 자신대로 돌아갈 수 있을 테니까. 그런 한심한 생각이나 이어가던 와중에 분홍 슬리퍼가 바닥을 끄는 익숙한 소리가 다시 가까워졌다. 윤모난이 다시 돌아온 것이다. 어느새 장난친 건 잊었는지 핀잔을 주듯이 말한다.

“길에서 혼자 뭐 해? 무구원, 얼른 가자.”

무구원이 반응하지 않자 윤모난이 웃으며 손목을 끌어당겼다.

“그새 흥분했냐?”

“…….”

“음, 너 소불고기 먹을 거야?”

“…아니요.”

“그럼 가자, 내 훈련실로.”

전형적인 변태의 수법이었다. 하지만 투덕거린 건 어느새 잊어버린 무구원은 그에게 순순히 손목을 잡혀주었다. 아침을 먹으려던 두 사람이 식당을 등지고 가는 길에, 윤모난이 불쑥 무언가 생각난 듯이 말했다.

“십자, 당신은 꼬시기 좋아서 변태 조심해야겠다.”

“…절 꼬시려는 변태는 팀장님밖에 없습니다.”

“그래도 안 된다고 저항했어야지. 쯧쯧.”

저항하라고? 그게 가능이나 하겠는가. 빌어먹을 심장 한구석이 그를 만난 뒤에는 한 번도 소란스럽지 않은 적이 없는데. 무구원은 늘 눈길이 가는 남자의 뒷덜미에 시선을 고정했다. 한없이 가벼운 행동과 말씨하며…. 저 이상한 분홍 슬리퍼까지.

모든 것이 거슬리는 것투성이지만, 윤모난은 늘 혼자였던 자신에게 처음으로 같이 가자고 한 사람이었다. 그런 그에게 자신이 어떻게 저항했어야 할까.

“…무구원, 얼른 가자.”

그때 경해국이 불쑥 문을 열고 들어왔다. 무구원은 회상 속에서 천천히 빠져나왔다.

“어.”

“뭐, 시간이야 아직 쬐금 더 있으니… 늦게 출발해도 되고….”

“그래.”

적막이 내려앉은 합숙소 방 안. 상자 가득 윤모난의 물건들이 담겨 있었다. 수도에서의 마지막 사건 이후에 시간은 흘렀고 해도 바뀌었다.

윤모난을 제외한 2부 7팀 팀원들이 서곡에 돌아왔을 때, 팀장의 방은 이미 정리되어 있었고 물건도 모두 상자에 들어가 있었다. 누군가가 그 상자 위에 ‘유품’이라고 적어둔 글씨를 무구원은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바닥에 앉아 오후 내내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로 그는 두 글자를 보고 또 봤다. 어쩌면 오후가 아니라 하루 종일 그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시간 감각을 잃어버린 지 오래였다.

“…무 선배님, 시간 다 됐어요. 이젠 가야 합니다….”

경해국이 간 지 얼마 안 되어 곧이어 방문을 열고 안범이 쭈뼛쭈뼛 등장했다. 안범은 그날 이후로 매일같이 울었던 탓에 눈이 팅팅 부어 있었고 코맹맹이 소리를 냈다. 무구원이 부름에 대답하지 않자 안범이 조금 훌쩍이더니 이내 다시 문을 닫았다.

무구원도 이제 정말로 가야 한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또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른다. 경해국과 안범이 밖에서 먼저 가겠다고 말을 전해왔다.

무구원은 느리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닥에 놓인 상자를 챙기려고 하는데 무언가 바닥에서 가느다랗게 반짝거렸다. 분홍색 머리카락 한 올이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

그건 이 세상에서 증발하듯이 사라져버린 윤모난의 흔적이었다. 이 세상에 미련을 두지 않은 사람의 부스러기였다. 아마도 자신에게 허락된 윤모난의 존재란 그 정도로 작은….

그 순간 무구원의 양철 심장이 가시에 박힌 것처럼 꽉 욱죄어왔다. 무거운 추가 매달린 것같이 고통을 상쇄할 방법이 떠오르지 않는다. 눈에 뜨거운 김이 차올랐다. 이윽고 뺨을 타고 주르륵 눈물이 흘러내린다.

무구원은 어리광이나 떼를 써본 적이 없는 아이였다. 운 것도 손에 꼽았을 만큼 늘 무감했다. 그런 무구원은 거의 처음으로 흐느껴 울었다.

“…별로 슬프지 않다면 제가 이상한 걸까요?”

어느 날 새벽 누군가를 상실한 고통을, 그 슬픔을 아직 몰랐을 때 무구원은 그렇게 윤모난에게 물었었다. 그러자 윤모난은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그의 등을 투박하게 두드렸다.

“무구원 너, 어렸을 때부터 아무한테도 어리광 부려본 적 없지?”

“…….”

“아이들은 걸핏하면 울고 슬퍼하잖아. 먹던 과자만 빼앗겨도 세상 잃은 것처럼 울지. 그게 다 어리광 같아도 인생살이 훈련 과정이야.

단단한 손이 계속해서 툭툭 두드린다.

“이렇게 토닥여지면 저 안에서 몰랐던 슬픔이 새어 나오거든? 어렸을 때 어른들이 해줬어야 하는 건데 넌 그 단계를 다 뛰어넘었다니까, 내가 등 두드려줄게.”

그때 울지 못했던 울음을 무구원은 지금에 와서야 아이처럼 터뜨렸다. 마침내 그는 상실을 알게 되었다. 그 고통을 온몸으로 만끽하고 통감했다. 이제는 안다. 무구원은 이제 겨우 24살이었고 사랑을 잃었다. 누가 뭐라 하건 윤모난은 그의 첫사랑이었다.

잠시 뒤에 무구원은 상자를 들고 천천히 합숙소를 나섰다. 혹독한 겨울바람을 맞으며 서곡역으로 가는 와중에, 시계 위에 찬 호출기가 노란 불빛을 띠며 삐리리 울렸다. 그건 조금 생뚱맞았다. 이 호출기는 윤모난이 주고 간 이후로 한 번도 울린 적 없었기 때문이다.

큐브였다. 연구조 김동희라는 에스퍼에게 의뢰한 뒤 처음 온 소식이었기에, 무구원은 바로 호출에 응답했다.

“네.”

―연구조 김동희입니다. 몇 달 전에 우리 쪽에 물건을 의뢰하셨죠?

“네, 맞습니다. 무슨 일이시죠?”

―…지금 만날 수 있을까요? 반드시 확인하셔야 할 게 있어서요.

북해행 막차는 15분 정도 남았다. 연구조 에스퍼를 만나러 가면 필시 기차는 놓칠 것이다. 기관에서는 퇴소자의 동선을 엄격하게 관리했고, 오늘 서곡을 떠나지 않으면 여러 문제가 생길 터였다. 특히 북해에 가서 받아야 하는 예정된 심문에 늦는 건 용납되지 않는다.

지난 일로 무슨 처분을 받게 될지 모르는 위태로운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구원은 발걸음을 돌렸다. 도저히 외면하고 떠날 수가 없었다. 합숙소에 남은 한 올의 머리카락처럼 윤모난의 흔적이라면 그것이 무엇이든 놓칠 수가 없었다.

어두운 숲길을 걸으면서 무구원은 생각했다. 어쩌면 이런 집착과 맹목은 병의 징후일 거라고. 언젠가 병이 다 나아 난데없이 자신을 불태우는 이 열기 같은 사랑도 끝나고 나면 모두 추억이 될지 모른다. 이 병적인 사랑은 환상처럼 흩어지고 불꽃처럼 재만 남기며 헛되이 연소될 테다.

허나 지금으로써는 포기란 걸 모르는 그의 병증은, 윤모난이 찢어놓았던 책의 한 구절이 정확히 진단하고 있었다.

스완의 사랑은 과연 병이었다. 이 병은 계속해서 온몸으로 전이됐으며, 이 사랑은 그의 모든 습관과 행위, 사념, 건강, 꿈속과 현실, 심지어는 그의 사후에 바라는 것에조차 혼재했기에, 그가 사랑과 일체가 되어버렸기에, 그를 완전히 파괴하지 않고서야 도려내질 수 없는 것이었다. 외과식 표현을 써보자면 그의 사랑은 이젠 수술도 불가능한 상태였다.*

1부 完

<4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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