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부-1. 쥐덫 (14/24)

2부

1. 쥐덫

봄이 찾아오면 남경 전체엔 향긋한 꽃향기가 번진다. 윤씨들의 전 가주는 유독 이 향기로운 계절에 피비린내를 풍기는 것을 즐겼더랬다. 그런 봄이 더 이상 두렵지 않게 된 지 벌써 7년이었다. 서재에 앉아 있던 윤이화는 검토하던 서류를 덮으며 얕은 감회에 젖었다. 마침 저택에서 일하는 서씨가 찻잔을 소반에 담아 내밀었다.

“가주님, 외출 전에 차 한 잔 드시죠.”

“고맙네.”

윤이화는 차를 몇 모금 마시며 지난 시간을 돌이켰다. 남경 윤씨의 가주 자리를 지키는 것은 생각보다 만만치 않았다. 끊임없는 위험과 협상, 그리고 음모로 7년 사이에 꽤 늙어버릴 정도로.

이럴 줄 알았으면 권력에 욕심이 많은 여동생에게 자리를 넘길 걸 그랬나 싶기도 했지만. 그저 의미 없는 생각일 뿐이었다. 그간 윤이화와 윤도화 남매는 어렵게 얻은 남경의 가주 자리를 두고 암투를 벌여왔다. 다른 이들이 반쪽짜리가 된 남경을 두고 혈육끼리 다툰다며 비웃을 정도로.

반쪽이란 말이 그저 우스갯소리는 아니다. 7년 전 사건 이후로 윤씨들은 남경에서 지배력을 많이 상실한 상태였다. 북해와의 협상 끝에 멸문은 막고 재산과 부지도 그대로 유지할 수는 있었지만, 남경 지부에 대한 통제권을 내줌으로써 사실상 현재의 남경 윤씨는 그저 지방 호족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므로 평의회에서의 발언권 역시 미약한 수준으로 축소됐다. 그곳은 이미 북해와 무정원이 장악한 거나 다름없었다. 더욱이 남경 지부마저 그의 손아귀에 있으니, 남경 자체가 북해의 부속이나 매한가지였다.

“여보, 시간 됐어요. 차가 대기하고 있으니 얼른 오세요.”

“그래요.”

때맞춰 윤이화의 아내가 한껏 멋을 부린 모습으로 나타나 남편을 재촉했다. 오늘 밤, 남경 시내의 극장에서 예정된 행사가 있었다. 남경 지부장이 취임하고 처음으로 마련한 자리였다. 7년 전부터 은근한 각을 세우던 북해와 남경 사이에 다시 친목을 도모하자는 뜻이라나.

하지만 새 지부장은 북해에서 온 이방인일 뿐이다. 대대로 남경인이 앉았던 자리를 차지한 그 이방인을 누구도 환영할 리 없었다. 그래서 남경인들 대부분이 대놓고 그에게 반감을 표해왔다. 그 젊은 지부장이 나름의 노력이랍시고 마련한 자리를 여러 차례 거절하면서.

하지만 여러 가지 과거의 일로 껄끄럽던 와중에, 얼마 전 지부장이 직접 윤이화에게 찾아와 공손한 태도로 초대장을 건네며 허리를 굽히면서 부탁했다.

“가주님. 더는 분열이 아니라, 화합의 장이 마련되었으면 합니다.”

그가 굽히고 들어오자 윤이화의 위신이 조금 살아난 것은 당연했다. 그래서 한 번쯤은 응해주겠다는 마음으로 오늘 ‘남경의 밤’ 행사를 수락하고 참석하기로 한 것이다. 윤이화는 마련된 리무진에 아내와 함께 올랐다. 이전에는 큰아버지가 똬리를 틀고 있었지만, 이제는 그의 소유가 된 하얀 저택을 빠져나온 차는 외곽 도로를 내달렸다.

극장으로 향하는 길. 윤이화는 오랜만에 기분이 썩 괜찮았다. 어쩌면 오늘 행사는 자신의 장악력과 리더십을 재증명할 좋은 기회일지도 모른다. 기분이 좋은 윤이화는 아내의 손을 꼭 쥐며 그녀에게 오늘따라 아름답다는 립서비스까지 했다.

“가주님, 오셨어요?”

극장에 도착해 차에서 내려서기 무섭게 익숙한 목소리가 빈정거리는 투로 반겨왔다. 볼 것도 없이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자신의 여동생인 것을 아는 윤이화는 얼굴을 굳히며 호통부터 쳤다.

“도화, 너 바쁘다는 핑계로 가문 회의도 참석하지 않더니. 이런 데는 얼굴을 비추는구나!”

“오라버니께서 오랜만에 가주로서 뽐내는 자리인데, 제가 당연히 와야지요.”

“…윤도화, 너.”

“어린아이들까지 죽여 오른 자리라고 워낙 손가락질을 받으시기에 나도 마음이 아팠답니다. 이제는 위엄을 되찾고 남경도 되찾으셔야죠.”

좋았던 기분이 바닥으로 처박혔다. 하지만 여기서 사촌 조카들을 죽이자고 주장한 건 바로 너라고 따져봤자 아무 소용도 없다. 저 독하고 잘난 여동생이 아무리 날뛴다고 한들, 가주의 자리에 오른 것은 자신이었다.

윤이화는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화를 애써 삭인 뒤에, 여동생을 지나쳐 경호원들의 호위를 받으며 붉은색 융단이 깔린 계단을 밟고 올라갔다. 주변을 보니 오늘 밤 지부장이 남경 윤씨들을 싹 다 부른 모양이었다. 익숙한 얼굴이 대다수였지만 어디에도 지부장은 없었다. 극장 로비 안은 이른 저녁임에도 이미 술에 흥건히 취해 있는 꽃들로 붐볐다.

이제 와 보니 7년 전 사건에 직간접적으로 동조한 사람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여 있다. 사실상 윤화신 일가를 제외한 윤씨 대부분이라고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윤이화는 쏟아지는 인사를 받으며 상석으로 향했다.

남경극장은 꽤 근사한 곳이다. 근대 이후에 서양식으로 지어진 극장 천장에는 웅장한 크리스털 샹들리에가 걸려 있었다. 자리에 앉자마자 누군가 윤이화에게 다가왔다.

“오셨습니까?”

“지부장님은 어디 계시지?”

“지부에 일이 있어 조금 늦을 거라고 연락하셨습니다. 가주님께 미리 양해 부탁드린다고 하십니다.”

극장을 경호하는 인원들은 남경 지부 치안조에서 차출된 인력이었다. 그중 치안조 팀장 한 명이 소식을 전달하고 양해를 구한 것이다. 윤이화는 대놓고 혀를 찼다. 제발 와주십사 고개를 숙일 때는 언제고 정작 본인은 일 핑계를 대고 늦는다니. 윤이화의 얼굴에 불편한 기색이 서렸다.

그때 잠깐 파우더 룸에 다녀온다고 자리를 비웠던 아내가 자리로 돌아오며 즐거운 어조로 떠들어댔다.

“오늘 연극은 『햄릿』이라고 하던데요?”

“『햄릿』?”

“네, 전에 읽어본 적은 있는데 연극으로는 처음 봐요.”

작품 선택하는 꼬라지 하고는. 7년 전 암살을 도모한 남경의 꽃들을 모아놓고, 동생에게 시해된 선왕의 죽음을 복수하는 미치광이 아들의 이야기를 다룬 연극을 상연하는 건 무슨 뜻이란 말인가.

다른 꽃들도 비슷한 생각을 하는지 오늘의 공연 제목이 소개되자 약간 술렁였다. 아직도 지부장은 나타나지 않았다. 아무래도 불편함을 견디기 힘들어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그때, 객석의 조명이 꺼지고 프로시니엄 무대 위 조명이 밝아졌다. 아내가 기겁하며 끌어당긴 탓에 윤이화는 결국 도로 자리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왜 이 작품을 골랐는지 잘 한번 설명해보라지.”

“여보, 쉿.”

연극이 시작하자 객석도 침묵으로 가라앉았다. 얼굴에 분칠을 한 보초병들이 성벽에서 선왕의 유령과 마주치는 첫 장면이 펼쳐지면서 객석에 있는 모두가 금세 연극에 빠져들었다. 공연은 꽤 흥미로웠다. 소재의 불온함만 차치하면 배우들도 연기를 꽤 잘했고 연출도 이만하면 수준급이었다.

유희로 삼을 것이 별달리 없는 반도에서는 보기 드문 수준 높은 공연이었기에 윤이화의 삐뚜름한 심기도 조금 가라앉았다. 지부장이 아무래도 신경을 많이 쓴 모양이었다. 이런 극단을 초대하기 위해 돈도 돈이지만 정성을 들였을 것이라 생각한 그가 흡족하게 미소 지었다.

극장 안의 분위기가 바뀐 것은, 숙부인 클로디어스의 음모를 떠보기 위해 햄릿이 궁정에 배우들을 초대해 극중극을 하는 장면에 들어서면서였다. 「쥐덫」이라 불리는 『햄릿』의 유명한 파트였다. 모두가 무대 위 장면에 몰입해 있는데, 뒤쪽에서 쾅, 하고 문을 여닫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소리가 상당히 컸기에 모두 고개를 돌렸지만, 객석이 워낙 어두운 탓에 소음을 낸 주인공이 누군지 확인할 수 없었다. 약속 시간에 늦은 지부장이겠지. 대부분 윤이화와 같은 생각인지 무심하게 넘기곤 다시 공연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극의 제목이 무엇이냐? 햄릿.”

극중극인 「쥐덫」의 내용은 숙부의 선왕 시해를 암시하는 내용이었다. 형의 아내와 왕위를 빼앗은 숙부 클로디어스가 자신의 죄를 떠올리고 햄릿에게 의중을 묻자, 그가 대답했다.

“쥐덫입니다. 정말 절묘한 비유이지 않습니까! 이 연극은 실제 살인 사건을 그대로 그린 건데 지독한 작품이긴 하지만, 뭐 어떻습니까. 죄가 없는 저희 같은 사람에겐 아무 상관 없지요. 양심에 찔리는 말이야 날뛰든 말든, 우리는 말짱하니까요.”

배우가 대사를 읊는 사이에 한 남자가 극장 안으로 조용히 들어왔다. 객석 맨 뒤에서부터 천천히 걸음을 옮기던 그는 구역 사이 복도를 지나 무대로 향하고 있었다. 남자는 짙은 검은 머리였다. 다부진 몸을 단정하게 감싸는 회색의 트렌치코트 끝자락이 걸음에 맞춰 흔들렸다.

그는 한쪽 손을 주머니에 넣고, 다른 손으로는 열을 맞춰 놓인 객석 의자를 훑었다. 관객 모두가 무대를 보는 것처럼 그의 시선도 무대에 고정되어 있었다. 무대를 밝히는 색색의 조명이 이채를 띤 그의 망막에 섞여 붉은빛을 드리웠다.

조금 예민하고 창백해 보이는 인상의 남자는 습관처럼 앞으로 쏟아져 내리는 머리를 뒤로 쓸어 넘겼다. 흉터가 많은 긴 손가락 사이로 검은색의 머리가 곡선을 그리며 물결쳤다.

동시에 무대 위에서 햄릿이 한창 열연하며 외쳤다.

“이제 시작해! 이 살인자야. 저주스러운 인상은 그만 쓰고 살인을 시작해. 저기 까마귀가 깍깍거리며 복수하라고 외치지 않은가!”

그 대사를 들은 남자의 입가에 쓰디쓴 웃음이 떠올랐다. 무대 바로 아래 오케스트라 피트까지 도달한 그가 중앙으로 가서 서자, 드디어 무대 위에 고정됐던 시선이 그에게로 쏠렸다. 곧이어 누군가 새된 비명을 터트렸다.

철컥하고 총을 장전하고 겨누는 소리가 섬뜩하게 울리자, 극장 안이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고요해졌다. 남자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대체 이 연극의 교훈이 뭘까?”

“…….”

“아마도 죄를 지은 인간들은 이따위 연극이나 보면서 양심에 찔리지 않는다는 거겠지. 죽음이 눈앞에 닥쳐야 뒤늦게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깨닫거든.”

그 말에 정신을 차린 꽃들이 일제히 일어나 문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하나같이 하얗게 질린 얼굴이었다. 객석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너나없이 서로를 밀치며 나가려 했지만 문은 굳게 잠긴 채 열리지 않았다.

아수라장 속에서 공간계 에스퍼 몇 명이 탈출을 시도했으나 그 순간 남자에게서 뻗어 나온 파동이 모두의 능력을 봉쇄했다. 이어서 총소리가 섬뜩하게 울려 퍼졌다.

탕―!

매섭게 포효하는 총성은 일정한 박자로 계속 이어졌다. 사방에서 비명과 함께 핏방울이 터졌다. 남자는 가지고 있는 권총의 총알이 떨어지자 주머니에서 탄창을 꺼내 장착하고 다시 박자에 맞춰 꽃들을 겨냥했다.

“윤모난!”

아수라장 속에서 분에 받친 윤도화가 마침내 남자의 이름을 외쳤다. 7년이 지나도 잊히지 않는 사촌의 얼굴을 보며 윤모난은 손에 쥔 권총의 방아쇠를 당겼다. 그 모습을 보는 윤도화의 얼굴에도 희번덕거리는 광기가 서렸다. 객석 위로 올라서서 한 발을 등받이에 올린 그녀가 품에서 총을 꺼내며 외쳤다. 마치 이 순간을 기다려왔다는 듯이.

“그래! 네가 곱게 죽었을 리 없지.”

깔깔거리는 특유의 웃음소리가 객석을 울렸다. 그녀는 능력을 써서 윤모난에게서 뻗어져 나오는 간섭 파동을 덮으며 교란시키는 동시에 무대 방향을 향해 마구잡이로 총을 쏘기 시작했다.

“얼른 죽여!”

윤도화의 총질에 미처 자리를 떠나지 못한 남경 윤씨의 가주 윤이화가 객석 아래로 몸을 숙이며 외쳤다. 사방에 파편이 튀며 비명과 총성이 한데 뒤섞였다. 꽃들 모두가 유령을 마주친 듯 두려움에 떠는 이때, 윤도화만이 희열에 젖어 있었다.

“독재자인 네 아버지를 위해 복수하려고 온 거니? 『햄릿』의 결말이 어떻게 되는지 너도 알지? 깔깔깔!”

광기 어린 웃음이었다. 허리까지 꺾어가며 웃어대던 그녀는 순간 제 몸을 찌르는 감각을 느꼈다. 무언가 가로막힌 것처럼 파동을 뻗을 수가 없었다. 여유작작하던 그녀의 얼굴에도 금이 가기 시작했다. 윤모난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오지 않았다.

“윤모난!”

눈이 빨갛게 변한 윤도화가 짐승처럼 부르짖었다. 그리고 그것이 어떤 신호라도 된 것처럼 그녀가 서 있는 천장 위에서 무언가 틱, 하고 불씨를 터트렸다. 그 작은 불씨는 하나의 커다란 화염이 되어 순식간에 그녀가 있는 자리를 집어삼켰다.

쾅!

커다란 폭발음과 함께 불길이 극장 전체로 번졌다. 능력을 잃은 채로 무기력하게 절규하던 꽃들은 순식간에 화염으로 빨려 들어갔다. 자신에게로 다가오는 불길을 지켜보던 남경의 가주 윤이화는 죽기 직전 비로소 예감했다.

‘…저주가 마침내 당도했구나.’

모든 꽃들이 불구덩이 속으로 휘말리며 아름다운 극장은 쥐덫이 되었다.

* * *

남경극장에서의 테러로 며칠간 도시 전체가 난리였다. 국가이능력기관, 남경 지부 소속 치안조의 김 부장이라 불리는 남자는 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현장에 있느라 집에도 못 가고 지부 사무실에서 숙식을 해결하던 고난의 일주일이 지나, 조사가 한 차례 마무리되는 시점이었다.

“사제 폭탄입니다. 화력을 높이기 위해 범인이 개조한 것 같습니다.”

극장의 잔해를 둘러보던 김 부장은 현장을 찾은 지부장에게 조사 진척 사항을 보고했다.

일주일 전 ‘남경의 밤’ 테러 사건. 극이 시작된 이후 남경역에 폭탄을 설치했다는 누군가의 전화를 받고 극장에 있던 치안조 대원들은 그곳으로 달려간 덕에 지부 인원의 피해는 없었지만, 남경 윤씨가 극장과 함께 전멸했다.

이 테러로 인해 남경 윤씨 가주인 윤이화는 물론, 7년간 윤가를 이끌었던 인물들이 모두 잿더미로 사라졌다. 끔찍한 테러였다. 다행인 건 밤에 열린 행사라 아이들의 피해가 없었다는 점뿐이었다.

커다란 극장 건물을 집어삼킨 폭발흔을 보며 김 부장은 상관이 옆에 있는 것도 잊고 혀를 내둘렀다. 지부장은 아까 전부터 테러 현장을 담담한 눈빛으로 보고 있었다.

“정말 끔찍하네요. 도시 치안 수위를 높이고 범인을 색출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그래.”

“그날 일이 있어 지부장님께서 자리에 안 계셨던 게 천만다행입니다.”

“이 일은 사소한 것 하나 놓치지 말고 다 보고해.”

“네.”

자신의 무덤이 될 뻔한 이 지옥도를 보고도 지부장은 표정 하나 변함이 없었다. 그을음이 묻은 벽돌의 잔해를 밟고 두 사람은 천천히 현장에서 빠져나왔다.

“지부장님 주변에도 경호 인원을 더 추가해야 할 것 같습니다.”

김 부장은 혹시 모르는 사태에 대비해야 한다며, 정예 에스퍼들을 골라 경호 인력으로 배치하자고 제안했다. 하지만 돌아오는 건 냉랭한 대답뿐이다.

“난 필요 없어. 범인을 쫓는 데나 신경 써.”

“그럼 지부장님의 사저라도 경호를 강화하시죠. 사모님과 자제분이 위험해질 수도 있지 않습니까.”

사려 깊은 부하의 조언에도 지부장은 침묵했다. 그러나 가족의 신변이 걸린 문제에는 그도 초연할 수 없었는지 허락이 떨어졌다. 현장 주변에 둘린 안전띠를 위로 올리며 김 부장이 상관에게 물었다.

“사무실로 복귀하실 겁니까?”

“아니, 바로 퇴근하려 하는데. 지금 몇 시지?”

지부장은 손목에 시계를 차고 있는데도 상대에게 굳이 시간을 물었다. 이런 상황에 익숙한 김 부장이 냉큼 대답했다.

“오후 6시 10분 전입니다.”

“아이가 생일이라 선물을 사주기로 약속했으니 상점가로 가겠다고 말해둬.”

“아, 아드님께서 생일이시군요. 그럼 제가 그쪽으로 직접 모시겠습니다.”

둘은 대기해 있는 차로 향했다. 테러로 어수선한 가운데에서도 지부장은 늘 그렇듯이 평균 이상의 침착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 와중에 아들의 생일까지 직접 챙기다니 일에 치여 사는 그로서는 쉽지 않은 일일 테다. 김 부장은 상관이 유달리 극성맞은 아버지라는 것쯤은 이미 알고 있었다.

지부장은 끔찍하게 아끼는 아들이 가벼운 감기라도 들면 모든 일정을 미루고 집으로 달려가는 아버지였다. 아무리 눈에 넣어도 안 아픈 것이 자식이라지만 그의 아들 사랑은 남이 보기에도 조금 유별났다. 테러가 나서 남경뿐만 아니라 반도 전체가 뒤집혔는데, 이 와중에 아들 생일 선물을 사러 가겠다니. 김 부장은 몰래 고개를 저었다.

차는 막힘없이 상점가로 향했다. 뒷좌석에 앉은 지부장은 가는 내내 말없이 창문 밖을 보고 있었다. 1년 정도 모신 상관은 딱 필요한 말 외에는 하지 않는 과묵한 사람이었다.

“도착했습니다. 저희는 뒤에서 따라가며 경호하겠습니다.”

“그래.”

고급 상점가 한가운데 위치한 백화점 정문에 내리자, 유모와 함께 아버지를 기다리고 있던 아이가 손을 흔들고 있었다.

“아빠.”

아들을 발견하자마자 내내 무표정이던 지부장의 얼굴에 일순 따듯한 미소가 번졌다. 평소 남들 앞에서는 전혀 웃는 법이 없는 남자의 아름다운 입술이 보기 좋게 호선을 그렸다. 근사한 미소였다. 그는 아들의 검은 머리카락을 쓱쓱 쓸어 넘기면서 다정한 어조로 물었다.

“생일 선물로 뭘 가지고 싶은지 정했니.”

“응, 올라가면서 설명해줄게.”

“그래.”

남자는 경호 팀에게 조금 거리를 두고 쫓아오라고 명령한 뒤에 아들과 함께 백화점 안으로 들어갔다. 아이가 가지고 싶은 것은 7층에 있다며 손을 끌어당겼다.

“7층에 뭘 파는데?”

“사냥용 칼. 애들 가지고 노는 장난감 말고 진짜 칼이 가지고 싶어.”

“칼이라고? 위험할 텐데.”

핀잔을 무시하고 대꾸하지 않는 아들을 보며 아버지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원래부터 또래들이 가지고 노는 장난감 같은 것엔 관심이 없는 아이였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탄창이 빈 아버지의 총을 가지고 놀더니, 1년 전에는 새 사냥에 재미를 붙여 죽은 비둘기를 하루에 20마리씩 가져와서 부모를 기함하게 만들었다.

이번 생일을 맞이하여 아이는 자신만의 권총을 가지고 싶다고 했는데, 아들의 부탁이라면 다 들어주던 아버지도 그것만은 허락해주지 않았다. 그 말에 내내 고심하던 아이가 차선책으로 선택한 것이 사냥용 칼인 모양이었다.

“사줄 테니 유치원에 가지고 가면 안 된다.”

“…응.”

조금 늦게 대답이 나온다. 괜히 노파심이 든 아버지는 한 번 더 당부하기로 했다.

“그냥 하는 말 아니야. 유치원에서 엄마에게 전화 오게 만들지 말고.”

“안 가져가. 우리 선생님은 쓸데없는 걱정이 많거든.”

“무슨 걱정?”

“나 몰래 뒤에서 얘기하는 거 들었는데. 나 같은 애는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지 않았으면 커서 나쁜 길로 빠졌을 거래.”

“…….”

“아빠, 남경극장에서 사람 많이 죽었어?”

“응.”

“시체도 있었어?”

“그렇지.”

“어떻게 생겼어?”

“온전치 않지.”

“나 구경하고 싶다고 해도 안 데려가줄 거지?”

아이의 천진난만한 물음에 아버지는 고개를 저었다.

“생일 선물 대신이래도?”

“응, 안 된다.”

“치…. 알았어.”

그러다 대뜸 남자가 아이에게 물었다.

“유치원 선생님이 너에 대해 그렇게 말해서 속상했니?”

“아니.”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가며 개미처럼 작아진 아래층 사람들을 무심한 표정으로 내려다보던 아이가 말했다.

“뭐, 내가 생각하기에도 선생님 말이 맞는 것 같아.”

“왜 그렇게 생각해?”

“그냥. 아빠, 나 북해로 돌아가서 살고 싶어. 여긴 별로야.”

“남경이 왜?”

“왜냐니. 아빠도 알잖아. 여긴 북해 사람들을 싫어하니까.”

“그랬나…?”

“응, 그리고 나도 북해가 더 좋아. 남경은 너무 덥고 복잡해. 음식도 소금처럼 짜고.”

“너도 아빠처럼 여길 좋아하게 될 거야.”

“그건 아빠 생각이지. 난 별로인 거 같아. 아빠가 좋아한다고 해서 나도 좋아하란 법은 없다고.”

그럴 리가. 남자는 아들을 제게 기대게 하여 품에 안으며 뺨을 쓸었다.

“내 반쪽을 갈라 만든 아들인데 반만큼이라도 아빠처럼 여길 좋아해주면 안 될까?”

“노력해볼게. 하지만 장담 못해. 여긴 사촌 형도 없고 심심해.”

“북해는 여름에 잠깐 다녀오면 되지.”

“사냥칼부터 사줘. 형한테 보여주고 싶어.”

조곤조곤 대화를 나누는 사이 어느새 7층에 다다랐다. 매장에 들어간 둘은 둘러볼 것도 없이 아이가 원하는 칼부터 찾았다. 아무래도 7살 아이에게 사냥용 칼을 선물로 사주는 경우는 드물었는지, 점원이 재차 아이가 쓸 게 맞냐며 물었다.

“저같이 어린 애는 칼 사면 안 돼요?”

“아, 그건 아니죠. 저… 원하시는 디자인은 주문해서 받아야 하는데 자택 주소를 적어주시면 배송해드리겠습니다. 여기 고객 카드 작성 부탁드립니다.”

점원이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고객 카드를 내밀었다. 남자는 재킷 안쪽에서 만년필을 꺼내어 빈칸을 채워 내려가기 시작했다. 성명란에 ‘무구원’ 이름 석 자가 정갈한 글씨체로 쓰였다.

“손잡이 부분에 각인도 됩니까?”

“네, 물론입니다.”

“아들 이름을 적었으면 합니다.”

무구원은 아이의 이름도 적은 뒤 직원에게 카드를 건넸다. 계산을 마친 그가 매장 안 다른 물건을 둘러보던 아들을 불렀다.

“태오야, 가자.”

“응, 아빠.”

“가지고 싶은 건 더 없니?”

“없어.”

아들 태오는 딱히 욕심이 많은 아이는 아니었다. 그러다가도 가끔 갖고 싶은 물건이 있으면 꼭 가져야 성미가 풀리는지 어떻게든 얻어내려고 했지만. 그런 건 가끔가다 한 번이었지 다른 걸 크게 요구하지 않았다. 부자는 빠르게 쇼핑을 마치고 다시 아래층으로 향했다.

“아빠, 엄마가 시간 되면 집에 와서 저녁 먹자고 했어.”

“응, 같이 집으로 가자.”

백화점 로비에서 차를 기다리고 있는데, 문 쪽에서 담배를 태우는 남자를 본 태오가 코를 잡으며 얼굴을 찌푸렸다.

“윽…. 담배 연기.”

그 말에 주차장 쪽에 고정되어 있던 무구원의 시선이 그쪽으로 향했다. 부자가 서 있는 반대 방향에서 키가 큰 남자가 등을 진 자세로 담배를 태우고 있었다.

“태오야, 이쪽으로 서.”

그는 담배 연기를 싫어하는 태오와 자리를 바꾸었다. 이상하게 남자의 뒷모습이 눈에 익었다. 무구원은 본능적으로 머리 색부터 확인했다. 검은 머리. 하지만 자신과 비슷한 큰 키에 건장한 체격. 유독 흉터가 많은 기다란 손가락 사이에 들린 담배. 비치된 재떨이에 재를 털어내는 손짓. 그 모든 것에 시선이 따라붙었다.

옆으로 고개를 반만 돌리면 반쪽 얼굴이라도 볼 수 있을 듯한데. 남자는 한 번도 몸을 움직이지 않았다. 그의 뒤통수 너머로 하얀 담배 연기가 공기 중으로 피어올라 부서진다. 무구원은 어느새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고 있었다. 점점 더 그 뒷모습에서 익숙한 부분들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예를 들면, 어깨의 넓이나 손등의 핏줄 생김새라든지 서 있는 자세 같은 것. 부드러운 반곱슬머리가 자라난 뒷덜미 아래 하얗게 뻗은 굵은 목선 따위의.

“아빠?”

무구원은 태오가 의아한 목소리로 부르고 나서야 정신을 차렸다. 자기도 모르게 아이의 손을 놓고 있었던 것이다. 여전히 남자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무구원은 자신에게로 오는 태오를 손으로 저지하며 그에게로 한 걸음 더 다가갔다.

“아빠, 나 담배 연기 싫다니까.”

“…어? 그래.”

기어코 아이가 옷깃을 잡아당기며 볼멘소리를 하는 통에 잠시 그를 시야에서 놓고 말았다.

“태오야, 아빠가 경호원들한테 말할 테니 먼저 차에 타고 있어.”

“왜? 아빠, 집에 가서 저녁 안 먹어?”

“그게 아니라….”

“엄마가 싫어해.”

“그럼 차에서 잠깐 기다리고 있을래.”

무구원은 경호원들에게 손짓해 태오를 데려가라고 했다. 확인할 것이 있었다. 지난 7년간 수도 없이 비슷한 상황에 놓였고 번번이 똑같은 결과를 맞이하면서도, 누군가와 비슷한 체격을 가진 남자가 담배를 피우고 있으면 항상 확인하는 버릇은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 다시 돌아섰는데, 그 잠깐 사이에 남자가 사라졌다. 무구원은 그 자리로 달려가서 완전히 꺼지지 않아 실 같은 연기가 달린 재떨이 속 담배를 확인했다. 오늘따라 기분이 이상했다. 무구원은 본능적으로 수많은 사람이 드나드는 백화점 입구에서 익숙한 뒷모습을 찾았다.

하지만 무작위의 인파 속에서 아까 눈길을 끌었던 그 뒷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무구원은 따라오려는 경호원을 물리고 도로 백화점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는 사이 왠지 모르게 발걸음도 다급해진다. 바깥보다 더 복잡한 실내를 두리번거리는 내내 조바심이 났다.

“팀장님한테서는 담배 냄새가 납니다.”

“그래서 누가 담배를 피우면 보게 됩니다. 팀장님인가 하구요.”

그 사람 특유의 진하고 씁쓸한 잔향. 그 냄새를 떠올리면 담배를 물고 머리를 쓸어 넘길 때마다 짓던 나른한 표정이 절로 떠올랐다. 이따금 연기와 함께 탁한 웃음을 짓는 입매와 깊은 음영이 진 눈가도. 제 의지와는 상관없이 기억들이 파노라마처럼 되살아난다.

그런 면에서 후각은 솔직했다. 순식간에 사람을 과거로 되돌려놓으니까. 무구원은 자신을 지나쳐 가는 인파의 그림자 속에서 과거의 실체를 쫓고 있었다.

“아빠!”

함께 집에 가고 싶어 버티고 있던 아이의 부름에 몸이 일순 멈춰 섰다. 퍼뜩 정신을 차린 것도 그때였다.

“아빠, 왜… 그래?”

“아니야. 이만 가자.”

무구원은 주위를 가느다란 눈으로 훑어본 다음 바로 돌아섰다.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발길을 돌려 다시 백화점 로비로 나가는데 온몸의 근육이 경직되고 턱이 뻣뻣해졌다. 대기해 있던 차의 뒷좌석에 탔을 때는 식은땀마저 흘리고 있었다.

“아빠?”

아이의 말간 얼굴이 마주해오자, 명치 부근에서 송곳으로 찔린 듯한 고통이 느껴졌다. 대답할 틈도 없이 무구원은 창백한 얼굴로 운전사에게 말했다.

“당장 출발해.”

차는 도망치듯 순식간에 그 자리를 벗어났다.

한편 백화점 로비가 내려다보이는 2층 창가에서 윤모난은 멀어지는 검은 세단을 한참 바라보고 있었다. 이윽고 차가 교차로를 지나 시야에서 사라지고 나서야 두 발이 떨어졌다. 그는 아까 봐둔 대로 7층 사제 나이프를 파는 판매점으로 향했다.

“뭘 도와드릴까요?”

“남경 지부에서 왔습니다. 제 상관이 방금 여기서 아들 생일 선물을 샀는데, 고객 카드에 주소를 잘못 기재했다고 하시더군요.”

“아, 그러세요? 혹시 본인 관련 확인을…”

“방금 다녀갔는데 번거롭게 그럴 필요 없다고 하셨어요. 아드님 생일 파티가 급하시다고 저한테 맡겼으니까 걱정 마세요.”

“아, 그럼 이전 건 폐기하고 새 카드를 드릴게요. 집 주소를 따로 아시나요?”

“아니요, 사무실 주소로 옮겨 적겠습니다. 이전 건 보안을 위해 직접 폐기해야 하니 저에게 주시면 됩니다.”

점원은 의심 없이 무구원이 집 주소를 적었던 카드를 내밀었다. 윤모난은 무구원의 집 주소가 적힌 카드를 주머니에 집어넣고 새 카드에는 남경 지부의 주소를 대충 적었다. 무구원의 아들에게는 미안하지만 다른 곳도 아니고 아버지의 사무실로 옮긴 것이니 전달에 무리는 없을 거였다.

“감사합니다.”

힘들이지 않고 무구원의 집 주소를 얻은 윤모난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매장을 나섰다. 무구원의 거처야 다른 방법으로도 충분히 알아낼 수 있겠지만 지금으로서는 이쪽이 제일 간단했다. 다시 1층으로 내려와 백화점을 빠져나온 윤모난은 새 담배부터 꺼내 물었다.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며 연기를 뱉어내고 있는데 자신도 모르게 넋두리 비슷한 것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소원대로 아빠가 됐군. 딸이 아니라 아들이긴 하지만.”

무구원이 자식을 낳으면 딸일 거라 생각했던 건 혼자만의 상상이기는 했다. 윤모난은 제가 생각하기에도 터무니없는 생각의 불씨를 담배와 함께 비벼 꺼트렸다. 그리고 손님을 태우기 위해 백화점 정문 앞에 줄지어 있는 택시 중 하나를 골라 탔다. 윤모난이 목적지를 말하자 택시 기사는 깜짝 놀라 되물었다.

“아이고, 그쪽은 무슨 일로 가십니까?”

기사의 반응은 당연했다. 윤모난이 가려는 곳은 남경 윤씨의 가족 묘지였으니까. 그동안 꽃들을 죽여 없애느라 아직 청연이와 형들의 무덤에 가보지 못했던 참이었다. 밤을 틈타 한 번쯤 다녀오는 것이 좋을 것 같아 한 결정이었다.

승객을 태운 택시는 곧 시내를 빠져나와 외곽으로 향했다. 오가는 차가 없어 한적한 도로를 미끄러지듯 달리자 금세 익숙한 곳에 당도했다. 윤모난을 내려준 택시가 매연을 뿜어대며 사라지자 익숙한 아까시나무꽃 향이 진동했다.

어둠에 잠겨 적막한 묘지의 울타리를 따라 걸으며 윤모난은 7년 전 무구원과 함께 담을 탔던 커다란 나무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는 또 한 번 훌쩍 담을 넘어 안으로 들어갔다. 열에 맞춰 심어진 커다란 아까시나무가 늘 그렇듯이 흰 비를 내리며 이 적막한 곳을 소복하게 덮고 있었다. 윤모난은 눈을 감고도 찾아갈 수 있는 길로 천천히 올라갔다.

“나 왔어.”

적막한 묘지에 당도하자 그는 일상적인 말투로 인사부터 했다.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무거운 침묵뿐이었다. 그러나 동생도 할 말은 그게 다였다. 오늘 이곳에 온 건 형들 때문만은 아니었기에.

“…우리 청연이가 여기에 누워 있었구나.”

윤모난은 옆으로 몸을 옮겨 푸릇하게 자란 무덤가의 잔디를 손바닥으로 쓸었다. 조카의 머리를 만질 때처럼 부드러운 손길이었다.

“삼촌이 늦게 와서 미안해.”

무구원이 약속대로 가족 묘지에 조카들을 안치시켜주었나 보다. 반란에 휘말려 죽은 아이들이지만 동정을 받기는 했는지 가문에서 굳이 막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저 아래 언덕에는 일주일 전 새로 조성되어 아직 흙만 덮인 무덤들이 끝도 없이 이어져 있었다.

말하자면 윤모난은 어린애들을 제외하고선 최후의 윤씨였다. 이 묘지에 잠든 윤씨들보다 더욱 끈질기게 살아남은 마지막 서자였다. 그렇다 해도 거기 별다른 의미가 있는 건 아니었다. 윤모난은 늘 자신의 성에 무게를 담은 적 없었기에.

성은 그저 글자였다. 제 이름 두 글자 앞에 성가시게 붙은 한 글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윤모난은 무덤 앞 비석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하지만 그가 사랑했던 이들은 하나 빼곤 모두 윤씨였다.

“봄이 되면 우리 청연이가 정말 보고 싶더라…. 살아 있었다면 지금쯤 훈련 학교에 들어갔을 텐데. 삼촌이 입학식에도 가고….”

아이가 죽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아서, 해마다 기일이 되면 크게 앓아야 했다. 봄에 태어난 아이는 겨울에 죽었다. 아이가 죽은 겨울은 여전히 눈앞에 생생하건만, 태어난 봄은 도저히 떠오르지 않아 생일에는 꼭 청연을 보러 가야지 다짐했다.

아무리 기억을 되짚어봐도 아이가 태어난 날이 기억나지 않는다. 처음에 윤모난은 그 순간을 언제부터 잊어버리게 되었는지조차 잊은 것만 같아 자책했다. 그리고 다른 과거의 기억들이 이런 식으로 간간이 사라져간다는 걸 알아차렸을 때는 두렵기까지 했다.

“…이러다 우리 청연이 얼굴도 기억 못하면 어쩌지. ”

그럴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지레 겁이 났다. 굳이 과거의 기억이 띄엄띄엄 사라지게 되는 기이한 현상을 제외하고서라도,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과거는 당연히 흐려지기 마련이기에.

윤모난은 그런 두려움이 들 때마다 자신을 호되게 다그쳤다.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고. 어떻게 잊을 수 있냐고. 기억을 되새기기 위해서라도 복수해야만 했다. 조카들의 죽음에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개입한 인간들은 다 죽여야 한다. 꽃들을 죽인 건 겨우 시작일 뿐이다.

“무구원.”

윤모난은 조금 뜬금없는 세 글자를 입에 담았다. 그러곤 주머니를 뒤져 안에 들어 있던 종이의 표면을 엄지로 쭉 쓸어내렸다. 손에 들린 건 아까 얻은 무구원의 고객 카드가 아닌, 편지 봉투에 정갈히 담긴 두꺼운 종이었다.

“이 편지를 네가 보낸 게 아니었나.”

윤모난은 편지 봉투에서 종이를 꺼내 눈으로 한 번 더 읽었다. 그가 반도로 다시 돌아온 건 모두 이 의문의 편지 때문이었다.

7년 동안 윤모난은 외국의 모처에서 용병 집단에 속해 살았다. 명줄이 어찌나 질긴지, 무간의 균열을 메우던 용병들에게 발견되어 살아남은 이후로 윤모난에겐 모든 시간은 지루한 과거의 반복이었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자기혐오, 정신 붕괴, 환각과 환청, 부분적 기억상실까지.

용병단에 속한 정신계 에스퍼가 아무래도 오래 복용한 향정신성 약의 부작용인 것 같다며, 약을 끊으라고 조언했다. 타고난 머리로 기억력에는 자신 있었건만 이런 일은 스스로도 당혹스러웠던 윤모난도 결국 약을 끊었다.

다만 반도를 떠나 있었던 덕분인지 갑작스러운 발작 같은 건 제법 줄어들어 다행이었다. 하지만 결코 뭔가를 극복했다는 기분은 도통 들지 않았다. 윤모난은 여전히 과거에 살고 있는 자신을 보며 조소했다.

“네가 아니라면 누가 나에게 이런 편지를 보낸 걸까.”

반도인들은 근처에 올 일도 없을 오지에 틀어박혀 있거나 무간에서 형을 찾는 이분적인 생활을 하던 그에게 갑자기 웬 편지가 왔다. 그걸 보자마자 처음으로 떠올린 사람이 무구원이었다. 물론 근거 없는 직감이었다.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XXXX년 05월 25일, 남경극장. 공연 『햄릿』

윤모난은 다시 한번 봉투에 담긴 편지를 읽었다. 『햄릿』의 가장 유명한 구절과 일시와 장소가 담긴 초대장이라.

이걸 받기 전까지 윤모난은 이상한 계획을 세우고 있던 참이었다. 10년을 기다리기로. 10년이 지나는 날, 청연의 생일인 봄이 되면 다시 반도로 돌아가 모두를 죽이려 했다. 하지만 난데없이 날아든 편지로 인해 그 기다림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네가 아니어도 달라질 건 없지.”

겨우 7년이 흐른 봄날 돌아온 고향. 복수는 이미 시작됐고 윤모난은 자신의 적들을 계속해서 되새겼다. 행여 잊어버리지 않도록 기억들을 압축해 이어 붙이면서.

10년 전 마지막 무간에서의 임무. 형의 죽음에 대한 기억의 상실. 뇌 의식 영상. 놀이 상대. 무구원.

“…….”

무구원. 신입 대원 학살 사건. 안범의 병실에 온 암살자. 청파액의 알싸한 향. 고문실. 한백호. 그리고 괴물의 환영….

“모난아, 내가 널 도와줄 수 있다.”

“…….”

“북해로 전향해라. 내게 복종하고 하라는 대로 해.”

무정원. 그가 조카들을 죽인 진짜 살인자다. 나란히 줄 서 있는 살인자들 중에서도 가장 까다로운 적. 차분하게 생각을 정리한 뒤, 윤모난은 청연의 묘비에 등을 바짝 기대었다.

“삼촌이 우리 청연이를 죽게 만든 사람은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야.”

그렇다면 시작은 무구원부터였다.

* * *

무구원의 아들 태오가 직접 고른 선물은 주문 제작을 거쳐 며칠 뒤 남경 지부 지부장의 사무실에 배송되었다. 마침 그날이 태오의 생일이었다.

“이게 왜 여기로 배달됐지? 고객 카드에 집 주소를 적었는데.”

대뜸 사무실로 도착한 아들의 선물을 본 무구원은 무언가 잘못됐음을 알아차렸다. 김 부장 역시 수상한 분위기를 눈치채고, 바로 백화점에 전화를 걸어 사실관계를 파악했다.

“지부장님. 점원이 말하기를 부하 직원이 주소가 잘못됐다며, 사무실 주소를 적고 갔다고 하는데요?”

“그날?”

“네, 시간을 물어보니 지부장님이 아드님과 백화점을 떠나고 한 15분 뒤였다고 합니다.”

“그날 백화점 감시 카메라 필름 전부 검수해서 당장 누군지 알아내.”

“네. 저기… 사모님께도 혹시 모르니 전화 드리는 것이 좋겠습니다. 외출하시는 것도 당분간 조심하셔야겠습니다. 전 백화점에 가서 확인하고 오겠습니다.”

김 부장이 서둘러 사무실을 나가자, 무구원은 바로 책상에 놓인 전화기로 집에 전화를 연결했다. 잠깐 연결음이 이어진 끝에 상대방이 전화를 받았다.

“…접니다. 네. 집에 경비를 강화하려 하는데 태오랑 외출을 삼갔으면 좋겠어요.”

수화기 너머로 아내가 짤막하게 뭐라 떠들었다. 침묵하던 무구원이 담담한 어조로 대답했다.

“뭘 걱정하는지 압니다. 그런 일은 없을 거예요. …네. 오늘은 태오 생일이니 늦지 않게 들어가겠습니다.”

퍽 사무적인 어조로 나눈 통화는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무구원은 전화를 끊고서도 심각한 시선으로 사무실 창문 밖을 내다보았다. 그날 백화점에서 익숙한 뒷모습과 마주친 뒤로 어쩐지 느낌이 좋지 않았다.

이럴 때일수록 정신을 차려야 한다며 무구원은 스스로를 다그쳤다. 책상 위에 쌓인 남경극장 테러 사건의 조사 보고서를 집어 든 그가 몇 번이고 읽었을 내용을 다시 찬찬히 훑어 내려갔다. 전혀 범인의 실마리를 잡지 못했다는 내용밖에는 없었다.

남경 전체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신분이 확인되지 않는 미상자까지 불심검문을 했는데도 수사에 아무런 진전이 없다니. 며칠째 과도한 업무를 처리하느라 강행군을 이어온 여파인지 관자놀이 근처가 욱신댔다. 무구원은 항상 윗주머니에 넣어두는 낡은 안경집에서 안경을 꺼내 썼다.

무구원은 도통 손에 잡히질 않는 업무를 처리하며 꾸역꾸역 일과를 이어갔다. 그때 오배송된 선물 문제를 알아보러 자리를 비웠던 김 부장이 갑자기 다급한 노크와 함께 문을 열고 들이닥쳤다.

“무슨 일이지.”

“지부장님. 저도 방금 들어오다가 아래에서 연락을 받았는데…. 남경극장 테러를 저질렀다는 남자가 갑자기 자백하러 왔다고 합니다.”

“…뭐? 용의선상에 있는 사람인가?”

“아니요. 신분 조회가 전혀 안 된다는데, 지부장님이 오시면 말하겠다고 버티고 있답니다.”

“나를?”

“…그리고 그 남자가 지부장님께… 이렇게… 전달을… 하라고. 오늘은 아들의 생일이라 주연동에 있는 댁에 일찍 가셔야 하니, 시간 많이 빼앗지 않겠다고….”

말이 끝나기도 전에 책상을 두 쪽으로 가를 것 같은 흉포한 소리가 울렸다. 무구원이 책상 위로 내리꽂힌 주먹을 두어 번 쥐었다 펴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 있어.”

“…지하 조사실입니다.”

“당장 정예 팀부터 집으로 보내. 내가 직접 만나러 가지.”

“하지만 지부장님…. 신원도 확인되지 않은 사람을 무작정 만나시는 건….”

“그 인간은 내 아이를 언급하며 날 협박하고 있어. 그런데 가만히 있으라고?”

무구원은 당장 지하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를 잡아탔다. 헐레벌떡 쫓아온 김 부장이 그에게 장전한 권총을 건넨다.

“가지고 계시죠.”

“…별걱정을 다 하는군.”

“하지만….”

때맞춰 엘리베이터가 지하 8층에 도착했다. 무구원은 어두운 복도 끝에 있는 조사실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이윽고 문이 열린다. 먼저 눈에 들어온 건 방 안 가득 남자를 둘러싸고 있는 치안조 에스퍼들이었다. 그 때문에 가운데 있는 남자의 얼굴이 바로 보이지 않았다.

“지부장님, 오셨습니까?”

심문 중이던 에스퍼들이 일제히 돌아서며 벽 옆으로 붙었다. 그러자 그림자들에 가려져 있던 실체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아니. 익숙한 향이 먼저 무구원을 맞이했다. 지그시 시선을 맞춰오던 남자가 입술 사이에서 흰 담배를 빼내더니 바닥에 툭, 하고 던졌다.

“지부장님. 보고 싶었는데 이렇게 만나게 되어 반갑습니다.”

하얀 얼굴에는 조소가 걸려 있었다.

윤모난. 그가 마치 떠난 적도 없다는 듯이 홀연히 눈앞에 앉아 있었다. 약간 낯선 색의 머리카락. 목을 감싼 코트의 깃 사이로 언뜻 보이는 끔찍한 흉터. 그곳을 은실처럼 감싸고 있는 펜던트 줄. 틀림없이 윤모난이었다. 이윽고 낮은 목소리가 주변 모두에게 명령했다.

“모두 나가.”

“…하지만… 경호가…. 지부장님, 그것만은 안 됩니다.”

명령을 어기는 건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 무구원의 손이 옆에 버티고 선 김 부장의 멱살을 잡고 뒤로 세게 밀쳤다. 그의 눈매가 전에 없이 사나웠다.

“나가.”

김 부장은 의문의 남자와 자신의 상관을 번갈아 본 뒤에 다른 에스퍼들을 데리고 조사실을 나갔다. 사람을 태워 죽일 것 같은 무서운 눈빛에 버틸 재간이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방 안에는 둘만 남았다. 이윽고 총알이 장전된 권총의 총구가 무언가에 이끌리듯 윤모난의 이마 한가운데에 닿았다. 그립을 쥔 손에 유독 힘을 주며 무구원이 물었다.

“왜 돌아오셨습니까?”

그 말에 윤모난에게서 탁한 웃음이 터졌다.

“서운하네. 그게 첫인사라니.”

“왜 돌아오셨냐고 물었습니다.”

“알잖아.”

공백이 들어찬 부분에 둘 모두 아는 답이 있었다. 복수. 말끝과 말머리 사이를 잠깐 쉰 무구원이 취조하듯 딱딱하게 물었다.

“남경극장이 시작이었군요.”

“그래.”

“그날 꽃들이 거기에 모이는지는 어떻게 알았습니까. 보안상 알 방법이 없었을 텐데요.”

“글쎄다, 우선은 누가 그 모임을 주관했지?”

“접니다.”

윤모난은 눈썹 사이를 팍 좁히더니 한참이나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는 여전히 찌푸린 얼굴로 느리게 대답했다.

“뭐어… 어쩌다 알게 됐는데. 중요한 건 이런 게 아니라 남경 윤씨들을 다 터트려 죽인 범인이 바로 나란 거지.”

또박또박 씹어뱉는 얼굴에 비정한 한기가 떠올랐다. 당당하게 죄를 자백하는 테러범을 앞에 두고 오히려 말문이 막힌 건 무구원이었다. 7년 전 무간으로 가 사라졌던 윤모난은 복수의 화신이 되어 돌아왔다. 그에게서 느껴지는 서늘함은 이성을 잃었다는 증거일 터였다. 하지만 왜….

“왜 지금입니까. 바로 돌아오지 않고…. 왜 이제야.”

윤모난은 그 질문의 뜻을 헤아리려는 듯이 미간을 좁혔다. 고민 끝에 대답이 이어졌다.

“그냥.”

고민이 무색하게 아무런 의미조차 없는 듯한 여상한 말투였다. 무구원은 화가 치민 듯 옆에 있던 의자를 거칠게 걷어찼다. 의자가 쾅, 하고 커다란 소음을 내며 벽에 처박혀 부서졌다.

“내가 살아 돌아와서 화가 났구나.”

“…….”

“아니면 두려운 건가? 내가 네 아들까지 건드릴까 봐?”

성역이 건드려진 듯 무구원의 눈빛에 일순 불길이 퍼졌다. 거칠게 윤모난의 멱살이 추켜올려졌다. 이윽고 등에 둔탁한 통증이 밀려온다. 하지만 윤모난은 별다른 방어 없이 무구원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항상 무감정한 로봇 같다고 생각했던 무구원의 얼굴이 붉게 상기되어 있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정말 많이 변했구나, 너도. 이 와중에도 윤모난은 이상한 감회에 젖었다.

“…제 아들은 당신 일과 관련 없습니다.”

“아니, 그 아이도 무씨 성을 가졌지. 북해가, 무정원이 내 조카들을 죽게 만들었잖아. 내가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그전 일들부터 찬찬히 따져보면 전부 아귀가 맞더라고. 너도 이젠 잡아뗄 수 없을 텐데.”

멱살을 쥔 무구원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내내 여유를 유지하고 있던 윤모난의 얼굴도 가면을 벗어 던진 듯 구겨졌다.

“그런 생각 안 해봤어?”

“…….”

“네 작은 거짓말이 생각지 못한 커다란 결과를 불러왔다고.”

그 말에 맥없이 멱살이 놓아지는가 싶더니 얼굴로 주먹이 날아왔다. 예상치 못한 주먹에 맞은 윤모난의 얼굴이 옆으로 휙 돌아갔다. 붉게 부어오르기 시작한 뺨 위로 주먹이 연이어 내리꽂혔다. 입이 찢어져 피가 터질 즈음 윤모난은 무자비한 주먹질을 한 손으로 막았다. 막는 힘과 때리려는 힘이 중간에서 맞붙어 서로를 밀어내고 있었다.

무구원이 무서운 얼굴로 경고했다.

“제 아들을 건드리면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

“…아버지가 다 됐네. 조금 서운하다, 구원아.”

“그렇게 부르지 마세요.”

바르르 떨릴 정도로 콱 쥔 주먹이 허공을 갈랐다. 그러자 윤모난이 막고 있던 자신의 손을 내리며 더 때려보라는 듯 얼굴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는 감정 없는 말투로 무구원을 부추겼다.

“그래, 최선을 다해서 막아봐. 여기서 날 죽이지 않으면 네 아들도 내 조카들이 간 길을 밟게 해줄 테니. 저번에 백화점에서 보니까 아이가 아버지를 많이 빼닮았더군.”

“…….”

“이름이 태오라 했던가. 좋은 이름이야. 성은 영 마음에 안 들지만.”

연이어 주먹이 망설임 없이 내리꽂혔다. 자신에게 쏟아지는 무구원의 주먹을 받아낸 윤모난의 얼굴에 금세 피가 번졌다. 윤모난은 입에 고인 피를 바닥으로 찍 뱉었다.

“감질나게 패지 말고. 자, 총으로 쏴.”

윤모난은 손등으로 피를 훔치며 흥분한 얼굴로 자신을 붙드는 남자에게 선심 쓴다는 듯 말했다. 무구원은 화풀이처럼 주먹만 휘둘렀을 뿐 가장 확실한 살인의 도구를 쓸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 뻔한 행동에 윤모난이 비아냥거렸다.

“왜. 못 죽이겠어?”

피 묻은 손이 무구원의 얼굴 위를 살짝 가리더니 샌님 같은 안경알을 가볍게 툭툭 쳤다. 윤모난은 자신이 7년 전 선물했던 안경을 단번에 알아본 것이다.

“태오 아버님, 엉큼하시잖아요. 아직도 한때의 몸정을 못 잊고 이런 거나 간직하고 계셨어요? 아내와 아이도 있는 분이. 쯧쯧.”

“…….”

“아직 나한테 미련이라도 남은 건가?”

안경을 두드리던 손은 독사처럼 목선을 훑고 내려가 무구원의 하체까지 미끄러졌다. 버클 아래 두툼한 부분을 툭툭 건드리며 윤모난이 비소했다.

“그런데 어쩌지. 내가 유부남 따먹는 취미는 없어서.”

윤모난은 자신을 막으려는 무구원의 손을 치우면서 무릎을 세워 하체 가까이에 붙였다. 시선은 무구원의 향한 채로. 하지만 둘은 아주 가까이에 있을 뿐 차마 서로 닿지는 못했다.

이렇게 가까이에 있으면 차마 숨길 수 없는 표정이 드러나는 법이다. 윤모난이 나지막이 속삭였다.

“무구원, 너 겁나는구나.”

무구원의 입가 근육이 미세하게 요동쳤다. 약간만 움직이면 입술이 닿을 만큼의 거리를 둔 두 사람은 서로 눈을 마주쳤다. 무구원의 눈동자는 늘 그랬듯 칠흑같이 짙은 검은색이었다.

“당연히 그래야지.”

먼저 고개를 움직여 시선을 이탈한 건 무구원이었다. 그의 얼굴 위로 손이 다가와 쓰고 있던 안경을 건드려 떨어트리자 와작, 부서지는 소리가 이어졌다. 범인은 윤모난의 무자비한 발이었다.

“겁내고 두려워해야지, 무구원. 너도….”

다시 단단한 턱을 쥐어 제게로 시선을 고정시킨 윤모난은 7년 전 기만과 거짓의 말을 뱉었던 무구원의 아름다운 입술을 간접적으로 범하듯이 자신의 입술을 혀로 느긋하게 훑었다. 매운 주먹질에 터져 붉게 번진 입술에서 뛰쳐나온 뜨거운 숨이 무구원의 얼굴에 닿았다.

“너도 내 조카 죽음에 일말의 책임이 있잖아. 그런데도 난 너희가 7년간 평범한 삶을 살도록 해줬어.”

순간 무구원이 발작하듯 몸부림쳤다. 마치 독사가 교미하듯 장신의 남자 두 명의 몸이 거칠게 뒤엉켰다. 하지만 저항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이 윤모난의 나머지 손이 그의 뻣뻣한 목을 떡하니 조이며 벽으로 밀어붙였다.

“이제 너도 알겠지. 그게 얼마나 큰 관용인지? 만약 내가 네 아들을 죽이면 넌 용서할 수 있을 것 같아?”

그 말에 무구원이 눈을 부릅뜨고선 무섭게 노려보았다. 무엇이 뒤섞였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하면서, 동시에 상대를 조각내 찢을 것같이 날카로운 눈빛이었다. 7년 전과는 완전히 달라진, 자신을 향한 그 시선이 반갑지는 않으면서도 윤모난은 협박을 이어갔다.

“내가 마음만 먹으면 네 가족들은 죽은 목숨이야. 지금까지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은 건 내가 참아줬기 때문이라고.”

“…….”

“하지만 네가 날 즐겁게 해주면, 아내와 아들은 안 건드리지.”

무구원은 귀에 내리꽂히는 잔인한 말을 들으며 생각했다. 테러범인 주제에 자신의 영역인 이곳으로 들어와 주인인 자신을 협박하다니 과연 윤모난답다고. 그런 생각을 하던 와중에 목을 쥔 손이 악력을 더하며 꺾을 듯이 몸을 흔들었다.

“무슨 말인지 알아들어?”

“…이제 와서 제게 뭘 기대하는 겁니까?”

“복종해라.”

윤모난은 음절 하나하나를 분절하듯이 말을 뱉어냈다. 그 모든 말을 상대에게 다 집어삼키게하려는 것처럼.

“내가 네 가문을 멸문한 뒤에, 무정원을 산 채로 갈기갈기 찢어 북해에 뿌리고, 내 조카들을 죽게 만든 인간들을 모두 죽일 때까지. 내게 복종해.”

무구원의 얼굴에 알 수 없는 변화가 있었지만, 여전히 대답은 없었다. 하지만 이건 대답의 문제가 아니었다. 윤모난의 계획을 알고서도 지금 그의 머리를 총알로 꿰뚫어 막지 않는다면 결국 첫 순응을 하는 셈이었다.

잠시간 침묵이 이어지자 윤모난 역시 대답을 이미 들었다는 듯이 다음 요구 사항을 말했다.

“가짜 신분증부터 하나 만들어. 어딜 가나 신분증 없이 움직이기가 불편해서.”

“…지부장인 제가 테러범 신분 위조나 하란 말씀입니까.”

그 말에 윤모난이 기다렸다는 듯이 매섭게 뺨을 내려쳤다.

“안 하면 뭘 어쩔 셈이지.”

“…….”

“묻잖아, 무구원.”

천천히 제자리로 돌아오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윤모난이 비정하게 물었다.

“아직도 너한테 선택지가 있다고 생각해?”

그 질문은 조롱처럼 들렸으나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무구원에게는 선택지가 없었다. 이 복수의 대상이 되든가 공모자가 될 수밖에. 무엇보다 아들 태오의 생사가 걸린 문제이다. 무수히 손에 피를 묻히고 살아온 윤모난에게 제 아들의 피까지 묻히게 내버려둘 수는 없었다.

“가짜 신분증을 만든 다음에는요?”

“차례로 다 없애야지. 무정원이 쌓아온 것, 공들여온 것, 지키려는 것 모두.”

“결국 내통자가 필요하신 거군요. 외부인이 북해에 들어가서 누군가를 암살한다는 게 쉽지 않을 테니.”

허나 윤모난에게 복종하면 가문이 멸문하더라도 태오는 산다. 이윽고 무구원이 무거운 입술을 뗐다.

“…남경극장 테러로 모두가 남경을 주목하고 있습니다. 특히 여긴 이런 대화를 하기엔 부적절한 장소입니다.”

“그래서?”

“시내에 집이 하나 있습니다. 드나드는 사람이 없어 은신해 있기 좋은 곳이니 그곳으로 가시죠.”

윤모난은 경계하는 눈으로 한참을 보더니 이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깐이지만 그의 얼굴에 스친 복잡한 기색을 본 무구원은 손수 조사실 문을 열어주었다. 그러자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김 부장과 에스퍼들이 허둥지둥하며 둘을 바라봤다.

“차 준비해.”

“네? 네…!”

본인을 테러범이라 지칭하며 자수하러 왔다는 남자를 지부장은 직접 문을 열어 차에 태웠다. 그러더니 자신이 운전하겠다는 김 부장을 저지하고 본인이 운전석에 앉았다. 차 안을 침묵의 시선으로 쭉 훑는 무구원은 그답지 않게 산만하고 긴장한 것처럼 보였다.

이윽고 차가 정차한 곳은 시내 한쪽에 있는 작은 단독주택들이 밀집해 있는 지역이었다. 소담한 2층 크기의 단독주택들이 나란히 울타리를 맞대고 있는 거리는 평화로웠다.

목적지에 차가 섰을 때 윤모난의 시야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언뜻 보인 마당에 가득 핀 모란꽃이었다. 차에서 내린 무구원이 열쇠 구멍에 맞춰 열쇠를 밀어 넣고 몸소 대문을 열어주었다.

“들어오세요.”

모란이 한창일 5월 말이라 그런지 마당에는 탐스럽게 속을 꽉 채운 분홍색 모란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당연히 집주인의 취향에 따라 제멋대로 심어둔 것일 테다. 남경에서는 윤씨 저택 말고는 감히 모란을 심는 것이 금지되어 있으니까.

무슨 목적으로 여기에 이 부담스러운 꽃을 심은 걸까. 예상치 못한 광경에 당황한 윤모난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그새 무구원에게 산만함이 옮았는지 못 본 척하는 것조차 못했다. 그래서 무구원이 안내하는 대로 현관에 들어서면서 윤모난은 약간이지만 방심하고 만 것이다.

방심의 증거는 등 뒤로 바짝 다가서는 무구원에게 실없는 농담을 던진 것부터였다.

“…태오 아버님, 나랑 하고 싶으면 도서관 변태처럼 그러지 말고 엉덩이라도 흔들어 동하게 해보시든가.”

한껏 비웃으며 이죽거리는 순간 팔뚝이 따끔했다. 시선을 떨어트리자 팔뚝에 꽂힌 작은 주사기와 그 끝을 누르는 검은 손끝이 보였다. 약물은 순식간에 윤모난의 혈관으로 흘러 들어갔다. 예상치 못한 공격에 얼굴을 찡그린 윤모난은 빈 주사기를 자신의 팔뚝에서 빼내 확인했다.

“뭐야, 최음제는 아닐 거고.”

“그럴 리가요.”

“…넌 죽었어.”

협박이 무색하게 이내 윤모난의 커다란 몸이 옆으로 휘청거렸다. 현관에 달린 거울에 얼굴이 부딪히기 전에 무구원이 얼른 그를 뒤에서 끌어안았다. 이윽고 품 안에 안긴 몸이 무게를 더하며 아래로 처졌다.

이 정도 고농도의 마취제면 아무리 윤모난이라도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무구원은 완전히 기절한 그를 단단히 지지한 채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머뭇거리는 손은 윤모난의 얼굴 근처에서 맴돌았다.

다만 그게 다였다. 무구원은 기절해 누워 있는 사람을 죽일 수도 있는 입장이었건만, 손끝으로 만지지조차 못했다. 이내 등 뒤에서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들리자 갈 데 없는 그 손도 제자리로 돌아갔다. 뒤늦게 쫓아온 김 부장이었다.

“성공하셨습니까?”

차에 타기 전에 몰래 마취제를 건네준 것이 바로 그였다. 무구원이 대답하지 않자 제 눈으로 윤모난의 상태를 확인한 김 부장이 물어왔다.

“이 사람은 어떻게 할까요?”

“이 정도 마취제를 맞았으니 당분간은 일어나지 못하겠지. 수갑만 채워놓고 여기 가두겠어. 내가 없는 동안 혹시 모르니 주변 경계를 강화하고… 절대 방심하지 마. 우습게 볼만한 사람이 아니니까.”

“네. 이 자는 그럼 앞으로….”

“앞으로 코드명으로 부르지. …이리라고 부르면 되겠군.”

“전달하겠습니다.”

이름이 말소된 윤모난에게 이리라는 새로운 명칭을 선사한 뒤, 무구원은 그를 현관 앞에 뉘어놓고 연이어 부하들에게 지시 사항을 전달했다.

“오늘 바로 북해에 전보를 넣어. 일주일 뒤에 수도에서 평의회 회의가 있으니 그때 가주님을 뵈어야겠어. 따로 접견 시간을 달라고 요청해. 급한 일이니까 꼭 봬야 한다고.”

“네 알겠습니다.”

“지금 몇 시지?”

김 부장은 습관처럼 시간을 묻는 상관에게 시간을 일러줬다. 벌써 8시가 넘었다. 아이와 약속한 시간이 꽤 지나버렸다. 무구원은 우선 집부터 가기로 결정했다.

그렇게 집으로 가는 길. 차 뒷좌석에 앉은 무구원은 엉망으로 부러진 안경만 계속 매만졌다. 김 부장이 제가 유독 이 물건을 아끼는 것을 알고 따로 챙겨 안경집에 고이 넣어 건네준 것이다. 하지만 발에 밟힌 안경은 알이 깨지고 대가 부러져 고쳐서 쓸 수 없을 정도로 망가진 상태였다.

집 앞에 도착해 운전기사가 자신을 부르는데도 안경에 정신이 팔린 무구원은 전혀 듣지 못했다. 그는 누군가 유리창을 쾅쾅 두드리고 나서야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빠 미워!”

태오였다. 무구원은 조금 느리게 안경을 안경집에 넣어 보관한 뒤, 얼굴을 한 번 손으로 쓸어내리고 나서야 차에서 내릴 수 있었다. 아이의 생일이라 집에서 저녁을 먹기로 했는데, 어쩌다 보니 두 시간이나 늦었다. 내리자마자 아이를 안으려 했지만, 태오가 주먹으로 퍽퍽 윗배를 갈겼다.

“내 생일이라 오늘 일찍 온다고 했잖아! 미워! 밉다고!”

“…급한 일이 생겨서. 미안해, 태오야.”

“아빠는 거짓말쟁이야…! 난 거짓말하는 사람이 제일 싫어!”

무구원은 아들의 응석을 다 받아주며 묵묵히 서 있었다. 이럴 때마다 피는 진하다는 생각을 어쩔 수 없이 한다. 태오는… 자신의 아버지를 너무 많이 닮았다. 용서가 없는 성격이 특히 판박이였다. 무구원은 아들을 달래며 다정하게 끌어안았다. 하지만 아이는 인상을 쓴 채로 씩씩거릴 뿐이었다.

“아빠가 어떻게 해야 우리 태오가 용서해줄까.”

“아빤 날 사랑하지도 않지?”

“왜 그렇게 생각해?”

“날 사랑하면 나랑 한 약속은 지켰겠지. 자꾸 약속도 어기고 거짓말만 하잖아!”

할 말이 없었다. 그러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니라는 건 변명에 불과했다. 아이의 말이 옳았다. 자신은 약속도 지키지 못했고 거짓말도 했다. 하지만 무구원은 오늘만은 아이에게 작은 용서나마 받고 싶었다.

“아빠도 최선을 다했어. 그러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니야. 태오야, 믿어줘.”

“…….”

“태오가 아빠를 미워하면… 아빠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사랑하는 사람한테서 미움받는 게 아빠는 제일 무섭거든. 그러니까 태오가 좀 봐주면 안 될까?”

그제야 태오의 화가 조금 누그러졌다. 이윽고 아빠의 검은 머리를 움켜쥐며 품에 얼굴을 파묻은 것이다. 아이의 작은 숨이 닿는 곳이 뜨거웠다.

“알았어…. 아빠만 용서해줄게. 거짓말하는 사람은 정말 싫지만… 아빠는 용서해줄 거야. 그러니까 그런 표정 짓지 마.”

이럴 때 자신이 어떤 얼굴이기에 자꾸 이런 소리를 듣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태오가 그의 손을 끌어당겼다. 현관에 서서 부자를 바라보는 한 여자가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무구원은 그녀와 시선이 마주치자마자 예의를 차려 묵례했다.

“오셨어요?”

“…네.”

“죄송해요. 바쁘실 텐데, 태오가 오늘따라 유독 어리광을 부리네요.”

여자는 조금 쓸쓸한 표정으로 어리광을 부리는 태오를 지켜봤다.

“아직 어리니까 어리광 정도는 부려도 됩니다.”

“엄마, 아빠 자고 간댔어.”

자고 간다고 한 적 없는데, 태오는 제멋대로 아빠의 거취를 결정했다. 아들의 황소고집을 모르지 않는 엄마는 조금 난처하게 무구원의 눈치를 살폈다.

“태오 너…. 아빠 바쁘신데 고집 피우면 돼?”

“아닙니다. 태오랑 약속을 어겼으니 오늘은 여기서 자고 가죠.”

전반적으로 예의를 차리면서도 딱딱한 부부 사이였다. 어린 태오가 아빠를 끌어당겨 엄마 옆에 놓자, 정해진 순서처럼 무구원이 그녀의 뺨에 키스했다. 무슨 의식처럼 보일 정도로 건조한 인사였다. 한 치의 애정도 담기지 않은. 그건 키스를 받는 그의 아내도 마찬가지였다.

“태오 먼저 들어가 있을래? 엄마랑 할 얘기가 있어서.”

“응.”

태오가 현관에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무구원은 입이 잘 떨어지지 않는지 한참을 머뭇거렸다.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오는 내내 고민했지만, 다른 말은 필요 없을 것이다.

일주일 전 남경극장에서의 테러부터 아내의 걱정과 두려움이 극에 달한 상태인 것을 알고 있으니. 무구원은 듣는 사람 입장을 고려해 최대한 아무렇지 않게 핵심을 잘 전달하기로 했다.

“그 사람이 돌아왔습니다.”

단번에 말뜻을 알아들은 여자의 눈이 동그랗게 커지더니 불안한 기색이 점차 온 얼굴에 번졌다. 그녀는 태오가 들어간 집 안을 흘긋 본 다음 허둥지둥 문을 닫았다. 마치 아이가 절대 들어서는 안 되는 듯이.

“그게 갑자기 무슨 소리예요? 왜… 그 사람이 갑자기! 분명 죽었다고 했는데… 어떻게!”

“저도 내막은 모릅니다. 오늘 갑자기 찾아왔습니다.”

“그럼 설마…. 남경극장에서의 일도… 설마!”

별안간 벼락을 맞은 듯한 모습이었다. 7년 동안 죽은 줄 알았던 사람이 돌아와 제 일가친척들을 모조리 폭탄으로 죽였으니 그럴 수밖에. 그녀는 긴장한 얼굴로 숨을 색색 내몰아 쉬었다. 대문 밖을 불안한 시선으로 주시하던 그녀가 한참 소리를 죽이고 속삭이듯 물었다.

“태오는요? 설마 그 사람이 태오에 대해서도 알고 있는 건 아니죠?”

“모를 겁니다. 그 사람이 무간으로 가고 나서야 저도 겨우 안 사실이니까요.”

“설마 태오에 대해서 말할 생각이에요?”

“아직은 모르겠습니다.”

무구원은 질문에 답할 수 없었다. 태오의 문제는… 쉽지 않다. 태오는 태어난 순간부터 제 아들이었다. 피 한 방울 나누지 않았지만 한 번도 내 자식이 아니라 생각한 적 없었다. 애초에 태오가 태어난 데는 자신의 책임도 있었으니까.

“모르겠다니요? 절대 안 돼요!”

“…진정하세요. 언젠간 벌어질 일이 벌어진 것뿐입니다. 그동안 상의한 대로 행동하시죠. 괜히 흥분해서 실수하면 안 됩니다.”

무구원의 아내는 눈을 감고서 냉정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꽤 긴 시간 동안 숨을 골랐음에도 두려움이 여전히 가시지 않는 듯 그녀는 쥐어짜듯 말해야만 했다.

“윤모난은… 생물학적 아버지일 뿐이에요. 단순히 정자만 제공한 거죠. 태오에게 아버지는 당신뿐이에요. 저도 계속 그랬으면 하구요.”

“…….”

“7년 전에 당신이 저한테 뭐라고 했어요? 무슨 일이 있어도, 그 어떤 위험으로부터도 태오를 지키겠다고 맹세했잖아요. 그 사람이야말로 태오에게 가장 위험한 사람이에요. 알잖아요? 돌아와서 가족들부터 죽였으니!”

“소리 낮추세요.”

아내가 다시 흥분할 기미가 보이자 무구원이 딱딱한 얼굴로 일렀다. 그러자 그녀가 이내 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내 한 개비를 물고 불을 붙였다. 대를 지지하는 가느다란 손이 눈에 띌 정도로 떨리고 있었다.

“…그럼 어떻게 말할까요. 당신 아버지가 시켜 내가 당신을 강간해서 몰래 애를 낳았다고? 생각만 해도 끔찍해요. 저도 윤모난에 관해서 대충 알아요. 태오랑 비슷하겠죠. 용서가 없는 성격이라더군요.”

“연민이 없는 사람은 아닙니다.”

그 말에 여자가 담배 연기와 함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연민 따위를 기대하며 태오가 위험에 빠지게 그냥 두자구요? 저도 당신 마음 모르지 않아요. 하지만 반드시 선택해야 할걸요. 아들인지… 아니면 그 사람인지.”

아내의 눈초리가 선택을 종용하며 마주해왔다. 그녀는 7년 전 부른 배를 끌어안고 몰래 무구원을 찾아왔을 정도로 심지가 굳은 여자였다.

“대화는 이 정도 하고 들어가죠. 태오가 기다리겠어요.”

결국 아무런 결론이 나지 않은 채로 대화가 갈무리됐다. 어쨌건 오늘은 태오의 생일이었다.

뒤늦게 세 가족은 외동아들의 생일 케이크에 촛불을 붙이고 간소하게 생일 축하를 했다. 일곱 개의 촛불을 모두 분 뒤에 케이크를 나눠 먹고, 함께 고른 생일 선물을 풀어보기도 했다. 태오는 손잡이에 자신의 이름 석 자가 각인된 칼을 한참이나 매만지더니 이내 기분을 조금 푸는 듯했다.

그런 다음 부자는 함께 목욕을 하고 침대에 나란히 누웠다. 이때쯤 기분이 완전히 풀어진 태오가 새끼 원숭이처럼 아빠의 목에 매달렸다. 이불에 누워 작은 발바닥을 아빠의 단단한 정강이에 비비적거리던 태오가 불쑥 말을 꺼냈다.

“아빠.”

“응.”

“아빤 왜 우리랑 같이 안 살아? 엄마랑 내가 싫어?”

아이의 질문에 무구원은 일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건 대답하기 힘든 문제였다.

무구원이 남경의 지부장에 취임하면서 세 가족은 집을 분리했다. 허울만 부부인 무구원과 태오의 엄마가 그들의 아들을 위해 내린 최선의 결정이었다. 오로지 태오의 안전만을 바라면서. 두 사람의 인생은 7년 전부터 모두 아들을 위해 바쳐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아이는 북해의 혹독한 겨울 한가운데서 태어났다. 하지만 정체를 숨기기 위해 생일은 5월로 옮겨야 했다. 혹시라도 꼬리가 밟혀 아이의 탄생 시기를 특정하게 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7년 전, 결혼을 허락해달라며 찾아온 무구원을 보며 무정원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천경교 교단에서 혼외자식을 받아줄 리도 없고, 그가 하는 말들이 거짓말이라는 것을 모를 리 없었음에도 웬일인지 흔쾌히 허락한 것이다. 당시 무구원은 명령 불복종으로 채찍형 처분을 받고서 가문에서 내쳐지기 직전이었는데, 돌연 큰형은 그를 북해에 머무르게 해주며 직함을 떠맡기기까지 했다.

태오는 그렇게 지킨 아이였다. 적당히 연기하고 한없이 희생하면서. 무구원은 닳아 사라질까 두려운 듯 아들의 보드라운 뺨을 가만가만 쓰다듬었다.

“지금도 태오가 아빠 보고 싶으면 이렇게 오잖아. 그래도 부족해?”

“그냥 좀 이상해. 아빠랑 엄마랑 이렇게 따로 사는 거.”

“나중에 아빠가 다 설명해줄 거야…. 태오, 네가 더 크면.”

“아빤 엄마를 사랑하지 않지?”

아이는 새초롬하게 눈을 뜨며 빤히 물었다. 순간 말문을 잃은 무구원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로 태오가 거침없이 조잘댔다.

“아빤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된 거야.”

“뭐?”

“난 알 수 있어. 아빠는 엄마를 사랑하지 않아. 늘 다른 사람 생각하는 것 같아.”

“왜 그렇게 생각해?”

“아빠가 사랑하는 사람 말이야. 담배 피우는 키 큰 아저씨지?”

무구원은 이 녀석이 지금 무슨 말을 하나 싶어 제 품에서 살짝 떨어뜨리며 멀뚱한 눈으로 바라봤다. 태오는 거리낌 없이 자신의 의견을 늘어놓았다.

“아빠가 길거리에서 키 크고 담배 피우는 아저씨들을 발견하고 슬픈 표정을 지을 때 말이야.”

“…….”

“그때마다 아빠 파동이 뾰족해져. 송곳보다는 좀 뭉툭한데, 뭐랄까… 꽃줄기에 난 잔가시처럼 막 뒤죽박죽이야. 좀 이상하잖아? 왜냐하면 아빤 평소에 얼음처럼 파동이 잠잠하거든. 늘 잠든 것 같단 말이야.”

이럴 때의 태오는 여지없이 윤모난의 핏줄이었다. 어린 나이에도 상대를 꿰뚫어 보는 거침없는 통찰력은 생부와 꼭 닮았다. 윤모난의 가이드 능력을 물려받았을 때는 그러려니 했지만, 정작 강한 혈연을 상기시키는 건 아이의 이런 직관이었다. 무구원은 손으로 아이의 얼굴을 빗자루처럼 장난스레 쓸었다.

“그만하고 얼른 자자.”

“이잉, 나 궁금해. 말해줘.”

“네가 몰라서 그래. 아빠한테 사랑은 오직 태오뿐이야.”

“정말?”

“응. 태오는 아빠의 무조건적인 사랑이거든.”

수백 번은 들은 그 말을 자장가 삼으며 아이는 곧 잠이 들었다. 하지만 무구원은 새벽이 되어도 잠을 이루지 못했다. 결국 아이 방을 나와 거실로 향했다. 그는 창문 너머로 남경 시내 풍경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윤모난이 있는 집 방향이었다.

7년간 바닥에 처박힐 만큼 처박혔다고 생각했는데, 도저히 땅을 박차고 오를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 그 사람도 그리고 저 자신도. 이 적응되지 않는 바닥의 희미한 공기에 가끔 질식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무구원은 코트 주머니에서 기도할 때 쓰는 금색 바늘 함을 꺼냈다. 또각, 하고 열린 손바닥만 한 바늘 함에는 바늘 대신 알알이 작은 알약들이 담겨 있었다. 탐욕스러울 정도로 붉은 빛깔의 작은 알약 하나를 꺼내, 혀 안쪽으로 밀어 넣고 꿀꺽 삼켰다.

“…….”

바늘 함을 닫아 다시 코트 주머니에 넣어놓으며 무구원은 아득한 두려움의 밑바닥으로 잠겨 들었다. 두려움은 질소처럼 이 바닥 공기의 가장 큰 지분을 차지하고 있는 감정이었다. 그러니 이 고통 또한 긍정해야 할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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