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이중 곡선
무구원이 놓은 그 수상한 주사의 위력은 우습게 볼 수준이 아니었다. 꺼진 정신을 겨우 차린 건 꽤나 시간이 흐른 뒤였다. 윤모난은 일어나자마자 방심한 자신을 자책하듯 욕을 씹어 뱉었다.
“젠장.”
잘난 척이란 척은 다 해놓고 고작 범생이 따위에게 그런 치사한 수를 당해 이러고 있으니, 그러지 않으려 해도 자괴감이 밀려왔다. 정신을 차리고도 몇 시간째. 방에 딸린 욕실로 추정되는 곳에 갇혀 윤모난은 스스로를 비난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팔 뒤쪽으로 수갑이 채워져 움직이기가 불편했다. 특수 제작한 수갑인지 힘을 줘 부숴보려 했지만 꼼짝도 안 했다. 무구원 이 쓸데없이 치밀한 새끼.
“…무구원.”
무구원이 바깥에 있다는 건 내내 파동으로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문은 닫혀 있고 밖에서는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윤모난은 최대한 애처로운 소리로 무구원을 불렀다.
“구원아, 나 배고파.”
별 기대 없이 던진 미끼였는데, 조금의 간격을 두고 마침내 문이 열렸다. 문을 등지고 바닥에 누워 있던 윤모난은 최대한 몸을 웅크렸다. 무구원이 가까이에 다가오면 박치기로 대가리를 깰 셈이었다. 옛정이고 뭐고 붙잡아다 고문한 뒤에 다시는 이따위 수작을 못 벌이게 혼쭐을 낼 것이다.
“당신이 언제부터 끼니를 챙겼다구요.”
익숙한 저음의 목소리와 함께 일순간 방 안의 불이 밝아졌다. 내내 어둠에 익숙해져 있던 눈이 오랜만에 빛을 보자 시리고 아팠다. 윤모난은 인상을 찡그린 채 몸을 천천히 돌렸다.
“이젠 속지도 않는구나.”
“…….”
“당장 풀어.”
허나 무구원은 표정 없이 그저 바라보기만 할 뿐이다. 그러고서 하는 말이라고는.
“안경, 그거 제가 아끼는 물건이었습니다.”
“…그래서?”
“당신한테는… 그런 사실이 별로 중요하진 않겠죠. 하지만….”
그는 계속 말을 이어가려 하는 듯했으나 윤모난은 그만 듣고 싶다는 듯 수갑 찬 손목을 휘휘 흔들었다. 자신이 며칠째 이 빌어먹을 곳에 있었는지나 알고 싶었다.
“됐고. 지금 몇 시야? 여기 날 얼마나 가둬둔 거야.”
“…모릅니다.”
“시간 능력자라는 놈이 시간을 모르는 게 말이 돼?”
몸을 일으켜 무구원이 항상 차고 다니는 손목시계를 확인하려고 가까이 가자 뒤로 물러서며 손목을 뺀다. 윤모난은 황당하다는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지금 몇 시냐니까? 진짜 몰라?”
“…….”
또 입을 다문다. 어이가 없네. 7년 동안 머리가 돌아버렸나? 어머니 신이니 뭐니 개 같은 종교를 평생 믿은 놈이니 그럴 확률도 충분히 있었다.
“너 진짜 날 여기 계속 가둬놓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 건 아니지?”
“불가능하다는 건 압니다.”
“알면서도 이러는 건 멍청한 선택인데. 똑똑하게 굴어야지. 네가 살 방법은 일찌감치 알려줬잖아.”
“남경극장…. 꽃들이 그날 그곳에 모이는지는 어떻게 알았습니까?”
역시나 무구원은 이전에 윤모난이 ‘그냥 알게 되었다고’ 얼버무린 남경극장 문제를 확인하고 싶은 듯했다. 다만 윤모난은 그에게 자신이 아는 사실을 전부 말해도 될지 확신이 없었다. 그가 현재 어떤 입장이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복종하라고 다그치긴 했지만 무구원을 완전히 믿을 순 없었다. 물론 지금 자신이 여기에 갇힌 건 무구원에게 조금 방심한 결과이고, 그 대가가 지금의 이 개 같은 상황이지만.
“그게 왜 궁금하지?”
“…소지품에 이 초대장이 있더군요.”
무구원이 품 안에서 꺼낸 초대장을 확인한 윤모난의 눈이 가느스름해졌다. 코트 주머니에 넣어놓은 걸 가져간 모양이었다. 다만 저것만 가지고는 아무것도 알 수 없을 거였다. 윤모난조차 저걸 누가 보냈는지 모르고 있으니. 무구원은 집요하게 취조하듯이 질문했다.
“이건 제가 남경 윤씨들에게 보낸 것과 다른 겁니다. 거기에는 공연의 제목이나 문구가 쓰여 있지 않았어요. 그러니 이 초대장은 누군가 따로 만들었다는 뜻이겠죠.”
“…….”
“이 초대장,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 받은 겁니까?”
대답하지 않을 이유는 없었으나 윤모난은 입을 다물고 상대를 빤히 바라봤다. 무구원이 왜 자꾸만 저 초대장의 출처를 묻는지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다. 물론 저것이 수상하다는 건 그도 동의하는 바였다. 『햄릿』의 구절, 날짜와 장소가 적힌 초대장.
직관적으로 추리해보자면 저건 누군가 윤모난의 복수를 부추기기 위해 보낸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그 주체가 아직까지 어떤 개입을 한다거나 정체를 드러내지는 않았다. 윤모난도 여러 방면으로 그걸 알아보려 했지만, 이제껏 아무런 소득도 없었다. 그래서….
“…난 너인 줄 알았어.”
무심코 한 말에 무구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형편없는 표정을 보아하니 확실히 무구원은 아니라고, 윤모난은 확신했다. 그건 확인했으니 이제 됐다.
“저는 당신이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습니다.”
“그럼 무정원인가? 또 날 함정에 빠트리려는 것일 수도 있겠지. 실제로 그걸 받고 여기까지 당장 달려왔으니.”
“그럴 리가요.”
무구원은 그 가정에도 부정을 표했다. 단지 제 가문을 겨냥한 화살을 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논리적으로 맞는 구석이 없다는 얼굴로. 윤모난은 그로써 무정원도 후보에서 말끔하게 뺐다.
“하긴, 무정원이 내 복수를 구태여 도울 이유는 없지.”
“이 초대장이 당신의 복수를 돕기 위한 거라고 생각하는 겁니까?”
“『햄릿』 안 읽어봤어? 복수하는 내용이잖아.”
“…확실히 그렇긴 하죠.”
“무슨 뜻이야?”
대답하지 않고 뜸을 들이며 생각에 빠진 무구원이 편지의 구절을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유명하다 못해 『햄릿』을 읽지 않은 사람도 아는 구절이다. 이 작품을 대표하는 문장이고 가장 많이 기억되는 문장이기도 했다. 하지만 뒤이어 따라오는 구절을 아는 이에게는 조금 다르게 읽힌다. 편지에 적히지 않은 뒤 문장을 무구원이 소리 내어 되새겼다.
“포악한 운명의 돌팔매와 화살을 맞고도 죽은 듯이 참아야 하는가. 아니면 밀려드는 재앙의 파도와 맞서 싸워야 할까. 죽는 건 그저 잠을 자는 것과 다름없지. 그저 잠에 들어 마음과 육신의 고통이 사라진다 하더라도….”
신원 미상의 발신인으로부터 초대장을 받자마자 윤모난은 다시 이곳으로 돌아왔다. 고뇌를 끝내고 복수를 결심한 햄릿처럼.
“하지만 죽음의 잠 속에 찾아올 꿈을 생각하면 우리는 망설일 수밖에. 그런 까닭에 산다는 건 결국 재앙이 아닌가. 누가 견딜 수 있을까. 세상의 채찍질과 멸시를. 폭군의 횡포, 권력자의 오만함이며 좌절한 사랑의 고통과 오만방자한 관리들. 인내와 덕을 갖춘 사람이 소인배에게 모욕당하는 것을. 그저 이 칼 한 자루면 모든 것을 끝장낼 수 있을진대.”
하지만 결정적인 부분에서 윤모난은 햄릿이 될 수 없었다. 둘의 복수는 결이 다르기 때문이다. 윤모난의 복수는 순수하리만치 사적인 것이었다. 지극히 개인적이고 아무런 대의명분도 존재하지 않는. 그래서 더 지독하고 잔인한.
자식이나 다름없던 조카의 목숨을 빼앗은 대가를 묻는 복수. 새끼를 잃은 짐승처럼 이성을 잃은 처절한 보복행위다. 왕위를 찾으려는 것도, 이 세상으로부터 당한 채찍질과 모욕을 탓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그저 칼 한 자루면 이 모든 것을 깨끗하게 끝장낼 수 있다….”
암송을 멈춘 무구원의 얼굴이 서서히 차갑게 식었다. 그 변화에 윤모난 역시 덩달아 얼굴이 굳었다. 순간 무구원의 얼굴에 스친 서늘함을 보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다시 침음하며 생각에 빠진 무구원에게 윤모난은 물을 수밖에 없었다.
“왜 그날 하필 『햄릿』을 공연한 거지? …행사를 주관한 게 너라면 작품도 네가 골랐을 텐데.”
무구원이 대답하려 입을 떼려는 그 순간. 딩동. 별안간 울린 초인종 소리가 대답을 가로막았다. 이유 없이 등골이 서늘한 느낌에 두 사람은 동시에 욕실 밖을 내다보았다.
딩동. 한 번 더 재촉하는 소리에 무구원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짧게 경고했다.
“여기 가만히 있으세요.”
무구원은 현관으로 걸어 나갔다. 달칵 문고리를 돌려 문을 열자 당연한 것처럼 그곳엔 아무도 없었다. 발치에 놓여 있는 무언가를 따라 시선이 조용히 바닥으로 떨어졌다. 무구원은 허리를 굽혀 커다란 유리장을 들어 올려 안에 들어 있는 생물과 눈을 맞췄다.
“…….”
두 마리의 생물이 서로 뒤엉켜 보라색 혀를 날름거리며 섬뜩한 시선을 마주해온다. 남경의 독사들이었다.
독사 세 마리가 아닌 두 마리는 윤모난의 쌍둥이 형, 작약을 가리킨다. 무구원은 쉭쉭거리며 이빨을 드러내는 사나운 독사들과 눈을 마주쳤다. 그중 한 마리가 쾅, 하고 유리 벽에 대가리를 치받더니 독액을 뿌려댔다.
반사적으로 몸을 물린 무구원은 현관 앞에 사육장을 도로 내려놓은 뒤 다시 집 안에 들어갔다. 잠시 후 나온 그의 손에는 리볼버 한 자루가 들려 있었다.
“대체 벌써 어떻게 알고.”
탕― 탕―
무구원은 단 두 발로 독사 두 마리의 대가리를 박살 냈다. 사방으로 튄 유리 파편과 핏자국을 지르밟고 그가 향한 곳은 대문 밖이었다. 조용한 주택가 거리를 구석구석 살펴보았지만 여전히 의심스러운 인기척은 없었다. 주연동에서 여기로 돌아오면서 지부 대원들도 모두 돌려보낸 참이라 당장 추적도 불가능했다.
무구원은 아무도 없는 마당에 서서 심기를 다잡으려 한참이나 노력했지만, 침착함을 유지하기 힘들었다. 다시 집 안으로 들어오는 걸음이 저도 모르게 빨라져 있었다. 다시 욕실로 들어가자 윤모난이 미간을 구긴 채로 자신을 보고 있다.
“방금 무슨 총소리야?”
“당장 말하세요. 그 초대장, 언제 어디서 받은 겁니까.”
“그게 왜 궁금한지 알려주면 말하지.”
무구원은 기대도 안 했다는 듯이 욕실을 나가버렸다. 그리고 다시 나타난 그의 손에는 익숙한 물건이 들려 있었다.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그것을 보며 윤모난의 표정이 차게 식었다.
“하…. 이 새끼가 진짜.”
이능력을 제어하는 구금 장치였다. 7년 전 윤모난에게 사라지지 않는 평생의 흉터를 남긴 물건이 무구원의 손에 들려 있었다. 윤모난은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눈앞의 남자와 장치를 번갈아 보았다.
“설마 그거 나한테 채우려고?”
“…두려움이란 걸 알긴 아십니까?”
“뭐?”
“그런 감정도 이젠 우습다 여기시겠죠. 두려움은 지키고 싶은 존재가 있는 사람에게만 있는 감정이니까.”
무구원은 한 발자국 더 다가왔다.
“하지만 괴물과 우리를 구분할 수 있는 건 그 두려움이란 감정입니다.”
그 말을 듣자마자 윤모난의 얼굴에서 표정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그 괴물을 죽이지도 못하고 여기 숨겨두는 넌 뭐냐? 그럼.”
“…….”
“안경은 왜 가지고 있었어. 복수는 무섭지만 날 죽일 용기는 없어? 날 여기 가둬두면 막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해? 해봐, 무구원.”
윤모난은 상체를 일으켜 무구원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구금 장치를 들고 멀거니 서 있는 무구원에게 자신의 목을 내놓았다. 훤히 드러난 윤모난의 목덜미에는 흉측한 흉터가 낙인처럼 새겨져 있었다. 7년 전 제 아버지를 죽이고 얻은 저주스러운 전리품이었다.
“해보라고.”
무구원의 칠흑처럼 검은 눈동자에 떠오른 자신의 흰 얼굴을 마주하며, 윤모난은 목덜미를 대주었다. 그러자 무구원의 날카로운 눈매가 더 사나워졌다. 깊이를 알 수 없는 검은 늪이 끈덕지게 목덜미를 감싸오는 것 같았다.
이윽고 차가운 쇠의 감촉이 피부에 닿았다. 마디가 굵고 긴 손가락이 천천히 잠금쇠를 채운다. 알싸한 식물의 향기가 감도는 검은 손끝이 구금 장치의 버튼을 누르자 피부를 따라 미세한 전류가 흘렀다. 내내 내리깔려 있던 윤모난의 눈꺼풀이 치켜 올라갔다.
“그래. 넌 이렇게 시키는 대로나 해.”
그 말에 내내 냉정을 유지하려던 무구원의 시선이 의미를 알 수 없을 정도로 흐려졌다. 사실 윤모난에게 이 구금 장치는 우스운 물건이었다. 흉터를 얻긴 했지만 이걸 차고도 아버지를 죽인 그였다.
그러므로 오히려 상징적이었다. 망설이기만 하는 무구원의 양철 심장에 불씨를 던지는 행위였고, 이 모든 것을 되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각인시키는 의미였다. 7년 전의 일이 자신에게 고통인 만큼 무구원에게도 그래야만 했다.
“네 생각이나 신념 따위 내세우지 말고 그렇게 개처럼 기면서 살라고.
“…….”
“결국 그게 너란 인간이 선택한 인생이야. 내 실수는 네가 이 정도밖에 안 되는 새끼일 줄도 모르고 너를 믿었던 거고.”
과거의 그를 조롱하듯 이죽거리는데 정수리에서부터 머리가 뽑히는 고통이 일었다. 무구원이 갑자기 행동에 나선 것이다.
“윽! 이 미친 새끼가…!”
무구원은 자비 없이 거친 힘으로 윤모난의 머리채를 휘어잡아 그를 욕실 바깥으로 질질 끌어냈다. 어느새 이성이랄 것이 사라진 모습이었다. 무구원에게서는 처음 보는 일면이기도 했다.
순간 윤모난은 붙잡힌 머리보다도 명치 아랫부분에서 느껴지는 욱신거림에 신음했다. 이 고통이 어디에서 기인했는지 의아한 가운데, 무구원이 대뜸 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네, 선택했었죠.”
“뭐?”
목소리가 워낙 작아 잘 들리지 않는 탓에 윤모난이 반문했으나, 무구원은 욕실을 나오자마자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고 나서 무언가 맥락이 끊긴 것 같은 말을 지껄였다.
“여기 백날 가둬둔다고 해서 당신이 두려움이란 걸 알 리가 없죠.”
욕실을 나와서 제대로 보게 된 집 안은 살풍경이 따로 없었다. 작은 복도에 이어 나타난 거실에는 커다란 소파 하나와 짙은 오크색의 가구들만이 간소하게 갖춰져 있었다. 무구원은 수갑에 구금 장치까지 채운 윤모난을 그 삭막한 거실 한가운데로 거칠게 내동댕이쳤다.
“이 집… 도대체 무슨 용도냐? 와이프랑 아들내미 놔두고, 뭐 딴 살림이라도 차렸어?”
그 와중에 협탁 한가운데에 가지런히 놓여 있는 낡은 천경교 경전을 흘긋대며 윤모난이 물었다. 머리 가죽이 꽤 얼얼하기는 해도 아직까지는 그럴 만한 여유가 있었다.
“제집입니다.”
“사랑하는 네 아내와 아들은 어쩌고?”
“지키려면 떨어져 살 수밖에 없죠.”
“누구한테서?”
“온갖 해충들한테서.”
마치 그 해충을 눌러 죽이려는 듯이 커다랗고 두꺼운 손이 얼굴을 덮쳐오더니 머리를 바닥에 꽉 짓눌렀다. 윤모난은 속절없이 떠밀리면서 무구원이 무슨 짓을 하려는지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그러고 나서 든 생각은….
두려움보다는 황당함이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여유를 띠고 있던 윤모난의 얼굴이 사정없이 구겨지며 온몸을 휘감는 분노가 머리를 차갑게 식혔다.
“무구원.”
“…….”
“후회할 짓은 하지 마라. 정말 돌이킬 수 없을 테니까.”
그러나 뺨과 입술이 딱딱한 바닥에 짓이기듯 밀어붙여졌다. 윤모난은 제 바지의 버클을 풀어 옆으로 내던지며 거칠게 위에서 옷을 잡아 뜯는 무구원에게 굳이 반항하지 않았다.
“네가 이럴 만한 대단한 이유가 있어야 할 거야.”
“대단한 이유요? …그걸 정말 몰라서 묻습니까?”
바지가 우악스럽게 내려가 종아리에 걸쳐지고, 등에서는 무구원이 벨트를 푸는 소리가 섬찟하게 울려 퍼졌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해 힘을 써서 몸을 뒤집으려는 그때, 무구원이 몸을 붙여오며 귓가에서 음산하게 속삭였다.
“당신이 날 타락시켜놓고 내 인생도 당신 것처럼 망쳤잖아.”
“…너, 으으윽!”
순간 하반신에서 살을 찢는 고통이 밀려 들어왔다. 윤모난은 더 말을 잇지 못하고 이를 꽉 악물었다. 전희도 없이 바짝 긴장한 몸이었다. 마르고 좁은 구멍을 무식하게 찢으며 밀어닥친 무구원을 수갑을 찬 손으로나마 밀어내려 했지만 꿈쩍도 안 했다.
마치 칼이 아래를 쑤시고 들어온 것처럼 아팠다. 온몸에 총이며 칼을 맞은 흉터가 가득한 윤모난에게 이런 고통이 유달라서는 아니었다. 육체적인 고통을 견디는 것에는 인이 박였으나 정신적으로는 버틸 재간이 없었다.
명치 밑부터 밀어닥친 그 미묘한 통증은 온몸에 독처럼 퍼지고 있었다. 그건 무구원이 원하는 유의 두려움은 아니었다. 윤모난에게 들이닥친 건 의문이자 실망이었고, 동시에 분노이자 슬픔이었다.
“…아으윽… 무…구원! 이 미친 새끼….”
그런 복잡한 기분을 알 리 없는 무구원은 우악스럽게 삽입하며 등 뒤에서 길게 숨을 쉬었다. 뻑뻑하게 다물려 있던 살이 순식간에 너절해지며 무언가 뜨거운 것이 허벅지를 타고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무구원이 자신의 몸을 조각낼 기세로 가르며 들어왔으니 피가 나지 않을 리 없었다.
그런데도 무구원은 그 피를 윤활제 삼아 미처 다 들어가지 못한 자신의 흉물 같은 좆을 꾸역꾸역 밀어 넣었다. 투둑, 살이 찢어지는 소리가 났다. 생리적인 반응으로 눈가에 열이 확 몰리는데, 마침내 무구원의 골반이 엉덩이를 꾹 짓눌렀다.
다만 무구원은 그렇게 폭력적으로 삽입까지 한 주제에 위에서 전혀 움직이질 않았다. 틈을 한계치까지 벌리며 침입한 성기가 단단히 발기했는데도, 그저 몸을 깔아뭉갠 채 얕은 숨만 내쉬고 있었다. 이왕 강간을 하기로 했으면 마땅히 이쪽 사정 따위 봐주지 않는 것이 맞을 텐데.
“하… 하하….”
순간 윤모난에게서 어이없는 웃음이 터졌다.
“형만 한 아우 없다더니…. 무정원도 처음 할 때 이런 식으로 밀어붙였는데.”
무정원이 겁 없는 윤모난을 붙잡아 잔디밭에 얼굴을 짓이기며 치른 관계가 둘의 첫 경험이었다. 몸을 너덜너덜하게 만들었던 섹스가 강간이 아니라는 것을 입증하려는 듯, 무정원은 두 번째부터는 태도를 180도 바꿔 꽤나 다정하게 윤모난을 다뤘다. 하지만 윤모난은 그 고통스럽고 폭력적인 첫 섹스를 잊은 적 없었다.
첫 단추를 잘못 끼우면 그 이후도 계속 밀려 끼우는 법이다. 하지만 무구원은 7년이 지나서야 강간을 하고 있으니 형과 정반대로 가고 있는 셈인가.
“네. 원래도 이런 짓 할 때는 맞는 걸 좋아하는 인간이었던 것도 압니다.”
“윽…!”
“…그거 아십니까? 형님은 그때부터 당신을 지배한 겁니다.”
중저음의 목소리는 음산하리만치 반음 더 내려와 있었다. 말이 끝나자마자 무구원이 채찍을 휘두르는 것처럼 허리를 움직이더니 성기를 짓쳐 마저 박아 넣었다. 찢어진 살점을 긁고 지나가는 느낌에 윤모난의 입에서 헉 소리가 튀어 나갔다.
기껏 박아놓고는 석상처럼 굳어 있을 땐 언제고, 무구원은 초장부터 채찍을 맞은 말처럼 거칠게 밀어붙였다. 한계를 넘어 구멍이 찢어진 건 물론 내벽 안까지 상해버린 듯 날카로운 고통이 하체에서부터 밀려왔다.
단단한 치골에 부딪혀 앞으로 계속 밀려나는 통에 처박힌 머리가 바닥에 쓸렸다. 뺨과 입술은 다 터졌고 입안 여린 살이 송곳니에 짓이겨져 윤모난은 위아래로 피를 흘렸다.
“아, 아윽, 흐으, 으… 으윽.”
“하아….”
퍽퍽 살갗이 거칠게 마찰하는 소리가 적막한 실내를 울렸다. 견디다 못한 윤모난은 무자비하게 망가지고 있는 하반신을 비틀어 무구원에게서 빠져나오려고 했다. 하지만 그럴 희망을 산산이 부수겠다는 듯이 무구원의 성기가 독니를 세운 뱀처럼 내벽을 긁었다. 잠시 빠져나가나 싶던 그는 이어서 아까 전보다 더 깊숙이 찔러왔다.
그러자 윤모난이 물고문을 당했을 때처럼 위아래로 등을 퍼뜩 떨었다. 순간 흑색 늪에 몸이 처박히는 느낌과 함께 숨이 콱 막혔다.
미련한 몸은 어느덧 고통에 적응하여 이 폭력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사나운 고통의 파도 속에 떠밀려 온 부표처럼 희미한 쾌감이 꼬리뼈 부근에서 뭉근하게 퍼졌다.
“하으으… 윽.”
“…….”
생리적인 쾌감으로 흥분한 윤모난의 성기가 반쯤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내내 개처럼 엎어진 채로 당하고 있던 탓에 무구원 역시 이 행위에서 어떤 쾌감을 느끼고 있는지는 전혀 알 수 없었다. 섹스 중의 무구원은 조각상처럼 말이 없는 편이니까. 예전에도 그의 흥분을 감지할 때는 그 취약한 표정이라든가, 아니면 뜨겁게 달아오른 뺨을 보았을 때뿐이었다.
“ㅁ…구원… 아―!”
퍽퍽 떠밀리는 와중에 윤모난은 홀로 조난당한 사람처럼 그 이름을 불렀다. 그러자 거칠게 쑤셔 박기만 하던 단단한 하체가 잠시 멈칫하는 게 느껴진다. 식은땀으로 범벅이 된 윤모난의 등에 시차를 두고 불처럼 뜨거운 무언가가 닿았다.
둥근 이마와 높이 솟은 콧대가 척척한 피부 위로 살짝 무게가 실리며 꾹 눌렸다. 뭉근하게 날갯죽지 부근을 비비던 얼굴이, 포근한 베개에 파묻듯 부드럽게 원을 그리며 문질러졌다. 웃을 때면 더없이 근사하게 휘어지던 입술은 허리 중앙에서 더운 김을 뿜더니, 이내 축축한 무언가가 틈을 비집고 나와 등을 핥았다.
무구원은 강간하는 주제에 등에 맺힌 땀을 무슨 설탕물이라도 되는 양 부드럽게 핥고 빨았다. 그 모순적인 야릇한 행동에 윤모난의 허리가 오목하게 휘었다. 온몸을 찌르던 고통이 조금씩 완화되고, 피부 위로 은근한 소양감이 느껴졌다.
윤모난은 기다렸다는 듯이 그 부표에 매달렸다. 무구원이 추삽질을 더 부드럽게 한다거나 태도를 바꾼 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강간은 강간이었다. 그러나 윤모난은 피부를 뜨겁게 달구는 무구원의 숨을 느끼며 파도에 떠밀리면서도 사정없이 신음을 뱉었다.
처음에는 고통 때문에 전혀 서지 않던 좆이 서서히 부피를 키우는 것이 느껴졌다. 무구원도 이를 느꼈는지 한 손으로 덥석 윤모난의 귀두 끝을 감싸 쥐었다. 하지만 목소리는 여전히 낯설 정도로 경직된 채였다.
“날… 하아… 이렇게, 바닥에 처박아…놓고선….”
“아읏―!”
“내 가족들로… 하, 날 협박했습니까?”
“아―! 아윽….”
“지옥에나… 떨어지세요.”
성기를 쥔 손의 악력이 고스란히 전해져오자 윤모난이 흐느끼듯 소리를 질렀다. 동시에 추삽질을 하는 속도도 빨라졌다. 두 사람은 짐승처럼 신음하며 바닥에서 뒹굴었다. 무구원은 이미 비린내가 진동할 만큼 찢어져 피를 흘리는 구멍에, 뭔가 더 집어넣고 싶은 사람처럼 손가락까지 들이밀었다.
신앙의 증거인 흉측한 손가락은 이음새 부근을 매만지다가 회음부 근처 살을 꾹 눌렀다. 아래로 압박을 받은 구멍은 흉폭한 행위를 가시화하듯 더 찢어졌다. 그러자 윤모난의 하체가 전반적으로 경련하며 사나운 근육을 뽐냈다.
무구원은 아픔인지 쾌락인지 모를 감각이 뒤섞여선 부들부들 떨고 있는 윤모난의 등을 여전히 우악스레 짓누르고 있었다. 그는 앞에서 깔짝대던 손끝이 무색하게 기어코 안에 손가락을 푹 집어넣었다. 동시에 꿈쩍거리는 좆이 손마디를 문지르며 안을 비벼댔다.
그렇게 몸이 망가져버리는데도 윤모난은 꿰이고 뚫린 몸을 무구원에게 내준 채 신음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이윽고 마음껏 속살을 만지고 누르며 안까지 탐닉한 무구원이 손가락을 빼더니 좀 더 수월하게 쑤셔대기 시작했다.
텅 빈 머릿속이 검고 끈적한 액체로 가득 채워지는 느낌이었다. 그게 단순 상상은 아니었는지 순간 무구원이 뿌리 끝까지 박아 넣은 채로 안에서 욕망을 터뜨렸다. 윤모난은 이 와중에도 사출이 유독 길어서 마치 호스를 연결한 수도꼭지를 열어놓은 것 같다는 얼빠진 생각을 했다.
윤모난 역시 얼마 지나지 않아 희뿌연 액을 흩뿌리며 바닥에 축 늘어졌다. 몸도 마음도 힘이 쭉 빠져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이제 정말 무구원과의 관계는 막장으로 치닫게 돼버렸으니까.
“…뭐야.”
그런데 그 순간 등에 무슨 불꽃이 닿은 양 뜨거운 것이 투둑 떨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화들짝 놀란 윤모난은 몸을 휙 뒤집었다.
그리고 윤모난은 제 등허리를 적신 것의 정체가 무엇인지 바로 알게 되었다. 무구원의 뺨을 타고 눈물이 쏟아지듯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가 피범벅이 된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며 울고 있었다. 강간하는 내내 강압적으로 닿았던 손이 벌벌 떨리고 있었다.
“미친놈, 대체 뭐 하는 짓이야…?”
피해자도 가만히 있는데 가해자가 우는 건 무슨 상황이냐고 따져야 마땅한데, 윤모난은 이 이상한 상황에서 어쩐지 막막한 기분이 들었다. 무구원이 우는 건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예전에 그렇게 밀어붙였는데도 물기 한 번 서린 적 없던 검은 눈동자 두 쌍이 어둠 속에서 소리 없이 눈물을 쏟아내는 광경은 참으로 처연해 보였다.
마치 부모를 잃어버린 미아처럼 쓸쓸하고 슬퍼 보이는 모습이었다. 절로 가슴 한쪽이 저릿해져 본능적으로 손을 뻗자 무구원이 안 된다는 듯이 고개를 치워버렸다. 그러면서 미세하게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또다시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맞닥뜨리는 기분이었다.
“무구원, …너 대체 왜, 아!”
불쾌하고도 따끔한 기분이 들어 기시감에 밑쪽을 내려다보니, 주삿바늘이 또 팔뚝에 꽂혀 있었다. 무구원은 설명이나 변명 따위 하지 않겠다는 의사 표현을 분명히 한 것이다. 검은 파도가 자신을 덮치는 환각을 끝으로 무구원의 우는 모습도 이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무구원을 상실하는 듯한 경험은 윤모난을 과거와 다시 마주하게 했다. 휩쓸려 갔던 감정들이 다시 들이닥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과거를 마주할 때마다 늘 어쩔 줄 몰라 하는 것밖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윤모난에게 시제란 늘 과거뿐이어서. 과거의 상실은 그에게 중요한 문제였다. 청연이 태어난 봄을 기억하지 못한다거나, 무간에서의 형들과의 마지막 순간을 잊어버리는 것까지.
그러니 무구원만은 변하지 말았어야 했다. 10년 뒤에도 살아 있겠냐고 물으며 서글픈 표정을 짓고, 10년 뒤를 기약할 수 없는 사람의 구원을 위해 기도해주기까지 했으면 10년 정도는 그대로여야 하는 게 마땅했다.
그게 윤모난이 무구원과의 관계에 둔 유효기한이었다. 그만큼 시간이 흐르면 이런 감정도 흐려지고 포기가 됐을 테니까. 그런 다음에서야 조카들의 복수를 하겠다고.
3년을 앞두고 너무 일찍 찾아온 탓일까. 이딴 꼴을 볼 줄도 모르고, 쓸모없는 계획이나 세우고 있던 저 자신이 멍청하다고 자책할 수밖에. 결국에 7년간 무구원은 미래를 향해 살았고 멈춰 있는 사람은 저뿐이었던 것이다.
“으으….”
윤모난은 눈을 뜨자마자 말 그대로 갑자기 들이닥친 고통을 온전히 느꼈다. 또 빌어먹을 욕실이다. 마음이 아프다고 생각했던 것이 무색하게 하반신에서 끔찍한 통증이 밀려왔다. 연속으로 마취제 두 대를 맞고 그사이엔 강간까지 당했으니, 아무리 강한 몸이라고 해도 아작 나지 않을 리 없었다.
그렇게 몸을 뒤집으며 끙끙 앓는데 허리 아래로 누군가의 손이 들어오더니 쑥 몸이 들렸다. 억지로 바닥에 앉고 나니 엉덩이가 불에 덴 듯이 홧홧했다. 하지만 피로 범벅이 되어 있어야 할 다리는 멀쩡하고 깨끗했다. 아무래도 강간범이 직접 씻겨준 모양이었다.
윤모난이 겨우 정신을 차리려는 그때, 반복되는 질문이 또다시 시작됐다.
“…초대장, 언제 어디서 받았습니까?”
“꺼져….”
윤모난은 비참한 기분으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무구원이 턱을 거칠게 제게로 고정시키며 다시 한번 물었다.
“그 초대장 언제 어디서 받았습니까. 누가 보냈는지는 진짜 모르세요?”
“너 진짜 돌아버렸냐…? 이게 뭐 하는 짓이야.”
“초대….”
“한 번만 더 물었다간, 네 집에 불부터 지른다.”
그 말에 무구원이 잠깐 침묵하더니 이내 말을 이었다.
“정신계 에스퍼를 불러서 진실을 말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이제는 도덕이고 윤리고 집어치웠나 보지? 그건 엄연히 금기일 텐데. 자칫하면 대가리가 망가질 수도 있다고. 들키면 바로 사형이고.”
정신계 에스퍼가 진실을 알아내기 위해 정신을 들쑤시는 건 폭주의 위험성 때문에 반도에서 금기 중의 금기였다. 7년 전 한백호조차 그런 방법은 안 썼다. 윤모난은 터무니없는 소리에 웃음이 났다.
“강간도 모자라서 이제는 정신계 능력으로 고문까지 할 생각을 해? 그렇게 그 초대장이 궁금하면 나한테 묻지 말고…. 너네 사냥개들 풀어다가 알아서 조사해.”
“아는데 버티는 겁니까, 아니면 정말로 모르는 겁니까.”
“…….”
“…모르는 거라면.”
무구원의 목소리에는 여전히 냉기가 돌았다. 최상의 컨디션이라면 구금 장치와 수갑을 벗어날 궁리를 해보겠으나, 지금의 윤모난으로서는 자신을 둘러싼 모든 상황이 버겁기만 했다. 심지어 이번엔 무구원 이 새끼가 옷까지 싹 벗겨 나체로 욕실에 가둬놓은 차였다.
“넌 왜 그렇게 초대장에 집착해?”
윤모난은 자신의 입안에 손수건을 말아 넣으려는 무구원에게 물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서로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윤모난은 지난밤 이 눈에 고여 있던 눈물을 떠올렸다.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버석해진 눈가에는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무정원에게 날 넘기지도 않고 날 여기에 가둬놓았으니 무슨 꿍꿍이가 있을 텐데, 그게 뭔지 알려주면 나도 말해준다니까.”
“『햄릿』. 그날 남경의 밤 행사에서 왜 『햄릿』을 골랐는지 물으셨죠.”
“그래. 대답은 못 들었고.”
“어느 날 소포를 받았습니다. 딱 낱장 하나만 찢겨나간 『햄릿』이었죠. 찢긴 부분은 당신도 아는 그 구절이었구요.”
윤모난은 ‘낱장을 찢었다’라는 표현에 눈에 띄게 반응했다. 그건 자신이나 할 법한 장난이었다. 상대에게 말하고 싶은 뜻을 담은 구절이 있으면 그걸 찢어내 자신이 보관하고, 그 부분이 빈 책을 선물하는 형들의 수수께끼를 따라 하곤 했다.
7년 전에도 윤모난은 그런 식으로 무구원에게 책을 준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 수수께끼의 규칙을 무구원에게 미주알고주알 설명한 적은 없었다. 그 낱장은 서랍에… 아, 고문실로 끌려간 뒤에 합숙소에 제 물건이 그대로 남아 있었을 테니 그걸 저놈이 발견했을 확률이 있구나.
“그 책을 보낸 게 나라고 생각했어?”
무구원은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침묵에서 긍정이 느껴졌다. 자신이 남경극장에서 꽃들을 죽이기까지 했으니 내심 확신했을 것이다. 윤모난도 초대장을 보고 무구원을 떠올리며 착각했듯이 말이다.
윤모난은 천천히 단서들을 돌이켜보았다. 착각. 환영. 무대. 연극…. 이 초대장을 보낸 사람은 익숙한 은유를 쓰고 있었다. 그 순간, 무구원의 손이 팔목을 덥석 잡아끌었다.
“어제 현관에 남경의 독사 두 마리가 배달되었습니다.”
“…….”
“그걸 보니 알겠더군요. 이 모든 일들이 당신의 죽은 형들을 가리키고 있다는 거.”
윤모난은 어쩐지 넋이 나간 표정을 지었다. 자신의 팔목을 움켜쥔 손에 힘을 주며 재차 말하는 무구원을 보며 그는 이상한 의문이 들었다. 왜 무구원의 태도가 또 미묘하게 변했을까. 무구원은 무엇을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걸까.
“한 가지 충고하죠. 여기서 더 깊게 파고들지 마십시오.”
“뭐? 그게 무슨 뜻인데?”
“제가 안일했습니다. 또다시… 다른 사람의 칼로 쓰이게 할 수는….”
맥락을 알 수 없는 말만 중얼거리던 무구원의 눈썹이 팽팽한 현처럼 튀어 올랐다. 무구원은 쥐고 있던 손수건을 말아 윤모난의 입에 억지로 욱여넣으며 낮게 읊조렸다.
“약속하십시오. 앞으로 남경이든 북해든, 그 어떤 것에서도 손 떼겠다고.”
윤모난이 바닥에서 입이 막힌 채로 망연하게 바라보고 있는 사이, 무구원은 욕조에 어제 벗겨놓은 옷가지를 전부 던져 넣더니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 금세 옷에서 불꽃과 함께 매캐한 연기가 피어올랐다. 화르르 치솟은 불꽃이 무구원의 눈에 반사되어 일렁였다. 독한 연기가 욕실을 꽉 메웠다.
“제 옷도 모두 치웠습니다. 옷이 없는데 설마 밖에 나가지 않으시겠죠.”
잠시 잦아들었던 윤모난의 반항이 다시 거세졌다. 재갈이 물린 채 읍읍거리며 뭔가를 외치던 윤모난이 수갑을 찬 손을 말아 쥐어 무작정 타일을 내려쳤다. 순식간에 타일 조각이 이리저리 튀고 회색 시멘트 가루가 사방으로 날렸다. 난장판이었다. 욕조에서 피어오르는 연기와 시멘트 가루 같은 온갖 분진들이 두 사람을 뽀얗게 감쌌다.
“기다리세요.”
버둥거리는 윤모난을 두고 욕실을 나오자마자, 무구원은 주머니를 뒤져 바늘 함을 찾아 붉은 알약을 또 꺼내 삼켰다. 초조한 시선이 집 안을 훑다가 창밖으로 향했다.
이곳에 윤모난을 가둬놓은 지 얼추 나흘이 지나는 참이었다. 여러 예상치 못한 변수 때문에 기간이 생각보다 길어져 무구원도 초조해졌다.
일단 며칠간 끊어놓았던 집 전화를 연결해, 지부에서 직원을 불러 옷장에 있는 옷을 모두 싼 뒤에 주연동 집으로 보냈다. 옷 상자를 내보내고 욕실로 가서 연기에 질식하기 직전인 윤모난을 발견해 욕실 문을 활짝 열어두었을 때쯤 별안간 전화벨이 울렸다. 주연동 집 번호였다.
“무슨 일….”
―혹시 구원 씨가 오늘 태오 만나기로 했어요?
“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수화기 너머에서는 다급하다 못해 벌벌 떠는 아내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태오가 방에서 아무런 기척이 없길래…. 저는 낮잠을 자는 줄 알았는데 문을 열어보니까… 없어요. 나간 것 같아요. 설마, 설마 그 사람이….
아니다. 윤모난은 저 욕실에 멀쩡히(는 아니지만) 갇혀 있다. 태오가 갑자기 사라졌다는 말에 무구원은 당장 전화를 끊었다. 서둘러 차 키를 챙겨 뛰쳐나왔는데 대문 밖에 있는 작고 동그란 두상이 눈에 익었다.
“태오야!”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바로 뒤를 돌아본 태오가 아빠를 확인하자마자 잰걸음으로 달려왔다. 무구원이 허겁지겁 안아 올리자 아이의 얼굴에 머쓱한 표정이 떠올랐다. 무턱대고 아빠 집에 찾아오긴 했는데 아무래도 혼이 날 것 같아 여기서 고민하고 있었던 눈치였다.
“무슨 일이야. 네가 여기 왜…. 혼자 어떻게….”
“버스 타고 왔어. …아빠가 전화도 안 하고 받지도 않았잖아.”
“뭐?”
“맨날 연락했는데 내 생일 이후로 며칠째 안 했어. 아빠는 이제 혼자 사는데…. 혹시라도 혼자 쓰러져서 죽어 있으면 어떡해. 그래서 확인하고 싶어서… 엄마한테는 일단 말 안 했는데.”
요 며칠간 전화선을 끊었다가 오늘에서야 전화를 연결한 것이 문제였던 모양이다. 무구원은 이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태오를 꽉 안았다.
“…어. 태오가 걱정했구나.”
이유를 듣고 보니 마냥 화를 낼 수 없었다. 태오가 어릴 적에 이런 일로 크게 놀란 적이 있기 때문이다. 아이가 다섯 살쯤 되었을 때, 새벽에 방에 들어왔다가 쓰러져 있는 자신을 발견한 적 있었다. 큰일은 아니었지만 아빠를 보고 놀라 경기를 일으킨 탓에 온 집이 한바탕 난리가 났었다.
그 이후로 태오는 불안이 조금 늘었다. 아빠가 죽으면 어떡하냐고 밤중에 뜬금없이 물어오기도 했다. 반도에서는 가족을 잃는 일이 흔해서 같은 반 친구 중에서도 그런 경우들이 왕왕 있을 테니 생각이 무거워졌을 것이다. 그럴 때마다 무구원은 늘 하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아빠는 태오 나이쯤에 저 깊은 바다에 빠졌는데도 살았어. 걱정하지 말라니까.”
“응.”
하지만 목을 끌어안아 오는 작은 손이 단단하게 얽혀 있는 걸 보니 불안은 금세 사라지지 않을 모양이었다.
“엄마한테 가자.”
아이를 얼른 집에 보내야겠다고 생각하며 돌아서는 찰나, 태오가 무릎을 폭 포개더니 울상을 지었다.
“아빠…. 나 쉬 마려워.”
부모를 제일 난처하게 만드는 대사였다. 설상가상으로 지금은 퇴근 시간이라 복잡한 남경 시내를 빠져나가 주연동까지 가려면 못해도 한 시간이다. 어른도 참기 힘든 시간이고 하물며 아이에게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무구원이 난처한 얼굴로 집 쪽을 바라보자, 태오가 소맷자락을 잡아당기며 졸라댔다.
“배도 고파. 쉬 싸고 아빠가 만들어주는 계란말이 먹고 싶어.”
“…어? 어… 알았어.”
무모한 건 알지만 무구원은 태오에게는 안 된다는 말을 해본 적 없었다. 윤모난은 욕실에 가둬놓았고… 입도 손수건으로 막아뒀다. 결국 주저하던 무구원은 태오를 안으로 데려갔다. 얼른 다른 욕실로 가서 태오를 변기에 앉혀놓았는데, 아이가 킁킁 콧잔등을 움찔대다가 물었다.
“아빠 집에서 탄 냄새 나. 불났어?”
“…아니.”
생각해보니 윤모난이 질식해 죽지 않도록 문을 열어놓고 온 것이 떠올랐다. 무구원은 태오를 두고 얼른 방 안에 딸린 욕실로 향했다. 아니나 다를까 욕실 문 앞에 선 불길한 검은 그림자가 눈에 들어왔다.
“…….”
“…….”
윤모난은 완전한 나체였다. 여기저기 검댕이 묻은 채로 서 있는 모습은 지옥에서 올라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가 혀를 밀어 꾸역꾸역 손수건을 벗겨내는 걸 본 무구원은 지체할 틈이 없다는 걸 직감하며 몸을 빠르게 움직였다.
얼른 윤모난을 잡아 메친 다음 욕실에 밀어 넣으려는 그때, 실올 하나 걸치지 않은 긴 다리가 옆에 있는 유리 장식장 뒤를 걷어찼다. 와장창, 하는 소리와 함께 무구원은 쓰러지는 장식장을 맞으며 바닥에 쓰러졌다. 윤모난의 손이 재빨리 유리 조각을 움켜쥐었다.
“아빠?”
…태오다. 복도에서 아이의 가벼운 발소리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안 돼! 태오야! 오지 마!”
무구원이 비명을 지르듯 외치며 수갑을 찬 윤모난의 손을 제압해 몸으로 깔아뭉갰다. 하지만 그 순간, 윤모난이 재빠르게 고개를 뒤로 물렸다가 온 힘을 다해 무구원의 이마 한가운데로 제 머리를 박았다.
쿵―! 심상치 않은 소리와 함께 머리 전체가 징, 하고 울리는 기분에 무구원은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심장이 주저앉는 기분이었다. 지금 여기서 정신을 잃으면 큰일이다.
“…태오야!”
시야가 고장난 전등처럼 점멸했다. 무구원은 온몸으로 세찬 중력이 쏟아지는 느낌에 애써 저항해보려 했지만 결국 바닥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제발… 팀장님…. 태오….”
아이의 이름을 중얼거리며 버티던 무구원이 몸을 늘어뜨리더니 이내 잠잠해졌다. 기절하는 것과 동시에, 얼굴이며 입술에 하얗게 핏기가 빠지는 모습이 기이했다. 박치기가 세긴 했지만… 죽을 정도는 아닌데. 윤모난도 해쓱한 얼굴이 되어서는 발로 툭툭 무구원을 걷어찼다.
그때였다. 요란한 사이렌 같은 소리가 난 것은.
“아빠아아아아아악!”
마치 도둑질을 하러 왔다 들킨 사람처럼 윤모난의 몸도 놀라 퍼뜩 뛰었다. 소리의 진원지를 확인해보니 아이가 문 앞에서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바로 백화점에서 본 무구원의 아들이었다.
태오라는 이름을 가진 아이가 달려와 무구원의 몸을 흔들어대며 울기 시작했다. 윤모난은 저도 모르게 엉덩이를 끌어 부자에게서 떨어졌다. 아빠의 단단한 가슴팍을 두드리며 아이는 경기를 일으킬 기세로 울었다. 최악의 상황이었다.
“아, 아빠가아…. 우리 아빠 죽었어억!”
“…무슨, 안 죽었어. 그럴 리가 없잖아.”
“…아빠… 흑… 으으….”
“너, 너희 아빠 멀쩡하다니까! 피곤해서 잠깐 잠들었겠지. 숨 쉬는 거 확인시켜줘야 믿을 거냐? 엉?”
자지러지듯 우는 아이는 윤모난에겐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윤모난은 당황한 얼굴로 부자를 번갈아 보기만 했다. 무구원이 저딴 장식장이랑 제 박치기를 좀 맞았기로서니 죽을 놈이 절대 아닌데. 그의 어린 아들내미는 아빠를 잘 모르는 모양이었다.
“그만 울어라. 무구원 안 죽었다고.”
“아빠, 끅, 일어나봐….”
“야, 꼬맹이. 일단 니네 아빠 주머니나 좀 뒤져봐. 손을 풀어야 상태를 정확하게 확인하지.”
훌쩍훌쩍 코를 흘리면서도 아이는 눈을 휙 치켜떠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윤모난을 쏘아보았다. 저거, 지 애비가 꼴통이라 그런지 벌써부터 성질머리가 보통이 아니네. 윤모난은 한숨을 푹 쉬고는 수갑이 채워진 제 손을 슬쩍 흔들어 보였다.
“진짜야. 아저씨가 가이드거든? 아빠 가이딩해줄 테니까 빨랑 그 주머니 뒤져서 열쇠 같은 거 없나 한번 봐봐.”
아이는 여전히 적의가 가득한 눈으로 윤모난을 빤히 바라보았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듯 작은 입술이 오물거리며 달싹였지만, 결국 그는 작은 손을 뻗어 아무렇게나 흐트러진 아버지의 주머니를 뒤져 열쇠 두 개를 찾아냈다.
“진, 짜… 진짜 아빠한테 해코지 안 할 거지?”
“안 한다니까. 아저씨가 이상한 사람 같아 보여?”
“…응.”
“아닌데? 사람 잘못 봤어.”
애 앞에서 팬티 한 장 없이 수갑을 찬 채 고추를 덜렁거리면서도 윤모난은 뻔뻔하게 결백하다는 표정을 했다. 그의 나체를 질색하듯 바라보던 아이가 주춤대며 다가오더니 그의 수갑과 구금 장치의 잠금을 해제했다.
“옘병, 답답해 죽는 줄 알았네.”
“우리 아빠, 흡, 가이딩부터, 해! 얼른!”
무구원을 저렇게 놔둔다고 해서 죽거나 하진 않을 텐데. 윤모난은 내키지는 않았으나 손목을 두어 번 돌린 뒤 무구원의 몸을 번쩍 안아 올렸다. 그러곤 침실로 보이는 곳에 그의 몸뚱이를 던져놓고선 대충 그의 이마에 손을 올렸다.
“…자, 아빠 힘내세요 가이딩이다. 됐냐? 이러고 좀만 자면 돼.”
애써 쥐어 짜낸 다정함이 무색하게 아이는 다시 눈물을 쏟았다. 윤모난은 제 머리를 벅벅 문지르며 한숨을 푹 쉬었다.
“하아―.”
“아빠아….”
“야, 꼬맹이, 아빠 잠깐 잠든 거라고 몇 번 말하냐. 자, 심장 소리 한번 들어봐봐.”
결국 윤모난은 아이의 손을 끄집어 당겨 침대에 눕혀놓은 무구원의 가슴팍에 귀를 대게 했다. 얼굴이 아직 좀 백지장 같기는 한데 따지고 보면 그냥 잠이 든 거나 마찬가지인 상태이니 크게 걱정할 것도 없었다.
무구원의 셔츠를 눈코입 모양으로 축축하게 적시는 아이를 내려다보던 윤모난은 슬쩍 무구원의 바지춤으로 손을 뻗었다. 어차피 이놈이 집주인인데 아랫도리에 빤스만 입어도 되는 거 아닌가? 윤모난은 그의 바지를 벗겨 빼앗아 입으려고 했으나 ‘아빠아아아아!’ 사이렌이 2차 가동되는 바람에 포기하고 말았다.
그때 내내 눈물 바람이던 아이의 작은 배에서 크게 뱃고동 소리가 울렸다. 우느라 진이 빠진 듯 아이는 이제 힘없이 늘어져 코를 훌쩍이기만 했다.
“너 배고프냐?”
“…….”
“됐다.”
결국 윤모난은 집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부엌으로 향했다. 싱크대 옆에 걸린 앞치마를 찾아 몸에 두르자 제법 산뜻한 기분이 들었다. 이대로 그냥 나갈지 말지 3초 정도 고민한 윤모난은 밖으로 나가는 문 대신 냉장고 문을 열었다.
그래도 아빠의 주머니를 뒤져 수갑과 목의 구금 장치를 푸는 열쇠를 찾아준 은혜가 있으니 아이와 함께 조금만 같이 있어줄까 싶었다. 우는 애를 쓰러진 아빠 옆에 나 몰라라 버리고 가기도 조금 찝찝했다.
“꼬맹이.”
“…왜!”
“너 후라이 먹을래? 냉장고에 별게 없어.”
“흐으, 끕, …고, …이.”
“뭐라고?”
“후라이 말고 말이이이이―!!!”
어른한테 저렇게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다니. 무구원의 가정 교육이 어땠을지 알 만하다며 혀를 찬 윤모난은 냉장고에서 꺼낸 계란과 손에 들린 뒤집개를 비장하게 내려다보았다. 비장한 손길로 가스레인지 불을 켠 그가 첫 계란을 톡, 하고 까 프라이팬 위로 투하했다.
두 시간 후, 무구원과 태오를 넣어놓은 방으로 향하는 윤모난의 얼굴은 폭삭 늙어 있었다. 그의 한쪽 손에는 기름 범벅인 뒤집개가 들려 있었고 눈은 반쯤 풀린 채 지친 기색이 만연했다. 그러다 침대 위에 누운 무구원을 본 윤모난은 갑자기 열이 뻗쳤다.
“일어나, 이 새끼야.”
“으앙―! 아빠한테 그걸로 그러지 마! 아빠 아프단 말이야!!”
뒤집개로 무구원의 볼을 쭉쭉 밀던 윤모난은 떽떽대는 소리에 손길을 거둬들이며 분을 삭였다. 그 와중에 태오는 무구원의 얼굴에 묻은 기름을 소매로 닦아내고 아빠의 품에 더 파고들며 몸을 웅크렸다.
“효자 났다. 효자 났어.”
윤모난이 빈정거리자 태오가 사납게 치뜬 눈으로 노려봤다. 아까부터 느낀 건데, 제법 눈빛이 매서웠다. 그뿐만 아니라 윤모난은 무구원의 아들이 또래보다는 꽤 똘똘하다는 걸 계란말이를 굽는 동안 알게 되었다.
태오는 무구원이 쓰러진 직후에 내내 오열하던 주제에 엄마가 걸어온 전화에서는 갑자기 의젓한 척 연기를 했다. 아빠가 보고 싶어 잠깐 아빠 집에 왔다며. 걱정하는 엄마에게 아빠는 잠깐 앞에 갔는데 여기서 자고 가도 되냐고 묻기까지 했다. 전화를 끊고서는 다시 울기는 했지만 그 정도면 제법 씩씩한 편이었다.
“자, 이제 계란말이 먹으러 가자.”
“…….”
아이는 아빠 곁에서 떠나기 싫어 보였지만, 밥을 먹어야 아빠도 잘 돌볼 수 있는 거라며 어르고 달래자 겨우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그렇게 애써 부엌에 모셔 왔더니 이번에는 입을 꾹 다물며 묵언 시위를 하기 시작했다. 윤모난은 뒤집개를 다시 들었다.
“왜 또?”
“…이건 싫어.”
“네가 계란말이 먹겠다며?”
“이거 말고!”
“그럼 뭐?”
“다 탔잖아! 이런 거 먹으면 배 아플 거야.”
“너 자꾸 어른한테 반말할래? 너네 아빠가 예의범절도 안 가르쳤어? 조막만 한 게.”
“…아빠.”
태오는 또 드릉드릉 울 기세였다. 진짜 또 한 번 사이렌 소리를 들었다간 미쳐서 기절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윤모난은 얼른 태도를 누그러뜨렸다.
“알았어! 알았다고. 다시 해주면 되잖아!”
그 말에 새카맣게 탄 계란말이를 쭉 밀어내며 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젠장! 윤모난은 속으로 욕을 삼키며 벌써 15번째로 계란말이 만들기를 시도했다. 아이가 뒤에서 집요한 시선으로 감시하는 게 느껴졌다.
“근데 아저씨는 왜 수갑 차고 옷을 벗고 있었어?”
이제야 그게 궁금하다니. 그리고 아까 옷 입으려고 무구원 바지 벗길 때 악을 쓰며 울던 게 누군데. 윤모난은 찡그린 얼굴로 뒤를 돌아봤다.
“어이, 여기 보지 말고 고개 돌려. 조그만 게.”
“아저씨 변태야?”
“이상한 사람이 아니고, 네 아빠 친구, 뭐 비슷한 거란다.”
“근데 왜 옷이 없어?”
시팔, 네 아빠가 날 강간하고… 옷을 불태웠다고는 차마 말할 수 없으니까 참는다. 생각해보니 아주 부자가 쌍으로 지랄이네. 윤모난은 침묵하며 새 계란을 오목한 그릇에 깠다. 부엌일에 익숙하지 않은 탓에 이 간단한 단계에서도 껍질 몇 개가 들어갔다.
애한테 껍질을 먹였다간 큰일 날 것 같아, 젓가락으로 껍질을 골라내고 있는데 태오가 뒤에서 또 한 번 물었다.
“아빠 친군데 왜 발가벗고 아빠 집에 있어?”
무구원의 아들은 똘똘함이 과했다. 이런 애들에겐 가벼운 거짓말도 먹히지 않는 법이었다. 누드 에이프런으로 애한테 계란말이를 만들게 된 경위를 대체 어떻게 설명한단 말인가. 이따위 차림새를 어디 들켰다간 변태로 오인받기 딱 좋은 상황이었다.
윤모난이 한참 대답을 피하자 아이는 질문을 바꾸었다.
“아저씨, 담배 피우지?”
“어.”
“혹시이… 아저씨가 아빠가 사랑하는 사람이야?”
“뭐어?”
순간 황당해져 돌아보자, 아이가 빤한 시선으로 마주해오고 있었다. 윤모난은 정말 당황해서 말까지 더듬었다.
“아니, 아니야. 무구원은… 아니 너희 아빤 네 엄마를 사랑하지. 왜 날 사랑해.”
“거짓말.”
“야….”
“난 다 알아. 거짓말하는 사람 표정은 다 똑같아.”
쟤 때문에 진짜 무서워 죽겠네. 이런 기분은 윤모난 생애 처음이었다. 아이는 가자미눈으로 윤모난을 쭉 스캔하듯이 보더니 이내 시선을 거둬들였다. 그러고서는 뭔가를 포기한 듯이 식탁 의자에서 꾸물대며 내려간다.
“계란말이 안 먹어?”
“…만들지도 못하잖아.”
“만들어볼게. 이번에는 안 태우면 되잖아.”
“아저씨는 처음부터 불을 너무 세게 해.”
윤모난은 혹시라도 이 어린 마마께서 노하실까 얼른 불부터 줄였다. 죄지은 것도 없는데 방금 전 대화로 인해 태도부터가 이미 한 수 아래로 밀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윤모난은 껍질을 다 골라낸 계란 물을 프라이팬에 붓고 아까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정성을 다해 계란말이를 부쳤다.
멀쩡한 계란이 몇 개 남지 않았을 때쯤, 맛까지는 모르겠고… 대충 타지 않은 뭔가가 만들어지긴 했다. 물론 뒤집기를 제대로 하질 못해서 말이보다는 조각에 가까웠지만.
“자, 먹어.”
“…….”
아이도 지쳤는지 이윽고 포크를 들었다. 묵묵히 작은 입에 계란 조각을 밀어 넣는 걸 보며 윤모난은 냉장고에서 우유를 꺼내 컵에 따라주고, 자신도 태오가 거부한 탄 계란말이 중 하나를 먹기 시작했다.
솔직히 자신이 먹기에도 형편없는 음식이라고 윤모난은 생각했다. 그런데도 태오는 배고팠는지 아니면 만들어준 정성이 이제야 새삼스러워졌는지 제 그릇을 깨끗이 비웠다.
“이제 자라. 눈에 졸음기가 한가득이네. 아빠 옆에 누워서 자.”
볼품없는 계란말이를 저녁으로 먹은 태오는 앉은자리에서 눈을 가물거리고 있었다. 몰래 집에서 빠져나와 버스를 타고 여기까지 온 뒤에, 아까 일어난 난장판을 목격하고 내리 몇 시간을 울었으니 지칠 법도 했다. 그런데도 태오는 밀려오는 잠을 참는가 싶더니 의외의 소리를 했다.
“지금 자면 안 돼. 기도해야 해.”
“뭐?”
“20시 20분은 기도 시간이야.”
윤모난은 조막만 한 무구원의 아들이 제 아빠와 똑같은 대사를 하는 걸 보고 소름이 돋았다. 무구원, 독한 새끼…. 기어코 자식까지 십자 2세로 만들었구나. 윤모난은 그릇을 싱크대에 와장창 던져 넣으며 말했다.
“오늘 같은 날에는 하루쯤 안 해도 돼. 졸릴 테니 자.”
“안 돼.”
“어휴, 맘대로 하든가.”
“…아저씨한테 허락해달라고 한 적 없어.”
저 망할 말본새도 딱 아빠 피의 영향일 테지. 태오는 식탁 의자에서 꾸물꾸물 내려가더니 거실로 향했다. 그리고 어디선가 매트를 찾아와서는 능숙하게 기도할 준비를 마쳤다.
어려운 글자가 많은 경전을 읽을 나이는 안 될 테지만, 구색을 갖추려는지 태오는 머리맡에 경전을 놓고 매트 위에 짧은 다리를 꿇었다. 절로 감탄이 튀어나오는 그 과정을 윤모난도 거실 소파에 앉아 구경했다. 애가 기도하는데 이렇게 발가벗고 있어도 되나 하는 생각이나 하면서.
“어이― 십자 2세. 기도하는데 바늘로 손가락 찌르기는 안 해?”
아이의 손끝도 제 아비랑 마찬가지로 수없이 바늘에 찔린 흔적이 있어 한 질문이었다. 그러자 태오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답했다.
“아저씨 있어서 안 돼.”
“나 있는 게 왜.”
“어머니 신께서 신성한 피는 밤에 꾸는 꿈과 똑같이 여기라고 하셨다 그랬어. 남에게 함부로 보이면 안 된다고.”
어릴 때부터 천경교 교단에서 종교 교육을 받고 자란 태오가 이쪽으로는 전혀 문외한인 윤모난을 위해서 나름의 설명을 덧붙였다.
“아, 부모님처럼 피를 나눠준 사람한테는 보여도 돼. 그 외에 생명을 낳을 수 있는 사이가 아니면 안 돼.”
“생명을 낳을 수 있는 사이라. 너 그게 무슨 뜻인지는 알아?”
“응. 엄마 아빠 될 사이잖아.”
태오가 이마를 바닥에 콩 찍으며 짐짓 엄한 척 굴었다.
“그리고 기도 중에는 말하면 안 돼.”
“무섭다, 무서워. 십자 2세.”
아이들은 약식 기도를 하는 모양인지 기도가 길게 이어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노래처럼 외운 기도문을 중얼거리며 올리는 태오의 기도는 제법 그럴듯해서 윤모난은 자신도 모르게 입을 다물었다.
한편으로 윤모난은 태오가 알려준 금기 사항이라는 것을 곱씹어보았다. 기도 중간에 쳐들어간 경우를 제외하고서라도, 그는 7년 전 무구원이 바늘로 제 손가락을 찔러 피를 내는 것을 수도 없이 봤다. 처음 합숙소에 들어가서 본 기도에서는 바늘을 꺼내지 않았지만 말이다.
윤모난은 언제부터 무구원이 그 ‘생명을 낳을 수 있는 사이’가 아니면 보여줘서는 안 된다던 피를 보여줬는지 떠올려보려 했지만 도통 기억이 나지 않았다.
“끝났어.”
태오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또 매트를 착착 정리하고 경전을 제자리에 가져다 놨다. 그 바람에 턱을 괸 채 빠져들었던 윤모난의 추억 여행도 중단되었다. 윤모난은 아이에게 턱짓으로 아빠가 잠든 방을 가리켰다. 얼른 들어가서 자빠져 자라는 뜻이었다. 아이도 밀려오는 졸음을 참기 힘든지 이번에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세수…랑 양치해야 해.”
“오늘 같은 날에는 빼먹어도 돼.”
“안 돼.”
하지만 어른보다 더 어른 같은 구석이 있는 태오는 기어코 세수와 양치까지 마치고 나서야 잠자리로 향했다. 그 모습이 꽤나 신기해서 윤모난은 쭉 따라가며 아이를 지켜봤다. 콩 심은 데 콩 난다는 게 정말인지 제 아빠랑 판박이라 생각하면서.
험난한 하루를 마친 태오는 침대로 가서 아빠의 목을 끌어안고 제 뺨을 어깨에 비볐다. 그러고서는 참새 부리같이 입술을 모아 쪽쪽 무구원의 얼굴에 뽀뽀했다. 윤모난은 그 광경도 문틀에 기대어 조용히 지켜봤다.
“아빠 사랑해. 아프지 마. 태오가 아빠 지켜줄게.”
“…….”
“아빠는 내 무조건적인 사랑이야.”
아이가 애달프게 속삭이는 모습에 윤모난은 문을 닫고 돌아서서 나왔다. 어쩐지 방해꾼이 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거냐. …대체.”
윤모난은 여기 이러고 있는 저 자신이 우스워졌다. 모든 것이 엉망이라는 생각과 함께 무구원을 찾아온 것도 후회되기 시작했다. 이럴 줄 몰랐다는 건 핑계일 뿐이다. 뭘 보고 싶었고 뭘 확인하고 싶었는지 스스로조차 의심이 갔다.
무구원을 마주치기 전까지는 모든 게 단순하리라고 생각했다. 북해의 가주가 된 무정원에게 가까이 접근하는 건 내부자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하고, 그래서 무구원을 찾아가는 것이라고.
윤모난은 북해를 향한 복수를 위해서 내통자로 무구원을 선택했다. 무정원이 7년 전에 제게 한 방식 그대로 돌려주고자 한 것이다.
공모자 아니면 복수의 대상. 그것 이상으로 무구원이 어떤 의미를 가지게 되는 건 곤란하다. 하지만 윤모난은 자꾸 가슴 한쪽 구석에서부터 비집고 들어오는 그 곤란함을 명확히 인식하고 있었다.
그건 해소되지 않고 중단된 7년 전의 감정들과 관련이 있을 터였다. 특히 마지막 순간, 함께 무간으로 가고 싶다던 무구원의 말. 그리고 늦은 건 알지만 자신을 선택했다는 그 말.
그때 했던 선택을 곱씹어보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태오야, 가자.”
“응.”
백화점에 생일 선물을 사러 온 사이좋은 부자를 보면서 윤모난은 무구원이 선택한 미래가 그에게 얼마나 충만함을 주었을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사랑하는 대상을 한 번도 온전히 소유해본 적 없어 상실조차 모르는 무구원에게 그런 존재가 생겨서 내심 다행이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러니 아마도 이 모든 일이 없었다면, 그에게 말해주었을 거다. 너에게 무조건적인 사랑을 줄 수 있는 존재가 생겨서 다행이라고. 그러니 이젠 버림받은 것 같은 외로운 표정 짓지 말라고.
하지만 윤모난은 복수를 선택했다. 그런 선택 앞에 머릿속에 든 건 모두 부차적인 것일 뿐이었다. 그래서 그는 부탁하기보다는 협박하기로, 옛정보다는 숙명을 택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그래. 할 수 있으면 막아봐. 여기서 날 죽이지 않으면 네 아들도 내 조카들이 간 길을 밟게 해줄 테니. 저번에 백화점에서 보니까 아이가 아버지를 많이 빼닮았더군.”
“…….”
“이름이 태오라 했던가. 좋은 이름이야. 성은 영 마음에 안 들지만.”
그때 무구원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과, 태오라는 아이가 오늘 제 아빠를 끌어안고 자신이 지켜주겠다고 속삭이던 모습을 떠올리면서 윤모난은 생각했다. 네가 줄 수 있는 무조건적인 사랑은 이미 미래의 몫이 되었으니, 과거인 나는 너에게 증오밖에는 받을 수 없겠구나.
어쩌면 그것이 옳을 것이다. 윤모난은 무구원의 가문을 멸문시키고 그의 가족을 도륙 내 그 피를 모두 마실 셈이었다. 그 선택은 변하지 않는다. 북해의 바다만큼 그 혈족이 피를 흘린다고 해도 자신의 미래였던 존재를 죽인 건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자신의 목적을 되뇌면서도 윤모난은 어두운 거실 한가운데에서 길을 잃은 듯 괴괴하게 서 있었다. 그가 무구원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10년을 기다려주는 것뿐이었다. 10년 정도는. 무구원이 평범한 삶을 영위하였으면 했다. 어차피 제 복수가 막이 오르면 그의 삶도 파괴될 테니. 윤모난이 무구원에게 주고 싶었던 건 바로 시간이었다.
윤모난은 거실의 한쪽 벽에 나 있는, 마당이 보이는 창 너머로 시선을 돌렸다. 여기에 앉아서 보는 모란이 가득한 마당은 꽤나 호사스럽고 아름다웠다. 경전이 놓인 무구원의 삭막한 공간과는 상반되는 풍경이다.
“…언제까지 날 위해 기도했었냐, 무구원.”
한 번은 그렇게 물어보고 싶었는데, 무구원에게서 자신을 타락시키고 인생을 망쳤다는 원망을 듣자 전부 소용없다는 것을 알게 됐다. 윤모난은 창을 열고 담배를 꺼내 문 다음 머리를 차갑게 식혔다. 이 미적지근한 감정을 이어가서는 안 된다. 그는 무구원이 일어나면 여길 당장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생각을 정리한 윤모난은 아이와 아빠가 나란히 잠든 방으로 향했다. 올해의 효자상을 받아도 놀랍지 않은 아이는 아빠를 꼭 안은 채로 자고 있었다. 자기 전에도 찔끔대며 울었는지 눈물 자국이 얼굴에 말라붙어 있었다.
윤모난은 아이 옆에 조용히 누운 무구원의 이마에 손을 가져다 댔다. 애도 애지만, 이 상황을 외면하고 그냥 가지 않은 건 무구원의 파동이 아무래도 이상했기 때문이다.
분명 처음 기절했을 때는 완전히 폭주 직전까지 파동이 날뛰고 있었다. 박치기 한 번에 기절할 신체도 아니고, 그 정도 상해에 이렇게까지 파동의 변화가 급격해질 이유는 없었다. 생리학에 문외한은 아님에도 이런 증상을 어떻게 진단 내려야 할지는 혼란스러웠다.
애초에 파동이 이 정도로 날뛸 경우 이미 트랜스화됐어야 하는데, 그저 잠든 상태일 뿐이라니. 생체 변화 징후도 전혀 없고, 미묘하지만 무구원의 파형이 이중 곡선을 그리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도 묘했다.
“무구원, 일어나.”
윤모난은 혈관을 에워싸며 흐르는 에너지에 최대한 간섭하기 위해 능력을 썼다. 하지만 이중 곡선을 그리는 파동 때문인지 가이딩이 먹히지 않았다.
무언가 그의 안에서 가로막혀 있었다. 어쩌면 무구원의 어린 시절 능력이 제한된 이유와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
7년 전에도 무구원은 3분 이상의 시간을 돌릴 수 있도록 부단히 애썼지만, 전혀 나아지는 바가 없었다. 노력 부족보다는 장애에 가깝다는 것이 윤모난이 당시에 내린 결론이었다. 훈련만큼은 혀를 내두를 정도로 스스로를 몰아붙이며 하는 놈이니까.
윤모난은 잠시 고민하며 허연 얼굴을 빤히 내려다보았다. 점막을 통한 가이딩이 더 효과가 강하다는 생각이 문득 뇌리를 스쳤다.
“오해하지 마. 무구원, 일단 널 일어나게 해야 죽이 되든 밥이 되든 할 테니까.”
들을 정신도 없는 상대에게 주절주절 변명을 늘어놓은 윤모난이 상체를 굽히고 고개를 숙여 입술을 맞췄다. 잠자는 공주라기에는 무구원의 덩치가 너무 컸지만, 어쩐지 동화 속 왕자가 된 심정이었다. 윤모난은 애들이 보는 동화에서보다 더 질척하게 혀를 놀렸다.
입을 벌리고 축축한 살덩이를 밀어 넣자, 저항도 없이 무구원의 입술이 갈라졌다. 윤모난은 부드럽게 입술을 핥은 뒤 잇새로 숨을 불어 넣었다. 촉촉한 수분을 머금으며 붉게 번진 무구원의 아랫입술을 자신의 입술로 지그시 누르면서 토닥이듯 까슬한 입천장을 핥았다.
그리고 늘 가이딩을 할 때와 마찬가지로 마음속으로 말을 걸었다. 너는 에스퍼고 나는 가이드니까, 내 손에 들린 불꽃을 보고 따라오라고. 윤모난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잠에 빠진 무구원을 어둠 속에서 건져내려 했다.
“윽―!”
순간 긴 바늘이 두개골을 뚫고 뇌를 찌르는 듯한 두통이 일었다. 화들짝 놀란 윤모난은 입술을 떼고 뒤로 물러섰다. 고통의 여파가 내내 이어지며 눈앞이 희게 번지고 어지러웠다. 뒷덜미가 시큰거리고 혀뿌리에 비린 맛이 감돌아서 확인해보니 어느새 코에서 웬 피가 줄줄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건 무구원도 마찬가지였다. 누워 있는 무구원의 뺨을 타고 검은 코피가 흘러내렸다. 그 모습을 발견한 윤모난은 바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무구원? 무구원….”
윤모난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빠져나갔다. 그건 비단 본인이 흘린 코피 탓은 아닐 것이다. 그는 무구원의 얼굴을 흠뻑 적시고 있는 핏물을 맨손으로 찍어내려다가 이내 굳어버렸다. 무구원에게서 파동이 느껴지지 않았다. 포스트에게서 파동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건…. 곧 죽음을 의미하지 않는가.
그대로 온몸이 얼어붙었다. 무구원이 죽는다고? 왜? 생명력 하나는 끈질긴 놈인데. 겨우 박치기 때문에? 이성적인 사고랄 것이 마비된 윤모난은 시체처럼 차갑게 식어가는 무구원을 보며 망연해졌다.
그러다 끝내 그런 생각을 했다. 이 새끼마저 죽으면 난 어떡하지?
“씨발! 무구원 너 이 새끼, 목숨 끈질긴 거 딱 하나 맘에 들었는데… 당장 일어나!”
사색이 된 윤모난은 피범벅인 주먹으로 뻣뻣하게 굳어 있는 무구원의 가슴팍을 퍽퍽 내리쳤다.
“박치기로 너 같은 꼴통이 죽을 리가 없잖아!”
멱살을 잡고 침대 밖으로 끌어낼 기세로 짤짤짤 흔들어대자, 무겁게 늘어져 있던 손이 조금 힘겹게 올라와 가로막았다. 방금 전까지도 죽었다고 생각한 무구원이 무거운 눈꺼풀을 밀어 올리며 손톱 끝으로 윤모난의 손등을 긁적였다.
“…이러다 진짜 죽겠습니다.”
“이…! 젠장!”
윤모난은 순간 알 수 없는 감정이 확 끓어올라 무구원을 도로 침대로 내동댕이쳤다. 무구원은 눈을 깜빡거리며 현실을 인식하는 데 오랜 시간을 썼다. 긴 잠을 자고 깨어난 사람처럼 혼곤한 얼굴이었다. 그러다가 제 얼굴에 묻은 피를 옷소매로 닦으며 무구원이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태오는요.”
“네 옆에.”
무구원은 자신의 옆에서 잠든 태오를 발견하고서야 작게 숨을 내쉬었다. 얼마나 애틋한지 피로 더러워진 손으로 만지지도 못하고 잠든 아이를 길게 지켜보기만 했다.
“주, 죽은 줄 알았잖아.”
윤모난은 그 말이 자신이 듣기에도 꽤나 떠듬거려서 스스로도 놀랐다. 그러자 무구원이 딱딱한 말투로 대답했다.
“제가 박치기 좀 당했다고 죽을 리가 있습니까.”
“…….”
“더한 상황에서도 살아남은 접니다. 목숨 하나만은 끈질긴 게 제 단점이자 장점 아닙니까.”
제 손에 묻은 피를 바라보며 장난인지 진심인지 모를 말을 한 뒤에 무구원은 침대에서 내려왔다.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는 것을 보니 태오가 깰 수 있으니 거실로 나오란 뜻 같았다. 윤모난은 잠자코 그의 뒤를 따랐다.
“수갑과 구금 장치는 태오가 풀어줬습니까?”
“어. 네 아들 똑똑하더라. 나도 못 당하겠던데.”
“네. 가끔 아내와 피는 못 속이겠다고 이야기한 적 있습니다.”
“아직까지 네 아들을 건드리지 않은 걸 내 호의라고 생각하는 거 아니지?”
그 말에 무구원이 무표정한 얼굴을 마주해왔다.
“물론입니다.”
“네 아들은 저기서 자고 있고. 얼른 옷부터 내놓지? 닭하고 병아리하고 한 소쿠리에 담은 김에 깃털 다 뽑아버리기 전에.”
무구원은 잠깐 태오가 잠들어 있는 방 쪽을 바라보다가 이내 몸을 움직였다. 숨겨놓았던 옷이 있었는지 가지고 와서 내밀었다. 그리고 바지부터 꿰입는 윤모난에게 가짜 신분증을 건넸다.
“요청하신 겁니다.”
갑자기 또 순한 양처럼 구는 게 영 이상하긴 했지만 머리가 복잡해 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윤모난은 얼른 이곳을 나갈 생각으로 신분증을 낚아챘다. 그렇게 몸을 돌려 나가려는데 무구원이 손목을 붙들었다.
“아까 제가 한 말, 그냥 한 소리 아닙니다.”
묘하게 조심스러운 말투였다. 이미 한 이야기를 왜 비밀인 양 경계하며 하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그 속내를 가늠조차 할 수 없는 윤모난은 초대장과 관련해서 더 파고들지 말라는 말에 얼굴을 구기며 손을 뺐다.
“왜? 뭐가 두려워서.”
“앞뒤 안 재고 무모하게 달려드는 건 여전하시군요.”
“앞뒤는 두려운 게 많은 너나 많이 재라. 성가시게 굴지 말고. 당장 여기서 널 죽이지 않은 걸 감사하게 여겨야지.”
“…….”
“내가 널 좀 봐주니까 뭔가 착각하나 본데, 네가 나 대신 청연이를 형들 옆에 묻어준 걸 봐서 그런 짓을 했어도 참은 거야. 빚이 있어 갚은 거라고.”
청연의 얘기에 무구원의 얼굴에 쓸쓸한 기색이 비쳤다가 이내 사라졌다. 죄책감이 가득한 그런 표정을 지으면서도, 무구원의 입에서는 영 상반된 말이 튀어나왔다.
“왜요? 제 형편없는 실력에 느끼기라도 하셨습니까?”
“이 새끼가 보자 보자 하니까!”
굳이 긁어 부스럼을 만들고 지랄이군. 무구원에게서 뻔히 보이는 괴리를 곱씹어볼 새도 없이 윤모난은 주먹을 들어 그의 얼굴을 냅다 내려쳤다.
“그래. 복종시켜야 할 개가 첫날부터 주인을 물었으니 관용은 너무 후한 대처지.”
“윽….”
“내가, 너무… 안일했다, 그치?”
그러곤 이미 바닥에 쓰러진 무구원 위에 올라탄 다음 어절마다 주먹을 내다 꽂았다. 이미 한바탕 코피를 흘린 것도 모자라, 단단한 주먹에 흠씬 두들겨 맞은 무구원의 단정한 얼굴은 급속도로 망가졌다.
때리는 사람도 아프지 않은 건 아니었다. 폭력이 더해질수록 윤모난은 어제 느꼈던 고통이 생생하게 되살아나는 것만 같았다. 제 안에서 무구원을 상실했다는 그 감각이 주먹질을 더 부추겼다.
“내가, 너 같은, 새끼 따위를! 언제는 내 다리가 되겠다며! 다른, 자식들은, 몰라도… 너만은 그러면, 안 되지!”
횡설수설, 엉겁결에 진심이 뒤섞인 줄도 모르고 쏟아져 나오는 윤모난의 말에 무구원은 처맞으면서도 어쩐지 안도한 얼굴을 했다. 하지만 그의 입에서는 윤모난의 분노를 부추길 만한 소리만 나왔다.
“선택하려는 나를 밀어낸 건 당신이야.”
“…….”
“당신은 날 기만하고 속이면서 미리 선택하지 않았다고 비난했지만… 정작 아무것도 선택한 적 없는 건, 바로 당신이야. 그게 얼마나 외롭고 비참한지는 절대 모르겠지.”
“닥쳐, 무구원!”
무구원은 윤모난이 절대 피하고자 했던 주제를 꺼내려 들고 있었다. 윤모난의 형형한 눈에 노기가 어렸다.
“청연이가 죽었어. 그런데 내가 널 선택해야 했다고? 그때 우린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사람들끼리 잠깐 통했던 것뿐이야. 다 착각이라고.”
“날 타락시켜놓곤, 단지 착각일 뿐이라니.”
무구원의 검은 눈동자에 차가운 빛이 돌았다. 아무런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겨울날의 황폐한 황무지같이 마른 눈이었다. 그 얼굴을 마주하며 윤모난이 물었다.
“이제 와서 그게 다 무슨 소용이야? 날 여전히 좋아하기라도 해?”
“…….”
“말해봐, 무구원. 네 아들이랑 아내랑 행복하게 살면서 7년 동안 내 생각을 얼마나 했어. 몇 달에 한 번? 몇 년에 한 번? 날 위해 언제까지 기도했어?”
“말해봤자 뭐가 달라집니까?”
“그래. 이제야 말이 통하네. 그딴 얘길 꺼낸다고 해서 여기서 달라질 건 없지.”
무구원은 늘 그런 식이었다. 자꾸만 악몽 중에 단꿈을 맛보게 만들었다. 가장 미천한 곳에 닿은 한 줄기 빛처럼. 바닥에 처박힌 존재를 위해 기도하여 자신의 진창 같은 삶에 구원이 올 것처럼 기대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 빛은 잡히지도 않고 금세 사라진다는 사실을 처절하게 경험시켰다. 구원은 사실 허상이었다는 그 상실감과 허탈감. 무구원이 죽은 청연을 품에 안고 돌아왔을 때, 윤모난이 분노했던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다.
무구원이 보여준 그 구원의 광채가 철저한 희망 고문이자 허상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날의 윤모난은 비로소 자신이 영원히 구원받지 못할 거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선택받지 못해 외롭고 비참했다고? 그럼 내 기분은 어땠을까. 7년 전 네가 구하겠다고 약속했던 청연이가 시체로 되돌아온 날, 나는?”
“…저는.”
“아버지가 아니라 내가 죽었어야 했어. 그랬으면 청연이나 조카들은 살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 그런데 네가 심어놓은 그 희망 때문에… 윤이화의 말을 들은 거야. 그 사실을 외면하기에는 치른 대가가 너무 커.”
그게 무구원을 선택할 수 없는 이유였다. 용서를 할 수는 있어도 선택해서는 안 된다. 그 희망 고문 때문에 청연이가 죽었으니까. 그를 사랑해서는 안 된다. 언젠가 누군가가 그랬다. 복종과 사랑은 엄연히 다르다고. 그렇다면 윤모난은 무구원에게서 복종만을 바라기로 다짐했다.
윤모난은 무구원의 허리에서 내려와 휘두르던 주먹을 거두었다. 서로를 향한 이 무의미한 폭력의 행렬도 사실상 욕구불만의 표출이고 7년 전 감정의 찌꺼기일 테다. 그걸 깨닫고 나니 이제는 때리는 것도 우스웠다. 윤모난은 엉망이 된 채로 바닥에 누워 있는 무구원에게 말했다.
“그러니 이따위 개 같은 짓은 이제 그만두자, 무구원.”
“…….”
“난 너에게 복종 말고는 요구하지 않는다.”
“싫다면요?”
“그럼 여기서 당장 죽어. 내 조카들 목숨을 네 목숨으로 갚으면 네 아들하고 아내는 놔두지.”
“약속하시는 겁니까?”
“그래.”
윤모난은 한쪽 구석에 있던 리볼버를 무구원의 손에 쥐여줬다.
“약속할게. 네 잘난 머리통에 쏴 갈기면 끝이라고. 나와의 악연도 끝나는 거야.”
그의 목소리에는 명백한 분노가 서려 있었다. 고집스러운 무구원에 대한 원망도 함께. 무구원은 총을 장전하더니 망설임 없이 자신의 머리에 겨눴다. 그렇게 검지가 방아쇠를 당기려던 그 순간이었다.
“아빠?”
방에서 소란을 듣고 나온 태오가 창백한 얼굴로 두 남자를 보고 있었다. 심각한 상황을 직감한 듯 손에 생일 선물로 받은 칼을 든 채로. 자신의 집에 침입한 괴물을 물리치기 위한 제 나름의 무기일 것이다. 자신을 보며 굳은 두 남자의 사이를 가로질러 태오는 무구원의 편에 섰다.
“아저씨 미워. 아빠 괴롭히지 마!”
“태오야.”
무구원은 여전히 총구를 제게 떼어놓지 않았지만, 방아쇠를 당기지도 못했다. 윤모난은 허탈함인지 안도감인지 모를 쉰 웃음을 터뜨렸다.
“이젠 선택도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처지를 너도 이해하겠지?”
윤모난은 자신에게 겨눠진 칼끝에 가까이 다가서며, 그 날카로운 끝을 손가락으로 눌러 향하는 방향을 휙 돌렸다. 그러자 태오가 칼을 거두고 몸을 돌려 무구원의 허리를 감싸 쥐며 눈을 꽉 감았다. 무구원도 총을 바닥에 떨어트리고 태오의 작은 머리통을 감싸 안았다.
“무구원, 소중한 게 생겼으면 그따위 객기는 부리는 게 아냐.”
“…….”
“또 보자, 십자 2세.”
윤모난은 부자를 두고 발걸음을 돌렸다.
모란이 가득 핀 무구원의 집을 순조롭게 빠져나오는 길에 그가 가장 먼저 느낀 것은 극심한 허기였다. 오래간만에 정말로 밥이 먹고 싶었다. 그 허기가 어디에서 기인하는지 따져볼 여력도 없이, 거리로 나와 적당한 식당을 찾아 들어갔다.
너무 이른 시간이라 간단하게 상인이나 직장인들이 아침을 해결하는 국숫집이 유일하게 갈 수 있는 곳이었다. 허름한 국숫집 구석에 대충 자리를 잡고, 아무거나 골라서 한 그릇을 시킨 윤모난은 주린 배를 감싸 쥐며 멍하니 앉아 있었다.
“아이구야, 멀끔한 총각이 왔구먼.”
별로 기다리지도 않은 듯한데 흰 김이 뽀얗게 번지는 국수 한 그릇을 내놓으며, 나이가 지긋한 할머니가 대뜸 그렇게 말을 걸어왔다. 나무젓가락을 뚝 뜯은 윤모난은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네, 압니다. 그런 소리 너무 많이 들어서 이젠 질려요.”
“얼굴 한번 귀티 나게 잘생겼구만. 분명히 좋은 집서 자랐것어…. 이렇게 얼굴도 훤하고 키도 크니 부모님이 대견해하실겨.”
국수를 한 젓가락 말아 후루룩 먹으며 윤모난은 자신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는 온전한 타인일 뿐인 주인에게 마른 웃음을 지어 보였다.
이렇듯 현상과 본질은 늘 동떨어져 있는 것이다. 저 할머니는 자신이 대견스럽게 여겨지기는커녕 아버지를 죽인 패륜아라는 사실을 짐작조차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 눈에 보이는 것은 사태의 본질을 정확히 알려주지 못한다.
그때 문득 감금되어 있던 내내 급변하던 무구원의 태도가 떠올랐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늘 로봇처럼 일관적으로 행동하던 무구원이 지난 며칠간은 미묘하게 불안정한 모습을 보인 것이 어쩐지 이상했다. 무의식적으로 그 사실을 곱씹어보려던 시도는 곧 타인의 개입으로 중단되고 말았다.
“총각은 올해 나이가 몇이유?”
“먹을 만큼 먹었습니다. 서른 넘었어요.”
“그려? 그럼 벌써 결혼하고도 남았겄네?”
“아직이요.”
윤모난의 대답에 노인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본격적으로 오지랖을 부려대기 시작했다.
“그르게나 뭐가 모자라서 여태 장가를 안 갔디야. 멀쩡하게 생겼구만… 뭐 취향이라도 있는 거여? 까다롭게 굴지 말어. 심성이 착한 사람이 최고인겨. 다 필요 없다니께?”
“저부터가 착한 사람이 아닌데요. 뭘.”
“아이구, 그려? 요즘 세상에 착하게 살기도 쉽지 않어. 당장 눈앞에서 사람이 죽어도 놀랄 일도 아닌 시상이니께. 총각은 얼굴값한게 이용하려 드는 사람도 많겄어. 조심햐. 그래도 꼭 좋은 짝지 만날 수 있을 거여. ”
주인 할머니는 더 먹으라며 반찬을 따로 가득 담아서 식탁에 올려놓곤 주방으로 향했다. 윤모난은 받은 반찬을 꾸역꾸역 입에 밀어 넣고, 꽤 양이 많은 국수도 모두 넘겼다. 기계적으로 젓가락을 놀려 식사를 다 마칠 즈음, 짤랑하고 문에 달린 작은 종이 울리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 식당 안으로 들어왔다.
평균보다 작은 키에 머리숱이 적은 서른 초반쯤의 남자는 남경 지부 치안조 제복을 입고 있었다. 이전에 남경 지부에 갔을 때 무구원의 옆에 붙어 있던 부하였다.
“안녕하십니까.”
김 부장은 능청스럽게 인사를 하며 윤모난의 건너편에 앉았다. 윤모난은 비치된 휴지로 입을 쓱 닦으며 빤한 시선으로 남자를 바라봤다.
“남경 지부 치안조 부장 김종훈이라고 합니다.”
자신을 소개하는 말에 윤모난은 대꾸 없이 손끝으로 식탁을 툭툭 두드릴 뿐이었다. 그런 침묵이 조금 이어지다가 이내 늦은 대답이 나왔다.
“네, 김 부장님. 또 뵙네요.”
“아침 드셨나 봅니다. 저도 한 그릇 할까요? 저기….”
“남경 지부에는 얼마나 있었죠?”
주문도 못하고 대뜸 질문을 받은 김 부장은 자신을 뜯어보는 듯한 윤모난의 눈을 마주치며 대답했다.
“5년 정도 됐습니다.”
“그전에는요. 여기 출신인가?”
“아니요. 북해가 고향입니다.”
“그럼 그쪽도 북해 가문에 봉사하는 개인가 보군. 북해 출신이 여기서 치안조 부장까지 달고 있는 걸 보면.”
분위기가 삽시간에 얼어붙었다. 자신을 향한 경계심을 눈치챈 김 부장은 바로 연륜을 발휘해 능청스럽게 받아쳤다.
“북해 출신 에스퍼가 몇인데 저 같은 사람이 특별하겠습니까? 치안조 부장은 제 능력으로 단 거구요.”
“…….”
“북해와 인연이 있으신가 보군요?”
“인연이 있는 정도가 아니지. 북해에 보고 싶은 사람이 있어서.”
“그럼 왜 직접 뵈러 가지 않으시는지요? 기차 타면 하루 안에 갈 수 있는 곳을 미루는 이유라도 있으십니까?”
“저기, 김 부장님?”
윤모난이 대뜸 김 부장의 말을 끊었다.
“지금 바쁜가?”
“네?”
“아침은 다음에 드시고 어차피 나 감시하러 온 김에 어디 좀 태워다 주지.”
“…….”
“갈 데가 있어서.”
까닥하는 시선이 식당 밖에 주차된 까만 세단을 가리켰다. 조금 뻔뻔한 요구인데도 태도가 너무 당당해서 그런지 김 부장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그러자 윤모난이 그릇 옆에 지폐 몇 장을 꺼내놓았다.
“잘 먹었습니다.”
“으응, 그려. 또 와, 총각.”
두 사람은 국숫집을 나와 앞에 주차된 차로 향했다. 윤모난이 거침없이 차에 올라타자 김 부장 역시 허둥지둥 운전석에 올라탔다.
“어디로 가시는데요?”
“남경 윤씨 저택.”
“…거긴, 왜.”
운전석에 앉은 김 부장의 얼굴이 해쓱해졌다. 이른 새벽 지부장의 연락을 받고 이리를 감시하는 임무를 받았으나, 남경 윤씨 저택에 가는 건 또 다른 문제였다. 남경극장 테러 용의자를 아이들만 있을 그곳에 데려가는 것이 옳은가? 혹시 무슨 문제라도 생긴다면?
김 부장이 혼란한 얼굴로 머뭇거리자, 윤모난이 다독이듯이 평연한 말투로 그의 염려를 불식시켰다.
“누구 죽이러 가는 건 아니니까 걱정 말고. 정 걱정되면 당신 상관한테 보고하든가.”
정 간다고 하면 말릴 수도 없는 노릇일 테다. 차라리 자신이 동행하여 동태를 파악하는 것이 낫다고 판단한 김 부장은 우선 차를 출발시켰다. 주택가를 벗어난 차는 도시 외곽으로 향했다. 가는 내내 김 부장은 종종 힐끗대며 말이 없는 옆자리에 시선을 던졌다.
“남경에 오래 계실 예정입니까?”
“아니요.”
“그럼 얼마나….”
“당신, 파동이 곤두섰네. 긴장했어?”
“…가이드시군요.”
“이봐. 치안조 부장이라면서 아직 내 정체도 파악 못했어? 아, 모르는 척하는 건가. 뭐 어차피 둘 다 멍청한 짓이기는 하지만. 쓸데없는 질문 이어가면서 사람 떠보지 말고 운전이나 해요. 내가 부탁한 일은 그거잖아?”
엄밀히 말해 이런 걸 부탁이라고 할 수 있을 거 같진 않았다. 오히려 협박에 가까운 것 같은데. 김 부장은 식은땀을 흘리며 남경 윤씨 저택까지 차를 몰았다. 그러는 사이 윤모난은 짧은 감금 생활 동안 생각했던 것들을 되새겨보았다. 햄릿과 무정원. 둘은 모두 자신과 관련이 있는 듯하지만 서로 간의 인과관계가 명확하지 않았다.
윤모난은 자신의 목에 걸린 은제 펜던트를 만지작거렸다. 태엽의 거친 단면을 달칵거리는 반복 행동은 이성적인 사고를 하는 데 도움이 된다.
“북해로 전향해라. 내게 복종하고 내가 하라는 대로 해.”
7년 전 구치소에 있을 때 무정원이 한 말부터 돌이켜보면.
그때는 무정원이 아버지의 암살을 요구하는 것이라 여겼지만, 후에 가만히 생각해보니 아니었다. 무정원이 윤화신의 암살 위에 굳이 자신의 ‘전향’까지 얹을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그때 북해는 꽃들과 밀약을 맺었을 게 뻔했다. 애초에 무구원이 무정원의 감시를 피해 인질을 데려오겠다는 계획을 세우는 것부터가 말이 안 되기 때문이다. 윤모난은 여기까진 어렵지 않게 추론할 수 있었다. 그리고 무구원은 그날 이후 7년이란 시간이 흐를 동안 목숨을 부지하고 있으며, 심지어 지금은 남경의 지부장 자리에 앉았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분명했다. 무구원이 그때 정확히 무슨 생각으로 행동했는지는 모르지만, 무정원의 동의하에 이 모든 일이 벌어졌다는 확실한 증거였다.
그러나 여전히 무정원의 의도가 불분명했다.
‘…무정원이 그저 남경을 원했던 거라면… 굳이 내 전향을 요구할 필요도 없거니와 무구원을 이용해 내 조카들을 구해낼 필요도 없지.’
윤화신이 죽으면 남경은 자연스레 무정원의 손에 떨어질 일이었다. 그러니 자신을 통해 무정원이 얻으려고 한 것은 고작 남경 따위가 아니라는 것이 논리상 맞지 않겠는가. 하지만 윤모난이 아는 한 무정원은 지금껏 자신의 진정한 속내를 내비친 적 없었다.
구체적인 인과관계는 드러나지 않았지만, 윤모난은 직감적으로 자신에게 날아든 초대장과 이 모든 일들이 연관됐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그런 점에서 이건 반드시 풀어야 하는 수수께끼였다. 불확실성은 목적 달성에 있어 가장 큰 방해 요소이니까.
초대장 그리고 무구원에게도 배달된 낱장이 없는 『햄릿』. 남경의 독사 두 마리, 작약. 그러니 다음 단서가 있을 곳은 뻔했다. 남경의 삼 형제가 자란 집이다.
“저기… 도착했는데요.”
어느새 차가 이른 아침의 햇빛을 받아 먼 거리에서도 호사스럽게 빛나는 하얀 저택 앞에 섰다. 예전보다 규모가 축소된 듯 경호원 몇 명만이 대문 앞을 지키고 있었다. 도착하자마자 윤모난은 망설임 없이 차 문을 쾅 밀고 내렸다. 자갈이 깔린 길로 올라오는 그를 본 경호원들의 얼굴이 일순 새파랗게 질렸다.
“열어.”
엄밀히 말해서 윤모난은 7년간 죽은 사람으로 여겨졌고, 이제 여긴 그의 집도 아니었다. 그리고 경호원들에게는 이방인을 막아야 하는 의무가 있었다. 긴장감이 팽배해진 분위기를 감지한 김 부장 역시 침을 꼴깍 삼키며 뒤늦게 차에서 내렸다.
“여기서 나한테 맴매 맞을래? 아니면 조용히 문 열래?”
“…….”
“이놈! 문 열으라니까.”
마치 어린애 겁을 주듯 윤모난은 발을 쾅 구르며 손을 번쩍 들었다. 그러나 이 황당한 위협에도 이제 막 고용된 어리숙한 경호원들은 움찔대며 물러섰다. 뒤에서 김 부장은 서둘러 호출기로 무구원에게 긴급 호출을 넣었다. 이리가 곧 사고를 칠 게 분명하지 않은가.
“쯧.”
윤모난은 혀를 차며 얼떨떨한 얼굴인 경호원을 옆으로 밀치더니 대문을 열고 안으로 태연스레 걸어갔다. 모두가 멍하니 그가 올라가는 모습을 보는 와중에 빠르게 정신을 차린 김 부장이 서둘러 그의 뒤를 바짝 쫓았다.
이미 경호원들이 집에 연락을 넣었는지 현관에는 사람이 몇 명 모여 있었다. 그중 상복을 입고 있는 어린 얼굴의 정체를 아는 김 부장만 당혹감을 느꼈다.
“…종숙.”
윤모난을 부른 것은 윤이화의 큰아들이었다. 한꺼번에 부모를 잃고 남경의 가주 자리를 이어받은 아이. 훈련 학교에 들어갈 나이인 오촌 조카는 자신의 여동생 손을 꼭 잡은 채로 종숙을 맞이했다.
“잘 있었니.”
아이는 생각보다 침착했다. 7년 전에 죽었다던 종숙이, 부모가 테러에 휘말려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아 홀연히 나타났는데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그저 담담히 예의를 갖춰 묵례할 뿐. 아이를 제외한 주변인들의 얼굴에 명확히 떠올라 있는 두려움과는 퍽 상반되는 모습이었다. 아직 어려도 윤씨 핏줄은 핏줄이었다.
“그래.”
윤모난이 아이를 지나쳐 현관으로 올라서자, 집 안에 갑자기 맹수라도 쳐들어온 듯이 분위기가 삽시간에 뾰족해졌다. 윤이화의 큰아들이 조용히 그의 뒤를 따랐다.
“…미리 연락을 주고 오셨으면 경호원들에게 언질을 해놓았을 텐데요. 장례 때문에 집안이 어수선해서요.”
이 집의 주인답게 손님에게 양해를 구하는 오촌 조카를 바라보며 윤모난이 물었다.
“네가 올해 몇 살이지?”
“14살입니다. 동생은 8살이구요.”
“14살이면 훈련 학교에 다니고 있겠구나.”
“네.”
겉보기에는 평범하기만 한 대화를 나누며 복도 중앙까지 들어서자 윤모난이 용건을 꺼냈다.
“내 형들 물건을 좀 찾고 싶은데.”
“유품이니 창고에 보관 중일 겁니다. 사용인들을 시켜 다 꺼내라고 할까요?”
아이는 능숙하게 멀리 서 있는 사용인을 불러 종숙이 찾는 물건을 가져오라고 전했다.
“유품 중 몇 개를 가져가고 싶은데 그래도 될까?”
“종숙 물건인데 당연히 됩니다. 응접실을 편히 쓰시죠. 거기로 옮겨놓으라 할게요.”
“그래.”
“제가 옆에 있으면 방해가 될 테니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공부도 훈련도 열심히 해라. 어른이 되려면 6년 정도 남았으니….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고. 기회는 얼마든지 있어. 오늘처럼 침착함을 유지하면 돼.”
단단한 뼈가 있는 말에 그의 사촌 조카의 시선이 조용히 부딪쳐왔다. 아직은 성인이라 할 수 없는 앳된 아이의 두 눈에서 일순 광분이 서렸으나 곧 훅 꺼져 사라졌다. 가르침을 새기듯이 아이는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아버지의 원수에게 침착하게 감사 인사를 전하는 사촌 조카를 보며, 윤모난은 쓴웃음을 매단 채 응접실로 향했다. 원래는 작약의 그림으로 장식돼 있던 응접실의 벽은 어느새 흰 배꽃으로 뒤덮여 있었다.
곧이어 사용인들이 눈치를 보며 상자를 들어 날랐다. 오래 방치된 듯 보관 상태가 영 좋지 않은 상자들 가운데 윤모난은 책 목록을 발견했다. 삼 형제의 개인 서재에 있던 책들일 터였다.
퀴퀴한 먼지와 곰팡이를 먹은 책들을 하나둘씩 꺼내어 내려놓던 윤모난은 이내 찾던 물건을 발견했다. 상자 밖으로 나온 윤모난의 손에는 『햄릿』이 들려 있었다. 파르륵 책장을 넘기던 손이 한 페이지를 짚어내는 순간 책에 끼워져 있던 것이 바닥으로 툭, 하고 떨어졌다.
“…화투패라.”
책갈피라 생각했던 것은 생뚱맞게도 화투패였다. 형들의 짐에 섞여 있을 이유가 없는 물건이니 이것도 실마리일 듯했다. 윤모난은 화투패를 주워 주머니에 넣어놓고 우선 책부터 확인했다. 예상대로 초대장에 있던 그 부분이 낱장으로 찢겨 단면이 울퉁불퉁했다.
햄릿에 이어서 독사 두 마리. 무구원을 후보에서 제외하니 그 뒤를 추리해내기란 어렵지 않았다. 『햄릿』은 작약이 좋아하던 책이기도 하니까. 책의 한 페이지를 찢은 다음 선물하는 것도 형들 사이에서 처음 시작된 장난이지 않은가.
일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도통 알 수는 없지만, 초대장이 형들과 관련이 있다는 가설이 점점 입증되고 있었다. 다시 한번 일련의 사건에서 불쑥 불거져 나오는 죽은 작약의 존재에 윤모난은 조금 막막해졌다.
유독 7년 전부터 윤모난에게 작약은 수수께끼처럼 다가왔다. 부재한 어머니 대신으로 여기며 사랑했던 형들이 아니라 낯설고 불가해한 존재로서. 수면 위로 점점 드러나는 진실들이 마치 형들이 만든 또 다른 미로인 것만 같았다.
무구원은 초대장에 대해 더 파고들지 말라며 이유 모를 경고를 했지만 그건 사실상 소용이 없었다. 윤모난은 형들과 관련된 일에는 이성적인 사고를 발휘하지 못하니까. 그에게 형제란 그런 것이다. 윤모난처럼 강인한 사람도 평생 구속할 만큼의 위력을 가지고 있는 가장 무서운 덫이었다.
“…도련님?”
그때 등 뒤에서 누군가가 유쾌하지 않은 호칭으로 자신을 부르자, 윤모난은 소리 나게 책을 닫았다. 그를 부른 이는 바로 몇십 년 동안 이 저택에서 일하는 사용인 중 한 명인 서씨였다. 그야말로 모든 비극을 빠짐없이 지켜본 이였다.
윤모난이 아버지의 계략에 빠져 약에 취해버린 그날까지도 말이다. 가주의 명령으로 차에 수면제를 탔던 장본인이 바로 서씨였기에.
“…도련님… 대체 어떻게….”
서씨는 달려와 윤모난의 손부터 덥석 잡았다. 그렇게 맞잡은 노인의 손은 식은땀으로 축축했다. 그는 지금 떨고 있었다. 윤모난은 냉정하게 뿌리치며 노인을 노려봤다.
“뭐지?”
“설마 이렇게 살아 계실 줄은, 7년 전에 이미 돌아가신 줄로만 알았는데….”
일반 반도인들은 윤모난의 사형이 집행되었다고 알고 있었다. 평의회의 고위 인사들만이 윤모난이 무간으로 사라졌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대외적으로는 그의 사망이 공표됐기 때문이다.
“어째서… 여기에 계십니까?”
“내가 못 올 데를 온 것처럼 말하는군?”
그 말에 서씨의 주름진 눈매가 무겁게 처졌다.
“죄송합니다. 7년 전에 이 늙은이가 무슨 일이 있더라도 청연 도련님과 아기 도련님들을… 지켰어야 했는데, 갑자기 가주님께서 돌아가시고… 상황이….”
“당신 한탄이나 듣자고 온 거 아니야. 비켜.”
초대장이 형들과 관련이 있음을 알게 되었으니, 다음에는 화투패가 뭘 의미하는지 알아봐야 할 것이다. 그 목적만 되새긴 윤모난이 미련 없이 발걸음을 돌려 응접실을 나가려 하자, 서씨의 주름이 더 진해지더니 혼탁한 망막에도 물기가 어렸다. 어쨌건 서씨도 이 집안의 비극에 말려 고생을 한 이들 중 하나였다.
“이제 저도 죽어야겠습니다. 쓸모없이 부지한 인생 더 살아 무엇 하겠습니까? 그나마 그립던 도련님을 이렇게 뵙게 돼서, 이 늙은이 죽기 전에 한은 풀고 가는군요.”
“내가 그리웠다고?”
옛날이라면 윤모난 역시 서씨를 딱하다고 생각했을 테지만 이제는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는 과거 자신이 아닌 윤화신을 선택했고, 그에 따른 책임은 본인이 감당할 몫이었다. 소매 끝으로 눈물을 꾹꾹 찍어대며 우는 서씨를 윤모난이 매섭게 다그쳤다.
“7년 전에도 그랬잖아. 내가 오랜만에 이 집에 왔을 때도 모두가 내게 보고 싶었다며 눈물까지 흘렸지. 그래놓고 당신은 내 차에 수면제를 타서 내밀었어. 입으로는 내 걱정을 늘어놨던 주제에.”
자신보다 한참 작은 덩치의 노인에게 다가서며 윤모난이 물었다.
“그렇게 날 소중하게 여긴다면 말해봐. 그날 아버지가 내게 무슨 짓을 했지? 이제 모두 죽고 진실을 아는 건 당신밖에 없군.”
“…그건.”
갑자기 윤모난이 그날 밤 일을 물어올 줄 몰랐던 서씨의 얼굴은 사색이 되었다. 그건 7년 전 겨울, 냉골 같은 비를 맞으며 홀연히 남경의 하얀 저택으로 한 남자가 찾아오면서 묻어놓았던 일이었다.
윤화신 내외와 작약의 처자식들 그리고 윤모난까지, 윤화신 일가는 전부 죽었다고 여겨지던 시기의 어느 날, 남자는 불쑥 이곳에 나타났다.
그는 윤모난의 애인 자격으로 일전에 이 집에 방문한 적 있는 사람이었다. 커다란 키에 짙은 검은 머리카락, 건조한 눈빛. 봄에 봤을 때보다 훨씬 초췌해진 그의 등에는 부드럽고 깨끗한 천으로 싸인 청연이 업혀 있었다. 그 뒤로는 나머지 조카들의 시체를 데리고 온 낯선 남자 두 명이 따랐다.
아이들이 죽은 지 한 달이 되어가는 시점이었다. 누군가의 이능력으로 깨끗이 보존된 시신은 겉보기엔 그저 잠든 것처럼 보였다. 천으로 감싼 청연을 소중하게 데려온 남자는 행여 아이가 비에 젖을까 검은 코트까지 소중히 덮어놓았다.
그 남자는 죽은 애인 대신 그의 조카를 매장하러 왔다며 방문 목적을 전했다. 겨울비에 온몸이 젖은 채로 새로운 가주님께 접견을 구하는 남자의 아랫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무슨 연유인지는 모르지만, 한쪽 발을 심하게 절었고 움직일 때마다 고통을 삼키려는 듯 약간 얼굴을 찡그리기까지 했다.
그렇게 서재로 가서 한참 대화를 나눈 끝에, 그는 청연과 다른 조카들을 가족 묘지에 매장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아냈다. 윤가의 하인이라고는 하지만 작약의 조카들 또한 자신이 모셨던 주인이기에 서씨는 내심 감사함을 느꼈다.
서씨가 남자에게 이름을 묻자, 그는 잠시 고민하더니 무구원이라고 대답했다. 며칠간 이어지는 아이들의 장례식 동안 무구원을 몰래 지켜보며 서씨는 막내 도련님에 대한 그의 감정을 확신했다.
그래서 그 비밀을 말해준 것이다. 윤모난의 핏줄을 이은 아이가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 아이의 존재가 드러날 경우 발생할 수 있는 파국에 대해서. 막상 들었을 때는 별 반응 없던 무구원은 남경을 떠나는 날 서씨에게 웬 편지 하나를 건넸다.
“아이 어머님께 제 편지를 전해주실 수 있습니까. 북해로 오시면 제가 지켜드린다고도 전해주십시오.”
“행여 이 일이 세간에 새어나가기라도 하면 모두가 위험해질 텐데요.”
서씨의 염려에 그는 누가 또 이 사실을 알고 있냐고 물었다. 윤화신 사망 이후에도 몇몇 살아남은 화사들이 있었고, 개중에는 윤모난이 강간당한 그날 밤 일을 어렴풋이 알고 있는 사람도 있었다.
무구원이 그 사람들의 이름을 받아 간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이 비밀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은 서씨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임신 중인 아이의 엄마에게 편지를 전달하고 그녀를 몰래 북해로 보낸 것도 서씨였다. 그런데 그대로 끝난 줄 알았던 일이 생부 윤모난의 등장으로 다시 수면 위로 올라온 것이다.
“말해.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윤모난이 재차 다그쳤지만, 남경 윤씨의 저택에서 역대 가주만 셋을 모시며 산 서씨는 상황 파악이 빨랐다. 윤모난이 자신에게 아들이 있다는 진실을 알게 되면 파국이다. 서씨는 늙은이의 지혜를 발휘해 고개를 저었다.
“선대 가주님께서 그날 도련님과 애인분께서 청연 도련님께 안 좋은 영향을 준다며 일찍 주무시도록 한 겁니다. 이 이상은 저도 더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나도 지금 와서 옛일을 다 들쑤실 생각은 아니야.”
냉랭한 시선이 서씨의 얼굴에 닿았다.
“하지만 이제 거짓말하는 것들한테는 질렸어. 그 말이 거짓이면 당신 늙은 목숨은 더 부지하기 어려울 거야.”
차가운 경고와 함께 돌아서는 윤모난을 향해 서씨가 주저하는 말투로 물었다.
“도련님, 남경극장에서의 일…. 혹시 도련님이.”
가면 같은 흰 얼굴이 자신을 마주해오자 노인은 순간 움찔했다. 저런 얼굴은 자신이 알던 도련님이 아니었다. 서씨는 갓난쟁이일 때부터 윤모난을 키웠다. 작고 하얀 아이가 요람에 담겨 형들의 사랑을 받을 때부터 옆에서 지켜봤단 소리다.
잔혹한 성정이었던 작약은 윤모난에게 장난감 대신 손에 칼을 쥐여주고 학교에 다닐 때쯤에는 총 쏘는 법부터 손수 가르쳤다. 독에 내성이 생기게 하기 위해 독을 탄 차를 마시게 한 뒤, 좋아하는 단 사탕을 입에 넣어주는 훈련도 불사했다.
하지만 작약이 그렇게 키웠어도 모란은 근본적인 데서 형들과 달랐다. 모란은 연민을 느낄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의외로 무른 구석이 있어 항상 어떤 선을 넘지는 않았는데.
“그래, 맞아. 굳이 셈을 하자면 내 조카들 목숨은 꽃들을 다 갈아엎어도 만회가 안 되지만.”
섬뜩한 소리에 서씨의 몸이 뻣뻣해졌다. 지금 눈앞에 나타난 이 위협적인 남자는 대체 누구란 말인가.
“왜 이렇게 변하셨습니까? 도련님.”
“나약하게 굴다 다 잃었으니 당연히 변해야지.”
“제가 이런 말 할 자격이 없다는 걸 알지만… 이런 끔찍한 대물림은 끝나야 합니다. 그러니 부디 과거는 잊으시고 도련님 인생을 찾아서 떠나세요.”
순간적으로 윤모난의 얼굴에 잠깐이지만 슬픈 표정이 스쳤다가 사라졌다.
“다 그만두라고? 그렇게는 못하지.”
윤모난의 손등에 핏줄이 불거졌다. 주먹을 세게 말아 쥔 단단한 손은 그의 형들처럼 마음만 먹는다면 누구든 죽일 수 있을 것이었다. 서씨는 힘없이 고개를 떨구었다.
“큰 도련님들이 가문에 매이지 말라 그렇게 말씀하셨는데. …이 나이만큼 살아보니 보입니다. 파국을 맞이한 뒤에야 하는 후회는 늦다는 것이요.”
윤모난은 대꾸조차 하지 않고 응접실을 박차고 나갔다. 감히 후회를 말하기엔 자신은 아직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감정을 눌러 참는 그의 얼굴은 꼭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았다. 문밖에 서 있던 윤이화의 큰아들에게 윤모난이 물었다.
“너도 그렇게 생각하니. 대물림을 끝내야 한다고?”
“…….”
“분명히 말할게. 내가 네 부모를 죽였어. 네 부모가 한 짓을 용서할 수 없었거든. 하지만 너에겐 나도 똑같은 인간이겠지. 그러니 어른이 되면 언제든지 찾아와라. 내가 네 부모를 죽였다는 사실을 가슴에 새기고 절대 잊지 마.”
“…명심하겠습니다.”
응접실 안에서의 대화가 모두 들렸을 텐데, 여전히 침착함을 유지하는 모습이 제법 어른스러웠다. 윤모난은 창백한 안색을 한 소년의 곁을 지나쳐 복도로 향했다. 그리고 안절부절 못하고 있던 김 부장에게 한 가지 더 용건이 있음을 전달한 뒤에 원래 자신의 방이 있는 방향으로 발길을 돌렸다.
잠긴 문에 힘을 줘 문고리를 뜯어내고 안으로 들어가자 무거운 먼지 냄새가 반겼다. 예상대로 자신의 방은 그대로 방치되어 있었고 물건들도 상자에 엉망으로 담겨 있는 상태였다.
윤모난은 다른 짐은 놔두고 사진부터 찾았다. 보관하고 있는 앨범 가운데 청연이 태어나는 날 찍은 사진이 분명 있을 것이다. 이제 이 집에 올 일은 절대 없을 테니 그 사진만은 꼭 챙겨 가져가고 싶었다. 연도별로 정리되어 있는 앨범을 넘기던 윤모난의 손이 한 페이지에서 멈췄다.
“청연아….”
청연이 태어난 날짜가 하단에 찍힌 사진 몇 장이 남아 있었다. 아이가 태어난 날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해 얼마나 괴로워했던가. 구멍이 뚫린 듯 머릿속에선 텅 비어 있는 그날이 사진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하지만 사진을 계속 들여다볼수록 윤모난의 얼굴은 서서히 일그러졌다. 도저히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흐려진 기억은 작은 단서만으로도 복구되기 마련이지만, 윤모난에게는 이 모든 일이 마치 남의 일처럼 낯설게 느껴질 뿐이었다.
“왜 기억 못하는 거야…. 왜.”
스스로를 다그치며 물어봤자 망실한 기억을 어디서 되돌려받을 수 있을지 요원하기만 했다. 윤모난은 어느 순간부터 확연히 인지하기 시작한 이 이상한 증세 탓에 당혹스러워하는 순간이 종종 늘어나고 있었다.
그는 일단 청연의 사진을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이런 증상은 용병단에서 만났던 누군가의 의견대로 오래 복용한 향정신성 약의 부작용일 가능성이 컸다. 그 빌어먹을 약이 여러모로 제 발목을 잡긴 했다만 이 정도로 머리를 망가뜨릴 줄은 몰랐다.
혼란스러운 나머지 문득 길을 잃은 심정이 된 윤모난의 시야에 자신의 독사진이 들어왔다. 망가진 액자의 사진 속 천진하게 웃으며 카메라를 든 사람을 바라보는 제 모습이 낯설었다. 예전에 무구원이 누가 찍어준 사진이냐고 물었을 때 대답하지 못했던 것은 기억나는데, 이 사진을 누가 찍어줬는지는 지금도 여전히 떠올릴 수가 없었다.
‘괜찮아.’
당황스러워 하고 있는 와중에, 돌연 부드러운 목소리가 머릿속으로 불쑥 끼어들었다. 놀란 윤모난은 제 귀를 틀어막았다. 하지만 목소리는 더 선명해졌다.
‘괜찮아.’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듯하면서도 그게 누구인지 생각해보려고 하면 문득 막연해지는 느낌을 주는 음성이었다. 뭔가 중요한 사실을 잊은 것 같다는 느낌에 눈을 감자, 돌연히 거친 모래바람 같은 것이 뺨을 스치고 지나가는 기이한 기분마저 들었다.
‘무서워하지 마. 항상 되찾을 방법은 있어.’
“누구…!”
목소리가 유령처럼 주변을 맴맴 도는 것 같아,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봤지만 아무도 없었다. 방에 있는 건 자신뿐이었다. 유령에 홀린 기분으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자, 들고 있던 액자가 바닥으로 떨어지며 틀까지 완전히 박살났다.
‘내가 다 되찾아줄게.’
유령은 허공이 아닌 자신의 안에서 속삭이고 있었다. 그 사실을 알아차리자마자 이내 무거운 침묵이 윤모난의 어깨를 짓눌렀다. 작은형이 하루 종일 귓가에서 속삭이던 나날도 있었으니 환청이 들린다고 해서 새삼 놀랄 일은 아니었다.
다만 형의 목소리가 멈춘 지 몇 년이 되었는데 이런 증상이 다시 도진다는 건 정신이 또 무너진다는 징후였다. …그렇다면 자신에게도 시간이 그리 많이는 남지 않았다는 뜻일 테다.
윤모난은 주머니에 든 화투패와 청연의 사진의 무게를 느끼며 완수하지 못한 일들에 대해 생각했다. 다시 파멸이 추격에 나섰고, 이번에도 쫓기는 건 자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