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도박판
태오를 주연동 집에 데려다주고 나오는 길에, 무구원은 윤모난의 행적에 관한 보고를 받았다. 김 부장에게 그가 남경 윤씨 저택에 들렀다는 얘기를 듣자마자 무구원은 결국 윤모난이 자신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으리란 것을 확신했다.
“지부장님께서 남경을 떠나신 사이에 이리가 문제라도 일으키면 대처하기 어려울 텐데. 지금이라도 체포해서 구금하시죠.”
“이리와 관련된 결정은 내가 해. 두 번 말하게 하지 마라.”
대문 앞을 나서며 무구원은 빳빳하게 다림질이 되어 있는 멀끔한 제복 재킷 안쪽에서 작은 크기의 함을 꺼냈다. 그리고 정해진 시간에 약을 복용해야 하는 사람처럼 안에 든 붉은색 알약 두 알을 꺼내 삼키며 이동할 준비를 마쳤다.
“가실 시간입니다.”
“그래.”
지부장에게 소속된 공간계 에스퍼의 인도로 공간을 넘어가자 눈앞의 풍경과 공기가 확연히 달라졌다. 순식간에 수도에 위치한 북해 가문 별저에 도착한 것이다. 장식이 많지 않고 소박한 북쪽 특유의 건축 양식으로 지어진 청회색 이층 기와집은 수도의 회색 건물들 사이에서 위압적인 존재감을 드러내는 곳이었다.
“지부장님, 오셨습니까.”
안으로 들어서기 전에는 무구원에게도 예외 없이 몸수색이 이뤄졌다. 지난번에 요청한 접견 신청에 대한 답으로 북해의 가주는 평의회 정기 회의 전에 미리 방문하라고 지시했다. 철저한 몸수색을 마친 뒤에 별저 안으로 입장한 무구원은 질서 정연한 걸음으로 복도를 지나 서재로 향했다.
마침내 문이 열리자 늘 그렇듯이 뼈가 시릴 만큼 차가운 공기가 방문자를 먼저 반겼다. 가주가 된 이후로 무정원은 자신의 냉각 능력으로 방 안의 온도를 늘 냉동실처럼 차갑게 만들어두곤 했다. 극한의 낮은 온도에서는 에스퍼들이 이능력을 잘 발휘할 수 없다는 점을 이용한 일종의 경계인 셈이었다.
방 중앙으로 들어가자 차가운 공기가 훅 무구원의 폐부 깊숙이 파고들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절로 입김이 서리고 견디기 힘든 온도에서도 평온한 사람은 무정원뿐이었다. 무구원은 그의 앞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무구원, 후회할 짓은 하지 마라. 정말 돌이킬 수 없을 테니까…. …네가 이럴 만한 대단한 이유가 있어야 할 거야.
―대단한 이유요? …그걸 정말 몰라서 묻습니까? 당신이 날 타락시켜놓고 내 인생도 당신 것처럼 망쳤잖아.
―…너, 으으윽!
방 안에 생생하게 울리는 자신과 윤모난의 목소리에도 무구원은 개의치 않으며 고개를 숙여 예의를 갖췄다. 점점 노골적으로 변해가는 녹음 소리를 감상하던 무정원이 시선을 무구원에게로 돌렸다. 이내 검은 장갑을 낀 손이 일시 정지 버튼을 눌렀다.
“무구원.”
낮고 지긋한 목소리. 목덜미를 서늘하게 감아오는 듯한 그 음성에 무구원은 자세를 고정한 채 다음 말을 기다렸다.
“태오는 잘 있니.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느라 아이가 조금 힘들겠구나.”
무정원은 평연한 태도로 불쑥 태오의 안부부터 물었다. 이에 무구원 역시 무표정으로 대답했다.
“다행히 잘 적응하고 있습니다.”
“우리 연오가 사촌 동생을 퍽 그리워해. 이번 여름에는 태오가 북해를 방문하면 좋겠구나.”
“안 그래도 태오가 바라기도 해서 그럴까 생각하던 참입니다.”
검은 장갑을 낀 무정원의 손에는 늘 그렇듯이 담배가 들려 있었다. 이윽고 툭툭 무심하게 재떨이에 담뱃재를 털어내던 손끝이 책상 앞 소파 쪽을 가리켰다. 무구원은 늘 자신의 자리로 마련되어 있는 가장자리로 향했다.
“아니.”
그런데 차가운 목소리가 막았다.
“내 왼쪽 가까이에 와서 앉아라.”
“네.”
무구원은 자리를 옮겨 무정원의 곁에 앉았다. 동시에 재떨이에 다 태우지 않은 하얀 담뱃대가 휙 버려졌다.
“접견 신청을 했다고.”
서늘한 실내 온도만큼 차가운 잿빛 시선이 무구원의 옆얼굴에 날아와 꽂혔다. 어차피 접견을 신청한 이유를 도청으로 이미 알고 있을 텐데 굳이 물을 필요도 없는 질문이었다. 이에 무구원은 내내 아래를 향하고 있던 고개를 치켜세웠다.
“윤모난이 돌아왔습니다.”
“7년 만이던가. 어떻지? 목소리만 들어서는 잘 알 수가 없어서.”
짐짓 점잖게 웃는 무정원의 모습에 무구원은 잠시 말을 아끼며 생각했다. 그의 반응을 보건대 역시 욕실은 도청 범위에 포함되지 않은 모양이었다. 자신이 모르는 새 혹여 욕실까지 도청기가 매설되어 있을까 염려했는데 불행 중 다행이었다.
사무실을 비롯한 집, 차 안까지 감시당하지 않는 곳은 없다. 따라서 이곳에 오기 전 무구원은 윤모난과 단둘이 있다고 할지라도, 욕실이 아닌 곳에서는 절대 진심을 말하지 않았다.
“예상한 반응 그대로입니다.”
“7년 내내 발톱을 갈았을 테니 이젠 피를 보려 하겠군. 그럴 만도 하지. 그래서 네가 모난이에게 이리라는 별명을 붙인 건가.”
“…그저 말장난일 뿐입니다.”
“그래. 그 이리가 언제쯤 이쪽으로 발톱을 들이밀 거라고 생각하지?”
“이미 시작했습니다. 남경극장이 첫 습격이구요.”
“아, 이를 어쩐다.”
심각한 얘기를 하면서도 무정원은 입가에 여유로운 미소를 띨 뿐이었다.
“이제 우리 모두의 목숨이 위험해질 테니 어머니 신께 더 열심히 기도라도 드려야 할까?”
“…….”
농담처럼 가벼운 말에도 무구원의 검은 눈동자에는 작은 일렁임조차 없었다. 그런 무구원의 반응을 살피는 듯 한참을 침음하던 북해의 가주, 무정원이 이내 검은 장갑을 낀 손을 들어 까닥였다. 그러자 문 앞에 대기하고 있던 몰이꾼 중 한 명이 발소리도 내지 않고 다가왔다.
“오늘 기도는 했니.”
자신에게 떨어진 질문에 무구원은 ‘아니요’라고 대답했다.
“불성실하구나.”
그 말에 무구원은 사람 손을 탄 짐승처럼 의자에서 내려와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그러자 곧이어 무정원이 불러온 에스퍼가 등에 손을 대었다. 무정원이 차가운 공기를 모두 거둬들이며 시작하라는 말을 뱉었다.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정신계 에스퍼는 무구원의 심중을 파고들었다. 정신계 이능력은 순간적으로 한 사람의 인지 능력을 매우 저하시켜 거짓말을 할 수 없게 만든다.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에게 그 의지의 표현 수단 중 하나인 거짓말을 허용하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이건 한 인간을 철저하게 하나의 짐승으로 격하시키는 고문이라고 할 수 있었다. 동물적 본능을 증폭시키고 사유를 억압하는 이러한 행위는 그 대상을 철저하게 비인간으로 볼 때만 가능한 법이다. 그리고 7년 전부터 무정원은 무구원의 접견마다 이 방법을 사용해왔다.
“모난이가 남경극장에서 테러를 저지른 직후에 직접 널 찾아왔다고.”
“네. 그렇습니다.”
“그전까지는 아무런 낌새도 없었나.”
“…전혀 없었습니다. 그의 생사 여부도 확신하지 못했습니다.”
“모난이가 널 찾아와서 뭘 요구했지?”
“복종입니다.”
“복종?”
“우리 가문을 멸문시키고 가주님을 죽이기 위해서는 내부 공모자가 필요하니 자신에게 복종하라고 하더군요.”
“나도 길들이지 못할 만큼 까다로운 너에게 복종이라니. 우습군.”
말과는 달리 무정원의 입가에는 어느새 웃음기가 모두 증발해 있었다. 그는 정신계 에스퍼에게서 무언의 신호를 얻은 다음에서야 그만할 것을 명했다. 무구원이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이 무심하게 일어나 자리에 앉자, 무정원이 물었다.
“모난이는 지금 어디 있지?”
“아직 남경입니다. 아마도 다음 행선지를 곧 결정하겠죠.”
“음.”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무정원은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는 듯 소파 등받이에 등을 기대더니, 광택이 흐르는 양단으로 지은 스리피스 정장 단추를 풀었다. 그는 기분이 썩 나빠 보이지는 않았다. 오히려 아까 전보다 약간의 기대감이 서린 얼굴이었다.
“마침 모난이가 꽃들을 치워버렸으니 다행이야. 한참 성가시게 굴었는데 말이지. 다음에는 그 녀석이 날 위해 무얼 해줄지 기대가 되는데.”
서른여덟. 불혹을 앞둔 나이만큼 노련해진 무정원은 모든 상황을 자신의 입맛에 맞는 온도로 조절할 수 있는 연륜을 갖춰가는 중이었다. 제 목을 노리는 사람이 있다는데도 그는 동요하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7년 전 일에 대해 모난이가 어디까지 알고 있지?”
“상황 판단이 빠른 사람이니 어느 정도까지는 이미 추론해냈을 겁니다. 우리 가문에 대한 적개심만 보더라도요.”
7년 전, 죄책감과 상실감에 시달리던 무구원에게 무정원은 직접 모든 것을 알려주었다. 윤모난과의 첫 만남과 작약과의 악연 그리고 무간에서의 신입 대원 학살 사건까지. 모든 내막을 알게 된 무구원은 더 이상 정의를 자신의 입에 올리지 않았다. 그는 부당한 죽음을 수없이 외면했고, 생명의 가치를 저울질하지 않겠다던 그의 신념은 점차 빛을 잃어갔다. 그것 또한 7년 전 선택의 대가였다.
“마침 잘되었어. 그때처럼 모난이가 날뛰어준다면 우리로서는 이득인 셈이야.”
무정원은 윤모난에 관해서 이미 생각을 마친 것처럼 보였다.
“이참에 분풀이라도 할 겸 복수라도 실컷 하게 만드는 것도 나쁘지 않아. 그 과정에서 몇 명 정도 더 휘말려 죽는다면 금상첨화고. 네 생각은 어떠냐.”
“…제 생각보다는 가주님의 의중이 더 중요하겠지요.”
“이 건에 관해서는 무구원 네 의견을 수용해보려 한다. 여태 제법 고분고분하게 굴었으니 나도 매사 엄하게만 널 대할 수는 없지. 생각한 게 있으면 말해봐.”
무구원은 길지도 짧지도 않은 시간 동안 침묵한 뒤에 이내 입을 열었다.
“이 기회에 대업에 방해가 되는 세력들을 정리하시면 어떻습니까.”
“그래?”
“7년 전 일부러 한백호를 지정하여 윤모난을 직접 고문하게 하셨던 것으로 압니다. 향후 고섬 한씨가 방해물이 될 것을 염두에 두셨기 때문 아닙니까.”
거침없는 말에 무정원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서렸다가 이내 사라졌다. 감히 자신의 의중을 깊이 파악한 무구원이 기껍지만은 않은 기색이었다.
“곧 평의회에서 까다로운 법안 하나가 통과될 예정인 걸로 압니다. 그 전에 이리를 이용해서 한백호부터 치시죠. 고섬의 세력이 예상보다 커졌으니 더욱 경계하셔야 합니다.”
“한백호가 있는 서곡에서 흙탕물을 일으켜라? 그다음에는?”
“가주님의 발밑에 이리를 엎드리게 해야겠지요.”
순간 무구원은 북해의 가주에게 시선을 대등히 마주치고서 약간 힘주어 말했다.
“제가 7년 전 가주님께서 놓치신 것을 바치겠습니다.”
“어떻게?”
“…이리의 약점은 제가 가장 잘 알고 있습니다. 결국 사람이겠죠.”
“그러려면 이번에는 쥐어 터뜨리지 않게 조심해야겠지.”
의미심장한 말에 무구원의 손가락 끝이 미세하게 곱아들었다. 그런 그의 반응을 천천히 살피던 무정원이 또 훌쩍 대화 주제를 바꿨다. 그 타이밍이 매우 묘했다.
“아까 말한 대로 태오는 여름에 북해로 보내라. 연오는 형제가 없으니 태오가 친동생이나 마찬가지잖니.”
“네.”
“애들은 아무 걱정 없이 자랐으면 좋으련만. 시대에 먹구름이 끼었으니 쉽지 않구나.”
“…….”
“방학이 시작되면 방문하게 해라. 태오 혼자는 위험할 테니 네 아내도 같이.”
“알겠습니다.”
“그럼 대화는 이 정도로 할까.”
무구원은 자리에서 일어나 상체를 굽히고 고개를 숙였다. 청회색의 카펫이 깔린 서재를 벗어나자, 복도에 몰이꾼들이 쭉 서 있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모두 무구원을 확인하고서는 일제히 묵례했다. 가문에서 그의 위치가 7년 전과 확연히 달라졌다는 증거였다. 곧이어 누군가 다가와 정중히 물었다.
“지부장님. 가주님께서 며칠간 별저에 더 머무시라고 권하셨습니다.”
무구원은 그것이 권유가 아니라 명령임을 알기에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발길을 돌리려는데 긴 복도 끝에서 누군가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 곧이어 도통 큰 소리가 나는 법이 없는 이 삭막한 곳에 어울리지 않는 탁한 목소리가 크게 울렸다.
“어이, 내 사랑하는 처남!”
“…….”
“엥. 무씨 너 얼굴이 왜 그러냐. 나 안 반가워?”
“네가 여긴 무슨 일이지?”
무구원의 대답에 재미없다는 듯 상대가 대놓고 혀를 찼다. 여전한 까까머리에 억실억실한 인상인, 한쪽 눈이 먼 남자는 늘 그렇듯 눈치를 보는 기색도 없이 크게 떠들었다.
“무슨 일이긴. 수도에 일 있어서 왔다가 무씨 너 온다는 소식에 만나러 온 거지. 어때, 남경 지부장은 할 만하냐?”
“경해국.”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무구원의 어깨에 경해국이 손을 올리며 시선을 맞췄다. 어깨를 잡는 그 우악진 손에는 긴장한 듯 바짝 힘이 들어가 있었으나 말투는 여전히 가볍고 경박스러웠다.
“어이, 무씨 얼른 나가자. 오랜만에 만났는데 술이라도 한잔해.”
경해국과 무구원은 어깨를 나란히 하며 별저에서 나왔다. 대문을 나서자마자 내내 숨을 참고 있었는지 경해국에게서 깊은숨이 흘러나왔다. 둘은 서로 조용히 마주 본 뒤 말 한마디 없이 거리로 향했다.
두 사람은 수도에 오면 안주가 형편없어 망하기 직전인 외딴 술집에 꼭 들르곤 했다. 손님 없이 텅텅 빈 가게 안으로 익숙하게 들어간 경해국이 자리에 앉자마자 소주 한 병과 간단한 마른안주를 시켰다. 이곳에서 먹을 만한 건 그 정도가 다였다.
“무씨, 이제 감시도 없으니 말해봐라. 갑자기 난 여기 왜 부른 거냐.”
경해국이 더는 궁금해서 못 참겠다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들 주변에는 항상 듣는 귀가 많았다. 아니, 정정하자면 무구원의 주변이 특히 그렇다고 해야 할 것이다. 북해의 가주는 무구원의 부하 직원들까지 일일이 임명하는 등, 자신의 수족을 남경 지부 주요 요직에 앉혀놓았다.
윤모난을 따라다니고 있는 치안조 김종훈 부장을 포함하여 무구원의 주변에 있는 대원들 전부가 북해의 가주가 부리는 몰이꾼들이거나 그의 측근들이었다. 그들은 직접 지부장인 무구원의 집에 도청기를 매설했고 시시때때로 그의 동태를 윗선에 보고해 올렸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무구원이 자신에게 수도에 와달라며 연락한 것도 큰 위험을 무릅쓴 일임을 경해국 또한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그 또한 별저 복도에서 팔자에도 없는 생쇼를 하며 무구원의 장단에 맞춰준 것이었다.
“…그 사람이 돌아왔어.”
순간 경해국의 손이 들고 있던 잔을 놓쳤다. 소주잔이 투명한 액체를 테이블 위에 흩뿌리며 데구루루 구르다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경해국은 유리가 깨지는 소리가 난 뒤에야 퍼뜩 정신을 차렸다.
“미친, 그 사람이라니. 설마 윤 팀장? 안 죽었다고?”
“그래.”
“그럼 씨…. 설마 신문에 난 남경극장 사건도 윤 팀장이 한 짓이냐?”
경해국은 무구원에겐 유독 어려운 그 호칭을 7년 만에도 서슴없이 불렀다. 곧이어 술집 주인이 테이블에 새 잔을 가져다줬다. 거기에 소주를 가득 부어 한입에 털어 넣은 경해국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랬군. 그럼 이제 다 어떻게 되는 거냐? 다 좆 된 거 아니야? 윤 팀장이 뭐래?”
“복수하겠다고 하더군. 정확히는 우리 가문을 멸문하겠다고.”
경해국의 표정이 바로 굳었다. 북해 무씨를 멸문하겠다니. 거기에는 경해국의 아내인 무자연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윽고 두 번째 소주잔도 경해국의 손을 떠나 벽에 날아가 꽂혔다.
팡, 하고 터지는 유리잔을 보며 경해국은 자신의 짧은 머리를 벅벅 긁었다. 아주 예상하지 못했던 일은 아니라고 하지만, 당황과 혼란이 혼재하는 표정이었다. 그 모습을 보며 무구원은 시간에 쫓기는 사람처럼 본론부터 꺼내놓았다. 대화가 길어지면 자칫하다간 꼬리가 밟힐 위험이 컸다.
“경해국, 한 가지 부탁이 있다. 태오와 태오 엄마, 그리고 자연이까지 안전한 곳으로 데려가줬으면 해.”
“뭐 이제 피바람이 불 테니 도망이라도 치라고?”
“그래. 어디로 갈지는 알아서 정해.”
“…동산에서 보호해줄 거야. 당장 여보한테 전화해서 떠나라고 할게. 그런데 네 가족은? 남경을 무사히 빠져나올 수는 있는 거냐?”
“이미 오기 전에 손을 써뒀어. 내일 아침에 은밀히 움직이기로 했으니 곧장 동산으로 가라 전달하지. 태오의 엄마는 가이드니까 어떻게든 도망은 칠 수 있을 거다. 경해국, 네가 동산으로 가서….”
“아니, 그 둘도 동산 쪽에 부탁하면 돼. 걱정할 거 없어. 대신에 내가 윤 팀장을 만나보지.”
경해국의 말에 무구원이 팍 미간을 좁혔다. 주인에게 세 번째 소주잔을 받으면서 경해국이 짜증스러운 얼굴로 투덜거렸다.
“무씨, 넌 목줄에 묶인 신세니까. 나라도 가서 윤 팀장 지켜보겠다고, 이 새끼야.”
“…너도 자연이와 동산으로 가.”
“맘에도 없는 소리 하지 마라. 날 여기로 부른 건 그걸 바라서잖아. 동산에 가긴 뭘 가? 이 음흉한 로봇 새끼.”
“…….”
“이래서 사람은 친구를 잘 사귀어야 해. 내가 신입 때 네놈 면상 첨 봤을 때부터 딱 꼴통이라는 느낌이 왔거등. 저 윤 팀장도 마찬가지고.”
“경해국, 이번 선택은 돌이킬 수 없을 거다. 일이 실패하면 너는 물론이고 가주께서 자연이에게까지 책임을 물을 거야.”
“너 내 목 위에 달린 이 머리통이 그저 뇌 보관 용기인 줄 아냐? 나도 알어, 이 자식아!”
“만에 하나 성공한다고 하더라도 어쩌면 자연이와 함께 평생 도망치며 살아야 할 수도 있어.”
“나랑 여보는 서로만 있으면 돼. 알간?”
“…서로만 있으면 된다고.”
경해국은 사랑을 얘기하는 것도 팀장님 소리만큼 당당하고 거침없었다. 무구원은 쓸쓸한 표정으로 잠깐 말없이 손끝에서 천천히 소주잔을 굴렸다. 그런 상대의 변화를 포착할 만큼 섬세하지 못한 남자, 경해국이 대뜸 눈치도 없이 물었다.
“그나저나 윤 팀장은 어떻게 무간에서 살아남은 거야? 동네방네를 샅샅이 뒤져도 흔적 하나 없더니.”
경해국은 7년 전 무간에서 윤모난을 찾던 때를 떠올리며 괜히 몸서리를 쳤다. 그때 미친놈처럼 헤매는 무구원을 말리려다가 맞아 부러진 다리는 아직도 비만 오면 시큰거린다. 무구원이 그 지랄을 떤 것이 장장 1년이었다.
윤모난이 사라진 이후, 무구원은 중상을 입은 몸으로 북해에 끌려가 채찍을 맞고 말 그대로 죽을 뻔했다. 여동생인 무자연이 무정원에게 무릎을 꿇고 내내 빌어 겨우 목숨을 살려놨더니, 그는 어느 정도 회복하자마자 안범이 보호하고 있던 청연의 시신을 묻어줘야 한다며 훌쩍 남경으로 향했다. 남은 조카 둘의 시신은 안범과 경해국이 직접 운구했다.
그리고 돌아와서는 미친놈처럼 무간에 가서 윤모난을 찾는 데에만 매진했던 무구원이다. 그러다가 징계까지 받아 잠깐 유치장 신세를 진 걸 생각하면 저 망할 새끼야말로 꼴통 중의 상 꼴통이 아닐 리가 없다고, 경해국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 난리를 치기에 경해국도 윤모난의 뼛조각이라도 찾을 요량으로 나름 도와주기까지 했는데. 윤모난 실종 딱 1년이 되던 날, 무구원이 갑자기 모든 것을 대뜸 그만두더니 그 뒤로는 절대 무간에 가지 않았다. 전투조도 그만두고 치안조로 소속을 바꾼 것도 그때였다.
“윤 팀장은 7년 동안 어디서 뭐 하고 지냈대? 무씨, 너 그 인간이랑 대화는 좀 해봤어?”
“아니.”
“엑? 넌 궁금하지도 않냐?”
“전혀.”
무구원이 손안에서 굴리기만 하던 소주잔을 들이켜려 하자 경해국이 손으로 제지했다.
“먹지 마, 술도 약한 새끼가. 너 업으려면 얼마나 힘든 줄 알아?”
“경해국.”
“왜 불러어.”
“돌아가는 길에는 따로 사람 부르지 말고 네가 직접 날 부축해 걸어가라. 이왕이면 사람이 없고 어두운 곳으로.”
무구원은 알아듣기 힘든 말을 잘도 하고선 단숨에 소주를 들이켰다. 그렇게 소주를 한 잔 더 따라 들이켜자,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몸이 천천히 늘어지기 시작했다. 연거푸 석 잔째를 마시고 나니 고개가 견디지 못하고 아래로 떨어졌다. 경해국이 혀를 끌끌 차는 와중에 무구원이 혼잣말인지 뭔지 구분이 안 될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 사람이 태오에 대해서 알면 어떻게 나올까.”
불쑥 던져진 말에 경해국은 눈알을 한 바퀴 굴리다가 소주를 꿀꺽 넘기곤 한숨처럼 답했다.
“개판 사판 아사리판 되는 거지.”
“…….”
“숨기는 게 최선이긴 한데, 돌아온 이상 쉽진 않겠지. 원래 같은 피끼리는 끌리는 법이거든. 얼굴 보자마자 알걸. 너는 죽어라 네 아들이라 우기지만, 태오 고것은 어쩔 수 없이 윤 팀장을 너무 빼닮았어.”
“글쎄. 의외로 눈에 보이는 게 깨달음으로 이어지는 경우는 많지 않아.”
“무씨, 넌 머리는 팽팽 잘 돌아가고 어려운 말은 들입다 해대지만 실상 바보 아니냐? 전쟁 통에 데려다 놔도 둘이 부자 사이인 걸 알겠더만. 애가 아버지 얼굴을 콱 빼다가 똑같이 박아놨는데 어떻게 몰라?”
미련한 놈. 경해국은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왜 남의 씨를 데려다 키워? 뭐 하러 네가 그 일을 떠맡느냐 말이야. 대체 너는 왜 윤 팀장 일이라면 발 벗고 나서지 못해서 안달이냐? 이상한 자식.”
“…….”
“뭐 윤 팀장이 예전에 너 화장실에서 휴지 없을 때 휴지라도 건네줬냐? 무슨 커다란 은혜를 입었길래, 펴엉생 도 닦는 수도승처럼 독신으로 살면서 윤 팀장 아들이랑 그 여자까지 보호하고 있는 건데?”
경해국은 콧잔등을 씰룩거리며, 로봇처럼 가만히만 있는 무구원을 쿡쿡 찔렀다.
“뭔데. 뭐냐고, 무씨. 윤 팀장 아들 왜 데려다 키운 건데?”
“내가 …하거든.”
“뭐?”
“…….”
하지만 말은 더 이어지지 못하고 뭉그러졌다. 술이 약한 무구원은 이미 눈앞이 흐릿한지 술집 벽에 무거운 몸을 기대며 눈을 감았다. 더 이상의 대화는 없다는 뜻이었다. 마지막 잔으로 목을 축인 경해국이 쌍욕을 지껄이며 자리에서 일어나 무구원을 일으켰다.
“일어나, 이 새끼야.”
대충 술값을 던져둔 경해국은 힘이 풀린 채 흐물거리는 커다란 덩치를 겨우 술집에서 질질 끌어냈다. 술집 밖 거리 곳곳에 반복적인 사이렌 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곧 통금 시간이라 오가는 이는 아무도 없고 도로에는 차조차 없었다. 두 사람은 텅 빈 밤거리를 비틀거리며 걷기 시작했다.
“아우, 시팔. 무거워. 뭐 처먹고 이렇게 키만 큰 거야! 아이구, 여기 지름길로 갈까나―.”
경해국은 무구원을 우악스럽게 끌고 골목 안쪽으로 들어갔다. 늦은 시각 문을 닫은 세탁소와 상점 사이에 있는 어두운 골목은 건물의 가스보일러로 인해 증기가 빠져나가는 소리나, 살찐 쥐가 돌아다니는 소리 말고는 고요했다. 그때 제 걸음을 걷지 못하고 갈지자를 그리던 발이 땅을 잘못 디뎠고, 덩어리진 그림자가 벽 쪽으로 휘청하며 기울었다.
“야, 씨! 똑바로 못 걸어?”
경해국의 투덜거림 뒤로 옷깃을 젖히는 소리가 이어졌다. 경해국은 몸을 가누지 못하고 벽에 기대어 있는 무구원을 바라보며 담배를 꺼내려는지 자신의 점퍼 안쪽을 더듬었다.
그러나 옷 안을 더듬고 나온 손에는 아무것도 들려 있지 않았다. 대신에 뼈가 굵고 거친 경해국의 손마디에서 순식간에 불길이 흘러나왔다. 그 시각, 조용히 골목에 진입하던 낯선 이의 발걸음도 우뚝 멈췄다.
“우리 지부장이 적이 너무 많다. 뭐, 너도 무씨 죽이러 온 어디의 누구냐?”
몰래 두 사람 뒤를 밟던 암살자는 순식간에 땅을 걷어차고 이쪽을 향해 달려들었다. 동시에 그의 등 뒤로 건물 외벽에 설치된 철관들이 뾰족한 창처럼 무구원을 향해 날아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바닥부터 치솟은 경해국의 불길에 닿자 모두 쇳물이 되어 화르륵 녹아 사라졌다.
이윽고 소음기가 부착된 권총에서 폭죽이 터졌다. 쯧, 하고 혀를 찬 경해국이 불로 방패를 삼아 총알을 중간에서 막아내자 작은 폭음이 거리를 뒤흔들었다. 불을 꺼트리지 않으면 승산이 없는 것을 깨달은 암살자가 염력을 써서 건물 한쪽을 커다란 발톱으로 긁어내듯이 부서트렸다.
터진 수도관에서 순식간에 물이 촤르르 흩뿌려졌다. 세 사람 사이를 벽처럼 가로막고 있던 화염의 기세가 점차 수그러들었다. 이내 충분히 뛰어들 수 있을 정도로 불의 크기가 줄어들자, 암살자는 다시 한번 둘을 향해 재빠르게 접근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상대가 더 빨랐다. 타깃이던 남자가 내내 감겨 있던 눈을 뜨고 몸을 움직인 것이다. 방심한 암살자는 목을 잡힌 채로 뒤로 밀쳐졌다. 모든 행동이 빠르고 거침없었다. 아주 찰나의 순간에 날쌔게 유리한 고지를 선점한 무구원은 암살자의 배에다 대고 거침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일어난 일들에, 암살자는 총탄에 내장이 엉망이 될 때까지 여러 번 몸을 뚫리고 말았다. 무구원의 발치에 선혈이 고이기 시작하더니 곧 웅덩이가 되었다.
“너한테 이런 놈들이 얼마나 찾아오냐?”
상황이 종료된 뒤 경해국이 얼굴을 찌푸리며 물었다. 무구원은 별일 아니라는 듯이 이미 죽은 남자의 머리에 확인 사살로 두 발 더 갈기며 답했다.
“1년에 서너 번. 올해는 유독 잦았고.”
무구원은 집중적으로 암살자의 얼굴을 총탄으로 훼손하고 있었다. 두개골이 으깨지고 방금 전까지도 숨이 붙어 있었던 사람이 죽사발이 될 때까지 무구원은 눈 하나 깜짝 않고 마무리를 지었다.
“취한 척 유인해서 오늘은 목숨 한 번 더 구했다지만 앞으로 어쩔 셈이야?”
무구원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코트 안에서 손수건을 꺼내 총의 그립 부분을 닦은 다음 묵사발이 된 시체 옆에 툭 버릴 뿐이었다. 이에 경해국은 아무리 물어도 당장 무구원이 모든 계획을 공유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아마 어디서도 안심할 수 없기 때문일 거다. 이윽고 무구원이 다짜고짜 입을 열었다.
“서곡으로 가라.”
“서곡은 왜?”
“하루 뒤에 수도 중앙역에서 서곡센터로 가는 기차를 타. 중앙역 캐비닛에 편지 하나를 넣어놓을 거다. 앞으로 할 일은 거기에 적어놓지.”
이유는 설명해주지도 않고 명령조로 말하는 무구원을 보며 이를 악다물던 경해국이 이내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이 아, 하고 작게 탄성을 뱉었다.
“서곡이면 안범도 부르지? 윤 팀장이 안범을 특히 편애하니까 그놈이 있으면 여러모로 일이 수월할 텐데.”
“그건 네가 알아서 해.”
용건이 모두 끝난 듯 무구원은 인사도 없이 골목을 빠져나가는 길로 발길을 돌렸다.
“무씨, 넌 인사도 안 하고 가냐?
몸을 돌려 자신을 보는 무표정한 얼굴에 경해국은 입을 다물었다. 경해국도 무구원이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를 대충 이해는 하고 있었다. 주변에 믿을 사람 없이 외딴섬처럼 고립된 그에게는 안범이나 저 자신이 그나마 유일하게 믿을 만한 사람일 테니까.
지난 7년간 그나마 평범한 삶을 살아온 안범이나 자신과는 달리, 무구원은 전혀 그렇지 못했다. 놀라운 건 한 발을 내딛는 것도 위태로운 불안한 삶을 사서 선택한 게 저놈이라는 것이다. 경해국은 늘 그 이유가 궁금했으나 한 번도 속 시원한 답을 받은 적 없었다.
“끼니는 거르지 말고 쫓아다녀. 이왕이면 그 사람과 같이 먹으면 좋고.”
어느새 골목 끝에 다다른 무구원에게서 인사 대신 난데없는 끼니 타령이 튀어나온다. 방금 전까지 자신이 궁금해하던 문제에 나름의 답을 얻은 줄도 모르고 경해국은 와락 얼굴을 구기며 욕을 뱉었다.
“진짜 미친놈인가. 저거?”
씩씩대던 경해국은 곧 이어지는 상황에 당황한 채 입을 떡 벌릴 수밖에 없었다. 욕을 들은 무구원의 입매가 잠깐이지만 팽팽해지더니 꼬리가 부드럽게 말려 올라가는 게 아닌가. 나이에 맞지 않는 순하고 천진한 미소가 그의 입가에 조용히 내려앉았다가 나비처럼 훌쩍 떠나는 것과 동시에 무구원도 골목을 돌아나갔다.
혼자 남은 경해국은 마치 귀신이라도 만난 듯이 홱 얼굴을 찌푸렸다. 난생처음 보는 웃는 얼굴이었다. 더욱이 이 위기 상황에 저런 웃음을 짓다니 무언가 맞지 않는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 * *
경해국을 보내고 방으로 돌아온 무구원은 앞으로 경해국에게 줄 편지부터 썼다. 방 안은 물론이고 전화선까지 감시당하는 통에, 읽자마자 찢을 수 있고 여차하면 먹어서 증거를 없앨 방법은 편지뿐이었다.
늘 그림자같이 쫓아다니며 감시하는 김 부장을 포함한 부하 직원들은 모두 이리를 감시하러 갔으니, 내일 아침 중앙역에 가서 이 편지를 넣어둘 틈을 겨우 확보해놓은 셈이었다. 빠르게 편지를 마무리 지은 무구원은 재킷 안쪽에 다 쓴 편지를 넣어두고 약이 든 바늘 함을 꺼냈다.
7년간의 경험으로 볼 때, 이 붉은 약은 정기적으로 복용해야 훌륭한 부작용을 만들어낸다. 이 약의 홍보 문구가 뭐였더라. 무구원은 문득 기억을 되짚었다. 순응, 체념, 포기와 같은 허름한 단어들이 뇌리를 스쳤다. 과연 긴장을 극도로 이완시키고 잠깐의 고통을 잊게 해주는 약은 사람을 그런 허름함에 기대게 만드는 것이었다.
누군가는 이 약을 한없이 무기력해지기 위해 복용하겠지만, 무구원은 그 반대였다. 그는 어떤 노력을 위해 기꺼이 이 약을 먹고 있었다. 붉은 석류알 같은 알약들이 작은 바늘 함을 이리저리 굴러다녔다.
“이젠 저도 이해할 것 같네요.”
왜 그토록 매번 당신이 약 먹기 싫다고 했었는지.
무구원은 알약 두 알을 골라 삼킨 다음 뚜껑을 닫았다. 창밖을 확인하니 1층 서재 쪽의 불이 여전히 켜져 있었다. 무정원은 늘 새벽까지 업무를 했다. 약의 효과로 긴장이 풀어진 탓에 무구원은 창가에 기대어 한참을 멍하니 있었다.
방 안의 모든 사물이 한밤중의 고요 속에서 아우성을 친다. 가끔 이 약은 들리지 않는 소리까지 불러왔다. 누군가 귀에 대고 악다구니를 지르는 듯 서늘한 기분에 무구원은 어금니 안쪽을 꾹 깨물며 정신을 집중하려 노력했다.
따르르르릉!
때맞춰 울리는 전화기 소리가 고요 속 아우성을 가르고 정신을 깨웠다. 무구원은 내도록 전화가 울리게 놔두다가 조금 늦게 받았다. 전화를 건 이가 누구인지는 이미 예상 가는 바였다.
―지부장님, 접니다.
“그래.”
남경에서 윤모난을 지켜보고 있는 김종훈 부장이었다. 무구원은 무심하게 대답하면서 연결된 방향을 따라 전화기 선을 시선으로 쭉 훑었다. 무정원의 서재로 이어져 있을 선이었다.
―…다름이 아니라 이리가 지부장님과 통화를 원합니다.
“감시를 하랬더니, 대체 왜 심부름 따위를 하고 있는 거지?
―죄송합니다.
“바꿔.”
곧이어 부스럭대며 김 부장이 전화기를 넘기는 소리가 이어지고, 익숙한 음성이 수화기에서 흘러나왔다. 그날 이후로 처음 듣는 목소리였다. 약 기운에도 불구하고 무구원은 약간 긴장하고 말았다.
자신이 한 행동을 생각하면 윤모난이 어떤 욕을 해도 놀랍지 않았다. 마지막에는 죽으라는 말까지 들은 처지에 무슨 말로 그를 구슬려 서곡으로 가게 해야 할까.
―무구원.
“네.”
―궁금한 게 있는데, 도대체 너네는 왜 나를 이리라고 부르는 거냐?
무구원은 순간 멍청한 소리를 낼 뻔한 입을 틀어막았다. 그렇게 헤어진 이후에 하는 첫 대화치고는 그가 꺼낸 것이 너무도 여상한 주제였기 때문이다. 조금 혼란스러운 가운데 윤모난이 갑자기 아우우우, 하며 짐승 소리를 흉내 냈다.
―어때? 좀 이리 같은가?
입을 가로막은 손 틈새로 충동적인 웃음이 샜다. 갑자기 터진 웃음소리가 수화기에 흘러 들어가지는 않았는지 조금 초조해진 무구원은 1층 서재 쪽을 힐끔거렸다.
―아, 아니면 그건가. 어이, 김종훈 부장님. 그거 알아? 당신 상관 말이야. 사실 고전문학 같은 거 보면서 꼴리는 변태거든. …응? 몰랐다고?
“그만하시죠.”
―헤밍웨이 맞지?
“헤르만 헤세입니다.”
―그게 그거잖아.
“전혀 다릅니다.”
겨우 웃음을 삼킨 무구원은 손끝으로 전화선을 만지작거리며 부러 딱딱하게 응답했다. 그러건 말건 상대방은 의미 없는 농담을 이어나갔다.
―그래서 이 꼬랑지들 언제까지 붙여둘 셈이야? 슬슬 거슬리는데. 죽이는 건 좀 그렇고 심심하면 따먹어도 돼?
그 말에 전화선을 툭툭 건드리던 손가락이 멈췄다.
“농담 그만하시죠.”
―농담 아니야. 이 새끼들 당장 치워.
“어차피 곧 철수할 겁니다. 따라갈 수 없는 곳에 가게 되면요.”
―아하, 내 다음 행선지는 네가 골라줄 셈이구나.
윤모난이 건너편에서 ‘하… 이거 웃기는 새끼네’라며 헛웃음을 뱉었다. 이윽고 잠깐 말을 끊었던 무구원이 물었다.
“서곡에서의 도박판은 어떻습니까?”
―도박판?
“매주 토요일 밤, 사교 클럽에서 벌어지는 도박판 말입니다.”
―한백호 말인가?
윤모난에게서 냉큼 그 이름이 튀어나왔다. 어느새 수화기 너머 목소리의 온도가 한층 낮아져 있었다. 동시에 무구원은 창문 밖을 확인했다. 기역 자로 꺾인 별저의 1층 서재 창가에서 순간 검은 그림자가 일렁였기 때문이다.
―그래. 한백호가 거기서 토요일 밤마다 화투판을 벌였었지. 맞아. 화투가…. 그런 의미였어.
“그게 무슨 말입니까?”
―아니야. 서곡이라…. 그래, 거기로 갈까.
“제가 만들어준 신분증으로 무리 없이 서곡센터로 갈 수 있게 처리를 해뒀습니다. 서곡뿐만 아니라 어디든 다니는 데엔 문제없을 겁니다.”
대답 대신 갑자기 윤모난이 아우우, 하고 또 어설픈 이리 흉내를 냈다. 그러곤 잠시 후 돌연 이름을 불렀다.
―무구원.
이러고 있으니 자신을 찾는 남자의 목소리가 퍽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무구원은 미세한 잡음에 섞인 그 음성을 모래에서 진주를 찾듯이 잠깐 헤아렸다. 약을 먹을 때마다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금방 이런 식으로 현실과 유리된 느낌을 받고는 했다.
―조신하게 잘 있어. 날 감금하고 강간한 건 돌아와서 갚아줄 테니.
그 순간 건물 어딘가에서 미세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바로 창문에서 떨어진 무구원의 얼굴이 화석처럼 굳었다.
―또 보자.
다음을 기약하는 윤모난의 작별 인사를 끝으로 전화는 끊어졌다. 아까 전까지만 해도 대화를 나누던 수화기에선 뚜― 하고 이어지는 반복적이고 단조로운 기계음만이 들렸다. 무구원은 조금 늦게서야 대답했다.
“네. 또 봐요, 팀장님.”
몇 시간 뒤, 서곡으로 가는 기차를 타려는 윤모난을 김종훈 부장이 쫓아왔다. 그 짧은 새에 정이 들어 배웅하고 싶다는 기특한 의도는 당연히 아닐 테고, 윤모난이 정말 서곡으로 가는 기차를 타는지 확인하려는 속셈일 거였다.
딱히 북해의 무말랭이에 불과한 사람에게까지 손을 대고 싶은 마음은 없었기에 윤모난은 아직 오지 않은 기차를 기다리며 승강장 구석에 있는 자판기를 찾았다.
“동전 있어요?”
“네.”
“줘봐.”
반말과 존대를 왔다 갔다 하는 희한한 말버릇을 곱씹을 틈도 없이 김종훈 부장은 윤모난에게 동전 몇 개를 뜯기고 말았다. 자판기에 은색 동전을 밀어 넣고 가장 설탕이 많이 든 커피를 뽑아 든 윤모난은 커피 한 모금을 김종훈에게 물었다.
“당신도 북해 출신이니 남경에 와서 적응하기 힘들었겠네. 여긴 북해보다 덥고 음식도 짠데.”
대뜸 친밀한 척 말을 붙인 윤모난은 승강장 너머 철로에 시선을 둔 채 커피를 홀짝였다.
“고향이라는 건 꽤나 구속력을 가지고 있거든. 아무리 그곳을 싫어한다고 해도 어떤 식으로든 사소한 습관에 영향을 미치지. 나만 해도 추운 기후에서는 절대 못 살아.”
“네. 반도의 사람이라면 모두 자신이 태어난 곳에 애착을 가지고 있으니 고향을 떠난다는 게 쉽지 않죠. 그런 점에서 우리 지부장님은 참으로 애처가십니다.”
김종훈은 천성인지 아니면 연기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가벼운 말투로 제 상관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윤모난과 그는 딱히 막역한 사이도 아니었으니 아마도 연기일 확률이 높았다.
“남경의 지부장에 부임하신 것도 사모님께서 남경 출신이셔서, 라는 말이 돌았거든요.”
“…그래?”
“참 금실 좋은 부부지 않습니까? 뭐 오다가다 사모님을 여러 번 뵌 적 있었는데 정말 아름다운 분이시니 지부장님 마음도 이해가 갑니다.”
그 말에 윤모난에게서는 어떠한 반응도 없었다. 실없는 말이라 생각하고 넘기려나 싶었던 그때, 갑자기 콰직 종이컵 구겨지는 소리와 함께 그의 손에서 커피가 작게 폭발해 사방으로 튀었다. 이어서 김 부장에게 날카로운 음성이 날아왔다.
“그럼 사람 기분 잡치게 만드는 건 북해인 특성인가 봐.”
“…….”
“내가 남의 부부 금실 따위 알아야 하나?”
“아이고, 불쾌해하실 줄은….”
김종훈은 옹졸한 눈매를 휘며 전혀 기죽은 기색도 없이 능글맞게 사과했다.
“커피 다 드시지도 않았는데 저 때문에 버렸네요.”
“…….”
윤모난은 짜증이 가득한 얼굴로 손안에서 구겨진 종이컵 뭉치를 휙 휴지통으로 던졌다. 그러자 김종훈이 포수처럼 위로 손을 휙, 하고 들더니 뭉치를 낚아채고는 이내 다시 내밀었다. 그의 손에는 구겨진 흔적 없이 멀쩡한 모양의 종이컵이 들려 있었다.
“시간 역행 능력자군.”
그의 능력을 간파한 윤모난이 말했다.
“기왕 뽑은 걸 버리기는 아까운 것 같아서요.”
“시간 역행 능력자 상관 아래에 중복되는 능력을 가진 부하라니?”
윤모난의 의문은 당연한 것이었다. 포스트의 능력이 가지각색이긴 하지만 국가 임무에 도움이 되는 이능력들이란 거의 정해져 있는 것이 정설이다. 가이드를 제외하고 중요한 순위를 굳이 따지자면 시공간 에스퍼들이 1등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각 집단에 고루 배치될 뿐만 아니라, 근무처가 겹치는 경우도 거의 없었다. 김종훈이 그 의문을 냉큼 받았다.
“아, 그거요? 혹시 그 광고 아십니까? 우리에겐 시간이 없다!”
김종훈은 갑자기 과장된 어투로 고릿적에 유행하던 광고 문구를 외며 손을 허공에 뻗었다. 눈살을 찌푸리는 윤모난을 발견한 그가 허허 웃었다.
“뭐 요런 이유랄까요…? 그 이상은 공무와 관련한 일이라 말씀은 못 드리고요.”
“…….”
“기차 도착했네요.”
승강장으로 검은 기차가 흰 김을 뿌리며 역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제복을 입은 몇몇 무리들은 벌써 기차에 오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윤모난은 주머니에 든 화투패의 딱딱한 모서리를 손끝으로 매만졌다.
싱거운 남자의 말에 더 귀를 기울이기엔, 해야 할 일이 많았다. 자리에서 일어나 기차에 오르려는데 갑자기 김종훈이 악수를 청했다. 남자의 손목에 매인 검은 줄의 시계가 윤모난의 시야에 들어왔다.
“언제 북해에 가실 일 있으면 말씀해주세요. 가볼 만한 곳을 소개해드리죠.”
“테러범에게 베푸는 친절치고는 과한데.”
윤모난은 악수에 응하지 않고 돌아서서 기차에 올랐다. 김종훈은 어딘가 불쾌감이 드는 작자였다. 무구원의 성격을 생각하면 저런 부하를 믿고 부리지는 않을 테니 무정원 쪽 사람이겠지. 북해인들은 자신의 가주에게만 충성하는 족속이기도 하고.
정작 무구원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궁금해졌다. 윤모난은 물론 무구원이 제 속내를 숨기는 데는 도가 튼 놈이란 걸 알고 있었다. 7살까지 입을 다물고 말을 안 했다는 것도 그런 성정을 예시하는 것이겠지.
무구원이 그가 모르는 뭔가를 이미 알고 있다는 건 분명했다. 초대장을 쫓지 말라는 경고와 그의 검은 눈동자 속에서 비치던 두려움. 아마도 무구원은 초대장을 누가 보냈는지 짐작하고 있을 테다. 『햄릿』 속에서 발견한 화투패와 한백호의 도박판으로 가라는 그의 말은 아귀가 딱 맞아떨어지는 감도 있으니까.
“대체 7년간 너에게 어떤 일이 있었던 거냐…. 무구원.”
초대장과 『햄릿』, 독사, 화투패. 윤모난은 이 모든 것에 일관성이 있다는 의심을 지울 수 없었다. 아무래도 제삼자의 의도가 끼어들었다는 확신이 강하게 들었다. 이 모든 일들이 일종의 덫일 수도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번에도 무구원이 미끼일지는 알 수 없었다.
* * *
안범. 일명 미친 다람쥐라 불리는 국가이능력기관 서곡센터 전투조 5부 1팀의 팀장은 서곡에서의 지극히 평범한 하루를 보내는 중이었다. 8년 차, 어느새 고이다 못해 썩은 물이 되어버린 그는 매사 심드렁한 기분마저 느꼈다.
출동을 나가거나 아니면 훈련, 서류 작업의 연속. 그다지 재미가 없었다. 다른 건 다 좋지만 서류 작업만큼은 해도 해도 끝이 보이질 않았다. 안범은 한숨을 푹 내쉬면서 오늘 내로 마무리 지어야 할 훈련 보고서 작성을 겨우 마쳤다.
“아유유유유― 삭신이야!”
몇 시간을 의자에 앉아 있었던 탓에 허리가 욱신거렸다. 안범은 기지개를 쭈욱 켜며 앉아 있던 바퀴 의자를 뒤로 쭉 밀었다. 배고프다. 벌써 저녁 먹을 시간이 지난 것 같은데. 자신이 끼니까지 거르면서 이렇게 살 줄은 정말로 몰랐다. 늦게라도 야식을 먹으려 몸을 일으키려는 참에, 누군가 헐레벌떡 문을 열고 팀장 개인실로 들어왔다.
“안 팀장님!”
“…뭐야. 종식이가 또 사고 쳤어?”
스물일곱의 안범은 늦자라는 법도 없이 여전히 동안이었다. 모르는 사람이 보기에는 고등학생이라 할 법한 그의 조막만 한 얼굴이 험악하게 구겨졌다.
“안 팀장님…. 그게, 종식이가 전투조 그만두고 싶다고 짐 싸 들고 토낀 모양입니다.”
“이 자식이!”
안범은 사자후를 내지르며 책상 한켠에 꽂아둔 자신의 사시미칼을 쥐었다. 종식이라는 팀원은 신입 때부터 내내 훈련이 힘들고 무간에 가는 게 무섭다며 잉잉 우는 것이 일상이라 5부 1팀 요주의 대상이었다.
미친 다람쥐가 사시미칼을 들자 그를 찾아온 팀원이 사색이 되어 팀장의 짧은 다리에 매달렸다.
“팀장님! 지금 팀원들이 종식이 잡으러 갔습니다. 우선 칼은 내려놓으십쇼!”
“이거 팀 내 기강이 증말 응망이구만, 응망이야! 내 종식이 이놈 오늘 본때를 보여주겠어.”
“악―! 팀장님 제발 고정하세요!”
그 순간, 별안간 울린 전화벨 소리가 종식이의 목숨을 살렸다.
띠리리리리리―
내선 호출이 아닌 외선 전화가 울리는 소리였다. 저녁을 훌쩍 넘긴 이 시간에 외부에서 걸려 오는 전화라니. 예감이 좋지 않았다. 안범은 다리에 엉겨 붙은 제 팀원을 떼어놓고 전화가 끊기기 전에 수화기를 달칵 들었다.
“네, 안범입니다아.”
―어이, 안 팀자앙!
“어라…? 경 선배님?
익숙한 껄렁한 목소리에 안범은 도로 자리에 앉았다.
―잘 있었냐. 서곡은 어때?
“늘 같습니다. 요즘엔 새 팀원이 들어와서 훈련하느라 바쁘구요. 선배님은 잘 계십니까? 북해는 어떻습니까?”
―난 뭐. 늘 똑같아. 여긴 서곡에 비하면 한가한 편이지. 심심해 미쳐 돌겠어.
사모님이랑 보낼 시간 많다고 좋아 죽으시면서. 그렇게 말했다간 경해국이 또 닭털을 날리며 결혼의 장점 300가지를 줄줄 읊을까 겨우 참아 넘긴 안범은 손을 까딱까딱해서 팀원을 밖으로 내보냈다.
예정대로 약혼녀와의 결혼 후 북해 지부에 전근을 간 경해국은 결혼이 답이었는지 성질도 많이 죽이고 큰 사고 없이 사는 모양이었다. 예전에는 휴가 때마다 북해에 놀러 가기도 했었는데, 근래에는 무구원도 남경 지부로 이동하고 안범도 바빠진 탓에 서로 못 본 지가 꽤 됐다.
―그래서 팀장질 해보는 건 어때?
“뭐… 그냥 그렇습니다. 승진했다고 좋아했는데. 일만 엄청 많고 밥 먹을 시간도 없습니다. 월급은 쥐꼬리만큼 올랐는데 말이죠. 그리구 팀원들이 속 썩여서 원형 탈모도 생겼습니다.”
―에잉, 쯧쯧. 팀장 된 지 겨우 몇 달 됐는데 벌써 볼멘소리냐?
“그냥 그렇다구요. 그런데 밤이 다 돼서 왜 갑자기 전화하신 겁니까? 무슨 일 있으세요? 설마 사고 쳐서 잘리셨습니까? 형수님이 사고 치면 이혼한다고 하셨다면서요.”
―시팔, 내가 왜 이혼해! 그런 거 아니야. 이 새끼 재수 없게 왜… 이혼 소리를….
그래. 한 쌍의 바퀴벌레들이 이혼할 리 없지.
안범은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그럼 무슨 용건이냐며 물었다. 그런데 수화기 너머에서 경해국이 조금 뜸을 들이는 기색이 느껴졌다. 항상 용건이 있으면 시원하게 본론부터 내지르던 그다운 행동은 아니었다.
7년간 전투조에서 산전수전을 다 겪으며 눈치 고단수가 된 안범의 머리에 순간 어떤 예감이 스치고 지나갔다.
“호, 혹시….”
입 밖으로 내뱉는 것도 조심스러운 이름 석 자. 7년 동안 여러 번 불렀다가 여러 번 실망했던 그 사람을 바로 떠올리며 안범은 약간 말을 더듬었다.
―너 놀랄까 봐 미리 말해주는 건데…. 나 지금 수도에서 서곡 가는 열차를 기다리고 있다.
“서곡에요? 왜요? 갑자기 무슨 일이십니까?”
―마음의 준비 해둬. 오늘 밤 거기에… 누가 좀 나타날 거거등. 물론 난 아니고.
“…팀…장님…. 혹시… 돌아오신 거예요?”
경해국은 또 잠깐 침묵했다. 그리고 이내 긍정의 답이 돌아오자 안범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조금은 앳된 티를 벗은 그의 뺨을 타고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전화로는 길게 말 못해.
“확실한 거예요? 정말 팀장님이에요? 경 선배님이 직접 만나신 거예요? 보셨어요?”
―아니. 나도 아직은. 하지만 확실해.
“무 선배님 말이 맞았네요. 정말 살아 계셨던 거예요!”
―원래도 괴물 같은 인간이잖냐.
“…하지만 팀장님께 서곡은 위험할 텐데. 여길 왜!”
―왜겠냐. 일단 준비하고 있어. 난 기차 시간 돼서 이만 끊어야 한다.
전화를 끊고도 안범은 그 자리에서 망연한 얼굴로 내내 서 있었다. 뜨거운 눈물이 눈꺼풀을 비집고 끊임없이 흐른다. 우는 건 싫지만 막을 수가 없었다. 죽은 줄 알았던 사람의 생환 소식은 안범을 순식간에 20살의 그 새내기로 돌려놓았다.
모든 것이 미숙한 신입이었던 그 시절, 자신의 머리를 무심한 듯 다정히 쓰다듬어주던 팀장님. 서곡으로 오는 첫날 기차 안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경청하며 미소를 지었던 그가 돌아왔다.
“엇 팀장님? 어디 가세요?”
“…서곡역.”
“종식이 족치시게요?”
“내 친형 같은 분이 오고 계셔. 나 휴가 낼 거니까 당분간 훈련은 다들 알아서 해.”
“그게 무슨 말이세요!”
“놔!”
안범은 당장 서곡역으로 부리나케 달려갔다. 막 종식이를 납치해 오던 팀원들이 광분해서 달려오는 안 팀장을 발견하고 움츠러들었다.
“으아아악―! 미친 다람쥐 온다. 종식아, 무조건 빌어.”
“저리 비켯!”
하지만 안범은 종식이 따위 눈에 들어올 정신이 아니었다. 지금 바로 윤모난이 온다는 확신은 없었지만, 안범은 어두운 승강장에서 검은 제복 무리들 가운데 누군가를 찾았다.
“팀….”
막 열차에서 내린 승객들 가운데서 그를 찾기 위해 안범은 소리 높여 부르려고 했으나 이내 적절한 처사가 아니라는 걸 깨닫고 입을 다물었다. 반도에서는 이미 사형당한 걸로 되어 있는 사람이다. 안범은 우물우물 그 호칭을 입안에서 조그맣게 굴렸다.
“팀장님….”
하나같이 특색 없는 검은 머리들 가운데서 기억 속 분홍 머리가 있기를. 특유의 예민한 인상을 가진 남자가 있는지 찾던 안범의 얼굴은 초조함으로 물들었다. 하지만 기차가 어둠이 내려앉은 승강장을 떠나고, 텅 비어버릴 때까지도 분홍색 머리칼은 한 올도 찾을 수 없었다.
“으흑―!”
실망감을 감추지 못하고 적막한 승강장만 멍하니 바라보던 안범은 결국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어쩌면 경 선배님이 착각한 것일 수도 있다. 7년 동안 연락 한 통 없었고, 비슷한 사람을 보고 착각한 적도 수없이 많았으니까. 하지만 그런 전화까지 받고서는 기대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더 이상 실망하는 것도 나약하게 우는 것도 싫었던 안범이 돌아가려는 그때.
“안범 씨.”
등 뒤에서 누군가 그를 불렀다. 움찔한 안범이 뒤를 완전히 돌기도 전에 정수리에 커다란 손이 턱 얹혔다. 슥슥 연한 갈색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이 퍽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7년간 밥 많이 먹었어? 많이 컸네. 못 알아보겠다.”
잠깐 얼어있던 안범은 이내 돌아서서 그를 와락 끌어안았다. 차마 부르지조차 못했다. 부르면 그가 또 사라질 것 같아서. 안범이 자신을 더듬대며 끌어안는 것을 가만히 받아주던 윤모난의 얼굴에도 쓸쓸함이 배었다.
“팀장님…. 정말 팀장님 맞죠? 그동안 어디 계셨어요?”
“외국에.”
“보고, 보고… 으흑, 싶었어요.”
“…나도.”
그렇게 눈물의 재회를 했다. 윤모난이 정말 돌아왔다는 것을 확인받은 안범은 금세 기분이 좋아졌는지 헤헤 웃으며 윤모난의 코트 자락을 놓지 않고 쫄래쫄래 쫓아왔다.
“팀장니임.”
“팀장님은 무슨. 난 이제 더 이상 팀장도 아닌데.”
“…그럼.”
“선배라고 불러. 처음에 기차에서 만났을 때도 선배라고 불렀잖아.”
“네. 이름이 개똥이라고 소개하셨었지요.”
안범이 옛날을 회상하며 희미하게 웃었다.
“어쩌면 개똥 선배로 불려야 할지도 모르겠네. 내 이름을 괜히 언급해봤자 안범 씨한테 좋을 리 없으니.”
“역시 복수하러 돌아오신 거죠?”
“응.”
안범이 갑자기 결연한 표정으로 우뚝 멈춰 섰다.
“저도 돕고 싶습니다.”
“…음, 안범 씨가 왜?”
윤모난은 별 농담 다 듣겠다는 듯이 피식 웃으며 담배 하나를 꺼내 물었다. 불을 붙이며 한번 말해보라는 듯이 까닥 턱을 들어 보이자, 안범이 냉큼 대답했다.
“전 선배님께 목숨을 빚졌습니다.”
“안범 씨는 내 팀원이었고, 난 팀장으로서 할 일을 한 것뿐이야. 내가 해야 할 의무를 수행한 거라고.”
“…….”
“그나저나 우리 다람쥐 정말 다 컸네. 팀장도 하고. 애인은 있어? 이제 몇 살이지?”
능숙하게 말을 돌리는 윤모난을 보는 안범의 커다란 눈이 발갛게 충혈되더니, 이내 투명한 눈물을 툭, 하고 떨어트렸다. 방울방울 흐르는 눈물에 어느새 뺨을 푹 적신 안범의 입에서 원망이 쏟아져 나왔다.
“서운합니다. 정말 너무하세요.”
“아, 왜 울어? 갑자기?”
“흐으―! 왜 저한테는 꼬박꼬박 ‘씨’라고 붙이면서 부르세요? 무 선배님이랑 경 선배님한테는 이름 부르시면서…. 서… 선배님들은 저보고 편애받았다고 하지만… 몰라서 하는 소리예요. 팀장님은 마냥 절 어리게만 보시구… 그냥 팀원 중 한 명… 끅, 그냥 지나가는… 팀원, 끄윽….”
윤모난은 난처한 얼굴로 눈썹 위쪽을 벅벅 긁었다. 유독 우는 아이 앞에서는 약했던 그가 안범을 어색하게 어르며 다독였다.
“알았어, 알았어. 안범이라고 부를게. 경해국, 무구원 그 짐승 새끼들은 하도 말을 안 들어 처먹어서 야, 너, 하다 보니까 짧아진 거고.”
“끄윽, 안범도… 거리감, 느껴집니다. 범이라고…흑… 불러주세요.”
“아. 그래, 범아. 알았어.”
“저도 선배님 말고… 선배라고, 부를래요.”
해결책이 보이기 시작하자 윤모난이 고개를 위아래로 크게 끄덕이며 소매로 안범의 눈가를 찍어냈다. 그러고서는 이왕이면 형이라고 부르라며 오버까지 떨었다. 그러자 안범이 눈물을 뚝 그쳤다.
“정말 형이라도 불러도 돼요?”
“그럼. 이건 경해국하고 무구원한테는 절대 허락 안 하는 건데, 어차피 넌 내가 제일 편애하는 후배니까. 기분이다. 실컷 불러.”
“후와… 형!”
안범은 심호흡을 하더니 형, 하고 재차 윤모난을 불렀다. 그런 안범을 보던 윤모난은 못 말리겠다는 듯이 웃음을 터뜨리며 몇 번이고 대답해주었다. 안범의 맑은 갈색 눈동자가 초롱초롱 빛을 발했다.
“그럼 복수하는 것 도와도 돼요? 형?”
“안 돼. 헛소리할 거면 다시 선배님이라고 불러.”
“아…! 그래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야.”
윤모난이 성큼성큼 앞서가며 단호하게 말하자, 안범은 얼른 잰걸음으로 그의 뒤에 바짝 붙었다. 포기할 기세가 전혀 아니었다.
“어디 가세요?”
“…….”
“형.”
“…….”
“혀엉. 형! 형!”
“하아….”
윤모난은 낯설지 않은 성가심에 한숨을 내쉬었다. 안범은 생각보다 고집이 세고 끈질긴 구석이 있어 쉽사리 떼어놓을 수 없는 놈이었지. 반도로 오면서도 안범이나 경해국을 찾아갈 생각을 하지 않은 건 이런 일을 염려했기 때문이었건만.
윤모난은 7년 전 안범과 경해국을 끌어들인 것을 무척이나 후회했다. 무구원이야 그렇다 쳐도 이 둘은 아무런 상관도 없는 자신의 사적인 일에 끌려 들어와 인생을 망칠 뻔했다. 아무리 당시에 제 앞가림도 못하는 처지였다지만, 명백히 팀장으로서 자격 미달이었다. 팀원들을 사지로 몰아넣는 팀장이 대체 무슨 자격이 있단 말인가.
그런데 어떤 음모와 함정이 도사리고 있을지 모르는 곳으로 걸어 들어가면서, 또다시 안범을 끌어들이는 것은 반성 능력이 없는 짐승이라 할지라도 못할 짓이었다. 정작 당사자는 그런 윤모난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저를 떼어놓고 집 나가려는 엄마를 보는 아이처럼 그에게 매달렸다.
“있잖아요, 형. 선배님들하고 제가 얼마나 많이 무간에 갔는지 아세요? 임무가 있을 때마다 형을 찾으려고 헤매고 또 헤맸어요. 저희는 형이 진짜로 죽은 줄 알았어요.”
“…….”
“그런데 무 선배님이 팀장님은 강해서 죽을 수가 없는 사람이라고, 믿음을 가져야 한다고 했어요.”
“…날 찾았구나.”
“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돌아가신 거 같아서 저랑 경 선배님이 묘비라도 만들자고 그랬는데, 무 선배님이 크게 화를 내셨어요. 다시는 그런 소리 하지 말라면서. 그래도 형 생각나면 찾아갈 묘지는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안범은 겨울이 되면 7년 전 무간의 균열이 벌어져 쑥대밭이 되었던 거리를 찾았다고 했다. 재난 이후에 멀쩡하게 복구되어 일상의 활기가 돌아온 그곳에 아주 비싼 돈을 주고 산 헌화를 놓았다고.
“그런데 어떻게 저희한테 지금껏 연락 한 번 안 하셨어요?”
“…….”
“그냥, 잘 살아 있다고 한마디만 해주셨어도 좋았을 텐데.”
“미안. 나는 도저히….”
윤모난은 우선 사과했으나 뜻을 굽히지는 않았다.
“하지만 미안한 건 미안한 거고 이건 달라. 내 복수를 돕겠다고? 난 무슨 정의의 사도씩이나 되자고 돌아온 게 아니야.”
“저도 알아요. 그러니까….”
“나는 여기 살인을 하러 온 거야, 안범. 누구든 나를 방해하면 그 사람도 죽일 거라고.”
안범이 이런 일에 가담하게 되면 결과는 하나였다. 그 또한 자신과 비슷한 처지로 떨어지는 것. 아버지를 살인한 존속 살해범, 사형수에 탈옥범, 테러범이자 수배자로. 더 나아가 모두에겐 이미 죽은 것으로 여겨져 살아 있는 것도 뭣도 아닌 처지로.
이건 마이너스인 팀 점수를 올리며 우당탕탕하는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안범도 이제 그쯤은 알아야 할 나이였다. 다시 2부 7팀이 아침 일찍 모여 주에 세 번씩 아침 식사를 할 일은 다시는 없다. 그건 과거의 추억일 뿐이고, 좋은 기억이라도 보존하려면 여기서 그만두는 것이 옳았다.
윤모난은 안범의 정수리에 손을 올렸다.
“마음은 고맙게 생각할게. 사람 마음이 참 간사하다고. 무구원이 돌아온 나한테 화낼 때는 그러려니 했는데 이렇게 날 반기는 사람을 보니까 새삼 좋네.”
“네? 무 선배님이 화를 내셨다고요? 그럴 리가요. 무 선배님은…”
“됐어. 무구원 얘기는 하지 말자.”
“…….”
“우린 여기서 헤어지자고. 넌 이만 숙소로 돌아가.”
갈래 길에서 윤모난이 합숙소로 향하는 길로 안범의 등을 밀었다.
“인연이 있으면 또 보겠지, 뭐.”
그 말만큼 다음을 기약할 수 없는 인사말은 없을 것이다. 안범은 윤모난이 자신의 반대 방향으로 멀어져가는 모습을 가만히 서서 바라보았다. 이윽고 뒷모습이 어둠 속으로 완전히 사라지자 그는 작은 주먹을 콱 쥐었다.
생각대로 모난 형이 만만치 않다. 게다가 아직까지 무 선배님의 마음을 모르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안범은 긴 세월 동안 주야장천 삽질만 하고 있는 두 사람을 떠올리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는 자신이 나서야지, 이래서는 안 된다. 앞으로의 사명을 되새긴 안범은 종종걸음으로 합숙소로 뛰어갔다. 당장 경 선배님이 오면 상황을 보고하고 어떻게 윤모난에게 거머리처럼 달라붙을지 상의할 계획이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서곡역.
“어이, 안 팀장!”
“경 선배니임!”
안범은 첫차를 타고 온 경해국을 맞이했다. 안범에게 어젯밤의 사정을 모두 들은 경해국이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무구원이 직접 쓴 편지였다. 둘은 앞으로 할 일들이 모두 적힌 편지를 함께 읽었다.
토요일, 사교 클럽 그리고 한백호. 디데이가 코앞이었다.
* * *
고섬 한씨 집안의 차남 한백호는 제약 권력으로 유명한 한씨 집안의 소문난 골칫덩어리였다. 세 남매 중 서러움 많은 둘째. 부모의 무관심 속에서 그는 훌륭한 개망나니 약쟁이로 자랐다.
약을 팔아야 하는 장사꾼이 약에 중독되어서는 안 된다는 가훈이 무색하게 온갖 혼합 복용을 터득한 한백호는 일찍이 13살에 감기약 중독으로 병원에 1년간 감금되었고, 14살에는 훈련 학교에 들어가서 화학을 부전공했다.
집안에 차고 넘치는 원재료들, 안 좋은 쪽으로 꽤나 비상한 머리, 타고난 죄의식 없음이 합쳐져 한백호는 16살 때부터 마약을 제조해 훈련 학교 안에서 몰래 유통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해에 14살이었던 윤모난이 입학했다. 악연의 시작이었다.
“패 까봐, 구땡.”
“십땡, 아싸!”
“씨발, 오늘따라 패가 안 붙잖아아!”
두툼한 녹색 담요 위로 붉은 화투패가 와르르 쏟아졌다. 오늘따라 마음처럼 돌아가지 않는 도박판에 초조해진 한백호는 떡 진 백금발의 머리를 아무렇게나 쓸어 넘기며 담배 필터를 콱 물었다. 판돈 대신 걸었던 칩을 옆에 앉은 사촌에게 몰아준 그가 낮게 욕을 짓씹었다.
토요일 저녁부터 다음 날 새벽까지 이어지는 사교 클럽 도박판은 서곡에 있는 고섬 한씨들이 주기적으로 친목을 다지는 모임이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고섬 한씨 내부에서도 조금 마니악한 취향을 가진 인간들 십여 명이 모여 노는 자리였다.
새벽 1시. 노름이 한창인 넓은 방 안은 뿌연 담배 연기로 가득 차 있었다. 사내들은 모두 팬티 한 장만 걸친 채로 저마다 담배를 물고 화투패를 잡고 있었다. 이 자리에는 고섬 한씨뿐 아니라 친분으로 초대를 받아 온 이들도 중간중간 섞여 있었다.
그중에서 이 자리의 주인공이자 가장 신분이 높은 한백호가 목을 우두둑 꺾으면서 다음 판을 기다렸다. 그럴 때마다 그의 등허리부터 목까지 이어지는 장미 문신이 움찔댔다.
“백호 형, 재밌는 거 알려줄까요?”
그때 한백호의 왼쪽 자리에 앉은 사촌 동생 하나가 킬킬대며 갑자기 화두를 꺼냈다.
“북해의 무정원 그 광신도 새끼, 아들이 좀 모자란다는 소리가 있던데요?”
“뭐?
“요즘 그런 소문이 돌더라고요? 무정원네 어린 아들이 학교 갈 나이가 되었는데도 집 안에만 틀어박혀 있어서 덜떨어진 거 아니냐고. 이래서 애들은 최대한 많이 낳고 봐야 하는데…. 북해 광신도 새끼들은 재혼도 못하고 아랫도리도 함부로 못 돌리잖아요?”
“푸하하하하!”
별안간 한백호가 박장대소하며 배꼽을 잡았다. 낄낄대는 소리에 방 안에 있는 한씨들이 메아리처럼 따라 웃었다.
“뭘 시팔, 아랫도리를 함부로 안 돌려? 너 원래 종교쟁이 새끼들이 더한 거 몰라? 무정원 그 새끼 좆 돌리는 데는 선수일걸.”
“에이, 무슨 세기의 애처가라는 소문까지 났던데 무슨.”
“뒤진 아내가 무슨 소용이야? 특히 무정원은 아내 무덤에 풀도 자라기 전에 벌써 싹 잊었을 거다. 야, 야. 패 제대로 섞어라, 이 새끼야.”
한백호는 옆에서 패를 섞는 사촌의 뒤통수를 퍽 갈기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다 갑작스럽게 뭔가가 생각난 듯이 턱을 매만지며 뭔가를 곱씹는 듯했다.
“무정원 아내라…. 뒈지게 이뻤는데. 뭐 정말 뒈졌지만.”
“어디서 봤어요?”
“훈련 학교 다닐 때. 바로 옆이 여자 생도들 학교잖아. 무정원 아내가 거기서도 미인으로 유명했어. 학창 시절에 발정 난 새끼들이 걔 얼굴 한 번 보겠다고 난리를 쳐서 알았지.”
“얼마나 이뻤길래?”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진짜 재미있는 얘기 해줄까?”
순간 한백호의 입에 비소가 걸렸다. 그는 재밌는 에피소드씩이나 푼다는 정도의 가벼운 말투로 무정원의 죽은 아내 얘기를 늘어놓았다.
“그 여자가 갑자기 무정원과 결혼해서 다들 놀랐었지. 사실은 걔가 다른 놈을 짝사랑한 걸로 아주 유명했거든.”
“누구요?”
“남경 독사 새끼 있잖아. 윤약.”
“그 윤약? 트랜스 됐다는 그?”
“어. 그 독사 새끼가 아주 예쁘게 생겼어. 기생오래비같이. 기집애건 사내놈이건 하나같이 그 새끼한테 반해서 난리도 아니었거든.”
“뭐, 그 동생은 7년 전에 서곡에서 본 적 있는데, 비슷하게 생겼어요?”
“핑키? 핑키는 이쁘장한 얼굴은 아니지. 걘 지 큰형이랑 더 비슷해. 윤약 그 새끼는 머리만 기르면 남자한테 안 서는 새끼들도 바로 바지 벗을 정도인데.”
“진짜로? 아, 씹, 꼴리는데.”
한백호의 사촌이 쩝쩝 입맛을 다시자 옆에 있던 다른 사촌 하나가 넌 괴물이 되었다는 새끼한테까지 꼴리냐며 핀잔을 줬다. 그러자 와하하하 또 웃음이 터졌다. 그러다 다른 누군가가 한백호의 말에 관심을 가지며 물었다.
“그래서요? 죽은 무정원 아내랑 윤약이랑 소싯적에 떡이라도 치는 사이였어요?”
“그럴 리가. 그 독사 새끼들이야말로 고자로 유명했지. 여자는 무슨, 남자도 따먹었단 소리 들어본 적이 없다. 발랑 까진 핑키하곤 달라. 그래서 걔네 결혼해서 애 낳았다고 했을 때 다들 놀랐잖냐.”
“아…. 그 7년 전에 죽은 애들이요?”
“어. 핑키가 제 애비까지 죽이면서 구하려다가 실패한 애들이 작약이 깐 새끼들이지.”
한백호는 어떠한 연민도 느껴지지 않는 말투로 씨불였다.
한백호를 포함해 이 자리에 있는 고섬 한씨들은 모두 7년 전 사건의 공모자들이었다. 무간 신입 대원 학살 사건을 이용하여 남경을 몰락시키기 위해 생존자로 살아 돌아온 한백형이라는 가문의 일원을 내민 것이 바로 그들이다. 한백호의 아버지 고섬 한씨 가주는 직접 무정원과 물밑에서 거래를 했다.
이 정치적 공모에서 행동 대장이 된 것이 바로 차남 한백호였다. 치안조인 한백호가 윤모난을 고문해 자백을 얻어내는 데 성공하여 윤씨들을 수세에 몰았다. 그 대가로 고섬 한씨들은 남경에서 비싼 값에 사들이던 약의 원재료 중 일부의 가격을 싸게 공급받을 수 있게 되었다.
드넓은 곡창지대와 항구 무역으로 벌어들이는 수입으로 가장 부유했던 윤씨 가문의 몰락으로 다른 네 가문은 저마다 실속을 챙겼다. 따라서 이 일로 인한 법적인 처벌 같은 것은 전혀 겁낼 것이 아니었다.
무간에서 죽은 신입 대원들과 윤모난의 조카들은 한마디로 개죽음을 당한 것이고, 그 죗값을 물어 법정에 서 있어야 할 모든 이들은 7년이 지난 지금 권력의 꼭대기에 있었다.
“얼른 패 돌려. 승부를 끝내야 재미라도 좀 볼 거 아니냐?”
기다리기 지루했던 한백호가 벌렁 뒤로 눕더니 목을 빳빳이 세웠다. 그러고서는 필터까지 타들어간 담배를 엄지와 검지 끝으로 잡아 자신의 머리 가까이에 있는 다리에 지지듯이 비벼 껐다. 그러자 절그럭하는 쇠사슬 소리와 함께 새된 비명이 터졌다.
무자비한 손길을 피하려는 흰 다리를 한백호가 한 손으로 틀어쥐었다. 그는 몸을 반대로 뒤집어 덜덜 떨고 있는 사람의 두 다리 사이로 제 머리를 집어넣었다. 피부에 지져진 담배는 누군가의 다리에 검은 화상 자국을 남기고 불씨가 꺼진 채 바닥에 떨어졌다. 한백호가 묶여 있는 사람에게 물었다.
“왜? 심심해?”
“…으… 으읍!”
“판이 길어지네. 새벽 3시는 돼야 끝날 텐데. 우리 판돈이 심심해서 어쩌지?”
한백호가 주관하는 도박판은 사람을 거는 것으로 아주 악명 높았다. 피해자 대다수가 한백호가 서곡에서 몰래 유통하고 있는 마약 ‘쓰레드’의 중독자였다. 터무니없이 높은 가격에 거래되는 이 마약에 중독된 대원들 중에 돈이 모두 털린 사람은 빚을 탕감하고 약을 공짜로 공급받는 조건으로 이 자리에 초대된다.
한백호의 도박판은 그날의 판돈을 이 덫에 걸린 중독자로 삼는다. 판돈을 가장 많이 딴 한씨가 한 사람의 존엄성을 훼손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건 주로 기괴한 성벽의 표출인 경우가 많았다.
이 자리에 끌려온 중독자는 입에 재갈을 물고 묶인 채로, 자신을 걸고 하는 도박판을 처음부터 끝까지 반항조차 못하고 지켜봐야 했다. 온갖 가혹행위를 동반한 이 이상성욕자 회동은 극비리에 이루어졌고, 사교 클럽은 이러한 모임에 아주 제격인 장소였다.
“기다려. 내가 이번에는 크게 이길 테니까. 넌 피부가 하얘서 때리면 자국이 잘 남아 좋겠다.”
그 말에 절그럭거리는 쇠사슬 소리가 커졌다. 여기저기서 비웃음이 터져 나왔고, 억눌린 울음도 그에 묻혀버렸다. 방 안이 소란스러워지자 한백호가 상체를 일으켜 내내 벽 한쪽에 그림자처럼 서 있던 경호원에게 눈짓했다.
“조용히 시켜.”
짐승처럼 벌거벗은 한씨 남자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단정히 옷을 갖춰 입은 여자가 명령을 듣고 앞으로 한 발자국 나섰다. 옆이 트인 기다란 검은 차이나 원피스를 입은 그녀는 한씨 가문 방계 출신의 경호원이었다.
갓 20살이나 넘었을까. 그녀는 자신보다 훌쩍 나이가 많은 아저씨들의 눈살 찌푸려지는 행태에도 얼굴 한번 찡그리는 법이 없었다. 지금도 한백호의 명령에 따라 품에서 비닐봉지를 꺼내 붉은 알약을 오늘의 판돈으로 나온 중독자의 입에 비집어 넣고 있었다.
한백호가 다시 화투패를 잡으며 그녀를 불렀다.
“연숙아.”
“네.”
“대충 하고…. 자리 길어질 거 같으니까 한 바퀴 돌고 와라.”
“네. 알겠습니다.”
자리를 떠나 방을 나서려는 그녀에게 허스키한 목소리가 따라붙었다.
“요즘 소문이 흉흉하니까 여기 오빠들은 연숙이 네가 지켜주고. 수상한 새끼들은 잡아 족쳐.”
“다녀오겠습니다.”
“그래.”
한백호가 손을 휘휘 젓자 연숙은 너구리 굴 같은 방을 나왔다. 방을 나서자마자 옷에 밴 담배 냄새를 털어내기 위해 툭툭 옷을 두드린 그녀는 어두운 복도를 따라 걸었다. 얼마 전 남경극장 테러로 인해 한창 붐빌 시간대임에도 사교 클럽은 비교적 한산했다.
그나마 있는 사람들도 대다수 플로어에 몰려 있었고, 한백호 일당처럼 따로 방을 빌려 구석에 처박혀 있는 무리는 많지 않았다. 미로처럼 얽혀 있는 복잡한 구조의 복도를 주저 없이 성큼성큼 걷던 연숙은 순간 걸음을 멈췄다. 오른쪽 복도 코너에서 낯선 말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그래서요. 사교 클럽에서는 원칙적으로 총기 소지가 금지래요.”
오른쪽 복도에서 이곳으로 걸어오는 사람은 하나가 아닌 둘이다. 참새처럼 조잘대는 미성은 최대한 낮춘 듯했지만, 청각이 예민한 연숙에게는 무리 없이 들리는 정도였다. 연숙은 허벅지에 달려 있던 칼 손잡이를 꽉 쥐었다.
“그래서요, 경 선배님. 개똥 형이… 악!”
경계한 것이 무색하게 상대는 아무런 조심성도 없이 코너를 돌자마자 연숙의 몸에 퍽, 하고 부딪쳤다. 충돌에 살짝 뒤로 튕겨 나간 남자는 연숙과 키가 엇비슷했다.
“죄송해요! 괜찮으세요?”
앳된 얼굴의 남자가 선량한 목소리로 바로 사과를 해오자, 연숙은 사교 클럽 깊숙한 이곳에 나타난 두 남자를 위아래로 빠르게 훑었다.
한편 경해국과 안범도 말없이 자신을 관찰하고 있는 여자를 보며 의아해진 것은 마찬가지였다. 갓 스물 남짓한 나이로 보이는 그녀의 얼굴에서 풍기는 냉기가 어딘가 선득했기 때문이다.
“이봐, 뭘 그렇게 무섭게 쳐다봐? 씨팔, 미안하다잖아.”
“경 선배님, 그러지 마세요. 저, 죄송합니다. 가요.”
만인에게 평등하게 시비를 거는 경해국을 말리며 안범이 꾸벅 고개를 숙였다. 둘은 윤모난이 오늘 이곳에 나타날 것을 알고 한참이나 그를 찾아 헤매는 중이었다. 안범이 경해국의 옷자락을 끌어 연숙을 지나쳤다. 그런데 연숙이 몸을 돌려 두 남자를 불러 세웠다.
“잠깐.”
“네?”
“이거. 떨어트리셨네요.”
연숙은 몸을 굽혀 바닥에 떨어져 있던 흰색 천을 주워 내밀었다. 그러자 사선으로 치켜 올라가 있던 경해국의 짙은 눈썹이 단숨에 순하게 휘어졌다. 그는 얼른 달려와 자신이 떨어트린 물건을 연숙의 손에서 낚아챘다.
“젠장, 잃어버릴 뻔했네. 우리 여보가 준 손수건인데.”
경해국은 손으로 흰 손수건의 먼지를 털어내며 다시 조심스럽게 주머니에 넣고선, 고맙단 인사도 없이 다시 안범에게로 돌아갔다. 제게서 멀어지는 두 남자를 보면서 연숙은 방금 전 본 것에 관해 생각했다. 흰 손수건에 수놓인 솔잎. 동산 경씨가 왜 여기 나타났을까 하고.
한편 윤모난에게만 정신이 팔린 경해국과 안범은 연숙의 존재는 까맣게 잊고 복도를 헤매며 속닥거리고 있었다. 사교 클럽에 들어온 지 약 두 시간이 흐른 시점이었다.
“경 선배님, 개똥이 형은 어디 계실까요?”
“여기 어디 있겠지. 좀 더 돌아다녀보자.”
둘은 무구원의 전달 사항이 담긴 편지를 읽고 나서 전날 밤 홀연히 사라진 윤모난을 찾고 있었다. 뒤늦게 합류해 아직 윤모난을 발견하지 못한 경해국이 안범에게 물었다.
“그런데 그 윤 팀….”
“경 선배님! 성씨랑 이름은 말하지 마세요!”
“어, 맞다. 그래서 그 괴물 마귀를 어떻게 설득할 건데? 자기 일에 끼어들지 말라고 엄포를 놓았다면서?”
“개똥이 형이 왜 괴물 마귀입니까? 그렇게 부르지 마세요!”
“넌 괴물 마귀한테 독사로 당했던 거 벌써 잊었냐? 그러는 안범 넌 개똥이 형이라 부르는 주제에.”
“개똥이 형은 애칭입니다. 친한 사이에서만 부를 수 있는 애칭 말입니다.”
“야, 안버엄. 요 조막만 한 새끼. 난 그럼 왜 애칭으로 안 불러? 너 사람 편애하고 차별하냐?”
“…….”
소싯적 경해국에게 찌찌 애비라는 치욕스러운 별명으로 불리며 설움을 받았던 안범은 눈을 흘길 뿐이었다. 그런데도 경해국은 손가락 두 개로 갈고리를 만들어 추켜올리곤, ‘콱, 이게 선배한테 눈 안 깔아?’라며 유치한 협박만 했다.
안범이 자신이 참는다는 듯 휴, 숨을 한 번 내쉬더니 화두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개똥이 형을 설득하는 건 쉽지 않지만, 영 불가능한 건 아니지요.”
“뭔데?”
“뭐긴 뭐겠습니까. 그냥 끼어들면 되잖아요. 그럼 개똥이 형도 어쩔 도리가 어쩔 수 없을걸요?”
“엑?”
혀를 차며 비웃긴 했지만 경해국이 생각하기에도 그 말은 꽤 일리가 있었다. 말로써 아무리 설득하려 해봤자 허락할 리 만무하고, 그냥 이런 식으로 앞에 나타나버리면 윤모난도 어쩔 수 없는 노릇일 터였다.
아주 단순하지만 정공법이다. 더욱이 상황이 심해지면 윤모난도 이쪽 도움을 안 받고는 못 버틸 것 아닌가.
무구원의 편지 내용에 따르면 오늘 서곡센터는 하나의 용광로가 될 것이다. 각자의 욕망과 음모, 비밀이 뒤섞이는 용광로. 그 불씨를 지필 윤모난이 이곳 어딘가에 있다. 그리고 곧 어둠 속에 숨어 있는 누군가가 정체를 드러낼 것이다. 편지에서 무구원은 경고했었다.
이리를 노리는 것이 있어. 가장 위험한 덫이지. 이리가 걸어 들어올 수밖에 없도록 이미 설계를 끝냈을 거다. 이대로라면 또 이용만 당하게 될 거야.
둘은 벌써 여섯 번째 다른 복도로 들어섰다. 경해국은 미로처럼 꼬여 있는 길이 마치 자신들의 미래 같다고 생각했다. 도저히 빠져나갈 구멍이 보이지 않았다.
“…씨, 차라리 안 돌아왔으면 좋았을 텐데.”
“경 선배님, 그게 무슨 말이세요?”
“내 솔직한 심정으로는 그렇다구. 말 정도는 할 수 있잖아?”
“선배님은 개똥이 형이 불쌍하지도 않으세요?”
“썅, 이 세상에 불쌍한 사람이 한둘이냐? 그리고 내가 불쌍해한다고 해서 뭐 달라질 것도 아니고. 그래도 괴물 마귀는 능력이 있어 복수라도 하는 거지. 사실상 평범한 인간들은 그럴 엄두도 못 내거등. 그런 사람들이 더 불쌍하다, 나는.”
“너무해요.”
“뭘 너무해?”
“저는요. 원래 복구조에 가고 싶었는데 개똥이 형을 보면서 꿈을 바꿨습니다. 우리 아버지를 죽게 만든 트랜스를 많이 죽여서 최대한 한 사람이라도 더 살리겠다구요.”
안범의 목소리는 어느새 조금 결연해져 있었다.
“개똥이 형은 그런 복수도 가능하다는 걸 저에게 알려줬습니다.”
“…….”
“있잖아요. 개똥이 형도 처음부터 이런 방법을 선택하려 한 건 아니었을 거예요. 사랑하는 가족이 너무 그리워 죽으려던 사람이잖아요. 오히려 그게 가장 쉬운 선택이었겠죠.”
안범은 뭔가를 생각하다가 약간 울컥해 더듬더듬 말을 이어갔다. 어느새 경해국도 입을 다물고 그의 말을 경청했다.
“우리 엄마가 3년 전에 돌아가실 때 그러셨어요. 부모나 형제가 죽는 건 슬프지만 어찌 됐든 극복이 된다구요. 하지만 자식만큼은 그렇게 안 된다고 하셨어요. 그러니까 하늘에 있을 자신이 슬프지 않도록 항상 몸조심하라고.”
“그래서 네가 하고 싶은 말이 뭐냐?”
“개똥이 형한테 조카들은 자식이나 마찬가지 아니었을까요. 청연이란 조카가 죽었을 때 형의 얼굴을 보니 알겠더라구요. 억장이 무너진다는 건 저런 거구나.”
“…….”
“그러니까 개똥이 형한테 이건 할 수밖에 없는 일인 겁니다. 저는 형에게 목숨을 빚졌기 때문에 도우려는 거구요. 그건 경 선배님도 마찬가지잖아요?”
“젠장.”
안범의 똑 부러지는 말에 경해국도 할 말이 없는지 낮게 욕을 지껄였다. 그 역시 7년 전 수도에서 윤모난에게 목숨을 빚진 것은 마찬가지였다. 조카의 시신을 안고 사라졌어야 할 윤모난이 자신들을 구하려고 돌아오지 않았다면, 지금쯤 2부 7팀 모두의 이름이 위령탑에 올라가 있었을 테니까.
세 팀원은 균열을 수습했다는 공로로 훈장을 받았고 팀 점수는 단숨에 마이너스에서 벗어났다. 1년 만에 팀 점수를 다 만회시켜주겠다는 그 약속을 윤모난이 결국 지킨 셈이었다.
그로써 그들은 평범한 삶을 살아볼 기회를 얻었고, 무사히 전근 신청을 해서 결혼까지 한 경해국도 은혜를 모르는 인간은 아니었다. 받은 것이 있다면 돌려주는 것이 마땅하다. 이 사실은 윤모난을 중심으로 옛 2부 7팀을 여전히 공고하게 만드는 유대였다.
“그래, 나 동산 경씨 경해국, 이미 마음을 정한 이상 빠꾸는 없지. 씨팔, 죽이 되든 밥이 되든 한번 뭉개보자고!”
경해국이 의지를 다지는데, 옆에서 ‘네!’ 하고 낭랑하게 돌아와야 할 답이 오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옆에 도토리처럼 붙어 있던 갈색 머리 꽁무니가 없었다. 놀라서 뒤를 돌아보자 역시나 안범은 온데간데없고, 미로같이 음침한 사교 클럽의 복도는 적막하기만 했다.
“…안 팀장?”
한편 안범은 입이 가로막힌 채로 문밖에서 자신을 찾는 소리를 들으며 눈알만 데굴데굴 굴리고 있었다. 그러다 손을 들어 더듬거리며 자신을 낚아채 방으로 끌고 들어온 사람의 신원을 확인하려 시도했다.
긴소매 옷이 아닌지 손이 닿는 곳에서 매끄러운 피부가 느껴졌고, 그 안으로는 단단한 근육이 만져졌다. 전등이 꺼져 있어 방 안은 깜깜했다. 낯선 기분에 안범은 필사적으로 몸을 뒤틀어 자신의 품 안에 숨겨 온 사시미칼을 꺼내려고 했지만, 이내 팔이 비틀어질 듯 쥐어지며 막혔다.
“으읍!”
“조용히 해.”
숨죽인 음성이 들린 순간 안범의 작은 체구가 퍼뜩 뛰어, 그가 기대어 있는 문에서 덜컹하고 미세한 소리가 났다. 그러자 밖에 있던 경해국이 이름을 부르기를 멈추고 가까이 다가오는 게 느껴진다.
이윽고 안범을 잡아놓은 사람에게서 나지막한 한숨이 터져 나왔다. 그는 이내 안범의 입을 막은 손을 떼고 뒤로 물러섰다. 안범은 구속에서 풀려나자마자 얼른 앞으로 몸을 숙여 자신을 납치한 사람의 허리를 콱 끌어안았다.
“개똥이 형!”
“…젠장.”
동시에 두 사람의 등 뒤에서 문이 벌컥 열렸다. 화르륵 손끝에서 타오르는 불길과 함께 들이닥친 경해국 덕분에 일순간 방 안이 잠깐 밝아졌다. 드디어 세 사람은 서로의 얼굴을 잠깐이나마 확인할 수 있었다. 이내 스위치가 올라가고 실내가 환해졌다.
“팀장님.”
“어.”
“썅, 대체 뭘 입고 있는 겁니까?”
7년 만에 윤모난을 처음 보는 경해국의 첫인사였다. 그제야 안범도 윤모난의 허리에 얽은 팔을 풀고 물러나서 그의 꼴을 확인했다. 경해국이 놀라 그렇게 물은 이유가 확실히 있었다.
몸이 다 비치는 검은 시스루 셔츠에 민망할 정도로 달라붙은 광택 있는 얇은 바지. 윤모난이 입은 것은 이 사교 클럽에서 일하는 종업원들이 입고 다니는 야시시한 유니폼이었다. 여기 오는 길에 경해국이 남세스럽다며 눈길을 돌린 그 옷을 윤모난이 입고 있었던 것이다.
“난 꽤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옷을 입고도 한 치의 부끄러움도 없는 윤모난에게서는 당당함마저 풍겼다.
“존나 잘나가는 남창 제비 같은데요.”
“그래, 남창인데 안 팔리는 것보다는 존나 잘나가는 게 낫지.”
“그리고 젖꼭지 다 보입니다. 씨팔, 역겨워 뒈지겠네!”
경해국은 못 볼 것을 봤다는 얼굴로 허공에다 대고 헛구역질까지 했다. 예전에 분홍 머리일 때의 윤모난은 꽤나 화려한 인상이었는데, 머리 색이 바뀌어서 그런지, 지금은 어딘가 위험한 구석이 있는 비련의 남창 꼬락서니였다.
종업원 옷을 입은 건 나름의 위장이었던 듯한데. 저런 옷이 어째 더 시선을 끌어서 위장이 될지도 의문이었다. 그 와중에 윤모난은 얇은 옷감 너머로 비치는 젖꼭지를 두 손으로 가리며, ‘밴드로 가려볼까…?’ 하는 헛소리나 지껄이고 있었다. 안범이 거기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덧붙였다.
“혀엉, 솔직히 너무 야합니다. 어쩐지 너무 잘 어울려서 자꾸 쳐다보게 돼요.”
“그래. 얼굴이 잘생기면 이게 문제라니까.”
“검은 머리 때문에 더 섹시 다이너마이트가 된 것 같으신데요.”
“웩.”
어디서 주워들은 듯한 안범의 어설픈 표현에 경해국은 입을 틀어막고 신물을 삼켰다. 그러나 농담 따먹기는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돌연 윤모난이 두 사람의 멱살을 잡고 벽으로 동시에 쾅 몰아붙였다. 그러더니 파동을 뻗쳐 두 사람의 능력을 봉쇄시켰다.
“내가 따라오지 말랬지? 안범.”
“…예에.”
“형 말 자꾸 안 들을래? 너 혼난다.”
“저… 저희도 여기 놀러 온 건데요?”
“얼씨구, 거짓말까지? 경해국, 넌 여기 왜 왔어. 내가 여기 있는지는 둘 다 어떻게 알았지?”
“…….”
“설마 무구원이 알려줬냐?”
“…네니요.”
푹 한숨을 내쉰 윤모난은 이내 두 사람의 멱살을 놓아주었다.
“너희도 참 학습 능력이 없구나. 7년 전에 그 난리를 치고도 여기까지 쫓아오다니.”
“…형, 그런 게 아니고. 저희도 이 일에 책임이….”
“헛소리하지 마. 너희한테는 아무런 책임도 없어. 그저 똥 밟아서 나 같은 팀장 만나 죽을 뻔했던 거지. 그러니까 똑같은 실수 하지 마. 난 이제 너희 뒤치다꺼리할 여력 없다. 그러니까 당장 가.”
자신을 향한 비정한 태도에 안범은 죄지은 사람처럼 푹 고개를 수그렸다. 둘이 더 이상 말이 없자, 윤모난은 그들을 뒤로하고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그때 경해국이 속에서 무언가가 터지기라도 한 듯 우렁차게 소리쳤다.
“저한테는 있습니다요, 그 책임!”
“…뭐?”
“이런 소리는 하기 싫었는데, 저희도 다 압니다. 무간에서 신입 대원들 죽은 거…. 팀장님 형님 짓이 아니라는 거.”
“…….”
윤모난의 얼굴이 굳어졌다. 경해국은 괴로운 듯이 벅벅 자신의 까까머리를 긁으며 마침내 속내를 털어놓았다.
“팀장님이 왜 허위 자백을 했는지도 이젠 압니다. 한백호가 고문을 했다죠. 트랜스가 된 형님의 환영을 불렀다구요. 무구원이 그러더군요. 그때 한백호가 그 환영을 재현할 수 있었던 건 팀장님의 뇌 의식 영상 때문이었다고.”
“…경해국.”
“그런데 그 뇌 의식 영상은… 내가… 요구했던 거 아닙니까? 심지어 무구원이 말렸는데도. 씨팔, 저는 그거 하라고 해놓고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그거 하나가 화근이 돼서 결국 못 이겨 자백한 거라니. 나 원, 어이가 없어서. 씨….”
방 안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경해국은 옆에 있던 의자를 걷어차며 쌍욕을 터뜨렸다.
“그 영상만 없었어도… 무씨네 대장이 과연 그 일을 꾸몄을까요? 전 팀장님 당신한테만 빚이 있는 게 아니라, 무간에서 죽은 신입들한테도 빚이 있는 겁니다.”
경해국의 마음의 빚은 바로 그 죄책감에 있었다. 딱히 의도하지 않았지만 과거에 했던 사소한 인간적인 실수와 결함들이 불러온 큰 파동. 그것 때문에 윤모난은 조카를 잃고 아버지를 죽였으며, 신입 대원 수십 명이 허망하게 목숨을 잃었다.
이런 상황에서 난 그런 의도가 아니었다고 한탄하는 게 대체 무슨 소용일까. 그러니 안범뿐만 아니라 경해국까지, 그들은 결국 어느 정도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 이 일에 끼어든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선택도 윤모난이 허락하고 말고 할 문제가 아니었다. 그건 그들 스스로의 몫이니까. 윤모난은 자신처럼 비참한 얼굴을 하고 있는 옛 팀원들을 한참 조용히 바라보다가 마침내 입을 뗐다.
“마음대로 해. 대신 이 일 때문에 만약 너희가 죽는다거나 가진 것을 전부 잃게 되어도 난 죄책감 가지지 않을 거다.”
“…….”
“무릇 팀장이라면 팀원들에게 살길을 열어줘야 하지만, 생각해보니 난 더 이상 팀장도 뭣도 아니지. 너희가 죽을 길을 선택하겠다는데 내가 무슨 자격으로 막겠어.”
그러자 안범이 냉큼 말을 받았다.
“형, 이전에 그러지 않으셨습니까? 원래는 천재보다 범재가 더 수명이 길다구요. 저랑 경 선배님은 범재라서 수명이 깁니다. 걱정 마십시오. 그리고 제가 사시미도 챙겨 왔구요.”
“걱정 안 해.”
윤모난은 손에 든 담뱃갑에서 담배 한 개비를 물었다. 이윽고 불을 붙이고 연기를 한 모금 빨아들인 그가 차가운 목소리로 지시했다.
“이제 한백호 죽이러 갈 거니까. 너희도 얼른 젖꼭지 보이는 옷으로 갈아입어, 새끼들아.”
미리 계획한 것도 아니건만, 젖꼭지 보이는 남세스러운 옷은 맞춘 것처럼 딱 세 벌이 있었다.
“아니, 젖꼭지가 문제가 아니라 이런 바지를 입고 어떻게 싸웁니까. 자지 엄청 낀다고요. 옷이 왜 이따구야. 불알 짜부라지겠네.”
“대충 욱여넣어. 불가능한 크기도 아니더만.”
“아, 씹. 진짜.”
경해국은 바지가 영 불편한지 손을 넣어 사타구니와 허벅지를 자꾸 뒤적거리며 투덜댔다. 안범도 민망스러워 자꾸 벌어지는 셔츠를 꽉 조이며 얼굴을 붉혔다. 준비를 마치자 윤모난이 사뭇 심각한 어조로 말했다.
“잘 들어. 한백호 도박판에는 항상 경호원들이 포진해 있어. 클럽에 올 때는 정체를 숨기고 주변을 배회하지. 방 위치도 전혀 알 수 없게 해놓았고.”
“그럼 한백호를 어떻게 찾으시려구요?”
“하마처럼 술을 마시는 새끼들이니까 곧 술을 주문할 거야. 주문이 들어오면 종업원으로 위장해서 찾아가면 돼.”
“어차피 한백호는 형 얼굴을 알아서 위장하기 힘들잖아요?”
“방만 찾으면 위장이 무슨 소용이야. 그때부터는 죽기 살기로 싸우는 거지. 냄새라도 맡고 도망치기 전에 일단 방부터 찾아야 해.”
사교 클럽에서 특정 방을 찾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이곳 자체가 공간계 에스퍼가 능력으로 만든 공간이기 때문이다. 사교 클럽은 클럽 안에서 발생할 수 있는 각종 폭력 사태를 방지하고, 고객에게는 밀담을 나눌 수 있는 최적의 장소를 제공하기 위해 미로처럼 왜곡해서 설계한 곳이다.
이곳의 구조를 완전히 파악하기도 불가능하거니와, 끊임없이 방문이 늘어진 복도에서 평생 길을 잃기 십상이다. 그래서 각 방에 술 심부름을 가거나 청소를 해야 하는 종업원들은 허리에 공간 좌표를 전송받는 신호기를 항상 차고 다녔다. 윤모난은 어제부터 몰래 이 클럽에 잠입하여 그 신호기를 확보해놓았다.
벽에 걸려 있는 시계를 확인하니 벌써 새벽 2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약에 취한 놈들이 굳이 종업원 얼굴을 확인하지는 않을 거야. 먼저 한백호 주변에 경호원 수가 몇 명이 있는지 파악부터 하자고.”
“그럼 누가 방에 한 번 들어갔다가 나오면 좋겠네요.”
마침 종업원 호출기에서 삐리릭 하는 신호음이 울렸다. 내용을 확인한 윤모난이 고개를 들었을 때, 그의 얼굴에서는 어떤 확신이 느껴졌다. 셋은 바로 방을 나왔다. 안범이 쫓아가며 물었다.
“개똥이 형. 그 호출이 한백호인 걸 어떻게 확신하세요?”
“청소를 부탁하는 호출이었거든.”
“청소요?”
“가보면 알게 돼.”
세 사람은 빠른 걸음으로 호출을 보낸 매니저를 찾아갔다. 토요일 밤, 유독 피곤해 보이는 매니저는 주방을 지휘하다가 호출을 받고 온 세 사람을 미심쩍은 눈으로 바라봤다.
“뭐야. 셋 다 처음 보는 얼굴인데?”
“네. 오늘 처음 출근했습니다.”
안범이 냉큼 대답했지만 매니저는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다. 그간 수많은 사람을 보아 사람 보는 눈 하나만은 좋다고 스스로 자부하는 그에겐 세 사람 다 기운이 범상치 않아 보였다. 특히 가운데에 서 있는 키가 큰 남자가 그랬다.
종업원들이 입는 천편일률적인 유니폼에 감싸인 그의 몸은 대단히 다부지면서도 관능적이었다. 굉장한 미남이지만 남자의 눈에는 날카로움이 시릴 정도로 서려 있었다. 매니저는 윤모난에게서 시선을 떼며 출근 명부를 확인하고자 마음먹었다.
“셋 다 이름이 뭐지? 오늘 출근했다고? 명부 좀 먼저 확인하고….”
“저기, ‘청소’를 원하는 방이 있다고 해서 온 건데 뭐 잘못됐습니까? 여기 있는 다른 종업원분들이 저희보고 가보라고 하던데요.”
윤모난의 말에 매니저의 눈썹이 미세하게 꿈틀댔다. 한백호의 도박판 청소는 여기 사정을 아는 종업원이라면 모두 기피하는 일이라 호출을 넣어도 다들 꽁지 빠져라 도망가기 일쑤였다.
그 바람에 일할 만한 사람을 찾느라 자칫 늦어지기라도 하면 그 방에서 더한 난리가 나기 때문에, 매니저로서는 난처한 상황이었다. 신입이라는 세 사람을 보니 어쩐지 다 덩치도 있고 비위도 약해 보이지 않았다.
셋 다 수상하기는 하지만 청소를 요구한 고객이 보통 사람도 아니고…. 또 워낙 종업원들에게 사건 사고가 많다 보니, 직원 교체가 잦아 당장 모르는 얼굴이더라도 이상하지 않았다. 실상 무슨 일이 나더라도 폐쇄될 걱정 없는 이 사교 클럽을 매니저가 나서서 염려할 이유도 없었다.
매니저는 결국 한백호 방의 좌표를 내놓으며 가는 길에 카트와 함께 청소 도구를 가져가란 말도 잊지 않았다. 그리고 따로 주문이 들어온 위스키 수십 병은 현상 유지 처리를 한 커다란 얼음통에 담아 내밀었다.
“얼른 가봐. 뭐, 몸조심하고. 특히 제일 작은 너.”
“…예? 네.”
안범이 어수룩하게 대답하자 매니저는 못마땅한 얼굴로 혀를 끌끌 차더니 돌아섰다. 세 사람은 공간 좌표가 찍힌 호출기가 인도하는 대로 카트를 밀고 나란히 걸었다. 그런데 갑자기 윤모난이 걸음을 멈췄다.
“잠깐. 너희 둘 먼저 들어가. 아무리 약에 취했어도 한백호가 내 얼굴을 못 알아볼 리 없지. 들어가서 청소부터 하고. 술 가져오는 걸 까먹었다고 하면서 다시 오겠다고 말해.”
“앗, 알겠습니다. 저희는 들어가서 안에 있는 사람 수랑 경호원은 몇 명 있는지 확인하면 되죠?”
“그래.”
윤모난이 대견하다는 듯이 씨익 웃어주자 안범이 괜히 얼굴을 붉혔다. 가마 주변 머리털이 바짝 서 있는 것을 보며 윤모난이 습관처럼 당부하려 입을 열었다.
“몸조심… 아니, 애도 아닌데 알아서 해라.”
경해국과 안범은 걱정하지 말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둘은 도로로로 카트를 끌고 한백호의 방으로 향했다.
“고객님, 부탁하신 청소 하러 왔습….”
문을 두드리고 미처 말을 마치기도 전에 안에서 잠긴 문이 열렸다. 틈새로 나온 뿌연 연기에 섞여 독한 연초 냄새가 풍겼다. 연기가 방 위쪽 공기를 꽉 메우고 있는 탓에 거의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다만 도박판을 벌이고 있는 사람들은 비교적 연기가 덜 들어찬 바닥에 앉아 있었으므로 인원수를 파악하기가 어렵지는 않았다. 경해국이 빠르게 멀쩡한 한쪽 눈으로 인원을 세는 그때, 갑자기 옆에 있던 안범이 툭툭 어깨를 쳤다.
돌아서자 파랗게 질린 안범의 작은 얼굴이 뿌연 연기 속에서도 확연히 보였다. 경해국이 왜냐며 입 모양으로 묻자 안범이 파들거리며 바닥을 가리켰다.
“…저기.”
안범이 질색한 이유가 있었다. 그리고 한백호 일당이 어떤 청소를 원했는지도. 연기 속에 희끄무레한 나신이 널브러져 있었다. 안개가 낀 것처럼 뿌연 이 공간에서 피부 위에 맺힌 핏방울이 유달리 선명했다.
죽었다고 해도 놀라지 않을 그 사람은 파들파들 경련하고 있었다. 몸이 작게 떨 때마다 발에 채워진 쇠사슬이 절그럭거렸다. 굳어 있는 안범을 두고 경해국이 먼저 나섰다.
이제 와 보니 가져온 카트 위에 검은 비닐 소재의 시체 가방이 접혀 있었다. 경해국은 그것 대신 그 옆에 있는 커다란 흰 천을 들어 상처 입은 몸을 감싸고 다리의 쇠사슬도 풀었다. 그러자 안범도 정신을 차린 듯 그를 돕기 시작했다.
“업어라.”
“네.”
감정을 억누르기 위해 사무적으로 짧게 대화를 마친 뒤에 안범이 자신보다 약간 작은 체구의 사람을 등에 업었다. 손을 받치려고 하는데 피부가 미끈거려서 확인하니 정체를 알 수 없는 역겨운 액체가 손에 묻어 나왔다. 그걸 보고 멍해져 있는데 갑자기 걸걸한 목소리가 날아들어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야, 이 새끼들아. 술은?”
“그… 양이 많아서 따로 카트를 가져오는 바람에. 바로 가져다줄… 아니 드리겠습니다.”
“아, 일 좆같이 할래?”
“…….”
“판돈 잃어서 꿀꿀한데 너라도 박아버릴까 보다. 빨리 가져와.”
동시에 탁한 웃음소리가 지뢰처럼 사방에서 터졌다. 경해국은 화를 꾹 누르며 안범을 데리고 문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그런데 돌연 누군가 벽처럼 두 사람을 막아섰다.
치파오를 개조한 것 같은 기다란 장막 같은 검은 드레스. 두 사람은 저절로 치마 사이로 드러난 탄탄한 허벅지의 옆선을 탐색했다. 가터벨트 안쪽으로 칼집이 있을 것이다. 경해국과 안범은 본능적으로 고개를 푹 수그렸다.
“연숙아!”
꿀꺽하고 안범이 침을 넘기는 소리가 다행히 한백호의 카랑카랑한 목청에 묻혔다.
“…….”
두 사람의 얼굴을 보는 연숙의 시선은 숨이 막힐 것처럼 적요했다. 그저 질식할 것 같은 기분 말고는 아무것도 허락하지 않는 시선이었다. 곧이어 한백호가 그녀의 이름을 한 번 더 부르자, 연숙이 몸을 옆으로 틀어 안범과 경해국을 지나쳐 너구리 굴로 들어갔다.
안범은 후회할 것을 알면서도 슬쩍 등 뒤를 확인했다. 연숙은 한백호의 옆으로 다가가면서 여전히 시선을 안범에게 고정하고 있었다. 순간 확 숨이 막히는 기분에 안범은 손 마디마디를 튕기듯이 떨었다. 한백호는 느긋한 말투로 연숙에게 물었다.
“어때? 바깥은?”
“네, 그게….”
탁― 그사이에 문이 닫혔다. 안범은 길게 숨을 내몰아 쉰 다음 축 늘어진 사람을 고쳐 업고 냅다 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건 경해국도 마찬가지였다. 시발! 복도에서 손수건을 주워준 여자가 한백호 경호원이었다니! 일이 꼬이려 해도 이렇게 꼬일 수가. 두 사람은 후다닥 윤모난이 기다리고 있을 복도로 뛰어갔다.
다시 돌아간 복도에서 윤모난을 보자마자 두 사람은 이상하게도 안도감이 들었다. 윤모난은 두 사람이 데려온 사람의 상태를 확인하고 바로 가이딩을 하기 시작했다. 그 덕분에 다행히 경련이 조금은 멎었으나, 몸에 입은 상처는 한 달 넘게 병원에 누워 있어야 하는 수준이었다.
한백호의 행태가 도가를 넘었다. 같은 서곡에서 일하는 대원에게 이런 무지막지한 행동을 하다니. 서곡에 있으면서도 이런 일은 듣도 보도 못한 안범은 피해자의 상태를 보고 그저 어떻게 이럴 수가 있냐는 말만 되뇌었다.
“소싯적 하던 개 같은 버릇 못 버린 거지. 한백호 그 새끼는 훈련 학교 다닐 때부터 이랬어.”
“신고하죠, 형….”
“소용없어. 여기 오는 사람은 다 한백호가 만든 마약 중독자들이야. 신고하면 이 사람만 마약 복용으로 잘리고 한백호는 털 한 올 다치지 않겠지.”
“마약이요?”
“그래. ‘쓰레드’라고 한백호가 직접 만든 마약이야. 세간에는 잘 안 알려져 있는데 중추신경계 기능을 저하시켜 인지 기능을 떨어트리는 약이라, 포스트의 이능력에도 영향을 미쳐서 중독되면 이 약 없이는 이능력을 아예 못 쓰는 상태가 돼.”
“포스트에게 이능력을 못 쓰는 건 죽는 거나 마찬가진데. 어떻게 그런….”
“선택의 여지를 없애야 이 약에 매달리게 만들 수 있으니까. 예전에 한백호 방에서 모두 수거한 적 있는데 역시 미봉책에 불과했군.”
윤모난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두 사람에게 말했다.
“얘는 너희가 병동에 데려다주고 와.”
“어쩌시게요?”
“방 안에 몇 명이나 있지?”
“한백호 포함해서 열다섯 명 정도…. 거의 약에 꼴아 있는 것 같습디다. 그런데 경호원은 한 명밖에 없던데, 생각보다 일이 쉬울 것 같은데요.”
그건 뭘 모르고 하는 소리였다. 열다섯 명에 경호원 하나라니, 척 봐도 어려운 상대임이 분명하지 않은가. 쓸데없이 머릿수를 늘리는 대신 한 명으로도 자신 있다는 뜻일 테니. 윤모난은 위스키병이 든 카트의 손잡이를 잡았다.
“가.”
“혼자 가시려구요?”
“너희가 병동에 빨리 다녀오면 혼자가 아니게 되겠지?”
잡을 새도 없이 윤모난은 카트를 밀고 저만치 가고 있었다. 안범은 당혹스러운 얼굴로 바닥에서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는 사람을 봤다. 그때 경해국이 안범의 어깨를 떡하니 잡았다.
“안 팀장, 네가 병동에 데려주고 와. 내가 따라갈 테니까. 알겠지?”
“…네.”
안범을 보낸 뒤에 경해국은 바로 윤모난의 뒤를 쫓았다. 하지만 한발 늦게 쫓아가는 사이 그는 길을 잃고 말았다.
그렇게 30분가량을 헤매다니던 중 갑자기 포스트의 예민한 후각으로 어떤 냄새가 파고들었다. 피 냄새. 경해국은 그 냄새를 쫓아 달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눈에 익은 길과 익숙한 구조가 보였다. 여기다.
“윤…!”
맞다. 안범이 성씨랑 이름을 부르면 안 된다고 했지! 경해국이 제 입을 막는 그때.
“윤모난?”
낭랑한 목소리가 경해국이 집어삼킨 그 이름 석 자를 대신 밖으로 끄집어냈다. 검은 차이나 드레스를 입은 20살 남짓의 여자가 윤모난과 대치하고 있었다. 경해국은 부서진 문을 지나쳐 방 안으로 들어서면서 연기 속에 서 있는 두 사람을 지켜봤다.
30분 먼저 도착했을 뿐인데 이미 윤모난은 피를 흠뻑 뒤집어쓰고 있었다. 무아지경에 빠진 얼굴로 턱 끝에 맺힌 핏물을 닦고 허공에 털어내는 그의 주변으로는 이미 여섯 구의 주검이 널려 있었다. 잔인하게 난자당한 시체들 중에 한백호는 없었다.
“맞으시군요. 얘기 많이 들었습니다.”
“누구?”
“저는 한연숙입니다.”
연숙은 차분하게 자신을 소개하더니 피 웅덩이를 사뿐하게 밟으며 뒤로 물러났다. 어디선가 불어오는 바람에 그녀의 치맛자락이 펄럭였다. 윤모난은 한백호의 경호원인 그녀에게 물었다.
“한백호는?”
“제가 보호해드리는 중입니다.”
그 말을 끝으로 에스퍼가 이능력을 쓸 때 느껴지는 에너지가 증폭되며 공간 전체로 퍼졌다. 곧이어 바람이 전보다 더 거세게 불어닥치더니 너구리 굴의 연기가 서서히 걷히고 한 치 깊이를 알 수 없는 커다란 공간이 드러났다. 경해국은 돌연 물리법칙을 왜곡하는 방의 크기에 놀라 침을 꿀꺽 삼켰다.
연숙은 공간 창조가 가능한 공간계 에스퍼였던 것이다. 시간계 능력처럼 공간계 능력을 가진 에스퍼를 상대하기 까다로운 점은 그들이 보편적인 물리법칙을 위반하기 때문이다. 가이딩은 원거리에서도 가능하지만 엄연히 물리적인 범위가 존재했다.
윤모난이 이능력을 제압하려 할 때마다 연숙은 순식간에 둘 사이를 벌렸고, 다음 순간 바로 옆에서 불시에 공격을 해왔다. 가이딩 역시 일종의 이능력이므로 쓰면 쓸수록 체력이 고갈되기 마련이다. 연숙은 마치 먹이를 눈앞에 둔 여유로운 암사자같이 윤모난의 체력이 떨어질 때를 노리고 있었다.
자유자재로 변형 공간을 오가면서 그녀는 순식간에 윤모난을 향해 달려들었다. 윤모난은 벌써 몇 번째 매섭게 허공을 가르는 연숙의 다리를 막아내며 반격을 시도했다.
하지만 보다 유연한 신체를 가진 연숙은 그의 손을 발로 쳐내 방어한 뒤 또 능력을 써서 멀어졌다. 이 정도 되니 윤모난도 그녀의 실력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연숙은 천재였다. 천재란 소리를 들으며 자란 자신의 20살 때 기량보다 뛰어났다.
“젠장, 팀장님!”
“경해국?”
연숙은 또다시 왜곡된 공간의 어둠 속으로 몸을 감췄다. 어디선가 울려오는 경해국의 목소리에 윤모난은 칼자루를 세게 고쳐 잡았다. 또다시 빌어먹을 미로에 갇힌 기분이다. 이번에는 환영이 아니라 진짜 미로지만. 윤모난은 언제 튀어나올지 모르는 연숙 때문에 신경을 곤두세우며 파동을 읽기 시작했다.
근거리에는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연숙이 모든 이들을 떨어트려놓았기 때문이다. 이 공간의 지배자는 그녀였으므로 이대로라면 상황이 윤모난에게 너무 불리했다. 승기를 잡으려면 막기에 급급할 것이 아니라 흐름을 잡아야 했다.
윤모난은 제 팀원들이 언젠가 썼다던 유치한 계략을 써먹기로 했다. 그는 오른쪽으로 달리며 외쳤다.
“경해국!”
“…….”
“경해국 어디 있어! 해국아!”
순간 온몸을 전율케 하는 아주 강한 파동이 빠르게 다가오는 것이 가이드에게 느껴졌다. 하지만 충분히 등을 내줘야 한다. 섣불리 잡으려 하면 안 될 것이다. 윤모난은 반대로, 더 반대로 달렸다.
“해국아! 내 동생!”
절절한 목소리가 한층 더 끓어올랐을 때 칼끝이 공기를 가르며 등 뒤로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순간 윤모난이 몸을 돌려 뒤로 손을 뻗었다. 손아귀에 뻣뻣한 옷감이 떡하니 잡혔다.
경직된 몸이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하자 윤모난은 최대한의 능력을 끌어내 상대의 파동을 제압했다. 그러자 드디어 연숙의 입가가 비시시 찢어졌다. 그녀는 칼을 쥔 손을 먼저 밑으로 내렸다.
연숙은 감히 자신을 잡은 상대를 보며 즐거워하고 있었던 것이다. 방계라고는 하지만 그녀도 고섬 한씨의 일원이었다. 적요하던 눈동자에 일순 불꽃이 이는 듯했다.
“선배님 소문은 들었습니다. 서로 이능력 없이 순수하게 겨뤄보는 건 어떠세요?”
“연숙이라고 했나?”
“네, 선배님.”
“그래. 그러든가.”
“그 전에 이능력 억제부터 풀어주십시오.”
다른 사람들이 방해하지 않도록 최대한 고립시키겠습니다, 선배님. 연숙이 예를 갖춰 부탁하자 윤모난은 능력을 억제한 것을 풀어주었다.
이윽고 둘만을 위한 대련장으로 적합한 크기의 공간이 만들어졌다. 연숙은 그 즉시 자신의 허벅지에 달린 칼집에서 30cm 정도의 서슬 퍼런 중형 나이프를 꺼내 들었다.
“훈련 학교 나왔어?”
윤모난의 질문에 연숙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71기 졸업생입니다. 선배님의 소문은 익히 들었습니다.”
“그래?”
“다들 잘생겼다고 칭찬하던데요. 하지만 대련에 있어서만큼은 선배님의 형님분들에겐 못 미치는 실력이었다고.”
짐짓 예의를 갖추는 척하는 그녀의 말에 윤모난은 웃음을 터뜨렸다.
“시건방 떨지 말고 얼른 칼이나 잡아. 내가 오늘 죽여야 할 사람이 많거든.”
“…….”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땅을 차고 서로를 향해 달려들었다. 둘 다 한 치의 낭비도 없는 동작이었다. 그러고 나서는 온통 붉은빛이었다. 농도가 짙은 검붉은 살기가 두 사람을 감쌌다. 숨소리마저 제어하면서 두 사람은 최선을 다해 싸웠다.
챙―! 하고 칼이 부딪치는 소리. 그리고 육중한 몸이 갈라지는 소리와 함께 터지는 작은 신음 소리. 싸움이 길어질수록 각자의 숨이 점차 거칠어졌다. 상대를 향하는 칼이 빠르게 맞부딪치면서 포효했다. 칼날이 공중에서 춤출 때마다 공기가 처연한 울음소리 같은 것을 토해냈다.
마침내 푹, 하고 근육에 칼이 꽂혀 들어가는 소리가 상황을 정지시켰다. 동시에 진득한 피비린내가 훅 피어올랐다. 동시에 윤모난은 비틀대며 뒤로 물러섰다.
“…쿨럭!”
기침인 줄 알았는데 피가 가래에 섞여 튀어나왔다. 윤모난은 최대한 침을 모아 입안의 비린 맛을 모두 바닥으로 뱉었다. 한 걸음씩 내디딜 때마다 칼에 찔린 허리에서 펌프질하듯 피가 쏟아졌다.
“하, 젠장.”
연숙은 정확히 급소를 노렸고 공격은 정확했다. 윤모난은 깊숙이 찔린 자신의 허리를 손으로 막으며 숨을 크게 내쉬었다.
“까닥하면 질 뻔했잖아.”
결코 엄살이 아니었다. 정말로 연숙은 거의 그를 죽일 뻔했다. 한 끗 차이로 그녀가 먼저 죽었을 뿐. 사선(死線)이 겨우 각도를 틀어 윤모난을 비껴갔다. 그를 이 정도까지 밀어붙인 상대는 작약 이후로 처음이었다. 물론 그녀의 천재성에 감탄할 여유는 없었다.
윤모난은 발을 디디며 꿈틀거리는 연숙의 시체를 지나쳐 앞으로 걸었다. 한백호를 죽여야 이곳에 온 의미가 있었다. 더욱이 연숙에게 당한 부상으로 슬슬 시야가 희뿌옇게 번지기 시작하니 서둘러야 했다. 윤모난은 자신의 칼을 연숙의 심장에 꽂아 넣었다는 사실조차 잊고 한백호를 찾아 나섰다.
“…한백호!”
연숙이 만든 이 미로 같은 공간이 얼마나 큰지, 어떤 구조인지 전혀 알 길이 없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영원히 이곳에서 헤매다가 죽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날짐승처럼 예민한 감각을 가진 윤모난은 적의 체향을 감지했다. 연숙은 한백호를 경호하기 위해 그를 가장 깊숙한 곳에 숨겨놓았을 것이다. 걸음을 뗄 때마다 바닥에 핏방울이 점점이 떨어졌다.
얇은 소재의 셔츠는 피에 젖어 이미 척척했다. 윤모난은 하는 수 없이 셔츠를 벗어 길게 돌돌 말아 허리를 동여맸다. 그렇게 대충 상처를 지혈하고 있는데 가까운 곳에서 또 칼날이 부딪치는 소리가 울렸다. 팔이 짧은 안범은 사시미칼을 휘두를 때 보통 사람보다 더 가볍고 빠르게 휘두른다. 이 박자감은 안범이 분명했다.
방향이 잡히자 몸이 탄력을 받은 듯 나아갔다. 복도 끝 방이다. 양쪽으로 열리는 문을 열고 들어서자 진한 피비린내가 훅 끼쳤다. 손에 칼을 들고 안범과 한백호가 뒤엉켜 있었다. 시퍼런 날이 안범의 얼굴 옆으로 아슬하게 비켜나는 것을 발견한 윤모난이 목적조차 잊고 크게 소리쳤다.
“안범!”
“…형.”
동시에 한백호가 바닥에 꽂힌 칼을 빼내더니 안범을 옆으로 밀어내며 말했다.
“핑키 왔어?”
대답할 시간이 없었다. 한백호는 순식간에 칼의 각도를 바꿔 들었다. 그의 손을 타고 칼이 물결을 탄 듯 회전했다. 반동을 받은 칼날이 자신에게 처박히기 전에 윤모난은 다리를 뻗어 한백호의 가슴을 걷어찼다.
명치를 정통으로 맞고 물러난 한백호가 이어지는 발길질을 팔로 방어하며 반격의 틈을 노렸다. 순식간에 발이 붙들린 채로 윤모난이 벽으로 날아갔다. 와장창 무언가 깨지는 소리와 함께 바닥으로 떨어진 윤모난은 자신에게 쏟아지는 서슬 퍼런 칼을 몸을 돌려 겨우 피했다.
그러곤 손에 잡히는 대로 유리 조각을 움켜쥐곤 한백호의 뒤꿈치를 베어냈다. 얼굴로 확 튀는 선혈과 함께 한백호가 비명을 지르며 뒤로 두어 걸음 물러섰다.
“아아으…!”
“하아, 하아….”
몸을 일으킬 수 있는 시간은 벌었다. 윤모난은 깊게 베인 뒤꿈치를 감싸 쥐고 있는 한백호의 등 뒤에서 달려들어 팔로 그의 목을 죄었다. 이윽고 사형장에서나 들을 법한, 억센 밧줄로 두꺼운 목을 조이는 소리가 들렸다.
7년 전에 똑같은 방법으로 한백호를 기절까지 시켜 대련에서 이겼던 적 있다. 윤모난은 이번에는 아예 숨통을 끊어낼 생각으로 팔 근육에 힘을 주고 목을 세게 조였다. 그러나 꺽꺽대는 소리와 함께 품 안에서 버둥거리던 한백호가 겨우 바닥을 더듬어 떨어져 있던 자신의 칼을 손에 넣었다.
“형! 피하세요!”
때맞춰 안범이 비명을 지른 덕분에 윤모난은 적시에 몸을 물릴 수 있었다. 하지만 센 바람이 스치고 지나가는 느낌이 들어 옆얼굴을 만져보니 손에 피가 묻어 나왔다. 바짝 날이 선 칼끝에 귓바퀴를 얕게 베인 것이다.
“카악 퉤―!”
숨을 몰아쉬며 바닥에 피가래를 뱉는 한백호와 거리를 넓히면서 윤모난은 자신이 지금 빈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안범, 네 칼 좀 빌리자.”
“네!”
안범이 재빨리 손에 쥐고 있던 사시미칼을 던졌다.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온 칼을 낚아채며 윤모난은 얼굴에서 흘러내리는 땀을 손등으로 닦았다. 한백호 역시 전열을 가다듬는 듯 성급하게 공격하지 않고 탐색하는 중이었다.
허리가 깊게 찔린 탓에 윤모난은 커다란 장애를 떠안고 싸움을 시작한 셈이다. 피를 내뿜는 몸의 온도가 점점 차갑게 떨어지고, 심장은 곧 멈출 것처럼 거세게 요동쳤다. 그 상처를 발견하고 사색이 된 안범을 본 윤모난이 그를 안심시키려는 듯 문득 딴소리를 했다.
“안범, 한백호 상대로 이만하면 잘 싸웠어.”
“…네.”
“하지만 체격이 큰 상대와 싸울 때는 불리할 수밖에 없으니까. 반복 동작을 연마해서 속도를 높이고 잔 동작은 없애도록 해. 알겠어?”
안범은 입을 뻐끔거리기는 했지만 미처 대답할 여유가 없었다. 윤모난이 먼저 칼끝을 세운 채로 한백호의 공격 범위 안으로 들어간 것이다. 안범이 봐도 너무 섣부른 행동이었다. 체력이 떨어지기 전에 서두르려는 건가? 한백호의 칼날이 윤모난의 목덜미를 향하는 것을 보며 안범은 지레 눈을 꽉 감았다.
하지만 예상과는 달리 끔찍한 소리가 이어지지는 않았다. 다시 눈을 뜨자 몸을 틀어 한백호의 등 뒤로 휘감듯 도는 윤모난이 보였다. 그리고 안범은 저의 걱정과 우려가 모두 쓸데없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형!”
윤모난은 호흡을 가라앉혔다. 호흡을 통제하지 못하면 이 싸움에 승산은 없다. 아드레날린이 과도하게 분비되어 상처의 고통마저 잊고 날뛰는 신체를 차갑게 식혀야 했다.
몸은 다루기 까다로운 현악기와 유사하다. 적당한 압력과 진동으로 활을 켜야 정확한 음이 흐른다. 사선에서의 싸움은 공격과 방어에 한 치의 낭비도 허용하지 않고, 정확한 음을 내지 않으면 죽음뿐이다. 무아지경 중에서도 어떻게 활로 켜고 손가락을 놀려야 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는 연주자처럼 정신과 호흡을 유지해야 한다.
이 순간만큼은 한 가지 사실에만 몰두하자. 먼저 죽이지 않으면 죽는다. 생과 사를 관류하는 이 단순한 진리는 변덕스러운 세상 속에서도 한 번도 그를 기만한 적 없었다. 따라서 윤모난은 그 진리의 추종자였다.
“커억―!”
손으로 더듬었을 때 갈비뼈가 끝나는 푹신한 부분에 칼이 깊숙이 빨려 들어갔다. 이윽고 짐승을 도축할 때처럼 근육을 쑤시고 가르는 감각이 칼끝과 윤모난의 손을 타고 오롯이 전해져왔다. 한백호의 내장이 터져나가고 찢긴 장기에 콸콸 피가 들어차는 것 또한 느껴졌다.
“한백호.”
푹. 더 깊이 칼을 박아 넣으며 부르는 음성에 고통으로 이가 빠드득 갈리는 소리가 대답을 대신했다. 가장 고통스러운 부분을 찌르긴 했으나 치명상까지는 아니었다. 손목을 돌려 칼을 90도로 꺾자 파드득거리며 한백호의 몸이 튕기듯 경련했다. 이래야 치명상이 되는 거다.
“너 나한테 빚진 게 있지?”
“…이 개새끼가―!”
“네 머리 나한테 빚졌잖아. 갚아야지.”
깊숙이 박힌 칼을 끄집어내자 피가 분수처럼 솟구쳤다. 흩뿌려진 피가 조각상에 튄 빨간 물감처럼 윤모난의 잘생긴 얼굴을 적셨다. 한백호의 위에서 몸을 물린 윤모난은 들고 있던 칼을 이리저리 굴려가며 생각에 빠졌다.
안범의 칼은 길이가 짧아 한 사람의 목숨을 끊기엔 괜찮을지는 몰라도 빚진 머리를 회수하기에는 힘들었다. 윤모난은 주변을 둘러보다가 적절한 물건을 발견했다. 그곳으로 향하려는데 옆방에서 또 우르르 발길질 소리와 비명 소리가 벽을 넘어 건너왔다. 저쪽에 있는 건 아마 경해국일 것이다.
“안범, 가서 도와.”
“네? 네.”
내내 구석에서 혈전을 지켜보던 안범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서둘러 경해국이 불을 지르고 있는 옆방으로 뛰어갔다. 마침내 이곳에는 바닥에서 신음하며 뒹구는 한백호와 윤모난 둘만이 남았다. 한백호는 제 상처를 바라보다가 위스키가 담긴 카트로 가는 윤모난에게 물었다.
“…핑키야, 얼음은 뭐 하게. 마지막으로, 큽, 형한테 술이라도 말아주려고?”
윤모난은 제 허리에 동여맸던 셔츠를 풀어 성인 남자 주먹 크기로 카빙한 단단한 위스키 얼음 여러 개를 담아 단단하게 묶은 뒤에 다시 돌아왔다.
“딱히 둔기가 없어서.”
“푸하, 참 창의력도 좋다. 씨발, 얼음으로, 머리 깰 생각을 하고.”
“얼음 가지고 노는 아저씨랑 작당 모의 하다가 이렇게 됐으니 꽤 상징적이지 않나?”
“시발, 그러네. 무정원, 그 씹새끼.”
한백호는 피가 식도를 따라 역류해 입안에 고인 듯 그르렁거렸다. 폐에도 핏물이 차 호흡이 힘들 테니 지금 꽤 고통스러울 것이다. 하지만 윤모난은 그를 단숨에 죽여 고통으로부터 구제해줄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윤모난은 제 몸에 남은 흉터처럼 한백호의 머리를 박살 내서 형체도 없이 뭉그러뜨릴 생각이었다. 부모마저 제 자식이 맞는지 못 알아보게 만들어줄 것이다. 이제 자신의 운명을 예감한 듯 한백호가 눈에서 살기 대신 비릿한 흥미를 담은 채로 물었다.
“나 다음은 무정원이지?”
“…그래.”
“그럼 내가 핑키 너한테 도움이 될 만한 재미있는 얘기나 하나 해줄까?”
“무슨 재밌는 얘기? 들었는데 재미없으면 머리 잘라서 바로 네 부모한테 보낸다?”
“씨이발, 그건 참아주라. 노인네들 놀라 뒤진다고. 너도 재밌을 거야. 왜냐하면 핑키 니네 형들이랑 무정원 얘기거든.”
‘작약, 이 천하의 괴물 새끼들’ 하며, 한백호는 킬킬킬 길게 웃었다. 사람을 판돈으로 거는 악인의 입에서 형들의 이름이 더럽혀지자, 셔츠 자락을 쥐고 있던 윤모난의 손의 마디가 희게 변했다.
하지만 한백호를 멈추게 할 수는 없었다. 형들의 책에서 발견한 화투패의 수수께끼에 대한 해답을 얻어야 한다.
“네 형들이 무정원 아내를 죽인 건 알고 있나?”
“…뭐?”
“거봐. 재미있는 얘기일 거라 했지? 크흐흐. 순진한 핑키 너만 모르고 있던 얘기가 있다 이거야.”
내내 냉정함을 유지하던 윤모난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었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한백호가 제 주머니에서 작은 봉투 하나를 꺼내 붉은 알약을 입에 집어넣었다. 살기 위한 몸부림이라기보다는, 미처 하고 싶은 말을 못하고 숨이라도 끊어질까 염려하여 고통을 완화시키는 마약을 삼킨 것이다.
“어느 날 무정원 아내가 애를 낳고 몸을 완전히 회복하지도 않은 채로 몰래 집을 나갔다지? 연구조 에스퍼로 잘 나가던 여자니 멍청하지도 않았을 텐데, 쪼르르르 달려 나간 다음에 어디서 발견됐게?”
“…….”
“남경으로 가는 기차에서 시체로 발견됐다더라. 칼로 난자당해 죽었다던가.”
“…하고 싶은 말이 뭐야?”
“어이, 핑키. 감이 안 와? 그 열차에 니네 형 윤약이 타고 있었어.”
그녀가 죽은 장소와 시간을 정확히 아는 인물들은 매우 소수였다. 한백호 역시 가주가 수집한 첩보를 들어 아는 거였다.
“무정원 아내인 그 여자가 윤약을 얼마나 열렬히 짝사랑했는지. 훈련 학교 위 학번들은 다 아는데 말이지. 물론 뱀 먹이에 불과한 핑키 넌 들은 바 없겠지만.”
“…….”
“뭐, 네 둘째 형이 꽤나 꼴리게 생기긴 했잖냐. 여자가 매달릴 만하지.”
“닥쳐. 고인을 욕보이지 마.”
“핑키야. 들을 귀도 없는 귀신 따위 욕보여서 내가 무슨 재미를 얻겠니. 난 그냥 네 표정이 웃겨 미치겠는데.”
한백호는 대놓고 비웃음을 흘렸다. 7년 전도 그렇지만 죽은 형들 얘기만 나오면 비 맞은 개새끼처럼 꼬리를 내리는 게 윤모난이었다. 나약한 놈. 그때, 갑자기 한백호의 목덜미로 발이 콱 들어오며 낮은 목소리가 그 위로 떨어졌다.
“하나도 재미없는데.”
“큭―! 핑키, 네가 이 지랄을 겪게 된 건 무정원 때문이 아니라…. 네 형들 때문이라는 게 안 웃긴다고?”
목을 짓밟은 발에 꽉 체중이 실렸다. 언제 혼란스러워했냐는 듯이 윤모난의 얼굴은 냉정을 되찾고 살기를 뚝뚝 흘리고 있었다. 하지만 한백호는 그 냉정함 뒤에 숨은 불안의 냄새를 맡았다.
오늘 자신의 목숨을 가져갈 수는 있겠지만 윤모난은 곧 저 불안 때문에 모든 것을 망치게 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7년 전 윤모난을 고문할 때의 쾌감이 생생하게 되살아나는 듯했다. 누군가의 육체를 훼손하는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쾌감이었다.
“…그런데 핑키야, 네 형, 윤약, 그 괴물은 어떻게 됐냐?”
“…….”
“무간에 가서 네가 직접 죽이고 온 거냐?”
마지막 도발이랍시고 빈정거리며 눈을 치뜬 한백호는 당황하고 말았다. 윤모난의 얼굴이 인간적인 표정이랄 것이 전혀 사라진 가면같이 변했기 때문이다. 그 모습이 어쩐지 괴이하기까지 해서 되레 물은 사람이 당혹스러워졌다.
“넌 그 얘기 꺼낸 걸 후회하게 될 거다.”
한백호의 얼굴이 점차 굳었다. 그는 사악한 인간일지언정 비굴하지는 않았고, 윤모난에게 살려달라고 비는 것은 일생일대의 치욕임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윤모난의 말을 들은 그의 두 눈에는 어느새 본능적인 두려움이 스몄다.
그리고 이번에 그것을 음미하는 쪽은 윤모난이었다. 곧이어 묵직한 얼음이 든 셔츠가 허공에서 포물선을 그리며 한백호의 머리를 향해 날아갔다. 쿵, 쿵, 둔탁하게 부딪히는 소리가 계속 이어졌다.
그 순간 건너편 방에 있던 안범과 경해국은 누군가의 단말마를 들었다. 겨우 한백호 일당을 때려눕히고 있던 참에 둘은 눈을 마주쳤다.
“모난 형…!”
쏟아지는 공격을 어렵사리 불로 막아낸 경해국이 공간 전체에 불을 지를 기세로 화염을 휘둘렀다. 그들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모조리 불길 속에 갇혀 검은 그림자가 되자 경해국과 안범은 곧장 윤모난에게로 돌아갔다.
문을 열고 들어간 방 안은 난장판이었다. 형체를 알 수 없이 뭉그러진 머리의 주인은 추측건대 한백호였다. 그리고 그 옆에는 윤모난이 바닥에 얼굴을 묻은 채로 쓰러져 있었다.
안범이 얼른 윤모난의 생사부터 확인했다. 그는 겨우 숨이 붙어 있을 뿐이었다. 연숙에게 당한 자상이 탈이 난 모양이었다. 상처를 손으로 압박하려는데 윤모난의 명치에 새겨져 있던 뱀 문신의 머리가 한백호의 머리처럼 뭉그러져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어쨌건 복수는 한 셈이었다. 이제부터는 지체할 틈이 없다.
“안 팀장! 얼른 빠져나가자.”
“네!”
비교적 몸집이 큰 경해국이 윤모난을 넘겨받아 등에 업었다. 커다란 덩치를 등에 업자 절로 곡소리가 났다.
“우왁―! 씨팔, 왜 이렇게 무거워! 무구원 그 새끼보다 더 무겁네.”
“얼른요, 선배님. 얼른 빠져나가야 해요! 늦겠어요!”
“젠장…!”
안범과 경해국의 임무는 지금부터가 본격적인 시작이었다. 그들은 최대한 빨리 윤모난을 데리고 사교 클럽을 빠져나가 은신처로 향해야 했다.
무구원은 애초에 윤모난이 다치는 일을 계산에 넣지 않았다. 그래서 당연히 한백호를 죽이고 그의 힘으로 사교 클럽을 빠져나올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고, 안범과 경해국은 그에게 접근하는 해충들을 막기만 하면 될 줄 알았다.
그러나 연숙의 존재가 변수였다. 윤모난을 끝까지 밀어붙일 만큼 강한 에스퍼가 한백호 따위를 경호하고 있을 줄 누가 알았을까. 경해국은 등에서 무겁게 늘어지는 윤모난을 여러 번 고쳐 업으면서 안범과 함께 복도를 내달렸다.
“멈추세요, 경 선배님!”
“…왜?”
“모난 형 피가 너무 많이 나요. 이러다 죽겠어요. 응급처치부터 해야겠어요.”
자신의 등이 피로 흠뻑 젖은 것을 깨달은 경해국이 윤모난을 내려놓았다. 안범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손을 뻗어 허리의 자상에 현상 유지 능력을 썼다.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능력은 없지만, 지혈만 되어도 지금으로서는 감사한 일이었다.
“무사히 기차에 탈 수 있을까요?”
“방법이 없진 않지. 이왕 이렇게 된 거 머리를 쓰자고!”
“…네?”
경해국은 두리번거리다가 아까 한백호의 방을 청소하러 들어갔을 때 끌고 들어간 카트를 가져왔다. 그리고 아까 쓰지 않은 시체 가방에 윤모난을 집어넣고 카트에 실었다. 둘은 복도를 빠져나갔다.
“어이, 거기 둘.”
살금살금 플로어를 지나가려는데 누군가 둘을 불러 세웠다. 안범이 굳은 얼굴로 돌아서자, 한백호 방의 청소를 부탁했던 매니저가 팔짱을 낀 채로 서 있었다. 다행히 사교 클럽 안이 시끄럽고 복잡한 탓에 깊숙한 곳에 위치한 한백호 방에서 그 난리가 난 건 아무도 모르는 눈치였다.
하지만 들키는 건 시간문제였다. 안범은 침을 꼴깍 삼키며 자신에게로 다가오는 매니저를 기절시켜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아니, 청소하러 들어간 지가 언젠데 지금에서야 그걸 가지고 나와?”
“…손님께서 판이 안 끝났다고, 기다리라고 하셔서요.”
“죽은 거야?”
매니저가 시체 가방을 확인하더니 얼핏 그렇게 물었다.
“네.”
“젠장, 그럼 이쪽이 아니라 뒤로 나가야지. 다른 사람 눈에 보일 일 있어? 쯧쯧.”
“네!”
사교 클럽에 다른 출입구가 있다는 건 처음 듣는 소리였다. 이곳에 손님으로 드나드는 사람만 몰랐을 뿐, 역시 직원들이 다니는 통로가 따로 존재했던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서곡에서 이쪽으로는 공간 이동 능력으로 들어온 터라 사실상 사교 클럽이 정확히 어디에 위치해 있는지는 모른다는 점이었다.
좁은 통로를 지난 세 사람은 시체 가방을 끌고 낡은 철문 앞에 당도했다. 매니저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열쇠로 문을 밀어서 연 다음 바깥을 가리켰다.
“밖에 아무 데나 가져다 버려.”
사람을 쓰레기 다루듯이 취급하는 말을 코앞에서 들으니 뒷골이 당겼다. 이런 식으로 한백호 일당이 몇 명이나 대원들을 죽여버렸는지 모를 일이다. 이제라도 죗값을 치러 다행이라 할 수밖에.
다행히 매니저는 두 사람에게 처리를 맡기고 먼저 안으로 들어갔다. 카트를 밀고 나온 곳은 어두운 골목이었다. 코를 찌르는 악취가 나는 검은 웅덩이가 뒷골목 군데군데 파여 있었고, 그 구정물 위로는 색색의 네온사인이 별세계처럼 비쳤다.
“여기가 대체 어딜까요, 경 선배님?”
“…글쎄다.”
경해국은 목을 빼서 위에 달린 간판을 확인하다가 이내 표정을 굳혔다. 간판 아래 적힌 전화번호의 지역 번호를 보고 이곳이 어디인지 깨달은 것이다. 아마도 수도 외곽 지역의 슬럼가인 듯했다.
그리고 예상은 곧 확신이 되었다. 사교 클럽이 있는 골목을 벗어나자 곳곳에 사람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약에 취해 자는 것 같기도 했고 죽은 것 같기도 했다. 이런 곳에 시체를 버려도 누구 하나 신경조차 쓰지 않을 터였다.
“…염병, 개판이네. 이게 쓰레기장이야, 시체 전시장이야. 씹.”
그런데도 안범은 비교적 침착한 얼굴이었다.
“제 고향에도 이런 곳이 있었습니다. 삶을 포기하고 절망에 빠져 사는 사람들이 적은 돈으로 식량을 사는 대신 약을 사더군요. 정작 한백호 같은 사람들은 그런 사람들한테 약을 팔아 떵떵거리며 잘살았구요. 너무 불공평합니다.”
“세상이 불공평한 거 이제 알았냐?”
“그래도 선배님들은 가난하게 살아본 적은 없으시지 않습니까. 끼니 걱정 같은 건 해본 적 없으시죠?”
“…뭐?”
“그거 아십니까? 반도에서 트랜스에게 잡아먹혀 죽는 사람보다 굶어 죽는 사람이 더 많다는 거요.”
그 사실까지는 몰랐던 경해국이 입을 꾹 다물자, 안범이 이럴 때가 아니라는 듯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 이럴 때가 아니죠. 선배님, 얼른 개똥이 형 데리고 이곳을 빠져나가야죠.”
“어, 어 그래.”
시체 가방은 산 사람을 넣기에는 조금 불길한 물건이었지만 생각보다 편리해서 피떡이 된 부상자의 정체를 숨기기에도 용이했다. 가방에 담긴 윤모난을 다시 어깨에 둘러멘 두 사람은 여전히 어둠이 짙은 거리를 내달렸다. 그러나 두더지 소굴 같은 좁은 골목 골목은 도저히 끝이 나질 않았다.
둘은 지친 숨을 내몰아 쉬며 골목 이곳저곳을 둘러보았다. 한곳에 오래 지체하는 것은 결코 좋지 않았다. 얼른 이동할 수 있는 수단을 구해서 윤모난을 실어 은신처로 가야 한다. 안범과 경해국은 무구원이 편지에 쓴 내용을 떠올렸다.
안범, 경해국.
이 편지는 읽은 뒤에 바로 태우고 내용은 직접 전달하기를.
해충들이 시체 냄새를 맡고 몰려들기 시작할 테니 이제 반도에 안전한 곳은 없어. 그 사람을 설득해 대륙을 횡단하는 열차를 타게 해라. 설득이 안 돼도 목숨을 걸고 해내야 한다. 조건은 내 형님의 목숨이야.
무간에서 죽은 신입 대원들, 그리고 상관없이 희생된 자들의 죗값을 치르기 위해 내가 직접 형님의 목숨을 거두겠어. 그 사람에게 더 이상 초대장과 관련된 일은 쫓지 말아달라고 해라. 복수할 기회를 빼앗을 자격이 없다는 건 알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모두를 위한 방법은 이것밖에 없다.
이리를 노리는 것이 있어. 가장 위험한 덫이지. 이리가 걸어 들어올 수밖에 없도록 이미 설계를 끝냈을 거다. 이대로라면 또 이용만 당하게 될 거야.
그러니 이 말을 전해줘. 나에게 당신을 대신할 기회를 주면, 이번만큼은 실망시키지 않겠다고.
“윤 팀장은 기절했으니 이대로 기차에 실어 그 은신처로 보내면 끝 아니야?”
“그러려면 일단 여기를 벗어나야죠!”
“아니, 여긴 무슨 길이 이렇게 복잡해?”
세 사람의 머리 위로 번쩍번쩍한 간판들이 끊임없이 늘어서 있었다. 그러나 거리에는 전혀 오가는 사람이 없고 황량하기만 했다. 이 거리 전체가 하나의 유령도시 같은 느낌이었다.
간판은 번쩍번쩍 불을 밝히고 있었으나 건물들은 모두 비어 있었다. 마치 연극의 무대 세트나 독재 국가에서 지은 눈속임용 건물처럼. 두 사람은 어느새 이곳에서 떠드는 것은 자신들뿐이고, 사위가 무서우리만치 고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흔한 노랫가락조차 없는 환락가가 과연 존재할 수 있을까?
그 순간 뒷덜미 털이 바짝 서는 느낌에 안범은 서서히 고개를 돌렸다. 거리에 널브러져 있던 시체인 줄 알았던 부랑자들이 어느새 몇 걸음 뒤에 서 있었다. 발걸음을 죽이고 이곳까지 쫓아온 그들의 검은 손이 그들을 향해 뻗어왔다.
“안범, 달려!”
순간 경해국이 홱 뒷덜미를 잡아끌었다. 두 사람은 사정없이 달렸다. 그러나 추격자들은 사방에서 나타났다. 이윽고 검은 손들이 세 사람을 잡기 위해 덮쳐왔다. 무간에서 트랜스를 봐도 그렇게 놀란 적은 없던 경해국마저 두려움에 악다구니를 질렀다.
그건 안범도 마찬가지였다. 검은 손들은 순식간에 그들이 사수하려는 윤모난이 담긴 시체 가방을 움켜쥐었다. 누군가가 지퍼를 내리고 그 안에 든 남자를 더듬더니 퀴즈를 맞힌 사람처럼 소리를 질렀다.
“잡았다!”
머리를 뜯겨가며 윤모난을 쥐고 놓치지 않으려 애쓰던 안범의 가벼운 몸이 인파에 밀려 붕 떠올랐다.
“으악! 경 선배님!”
“안범!”
경해국은 필사적으로 안범의 다리를 붙잡았다. 시체 가방을 두고 벌어진 개싸움 가운데, 경해국의 한쪽 시야에 파도처럼 밀려 들어온 것이 있었다. 커다란 트럭이 마치 해일과 같은 모양새로 이쪽을 향해 돌진하며 헤드라이트를 비추자, 파리떼처럼 우글거리던 인파가 옆으로 흩어졌다. 그리고 트럭 옆면에 쓰인 로고가 드러났다.
[기러기 장난감 회사]
<5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