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복종
무구원은 이 모든 일이 어머니 신의 고약한 농담 같다고 생각했다. 만물을 돌보는 어머니 신께서 자신의 신자 중 한 명에게 던지는 의미 모를 우스갯소리라고.
어린 시절, 차가운 바다에 빠졌을 때 어머니께선 죽으라 하셨다. 하지만 짓궂은 농담처럼 능력을 내려주시어 결국 살게 만드셨다. 그 이후로 무구원은 매일같이 기도하며 그녀에게 고통을 긍정할 수 있게 해달라고 간청했다. 그러나 어머니께선 대답 대신 시련을 주었다.
태어나 제대로 사랑받아본 적 없는 사람에게 사랑할 이를 주셨던 탓에, 가진 게 없는 무구원은 자신의 반을 가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아들 태오가 생겼을 때 반쪽짜리이던 그는 한 번 더 자신을 갈라냈다.
이 너덜너덜한 조각은 고통에 부나비처럼 흔들리며 그것을 생의 조건으로 받아들였다. 누군가는 이런 사랑이 착각이라 했고 환상이자 질병이라 했다. 무구원은 그중에서 질병이라는 표현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윤모난이 남기고 간 책의 한 구절이 마침내 그에게 내려준 진단이었다.
“태오야. 아빠 없는 동안 네가 엄마를 지켜줄 수 있어?”
남경을 떠나기 전. 무구원은 태오의 모습을 오래도록 눈에 담았다. 지금 이별하면 얼마간은 아이를 못 본다는 생각이 들자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태오는 자신의 아버지를 닮은 얼굴로 끄덕이며 너른 품에 안겼다.
“아빠, 언제 올 거야?”
“아빠가 뭔가 잃어버린 게 있는데, 그걸 찾으려면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아. 태오도 알다시피 아빤 늘 시간이 없잖아.”
“뭘 잃어버렸어? 태오가 가서 같이 찾아줄게”
“아니. 이건 아빠만 찾을 수 있는 거야. 아빠가 잃어버린 것 중에는 태오 것도 있는데 다 되찾아줄게.”
그러자 태오가 오히려 무구원을 달래려는 듯이 속삭였다.
“아빠, 내 거는 찾지 마. 아빠 힘들잖아. 태오는 잃어버린 거 없어.”
“…….”
“태오는 아빠만 있으면 돼. 아빠를 제일 사랑해.”
“아빠도 태오를 사랑해. 태오는 아빠의…”
“무조건적인 사랑이지?”
무구원이 망설임 없이 그렇다 대답하자 아이가 마침내 안심했다. 태오는 혹시라도 아빠가 죽을까 봐 부쩍 걱정이 늘었다. 가이드라서 그런지 아빠의 주변에 도사리는 죽음을 예민한 감각으로 아는 것 같았다.
“아빠도 내 무조건적인 사랑이야.”
태오와 아이 엄마가 무사히 동산에 도착했다는 연락은 받았다. 가족들이 남경을 떠났으니 곧 무정원도 소식을 들을 것이다. 가족들을 동산으로 보낸 것은 무리한 결정이긴 했지만, 무정원이 태오를 언급하며 인질을 삼으려고 하는 이상 어쩔 수 없었다.
그때 갑자기 들린 노크 소리가 회상을 방해했다.
“지부장님, 저녁을 차릴까요?”
“지금 몇 시지?”
수도에 있는 북해의 별저에 발이 묶인 무구원은 사용인에게 시간을 물었다. 그러자 저녁 7시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벌써 토요일 밤은 지났고 일요일 저녁이었다. 윤모난이 과연 자신의 제안을 수락하고 기차를 탔을까. 여전히 셋에게서는 어떠한 소식도 없었다.
“저녁은 거르지. 가주님께서는 돌아오셨나?”
“아직 평의회에 계실 겁니다.”
“그래. 나가봐.”
윤모난이 기차에 올랐든 아니든 계획은 예정대로 진행해야 했다. 무정원이 북해로 돌아가면 그를 죽이는 건 거의 불가능해진다. 곧 천경교의 축일이라 수도에 있던 인원이 북해로 돌아가야 하므로 시간이 별로 없었다.
무구원은 이 시점에서 일부러 윤모난이 한백호를 죽이게 했다. 명색이 고섬 한씨 가주의 차남이 죽었으니 무정원은 축일 주간에 고섬에 가서 장례식에 참석해야만 할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그 옆을 보좌하는 때가 기회이다.
그런데 그 순간 또 한 번 다급한 노크 소리가 방문을 두드렸다.
“누구지?”
“저기, 지부장님! 얼른 나와보셔야겠는데요!”
예감이 좋지 않았다. 무구원은 방문을 열고 안절부절못하는 사용인에게 이유를 묻지도 않고 단숨에 1층으로 내려갔다. 이윽고 사람들의 부축을 받으며 들어오는 낯익은 얼굴을 발견한 무구원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었다.
“경해국.”
“…젠장, 무씨.”
무구원은 부상을 입은 경해국을 끌어당겨 자신에게 기대게 했다. 무언가 상황이 틀어졌음을 직감한 무구원이 낮은 목소리로 옆에 서 있는 부하들에게 말했다.
“당장 치료해야겠어. 의사부터 데려와.”
“네.”
이곳은 듣는 귀와 보는 눈이 많았다. 그걸 모를 리 없는 경해국이 크게 앓는 소리를 내며 몰래 무구원의 귓가에 입을 가까이 했다. 실상 그의 부상은 보기에만 심할 뿐 경미한 수준이었다.
“놈들이 …을 데려갔어. 안범까지.”
“어쩌다가?”
“젠장, 칼에 찔려서 정신을 잃었거든….”
“사라진 위치는?”
무표정이던 무구원의 얼굴에 일순 초조한 기색이 묻어 나왔다. 경해국이 안범과 윤모난의 행방을 알리려 입을 벙긋거리던 그때.
대문 앞에 차가 서는 소리와 함께 몰이꾼들이 일제히 정렬하는 일사불란한 발걸음 소리가 이어졌다. 이윽고 벌컥 현관문이 열리고 갑자기 무정원이 나타났다. 카펫을 사뿐히 밟으며 집 안으로 들어선 무정원은 두 사람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로 느리게 코트를 벗어 옆으로 넘겨주었다.
“방금 들었는데 경 서방이 다쳤다지.”
너무 놀란 탓에 인사하는 것마저 잊어버린 경해국은 자신들에게로 다가오는 무정원을 멀뚱히 보고만 있었다. 어느새 무구원은 태연스레 표정을 숨긴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휴가를 내고 후배를 만나러 잠깐 나갔다더니 어디서 갑자기 다친 건가.”
“아…. 저기. 네, 가주님. 그게 교통사고를…. 트럭에… 치였습니다.”
경해국의 형편없는 거짓말에 무구원은 눈을 질끈 감았다. 마찬가지로 그 허접한 거짓말을 눈치채지 못했을 리 없는 무정원이 태연히 되물었다.
“트럭에 치였다고? 이런, 자연이가 크게 놀랐겠어. 운전수 연락처는 받았나? 사고면 후처리를 해야지.”
“아… 아닙니다. 아주 사알짝 치인 거라서요. 제가 막 무단횡단을 했던 거라 운전수는 아무 잘못도 없습니다. 아주 선량한 시민이더군요. 애기들 장난감 만드는 회사 차량이라던데… 문제 키울 것도 없을 것 같아 그냥 보냈습니다요.”
순간 무구원은 경해국의 저 허접한 거짓말이 나름의 힌트인 것을 깨달았다. 장난감 만드는 회사의 차량, 트럭, 큐브, 기러기 장난감 회사.
‘해충’들이다.
무구원에게는 이미 익숙한 적이었다. 해충들은 7년 동안 무구원에게 암살자들을 보냈고 끊임없이 큐브의 행방을 찾아 어둠 속을 기어 다니고 있었다. 윤모난에게 초대장을 보낸 것도, 독사를 보내 작약의 일을 상기시키려 하는 것도 아마 그들일 것이다.
7년 동안 무구원은 한편으로는 무정원을,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 해충들과 싸우면서 이중의 싸움을 벌여왔다. 무구원은 윤모난이 꽃들에 이어 해충에게 이용당하는 것만큼은 막고 싶었다.
“그래도 시시비비는 정확히 가려야지. 회사명을 알려주면 내 비서에게 해결하라 전달하지.”
“아… 아니요. 바쁘실 텐데. 뭐 저 같은 놈한테까지 신경을 쓰십니까. 제가 아주 튼튼합니다. 예전에 사과나무에서 떨어졌는데도 반나절 만에 망아지처럼 뛰어다닌 놈인데요. 제가.”
“…….”
무정원은 경해국의 헛소리에는 전혀 면역이 없는지, 잠깐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불쾌한 얼굴로 이내 돌아섰다.
“그럼 알아서 하도록 해.”
“네, 네. 바쁘실 텐데 들어가시지요, 네.”
거의 동시에 무구원은 반대쪽으로 발을 뻗었다. 이 길로 나가서 윤모난을 찾는 것이 우선이다. 해충들이 윤모난을 데려갔다면 모든 계획을 수정해야 했다.
“무구원.”
대뜸 낮은 목소리가 뒤통수를 잡아끌었다. 무구원은 걸음을 멈추고 몸을 돌렸다.
“네. 부르셨습니까.”
“들어와라. 할 얘기가 있다.”
무정원의 목소리에서 뿜어져 나오는 냉기가 성큼 그를 향해 다가왔다. 이윽고 무정원이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는 듯이 말했다.
“분명 내게 할 말이 있을 텐데.”
그 말에 경해국이 식은땀을 흘리며 무구원에게 시선을 돌렸다. 편지를 통해 무구원이 제 형을 죽이기로 했다는 것을 아는 그로서는 무정원의 고압적인 말이 위험 신호로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역시 이를 감지하지 못했을 리 없는데도 무구원은 늘 그렇듯이 퍽 순종적인 태도를 고수하며 머리를 깊이 조아렸다. 무정원은 검은 장갑을 낀 손끝으로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신경질이 난 듯한 모습을 보였다. 무언가 심히 거슬린 듯했다.
“어제 사교 클럽에서 모난이 옆에 조력자가 있었다더군.”
그 말에 무구원의 눈썹이 미세하게 움찔했다. 사교 클럽은 장소 자체가 은밀한 곳이기도 하지만 특성상 미행이나 감시가 어려운 장소였다. 거길 드나드는 사람들의 신분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윤모난에게 조력자가 있다는 사실이 벌써 무정원 귀에 들어갔다니. 한백호가 죽은 지 채 하루도 지나지 않았다. 무구원은 어디선가 정보가 새어 나갔음을 의심했다.
하지만… 그건 불가능하다. 무구원은 모든 일을 혼자서 진행했고 안범과 경해국이 배신한 것이 아니라면 정보가 샐 틈은 없었다. 계획대로 윤모난이 기차를 타고 은신처로 향했어도 이틀 정도는 무정원의 눈을 돌렸어야 했는데….
“고섬 한씨 일은 네 머리에서 나온 계획이었겠지. 아무래도 다른 속셈이 있었던 건가.”
다른 속셈? 이미 배신을 눈치챘나. 무구원은 처음부터 무정원이 이쪽의 계획을 모두 알고 있었던 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지만 속단할 수는 없었다. 만약 그랬다면 무정원이 지금까지 자신을 살려뒀을 리 없었다.
“결국 별것도 아닌 착각 때문에 가문을 저버리려 하는구나. 내가 그토록 경고했는데. 가짜와 진짜도 구분 못하는 사냥개를 함께 데려갈 수는 없지.”
“…….”
“결국 널 길들이는 데는 실패했구나.”
무정원은 천천히 커다란 산처럼 그림자를 드리우며 다가왔다. 주변 온도처럼 표정이 차갑게 식은 채였다.
“이게 모두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네 자유의지 때문 아닐까. 정신계 에스퍼가 그러더군. 그런 쓸데없는 부위를 영원히 잘라내는 것도 가능하다고 말이야.”
“…….”
그 말이 무슨 신호라도 된 것처럼 몰이꾼들이 무구원을 에워쌌다. 그 순간 무구원은 자신을 무섭게 내려다보는 가주와 눈을 맞추곤 깨달았다. 아직은 아니다.
형님은 제 배신을 확신하고 있지는 않았다. 만약 그랬다면 여기에 오자마자 경해국과 자신부터 바로 죽였을 것이다. 하지만 정신계 에스퍼를 들먹이며 협박하다니, 아직까지는 단순 의심에 불과한 게 분명했다.
여기에 휘말려 섣부르게 행동한다면 그에게 확신을 심어주는 셈이었다. 무구원은 고개를 숙이며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것 또한 가주님의 명령이라면 따르겠습니다.”
무구원은 마음을 다잡았다. 여기서 반항하거나 도망치는 것 같은 최악의 수는 두지 말아야 한다. 그건 지금껏 공들여온 탑을 모두 무너뜨리는 지름길이었다. 태오를 지키고 복수를 대신 하려면 지금까지의 태도를 고수해야 한다.
“들어와라.”
무정원의 뒤로 괴물의 아가리처럼 응접실 문이 열렸다. 무구원이 명령에 따라 걸음을 떼려는 찰나 옆에 서 있던 경해국이 눈에 띄게 움찔댔다. 그의 동요를 눈치챈 무구원은 저도 모르게 얼굴을 찡그렸다. 몇 걸음 옮기는 동안만이라도 경해국이 가만히 있어주길 바랐다.
하지만 이어지는 상황은 무구원의 바람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젠장! 무구원, 네 진한 의리가 내 마음을 움직였다. 여보! 미안해!”
갑자기 경해국의 경망스러운 외침과 함께 냉기를 몰아내는 거센 화염이 복도를 휘감았다. 커다란 넝쿨처럼 실내를 휘젓던 불길은 꾸물거리며 응접실로 들어서려던 무구원의 앞을 막았다. 갑자기 치솟은 불에 당황한 모두가 몸을 물리며 피하는 모습이 무구원의 눈에는 느린 화면처럼 보였다.
저런, 경해국. 네가 이러면 지금까지의 내 노력이 모두 허사가 된단 말이다. 무구원이 낭패했다 생각하건 말건, 경해국은 멍하니 서 있는 무구원을 덥석 잡아 거칠게 끌어당겼다.
“무씨, 도망가자!”
상황이 상황인 만큼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드디어 무구원이 발을 떼자 그를 감싸듯 불길이 치솟았다. 갑자기 집 안으로 퍼진 불길에 가주를 보호하느라 몰이꾼들의 정신이 팔린 사이, 둘은 현관으로 나와 빠르게 거리로 향했다. 무구원의 공든 탑이 와르르 무너지는 순간이다.
그렇게 모든 것을 뒤로하고 달리는데, 허탈감이 뒤섞인 바람 빠진 웃음이 한숨처럼 무구원의 입을 비집고 튀어나왔다. 절체절명의 순간을 겨우 벗어난 경해국은 무구원의 웃는 얼굴을 보고 깜짝 놀랐다.
“야, 이 새끼야. 지금 웃음이 나와?”
“…경해국, 방금 네가 내 계획을 완벽하게 망쳤단 말이다.”
“뭐어?”
죽도록 내달려 도시를 가로지르는 트램에 겨우 올라타자 겨우 숨을 몰아쉬며 두 남자의 위 가슴이 크게 부풀었다 꺼졌다. 경해국의 의아한 얼굴을 뒤로하고 무구원은 빠르게 멀어지는 풍경을 눈에 담았다. 저 멀리 청회색 기왓장을 얹은 건물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계획이고 뭐고 지랄하네. 그럼 거기서 네놈을 죽게 놔뒀어야 했냐? 너 이젠 좀 말해봐라. 대체 윤 팀장 일에 목숨까지 내놓으려는 이유가 뭐냐? 씨팔, 윤 팀장이랑 너랑 무슨 사이라도 되냐고?”
어디까지나 항상 하던 핀잔 섞인 농담일 뿐이었다. 그래서 별다른 답을 기대하지 않던 경해국은 곧이어 자신에게 돌아온 말에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 맞아.”
“뭐?”
목소리가 조금 컸던 탓에 트램 안에 탄 승객들이 두 사람을 향해 흘긋 시선을 던졌다. 그리고 마침내 무구원이 경해국에게 사실을 털어놓았다. 저 자신도 이제는 숨기기 힘들다는 듯이.
“7년 전 팀장님께 내 동정을 바쳤으니 목숨을 걸 수밖에.”
“…뭐? 뭘 바쳐? 몽정?”
“동정.”
“거짓말이지…?”
“아닌데.”
폭탄선언을 들은 경해국은 잠시 그 사실을 소화해보려 시도하다가, 철저하게 실패했다. 결국 그는 밖으로 목을 빼고 한참이나 속을 게워냈다. 식도가 터졌는지 피가 섞여 나오는 것을 보며 무구원은 눈썹을 쭉 위로 밀어 올리며 뭐가 문제냐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 정도로 심하게 반응할 줄은 몰랐는데.”
“씨팔! 닥쳐! 메슥거려 죽겠어! 이 더러운 새끼야! 네놈 동정 따위 누가 뗐는지 내가 왜 들어야 하나고! 그것도 윤 팀자앙? 젠장, 젠장!”
“…….”
“난 이 모든 게 사나이의 의리인 줄 알고. 내 여보의 친정집에 불까지 지르고 왔다고! 이걸 다 어쩔 거야! 무구원! 네 사랑놀음에 나하고 안범이 놀아난 거냐!”
“…그건 아니다.”
“아니긴 뭐가 아니야! 그래, 한번 변명해봐. 이 남색가 자식아!”
“7년 전에 팀장님하고 치안조 지원을 위해 수도에 갔다가 우연히 공동 거주지에서 큐브라는 물건을 발견했다.”
무구원의 얼굴이 진지해지자 경해국도 입가를 겨우 추스르며 몸을 일으켰다. 설명은 찬찬히 이어졌다.
“나중에 알게 됐지만 그 큐브는 예사 물건이 아니더군.”
그러니까 이 모든 것은 그 큐브에서 시작되었다.
―연구조 김동희입니다. 몇 달 전에 우리 쪽에 물건을 의뢰하셨죠?
7년 전 윤모난의 유품을 정리하고 북해로 떠나야 했던 날, 큐브를 의뢰했던 김동희라는 에스퍼에게서 갑자기 연락이 왔다. 막차를 포기하고 찾아간 사교 클럽에서, 김동희는 초조한 얼굴로 큐브를 꺼내놓으며 말했다.
“이거 의뢰 없던 일로 하겠습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뭐가 잘못됐습니까?”
“…이 물건 어디서 얻으신 거죠? 이거… 아무래도 파동 간섭 장치 같은데요.”
“출처는 기밀입니다. 더 정확히 설명해주시죠.”
김동희는 한참을 머뭇거리며 자신의 동그란 안경을 올렸다 내렸다 뜸을 들이다가 끝내 입을 열었다.
“파동역학에 대해서 조금 아시나요?”
“정규 과정 수준 정도 수강했습니다.”
“그럼 쉽게 설명하죠. 이 물건은 엄밀히 말해서 파동 탐색 방해 장치가 아니라, 간섭 장치라고 하는 게 정확해요.”
김동희의 설명을 요약하자면. 큐브는 가이딩과 매우 유사한 효과를 내는 물건이었다. 폭주하는 에스퍼의 파동을 가라앉힐 때, 가이드는 보통 자신의 에너지를 방출해서 파동을 중첩시켜 상쇄한다.
지금까지 이 같은 효과를 발생시킬 수 있는 건 오로지 가이드밖에 없었다. 따라서 가이드만이 에스퍼의 트랜스화를 막고 전쟁을 끝낼 수 있는 구원자로 여겨져온 것이다.
“지금까지 파동 제어 장치를 개발하지 못한 건 사람인 가이드 외에 다른 에너지원을 발명하지 못했기 때문이에요.”
김동희는 조금 격앙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근데 이 장치가 미약하나마 파동에 간섭할 수 있는 에너지를 발생시켰어요. 무슨 말인지 아시겠어요? 이 장치 하나가 가이드랑 비슷한 역할을 하는 거죠.”
“…그 말은.”
“모든 가이드가 그럴 수 있듯이 이 큐브 또한 파동에 영향을 줄 수 있어요. 문제는 이것 하나만으로 에스퍼를 제압할 수도 …폭주시킬 수도 있다는 거예요.”
“폭주요?”
“생각해보세요. 물건에 윤리나 도덕, 역사관이라는 게 있을까요? 인간인 가이드야 그런 것들에 제약을 받아 가이딩에만 특화된 능력을 발전시켜왔지만, 이 큐브는… 그럴 이유가 없죠. 무생물이잖아요.”
무구원은 김동희의 말에 담긴 핵심을 간파했다. 심지어 큐브는 일단 손에 넣기만 한다면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물건이다. 만약 가이드처럼 큐브가 파동을 교란할 수 있다면….
“이 작은 큐브 하나가 모든 포스트들의 운명을 박살 낼 수도 있다는 소리군요.”
“네. 이게 전쟁 무기로 대량 개발이 된다고 생각해보세요.”
문득 무구원의 머릿속에 공동 거주지 지하에 있던 트랜스가 떠올랐다. 절로 등골이 서늘해졌다. 큐브가 혁신적인 물건인 것은 맞지만, 파동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포스트에겐 분쟁을 일으킬 가능성이 컸다.
만에 하나 누군가 나쁜 목적으로 큐브를 사용한다면? 역사적으로 과학 혁신이 시대에 화마를 불러오는 것은 되풀이된 일이었으니 이 또한 단순 망상이 아니었다. 그리고 무구원의 그 생각은 곧 확신이 되었다.
‘해충들’이 처음으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 것이 김동희를 만난 직후이기 때문이다. 큐브가 수면 위로 떠오르자마자 그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어둠 속에서 기어 나와 무구원을 찾아왔다. 큐브가 제법 탐나는 부스러기였는지 바글바글 몰려들었을 뿐만 아니라 황당한 요구까지 했다.
“큐브의 설계도는 어디 있지? 이미 윤모난에게 설계도가 있었다는 것을 알고 왔다.”
설계도. 큐브가 아니라 이걸 만들 수 있는 공식이 그들의 요구 사항이었다.
이상하지만 해충들은 처음부터 윤모난에게 설계도가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리고 윤모난이 사라진 시점에서 그 실마리를 얻을 수 있는 건 무구원뿐이라는 것도.
모든 일은 그렇게 시작된 거다. 큐브, 설계도, 윤모난. 7년간 해충들을 상대하면서 무구원이 배운 것이 있다면 큐브는 세상에 나와서는 안 될 물건이라는 것뿐이었다.
무구원에게서 그간의 얘기를 들은 경해국이 심각한 얼굴로 되물었다. 그 역시 이 일의 심각성을 깨달은 눈치였다.
“그럼 지금껏 무씨 널 죽이려 한 놈들이 그 큐브인지 뭐시깽이인지 고거 설계도를 노린다는 거냐?”
“그래.”
“윤 팀장이 전에 설계도에 대해서 언급한 적은 있고?”
“아니 전혀. 팀장님도 모르고 있었던 건 분명해. 그랬다면 7년 전에 큐브를 발견하고 다른 사람에게 의뢰를 맡기진 않았겠지.”
“그래. 그렇네.”
“…그리고 알 필요도 없고.”
“뭐?”
경해국은 무구원의 얼굴에 드리워진 차가운 어둠을 발견하고 문득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둔한 자신이 보기에도 무구원이 지금껏 있었던 일을 다 털어놓은 게 아니라는 의심이 들었기 때문이다.
“무씨, 너 뭐 숨기는 거 있지?”
“…일단 팀장님과 안범부터 찾자.”
“야, 이 새꺄. 너 진짜 또 말 안 한 거 있으면….”
“사람부터 찾아. 둘 다 위험할 수 있어.”
퍽 단호한 무구원의 태도에 경해국도 한 수 굽힐 수밖에 없었다. 무구원 이놈이 입을 다물고자 마음을 먹었다면 추궁할 방법이 없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에휴, 무슨 수로?”
그즈음 마침 트램이 중앙역 앞에 멈춰 섰다. 말없이 내리는 무구원을 따라 경해국 역시 서둘러 내렸다.
“무씨? 이 남색가 자식아. 어떻게 찾을 거냐구 묻잖아.”
무구원은 비상시를 위해 챙겨놓은 물건이 있는 중앙역 캐비닛으로 향하며 입을 열었다. 언제부터 넣어놓았는지 모르겠지만 캐비닛 안에는 이미 짐이 한가득 들어차 있었다.
“팀장님께 드렸던 바지 안감에 위치 추적기를 달아놨어. 그걸로 추적하면 돼.”
“허어… 그래? 어?”
순간 경해국의 머리에 퍼뜩 젖꼭지가 비치는 야한 차림새의 윤모난이 퍼뜩 떠올랐다.
“젠장! 안 돼. 윤 팀장 클럽에서 옷 갈아입었어. 그 옷은 사교 클럽에 처박혀 있을 거라고!”
“뭐?”
위치 추적기를 꺼내 전원을 켜고 있던 무구원이 미간을 찡그리며 되물었다. 윤모난이 옷을 갈아입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무구원은 잠시 고민하다가 위치 추적기의 주파수를 다시 조정했다.
“무씨, 윤 팀장 옷 갈아입었다니까?”
“…혹시 몰라서 대비책을 세워두기는 했다.”
“어떻게?”
“몸 안에도 하나 있어.”
“몸 안에? 뭐가?”
“…….”
대답 대신 내려앉은 침묵의 의미를 눈치챈 경해국이 오만상을 구겼다. 무슨 수로 몸 안에 위치 추적기를 넣어놨다는 걸까. 경해국은 가자미눈으로 무구원을 흘겨보았으나 무구원은 더 이상 설명을 덧붙이지 않았다. 몇 번의 시도 끝에 다른 추적기의 위치를 알아낸 무구원의 얼굴이 당황한 듯 살짝 꿈틀거렸다.
“…지금, 왜 여기에… 있는 거지.”
“왜? 어딘데?”
무구원은 대답 대신 화면을 보여줬다. 이윽고 위치를 확인한 경해국의 눈썹도 한껏 구겨졌다. 윤모난의 위치 신호가 제법 황당한 곳에 띄워져 있었기 때문이다. 수도 3구의 중심가. 여긴 서강 주씨들의 별저가 있는 곳 아니던가.
“야, 무씨. 그 기러기 장난감 회사 트럭… 서강 주씨들이었어?”
“…아마도 그랬던 것 같군.”
7년 전 윤모난과 이 일을 두고 상의할 때, 무구원은 큐브가 서강 주씨뿐만 아니라 반도 다섯 가문과 관련이 있음을 짐작했었다. 그리고 그 의심은 지금 실체가 되어 그의 눈앞에 나타났다.
애초에 이런 수상한 물건이 당국의 시야에 들지 않았을 리 없음에도 불구하고, 큐브는 지금껏 단 한 번도 어디에서도 언급된 적 없었다. 사실상 모두가 이 큐브에 대해 알고 있으면서도 쉬쉬했다는 것이 합리적인 추론일 것이다.
그동안 의심만 하던 사실을 곱씹어가며 무구원은 의문들을 입 밖으로 툭 내놓았다.
“서강 주씨는 왜 애초에 가문의 상징인 기러기를 드러냈을까?”
“그게 무슨 소리냐?”
“큐브는 독이 든 성배야. 권력의 특성상 반도의 다섯 가문이 이 물건을 동등하게 공유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한 가문에서 이 물건에 대한 욕심을 드러내면, 바로 경계의 대상이 되겠지. 마치 7년 전 남경 윤씨들처럼.”
무구원은 생각에 골몰했다. 아무리 난다긴다하는 반도의 정치 세가라 해도 아직까지 설계도도 없는 물건을 얻자고 모두를 적으로 돌리는 건 무모한 짓이었다.
“윗대가리들 속셈이야 뻔하지. 다 정치질에 이용하려 한 거 아니겠어?”
경해국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에스퍼에게 큐브의 존재는 공포 그 자체니까. 어느 순간 괴물이 나타나도 이상하지 않은 반도에서 공포만큼 강력한 전략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가문을 중심으로 권력이 분산된 반도에서는 막상 그런 정치를 하기란 쉽지 않았다.
평의회를 구성하는 여러 가문들은 저마다 사상과 문화가 너무 달랐고, 서로가 서로의 안건에 반기를 드는 것이 일상이었다. 따라서 강압적인 수단을 통해 의견을 단일하게 합치하기보다는 수많은 갈등에 따른 의견 합의를 추구하는 반도의 정치에 ‘공포’는 실현되기 어려웠다. 공포라는 심상은 그런 다양성을 허용하지 않으니까.
모두의 목에 칼날을 들이밀어 한 가지 의견에만 맹종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공포다. 그러니 그것은 독재자의 전략이 될 수밖에 없었다.
“무씨, 너 얼굴이 왜 갑자기 파랗게 질렸냐? 뭐야?”
“…내가 그동안 정말로 멍청했다는 걸 깨달았거든.”
“뭐?”
무구원은 빠르게 얼굴에서 낭패감을 지우며 고개를 들었다.
“경해국, 일단 3구로 가자.”
남경 테러와 이어진 한백호의 죽음으로 평의회의 비상 회의 소집으로 각 가문의 가주와 참모진들이 모두 수도에 몰려 있을 터였다. 서강 주씨들도 수도 별저에 모여 있을 확률이 높았다.
두 사람은 곧바로 수도 제3구로 향했다. 붉은색 휘장이 펄럭이는 주씨의 별저로 다가가자 누군가 대문을 이미 열어놓고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저런. 기러기들이 북해 별저에 작은 소란이 있었다고 첩보를 전달한 지 얼마 안 되었는데…. 남경 지부장이 갑자기 이곳에 나타나다니.”
중년의 여성이 무구원의 인사를 기껍게 받았다. 위엄 있는 붉은 정장을 차려입은 그녀는 지난날 서곡센터의 감찰부 부장을 역임했고, 지난날 윤모난에게 큐브에 대한 경고한 바 있는 인물이었다.
“우리 장비에 웬 위치 추적기 신호가 잡혀서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당신이었군요, 무구원 씨.”
“처음 뵙겠습니다, 주현희 부장님.”
“감찰부 부장직을 내려놓은 지 꽤 되었는데 부장이란 칭호는 부적절하지 않나.”
“그럼 보좌관님이라 부르면 되겠습니까.”
“그게 낫겠네요.”
주현희는 첩보 수집으로 유명한 서강 주씨들의 정보 조직을 통솔하기 위해 부장직에서는 은퇴한 상태였다. 그리고 그녀는 큐브의 내막을 알고 있는 사람임이 확실했다.
“혹시 그 사람을 데려가셨습니까?”
주현희의 빤한 시선이 대답 대신 돌아왔다. 한참을 침묵한 끝에 그녀가 입을 열었다.
“일부러 한 명을 놓아주긴 했지만, 시간이 꽤나 걸릴 줄 알았는데. 위치 추적기라니… 내가 방심했어요.”
“…제가 일찍 찾아온 게 낭패라는 듯이 말씀하시는군요.”
“확실히… 그렇네요. 하지만 어쩔 수 없죠. 어때요. 무구원 씨, 드디어 이 일을 파고들 마음의 준비가 됐나요?”
“이제 막 7년간의 수수께끼가 풀리려던 참입니다.”
그녀와 시선을 마주하면서 무구원은 주머니 속에 든 큐브를 손안에서 굴렸다. 무수히 헛손질한 끝에 드디어 큐브 한쪽 면을 맞추는 순간이었다. 색깔은 빨간색이다.
“둘 다 들어와요. 당신 동료들은 지금 치료 중이에요.”
주현희가 옆으로 몸을 틀어 길을 터 주었으나 경해국은 잠시 우물쭈물했다. 방금 처가에 불을 지르고 바로 서강 주씨한테 오다니. 경 서방이 뒤늦게 고민하는 사이, 그의 처남은 윤모난의 이름을 듣자마자 저택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갔다.
주현희는 두 사람을 2층 복도 깊숙한 곳에 있는 방으로 데려갔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방 중앙에 위치한 커다란 침대가 시야에 들어왔다. 거기에 윤모난이 고요히 누워 있었다. 침대 끝에 엎드려 있던 안범이 인기척을 듣고 부스스한 얼굴로 몸을 일으켰다.
“어? 선배님들!”
“야! 안범! 너 이 새끼, 여기 있으면서 연락도 안 하면 어떡해! 놀랐잖아!”
“…그게 어디로 연락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일단 형 일어나면 의논해보고 결정하려고 했어요.”
안범의 말이 맞았다. 신분을 숨기고 다니는 윤모난이 어디에 있다고 동네방네 떠들고 다닐 수도 없고, 무구원 주변의 감시 때문에 연락도 조심스러워 편지로만 소통했던 차였다. 무구원은 온갖 욕을 늘어놓는 경해국을 제지하며 윤모난의 상태부터 확인했다.
“많이 다치셨어?”
“네, 조금. 처치는 했고 의식은 있는 것 같은데 아직 일어나시지는….”
안범이 눈치껏 몸을 옆으로 물리고 피해줬지만, 무구원의 두 발은 제자리에 못 박은 듯이 붙어 있을 뿐 움직이지 않았다. 조금 떨어져서 윤모난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던 그는 이내 돌아서서 방을 나가버렸다. 그저 살아 있으면 되었다는 듯이.
무구원이 방 밖으로 나오자, 기다리고 있던 주현희가 그를 불러세웠다.
“무구원 씨, 우리 이야기 좀 나누죠.”
무구원은 기꺼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방금 전에 깨달은 것을 확인해야 했기 때문이다. 둘은 바로 옆방으로 향했다. 무구원은 마치 가슴 위에 큰 돌덩이를 얹은 듯한 기분이었다. 주현희와 단둘이 되자, 그가 무겁게 말문을 열었다.
“처음에는 큐브를 노리는 게 해충들뿐이라 생각했습니다.”
“음, 해충들이요?”
“7년 전부터 큐브의 설계도를 요구하는 이들에게 제가 임의로 붙인 이름입니다. 그들은 제가 설계도의 행방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더군요. 응하지 않자 절 죽이려 했구요.”
그간의 상황에 대한 설명이 이어졌다. 이야기를 마친 무구원이 주현희에게 물었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습니까. 해충들은 제가 설계도의 위치를 알고 있다고 여기면서도 저를 회유하지 않고 죽이려 했습니다. 제가 죽으면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는 걸 모르지 않을 텐데.”
띄엄띄엄 흩어져 있던 단서들을 곱씹으며 무구원은 그 조각들을 이어 붙이려 하고 있었다. 그의 낮은 목소리에서는 꽤나 굳은 확신이 느껴졌다.
“큐브의 설계도를 노리는 건 한두 집단이 아닐 겁니다.”
“왜 그렇게 생각해요?”
“보좌관님의 가문만 하더라도 그렇습니다. 최고의 정보력을 자랑하는 서강에서 큐브를 몰랐을 리 없겠죠.”
“무구원 씨는 우리 가문이 설계도를 욕심낸다고 생각하는 건가요?”
“정확히는… 보좌관님께서 사라진 설계도를 찾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욕심까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큐브에 얽힌 각 집단의 이해관계가 모두 다르다는 것이 무구원의 결론이었다. 설계도를 가지려는 쪽과 그걸 막으려는 쪽이 있다. 그리고 서강 주씨인 주현희는 그것을 막으려는 사람 중 하나일 터였다.
“이미 보좌관님은 7년 전 저희가 수도에서 큐브를 얻은 걸 알고 계셨습니다. 게다가 윤 팀장님이 이 일을 알아보도록 그저 은밀하게 부추기셨습니다. 그리고 아무것도 하지 않으셨죠. 설계도를 원하셨다면 그럴 이유가 없었을 겁니다.”
“이런 가정도 가능하지 않나요? 만약 내가 윤모난의 손을 빌려 사라진 설계도를 찾으려 의도한 거라면?”
주현희는 어린 학생을 가르치는 선생님처럼 함정에 빠지지 말라며 천천히 타이르듯이 말했다. 하지만 무구원은 이를 바로 반박했다.
“그렇다면 굳이 그런 식으로 찾을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설계도가 누구 손에 있는지는 이미 알고 계실 텐데요. 지금껏 찾지 못한 것뿐이죠.”
“맞아요. 알고 있지만… 얻는 데는 계속 실패했었죠.”
다시 침묵이 찾아왔다. 이 대화는 처음부터 진실에 가까이 다가가는 것보다는 상대방의 의도를 떠보려는 심리전에 더 가까웠다.
“…대체 큐브의 설계도를 찾으려는 이유가 뭡니까. 독이 든 성배를 얻는 게 무슨 의미가 있어서요?”
“난 그게 엉뚱한 사람한테 흘러 들어가지 않게 지키려는 것뿐이에요.”
“아무 상관 없는 저를 죽이면서까지 지키려는 것이니 당연히 큰 뜻이 있으시겠죠.”
그 말에 짧은 단발머리를 뒤로 쓸어 넘기던 주현희가 무구원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무구원은 그녀에게 물었다.
“지금껏 절 죽이려 한 해충이 보좌관님 아니십니까?”
“…….”
“7년 전 수도에서 기러기 장난감 회사 차를 끌고 나타난 가이드와 에스퍼와 부딪친 적 있습니다. 자폭하면서까지 저희를 죽이려 한 가이드가 마지막에 천경교 기도문을 읊었습니다. 서강은 북해 다음으로 신도들이 많은 곳이죠.”
“맞아요.”
의뭉스러운 확답 뒤로 이어지는 그녀의 말은 선득하기까지 했다.
“그럴 필요가 있었어요. 그동안은 당신이 가문에 충성하는 개처럼 보였거든요.”
“…….”
“허나 만약 제가 당신을 정말 죽이고자 마음먹었다면 진짜로 죽였을 거예요. 하지만 무구원 씨, 큐브는 육면체예요. 한쪽만 맞춰서는 본질을 알 수 없답니다. 제가 해충인 걸 알았다고 해서 끝이 아니죠.”
“절 시험하신 거군요.”
“설계도는 윤모난에게 있을 테니, 당신과 그의 관계가 여전히 이어지고 있는지 확인해야 했어요. 만약 당신이 그를 버리고 가문에 충성하기로 결심했다면 꽤 위험한 일이었죠. 그걸 확인한 뒤에 죽여도 늦지 않을 거라고 판단했어요.”
역시나 주현희는 자신과 윤모난의 관계까지 파악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결론은….
“초대장도 보좌관님 작품입니까.”
“어렵게… 윤모난의 위치를 파악했으니, 반도로 돌아오게 하지 않을 이유가 없죠.”
“그럼 제게 『햄릿』을 보낸 것도, 독사를 집 앞에 가져다 놓은 것도 보좌관님이시겠군요.”
결국 모두 주현희가 벌인 일이었다. 그녀는 무구원에게 한 면만 맞추고서는 모든 걸 알 수 없다고 말했지만, 무구원은 어쩌면 자신이 나머지 다섯 면의 힌트를 손에 쥐고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왜 하필 『햄릿』이었습니까?”
주현희는 그 말에 입꼬리를 올리더니 어딘가 나무라듯 말했다.
“왜 그게 첫 질문인가요? 해야 할 다른 질문이 산더미 같을 텐데.”
“이것도 작약과 관련이 있는 겁니까?”
물론 관련은 당연히 있었다. 작약이 생전에 가장 좋아하던 책이 바로 『햄릿』이었으니까. 그들을 아끼던 선배인 그녀가 그걸 모를 리 없었다. 주현희는 방 안을 천천히 둘러보다가 여전히 선명한 어느 날의 기억을 떠올렸다.
과거 어느 한 순간에, 무구원이 앉은 자리에 작약이 앉았던 적 있었다. 남경의 독사라고 불리는 쌍둥이들과 주현희가 마주 앉아 보내던 어느 오후였다.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윤작이 천천히 책장을 넘기며 다음 구절을 따라 읽어 내려갔다. 그런 그의 낭독을 가만히 듣던 주현희가 지금의 무구원처럼 그들에게 물었다.
“웬 『햄릿』이지?”
그녀의 목소리에서 예민한 기색을 읽은 작약은 그저 설핏 웃음을 지었다. 중요한 순간이 다가오는데 쌍둥이들은 늘 그렇듯이 태연할 뿐이었다. 웃음 끝에 윤작이 뜻 모를 말을 했다.
“선배, 이건 그저 우리 형제끼리 하는 가벼운 장난입니다. 하기 싫은 일을 맡을 때마다 마치 무대 위에 선 배우의 심정이 되어보려는 거죠.”
“…이 일은 그런 가벼운 장난 같은 게 아니야, 작아.”
중요한 일을 앞두고 실없이 구는 것을 꾸짖을 심산으로 한 말이었다. 그런데도 윤작은 여전히 평연한 얼굴로 이어서 대답했다.
“셰익스피어의 다른 희곡에 이런 구절이 있죠. 이 세상은 하나의 연극 무대일 뿐이다. 그렇다면 우리도 그저 연극의 배우일 따름인 거 아닌가요.”
윤작은 늘 이성적이고 차분하여 학자 같은 구석이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타고난 살인귀기도 했다. 어느 쪽이 정말 그의 본질이고 연기인지 확실히 알 수는 없었다. 단 한 번도 속내를 털어놓은 적 없던 쌍둥이들에게 주현희는 엄중한 말투로 강조했다.
“네 말장난에 내가 어떻게 당하겠니. 뭐가 되었든 이 일은 실패 없이 진행해주었으면 해. 설계도는 우리 모두에게 정말 중요한 물건이야. 윤약 네가 그 애를 잘 설득해서….”
“제가 알아서 할게요, 선배.”
옆에서 끼어든 윤약의 차가운 목소리가 염려를 단숨에 일축했다. 작과 달리 타고난 기질이 예민한 그는 대화를 길게 이어가는 법이 없었다. 약은 주현희의 눈길을 무시한 채 제 형의 손을 끌어당겨 손목의 시계를 확인하곤 나갈 채비를 시작했다.
저 멀리 북해에서 내려오는 기차가 이곳에 당도하기까지 한 시간 정도 남았다. 이곳 수도 중앙역에서 잠시 정차한 기차는 남경으로 향할 예정이었다. 윤약은 기차표를 다시 한번 확인한 뒤에 옆에 벗어 둔 코트를 걸쳤다.
“형, 갈게. 내 오필리아가 곧 도착할 테니.”
“…그래. 내일 보자.”
그 오필리아가 누구를 의미하는지는 이미 모두가 알고 있었다. 참으로 고약한 비유라고 생각하면서 주현희가 약에게 물었다.
“정말 그 애가 올 거라고 생각해? 아이를 낳은 지 얼마 안 됐다고 하던데.”
“당연히 오겠죠. 그 여자도 배역에 완전히 심취했을 테니까.”
윤약의 아름다운 미소가 어둠 속 등불처럼 기이하게 일렁였다. 불안감을 느낀 주현희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그는 훌쩍 저택을 떠나버렸다. 주현희가 작약이 말한 햄릿의 의미를 알게 된 건 그다음 날이었다. 무정원의 아내가 죽은 채로 남경역에 도착한 기차 안에서 발견된 것이다.
그날 이후 시간이 많이 흘렀으나, 주현희는 작약에게서 느낀 위화감과 그 이후에 벌어진 비극이 여전히 현재 진행형으로 이어지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무구원과 윤모난. 이 두 사람은 형들 세대의 일에 휘말려 이 자리까지 오게 된 것이다.
누군가는 이 모든 비극을 큐브 탓이라고 하겠지만 주현희는 그 말이 틀렸다는 것쯤은 아는 분별력을 갖게 되었다. 결국 이 모든 비극의 원인은 사람의 욕심이다.
“…햄릿에 더 가까운 건 작약보다는 그 동생이겠죠. 작약은 설계도를 햄릿이 될 만한 인물에게 주었을 테니까.”
과거의 회상에서 빠져나온 주현희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이를 놓치지 않은 무구원이 바로 그녀의 말을 반박했다.
“팀장님이 햄릿인 것이 아니라… 보좌관님이 팀장님과 햄릿을 연결 지으려는 것 아닙니까.”
“그럴 수도요. 지금은 이번 오필리아가 누구일까 생각하고 있어요.”
약의 오필리아는 무정원의 아내였다. 그럼 윤모난의 오필리아는…. 주현희는 날카로운 시선으로 무구원을 바라보았다. 젊고 기품이 있다고 한들, 늠름한 사내놈은 영 오필리아에 어울릴 법한 모습은 아니었다.
그러나 시적 언어는 결국 상징이다. 사물의 표면에 달라붙은 의미들이 그 상징을 완성한다. 천경교의 어머니 신께서 천국을 텃밭으로 부르셨듯이 햄릿이 그를 오필리아라 호명하면 그는 그렇게 될 것이다.
“…감히 그 사람을 이용하게 두지는… 않을,”
“누구라고 생각해요? 윤모난 씨?”
질문은 발끈하며 일어선 무구원이 아닌 문밖의 사람에게 향했다. 상처를 감싸 쥐고 문밖에서 대화를 엿듣던 윤모난이 살짝 어깨를 으쓱이며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의 등장에 무구원은 일순 긴장한 듯이 턱을 움찔했다. 그런 그를 발견한 윤모난이 짜증스레 대답했다.
“오필리아인지 나부랭이인지. 그게 저랑 무슨 상관입니까. 관심 없습니다.”
“…….”
“저 일어났으니 이만 가보겠습니다. 무구원, 너도 그만하고 나와.”
윤모난은 무구원을 억지로 의자에서 끌어 내려 무작정 뒷덜미를 잡아당겼다. 무구원은 저항도 없이 일어났다. 그런 그들에게 주현희가 나긋한 목소리로 권유했다.
“가는 건 상처가 나을 때까지 천천히 머무르지 그래요?”
“아니요. 저는….”
“내 도움 없이 무정원을 죽이긴 어려울 텐데요.”
사실상 협박이나 다름없는 말이었다. 당장 이곳을 뛰쳐나갈 기세인 둘에게 주현희는 다른 이유를 얹었다.
“무구원 씨도 당분간 여기에 있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요. 이번에 끌려가면 채찍형으로 끝나지 않을 텐데요?”
“…….”
“그간 당신이 무슨 일을 겪었는지 잡담이나 나눠볼까요?”
그 말에 무구원은 당장 뛰쳐나가려다가 윤모난의 억센 손길에 저지당하고 말았다. 주현희의 질문이 무구원을 향하기는 했지만, 사실상 윤모난을 회유하기 위한 미끼였던 것이다. 아까까지만 해도 제일 먼저 나가려던 윤모난은 그의 옷깃을 세게 잡아당기며 무언의 경고를 했다.
윤모난은 일단 예의를 갖춰 인사했다.
“지부장님의 뜻이 정 그러하시다면 따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잘 생각했어요. 밤이 늦었으니 대화는 이만 끝내죠.”
주현희는 다른 말을 더 보태지 않고 방을 나갔다. 속이 복잡해져 벅벅 마른세수만 하던 윤모난이 한층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무구원, 너 대체 무슨 생각 하고 사냐?”
“…….”
“입을 다무시겠다?”
살짝 긴 검은 머리칼 아래로 차가운 눈동자가 언뜻 비쳤다. 냉담한 눈빛으로 쏘아보던 윤모난이 보란 듯 품에서 종이 한 장을 들어 올렸다. 손가락 사이에서 팔랑거리는 종이의 정체는 바로 편지였다.
“안범이 이걸 나한테 주더라. 내용이 가관이던데.”
그건 서곡에 돌아가기 전에 무구원이 안범과 경해국에게 남긴 편지였다. 안범이 그 도토리 같은 머리를 데굴데굴 굴려 바로 폐기하라는 말을 듣지 않고 몰래 빼돌린 그 편지를 윤모난에게 준 것이다. 그 의도가 무엇이었든 간에 윤모난도 무구원의 계획을 모두 알게 된 셈이었다.
여전히 무구원에게서 아무런 대답이 없자 편지는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졌다. 이어서 윤모난은 착잡한 얼굴로 새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몇 번의 헛손질 끝에 불이 붙은 담뱃잎이 타들어가며 조용한 침묵을 갈랐다.
“너 이 편지에 쓴 내용 다 진심이냐?”
뿌연 연기를 뿜으며 윤모난이 물었다. 무구원은 굳게 닫혀 있던 입을 어렵게 뗐다.
“네.”
“…무슨 생각으로 내 복수를 대신 하겠다는 건데?”
연기 너머로 차가운 시선을 보내며 윤모난이 따지듯이 말했다.
“내가 언제 그렇게 해달라고 한 적 있어?”
“…….”
“아니, 내가 너한테 바라는 거는 딱 하나. 복종하는 것 말곤 없었어.”
이젠 지친 기색마저 배어 나오는 말투였다. 무구원 역시 그러한 말에는 반박할 여지가 없었다. 윤모난은 늘 무구원을 복종시키려 했으나 무구원은 어머니 신에게조차 순종하지 못하는 신도로서 그에게 실망만 안겨왔으니까.
“난 너에게 복종만을 요구했다고.”
“…팀장님.”
내내 바닥으로 떨어져 있던 무구원의 고개가 서서히 올라왔다. 항상 그랬듯 반항적인 눈빛을 하고 있을 거라 예상했지만, 의외로 그의 눈가는 금방이라도 눈물을 떨어트릴 것처럼 젖어 있었다.
윤모난이 잠시 당황하고 있는 사이 무구원은 띄엄띄엄 말을 이어갔다. 높낮이가 극명하지 않은 단조로운 목소리 끝이 살짝 떨리고 있었다.
“저에게 마지막으로 기회를 주신다면….”
무구원은 어딘가가 허물어진 듯한 모습으로 천천히 거리를 좁히며 경계심 가득한 이리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쓰러지듯이 윤모난의 앞에 무릎을 꿇더니 한껏 틀어막혔다가 겨우 새어 나온 듯한 목소리로 고백했다.
“복종할 겁니다.”
드디어 맹세하는 복종이었다. 사랑 고백을 하듯이 애원하면서 하는 복종. 늘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자의적으로 해석하던 무구원은 그 의미를 또 한 번 새롭게 정립했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을 길들이려는 윤모난의 시도를, 이 모든 과정을 그저 진심으로 사랑했기에.
“복종하겠습니다.”
“또 네 식대로 생각하겠다는 건 아니고? 네가 날 아주 병신으로 아는구나.”
그러나 윤모난은 발밑에 무릎 꿇은 남자를 냉랭하게 내려다볼 뿐이었다.
“싫다면서 강간하고 머리에 총 들이댄 게 당장 얼마 전이야.”
“…….”
“그런데 이제는 무릎까지 꿇는군. 거짓말쟁이에, 손바닥 뒤집듯 말 바꾸는 놈을 내가 뭘 믿고?”
순간 창백한 손이 무구원의 멱살을 잡아챘다. 손만큼이나 시린 음성이 그의 머리 위로 으르듯이 내리꽂혔다.
“…팀장님.”
“왜 갑자기 팀장님이야. 언제는 이리라며.”
“…….”
“뭐가 진짜고 거짓이야? 네 본질이 대체 뭐냐고, 무구원.”
무구원은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총을 겨눈 그때나 지금이나 제 행동의 본질은 같습니다.”
“그러니까 그게 뭔지 똑바로 말해.”
“말하면요. 용서라도 하실 생각이십니까?”
“…뭐?”
“저의 과오는 팀장님께 용서를 구하기엔 너무 크지 않습니까. 무엇보다 저 때문에 팀장님의 조카들이….”
순간 명치부터 욱 치밀어 오르는 분노에 윤모난은 무구원을 몇 대 치고 싶었지만 팔이 꿈쩍도 하지 않았다. 검은 늪같이 가슴속을 잠식하는 어떤 감정 때문에 숨이 턱 막혀 질식할 지경이었다.
“그러니 저를 믿는 게 아니라 증오하는 마음으로 복종시키십시오. 본질이 아니라, 제가 당신을 속이고 기만하고 감금하고 강간했다는 현상만을 되새기시면서요.”
무구원의 말끝에는 여전히 미세한 물기가 배어 있었다. 여전히 무릎 꿇은 채 제 멱살을 쥔 윤모난의 손등 위로 손을 겹쳤다.
“…제가 바랄 수 있는 건 그것뿐입니다. 이런 다리라도 괜찮다면, 팀장님이 원하는 곳에 가실 때까지만 저를 써주십시오.”
윤모난은 무구원에게 늘 가장 단단한 다리가 되라고 요구했었다. 마치 다리가 없어 한곳에 머무르고 있는 사람처럼. 그에 부응하려 했지만 무구원은 참으로 많은 실패를 했었다. 그런데도 여전히 윤모난이 자신을 바란다면, 비록 자신이 그의 생각보다 부실하고 어설프더라도 양해해주기만을 바랄 뿐.
“…내가.”
한참의 침묵이 지나고, 끝이 쩍 갈라진 목소리가 윤모난의 마른 입술을 비집고 나왔다.
“내가 가고 싶은 곳이 반드시 진실을 통과해야 갈 수 있다면?”
말이 잠깐 끊어졌다가 이내 나직이 이어졌다.
“나는 알고 싶어.”
“…….”
“현상이 아닌, 본질에 닿고 싶어. 그 어떤 고통이 따른다고 할지라도.”
“…그건 잠시 유예해주십시오. 복수가 먼저입니다.”
무구원은 그것에 관해서만큼은 확답할 수 있었다.
“저에게 계획이 있습니다.”
“무슨 계획?”
“곧 형님이 고섬에서 열릴 한백호의 장례식에 가는 기차에 탈 겁니다.”
“무정원이 공간계 에스퍼를 이용하지 않고 기차로 이동한다?”
“1월과 6월에는 천경교 축일 주간이 있습니다. 어머니 신께서는 축일에 자연의 섭리를 흩트리는 모든 행위를 금하셨죠. 그러니 해당 기간에 시공간 이능력은 엄격히 금지됩니다.”
과연 무구원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윤모난은 천천히 생각을 정리했다. 반도는 도로 사정이 좋지 않아 거점 간 오가는 데 기차를 타는 것이 보편적이고, 아무리 무정원이라도 천경교의 축일 주간에는 기차를 택할 수밖에 없을 터였다. 서곡센터 입소식이 있던 7년 전 1월, 자신도 서곡행 열차에서 무정원과 무구원을 마주치지 않았던가.
“하지만 기차에 북해 에스퍼들이 잔뜩 깔려 있을 텐데.”
“…저는 이걸 이용할 겁니다.”
무구원은 조용히 탁자 위에 은색 큐브를 올려놓았다. 전원을 켜자 주씨 저택에 어지럽게 얽혀 있는 파동들이 일시에 꺼진 듯이 느껴지지 않았다. 윤모난은 큐브를 보자마자 얼굴을 굳혔다. 이런 타이밍에 이 물건이 나올 줄은 미처 예상치 못했던 것이다.
“이 큐브를 사용해 기차 안에서 형님의 파동을 폭주시킬 겁니다. 북해에서는 그런 일을 수치스럽게 여기기 때문에 형님은 아마 가까운 이들 말고는 모두 물러가게 할 겁니다.”
무구원은 무서운 계획을 털어놓으면서도 평연한 얼굴을 유지하고 있었다.
“기도를 위해 기차 객실에 들어갈 수 있는 인원은 저를 포함해서 많아봤자 여섯입니다. 다 처리하는 데까지는 아마 7분 정도 소요되겠죠.”
폭주한 에스퍼는 트랜스가 되기까지 극심한 고통에 시달린다. 무구원의 말대로라면 무정원은 딱 죽기 직전까지 갔다가 결국 트랜스화하여 동생의 손에 처리될 것이었다. 윤모난은 무구원의 계획을 머릿속으로 천천히 시뮬레이션했다.
아마도 7분이면 객실 안은 피바다가 될 것이다. 그러나 시체로 뒤엉킨 좁은 객실에서 무구원이 무사히 빠져나오는 것이야말로 이 계획의 관건이다. 무정원과 그 수족을 죽이는 데 성공하더라도 객실 밖으로 나오자마자 복도에 있는 북해의 몰이꾼들에게 몰려 사면초가가 될 것이 분명하다.
물론 무정원이 죽으면 북해 몰이꾼들의 사기도 꺾일 것이다. 전쟁에서 괜히 적장의 목부터 베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개중에서도 죽은 우두머리를 위해 마지막까지 충성을 바치려는 놈들이 있기 마련이고, 무구원은 시체들을 밟으며 그들을 상대해야 할 것이다.
좁은 기차 복도에서의 근접전이라. 촌각을 다투는 싸움에서 3분 시간 역행 능력은 유리할 수밖에 없을 테다. 윤모난은 머릿속으로 무구원의 곁에 낙엽처럼 쌓이는 검은색 제복의 시체들을 그려보았다.
이론대로라면 흠잡을 데 없는 계획이다. 아주 무모하지만 못할 것도 없다. 그러나….
“이 큐브가 근거리에 있는 모든 에스퍼의 파동을 폭주시킬 텐데 넌 어쩌려고 그래? 너무 대책 없는 계획이잖아.”
“그건 나름의 방법을 생각해두었습니다.”
“하지만 큐브는…”
“혹시 이걸 이용하는 것이 양심에 걸려서 그러시는 겁니까?”
“…….”
그 말에 윤모난은 무구원의 계획을 들으면서 느꼈던 불편한 기분을 또 언제 받았는지 떠올리게 되었다. 명치 아래를 치는 듯한 격통. 얼마 전 강간당했을 때 느꼈던 것과 같은, 무구원을 상실했다는 바로 그 느낌이었다.
“거짓말을 하든 큐브를 이용하든 할 수 있는 건 다 해야 제 형님을 죽일 수 있습니다. 저야 거짓말쟁이이니 부끄러울 건 없습니다만 만약 그 부분이 걸리신다면…”
“양심에 걸려? 우습네.”
윤모난은 자신이 정의로운 인물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았다. 아버지를 죽이고 혈육들을 모두 폭탄으로 터뜨려 죽인 패륜아가 이제 와서 양심을 운운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다.
그러나 무구원은 다르다. 스물셋의 그에게는 신념이라는 게 있었다. 모든 생명의 가치를 저울질하지 않겠다는 신념. 그는 아동 병원에서 억울하게 죽은 어린아이들의 비극에 공감했고, 큐브가 일으킬 수 있는 모든 나쁜 결과들에 대해서 진심으로 걱정했었다.
위정자들의 복잡한 사정과는 별개로 우리는 사리에 맞게 행동해야 한다던 사람이 윤모난이 알던 무구원이었다. 자신만의 온전한 세계를 가진 무구원.
윤모난은 잔인한 계획을 망설임 없이 읊는 아름다운 입술을 보며 통렬하게 깨달았다. 자신은 진정으로 그를 타락시켜 바닥으로 처박고 온갖 더러운 흙을 묻혔구나.
그렇다면 무구원은, 무구원은… 대체,
“팀장님?”
제 형을 죽인 뒤에는 어쩌려고 했을까. 자신의 아내와 아이를 위해 대신 죗값을 치르겠다고 했으니 그 끝은 아마도 자결이었을 것이다. 무구원은 애초에 그 기차에서 내릴 생각이 없었던 거다. 복도로 나가려는 시도조차 염두에 두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객실 안의 모든 인원을 죽이고 난 뒤 누군가의 총이나 칼을 순순히 받아들여, 그토록 끈질겼던 생명이 꺼지는 순간 피를 흘리는 제 형제의 옆자리에 누웠으리라.
윤모난은 죽은 무구원을 발견할 자신을 상상했다. 바닥에 처박혀 죽은 무구원을 보고서도 복수에 성공했다며 웃을 수 있을까?
“팀장님.”
윤모난은 속절없이 그 상상에 매몰되고 말았다. 무구원의 미래가, 그의 죽음이 음울한 먹구름처럼 머리 위로 몰려들어 그림자를 드리웠다. 바보 같은 무구원은 절대 이해하지 못한다. 자신에게 또 상실을 안긴다는 게 얼마나 잔인한 일인지.
일련의 생각들이 몸서리칠 정도로 끔찍해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는 것 같았다. 윤모난은 문득 무구원의 제안이 무엇이든 받아들이고 싶지 않아졌다. 세상에 빼앗겨버린 것이 너무도 많아서 이젠 아무것도 잃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형들부터 청연이까지. 모든 평범한 삶을 빼앗긴 뒤에 벌거숭이처럼 내던져진 자신에게 이럴 수는 없는 거였다. 무언가 더 달라고 바란 적도 없는데 계속해서 잃기만 하는 삶이라니. 그저 가지고 있는 것만큼은….
그리고 윤모난은 깨닫고 말았다.
‘나는 무구원을 가지고 있었구나.’
그러니 잃을 수도 있겠구나. 어느새 얼굴이 미끈거릴 만큼 땀에 젖은 것이 느껴졌다. 어깨를 잡고 흔드는 무구원의 얼굴이 희게 번지고 안개처럼 흔들린다. 윤모난은 흐려지는 정신 사이로 그에게 따지고 싶었다.
네가 물었었지, 두려운 것이 없냐고. 내가 두려워하는 건 이렇게나 끔찍한 건데. 윤모난은 자신의 얼굴을 무구원이 큰 손으로 고정시키며 무어라 말하는 것도 같았지만, 갑자기 누군가의 목소리가 끼어든 탓에 도저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무서워하지 마. 항상 되찾을 방법은 있어.’
갑자기 찾아온 유령이 귓가에서 무언가 속삭였다. 친근하면서도 낯선 음성은 자꾸만 기억에 혼선을 주고 현실 인식을 방해했다. 눈을 감으면 훅 유령의 세계로 빨려 들어갈 것 같은 기분에 윤모난의 몸이 휘청였다.
“팀장님? 어디 아프십니까? 저 보세요.”
빌어먹을 환청. 여전히 삿된 환청에 시달리는 자신의 나약함을 들킬까 봐 윤모난은 겨우 힘을 쥐어짜 무구원을 제게서 떨어트렸다. 그에게서 두어 걸음 물러서는데 몸이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기우뚱했지만 단단한 벽에 기대어 넘어지지는 않았다.
무구원의 커다란 손이 날개뼈 사이로 쑥 올라오더니 윤모난을 단단히 끌어안았다. 누구라도 의지하고 싶어 할 만큼 침착한 목소리가 그를 어루만졌다.
“팀장님은 쉬셔야 합니다.”
“…….”
“주무시면 저는 떠나겠습니다.”
안 된다고 말하려 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아무리 윤모난이라 해도 부상 당한 몸으로 당장 무정원을 죽이러 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미 식은땀으로 축축해진 몸에서는 뜨거운 김이 솟을 듯 열이 끓었다. 상처에 침투한 세균을 막아내기 위해 몸이 악다구니를 지르고 있다는 증거일 터였다.
무구원은 쓰러지기 직전인 윤모난의 무릎 뒤에 손을 꿰어 넣고 들어 올리려 했다. 하지만 힘이 쭉 빠져나간 190cm의 육신은 너무 무거워 중심을 잡기가 어려웠다. 대신 윤모난은 스스로 방 안에 놓인 침대 위로 쓰러졌다.
유령은 여전히 무겁게 전신을 짓누르고 있었다. 윤모난은 자신에게 이불을 덮어주고 머리를 쓸어 넘기는 무구원을 붙잡으려 했지만, 유령에게 짓눌린 탓에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여전히 같은 말만 반복하는 유령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윙윙거렸다. 무엇인지도 모를 것을 되찾아주겠다는, 기약 없고 어딘가 황량한 소리. 결국 윤모난은 견디지 못하고 까무룩 정신을 잃고 말았다.
눈을 뜨니 윤모난은 다시 현실로 돌아와 있었다. 잠깐 눈을 감았다가 뜬 정도의 기분이었지만, 창을 투과하여 햇빛이 넘실대고 있는 걸 보니 적어도 일곱 시간 이상은 지난 것 같았다. 주변은 고요하기만 했고 유령도, 무구원도 없다.
“무구원.”
윤모난은 무구원을 가장 먼저 찾았다. 하지만 그 특유의 낮고 건조한 목소리가 되돌아오지 않는다. 갑자기 심장 근처가 욱신대는 느낌에 윤모난은 배에 상처가 있는 것도 잊고서 버럭 소리쳤다. 무구원, 그 우스운 이름을 연이어서 부르고 또 불렀다. 하지만 주변은 감감할 뿐이었다.
“무구원! 이 새끼야, 당장 안 와!”
그 빌어먹을 계획을 실행하러 벌써 떠나버린 걸까. 윤모난은 침대 매트리스를 주먹으로 퍽퍽 때리며 더 크게 소리쳤다.
“내 명령도 없이 떠나! 무구원!”
복종하겠다고? 우스운 소리다. 무구원은 목줄을 매어둬도 트럭을 향해 뛰어가는 정신 나간 개새끼와 다를 바 없는 천성 꼴통이다. 윤모난은 차오르는 분노를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미친 새끼….”
무구원의 본성은 그 자신이 누군가에게 진정으로 복종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리고 윤모난은 복종하지 않는 놈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하지만 윤모난은 그래서 무구원을 사랑했다. 무구원의 체향과 자아는 닮은 구석이 많다. 햇볕에 말린 빨래처럼 따듯하면서도 빳빳하고 정직하다. 윤모난은 그 단단하고 따사로운 자아를 사랑했다. 그는 멍해진 채로 되뇌었다.
“이럴 줄 알고… 내가 경고했잖아.”
그러니 이제는 그도 알 것 같았다. 이게 바로 무구원이 말한 두려움이라는 것을.
윤모난은 그간 무구원을 향한 자신의 사랑을 짝사랑이라 명명해왔다. 자신을 향한 마음을 외면하기 위한 구차한 행동임을 모르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자신만이 무구원을 기억하고 사랑하고 그리워한다고 믿음으로써 애초에 관계를 위한 구실 같은 건 주지 않으려 한 것이다.
그래서 무구원이 7년간 안경을 보관하고, 마당에 모란을 심고, 자신을 강간하면서도 내내 아픈 표정을 지었을 때도, 그 검은 늪 같은 두 눈이 그리움과 아픔으로 물결쳤을 때도 윤모난은 선을 그었다.
“나한테 아무것도 기대하지 말라고 애초에 경고했잖아. 너도 그러겠다고 약속했잖아.”
윤모난은 이기적인 자신의 요구에도 그저 순진한 아이처럼 고개를 끄덕이던 무구원을 떠올리며 침대 위 시트를 꽉 쥐었다.
“젠장…!”
7년 전 무력으로 무구원을 길들이는 데에는 완전히 실패했음에도, 다시 한번 그를 뒈지게 패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윤모난은 당장 쫓아가 그놈의 다리를 부러뜨릴 결심으로 일어났다가, 멀뚱히 자신을 향하고 있는 두 쌍의 눈과 마주하고 말았다.
“대체 시팔, 뭐 하시는 겁니까?”
윤모난의 생쇼를 문에서 모두 지켜본 경해국이 제 까까머리를 벅벅 긁으면서 뚱한 얼굴로 묻는다. 안범과 경해국, 둘 다 어디서 얻었는지 아이스크림 바를 입에 문 채로 윤모난을 구경하고 있었다. 그나마 조금 더 눈치가 있는 안범이 어색한 동작으로 경해국의 옷자락을 끌어당겼다.
“경 선배님, 하지 마세요.”
“이거 놔. 아니 어이가 없잖아. 대체 같은 남자끼리 이게 뭐 하는 짓이여? 설마 팀장님도 무씨 좋아합니까?”
“닥쳐! 경해국!”
“경 선배니이이이임! 입 다무세요!”
안범이 펄쩍 놀라 튀어 오르더니 얼른 좌우를 살피며 눈치를 봤다. 그런 안범을 밀치고 경해국이 씩씩대며 옆에서 무언가를 질질 끌고 왔다.
“그렇게 애타게 찾는 무씨 여기 있습니다! 여기! 뭔 전쟁 난 줄 알았네.”
“…뭐?”
윤모난은 그제야 문 바깥 구석쯤에 서 있던 키 큰 덩치가 무구원이었음을 깨달았다. 무구원은 어안이 벙벙한 듯 맹한 얼굴로 턱을 긁적이며 방 안으로 들어섰다.
“저… 찾으셨습니까?”
“아니. 너, 무슨… 나 잘 때 떠날 거라고 하더니… 아니.”
윤모난이 그답지 않게 더듬거리기 시작하자, 씨팔 저팔 하며 혼자 욕지거리를 뱉고 있던 경해국이 왁, 소리를 질렀다.
“우리는 씹, 무슨 눈뜬장님인 줄 압니까! 당연히 말렸죠.”
“어제 새벽에 저랑 경 선배님이랑 둘이서 무 선배님 다리 한 쪽씩 붙잡고 말렸습니다. 심지어 화장실도 같이 가고 잠도 같이 잤습니다. 경 선배님이 오른쪽, 제가 왼쪽에서 이렇게 꼭 껴안고요. 무 선배님이 어찌나 고집을 부리시던지….”
대화에 후딱 끼어든 안범이 슬쩍 눈치를 보더니 한마디 더 거들었다.
“우와아…. 모난 형이 무 선배님 엄청 걱정했나 봅니다.”
“…….”
그러고서는 정적이 찾아왔다. 결국 경해국이 옆에서 윗입술을 올리며 한 소리 했다.
“…시팔, 분위기 좆같네. 진짜.”
경해국의 말마따나 분위기는 더할 나위 없이 좆같았다. 옛 2부 7팀 전원이 무구원의 자살 시도나 다름없는 계획을 대충은 알게 된 참이었다. 한참을 침묵한 끝에 윤모난이 먼저 정적을 깼다.
“큐브를 사용하는 건 절대 안 돼.”
“…….”
“큐브가 정확히 어떤 물건인지 모르는 상황에서는 이용할 수 없어.”
“도구는 도구일 뿐입니다. 기능과 역할만 숙지하면 되지 그 내력까지 알아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 새끼가 따박따박 말대꾸를…!”
“엇, 형 참으세요!”
이번에도 안범이 얼른 중간에 끼어들어 말렸다. 윤모난의 뜻은 분명했다. 큐브를 사용하지 않으면 무구원의 무모한 계획도 성립되지 않는다. 하지만 무구원은 고집을 꺾을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이 와중에 ‘무 선배님한테 걱정되니까 가지 말라고 하세요’라며 조언이랍시고 속삭이는 안범을 옆으로 밀치며 윤모난이 무구원에게 물었다.
“너 왜 자꾸 내가 큐브에 대해서 알아보려는 걸 막는 거야? 그 설계도인지 뭔지가 우리 형들이랑 관련 있어서?”
“…….”
“내 일과 큐브는 서로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는 문제야. 네 거짓말은 나를 또 기만하는 거라고!”
그 말이 결국 무구원의 철벽을 허물어트린 듯했다. 그의 얼굴이 미세하게 굳더니 입술이 열렸다 닫히기를 반복했다. 기다림에 슬슬 지쳐가려던 윤모난이 벽을 한 차례 주먹으로 쾅 치자 무구원은 결국 아는 바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저도 모든 일의 인과관계를 정확히 아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주현희 보좌관과 팀장님의 형님들 사이에 큐브에 대한 정보가 오갔고… 그게 어쩌면 7년 전 일과도 관련이 있겠거니 짐작만 할 뿐입니다.”
“설계도 때문이지?”
“맞습니다.”
“주 보좌관의 목적이 뭐라고 생각해? 가문의 이득?”
주현희는 서강 주씨 가주의 딸이자 보좌관이고, 항상 그림자처럼 가주의 옆에 있어야 하는 임무를 지녔다. 윤모난은 주현희의 계획이 오로지 그녀의 뜻인지 아니면 가문의 의도에 따른 것인지 알아야 했다. 무구원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직은 모릅니다. 다만 한백호 문제로 열린 평의회 비상 회의에는 주 보좌관님이 가주의 대리인 자격으로 참석하고 있는 것 같더군요. 그 김에 큐브 문제도 은밀히 해결하려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주 보좌관이 가문 몰래 설계도를 찾고 있을 가능성도 있다?”
“네. 물론 몰래 해결하려는 건지 아니면 명령을 듣고 해결하려는 건지는 모르지만요. 주 보좌관이 여기 있는 건 어쨌건 회의에 대리 참석 하기 위해서니까요.”
이런 얘기가 괜히 튀어나온 것은 아니다. 어제 주현희와의 대화를 곱씹어보건대, 무구원은 이 가정이 확신까지는 아니더라도 꽤나 설득력 있다고 생각했다.
일단 주현희는 경쟁 가문 사람이라 할 수 있는 경해국과 무구원을 무정원의 추적을 피해 숨겨줬다. 그리고 그건 주현희의 단독적인 결정일 확률이 높았다. 주씨 가주가 정쟁에 휘말릴 수 있는 민감한 일에 끼어드는 악수를 나서서 둘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 둘뿐 아니라, 그녀는 윤모난도 숨겨주고 있었다. 서강은 7년 전 남경을 배신하고 윤화신을 저버렸다. 그런데 주현희는 윤모난을 평의회에 바로 넘기지 않고 뒷골목에서 건져내 치료까지 해줬다. 모순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결정적으로, 윤모난을 반도로 불러낸 인물이 다름 아닌 주현희였다. 서강 쪽에서 시한폭탄이나 다름없는 그를 굳이 불러냈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주 보좌관은 우리 형들이 큐브의 설계도를 나에게 줬다고 생각하는 것 같던데.”
“맞습니다.”
어제 주현희와 무구원의 대화를 엿들으면서, 윤모난은 한백호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작은형이 과거에 무정원의 아내를 죽였다는 이야기 말이다. 물론 아직까지는 그 일과 큐브가 어떠한 연관이 있는지는 알지 못한다. 그럼에도 그의 직감은 한백호의 마지막 말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렇다면 내게 그것에 대해 물으려 하는 게 당연하겠지.”
“형, 생전에 형님들께서 설계도나 큐브에 대해서 말씀하신 적 없으세요?”
“전혀.”
안범의 질문에 대답해주며 윤모난은 다시 생각에 잠겼다. 큐브는 불길한 물건이고 형들도 생전에 온갖 불길한 일들에 개입되어 있었다. 한백호조차 형들이 죽은 건 업보라는 식으로 말했으니. 심지어 어제 대화에 따르면 큐브의 설계도까지 그들의 손에 있었다.
‘…만약 작은형이 무정원의 아내를 살해한 것이 원죄였다면?’
물론 그렇다고 해서 무정원이 조카들을 죽게 만들었다는 사실이 없던 일이 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서씨의 말대로 이건 끊임없이 이어지는 대물림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무정원도 그저 아내의 복수를 한 것이고, 청연은 그 과정에서 안타깝게 희생된 것일지도.
윤모난은 불쑥 고개를 치켜든 생각을 꾹 누른 채로 말을 이었다.
“우리 형들은 평소 말할 때도 빙빙 돌려 이야기하곤 했어. 동생인 나도 못 알아들을 때가 많았지.”
작약은 유독 시나 고전 희곡을 즐겨 읽곤 했다. 시인이 될 일도 없고 아버지의 뒤를 이어 정치를 할 형들이 한가롭게 시집을 읽고 있으면 어린 윤모난이 물었다. 그렇게 시나 읽어 무얼 할 수 있느냐고. 그때 약이 동생의 뺨에 입을 맞추며 해준 대답을 윤모난은 세 사람에게 그대로 들려주었다.
“작은형이 그랬어. 상징과 알레고리로 가득한 시의 세계에서 의미를 지닌 것과 아닌 것을 가려낼 줄 아는 능력을 기르면 세상의 이치를 가려낼 수 있다고.”
“알레구리… 그건 뭡니까, 대체.”
경해국이 반쯤 못 알아듣고 꺼벙한 얼굴로 묻자 윤모난이 뜻을 알려주었다. 이면적 의미를 내포하는 이중의 추상. 작약과 모란이라는 이름이 세 형제의 관계를 암시하듯 표면적인 이야기 아래로 진정한 의미를 숨겨놓는 것.
“형들이 설계도를 가지고 있었다면 나한테도 수수께끼를 남겨놓았을 거야. 내가 풀지 못한 걸 수도 있고…. 어쩌면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걸 수도 있겠지.”
윤모난이 간접적으로 자신의 기억상실 증상을 염려해 털어놓자, 지금껏 조용히 있던 무구원이 끼어들었다.
“아니요. 그럴 리 없습니다.”
“원래 과거는 쉽게 잊히기 마련이야, 무구원.”
“팀장님은 평균보다 기억력이 뛰어난 사람입니다. 잊으셨을 리 없습니다.”
무구원은 이상하게 자신하는 태도였다. 그러면서도 이 주제를 약간 꺼리는 듯이 얼굴을 살짝 찌푸리기까지 했다. 남의 머릿속을 지가 알면 얼마나 안다고 저러나 싶던 윤모난은 순간 어떤 의심이 들었다. 혹시 무구원이 향정신성 약의 후유증에 대해서 알고 있나?
7년 전에도 무구원은 약 복용 문제로 간섭한 바 있었다. 시도 때도 없이 약을 먹으라며 닦달하던 버릇을 그만두고, 지금은 약에 대해 언급하거나 정신병에 대해서 일언반구 묻지 않는 것도 어떻게 보면 조금 수상했다.
“기억나는 것이 정말 하나도 없다면 팀장님의 형님들께서 말하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아니. 형들은 숨기는 게 많긴 했지만 힌트를 남기긴 했어. 당시에는 모르다가 나중에 가서 그게 힌트였구나 하는 경우가 많았지.”
“예를 들자면요.”
“책 낱장을 찢는 장난처럼 말이야. 그땐 뭔가 싶었던 것들도 나중엔 다 의미를 알게 되거든. 특히 설계도같이 중요한 거라면 반드시 뭔가 단서를 남겼을 거야.”
결국 대화는 아무런 결론을 내지 못하고 끝났다. 어쨌건 주현희와 작약이 큐브를 중심으로 모종의 관계에 있었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벌써 시간은 오후에 접어들었고 마침 붕대를 갈아야 할 시점이었다. 무구원이 돕겠다고 자청했기에 안범과 경해국은 눈치껏 자리를 비켜줬다.
아까 그 지랄을 떨었는데도 무구원은 별다른 말이 없었다. 그저 온 얼굴로 집중해 윤모난의 허리를 감싸고 있던 헌 붕대를 천천히 풀어낼 뿐이었다. 허리에 난 자상이 드러나자 그는 자신이 아픈 듯이 눈썹을 약간 찡그리기까지 했다.
“누가 감히 이 정도로 상처를 낸 겁니까.”
“이 세상에 천재는 나 한 명이 아니야.”
무구원은 상처 부위에 소독약을 뿌린 뒤에 깨끗한 붕대를 쥐고 허리에 댔다. 처치하면서 보니 윤모난의 몸 이곳저곳이 다 흉터들이었다. 시간이 많이 흘러 희미해진 것도 있었지만 여전히 눈에 띄는 상처가 많았다.
목에 남은 붉은색 흉터부터, 알 수 없는 검은 형체로 뭉그러진 가슴 아래 문신까지. 윤모난이 겪었을 고통을 생각하다가 무구원은 저도 모르게 붕대를 쥔 손에 힘을 주고 말았다. 욱신대는 통증을 못 참고 윤모난이 붕대를 쥔 팔을 꾹 눌러왔다.
“아파.”
고통을 호소하는 말에 움찔한 무구원이 고개를 떨구고 붕대를 고쳐 잡았다. 윤모난은 상처로 인한 고통으로 신음했다.
“연숙이란 여자가 시발… 조온나게 쑤셔댔어. 아파 죽겠으니까 살살 해.”
“…네.”
무구원은 기어코 붕대를 단단히 동여맨 뒤 상처가 벌어지진 않을까 다시 한번 허리를 살폈다. 그런 무구원을 보다가 윤모난이 물었다.
“네 아들이랑 아내는 지금 어디 있어?”
“…동산에 피신해 있습니다.”
“아들한테는 뭐라고 설명하고? 네가 가족을 버리고 어리석게 목숨까지 버리려 한다고 유언장은 남겼겠지?”
“알아서 잘 설명했습니다.”
“알아서? 네 애가 거짓말하는 사람은 싫다 그러던데. 아빠한테 실망하면 어쩌려고 그래?”
결국 무구원이 손을 놓고 뒤로 물러섰다. 그는 태오가 그립고 보고 싶은 것과 별개로 윤모난과는 아이에 대해서 얘기하고 싶지 않았다.
그의 입에서 태오의 얘기가 나올 때마다 배 속 깊이 무거운 추를 떨어트린 듯한 심정이 들었다. 옳음은 항상 진실의 영역에만 있는 걸까. 거짓말을 혐오하고 알 권리를 주장하는 부자를 마주하면서 거짓말쟁이는 무기력하기만 했다.
태오는 당신의 아들입니다. 제가 죽는다고 해서 아이에게 아버지를 빼앗는 것은 아닙니다. 무구원은 윤모난을 바라보며 죽어도 말하지 못할 진실을 천천히 곱씹었다. 윤모난이 자신에게 아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면 경해국의 말대로 정말 다 개판이 될까.
태오의 엄마는 늘 이 문제에 관해 같은 입장을 고수해왔다. 그녀는 이상할 정도로 윤모난이 반드시 태오를 해칠 거라고 확신했다. 물론 무구원은 태오의 문제에서 아이 엄마의 의견이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지금까지 그녀의 뜻을 따라왔다.
“네 아들은 언제 태어났지?”
하지만 친아버지의 궁금증 앞에서 무구원은 주머니를 다 털린 채로 서 있는 기분이었다.
“…겨울이요. 북해에 있는 고립된 섬에서 태어났습니다. 배가 뜰 수 없을 정도로 파도가 높게 치던 날에 세상에 나왔습니다. 산파가 말하더군요. 아이가 시련이 많은 계절에 태어나서 걱정이라고.”
“태어난 계절이 무슨 소용이야.”
정작 봄에 태어난 청연이는 피지도 못하고 죽은 것을 떠올리며 윤모난이 일축했다. 하지만 아이에게 어떠한 어려움도 없기를 바라는 부모의 심정을 아주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저와 태오 엄마는 왠지 그 소리가 귀에 박히더군요. 그래서 태오를 보고 있으면 늘 노심초사하게 됩니다.”
그 말을 하면서도 무구원의 얼굴에는 얼핏 미소가 떠올랐다. 생때같은 자식을 생각하면 으레 부모들이 짓는 그런 표정이다. 윤모난은 그 얼굴에 눈길을 떼지 못하는 저 자신이 저주스러우면서도 더 묻고 말았다.
“그래서 예전에 말한 계획대로 아이 어리광을 다 받아주며 키웠나?”
“네. 위험한 것만 아니라면 태오가 하고 싶다는 건 모두 들어주었습니다. 그럴 수밖에요. 아이가 제 무릎 정도에 왔을 때 아빠, 하고 처음 불렀는데 얼마나 이쁘던지요.”
무엇보다 그를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한 사람이 윤모난인데, 사랑스럽지 않을 리가. 무구원에게 있어 두 부자는 자신의 반쪽들을 탐욕스럽게 차지해버릴 만큼 아름다운 존재들이었다.
그래서 무구원은 운명의 꼬임 없이 무사히 제 아버지 밑에서 태어난 태오를 상상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아이는 무태오가 아니라 윤태오였을 것이고 청연이라는 의젓한 아이를 친형처럼 여기며 자랐으리라. 까르르 웃는 아이의 웃음소리와 조막만 한 손으로 아빠의 귀를 잡고 얼굴을 비비는 그 따스한 순간은 자신이 윤모난에게서 빼앗은 축복이었다.
“무구원, 내 말 잘 들어.”
자신을 쏙 빼닮은 아이를 가지고 그 이마에 입을 맞추는 평범한 삶. 그런 것들이야말로 윤모난이 잃어버린 미래였다.
그런데 정작 본인은 누구에게 무엇을 빼앗겼는지도 모르고, 자신의 몫을 뚝 떼어다 만들어진 남의 미래나 신경 쓰고 있었다. 무구원은 그를 위해 과연 무슨 말을 꺼내는 것이 옳을지 고민했다.
“넌 경해국과 함께 가족한테 돌아가. 내 복수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저는….”
“네 아이가 아버지 없이 살게 할 셈은 아니겠지. 가라고 할 때 가.”
“저는 잘못이 있습니다. 7년 전 일은 저에게도 책임이 있죠.”
윤모난은 손에 잡히는 이불을 주먹 안으로 꾹 말아 쥐었다. 무구원은 재회 이후 그에게 무엇 하나 얌전히 된다고 해주는 법이 없었다. 대체 뭐 어쩌라는 것인지 윤모난은 가슴께가 확 답답해졌다.
“네 죗값은 다른 식으로…. 시발, 그럼 앞으로 오이와 당근을 열심히 먹어서 갚아.”
“…….”
“무슨 뜻인 줄 알겠어?”
무구원은 그 말에 숨은 의미를 알아차렸지만, 부정의 뜻으로 고개를 저었다.
“저 오이도 당근도 싫어합니다. 아시지 않습니까?”
“그게 네 업보니 참고 먹어. 그걸로 네가 한 일의 대가를 치렀다고 생각할 테니.”
“아니요. 그러시면 안 됩니다. 그리고 당근을 먹으며 사느니 차라리 미움과 원망을 받는 쪽을 선택하겠습니다.”
우스운 말이나 하면서 무구원은 또 상처받은 아이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윤모난은 이 얼굴에 참 약했다. 어리광 한 번 부려본 적도 없을 놈이 제게만 이런 표정을 보인다. 그 고집 세고 집요한 시선에 가슴이 벅차지 않는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허나 윤모난은 그 얼굴을 외면해 버렸다.
“아니. 네가 진실을 말하지 않으면 믿을 수 없다. 말했듯이 난 본질에 닿고 싶으니까.”
“팀장님, 저는….”
“그러니 네 복종은 아직 받지 않겠어.”
윤모난은 무구원의 멱살을 콱 움켜쥐고서 자신에게서 떨어트리듯이 뒤로 밀쳤다. 멍하니 서 있는 상대를 냉정한 시선으로 훑어본 그는 결국 방을 나가버렸다.
* * *
검은 장갑 끝에 고인 핏물이 아래로 떨어졌다. 바닥에 닿기 전에 얼음 결정이 된 핏방울은 붉은 석류알처럼 바닥을 굴러다녔다. 비정상적으로 낮은 방 안의 온도 때문인지, 아니면 단순히 두려움 때문인지 바닥에 꿇어앉은 남자는 이를 부딪치며 덜덜 떨었다.
“가… 가주님.”
“…왜 사냥개 중 누구 하나 내 조카와 그 어미가 남경을 떠날 때까지 그 사실을 몰랐던 거지?”
“지부장님께서… 하도 은밀하게 가족들을… 윽!”
“결국 너희의 무능력 때문이란 소리군.”
피로 절어 축축해진 장갑을 벗으며 무정원이 음산하게 읊조렸다. 그는 자신 앞에 무릎 꿇은 남자의 목을 조르듯 들어 올렸다. 그의 손안에서 부들부들 떨고 있는 남자는 남경 지부의 김종훈 부장이었다. 무구원을 감시하는 임무에 실패한 뒤 이곳으로 끌려와 자신의 주인과 마주하게 된 김종훈은 목덜미를 찌르는 냉기에 손을 바르작댔다.
김종훈은 다가온 죽음 앞에 본능적으로 시간을 돌려 구차한 목숨을 이어보려 했지만, 무정원은 그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의 손끝이 닿은 피부 가까운 혈관에서부터 서서히 피가 굳어가는 끔찍한 고통에 김종훈이 참지 못하고 비명을 질렀다.
“모든 이는 죽으면 어머니의 땅으로 돌아가야 한다. 망자들은 조에의 거름이 될 것이고, 그 거름으로 다시 생명이 태어날 것이다.”
무정원의 차가운 목소리가 죽음의 기도문을 읊었다. 그 순간 비명이 멎고 대신 유리 깨지는 소리와 함께 성인 남자의 몸이 결정처럼 사방으로 쪼개져 박살 났다. 곧이어 응접실에 붉은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소복이 흩날리는 잔해를 맞으며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고 있던 다른 한 사람은 두려움을 견디지 못하고 앞으로 고꾸라지며 기절했다. 이 남자 역시 7년간 무구원의 고문을 맡아 책임졌던 정신계 에스퍼로, 무정원의 충성스러운 몰이꾼 중의 하나였다. 자신에게 수하를 냉담하게 내려다보던 무정원은 그 역시 김종훈과 똑같은 상태로 만들었다.
“치워.”
“…네.”
무정원의 옆에 서 있던 보좌관은 익숙한 상황인 듯 뒤처리를 시작했다. 그사이 무정원은 책상으로 돌아가 위에 있던 붉은 알약들을 휙 쓸어 바닥으로 털어버렸다. 바닥에 흩뿌려진 알약은 피 구슬들과 구분 없이 뒤섞였다.
“이 쓰레드인지 뭔지 하는 마약이 정신계 고문을 견디게 해준다는 사실을 왜 아무도 보고하지 않은 거지.”
“…저희도 몰랐습니다. 한백호가 개인적으로 만든 마약이라 한씨들을 통해서 은밀하게 유통되어 파악이 느렸습니다.”
“무구원이 그딴 약을 7년이나 복용했다. 내게 거짓말이나 하려고 말이다. 나도 이제 나이가 들었나 보군. 나답지 않게 자비를 베풀었어.”
무정원은 사실 지금껏 자신이 동생을 꽤나 관대하게 대했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길들지 않고 이단의 경계에 비뚜름히 서 있다고 해도 그는 자신의 혈육이었기 때문이다.
어머니 신께서 말씀하셨듯이 피는 신성하니까. 언젠가는 동생인 무구원을 계도하여 밝은 길로 이끌 수 있을 거라 믿었다. 그런데도….
“감히 날 거역하고 가문을 저버렸다.”
반도의 가문들은 사소한 것이더라도 가문을 배반하는 행위는 결코 용납하지 않는다. 그건 무정원도 마찬가지였다. 이제부터 무구원은 영원히 북해 땅을 밟지 못할 것이며, 그의 가족들은 평생을 몰이꾼들에게 쫓기며 살 것이다. 무구원이 잡히기만 하면 당장 그의 아들과 나란히 무릎 꿇린 다음 숨을 끊어놓을 작정이었다.
그러나 가문을 배반한 죄 말고도 무정원을 분노하게 만든 건 따로 있었다.
무정원은 누군가의 사랑 타령을 진심으로 혐오했다. 명색이 북해 무씨의 맏며느리라는 여자가 사랑에 미쳐 갓 태어난 아이를 버리고 도망쳤을 때부터였다. 하물며 그 상대가 그런 그녀를 비웃고 농락하는 독사였으니, 그에게 감정놀음이란 영원히 배제되어야 할 것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동생의 사랑 타령이 자신의 수고를 모두 허사로 만들려 한다. 무정원은 더 이상 자비를 베풀지 않을 생각이었다.
“가주님, 경해국과 무구원 둘 다 지금 행방이 묘연합니다. 그 가족들은 이미 남경을 떠나 동산으로 간 것 같습니다. 동산에서 그들을 보호하고 있는 탓에 손을 대기 어려운 상황입니다.”
보좌관 중 한 명이 분노로 흐트러진 주인의 눈치를 보며 현 상황을 보고했다. 무정원은 그의 이능력만큼이나 매사 냉정하게 판단하는 사람이었기에 그가 이렇게 분노하는 건 드문 일이었다. 어찌 보면 남경의 지부장이 그를 한 방 먹인 셈이었다.
7년 내내 복종하는 척하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판을 뒤집었으니, 오랜 기간 이 사안에 공들여온 무정원으로서는 오물을 뒤집어쓴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몰이꾼이 주인에게 말했다.
“둘 다 아직 수도를 벗어나지 못했을 겁니다. 중앙역과 도로를 봉쇄하고 더 찾아볼까요.”
“아니.”
화를 주체하지 못하던 음성은 어느새 차분히 내려앉아 있었다. 몰이꾼은 주인이 다시 본래의 냉정함을 되찾았음을 깨닫고 내심 안도했다. 어느새 무정원의 얼굴에 분노는 파도가 쓸어간 듯 사라지고 바늘 끝처럼 날카로운 기운만이 감돌았다.
“가족까지 동산으로 보냈다면 이미 단단히 각오한 거다. 구태여 찾지 않아도 알아서 돌아오겠지.”
“…언제쯤으로 예상하십니까.”
“내가 북해로 돌아가면 기회가 없다는 걸 알 거다. 곧 한백호의 장례식이 있고 축일 주간이니… 이동 중을 노리겠지.”
몰이꾼은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으나, 무정원은 청파 향과 피비린내가 동시에 풍기는 손을 손수건으로 가만히 닦았다.
“고섬에는 예정대로 장례식에 참석하겠다고 알리고, 몰이꾼들에게 대비를 해두라고 전해라. 무구원은 발견 즉시 죽여버려도 상관없지만 윤모난은 생포해야 한다.”
“네.”
몰이꾼이 고개를 꾸벅 숙이고 물러나려 하자 마침 바깥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밖에 손님이 온 모양이었다. 무정원은 난장이 된 집무실의 꼴을 아랑곳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그가 기다리고 있던 손님이었다.
이윽고 문이 열리자 붉은 옷감을 펄럭거리며 누군가 안으로 들어왔다. 검은 단발머리에 호리호리한 체격의 중년 여자는 서 있는 것만으로도 기품과 위엄이 흘렀다. 응접실에 방문한 주현희는 들어서자마자 무정원에게 눈인사를 했다.
“정원이 오랜만이다. 거의 10년 만인가.”
“11년입니다, 선배님.”
붉은 기러기가 북해의 가주를 격의 없이 이름으로 부르다니. 내심 놀란 몰이꾼이 얼굴을 확 굳혔으나 무정원은 나가라 손짓할 뿐이었다. 그러고서는 주현희에게 피가 튀겨 엉망이 된 응접실 소파에 앉으라 권했다.
“됐어. 옷에 뭐 묻는 건 질색이야. 짧게 용건만 말할게.”
그녀는 주머니 안쪽에서 뭔가를 꺼내 무정원의 앞에 내려놓았다. 은색으로 빛나는 큐브를 보자마자 차분히 가라앉았던 무정원의 잿빛 눈동자가 거대한 태풍처럼 회오리쳤다. 주현희가 그에게 물었다.
“정원아, 아직도 설계도를 찾고 있니?”
큐브를 본 무정원은 마치 자신의 물건을 되찾은 사람처럼 거침없이 손을 뻗었다. 어느새 방 안의 공기는 차게 얼어붙어 있었다. 그건 무정원이 상대를 경계한다는 의미였다. 주현희가 이능력을 발휘하지 못하도록 일부러 온도를 낮추고 있는 것이다.
“네가 알아서 그만두기를 바랐는데.”
“선배님.”
아이를 어르는 듯한 말투에 무정원은 뒤틀린 심기를 숨기지 않고 쥐고 있던 큐브를 바닥에 던져버렸다. 떨어져 데구루루 굴러가는 큐브를 따라 시선을 이동하던 주현희의 시야에 빨간 알약이 들어왔다.
“후배들한테 대체 왜 자꾸 그런 맹목적인 믿음을 가지시는지 저로서는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너희를 믿으려 한 나를 비난하는구나.”
“네, 반성하셔야죠. 그 지독한 낙관적인 태도가 우리 모두를 망쳤으니까.”
그의 얼음송곳 같은 시선을 받으며 주현희가 답했다.
“물론 나도 이젠 낙관적인 태도 따위 버렸다. 예전에는 너한테도 갱생의 여지가 있다고 생각했어. 너도 잃은 게 있으니 말로 설득할 수 있을 거라고. 그 심정을 이해해주려 했지.”
“멋대로 저를 동정하셨군요, 선배님.”
“내겐 작약이나 너나 진심으로 아끼는 후배였어. 지난날 작약이 잘못된 길을 택하는 것을 막지 못해 늘 후회했다. 다시는 똑같은 실수를 하고 싶지 않아.”
검붉게 물든 손으로 기도할 때처럼 손깍지를 낀 무정원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같은 스승님 아래서 배운 우리 모두가 이토록 다른 길을 가다니. 스승님께서 쉽게 답을 주지 않으셔서 그런 걸까요.”
“이제는 스승님 탓까지 하려는 거니.”
“글쎄요.”
과거의 날들은 여전히 선명했다. 모두가 미성숙했던 시절, 통금 사이렌이 울리면 두더지 굴 같은 곳에 모여 스승님이란 사람의 가르침을 들었던 시간이. 무정원은 자신의 어리숙했던 과거를 함께 보낸 선배와 시선을 마주쳤다.
“그분의 뜻을 이해하는 건 영원히 불가능할 겁니다.”
“…….”
“평생 이론이나 설파하신 분이 돌아가시면서 제자들에게 큐브를 남긴 것만 보더라도 그렇죠. 어떻게 하라는 말씀 하나 없이 이런 위험한 물건을 남기다니. 참으로 괴이하신 분이었습니다, 우리의 스승님은.”
“내 잘못이지. 내가 스승님에 이어 너희를 이끌었어야 했는데.”
“네, 선배님이 실패하신 건 확실합니다. 하지만 큐브를 사용해 우리 모두를 해방할 수 있다는 당신의 생각 하나만은 가치 있었죠.”
무정원의 어조는 차분하고 냉정했다.
“선배님은 한 번도 큐브를 욕심낸 적 없습니까?”
“…큐브는 누구의 것도 아니야. 스승님이 우리 모두에게 평등하게 남기신 물건이지.”
“그건 너무 책임감 없는 말씀인 것 같은데요. 자칫하면 줍는 사람이 임자가 돼버리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설계도를 만들어 독점하려고 한 거니?”
바위처럼 서서 엄한 목소리로 추궁해오는 그녀의 말에 무정원은 실소를 터뜨렸다.
“그게 뭐가 잘못됐습니까? 전 그저 반도인들의 안전과 평화를 위해 노력했을 뿐입니다. 하지만 모두 도둑맞았죠.”
“작약은 훔치려고 한 게 아니라….”
“의도는 상관없습니다. 저는 그저 작약의 동생에게 제 물건을 평화롭게 돌려받고 싶습니다.”
하지만 무정원도 그것을 쉽게 얻어낼 수 없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그가 말하는 평화로운 방법이라는 것도 7년 전에 이미 실패했으니까. 주현희는 이제는 너무 멀리 와버린 옛 후배의 목적을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네 진짜 목적이 뭐야? 그저 큐브로 사람들을 괴물로 만들려는 건 아닐 테고.”
“물론 아니죠. 전 이 큐브를 통해 우리 모두를 구원할 방법을 찾았습니다.”
“…뭐?”
“이 모든 수고스러움이 그저 헛된 일만은 아니겠죠. 제게는 선배님 같은 불신자의 믿음보다 더 굳건한 믿음이 있습니다.”
마침내 무정원이 야심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7년 전과 다르게 자신의 야심을 거리낌 없이 드러내도 아무런 비난을 받지 않을 위치까지 오른 그는, 북해의 가주이자 평의회를 이끌어가는 지도자 중 한 명이다. 늙고 병든 권력자들 사이에서 무정원은 가장 힘 있고 젊은 남자였다.
그러므로 무정원이 원한다면, 그가 정말 설계도를 손에 넣는다면 모든 것은 그가 바라는 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주현희는 자신 앞에 선 후배가 다음으로 뱉을 말이 진정으로 두려워졌다.
“인간의 자유의지는 이 세계를 더 복잡하게 만들 뿐입니다. 어머니 신께 선택받은 단 한 명의 보편 해석자만이 세계를 서술하는 것이 옳겠죠.”
“…너, 그 말은….”
“전 큐브를 통해 이 땅에 공포를 심을 겁니다. 오직 어머니 신의 가르침에 따라 보편을 해석할 겁니다.”
주현희는 말이 떨어지는 것과 동시에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듣는 것만으로도 등줄기에 소름이 끼쳤다. 무정원의 말은 이 땅에서 평의회를 몰아내고 하늘 아래 유일한 지배자가 되겠다는 선언이었다.
“네가 그 보편 해석자가 되겠다?”
“그렇습니다. 그것이야말로 반도에서 모든 가문의 이름을 지우고 평의회의 불합리한 구조를 뒤집어야 한다는 스승님의 뜻을 완수하는 일 아니겠습니까.”
감히 스승님의 가르침을 오독하는 그의 말에 주현희가 냉정한 얼굴로 일침을 가했다.
“스승님은 우리에게 독재자가 되라고 가르치신 적은 없었어. 감히 그분을 모욕하지 마라.”
주현희의 스승은 무정원과 작약을 비롯하여 수많은 제자를 가르쳤다. 그분의 사상을 흡수하고 자란 결실이 바로 이 자리에 있는 두 사람이었다.
아주 오래전에 누군가 만들었다던 큐브만을 남기고 세상을 떠난 노인은 대체 무엇을 예견했던 걸까. 그 의문스럽고 위력적인 물건을 남긴 건 대체 무슨 생각이었을까.
주현희는 그녀의 말마따나 스승의 타계 이후 남은 후배들을 제대로 이끌어보고자 했으나 실패했다. 결국 큐브는 판도라의 상자처럼 모두에게 탐욕을 퍼트렸다.
작약은 가문의 이름을 철폐하는 데에만 집착했고, 무정원은 스스로 메시아라도 되는 양 굴고 있다. 인류의 역사를 오염시켜온 권력과 종교의 경쟁을 종결하고, 이 땅 위에 모든 형태의 지배와 압제를 끝내야 한다는 가르침을 받은 이들이 아이러니하게도 지난날 척결하려던 대상과 다를 바 없어진 것이다.
“…스승님의 이상은 이제 완전히 땅에 처박혔어.”
낮게 혼잣말하는 주현희에게 무정원은 고개를 약간 숙여 인사했다.
“그만 돌아가시죠, 선배님. 우리가 서로 얼굴 맞대고 사이좋게 이상을 논하던 시절은 끝나지 않았습니까. 이 균열은 아주 오래전부터 이미 시작된 겁니다.”
주현희는 차마 반박할 수 없었다. 모든 일의 시작은 작약이었으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