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 알레고리 (18/24)

5. 알레고리

18세 윤약. 그는 수도의 한 헌책방 구석 자리에 앉아 있었다. 가느다란 손가락이 책장을 넘길 때마다 사르르 뿌연 먼지가 일어났다. 누런 종이를 넘기던 우아한 손이 한 페이지를 찢더니 책값을 지불하려는 듯 책방 주인에게 지폐를 꺼내 내밀었다.

“재밌는 책이라도 발견했어?”

그런 윤약의 옆에 있던 동기가 물었다. 잿빛 눈동자를 가진 젊은 청년은 훈련 학교의 교복을 단정히 차려입고 있었다. 흐트러진 차림새의 윤약과는 대조적이었다.

“햄릿.”

“햄릿이라. 아까 한 페이지를 찢는 것 같던데 이번에도 동생에게 선물로 주려고?”

“아니. 내 동생은 아직 너무 어려. 괜히 우울한 책 읽혔다가 성격 나빠지면 어쩌려고 이 책을 함부로 선물하겠어. 이건 형에게 줄 거야.”

“…참, 유별난 형제애군.”

대답 대신 윤약은 무언가 혼자 생각한 듯 비시시 웃었다. 하얀 도자기 인형같이 생긴 얼굴에 떠오른 서늘한 미소였다.

“작은 너보다는 상사병이 좀 덜한 것 같던데.”

“상사병?”

“그래. 너희만큼 누군가를 아끼고 사랑하고 그리워해서 정신이 갉하먹힌 사람은 상사병이라 할 만하지 않나.”

그 말에 약이 갑자기 폭소를 터뜨렸다. 책을 쥐고 얼굴을 가린 채 한참 꺽꺽대고 웃는 그 모습은 어딘가 광적인 느낌마저 들었다.

“상사병이라니…. 정원아! 크흡, 하하하.”

이상한 웃음은 부자연스러울 만큼 오래 이어졌다. 그러나 무정원 역시 이런 일에 기가 눌리는 종류의 사람은 아니었기에, 차분한 목소리로 약에게 연이어 물었다.

“너희 가문에서는 유별난 형제애가 큰 죄는 아닐 텐데. 아, 이 경우에는 같은 성별인 게 문제가 되나?”

그 말에 드디어 뚝, 하고 웃음이 멈춘다. 어찌 됐건 이 웃음을 멈추게 하는 소기의 목적은 달성했다고 생각하던 무정원은 이내 당황했다. 웃음을 멈추고 자신을 바라보는 윤약의 두 눈에서 번뜩이는 살기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내 동생에겐 말 가려서 하는 게 좋을 거야.”

무정원은 애초에 자신히 말한 작의 상사(相思) 대상은 네 동생이 아니라 너였다고 굳이 정정하지 않았다. 둘은 같은 스승님 아래서 배우는 동기였고, 사소한 농담 때문에 여기서 싸울 필요는 없었다.

“약아, 여기 있었구나!”

그때 누군가 헌책방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왔다. 들어오는 순간 이 허름한 먼지 구덩이 공간마저도 화사한 봄날처럼 뒤바꿀 만큼 아름다운 여자였다. 그러나 두 남자는 약간의 무심함마저 드러나는 표정으로 그녀를 맞이했다.

“운조구나.”

“응. 지나가는데 네가 보이길래. 현희 선배가 마침 약이 너 만나면 다음 강습에는 빠지지 말라고 당부하셨어. 요즘 네가 수업을 많이 빠져서 걱정이 많으셔.”

차운조의 말에 약은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그런데도 소녀의 얼굴에는 발그레한 빛이 돌고 있었다.

“가서 백날 천날 책이나 들여다보느니, 차라리 내 조부 제사상에 향불 올리며 부활을 기다리는 게 더 현실성 있지.”

약은 염세적인 청년이었고, 제자들 가운데에서도 늘 스승님의 의견과 부딪치는 때가 많았다. 내내 말없이 있던 무정원이 한마디 거들었다.

“사상을 논하는 것은 관념적인 일이지만, 최선의 방식을 상상하기 위해서는 필수적이야. 우리는 모두 그 과정을 거치고 있는 거고.”

“과정이라. 결말은 이미 정해져 있는 거 아닌가? 스승님이 왜 굳이 우리 같은 애들을 제자로 삼았겠어.”

윤약은 이런 빌어먹을 만치 순수한 아나키스트, 라는 말과 함께 빈정거렸다.

“우리보고 직접 가문을 뒤엎으라는 거지. 그게 아니라면 내란이 일어날 테니까. 오로지 정치 세가 내부자들의 피만 바쳐 이 땅에서 지배자들을 없애실 셈인 거야.”

“…….”

“우린 순교자로 길러진 거라고.”

그걸 너도 모르지 않았을 텐데? 약이 물었다. 물론 무정원도 그건 알고 있었다.

훈련 학교의 말단 사회 교사였던 그들의 스승은 옥석을 골라내듯 신중하게 제자를 선별해 그의 비밀 야학으로 끌어모았다. 이 땅에 자신의 꿈을 실현시켜줄 사자를 길러내기 위해서였다.

그는 이상한 구석이 많은 사람이었다. 포스트로 태어났음에도 이능력을 전혀 쓰지 않았으며, 포스트의 이능력이 이 땅에 무지를 불러온다고 늘 강조했다. 소수인 포스트가 다수의 국민을 지배하며 스스로 이해 불가능한 존재를 자처하며 신성을 뒤집어썼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는 이 땅에 신인류가 도래하고 세워진 평의회의 권력과 국교인 천경교 등, 이 모든 해로운 것들을 몰아내고 누구도 누구를 지배하지 않는 자연 그 자체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14살 무렵 그의 사상을 접한 아이들은 주로 훈련 학교에 다니는 고위급 자제들이었고, 대다수가 제 가문이나 종교에 심한 회의와 분노를 가슴속에 틔우고 있었다. 당시의 무정원 역시 종교 원리주의 가문에서 태어났지만 믿음을 저버린 상태였다.

작약은 어떠한가. 그들은 아버지에 대한 혐오와 분노가 너무 심한 나머지 남경 윤씨 가문 전체를 증오하는 수준이었다. 기회만 있으면 가족들을 몰살하고 막냇동생을 데리고 도망쳐 살고 싶다는 말을 두려움도 없이 툭툭 뱉곤 했다.

“그게 작약, 너희가 바라던 일 아니던가? 가문의 족보를 불태우고 싶다고 늘 그랬었잖아.”

“…사실대로 말할까? 난 우리 형이나 너랑은 다르게 혁명에는 딱히 관심 없어. 독재자가 나타나 수십수만 명을 죽여도 내 알 바 아니지. 빌어먹을 집안만 싹 밀어준다면 상관없어.”

“싸우지 마.”

또 차가워진 분위기를 느꼈는지 운조가 손을 뻗어 약의 옷깃을 슬쩍 건드리며 말렸다. 그런데 그 순간 매몰찬 소리와 함께 그녀의 손등이 빨갛게 부어올랐다. 동시에 윤약의 차가운 목소리가 그녀에게 떨어졌다.

“내 몸에 감히 손대지 마. 허락한 적 없으니까.”

“…어, 미안해.”

결벽증까지는 아니더라도 약은 병적으로 남이 자신에게 보이는 호감과 애정을 경계하곤 했다. 누군가 자신을 보며 얼굴 붉히는 것이 큰 모욕이라도 되는 양 치를 떨었다. 그는 책방 밖으로 아예 나가버렸다.

좋아하는 남자가 저다지도 굴다니 조금은 속상할 법도 한데. 차운조는 약의 뒷모습을 내내 바라보다가 이내 어색하고 아연한 얼굴로 무정원을 돌아보았다. 그러곤 빨갛게 부어오른 손등을 쓱쓱 매만지며 웅얼거렸다.

“내가 약의 답답함을 풀어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차운조는 미모가 아름답기도 하지만 머리도 비상한 여자였다. 똑똑하다는 표현만으론 모자랄 정도로 천재적인 두뇌를 타고났으니 약이 자신에게 보이는 부정적 감정을 모를 리 없었다.

무정원은 그녀가 품 안에 안고 있는 물리학책만 가만히 바라보면서 아무런 공감도 표하지 않았다. 맹목적으로 한 사람만 좇던 차운조가 후에 큐브의 설계도를 만들어내고, 제 아내가 될지 그때의 무정원은 몰랐기 때문이다.

그 이후, 큐브가 이 세상에 던져진 것은 모두가 졸업해 사회에 나가 있을 때였다. 스승이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당시 서곡에 있던 작약과 무정원, 주현희까지 모든 제자들이 그분의 임종을 지켰다. 그는 임종의 순간에 자신이 오래도록 간직해온 물건이라며 큐브를 대표로 주현희에게 주었다.

“현명하게 사용하도록 해라.”

그것이 그의 마지막 유언이었다. 하지만 치기 어린 젊은이들은 지혜로운 노인의 바람과는 다르게 현명함을 발휘하지 못했고, 큐브를 두고 제자들 사이에 의견이 갈려 상황은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무정원이 남경으로 오라는 작약의 초대를 받은 것도 바로 그즈음이었다. 한낮의 뙤약볕이 작열하는 여름. 푸른 잔디마저 축 늘어질 만큼 더운 계절 가운데, 무정원은 남경의 하얀 저택에서 작약의 동생과 처음으로 조우했다.

막 수영을 하다 나왔는지 윤모난은 젖은 나체를 가리지도 않고 휘적휘적 두 다리를 뻗어 다가왔다. 물기를 머금은 축축한 분홍 머리가 산호처럼 뒤엉켜 반듯한 이마에 달라붙은 채로.

“형이라고 불러도 되죠? 정원 형.”

윤모난은 무정원에게 활짝 웃어 보였다. 동생의 미소에도 윤약은 무표정한 얼굴로 수건 하나를 건넸다. 윤모난은 그걸로 젖은 몸을 닦으며 무정원의 잿빛 눈동자를 흥미롭게 들여다봤다.

“그런데 우리 어디서 만난 적 있어요? 아무래도 얼굴이 익숙해서….”

“그럴 리가. 남경은 처음인데.”

“그래요? 그럼 뭐, 내가 전생에 만났던 애인이랑 닮았나? 진짜로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전생? 애도 아니고 그런 걸 믿나.”

실없는 말에 무정원이 무심하게 대꾸했으나 윤모난은 개의치 않는 눈치였다. 그는 후드득 커다란 개처럼 물을 털더니 장난스럽게 정수리를 꾹꾹 제 큰형의 가슴팍에 문질렀다. 옆에 서 있던 윤약이 동생의 머리칼을 정리해주려 손을 뻗자, 그 손길을 피하며 윤모난이 무정원에게 대답했다.

“안 믿을 이유는 또 없잖아요?”

발칙한 되물음에 무정원은 작약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쌍둥이의 눈동자에는 호수 밑에 가라앉은 모래처럼 축축하고 음습한 기운이 담겨 있었다. 그때 윤작이 막냇동생의 귓바퀴에 입을 가까이 하더니 무언가 속삭였다.

그 말을 들은 윤모난은 천진하게 웃더니 다시 호숫가로 돌아가 풍덩, 하고 물속으로 사라졌다. 이윽고 잘게 포말을 부수며 진동하던 수면이 잠잠해졌다. 마치 인어처럼 물밑으로 사라지는 그의 모습을 감상하던 무정원은 이내 쌍둥이들에게 물었다.

“저게 그 유명한 너희 동생이구나.”

“…여기 어느 정도 묵을 예정이지? 사용인들에게 방을 준비하라고 할게.”

“글쎄.”

무정원은 품 안에서 담배 하나를 꺼내 물며 잔잔해진 호수의 수면을 꽤나 오래 지켜보다가 대답했다.

“2주 정도면 적당할 것 같은데.”

“그래.”

애초 예고한 사흘보다 기간이 훨씬 늘어났음에도 작약은 더 묻지도 않고 먼저 자리를 떠났다. 쌍둥이들이 수풀 너머로 사라져버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수면이 또 한 번 첨벙거리며 요동쳤다. 무정원은 호숫가로 다가가 분홍 머리가 다시 물 밖으로 올라오는 순간을 노렸다.

그러곤 동그란 정수리가 언뜻 보이자마자 물고기를 낚듯 휙 잡아서 물 위로 끌어 올렸다. 윤모난은 꺼들린 머리가 조금 아팠는지 인상을 찡그렸다. 턱 끝에서는 물이 뚝뚝 흘렀다. 색이 뚜렷한 눈동자가 여름인데도 땀 한 방울 흘리지 않는 무정원을 바라봤다.

“아파요.”

“네가 여기 구경 좀 시켜줄래. 난 남경이 처음이라서.”

“…이거 놓으면.”

“그랬다간 다시 물속에 들어가려고?”

“그럼 안 들어갈 테니까 뭣 좀 물어봐도 돼요?”

“그래.”

머리채를 붙잡히고서도 능청스럽게 받아치는 게 제법 여유로운 모양새였다. 광채를 담은 눈이 흥미로 번뜩이는 것을 보며, 무정원은 윤모난의 성정이 제법 제멋대로일 것이라 예상했다.

“정원 형, 남자랑 자봤어요?”

그 당돌한 질문에는 무정원마저 평정을 잃고 조금 웃고 말았다. 여전히 머리를 잡힌 채로 윤모난이 제 얼굴에서 휙 물기를 쓸어내면서 한마디 더 했다.

“난 안 해봤는데.”

그래? 조금 느슨하게 되물은 무정원의 얼굴에 일순 찬기가 스쳤다. 입술은 여전히 호선을 그렸으나 내려다보는 시선은 잿빛으로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나와.”

“…지금?”

“작약의 동생이면 내 동생이나 마찬가진데. 배우고 싶다면 기꺼이 가르쳐주지.”

물결치는 소리와 함께 호숫가로 창백한 몸뚱이가 위로 솟구쳤다.

그렇게 남경에서 보낸 2주간 윤모난은 무정원에게 형은 내 전생의 애인이나 아니면 그 비슷한 사람이었을 거라는 농담을 해댔다. 그런 쓸데없는 신소리도 윤모난은 즐겁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무정원은 그 시간을 꽤나 즐겼으면서도 자신이 윤모난과 일대일의 관계를 맺었다고 생각해본 적 없었다.

이 관계에는 작약이 끼어 있었으니까. 그 지독한 독사들이.

창밖에서는 풀벌레 소리가, 방 한쪽에서는 노이즈가 섞인 가곡이 레코드판에서 흘러나오던 어느 여름밤이었다. 그림 같은 저택 한구석에서 무정원은 남경에서의 체류가 막바지에 접어든 기념으로 작약과 위스키를 나눠 마셨다.

저녁부터 윤모난은 어디로 갔는지 도통 보이지를 않았다. 그것 때문인지 내내 예민하던 윤약은 신경이 곤두서 미치기 직전으로 보였다. 더 견딜 수 없는 듯이 과음하는 그는 당장이라도 누군가를 죽일 기세였다.

“약아, 자중해라.”

결국 윤작이 둘째 동생의 턱을 쓰다듬고 뒷덜미를 토닥이며 그를 타일렀다. 술 때문인지 얼굴이 붉어진 윤약이 차가운 눈으로 자신의 형을 보다가 이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형제는 의미 모를 대화를 시작했다.

“지금 못난이 찾으러 다녀올게.”

“찾지 않아도 알아서 올 거야.”

“그건 형 네 생각이지.”

“약아.”

약은 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자리를 떠나버렸다. 문밖 복도를 걷는 그의 발걸음 소리가 유독 크게 울렸다. 무정원은 처음 보는 윤약의 흥분한 모습에 웃을 수밖에 없었다.

“약은 내가 동생을 건드리는 게 탐탁지 않은 모양이지.”

“…모난이를 위해서는 제 목숨도 내놓을 애니까.”

“네 동생은 여자로 태어났어야 했어.”

“아니. 그렇지 않아서 얼마나 다행인지 넌 모를 거다. 약의 저런 모습을 보고 오해하는 것 같은데, 모난이는 우리에게 자식이나 마찬가지야.”

겨우 다섯 살 어린 동생의 부모를 자처하는 형들을 보며 무정원은 여전히 웃을 뿐이었다. 그러다 담배를 꺼내 물며 윤작에게 물었다.

“세상에 어떤 부모가 자식을 나 같은 인간한테 밀어 넣지?”

“…….”

“네 동생 경험이 전혀 없던데.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게, 너희가 순진하게 키우긴 했나 봐. 건방 떨던 거랑은 영 다르던데.”

무정원은 새 담배에 불을 붙이고 후, 하고 연기를 뱉어냈다.

“남자라서 다행일지도 모르겠네. 하루쯤 지나니까 잔디밭에서 바로 날아다니는 걸 보면 내구성 하나는 끝내주잖아.”

“정원아.”

작의 표정에는 일말의 변화도 없었다. 늘 그렇듯이 차분하고 담담했다. 무정원은 작의 얼굴을 감상하며 제 아래서 비명을 지르던 그의 동생을 천천히 곱씹었다. 머릿속으로 그를 범하고 또 범했다. 독사들의 꾀임에 넘어가는 바람에 조금 흠집이 난 자존심을 조금이나마 회복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인 절차였다. 하지만 속내를 숨기는 데 능한 윤작은 노련하게 화제를 돌렸다.

“스승님이 돌아가시면서 주신 큐브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

“…무서운 물건이지. 이게 너희 아버지 같은 사람에게 흘러 들어간다면 내일 당장 내전이 일어날 수도 있을 거다.”

“틀린 말은 아니지.”

윤작은 협탁에 놓인 조명에 술이 반쯤 담긴 글라스를 비춰보며, 그 안에 먼지들과 빛깔들이 유영하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말했다.

“우린 그 물건에 대해서 아는 게 없어. 대의를 위해 사용하려고 해도 방법을 모르니 분명 실패하겠지. 하지만 그 구조를 완전히 파악한다면 완전히 다른 얘기일 거다.”

큐브는 전대미문의 물건이었다. 스승은 그저 죽기 전에 제자들에게 그것을 남겼을 뿐이고 그 사용법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알려주지 않았다.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 고민하던 제자들 중 몇몇 깨어 있는 사람들은 큐브를 뜯어 설계도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모두 포스트의 파동을 교란시킬 수 있는 이 장치의 위험성을 알기 때문에 그 누구 하나 감히 나서는 사람은 없었다. 설계도를 만든다는 건 이것을 대량생산하고 개발할 수 있다는 뜻이니까.

윤작의 제안은 결국 이것을 무기화하자는 소리였다. 무정원이 대답했다.

“설계도를 만드는 게 쉽지는 않을 텐데. 몇 년이 걸릴지 모르는 일이지.”

“그건 차운조가 제격이야.”

“…차운조? 담이 작은 여자라 이런 일에 가담하지 않을걸.”

“확실한 동기만 있다면 못할 일은 없는 법이지.”

윤작이 잔에 남은 술을 단숨에 들이켰다. 그러고서는 짐짓 술주정처럼 중얼거렸다.

“누가 이 세상의 채찍과 모욕을 참겠는가. 폭군의 탐횡과 권력자의 거만함, 좌절당한 사랑의 아픔과 탐관오리들, 소인배가 명망 있는 이를 모욕하는 이 비극을 누가 참겠는가. 칼 단 한 자루면 이 모든 것을 깨끗하게 끝낼 수 있는데.”*

또 『햄릿』이었다. 무정원은 작의 뜻을 단숨에 간파했다.

“큐브를 칼로 삼자는 건가?”

“큐브가 과연 우리 모두를 해방시켜줄 수 있을지 궁금하지 않아?”

“…정말이지. 너희 형제들은 이 일에 목숨을 걸 생각이군.”

그러나 무정원 역시 셈이 어두운 인물이 아니었다. 윤작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큐브의 설계도를 만들 수만 있다면, 가장 위력적인 칼을 얻는 셈이니까. 오래도록 바랐던 혁명도 정말 가능할지 몰랐다.

그날 둘이 나누었던 대화는 작은 불씨가 되어 차운조를 기어코 이 일에 끼어들게 만들었다. 그녀로서는 그것으로 윤약의 마음을 얻고자 했겠지만, 그는 일말의 여지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윤약에게 쉼 없이 거절당하며 마음이 망가진 차운조였지만 그녀는 결국 설계도를 만들어냈다. 그래서 무정원은 자신의 아내로 그녀를 선택했다. 그러나 짧은 결혼 생활이 커다란 비극이라도 된다는 듯, 차운조는 첫 아이를 낳은 지 열흘도 안 돼서 기어코 남경으로 떠나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그리고 허무하게 단명한 것이다. 북해에서 소규모로 조용하게 치러진 장례식에 작약은 참석하지 않았다. 주현희가 무거운 죄책감을 안은 모습으로 장례식에 나타났을 때, 무정원은 그녀에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운조와 함께 큐브의 설계도가 사라졌더군요. 필시 작약이 가져간 거겠죠. 선배가 윤약에게 설계도를 가져오라고 시켰습니까.”

“…그래.”

“왜 그러셨습니까.”

“운조가… 내게 연락을 했어. 자길 남경에 데려가달라고. 그래서 약을 보낸 것뿐이야.”

“그래서 제 허락도 없이 내 아내를 북해에서 빼돌렸다는 겁니까.”

주변 공기가 뼈에 시릴 만큼 차가워지고, 제단에 올라와 있는 향불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주현희는 무정원의 품에 안긴 갓난아기를 보며 눈을 질끈 감았다.

“나도 작약이 운조에게 그럴 줄은…. 정말이야.”

“선배는 아직도 작약을 모르십니까?”

간신히 분노를 억누른 무정원은 아내를 위해서 향불을 더 올렸다. 그가 어머니 신에 대한 믿음으로 다시 돌아가게 된 것도 그 무렵이었을 것이다.

“작약이 그 설계도를 통해 뭘 하겠습니까. 항상 바라왔던 대로 자신들만의 목적을 이루는 데 쓰겠죠. 작약에게 다른 이들은 모두 제 동생을 위해 바칠 제물일 뿐이니까요.”

“…정원아.”

주현희의 부름에 무정원이 냉담한 시선을 던졌다.

“전 이 모욕을 반드시 갚아줄 겁니다.”

“그래. 작약을 법정에 세우자.”

“아니요. 그건 아닙니다.”

“…….”

“모조리 죽여야 합니다. 작약은 물론 그 동생까지 책임을 물어야죠.”

주현희는 말도 안 된다는 듯이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이 일과 상관없는 사람까지 끌어들이면 안 돼.”

“상관이 없다니요. 제 아들 연오는 태어나자마자 어미를 잃었습니다. 아이가 겪을 상실감을 생각하면 그들도 가장 아끼는 걸 잃어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정원아, 이 일은 장례식이 일단 끝나면…. 아니, 당분간 작약의 일은 내가 처리하마. 내가 그들이 정당한 벌을 받게 하겠다고 약속할게.”

하지만 무정원은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흰 상복을 차려입은 그는 그저 속싸개에 싸여 잠든 갓난아이를 내려다보기만 했다. 그 모습을 보며 주현희는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차운조의 사랑은 비웃던 천하의 무정원이 제 아이에겐 부성애라도 느끼는 걸까. 조금 허망한 기분마저 들었다.

주현희는 일찍이 혁명을 위해 결혼을 포기하고 아이를 낳지 않겠다 맹세한 적 있었다. 자식이란 존재는 으레 약점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작약에게는 그것이 막냇동생이고, 무정원에게는 아들이듯이.

스스로 가문을 파괴하라는 사명을 사사했던 이들 중 셋이나 대의가 아닌 혈육을 택했다. 작약과 무정원 모두 마땅히 수치스러워해야 한다. 결국 스승님의 가르침과 차운조의 천재성은 ‘큐브’라는 판도라의 상자만 열어버린 것이다.

“…넌 애초에 왜 운조랑 결혼한 거니.”

무정원은 전략적인 인물이고, 아내인 차운조에게 애정을 보인 적 없다는 걸 주현희도 모르지 않았다. 그가 지금 작약이 설계도를 훔쳤다는 것에 분노하지만, 기실 중소 가문 출신 차운조를 굳이 아내로 선택했다는 것부터가 무정원 또한 그것을 노렸다는 증거였다.

“너도 작약처럼 큐브가 탐이 났던 건 아니야?”

“…선배님, 욕심을 좀 낸다고 해서 모두가 작약 같은 괴물은 아닙니다.”

그에게선 알 수 없는 대답만이 되돌아왔다. 대화가 끝나고 등을 돌려 사라진 무정원의 뒷모습을 주현희는 오래도록 잊을 수가 없었다. 그 이후론 계속해서 죽음만이 이어졌기에.

차운조 사망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급작스러운 임무를 받은 작약과 윤모난은 무간으로 떠났다. 거기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정확히 아는 이는 아무도 없다. 그게 무정원의 복수였는지, 아니면 작약이 정말 운이 나빴던 건지. 정말로 업보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다만 주현희는 차운조에 이어 작약 역시 큐브로 인해 죽은 거라고 확신했다.

* * *

작약의 죽음 이후 설계도는 이 세상에서 증발한 듯이 사라졌다.

이상한 일이 벌어지기 시작한 것은 그들이 죽고 1년이 흐른 뒤였다. 우연인지는 몰라도 민간인 포스트들이 트랜스화하는 사고의 빈도수가 급격하게 올라간 탓에 서강 쪽에서도 경위 파악을 위해 주시하는 상황이었다.

주현희는 직감적으로 이 사태를 큐브와 관련지었다. 그녀는 여러 채널로 수소문하며 큐브와 관련되어 보이는 일이라면 모두 추적했고, 큐브가 민간인들 사이에 돌아다닌다는 것을 알게 된 것도 그즈음이었다.

“당국에서 강한 능력을 가진 포스트 아이들을 강제로 데려간다고 해서 구한 물건이에요. 파동 탐색을 막아준다고 해서요.”

뒤늦게 소지자들을 심문해봐도 돌아오는 대답은 온통 뜬소문뿐이었다. 잡음이 많을수록 진실에 접근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법이다. 주현희는 시중에 돌아다니는 큐브를 발견하고 좌절감마저 느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시간이 지난 지금도 큐브가 겨우 프로토타입에 불과한 물건이라는 것이었다.

설계도가 누군가의 손에 들어가 이러한 일들이 벌어지는 거라면, 이 정도 애매한 위력의 물건이 나돌아다닐 리 없었다. 주현희는 여전히 설계도가 작약의 죽음과 함께 어딘가에 묻혀 있는 거라 확신했다.

한편으로는, 사라진 설계도를 찾는 것도 중요했지만 당장 시중에 퍼진 큐브를 수습하는 것이 더 시급했다. 그러므로 암암리에 큐브가 퍼진 지역을 몇 년간 임시로 방비하는 것 말고는 답이 없었다. 큐브를 발견한 윤모난과 마주하기 전까지.

“윤모난 씨?”

“네.”

“그 주머니에 있는 거. 감당 못할 것 같으면 지금 나한테 내놓는 게 좋을 텐데요.”

그렇게 2년을 더 헤맨 끝에 맞닥뜨린 이상한 우연이랄까. 작약의 동생이 자신이 보낸 처리반과 마주치다니. 일부러 가문의 상징인 ‘기러기’를 내세우며 트랜스화 사고가 벌어지는 현장과 큐브를 쫓은 보람이 있었다.

“제 주머니 안은 제 소관이니 알아서 하겠습니다.”

설계도는 작약의 동생에게 있을지도 모른다. 작약이 사랑하는 건 그들의 동생뿐이기 때문이다. 귀한 물건은 가장 귀한 사람에게 주고 싶은 것이 사람 마음이니까.

꼿꼿한 태도로 앉아 있는 윤모난을 보며 주현희는 운명의 수레바퀴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는 그 큐브가 결국 제 형들을 죽였다는 것을 알까? 만약 윤모난이 설계도를 가지고 있다면 그 역시 큐브에 욕심을 낼까?

이미 변심한 친우들과 주변인들에게 실망한 주현희는 이어지는 질문과 의심 끝에, 단순히 윤모난을 실험해보기로 했다.

“…그거 알아요? 남경 윤씨와 서강 주씨는 역사적으로 한 번도 각을 세운 적이 없다는 거. 기러기와 독사들은 항상 정치적 동반자였죠.”

“이 일에 과연 가문을 들먹이는 게 맞을까요?”

맹랑하지만 주현희의 눈에는 어린애의 치기 어린 대답일 뿐이었다. 사실상 가문의 권력으로 호의호식하며 살아온 저나 윤모난 같은 이들이 상황을 이렇게까지 끌고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스스로 책임을 느끼지 않는다면 어떻게 이 세상의 부조리에서 벗어날 수 있겠는가.

큐브는 그 부조리 아래 스스로 책임을 느끼지 않는 이들의 사적인 욕심이 압축된 상징일지도 몰랐다. 윤모난은 가장 욕심이 컸던 작약이 손수 키운 인물이기도 했으니까. 어쩌면 동생 또한 형들과 같은 길을 갈 수도 있었다.

하지만 주현희는 이어지는 대화를 통해 윤모난의 텅 빈 두 눈에서 상실과 공허를 발견했다. 텅 빈 곳에 사람 거죽만 뒤집어쓴 몰골로 앉아 있는 작약의 동생은 일말의 욕심조차도 모두 거세된 상태처럼 보였던 것이다. 이렇게 망가진 사람에게는 어떠한 것도 기대할 수 없을 테지만 이대로 설계도를 포기할 수는 없었다.

“아쉽네요. 당신 형들은 당신만큼 둔하지는 않았는데 말이지.”

“…….”

“작약은 이해하고 있었죠. 기러기와 독사들이 상부상조하는 관계라는 것을.”

그건 주현희 나름의 힌트였다. 상부상조하는 기러기와 독사들. 가문의 멸칭을 반기지 않는 윤씨들 가운데 오로지 작약만이 스스로를 독사라 불렀다. 주현희는 윤모난에게 큐브가 작약과 관련이 있다는 나름의 암시를 준 것이다.

“…작약, 이것이 그저 우연은 아닐 테지.”

1층 관리동 건물을 빠져나가는 분홍 머리를 바라보며 주현희는 나직이 중얼거렸다. 작약은 늘 동생의 자유를 바란다고 했지만, 운명은 결국 윤모난을 형들의 업보로 이끌었다.

“너희의 죄가 이렇게 동생에게 가는구나.”

그 이후에 벌어진 일들은 주현희의 예상대로였다. 약이 트랜스가 되었다는 소문과 함께 살인죄로 사형선고를 받은 윤모난은 제 아버지를 살해했다. 의심할 여지 없는 무정원의 솜씨였다. 그 과정을 주현희는 묵묵히 지켜보았다.

사라진 작약의 동생이 지구 반대편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보고받았을 때는 7년이란 세월이 흘러 있었다. 그녀는 바로 윤모난에게 초대장을 썼다. 반도로 돌아와 작약의 원죄에 책임질 것을 요구하기 위해서.

이것이 그녀가 아는 내막이었다.

* * *

주현희는 방금 전 무정원과의 만남을 파하고 나오면서 깊은 사념에 빠졌다. 무정원은 자신의 야망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설계도를 손에 넣으려 할 것이다. 이를 막기 위해서는 작약의 업보와는 별개로 윤모난의 복수가 반드시 성공해야만 한다.

스승님이 늘 말씀하셨듯, 책임이 있는 소수가 피를 흘림으로써 죄 없는 다수가 평안해질 수만 있다면.

주현희는 최대한 냉정함을 유지하는 것이 자신의 역할임을 알았다. 북해의 별관을 떠나 자신의 영역으로 돌아가는 길에, 식당 창을 통해 네 사람이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며 함께 식사하는 모습을 발견한 주현희의 표정이 굳었다.

“모난 형, 이제 상처는 괜찮으세요?”

“어.”

안범은 슬쩍 윤모난의 눈치를 한 번, 그 옆에 앉은 무구원의 눈치를 한 번 보았다. 경해국 역시 가느다랗게 눈을 뜨고서 두 사람을 번갈아 봤다. 분명 둘이 또 뭔 지랄이 나도 난 거 같은데 내내 입을 딱 다물고 있었다.

그러다 안범이 분위기를 풀겠답시고, 제 딴에는 머리를 써서 슬쩍 능청을 떨며 무구원과 대화를 시도했다.

“어? 무 선배니임, 왜 오이랑 당근은 다 골라내셨어요? 안 드세요?”

“먹기 싫어서.”

“에이, 그래도 편식하시면 안 되지요.”

안범의 한마디에 어쩐지 아까 전보다 더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는다. 특히 윤모난 쪽에서 이루 말할 수 없는 찬바람이 불었다. 잠시 후 윤모난이 젓가락을 식탁 위에 탁 내려놓으며 무구원을 노려봤다.

“무구원, 헛짓거리하지 말고 돌아가.”

“싫습니다.”

“야, 경해국. 이 꼴통한테는 말이 안 통하니까 너한테 말한다. 최대한 빨리 얘 데리고 동산으로 가.”

“엑?”

갑자기 자신에게 화살이 향하자 경해국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구시렁거렸다.

“아니. 씨, 팀장님 말도 안 듣는 놈이 제 말을 듣겠습니까?”

“상관없어. 당장 얘 내 눈앞에서 치워. 가족들한테 얼른 보내란 말이다.”

“하아…. 제가 남자끼리 낯 뜨거워서 이런 말까지는 안 하려고 했는데요.”

사정을 아는 경해국은 눈을 흘기며 무구원을 본 뒤에 말하기도 뻑적지근하다는 듯이 말을 꺼냈다.

“무씨 이놈이 제 동정을 팀장님께 바쳤다고 하던데. 그 정을 생각해서라도 좀 놔둬주면 안 됩니까요? 팀장님은 천생 걸레 제비 새끼시겠지만 무씨 이놈은 꼴통이라 한 사람밖에 모르는….”

“천생 걸레 제비?”

“그럼 뭔데요. 팀장님이 얘 순진한 마음을 우롱하고 이 새끼 이거 몸, 이 몸만 실컷 유린해서 이 꼴 난 거 아닙니까요. 그러니까 상대도 잘 고를 것이지 왜 하필 무씨입니까? 얘 한번 물면 안 놓는 독한 놈이란 말입니다.”

무슨 오해를 하고 있는지, 경해국은 완전히 핀트가 나간 소리를 씨불였다.

“제가 예전부터 팀장님한테 꼭 말하고 싶었는데. 사내라면 말입니다. 무릇 아랫도리 함부로 돌리지 말고 한 여자… 아니, 사람에게 순정을 바쳐야 한다는 겁니다.”

설상가상으로 옆에서 안범이 미세하게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경해국의 말에 동의한다는 뜻이었다. 윤모난은 자신 빼고 모두 한통속임을 깨닫곤 쾅 식탁을 내리치며 항변했다.

“너네 무슨 커다란 오해를 하고 있는 것 같은데, 무구원 전혀 순진하지 않아. 가만히 있던 나한테 근무 중에 먼저 입 맞춘 것도 이 자식이야. 내가 얘를 뭐 강제로 뭐… 그런 줄 알아?”

“…….”

“난 이 새끼 동정까지 가져갈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고. 근데 이 자식이 나서서 바치겠다는데 그럼 어떡하냐. 내가 뭐 선비인 줄 알아? 천생 씹 걸레 제비 새끼를 먼저 꼴리게 한 놈한테 죄 있는 거지.”

무구원과 윤모난을 제외한 나머지 두 사람의 고개가 무구원에게로 향했다. 이 와중에도 무구원은 태연스레 식사를 하고 있었다. 여전히 그 빌어먹을 만치 바른 자세로 앉아 조용히 쌀을 씹고 있는 모습이 윤모난의 눈에는 정말로 가증스러웠다. 그때 안범이 무구원의 편을 들려는지 그쪽으로 확 몸을 기울이며 되레 소리쳤다.

“형, 그건 누가 봐도 거짓말인 것 같습니다. 무 선배님이 먼저 형을 꼬실 리가 없잖아요. 딱 봐도 목석인데 누가 누구를 꼬십니까? 섹시 다이너마이트인 형이 살살 무 선배님을 꾀셨겠지요.”

“섹시 다이너마이트?”

무구원이 밥알을 씹다 말고 조용히 되물었으나 윤모난의 커다란 목소리에 묻히고 말았다.

“아니라고. 내가 이런 얘기까지 안 하려고 했는데, 이 자식 무정원이 보낸 섹스 스파이였다니까!”

“푸하하하학!”

동시에 안범과 경해국이 입안에 든 것들을 사방으로 튀기며 웃음을 터뜨렸다. 옛 상관의 말을 대놓고 비웃는 탓에 밥알을 뒤집어쓴 윤모난만 기분이 더러워졌다. 그 와중에 무구원은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 윤모난의 얼굴을 닦아주려 손을 뻗었다.

“켱! 차라리 무씨가 팀장님을 강간했다고 우겨보시지 그럽니까!”

“꺄하학―!”

둘은 정말 배 속 깊이 터졌을 때만 나는 피치 높은 폭소를 터뜨렸다. 시발. 윤모난은 욕을 주워 삼키면서 주먹을 꽉 틀어쥐었다. 슬프지만 그것조차 사실이었다.

“그만 웃어라! 강간이 웃을 일이야!”

“하하하학!”

무구원은 ‘그만하시죠’라고 조언할 뿐 안범과 경해국의 만담을 굳이 정정하지 않았다. 그저 무덤덤한 얼굴로 얼굴이며 머리카락에 붙은 밥풀을 떼어줄 뿐이었다.

자신을 놀리는 웃음소리가 끊어질 기세를 보이지 않자 윤모난은 식탁을 뒤집고 저 세 녀석을 오랜만에 정신교육 시킬 결심을 했다. 그렇게 식탁 아래에 손을 걸치는 그때, 또각또각 발걸음 소리가 그들에게로 다가왔다.

“재미있는 얘기 중인가요? 분위기가 좋네요.”

“헉.”

안범은 목을 꺾어가며 웃을 때는 언제고 입을 합 다물었다. 경해국도 마찬가지로 웃음을 멈추고 경계 모드로 돌아갔다. 나머지 두 사람도 마찬가지였으나 주현희는 상관없다는 듯 비어 있는 자리 중 하나를 골라 앉았다.

“웃고 떠드는 것도 좋지만. 윤모난 씨, 조카와 형들이 텃밭에서 원망하겠어요.”

“…….”

“벌써 죽은 사람들은 잊고 저 혼자만 즐거우면 되냐고.”

분위기가 삽시간에 찬물을 끼얹은 것 싸늘해졌다. 드르륵 의자가 거칠게 뒤로 밀리는 소리와 함께 무구원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되레 저 자신이 커다란 모욕을 받은 듯한 무구원의 표정을 마주한 주현희가 싱긋 웃었다.

“앉아, 무구원.”

하지만 윤모난은 꽤나 차분했다. 주현희는 테이블에 앉은 네 사람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무정원을 암살하려는 계획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죠?”

주현희가 없을 때 나눴던 대화 내용을 그녀가 알고 있다는 것이 놀랄 만한 일은 아니었다. 여긴 주씨 가문의 별저이고, 그녀의 가문은 정보를 사고파는 것을 업으로 하고 있으니 수집하는 데도 유별난 재주가 있을 터였다. 무구원이 나서서 입을 떼려 하던 그때, 주현희가 손을 들어 그를 저지했다.

“저는 정보 거래를 업으로 삼은지라 판단력이 남들보다는 좋은 편이죠. 무정원을 우습게 보지 말아요. 무구원 당신이 약을 먹으면서 형을 속인 재주는 꽤나 뛰어났지만, 이제까지는 행운이 많이 작용한 것 같더군요.”

“…약?”

갑자기 튀어나온 생경한 단어에 윤모난의 눈썹 끝이 살짝 꿈틀거렸다. 이어서 주현희는 마치 인질을 잡은 듯한 얼굴로 무구원에게 화살을 돌렸다.

“그것보다는…. 무구원 씨.”

“…….”

“설계도는 어디 있어요? 당신은 알고 있죠?”

화살은 갑자기 무구원에게로 돌아갔다. 윤모난은 딱딱하게 굳은 무구원의 옆얼굴을 보며 생각에 빠졌다.

주현희가 저렇게 단도직입적으로 묻는 이유가 분명 있을 것이었다. 주현희는 그녀의 투시 능력만큼이나 사태에 대한 통찰력이 대단하니까. 7년 전에는 큐브의 정체조차 몰랐던 무구원이 지금은 그 설계도의 행방까지 알고 있다면, 세상이 뒤집힐 정도의 변화가 아닌가.

윤모난은 무구원의 표정을 살폈다. 그러고 보니 그는 자신이 부재했던 7년간 무구원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는 바가 전혀 없었다.

“…외람되지만 누굴 만나고 오시는 길이십니까?”

무구원은 대답 대신 질문으로 받아쳤다. 주현희의 옷자락에 살짝 묻은 핏자국 위로 그의 눈길이 향했다.

“진짜 해충이죠.”

그 말에 내내 변화가 없던 무구원의 얼굴에 잔잔한 물결이 일었다. 네 명 중에서 오직 그만이 주현희의 뜻을 이해했기 때문이다. 애초에 피로 난장이 된 곳에 다녀오지 않는 이상 보좌관인 주현희가 옷자락에 피를 묻힐 일은 없다.

한백호의 죽음과 남경 테러로 모두가 숨죽인 이 시국에 그런 난장판이 벌어질 곳은 단 한 곳밖에 없었다.

“…제 형님과는 어떤 인연이시죠?”

“당신들이 서로 선후배 간의 연을 쌓은 것처럼 우리도 그랬어요. 모두 같은 스승님을 모셨거든요.”

“스승님이요?”

“훈련 학교 시절 스승님께서 주관하셨던 야학 모임이 있었죠. 포스트와 포스트가 아닌 자들, 신분이나 가문과 상관없이 모두 그 자리에 있었어요.”

순순히 과거 이야기를 꺼내는 주현희를 향해 윤모난이 물었다.

“그 모임의 목적이 뭐였습니까.”

“무지에서 벗어나는 것.”

주현희의 입에서는 의외의 말이 튀어나왔다. 한 스승을 주축으로 한 제자들의 인연이 수면 위로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무지는 끊임없이 이어지는 이 전쟁과 관련이 있죠.”

주현희는 그들의 사상을 설명하며 거칠 것이 없다는 표정이었다.

“현생 인류는 포스트 에스퍼들의 폭주가 트랜스화로 이어지는 명확한 이유를 밝혀내지 못했고. 모두 그 무지의 덫에 빠진 채로 끊임없이 죽어나가야 할 운명에 처했습니다. 무지는 미래로 향하지 못하게 막는 정체이고, 암흑이자 덫이에요.”

“…어. 그거 모난 형이 예전에 저한테….”

그 순간, 갑자기 안범이 의아한 얼굴로 끼어들었다. 지금 주현희가 하는 말은 그에게도 익숙했기 때문이다. 안범이 신입 대원이던 시절, 처음으로 함께 아침을 먹었던 날 윤모난은 그에게 비슷한 말을 하면서 항상 벽화에 등을 돌려 앉으라고 했었다.

요컨대 주현희의 사상은 국가이능력기관의 이념이 담긴 문장과 관련이 있었다.

‘우리는 왜 한때의 영웅들이 괴물이 되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 무지로부터 다시 소생하리라.’

“모난 형, 보좌관님이 방금 하신 말씀 예전에 형이 해주셨었죠?

“…똑같이는 아니지만 비슷하지.”

하지만 정작 당사자인 윤모난은 왠지 모르게 조금 혼란스러운 듯했다. 그의 얼굴에 스친 당황한 기색을 미처 발견하지 못한 안범이 물었다.

“형은 그 말씀을 어디서 들으셨어요?”

“…그게.”

윤모난은 입을 다물었다. 그 말을 해준 것은 큰형, 윤작이었다. 모두의 시선이 쏟아지는 가운데 그의 얼굴이 한없이 어두워졌다. 그때 주현희가 윤모난 대신 답을 주었다.

“그건 스승님의 가르침이니. 당연히 작약이 말해주었겠죠. 작약 또한 스승님의 제자였으니까. 저와 작약, 그리고 무정원 이렇게 넷은 특히나 스승님의 애제자였죠.”

“그럼 무정원도 큐브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겁니까?”

윤모난의 질문에 주현희는 일말의 주저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더 빨리 깨달았어야 했다는 엄준한 꾸지람 같았다.

“큐브를 앞에 두고 헤맸던 우리한테 돌파구를 열어준 게 무정원의 아내였는데. 모를 리가 없겠죠?”

주현희는 손마디를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시선이 닿은 곳은 빈자리들이었다. 이곳 식당에 놓인 식탁은 유독 길이가 길고 커다란 데다 거기에 놓인 의자 수도 많았다.

그저 손님을 맞이할 일이 많은 집이니 그렇다고 여길 수도 있겠지만, 그 빈자리들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에는 얼핏 쓸쓸함이 감돌았다. 그녀가 그곳에서 상실을 보고 있음을 여기 살아 있는 자들은 모두 느낄 수 있었다.

“스승님께서는 우리에게 큐브를 남기고 돌아가셨지만 그걸 어떻게 이용하라는 말은 남기시지 않았어요. 차운조 덕분에 작은 희망이라도 생겼던 거고요.”

“형수님이요?”

“네. 운조가 큐브의 설계도를 만들었거든요.”

무구원은 자신이 기억하는 형수님의 모습을 떠올렸다. 생전에 그녀는 천재적인 연구조 에스퍼였고 임신 중에도 연구실에 나가 주위의 걱정을 사곤 했다. 생각해보면 설계도가 아니라 큐브 그 자체를 발명한 게 그녀라 해도 수긍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녀의 죽음은 가족들에게마저 비밀에 부쳐져 있었다. 공식적으로는 산후 후유증으로 알려져 있었지만, 사망 당시 애를 낳고 몸을 풀고 있어야 할 그녀의 시신이 집이 아닌 밖에서 들어온 것에 의문을 가진 사람이 그때도 몇 있었다.

“운조가 죽은 건 그 설계도를 만든 지 얼마 되지 않아서였죠.”

그 순간, 윤모난의 머리가 무언가에 얻어맞은 듯이 징 울렸다. 사교 클럽에서 한백호가 죽어가면서 주절거리던 말이 떠오른 것이다. 결국 큐브 때문이었나, 하는 깨달음에 온몸에서 피가 빠져나가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반란 모의, 꽃들의 맹세, 큐브와 설계도. 그리고 훈련 학교 시절 그 이상한 모임까지.

생전 형들은 항상 어떤 상황에도 대안을 마련해두곤 했었다. 그들의 행동을 전부 이해했던 건 아니었으나, 그래도 뜻이 있을 것이라고 내심 합리화하던 윤모난이었다. 그런데 돌고 돌아 결국 큐브라니.

식탁 위에 놓인 윤모난의 주먹에 단단하게 힘이 들어가자, 건너편에서 손이 불쑥 건너와 핏줄이 튀어나올 것 같은 손등을 덮었다. 무구원이었다.

“팀장님.”

혼란스러워하는 자신을 발견한 무구원은 늘 그렇듯이 얼어붙은 바다처럼 단단한 무표정으로 지그시 눈을 마주쳐왔다. 무구원이 가지고 있는 그 단단함이 윤모난의 마음속 깊은 혼란의 파고를 누르려 시도하고 있었다.

하지만 윤모난은 가슴 부근에서 달랑거리는 은제 펜던트를 터트릴 듯이 쥐며, 결국 진실을 선택하기로 했다.

“그 큐브를 얻으려고 형들이 무정원의 아내를 죽인 겁니까?”

“…네. 맞아요.”

“형들이 큐브를 원한 건 결국 저 때문이겠죠. 항상 날 가문의 족쇄에서 풀어주고 싶다고 했으니까.”

모두가 형들을 악마라 했다. 그것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라는 걸 알면서도 동생인 윤모난은 그들이 그래도 영웅이었기를 바랐다. 트랜스가 된 작은형은 그냥 죽었다고 치자는 아버지의 뜻에 따른 것도 그 때문이었다.

하지만 윤모난은 둘째 형의 죽음을 입에 올릴 때마다 칼끝으로 심장이 난자당하는 심정이었다. 그렇게 말함으로써 제 안에서 형의 존재를 지우고 죽여야 했기 때문이다. 죽는 것보다 못한 상태라고는 하지만, 초록빛 하늘 아래 검은 모래 폭풍 속에 형이 있는데도 말이다.

하지만 청연의 복수를 하기로 맹세했으면서 어떻게 진실을 두려워할 수 있단 말인가.

“그 일 때문에 무정원이 조카들을 죽게 한 거라면….”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아이들은 그들의 아버지가 쌓은 업보 때문에 죽은 것이 된다. 그렇다고 해서 무정원의 죄가 사라지는 건 아니지만, 조카들의 허무한 죽음을 그 빌어먹을 연좌제로 인한 결과로서 받아들이는 것은 다른 얘기였다.

결국 형들이 잘못 살아서, 자신이 지금 무정원에게 복수를 하려는 것처럼 무정원도 그랬다면. 생각이 거듭될수록 윤모난의 손톱이 손바닥에 더 깊게 파고들었다.

“제 조카들은 정말 저 때문에 죽은 게 되는군요.”

이게 그토록 알고자 헤맸던 본질이자 진실인가. 자신의 모든 분노와 절망이 실은 허상이라는 것? 형들은 괴물이고 동생도 괴물이고, 조카들도 모두 죽어 마땅한 괴물의 자식이라는 게 진실이라면.

자신의 가족을 증오했던 모든 사람들의 얼굴이 한눈에 겹쳐 보이는 것 같았다. 그때 손등에 얹힌 무구원의 손이 더 단단하게 얽혀 왔다.

“팀장님.”

“…….”

“조카들의 죽음은 이 모든 일과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아이들은 죄가 없다는 걸 아시지 않습니까.”

윤모난은 흔들림 없는 표정의 무구원을 보며 생각했다. 이 모든 사실을 그도 알고 있었을까. 그래서 자신에게 초대장의 실체를 뒤쫓지 말라고 경고했던 걸까. 너와 나는 대를 이어가는 악연 끝에 만난 인연이고, 그래서 자신이 북해로 겨눈 칼끝이 아무 의미 없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어서?

나의 복수와 마찬가지로 무정원의 복수도 정당성이 있다. 그러니 이건 결국 끝나지 않을 싸움이다. 윤모난은 잡힌 제 손을 빼내며 냉랭하게 말했다.

“표정을 보니 넌 이미 전부 다 알고 있었네. 그런데도 네 형을 죽이려 한 이유가 뭐지, 무구원.”

“…….”

“이건 무정원과 내 싸움이지 네가 멋대로 끼어들 일이 아니야.”

“부탁입니다, 팀장님. 더 이상 형님들 얘기는 파고들지 마십시오.”

무구원은 어느새 이곳에 저와 윤모난 둘만 있는 듯이 눈을 마주치며 말했다. 그의 검은 눈에 또다시 두려움이 일렁이는 것을 발견한 윤모난이 굳은 표정으로 물었다.

“너 아직도 내게 숨기는 게 있구나.”

“…….”

“그렇지?”

무구원은 시선을 피할 뿐 입을 열지 않았다.

“난 더 이상의 거짓말을 용납하지 않을 거야. 너도 알 텐데.”

“…네.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보좌관님 말씀대로 네가 설계도의 위치를 알고 있는 거랑 관련된 이야기인가?”

그 말에 아무런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 무구원을 보며 윤모난은 주먹으로 식탁을 쾅 내려쳤다. 안범이 숨을 삼키면서 윤모난을 말려보려 했지만 이내 뒤로 밀려났다.

“그래, 어쩐지 뭔가 이상했어. 겨우 내 복수 따위 대신 해주려고 스스로 목숨을 버릴 이유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지. 네가 죽고 못 사는 아들은 어쩌고 죽는 길을 택하겠어?”

“…….”

“넌 자신한 거야. 큐브인지 뭔지 설계도를 알고 있는 건 너뿐이라고. 너만 죽으면 설계도가 영원히 묻힐 걸 확신한 거라고. 하지만 왜? 설계도가 공개되든 말든 그게 너와 무슨 상관이 있길래.”

굳게 닫힌 입을 열지 않는 무구원을 바라보는 윤모난의 가슴 한켠이 욱신거렸다. 지금 그가 듣고 싶은 것은 7년 전 말했던 민간인들 핑계 따위가 아니었다. 수많은 기만과 거짓말 사이 이쪽의 삶은 완전히 망가져버렸다는 걸 알면서도, 여전히 진실을 미뤄두려고 하는 무구원의 태도에 분노가 일었다.

무구원은 이것이 자신을 위하는 일이라고 생각할 터였다. 어쩌면 사랑이라고 우길지도 모른다. 하지만 윤모난이 보기엔 이건 복종도 아니고 사랑은 더더욱 아니었다. 거짓을 통해서만 유지될 수 있는 감정이라면 그건 그저 일종의 아집이자 집착일 뿐이었다.

아주 긴 세월동안 서로를 향한 이 짝사랑은 단 한 번도 쌍방향이 된 적 없었고, 둘은 그 주변부에서 빙빙 돌기만 했다. 이게 병적이지 않다고 어느 누가 자신할 수 있을까.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방금 전까지 불같이 일었던 분노가 차갑게 식어버렸다. 윤모난은 자신을 바짝 쫓아오는 무구원의 시선을 피해버렸다. 내내 구경꾼의 위치를 취하고 있던 주현희가 입을 뗐다.

“작약이 무정원의 아내인 차운조를 죽인 건 맞지만, 그 일에 대해서 직접 설명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저도 이유는 몰라요. 누군가는 그걸 치정 사건으로 치부하고, 당신의 아버지 윤화신의 명령이라고 한 사람도 있지만….”

무언가 덧붙이려던 주현희는 지친 표정으로 말을 멈췄다. 하지만 그녀는 계속하는 것이 자신의 의무라는 듯, 잠시간의 침묵 후 무정원과 작약 그리고 차운조의 이야기를 담담히 서술했다. 어느새 식탁 주변 분위기가 무겁게 내려앉았다. 윤모난은 결국 자신의 질문에 확답을 받은 셈이었다.

이 모든 것이 무정원의 복수이다. 그리고 이제는 큐브와 관련된 그의 계획까지 알게 되었다. 모든 것을 털어놓은 주현희가 말했다.

“중요한 건 설계도의 현재 위치예요. 전 무슨 일이 있어도 그걸 찾아야 합니다.”

“보좌관님도 큐브 설계도에 욕심을 내시는 겁니까.”

“욕심이라…. 지금까지 난 그걸 막아내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지만, 무정원이 야심을 드러낸 이상 방관할 수는 없어요.”

주현희는 결연한 눈빛으로 무구원을 바라보았다.

“무구원 씨, 내가 이 모든 걸 끝낼 수 있게 해줘요.”

“…….”

“설계도를 내게 주세요.”

“보좌관님. 저는….”

“나는 모든 걸 제자리로 돌려놓을 거예요. 무정원의 야심을 잠재울 방법이 하나밖에 없다는 것쯤은 나도 알아요.”

그 ‘방법’은 곧 무정원의 죽음을 의미할 터였다.

“설계도를 완전히 없앨 수 있게 도와준다면, 내가 당신의 뜻을 이루게 해주죠.”

“그건 보좌관님 도움 없이도 가능합니다.”

주현희는 우습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무정원을 우습게 보지 마세요.”

“그럼 보좌관님의 계책은 무엇입니까?”

“설계도가 먼저예요. 생각할 시간을 조금 줄게요. 오늘 자정까지 결정하세요. 만약 내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주현희는 바늘 하나 안 들어갈 것 같은 완고한 얼굴로 식탁에 둘러앉은 네 사람을 한 명씩 훑어보았다.

“여기 있는 넷은 살아서 이 집을 빠져나가지 못할 겁니다.”

그건 주현희의 최후통첩이었다. 경해국이 어이없다는 듯 혀를 찼다. 하지만 그녀의 말을 가벼이 듣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말을 끝으로 주현희는 올 때처럼 곧은 자세로 식당을 나가버렸다.

“무구원, 얘기 좀 해.”

“…….”

“무구원!”

윤모난이 무구원을 불렀으나, 그는 들리지 않는 듯이 주현희의 곧바로 쫓아갔다. 그녀의 응접실까지 따라가자 주현희는 이미 무구원을 기다리고 있었다. 문을 닫고 들이닥친 무구원이 경직된 얼굴로 그녀에게 물었다.

“제가 설계도를 가지고 있다는 건 어떻게 아셨습니까?”

“이상하잖아요? 모두가 윤모난이 설계도를 가지고 있다고 의심하는 와중에, 당신만 그에게 설계도가 어디 있냐고 묻지 않으니.”

“…절 떠보신 거군요.”

“이런 경우엔 보통 둘 중 하나잖아요. 뭔가 숨기는 게 있거나, 아니면 답을 알거나. 당신은 둘 다 해당하는 것 같긴 한데. 나름 수확이 있었네요.”

무구원이 아무리 그간 남경의 지부장으로서 성장했다고 한들, 노련한 주현희는 몇 가지 추측만으로 그의 수를 쉽게 읽어냈다. 그녀 앞에 선 무구원은 주먹을 꽉 말아 쥐며 물었다.

“설계도를 영원히 없애고 싶다는 건 진심이십니까?”

무구원의 질문에 주현희는 서서히 얼굴에서 웃음기를 지웠다. 그리고 진지해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짓을 해서라도 없애고 싶어요. 진심이에요.”

“그렇다면 도와드리겠습니다.”

“설계도 위치를 알려주겠다?”

무구원은 긍정의 뜻으로 고개를 두어 번 끄덕이고는 잠시 뜸을 들였다.

“위치는… 현재로서는 저만 알고 있습니다.”

“윤모난은? 설계도는 분명 작약이 가지고 갔고, 동생이 아니라면 접근할 수 없는 위치에 있을 텐데요.”

“팀장님은 절대 모릅니다.”

“그 이유는?”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주현희는 무구원이 칼을 들이대도 그 이유를 말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그녀에게는 윤모난보다 더 익숙한 것이 바로 무구원이었다. 7년 동안 무구원에게 ‘해충들’을 보내왔고 그 긴 세월 동안 그의 굳은 심지를 확인한 바 있는 그녀였다.

이성적인 사고보다 오히려 직감이 진실에 더 가까운 경우가 종종 있다. 주현희는 그간 무구원에게 주목했던 자신의 행동이 무의식적인 직감이 작용한 결과라는 것을 이제는 깨달았다.

“자세히 말씀드리긴 어렵지만, 제가 직접 설계도를 없애겠다고는 분명히 약속하겠습니다.”

“어떻게 할 거죠?”

“…팀장님의 복수를 완성하면 자연스럽게 그렇게 될 겁니다.”

무구원의 말은 기차에 탄 북해인들을 멸문함과 동시에 자신 또한 그 기차에서 내리지 않겠다는 선언이었다. 그는 자신만이 설계도의 위치를 알고 있다고 말했으니 설계도 또한 그의 죽음과 함께 영원히 묻히겠지. 주현희가 무구원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

“그냥 내게 위치를 알려주면 죽지 않고 복수도 할 방법이 있을 텐데요.”

“저는… …여기서 더 밝혀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무구원은 주어 없이 말했지만 결국 윤모난이 알게 하고 싶지 않다는 소리였다. 주현희는 무구원의 계획이 명백한 자살일 뿐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강조하려 했지만 가로막혔다.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현재로서 사라진 설계도의 위치는 저만이 알고 있으니까요.”

그러면서 무구원은 손가락을 뻗어 제 머리를 가리켰다. 하지만 그건 성립할 수 없는 말이기에 주현희는 바로 반박했다.

“큐브 설계도는 복잡한 공식으로 이루어져 있어요. 당신이 천재가 아닌 이상 그걸 온전히 기억할 수는 없어요.”

“설계도를 기억하는 게 아니라 저만 갈 수 있는 위치에 있다는 뜻입니다. 절 믿으십시오.”

“당신이라면 정확한 설명도 듣지 않고 믿음을 줄 수 있겠어요?”

“그렇다면 구걸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오늘 여기서 우리 모두를 죽인다면 보좌관님께서는 평생 설계도가 다시 나타나지 않을까 불안에 떨어야 하시겠죠.”

한편으로 주현희는 무구원에게서 그의 형과 꽤나 닮은 구석을 발견했다. 이 형제들은 소위 ‘외부인’과는 온건한 타협을 시도하지 않는다.

그들의 성정을 형상화하자면 곧은 직선과 같을 것이다. 한번 결심한 일에 대해서는 생각을 바꾸지 않고. 비록 그것이 실패할 가능성이 있다 해도 무모하게 밀어붙인다. 그러나 충동적이진 않다. 그들은 종교인답게 모든 행위에 의미를 부여하니까.

‘그럼 그 마약은 왜 먹었을까?’

주현희는 그가 주기적으로 한백호가 만든 그 ‘쓰레드’라는 약을 사들인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무정원의 눈 정도는 피했을지 몰라도 기러기들의 정보력은 속일 수는 없었다.

작은 일에는 작은 위험을 감수하고, 큰일에는 큰 위험을 감수하는 법인데. 무정원의 정신 고문을 피할 미봉책이랍시고 능력을 잃을 수도 있는 마약을 7년간 복용하는 건 황당하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이 시점에서 또 한 번 빛을 발한 주현희의 직감은, 이 약을 들먹이는 것이 무구원에게는 일종의 약점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으로 귀결됐다.

“북해에 떠도는 공공연한 비밀이 있던데요. 당신에게 이능력을 못 쓰는 장애가 있다죠? 7년 전에 사고를 일으킨 건으로 채찍을 맞아 거의 죽을 뻔한 뒤에 능력을 쓰지 못하게 됐다고 하던데. 그건 그냥 당신이 지어낸 이유일 테고….”

“…….”

“쓰레드. 그 마약, 참 고약한 물건이죠. 쓰레드에 중독되면 그 약 없인 이능력을 전혀 쓸 수 없는 부작용이 있다더군요.”

물론 마약 중독자가 쾌락을 좇아 약물에 빠지는 것은 다반사라지만, 무구원은 그런 식으로 약물에 의존할 만큼 나약한 인물은 아니었다. 주현희는 쐐기를 꽂듯 말했다.

“스스로 마약을 복용해서 이능력을 더 이상 못 쓰는 장애를 떠안다니. 이걸 모두 알게 되면 어떨까요.”

“여기서 그건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역린을 제대로 건드린 것인지 무구원은 크게 동요했다. 내내 평정을 유지하고 있던 그가 턱 근육을 파르르 떨었다. 두 눈동자에 서린 이채는 검은 가시처럼 바짝 돋아나 만물을 찌를 것같이 날카로웠다.

주현희는 이 정도의 반응을 기대한 것은 아니라 의아해졌다. 지금껏 자살하러 기차에 기어들어가겠다던 사람이 장애를 들켰다고 해서 자존심이 상한 건 아닐 테고. 무엇보다 무구원의 눈빛에는 온갖 복합적인 감정들이 뒤섞이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의아한 건 두려움이었다.

“대체 그 약은 왜 복용한 거죠?”

“…저는.”

본디 주현희는 한번 물면 놓지 않는 집요한 인간이었다. 그녀가 채근하자 무구원이 몸을 살짝 옆으로 틀었다. 그러곤 무의식적으로 긴장한 신체 반응을 보였다는 것조차 용납하지 못하겠는지 주먹이 떨리도록 틀어쥐었다. 그렇게 잠시 동요하던 무구원은 곧이어 평정을 되찾았다.

“…무구원 씨, 당신 정말 맹목적이네요.”

주현희의 목소리는 순전히 감탄하는 투였다. 식당에서 그를 떠봤을 때만 해도 주현희는 무구원이 다른 속내가 있을 거라 의심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제 와 보니 무구원은 그럴 만한 남자가 못 된다.

7년 전부터 멈춘 시계를 손목에 두르고, 7년간 마약을 복용하며, 자신의 목숨을 노리는 암살자들을 담담히 초대하면서… 무구원은 마치 저 혼자만 7년 전에 갇힌 사람처럼 한자리에 계속 서 있었다. 그러니 변심이란 것이 이 남자에게 가당키나 하겠나.

“왜 그렇게까지 해요? 당신하고 윤모난 씨 둘 다 7년 전에 잠깐 스쳤던 가벼운 사이가 아니었던가요? 더욱이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은 지금 오로지 복수밖에 모르는 광인일 뿐인데.”

무구원이 미간을 찡그리며 주현희와 시선을 부딪쳤다. 주현희는 북해 출신인 이 남자가 단 한 사람에 대한 마음 때문에 모든 수난을 감수하고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이루어질 수도 없는 사랑 때문에 죽는다는 건 어리석지 않을까요. 그렇게 해서 가문 때문에 얽힌 악연이 사라지진 않을 텐데, 윤모난에게 뭘 바라고?”

“전 팀장님께 바라는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무구원은 자신이 감히 무언가를 바라서는 안 된다는 것을 뼛속 깊이 이해하고 있었다. 자신은 그의 조카들을 살리지도 못했고, 윤모난을 구렁텅이에서 구해내지도 못했다. 더욱이 지금으로서는 이 끈질긴 목숨을 이어가면 이어갈수록 윤모난에게 해만 될 뿐이었다.

“말이 되지 않잖아요.”

모든 일에 이해득실을 따지는 주현희는 그런 마음을 이해할 수 없었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는 말이야말로 기만 아닌가요? 내가 보기에 무구원 씨 당신은 죽어서 윤모난에게 계속 기억되기를 바라는 것 같은데요.”

주현희의 말에 무구원은 짐짓 할 말을 잃은 사람처럼 입을 다물었다.

“왜냐하면 윤모난이란 사람은 평생 죽은 이를 잊지 않으니까. 당신은 그에게 작약이나 조카처럼 잊히지 않는 존재가 되기를 바라는 걸 테죠.”

상실된 것들은 유독 더 큰 의미를 얻게 되기 마련이다. 그런 식으로 무구원은 윤모난에게 어떤 의미가 되기를 바라고 있을 것이었다. 복수가 끝난 다음에는 윤모난이 자신을 그리워하도록. 그에게 각인되기만을 기다리다 드디어 자신의 차례가 될 수 있기를 바라면서.

“너무 잔인하지 않나요? 무구원 씨. 그런 식으로 상대의 사랑을 갈구하는 거 말이에요.”

“…넘겨짚지 마십시오. 전 이기적이기는 해도 게으르지는 않습니다. 지난 7년간 다른 방법을 찾으려 끊임없이 애썼습니다.”

하지만 무구원에게 윤모난의 자취를 쫓으며 산 지난 7년의 삶은 그런 욕심 따위로 이어나갈 수 있던 것이 아니었다. 매사 죽을 고비를 넘겼고, 매 순간의 선택이 그를 시험이라도 하듯 목을 조였다.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날 수 있는 선택지는 무수히 많았지만, 그는 단 하나의 답만을 고수했을 뿐이다.

“…내일 오후에 제 형님이 기차를 탈 겁니다. 오늘 자정이 지나면 여길 떠나겠습니다.”

“무정원이 이미 당신이 올 거라는 걸 알고 있을 텐데요.”

“물론 그렇겠죠.”

“확실한 방법인가요? 정말 무정원을 죽일 수 있어요?”

“네. 방해만 없다면요.”

더 이상 주현희로서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무구원의 말대로 애초에 그녀의 목적은 설계도를 없애고 무정원을 막는 것이었으니 목적만 달성하면 될 일이었다. 주현희는 응접실 소파에 기대앉으며 이 일의 중요성에 관해 다시 한번 강조하기로 했다.

“내일 오전에 평의회 정기 회의가 있어요. 무정원이 통과시키려는 헌법 개정안, 당신도 그 내용을 알 테죠. 시작조차 못하게 막아야 해요. 실패하면 안 됩니다.”

무구원이 그 사실을 모를 리 없었다. 이번 정기 회의에서 무정원이 발의할 헌법 개정안은 그의 진짜 목적을 위한 초석이었다. 반도의 독재자를 꿈꾸는 남자는 개정안이 통과되자마자 설계도를 얻으려 더 가차 없이 행동할 것이다. 자신을 거역하는 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더 나아가 그는 설계도뿐만 아니라 윤모난도 원하고 있었다. 온전한 상태가 아니라 망가진 윤모난을. 유일하게 살아남은 윤씨인 그를 허울뿐인 남경 윤씨의 가주 자리에 앉혀 남경 쪽 여론을 잠재우고 그의 향후 통치에서 든든한 우군으로 쓸 계획인 것이다.

헌법 개정안, 큐브 그리고 윤모난. 이 세 가지는 무정원의 그림이 완성되기 위해서는 필수적이다. 그러므로 혹시 모르는 사태를 대비하기 위해, 일을 완수할 때까지는 윤모난을 그와 떨어트려놓을 필요가 있었다. 무구원은 이 문제에 관해서는 주현희의 도움을 구하기로 했다.

“다만 한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뭐죠?”

“오늘 떠나는 건 반드시 저 혼자여야 합니다. 다른 팀원들에게 말을 맞춰주십시오.”

“밤이 되면 정신계 에스퍼를 불러 당신을 제외한 사람들은 최면에 걸리도록 할게요. 하지만 윤모난은 가이드이니 최면이 쉽지 않을 텐데요.”

“그건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서로의 요구 사항을 확인한 뒤 무구원은 그녀에게 짧게 묵례하곤 뒤를 돌았다. 방문으로 나가려다 말고 잠시 망설이던 그가 무거운 목소리로 한마디를 더 얹었다.

“7년 전 남경 윤씨가 몰락했을 때, 서강 주씨들이 오랜 공생 관계를 포기하고 결정적인 순간에 남경을 버렸죠. 그 덕분에 팀장님은 조카를 잃었구요.”

“하고 싶은 말이 뭐예요?”

“만약 남경 윤씨가 무너지지 않았다면 저희 가문에서 그 법안을 통과시키려는 시도 자체가 불가능했을 겁니다. 표면적으로는 무간 참사가 동기였지만 실상 모든 가문이 손익을 두들겨봤겠죠. 몇 사람만이라도 그때 신의를 지켰다면 오늘날 제 형님이 공포를 무기로 휘두르며 이런 사태를 만들 수 있었을까요?”

“…….”

“죄 없는 아이들의 억울한 죽음을 팀장님 개인으로 인한 비극이라 생각하지 마십시오. 함부로 그 입에 올리지 말란 말입니다.”

처음으로 아무런 대답 없이 무거운 표정을 유지하는 주현희를 두고, 곧이어 무구원이 방을 나가버렸다. 그것으로 대화는 끝났다.

한편 윤모난은 불편한 얼굴로 식탁에 붙박인 채로 앉아 있었다. 경해국이 슬쩍 눈치를 보다가 쿡쿡 안범의 옆구리를 찔러댔다. 편애받고 있는 네가 이 분위기 좀 어떻게 해보라는 뜻으로.

“…저…. 모난이 형.”

“너희는.”

어딘가 차갑기도 하고 화가 난 것 같기도 한 윤모난의 목소리에 안범의 말이 뚝 잘리고 말았다. 윤모난이 이어서 물었다.

“무구원을 믿냐?”

“…그러는 형은요? 형은 무 선배님을 믿으세요?”

“글쎄, 내가 왜 이런 질문을 할까.”

알 듯 모를 듯한 대답을 하고선 윤모난은 다시 생각에 잠긴 얼굴로 식탁 표면을 두드렸다.

“무구원, 그 고집 센 놈이 내 말을 듣고 뜻을 단념할 리 없을 거고. 아마 오늘 안에 여길 몰래 빠져나가서 죽으러 가겠지?”

“그래서… 어쩌실 거예요?”

식탁 의자를 뒤로 밀어내며 윤모난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게 놔둘까. 그렇게 죽고 싶다는데 어쩌겠어. 난 나대로 하면 되지.”

“형!”

사뭇 비장한 목소리가 안범에게서 흘러나왔다. 한참을 머뭇거리던 안범은 무구원을 대신해서 그에게 호소했다.

“그냥, 무 선배님한테 좀 잘해주시면 안 돼요?”

“뭐?”

“저… 제가 봐도 무 선배님이 숨기는 것도 많고… 답답하고 그런 면이 있지만서도.”

“또 시작이군. 무구원 편들기. 니들 둘이 무구원 대변인이라도 되냐? 쟤가 무구원, 경해국이 무구투, 네가 무구쓰리냐고. 별….”

헛소리 같은 빈정거림에도 눈앞의 작은 남자는 괴로운 듯이 웅얼거릴 뿐이었다.

“…하지만 제가 무 선배님이라면 너무 외로울 것 같습니다. 형마저 믿어주지 않으면 대체 선배님은 뭘 위해….”

안범은 경해국과 함께 지난 7년 동안의 무구원의 모습을 목격해왔다. 겉으로 크게 표현을 한 건 아니지만 무구원은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는 사람을 생각하며 자주 그늘진 얼굴을 했다.

모두에게 윤모난의 질량만큼 상실이 있었으나, 어쩌면 무구원의 중력은 더 컸을지 모른다고. 그래서 상실의 무게도 더 무거웠을 거라고. 안범은 그렇게 생각했다.

“형도… 무 선배님한테 마음이 있잖아요.”

“너….”

“네, 형. 저도 선 넘은 거 압니다. 하지만!”

윤모난은 순간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기세등등하게 목소리를 높이는 안범을 타박할 기운은 없었다.

“너 헛소리할 거면 돈이나 줘라. 돈 내고 말해.”

“에?”

뜬금없는 돈타령에 안범의 조막만 한 얼굴이 멍해졌다. 그러다 줄이 팅, 하고 튕긴 듯이 번쩍 정신을 차린 안범이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하지만 나오는 건 동전 몇 개뿐이었다. 안범의 손에 올려진 동전 몇 개를 발견한 윤모난이 비웃으며 말했다.

“300원?”

“…으흑!”

“꼴랑 300원으로는 네 헛소리 못 들어주겠는데. 이만 일어나도 되지?”

300원밖에 없는 죄로 농락당하자 안범은 꾸역꾸역 울기 시작했다. 사실 윤모난이 그가 한 말에 화를 내지 않으려 능청으로 넘겨주려는 것도 모르고 주머니를 더 뒤적거리기까지 했다. 하지만 나오는 건 먼지뿐이었다.

그런 안범을 내려다보던 윤모난이 문득 살짝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너네가 보기엔 내가 다 망친 것 같냐?”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경해국과 안범 둘 다 입을 다물었다. 대답을 하지 않는 것을 보니 어쨌건 그들은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라고 윤모난은 짐작했다.

“이미 바닥을 칠 대로 친 나한테 다들 뭘 바라는 건지 모르겠다.”

“…….”

“나한테도 좀 쉬운 일이었으면 좋겠어.”

나도 이제 지쳤다는 말은 목구멍 너머로 삼켰다. 남의 불행을 제 일인 것처럼 여기며 괴로워하는 두 사람 앞에서 징징거릴 만큼 염치없진 않았기 때문이다.

“울지 마, 안범. 넌 남을 위해서 눈물을 너무 많이 흘려. 거리를 둘 줄도 알아야지. 알았어. 무구원은 내가 알아서 잘해줄게.”

그 말을 끝으로 윤모난은 안범과 경해국을 등지고 식당을 걸어 나왔다. 안범이 훌쩍이는 소리와 경해국이 지청구를 놓는 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복도 벽에 걸려 있는 시계를 확인하니 벌써 오후 3시를 넘기는 시각이었다. 날짜를 가늠해보던 윤모난은 발걸음을 잠시 멈췄다.

‘오늘인가?’

한백호의 장례식은 내일부터 3일간 이어질 것이다. 무정원이 이동한다면 오늘 밤이나 내일일 확률이 높지만, 정확한 출발 시간을 모르는 게 문제였다. 윤모난은 보안을 위해 겉창까지 닫아둔 어둑어둑한 2층을 흘긋 바라보다 다친 제 허리를 확인했다.

가이드의 뛰어난 재생력 덕에 남들보다는 빨리 아물어가고는 있지만, 애초에 칼에 깊게 찔린 만큼 단기간에 완벽하게 회복하는 건 불가능해 보였다. 윤모난은 성가시다는 듯 허리를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시계 옆에 걸린 금색 테두리의 거울 앞에 섰다.

“무구원, 너만 거짓말을 할 수 있는 건 아니란 말이지….”

빛이 없어 어둑한 공간을 배경 삼아 초연한 얼굴의 남자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진득하게 휴식을 취한 적 없어 창백한 얼굴에는 피곤함과 권태가 묻어 있었다. 그런 기미를 모두 닦아 지울 기세로 윤모난은 손바닥으로 머리를 깔끔하게 뒤로 쓸어 넘기고, 튼 입술과 퍼석한 피부를 문질렀다.

이내 거울 안을 메우고 있던 흰 얼굴이 옆으로 사라졌다. 윤모난은 성큼성큼 걸음을 내디디며 계단을 올라가 무구원이 있을 방으로 향했다. 문고리를 돌려 안으로 들어가자 바로 무구원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 …해주소서.”

무구원은 조금 열어둔 겉창 틈새에서 쏟아져 내리는 빛을 맞으며 기도하는 중이었다. 무릎을 꿇고 경건한 자세로 상체를 수그리고 있던 그는 인기척을 느꼈는지 서서히 일어나더니 팀장님, 하고 불렀다. 그 모습을 보자마자 이 방에 온 목적이 조금 양심에 걸리기도 했지만, 윤모난은 방문을 닫고 잠갔다.

“뭐 하시는 겁니까?”

아직 상황 파악을 하지 못한 무구원의 얼굴에 의아한 기색이 번지던 그때. 윤모난은 방을 가로질러 기도하고 있던 신자의 곁으로 다가가 겉창을 밀어 닫아버렸다. 그러자 무구원의 잘난 얼굴에 기다란 띠를 드리우고 있던 흰 빛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렸다.

“너, 나랑 같이 지옥에 가려던 거 아니었어?”

“…저를 위해서 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한 겁니다.”

“누구를 위해?”

“태오를 위해서요.”

어느새 윤모난의 손이 무구원의 눈가를 슬슬 문지르고 있었다. 엄지로 살결 위를 덧그리는 손길이 은근해서 금세 닿은 곳이 붉게 달아올랐다.

“뭘 빌었는데?”

무구원은 그 행동이 퍽 낯설게 느껴졌다. 윤모난의 시선은 퍼석하고 텅 비어 있어서 그가 무엇을 원해서 이러는지 전혀 뜻을 알 수 없었다. 그런데도 윤모난의 손이 닿는 것은 늘 그렇듯 무구원에게는 만족감을 주는 일이라, 그의 사나운 눈매가 금방 무방비하게 풀어졌다.

무구원은 윤모난이 자신의 얼굴을 감상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의 손가락이 스치는 곳마다 예민하게 솟구치는 감각에 순종적인 얼굴로 허물어진 무구원은 숨을 삼키면서 마저 대답했다.

“태오가 모든 고통을 긍정할 수 있게 해달라고 빌었습니다.”

“…그래? 그럼 마침 기도하는 김에 네가 믿는 신한테 나 대신에 이것 좀 물어봐줘라.”

“뭘, 말입니까.”

그러니까, 하며 대답을 끌던 윤모난은 혀끝으로 입술 표면을 훑었다. 그의 속내가 언뜻 내비치는가 싶었던 것도 잠시, 평소와 다를 것 없는 차가운 저음이 들렸다.

“어머니 신이시여, 이 새끼를 대체 어떡하면 제 말을 듣게 할 수 있겠습니까.”

“…….”

“다리를 부러트리면 되겠습니까?”

귓바퀴를 문지르던 손끝이 턱을 치켜올리자 무구원의 몸도 위로 서서히 올라왔다. ‘다리를 부러트리면 내 다리가 되진 못하려나?’라고 중얼거리며, 윤모난은 무심한 표정으로 무구원의 허벅지를 한 번 쓱 훑어 내렸다. 동시에 탄성 있는 대퇴근이 흠씬 조였다가 풀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아니다. 네가 한 대로 마취제나 수면제 같은 걸 먹여 감금하는 것도 방법이지.”

손으로 허벅지를 슬슬 문지르던 윤모난이 혀를 꺼내 단단하고 남자다운 턱을 쓱 핥았다. 그러고서는 당연한 순서인 듯, 입술을 벌려 무구원의 아랫입술을 쭉 빨았다. 곧이어 더운 숨결 틈을 가르고 혀가 입안으로 밀려들었다.

혀와 혀끝이 닿자 잠깐 멈칫하던 무구원은 이내 그를 받아들였다. 두 사람은 서로의 습한 구멍 속을 비집고 두드리며 숨을 교환했다. 퍽 부드럽게 입맞춤을 이어가던 윤모난이 돌연 입술을 떼며 뒤로 물러섰다.

“안범이 그러더라. 너한테 잘해주라고. 그런데 내가 너한테 잘해줄 수 있는 건 생각해보니 딱 하나밖에 없잖아.”

“…….”

“벗겨봐. 잘해줄 테니까.”

한껏 이완된 느슨한 목소리가 탐욕스럽게 속삭였다. 무구원의 시야에 남자의 단단하고 완벽한 몸을 감싸고 있는 셔츠와 바지가 눈에 들어왔다. 그의 몸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작은 단추들이 어둠 속에서도 반들거리며 빛을 냈다.

하지만 무구원은 자신을 유혹하며 손이 닿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에 쉽사리 손을 댈 수 없었다. 자신에게 화난 윤모난이 갑자기 올라와 이런 행동을 하는 이유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윤모난은 또다시 이런 식으로 관계를 정의하고 싶은 거다.

“왜. 유부남이라 양심에 찔려?”

“그게… 아니라.”

“무구원. 너 설마 아직도 7년 전 감정 때문에 이러는 건 아니겠지?”

“…….”

“넌 그냥 나한테 꼴린 것뿐이야. 내가 반반한 면상 하나는 타고났으니까.”

그렇게 말하는 남자의 얼굴은 상당히 설득력 있었다. 냉한 눈동자 위로 밀려 올라간 얇은 쌍커풀과 붉게 물든 눈가를 보고 있자니 무구원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머니 신께서는 윤모난을 만들 때 누구보다 가장 공들이셨을 게 분명하다고.

윤모난은 그 어떤 흉이 진다고 하더라도, 세상에서 제일 까다로운 예술가의 미감을 만족시킬 만큼 아름다웠다. 말하자면 세상에서 상상력이 가장 뛰어난 소녀의 꿈에 등장할 것만 같은 황홀한 얼굴이었다. 아무리 신앙심 깊은 신자라 해도 그를 눈앞에 두곤 어쩔 도리가 없을 터였다.

하지만 무구원은 그런 대단한 미남을 앞에 두고도 그저 슬퍼질 뿐이었다. 윤모난의 극단적인 자기혐오를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다. 무구원은 그저 그를 위해 기도해주고 싶었다.

“그래서 정말 안 하고 버티시겠다?”

그런 마음을 모른 척하는 건지, 정말 모르는 건지 윤모난은 귓바퀴에 입술을 붙이고 속삭였다.

“싫으면 기도하면서 버텨보든가. 난 네가 기도할 때 좆같이 꼴리니까.”

그 요구는 서로 다른 두 사람이 원하는 것 중 최저선의 접점이었다. 느릿느릿 깜빡이는 시선을 상대에게 고정한 채로 무구원이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조…에의, 땅에 계신 어머니 신이시여.”

“흐음.”

마치 라디오 재생 버튼을 누른 것처럼 나지막이 기도문이 흘러나왔다. 동시에 윤모난은 무구원의 어깨에 제 이마를 기대고 몸을 바싹 붙였다. 이윽고 옷감이 비벼지는 소리와 함께 윤모난의 기다란 다리를 타고 바지가 반쯤 흘러내렸다.

하체를 좁게 감싸고 있던 검은 드로어즈 속으로 제 손을 미끄러트리며 윤모난은 수음하기 시작했다. 손에 두툼하게 차오르는 성기를 한 번 쓸어 올리더니 은근한 숨소리를 흘려보냈다.

“우리에게… 고통을 긍정할 힘을 주소서.”

무구원의 어깨에서 목덜미로 이마를 비비적거리던 윤모난이 낮은 음성으로 짧게 씨발, 욕을 뱉었다. 비슷한 높이에 있던 무릎이 각을 세워 무구원의 허벅지 안쪽을 침범하며 윤모난은 몸을 더 가깝게 겹쳐왔다.

그 와중에도 기도는 착실히 이어졌다. 경건한 기도문을 들으면서 윤모난은 혀를 내어 입술을 쓸더니 미지근한 액이 맺힌 자신의 성기를 손으로 천천히 위아래로 훑었다. 그의 은근한 신음이 기도 소리를 오염시키고 범하고 있었다.

예전이라면 상상도 못할 천인공노할 짓을 저지르고 있다는 걸 알지만 무구원은 기도를 멈추지 않았다. 대신에 그는 ‘우리 앞에 어둠을 물러서게 해주시되’라고 말하며 윤모난의 턱에 조심스럽게 입을 맞출 뿐이었다. 품 안에서 잘게 몸서리치던 윤모난이 번들거리는 선단을 엄지로 문질렀다.

“서로를 구원할 수 없는 날에는….”

“하아….”

“텃밭에서 가장 먼 음지에 저희의 자리를 마련해주십시오. 빛이 들지 않는 곳에 저희 둘만 있을 수 있도록 해주소서.”

물기 어린 마찰 소리가 점점 커졌다. 윤모난은 눈을 홉뜬 채로 놀랍도록 사악한 기도를 하는 무구원의 얼굴을 놓치지 않고 바라보았다. 아래서부터 피어오른 열락에 녹아내려 호흡이 가빠진 그가 사정 직전에 움직이던 손을 멈췄다.

그리고 자신과 마찬가지로 피부 아래가 뜨겁게 달아올라 있는 무구원의 입가를 핥고 이빨로 살짝 간질이더니 마귀처럼 속삭였다.

“…하, 무구원.”

“…네.”

“네 입안에 싸고 싶어.”

방금 전까지 어머니 신을 담았던 입이다. 또한 무구원이 가진 것 중에서 가장 아름답고 탐스러운 생김새를 가진 게 바로 입술이었다. 윤모난은 손가락을 그 안에 넣고 꼭 구음이라도 하듯 휘저었다. 축축한 입안과 고른 치열을 탐하는 그의 눈에는 욕망이 번들거렸다.

무구원은 서서히 혀를 놀려 입안에 들어온 손가락을 핥았다. 그가 충실하게 응하는 만큼 입안에 금방 고인 달큼한 침이 손가락 사이를 타고 흘러내렸다. 윤모난은 가득 젖은 손가락을 빼낸 다음 자신의 성기에 부드럽게 마찰시켰다.

“얼른.”

은근히 채근해오는 말투에 무구원은 윤모난을 창문 옆 벽으로 밀어붙이며 무릎을 꿇었다. 윤모난의 손안에서 미끄덩거리며 마찰을 받고 있던 성기 끝을 살짝 입술에 담자, 위에서 다른 손이 내려와 살살 달래듯이 머리를 쓰다듬어준다.

무구원의 혀끝이 성기를 꽉 쥐고 있는 윤모난의 손가락과 그 표피 사이를 건드리다가 동시에 핥았다. 그러자 머리 위에 얹어진 손이 칭찬이라도 해주듯 정수리를 부드럽게 두드렸다.

턱을 한껏 벌려 성기를 문 뒤엔 무구원 역시 그곳을 부드럽게 핥았다. 입안 가득 윤모난이 들어찼다. 무구원은 강압적인 면이 있는 윤모난이 곧 허리를 움직여 성기를 뿌리 끝까지 박아 넣을 거라 생각했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하… 목 끝까지 넣고 다 삼켜.”

벽에 기대고 선 남자는 그저 이 순간을 즐기며 천천히 음미했다. 얕은 바다 위를 유영하고 있는 사람처럼 기분 좋은 신음을 뱉으면서. 펠라는 부드럽고 순조롭게 이어졌다. 자연스러운 흐름 끝에 느긋하게 입안에 토정하는 과정까지.

무구원은 역한 기색도 없이 미끈한 정액을 한 번에 꿀꺽 넘겼다. 그의 입에서 자신의 좆을 빼낸 윤모난이 두 뺨을 거칠게 틀어쥐었다.

“마지막으로 묻는다. 할 거야, 말 거야?”

“…….”

“왜. 여기서 나랑 섹스하면 네 순수한 마음이 더럽혀질까 봐 그래?”

옷깃을 당기자 무구원이 쑥 몸을 일으켰다. 윤모난은 그의 손을 감싸 쥐고는 자신의 허벅지 사이로 끌어당겼다. 손끝이 음낭 안쪽의 여린 살에 닿자 무구원은 눈꺼풀을 아래로 내리깔았다가 천천히 들어 올렸다.

“모르겠으면 만지면서 생각해.”

“…….”

무구원은 과연 신도다운 경건한 모습이었다. 깊은 산중에서 도를 닦고 있다 해도 믿을 만큼 정적인 그의 표정을 보며 윤모난은 눈썹을 찌푸렸다. 놈의 손가락을 벌려 회음부를 문지르게 하자, 여전히 정액이 묻은 무구원의 축축한 입가가 살짝 벌어졌다.

윤모난은 단단한 손을 다리 사이 더 깊은 곳으로 끌어당겼다. 자연스럽게 허리가 뒤로 빠졌다. 가장 취약한 부분인 국부를 내주고 있는 건 윤모난이지만, 여전히 주도권은 그에게 있었다.

“하아…. 무구원.”

앞을 주무를 때보다 더 은근한 신음 소리였다. 무구원의 손은 그에게 속박당한 채 어느새 다물린 입구를 지나 빨려 들어가듯이 구멍 안을 강제로 휘젓고 있었다. 윤모난이 남의 손을 자위 도구로 사용하고 있는 그 광경은 매우 음란했다. 그가 이마를 어깻죽지에 문지를 때마다 무구원은 자신의 심장이 터질 듯이 쿵쿵 세차게 뛰는 것을 느꼈다.

더 이상 참기 힘들어 손을 빼내려던 그때, 윤모난이 붉어진 입술을 벌려 작게 속삭였다.

“그거 알아? 하…. 7년 전에 난 네가 꽤 마음에 들었었어.”

“…….”

“너랑 이러는 것까지도. 몸정이 무섭다더니.”

그 말에 여전히 허벅지 사이에 파묻혀 있던 손이 움찔거렸다. 피식 마른 웃음이 무구원의 뺨을 간질였다. 무구원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뜨면서 윤모난을 바라보았다.

“너는 어떻게 기억할지 모르지만 난 한 번도 순수하게 널 대한 적 없었다는 뜻이다.”

그 말에 무구원은 이 행위를 시작한 이후로 처음, 자의로 손가락 끝을 구부려 내벽 안쪽에 튀어나온 곳을 두드렸다. 그러자 달뜬 숨소리와 함께 단단한 상체가 무너지듯 기대왔다. 무구원은 제 몸으로 그를 받쳐 벽으로 바짝 밀어붙인 다음 한껏 억눌린 목소리로 말했다.

“상관없습니다.”

“…읏, 뭐?”

“저 역시 팀장님을 단 한 번도 순수하게 대한 적 없으니까요.”

허물어져 있던 윤모난의 시선이 무구원에게 향했다. 무구원은 제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손가락으로 안을 더 깊게 쑤시며, 아까 건드린 곳을 또 한 번 지그시 눌렀다.

“저도 추잡하고 더럽고 불결할 수 있습니다.”

“…그, 래?”

대충 대답하며 윤모난은 무구원의 벨트를 풀어 바닥으로 던졌다. 쩔렁, 하고 쇠 부분이 부딪치는 소리가 울리는 그 잠깐 사이에 빠르게 지퍼까지 내린 윤모난은 속옷 안으로 두 손을 집어넣었다. 그러곤 무구원의 엉덩이를 콱 움켜쥔 채 하체를 바짝 붙였다.

이미 터질 듯 발기한 성기 때문인지 잠깐의 마찰에도 성감이 자극을 받아 차올랐다. 무구원의 단정한 얼굴이 살짝 찡그려지자 윤모난은 뜻 모를 웃음을 흘리며 갑자기 반음이나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서 나한테 거짓말한 거냐?”

“…….”

“왜 네가 설계도 가지고 있다고 말 안 했어?”

개폐 버튼이라도 달렸는지 다시 입을 다무는 무구원을 보며, 윤모난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조소했다.

“무구원. 과거에 아무런 의미 부여도 하지 말자. 우린 그냥 개같이 붙어먹었던 것뿐이야. 넌 지금 가정이랑 일도 다 내팽개치고서 나랑 이러고 있는 거고.”

“…어떡하면 제 말을 믿어주실 겁니까?”

윤모난은 벽에 몸을 기댄 채 무구원을 바라보았다. 묘한 미소가 걸린 입술에서 다시 한번 마귀의 속삭임이 흘러나왔다.

“네가 기도한 대로 나랑 같이 지옥에 가면 믿을게.”

“그 말씀은….”

“같이 죽을 각오까지 했냐는 뜻이다.”

윤모난은 지금 그 기차에 둘이 타자는 말을 하는 거였다. 무구원이 세운 계획의 대미를 함께 장식하자고. 무구원은 주먹을 꾹 말아 쥔 채 숨을 참듯 침묵했다.

내내 다물려 있던 입술이 벌어졌을 때 튀어나온 말은 뜻밖이었다.

“…제가 그럴 자격이 됩니까?”

안 된다면서 제발 그러지 말자거나, 죽는 건 하나로 족하니 당신은 살아달라는 말 따위가 아니라 무구원은 ‘자격’을 물었다.

“자격 따위 상관없어. 네가 결심만 하면 우린 오늘 자정 전에 여기를 떠나서 둘만 기차에 탈 테니까.”

윤모난은 무구원에게 한 걸음 다가서면서 그의 셔츠 단추를 풀었다. 그리고 나지막이 앞으로의 일들에 관해서 말했다.

“무정원을 죽이고 설계도나 큐브 따위 모두 잊자. 청연이 복수만 할 수 있다면 아무래도 다 괜찮으니까.”

“…….”

“대신에 너도 네 아들이나 아내한테 미련 두지 마라. 네 가족은 동산에 맡기고 우린 기차에서 내리지 않는 거야. 그럴 수 있겠어?”

윤모난의 시선이 대답을 종용하듯 새카만 눈동자를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무구원은 또다시 굳게 입술을 닫은 채 눈만 느리게 깜빡였다. 긴 속눈썹이 위아래로 움직이는 모습이 그간 본인의 행적과는 달리 꼭 순한 짐승의 눈 같았다.

무구원은 대답을 망설이는 것이 아니었다. 윤모난과 같이 죽을 수 있는 자격을 부여받았다는 것만으로도 그의 마음은 한껏 상기되어 있었다.

“좋습니다.”

한 톨의 망설임도 없는 긍정에 윤모난의 얼굴이 미세하게 굳었다. 하지만 이내 여타의 다른 기색을 지워내며 윤모난은 무구원을 끌어당겨 입술을 부드럽게 포갰다. 두 사람은 잠깐의 떨어짐도 아쉬웠다는 듯이 서로를 삼켰다.

그러나 윤모난은 자신의 허리를 감싼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들여다본 눈은 작은 두려움조차 매몰되어 여전히 평온했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어떤 파랑이 치고 있는 듯했다. 윤모난은 잠깐 입술을 떼어내곤 허리에 얹었던 무구원의 손을 끌어다 혀로 길게 핥아주었다.

윤모난은 식은땀으로 습해진 무구원의 손을 들어 올려 혀로 길게 핥고 저의 얼굴을 만지게 했다. 혀끝에 남은 짠맛을 침으로 적셔 중화시키며 윤모난이 말했다.

“그럼 이젠 두려워할 것도 없겠네. 어차피 죽을 거라면.”

“…네.”

그러나 무구원의 심경은 보다 복잡한 듯 보였다. 그 단순한 진리가 두 사람 앞에 예언처럼 놓인 탓일지도 몰랐다. 윤모난의 낮은 중얼거림이 그 뒤를 이었다.

“혹시 모르잖아. 지옥에서는 우리 같이 있게 될지.”

자세를 바꿔 바닥으로 내려가면서 무구원은 윤모난의 뒤통수와 바닥 사이에 깍지를 끼고 그를 내려다봤다. 그렇게 올가미처럼 가둔 것도 모자란다는 생각에, 윤모난에게 자신을 끼워 넣고 싶었던 그는 오목한 부분을 성기 끝으로 더듬어가며 자리를 맞춰갔다.

윤모난은 그를 달래듯이 제 손가락을 사용해 길을 터주고는 체액으로 찰기를 머금은 무구원의 성기를 훑어 제 몸에 맞춰주었다. 뭉툭한 끄트머리가 닫혀 있던 살 틈을 가르고 들어왔을 때, 윤모난은 눈 한 번 깜빡이지 않았다.

아주 느릿한 교미였다. 성기가 어두운 곳으로 천천히 빨려 들어가듯이 사라지면서 완전히 몸을 합치는 데까지 몇 분이 걸렸을지 모를 만큼. 안간힘을 다해 거센 충동을 조여가며 그 느린 박자를 오롯이 탐닉하던 무구원의 다리 근육이 반들거렸다.

“하아….”

윤모난도 아래서 느릿하게 몸을 움직이는 탓에 마찰하는 피부가 미세하게 자극받았다. 느린 연기처럼 열기가 서서히 피어오를 때, 쾌감이 찬바람처럼 불어닥쳤다. 윤모난을 극한까지 몰았던 그동안의 정사와는 다른 방식이었다.

무구원은 그 조합을 음미하고 또 음미했다. 두 눈으로는 윤모난을 계속 바라보면서 그의 머리를 단단히 옭아맨 손을 풀지 않았다. 골반이 그의 허벅지에 문질러질 때마다, 닿은 부분이 서로 진득하게 들러붙는 것 같았다.

그는 이미 몸을 섞고 있음에도 온전한 합일을 원했고,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더 조바심이 났다. 그런 마음을 가진 건 분명 자신뿐일 것이다. 무구원은 쾅, 하고 몸을 부딪치며 윤모난에게 물었다.

“아―!”

“하아… 팀장님….”

“흐으, 왜?”

“읏, 정말이십니까? 죽으면 우리 둘만… 하아, 우리 둘만 있을 수 있는 겁니까.”

“응, 흐으― 아!”

“그럼 이제 두려워하지 않아도 됩니까?”

철썩철썩 몸을 밀어붙이자 안쪽에서 흡입하듯이 성기를 붙잡는 윤모난의 내벽이 느껴져 아찔했다. 점막 안쪽을 뭉근하게 찌르고 진득하게 비비자 길게 뻗은 두 다리가 샅을 좁히며 접합부를 더 가까이 붙였다. 무구원은 흠씬 조여드는 구멍에 작게 탄성을 뱉었다.

윤모난은 자신을 사랑한다고 말한 적도 없고 내내 밀어내기만 했지만, 이제는 함께 죽자고 한다. 그리고 죽어서는 둘이 지옥 저 끝으로 떨어지자고 말한다.

온갖 부정적인 언사와 폭력, 그리고 죽음까지. 무구원에게 윤모난은 그 자체로 막막한 어둠이고 재앙이었다. 그 막막한 어둠을 깰 기세로 무구원은 몸을 부딪쳤다. 어느새 약간의 틈이 벌어진 그 안에 담긴 것은 먹어도 먹어도 모자랄 만큼 탐스러웠다.

“아흑― 그래…. 두려워, 흣, 하지 마.”

“…네.”

“두려워하지, 마.”

커다란 손이 무구원의 등을 쓸어내렸다.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이 교성에 섞여 분명하게 울렸다가 번졌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무구원은 그 말을 열심히 받아먹었다. 게걸스럽게 해치우는 동시에 윤모난의 육신마저 파먹을 기세로 달라붙었다.

노골적이고 색정적인 소리가 공간을 가득 메웠다. 어느새 느린 박자를 떠난 몸이 세게 흔들렸다. 무구원은 이빨을 세워 윤모난의 목덜미에 남은 붉고 끔찍한 흉터를 깨물었다. 그러고서는 윤모난의 상체에 난 모든 흉터들을 다 핥고 깨물었다.

과하게 요동친 탓에 윤모난의 허리에 감아놓은 붕대에서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겨우 봉합한 상처가 벌어진 것이다. 윤모난은 고통과 쾌감에 휘감긴 채로 식은땀을 흘리며 자신의 가슴 근처를 핥고 있는 무구원을 붙잡았다.

“아! 어흑! 야! 그만! 무구, 원! 잠깐…!”

“으읏….”

피가 너무 많이 흐른 까닭인지 단단하게 묶여 있던 붕대가 조금씩 풀려 너풀거렸다. 오탄탄하게 근육이 잡힌 윤모난의 복부를 타고 뜨거운 피가 흘렀다. 이미 이성을 잃은 무구원은 그 흐르는 피를 모두 핥고 삼켰다.

자신이 좆을 박아 넣고 있는 곳만큼 구멍이 벌어진 허리에서 계속 피를 흘려보내고 있었다. 그곳에 성기를 고집스레 집어넣은 채 사정하고 싶은 충동이 일 정도로 끔찍하고 탐스러운 빨간 근육을 혀로 사정없이 훑어내자, 윤모난이 펄떡거리며 몸부림쳤다.

강렬한 피 냄새가 무구원의 비강에 강하게 닿았다. 만성적인 마약 중독자인 무구원은 붉은색을 집요하게 쫓으며 피를 빨아 마셨다. 그러면서 넝마가 된 윤모난의 안쪽을 박고 또 박았다.

그런데도 제가 사랑하는 이 사람은 빌어먹을 만치 피학적이라서, 고통을 주는 행위에 몸을 움츠리기는커녕 스스로가 망가지고 부서진다는 것에 흥분하며 신음했다. 이 기괴한 성벽마저 그다웠다. 무구원은 성기를 뿌리 끝까지 그에게 박아 넣으며 거세게 안을 두드렸다.

닿지 말아야 할 곳을 건드렸는지 몸이 본능적으로 이물질을 밀어내기 위해 내벽을 강하게 수축시키며 요동쳤다. 무구원은 그런 생리적인 밀어냄조차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이 몸 가장 깊숙한 곳에 사정했다.

“윽…. 젠장!”

집요하게 윤모난의 위에 올라타 있었던 무구원의 얼굴은 피로 붉게 번져 있었다. 그 모습이 어떤 강한 감흥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인지, 아니면 배가 칼에 뚫린 마당에 장기에 닿을 만큼 깊게 정액을 받은 탓인지 윤모난은 순간 토기가 치밀어 올랐다.

고개를 옆으로 돌려 웩, 구역질을 하자 연이어 식도를 타고 탁하고 뜨끈한 액체가 넘어왔다. 윤모난은 바닥을 짚고 길게 토하다가 앓는 소리를 냈다.

“이 쌍놈의 새끼…. 으으.”

윤모난이 속을 게워내는 것을 보고서야 무구원은 찬물을 맞은 것처럼 정신이 들었다. 그는 안에서 얼른 빠져나온 뒤, 제 셔츠를 주워 바닥에 축 늘어져 있는 윤모난의 입가와 얼굴을 조심스럽게 닦아주었다. 벌어진 상처가 아픈지 윤모난이 몸을 움찔 떨었다.

“다시 상처를 꿰매죠.”

“이따가. 난 아직 사정 안 했어.”

어딘가 사무적인 태도에 무구원의 얼굴이 굳었다. 그런데도 윤모난은 허리를 대충 손으로 감싼 뒤 허름해진 몸을 일으켜 무구원의 허벅지에 올라탔다.

“내가 위에서 하고 싶어.”

“상처 수습이 급선무입니다.”

“어차피 죽을 건데 대충 때우기만 해도 돼.”

그러나 무구원은 기어코 허리에 벌어진 상처로 손을 뻗었다. 윤모난이 매섭게 뿌리치자 그는 무언가 감내하는 듯이 억눌린 목소리로 말했다.

“짐승도 피 흘릴 때는 사냥에 나서지 않는 법입니다. 피 냄새가 사냥감들을 동요시키니까요.”

“이미 피 냄새는 흘릴 만큼 흘렸어. 그냥 하자.”

“정 하고 싶으시면 제가 누워 있을 테니 내키는 대로 박으십시오. 전 상관없으니까.”

“시발, 그럼 얼른 누워!”

갑자기 터져 나온 분노였다. 윤모난은 무언가를 크게 망친 뒤에 절망하는 사람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런 그를 한참 묵묵히 바라보던 무구원이 유순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그러겠습니다. 대신에 치료부터요, 팀장님. 제발 치료부터 하게 해주십시오.”

“…….”

지금 이 상황에서 정상적인 구석이라곤 단 하나도 없었다. 다만 무구원은 윤모난의 눈빛이, 꼭 자신이 그에게 무의미로 남기 싫다고 생각했던 그 어느 날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무구원은 그 어떤 말도 보태지 않고 자신이 악화시킨 상처만 묵묵히 바라보았다. 그러곤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 옆에 있던 의료 상자를 가져와 벌어진 허리를 유심히 살폈다. 윤모난은 분기탱천하여 소리를 질러놓고서는 뭐가 그리 서글픈지 참담한 얼굴이었다.

안에 있는 약병을 손끝으로 조용히 훑던 무구원은 그중 몇 가지를 꺼내 집어 들었다. 방금 정사를 치른 사람치고 차분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던 그가 갑자기 화제를 돌렸다.

“기차에 타면 모든 일이 순조롭지는 않을 겁니다.”

“…공간적 특징 때문에 상대의 전열을 흩트리기 어려울 테지.”

“네. 기차는 한 사람을 보호하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이로운 공간이니까요. 설사 흐트러진다고 하더라도 어차피 도망갈 곳도 없으니 죽기 살기로 덤벼들 겁니다.”

“싸우는 중간에 옆에서 끼어들면?”

윤모난은 무구원이 골라잡는 주사기와 약병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말했다. 불쑥 솟구친 감정은 어느새 가라앉은 모양이었다.

“…아무리 팀장님이라 해도 달리는 기차에 올라타지는 못합니다.”

“네 계획은 뭔데?”

“내일 오후, 중앙역으로 가는 겁니다. 경호 때문에 반드시 통금시간을 이용해 밤에 이동할 겁니다. 형님도 우릴 기다리고 있겠죠. 저한테는 화가 많이 나셨으니 저는 바로 그 자리에서 죽이고, 팀장님은 기차에 타기를 권유하겠죠.”

말이 이어지는 와중에 주삿바늘이 투명한 약병 뚜껑에 꽂혀 들어갔다. 피스톤이 밀려 올라가자 투명한 주사기에 투명한 액체가 위로 올라왔다. 약이 모두 옮겨간 것을 확인한 무구원은 바늘을 빼내더니 능숙하게 손가락으로 몸통을 두드려 기포를 없앴다.

“그러니 우리 둘 다 나란히 기차에 탈 방법은 없습니다. 몸수색이 이뤄질 테니 무기를 가져가는 것도 쉽지 않죠.”

“그렇겠지.”

“마취부터 하겠습니다.”

나직이 중얼거리며 무구원은 주사기를 윤모난의 팔뚝에 꽂아 넣었다. 저항도 없이 팔을 내준 윤모난은 그래서 어떡할 거냐는 시선을 보냈다. 무구원은 남의 일 말하듯 덤덤히 계획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큐브 안에 내장된, 파동 간섭을 발생시키는 칩은 엄지손톱만큼 작습니다. 제 혀 아래 숨기기에는 더할 나위 없는 크기죠.”

“그래서?”

“중앙역으로 가기 전에 제 목을 잘라 혀뿌리에 장치를 숨기는 겁니다. 제 머리를 가지고 가세요. 그럼 아무런 의심 없이 파동 간섭 장치를 가지고 기차에 탈 수 있을 겁니다. 그런 다음에는 모든 것이 쉽겠죠. 저는 어차피 죽기로 했으니 결과론적으로는 다를 것 없습니다.”

이 황당무계한 계획에 윤모난은 그만 실소를 터뜨리고 말았다. 그러자 방금 전까지 제 머리를 잘라 가져가라던 무구원의 입가에도 따라서 웃음이 맺혔다.

너무나 실없고 악의적인 농담이었다. 다만 그렇게 하지 않으면 둘 모두 기차에 탈 수는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무구원은 아직도 같이 죽을 생각은 없고, 그저 그런 가정만으로도 만족하는 모양이었다.

결국 혼자 계속 고집을 부리겠다는 거다. 이 황당한 놈. 미친놈. 재활용도 안 될 또라이 꼴통 새끼. 어이없다는 듯이 실실거리는 윤모난을 보며 무구원은 바늘과 의료용 실을 꺼냈다.

“머리는 상처를 꿰맨 다음 자르시죠.”

그 말에 윤모난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리며 뒤로 벌러덩 누웠다.

한참 윤모난의 몸을 들썩이게 했던 웃음은 긴 시간을 두고 점차 잦아들었다. 머리와 몸을 무겁게 짓누르는 마취제의 기운 탓에 몸이 이완되어갔기 때문이다. 눈을 깜빡이며 속으로 가만히 초를 세고 있는데, 무구원이 이마에 짧게 입을 맞추며 물었다.

“팀장님. 물어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

“어.”

“왜 7년 만에 돌아와서 절 찾아오신 겁니까. 팀장님이라면 혼자서도 얼마든지 제 형님을 죽일 수 있지 않습니까. 제가 이렇게 방해가 될 줄 정말 모르셨습니까?”

윤모난은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을 받은 듯 팔을 들어 제 눈을 가렸다. 무구원이 그가 이미 잠에 빠진 모양이라고 생각하던 참에 문득 윤모난이 늘어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글쎄, 내가 너무 쉬운 복수는 싫었나 보지.”

“…….”

“그렇게 실없는 놈이거든. 내가.”

그 말을 끝으로 윤모난은 완전히 눈을 감았다. 약물이 주는 익숙한 안락함이 찾아오기 전에 윤모난은 한 가지 사실만은 잊지 않겠다는 듯 마지막으로 곱씹었다.

‘무정원이 탈 기차는 내일 오후에 출발하는구나.’

* * *

다음 날, 수도 중심부 반도 최고평의회당. 평의회 정기 회의가 열리는 회의장 안은 마치 스포츠 경기장처럼 소란스러웠다. 공중으로 흰색 종이들이 끊임없이 나부꼈다.

도떼기시장 같은 회의장은 반원형의 3층짜리 구조로 이루어져 있었다. 1층에는 의장석을 둘러싼 230개의 평의원석이 있었고, 2층과 3층은 반도를 실제로 움직이는 85인의 최고 위원들이 앉는 자리였다.

소리를 지르는 쪽은 주로 젊은 축에 속하는 1층의 평의원들이었다. 몇몇이 끊임없이 의장석과 연설대를 향해 항의를 표했다. 물론 이 달아오른 목소리에는 비단 항의만 섞여 있지 않았다. 무시할 수 없는 지지의 의견도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분기마다 정기 회의가 열리는 반도 평의회장은 사분오열되기 직전이었고, 그 한가운데에 무정원이 있었다.

“이건 말도 안 돼! 반도를 신정 국가로 만들 셈이야!”

“당 지도자는 상징적인 공석으로 남겨두는 게 오랜 관례인데, 성직자 회의 결과를 반영해 선출하자니!”

“천경교는 이 나라의 기반이고 국교입니다. 국민의 70%가 신자들이란 말입니다! 어머니 신의 가호로 전후에 바로 선 국가에서, 원수는 신의 뜻에 따라 정해지는 것이 당연하지 않습니까! 어떻게 신성한 회의에서 감히—!”

“이 법대로라면 반도 다섯 개 자치주가 모두 복속되고 말 겁니다. 종교 아래 가문의 역사와 이름이 지워진단 말입니다!”

서로 다른 입장이 갑론을박하며 사방에서 터져 나왔다. 그사이 무정원의 눈은 조용히 위층의 최고 위원 상석 중 빈자리를 훑었다. 남경에서 8석 전부, 고섬에서 19석이 비었다. 그 외에 자리한 건 가장 인원이 많은 북해가 24석. 동산과 서강이 각각 17석씩이었다.

대리인을 보내온 사람을 포함해 계산하자면, 85인 중에서 70명 정도가 투표한다. 동산에서는 모두 무효표를 던질 가능성이 컸고, 고섬 쪽 대리인 표와 북해를 모으면 과반수는 충분했다.

계산을 마친 순간, 의장이 의사봉을 두드려 좌중을 진정시켰다.

“아직 최고 위원 연설이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에 모두의 시선이 연설대에 선 무정원에게 모였다. 그는 견장이 달린 검은색 제복과 북해를 상징하는 청회색의 안감을 덧댄 긴 망토를 갖춰 입었고, 오른팔에는 최고 위원임을 상징하는 붉은 완장이 둘려 있었다. 그리고 그의 가슴팍에 달린 약장과 훈장은 모두 무정원의 공적을 치하하기 위한 것으로, 그의 나이를 무색하게 만드는 명예들이었다.

이곳에 선 그 누구보다도 그 무게를 많은 무게를 매단 무정원은 고개를 꼿꼿이 세운 채로 이곳에 자리한 모든 젊은이들과 늙은이들을 바라보았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평의원들은 그저 괄괄댈 뿐이고, 법안을 통과시킬 표를 가지고 있는 건 최고 위원인 늙은이들이었다.

“영토 가장 끝 혹독한 땅에서 살아남은 가문의 맏아들이자, 이 땅의 신민들을 비호하는 임무를 지녔던 군인 된 자로서 여기 모든 의원님들께 말씀드리겠습니다.”

부드러운 듯 굳은 심지가 박힌 목소리가 무정원의 입에서 흘러나오기 무섭게 좌중을 순식간에 압도했다. 단정한 음성에는 은근한 위압감이 묻어났다.

“현재 우리의 문명은 제2 시기를 지나 제3 시기에 접어들었고, 인류는 종의 진화를 이루어냈으나 여전히 트랜스와의 전쟁이 우리 모두를 위태롭게 하는 상황입니다. 국가의 존망을 기약할 수 없던 긴 시간 동안, 오로지 포스트 전사들이 피를 흘렸기 때문에 오늘이란 시간을 누리고 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무정원은 이 순간 누구보다도 인류를 위해 헌신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엄숙하다 못해 경건한 음성이 장내에 퍼졌다.

“우리 모두 죽은 영웅들에게 빚을 졌습니다. 수많은 목숨이 희생하는 동안 반도는 너무 길게 어둠 속을 방황해왔습니다. 오로지 어머니 신께서만이 이 영웅들을 텃밭의 양지로 인도하실 뿐인데, 그분의 뜻을 해석할 수 있는 바로 선 자가 없다면 그들이 생전에 어떻게 시름과 고통을 달랠 수 있겠습니까.

어느새 회의장은 무덤가처럼 조용해졌다.

“포스트 전사들은 태어나자마자 숙명을 지고 가장 영광된 죽음을 약속한 이들입니다. 하지만 국가이능력기관에 지원하는 포스트의 수는 날이 갈수록 급감하고 전사자들의 수는 급증하는 실정입니다. 더욱이 소수인 포스트가 다수를 보호해야 하는 상황 속에서 치국의 일관성을 상실한다면 이 나라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여기 평의회에 있는 의원 중에서는 군인 출신이 의외로 드물었다. 애초에 가문을 다스리는 위치에 있는 이들은 포스트라 하여도, 국가이능력기관에 복무하지 않으려 하는 경향이 강했다. 그러므로 정치판에 몰린 소위 ‘명문가’ 출신인 놈들은 트랜스 한 번 죽여본 적 없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이 우매한 돼지 새끼들 앞에서 무정원의 정당성이란 얼마나 위협적인가. 그는 스스로 말했듯 가주에 오르기 직전까지 군인이었다. 젊은 나이에 전사(戰死)하는 경우가 많은 포스트 전사(戰士)들 가운데에서도 강하게 살아남아 이 자리에 선 남자이다.

요컨대 무정원에게는 포스트를 감히 대표한다고 할 수 있을 만한 자격이 있었다. 모두가 서로 눈치를 보는 가운데 그의 출사표가 이어졌다.

“지금 반도는 각자의 이름과 가문, 개성이 난립하는 탓에 내부적으로 분열돼 있습니다. 외부의 적과 싸우는 전시 상황에서 이러한 분열이 계속된다면 남은 것은 파멸뿐입니다. 그러니 어머니 신에 따라 보편을 해석할 수 있는 지도자를 세워 이 난세를 헤쳐나가야 할 것입니다.”

오늘 무정원이 제안한 개헌 법안은 결코 쉬이 받아들여질 만한 것이 아니었다.

우선 모두에게 반감을 불러일으킨 지점은 각 가문과 자치구, 거점을 중심으로 나뉘어있던 반도의 기존 체제를 중앙집권화해 재조직하자는 부분이었다.

오래 이어진 전쟁 탓에 반도에서는 역사적으로 혈족 중심의 문화가 깊이 자리 잡았고, 정부의 역할은 어디까지나 행정적인 차원에 머무르는 것이 당연했다. 더욱이 성직자 회의에서 지정된 후보자를 선출 과정을 거쳐 국가원수로 세우자는 개헌안은 반도의 근간을 뒤흔드는 법안이었다.

반도는 각 가문부터가 하나의 군대를 형성하고 있는 무력 집단이나 다름없고, 그들이 가지고 있는 군사력과 영향력은 국가의 운명을 좌지우지할 만큼 크다. 그러니 지금 무정원의 주장은 반감을 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것이 영 현실성이 없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7년 전, 서로를 견제해야 할 다섯 가문 중 남경 윤씨가 무너진 이후로 반도의 평형은 깨졌다. 펜타곤의 한 꼭짓점이 붕괴됐으니 오늘 같은 사태는 그때부터 예정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 모든 일이 무정원이 그려온 그림이었다.

“보좌관님, 법안이 가결돼도 꼭 무정원이 당선되리라는 법은 없는데 성직자 회의에서 지도자를 선출한다면 우리 서강 쪽 인사도 가능하지 않습니까.”

3층에서 회의장을 내려다보던 서강 주씨 인사들 중 한 명이 주현희에게 속삭였다. 하지만 가주의 대리인 자격으로 상석에 앉아 있던 주현희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이건 오히려 우리에게 기회일 수도 있습니다. 천경교 신자가 많은 우리 서강 주씨도 후보로 나설 수 있을 겁니다.”

“맞습니다. 윤화신이 몰락한 뒤 북해가 남경에서 재산을 많이 빼돌렸다지만, 부족한 재정을 메우기에는 역부족이었다죠. 명색이 반도의 첫 지도자 선출입니다. 재정 불안정성이 무정원의 발목을 잡을 겁니다. 그러니 우리가….”

다들 저 나름대로 주판을 굴리기 시작하자 주현희가 차갑게 일갈했다.

“바보 같은 소리 마. 재정은 지도자가 되면 자연스레 해결될 문제야. 무정원은 모든 면에서 정당성을 가지고 있어. 7년 전 무간 사건 때 추도식 연설을 하면서 얼굴을 노출해 국민들의 지지까지 받았지.”

“이대로라면 법안의 통과를 막을 수는 없을 것 같은데요.”

“…7년 전 모두가 도모해 남경을 공격한 결과가 결국 이것이군. 무구원의 말이 맞았어.”

“보좌관님?”

“가결만은 막아야 해.”

오늘 법안이 통과되고, 만에 하나 큐브 설계도까지 무정원의 손에 들어간다면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다. 주현희는 붉은 립스틱을 바른 입술을 콱 깨물었다. 이윽고 그녀가 결심한 듯이 자신의 양복 안쪽에서 권총 하나를 꺼내자 주변 주씨들이 일제히 사색이 되었다.

“보좌관님, 대체 뭐 하시는 겁니까!”

말릴 틈도 없이 총구에서 불꽃이 일었다. 천장으로 일직선으로 향한 손이 방아쇠를 당기자, 위협적인 격발음이 터져 나오며 회의장이 순식간에 뒤집어졌다. 의장이 자신의 대머리를 감싸며 쭈그려 앉아 소리쳤다.

“휴정! 휴정합니다!”

겨우 경고 사격일 뿐인데도 겁쟁이들은 우왕좌왕했다. 주현희는 총을 든 손을 아래로 내리며 아래서 자신을 바라보는 무정원과 눈을 마주쳤다. 그의 입가에는 미묘한 웃음이 떠올라 있었다.

“…일단 오늘만 넘기면 돼.”

주현희는 초조하게 중얼거렸다. 오늘만 넘기면 무정원은 죽을 것이다. 무구원이 실패한다면 다음을 또 기약해야겠지만, 오늘은 어떻게든 넘겨야 한다. 그때 서둘러 회의장을 빠져나가려는 의원들의 뒤로 매서운 호령이 따라붙었다.

“바깥에서는 온갖 적들이 몰려오는데. 반도의 정치인이라는 사람들이 잠깐의 두려움도 못 참고 줄행랑을 치다니.”

무정원의 말에 주현희의 얼굴이 굳었다. 그녀가 총을 갈겨 일부러 휴정을 시킨 이유는 의원들이 무정원의 기세에 휩쓸리는 사태를 막기 위함이었다. 그가 휘어잡은 분위기가 까닥하면 이 법안을 통과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문득 일전에 무정원과 나눈 대화가 그녀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전 큐브를 통해 이 땅에 공포를 심을 겁니다.”

그녀의 시선이 절로 이끌린 듯이 굳게 닫혀 있는 회의장 문으로 향했다. 무정원의 말을 되새기다 일순간 싸늘한 얼굴이 된 주현희는 문밖으로 몸을 돌렸다.

“당장 나가야겠어.”

“네?”

하지만 그녀가 회의장을 미처 벗어나기도 전에 밖에서 의문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처절하고 끔찍한 소리는 비일상적인 무언가의 신호탄이었다.

주현희는 자신을 말리는 비서들을 거칠게 밀치며 회의장을 뛰쳐나갔다. 복도를 따라 달려 나간 그녀는 이내 회의장 밖 중정에 선 커다란 그림자를 마주하고 멈춰 섰다. 순간 식은땀이 등골을 스치고 지나간다.

퍽 비현실적인 풍경이 모두의 앞에서 펼쳐졌다. 어디서 갑자기 나타났는지 모를 트랜스 한 마리가 가장 앞서서 나간 젊은 평의원 중 한 명을 손에 쥐고 까득까득 씹어 먹고 있었다. 진득한 피가 잔디밭에 흩뿌려지고 웅덩이에서는 김이 솟아오른다. 잘린 팔이 툭, 하고 떨어지자 누군가는 참지 못하고 고함을 질러댔다.

“…무정원.”

산전수전을 다 겪은 주현희의 입에서도 탄식이 흘러나왔다. 급파된 전투조 전사들이 왼쪽에서 몰려오고 있었지만 이미 늦었다. 회의에 참석한 모두가 이 광경을 보고 말았다.

끼이이이이이이이―

트랜스는 누군가의 공격에 맞아 기괴한 소리를 내며 꿈틀거렸다. 괴물이 몸을 굴리며 꼬리로 땅을 걷어차자 의원들이 혼비백산하며 흩어졌다. 무간에서 전사들이 항상 마주치는 낮은 등급의 트랜스가 이곳에서는 상황을 압도하고 있었다.

여기 있는 모두가 알고 있다. 괴물들은 이렇듯 언제고 우리의 생태계를 파괴할 수 있고, 방심한 틈을 타 문명을 쓰러트릴 수 있다는 것을.

“…이만 마무리된 것 같은데 회의를 재개할까요?”

문 앞에서 넋 놓고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의 고개가 일제히 뒤로 돌아갔다. 그곳에는 무정원이 있었다. 그는 회의장에서 한 발자국도 나오지 않고 모두를 관망하고 있었다. 누군가 꿀꺽 침을 삼키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한 그때.

쿠당―! 하고 잔디밭에 트랜스가 쓰러지는 기척과 함께 날카로운 창에 육질이 꿰뚫리는 소리가 이어졌다. 약간 후덥지근했던 공기는 어느새 싸늘한 겨울처럼 얼어붙어 있었다.

공기 중에 수증기를 응집하여 만든 얼음이 괴물의 몸통을 그대로 관통한 것이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대다수 의원들은 입을 다물고 홀린 듯이 회의장으로 들어갔다. 그 걸음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가운데, 가장 끝에 서 있던 주현희만 바깥에 남았다.

“안 들어오실 겁니까?”

누군가의 부름에도 주현희는 움직이지 않았다. 결국 그녀를 남겨두고 문은 닫혔다.

다음 순간, 좌절감이 주현희의 어깨를 무겁게 짓눌러왔다. 스승님이 돌아가신 이후 한때 뜻을 함께했던 제자들은 무간에서 죽거나 큐브와 관련된 일에 휘말려 죽었다. 혁명을 포기하고 변심하여 무정원의 편에 선 이들도 있다. 게다가 지금은 스승님의 유지를 이어 혁명을 성사시키겠다는 기막힌 욕심을 내볼 만한 상황도 아니다.

둑은 무너진 지 이미 오래되어 최후의 또 최후…. 결국 누군가의 희생 없이는 이를 타개할 방법이 없다.

‘절대로 암살이 실패해서는 안 돼.’

무정원을 막지 못하면 독재가 현실이 되는 건 시간문제였다. 주현희는 냉정함을 되찾기 위해 담배 하나를 꺼내 물었다. 그녀의 잇새에 물린 담배 끝에서 서서히 연기가 피어올랐다. 한 개비를 다 태운 뒤에 주현희는 손목시계로 시간을 확인했다.

지난밤 무구원은 그를 제외한 셋을 최면과 마취제로 재운 뒤, 자정을 넘기자마자 홀로 저택을 떠났다. 그와 약속한 대로라면 개입하지 말고 기다려야 한다. 하지만….

‘무구원에게는 미안하지만 그가 실패할 경우, 윤모난이 반드시 마무리 지어야 해.’

주현희의 고민은 길지 않았다. 그녀는 당장 별저로 전화를 걸어 오늘 오후 8시 무정원이 기차 하나를 대절하여 고섬으로 이동한다는 첩보를 집에 있는 윤모난에게 전달하라고 지시했다. 하지만 그곳은 이미 세 사람의 흔적조차 없이 텅 비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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