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 동형 반복 (19/24)

6. 동형 반복

정기 회의는 오후 7시경에 끝났다. 회의장을 빠져나오는 무정원에게 그를 지지하는 의원들이 따라붙으며 악수를 건넸다.

“의원님, 축하드립니다.”

거북한 인사치레를 말없이 다 받아준 무정원은 의사당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관용차에 올라탔다. 타자마자 불편한 심사를 어김없이 드러내듯 그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

“그 둘은?”

“…아직입니다.”

보좌관 한 명이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아직 무구원과 윤모난, 둘 다 행방을 찾지 못해 며칠간 가주의 불편한 심기가 이어지고 있었다. 그 둘이 이동하는 중에 나타날 거라 생각해, 동선마다 경호 팀들도 배치해뒀지만 아직까진 아무런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오늘 오후 8시에 출발하는 전세 기차는 고섬으로 가는 항구까지 무정차로 직행한다. 무슨 재주를 부리지 않는 이상, 중간에 기차 안으로 침입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무정원은 부하에 대한 실망감을 여지없이 드러냈다. 대업을 앞두고 겨우 사람 둘 단속 못해 일을 그르친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더욱이 가주의 동생이 배신했다는 사실이 바깥으로 새어 나가기라도 한다면 북해의 위신이 어떻게 되겠는가.

“가주님, 동산 경씨 측에 협조를 요청해서… 무구원의 아내와 아들을 인질로 잡으시는 것은 어떻습니까?”

“신성한 길을 가려 하는데 여자와 아이를 인질로 잡았다는 소문을 내라?”

“…생각이 짧았습니다. 죄송합니다.”

“무구원이야 곧 나타날 테니 일을 크게 벌일 이윤 없다. 다만 축일 주간인 것이 걸리는구나. 하필이면 살생을 금하고 몸을 정결히 해야 하는 이때.”

“혹여 윤모난이 나타날 경우를 염두에 두고 대안을 세우셔야 합니다. 공간계 에스퍼를 옆에 대동하시고….”

남자는 미처 말을 다 끝마치기도 전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자신을 향한 매서운 시선이 더 말을 꺼내지 못하게 막은 것이다. 무정원이 엄중하게 그를 꾸짖었다.

“천경교의 율법은 우리를 구속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한계를 인식하여 다음 단계로 나아가게 하기 위함이다.”

“하지만 이 중요한 때 혹시 경호에 문제가 생길까 걱정됩니다.”

“그저 살아보겠다고 원칙마저 버린다면, 문명화되지 않은 버러지들과 우리의 차이점이 뭐지? 이 문제는 더 이상 얘기하지 않겠다. 예정대로 공간계 에스퍼는 이능력 사용을 금한다.”

낮에는 이용객으로 붐비는 중앙역의 텅 빈 광장 앞에 차가 도착했다. 늦은 시각엔 민간인들이 도시 간 이동을 하는 경우가 거의 없기도 하고, 경호 때문에 근처를 이미 철통같이 통제해 행인 한 명 길가에 나다니지 않았다.

차 문을 밀고 내리면서 무정원은 훅 끼치는 따뜻한 공기에 작게 혀를 찼다. 약간만 남쪽으로 내려와도 이렇듯 따스한 기후가 불쾌함을 불러온다. 심기가 불편한 무정원의 뒤로 길게 경호원들과 보좌진들이 따라붙었다.

“가주님.”

그때 뒤에서 누군가 그를 조심스럽게 불렀다. 수하들이 가리킨 방향에는 누군가 홀로 서 있었다.

장대같이 큰 키에 마찬가지로 북해의 검은 제복을 입은 남자가 중앙역 문 한가운데서 그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무정원의 시선이 본능적으로 그의 주변을 훑었지만, 정작 와야 할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건방진 놈. 잡아.”

몰이꾼들이 동시에 튀어나와 재빠르게 무구원에게 달려들었다. 무구원은 아무런 저항 없이 북해 에스퍼들에게 붙잡혀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무거운 구둣발 소리가 다가오고, 가죽 장갑의 손끝이 무구원의 턱을 들어 올렸다. 이제는 분노조차 가신 냉담한 잿빛 눈동자가 무심하게 동생을 내려다봤다.

“모난이는?”

“…아시다시피 서곡에서 칼에 찔려 부상을 입었습니다. 정신을 잃어 회복 중입니다.”

“그럼 너도 쓸모를 다했다는 의미구나.”

무정원이 옆으로 손을 뻗자 보좌관이 얼른 무기를 건넸다. 이윽고 차가운 총구가 무구원의 이마에 닿았다.

“일전에 제 쓰임에 대해서 달리 판단해본다고 하셨었죠.”

“그랬었지. 아마 7년 전이었나. 모난이가 사형을 받는다는 소리에 네가 무릎을 꿇으며 그 녀석을 살려달라 빌었지.”

“그래서 7년간 어떠셨습니까?”

“네게는 실망이 크구나.”

“제가 형님께서 원하시는 걸 가져왔는데도 말입니까?”

무구원은 이마에 닿은 총구를 밀어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참으로 담대한 반응이었다. 금방이라도 달려들 듯한 몰이꾼들에게 손짓한 무정원이 일어선 동생의 멱살을 확 잡아끌었다.

“그래?”

“…큐브 설계도. 그걸 드릴 테니 저와 팀장님은 이만 놓아주십시오.”

“…….”

“그만하면 저의 쓰임은 충분한 것 아닙니까.”

“ 네게 설계도가 없다는 건 이미 확인했다.”

“네, 없었지요. 하지만 그 위치는 알았습니다. 그리고 이젠 거래를 위해 꺼내놔야 하는 때라는 것도요.”

7년 동안 무정원은 무구원을 감시하면서 그에게는 설계도가 없다는 것을 확신했다. 그는 일부러 자신에게 설계도가 있다는 식의 유인작전을 펼치면서 윤모난을 보호하려는 멍청한 태도를 고수했기 때문이다. 그건 오히려 설계도가 없다는 반증이었고, 암살자들이 그렇게나 찾아오는데 이쪽이 모르리라 생각했다면 그건 큰 오산이었다.

무정원은 헛소리하지 말라는 듯 코웃음 치며 물었다.

“그게 무슨 물건인지는 알고 나와 거래를 하겠다는 거냐.”

“…뭐든 저와 상관없는 일입니다. 원래부터 이걸 지켜야 할 의무도 없었구요. 저도 이 문제에서 이제 그만 홀가분해지고 싶습니다.”

“…….”

“저와 팀장님 그리고 제 가족까지. 설계도가 아니면 형님께는 아무런 가치도 없는 존재들 아닙니까.”

무구원의 두 눈은 그 어떤 감정도 읽을 수 없을 만큼 까맣고 짙었다. 거짓이나 기만 같은, 드러나기 쉬운 것들조차 보이지 않는 새카만 눈동자. 무정원이 이 동생을 믿지 않았던 궁극적인 이유도 그러한 눈은 신뢰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어느새 중앙역 중앙에 있는 커다란 시계의 분침이 50분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무정원은 무구원을 뒤로 밀어 몰이꾼들에게 던졌다.

“몸수색해. 기차에 태워라.”

“네.”

몸수색을 마친 무구원은 몰이꾼들에게 붙들린 채 승강장으로 끌려갔다. 이미 출발할 준비를 마친 기차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지만 여전히 윤모난은 나타나지 않았다. 최종적으로 이를 확인한 뒤에 모두 기차에 올랐다.

축일 주간의 안전한 이동을 위해 북해에서는 기차 전체를 대절했다. 칸마다 대기하고 있는 북해의 전사들 수만 합쳐도 몇 소대쯤은 가뿐히 넘었다. 모두 윤모난의 등장을 염려한 조치였다.

“가면서 가족끼리 오랜만에 담소나 나눌까.”

무정원의 갑작스러운 제안에, 몰이꾼들에게 결박된 채로 그를 따르던 무구원의 얼굴이 굳었다. 1등석 객차 칸에 들어서자 익숙한 사람들이 보였기 때문이다.

“가주님.”

복도에는 무정원과 무구원의 친형제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고개를 숙여 무정원에게 예의를 표한 다음, 뒤에 선 무구원에게로 조용한 시선을 던졌다.

그의 가족은 혈육의 연을 떠나서도 맹목적으로 가주에게 충성할 뿐이다. 형제들은 모두 무구원이 어떻게 가문을 배반했는지 전부 듣고 이 자리에 있었다. 무구원은 자신을 향한 큰누이의 경멸 섞인 시선을 받으며 고개를 숙여 먼저 인사했다.

“…어머니 신이시여. 이 어리석은 배신자를 용서치 마소서.”

종교인이 으레 하듯이 경멸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그녀는 불쾌한 듯 고개를 돌려버렸다.

무정원이 마련한 객실은 무구원이 그와 독대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심지어 무정원은 그간 습관과는 다르게 실내 온도를 차갑게 낮추지도 않았다. 쓰레드 없인 이능력을 쓰지 못하는 무구원을 완전히 낮잡아 보는 태도였다.

객실 문이 닫힌 뒤에도 형제들은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들의 그림자는 혹시 모를 저항이나 암살 시도가 단순한 골육상잔으로 끝날 것이 아님을 암시하고 있었다. 무정원은 제 형제들을 경호원으로 부리면서 짐짓 여유로운 태도였다.

“모난이에게 있어야 할 설계도를 어떻게 내놓겠다는 건지 설명해봐라. 내가 알기로 설계도는 작약이 죽고 나서 사라졌어. 그러니 그 녀석에게 있을 확률이 지금까진 가장 컸지.”

무정원은 7년 전에 윤모난의 주변을 샅샅이 뒤져봤지만 그 스스로가 설계도의 존재를 모르는 건 물론이고 작은 실마리도 잡히지 않았었다. 그러나 무턱대고 이것을 들쑤실 수는 없었다. 만약 설계도가 작약과 관련이 있다는 걸 알게 되면, 윤모난이 결코 그것을 내놓지 않고 끝까지 지킬 확률이 높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무구원을 이용하여 윤모난을 전향시키려 한 것은 감정적으로 무너진 그를 공략하기 위함이었는데, 꽃들이 그의 조카들을 죽이면서 모두 수포가 됐다. 무정원의 원래 계획대로 무구원이 그의 조카들을 북해로 데리고 왔다면, 그 조카를 인질 삼아 가문과 뒷배를 잃은 윤모난을 이용할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모난이는 그 설계도가 작약에게 있었다는 사실조차 몰랐던 눈치던데.”

“작약은 생전에 팀장님께 힌트를 남겼지만, 지금껏 팀장님은 그것이 열쇠인지도 모르고 쥐고 있었던 것뿐입니다.”

“…그래서?”

“팀장님이 늘 그 열쇠를 소지하고 다녔기 때문에 지금까지 형님이 찾을 수 없었던 것이죠.”

무정원은 조금만 더 인내하며 기다려주기로 했다. 무구원이 지금껏 실마리도 잡지 못했던 설계도에 대해 마침내 귀담아들을 만한 정보를 가지고 나타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참을성도 곧 시효를 다할 때가 머지않았다.

무구원이 모든 사실을 털어놓기를 기다리는 사이 기차가 출발했다. 이 거대한 쇳덩이는 목적지까지 멈출 일이 없을 테니 이미 총알은 총구를 떠난 셈이다. 이제 윤모난은 기차에 올라탈 수 없으니, 무구원이 반드시 답을 줘야 했다.

“모난이가 그걸 지니고 있었다면 어째서 지금껏 설계도에 대해 몰랐던 거지?”

“팀장님이 그 일을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 기억을 부분적으로 잃었습니다.”

“…그럼 무간에서였겠군.”

무정원은 알 만하다는 듯이 자신의 턱을 매만졌다. 윤모난이 무간에서의 기억을 꽤 상실했다는 건 이미 그도 아는 바였다. 무정원 자신도 그걸 이용했으니. 무구원은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

“제가 그 사실을 처음으로 어렴풋이 알게 된 건 7년 전이었습니다. 구치소에 있을 때 팀장님이 쇼크 상태에서 누군가의 환영을 보며 중얼거린 말이 아무래도 이상했습니다.”

“그게 설계도의 위치였나?”

“네. 하지만 팀장님은 후에 저와 나눈 대화나 자신이 무슨 소리를 했는지 전혀 기억하지 못하더군요. 저도 나중에서야 그 힌트를 되새겨보았습니다.”

설계도는 모두가 오래도록 찾아 헤맨 물건이었다. 성큼 다가온 진실 앞에 무정원은 태연한 척 오히려 느긋하게 몸을 등받이에 기댔다. 창밖으로 펼쳐지는 풍경에 시선을 던지던 그가 입을 열었다.

“그래서? 작약이 모난이에게 남긴 힌트가 뭐였지?”

무구원은 머릿속 기억을 되새김질했다. 그에겐 눈을 감으면 절로 생생해지는 과거의 장면이 있었다. 아무것도 없는 빈 허공에 매달아진 윤모난의 멍한 시선. 바닥에 머리를 찧으며 몸부림치는 그의 모습. 형을 부르는 목소리가 꺼질 것처럼 흩어지는.

“형… 미안해.”

무구원은 그런 그의 옆에 있었다. 당시만 해도 윤모난을 살릴 수 있을 거라 확신했던 무구원은 그를 진정시키려 점점 차가워지는 얼굴을 한참이나 문질렀다. 그때의 윤모난은 결코 제정신이라 할 수 없었다. 그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만 토막 내 뱉으며 끔찍한 병을 앓는 사람처럼 몸을 떨었다.

무구원은 덜컥 겁이 났었다. 윤모난의 정신이 완전히 붕괴된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미로는… 실체 없는, 환영. 현혹… 않으면, 있어. 다 속임수야. 우리를 현혹하는 거라고.”

“…….”

“…우리는, 어둠이 가라앉은 객석의… 관객이야.”

팀장님, 하고 부르자, 갑자기 품속에 안긴 몸의 떨림이 멈췄다. 윤모난은 손을 들어 자신의 허전한 목을 확인하듯이 더듬었다. 당시에 안범에게 펜던트를 주고 그의 목은 휑한 상태였다. 그 사실조차 잊은 윤모난이 펜던트를 찾았다.

“내 펜던트….”

“제가 안범에게서 가져오겠습니다. 조금만 기다리세요.”

“…형들이 마지막에… 말했어. 길을 잃었을 땐, 현혹되지 말고… 이걸 열쇠로 삼으라고.”

버석 말라 있는 윤모난의 입가가 뻐끔거렸다. 무구원은 윤모난의 은제 펜던트에 각인된 문양을 떠올렸다. 작약이 각인된 그 목걸이는 환영 능력과 현상 유지 능력을 가진 형제가 동생에게 미로를 빠져나갈 수 있는 열쇠로 남긴 물건이었다.

“설계도는 지금껏 작약의 죽음과 함께 묻혀 있었습니다.”

무구원은 회상에서 빠져나오며 결론을 꺼내놓았다. 펜던트는 말하자면 작약의 죽음을 상징하는 물건이었다. 환영을 보여주는 물건이지만 모순적으로 진실을 가리키는 열쇠이기도 했다.

그래서 윤모난이 작약의 죽음과 정면으로 마주하지 않으면, 다시 말해 작약이라는 환상을 거둬들이지 않으면 결코 설계도라는 진실에 닿을 수 없다.

설계도와 펜던트를 둘러싼 모든 것이 상징과 알레고리로 가득 찬 하나의 수수께끼였다. 당사자보다 이 수수께끼에 가까이 접근한 무구원은 자신의 목에 걸린 무언가를 꺼내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찰랑하고 금속제의 물건이 표면에 닿는 소리가 났다. 윤모난의 펜던트였다.

“이게 열쇠입니다.”

은제 펜던트가 빛을 반사하며 유유히 빛나고 있었다. 다소 어두운 실내등에도 뚜렷이 보이는 각인이 이것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분명히 알려주고 있었다.

“모난이가 20살이 되던 해 작약이 선물한 펜던트이군.”

무정원은 이 펜던트를 제 목숨인 양 걸고 다니던 윤모난을 떠올렸다.

“표면에 모란을 새기다니. 작약은 동생이 모란으로 태어난 걸 누구보다 저주스러워하면서도, 정작 본인들이 이 상징에 가장 집착했다는 게 웃기는 일이지.”

“틀렸습니다.”

지적과 함께 무구원은 손가락으로 펜던트 표면에 새겨진 꽃을 쓸었다.

“이건 모란이 아니라 작약입니다. 보통은 둘을 잘 구분하지 못하지만, 엄밀히 다른 꽃입니다.”

“그렇군.”

무정원은 별 상관 없다는 듯 펜던트를 가져가 손에서 이리저리 굴려보며 묵직하게 떨어지는 무게감을 느끼다가 물었다.

“이게 열쇠라면 사용하는 방법이 따로 있겠지.”

“네. 여는 방법이 있습니다. 돌리는 순서와 방향으로 정해진 암호를 모르면 열 수 없죠. 그리고 그건 오직 팀장님만 압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거래의 요지였다.

“저의 가족들을 추적하지 않고 무사히 반도를 떠나게 해주신다면, 팀장님이 암호를 전달해드릴 겁니다.”

이미 필요한 조처는 모두 해두었다는 말에 무정원은 손안에서 가만히 펜던트를 굴리며 침음했다. 불쾌한 기색이 이어지는 듯하더니 마침내 대답이 떨어졌다.

“좋다. 어차피 기차를 중간에 멈추게 할 수는 없으니 도착지에 갈 때까지 협상을 진행해보지.”

“…….”

“이 정도도 너에게 큰 자비심을 베푸는 거다.”

그러나 무구원은 무정원의 말을 믿지 않았다. 자신의 형님은 한 번도 그런 식의 자비심을 가져보거나 베풀어본 적이 없음을 알기 때문이다. 치욕 속에 살게 하는 것보다는 깔끔하게 죽여주는 편이 오히려 자비라고 하는 사람이 그럴 수 있을 리가.

적당한 실내 온도는 계속됐다. 도통 방심하는 법이 없고 포스트의 이능력을 신성시하는 이 남자가 자신을 적수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쯤은 무구원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유일하게 파고들 수 있는 허점이라는 것도.

“네 능력은 여전히 고장 난 상태인 건가.”

“네.”

“네가 복용한 그 약에 대해서 보고를 받았는데 제법 흥미롭더군. 중독이 되면 그것 없이는 이능력을 쓰지 못한다지.”

“신경계에 손상을 줘 장기적으로는 전혀 에너지를 운용하지 못하게 만드는 약입니다. 그 약을 먹으면 일시적으로는 능력을 쓸 수 있긴 하지만 아주 잠깐일 뿐이죠.”

“…그래서 오늘은 그 약을 복용하진 않은 모양이군.”

무구원이 그렇다고 대답하자 무정원이 비릿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모난이가 정말 그럴 만한 가치가 있나. 네 가문과 모든 의무를 저버리고…. 심지어 포스트로서 이능력을 쓰지 못하는 수치까지 감수할 만큼인지는 모르겠구나.”

무구원은 그런 말에 어떠한 반응도 표하지 않고 그저 창문으로 시선을 돌렸다. 창문 밖은 이미 칠흑 같은 어둠이었다. 드문드문 있는 민가에서 흘러나오는 희미한 불빛이 이정표처럼 늘어져 있었다.

어둠 속을 뚫고 목적지를 향해 달려가는 이 기차처럼, 대부분의 북해인들은 무언가에 맹목적인 습성을 타고나는 면이 있었다. 무정원이 정치적 목적을 위해서 지금껏 지난한 길을 밟아왔듯이 무구원 역시 그랬다. 그는 만사 북해인들 특유의 아집으로 사고하며 살아왔다. 윤모난도 그중 하나였을 뿐이다.

“그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따로 있지. 모난이야말로 제 가족밖에 사랑하지 않는 녀석이야. 조카 일만 봐도 그래. 원래대로라면 윤모난의 상대도 되지 않았을 꽃들이 걜 거의 죽기 직전까지 몰았어.”

“…….”

“모난이의 의지를 꺾는 건 그런 간단한 방식만으로도 너무 쉬웠을 테니까.”

“그래서 형님께서도 그 의지를 꺾으려 그러셨던 겁니까? 아무런 죄도 없는 팀장님이나 그 조카들까지 끌어들이면서요?”

“그래. 원래 길가에 그렇게 나약한 것이 함부로 나와 있으면 손을 댈 수밖에 없는 법이야. 그건 어쩔 수 없는 거다. 모난이는 많은 걸 가지고 태어난 주제에 천진난만하게 길가에 나와 굴러다닌 거고. 이 모든 비극은 그 녀석 스스로 자초한 거다.”

능력이 있는 자에게는 천하가 따른다고 했던가. 윤모난은 타고나기를 천하를 휘어잡을 팔자였음에도 그걸 비극이라 하는 사람이었다. 그런 식으로 먼저 세상을 외면했으니 세상이 그를 버리려 하는 것도 당연한 수순이었다.

모든 사람에게는 저마다 짊어져야 할 운명이 있다고, 무정원은 믿었다. 그 길이 결코 쉬울 수만은 없으나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회피하는 것은 나약함의 증거일 뿐이다.

무구원은 어떠한가. 어머니 신께서 선고한 죽음을 거부하고 천박하게 살아남지 않았나. 그가 제 앞에 앉아 있는 것 자체가 수치이자 나약함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꼴이었다. 그런 면에서 윤모난과 무구원은 동류였다.

“팀장님은 나약하지 않습니다.”

무구원은 치욕스러운 삶을 살아가는 주제에 저리도 당당한 시선을 보내왔다. 그 뻔뻔함에 불쾌해진 무정원은 눈썹을 약간 찡그렸다.

“그래. 그럼 모난이가 아닌 너의 나약함에 관해 얘기해볼까. 이걸 여기까지 가져왔으면서 펜던트의 암호를 정말 몰랐을 리 없겠지. 넌 그런 배짱을 부릴 만한 놈이 못 돼. 특히나 불확실한 것에 목숨을 걸 성격도 아니지.”

“그렇다면 저와 협상을 진행하시는 이유가 뭡니까.”

“넌 지금 나의 미끼고 인질이야. 모난이가 회복 중이라서 나를 찾아오지 않을 거라 생각하나? 천만에, 복수를 하기 위해서라면 세상 끝까지라도 쫓아올 녀석인데 그럴 리가. 그러니 널 미끼로 삼아 이번에는 사냥을 완수해야지.”

어느새 밤안개가 철로 주변을 뒤덮고 있었다. 윤모난은 언제 나타날까. 달리는 열차로 그가 뛰어들 방도는 없겠지만 무정원은 윤모난이 이번 축일 주간을 놓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는 창밖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이 오랜 사냥의 과정은 무정원에게 순전한 흥취마저 불러일으켰다. 가축보다는 산짐승을 잡는 게 더 흥미로운 법이고, 길들지 않았을수록 잡았을 때 손맛이 더 좋은 법이었다. 저 자신이 죽을 길인지도 모르고 안개 속을 달리고 있을 윤모난을 상상하며 무정원은 손가락을 툭툭 움직였다.

“이번 사냥은 쉽지 않겠네요.”

무구원의 건조한 목소리가 들리자 무정원의 시선도 다시 돌아왔다. 어느새 무구원은 펜던트를 잡고 옆에 감긴 태엽을 손으로 달칵거리고 있었다. 그의 검은 손끝이 몇 번 움직이자, 무언가 틱, 하고 튀기는 소리가 나더니 펜던트의 뚜껑이 열렸다.

타원형의 뚜껑이 위로 올라가자 안에서 작은 스파크가 튀며 지지직거렸다. 무정원의 고요한 시선이 의문을 담고서 펜던트에 고정되어 있었다.

“…이건 모난이 펜던트가 아니군.”

윤모난을 몇 년간 본 무정원이 펜던트가 작동될 때의 모습을 모를 리 없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똑같이 생겼을지 몰라도 무구원이 들고 온 것은 모조품이었다. 무언가 깨달음이 머릿속을 스치는 그때, 날카로운 소리가 갑자기 고막을 찔렀다.

삐이이이이익―!!

흠칫 놀라 귀를 감싸 쥐며 상체를 숙이던 무정원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가 상황을 파악하자마자 이어서 그의 얼굴에 떠오른 것은 분노와 혐오감, 그리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증오였다.

“무구원, 너…. 대체 큐브에 대해서 어디까지 알고 있었던….”

그때 복도에서 울려 퍼지는 새된 비명이 무정원의 말을 가로막았다. 무정원의 이마가 미세하게나마 땀으로 젖기 시작했다.

“윽―!”

“형님, 고통을 긍정하십시오. 어머니 신께서는 괴물이 된 사람에게 구원을 약속하지 않으십니다.”

복도는 어느새 발을 구르는 소리와 고통스러운 신음으로 소란스러워졌다. 모조 펜던트 안에 숨겨온 이 파동 간섭 장치는 기껏해야 근거리에 있는 에스퍼들의 파동만 폭주시킬 뿐이다. 이능력 장애가 있는 무구원만이 여기서 평온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사이 무정원은 더 버티지 못하고 앞으로 몸을 숙이며 신음을 흘렸다. 파동이 폭주하는 건 온몸의 세포가 터지는 것 같은 고통과 맞먹는다. 온몸이 불에 타고 뼈가 가루가 되는 듯한 생생한 고통이 지나면 무정원은 괴물이 될 것이다.

무구원은 그런 형을 감정 없이 바라볼 뿐이었다. 건조하지만 날이 서려 있는 그 날카로운 눈매에는 일말의 망설임도 보이지 않았다.

“…어머니 신이시여.”

누군가 기도문을 중얼거리는 소리와 함께, 복도에서 우왕좌왕하는 소리가 퍼지더니 이윽고 객실 문이 벌컥 열렸다. 동시에 무구원은 형의 멱살을 잡아 제 앞에 세우며 그의 허리춤에서 빼낸 권총을 그의 목에 겨눴다.

“가주님!”

몰이꾼들은 하나같이 낭패감이 서린 얼굴로 객실 안에 진입하지 못하고 총을 조준하고 있었다. 두 형제를 향한 총구들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객실의 구조상 무구원이 있는 방향으로는 조준 사격이 어렵기에 누구 하나 쉬이 대처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제는 형제들까지 모두, 괴물로 만들… 셈인가 보지.”

“그 사람이 원하는 건 형님 한 명이 아니라 북해 무씨의 멸문입니다.”

무구원은 옷깃을 바짝 잡아당기며 총구를 더 가까이 들이밀었다. 그러자 몰이꾼들이 움찔하며 반응했다. 이 와중에도 무정원은 몇 번 고통 어린 신음을 뱉을 뿐 침착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너도 윤모난처럼 네 혈육을 모두 죽여 없애기라도 하겠다는 거냐?”

“어린아이들은 건드리지 않습니다. 이 기차를 탄 사람들만 죽으면 됩니다.”

몰이꾼들의 뒤로는 고통에 몸부림치는 다른 형제들이 보였다. 누구 한 명이라도 여기서 살아남는다면 반도는 다시 혼란에 빠지고 말 것이다. 무정원이 제안한 개헌안은 한 가문의 독재를 위한 초석이니까.

무정원이 여기서 죽는다 해도 다른 형제가 살아남는다면 그 자리를 이어받을 것이고, 그럼 큐브가 무고한 사람들을 괴물로 만드는 것을 아무도 막지 못한다. 북해 무씨들은 여기서 모두 죽어야 한다.

“형님, 죄 없는 사람들을 실험 삼아 트랜스로 만들어 사냥터에 넣었으니 이 모든 일이 가문의 업보가 아니겠습니까.”

“…너.”

“우리 형제 모두가 그 일에 개입한 거 알고 있습니다.”

무정원의 전투조가 훈련하는 사냥터는 큐브 실험의 피실험자들을 수용하는 곳이었다. 설계도가 없어 온전하지 않은 큐브의 성능을 테스트한 뒤 트랜스가 된 인간들을 버려두기 위한 장소였던 것이다. 무정원은 그러고도 윤모난을 이용하여 설계도까지 손아귀에 쥐려 했다.

“그 모든 걸 가문을 위한 것이라 하셨으니, 설령 몰랐다 해도 모든 북해인들이 동조자라 해도 과언이 아니겠죠.”

무구원은 주현희에게 작약과 설계도에 관한 이야기를 듣기 전까지는 무정원의 그런 행동을 납득할 수 없었다. 그가 권력에 눈이 멀어 그런 식의 극악스러운 범죄를 저지르는 줄 알았다. 그러나 무구원은 과거의 사실과 마주하면서 이토록 오만한 남자가 이 모든 일을 벌인 이유가 단순히 자존심이 상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닫고 말았다.

윤모난은 무정원에게 꺾이고 만 신념이자, 적의 술수인 줄 알면서도 넘어간 충동의 상징이었다. 그래서 그는 스스로 길가에 핀 꽃을 꺾듯이 모란을 맘대로 짓밟을 권리를 얻었다고 주장했다. 무구원은 저의 목숨을 다 바쳐도 아깝지 않은 사람이 그런 식으로 짓밟히는 모욕을 참을 수 없었다.

“우리는 모두 여기서 죽게 될 겁니다.”

무구원은 형의 미간에 총구를 짓누르며 읊조렸다. 방아쇠만 당기면 계획의 절반 이상은 성공하는 셈이었다. 그런데 그 순간 무정원이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무구원. 내가 그 오랜 세월, 큐브를 가지고 실험하면서 그걸 통제하는 법도 고안하지 못했을 거라 생각한 건 아니겠지.”

순식간에 공기가 차게 얼어붙기 시작했다. 실내등이 불안하게 요동치고 복도에서 들려오던 신음은 점차 잦아들고 있었다. 그 순간 검은 장갑을 낀 무정원의 손이 무구원의 손목을 턱 잡았다.

“탄창을 확인해봐.”

달칵하는 소리와 함께 방아쇠가 당겨졌으나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그 순간 장갑을 뚫고 퍼져 나온 냉기가 무구원의 손목을 얼려 터뜨릴 기세로 매섭게 관통했다. 무구원은 고통을 참으며 무정원을 제 쪽으로 더 바짝 끌어당겼다.

하지만 무정원은 벗어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고 여유롭게 기차 전체를 차게 얼리고 있었다. 이런다고 한들 파동이 안정화될 일은 없을 테지만 극도로 낮은 온도가 감각을 둔하게 만들어 폭주 과정을 지연시키고 있었다.

“여길 나가면 네 아들부터 트랜스로 만들어 사냥개들에게 던져주지.”

빈총을 그대로 얼굴에 내려찍으려는 완력에 손목이 끊어지는 듯한 통증이 일었다. 무구원은 고통으로 인해 이젠 감각이 반쯤밖에 남지 않은 손을 볼품없이 떨면서도 고집스럽게 형을 놓지 않았다.

상황이 무정원에게 유리하게 흘러가고 있을지라도, 그를 반드시 죽이겠다는 생각이 무구원의 머리를 차게 식혔다. 손목을 포기하고 무정원의 목을 조를 기세로 몸을 날리던 그때였다. 무언가 펑―! 소리와 함께 공간이 갑자기 크게 뒤흔들렸다.

이어서 돌진하는 벽이 두 형제를 덮쳐오며 굉음을 냈다. 빠른 속도로 달리고 있던 기차는 순간 중력을 잃고 나뒹굴며 안개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기차가 철로를 이탈한 것이다.

몇 시간 전.

자리에서 일어난 윤모난은 부스스한 얼굴로 한참을 침대 위에 앉아 있었다. 몸은 언제 씻겼는지 깨끗하게 말라 있었고 허리에는 새 붕대까지 감겨 있었다.

“부지런도 하지, 무구원.”

그는 손을 몇 번 죔죔 쥐었다가 펴면서 약 기운이 아직 남아 있는지 확인했지만, 딱히 그런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훌쩍 침대에서 내려온 윤모난의 시야에 사각형의 반듯한 무언가가 들어왔다.

무구원이 준비해둔 옷이었다. 어떻게 저처럼 칼같이 모서리를 잡아 갰을까, 생각하며 윤모난은 가지런히 놓여 있는 옷을 집어 들었다. 여기 올 때는 창놈들이나 입을 법한 천 조각을 걸치고 왔는데, 무구원 이 부지런한 놈이 미리 챙겨둔 모양이었다.

옷을 꿰입으려 펄럭 펼치는데, 바닥으로 툭, 하고 작은 흰 뭉텅이가 떨어졌다. 흰 양말이다.

“…….”

윤모난은 그걸 들고 잠시 멍하니 서 있었다. 섬유를 손끝으로 문지를 때마다 향긋하고 깨끗한 세제 냄새가 풍겼다. 평소 무구원에게서 나는 향기였다. 윤모난은 스스로 멍청하다고 생각할 때까지 가만히 냄새만 킁킁대고 있다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청바지와 흰 반소매 티셔츠, 그 위에 넉넉한 트러커 재킷을 걸치자 얼추 나갈 준비는 되었다.

“안범, 경해국!”

“네에.”

1층으로 내려가자 두 사람도 준비를 마치고 모여 있었다. 오전부터 서강 주씨 저택은 소수의 경호원들 빼고는 텅 비어 있는 상황이었다. 그나마도 경호원들은 안범과 경해국이 처리하여 바닥에 납작 누워 꿈나라 여행 중이었다.

“가자.”

“네!”

현관을 나오자마자 윤모난은 담배부터 물었다. 그의 옆으로 안범이 쪼로로 따라붙으며 안부부터 확인했다.

“상처는 괜찮으세요? 형?”

“괜찮아. 걱정 마.”

커다란 손이 도토리묵 같은 머리칼을 쓱쓱 쓸어 넘기자, 안범이 헤헤 웃어 보였다. 옆에 있던 경해국이 자신의 담배에도 불을 붙이며 불만스러운 얼굴로 거리를 내다봤다.

“무씨 그놈 쫓아서 중앙역으로 가는 건 위험할 텐데요. 어쩌실 생각입니까.”

“후― 글쎄다. 일단은 바쁘게 움직여야겠지.”

모호한 말을 던진 윤모난은 두 사람을 의외의 장소로 데려갔다. 오늘의 첫 번째 목적지였다. 안범은 수도 제5 구역에 위치한 커다란 하얀 저택을 보며 입을 떡 벌렸다.

“후와―! 여기가 남경 윤씨 별저예요?”

“어.”

흰 벽돌에 꽃문양이 새겨진 회색 기와. 세로로 긴 커다란 창문과 문을 따라 그려진 당초 무늬까지. 전형적인 남경식 건축 양식이 돋보이는 별저 안에는 최소한의 경비 인력조차 없었다. 본거지인 남경이 쑥대밭이 됐으니 당장 여길 관리할 정신도 없을 터였다.

안범과 경해국은 섬세하고 아름다운 건축물에 감탄하며 윤모난을 쫓아 안으로 들어갔다. 오랫동안 사람의 손이 닿지 않은 저택 내부는 어둡고 조용했다. 예전 같았으면 사용인들이 별저를 관리했을 테지만 실내에는 역시 아무도 없었다.

“형, 근데 여기는 왜 오셨어요?”

“수도에 온 김에 확인해볼 게 있어서.”

세 사람은 나란히 지하실로 내려갔다. 지하의 크기도 생각보다 커서 미로 같은 길들의 끝마다 커다란 금고가 있었다. 윤모난은 그중 하나로 두 사람을 데려갔다. 커다란 철문의 표면에는 작약이 새겨져 있었고, 중앙에는 복잡해 보이는 잠금장치가 달려 있었다.

“열쇠는 가져왔습니까?”

“응. 항상 가지고 다니지.”

경해국의 질문에 가뿐히 대답한 윤모난의 손에 나타난 것은 그의 펜던트였다. 도로록 태엽을 굴리자 분홍색 실뱀이 스르르 흘러나온다. 안범이 눈을 빛내며 물었다.

“와, 이거 원래 열쇠였군요.”

“응. 여긴 윤씨들 개인 금고인데 열쇠가 있어야만 들어올 수 있는 곳이야. 형들이 내가 20살 때 입대하자마자 목걸이로 제작해서 줬지. 형들 나머지 유품은 거의 다 여기에 보관되어 있을 거야.”

“…유품이요? 그럼 혹시 설계도도 여기 있는 거 아닐까요?”

“글쎄. 그건 모르지. 예전에는 한 번도 열어본 적 없거든. 오늘 확인해보자고.”

분홍색 실뱀이 금고의 오목진 부분을 따라 기어가자, 잠금장치들이 철컥대며 열리는 소리가 울렸다. 곧이어 육중한 철문이 먼지를 일으키며 활짝 열렸다.

금고 안은 작은 방과 같은 모습이었다. 양쪽 벽으로 저격용 라이플과 권총이 쭉 늘어져 있었다. 이능력을 이용해 산화 방지 처리를 하고 완벽하게 밀폐까지 해둔 탓에, 안에는 먼지조차 쌓이지 않아 모든 것이 꼭 어제 넣어놓은 것 같았다.

“전부 상태가 좋네요. 오, 저 총은 단종된 건데 여기 있었네. 이거 완전… 시팔, 보물 창곤데요?”

“진짜 다 새 물건 같습니다. 신기해요!”

“남경 윤씨 조상이 원래 장례업자들이었다더니. 보존 기술 하나 끝내주네. 가문에 현상 유지 능력자들이 많은 것도 그렇고. 야, 안범. 너도 남경이랑 가까운 남도에서 태어났으니 팀장님하고 먼 친척일 수도 있겠네.”

“와,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요.”

이미 깊숙이 들어가 물건을 뒤적거리고 있던 윤모난이 둘의 대화를 듣더니 무심한 말투로 반응했다.

“가족 얘기 금지.”

“…넵.”

“흠. 뭐 좀 있습니까?”

안쪽을 한참 뒤지던 윤모난이 돌아서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곳에 설계도는 없었다. 충분히 가능한 후보지였음에도 그 비슷한 것조차 발견할 수 없었다. 조용히 금고 안을 둘러보던 윤모난은 침음했다.

‘여기가 아니라면. 무구원이 형들이 가지고 있던 설계도를 어디서 어떻게 가져간 거지.’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무구원의 얼굴을 떠올리며 윤모난은 생각에 잠겼다가 이내 시간을 확인하고 정신을 차렸다. 시간에 맞춰 도착하려면 서둘러야 했다. 어쨌건 금고 안에 남은 건 살상 무기와 지폐들뿐이었다. 윤모난이 더플백을 가져와 벽에서 총을 내려 모두 쑤셔 넣곤 구석에 놓인 돈뭉치 몇 개도 챙겼다.

딱히 성과도 없이 금고에서 나오는데 경해국이 가방을 힐끗 내려다보더니 물었다.

“그런데 어차피 이렇게 따라갈 거면서 왜 무씨 그놈 그냥 가게 놔두신 겁니까?”

“어차피 그놈은 말 안 들어서 방해만 돼. 설득하기도 입 아프고 계속 날 속일 생각만 하니 각자 계획대로 움직이고 나중에 후드려 까든가 해야지.”

“…무슨, 정말 둘이 그렇고 그런 사이 맞습니까?”

“무구원 그건 실한 아랫도리 빼고는 보잘것없는 놈이야.”

“제발 좆같은 아랫도리 얘기는 그만두십쇼.”

“그놈은 부하로서도 더할 나위 없이 최악이다. 그런 반골은 군인 따위 되지 말았어야 했는데, 시대가 이 모양 이 꼴이라 직업을 잘못 골라잡은 거지. 그놈은 천생 살림이나 하고 애 보면서 집에 박혀 책 읽는 게 어울려.”

“…뭐, 뭐요?”

무구원에 대한 촌철살인의 평가에 경해국은 입을 떡 벌릴 뿐이었다. 그사이에 골초인 윤모난은 또 담배가 고팠는지 습관처럼 주머니를 뒤적대며 담배를 찾았다.

“그렇게 마음이 여리고 무른 놈은 이런 일에 휘말리지 말았어야 했는데.”

윤모난이 혼잣말처럼 뱉은 말에 경해국이 참지 못하고 왁왁 짖기 시작했다.

“…무씨 그놈이 어디가 여리고 무릅니까? 전부터 사람 패고 다녀서 도축 살인마 광신도 소리 듣던 인간인데!”

“어, 그래. 늦겠다. 이만 가자.”

“제 가족들 싹 다 죽이러 간 놈이 씨팔, 무어가 여리냐고요! 말해보십쇼. 무씨랑 당신 둘 다 총체적으로 맛이 간 거 아닙니까?”

하긴 정상이면 같은 고추 달린 새끼한테 좆이 설 리가 없다며 투덜거리는 경해국의 뒤통수에 결국 손바닥이 날아들었다. 커다란 혹을 매단 경해국과 안범을 데리고 윤모난은 원동기 이동 수단을 파는 판매점으로 향했다.

그러고는 두꺼운 지폐 다발을 턱턱 내놓으며 호쾌하게 산악용 모터사이클을 샀다. 무슨 목적으로 이런 걸 사나 싶었는데, 이윽고 윤모난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가파른 산을 보고 경해국은 기함하고 말았다.

“대성전 때 민간인 대피를 위해서 수도 주변 산에 비상 통로를 만들어놨는데, 지도를 확인해보니 능선을 타고 가면 충분히 기차에 접근할 수 있겠더라고.”

“아니 대성전 때면 몇백 년 전 길이잖아요. 애초에 그냥 철로를 따라서 가면 되잖습니까? 왜 굳이 위험하게 저 산을….”

“그러면 너무 늦어. 어차피 저격 위치도 잡아야 하니 산길이 딱이야. 그리고 도시 사이에는 민가도 거의 없으니까 철로를 따라가다 보면 발각되기도 쉽다. 기차를 쫓아가다가 경호원들이 창문 열고 총 쏘면 저항도 못하고 꼴까닥이지.”

윤모난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모든 전투는 크든 작든 지형에 맞게 전술을 짜야 하는 법이다. 기차는 그 자체로 완벽한 요새이고 계속 이동하기 때문에 도주에도 이로운 일종의 쟁지(爭地)라 할 수 있었다. 이러한 요충지를 뚫기 위해서는 시야 확보가 쉽고 고도가 높아 저격에 유리한 산이 제격이다.

게다가 산악 지형은 넘기에는 험준하지만, 수도를 에둘러 싸며 이동하는 기차와 달리 직선 이동이 가능해 단시간에 목적지로 가기에 적당했다.

가만히 설명을 듣고 있던 안범이 슬며시 손을 들었다.

“형, 저는 바이크 타본 적 없는데요.”

“그럼 범이 넌 내 뒤에 타고, 경해국은 네 거 타고 쫓아와라. 됐지?”

윤모난은 길쭉한 다리를 휘둘러 높은 안장 위에 올라타고 바로 시동을 걸었다. 그러고서는 헬멧을 들고 쭈뼛거리는 안범에게 엿 같은 멘트를 날리는 여유까지 보였다.

“야, 타.”

“멘트 진짜 구립니다.”

질색하는 경해국과는 달리, 안범은 괜히 얼굴까지 붉히며 후다닥 윤모난의 뒤에 올라타더니 허리를 꼭 끌어안았다. 부르릉 내연기관에 불이 붙는 소리가 울리자 경해국도 하는 수 없이 한숨을 푹 내쉬며 자기 오토바이로 향했다.

윤모난도 한때 군인이고 팀장이었는데 설마 우릴 자살 미션에 꼬라박을까 싶었다.

…라고 생각했던 경해국은 몇 시간 뒤 자신의 돌대가리를 콱 쥐어박고 싶어졌지만 안범이 하도 비명을 질러대는 탓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으아아아아아악!”

“참아, 참아. 다 왔어!”

얼굴을 거세게 할퀴는 나뭇잎을 맞으며 거의 절벽이나 다름없는 길을 자유 낙하 하듯 내려가는데 참으라니! 여기 길 있다며! 길 있었다며! 경해국도 참지 못하고 앞서가는 괴물 마귀를 향해 욕이 섞인 고함을 질렀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산은 길은 개뿔이고 극히 험준해서 이따위 산악용 바이크로 넘을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이렇게 무데뽀로 산을 타다가 사고가 나 목이 꺾여 뒈지면 산짐승 밥이 되어 시체도 못 찾을 판이다.

경해국은 윤모난이 안전을 위해 총으로 갈겨버린 멧돼지와 정체를 알 수 없는 고양잇과의 커다란 짐승을 생각하면서 콧물과 눈물을 동시에 삼켰다. 여긴 지옥이다.

“살려주세요! 엄마! 으악!”

안범의 죽은 엄마까지 소환되는 판에 윤모난은 거칠게 핸들을 돌렸다. 그 모습이 능숙한 기수와 다름없었다. 하지만 운전자의 능숙함과 상관없이 안범은 경사를 내려가던 오토바이 안장에 고간이 튕겨 하마터면 저 멀리 날아갈 뻔했다.

“쯧, 허벅지에 힘 줘라. 범아, 남자가 허벅지에 힘이 있어야지.”

“으아아악! 형! 제발! 제발! 무서워요! 살려주세요!”

“응, 응. 조금만 더 가자. 할 수 있어.”

“그웨웨엑!”

정신이 반쯤 나간 안범이 결국 공중에 토를 흩뿌리고 있는 사이 셋은 드디어 경사가 조금 완만해진 길에 접어들었다. 하지만 혹사당한 바퀴가 불길한 소리를 내며 터덜거리고 엔진도 안범처럼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그런데도 윤모난은 내일을 모르는 사람처럼 기어를 올려 속도를 냈다.

“어, 기차다.”

어두운 산을 깨우는 요란한 모터 소리 사이로 기차 소리가 조금씩 끼어들고 있었다. 절벽 근처에 바이크를 아슬아슬하게 세우자 작은 돌이 부우우욱 흙먼지를 일으키며 아래로 쏟아져 내렸다. 몇 시간 만에 가까스로 지옥의 산악 주행에서 벗어나게 된 안범은 내리자마자 바닥에 몇 번째인지도 모를 토를 했다.

경해국도 상태가 안 좋은 건 마찬가지였다. 윤모난이 죽인 산짐승의 사체가 터지며 피를 뒤집어쓰고, 얼굴은 여기저기 나뭇가지와 풀잎에 긁혀 엉망이었다. 딱 산에서 죽은 귀신들 몰골이었다.

그 와중에도 빌어먹게 멀쩡한 윤모난은 내리자마자 더플백을 당겨 총을 꺼냈다. 그러고서는 저격용 총에 달린 조준경에 야간 투시경과 확대경을 장착하더니 저 멀리 기차에 총구를 향했다.

“오, 보인다.”

“후욱… 후우… 웩. 무 선배님 보이세요?”

“응. 1등석 칸의 왼쪽에서 세 번째 객실. 가족끼리 오붓한 시간 보내고 있군.”

“하아… 이제 어떻게… 하실… 겁니까….”

경해국 역시 메슥거리는 속을 참으며 겨우 물었다. 그러자 흐음, 하고 목젖을 울리며 고민하던 윤모난이 엉망이 된 두 사람을 향해 돌아섰다. 이윽고 빈틈없는 지시가 두 사람에게 떨어졌다.

“너희 둘은 경장역과 수도 중앙역 사이 80km 구간으로 가. 그쪽은 사고가 나도 피해가 없을 거야.”

“…그런 다음에는요?”

“기차를 멈춰야지.”

밤공기가 촉촉하니 안개를 만들면 좋겠는데…. 낮게 읊조리던 윤모난이 안범에게 시선을 던졌다. 찰떡같이 명령을 알아들은 안범은 동그란 눈을 결연하게 빛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윤모난은 손을 뻗어 기차가 곧 지나갈 철로를 가리켰다.

“불은 쇠를 녹인다. 다들 알지? 먼저 경해국이 철로에 손을 본 다음 기차를 탈선시키면 내가 절벽 위에서 다 총으로 쏴 갈길 거야. 어때, 쉽지? 그럼 이만 위치로.”

말을 마친 뒤에 윤모난은 다시 조준경에 눈을 바짝 대며 무구원이 있는 객실 창문을 바라보았다. 여기 자신이 있다는 걸 알지도 못할 텐데, 마침 검은 두 눈동자가 창밖을 향해 있었다. 두 사람은 먼 거리에서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잠시 뒤에 윤모난은 조준경을 거두었다. 그러고서는 이미 내려갈 준비를 하고 있는 안범과 경해국에게 한마디 툭 던졌다.

“다치지 마라.”

몰골은 꼬질꼬질한 주제에 둘은 용감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곧장 바이크에 올라타던 경해국이 뭔가 생각난 듯 갑자기 윤모난에게 물었다.

“그런데 이번 작전은 이름이 뭡니까? 항상 작전에 이름을 붙이시지 않습니까?”

“글쎄.”

마침 달이 구름에 가렸고 어둠이 윤모난의 얼굴을 순식간에 집어삼켰다. 이윽고 어둠 속에서 조금 메마른 목소리가 단조롭게 흘러나왔다.

“이번에는 작전명 없다. 무제야.”

그 의미를 곱씹어볼 여유는 없었다. 안범과 경해국이 탄 바이크는 연기를 흩뿌리며 비탈길을 내려갔다. 금방 도착한 목적지에서 두 사람은 빠르게 움직였다.

찬바람을 맞으며 산길을 내달린 탓에 삐죽 흘러나오는 코를 들이켜며 안범은 이능력을 쓰기 위해 손을 뻗었다. 현상 유지 능력으로 공기 중에 수증기를 가두자 곧 주변으로 뿌연 안개가 번지기 시작했다. 이어서 경해국 역시 쇠를 녹여 철로를 망가뜨리는 데 성공했다.

두 사람은 철로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바이크를 세우고 기다리기로 했다. 저 멀리서 증기기관차 특유의 반복적인 소음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기다리는 와중에도 안범이 계속 코를 훌찌럭거리자 경해국은 마지못해 주머니에서 하얀 손수건을 빼내 다가갔다.

“에잇. 씨팔! 신경 쓰여 죽겠네. 흥 해, 흥!”

경해국이 안범의 작은 뒤통수를 잡고 손수건으로 콧구멍을 막으며 우악스럽게 소리쳤다. 안범은 끙, 하고 앓다가 ‘흥’을 시도해보았다.

“흥.”

“흥! 크게 풀어, 이놈아. 콧물 삼키면 감기 걸려.”

“흥!”

쾅! 손수건에 막힌 콧물이 뱉어내지는 동시에 굉음이 솟구쳤다. 둘은 남은 코를 손수건으로 문질러 훔친 다음에서야 철로 쪽에 시선을 돌렸다.

무사히 철로를 탈선하여 땅으로 곤두박질친 기차가 보였다. 이미 상황은 끝나고 검은 연기와 함께 붉은 불꽃이 치솟아 오르고 있었다. 밤안개 때문에 기관사가 손상된 철로를 발견하지 못한 것이다.

큰 쇳덩이가 옆으로 쓰러지고 차량은 저마다 분리되어 흩어졌다. 사방으로 쇳조각과 부산물이 쾅쾅 쏟아지며 몇몇은 진흙에 처박혔다. 그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던 안범이 문득 뭔가가 생각난 듯 경해국에게 물었다.

“그런데 무 선배님은 괜찮으실까요?”

“뭐가.”

무심코 되물었던 경해국은 어쩐지 등줄기를 스치고 지나가는 위화감을 지울 수 없었다. 그는 불길한 예감에 마른침을 삼켰다.

“야, 안범. …윤 팀장이 무씨 이능력 못 쓰는 거 알고 있냐?”

“…에? 이미 말―하지 않았나… 니요. 말 안 했다요….”

“젠장! 무씨!”

경해국이 서둘러 앞으로 달려 나가려던 찰나, 절벽 위에서 매섭게 내리꽂히는 총탄이 야속하게도 앞을 막아섰다. 어두운 하늘을 뚫고 비처럼 쏟아지는 총알이 기차를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경해국은 경악한 얼굴로 절벽 쪽을 확인했으나 윤모난이 보이지 않았다. 보나 마나 신나게 총알을 갈겨대고 있을 터였다.

“안범! 안개! 더 진하게 씌워! 무씨 총 맞으면 그냥 사망이라고! 생각해보니 윤 팀장은 무씨 이능력 못 쓰는지 모른다!”

“네! 네!”

안범은 서둘러 빠르게 흩어지고 있는 안개를 능력으로 모아 다시 기차 주변을 가렸다. 이렇게 손발이 안 맞아서야! 무 선배님이 이능력 장애가 있다고 진작 말했어야 했는데! 이미 말한 걸로 착각하다니. 다른 에스퍼들이야 제 능력으로 이 정도 사고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 치더라도, 일반인이나 다름없는 무구원에게는 무리였다.

잠시 뒤 안개 때문에 조준이 쉽지 않은 탓인지 사정없이 내리던 총알 비가 조금 잦아들었다. 경해국은 얼른 바이크에 올라탔다. 그리고 바이크의 전조등을 깜빡거리며 기차 쪽으로 접근했다.

일단은 무구원을 구출해야 한다. 전조등으로 신호를 보냈으니 윤모난도 뭔가 일이 틀어진 걸 깨닫고 사격을 멈출 것이다. 그 생각 하나만을 하며 경해국은 망설임 없이 안개 속으로 들어갔다. 사고 현장에는 무서운 침묵만이 가라앉아 있었다.

“무구원!”

경해국은 속도를 낮추며 천천히 바이크를 예상 방향으로 몰았지만, 한쪽 눈이 안 보이는 탓에 방향을 잡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무구원의 이름을 외쳤다. 근거리에서는 출처 모를 신음 소리와 다 떨어진 철문에서 나는 기분 나쁜 소리만 되돌아왔다.

결국 경해국은 바이크를 버리고 손을 앞으로 뻗쳐 더듬거리며 나아가기로 했다. 곧이어 안개 속에서 손에 무언가 닿기 시작했다.

“으으윽―!”

기차에서 떨어진 북해 에스퍼들은 하나같이 피를 줄줄 쏟아내며 바닥에 흩어져 있었다. 발에 물렁하게 밟히는 몸통을 느끼고선 경해국이 걸음을 뒤로 물렸다.

“가…주님, 가주님 안전부터….”

모두가 신음을 흘리며 무정원을 찾고 있었다. 이곳에서 무구원을 찾는 사람은 경해국이 유일할 터였다. 이쯤이면 꽤 안쪽까지 들어왔다고 생각하던 그때. 갑자기 안개가 걷히더니 빠르게 허공으로 흩어졌다.

안범 쪽에서도 무언가 일이 생긴 모양이었다. 경해국의 억실억실한 얼굴을 타고 식은땀이 한 줄기 흘러내렸다. 여기까지 들어온 이상 돌아갈 수는 없고, 얼른 무구원을 찾아 무사 복귀하는 게 답이다.

경해국은 일단 전진했다. 기차는 몸통 전체가 완전히 쓰러지지는 않았고, 앞머리와 중앙 칸까지 오른쪽으로 넘어져 거의 박살이 난 상태였다. 후미는 겨우 철로 위에 걸쳐 옆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젠장, 무씨. 이 겁도 없는 꼴통 새끼. 능력도 못 쓰는 주제에 여기까지는 혼자 왜 처온 거야.”

실상 그의 계획을 방해한 건 자신들이라는 자각도 없이 경해국은 마음에도 없는 욕을 지껄였다.

무구원이 이능력을 못 쓰게 된 지 얼마나 되었을까. 경해국이 그 사실을 알게 된 건 6년 전쯤이었다. 우연히 무구원의 이능력이 발동되지 않는 걸 보고 기함한 그는 당장 병원에 가야 한다고 난리를 쳤지만, 무구원은 걱정할 일이 아니라며 일축했다.

포스트에게 이능력이 어떤 의미인데. 그건 거의 자아나 다름없다. 조상으로부터 선천적으로 물려받은 유산이자, 평생 혹독한 수련을 통해 연마한 것이다. 평범한 포스트 에스퍼인 경해국은 능력을 잃느니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그런데 무구원은 병원도 가지 않고 능력을 잃은 사유도 꽁꽁 숨긴 채로 살고 있었다. 그 이후로 경해국은 술만 마시면 그의 아내에게 ‘무구원, 어이구, 이 불쌍한 놈!’ 하며 한탄하는 것이 버릇이 됐다.

“어이! 이 개떼 놈들아, 내 처남 어디 갔어?”

무작정 찾는 일이 쉽지 않자 경해국은 거의 반죽음 상태가 된 북해 에스퍼 한 명을 주워 짤짤짤 흔들어가며 윽박질렀다.

“얼른 말해! 확 다 태워버린다!”

“…당신이, 왜…. 아가씨 남편… 아닙니까?”

“맞아! 씨팔. 그래서 내 처남 구하러 왔잖아!!”

“으윽―!”

“열받게 하지 마! 당장 불어! 당장!”

두꺼운 손으로 뺨을 짝짝 갈겨대는 폭행을 참지 못하고, 에스퍼가 덜덜 떨며 손가락으로 방향을 가리켰다. 경해국은 넝마주이가 된 에스퍼를 다시 던져놓고 그가 가리킨 방향으로 향했다.

불행하게도 다른 에스퍼가 가리킨 칸은 탈선한 부분 중 하나였다. 옆으로 기울어진 객차는 분리되어 날카로운 암초처럼 커다란 조각들이 튀어나와 있었다. 처음에는 연기와 먼지가 뒤섞여 시야를 가린 탓에 그 조각 끝에 사람이 매달려 있다는 것조차 알지 못했다.

눈이 좋지 않은 경해국은 그곳까지 더듬어가고 나서야 조각에 꿰여 있는 사람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상한 느낌에 가까이 다가가보니 피 묻은 손에서 툭, 하고 뭔가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은제 펜던트였다.

“무구원?”

대답 대신 피리 소리 같은 가는 숨이 터졌다. 평소 동굴같이 낮은 목소리를 가진 무구원에게서 날 수 없는 그런 소리였다. 경해국은 장애물들을 헤치며 단숨에 기차 몸통 위로 올라갔다. 무구원의 단단한 몸이 손에 닿자마자 그의 두꺼운 눈썹 사이가 움츠러들었다.

“…야. 이 새끼야! 무구원!”

거대하고 날카로운 무언가에 몸 한가운데를 완전히 관통당한 무구원의 몸은 마치 효시를 당한 것처럼 공중에 매달려 있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심상치 않은 부상으로, 즉사하지 않은 것이 신기한 수준이었다.

무구원은 자신에게 다가온 경해국을 발견하고 감았던 눈을 천천히 떴다. 그의 얼굴은 원래의 단정한 모습은 기대하기 힘들 만큼 피에 흠뻑 젖어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서야 경해국은 그의 몸을 두 동강 낼 기세로 꿰뚫은 커다란 것이 날카로운 얼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경해국은 지체할 것 없이 손에서 열을 흘려보내 얼음의 밑동을 녹였다. 섣불리 몸을 관통한 것까지 녹이면 과다출혈로 죽을 수도 있기에, 그는 신중하게 얼음을 녹인 다음 무구원을 잡아당겼다. 하지만 그의 상태는 신중히 구조한다고 해도 딱히 달라질 것이 없어 보였다.

아마도 내장은 얼음송곳에 뚫려 죄다 찢겼을 테고, 그 상처에서 흘러내린 피는 하체를 흠뻑 적실 정도였다. 경해국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무구원, 조금만 참아…. 씹. 정신 차려. 안범이 있으니까 현상 유지로 출혈만 막으면 돼. 야! 정신 차려!”

경해국의 손이 뺨을 거칠게 갈겨댔지만, 무구원의 검은 눈동자는 점점 흐릿해져갔다. 살려는 의지를 버린 듯했다. 그건 경해국이 아는 무구원답지 않았기에. 항상 찌푸려져 있는 경해국의 얄궂은 얼굴이 멍하게 변했다.

“경….”

그 와중에 무구원은 입안에 고인 핏물을 흘려대며 무어라 말을 하려 시도하고 있었다. 하지만 혀가 잘 움직이지 않는지 한 글자를 뱉고 나서 고통스러운 듯 눈을 꾹 감았다가 떴다. 경해국은 그런 무구원을 흔들어대며 정신을 잃지 않게 하려고 애를 썼지만, 그의 시선은 계속 다른 곳을 향해 있었다.

“…경 서방.”

그 순간. 어깨에 올라온 차가운 손에 경해국의 몸이 굳었다. 정신을 잃어가며 가물거리던 무구원의 눈도 그들 뒤에 선 존재를 확인하고 약간이지만 뚜렷해졌다.

등 뒤에 달빛을 등지고 선 검은 인영이 서 있었다. 전신에서 냉기를 뿜으며 등장한 무정원은 이마에 핏줄기 하나를 매단 채 흐트러진 모습이었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한 경해국의 미간에 주름이 가득 잡혔다.

창백한 피부. 피부를 뚫고 나오는 점액질. 이미 변형되기 시작한 팔과 다리. 모든 것이 트랜스화의 징조였다. 다만 포스트에게 있어 의식은 가장 마지막 저항선이었던지라. 무정원의 잿빛의 두 눈은 여전히 이지를 담고 경해국과 무구원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

경해국이 뭐라 입을 열기 전에 무정원의 손이 그의 어깨를 부서져라 쥐었다. 그다음은 순식간이었다. 그의 손을 타고 흘러나온 냉기가 단단한 한 사람의 몸을 박살 낸 것은.

“그러게…. 아내의 가문을 배신하면 쓰나.”

다음 순간, 무구원의 몸 위로 후드득 잔해들이 쏟아져 내렸다. 비명 한 번 내지를 틈도 없이 여동생의 남편을 조각낸 무정원은 괴물이 되어가는 와중에도 질릴 만큼 고요한 시선을 내리깔았다. 빈사 상태인 무구원의 눈동자가 거세게 맥동하고 있었다. 무정원은 그르렁거리듯 그에게 물었다.

“무구원, 결국 그나마 널 좋아해주던 동생까지 과부로 만들었군.”

“…….”

종잇장 같은 피부 위로 점액질이 흘러내렸다. 자비 없는 손끝이 생명이 꺼져가는 남자에게로 느리게 향했다. 무구원은 자꾸만 풀리려는 눈꺼풀을 겨우 들어 반쯤 괴물이 된 큰형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탕―! 하고 저 멀리서 격발음이 포효했다. 그 신호에 반응하며 무정원은 느긋하게 뻗었던 손만큼이나 천천히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마치 반가운 이를 맞이하듯 읊조렸다.

“모난이가 왔구나.”

폭주하여 괴물이 되어가고 있는 에스퍼가 으레 그렇듯이 본능적으로 가이드를 찾는 듯했다. 그는 미련 없이 뒤를 돌아 잔해를 지르밟으며 내려갔다. 어차피 몸을 관통한 얼음이 녹으면 무구원은 죽을 터였다. 무정원은 동생을 그대로 버려두고 떠났다.

어둠 속에 혼자 남겨진 무구원의 손끝이 느리게 곱아들었다. 제 것인지 아니면 경해국의 것인지 모를 미끄러운 피가 느껴졌다. 계획은 거의 성공했다. 윤모난이 왔다면 무정원을 죽이고 이 모든 일을 끝낼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무씨, 넌 인사도 안 하고 가냐?”

특유의 컬컬한 목소리가 기억 속에서 튀어나와 아둔해진 머리 한구석을 울렸다.

경해국. 무구원은 주먹을 콱 틀어쥐었다. 손마디가 하얗게 변한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하지만 그것 역시 마지막으로 겨우 짜낸 힘이었는지 서서히 악력이 풀어진다.

몸이 서서히 늘어지고 내쉬는 숨은 점점 가늘어져 선으로 그릴 수도 있을 정도였다. 그 선은 무구원의 꺼져가는 생명을 따라 끊어지기 시작했다. 육신이 이미 활동을 정지해가고 있었지만 의식이 그보다 좀 더 오래 이어졌다.

고통은 언제 찾아왔었냐는 듯이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그 과정을 보내며 무구원은 차라리 죽음이 편안하다던 윤모난의 말에 공감을 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죽음은 고통을 어루만지고, 흐리게 하고, 사라지게 한다.

하지만 그것을 긍정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를 깨닫는 순간 핏줄이 몸속에서 불끈 튀어나와 잡아 뜯기는 것 같은 괴로움이 솟구쳤다. 무구원은 생경한 통각에 비명을 질렀다. 아직 꺼지지 않은 의식이 멋대로 그의 육신을 찌르고 난도질하고 파먹었다.

그리고 무구원은 이제껏 고집스레 틀어쥐고 있던 무언가를 손안에서 조금씩 흘려보냈다. 약한 물줄기처럼 흐르다가 금세 거센 파도가 되어 그를 덮친 것은 다름 아닌 시간이었다.

돌아오자마자 무구원은 객실 위에 달린 시계부터 확인했다.

“네 능력은 여전히 고장 난 상태인 건가.”

무구원은 손안에서 흘려보낸 시간을 콱 움켜쥐며, 자신의 앞에 앉아 있는 무정원과 눈을 마주쳤다.

“네가 복용한 그 약에 대해서 보고를 받았는데 제법 흥미롭더군. 중독이 되면 그것 없이는 이능력을 쓰지 못한다지.”

아직 철로 위를 달리고 있는 기차 안. 무구원은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진한 안개가 서서히 기차를 감싸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앞으로 다가올 시간을 멍하니 생각하던 무구원이 입을 열었다.

“신경계에 손상을 줘 장기적으로는 전혀 에너지를 운용하지 못하게 만드는 약입니다. 그 약을 먹으면 일시적으로는 능력을 쓸 수 있긴 하지만 아주 잠깐일 뿐이죠.”

“…그래서 오늘은 그 약을 복용하진 않은 모양이군.”

“네. 그렇습니다.”

시간을 돌리기 전과 토씨 하나 틀리지 않은 대답이었다. 하지만 무구원은 그간 자신이 쓰레드를 복용해온 진짜 목적을 되새겼다. 그 약은 순전히 이능력의 제어를 위해 먹은 것이었다. 그러니 사실 무구원이 쓰레드를 먹는 이유는 알려진 부작용과는 정반대라고 할 수 있었다.

무구원은 7년 전 그날 이후, 이능력을 쓰고 나면 간헐적으로 제어가 되지 않는 순간이 생기곤 했다. 아마도 어린 시절 바다에 빠져 죽을 뻔했던 일과, 7년 전 충격이 트리거가 된 듯했다.

오늘은 약을 먹지 않았으니 그 순간이 곧 올지도 몰랐다. 불쑥 솟구칠 듯 손안에서 꿈틀거리는 시간을 느끼며 무구원이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형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뭐지?”

“…정확히 기차가 34분 뒤에 탈선할 겁니다. 선로에 손을 썼을 테니 확인해보십시오.”

“무슨 소리지. 네 능력은….”

“믿지 않으셔도 상관은 없습니다만, 저는 3분에서 시간을 더 돌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어쨌든 오늘 약을 먹지 않은 건 사실입니다.”

이능력을 쓰자마자 무뎌졌던 시간 감각이 바로 돌아오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무구원은 알고 있었다. 이 감각은 실상 되돌아온 게 아니라, 그저 자신의 깊숙한 곳에 묻혀 그동안 의도적으로 무시되어 왔다는 것을.

쓰레드는 무구원에게 있어 보조적인 수단이었지 완벽한 치료제는 아니었다. 제한 없이 날뛰는 이능력이 예기치 못하게 발동되는 것만 겨우 억눌렀을 뿐, 무구원이 마음만 먹는다면 그 벽을 무너트리는 것은 너무도 쉬웠다.

‘…능력을 쓰면 쓸수록 위험해진다.’

그 단순한 법칙을 무구원은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지만, 다짐하듯 한 번 더 되새겼다. 그사이 무정원은 객실 문을 열고 밖에 서 있는 몰이꾼들에게 명령했다.

“기차의 속도를 늦추고, 에스퍼 몇 명을 내려 다음 역까지 선로를 점검하게 해라.”

“네.”

“철로 주변 지형을 파악할 수 있는 지도가 있나?”

“기관사에게 말해 가져오게 하겠습니다.”

“가까운 산에서 저격할 만한 장소가 있는지도 확인해.”

“네.”

명령은 빠르게 하달됐다. 무정원은 손짓으로 몰이꾼들에게 경계 태세 명령을 내렸다. 몇몇 에스퍼들과 함께 다시 안으로 돌아온 그의 눈은 흥미로 번뜩이고 있었다.

“네가 약을 먹지 않은 게 진짜라면, 능력이 예전처럼 돌아온 모양이지?”

“…….”

“그게 거짓말인지 아닌지는 곧 확인해보면 알겠지. 무구원은 데려가서 가두고 지켜봐라. 곧 이리가 올 테니 써먹을 데가 있나 봐야지.”

무구원은 장정 여럿에게 포박당한 채 객실 바깥으로 끌려 나갔다. 무정원은 펜던트를 손안에서 굴리며 탐색했다.

“이게 정말 설계도와 관련 있다면, 암호는 모난이에게 직접 물어보면 되겠군.”

“…….”

시간을 돌리면서 펜던트를 사용하는 경우의 수는 배제한 무구원은 차선책을 생각하던 차였다. 문을 나와 복도 끝으로 가는데 무정원의 엄한 목소리가 따라붙었다.

“축일 주간에 시간 능력을 썼으니 율법을 어긴 죄는 충분히 일러줘야겠지. 처벌해라.”

“네.”

그다음 순서는 기차 가장 후미에 있는 짐칸으로 끌려가는 것이었다. 철문을 열고 그 안으로 무구원을 밀어 넣은 몰이꾼이 윗주머니에서 금속 너클을 꺼내 손 관절에 끼워 넣었다.

“바로 서십시오.”

북해의 천경교 원리주의자들은 율법을 제 목숨처럼 여긴다. 집단에서 율법을 어긴 자가 있으면 이단 심문관의 자격을 대리한 자가 심판과 훈육을 맡는다. 무구원은 조용히 차가운 벽에 등을 기대고 섰다.

“6월은 어머니 신께서 텃밭에서 생명을 틔워 영웅들을 부활시키는 기간입니다. 특히 축일 주간 동안에 어머니 신께서는 대지와 자연의 원리를 흩트리는 어떠한 행위도 금하셨으며, 정신과 신체를 정결히 하라 명하셨습니다.”

괴괴한 어둠 속에서 무기가 번쩍 빛을 냈다. 이어서 둔탁한 소리와 함께 무구원은 벽으로 몰아붙여졌다. 쿵― 하고 내달리는 소리가 그 이후로 몇 번 더 이어졌다. 금색 너클에서는 어느새 피가 뚝 뚝 떨어지고 있었다.

오랜만에 이능력을 써서 그런 건지, 아니면 얼굴을 집중적으로 맞아서인지 콧등부터 찌릿한 두통이 시작되었다. 무구원은 손으로 얼굴을 쓸어 피를 훔쳤다. 문득 자신을 때리는 에스퍼의 손목에 찬 시계가 눈에 들어왔다.

지금까지 17분이 흘렀다. 그럼 앞으로 1분 남았다.

또 한 번 강제로 일으켜진 무구원의 얼굴로 주먹이 날아왔다. 사정없이 구타당하면서도 무구원은 마음속으로 기민하게 초를 셌다. 이윽고 머릿속 시계가 마지막 1초에 다다랐을 때, 예상대로 무정원에게 말한 34분보다 일찍인 18분에 정확히 쾅―! 하고 기차가 흔들렸다.

순간적인 압력과 함께 짐칸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한쪽으로 쏠렸다. 그러나 짐칸은 기차의 가장 후미에 있는 부분이고, 이전 시간대에서 본 대로라면 여긴 약간 기울기만 할 뿐 큰 타격이 없는 칸이었다.

“가주님―!”

사고는 순식간이었다. 어둠 속에서 누군가 무정원을 찾는 소리를 들으며, 무구원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몸이 반사적으로 튀어 나갔다. 순식간에 자신을 심문한 에스퍼의 허리에서 총을 빼앗아 든 무구원이 반사적으로 방아쇠를 당겼다.

이전 시간대에서 무정원은 사고의 순간, 얼음으로 장벽을 만들어 충격을 완화시키고 자신을 공격하기까지 했다. 이렇게 시간을 벌지 않았다면 똑같은 일이 벌어졌을 터였다. 그러곤 자신을 구하러 온 경해국도 무참히 죽였다.

무구원은 코 안쪽에서 흘러나오는 검은 피를 소매로 닦으며 휘적휘적 짐칸 밖으로 향했다. 예상대로 밖은 아수라장이었다.

“무구원!”

짙은 안개를 뚫고 바이크의 엔진 소리에 뒤섞여 어디선가 익숙한 탁성이 들렸다. 다음 칸으로 향하자 처참한 풍경이 펼쳐졌다. 좌석이 있는 객차는 기물이 많아 사고가 났을 때 피해가 더 극심했을 것이다.

개중에는 능력을 사용해 이미 빠져나간 에스퍼도 있었지만, 충격의 순간 몸을 피하거나 대비하지 못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심한 부상을 입고 널브러져 있었다. 무구원은 검은 제복을 입은 몸통들에 일제히 총알을 박아 넣고, 총알이 떨어지면 다른 총을 주워 그의 친족을 마저 사살했다.

죽음이 가까워지면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는 것이 사람이기에, 적은 최대한 줄이는 것이 유리한 법이었다. 무구원은 옆으로 완전히 넘어간 다음 객차로 넘어가서도 똑같은 행위를 기계적으로 반복했다.

“무구원!”

탕―! 마지막 총알을 쏘면서 바닥에서 탄창이 가득 찬 소총 하나를 새로 주운 참이었다. 치이이익 바람 빠지는 소리와 함께 훅 매캐한 냄새가 끼쳤다.

시간을 돌리기 전에 무정원은 보란 듯이 무구원을 기차 몸통 바깥에 걸어두고 전시했다. 자신이라는 미끼를 두고 윤모난이 오기를 기다리기 위해서였을 테다. 하지만 이번에 자신은 멀쩡히 여기 살아 있으니, 이제부터는 이전 시간대에서 본 것에 기대어 무정원의 위치나 행동을 파악할 수 없었다.

이제부터 다르게 닥쳐올 미래를 생각하며 무구원은 손에 묵직하게 감겨오는 총을 꽉 틀어쥐었다. 바깥으로 나오자 여전히 경해국이 자신을 찾는 소리가 이어지고 있었다. 명색이 군인이라는 인간이 전투 시에는 표적이 되지 않도록 소리를 최대한 죽여야 한다는 기본 원칙도 잊다니.

경해국은 자신이 그저 이능력을 못 쓰는 것으로 알고 있으니 이해 못할 건 아니지만, 그의 무모함을 탓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무구원은 천천히 1등석 객차가 있는 곳으로 접근했다.

“젠장, 무씨. 이 겁도 없는 꼴통 새끼. 능력도 못 쓰는 주제에 여기까지는 혼자 왜 처온 거야.”

투덜거리는 음성은 꽤 가까운 곳에서 들렸다. 곧이어 경해국이 널브러진 에스퍼 하나를 협박해 자신의 위치를 알아내는 대화도 들을 수 있었다. 날선 분위기를 따라 무구원의 신경도 덩달아 날카로워졌다. 형님이 어디서 갑자기 나타날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엄밀히 말하면 시간계 능력은 공격형이라 할 수 없다. 물질을 조작할 줄 아는 이능력자와 다른 장점이 있긴 하지만 파괴력과 살상력 면에서는 단점이 명확하다. 상대의 수를 예측하고 움직인다고 한들 완력에서 밀리면 궁지에 몰리기 십상이었다.

더욱이 무구원은 자신에게 이능력을 사용하는 일이란 곧 자살 행위나 다름없다는 것을 이미 지난 7년간의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다. 한계선이 사라져버린 이능력은 제멋대로 날뛰기 일쑤였고, 미끄러지는 시간 위에서 길을 잃을 수도 있었다.

“무구원.”

그때 컬컬한 목소리가 전처럼 그를 불러 세웠다. 경해국과 예상치 못한 순간에 마주치게 된 것이다.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다른 미래가 시작되는 시점이었다. 무구원이 오른쪽을 턱짓으로 가리키자, 경해국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응답해왔다.

그의 말을 따라 기차 오른쪽으로 나온 경해국은 울혈과 피투성이가 된 무구원의 몰골을 보고 얼굴을 찌푸렸다.

“얼씨구, 고려청자 또 금 갔네. 사고 나서 다친 거냐? 아님 형님한테 맞았냐.”

“사고 나서.”

“윤 팀장한테 너 능력 못 쓴다고 말한다는 걸, 시팔, 까먹고 있었다. 계속 말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다가 깜빡 잊어버린 거지…. 그러다가 기차 탈선하고 나면 위에서 그 인간이 총알 쏘아댈 텐데 그게 딱 생각나는 거여.”

“…하마터면 죽을 뻔했군.”

무구원의 말에 담긴 이중적인 의미를 알아들을 턱이 없는 경해국이 제 험한 인상을 구기며 퍽 등을 갈기더니 지청구를 놓았다.

“그래서 내가 너 살리러 온 거 아니냐.”

“그래. 고맙다.”

“당연히 그래야지.”

고개를 대충 끄덕이던 무구원은 순간 피부에 닿는 낯선 감각에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봤다. 그건 경해국도 마찬가지였다.

“6월에 무슨 눈이….”

거짓말처럼 이 따듯한 계절 눈이 날리고 있었다. 굵은 눈발이 어깨에 닿으며 사르르 녹자, 무구원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무정원이다. 이 주변을 모두 얼려 그에게 접근하는 사람이 능력을 쓰지 못하게 막으려는 것이다.

무정원은 빙결 능력자이고, 포스트의 혈액을 매질로 하는 이능력은 온도에 취약하다. 매서운 추위 한가운데에서는 풀 한 포기 자랄 수 없듯이 포스트도 낮은 온도에서는 능력을 꽃피우는 데 제한이 있다.

경해국도 이를 깨닫고 당황한 얼굴을 했다. 적뿐만 아니라 아군까지 이능력을 못 쓰는 환경을 만들다니, 그로서는 예상치 못한 대응이었다. 이렇게까지 한다는 건 무정원이 싸움을 피하지 않겠다는 확실한 뜻을 내비친 것과 다름없었다.

“일단 팀장님한테 합류하자.”

무구원은 적이 전열을 가다듬기 전에 팀이 한데 모여 계획을 정리하는 것이 현명하다는 판단을 내렸다.

“오른쪽으로 뛰엇!”

하지만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경해국이 방향을 가늠하더니 먼저 튀어 나갔다. 미처 잡기도 전에 뛰어간 성질 급한 까까머리 남자를 무구원이 잡아 세우려는 그때였다. 갑자기 옆에서 솟아난 얼음기둥이 경해국의 옆구리를 노렸다.

푹―! 미처 피하지 못하고 경해국은 그대로 몸통을 꿰뚫린 채로 나가떨어졌다. 무구원은 멍하니 그 광경을 보다가 이내 눈을 꾹 감았다.

‘경해국…. 이 멧돼지 같은 자식.’

무구원은 순간 욱하는 마음을 애써 잠재우며 시간을 돌렸다. 그를 살릴 수 있는 최적의 타이밍을 찾기 위해서는 정신을 바짝 차려야 했다.

“일단 팀장님한테 합류하자.”

“오른쪽으로 뛰엇!”

“잠깐 기다려.”

다시 한번 겁 없이 튀어나가려는 경해국의 뒷덜미를 이번에는 제때 잡아챘다. 버둥거리는 경해국에게 무구원이 한숨을 섞어 말했다.

“조심해. 언제 어디서 공격이 날아올지 모르니까. 형님의 위치가 파악 안 됐으니 여길 벗어나려면 신중해야 해.”

“어. 그래.”

시간을 돌리기 전 이미 두 번이나 죽은 줄도 모르고 경해국은 멍청한 얼굴로 뒤통수를 벅벅 긁었다. 그사이에 무구원은 상황을 파악했다. 시야 확보가 어려운 야간에는 목표물을 유인 후 공격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생각을 끝낸 무구원은 경해국에게 총을 넘겨주었다.

“내가 미끼가 될 테니 경해국 네가 총을 쏴서 엄호해라.”

상의를 마친 뒤에 움직였다. 무구원은 최대한 조심스럽게 잔해물을 밟으며 엄폐물 옆으로 이동했다. 피부에 닿는 눈발이 점점 더 거세지고 있었다. 비탈진 곳을 내려가는 곳에 하얗게 얼음 막이 쌓이기 시작한 것이다.

주변은 이상하리만치 고요했다. 6월과는 어울리지 않는 삭풍이 휘몰아치자 식은땀마저 얼어붙는 것 같았다. 경해국과 조금 떨어진 거리에 당도하자, 가까운 곳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반사적으로 걸음을 멈춘 무구원은 곧이어 자신을 뚫을 기세로 솟구치는 얼음을 겨우 피했다. 약속한 것처럼 경해국이 엄호 사격을 가하며 방향을 유도했다. 동시에 우두두둑 땅이 갈라지는 소리와 함께 무구원의 발이 콱 묶여 꿈쩍도 하지 않았다.

“경해국! 능력을 써!”

크게 소리치는 것과 동시에 귀가 떨어질 것처럼 온도가 차가워지더니, 뒤에서 쫓아오고 있던 경해국의 손에 붉은 화염이 휘감기는 모습이 보였다. 그 불꽃이 얼음에 발이 붙잡힌 무구원이 있는 곳으로 다가가려는 그때.

허공에서 일렁이던 불꽃이 매섭게 닥친 바람에 훅 꺼져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당혹감이 경해국의 얼굴을 스쳤다. 다시 손에 불끈 힘을 줘봤지만, 불은 겨우 손가락 끝을 달구기만 했다. 그리고 경해국은 이 냉기를 몰고 온 남자가 무구원에게 다가가는 모습을 목도했다.

“설마 모난이가 올 때까지 버틸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씨팔! 경해국은 당장 총을 받치고 방아쇠에 손가락을 걸었다. 무정원이 동생에게 손을 뻗는 걸 보며 망설임 없이 그의 머리를 겨누고 방아쇠를 당겼다.

탕―

그러나 총이 격발됐을 때 총구는 무정원이 아니라 이미 하늘로 쳐들린 상황이었다. 쩡 소리를 내며 경해국의 몸이 조각나 커다란 얼음처럼 사방으로 튀겼다. 이윽고 총이 바닥으로 툭, 하고 떨어진다. 또 한 번 경해국이 죽었다.

‘…기차는 일종의 요새야. 형님이 있는 이상 벗어나는 건 불가능해.’

몇 번의 실패를 통해 무구원은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 기차가 탈선하면 경해국은 반드시 죽는다. 자신이 이능력을 못 쓴다고 믿고 있는 경해국이 앞뒤 재지 않고 불리한 이곳으로 뛰어들기 때문이다. 무구원의 손에서는 어느새 또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무구원은 눈을 떴다. 건너편에는 자신의 큰형이 평화로이 앉아 있었다. 시선을 마주치자 그가 미세하게 미간을 찡그렸다. 무구원이 코에서 피를 흘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네 능력은 여전히 고장 난 상태인 건가.”

벌써 세 번째 듣는 질문이었다. 무구원은 손등으로 제 코에서 흐르는 피를 훔치며 말했다.

“…준비하시죠. 이리가 곧 올 겁니다.”

무구원은 정확히 18분 뒤에 기차가 탈선할 것이라 알렸다. 다시 한번 다른 미래가 펼쳐질 예정이었다.

“기차를 멈추면… 쿨럭!”

피가 바닥으로 울컥 쏟아졌다. 턱을 타고 셔츠 깃 안쪽까지 검붉은 피가 번진다. 훅 숨을 내쉬자 뜨거운 김이 맺혀 무구원은 제 숨인데도 그에 델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먹먹해진 귓가에 무정원이 몰이꾼들에게 차분히 명령을 내리는 소리가 웅웅 울렸다.

선로를 검사하고 주변 지형을 탐색해 저격이나 암살 시도가 있는지 확인하라는 말이 똑같이 이어졌다. 무겁게 늘어지는 몸을 겨우 추스르며 무구원은 손수건을 꺼내 코를 틀어막고 지혈했다.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생각하고 있는데 무정원의 싸늘한 시선이 그에게로 떨어졌다.

“능력이 예전처럼 돌아온 모양이지?”

“…….”

“뭐 그게 진짜인지 아닌지는 곧 확인해보면 알겠지. 무구원은 데려가서 가두고 지켜봐라. 곧 이리가 올 테니 써먹을 데가 있나 봐야지.”

무정원의 차가운 시선이 무구원의 몰골을 훑었다. 창백한 얼굴. 검은 피를 쏟아내는 꼴하며. 저건 보통 에스퍼들이 자신의 한계치 이상으로 이능력을 썼을 때 육신이 망가지는 징조였다. 저놈의 속셈이 무엇이든 능력이 돌아온 것은 맞는 듯한데…. 무정원은 눈을 가늘게 떴다.

무정원은 이전 시간대에서와 마찬가지로 무구원을 끌어내라 지시했다.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에스퍼들을 보며 무구원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계속 진행하시죠. 아직 얘기가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런 건방진 놈을 봤나.”

무정원이 인상을 굳히며 멱살을 추켜올려 무구원을 벽으로 쾅 처박았다. 권위적인 음성이 잇따랐다.

“너와 협상을 계속할지 말지는 내가 결정한다.”

“설계도가… 필요하지 않으신 겁니까.”

“그 말의 진위도 곧 가려낼 수 있겠지. 모난이를 붙잡아 너희 둘 다 한꺼번에 심문하면 될 테니. 손 한 짝 정도 없다고 해서 심문하는 데 지장이 있진 않겠지만.”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무정원이 거세게 무구원의 손목을 틀어쥐었다. 무구원은 비명을 지르지 않기 위해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근육을 통과해 뼈까지 파고드는 서릿발 같은 냉기가 손목을 끊어내려 하고 있었다. 짧게 신음을 뱉은 무구원의 입술이 찢어져 주룩 피를 흘렸다.

얼음 칼로 손목을 도려내는 것 같은 생생한 고통이 잇따랐다. 무정원은 기어코 무구원의 손을 얼려 망가뜨릴 셈이었다.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갑자기 탕―! 하는 날카로운 총기의 소음이 번개처럼 틈을 가르며 등장한 것은.

무정원의 뺨을 스친 총알은 무구원의 얼굴 바로 옆 벽에 날아와 꽂혔다. 동시에 무정원이 반사적으로 몸을 물렸다. 그는 한껏 여유로운 표정을 지었다.

“모난이구나.”

무정원은 창문 밖 어둠을 바라보며 상황 파악을 마쳤다.

“이 정도 사격이 가능한 건 윤모난밖에 없지. 이렇게 빨리 위치를 노출하다니 모난이답지 않군.”

그 말을 들으며 무구원은 깨달았다. 기차가 멈추지 않아도 윤모난은 반드시 추격할 거라고. 기차를 탈선시키지 않는다면 가까이에 붙어 안에 진입을 시도할 확률이 높다. 그러면 내부에서 날리는 공격을 피하기가 힘들어 무조건적으로 윤모난 쪽이 불리한 싸움이 된다.

그가 맨몸으로 총알 밭에 뛰어들기 전에 상황을 반전시켜야 했다. 무구원은 이미 반쯤 망가져 돌아가지도 않는 손목을 내려다보다 이내 말했다.

“설계도는 펜던트 안에 있습니다. 이걸 열 수 있는 방법을 알려드리겠습니다.”

그러자 무정원이 조용히 돌아봤다. 만면에 비웃음을 띤 채로.

“넌 아직도 이 협상이 유효하다고 생각하는가 보군. 윤모난이 나타난 이상 내가 너와 협상해야 할 이유가 무엇이지?”

“…….”

“다만 윤모난을 잡으려면 네가 필요하긴 하지. 참을성을 발휘해 기다린 보람이 있구나.”

‘데려가.’ 무정원이 서늘하게 명령했다. 윤모난이 나타난 이상 무정원은 펜던트를 가지고 입씨름할 생각도, 윤모난을 포기하지도 않을 것이다. 오늘 설계도와 윤모난 두 가지 모두 기어코 얻을 목적일 테다.

대기하고 있던 에스퍼들이 무구원을 거칠게 잡아당겨 복도로 끌고 갔다. 아까 전부터 복도에 있던 형제들은 경멸의 시선으로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 시선에 무감해질 정도로 무구원은 순간 현기증을 느꼈다.

‘구원아.’

그때 점점 무거워지는 머릿속에서 분명하고 또렷한 음성 하나가 들렸다. 콧방울 안쪽에서 흘러나온 검은 피가 무구원의 군화 앞으로 뚝 떨어졌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무구원은 지금의 상태로 더 이상 이능력을 사용하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한계치에 아슬하게 닿은 정신과 몸이 분명히 경고하고 있었다. 에너지에 과부하가 걸리게 되면 얽히고설킨 시공간의 미로에서 또다시 길을 잃게 될 거라고. 7년간의 분투 끝에 내린 처방은 최대한 이능력을 억제하고 사용하지 않는 것뿐이니까.

‘구원아.’

하지만 익숙한 목소리가 시간을 넘어 저 멀리서 그를 유혹하듯 부르고 있었다. 기차의 엔진 소음이나 무구원을 둘러싼 주변 사물들이 점차 뒤섞여 희미해져가는 중에, 유일하게 뚜렷하고 형체를 갖춘 목소리였다.

“…네. 팀장님.”

무구원은 저도 모르게 대답하고 말았다. 이성적인 판단을 할 겨를도 없이 몸이 저절로 움직였다. 좀 전까지는 그가 몸을 가누지도 못했기 때문에 몰이꾼들의 구속이 조금 느슨해져 있었다. 자신을 붙들고 있는 에스퍼의 허리춤에서 순식간에 총을 탈취한 무구원이 곧장 방아쇠를 당겼다.

망설임 없이 지척에 있는 사람부터 쏘아 넘어트리자, 복도에 줄지어 있던 에스퍼들이 일제히 그를 향해 사격을 가했다. 순식간에 탄환이 셀 수도 없이 쏟아졌다. 끔찍한 소리와 함께 피가 벽으로 흩뿌려진다. 아픔을 느낄 시간도 없었다.

무구원은 인식조차 못하고 제 이능력의 제한을 모두 풀었다. 총알이 몸을 통과하면 시간을 돌리고 또 새로운 틈을 타서 방아쇠를 사정없이 당겼다. 매 발포가 정확했다. 그는 시간을 돌리고 또 돌렸다. 마치 북해의 차가운 바다에 빠져 살고자 몸부림쳤던 어린 무구원처럼.

“무구원! 너—!”

경악한 형제들이 고함을 치는 가운데, 복도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누군가 염력을 써서 무구원의 총질을 되돌려보낸 탓에 몸통이 사정없이 꿰뚫렸다.

몸 전체에 파도처럼 닥쳐오는 고통을 참으며, 무구원은 2초 전으로 돌아가 염력을 쓴 에스퍼를 어머니 신의 텃밭으로 보내주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복도가 시체로 가득했다.

형제들은 다음 칸으로 몸을 피해 도망친 모양이었다. 턱까지 차오른 숨을 삼키며 무구원은 흥건히 고인 피에 미끄러지다 벽에 부딪혀 바닥으로 넘어졌다. 그가 지쳐 나가떨어지자 총탄으로 엉망이 된 벽 안쪽에서 무정원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무정원은 무기질적인 시선을 보내오며 주검이 된 자신의 수하들을 건너 무구원에게 다가왔다.

“부디 모난이가 오기 전에 이렇게 무모한 자살 시도를 한 이유가 부디 있었기를 바란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의 멍청함에 질려버리고 말 테니.”

심장이 터질 듯이 뛰고 입 밖으로는 거친 숨이 간헐적으로 튀어나왔다.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이 신경다발 전체로 퍼지고 있었다. 귓속에서는 이명이 울리고 혀에서는 쇠 비린내가 감돌았다.

무구원의 몸은 한계선 앞에 성큼 다가서고 있었다. 이미 시간 능력이 제멋대로 날뛰면서 그의 시간 감각에 서서히 혼선을 주고 있었다. 타인에게는 그 미세한 차이가 느껴지지 않을 것이나 무구원은 느낄 수 있었다.

0.0001초의 시간이 앞섰다가 다시 뒤로 물러난다. 0.0001초 전으로 몸이 돌아갔다가 다시 돌아온다. 시간 능력자만이 느낄 수 있는 카오스 속에서 현재, 과거, 미래가 온통 뒤섞였다. 아마 가이드가 바로 옆에 있었다면 무구원의 파동이 폭주 직전까지 날뛰고 있다는 걸 깨달았을 테다.

“이렇게까지 한 너를 잠깐이라도 살려두는 건 지도자로서 자격 미달일 테지.”

차가운 총구가 이마에 닿았을 때조차 무구원은 그것이 ‘언제’ 일어난 일인지 헷갈렸다.

탕―!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 총알이 발사됐다. 총신이 타들어가는가 싶더니 작은 폭음이 들렸다. 누군가 짤막한 비명을 뱉었다.

“윽―!”

물리법칙을 거스르며 역방향으로 발사된 총알이 총신 전체를 폭발시킨 것이다. 무정원의 손안에서 폭발한 총이 바닥으로 떨어지고, 그 위로 붉은 피가 흩뿌려졌다. 반사적으로 이능력을 써서 손이 거덜 나는 것만 막은 무정원은 까맣게 파인 손바닥을 확인하고선 이내 바닥으로 쓰러진 동생에게 시선을 던졌다.

“…감히.”

눈빛이 변한 무정원이 새 총을 꺼내 들어, 이미 정신을 잃은 무구원에게 겨누려는 때였다. 객차 문 칸 쪽이 소란스러워지더니 총성이 울려 퍼졌다. 누군가 헐레벌떡 안으로 들어와 소리쳤다.

“윤모난입니다! 이미 안으로 침입했습니다!”

그 소식을 듣자마자 무정원은 겨누고 있던 총을 거둬들였다. 죽은 주검들 옆에 널브러져 있는 무구원에게는 시선 한 조각조차 주지 않았다. 서 있던 곳에서 두어 발자국 물러선 무정원이 몰이꾼들에게 명령했다.

“모두 손님을 맞이할 준비를 해라.”

***

한편 절벽 위.

윤모난은 불현듯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의 직감이 날카로워졌다. 조준경에 눈을 가져다 대니 저 멀리 선로를 달리고 있는 기차 안 상황이 다시 눈에 들어왔다. 그는 바로 계획이 틀어진 것을 알아차렸다.

곧이어 바이크를 탄 북해 에스퍼들이 기차 후미에 붙은 짐칸 문을 열고 쏟아져 나오는 광경이 보였다. 하지만 윤모난의 조준경은 무정원의 객실에 고정되어 있었다.

무구원이 거기 있었다. 무정원에게 붙잡혀 손목이 끊어질 위기였다. 윤모난은 계산할 겨를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이만큼 떨어진 위치에서, 그것도 달리는 기차에 탄 타깃을 맞히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으나 하늘이 도왔는지 탄환이 두 형제 사이로 날아가 꽂혔다.

그다음부터는 몸이 저절로 움직였다. 윤모난은 바이크 위에 올라타 시동을 걸고 절벽 아래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선로에 손을 썼다는 것을 들켰군.’

절벽을 내려오자마자 안범과 경해국이 보였다. 이미 북해 에스퍼들과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부우욱 흙먼지를 일으키며 등장한 윤모난에게서 순식간에 파동이 뻗쳐 나왔다.

에스퍼들의 능력을 제어시킨 다음 윤모난은 기계적으로 적들을 사살했다. 그의 상대가 될 리 없는 북해 에스퍼들의 주검이 여기저기 나가떨어졌지만 이걸로 끝이 아니었다. 계획이 틀어진 이상 무정원 쪽에서도 어느 식으로든 대처를 할 터였다.

“형!”

그때 안범이 허겁지겁 달려왔다. 그의 입에서 예상치도 못한 소리가 튀어나왔다.

“무 선배님, 이능력을 못 씁니다! 말씀드려야 하는데 깜빡했어요!”

“뭐라고?”

난데없는 소리에 윤모난이 의미를 모르겠다는 얼굴을 하자, 안범이 울상을 지으며 사실을 털어놓았다.

“제가 자꾸 형이 7년간 없었다는 사실을 깜빡 놓치는 것 같아요. 무 선배님 이능력 못 쓰게 된 지 오래되셨어요. 지금 일반인이나 다름없어요.”

“…그럼.”

윤모난의 얼굴이 어느새 차게 굳어버렸다. 그의 고개는 점점 가까워지고 있는 기차로 돌아갔다.

“무구원이 능력도 못 쓰면서 저기에 탔다고.”

“정확히 무 선배님이 어떤 상태인지는 모릅니다. 말해주시지 않으니까요. 그런데 그동안 이능력 쓰시는 걸 한 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차마 물어볼 수도 없었어요. 고문 후유증이겠거니 하구요….”

“무씨 저놈이 7년 전에 그 뭐냐… 팀장님 조카들 살린다고 난리 친 탓에 북해로 끌려가 죽을 뻔하지 않았습니까. 그때부터인 것 같은데 정확히는 저도 잘….”

경해국이 옆에서 덧붙였다. 그때 윤모난에게서 거친 탄식이 터져 나왔다. 의아한 시선이 따라붙는 가운데 윤모난은 타고 온 바이크를 쾅 걷어차며 욕을 읊조렸다.

“저 꼴통 거짓말쟁이 새끼.”

그제야 윤모난은 무구원이 지난날 자신의 박치기 한 번으로 나가떨어진 이유를 납득하게 되었다. 그 직후에 느꼈던 그의 이상한 파동과 김종훈인지 뭔지 시간 능력자인 부하를 항상 대동하고 다닌 이유까지.

뭔 조홧속인지는 모르겠지만 무구원이 어렸을 적에 생긴 장애가 악화한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도 기어코 저한테 또 마취제까지 놓으면서 저기를 기어들어 가다니. 그런 무모함에 감동이라도 받으란 말인가? 그따위 무모함만큼 사람을 허망하게 만드는 것이 어디 있다고.

윤모난이 욕을 지껄이며 얼굴을 거칠게 쓸어내리는 와중에도 기차는 착실히 선로를 달리고 있었다. 그대로 여기 있다간 모두 죽은 목숨이었다.

“너넨 돌아….”

그때였다. 세 사람의 등 뒤로 갑자기 환한 빛이 타오른 것은. 반사적으로 경계하며 총을 겨누는 세 사람에게 시선을 맞추며, 낯선 남자가 갑자기 다른 공간에서 기어 나왔다. 차원이 어그러지는 모양이 익숙했다. 공간계 이능력자가 이동할 때마다 번쩍거리며 나오는 특유의 빛이다.

“어이쿠, 다들 여기 계셨네요. 한참 찾았습니다.”

“너 뭐야―! 씨발, 깜짝 놀랐다고! 누구야!”

경해국이 바짝 경계하자 남자는 양손을 허공에 들어 보이며 난처한 얼굴을 했다. 평범하게 생긴 남자는 신분을 확인할 수 없는 평상복을 입고 있었다. 경해국이 마구 윽박지르자 그는 자신이 주현희 선배가 보내서 온 사람이라 차분히 소개했다. 윤모난을 발견하고는 작약과 동기 동창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그 역시 그 스승님의 제자인 듯했다.

“주 선배님이 절 보내며 말을 전하라고 하더군요. 여러분에게 도움이 필요할 거라고. 그게 접니다. 도움. 제가 왔습니다.”

“도우우움? 그따위 거 필요 없으니까 꺼지라 해! 주 보좌관인지 뭔지 우리한테 최면 걸어가지고 무구원 내보낸 것만 생각하면 내가 아주―!”

“…아니. 도움 필요한 거 맞아.”

경해국의 대거리에 남자가 멋쩍은 웃음을 짓는 가운데 빠르게 상황 파악을 마친 윤모난이 그를 가로막았다.

“제가 작약의 동생님을 기차 안에 보내드리려 하는데요.”

“…이름으로 불러주시죠. 그쪽이 아무리 상급 에스퍼더라도 저를 움직이는 기차 안에 정확히 이동시키는 건 쉽지 않을 텐데요.”

“쉽진 않지만 불가능한 일은 아닙니다.”

가이드인 윤모난은 남자의 에너지가 증폭되는 것을 느꼈다. 주현희가 보낸 만큼 그는 훌륭한 공간계 에스퍼가 분명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 이상의 묘수가 필요했다. 윤모난은 머리를 굴렸다.

“제게 전략이 있는데, 한 가지만 더 부탁드리겠습니다.”

“네. 말씀하세요.”

“제가 안에 들어가고 나서, 꼬리 칸이 이 구간을 지나갈 때 중간에 공간을 열었다가 닫을 수 있습니까?”

“기차 꼬리 칸만 잘라서 다른 장소로 이동시켜달란 말인가요? 하지만 그에 앞서 이동하는 기차부터가 공간 이동이 쉽지 않은지라…. 꼬리 칸과 먼 곳에 떨어질 수도 있어요.”

그러니까 공간을 이동한 윤모난이 기차의 몇 번째 칸에 도착할지 장담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운이 나빠 몰이꾼들이 몰려 있는 선두에서 시작해야 한다면 꼬리 칸까지 가는 데 시간이 꽤 걸릴 테고, 적절한 타이밍에 기차 꼬리 칸을 잘라 이동시키기 어려울 확률이 높았다. 하지만 윤모난은 확신하는 얼굴로 말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이 구간을 지날 때 저는 후미 쪽에 당도해 있을 겁니다. 기차 뒤의 세 칸만 이동시켜주십시오.”

“어디로요?”

“…북해가 좋겠습니다.”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작전 실행까진 잠깐의 시간이 남아 있었다. 윤모난은 그 시간을 안범과 경해국에게 당부하는 데 썼다.

“기차 안은 나만 들어간다.”

“네? 그게 무슨—!”

“내가 들어가면 여기 남은 북해 에스퍼들은 너희 둘이 처치해. 할 수 있지? 그리고 일이 끝나면 바로 동산으로 가서 가족들을 보호해라. 무구원 아내와 아들까지.”

‘팀장님’, ‘형’과 같은 저마다 다른 호칭이 쏟아졌다. 윤모난은 그들에게 너희만 믿는다고 말하더니 갑자기 무언가 생각난 듯 제 목에서 펜던트를 벗어 안범에게 건넸다.

“알지? 내 부적 네가 가지고 있어.”

“이건….”

“만약 내가 돌아오지 않으면 형들 금고에 든 물건은 둘이 정리해줘. 부탁한다.”

윤모난은 두 사람의 어깨에 양손을 올렸다. 어딘가 작별 인사 같아서 안범은 참지 못하고 그의 품 안으로 뛰어들었다. 경해국마저 팔을 올려 윤모난의 팔뚝을 꽉 쥐었다. 그렇게 하니 셋은 서로를 부둥켜 껴안은 꼴이 됐다.

“형. 무 선배님이랑 꼭 돌아오세요. 동산에서 기다릴게요. 그때 펜던트도 다시 돌려드릴게요.”

“…….”

“팀장님, 몸조심하십쇼. 무씨 그놈한테 가족은 걱정하지 말라고 전해주시구요. 무슨 일이 있어도 제가 지키겠다고.”

“그래.”

두 사람의 어깨를 감싼 윤모난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하지만 더 시간을 끌 수는 없었다. 기차가 다가오는 소리가 점점 더 커지고 있었다. 공간계 에스퍼가 말없이 눈짓으로 재촉했다.

준비를 마치자 남자가 허공으로 손을 뻗어 공간을 찢어 틈새를 만들었다. 윤모난은 망설임 없이 그곳으로 발을 뻗었다.

“침입자다! 공간 능력을 썼어!”

발을 내디딘 곳은 미세한 진동이 느껴지는 기차 바닥이었다. 도착한 곳은 1등석 객차와 조금 떨어져 있는 부분인 듯했다. 일반석이 열을 따라 늘어져 있는 객차 안, 북해 에스퍼들이 놀라 일어나더니 일제히 총구를 겨눴다.

어지러운 총성과 함께 윤모난이 등지고 있던 벽이 순식간에 벌집이 됐다. 그뿐 아니라 공격형 이능력이 한쪽으로 쏟아지면서 불이 번쩍번쩍하고 튀었다. 한참 공격이 쏟아진 끝에 열차 안에는 괴이한 침묵이 찾아왔다.

에스퍼 중 하나가 침입자를 확인하기 위해서 다가갔을 때. 좌석 아래서 기다란 팔이 뻗어와 객차 문의 개폐 스위치를 순식간에 박살 냈다. 당황한 시선들이 일제히 꽉 잠긴 문으로 향하자, 침입자의 총구에서 격발된 탄환이 객차 안의 전등을 모두 박살 냈다.

“막아라! 가주님이 계신 곳까지 못 가도록 막아!”

누군가 소리친 것이 무색하게 순식간에 어둠이 찾아들었다. 동시에 가이드에게서 파동이 뻗쳐 나와, 여기에 있는 모든 에스퍼들의 이능력을 압도했다. 이능력을 제어당한 둔한 신체들이 사물을 분별하기 어려운 어둠 속에서 버둥거린다. 누군가 나지막이 외쳤다.

“…윤모난이다.”

북해 에스퍼들은 이미 그의 능력에 대한 경고를 받은 바 있었다. 폭주를 막는 데 집중하는 일반적인 가이드와 달리 윤모난은 에스퍼의 파동을 간섭하여 교란하고 이능력을 제압한다는 것을.

순식간에 어둠이 공포의 형상을 하고 에스퍼들의 어깨를 짓눌렀다. 갑자기 이능력을 제압당한 그들은 독이 한 방울 떨어진 어항 속 물고기 떼처럼 일제히 반대쪽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굳은살이 박인 단단한 손에 가장 먼저 잡힌 건 도망치는 줄 가장 뒤에 있던 에스퍼였다. 얼굴을 잡힌 채로 고개가 확 뒤로 꺾인 그는 귓가에서 울리는 선득한 음성을 듣고 몸서리쳤다.

“어딜 가.”

“으아아악—!”

공포로 마비된 턱을 벌려 신음을 내지르기도 전에, 그의 머리에 바람구멍이 났다. 드디어 사냥을 시작한 윤모난에게 어둠은 아무런 문제가 아니었다. 파동을 읽을 수 있는 그는 단 한 발도 낭비하지 않고 북해 에스퍼들의 머리를 노려 사격하기 시작했다.

총알이 떨어지면 가져온 더플백을 열어 탄창을 갈아 끼우고 무심하게 방아쇠 당기기를 반복했다. 마침내 객차 안 청소를 다 마쳤을 때, 윤모난은 다음 객차의 잠긴 문고리에 총을 가격하며 날카롭게 외쳤다.

“무정원!”

문이 열리자마자 에스퍼들이 우루루 쏟아져 들어왔다.

“접근하지 말고 총으로 쏴라—!”

순식간에 불꽃이 여기저기로 튀었다. 어둠이 내려앉은 공간, 눈먼 총알들이 사방으로 쏟아졌지만 사활을 건 반격은 노련한 사격 솜씨를 이기지 못하고 끝나고 말았다. 오래지 않아 윤모난은 뜨끈해진 권총을 시체 더미 위로 던졌다.

평범한 에스퍼들이 피할 수 없는 재앙처럼 닥친 윤모난의 상대가 될 리 없었다. 그는 반평생 생명을 죽이는 일을 업으로 삼았고, 심지어 그중 7년은 열악한 곳에서 용병으로 있었다. 객차 안은 삽시간에 살육의 장이 되었다.

“…모든 이는 죽으면 어머니의… 땅으로….”

아직 숨이 끊어지지 않은 누군가가 어둠 속에서 기도문을 외우고 있었다. 윤모난은 심드렁한 얼굴로 그를 추어올렸다. 그리고 순식간에 몸뚱이를 내다 던져 벽면에 달린 옷걸이에 옷 대신 그의 목뼈를 친히 걸어주었다. 워커 위로 후드득 피가 쏟아졌다.

“아니, 나쁜 짓을 많이 했으면 다 같이 지옥에 가야지. 니네 엄마도 나쁜 자식새끼는 싫어할걸.”

이미 주검이 되어 옷걸이에 걸린 몸은 대답 없이 축 늘어졌다. 윤모난은 훌쩍 객석을 넘어 건너가면서, 객석 뒤에 몸을 숨기고 있던 에스퍼들을 사냥했다. 사나운 비명이 이어졌다. 다음 객차 문을 열었을 때 윤모난은 약간 휘청댔을 뿐이었다.

다음 칸은 텅 비어 있었다. 복도를 지나 서둘러 후미로 이동하는데 일순 눈앞이 뿌옇게 번지며 심한 현기증이 예고도 없이 닥쳤다. 갑작스러운 신체 반응에 손을 들어 얼굴을 쓱 쓸어보니 식은땀으로 축축했다. 상처가 터졌나 싶어 허리를 확인했지만, 아직까지는 멀쩡했다.

그렇다면 신체의 문제라기보다는 정신적인 문제일 확률이 컸다. 동시에 몸이 크게 흔들렸다. 심한 어지럼증을 느끼던 윤모난은 목덜미를 서늘하게 감싸오는 목소리에 퍼뜩 눈을 떴다.

‘괜찮아.’

또 유령이다. 지난번 형들의 유품을 찾으러 방에 갔을 때 들었던 그 목소리가 기분 나쁘게 자신의 목덜미를 어루만지는 듯했다.

하필이면 지금 이 빌어먹을 환청이.

‘괜찮아. 무서워하지 마. 항상 되찾을 방법은 있어.’

익숙하지만 낯선 음성이 저번과 토씨 하나 다르지 않은 말을 실은 채 기분 나쁜 미풍처럼 귓가에 파고들었다.

‘내가 되찾아줄게.’

순간 끓어오르는 불쾌감에 윤모난은 거슬리는 벌레를 쫓아내려는 듯 자신의 뺨을 한 번 거세게 내려쳤다. 날카로운 마찰음과 함께 한쪽 뺨이 불이 붙은 듯 달아올랐다. 윤모난은 한없이 냉정한 목소리로 자신에게 명령했다.

“정신 차려.”

아직 끝나지 않았잖아. 그는 시들해진 경주마 같은 정신을 단속하기 위해 매섭게 채찍을 내려치듯 자신의 얼굴을 연달아 갈겼다. 윤모난은 수없이 죽인 다른 적과 마찬가지로 스스로에게도 자비를 보이지 않았다. 이 순간 되새겨야 하는 이름은 단 하나였다.

“…청연아.”

부르기도 아까운 이름을 입안에서 되뇌던 윤모난은 숨을 깊이 들이켰다.

“삼촌이 우리 청연이를 죽게 만든 사람은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야.”

그 생각 하나만으로 무거운 몸이 절로 일으켜졌다. 겨우 정신을 가다듬으며 문고리에 손을 뻗은 그 순간, 갑자기 뒷덜미로 휑한 바람이 느껴졌다. 그리고 침입자를 반기는 짠 냄새가 훅 끼쳐왔다. 윤모난은 고개를 돌려 등 뒤 풍경을 확인했다.

아까 전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풍경이었다. 잿빛 먹구름과 그 아래 펼쳐진 퍼렇고 사나운 바다. 꼬리 칸만 잘린 채로 북해 바다 앞으로 온 기차에서 윤모난은 마치 이곳에 온 여행객이 된 듯 천천히 바깥으로 나왔다. 발아래로 푹신한 모래사장이 밟혔다.

“…….”

사납게 울부짖는 파도 소리가 모든 생명을 집어삼킬 것처럼 들이닥쳤다. 뺨을 스치는 서늘한 바람과 가슴 저변을 쿵쿵 울리는 파도의 진동이 인상적인 이곳은, 북해였다.

윤모난이 바다에 시선을 빼앗긴 사이, 어느새 등 뒤에서 발걸음 소리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와 어깨를 나란히 할 만큼 다가온 남자의 시선도 바다에 고정되어 있었다.

별안간 행선지를 벗어나 북해까지 날아들었는데도 무정원의 낯빛엔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늘 그렇듯이 고요하고 침잠된 분위기였다. 윤모난이 그 이면에 있는 잔혹함을 알아차리지 못했던 이유이기도 했다.

“형.”

“그래.”

불현듯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무정원이 부드럽게 대답했다.

“왜 날 여태껏 안 죽이고 살려둔 거예요? 설계도 때문에?”

“…….”

“형이 이렇게까지 한 이유가 궁금해서.”

차분하게 묻는 윤모난의 옆얼굴을 보며 무정원은 설핏 웃음 지었다. 실물로는 7년 만에 처음 보는 윤모난의 얼굴이었다. 그 시간이 결코 짧은 건 아닌데도 윤모난은 변한 것 없이 여전했다. 이런 발칙한 질문부터가 그랬다.

이유를 묻다니. 인생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비극 중에 정작 ‘이유’를 따질 수 있는 게 얼마나 있다고. 무정원은 웃음기가 담긴 목소리로 가볍게 대답했다.

“내가 너한테는 늘 무르잖니.”

두 사람을 둘러싼 공기가 답답하게 확 조여들었다. 무정원은 어느새 웃음기를 거두고 나지막이 고백했다.

“모난아, 난 정말 너에게 아무런 악감정 없다. 이렇게 돼서 유감스러울 정도로 말이야.”

그 말에 윤모난의 얼굴이 조금의 여유조차 가장하지 못할 정도로 싸늘하게 식었다. 사형수를 눈앞에 둔 집행인처럼 비정한 낯이었다. 자신을 향한 살기를 외면하지 않고 무정원은 그의 번듯한 이마 위에서 나부끼는 검은색 머리칼을 손끝으로 넘겨주며 여상히 말했다.

“넌, 검은색 머리가 더 잘 어울리는구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윤모난이 파동을 뻗쳤다. 그리고 손가락에 걸어놓은 리볼버를 무정원의 흉곽 한가운데에 바짝 붙이며 그를 뒤로 몰아세웠다.

무정원은 그저 눈썹을 비죽 올리면서 놀랐다는 척을 할 뿐이었다. 이능력을 제어당해도 특유의 여유는 버리지 않는 것이 그다웠다. 대신에 그는 고개를 돌려 백사장에 처박혀 기울어진 기차 쪽으로 고갯짓했다.

시선을 쫓아가자 무구원이 북해 에스퍼에게 붙들려 축 늘어진 채로 끌려 나오는 광경이 보였다. 윤모난은 미간을 약간 찡그리며 총구를 무정원에게 더 바짝 찔러 넣었다.

“내가 인질극은 아주 지긋지긋한 사람인데.”

“하지만 매번 통하잖아.”

그 말이 끝나자마자 윤모난은 무정원의 팔을 꺾어 어깨로 그의 명치를 받치며 들어 올렸다. 휙, 하고 넘어간 몸이 순식간에 모래사장에 처박히고, 그 위로 묵직한 신체가 실렸다. 우위를 점한 윤모난이 당장이라도 방아쇠를 당길 기세로 총구를 이마에 들이댔다.

북해 에스퍼들의 움직임도 긴박해졌다. 하지만 무정원은 손을 들어 그들의 접근을 막았다. 대신에 그는 손을 뻗어 윤모난의 빈 목덜미를 쓱 훑다가 눈을 내리깔았다.

“들어가서 이야기하자. 네가 여기서 물러선다면 무구원은 가만히 두겠어.”

회유에도 불구하고 윤모난의 눈매는 점점 사나워지기만 했다. 속에서 치미는 분노를 참을 수 없는 듯 앓는 소리가 그의 입술을 비집고 튀어나왔다. 어느새 총의 그립 부분을 쥔 손은 볼썽사나울 정도로 떨리고 있었다.

“…염병.”

윤모난은 떨리는 목소리로 욕지거리를 뱉었다.

이를 너무 세게 사리문 탓에 턱 전체가 경련했다.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머릿속이 복잡하게 뒤엉켰다. 그는 당장이라도 총을 쏴 무정원의 목숨을 빼앗을 수 있었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렇게 할 의향이 있었다. 아니, 그렇게 해야만 했다. 무정원을 갈기갈기 찢어 북해 앞 바다에 뿌리겠다고 청연의 무덤 앞에서 맹세했기 때문이다.

방아쇠를 당기면 다 끝인데도. 형들의 업보도 조카들의 죽음도, 이 지긋지긋한 복수도 다 끝인데. 자꾸만 미련하게 뒤를 돌아보게 된다.

“너에게 무구원의 목숨이 가치가 없다면 지금까지의 내 판단이 틀렸다는 것일 테니. 가문 전체와 수하들을 위험에 빠트린 죄로 지금 네 손에 죽지.”

“…순순히 죽겠다?”

“그래. 사냥에 실패해 가족을 굶기느니 내 육신이라도 먹게 해주는 것이 지도자의 역할이니까.”

사냥. 무정원의 비유는 정확했다. 오래도록 공들이며 무구원을 미끼로 삼고, 결국에는 윤모난까지 지금 여기에 불러들인 이 모든 과정이 그의 사냥이었다. 윤모난은 한낱 미끼와 사냥감의 신세가 된 자신과 무구원의 처지를 생각하다가 숨을 들이켰다. 그러다 머리를 뒤로 젖히며 탄식을 뱉었다.

‘젠장, 무정원. 넌 가장 수치스럽고 고통스러운 방식으로 죽게 될 거다.’

방아쇠 근처를 맴돌던 손가락을 어렵게 떼어내며 윤모난은 속으로 다짐했다. 오늘은 이렇게 넘어간다 해도 다음은 없을 거라고.

윤모난이 몸을 물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터져 나오는 분노를 억지로 억누른 탓에 전신에서 땀이 배어 나왔다. 겨우 살인 충동을 누그러뜨리며 담배를 물고 있는 사이에 무정원이 천천히 곁으로 다가왔다.

“가자, 모난아.”

가만히 아무 말도 없던 무정원은 담배 한 대를 다 태워가는 시점에 윤모난을 불렀다. 바다를 볼 때는 몰랐는데 백사장 뒤로 병풍처럼 펼쳐진 푸른 교목 사이로 청회색 기와가 어엿하게 위용을 드러내고 있었다. 무구원이 자란 집이었다.

***

윤모난은 한발 물러서기로 한 결정이 옳았던 건지 아닌지 판단할 수 없었다. 더 나아가 그게 필요했던 것인지도 판단이 서지 않았다. 왜냐하면 무구원은 말 그대로 가사 상태에 빠졌으니까. 벌써 며칠째 반응 없는 그의 신체를 보며, 윤모난의 마음도 싸늘하게 식어버렸다.

고요한 방 안과 달리 바깥은 요란했다. 윤모난은 열려 있는 창을 통해 예배당이 있는 쪽을 확인했다. 광신도들이 뭔 짓을 하는지 모르지만 누군가 흐느끼는 듯한 서늘한 곡소리가 며칠째 이어지고 있었다. 중간중간 들리는 건 채찍을 휘두르는 소리 같았다.

“이 빌어먹을 광신도 새끼들. 밤이건 낮이건 저 지랄이네.”

윤모난은 창문을 쾅 닫으며 욕을 뱉었다. 북해는 남경과는 정반대의 기후를 가진 북쪽 도시로, 한여름에도 서늘한 바람이 부는 곳이다. 부동항을 끼고 형성된 거점의 동쪽에는 거대한 침엽수림이 펼쳐져 있고, 북쪽 방향으로는 척박하지만 봄과 여름이면 온갖 들꽃들이 장관을 이루는 거대한 평원이 있었다.

북해 가문의 조상들은 개척자이자 사냥꾼이었다고 한다. 척박한 땅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위안 삼을 종교에 매진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역사에 따르면 북해의 초대 가주는 어떠한 농작물도 자라지 않는 땅을 보며 가족들을 굶길 수 없다는 결심으로 희생 의식을 치렀다고 한다.

그는 어머니 신에게 호소하며 자신의 손목과 발목을 모두 끊어 땅 위에 피를 흘려보냈다. 그의 피를 받아먹고 가장 먼저 땅에서 자라난 것이 청파라는 식물이었다. 그 땅은 그대로 성지가 되었고 북해 무씨의 본가도 그 위에 자리 잡았다.

“이런 데서 자란 바람에 네가 그 모양 그 꼴인 건가. 어이, 무구원. 집에 오니까 기분이 어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윤모난은 침대 위에 누운 채로 창백해진 무구원에게 다가가 손등으로 그의 뺨을 툭 건드렸다.

“어떠냐고.”

“…….”

그동안 윤모난은 무구원의 파동에 간섭하려 시도했지만, 지난번 남경에서 기절했을 때처럼 그는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무구원은 이대로 툭 꺼져 죽을 것처럼 위태로운 상태인 것이 분명했다.

녀석이 어쩌다 이렇게 됐는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남경 집에서의 사건으로 추측하건대 외부적인 충격을 받는 상황과 관련이 있어 보였다. 어찌 됐건 이능력을 잃지 않았다면 벌어지지 않았을 일이었다.

고문을 당해 이능력을 잃었다니. 이 무모한 자식의 혈관에는 조상에게서 받은 어떠한 희생정신이 흐르기라도 하는 건가. 아무리 생각해도 7년 전 무구원의 행동은 무모하기 그지없었다. 무정원이 그를 살려둔 것이 신기할 정도로.

“이런 일도 다 네 계획에 있었냐?”

영원히 깨지 않을 것같이 잠이 든 무구원의 단정한 얼굴을 두고 윤모난은 문득 그렇게 물었다. 아마 무구원은 아니라고 대답할 듯했다. 그는 자신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윤모난이 결정적인 순간에 물러섰다는 걸 믿지 않을 것이다. 윤모난 스스로도 믿기지 않았으니까.

“무구원, 넌 나한테 방해만 되고 있어. 믿어져? 너 때문에 무정원을 못 죽이다니. 네가 인질로 잡혀서.”

사실 난 말이야. 너하고 안범 그리고 경해국까지 다 살길을 찾아주고 싶다. 너희 모두 소중한 내 새끼들이니까. 내 마지막 남은 약점들이지. 그리고 너는….

윤모난은 말을 줄이며 쓴 미소를 지었다. 때맞춰 누군가 방문을 두드렸기 때문이다.

“가주님께서 부르십니다.”

며칠 만에 온 무정원의 호출이었다. 윤모난은 이불을 끌어다 무구원에게 꼼꼼히 덮어주고 난 뒤에, 자신을 데리러 온 북해 에스퍼의 뒤를 따라갔다. 대청마루처럼 밖으로 트여 길게 뻗은 복도 끝에 있는 방이 무정원의 집무실인 듯했다.

주거 공간과 동떨어진 곳에 위치한 집무실로 들어가자, 무정원이 누군가를 무릎에 앉힌 채 윤모난을 맞이했다.

“연오야, 인사해라.”

“…안녕하세요.”

무정원의 무릎 위에 앉은 아이는 갑자기 등장한 윤모난을 보고서는 아버지의 품에 파고들며 긴장한 구석을 내비쳤다. 윤모난은 조용한 시선으로 부자를 바라보며 집무실 안의 적당한 소파를 골라 앉았다.

“아들한테 껌뻑 죽는 건 집안 내력인가 보네요.”

“일부러 만나게 하려고 여기까지 부른 거다. 연오가 너에게 인사를 했으면 해서.”

영문 모를 말을 뱉은 무정원이 자리에서 일어나 아이의 손을 잡고 윤모난의 앞으로 다가왔다.

무정원의 아들은 태어난 해를 대충 계산해보면 10살 남짓일 터였다. 하지만 또래보다 훨씬 작은 체구에 마른 팔다리, 햇빛을 자주 못 본 것처럼 창백한 피부가 눈에 띄었다. 어려서 병치레를 자주 한 건지 아이는 낯을 많이 가리며 아빠의 뒤에 숨어 머뭇거리기만 할 뿐 다가오지 않았다.

“아버지….”

“응.”

“이분이 절 살려주신 분이세요?”

아이의 말에 윤모난이 의아함을 내비쳤다. 무슨 소리냐고 눈빛으로 물어보자 무정원이 검은 장갑을 낀 손으로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대신 설명했다.

“그래. 네가 독사한테 물렸을 때 죽지 않고 산 건, 다 이분 덕분이다. 그러니 감사하다고 인사하고 평생 마음에 새겨야 한다.”

“…무슨.”

아이는 용기를 내 아버지의 등 뒤에서 나와 허리를 숙이고 정중히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이게 무슨 소리예요. 나 때문에 아이가 살았다니. 독사한테 물린 건…. 아.”

질문을 던지는 과정에서 윤모난은 예상 가는 바가 있어 입을 다물었다. 독사한테 물렸다. 이 말은 아버지 윤화신이 누군가를 암살할 때 쓰던 은어가 아닌가. 동시에 무정원의 눈가가 부드럽게 휘었다.

“11년 전 내 아내의 장례식에 네가 문득 찾아왔었지. 갑자기 품에서 보자기에 싸인 무언가를 주길래 황당했는데 열어보니까 술이었어.”

십여 년 전의 어느 날을 회상하며 무정원이 좋은 미담이라도 푼다는 듯이 과거의 일을 풀어놓았다. 차운조의 장례식 마지막 날이었다.

“북해 무씨 16대 종손 거참, 잘생겼네요.”

조문객들을 모두 물린 뒤 빈소를 지키던 무정원에게, 그의 품에 안긴 갓난아기를 바라보며 윤모난이 그렇게 말했었다. 윤모난은 가지고 온 것을 내밀며 하얗고 예쁜 아이의 부드러운 머리칼을 손끝으로 슬쩍 쓸었다.

“나중에 가주가 되면 오늘 내가 뇌물 바친 거 잊으면 안 된다?”

“…….”

“형. 아이가 백일이 지나면 안에 든 걸 바늘에 묻혀서 소량만 매일같이 먹여요. 그럼 나중에 남경에서 쓰는 독에 당할 위험은 없을 테니까. 세상이 험하니까 미리 조심해서 나쁠 건 없잖아.”

윤모난이 아이의 탄생 기념으로 준 선물은 남경 윤씨 가문 내부에서만 공유하는 비법이었다. 남경에서 서식하는 독사의 독에 면역이 생기도록 뱀으로 담근 술을 어렸을 때부터 미량 섭취하는 것. 외부에 이것을 발설하는 건 당연히 안 되고 뱀술을 선물하는 건 더 금기였다.

하지만 윤모난은 그런 가문의 규칙 따위 우습다는 듯,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엄마를 잃은 아이가 불쌍해서였는지 아니면 옛정 때문인지 뱀술이 든 단지를 들고 북해에 조문을 온 것이다. 이 아이가 엄마를 잃은 건 다 그의 형들 때문인데도.

무정원은 이런 것이야말로 지독한 운명의 장난이라 생각했다. 7년 전 윤화신이 자신의 하나뿐인 아들을 죽이려 식사에 독을 탔을 때도 그 사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무정원은 인사를 마친 연오를 집무실 밖으로 보냈다. 문밖으로 향하는 아들의 작은 뒤통수에 고정됐던 그의 시선이 되돌아왔다.

“전에 내가 왜 널 죽이지 않고 지금껏 놔뒀냐고 물었지. 네가 아내 장례식에 그 흉측한 술을 가지고 오지 않았다면 내 아들은 이미 죽은 목숨이었을 테니까.”

윤모난의 얼굴은 금이 간 듯이 일그러져 있었다. 자기 덕분에 산 아이에게 감사 인사를 받았는데 저런 표정을 짓는 건 윤모난밖에 없을 것이다. 무정원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어때. 그간 어떻게 살았는지 대화나 나누며 술이나 한잔하는 건?”

무정원은 오늘 처리할 업무가 끝났는지 단정히 매고 있던 넥타이를 풀어 옆에 던져두었다. 그러고서는 직접 사용인에게 술병을 가져오라 시켰다. 이윽고 작은 잔 두 개와 익숙한 병이 들어오는 것을 보며, 윤모난은 실소를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이젠 형이 도대체 뭐 하는 인간인지 모르겠네요.”

“뭐가?

“우리 둘이 마주 보며 술잔 기울일 사이는 아니지 않나. 내 조카들을 셋씩이나 죽여놓고?”

“엄밀히 말하면 그 아이들은 꽃들에게 죽은 거다. 난 무구원을 보내 네 조카들을 구하려 했어.”

“애초에 그 애들을 인질 삼아 날 이용할 생각이었잖아요.”

병 안의 술이 찰랑거리며 잠깐의 침묵을 메웠다. 무정원의 위치를 생각하면 꽤나 소박한 싸구려 소주는 윤모난의 취향을 고려한 선택인 듯했다. 무정원은 소주 뚜껑을 따 유리컵 두 개에 가득 따랐다.

“네 아버지는 치세 동안 친족들을 이유도 없이 처형했어. 그러니 나 정도라면 꽤나 관대한 처사였을 텐데, 그 일에 관해 내 탓을 하는 건 조금 부당하군.”

“…그래서 내 조카들의 죽음에 일말의 책임도 안 느낀다고?”

“내가 그 일에 마음 아파한다고 해서 뭐가 달라지겠니.”

무정원은 잔을 기울여 투명한 액체를 삼켰다.

“그렇다고 내가 어머니 신께 용서를 구하고 속죄했다면 네 마음이 더 안 좋아지겠지.”

“…애들이 죽었어. 좆같은 정치질에 휘말려서 내 조카들이 죽었다고. 그런데 뭐가 달라지냐고?”

“모난아.”

지그시 불러오는 목소리는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넌 네가 사랑하는 사람의 목숨에만 지극히 가치를 두는 경향이 있어. 작약이나 네 조카들이 다른 사람보다 뭐가 그렇게 대단하지. 서로 죽고 죽이는 판에서 모두 다 똑같은 처지 아닌가.”

무정원은 술을 한 모금 더 털어 넣으며 물었다.

“지치지도 않니. 이 모든 걸 그만두는 건 당연히 어려운 일이겠지. 실상 멈추고 싶어도 그럴 여력이 없다는 거 안다.”

“…….”

“자신의 고통을 긍정하는 데는 생각보다 큰 용기가 필요하니까.”

“그래서 나더러 복수를 단념하라고? 아들을 보여주면서 살려달라고 나한테 빌어볼 속셈이었나, 천하의 무정원이?”

윤모난의 목소리는 어느새 냉정을 되찾아 뚜렷하고 분명했다. 타고난 전사답게 호흡을 조절하여 감정을 잠재울 줄 아는 그다웠다. 윤모난은 쉬이 도발할 수 있는 쉬운 상대는 아니었다.

무정원은 그의 안에 숨은 잔혹함과 살기를 알고 있었다. 윤모난이 결정적인 순간에서 극악무도한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사람이란 것도. 이런 재앙 같은 존재 앞에서는 여러 계략과 속임수도 무의미해질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거친 풍랑이라 해도 가야 할 길이 있다면 길들여야 한다. 무정원은 물었다.

“글쎄. 너에게 무릎 꿇고 빌면 날 죽이지 않는 걸 고려해볼 셈인가?”

그 말에 대답 대신 바람 빠지는 듯한 웃음이 돌아왔다. 이윽고 윤모난이 손을 뻗어 술잔을 가져가 갈증 난 사람처럼 한입에 소주를 털어 넣었다.

“그럼 내 죽은 조카들을 도로 살려내서 진심으로 사죄하고 용서라도 빌면 생각해보죠.”

무정원은 자신의 잔에서 남은 술을 부어주며 ‘용서라…’라며 중얼거렸다. 여전히 긴장감이 팽배한 채로 대화는 묘한 분위기로 흘러갔다.

“연오. 네 아버지가 쓴 독이 어찌나 셌는지, 이미 내성이 있는데도 어린아이가 몇 달간 사경을 헤맸다. 그 이후로는 몸이 부쩍 약해졌지.”

“내가 아는 아버지라면 아이라 해도 확실히 죽일 셈이었겠죠. 외동아들이고 형의 유일한 약점이니까.”

“그래. 아들은 내 유일한 약점이지. 네 조카들처럼 태어나자마자 부모 하나를 잃었으니. 생각해보면 난 네 가족들한테 아내에 이어 아들까지 빼앗길 뻔했던 거야.”

윤모난은 말없이 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내 하나 꺼내 물었다. 그러고는 무정원에게도 담뱃갑을 건넸다. 검은 장갑을 낀 손가락이 거절 없이 한 대를 가져갔다. 두 사람은 불을 붙이고 가만히 집무실 한가운데에서 담배를 태웠다.

윤모난은 무언가 생각에 잠긴 듯 조용해진 무정원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겉으론 한없이 차분하고 온건해 보이는 이 사람도 언젠가는 혁명을 꿈꾸었고, 동지들과 나란히 사상을 논했다는 게 이제 와선 낯설기만 했다.

“참 유감이네요.”

작약이 무정원의 아내를 죽인 것뿐만 아니라 그 대가로 그가 자신의 조카들을 죽인 것도. 그리고 그의 아이가 겪은 일까지. 체인처럼 얽힌 일들을 떠올리자니 드는 것은 참으로 유감스러운 감정이었다.

“형이 내 조카들의 죽음에 공감 못하듯이, 나도 형 아내와 아들 일에 아무런 연민도 못 느껴서 정말 유감이에요.”

“…그래.”

“어쩌지. 목숨을 구걸하려 아들까지 보여준 걸 텐데.”

그 말에 잿빛 눈동자가 박힌 무정원의 눈이 옆으로 부드럽게 휘었다. 그는 웃음을 띤 채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 틀렸어. 모난아, 난 그저 보여주고 싶었을 뿐이야. 너도 이 죄악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걸. 네 형들은 내 아내를 난도질한 뒤 내 소유물을 갈취했고, 네 아버지는 내 어린 아들을 독살하려 했지.”

“…….”

“그건 전부 다 너를 위해서였지. 아무런 감정도 못 느껴 유감이라고? 안타까워하란 뜻이 아니었다. 난 그저 너의 무지와 과거를 미화하는 어리석음을 지적하고 싶었을 뿐이야. 그거야말로 마땅히 비난받아야 하는 것이니까.”

무정원은 마치 연단에 선 정치인처럼 음절 하나하나 날을 세워 뱉었다.

“하지만 난 모든 대의를 위해 널 용서하기로 했다.”

“…뭐라고?”

그러다 갑자기 기류를 바꾼 그의 말이 순간 귓구멍에 떡하니 걸렸다. 윤모난은 그야말로 어이가 없다는 시선으로 맹하게 그를 쳐다보았다. 나를 용서하겠다고?

“왜 내가 널 지금껏 죽이지 않았느냐고 물었지. 난 너에게만큼은 퍽 약하게 굴었어. 네가 나에게 준 모든 모욕에도 불구하고 널 용서하기로 한 결정까지 계속 그래온 거다.”

“…내가 모욕을 줬다고?”

그때 무정원이 책상 위로 무언가를 던지듯 내려놓았다. 은색 펜던트였다.

“네가 수치도 모르고 네 형들이 준 물건이라며 이걸 걸고 다녔을 때, 그게 내게 얼마나 큰 모욕인지 몰랐을 거다.”

“이게 무슨….”

윤모난은 갑자기 등장한 펜던트를 내려다보며 무정원 앞인 것도 잊고 얼굴을 굳히고 말았다. 분명 안범에게 펜던트를 줬는데, 하는 생각을 하다가 자세히 확인해보니 미묘하게 다르게 생겼다는 것을 발견했다. 확실히 모조품이었다.

당사자나 눈썰미가 좋은 사람만 알 수 있을 정도로 섬세하게 복제된 펜던트에는 원래의 것처럼 작약이 각인되어 있었다. 그사이 묘한 얼굴로 펜던트를 엄지로 쭉 훑는 윤모난의 모습을 무정원이 주시하고 있었다.

“무구원이 가져왔더군.”

역시 무구원이었나. 윤모난은 복잡하게 생각할 것도 없이 이것이 무구원이 말했던 계획의 일부라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아마도 큐브에 있는 파동 간섭 장치 칩을 숨기기 위한 용도였을 듯싶다. 태엽으로 전원을 껐다 켤 수 있고, 유사시에 가장하기도 쉬울 테니까.

다만 왜 하필이면 하고 많은 것 중에 펜던트일까. 펜던트는 너무나도 특징적인 물건이라 무구원이 굳이 이걸 선택한 데는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윤모난의 생각은 무정원의 말로 인해 오래 이어지지 못했다.

“펜던트라… 충분히 그럴 만하지. 작약이 너한테 설계도를 줬다면 중요한 물건으로 힌트를 줬을 테니까.”

순간 싸한 기운이 등골을 스치고 지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무정원의 말이 맞았다. 펜던트가 설계도를 찾을 수 있는 열쇠라는 건 상당히 설득력 있는 말이었으니, 단순히 무구원의 속임수에 불과하지만은 않을 확률이 높았다. 윤모난은 차게 식어버린 머리로 이성적인 추론을 시작했다. 형들은 분명 설계도를 가장 안전한 데 두려 했을 것이다.

벽을 뚫으면 침입할 수 있는 금고보다 안전한 ‘장소’는 바로 윤모난 그 자신이 아니던가.

하지만 지금 그에게 중요한 것은 펜던트가 열쇠일 수 있다는 사실이 아니었다. 저 자신도 몰랐던 펜던트의 비밀을 무구원이 어떻게 이미 알고 있었는가? 이에 대답을 해줘야 할 무구원은 혼수상태가 되어 침대에 누워 있었다.

“모난아, 내 물건을 돌려줘. 이번엔 가짜가 아닌 진짜로 말이야.”

돌아와서 확인해보니 무구원이 제법 머리를 써서 만든 정교한 모조품이더라는 설명을 붙이며, 무정원이 가소롭다는 듯이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그러한 술수에 넘어갈 뻔한 건 사실이었기에 결코 이를 가볍게 생각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설계도는 원래 내 소유였다. 작약이 내 아내를 죽이고 강탈한 것이지. 널 용서할 테니 너도 형들 대신에 내게 속죄할 기회를 주마.”

“…….”

“넌 네 형들처럼 괴물이 아니잖니.”

순간, 윤모난은 충동적으로 무정원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결단코 쉽게 제압할 수 있는 체격도 아니건만, 우악스럽게 그를 책상 위로 내다 던진 윤모난은 무릎을 세워 무정원의 명치 부분을 꾹 짓눌렀다. 꽉 힘이 들어간 손아귀가 바르르 떨릴 지경이었다.

씨근거리던 숨이 잠시 잦아드나 싶더니 윤모난이 입에 물려 있던 담배를 책상 위에 신경질적으로 짓이겼다. 무정원의 뺨 옆으로 담뱃재가 흩어졌다. 그리고 차가운 목소리가 무정원에게로 떨어졌다.

“…용서해줘서 고마워요. 값싸고 역겹긴 했지만.”

“그런데?”

“하지만 난 형 용서 못해. 이 모든 얘기를 들어도 당신을 죽이지 않을 이유를 못 찾겠거든. 어쨌건 살아서 그 대단하신 권력을 휘두르려면 모가지 아껴야 할 거 아냐.”

“…….”

“그러니까 내가 생각을 마칠 때까지 얌전히 기다려, 형. 당장은 당신 미련한 동생 덕분에 목숨 부지하고 있는 걸로 하자고.”

“무구원에게 감사 인사는 따로 하지.”

그 말에 윤모난이 뜻 모를 웃음을 짓더니 쥐었던 멱살을 놓았다.

“이제 구질구질한 과거 얘긴 집어치우자구요. 서로 불쾌하기만 하잖아.”

그 말에 자리를 털고 일어난 무정원은 어딘가 조금 씁쓸한 기색이었다.

“일단은 돌아가서 간호에 매진해라. 생각해볼 시간은 충분히 주마.”

“그러든가.”

윤모난은 부러 책상 위에 놓여 있던 자신의 잔을 손등으로 쳤다. 유리잔이 낙하하기 무섭게 쨍그랑하고 유리 조각이 튀자 무정원의 얼굴이 미세하게 일그러졌다. 윤모난은 거칠게 문을 걷어차는 패악질까지 부리며 집무실을 떠났다.

혼자 남은 무정원에게 보좌관 중 한 명이 찾아온 건 조금 시간이 흐른 뒤였다. 내내 생각에 빠진 얼굴로 흩어진 유리 조각을 바라보던 차였다.

“무구원의 상태는 어떻다지?”

“당장 일어나기에는 어려워 보입니다. 진단에 의하면 사실상 코마 상태와 다를 바 없다더군요.”

“가이딩이 영향을 줄 수 있는 확률은?”

그 말에 보좌관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이미 가이드를 포함한 의료진이 모든 정밀 검사를 했습니다. 가이드라 해도 방법이 없을 거라고 모두 확신했습니다.”

“…혹여 죽기라도 하면 성가셔진다. 지금으로서는 무구원이 유일한 협상 조건이니까.”

“네. 그런데 윤모난이 정말로 무구원을 위해서 설계도를 내놓을까요?”

그건 몰라서 하는 소리였다. 윤모난이 자신에 대한 복수를 지금까지 미뤄둔 것은 어디까지나 그가 아직 실행하지 않은 것뿐이다. 언제든지 그가 마음만 먹는다면 여기 북해 본가를 살육의 장으로 만들고도 남았다.

일부러 기차를 북해로 이동시킨 것부터가 그런 자신감이었을 테다. 윤모난은 기차 안에 있는 북해인들의 피로는 모자랐던 것이다. 기어코 북해의 땅을 밟고 이곳에 숨 쉬는 모든 이들을 죽일 각오로 여기에 왔을 터였다. 다만 무구원 한 명이 결정적인 순간 그의 발목을 잡았겠지.

“…서로를 만나게 한 계획이 이렇게 결실을 낼 줄이야.”

뜻 모를 혼잣말에 보좌관은 고개를 들어 오랜만에 퍽 만족한 표정인 무정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무정원은 가장 사나운 이리를 마주하고도 오히려 유리한 입장을 선점하고 있었다. 반면에 윤모난은 모두를 물어 죽일 수 있는 날카로운 이빨을 가졌으면서도 착실히 덫으로 기어들어 왔다.

7년 전도 그렇고 지금도 그랬다. 이다지도 형들과 동생이 닮았다니. 무정원은 조급해하지 않기로 했다. 그저 차분히 기다릴 것이다.

작약이 동생 때문에 허무하게 죽은 것처럼, 모란이 결국 꺾일 그 순간을.

***

무정원의 집무실을 나왔을 땐 이미 밤이었다. 원래 있던 방으로 돌아가는 대신 윤모난은 발걸음을 돌려 예배당 옆에 난 길로 향했다. 아주 오래전에 무정원의 아내 장례식 때 북해에 방문한 적은 있다만 이렇게 집 깊숙한 곳까지 들어온 건 처음이었다.

그런데도 다리가 이미 그 길을 알고 있는 것처럼 절로 움직였다. 예배당 옆 교목이 우거진 오솔길은 겨우 한 사람이 지나갈 만한 넓이로 어둡고 외진 곳이었다. 쿵쿵거리는 발걸음 소리가 바다의 짠 냄새와 교목에서 흘러나오는 청아한 향이 감도는 고요한 길을 깨웠다.

얼마지 않아 길 끝에 뻥 뚫린 바다가 펼쳐지고 발아래로 모래가 밟혔다. 사람이 없는 어둡고 드넓은 백사장을 지나 파도 앞에 선 윤모난은 가장 먼저 손에 들고 있던 모조 펜던트부터 바다에 던졌다.

이윽고 억눌렸던 분노가 파도와 함께 철썩 부딪히더니 터져버렸다. 모든 것을 집어삼킬 만큼 커다란 파도 소리 뒤로 윤모난이 소리를 질렀다.

“…젠장.”

온 힘을 쥐어짜 소리를 지른 탓에 목청이 터져버렸는지 목이 금방 쉬었다. 봄바람치고는 매서운 찬바람이 사정없이 피부를 두들긴 탓에 휘청대던 윤모난은 이미 미쳤음에도 불구하고 더욱 미칠 것 같았다.

“날 용서하겠다고….”

순간 섬뜩한 생각이 윤모난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저 집으로 돌아가서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 다 죽여버릴까?

“넌 네 형들처럼 괴물이 아니잖니.”

그러자 그런 생각을 단속하듯이 무정원이 한 말이 자동으로 재생됐다. 윤모난은 멍해졌다가 자신의 안에 숨은 모순을 깨닫고 말았다. 이 와중에도 무정원의 그 말을 떠올린 것은 그것이 사실이기 바랐기 때문이다.

사실 윤모난은 스스로 괴물로 남지 않기를 바랐다. 물론 형들까지도. 늘 형들은 페르세우스 같은 영웅이고 자신은 그들을 위한 방패이고 싶었던 윤모난은, 이 작은 신화와 같은 상징의 파괴로 인해 근본부터 흔들려버린 것이다.

그렇게 생각해보면 지금껏 자신의 모든 행동이 모두 모순적이었다. 복수를 다짐했으면서 7년이나 머뭇거린 것부터. 적들과 똑같이 아이들의 목숨은 빼앗지 않겠다거나, 안범과 경해국처럼 상관없는 제삼자를 끌어들이지 않겠다며 나름의 선을 지키려는 것도.

“거짓말을 하든 큐브를 이용하든 할 수 있는 건 다 해야 제 형님을 죽일 수 있습니다. 저야 거짓말쟁이이니 부끄러울 건 없습니다만 만약 그 부분이 걸리신다면…”

“양심에 걸려? 우습네.”

큐브를 사용해 무정원을 죽이겠다는 무구원에게 충격을 받은 것도, 그 양심이라는 말에 지레 찔려 비웃은 것도 그러한 맥락이었다. 남은 양심을 지키려는, 즉 나름의 선을 지켜 괴물은 되고 싶지 않다는 마음 때문에.

스스로가 가진 그 모순에 대해 윤모난은 생각했다. 어쩌면 이 모든 비극 속에서도 무구원을 사랑하는 일부터가 시작 아니었을까. 자신에게는 어쩌면 사랑만이 유일하게 남은 인간성을 확인하는 감정이었고. 무구원을 사랑하는 일이 그 일말의 인간성을 수호하고 완전히 괴물이 되지 않는 길이라 생각하면서.

윤모난에게 무구원은 마지막으로 남은 한계선이었다.

“…….”

윤모난은 차갑게 식은 눈으로 검은 바다에 시선을 던졌다. 그리고 직감했다. 그 선은 점점 허물어지고 있었다. 그는 손마디를 죔죔 굽혔다가 펴며 텅 빈 손을 내려다보았다.

순간적으로 손이 피로 젖어드는 환영이 눈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이전이라면 그 끔찍함을 떨치기 위해 머리를 털었겠지만, 윤모난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사람처럼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렇게 한참 시간이 흘렀다. 온몸을 휩쓸고 지나가는 바람이 칼날같이 느껴지기 시작할 때쯤 되어서야 그는 발길을 돌려 묵는 방으로 돌아갔다. 검은 머리칼이 지저분하게 엉켜 푹 내려온 추레한 몰골을 그대로 방치한 채로, 윤모난은 단정한 침대 위의 무구원에게 물었다.

“무구원, 날 위해 목숨도 내놓을 각오가 되어 있다고 했었지.”

“…….”

“내가 더 이상 네가 목숨을 바치려 했던 그런 사람이 아니게 되어도, 그래도 그 선택 후회하지 않을 거냐?”

손끝이 미세하게 찌르르 울렸다. 에너지가 감돌 때 으레 전류가 흐르는 듯 손을 휘감는 것이 느껴진다. 윤모난의 기다란 손가락이 현악기를 연주하듯이 서서히 너울 쳤다. 그는 정신을 집중하기 위해 눈을 감았다.

잠시 뒤 온몸을 타고 에너지가 뜨겁게 솟구쳤다. 손톱 끝까지 뜨겁게 달아오르는 착각이 들 때쯤, 차갑게 식어 있는 무구원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 그러자 무형의 저항감이 손바닥을 뾰족하게 찌르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윤모난은 적에게 칼을 들이대듯 집요하고 단호하게 그 저항을 억눌렀다. 그럼에도 그의 눈은 의외로이 서글픈 빛을 띠고 있었다.

“내 진심을 말해줄까? 나는 네가 후회하는 얼굴을 볼 자신이 없거든. 네가 나한테 실망하게 되는 순간 깨닫게 될 테니까. 내가 정말 네 인생을 진창에 처박았다는 걸. 그러니까 무구원, 그냥 영원히 일어나지 마. 그게 우리한테는 더 좋은 일이야.”

무구원은 사물처럼 뻣뻣하게 굳은 채 윤모난이 하는 행동에 저항은 고사하고 반응조차 보이지 않았다. 말하자면 이것은 이미 자는 사람의 얼굴에 베개를 덮어놓는 것 같은, 순조로운 살인과 매한가지였다.

무구원이 지금 어떠한 상태인지, 이 행위로 인해 앞으로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었다. 그가 대답할 수 있을 리도 없었다. 하지만 늘 그렇듯이 윤모난은 자신에게만은 한없이 순종적인 무구원의 얼굴을 보았다. 그 모습에 오히려 분노가 차오른 것은 가해자 쪽이었다.

“넌 내가 널 죽일 각오까지 했는데 화도 안 나냐? …정말 내가 원하는 대로 하게 내버려둘 거냐고.”

대답해봐. 무구원. 윤모난은 몇 번이고 그렇게 뇌까렸다. 하지만 변함없이 복종을 내비치는 듯이 고요히 잠든 그의 얼굴을 보며, 윤모난의 마음속 서로 다른 모순들이 계속해서 부딪혔다. 지금이라도 그만두라는 마음과 그럴 수 없다는 마음이.

“내가 너한테 바라는 복종이라는 건 말이야. 팀장이 아무리 양아치 같고 못 미더워도…”

“…….”

“그래도 믿는 거야.”

“뭘 말입니까?”

“내가 살길을 찾아줄 거라는 걸 믿어. 죽게 놔두지 않을 거란 걸 맹목적으로 믿으라고.”

과거, 윤모난은 무구원에게 복종을 가르치면서 말했다. 내가 너에게 칼을 겨눠도 두려워하지 말고 내 손에 들린 작은 불을 보고 걸으라고. 언제든 널 살게 해줄 것이라 믿으라 했었다. 그러자 태어나 누군가에게도 그런 믿음을 줘본 적 없을 것 같던, 무구원이 까만 눈을 한없이 느슨하게 풀고선 자신에게 시선을 맞춰왔다. 그리고 말했다.

“팀장님, 살려주세요.”

가족에게마저 버려져 아주 어린 나이에 바다에 빠져 죽을 뻔했던 놈이. 살려달라는 호소를 해봤자 자기 자신 말고는 아무도 구해주지 않는다는 걸 뼈아프게 배우고 자란 무구원이, 처음으로 윤모난에게 진심을 담아 한 말이 그것이었다.

살려달라고. 살고 싶다고.

강한 파동을 피부 사이로 흘려보내던 윤모난은 그 기억을 떠올리고선 상체를 무너뜨렸다. 하지만 파동을 뻗치는 손을 치우지는 않았다. 그는 겨우 쥐어짜낸 쉰 목소리로 말했다.

“…구원아, 미안하다.”

그런데 나한테 남은 게 이 방법밖에 없어. 난 이미 결심했어. 내 인간성을 지키면서 이 모든 일을 끝낼 방법이 이젠 아무것도 없어. 윤모난은 저 심연의 끝에 가라앉은 인간성을 모두 끌어내 사죄했다.

“하지만 이제 두려워할 일은 없을 거야.”

윤모난은 무구원의 턱과 뺨을 쓸었다. 손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행위의 중단으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윤모난은 이미 마음을 결정했고, 그 결심을 돌리지 않기로 다짐했다. 오늘이 지나면 무구원에게 더 미안해하지도 슬퍼하지도 않을 것이다.

순간 무구원의 몸이 저항하듯 크게 덜컹대며 요동쳤다. 윤모난은 경련하는 그의 몸을 온몸으로 짓누르며 끄윽, 하고 앓는 소리를 냈다. 이마에서 배어 나온 땀이 무구원의 단정한 얼굴 위로 빗물처럼 쏟아졌다.

창백한 얼굴을 덧그리며 뚝뚝 흘러내린 땀은 무구원의 뺨을 타고 베개를 적셨다. 윤모난은 마치 목을 조르는 듯 무구원 위에 올라타 자신을 한계까지 몰아붙였다. 전신에서 피가 거꾸로 솟는 듯한 기분을 느끼던 윤모난은 어느새 위로 드리운 검은 그림자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

‘내 동생.’

괴물이었다. 유령이 아니라. 7년 만에 나타난 형의 환상을 마주하며 윤모난은 멍한 표정을 지었다. 무너져버린 정신이 그를 다시 불러냈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괜찮아. 괴로워할 필요 없어.’

“…….”

‘왜냐하면 넌 그런 사랑을 받도록 태어난 존재니까. 돌려줄 필요는 없는 거지.’

하얗게 떠오른 윤모난의 얼굴이 괴물과 정면으로 마주했다. 사악한 괴물의 속삭임은 자괴감을 전혀 희석해주지 않았다. 다만 그것은 이제 윤모난이 형들과 똑같아졌음을 알려줄 뿐이었다.

윤모난의 영혼은 이제 산산이 조각났으며. 그 날카로운 조각으로 자신에게 한없이 맹목적인 사람의 영혼까지 모두 찢어 엉망으로 만들게 될 터였다.

땅을 친 자신에게도 어딘가 올라갈 구석이 있다고 믿었던 때가 있었다. 무구원이 자신에게 주려 했던 구원이 바로 그 길이 될 거라 믿은 적도 있었다. 그러나 이제 어둠은 모든 길을 덮어버렸고, 마침내 이 모든 일의 대단원이 코앞이었다.

그리고 이 마지막에 다다라서야 할 수 있는 선언이 있었다.

“형.”

윤모난은 괴물에게 말했다.

“이제 나타나지 마. 형은 죽었잖아.”

그렇게 윤모난은 사랑하는 형들이 죽은 지 10년이 지나 온전하게 인정할 수 있었다. 지독히도 상실을 앓고 나서야 자신이 품었던 모든 환상과 기대, 그리고 기억들에서 떨어져나와 비로소 현 상태를 오롯이 직시했다.

형들은 영웅이 아니다. 그들은 살인마고 괴물이다. 이 모든 불행을 불러온 장본인들이다.

“이제야 깨달았어. 내가 이렇게 된 건 형들 때문이라고.”

짙게 드리웠던 그림자가 점차 작아졌다. 마주하기만 해도 끔찍했던 그 얼굴이 원래 그 주인이 가지고 있던 아름다운 모습으로, 기억 속 형으로 변했다. 윤약의 하얀 얼굴이 금이 간 거울처럼 일그러졌다.

“형, 그런데 내가 이걸 너무 늦게 깨달은 거 아닐까.”

‘…….’

“난 영원히 이 미로 속에서 나갈 수 없을 것 같아.”

윤약의 손이 어깨에 닿자 윤모난은 더 강하게 에너지를 뻗쳤다. 예전에는 환영이 자신에게 닿을 때마다 그 부분이 칼로 도려지는 듯 고통스러웠는데, 그것조차 모두 착각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형의 환영이 닿는 곳에서는 당연히 아무런 감각도 느껴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죽었으니까. 이미 죽은 과거일 뿐이다. 그것은 자신의 앞에 있는 무구원의 실체감과 퍽 대조되어 분명한 사실로 다가왔다. 윤모난은 죽은 듯이 잠들어 있는 무구원의 손을 더 세게 맞잡았다.

“…그런데 나를 따라서 이 미로 속에서 헤매고 있는 사람이 있는데, 그게 나한테는 유일한 위안이었어.”

이 전적인 자기희생과 집착과도 같은 기다림이 빛을 보여줬다. 그것이 기만이라고 비난하며 원망하고 발버둥 칠 때도 한결같이 구원은 거기에 있었다. 어쩌면 사랑이란 속된 감정마저 초월한 그 순수한 마음을 인정하며 윤모난은 순순히 무구원과 저 자신만의 순간으로 접어들었다.

여전히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었다. 윤모난은 그의 가족을 죽일 것이며, 그러기 위해서 자신의 약점이 된 무구원을 역으로 이용할 셈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을 알고 난 뒤에도 자신과 여기에 있기를 자처하며 고개를 끄덕여줄 무구원을 내려다보며, 윤모난은 그동안 그가 자신에게 보여준 빛을 그대로 긍정했다.

“…그러니 나도 이 녀석에게만큼은 돌려주고 싶었어.”

그 순간, 대답이라도 하듯 무구원의 몸이 예상치 못하게 크게 흔들리는 바람에 윤모난은 뒤로 몸을 물렸다. 무구원은 잠깐 몸을 떨더니 곧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평온한 상태로 돌아갔다.

윤모난은 어느새 자신이 숨을 거칠게 몰아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얼굴을 한 번 쓸자 축축한 물기가 묻어 나왔다. 사방이 고요했다. 환영이 물러가고 방 안에는 단둘뿐이었다.

순간 허하고 괴괴해진 마음에 서늘한 바람이 끼쳐 들어왔다. 윤모난은 방금 전까지 자신이 무얼 하고 있었는지도 잊은 채 잠시 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 그저 몸에서 무언가가 다 증발해버린 듯한 진한 탈력감이 들었다.

무구원의 손이 아까 전 몸부림친 탓인지 이불 밖으로 튀어나와 아래로 떨어져 있었다. 윤모난은 문득 손을 뻗어 그 손을 잡았다. 얼음장처럼 차가워 온기라고는 전혀 느낄 수 없는 무구원의 손을 잡고 한 번 더 파동을 뻗친 것은 거의 반사적인 행동이었다.

그렇게 윤모난은 무구원과 단둘만의 시간을 마음껏 누렸다. 그 지옥 같은 시간이 끝났을 땐 일주일이 흐른 뒤였다.

<6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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