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시간을 찾는 여행
낮은 목소리가 무구원의 귓가에서 웅웅 맴돌았다. 이윽고 손바닥에서 뜨거운 기운이 느껴진다. 꼭 누군가가 꽉 쥐고 있는 느낌이었다. 맞닿은 감각으로 누군가 옆에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윤모난이었다.
‘…그러니 나도 이 녀석에게만큼은 돌려주고 싶었어.’
“팀장님?”
순식간에 따스한 느낌과 손에 닿는 감각들이 물러가고, 검은 파도가 온 시야를 집어삼킬 듯이 무구원에게 달려들었다. 파도가 몸을 휩쓸고 난 뒤에 휘몰아치는 기이한 바람 소리가 이어졌다. 얼굴 위로 따가운 모래가 스친다. 마치 유리 조각 같았다.
온통 까맣게 번진 장면 속 선명한 분홍색 머리칼이 무구원의 시야에 들어찼다. 바람에 엉긴 반곱슬머리가 나비 날개처럼 아름답게 휘날렸다. 익숙한 장면 속에 그 사람이 있었다.
‘괜찮아.’
무구원은 알고 있다. 모래 폭풍 속에 곧 사라질 것 같은 모습으로 서 있는 윤모난이 천천히 걸어올 거라는 것을. 그다음엔 한쪽 무릎을 꿇고서 저와 눈높이를 맞추고 손을 뻗어 얼굴 한쪽을 쓸어내릴 것이다.
‘괜찮아, 구원아.’
울림이 좋은 목소리가 달래듯이 속삭일 테고. 허망한 기분에 뒤로 물러나려 하면 그만큼 더 다가올 것이다. 그리고 한 번도 잊은 적 없는 그 말을 한다.
‘무서워하지 마. 항상 되찾을 방법은 있어.’
자신의 얼굴이 슬픔과 혼란에 젖어들자 윤모난은 몸을 붙이고 팔을 벌려 등을 토닥여준다. 마치 엄마가 아이를 달래듯이. 이 무한한 반복 속에서 그 접촉만큼은 유일하게 생생한 감각을 피워올렸다.
‘내가 되찾아줄게.’
기댈 수밖에 없게 만드는 약속이었다. 무구원은 무거운 팔을 들어 그를 끌어안았다. 모래 폭풍 속에서 둘은 서로를 그렇게 안고 있었다. 그들을 둘러싼 밖은 시련뿐이었지만, 이렇게 있으면 두려움은 어느새 꺼져버린다는 것을 시간 능력자는 이미 알고 있었다.
‘나를 좌표의 중심으로 삼아.’
윤모난이 마침내 몸을 떨어트렸다. 저 멀리 평원 끝에서부터 이는 모래바람이 두 사람을 스치고 지나갔다.
‘가.’
윤모난의 손가락이 이마에 닿았다. 그 자리가 뜨겁게 달아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점점 시공간이 일그러지더니 점점 무너지기 시작한다.
무구원은 이미 알고 있다. 자신보다 훨씬 강해서 감히 걱정할 필요 없는 이 사람을 위해, 무리하게 시간을 돌리면서까지 한 명이라도 더 죽이려던 시도가 너무도 멍청하고 충동적인 짓이었다는 것을. 그 벌로 또다시 이 미로 속에 빠져 앞으로 얼마나 허덕이게 될지 기약할 수 없다는 것도.
하지만 무구원은 자신을 중심으로 삼으라는 윤모난의 목소리를 가슴속에 깊이 각인시켰다. 저 너머, 어둠 속 어딘가 있을 그를 발견하길 고대하면서. 그렇게 무구원은 다시 한번 잃어버린 시간을 찾는 여행에 접어들었다.
주변의 공기가 변하는 느낌과 함께 무구원은 눈을 떴다. 깊은 잠에 빠졌다가 깬 듯이 혼곤한 가운데, 익숙한 방의 천장이 보였다. 격자무늬로 짜인 나무 천장은 북해 양식의 집에서만 볼 수 있는 특징이었다.
고개를 돌려 주위부터 확인했지만 아무도 없었다. 여긴 북해에 있는 자신의 방이었다. 삭막하고 건조한 공간을 보자마자, 죽음과도 같은 적막이 숨통을 조여 무구원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본능적으로 시간을 확인하니 밤 9시 30분이었고, 가시 같은 분침은 순식간에 31분으로 넘어갔다.
“…팀장님?”
주변은 조용했고 윤모난은 어디에도 없었다.
‘돌아온 건가? 아니면 아직도….’
무구원은 몸을 일으켜 침대를 빠져나와 윤모난을 찾기 위해 휘청거리는 걸음을 옮겨 바깥으로 향했다. 맨발로 자갈이 깔린 마당까지 나오자 을씨년스러운 추위가 전신을 파고들었다. 길 잃은 아이처럼 그 온도가 낯설게 느껴졌다.
얼음같이 차가운 돌 위에 서 있던 그는 본능적으로 몸을 돌려 익숙한 길을 따라 쪽문으로 갔다. 어둠이 북해 본가 주변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 청회색 기와 너머는 이상하리만치 고요했다.
예배당 근처 교목 숲을 향해 난 쪽길을 쭉 따라가면 바다가 나온다. 무구원은 그곳을 향해 비틀대며 걸었다. 금세 발바닥에 버석한 모래가 밟히고 파도가 요란하게 우짖는 소리가 그를 반겼다.
“…하아, 하아….”
여기에 와서야 겨우 숨이 트인 무구원은 상체를 무릎에 붙일 기세로 허리를 접으며 숨을 크게 내쉬었다. 결국 힘이 풀린 두 무릎이 푹 모래에 박혔다. 어떻게 된 거지? 돌아온 건가? 팀장님은? 아득한 정신에 시야까지 흐릿해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았다.
멍하니 넋을 놓고 있는데, 달빛이 내려앉아 하얗게 빛나는 모래사장에 웬 인영이 길게 드리워져 있었다. 그림자의 주인은 홀로 밤바다 앞에 서 있었다. 바닷바람에 나부끼는 분홍색 머리를 발견하자 무구원의 새카만 눈동자에 초점이 돌아왔다.
모든 생각을 멈춘 무구원은 모래투성이인 몸을 털 생각도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관자놀이가 지잉 울렸지만 그는 홀린 듯이 그쪽으로 다가갔다.
“어이.”
두 발자국이나 갔을까. 돌연 분홍 머리의 남자가 뒤를 돌아보지도 않고 말을 걸었다.
“라이터 있어요?”
“…….”
“담배 피우고 싶은데. 나 불 좀 빌려주지?”
그의 손에서는 고장이 난 라이터가 찰칵찰칵 소리만 내고 있었다. 남자는 ‘에잇 썅…’ 하고 짧은 욕을 뱉더니 라이터를 주머니에 도로 집어넣었다. 그러고선 불씨 없는 담배를 입에 물고 마침내 몸을 돌려 시선을 마주쳐왔다.
달빛 아래로 익숙하면서도 동시에 낯선 얼굴이 드러났다. 예민해 보이지만 생기 있는 앳된 외모가 눈길을 끌 만큼 훤칠했다. 남자는, 그러니까 윤모난은 저 자신을 멍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무구원을 향해 고개를 옆으로 까닥였다.
“왜 그렇게 보지? 나 뭐 잘못했어요?”
반말과 존댓말를 오가는 그 특유의 말버릇.
“외부인은 바다 쪽으로 들어오면 안 되는 북해 법이라도 있나?”
“…….”
“뭐, 나한테 반하기라도 하셨나. 하하.”
싱거운 말을 해놓고서는 상대가 아무런 반응도 없자, 윤모난은 ‘엇 추워!’라고 외치며 코트 자락을 여몄다. 무구원은 북해의 가혹한 날씨를 견디기에는 한없이 얇은 그의 차림새를 확인하고 제가 입은 옷이라도 벗어주려 아래를 내려다봤다.
하지만 자신 역시 얇은 차림새인 건 마찬가지였고, 심지어 웬 상복을 입고 있었다. 이제야 자신의 행색을 확인한 무구원은 당황스러움에 눈을 끔뻑거렸다. 그 와중에 윤모난은 무구원에게 가까이 다가오며 장난스레 말했다.
“신발도 안 신은 사람한테 옷 뜯어내려던 건 아닌데.”
“아….”
무구원은 자신이 입고 있는 상복을 보며 서서히 상황을 파악했다. 아직 돌아가지 못한 것이다. 여긴 일종의 과거임이 분명했다.
상복을 입었으니 지금은 11년 전에 있었던 큰형수님의 장례 기간일 거다. 무정원이 마지막 날 빈소를 혼자 지키고 싶다며 예배당에서 사람들을 모두 나가게끔 해서 자신도 며칠간 못 잔 잠을 보충하려 방으로 갔던 기억이 남아 있었다.
다만 전과 다른 것은 밤중에 일어나 바다로 나왔다가 윤모난과 마주친 것이다. 몰랐던 사실이지만 아마도 형수님의 장례식에 참석하러 이즈음에 북해를 방문했던 모양이었다. 생각을 정리한 무구원은 당황을 빠르게 가라앉히고 상황에 순응했다.
“…많이 추우시면 안에 들어가서 외투라도 가져다드릴까요?”
그는 이 모든 사정이 복잡한 것과 상관없이 윤모난의 얇은 옷이 신경 쓰였다. 여기 날씨가 어떠한지 전혀 예상도 못한 차림이었다. 밤이라 기온이 더 떨어져서인지 윤모난의 손가락이 빨갛게 언 것이 보였다.
윤모난은 대충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됐다는 시늉을 하곤 입을 열었다.
“상복을 입은 걸 보니, 북해 무씨인가? 정원 형 친척? 아니면 동생?”
신분을 묻는 말에 무구원이 동생이라고 밝히자 그의 얼굴에 서려 있던 희미한 경계심이 사라졌다. 그러고서는 가까이 다가와 흘긋 얼굴을 확인한다.
“영, 형제가 안 닮아서 모르겠다.”
나직이 읊조린 그는 말끝에 슬쩍 귀엽네, 하며 덧붙였다.
“정원 형 동생은 처음 보는데, 이렇게 귀여운 동생이 있는 줄은 몰랐네요. 저는 윤모난입니다. 형이랑 친분이 있어서 조문하러 왔어요.”
“…네.”
이렇게 첫 만남이 또 한 번 뒤틀렸다. 원래대로라면 서곡센터의 대운동장에서 처음 마주해야 했는데, 그보다 앞선 날짜에 이렇게 마주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런 사실 따위 알 리 없는 윤모난은 흥미로운 듯 흠흠 허밍 소리를 낼 뿐이었다.
“그쪽 이름은? 이름은 안 알려줘요?”
“…무구원이요.”
무구원은 복잡한 머릿속과 상관없이 자신을 윤모난에게 소개하는 일에 어색함을 느끼진 않았다. 기실 이런 첫 만남을 반복하는 것은 이제는 익숙해진 일이었다.
“무구원 씨 나이는 몇 살이에요?”
윤모난의 질문에 무구원은 이맘때쯤 나이를 금방 헤아려 답했다.
“20살…입니다.”
“…음. 그래?”
위아래로 쭉 훑는 윤모난의 시선이 은근히 묘했다. 뜻 모를 말을 던진 그는 청회색 기와가 있는 쪽을 흘긋 보다가, 빨갛게 언 손을 코트 주머니에 푹 찔러 넣었다.
“조문하러 온 건데,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늦었네요. 혹시 여기 주변에 어디 묵을 만한 곳이 있을까요? 곧 통금인데 내일 아침 기차라서. 춥지만 않으면 여기서 밤새워볼 만할 텐데 너무 추워서 못 견디겠어.”
“여기 근처에 숙박 시설은 전혀 없습니다. 시내로 나가면 호텔이 있는데 거기로 가시죠. 제가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음.”
무구원이 보인 친절에도 윤모난은 잠시 생각에 잠긴 듯 침음할 뿐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찬바람을 맞으며 살짝 물결치는 앞머리를 슥슥 쓸어올린 그가 비시시 웃었다.
“처음 보는 형이 꼬신다고 호텔을 그냥 따라오겠다 그러네.”
“…네?”
“당신은 변태 조심해야겠다.”
제 생애 가장 조심했어야 할 변태는 바로 당신인데요. 무구원은 목끝까지 차오른 말을 삼키곤 그의 말 같지도 않은 농담에 덩달아 피식 웃고 말았다. 멍한 기분의 여파인지 맥이 탁 풀렸다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이었을 거다.
“하얗게 질려서 갑자기 튀어나오길래. 귀신인 줄 알았는데 웃는 거 보니까 사람 맞네요.”
“…….”
“시내로 나가야 하는 거면 귀찮다. 추워도 그냥 여기서 시간 때워야겠네.”
윤모난은 다시 바다 근처로 터벅터벅 걸음을 옮겼다. 춥다면서도 까만 밤바다가 맘에 들었는지 그는 수평선을 한참 바라보다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를 밟기도 했다. 남경에서 가장 먼 이곳에 발을 디딘 그는 숨통이 트인 사람처럼 이 시간을 오롯이 즐기고 있었다.
거센 해풍이 해변을 스치고 지나가는 순간, 윤모난이 내내 손에 들고 있던 담뱃대를 놓치고 말았다.
“내 담배! 돛대인데!”
제발 저 몸에도 안 좋은 담배 좀 끊었으면 좋으련만…. 무구원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윤모난의 옆으로 다가가 파도가 담배를 삼킨 방향으로 손을 뻗어 시간을 돌렸다. 그러자 바람에 날아간 담배가 다시 윤모난의 손에 안착했다.
“주머니에 넣으세요. 여긴 바람이 많이 불어서 소지품을 놓치기 쉽습니다.”
“고마워요.”
정중하게 감사 인사를 하던 윤모난의 얼굴에 흥미가 번졌다. 그는 담배를 손가락 사이로 굴리다가 또다시 바람에 흘려보냈다. 그러곤 입에 침도 안 바른 표정으로 뻔뻔하게 요구했다.
“아이고, 이를 어쩌나. 내 소중한 담배. 아까 그거 또 해봐요.”
“…제가 똥개입니까.”
“에이― 해봐.”
“정말, 팀장님은….”
“응? 팀장님?”
저도 모르게 내뱉은 호칭을 깨닫고 무구원은 입을 꾹 다물었지만 이미 늦었다. 그는 뭐라 말해야 할지 몰라 입을 꾹 다물고 윤모난의 돛대부터 구해냈다.
“팀장님이 누구지? 난 윤모난인데.”
“…….”
“뭐, 얘기하기 싫음 말아요. 당신은 말이 별로 없는 편인가 봐. 그건 형이랑 좀 다르네.”
정원 형은 당신보다는 대화하는 재미가 있는 편인데. 그 말을 들은 순간 무구원의 눈이 대번에 날카로워졌다. 그러고서는 갑자기 손을 들어 윤모난의 손등을 탁 내려친다. 그 바람에 윤모난은 두 번이나 놓쳤던 담배를 또 파도에 잃고 말았다.
“아야.”
하나도 안 아프면서 윤모난은 어깨를 과장되게 움츠리며 가여운 척을 했다. 어린애 같은 심술에 맞춰준다고는 하지만 무구원이 갑자기 성질을 낸 이유를 알지 못하겠다는 듯, 울상인 표정 사이로 의아함이 언뜻 비쳤다.
“담배 못 피운 지 네 시간이나 됐는데….”
무구원이 휙 고개를 돌려버리자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잠시 후, 음산하게 구시렁거리던 윤모난이 갑자기 등으로 달려들었다. 무구원은 저항도 못하고 팔이 꺾인 채로 바닥에 엎어졌다. 윤모난은 태연히 협박했다.
“빨리 내 돛대 안 구하면… 여기서 확 따먹어버린다.”
“…….”
“거짓말 같아?”
거칠게 엉덩이를 움켜쥐는 손길이 느껴졌지만, 무구원은 그런 협박에는 이미 면역이 있었다. 겉으로는 꿈쩍도 하지 않던 그는 무심결에 윤모난의 손등을 때린 건 후회했다. 과거로 와버렸다고 한들 20살의 어리숙한 행동을 해버리면 어쩌냐고, 무구원은 속으로 자기 자신에게 훈계했다.
그때, 뒤에 바짝 붙은 윤모난의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그 생경한 생체반응이 정말 자신이 들은 게 맞나 싶어 무구원은 물었다.
“…배고프세요?”
“어.”
“들어가실래요? 안에 가서 밥도 대접하고 담배도 새것으로 가져다드리겠습니다.”
“라이터도.”
“네. 알겠습니다.”
그렇게 원하는 걸 약속받고 나서야 윤모난은 잡고 있던 팔을 풀어주었다. 과연 22살이라는 나이답게 조금은 단순하고 악의도 없었다. 무구원은 그를 데리고 자신이 뛰쳐나온 쪽길을 통과해 자신의 방이 있는 외진 건물로 향했다. 그러자 윤모난이 뒤를 쫓아오면서 물었다.
“나 처음 봤는데 왜 이렇게 잘해줘요?”
“저희 집에 오신 손님이니까요. 형수님 장례식에 조문하러 오셨다면서요.”
“북해 사람치고는 친절하네. 여기 광신도들은 하나같이 메마른 줄 알았는데.”
“…친절한 북해 사람도 찾아보면 있습니다.”
두 사람은 다행히 아무도 마주치지 않고 방에 도착했다. 적당한 신발을 찾아 신고 윤모난에게 방문을 열어준 뒤에 여기서 잠깐 기다리라는 말을 남기고 사라진 무구원은 곧이어 큰 대접 두 개를 들고 돌아왔다.
그의 손에 들린 건 소박한 나물이 올라간 간장 양념 베이스의 비빔밥이었다. 생전 그렇게 밍밍해 보이는 음식은 처음 본 윤모난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그릇을 받아 들었다.
“고추장 빼먹은 거 같은데.”
“원래 그렇게 먹는 겁니다. 간은 충분히 되어 있어요.”
“거짓말. 이렇게 하얀 비빔밥이 있을 리 없잖아.”
미심쩍긴 하지만 허기를 해결하는 게 먼저였다. 윤모난은 숟가락을 들어 비빔밥을 한술 떠서 맛봤다. 우물우물 저작운동을 하던 턱이 멈칫했다. 북해는 음식이 별로 맛이 없다고 하더니 아주 밍밍하고 씹히는 나물도 거칠고 질겼다. 밥알과 나물이 입안에서 술래잡기하는 기분이랄까….
그런데도 시장이 반찬이라고 꿀떡꿀떡 몇 숟가락을 넘기고 나니 아주 못 먹을 수준은 아니었다. 윤모난은 대접을 순식간에 비웠다.
“입맛에 맞으세요?”
내내 옆에서 밥 먹는 걸 지켜만 보던 무구원이 물었다. 윤모난은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무구원이 한 입도 건드리지 않은 제 밥을 그에게 내밀었다.
“더 드세요. 그럼.”
“그럼 나야 고마운데, 당신은 안 먹어요?”
“저는 이미 배부릅니다.”
“그래요, 그럼.”
윤모난은 사양하는 법도 없이 그릇을 가져갔다. 무구원은 그 광경이 무슨 대단한 구경거리나 되는 듯이 시선을 떼지 않고 뚫어지게 지켜보았다. 조금 뻔뻔한 성격인 윤모난마저 민망해질 정도로 노골적이었다.
“혹시 내 얼굴에 밥풀 묻었어요? 왜 그렇게 빤히 봐. 체하겠네.”
“그냥…. 밥을 그렇게 맛있게 드시는 게 신기해서요.”
너무 게걸스럽게 먹었나 싶어 살짝 민망해진 윤모난이 이마를 슬쩍 긁자, 무구원이 물을 따라주며 자연스레 시선을 돌렸다. 구경을 그만둘 모양이었다.
“알겠습니다. 안 볼 테니까 더 드십시오.”
“…봐도 돼. 봐도 되는데. 정원 형 동생 참 특이하네.”
비빔밥 두 그릇을 비운 윤모난은 쭉 기지개를 켜더니 제 방인 듯이 뒤로 벌러덩 눕기까지 했다. 그렇게 눈을 깜빡이며 천장을 구경하던 그가 문득 몸을 옆으로 세우곤 이상한 질문을 던졌다.
“나 밥도 먹였겠다. 이제 뭐 할 건데?”
“네?”
“보통 차근차근 본론 들어가는 타입들이 이러잖아. 서로 말 좀 트면서, 밥도 한 끼쯤 하고… 그러고 나면 원하는 게 나오던데.”
그 뻔뻔한 말에 무구원의 얼굴이 굳어버리고 말았다. 안 그래도 낮은 목소리는 반음 더 낮아졌다.
“…항상 이런 식으로 애인들을 만나셨던 겁니까?”
또다시 무구원의 눈매가 사나워지는 걸 본 윤모난은 진심으로 이 만남이 흥미로워지기 시작했다. 그는 귀에 괴고 있던 손을 풀며 무구원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어이, 정원 형 동생. 참 이상하네. 너 나 알아?”
단도직입적인 질문에 무구원은 잠시 할 말을 잃은 채 주먹을 꽉 쥐었다. 당신을 아느냐고? 참으로 답하기 힘든 질문이었다. 저 자신도 납득하기 힘든 이 시간의 꼬임을 설명할 수 있을 리 없기에. 무구원의 얼굴에서 복잡한 기색을 읽은 윤모난은 더 묻지 않고 물러섰다.
“담배랑 라이터는?”
“…여기요.”
“수상하긴 하지만 일단 넘어간다.”
윤모난은 새로 얻은 담배에 바로 불을 붙이며 자리에서 훌쩍 일어났다. 그러고는 무구원의 방을 크게 한 바퀴 둘러보다가 문득 물었다.
“수도 훈련 학교 나왔어요? 두 살 어리면 나랑 마주쳤을 텐데. 처음 보는 얼굴이라.”
“저희 형제들은 큰형님 빼고는 모두 북해에 있는 훈련 학교에 진학했습니다.”
“아.”
각 거점마다 훈련 학교가 있기는 하지만, 명실상부 수도에 있는 곳이 그중 최고 명문이라 할 수 있었다. 각 집안에서는 아끼는 자식들을 거기에 넣으려고 애쓰는 것이 반도의 일반적인 풍경이었다.
윤모난은 딱히 북해 가문 사정에 대해서는 아는 바 없었지만, 이런 집안에서 태어났으면서 굳이 지방에 있는 훈련 학교에 갔다는 말인즉 그가 부모에게 딱히 귀여움은 못 받고 자랐다는 의미였다. 희귀한 시간 능력자라면 수도에 올라와 교육을 받는 편이 더더욱 좋았을 텐데.
윤모난은 조금 아쉽다고 생각하며 시선을 옮겼다. 무구원의 방 벽 한쪽을 빼곡하게 메운 책들이 눈길을 끌었다. 방 주인이 꽤나 문학 소년이구나 생각하며 윤모난이 물었다.
“이건 나도 좋아하는 책인데. 읽어봤어요?”
윤모난이 발견한 것은 마르셀 프루스트의 소설이었다. 그의 손에 들린 책을 보자마자 어쩐지 무구원은 목이 콱 막힌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읽은 적 있습니다.”
“나도. 특히 「스완의 사랑」 파트가 좋던데.”
“왜 그 부분을 가장 좋아하십니까?”
무구원은 항상 궁금했던 질문을 불쑥 꺼내놓았다. 그러자 윤모난이 어렵지 않은 질문이라는 듯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그냥, 사랑의 본질을 적나라하게 말해주니까요. 치명적일 만큼 위력적이지만, 한편으로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게.”
“…….”
“의미와 무의미를 동시에 가지는 거지.”
윤모난의 얄궂은 장난이 의미하는 바가 결국 이거였나. 과거의 그에게서 수수께끼의 답을 얻은 무구원은 그 말을 가만히 삼키며 자신의 마음 한구석에 보관해두었다.
“시간 능력자면, 시간 역행 능력자인가요?”
때맞춰 윤모난이 자리로 돌아와 화제를 돌렸다.
“네. 맞습니다.”
“예전부터 궁금했던 건데, 시간 능력자들이 시간을 돌리면 타임라인이 어떻게 되는 거죠? 평범한 사람들은 시간이 일직선이라고 생각하는데…. 시간을 돌릴 수 있다는 건 사실 그렇지 않다는 뜻이잖아.”
윤모난은 말을 이어가면서 카펫 바닥에 손가락을 놀려 직선을 그렸다가, 끝에 방향을 달리해 뒤로 쭉 곡선을 그렸다. 그는 ‘이렇게 되는 건가?’라는 말과 함께 다시 곡선 모양으로 손끝을 문질렀고, 그려진 무늬는 점점 이상한 매듭 모양으로 변했다.
카펫 위 이리저리 엉클어진 모양을 보던 무구원은 가만히 침묵하다가, 윤모난의 고개가 조금 기울어질 때가 되어서야 입을 열었다.
“…그것과는 조금 다릅니다.”
무구원은 카펫을 손으로 쓸어 남은 자국을 깨끗하게 지운 뒤 완전히 다른 모양을 그렸다. 윤모난은 검은 자국으로 물들어 있는 기다란 손을 눈으로 좇았다. 이윽고 카펫 위에는 완전히 다른 모양이 나타났다. 가로와 세로선이 무수히 엮인 격자무늬였다.
“사실 시간을 굳이 모양으로 그린다면 이런 격자에 가깝습니다. 각 선이 만나는 접점마다 하나의 현실이 존재하죠. 과거, 현재, 미래라는 건 다소 관념적인 말입니다. 격자로 보면 선후 관계를 파악하기 힘드니 그런 게 있을 수 없으니까요.”
“여러 개의 시간이 여러 개로 동시에 존재한다는 뜻인가요?”
“네, 접점마다 각각의 우주가 놓여 있는 거죠.”
“흐음. 그럼 시간 능력자는 하나의 접점에서 선을 따라 하나의 접점으로 이동하는 거고?”
“굳이 따지자면 그렇다고 할 수 있겠네요.”
“영업 비밀 같은데 오늘 처음 보는 사람한테 알려줘도 돼요?”
“…비밀은 아닙니다. 저 혼자 생각한 거라 대단한 것도 못 되구요.”
그런데도 윤모난은 카펫 위의 그림을 흥미롭게 바라보았다. 그러다 문득 한 접점에서 공백을 넘어 대각선에 있는 다른 점으로 훌쩍 손가락을 넘기며 물었다.
“그럼 이렇게 폴짝 뛰어가는 건 안 되나. 가로세로 선만 따라가면 너무 비효율적인 것 같은데.”
“…….”
“이론상으로는 가능하지 않나요?”
“…글쎄요.”
“이런 경우 역행이라기보다는 횡단이라는 말이 더 정확하겠네.”
그에게는 다소 흥미로운 주제였는지. 윤모난은 무언가 골똘히 생각에 빠진 표정으로 턱을 매만졌다. 그 광경을 바라보며 무구원은 저도 모르게 입을 열고 말았다.
“격자가 복잡하게 펼쳐져 있는 탓에 정확한 지점으로 횡단하려면 좌표의 중심이 필요할 겁니다.”
“중심?”
“네. 좌표를 설정하려면 기준이 되는 원점이 필요하니까요.”
무구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원하는 우주로 가기 위해서는 원점이 필수불가결했다. 윤모난이 그에게 말했듯이.
‘나를 좌표의 중심으로 삼아.’
좌표 사이를 횡단하며 다른 우주 속에서 길을 잃을 때마다 무구원에겐 돌아갈 원점이 필요했다. 그리고 뒤엉킨 시간의 흐름 속에서 이정표가 되어주는 건 언제나 윤모난이었다.
그런데도 이 사랑이 무의미하다고? 그건 몰라서 하는 소리였다. 무구원은 저에게 한 번도 무의미로 다가온 적 없는 윤모난의 얼굴을 코앞에 둔 채 하고 싶은 수많은 말들을 겨우 삼켰다.
“이론상 그렇다는 겁니다.”
“…음, 일리 있는 말이네. 격자무늬란 비유가 정확해요. 단순하지만 시간을 공간적으로 이해하는 데 제격이고. 몇백 년 전 트랜스들이 무간 경계 너머로 다른 차원을 만들었을 때도 시간계 능력이 동원됐으니까.”
윤모난은 무구원의 시간 개념에 기반한 다중 우주론에 꽤나 흥미를 보이며 여러 가지 의견을 보탰다. 그렇게 시간이 조금 흘렀을 때였다. 갑자기 무구원의 팔을 끌어당겨 시계를 확인한 윤모난이 대뜸 한 가지 더 부탁했다.
“아, 전화 좀 쓸 수 있을까요. 여기 올 때 동료들한테 따로 말을 안 하고 나온 거라 연락해야 해서.”
“네. 저기 있는 거 쓰시면 됩니다.”
무구원은 부탁하지 않았는데도 알아서 자리를 비켜줬다. 윤모난은 서곡에 있는 자신의 팀 합숙소로 전화를 걸었다. 자신은 탈영이나 다름없는 짓을 했으므로 형들은 난리가 났을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신호음이 몇 번 이어지기도 전에 달칵하고 누군가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모난이니?
대뜸 동생의 이름부터 부르는 목소리를 들으니 어지간히 걱정한 게 아닌 것 같았다. 윤모난은 부러 침착한 목소리로 대답하며 통화를 이어갔다.
―못난아, 너….
“형, 미안. 어디 가는지 말하면 못 가게 할 것 같아서.”
―지금 어디서 전화하는 거야.
전화를 받은 건 큰형이었다. 늘 그렇듯이 차분한 목소리였다.
“정원 형 아내 장례식에 조문 왔어. 형, 근데 나 탈영 상태인데 어떡해?”
―…지금 북해에 가 있다고?
“팀장 권한으로 휴가 처리 해주라. 내일 아침에 돌아갈게.”
―북해에 있다고 하면 약이 싫어할 텐데. 일단은 어디에 갔는지는 우리끼리 비밀로 하자.
“우리 둘째 형 화 많이 났어?”
되묻는 말과는 달리 윤모난의 얼굴엔 걱정하는 기색조차도 없었다. 그저 전화선을 손끝으로 둘둘 말아가며 약이 얼마나 난리를 쳤을지 확인만 했다. 그런 동생의 의도를 모르지 않을 윤작이 한숨을 내쉬었다.
―너 찾는다고 따라서 탈영했으니 곧 전화 오면 알겠지.
“…으음. 그래?”
―아마도 북해에 갔을 수도 있겠어. 걔가 너 찾는 덴 귀신이잖아. 어찌 됐건 사고 치지 말고 돌아와.
“작은형이 나간 게 언제쯤이었는데?”
―너 사라지고 세 시간 뒤였으니 충분히 북해에 가고도 남을 시간이지.
“그래, 그럼 형이랑 같이 돌아가야겠네. 걱정하지 말고 먼저 자. 벌써 새벽이잖아.”
―그래.
수화기를 내려놓고 한숨을 푹 내쉰 윤모난은 혼잣말로 볼멘소리를 늘어놓았다.
“…형 왔으면 얼른 가야겠네.”
둘째 형이 왔다면 여기서 이러고 있는 건 좋지 않다는 생각에 윤모난은 서둘러 방을 빠져나왔다. 복도에서 기다리고 있던 무구원이 기척을 듣고 그를 바라봤다. 윤모난은 올 때처럼 얇은 코트를 입은 차림새였다.
“무구원 씨. 이 야심한 시각에 결례가 많았습니다. 난 이제 갈게요.”
“…네?”
밥을 해결하자마자 자리를 뜨는 비정한 길고양이처럼, 윤모난이 살랑살랑 손을 흔들며 작별 인사를 남기고 마당으로 내려갔다. 무구원이 마중도 못하고 멍하니 서 있는 걸 본 그가 싱긋 웃었다.
“만나서 반가웠어요. 또 보자고.”
자정을 훌쩍 넘겨 가장 어둠이 짙은 시각. 윤모난은 미처 인사할 틈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아마도 바닷가에 난 쪽길을 통해서 돌아갈 것이다. 걱정할 만한 사람이 아니라는 건 알면서도 무구원은 그 자리에 서서 그를 삼킨 어둠을 한참 바라보았다.
한편 윤모난은 무구원의 예상대로 바닷가 쪽으로 난 통로를 따라 빠져나와 한적한 길을 걸었다. 한참 가다가 보니 적당히 빌릴 만한 바이크가 눈에 들어왔다. 대충 예전에 연마한 나쁜 손버릇을 이용해 쉽게 시동을 걸자, 바이크는 아무도 없는 도로를 미끄러지듯 달려갔다.
날카로운 겨울바람이 분홍 머리카락을 할퀴고 지나갔지만, 그 저항감이야말로 진정한 자유로움 중 하나였다. 그 감각을 만끽할 겸 윤모난은 일부러 돌아가는 길로 핸들을 꺾었다.
“으, 추워.”
적당히 통금이 끝나가는 시각에 시내로 접어든 윤모난은 몸을 부르르 떨며 얼어붙은 뺨을 문질렀다. 북해역엔 첫차를 타기 위해 몰려든 사람들이 간간이 지나다니고 있었다.
“수도행 첫차가 10분 뒤에 출발합니다.”
승무원이 역내를 돌아다니며 기차 출발 시각을 알려왔다. 서곡센터로 가기 위해서는 수도 중앙역으로 가서 기차를 갈아타는 고단한 여정을 거쳐야 한다. 기차에서 눈을 좀 붙여야겠다는 태평한 생각과 함께 윤모난은 앞으로 쏟아지는 머리를 쓸어 올리며 예약한 객실로 향했다.
“하암―!”
오랜만의 밤 나들이라 피로가 순식간에 몰려왔다. 하품을 하며 벌컥 문을 열었는데, 이미 안에는 다른 승객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왜 왔으면서 미리 말 안 하고?”
윤모난은 놀란 기색도 없이 그의 건너편 좌석에 몸을 욱여넣었다. 그러자 윤약이 그냥, 하는 심드렁한 대답과 함께 긴 다리를 뻗어 윤모난의 허벅지 옆으로 발을 올렸다. 훈계도 잔소리도 없었다. 어차피 한다고 한들 뻔뻔한 동생이 들을 리도 없었지만.
“형.”
“응.”
“나 졸려. 베개 하게 코트 줘. 내 거는 이불로 덮을 거야.”
“거기 베개 따로 있잖아.”
“기차 베개는 퐁신하지 않아서 싫어.”
윤약은 하는 수 없이 옆에 곱게 벗어놓은 코트를 동생에게 건네주었다. 그걸 돌돌 말아 제 머리에 받치던 윤모난은 무언가 뒤통수를 찌르는 이물감을 느끼곤 미간을 구겼다. 확인해보니 코트 안쪽에 권총이 들어 있었다.
“나 찾으려고 여기까지 온 거 아니야? 설마 나 쏴버리려고 가져왔어?”
“아니.”
“이거 장전되어 있는데. 하마터면 머리에 구멍 날 뻔했잖아.”
재빠른 솜씨로 탄창을 확인한 윤모난이 형에게 권총을 툭 던졌다. 윤약은 그걸 옆으로 치우면서 윤모난의 가마 쪽에 위치한 발로 머리를 툭툭 가볍게 건드렸다.
“머리가 눅눅한 게 엉망이다. 소금기 같은데. 바다 보러 갔어?”
“응. 구경하고 싶어서.”
“수영도 하지 그랬어?”
“그러기엔 너무 춥고. 아 참, 거기서 누굴 만났는데. 꽤 재밌었어.”
“그래?”
“응. 근데 나 너무 졸리다. 형, 발 치워. 도착하면 깨워주고. 내려서 얘기해줄게.”
윤모난은 코트를 코까지 끌어 올리며 눈을 감았다. 이내 색색 숨소리가 들려오는 걸 보니 금세 잠에 빠진 모양이었다. 동생의 잠버릇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아는 윤약은 그의 몸을 바로 누인 다음, 신발을 벗겨줬다.
그러자 곧이어 작게 코를 고는 소리가 들렸다. 못난 동생을 가만히 보던 윤약은 문득 그의 코 아래 손가락을 가만히 가져다 댔다.
“코 골지 말라니까. 점잖지 못하게.”
숨이 막힌 윤모난이 금방 끄응 소리를 내며 뒤척였다. 윤약은 코 밑에서 손을 치우며 숨통을 놔줬다가 기회를 봐서 다시 숨을 막았다.
“허락 없이 남이랑 어울려 다니기나 하고.”
어느새 다섯 손가락이 쫙 펼쳐져 윤모난의 얼굴을 가볍게 틀어쥐었다. 윤약은 무감정한 목소리로 잠든 동생을 훈계했다.
“여기저기 웃어주고. 우리 못난이가 형을 자꾸 서운하게 만든다.”
“…….”
손을 치우고 윤약은 자리로 돌아갔다. 이곳에 올 때 들고 온 술병은 이미 반쯤 비어 있었다. 병을 들어 한 모금을 목젖 너머로 털어 넣으며 윤약은 백사장에서 동생과 대화하던 남자를 생각했다.
얼굴 생김새를 보아하니 아마도 무정원의 동생인 듯했다. 시기가 좋지 않긴 했지만 별다른 개입 없이 돌아선 것은 윤모난이 그를 향해 밝게 웃었기 때문이다. 동생이 그런 식으로 웃으면 불쾌한 일도 넘어가는 아량 정도는 베풀어야 하는 것이 형의 역할이었다.
누군가는 이런 내리사랑이 상사병이 아니냐며 조롱하던데. 어쩌겠는가. 내 동생을 낳은 마녀가 동생을 무조건 사랑해줘야 한다는 저주를 내린 것을. 윤약은 창밖으로 동이 터오는 것을 확인하고선 이내 커튼을 쳤다.
이 우주에서도 시간은 계속 흘렀다.
시간의 굴레에 갇힌 무구원은 일련의 사건들을 겪으면서 과학적 설명이 모든 것을 납득하게끔 만들어주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사실상 논리적으로 이해하기에 어려운 문제는 아니었으니 거기까지 나갈 일도 없었지만.
그의 짐작은 시간 역행 능력자가 시간을 돌린다는 것이 기존의 시간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우주에 접근하는 쪽에 가깝다는 가설 정도였다. 그러니 이 능력의 본질 자체도 사실은 역행이 아니라 횡단이었을 테다.
결국 시간은 공간적인 개념이고, 하나의 시간은 하나의 우주라고 할 수 있다. 격자로 엮인 여러 개의 우주에서 수없이 길을 잃었던 지난 7년 동안, 무구원은 이런 일이 자신의 에너지에 과부하가 걸렸을 때 발생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자신의 시간 여행은 이능력이 마음대로 작동한 결과라는 것을 알고선 이를 이능력 장애라고 판단했다.
“오늘부로 국가이능력기관 전투조 2부 7팀에 배치받은, 그… 경해국입니다요.”
껄렁한 인사가 전혀 신입답지 않았다. 불손한 까까머리를 본 2부 7팀의 강 팀장이란 남자의 얼굴이 험악하게 구겨졌다. 그는 대번에 경해국의 정강이를 퍽 걷어찼다. 바로 ‘씹!’ 하고 상스러운 욕이 튀어나왔다.
“어라. 이 새끼 군기 봐라? 씹? 씨입? 야, 신입. 너 기관이 장난 같아?”
“…씨.”
“이 새끼. 이거 안 되겠다. 경해국. 복무 신조 읊어.”
강 팀장은 초장부터 군기를 바짝 잡을 기세였다. 무구원이 보기에도 막 소속 배치를 받은 갓 20살의 경해국은 신입다운 구석이 전혀 없었다. 제 성격을 죽이기는커녕 정강이를 걷어차이자 금세 살기를 드러내는 두 눈에서는 금방이라도 불꽃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하지만 6개월에 달하는 예비 훈련소에서 제 성격대로만 행동해서는 안 된다는 것쯤은 배운 그였다. 그래서 그 산만한 머리통으로 6개월간 외우지 못한 복무 신조 앞머리를 외우는 시도는 나름대로 해보려 한 것이다.
“우리는 국가이능력기관에 복무하는 제1 반도 공화국의 포스트 전사로서… 반도의 대지를 수호하고, …아니 대지를 방위하고, 국민을….”
“와, 씨. 이거 개빡대가리 아니야? 첫 문장부터 막히는 놈은 내 팀장 인생에서 처음 봤다.”
강 팀장의 말에 경해국이 고개를 푹 숙였다. 그 얼굴이 빨갛다 못해 거무죽죽해지는 것이 실시간으로 보였다. 생각해보면 경해국은 예비 훈련소에서 훈련 교관에게 ‘사상 최악의 돌대가리. 넌 포스트 종의 수치다.’라는 소리까지 들었었다.
예비 훈련소를 떠나 서곡에 오면 그런 비난도 그만 듣겠지 싶어 제 딴에는 꾹 참았던 모양인데, 무구원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렇게 쌓인 경해국의 화가 신입 첫날 지뢰처럼 터진다는 것을.
이 이후로 펼쳐질 일은 다음과 같다. 방으로 돌아간 경해국은 홧김에 제 방 침대를 불태우고 창문을 머리로 깨는 자해까지 선보인 뒤, 강 팀장을 패려고 달려가던 참에 그걸 말리는 자신과 싸운다. 그게 경해국과의 공식적인 첫 만남이 된다. 하지만….
“그만하시죠. 그깟 복무 신조, 첫날이 아니면 읊을 일도 없지 않습니까.”
뜬금없이 끼어든 목소리에 또 한 번 경해국의 정강이를 군홧발로 걷어차려던 강 팀장의 다리가 공중에서 멈췄다. 2부 7팀 팀원의 시선이 문제아인 경해국이 아니라, 그 옆에 꼿꼿이 서 있던 또 다른 신입에게 모인 것은 그 순간이었다.
단정한 것이 한눈에도 모범생 같던 무구원이 명백히 반항심을 내비치며 끼어든 것이다. 신입 주제에. 감히. 팀장한테. 그를 딱히 신경 쓰고 있지 않던 사람들의 얼굴이 도미노처럼 연이어 굳었다. 그깟 복무 신조?
“이건 또 뭔 참신한 폐급 새끼지?”
서곡에서 팀 내 위계는 절대적이다. 적어도 신입 시절의 무구원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사실상 여기 서 있는 무구원은 갓 20살의 모습을 하곤 있었지만, 시간을 횡단할 수 있는 이능력자였다.
여기 있는 그 누구도 그가 이 평범한 일상을 벌써 세 번째 반복하고 있다는 걸 모를 것이다. 심지어 무구원조차 미처 예상치 못했는데 누가 알았겠는가.
세 번째로 똑같은 일상을 보내면서, 무구원은 상상 이상으로 심한 권태에 휩싸인 상태다. 경해국이 정강이를 실컷 얻어맞고 방으로 돌아가 사고를 치는 그 일련의 과정을 또 볼 만큼 마음의 여유가 별로 없었던 것이다.
“야. 무구원.”
“…….”
“북해 무씨.”
“네.”
“너도 얘처럼 네 가문 믿고 까부냐? 하― 씨발, 좆같네. 동산이랑 북해에서 신입 한 명씩 들어온다고 하더니. 무슨 양반 나으리들 납시셨구만? 모가지가 왜 이렇게 뻣뻣해!”
강 팀장의 분노의 화살은 어느새 경해국이 아닌 무구원에게로 돌아가 있었다. 무구원은 솔직히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알고 있던 현실을 이런 식으로 소소하게 바꾸는 유희가 자신의 권태에서 비롯된 쓸데없는 짓임을.
어차피 이 우주에서 이런 짓을 한들, 자신이 원래 있던 우주에 영향을 끼치는 것은 아니었다. 두 우주는 엄연히 다른 현실이라 할 수 있을 테니. 영원히 여기에 머무르지 않는 이상 의미 없는 짓이었다.
그런데도 이렇게 개입하여 현실이 조금씩 바뀌는 것을 볼 때마다, 미처 몰랐던 경우의 수를 발견할 때마다 그는 아릿한 쾌감을 느꼈다. 평소 덤덤한 그에게 있어서는 너무나도 미묘한 느낌이었다.
“이 새끼가 이 와중에 딴생각을 하네?”
곧이어 얼굴로 주먹이 날아왔다. 무구원은 분풀이를 실은 주먹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옆에서는 경해국이 귀를 후비적거리면서 ‘이 미친 새끼는 뭐여?’ 하는 심드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어쨌든 이 우주에서 팀장의 신입 기강 잡기는 경해국이 아니라 무구원을 향했고, 기합과 폭력은 저녁 늦게서야 멈췄다. 모든 행위가 끝나고 무구원은 발이 닿는 대로 훈련 동으로 향했다. 그리고 화장실을 찾아 들어가 세면대에서 붓고 피나는 얼굴을 씻어 내렸다.
그는 하수구로 빨려 들어가는 핏물을 바라보며 또 멍한 기분에 휩싸였다. 고통은 참으로 실제적이다. 상처가 욱신대고 터진 곳이 쓰라린 건 바로 지금 여기가 현실이라는 증거니까.
“대체 나는 뭘 하고 싶었던 건지.”
무구원은 자조적인 혼잣말로 아까 자신이 한 행동을 지적했다. 아무리 권태로웠다지만 쓸데없는 짓에 몸과 정신만 파먹혔다. 경해국이 정강이를 수백 번 까여 다리가 부러지든 말든 상관할 일이 아니었는데.
왜냐하면 여긴 나의 우주가 아니니까. 내가 속한, 내가 있어야 할 우주는 조카의 복수를 하려는 윤모난이 있는 곳이다. 그러니까 그 사람이 없는 여긴 삼천 광년 떨어진 외계 행성이나 마찬가지 아닌가.
“…팀장님.”
윤모난을 떠올리자마자 막막한 기분은 실체가 되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동시에 얼굴을 타고 흐르는 물방울이 세면대 위로 뚝, 하고 떨어졌다. 왜 이렇게 힘들까 생각해봤더니, 이렇게 길을 잃을 때마다 막연하긴 했지만, 이번에는 뭔가 느낌이 다른 까닭이었다.
이전에 같은 일이 생겼을 때도 이렇게까지 방황이 길어진 적은 없었다. 무구원은 북해에서 윤모난과 마주친 날부터 자신이 얼마나 이 우주에 있었는지 생각해보았다. 형수님의 장례식 직후 입소하기 위해 서곡으로 왔고 시간은 그 뒤로 몇 주가 더 흘렀다.
돌아가는 방법은 늘 확실치 않았지만 그래도 결국에는 돌아가게 되기는 되었었다. 하지만 여기 머무르는 시간이 점점 길어지고 있었다. 어쩌면 이번엔 돌아가기 쉽지 않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든 이유였다.
“나를 좌표의 중심으로 삼아.”
무구원은 기억 속에 있는 윤모난의 말을 가만히 곱씹었다. 언젠가 다른 우주에서 윤모난은 자신을 좌표의 중심으로 둔다면 돌아갈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거라 말했다.
하지만 무구원은 그의 말을 어떠한 인상으로 새겼을 뿐 실제로 그를 어떻게 원점으로 삼을 수 있는 건지는 정확히 알지 못했다. 윤모난에게 시간 횡단에 대해 자신 있게 설명했던 것은 경험에 기반한 것이지 정확한 근거가 바탕은 아니었다. 이번 여행은 정말로 무한정 길어지게 되는 건가. 막막함이 그를 집어삼켰다.
“아―!”
그 순간 웬 낯선 목소리가 고독한 사념을 방해했다. 여긴 저녁 늦은 시간, 인적이 드문 훈련 동의 화장실이다. 내내 조용하던 칸 안에서 무언가 부스럭거리는 인기척이 묘하게 무구원의 신경을 끌었다.
한번 거슬린 소음은 이상하게도 점점 더 분명하게 귓가에 박혔다. 평소라면 이런 일에는 관심을 가지지도 않았을 거다. 그러나 무구원은 이 묘한 상황과 소음을 지나치지 못하고 콸콸 물을 쏟아내는 수도꼭지를 돌려 잠갔다.
화장실 안에 기이한 정적이 감돌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일 뿐. 가벼운 소음이라 할 수 없을 만큼 커다란 소리가 덜컹하고 화장실 칸 안쪽을 울리더니 예상치 못한 상황이 이어졌다. 쿵 소리를 내며 벌컥 문이 열리고 한 남자가 나타난 것이다.
“…음?”
남자의 고개가 갸우뚱했다. 흐트러진 옷의 매무새와 열기를 띤 뺨. 결정적으로는 셔츠 단추를 채우는 손짓까지. 온갖 수상한 흔적을 가득 묻히고 등장한 것은 바로 윤모난이었다.
“…….”
“…….”
남녀의 근무 공간이 엄격하게 분리되어 있는 서곡센터에서 이 외진 남자 화장실, 그것도 닫혀 있는 칸에 왜 윤모난이 있었는지 달리 짐작할 만한 것이 없었다. 예상외의 얼굴에 주춤하기도 잠시, 무구원은 지난 북해에서 그와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그는 지금의 윤모난이 방탕한 22살임을 새삼 체감했다.
그렇다고 무구원이 이런 광경을 갑자기 맞닥뜨릴 만한 준비가 돼 있었냐고 하면 그건 또 아니었다. 그런 그의 뺨을 후려치기라도 하듯, 방금 윤모난이 들어 있던 칸에서 제삼자의 팔이 툭 튀어나와 쾅! 하고 문을 급히 닫았다.
“또 보네요.”
“…….”
“정원이 형 동생. 무구원.”
윤모난이 손을 들어 인사했다.
“우리 구면인데…, 인사도 안 하네.”
칸 안에 숨은 사람이 부끄러움을 아는 것에 비해, 윤모난은 그런 것이 전혀 없어 보였다.
“소리 들렸어요? 참으라고 했는데 못 참더라고. 나도 공중도덕을 아는 인간인지라, 이런 데서 난잡하게 굴고 싶진 않은데. 내가 오늘 별로 기분이 안 좋아서요.”
윤모난은 방금까지 무구원이 쓰던 세면대를 점령하더니 물을 틀고 손을 씻으며 거울 속에 담긴 무구원을 흘긋 보았다. 그렇게 거울 안에서 시선이 부딪치자 한껏 느슨하고 가벼운 웃음을 지었다.
“…바지 지퍼 열리셨습니다.”
같이 웃어주는 대신에 무구원은 차가운 목소리로 지적했다. 윤모난이 제 바지를 확인하고 지퍼를 올리더니 심술이 서린 얼굴을 가까이에 들이댔다.
“그런데 무구원 씨. 하나만 묻자. 지금 당신 파동이 날뛰는 게, 누구한테 얻어맞아서 그러는 거예요? …아니면 공중도덕을 어긴 누군가 때문에 불쾌해서 그러는 건가?”
순간 무구원은 저 자신도 깨닫지 못할 만큼 파동이 날카로워져 있단 걸 인지하고 몸을 뒤로 살짝 물렸다. 그러면서도 그의 시선이 다시 한번 잠긴 화장실 칸으로 향한 것을, 윤모난은 놓치지 않았다.
전혀 단정하다고 할 수 없는, 촉촉한 물기가 어린 윤모난의 얼굴에 답을 찾은 듯 흥미로운 웃음이 번졌다. 무구원의 시선을 후자에 대한 긍정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불쾌했어?”
껄렁한 반말조차 윤모난을 통과하면 이상하리만치 집중해 듣게 된다. 건들건들한 모습에는 평소 반감이 있는 무구원도 그에게는 예외를 둘 만큼. 윤모난은 수도꼭지를 잠그고 옷매무새를 대충 만지더니 무구원에게 다가왔다.
그러고서는 무언가 거슬린 행동을 하려고 마음이라도 굳게 먹은 사람처럼 물기 묻은 손을 그대로 무구원의 제복 상의에 슥슥 문질렀다. 윤모난은 낮은 목소리로 조르듯이 읊조렸다.
“한 번만 눈감아주라.”
“…….”
“어디 이르지 말고.”
물기를 다 닦은 뒤에 윤모난은 아까 자신이 들어 있던 화장실로 돌아가 똑똑 노크했다.
“나 간다.”
담백한 인사였다. 아마도 그가 크게 의미를 두지 않은 수많은 애인들에게 무수히 했을 법한. 관계에 있어 선을 긋는 데 천부적인 재능이라도 타고난 듯 작은 여지도 남기지 않는 말투였다.
그사이 무구원은 윤모난이 젖은 손을 문질러 엉망이 된 자신의 셔츠를 가만히 내려다봤다. 그래, 윤모난은 이런 사람이었다. 늘 불쑥 튀어나와 일상을 엉망으로 만들어놓고 곧 사라져버릴 흔적을 남긴다.
시간이 조금 흐르면 젖은 자국은 금세 말라 작은 자국도 남지 않을 테고. 윤모난이 그곳에 손을 비비며 지었던 웃음도 마찬가지로 흐려질 것이다. 멀쩡하게 마른 부분을 계속 내려다보며 그를 떠올리는 건 자신처럼 둔하고 멍청한 사람의 몫이었다.
그저 윤모난의 수없이 많은 애인 중 하나인. 그에게 있어 어떠한 의미도 지니지 않은….
“어이, 무구원 씨.”
예상치 못하게 뒷덜미가 잡아당겨진 무구원은 뒤로 살짝 휘청였다. 의아한 얼굴로 돌아보자 윤모난이 바깥으로 고갯짓을 하며 신호를 줬다. 나가자는 뜻이었다.
윤모난은 나오자마자 습관대로 담배부터 꺼내 물었다. 팔을 위로 쭉 뻗어 스트레칭을 하며 훈련동 앞마당까지 나간 그가 문득 돌아서서 무구원에게 시선을 마주쳐왔다.
“누구한테 맞았어요?”
무슨 소리를 하려고 따라 나오라고 했나 싶었는데 의외의 질문이 날아왔다. 무구원에게 이 시기의 윤모난은 조금 낯설었다. 그가 잘 아는 건 형들이 죽고 3년간 정신보호센터에서 악몽 같은 시간을 보낸 스물다섯의 윤모난부터였다.
스물둘과 스물다섯은 꽤나 큰 차이가 있다. 스물둘의 윤모난은 무구원이 알던 것보다 더 제멋대로였다. 오늘 일만 해도 그랬다. 이전에도 ‘다른’ 우주에서 여러 나이대의 윤모난을 겪어본 적 있으나 그와의 만남은 언제나 예측 불가능했다.
“…맞았다고 한 적은 없는데요. 훈련 중에 다친 겁니다.”
“입소한 지 겨우 하루 된 신입이 무슨 훈련? 그리고 내가 맞은 상처랑 훈련하다 다친 거랑 구분도 못할까 봐?”
당연한 소리에 할 말이 없어진 것은 둘째 치고, 무구원이 의아한 것은 따로 있었다. 이런 질문이 참으로 낯설었던 것이다.
“왜… 신경 쓰십니까?”
“뭐?”
“그냥, 제가 훈련 중에 다쳤든 아니면 누구한테 맞았든. 지금의 팀장님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을 텐데요.”
그러자 윤모난이 눈썹을 비쭉 위로 올리며 무언가 묘한 표정을 짓는다. 그는 담배 연기를 후 뱉어내며 의미심장하게 중얼거렸다.
“또 팀장님이라고 하네.”
순간 아차, 싶었다. 입에 붙은 호칭을 하루아침에 다르게 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이러한 실수를 두 번이나 반복했으니 가뜩이나 예민한 감을 가진 윤모난이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무구원은 얼굴을 굳히며 몸을 틀었다.
“이만 가겠습니다.”
“거기 서.”
“…….”
마치 스위치를 누른 것처럼 두 발이 그의 명령에 바로 멈춰 섰다. 윤모난은 자신에게 등을 돌린 무구원의 앞으로 걸어오더니 짐짓 미간을 찡그렸다.
“아직도 파동이 뒤죽박죽 엉망이잖아. 트랜스 되고 싶어요?”
그것 또한 지금의 윤모난과는 상관없는 일일 터였다. 무구원은 새삼스레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는 그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는 것으로 대답을 건너뛰었다. 그러자 윤모난이 짧게 혀를 찼다.
그러고서는 이윽고 손가락 두 개를 뻗어 가위질하는 시늉을 해 보이더니, 이음새를 붙여 무구원의 이마 한가운데에 손끝을 꾹 눌러 붙였다. 최소한의 접촉이었음에도 강한 힘이 순간적으로 무구원을 감쌌다.
타고난 기운의 차이를 증명하듯 윤모난은 너무나도 손쉽게 그의 파동을 제어하고 길들였다. 압도당하는 느낌이 들어 저절로 저항감이 생겨날 정도였다.
“어이, 가만히 있어요.”
윤모난이 단호하게 말했다. 그저 그러한 저항감을 느꼈을 뿐인데. 윤모난은 상대의 생각을 읽을 정도의 경지에 이른 것이다. 이런 가이드에게는 어떠한 에스퍼라도 그저 복종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무구원은 일련의 비극을 겪기 전의 윤모난이 이토록 강력한 인물이었다는 사실에 감탄했다.
무구원은 문득 애상의 그늘에 잠기기 전의 윤모난을 눈에 가득 담았다. 그의 어둠을 사랑하는 만큼 빛도 사랑하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시간 여행을 하지 않았다면 결코 보지 못할 모습이었다. 가만히 시선을 향하고 있는 와중에 윤모난이 방심하고 있던 무구원의 허를 찔렀다.
“그 팀장님이라는 호칭, 이상하게 익숙하던데.”
“…….”
“참 이상하지. 난 당신을 얼마 전에 처음 봤고. 팀장을 해본 적도 없는데 말이야.”
예의 그 무서운 직감이 발동한 결과다. 윤모난은 논리적으로 추론할 수 없는 느낌을 두고 이상한 확신을 담은 채로 묻고 있었다. 사실 이럴 때 인간은 오히려 본질에 더 가까이 다가서는 법이다.
“이게 당신이 시간 능력자인 것과 관련이 있을까?”
바로 이런 경우처럼. 무구원은 숨을 들이마셨다.
“…글쎄요.”
“그래?”
무언가 확실한 대답을 바라고 한 질문이 아닌 듯했다. 윤모난은 성실하게 가이딩을 이어나가면서 다시 생각에 빠진 것 같더니 또 한 번 뜻 모를 소리를 했다.
“내가 전에 당신 얘기 듣고 생각해봤는데. 만약 당신 말대로 시간이 끝없는 격자로 이루어져 있고 무수히 다른 우주가 실제로 존재한다면, 거길 횡단할 수 있는 걸 행운이라 해야 할까. 아니면 불행으로 여겨야 하나.”
“…갑자기 그건 왜 물으십니까?”
“그냥. 그게 궁금하더라고. 당신한테 들은 얘기가 인상적이었거든.”
윤모난의 시선은 그가 아까 전에 남겨놓은 무구원의 셔츠 위 젖은 자국에 달라붙어 있었다. 다만 그건 어떤 다른 의미를 띤다기보다 무언가를 곱씹어보는 것 같은, 의미 없는 행동에 불과한 듯했다. 이어서 그는 자신이 생각한 것에 관해 떠들었다.
“횡단을 하는 당사자에게는 확실히 불행인 측면이 있을 것 같아. 본인만 다른 우주에서 발생한 일을 알고 있고, 다른 사람들은 아무도 모른다는 부분에서.”
“네. 확실히 그렇겠죠.”
“또 시간 능력자에게 중요한 사람이 있다면 정말로 불행이겠지. 다른 우주에 있는 사람과 원래의 우주에 있는 사람을 같은 존재라고 인식하기는 어려울 테니까.”
윤모난은 말끝에 하지만, 하고 단서를 덧붙였다. 그가 정말로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앞으로 나올 말임을 무구원은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었다.
“하지만 과연 나쁜 일만은 아닐 수도 있겠지.”
“뭐가 말입니까?”
“망한 인생을 버리고 도망치기에는 최고의 수단이잖아.”
그런 말을 뱉은 뒤 윤모난은 씨익 웃었다. 뼈가 있는 말이었다. ‘최고의’ 수단이라는 부분에서 그가 어느 쪽에 더 가치를 두고 있는지 대번에 알 수 있었다. 지금의 그가 이렇게 말하다니.
혼란스럽던 와중에 무구원은 문득 깨달았다. 아까 윤모난이 스치듯 뱉은, 오늘 별로 기분이 안 좋았다는 말에서 대강 단서를 잡아낸 것이다. 비단 형들과 조카가 죽는 그러한 비극이 일어나기 전부터, 아마도 그의 인생은 이와 같은 기분 나쁘다고 치부하기에는 소소하지 않은 여러 우울함으로 점철되어 있지 않았을까.
그러니 이 우주 속 스물둘의 윤모난 또한 자신의 망한 인생을 버리고 도망치기를 바랐을 터였다. 무구원은 그 와중에도 제 본분을 지켜 날뛰는 에스퍼의 파동을 가라앉히고자 가이딩을 하는 윤모난을 바라보았다. 22살의 그를 안아주고 싶었다.
“이상하네. 자꾸 무구원 씨 당신한테 이런 소리를 하고. 우리 친하지도 않은데, 그치? 당신이 전생에 집 나간 내 마누라라도 되나….”
“…….”
“이게 당신이 시간 능력자인 것과 정말 관련이 없는 거라면. 그냥 정원이 형 동생이라 친근하게 느껴지는 거겠지.”
윤모난이 저 나름대로 상황을 갈무리하려는 와중에 가이딩이 끝난 모양이었다. 이마에 붙어 있던 그의 손이 멀어지기 전에 무구원은 그를 안고 싶은 충동을 어쩌지 못하고 낚아채듯이 손을 잡았다. 이윽고 스스로를 절제하느라 한껏 억눌린 목소리가 저도 모르게 튀어나갔다.
“만약. 도망칠 수 있는 방법이 없는 경우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어차피 도망쳐도 똑같은 일은 그저 일어나게 마련이라면요.”
윤모난은 질문을 이해하지 못한 건지, 아니면 그 말의 저의를 깨닫지 못한 탓인지 눈을 가느다랗게 뜰 뿐이었다. 그 바람에 무구원의 말투가 조금 더 조급해졌다.
“시간 능력자에게 허락된 행운이라는 게, 그저 바꿀 수 없는 미래를 미리 아는 것뿐이라면. 그래서 아무리 횡단을 한다고 해도 어디로도 도망칠 수도 없고 같은 일들을 끊임없이 반복해야 한다면. 그걸 과연 행운이라 부를 수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건 비극이겠네.”
이어지는 윤모난의 답은 간소했다.
“정말 힘들겠어.”
그러면서 팀장에게 얻어터져 엉망이 된 얼굴을 툭툭 건드리는 손길이 무언가를 알고 있는 듯해서. 그럴 리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무구원은 신 앞에 답을 구하는 신자의 심경으로 그가 무슨 답이라도 내려주기를 기대했다. 윤모난은 생각에 잠긴 얼굴로 눈을 아래로 내리깔았다가 느리게 치켜떴다.
“그런데 진짜로 바꿀 수 없다고 생각해요? 애초에 모든 것이 그저 똑같이 되풀이되는 거라면 여러 개의 우주가 필요하지도 않았겠지. 하지만 우주가 여러 개라면, 그건 바뀔 수 있는 경우의 수도 그만큼 많다는 증거가 아닌가.”
“…….”
“그리고 무구원 씨, 겨우 20살 먹은 주제에 인생 100살은 산 체념한 노인 같은 표정 지으면요. 아무리 얼굴이 반반해도 애인한테 사랑받기 힘들걸?”
그의 말투는 어느새 본래의 가벼운 농담조로 돌아와 있었다.
“그러니까 쉽게 포기하거나 체념하지 말지 그래? 아주 최―악의 상황이 돼서 이 정도면 내가 정말 바닥을 쳤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도 말이야. 어떤 상황이든 바꿀 수 있다 믿어보라고. 이러니저러니 해도 난 빠져나갈 수 있는 길은 항상 있다고 믿거든. 그게 도망이든 극복이든.”
“…….”
“그냥 그렇다고. 이제 슬슬 가야겠다.”
갑자기 대화를 갈무리하며 윤모난이 한 발자국 뒤로 몸을 물렸다. 시계를 확인하는 걸 보니 돌아가야 하는 시간인 듯했다. 그때 내내 멍하게 서 있던 무구원이 인사도 없이 발길을 돌리려는 그를 다시 한번 잡았다.
“그런데 오늘 왜 기분이 안 좋으셨습니까?”
어느새 몇 걸음 걸어간 거리에서 윤모난이 입에 문 담배를 아래로 내리며 조금 서글픈 얼굴로 돌아봤다. 그런 기분을 덮어버리려는 것처럼 윤모난이 크게 기지개를 켰다. 연기를 하듯 과장이 섞인 제스처였다.
“오늘 내 생일이거든요.”
“…네?”
놀란 무구원의 등이 뻣뻣해졌다. 그는 이미 윤모난의 생일을 알고 있었다. 예전에 윤모난의 물건을 정리하며 본 신분증에 적힌 그의 생일은 분명 5월이었다. 지금은 3월이고….
“하지만… 생일이.”
무구원은 입을 닫았다. 아무리 호칭을 두 번이나 잘못 부르긴 했지만, 신분증에 적힌 생일까지 알은척했다간 윤모난의 의심을 살 거란 사실을 모르진 않았다. 그래서 왜 생일이 두 개냐며 물어보고 싶은 마음을 꾹 눌러 삼켰다.
다만 이제 와 새삼스러워지는 일은 두 사람은 서로 생일 같은 사소한 일들을 챙겨본 적이 없다는 것이었다. 물론 그전까지는 그럴 만한 사이도 못 됐지만, 팀장과 팀원 사이에 충분히 할 수 있을 만한 축하조차 해본 적 없었다.
“생일 축하드립니다.”
그래서 무구원은 제 생일이라고 기분이 안 좋다는 남자에게 축하 인사를 건네고 만 것이다.
“…….”
당연하게도 축하 인사를 받은 윤모난의 얼굴이 굳어가는 것이 보였다. 갑자기 모욕을 받은 듯 그 표정에서 서로 간의 거리감을 넓히는 장벽이 느껴졌다.
“그래. 뭐, 고마워.”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충동적으로 축하 인사를 하고 한껏 어색한 얼굴로 안절부절못하는 무구원에게 기대하지 않던 말이 떨어진 것은. 윤모난은 물고 있던 담배를 바닥으로 던져 발끝으로 비벼 끄면서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이 한마디 툭 뱉었다.
“너무 고마워서 나 생일잔치 하면 무구원 씨 꼭 불러야겠다.”
“…생일잔치도 하세요?”
“염병. 하겠냐?”
“죄송합니다.”
“왜, 와서 고깔 쓰고 노래도 부르죠?”
윤모난이 혀를 쯧쯧 하고 찼다. 그러면서도 어느새 표정은 한껏 풀어져 있었다.
“축하는 이만 됐고. 그리고 다음에 만나면 팀장님이라 부르지 말아요. 당신 팀장은 따로 있잖아. 강 팀장 맞죠? 그 인간 성격 꽤 나쁜데….”
이미 속으로 그 인간에게 맞았나 보다고 완벽하게 결론까지 내버린 윤모난이 산뜻하게 제안했다.
“대신에 선배라고 부르든가.”
“…선배요?”
“아님 형도 좋고. 뭐 당신 맘에 드는 것 중 아무거나. 대신 그 상처는 꼭 치료해요. 잘생긴 얼굴 간수 잘해야지.”
난데없는 외모 칭찬을 마지막으로 대화가 끝났다. 윤모난은 축하 인사를 받아주고 호형호제까지 제안하는 선심까지 베푼 뒤에 합숙소로 가는 길로 쓱 사라져버렸다. 무구원은 더 이상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자리를 보면서 생각했다. 과연 이곳이 다른 우주라고 한들, 당신도 다른 사람일까.
꼭 그렇진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처음으로 떠올랐다. 저 자신이 영원히 다른 우주를 횡단하며 떠돌아다닌다고 해도, 매번 다른 우주에서 다른 모습의 윤모난을 만난다고 해도….
자신은 틀림없이, 그리고 한결같이 사랑에 빠졌을 테니까. 첫사랑을 막 시작한 소년처럼 난데없이 자신을 불태우는 사랑의 열기에 휘말려 정신 못 차리면서.
윤모난이 다가와 웃으며 말을 걸 때도. 그 근사한 얼굴을 찌푸리며 생각에 잠긴 모습을 보일 때도. 설령 그가 가장 초라한 모습으로 상처 입고 바닥에 처박혀 있다 할지라도.
“…행운인지 불행인지 이젠 저도 모르겠네요.”
어쩌면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닐 테다. 수많은 우주와 그보다 더 무수한 경우의 수. 변동성으로 뒤흔들리는 선택과 시간을 어떻게 받아들이든, 그 모든 변수를 관통하는 하나의 좌표에 집중한다면 마침내 답에 이를 터였다.
무구원이 유리한 것은 이미 답을 알고 있다는 점뿐이었다. 당연히 답은 윤모난이다. 모든 경우의 수를 관통하는 단 하나의 절대 수인 그였다. 하지만 알기 때문에 더 두렵기도 했다. 그런 감정은 여전히 무구원을 떠나지 않았다. 7년간 내내 그랬듯이.
윤모난과 헤어지고 합숙소로 돌아온 뒤에 무구원은 방금 전의 대화에 관해서 계속 생각했다. 그러던 중 문득 아직 짐을 정리하지 않아 텅 빈 합숙소의 광경이 시야에 들어왔다.
짐 속에서 달력 하나를 찾아 벽에 걸어둔 뒤, 그는 펜을 들어 가장 먼저 오늘 날짜에 동그라미를 그렸다. 윤모난의 생일이다. 그는 태오처럼 겨울이 끝날 즈음 태어났구나….
그다음엔 여기 온 날부터 날짜들을 차례차례 소거해나갔다. 그리고 장을 넘겨서 한 날짜에 동그라미를 그려 넣었다. 그 숫자는 윤모난이 작약과 무간에 출정하는 날이었다.
“시간 능력자에게 허락된 행운이라는 게, 그저 바꿀 수 없는 미래를 미리 아는 것뿐이라면. 그래서 아무리 횡단을 한다고 해도 어디로도 도망칠 수도 없고 같은 일들을 끊임없이 반복해야 한다면. 그걸 과연 행운이라 부를 수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건 비극이겠네.”
아까 전 윤모난의 말을 떠올리며 무구원이 조용히 펜을 내려놓았다.
“그런데 진짜로 바꿀 수 없다고 생각해요?”
그가 말했다. 절대 바꿀 수 없다면 우주가 여러 개 존재할 이유도 없지 않겠냐고. 처음에는 그도 윤모난처럼 생각했었다. 바꿀 수 있을 거라 믿었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실패했을 뿐이다.
윤모난의 입으로 들은 그 생각은 무구원을 다시 시간 여행의 맨 처음으로 되돌려놓았다. 그의 말은 곧 이 우주에서 헤매는 것이 그저 허무한 방황일지도 모른다는 무구원의 불안을 거침없이 허물어트리는 것이었다.
시간 여행자는 달력 앞에 멀거니 서서 새벽을 한참 흘려보내다가 동이 틀 기미도 보이지 않는 창문가로 향했다. 하지만 깨끗한 창문에 나타난 환영 같은 기억이 끈질기게 말을 걸었다.
“그러니까 쉽게 포기하거나 체념하지 말지 그래?”
포기. 체념. 그 두 가지를 모르는 죄로 내가 당신에게 끼친 해악을 알지도 못하면서. 7년간 수많은 다른 우주에 갈 때마다 내가 얼마나 당신의 비극을 막으려 했는지 상상도 못할 것이다.
무구원은 창문 너머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오늘도 그렇게 돌아가지 못한 하루가 또 지났다.
달력에 체크한 날은 여지없이 다가왔다.
“어이, 밥 다 먹었으면 일어나 이 새끼들아.”
퍽― 퍽― 뒤통수로 손이 날아왔다. 옛 2부 7팀의 강 팀장이란 사람은 신입들을 가만두는 법이 없고 걸핏하면 군기를 잡으려고 했다. 그리고 이번 우주에서는 첫날부터 대든 무구원 역시 그 대상에 포함되었다.
경해국이 옆에서 욕을 중얼거렸지만 무구원은 반응하지 않았다. 약 1년 뒤에 자신과 대련하다가 십자인대가 부서져 반강제로 제대할 강 팀장 따위 신경 쓸 겨를은 없었다. 오늘은 바로 그날이기에.
무구원과 경해국을 포함한 2부 7팀은 밥을 먹은 뒤에 ‘예전에도 그랬던 대로’ 체력 훈련을 하기 위해 대운동장의 트랙으로 향했다. 저 혼자만 한껏 긴장한 채 걸음을 옮긴 무구원은 트랙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 윤모난이 있었다. 혼자 트랙을 달리는 분홍 머리의 그가 보인다. 반 바퀴를 돌아 가까운 지점을 돌 때 보이는 익숙한 얼굴, 하얀 피부 위로 맺힌 땀과 입가에 걸린 미소까지.
“아, 윤모난 저거 또 혼자 트랙 독차지하고 있네.”
“누군데요?”
옆에 있는 팀원이 강 팀장에게 윤모난에 대해 물을 것이며, 윤모난은 곧이어 2부 7팀을 발견하고 손을 흔들며 다가온다. 다만 이전과 다른 것은 이번에는 강 팀장이 아닌 무구원에게 먼저 시선을 고정했다는 점이다.
“어이, 무구원 씨―.”
“…뭐야? 너네 둘이 아는 사이냐?”
강 팀장이 심술궂게 생긴 얼굴을 구기며 물었다. 무구원은 아무런 반응 없이 그냥 무시해버렸다. 그때 윤모난이 무리로 다가와 먼저 무구원에게 말을 걸었다.
“적응은 잘하고 있어요?”
“…네.”
싱긋 웃는 미소가 눈이 부실 만큼 환했다. 옆에 있던 강 팀장이 볼멘소리를 했다.
“윤모난, 넌 선배를 보고 인사도 안 하냐. 새끼, 빠져가지고.”
“하하, 죄송합니다.”
“너네 팀 오늘 출동 아니야? 휴식이나 하지 아침부터 왜 이렇게 힘 빼고 있어?”
“네, 벌써 두 팀이 출동했는데 전원 실종된 상태인가 봐요. 무간 중에서도 격전지라서요.”
다시 대화가 기억의 궤도에 맞게 돌아갔다. 그사이 무구원의 시선은 언덕 위로 향해 있었다. 거기 두 남자가 서 있을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나무에 가려져 얼굴이 잘 보이진 않지만 커다란 키에 호리호리한 체격이 윤모난과 비슷했다.
“못난아― 가자.”
작약의 부름에 윤모난이 바로 고개를 돌렸다. 그는 강 팀장을 포함한 무리에게 간단히 인사를 한 뒤 돌아가다 말고 문득 걸음을 멈췄다. 다시 돌아온 그가 갑자기 무구원 앞에 서서 얼굴을 꼼꼼히 들여다보는가 싶더니 대뜸 물었다.
“얼굴이 왜 그래요? 또 누가 때렸나?”
“…….”
대답이 없자 귓가 가까이에 입술을 붙이며 윤모난이 은밀하게 속삭였다.
“강 팀장 내가 혼내줄까요? 대련 신청해서 팔 하나 부러지면 다시는 못 때릴 텐데. 임무 마치고 돌아오면 바로 처리해줄게.”
아니. 윤모난은 이 임무를 마치고 돌아오면 강 팀장을 때릴 여력이 없을 것이다. 피를 뒤집어쓰고 무간에서 기어 나와 며칠간 안정제를 맞으며 기절했다가, 가장 먼저 하는 일이 화장실에서 목을 매는 것일 테니까. 그는 숨이 끊어지기 직전에 발견되어 구속복을 입은 채로 정신보호센터로 보내질 것이다.
“나 마치고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어요, 무구원 씨.”
앞으로의 시간에서 기다리는 건 그런 비극뿐이었다. 윤모난은 몸을 뒤로 물리더니 짐을 챙겨 언덕 위로 향했다. 그런 그의 뒷모습을 보던 무구원의 발이 저절로 움직인 것은 그때였다.
“응? 뭐야.”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언덕을 반쯤 올라간 윤모난을 잡아 세운 뒤였다. 그는 작약과 자신 사이에 낀 채 뒤를 돌아봤다. 의아한 시선이 잡힌 팔을 훑는다.
“팀장님.”
“팀장님이라 부르지 말라고….”
“모난아.”
그때 언덕 위 차가운 목소리가 상황을 일시 정지시켰다. 나무에 가려져 있던 남자 한 명이 이리로 오고 있었다. 윤모난과 닮은 흰 피부에 유독 날카로운 미형을 띤 얼굴을 보아하니 둘째 형인 윤약이었다. 개입하지 않고 언덕에 가만히 서 있는 무표정한 남자는 첫째 형인 윤작이고.
“누구야. 아는 사람이야?”
“응. 후배.”
“언제부터 네가 후배들이랑 친하게 지냈다고?”
동생에게 묻는 윤약의 표정이 서릿발같이 차가웠다. 윤모난의 팔을 잡은 무구원의 손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그는 당장 적을 베러 온 사람처럼 독살스러운 기운을 숨기지 않았다.
대놓고 적대심을 보이는 그를 만류한 건 윤모난이었다. 자신을 잡은 무구원을 바라보는 그의 얼굴에 잠깐이지만 난처함이 스치고 지나갔다. 이윽고 무구원의 손을 떼어내며 그가 제 형 앞을 막아섰다.
“왜 갑자기 성질을 내고 그래? 출정 앞두고 예민해졌어?”
“…내가?”
능청스럽게 달래는 말에 윤약은 일단 기세를 누그러뜨리고 동생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약의 손이 무구원이 방금까지 잡고 있던 팔 부분을 꽉 조이자 윤모난이 눈썹을 약간 찡그리며 웃었다.
“아파. 형.”
“미안.”
그렇게 형제는 서로를 보며 타인에겐 한 치의 틈도 허용하지 않을 어떤 견고한 벽을 순식간에 쌓아 올리고 있었다. 무구원은 윤모난을 잠깐 잡았다가 이제는 텅 빈 손끝을 엄지로 문지르며 시선을 내리깔았다.
“…형이 말했잖아. 당분간 다른 가문 사람들과 교류하는 건 자제해.”
“왜 이럴까. 우리 둘째 형이 오늘따라 좀 이상하네. 다 큰 동생 인간관계까지 간섭하려 들고.”
“모난아.”
“그건 나 몰래 해주라. 원래 하던 대로 뒤에서만 단속해. 남들 앞에서 이러면 내 체면이 뭐가 되겠어?”
할 말을 잃은 듯 윤약의 얼굴이 다시 차갑게 굳었다. 그 말을 듣고 내내 무표정이던 윤작이 결국 나섰다.
“약아.”
“어. 형.”
“우리 먼저 가자.”
“…….”
약은 형의 말에 결국 한발 물러섰다. 하지만 당연한 수순처럼 다시 언덕 위로 향하던 발걸음이 우뚝 멈췄다. 윤약이 한껏 경계하는 시선으로 윤모난의 뒤에 서 있는 무구원을 바라봤다.
두 사람은 시선을 잠깐 마주쳤다. 무구원은 알고 있다. 오늘 자신이 갑자기 이렇게 윤모난을 붙잡지 않았다면. 세 형제는 우애 좋게 출정할 준비를 하러 간다는 것을.
그 평범한 일상을 균열 낸 것은 자신이며, 윤약은 그것을 못 견디는 성정의 사람이란 것까지도 안다.
“북해.”
“…….”
“이제 보니 무정원 동생이구나.”
“네. 맞습니다.”
무구원이 딱딱하게 대답하자 윤모난이 괜히 그를 한 번 되돌아보더니 피식 웃었다. 의외로운 면이 있다는 듯한 생각이 엿보였다.
“그쪽도 참 취향 한번 일관적이군. 광신도들이 단체로 머리가 돈 것도 아니고 말이야.”
윤약은 활시위에 말을 걸고 당긴 다음 가차 없이 놓았다.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이 자리에 있는 네 사람 모두 알고 있었다. 윤모난이 끼어든 것은 그때였다.
“형. 괜한 소리 나오게 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어차피 큰 비밀도 아니잖아?”
“약아.”
다시 한번 윤작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윤약은 이내 짜증스러운 듯이 낯빛을 바꾸면서도 순순히 돌아섰다. 윤작은 더 반복하지 않겠다는 듯, 그저 둘째 동생을 향해 손을 뻗었다. 결국 윤약은 큰형의 곁으로 돌아가 먼저 자리를 떠버렸다. 그들이 사라지자 평소대로 돌아온 윤모난이 사과부터 했다.
“미안. 우리 형이 나쁜 사람은 아닌데, 오늘따라 유독 그러네.”
“아닙니다.”
“그런데 갑자기 무슨 일인데요? 할 말 있어서 잡은 거 아니야?”
방금 전까지 상황도 그렇고 갑자기 말할 기회가 주어지자 메마른 목구멍이 서로 달라붙는 느낌이었다. 사실은 무구원도 자신이 무슨 생각으로 윤모난을 잡았는지 혼란스러웠다.
비극으로 걸어 들어가는 윤모난의 뒷모습을 보노라니, 어쩌면 미래를 바꿀 수도 있지 않냐며 포기하지 말라고 했던 그때 그 말이 떠올랐을 뿐이지만.
무구원은 비참한 마음에 침묵하고 말았다. 그런데 앞에서 난데없이 푸하하하 웃음이 터졌다.
“당신 설마 나한테 첫눈에 반했다고 고백하려는 건 아니지?”
“네?”
“내 취미가 뻣뻣한 놈들 꾀어 즐기는 거기는 한데…. 정원 형 동생한테 고백은 좀.”
커다란 웃음소리가 호쾌하게 사방으로 번져나갔다. 윤모난은 무구원이 침묵하자 정말이냐 묻더니만 아까보다 더 크게 웃어젖혔다. 그런 그를 보다가 맥이 탁 풀려버린 무구원은 전염이라도 된 듯 따라 웃고 말았다.
그래. 본질은 바로 그것이었다. 이 뻣뻣한 내가 대책 없이 당신에게 꾀어버려 말도 안 되는 짓을 하려고 하는 거.
“미안. 고백은 안 받아줄 건데. 우리 형 앞에서 안 쫀 건 마음에 들었어.”
“…그렇습니까.”
“보통이라면 둘째 형이 인상 쓰고 다가오면 당황해서 가버렸을 텐데, 표정 하나 안 바뀌더라?”
만면에 웃음을 띤 윤모난의 모습은 어느 때보다도 유쾌해 보였다. 무언가 형언할 수 없는 어떠한 빛깔을 담고 있었다.
무구원은 그게 좋았다. 계속 보고 싶었다. 그 생각에 내내 망설이느라 복잡했던 머리가 텅 비어버릴 정도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제 말을 믿어주시든 아니든 상관없지만. 그래도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음, 긴 얘기일까요?”
시간을 확인하는 몸짓을 보며 무구원은 담담하게 말했다.
“짧다면 얼마든지 짧게 할 수 있는 말이죠.”
“30분 줄게. 해요.”
30분. 그게 윤모난이 내줄 수 있는 최대한의 시간일 터였다. 무구원은 그와 함께 식당 옆에 있는 벤치로 향했다. 언젠가 여기에 있는 자판기에서 윤모난에게 설탕을 왕창 추가한 단 커피를 뽑아준 적이 있었다.
무구원은 그때와 똑같이 커피를 뽑아 건넸다. 그걸 받아 든 윤모난은 혀로 할짝거리며 맛을 체크하더니 이내 만족한 듯 마시기 시작했다. 그런 일상적인 행동을 이어가는 윤모난을 보며 무구원은 결심했다.
“지난번에 제가 아무리 시간 능력자라도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면 어떻게 할 건지 여쭌 적 있었죠.”
“…음?”
“그 말에 정말 바꿀 수 없다 생각하냐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 그랬지요?”
이건 윤모난이 예상한 대화 주제의 범위를 벗어난 듯했다. 그가 종이컵을 내리더니 더 말해보라는 듯 눈을 맞췄다.
“솔직히 말하면 전 아무리 시간 능력자라고 해도 바꿀 수 없는 게 있다고 생각합니다.”
“무슨 소리예요?”
“그런데 만에 하나, 아주 작은 가능성이라도 있다면 말입니다.”
내가 비록 당신에게 예정된 비극을 막으려 수없이 노력한 전력이 있고, 이를 깨달은 당신이 그러지 말라고 경고한 적이 이미 있다고 해도.
“이 우주에서는 제가 사랑하는 사람이 비극을 겪지 않기를 바랍니다.”
“…어이, 무구원 씨. 대체 무슨 소리를 하려는 건지,”
“그리고 제가 그러기를 바라는 사람은 당신뿐이구요.”
“…….”
우습게도 그건 윤모난이 예견해버린 고백이었다. 무구원은 30분 중에 큰 부분을 할애하여 그 우스운 고백을 하고야 말았다. 그러지 않으면 앞으로 해야 할 이야기들을 이해할 수 없을 테니까.
“제가 팀장님을 사랑합니다.”
윤모난에 대한 가망 없는 사랑이야말로 이 모든 말도 안 되는 일의 가장 큰 전제이므로. 그러니 무구원은 그런 이유를 들어, 자신이 있던 우주에서는 차마 하지 못하는 사랑 고백을 했다. 여기서는 가능했다. 그런 말을 하고 3분이라는 시간을 돌리지 않아도 된다.
“죄송합니다. 제 병은 정말로 가망이 없는 것 같네요.”
“…….”
“저를 완전히 파괴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팀장님, 또다시 이렇게 끼어드는 저를 용서하지 마십시오.”
언젠가 윤모난이 남기고 간 글귀의 마지막 문장을 떠올리면서, 무구원은 그 전제를 고백한 뒤에 마침내 하고자 했던 말을 뱉었다.
“오늘 무간에 가면 모두 S급 정신계 트랜스에게 죽을 겁니다. 살아 돌아오는 건 당신뿐이에요. 나머지 팀원들과 팀장님의 형제들 전원 사망합니다.”
이어지는 말에 윤모난은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너무 상세하지도 간략하지도 않은 무구원의 설명이 끝날 때까지, 그는 자리에 못 박힌 듯이 앉아 전부 경청했다. 그리고 30분이 모두 지났을 때는 맥없이 웃었다.
“너무 갑작스럽잖아.”
“…….”
“고백도, 방금 한 소리도 전부.”
윤모난은 기막힌 상황을 소화해내는 재주가 남다른 사람임이 분명했다. 방금 들은 얘기는 그에게 황당한 수준을 넘어 불쾌할 수도 있을 터였다. 이해할 수 없는 비극적 예언을 출정 직전에 듣다니. 잠시 침음하던 윤모난이 미간을 찡그리며 물었다.
“젠장, 무구원 씨 당신 지금 천경교 전도하려는 거 아니지?”
하지만 이런 반응을 보이는 건 확실히 특이했다. 전도? 생각지도 못한 말에 무구원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자 무언가 확신을 얻었는지 윤모난이 소금을 씹어 먹은 표정을 지었다.
“어이, 나 종교 싫어해. 질색한다고. 당신네 어머니 신이 뭐 꿈에서 말해준 내용이니 하면 나 방금 형 그냥 보낸 거 후회할 거 같아.”
“…그럴 리가, 있습니까. 제가 팀장님께 왜 전도를? 아니.”
“그래, 포기해. 난 정말 그 종교랑은 안 맞아. 특히 당신 동네에서 하는 그런 건 좀 무섭달까.”
거기 무슨 채찍으로 맞으면서 기도하지 않아? 가벼이 묻는 윤모난에게 무구원이 바로 항변했다.
“그런 거 아닙니다!”
“아니라고? 그럼 뭐야. 예언의 눈이 틔었으면 다른 데 가서 점이나 봐줘. 난 가만 놔두고.”
30분이 지나고 몇 분이 더 흘렀다. 윤모난은 어깨를 으쓱하더니 자리를 뜰 준비를 했다. 대놓고 헛소리 취급하는 눈치였다. 그런 모습에 기가 막힌 무구원이 떠나려는 그를 다시 잡아 붙들었다.
“전도하는 거 아닙니다. 제발 진지하게 들어주십시오, 팀장님—!”
이전에도 윤모난의 비극을 ‘직접’ 막으려는 시도는 몇 번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말로 사실을 전달하는 간접적인 시도는 처음이었다. 자신의 소극적 태도가 되레 역효과를 일으킨 걸까. 무구원은 조바심이 났다. 본인의 조급함과 상관없이 윤모난도 입장을 바꾸지 않았다.
“놔라. 나 이제 가야 해. 늦는다고.”
“…제발 부탁입니다.”
“안 놔?”
스물둘 윤모난의 성질머리가 뚝 끊어져버렸다. 그는 고집스럽게 자신을 놓지 않는 무구원에게 주먹을 콱 쥐어 흔들어 보였다.
“너 꿀밤 맞을래? 이거 뒈지게 아프거든?”
“…진심입니다. 격자무늬 우주, 우주가 여러 개 존재할 수 있다고 말씀드린 적 있죠. 전 거길 횡단할 수 있습니다. 아니 지금껏 계속 수없이 횡단해왔고, 다른 우주에서도 팀장님을 만난 적 있습니다.”
“…….”
“팀장님이라는 호칭, 이상하게 익숙하다고 하셨죠. 그건 제가 원래 당신을 그렇게 불렀기 때문입니다. 팀장님은 절 보면서 아무런 이상한 느낌도 못 받으셨습니까?”
윤모난이 서서히 들고 있던 주먹을 내렸다. 좀 전까지 한껏 가벼워 보이던 얼굴이 점차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무구원의 말에서 느낀 이상한 위화감 때문이었다. 그 순간 불현듯 윤모난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것이 있었다.
사실 저번에 화장실에서 무구원과 마주쳤을 때, 시간 능력에 관해 물었던 이유가 따로 있었다. 무구원을 만난 이후로 반복해서 꾼 이상한 꿈 때문이다. 그 꿈에서는 무구원이 자신을 팀장님이라 불렀고, 자신도 그를…
“구원아.”
갑자기 튀어나온 낯익은 호칭에 무구원이 멈칫했다. 입 밖으로 소리를 낸 윤모난이 그걸 입에서 천천히 굴리고 있었다. ‘구원아’ 하고 나지막이 더 불러보기도 했다. 윤모난은 그 이름이 자신에게 너무나도 익숙하다는 사실이 기이하게 느껴졌다.
꿈에서야 무정원의 동생을 그토록 간지럽게 부르는 것이 이상하게 느껴지진 않았지만, 막상 소리를 내보니 새삼스러웠다. 그렇다면 그 꿈의 의미가 무엇이란 말인가. 무간의 검은 모래와 초록빛 하늘. 그리고 피를 뒤집어쓴 자신. 등 뒤에서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이쪽을 바라보는 무구원까지.
갑자기 꿈이 선명해져서 현실로 닥쳐오는 것만 같았다. 무간의 검은 모래 위에 무구원이 서 있었는데, 그는 절망한 채로 아이처럼 눈물을 떨어트렸다. 그리고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을 했다. 그는 이번에도 실패했다는 말로 서두를 꺼냈다.
“하지만 이렇게 될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
“이렇게 팀장님의 시간을 빼앗을 줄은 정말로….”
꿈속에서, 무구원은 고개를 들어 예의 그 어둡고 우울이 묻은 표정의 윤모난을 바라보았다. 상실이 끈덕지게 들러붙은 두 눈은 텅 비어 있었고, 가만히 귀를 기울이면 공허가 메아리치는 소리가 들릴 것만 같았다.
“당신이 바닥을 친 건 모두 저 때문입니다.”
무구원은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시간 능력자가 그의 운명에 개입하는 동안 모든 우주에서의 윤모난이 기억을 잃고 만다는 것을. 기억이 손실된 빈자리는 모두 무구원이 발버둥 친 흔적이었다.
윤모난에게 소중한 기억들, 예컨대 청연이 태어난 날이라든가. 그런 수많은 순간들이 휘발되어 사라져버렸다. 그러니까 윤모난이 호소하는 기억의 상실은 모두 그의 이기심의 증거였다.
그리고 윤모난은 무간에서 형들과의 마지막 순간에 대한 기억을 잃었다. 이 모든 비극의 시작은 사실 작약의 죽음이 아니라, 윤모난이 그 순간을 기억하지 못하는 데서 시작됐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오로지 무구원뿐이었다.
“아니, 그건 정말 개꿈이어야 할 거 같네.”
불길한 꿈이 현실로 성큼 다가오자 윤모난은 예민하게 반응했다. 정상적이지 않은 뒤틀림이었다. 시간 능력자가 순간적으로 발생시킨 이상한 정동에 몸이 부르르 떨렸다. 무구원 역시 그의 거부감을 느끼며 몸을 잠깐 뒤로 물렸다.
시간의 유령. 이것이 꿈의 형태로 윤모난에게 남은 것이었다. 시간 능력자가 진정으로 교감하는 사람에게 불어 넣는다던 그것의 정의는 윤모난이 찾아보지 않았는데도 뇌리에 박혀 있었다. 그러한 감각이 꽤나 불쾌했는지 윤모난은 무언가를 떨쳐내듯 턱을 한 번 쓸어내렸다.
“지금의 나로서는 그런 짓을 한 인간은 도저히 용서하지 않을 것 같거든. 미래에 내가 당신과 무슨 관계이든 간에 말이야.”
윤모난은 시간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이젠 정말로 가야 한다. 형들과 팀원들이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하지만 걸음을 돌려 가는 와중에 무언가에 잡힌 것처럼 두 다리가 무거웠다. 다시 뒤돌아보니 무구원이 그 자리에서 뿌리박힌 채 처참한 표정으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그 시선이 한결같이 고집스럽고 끈질겼다.
“…….”
무구원은 거기서 물러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냥 두면 영원히 그 자리에 있을 것처럼. 무언가 말을 하려다가 입을 다문 윤모난은 먼저 등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