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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가이드 (21/24)

8. 가이드

이상한 꿈을 꿨다. 무구원이 나오는 꿈이었다. 지금보다는 조금 젊어 보이는 그 녀석이 자판기에서 단 커피를 뽑아 건넨다. 거긴 서곡센터의 벤치였고. 나는 순간의 날씨라든가 향기를 통해 그날이 바로 과거였음을 깨닫는다.

기억에도 없고, 겪은 적 없는 이상한 장면이 이어졌다. 무구원이 커피를 쥐여주는데 얼굴이 체한 사람처럼 창백해 보여서 일부러 농담을 했다.

“당신 설마 나한테 첫눈에 반했다고 고백하려는 건 아니지?”

이어서 경계 없이 풀어지는 눈이 참으로 무구원답지 않았다. 그러나 낯설지는 않았다. 무구원은 자신에게만은 그런 눈빛을 종종 보여주곤 했으니까. 따라 웃을 때마다 아름다운 입가에 맺히는 미소도 자신이 독점하는 것 중 하나였다.

“지난번에 아무리 시간 능력자라도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면 어떻게 할 건지 물은 적 있었죠.”

“…음?

“그 말에 정말 바꿀 수 없다 생각하냐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대화는 뭘까. 왜 이날 이 시간에. 무구원과 대화를 하고 있는 걸까. 문득 그 사실이 낯설었다. 그날 형들과 무간에 가기 전에 내가 뭘 했지? 떠올려보려 했으나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언제부터 생각나지 않았던 건지도 생각나지 않는다. 또 향정신성 약의 부작용인가? 그렇다면 정말 큰일이다. 아직은 10년 전 그날의 기억을 모두 떠나보낼 준비가 안 됐으니까. 하지만 다른 방법이 딱히 있을 건 같진 않았다.

청연이가 태어난 날을 잃었듯이 이건 내가 잃은 순간 중에 하나겠구나, 생각할 뿐. 인정에 이어서 막막한 체념이 따라붙는다.

“솔직히 말하면 전 아무리 시간 능력자라고 해도 바꿀 수 없는 게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만에 하나, 아주 작은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있다면 말입니다.”

“전 이 우주에서는 제가 사랑하는 사람이 비극을 겪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제가 그러기를 바라는 사람은 당신뿐이구요.”

“제가 팀장님을 사랑합니다.”

“오늘 무간에 가면 S급 정신계 트랜스에게 모두 죽을 겁니다. 살아 돌아오는 건 당신뿐이죠. 나머지 팀원들과 팀장님의 형제들 전원 사망합니다.”

이 모든 일이 시작되기 전에 듣게 된 예언이라니. 그 작은 변화에서 시작된 꿈은 윤모난이 미처 기대하지도 못했던 것들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형들이 죽는다는 것을 알게 된 나는 무간에 갔을 때 이상한 오기를 부리지 않는다. 큰형이 명령하는 대로 팀에 남고, 내가 이탈하지 않았으므로 둘째 형이 날 따라오는 일도 없다. 우리 팀은 한 명의 이탈자도 없이 괴물을 맞이했다. 모두가 그 자리에서 제 본분을 다했다.

…그리고 마침내 괴물을 죽인다. 숨을 끊어 산산조각 냈다. 피를 뒤집어쓰고 난 뒤에 흩어져 있는 잔해 위에 서서 숨을 내몰아 쉬며 생각했다. 정말 바꾼 걸까? 무구원 네가 말한 그 일말의 가능성이 내게도 빛을 드리운 걸까?

그렇게 해서 나는 너를 미워할 일도 없고, 너도 나에게 사죄할 일도 없이. 아무런 나쁜 일도 일어나지 않은 다른 미래를 만들어낸 걸까. 너와 나 사이의 어떤 사랑이 그런 대단한 힘을 발휘했다면….

‘못난아―’

생각에 빠진 와중에 너무나 오랜만에 듣는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윤모난이 고개를 들자 눈앞에 형들이 있었다. 모두 얼굴에 핏방울을 매달고 있었으나, 그들의 것은 아니었다. 괴물은 죽었고 형들은 살았다.

그 순간 의심을 놓아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구원, 네가 고집스럽게 날 구원하려고 한 시도가 내 가장 큰 악몽을 막아냈다면.

‘잘했어. 이제 돌아가자.’

‘…어, 형.’

그거 알아? 형들은 원래 죽을 뻔했어. 내가 고집을 피워 대열을 이탈해 괴물을 죽이려고 했거든. 날 희생하면 형들과 다른 팀원들은 모두 살 줄 알았어. 하지만 그건 내 착각이고 오히려 나 때문에 팀 전부가 죽게 된 거야.

그런데 어떤 사람의 의지 하나로 인해서 이 모든 비극을 막아낼 수 있었으니 얼마나 행운이야?

‘형’

‘응?’

‘나 돌아가면, 잠깐 휴직하고 떠나 있을까 봐.’

‘어디로?’

‘어디로든.’

형들이 살아 있다면 청연에게도 아버지가 남아 있는 것이다. 다른 조카들도 무사하다. 그렇다면….

나도 한 번쯤은 원하는 곳에 갈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마음속 깊이 바라던 것들이 떠올랐다. 형들은 선선히 답했다.

‘네가 그러고 싶다면 그렇게 하는 거지.’

‘…그래.’

‘모난이 네가 가고 싶은 곳이 있다면 가. 어디든 매이지 말고.’

하지만 윤모난은 알았다. 이건 꿈이고 일어나지 않은 일일 뿐이라는 것을. 자신이 그토록 바라던 어느 순간이 꿈이라는 형태를 빌려, 만약이라는 가정과 허황한 바람으로 나타난 것일 뿐이다.

형들은 나를 해방해주기 전에 죽어버렸다. 그들이 저지른 죗값과 사랑이 만들어낸 굴레는 여전했다.

고작 꿈 따위의 위력이 얼마나 대단한가. 깨고 나면 현실이 얼마나 초라한지 느끼게 만드는 잔인한 상상력은 배 속 깊은 곳까지 꿰뚫어 한 사람을 뒤흔들고 만다. 깨달음의 순간은 고통스럽다. 그건 현실로 돌아오라는 신호였다.

“…….”

윤모난은 잠에서 깬 이후에 무겁고, 초라하고, 음울한 현실이 자신을 짓누르고 있음을 오롯이 느꼈다. 일주일째 시체처럼 누워 있는 무구원도 마찬가지였다.

단 한 번도 정신을 차린 적 없는 그에게 파동을 뻗쳤던 지난 일주일이 파도처럼 닥쳐왔다. 그러자 달콤한 꿈이 후퇴하며 빠르게 멀어진다. 윤모난은 여전히 여운에 잠긴 얼굴로 무구원에게 말을 걸었다.

“참 현실처럼 구체적인 꿈이네.”

“…….”

“주저하지 않고 거기로 도망치고 싶을 정도야.”

거기서는 나도 괴물이 되지 않고 너도 그 희생물이 되지 않았을 테지. 윤모난은 거미줄처럼 얽혀 있던 무구원의 손을 제게서 떼어냈다. 마지막으로 닿아 있었던 그의 살결에서는 아무런 온기도 느껴지지 않았다.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일주일간 폭압적으로 에너지를 쏟아부은 탓이다. 아마도 무구원은 이미 혈관이 터져 숨이 끊어졌거나, 원래의 목적대로라면….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바꿀 수 없는 것도 있는 거겠지.”

윤모난은 자신의 몸 안에서 순리를 역행하며 흐르는 뾰족한 에너지를 느꼈다. 얼추 준비가 된 것 같아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침대에 누운 무구원을 한 번 더 눈에 담았다. 전기가 흐르는 것처럼 찌르르하는 손등으로 미동조차 없는 그의 단정한 뺨을 슬쩍 훑었다.

마치 죽은 사람 같았다. 죽음이라니. 무구원에게는 참 어울리지 않는 단어인데.

하지만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는 오늘 윤모난이 죽일 사람들 가운데, 가장 편안하게 죽는 사람이자 온전한 모습으로 죽은 유일한 사람이 될 것이다. 손을 천천히 거둬들인 윤모난은 그대로 등을 돌려 방을 나왔다.

시간마다 제공된 식사에 손도 대지 않고 틀어박힌 지 일주일만이었다. 그는 나오자마자 예상대로 앞을 철통처럼 지키고 있던 몰이꾼에게 말했다.

“무정원한테 전해. 생각을 마쳤으니 만나자고.”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를 떠난 몰이꾼은 오래 걸리지 않아 되돌아왔다.

“천경교 축일 주간이라, 가주님께서는 예배당에서 사제들과 함께 의례를 치르고 계십니다. 오늘이 마지막 날이니 오후는 돼야 접견이 가능합니다.”

“오늘이 마지막 날이다? 그럼 내일부터는 너네가 그렇게 신성시하는 날도 끝이네?”

“…네?”

몰이꾼이 의아하게 되물었으나 윤모난은 다시 입을 열지 않았다. 오후 늦게가 되어서야 그에게 예배당으로 오라는 무정원의 허락이 떨어졌다. 축일 주간에는 북해 전체에서 몇 시간 간격을 두고 계속 종이 울리는데 마침 그 시간이었다.

평소에는 적막하기 그지없던 이곳을 바짝 깨우는 소음에 놀란 산새들이 불안한 듯 날갯짓하며 바다 쪽으로 날아갔다. 예배당으로 들어가기 전에 당연한 수순으로 몸수색이 이어졌다. 혹시라도 무기가 될 만한 게 있는지 꼼꼼하게 확인하는 걸 보며 윤모난은 코웃음을 쳤다.

“잠깐 멈추십시오.”

수색이 끝나자 정문과 안쪽 공간 사이의 벽에서 사제 한 명이 막아 세웠다. 긴 바늘을 들고 나타난 사제가 자신의 손가락을 살짝 찌른 다음 피를 냈다. 그러고는 그걸 물감처럼 윤모난의 두 눈 아래에 찍는다.

그 과정 또한 윤모난은 순순히 따랐다. 사제가 단조로운 목소리로 기도를 읊조렸다. 그 내용이 꽤나 아이러니했는데, 축일 주간을 맞아 축복을 내리는 기도였기 때문이다.

“이 사람에게 고통을 긍정할 힘을 주소서—.”

짧은 기도를 끝낸 사제가 유령처럼 사라지자마자 윤모난은 격자무늬로 된 문을 밀고 들어갔다. 예배당 안은 생각보다 공간이 휑했다. 제단 아래 신자들을 위해 마련된 바닥은 텅 비어 있었고, 그 위에 매트를 깔고 무릎을 꿇고 있는 사람은 무정원뿐이었다. 발걸음 소리가 벽을 타고 울렸다. 그 소리는 무정원의 옆에 이르러서야 끝이 났다.

“기도 중이다.”

무정원은 경전의 종잇장을 맨손으로 넘기며 여상하게 말했다. 종이를 넘긴 뒤에 그는 무언가 읊조리며 바닥에 머리를 가까이 댔다. 그사이에 윤모난은 예배당의 풍경을 쭉 훑었다.

적막한 공간 한가운데 나무로 조각된 여신상이 있었다. 손끝에서는 정체 모를 액체가 흘러 연거푸 아래로 떨어졌다. 신상 앞에서도 윤모난은 몸을 굽히지도 예의를 보이지도 않았다.

“아직도 이 종교를 우습게 보는 모양이군.”

무정원이 문득 고개를 들더니 핀잔을 줬다.

“그거 알아? 어머니 신은 자비로운 동시에 가혹하기도 하시지. 영웅들에게는 텃밭을 내어주시지만 괴물들에겐 한 치의 자비도 베풀지 않아. 영원히 음지에 가둬 몇천 겁의 시간 동안 추위에 떨게 하신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데요?”

“그런 점에서 작약은 영원히 추위에 떨게 되겠지.”

툭, 하고 두꺼운 경전을 닫는 소리가 울렸다. 그러고서는 경건한 신도의 입에서만이 나올 법한 말이 잇따랐다.

“난 그 생각만 하면 믿음이 굳건해지는 걸 느낀다. 그 믿음 하나만으로 너무 잔인하게 굴지 말고 그 동생인 너를 용서하겠다는 결심도 한 거고.”

“…그러고 보니 묻고 싶은 말이 있었는데. 우리 형들의 일. 그것도 형과 관련이 있어요?”

무정원은 대답이 없었다. 무표정하던 그는 조금 시간 차를 두고 미간을 찡그리며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명백히 꾸며낸 연민이었다.

“이제 와서 그런 게 중요한가? 그 일이 내 의도였든 천벌이었든 간에, 영원히 모르는 편이 더 나은 법도 있는 거란다. 생각해봐. 작약의 잘못을 몰랐을 때의 네가 얼마나 행복했는지. 그리고 마침내 알게 된 지금의 넌 얼마나 비참한지.”

“…내가 그 옛날에 형한테 술을 주지 않았다면 그날 나도 죽었을까요?”

“그냥 묻어두지 그래, 모난아.”

일견 인자해 보이는 미소가 무정원의 가증스러운 얼굴에 서려 있었다. 진실을 알고 있지만 너를 위해서 자애로운 내가 너의 고통을 완화시켜주겠다는 시혜적인 태도가 엿보였다. 윤모난은 그 순간 사제가 자신의 피를 찍은 눈 밑을 손으로 닦아내며 자조했다.

“여기서 하는 기도 말 중에 와닿는 건 하나도 없었지만. 그래도 한 가지는 왠지 기억에 남더군요. 고통을 긍정하라는 말.”

피 묻은 손끝을 문지르며 윤모난은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내가 보기에 고통을 긍정하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그것을 직시하는 건데,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는 그러기 쉽지 않아요.”

“…….”

“게다가 모르는 것도 이제 지쳤달까.”

“알고도 감당할 자신은 있고? 알다시피 난 죽은 네가 아니라 살아 있는 네가 필요하거든.”

“형, 죽고 사는 문제에 왜 그렇게 집착해요. 죽어도 텃밭에 가려고 이렇게 기도하시는 분이.”

“내가 아니라…. 나는 네가 살지 죽을 지에 관해 이야기한 거다.”

그 말에 윤모난의 차가운 시선이 무정원에게로 떨어졌다. 손으로 대충 문지른 탓에 윤모난의 흰 얼굴이 붉은 피로 번져 있었다. 이미 살인을 하고 나온 사람의 몰골이었다.

거기서 무정원은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다. 피가 섬뜩하다거나 흉측해서는 전혀 아니었다. 이곳에 온 뒤로 윤모난 주위를 두르고 있는 불쾌하고도 기이한 느낌 때문이었다.

명색이 무정원은 윤모난과 몇 년이나마 살을 섞었고 좋은 관계를 유지하던 사람이었다. 그런고로 그는 그에 대해 잘 안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살성을 타고나 늘 피를 묻히고 살아가는 녀석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이렇듯 이질감을 풍기지는 않았다. 하지만 오늘은 무언가 이상하다.

굳이 말하자면 지금의 윤모난에게서는 전혀 인간답지 않은 위화감이 풍겼다. 일전에 작약에게서도 똑같이 느꼈던….

“좋네요, 여기. 조용하고 평화로워서.”

별안간 단조로운 감상이 그의 생각을 뚝 잘라냈다. 윤모난은 예배당 천장을 구경하고 있었다. 수백 수천 개의 거울 조각들이 매달린 천장에 시선을 고정한 그에게서는, 방금까지 들던 이질적인 느낌이 언제 그랬냐는 듯 밤안개같이 사라져 있었다.

그것에 무정원은 기묘한 안도감을 느꼈다. 왜 그런 기분을 느꼈는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내심 윤모난이 작약과 똑같은 인물이 되지 않기를 바라기라도 했던 걸까.

“모난아.”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다만 어디선가 불어오는 미풍에 떠밀려 예배당 천장에 매달린 조각들이 서로 몸을 부딪치는 소리가 침묵을 메웠다. 유리가 만들어낸 화음을 즐기는 윤모난을 보노라니, 무정원은 잠시지만 모든 것이 아득하게 느껴졌다.

그의 머릿속에 갑자기 윤모난을 처음 만난 그날이 떠올랐다. 수면 위로 포말을 흩뿌리며 솟구치던 이미지가 묻어두었던 기억 저편에서 불현듯이 선명해졌다. 그날로부터 너무 많은 것이 달라져버렸다.

“가주님.”

갑자기 생생해지려던 회상을 방해한 건 밖에서 소식을 가져온 보좌관이었다. 굳은 얼굴로 다가온 그는 귓속말로 무언가를 속삭였다. 이윽고 보좌관이 할 말을 모두 전하고서는 뒤로 물러섰다. 예배당 안으로 제복을 입은 에스퍼 몇 명이 더 들어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무정원은 저답지 않게 감상에 빠져들던 스스로를 남몰래 비난하며 탄식을 내뱉었다.

“이런, 모난아. 정말 놀랐다. 아무리 그래도 네 손으로 직접 무구원을 죽일 줄이야.”

상황의 반전과 더불어 아름답게 느껴졌던 유리 조각의 화음이 귀에 거슬리기 시작했다. 태연하고 여유로운 윤모난을 보는 무정원은 짐짓 냉정을 가장하고는 있지만, 당혹스러움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자신의 판단이 틀렸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터였다.

“결국 무구원은 너에게 아무런 가치도 없었던 걸로 판명이 났군.”

정말 예상하지 못한 일인 듯, 동생이 죽었다는 말을 들은 뒤에도 무정원은 슬픔을 제외한 불쾌한 감정만 내비쳤다.

“자다가 죽었다니. 무구원이 저지른 죄를 생각하면 너무도 평화로운 죽음이야.”

내 판단이 틀렸구나, 인간다운 감정이 네 발목을 조금은 잡을 줄 알았는데. 덧붙이는 말에 윤모난의 시선이 아래로 처박혔다. 자신이 저지른 죄가 갑자기 무거워지기라도 한 걸까. 고개를 숙인 그에게 무정원이 천천히 다가갔다.

“결국 무구원은 아무런 의미도 없이 죽었어.”

그 한마디로 동생의 죽음을 평한 무정원의 잿빛 눈동자 안에선 어떠한 감정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대신에 그는 안타까움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지 말지 그랬니. 어쩌면 무구원이 너를 맹목적으로 사랑해줄 마지막 사람이었을 텐데.”

“…….”

“난 네가 과거는 잊고 행복해지기를 바랐는데 말이다.”

무정원은 위로라도 하려는 듯 윤모난의 머리를 끌어당겨 제 어깨에 기대게 했다.

하지만 무정원이 착각한 것이 있었다. 윤모난은 이미 맹세했다. 아무런 아픔이나 후회, 죄책감을 느끼지 않기로.

다음 순간, 윤모난은 손을 들어 무정원의 멱살을 움켜쥐며 바닥으로 거세게 밀어붙였다. 동시에 뒤에서 철컥하고 총을 장전하는 소리가 연이어 울리고, 다른 에스퍼들의 움직임이 부산스러워졌다.

“네가 아무리 가이드라고 해도 내 가문의 본가에서 날 죽이고 무사히 빠져나갈 방법은 없다.”

“…….”

“무구원에 이어 무의미하게 죽으려는 건 아니겠지? 그러지 마라. 네가 가이드로 태어난 건 이렇게 허무하기 죽기 위해서가 아니야.”

“아니. 무구원이 무의미하게 죽은 건 아니지.”

윤모난은 선선히 무정원의 멱살을 놓아주었다. 그리고 숙였던 상체를 세워 예배당 안에 있는 사람들을 쭉 둘러보았다. 모두의 얼굴이 뭉개진 것처럼 흐릿했고, 거울 조각에 난반사된 빛이 여기저기 산란하며 공간 곳곳으로 번졌다.

“무구원이 아니었다면 내가 이 방법을 떠올리지도 못했을 테니까.”

“…뭐라고?”

“이 짓을 거듭 반복하고 내 마음에 찰 때까지 무구원이 버텨줬거든. 그러니까 무정원 넌 그렇게 비웃고 업신여겼던 동생 덕분에 잠깐 목숨을 부지했고, 또 죽는 거야.”

모두가 윤모난에게 아무런 무기가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뜻을 알 수 없는 섬뜩한 말에 긴장이 확 조여들었다. 무정원마저 윤모난의 말이 의미하는 바를 바로 이해하지 못한 듯 미간을 찌푸렸다.

윤모난은 자신의 사냥감이 될 그를 내려다봤다. 한없이 연약해서 우스울 만큼 무방비해 보였다.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지?”

“…잃는 것 없이 아무것도 얻을 수 없으니, 추가적인 희생은 나도 감수해야 했어. 나는 널 절대 용서 못해, 무정원. 넌 내 자식을 죽인 거나 마찬가지거든.”

이 모든 일이 끝나게 되면 누군가가 물을지도 모른다. 이럴 만한 가치가 있었는지 말이다. 널 사랑하는 사람에게 그런 짓을 하면서까지, 너 스스로 그런 괴물이 되어서까지 그랬어야만 했는지도. 네 고통이 뭐가 그렇게 유달라서?

하지만 윤모난에겐 답할 말이 있었다. 자신은 애초에 어떤 거창한 대의나 정의감으로 이 일을 시작한 게 아니었다고. 주현희처럼 실패한 혁명을 다시 꿈꾸는 것도, 작약처럼 가문의 이름을 지워 자유를 바랐던 것도 아니라고. 권력에 대한 무정원의 야망 같은 것도 아무 해당 사항이 없었다고.

대신에 윤모난은 그 모든 거대한 서사가 만들어낸 그림자 속에 존재하고 있었다. 한 줌에 불과한 희망과 고뇌를 끌어안고서.

“윤모난, 너…!”

순간 무정원이 두려움을 감추지 못한 채 평정을 잃고 소리쳤다. 결국 그도 알아차린 듯했다. 윤모난이 무얼 하려는지. 늘 여유로웠던 그의 얼굴 위로 깊은 혐오감이 번졌다. 윤모난은 손가락을 뻗어 무정원의 이마 한가운데를 지그시 누르며 말했다.

“소용없다는 거 알잖아요.”

뺨에 닿는 차가운 공기가 우스웠다. 무정원을 중심으로 방사형으로 흘러나오던 흰 얼음 결정들은 순식간에 냉기를 잃고 융해되며 바닥에 고였다. 모든 것이 순식간이었다.

한 사람에게서 흘러나온 파동이 예배당 전체로 퍼지며 강한 섬광이 발생했다. 총을 발포하려던 에스퍼들은 빛에 눈을 덴 듯이 찡그리며 움츠러들었다. 누군가 기이한 신음을 뱉었다.

“내가 이 순간을 완벽하게 만들려고 얼마나 노력했는데.”

누군가에게 닿으려는 듯 허공을 향해 허우적거리는 무정원의 손으로 단두대의 칼날같이 발이 떨어졌다. 검은 장갑을 낀 손이 바퀴에 끼인 것처럼 무기력하게 짓밟혔다. 윤모난이 무미건조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이 흉측한 손으로 그걸 막을 수 있을 것 같아? 무정원?”

“으으으―!”

마지막 자존심이었을까, 무정원이 비명을 참으려 입술을 콱 깨물었다. 날카로운 이에 잘릴 기세로 앙다문 입술에서 핏물이 주르륵 흐른다. 하지만 비명은 공간 전체에서 터지고 있었다.

어느새 손에 들고 있던 총을 바닥으로 떨어트린 몰이꾼들이 하나둘씩 바닥으로 쓰러지며 귀를 감싸고 굴렀다. 경건한 예배당은 삽시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윤모난은 바닥에 떨어진 총기로 다가가 탄창을 확인하고 장전했다.

끼이이이이이이―

섬뜩한 울음소리가 이어지기가 무섭게 탕―! 하고 총구 끝에서 연기가 피어오른다. 죽음을 향한 무자비한 선고는 멈추지 않았다. 윤모난은 바닥에 붙어서 꿈틀거리기 시작한 ‘것’들을 모두 죽였다.

그러고는 마지막으로 예배당 한가운데에서 뒹굴고 있는 것에게 마찬가지로 총을 겨눴다. 총알이 그것의 두 다리로 날아갔다. 피가 튀어 오르고 얼음들이 제멋대로 무작위로 솟았다가 사그라들었다.

윤모난은 총구를 잠깐 치웠다. 무언가 생각난 듯 그는 입가에 웃음을 띠었다.

“아, 이제야 저도 형을 용서할 수 있을 것 같네요.”

그 말을 끝으로 흉터 많은 손가락이 괴물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드디어 안을 모두 정리한 윤모난은 총을 고쳐 잡으며 예배당 문으로 향했다. 그러자 ‘그것’이 핏자국을 매달고 쫓아왔다.

훑은 자리마다 불투명한 액체가 흔적을 만들었다. 창백한 피부. 피부를 뚫고 나오는 점액질. 변형되기 시작한 팔과 다리. 윤모난은 이지를 잃어가는 괴물의 눈을 건조하게 바라보다가 길을 틔워주려는 듯이 격자무늬 문을 손으로 밀어 열었다.

“예배당에서 총소리가 들렸다―! 전원 집결하라!”

밖은 이미 부산스럽고 소란스러웠다. 댕댕댕댕 종소리가 사정없이 북해의 이곳저곳을 날카롭게 깨웠다. 소동을 가르며 윤모난이 예배당 문을 열고 나타났을 때, 모두의 시선이 일제히 쏟아졌다.

그곳에는 두 괴물이 있었다. 한때 가이드였지만 더 이상 가이드라는 칭호가 걸맞지 않은 괴물 하나와, 한때 누구보다도 오만한 북해의 가주이자 포스트 전사였으나 더 이상 사람이 아닌 괴물이었다.

그 순간 째질 듯 울리던 종소리가 멈췄다. 괴물을 본 누군가는 반격할 의지를 잃은 듯 허망하게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어머니 신이시여…’ 하고 외우면서. 여기 있는 모두의 심경을 대변하는 모습이었다.

괴물을 죽이기 위해서 태어났지만, 한편으로 그 괴물이 될 수 있다는 것은 포스트 에스퍼에게 각인된 실존적인 공포였다.

“…가주님께서.”

그러므로 모든 에스퍼들은 가이드를 경외한다. 그들의 힘을 두려워하면서도 자신들을 구원할 수 있는 건 가이드밖에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가이드는 어머니 신보다 더 가까운 구원자였다. 왜냐하면 어머니 신은 괴물들을 위한 텃밭을 마련하지 않기 때문에.

그녀는 괴물에겐 잔혹하고 영웅은 보호하는 양면적인 신이다. 사실 괴물과 영웅은 동전의 양면처럼 한 존재의 명암일 뿐인데도. 그러니 삶에서 가이드가 가진 의미는 사실상 어머니 신을 뛰어넘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가이드는 에스퍼를 구원해야만 하는 존재였다. 그러나 윤모난은 에스퍼를 트랜스로 만듦으로써 자신의 존재 이유 자체를 저버린 것이다.

“접근하지 마!”

개중에 이성적인 누군가가 옳은 판단을 했다. 더 이상 가이드가 아닌 윤모난에게 가까이 갔다가 초래될 결과는 하나뿐이니까. 두려움은 전염병처럼 빠르게 퍼졌다. 큐브 따위는 에스퍼를 트랜스로 만드는 방법을 터득한 가이드가 주는 공포엔 비할 것도 안 됐다.

여기 있는 사람들이 큐브로 사람을 트랜스화하면서도 그 행동을 그나마 변호할 수 있었던 것은, 그것이 사람이 아닌 사물이기 때문이었다. 큐브는 그저 총이나 핵폭탄 같은 무기일 뿐이라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들은 같은 사람이 그런 사물과 똑같은 무기가 되었다는 것은 받아들이지 못했다.

“당국에 신고해! 당장 이 소식을 알려―!”

“…하지만.”

그 말에 보좌진 중 몇 명이 난색을 표했다. 윤모난은 신고는커녕 아무것도 못하고 머뭇거리는 그들을 비웃었다.

신고는 당연히 못할 것이다. 그러려면 무정원이 무엇이 되었는지 모두에게 알려야 하니까. 축일 주간, 성지 위에 세워졌다는 이 북해의 땅에서 트랜스가 된 무정원을 이 광신도들이 납득할 수 있을까?

윤모난은 몸부림치고 있는 괴물의 목덜미를 잡고 그들 앞에 전시하듯 바닥으로 질질 끌기 시작했다.

“비켜.”

끼이이이이이이.

괴상한 소리를 내며 반항하는 무정원을 코앞에서 목도한 에스퍼들이 사색이 되어 몸을 물렸다. 나름의 인질이었다. 이 추한 괴물은 명색이 그들의 가주였다. 함부로 총을 갈겨댈 수는 없을 터였다.

윤모난은 그들이 스스로 틔워준 길로 힘들이지 않고 걸어 나와 예배당 옆길로 향했다. 중간에 괴물이 뼈가 하얗게 드러난 다리를 바르작댔지만, 단단한 손에 잡혀 꼼짝하지 못했다. 그렇게 길을 벗어나니 어느새 부드러운 모래가 밟힌다.

“…내가 다짐했거든? 무정원 넌 가장 수치스럽고 고통스러운 방법으로 죽여주겠다고.”

바다에 도착한 뒤 윤모난은 모래사장 위로 괴물을 패대기쳤다. 족쇄에서 풀려난 괴물이 끼긱거리며 달아날 준비를 했지만, 가이드에게서 빠져나온 날 선 파동이 퍼덕대는 몸뚱이를 무겁게 짓눌렀다.

“이렇게 되어보니까 기분이 어때?”

둘 사이의 대화는 이미 불가능한 상태였다. 저 잿빛 눈동자나 깊은 의식 속에 여전히 인간이라는 자각은 있을지도 모르지만, 곧 그것도 꺼지게 될 것이다. 하지만 윤모난은 그런 괴물이 알아들을 수 있는 것처럼 말을 걸었다.

“내가 딱 청연이만 한 나이가 됐을 때 우리 아버지가 그러더라고. 넌 형들하곤 다르다. 넌 내가 가장 공들여서 만들어낸 걸작이다.”

그건 누구에게도 하지 않았던 얘기였다. 들을 수 없는 무정원에게 하는 말이 아니라, 윤모난 자기 자신에게 하는 말이었다.

“그때부터 어렴풋이 알았어. 형들은 태어난 거지만 난 다르다고, 그래서 아버지가 나한테는 한 번도 사랑을 주지 않았구나. 그 인간 때문에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내 생모가 날 낳았겠지.”

마치 제비뽑기처럼, 유전자 조합의 한 경우의 수에 불과한 가이드가 필요해 몇 명을 희생시킨 윤모난의 아버지는 아들이 겨우 7살이 되었을 때 평생을 따라다닐 꼬리표를 붙였다. 윤모난은 그렇게 만들어진 인생을 살았다.

“그러니 내가 더 이상 가이드가 아니게 된다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게 되는 거라고. 그러고 나니까 알겠더군. 나는 이제 온전히….”

용도에 맞게 만들어졌다는 것. 그게 윤모난에게 각인된 자신의 본질이었다. 그래서 스스로의 용도를 완전히 부정해버린 지금, 그는 오히려….

“…자유로워졌구나.”

윤모난은 일주일간 파동이 이중 곡선을 그리던 무구원에게 파동을 뻗쳤다. 가이딩이 아닌, 완전히 역전된 그 행위는 에스퍼를 트랜스로 만들기 위한 연습 과정이었다.

한 사람의 용도를 완전히 바꾼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가이드에서 괴물로 떨어지기 위해서는 고통스러운 과정이 필요했다. 그래서 윤모난은 자신에게 복종하겠다며 선선히 목숨을 바치겠다고 한 무구원에게 그걸 연습해야 했다.

에스퍼의 에너지는 마치 리듬과 같다. 각자 저마다 가진 가락이 다르고, 가까운 사람일수록 그 리듬에 익숙하다. 그런 점에서 윤모난에게 무구원은 최적의 연습 상대였다.

“…그런데 내가 이 자유 하나를 얻기까지 희생된 사람이 너무 많아.”

손이 총을 다시 고쳐 잡았다. 윤모난은 그저 땅을 기는 것밖에 할 수 없는 괴물의 머리에 조용히 총구를 들이댔다.

“형 말이 맞네요. 안다는 건 참 비참한 일이야.”

탕―!

“그래도 나는 기꺼이 진실을 선택하겠어.”

방아쇠가 당겨졌다. 연이어 윤모난의 손가락이 움직였다. 탄창이 빌 때까지 윤모난은 괴물에게 발포했다. 턱, 하고 빈 탄창이 걸리는 소리가 들리면 새 탄창으로 갈아 끼우면서 총질을 멈추지 않았다. 이윽고 괴물에게서 흘러나온 피가 신발 끝에 닿아서야 그는 손을 내렸다.

무정원이 죽었다. 괴물이 되었으니 텃밭에는 가지 못할 것이다. 복수도 끝이 났다.

“…청연아.”

다음 순간 튀어나온 말끝이 엉망으로 뭉개져 있었다. 아래로 떨어진 손은 사정없이 떨렸다. 윤모난은 지독한 오한이 찾아온 몸을 가누지 못하고 바닥을 향해 무너졌다. 끅끅대며 앓는 소리가 그의 몸을 쪼개고 튀어나왔다.

너무도 참혹한 마음이 눈물을 요구했지만, 짐승처럼 앓는 소리 외에는 아무것도 내보내지 못하던 윤모난은 지난번 집에서 가져온 청연의 사진을 주머니에서 꺼냈다. 사진의 표면은 영원히 분리된 삼촌과 조카 사이를 상징하고 있었다.

“삼촌, 그리고 저도 편지 보내면 답장받고 싶어요.”

“…그래, 그것도 꼭 할게.”

그게 아이와 마지막으로 나눈 대화였다. 한 번도 조카의 편지에 답장해준 적 없으면서 써주겠다고 거짓말한 것이 마지막 대화라니. 윤모난은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었다.

정말 텃밭이라는 곳이 있어서 청연 또한 거기 있다면, 과연 지금 삼촌의 모습을 반겨줄까? 아니, 아마도 그렇지 않을 것이다. 아이의 순수하고 깨끗한 영혼은 불결한 것들과는 멀어져야 하니까.

윤모난은 더 이상 편지를 보낼 수 없는 곳에 있는 청연에게 작별 인사를 해야 했다. 이제 7년 동안의 긴 애도를 끝내고 청연을 보내줘야 할 때였다.

“청연아, 삼촌이 미안해….”

그 말을 뱉자마자 아이가 없는 현실이 차갑게 윤모난을 짓눌렀다. 복수라는 명분 따위 다 사라진 곳에 덩그러니 남은 현실은 단 한 가지 사실을 뼈아프게 알려줄 뿐이었다. 해방된, 괴물이 된 자신만 혼자 남았다는 것.

윤모난은 숨을 삼키며 바다로 시선을 던졌다. 그사이 여러 에스퍼들의 파동이 느껴졌다. 교목 쪽에서 접근하고 있었다. 무정원의 죽음과 동시에 잠깐 우왕좌왕했던 북해 가문에서 윤모난을 이대로 보내선 안 된다는 판단을 한 것이다.

하지만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진한 탈력감에 그저 이대로 쓰러지고 싶었다.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모든 걸 놓아버리려던 그 순간이었다.

“…무구원?”

아래로 떨구어져 있던 고개가 올라왔다. 때맞춰 부드러운 바람이 윤모난의 머리칼을 스치고 지나갔다. 아무리 추운 곳이라 해도 봄은 찾아온다. 차가운 바닷바람 속에서 따스한 기운이 움트고 있었다.

정신을 집중하지 않으면 모를 만큼 아주 미미하지만 윤모난에겐 그걸 느낄 만큼 충분히 예민한 감각이 있었다. 더 기다리면 온전히 따듯해질 바람에 섞인 무구원의 파동이, 그의 고유한 리듬이 모든 어지러운 것들에 섞여 미약하지만 닿고 있었다.

거기에 본능적으로 반응하듯 몸이 저절로 움직였다. 윤모난은 자신을 막아서기 위해 교목 뒤로 까맣게 몰려들고 있는 에스퍼들과 맞섰다. 총을 발포하는 소리가 요란스럽게 이어진 것은 그다음이었다.

* * *

3개월 뒤. 안범은 가능한 모든 휴가를 전부 끌어모아 버티고 버티다가 결국 기관으로부터 경고를 받았다. 당장 복귀하지 않으면 팀장에서 해임되는 것은 물론 강제 퇴직까지 당할 상황이었다.

경해국이 몇 살 더 많은 선배로서 조언이랍시고 내놓은 말은, 그냥 다 때려치우고 동산에서 살자는 거였다. 황당한 소리에도 안범은 의젓하게 답했다.

“아뇨. 돌아가야죠. 저도 이제 팀장입니다! 저한테도 책임질 팀원이 있습니다.”

“오, 안 팀자앙. 아주 으른 다 됐어.”

“그럼요. 경 선배님은 제가 아직도 울보 찌찌 애비인 줄 아십니까? 저도 어엿한 성인입니다.”

20살에도 성인이긴 했던 안범의 새삼스러운 주장에 경해국이 호쾌하게 웃었다.

그날 이후로 3개월이 흘렀다. 두 사람은 무정원이 탄 기차를 두고 윤모난과 헤어진 날부터 줄곧 동산에 있었다.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많은 일이 있었다. 무엇보다 가장 충격적이었던 소식은 북해에서 무정원이 갑작스레 사고로 사망했다는 것이었다. 그 일이 사고가 아니라는 걸 아는 사람으로서는 당황스럽기 그지없었지만…. 뭣보다―

윤모난은? 무구원은? 두 사람도 이 세상에 원래 없던 존재처럼 사라졌다. 이제껏 아무런 연락도 없이.

“제가 명색이 신입 때 훌륭한 리더라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난 형한테 직접 배운 놈입니다!”

“…그런 놈이 무작정 장기 휴가 내고 여기 와 있냐. 동산에서 살 거 아니면 얼릉 복귀해라. 진짜 잘릴라. 씨팔, 공무원 철밥통 걷어차고 소식 없는 인간들 기다리는 것만큼 미련한 일이 무어가 있다고.”

경해국이 투덜거렸다.

“그런데 경 선배님은 정말 퇴직하실 겁니까?”

“어. 내 여보가 북해로 돌아가는 걸 불안해하기도 하고. 나도 씹, 다 지겨워. 여기서 새끼들이나 놓고 재롱 보면서 살련다.”

“…무 선배님 아이 때문에 그러시죠?”

안범은 경해국이 동산에 있는 태오와 아이 엄마를 보호하기 위해 퇴직까지 결심했다는 것을 눈치챘다. 경해국은 멀쩡한 한쪽 눈을 데굴데굴 굴리다가 뒤통수를 벅벅 긁으며 겸연쩍은 듯이 답했다.

“그래. 무씨 그 새끼가 아들을 그렇게 애지중지하며 키워왔는데. 그 어린놈을 이제 나라도 보살펴야지 어떡하겠어. 그놈 아버지란 것들은 이미 죽었을지도 모르는데.”

“…무슨―!”

그 순간 안범이 갑자기 뺨을 맞은 사람처럼 소리쳤다. 금세 그의 눈가가 붉게 물들었다.

“안 죽었습니다! 무 선배님이랑 모난이 형 안 죽었단 말입니다!”

“…….”

“취소하십시오! 경 선배님, 왜 자꾸 불길한 소리만 하십니까?”

“이렇게… 연락이 없는데 뻔하… 으악―! 이 새끼가!”

안범의 손이 경해국의 짧은 머리를 움켜쥐었다. 쪼그마한 놈에게 무슨 그런 힘이 있는지 머리카락이 죄 뽑혀 나갈 것 같은 고통에 경해국이 노성을 질렀다.

“이 씨팔, 안 놔! 감히 선배한테. 무씨랑 윤 팀장만 선배고 나는 선배도 아니냐! 안범, 너 이거 하극상이야!”

“으헝! 취소하십시오! 취소하세요!”

“이 미친 다람쥐 자식아—!”

급기야 경해국도 못 참고 작은 머리통을 쥐었다. 서로 머리를 쥐어뜯으며 옥신각신 실랑이가 이어졌다. 비록 하극상까지 벌이며 경해국에게 소리를 질러댔지만 안범도 알고는 있었다. 사라진 두 사람이 얼마나 위태로운 상태일지.

그래서 더 불안했다. 7년 전 윤모난이 사라졌을 때와는 다른 느낌이었다. 그때는 아직 이 모든 일이 끝나지 않았다는 느낌이 있었는데.

“그럼 그 두 사람이 지금 어딜 가 있겠냐! 외국이면 몰라도—!”

순간 요란스럽던 대거리가 멈췄다. 히끅거리며 울 때는 언제고 눈물이 쏙 들어갔는지 안범이 멍한 표정으로 경해국에게서 떨어져 나갔다. 무언가를 가만히 곱씹어보던 안범이 자문하듯이 물었다.

“…무 선배님이 예전에 말한 그 은신처가 어디에 있지요?”

“어?”

두 사람은 대번에 시선을 마주쳤다. 죽었느니 살았느니 서로 싸울 때는 언제고 두 사람의 얼굴에 숨길 수 없는 희망이 약간이지만 번지고 만 것이다.

* * *

무구원이 예전에 알려준 은신처는 반도의 국경을 벗어나 기차로 이틀 정도의 거리에 있는 외국의 한 마을에 있었다. 둘은 그날로 당장 짐을 싸서 기차를 타고 무작정 그곳으로 향했다.

이런 곳에 기차가 선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인적이 드문 동네에 내린 안범과 경해국은 역 주변에서 겨우 트럭 하나를 빌릴 수 있었다. 지도에 의하면 은신처는 역에서도 더 먼 거리에 있었다.

트럭을 몰고 그곳으로 가는 길에는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에, 둘은 중간중간 캠핑을 하고 화톳불을 틔워 맨땅에서 잠을 청해야 했다.

“무구원 독한 놈. 과하게 완벽한 은신처를 찾아냈구나.”

“그러게요.”

낙엽을 모아 축축한 땅의 습기만은 겨우 막아낸 침상에 누운 경해국과 안범은 이 기약 없는 사람 찾기 여정에 대한 감상을 나눴다.

“저는 사실 반도를 나와본 건 처음입니다. 이렇게 여행하는 것두요.”

“씨팔, 이게 여행이냐? 개고생이지.”

경해국이 신경질을 내며 괜히 발로 낙엽을 퍽 걷어찼다. 여름이라 해도 산속이라 밤에는 추웠다. 방풍복 지퍼를 올린 안범은 타닥거리며 타고 있는 불씨를 구경하다 문득 말했다.

“고생 아닙니다. 경 선배님과 제가 똑같은 상황에 처했다면 모난 형과 무 선배님이 우리를 이렇게 찾으러 왔을 걸요.”

“…….”

“우린 언제까지나 한 팀이니까. 2부 7팀은 영원합니다.”

“야. 넌 그런 속 간지러운 소리를 어떻게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거냐? 대체 뭘 듣고 보고 자라면 이렇게 크냐? 입소 첫날부터 찌찌 인형 데리고 온 것부터 알아봤다.”

안범은 ‘찌찌가 아니라 치치입니다’라고 부러 정정해주었다. 지난 몇 년간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경해국은 아마도 죽는 날까지 치치를 찌찌라고 부를 테지만 말이다. 안범은 목에 걸고 있던 은제 펜던트를 만지작거렸다. 윤모난의 것이었다.

“저는요, 줄줄이 동생밖에는 없으니까 저한테 형들이라고는 세 분이 유일합니다.”

“…그만 조잘대고 자라. 내일이면 그 형들 보게 될 거다.”

“전 집이 가난하고 아버지도 일찍 여읜 데다가 어머니도 아프셔서 어릴 때부터 가장이었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 팀에 와서는 막내가 된 거 같아서 좋았습니다. 또 다른 가족이 생긴 것 같기도 하고.”

“무슨, 겨우 1년도 못 간 팀을 가지고….”

“진심입니다. 있잖아요, 경 선배님. 우리 팀 서곡에서 계속 같이 일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나쁜 일도 안 일어나고, 누가 죽을지 걱정하는 일 없이. 그랬으면… 좋았을, 하암….”

안범은 긴 여정에 지쳤는지 하품을 찢어지게 하더니 눈을 끔뻑거렸다. 곧 왜소한 몸을 말고 웅크리고 자는 모습이 어찌나 불쌍해 보이는지, 경해국은 신경질이 뻗쳐 이능력으로 모닥불을 더 키우고 제 담요를 안범에게 던지듯 덮어주었다.

“젠장. 씨팔, 가족은 염병…. 좆같은 무씨, 윤 팀장!”

뒈질 거면 소식이라도 전해주지. 이런 막내를 두고 뒈져서 시체로 발견되면 애가 받을 충격은 어쩌라고. 망할 놈의 호모 새끼들.

말은 안 했지만 경해국 역시 두려운 바는 있었다. 은신처라는 곳에 가서 머리에 총알구멍이 난 주검 두 구를 발견하는 일. 그래서 그 주검을 연고도 없는 외국의 땅에 묻고 돌아와야 할까 봐.

안범은 어떻게 달래서 돌아와야 하며, 태오에겐 무어라 설명할 것인가. 지금도 밤낮 아빠를 목 빠지게 기다리고 있는 아이인데. 경해국은 사라진 두 사람을 찾아 나서면서 태오의 엄마와 나눈 대화를 떠올렸다.

“만약 죽었다면 태오에겐 영원히 비밀로 해주세요.”

당연하지만 그녀는 무구원이나 윤모난에겐 일말의 감정도 없었다. 그저 태오에게 어떠한 영향도 안 미치는 것이 유일한 소망이라 했다. 경해국은 그런 대화를 나누는 내내 씁쓸한 마음을 지울 길이 없었다.

무구원이 그렇게 태오에게 온갖 애정을 쏟아부었어도 그는 가짜 아버지일 뿐이다. 한편으로 생물학적 아버지인 윤모난은 태오가 제 아들인지도 모른다. 태오는 다른 아이보다 아버지가 한 명 더 많았지만, 영원히 그들에 대한 일을 모르고 살게 될 터였다.

“자식보다는 결국 사랑이라 이거지….”

경해국은 듣는 사람도 없는 빈 허공에다 대고 비난을 지껄이곤 몸을 돌려 잠을 청했다. 이 속 시끄러운 여행이 내일이면 답을 내기를 바랄 뿐이다. 죽었든 안 죽었든. 확인한 뒤에는 돌아가면 된다.

다음 날, 아침 일찍 경해국과 안범은 캠핑용품을 거둬들인 뒤에 다시 트럭에 올라탔다. 낡은 트럭 엔진의 탈탈거리는 소음을 길동무 삼은 끝에 마침내 그들은 그 은신처라는 곳에 당도했다.

그곳에 도착한 첫 소감은 조금 미묘했다. 인적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산속 깊숙한 곳에 있는 낡은 집 한 채가 유령의 집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내가 들어가볼게. 안범 넌 여기서 얌전히 기다리고 있어라.”

경해국은 착잡한 얼굴로 안범을 밀었지만, 함께 가겠다는 그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다. 결국 둘은 나란히 집 현관으로 향했다. 햇살이 한창 비추는 오후. 주변 공기는 따듯했고 향기로운 나뭇잎 냄새가 감도는 고즈넉한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하지만 그곳에 외따로 떨어진 듯 놓여 있는 집 안에서는 아무런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현관문을 두드려봐도 돌아오는 건 적막뿐이었다. 기다림 끝에 경해국이 문손잡이를 잡아당겼다. 덜컹하고 소음을 낸 문은 잠기지도 않았는지 허무하게 열려버렸다.

집 안은 어두컴컴했다. 불을 켜지 않은 실내에서는 미묘하게 먼지 냄새가 났다. 안범은 머뭇거리며 안으로 들어가 이곳에 생활의 흔적이 있는지부터 확인했다. 분주하게 돌아다녔으나 바라던 것은 발견할 수 없었다.

“…형.”

실망 섞인 탄식이 흘러나왔다. 결국 1층에는 아무도 없었다. 경해국은 그런 안범을 보다가 마른침을 삼켰다. 아직 확인할 곳은 많았다. 둘은 삐걱대는 나무 바닥을 밟으며 복도를 따라 걸었다. 복도 안쪽으로 2층으로 난 계단이 보이고 작은 거실이 있었다.

두 사람은 무거운 걸음으로 계단을 밟아 층고를 올라갔다. 단출한 구조의 집은 2층이긴 하지만 방이 하나밖에 없었다. 문이 빼꼼 열려 있고 그 사이로 빛이 긴 띠를 드리워 어두운 복도로 뻗어 나와 있었다. 그리고 경해국은 직감했다. 그 방 안에 어떠한 답이 있을 거란 것을.

“스읍, 시체 냄새는 안 나는데.”

“경 선배님…! 그런 말 막 하지 마세요.”

안범이 참지 못하고 숨을 터트렸다. 경해국의 무시무시한 말 탓에 두 사람 모두 바로 문 안을 들여다볼 엄두를 내지 못했다. 시간 능력자도 아닌데 그 망설임의 순간이 시시각각 지나가는 것을 셀 수도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던 그때였다.

끼이이익.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던 방문이 갑자기 귀신 들린 것처럼 움직였다. 낡은 경첩이 비명을 지르는 소리가 생생해 두 사람은 그 자리에서 바짝 굳고 말았다.

“…모난 형?”

그 부름에 응하듯이 기다란 그림자가 경계를 넘어 나타났다. 동시에 안범의 긴장한 얼굴이 팽팽하던 고무줄을 놓은 것처럼 무방비하게 풀어졌다. 늘 그랬던 것처럼 안범은 잽싸게 튀어 나가 문을 열고 나타난 남자의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

“형!”

“…이 자식들, 왜 이렇게 늦었어? 언제 오나 기다렸는데.”

낮은 목소리가 오랜 여행을 한 방문객을 맞이했다. 윤모난이 당연하다는 듯 거기에 있었다. 기다리고 있었다는 말이 거짓이 아니었는지 멀쩡한 모습으로 안범을 토닥였다.

“무구원이 말한 은신처를 알려준 건 너희잖아. 난 바로 쫓아올 줄 알았는데. 이렇게 오래 걸릴 줄이야.”

“…제가 그랬잖아요, 형! 동산에서 기다릴 거라고. 약속을 어긴 건 형이면서.”

“아, 맞다. 그렇네. 범이 네 말이 맞군.”

경해국은 말없이 윤모난의 얼굴을 살폈다. 평온하고 담담한 모습이었다. 그런데도 무언가 명치를 콱 옥죄어오는 이상한 불안감이 들었다. 경해국은 윤모난의 등 뒤를 흘긋대며 물었다.

“무씨, 무구원은요?”

대답 대신 침묵이 이어졌다. 윤모난은 뭐라 대답해야 할지 막막한 표정이 되어버렸다. 그러다 이내 고갯짓을 하며 방을 가리켰다. 경해국은 바로 그곳으로 향했다. 그리고 방 안을 확인하고 나온 그의 얼굴이 심상치 않았다.

“씨팔! 무씨 왜 저럽니까?”

“경 선배님…?”

둘의 의아한 얼굴에 대고 윤모난이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말 나온 김에, 너희가 무구원 좀 데려가라.”

“무슨, 대체―!”

“무구원 데리고 반도로 돌아가라고.”

“죽은… 겁니까?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는 듯 경해국이 턱을 경련하며 물었다. 그 말에 내내 아무런 표정도 드러나지 않은 채 그저 창백하기 그지없던 윤모난의 얼굴이 미세하게 일그러졌다. 그가 처음으로 보인 감정 변화였다.

“말씀하십쇼. 무씨. 죽은 거예요?”

“…….”

“…대체 무슨 짓을 한 겁니까?”

윤모난의 멱살을 쥔 경해국의 얼굴이 뻘겋게 달아올라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았다. 그가 그런 식으로 흥분한 건 낯선 일이었다. 정확히는 분노 조절 장애가 있는 경해국이 화가 아니라 슬픔과 충격으로 물든 것은 처음이었다.

안범이 옆에서 무슨 소리냐며 그를 말리려 했다.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아 허둥거리는 가운데 윤모난의 두 입술을 비집고 튀어나온 말이 무언가를 확신시키고 말았다.

“그래. 내가 그랬어. 내가 그랬으니까…. 제발 좀 데려가.”

“…뭐라구요? 누가 누굴 어떻게 했다고요?”

“내가 무구원한테….”

“씨팔!”

그 말에서 경해국은 무구원이 저렇게 된 건 윤모난 때문이라는 예상을 확신하며 이를 빠드득 갈았다. 이윽고 울분이 섞인 고함이 터졌다.

“이제 속이 시원하십니까? 결국 무구원을 저렇게 만들어놓으니까?”

“…….”

“아시죠? 저놈, 팀장님 아니라면 저런 꼴 안 났다는 거. 희망도 뭣도 없이 자포자기하고 목숨 내던질 놈 아닌 거 아시지 않습니다. 그렇게 저놈 인생 망쳐놓고서는 왜 아직 살아계십니까? 그렇게 죽고 싶다 타령했으면서. 무구원은 죽었는데 당신은 왜 살아 있냔 말입니다!”

“그러지… 그러지 마세요, 경 선배님.”

안범 역시 그사이에 방 안을 확인하고 온 모양이었다. 눈물이 그의 얼굴 전체로 번져 있었다. 경해국은 안범의 만류에 결국 윤모난의 멱살을 놓아주었지만 고조된 감정은 가라앉을 줄 몰랐다.

“개씹, 이기적인 인간. 무구원 저 바보 같은 새끼는 다른 건 다 내팽개치고 딱 하나만 바랐는데. 이게 그에 대한 답이야? 당신은 그 빌어먹을 복수인지 뭔지 하고 무구원은 죽은 거?”

“…….”

“뭐 때문에 아직까지 그 목숨 부지하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내가 저 새끼가 불쌍해서 말하겠는데 말입니다. 무구원 아들 태오, 그거 당신 자식입니다.”

순전히 충동적인 발언이었다. 화를 조절하지 못하는 경해국만이 할 수 있는 폭로였다. 오랜 친구이자 가족의 죽음 앞에 이성을 잃고 그 분노를 어디 다른 곳에 쏟아낼 길이 없어 던진 말이 윤모난의 얼굴에 파문을 일으켰다.

안범이 소리치며 경해국을 말리려 했지만 이미 뱉어낸 말은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경해국마저도 자신의 입에서 튀어 나가는 말을 막을 수가 없었다.

“당신이 7년간 모두 버리고 사라졌을 때 당신 아들을 데려다 자기 자식처럼 키운 게 무구원이라구요. 그 새끼가 왜 그랬겠습니까? 제 핏줄도 아닌 애를 데려다 가짜 결혼까지 하면서 누굴 그리워했겠습니까.”

“…내 아들이라니. 그게 무슨….”

“아직도 모르십니까? 당신 아버지가 한 짓. 그 일로 7년 전에 태오가 생겼다는 거.”

악다구니를 쓰는 경해국의 눈에서도 굵은 눈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무구원이 지금까지 품고 있던 비밀을 터뜨리면서 이것이 옳지 않다는 것쯤은 경해국도 알았다. 하지만 그의 머릿속에는 뱉어내야지만. 해야지만. 후회가 남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는 소맷부리로 눈물을 닦으며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외쳤다.

무구원은 태오가 당신 아들이라서 키운 거라고. 7년간 아무도 믿지 않았던 무구원이 유일하게 마음을 조금이라도 터놓고 자신과 안범에게만 말한 사실을, 윤모난만 모르고 있었던 그 진실을 토해냈다.

“내가 예전에 말했잖습니까. 당신 집안 비극에 우릴 끌어들이지 말라고…. 분명 안 그런다고 약속했으면서. 이게 그 약속의 결과입니까?”

경해국은 젖은 눈가를 뻑뻑 닦은 다음, 윤모난을 지나쳐 방으로 다시 향했다. 침실 위에 정갈하게 누운 무구원은 겉으로 보기에는 단순히 잠들어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만져보면 차갑고 뻣뻣한 느낌에 맥박이 뛰지 않는 몸이 대신 말하고 있었다.

무구원은 죽었다. 데려다 장례를 치러야 한다. 그래야 이 새끼가 그렇게 가고 싶다던 어디 텃밭에 갈 수 있을 테니까. 결심을 마친 경해국은 시트로 무구원을 둘둘 감싼 다음 그의 등에 팔뚝을 집어넣고 힘을 줬다.

“…씨. 개자식, 여전히 존나 무겁네.”

“경 선배님…, 제가 돕겠습니다.”

어느새 따라 들어온 안범이 훌쩍대며 옆에서 힘을 보탰다. 두 사람은 축 늘어져 더 무겁게 느껴지는 무구원을 업는 데 겨우 성공했다. 무구원을 데리고 방을 나온 경해국은 복도에 멍하니 선 윤모난과 다시 한번 마주쳤다.

“갑니다.”

“…….”

“안 따라올 거죠?”

당연하다는 듯이 윤모난에게선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그저 시선을 경해국의 뒤에 업힌 무구원에게 고정하고 있을 뿐. 침묵이 길게 이어지자 안범이 눈물을 흩뿌리며 설득에 나섰지만, 그것도 경해국이 욕을 섞어가며 노성을 지르는 탓에 가로막힌다.

“놔둬! 씨팔! 그냥 우리끼리 가자!”

“으흐흑― 혀엉, 저희랑 같이 가요. 네?”

“안범! 빨리 안 와!”

자신을 거칠게 잡아당기는 경해국의 손길에 안범은 어린애처럼 울기 시작했다. 끈덕지게 윤모난의 손을 잡고 버티던 안범은 얼마 안 가 당기는 힘을 견뎌내지 못하고 바닥으로 꽈당 넘어졌어.

“그만 울어!”

“혀엉―!”

“형은 개뿔. 이제 됐어! 다 집어치워!”

결국 윤모난을 두고 두 사람은 계단을 내려왔다. 밖으로 나왔을 땐 도착한 지 한 시간도 되지 않은 시각이었다. 안범은 거의 탈수 직전까지 울어대고 있었다. 시트에 감싼 무구원을 트럭 뒷좌석에 조심스럽게 실으며 경해국은 이를 꾹 사리물었다.

단호하게 말하기는 했으나 그의 시선도 낡은 집의 2층에 난 창문에 고정되어 있었다. 당장 가자고 했으면서도 경해국은 발로 타이어를 쾅쾅 걷어차며 몇 분이나 기다렸다. 하지만 기다리는 사람은 끝내 오지 않았다.

결국 경해국이 안범을 조수석에 밀어붙이듯 태우고 자신도 운전석에 올라 시동을 걸었다. 곧이어 덜컹거리며 트럭의 엔진이 소음을 냈다. 매캐한 매연과 배기음을 쏟아내며 트럭은 마당을 빠져나가 왔던 길로 다시 돌아갔다.

“흐어어어엉. 경 선배님 돌아가, 흐으, 요…. 무 선배님도 그걸 원할 거란 말입니다.”

“씨팔, 뒤진 놈이 뭘 원하는지 알 게 뭐야! 얘는 내 가족이야! 내가 결정해!”

운전대를 주먹으로 퍽퍽 내려치는 경해국에게서는 금방이라도 불이 치솟을 것 같았다. 두 사람의 눈물과 분노는 이동하는 내내 이어졌다. 더 우는 것도 화를 내기도 지쳤다는 생각이 들 때가 되어서야 차가 잠깐 멈췄다.

날이 어느새 어둑어둑해져 있었다. 기차역으로 가려면 또 빌어먹을 캠핑을 해야 한다. 오는 길에 가지고 있었던 기대감과 그리움이 다 재가 되어버려서 그런지, 둘은 저녁 내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피워놓은 화톳불만 멍하니 바라봤다. 몇 시간을 대성통곡하던 안범마저 얌전해진 참이었다.

붉게 타오르는 불꽃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던 경해국이 문득 입을 열었다.

“안범.”

“…네.”

“무구원, 여기서 화장하자.”

그 말에 안범이 고개를 돌려 경해국을 봤다. 그리고 우욱, 하며 입술을 말아 물더니 몸을 조금씩 떨었다. 충격에 빠져 또 오열하기 시작하려는 안범에게 경해국이 그답지 않게 침착한 설명을 덧붙였다.

“지금 이런 상태로… 국경을 넘을 수 있을 리 없잖아. 시신이라도 빼앗기면 어떡하냐. 차라리 뼛가루로 가져가는 게 낫지.”

“…….”

“내 능력으로 발화점을 높여서 산에서 태우면 몇 시간이면 될 거야. 적당히 담아 갈 유골함이 없긴 한데. 그래도 깡통이라도 하나 비워서 거기다가 넣으면 되겠지.”

“…깡통이, 요? 으흑―!”

“또 울기만 해! 콱, 너도 그럼 무씨랑 같이 따라가든가. 젠장! 나도 겨우 맘 추스르고 결단을 내리려는데….”

안범이 결국 엉엉 소리를 내며 앞으로 엎어졌다. 경해국 역시 착잡한 얼굴로 트럭 뒷좌석을 바라봤다. 하지만 그래서야 답이 없다는 생각에 두 사람은 밤늦게까지 이 일에 관해서 상의했다. 결국 안범은 경해국의 말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적당히 나뭇가지를 모으고 화장터를 마련하는 일까지 하고 나니, 동이 막 터오는 새벽이었다. 적막하기 그지없는 깊은 산속. 둘은 나뭇가지와 마른 잎으로 뒤덮인 자리에 무구원을 가지런히 놓는 일까지 마무리 지었다.

남은 것은 화장하는 일뿐이었다. 경해국은 무구원의 얼굴을 가린 시트를 내리려 하다가 내키지 않아 건드리지 않았다.

“…시작하자.”

두 사람은 손을 모으고 장작더미 옆에 섰다. 시작하자고 했으면서 정작 불을 붙여야 할 사람이 머뭇대고 있었다. 안범은 콧물을 손등으로 닦아내면서 어디선가 꺾어 온 꽃다발을 위에 놓았다. 초라하지만 그래도 구색은 갖춘 화장이었다.

공기에 푸른빛이 뒤섞이는 새벽이 되어서야 경해국은 결심을 마친 듯했다. 시작하자고 말해놓고서도 꽤나 긴 시간이 흐른 다음이었다. 이윽고 경해국의 손가락에 푸른 불꽃이 일었다. 온도가 높고 정제된 불덩이를 장작 위로 떨어트리려는 그 순간이었다.

부우우우우웅―

“잠깐만요!”

안범이 다급하게 외쳤다. 그는 멀리서 들려오는 낯선 엔진 소음에 귀를 쫑긋 세웠다. 그 소리는 숲을 삥 둘러싸며 내내 이어지다가 이리로 가까워지고 있었다. 누군가 다가오고 있다.

“모난… 형 아닐까요?”

“씨팔, 그 망할 인간이 올 리가 있냐!”

그 순간 아슬아슬했던 경해국의 뇌관이 터져버렸다. 그는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서서 손에서 활활 불을 태우더니 아래로 떨어트렸다. 순간 안범이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무구원의 시신이 놓인 장작더미에 순식간에 불이 붙어버린 것이다.

그러는 사이에 엔진 소음은 지척에서 들려오기 시작했다. 이쪽을 비추는 전조등에 화장터 옆에 선 두 사람은 눈을 확 찡그리고 말았다. 이어서 강한 빛이 옆으로 쓰러지고 누군가의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이어졌다.

“무구원!”

그를 그렇게 애타게 부를 사람은 단 한 명밖에 없었다. 윤모난은 바이크를 내팽개치며 달려와 막 무구원의 시신을 위협하고 있던 불길로 뛰어들었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불에 달려든 그는 흰 시트로 감싸인 무구원을 꼭 끌어안았다.

윤모난의 흰 뺨에 검은 그을음이 번졌다. 윤모난은 자신의 몸으로 무구원을 감싸며 그가 화염에 완전히 집어삼켜지기 전에 무사히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쿨럭―!”

“형….”

정작 무구원은 시트에 감싸 놓은 탓에 멀쩡한 데 반해, 윤모난의 몸 여기저기서 매캐한 연기가 피어올랐다. 연기를 마셨는지 바닥에 엎드려 연신 기침을 쏟아내는 윤모난을 보며 경해국과 안범 모두 넋을 잃고 말았다.

“…대체.”

“아직… 몰라.”

“네?”

“아직, 모른다고…. 쿨럭! 무구원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몰라.”

겨우 가라앉은 기침을 삼키며 윤모난이 컬컬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에 경해국이 황당하다는 듯이 말했다.

“…저게 어떻게 살아 있는 겁니까? 숨도 안 쉬고 맥박도 안 뛰는데.”

“…….”

“무구원은 죽었어요. 죽었다구요!”

“…이렇게 된 지. 벌써 석 달째야.”

윤모난은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이윽고 창백하고 조금 지친 얼굴의 남자가 나직이 읊조린다.

“어느 시체가 3개월간 부패하지 않고 같은 상태지?”

“…….”

“…그래서 모르겠다는 거야. 정말 죽은 걸 수도 있지만, 염병 불에 태우면 그걸 확인할 수도 없잖아.”

안범이 턱, 하고 손으로 입을 막았다. 윤모난의 말이 옳다. 만약 무구원이 저 상태로 3개월이나 있었다면, 아무리 죽은 것처럼 보인다 해도 실제로 그럴 확률은 낮았다.

그러니까 그 말인즉슨, 방금 저와 경해국이 살아 있는 무구원을 바비큐 통구이로 텃밭에 보내줄 뻔했다는 소리였다.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안범은 온몸에 오한이 찾아오고 손끝이 다 저릿저릿해져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건 경해국도 마찬가지였다.

“왜, 왜, 왜, 왜. 그 중요한 사실, 을, 왜 지금에서야 말하는, 건데요.”

“…너희가 이따위 화장 쇼를 벌일 거라 상상도 못했거든. 그저 반도에 무사히 데려간 다음 알아서 하겠거니 했다고.”

“…개씹. 제발, 말 좀…. 말 좀 제때제때 하고 삽시다!”

“아이고, 선배님!”

안범이 무구원에게 달려들어 얼른 덮어둔 시트를 걷어냈다. 그러곤 불안한 눈으로 무구원의 몸에 어디 탄 곳이 없나 확인하더니, 무사하다는 걸 확인하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경해국은 한쪽 눈으로 윤모난을 흘겨봤다.

“왜 따라오셨습니까? 우리가 화장할 걸 예상한 것도 아니라면서요.”

이 난리 통에 잠자코 있는 윤모난에게 향한 질문이었다. 그러자 엉망으로 그을린, 3개월 만에 마르고 초췌해진 낯이 한순간에 깨진 것처럼 일그러지며 어긋났다. 내내 홀로 견디고 있었던 두려움을 털어놓듯 윤모난이 떠듬떠듬 고백했다.

“내가…. 너희한테 면목이 없어서.”

무구원이 어쩌면 깨어날 수도 있다는 희망 같은 건 오히려 부차적인 것이었다. 그를 떠나보낸 뒤에 잠깐 느꼈던 상실감과 외로움도 그 이유가 되지 못한다. 그저 윤모난은 지옥에 가서도 무구원을 볼 낯이 없게 될까 봐 두려웠다.

안범과 경해국도 마찬가지이다. 윤모난은 경해국의 말대로 그들을 자신의 비극에 끌어들이지 말았어야 했다고 후회했다. 하지만 이미 저질러버린 이상 자신에게는 끝까지 책임져야 할 의무가 있었다.

윤모난은 자신의 팀원들 셋 모두 자신이 없던 7년으로… 그 평범한 삶으로 무사히 돌려보내주고 싶었다.

“너희한테 원망은 받을지언정, 무책임한 인간이 되고 싶진 않았다.”

“…….”

“너희는 이제 내 유일한….”

윤모난이 말을 끝내지 않은 탓에 다시 적막이 내려앉았다. 그러나 그 뒷말이 무엇인지, 부러 묻지 않아도 여기 있는 나머지 사람은 알 수 있었다. 세 사람은 울창한 나무 사이로 밝은 빛이 내리쬐는 때까지 말없이 자리를 지켰다. 한참을 침묵한 끝에 윤모난이 물었다.

“태오란 아이가 나와 생물학적인 부자 관계라는 사실을 털어놓는 거, 무구원과 그 아내도 동의한 건가? 이런 일에는 부모의 의견이 가장 중요할 텐데.”

경해국은 찔리는 얼굴로 입을 꾹 다물었다. 그의 표정을 보고 윤모난은 눈치챘다. 그 급한 성질머리가 말하면 안 되는 비밀을 터트린 것일 터다. 아마도 무구원은 끝까지 숨길 생각이었겠지.

“이미 알게 된 걸 되돌릴 순 없지. 그렇다고 이제 와 모르는척할 수도 없을 테고.”

“…그래서 어쩔 겁니까? 크흠. 뭐, 내가 네 아부지다 이렇게 밝히기라도 하시게요?”

경해국의 질문에 윤모난은 무슨 소리냐는 듯이 단호한 표정을 지었다.

“난 그 애 아버지가 아니야. 내 유전자를 줬다는 걸 부정하진 않겠지만, 걔한테는 이미 아빠가 있어.”

“…무씨 저놈이 만약 죽기라도 하면요?”

“그럼 그 아인 그저 아버지를 잃는 거겠지.”

한 치의 여지도 없이 선을 긋는 강경한 태도에 경해국은 조금 놀라고 말았다. 물론 윤모난 입장에선 갑자기 아들이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든 건 알겠지만, 이렇게까지 칼같이 자르는 것도 어딘가 이상했던 탓이다.

반도에선 누구나 혈연과 핏줄에 큰 의미를 두고, 그건 조카와 형들을 무척이나 사랑한 윤모난도 마찬가지가 아니던가. 그런데 막상 제 친아들에겐 저런 냉정한 태도라니. 어딘가 맞지 않았다. 심지어 윤모난은 더 이상 이 이야기를 하기 싫은 듯 얼굴을 찡그리기까지 했다.

“피로 이어졌다고 해서 다 가족이 아니야. 난 그 아이가 있는 줄도 몰랐고 직접 키우지도 않았어. 무구원이 그 아이한테 이름과 성을 줬고 사랑을 줬으니 걔가 아버지인 거야.”

“하지만… 핏줄은 당기는 법이라구요. 어찌 됐건 태오 고 녀석이 자라면 진실을 알게 될 수도 있는 법인데요.”

“아니. 핏줄은 아무것도 증명하지 못해.”

윤모난은 자신의 옆에 단정히 누워 있는 무구원을 보며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저, 같이 보낸 시간만이 더 실제적인 법이지.”

어쨌건 당사자가 아닌 경해국이 더 할 말은 없었다. 이미 선은 넘었고, 향후 그 일은 무구원이 일어나면 생각할 일이었다. 윤모난 역시 그에 동의하는 듯 더 얘기하기를 원치 않는 눈치였다. 그 이후에 역시 ‘가족’이라는 말을 언급한 것은 여정에 관련해서 상의할 때뿐이었다.

“무구원을 데리고 동산까지 조용히 가려면, 너희 판단대로 기차는 무리야. 육로로 국경을 넘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지.”

“젠장, 그럼 돌아가는 길이 몇 주는 넘게 걸릴 텐데요? 완전 개고생이잖습니까.”

“후와, 완전 여행이네요! 재밌겠습니다.”

경해국과 안범에게서 서로 다른 감상이 나왔다. 윤모난은 안범에게 씨익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는 핀잔 한 번 주는 법도 없이 안범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그래. 여행이라고 생각하자.”

그렇게 네 사람은 귀환 여행길에 올랐다. 가는 길 내내 안범은 윤모난에게 화장 쇼에 관한 비화를 열심히 늘어놓았다.

“옥수수 깡통에 무구원을 담으려 했다고?”

“넵. 제일 큰 깡통이 옥수수 캔이었거든요. 무 선배님이 키가 엄청 크지 않습니까. 화장하면 뼛가루가 어마어마하게 나올 텐데 반 나눠서 수프 캔이랑 생선 통조림 캔에 담을 수는 없잖아요. 그나마 가장 큰 깡통을 유골함으로 선정한 겁니다.”

비포장도로 위로 트럭을 꽤 거칠게 몰던 윤모난이 그 말에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정말 옥수수 깡통에 무구원을 담았다간 그 어머니 신인지 뭔지가 벼락을 내렸을 거다. 너흰 살인죄에 더해 모욕죄까지 추가됐을 거라고.”

“아니, 깡통 얘기를 꺼낸 건 경 선배님이 먼저입니다!”

“유골함이 다 거기서 거기지, 깡통이 어때서?”

경해국이 깡통에 뼛가루를 담았어야 국경 검문소에서 의심을 사지 않았을 거라며, 제 나름의 정당한 이유까지 덧붙인 탓에 트럭 안에 웃음이 번졌다. 옥수수 캔 안에 든 무구원이라니. 쿡쿡 웃던 윤모난은 자동차 핸들에 이마를 부딪치기까지 했다.

“무씨 저 결벽증 새끼, 벼락까진 모르겠고 아마 꿈에는 몇 번 나왔을 텐데. 시팔, 안 태워서 천만다행인가.”

“꺄하하학―!”

“안범, 너는 멀쩡한 네 선배 통구이 될 뻔한 얘기가 그렇게 재밌냐? 무슨 다 가족이고 형 같다고 그러더니. 요 웃기는 새끼.”

“무구원은 아마 꿈에 나와서도 깡통이 싫다고는 말 안 하고 그냥 노려보기만 할걸?”

윤모난이 사악한 가정을 늘어놓자 경해국마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당연하죠. 저 새끼는 말해야 하는 건 꾹 참고 안 하는 게 특기니까요.”

세 사람의 시선이 문득 뒷좌석에 있는 무구원에게 모였다. 그를 감싸고 있던 시트는 거둬들인 참이었다. 왠지 시체를 대하는 것 같다는 꺼림칙한 느낌 때문이었다. 대신에 그를 좌석 한켠에 앉혀놓았다.

이상한 말이긴 하지만 무구원은 여행 중에 잠깐 잠이 든 사람처럼 보였다. 처음 봤을 때보다 뺨에 혈기가 돌아온 것 같다는 착각마저 들 정도로. 여행을 시작한 지 벌써 일주일이 지나가는 시점에서도 그에게선 아무런 반응이 없었지만.

“화장실 간다고?”

“넵.”

“난 커피나 마셔야겠다. 경해국, 나 기름 사는 동안 커피 뽑아 와라.”

가는 길 어느 시골 동네에서 겨우 가솔린을 파는 가게를 찾았다. 현지 사정에 조금 더 익숙한 윤모난이 가게 사장에게 기름을 사는 사이. 안범은 화장실에 갔고 경해국은 가게 옆에 딸린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았다.

“기름 샀습니까? 여기 커피요.”

“고마워.”

주유구에 기름 넣는 것까지 마쳤을 즈음, 경해국이 뜨거운 커피를 가져와 내밀었다. 연이은 운전으로 피로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컵을 집어 든 윤모난은 커피를 마시자마자 웩, 하고 혀를 뺐다.

“윽, 써.”

“커피가 쓰지. 그럼 답니까?”

“쓴 건 싫어. 단 게 좋아.”

“염병. 제발 그냥 좀 드십시오.”

“맛있는 거만 먹고 싶단 말이야.”

윤모난은 오만상을 쓰고 사약을 삼키는 듯이 커피를 목구멍으로 꿀꺽꿀꺽 넘겼다. 혀뿌리까지 탄 맛이 난다며 토하는 시늉과 함께 투정을 부리는 것도 잊지 않는다. 그는 종이컵을 구기더니 깔끔한 동작으로 쓰레기통에 골인시켰다. 그사이에 화장실 간 안범이 돌아왔다.

“형, 여기 들른 김에 점심 먹고 갈까요? 지도를 보니까 다음 마을로 가려면 이틀은 더 가야 하는 것 같은데. 캔 말고 다른 것도 먹고 싶습니다.”

“여기도 식당은 따로 없는 거 같은데, 음식을 살 수 있으면 더 사고, 차 밖에서 먹자.”

“네―! 무 선배님도 내리죠.”

안범은 뒷좌석으로 가서 낑낑대며 무구원을 내리려 시도했다. 그런 안범을 보다 못해 윤모난이 가서 무구원의 무릎 뒤에 팔을 넣고 한 손은 등 뒤를 받쳐 그를 내렸다. 커다란 몸이 남자의 품에 안정적으로 안착하는 걸 보며 안범은 감탄했다.

“무 선배님 무슨 쌀 포대보다 무겁던데 형은 참 잘 드십니다.”

“쌀포대는 무슨…. 깃털 같구만.”

“…에이.”

“정말이야. 무구원 이 새끼 깃털 같아.”

“그럼 무 선배님 들고 무릎 굽혔다가 펴기 해보세요.”

“그게 뭐 힘든 일이라고.”

윤모난은 무구원을 잠깐 고쳐 잡은 뒤에 안범의 말 대로 무릎을 굽혔다가 폈다. 힘 하나 들이지 않고 몸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걸 보며 안범이 손뼉을 짝짝짝 쳤다. 그의 응원에 힘을 얻은 윤모난은 한 발을 들고 버티는 묘기까지 보여줬다.

“무씨가 무슨 장난감입니까!”

보다 못한 경해국이 버럭 소리를 지르자 윤모난이 눈썹 끝을 삐죽 올리다가 갑자기 이상한 제안을 했다.

“경해국 심심한데 내기나 할래? 무구원 안고 한 발로 오래 버티는 사람이 이틀간 쉬지 않고 운전하기.”

“…무슨, 애들도 아니고 갑자기 웬 내깁니까?”

“진 사람이 운전 플러스 다른 사람 소원 하나 들어주는 걸로 어때. 아니다. 체급 차이가 있으니 넌 안범, 나는 무구원 드는 걸로.”

방금까지 떨떠름해하던 경해국의 입에서 바로 ‘좋습니다’ 하는 소리가 튀어나왔다. 경해국이 안범을 안고 의지를 불태우는 사이 윤모난은 입가에 사악한 웃음을 띤 채로 대기하고 있었다. 안범이 신호하자 두 사람 모두 한 발로 버티기 시작했다.

물론 객관적으로 보자면, 경해국이 압도적으로 유리한 조건이었다. 안범은 170cm가 조금 넘는 작달막한 남자이고, 그에 비해 무구원은 192cm였다. 중량으로 따져도 어마어마한 차이다.

그런데 이 터무니없는 내기가 삼십분이나 지속되자 경해국의 이마에 땀이 비 오듯 흐르기 시작했다. 윗옷이 다 젖을 때까지 분투하던 그는 헥헥 숨을 몰아쉬다가 결국 비틀대며 안범을 떨어트리고 말았다.

“악―! 젠장!”

“…이겼다. 경해국 네가 이틀간 운전 다 하는 거다.”

윤모난의 발 한쪽이 안정적으로 땅에 안착했다. 한 시간이나 무구원을 들고 있었으면서 땀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말끔한 모양새였다. 윤모난은 승자답게 경해국을 맘껏 비웃었다.

“네가 내 상대가 될 거라 생각했다는 게 놀랍군.”

“으윽….”

“이제 소원 말한다.”

상대의 입가에 어린 비열한 웃음을 본 경해국이 섬뜩함을 느끼곤 움찔 떨었다. 이어서 윤모난의 소원이 장황한 설명과 함께 튀어나왔다. 이미 내기하기도 전에 생각해놓은 것이 있는 모양이었다.

“얼마 전, 네가 하는 말을 듣고 무구원과 너의 우정에 크게 감명받은 참이거든. 너흴 보고 생각했어. 우정이야말로 지고의 가치가 아닌가 하고.”

웬 우정 신봉론을 펼치기 시작한 그를 보며 경해국은 미심쩍은 표정이었다. 윤모난은 큼큼 목을 고르더니 엄숙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 천생 걸레 제비가 보기에 사랑? 그따위 건 변덕스럽고 영원하지도 않아. 우정이야말로 영원히 가는 거지.”

“무슨? 개 같은 소립니까 그게.”

“너희도 동화의 법칙을 알고 있을 거야. 잠든 공주님을 일어나게 하는 법.”

“…에?”

윤모난의 궤변에 나머지는 입을 헤벌리고 있었다.

“무구원한테 키스해. 입맞춤으로 공주를 한 방에 깨우자고.”

“…….”

“이게 내 소원이다.”

말이 끝나자마자 경해국의 발 옆에 불꽃이 솟자 윤모난이 엇차 하며 가볍게 몸을 놀려 피했다. 이윽고 스프링처럼 달려들려는 경해국을 안범이 붙잡았다.

“뭘, 씨팔! 장황하게 설명하나 싶었더니! 그런 개 같은 소원을! 놔! 안범!”

“경 선배님! 내기는 내기입니다!”

“맞아. 내기는 내기야. 넌 졌어. 결과에 승복해라, 경해국.”

“이 씹! 제가 왜! 무씨한테, 씨!”

실랑이는 길게 이어졌다. 그러나 내기에 졌다는 건 사실이었기에 경해국도 끝까지 우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세 사람은 기름 가게 주인에게 웃돈을 주고 산 따듯한 음식으로 간단하게 요기를 때우는 참이었다. 가는 길에 아무 데나 차를 세워 음식을 나눠 먹으면서도, 대화의 화두는 경해국의 키스였다.

“정말 이래야겠습니까? 전… 유부남이에요. 임자 있는 몸인데 키스라니요!”

“누가 무구원이랑 불륜을 저지르래? 입만 맞춰보라고.”

“무씨 이 새끼는 남색가 아닙니까!”

“다행히 동성애는 전염되는 건 아니라더라.”

“그거 확실합니까?”

“어. 하지만 한번 맛을 들인 놈치고 여기에서 빠져나오는 사람은…. 장난이야, 경해국. 농담이라고.”

둘 사이의 말싸움은 절정에 접어들고 있었다. 소원을 물릴 기세가 전혀 보이지 않자, 윤모난의 말대로 ‘공주’처럼 자고 있는 무구원을 내려다본 세 사람의 시선에 여러 복잡한 감정들이 섞였다.

“염병, 이 새끼 등치 좀 보십쇼. 공주라니 토 나옵니다.”

“…하긴.”

“그리고 애초에 공주는 왕자님의 키스를 받아야 일어나는 건데. 씹, 뭔가 이상하다구요.”

“뭐. 그래서 어쩌라고.”

윤모난이 귀를 후비며 대답하자 경해국이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무씨 이 새끼 꼬셔서 마음 싱숭생숭하게 만들 때는 언제고요. 이제 와서 발 빼려구요?”

“어이. 공주님이란 건 어디까지나 비유야. 꼭 왕자 공주 사이가 아니어도 된다고.”

“그럼 적어도 사랑… 크흠! 적어도 그 뭐시기한 사이 정도는 되어야 하는 거 아닙니까?”

“무구원이 일어나도 그렇게 생각할까? 아마 아닐걸.”

빤한 시선들이 윤모난에게 향했다. 안범과 경해국 모두 벙긋거리며 입을 떼려 했지만 그의 지독한 무표정이 순식간에 할 말을 앗아가버렸다. 굳이 소리 내 말로 하기엔 이상한, 두 사람이 공통적으로 느끼는 어떤 위화감이 있었다. 아마도 그건 이 여행이 사실은 여행이 아니고, 무구원은 죽은 것도 산 것도 아닌 상태라는 것과 관련 있는 것일 테다.

윤모난의 복수가 모두 끝났으나 실상 일이 해결되어 다행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고, 시간이 가면 갈수록 일은 오히려 나빠지기만 할 것 같다는 그런 느낌이었다. 윤모난의 얼굴을 마주하면 누구라도 예감할 수 있을 만한 그런 거였다.

“둘 다 왜 그렇게 빤히 봐?”

“…그냥, 참 자알―나게 생겨서 봤습니다.”

“지랄 말고. 허리 굽히고 주둥이 내밀어.”

“악―! 싫어요!”

윤모난은 결국 버티고 선 경해국의 뒤통수를 꾹 누르며 달라붙었다. 이 긴 여정이 못내 지루했었던지 괴물 마귀가 여지없이 내면의 사악함을 발산하고 있었다. 결국 경해국도 하중을 버티지 못하고 허리를 굽히며 몸을 숙였다.

무구원의 얼굴이 가까워지자 배 속이 울렁거리고 도저히 못하겠다는 생각에 몸을 크게 뒤흔들며 저항했지만, 단단하게 몸을 압박하는 윤모난의 솜씨에 옴짝달싹할 수도 없다. 다리가 안쪽으로 꺾이며 경해국이 휘청였다.

“젠장! 이 미친 인간! 뽀뽀가 하고 싶으면 자기나 할 것이지! 왜 나한테!”

“호모들을 모욕한 죄야.”

“정신병자! 사이코! 호모!”

기어코 무구원의 얼굴 위로 입술이 닿으려 하고 있었다. 일이 코앞까지 닥치자 저항할 여력도 없어진 경해국은 온몸의 힘을 쭉 빼고 말았다. 이 지랄을 떠느니 그냥 눈 딱 감고 해버리고 오늘 일은 사나이답게 깨끗이 잊자! 다짐한 것이다.

자포자기한 경해국이 순순히 재앙을 받아들이며 입술을 쭉 내밀려는 찰나, 거친 손바닥이 그 앞을 턱 막았다. 입이 막힌 채로 고개를 돌리자 윤모난이 피식 웃음을 흘리는 모습이 보였다.

“진짜 하려고 하네.”

“…으으으읍!”

“순진하긴.”

손바닥이 떨어지자마자 경해국이 쌍욕을 내지르는 바람에 옆에 서 있던 안범이 귀를 틀어막았다. 윤모난은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무구원을 다시 업어 차에 실은 다음 출발하자고 소리쳤다. 결국 경해국의 씩씩거림이 잦아들고 운전석에 앉는 데까지는 시간이 꽤 걸렸다.

“난 뒷좌석에서 눈 좀 붙일 거니까 조용히 안전하게 운전해, 경 기사.”

윤모난의 뻔뻔스러움에 경해국이 쾅 이마를 클랙슨에 세게 들이받았다. 빵―! 하고 우렁찬 소리가 사람 하나 없는 인적 드문 길을 깨웠다. 안범이 펄쩍 놀라 호들갑을 떨어대고 차 안은 소란스러워졌다.

이 소란에 조금의 소음도 보태지 못하는 건 무구원뿐이었다. 윤모난은 벽에 기대 있는 무구원을 제 쪽으로 끌어당겨 기대게 했다. 어깨 위로 느껴지는 묵직한 무게감이 그가 여기에 있다는 유일한 증거였다.

“경 선배님, 참으세요.”

“내가 참게 생겼어? 저 팀장이고 뭐고 내가 언제 한번 들이받는다.”

“아무리 그래도 형이 선배님의 윗사람인데 그러면 안 되지요.”

“안범, 이 간사한 내시 자식….”

윤모난은 앞좌석에서 설왕설래하는 소란에 더 이상 끼어들지 않았다. 그저 소음에 묻히는 김에 몰래 좌석에 가지런히 놓인 무구원의 손바닥 아래로 손을 끼워 넣고 단단히 잡았다. 여전히 맞붙잡아오는 느낌은 없었다.

지난 3개월간 한 번도 잠다운 잠을 자지 못했던 윤모난은 무거운 눈꺼풀을 닫으며 조금이라도 잘 수 있기를 바랐다. 그렇게 서로 똑같이 눈을 감고 몸을 맞댄 두 사람에게로 오후의 햇살이 하얗게 드리웠다.

“쉿, 경 선배님. 형 주무셔요.”

뒷좌석을 힐끔 바라본 안범은 여전히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는 경해국을 달랬다. 경해국도 백미러를 확인했다. 창문을 투과하여 들이쳤던 빛은 구름 사이로 숨었는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그늘 같은 푸르른 음지에 갇힌 두 사람만이 고요히 서로 기대어 있었다.

“윤 팀장, 어째 태오 얘기 들어도 생각한 거보다 덤덤하더라….”

경해국이 불쑥 속내를 꺼냈다. 아무래도 실수로 꺼낸 태오 얘기 때문에 계속 신경이 쓰였던 눈치였다. 안범도 복잡한 속내를 감추지 못하고 무거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심각하게 생각 안 하시는 게 좋은 거 아닐까요.”

“정말 심각하게 생각 안 해서 저러는 건지 아닌지 모르겠으니까 그러지. 사람이 좀 위태롭잖냐. 만날 헛소리나 하면서 가벼운 척하긴 한다만.”

“…네.”

“에휴, 모르겠다. 무씨가 얼른 일어나야 할 텐데.”

사흘 정도 서둘러 달리면 무리 없이 반도의 국경에 닿을 것이다. 하지만 경해국은 액셀을 꾹 밟고 있던 발을 조금 떼며 속도를 늦췄다.

국경까지 가는 길, 마을의 수가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지도에 따르면 이쯤 작은 마을이 있어야 하는데, 막상 도착하니 이미 폐쇄된 모양이었다.

아마도 트랜스의 습격을 받은 듯했다. 세 사람은 정차하지 않고 버려진 마을을 통과해 바로 국경까지 가기로 결정했다. 기름을 넉넉하게 사둔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안범이 차창 너머로 펼쳐진 참혹한 풍경에 안타까운 탄식을 내뱉었다.

“마을 하나가 통째로 폐쇄되기는 쉽지 않은데. 비극이네요.”

“여긴 군대도 없고 무정부 상태나 다름없어서 용병을 고용하지 않으면 트랜스가 나타나도 어쩔 도리가 없어. 운에 맡길 수밖에.”

윤모난은 어느새 실눈을 뜨고 차창 밖을 흘끔 내다보고 있었다. 그에게는 꽤 익숙한 풍경이었다. 전쟁 중이긴 하지만 반도가 어느 정도 문명을 유지하고 있는 것과 달리, 그 밖의 지대는 여전히 인간이 괴물에게 사냥을 당하는 지옥도였다. 운전을 하던 경해국도 한마디 얹었다.

“소문에는 트랜스 수가 더 늘었다고 하던데. 진짜 세상이 한 번 더 망하려는지. 요즘은 무간에 가서 죽는 에스퍼들이 사살하는 트랜스보다 더 많다더구만요.”

차 안의 분위기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안범이 굳은 얼굴로 흘긋 윤모난을 바라봤다.

“…저기, 형. 궁금한 게 있는데요.”

“뭐?”

“그게… 혹시.”

“무간에 있던 우리 형은 어떻게 됐냐고 묻고 싶겠지. 죽었냐고?”

꿀꺽하고 침 넘기는 소리가 긍정을 대신했다. 안범도 막상 묻기는 했으나 답을 기대한 건 아니었다. 그 일은 어디까지나 윤모난에게 비극적인 상흔이다. 이 모든 일의 시작이고.

“아니.”

그래서 윤모난이 단조로운 목소리로 답을 내주었을 때, 앞좌석에 앉은 두 사람은 조금 놀라고 말았다.

“7년간 무간을 샅샅이 뒤졌는데도 없었어.”

대화 중에 윤모난의 건조한 시선이 잠깐 안범의 눈과 마주쳤다가 스치듯이 돌아갔다.

“나 스스로가 의심스러울 지경이더군. 작은형이 괴물이 된 건 내 환상이 아니었을까 하고. 마지막 순간에 대한 기억은 거의 다 잃어버렸으니 영 불가능한 이야기는 아니지.”

“…형.”

“하지만 내가 아는 바에 따르면 형은 여전히 무간에 있을 테니 찾아야겠지. 물론 거기 있는 건 더 이상 형이 아니지만. 형은 죽었어. 무덤도 있잖아.”

감정 하나 실리지 않은 목소리로 형의 죽음을 이야기하는 윤모난은 그 모든 인정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상실의 굴레를 지고 있는 듯 보였다. 안범은 그를 위로해주고 싶었다.

“형, 반도에 돌아가면 다 같이 남경에 가요. 형의 가족들 무덤에 가서 꽃을 놓고 오는 거예요.”

“그래.”

여전히 창밖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그러자고 담담하게 약속한 윤모난은, 이 주제에 관해 더 얘기하기 싫은 듯이 입을 다물었다. 그는 딱히 슬퍼 보이진 않았다. 그저 지독하게도 무감정해 보일 뿐이었다.

반나절을 더 달리다가 깊은 숲속 길에 들어섰을 때쯤 차가 잠시 멈춰 섰다. 긴 운전과 여행으로 누적된 피로 탓에 셋은 조금 일찍 야영을 결정했다. 경해국이 거의 몇 주간 계속된 통조림 식사에 질렸음을 토로하자, 윤모난이 뭐라도 구해 오겠다며 홀로 숲속으로 훌쩍 사라졌다.

“이제 좀 있으면 국경으로 들어가는데. 도착한 뒤에는 뭐, 어떻게 되는 거냐?”

윤모난이 없는 자리에서 남은 둘은 복잡한 심경을 슬쩍 털어놓았다. 주로 무구원과 윤모난, 이 두 사람의 향후 거취에 관한 문제였다. 무정원이 죽고 나서 둘이 공식적으로 수배를 당한 건 아니라지만, 아무래도 여간 뒤숭숭한 게 아니었다.

뭣보다 정황상 윤모난이 무정원을 죽인 것으로 보이는데,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본인 빼고는 정확히 아는 바가 없었다. 무정원의 죽음에 관해서는 반도도 그렇고 세 사람 사이에서도 이상한 침묵만 감돌았다.

북해 쪽에서도 딱히 범인을 지목하지 않았고, 그저 서둘러 무정원의 장례를 비밀리에 치렀을 뿐이었다.

“뭐, 지금은 추적하는 놈들이 없긴 하지만 돌아가면 위험해질 수도 있으니 서둘러 동산으로 가서 은신하는 수밖에는 방법이 없지. 씹, 우리 가문도 7년 전에 애먼 사람 누명 씌우는 데 동조했으면 그 정도는 해야지.”

“네, 모난 형한테도 생각이 있겠지요. 항상 계획이 있는 분이잖아요. 생각이 있으니까 저희를 따라오셨겠죠.”

“글쎄다. 난 모르겠다.”

경해국은 묘한 회의감을 내비쳤다.

“넌 윤 팀장 이상한 거 못 느끼겠어? 뭔가 분위기가 이상하다고 해야 하나. 어딘가 붕 뜬 사람 같달까나. 아까 자기 형 얘기할 때도 그렇고.”

“…그건.”

“확실히 옛날 같지도 않어. 변한 것 같긴 한데 정확히 어디가 변한지는 모르겠달까. 어쩐지 영혼이 없다. 그래, 영혼이 없어 보여.”

“허무해서 그러시겠죠. 경 선배님도 생각해보십시오. 7년간 복수만 생각했는데 진짜로 성공했다니 허무하지 않겠어요? 하지만 조금 지나면 형도 나아지실 거예요. 아직 시간이 얼마 안 지났잖아요.”

“글쎄.”

대화 중에 둘은 윤모난이 숲으로 사라진 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났다는 걸 깨달았다. 안범이 불안한 표정으로 숲 너머를 바라보다가, 못 참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형이 너무 안 오네요. 제가 찾으러 다녀오겠습니다. 선배님은 무 선배님 지키고 계세요.”

“그래. 혹시 무슨 일 있으면 신호하고.”

“네.”

안범은 걸음을 서둘러 윤모난이 사라진 쪽으로 향했다. 어디까지 간지는 모르겠지만 숲 어디에도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게 불안한 시선으로 사방을 훑던 찰나, 저 멀리서 갑자기 탕―! 하는 총성이 울렸다.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은 안범은 서둘러 소리가 난 쪽으로 달렸다. 발걸음 소리가 심장처럼 쿵쾅쿵쾅 날뛰었다. 참혹한 상상이 안범의 머리를 잠식했다.

“…형, 모난… 모난 형?”

우거진 수풀을 헤치며 한참 달린 끝에 안범의 걸음이 멈춰 선 것은 찾던 사람을 발견하고 나서였다. 나무로 둘러싸인 작은 공터 같은 곳에 윤모난이 멀쩡히 서 있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던 것이다.

안범은 유독 짙고 기다란 그림자를 매달고 있는 그의 등 뒤로 다가갔다. 윤모난은 누군가 기척을 내며 접근하는데도 돌아보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땅에만 고정되어 있었다.

“형?”

안범은 가까이 다가가서야 윤모난의 시선이 향한 곳이 어딘지 알아차렸다. 작은 사슴이 옆구리에 총알이 박힌 채로 그의 발치에서 꿈틀거리고 있던 것이다. 그가 쏘았을 것이 분명한 동물의 사지가 생애 마지막으로 바르작대고 있었다.

급소를 비켜나가 길고 고통스러운 죽음을 맞이하고 있는 사슴의 검은 눈이 끔찍했다. 총알을 맞은 검은 구멍에서 흘러나온 붉은 피는 흰 털이 북슬북슬한 짐승의 뱃가죽 아래 웅덩이처럼 고여 윤모난의 발치까지 닿아 있었다.

“…형, 왜 그러세요?”

윤모난은 정신을 놓은 채 그 광경을 멍하니 보고 있었던 거다. 상태를 묻는 안범의 말끝이 조금씩 떨리다가 이내 젖어버렸다. 그건 오롯한 그의 슬픔이 아니라 옆 사람에게서 옮아온 것이었다.

그때 흰 뺨을 타고 흐르던 눈물이 턱 끝에 고였다가 뚝, 하고 바닥으로 떨어져 피 웅덩이 속으로 자취를 감췄다. 연이어 눈물이 다시 피부 위로 궤적을 이어가며 흐른다. 윤모난이 울고 있었다.

“형….”

“…….”

안범은 그의 등에 얼굴을 묻었다. 그러나 뻣뻣한 몸은 응해주지 않았다. 윤모난은 석상처럼 서서 눈물만 뚝뚝 흘리고 있었다. 빛을 잃은 눈동자에 공허한 구멍이 뚫린 듯이 쉴 새 없이 비집고 흐르던 투명한 눈물만이 그가 보이는 유일한 반응이었다.

그를 둘러싼 공기가 너무나도 적막하고 서글펐다. 이제는 온전히 죽어버린 사슴의 사체 위로 끊임없이 눈물을 떨어트리는 윤모난을, 안범은 몸을 흔들어가며 정신 차리게 하도록 애를 썼다.

“어디 아프세요? 무 선배님 때문에 그러시는 거예요? 괜찮아요. 무 선배님 곧 일어나실 거예요.”

“…….”

“아니면 경 선배님이 태오 얘기해서 그러는 거예요? 신경 쓰지 마세요. 몰랐잖아요. 형은 몰랐으니까. 형 잘못은 하나도 없어요….”

“…범아.”

마침내 무거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것만으로도 반가워 안범은 허리를 더 세게 끌어안았다. 느릿하게 윤모난이 몸을 돌리며 안범의 뒤통수를 커다란 손으로 감쌌다.

“미안해.”

“…흐으으!”

“불안하게 만들어서 미안하다.”

윤모난이 어깨를 부드럽게 밀어내며 몸을 떨어트렸다. 허리를 약간 숙여 더운 눈물로 젖은 안범의 얼굴을 닦으며 그가 중얼거렸다. 하지만 오히려 눈물을 닦아야 하는 건 윤모난이었다.

“괜찮아.”

안범이 마구 도리질을 치다가 무언가 떠오른 듯, 자신의 목에 걸려 있던 윤모난의 펜던트를 빼 그에게 도로 걸어주었다.

“이 부적 이젠… 형이 가지고 계세요. 원래 형 거잖아요.”

윤모난이 펜던트를 다시 빼려 하자 안범이 손으로 막으며 홱 몸을 물렸다. 그러고서는 윤모난을 손을 끌어당겨 사슴의 사체로부터 그를 떨어트려놨다. 죽음으로부터 필사적으로 그를 구출해내려는 듯이.

우울한 생각 따위 훠이 훠이 멀리 쫓아내 윤모난에게 얼씬도 못하게 만들고 싶었다. 하지만 윤모난은 이곳에서 도통 움직이지 않았다. 죽음이 반대쪽에서 그를 끌어당기고 있던 탓에 안범은 이 줄다리기에 끼어들게 된 것이다.

“형. 돌아가요.”

애타는 외침에도 땅에 박힌 발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눈물에 푹 젖은 윤모난의 안색은 창백하기만 했다. 안범은 어쩐지 그를 영원히 잃게 될 거 같다는 불안감에 사로잡힌 채 필사적으로 옷소매를 끌어당겨, 윤모난의 얼굴을 박박 문지르며 닦아냈다.

“…아파.”

안범이 한참 정신없이 눈물을 지워내고 있는데, 윤모난이 아래서 평소 같은 투로 투정했다. 불안함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무던히 애쓰는 안범을, 윤모난은 적막한 시선으로 바라보다가 이내 그의 손을 자신의 뺨에 가져다 붙였다.

그러고 나서는 조용히 가이딩하기 시작했다. 안범은 희망이 점점 불씨를 꺼트리고 있는 상황에서도 자신의 불안을 누르려 가이딩을 하는 남자를 젖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초췌한 상태에서도 묘하게 완벽한 윤모난의 얼굴은 한없이 위태로워 보였다.

모든 것을 잃고 남은 건 어둠뿐인 사람에게. 안범은 그가 항상 그대로이길 바라는 자신의 마음이 욕심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일들을 몇 번이나 겪은 사람이 그대로일 수는 없는 거다.

“윤 팀장님—! 안범—!”

카랑카랑한 목소리에 윤모난의 손이 떨어졌다. 두 사람의 고개가 동시에 소리의 근원지로 돌아갔다. 낙엽과 흙을 밟는 발걸음 소리가 어쩐지 가볍고 빨랐기 때문이다.

곧이어 등장한 경해국의 얼굴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오랫동안 둘을 찾아 헤맨 듯 훅훅 숨을 몰아쉬던 그는 들뜬 숨으로 소식을 전했다.

“무씨, 무씨가 움직였어요. 무씨가…!”

“네?”

안범이 제자리에서 튕겨 오르듯 몸을 떨다가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윤모난 역시 놀란 표정으로 굳어 있었다.

“뭐 해요? 씨팔, 빨리 가보시죠!”

윤모난은 발걸음을 뗐다. 방금 전까지 요지부동이던 두 발이 갑자기 족쇄에서 풀린 듯 흙을 가볍게 박찼다. 가장 먼저 야영지로 돌아온 그는 담요 위에 누워 있는 무구원에게로 다가갔다.

경해국이 피워올린 화톳불이 그의 단정한 얼굴을 따스하게 감쌌기 때문인지 혈색이 돌아온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눈은 여전히 감은 채였다. 윤모난은 무구원에게 다가가 뺨을 쓸어내렸다.

따스했다. 손가락으로 맥박을 짚으니 희미하게 박동하는 듯도 했지만, 자신의 숨인지 아니면 무구원의 숨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윤모난은 무구원의 등을 받치고 일으켜 자신의 어깨에 기대게 하고 저 자신도 그에게 얼굴을 묻었다.

“무구원.”

나지막이 그의 이름을 부르며 코끝으로 그의 살결을 훑었다.

“…돌아와라.”

지난 3개월간 반복한 그 한마디를 떨어트린 뒤, 윤모난은 애타는 입술을 무구원의 얼굴 여기저기에 찍어 눌렀다. 무구원은 공주가 아니고 자신은 왕자가 아니었지만 우스운 미신이라도 지금으로서는 따르고 싶었다. 그러는 사이 눈가에서 흘러내린 눈물이 계속해서 무구원의 얼굴 위로 떨어졌다.

‘팀장님, 울지 마세요.’

의미가 없을 게 분명한 행위를 이어가던 중에, 갑자기 익숙한 목소리가 적막을 뚫고 솟아올랐다. 멈칫 굳은 윤모난이 방금 들은 소리의 진위를 가리고자 자신의 귓바퀴에 손을 가져다 댔지만, 남은 것은 고요뿐이었다. 그 울림이 좋은 목소리는 일종의 착각임이 분명했다. 환청은 종종 현실의 목소리보다 더 분명하고 선명하니까.

그러나 잠시 후 윤모난은 그 환청이 고스란히 자신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마지막으로 입술이 닿은 곳에서, 항상 아름답다고 생각했던 무구원의 입술이 자극에 반응하며 조금 움찔댔기 때문이다.

“구원아?”

이름이 한 번 더 불리자 이번에는 내내 감고 있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린다. 서서히, 아주 천천히 눈꺼풀이 밀려 올라가고 긴 잠에서 깨어난 검은 눈이 시야에 파도처럼 들이닥쳤다. 왠지 이 상황이 현실감 없이 아득했다.

하지만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긴 숨이 서로의 살갗에 닿자 윤모난은 이것이 실제 상황임을 자각했다. 한껏 몽롱하던 무구원의 시선이 윤모난을 인지하는 순간 또렷해진다.

“…네. 팀장님.”

이윽고 희미하고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가 답해왔다. 환청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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