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 선택 (22/24)

9. 선택

무구원은 몇 개월간 혼수상태에 빠졌던 사람이 아니라 잠깐 낮잠을 자고 일어난 것처럼 보였다. 다만 일어난 직후에 조금 멍하게 사방을 둘러보다가 생뚱맞은 질문을 하기는 했다. 윤모난의 나이를 물은 것이다.

자신이 아는 대로 답이 나오자 그는 숨을 크게 내쉬고선 상황에 빠르게 순응했다. 여기가 외국이라는 것도, 윤모난의 복수가 끝났다는 것도 순조로이 받아들였다. 그러나 지난 3개월의 여운에 오래 시달리는 듯이 무구원은 명백히 가라앉아 있었다.

“어째 무씨 일어나기 전보다 일어난 후가 더 분위기 좆같네.”

“경 선배님.”

“씨팔, 죽상을 한 인간이 하나 더 늘어나니까 분위기가 그렇잖아. 저럴 바에야 차라리 자빠져 누워 있는 게 낫지.”

“들리겠습니다.”

“뭘 들리겠습니다야. 당연히 들리지.”

듣다 못한 윤모난이 핀잔을 주었다. 앞에서 속닥거리던 두 사람은 슬쩍 뒷좌석 눈치를 살폈다. 오전 내내 분위기가 이랬다. 무구원이 깨어난 뒤 다시 출발해 국경의 코앞까지 당도하는 긴 시간 동안, 두 남자는 대화다운 대화 한 번 나누지 않았다.

무구원이 일어나면 얼싸안고 기뻐할 거라 예상했건만. 웬일인지 둘은 내외하는 사람처럼 좌석의 끝과 끝에 떨어져 앉아 창밖만 내다보고 있었다. 오는 동안 이 질식할 것 같은 침묵에 지친 건 경해국과 안범뿐이었다.

“국경에 들어가기 전에 여기서 하루 정도 휴식하죠.”

국경 검문소를 통과하기 전 마지막 인접 마을에서 차가 섰다. 목적지인 동산까지 가려면 한참이 더 남았고, 반도로 들어가면 지금처럼 야영을 한다거나 쉬는 여유를 부릴 수 없을 것이다.

아무리 당장은 추적하는 사람이 없다지만 긴장을 놓을 수 없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북해의 가주가 죽었다. 이 일이 그냥 흐지부지 넘길 수 없는 중대 사안이라는 건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길가에 정차 후 차에서 내리자 가까운 곳에 한적한 마을의 풍경이 펼쳐졌다. 국경 근처는 아무래도 통행하는 사람이 많아 붐빌 것으로 예상했는데, 웬일인지 길거리가 조용했다. 대다수 상점의 문도 닫혀 있고 간간이 열려 있는 가게에도 손님은 없어 보였다.

“기름을 구할 수 있으려나?”

“경 선배님, 같이 가서 찾아봐요. 모난 형, 저녁 먹을 시간에 이 앞에서 다시 모이는 거 어떠세요?”

“그래.”

텅― 하고 차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짧은 대답이 이어졌다. 눈치껏 사라지는 두 사람의 뒤통수를 구경하며 윤모난은 담배 하나를 꺼내 물고는 주변부터 살폈다. 불을 붙이자 흰 연기가 공기 중으로 쏟아진다.

“조용하네.”

“네. 그렇네요.”

“우린 주변이나 산책할까?”

오늘 처음 하는 대화였다. 곁으로 다가온 무구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조용한 중심가를 가로질러 마을 끝에 있는 언덕으로 향했다. 저 너머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좋은 자리였다. 문득 그곳에 시선이 붙박여 있는 무구원에게 윤모난이 물었다.

“아들 보고 싶어?”

쾌청한 날씨 덕에 언덕 위에서는 반도의 풍경이 어렴풋이 보였다. 그 풍경을 가만히 눈에 담고 있던 무구원이 나직이 대답했다.

“네.”

“네 아들도 아빠가 보고 싶겠지.”

무구원의 얼굴에 복잡 미묘한 표정이 떠올랐다. 그는 항상 단정하게 정리되어 있던 머리가 엉망으로 헝클어진 채, 풍경만 봐도 아들이 눈에 아른거리는 듯 눈을 꾹 감았다. 다시 눈꺼풀을 들어 올린 무구원은 아까보다 더 음울해 보였다.

어디서 빙빙 헤매다 온 것처럼 돌아와서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다니. 무구원답지 않은 모습이었다. 윤모난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그의 검정 머리카락이 여름 바람에 휘날려 눈을 스치듯이 가릴 때 눈가를 살짝 찌푸리기까지 했다. 이유 모를 조바심 때문에.

“무구원, 나 좀 봐라.”

윤모난은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비스듬하게 돌리며 무구원의 앞에 섰다. 그러고는 바람에 휘날려 어지럽게 엉기고 있는 검은 머리칼로 손을 뻗었다. 그는 손수 무구원의 머리를 쓸어 넘겨 정리해주었다.

“단정치 못하긴. 아들 만나러 가는데 깔끔하게 보여야지.”

“…….”

“그러고 보니까 너도 예전에 이런 식으로 내 머리 빗어줬었지.”

그 말이 어떤 깊은 추억이라도 상기시켰는지, 무구원의 눈매가 느슨하게 풀어지며 검은 눈동자 위로 물결이 일었다.

“그때와 다르게 너도 나처럼 엉망이 됐군.”

“엉망이요?”

“그래. 너도 나처럼 가족을 잃고 그리워서 서글픈 표정이나 짓고 있잖아.”

깨어난 뒤 일이 어떻게 되었는지, 왜 우리가 국경 너머에 있으며 다시 반도로 돌아가려 하는지 묻지 않았던 무구원이다. 그걸 입에 올리면 미뤄뒀던 문제들이 한 번에 터져 나올 것을 직감이라도 한 듯이. 그는 겁먹은 아이처럼 불안한 눈빛으로 윤모난의 눈가를 훑었다.

“어떻게 된 건지 궁금하지 않아? 내가 어떻게 무정원을 죽였고 우리가 거길 어떻게 살아 나왔는지.”

“…….”

“말해줄게.”

윤모난은 자신이 한 모든 일에 슬퍼하거나 후회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었다. 특히 무구원에 관해서는. 그건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이었으니까.

“네가 기차에서 정신을 잃었을 때, 무정원이 널 인질로 삼아 나에게 최종 협상을 시도했어. 그래서 난 내 약점을 없앨 수밖에 없었지.”

“…약점이요?”

“그래. 무구원 너 말이야. 네가 남의 손에 죽거나 이용당하는 것보다는 내 손으로 끝내는 게 맞는다고 생각했어.”

무구원은 방금 자신이 들은 말들을 천천히 곱씹었다. 약점. 이용. 끝. 목숨. 이토록 달콤한 말과 잔인한 말이 서로 엮일 수나 있는 것일까. 존재 자체에 빛과 어둠의 대비가 유독 짙은 사람인 윤모난만이 구사할 수 있는 언어일 터였다.

“무엇보다 난 무정원에게 수치와 고통을 주고 싶었어. 미리 예고했었지? 무정원을 갈기갈기 찢어 북해 바다에 버리겠다고. 하지만 무기를 모두 빼앗긴 상황에서는 쉽지 않았거든.”

그러니 내 능력을 사용할 수밖에. 말을 맺음과 동시에 윤모난이 목에 걸려 있던 펜던트를 벗어 보여줬다. 찰랑하며 허공으로 떨어진 펜던트가 빈 그네처럼 앞뒤로 흔들렸다. 유령이라도 탄 것처럼 흔들리고 있는 그것을 통해 무구원은 무언가를 떠올렸다.

“큐브를 이용하신 겁니까.”

“아니. 내 능력을 사용했다니까. 하지만 너에게서 영감을 얻었어. 큐브는 가이드를 대체하기 위해 그 능력을 본뜬 거야. 너는 그걸 이용해서 무정원을 괴물로 만들고자 했고.”

“그래서요?”

“그래서 생각했다. 반대로 가이드가 큐브처럼 에스퍼를 괴물로 만들지 못하란 법 있냐고.”

그 말에 무구원이 번쩍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이 전에 없이 거세게 요동치고 있었다. 하지만 마주해야 하는 진실은 더 남아 있었다.

“그건 나란 인간의 용도를 전복시키는 일이지. 나로서도 쉽지 않았어.”

“…그럼. 팀장님이.”

“그래서 실험할 대상이 필요했어. 반송장이었던 네가 제격이었고. 가설은 두 개였지. 네가 괴물이 되든가 아니면 혈관이 다 터져서 죽어버리든가.”

“팀장님….”

“일주일간 너한테 계속 간섭 파동을 흘려보냈어. 네 파동을 가라앉히는 게 아니라 계속 폭주하도록. 밤이고 낮이고 쉬지 않고.”

듣고 싶지 않다는 듯이 몸을 비틀며 빠져나가려는 무구원을 흉터투성이 손이 붙들었다. 윤모난은 계속해서 진실을 쏟아냈다.

“들어.”

“…….”

“내가 널 실험 대상으로 삼았어.”

“…….”

“마음이 약해지려 하면 내 뺨을 때려가면서. 네 얼굴을 보면서 그렇게 했어, 내가. 무구원.”

어느새 두서없이 말투가 빨라지고 말의 목적 역시 와해되기 직전이었다. 스스로도 버거운 듯이 경련하며 떨고 있는 그를 보며 무구원의 마음 한구석도 마찬가지로 끓어올랐다.

무구원은 이내 참지 못하고 손을 뻗어 윤모난을 단단하게 끌어안았다. 그러고도 모자란 듯 두른 팔을 안으로 꽉 조여 그의 몸을 가두었다. 윤모난의 떨림이 조금이라도 완화되기를 바라면서. 품속에서 윤모난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구원아, 난 네가 살기를 바라는 동시에 죽었으면 했다.”

“…….”

“네가 살게 되면…. 또다시 버려진 아이 같은 표정을 지을 테니까. 내가 너를 버렸거든.”

무구원의 어깨에 얼굴을 묻은 윤모난이 제 무게를 온전히 그에게 기대며 몸에 힘을 뺐다. 버렸다는 말과는 상반되는 행동이었다. 윤모난은 자신을 부서져라 안고 있는 무구원에게 완전히 자신을 내맡긴 것이다.

윤모난과는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 검은 머리칼이 무구원의 턱에 닿았다. 우울이 하나의 실체로 다가오는 기분이었다. 무구원은 깨달았다. 지난 7년간 윤모난은 하나도 나아지지 않았구나. 숨이 턱 막힐 때쯤 되어서야 순간순간을 잠깐씩 연장하면서 겨우 살아왔겠구나.

“팀장님은 절 버릴 수 없습니다. 아시지 않습니까. 저는 그저 복종할 뿐인걸.”

그러니까 그 순간마저도 저는 버려지는 게 아니라 복종하고 있는 겁니다. 무구원은 품 안에 든 사람의 뒷덜미에 뺨과 광대를 문지르며 맹목적으로 속삭이다가, 그것조차 기만이라는 것을 깨닫고 말았다.

“아니요…. 사실은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다는 건 거짓말입니다. 제가 죽으면 팀장님이 절 계속 기억해줄 거라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라도 의미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거든요.”

“…무구원.”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견딜 수 없어서… 제가 마음대로… 이기적으로.”

마음대로 윤모난을 좋아했고, 그가 사라진 뒤에는 멋대로 그의 자취를 쫓았다. 무의식적으로 이능력이 날뛰는 지경이 될 때까지 집착했고, 7년간 그의 비극을 막으려 마음대로 그의 우주에 개입했다. 윤모난의 핏줄을 데려와 아들 삼아 키우면서.

자신은 그가 원한 적도 없는 그 일련의 일들을 했다. 윤모난은 알까? 그에게 일어난 모든 비극들이 저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무구원은 얽히고설킨 우주만큼 뒤엉킨 눈빛으로 윤모난을 바라보았다.

어깨에서 떨어져 나간 그의 얼굴이 희게 질려 있었다. 당신의 주장처럼 진실은 항상 진리의 영역에 있는 걸까? 거기에 동의하기엔 너무 많은 실패를 겪은 무구원이었다. 하지만 항상 진실을 추구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입장이니 어쩔 도리가 없지 않은가.

“…팀장님, 저도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사실….”

“태오. 나 때문에 만들어진 아이지?”

그 입에서 절대 나오지 말아야 할 이름이 들리자 무구원의 입가가 굳어버렸다.

“…그 애에 대해서 짐작해봤어. 나와 똑같은 방법으로 만들어졌겠지. 하지만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그 앤 좋은 아버지를 뒀다는 거야. 행운이지.”

“…….”

“그러니까 무구원, 네가 좋은 아버지라면 나로부터 마땅히 그 아이를 지켜야 해.”

“…무슨 뜻입니까?”

“방금 전까지 우리가 나눈 대화를 상기해라. 난 태오를 받아들이지 못해. 내가 미쳐서 그 아이를 한밤중에 죽이려 하면 넌 어떻게 할 거지?”

듣기만 해도 심장에 칼이 꽂히는 듯한 질문이었다. 미련한 제가 누구 하나만을 선택할 수 있을 리 없었다. 그 상황에 내몰리는 것 자체가 끔찍할 정도로 잔인한 일이었다. 그리고 무구원은 윤모난이 자신을 일부러 그렇게 내몰아 떨어트리려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태오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의심하지 않으니까.

진실을 알고 난 뒤에도 변한 건 없었다. 무구원은 태오의 얘기를 꺼내기 전에 하려던 말조차 잊고 차가운 손끝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아들이 있는 집에 괴물을 들이는 아버지는 없어, 무구원.”

“…….”

“아이란 그런 거야. 내가 아직도 청연이를 구하지 못한 너를 내심 원망하는 것처럼. 너에게 미안해하면서도 네가 겪는 고통이 어느 정도는 그 대가라고 생각한 면도 있지.”

윤모난은 침잠된 얼굴로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이 복수 자체가 그래. 혐오스러운 가족애가 낳은 살인이라는 게 내 복수의 본질이야. 청연이를 죽인 게 너였다고 해도 난 망설이지 않고 널 죽였을걸.”

“…….”

“그러니까 내가 청연이를 사랑하듯 네가 아들을 사랑한다면 당연히 아이를 선택해야 해. 아버지니까.”

순간 이루 말할 수 없이 서늘한 냉기가 스치고 지나갔다. 어느새 서로 떨어져 거리를 두고 선 두 사람의 시선이 각각 사선으로 엇갈렸다. 절벽 위는 아슬아슬했고 바람은 금방이라도 둘을 밀어 아래로 떨어트릴 것만 같았다.

먼저 발을 뗀 건 윤모난이었다. 말이 없는 무구원에게 이미 대답은 들었다는 듯, 더 이상 대화를 이어가지 않고 등을 돌렸다. 굳건한 옹벽처럼 참으로 막막한 등이었다. 한 번도 틈을 보인 적 없는 거기에 대고 무구원은 호소했다.

“그래도 제가 선택하겠다면요…?”

그 말과 함께 무구원은 언덕 너머로 펼쳐져 있는 반도의 풍경을 등졌다. 이미 절반쯤 언덕을 내려가던 윤모난의 걸음이 멈췄다. 일전에도 이와 비슷한 대화를 한 적이 있다는 사실이 그의 기억을 스치고 지나갔기 때문이다. 7년 전에도.

“경해국과 안범은 이대로 보내고, 우리는 온 길을 되돌아가면….”

“…다시 선택해.”

윤모난의 말이 선택을 가로막자 가장 아픈 기억을 찔린 듯 무구원은 차마 더 말을 잇지 못했다. 그리고 윤모난은 7년간 되새기고 또 되새겼던 그 말을 똑같이 반복했다. 무구원은 자신에겐 다른 선택지가 있다는 사실을 반드시 알아야 했다.

“존재하지 않을 미래에 현재를 투자하는 건 어리석은 짓이야.”

“…….”

“돌아가. 이젠 너에게도 사랑할 수 있는 미래가 있잖아.”

윤모난은 다리를 움직여 아래로 내려가 멀어졌다. 그길로 영원히 사라진다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뒤늦게 언덕에서 내려오면서, 무구원은 윤모난이 어디로 가버렸거나 또 흔적도 없이 사라질 거라 예상했다. 그래서 윤모난이 안범과 약속한 대로 저녁 시간에 맞춰 식당에 앉아 있는 모습이 퍽 의외로웠다.

그의 앞에 자리를 잡고 앉으며 무구원은 관자놀이를 찌르는 두통을 느꼈다. 아까 전에 나눈 대화의 여파인지 심신이 불안정했다. 명백한 불안과 두려움이 그를 좀먹고 있었다.

“무 선배님, 왜 이렇게 늦게 오셨어요? 선배님 메뉴는 제가 알아서 시켰습니다.”

“…어.”

“어디 안 좋으세요?”

“피곤해서.”

안범이 얼른 물 잔을 내밀었다.

“막 혼수상태에서 깨셨으니 무리하시면 안 됩니다.”

“들었죠? 팀장님? 안범 말이 맞습니다. 무씨 저거 무리하면 안 돼요. 무—리.”

경해국이 이상한 강세를 넣어 헛소리를 지껄이며 조용히 있는 윤모난의 옆구리를 퍽 찔렀다. 그러자 윤모난이 어이없다는 듯 실소했다.

“대체 경해국 넌 나를 무슨 쓰레기로 보는 거냐. 내가 설마 무구원한테 무슨 짓 할까 봐 그래?”

“또 모르죠.”

“…허리 흔들 기운도 없어. 그만해.”

“젠장! 누가 허리 흔드는 거 말했습니까? 무씨한테 또 말로 상처 주고 그러지 말라는 겁니다!”

“아하, 네가 가벼운 입을 놀려 쟤 아들 얘기를 나한테 홧김에 털어놓은 게 신경 쓰여 그러는 거구나.”

무신경하게 던진 폭탄이었다. 안범과 경해국이 고개를 돌려 무구원의 안색부터 살폈다. 그러나 방금 전의 대화를 듣기나 한 건지, 그는 조용히 안범이 따라준 물만 마시고 있었다.

문득 찾아온 정적을 가르고 빈 컵이 테이블 표면에 부딪쳤다. 물을 넘겨도 현기증이 가시지 않아 무구원은 연신 눈가를 쓸었다. 그러자 경해국이 과장된 뉘앙스로 걱정을 늘어놓았다.

“야, 무씨 너 괜찮냐?”

“…어. 저기 물 좀 더 달라고 할 수 있어?”

“그래. 그래. 너 방금 윤 팀장이 한 소리는…. 아니다.”

경해국이 종업원을 부르자, 무구원이 손가락으로 잔을 테이블의 가장자리로 밀었다. 달그락거리며 밀리던 컵이 순간 핑글핑글 돌았다. 모두의 시선이 몰린 가운데 무구원은 저도 모르게 컵을 툭 치고 말았다.

쨍그랑―!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아슬아슬하게 걸쳐져 있던 잔이 바닥으로 떨어져 산산조각이 났다. 바닥 곳곳으로 흩어진 유리 조각들이 드르르륵 진동하는 소리에, 무구원은 퍼뜩 정신을 차린 듯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그의 손에 멀쩡해진 유리잔이 잡혔기 때문이다.

“…….”

저도 모르게 이능력을 발현하여 깨진 컵의 시간을 돌려버린 것이다. 순간 공포에 질린 듯 자신의 손을 확인하는 무구원을 보는 세 사람도 놀란 것은 사실이었다. 이윽고 경해국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

“너…. 이 새끼 이능력 못 쓰는 거 아니었어? 멀쩡히 잘 쓰잖아?”

“…그게 아니라.”

“어머, 컵 새로 가져다드릴까… 했는데, 제가 잘못 들은 것 같네요.”

때맞춰 종업원이 끼어들었지만, 자리에 앉은 네 사람은 모두 입을 다물고 각자의 생각에 빠졌다. 그러는 사이 종업원이 주문한 음식을 내왔다.

차례로 서빙하던 종업원은 윤모난의 앞에 그릇을 놓을 때는 수줍게 웃어 보이며 얼굴을 붉게 물들였다. 그녀가 떠난 뒤에도 누구 하나 숟가락을 들지 않았다. 결국 경해국이 못 참고 나섰다.

“…무씨, 우리는 네가 이능력을 못 쓰는 줄 알고 그동안 얼마나…. 휴, 무슨 일인지 정말 말 안 할 거야? 씨팔! 다들 뒤지게 비밀만 많고 속 시원하게 말하는 법이 없네! 죄다 주둥이에 바느질하고 있으니 이 지경이 됐지!”

“…….”

“이게 팀이야? 이게 동료냐고! 개썅! 빨리 털어놔! 얼른! 다 불 지르기 전에. 존나게 쓸데없는 동정 뗀 이야기는 하면서 왜 중요한 건 말 안 하냐고!”

보통이면 경해국의 성질머리를 만류할 안범마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도 꽤나 속이 답답한 모양이었다.

“에라이, 불 지를 테니까 여기서 다 통구이 되고 끝내자.”

“…경해국.”

결국 무구원이 입을 열었다.

“난 이능력을 못 쓴다고 한 적 없다. 지레짐작한 건 주변 사람들이지.”

“뭐?”

“능력을 쓰면 몸에 무리가 가기 때문에 자제하고 있었던 것뿐이야. 내가 혼수상태에 빠진 것도 그 이유 때문이고. 네가 날 구하러 기차에 왔다가 죽는 걸 세 번이나 봤거든. 널 살리려고 능력을 쓰기 시작했지.”

다른 사실보다 자신이 세 번이나 죽었다는 말에 경해국이 굼실굼실한 눈썹을 위로 삐쭉 올렸다. 경해국이 하도 소리를 지른 탓에 두통이 심해진 무구원이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난 식사보다 명상을 해야 해.”

“야, 야! 무씨! 그래도 밥은 먹어야지?”

자리를 떠나 밖으로 나가는 무구원을 경해국이 밥그릇을 들고 쫓아갔다. 그렇게 두 사람이 사라진 자리에 남은 나머지는 상황을 관전하다가, 오랜 친구끼리만의 시간을 주기로 했다.

“염병. 저렇게 친구한테 죽고 못 살면서 키스는 왜 안 했대.”

냉소적인 소감을 지껄인 윤모난은 자신의 그릇도 식탁 저 멀리 밀어버렸다. 입맛이 싹 사라진 그는 의자에 등을 기댄 채로 눈치만 보는 안범에게 명령하듯이 말했다.

“얼른 먹어. 키 크려면 많이 먹어야지. 내 것도 가져가서 먹어. 범이 너 밥통 크잖아.”

“…네.”

“그런데 이 식당은 참 손님들이 우리한테 관심이 없네. 이 지랄을 해도 조용히 하라는 사람도 없고.”

갑자기 딴소리를 하는 윤모난 때문에 안범이 네? 하고 되물었다.

“여기 사람들은 인심이 정말 좋은가 봐. 국경으로 들어가기 전에 더 머무는 것도 좋겠어. 다들 오랜 여정에 지친 데다가 무구원 상태도 별로 좋아 보이지 않잖아.”

“…뭐, 안 그래도 경 선배님도 아까 비슷한 말씀을 하시긴 했어요. 무 선배님 무리하면 안 될 것 같다구요.”

“그래. 며칠 정도 더 있자.”

“저는 좋아요! 형 말대로 여기 한적하고 좋은 것 같아요. 음식도 맛있구요.”

사실 국경을 통과한다는 게 부담이었던지라 오히려 다행이었다. 안범은 조막만 한 머리를 끄덕인 뒤에 숟가락을 들어 푹푹 밥을 떴다. 야무지게 밥을 씹는 안범을 보는 윤모난의 눈가가 부드럽게 휘었다.

반면 여전히 자신의 음식에는 손도 대지 않는 그를 힐끔거린 안범은 금방 시무룩해졌다. 아무래도 아까 무 선배님과 둘이 무슨 얘기를 하고 온 것 같은데, 좋은 분위기는 결코 아니었다.

“형. 기분 안 좋으세요?”

“그건 왜 물어.”

“…그냥, 무 선배님 일어나서도 계속 얼굴이 안 좋으셔서요.”

안범은 숲속에서 본 윤모난의 모습이 계속 신경 쓰이던 참이었다. 기적처럼 무구원이 일어나기는 했지만, 숲속에서 보았던 윤모난의 눈물은 그의 가슴에 가시처럼 박혔던 것이다.

“그냥. 쉽지가 않아. 반도에 돌아올 때는 목표가 분명했는데, 이젠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지금 내가 어디에 서 있는지조차도. 내가 이 모양인 탓에 너희들도 다 길을 잃었지.”

기대하지 않았던 진솔한 말이었다. 지금껏 강한 모습만 보여왔던 윤모난이 저 자신의 속내를 고백하는 건 처음이나 매한가지였다.

“다 내 잘못이다.”

“하지만… 제가 말했잖아요. 형은 몰랐던 것뿐이라고. 형님들 일도… 7년 전 일도 몰랐는데 그게 어떻게 잘못이에요?”

“범아.”

지그시 부르는 윤모난의 목소리가 조금은 냉정했다. 그는 안범을 타일렀다.

“그렇게 나를 맹목적으로 지지하지 마.”

“…네?”

“난 네 생각보다 대단한 사람이 못 돼. 너의 존경과 지지는 고맙지만, 날 이해하고 싶다면 내 결함도 직시해야지. 난 이미 잘못을 많이 저질렀어.”

“…….”

“그러니 이 불안과 우울은 떨쳐낼 수 없을 거야.”

물론 안범도 알고는 있었다. 윤모난에게 달라붙은 죽음의 그림자를 훠이 훠이 쫓아낼 수 없다는 것을. 그것은 그의 일부이니까. 그 부분을 삭제하고 회피하려 한다면 윤모난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을 터였다.

그렇다 하더라도. 안범은 한 사람 안에 있는 어둠을 인정하는 것만큼 빛도 보아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만약 편을 든다면 안범은 윤모난이 외면하고 있는 그 안의 희망을 지지하고 싶었다.

“하지만 편향된 건 형도 마찬가지잖아요.”

희망은 바보 같은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우리가 간과하기 쉬운 것 중에 하나였다. 왜냐하면 믿음이 너무도 쉽기 때문이다. 사람 마음이라는 게 쉽게 가질 수 있는 것에는 가치를 두지 않는다. 그래서 반대로 안범은 더더욱 윤모난이 희망을 더는 모른 척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무 선배님이 기적처럼 깨어났는데 기뻐하지도 못하잖아요.”

윤모난은 안범의 말에 머리를 한 방 얻어맞은 표정으로 자리에 멍청하게 앉아만 있었다. 어설프지만 진심을 담은 안범의 말은 음절마다 무게를 실어 전달되었다.

“그냥요. 언제 올지 모르는 그날에 미리 절망하지 말고, 내일 어떻게 할지만 생각하면 안 될까요?”

“…….”

“기억하세요? 형이 제가 처음 무간에 갈 때 해준 말을 비튼 거예요. 희망을 거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아서.”

어느새 눈가가 붉게 물든 안범이 뺨을 끌어당겨 맑게 웃어 보였다. 참, 우는 것만큼 웃는 것도 잘하는 신기한 녀석이다.

“형. 우리 모두 언제 죽을지 모르는 전쟁 통에 살고 있잖아요. 그러니까 다들 조건은 같은 거죠. 그리고 저는요… 만약 내일 죽는다면 오늘은 사랑하는 사람이랑 있을래요.”

낭만 다람쥐 앞에서 냉소적 인간은 맥도 못 추렸다. 그를 실망시키기 싫었던 윤모난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게 안범이 가진 마력이었다.

마침 다시 식당으로 돌아온 경해국에게 그는 며칠간 여기 더 머무르자는 계획을 밝혔다. 오늘 하루만 묵기로 하고 잡아둔 숙소를 연장하면 될 터였다. 명상이 필요하다는 무구원은 이미 방에 있는 듯했다.

“그럼 잘 쉬어.”

숙소 건물에 도착한 이후 윤모난이 안범을 데리고 이인실로 들어가려 하자, 나머지 두 사람의 움직임이 부산스러워졌다. 안범이 옆구리를 퍽퍽 찔러대는 걸 못 참고 결국 경해국이 나섰다.

“저기…. 크흠. 팀장님, 이쪽 방 쓰세요.”

경해국의 손가락이 가리킨 곳은 무구원이 있는 방이었다.

“무구원 건드리지 말라며.”

“…씹, 그냥 들어가라고 할 때 들어가십쇼.”

“무구원이 명상하는 모습이 너무 섹시해서 나도 모르게 덮치면 어떡해.”

“그냥! 좀! 들어가십쇼!”

거칠게 밀치는 손길에 윤모난은 구겨지듯 문 안으로 욱여넣어졌다. 이윽고 경해국이 문을 쾅 닫으며 밖에서 음산한 목소리로 주의를 줬다.

“어이, 잠만 자세요. 손잡고 잠만!”

“저게 진짜.”

이윽고 문 너머로 건너편 방문이 닫히는 소리가 울렸다. 안은 어두웠다. 윤모난은 신발을 벗고 안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예상대로 방에는 무구원이 있었다. 벽 한쪽에 난 창문 가까이에 몸을 굽힌 채로 가만히.

기도할 때와 비슷한 자세였지만 기도문을 외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순간 이상한 느낌을 받은 윤모난은 돌연 시선에 걸리는 익숙한 액체를 보고선 멈칫 섰다.

“무구원?”

아무 대답이 없다.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더 놀라거나 후회하고 슬퍼할 일도 없이 심장이 화석처럼 굳어버렸을 줄 알았는데. 윤모난은 제 몸을 뒤흔들 기세로 뛰는 심장 소리만큼 크게 소리쳤다.

“야, 이 새끼야!”

무구원의 어깨를 잡고 돌리자 너무나도 당연하게 검은 눈동자가 마주해왔다. 눈을 느리게 깜빡이던 무구원이 짧은 숨을 내쉬었다.

“…팀장님.”

윤모난의 시선이 피가 흐르는 무구원의 손끝에 무겁게 매달렸다. 기도를 했다고 하기에는 평소 바늘로 찔렀을 때보다 더 많은 양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제야 바닥에 어디서 구했는지 모를 뾰족한 날붙이가 보였다.

“무구원, 너 미쳤어? 이러다 또 정신 잃고 싶어? 아들 보고 싶다며…. 그런데 이런 짓을 해? 뭐가 옳고 뭐가 그른지 판단력도 잃었어?”

하지만 여전히 눈은 풀린 채 대답하지 않는 무구원을 보며, 윤모난의 속에서도 무언가 울컥 치밀었다. 이 새끼를 어떻게든 정신 차리게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에 흠씬 팰 작정으로 주먹을 든 순간이었다. 낮게 울리는 목소리에 모든 것이 일제히 멈췄다.

“…두려워서요.

나약함을 허물없이 드러내는 대답에 윤모난의 마음속 벽이 무너져내리고 말았다. 안범의 말이 맞았다. 희망이란 게 전혀 없을 수는 없다. 그러나 그걸 아무도 보아주지 않는다면. 이렇게 사랑하는 사람마저 진창에 빠트리게 된다.

윤모난은 무구원을 앞에 두고 생각했다. 오랫동안 자신이 간과해온 희망과 빛에 관하여. 무구원은 바닥에 처박혀 진창에서 굴러도 앞에 놓인 어둠에 맞서고자 했다. 응달 아래 죽음이 아닌 숭고한 삶을 살아내면서.

“…넌 알아야 해.”

무구원과의 자신의 관계는 일종의 끊임없는 재판 같은 것이 아닐까. 윤모난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내 죽음을 주장해온 자신에게 무구원은 삶으로 끝까지 항변하고 있었다.

얼마 전에도 그는 제가 죽음을 떠올린 바로 그 순간에 무언가 알아차리기라도 한 것처럼 깨어났다. 그러한 기적을 일으키는 무구원을 보며 어쩐지 이 녀석에겐 져줘야 할 것 같다는 예감이 든 것은 그러한 이유였다.

“난 너를 한 번도 무의미하다고 여기지 않았다는 걸.”

그러므로 윤모난 또한 해야 할 말이 있었다. 7년 전 찢어 가져간 페이지의 글귀를 무구원에게 돌려줘야 한다. 수수께끼는 끝났고 이미 답은 나와 있었다.

“나는 수술이 불가능한 상태거든. 가망 없이 너를… 사랑하니까.”

이번에는 윤모난이 그 글귀의 마지막 문장을 무구원에게 직접 말해주었다. 오랜 시간 수없이 엇갈려 갈 곳 잃었던 그 말은 둘 모두에게 동등하게 선언됨으로써 이제 모호함을 벗어 던졌다. 이 감정은 그 진단대로 병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윤모난은 영원히 나아지지 않으며 이 고통을 기꺼이 긍정하기로 하였다.

그때 두통이 심한 듯 무구원이 얼굴을 찌푸리며 신음했다. 윤모난은 기민하게 반응하며 그에게 다가갔다.

“왜?”

“…아닙니다.”

“왜 그러는데?”

무언가 눌러 참는 듯이 어금니를 꾹 깨물던 무구원이 무심결에 금속 조각을 찾았다. 거기로 손을 뻗으려 하는데 바로 가로막혔다. 머릿속을 뒤흔드는 격통에 그는 애처롭게 고백할 수밖에 없었다.

“…제 능력을 제어할 수 없어서 그게 필요합니다.”

“시간이 계속 돌아가는 거야?”

“네.”

“이게 몇 번째인데?”

“세 번째요.”

충격적인 답이었지만 윤모난은 짐짓 감정을 누그러뜨렸다. 그는 조각을 구석으로 던져버리고선 무구원의 얼굴을 끌어당겨 자신의 코앞 가까이에 위치시켰다. 그리고 단호하게 명령했다.

“이능력은 누구나 정신으로 제어할 수 있어. 저런 방식이 아니어도 할 수 있다고, 무구원.”

느슨하게 풀리던 무구원의 시선이 그의 부름에 조금 또렷하게 되돌아왔다. 그간 마약을 복용해 이능력을 제어했던 탓에 약 없이는 몸을 추스르는 데 어려움이 있었다. 일종의 부작용이기도 했다.

“정신 차려.”

순간 거세게 뺨이 올려붙여진다. 그러자 흐물거리던 몸이 채찍을 맞은 것처럼 바짝 긴장감이 찾아들었다. 무구원은 얼얼함을 느끼며 아픔을 토로했다.

“아픕니다.”

“과다 출혈로 죽는 거보단 나아.”

“고백한 뒤에 하는 행동치고는 가학적이라는 생각 안 드십니까?”

두통으로 비몽사몽인 와중에 실없이 흘러나간 말에 윤모난이 피식 웃더니 바로 긍정했다.

“그러게.”

그 순간 무구원의 얼굴 위로 구름에 가린 듯 그늘이 졌다. 윤모난이 얼굴을 비틀어 갑자기 입술을 부딪쳤기 때문이다. 씁쓸한 숨결이 무구원을 덮쳤다. 부드럽게 그의 아랫입술을 핥던 윤모난이 문득 뒤로 물러나더니 더운 목소리로 말했다.

“어이, 무구원. 세 번이나 시간을 돌렸으면 내 고백도 세 번이나 들었겠네?”

“…네.”

“그럼 좋은 거잖아?”

짓궂은 질문에 무구원은 웃는 법도 없이 진지하게 대답했다.

“네. 나쁘기만 한 시간 사이에서 유일하게 좋은 일이었습니다.”

다시 윤모난이 입술을 붙였다. 이로 은근하게 입술을 벌리더니 혀를 밀어 넣었다. 매사 거친 면이 있는 윤모난치고는 퍽 부드럽고 다정한 입맞춤이었다. 절로 정신을 아득하게 만들어 몸을 이완시키는 행위에 무구원의 불규칙하던 파동도 점차 잦아들기 시작했다.

“파동을 잠재워. 마음을 가라앉히고 머리를 비워.”

윤모난이 주문처럼 언어를 불어 넣었다. 커다란 손이 무구원을 아이처럼 어루만지고 달랬다. 윤모난은 그에게 가이딩을 하고 있었다. 그러자 서늘했던 마음에 한 줄기 작은 빛이 스며드는 것 같은 따스함이 잇따랐다.

차가운 음지를 서서히 달구고 시들어 있는 식물을 토닥이는 빛이었다. 동시에 둘은 앞에 아득히 펼쳐진 어둠이 물러갈 것만 같은, 희망이라는 것이 아지랑이처럼 눈앞에서 아른거리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무서워하지 마.”

예의 그 속삭임이었다. 어느 시간 속, 어느 우주에 있어도 무구원이 그쪽을 돌아보게 만드는 좌표의 중심만이 할 수 있는 말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조급하기만 한 무구원은 이로 할퀴듯이 윤모난의 아랫입술을 빨았다.

하나의 분명한 각인을 새기고 싶었다. 이 모든 것이 현실이라는 것을 인지시켜줄 고통이 필요했다. 조급하게 더운 숨이 오가고 미지근한 타액이 섞이다가 잠시 입술이 떨어졌다. 잔류하는 그의 두려움을 깨달은 윤모난이 구원아, 하고 지그시 불렀다.

“네가 내게 정말로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면 7년을 기다리지도 않았을 거다. 네가 예전에 나한테 물었었지. 10년 뒤라는 시간도 생각하고 있냐고.”

“네. 그리고 그때는 대답하지 않으셨습니다.”

“맞아. 그랬는데, 반도를 떠나 바깥을 떠돌면서 그 말을 내내 생각했어. 10년은 긴 시간이야. 누군가에게 잊히기엔 충분하지.”

무구원은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그의 얼굴을 살폈다. 평소 냉랭한 기운이 감돌던 창백한 낯에 미세한 온기가 차오르는 듯하더니 윤모난이 다시 입을 뗐다.

“하지만 나는 그걸 용납할 수 없었던 것 같다. 그래서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 네 앞에 다시 나타난 거야. 네 일상을 흔들고 엉망으로 만들려고. 널 다시 타락시키기 위해서.”

“…….”

“왜냐하면 한 번은 그저 실수로 여겨질 것 같아서 싫었거든. 두 번째부터는 변명할 수 없을 테니까.”

참으로 고약하고 비뚤어졌으면서도 낭만적인 말이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은 결코 건강한 것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데 네가 어떻게 내게 무의미가 될 수 있겠어.”

차갑고도 뜨거운, 다정하면서도 잔인한 그 언사에 여전히 무구원은 혼란스러워 보였다. 반복해서 들어야만 납득할 수 있는 사람 같기도 했다. 다시 시간을 돌리려는 듯이 무구원의 파동이 미세하게 뾰족해졌다. 하지만 윤모난이 그를 다잡았다.

“아니. 시간 돌리지 마. 그냥 내 말도 이 순간에 고정시켜놔. 마음은 생각보다 질량이 크거든. 그러니까 기억 하나만으로 이 순간에 돌아올 수 있도록 만들어줘.”

“…좌표처럼요?”

“그래. 그렇게 특별한 어느 한 점으로 만들어줬으면 해.”

그러자 무구원의 얼굴에 무언가가 비쳤다. 윤모난의 우울과는 다른 맑고 투명한, 순수한 슬픔이었다. 윤모난의 말은 이 관계 아래 도사리고 있는 모든 불안과 두려움을 까발리는 동시에 잠시나마 식히기도 했다.

윤모난도 마찬가지였다. 그 역시 이 순간에는 자신의 불안과 고통을 식힐 수 있었다. 그러자 물속 모래처럼 가라앉아 있던 그의 인간성이 정념들과 함께 부유물처럼 떠올라 모습을 드러냈고 마침내 윤모난 또한 잠깐의 안식을 취할 수 있었다.

“그런데, 삼 개월이나 자면서 무슨 꿈이라도 꿨냐?”

“네. 상상도 못할 만큼 좋은 꿈이었네요, 하지만 전 빨리 깨고 싶었습니다.”

“왜. 그런 꿈은 흔치 않은데.”

“팀장님이 혼자 계실 것 같아서요.”

두 사람은 적막 가운데서 서로를 바라봤다. 아주 가까이에서.

아주 오랫동안 방황하던 두 여행자는 휘몰아치는 폭풍 속에서 겨우 쉼터를 발견한 것처럼 안락함을 누렸다. 윤모난의 눈매가 부드럽게 휘었고, 무구원의 아름다운 입술도 따라서 곡선을 그렸다.

해결된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여전히 바닥은 바닥이었다. 그러나 이곳에서 두 사람은 끊임없이 손으로 흙을 긁어내고 돌을 고르며 다친 끝에 서로를 붙잡은 것이다.

“경해국이 너 아프니까 손만 잡고 자라고 하던데.”

“…무슨.”

“많이 아프냐? 너 건강한 편이잖아.”

무구원에게서 어이없는 웃음이 터졌다. 그러자 윤모난이 쿡쿡거린다. 희롱하는 재주 하나만은 대단한 남자였다. 웃음을 갈무리한 윤모난이 베개 하나를 끌어다 놓았다.

“농담이다. 얼른 자. 피곤하고 지쳤을 텐데, 형이 너 손만 잡고 잘게.”

그건 맞는 말이었다. 지금은 다시 가라앉긴 했지만, 파동이 날뛴 탓에 몸이 무거웠던 무구원은 먼저 자리에 누웠다.

“같이 누우실 겁니까?”

“그럼 같이 눕지, 어디 마당 가서 누울까? 나도 졸려.”

윤모난이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기어들어 갔다. 얼마 뒤 나온 그의 몸엔 깨끗한 물기가 서려 있었다. 머리를 제대로 수건으로 말리지도 않았고 빗질은 말할 것도 없었다. 물기가 뚝뚝 떨어지는 채로 돌아온 윤모난은 웃통을 훌렁 벗고 자리에 누웠다.

그의 옆에 단정히 누워 있던 무구원이 베개와 이불을 끌어당겨주었으나, 눈길도 주지 않고 이쪽만 물끄러미 바라보는 윤모난의 시선이 느껴졌다.

“왜 보십니까.”

“왜 보십니까? 왜 보겠냐…. 질문하고는.”

“손만 잡고 잔다면서요.”

“농담 한마디 했다고 변태로 몰아세우긴. 그냥 잘생긴 얼굴 보는 거야. 언제 이렇게 보겠나 싶어서.”

무구원은 몸을 옆으로 돌렸다.

“많이 보십시오. 잘생긴 얼굴 보고 싶으면 그냥 거울 보시면 될 것 같지만 말입니다.”

“내 얼굴은 질려. 나보다 좀 덜 잘생긴 얼굴이 좋아.”

“그게 저입니까?”

“그래, 넌 그런 점에서 딱 내 취향인 거지. 우리 처음 만났을 때, 기차에서 네가 갑자기 나타났잖아. 수구 꼴통 같긴 했지만 제법 귀여웠는데.”

“제가 기억하는 처음은 다릅니다.”

무구원은 윤모난이 기억 못할 첫 만남에 관해서 말해주었다.

“원래는 제 신입 시절, 서곡 대운동장에서 처음 뵀습니다. 7년 전에 저하고 팀장님이 치고받고 싸웠던 곳 말입니다. 팀장님이 거길 혼자 달리고 계셨는데, 제 무리를 발견하고 다가오셨어요. 그때도 제 얼굴이 잘생겼다고 하시던데요.”

“…그랬나? 난 기억 안 나는데.”

“네. 제가 경례했는데 팀장님이 받아주셨습니다. 그 후로 팀장님의 웃는 모습이 계속 기억에 남았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가슴이 뛰었던 것 같습니다. 둔한 전 몰랐지만요.”

“그럼 내가 무구원 네 첫사랑이겠군.”

윤모난이 조용히 미소를 띤 채로 물었다. 눈꺼풀이 무거웠다. 잠이 몰려온다는 신호였다. 좀 더 느리고 가라앉은 목소리가 이윽고 무구원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리고 또 다른 우주에서도 만났었죠. 어느 밤에 북해 바닷가에서요. 팀장님이 바람에 놓친 담배를 제가 찾아드렸는데, 다른 남자 얘길 하길래 화가 나서 팀장님 손등을 쳐 또다시 놓치게 해버렸습니다.”

“…응.”

한밤중에 켜둔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사연처럼, 선잠이 든 채 듣는 기억들이었다. 윤모난은 습관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다가 이내 완전히 떨어트렸다. 무구원은 그런 윤모난에게 이불을 덮어주고 그 위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또 언젠가 처음 만났을 때는 더 어릴 때였습니다. 아버지께서 아직까진 거동하실 때여서 남경으로 출장 가실 일이 있었죠. 그때 제가 따라가겠다고 고집을 부렸습니다.”

“…….”

“그날은 마침 팀장님 조카, 청연이가 태어날 때쯤이었습니다. 꽃이 만발한 봄날이었는데, 팀장님 댁에 갔다가 소식을 들었죠. 결국 아이가 태어나기 전에 떠나야 하긴 했지만요.”

무구원도 눈을 감았다. 하지만 여전히 말을 멈추지 않았다.

“대신에 어린 팀장님을 볼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어릴 땐 꽤 귀여운 구석도 있으시더군요.”

윤모난의 뜨거운 숨이 목젖 부근을 데우고 있는 것을 느끼면서, 무구원은 우주를 펼쳐놓았다. 수많은 첫 만남으로부터 시작된 첫사랑을 더욱 세게 끌어당기면서. 그때 품에 갇혀 있던 윤모난이 잠꼬대처럼 웅얼거렸다.

“…난 청연이… 태어난 날 이젠 기억 안 나는데…. 사진밖에는….”

“…….”

무구원은 저도 모르게 힘을 주고 있던 팔을 살짝 풀었다. 그러자 윤모난이 크게 숨을 내쉬더니 옆으로 데구루루 굴러갔다. 그 말을 끝으로 온전히 잠이 든 것이다.

윤모난이 깨어난 건 새벽녘이 되어서였다. 문득 정신이 맑아지며 눈이 자연스럽게 떠지는 그런 순간이었다. 트인 시야에 눈을 감고 있는 무구원이 들어왔다. 그는 푸른 새벽빛이 무구원을 담은 장면을 온전히 기억 속에 담아 밀봉했다.

“이상한 꿈을 꿨는데…. 우리가 무간에 있었고 나는 너한테….”

말을 이어가던 윤모난은 문득 중간에서 멈췄다. 꿈은 늘 모호한 구석이 있다. 자고 있을 때는 선명한데 깨고 나서는 영 현실감이 없이 멀어지기에. 윤모난은 방금 꾼 꿈을 되새기지 않기로 했다. 완벽한 순간을 망치긴 싫었다.

그런데 그 순간, 윤모난의 시선이 마치 그를 두드려 깨운 것처럼 무구원이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잠기운이 서려 있지만 여전히 단정하기만 한 얼굴이 약간 구겨진다.

“팀장님, 그거 아십니까?”

“뭐가?”

“…잠버릇 정말 안 좋으십니다. 이 가는 소리 때문에 선잠이 들었는데, 그다음엔 팀장님이 저를 발로 차서 중간에 여러 번 깼습니다.”

그러면서 바지를 걷어 올려 보여준 무구원의 다리에는 정말 시퍼렇게 멍이 들어 있었다. 윤모난이 뻔뻔하게 웃었다.

“미안, 좀 떨어져서 자자. 내 잠버릇은 나도 어쩔 수 없어. 예전에 기숙사 생활 할 때도 룸메이트들이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고.”

그는 말과는 달리 기다란 다리를 뻗어 무구원의 허리를 감았다. 투정을 부리느라 일자가 된 무구원의 진한 눈썹을 엄지로 쓱 덧그리기도 했다. 그러자 무구원이 그의 손바닥에 입술을 붙이며 중얼거렸다.

“그럼 주무시지 마시죠.”

그렇게 시작된 입맞춤은 윤모난의 손목에서 팔로, 가슴에서 목으로 이어졌다. 막 잠에서 깨어 뜨거운 체온을 입술로 옮기면서 무구원은 적나라하게 드러난 윤모난의 흉터들을 정거장 삼아 천천히 머물렀다.

이제는 흐릿해진 뱀 문신, 칼에 찔린 상처, 아버지를 죽이고 얻은 목의 흉터, 그 외에 자잘한 실금까지. 이 모든 것이 윤모난의 인생에 퇴적된 상처들이었다. 입을 맞추는 곳곳마다 그가 느꼈을 고통을 똑같이 옮겨 받는 듯했다.

“강아지같이 비비적거리긴.”

무구원이 흉터만 골라 입술을 비비는 걸 알면서 하는 소리였으나 무릇 말에는 이상한 힘이 있다. 다친 곳을 어루만지며 달래려는 마음 아픈 행위가 정말로 강아지가 품에서 비비적거리는 행위로 변모한 것이다.

윤모난의 손이 부드럽게 칠흑 같은 머리칼을 휘어 감았다. 손길에 끌려온 무구원의 얼굴을 마주 본 그는 고생을 하고 온 입술을 달래듯 짧게 꾹 찍어 누르다가 나지막이 속삭였다.

“어차피 나도 자기 싫었어. 이상한 꿈을 꿨거든.”

무슨 꿈이냐고 묻기도 전에 입술이 맞물렸다. 그건 중요하지 않다는 듯이 윤모난은 무구원을 끌어당겼을 뿐이다.

* * *

국경 마을에서의 평화로운 이틀이 흘렀다. 그날, 경해국과 안범은 일찍이 근처에 폭포를 구경하겠다고 떠났고, 그럴 생각이 없는 나머지 두 사람은 마을에 머물기로 했다.

저녁에 식당에서 다시 모이기로 약속하고 느긋한 오후를 보내던 차에, 윤모난이 작은 책방을 발견했다며 무구원을 데려갔다. 서로 방에 붙어만 있다가 처음으로 돌아다녀보기로 한 것이다.

“이런 데도 책방이 있네요. 큰 도시가 아니면 찾아보기 힘든데.”

먼지 냄새와 텁텁한 공기로 가득 찬 책방 안은 적막했다. 주인은 자기 자리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었고, 구석엔 고양이 한 마리가 몸을 말고 있었다. 책들이 최소한의 분류도 되지 않은 채로 그대로 선반에 쌓여 있긴 했지만 손때가 묻은 좋은 장소였다.

무구원은 책장 너머에서 책 하나를 골라 금방 집중하며 읽기 시작했고, 그건 윤모난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잡은 책을 거의 다 읽어가는 시점이었다.

“눈 안 아파?”

“괜찮습니다.”

책장 너머로 윤모난의 얼굴이 빼꼼 튀어나왔다. 시력이 안 좋은 무구원이 미련하게 책을 얼굴에 가까이 붙이고 읽는 모습을 발견한 모양이었다.

“물론 안경이 있으면 더 좋았겠죠. 안타깝게도 제가 소중하게 간직하던 안경은 누가 밟아서 아작을 내서요.”

“누가?”

“팀장님이요.”

그러자 윤모난이 흠, 하고 숨을 내쉬더니 코너를 돌아 옆으로 다가왔다. 그러고서는 책을 낚아채듯이 강탈해 간다.

“잘못했으니까 내가 읽어줄게.”

“…싫습니다.”

“왜?”

바로 거절이 흘러나올 줄은 몰랐던 윤모난이 의아하게 묻자 덤덤한 대답이 되돌아왔다.

“여기서는 싫습니다. 단둘이 있을 때 해주십시오. 남이 듣는 건 싫어요.”

무구원이 고갯짓으로 졸고 있는 카운터의 책방 노인을 가리켰다. 윤모난은 황당함을 감추지 못했다.

“왜, 내가 창피하냐?”

“…설마 창피해서 그러겠습니까? 그냥 저만 듣고 싶어서 그럽니다.”

그건 또 무슨 헛소리냐는 듯 윤모난이 미간에 주름을 잡으며 핀잔을 줬다.

“너도 참 별스러운 놈이다.”

“제일 별스러운 사람한테서 그런 소리 듣고 싶지 않습니다.”

“이 자식이, 한마디도 안 져?”

순간 윤모난의 얼굴이 엉뚱하고 짓궂은 소년같이 변했다. 무언가 악랄한 생각을 했는지 사악하게 웃더니 그가 무구원을 선반으로 밀어붙였다. 구석진 사각지대라 주인이 보지 못하는 곳이었다.

“그런데 너만 듣고 싶다는 심리는 뭐야. 저 노인 양반이 들으면 뭐 어떻다고. 질투라도 하냐?”

“…….”

“그러고 보니 무구원 너, 보기보다는 질투 좀 하는 거 같더라? 우리 수도에 치안조 지원 나갔을 때 말이야. 갑자기 벽 부수고 아닌척하면서 이상한 말 한 거, 그때도 질투한 거지?”

무구원은 이야기를 듣느라 살짝 올라갔던 진한 눈썹을 일자로 돌려놓고선 입도 같은 모양으로 다물었다. 그런다고 봐줄 윤모난이 아니었다.

“내가 그렇게 좋아? 예전에는 맨날 삐뚜름하게만 보더니 이제는 노인한테까지 질투할 정도로?”

“…….”

“어이, 무구원. 내가 그렇게 좋냐고, 이 자식아.”

얼굴을 붉히는 간단한 변화도 없이 목석같은 무구원이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저 수학 공식이나 읊을 것 같은 인상이랄까.

그런데도 미세하게 숨을 삼키는 타이밍이라든지, 아니면 눈을 조금 빨리 깜빡인다든지 윤모난의 눈에만 선연히 보이는 것들이 있었다. 그런 신호는 무구원이 의외로이 말로 폭탄을 떨어트리기 전에 보이는 것이었다.

“네. 사랑합니다.”

“…….”

“팀장님을 보고 있으면 가슴이 벅찰 정도로요. 남들 말을 빌리자면, 누가 밥 먹는 것만 봐도 배부를 때가 있다죠. 제가 딱 그렇습니다.”

역시나 예상 범위 밖의 폭격이었다. 윤모난은 조금 위험하다는 생각을 하며 다른 부분을 지적했다.

“그건 부모가 애한테나 쓰는 말이잖아.”

“그렇다면 전생에 팀장님은 제 자식이었나 봅니다.”

“음, 그건 싫은데. 이왕이면 전생에는 애인이었던 게 좋겠어.”

애인? 상대의 헛소리도 귀담아듣던 무구원의 눈이 약간 사나워졌다. 어딘가 토라진 모양새였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라고는….

“…팀장님은 전생에도 애인이 많았을 것 같은데요.”

“그럼 전생에 네가 내 마누라였다고 치든가. 무구원, 넌 분명 악처였을 거야. 질투도 많고. 밥 먹어라, 일찍 일어나라, 청소해라.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날 들들 볶았겠지.”

“보통 그런 경우는 악처가 아니라 현모양처라고 부릅니다.”

“현모양처라…?”

윤모난은 눈앞의 무구원을 벗겨 먹을 듯 바라보며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한복 치마 입은 모습이 꽤 섹시했겠다고 대꾸하는 윤모난을 무구원은 이길 재간이 없었다. 더욱이 평소에 대체 무슨 상상을 하고 살았던 건지, 윤모난이 본격적으로 음란한 말들을 속닥거리기 시작했다.

“네가 내 아내였다면, 무구원. 난 너를 1년 내내 임신시켰을 거야. 밥 먹다가도 밥상에 엎어놓고 치마를 올려서….”

이어지는 말에 잘 달아오르는 법이 없는 무구원의 귓바퀴가 다 절로 뜨거워졌다. 주절주절 생전 들어본 적도 없는 행위와 기상천외한 체위들을 늘어놓던 윤모난이 단정한 뺨을 혀로 날름 핥으며 긴 음담패설을 끝맺었다.

“…그렇게 하면 애 일곱은 그냥 낳겠다. 그렇지?”

“…….”

“애 일곱이나 낳으면 넌 날개옷 찾을 생각도 못하고 내 옆에 있어야겠네.”

“…갑자기 무슨 선녀와 나무꾼입니까?”

“어, 그러게. 얘기가 갑자기 거기로 샜지.”

무구원은 수치심으로 뜨거워진 얼굴을 손으로 가린 채였다. 몸을 살짝 떨어트리며 웃은 윤모난이 지금껏 무구원이 읽고 있던 책을 접어 표지를 확인했다. 그러자 갑자기 그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희미하게 가신다. 『햄릿』이었다.

“이건 왜?”

“…그냥. 결말을 다시 읽어보려고요.”

“그래서. 결말이 어땠는데?”

“이제 읽으려던 참인데… 팀장님이 마침 말을 거셔서요.”

“음, 그래?”

별다를 것 없다는 듯한 음성이었으나, 윤모난의 얼굴은 조금 복잡해 보였다. 잠시 후 그가 시선을 돌리는 방향을 따라가보니 노을 지는 창밖이 보였다. 벌써 저녁 시간이니 식당으로 가야 했다. 윤모난은 책을 선반에 던지듯 돌려놓으며 고갯짓했다.

“구원아.”

책방을 나와 걷는데 윤모난이 뒤에서 무구원의 뒷덜미를 끌어당겨 제게로 붙였다. 무구원은 『햄릿』을 들킨 뒤부터 마치 혼날 것을 예감한 똥강아지 같은 얼굴이었다. 윤모난은 똥강아지를 토닥이며 오늘의 감상을 늘어놓았다.

“좋았다, 그치?”

“…네.”

두 사람은 나란히 식당 쪽으로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낮에도 한적하기는 했지만, 저녁이 되니 거리에는 사람이 더 없었다. 조금 서늘해지는 공기 사이로 두 사람의 손등이 계속 스쳤다. 세 번쯤 스쳤을까, 무구원이 먼저 윤모난의 손을 쥐었다.

“나도 그래.”

순순히 손을 내어준 윤모난이 문득 말했다. 그냥 밥을 먹으러 가자는 것과 다를 바 없는 평범하고 멋없는 투로 뒷말이 이어졌다.

“나도 너 사랑한다고.”

“…….”

“그냥, 네가 또 무서워하는 것 같아서.”

무구원은 아무래도 날개옷은 윤모난의 것이고, 나무꾼은 오히려 저 자신이 아닌가 생각했다. 그에게 자신의 필사적인 마음을 들킨 것 같아 오히려 부끄러웠다. 하지만 할 수 있는 일은 꽉 잡은 손을 놓지 않는 것뿐이었다.

그렇게 뿌리치지 않고 이어진 마음은 끊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던 터라, 이미 식당에서 기다리고 있던 경해국이 보자마자 뭐 씹은 얼굴을 해도 놓을 수가 없었다. 경해국과 안범이 마주 보고 앉은 탓에 두 사람이 손을 놓고 떨어져야 하는 순간에도 둘은 그대로 손을 잡고 있었다.

“딱 보니 손만 잡고 자는 거 빼고 다 한 모습이구만? 씹, 챙피하지도 않습니까? 못 비킵니다. 떨어져 앉으세요.”

“마음을 곱게 써야 다음 생에는 축생이 아닌 인간으로 태어나는 거다.”

“무씨, 꺼져. 누구는 사랑하는 여보 얼굴도 몇 주째 못 보고 있는데!”

“선배님, 제가 대신 비켜드릴게요. 으유, 경 선배님. 마음 좀 곱게 쓰세요.”

결국 안범이 가벼운 엉덩이를 들어 경해국의 옆자리로 옮겼다. 뻔뻔한 무구원과 윤모난이 나란히 앉는 걸 보고선 경해국의 투덜거림이 더 심해지긴 했지만, 즐거운 저녁 시간이 이어졌다.

“이제 슬슬 집으로 가야죠? 내일이나 모레쯤에는 출발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야 상관없는데 안범 저건 진짜 잘립니다. 저 녀석 이제는 팀장이라구요.”

“어, 그러게. 팀장한테 이렇게 휴가를 길게 줄 리가 없는데, 너 괜찮은 거 맞아?”

자신에게 쏟아진 관심에 안범이 손을 들어 저었다.

“7년간 제대로 된 휴가 쓴 적도 없고, 제 팀원들은 아직 출정권이 없거든요. 어차피 신입 훈련 중이라 교관 실습이 더 많아서 괜찮습니다. 하지만 이제 슬슬 돌아가야겠지요. 안 그래도 오늘 연락했습니다.”

“장하네, 안범. 팀장 노릇도 하고.”

“다 형한테 배운 건데요. 뭘.”

겸손을 떨면서도 칭찬에 얼굴을 붉히는 안범을 흐뭇하게 보던 윤모난이 갈색 머리를 쓱쓱 쓸었다.

“처음에 내가 너네 맡았다고 들었을 때 눈앞이 캄캄했었지. 다들 하나같이 답이 없었어. 나도 마찬가지였고. 아니, 팀 스코어가 마이너스 오천 점이라니. 말이 돼?”

“꺄하하학! 아직도 서곡에서 그 마이너스 오천 점, 아니 육천 점이지요. 그거 전설입니다.”

네 사람은 다 함께 7년 전의 추억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때 무구원이 뭔가 생각난 듯 말을 얹었다.

“그 팀장님이 내주신 반숙란 프로젝트 하다가 경해국이 운 건 아십니까?”

“야, 씨팔! 무씨, 그건 운 게 아니라 그냥 열받아서 땀이 눈가에 맺힌 거라니까.”

“…그때 왜 땀이 눈가에만 맺혔는지는 설명 못했을 텐데.”

그러면서 무구원은 원래 경해국이 은근히 눈물이 많다며 설명을 덧붙였다. 안범이 예전에 혼수상태에 빠졌다가 일어났을 때 벽을 치며 흘린 눈물까지 고발하자 경해국을 뺀 나머지 사람들이 와하하 웃었다.

“선배님! 감동입니다아!”

“언제, 내가, 언제! 언제 안범 요 새끼가 일어났다고… 울었다는! 놔!”

“경 선배니임!”

안범이 와락 품에 안겨들며 허리를 끌어안자 경해국의 얼굴이 불에 달군 것처럼 시뻘게졌다.

“이거 안 놔? 유부남의 허리를 막 끌어안고…!”

“제가 말하지 않았습니까. 저한테는 선배님들 다 제 가족이나 다름없다고요. 전 정말 우리 팀이 좋습니다. 저한테 진정한 팀은 하나뿐이에요, 영—원히.”

“…젠장.”

안범의 솔직한 감회를 비웃는 사람은 없었다. 잠시 네 사람은 기탄없이 웃음을 나눴다. 피를 나누지 않은 가족이라. 죽을 때까지 혈연의 굴레에 얽혀 살아가는 반도 출신으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개념이었다.

어쨌건 그들은 혈연의 바깥에서 가장 굳건한 인연을 얻었다. 거친 성격 때문에 소외되었던 경해국부터 부모를 잃은 안범, 가족에게 외면당하며 살아온 무구원 그리고 가족의 사랑이 굴레가 되었던 윤모난까지.

이 인연을 뭐라 부르든 그게 무슨 상관일까. 친구든 연인이든 그리고 선후배이든. 서로를 향해 한 가지씩 내어주고 받은 이는 그걸 잊지 않고 돌려주면서 긴 세월 이어진 관계란 실로 굳건한 것이었다.

“다행이다.”

대뜸 윤모난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에 나머지 세 사람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그는 어떠한 그늘도 없는 얼굴로 솔직하게 자신의 마음을 털어놓았다.

“계속해서 좋게 기억할 수 있는 인연이 내게도 있어서 다행이야.”

침묵이 오래 이어졌다. 그러다 별안간 안범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르더니 보송했던 뺨 위로 뚝뚝 눈물이 흩뿌려졌다.

“…형, 우리랑 같이 안 돌아가실 거죠?”

“응.”

윤모난은 돌아가지 않는다. 내내 자리에 앉아 있는 동안 손을 놓지 않았던 무구원도 예상했다는 얼굴로 담담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사실 윤모난에게는 책의 결말을 보지 않았다고 했지만, 마지막 페이지에 무엇이 쓰여 있는지 무구원은 이미 알고 있었다.

“너희는 내일 반도로 가.”

“형….”

안범이 뭐라 말을 얹으려 하는 그 순간 무구원이 그를 제지했다. 굳은 얼굴로 고개를 내저은 건 말리지 말라는 뜻이었다. 표정을 읽기 힘든 그이지만 지금만큼은 모든 것이 뚜렷했다. 너무나도 확연하게 슬픔이 배어 나오는 표정을 짓고 있는 무구원에게 문득 윤모난이 말했다.

“…무구원. 아직 10년을 채우려면 3년이나 남은 거 알아?”

어떠한 근심도 무게도 없는 웃음이 윤모난의 얼굴 위로 펼쳐졌고, 깍지를 끼고 있던 손도 단단하게 얽혀왔다. 무구원은 그의 말뜻을 알아차렸다.

윤모난은… 지금 같이 떠나자고 하는 것이다. 3년이라는 유효기간을 둔 채로.

언덕 위에서 말했던 대로 반도를 등지고 가자니. 무구원이 말한 그 헛된 기대와도 같았던 희망을 현실화하자는 의미였다. 3년은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다. 7년을, 아니 시간 여행을 하며 그보다 더 긴 시간 동안 윤모난을 쫓았던 무구원은 그 무게를 알고 있었다.

“…저는.”

그리고 윤모난이 이렇게 말하기까지 거쳐왔을 고민들 또한 이미 알고 있다. 왜 그의 제안에 3년이란 유효기간이 붙었는지도. 그렇기에 무구원은 서글퍼졌다. 이 희망을 연속시키려면 그에게 계속 거짓말을 해야 하니까.

그렇게 억지로 이어 붙이는 희망이 무슨 가치가 있을까. 그걸 과연 사랑으로 정당화할 수나 있는 건가. 무구원은 이 결말에 이르러서야 지금껏 해왔던 거짓말에 대한 죗값을 치러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말로 희망을 늘어놓기란 쉽지만 막상 선택에는 수많은 책임이 뒤따른다. 그리고 무구원은 이 선택이, 온전히 이기적인 자신만을 위한 것이라는 생각을 떨치지 못했다. 왜냐하면 아주 찰나 동안만 제 연인이 되어줄 윤모난은 끊임없이 본질을 보고자 하는 사람이기에.

“팀장님,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뜻 모를 말이 뱉어진 다음에 모두가 그다음 말을 기다렸지만, 들을 여유가 없었다. 갑자기 종업원이 물병을 들고 끼어들었기 때문이다. 예전에 왔을 때도 봤던 친절한 종업원이었다.

빈 잔에 물을 따르는 그녀를 문득 바라본 윤모난의 얼굴이 서서히 식었다. 그때 마침 잔에서 넘친 물이 테이블을 따라 흐르다가 그의 손도 살짝 적시고 말았다. 지레 놀란 듯 종업원이 들고 있던 물병을 떨어트렸다.

쨍그랑! 동시에 모두의 시선이 한가운데로 모였다.

“죄송합니….”

사과가 끝나기도 전에 윤모난이 빠르게 움직였다. 순식간에 품에서 권총을 꺼낸 그가 뒷자리에 앉아 있던 남자의 목덜미에 대고 방아쇠를 당긴 것이다. 탕! 소리가 나자마자 종업원이 비명을 지르며 몸을 낮췄다.

그러나 식당 안을 가득 채우고 있던 손님 중 그 누구 하나 그녀처럼 반응하는 사람은 없었다. 얼굴에 튀긴 피를 손바닥으로 쓸어내리며 윤모난이 의자 위로 올라섰다.

“파동이 안 느껴졌는데?”

총구 십여 개가 모두 그를 향하고 있었다. 손님으로 가장하고 있던 요원들이 재빠르게 반응한 것이다. 전투 준비 태세에 들어간 건 2부 7팀도 마찬가지였다. 서로 대치하는 와중에 추가로 질문이 날아갔다.

“파동을 숨기는 훈련이라도 받은 건가? 아니면 죄다 가이드들인가.”

“…….”

여러 시선들이 각기 다른 위치로 집산했다. 주변 상황을 파악하던 윤모난은 식탁 아래 몸을 욱여넣은 채 떨고 있는 종업원에게 부드럽게 종용했다.

“얼른 나가세요. 위험하니까. 무구원, 바깥으로 데려다드려.”

“네.”

무구원이 자리에서 나와 종업원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녀를 문까지 데려가는 동안 경계하는 시선이 따라붙었으나, 누구 하나 나서지는 않았다. 그녀는 이 일을 미리 알고 있었을 뿐 인질은 아닌 모양이었다.

“민간인을 인질로 잡지도 않고 일 처리가 묘하게 깔끔한 걸 보아하니, 결벽증 부리는 놈들이 확실한데…. 어디서 온 거지? 북해? 아니면 평의회 쪽?”

궁금증은 어렵지 않게 풀렸다. 이윽고 식당 바깥으로 종업원을 데리고 나갔던 무구원과 함께 안으로 들어온 사람 때문이었다. 짧은 단발머리에 냉철한 표정. 그리고 상징처럼 바르고 다니는 붉은 립스틱까지.

절제미가 느껴지는 중년의 여자가 문을 지나 안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 딱딱한 바닥에 닿는 구두 굽 소리가 날 선 긴장으로 적막하기까지 한 식당 안을 영롱할 정도로 울렸다.

“오랜만이에요, 윤모난 씨.”

“주 보좌관님.”

윤모난의 예상을 깨고 등장한 사람은 주현희였다. 급할 것도 없이 식당 안으로 들어온 그녀는 네 남자를 향해 평범한 안부 인사부터 건넸다.

“잘 있었어요? 오랜만이네요. 그동안 많은 일이 있었죠?”

“여기까지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마무리 지어야 할 일이 있으니까요.”

“이렇게 가이드만 모아서 마무리 지어야 할 일이라면… 굉장히 중요한 일이겠죠.”

명목상의 흔연한 웃음을 띠고 있던 주현희의 얼굴이 차갑게 변했다. 낯빛을 순식간에 바꾼 그녀는 사사로운 얘기 따위 관심도 없다는 듯이 대꾸했다.

“다들 그날의 진상을 듣더니 자원하더군요. 당신이 한 짓 말이에요.”

“…….”

“가이드는 너무나도 중요한 존재들이죠. 그들이 없었다면 괴물들에게 우리 모두 진작에 멸종당했을 테니. 구원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거예요.”

“…믿음이 대단하시네요.”

“저조차도 한낱 에스퍼일 뿐이니까요. 모든 에스퍼들은 가이드를 숭배하면서도 두려워하죠. 평생 그 경외심을 받으며 살아왔으니 윤모난 씨도 이미 잘 알고 있을 텐데요. 거기엔 마땅히 책임이 뒤따른다는 걸.”

반음 내려온 주현희의 목소리가 칼날같이 날카로웠다. 연륜으로 억누르고 있으나 그녀의 목소리에는 미처 갈무리하지 못한 증오가 서려 있었다.

“그 책임을 저버리는 건. 큐브나 설계도만큼… 어쩌면 독재자보다도 더 위험해요.”

“…설계도 때문에 온 게 아니셨군요?”

“당신이 저지른 일에 비하면 그깟 물건이 중요할까요?”

그러면서 주현희는 굳은 얼굴의 안범과 경해국, 그리고 무구원을 쭉 시선으로 훑었다. 그러고서는 마지막으로 자비를 베푼다는 듯이 말했다.

“품위를 지킬 기회는 줄게요. 방금 전까지 감동적인 대화를 나눈 옛 팀원들에게 추한 모습을 보이고 싶진 않을 테니.”

그 말은 세 사람을 바깥으로 보낼 기회를 주겠다는 뜻이었다. 오늘 여기서 이 일을 끝내겠다는 굳건한 의지가 드러나는 말이기도 했다.

그녀의 말에 따르지 않는다면 무구원은 몰라도 안범과 경해국은 목숨을 부지할 수 없을 것이다. 운이 좋아 오늘 여기서 벗어난다 해도 둘 또한 가족을 버리고 평생 도망자 신세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무구원의 아들, 태오는…. 윤모난은 생각하기를 멈췄다.

“셋 다 나가.”

“…형, 하지만.”

“미안한데…. 걱정할 사람을 걱정하지 그래.”

윤모난의 말엔 일리가 있었다. 그는 쉬이 해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윤모난을 걱정할 시간에 본인의 안위를 챙기는 편이 더 합리적인 처사였다.

결국 경해국이 한참을 머뭇거리던 안범을 끌고 밖으로 나갔다. 윤모난의 표정이 시시각각으로 어두워지는 걸 발견했기 때문이다. 무슨 일이 일어나면 바로 들어와 개입하면 될 것이었다. 두 사람이 나갔지만 무구원은 자리에 남아 있었다.

“구원아.”

“싫습니다.”

“그래….”

윤모난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사이에 주현희도 건너편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녀는 말을 섞기도 불쾌하다는 얼굴로 차갑게 일갈했다.

“윤모난 씨, 당신은 선을 넘었어요. 복수를 하겠답시고 당신 형들이 한 실수를 반복하다니.”

“…….”

“애초에 그래서는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선택했겠죠. 작약이나 무정원처럼. 그들은 죽음으로써 죗값을 치렀다지만, 당신이 처벌받지 않는다면 이 땅에 정의란 없는 겁니다.”

그녀의 말이 맞았다. 가이드면서도 에스퍼를 괴물로 만드는 것은 그 뒤로 닥쳐올 모든 걸 감수하기로 한 결정이었다. 그래서 윤모난도 딱히 오래 살 생각은 하지 않았다. 딱 3년만, 무구원과 잠깐이라도 함께 살았으면 했을 뿐. 그리고 약속된 시간이 지나면 무간으로 가서 둘째 형을 소멸시키고 죽으려 했다.

“주 보좌관님, 애초에 이럴 생각이셨죠. 큐브를 이용하든 내가 직접 하든 나를 칼로 삼아 무정원을 죽인 뒤에 제가 죽기를 바라셨겠죠. 그러지 않으니 이렇게 찾아온 걸 테고요.”

“저라고 그렇게 냉정한 사람은 아니에요. 당신이 그런 행동만 하지 않았어도 측은지심을 가졌겠죠.”

계획은 그랬지만 이미 주현희가 무정원의 죽음에 관한 책임을 물으러 왔다. 윤모난은 자신이 저지른 일이 그녀에게 양해를 구할 수는 없는 것임을 알았다. 왜냐하면 그녀는 누구보다 대의를 우선시하니까. 주현희는 모두가 무지 끝에 파멸해버린 이 세상에서 끝까지 정의를 구현하려는 사람이었다.

그녀가 꿈꾸는 그런 바른 사회에 자신 같은 괴물은 이물질일 뿐이다. 솔직히 윤모난에게 오히려 그런 취급은 달가웠다. 마음대로 기대하며 자신을 숭배하는 다른 이들의 시선보다는 경멸이 더 마음 편하니까.

그러니까 이 밑바닥에서, 나는….

“…저는 그럼 보좌관님과 여기 있는 사람들을 모두 죽여야겠네요.”

윤모난은 생각을 매듭지었다. 주현희를 포함한 모두를 죽인 다음에 무구원을 데리고 도망칠 것이다. 그곳이 어디든, 고작 3년뿐이라고 해도….

그는 옆에서 침묵하고 있는 무구원에게 시선을 돌렸다. 핏기가 가신 얼굴이었다. 그때 주현희가 끼어들었다.

“윤모난 씨,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은 단 한 번으로 족해요. 반도로 돌아가서 재판을 거쳐 정당한 처벌을 받는 게 좋을 거예요.”

“…….”

“그거 알아요? 작약이 차은조를 죽였을 때. 이를 되갚아주겠다는 무정원에게 저는 지금과 똑같이 말했어요. 작약이 잘못한 게 있다면 재판에 세워야 한다고. 만약 그랬다면… 작약이 무간에서 죽었을까요?”

아무리 세상이 멸망을 거듭하고 또 다른 멸망 직전까지 간다고 해도 수호해야 할 최소한의 가치는 있는 법이었다. 주현희는 인간성을 저버린 사람들이 결국 어떻게 되는지 지켜봐왔다. 그래서 더욱 물러설 수 없었다.

“이 모든 일을 겪고도 작약이 정말 왜 죽었는지 정말로 모르겠어요?”

그 순간 무구원의 얼굴이 깨진 도자기처럼 일그러졌다. 윤모난이 그런 비난을 받게 놔둘 수는 없었다. 그는 비겁해서 진실을 외면하고 있는 게 아니니까. 그건 자신만이 안다. 윤모난은 늘 그것을 알고자 했지만, 야속한 운명이 그를 기만했을 뿐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죄가 아니다. 안타까운 비극일 뿐. 무구원은 지금이야말로 그 부조리에 빠져 있는 윤모난을 건져내야 하는 때임을 깨달았다. 그에게 진실을 이야기해야 했다.

“…잠시만 제게 시간을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보좌관님. 팀장님과 저만 나눠야 할 이야기가 있습니다.”

무구원은 주현희에게 담담하게 요구 사항을 전달했다. 그의 눈이 검은 늪처럼 한 길 끝도 없이 깊어졌다.

“…30분이에요.”

아무 조건 없이 물러나는 그녀를 보며 무구원이 묵례했다. 주현희는 식당 안에 포진해 있던 가이드 요원들을 모두 식당 밖으로 보내며 본인도 뒤따라 나갔다. 모두가 나간 뒤 적막 속에 두 사람만 남았다.

“드디어 나한테 말할 마음이 든 거냐?”

윤모난은 기다리고 있는 말이 있었다는 듯이 불쑥 그렇게 말했다. 무구원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을 먹은 이후에는 어렵지 않았다. 무구원은 먼저 그를 당겨 안았다. 그러곤 죄 많은 입술을 윤모난의 뺨 근처에 가까이 붙이며 지난 7년간 맹목적인 사랑 하나로 저지른 지난한 역사를 고백했다.

“제가 그렇게 시간을 횡단할 때마다 가장 많이 시도했던 것은 작약의 죽음을 막는 일이었습니다.”

“…….”

“그러다가 깨달았습니다. 팀장님이 기억 속에서 잃어버리신 그 순간들에 관한 진실을요.”

무구원은 고저 없는 목소리로 차분히 진실을 전했다. 난 수없이 시간을 돌려 우주에 개입했고 당신은 그로 인해 부분적으로 기억을 잃었노라고.

예를 들면 그의 방에 놓여 있던 독사진을 찍어준 사람이라든가 그에게 잠결에 속삭였던 청연의 탄생일 같은. 여기까지는 그래도 쉬웠다. 하지만 목구멍에서 턱 걸리는 부분은 역시 윤모난의 가장 깊은 어둠을 드러내는 일일 것이다.

“그러다 무간에서….”

“거기서 네가 본 게 뭔데?”

윤모난은 핵심에 성큼 다가섰다. 그의 얼굴에는 주저함이나 회피하려는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이 순간을 오래 갈구해왔다는 얼굴 앞에서 거짓의 장막은 소용없었다. 그리고 무구원은 윤모난의 기억 속에서 사라진 그 사건의 최후 목격자로서 진술해야만 했다.

“무간에 가도 아무도 없을 겁니다.”

“…….”

“작약은 이미 죽었어요. 그날 둘 모두 죽었습니다.”

눈을 감으면 여전히 버젓이 떠오르는 끔찍한 장면들이 있다. 시간을 횡단한 죄로 무구원은 그 처참한 광경을 모두 목격해야 했다. 그가 목도한 것은 윤모난이 누더기로 이어 붙인 불완전한 기억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윤모난은 윤약이 자신을 미로에 두고 홀로 나갔다고 했던가. 하지만 그건 진실이 아니다. 윤모난이 형을 따라가지 않았을 리 없다. 심지어 그는 충분히 미로를 빠져나갈 수 있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미로를 벗어난 윤모난은 폭주한 둘째 형이 괴물이 되어 자신의 큰형을 씹어 먹는 광경을 보고 말았다.

“형?”

윤모난은 혈육의 피를 뒤집어쓴 괴물을 불렀다. 트랜스화가 진행되는 시점에 괴물의 폭력성은 극대화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일말의 인간성이 남아 괴물도 인간도 아니게 되는 중간 상태이기도 했다.

윤약은 무아지경으로 제 혈육을 뜯어먹다가 막냇동생의 부름에 뒤를 돌아봤다. 그의 눈에 순간 이지가 돌아온 것처럼 느껴져 지켜보던 무구원은 온몸이 전율하듯 떨렸다.

“모난아, 내 동생.”

그가 그렇게 불렀다는 건 착각일지도 모른다. 아무리 완전히 괴물이 되지 않았다고 해도 기괴한 형상을 한 그에게 인간의 언어가 가당키나 했을까?

“형, 그만해.”

그러나 윤모난은 형의 부름을 들은 사람처럼 그에게 계속 말을 걸었다. 무구원은 윤약이 정말 그를 불렀는지 아니면 윤모난이 충격으로 인해 환각을 보고 있는 건지 가늠할 수 없었다.

“괜찮아. 내가 형을… 자유롭게 해줄게.”

주절주절 대화를 나누던 윤모난에게서 어느샌가 쨍한 섬광이 뻗어 나왔다. 주변의 모든 괴물과 인간들을 굴종시킨 그의 분홍 머리를 매서운 모래바람이 스치고 지나갔다. 다음 순간 그는 웅크린 채로 떨고 있는 형의 머리에 총을 겨눴다.

탕! 총알이 순식간에 윤약의 머리를 관통했다. 피가 고장 난 분수처럼 허공으로 솟구치더니 금세 웅덩이로 고여 윤모난의 발치까지 흘렀다. 그 위로 윤모난의 뺨을 타고 흐른 눈물이 하염없이 떨어졌다.

“구원아.”

무구원은 이 일을 수십 번도 넘게 목격했다. 윤모난의 우주에 개입하는 횟수가 쌓일 때마다, 시간의 유령 때문에 윤모난의 상태도 점점 불안정해졌다. 그 일이 말 그대로 수십 번 반복되었을 때, 온갖 기억이 뒤섞여버린 우주의 윤모난은 이번에도 찾아온 무구원을 타일렀다.

“…이제 그만해라. 나는 결말을 알아. 아무리 발버둥 쳐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어.”

“…….”

“내가 형을 죽였다는 사실은 그런 것 중에 하나겠지.”

“팀장님.”

“사실 난… 늘 이렇게 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윤모난은 자신의 형을 제 손으로 죽이곤 그 사실을 잊어버렸다. 무구원이 이 일을 막으려 개입했기 때문에 그는 마땅히 그것을 기억하고 감내하고 승화할 수 있는 애도의 기회를 빼앗기고 말았다.

어쩌면 윤모난에게는 애초에 그런 능력이 존재했을 수도 있었다. 비극적인 운명을 회피하지 않고 그것과 맞서 싸울 수 있는 능력이.

거친 모래바람이 잔인하게 두 사람을 할퀴고 지나가는 것 같았다. 계속해서 반복된 장면임에도 무구원이 여전히 적응하지 못한 순간이기도 했다. 하지만 윤모난은 무구원에게 웃어 보였다.

“괜찮아, 구원아. 모두 잃을까 봐 두려워서 그랬던 거지?”

“…….”

“무서워하지 마. 항상 되찾을 방법은 있어. 내가 되찾아줄게.”

나를 좌표의 중심으로 삼아. 그 말을 끝으로 윤모난이 몸을 떨어트렸다.

“가.”

윤모난의 손가락이 이마에 닿았고, 가이딩에 이어 시공간이 일그러지며 점점 허물어진다. 무구원은 눈을 깊게 감았다가 떴다. 회상뿐이지만 시간 여행을 할 때와 똑같은 감각으로 되돌아온 무구원은 눈앞의 사람을 보았다.

제 좌표의 중심이자 모든 우주의 기준인 윤모난을.

“…난 내내 환상에 빠져 있었군. 둘째 형 말대로… 객석에 앉아 넋을 잃고 있었어.”

모든 내막을 들은 윤모난이 겨우 뱉은 말이었다. 무구원의 뺨을 타고 어느샌가 눈물이 흘렀다.

“다 저 때문입니다. 팀장님이 기억만 잃지 않았어도….”

그 순간 커다란 손이 얼굴을 감싸왔다. 윤모난이 엄지로 눈물을 닦아주며 시선을 제게로 맞춘 것이다. 그의 얼굴에도 눈물이 축축하게 번져 있었다. 하지만 모든 걸 알게 된 뒤에도 단단한 눈빛만은 여전했다.

“아니. 그동안 내가 괴로웠던 건 단지 무지했다는 사실 때문만은 아니야. 그건 오히려 핑계지. 난 너무 좋은 것들만 보려 했어. 환상에 빠져 산 거지.”

“…팀장님.”

“하지만 이젠 나도 환영에서 눈을 돌리고 가고 싶은 곳에 갈 수 있게 됐어.”

윤모난은 목에서 펜던트를 벗어 무구원에게 주었다. 애초에 이건 자신이 가지고 있을 만한 물건이 아니었다. 작약이 도둑질한 거니까.

“이건 돌려주자. 주현희 보좌관은 냉정하지만 정도를 아는 사람이야. 내가 자기 부하들을 다 죽일까 봐 우리에게 시간을 줬을 정도로.”

“…….”

“난 저 사람이 설계도를 이용하지 않을 거라 믿는다. 그럼 이 일도 전부 끝이군.”

윤모난의 얼굴은 홀가분해 보였다. 무거운 짐을 모두 내려놓고 그토록 가고 싶던 목적지에 도착한 사람처럼 약간은 허탈하지만 평화로워 보이기도 했다.

“이제 네 문제만 남았지만…. 이건 쉽지 않네.”

“팀장님.”

“정말로 3년은 너와 있으려고 했는데.”

“…….”

“결국 내 나약함에 졌군.”

윤모난이 한껏 젖은 눈꺼풀을 밀어 올리며 슬프게 웃었다. 그러고서는 차분하게 말했다.

“구원아, 넌 내 다리야.”

“…알고 있습니다.”

“정말로 알고 있다면 내가 가고 싶은 곳으로 데려가줘.”

윤모난의 목소리에서는 간절함이 느껴졌다.

“네가 그런 얼굴을 하고 있으면 가기가 힘들잖아. 난 네 생각보다 마음이 약하거든.”

“…….”

먹먹한 마음은 마치 물에 젖은 솜처럼 무거웠다. 그러나 한결 가벼운 윤모난의 표정에서 그가 진정으로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가 느껴졌다. 그는 단연코 희망을 쉬이 저버린 것이 아니다. 윤모난이 지나온 삶은 곳 그가 투쟁한 역사였으므로.

윤모난은 오래도록 죽음과 지리멸렬한 싸움을 벌여왔고, 전사로서 마땅히 명예로운 죽음을 맞이할 준비를 하는 것이었다. 모든 전사들은 전장에서 죽는 걸 명예로 여기니까.

이것이 혹여 패배라면 또 어떠한가. 평화로움과 안식이 그의 패배를 달래주고 어루만져줄 텐데. 무구원은 젖은 뺨을 손바닥 위로 천천히 비비며 생각했다. 윤모난에게는 그런 안식을 요구할 자격이 있었다. 그러니 그는 비로소 가고 싶은 곳으로 가는 것이다. 온전한 그의 선택으로.

“…그게, 제가 바라던 겁니다. 저는 늘… 당신이 가고 싶은 곳에 갈 수 있도록….”

“그래, 넌 부러지지 않았지.”

“그래도 저는…계속 두려워할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이리 와.”

혹여 무구원이 또 두려움에 빠질까 봐, 윤모난은 아낌없이 그에게 말해주었다. 자신의 마음은 7년간 한 번도 바뀌지 않았다고. 지금도 나는 여전히 너를 사랑한다고. 서로의 질량을 끌어당기는 중력이 점점 더 커지고 있었다. 마음의 무게가 또다시 무거워진다.

이토록 무거우니 어디에 있든 우리는 서로를 끌어당길 것이다. 윤모난은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마음을 놓았다. 그의 연인은 좌표를 찾아 우주를 횡단하는 시간 능력자이니까.

하지만 그것도 온전히 무구원이 선택해야 할 문제이기에 그는 물을 수밖에 없었다.

“무구원, 다시 날 찾아올 거냐?”

윤모난은 눈을 내리깔고 평온히, 그러나 그 어느 때보다도 다정히 말을 이었다.

“다른 우주로 횡단해서 날 찾아올 거라면.”

“…그건.”

“물론 난 말리고 싶어. 너무 위험하고 무모한 짓이거든. 네 주변 사람들도 많이 슬퍼하겠지. 하지만 만약 그래도 선택하겠다면….”

“…….”

“나를 좌표의 중심으로 삼아.”

무구원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에 천천히 고개를 틀어 윤모난의 입술을 조심스레 머금었다가 뗐다. 무구원의 검은 눈동자가 늪에서 파도로 번지며 다가오고 가까이에서 숨결이 느껴졌다.

“무슨 애처럼 뽀뽀하긴.”

가까워진 얼굴에 반사적으로 눈을 감은 윤모난이 실눈을 뜨고 밉지 않게 비웃었다. 애 같다는 핀잔을 뒷받침하려는 기세로 들이닥치듯이 다가온 그가 무구원의 혀를 빨아들였다. 한참을 숨을 나누고 진득하게 입술을 삼킨 끝에 입술이 아쉽게 떨어졌다.

“가.”

밀어내는 손길이 금방이라도 도로 잡을 것처럼 무거웠으나, 윤모난은 당연하게도 그러지 않았다. 무구원은 자리에서 일어나 식당 문까지 갔다가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그동안 항상 입안에 머물렀던 호칭으로 그를 불렀다.

“팀장님.”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윤모난은 무구원 쪽에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그저 테이블 위에 놓인 권총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가만히 있을 뿐이었다. 마치 모든 주변 상황과 멀어져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사람 같았다. 무구원은 말을 삼켰다.

그와 대화할 수 있는 30분은 이미 한참 전에 끝났다. 이젠 윤모난만의 시간이었다.

문을 밀고 나오자 모두의 시선이 한꺼번에 날아들었다. 한껏 경계한 타인들 사이로 안범과 경해국이 보였다. 밖에서 기다리면서 나름의 설명이라도 들은 건지 둘 다 얼굴이 어두웠다. 하지만 둘은 다른 말을 더하는 것 대신 홀로 식당에서 나온 무구원에게 다가와 조용히 그를 끌어안았다.

“무구원, 윤 팀장은 그럼….”

경해국이 뭐라 말을 하려던 그 순간이었다. 모두의 등 뒤에서 탕―! 하고 매서운 총성이 울렸다. 그 순간 말을 멈춘 경해국이 무구원을 안은 손을 미세하게 떨며 옷자락을 더 꽉 쥐었다. 안범도 마찬가지였다. 세 사람은 그렇게 잠깐 서로를 의지했다.

“…무 선배님. 형이….”

“괜찮아.”

무구원의 얼굴은 모든 감정이 지워진 듯 건조하기만 했다. 그는 경련하듯이 흐느끼는 안범과 마찬가지로 온몸을 떠는 경해국을 떼어낸 뒤, 말없이 그들을 지켜보던 주현희에게 펜던트를 주면서 딱딱하게 말했다.

“이겁니다. 그토록 원하시는 거. 이젠 다 끝난 겁니까?”

주현희가 그것을 받아 들며 대답했다.

“…그래요.”

“설계도와 큐브 모두 없애주시기로 하셨죠. 약속 꼭 지키십시오.”

무구원은 대답도 듣지 않고 돌아섰다. 얼른 이곳에서 멀어지고 싶었기에. 윤모난은 죽었다. 이 우주에서 그의 생이 끝났다. 그럼 자신 또한 끝이었다.

* * *

3년 뒤. 윤모난과 기약한 10년이 되는 날이다. 이날이 오기까지 무구원의 시간은 느리게 흘러갔다.

3년은 태오가 하나의 독립적인 존재로 발돋움하기에 충분한 시간이기도 했다. 아버지인 무구원은 사랑하는 아들에게 변명에 불과한 설명을 긴 시간을 들여 이야기했다. 아이가 납득하기에는 어려운 일이었지만 거짓말을 싫어하는 태오를 위해서라도 그는 그 일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무구원은 태오에게 엄마가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경우를 위해 부모는 하나가 아닌 둘인 게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면서 이기적인 아버지는 집을 나섰다.

“무 선배님!”

“무씨, 왔냐?”

1년마다 꽃을 놓는 날의 남경 윤씨의 가족 묘지. 무구원은 아까시나무 꽃잎이 흩어진 그 길을 올라갔다. 순백의 향기로운 길이 앞으로 아름답게 펼쳐져 있었다.

“가져오셨어요?”

“응.”

무구원은 집 마당에서 꺾어 온 모란 다발을 비석 앞에 내려놓으며 대답했다. 애도는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세 사람은 항상 꽃을 놓고 비석을 물끄러미 보다가 내려올 뿐이었다. 그러나 오늘은 조금 달랐다.

“나 혼자 잠깐 있어도 될까.”

“…그래. 어디 한 바퀴쯤 돌다가 해 질 때쯤 올게. 그러면 되냐?”

“어.”

이곳에 오면 무구원이 종종 하던 부탁이었기에 두 사람은 별 의심 없이 발걸음을 돌렸다. 혼자만 남게 된 무구원은 미리 써 온 편지를 묘비 앞에 정갈히 두었다. 경해국과 안범 앞으로 남기는 것으로 내용은 간단했다.

이번엔 내가 죽은 듯이 보여도 화장해서 옥수수 캔에 담는 건 삼가라는 입장을 분명히 해두었다. 그들은 아마도 이 짧은 내용만으로도 사정을 깨닫고 이후에 어떻게든 해줄 것이다. 그러고 나서 무구원은 10년 전부터 멈춰서 움직이지 않는 제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3년 동안 방법을 많이 연구해봤습니다.”

사위가 적막한 가운데 무구원은 손끝으로 모란의 꽃잎을 지나 줄기를 쭉 훑으며 말을 걸었다.

“팀장님 말대로 완전히 위험하고 무모한 짓은 맞습니다. 운이 안 좋아 이곳에서 다시 깨어나면 돌아와버릴 수도 있구요….”

조심스럽게 모란을 어루만지던 손이 줄기 끝에 꺾인 부분에 걸렸다. 이곳에 가져오려면 어쩔 수 없었으나, 잘린 부분이 꼭 연인이 입은 상처 같아 애달팠다. 그러는 사이 상흔을 길게 어루만지는 손가락 틈으로 시간이 흘렀다.

꽃은 시간을 거슬러 만개한 상태에서 꽃봉오리로, 그리고 한 움큼의 씨앗으로 변했다. 시간을 통과한 꽃은 생의 끝에서 처음으로 돌아갔다. 무구원은 그 씨앗을 손바닥 한가득 그러쥐었다.

그의 손안에서는 무수한 우주가 간직한 온갖 경우의 수들이 움트고 있었다. 격자무늬로 펼쳐진 무한한 공간이 씨앗 안에 존재했다. 거긴 끝이 아니라 시작이 있고 윤모난이 존재하는 시간이 펼쳐져 있는 곳이었다.

“팀장님… 그렇다 하더라도… 저는.”

무구원은 맨손으로 비석 앞에 조그맣게 구덩이를 팠다. 흙을 긁어내고 돌을 고른 뒤 그곳에 씨앗을 심었다. 염원을 담은 그 작은 알갱이 위로 잠시 후 붉은 피가 후드득 떨어졌다.

흙을 덮어 씨앗을 완전히 묻자, 무구원을 빨아들일 듯 주변의 시공간이 그곳을 향해 일그러지며 무너져내렸다. 급류처럼 쓸려오는 시공간의 흔적이 발밑부터 차오른다.

“…저는 선택했습니다.”

멈춰 있던 손목시계의 초침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시침과 분침이 전쟁터의 군마처럼 요란한 발소리를 내며 다가오고 있었다. 한 우주가 허물어질 때는 차원이 온몸으로 쏟아진다. 마치 물결을 거스르는 것과 같기에 길을 잃기 십상이다.

그래서 무구원은 윤모난을 생각했다. 마음은 질량이 크다는 그의 말을 이제는 제대로 이해할 수 있었기에 길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은 들지 않았다. 손가락 사이를 훑고 지나가는 시간이 부드럽게 감긴다.

마치 이미 아는 길을 가는 것처럼 순조로웠다. 흘러가던 시간을 움켜쥐자마자 뺨에 한겨울의 매서운 찬바람이 닿으며 그를 휘감던 차원의 잔해들이 삽시간에 사라졌다. 그는 자신이 어느 좌표에 도착했음을 직감했다.

주변이 모두 선명해지고, 무구원을 가장 먼저 맞이한 것은 누군가의 목소리였다.

“열차표하고 신분증 좀 보여주시겠습니까?”

역무원이 기차역의 다른 승객에게 티켓을 확인하는 중인 듯했다. 시간을 돌린 뒤에 가장 먼저 느낀 것은 낯섦이었다. 사람으로 가득 찬 승강장. 입소 전 가족과 작별 인사를 나누고 있는 사람들.

그리고 이곳에 짐 가방을 들고 혼자 서 있는 저 자신. 분명히 기억에 없는 순간이었다. 나는 어디로 온 걸까. 제대로 왔다고 생각했는데. 하지만 영 낯설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무언가 상황이 조금 달라진 것 같지만 분명히 이날은….

무구원은 사람들을 헤치며 앞으로 나아갔다. 눈으로 계속해서 한 사람을 찾았지만, 인파 사이로 여러 이미지와 목소리들이 섞여 방향을 쉬이 잡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 순간, 소란함을 덮어버리는 청량한 목소리가 무구원의 걸음을 멈추게 했다.

“삼촌!”

잘 보이진 않았지만, 삼촌과 조카 사이로 추정되는 인물 둘이서 대화하는 소리가 어디선가 뚜렷하게 이어지고 있었다.

“너 삼촌 얼마만큼 사랑해?”

“하늘만큼 땅만큼이요.”

“삼촌 보고 싶으면 어떻게 하라고 했지?”

“편지 쓰라고요.”

“한 달에 100통 써야 해. 하나라도 모자라면 삼촌 서운해서 울 거니까.”

“네. 100통 아니고 1000통 쓸 거예요.”

문득 그 대화를 듣던 무구원은 도망치듯이 기차에 먼저 올랐다. 기차 안은 훈기가 돌았으나 피부 아래로 쭈뼛 끼친 오한이 가시지 않았다. 대충 자리를 찾아 앉자 잠시 후 서곡행 기차가 덜컹하며 출발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아직은 조금 멍한 기분이었다. 현실감이 없다는 말이 정확할 거다. 그의 목소리만 듣고도 이렇게 떨고 있는데 실제로 마주하면 어떻겠는가. 무구원은 이미 돌이킬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자신의 선택에 과연 자격이 있고 그것이 온당한지에 대해 생각했다.

하지만 아무리 고민해봐도 다른 선택이라는 건 불가능했다. 남들처럼 얼마간 상실을 앓은 뒤에 애도의 기간을 보내고, 그의 사진이나 가끔 들여다보며 기억하다가 점점 무뎌지는 그런 평범한 삶을 무구원은 원하지 않는다.

어쩌면 그 우주에서는 태오가 공허를 메워주었을 것이고, 세월이 흘러 자신도 그 사람을 서서히 잊은 다음에 조금 견딜 만해졌을지도 모른다. 마땅히 그런 선택지도 있었다는 것을 알기에 무구원은 자신을 정당화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마땅히 그런 좋은 선택이라. 그는 홀린 듯이 자리에서 일어나 복도로 향했다. 그리고 뒤엉킨 시간 속에서 건져낸 기억을 단서 삼아 객차 칸으로 향했다. 아마도 지금이 윤모난과 기차에서 만난 그때와 같은 날, 같은 시각, 조금은 다른 상황이라면. 그는 여기에 있을 것이다.

“…….”

객실 문 앞에 서자, 안에서 두런두런 말소리가 들렸다. 3년이 지났어도 잊을 수가 없는 음성이었다.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망설이면서 무구원은 자신의 얄팍한 두려움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만일 이 우주도 마찬가지라면? 이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시작되는 다른 우주가 끝내 국경 마을에서처럼 끝나게 된다면?

기억 속의 지난 실패와 비참함, 슬픔이 무구원을 납작하게 짓눌렀다. 언젠가 이 여행을 불행이라 해야 할지 행운이라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말은 진심이었다. 두 번째 겪는 윤모난의 부재 동안 두려움은 당연하다는 듯이 다시 찾아왔다.

“무서워하지 마. 항상 되찾을 방법은 있어.”

그러니 이 선택은 단순한 것이 아니다. 자신과 윤모난은 바닥을 친 삶을 살았고, 그걸 다시 반복해야 하는 것이 과연 옳은가?

“나를 좌표의 중심으로 삼아.”

하지만 기억 속의 목소리가 손을 저절로 밀어 올렸다.

드르륵―

객차 문이 활짝 열리자 급작스러운 방문객의 등장에 두 사람이 놀란 듯 모두 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무구원은 숨을 삼킨 뒤에 안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저벅저벅 워커의 밑창이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가 유독 크게 들렸다.

처음부터 무구원의 시선은 한쪽에만 고정되어 있었다. 왼쪽 창가 자리에 앉아 햇빛을 등지고 있는 남자. 그늘이 내려앉아 표정이 잘 읽히지 않는 그에게 무어라 말을 해야 하는지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그래서…,

“전투 2부 7팀 소속 에스퍼 무구원입니다. 윤모난 선배님을 찾고 있습니다.”

그 순간이었다. 무구원의 이상한 소개에 남자의 눈가가 부드럽게 휜 것은. 그가 몸을 움직인 탓에 각도가 변하며 커다란 등에 가려져 있던 햇빛이 객실 안으로 쏟아졌다. 찬란한 빛은 가장 먼저 윤모난을 어루만졌다.

그의 가벼운 분홍색의 머리와 예민해 보이는 눈매. 선이 굵고 긴 목선. 기다란 손가락. 탁하게 짓는 웃음과 시원하게 벌어지는 입매까지.

마침내 그를 통과한 빛은 무구원에게 닿았다. 드리워진 햇볕을 따라 남자와 눈을 맞추자 모든 두려움은 흔적도 없이 증발해버렸다. 가슴속에서 확신이 솟구쳐 오르자 무구원은 손아귀에 허공을 틀어쥐었다. 어수선하던 시간이 웅덩이로 고이더니 스며드는 것이 느껴진다.

눈앞의 그와 마주한 순간 무구원은 저절로 알게 된 것이다. 어린 시절 바다에 빠졌을 때와 같이 나는 이 짓을 계속 반복하겠구나. 하루하루 사는 것이 수치인 삶. 온갖 가시와 덩굴, 더러운 해충이 가득한 이 바닥에서 나는 윤모난 당신을….

“구원아.”

아무래도 나는 꼭 당신을 건져내야겠다. 당신을 살게 하여 깊게 추락하는 죽음이 아니라 멀리 상승하는 삶을 선사할 것이다. 그러려면 나는 또다시 당신의 다리가 되어야 한다. 이번에는 음지가 아니라 햇볕이 내리쬐는 따스한 곳으로 데려가기 위해서.

당신이 나를 그렇게 부를 때마다 나는, 내 이름대로 해야겠다는 생각밖에 못하니까. 그 과정에서 어떤 고통이 있을지라도. 그게 몇 번이 된다고 하더라도. 나는 선택했다.

그렇게 포기가 아닌 긍정으로.

2부 完

<외전에서 계속>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