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 : 편지
윤모난은 조카 윤청연이 글자를 제법 쓸 줄 아는 나이가 됐을 때부터 아이와 소소하게 편지를 주고받기 시작했다. 그렇게 두 사람 사이에 오간 편지는 몇 년 사이에 수천 통을 넘어가게 되었다.
XXXX년 XX월 XX일
삼촌 청연이애요. 보고 시퍼요. 일곱 밤 자면 청연이 보러 온다고 해지요? 얼른 오새요. 뱀들도 삼촌이 보고 시퍼요. 어제 모난이가 저 손 앙 하고 물엇어요.
XXXX년 XX월 XX일
사랑하는 청연이에게.
청연이가 글자가 많이 늘었구나. 어제 전화했을 때 입학한 학교가 마음에 든다고 해서 삼촌도 기뻤다. 친구들도 새로 사귀고 즐거운 일만 가득하겠지. 혹여 널 괴롭히는 녀석이 있거든 편지에 이름을 써서 보내기를 바란다.
청연이를 보러 갈 날이 사흘밖에 남지 않았네. 이번에 가면 너에게 꼭 사냥을 가르쳐주기로 마음먹었어. 물론 무구원이 반대하고 있지만 워낙 앞뒤가 꽉 막힌 사람이니 신경 쓰지는 않는다. 청연이는 배포가 큰 어른이 되기를 바라.
어제 문득 달력을 보니 삼촌이 서곡에 돌아온 지 벌써 1년이란 시간이 되었더구나. 일곱 살인 우리 청연이보다 말 안 듣는 팀원들이 어제도 사고를 치는 바람에, 겨우 올려놓은 점수가 또 깎였어.
마이너스에서는 벗어났지만, 여전히 점수가 하위권이라 삼촌의 체면이 이만저만이 아니야. 그나마 무구원이 작전에서 소소하게 공을 세운 바가 있어, 이번 휴가는 조금 더 길게 받을 수 있을 것 같다.
삼촌도 청연이가 늘 보고 싶어. 그럼 다시 보는 날까지 건강히 잘 있기를.
삼촌이.
XXXX년 XX월 XX일
삼촌 잘 있어요? 밥 잘 먹어요? 벌써 보고 싶어요.
남경에 버꽃이 피었어요. 마당에 모란은 아직이에요. 모란이 활짝 피면 가장 이쁜 거로 서곡에 보낼께요. 구원이 삼촌한테도 인사해요. 다음에 올 때 꼭 구원이 삼촌도 가치 오세요.
청연이.
XXXX년 XX월 XX일
사랑하는 청연이에게.
며칠간 무간에 다녀오느라 늦게 답장하게 돼서 미안하다. 편지는 잘 받았어. 그동안 보내준 모란을 삼촌 팀원이 이능력을 써줘서 보관하는 중인데, 올해 받으면 세 개째가 되겠구나.
요즘 삼촌은 출정할 일이 많아져 바쁘게 지내는 중이야. 바쁜 가운데 좋은 소식은 우리 팀 점수가 많이 올라서 꽤 높은 순위에 들었다는 것 정도야. 그 외에는 그저 평범하게 지내.
참고로 금연은 철저하게 실패하는 중이야. 133일 만에 열받는 일이 생겨 피울 수밖에 없어서 다시 처음으로 돌아갔지. 포기하지 않고 다시 해볼 셈이긴 한데, 이번이 벌써 다섯 번째라 쉽지만은 않을 것 같아.
아, 그리고 무구원도 너에게 안부 전해달라고 하는구나. 다음번에 남경에 갈 땐 이놈도 꼭 데리고 갈게. 저번에는 일 때문에 못 갔다고 어찌나 서운해하던지. 이번 네 생일에는 가겠다고 하더라.
그럼 생일에 보자. 건강히 잘 있어라.
청연이를 항상 그리워하는 삼촌이.
XXXX년 XX월 XX일
사랑하는 삼촌에게.
삼촌, 여행은 잘하고 계세요? 거긴 날씨가 어떤가요?
훈련 학교에 입학하자마자 기숙사 짐을 정리하고 적응하느라 며칠간 편지를 못 썼네요. 답장이 늦어서 죄송해요. 입학식 때 뵙고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벌써 그리워요.
삼촌이 전에 관상이 별로라고 마음에 안 든다고 했던 제 룸메이트는 알고 보니 착하고 좋은 친구였어요. 벌써 많이 친해져서 대화도 나누고 수업도 같이 들어가요. 그러니 제 걱정은 마시고 구원 삼촌과 즐거운 여행 하고 계시기를 바라요.
반도는 날씨가 아주 추워요. 문득 어제 눈 내리는 걸 보다가, 이맘때면 구원 삼촌이 늘 가라앉아 계신 모습이 떠올랐어요. 그럴 때마다 어린 저를 오래 안아주시기도 하셨는데. 여전히 그러실까 문득 걱정이 됩니다.
이번에 길게 여행을 가기로 하신 건 좋은 결정인 것 같아요. 삼촌을 오래 못 보는 건 아쉽지만, 지금까지 쉬지 않고 일하셨으니 두 분이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셨으면 좋겠어요.
항상 몸조심하시고 엽서와 편지 꼭 보내주세요. 얼른 방학이 돼서 삼촌들이 계신 곳에 갔으면 좋겠어요.
청연 올림.
XXXX년 XX월 XX일
사랑하는 청연이에게.
학교에 잘 적응하고 있다니 다행이다. 그 룸메이트가 동산 출신이라고 했었지. 경씨들은 성질머리가 더러우니 신중하게 사귀기를 바란다. 내가 아는 경씨는 이상한 놈들밖에 없거든.
현재 삼촌이 있는 곳은 마을이랑 멀리 떨어져 있는 외진 곳이라 편지를 부치기에 여의치 않아. 2주일마다 편지함을 확인하러 마을로 가는 데만 반나절이 걸리지. 이제까지는 무구원이랑 농담 따먹기 하며 다닌 길인데, 오늘은 그 녀석이 아침부터 성질을 부리기에 결국 나 혼자 왔어.
넌 애인을 사귀거든 꼭 결벽증인 놈은 피하거라. 특히 빨래는 분류해서 빨아야 한다느니 하등 쓰잘데기없는 것에 사소하게 집착하는 놈은 변태일 확률이 높아. 인생의 지혜이니 꼭 새겨야 한다.
마침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사실 너에게 사소한 부탁이 하나 있어. 시간이 나면 종종 무구원에게도 따로 편지를 보내주었으면 해. 내가 늘 그 녀석 옆에 있긴 하지만, 부쩍 날씨가 추워지면 가족을 그리워하는 것 같거든.
문장을 읽는 걸 즐기는 녀석이니 네가 보내주는 편지가 소소한 즐거움이 될 거야. 사실은 무구원과 그간 많은 대화를 나눴는데, 이 중에서 네가 더 자라면 꼭 해주고 싶은 이야기들이 있어.
아마도 서글프게 들릴 얘기에 가깝겠지만, 시간이 좀 더 흐르면 그런 일들도 감내하며 털어놓을 수 있는 순간이 오겠지. 그날이 오기만을 기대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갈 뿐이야. 물론 현재 우리의 일상은 대체로 조용하고 평안한 편이니 다른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단다.
마을 우체국에서 이 편지를 쓰는 중인데 마침 청소 변태가 여기까지 쫓아왔구나. 이만 줄여야겠어.
그럼 다시 보는 그날까지 건강히 잘 있어라.
추신 : 참고로 훈련 학교 수학 선생한테 먹을 걸 뇌물로 바치면 무조건 A+ 줌.
삼촌이.
“…삼촌 못 말린다니까.”
청연은 막 도착한 편지를 읽다가 웃음을 터트렸다. 삼촌의 편지를 받을 때마다 안에 적혀 있는 엉뚱한 소리에 파안대소하는 것이 청연의 일상이었다.
어느새 키가 훌쩍 자라 어엿한 청소년이 된 윤청연은 곱게 편지지를 접어 베개 밑에 넣어두었다. 여기에 뒀다가 삼촌이 그리워지면 언제든 꺼내 볼 요량이었다.
그렇게 베개 밑에 넣어둔 편지만 십여 장이다. 나머지는 서랍에 뒀는데, 하도 오간 편지가 많아 미어터지기 직전이었다. 그러나 청연은 삼촌의 편지를 단 한 장도 버리지 않고 보물처럼 아꼈다.
“윤청연―”
“응?”
그때 마침 경씨 룸메이트가 방으로 들어왔다. 오른쪽 옆구리에 축구공 하나를 끼고 온 녀석은 이미 실컷 놀다 왔는지 얼굴이 땀으로 축축했다.
“우리 옆 동 기숙사랑 축구 대항전 할 건데. 너도 껴.”
“…추운데.”
“아, 왜 하는 척이라도 해. 머릿수 모자란단 말이야.”
“으응….”
원하던 답을 듣기는 했지만 룸메이트도 윤청연에겐 크게 기대하는 바가 없었다. 그는 성격이 너무 순해서 도통 경쟁적인 스포츠에 재미를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타고난 허우대는 좋아 세워놓으면 방해되지는 않는 정도였다.
“너 또 삼촌 편지 들여다보고 있었냐? 넌 무슨 삼촌이랑 그렇게 편지를 많이 주고받냐. 귀찮지도 않아?”
“귀찮긴. 지금은 여행 중이셔서 띄엄띄엄 와서 아쉬운걸. 그리고 네가 우리 삼촌을 잘 몰라서 그래. 얼마나 멋진 사람인데.”
“네 삼촌, 입학식 때 내 얼굴 보고 성질머리 한번 더럽게 생겼다고 조―온나 크게 말한 사람 아니야?”
“…으응.”
청연은 단 몇 초 만에 새로 사귄 친구 앞에서 면목이 없어졌다. 실제로 윤모난은 옆에서 무구원이 말리는데도 유별나게 조카의 주변을 경계해서, 삼촌 바보 청연마저 조금은 부끄럽게 만든 건 사실이었다.
그나마 이성적인 무구원 덕분에 청연은 윤모난이 짐에 몰래 넣어놓은 호신용 권총만은 겨우 사양할 수 있었다. 이제 막 학교에 들어가는 애한테 왜 총을 주냐며 한참을 입씨름하는 두 성인 남성 때문에 주변의 시선을 끌긴 했지만….
그래도 생일이며 방학, 입학식이나 졸업식마다 모든 바쁜 일정을 미루고 달려오는 그 두 사람 덕분에 청연은 기숙사 생활이 그다지 외롭지 않았다. 청연에게 삼촌들은 항상 집과 같은 존재들이었고, 편지를 통해 받는 그들의 소식은 늘 반갑기 그지없었다.
“뭐, 네 삼촌 정도면 얼굴 지적해도 할 말 없긴 하다. 존나 잘생기셨네.”
룸메이트는 청연의 침대맡에 붙어 있는 사진을 구경했다. 그 안에는 입학식 때 찍은 세 사람의 얼굴이 담겨 있었다.
“그런데 네 삼촌 옆에 있는 분은 누구셔? 그때도 오셨었지?”
룸메이트가 가리킨 사람은 윤모난의 옆에 있는 남자였다. 사진을 찍을 때는 물론이고 평소에도 항상 삼촌 쪽으로 시선을 고정하고 있는 그는 여지없이 삼촌을 향해 웃고 있었다.
그 근사한 미소의 주인을 마찬가지로 애정 어린 눈길로 보던 청연은 천천히 입을 뗐다. 늘 다른 사람이 물을 때마다 한 번도 다르게 말한 적 없었다. 지난 7년 내내.
“응, 우리 삼촌 애인이셔.”
“…엥? 애인?”
“너, 남자가 남자를 좋아하는 것에 대해 혹시 편견이 있니?”
“…….”
그리고 혼란스러워하는 사람들에게 늘 똑같은 레퍼토리로 그들의 이야기를 소개할 때면 청연의 얼굴에는 짓궂은 미소가 번졌다. 어엿한 청소년이 된 윤청연은 자신의 삼촌이나 아버지와 다르게 성격이 순한 편이었지만 묘하게 짓궂은 구석이 있었다.
할 말을 잃고 머리를 긁적이던 청연의 룸메이트는 조금 떨떠름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니. 두 분이 너무 잘 어울리셔서.”
“그렇지?”
“응. 그렇네. 그래서 축구는?”
“으, 진짜 추운데. 알았어. 나가자.”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던 소년들의 웃음소리는 어느새 기숙사 방의 벽을 넘어갔다.
여전히 이곳은 가족과 연인, 친구를 언제든 잃을 수 있는 세상이었다. 그러나 슬픔과 상실이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그런 어두운 나날 가운데에도, 소년들의 순진한 웃음은 희망의 씨앗을 심어놓는다.
대체로는 절망적이라 할 수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꽃피우는 시대였다. 사소한 날들로 이어가는 평범한 삶이 모여 그런 기적을 만들어내기도 하는 그런 나날이 있다. 청연이 앞으로 살아갈 미래는 그런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