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2 : 시간의 유령
그건 무구원에게 인상적인 우주 중 하나였다. 윤모난이 수도에서 무간으로 사라지고, 7년 동안 고통스럽게 시간을 헤매던 중에 방문한, 드물게 평화롭던 우주이기도 했다.
“남경에 따라가겠다고?”
어느 날, 무구원의 아버지인 북해의 가주는 갑자기 남경에 갈 일이 생겼다. 남경 윤씨에게 차관을 빌리러 가는 목적의 출장이었기에, 아직 어린 무구원을 데려가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하지만 평소 집안 문제에도 관심이 없고, 주로 독서에만 치중하는 조용한 무구원이 이번 남경행에 꼭 따라가고 싶다고 밝혔을 때 북해의 가주는 내심 놀랐다. 업무차 가는 출장이라지만, 한 번도 제 의견을 내본 적 없는 아들이 막무가내로 고집을 부리는 것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한 번쯤은 데려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 끝에, 부자는 나란히 수행원들을 데리고 남경으로 향하는 여정에 올랐다.
“남경은 북해와 기후가 많이 달라 풍광을 보는 재미가 있어.”
“…네.”
무작정 따라가겠다고 고집을 부릴 때는 언제고, 무구원은 기차를 타고 이동하는 내내 기분이 저 밑으로 가라앉은 기색이었다.
어린 아들의 희한한 상태는 남경 윤씨들이 모여 사는 하얀 저택에 이르러서 더 심해졌다. 무구원은 마치 이미 와본 적 있는 사람처럼 익숙하게 길을 올라가면서도, 낯선 환경 앞에서 낯이라도 가리는 건진 모르겠지만 뒷모습이 뻣뻣해 보였다.
“윤씨라고는 해도 우리와 다를 바 없는 사람들이야. 머무르는 동안 예의를 갖춰 행동하거라. 윤씨 가주한테도 아들이 셋 있다지. 아마 막내가 너보다 두 살이 많을 거야.”
“명심하겠습니다.”
여전히 딱딱한 어투였다. 이유를 물을까 하다가, 이른 아침부터 부쩍 심해진 기침 때문에 그러지 못한 아버지는 수행진에게 명령해 무구원을 데려가게 했다. 그러고 나서 자신은 가주의 접견실이 있는 건물로 향했다.
회담에 참석하는 아버지와 헤어진 무구원은 하얀 저택으로 들어갔다. 여기서 이틀간 머무르기로 했으니 저택 남쪽에 있는 손님방으로 가게 될 것이다. 이미 눈에 익은 저택의 광경을 보며 무구원은 천천히 계단을 올라갔다.
현관 앞에 세 여인들이 마중을 나와 있었다. 잔뜩 배가 부른 윤작의 아내를 포함한 이곳 안주인들이었다. 하지만 정작 무구원이 이곳에 온 목적인 그 사람은 없었다. 옆에 있던 윤약의 부인이 안내에 나섰다.
“사실 형님께서 지금 출산을 앞두고 있으니 건물 동쪽은 출입을 삼가줬으면 좋겠어요. 그것 외에는 이곳에 있는 동안 편하게 지내도록 해요.”
“네. 감사합니다.”
무구원은 이제 막 태어날 아기, 윤청연의 탄생일 직전에 윤모난의 집에 왔다. 그러니 이는 그의 수많은 시간 여행 가장 인상적인 우주 중 하나일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그가 만난 윤모난 중 가장 어린 그를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시간 여행으로 열여섯 자신의 몸으로 돌아온 무구원은 사춘기 소년처럼 마음이 소란스러웠다. 시간 여행을 하게 되면 항상 그 우주에서의 몸과 정신이 강한 영향을 받기 마련이었다.
“이 방이에요. 필요한 게 있으면 사용인에게 말하고, 이따 저녁 식사가 있으니 시간 맞춰 오도록 해요.”
무구원은 명색이 북해 무씨 가주의 막내아들이었다. 윤약의 부인은 친히 방까지 안내해준 다음 돌아갔다. 문이 닫히고 화려한 손님방에 남은 무구원은 짐을 내려놓고 천천히 창가로 가 섰다.
좋은 날이었다. 사실 무구원은 북해의 추운 날씨보다는 남경의 따스한 기후를 더 좋아했다. 이 지역의 기후에 맞게 자생하는 갖가지 꽃과 나무는 과도하게 화려한 면도 있었으나, 그것도 무구원이 사랑하는 남경의 모습 중 하나였다.
무구원은 그저 윤모난이 이곳에서 자랐다는 사실만으로도 남경을 좋아했다. 그에게 고향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는 건 알지만 남경의 토양과 풍토는 분명 윤모난이란 사람의 한 부분을 형성했으니까.
“풀잎아.”
창문 너머를 구경하는 그때, 유화로 그려놓은 것 같은 풍경 속에서 불쑥 튀어나온 분홍 머리가 무구원의 눈길을 끌었다. 2층 창문에서 누군가 자신을 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 리 없는 윤모난이 저택 뒤쪽의 정원에서 두리번대며 풀숲을 뒤지고 있었다.
“쭈쭈쭈, 착하지. 풀잎이 어디 있니.”
풀잎은 독뱀이 많은 이 지역 특성상 사용인들의 안전을 위해 키우는 윤작의 고양이었다. 윤모난은 큰형의 서재 창문을 열어뒀다가 이 털북숭이를 놓쳐 곤란해진 참이었다.
“젠장, 풀잎아. 얼른 나와. 멸치 줄게. 착하지.”
첫 조카들이 곧 태어날 예정이라, 형들 모두 휴가를 내고 집에 와 있는 상황이었다. 지금은 북해 가주와의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자리를 비웠다지만, 돌아와 풀잎이 녀석이 사라진 걸 큰형이 알면 분명 곤란해질 것이다.
“뚱뚱해서 뱀 한 마리 못 잡는 것이 대체 어디로 간 거야. 아, 씨….”
“…고양이는 자기 영역을 잘 벗어나지 않는 동물이라서, 이 주변에 있을 겁니다.”
순간 머리 위에서 들린 낯선 목소리에 윤모난은 굽혔던 허리를 폈다. 처음 보는 얼굴에 고개를 갸웃거리던 그의 얼굴에 다양한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마지막엔 제법 개운한 표정인 걸 보니 대충 이쪽이 누구인지 알아낸 얼굴이었다.
“그럼 어떻게 찾아야 하는데?”
“건물 근처 어둡고 외진 구석이나 틈 같은 데를 위주로 살펴보세요.”
“…구석이나 틈이라.”
“도와드릴까요?”
“그럼 나야 고맙지.”
윤모난은 뒷덜미를 덮을 만큼 제법 길게 자란 머리를 쓸어 넘기며 무구원이 내려오기를 기다렸다.
잠시 후 뒷문을 통해서 나온 무구원과 마주한 윤모난은 앳된 얼굴에 비해 덩치가 꽤 크구나 생각하며 소년의 나이를 가늠해보았다. 뻣뻣한 자세를 제외하면 봐줄 만한 얼굴이었다.
햇빛을 잘 못 본 듯 창백한 피부에, 짙은 흑발과 마찬가지로 새카만 눈동자가 먹실로 수를 놓은 듯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전체적인 윤곽이 그리 진한 편은 아닌데, 수려한 쪽에 가까운 이목구비가 차분한 샌님 같아 보였다.
“난 윤모난이다. 여기 막내아들. 너는?”
“…무구원입니다.”
“몇 살이야? 훈련 학교에서는 못 본 거 같은데.”
“저는 북해에서 학교를 다닙니다. 열여섯이에요.”
“그래? 그럼 형이라고 불러.”
“…형이요?”
“응.”
별 대단할 것도 없는 호칭인데, 무언가 곱씹기라도 하듯 멍하게 허공을 응시하는 무구원을 보며, 윤모난은 눈썹을 한껏 찌푸렸다.
“뭐 해, 고양이 안 찾아줘?”
“…찾습니다. 저쪽부터 보시죠.”
“그런데 왜 그렇게 극존칭을 쓰냐? 북해에서는 두 살 형한테도 그렇게 말해야 해? 아니면 채찍으로 맞아?”
“…채찍으로는 안 맞습니다.”
“그럼 말 편하게 해. 듣는 내가 다 어색하잖아.”
넉살 좋게 웃어 보이는 윤모난을 멍하니 보다가 무구원은 겨우 입을 대답했다.
“…네. 형.”
풀잎이 찾기 대작전을 시작한 지도 제법 시간이 지났는데, 부지가 넓어서인지 틈이나 구석이라고 해도 일일이 확인해야 하는 곳이 너무 많았다. 거의 초여름에 가까운 늦봄의 햇볕 아래에서 둘은 땀을 뻘뻘 흘려가며 주변을 다 뒤졌다.
도중에 윤모난은 너무 덥다며 신발을 어디론가 던져버렸고 반바지도 여차하면 벗을 기세였다. 아직 다 영글지는 않았으나 꽤 탄탄한 허벅지 위로 송골송골 땀이 맺혔다.
“이미 집으로 돌아간 걸 수도 있어요.”
“아냐. 내가 분명히 밖으로 나가는 걸 봤단 말이야. 아직 밖에 있을 거야. 예전부터 호시탐탐 나갈 궁리만 하는 놈이었어.”
윤모난은 얼굴이 빨갛게 익어가는 중이었다. 무구원이 오기 전부터 거의 세 시간째 고양이를 찾느라 헤맨 탓이다. 보다못한 무구원은 그의 얼굴에 대고 손차양을 만들어 더위를 식혀주려 애썼다.
형들에게 챙김을 받는 데 익숙한 윤모난은 그런 친절을 거리낌 없이 받아들였다. 무구원은 그 앳된 옆얼굴을 보며 어쩌면 제가 사랑하는 이의 뻔뻔한 성격은 그런 내리사랑의 결과였을 것이라 결론지었다. 어린 윤모난에게는 훌륭한 응석받이로서의 자질이 충만했다.
땀에 젖은 분홍 머리가 반듯한 이마에 달라붙은 윤모난의 얼굴은 뺨부터 눈가까지 온통 빨갰다. 진한 눈썹 위로 땀방울이 맺혀 뚝, 하고 떨어져 오른쪽 눈을 찡그리기도 했다.
“더워. 고양이 새끼, 내가 찾으면 가만 안 둘 거야.”
“형이 실수해서 잃어버린 거라면서요. 그러면 안 되죠.”
무구원은 현재 열여섯의 몸이긴 했지만, 엄연히 정신은 스물일곱의 어른이었다. 어린 아들을 키우는 아버지였고, 첫사랑의 열병을 지독하게 앓은 탓에 이 시간 여행까지 하고 있었다.
그러니 여기, 열여덟의 윤모난은 그에 비하면 미성숙한 존재였다. 강인하고 뛰어나서 앞서가는 그를 늘 뒤에서 지켜봤던 무구원에게 이는 색다른 감상을 불러일으켰다.
아직 미성숙하고 어린 윤모난은 색으로 치면 감히 정의 내릴 수 없는 정제되지 않은 빛을 띠고 있었다. 그래서 무구원은 내내 그의 가슴 언저리에 자리 잡았던 그리움과 슬픔을 잠시나마 잊고 이번 우주의 윤모난을 눈에 한가득 담았다.
“풀잎이 그것은 애초에 나만 싫어한단 말이지. 좀 만지려 해도 할퀴고 캭 물기만 하고…. 우리 형들한테만 애교 부리는 요물이야. 내가 멸치 줘도 발로 탁 쳐버린다니까.”
“형만 싫어하다니 이상하네요.”
“난 원래 동물한테 별로 인기가 없어. 내가 키우는 뱀들도 나만 물어. 이상해 진짜.”
두 소년은 몇 시간 동안 고양이를 찾으며 빠르게 친해졌다. 그러나 정작 풀잎이 찾기 대작전에는 별 진전이 없어서 결국 윤모난이 포기 선언을 했다.
“큰형이 오면 찾을 수 있을 거야. 신경 쓰게 하고 싶지 않았는데…. 아니면 작은형이 찾아주겠지.”
집 주변을 삥 돌며 고양이를 찾던 둘은 어느새 조금 외진 곳으로까지 와 있었다. 윤모난은 연신 배고프다고 외치더니, 벌떡 일어나선 수풀에 손을 쑥 넣어서 여기저기 무언가를 뚝뚝 땄다. 돌아온 그의 손에는 붉은 열매가 가득 담겨 있었다.
“산딸기 알아? 북해에도 있나. 먹어봐. 맛있어.”
“고맙습니다.”
무구원은 손에 든 걸 모두 가져갔다. 그리고 우물 옆에 받아둔 맑은 물에 열매를 한 번 씻은 다음, 가지고 온 손수건에 받쳐 윤모난에게 돌려주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윤모난은 갸우뚱했다.
“뭐 하는 거야? 그냥 먹어도 돼. 깨끗하다고.”
“네.”
“너 결벽증이냐? 북해에서는 과일 안 씻어 먹으면 채찍 맞아?”
“왜 자꾸 채찍 맞는다는 소리를 하는지….”
“우리 둘째 형이 그러던데, 북해에서는 무슨 잘못만 하면 채찍 맞는다고.”
무구원은 황당함을 숨기지 않고 온 얼굴에 물음표를 띄운 채 윤모난을 바라보았다. 죽을죄가 아닌 사소한 일에 채찍을 맞을 리가. 북해에서 채찍을 맞으면 등 근육이 다 터질 만큼 열상을 입어서 종종 죽는 사람도 있었다. 윤모난이 무간으로 간 이후에 가문에 끌려가 혹독하게 채찍을 맞아본 경험이 있는 무구원은 누구보다 이를 잘 알고 있었다.
“너도 맞아본 적 있어? 등짝 봐봐.”
“네?”
앗, 하고 소리를 낼 틈도 없이 윤모난의 손이 윗옷 안을 파고들더니 등허리를 휙 쓸어내렸다. 이 우주에서 어린 무구원의 몸에 채찍을 맞은 흔적이 있을 리 없었다. 깨끗한 피부를 쓸어내리는 얄궂은 손길에, 무구원은 손수건에서 산딸기를 떨어트리며 앞으로 수그렸다.
“대체….”
“깨끗하네?”
“…다 떨어트렸잖아요.”
바닥으로 떨어진 붉은 열매들이 윤모난의 맨발 근처로 흩어져 있었다. 윤모난이 직접 따준 거라 아까운 생각이 들어 다시 주우려 하는데, 옆에서 발이 떨어지더니 또 뚝뚝 무언가를 따는 소리가 들렸다.
다시 돌아온 윤모난의 손에는 또 새 열매가 한가득이었다. 그러다 윤모난이 아! 하고 뭔가 생각난 듯이 맑은 물에 오디를 훌훌 씻어 다시 내밀었다.
“자, 이거 먹어. 깨끗한 거 좋아하잖아. 아니야?”
“…….”
순간 때아닌 감정이 갑작스럽게 무구원을 덮쳤다. 폐에서 물이 차오르는 것처럼 숨이 안 쉬어지는 것이 시작이었다. 지금 이렇게 몰려와서는 안 되는 감정이었음에도 제어가 잘 안됐다.
하지만 열여섯의 자신이 미숙한 것인지, 아니면 스물일곱의 자신이 미숙한 탓인지.
무구원은 깊숙한 곳에서 끌어올려진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먹물 같은 그의 눈동자가 촉촉해지더니 금세 투명한 구슬을 만들어냈다. 이윽고 그 구슬이 소년의 창백한 뺨을 훑으며 흘러내렸다.
청연이가 죽은 지 4년. 그러니까 윤모난이 사라진 지도 마찬가지로 4년이었다. 무구원은 그가 진심으로 그리웠다. 이렇게 앞에 두고 보는데도 그랬다. 채찍을 백번 천번 맞아도 이런 사랑이 쉬이 꺼져버릴 것 같지는 않았다.
생사조차도 모르는 첫사랑이 이렇게 눈앞에 생생하게 숨 쉬고 있는데 마음이 평온할 리가.
“왜 울어? 남이 너한테 산딸기 따준 게 너무 감동이야?”
“…….”
“너 왕따구나.”
“…….”
한편 이런 사정 따위 알 리 없는 어린 윤모난은 갑작스럽게 우는 무구원을 보며 나름의 결론을 내렸다. 아무래도 이놈은 삭막한 북해에서 외롭게 크는 바람에 애정 결핍이 온 거라는.
그렇다고 오늘 처음 만난 놈한테 딱히 해줄 건 없고…. 윤모난은 가장 실한 열매를 골라 어린애를 달래듯이 무구원의 촉촉한 입술 사이로 밀어 넣었다.
“자, 먹어라.”
산딸기에서 붉은 즙이 흘러나와 무구원의 입술을 물들였다. 예쁘게 호선을 그린 입술을 따라 즙이 흘러내리는 모양새를 뚫어져라 바라보던 윤모난은 딱해 보이는 소년을 달래주려던 본래의 목적을 잊고 엄지로 입술에 즙을 바르는 데 빠져들었다. 왜냐하면 이 무구원이라는 녀석의 입술이 붉게 물들자 꽤나 탐스럽게 변했기 때문이다.
젠장, 좆 됐다. 나 남자 좋아하는데.
윤모난은 사춘기 소년의 흑심을 바탕으로 그런 짓을 자행하면서도 나름의 의식은 있었다. 적어도 두 살이나 어린 동생을 추행하고 싶진 않았다. 그러니까 이건… 이 녀석의 입술이 건조해 보여서. 립밤을 발라주는 것 같은 거지.
“…아.”
나름대로 변명을 주워섬기는데, 난데없이 무구원의 혀가 입술 틈새에서 삐져나오더니 윤모난의 손가락을 살짝 핥았다. 그 뜨거운 느낌에 놀란 건 오히려 윤모난이었다. 그는 얼른 손을 떼어냈다.
자신의 손가락을 멍하게 내려다보는 윤모난을 두고, 무구원은 우물가로 가서 얼굴에 물을 끼얹어, 얼굴에 남은 눈물 자욱이며 붉은 즙을 씻어 내렸다. 그러고선 방금 전 행동에 대한 어떠한 자각도 없는 평온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이제 가죠.”
“어? 어…. 그래.”
손수건으로 단정하게 얼굴의 물기를 닦는 무구원을 쫓아가며 윤모난은 손안에 든 열매를 모두 땅에 버렸다. 가지각색의 꽃이 핀 숲을 빠져나온 뒤, 무구원은 옷을 갈아입어야겠다며 방에 올라가겠다고 말했다. 그때까지도 윤모난은 조금 몽롱한 기분에 휩싸인 채 그저 고개를 끄덕이고 자신도 뒤늦게 집으로 들어왔다.
실내는 훨씬 시원했다. 흙이 묻은 맨발을 툭툭 털어내며 윤모난은 차가운 물 한 잔부터 찾아 마셨다. 물잔을 쥔 손가락이 뜨끈거리는 건 아마도 날씨 때문일 것이었다.
* * *
예정대로 저녁 식사는 북해의 방문객들과 함께 먹게 되었다. 저녁을 먹기 전에 목욕을 하고 머리까지 단정하게 빗어 넘긴 윤모난은 깔끔한 옷을 골라 입고 식당으로 향했다.
유기그릇에 담긴 남경식 요리는 꽤나 간이 세 보이는 비주얼이었다. 북해인들은 이런 간이 센 요리는 싫어하지 않나 생각하던 윤모난은 오늘 후식이 무엇인지 확인했다. 팥고물을 넣은 대추떡. 이건 그나마 북해 사람들 입맛에 맞을 만했다.
“왜? 배고파? 웬일로 음식 뭐가 나오는지 챙기고 있어?”
마침 회의 참석을 마치고 윤모난을 찾으러 온 윤약이 물었다. 아직 식사가 시작하려면 20여 분 정도는 남아 있었다. 도통 이런 자리에 늦으면 늦었지 미리 와 있던 적 없는 막냇동생의 행동이 의외인 모양이었다.
“배고프면 식사 전에 과일 조금 먹어. 가져오라고 할게.”
“아냐.”
“그럼 왜 이러고 있었는데?”
“…그냥. 형, 나 풀잎이 잃어버렸어.”
윤모난은 무언가 다른 데 정신이 팔린 듯이, 걱정하던 모습과는 달리 여상한 목소리로 자신의 죄를 실토했다. 평소와 다른 동생을 보며 윤약이 가느스름한 눈썹을 살짝 찡그렸다.
“걱정 마. 형이 식사 마치고 찾아볼게. 큰형은 지금 정신없어서 풀잎이 신경 쓸 겨를도 없을 거야.”
“응. 그래.”
“모난아, 근데 너 머리 빗었어? 웬일로…?”
“나 원래 머리 빗어.”
“한 번도 네가 빗은 적 없잖아.”
“놔둬!”
자신의 곱슬머리를 부러 흐트러트리려는 작은형의 손길을 피해, 윤모난은 식당 문 근처로 달려갔다. 그러자 그가 내색하지 않고 있던 얕은 의심이 윤약의 얼굴에 내려앉았다.
“너….”
“무구원-”
형이 그러건 말건 윤모난은 기다린 사람이 있었던 것처럼 훌쩍 복도로 나가버리더니, 이내 낯선 녀석을 하나 끌고 왔다. 윤약은 동생과 나란히 들어온 소년을 발견하자마자 표정을 굳혔다.
무구원이라는 이름을 가진 녀석의 손에 흰 털을 가진 뚱뚱한 고양이가 안겨 있었기 때문이다. 풀잎이었다. 방금 전까진 별 신경도 안 썼으면서 윤모난이 신나서 물었다.
“어디서 찾았어? 어떻게 찾은 거야?”
“…그냥요.”
무구원은 고양이를 그에게 넘겨주려 했다. 그런데 무구원의 손에는 순하게 안겨 있던 고양이가 윤모난을 보자마자 웨오오옹 성질을 내며 발톱을 세웠다. 윽, 하고 몸을 물린 윤모난이 손을 내저었다.
“그냥 바닥에 놔둬. 알아서 서재로 갈 거야. 찾아서 다행이다. 고마워.”
“네.”
무구원은 고양이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고양이에게 무슨 마술을 부렸는지 낯을 가리는 녀석이 무구원의 바짓단에 코를 비비적거리다가 이내 식당을 훌렁 뛰어나가버렸다. 그 바람에 털이 한가득 묻어 더러워진 바지를 보는 무구원의 얼굴이 조금 뚱해 보였다.
윤모난은 그를 끌어당겨 자신이 항상 앉는 자리 옆에 앉혔다. 원래 무구원은 아버지인 북해의 가주 옆에 앉아야 하건만 윤모난은 급기야 고집을 부렸다.
“형이 손님 옆에 앉아.”
“…….”
가만히 서 있던 윤약만 수모를 겪었다. 다만 그는 두 소년을 말없이 주시할 뿐, 동생의 지시에 따라 원래 무구원의 자리였을 의자로 향했다. 곧이어 사람들이 식당으로 내려와 자리를 잡은 탓에 별다른 수도 없었다.
“먼 곳에서 손님이 오셔서 이렇게 자리를 만들게 되어 기쁩니다. 음, 아이들끼리는 이미 친해진 것 같군요.”
이 집의 가장인 윤화신이 인사치레를 늘어놓는 동안, 윤모난은 무구원의 단정한 목덜미만 구경하고 있었다. 여긴 상석과 조금 떨어진 곳이라 속닥거리며 대화해도 어른들에게는 들리지 않을 터였다.
“근데 고양이는 진짜 어떻게 찾았는데?”
“그냥, 서재 근처 창문에 다시 가보니까. 거기 아래 있었어요.”
“그래? 싱거운 고양이군. 내일 나랑 밖에 놀러 가자. 남경에 재미있는 거 많거든.”
“…….”
“아니면 수영하러 갈래? 낮에는 별로 안 추워.”
“…제가 물을 무서워해서요.”
윤모난은 고민에 빠졌다. 이왕 여기까지 온 왕따 녀석에게 무언가 재미있는 걸 보여주고 싶었는데. 그러다 문득 시내에 있는 남경극장에서 오래된 영화를 틀어준다는 것이 떠올랐다.
이름은 연극용 극장이긴 했는데, 공연보다는 스크린을 내려 영화를 상영하는 곳이었다. 틀어주는 것들도 제법 볼 만하니 북해 소년을 데려가기에도 좋을 것 같았다. 이런 극장은 남경 정도 되는 대도시에서만 볼 수 있는 구경거리이기도 했다.
“그럼 우리 영화 보러 가자.”
“내일 아버지께서 허락하시면요.”
뭐야. 양갓집 규수도 아니고 데이트 한 번 하기 까다롭네.
속으로 구시렁거리던 윤모난은 매끄럽게 이어진 자신의 생각에 제동을 걸었다. 방금 내가 데이트라고 했나? 미간을 한껏 모으며 생각에 빠진 그에게 낮은 목소리가 불쑥 뜻을 전해왔다.
“하지만 저도 가고 싶습니다.”
윤모난의 머릿속에서 마구 뛰어다니던 잡생각들이 한꺼번에 뻥 터져 사라졌다. 가고 싶다고? 그럼 가야지! 윤모난은 영양가 없는 대화나 나누고 있는 어른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가주님, 대화 중에 끼어들어 죄송한데요. 내일 무구원을 데리고 시내에 구경을 다녀와도 될까요?”
갑자기 침묵이 내려앉았다. 조금 무례한 행동이었기 때문이다. 윤화신 옆에 앉아 묵묵히 식사 중이던 큰형 윤작이 고개를 들어 못난 동생을 놀란 표정으로 바라봤다. 그 침묵을 깬 건 의외로 무구원의 아버지였다.
“그럼. 구원이 저 녀석이 남경을 구경하고 싶다고 했으니 네가 소개해주면 나야 고맙지.”
“네. 걱정 마세요.”
“모난아.”
보다못한 윤작이 그를 나직이 불렀다. 자중하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이미 목적을 달성한 윤모난에겐 별 상관 없는 일들이었다. 대신에 윤모난은 얼빠진 표정을 짓고 있는 무구원에게 비시시 웃어 보이더니 식사를 재개했다.
그는 자신의 몫으로 나온 대추떡을 무구원에게 몰아주기까지 했다. 그 광경을 지켜본 작약이 식사 후에 어딘가로 급히 가버리려는 윤모난을 다급하게 잡아끌었다.
“윤모난, 너 아까 왜 못난이짓 했어…? 뭐야, 갑자기 머리는 왜 빗었어?”
윤작이 단정한 동생의 머리를 보며 놀라 물었다. 그러자 거리낄 것 없이 당당한 대답이 되돌아왔다.
“형, 나 쟤가 마음에 들어. 내일 데이트할 거야.”
“…뭐?”
“들었잖아.”
“쟤는 너보다 두 살이나 어려. 아직 애라고.”
“그게 무슨 상관이야?”
오늘 처음 만난 열여섯짜리에게 데이트를 신청하겠다니. 작은 물론이고 이제껏 참았던 약이 방종한 동생을 단속하려 나섰다.
“너 이번 주까지 논문 초고 쓰는 거 마무리하기로 했잖아. 형이랑 같이 공부한다고. 그런데 무슨 데이트?”
“…….”
“그리고 쟤는 알아? 이게 데이트인지?”
“알아야 해? 쟤는 남자를 안 좋아할 수도 있잖아.”
참으로 일방적인 데이트였다. 하지만 윤모난은 아까 자신을 향한 무구원의 목소리에서 이상한 확신을 얻었다.
“…그런데 걔도 좋다고 했어. 가고 싶다고.”
“…….”
“내일 분위기 좋으면 키스해야지.”
기함할 정도로 뻔뻔하고 발칙한 소리였다. 충격에 빠진 작약은 발랑 까진 동생을 두고 아무런 말도 잇지 못했다. 막냇동생이 이런 녀석인 걸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이렇게 막무가내인 경우는 또 처음이었다.
“나 이상한 확신이 느껴져. 아무래도 쟤가 전생에 내 애인이 아니었을까?”
윤약은 연거푸 마른세수를 하더니 질린 얼굴로 먼저 자리를 떠버렸다. 상황을 정리해야 하는 건 항상 큰형인 윤작의 몫이었다. 그가 진중한 목소리로 동생을 타일렀다.
“그래. 가는 건 괜찮지만, 북해 쪽에서 대외적인 방문한 거니 제발 사고는… 일으키지 마. 응?”
“나도 그 정도는 알아. 아까는 농담 좀 한 거야.”
“모난아.”
“그만해. 손님방에 아버지가 개수작 부려놨는지 확인하러 가야 해. 바빠.”
“모난아!”
윤작이 말려볼 새도 없이 윤모난은 저택 남쪽 계단을 훌훌 올라가버렸다. 이윽고 먼저 가버린 윤약이 화난 얼굴로 되돌아오며 이미 사라진 윤모난을 찾았다.
“못난이 이 자식 어디 갔어.”
“…아버지가 손님방에 무슨 짓 했는지 확인하러 간대.”
“그래서. 형은 그걸 그냥 보냈어?”
“모난이가 무슨 수로 그걸 찾겠어. 대놓고 뒤집어엎진 않겠지. 그냥 놔둬.”
불행인 것은 윤약도 막내와 마찬가지로 형의 말을 듣지 않는다는 거였다. 예민하고 신경질적인 성정이 기본값인 윤약은 당장이라도 뛰어가 윤모난을 말뚝에 꽁꽁 묶어둘 기세였다. 윤작이 뒤에서 끌어안으며 막았다.
“약아, 참아라. 제발.”
“…형, 너나 참아.”
“제발… 오늘은 날 봐서라도 참아줘. 아무 문제 일으키지 말고.”
“…그나저나 형수 상태는 어때?”
“아직 진통은 없어. 아마 곧이겠지.”
윤약이 갑자기 출산을 갓 앞둔 산모의 상태를 물었다. 아마도 곧 있으면 진통을 시작할 무거운 몸이니 집안사람들이 신경을 쓰는 것이 당연했다. 맏며느리의 출산 예정일을 갓 앞둔 지금, 큰 손님을 받은 아버지 윤화신만 무심하게 굴었지만 말이다.
워낙에 가족보다 가문의 정치적 이득을 따지는 사람이니 놀랄 것도 없었지만 큰형 윤작은 달랐다. 첫아이를 앞두고 그는 신경이 꽤 곤두선 상태였다. 아내의 곁에 있을 수도 없고 온갖 일에 불려 다니는 건 물론, 막내까지 저 지경이니.
윤약은 작의 얼굴을 봐서 잔뜩 날카로워진 신경을 억누르기로 했다. 쌍둥이로서의 의무였다.
“어때. 형? 아버지가 되려니 조금 심란해?”
“…확실히. 그렇긴 하지.”
“아버지 바람대로 가이드로 태어났으면 하고 있어?”
윤작은 답을 하지 않았다. 그런 형을 보던 윤약이 피식 웃었다.
“형수 배를 보니 우리처럼 쌍둥이로 태어날 것 같더라.”
“그래. 그럴 확률이 높지.”
“아이가 태어나면, 하나는 홍연이라 짓고 하나는 청연이라 짓는 건 어때?”
“이름 중에 아직 연꽃이 남았던가?”
“응.”
윤작은 잠깐 동생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윤약이 곧 아버지가 될 쌍둥이 형의 뺨을 치듯이 툭툭 두드린다.
“형수한테 가서 아이 이름은 내가 지었다고 전해줘.”
“…그래.”
작약은 부러 말하지 않아도 많은 것들을 공유하는 사이였다. 서로 무언의 말을 주고받는 시간이 얼마나 이어졌을까. 윤약은 어느샌가 맞잡고 있던 형의 손을 떼어내고 반대 복도로 갔다.
* * *
다음 날, 윤모난은 무구원을 시내에 있는 극장으로 데려갔다. 매표소에서 티켓을 사고 나오는 길에 무구원이 물었다.
“무슨 영화예요?”
“어. 동화 같은 내용인데. 예전에 봤는데 꽤 재밌어.”
무구원은 종이 티켓을 확인했다. 『소년과 양』이라. 전혀 내용을 유추할 수 없는 제목이었다. 잔뜩 들뜬 윤모난을 보고 몰래 한숨을 쉰 그가 객석에 앉았는데, 분명 재밌다던 영화 내용이 정말로 가관이었다.
들판에서 혼자 사는, ‘울프’라는 이름을 가진 양치기 소년이 정신착란을 일으켜 양과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라니. 어린이도 관람할 수 있는 수위긴 했지만, 전반적으로 불쾌한 은유로 가득한 수상한 영화였다.
―다음에 양털을 깎을 때 돌아올게―! 미아 잘 있어!
―메에에에에에에…
이게 대체 무슨 영화지? 윤모난은 이게 왜 꽤 재밌었다고 한 걸까. 무구원의 심리가 복잡해졌다.
“영화 재미있었다. 그치? 아름다운 얘기야.”
관람을 마치고 나오는 길에 윤모난이 내놓은 짤막한 감상이 무구원을 더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전,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요.”
“뭐가?”
“…양이랑 사랑에 빠지는 게 안 이상하다구요?”
“그게 무슨 소리야? 양이랑 울프는 친구 사이야. 종을 뛰어넘은 우정을 그린 영화라고.”
“…….”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수상한 흑백영화 따위로 입씨름을 할 이유는 없었다. 무구원은 사랑의 맥락을 읽어내기에는 너무 어린 윤모난을 보며 길게 숨을 내쉬었다. 윤모난은 영화관 옆의 빵집으로 무구원을 데려가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뭐가 사랑… 이야기라는 거지? 너 진짜 이상하다.”
“그럼 울프란 애가 양을 찍은 사진에 입 맞추는 장면은 뭐라고 보셨습니까?”
“그거? 그냥 친구가 보고 싶고 그리워서 그랬겠지….”
윤모난은 단순한 해석을 내놓았다. 무구원은 빵가루를 입에 묻히고 먹는 그를 보며 허탈한 웃음을 터트렸다.
“나중에 한 번 더 봐봐요. 어른이 되면 다르게 보일걸요.”
“누구는 어른인 것처럼 말하네. 나보다 두 살이나 어리면서.”
“생각보다 제가 꽤나 어른스러운 구석이 있거든요.”
무구원은 그의 앞에 따듯한 두유를 놓아주었다. 하지만 받은 두유를 쪽쪽 마시면서도 무구원이 말하는 그런 의미를 모두 알아들을 리 없는 윤모난이었다. 그저 또래에 비해 생각이 많아 보이는 무구원이란 아이에게 관심이 짙어질 뿐.
윤모난은 조용히 빵을 씹어 먹는 무구원을 구경하다가, 문득 오늘의 데이트가 그에게도 재미있었을까 걱정되기 시작했다. 딱히 무구원에게서는 영화가 이상하다느니 하는 말 외에 별다른 감상이 없었기 때문이다.
“형.”
“응?”
“오늘 재미있었어요. 데려와줘서 고마워요.”
그래서 무구원이 자신의 생각이라도 읽은 듯이 그렇게 말했을 때, 윤모난은 조금 놀라고 말았다. 녀석이 먹던 것을 가만히 내려놓고 시선을 맞추며 큰 기복 없이 듣기 좋은 목소리로 말했다.
“오길 잘했어요.”
무슨 고백이라도 되는 양 의미심장하게 하는 말에, 왠지 윤모난의 가슴 한쪽이 쿵, 하고 박동했다. 유리창에 비친 전광판의 노란 불빛에 부드럽게 감싸인 무구원의 수려한 얼굴이 소년의 가슴을 뛰게 만들었던 것이다.
‘키스해도 되나…?’
윤모난은 그 와중에 발칙한 생각이나 하고 있었다. 주변에 사람이 얼마나 있건 여기가 어디건 상관없었다. 저 자신도 이해 못할 충동이 마음속 저 깊은 곳에서 불쑥 튀어나오기 직전이었다.
“야, 넌… 키스해봤냐?”
“네.”
망설임 없이 되돌아온 그 정직한 말에 윤모난은 순간 찬물을 맞은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 뭐? 키스를 해봤다고? 저 샌님 같은 놈이? 고작 열여섯짜리가? 어디서? 누구랑?
“…너. 생각보다 발랑 까졌구나.”
“발랑 까졌다니요. 저는 평생 살면서 단 한 사람만 좋아할 예정입니다. 키스나 손잡는 것도 그 사람하고만 하고 싶습니다.”
“아….”
그럼 저 자신에게는 이미 기회가 없다는 뜻일 테다. 윤모난은 운동화 앞코를 바닥에 툭툭 두드리며 애써 억지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래? 좋아하는 애가 있단 말이지…. 그럼 크면 그 여자하고 바로 결혼하겠네?”
“아니요. 아마도… 그건 어려울 것 같은데요.”
“왜?”
“그 사람은… 저를 안 좋아하거든요.”
대화는 다른 국면으로 흘러갔다. 말하자면 무구원은 자신이 짝사랑 중임을 고백한 것이다. 윤모난은 미간을 양껏 찌푸리며 그에게 취조하듯이 물었다.
“그런데 이미 키스했다며? 어떻게 짝사랑이야?”
“그러게요. 어쩌면 그 사람도 제가 좋았던 순간이 있었을 수도 있겠죠. 그런데 이제는 제 실수 때문에 더 이상 바라기도 어려워졌습니다.”
“…큰 실수를 했어?”
“네. 아주 큰 실수요.”
“음.”
큰 실수라…. 샌님인 무구원 같은 애가 큰 실수를 해봤자 무슨 치명적인 사고를 쳤을 걸로는 보이지 않았다. 윤모난은 금세 낯빛이 어두워진 무구원에게 남은 빵을 밀어주며 상심한 그를 달래듯 입을 열었다.
“용서하는 거랑 좋아하는 거랑은 달라. 그 사람이 널 용서할 수는 없어도 좋아할 수는 있지.”
“…용서 못하는 사람을 사랑할 수 있다구요?”
“난 오히려 사랑해서 용서해준다느니 그런 소리는 안 믿어. 하지만 자신에게 큰 실수를 한 걸 알면서도, 용서 못하면서도 입을 맞춘다면. 그건 사랑으로밖에 설명할 수 없는 일이지.”
대답을 들은 무구원의 얼굴은 한층 더 복잡해져 있었다. 윤모난은 심각한 짝사랑에 빠진 무구원을 보며 저 절절한 사연을 가진 어린애한테 키스하고 싶은 못난 충동은 집어넣기로 했다.
빵집을 나와 두 소년은 땅거미가 진 거리를 천천히 걸으면서 집으로 돌아왔다. 저택에 도착해서 윤모난은 자신의 방에 무구원을 초대했다.
그러나 도저히 손님을 맞이할 수 없을 만큼 심란한 방 상태에 무구원이 놀란 듯이 굳어 있는 걸 보며, 윤모난은 이마를 벅벅 긁고는 바닥에 굴러다니는 책이랑 옷가지들을 퍽 걷어찼다.
“이 정도면 깨끗한 편인데….”
“…….”
“들어와….”
문가에서 서성거리던 무구원은 윤모난의 손에 끌려 들어가다가, 발에 뭔가 차이는 느낌이 들어 걸음을 멈췄다. 시선을 힐끗 내리자 마찬가지로 바닥에 아무렇게나 굴러다니던 필름 카메라였다. 그걸 들어서 보는데 윤모난이 옆에서 조잘댔다.
“이제 내 조카들이 태어날 예정이라 그걸로 사진 찍으려고. 우리 큰 형수님이 쌍둥이를 낳을 것 같거든.”
“…네. 그렇군요.”
“애기들 태어나면 얼마나 예쁠까? 이름이 청연이랑 홍연이가 될 거래.”
아이들 얘기가 나오자 무구원은 더 말수가 없어졌다. 그저 카메라를 만지작거리며 가만히 있는 녀석을 두고 윤모난은 창가 근처 바닥에 쿠션으로 만들어둔 자리에 엉덩이를 깔고 앉았다.
“무구원, 이리로 와봐. 보여줄….”
찰칵.
셔터가 열렸다가 닫히는 소리가 시간을 하나의 장면으로 잘라냈다. 무구원의 검은 손가락이 버튼 위에서 떨어졌다. 갑자기 무방비하게 사진이 찍히게 된 윤모난과 그를 찍은 무구원 사이에 조용한 침묵이 오고 갔다.
이내 무구원이 카메라를 아래로 떨어트렸다. 그렇게 드러난 그의 얼굴은 파도가 일렁이는 것처럼 일그러져 있었다. 이윽고 무언가를 깨달은 듯한 무구원이 이내 허탈한 웃음을 터트린다.
“저였네요.”
“응?”
“이 사진을 찍어준 사람….”
이건 오래도록 계속될 이야기들과 시간, 우주의 한 장면이었다. 무구원은 자조하듯이 읊조렸다. 그의 검은 눈동자에 슬픔을 매단 채로.
“그런 거였네요. 팀장님의 기억이 저 때문에….”
무구원은 다시 한번 또 울음을 터트릴 것 같았다. 윤모난은 영문을 몰라 멍한 얼굴로 그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그러자 무구원이 카메라를 바닥에 내려놓고 애달픈 시선으로 윤모난을 본다. 마치 만지기조차 아까운 누군가를 바라보듯이. 오래도록 추앙하고 그리워해온 누군가를 보는 것 같은 그런 시선이 어린 윤모난의 기분을 낯설게 만들었다.
“…무구원?”
“이 사진을 누가 찍어줬는지. 이 우주에서는 잊지 마십시오.”
그가 하는 이야기 중에 윤모난이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저 비밀을 한껏 품은 듯한, 생각이 깊어 보이는 열여섯의 무구원의 아름다운 입술이 자신에게로 다가오는 순간 눈을 감았을 뿐이다.
아래서 옷깃을 당기는 손에 힘이 꽉 들어간 것이 느껴진다. 무구원이 자신을 영원히 놓치지 않을 기세로 잡아당기고 있었다. 윤모난은 자신을 붙드는 그의 손길에 저항 없이 빨려 들어갔다.
* * *
“구원아.”
자신을 부르는 부드러운 목소리에 무구원은 서서히 눈을 떴다. 여전히 가까이에 붙어 있는 남자의 얼굴의 오목조목한 생김새가 시야 가득히 들어왔다.
“…네.”
“꿈꿨니.”
잠이 묻어 가라앉은 목소리에 이어, 커다란 손이 등을 툭툭 두드린다. 마치 아이를 어르는 듯한 손길. 여전히 잠기운에 취해 눈을 뜨지도 못하는 남자는 옷 한 장 걸치지 않은 나체였다.
굴곡진 근육이 붙은 단단한 복부가 숨을 쉴 때마다 부풀었다가 꺼지기를 반복하고, 아침이라 뜨겁게 달아오른 체온 때문인지 달큼한 살냄새가 풍겼다. 완전히 잠에서 깬 무구원은 눈으로 그의 몸을 훑었다.
크고 작은 흉터는 여전했으나, 지난 우주에서 무구원의 마음을 아프게 했던 그런 흉터는 없었다. 상체 중앙부에 위치한 문신도 마찬가지였다. 아침에 보면 더 생생해 보이는 뱀이 무구원을 노려보고 있었다.
“…네가 꿈꿀 때마다 나도 꾸니까 자꾸만 잠을 설치잖아. 어떻게, 조절 안 되냐?”
“시간의 유령 때문에 어쩔 수 없습니다. 저도 제어할 수 있는 게 아니라서….”
“아니 그게 아니라.”
여전히 눈을 감은 채로 윤모난은 정직한 설명을 붙이려는 연인의 허리를 찰싹 쳤다.
“꿈에서 네가 한결같이 슬픈 얼굴이라 나도 슬프단 말이야, 이 자식아….”
동시에 윤모난이 서서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생김새 때문에 차가워 보이는 눈이 창문으로 들어온 햇빛에 반사되어 유달리 투명해져 있었다. 길게 진 속눈썹의 그림자 사이로 보이는 눈동자의 경계가 선명하다.
“물론 이것도 7년이나 겪다 보니까, 조금 둔해지는 감은 있지만.”
“…이미 겪었는데 없었던 일로 될 수는 없는 거니까요.”
“그래서? 여전히 슬프고 무섭냐?”
“조금은요.”
머뭇거리며 대답한 뒤에 무구원은 베개에서 머리를 떼어 윤모난의 눈가에 입술을 가볍게 맞췄다.
“하지만 예전만큼은 아닙니다.”
“왜? 여차하면 시간을 횡단하면 되니까?”
“아니요. 이 모든 일에도 불구하고 드디어 희망을 봤으니까요.”
마른 웃음이 아래서 터지더니, 윤모난의 단단하고 긴 다리가 두꺼운 뱀처럼 허리를 감싸며 꾹 조였다. 이에 맞춰 무구원은 그의 허리춤으로 몸을 밀착시키며 한 손으로 윤모난의 다른 쪽 다리를 팔에 걸쳤다.
그런데 어제 벗지 않고 잤는지 흰 양말이 윤모난의 발에 신겨 있었다. 몸에는 실오라기 한 올 걸치지 않았으면서 흰 양말이라니. 아침부터 보기에는 조금 자극적인 광경이었다. 그런데 양말 신은 발이 난데없이 무구원을 꾹 밀어낸다.
“잠깐.”
“왜요?”
그의 얼굴에 입 맞추려던 무구원이 멈칫했다.
“너 어제 양말 신고 섹스해주는 대가로 담배 준다고 약속했잖아.”
“…아.”
“담배 가져와, 얼른. 씨발, 대체 어디 숨겼어.”
윤모난의 금연 시도는 7년간 약 열 번의 실패를 했고, 이번이 열한 번째였다. 이번에는 성공하는가 싶더니 어제저녁에 남이 담배 피우는 걸 보며 울적해져 있던 그가 갑자기 자기 전에 흰 양말을 신고 와서는 조건을 건 것이다.
맨날 말을 바꾸고 사기 치는 윤모난과 달리, 무구원은 그럴 만한 성격이 못 되는 사람이었다. 하는 수 없이 몸을 일으켜 이중 삼중 잠금장치를 해 구석에 숨겨뒀던 담배와 라이터를 가져와 내밀었다.
“허어, 거기에 숨겨뒀어? 이 철저한 놈. 양말 신고 지랄한 보람이 있다.”
“이게 진짜 마지막입니다.”
“얼른 줘.”
담배를 받은 윤모난은 간사한 너구리처럼 당장 양말을 벗어 침대 구석으로 던져버렸다. 그런 모습에 이미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무구원은 창문을 열고 재떨이를 가져와 얌전히 받쳐줄 뿐이었다. 오늘은 휴일이라 둘 다 한가했다.
윤모난은 돌려받은 담뱃갑의 반이 빌 때까지 줄줄이 담배를 태우며 침대에서 어제 읽다 만 논문을 읽기 시작했고, 무구원도 옆에서 무언가 끄적이고 있었다. 얼굴에는 은테 안경이 자리 잡고 있었다.
“시간의 유령 말이야. 연구하면 할수록 무슨 패턴이 있는 건 아닌 것 같단 말이지. 그동안 기록해놓은 걸로 대충 통계를 내봐도 무작위인 것 같고. 보여주는 장면도 각각 다르고.”
“처음 이 우주에 와서는 반복적으로 한 장면을 보여줬으니, 제 상태에 영향을 받는 거겠죠.”
“그래. 아마도.”
처음에 무구원이 이 우주에 왔을 때, 둘은 밤마다 국경 마을에서 있었던 순간을 반복해서 꿈으로 꿨다. 그러면 무구원은 자신이 다시 그 시간으로 돌아간 줄 알고, 놀라 과호흡까지 하며 깨어나곤 했다.
윤모난 또한 실제로 겪지 않았지만 자신의 일이었던 그 비극을 쉽사리 받아들이지 못했다. 긴 시간 동안 서로의 고통을 치유하는 과정이 이어졌다. 그렇게 7년이 지난 뒤. 둘은 어느새 평범한 일상을 살고 있었다.
무엇보다 서로에겐 서로가 있었다.
“다른 우주가 시작되고 7년이 지났으니 이곳은 제가 가장 오래 머무른 우주입니다. 가장 많이 바꾼 우주이기도 하죠. 시간의 유령이 자주 출몰하는 건 아마 그 영향일 겁니다.”
말을 마친 뒤 무구원은 조금 어두운 얼굴이었다. 이따금 짓는 그늘진 표정에 윤모난이 시선을 맞추며 물었다.
“왜 그래?”
“…가끔 원래 제가 있던 우주가 저를 다시 빨아들일 것 같다는 느낌이 듭니다. 시간의 유령도 그렇구요.”
“아니. 여긴 네가 가장 오래 머무를 우주야.”
“…….”
“넌 이곳에 있을 거다.”
단호한 말은 거의 명령이나 다름없었다. 이어서 윤모난이 단단히 그에게 엉겨 붙으며 굳은 무구원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꾹 눌러 찍었다.
“평생 내 옆에.”
얼굴 곳곳에 쪽쪽거리며 가볍게 시작한 입맞춤은 목으로 향하며, 점차 노골적으로 변해갔다. 무구원이 등허리를 만지려 하자 윤모난은 두 손목을 꽉 이불에 눌러 붙이며 제지했다.
“구원아, 따라 해. 나는 여기 있을 거라고. 다시는 시간 여행 따위 하지 않겠다고. 늙어 죽을 때까지.”
“…저는 여기 있을 겁니다. 다시는 시간 여행 따위 하지 않을 거예요. 늙어 죽을 때까지. 읏.”
나지막하게 복창하는 유순한 목소리에 윤모난은 날카로운 이로 무구원의 옆구리를 꽉 깨물었다가 놓았다. 스멀스멀 아래로 내려간 다음 곧이어 입술을 벌려 두꺼운 살덩이를 물어 삼키는 그의 손에는 여전히 연기가 피어오르는 담배가 들려 있었다. 불씨가 붙은 담뱃재가 아슬아슬하게 이불 위로 떨어지기 직전이었다.
거기에 정신이 팔려 있던 와중에 윤모난의 혀가 부드럽게 성기를 감싼 탓에, 무구원은 도로 침대에 눕고 말았다. 그렇게 두 살이나 어린 애인의 좆을 농락하듯이 한참 능숙하게 빨던 윤모난은 잠시 후 다리 사이에 파묻고 있던 머리를 들었다.
까맣게 떨어진 담뱃재가 이윽고 이불은 물론이고 무구원의 허벅지 주변까지 더럽혔다. 축축한 입가를 혀로 훑는 윤모난을 보다가, 무구원은 뜨거운 눈가를 손으로 가렸다.
“제발… 이불에서… 담배 피울 거면 재떨이를….”
“아주 분위기 초 치는 데 재능 있지?”
이윽고 다 타버린 담배가 재떨이로 휙 날아갔다. 그걸 보자마자 무구원은 압박된 손목을 비틀어 빼내고 윤모난을 뒤에서 퍽 덮쳤다. 침대에서 반쯤 튀어나온 윤모난이 작게 앓으며 인상을 썼다. 불손한 연하 애인이 손가락을 꾸역꾸역 엉덩이에 밀어 넣으려 했기 때문이다.
“어제 많이 해서 이미 풀어졌어. 너무 쑤시지 말고…. 읏.”
“서두르지 마세요.”
이윽고 무구원의 골반이 하체를 내리눌렀다. 찔걱거리며 좆을 안에 깊숙이 삽입한 무구원은 아까 윤모난이 침대에 던져버렸던 흰 양말을 다시 주워 갔다. 그러고는 윤모난의 무릎을 접어 양말을 고이 그의 발에 다시 신긴다.
그러자 윤모난이 아래서 끄응 소리를 내며 한마디 덧붙였다.
“아윽, 무구원. 그럼 나 담배 한 갑 더 줘야 해….”
“하아, 제발. 담배 하나에 몸 파는 사람처럼 그런 대사 좀 하지 마시죠.”
그런 훈계를 내뱉은 것이 무색하게 무구원은 퍽 하체를 앞으로 거칠게 튕겼다. 이에 떠밀린 윤모난이 침대 아래로 떨어질 뻔하자, 손아귀가 골반 근처를 빈틈없이 쥐고 꾹 잡아당겼다.
흰 양말을 신은 윤모난의 커다란 발이 눈앞에서 요란하게 흔들리는 탓에 무구원도 자신을 제어하기 힘들었다. 그저 커다랗고 잘생긴 발이건만, 저 자신도 몰랐던 음심을 부추기는 광경이었다.
“제가… 하아, 흰 양말에 흥분할지 어떻게, 아셨습니까?”
“아, 읏. 결벽증인 놈들이, 아! 뻔하지!”
요망한 새끼, 하며 윤모난이 아래서 등을 움찔 떨었다. 으레 쾌감을 느낄 때면 윤모난이 하는 신체 반응이었다. 동시에 아래가 콱 조여들어 무구원도 심한 압박감과 함께 쾌감을 느꼈다. 꼬리뼈 근처가 미세한 바늘로 찔린 것 같은 기분에 그는 윤모난의 미끈한 등에 달라붙었다.
무구원은 손바닥으로 윤모난의 유륜 근처를 더듬으면서, 목덜미에 혀로 압력을 가해가며 핥았다. 반곱슬머리인 윤모난의 목덜미에는 부드러운 솜털이 곱게 나 있어 유독 무구원이 좋아하는 부위였다. 입술 사이로 피부 가죽이 흡착되며 빨렸다가 놓아지기를 반복했다.
그 순간 윤모난이 아래서 분명한 목소리로 무언가 종용하기 시작했다.
“무구원, 하윽, 양말에다가 싸.”
“…네?”
“네가 색깔 있는 빨래랑 구분해서 빨아준 내 하얀 양말에다 좆을 비비면서 싸라고.”
윤모난의 지시 사항은 매우 정확했다. 이걸로 금연을 끝내고 담배를 계속 공급받겠다는 계산속이 보였다. 그러나 그 말에 왠지 모르게 더 흥분에 휩싸인 무구원은 당장 윤모난을 뒤집어서 끝에서 안까지 더 콱 좆을 짓쳐 박았다.
그러자 윤모난의 탄탄한 배가 불룩 솟았다가 꺼진다. 신경질적으로 신음을 뱉은 윤모난이 다리를 굽혀 올리자 대퇴근이 갈라지다 못해 튀어나올 것처럼 전율했다. 무구원은 자신의 명치 중앙부로 가지런히 모인 윤모난의 발을 아래로 서서히 내리며 단정한 얼굴을 붉게 물들였다.
“얼른.”
“읏.”
이윽고 성기가 내벽을 긁고 밖으로 나갔다. 생살끼리 닿아 뜨거워진 마찰열에 푹 전 붉은 성기가 흰 면으로 오밀조밀하게 짜인 흰 양말 위로 닿았다. 검붉은 성기를 흰 배경과 함께 놓고 보니 더 흉흉해 보인다. 윤모난은 엄지발가락을 쫙 벌린 뒤, 부드러운 면으로 성기의 기둥 한쪽을 자극하기 시작했다.
단단하게 발기해서 핏줄이 불거진 성기의 표면을 꾹꾹 누르는 양말의 흰색 면이 점차 젖어들며 반투명해지기 시작했다. 초반에는 약간 거칠했던 면은 끈적한 물을 먹어 질척해지며 자극이 더 섬세해졌다.
“하으….”
“하, 구원아. 어때, 형이 양말 신고 네 좆 비벼주니까 꼴리지.”
“…네.”
“내 양말 네 자지 때문에 다 젖었어. 발가락 사이까지 다 축축하다고.”
수치심과는 별개로 윤모난의 솜씨에 골반이 계속해서 그의 발 쪽으로 움직였다. 무구원은 두 손을 윤모난의 옆에 받치고 몸을 띄운 채로 계속 자세를 유지했다. 아래에서 윤모난은 발을 움직이는 동시에 손으로 자신의 좆을 쓰다듬기 시작했다. 윤모난은 발가락을 굽혀 무구원의 성기의 요도구를 꾹 틀어막는 시늉을 하며 풀어진 목소리로 말했다.
“너 이거 좋아하잖아…. 흘리지 말고 내 발 구석구석에 다 싸질러. 응?”
“…읏, 아!”
결국 정액이 왈칵 발등 위로 쏟아졌다. 마치 실수로 연유를 쏟은 듯이 끈적한 백탁액이 윤모난의 발등 위에서부터 쭉 흘러내린다. 무릎을 접고 있었던 탓에 발등을 타고 늘어진 정액은 윤모난의 음모 위로 흘렀다.
윤모난은 자신의 하체에 엉킨 무구원의 정액을 윤활제 삼아 수음에 박차를 가했다. 이윽고 윤모난의 승모근이 뻣뻣해지더니 달뜬 신음을 뱉는다. 그 역시 절정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더러워진 채로 허공을 맴돌고 있던 발이 순간 거칠게 당겨졌다. 동시에 윤모난의 입술이 뜨거운 숨에 잡아먹히듯이 빨려 들어갔다. 무구원이 갑자기 잡아먹을 기세로 입을 맞추며 성난 좆을 옆에서 다시 들이댔다.
“나 아직, 읍, 흐…. 아, 안 갔어! 기다리….”
허벅지 사이로 뜨거운 물건이 비벼지는 느낌이 들어 윤모난은 퍼뜩 몸서리를 쳤다. 방금 사정했으면서 또 좆을 세운 무구원의 머릿속에서 무언가 뚝 끊겼다는 것을 직감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연이은 마찰로 조금 부어오른 구멍이 곧 단단한 살덩이로 들어찼다. 팽팽하게 주름을 넓히며 파고든 성기는 들어오자마자 윤모난이 정확히 느끼는 부위를 찔렀다. 이미 절정 직전이었던 윤모난은 자극을 이기지 못하고 이불에 얼굴을 짓이기며 신음했다.
“양말은, 읏, 짝이, 두 개입니다.”
“하윽!”
“발, 하나 더 남지, 않았습니까…. 하아.”
평소에도 짐승같이 섹스하긴 했으나, 무구원은 여러 이유로 끝까지 몰아붙이는 섹스를 자제하려 했다. 왜냐하면 윤모난이 엄연히 상사이고 선배이므로 장유유서의 예를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윤모난의 하얀 양말은 그 잡다한 생각을 일시에 소거시켰다. 이건 지난해 생일 때, 윤모난이 선물이랍시고 구해 온 한복 치마를 무구원더러 입으라 했던 해괴한 요구를 했을 때와 비슷했다. 그때도 젖혀 올려진 치마에 시야가 가려진 무구원은 혼이 쏙 빠지는 경험을 했었다.
윤모난의 난잡스러움은 때로 정도를 지나쳐 무구원을 당황하게 만들기도 했지만. 이번만큼은 무구원의 취향을 제대로 저격했다.
“흐으, 흣, 윽!”
그 와중에 윤모난이 사정했는지 그의 손과 이불 위로 정액이 튀었다. 무구원은 정액으로 더러워진 그의 손을 끌어당겨 손가락 사이를 샅샅이 혀로 핥았다. 그의 결벽증이 유일하게 발동하지 않는 지점이었다.
동시에 찰싹하고 피부가 거칠게 부딪치는 마찰음이 채찍 소리 같아 섬찟했다. 동시에 윤모난의 몸이 평소보다 더 깊게 열린다는 느낌을 받은 무구원은 그 틈새를 놓치지 않고 좆을 더 꾸역꾸역 욱여넣었다.
움칠거리던 윤모난의 입에서 끄으윽, 하는 정체 모를 소리가 튀어나왔다. 남들보다 더 튀어나온 귀두가 장기를 꾹 밀어 올리는 바람에 드는 생리적인 거부감과 이상한 쾌감 사이의 아슬아슬한 선이 무너진다. 이어서 오금이 저릿해지면서 아랫배가 콱 조여드는 느낌이 찾아왔다.
“으읍…!”
곧이어 팽팽하게 고개를 쳐들고 꺼떡이던 성기의 요도구에서 퍽 하고 투명한 액체가 터져 나왔다. 정액과는 확연히 농도나 색깔이 다른 그것이 침대 시트를 흥건히 적셨다. 이 와중에도 무구원이 허리를 짓쳐 올리는 통에 물이 사방으로 튀었다.
뻣뻣해진 윤모난의 좆이 허공으로 흔들리며 끊임없이 액체를 쏟아냈다. 윤모난은 억 소리를 내며 축축한 침대 위로 엎어졌다. 꼬리뼈를 타고 전류가 흐르는 것처럼 몸이 경련했다.
“아! 씨발. 이런 개 같은… 무구원! 그만! 그만, 흐으, 잠깐 멈춰봐.”
둘이 몸을 섞은 지 꽤 되었으므로, 이런 사정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를 리 없었다. 다만 윤모난은 이 뒤에 달라붙은 짐승 새끼가 눈깔이 완전히 돌기 전에 살짝이라도 고삐를 잡을 요량이었다.
저 자신은 물론 무구원의 하체까지 흠뻑 적신 물이 두 사람이 부딪칠 때마다 찰박거리는 소리를 냈다. 윤모난은 무구원이 조금만 움직여도 역치를 넘어가는 쾌감에 앓기만 했다.
“하아, 다시… 금연하겠다고, 약속하세요.”
“으으윽….”
듣기만 해도 음산한 목소리였다. 아직 사정의 여운에 잠겨 몸이 뜨거운 윤모난의 눈가에 생리적인 눈물이 고였다. 그리고 그 눈물마저 무구원 짐승 새끼가 게걸스레 다 빨아 먹어버렸다.
“으읍, 알았…어. 씹, 알았다고. 하윽! 구원아….”
코를 물리고 눈꺼풀까지 모두 먹히듯이 빨리며 윤모난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무구원은 추삽질을 멈추지 않았다. 더 콱콱 들이박는 탓에 윤모난은 정신을 놓고 소리를 질렀다. 쾌감이 너무 과한 탓이었다.
기어코 무구원은 윤모난의 배 속 깊숙이 사정했다. 꾸역꾸역 배출된 정액은 안에 고여 있다가 무구원이 좆을 빼자 딸려 나와 줄줄 흘렀다. 윤모난은 뜨거운 눈물이 흐르는 눈가에 손등을 얹은 채로 거친 숨만 몰아쉬었다.
심장이 금방이라도 제 기능을 멈출 것처럼 방망이질치고 흉곽이 부풀었다 꺼지기를 반복했다. 절정의 여운에 녹아든 몸의 감각이 곤두선다.
“염병. 어젯밤에도 존나게 박아댔으면서. 뒤에 너덜너덜해졌겠네.”
“…….”
“다리 사이에서 흐르는 게 정액이 아니라 피면 넌 죽었어.”
그 말에 무구원이 윤모난의 다리 사이를 더듬었다. 다행히 묻어나온 액체에 피는 없었다. 그런데도 윤모난은 다소 울적한 얼굴로 침대에 얼굴을 묻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무구원은 쪽쪽 입맞춤을 내리고 축축한 양말도 벗겨주었다.
“아프세요?”
“…어어.”
“어디, 다리 더 벌려보세요.”
“…금연 취소해주면 용서해줄게.”
“…….”
결국 이거였다. 간사한 윤모난이 베갯머리송사를 시도하는 건 사전에 차단해야 한다. 섹스의 여운이 가시고 차가운 이성이 반쯤 돌아온 무구원은 그에게서 떨어졌다. 축축한 이불부터 치우려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를 내려왔는데, 턱 하니 손목이 잡힌다.
“금연 취소해주면 용서해줄게.”
“…매번 이런 식입니까? 이번에는 정말 안 넘어갑니다.”
무구원이 매몰차게 손을 치워버리고 이불을 잡아당겼다. 그러자 이불을 깔고 있던 윤모난의 몸이 한 바퀴 회전하더니 저만치로 굴러가버린다. 윤모난이 분한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주먹으로 퍽퍽 매트리스를 내려친 탓에 스프링이 비명을 질렀다.
무구원은 빨랫감을 정리하고 습관대로 몸을 움직였다. 바닥에 흩어진 논문, 책, 옷가지 등을 제자리에 정리한 뒤 대충 시간을 확인한 무구원은 붕 뜬 곱슬머리를 베개에 문대며 심술 맞게 누워 있는 윤모난을 불렀다.
“아침, 아니 이제 점심이네요. 점심 먹으러 가야죠.”
“네 정액 때문에 배불러.”
“이상한 소리 하지 말고. 식사는 제때 해야 합니다.”
반응이 없는 윤모난을 확인하려 가까이 다가가는데, 쿠왁! 하고 포악한 소리가 나더니 윤모난이 달려들어 침대에 엎어치기를 시전했다. 얼얼한 뒤통수를 따라 온 머리가 징, 하고 울린다. 허리에 올라탄 윤모난은 무구원의 귓불을 꽤 세게 물었다.
눈을 질끈 감고서 아픔을 삼킨 무구원이 질린 얼굴을 했다가 이내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응석받이인 줄은 알았지만, 윤모난이 고집을 부릴 때면 영락없는 어린애 같았다. 태오랑 똑같다.
“…왜?”
코며 입술을 물었다가 놓는 패악질을 부리던 윤모난이 순식간에 바뀐 분위기를 눈치채고 떨어졌다. 곧 연인의 검은 눈동자에 얕게 서린 슬픔을 알아챈 그는 애초의 목적을 바꿨다.
손에 걸리는 법 없이 찰랑거리는 무구원의 검은 머리카락을 다정스레 넘기며 윤모난은 아무 말 없이 그를 안아주었다.
“…….”
“…….”
슬픔은 이렇게 예고 없이 방문할 때가 있었다. 시간의 유령 때문이든 아니면 기억 때문이든. 아무리 바닥에서부터 서로를 건져냈다고는 하지만, 고통 없는 삶이라는 것이 어찌 가능하겠는가.
그리움과 지난날의 아픔. 없는 일로 되돌릴 수 없는 일들은 이 두 사람의 영혼에 여전히 흉터로 남아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긍정한다는 것은, 곧 그것을 감내하는 길을 선택한다는 뜻이었다. 죽음이 아니라 삶으로 향하는 여정을.
“구원아.”
“…네.”
“점심 먹으러 가자.”
“좋습니다.”
윤모난은 자신의 품에 파고드는 무구원을 꽉 끌어안았다. 그렇게 둘은 서로를 한참 안고 있었다. 서로만 있으면 된다는 건 확실히 충분치 않은 말이었다. 하지만 서로가 없다면 절대 견딜 수 없었을 거라는 사실은 분명했다. 그것만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갑자기 울린 윤모난의 호출기가 야속하게 그 시간을 방해했다.
“어. 무슨 일이야?”
―팀장님. 휴일에 쉬시는 데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긴급 출동 명령입니다. 무간에서 S급 정신계 트랜스가 출몰한 모양이에요.
“갈게. 20분만 줘. 팀원들 집합시키고 사전 브리핑할 자료 준비해놔.”
―네.
통화를 마치니 어느새 무구원은 침대 위에서 몸을 일으켜 앉아 있었다. 윤모난이 어깨를 으쓱하자 둘은 서둘러 침대에서 빠져나와 씻고 옷을 꿰입었다.
“승강장까지 같이 가겠습니다.”
“응.”
윤모난은 옷장에서 전투복을 꺼내 챙겨 입으며 대답했다. 둘은 서둘러 관리자들이 쓰는 생활관 건물을 빠져나와, 서곡센터 중앙에 있는 이동 승강장으로 향했다.
2부 7팀은 2년 전에 이미 해체됐다. 직급이 찬 다른 팀원들이 각자의 길을 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윤모난의 결정이었다. 그길로 경해국은 아내와 동산으로 갔고, 안범은 새로운 팀에 들어갔다가 6개월 전에 팀장을 달았다.
무구원은 적성에 안 맞는 전투조 생활을 그만두고, 감찰부로 소속을 바꿔 일하는 중이라 더 이상 무간에 갈 일이 없었다. 그렇게 전쟁터로 가는 연인을 매번 배웅하면서 무구원은 어렵사리 찾은 둘만의 시간을 조금씩 잃어가고 있는 기분도 들었다.
그런 기분들을 애써 누그러트리는 와중에 윤모난이 문득 다른 대화 주제를 꺼냈다.
“이번이 휴가 전에 마지막 출동이 되겠네.”
“네.”
두 사람은 청연이 훈련 학교에 들어가면서 긴 휴가를 계획한 참이었다. 승강장의 회색 돔 끄트머리가 보이는 길을 따라가며 윤모난은 출정 때마다 늘 하는 말을 했다.
“무구원, 내가 만약 전사하면 어떻게 해야 할지 알지?”
“네.”
“네가 나 18살 때 찍어준, 끝내주게 섹시한 사진을 꼭 영정사진으로 해줘.”
“물론입니다.”
이제는 이런 농담에도 익숙해진 무구원은 희미한 미소를 입가에 띤 채로 정직하게 답했다.
“그리고 내 연하 애인을 꼭 같이 순장할 것을 유언으로 남긴다.”
“…얼른 가시죠. 늦습니다.”
길을 지나가는 몇몇 대원들이 윤모난을 알아보고 경례를 하는 것을 보며 무구원은 재촉했다. 명색이 전투조 정예 팀 수장인 그가 작전에 늦게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윤모난은 기어코 버티면서 자신의 뺨을 손가락으로 툭툭 쳤다.
“어이, 애인이 전장에 가는데 뽀뽀나 한번 갈겨봐.”
“…사람들이 봅니다.”
어쩌라고? 윤모난은 뻔뻔한 웃음을 뱉으며 뭐 문제 있냐는 얼굴로 어깨를 으쓱했다. 곧이어 누가 보건 말건, 그가 먼저 무구원을 끌어당겨 진하게 입술을 맞추고 뒤로 퍽 밀쳤다. 손등으로 입가를 훔친 뒤에 윤모난이 듬직하게 말했다.
“돌아올게.”
이제 돌아오겠다는 말은 그들의 인사말이 되었다.
무간으로 가는 공간 이동 게이트가 있는 승강장 앞에 윤모난의 새로운 정예 팀이 모여 작전 브리핑을 하고 있었다. 팀장인 윤모난까지 도착하니 곧 이동할 시간이었다.
―무간으로 출정하는 전투조는 2번 승강장에서 대기하십시오.
단조로운 기계음에 맞춰 윤모난의 뒤로 팀원들이 일사불란하게 정렬했다.
“팀장님.”
“어?”
“가장 마지막에 들어오시죠.”
그중 팀원 한 명이 갑자기 짓궂은 웃음을 지으며 윤모난에게 제안했다. 무구원이 승강장 앞에서 이쪽을 보고 있는 걸 발견하고 하는 말일 터였다. 윤모난으로서는 그러지 않을 이유가 없었기에 흔쾌히 줄 뒤로 가는데 팀원들에게서 야유가 쏟아진다.
“그렇게 오래 만났는데 아직도 좋으세요?”
“응. 그러니까 나 죽으면 너네가 책임지고 쟤 순장해줘야 된다.”
“아, 제발 어려운 일만 골라서 시키는 거 그만두시죠.”
“얼렁 들어가, 새끼들아.”
팀원들의 등을 밀어 전쟁터로 집어넣은 다음 윤모난은 잠깐 뒤를 돌았다. 이동을 맡은 공간계 에스퍼가 뭐 하냐는 듯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하지만 윤모난은 들고 있던 사격 총을 잠깐 아래로 내리며 저 멀리 서 있는 검은 머리의 뚱한 표정의 남자를 봤다. 열여덟에 남경에서 처음 만났고, 7년 전에는 기차에 올라타 창백한 얼굴로 인사를 하던 무구원이다.
자신을 위해 시간을 수없이 횡단한 연인에게 그 여파로 때때로 드리워지는 그늘을, 윤모난은 알고 있었다. 그러니 이제는 자신이 무한한 사랑으로 그를 음지에서 건져내야 하지 않겠는가.
윤모난은 한 손을 올려 입가에 대고 간이 확성기를 만들었다. 그에게 꼭 해줄 말이 있었다.
“다음에 양털을 깎을 때 돌아올게―! 미아 잘 있어!”
동시에 무구원의 커다란 몸이 주춤주춤 흔들리더니 결국 반으로 꺾이는 것이 원거리에서도 잘 보였다. 방금 전만 해도 표정이 굳어 있던 녀석이 어느새 활짝 웃고 있었다. 윤모난의 입가도 덩달아 찢어졌다.
당연히 무구원은 ‘메에에에에에’라는 다음 대사를 해주지 않았다. 그저 서로가 아니라면 짓지 못했을 환한 웃음을 주고받으며 그들은 먼 거리에서 눈을 마주쳤다.
곧이어 윤모난은 여유롭게 뒷걸음질해 게이트로 들어갔다. 초록색 빛무리가 자신을 완전히 삼킬 때까지 연인에게 시선을 떼지 않은 채로. 이윽고 환한 빛이 타오르며 그가 환영처럼 사라졌다.
“절대 사랑 영화는 아니라고 우기더니. 드디어 깨달았나 보네요.”
혼자 남은 무구원은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도 등을 돌려 한결 가볍게 걸음을 뗐다. 윤모난은 무사히 돌아올 것이다. 자신의 곁으로.
더 이상 두려워할 일은 없다. 윤모난이 자신의 중심이듯이 자신 역시 그의 원점이기에. 무구원은 건물의 그림자를 벗어나 따스한 양지로 발을 뻗었다.
봄날. 모란이 만개하는 계절이었다. 윤모난의 무덤 앞에 묻어두었던 씨앗이 결실을 피워 낸 것이다. 무구원은 그런 시간 속에 살고 있었다.
그 무엇도 침해할 수 없는 둘만의 시간.
시간 여행자의 격자에 고정된 단 하나의 절대좌표였다.
외전 完
<힛 더 그라운드(Hit the Ground),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