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I burn, I pine, I perish!
뜨겁게 원하고, 애타게 그리워하고, 또 죽을 듯이 사랑하네!
“네스는 언제나 주변의 어려운 사람을 챙기는 친구였습니다. 제가 봐 왔던 누구보다요.”
네스 바라노프가 죽었다.
미국 케이블 역사상 가히 기록적인 시청률을 뽑아낸 드라마의 작가로 일약 스타덤에 올랐던 네스. 녀석은 그렇게나 자랑스러워했던 새 저택에 짐을 푼 지 한 달, 거실을 다 채우기도 전에 머리에 총알이 박힌 채로 발견됐다.
지혜로운 장수의 신, 네스토르의 이름을 빌린 녀석이 죽은 나이는 겨우 서른둘이었다.
“내로라하는 유명 작가가 되고 나서, 녀석이 제일 먼저 했던 일은 중독자 모임의 후원자가 되는 거였죠. 맙소사.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요.”
네스의 추도사를 맡은 빌리인지, 코너인지 하는 사내가 코를 훌쩍이는 소리가 요란하게 났다. 그는 네스가 마약 중독 회복 모임에서 돕던 약쟁이 녀석이었다. 어쩌면 마약중독자에게-정확히는 중독을 떨치기 위해 노력중인-추도사를 맡기는 건 가장 현명한 일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
중독 회복 모임에 꼬박꼬박 출석하며 ‘참 잘했어요’ 코인을 모으는 녀석들은 하나같이 눈물 뽑는 연설에는 달인이 될 수밖에 없는 일이니 말이다. 나 역시 5년 조금 넘게, 그래, 정확히는 1847일 동안 매주 수요일마다 보는 얼굴들이니 그 특유의 화법을 모르려야 모를 수 없었다.
네스의 장례식은 허무할 정도로 금방 끝났다.
제아무리 브라운관을 들끓게 한 스타작가라고 하더라도 인생의 마지막 페이지에는 추가편성이 없다. 나는 목울대가 훅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며 눈에 힘을 줬다. 바보 녀석. 그 대단한 저택으로 이사 갔으면 제일 먼저 경비나 세울 것이지.
“저기…. 이선?”
웅성이며 하나씩 제 갈 길을 찾아가는 장례식장의 문 앞에서 여느 사람들이 그렇듯 뻔한 회한에 잠겨 있자니, 낯선 목소리가 나를 찾았다.
“이선, 이선 박. 맞죠?”
“……흠, 흠. 예에. 그렇습니다.”
짙은 블론드의 곱슬머리를 한 여자였다.
나는 그녀와 모임에서 몇 번 이야기를 한 적이 있던 것을 기억해 내고 괜히 얼굴을 한 번 훑으며 대충 눈인사를 했다. 하지만, 그녀와 내가 이렇게 친근하기 짝이 없게 부를 정도로 대단한 대화를 한 적 있던가? 그것도 모두 새까만 옷을 입고 있는 공동묘지에서는 더욱 아닐 거다. 나는 저도 모르게 떨떠름한 표정을 짓지 않도록 노력하며 어색하게 웃었다. 이 따스한 LA의 미덕은 눈이 마주치면 웃는 거라고 말한 것도 네스 녀석이었으니까.
“출연한 영화 찾아봤어요.”
“…어…. 음. 고마워요.”
“저, 이선. 혹시 이번 주말 시간 괜찮아요?”
할리우드에는 많은 배우가 있다.
당신이 지금 당장 자리에서 일어나 영화관으로 직행했을 때, 푹신한 의자에 앉기도 전 가득 깔린 포스터를 통해 볼 수 있는 누군가 역시 할리우드의 일원이다. 할리우드는 무릇 배우를 꿈꾸는 사람, 혹은 배우인 사람들 모두에게 가슴 설레는 단어다. 물론 파파라치들이 제집처럼 뛰놀고, 당신이 사랑하는 스크린 속의 얼굴이 울긋불긋하게 기름진 채로 선글라스 하나에 의존하게 되는 곳이기도 하다.
“미안해요. 선약이 있어요.”
최대한 친절한 목소리로 꺼내 든 내 대답에 이름조차 가물가물한 여자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그래, 감히 말하건대 나는 그런 할리우드의 일원이다.
기억을 잘 더듬어 보길 바란다. 당신은 나를 어디선가 봤을지도 모른다.
나는 대체로 백인 남성의 옆에서 노트북을 붙잡고 온종일 키보드를 두드리거나, 치파오를 입고 무술 고수인 양 팔을 휘적거리거나, 수술실 구석에서 심각한 얼굴로 조언하고 있다. 가끔씩 당신은 알아들을 수 없는 외국어로 외치며 드문 자막을 띄우는 존재이기도하다. 만약 당신이 이 정도의 묘사로 나를 떠올릴 수 있다면 당신은 영화관에 꽤나 자주 들락거린 사람일 것이다.
정답이다. 나는 당신의 짐작대로 아시안계의 남성이다.
할리우드에서 아시안 남성은 썩 좋은 대우를 받는 존재는 아니다. 끽해야 백인 남성의 절친한 친구고, 재수 없으면 스쳐 지나가는 미친 과학자다.
별들의 도시, 할리우드에서의 나의 위치를 좀 더 상세히 설명해 보겠다.
할리우드는 태양계나 다름없다. 태양을 가장 빛나는 방점으로 친다면, 나는 그 중심부에서 제법 떨어진 태양을 중심으로 두고 회전하는 외행성 중 천왕성과 해왕성 가운데 어디쯤 있다.
내 목표는 별거 없다. 명왕성 부근까지 떨어지지 않는 거다.
감히 내행성 근처로 가는 것은 바라지도 않는다. 다행히도 이 지구촌은 다인종을 기꺼이 존중하는 세상인 척, 편견을 숨긴 채 어쨌거나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고 있고 자본 그 자체인 할리우드에서는 그것을 마케팅 포인트로 활용하는 걸 망설이지 않는다.
나는 내 뒷모습을 묘하게 끈적이는 시선으로 좇는 눈을 피해서 도망치듯 집으로 향했다.
함께 애도를 나눌 사람 같은 건 없었다. 나나 녀석이나 회복 모임에서마저 우울한 얼굴을 한 채 사람들과 떨어져 있는 동지였다는 이유로 친해졌던 터다.
사실 그 덕분에 나를 이 모임에서 만난 사람들은 처음에는 내 직업을 듣고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을 하기도 했었다. 축축 늘어지는 발걸음으로 아파트 계단을 올라 문을 연 순간부터 잔소리부터 늘어놓는, 아랫배가 톡 튀어나온 저 남자- 브랜든 우드를 제외하고는 말이다.
“빌어먹을, 이선!”
“왔냐.”
“이 피자 언제 거야?!”
“글쎄. 아마 사흘? 아니, 나흘 전인가. 야, 버리지 마. 전자레인지에 돌리면 먹을 만하다고.”
“절대 안 돼. 그리고 너, 내가 TV 켜 놓고 가지 말라고 했지. 그러면서 전기세가 어쩌고저쩌고….”
푹 꺼진 소파로 몸을 던져 누우며 대충 대답하기가 무섭게 뭐라고 구시렁대는 소리가 쉼 없이 이어졌다.
나는 저 잔소리꾼 브랜든 우드를 5년 전 중독자 치료모임에서 처음 만났다. 그는 로스앤젤레스에서 발에 치일 정도로 많은 삼류, 아니 급조차 매길 수 없는 채로 진작 링에서 떨어져 나간 약쟁이로 썩어 갔을 나를 자신이 일하는 에이전시로 데려가 주고, 기꺼이 중독치료후원자가 되어 주었다.
인정한다. 브랜든은 정말 고마운 녀석이다.
하지만…….
“아, 먹을 수 있다니까.”
“닥쳐!”
“버릴 거면 분리수거라도 잘하든가! 쓰레기통에 넣으면 냄새나!”
“쓰레기통은 원래 냄새나.”
저 새끼는 분리수거가 엉망이다!
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아직 먹을 수 있을 것이 분명한 피자를 쓰레기통에 처넣는 브랜든을 향해 볼멘소리를 냈다. LA에서 분리수거를 잘하는 미국인을 순서대로 세운다면, 나는 단연코 그 앞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것이다. 어머니는 늘 미국 놈들은 쓰레기를 버리는 기본이 안 되어 있다며 욕하시면서 나를 호되게 가르쳤다. 그 덕분에 나는 ‘기본이 된’ 미국 놈이 되었다.
하하. 물론 내 주변의 누구도 이것에 동의하지 않는 것은 슬픈 일이다.
소파에서 주섬주섬 일어나서 브랜든가 쓰레기통에 버린 피자 몇 조각을 따로 빼내고 있자니 저 강박증을 어쩌면 좋지, 하며 질색하듯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 시선이 느껴졌다.
……정말로 이거 잘만 데우면 먹을 수 있을 것 같은데.
나는 피자에 대고 코를 킁킁댔다. 그러자 브랜든가 등이 따가울 정도로 세게 등을 퍽 때렸다. 아야. 나도 진짜 먹을 생각은 아니었다. 그냥 냄새만 맡아 본 거였는데….
“오디션 일정 잡힌 것 몇 개 가지고 왔어. 확인해 봐.”
“영화?”
“영화도 있고, 드라마도 몇 개.”
아. 브랜든 우드는 정말 잔소리가 심하다.
나는 브랜든의 서류첩을 들추며 다른 한 손으로는 어느새 꺼진 TV를 도로 켰다. 물론 그걸 그냥 두고 볼 브랜든이 아니어서, 나는 다시 쏟아지는 매서운 목소리에 대충 대답하며 채널을 마구 돌리다가 이윽고 녀석의 잔소리를 멈추게 할 화면에 이르렀다.
좀 더 정확히는, 그건 나와 브랜든 모두가 입을 다물게 되는 화제였다.
[일주일 전 A 방송국의 간판 작가 네스 바라노프가 자택에서 시신으로 발견되어 많은 이들에게 큰 충격을 줬는데요.]
잠시나마 잊었던 울적함이 휙 몰려들기 시작했다.
나는 가래 낀 듯 텁텁한 목소리를 한 기자의 목소리에 온 정신을 집중했다.
[오늘 LA 경찰은 바라노프의 죽음을 총기 살인으로 공식 발표하고, 본격적인 수사에 임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브랜든은 TV를 가득 채운 네스의 사진을 보며 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은 저래도 앞으로 한 달이면 손바닥만 한 기사 하나 보기 힘들걸.”
방송국은 이미 네스 바라노프의 자리를 채울 새로운 작가진을 별처럼 수많은 인재 사이에서 추려 낸 지 오래일 거다. 교통사고로 죽는 사람보다 총에 맞아 죽는 사람이 더 많은 이 나라에서 총기 사고는 그 무엇보다 유통기한 짧은 죽음이기도 하다.
게다가 여기가 어딘가? 망할 LA, 빌어먹을 할리우드다.
나는 브랜든이 혀를 차는 소리를 들으며 손에 들었던 종이 뭉치들을 소파 옆으로 대충 던져 버렸다. 오늘은 뭐든 하기 싫은 날이었다. 브랜든은 이해한다는 듯 냉장고에서 차가운 맥주 두 개를 가져왔다.
* * *
요 몇 주는 정말이지 일진이 좋지 않다.
-아니, 정정하겠다. 최악이다!
감히 말하건대 이보다 더 나쁠 수는 없을 거다. 나는 손톱을 이로 가져갔다가 그걸 물어뜯기 직전에야 정신을 차리고 주먹을 말아 쥐었다. 고친 지 오래되었다고 믿었던 버릇이었건만 사실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하긴, 어쩔 수 없다.
초조함을 감추지 못하고 몇 분째 입구를 맴도는 나를 보며 노골적으로 “뭐야, 저건?” 하고 위아래로 훑는 시선들 앞에 있다 보면 누구라도 없던 버릇이 생기고도 남을 거다. 왠지 등 뒤로 식은땀이 쭉 나는 것 같기도 하고 말이다.
하지만 빠른 좌절은 잠시 미뤄 두시라.
시간 감각 좋은 구세주가 머지않아 등장할 예정이니 말이다.
“미안. 오래 기다렸어? 회의가 늦게 끝나서.”
“저도 방금 도착했어요.”
볼 때마다 다른 차에서 내리는 것 같은 저 남자는 다니엘 바커다.
짙은 눈썹이 눈에 띄는 히스패닉인 그는, 외모만 보면 6피트-183정도-인 나와 키는 거의 비슷한데도 팔다리가 유독 길고 늘씬해서 꼭 런웨이 위를 걸을 것 같은 사내다. 실상은 직접 무대 위에 서는 게 아니라 그들을 뒤에서 꽉 쥐고 있는 엔터테인먼트계의 큰손인 바커이지만 말이다.
나는 BAA, 다시 말해 바커 아티스트 에이전시 소속이다.
브랜든이 그 많디많은 에이전시 중 BAA에서 근무한다는 건 더없는 축복이었다.
BAA가 잘나가는 할리우드의 간판들을 여럿 거느린 에이전시라서? 물론 그 이유도 있다.
하지만 그 행운의 가장 큰 부분은, 최근 부인과 함께하는 크루즈 여행에 빠져서 얼굴 보기 힘들다는 바커가의 수장 존 바커를 대신해서 BAA를 꽉 잡은 저 남자가 내 필모그래피를 엄청 마음에 들어 한다는 거다!
나는 바커를 향해 쏟아지는 시선에 턱을 긁적이며 멋쩍게 말을 이었다.
“다니엘 바커가 경찰서라니…. 다들 뭔 일 있나 싶을걸요.”
“내가 못 올 곳 온 것도 아닌데, 뭘.”
그렇다.
나는 지금 LA 경찰국 앞이다.
이제 내가 그렇게나 긴장한 채로 벌벌 떨었던 이유를 이해하리라 믿는다.
모든 약쟁이에게- 아, 물론 나는 약을 끊은 지 5년이 넘었지만, 어쨌거나 전현직 약쟁이들에게 경찰은 보기만 해도 입이 마르는 존재다. 바커는 긴장을 감추지 못하는 나를 향해 여느 때와 같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바라노프와는 중독회복 모임 친구라고 했었지. 마지막으로 만난 건?”
“어, 아마…. 3년 전쯤이요. 녀석도 워낙 바빠서.”
“그런데 직접 출석까지 해서 참고인 조사라. 세금 한번 멋대로 쓰는군. 매해 재정난이라고 소리치면서 말이야.”
매년 천문학적인 세금을 낼 게 분명한 남자의 이유 있는 짜증이었다.
나는 오늘 네스 바라노프 살인사건의 참고인으로 이곳에 불려 나왔다.
명성을 얻기 시작한 전도유망한 유명 작가의 죽음과 빈말로도 잘나간다고 말하기는 어려운 배우 그 두 사람 사이의 공통점인 마약 전과는 내가 봐도 참 구미 당기는 조합이다. 재수 없으면 시끄럽게 입방아에 오르기 딱 맞고 말이다.
네스 녀석이 죽은 지 2주.
미궁에 빠진 수사를 도울 조언을 받을 친구이기는커녕, 의심스러운 눈을 한 형사들을 앉혀 두고 참고인 조사나 받는 신세라니. 정말이지 약 생각 나게 한다.
……아, 물론 다니엘 바커의 뒤에 서 있던 변호사의 눈썹이 ‘중독회복 모임’이라는 단어에 꿈틀거리는 건 못 본 척하자. 아마 저 여자는 자신이 도우러 온 에이전시 소속 무명배우의 전과까지는 몰랐던 것이 틀림없으니 말이다.
“들어가지. 끝내고 나와서 같이 식사나 하자고.”
“나올 때도 입맛이 있었으면 좋겠네요.”
“뭐라도 하는 척하려고 불렀을 뿐이니까 걱정하지 마.”
전과가 없는 사람은 경찰서를 이렇게 자신 있게 들어갈 수 있구나.
나는 웃음기마저 어린 목소리로 말하며 앞서 걷는 바커의 뒤를 허둥지둥 따르며 생각했다.
그 모습이 어지간히 멍청하게 보였을까. 변호사가 영 못 미더운 얼굴로 모든 대답은 자신의 사인을 받고 난 뒤에 하라며 몇 번이나 신신당부하는 게 뒤로 들린다. 뭐. 저 걱정이 이해 안 가는 건 아니다.
아무리 내 연기를 마음에 들어 한다고 한들, 어쨌거나 다니엘 바커는 일분일초의 스케줄이 꽉 차 있는 사내다. 기껏해야 조연자리를 전전하는 소속 배우의 자잘한 일 따위 그의 일상과 멀어도 한참 멀다.
하지만 오늘 그는 기꺼이 자신의 변호사까지 대동해서 내 옆에 섰다.
대형 화재로 번지기 전에 아예 불씨부터 잡아 버릴 심산이겠지만 어쨌거나 고마운 일이다.
나는 자신만만한 바커의 곁에 바짝 붙어 서서 영 어울리지 않는 방문자 태그를 셔츠 앞단에 달았다. 심장이 기분 나쁠 정도로 크게 뛴다.
지은 죄가 없으면 떳떳하다고 누가 그랬나?
탈탈 털어 먼지 하나 안 나오는 사람은 없다는 말도 있는 판국에 먼지 구덩이에 처박힌 적 있는 나로서는 기억하지도 못하는 티끌들이 쏟아져 나올까 그저 불안할 뿐이다.
한편 바커는 그렇게 불안을 감추지 못하는 나를 눈치챈 모양이었다. 그는 한숨 쉬듯 웃으면서 내 어깨를 감싸 쥐었다. 아, 세상천지에 이렇게 친절한 사장님이 어딨나.
왠지 울컥하기까지 한 나는 기꺼이 감사 인사라도 하려고 했다.
“세상에. 이런 곳에서 아는 얼굴을 다 볼 줄이야. 누가 반가운 것도 오랜만이군요!”
목소리만으로 뒤돌아보게 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그것도 내로라하는 자들 사이에서 살다시피 하는 바커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는 건 더욱 어렵다. 하지만 갑자기 튀어나온 누군가의 낮은 노랫말 같은 목소리는, 고작 말 몇 마디로 나와 바커는 물론이고 경찰서 홀에 있는 대부분을 멈춰 세우게 했다.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한쪽으로 향했다.
“…….”
그 끝에는 겨우 코끝과 입만 보일 정도로 모자를 푹 눌러쓴 남자가 서 있다.
바커는 조금 놀란 듯한 눈을 했다가, 이윽고 살짝 눈썹을 찡그리기는 했지만 깍듯하게 대답했다.
“죄송하지만… 사람을 착각하신 것 같습니다만.”
나는 붉은 입술 끝이 위로 보기 좋게 올라가는 그 몇 초를 왠지 멍하게 지켜봤던 것 같다. 아마 그건 내가 이 답답한 건물에서 정상적으로 숨 쉬었던 거의 마지막 순간이었다.
아니, 그런 게 비단 나뿐이었을까?
흔한 야구 클럽의 로고 하나 없는 감청색의 모자를 눌러쓴 남자가 그의 얼굴을 꽁꽁 감추던 것을 벗으며 살짝 눌린 머리카락을 가볍게 터는 순간, 여기저기서 놀란 헛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린 걸 내 착각이 아니다.
심지어 그건 다니엘 바커조차도 마찬가지였다!
“존은 잘 지냅니까? 재작년 연말 파티에서 만난 게 마지막 같은데.”
“……스펜서?”
나는 다니엘 바커의 아버지인 존 바커의 이름을 태연하게 입에 담는 저 남자를 잘 안다.
아니, 과장 좀 섞어서- 그는 이 미합중국의 사람 대부분이 알 것이 분명할 사람이다. 요 몇 년 동안 흔하디흔한 스펜서라는 성을 자기 자신만을 위한 특별한 지칭으로 바꿔 버린 남자를 어떻게 모를 수가 있을까.
망할. 션 스펜서라니!
할리우드 최고의 블루칩으로 떠오른 초대형 무비스타의 등장에 멍청할 정도로 얼이 빠진 나보다, 그리고 경악을 감추지 못하는 사람들보다 먼저 정신을 차린 건 다니엘 바커였다.
“아버지께서는 언제나처럼 정정하십니다. 그런데 스펜서, 여긴 무슨 일로….”
“하하, 글쎄요. 피차 마찬가지로 좋은 이유는 아니겠지요.”
“…….”
역시 보통은 아니다.
나는 ‘그’ 다니엘 바커에게 한 치의 양보도 없는 남자를 보며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러고 보면, 저 남자도 ‘그’ 션 스펜서다. 세상의 많디많은 바커와 스펜서 사이에서 특별한 무언가가 되는 게 보통 일인가.
언제나 주연에 가까워지기 위해 애썼던 나는, 지금 이 순간만큼은 이 분에 넘치게 거창한 화면 속 엑스트라가 되기 위해 노력하며 숨을 골랐다.
하지만 스펜서의 레이더는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더랬다.
“그런데 이쪽은?”
새파란 눈동자가 별안간 휙 내 쪽을 향하는 순간 저도 모르게 숨을 참은 건 거의 반사적인 행동에 가까웠다. 그 어떤 오디션장보다 긴장한 나는, 거의 튀어 오르듯 자세를 바로 했다.
“저, 저요? 저는 이선 박입니다.”
“아하….”
“BAA 소속인- 배, 배웁니다.”
미친. 이 짧은 말을 하는데 두 번이나 더듬었다.
삐끗한 목소리는 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그도 그럴 것이……. 온 세상이 떠받드는 남자 앞에서 그와 같은 일을 하고 있다며 소개하는 건 왠지 좀 낯부끄러웠단 말이다. 왠지 묘하게 눈을 가늘게 뜨는 스펜서를 두고 쩔쩔매고 있노라니 그의 곁에 서 있는 양복쟁이 남자가 작게 채근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빨리 가셔야 합니다. 혹시 누가 붙기라도 하면….”
“뭐 어떤가요. 사진 몇 장 찍히는 것도 나쁘지 않지.”
션 스펜서와 함께 파파라치 사진이라니. 세상에나. 듣기만 해도 끔찍하다.
장담컨대 나는 그의 옆에서 멍청하게 얼떨떨한 얼굴을 한 얼간이로 나오지 않을까? 아니다, 일반인일 줄 알고 얼굴을 뿌옇게 만들 수도 있겠지. 내가 암담한 상상을 하는 사이, 스펜서는 그보다 더 무서운 말을 서슴없이 내뱉기 시작했다.
“들은 적 있는 것 같은 이름인데.”
“예에? 하, 하하핫! 딱히…, 그럴 리는 없을 겁니다. 어떤 사람은 썬 같은 이름이랑 착각하기도 하더라고요. 정말로 스펜서 씨 당신이 알 만한 이름은… 아닌데요.”
이렇게 비굴할 정도로 구구절절 말하고 싶지는 않았건만 바짝 긴장한 입에서는 한심한 단어들만이 줄을 지어 튀어나왔다.
하지만 그러든지 말든지, 고작 모자만 벗었을 뿐인데 방금 막 분장 부스에서 튀어나왔다고 해도 믿을 정도로 흠잡을 데 없는 남자는 소름 끼칠 정도로 나직한 목소리로 내 이름을 몇 번이고 중얼거렸다. 이선, 이선, 이선 박….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한 건 나만이 아니었는지 바커가 살짝 눈썹을 찌푸리는 게 보였다.
나는 하나둘 휴대폰을 꺼내기 시작한 사람들을 보며 건물에 들어오며 스펜서 그와 마찬가지로 벗었던 모자를 다시 눌러쓸까 말까 고민했다.
젠장할!
미국, 아니 전 세계에서 가장 공룡 같은 규모를 자랑하는 비상장기업을 독식하는 집안의 도련님께서 손톱만 한 규모의 영화 아니면 케이블 드라마 조연으로 간간이 출연하는 무명의 이름 따위 알 리 없다. 나는 제 분수를 넘치도록 잘 안단 말이다.
션 스펜서의 입에서 조금은 탄식 같은 소리가 흘러나온 건 내가 왠지 슬쩍 떨리는 것 같은 눈꺼풀에 힘을 꽉 주었을 때였다.
“-아, 그래. 그렇지. 역시 아는 이름이었군.”
글쎄. 착각이 아닐까요. 나는 눈을 묘하게 가늘게 휘고 웃는 남자를 보며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하는 말 대신 조심스레 되물었다.
“……네?”
“그렇지 않아도 전부터 귀에 못이 박이게 들었거든요. 그런데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이야. 설마 직접 만날 기회가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순간적으로 흘끗 쳐다본 바커는 그 역시도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다는 얼굴을 하고 있다.
어찌나 반가움을 감추지 못하는 목소리던지, 나마저도 익명의 할리우드 거물이 날 몰래 눈여겨보고 있었던 걸까 하는 달콤한 상상을 몇 초나마 하고 말았을 지경이었으니 당연한 일이다.
물론 그건 눈앞의 그림 같은 남자가 도톰한 입술을 열어 사근사근하다 못해 다정하기까지 한 목소리로 말을 잇기 전까지의 일이지만.
“정말 궁금했지 뭡니까. 그 잘나가는 BAA가 삼류 약쟁이까지 모셔다 계약할 만큼 급이 떨어진 건지, 아니면-”
“…….”
“당신이라는 사람이 정말 꼭 데려와야 할 이유가 있을 정도로 괜찮은 배우였던 건지. 뭐, 말이야 쓸 만하다고 하는데 그것도 어디 보여야 아는 일이니….”
장난 같은 문장을 채 이해하기도 전에 내 옆에 서 있던 다니엘 바커의 미간이 심상치 않게 구겨지는 게 보인다. 아. 고마운 나의 사장님. 난 정말 어떻게 쫓겨나기 전까지는 BAA에 뼈를 묻고 말 거다.
그래. 잊고 있을 뻔했다.
션 스펜서, 그는 잘난 얼굴과 어이없을 정도로 화려한 배경만으로 유명한 사내는 결코 아니다. 어제는 소아암 재단에 까마득한 돈을 기부하고, 오늘은 한쪽 팔에는 여자, 다른 한쪽 팔에는 남자를 낀 채 보란 듯이 파티장으로 걸어 들어가고, 내일은 자신을 못 잡아먹어 안달인 진영의 인터뷰를 일부러 잡고서 속을 뒤집어야 직성이 풀리는 남자다.
데뷔 몇 해 만에 이 할리우드에서 가장 적이 많은 사내라는 별명이 괜히 붙었겠나?
나는 뭐라고 입을 열려는 바커의 팔을 얼른 붙잡으며 먼저 선수를 쳤다.
“틀린 말은 아니네요. 그런데- 대체 누가 내 얘기를 그렇게 했습니까?”
굴욕에 익숙해진 얼굴이 이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그 전까지 멍청하게 떨리기만 했던 목소리도 이 정도면 퍽 멀쩡하게 흘러나왔다. 이 정도면 머릿속은 이미 사고라는 걸 멈춘 채 하얗게 변한 상태라는 걸 눈치챈 사람은 없을 거다.
“보아하니 여기 바커 씨는 아닌 거 같은데. 아시다시피 저는 찾아보기 힘든 배우여서요. 대단하신 분인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어울리는 사람은 비슷한가 봅니다.”
있는 힘껏 빈정거린 말에 짙은 검은 눈썹이 슬쩍 휘었다.
솔직히 상대가 상대인지라 그 까칠한 반응에 심장이 일렁였던 건 사실이다. 하지만 지금은 나도 혼자가 아니다. 바로 옆에 늘 내 편을 들어 주는 팬이자, 어디 내놓아도 꿀리지 않을 사내가 있지 않나!
긴장한 채로 입을 다물고 있노라니 내 얼굴을 뜯어 살피던 새파란 눈동자가 이윽고 재미있다는 듯 가늘어졌다. 션 스펜서의 옆에 있던 변호사인지 비서인지 모를 양복쟁이가 안절부절못한 표정으로 어쩔 줄 몰라 하는 것도 함께다.
찰칵, 찰칵. 나와 스펜서를 담는 카메라 소리가 이어지기 시작했다. 아예 동영상을 찍는 사람들도 있었다. 인상을 찌푸릴 대로 찌푸린 바커가 내 어깨를 살며시 짚었다. 하지만 난 그 정중한 행동과는 정반대의 거친 힘에 별안간 확 몸이 끌렸다.
할리우드의 많은 감독이 집요할 정도로 스크린에 잡던 눈동자에 내 얼빠진, 솔직히 조금은 놀라 겁먹고 긴장한 얼굴이 비치는 게 보인다. 정확히는 그걸 알 수 있을 만큼 그와 내 얼굴이 가까워졌다.
스펜서의 입술이 내 이마에 스치듯 닿았다 떨어졌다.
하지만 나는 누군가 숨을 작게 들이켜는 소리도, 이마의 감촉도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그가 나만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작고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기 시작한 문장 때문이었다.
“…아마 당신과 나는 같은 이유로 이곳에 왔을 거라고 하면.”
동공 주변에 아주 밝은 갈색이 흩뿌려진 파란 눈동자가 반짝였다. 왠지 소름이 돋았다.
“대답이 되겠습니까, 이선?”
* * *
“시건방진 개자식! 이선, 너 정말 고소할 생각 없어?”
“됐어. 고소는 무슨.”
“바커 씨도 난리라고! 네가 고개만 까딱하면 에이전시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지원할 거야. 이참에 그 잘난 스펜서 인더스트리에서 한밑천 뜯어내!”
“뭐… 그건 동하네.”
“해? 할 거야? 지금 회사로 연락한다?”
세상에 나 대신 화내 주는 사람이 하나도 아니고 둘이나 있다는 건 얼마나 큰 축복인가. 나는 반색하는 브랜든 녀석에게 웃으며 손사래 쳤다. 그러자 당장에라도 정말 전화할 것처럼 휴대폰을 쥐고 있던 브랜든은 “아 왜! 그런 말을 듣고 잠이 오냐?” 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서글픈 일이지만, 못 잘 게 뭔가.
나보다도 더 펄펄 날뛰는 바커와 브랜든은 이 영화판에서 대체할 사람이 한 트럭은 있는 아시안 중에서 이 정도 무시와 폭언을 안 들어 본 사람은 없다는 사실을 잘 모른다. 아니, 차라리 이 정도는 귀여운 수준이라는 걸 알면 무슨 표정을 할까.
턱을 긁적이며 씩 웃고 있자니 브랜든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잔소리 많고 다정한 매니저와 전폭적으로 믿고 밀어 주는 에이전시 보스까지. 이 살벌한 동네에서 이 정도면 만족이다.
“하여간 이상한 데에서 물러 터져서는…. 애초에 네가 조사받는 것부터가 미친 일이었어.”
브랜든은 대체 네가 무슨 잘못이냐는 둥, 아직 충격을 다 추스르지도 못했는데 성실하게 사는 사람을 전과만 보고 곧바로 용의 선상에 올리다니 너무했다는 둥 나보다도 더 투덜대기 시작했다. 나는 그런 브랜든을 멍하게 보면서 녀석이 욕하는 ‘그 날’의 기억을 다시 떠올렸다.
션 스펜서는 네스 바라노프 살인사건의 참고인 조사를 받았다.
물론 그 어떤 뉴스도, 신문도 그것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스펜서 그가 나라는 인간을 신랄하리만큼 잘 알고 있는 건 그의 말이 사실임을 증명한다.
“왜. 경찰서에서 더 무슨 일 있었어? 그냥 참고인 조사라며. 별말 없이 끝난 거 아니었어?”
“어, 어? 어어, 응. 그랬지. 뭐 그냥…… 좀 피곤해서 그렇지, 뭐.”
하여간 이런 걸 눈치채는 데에는 귀신이다.
나는 괜히 맥없이 웃으면서 소파에 벌렁 드러누워 한쪽 팔로 눈을 가렸다. 브랜든이 내 기분을 살피듯 곁눈으로 엿보는 것이 느껴진다.
요 며칠 나는 틈만 나면 션 스펜서에 대해 알아보았다.
물론 알아본다고 해도 기껏해야 구글링 정도가 다이지만, 나를 어디까지 어떻게 알고 있을지 모를 유명인사를 두고 그 정도라도 하지 않으면 속이 남아나질 않았을 거다.
션 스펜서, 그는 그 화려한 외모만큼 수식어 역시 새삼스러울 만큼 다양한 남자였다.
전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큰 비상장기업인 스펜서 인더스트리즈 대표와 세기를 풍미한 배우, 나탈리 슬로안 사이의 하나뿐인 아들. 칼텍의 과학도에서 할리우드의 블루칩으로 떠오른 남자.
솔직히 보기만 해도 배 아프게 잘난 남자에 대해 이제껏 알아볼 일이 뭐가 있었겠나?
그 화려한 배경의 남자가 극과 극의 사건 사고만 몰고 다니면서 사랑받는 것쯤이야 마트 가판대의 가십지만 봐도 알 수 있는데 말이다.
아, 젠장. 대체 션 스펜서가 네스와는 무슨 관련이 있는 걸까?
대체 무슨 일이기에 나랑 같은 날에 나란히 경찰 조사까지 받았지?
“그런데 이선.”
“……응?”
“오디션이 하나 더 들어왔는데 말이야.”
사실 영화 속에서 이런 의문을 갖는 주인공은 가족을 잃고 혼자 은둔하던 전직 연방 요원이지, 매달 렌트비를 내고 나서 남은 돈을 빠듯하게 계산하는 배우는 아니다.
좀 더 냉정하게 따지면 아시안 남자에게 그런 어마어마한 할리우드 주연이 떨어질 리 없다. 게다가 우리 가족들은 아주 멀쩡하게 잘 지내고 있기까지 하다. 그런 대단한 결핍 따윈 사절이다.
현실은 영화와는 다르다. 나는 고개를 휘휘 저으며 몸을 바로 일으켰다.
대단한 추리 소설보다는 오디션을 보고 배역 하나라도 더 따내는 게 급하다.
“후우…. 그래. 이선. 이건 확실히 대박 건수야.”
“대박 건수? 그런데 표정이 왜 그래?”
사실 이전에도 브랜든의 저런 떨떠름한 얼굴은 몇 번 본 적 있다.
녀석은 북한의 미친 과학자나 국적 불명의 온갖 아시아 요소를 섞어 둔 대머리 찻집 주인의 배역을 두고 저런 얼굴을 했었다. 설마 그보다 더한 것이 있단 말이야? 나는 말해 보라는 듯 고개를 까딱했다.
한참을 망설이던 브랜든의 말이 이어진 건, 마치 선언 같은 한숨과 함께였다.
“……데이비드 밀러의 새 작품 오디션이거든.”
나는 멍하게 눈을 끔벅이며 브랜든이 말한 이름을 머릿속에서 찾아 헤맸다.
사실 헤맬 필요조차 없기는 했다. 이 할리우드에서 데이비드 밀러라는 이름을 가진 감독은 단 한 명이니 말이다.
“밀러?”
“그래, 밀러.”
“내가 아는 그 데이비드 밀러? 너 지금 내가 아는 그 데이비드 밀러를 말하는 거야, 설마?”
“어.”
사람은 너무 놀라면 순간 말문이 막힌다. 바로 지금처럼!
몇 초간 멍하게 있던 나는, 곧이어 소파에서 튀어 오르듯 벌떡 일어났다.
“그런 오디션 자리가 나한테까지 돌아왔다고? 와, 뭔데? 단역? 설마 조연? 아니, 단역이 어디야! 젠장!”
“단역도, 조연도 아니야.”
그럼, 까메오? 나는 맹세하건대 그 마지막 가정에도 전혀 실망하지 않았다. 하지만 묘한 얼굴을 한 브랜든은 더욱 믿을 수 없는 말을 이어 갔다.
“주연이야.”
“거짓말하지 마!”
“그, 저기, 이선-”
“아니 그냥 더 해라. 대체 무슨 소리야 그게! ……야. 너 내가 아무리 요새 안 풀린다고 해도 이런 장난은 치면 안 돼. 전혀 위로가 안 된다고. 웃기지도 않고.”
“장난 아냐. 진짜야.”
이렇게 심장이 빠르게 뛰는 게 얼마 만일까. 아니, 뛰다 못해 왠지 숨이 막힐 지경이다.
“근데 왜 그렇게 우중충하게 말하는데?”
“이미 출연 확정인 새끼 때문에.”
이미 출연 확정인 ‘새끼’?
우리는 저 비뚜름한 표현에 집중해야 한다.
나는 브랜든을 잘 안다. 녀석은 웬만해서 일을 가리라고 하는 녀석도 아니고, 같은 배우를 저렇게 말하는 일은 웬만해서 잘 없다. 오히려 녀석은 그 둥그런 얼굴과는 다르게 깜짝 놀랄 정도로 신중해서 이 살벌한 동네에서 안 좋게 말하는 사람 하나 없다.
애초에 입에 풀칠은 하고 사는 것도 에이전시의 후광은 둘째 치고 나를 담당하는 브랜든 때문이다. 나는 왠지 심란한 눈을 한 녀석을 물끄러미 보다가, 이윽고 조금 전까지 이상할 정도로 힘주어 욕하던 대상까지 생각이 미쳤다.
“……어…….”
“…….”
“설마?”
“……그 설마.”
내 일에 나보다 더 화를 내 주는 녀석의 모습은 새삼스럽지 않지만, 왠지 오늘 온종일 스펜서를 씹는다 했지! 브랜든은 아마 내가 나중에라도 욱해서 션 스펜서를 고소할까 싶어 몇 번이나 힘주어 의중을 떠본 걸 거다.
나는 흐린 쌍꺼풀이 진 눈을 살살 굴리며 내 눈치를 보는 녀석을 알면서도 괜히 심각한 얼굴을 했다. 뭐 물론 탁월한 배우는 아닌지라, 1분도 못 가고 비실비실 올라가는 입꼬리를 감추지 못하다가 낄낄대는 웃음을 터트려 버리기는 했지만 말이다.
“웃음이 나오냐, 넌! 야. 그리고 그렇게 웃지 말랬지. 진짜 없어 보인다고!”
“왜 웃기잖아. 그렇게 어디 나오는지도 모르겠다고 무시한 무명 녀석이랑 같은 영화에 출연할지도 모른다니.”
“오디션부터 통과하고 봐야지! 통과하고 나서도 뭐 쉽게 풀리는 일이 있는 줄 알아? 촬영 들어가기 전까지 꽉 잡고 버텨야 한다고!”
브랜든이 뭐라고 하든 말든 한없이 경박한 웃음소리를 키우던 나는 소파에 벌렁 드러누운 채로 데굴데굴 굴렀다.
“아, 이제 너 없이 어떡하냐.”
“망할! 애인한테도 못 들은 말을 너한테 먼저 듣기는 싫거든?!”
하하, 브랜든 녀석이 던지는 쿠션을 낚아채 잡는 것쯤은 이제 이골이 났단 말이지.
* * *
아. 호텔 몽타주 베벌리 힐스!
설마하니 죽기 전에 이 땅값 비싼 곳에서 하루를 보낼 수 있을 줄은 몰랐다. 나는 마치 구름 위에 누운 듯 푹신한 침대에 몸을 맡기며 느긋하게 늘어졌다. 사실 호텔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노인네가 잠도 없다며 내심 데이비드 밀러가 지정한 시간대를 조금은 욕하기도 했었다.
아홉 시 반이라니, 아직 목이 풀리기도 전에 무작정 오디션을 본다는 건 아무래도 꽤 부담스럽다. 하지만 보시다시피 그런 초조함 섞인 불평은 호텔에 발을 내딛는 순간부터 완전히 녹아 사라졌다.
이런 곳에서 오디션 일정을 잡은 노인네 만세다.
밖으로는 휘황찬란한 명품 스트릿이, 안으로는 흠 하나 없이 빛나는 객실에 저 멀리 할리우드 사인이 보이는 전망이라니 이건 평생 기억해도 모자랄 순간이다.
나는 룸서비스로 와인을 시켜 홀짝이면서 음악을 크게 틀었다.
브랜든은 ‘이선 박의 컨디션 조절을 위해’라는, 시답지도 않은 이유로 덩달아 방을 잡고 애인인 크리스티나를 부른다고 했다. 뭐, 그런 브랜든을 말릴 이유가 뭐가 있겠나? 바커에게 걸려 욕을 먹는 건 브랜든이지 내가 아니다.
그리고 할리우드에서 온갖 굵직한 배우들을 데리고 있는 매니지먼트계의 큰손 다니엘 바커 정도 되면 카드 고지서에 고급 호텔 방 두 개와 약간의 룸서비스 가격이 추가되는 정도는 우스운 일일 것이다.
애초에 카드 고지서 종이를 직접 챙기지도 않을 테니 이런 작은 횡령 아닌 횡령을 알 리도 없겠지만.
“흠. 그래도 둘이서 벌써 재미 보게 하는 건 짜증 나는 일이지.”
나는 일 년 전부터 울적한 솔로로 귀환한 차였다.
어디 그뿐인가. 오늘 밤 내내 오디션을 머리로 그리며 바짝 긴장한 채로 덜덜 떨고 있을 예정이기까지 하다. 이런 상황에서 브랜든 혼자 신나는 건 역시 속이 뒤틀린다. 적어도 나와 한 시간 정도는 술친구를 해 주는 것이 도리다.
설마 벌써부터 포르노를 찍고 있는 건 아니겠지?
나는 브랜든이 문자 한 그의 객실로 와인병을 들고 발걸음을 옮겼다.
저절로 낄낄대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그렇게 기분 좋던 나의 표정은 얼마 안 가 비뚜름하게 일그러졌다.
“브랜든 우드. 이 개자식.”
녀석이 묵는 방은 누가 봐도 내 객실보다 훨씬 더, 몇 배는 더 좋고 넓은 곳이었다.
이곳의 뷰는 반짝이는 할리우드 사인이 다가 아닐 것이 분명하다. 나는 나무결이 고상하게 살아 있는 그 거대한 문 앞에 서서 헛웃음을 흘렸다.
이 양심도 없는 새끼.
브랜든은 이 기회에 크리스티나 앞에서 제대로 목에 힘을 줄 생각임이 분명했다.
나는 기세 좋게 문을 두드렸다. 브랜든 이 녀석. 한 시간 술친구로는 모자라다. 적어도 두 시간은 나와 노닥거려 줘야 한다. 분명 녀석은 나중에 카드를 반납하며 나를 팔아먹을 것이 분명하니, 이 정도는 얻어야 수지가 맞다.
정말 그때까지만 해도 난 이 엄청난 호화 객실에서 연인과 달콤한 분위기를 잡고 있을 브랜든에게 따질 기운이 넘쳤다. 하지만 돌이켜 보면, 그 든든한 기세는 얼마 안 가 열린 문 안의 사내 앞에서 꽤 우스꽝스럽게 보였을 것이 분명하다.
“…….”
“…어….”
나는 새파란 눈동자가 상황을 파악하려는 듯 천천히 커졌다가 이내 의문과 신경질적인 예민함을 동시에 품고 구겨지는 순간을 멍하게 지켜보았다.
그는 심지어 그마저도 참 ‘배우다웠다’.
“대체 뭐야?”
아마도 내게는 없을 천부적인 무언가를 가지고 있을 남자는 다름 아닌 지난주 브랜든과 함께 그렇게나 흉을 봤던 션 스펜서였다. 나는 멍하게 입만 뻐끔거리다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실로 합당한 방문 목적을 쏟아 내었다.
“저-어는, 그, 브랜든- 그러니까 제 매니저를 보러. 여기는 일이 있어서… 요.”
“일? 여기서?”
말이 되는 소리를 하라는 듯한 얼굴이었다.
그래, 일반적으로는 맞는 말이다.
베벌리 힐스 중심에 있는 최고급 호텔에서 오디션이라. 이곳은 내로라하는 스타들이 만나거나 종종 프리미어 행사를 진행하기는 했었어도, 별 이름 없는 배우의 오디션을 볼 만한 장소로 얼른 꼽히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 영화의 감독이 데이비드 밀러이고 션 스펜서가 주연을 맡을 예정이라면 사정이 달라진다. 이런 엄청난 규모의 일에 참여해 본 적이 없어서 아직 감조차 오지 않지만, 그들의 영화를 볼 때마다 앞에 6대 스튜디오가 안 붙은 걸 본 적이 없다. 제작이며 배급이며 휘황찬란할 게 분명하다.
그런 영화의 오디션이라면 어디서 진행되어도 놀랍지 않다.
흔히 하던 것처럼 영상 통화로 진행하는 거든, 이런 번쩍이는 호텔이든 뭐 장소가 문제겠나?
망할 브랜든 우드! 스펜서와의 자리를 마련해 뒀으면 미리 언질을 줘야 할 거 아닌가.
될지 안 될지 모를 오디션으로 자꾸 마음이 저만치 떠올라 있어서 그렇지 않아도 심란한데, 저 남자가 확정 주연인 영화에 아마도 이름뿐인 주연일 배역을 두고 오디션을 보러 왔다고 말하는 건 사라진 자존심마저 다시 머리를 들게 하는 일이다.
-감독이나 배우나 둘 다 이 호텔 한번 끔찍하게 좋아하는군! 나는 속으로 혀를 차면서 일부러 시큰둥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뭐, 듣도 보도 못한 배우의 볼일 같은 걸 잘나신 분께서 알 게 뭐랍니까.”
“……보기보다 성격 있군.”
“지금 누가 누구한테 성격 운운하는 건지! 댁이요?”
“듣던 거랑은 여전히 꽤 달라서 말이야.”
이번에 인상을 쓰게 된 건 내 쪽이다.
사실 나 역시 궁금한 게 많았다.
하지만 너무 많은 질문이 머리를 떠돌아서 그중에 뭘 꺼내야 할지 얼른 감이 오지 않았다. 이미 경찰 조사까지 한 번 받은 판국에 괜히 긁어 부스럼을 만드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없잖았다.
간신히 버티는 삶을 오래 보내다 보면 위험한 것을 잘 알아보게 되는 법이다.
네스와는 알고 지냈던 건지, 어쩌다 ‘그런’ 혐의로 경찰서에 가게 되었는지… 물어볼 건 많지만 나 역시 그와 같은 이유로 경찰과 마주 앉았던 주제에 어쭙잖은 정의감은 위험하다.
게다가 친구였다는 사실조차 부담스러워질 만큼 상한가를 달리던 네스 녀석이라면 션 스펜서와 안면을 트는 게 놀라울 일도 아니고 말이다.
…듣던 것과 다르다는 말은… 설마 정말 네스가 나에 대해 뭐라고 했다는 뜻일까?
젠장. 녀석을 떠올리자 괜히 속이 일렁거렸다. 나는 짧은 한숨과 함께 툭 받아쳤다.
“제 매니저는 어딨습니까.”
“그걸 왜 여기 와서 묻지?”
사실 평소 같았으면 금방 눈치챘을 일이었다.
그제야 뭔가 잘못됐다는 걸 깨달은 나는, 머쓱한 표정을 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하지만 객실에 두고 나온 건지 휴대폰 대신 구겨진 영수증과 민트사탕 껍질 소리만 요란하게 났다.
그래. 아무리 브랜든이 배짱이 두둑하다고 한들, 이런 말도 안 되는 객실을 턱하고 빌렸을 리는 없는데.
“죄송합니다. 방을 잘못 찾았나 봅-”
“……망할.”
어머나. 션 스펜서가 방금 ‘망할’이라고 했다.
나는 욕마저 우아하게 내뱉는 남자의 목소리에 말이 끊긴 채로 눈을 끔벅였다. 하지만 스펜서는 내가 아닌 저쪽 호텔 복도 너머를 노려보고 있을 뿐이다.
“잠깐 좀 돕지.”
“네?”
“사례는 할 테니까. 대충 맞춰.”
“뭘 말이에요?” 같은 질문은 차마 입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솔직히 이제껏 살며 체격이나 힘으로 크게 밀려 본 적 없는 나는, 순간적으로 익숙하지 않은 악력에 끌려 얼결에 그의 스위트룸으로 튕겨 들어갔다. 솔직히 그 순간마저 방이 근사하다는 얼빠진 생각부터 했더란다.
그다음으로는 급하게 셔츠를 벗어 던지고 나를 품에 끌어안은 남자의 근육 가득한 몸을 눈으로 훑으며 저도 모르게 이열, 하는 좀 저속한 탄성을 내지 않을 수 없었고 말이다.
……그래. 이건 다시 말해 상황에 대한 당혹은 지극히 1차원적인 두 감탄 이후에나 밀려왔다는 뜻이다.
내가 원래 한 세속적임 한다.
“뭐, 뭐 하는 겁니까!”
“쉿.”
귓가로 ‘쉿’ 같은 거 할 사이 아닐 텐데!
나는 숨결까지 가까워진 남자의 온기에 뒤늦은 소름이 싸악 올라왔다. 하지만 내 질문에 답해 준 사람은 따로 있었다.
“맙소사, 스펜서 씨!”
밀쳐 내려는 힘을 가볍게 무시한 채 더욱 단단히 끌어안은 남자가 내 목덜미에 코를 박는 순간 이 거창한 스위트룸의 문을 열고 들어온 남자가 그 주인공이다.
“이번에는 또 누구랍니까! 어디의 순진한 도련님을 꼬셨어요?”
“어떻게 생각해, 자기?”
난 성소수자에 별 편견이 없다.
다른 곳도 아니고 캘리포니아에서 이들을 못 견뎌 한다면 살아가기 좀 힘든 게 아닐 거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한들 조금 전까진 날 벌레 보듯 하던 남자가 별안간 달짝지근한 시선과 미소를 건 채로 ‘자기’ 같은 애칭으로 부르는 건 아무리 상상력이 좋아도 예상하기 힘든 일이다.
남자가 조금 전 급히 덧붙였던 말이 순간 머리를 스쳐 지나가지만 않았어도 나는 목청껏 무슨 미친 소리냐고 따졌을 거다.
‘사례’!
스펜서 도련님의 사례라니 실로 궁금하지 않는가.
다시 말하는데 나는 세속적인 인간이다. 속물이라고까지 하면 좀 슬플 테니 여기까지만 하자.
“……글쎄. 순진한 거랑은 거리가 멀 텐데?”
솔직히 션 스펜서는 내가 이렇게까지 맞춰 줄 몰랐던 것 같다.
언제나 모두의 머리 위에 있는 것처럼 굴던 남자는, 내가 샐쭉 눈을 접어 웃으며 받아친 말에 처음으로 조금 놀란 듯한 얼굴을 하다가 머잖아 입술을 꽉 오므렸다.
밀착한 몸을 보란 듯이 기대자 스펜서의 직원으로 보이는 양복쟁이의 표정이 떨떠름해졌다. 심지어 나를 향한 귀여운 폭언마저 이어 갔다.
“병은 안 옮기는 사람 맞습니까?”
“하하. 짓궂기도 하시지. 같이 하실래요? 3P?”
그 잘나간다는 배우에게서 기어코 NG를 뽑아냈을 때의 희열이란!
아, 지금처럼 내 직업에 자긍심이 생기는 순간이 또 없다.
나는 스펜서가 잘 꾸며 낸 근사한 얼굴 대신 터져 나오는 웃음을 기어코 작게 흘리는 걸 들으며 거만하게 눈썹을 까딱했다. 그는 가까이 있는 나만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작게 숨을 들이 삼키고 심호흡하더니, 간신히 입을 열었다.
“후우…, 걱정하지 말라고. 제임스. 신원은 확실한 사람이니까.”
“그렇다면야 어쩔 수 없지만요. 내일 일정 진행하시기 전에 간단히 보셔야 할 서류들이 있어서요. 몇 가지만 간단하게 말씀드리고 가겠습니다.”
제임스라고 불린 남자는 여전히 나를 세균 덩어리로 보는 눈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지금 같은 상황이 제법 익숙한 모양인지 사내 둘이 뒹구는 모양새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은 채 들고 온 가방에서 서류며 태블릿을 꺼내 들었다.
이것만 그럴듯하게 잘 넘기면 된다는 거겠지.
나는 저도 모르게 자꾸 힘이 들어가는 어깨에서 긴장을 풀려고 노력하며 스펜서의 허벅지 위에 자연스레 손을 얹었다.
“…….”
그런데 앗차차. 그게 실수였을 줄이야.
나는 손바닥 아래로 느껴지는 그…… 어떤…… 부피감에 눈을 끔벅였다.
이건 불가피한 일이다. 하늘에 맹세하건대 난 사춘기를 지난 이후부터는 쭉 ‘왼쪽 선호’였다. 오른쪽은 왠지 좀 불편하단 말이다. 애인인 척해 보라고 해서 그냥 손만 얹었을 뿐인데, 그게 여기 있을 줄 내가 알았겠나.
‘떼.’
아니, 야! 사고라고. 나라고 기분이 좋을 리가 있냐!
하지만 내가 그러거나 말거나, 조금 전까지 웃음기를 머금고 있던 새파란 눈동자는 어느새 순식간에 싸늘하게 식은 채다. 아주 눈만으로도 쌍욕이 느껴지는 걸 보니 거참 대단한 배우시다!
참 내, 어이가 없어서 정말. 본인도 웃옷을 홀딱 벗고 대뜸 나를 끌어안고 있으면서 나한테만 신경질 내는 인성이라니. 먼저 맞춰 달라고 한 건 이쪽이다.
나는 사례 앞에서는 언제나 최선을 다하는 성실한 인간이었을 뿐이다.
살면서 얻어맞은 걸 돌려줄 기회가 별로 없던 소시민이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내일 아침에는 스튜디오 사람들과 미팅이 있습니다. 참석하시기 전에 꼭 오늘은 이걸 읽어보시고요. 또-”
뿐만 아니라, 낯선 사람 앞에서는 키스조차도 어려워하는 보수적인 면이 있는 남자였다는 것도 꼭 덧붙여 말하고 싶다. 내 32년 한평생 여자만 만나 온 이성애자가 분명하고 말이다.
내가 이렇게 누누이 설명을 늘어놓는 걸 자기방어라고 비웃어도 어쩔 수 없다.
하지만 나는 이 순간 내게 엿 먹인 남자가 조금은 ‘좆같은’ 기분을 느꼈으면 하는 마음이 아주 조금 더 컸으니.
“자기, 션?”
“……어. 내 사랑.”
바득바득 잇새로 애칭을 토해 내는 남자를 놀려 먹는 건 감히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재미있다. 나는 남자의 무릎까지 나른하게 손을 움직였다가 이윽고 손가락 끝만 이용해서 단단한 근육을 타고 올라왔다.
몸은 개인의 평소 습관을 모두 말해 주는 거울이다.
꽉 맞닿은 그의 육체는 평소 근육 하나하나를 섬세하게 갈고닦아 왔는지 알려 주는 것은 물론이고, 늘어지고 구부정한 자세보다 어깨를 꼿꼿하게 펴고 허리를 바로 세운 긴장감이 더 편안할 거라는 일상까지 귀띔해 준다.
그 찬란한 몸을 한껏 손으로 그리고 만지며 기대고 있자니, 이를 박박 가는 션의 말이 이어진다.
“원래 이렇게… 자유분방한 편인가?”
“하하, 순진한 거랑 거리가 멀다고 했잖아. 왜, 싫어? 그만할까?”
“그럴 리가.”
아무리 살벌한 시선으로 노려봐 봤자 지금 션 스펜서는 내 손아귀에 떨어진 6.3피트의-192cm- 거대한 초식동물이나 다름없다.
나는 양복쟁이가 잠시 고개를 돌리 사이, 내가 들어도 조금 비열하게 들리는 목소리로 킬킬대며 속삭였다.
“이야. 이거 스테로이드 쓴 거 아니지?”
“…닥쳐….”
“왜. 몸 좋다는 소린데, 자기야.”
솔직히 난 꽤 오랜 시간 스스로의 피지컬에 콤플렉스가 있었다.
그건 혈혈단신으로 LA에 이사 온 다음 하는 일마다 개고생만 하며 구르다, 어느 순간 빠진 약에 그나마도 하던 운동을 내던지고 더욱 말라 비틀어졌던 때부터 시작된 것이니 못해도 5년은 된 오랜 열등감이다.
할리우드에서 아시안 남자에게 가장 많이 떨어지는 신비로운 무도가 어쩌고 하는 배역을 위해 죽기 살기로 몸을 만든 지금도, 골격 자체가 딱 벌어지게 잡힌 사람을 볼 때마다 내심 부러운 건 어쩔 수 없다.
그래, 좀 더 솔직히 인정하자면- 션 스펜서 이 남자 같은 체형은 딱 내 이상 그 자체다.
나는 아예 근육이 단단히 자리 잡다 못해 손에 잘 잡히지도 않을 정도로 탄탄해진 가슴부터 보기 좋게 쪼개진 복근까지, 꼭 무언가의 교과서처럼 다듬어진 남자의 몸을 한껏 의도를 품어 더듬었다.
그건 정말 이상한 느낌이었다.
단단한 근육은 부드럽지만 손에 꽉 차서 감기지는 않았고, 오히려 단단한 결을 따라 미끄러지게 했다.
“아. 그리고 어제 보내드린 메일은 검토하셨습니까? 잊지 말고 꼭 확인하고 가셔야 합니다. 또….”
“…….”
“…….”
“…어….”
영원히 떠들 것 같던 제임스인가 뭔가 하는 뿔테안경의 목소리가 점점 줄어들기 시작했다. 저자가 얼이 빠진 이유야 뻔하다.
지금 션 스펜서는 목덜미는 물론이고 얼굴과 귀 끝까지 벌겋게 된 채로 나와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입술만 꾹 깨물고 있다. 셔츠라도 걸치고 있으면 티가 덜 날 텐데, 아주 자진해서 벗어 던진 터라 내가 손을 댄 곳마다 울긋불긋 열이 오른 게 훤히 보인다.
“…스펜서… 씨?”
나는 보면서도 믿기지 않는다는 목소리로 되묻는 양복쟁이 쪽으로 샐쭉 눈을 접어 웃어 주었다. 단단한 어깨에 머리를 기대자 간신히 이어 가던 숨마저 크게 들이켠 상태 그대로 얼어 버린 것이 느껴졌다.
아니, 수습하려고 한 행동일 뿐인데 이건 너무 순진한 반응 아닌가.
비단 그걸 눈치챈 건 나뿐만이 아닐 거다. 지켜보고 있는 저 양복쟁이는 물론이고 스펜서 본인도 주먹 위로 하얀 뼈가 그려 보일 정도로 주먹을 세게 움켜쥐었으니 말이다.
아무리 내가 보란 듯이 추근댄다고 한들 애초에 먼저 가볍게 끌어안았던 것처럼 반대로 쉽게 밀어 떼어 내기만 하면 되는데 이렇게까지 어쩔 줄 몰라 하면 아주 조금은 미안해진다.
뭐, 그렇다고 해서 이 뜻밖의 재미를 그 얄팍한 연민에 포기했다는 뜻은 아니다.
“어어, 흠, 크흠, 그럼 가겠습니다, 스펜서 씨! 나머지는 제가, 어, 메일, 그래요! 메일로 보내 놓겠습니다!”
일부러 귓가로 더운 숨을 흘리면서 더욱 노골적으로 허벅지를 쓸어 올리는 순간의 재미를 어떻게 모르는 척하겠나.
이 성격 나쁜 남자가 느긋한 척하려고 발버둥 치던 마지막 노력을 산산조각 낼 때의 희열이란!
나는 허둥지둥 도망치듯 서류와 가방을 한 번에 끌어안는 불쌍한 제임스 씨에게 가볍게 손을 저어 주었다. “조, 좋, 좋은 밤 되시기를!” 하고 덧붙이는 마지막 외침이 조금 갈라져 있었던 것으로 보아, 산전수전 다 겪은 듯한 저 남자에게도 이 상황은 당혹스러운 것이 분명하다.
물론, 쾅하고 스위트룸의 문이 닫히자마자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는 듯 몸서리치며 자신의 셔츠부터 주워 움켜쥐는 션 스펜서 역시 그 증거다.
이건 뭐 웃음이 안 터지려야 안 터질 수가 없다!
“으하하핫! 하, 하하핫!”
“-너!”
“남자 여자 안 가리고 뒹구는 희대의- 뭐라더라? 그거 진짜이긴 하나?”
스펜서는 내 질문에 대한 대답 대신 솟구치는 짜증과 기타 등등의 온갖 감정을 숨기지 않는 목소리로 외쳐 물었다.
“너, 너…… 게이야?!”
“아니. 그래도 그쪽 정도면 해 볼 만했지!”
살면서 할리우드 스타와 호텔에서 어쩌고 하는 상황의 주인공이 되는 기회가 내게 올 줄이야.
그게 글래머러스한 여자가 아닌 동성인 사내라는 건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지만- 어쨌거나 지금 제일 잘나가는 유명인사로는 첫손가락에 꼽히는 사람이니, 살며 딱 한 번 있을 만한 이색적인 경험으로는 뭐 나쁘지 않은 것 같다.
“이봐, 도련님. 키스는 해 보셨나요?”
“닥쳐!”
“이걸로 비긴 겁니다?”
잠시나마 내일의 긴장감을 잊고 거 스릴 넘치는 장난을 즐겼다.
나는 여전히 발갛게 상기된 뺨으로 노려보는 스펜서를 향해 히죽 웃으며 상쾌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물론, 내가 가지고 싶은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있는 남자를 마지막으로 놀려 먹는 것도 잊지 않은 채였다.
“아. 아니다. 제가 손해 보는 것 같은데요. 미스터 스펜서, 말씀하신 사례는 뭐로….”
션 스펜서는 뭐라고 하는지도 알 수 없는 소리를 내며 나를 자신의 방에서 몰아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