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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to be, or not to be, that is the question (4/21)

2. to be, or not to be, that is the question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미시간의 미친 자매 이야기를 들어 본 적 있는가?

그들은 디트로이트 한인 사회에서 꽤나 그 악명이 자자한 괴인들로, 한인 교회를 모두 적으로 돌리고 유유히 그녀들의 길을 가는 것으로 유명하다. 하다못해 심지어는 세탁소 앞에 시뻘건 글씨로 ‘한국인 사절’을 붙여 놓고 장사하다가 경찰 신고도 몇 번 받았을 정도니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사방을 전쟁터로 만들며 살아가는 자매이지만, 그나마 다행인 건 자매 중 둘째의 남편이 늘 스마일을 걸고 사는 스윗한 남자인 데다 누구보다 좋은 인맥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 정도일까?

이쯤 되면 내가 왜 이들의 이야기를 꿰고 있는지 눈치챘을지도 모른다.

그렇다, 그 미친 자매는 내 어머니와 이모의 이야기이다.

나는 귀가 찢어질 듯 높게 들리는 웃음소리에 미간을 찌푸리며 수화기를 멀리했다. ‘깔깔깔’을 웃음소리로 옮긴다면 딱 우리 이모의 웃음소리일 거다.

-얘. 션 스펜서 사인은 받았지?

“……사인은 무슨.”

-안 받았어? 당장 받아! 우선 옆집 장 씨 이름으로 하나 받고, 그다음에는….

“이모. 저 지금 나가 봐야 돼요. 사랑해요.”

-어머! 얘! 박이선!

내 가족들은 지구상에서 이선 박의 캐스팅 소식을 가장 기뻐한 사람일 것이 분명하다.

좀 더 정확히는, 그들은 기뻐하다 못해 정말 내 배우인생에서 이제껏 본 적 없는 폭발적인 반응으로 화답했다.

아무래도 배우 본인이 투영된 배역인 터라 널리 알려져서 좋을 것 없는 내 과거나 가족의 프라이버시가 다뤄질 수도 있는데 괜찮겠냐고 물어봤다가 “지금 네가 그런 거 가릴 때야?! 감사합니다, 하고 무조건 맡아!” 하고 욕만 얻어먹었다. 냉정하기도 해라.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안타깝게도 나는 그들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할 예정이다.

어쩌면 가족뿐만 아니라 그 누구의 만족도 힘들지도 모른다.

영화 촬영 준비가 삐걱이고 있냐고? 아니, 그건 순조롭다 못해 마치 쾌속선을 탄 것처럼 신속하기까지 해서 하루하루 정신없을 지경이다.

모든 문제는 그저 온전히 내게 있다.

나는 입을 다물다 못해 숨소리까지 죽이고 눈알만 빙그르르 돌렸다.

정사각형으로 짜여진 테이블은 사람들의 표정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고 볼 수 있게 해 준다. 이곳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앉아 있다. 영화사의 직원들은 물론이고, 조연으로 캐스팅된 초면인 배우들…….

그리고 션 스펜서와 데이비드 밀러까지.

이 수많은 이들이 지금 침묵하고 있는 이유는 하나다.

보안 때문에 교집합끼리 몇 번이나 팀을 나눠 진행하는 대본 리딩 현장에서, 데이비드 밀러가 내 대사가 끝나기가 무섭게 손을 까닥거렸기 때문이다.

나는 그 나긋한 손짓이 마치 지옥의 인사처럼 느껴졌더랬다. ‘연습도 실전처럼’. 밀러의 철학을 따르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했는데!

“……흠. 잠시 쉬었다가 할까.”

시간이 돈인 할리우드에서 저보다 더 무서운 말이 있을까.

나는 속으로 온갖 욕을 쏟아 내며 테이블에 있던 모자를 깊게 눌러썼다.

화기애애하던 분위기에 몇 번이고 찬물을 끼얹은 나에게 편안한 휴식은 사치다.

내가 이곳에서 제대로 된 첫 숨을 토해 낸 건 기지개를 켜거나 커피를 홀짝이는 사람들의 틈바구니를 어색하게 빠져나와 어둡고 으슥한 비상계단에 도착했을 때였다.

“…….”

안 되는 날은 뭐든 안 된다고 하더니.

기껏 도망쳐 나온 곳에는 미처 눈치채지 못한 관객 하나가 먼저 자리 잡고 있었다.

나는 벽에 기대서 있는 그의 존재를 눈치채자마자 곧바로 발길을 돌려 나가려다가, 별달리 갈 곳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대로 푹 주저앉았다. 콘크리트 위로 올라오는 한기가 서늘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속을 콕콕 찌르는 건 바로 망할 파트너의 시선이었다.

“대체 뭐가 문제일까.”

고작 몇 분이었겠지만 마치 몇 시간처럼 느껴졌던 침묵을 먼저 깬 건 션 스펜서였다.

나직한 목소리가 조금 잠긴 것처럼 들린다. 나는 슬쩍 고개를 들어 스펜서를 올려다보았다가 장난기 없는 그의 얼굴에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네?”

“갈수록 엉망이 되는 이유가 있을 거 아냐.”

“엉망이라니, 말 좀 좋게 하시죠!”

“그럼 오디션 땐 얻어걸린 건가?”

“그래요!”

나는 악에 받친 채 소리 질렀다.

오디션, 오디션, 망할 오디션!

그건 만년 무명의 이류 이선 박의 이름이 틀린 철자로나마 굵직한 영화계 사이트에 실리게 해 준, 하늘이 준 기회였다.

그때처럼 하면 된다고?

젠장, 말이야 쉽다. 밀러 감독이나 스펜서나 그 순간의 무엇에 그렇게 꽂혔는지는 모르겠지만 찰나의 연기와 완전히 한 작품에 빠져드는 건 완전히 다른 문제다.

차라리 정말 ‘제대로 된’ 배역을 던져 줬으면 이렇게 끙끙 앓을 필요도 없었을 거다.

하지만 이 망할 영화의 주인공은 마치 거울에 비춘 듯 나를 완전히 흉내 내고 있다. 한때 마음속 으슥한 이야기까지 모두 알고 있는 녀석이 쓴 각본이니 오죽할까!

내가 연기하는 ‘나’는 대체 어떤 모습을 해야 적당한 선인지 알 수가 없다.

[이선]은 내 모습을 하고 있지만, 이건 다큐멘터리가 아니다. 실제의 나와 가상의 이야기 사이의 경계에서 줄타기해야 한다.

스펜서의 시선이 옅게 떨리기까지 하는 내 손에 꽂힌 것을 눈치챈 나는, 그것을 황급히 주먹 쥐어 감추면서 애써 억누른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젠장. 당신처럼 영화 한 편 망해 본 적 없는 사람은 모를 거라고요.”

“그래, 맞아.”

“…….”

“앞으로도 마찬가지겠지. 난 이번에도 새 흥행작을 추가할 거거든.”

뻔뻔하기 그지없는 확언에 심기가 뒤틀린 나는, 뭐라고 퉁명스레 대꾸하려고 했다. 하지만 스펜서는 그런 나보다 앞서 선수를 쳤다.

“그런데 지금 아주 심각한 변수가 생긴 거고.”

와. 씨!

정말 뼛속까지 재수 없는 남자다!

“모, 몰입할 시간이 필요하다고요.”

“여기가 어디라고 생각해?”

나도 안다.

할리우드에서는 저렇게 한가하게 여유 부릴 시간 따위 없다. 시간은 돈이다. 투자자들은 그럴듯한 유명 대표작 하나 없는 2류 배우에게 절대 돈을 투자하지 않는다. 말문이 턱 막힌 나는 입을 꾹 다물고 그를 노려보았다.

애꿎은 화풀이 상대라는 걸 알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죽을 것만 같았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상대는 내 분노 따위에는 움츠러들기는커녕 오히려 코웃음 치는 남자였다.

“일생일대의 기회라고. 분발해.”

“거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얘기를 참 쉽게 하시네요!”

나는 벽에 머리를 박고 괴성을 내질렀다.

결국 그날 하루는 그 괴성만큼 최악으로 마무리된 건 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다.

밀러 감독은 내 차례가 될 때마다 몇 번이고 신통치 않은 표정으로 리딩을 중단시켰다. 물론 난 그때마다 정말 딱 미쳐 죽고 싶은 심정이었고 말이다.

차라리 반대였으면 더 나았을까?

왜, 션……, 아니, [S]가 사랑했던 마음을, [E]가 그 기억을 가지는 식이면 어쨌거나 뭇 사람들이 기대하는 것처럼 달짝지근한 미남을 스크린에 담을 수 있을 것 아닌가.

애초에 더 팔리기도 할 텐데. 그 대상이 나라는 건 꽤 끔찍하지만 말이다.

나는 차마 다른 사람에게는 하지 못하는 한탄을 속으로 곱씹으며 매일매일 조금씩 찢겨 나갔다.

하지만 사건은 얼마 안 가 터졌다.

일주일 뒤 있던 리딩 현장에서 드디어 최후통첩과도 같은 중얼거림이 떨어지고 만 거다.

“이거, 이거. 안 되겠군.”

밀러 감독의 그 말을 듣는 순간 수명이 한 10년은 줄었을 거다.

누군가 긴장한 숨을 삼키는 소리마저 생생하게 들린다.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난 데이비드 밀러가 왜 그렇게 적이 많은 감독인지 알지 못했더랬다. 오히려 ‘소문보다 훨씬 더 젠틀한걸. 거 죄다 헛소문이로구만!’ 하고 혹자들을 탓하기까지 했었다.

“두 사람 다 잠시 이쪽으로.”

학교를 언제 졸업했는지 그 햇수도 가물가물하건만 밀러의 말 한마디에 순식간에 혼날 것을 앞둔 고등학생이 된 나는, 긴장한 눈으로 감독의 뒤를 따랐다.

숨죽인 이들의 시선이 동시에 꽂히는 탓에 등 뒤가 따끔따끔했다.

밀러 감독은 사람들과는 한참을 떨어진 회의실로 나와 내 망할 파트너를 함께 데리고 갔다. 이번에는 오디션 때와는 달리 그들과 함께 나란히 앉을 수 있었지만, 동등한 느낌이라고는 전혀 없었다.

이 공간에서 밀러 감독과 ‘정말’ 나란히 앉은 건 분하게도 여전히 스펜서뿐이었다.

“대체 뭐가 문제지, 이선?”

나는 살면서 이미 몇 번이나 들은 적 있는 질문 앞에 다시 한번 내동댕이쳐졌다. 밀러 감독의 회색 눈동자가 순간 번득인 건 착각이 아닐 것이다.

머릿속에 온갖 변명이 다 휩쓸고 지나갔다. 가장 먼저 떠올린 건 이미 스펜서에게 앞서 지껄인 바 있는 ‘적응할 시간’ 운운하는 핑계였다. 하지만 안 그래도 밑천이 바닥난 상태에서 그 말을 꺼냈다간 이 두 사람이 그렇게나 마음에 들어 했다던 오디션의 순간이 정말 얻어걸린 거라는 걸 확인해 주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나는 머뭇머뭇 말문을 열었다. 그건 그나마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진심과 가장 가까운 대답이었다.

“……사실 잘 모르겠습니다.”

사실 작품 속의 인물들이 [션]과 [이선]의 이름을 하고 있어서 몰입이 잘 안 된다느니 하는 말은 다 헛소리다. 어떻게든 자리 보존을 하고 싶어 발버둥 치는 변명일 뿐이다.

그 사실을 가장 잘 알고 있는 건 나 자신이다.

배우의 실제 성격이나 과거를 따다가 역할을 만드는 건 영화계에서 제법 흔한 일이다. 처음에는 조금 어색하더라도 사실 적응되고 나면 그것만큼 더 편한 건 없을지도 모른다. 심지어 어떤 배우들은 오히려 이쪽을 더 선호한다고도 한다.

젠장. 왜 하필 난 그것에 해당 사항이 없을까.

뜻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는 밀러 앞에서 자꾸 목소리가 작아졌다.

“전 나름대로…, 아니,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서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더 모르겠습니다. 정말 ‘뭐가’ 문제인가요?”

역량 부족을 솔직하게 인정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어느새 질문은 다시 원점이다. 하지만 나는 정말 저들의 도움이 절실했다.

“표정이 문제인가요? 아니면 시선 처리나 대사치는 게 어색합니까?”

“…….”

“그걸 조금만 디렉팅 해 주시면….”

용기 내어 꺼낸 문장의 끝이 어물어물 흐려졌다.

운 좋게 투톱 주연으로 캐스팅되었다고 한들 저들과 서 있는 위치마저 같아진 것이 아님을 잘 안다. 최대한 진솔하게 털어놓은 말이 통하기는 한 건지, 데이비드 밀러는 무언가 깊게 생각하는 표정으로 날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이래저래 부딪히기는 했지만 그래도 꼴에 가장 익숙한 사람이어서였을까.

나는 엉겁결에 도움을 청하듯 스펜서 쪽으로 눈을 굴렸다. 하지만 그는 시선이 마주치자 영 씁쓸한 미소를 걸고 살짝 어깨를 으쓱했을 뿐이다. 저 웃음의 뜻까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 ‘문제’의 이유를 알고 있음은 분명해 보였다. 젠장, 저 남자는 나보다 어떻게 늘 앞설까.

한참을 굳게 닫혀 있던 밀러 감독의 입은 내가 한창 자격지심의 싹을 틔우기 시작했을 때쯤 천천히 열렸다.

“자네 생각보다 굉장히 조심스러운 편이었군?”

“……네?”

“그래. 뭐 그럴 수도 있는 법이지. 내 배려가 부족했네. 부디 용서하게나.”

일순간 밀러 감독의 등 뒤에서 후광이 비쳤다. 긴 구불구불한 회색 머리카락을 느슨하게 묶은 천사가 나를 향해 웃고 있었다. 세상에 이렇게 자애로운 사람은 이 바닥에서 처음이었다. 순간 긴장이 쭉 풀리고 왠지 모르게 눈물이 핑 돌 뻔하기까지 했으니, 내가 받은 감동은 더 설명하지 않아도 될 거다.

망할 <디렉팅>이 떨어지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래. 저렇게까지 말하는데 내 지휘봉을 잡은 의무로서 도움을 주는 것이 맞지. 그렇지 않나, 션?”

환한 미소를 띤 밀러의 화살촉은 이 회의실의 또 다른 배우 션 스펜서를 향해 휙 틀어졌다. 그러자 스펜서는 밀러 감독을 보며 눈썹을 휜 채로 조금 찡그리듯 마주 웃었다.

드물게도 그 역시 감독의 뜻을 파악하지 못한 표정이었다.

“션 스펜서, 그리고 이선 박.”

하얗고 가지런한 치아를 자랑하듯 웃던 밀러 감독은 경건할 정도로 또박또박한 목소리로 그와 내 이름을 입에 담았다.

“자네 둘. 이번 촬영 기간 동안 같이 지내는 건 어떤가?”

매우 친절하고 나긋한 어조로 흘러나온 문장인데도 나는 잠시 고장 난 컴퓨터처럼 눈만 끔벅거렸다. 그건 나와 함께 ‘자네들’로 묶인 션 스펜서 역시 마찬가지였는지 그 역시 입을 다물고 몇 초간 가만히 있었다.

출력할 대사 대신 넋을 놓는 것을 택한 나 대신 먼저 목소리를 키운 건 션 스펜서였다.

“그게 무슨….”

“말하자면 합숙 같은 거지. 보이 스카우트 같은 기분도 내고 말야.”

“데이브, 말도 안 되는 소리 말아요.”

“왜? 어차피 션 자네, 이번 촬영에 맞춰서 일정도 최대한 비워뒀다고 하지 않았나.”

빙글빙글 장난치듯 말하는 밀러 감독의 얼굴은 세상에 저보다 즐거울 수는 없어 보였다.

나는 정답게 애칭까지 불러 가며 이어지는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며 얼른 정신을 차리려고 애썼다. 누구랑 누가? 뭘 해?

“그건- 후우, 장난은 그만 치시죠!”

“난 이게 최고의 디렉팅이라고 생각하네.”

최고의 각성제는 칼자루를 쥔 자의 한 마디였다.

<디렉팅>. 불과 몇 분 전 내가 요청했던 그 빌어먹을 단어에 뒷골이 땅겨 왔다. 사태가 심각해졌다. 나는 흠, 흠, 하고 작게 목을 가다듬었다. 그러자 각자 강렬한 인상을 한 두 사내의 시선이 동시에 나에게 꽂혔다. 왠지 전에도 느껴 본 적 있는 기시감이 드는데….

뭐 여하튼 드디어 나의 마이크가 켜졌다.

“저어, 감독님?”

자애로운 나의 세인트 밀러는 상냥하게 눈을 접어 웃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나는 그 다정함에 용기를 얻어 느리게 말을 이었다.

“만약에 그걸 따르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내 조심스러운 물음에 밀러 감독의 입에서 익숙한 ‘흠’하는 추임새가 흘러나왔다.

엄청난 몸값을 자랑하는 스타들이 먼저 일하고 싶어 안달인 감독. 하지만 그 인기와는 상반되게 영화 한 편이 끝날 때마다 새로운 천적을 만든다는 할리우드 최고의 괴짜 데이비드 밀러.

나는 이제껏 그를 이제껏 얕봐도 너무 얕봤다.

“어차피 대본은 여러 개라네.”

“…네?”

“설마하니 박, 자네의 이름으로만 대본이 있겠나? 하하, 자네 말고도 후보 배우는 많네만.”

데이비드 밀러는 나를 향해 그 여전한 미소를 건 채로 온화하게 쐐기를 박았다.

“만나서 즐거웠네. 그다음은 변호사와 이야기하게나.”

씨발. 빌어먹을 노인네!

“어떻게 할 건가. 박?”

“…제가 어렸을 때부터 보이 스카우트를 동경했다는 얘기를 했었나요?”

“으하하핫! 역시 말이 통하는군!”

비굴하다고 혀를 차지는 말아 줬으면 한다. 난 호쾌하게 웃으며 “그럼 그렇게 알겠네. 오늘은 빨리 끝내자고. 그래야 가서 짐을 쌀 게 아닌가?” 하며 빠져나가는 노감독의 뒤통수를 후려치고 싶은 충동을 참기만도 벅차다.

“미치겠군! 정말 할 생각이야?”

“해야지 그럼 별수 있나요? ‘일생일대의 기회라고. 분발해.’ 라고 말한 사람이 누구였더라.”

특유의 느긋한 말투를 과장해서 흉내 내자 스펜서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하지만 그는 이번에는 빈정대는 것 대신 어떻게든 나를 달래보려는 듯 침착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 갔다.

“차라리 밀러를 같이 설득하는 건 어때.”

“하하! 짤릴 각오를 하고요? 싫은데요! 난 이 영화 반드시 찍어야 합니다. 무슨 짓을 해서라도 찍을 거라고요.”

한 글자 한 글자 힘주어 말할 때마다 스펜서의 한숨이 깊어진다.

그래, 뭐 이해한다. 나도 이 담배 한 개비가 아니었다면 절대 침착한 얼굴을 하지 못했을 거다.

담배는 정말 인간이 만든 최고의 발명품이다.

나는 약과 함께 끊었던 담배를 며칠 전부터 다시 피우기 시작했다. 하루 딱 한 개비, 정확히는 반 개비씩이지만 안 피우고는 견딜 수가 없다.

희뿌연 담배 연기 너머로 잔뜩 인상을 찌푸린 채인 할리우드의 블루칩이라.

그건 참 비현실적인 모습이어서, 나는 그 형형한 눈빛을 무시하고 담배를 태우는 데 집중했다. 그러자 딱 미쳐 돌겠다는 듯 짜증을 숨기지 않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얼마 전에 TV에서 봤어요. ‘할리우드 스타 톱 텐.’”

담배 때문인지 조금 갈라진 목소리가 흘러나와서, 나는 평소보다 담배를 조금 더 일찍 짓이겼다. 스펜서는 내 말을 이해해 보려는 듯 파란 눈동자를 느리게 깜박이고 있었다.

“……뭐?”

“축하드립니다. 할리우드 스타 저택 순위 3위던데. 집에 수영장이 두 개라면서요?”

나는 스펜서의 LA 저택이 3위로 랭크된 이유가 그 안에 교회를 짓지 않아서라고 확신한다. 하지만 내로라하는 상을 휩쓴 할리우드의 별께서는 그런 시시껄렁한 가십 프로그램의 순위 따위는 전혀 관심 없는지, 기가 찬다는 듯 헛웃음만 쳤을 뿐이었다.

“방 한 칸만 주세요.”

난 ‘원 달러’를 외치는 거지처럼 말했다.

“아님, 뭐, 호텔이라도…… 잡아요?”

나는 우리가 호텔에 관련한 공통된 나쁜 추억을 가지고 있음을 상기하며 은근하게 물었다. 그러자 션 스펜서는 시퍼런 눈에서 번쩍이는 안광을 쏟아 내며 주먹에 힘을 주었다.

“후우, 그래. 좋아.”

하하. 성공이다.

그런데 왜 기쁘지 않을까. …썅.

나는 금방이라도 목을 조를 것처럼 흉흉한 표정을 한 장신의 남자가 내려다보는 위압감에 뭐라고 더 까불려던 입을 다물었다.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으면서 입꼬리만 보기 좋게 올리는 얼굴은 적잖게 열 받은 게 분명해 보였다.

“어디 한번 끔찍한 연인이 되어 보자고, 이선.”

나는 션 스펜서가 이를 바득바득 갈면서 꺼낸 문장의 위험성을 일찍이 눈치챘어야 했다.

살면서 제 뜻대로 안 되는 일 앞에 몇 번 서 본 적 없었을 남자가 이도 저도 못하고 상황에 휩쓸리는 것을 좋아할 리가 없었는데 말이지.

* * *

LA에 처음 도착한 이방인들이 가장 먼저 가는 곳들은 대체로 뻔하다.

말리부 해변, 명예의 거리, 그리고…….

“브랜든. 살려 줘. 여긴 지옥이야.”

-너 거기가 얼마짜리 저택인 줄은 알고 하는 소리냐? 젠장. 베벌리 힐스라니!

베벌리 힐스.

그렇다. 나는 지금 전 세계에서 손꼽히는 부촌인 그곳에 있다.

심지어 가장 노른자 땅인 고지대에 외딴 섬처럼 자리한 대저택의 침대에 한가로이 누워 있기까지 하다.

누군가는 이 순간을 마치 꿈결 같을 거라 상상할지도 모른다.

그래, 뭐. 그 짐작처럼 이 망할 저택은 정말 끝장나게 좋긴 하다. 삼류 가십 프로그램에서 보여 줬던 시시껄렁한 위성 이미지와 파파라치 사진 그 이상이다.

사실 ‘좋다’라는 단어를 함부로 갖다 붙일 수 있는 것인지도 잘 모르겠다.

낮에는 저 멀리 해변이 보이고 그 반대로는 황홀한 야경이 보이는 최고의 전망은 종일 저택에 있어도 지루하지 않게 해 준다.

하지만, 이곳이 완벽한 파라다이스냐고 묻는다면 그건 아니다.

배가 불렀다고?

자, 여러분.

여러분들은 혹시 할리우드의 휘황찬란한 별 션 스펜서가 또라이였다는 걸 알고 있었는가? 아마 몰랐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오늘 이 자리에서 확신에 차 말할 수 있다. 션 스펜서는 아주 악랄하고 교활한 사내다! 제발 해시태그라도 달아서 퍼트려 주길 바란다.

이제 내가 스펜서의 저택에 처음 도착했던 그날로 돌아가 보겠다.

내가 짐을 바리바리 챙겨 들고 도착한 저녁, 집주인인 스펜서는 보란 듯이 부재중이었다.

거대한 철문을 지나 차로 한참을 들어간 다음에야 나오는 그의 저택은 세계적인 건축가 누구 씨가 오랜 건물을 리모델링했다더니 과연 집이라기보다는 마치 하나의 세련된 작품 같은 공간이었다.

맞아, 세상에! 난 집사와 메이드를 실제로 본 것도 그때가 처음이었다.

아, 혹시 은회색의 머리카락을 가진 온화한 얼굴의 노집사와 빅토리안 시대에서 튀어나온 너풀대는 드레스를 입은 여인들을 상상하고 있다면 꿈 깨시라.

그들은 주름 하나 없는 완벽한 정장 차림에, 디트로이트의 매서운 눈보라가 떠오르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런 곳에서 오래된 데미지 진에 적당히 늘어난 티를 걸쳐 입고 건성으로 챙긴 커다란 여행 가방을 꼭 안고 있는 내 모습이 얼마나 멍청해 보였을지는 말하지 않아도 될 거다.

나는 가브리엘이라는 다정한 이름과는 어울리지 않는 냉랭한 사내의 뒤를 따라 미로 같은 복도를 걸으며 몇 가지 주의 사항을 들었다.

“늦은 시간에 저택을 돌아다니는 건 최대한 삼가십시오. 뭔가 필요한 게 있으시면 방 안에 있는 호출기를 이용하시면 됩니다.”

“……예에.”

“저택은 동관과 서관으로 나뉩니다. 머무실 곳은 이곳 동관입니다.”

고백하건대 나는 길치다. 하지만 웃음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표정으로 말을 잇는 집사의 얼굴에 대고 ‘저 지도 좀’이라든지, ‘여기가 어쩌다 동관이죠…. 해 뜨는 방향을 봐야 할까요?’ 같은 넋 나간 말을 하긴 힘들었다. 짙은 갈색 머리카락을 가진 그는 그래 봤자 나보다 대여섯 살이나 많을까 싶을 사내였건만, 편하게 대하기 어려운 위압감이 있었다.

나는 구걸로 받아 낸 침실에 들어서자마자 편안해 하기는커녕 완전히 기세에 눌려서 소파에도 앉지 못한 채 한참 동안 넓은 방을 서성거렸다.

분명 내 침대보다 몇십 배, 아니 몇백 배는 더 비쌀 최고급 침대에 누웠을 때는 거의 황송할 지경이었다. 내게 스펜서의 저택은 좋게 표현하면 현대적이고 나쁘게 말하면 사람이 사는 곳인가 싶은 세트 전시장이나 마찬가지였다.

살벌한 공간의 궁극적인 이유를 만난 건 퉁퉁 부은 눈으로 일어난 다음 날 아침의 일이다.

간신히 세수만 한 채로 메이드의 뒤를 따라 도착한 홀에서, 나는 공사다망하신 나머지 이제야 겨우 만나게 된 동거인, 아니 합숙인의 무뚝뚝한 질문과 마주했다.

“뭐가 보이긴 해?”

나는 자고 일어나면 50퍼센트의 확률로 눈이 말 그대로 부풀어 오른 개구리가 된다. 한때는 이게 콤플렉스이기까지 했을 정도다. 쉰 목소리로 “……그럼요.” 하고 대답하자 스펜서는 여전히 미심쩍다는 듯 내 얼굴을 뜯어 살폈다.

이곳의 고용인들은 내가 오든지 말든지, 일사불란하게 테이블을 세팅하고 있었다. 작은 나무 자를 들고 익숙하게 식기의 각을 잡는 모습은 질릴 만큼 강박적이다가도 한편으로는 매우 일상적인 풍경 같기도 했다.

“더 잘 줄 알았는데. 간단하게 먹어도 괜찮나?”

“네? 네에, 그럼요.”

입 밖으로 저절로 갈라진 문장이 튀어나왔다.

이 꽉 막힌 공간에서 평온한 건 션 스펜서뿐이었다. 심지어 그는 이 기괴할 정도로 계산된 각도로 채워지는 강박적인 테이블이 자연스럽기까지 한 것 같았다. 애초에 이걸 원한 게 이 사내일 테니 위화감을 느낄 수야 없을 거다.

나는 대답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내 앞에 차곡차곡 놓이는 접시들을 보면서 어색하게 턱을 긁적였다. 아침에 이런 지극한 대접을 받는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스펜서는 이미 식사가 거의 다 끝났는지 커피를 마시고 있다.

분명히 저 커피 타임이 지나면 여느 때처럼 휙 사라질 게 분명하니, 지금이야말로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며 가장 많이 한 생각을 전하기에 가장 좋은 타이밍이었다.

“저, 스펜서.”

이 기계 같은 공간의 주인이자 내 영화 파트너인 사내는 말하라는 듯 살짝 고개를 까딱했다. 나는 그 우아하다 못해 오만한 몸짓을 눈에 담으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달마다 얼마씩 드리면 될까요?”

“뭘?”

“뭐. 렌트비라든가. 식비라든가. 대충 퉁쳐서 말입니다.”

사실 그건 꽤 안일한 마음으로 꺼낸 말이었다.

명색이 나란히 캐스팅됐는데! 하는 쥐꼬리만 한 자존심과 설마 저런 대재벌이 말도 안 되는 소릴 하겠어 하는 근거 없는 안도가 바탕이 된 허세라고 해도 좋다.

스펜서의 반응은 참 전형적이면서도 놀라웠다.

뭐, 그럴 만도 하지. ‘렌트비’라느니, ‘식비’라느니 하는 귀여운 단어를 스펜서가의 도련님이 살면서 몇 번이나 들어 봤겠는가.

뭐라고 할까?

세상 퉁명스럽게 ‘필요 없어. 됐어.’?

이게 아니라면 ‘집사와 이야기해.’ 같은 소름 돋는 잘난 척을 할지도 모른다. 나는 그와 마찬가지로 커피 한 모금을 슬쩍 삼키면서 어느 정도 뻔하게 윤곽이 그려지는 대답을 상상했다.

하지만 스펜서, 그는 정말 할리우드의 극적인 전개에 완전히 흡수된 배우 중의 배우이자……

“한 달에 4만 달러.”

개새끼 중의 개새끼였다.

이제껏 단 한 번의 소음도 낸 적 없는 프로페셔널 고용인들의 손이 일제히 삐끗하는 순간이었건만, 나는 충격에 빠져 그 역사적인 소리를 놓쳤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그 직전에 들은 끔찍한 단어 때문이었다.

4만. 4만? 4만 달러?

지금 사는 곳이 한 달에 천 달러 좀 넘는데, 뭐, 얼마?

“4만?”

“4만.”

스펜서는 못 박듯 단호하게 대답했다. 잠시 얼이 빠져 있던 나는 몇 초간 입까지 벌리고 있다가 빽 소리쳤다.

“와, 이거 완전 사기꾼 아냐!”

“사기라니. 사정 고려해서 하루 가격을 한 달로 계산해 준 건데.”

“하, 하루요? 말이 됩니까?”

미국이 사랑하는 미소를 가졌다는 션 스펜서의 얼굴에 그린 듯한 웃음기가 걸렸다.

오, 썅! 스펜서가가 대부업도 했었나 보다!

나는 손에 쥔 포크를 흉기로 쓰지 않기 위해 부단히도 애를 쓰며 콧김을 내뿜었다. 하지만 스펜서, 저자는 연기뿐만 아니라 사람의 속을 뒤집는 데에도 천부적인 재능이 있었다!

“사방으로는 로스앤젤레스 최고의 뷰에, 위치로는 베벌리 힐스 한복판.”

“……아니, 잠깐만요!”

“그 포크만 하더라도 오로지 이 저택에서만 쓰기 위해 만들어졌지. 기성품은 단 하나도 없어. 침구류는 물론이고 네가 아침에 썼을 비누 하나까지도 말야. 그게 다 얼마라고 생각해?”

나는 물 흐르듯 이어지는 문장에 붕어처럼 입만 벙긋거렸다.

“최고급 호텔 출신 주방장이 신선한 식재료로 매끼 식사를 만들고 대부분 버틀러 아카데미까지 나온 사람들이 언제나 모든 걸 완벽한 상태로 유지하는 환경에서 하루 사만 달러라! 우습지.”

버틀러 아카데미라니. 그런 게 정말 세상에 있긴 한단 말인가. 나는 얼이 빠진 채로 벌어진 입을 다무는 것조차 잊어버렸다.

“뭐. 이곳 시설에 대해서는 ‘할리우드 스타 톱 텐’에서 익히 들었을 테니 더 말할 필요는 없겠지, 박?”

있는 놈들이 더 지독하다더니 정말 그 말이 맞았다.

간지러운 미소를 띠며 놀리듯 눈을 접는 션 스펜서를 보고 있자니 아주 속이 꼬이다 못해 쓰리기까지 한 것 같다.

나는 잠시 내 앞에 얌전히 놓여 있던 스크램블 에그를 난도질한 후 꾸역꾸역 입에 밀어 넣었다. 좀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사실 그건 한 입 먹은 다음 ‘이깟 게 뭐 얼마나 대단한 요리라고!’ 하고 욕할 계획으로 했던 행동이었다.

“…….”

하지만 분하게도 저 사기꾼 놈과는 달리, 나는 32년간 먹었던 것 중 가장 맛있는 스크램블 에그를 감히 부정할 만한 뻔뻔함이 조금 모자랐다.

싱싱한 계란과 버터의 풍미, 거기에 부드럽게 늘어지는 치즈까지 입에 넣자마자 이로 씹기도 전부터 부드럽게 혀를 감싸는 맛은, 분명 최고 수준의 요리사가 만든 음식임이 분명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씨이, 겨우 스크램블 에그 따위가 이렇게까지 맛있을 필요가 있냐고!

말이 뚝 사라진 나를 뭐라고 생각했는지 션 스펜서는 입가에 걸린 미소를 더욱 짙게 걸고는 고개를 기울였다.

나는 울컥한 마음에 되는대로 입을 열기 시작했다.

“크리스티나가 부럽네요.”

“크리스티나?”

“브랜든 우드 아시죠. 제 에이전시 담당자요. 녀석의 여자친굽니다.”

“그래서?”

대체 맛 없는 게 뭐야!

이 샌드위치는 왜 고작 ‘샌드위치’면서 이렇게 맛있고 난리냐고.

나는 악에 받쳐 입을 놀리면서도 최후의 만찬이 될 수 있는 아침 식사를 무엇 하나 빼놓지 않고 입에 욱여넣었다.

물론, 머릿속은 이미 그다음의 행보를 정한 지 오래다.

여기서 집세를 핑계로 쫓겨나게 되면 당장 변호사를 찾아가자. 데이비드 밀러와 션 스펜서를 상대로 하는 소송이니만큼 변호사들이 관심을 적잖게 보이겠지. 돈 안 받고도 해 주겠다는 사람이 찾아올지도 모른다. 난 분명히 할 만큼 했다.

보라고. 한 달에 4만 달러 내놓으라는 놈하고 대체 어떻게 보이 스카우트 놀이를 하겠나.

“브랜든은 크리스티나한테 1센트도 못 쓰게 하던데.”

“…….”

“정마알, 스펜서 씨. 당신은 새삼 최-고의 애인이네요. 예?”

나는 넉넉하게 놓인 음식을 마구 쑤셔 넣으면서도 이죽대는 것을 잊지 않았다.

“끔찍한 연인이 되어 주겠다는 약속 한 번 철저하게 지키시는 모습에 목이 막힐 지경입니다.”

물론 속으로는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하는 욕을 잔뜩 했다. ‘내가 저 새끼 속 좁을 줄 알았다니까.’, ‘돈 좀 있다고 유세는. 젠장.’

나는 꼴도 보기 싫은 남자 대신 접시에 코를 박듯 고개를 숙이고 음식만 꾸역꾸역 먹으면서 있는 힘껏 조롱을 이어 갔다.

“이야, 크리스티나가 알면 감명받겠다니까요. 그 션 스펜서는 애인한테 한 달 4만 달러 받아 챙기겠다는데, 일개 직장인인 브랜든은 그렇게 버는 족족-”

끝을 모르고 흘러나올 것 같던 내 말을 잘라먹은 건 조금은 짜증 섞인 헛웃음이었다.

나는 그 날카로운 소리에 뭐 인마! 하고 보란 듯이 미간을 찌푸리고 고개를 들었다가, 1초 만에 그 주름을 쫙 폈다. 좀 비굴해 보일지라도 거의 자동반사에 가까운 거였으니 변명은 않겠다.

“미안하게 됐어. 잠시…… 깜박했군.”

“…….”

“박, 그쪽과 난 사귀는 사이였지.”

“그- 그렇죠.”

-최소한 몇 달은.

나는 언제 미소를 걸고 있었냐는 듯이 여느 때와 같은 싸늘한 얼굴이 된 션 스펜서를 보면서 입안에 있는 음식을 꿀꺽 삼켰다.

……미리 변명해 보자면 난 어렸을 때부터 한번 화가 나면 주변을 잘 보지 못하는 경향이 있는 편이다. 덕분에 원치 않는 반성문과 봉사활동도 꽤 했다.

좀 머리가 자라고 나서 할리우드에서 구른 이후로는 먼저 화를 내기는커녕 존재감 없이 묻혀 있는 쪽이 됐지만, 여하튼 소싯적엔 그랬단 소리다.

언제부터 이렇게 이상 기류를 알리는 붉은 등이 깜박이고 있었을까?

널찍한 홀 안에 있는 모든 이들이 행동을 멈추고 있는 모습은 순간 등줄기로 서늘한 한기가 스쳐 지나가게 하기 충분할 정도로 기괴하다. 심지어 어딘가에선 누군가 작게 헛숨을 들이켜는 소리마저 들린다.

대본에 ‘S, 조용히 화를 삭인다’라는 부분이 있다면, 스펜서는 아마 딱 저런 표정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의 생생한 분노보다 더 중요한 사실을 먼저 확인해야 했다.

“그럼 공짜인가요?”

영화 캐스팅을 포함한 4만 달러와 나를 노려보는 새파란 눈동자 중 무엇이 더 무섭냐고 묻는다면, 1초도 망설이지 않고 대답할 수 있다.

몇백 번을 다시 선택한다고 해도 전자다.

나는 눈도 깜빡이지 않으며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러자 내 소중한 동거, 아니 합숙인의 입에서 낮은 한숨 같은 대답이 흘러나왔다.

“그래.”

“감사합니다.”

이전의 우울한 변호사 어쩌고 하는 이야기들은 모두 잊어 주길 바란다.

오늘은 내 인생 최고의 아침 식사로 기억될 것이다. 좀 살벌하기는 해도 어쨌든 이제껏 살면서 했던 도박 중에서 가장 배짱 좋은 승부수였다.

적어도 몇백 달러는 기꺼이 내놓을 의향이 있었는데 날 놀리겠답시고 그 기회를 완전히 차 버린 건 스펜서다. 나는 표정 관리를 할 생각도 하지 않고 입꼬리를 한껏 올린 채로 커피를 홀짝이다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아, 맞다. 션?”

[이선]이 아닌 ‘이선’으로는 처음으로 꺼내 부르는 남자의 이름이었다.

최대한 상냥하게 내려 노력한 목소리였건만 나의 파트너는 눈썹 하나를 치켜뜬 채로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는다.

“저 와이파이 비밀번호도 좀.”

아, 저 불쾌함 가득한 얼굴이 이렇게 기쁘게 다가올 수 있다니.

* * *

스펜서의 LA 저택 와이파이 비밀번호는 ‘spencer0817’이다.

션 스펜서는 나와의 아침 식사 이후 볼일이 있다며 곧바로 저택을 떠났다. 뭐, 어차피 예상했던 것이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또 나야 반가운 일이다. 집사는 늦은 시간 저택을 돌아다니지 말라고 했지 대낮에도 숨죽이고 있으라는 말은 하지 않으니 말이다.

나는 두툼한 대본을 들고 날아갈 듯한 발걸음을 옮겼다.

이건 뭐 저절로 콧노래가 흘러나온다. 가십 프로그램의 말에 따르면, 여기에는 영화 상영관도 있고 체육관도 있다고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참 기분이 좋았다. 마치 대단한 모험을 떠나는 듯 설레기도 했다.

정말이지 연기가 어쩌고저쩌고하는 건 오늘 하루만큼은 잊고 싶었다.

젠장. 브랜든의 말마따나 베벌리 힐스 아닌가!

밀러가 날, 아니 내 연기를 탐탁지 않아 하는 이유야 조만간 션 스펜서를 잡아다 앉혀 두고 물어보면 그만이다.

당사자인 내가 모르는 걸 그는 알고 있다는 게 자존심이 상하지 않는 건 아니지만 잘난 것들에 맞춰 주는 것쯤이야 새삼스럽지도 않다.

나는 우울한 쪽으로 빠지려는 생각을 애써 돌린 채 다시 즐거운 상상을 시작했다. 사연이야 어쨌든, 최소한 몇 달간은 이 엄청난 곳에서 머물 기회는 내 평생 다시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열일곱. 나는 로스앤젤레스에 처음 왔다.

사실 그때가 비행기를 타고 주를 넘었던 첫 가족 여행이었다.

늘 바빴던 부모님과 이모네 식구가 겨우 일정을 맞춰 휴가를 떠났던 그날이 지금도 생생하다. 비좁은 저가항공이었지만 나는 그 순간이 내 인생에서 가장 시간이 빨리 흘렀던 때라고 기억한다. 덜컹거리는 비행기 안에서의 다섯 시간이 얼마나 쏜살같이 지나갔는지 모른다.

LA에 첫발을 내딛는 순간 나는 생각했다.

‘빌어먹을. 정말 여기서 살고 싶어!’

벌써 15년 전의 일이다.

이제 내 말투에서는 미시간 악센트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의 시간이 지났고, 어쨌거나 난 절반의 꿈을 이뤘다. 지구상에서 가장 근사한 저택 중 하나에서 오래된 감상에 빠져드는 건 꽤 낭만적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조금 구질구질한 일이었다. ‘내가 어렸을 땐 말이야, 얼마나 살기 힘들었는지 알아?’ 같은 말을 하는 술 취한 아저씨들이나 하는 회상이었으니 말이다.

이제 와 생각해 보면 그렇게 넓은 저택에서 정신을 놓고 있던 것이야말로 실수 아니었나 싶다.

그렇다고 너무 탓하지 마시라. 여러분은 집 안에서 길을 잃는 것을 상상이나 해 본 적 있는가? ‘집 안을’ 정처 없이 걷다가 어느 순간 등장한 갈림길을 앞두게 된다면 누구라도 얼이 빠질 것이다.

농담이 아니라 스펜서는 정말로 이 망할 저택에 푯말을 설치해야 한다. ‘화장실 50m’ 뭐 이런 식으로라도 말이다. 나는 갈림길에 서서 잠시 고민했다. 집사의 말이 퍼뜩 떠올랐기 때문이다. 동관에서 지내라고 했었지. 그런데 그 망할 동관이 어딘지 알 게 뭐란 말인가.

나는 길게 고민하는 걸 포기하고 오른쪽 길을 선택했다. 뭐 잘못 든 길이라고 해도 그래 봤자 사람이 사는 저택인데 언젠가는 누구 하나라도 만나겠지 하는 태평한 생각에서였다.

“저, 누구 없나요? 저기요?”

……뭐. 첫 SOS는 그렇게 걷기 시작한 지 10분이 지나고 나서야 나왔다.

젠장. 이 빌어먹을 저택은 정말 넓어도 너무 넓다.

성인 남성이 10분 이상을 걸어도 끝이 나지 않는 정원이 딸린 집이라니! 나는 사람은커녕 개미 새끼 하나도 보이지 않는 산책로를 따라 한참을 더 걸었다.

아, 그 외로운 산책 혹은 조난 끝에서 아담한 높이의 건물의 머리가 눈에 들어왔을 때의 기쁨은 말로 설명 못 한다. 시야에 들어온 미색의 벽돌이 나무들 사이에 숨기를 몇 번, 나는 드디어 제법 높은 문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사실 그건 내가 이 저택에 도착한 이후 본 것 중 가장 인간미 넘치는 것이었다. 단단한 재질의 나무문이며 고풍스러운 검은 손잡이는 그 세월이 곳곳에 엿보이는 게, 현대적인 가공을 거치지 않은 채로 이곳에 오랫동안 있던 것 같았다.

나는 조금 망설이다가 문에 대고 가볍게 노크했다. 물론 문이 열리리라는 기대가 있었던 건 아니다. 그저 몸에 밴 예의에 불과했다. 하지만 얼마 안 가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

철컥, 하는 소리와 함께 그 두꺼운 나무문이 저절로 열린 것이다.

보통의 호러무비에서는 이런 순간에 문을 열고 들어가면 백 퍼센트 죽는다. 이건 여러분들이 ‘안 돼, 대체 왜 들어가? 나 같으면 절대 안 들어가.’ 하는 순간이기도 할 거다. 잘 안다. 이제껏 나 역시 멍청한 주인공들을 얼마나 많이 욕해 왔는지 모른다.

“계세요?”

미안하다. 내가 바로 그 멍청한 주인공이다!

조금은 긴장한 채 들어섰던 건물 안은 생각보다 아늑하고 또 고풍스러웠다. 금방이라도 레코드판을 타고 오래된 음악이 흘러나온다고 해도 놀랍지 않을 정도였다고나 할까.

각자 사연깨나 있어 보이는 골동품들이 강박적일 정도로 일정한 간격으로 놓인 모습은 앞서 아침 식사 때 보았던 것과 익숙하다. 덕분에 난 조심조심 발을 옮기면서도 이곳이 션 스펜서의 공간으로 향하는 길임을 확신했다.

하지만 복도를 걸으며 “저기요?”, “아무도 없습니까?” 하고 아무리 목소리를 키워도, 고대했던 다른 누군가의 흔적은 머리카락 한 올 찾아볼 수 없었다.

이 오래된 건물은 근사하게 잘 꾸며진 개미굴 같았다.

무려 그 스펜서의 저택인데 너무 심한 표현이 아니냐고 물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복도를 중심으로 널찍하게 트인 방들이 이어진 이곳은 그 외의 적절한 표현을 찾기 어려운 구조였다. 공간을 나누며 한편으로는 프라이버시를 지키기 위한 수단이기도 한 문이 없다는 건, 다시 말해 이 거대한 공간에서 누군가의 시선을 신경 쓸 필요가 없다는 말이기도 할 거다.

얼마나 걸었을까.

복도 가장 끝에 가로로 길게 트인 방에 도착한 나는 저도 모르게 작게 탄성을 내뱉었다.

정말 이 저택은 션 스펜서 그가 자랑했던 대로 LA에서 손꼽히는 뷰를 자랑하는 곳이었다.

베벌리 힐스와 저 멀리의 불빛들이 한눈에 들어오는 거대한 창 앞에서 한참을 넋을 놓고 있던 난, 머잖아 한 박자 늦게 이곳의 이름을 짚어 내었다.

짐작건대 이곳은 집사가 말했던 ‘서관’일 것이다.

정확히 동에서 서로, 참 부지런히 길을 헤맨 게 분명했다.

…여긴 오지 말라고 했었는데 말이지.

냉랭한 목소리를 잊지 않은 나는 뺨을 긁적이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말을 어긴 건 미안하지만, 어차피 다시 나가 봤자 어딘지도 모를 곳을 빙빙 돌 것이 뻔하니 누군가 이 불쌍한 이방인을 발견해 주기 전까지는 이곳에서 얌전히 시간을 보내는 수밖엔 없다.

내가 도착한 이 방-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넓지만, 뭐!-은, 아마도 션 스펜서의 서재인 듯했다. 빛이 닿지 않는 그늘진 곳에는 빽빽한 책들이 종류별로 한 번, 또 거기서 크기별로 한 번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고 창가를 등진 중앙에는 나무의 결을 고스란히 살려 만든 거대한 책상이 멋들어지게 놓였다.

할리우드 최고의 배우이자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셀러브리티의 사적인 공간에 와 있다는 긴장감에 침을 꼴딱 삼키면서도 그의 자리로 슬금슬금 다가가는 발을 멈추기 어려웠다. 못된 호기심이 동했다고 봐도 좋다. 아니, 솔직히 내 약점이란 약점은 모두 꿰고 있는 남자의 작은 흐트러짐이라도 발견해서 저놈도 인간이구나 하며 이 허탈함을 달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각자 정해진 위치에서 잔뜩 기합이 든 것 같은 테이블 위를 눈으로 훑던 나는, 얼마 안 가 내게도 익숙한 것을 발견했다.

그건 지금 당장 내 손에도 들려 있는 거였다.

바로 그와 함께 출연하는 영화의 대본이다.

“…….”

반가웠냐고?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그걸 보자마자 살짝 들떴던 마음 한구석에 돌덩이가 앉은 것처럼 답답해졌다.

자랑까지는 아니지만 난 이제껏 함께 작업했던 감독들에게 꽤 괜찮은 평가를 받아 왔다.

누구보다 대본을 꼼꼼하게 읽고 숙지한 다음 감독의 디렉팅을 충실하게 따른다는 이유에서였다. 사실 드문드문한 간격이나마 할 수 있는 역할이 있다는 게 절실해서이기도 했지만, 여하간 그들에게 ‘이선 박’은 꽤 괜찮은 배우로 꼽혔다. 덕분에 그들의 차기작에 크고 작게 계속 얼굴을 내밀 수도 있었다.

나는 스프링이 늘어나 살짝 옆으로 휠 정도로 너덜너덜해진 내 파트너의 대본을 보며 할 말을 잃었다. 서약서를 쓰고 단단한 밀봉을 뜯은 그 날부터, 나 역시 이 종이뭉치를 둘도 없는 보물처럼 들고 다니며 살피고 분석했었다.

아니 사실 그 정도의 표현으로는 지난 내 고민을 다 표현할 수도 없다.

리딩 현장에서 지적받고 돌아온 날에는 단 1분도 제대로 앉아 쉬지 못하고 끙끙대며 미친놈처럼 대사를 반복했고, 머리를 비우러 갔던 체육관에서조차 망할 [이선]에게 푹 빠져 지냈다고 단언할 수 있다. 그랬기에 밀러의 신통찮은 반응이 훨씬 속을 쓰리게 했었지만 말이다.

아. 이 추한 열등감, 추한 자격지심!

할리우드가 사랑하는 션 스펜서의 연기가 나 따위는 까마득히 뛰어넘는 재능과- 심지어 거기에 노력까지 더해 만들어졌다는 것을 확인하는 건 전혀 기분 좋은 일이 아니었다.

타고난 사람을 누구보다 잘 알아보는 건 같은 천재가 아니다.

오히려 ‘평범’들이지.

“여긴 들어오시면 안 됩니다!”

집사였다.

펄떡펄떡 뛰는 심장 소리가 얼마나 큰지 귀가 잠시 멍해질 정도로 놀란 나는, 집사의 부름에 대답 대신 깜짝 놀랐다는 듯 긴 한숨을 토해 내며 스펜서의 대본을 내던지듯 제자리로 원상복구 시켰다.

“이쪽은 서관입니다.”

단호하게 흘러나온 문장이 설명하는 바는 하나였다. 그는 지금 이곳이 그의 고용주인 스펜서의 공간임을 알리고 있는 거였다. 나는 변명하듯 우물쭈물 입을 열었다.

“네에. 그런 것 같았는데, 그게, 길을 헤매서.”

“그렇지 않아도 CCTV를 관리하는 가드의 연락을 받고 왔습니다.”

집사는 살짝 몸을 비스듬히 하더니 정중하지만 빈틈없는 손짓으로 복도를 가리켰다. 큰 죄를 저지른 듯 찔끔해진 나는, 그가 있는 쪽으로 허둥지둥 발걸음을 옮기려고 했다. 하지만 놀란 마음을 다스리지도 못한 채 급히 움직여서일까. 내 발보다 먼저 바닥에 닿은 건 아직 빳빳하기만 한 내 대본과 함께 움켜쥐고 있던 휴대폰이었다.

다들 한 번쯤 경험해 봤을지도 모르지만 망할 대리석은 휴대폰 액정의 가장 큰 적이다.

“……아. 젠장!”

내 인생은 좀 잘 풀리나 싶으면 언제나 이렇게 금세 엉망이 되어 버린다!

설마 필요하겠나 싶어서 보험 가입도 안 했는데. 집사는 허겁지겁 떨어진 휴대폰을 확인하려는 나를 제지하고 하얀 면장갑을 낀 그의 손으로 완전히 거미줄처럼 금이 간 액정을 들어 확인시켜 주었다.

“완전히 나간 것 같군요. 위험하니 사용은 자제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망할, 그렇네요.”

나는 집사의 앞에서 꾹 참았던 욕 몇 마디를 기어이 더 쏟아 내고 말았다. 빌어먹을!

불과 몇 년 전만 하더라도 어린 친구들이 일부러 액정을 깨서 쓴다는 말도 들었던 것 같은데, 안타깝게도 내 휴대폰은 그런 행운과는 거리가 멀었다.

“저 혹시 문자 한 통만 빌릴 수 있을까요.”

“물론입니다.”

혹시 몰라 브랜든의 번호를 외우고 있던 게 이렇게 도움이 될 줄이야.

[나 휴대폰 박살 남! 썅! - E]

보낸 내역을 지울걸, 하고 후회한 건 집사에게 휴대폰을 돌려주고 나서의 일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별로인 이미지에 상스러운 단어까지 더해지면 좋을 게 없을 텐데. 나는 스펜서처럼 꼿꼿한 자세로 걸으려고 노력하며 집사의 뒤를 따랐다. 물론 이번에는 어제처럼 멍청하게 주변 구경만 하는 게 아닌 길을 외우려고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리면서였다.

정원에서 거의 삼십 분 넘게 헤맸던 것이 무색하게 집사는 거기서 딱 절반의 시간 안에 동관에 도착했다.

젠장. 별로 대단하게 한 것도 없으면서 기운이 다 빨렸다.

나는 어제까지만 해도 엉덩이를 걸치는 것만으로도 황송해했던 소파를 발견하자마자 거기에 늘어지듯 주저앉았다. 그러자 눈치 빠른 메이드 하나는 어디선가 금세 트롤리를 끌고 와서 내 앞에 간단한 차와 먹을 것을 차려 주었다.

“아. 정말 필요했습니다. 고마워요.”

“천만에요.”

첫인상에 그녀를 냉랭한 얼굴을 한 무서운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것을 진심으로 반성한다.

한편, 몸에 여유가 생기자 곧바로 속을 울렁이게 하는 방해꾼들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나는 차를 홀짝이면서도 멍하게 생각에 잠겼다. 낡디낡은 스펜서의 대본이 주는 충격, 그것에 놀란 스스로에 대한 부끄러움, 감탄. 대체 어디서부터, 뭐가 삐끗한 건지 감조차 잡을 수 없는 내 연기. 그리고…….

그렇게 꼬리에 꼬리를 물며 깊어지는 늪에서 나를 꺼내 준 건 아직 내 맞은편에 서 있던 메이드였다.

잠시 정신을 빼놓고 있던 나는, 뭔가 할 말이 있는 듯한 눈치인 그녀를 향해 황급히 입꼬리를 들어 올려 웃었다. 이건 내가 캘리포니아에서 배운 가장 쓸 만한 거다. ‘스마일!’ 그러자 메이드는 나를 향해 조금은 곤란한 듯 마주 웃어 주면서 살짝 입술을 달싹이다가, 느리고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뭐 한 가지만 여쭈어도 될까요?”

“네에. 그럼요.”

메이드는 흔쾌히 떨어진 승낙에도 얼른 말을 잇지 못하고 한참을 망설였다.

대체 뭘 물어보려고 저러는 건가 싶어진 나는, 찻잔을 내려놓고 자세를 바로 했다. 설마하니 그때까지만 해도 망할 미래를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나다.

“저, 정말 스펜서 님과 당신께서 그…….”

“그?”

“그…….”

“친밀한 관계이신지……요.”

몇 번을 뜸 들이다 겨우 나온 마지막 문장은 거의 속삭임과 같았다.

순간 그녀가 지칭한 ‘sir’와 ‘mister’ 사이의 ‘친밀한’ 상관관계를 얼른 이어 생각하지 못한 나는 얼굴 가득 물음표를 띄웠다가, 한 박자 늦게 그 끔찍한 문장을 해독해 냈다.

메이드는 나와 션 스펜서가 정말 연인이냐고 물어보는 거다!

“하하, 하, 하하핫! 아닙니다, 아니에요. 사귀는 건 무슨.”

저도 모르게 이 저택에 들어선 이후 가장 호탕한 웃음이 터진다. 으, 정말이지 말도 안 되다 못해 누가 들을까 무서운 가정이다.

나는 여전히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한 눈을 한 메이드를 향해 차근차근 설명을 덧붙이기 시작했다.

“영화 얘깁니다. 그냥 서로 농담한 거예요. 작품에서 못해도 몇 달간 애인으로 살아야 하니까요.”

“잘은 모르지만 꽤 오랫동안 캐스팅이 미뤄지던 작품인 걸로 들었거든요. 그런데 그 자릴 맡으시고 또 이렇게 저택까지 오신 걸 보고… 다들 혹시 해서.”

그녀는 생각보다 이번 작품의 표류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저 문장에는 치명적인 오류가 있다.

망할, ‘다들’이라니?

대체 고작 하루 사이에 무슨 상상의 나래가 펼쳐진 건가. 메이드는 순간 말문이 막힌 나를 보며 노골적으로 “어머, 역시!” 하는 눈이 되었다.

나는 그녀에게 영화의 내용을 말하지 않는 선에서 이 끔찍한 상황을 정리하려 발버둥 쳤다.

“워, 워워. 그거 아니에요. 제발 나를 션 스펜서와 그렇게 엮는 건 그만-”

“……왜 그만해, 달링?”

메이드의 목소리치고는 순간 소름이 돋을 정도로 낮은 목소리였다.

부디 내 팔에 곤두선 솜털들이 그 저음에 감탄해서 일어선 게 아님을 알아줬으면 좋겠다. 얘네들은 그 내용의 처참함을 견디지 못해 들고일어난 거다.

맞은편에 있던 메이드가 후다닥 물러나는 모습에 왠지 뒷골이 땅긴다.

나는 등 뒤에 있는 사내를 뒤돌아 확인하기도 전부터 느껴지는 암울한 기운에 전율했다.

“조금 놀렸다고 그렇게 차갑게 말을 하면 쓰나.”

이게 무슨 좆같은…….

나는 마치 고장 난 태엽 인형처럼 삐걱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소리도 내지 않고 저만치서 걸어오는 장신의 사내가 한눈에 들어왔다. 스펜서는 걸치고 있던 얇은 트렌치코트를 고용인의 손을 따라 자연스럽게 벗고는 뚜벅뚜벅 나에게로 직행했다.

사람이 너무 황당하고 너무 놀라고 너무 억울하면 순간 머릿속이 하얗게 변한다.

난 그 빌어먹을 경험을 실시간으로 하고 있다. 그것도 수중 호흡하는 물고기처럼 입을 뻐끔거리면서 말이다. 뭐, 뭐, 뭐…….

션 스펜서는 그 새파란 눈을 호선으로 휘어 접어 웃더니 무서울 만큼 다정하게 말을 이어 갔다.

“오늘은 뭐 했어. 종일 여기 있었던 거야?”

“아니 이런 미친…….”

그의 손가락이 멍하게 있던 내 손에 자연스레 맞닿아 얽혀 드는 순간은 마치 물줄기가 흐르듯 유연했지만, 한편으로는 뱀이 먹잇감을 조이듯 힘이 가득 들어가 있었다.

밖에 있던 탓인지 조금 더 서늘한 그 감촉에 얼이 빠진다.

덕분에 난 이 미친놈이 “그래, 그래. 너무 늦었어. 미안하군.” 하고 덧붙이며 손등에 입 맞추는 것을 막지 못하고 말았다.

“가비, 목욕 준비 좀 해 주겠어.”

“예.”

고개를 들어 살피지 않아도 경악으로 가득 차 꽂힌 두 고용인의 시선이 생생하게 짚어진다.

아. 여긴 지옥이다. 지옥이 분명하다!

이 새끼야, 이 타이밍에 목욕 얘기하지 말라고!

나는 여전히 보란 듯이 꽉 맞닿은 스펜서의 손을 거의 기백으로 쥐어짜 내며 있는 힘껏 눈으로 욕했다. 이래 보여도 깡말랐을 시절에도 어디 가서 힘으로 밀린 적 없으니 이 정도면 질겁하며 손을 놓지 않겠나, 하는 자신도 좀 있었다. 하지만 비겁하고 교활하며 뒤끝은 더럽게 긴 스펜서 녀석은 그마저도 우습다는 듯 나만 눈치챌 정도로 슬쩍 입꼬리를 비트는 게 다였다.

“하하. 조르는 건 고마운데 벌써 같이하기는 이르잖아?”

1승 1패.

한 방 먹이고, 한 방 먹었다. 그런데 아무래도 이건 내 쪽이 더 부상이 크다. 젠장.

* * *

요 며칠간 나에게는 새로운 별명 몇 개가 생겼다.

달링을 시작으로 한 스윗 하트, 내 사랑이 그중 몇 개다.

소파에 걸치듯 누운 채로 대본을 뚫어지라 읽던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울컥한 마음에 맞은편에서 같은 책자를 손에 든 사내를 노려보았다. 그러자 진지한 얼굴을 한 채 대본 말고는 그 어떤 것에도 시선을 주지 않던 사내의 고개가 처음으로 살짝 들렸다.

“할 말 있어, 자기?”

빌어먹을, 가장 대표적인 걸 빼먹었다. 자-기. 자아아-기이이!

난 저게 제일 싫다! 입으로는 달짝지근한 단어를 담으면서 눈으로는 옅게 이죽거리고 있는 것이 훤히 보인다. 모든 감정을 다 담을 수 있을 것 같던 섬세한 얼굴이 작정하고 다정한 척 심술을 부리자 정말 그것만큼 교묘하게 열 받는 일이 또 없었다.

요 며칠 션 스펜서와 나는 세상에서 가장 달콤한 혈투를 펼쳤다.

대체 그 상반된 단어가 어떻게 같이 붙어 있을 수 있냐고?

이제껏 적지 않은 수의 연애를 해 봤다고 자신하는 나는 이제까지-, 아니 좀 더 뒤로 돌아가 태어나 기억이라는 게 존재하는 이래 단 한 번도 받아 보지 않은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 물론 나에게 4만 달러의 월세를 요구했던 악랄한 고리대금업자 션 스펜서로부터다!

스펜서는 그 망할 아침 이후로 단 한 번도 먼저 식사를 시작하지 않았다.

매일 아침 직접 내가 머무는 침실까지 찾아와 “자기. 아침인데. 많이 피곤해?” 하며 나를 깨웠고, 퉁퉁 부은 눈으로 세수하고 나올 때까지 기다린 후 함께 이동해서 식탁에 앉았다. 물론 의자는 그가 직접 빼 주었다.

젠장, 나는 오늘 아침도 션 스펜서가 손수 잘라 주는 소시지와 곡물 빵을 집어 먹었다!

왜 거부하거나 반항하지 않았냐고 물어볼 생각인가?

그렇다면 우리 사이에 정말 섭섭한 일이다. 아직도 날 그렇게 모르다니!

난 고용인이 있든 말든 정말 진심을 담아 꺼지라고 욕도 했고, 식사를 안 하겠다며 휙 침실로 도망도 갔었다. 한데 저 망할 새끼가 내가 안 먹는다며 자기도 식사를 걸렀다는 거다. 이제는 제법 친해진 메이드 줄리에게 그 말을 전해 듣고 이불을 뻥뻥 차며 굴러다녔던 오전이 지금도 생생하다.

결국, 맹세컨대 그런 상황에서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철저하게 하나뿐이었다.

바로 아주 보란 듯이 스펜서를 부려 먹는 거다!

하하, 역시 그건 꽤 효과적이었다.

엊그제 저녁 식사를 마치고 ‘션. 나 커피 하나만 내려서 내 방으로 가져다줄래요?’라고 말하자 살며 단 한 번도 그런 명령을 받아 보지 않았을 스펜서의 눈썹이 희미하게 부들거렸더랬다.

물론 그는 이를 박박 갈면서도 ‘자기, 카페인은 숙면에 좋지 않을 거야.’ 라고 받아치며 커피 대신 잘 데운 우유를 들고 오는 것으로 또 무승부가 되기는 했지만 말이다.

오랜 전쟁은 피로를 부른다.

괜히 중세의 왕들이 서로 적당히 조건을 맞춰 휴전했던 것이 아니다. 나는 솔직히 이제 스펜서와의 이런 신경전이 좀 버거워지고 있었다. 이건 내가 그 사람보다 뭐 꿀리거나 했단 말이 절대, 절대, 절대 아니다.

문제는 이거다.

이 빌어먹을 애인 놀이가 지속될수록…….

“후우, 줄리. 잠깐 자리 좀 비워 줄 수 있을까요?”

저거다! 저거!

저 세상에서 가장 흐뭇하다는 눈!

한때는 디트로이트의 혹한 같던 그녀의 표정이 마치 지금은 로스앤젤레스의 5월처럼 포근하지 않나!

나는 유유히 응접실을 빠져나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저 속부터 끓어오르는 울분 섞인 한숨을 토해 냈다.

“스펜서.”

“그래, 내 사랑.”

“젠장! 션!”

단둘이 되자마자 커지는 목소리에 스펜서는 드디어 대본을 덮고 느슨하게 다리를 꼬았다.

늘 잘 손질되어 있던 흑갈색 머리카락이 가볍게 흩어진 모습은 뭇 여성들이 로맨틱 코미디에서 보길 바라는 모습일 거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32년간 단 한 번도 동성의 사내에게 심장 뛰어 본 적 없다!

이제 와서 뜯어 생각해 보니 분한 것도 많다. 난 그래도 그에게 무려 매달 생활비를 챙겨 주려고 했던 사람이다. 받을 필요도 없을 사람에게 기꺼이 벼룩의 간을 떼어 주려고 했던 이 시대 진정한 살아 있는 양심이었단 말이다!

“적당히 하라고!”

“뭘?”

잠시 깜박했다.

션 스펜서는 까칠하게 나가면 그 반동으로 몇 배는 더 다루기 힘들어지는 사내다. 나는 욱하고 올라온 것을 한 번 삼키고는 느릿느릿 말을 이었다.

“션. 자, 내 친애하는 동료이자 파트너.”

“…….”

“휴전하자고. 제발.”

과연 그 스펜서가의 사람답게 절대로 접고 들어가지 않는 오만함은 기본에, 자신이 한 번 마음먹은 일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밀어붙이며 살아왔을 게 분명한 남자는 정말 피곤하다. 이 별 볼 일 없는 무명배우 하나를 엿 먹이기 위해서 팔자에도 없는 말들을 쏟아 내며 시중드는 것까지 마다치 않는 것을 보면 다른 건 안 봐도 훤하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먼저 굽히고 들어가는 상대를 짓밟지는 않을 거다.

저렇게 꼿꼿한 성격이면서 먼저 사과하러 왔던 것만 봐도 그렇다. 그러니 이번엔 내 차례였다.

나는 두 손을 들어 보이며 최대한 입술 끝을 들어 올려 웃으려고 애썼다.

얼마나 지났을까. 션 스펜서는 작게 한숨을 쉬더니 절대 열리지 않을 것 같던 입을 열었다.

“어차피 이곳의 고용인들은 밖으로 쓸데없는 말은 못 하게 되어 있어. 이선.”

“맙소사, 내 이름이 그렇게 반가울 줄은 몰랐군. 젠장할!”

성공이었다!

진심이 가득 담긴 욕을 작게, 하지만 힘주어 토해 내자 스펜서가 작게 뻔뻔한 웃음을 흘렸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그게 고깝지 않았다. 이제 작별이다! ‘달링, 허니, 스윗하트, 내 사랑!’ 다신 듣지 말자!

션 스펜서에게 이건 웃으면서 넘어갈 장난스러운 해프닝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 같은 평범 무구한 스트레이트 남성에게는 위험천만한 소문이 될 수 있다.

애초에 무명 이선 박은 카사노바 울고 갈 정도로 연인들을 갈아 치운다는 소문이 자자한 톱스타와는 다른 차원에 있다고.

아. 그래, 소문 하니 또 짚고 넘어갈 게 있다.

스펜서와 같이 지낸 지 보름이 좀 넘어가는 지금, 나는 몇 가지 확신을 내린 게 있다.

그중 하나는 션 스펜서가 남자 여자 안 가리고 난잡하게 노는 바람둥이라는 건 새빨간 거짓말이라는 사실이다. 그건 높은 확률로 스펜서 그가 일부러 만들어 낸 얘기다. 마치 이전에 나와 호텔에서 만들었던 그림처럼 말이지. 

나는 소파에 다리를 쭉 펴고 반쯤 누워서 툭 입을 열었다.

“난 션 스펜서라고 하면 엄청 바쁠 줄 알았는데. 어째 요 며칠은 한가하네?”

“편견이지.”

“나갔다 들어올 일 있으면 들어오는 길에 아이스크림 좀 사 와.”

“……뭐?”

“프랭클린 애비뉴랑 브론슨 애비뉴 사이에 있는 가겐데. 왜, 그 사이언톨로지 건물 엄청 크게 있는 곳 말야.”

이제 하다 하다 아이스크림 부탁까지 하는 내 말에 션이 기가 막힌다는 듯한 눈으로 날 바라보았다. 하지만 저 남자의 그런 시선에 꽤 익숙해진 나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이제까지의 공손한 말투도 집어치우기로 했다. 미스터 스펜서, 이렇게 부르는 게 얼마나 쏠렸는지 모른다. 다행히도 스펜서는 그런 거엔 꽤 쿨했다.

어쨌건, 요 몇 주 바로 옆에서 지켜본 결과 밤낮이고 누군가와 침대에서 뒹구느라 바쁘다던 스펜서의 일과는 그런 색정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옷을 잘 차려입고 나가서 아무리 늦어도 밤 10시 안에는 귀가하고, 오늘처럼 별다른 스케줄이 없는 날에는 오전 운동을 한 다음에 저렇게 꼬박 대본을 들여다보며 연구하는 게 그의 일상 전부다.

종일 앉아 있다가도 가끔은 중간중간 산책을 하거나 우아하게 앉아 음악을 듣는 모습은, 언제나 어디엔가 기대 있기 좋아하는 내 쪽을 돌아보도록 만들 지경이니 더 설명할 필요도 없을 거다.

“스펜서 님.”

그와 내가 있는 응접실의 문이 조심스럽게 열렸다.

이제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것도 꽤 익숙해진 집사다. 나는 그들이 낮게 소곤거리며 대화하는 것을 흘겨보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괜히 과장되게 대본을 넘겼다.

저 둘은 늘 저렇게 바쁘다.

게다가, 왜인지 지금은 꽤 심각한 표정이기까지 하다. 이쯤 되면 눈치 있게 빠져 나가 주는 게 좋겠지.

나는 자연스럽게 기지개를 켜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깐만.”

하지만 그런 나를 붙잡은 건 집사에게 뭐라고 작게 눈짓한 션 스펜서였다.

“그거 몇 분만 더 연장하는 거 어때.”

“뭘?”

“우리가 하던 거.”

왠지 익숙하지 않은 친근한 단어의 연속 때문일까. 사실 난 그 말을 이해하기까지 몇 초 걸렸다.

“……왜?”

“일이 그렇게 됐군.”

얘는 이 뻔뻔함만 좀 죽이면 훨씬 사람이 나아 보일 거다.

부탁하는 처지는 그쪽이면서 뭐가 저렇게 뻔뻔하담!

“좋아. 그때 사례한다고 했던 거 잊지 않고 있다고. 이번까지 해서 두 배야.”

“어련하실까.”

“그리고 이따 아이스크림도 사 와. 누구 시키지 말고, 직접!”

나는 발소리조차 내지 않고 응접실을 빠져나가는 집사의 뒷모습을 보며 그만 들을 수 있을 만한 목소리로 단호하게 덧붙였다.

그리고 뭐, 적당한 사례만 있다면야 이 정도는 어려울 것도 없긴 하다. 나는 별 망설임조차 없이 션 스펜서의 옆자리를 차지했다.

“이번엔 또 누구야? 비서? 기자? 맞다. 이번엔 안 만질게.”

“…너…!”

보란 듯이 손가락을 까딱이며 말하자 여유롭게 등을 기대고 있던 스펜서의 얼굴은 순식간에 화르르 불이 붙었다.

이런 놈이 뭐, 일주일에 한 명씩 사람을 바꿔서 뒹굴어?

하하,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딱 봐도 녀석은 숫된 도련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걸.

나는 낄낄대고 웃음을 터트리며 한껏 인상을 구긴 스펜서의 미간을 꾹, 눌러 주었다. 이렇게 딱 붙어서는 하지 말라고 짜증 내는 것쯤이야 별거 아니지.

하지만 무릇 배우라면 슬레이트 소리에 맞춰 바로 몰입해야 하는 법이다.

나는 경직된 얼굴의 집사가 다시 문을 열고 들어옴과 동시에 자세를 바로 했다. 정확히 묘사하자면 스펜서의 어깨에 자연스레 머리를 기댔다는 뜻이다.

집사의 뒤에는 못 보던 얼굴의 중년 사내가 있다.

보아하니 션 스펜서는 이번엔 저 사람 앞에서 돈 많고 가벼운 셀러브리티가 되어야 하는 모양이다.

중년 사내는 응접실에 들어와서 션과, 정확히는 우리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옅은 주름이 지고 처진 눈매를 사람 좋게 휘었다.

……꽤 괜찮은 사람 같은데?

첫인상을 제법 믿는 편인 나는 무작정 첫 판단을 내렸다.

심지어 그는 이제껏 이곳에서 봐 왔던 그 어떤 사람들보다 인간적인 옷차림이기도 했다.

희끗한 새치가 자란 머리가 조금 거칠게 손질된 모습은 왠지 디트로이트에서 오늘도 더운 스팀 앞에 서 있을 아버지가 떠오르기도 하고 말이다.

“어이쿠, 이런. 제가 좋은 시간을 방해한 건 아닌지.”

“틀린 말은 아니지만 바쁘다 한들 도리를 다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제발 다른 사람들도 스펜서 씨의 반이라도 저흴 존중해 주면 얼마나 좋을까요. 훨씬 일하는 맛이 날 겁니다. 오늘만 해도 하나같이 코앞에서 문을 쾅쾅 닫아 버리지를 않나 말이라도 걸려고 하면 주위를 살펴보면서 무작정-”

아차.

좋은 사람일지라도 말은 좀 많은 것 같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한 건 스펜서 역시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스펜서는 중간에 끊지 않으면 영원히 말을 이어 갈 것 같은 사내의 한탄을 부드럽게 끊어 냈다.

“그렇게 말해 주다니 영광입니다. 불편하지 않으시다면 자리에 앉으시죠.”

“아핫핫. 여기 애인분도 같이 들어도 되는 얘기는 아닐 것 같아서 말입니다.”

내가 두 사람 사이의 묘한 긴장감을 짚어 낸 건 이때부터였다.

웃는 낯으로 사람 물 먹이고 싶어 하는 말투 정도야 이 드넓은 땅덩어리에서 이민자의 2세로, 언제든지 대체 가능한 남자 아시안 배우로 구르며 익히 감을 잡은 지 오래다. 나는 입술 끝을 슬쩍 밀어 올리면서도 눈으로는 스펜서에게 다시 한번 확인했다.

‘나 진짜 여기 있어도 되는 거 맞냐?’

대답은 여러모로 명쾌했다.

스펜서는 보란 듯이 내 어깨에 그의 길쭉한 팔을 둘러 감쌌다. 그리고,

“괜찮습니다. 코빗 형사.”

듣는 순간 저절로 몸이 얼어붙을 문장들을 술술 내뱉기 시작했다.

“어차피 얼토당토않은 이야기를 늘어놓으려고 오신 것 아닙니까?”

와. 얘는 경찰한테도 이렇게 재수 없게 말한다!

제법 괜찮은 애인 행세를 하던 나는, 션 스펜서의 믿을 수 없는 인성에 순간적으로 표정 관리에 실패하고 말았다.

이건 내가 전과가 있어서 오버하는 게 아니다. 아무리 결백해도 경찰 앞에서는 저절로 긴장되고 좀 그렇지 않나. 갱단이 아니고서야 저절로 말이 곱게 나오기 마련인데 이 녀석은 아주 가리는 게 없다.

하지만 응접실에 들어오자마자 자신이 오늘 하루 당한 문전박대를 한탄하던 형사는 이런 스펜서의 태도가 놀랍지 않은 듯했다.

“하핫! 뭐 그렇지요. 하지만 꽤 그럴듯한 소설도 몇 개 끼어 있습니다. 그러니 정말 이쪽 분….”

형사의 시선이 잠시 나에게 닿는 순간, 차가운 얼음이 닿은 것처럼 작게 어깨를 떨고 만 것은 연기로도 어쩔 수 없는 자동반사에 가까웠다.

“앞에서도, 괜찮겠습니까? 변호사가 좋아하지 않을 것 같은데 말입니다.”

“나는 언제나 변호사가 좋아하지 않는 일을 하지요.”

자랑이다, 야.

하지만 그걸 대놓고 내색할 수는 없는 일이라, 나는 술에 취하기라도 한 사람처럼 실실대면서 “괜찮아요! 이야기하라고요, 신사분들.” 하고 말을 더하고는 스펜서의 목에 고개를 묻었다.

이름하야 필름 끊긴 투명인간 전술이다.

먼저 손을 든 건 형사 쪽이었다. 그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쉬면서 그렇게야 자신한다면야, 뭐. 하고 웃었다.

“자. 스펜서.”

일정하게 뛰는 션의 맥박 소리가 점점 속도를 더해 가는 내 쪽의 소리와 뒤섞이기 시작한다.

“오늘도 죽은 바라노프의 이야기를 해 볼까요.”

션 스펜서가 나를 이 방에 남겨 둔 진짜 이유가 뭘까.

그저 같은 사내와 뒹구는 척하기 위함만은 아니라는 건 덕분에 잘 알겠다.

비극적으로 세상을 떠난 친구의 사건이 어떻게 진전되고 있는지 알려 주기 위해서? 아니면 경중은 달라도 같은 수사 선상에 올랐던 몇 달간의 파트너를 향한 과한 배려라도 되나.

“고인의 일은 참 안타깝습니다만, 집까지 찾아와서 했던 말을 몇 번이고 반복하게 하는 건 과한 표적 수사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아니죠. 그땐 목요일 밤의 약속을 말씀하지 않으셨잖습니까.”

슬쩍 실눈을 뜨고 바라본 형사의 입꼬리는 히죽 올라가 있었다.

“스펜서 씨가 바쁘신 걸 이 LA에서 모르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데 그런 분이 재작년 겨울부터- 벌써 1년도 넘게 한 달에 두 번, 목요일 밤을 꼬박 비우셨다고요?”

“…….”

“몇 년을 코카인이며 스피드-메스암페타민-에 빠져 허우적대다가 드라마 좀 성공했다고 패서디나의 대저택부터 산 약쟁이를 만나기 위해서? 하핫, 그걸 누가 믿겠습니까.”

“코빗 형사. 우선 당신의 그 장황한 말 중 하나를 정정하죠.”

예의 바른 듯하지만, 평소보다 조금 빠르게 흘러나온 스펜서의 목소리는 평소와는 묘하게 다른 악센트였다.

“바라노프의 드라마는 좀 성공한 게 아닙니다. 케이블 기록을 완전히 갈아 치웠죠.”

“이렇게나 낭만적이실 데가! 아, 물론 이번에는 증인 확보까지 모두 했습니다. 거 단단히 입을 봉해 두셔서 고생깨나 했지만 말입니다.”

“역시 이번에도 괜한 수고를 하셨군요.”

단어 하나하나를 꼬투리 삼아 이어 가던 날 선 대화가 잠시 멈췄다.

나는 숨소리조차 크게 내지 못한 채로 그 짧은 침묵에 마른침만 꼴깍 삼켰다.

“사실이 아니라는 말씀입니까?”

“말씀하신 대로 저와 바라노프는 꽤 오랫동안 교류했습니다.”

“-그럼!”

“물론 영화 때문이지요.”

“영화요?”

션 스펜서는 지극히 의도적인 몇 초의 침묵 끝에 느리게 대답했다.

“제인 버킨. 바라노프의 다른 이름입니다. 이번 영화의 각본가로 찾으실 수 있을 겁니다.”

이들의 대화는 모든 것이 낯설지만 제인 버킨이라는 사랑스러운 이름의 정체가 네스 녀석이었다는 건 또 새로운 소식이었다.

왠지 현장 작가들과의 미팅에서도 얼굴 한번 볼 수 없더니 모두 이유가 있었다.

지금 네스의 이름이 스태프 롤에 들어가 봤자 소란스러울 게 뻔하니 나중에 공개할 줄 알았는데 이미 한 자리 차지했을 줄이야.

“이번 영화가 워낙 특별한 내용이다 보니 어쩔 수 없었습니다.”

“특별한 내용이란……, 여쭤볼 수 없는 거겠죠?”

“여기서부터는 저 혼자 말하기 어렵군요. 사실 지금 하는 모든 말들이 다 대외비라는 걸 잘 아실 텐데요.”

대체 왜 그런 살벌한 단어들 사이에 술에 취해 늘어진 애인 역할이 필요한 걸까. 하지만 그런 의문을 한숨처럼 떠올리기도 전에 형사는 진짜 한숨을 내쉬면서 “그럼 질문을 바꿔 보겠습니다.” 라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렇게나 자주 만나서 무슨 이야기를 하셨습니까?”

“여기까지 찾아와서 말장난이라도 원한다면-”

“그럴 리가요! 얼마나 힘들게 만난 스펜서 씨인데요. 전 그저 그렇게나 자주 만나신 게 그저 작품 때문이라는 걸 믿을 수 없을 뿐입니다. 영화 내용에 대해서 말할 수 없다면 그 밖의 거라도 설명해 주셔야 할 것 같은데요.”

션이 처음으로 작게 동요했다.

사실 표정을 보지 못해서 그가 정말로 동요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최소한 머리를 기댄 그의 어깨가 묘하게 단단하게 당겨지는 걸 분명히 느꼈다.

나와 관련이 있는 듯, 또 없는 듯한 대화에 심장이 고무 밴드처럼 늘어났다 줄어들기를 반복하는 것만 같았다.

“…글쎄요. 바라노프 그와는 이런저런 고민을 많이 나눴습니다만, 요즈음엔 특히 파트너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했습니다.”

“파트너요?”

“이를테면 이번 영화의 상대 배역에 대한 것 말입니다.”

“아하!”

……놀리는 거야 뭐야.

나는 속으로 이 망할 시간이 지나면 스펜서에게 반드시 성의 있는 대가를 얻어 내고 말리라 이를 갈았다. 같이 수사 선상에 올라간 동지끼리 이러는 게 어딨나? 심지어 내 쪽은 그처럼 대단한 백도 없는데 말이다.

마음만 같아서는 술에 취해 움직이는 척 발이라도 밟고 싶다.

나는 괜히 몸을 뒤척이며 정말 내키면 그의 발등을 내리찍을까 생각했다. 하지만, 형사의 말이 이어진 건 그런 내 움직임과 거의 동시였다.

“혹시 옆에 늘어져 있는 분을 이야기하는 겁니까?”

배우가 꼭 유능한 거짓말쟁이라는 법은 없다.

혹자는 이 둘이 서로 같은 결을 가졌다고도 하겠지만, 굳이 차이점을 찾자면 난 거짓말이 들통났을 때조차 꿈쩍하지 않을 정도로 대범한 인간은 절대 못 된다.

이 말인즉슨, 소심한 이선 박은 형사의 물음이 귀에 꽂히는 순간 어깨를 들썩이고 말았다는 의미다.

젠장!

응접실 문이 열리는 것과 거의 동시에 고개를 푹 숙여서 얼굴을 제대로 보기도 힘들었을 텐데, 대체 언제부터 눈치를 챘는지 모르겠다.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박.”

심지어 형사는 내 이름마저 알고 있었다!

결국, 내 선택지는 몰려오는 쪽팔림과 머쓱함을 혼자 견디며 몸을 바로 하는 것뿐이었다.

그는 내 뒤늦은 인사에도 사람 좋게 껄껄 웃으며 자신의 명함을 건네주었다. 나는 괜한 오해 따윈 말아 줬으면 한다는 의도를 가득 품은 공손한 자세로 작은 사각의 종이를 받아 들었다.

닉 코빗.

나는 그의 이름 위에 선명히 인쇄된 LAPD의 마크를 보며 최대한 상냥하게 입꼬리를 올려 보였다.

“혹시 몰라 얼굴을 외우고 오길 참 잘했군요. 하하, 저는 여기 들어오는 데 몇 주가 걸렸는데. 이 까다로운 분이랑 꽤 절친하신가 봅니다?”

“예? 하, 하하…, 어쨌거나 몇 달은 함께해야 할 동료이니까요.”

“‘대외비’라고 단언할 대화까지 함께해도 될 만큼 가까운?”

뾰족한 화살이 나를 정조준하고 있는 것이 생생하게 느껴진다.

나는 형사와 눈을 마주쳤다가, 스펜서를 한 번 돌아봤다가 하며 입술만 달싹였다. 무슨 생각인지 입을 다문 채 당황해 어쩔 줄 모르는 나를 지켜보고만 있는 션 스펜서의 시선이 유독 껄끄러웠다.

그 침묵에 힘을 얻기라도 한 걸까. 형사의 조롱과도 같은 감탄이 이어진다.

“이렇게 보니 참 대단한 영화군요! 주연 배우라고는 둘뿐인데 한 명은 각본가의 가장 유력한 살인 용의자이고, 또 다른 한 명은 그 각본가와 절친했던 마약 중독자라.”

분명 한 달도 전에 찾아간 조사실의 형사들은 권태로운 눈을 하고서 뻔한 질문만 던져 댔었다. 그건 얼마나 형식적이던지 왼쪽에는 에이전시 사장인 다니엘 바커를, 또 오른쪽에는 LA에서 손에 꼽는 로펌의 변호사를 나란히 끼고 등장한 게 괜한 요란법석 같아 낯이 뜨거워질 정도였다.

차라리 그날 내게 던지는 질문보다 바커에게 잘 보이고 싶어 엉덩이를 들썩이던 그들의 눈빛이 더 명확했을 거다.

심지어 나는 그들의 틀에 박힌 물음들을 완벽하게 통과했다.

내가 네스 녀석과 가까이 지냈다고 한들 근 3년은 전화 한 통 한 적 없단 말이다.

애초에 네스 바라노프라는 이름을 아는 마약 중독 회복 모임의 사람이 한둘이었겠나! 하지만 그런 말을 나를 의뭉스러운 눈으로 보는 형사를 향해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당황한 채 구구절절 설명하는 게 더 의심스럽지 않을까?

그렇지 않아도 도로 반품될 위기에 처해 있는데 괜한 잡음이라도 샜다가는 반론의 기회조차 없이 자리를 빼앗길 수도 있는데.

나는 초조하게 잘 돌아가지 않는 머릿속으로 온갖 단어를 떠올려 엮기를 반복했다.

그때였다.

“닉 코빗.”

담담하게 들려온 구원의 목소리에는 그 어떤 당혹도, 떨림도 찾아볼 수 없었다.

“너무 무례하게 굴지는 않는 게 좋을 겁니다.”

“……뭐요?”

“뇌물 수수로 6개월 정직. 배지도 없는 그쪽에게 이 정도면 충분한 예의를 차린 것 같은데.”

심지어 한결같은 싹수를 자랑하기까지 했다.

션 스펜서는 내 손에 있는 명함을 흘끗 보더니 “저것도 엄연히 지금은 꺼낼 수 없는 카드고 말입니다.” 하고 웃었다.

대화 내내 고상한 어조로 흘러나오는 아슬아슬한 문장에 잔뜩 긴장했었던 나는, 사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저 말아먹은 성깔에 안도했다.

시종일관 사람 좋은 얼굴을 하던 형사가 순식간에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퀭한 눈으로 너털웃음을 흘리며 노려보는 순간의 스산함은 그 상대가 내가 아니라서 다행일 지경이었다.

스펜서는 흉흉한 기세를 한 억센 사내를 앞에 두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보란 듯이 마지막 한 타를 쳤다.

“그럼, 코빗 형사님.”

“…….”

“조심히 들어가시기를.”

조금 전까지 물 먹여 놓고서 세상 우아한 목소리로 코빗 형사님이라니 얜 진짜 새삼스레 못됐다.

나는 내부의 이야기를 모두 듣고 있었다는 듯 곧바로 열리는 응접실 문을 보면서, 진심으로 내 파트너의 안위가 걱정됐다.

전부터 생각했지만 이 녀석은 숨만 쉬어도 적을 만들 녀석이다.

스크린에서 눈을 뗄 수 없는 연기력으로는 갈채를, 절대다수의 선망인 배경을 두고도 거침없이 이어 가는 아슬아슬한 행동들로는 야유를, 아이와 미혼모들을 위한 기부자 명단에는 언제나 가장 맨 위에 존재하며 존경을 사는 남자의 삶은 이미 자극이 충분하다 못해 넘친다.

괜한 총구를 더할 필요가 없단 말이다.

나는 형사가 무뚝뚝한 표정을 한 집사의 뒤를 따라 나가는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자리에 앉아 있다가, 문이 작은 소리와 함께 닫히자마자 벌떡 일어났다.

“이봐.”

최대한 아무렇지도 않게 부르고 싶었건만, 저도 모르게 조금 무뚝뚝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션 스펜서는 그 꼿꼿하게 앉은 자세 그대로 턱만 기울여 내 쪽으로 시선을 움직였다. 평소에는 퍽 근사하다고 생각했던 그의 푸른 눈동자가 왠지 거슬렸다.

나는 아무 대답 없는 남자를 향해 천천히 말을 이어 갔다.

“네스가 나를…….”

애써 피하려고 했던 주제다.

네스 바라노프의 죽음은, 나에게는 친구였던 남자의 비극적인 끝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

“이 영화의 주인공으로 추천이라도 했었어?”

침묵은 그 어떤 대답보다 진득한 긍정을 품고 있다.

나는 이어지는 질문을 내뱉는 숨에 섞어 간신히 토해 냈다.

“나에 대해서- 뭐라고 하면서?”

이름을 붙일 수 없는 무언가가 목구멍을 막아서 자꾸 갈라지고 쉰 목소리가 튀어나온다.

내가 이제껏 만났던 그 누구보다 오만한 사내가 느슨하게 다리를 꼬고 앉은 자세로 나를 심사하듯 눈에 담는다. 그 순간, 서 있는 건 내 쪽인데 이상하게도 그를 올려다보는 기분이 들었다.

“알고 싶어?”

단정하게 흘러나온 목소리에서는 여전히 어떤 감정도 훔쳐볼 수 없었다.

나는 대답 대신 방을 뛰쳐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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