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 to be, or not to be, that is the question(2) (5/21)

* * *

10월. 이맘때의 LA는 비가 거의 오지 않는다.

하지만 늘 운이 따라 주지 않는 인간의 외출에는 그 드문 날씨마저 늘 함께 따른다. 나는 주인이 자리를 비운 집의 계단에 음침하기 짝이 없게 앉아서 부슬부슬 떨어지는 빗방울을 고스란히 맞았다.

사실 여긴 집이라 하기도 좀 뭐 하다.

고철들이 탑처럽 늘어진 폐차장 구석에 있는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낡은 카라반은 집이라는 따듯한 단어보다 경계 보초 같은 살벌한 표현이 더 잘 어울린다.

실제로도 이 카라반의 주인은 이걸 그런 용도로 사용하고 있고 말이다.

“쳐 죽일 놈들!”

드디어.

나는 저만치에서 들리는 익숙한 욕설에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제아무리 태양의 도시라고 한들 비 오는 폐차장이 주는 칙칙함을 다 털어 내지 못했다.

“오늘이야말로 머리에 구멍을 내 줘야지. 매일같이, 매일같이 거슬리게 찍찍찍찍!”

철컥, 철커덕. 익숙한 장전 소리다. 나는 오랜만에 듣는 그 살벌한 소리에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떤 쥐새끼가 또 살금살금, 살금살금 기어 들어왔느냔 말이야!”

“…헬렌.”

새하얀 곱슬 머리카락을 가진 아담한 체구의 할머니가 자신의 키만 한 샷 건을 들고 온갖 욕을 중얼거리며 걸어오는 모습은, 지금 여러분들이 상상하는 것보다 더 살벌하다.

어쨌거나 즉발 즉사의 산탄총 아닌가.

나는 생명 연장을 위해 기꺼이 텅 빈 두 손을 들어 보였다.

“저예요.”

“…….”

“오랜만이죠?”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는 초록 눈에는 미심쩍음이 가득했다.

짐작하건대 헬렌의 저런 표정은 내가 진짜 ‘이선 박’인지  그녀 나름의 기준으로 확인하는 것이겠지.

나는 헬렌이 원 없이 나를 감시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뒈진 줄 알았더니!”

“하하, 보시다시피 살아 있었어요.”

어쩌면 헬렌은 내가 아는 사람 중 이번 캐스팅을 축하해 주지 않은 유일한 사람일 것이다.

그도 그럴 게 헬렌의 집에는 컴퓨터는커녕 TV조차도 없다. 스마트폰은 고사하고 선불폰만을 쓰는데 그마저도 일주일에 한 번씩 바꿔 대니 차라리 비둘기를 가르쳐서 다리에 편지를 매는 게 더 빨리 연락하는 길일지도 모른다.

사실 지금의 재회도 헬렌의 기준에서는 ‘뒈진 줄 알았을 만큼’ 간만의 일이다.

나는 헬렌이 카라반 문에 주렁주렁 달린 주먹만 한 자물쇠와 걸쇠를 하나씩 푸는 것을 보면서 히죽 웃었다.

한때 우리는 이 카라반에서 온종일 죽치고 누워서 그녀가 만들어 주는 진득한 쇼콜라 쇼를 먹으며 시답지 않은 미래를 이야기하고는 했다. 사실 그땐 패서디나의 대저택을 사는 것도, 유명 감독 영화의 주연을 차지하게 되는 것도 반쯤 단것에 취해 지껄이는 망상 중 하나일 뿐이었는데.

나는 씁쓸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모임은 다시 안 나오세요?”

“흥, 얼간이들 코 찔찔 흘리는 걸 더 듣느니 콱 머리에 총알을 박고 말지!”

“뭐 저도 비슷한 감상이긴 해요.”

말은 그렇게 하지만 카라반 구석에 있는 코인 액자는 먼지 하나 끼어 있지 않았다.

나는 몇 년이 지나도 그대로인 낡고 아늑한 카라반을 눈으로 훑었다. 라디에이터가 돌아가는 소리가 듣기 좋았다.

“있죠, 헬렌.”

나는 당장 어제도 이곳에 왔던 사람처럼 소파베드에 등을 기댔다. 끼익, 끼익 소리가 나는 이 낡은 소리마저도 여전했다.

“네스가 죽었어요.”

어떻게 말을 꺼내는 게 좋을지 한참을 고민했던 문장이었는데 이곳에 들어오니 놀라울 만큼 담담하게 나왔다. 심지어 헬렌의 대답은 그런 내 어려움이 무색해지는 내용이기도 했다.

“……알아.”

“모임에서 누가 왔다 갔어요?”

“그럴 리가! 그 시끄러운 녀석들이 내 집에서 찍찍, 찍찍, 시끄럽게 울게 두라고?”

당연한 말이다.

사실 헬렌의 이 거대한 차고는 웬만한 사람은 들어올 엄두조차 못 낼 곳이다.

LA에 가득한 노숙자와 막가는 갱단 녀석들조차 은밀하게 숨어서 이런저런 일을 하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을 이곳만은 얼씬도 하지 않는다.

난 개인적으로 그 이유가 사방에 사나운 가시덤불과 편집증적인 사유지 마크가 박혀 있는 건 둘째 치고서라도, 왠지 들어왔다간 뭔가에 오염될 것만 같은 느낌을 주는 게 결정적이지 않을까 늘 생각한다.

나조차도 헬렌이 자신의 집이라며 처음 이곳에 데리고 왔을 땐, 정말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지는 게 아닌가 싶어 섬뜩하기까지 했었다.

뭐. 눈에 거슬리면 곧바로 총을 쏘는 살벌한 할머니가 있다는 소문이 퍼졌는지도 모르지!

“그럼 어떻게 알았어요. 장 보러 갔다가 신문이라도 봤나?”

주전자에 물을 채우던 헬렌의 손이 잠시 멈췄다.

느슨한 마음으로 헬렌의 대답을 기다리던 나는, 천천히 뒤도는 얼굴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심각해서 바보같이 늘어졌던 몸을 바로 세웠다.

블라인드에 커튼까지 주렁주렁 달려서 밖에서는 카라반 안을 보려야 볼 수 없을 텐데도 순간적으로 흘끗 밖을 살피는 헬렌의 눈은 매섭기만 했다.

“네 녀석만 온 거 맞지?”

“……네.”

헬렌은 은밀한 비밀을 말해 주겠다는 듯이 내 지척까지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나는 그 작은 속삭임에 기꺼이 귀를 기울였다.

“바라노프 녀석이 말해 주더라고.”

내가 아는 바라노프는 단 한 명이다. 그리고 그건 헬렌 역시 마찬가지다. 덕분에 순간 맥이 탁 풀린 나는 거의 한숨에 가깝게 대답했다.

“네스는…, 맙소사. 헬렌. 그렇게 된 지 벌써 두 달은 됐어요.”

“알고 있대도. 두 달 전 목요일. 내 똑똑히 기억하지.”

말이 안 통한다. 헬렌의 기억력은 정말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정확하지만, 망상과 현실을 뒤섞어 기억한다는 치명적인 문제가 있다. 나는 길게 한숨을 내쉬고는 “내 말을 믿지 않는 게야?!” 하고 미간을 찌푸리는 헬렌에게 다시 한번 두 손 들기로 했다.

“후우, 그래요. 네스가 뭐라고 하던가요?”

“누가 찾아왔다더군!”

빗소리가 창문을 때리는 소리와 희미하게 깜박이는 등, 작게 속삭이는 목소리. 정말이지 오늘따라 모든 것이 음산하기 짝이 없다.

하지만 그중에서 가장 큰 건 꿀꺽하고 마른침을 삼키는 내 목울대의 소음이었다.

“……누구요?”

“그 쥐새끼 말이야.”

“그 쥐새끼가 누군데요, 헬렌.”

“그 쥐새끼가 살금살금, 살금살금….”

헬렌의 초록색 눈이 가늘어졌다.

“오늘같이 비 오는 밤에 찾아왔다지.”

내가 뒤처지는 게 아니라면, 경찰은 아직까지 네스를 그렇게 한 범인을 찾지 못했다. 바커와 변호사를 함께 대동하고 찾아갔던 때도 그리 말하지 않았었나.

……아니! 애초에 진지해질 필요조차 없는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뭐, 네스가 자기가 죽었다고 말해 줘? 쥐새끼는 또 뭐람!

머리로는 그걸 분명히 아는데 왜 손바닥이 축축해지는지 모르겠다.

나는 주름진 입을 꾹 다문 채 날 거의 노려보다시피 하는 헬렌의 말이 이어지는 걸 숨도 제대로 못 쉬면서 기다렸다.

하지만, 그건 괜한 짓이었다.

“글록 같은 장난감은 품위가 없어!”

“…네?”

“그렇다고 겉멋만 들어서 파이슨 따위를 쓰다간 곧바로 대갈통이 뚫리는 수가 있지! 내 어제도 그런 얼간이를 봤다고. 특히 이선, 너처럼 몸만 키운 비실비실한 녀석은 한 방에 관짝으로 갈 게야!”

솔직히 요새 뒤숭숭한 일이 한둘이 아니다.

게다가 이런 날씨에, 이런 분위기라면 무슨 말을 들어도 휩쓸리기 쉽다.

나는 언제나 같은 헬렌의 허풍과 피해망상에 팔뚝에 소름까지 돋을 정도로 긴장했던 스스로가 민망해져서 반사적으로 머리를 짚었다. 물론, 헬렌은 내가 그러거나 말거나 혼자 흥분한 채로 빠르게 말을 이어 갔다.

“그러니 라이플을 써. M82가 단연 최고지! 못해도 레밍턴 정도는 들라고. 안 보이게 숨어서 녀석을-”

“맙소사, 헬렌. 제발요. 그래요, 전 몸만 키운 비실비실한 녀석이라 그런 건 꿈도 못 꾸니 그만하자고요.”

6피트의 덩치로 내뱉기에는 너무 귀여운 척하는 말이 아니냐고 날 비난하지 말았으면 한다. 이렇게 끊지 않으면 헬렌은 언제나처럼 알고 있는 모든 총기류를 내뱉으며 그녀의 비밀 창고에서 장물일 게 분명한 총을 쥐여 주고 말 거다.

그런 상황은 사절이다.

나는 헬렌이 그건 그렇다며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못 본 척하며 말을 이었다.

“우리 나가서 포나 먹어요. 사실 어제 엄청 술을 들이부었더니 영 속이 안 좋아. 내가 쏠게요. 보니까 이 앞에 새로-”

“이선!”

어깨에도 닿지 않을 정도로 작은 노년 여성의 힘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강한 악력에 순간적으로 작게 미간이 찌푸려졌다. 나는 주름지고 작은 손에 있는 힘껏 틀어 잡힌 내 팔과 헬렌의 얼굴을 번갈아 보면서 대답했다.

“왜요, 헬렌?”

“이제 남은 건 우리 둘뿐이야.”

멍청한 내가 네스를 통해 배운 게 있다는 건 그나마 다행이었다.

바로 오랜 친구를 혼자 둬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나는 “알아요.” 하고 작게 대답하며 헬렌의 주름진 손을 꽉 마주 잡아 주었다.

* * *

요새 스펜서 저택에는 알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네, 스펜서입니다.”

그리고 거기엔 그때마다 늘 불성실한 구경꾼이 하나 있다.

바로 스펜서 저택의 게으른 객식구 이선 박이다. 나는 소파에 느슨하게 누워 대본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물었다.

“또야?”

“그래.”

“여기도 장난전화가 다 오고. 진짜 별일이네.”

그렇다.

요 일주일 동안 션 스펜서의 저택에는 하루걸러 한 번씩 저런 발신인 불명의 전화가 온다.

요즘 세상에 누가 발신인 번호가 안 뜨는 전화기를 쓰냐고? 하하. 어디겠는가. 바로 여기다. 이 으리으리한 저택의 전화기는 하나같이 몇십 년은 된 것 같은 앤틱한 골동품들뿐이다.

아니, 난 이제 발신자 표시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이 예쁜 쓰레기들은 재다이얼 버튼조차 없으니 말이다!

“슬슬 번호를 바꿀 때가 되긴 했지.”

“아예 없는 일은 아닌가 봐?”

“저택에서 한 발자국만 나가면 카메라가 따라다니는데 전화가 대수일까.”

나는 턱을 긁적이며 이어 물었다.

“왜 바로 안 바꾸고?”

“몇 통 정도는 견딜 만한 일이니까.”

“뭐?”

“폭탄 돌리기가 익숙한 쪽이 겪는 게 낫지 않겠어.”

확실히 틀린 말은 아니다. 이곳의 번호가 어디론가 흘러나간 게 정말 확실하다면, 그걸 버렸을 때 재수 없게 그 숫자 조합에 얻어걸릴 선량한 소시민의 일상은 썩 유쾌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게다가 션 스펜서의 저택 전화번호라면 솔직히 누구라도 한 번쯤은 실수인 척 걸어 보고 싶을 것 같지 않나? 나는 의외로 휴머니즘 가득한 답변에 히죽 웃었다.

요새 그와 나는 이렇게 고용인들을 모두 멀리 물린 다음 대사를 중얼거리거나 호흡을 맞추는 시간이 늘어났다.

벌써 다음 주로 다가온 크랭크인 때문이었다.

“……그래도 여기서는 처음이네.”

“뭐?”

“장난전화.”

션은 대본에서 꼼짝 않던 시선을 나에게로 슬쩍 돌렸다.

“네가 온 이후부터인 것 같은데, 이선.”

“……어엉?”

저건 또 무슨 소리람. 나는 눈썹을 휜 채로 고개를 기울였다.

“진짜?”

“됐어. 그냥 한 얘기니까.”

“거 되게 찝찝하게 그래.”

션은 날 놀려 먹은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했다는 듯 희미하게 웃더니 다시 그만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하여간 어울리지도 않는 농담마저 쟤는 좀 저렇게 한다!

나는 표지가 너덜거리다 못해 떨어져 나간 탓에 얇은 플라스틱 커버를 씌운 그의 대본을 몰래 훔쳐보며 작게 속으로 혀를 찼다.

그는 아직도 나와 대화를 맞출 때마다 종종 알 수 없는 얼굴을 한다.

사실 그건 밀러 감독이 뭐가 문제냐고 은근히 다그치던 그날의 표정과 꽤 비슷해서, 종종 선생님에게 혼나는 애송이가 된 것은 기분이 될 때도 있다.

대본을 쥔 지 얼마나 됐다고 몇 분 만에 그 안으로 완전히 빠져드는 파트너의 얼굴은 언제 봐도 퍽 따끔한 각성제다.

나는 감독도, 상대 배우도 일제히 지적하는 벽 앞에 막혀 있다.

사실 이 저택에 처음 발 디뎠을 때만 해도, 난 그걸 스펜서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볼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건 시간이 갈수록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미스터 스펜서.”

“네, 미스터 박.”

이제 그와 나는 이런 장난스러운 대화도 나눌 수 있을 만큼 제법 편해졌다. 하지만 나는 기세 좋게 먼저 말문을 튼 것과는 달리 쉽사리 본론을 꺼내지 못하고 한참을 망설였다.

아무리 비교 불가의 필모그래피를 가지고 있다 한들, 저 ‘션 스펜서’는 어쨌거나 이번만큼은 나와 같은 타이틀 롤을 맡은 남자다.

그는 내 선생님도, 상사도, 감독도, 제작자도, 하다못해 각본가도 아니라는 거다.

그래. 그냥 길게 변명처럼 말할 것도 없이…… 막상 물어보려니 자존심이 상했다는 뜻이다. 그게 다다. 젠장.

자, 일주일. 일주일 남았어, 이선.

나는 슬금슬금 머리를 들려는 알량한 자존심을 누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네 생각엔 내 문제가 뭐야?”

스펜서는 앞뒤를 뚝 잘라먹은 내 물음을 곧바로 파악하지 못하고 잠시 눈썹을 휘었다.

하지만 그건 길지 않았다.

그 빠른 사태 파악의 이유가 묘하게 시선을 피하며 대본 모서리를 초조하게 만지작거리는 내 모습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그가 눈치가 빠른 사내이기 때문이었을까. 솔직히 그건 잘 모르겠다.

중요한 건 방금까지는 꼬박꼬박 대답하던 스펜서가 얼마 안 가 조금 곤란하다는 듯 살짝 찌푸린 미소를 걸었다는 점이다.

“글쎄. 잘 모르겠는데.”

“아. 제발. 이번엔 대충 넘어가지 말고! 나 지금 완전 심각하다고.”

기껏 용기 내어 꺼내 놓은 말을 뱀처럼 빠져나가려는 모습에 울컥한 나는 조금은 신경질적으로 소리를 높였다.

젠장. 스펜서 저 녀석은 분할 정도로 여유롭다.

하긴 평단이 극찬하고 관객이 열광하는 배우 션 스펜서 님이 무슨 걱정이 있겠는가. 다음 주는커녕 내일부터 촬영을 시작한다고 해도 눈 하나 깜박 안 할 것을.

얼마나 그렇게 씨근대고 있었을까.

영원히 꾹 닫혀 있을 것만 같던 내 완벽한 파트너의 입이 실로 뜬금없이 열린 건 그때였다.

“비평가를 봤어.”

“…너도 그게 마음에 들던?”

나는 몇 초간 그 간결한 문장에 다른 뜻이 있나 되짚어 보다가 결국 얼빠진 물음을 던졌다. 그렇지 않아도 그 영화를 참 좋아하는 팬이자 후원자가 곁에 있지 않나.

“그것만 본 건 아니지. 차이니즈 붐, 컬러 앤 라이트, 디아블로, 천국의 문….”

“야! 마지막 건 말하지 마. 기억하고 싶지 않은 영화니까.”

순서의 대중도 없이 멋대로 흘러나오는 이름들 덕분에 찍었다는 사실조차 잊고 싶은 스무 살의 암울한 것들까지 덩달아 떠오른다. 워낙 갑작스레 맞닥뜨린 탓인지, 뺨이 조금 뜨끈한 것 같기도 하다.

“어쨌든, 그렇게 네 작품을 다 봤다는 말이지.”

“나 이래 보여도 꽤 다작했는데. 그걸 다 봤다고?”

“영화, TV 시리즈 다 합쳐서 서른여덟 작품. 참 부지런히 했던데. 연극도 자주 했었고.”

솔직히 좀…… 의외다.

제대로 흥행한 거 하나 없긴 하지만, 어쨌거나 내가 처음으로 스크린에 얼굴을 내민 건 벌써 15년 전의 일이다.

솔직히 이 정도쯤 되면 당사자인 내게 물어봐도 이제껏 몇 개의 작품에 출연했는지 곧바로 답이 나오지 않는다. 크고 작은 단역으로 출연했던 것들을 세면서 회상에 젖는 것보다, 눈앞의 새 각본과 오디션을 찾는 게 더 급했었으니 말이다.

왠지 뭐라 대꾸할 말을 잊고 눈만 깜박이고 있으려니 매끄러운 남자의 말이 이어진다.

“사실 네 연기는 여기서 참 좋아할 스타일이지.”

“욕이야?”

“전혀. 극찬에 가깝지. 메소드를 숭배하는 곳이잖아?”

왠지 속이 근질근질해진 나는 괜히 과장되게 어깨를 으쓱했다.

답지 않게 단어를 골라 말하는 스펜서는 영 적응되지 않는다.

사실, 화려한 그의 필모에 비해 길이만 길지 내실은 빈약할 내 경력에 대고 믿을 수 없는 표현을 쓰는 그의 말은 어쩌면 욕보다도 나빴다.

“넌 단순히 책이나 인터뷰로는 만족을 못 하는 편이지. 택시기사 역을 맡으면 직접 택시를 몰아보고, 노숙자 역을 앞두고는 직접 길바닥에서 한 달 동안 웅크리고 지내고…. 아, 그래.”

“…….”

“마약중독자 연기는 특히 끝내주던데.”

“욕 맞잖아, 개새끼야!”

“이런 건 가벼운 농담이라 하지 않나?”

다시 말하지만 쟤는 정말 농담에 소질이 없다!

나는 가늘게 눈을 휘어 웃는 션 스펜서를 보며 역시나 싶어져서, 조금 뾰족하게 따지듯 물었다.

“결국 내 작품을 다 본 감상은 그게 단가? 끝내주는 마약중독자 연기?”

“아니. 그래서 더 이해가 안 된다는 뜻이지.”

나긋나긋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내가 끼어들 틈도 없이 무심하게 이어졌다.

“한 시간 반 영화에서 겨우 몇 분 등장하는 작은 역할에도 그렇게 빠져드는 사람이 왜 이번에는 일찌감치 발을 뺐을까?”

“-내가 언제…!”

“길바닥에서 잠을 잘 필요도, 맞지도 않는 아르바이트를 할 필요도 없는데.”

대답을 기다리는 시선은 건조하기 짝이 없다.

칭찬 끝에 바닥에 내동댕이치기라! 롤러코스터도 이런 롤러코스터가 따로 없다.

나는 뭐라도 내뱉어 보려고 입을 어물거리다가, 끝내 제대로 된 말을 만들어 내지 못하고 애꿎은 입술만 꽉 깨물었다.

망할. 스펜서의 도움 아닌 도움은 그게 끝이었다.

한껏 지껄인 녀석은 “난 데이브도 아니고, 이 이상 떠들 위치는 아닌 것 같군.” 하며 자리에서 훌쩍 일어나더니 그 곧디곧은 걸음걸이로 방을 빠져나가 버린 것이다.

결국 일방적으로 가득 얻어맞고 응접실에 혼자 남은 나는 혼자 몇 번을 산만하게 앉았다가 일어서고, 방 안을 빙글빙글 돌면서 뭐라 이름 붙일 수 없는 것에 휩쓸린 속을 달랬다.

이 넓고 편안한 감옥에서 궁지에 몰린 내가 한탄할 곳은 하나였다.

“젠장. 듣고 있어?”

-이것만 알아 둬라. 나 이번 주에 크리스티나보다 너랑 더 통화 많이 했다.

친구 좋다는 말은 다 헛거다.

나는 촬영이 끝나면 뭐든 사람을 사귈 모임 같은 것에 가입하고 말리라 다짐했다. 물론 마약 중독자 회복 모임만은 제외하고 말이다.

“나야 크리스티나야!”

-크리스티나지, 미친놈아.

브랜든 우드는 단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물론 녀석의 대답이 맞다. 그야 그렇지만! 다른 대답이 나왔더라면 역겨웠을 것 같기는 하지만! …여하튼 난 지금 그만큼 돌아갈 곳도 기댈 곳도 없단 말이다!

여기서 삐끗하면 일생일대의 기회가 물거품이 된다고.

“있지, 브랜든.”

-어엉.

“너무 징그럽게 듣지 말고 솔직하게 말해 주라. 나 피드백이 필요해.”

나는 “벌써 징그럽다야.” 하고 심드렁하게 말하는 목소리는 철저히 무시한 채 말을 이었다.

“네가 생각하는 내 연기의 장점은 뭐야?”

-발음이랑 발성이 좋지. 대충 중얼거린 말도 귀에 딱딱 꽂히잖아.

맞아, 맞아. 나는 흐뭇한 미소를 얼굴에 가득 건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시작이었다. 그래, 생각해 보면 요새 이런 칭찬이 부족했던 것도 같지. 나는 기분 좋게 이어질 문장들을 기다리며 귀를 쫑긋했다.

아니나 다를까, 브랜든 녀석은 그런 내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

-…….

“……개자식, 이렇게 기다리는데 당연히 좀 더 말해 줘야 하는 거 아니냐?”

-발음 안 좋아서 고생하는 배우 한둘 아니다, 너. 그거 우습게 보지 마.

“아, 좀 더 써! 사람이 이렇게 우울해서 묻는데, 하여간 스펜서 같은 새끼.”

나는 무슨 소리냐며 되묻는 브랜든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전화기 너머로 작은 한숨과 함께 영 마지못해 나오는 듯한 입에 발린 말이 이어지기 시작한다.

-한번 빠져들기만 하면 최고지. 생긴 거랑 다르게 의외로 섬세해서 표현력도 좋고….

그게 꼭 백 퍼센트 칭찬이었다고는 말 못 하겠지만 말이다.

“꼭 쓸데없는 말을 붙이더라, 너! 그리고 빠져들기만 하면 최고라는 말은 또 뭐야. 안 빠져들면 별로라는 말이야?”

-그건 아니고. 못해도 늘 중간은 간다는 소리지. 넌 어딜 가든 구멍은 안 내. 그것만으로도 이 판에서 살아남을 가치가 있지.

하여간 이 세상에서 구걸로 좋은 게 떨어지는 일은 없다.

그건 위로조차도 마찬가지다.

기껏 주연을 맡은 거장의 작품에서 구멍으로 낙인찍히기 직전에 듣는 브랜든의 말은 위안은커녕 썩은 달걀이 되어 바닥에 내던져지는 기분밖에는 더 안 됐다.

-너 정도면 순간 몰입력도 좋은 편이라 잘 맞는 배역만 만나면 물 만난 물고기지. 너 잘하고 있어, 인마. …이선?

내 침묵을 뭐라고 해석했는지 뒤늦게 브랜든이 온갖 좋은 말을 뒤늦게 덕지덕지 붙이던 순간, 작은 신호음이 겹쳐 들리기 시작했다.

하여간 이 골동품은 잠시 전화를 멈추고 다른 전화를 받을 수 있는 기능도 없다.

나는 한숨을 푹 쉬면서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됐어. 전화 들어온다. 끊어.”

-맞다. 너 대체 휴대폰 언제 고칠 거야? 너한테 갈 연락이 다 나한테 오잖아. 디트로이트에서도 무슨 일 있냐고 난리였다고.

“다음 주에 계약금 들어오면 아예 이번 새 모델로 뽑을 거야. 그냥 이쪽으로 전화해. 아니면 망할 미스터 스펜서에게 연락하시든가.”

-하나 더! 아파트는 그럼 당분간 안 써? 렌트비만 매달 내는 거 좀 안 아까워? 뭐 어떻게 BAA 직원들 중에서 잠깐 임시 숙소 필요한 사람 연결이라도 해 줄까?

“친구가 잠깐 쓰기로 했어. 그건 걱정 안 해도 돼.”

마지막 건 오늘 들었던 어떤 말보다 구미가 당기는 제안이기는 하지만, 내 작은 아파트는 이미 당분간 무료 선점한 사람이 있다.

누구냐고?

나름 포근하게 꾸몄다는 자부심 가득했던 아담한 스윗 홈에 발을 딛자마자 “맙소사! 자다가 총을 맞아도 모르겠군!” 하는 칭찬인지 저주인지 모를 평을 한, 제법 거친 내 친구다.

……그래. 맞다. 헬렌에게 몇 달 빌려주기로 했다.

나는 “근데 진짜 스펜서한테 전화해도 돼?” 하고 은근한 기대를 품고 이어 묻는 브랜든의 목소리에 대답 대신 곧장 전화를 끊고, 클래식하기 짝이 없는 전화벨이 다시 울리기를 기다리는 쪽을 택했다.

그래도 남의 집 전화기를 막 쓰고 있다는 자각은 있었으니 말이다.

젠장, 뭐 하나 마음에 드는 게 없다.

정말이지 모든 게 찝찝해 죽겠다. 물론 이 저택의 주인인 잘난 션 스펜서께선 그런 나를 비웃듯이 산뜻하기만 했지만.

“운동하고 왔나 보네.”

“어.”

몇 시간째 소파 위에 한심하게 퍼져서 뒹구는 나와는 달리 녀석은 살짝 물기가 남아 있는 머리를 한 채 응접실, 아니 우리의 연습실로 복귀했다.

방 개수를 열 개까지 센 다음에 이제는 숫자를 파악하는 것을 포기한 이 드넓은 저택에서 내가 머무는 이 동관 응접실에서 함께 연습하는 건 어느새 그와 내가 암묵적으로 정한 약속과도 같다.

나는 스펜서가 창문을 열어 환기하는 뒷모습을 작게 한숨 쉬며 눈에 담았다.

아직도 속이 부글부글한 나와 달리 평온하기 짝이 없는 저 남자의 다음 행동은 안 봐도 뻔하다. 또다시 대본을 쥐고 연습, 연습, 또 연습이다.

망할. 그건 다시 말해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양 화해할 때라는 뜻이다.

아쉬운 건 이쪽이니 녀석과는 감정싸움을 오래 해 봤자 좋을 게 하나 없다.

“야.”

그리고, 애초에 내 문제이기도 하다. 나는 동공 주변으로 옅은 금빛이 뿌려진 것만 같은 푸른 눈동자가 나를 돌아보는 것을 보며 최대한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목소리를 내려고 애쓰며 말을 이었다.

“아이스크림 먹을래?”

“…방금 운동하고 왔냐고 물어보지 않았던가.”

“운동했으니까 먹어도 되는 거지.”

아직 냉장고에는 션이 사다 둔 아이스크림이 남아 있다.

아, 내 심부름을 하고 온 그를 보던 집사와 고용인들의 얼굴을 떠올리니 좀 기분이 풀리는 것도 같다.

그런데 그때였다.

-링, 링, 링.

내가 앞서 기다렸던 올드한 벨소리가 다시 울렸다.

덕분에 자리에서 일어나던 나와 션의 시선이 동시에 전화기를 향했다.

실은, 이제 와 고백하자면 션 그는 이 장난전화에 시달릴 필요가 없다.

애초에 이 저택의 그 많은 하인 중 하나를 시켜서 대신 받든가 그것도 아니라면 계속 연습을 방해하는 이곳의 전화기를 빼 버리면 그만인 일이다. 하지만 녀석은 이런 면에서는 퍽 자애로웠다.

……다시 말해, 그는 내가 종종 이걸로 수다를 떨 수 있도록 일부러 배려해 주고 있다는 거다.

뭐. 확실히 좋은 녀석이긴 하다. 가끔씩 대놓고 심술부릴 때만 빼면 말야.

나는 작게 한숨을 쉬며 팔을 뻗는 스펜서를 보며 생각했다.

“스펜서입니다.”

나는 그때까지만 해도 완전한 방관자의 위치에 서서 저 잘난 몸을 가진 남자가 땀 흘려 갈고닦았을 몇 시간 동안의 운동을 초고열량의 아이스크림으로 날려 버릴 의욕에만 가득 차 있었다.

꾸준히, 계속해서 이 방을 울리는 전화 같은 건 그저 집주인인 그의 작은 곤경이라고 안일하게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후우, 여보세요? 말씀하시죠.”

“또 꽝이야?”

“…듣고 있는 것 같기는 한데… 말이 없군.”

그 오래된 수화기에 귀를 바짝 댄 채로 눈을 가늘게 뜬 그를 보며 히죽거리다 정말 문득…… 묘한 생각이 삐죽 머리를 들기 전까지는 말이다.

사실 그건 스펜서의 손에 있는 저 오래된 전화기를 들고 조금 전까지 한참을 떠들었던 상대가 지나가듯 한 말이 아니었다면, 끝내 떠올리지 못했을 수도 있다. 영영 스펜서 저택의 미스터리 콜로 남았을 수도 있겠지.

나는 거의 생각과 동시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잠깐만, 션!”

급하게 치고 들어간 탓에 스펜서의 다른 손에 있던 대본이 순간 바닥에서 떨어져 나뒹군다. 하지만 난 지금만큼은 그것에 신경 써 사과할 여력이 없었다.

놀란 눈을 한 남자에게서 수화기를 거의 빼앗아 들다시피 가져갈 때마저 삐끗해서 수화기를 거하게 떨어트릴 뻔했으니, 대본이 대수일까.

“…….”

고급스러운 쇳덩이 너머로는 그 어떤 인사도 없다.

나는 그 침묵에 귀를 기울였다.

세상에는 전화를 걸 수는 있지만, 전화를 쓸 수는 없는 이들이 있다. 이상한 말처럼 들릴지도 모르지만 그들이 할 수 있는 건 전화를 건 뒤 옅은 숨소리를 내는 것뿐이다.

그건 아주 작디작은 소리라, 세상의 꽤 많은 사람이 모르고 지나치고는 한다.

하지만 그것에 꽤 익숙했던 나는 얼마 안 가 수화기 너머의 고요 속에서 친숙한 흔적을 확인했다. 그러자 순간 속에서 뭔가 옅게 무너졌던 것도 같다.

나는 션 스펜서에게 뒤늦은 사과를 입에 담았다.

“미안.”

“왜?”

“…내… 전화였어.”

평소보다 더욱 무뚝뚝한 목소리가 흘러나간 건 내 표정을 뚫어지라 보고 있는 사내에게 이 작은 침몰을 들키고 싶지 않아서였지만, 성공했는지는 모를 일이다.

* * *

모든 소리가 사라진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아주 어렸을 때부터 수도 없이 떠올렸던 질문이건만, 나는 여전히 그 답을 모르겠다.

내 부모님은 농아인이다.

어머니는 태어나서부터, 또 아버지는 어릴 적 심한 열병을 앓은 다음부터 말과 소리를 모두 잃었다고 했다. 덕분에 이모는 아직까지 술만 마시면 내 부모님이 얼마나 단 한 순간도 호락호락하지 않았던 삶을 살았는지 말하고는 한다.

하지만 나는 이제껏 귀에 못이 박이게 들은 ‘호락호락하지 않은’이라는 단어에 담긴 굴곡을 다 알지 못한다.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운 집안의 장남과 장녀. 치료가 가능했던 시기가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그 모든 기회를 이미 진작에 놓친 두 사람.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세상.

그걸 상상할 수 없는 건지, 상상하기 싫은 것인지 구분하기조차 쉽지 않다.

나는 션의 휴대폰을 빌려 부모님에게 문자를 보냈다. 살짝 손이 떨려서 타이핑 실수도 몇 번이나 했다. 다행스럽게도 답장은 그 즉시 왔다.

[미안해, 아들. 아빠가 너무 걱정되어서!]

범인 아닌 범인은 아버지였다.

짧은 문장 뒤에 우는 이모티콘도 세 개나 붙어 있었다.

나는 짤막하게 문자를 한 번 더 보냈다. ‘제가 더 미안해요. 내일 당장 휴대폰 새로 사고 연락할게요. 사랑해요.’

스펜서 저택- 그것도 정확하게 응접실의 전화기만 울리게 했던 괴전화의 사정은 이랬다.

얼마 전 내가 집사의 휴대폰을 빌려 브랜든에게 휴대폰이 망가졌다고 문자 한 통을 남겼던 걸 기억하는가?

젠장, 그게 이 모든 사건의 시작이었다.

브랜든은 그 문자를 확인한 다음 대뜸 집사의 번호로 전화를 걸어 물었다고 한다. ‘그럼 이선이 휴대폰 사기 전에는 어디로 연락하는 게 제일 빠르죠?’

충실하기만 한 고용인은 나와 션 스펜서가 하루에 몇 시간이고 박혀서 대본을 펄럭이는 응접실 직통 번호를 알려 주었을 뿐이었지만, 나와 며칠이고 연락이 되지 않자 걱정한 아버지는 사정이 달랐을 거다.

어렸을 때부터 혹시라도 내가 당신과 같은 ‘상태’가 될까 봐 한평생 전전긍긍했던 분은, 이렇게 보란 듯이 다 큰 자식을 두고도 종종 꽤 예민해지신다. 특히 그게 몇 년을 마약에 빠져 뒹군 멍청이라면 더욱 그럴 거다.

나는 살짝 킬킬대고 웃으며 입을 열었다.

“사실 어머니라면 일주일 정도 연락 안 되더라도 걱정 안 하실 분인데……. 아니, 일주일이 뭐야? 한 달을 연락 없이 있어도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 하실걸.”

사실 무언가에 대한 중독을 끊은 사람들은 술을 잘 마시지 않는 편이다.

그건 나 역시 예외가 아니다. 하지만 오늘은 그럴 기분이 아니다. 나는 션이 따라 준 호박색의 액체를 가만히 눈에 담다가 마치 물을 삼키듯 한 번에 쭉 들이켰다.

높은 도수를 자랑이라도 하려는 걸까, 뜨거운 불이 식도를 할퀸 듯 뜨거웠다.

“그렇게 마시지 마.”

나를 지켜보던 남자가 한껏 구겨진 내 얼굴을 보며 작게 꾸중하듯 속삭였다.

“뭐. 며칠 동안 미안했어.”

“괜찮아.”

“우리 아버지는… 뭐랄까. 정말 날개 없는 천사 같은 분이지. 성실과 근면의 아이콘이라고나 할까. 그런 분한테서 어쩌다 이런 게으른 아들이 나왔는지!”

크고 정확한 발음, 어색하지 않은 신체 표현.

배우 ‘이선 박’의 장점으로 꼽는 것들은 모두 부모님의 덕을 본 것들이다.

아예 션의 손에서 술병을 빼앗아 욕심껏 술을 채운 나는, 다시 한번 호기롭게 술을 쭉 들이켰다. 평소엔 엄두도 못 낼 값비싼 위스키가 다시 한번 목구멍을 뜨겁게 훑고 지나갔다. 그러자 내 파트너도 한숨을 한 번 쭉 내쉬더니 진한 호박빛의 술을 그 역시 한 번에 집어삼켰다.

“있잖아, 션.”

내 멍청함을 비웃듯 손가락 끝이 저릴 정도의 술기운이 치고 올라왔다.

다시 한번 그 오래된 전화벨이 머릿속에서 울리는 것도 같았다.

“우리 부모님은 말야, 내 작품을 한 번도 영화관에서 본 적 없어.”

“……왜?”

술기운으로 살짝 번진 시야로도 남자가 나를 눈에 담고 있는 것이 보인다.

할리우드의 태양계에서 가장 뜨거운 열점에 서 있는 배우, 션 스펜서. 전 세계의 영화인들을 열광케 한 천재 신성.

나는 그 황홀한 수식어를 속으로 곱씹으며 대답했다.

“디트로이트에서 개봉하질 않아서.”

내로라하는 감독들과 제작자, 그리고 미국 전역이 열광하는 배우에게 이런 말을 하는 건 얼마나 우스운 일일까?

하지만 술기운에 절어서 멋대로 움직이는 입은 이미 내 제어를 벗어난 지 오래다.

“상영관이 적으면 열 개, 많으면 간신히 백오십 개 정도 됐나? 보려면 주를 넘어서 한참을 가야 했어. 이모네 부부만 겨우 한두 번 봤을걸.”

“…….”

언제나 물심양면으로 나를 도와주는 브랜든이나 바커에게도 단 한 번도 하지 못했던 말이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서로 잡아먹지 못해 안달이었던 사내의 앞에서 술술 흘러나온다. 그건 아마 션 스펜서, 그가 내가 가장 부러워하는 것들을 가졌기 때문일 거다.

“……아. 그런 새끼한테 데이비드 밀러의 작품이라니.”

작게 속삭이듯 덧붙인 문장에는 끔찍한 자격지심과 열등감이 덕지덕지 붙어있었다.

“긍정적으로 생각해. 잘할 거야.”

“뭐? 썅! 난 원래 부정적이야. 동부인이 될 수 있는 가장 최악의 형태라고. 이곳 녀석들처럼 늘 실실대고 다니는 건 절-대 불가능해!”

젠장. 취객은 자신을 받아주는 자에게 더욱 떼를 쓰는 법이다.

차라리 션은 나에게 정신 차리고 제대로 연기할 생각이나 하라고 빈정댔어야 했다. 저렇게 달래듯 다정하게 말해서는 안 됐단 말이다.

“요 며칠 동안 잠도 제대로 못 잤어! 잠들 것 같으면 늘 같은 악몽을 꾸거든. ‘이선 박, 미안하네. 역시 안 되겠군.’ 하는 빌어먹을 꿈 말이야. 망할, 나도 열심히 하고 있다고!”

“…….”

“이제 그 씨발할 ‘흠’만 들으면 미칠 지경이야.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데. 야, 술 따라!”

션 스펜서는 얌전히 내 잔에 술을 채웠다.

나는 그걸 한 번 더 들이켜고는 벌벌 떨리는 숨을 길게 내쉬었다. 몸 안에 불덩이가 앉아있는 것처럼 열이 났다.

“어렸을 때, 겨우 일곱 살 정도나 됐을 거야. 그땐 한국에 있었거든?”

“응.”

“어머니가 다니던 회사의 사장인가 뭔가랑 싸웠어. 씨발, 그러면 어른들끼리 해결해야 할 거 아니야. 그렇지? 그게 어른이잖아.”

“맞아, 그렇지.”

달래는 듯한 낮은 목소리가 알코올보다 더 빨리, 꼭 독처럼 퍼진다.

“그런데 그 개새끼가 일부러 집으로 전화한 거야. 그 소름 끼치게 조용한 집에서 들을 수 있는 건 나뿐인데, 망할 전화를 했다고!”

“…….”

“웃기지, 제까짓 게 뭐라고 우리 엄마를 다시는 일 못 하게 만든다느니, 하여간 병신은 어쩔 수가 없다느니 하더라. 빌어먹을. 닥치라고 욕해 줬어야 했는데 멍청한 나는 엉엉 울면서 그걸 부모님한테 수화로 하나하나 전했어. 차라리 거짓말할걸. 한심하게.”

다시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상처가 될까 봐 가족끼리도 다시 꺼내지 않는 기억마저 술술 토해 낼 수 있는 건 눈앞의 남자가 너무 다른 세계에 있는 사람이어서였을까?

아니면 내가 투정처럼 늘어놓는 말을 단어 하나하나 새겨들으며 달래는 목소리가 이제껏 단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을 만큼 다정했던 탓일까?

“뭐 물론 여기도 이제 환상 같은 건 없어. 다 똑같이 좆같아. 이 망할 나라는 인종 차별 없이는 굴러가질 않는다고. 한인 사회? 웃기지 말라고 해.”

“…….”

“그 개새끼들이 우리 이모를 흉보는 이유가 뭔지 알아? 흑인이랑 결혼해서래. 씨발, 뭐라더라. 시민권을 따려고 결혼했다나?”

나는 꿈을 핑계로 도망쳐 이곳으로 왔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몰랐던 때부터 부모님의 귀와 입이 되어야 하는 삶에 신물이 났었다. 혼잣말을 중얼거려 봤자 아무도 대답해 주지 않는 집의 고요가 싫었고, 전등을 깜박여야지만 내가 부르는 걸 아는 순진한 얼굴이 지겨웠다.

……물론 무엇보다 끔찍한 건 그 다정하기 짝이 없는 가족들 사이에서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나 자신이었다.

“이 영화, 분명히 월드 와이드 개봉 맞겠지?”

“그 어떤 영화관이라도 다 걸릴 거야.”

“그래, 그럼 당연히! 디트로이트에서도 개봉할 거고?”

“북미 어디서든 볼 수 있어.”

“잘됐다. 배 아파 뒈졌으면 하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야.”

모든 것이 힘겨워 도망친 주제에 챙기는 척하는 위선이라는 걸 안다.

하지만 나는 이 가식이라도 떨지 않았다면 진작에 죄책감에 짓뭉개졌을 거다.

이 빌어먹을 도시는, 비열한 할리우드는 이제 내 전부나 마찬가지다. 깜짝 선물로 말없이 LA에 왔다가 약에 취한 나를 보고 당장 디트로이트로 돌아오라며 울던 얼굴들을 기억하는 이상 맘대로 넘어질 수도 없다.

왠지 눈이 시려서 손등으로 마구 비벼 대자 살짝 온도가 낮은 서늘한 손가락이 익숙한 듯 얽혀 들었다.

나는 그 손을 힘주어 잡았다.

“나 짤리면 어떡해?”

“안 짤려.”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나온 확답이었지만 대체로 취객에게 그런 건 통하지 않는다.

“일생일대의 기회니까 분발하라는 개소리나 해 놓고 어떻게 확신하는데!”

보통은 이렇게 괜히 욕만 얻어들을 뿐이다.

나는 옆자리에서 다독이듯 손등을 간질이는 사내가 작게 한숨 쉬는 소리에 더욱 미간을 찌푸렸다. 션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한참을 말없이 있다가, 얼마 뒤 그 자신도 조금은 자신 없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후우, 좋아. 이선. 좀 더 이야기를 해 보자고.”

“뭘?”

“그러니까…, 이제까지 대사만 맞췄지, 작품 분석을 같이한 적은 없잖아.”

할리우드 영화판이 거대한 학교라고 치면, 지금 이 순간은 교내 최고 모범생의 특별 과외나 다름없을 거다.

나는 빨갛게 변했을 것이 분명한 눈으로 남자를 퉁명스레 바라보았다. 스펜서는 이런 게 영 익숙하지 않은 듯, 평소보다 한참 동안 말을 골랐다. 심지어는 어울리지 않는 욕도 했다.

“넌 [이선]이 [션]을 어떻게 생각한다고 생각……, 젠장.”

“아냐. 이해했어.”

“…그래, 그럼 어떻지?”

‘[이선]은 [션]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나는 여태껏 단 한 번도 문장으로 떠올려 본 적 없는 가정을 술기운에 아른거리는 머리로도 열심히 굴려 보았다. [이선], [이선], 이선…….

“…뭐 처음에는 몰랐겠지.”

“…….”

“사랑했던 걸 기억하지 못하니까, 사랑하는 줄도 몰랐을 거야.”

지금 이 순간만큼은 정말로 지나왔던 과거의 어느 순간을 헤매는 사람이 되어야 했다. 기억을 더듬듯 말끝이 흐려졌다. 팝콘의 고소한 냄새. 누군가가 바스락대며 의자를 차는 감각. 나는 어느새 이름 모를 사람들이 꽉 들어찬 상영관에 앉아 있다.

“그런데……별 기대도 없이 들어갔던 영화관에서, 우연히 보게 됐어. [션]을.”

카메라는 천천히 움직인다.

먼지 하나 없는 그의 말끔한 구두굽부터 얇은 코트, 시계와 커프스. 그리고……마침내, [션 스펜서]까지.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는 옆자리의 여자를 전혀 눈치채지 못한다.

그럴 여유 따위 없다. 손마저 덜덜 떨면서 스크린을 노려보듯 바라보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다.

“네가 눈앞에서 숨 쉬고, 말하고, 웃고, 화내고, 우는 걸 보면서 뭔가가 달라져. 분침은 있지만 시침은 없는 시계처럼 살았다는 걸 알게 되는 거야.”

“꽤 감동적이네.”

“왜, [션]에 대한 감정은 이를테면 빼놓고는 못 사는 장기 같은 거잖아. 신장처럼 두 개 달린 것도 아니고….”

이건 취객 특유의 과한 설명이었나 보다.

나는 거기까지 하라는 듯 손을 젓는 내 파트너를 보면서 열이 오른 목을 쓸었다.

확실히 처음에는 감히 그 감정에 이름조차 붙이지 못한다. 영화 속 배우를 보자마자 난 저 사람을 아주 오래전부터 사랑했다는 걸 인정해야 하는 건 미치지 않고서야 불가능한 일이다.

나는 얼음 몇 개를 내 잔에 넣어 주는 남자의 길고 우아한 손가락을 멍하게 보다가 툭 말을 이었다.

“……꽤 무섭지 않았을까.”

“뭐가?”

“나 말이야.”

짙은 눈썹 하나가 휙 치켜 올라갔다. 그는 영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한 표정이다.

“션은 날 미친 사람 보듯 굴 테니까. 난 죽을 것 같은데 끔찍한 취급 받는다고 생각해 봐. 무섭지 안 무섭겠어? 끔찍하지.”

“말도 안 돼.”

“뭐가? 뜬금없이 ‘당신을 사랑해요!’ 하고 외치는…, 시커멓게 큰 남잔데. 단순한 팬도 아니고 진짜 진심으로 사랑한대. 그것도 영화관에서 영화 한 편 보고! 접근금지 명령이라도 안 떨어지면 다행이지.”

최선을 다해 꺼내 놓은 문장이었건만 날 바라보고 있는 남자의 표정은 기묘하다고밖에 말할 수 없었다. 아무리 시야가 번지고 있다 한들 그조차도 모를 정도로 눈치 없지는 않았다.

“겨우 그 정도…, 정말 겨우 그런 이유인 것 같다고?”

“겨우 그 정도라니!”

“그래서 그렇게 뻣뻣하게 거리를 뒀던 건가?”

이건 또 뭔 소리인가.

“그런 적 없어.”

“아니, 그랬어. 오디션 이후로 쭉.”

주연 둘의 작품 해석이 완전히 갈리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대립에서 먼저 설득력을 갖춘 건 파트너 쪽이었다. 션은 단어 하나하나 힘주어 내 말을 맞받아쳤다.

“넌 기억 못 하지만 난 기억하잖아.”

“아.”

“이제껏 미친 게 분명하다며 생각하고 살았는데, 사실은 그게 아니었다는 증거나 마찬가지인 널 왜 밀어내겠어.”

그러고 보니 [션]은 연인이었던 때를 기억하지.

나는 멍하게 눈을 깜박였다. 하지만 그의 말이 전혀 위로가 되지 않았던 건, [션]은 그저 기억할 뿐이기 때문이었다. 감정이 사라진 기억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건 사랑이 식은 것과는 결이 다르다.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던 감정을 멀리서 관찰하는 것과 마찬가지일 것이 아닌가.

언제나 미끼를 던진 다음 저 멀리서 내 반응을 살피는 션 스펜서처럼 말이다.

나는 꼬부라진 목소리로 되물었다.

“……날 싫어하지 않는다고?”

“그래.”

“그렇다고 해서 사랑하는 것도 아니잖아?”

별다른 거름망 없이 떠오른 질문들이 떠오르는 족족 곧바로 입 밖으로 튀어 나간다.

살짝 고민하듯 인상을 찌푸린 션을 보며, 나는 몽롱한 채로도 퍽 차분하게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하지만 굳게 닫힌 입은 다시 열리지 않았다.

싫어하지는 않지만, 사랑하지도 않는다.

이게 바로 션 스펜서가 내린 [션 스펜서]의 결론이다.

“젠장, 너 진짜 재수 없어.”

“왜?”

“차라리 완전히 싫어하면 마음이라도 편하잖아. 포기라도 할 수 있어. 그런데 뭐 밀어내진 않아? 희망 고문이라도 하겠다는 거야 뭐야.”

다시 생각해도 끔찍하다.

서로 사랑했던 기억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는 남자가 더는 날 사랑하지 않는데, 나는 그 사람을 이유도 잊은 채 사랑해야 한다니.

대체 그런 사랑이 되돌아올 가능성이 있기는 한가? 애초에 그런 마음은 시작조차 해서는 안 됐는데.

나는 열이 오른 눈으로 션을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

“너 나랑 바꿔. 불공평해. 왜 나만 이렇게 힘들어야 해. 난 이미 하루하루가 충분히, 정말 좆같이 힘들었다고!”

하지만 해묵은 원망을 한몸에 받은 션은 변명 대신 뭐라 이름 붙이기 힘든 표정이 될 뿐이다.

아니, 심지어 기대조차 하지 않았던 대답이 내가 그의 시선에 담긴 감정의 이름을 찾는 것보다 먼저 흘러나오기까지 한다.

“……그래. 아마도, 그렇게 하면 돼.”

“뭘?”

“방금 한 것처럼.”

“방금 내가 뭘 했는데.”

난 션 스펜서가 몇 초간 ‘돌겠군’ 하는 표정을 지은 것을 똑똑히 봤다.

그건 착각이 아니었는지, 션은 정말 깊은 곳에서부터 우러나온 깊은 한숨을 내쉰 뒤 스스로 술잔을 채워 삼켰다. 영문을 알 수 없는 일이다. 분명 내 말의 무언가가 그를 저렇게 답답하게 만든 건 분명한데, 자꾸 멍해지려는 머리를 아무리 굴려 봐도 조금 전의 대화에서 별다른 특이사항은 없었다.

시종일관 상냥했던 스펜서 선생님의 입에서 처음으로 조금 힐난 같은 물음이 튀어나온 것도 그때였다.

“너 이래서 첫 촬영 어떻게 하려고 그래?”

“첫 촬영? 첫 촬영이 뭔데.”

……엇. 나 방금 되게 개념 없는 질문을 한 것 같다.

수증기가 찬 것 같은 시야로도 내 파트너의 표정이 순간 매서워진 것만큼은 선명하게 짚어진다.

취한 채로도 아차 싶어진 나는 “아니. 휴대폰 때문에……. 다음 주에 돈 들어오면 바로 사려고 했는데. 아니, 아니, 내일 뭐든 살 건데.” 하고 곧장 우물우물 변명했다. 하지만 대답 대신 술을 한 모금 벌컥 삼키는 내 파트너를 보아하니 그 해명은 별 효과가 없는 것 같다.

언제는 나보고 그렇게 먹지 말라며.

나는 얼결에 쥐고 있던 그의 손을 살짝 잡아당겼다. 그러자 션은 한숨 대신 작은 헛웃음을 터트렸다.

“……183페이지의 두 번째 씬부터 첫 촬영이야.”

“그렇게 말하면 어떻게 아는데.”

내가 너처럼 대본을 다 뜯어 삼킨 줄 알아, 하는 말이 안 나간 게 기적이다. 오늘 밤만큼은 한없이 관대한 내 파트너는, 할 수 없다는 듯 자세한 설명을 덧붙여 주었다.

“……후우, 그래. 이선 네가 대본에 있는 줄 몰랐다고 날뛰었던 거.”

내가?

날뛰었다고?

파란만장했던 그와 나의 과거를 회상해 보자.

다시 떠올려도 그와 나는 애초에 처음부터 지금까지 순탄한 날이 하루도 없기는 하다. 하지만, 대체 내가 언제 날뛰었단 말인가? 나 나름 신사적인 사람인데. 정말이다.

나는 펄쩍 뛰며 그의 말을 부정하려고 했다.

“내가 언제-”

“…….”

“…어….”

그 정도도 못하면 설정이 무색하지 않냐며, 미국 전역에서 보란 듯이 올라가는 동성 키스신을 각오해 두라고 그가 웃으며 충고했던 순간이 머리 한구석에서 뿅하고 떠오르기 전까지는 말이다!

“거짓말이지?”

“…….”

션은 술을 한 모금 더 마시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으. 으으으. 으으. 젠장. 개 같은 노인네! 배려 같은 건 모르지!”

“……개 같은 노인네가 혹시 데이브야?”

“그래, 데이브다! 아주 둘이 친해서 좋겠다, 새꺄! 물고 빨아라, 개새끼들아!”

“…….”

이 해맑은 캘리포니아에서 10년은 넘게 비비고 산 영향일까.

나는 코앞까지 밀려온 끔찍한 현실 속에서 밝은 면을 찾기 위해 발버둥 쳤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바뀌는 건 하나도 없었다.

이선 박은 여전히 망할 문제점을 코앞까지 떠먹여 줘도 감을 잡지 못하는 등신이고, 할리우드에서 가장 괴짜 감독이라고 불리는 데이비드 밀러는 제가 뽑은 배우의 역량 부족을 눈치챈 지 오래다.

정말 이대로 가다간 ‘바이바이, 밀러’가 될 판이다!

남은 위스키를 한 번에 다 털어 넣자 순간적으로 눈앞이 핑 돌았다. 진짜 단어 그대로 핑, 돈다.

자, 여기서 묻겠다.

혹시 여러분들은 어떤 문제를 180도 뒤집어서 살펴보면 답이 나올 수 있다는 말을 들어 본 적 있는가?

하핫. 여러분! 그건 정말 사실이다!

물론 준비물이 있기는 하다. 바로 거의 몇 년 만에 마시는 독한 술과 손꼽히게 근사한 파트너. 이 두 가지다. 준비물을 챙기기 귀찮다고? 그래도 벌써 포기하지는 마시라.

우리는 벌써 ‘첫째. 도수 높은 술을 빠르게 마신다’단계를 끝냈지 않나. 시작이 반이다.

“……션!”

나는 여전히 내 손을 잡은 채 시선을 내리깐 남자를 거의 환희에 찬 목소리로 불렀다.

아, 무슨 일이냐는 듯 고개를 드는 순간이 꼭 슬로우 모션처럼 한 장면씩 뇌리에 박히는 것 같다. 이런 순간이야말로 두 번째 단계에 들어가기 딱 좋다.

난 그에게로 바짝 붙어 앉으며 말을 이었다.

“연습하자.”

“뭘?”

“뭐겠어!”

맙소사. 난 생각보다 좀 똑똑할지도 모르겠다.

그 잘난 션 스펜서조차 곧바로 이해하지 못하는 완벽한 해결책을 찾아낸 걸 보면 혹시 모르지 않나?

나는 멍하게 눈만 깜박이는 모습을 보면서 씩 웃었다.

답지 않은 얼떨떨한 얼굴을 보자니 이 거구의 남자가 처음으로 좀 귀여워 보이기까지 한다. 얼마 안 가 그 냉랭하고 단정한 이목구비 가득 당혹이 번지는 모습은 또 어떤가?

봐, 봐, 이것 보라고!

왠지 벌써 카메라 앞에 선 기분이다.

“미안하지만 거절하지.”

“왜?!”

“취했어, 이선. 침실로 데려다줄 테니까-”

션은 여태껏 얽혀 있던 손을 단단히 붙잡고는 나를 소파에서 일으켜 세우려고 했다. 하지만 나는 그런 것에 호락호락하게 당할 사내가 아니다, 암!

“하자.”

“싫어.”

“하자. 하자. 하자고!”

“싫다고!”

“키스 좀 한다고 큰일 안 난다, 자기야?”

내가 다정하게 건넨 애칭에 션 녀석은 거의 진저리를 쳤다.

언제는 징그러울 정도로 뻔뻔하게 온갖 단어를 다 입에 담던 녀석이 새삼스럽게 저런다. 어떻게 내 사정을 다 듣고도 저렇게 단호하게 무려 세 번이나 거절한단 말인가?

역시 션 스펜서는 세상에 다시없는 냉혈한이 맞다.

나는 어떻게든 일으키려는 녀석과 힘 싸움을 하며 억울함을 강력하게 호소했다.

“야, 사실 너 엄청 안 팔리잖아!”

“뭐?”

“애인 많다는 거 다 거짓말이면서! 파티광이라면서 술은커녕 외박도 안 하고 맨날 운동만 하는 새끼가. 주말에도 데이트하는 사람 한 명 없잖아. 아주 발랑 까진 척은 다 하고 다니면서 왜 나는 안 된대?”

…아, 물론 조금 방법이 잘못되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지금은 조금 들기는 하는데….

“손만 좀 가져다 댔다고 아주 그냥 시뻘겋게 익어서는 안절부절못하는 놈이 왜 그렇게 카사노바인 척하고 다니는….”

“-이봐, 이선 박.”

단호한 목소리에 담긴 내 이름이 꼬부라진 혀로 아무렇게나 토해 내던 문장을 끊어 냈다.

낮은 목소리에 담긴 익숙한 이름에 첫 번째로 움찔했고, 두 번째로는 맞잡은 손에 힘이 꽉 들어간 게 꽤 아파서 눈살을 찌푸렸다.

“우선, 난 원래 작품을 준비할 때는 어떤 파티에도 가지 않아. 그리고 무엇보다.”

……되짚어 보면 이어진 말은 솔직히 조금은 이를 갈며 했던 것도 같다.

“난……, 어디에 사고 팔릴 만한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특히 뒤에 한 말은, 한 달 넘게 저녁 약속 한 번 없던 네가 하기엔 좀 앞뒤가 안 맞지 않나?”

“아니거든? 나 연애는 곧잘 했거든? 게다가 너처럼 없는 거 있는 척은 안 하는데?”

아, 이제 보니 내 말투가 정말 주먹다짐이 일어나도 놀랍지 않을 만큼 짜증 나기는 했다.

제발 내게 변명할 기회를 주길 바란다.

하늘에 맹세컨대 나는 이 순간 저 우아한 남자의 자존심을 긁으려는 생각 같은 건 전혀 없었다.

그냥 술에 취해서 멋대로 지껄였던 것이 다다. 정말이다!

하지만 살며 놀림의 대상이 되어 본 적이 없는 남자는 이마저도 그냥 넘길 수 없는 모양이었고, 머리끝까지 알코올에 잠식된 채로도 그런 거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 발견하는 나는 퍽 신이 났던 것 같다.

더없이 싸늘한 눈보라가 몰아치는 표정이 된 그를 보고 움츠러들기는커녕 세상 근엄한 목소리로 선포했던 걸 보면 말이다.

“야, 입 벌려.”

하지만 션 스펜서, 얘도 참 한결같다. 딱 봐도 코가 비뚤어지게 취한 내 말 따윈 그냥 무시하면 됐을 걸-

“어디 잘나가시는 분께서 분발해 보시지.”

저 코웃음 치는 걸 보라지!

이 정도면 7:3 정도의 쌍방 과실 아닌가? 물론 내 쪽이 7이긴 하다.

……아, 아냐? 그럼 8?

…설마 9?

* * *

소위 말하는 그렇고 그런 분위기가 되려면 뭐가 필요할까.

적당히 어두워진 방에 그럴듯한 조명? 달콤하게 속삭이는 사랑의 밀어? 글쎄, 답은 많겠지만 난 이 질문의 답을 이렇게 내리고 싶다.

바로 긴장감이라고 말이다.

-정말 오늘은 이상한 밤이다.

고개를 살짝 오른쪽으로 틀었다가, 아닌가 싶어 왼쪽으로 다시. 그리고 또다시 오른쪽으로. 나는 마치 첫 입맞춤을 앞두고 떠는 얼간이처럼 키스하는 법을 고민하며 시계추처럼 좌우로 머리만 왔다 갔다 했다.

아, 진짜 왜 이러지?

키스 정도야 고등학생 때 이미 졸업했는데!

“용기 있는 올해의 배우께선 어디로 가셨나.”

“조용히 해 봐. 할 거라고!”

……에이 씨, 나도 남자한테 하는 건 처음이란 말이다!

그것도 이렇게 새파란 눈을 가늘게 뜨고 빙글빙글 웃는 톱스타에게 할 거라고는 이제껏 더욱이 상상해 본 적 없었다고!

노골적인 웃음기가 섞인 목소리에 울컥한 나는, 남자의 단단한 몸을 무작정 붙잡아 당겼다. 이제껏 만나 왔던 이들처럼 작고 부드럽기는커녕 위로도 옆으로도 나보다 더 크고 딱딱한 어깨가 별다른 저항 없이 딸려 오는 느낌은 참 묘했다.

기세 좋게 먼저 하자고 한 건 나였는데 그의 셔츠깃을 붙잡은 손이 왜 덜덜 떨렸는지는 모르겠다.

젠장, 역시 먼저 연습하자고 하길 잘했다.

현장 가서 이 모양으로 굴었으면 그게 무슨 망신이란 말인가.

“야.”

“왜?”

“……눈 좀 감으면 안 되냐?”

“싫은데.”

이렇게 무드 없는 키스는 처음이다.

결국 나는 “너 진짜 매너 없다.” 하고 욕하듯 속삭이는 것과 동시에 그에게 고개를 기울였다. 물론 그러면서 멍청할 정도로 떠는 것을 감추지도 못했다. 생각보다 자존심의 타격은 없다. 하긴. 별별 이야기를 다 했는데 이제 와 이 녀석에게 보여주지 못할 꼴이 뭐가 있겠나.

입술이 부딪히기 전 나는 작게 숨을 삼키며 스스로를 다독였다.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온몸이 흉기인 양 잘 벼려진 사내의 입술은 이제껏 내가 알던 입술의 감촉과는 좀 다를 것 같다는 생각마저 했던 것 같다. 말도 안 된다고?

하지만 그게 사실이었는 걸!

“-흐읍….”

원래 키스가 이런 느낌이었나? 이런 기분이었나? 아니었던 것 같은데.

나는 술기운에 멍해진 와중에도 생각했다. 닿자마자 어깨가 작게 튀어 오를 만큼 따듯하고, 또 부드러운 살덩이에 왠지 발가락 끝까지 힘이 꽉 들어간다.

덕분에 조금은 놀랐던 것도 같다.

저도 모르게 감았던 눈을 뜨면서 닿았던 입술을 떼어 내자, 누구의 것일지 모를 더운 숨이 뺨을 간지럽혔다. 할리우드의 모든 감독이 스크린에 담기를 탐낸다는 남자의 새파란 눈동자 역시 옅게 번지는 시야를 뒤따랐다.

그건 내가 이전까지 알던 색과는 조금 다르다.

원래는 좀 더 옅은 하늘색, 그래, 딱 요즘 같은 때의 하늘색이었던 것 같은데. 지금 그의 눈동자는 평소보다 더욱 진한 푸른색이었고, 동공 근처로 흩뿌려진 황금빛이 유독 너울거리는 것만 같았다.

“……끝이야?”

입이 열리며 스치듯 보인 가지런한 하얀 이와 붉은 혀가 예뻤다.

키스. 키스. 키스를 어떻게 했더라.

입을 맞추고, 입술을 열고, 그래, -혀를 섞고.

나는 대답 대신 다시 한번 그를 향해 입술을 부딪쳤다. 하지만 잠시 열렸던 녀석의 입은 다시 꾹 닫힌 채였다.

덕분에 조금은 조급한 기분이 들었을지도 모르겠다.

초조하게 그의 셔츠를 움켜쥐어 봐도 꽉 다물어진 입술은 여전히 반응이 없다. 일방적인 입맞춤을 하며 안절부절못하는 건 나뿐이었다. 술기운이 머리꼭지까지 차오른 상황에서도 참 한심하게 보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두 번째 시도 역시 그렇게 실패로 돌아갔다. 얼마나 긴장했는지 목 뒤가 뻣뻣했다.

아마도 망할 션 스펜서는 그런 나를 눈을 가늘게 뜬 채로 모조리 지켜보고 있던 게 분명하다. 그러지 않고서야 이렇게 얄밉게 말할 수는 없다.

“이선. 그쪽도 이제 ‘있는 척’하는 건 그래. 좀 늦긴 했지만 덜 구질구질한 게 낫잖나?”

여러분, 믿어 주시라.

난 최소한 침실에서만큼은 꽤 괜찮은 남자친구였다.

좀 더 사적인 이야기를 해 주자면 이제껏 스쳤던 그녀들에게 살며 키스를 못 한다는 말도, 섹스를 못 한다는 말도 들어 본 적 없다. “죽을 것 같아.”, “그만, 아니 더 해 줘.”가 이제껏 가장 많이 들은 말이다. 정말이라고!

손끝이 저릴 정도로 몰려왔던 긴장이 확 식고 그 자리를 활활 타오르는 분노가 대신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션 스펜서’에게 연기가 밀리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라지만, ‘멋 모르는 도련님’에게 이런 것까지 밀리는 건 도저히 용납할 수 없지.

나는 이를 갈면서 2차 선전포고를 했다.

“그러다 쩔쩔매고 빌게 될 걸, 스펜서.”

“어디 그렇게 해 보라고.”

션은 아랫입술이 살짝 얇은 편이지만 적당히 도톰해서 깨물기에는 나쁘지 않다.

혀끝으로 살짝 적신 후 아프지 않게 살살 빨아들이다가 가볍게 이를 세우자, 마치 석상처럼 굳어 있던 어깨에서 처음으로 반응이 왔다. 한 손은 소파 등받이를, 또 다른 쪽은 어설프게 셔츠를 붙잡고 있던 자세를 바꾸기 딱 좋은 타이밍이었다.

사랑하는 연인과의 키스라면 어떨까. 어떻게 행동하게 될까.

나는 필사적으로 자문했다. 그러자 그 전까지는 마치 첫 키스를 앞둔 10대처럼 허우적댔던 것보다는 훨씬 매끄러운 움직임이 나왔다.

널찍하고 단단한 몸 위에 올라타는 것엔 생각보다 별 거부감이 없었다. 서서히 이 일방적인 행위에 불을 붙일 때다. 완벽한 근육에 감싸진 뼈대가 짚어지는 어깨에서부터 살짝 힘이 들어간 듯한 목으로, 그다음에는 부드러운 머리카락까지.

간질이듯 손을 움직이자 스펜서는 눈에 띄게 몸을 굳혔다.

이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된다.

나는 션의 얼굴을 가까이 붙잡은 채로 입술이 아닌 턱 끝에 보란 듯이 쪽 하는 소리를 내며 키스했다.

“그만 튕겨. 나 잘한다니까?”

“……젠장.”

단정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욕이 꽤 듣기 좋았다.

저항 없이 벌어진 입으로 혀를 밀어 넣는 순간의 찌릿함은 더 말할 것도 없다.

가지런한 치열을 더듬고, 혀 아래의 부드러운 부분을 살살 긁자 조금의 틈도 없이 밀착된 상황에서도 열이 오른 숨을 들이켜는 남자가 전해졌다. 타액이 서로 부딪히는 소리가 점점 끈적이는 것처럼 들린 건 착각이 아니었을 거다.

처음에는 그 깐깐한 태도처럼 맞받아 움직이려는 기색이 없던 혀가 어느새 어설프게나마 침투해 오는 것을 막지 못한 건 그 때문이다.

할리우드의 모든 감독이, 아니, 이 망할 미국 전체가 열광하는 남자가 내 키스에 반응한다는 건 참 묘한 기분이었다.

그건 충족감인지, 뿌듯함인지, 그것도 아니라면 단순한 쾌감일지도 모르겠다.

난 그 이름 붙이기 힘든 무언가가 머리 한쪽을 녹이고 있는 것을 내버려 뒀다. 희미하게 실눈을 뜰 때마다 션 스펜서가 새하얀 얼굴을 붉게 물들인 채로 내게 정신없이 입 맞추는 게 보였다.

그건 말 그대로- 보고 느끼면서도 믿을 수 없는 모습이다.

입술이 떨어질 때마다 고개가 나를 따라오는 녀석을 밀어내는 건 마음 아픈 일이었지만, 승기는 이럴 때 잡는 거다.

“후우, 션.”

“……응?”

“더 하고 싶으면 항복해.”

션은 내 말을 바로 이해하지 못했는지 발갛게 상기된 뺨으로 뭐? 하고 묻는 듯한 표정을 했다가, 얼마 안 가 더운 한숨 어린 웃음을 흘렸다. 그건 아마 내가 처음으로 보는 션의 꾸밈없는 웃음이었던 것 같다.

볼우물이 쏙 들어가는 미소라니.

세상에, 얘가 이제껏 어디 가서 이런 웃음을 한껏 흘리고 다니지 않았던 게 왠지 다행스럽기까지 하다.

“……어떻게 빌어야 하는데?”

망할, 이래서 술이 문제다!

나는 내 영화 파트너가 티셔츠를 벗기는 것을 돕고, 또 내가 그의 옷을 벗기면서 작게 키득대고 웃었다.

물론 머리 한구석에서는 분명히 제정신이냐며 스스로에게 외치는 이성이 조금쯤 남아 있다.

하지만 섹스에서 중요한 건 이성 따위가 아니지 않나. 적절한 알코올과 분위기만 이끈다면 천 조각쯤이야 한없이 거추장스러워질 뿐이다.

여러분들 중 몇 명은 ‘야, 너 그러다 좆돼!’ 하고 충고하려는 분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 인정한다. 아무리 술에 취하고 분위기가 좋아도 같은 사내와 뒹구는 용기를 갖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하아, …젠장. 진짜 기분- 이상하네.”

“이상해?”

“그럼 이상하지, 마냥 좋겠어?”

하지만 키스조차 서툴기 짝이 없게 하는 남자가 열에 들뜬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는 건 꽤……나쁘지 않다. 스치기만 해도 붉은 물이 드는 어깨도, 단단하게 근육이 새겨진 등이 내 손이 닿을 때마다 눈에 띄게 꿈틀대고 반응하는 것도 재밌다.

젠장.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파파라치 사진과 영화에서만 보던, 그 누구나 찬양하지 못해 안달이었던 남자가 상반신을 벌거벗은 채로 내 가슴을 깨물고 있다니!

상상조차 어려울 정도의 비현실적인 상황은 때로는 사람의 모든 생각을 마비시킨다.

지금 나는 딱 그 상황이었다.

대체 가슴에 붙은 그 조그마한 살덩이가 이런 느낌을 줄 거라고 누가 알았겠는가. 난 살며 단 한 번도 의식한 적 없었던 부분이 주는 간지러움에 허리를 들썩이면서 간신히 속삭였다.

“으, 이 세우지, 말고…, 그래.”

션은 내 말을 꽤 충실하게 순종했다.

이를 세우는 것 대신 혀를 눕혀 살살 원을 그리듯 굴리기 시작하자 저절로 목이 뒤로 꺾이고 발가락 끝까지 힘이 꽉 들어갔다. 겨우 장난치듯 가슴을 물고 핥은 것만으로도 단단해지는 중심을 눈치챘을 때는, 정말 농담 않고 머리가 띵했다.

나는 어디 가서 키 작다는 소리는 들어 본 적 없는 성인 남성을 무릎에 앉히고도 불편한 기색 하나 없는 녀석의 어깨를 황급히 붙잡았다.

다행히도 녀석은 아직 내 중심을 눈치채지 못한 것 같다.

금욕적인 이목구비와는 어울리지 않는 상기된 뺨을 한 채로 천진하게 입을 여는 걸 보면 말이다. 그 안에 담긴 한숨이 너무 열이 올라 있어 입이 마른다.

“왜?”

“션, 다른 사람 거 입…, 아니 손으로라도 해 준 적 있어?”

“……아니.”

내 그럴 줄 알았다.

까진 척하던 도련님은 이제야 좀 진솔해졌다.

나는 션이 잠시간의 침묵 끝에 털어놓은 대답을 칭찬하듯 흑갈색 머리카락을 쓸어 올려 주었다. 녀석은 취기와 흥분이 뒤섞여서 두피까지 열이 올라 있었다.

“남자한테 박아 본 적은?”

솔직히 얘는 키스하는 것으로 보아 남자든, 여자든 어느 쪽도 안 만나 봤을 거 같은데…. 정말이지 내가 고등학생 때에도 얘보다는 더 잘했을 것 같다.

하지만 잠자리에서 상대의 과거를 상세하게 캐묻는 것만큼 촌스러운 짓은 또 없다.

아니 그런 걸 다 떠나서 별거 아닌 표현에 ‘지금 내가 무슨 말을 들은 거지?’하는 기색을 감추지 않는 녀석에게 뭘 더 바라겠는가.

나는 빙빙 돌리지 않고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럼 이참에 해 볼래?”

세상 금욕적인 얼굴에, 몸은 당장 어디 미술관에서 빠져나왔다 해도 놀라울 게 없는 순진한 도련님을 꼬시자니 진짜 나쁜 놈이 된 기분이었다. 이 이상 붉게 변할 수도 없을 만큼 익은 뺨을 더욱 물들이며 머뭇거리는 모습을 보면 더욱 그렇다.

심지어 녀석은 이제 와 말하기에는 너무 늦은 질문마저 한다.

“…게이 아니라고… 하지 않았었나.”

“어- 맞아. 아마, 아닐걸.”

예전에 호텔에서는 꽤 단호하게 아니라고 외쳤던 것 같은데, 지금은 상황이 상황이라 꽤 소극적으로 대답이 바뀔 수밖에 없었다. 나는 한참 전부터 뻐근했던 바지의 훅을 풀면서 션에게 다시 한번 키스했다.

아. 큰일이다, 큰일이야.

얘 키스를 너무 좋아한다. 나는 예쁘게 눈이 가늘어지는 녀석을 보면서 입술이 떨어질 때마다 드문드문 말을 이어 갔다.

“괜찮아. 별로 심각하게 생각 안 해도 돼.”

“……하아, 뭘?”

“피차 뒹굴고 싶은데 내가 너한테 박기에는 좀… 둘 다 재미 보려는 거치고는 여러모로 그렇잖아? 난 소송은 질색이라.”

나는 션과 입술을 부딪치면서 맨정신이었다면 절대 하지 않았을 미친 생각을 입 밖으로 술술 쏟아 내기 시작했다. 사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건 ‘그’ 션 스펜서를 최상위의 원나잇으로 이용하고 싶다는 말이나 다름없기는 했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 내가 무슨 생각을 할 수 있었겠나.

설마 션 스펜서가 이 키스에, 그리고 섹스에 어떤 의미라도 두리라는 기대를 한다고? 이거 보라고. 그건 기대가 아니라 망상인걸!

“뭐?”

“안 질척댈게. 어디에 폭로도 안 해. 진짜야. 네가 얼마나 더 유명해지든 남자랑 섹스한 거로 나중에 자서전 같은 것도 안 써.”

“…….”

“어때?”

취기 섞인 키스에 정신없이 빠져들던 남자가 순식간에 싸늘해진 채로 날 목 졸라 죽이고 싶은 눈이 됐다. 하지만 내 제안이 션 그의 마음에 들든, 들지 않았든… 그건 사실 크게 중요한 것도 아니다.

“이선 박, 넌 진짜-”

션 스펜서의 날 선 독설을 익히 알고 있는 나는, 살벌하게 이어질 그의 말을 더 듣는 것 대신 속옷만 걸친 내 중심과 그가 적당하게 맞물리도록 자세를 고쳐 앉았다.

물론 효과는 충분하다 못해 넘쳤다. 션은 뭐라고 말을 다 잇지도 못하고 날카롭게 숨을 삼키며 그에게 올라탄 내 허리를 우악스럽게 움켜잡았다.

다행히 녀석도 반은 서 있었다.

“-와, 이런. 대체 뭘 달고 다니는 거야. 이거 어디 들어가긴 하겠어?”

“제발. 제발, 이선! 말 좀 가려 할 수 없겠어?”

“미안.”

이 바닥에서 구르면서 그래도 제법 그럴듯한 문장을 입에 걸게 됐다는 자부심이 있었건만, 거나하게 취하고 나니 말의 수위가 들쭉날쭉해졌다.

어쨌거나 술과 분위기와 전 세계가 열광하는 톱스타와의 섹스에 취한 나는, 생애 첫 게이 섹스를 앞두고 75퍼센트의 능동적임과 20퍼센트의 의문-과연 그게 진짜 되긴 할까?-그리고 5%의 걱정으로 임할 마음이 가득했다.

그 말인즉슨 어디서 본 건 있어서 패기 있게 남자의 무릎 위에서 다리를 벌리기까지는 했다는 소리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섹스는 혼자 하는 게 아니다.

“그- 있잖아. 션. 좀 더 편하게 해도 돼.”

“……편하게?”

“그래, 편하게. 이렇게 막 쩔쩔맬 필요는 없다고. 보시다시피… 알잖아?”

무릎 끝부터 부드럽게 타고 올라오는 서늘한 손은 역시 서툴기 짝이 없다.

차라리 열에 취해 멋대로 움직이면 눈 딱 감고 휩쓸리기라도 하겠는데, 녀석은 모든 것이 너무 조심스럽고, 또 낯선 것을 눈을 감고 만지는 듯 옅게 떨리기까지 해서 더 미칠 것 같았다.

나는 션을 향해 보란 듯이 어깨를 으쓱했다.

솔직히 예전 말라깽이 시절일 때면 모를까, 지금의 나는 어딜 봐도 보란 듯이 건장한 성인 남성이다.

지금의 그처럼 손가락 끝을 가져다 대는 것만으로도 황송하다는 듯 조심스러워할 필요는 없을 거다. 술과 분위기에 취해 뒹구는 만큼 좀 더 멋대로 굴어도 기꺼이 용서할 수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션 스펜서는 조금 기묘한 눈으로 나를 물끄러미 보더니 뜻 모를 말을 중얼거렸다.

“…의외로 자기 학대적인 편이군.”

“뭐?”

“아니. 됐어.”

확실히 나는 시종일관 꽤 안일한 태도이기는 했다.

지나가듯 했던 그 말을 짚고 넘어가야 했을지도 모르고 말이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오랜만의 섹스가 더 급했던 나는, 스펜서에게 짧게 떨어지는 키스를 하면서 그의 바지춤에 손을 뻗었다.

흔한 주름마저 일부러 그려 만든 것 같았던 남자의 옷을 벗기는 건 절대 쉽게 얻을 수 없는 고양감마저 준다.

“같이 잡아 봐. …그래, 흐으으, 손 커서 좋네.”

게다가 한평생 눈짓만으로 모든 것을 명령했을 사내에게 이런 것까지 시키는 건 또 어떤가?

마디마디가 분명한 손가락에 남아 있던 흐린 냉기는 맞닿아 부딪힌 성기를 쥐고 흔들면서 완전히 사라진 지 오래다.

지금 그의 손은 그저 단단해진 기둥들을 자극하기 딱 좋을 정도의 온도가 되어 머릿속을 흐물흐물하게 녹일 뿐이다.

“끝도 만져. 좋아, 아, 잘…, 하고 있어.”

션 스펜서는 내 말을 꽤 고분고분 잘 따랐다.

학습력도 꽤 좋은 편이라, 선액을 줄줄 싸기 시작한 성기 끝을 엄지손가락 끝으로 살살 간지럽게 긁을 땐 앓는 한숨이 절로 튀어나왔을 정도로 좋아하는 지점을 금방 배우기도 했다. 내가 하는 일이라고는 그의 무릎 위에 다리를 벌리고 앉아 칭찬하는 것뿐이다.

열이 오른 눈이 내 표정을 뜯어 살피는 게 느껴진다.

나는 그 관음 어린 시선과 자극을 기꺼이 즐겼다.

“…하, 하핫, -너 너무 끝도 없이 커지는 거 같은데. 쌓였어?”

“네가…… 후우, 작은 건 아니고?”

……와. 이 새끼, 이렇게 한 방 먹이네.

어느 화장실을 가든 단 한 번도 꿀린 적 없던 나는 체급차를 생각하라고 항변하려다가 녀석이 움직이고 있는 중심을 바라보며 받아쳤다.

“그래 뭐 확실히…, 흣, 모양은 네가 더 예쁘네.”

사내 녀석들의 사타구니면 떠오르는 습하고 칙칙한 이미지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솔직히 게이라는 단어만 들어도 발작하는 사람의 대부분은 그 거무튀튀한 느낌에 사로잡혀 있는 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심지어는 나 역시 그것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않았다는 것에 동의한다.

나는 스펜서가 “뭐?”하고 묻는 것에 대답 대신 씩 웃으면서 녀석의 손등 위에 내 손을 겹쳤다.

“앞으로는…, 흐으, 손가락을 좀 더- 잘, 움직이라고. 션.”

손을 살짝 조일 정도로 둥그렇게 말고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하자 간질간질한 열기를 즐기며 제법 여유가 있었던 어깨가 팽팽하게 당겨진다. 같은 남자와 성기를 이렇게까지 가까이서, 심지어는 서로 맞댄 채로 움직이는 건 처음이었지만 션 스펜서는 같이 빼는 목적으로도 완벽한 파트너라는 것쯤은 확신할 수 있다.

그의 것은 딱딱해지기 전에도 꽤 묵직해서 같이 잡기에 좋고, 이렇게 같이 흥분하기 시작하면 크고 힘 있는 기둥이 단단하게 받쳐 준다. 인종 차별을 하려는 건 절대 아니고, 순전히 개인의 장점으로 보건대 심지어 이 짙은 선홍빛의 흥분도 편견을 깨는 데 솔직히 꽤…….

“-…잠깐만, 야, 으, 흣! 잠깐, 야아!”

“손가락을 좀 더 잘 움직이라고 했었나, 이선?”

“션! 션 스펜서!”

머릿속으로 한껏 음란한 생각을 한 벌이라도 되는 걸까?

엉덩이쯤에 걸쳐져 있던 브리프가 훅 내려가면서 습해진 곳에 찬 공기가 훅 와 닿는 감각에 허리가 뒤틀리며 몸서리쳤다.

“버, 벌리지 말라고! 야!”

“섹스하고 싶다며.”

“그건…… 그렇지만!”

“안 벌리고 할 방법은 뭔데?”

한평생 포식자로 살았던 남자의 문제점은, 주도권이 자신의 쪽으로 넘어가는 순간을 소름 끼칠 정도로 정확히 파악한다는 거다.

“아, 흐으으, 힉!”

션은 몸을 움츠리고 허리를 흔들다 못해 잠시 균형마저 잃을 뻔한 내 몸을 단단하게 붙들어 꼼짝하지 못하게 만든 다음, 꽉 다물어진 곳을 천천히 공략하기 시작했다.

맙소사. 이제껏 살며 만났던 애인들조차 건드린 적 없는 곳을 열고, 그래, 그…… 망할, 내 뒤를 천천히 간질이는 감각이라니! 그건 쾌감이 아니다. 그저 자극이라는 단어 그 자체로밖에는 설명이 안 된다.

‘긴장감’.

젠장, 섹스할 때 가장 필요한 건 역시 이게 맞았다.

정말 이렇게 해서 되는 건가?

아니, 그걸 ‘션 스펜서’와 한다는 게, 정말 현실에 있을 수 있는 일인 건가?

나는 스펜서의 어깨를 붙잡아 안은 채로 벌어진 다리가 주는 민망함을 잊으려고 애썼다.

젖지 않은 뒤는, 아니 애초에 젖을 수도 없는 구멍은 제아무리 물에 적신 손이 조심히 움직인다 한들 계속해서 금방 말라서 겨우 한 마디 정도가 들어가는 게 전부였다.

“……흐으읏!”

-정말 겨우 한 마디일 뿐인데.

그 별거 아닌 삽입에 무릎을 크게 튀면서 어떻게 종잡을 새도 없이 날카로운 소리가 튀어나올 줄 알았겠냐고!

온몸의 신경이 연약한 부위에 슬그머니 침입한 남자의 손가락에 집중되고, 등줄기로 식은땀마저 흐른다. 왠지 무릎이 달달 떨리고 등골이 쭈뼛할 정도의 뒤늦은 긴장이 느껴지는 것 역시 착각이 아니겠지.

맙소사, 기세 좋게 먼저 뒹굴자고 했으면서 이렇게 먼저 추한 꼴을 보이는 건 처음이었다.

스펜서가 내게 입을 맞춘 건 그때였다.

“…응….”

서툰 키스가 야하다.

어설퍼서 더 야할 수도 있다니. 정말이지 이건 교활하다고밖에는 말할 수 없다.

심지어 그 행동은 어찌나 달콤한지, 내가 조금 더 취했었다면 몇 초 정도는 내가 그와 정말 연인일지도 모른다는 착각을 했을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술은 다 깼어, 이선?”

내 목소리가 저런 울림이었나.

나는 흥분으로 살짝 낮게 갈라진 목소리를 들으며 멍하게 생각하다가, 여전히 흉흉하게 성이 난 성기가 살짝 부딪히는 감각에 그가 살짝 찡그리듯 웃는 것을 보며 속으로 온갖 욕을 삼켰다.

어느새 내 뒤에 살짝 들어갔던 이물감 역시 사라진 지 오래다.

션, 그는 땀이 송골송골 맺힌 내 등과 허리를 쓸면서 긴장으로 팽팽해진 몸을 달래 주고 있을 뿐이다.

서로의 열이 옮은 따뜻한 손의 감촉이 간지러워 견딜 수 없을 만큼 조심스러웠다.

“…빌어먹을. 진짜 돌았네….”

스펜서는 내 입에서 툭 튀어나온 흥분 가득한 거친 단어에 무슨 뜻이냐는 듯 그 발갛게 변한 얼굴을 옆으로 기울었다. 난 그제야 그의 눈이 짙어진 이유를 눈치챘다.

션 스펜서는 흥분하면 눈이 검푸르게 변한다. 동공 주변의 연한 갈색은 꼭 금빛처럼 빛나고 말이다.

“여기 젤은 없지.”

“젤?”

“아니, 됐어.”

……망할. 망할. 망할. 망할.

내가 천박한 걸까, 아니면 그가 매너 있는 걸까?

아마 둘 다 맞는 가정이겠지.

나는 후들후들 떨리는 다리로 간신히 그의 무릎에서 일어났다. 션은 그런 내 손을 잡고 지탱해 주기까지 했지만, 사실 그건 필요 없는 친절이기는 했다.

“이선?”

“내가 산통 깼으니까 좋은 건 해 줘야 계산이 맞잖아. 그리고-”

어차피 그의 무릎 앞에 도로 다시 앉을 작정이었으니까.

“……언젠가 같이 뒹굴 생각이 있거든 젤 좀 사다 놓는 게 좋을걸.”

의아한 눈을 한 남자의 대답보다 먼저 삼킨 건 빳빳하게 서 있는 그의 중심이었다.

미안하지만 나는 스펜서의 가정과는 달리 정말 발랑 까진 쪽이다. 살며 단 한 번도 상상한 적 없었던 음탕한 상황을 끝내 회피하기보다는 기꺼이 빠져 즐기는 걸 선택하는 인간이라는 거다.

“맙소사. 이선, 대체-! ……읏!”

익을 듯이 붉게 변한 얼굴을 가리듯 감추고 탁한 숨을 삼키는 남자를 구경하는 것도 놓치기 싫고 말이지.

나는 스펜서의 성기를 입에 문 채로 일부러 살짝 이를 세워 녀석의 말을 끊었다.

인상을 찌푸린 고운 미간을 올려다보며 히죽 웃자, 션의 입에서도 황당한 한숨에 가까운 웃음이 터져 나왔다.

얼마나 사정을 참고 있는지 시퍼런 힘줄까지 툭 불거진 것을 사과의 의미에서 정성껏 핥고 입술을 둥글게 오므려 삼키자 절대 휘청이지 않을 것만 같던 녀석의 단단한 허벅지가 옅게 떨렸다.

이제껏 별별 짓을 다 하고 살았다지만 솔직히 나 자신도 동성의 것을 이렇게 잘 빨 수 있을 거로 생각한 적은 없었는데, 역시 뭐든 상대가 중요한 모양이다.

섹스는커녕 키스마저 서툴디서툰 톱스타를 내 리드 아래 두고 가르치는 게 인생에 여러 번 있을 기회는 아니지 않나?

지금도 무릎을 꿇고 있는 건 내 쪽이건만 휘둘리는 건 저 잘난 남자라는 것도 마음에 들고 말이다.

나는 이미 선액의 콤콤하고 쓴맛이 느껴지는 벌어진 끝을 혀로 쿡쿡 찌르면서 바짝 아랫배를 당기는 내 것을 손으로 쥐고 흔들었다. 녀석은 내가 입과 목구멍을 조일 때마다 입술을 꽉 악물면서도 내가 그의 앞에서 보란 듯이 내 쾌감을 찾아 움직이는 것을 빠짐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내 쪽이 소질이 있는 거야, 아니면 네가 빠른 거야?”

“……전자로 해 두자고.”

입에서 조금 늦게 빼내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조금은 삼키게 된 정액의 낯설고 묘한 맛에 인상을 찌푸리며 묻자, 눈가까지 붉게 변한 션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한 채로 날 보다가 한숨처럼 대답했다.

알코올과 끈적이는 체액의 열감 어린 냄새로 가득 찬 방 안이 후덥지근했다.

션과 내 옷은 바닥에 엉망으로 뒹굴고 있고, 나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차림에 션 역시 마찬가지로 그 근육질의 몸에 딱 맞던 바지춤이 열린 채 내려간 드로워즈가 내 타액과 정액으로 지저분해진 채다.

나는 사정 뒤에 찾아오는 느슨한 긴장을 즐기며 술인지, 정액인지 모를 것에 젖은 내 웃옷 대신 션의 셔츠를 대신 꿰입었다.

“아. 역시 난 술 마시면 안 돼. 하도 오랜만에 마셔서 훅 갈 뻔했네.”

“……방금 그게 ‘갈 뻔한’ 거였다고?”

난장판이 된 방을 둘러보며 흘러나오는 낮은 목소리에는 뒤늦게 정신을 차린 뒤늦은 무언가가 조금은 깃든 것도 같았다.

나는 예의상 녀석의 뺨에 쪽, 하고 입을 맞추며 “도와줘서 고마워. 친구?” 하고 최대한 다정하게 대답했다. 내 애들 같은 뽀뽀를 밀어내지 않고 조금 인상을 찌푸린 채로 가만히 있는 커다란 남자를 보고 있자니, 녀석이 나보다 두세 살 정도 어렸다는 것이 문득 떠올랐다.

“그런데 말이야, 션.”

이렇게 말을 걸면 가만히 시선만 돌려 바라보는 것도 참 장족의 발전이다.

“키스는 해 본 적 있긴 해?”

나는 젤이라는 단어에 그 예쁜 눈을 말갛게 깜박이던 얼굴을 떠올리며, 저 비주얼만 완벽한 남자의 백지 같은 성경험을 확신했다. 젤도 모르는 놈이 잘도 누굴 침대로 데려가 봤겠다!

확실히 무작정 달려들기에 저 남자는 너무 잘났고, 근처에 온갖 종류의 미인들이 즐비하기는 했다. 의외로 같이 뒹굴기 어려웠을지도 모르지.

내 질문에 기가 찬다는 듯 미간을 구긴 남자의 입은 한 박자 늦게 열렸다.

“있어.”

“언제? 고등학교 프롬, 뭐 그럴 때? 혹시 대학생 때? …아니면 뭐 그 대단하신 파티 전전하다가?”

나는 퉁명스러운 얼굴을 한 녀석에게 보통 쥐어짜 낼 수 있는 웬만한 상황을 모두 갖다 대었다.

하지만 “혹시 지금처럼 취해서 했다던가?”라는, 가장 가능성 있는 질문 앞에 “내게 ‘이런 일이’ 두 번이나 있었을 것 같다고?” 하는 짜증 섞인 대답만 돌아왔을 뿐이었다.

상대의 과거를 캐묻는 건 촌스러운 짓이라고 앞서 말한 바 있던 나는, 저 자신의 얼굴에 얼마든지 침을 내뱉으며 남자를 살살 꼬드기기 시작했다.

“그럼 언제 했는데.”

“……<블랙 스페이스>.”

“블랙 스페이스?”

그렇게 기분이 나쁘면 차라리 대답하기 싫다고 말하면 그만할 텐데, 아직도 흥분이 다 가시지 않은 순진하고 야한 얼굴을 한 남자는 내 질문 아닌 질문에 꼬박꼬박 대답했다.

심지어 그가 말한 블랙 스페이스는-

“…야. 설마 영화 촬영하면서 찍은 키스가 처음이었다고 말하는 건 아니지?”

“그게 뭐 문제 있나?”

난 이름이 가물가물한 빨간 머리의 여자를 떠올리며 저도 모르게 입을 딱 벌렸다.

와! 그 사람은 자기가 션 스펜서의 첫 입맞춤 상대라는 걸 알기는 할까?

나는 첫 키스도 영화에서 한 게 전부고 침대에 누군가와 나란히 누워 보지도 못했으면서 민망함이나 멋쩍음은커녕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남자를 보며, 다 가진 자의 느긋함이 무엇인지 새삼 체감했다.

보라. 아쉬울 게 없는 남자는 동정을 못 뗀 것 따위에 연연할 필요조차 없다.

이 얼마나 대단한 여유란 말인가. 나는 옷을 정리한 스펜서의 무릎에 머리를 베고 드러누우면서 감탄 반, 진담 반으로 조언했다.

“세상에. 너 나쁜 누나들 조심해야겠다, 야….”

“지금 제일 나쁜 사람이 옆에 있는 것 같은데.”

틀린 말은 아니네.

나는 멋쩍게 턱을 긁적이면서 말을 이었다.

“누구 만나는 척은 왜 했어?”

“그래야 귀찮은 일이 줄어드니까.”

“예를 들면?”

내 이어지는 질문에 술술 대답하는 스펜서의 대답이 처음으로 딱 멈췄다.

솔직히 그 순간 조금 아차 한 게 사실이다. 왠지 지금 션과 내가 하는 대화가 필로우 토크와 비슷한 느낌이라는 생각도 그제야 슬쩍 들기도 했고 말이다. 때문에 나는 “아. 너무 사적인 질문인가.”하고 최대한 자연스럽게 발을 빼려고 했다.

하지만 션은 땀에 젖어 헝클어진 내 머리를 손가락 끝으로 살살 정리하면서 혼잣말 같은 답을 이어 내주었다.

“오가는 사람 안 붙잡고 뒹군다는 남자에게 아끼는 딸을 만나게 할 집안은 많지 않잖아?”

“……그야 뭐.”

…아니, 어쨌거나 실로 도련님이 떠올릴 만한 고육지책이기는 한데….

확실히 스펜서라는 그 화려한 배경의 집안에서 주선하는 진지한 만남을 쳐내기에는 이보다 더 좋은 핑계가 없을 거다.

션은 “미안한데 올해로 몇 살이지, 서른?”하는 내 질문에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나이의 앞자리가 3으로 바뀌면 결혼 얘기를 지겹게 꺼내기 시작하는 건 부의 끝을 헤아리기 힘든 집안이나, 평범하다 못해 때때로 처참했던 집안이나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어쨌거나 이 나라는 쿨한 척은 혼자 다 하면서 따뜻한 가정이며 작고 사랑스러운 아이며 하는 표준 규격을 멋대로 만들어 누구보다 스스로 목매는 곳이 아닌가.

“게다가 엿 먹이고 싶은 사람들도 좀 있고.”

“푸하핫! 와, 너도 그런 말 쓸 줄 알았냐?”

나는 내 머리를 아슬아슬하게 건드리는 남자의 손길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그의 고개를 쭉 잡아당겨 가볍게 입술을 부딪쳤다. 녀석은 순순히 끌려와 입 맞추면서도 이번에도 눈을 감지 않았다.

“이건 뭐야.”

입술을 살짝 맞닿은 채로 낮게 속삭이는 숨이 유독 달았다.

“이번에도 ‘그냥’하고 싶어서?”

“그렇지 뭐.”

정말이지 이상한 밤이다.

나도 션 스펜서도 이제는 완전히 술기운이 날아간 멀쩡한 얼굴을 하고 있는데, 서로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는 과거와 비밀을 공유하고 입을 맞춘다. 나는 의뭉스러운 눈을 한 남자에게 답을 이미 알고 있는 질문을 던졌다.

“별로였어?”

션 스펜서는 대답 대신 한숨 같은 웃음과 함께 다시 키스했다.

* * *

“……허어, 참.”

‘흠’까지는 영 마뜩잖은 반응이라는 걸 알겠다.

그런데 저 망할 ‘허어’는 또 뭐란 말인가. 나는 데이비드 밀러의 빌어먹을 추임새에 작게 떨리려는 손을 가까스로 쥐어 감추었다.

그는 말 그대로 알쏭달쏭한 표정을 한 채다. 그 뜻을 모르는 건 필시 나뿐만이 아닌지, 맞은편에서 눈이 마주친 밀러 감독과 합을 오래 맞춘 스태프 하나도 입을 일자로 다물고 있었다.

“이게 무슨 일인지. 솔직히 영문을 모르겠군.”

현장에서마저 양옆에 경호원을 낀 채로 촬영을 진행하는 이 시대 최고의 편집증, 밀러 감독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이 드넓은 해변에 모인 수많은 사람의 숨소리가 일제히 달라진다.

물론 그중에는 나도 있었다.

할리우드에서 가장 괴팍한 감독 중 한 손 안에 들지 않으면 아쉬운 것이 분명한 멋들어진 차림의 남자는 한참을 입을 다물고 자신의 턱수염을 만지작거리면서 작은 모니터링 화면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이 촬영장의 오랜 골칫거리가 누구였는지는 모두가 잘 알고 있다.

흘끗흘끗 꽂히는 시선들이 그걸 증명하지 않나.

영원히 계속될 것만 같은 침묵 속에서 나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눈치를 보다가, 결국 고해성사하듯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알면 됐네. 잠시 쉬었다 하는 게 낫겠지?”

“네, 그러죠.”

정말 입만 열었다.

그것도 한 절반쯤?

놀랍게도 지금 이 대화는 나와 밀러가 나눈 게 아니다.

묘하게 무뚝뚝한 얼굴로 성큼성큼 촬영장을 걸어 나가는 션 스펜서와 감독이 나눈 대화다. 덕분에 내가 벌린 입은 말문을 열려는 의도가 아닌 놀람을 감추지 못하는 것으로 마무리되고 말았다.

나는 션의 뒷모습을 보면서 녀석을 슬쩍 뒤따라가려고 했다.

하지만 밀러 감독의 화살촉은 남아 있는 내 목덜미를 낚아챘다.

“이선. 미안하지만 솔직히 말하겠네.”

“예, 예에.”

“난 솔직히 몇 번의 리딩 이후로 자네에 대한 기대가 완전히 사라진 지 오래였다네. 그래서 새 오디션도 몇 개 잡아 둔 상태였지.”

내내 긴장 반, 초조함 반으로 마른침만 꼴딱꼴딱 삼키다가 최대한 깍듯하게 대답했던 나는, 그 순간 이제껏 간신히 이어 왔던 표정 관리가 완전히 박살 나 버렸다. 심지어 제대로 된 문장 대신 조금은 이상한 소리가 섞인 한숨마저 쉬고 말았다.

그건 뭐라 변명을 해 보려다 그마저도 비참해서 삼키느라 난 소리였다.

빌어먹을!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사람에게는 분수 밖의 일들이 있기 마련이고 나에게는 그것이 이 캐스팅이었던 모양이다.

태양의 열점에는 절대 닿지 못하는 영원한 외행성이 드디어 주제 파악을 할 시간에 다다른 거다.

아. 그러고 보니 지금 여기 없는 션 스펜서에게도 면목이 없다.

션은 오늘 이 첫 촬영이 있기 며칠 전부터 모든 일정을 빼고 나와 저택에서 호흡을 맞춰 줬다. 솔직히 그는 요즈음 브랜든보다, 집 안의 어떤 고용인보다 내게 충실한 친구였다.

촬영을 하루 앞둔 어제는 심장이 하도 두근거려 죽을 것 같길래, 다른 생각을 하겠다며 종일 운동기구만 붙들고 있던 나를 붙들고 그러다 탈진한다며 달래 주고, 그거로도 모자라 나란히 아이스크림 가게에 가기까지-덕분에 굶주린 파파라치들의 떡밥이 되었는데도–할 정도로 말이다.

나는 그에게 할 인사를 머릿속으로 떠올렸다.

안녕. 내 파트너. 짧은 시간이지만 즐거웠어. 오늘 들어가자마자 짐 싸고 정리를…….

“자네는 딱 방금처럼만 하게.”

하도 혼자 행복한 상상을 하다 보니 꿈까지 꾸는 걸까?

“…예?”

“이제까지 왜 그렇게 속을 썩인 건가, 나 이거 참!”

아니면 다들 짜고 치는 장난 중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농담이시죠? 같은 질문 따위 할 수 없는 나는 얼떨떨한 얼굴로 예에, 예, 하고 멍청한 주억거림을 계속했다. 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인지 모르겠다는 기색인 건 나뿐만이 아니니 흉이 되지도 않을 터였다.

어디 저 멀리선가 들리는 것 같던 레퀴엠이 상투스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가, 감독님. 그럼 저도…… 잠깐 쉬다 와도 될까요?”

“그럼, 그럼.”

밀러 감독은 모니터링 화면에서 시선을 떼지도 않은 채로 건성으로 대답했다.

이미 그는 완전히 다른 세상에 있다. 이런 상황에서는 수많은 스태프 사이를 빠져나오는 것도, 홀연히 사라진 내 파트너 션 스펜서를 찾는 것도 어렵지 않다. 여기 있는 그 누구의 것보다 거대한 트레일러만 찾아가면 그만이니 말이다.

나는 내 작은 아파트보다 몇 배는 잘 꾸려진 거대한 트레일러로 살금살금 눈치 보듯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방문객이 온 줄도 모르고 생각에 빠져 있던 션은, 한 박자 늦게 시선이 마주치자마자 그의 방식대로 축하를 건넸다.

“이제 짤리는 걱정은 덜었네.”

“야, 정말 쫓겨나는 줄 알았다고! 제발 밀러 감독한테 ‘흠’ 좀 하지 말라고 해. 진짜 그거 들을 때마다 긴장되어서 토할 것 같아.”

“확실히 제스처가 평균보다 과하기는 하지.”

나는 평소와 별다를 바 없는 션의 모습을 보며 슬금슬금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이렇게만 보면 별문제가 없어 보이는데…. 조금 전 감독과 한 대화는 뭐였을까?

언제나 매니저가 둘 이상은 붙어 있던 녀석의 곁은 웬일로 텅 비어 있다. 직접 일어나 손수 마실 걸 챙겨 주는 것만 봐도 그렇다.

나는 여전히 놀람과 얼떨떨함으로 옅게 쿵쾅대는 가슴께를 누르고 있다가, 짐짓 모르는 척 툭 입을 열었다.

“…음, 그런데 무슨 일… 있어?”

내가 즐겨 마시는 주스를 컵에 따르던 션의 눈썹 하나가 휙 올라간 걸 보고 괜히 입방정을 떨었네, 하는 생각을 안 한 건 아니다. 하지만 난 이 순간만큼은 갑작스레 쏟아진 감독의 찬사보다 이쪽이 아주 조금 더 신경 쓰였다.

“아, 아니이. 별건 아니고. 갑자기 감독이 너한테 뭐라고 하길래….”

“-내 실수였어.”

이번에 인상이 찌푸려진 건 내 쪽이다.

그의 연기는 완벽했다. 내려다보는 그 마지막 시선과 입술이 떨어지는 순간의 작은 숨소리 하나마저도 흠잡을 데가 없었단 말이다. 바로 코앞에서 마주 보고 있던 나는 물론이고 션과 밀러 감독 빼고는 그 어떤 베테랑 스태프도 알 수 없는 NG가 있었다고?

밀러 감독과 십수 년을 합을 맞춘 촬영감독이 듣는다면 자존심 상해할 발언이 아닐 수 없다.

언제나처럼 궁금함은 산더미다.

하지만 그걸 더 캐묻기에 내 파트너는 왠지 평소보다 기분이 저조해 보였다.

이럴 땐 쓸데없는 호기심은 누르는 게 답이다. 나는 션이 건네준 주스를 홀짝거리면서 자리를 옮겨 앉았다.

“역시 실전이 최고지. 안 그래?”

분명한 호의가 느껴졌던 눈빛이 순식간에 미심쩍은 경계로 갈아타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이거야말로 내가 원하는 게 아니겠나. 나는 스펜서의 어깨에 다정하게 팔을 둘렀다. 세상 까칠하기 짝이 없던 도련님께서는 이제 이 정도는 어렵지 않게 허락하신다.

“괜히 영화에서 주인공들이 뒹군 다음에 확 가까워지는 게 아니었다니까. 역시 우리도 예외는 아니었어. 다 오랜 조상의 가르침이었는데, 그지.”

“가르침은 무슨!”

“허어. 이 자식. 힘겹게 바닷길 헤쳐 온 콜럼버스 선생이 울겠다.”

“굳이 따지자면 콜럼버스는 이탈리아인이고 스펜서는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신대륙에 도착한 영국의 오래된 성씨 중 하나지. 매독으로 죽기까지 한 작자가 울든 말든 내 알 바인가?”

“…….”

……음. 앞으로 녀석이 저기압일 때 괜히 분위기를 띄우려는 개수작은 부리지 않기로 하자.

괜히 서른 해 넘게 자진해서 독수공방하신 몸이 아니시다. 어설픈 야한 농담 따위에는 날 선 창만 꽂힐 뿐이다.

마찬가지로 콜럼버스가 울든 죽든 상관없는 이민자 2세인 나는 시선마저 돌려 버린 션 녀석의 안색을 살폈다.

오늘따라 고고하게 다리를 꼰 옆모습이 우아도 하시다.

“야.”

“…….”

“야, 야, 얌마.”

내 말 따윈 철저히 무시하면서 휴대폰만 바라보고는 있지만, 녀석과 온종일 붙어 지낸 게 벌써 두 달이 넘었다. 이제 저 고고한 표정의 다른 의미 정도는 훤히 보인다.

‘예의’는 갖췄지만 따라오는 ‘범절’을 내던진 그 특유의 성격상, 마음에 안 드는 것을 남겨 둘 사람이 아니라는 것도 익히 잘 알고 말이다.

“션-에드워드-스펜서?”

세련된 이미지와는 정반대라 외우기 쉬웠던 미들네임을 붙여 부르자 내 말을 무시하던 남자에게서 드디어 무뚝뚝한 시선이 돌아왔다. 나는 션을 향해 살짝 한쪽 눈을 찡긋하며 히죽 내뱉는 장난처럼 말을 이었다.

“오늘 할래?”

자고로 이런 난공불락을 허물어트리려면 이 정도는 되어야 먹히지 않겠나.

아니나 다를까 눈 하나 깜짝 않던 철옹성 같던 얼굴은 내 별거 아닌 한마디에 완전히 파스스 가루 났다.

“너 정말……!”

“으하하핫! 어쨌든 앞으로 계속 얼굴 보게 된 기분 좋은 날이잖냐. 안 그래? 잘 마무리해 보자고.”

분명히 말하건대 나 역시 꽤 혼란스러웠다.

아무리 직전까지만 갔다지만 살며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같은 남자와의 섹스에 자진해서 다리를 벌렸고, 나중에는 그걸 입에 물기까지 했는데 아무런 현실 자각 없을 정도로 둔하지는 않다. 하지만 언제나처럼 구글은 나에게 많은 가르침을 주었다.

서른둘에 찾아온 성 정체성에 대한 고민 앞에서 구글은 ‘킨제이 보고서’라는 영화를 추천해 줬고, 나는 밤을 꼬박 새워 그 영화를 세 번은 반복했다. 애초에 영화를 보며 성 정체성을 고민하는 영화배우라니, 듣기만 해도 꽤 합이 잘 맞지 않나?

“됐어. 먼저 나갈 테니까 천천히 와.”

“아, 자기, 너무해.”

“이선 박!”

“미안. 방금은 내가 생각해도 심했다.”

좀 역겨운 방법이기는 했지만 나는 션의 입에서 기어코 작은 웃음이 걸리게 하는 데 성공했다.

물론 어쩔 수 없다는 식의 헛웃음이긴 했지만 웃음은 웃음이다.

트레일러를 조금 급한 걸음으로 빠져나가려던 녀석이 도로 들어와서 내 머리를 새둥지처럼 만들고 나간 것만 봐도 좀 전까지 있던 어두운 기색 따위는 찾아볼 수가 없다.

하핫, 대성공이다!

그럭저럭 지내온 인생을 돌이켜 보건대 나는 킨제이 척도의 ‘수치 2’ 정도 되는 인간으로, 이성애가 우선이되 동성애도 생각보다 꽤 진하게 할 수 있는 인간이었다.

생각해 보니 이제까지 게이들을 보며 별다른 거부감을 느껴 본 적도 없었다.

퍽 어렸을 때부터 이쪽 판에 있었기 때문이라고 하기에는, 그보다 더 전부터 대체 왜 ‘게이 새끼’가 욕인지 궁금했더랬다. 아니, 그런 고민을 다 젖혀 두고서라도 션 스펜서 저 남자는 정말 꽤 괜찮다.

그가 엄청난 위치의 톱스타라는 이름표를 떼어 놓고서라도– 왜, 그 있지 않은가?

참 보여 줄 수 없어 아쉬울 따름이기는 하지만, 션도 갔겠다 우리끼리만 말해 보자. 녀석은 같은 사내로서 감히 엄숙한 마음으로 평가하건대-

“…흠. 이만 한가?”

나는 주인이 자리를 뜬 트레일러에 내 집처럼 앉아 팔에 대고 대충 그 길이를 가늠하면서 눈을 가늘게 떴다.

션 스펜서, 그는 크기와, 굵기와, 길이와, 단단함이 실로 완벽하다.

거기에 할리우드를 사로잡은 넘치는 비주얼과 피지컬까지!

대체 저런 완벽한 섹스 파트너가 지구상에 또 있단 말인가? 없다. 없어. 언제 날을 잡아 한 번 해 보고, 나도 할 만하다 싶으면 저 고지식하고 성격 나쁜 잘생긴 파트너가 다방면으로 동정을 끝내도록 도와주는 것도 피차 행복하지 않을까?

아냐? 괜찮을 것 같은데 말이지.

나는 썩다 못해 고여 버린 생각을 하면서 한 박자 늦은 발걸음을 희희낙락 옮겼다.

오늘 조금 남은 촬영을 마저 하고 디트로이트로 기분 좋게 연락해야겠다.

은근히 나를 걱정하는 듯한 브랜든이나, 며칠에 한 번씩은 메시지를 보내서 촬영 준비를 확인하는 바커 사장님에게도 첫 촬영 성공의 축포를 알리는 것도 좋겠지.

정말 이 순간까지 나의 하루는 요 몇 년 중 최고, 아니 좀 더 나가면 내 인생 중 베스트 몇 위쯤으로 꼽아도 무리가 아닐 거다!

내 빌어먹을 인생이 드디어 좀 사람같이 풀리려나.

잘되다가도 발목을 삐고 자빠지던 매일이 달라질 것 같다는 간지러운 생각이 머릿속을 살살 긁는다. 트레일러를 빠져나와 꺾인 코너에서 주변을 쭉 둘러보기 전까지, 실로 나는 구름 위를 흐물흐물 걷는 연체동물이나 다름없었다.

…….

내 작은 단서를 눈치챘나?

그래. 맞다. 나는 정말 끝내주게 기분이 ‘좋았었다’. 다시 짚어 주자면 이건 과거형이다.

“여봐요. 어, 그래, 그래.”

“…….”

“우리 구면이지?”

보잉 선글라스 너머로 눈을 감추고 하얀 이를 가지런히 내보이며 웃는 남자와 시선이 마주치기 전까지는, 이 세상에 나보다 더 행복한 사람이 몇 없었을 거다.

얼굴을 반쯤 가리는 번쩍이는 편광 선글라스는 그 뒤에서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도록 주인의 얼굴을 꽁꽁 감췄다.

그 아래 입이 실쭉대며 웃고 있다 한들 가려진 눈에는 어떤 생각이 숨어 있을까?

나는 왠지 바짝 마르려는 입술을 얼른 혀로 한 번 적시고는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매끄럽고 유쾌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 저, 그러니까- 성함이.”

“코빗.”

“닉 코빗 형사님. 네, 기억합니다. 안녕하세요.”

“이런! 그냥 코빗이라고 부르라고. 그쪽 친구 말대로 형사 직위는 잠시 내려 둬야 하니 말이야.”

천천히 나오라며 먼저 발걸음을 옮겼던 션의 어깨에 찰싹 붙어 함께 이동해야 했을까?

하지만 나는 이 사내의 시선이 언제부터 나에게, 션 스펜서에게 붙어 있었는지 짐작할 수 없었다. 망할. 트레일러 안에서 웃고 떠들기를 세상 잘했다.

혹시라도 밖에서 작은 장난이라도 쳤었다간…….

으. 왠지 등골이 오싹해진다.

“잠시 이야기 좀 할까?”

보아하니 영 재밌게 굴러가지는 않았겠어, 션.

나는 속으로 내 파트너에게 닿지 않을 혼잣말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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