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 What fools these mortals be!(2) (7/21)

* * *

약쟁이들의 자기 고백은 대체로 일정한 패턴이 있다.

“제 이름은 앤이에요.”

“안녕, 앤.”

여자의 자기소개에 의자에 줄지어 앉아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대답했다.

자신을 지켜보는 눈 때문일까. 여자는 약간 상기된 표정이다. 이건 매주 수요일, 중독자 회복 모임의 흔한 풍경이다. 이 권태롭지만 그래서 평온한 시간은 12월로 달력이 바뀌며 괜히 들뜨는 연말에도 계속된다.

네스가 죽은 이후로는 처음으로 들렀건만 이곳은 변한 게 하나도 없다.

나는 의자에 비스듬히 등을 기대고 앉아 그녀의 말을 들었다. 이곳에 출석한 지 며칠이나 됐더라?

분명 매일같이 아침마다 상기했던 것 같은데 어느 순간 그 날짜를 셈하는 것도 잊어버렸다. 나는 그 사실을 이제야 깨닫고는 속으로 혀를 찼다.

“저는 공립학교의 선생이었어요. 10년이 꼬박 넘게요. 약을 시작하게 된 건……. 정말 호기심이었어요. 정말이요. 한 학생이 가지고 있던 마리화나를 제가 압수했는데, 선생님 중 누군가 웃으면서 그러더라고요. ‘남편이랑 싸운 날 한 번 써 보세요, 선생님. 하하!’.”

여자, 앤은 조금은 씁쓸하게 웃으며 머리를 한 번 쓸어 올렸다.

“그 마리화나가 시작이었죠. 그리고 다음은……. 한밤중에 남편과 아이가 자는 걸 확인한 다음 마스크를 쓰고 나가 코카인을 샀고요.”

평범한 일상이 얼마나 순식간에 뒤집히고, 그다음은 또 얼마나 처참했는지를 털어놓는 문장은 무슨 공장에서 뽑아냈다고 해도 믿을 만큼 서로 엇비슷하지만, 나는 그 판에 박힌 말들을 제법 성실하게 듣는 편이다.

나 역시 그녀와 다를 게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약에 손댔던 건 7년 전이다.

이건 내 거다 싶었던 오디션에서 몇 번을 미끄러지고, 심지어는 촬영장에서 촬영까지 하고도 문자 하나로 잘리는 일이 겹치고 겹치던 어느 날이었다. 내 인생을 뒤흔든 그 날의 시작이, 얼굴조차 생각나지 않는 술집의 누군가가 건넨 것으로부터 시작했다는 걸 고백하는 게 여전히 꽤 부끄럽다는 것만 알아줬으면 한다. 그때부터 2년을 바닥에서 보냈다.

날 찾아온 브랜든을 만나고, 재활원에 가고, 세상에 존재하는 줄도 몰랐던 이 회복 모임에 참석하게 되고, 그다음은 BAA에 들어가 제대로 된 울타리에서 움직이게 된 건 길다면 긴 배우 생활에서 그렇게 오래된 일은 아니다.

그리고 그 커리어에서 단연 방점을 찍을 작품을 시작한 지금.

나는 모임에 들렀다가 느지막한 저녁 촬영에 합류하며 한숨을 푹푹 내쉬는 중이다.

오늘 아침, 션은 새벽 내내 뒤척이다 늦잠을 잔 나를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직접 깨우러 왔다.

“나란히 지각하면 욕먹지 않겠어?” 하는 목소리는 어제의 앙금 같은 건 찾아볼 수 없게 말끔해서, 덕분에 나는 비몽사몽한 와중에도 “어, 어어! 그렇지!” 하는 멍청한 대답만은 기합이 가득 들어간 채로 했다.

솔직히, 언제나처럼 문제는 션 스펜서가 아니다.

“간밤에- 아니, 오늘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요? 아니 대체 이게 뭐예요?”

“하핫. 제가 좀 감수성이 풍부해서.”

“이선! 진짜 이러면 안 돼요.”

“…미안합니다. 그냥 잠을 좀 늦게 잤을 뿐인데 평소보다 몇 배는 이러더라고요.”

잠을 푹 못 자서 그런지 찬물 세수로도 수습이 안 될 정도로 눈이 퉁퉁 부은 내가 제일 문제다.

덕분에 분장팀은 나를 둘러싸고 물에 적신 수건이라든지, 얼음주머니 같은 걸 만들어 오느라 바쁘다. 아주 이틀 연속으로 촬영장을 뒤집어 놓는 거나 다름없는 셈이 되고 만 거다.

그래서 이렇게 속이 심란하냐고? 아니. 그것 또한 아니다.

사실 이 정도는 별거 아닌 일이다.

촬영에 들어간 배우가 몸을 챙겨야 하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온갖 변수가 있는 현장에서 이 정도는 해프닝 축에도 못 낀다.

내가 지금 이 순간이 못 견디게 불편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

바로 눈이 개구리처럼 부은 나를 보며 뭔가…… 안쓰러운 듯이 쳐다보는 시선들이다.

‘괜찮은 척하더니 역시 마음고생을 제법 했나 봐.’ 하고 지레짐작하는 생각들이 둥둥 떠다니는 게 뻔히 짚어진다. 누군가가 작게 혀를 차는 소리에서 동정 어린 얼굴을 상상하고 싶지 않아 몸부림치는 건 습관적일 정도로 오래된 피해의식일지도 모른다.

“자.”

“어? 어어, 고맙… 다.”

션이었다.

눈에 차가운 수건을 대고 있던 나는, 그의 목소리에 괜히 속이 뜨끔해져서 다시 한번 덜떨어지게 허둥댔다.

하지만 다정한 내 파트너는 내가 그럴 것마저도 뻔히 알고 있었다는 듯 바닥으로 떨어지려는 수건을 대신 잡으며 내 손에 차가운 음료를 쥐여 줬다.

그건 휘핑을 산더미처럼 쌓은 프라푸치노였다.

“……직접 사 왔어?”

요 앞의 스타벅스가 얼마나 산만하다 못해 너저분한 분위기인지 잘 아는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작게 어깨를 으쓱하는 눈앞의 남자가 사람들 사이에서 줄을 선 모습이 쉽게 상상 되지 않았다.

와. 심히 황송하기까지 한 음료다.

얼른 빨대에 입술을 대지 못하고 멀뚱히 있자 션은 “모카 좋아하는 거 아니었나?” 하고 콕 집어 묻기까지 했다.

“맞긴 한데….”

“이선! 얼굴이 엉망이라고?”

꼭 성악가처럼 울리는 밀러 감독의 커다란 목소리가 그렇지 않아도 머뭇머뭇 흘러나오던 내 목소리를 낚아챘다.

덕분에 나는 ‘좋다고 마시기에는 차마 미안해서 그렇다’는 사과 아닌 사과를 다 끝내지도 못했다. 눈을 똑바로 바라보지도 못하는 이쪽을 물끄러미 눈에 담고 있는 시선이 뺨을 뜨겁게 했다.

“맙소사. 안 되겠군. 오늘 촬영 순서를 좀 바꾸지. 이선, 자네는 좀 쉬다 오게.”

이어진 밀러 감독의 말이 눈물 나게 고마울 일이었다는 건 설명해 무엇 할까.

나는 한 손에는 션이 준 음료를, 다른 손에는 차가운 수건과 얼음주머니를 잔뜩 든 채로 내 트레일러로 도망치듯 발을 옮겼다.

이 아담한 녀석은 이번 영화 출연 덕분에 에이전시에서 빌려준 거다.

다른 배우들-특히 션 스펜서-의 집채만 한 트레일러에 견줄 건 못 되지만, 난 이 트레일러가 더할 나위 없이 마음에 든다. 차라리 여기로 이사 가는 게 낫겠다 싶은 휘황찬란한 트레일러를 빌려주려는 바커를 말리느라 얼마나 고생을 했던지.

‘내 트레일러’라니. 새삼 감격스럽지 않나?

이제껏 쉴 땐 현장 구석이나 자동차 안, 회의를 위한 공용 트레일러만 전전하다가 나만을 위한 공간이 생긴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하다.

[야. 바쁘냐?]

짤막한 문자의 주인공은 브랜든이었다.

간이 의자에 다리를 쭉 펴고 누워서 눈에 수건을 대기가 무섭게 휴대폰이 작게 진동한다.

나는 곧바로 통화 버튼을 누른 뒤 스피커폰으로 전환했다.

“어, 왜?”

-한가한가 보네. 어때, 오늘은 분위기 좀 괜찮냐?

“불난 데 기름 부어?”

끅끅대고 웃는 브랜든의 쉰 목소리가 작은 트레일러를 가득 채웠다.

뭐 지금 이렇게 웃고 있기는 하지만, 녀석은 어제 질릴 듯이 쏟아진 전화 중 상당한 지분을 차지하고 있다. 사람들의 연락에 지친 내가 아예 수신 거부를 하자 이윽고 분노 가득한 문자 폭탄-대체로 월링턴 이 씹새끼 같은 내용이었다-보내기도 했고 말이다.

“왜, 인마.”

-너 혹시 얼마 전에 회사로 바커 씨 찾아온 적 있어?

망할, 이제야 좀 쉬어 볼까 했더니!

나는 저도 모르게 짜증 섞인 한숨을 크게 터트리려다가 그걸 가까스로 삼켜 냈다. 왜 이렇게 날 내버려 두는 사람이 없을까.

하지만 그런 답답함을 내색할 필요는 없다. 이미 어제 톡톡히 후회하지 않았나.

“어, 뭐. 저녁에 잠깐…. 왜?”

-회계팀 사람이랑 밥 먹는데 그러더라고. 얼마 전에 션 스펜서가 저녁에 로비에서 한 시간 넘게 있는 걸 봤다고.

“…….”

-BAA까지 찾아온 션 스펜서라니, 뻔하잖냐. 분명히 너 때문에 온 것일 테고, 요새 바커도 좀……. 아니. 이건 별거 아니고.

나는 브랜든 녀석이 어물어물 삼킨 문장을 분명히 들었다.

이성적으로는 에이전시와 상의하는 게 맞는 일이었지만 사실은 나 편하자고 털어놓은 것임을 스스로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양심이 콕콕 심장께를 찌른다.

나는 냉기가 남은 눈을 꾹꾹 누르면서 꽉 막힌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냥……. 내가 이렇게 사이즈 큰 작품은 처음이잖아. 그래서 잘하고 있는 건가 싶어서 상담 겸, 저녁이나 같이 먹을 겸 간 거야.”

-진짜 별일 없는 거지?

“그렇대도. 너야말로 요새 좀 살만한가 보다. 별걸 다 신경 쓰고.”

-장난해? 말도 마. 어제도 한나 젠킨슨 그 또라이가 이번에 대박 난 영화 보고 별 지랄을 지랄을…. 제발 해 보자고 사정해도 자기가 안 한다고 해 놓고!

브랜든 우드와 함께 지낸 지 5년.

어떻게 해야 녀석의 주의를 돌릴 수 있는지 정도는 뭐, 손쉽다.

나는 미지근해진 수건을 얼음주머니로 싸서 개구리처럼 부은 눈 근처를 달래며 요 일주일간 겪었던 온갖 종류의 진상과 자신의 공사다망함을 자랑하는 브랜든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세상에 왜 이렇게 이 바닥엔 사이코들이 많을까?

하긴, 제임스 월링턴만 봐도 그렇다. 난 정말 그 사람이 괜찮은 사람인 줄 알았는데.

-……이선?

“어, 듣고 있어, 듣고 있어.”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너무 대충 대하는 게 티가 났나 보다.

나는 괜히 목청까지 가다듬으며 녀석의 말에 대답했다. 브랜든의 목소리에 섞여 있는 건 질책이 아닌 의문이었다는 걸 이때 미리 알았어야 했는데!

-너 혹시, 지금 션 스펜서랑 같이 있냐?

“아니. 혼자 쉬고 있는데.”

-어…….

기묘한 침묵이 흘렀다.

나는 녀석이 뭐라 말을 잇지 않을까 싶어 채근하지 않고 기다렸건만, 브랜든은 그 이후로 묵묵부답이었다. 결국, 궁금함을 이기지 못한 건 내 쪽이었다.

“왜?”

[email protected]_PS_PS_P. 검색창에 쳐 봐.

솔직히 처음에는 무슨 말을 하나 싶었다.

하지만 브랜든은 내가 재차 “뭐라고?” 라고 물어도 고장 난 기계처럼 같은 말만 계속할 뿐이었다. 나는 더듬더듬 녀석의 말을 곱씹으며 그 암호 같은 글자를 입력했다.

그건 누군가의 SNS 계정이었다.

“뭐냐, 이게?”

-직접 확인해 보라고.

대체 왜 그 말 뒤에 ‘에휴’ 따위가 붙는 건지.

나는 그 한숨 같은 문장을 무시하며 그 누군지 모를 사람의 계정을 눌렀다. 이놈의 망할 SNS는 어제부터 쓸데없을 만큼 내 하루에 자주 등장한다.

솔직히 난 그때까지는 꽤 심드렁한 기분이었다.

이미 터질 폭탄은 어제 다 터진 뒤 잔불만이 남아 지글대고 있었고, 브랜든이 기어코 외워 읊게 한 이 단순한 아이디는 프로필도 텅 비어 있고 사진이라곤 단 한 장밖에 없는 소박한…….

“…….”

계정치고는 팔로워가 이상하게 많았다.

얼음주머니로 눈가를 달래던 나는 한 박자 늦게 미간을 찌푸리고 유일하게 올라온 사진 하나를 확인했다.

“야. 진짜 뭐냐고. 정말 별거 없는….”

-정말 별거 없냐?

“…….”

-너도 이거 몰랐던 거 맞지. 최소한 하루는 걸러서 터지는 게 예의 아니냐, 어엉? 정말 요새 네가 우리 회사에서 제일 언론 지분 높은 거 알지? 어떻게 홍보비 한 푼 안 써도 혼자서 척척….

내버려 두면 끝도 없이 떠드는 브랜든이다.

나는 녀석의 말에 대답 대신 통화를 툭 끊는 것으로 대신했다.

지금 난 뻔히 답을 알면서도 빙빙 돌려 전한 브랜든의 괘씸함을 탓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생겼다.

망할, 정말 세상살이가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지만 잠깐 눈을 뗐다고 일이 이렇게 돌아가는 건 해도 너무하지 않나? 평온의 상징 그 자체인 저 아담한 트레일러와 촬영장 간의 최단거리를 이런 식으로 주파하고 싶지는 않았는데 말이다.

“야, 션 스펜서!”

하지만 나는 지금 그런 자잘한 것에 신경 쓸 여력이 없다.

“너 이 새끼 뭐 올린 거야!”

소싯적에 올랐던 연극 무대에서도 내지른 적 없는 노호를 내지르느라 정신이 하나도 없으니.

“내 사진.”

“미쳐 버리겠네. 대체 그게 어떻게 네 사진이냐?!”

분장팀들 사이에서 태평하게 옷을 고르고 있는 모습을 보자니 뒷목마저 뻣뻣해지는 것 같았다. 그렇다.

그 망할 ‘@S_PS_PS_P’라는 수상해 빠진 계정은 션 스펜서의 것이었다.

션 스펜서의 SNS라니! 그딴 걸 들어 본 적 있나?

적어도 난 이번이 처음이다!

애초에 인터넷에 떠도는 과거 사진이라야 동기들이 올린 졸업사진이 전부인 녀석이다. 이만큼 유명해졌으면 흔히 돌아다닐 흑역사 하나 없는 인간이 저 잘난 스펜서라는 거다.

그런데 그런 션 스펜서가 처음으로 SNS를 만들었다.

심지어 그 역사에 남을 첫 사진으로-

“여기 있잖아.”

“웃기는 놈이네, 이거! 야. 당장 지워!”

“생애 처음으로 만든 SNS의 첫 글인데 너무 야박한데.”

그의 얼굴이 반쯤 나온 내 뒷모습을 찍어 올렸다!

한 손에는 녀석이 준 음료를, 다른 한 손에는 얼음주머니와 수건을 들고 털레털레 걸어가는 저 맥 빠진 뒷모습을 말이다!

[;)]

이 빌어먹을 이모티콘은 또 뭔지!

난 “널 ‘태그’까지 했어.” 하는 근사한 목소리에 정말 미치고 팔짝 뛸 심정이 됐다.

대체 브랜든 녀석이 나도 곧바로 알아보지 못한 나 자신의 뒷모습을 어떻게 바로 알아봤나 했더니, 이 예쁘게 걸린 태그가 문제였던 모양이다.

……아니. 이제 보니까 정갈한 숫자 1이 찍힌 망할 팔로잉의 주인공도 나잖아!

“너 또 올리기만 해!”

“고소라도 할 건가?”

“야!”

“좋아. 앞으로는 정정당당하게 올리지.”

“정정당당은 또 뭐래?!”

이 거대한 유기체 같은 촬영장에서 꽂히는 시선들을 처음으로 모두 잊은 채 망할 파트너와의 대화에만 몰두하는 순간이 고작 이런 이유 때문이라니 통탄할 일이다.

션의 계정은 피드를 새로고침할 때마다 무시무시한 속도로 팔로워가 늘어난다. 단 하나뿐인 사진에 찍히는 하트와 댓글의 수는 말하고 싶지도 않다.

심지어 촬영장의 새로운 친구 역시 내 편이 아니다.

“어머. 이선! 서로 안 친하다고 하지 않았어요?”

언제부터 우리의 대화를 듣고 있었는지 모를 목소리는 정말 예상하지도 못했던 방향으로 훅 치고 들어왔다.

“해리엇!”

“무슨 말이죠, 로스?”

션과 내 입에서는 각자 다른 호칭이 튀어나왔지만, 그 물음의 끝에 있는 당사자는 그것을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오히려 깊게 쌍꺼풀 진 눈을 접어 웃으며 장난스럽게 말을 이었을 뿐이다.

“제가 어제 두 사람 친하지 않냐고 하니까 아니라고 펄쩍 뛰던데요~?”

“내가 언제 펄쩍 뛰었어요!”

“호호, 아닌가? 아닌가 봐요, 그럼.”

거기에 해 봤자 좋을 게 없는 말뚝 박기까지.

……아, 아니. 흉을 본 것은 아니지만, 굳이 전해서 좋을 말은 아니지 않나!

어제만 해도 서로 빽빽 소리를 지르며 싸웠다지만, -나도 그게 내 일방적인 다그침에 가까웠다는 걸 잘 안다, 젠장.–솔직히 요 몇 달 션 스펜서와 나는 서로의 친분을 선 긋기에는 참 많은 일이 있었다.

……골치 아픈 가정과 상상들은 우선 젖혀 둔다고 해도 말이다.

그렇게 생각한 건 션 역시 마찬가지였는지 그는 해리엇 로스의 말에 그 짙은 눈썹 하나를 눈에 띄게 치켜떴다.

저런 표정 하나하나에 눈치를 보고 싶지는 않지만, 대범하지 못한 내 성격과는 별개로 그에게는 조금 기분 나쁠 수도 있는 말임을 자각 정도도 못할 정도로 바보는 아닌 탓이다.

하지만 그건 괜한 걱정이었다.

상대를 얕봐도 너무 얕봤다.

“다른 사람 앞에서는 그렇게 말하고 다닌 거야, 내 사랑?”

“진짜 죽여 버린다!”

촬영장 여기저기서 와아 하는 탄성인지, 탄식인지 모를 한숨들이 터져 나왔다. 썅, 누군가는 휘파람도 불더라. 미치고 팔짝 뛸 일이다!

나는 그제야 내가 목청 터지라 소리치며 션과 티격태격한 장소의 존재감을 깨달았다.

저만치에서 신기하다는 듯 눈을 빛내는 데이비드 밀러 감독과 눈이 마주친 건 둘째 치고서라도 홧홧한 열이 뒤늦게 얼굴을 달군다.

커다란 손이 아직도 붓기가 남은 내 눈을 덮듯이 가린 건 그때였다.

“가자. 가서 좀 더 쉬어.”

“아니, 야. 너 때문에 쉬겠냐고!”

닿는 순간에는 조금 서늘하고 그 후로는 옅은 온기가 전해지는 손은 장난스러운 말과는 달리 꽤 조심스러웠다.

“그래, 그래. 미안해.”

“제발 뭘 할 때 너의 그 망할 유명함을 생각해 볼 순 없든?”

“목까지 쉬면 볼만하겠어.”

“야!”

“미안.”

하여튼 누군가의 비위를 맞춰 본 적 없는 사람은 이래서 문제다.

나는 뒤늦게 별 그답지도 않은 사과를 덧붙이는 녀석의 목소리에 결국 작게 바람 빠진 웃음이 터져 버렸다.

어제 절대 아니라고 발 뺐던 해리엇에게는 할 말이 없지만, 아마도 나는 이 온화하고 또 기괴한 도시에서 누구보다 든든한 친구가 새로 생긴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전형적인 LA 날씨인 오후이다.

내가 이 도시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것도 열일곱에 이 날씨를 만났기 때문이 아닌가. 그런데 이렇게 화창한 주말, 기껏해야 칙칙한 사내자식과 함께 놀고 있는 꼴이라니.

“……왜?”

그래, 말을 정정한다.

굳이 따지자면 칙칙한 건 내 쪽이다.

창가에서 쏟아지는 햇살을 받으며 우아하게 독서 중인 저 남자와 의무적인 운동을 간신히 끝내고 들어와 세 시간째 꼼짝 않고 소파와 한몸이 되어 늘어진 쪽을 비교한다면, 누구라도 내 쪽을 향해 혀를 차겠지.

나는 눈이 마주친 션에게 부루퉁한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다른 사람도 좀 팔로우하고 그래! 많잖아. 배우, 가수, 뭐 그런 거.”

“하고 싶은 사람 없어.”

“그럼 그냥 친구라도!”

요 며칠, 내 SNS 팔로워는 이제껏 내 평생 얻었던 이상으로 늘었다.

이를테면 낙수효과라고나 할까.

이건 모두 다 션 스펜서가 주야장천 사진이며 짧은 영상을 올리며 날 태그한 탓이다.

사진 한 장, 10초도 안 되는 영상 하나 올릴 때마다 기사가 뜨는 그의 SNS는 여전히 단 한 명만을 팔로우하고 있다.

당장 현장에서 매일같이 얼굴을 보는 동료들이 웃으며 장난기 가득한 메시지를 보내도 그가 하는 건 작고 귀여운 빨간색 하트 하나를 찍어 주는 게 전부고 말이다.

덕분에 촬영장 밖의 사람들은 션 스펜서 최초의 공식 계정을 영화 홍보용으로 착각하고 있는 게 다행이면 다행이랄까.

내 질책 아닌 질책에 션은 한 시간 넘게 꼼짝하지도 않고 집중하던 두꺼운 책을 처음으로 덮었다.

“다들 대학원 연구실에 박혀 사는 애들뿐이야. 귀찮게 하면 욕할걸.”

그에게는 조금 미안하지만, 솔직히 내가 예상했던 대답은 “친구도 없어.” 였다.

나는 그제야 머리 한구석으로 애써 밀어 두었던 이런저런 사실들을 떠올렸다. 내 파트너는 어쨌거나 이 날씨 하나는 끝내주는 곳의 자랑 중 하나를 다녔다고 했었다.

“넌 뭐 공부했어?”

앞뒤 설명도 없이 떨어진 질문이었건만, 션은 내 물음에 잠시 고개를 기울이더니 순순히 원하는 답을 내주었다.

“우선은 화학공학.”

“우선은?”

“이것저것 공부했어. 작은 학교라 꼭 한 가지만 파고들 필요는 없었거든. 부전공도 있고.”

저 남자와는 시시껄렁한 것부터 속 깊은 이야기까지 별별 대화를 다 했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와 떠올려 보니 주로 나만 털어놓았던 것 같다.

구글이 알려 준 정보 말고는 얼른 생각나는 게 없는 거 보면 말이다.

나는 비스듬히 턱을 괴고 엎드린 채로 물었다.

“재밌었어?”

“재미있어서 했다기보다는, 그냥 했지. 진짜 이러다 죽는 거 아닌가 싶을 정도로 해야 간신히 따라가니까.”

‘죽는 거 아닌가 싶을 정도로’ 같은 꽤나 격렬한 표현과는 달리, 녀석의 얼굴은 싫은 기억을 떠올리는 표정은 아니다. 오히려 그건 먼지가 내려앉은 기억을 되짚는 쪽에 가까웠다.

그래서 나는 이어진 내 질문이 그의 평화를 깰 수 있으리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별로 하고 싶지도 않은 공부를 죽는 거 아닌가 싶을 정도로 해야 한다고?”

“…….”

“왜?”

온화하다 못해 미풍 한 점 없는 날씨처럼 누그러졌던 얼굴에 처음으로 정반대의 감정이 떠올랐다. 그걸 깨달은 건 미간을 확 찌푸린다든가 눈썹을 치켜뜬다든가 같은 뻔하게 손에 잡히는 반응 때문이 아니었다.

저 여유로운 눈웃음의 의미를 대충이나마 알게 된 건, 매일같이 붙어 있던 덕분이다. 션 스펜서는 그의 속내를 감추고 싶을 때 저렇게 웃는다.

그걸 반증하듯, 남자는 짧은 한숨의 시간만큼 침묵했다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뭐. 집 분위기가 조금, 그랬거든.”

지구상에서 가장 섹시한 너드라는 별명을 가진 남자의 동기가 이렇게나 빈약할 줄이야.

아무렇지 않은 척하지만 묘하게 가라앉은 녀석의 눈을 모를 수가 없었다. 이럴 땐 대체 어떻게 해야 분위기를 띄울 수 있을까. 나는 살짝 각질이 일어난 입술을 혀로 적시며 시선을 빙빙 굴렸다.

뭐, 무엇인가를 선택할 때 그게 성공인지는 해 봐야 아는 것 아니겠는가.

“공대는 MIT가 최고라던데.”

너무 혀를 차지는 않았으면 한다.

이것이 내 얕은 지식이 만든 최고의 대응이었으니. 다행스럽게도 이 문장 끝에 닿은 사내 역시 기대만큼 반응해 주었고 말이다.

“뭐?”

“영화에서 과학 천재들은 다 MIT잖아. 너네 학교는 한 명도 못 봤어.”

“맙소사, 이게 인스턴트 영화의 문제지! 올해 노벨상 수상자가 누군지 관심도 없는 사람에게만은 듣기 싫은 말이군.”

확실히 내가 아는 노벨상 수상자는 퀴리 부인 정도가 전부다. 아, 뭐 아인슈타인도 탔겠지…?

션은 내가 대는 옛 위인들의 이름에 반쯤 감탄한 듯 고개를 젓는다.

나는 그런 남자를 보면서 쐐기 박듯 말을 이었다.

“아, 맞다. 너희 학교 본 적 있구나. <빅뱅이론>에서-”

“됐어. 말하지 마.”

아주 치가 떨린다는 어조였다.

하지만 고개를 저으면서 어이없다는 듯 웃어 버리고 마는 모습은 한결 후련해 보인다. 나는 션이 앉아 있는 쪽으로 옮겨 앉아 녀석의 늘씬한 허벅지에 머리를 대고 누웠다.

“야, 나 뭐 더 물어봐도 되냐?”

“이미 마음대로 말하고 있으면서 뭘 또 새삼.”

“그건 그렇네.”

잘 정돈되고 반듯한 션에 비해 조금은 느슨한 이미지이면 좋겠다는 감독의 말에 살짝 기른 채로 유지하고 있는 머리카락은, 눈을 가리거나 해서 아예 짧은 때보다는 귀찮은 일이 꽤 많았다.

하지만 그중에서 꽤 좋아진 건 누군가 내 머리카락을 만져 줄 때의 노곤함이다. 나는 션이 내 머리카락을 손가락 끝으로 살살 건드리며 가지고 노는 것을 내버려 둔 채로 슬슬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너희 집안 사람들도 다 MIT 출신이라고 들었는데.”

“…….”

“너는 왜 여기로 온 거야? 어, 시차도 세 시간이나 있고…, 비행기로도 한참 떨어졌잖아. 웬만하면 집 가까운 곳이 편하지 않아? 가족들도 싫어했을 것 같은데.”

가족과 함께 있는 것이 버거워서 도망치듯 디트로이트를 떠났던 주제에 할 말은 아니라는 건 잘 안다. 하지만 왜 그런 게 있지 않나. 이때가 아니면 물어보기 어려울 것 같은 느낌이 드는 순간 말이다.

딱 지금이 그랬다.

나를 내려다보는 새파란 눈동자는 조금 전처럼 심란해 보이지는 않았다. 오히려 어디서부터 말을 꺼내는 게 좋을지 신중하게 단어를 고르는 쪽에 가까웠을 것이다.

션은 내 질문 세례에 뒤에서부터 거꾸로 대답하기 시작했다.

“그다지……. 가족들은 별로 신경 안 썼어.”

“그래?”

“애초에 대리만족이 목표였으니까.”

‘대리만족’?

예상하지 못했던 단어의 등장에 저절로 인상이 써졌다.

대체 누가 저 흠잡을 데 없는 남자를 대리만족용으로 내세울 수 있단 말일까. 아마 그건 션 스펜서에게 가장 어울리지 않을 표현 중 하나다. 그렇게 미간을 좁히고 있자니, 묘하게 가라앉은 나직한 목소리가 천천히 이어졌다.

“…엠마 힐, 알지?”

“엠마 힐? 지금 그 엠마 힐 말해?”

“어.”

“무슨 소리 해? 모를 수가 없지! 엠마 힐, 그리고 너희 어머니. 이렇게 둘 모르면 최소- XX년도 이후 미국 입국 확정이지.”

“……그래?”

“그래!”

엠마 힐이라니!

아무리 같은 세대를 살지 않았다고 한들 엠마 힐을 모를 수가 있을까.

풍성한 흑갈색의 머리카락과 우아한 이목구비, 그 선명하게 빛나는 짙은 녹색 눈이라니! 세기를 통틀어 할리우드를 달궜던 미인을 꼽을 때 반드시 다섯 손가락……, 아니 다섯 손가락은 조금 과장일지도 모르지만 좀 고쳐서 못해도 열 손가락 안에는 꼽히는 게 힐이다.

사람마다 다를지는 몰라도 최소한 내 열 손가락 안에는 반드시 꼽힌다.

얼마 전 개봉한 영화에서는 조연으로 등장했는데도 누구보다 강한 씬 스틸러로, 시간이 담기기 시작한 얼굴에서는 카리스마마저 느껴졌었다.

그런 엠마 힐을 모를 수가 있나?

션은 무슨 말을 하냐는 내 반응을 보며 어깨를 작게 으쓱했다.

“힐이 코넬대 출신이잖아.”

“그래? 그래서.”

“…….”

시종일관 내 말에 곧장 대답하던 남자가 처음으로 입을 다물었다.

내 의문에 별다른 해명을 붙이지 않고 나를 말없이 눈에 담고 있는 모습은, 마치 내가 답을 이미 알고 있다는 듯한 태도다. 덕분에 나는 멍하게 눈만 끔벅이며 이전까지 그와 내가 나눴던 대화를 되짚었다.

그러다, 내가 그의 어머니- 나탈리 슬로안의 이름을 꺼내 놓고도 잊고 있었음을 깨달은 건 머지않은 일이었다.

입 밖으로 아, 하고 작은 탄성인지 탄식인지 모를 것이 튀어나왔다.

남자는 그것을 책망하지 않았다.

“어차피 내가 보스턴으로 가든, LA로 가든, 하고 싶은 공부를 하든, 그게 아니든- 중요한 건 학교 이름뿐이었으니 여기로 오는 것쯤이야 내가 마음만 먹으면 어려울 건 하나도 없었어.”

“…….”

“전 인구 중에서 절반도 대학에 안 가는 나라에서 공립 고등학교 출신인 게 뭐가 문제인지 난 아직도 모르겠지만 말이야.”

오히려 기묘한 웃음과 함께 꽤 냉소적인 어조로 덧붙였을 뿐이다.

이런. 이건 좀 생각보다 좀…… 우중충한 전개다.

엠마 힐과 나탈리 슬로안.

분명 그녀들은 한 세대에서 그 이름을 깊게 새겼다.

하지만, 그렇게 시작은 같았을지언정 그 명성을 지금까지 쭉 지켜 온 건… 아무래도 힐 쪽이다. 결혼 뒤 할리우드에서 자취를 감추다시피 한 나탈리 슬로안과는 달리, 힐은 끊임없이 스크린에 얼굴을 비쳤다. 심지어 작년엔가는 TV 시리즈 드라마까지 생에 첫 시도를 했지 않나.

배역도 끊임없이 바뀌었다.

엠마 힐은 가슴 절절한 로맨스의 주인공에서 누군가의 어머니가 되기도 하고, 때로는 거대 군수 업체를 이끄는 폭군이 되기도 했다.

배우라는 카테고리 안에서 보자면 엠마 힐과 나탈리 슬로안은 이제 나란히 서 있다고 보기 힘들다. 언론에서 라이벌 관계로 띄워줬던 것도 옛날얘기다.

힐은 이미 대체 불가의 영역을 만든 배우다.

……감히 분명한 건, 그 간극을 만드는 데 학교 이름 따위가 기여한 바는 전혀 없고 말이다.

션이 말한 전 인구 중 절반 넘는 사람 중 하나인 나는 조금 얼떨떨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배우 일은 용케도 내버려 두셨다….”

“천만에. 오히려 ‘이 기회를 잘 이용해 보라’고 하던데.”

“기회?”

“이러나저러나 가만히만 있어도 사방에 스펜서가 찍혀 나가는 걸 싫어할 리가. 애초에 이 직업을 일로도 생각하지 않아. 언제든 그만둘 수 있는 취미나 마찬가지지. 그럴 거면 신년사에서 왜 셰익스피어는 들먹이는지, 웃기는 일이지.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

리어왕의 외침이 냉랭하게 흘러나온다.

뭇 오디션을 전전하는 배우들에게라면 흔하디흔한 저 문장이 이렇게나 기묘하게 다가올 수 있었나. 션은 숨을 한 번 참듯이 삼키고는 한 단어 한 단어 힘주어 물었다.

“그 꼴이 보기 싫어서 무작정 LA로 왔다고 하면 너무 유치한 이유인가?”

드디어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답에 도착했다.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내가 이런 아들이 있다면 난 꽤 목에 힘을 주고 다닐 것 같은데. 아니, 목에 힘을 줄 뿐인가? 아마 저 남자는 나 스스로보다 더 큰 자랑이 될 거다.

주먹을 말아 쥔 션의 손등에 하얀 뼈와 파란 힘줄이 툭 불거져 있었다. 나는 그 초조함을 조금이나마 털어 줄 수 있기를 바라며 솔직하게 대답했다.

“아니.”

“…….”

“만약에 부모님이 그런 이유로 죽기 직전까지 공부시켰으면, 난…, 음, 하와이나, 하다못해 국경 넘어 캐나다로 도망쳤을걸.”

최대한 멀면서도 만만한 느낌이 드는 도피처를 찾느라 아무렇게나 꺼낸 말이 스스로 생각해도 조금 우스웠다. 심지어 그건 션 역시 마찬가지인지,“…대학이든 하와이든 가 본 적은 없지만 말이야.” 하고 덧붙이자 터지는 한숨에 조금은 웃음이 섞여 있었던 것도 같았다.

솔직히 이렇게까지 흘러올 줄 몰랐던 대화였다.

사실 맨 처음 녀석에게 시작했던 질문 속에 내심 심문의 의미가 담겨 있지 않았다고는 할 수 없을 거다.

난 그 어떤 칭송받는 인터뷰어도 지면에 싣지 못했던 이야기를 기꺼이 꺼내 놓은 내 파트너를 앞에 두고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을 정도로의 냉혈한은 아니다.

“그럼 학교 다닐 땐…….”

이 질문 세례를 시작했을 때부터 마음속 깊은 곳에서 가장 먼저 돋아났던 가시를 꺼내기 위해 나 역시 제법 용기가 필요했다는 걸 여러분만이라도 알아주었으면 한다.

“어, 뭐- 기숙사 같은 거에서 살았어? 아니면 따로?”

“데이브, 그러니까 밀러 감독의 저택이 그 근처라서 거기서 지냈지.”

…바라건대, 나는 이 순간 내게 무릎베개를 해 주는 남자의 다리에 누구보다도 더 마음 편하게 기대고 싶은 당사자이니 말이다.

너무나 순순히 흘러나온 밀러의 이름에 잠시 뭐라 말을 잇지 못하고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올려다보고 있으려니, 그가 나직하게 이어 묻는다.

“왜?”

“아, 아냐. 돈 많은 사람은 어떻게 학교 다니나 싶어서.”

“나라고 별다를 거 없어. 데이브와는 열다섯 살 때부터 알고 지냈고, 거의 룸메이트와 사는 거…, 그래, 지금 너랑 비슷했다고 생각하면 돼.”

꽤 합리적인 이야기이기는 했다. 제아무리 다른 세계에서 사는 사람이라고 한들 알려진 것보다는 썩 화목한 것 같지는 않은 환경에서 일부러 비행기로 다섯 시간은 떨어진 곳으로 왔다면-

뭐라고, 잠깐만?

“열다섯?!”

션의 말을 곱씹으며 고개를 주억거리던 나는 한 박자 늦게 판독해 낸 숫자에 입을 떡하니 벌리고 말았다.

“너 지금 몇 살이었지? 서른? 맙소사! 진짜 친했구나….”

“진짜 친했구나는 또 뭐야.”

“촬영장에서도 맨날 데이브, 데이브 하길래 어지간히 가깝구나 생각하긴 했었거든.”

밀러 감독과 이야기할 때마다 묘하게 삼촌을 대하는 조카인 양 느껴진다 했더니 정말 그랬다! 나는 상상 이상으로 오래된 두 사람의 인연에 왠지 얼떨떨해졌다.

그 순간 내가 아는 모든 것이 정말로 다 우연일 확률이 있지 않을까, 희망 어린 생각이 아예 들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하필이면 네스 녀석이 밀러 감독의 저택을 산 것도, 이 영화를 오랫동안 함께 준비했다는 것도, 눈앞의 남자가 죽기 전 마지막으로 만난 사람이라는 것도, 모두 우연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나는 이 모든 가정에 찬물을 끼얹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다.

……빌어먹을. 휴대폰을 뒤져 보는 게 아니었는데.

나는 ‘신고하는 게 낫겠다’며 이야기를 주고받았던 두 사람의 문자를 상기하자 왠지 속이 안 좋아져서 머리를 베고 누웠던 녀석의 다리에서 휙 일어나 버렸다.

담담하게 나를 바라보는 푸른 눈에서는 어떤 동요도 보이지 않는다.

“‘이선’은 뭐라고 부르는 게 좋은데?”

“줄일 필요 없이 짧으니까 그런 짓 하지 마. 내가 널…… 뭐, 셔니, 이런 이름으로 부르면 좋겠냐?”

“…끔찍하긴 하군.”

정말로 그 끔찍한 일을 했거나, 못해도 교사했다면 네스가 죽은 그 저택을 이렇게 아무런 내색 없이 입에 담고 시시껄렁한 대화를 나누는 건 힘들지 않을까?

적어도 내가 이 몇 달간 보아 온 션 스펜서는 그렇다.

가끔은 열 받을 정도로 오만하고, 또 제가 가진 모든 것들을 잘 아는 잘난 사내이기는 하지만 악랄한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오히려 그는 촬영장의 스태프를 귀찮게 하는 일조차 하나 없는 얌전한 톱스타에 가깝다. 같이 영화에 이름을 올리는 파트너이자…… 친구로서는, 더욱 흠잡을 데 없고 말이다.

“이선. 이쪽 좀 봐봐.”

“왜? ……와, 진짜 정정당당도 하시다!”

그래서 더욱 물어볼 수가 없다.

차라리 이렇게까지 서로의 속내를 내놓지 않은 때 이 모든 것을 알았더라면, 설령 지옥 같은 180일을 보내게 될지언정 등 뒤로 칼을 움켜쥐는 순간이 이토록 역겹지는 않았을 텐데.

예쁜 아몬드형의 눈을 휘어 웃으며 기어코 내 사진을 찍어 가는 남자를 보자니 더욱 속이 쓰리다.

망할. 저런 애를 보고 “사실은, 웬 형사 말을 듣고 네가 바라노프를 죽인 게 아닌가 싶어서 네 휴대폰 문자를 뒤지고 에이전시 사장과 상의까지 하면서 의심했었는데…. 하하. 너 아니지?” 같은 헛소리를 할 수 있겠냔 말이다!

이미 션의 계정에 스무 장은 올라가 있는 내 사진에 자포자기의 심정이 된 나는, 뭐라고 짤막하게 타이핑 중인 그를 보며 툭 입을 열었다.

“너 진짜 SNS는 이게 처음이야?”

“어.”

“소싯적에 마이 스페이스 같은 것도 안 했어?”

“‘마이 스페이스’?”

“…됐다. 말을 말자.”

션은 한 박자 늦게 “아, 그거 알아. 해 보지는 못했지만.” 라고 했지만 이미 늦었다.

남들은 온갖 흑역사를 남기는 나이에 같이 노닌 사람이 할리우드를 손에 틀어쥔 노감독이었다니, 대체 어떤 청소년기를 보냈는지 상상도 안 갔다.

[한가한 주말 :0]

게다가, 과거가 어찌 되었든 이렇게 귀여운 이모티콘을 꼬박꼬박 붙여 가며 글을 올리는 미남을 싫어할 사람은 많지 않을 거다. 얼빠진 내 얼굴과는 다르게 대충 찍어도 반짝반짝한 녀석이 같은 배우라는 명함을 가지고 있다는 게 좋은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나는 내가 태그 된 사진에 미친 듯한 속도로-이제는 꽤 적응됐다-반응이 오는 걸 지켜보며 한숨을 푹 쉬었다.

확실히 션의 말마따나 한가한 주말이기는 하다.

그것도 이렇게 날씨가 좋은 날 쉬는 내내 저택에서만 보내는 꼴이라니!

고등학생 때도 이렇게 얌전하지는 않았는데, 어딜 가나 시선이 집중되는 톱스타와의 주말을 얻으니 건전함이 절로 따라온다.

건전함. 그래, 건전함이라.

나 같은 인간에게는 참 어울리지 않는 종류의 단어다. 심지어 한평생 진짜 ‘건전하게’ 살았던 남자가 눈앞에 있으니 더욱 기분이 묘하다.

나는 몇 초간 눈을 끔벅이다가 툭 입을 열었다.

“션.”

내 부름에 무슨 일이냐는 듯 선명한 벽안을 반짝이는 햇살 속의 도련님이라.

그 순간, 나는 세상에 이렇게 재미있는 게 또 없으리라는 걸 확신했다.

이상하지.

청바지로 감싸진 저 늘씬한 다리는 분명 조금 전까지 사심 없이 머리를 베고 있던 거였는데…….

* * *

마지막으로 누굴 만났던 게 언제였더라.

아마 반년은 된 일이다. 사실 그건 사귀었다고 하기도 뭐한 것이 한 달 정도 데이트했던 거니까, 어디 가서 애인이라고 소개하던 사이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1년 정도 잡아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얼마나 더 해묵은 과거의 책장을 넘긴다 한들, 이것만큼은 확실하다.

나는 이제껏 만났던 그 어떤 사람과도 이런 곳에 와 본 적 없다.

이런 곳이 어디냐고?

“미친….”

자. 잠시 화제를 돌려서.

여러분들은 조금 전의 욕을 분명 내가 했으리라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미안하게 됐다. 방금 그건 내가 한 말이 아니다. 내 차례는 바로 지금이다.

“표정 관리 잘하는 게 좋을걸. 플레이보이 씨?”

“…너 진짜 이따 보자….”

“복화술도 하고 대단하다, 야.”

난 왜 이렇게 저 열 받은 얼굴이 좋은지 모르겠다.

아 물론, 이 잘생긴 남자가 사르르 꿀 떨어지게 웃는 게 좋은 분들도 있을 거다. 녀석은 평소 얼굴이 좀 서늘한 편이라 눈을 접을 때의 화사함이 유독 굉장하니까 말이다.

하지만 나는 저 짜증을 꾹 눌러 참으면서 입꼬리를 들어 올리는 게 훨씬 좋다 이거다.

“어어, 그러니까 작품 연구 때문에……, 오셨다고요.”

“네. 편하게 구경 좀 해도 될까요? 하하, 션이 이런 데 직접 오는 건 또 처음이래서.”

“그, 그럼요. 저 그런데 혹시 사인 한 장만 해 주시면.”

“얼마든지요. …션?”

천사의 도시를 찾아온 관광객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곳 중 하나인 할리우드대로.

사실 이곳에는 흔히들 아는 극장과 기념품 상점, 식당들만 있는 게 아니다.

사람들의 발길이 좀 떨어진 이 외진 곳으로 올라오기만 하면, 어린 친구들의 방문을 정중히 거절하는 오색찬란한 형광빛의 가게들 역시 곳곳에 자리하고 있다.

그래, 다시 말해 어른 전용의 핑크빛 가게들이 즐비하다는 소리다.

밀러 감독이 난 그런 작품을 구상한 적 없다고 할 수도 있지만, 알 게 뭔가. 오늘은 든든한 파트너를 옆에 둔 채이니 무서울 거 하나 없다.

나는 고운 속눈썹을 세 겹쯤 붙인 듯한 드랙퀸 주인장이 건넨 종이 위로 펜을 움직이는 손이 조금 떨리는 걸 보며 자꾸 히죽 올라가는 입꼬리를 겨우 잡아 눌렀다.

솔직히 저 주인장은 내 사인을 받고 싶어서 한 말은 아니었겠지만, 성인용품점 한편에 걸릴 저 잘난 남자의 사인을 생각하면…… 하하, 지금의 난 뭐든 할 수 있을 지경이라고.

션은 묘하게 얼굴을 붉힌 가게 주인이 사인을 들고 총총걸음으로 물러나기가 무섭게 작게 이를 갈듯 입을 열었다.

“잠깐 바람이나 쐬고 오자며!”

“그렇지. 이 날씨 좋은 날 하루 종을 집 안에만 있긴 아쉽잖냐.”

“여기가 대체……! 대체, 날씨랑 무슨 상관인데.”

욱해서 커지려던 션의 목소리가 가까스로 줄어들었다.

하지만 나는 지금 녀석이 화나서 저러는 게 아니라는 걸 잘 안다.

그 증거로, 벌겋게 변한 목에 손등을 가져다 대자마자 거의 튀어 오르지 않나. 나는 매섭게 노려보는 시선에 조금도 기죽지 않고 낄낄대며 대답했다.

“양팔에 쌍둥이 남매 끼고 호텔 들어간다는 소문에 충실하려면 이 정도는 알아 둬야 하지 않나 싶어서 친히 도와주려고 했지.”

“거참 고맙군그래!”

“하긴. 직접 콘돔 사 본 적도 없을 것 같은데, 이 형이 너무 단계를 건너뛰었냐?”

솔직히 이 가게에 들어와서 몇 초 동안은 곧바로 상황 파악을 하지 못하고 순진하게 눈을 깜박이던 션 스펜서였으니, 콘돔은커녕 그걸 직접 써 본 적이나 있을까 싶다.

대체 이런 숙맥인 애가 난잡한 생활을 흉내 낼 수 있도록 하는 못된 롤모델들은 대체 누구람! 하여튼 요새 영화들이 문제다.

나는 엄청난 크기의 가죽 속옷 세트 앞에서 눈 둘 곳을 몰라 하는 남자를 데리고 본격적인 성인용품점 탐방을 시작했다.

솔직히 나 역시 이런 곳을 직접 와 본 건 처음이라 제법 들뜬 상태였음을 기꺼이 인정한다.

가게에는 정말 별것이 다 있었다.

앞서 말했던 속옷과 가죽 패들부터 대체 이렇게 긴 걸 뭐에 쓰려는 건가 싶을 정도로 긴 구슬 체인, 왠지 용도를 상상하고 싶지 않은 양초….

하지만, 그중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건 따로 있다.

“오. 이건 나도 신기하네.”

“맙소사 대체 이게….”

“으하하, 야, 독일제래. 이거야말로 너네 학교에서 공부해야 할 첨단 과학 아냐?”

바로 바닥에 고정하고 전원을 켜면 혼자 앞뒤 좌우로 움직이는 엄청난 크기의 모조 성기다. 혼자서도 살벌하게 움직이는 그 가짜 살덩이는 힘줄이며 툭 튀어나와 걸리는 귀두까지 섬세하게 묘사된 것이 실로 흉악하기까지 했다.

이 지구촌의 기술력은 대체 어디까지 발전했단 말인가?

심지어, 고작 건전지로 움직일 게 분명한 이 친구는 힘마저 보통이 아니었다.

혼자 추삽질 하는 녀석을 손으로 잡고 흔들자 퍽퍽 부딪히는 소리까지 나지 뭔가!

부끄러움 많은 파트너가 이제 한 손으로 얼굴을 반쯤 가린 채 현실도피를 하든지 말든지, 나는 촉감마저 썩 훌륭하게 발전한 최신 문물의 발전에 연신 감탄을 이어 가다가 슬쩍 목소리를 낮춘 채 속삭였다.

“야, 이거 네 것만 한 것 같은데.”

나 나름대로 조심스레 건넨 찬사였건만, 당사자인 남자는 오늘 보였던 그 어떤 반응보다 격렬하게 반발했다.

“이선!”

“아니다, 미안. 사과하마. 내가 너 완전히 선 건 기억이 안 나네. 감히 실리콘에 가져다 대서 미안하다. 그 가지만 한……, 아니, 팔뚝만 한 것을.”

“…이선 박, 너-.”

“아차차. 죄송합니다아아.”

하여간 요 입이 문제다.

워낙에 놀리면 재미있게 반응하다 보니 정신 차려 보면 아슬아슬한 선까지 가게 된다고나 할까.

낮에는 엄숙한 기사처럼 빈틈없는 얼굴을 하지만, 밤에는 환락에 빠진 뭇 아둔한 인간들을 쥐락펴락할 것 같은 근사한 몸을 가진 녀석이 이런 쪽에서는 어찌할 바 몰라 하는 게 귀여운 게 내 탓인가.

하여튼 덩치만 커 가지고는….

그렇게 낮게 소곤대고 있노라니 “옆에 온도 스위치도 있어요.” 하고 저만치에서 민망함도 없이 외치는 주인장의 시선이 오묘했다.

확실히 지금 우리는 좀 이상한 모양새이긴 했을 것 같다.

우렁찬 소리를 내며 움직이는 모조 성기를 쥐고 있는 나와 그 옆에서 한참 동안 속삭이는 톱스타라.

나는 그제야 괜히 헛기침을 크게 하면서 눈이 마주친 주인장에게 샐쭉 웃어 보였다.

그건 누가 봐도 의심할 여지 없이 ‘우리 그런 거 아니에요.’ 아닌 해명의 뜻이었다.

“‘그때’.”

망할 션 스펜서가 그 또박또박한 발음을 자랑하며 입을 열기 전까지는 말이다.

“이렇게 하라고 했었던가?”

물 한 방울 안 묻히며 살아온 도련님, 혹은 배우의 손이라기보다는 럭비공을 들고 뛸 것같이 마디마디가 크고 단단한 손이 모조 성기를 쥐고 있는 내 손 위를 덮는다.

덕분에 지금 이 순간에는 누구에게도 흥분을 주지 못할 가짜 살덩이에 들어가는 힘이 더해지면서 퍽, 퍽 소리를 내며 부딪치는 소리 역시 더욱 요란해졌다.

“…앞을 긁어 주는 걸 좋아했었지. 그냥 쥐고 흔들기만 했는데도 줄줄 쌌었잖아.”

커다랗지만 둔하지는 않은 섬세한 손가락 끝이 툭 불거진 끝을 문지르는 모습은 처음 보는 게 아니었다. 심지어 저 손이 어떤 느낌이었는지도 잘 안다.

그건 시끄러운 모터 소리를 내며 사타구니를 흔드는 저 실리콘 덩어리는 모르는 열기다.

내 손을 함께 틀어쥔 션은 엄지손가락 끝으로 느긋하게 모조 성기의 끝을 가지고 놀다가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추잡질 중인 기둥을 함께 훑게 했다.

“같이 부딪힐 때마다 허벅지로 엄청나게 조였던 건 기억해?”

“……무, 물론. 키스할 때마다 좋아서 정신 못 차리던 너도 기억하지.”

평소에는 별로 발휘도 안 되는 이 하찮은 자존심이 왜 이 동정남 앞에서만 기어코 고개를 드는지 모르겠다. 괜히 뻣뻣하게 구는 게 아니었는데, 하는 후회가 말을 내뱉자마자 밀려온다.

대체 이 작달막한 가게의 주인이 지금의 광경과 대화를 뭐라고 해석하고 있을지 두려워서 고개를 돌아볼 엄두조차 나지 않는 건 덤이다.

하지만 그렇게 눈치 보며 조심조심 입을 열던 내가 기어코 목소리를 높이고 만 건, 이어진 션의 뻔뻔한 기억 왜곡 때문이었다.

“들어갈지 모르겠네. 그때는 손가락 하나도 제대로 못 물고 울었잖아.”

“안 울었거든, 씨발놈아!”

“그랬었나? 미안하군.”

정확히는 손가락조차 제대로 안 들어가서 내가 녀석의 중심에 머리를 묻고 펠라티오를 했었다. 하지만 차마 그것까지 말할 수 없는 나는 이만 바득바득 갈면서 녀석의 손을 쳐내곤 진심을 가득 담아 물었다.

“대체 널 누가 그렇게 만든 거냐, 어엉?”

“누구겠어.”

“…….”

입 맞추는 것만으로도 좋아서 얼떨떨하게 열 오른 눈으로 고개가 쫓아오던 녀석을 저렇게 만든 죄인은 할 말이 없었다.

나는 흐음, 하고 느긋하게 가게 더욱 안쪽으로 발을 옮기는 녀석을 보면서 망할 기계의 전원을 얼른 꺼 버렸다.

“뭐였지, 그때. 젤이 필요하다고 했던가? 사 가자고. 딸기가 좋아, 사과가 좋아? ……향은 없는 게 낫겠네.”

썅. 나는 딸기 살 거다!

쓸데없이 기억력이 좋은 남자는 이래서 문제다. 그 우아하기 짝이 없는 손짓으로 원통형의 젤을 사재기하면서 “아!” 하는데 심장이 철렁 내려앉게 생겼다.

“그래. 생각해 보니 저번엔 콘돔도 없었군.”

“…야, 내가 정말 미안하게 됐….”

“고맙게 됐어. 이선. 네 말대로 처음 사 보는 게 맞아. 덕분에 골라 보네.”

형형색색을 한 모조 성기 위로 온갖 모양새의 콘돔들이 씌워져 있는 가판대에 진지하게 서 있는 장신의 미남은 정말 내가 상상했던 그림이 아니다.

적당히 얼굴을 붉히고 허둥지둥 실수하는 녀석을 조금 놀려 먹다가 데리고 나가려고 했는데.

아, 저렇게 믿을 수 없다는 듯한 얼굴로 나와 션을 번갈아 보는 얼빠진 시선 같은 건, 정말로…….

슬쩍 눈이 마주친 가게 주인장의 표정이 실로 처참하다.

나는 “야, 네가? 정말? 진짜? 션 스펜서랑?”이라고 묻는 것 같은 표정에, 고개를 푹 숙여 버리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내가 처음으로 콘돔을 샀던 게 언제였더라?

아마도 고등학교 졸업 여행 가기 전이었던 것 같은데, 그때 나는 정말 모자를 눌러쓰고 한참을 망설이다가 눈에 보이는 아무거나 집어서 계산한 다음 뛰어나왔었다.

부끄러운 게 아니라는 걸 알지만 보통 뭐든 처음은 그런 게 아닌가.

여튼, 그런 소시민인 나는, 키스는 쩔쩔매면서 콘돔은 눈 하나 깜짝 않고 사이즈까지 비교하면서 고르는 동정남의 패기 따위 이해할 길이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12월인데 조만간 하다 만 것 마저 하자고, 자기.”

정말 좆 됐다.

나는 뺨에 부드러운 입술이 와 닿는 것을 느끼며 생각했다.

* * *

#31. 서재 (밤)

커다란 창문 밖에서 새어 들어오는 달빛을 따라 들어가면 그 끝에 ???와 어린 S가 있다. 밤중인데도 흐트러짐 하나 없는 양복 차림인 ???. 그에 비해 어린 S는 신발조차 제대로 신지 못하고 흙 묻은 발을 꼼지락대고 있다. 구겨지고 얼룩진 옷차림.

???

숲을 다녀왔다고 들었는데.

어린 S

오늘 해야 할 일은 다 하고…. 그런 다음에야 다녀왔어요.

???

해야 할 일을 다 했다고? 네가?

그래, 궁금하기는 하구나. 대체 뭘 하고 나서 그 꼴이 됐는지 말이야.

어린 S

어. 그러니까, 오전에 마이클과 공부도 했고요.

친구들이랑 다음 주에 있을 경시대회 준비를 하다가,

애들이 이 옆의 숲에 가면 정말 괜찮은 호수가 있다고 해서…….

어둠 속에서 가려져 있던 ???의 얼굴에 달빛이 드리우면서 처음으로 그 눈이 보인다. 마치 벌레를 보는 것 같은 눈. 시선이 마주친 순간 S가 어깨에 닿은 손에 정신을 차린다.

E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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