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 What fools these mortals be!(3) (8/21)

* * *

이렇게 울어 본 게 얼마 만인지 모를 정도로 속 시원하게 쏟아 내고 난 밤은 영 싱숭생숭하다.

아니, 빈말이 아니라, 진짜 울어 본 게 언제가 마지막인지 기억나지 않아 심란하다.

심지어 연기로도 울 일이 별로 없었는데 매일같이 얼굴을 보다 못해 심지어는-엄청나게 넓은 저택이기는 하지만-집주인 앞에서 세상 떠나가라 울다니.

당장 내일 아침에 민망해서 어떻게 얼굴 보려고 그런 거냐, 진짜. 어?

나는 길게 한숨을 내쉬면서 침대 위로 툭 쓰러지듯 고개를 박았다.

아직 덜 마른 머리카락이 시트를 적시는 게 신경 쓰이기는 했지만, 지금 같은 심정이라면 영영 내일이 오지 않았으면 싶을 정도인데 침대가 대수일까.

죽겠다. 정말 죽겠다 싶다.

이렇게 딱 차라리 코 박고 죽고 싶은 심정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어떻게든 사람같이 살아 보려 시작한 첫 번째 시도는, 우선 휴대폰이었다.

정확히는 휴대폰 속 가벼운 영상들을 돌려 보는 거다.

하지만 평소엔 낄낄대고 웃으면서 봤던 스탠드업 코미디 영상들도, 보기만 해도 침이 고이던 소고기 통구이 영상들도 오늘만큼은 하나도 즐겁지 않다. 심지어는 최후의 보루처럼 아껴 두었던 아기수달 형제의 영상을 봐도 별 감흥이 없다.

이건 진짜 상태가 심각하다는 징조다.

결국, 나는 두 번째 방법을 강구했다.

-아니…… 이 미친놈이…. 이 시간에 뭐냐고.

바로 내 사정을 다 아는 친구와의 수다다.

하지만 한참 동안 신호가 간 끝에 받은 브랜든 녀석의 목소리는 반쯤 맛이 가 있었다.

나는 벽에 걸린 고풍스러운 시계를 흘끗 눈으로 훑으며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벌써 자? 이제 11시인데.”

-피곤해서. 왜, 뭐어. 또 뭐 사고라도 쳤냐아.

“아니이! 사고는 무슨….”

-그럼 끊어, 인마!

이런 놈을 붙잡고 무슨 넋두리를 하겠나.

다음에 통화하자는 말 외에는 꺼낼 만한 이야기가 없다. 애꿎은 휴대폰 속 전화번호부만 몇 번 스크롤 하다가 그마저도 지긋지긋해진 건 당연한 순서였을지도 모른다.

“…끔찍하네, 진짜….”

이제야 좀 잘 풀리나 싶었더니, 역시 세상은 호락호락하지 않다.

좀 잘 풀리나 싶으면 어딜 감히 쉽게 갈 생각을 했냐며 발목을 틀어쥔다. 당장 앞으로 몇 달. 나는 나를 보며 속으로 낄낄대는 사람과 몇 달을 함께 지내야 한다. 방금 보지 않았나. 월링턴만 그런다는 보장도 없다.

……언젠가 션이 말했던 것처럼, 촬영만 하면 다인가?

끝나고 나서도 또 홍보니 뭐니 하는 거로 몇 번이나 엮일 거고, 또 얼마나 서로 친한 척을 해야 할지…. 아. 정말 빌어먹을 정도로 우울한 밤이다.

내일 촬영도 마음 같아서는 딱 하루만이라도 미루고 싶다.

제아무리 주연이라고 해도 그럴 만한 위치가 아니라는 건 이번 기회에 철저하게 배웠지만 말이다. 나는 오늘 밤에만 벌써 몇 번을 내쉰 것인지 모를 한숨을 다시 한번 토해 내면서 넓은 킹사이즈의 침대 위를 좌우로 굴렀다.

“…….”

문득 침실 저쪽의 찬장에 시선이 닿은 건 그때였다.

‘기분 전환’.

한없이 가볍게 들리지만, 스트레스 충만한 현실을 살아가는 인류에게는 반드시 필요한 어떤 것.

이 기분 전환의 방법에는 아주 오래전부터 어느 무엇의 도움도 빌리지 않아도 되는 방법이 있었다. 요새 한창 세상의 풍파에 치이느라 까맣게 잊고 있었지만 말이다.

나는 마지막 세 번째 시도로 떠오른 그 방법- 혹은 행위를 두고 잠시 망설이며 눈만 깜박깜박했다.

다행스럽게도 답은 머지않아 나왔다.

이 방법의 첫 단계는 문을 착실하게 잠그는 거다.

여기까지 오면 대충 감이 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오늘은 여느 때와는 조금 다르다. 고용인들이 내 개인 물건을 두는 곳이라며 따로 손대지 않는 이 침대 찬장 속에 ‘있는 것’들 때문이다.

자. 인정해야 할 걸 먼저 인정하고 지나가겠다.

나는 정말 구제 불능의 쓰레기다. 삼창도 가능하다.

괜히 창문 커튼까지 치고 나서야 조심스럽게 꺼낸 작은 종이백을 보자마자 언제 우울했냐는 듯 입꼬리 끝이 애매하게 올라가기 시작한다.

“으와…. 미쳤다, 미쳤어.”

침대 위로 쏟아 낸 종이백 안의 친구들은 여전히 그 형형색색의 위용을 자랑했다.

그래, 맞다. 이건 저번에 션 녀석과 함께 성인용품점에 가서 사 온……, 굳이 말하자면 내 몫의 물건들이었다. 심지어 션이 계산한다길래 뭔지도 모르고 괜히 집어 온 것도 있다.

처음으로 포르노를 보는 어린애도 이렇게 들떠 하지는 않을 거라고 비웃지는 않았으면 한다.

나이가 몇이든 어른들의 장난감을 침실에서 은밀히 펼쳐 둔 채라면 실실 올라가는 입꼬리를 눌러야 할 거다. 적어도 난 그렇게 생각한다.

나는 작은 패들로 소심하게 내 손바닥을 툭툭 치면서-아픈지 안 아픈지 궁금했다-화려한 색감을 자랑하는 물건들을 훑다가, 가장 무난하고 안전해 보이는 쪽을 먼저 선택했다.

<스트로베리 핫 젤>

정말이지 다시 봐도 ‘세상에. 이게 뭐람’이다.

젤이면 젤이지, 스트로베리는 왜 붙고 핫은 또 왜 들어가는 걸까.

끽해야 젤이 있는 콘돔 정도를 써 본 게 다인 평범하디 평범한 남성인 나는 소심하게 젤의 뚜껑을 열어서 손바닥에 아주 조금만 짜냈다.

……음. 확실히 딸기다. 나도 션처럼 향 없는 걸 살 걸 그랬다.

훅 풍기는 달짝지근한 향은 입맛을 돌게 하는 쪽보단 어렸을 때 부모님이 사다 주던 립밤과 비슷하다.

물론 그 용도는 하늘과 땅 차이지만 말이다.

“오. 끈적해.”

손가락에 얽히는 점성은 또 어떤가?

나는 손가락 위에서 늘어지는 투명한 점액을 보면서 왠지 낯이 뜨거워졌다. 핫 젤이라고 그러기에 손에 닿으면 뭔가 뜨끈하게 변하는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닌 모양이다. 간지럽게 달라붙는 젤의 촉감에 무던하려고 애쓰는 다음은, 그날 가게에서 봤던 우람한 녀석보다야 훨씬 작고 귀여운 친구였다.

이런 걸 뭐라고 부르더라.

바이브레이터는 아닌데, 제품설명이 영어도, 한국어도 아니라 읽을 수가 없다.

……아니, 사실 이 손가락 두 마디 정도 하는 작은 장난감의 소개에서 영어가 딱 하나 있기는 하다.

“…12가지 패턴이라….”

선명하게 적힌 알파벳의 나열이 알려 주는 정보는 하나다.

패턴이 10개도 아니고 12개란다.

진짜 한다고 해도 12번을 다르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감이 오지 않는데, 대체 어떻게 움직이시길래 이렇게나 엄청난 다채로움을 자랑하는 걸까?

인류를 위협하는 인공지능은 다른 데 있는 게 아니다.

이 손가락 몇 마디만 한 형광 보라색 친구에게 있다.

나는 기대 반, 왠지 모를 부끄러움 반, 헛웃음 반으로 동봉된 건전지를 끼워 넣었다. 대체 이 작은 장난감의 무려 12가지 패턴은 어떤 모양새일지 궁금하기도 했다.

하지만.

“……애걔?

드디어 내 손바닥 위에서 작동하기 시작한 이 작은 보라 친구의 움직임은 기대보다는…, 솔직히 좀 실망스러웠다.

가게에서 봤던 무시무시한 장난감-혹은 흉기-이 보여 준 엄청난 위용을 이 작은 기계에게 바란 건 아니었지만, 이 앙증맞은 진동은 좀 뭐랄까.

-진짜 이게 좋나, 싶은 실존적인 의문이 먼저 들었다고나 할까.

사실 포장지에 그렇게나 자랑스럽게 새겨 둔 12가지 패턴도 손바닥 위에선 모스부호가 바뀌듯 그게 그거였다.

나는 손바닥 위에서 간질간질하게 진동하는 작은 조약돌 같은 녀석을 물끄러미 구경하다가, 저도 모르게 슬쩍 아래를 흘겨보고 말았다.

……궁금하지 않나?

왜애.

조금은… 궁금하잖아! 나만 그렇다고 해도 어쩔 수 없다.

오늘의 난 너무 우울하니까 작고 귀여운 도전으로 사라진 자존감을 좀 채울 필요가 있다. 당연히, 그 전에 이미 단단히 잠근 문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건 물론이다.

요 몇 년 동안 이렇게까지 열의에 찬 적이 없었던 것 같은데, 이런 의욕으로 뭔가를 했다면 내 인생은 일찍이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심지어 이런 불신 가득한 마음가짐으로 해 봤다가 기대 이상으로 진짜 괜찮으면 엉망진창이었던 오늘 만나는 첫 행운이 아니겠나.

자고로 좋은 건 모르고 살면 손해인데 말이다.

게다가 뭐든 첫인상이 중요한 법인데, 이 비슷한 것의 처음을 떠올려보면- 솔직히 꽤 나쁘지 않았다.

나는 왠지 바짝 마르는 입술을 혀로 한번 훔치고는 조심스럽게 허리를 틀었다.

그날 밤이 어땠는지, 기억 속에서 흐려진 부분도 물론 있지만….

“……으으-, 진짜!”

최소한 그 손이 어떻게 움직였는지만큼은 선명하게 떠올릴 수 있다.

혼자 하려니 또 시작은 영 별로라, 나는 젤을 충분히 덜어 낸 저 자신의 손이 닿는 것만으로도 왠지 소름이 돋아서 어깨를 작게 떨었다. 애초에 ‘이런 느낌’으로 젖어든 적 없던 부위가 찔꺽대는 소리를 내는 게 싫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보다도 먼저 나를 당혹시킨 건 따로 있었다.

“…망할 핫 젤….”

그랬다.

‘스트로베리 핫 젤’은 다른 건 몰라도 이름값 하나는 제대로 하는 녀석이었다.

딸기 향만 나는 줄 알았더니, 망할 녀석이 묘하게 뜨끈한 열을 품는 건 왜 그……, 피부가 서로 마찰하며 부딪힐 때의 일이었던 모양이다.

난 손가락으로 소심하게 건드린 부분에서 은근한 열감이 짚어지는 민망함에 왠지 혀끝까지 저릿저릿했다. 솔직히 이제껏 단 한 번도 스스로 해 볼 생각 없던 행위에 손댄 배덕감에 흥분도 조금 했다.

익숙하지 않은 자세로 쓴 적 없는 근육을 쓰고, 젖어든 적 없던 부분이 젖어들고, 이상한 소리가 나기 시작하고, 직접 저 손가락 두 마디만 한 장난감을 집어넣는 그 모든 과정 자체는, 낯설어서 더 좋은 면도 있었다.

확실히 이건 요즘의 나에게 가장 필요한 종류의 일탈이었을지도 모른다.

약도 끊었고, 그렇다고 술과 도박에 관심이 있는 것도 아닌데 혼자 소박하게 재미 보는 것쯤이야 괜찮지 않나.

나는 반쯤 선 내 성기에 초조하게 혀를 차면서 작은 보라색 장난감의 입구에도 충분하게 젤을 펴 발랐다. 습한 허벅지를 타고 뜨끈한 열을 품은 젤이 툭 떨어지는 감촉에 왠지 무릎에 힘이 풀릴 것 같았다.

“-아, 흐으……, 젠장.”

미쳤다. 미쳤어. 미쳤다고.

진짜 들어가고 있다.

솔직히 직접 꽉 맞물린 뒤를 적시고 소리를 내며 벌릴 때만 해도, 아무리 작다 해도 손에 쥐니 꽤 두둑한 저 작은 장난감이 들어가긴 할까 싶었다.

왜, 션이 그렇게……, 내 뒤를 벌리려고 했을 때도 제법 시간이 걸리지 않았었나.

하지만 직접 하는 쪽은 아무래도 긴장이 덜해서인지 체감상 그때보다 훨씬 수월하게 뒤가 열렸다. 허리를 반쯤 뒤튼 힘겨운 자세로도 작은 보라색 장난감이 천천히 밀려들어 가는 걸 볼 수 있다. 아니 사실 굳이 이렇게 눈으로 확인하지 않더라도-

“…흐….”

뜨끈한 열기를 품은 내 뒤가 벌어지면서 무언가가 내 몸 안으로 들어왔다는 게 선명하게 느껴진다.

나는 뒤로 작은 장난감을 다 삼킨 몇 초간은 차마 움직일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탁자를 짚은 채로 고개만 숙였다.

최첨단 성인용품의 소박한 전선을 달리는 기계답게 무선이기까지 한 이 작은 친구는 우선 들어갈…… 곳에는 다 들어갔다.

정말로 저지르고 말았다는 묘한 후련함과 앞으로 내가 할 것에 대한 조금의 기대, 긴장이 멋대로 섞여 모든 감각이 내 몸 안에 들어온 것에만 쏠린 것 같았다.

꽉 다물어진 곳이 이상할 정도로 습하고 뜨끈한 게 불쾌한 것 같기도 하고, 간지러운 것도 같은 게 내 몸이지만 날 잘 모르겠다.

기껏 여기까지 왔는데 포기할 순 없지.

그 대단한 12개의 패턴을 조금이라도 확인해 봐야 하지 않나.

나는 살짝 떨림을 담고 터져 나오는 한숨을 쭉 길게 내쉰 채 작은 리모컨을 붙잡았다.

고백하건대, 솔직히 그때까지는 난 이 작은 친구를 굉장히… 만만하게 봤다.

손바닥 위에 올려 뒀을 때 확인했던 그 별거 아닌 진동이 몸 안에서 울려 봤자 뭐 얼마나 대단할까 싶었다. 뭐랄까, 조금은 전동 칫솔 같은 느낌이지 않을까 싶었던 거다. 어차피 민감하고 부드러운 점막에 닿는다는 기본 전제는 같으니까 말이다.

……멍청한 놈.

조금이라도 경각심을 가졌다면 대번에 스위치를 몇 초간 꾹 누르지는 않았을 텐데.

“--히이익, 흑!”

너무 놀라 무릎을 크게 휘적이면서 테이블에 다리가 부딪치며 쿠당탕, 하고 요란한 소리가 났다. 그건, 조금 전까지만 해도 이 저택의 누군가가 이 소리를 듣고 올까 싶어 속을 졸였을지도 모를 정도로 요란한 충돌음이었다.

하지만 나는 기겁한 채 장난감의 전원을 끄느라 그런 것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미친, 미-, 친, 흐으, ……이게, 뭐야!”

진짜 돌았다.

말도 안 된다, 이건.

우선 곧바로 전원을 끄기는 했지만, 엉덩이며 허리가 반사적으로 움찔거리고 벌벌 떨린다.

대체 이 느낌을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좋았냐고?

아니, 하나도 안 좋았다! 그냥……. 그냥 너무, 좀…, 그랬다.

몸 안의 무언가에 대번에 찌르르한 전기가 통했다고! 확실히 건전지로 움직이는 것이긴 하니 아주 근본적으로는 전기가 통하긴 했겠지만, 이건 진짜……. 와, 진짜 F로 시작하는 모든 욕을 지금 다 댈 수 있을 거다.

놀라 곧바로 꺼 버린 전원을 켤 엄두가 안 난다.

고작 2, 3초 켜 뒀을 뿐인데도 이 모양인데, 대체 게이를 비롯한 뒤로 뭘 넣는 것에 취향을 둔 사람들은 어떻게 이걸 온전히 켜는지 존경스러울 지경이다.

그래 봤자 손가락 몇 마디 정도 몸 안에 들어온 게 전부인 작은 장난감이 사람에게 이런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게 말이나 되나?

분명 방금은 12단계 중 초보자, 아니, 입문 단계를 건너뛴 진동이었을 거다. 나는 정말 익숙하지 않은 부위가 자꾸 찌르르하니 떨리는 것이 민망해서 잠시 그렇게 벽에 머리를 기댄 채 심호흡만 몇 번 했다.

얼마나 그렇게 있었을까. 뒤의 떨림이 줄어들었을 때쯤, 나는 마른침을 크게 한 번 삼키고 감히 ‘꾸욱’ 누르는 게 아니라 아주 짧게 전원에 손을 댔다.

정말, 정말, 정말 짧게 말이다.

“아, 흐으으…, 와, ……진짜.”

이번에는 다행히도 1단계에 제대로 안착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한들 별 느낌이 없었다는 건 절대 아니었다.

분명 이 정도면 손바닥 위에 올려 뒀을 땐 간지럽지도 않을 정도였을 텐데, 고작 그 몇 마디가 내벽에 싸이니 밖에서와는 완전히 다르게 울렸다.

“…흐, 읏…!”

자꾸 허리가 옅게 튀고 저절로 움직인다.

뜨끈뜨끈하게 열이 오른 뒤도, 배에 손을 얹으면 옅은 진동이 느껴질 것 같은 자극도 발을 동동 구르게 한다.

이대로 서 있으면 왠지 더 추한 꼴을 보게 될 것 같아 간신히 침대로 걸어가 엎어지는 것까진 좋았다. 하지만, 아직도 오늘 하루 동안의 햇빛 냄새를 머금고 있는 것 같은 하얀 시트가 몸에 감기는 것 자체가 꼭…… 간지러운 전희 같아서 몸이 간질간질했다.

자꾸 허벅지 안쪽에 힘이 바짝 들어가고, 하반신에 모든 피가 다 몰린다.

나는 기묘한 이물감이 주는 자극에 넘실대고 있다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리모컨을 짧게 한 번 더 눌렀다.

이제껏 경험한 적 없는 종류의 자극이 뭔가를 자꾸 건드린다.

입에서는 자꾸 낯선 소리가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튀어나오지만, 관음하는 이 하나 없는 혼자라는 사실이 이 끔찍한 수치를 잊게 했을 거다.

나는 엎드린 채로 옅게 숨을 몰아쉬며 발가벗은 아래로 손을 내렸다.

반쯤 곤두선 성기가 부딪치는 게 왠지 생경했다. 아무리 별거 아닌 자극에도 멍청하게 단단해지는 아랫도리라지만 뒤로 뭔가를 넣고도 끝이 젖어들 줄은 몰랐다.

차마 장난감의 진동을 더 높일 용기 같은 건 없다.

눈앞까지 하얗게 변할 정도로 찌릿하게 울렸던 그 날것의 자극이 아직은 조금 두려웠던 탓이다. 하지만 몸 안에서 꿈틀대는 것이 주는 낯선 쾌감이 찾아갈 위치만큼은 거의 본능적으로 선택할 수 있었다.

뭐든 처음이 어렵다.

나는 미끌미끌하고 끈적거린 뒤로 손가락을 꾹 밀어 넣었다.

“--아, 흐으읏!”

낯설 정도로 꽉 입을 다무는 내벽이 장난감을 깊숙하게 집어삼킨다.

감히 진동을 더 높이지 않은 스스로에게 감사하다. 그저 위치가 달라졌을 뿐인데, 자극의 정도가 달라졌다. 다 큰 성인 남자가 침대 위에서 몸을 웅크렸다가, 폈다가, 이상하게 히끅거리는 소리를 내며 낯선 흥분에 헐떡이는 꼴은 분명히 꽤 끔찍했을 거다.

성기를 잡고 급하게 흔들기 시작하자 어떻게 제어할 수도 없는 앓는 신음이 터져 나왔다.

확실히 지금 이 순간 원래 목표였던 ‘기분 전환’ 자체는 대성공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다.

앞으로 이어 갈 촬영의 막막함도, 오늘 하루 속이 아릴 정도로 토해 냈던 감정소모가 주는 탈력감도 지금만큼은 머릿속에서 완전히 날아간 지 오래였으니까.

내가 간신히 혀까지 깨물며 소리를 낮춘 건 얼마 만인지 모를 허연 정액을 손안에 쏟아 내던 순간이었다.

“하아, 하, 읏……, 힉-.”

머리부터 발끝까지 쭉 모든 힘이 빠져나가는 사정감은 이제껏 겪었던 그 어떤 것보다 진득했다.

아마 사정하고 나서 곧바로 장난감의 전원을 끈다는 게 실수로 한 단계를 더 높여서 그랬을 수도 있다. 아직도 울컥울컥 남은 걸 토해 내는 중심이며, 허벅지가 옅게 꿈틀거렸다.

“…와….

……이렇게까지 자극 그 자체에만 충실한 행위를 해 본 게 언제가 마지막일지 모르겠다.

단언컨대 몇 년간 의도적으로 피해 왔던 모든 종류의 자극 중 지금이 가장 엉망진창이었을 거다.

난 거의 몇 분 동안 침대에 죽은 듯이 엎드린 채 달아오른 몸을 식히며 숨을 골랐다.

진짜 오래 살고 볼 일이다.

하기 전까지는 진짜 이 작은 게 뭐라고 싶었는데, 나는 아직 안쪽 깊숙이 들어와 있는 손가락 두 마디 정도의 녀석의 12단계는커녕 5단계도 못 가 본 것 같다. 이마저도 확실하지 않은 건, 처음 실수로 눌렀던 그때가 어느 단계였는지 몰라서다.

망할. 지금 생각해도 뒤가 얼얼하다.

그 정도면 아무리 못해도 9단계는 되지 않을까?

왠지 10부터는 다른 차원일 것 같아서 감히 상상도 안 간다. 나는 그런 실없는 생각을 하면서 살짝 힘이 들어가지 않는 팔을 더듬더듬 뒤로 뻗었다.

-사실, 난 그때까지만 해도 사정 후의 나른함에 반쯤 절어 있었더랬다.

“……허.”

이 한숨은 현실부정의 의미가 한 움큼 정도 담겨 있다. 아직 옅은 끈적임이 남아 있는 습한 부위를 더듬는 손등으로 조금쯤 소름이 돋았을지도 모르지.

나는 잔뜩 땅겨졌다가 원래대로 돌아온 고무줄처럼 말을 듣지 않는 허리를 간신히 틀었다.

아니지, 아니지, 아닐 거야.

나 자신에게 하는 혼잣말에는 믿기 힘든 웃음기마저 남아 있다. 하지만!

……빌어먹을.

“진짜 조졌다….”

그……, 두 마디밖에 안 되는 작은 녀석이 너무 깊게 들어갔다.

물론 그 작은 장난감 끝에는 잡아당길 수 있는 실리콘 끈이 달려 있기는 했다. 하지만, 대체 ‘스트로베리 핫 젤’이 얼마나 열심히 일을 했는지, 내 몸 안 깊은 곳까지 자리한 그 망할 뒤꽁무니에 손가락이 닿질 않는다.

정확히는 닿을 듯, 말 듯 한데- 이상한 각도로 억지로 잡아당겼다가 끊어지기라도 하면 어떻게 되는 걸까 하는 최악의 가정이 멋대로 손을 움직이지 못하게 한다.

끊어지면 어떻게 되냐고?

대체 어떻게 그런 끔찍한 가정을 할 수 있는지 모르겠지만, 굳이 궁금하면 대답해 드리겠다.

그냥 좆 되는 거다!

인생 접는 거지, 다른 답이 없다.

진짜 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수 말고 다른 게 없다. 차라리 딱 뒈지고 싶은 자괴감과 혀로 목구멍을 막고 싶은 수치심 사이에서 잠시 눈앞이 아득해졌다.

아니, 이미 좆 됐을지도 모른다는 확신에 가까운 절망이 머리를 가득 채운다.

안 되는 날은 뭘 해도 안 되는 거였는데! 조신하게 잠이나 처잘 걸 세상에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이 지랄을 했을까.

나는 정말 소리라도 지르고 싶어졌다.

진짜 세상에서 제일 끔찍한 상황 아닌가. 그렇지 않아도 저택을 나가면 익숙하지 않은 파파라치가 하나둘 붙기 시작했는데, 혼자 재미보다 장난감을 빼지 못해서….

그렇다고 뒤에 뭘 넣었다고 가까운 사람을 부르는 건…… 아무리 내 허물을 다 본 브랜든이라고 해도 이것만은 싫다.

……진짜, 진짜, 진짜 싫다.

대체 어떻게 녀석에게 장난감을 밀어 넣은 뒤를 내밀 수 있냔 말이다.

어차피 가족들은 와 줄 수도 없고, 부탁도 못 한다.

차라리 뒤에 뭘 넣고 죽은 채 발견되는 명예로운 최후를-과연 명예로운지에 대한 토론은 차치하고-택할 거다.

“…씨이발….”

결국 선택지는 급격하게 단 하나로 좁혀진다.

정말 나도 이러고 싶지 않았다. 정말 낸들 이럴 줄 알았겠나.

아무리 이미 별 흉한 꼴 다 보였다고 하더라도, 나도 자존심이라는 게 있다. 수치라는 것도 알고, 당장 오늘 낮에 무슨 꼴을 보였는지 생각하면 일전에 우연히 딱 한 번 왔었던 이 저택 ‘서관’으로는 절대 발 딛고 싶지 않았다고.

늦은 밤 이 뜬금없는 발걸음에 잠시 놀란 듯했다가 이내 흐뭇한 표정으로 “하핫, 이쪽입니다, 이쪽이요.” 하면서 길을 안내하던 고용인들의 얼굴을 봤을 땐 차라리 기절이라도 하고 싶었다.

물론, 기절은 못 했다.

오히려…….

“이선?”

막 잠자리에 들려고 하던 참이었는지 느슨한 머리와 옷차림을 한 이 저택의 주인의 앞까지 보기 좋게 배달됐을 뿐이다.

“그게-, 어, 자는데…… 깨웠냐?”

“아니. 아직 안 자고 있었어. 괜찮아.”

못해도 자고 일어나서 다시 볼 남자라고 생각했었는데!

망할, 아예 내일 봐도 어색했을 얼굴을 이 늦은 시간에 다시 보려니 시선을 마주치기조차 힘들었다.

……아니다,

사실 이렇게 지금 눈을 바라보기 힘든 건 애새끼처럼 펑펑 울어서가 아니지. 인정하겠다. 지금만큼은 자정도 넘은 지금 이 시간에 그의 침실 문 앞에 서 있기 때문이다.

“왜, 잠이 안 와?”

“……어. 좀.”

“드라이브라도… 갈까?”

망할, 썅, 젠장….

떠올릴 수 있는 짧고 굵은 욕이란 욕은 속에서 다 튀어나온다.

대체 션 스펜서, 이 새끼는 왜 이렇게 그답지 않게 내 눈치를 보면서 다정한 목소리를 낸단 말인가. 나는 금방이라도 내 어깨를 다독이며 걸어 나갈 듯한 남자의 팔을 붙잡고 도로 그의 침실로 밀어 넣었다.

그 새파란 눈을 조금 크게 뜬 채로 내 힘에 순순히 밀려나는 남자의 표정이 참 말갛다.

나는 주인의 허락도 없이 들어선 침실의 문을 제일 먼저 걸어 잠갔다. 다른 곳은 문 하나 없이 다 탁 트여 있었는데, 최소한 침실이라도 문이 있어서 다행이다.

없었으면 난…….

날 말리지도, 불쾌해하지도 않는 남자의 우아한 얼굴에는 여전히 옅은 의아함과 조심스러움만이 비친다. 나는 그를 보며 바짝 마른 입술을 혀로 한 번 적셨다.

“…션. 그……, 나 좀, 도와줄 수 있나 해서.”

“그래, 얼마든지.”

여전히 나에 대한 걱정이 떨어지는 진지한 목소리를 듣고 있자니 쓰레기통으로 직행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다.

정말 나란 새끼는 타지도 않을 쓰레기다.

하지만 아무리 쓰레기라고 한들 이… 문제는……, 해결해야 하지 않겠냐고….

* * *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있을 수 있는 가장 무서운 건 뭘까?

적어도 난 이 순간만큼은 그게 침묵이라는 생각이 든다.

“…….”

“…….”

특히 상대가 저렇게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이마 어딘가에 1등급 쓰레기 인증 마크를 달았을 나와 눈조차 마주치지 않으려고 든다면 더욱 그렇다.

얼마나 그렇게 있었을까.

왠지 다리에 힘이 안 들어가서 벽에 슬쩍 몸을 기댔을 때, 언제까지나 얼굴을 가리고 있을 것만 같던 할리우드의 떠오르는 첫사랑, 션 스펜서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난…….”

“…….”

“…난, 네가 정말 싫어….”

물론 그건 썩을 대로 썩은 나와는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로 풋풋한 내용이었다.

그리고 애초에 그 정도에 타격받을 거였으면 걸친 가운을 필사적으로 붙들고 허벅지를 벌벌 떨면서 녀석의 침실까지 오지도 않았을 거다.

나는 앉지도, 그렇다고 제대로 서지도 못한 멍청한 자세로도 꽤 차분하게 대답했다. 원래 쇼크가 너무 크면 금방 침착해지는 법이다.

“그렇지 않아도 지금 자기혐오가 엄청난데…… 굳이 그렇게 콕 집어서 말해야겠냐?”

“정말 이선 너란 인간은 대체 어떻게 단 한 번 자제력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고-.”

“알아, 알아.”

성의 없이 대답하자 여전히 그 커다란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던 불곰만 한 키의-이런 묘사를 붙이기에는 너무 완벽한 얼굴이긴 했지만- 남자가 살짝 신경질적으로 손을 내렸다.

물론 그 패기로움은 눈이 마주치자마자 몇 초 가지 않아 실시간으로 벌겋게 익으며 바스러지기는 했다.

“대체 어떻게 그걸…… 넣…, 은 채로….”

“기어오지 않은 걸 신께 감사하는 중이야.”

진심을 담아 대답하자, 션은 이제 “맙소사.”하고 테이블에 머리를 숙인다. 이제 그는 거의 신을 찾을 기세다.

나는 다리를 오른쪽으로 꼬아 기대섰다가 괜히 뒤로 힘이 들어가는 것 같아 자세를 고치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네가 좀 도와주라는 거지.”

“-내가 왜!”

“다른 사람한테 부탁할까, 그럼.”

쿡 찌르면 붉은 물이 묻어 나올 것처럼 벌겋게 변한 얼굴과 귀를 보며 말을 잇는 건 생각보다 쉽지 않다. 하지만 여기서 민망해하면 정말 분위기가 이상해진다는 걸 모를 정도로 바보는 아니다.

심지어 먼저 찾아온 건 내 쪽이니 더욱 그렇다.

“브랜든한테 연락하는 건 너무 쪽팔리고, 병원에 가자니 파파라치나 사람이 붙어서 캐물을 것 같고, 그렇다고 다른 적당히 아는 사람한테 연락하느니 차라리 죽자 싶던데.”

“……나한테 오는 건 아무렇지도 않아? 나야말로 부탁이니 어디…, 제발 다른 사람한테 가서-”

“그래도 넌.”

최대한 별 내색을 안 하려고 발버둥 쳤더니 정말 괜찮은 줄 안 모양일까.

나는 슬슬 이 상황에서 발을 빼려고 드는 녀석의 말을 얼른 힘주어 끊었다.

“그래도 넌, 한 번은 나한테 거의 박을 뻔하기도 했고….”

“…….”

“…그, 왜. 손가락도 해 봤으니까….”

키는 물론이고 체격도 나보다 훨씬 큰 남자한테 붙이기는 뭐한 말이지만, 술기운 없이 보는 션 녀석의 상기된 얼굴은 기억에서보다 훨씬 더… 뭐랄까.

“안 될까?”

그래 솔직히 인정하겠다.

붉게 익은 그의 얼굴은, 이래서 톱급 배우로 꼽히는구나 싶을 정도로 달짝지근하면서 야살스럽다.

평소에는 욕정 따위 모를 것처럼 서늘한 인상이 당혹으로 찌푸려지자 긴 속눈썹이 드리우면서 완전히 다른 색을 띠는데 괜히 저 사람을 스크린에 못 담아 안달이 아니구나, 코앞에서 체감하게 된다.

“지금…… 나도 여기까지 겨우 온 건데.”

덕분에, 나는 영 기세가 꺾인 목소리로 웅얼거리듯 덧붙이며 덩달아 시선을 피해 버렸다.

정말 머리가 어떻게 된 걸까?

여기서 내가 민망해지면 안 된다고. 누구보다 뻔뻔해져도 모자랄 판인데!

하지만 머리로 아는 걸 몸이 잘 실천할 수 있었으면 이제껏 이리 살아오지는 않았을 거다.

나는 다시 한번 시작된 낯부끄러운 침묵 앞에서, 전원이 꺼진 몸 안의 작은 장난감이 여전히 작게 움직이는 것 같은 느낌에 괜히 허벅지 사이에 힘을 주고 버텼다.

얼마나 그렇게 말없이 있었을까.

먼저 대답 대신 한숨으로 적막을 깬 건 션이었다.

흑갈색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는 그의 얼굴은 여전히 붉은 기운이 가득했지만, 적어도 답지 않게 말문이 막히던 충격은 대충 정리한 것 같았다.

“……좋아.”

나는 그 조금 얇은 듯 도톰한 입술이 열리는 걸 초조하게 지켜보며 저도 모르게 주먹까지 꽉 쥐었다.

“내가… 어떻게 하면 된다는 건데.”

성공했다!

저 세상 까다로운 결벽증 도련님을 술기운도 없이 꾀어내다니.

덕분에 눈치 없이 터져 나온 안도감에 입가가 헤실댄 모양인지, 그는 미간을 확 찌푸리며 “웃음이 나와, 넌?” 하고 조금 짜증을 냈다.

하지만 내뱉은 말은 무르지 않을 녀석의 성격을 잘 아는 나는, 변명 대신 넉넉한 가운 주머니에 숨겨 온 젤과 리모컨을 자랑스럽게 꺼냈다.

“이 젤을 잘 바른 다음에 빼내 주면 돼!”

“어디에 발라?”

“어, 우선 네 손이랑…….”

어떤 표현을 써야 저 우아한 남자가 질색하지 않을까. 나는 몇 초 동안 말을 고르다가 개중 가장 정중한 것 같은 단어를 입에 담았다.

“내- 구멍?”

……앗차차.

다시 한 손으로 이마를 짚은 모습을 보아하니 이것도 그리 좋은 선택지는 아니었나 보다.

그냥 무난하게 엉덩이나 뒤 정도로 말할 걸 그랬다 싶은 후회가 조금 들지만 이미 내뱉은 걸 어쩌겠나.

“이 리모컨은 혹시 위치를 못 찾을까 싶어 가지고 왔는데, 절대 꾸우욱 누르면 안 돼. 알겠지.”

“…알았다고….”

제대로 말을 잇지도 못하는 남자의 손에 ‘스트로베리 핫 젤’과 지옥문 컨트롤러를 쥐여 준 나는 녀석의 어깨를 퍽 다정하게 두드리며 격려했다. 아직 이건 별것도 아니다. 나와 그에게는 본격적인 난관이 남아 있다.

“션?”

그건 이곳에 오는 내내 고민했지만, 답을 찾지 못한 어려운 문제이기도 했다.

나는 ‘또 뭐.’ 하는 물음을 역력히 담은 예쁜 파란 눈을 보면서 최대한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엎드리는 게 낫겠냐, 아니면 바로 누워서 벌리는 게 낫겠냐?”

나는 아예 돌아서서 벽에 머리를 기댄 채 숨소리도 제대로 못 내는 남자의 달아오른 목덜미를 보면서 턱을 긁적였다.

이미 전의를 상실한 사람에게 가혹해져서는 안 되니 말이다.

* * *

계획은 꽤 그럴듯했다.

게다가 꽤 잘 풀릴 거라는 근거 없는 믿음도 있었다.

꽤 깊게 들어가기는 했지만 내가 직접 빼려고 했을 때도 손이 닿을 듯 말 듯 했던 게 전부니, ‘도와줄 사람’만 있으면 그까짓 거 쭉 미끄러져 들어갔던 것처럼 어렵잖게 처리할 수 있으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그건 얼마나 오만한 자신이었나.

“힘을 좀… 빼야 할 것 같은데.”

“어, 어어. 알았어.”

장고 끝에 우리가 선택한 건 엎드리는 거였다.

정확히는, 내가 주름 하나 없이 말끔한 녀석의 침대 위에서 엉덩이를 쳐드는 쪽이었다.

그건 머릿속으로 상상했던 것보다 정말 훨씬, 훨씬, 훠얼씬, 아니 상상과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부끄러운 자세였다는 건 설명하고 싶지도 않다.

“……후우.”

멍청하게 웅얼대며 대답한 나는, 자꾸 힘이 바짝 들어가는 뒤에서 긴장을 풀어 보려 노력했다.

빌어먹을, 소리는 또 어떤지!

처음에는 기세 좋게 두 팔로 짚고 섰던 나는, 이제 허리만 든 채로 입을 눌러 막는 걸 택했다. 술기운조차 없이 훤히 드러낸 민망한 부위에 젤과 마디마디가 딱딱한 손가락이 조심스럽게 부딪힐 때마다 요란하게 찔걱대는 소리가 났다.

이 와중에 내 입에서 한숨 소리라도 나오는 순간엔 정말 부끄러움에 가루가 될지도 모른다.

망할 핫 젤이 션의 손을 만나 혼자 할 때보다 더욱 뜨끈하게 변한 것도 거슬렸다.

긴장으로 움찔대는 내 뒤에 남자의 시선이, 조심스러운 손길이 닿는 감촉은 더 말할 것도 없다. 벌름거리는 뒤와 성기까지 훤히 내보인 꼴이면서 자꾸 어깨로 흘러내리는 가운을 고쳐 잡는 꼴도 적잖게 웃기겠지.

“이선.”

“……미안.”

진짜 미치겠네!

지금 나는 이 몰골로 거의 십 분도 더 넘게 몸을 굳힌 채다.

먼저 빼 달라고 찾아온 건 내 쪽이면서, 속전속결로 끝내도 모자랄 와중에 녀석의 손가락 하나도 들어갈 수 없도록 얼어 있는 셈이다.

“아니, 사과받자는 게 아니라….”

낮은 목소리에 조금 한숨이 섞여 있다.

하지만 나보고 어떡하라고!

이미 한껏 젖어든 지 오래인 꽉 다물어진 좁은 곳의 입구를 간지럽히듯 원을 그리는 손가락이 닿을 때마다 자꾸 엉덩이로, 허벅지로, 발가락 끝으로 힘이 들어가는걸. 안 그러려고 길게 심호흡 해 봐도 뜨끈한 체온이 닿을 때마다 자꾸 반사적으로 오므려지기만 한다.

“-흐으읏!”

그때였다.

모든 신경을 뒤의 은밀한 부분에 집중하고 있던 탓일까. 나는 갑자기 엎드린 내 몸을 쑥 들어 올린 힘에 놀라 기어이 이상한 괴성을 터트리고 말았다.

“너무… 놀라지 말고.”

“……어, 으응.”

우아하게 돌려 말하는 건 이렇게 하는 거구나.

이 와중에도 6피트나 되는 나를 꼭 베개를 들 듯 한 번에 잡아 일으킨 힘에 놀라는 것보다 이런 시답잖은 생각이 먼저 든 건, 션이 조금은 찡그리듯 웃고 있어서일 거다.

누가 봐도 예민해진 몸에 손이 닿아 놀라 낸 소리인데도 나를 일으켜 품에 안은 남자는 그 책임을 교묘하게 저 자신에게로 돌렸다.

나는 이전에 한 번 이 무릎 위에 앉은 적이 있었다.

그리고 이 무릎에 안긴 채 뭘 했었는지도 잘 기억한다. 그래서 찾아왔던 것이니까 변명조차 할 수 없다.

젤로 푹 젖은 사타구니와 뒤가 션의 허벅지에 닿으면서 녀석의 짙은 남색 실크 가운을 더럽히는 게 신경 쓰였다. 젖은 부분이 닿아서 진해지는 것도 싫었다.

하지만 션은 그런 건 전혀 신경 쓰이지 않는다는 듯 어느새 옅게 땀이 어린 등을 간지러울 만큼 조심스럽게 쓸어 주기만 했다.

물론, 나를 다독이지 않는 다른 한 손으로 미끌미끌한 내 엉덩이의 틈새를 벌리는 중이다.

맞닿은 피부에서 옅은 바디워시 향이 났다. 그건, 잔뜩 달기만 할 뿐 탁하기만 한 젤의 인공적인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청량해서 왠지 더 낯부끄러워졌다.

“기대도 돼.”

어색하게 웅크린 채로 있던 건 또 어떻게 알았나.

왠지 눈가가 화끈했다. 나는 제발 내 얼굴이 붉게 물든 녀석의 뺨처럼 덩달아 익지 않았기를 바라며 작게 사과했다.

“…진짜… 으, 망할. 미안.”

“사과도 그만했으면 하는데.”

내 상냥한 파트너의 목소리에는 처음으로 희미한 웃음기가 짚어졌다.

허락을 구하는 것처럼 고개가 천천히 기울여졌다. 얼굴이 가까워지는 만큼 어깨가 위로 올라가며 긴장하기는 했지만, 나는 점차 가늘어지는 파란 눈동자를 끝까지 지켜보는 것 대신 단단한 어깨에 팔을 두르고 질끈 눈을 감는 쪽을 택했다.

이걸 첫 번째라고 해야 할까, 두 번째라고 해야 할까.

술기운 없이 하는 첫 입맞춤이니 처음으로 쳐 주는 게 맞을까. 하지만 그렇다고 내 입술이 떨어질 때마다 저도 모르게 고개가 따라오던 그 귀엽던 순간을 완전히 제하기에는 좀 아깝다. 살짝 부딪혔던 입술이 떨어지자 귓가에서 괜찮아? 하고 묻는 나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눈을 뜨지 않은 채로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후우…, 읏.”

자꾸 어깨에 힘이 들어가고 허리가 쭈뼛 서면서 떨리는 건 이렇게 정중한 행위의 대상이 되어 본 적 없던 탓인지도 모른다.

게다가 머리를 처박고 무조건 입을 틀어막으면 됐던 자세보다 꽉 눌린 숨소리를 숨기기도 어렵다.

션 스펜서의 키스는 여전히 서툴기 짝이 없었다.

아직도 입술이 닿을 때면 숨 쉬는 걸 잊기도 했고, 그 오뚝한 코가 몇 번이나 부딪히기도 했다.

하지만 다행이라면 다행인 점은 그가 학습력이 퍽 뛰어난 남자라는 거였다.

아랫입술을 살짝 빨기도 하고, 자연스럽게 벌어진 입술로 물기 가득한 따뜻한 살덩이를 밀어 넣어 부드럽게 얽는 것 정도는 금방 비슷하게 따라 했다.

“…하아….”

꽉 닫힌 내 뒤를 부드럽게 원을 그리듯 굴리기도 하고 그 틈을 찾으려는 듯 살살 찌르기도 하던 남자의 커다란 손이 방향을 바꿔 내 중심을 쥔 건 그때였다.

“-그, 것까진…, 안 해도 될 것 같아.”

“하나도 안 들어가는걸.”

젠장.

나도 이제 모르겠다. 모두 다 이 욕망에 눈먼 아둔한 인간의 잘못이다.

나는 녀석의 목덜미에 머리를 기대 숙이며 한숨과 함께 항복했다. 그러자 션은 작게 웃었던 것도 같다.

줄곧 벗겨지는 게 신경 쓰였던 가운이 슬슬 어깨를 타고 내려간다.

이제 이 정도면 가운을 걸치고 있다고 하기도 어렵다. 애초에 이제는 그런 걸 붙잡을 기운조차 없긴 하다. 앞뒤로 벌려지고 또 부딪히는 소리가, 그 뜨끈한 마찰열이 주는 감각만이 머릿속을 흐물흐물하게 만들 뿐이다.

션은 내가 그의 어깨에 머리를 비비면서 어쩔 줄 몰라 할 때마다 고개를 기울여 내 눈가며, 콧잔등이며 때로는 입술에 키스했다.

확실히 섹스에서 전희는 중요하다.

나라고 그걸 몸소 깨닫고 싶지는 않았지만-

“……흐으, 앗!”

나도 모르게 서서히 힘이 풀리던 내 뒤로 긴 손가락 한 개가 기다렸다는 듯 들어와 한껏 민감해진 내벽을 긁는 것만 봐도 뭐라 반박할 여지가 없다.

갑작스러운 침입에 놀라 나도 모르게 무릎까지 세워 떨자 낮은 목소리가 쉬이, 하고 나를 달랬다. 나보다 몇 살인가 더 어린 남자에게 들을 만한 건 아니었지만 그런 걸 따지기엔 이미 그의 무릎 위에서 다리를 벌리고 목에 매달린 채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자세다. 애초에 결단코 전혀 아담하지 않은 체격의 성인 남성을 이렇게 품에 둘 수 있는 것부터가 상상 밖의 일이다.

하나가 들어가자 그다음은 쉬웠다.

“살짝 잡히기는 하는데….”

“-읏, 야, 그, 긁지 말라고!”

망할. 얘는 이제 이런 말엔 대답도 안 하고 그저 나를 달래듯 등을 쓸어 줄 뿐이다. 한동안 손가락 두어 개로 내 뒤를 민망하게 벌리던 션이 작게 혀를 찼다. 그 소리가 왠지 불길하게 들린 건 거의 본능에 가까운 것이었으리라.

“잠깐만 켤게. 그래야 쉽게 나올 것 같아.”

한 번쯤은 예상을 빗나가면 좋으련만.

덕분에 녀석의 손가락 끄트머리에 걸린 작은 장난감의 진동이 어떤 느낌을 주는지 아직도 잘 기억하는 뒤가 나도 모르게 션의 손가락을 꽉 조였던 것 같다. 그걸 끔찍할 정도로 잘 깨달을 수밖에 없는 지금이 싫다.

“…그렇다고 너무 세게 물지는 말고.”

“시끄러워!”

장난치듯 말하지만 그건 어느새 힘이 바짝 들어간 날 달래기 위함이라는 걸 잘 안다. 애초에 늘 누군가에게 우아하게, 때로는 거만하게 지시만 내렸을 말끔한 손이 묘하게 끈적이는 젤에 번들거린 채로 곤두선 내 성기를 쥐어흔들고 은밀한 뒤를 벌리게 된 것도 다 내 탓이다.

난 짧게 심호흡한 다음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나름대로 마음의 준비가 되었다는 신호였다. 아, 하지만 그 작은 결심은 이날 밤에 한 가장 큰 실수 중 하나가 됐다.

…씨발. 못해도 스위치는 내가 눌렀어야 했다고!

“-히이익!”

션 스펜서는 갑자기 펄쩍 튀어 오른 나를 보며 조금 놀란 듯한 눈을 했던 것도 같다.

분명 이 침실에 처음 발을 디뎠을 때만 해도 갓 말린 듯 보송했던 션의 머리카락이 어느새 살짝 헝클어진 채로 젖어 있다는 걸 알게 된 것도 그때였다. 발갛게 상기된 뺨은 또 얼마나 고운 빛이었는지 모른다.

“아, 흐응, 흐, 아, 앞- 만지지 마아!”

하지만 난 그런 보기 좋은 광경에 감탄할 여유 따위 없었다.

“시, 싫어어, 아, 아, 션, 흐윽-! 힉, 히이익, 그만, 아.”

“이선. 움직이지 마.”

“하지 마아, 응? 하지- 흐으앙, 힉…!”

제아무리 근사한 모습이 눈앞에 있다고 한들 보이는 게 없는 상황에서 무슨 찬사를 할 수 있겠나. 나는 거의 발작하듯 녀석의 품 안에서 몸을 뒤틀고, 다리를 펄떡이면서 녀석을 밀지 못해 발버둥 쳤다.

하지만 그 몸부림은 남자의 품에서 펑펑 울 때부터 쭉 나를 단단하게 받쳐 주기만 했던 넓은 어깨와 팔이 순식간에 꼼짝도 할 수 없는 올가미로 변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되는 계기에 불과했다.

평범하게 살면서 완벽하게 힘으로 제압당하는 기분을 살면서 몇 번이나 느껴 볼 것 같은가?

격투기를 배운다고 해도 이런 손쓸 수조차 없는 무력감은 경험하기 힘들다. 어떻게 힘을 써 밀어 보려고 해도 가장 수치스럽고 또 민감한 부위가 열린 채 그 깊숙이부터 징-징-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꿈틀대는 게 있다면 무릎부터 힘이 쭉 풀려 버리고 만다.

션 스펜서는 그를 밀어내려는 나를 고작 한 팔로 허리를 단단히 휘어잡아 붙잡고는 벌어진 구멍을 멋대로 휘저었다.

눈앞이 몇 번이나 하얗게, 또 까맣게, 다시 하얗게 변했을까.

손가락 두 마디 정도밖에 안 되는 그게 내벽을 기어코 모조리 문지르고 빠져나오는 순간 내 앞에서도 울컥울컥 참아 왔던 것이 터져 나왔다.

……다른 표현을 찾을 것도 없다.

정말 씨발, 또 씨발이다!

“흐으, 하, ……흑, 그만, 하랬잖아!”

내 몸 안 깊숙이에서 한참 동안 있었던 작은 장난감이 침대 위에서 혼자 진동하며 꿈틀대는 게 짜증 나서, 나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기어코 리모컨을 찾아 껐다. 아직도 뒤가 벌어지고 그 안에 뭔가 들어가 있는 것만 같았다.

“미안해. 몸은… 괜찮아?”

“내가아, 그만하라고 했잖아. 흑, 흐윽, 개자식아. 맨날 미안하기만, 하면 뭐 하냐고! 허엉….”

“맞아, 그랬지. 미안.”

솔직히 방금은 좀 세게 후려친 것 같다. 하지만 맞은 대상이 눈 하나 깜짝 안 하는데 굳이 양심의 가책을 느낄 필요는 없겠지. 이 모든 사태가 내가 자진해서 만든 것이라는 건 잠시 접어 두자.

정말 죽는 줄 알았다고!

곧바로 내리꽂히는 자극이 너무 크면 무서울 정도라는 걸 하필 오늘, 저 작은 장난감 따위로 알고 싶지는 않았는데.

“그리고 내가 버튼 살짝 누르랬잖아!”

“……살짝 눌렀는데?”

“뭐가 그래, 개자식아! 너 꾸우욱 눌렀어! 진짜 씨발 한 10단계는 됐을 거라고!”

사실 션은 내가 말한 ‘10단계’가 무슨 말인지도 몰랐을 거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처음으로 조심스럽게 흘러나온 사과가 아닌 문장에 서러움 섞인 욕을 담아 소리치자 션은 어떤 반박도 포기하겠다는 듯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하고 또 사과했다. 아마 오늘 낮부터 몇 년 치 사과는 나한테 다 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크게 숨을 헐떡이며 진정하려고 애썼다. 화나고 억울하면 씩씩대고 눈물부터 나는 인간인 게 내 탓인가? 망할, 어렸을 때부터 정말 고치고 싶었지만 해도 안 됐다.

-그런데 이런 와중에 얘는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왜. 뭐야?”

숨이 조금 편안해지기가 무섭게 션과 내 사이에는 두세 명은 들어갈 정도의 널찍한 거리가 생겼다. 맞닿았던 체온이 떨어지며 머리끝까지 치솟았던 열기가 훅 식기 시작한다.

“떨어져 있는 게… 편하지 않나?”

게다가 몇 분 전까지 날 무릎에 앉히고 뒤를 벌리던 사람이 이 서먹한 배려를 하는 건 또 무슨 의미인지. 나는 대답 대신 미간을 구긴 채 걸치고 있다고 하기도 민망할 정도로 간신히 팔에 걸려 있는 가운을 잡아 올렸다.

션 스펜서는 연기 하나는 잘한다.

하지만 거짓말도 잘하는지는 모르겠다.

지금도 봐. 꼭 기어코 뭔가 떨떠름한 한 뼘의 여백을 두고 만다. 나는 지금 그 묘함을 분명히 짚어 낸 터다.

대체 뭐야?

샤워한 게 무색하게 축축한 습기가 느껴지는 머리를 신경질적으로 쓸면서 답을 얻지 못할 물음을 속으로 삼키니, 얼마 안 가 내 고고한 파트너의 묘한 위화감의 정체가 드러났다.

“야.”

…물론 쉬운 만큼 짜증도 좀 났다.

나는 그 끝도 모르게 긴 다리를 조금 어색하게 꼬고 있는 남자를 보며 짜증을 감추지 않고 말을 이어 갔다.

“그래서 어떻게 하려고. 화장실 가서 혼자 잡을 거야?”

“…뭐.”

“아니면 그렇게 죽을 때까지 이상한…… 요가 하고 있을래?”

“…….”

떨떠름하게나마 대답하던 션은 내 뾰족한 목소리에 입을 다물었다.

긴장만 해도 의지와는 다르게 죽고 서는 게 망할 남자의 중심 아닌가.

아침에 자고만 일어나도 멋대로 반쯤 서 있는데, 제아무리 금욕적인 수도사래도 뒤에 기구를 넣고 헐떡이는 사람의 뒤를 벌리고 앞을 만져 주면서 아무런 반응이 없을 수가 있나.

바보인 건지, 신사인 건지, 아니면 너무 순진한 건지.

이미 상황 종료된 내 입이 바짝 마르는 건 무엇 때문인지 모르겠다.

설마 내가 마다할 거로 생각했을까? 이 늦은 밤에 뒤로 장난감을 넣고 걸어와서 허리를 흔든 동료에게 너무 다정한 배려를 해 주는 게 아닌가.

“지금 내가 어디 누워 있는지는 아는 거지?”

사실 나는 다음으로 꽤 퉁명스럽게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하고 부루퉁하게 투덜대는 것까지 덧붙이려고 했었다.

하지만 그런 내 말을 먼저 끊은 건 션이었다.

“저번에는 ‘술기운에 한 실수’.”

평소보다 조금 쉬고 갈라진 듯한 낮은 목소리는 혼잣말처럼 작기까지 해서 이렇게 늦은 시간 단둘이 아니었다면 제대로 듣지 못하고 지나갔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번에는 ‘어쩌다 일어난 사고’.”

“션?”

“덕분에 하룻밤 서로 뒹굴고 일어나도 내일이면 도망칠 구석이 있었지.”

단어 하나하나가 귀에 그대로 꽂히도록 말하는 건 배우 션 스펜서의 큰 장점 중 하나다. 하지만 가끔은, 특히 이런 순간만큼은 좀 적당히 뭉개져도 좋았을 텐데.

“실수’고 ‘사고’니까. 없었던 일처럼 굴기도 했다가 또 어떤 날은 심각해지면 바보 되는 일로 웃어넘기고. 아닌가?”

나는 피할 길 없이 쏟아지는 남자의 말 앞에서 조금 멍해졌다.

“이제껏 한 번도 남자와 섹스한 적도 없었고 스치듯 만나 본 적도 없었지만 뭐, 상관없잖아. 오늘 딱 하루, 아니면 기껏해야 이 저택에 있는 몇 달 잠깐 즐기고 마는 건데.”

“…….”

“-남자긴 해도 어쨌거나 션 스펜서와 처음으로 섹스하는 건 손해 보는 것 같지도 않고. 또 생각보다 나쁘지도 않네? 정말 해 볼 만한 기분 좋은 장난이잖아. 서로 데이트한다느니 게이라느니 하는 기사가 뜨는 것쯤이야 신경 쓸 일도 아니군. 어차피 여긴 이런 동네니까.”

우아한 단어가 서로 엮어 신랄한 문장으로 완성된 션의 목소리를 듣는 건 꽤 오랜만이었다.

“딱 몇 달만 지나도 어차피 접점 하나 없는 같은 남자와의 장난 같은 스캔들 따위 입에 올리는 사람 하나 없을 텐데. 뭐, 애초에 진지하게 생각해 보는 건 선택지에도 없었겠고.”

어느 순간부터 그는 내게 다정하고 정중한 파트너 배우이자 친구였으며, 내 치부를 낱낱이 들여다보고도 고개를 돌리지 않는 사람이 되어 있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나는 평소보다 빠르지도 않은 그 평이한 문장들 사이 어디에도 끼어들지 못하고 입술만 달싹거렸다.

“하지만 이선. 나는 한때 재미 본 트로피가 되는 건 정말 질색이거든.”

“…….”

“그러니까 잘 선택해.”

아니, 내게 제대로 된 기회를 준다고 해도 그처럼 완성된 말을 할 수 있었을지는 모르겠다. 난 션의 말에 왠지 모르게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간신히 대답했다.

“-뭐, 뭘?”

멀찍이 거리를 뒀던 션의 손이 내 얼굴을 향한 건 그때였다. 정확히 녀석의 손은 조금 멍청하게 벌어진 내 입으로 향했다. 연한 점막을 엄지손가락으로 살짝 건드렸다가 턱으로 떨어지는 손가락 끝에 저절로 어깨가 튀었다.

“‘하룻밤 사고’는 방금 막 끝났어.”

맑은 푸른빛이었던 션 스펜서의 눈이 저렇게 짙어진 걸 본 사람은 얼마나 될까?

나는 흥분이 고스란히 담기며 색이 살짝 바뀐 그 눈동자 앞에 해부되는 것 같은 느낌에 잘게 떨었다. 이 도시의 가장 바닥에서 기어 올라오면서 안전한 퇴로는 언제나 필수적이라는 걸 처절하게 배웠다.

그 아래로 다시 한번 떨어진다면 이번에는 그 억센 운이 다시 찾아오지 않을 게 분명함을, 이제는 너무나 잘 안다.

“지금부터 너와 내가 뭔가를 한다면.”

“…….”

“이제 그건 술기운에 한 실수도 아니고 어쩌다 생긴 사고도 아니야. 그래도 할 건가?”

잘 생각하자.

여기서 가장 현명한 선택은 이미 정해져 있다.

언제나 대체 가능한 이민자 2세에게, 한국계 미국인 배우에게 쏟아지는 스포트라이트가 마냥 좋을 리 없다. 당장이야 정신 못 차리게 좋겠지. 덕분에 얻어걸리는 일도 조금은 있을 거다.

그런데 그게 얼마나 갈 것 같은가?

당장 이 영화촬영이 끝나기도 전에 머릿속에서 ‘컷!’하는 우렁찬 경고가 울릴 수도 있다. 길어 봤자 일 년? 감히 일 년이나 꿈꾸는 게 가당키나 할까. 괜한 감정소모 할 필요 없다. 알지 않나, 해피엔딩은 내 몫이 아니다.

그러니까 지금 내가 여기서 해야 할 행동은 하나다.

조금은 머쓱하게 웃으면서 이번에는 내 쪽이 사과하면 된다. “그래도 우리 친구는 맞지?” 하고 뻔할 만큼 멍청한 말까지 덧붙이면 더 좋겠지.

하지만 그건 이상적인 그림이다.

그리고 내 인생은 이제까지 단 한 번도 이상적으로 굴러간 적이 없다.

그 말인즉슨 내 표정이며 작게 주먹을 쥐었다 펴는 것까지 무엇 하나 빼놓지 않고 담는 남자의 시선 앞에서 난 멍청하게 우물쭈물하며 눈이 마주칠 때마다 어찌할 바 모르고 있다는 뜻이다.

조금 전 션 스펜서는 확실히 선을 그었다.

어떤 날은 다정한 영화 파트너로, 또 어떤 날은 친구를 훌쩍 뛰어넘은 섹스 파트너로, 입맛대로 앞에 붙는 단어가 바뀌는 ‘파트너’는 끝내겠다고 말이다.

나는 대답 대신 그의 침대에서 일어났다.

다리에 곧잘 힘이 들어가지 않아서 조금 휘청거리니 젖어 있는 뒤에서 허벅지를 타고 뭔가 쭉 흘렀던 것도 같다. 션은 그런 나를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었다.

머릿속에서 온갖 문장이 떠돌았다.

이제껏 저 남자에 대해서 들은 온갖 종류의 평가와 기대들이다. 그건 때로는 브랜든의 목소리이기도 했고, 해리엇의 속삭임처럼도 들렸다. 언제나 마음 한구석에서 늘 선망했던 다니엘 바커와 아무렇지도 않게 나란히 서던 그의 모습 역시 일렁였다.

나는 자꾸 쓰러질 것만 같은 무릎에 억지로 힘을 주어 몇 걸음 성큼 걸었다.

“…아. 젠장….”

이 골치 아픈 상황에서 도망치려면 지금뿐이다.

한심한 영화 속의 아무리 덜떨어진 주인공이라고 해도 이 정도는 알아야 하지 않나.

그러니 이 넓고 멋들어진 침실에서 당장 빠져나가야 한다.

온종일 나한테 바보 같을 정도로 사과만 하고, 이제는 숨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나만 바라보고 있는 남자 같은 건 무시하는 게 맞다.

“……씨발.”

“…….”

“제발 좀. 정말 어쩌려고 이러는 건데….”

후우우, 하고 긴 한숨을 내쉬는 순간에 눈에 들어온 천장이 유독 창백하게 질린 것처럼 보였다. 부디 저게 내 미래를 암시하는 건 아니었으면 좋겠다만.

혼자 짜증을 냈다가, 욕을 했다가, 한숨을 쉬었다가. 이 이상 보일 만한 추태가 없을 거라고 매번 장담했던 것들을 저 잘난 스펜서 앞에서 하루가 멀다고 갱신한다.

나는 힘이 풀려 주저앉듯이 뒤돌아서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허리를 잡아채는 남자의 품에서 “아, 이번 생은 글러 먹었어.” 하고 한탄하듯 중얼거렸다. 그건 딴에는 꽤 심각한 자기비판이었건만, 내 입술에 급하게 키스하는 남자에게는 답지 않은 웃음을 터지게 했을 뿐이었다.

“글렀다고 하기엔 너무 운이 좋지.”

“교활한 새끼….”

느슨한 실내복을 위로 올려 벗는 순간까지도 나와 시선을 마주치던 션의 입술이 예쁘게 휘었다. 덕분에 순식간에 나를 제 침대 위에 눕히고 내려다보는 뻔뻔한 남자에게 뭐라고 더 투덜대려던 말이 쏙 들어갔다.

대체 뭘 먹고 자라야 저렇게까지 곧게 쭉 뻗을 수 있나 싶은 어깨며 곳곳에 완벽하게 자리 잡은 근육은 이제부터 내가 같이 뒹굴 남자의 몸이라기보다는 차라리 하나하나 새겨 조각한 공예품이라고 말하는 게 더 믿음직스러울 거다.

“-흐으, 읏!”

한 번 사정한 뒤라서일까.

얇은 가운 하나 없이 맞닿은 서로의 피부가 부딪히는 곳마다 찌릿찌릿했다.

특히 살랑대는 머리카락이 가슴께를 간지럽히고, 곧이어 뜨끈한 열기를 품은 혀가 작은 돌기를 깨물고 빨 땐 내 다리 사이에 있는 남자의 허리를 저도 모르게 휘감아 조일 만큼- 속이 뻐근해졌다.

완벽한 허락을 구한 남자의 손은 이제 거리낄 게 없다는 듯 멋대로 움직였다.

그나마 형식적으로나마 팔에 ‘걸려는 있던’ 내 가운을 벗겨 기어코 나신으로 제 밑에 누워 있게 만들 땐 이 새끼 너무 익숙한데 진짜 처음 맞나 의심도 조금 들었더랬다.

하지만 그런 소소한 의구심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은 건, 내 손가락 하나 닿지 않았는데 목이며 가슴께까지 이미 붉게 물이 든 흥분을 감출 시도조차 하지 못하는 숫된 반응 때문이었다.

난 내게 달려드는 것에 급급한 남자의 등 근육을 손가락 끝으로 달래듯 그리며 최대한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션, 내 거 가운 주머니에 콘돔 있어.”

……방금 ‘이 새끼, 아주 작정하고 왔잖아?’ 하고 생각했다는 거 다 안다.

아니. 굳이 그런 게 아니라 혹시 모르니까 가져왔을 뿐이라고. 진짜야.

“다음에는 직접 안 씌워 줄 거니까, 잘 봐 둬.”

“다음에는?”

“시끄러워.”

나는 열에 발갛게 익은 얼굴로도 기어코 꼬투리를 잡아 어울리지도 않게 웃는 남자의 쭉 뻗은 복근에 꽤 정확하게 주먹을 꽂아 넣었다. 물론 그는 그런 거에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가 미간을 곧바로 살짝 찌푸린 건, 그의 바지를 내리고 그 안에서 언제쯤부터 이렇게 흉흉하게 커진 채로 꺼덕거리고 있었을지 모를 단단한 기둥을 조심스럽게 손으로 잡아 쓸었을 때였다.

살다 보니 같은 남자의 것에 콘돔을 씌워 주는 날도 온다.

나는 이제까지 누군가와의 섹스에서 별생각 없이 했던 그 평범하고 무난한 절차 앞에서 괜히 손을 조금 떨었다.

그러자 션 스펜서는 누가 이름값 안 한달까 봐, 좀 못 본 척해 줄 것이지 굳이 말 한마디를 보탰다.

“이선, 너도 잘 못 씌우는 것 같은데.”

“죽을래? 나라고 내 거 아닌 거에 콘돔 씌워 본 적 있겠냐. 그것도 내 뒤에 박고 흔든다는 걸 붙잡고?”

결국 션은 내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죄송합니다, 하고 사과했다.

이 새끼는 이 정도면 미안하다고 하는 것에 맛 들린 정도다. 나는 조금 투덜거리면서 서툴게 녀석의 것에 콘돔을 씌웠다.

“조이거나 불편하지는 않아?”

“조금……, 익숙하지는 않은데. 괜찮아.”

와. 정말 이걸 넣는 거다.

겨우 몇 마디 정도 되는 장난감이 아니라- 손안에 꽉 들어차다 못해 핏줄까지 선 같은 남자의 것을.

뒤늦게 목 뒤로 쭈뼛 몰려오는 긴장감을 감추려 상기된 내 파트너의 뺨에 입을 맞췄건만, 눈치 빠른 남자는 그걸 알아챘는지 기어코 저와 시선을 마주하게 했다. 통, 하고 아프지 않게 부딪힌 이마가 꼭 어린아이인 양 뜨끈했다.

“괜찮아?”

이렇게나 정중한 감정의 대상이 되어 본 경험이 없는 탓일까, 왠지 속이 아린다.

아직 흐물흐물하게 녹은 채 남자의 손가락을 따라 부드럽게 물어 드는 뒤 역시 낯설다.

하지만 션은 그마저도 안심되지 않는다는 듯 내 뒤를 젤로 더욱 흠뻑 적셨다. 덕분에 구멍을 움찔거릴 때마다 부끄러운 줄도 모르는 쿨쩍이는 소리가 났다.

가슴부터 배까지, 그다음으로는 슬슬 다시 열이 몰리기 시작한 중심으로, 허벅지 깊은 안쪽으로 커다란 손이 움직인다.

엉덩이골 사이에 걸쳐진 단단한 기둥이 느껴졌을 땐 나도 모르게 다리를 오므렸지만, 션은 그런 내 무릎에 작게 입 맞추며 스스로 그를 받아들이게 했다.

하지만…, 그 낯설게 밀려오는 부피감은 작은 장난감 따위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다.

“--흐으, 으, 힉!”

뒤가 한계까지 벌어지는 감각이 생경했다.

푹 젖어 어렵지 않게 벌어지는 뒤로 같은 남자의 것이 삽입되고 있다는 게 뒤늦게 실감이 났다.

아프지는 않았다.

하지만, 부끄러움을 젖혀 두고 솔직히 말하면- 몸 안으로 가득 차는 팽팽한 부피감이…… 아주 조금쯤 무섭기는 했다. 그렇게나 만만하게 봤던 섹스였는데 정작 간신히 귀두 정도나 들어온 것에 덜컥 겁이 난 거다.

“아프지는 않아?”

“으, 으응….”

“……후우. 이선. 조금만…, 힘 빼 볼래.”

충분히 젖어서 쉽게 밀려 들어오고 있는 것 같았는데 정작 삽입하는 쪽은 그게 아니었나 보다. 살짝 미간을 좁힌 채로 내게 입 맞추는 목소리가 살짝 갈라진 채다.

“끝까지 안 넣을 테니까….”

한편, 정신없어 보이는 저쪽이 알고 한 말은 아니었겠지만- 나는 그 순간 내심 션의 말 하나에 꽤 위로를 얻었다. 분명히 끝까지 안 넣는댔지, 그렇지?

……다정해 빠진 저 남자에게는 미안하지만, 내 긴장을 푸는 데는 그 어떤 부드러운 입맞춤보다 저 한마디가 더 강력하다.

“흐…, 으으, 대체, 이게 뭐가… 좋다는 거야. 완전-, 완전히, 속았어.”

내 허리를 고쳐 잡고 천천히 삽입하는 남자에게 이렇게 투덜거릴 여유가 생겼으니 말이다. 션은 내 말에 작게 웃으며 더운 숨이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난 조금 알 거 같은데?”

“후우우, 그래. 뭐…….”

이제 와 생각해 보면 그 말이 문제였던 것 같다.

“한 놈이라도… 좋아야 하지 않겠냐?”

“…….”

그렇지만, 무조건 내 잘못이라고 하기도 좀 억울하다. 아니, 왜. 틀린 말은 아니지 않나.

둘 다 어설프게 하는 섹스에서 하나라도 좋으면 다행인 일이다. 심지어 그게 처음으로 몸을 섞는 쪽이라면, 혼자만 재미 본다고 해도 아쉬워하지 않고 기꺼이 맞춰 줄 용의가 있었다.

하지만 내 말에 몇 초 동안 움직임을 뚝 멈췄던 남자는 나와는 다른 생각을 했던 게 분명하다.

그때 어떤 표정을 하고 있었는지 봤어야 했는데.

“아, 힉, -하아악!”

사실 봤다고 해도 그 순간, 굵은 기둥이 푹 깊게 쑤시고 들어오는 것에 뒤가 꿰뚫리는 것과 겹쳐 눈앞이 하얗게 변하는 바람에 곧바로 잊어버렸을 거긴 하다. 나는 갑자기 말도 안 될 정도로 깊숙하게 치달은 기둥에 허리를 크게 휘면서 날카롭게 숨을 삼켰다.

갑작스레 까슬한 음모가 닿을 정도로 깊숙이 들어온 성기가 빠져나가고, 또다시 거세게 박힐 때마다 퍽, 퍽 하고 살이 부딪치는 소리가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귀를 두들겼다.

끝까지 안 넣는다며. 하는 처절한 외침은 차마 입 밖으로 나오지도 못했다. 정작 처음인 녀석은 따로 있는데 침대 위에서 한 약속을 순진하게 믿은 내가 문제라고 믿고 싶지 않거든!

“이- 개, 자식, 흐윽, 너어, 처음이라는 거 다 거짓마알- 히으읏!”

“칭찬……, 인 걸로, -후우, 들을게. 이선.”

완전히 속았다.

나는 처음 할 때 완전 멍청이처럼 손 모으고 누워 있었는데.

이렇게 뿌리 끝까지 처넣은 다음에 천천히 뒤를 휘저어 대는 것 따위는 엄두조차 못 냈었다고!

션 스펜서의 침대가 한없이 고급인 것에 감사한다.

내 싸구려 조립침대였다면 한창 시끄러운 소리를 내다가 어디 하나 휘었을지도 모르지.

모든 게 너무 빠르고 또 거셌다. 뒤의 어느 부분을 자극하면 몸 안에서 옅은 스파크가 튀면서 못 견딜 것 같은 기분이 된다는 건 이미 작은 장난감 놀이 덕분에 알고 있었지만, 이건 완전히 다른 선상의 행위였다.

“그-, 만, 아, 아, 흑, 히익…!”

정확히 어디를 찔러야 하는지도 모르면서 그저 꽉 차는 부피와 말도 안 되는 힘만으로 찍어 누르면서 기어이 쾌감을 끌어내고 마는 게 섹스라면, 이제까지 난 나와 몸을 섞었던 사람들에게 꽤나 큰 무례를 저질렀던 게 될 거다.

어떻게든 밀어내고 피하고 싶어 허리를 뒤틀고 몸부림치는 것도 쓸모없는 짓이다.

기어이 두 손을 잡아 들어 올리고 어디 하나 대충 다듬어진 곳이라고는 없는 몸으로 접어 올린 다리를 고정해 치받는 삽입은 섹스라는 단어로만 설명을 끝내는 게 귀여울 지경이다.

“…아직도 별로려나.”

“흐앙, 아, 션, 셔어언, 제발, 하지-마, 앗!”

“따뜻하고 미끌거리는 게 꽉… 물어서, 미칠 것 같은데, 난.”

헐떡이는 숨이 섞인 낮은 목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힌다.

젠장, 이 정도면 사기다. 하지만 이런 사기는 대체 어디에 있는 어떤 변호사를 찾아가야 하냔 말이지!

다 안 넣는다고 해 놓고는 뿌리 끝까지 처박은 다음에 내 뒤를 휘젓고, 깊게 찔러 넣은 채로 허리를 움직이는 걸 보니까 아무리 봐도 이 새끼 처음 아니라고 따지면, 되려 무슨무슨 죄로 잡혀 들어가는 거 아닐까?

결국 사기꾼에게 털린 내게 남은 선택지는 스스로를 위한 변론뿐이었다.

“션, 나 진짜…, 흣, 아, 허리, 아파. 응? 못 하겠어, 이제. 힉, 읏!”

하지만 내 손목을 올려 움켜쥔 아메리칸 사이코는 제발 천천히라도 해 달라고 코를 훌쩍이며 이어 가는 가엾은 자기변호에도 기다렸다는 듯 낮게 웃으며 입 맞출 뿐이었다.

……정말, 완전 속았다고!

* * *

『제임스 월링턴 건강 문제로 하차… 새 얼굴로는 노아 머피가 물망에 올라』

내 일상이 달라질 수 있을까?

아니, 달라지지 않더라도 적어도 이 영화를 촬영하는 180일간은 그런 꿈을 꿔 봐도 좋지 않을까.

나는 손바닥만 한 휴대폰 액정 위에 떠오른 활자를 몇 번이나 다시 읽으면서 감히 생각했다.

하하. 나 참, 올해 크리스마스 선물은 이거면 됐다.

짤막한 기사는 월링턴이 제작사와 자신의 에이전시, 그 외 여러 이해 관계자들이 얽힌 몇 시간 동안의 회의 끝에 ‘건강상의 이유’로 영화에서 하차한다고 말한다. 아마 그의 하차에는 어떤 조촐한 송별식조차 없을 거다.

그저 월링턴이 다른 영화 때문에 늦게 합류했던 탓에 촬영한 분량이 많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퍽 현실적인 안도를 담은 한숨만이 들리겠지.

사실 이건 꽤 기념비적인 일이다.

아니, 좀 더 냉정하게 말하자면 이 판에서는 말도 안 되는 일이다.

할리우드에서 몇 안 되는 역할 하면 몇 손가락 안에 얼른 이름이 나올 정도로 자리 잡은 사내가 이름값이라는 것을 치기도 무색한 비백인 배우와의 트러블로 강제 하차라.

이건 앞으로 이 바닥에서 한 50년 동안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을지도 모를 다윗의 승리다. 서글프지만 이게 지금의 현실이다. 이 업계는 진보를 흉내 내는 걸 사랑하는 인종차별자가 한 트럭이니.

덕분에 해리엇이 전해 준 현장의 근황은 더더욱 여전히 실감이 안 난다.

…스태프들이, 또 조연과 단역배우들이 항의하며 보이콧을 했다… 라.

나 때문에? 그게 말이 돼?

대체 어떻게 그런 운 좋은 일이 내게 일어날 수 있지.

나는 벌렁거리는 속을 달래며 침대에 배를 깔고 엎드린 채로 있다가, 내 거창한 ‘운’ 중 하나일 파트너를 향해 퍽 친절한 아침 인사를 건넸다.

“세상에서 제일 싫은 남자랑 섹스한 그 다음 날 기분은 어때?”

언제나 나보다 먼저 일어나서 세상 우아한 모습으로 다리를 꼬던 남자가 내 옆에 누워 웃통을 훤히 드러내고 헝클어진 머리를 한 채 부스스하게 눈을 뜨는 광경을 보는 건… 뭐랄까, 꽤 오묘하다.

션은 내 질문의 의미를 생각하려는 듯 잠시 눈만 느릿느릿 깜박이다가, 머지않아 그게 전날 밤 그 자신이 했던 말이라는 걸 상기한 듯 픽 바람 빠진 웃음소리를 내며 웃었다.

“……안녕.”

저러니까 또 달라 보이지.

아직 잠기운이 남아 살짝 가라앉은 목소리도 신기하다.

심지어 그 커다란 덩치로 어리광을 부리듯 내 허리를 감싸 안고 웅얼거리듯 이어 묻는 것도.

“몸은?”

“음…. 뭐 나쁘지 않아. 평생 알고 싶지 않던 뻐근함만 좀 있다는 거 빼고는.”

잠시 내 가슴팍에 입술을 대고 간지럽게 웃던 남자가 몸을 휙 일으킨 건 그때였다. 나는 그제야 그의 침실이 내가 머무는 곳보다 확실히 빛이 덜 든다는 걸 깨달았다.

딱 이맘때쯤의 시간이면, 커튼 없이는 저절로 미간이 찌푸려질 정도로 볕이 잘 드는 내 침실과는 달리 이곳은 정원 옆면이 시원하게 탁 트여 보이는 응달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한들, 아침은 아침이다.

그가 내 다리 사이에 몸을 끼우고 올라타서 마찬가지로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내 몸을 빤히 내려다보는 덴 전혀 지장이 없다는 뜻이다. 그 위를 손가락 끝으로 장난치듯이 덧그리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간지러워, 하지 마.”

“처음 봤을 때보다 근육이 많이 빠진 거 같은데.”

션이 여전히 나직한 목소리로 느릿느릿 말을 이어 간다.

툭 튀어나온 목젖에서 쇄골로, 가슴의 벌어진 골 사이로, 그러다 복근으로. 어젯밤 제멋대로 나를 휘둘렀던 그 커다란 손은 중심의 바로 위에서 아슬아슬하게 멈췄다. 나는 녀석의 손 위에 내 손을 겹치면서 물었다.

“그래서 보기 싫냐?”

“아니.”

대답이 빠른 건 합격이다.

“-그냥. 운동도 계속하는 것 같은데, 벌크는 전처럼 안 하니까. 일부러인가 싶어서.”

“음…….”

하지만 이 대답은 좀 신중히 해야 한다.

특히 어제 같은 일이-어제 참 많은 일이 있었다만-있었던 차라면 더욱 그렇다. 나는 한동안 말을 고르다가 그의 손등을 만지작거리면서 퍽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원래 난 뼈대도 별로 안 굵고… 되게 마른 편이었거든.”

“어.”

“그런데, 이쪽 일 시작하고 나서 보니까 마르면 나한테는 해커나 회계사 말고는 일을 안 주더라고.”

“…….”

“오히려 이쪽이 작품 비수기의 보통의 나에 가깝지. 그렇다고 너무 퍼지면 몸 만들고 산 게 벌써 꽤 됐는데… 그것도 현실 반영이 아니잖아?”

화면에도 잘 안 나올 거고. 하고 중얼거리듯 덧붙이자 션이 작게 웃으며 콧잔등에 입술을 떨어트렸다.

아, 아침에 이렇게 누군가와 맨살이 닿는 게 얼마 만이더라. 나는 그 시기를 셈해 보다가 그의 단단한 팔이 내 머릴 고정하고 키스하는 통에 계산을 포기했다.

부드러운 후희에 가까운 입맞춤을 받으며 단단하게 쭉 뻗은 근육이 곳곳에 새겨진 등을 쭉 쓸던 나는, 그와 마찬가지로 한 침대 위에서 눈 뜨는 사이가 되고 나서야 할 수 있는 질문을 마저 했다.

“야. 너 아침에 꽤 살벌하게 서는구나.”

입술이 닿는 대로 내게 키스하던 션은, 내가 그의 하반신을 빤히 내려다보고 있는 것을 뒤늦게 깨닫고 이불을 확 잡아당겼다.

“어제 볼 거 다 본 사이에 무슨.”

“이선, 넌 정말 기본적인 매너가 좀 부족해.”

“어이없네. 저 팔뚝만 한 걸 그만하라고 해도 아주 그냥 뿌리 끝까지 퍽, 퍽 처넣은 게 누구…….”

우와. 이제 깨물기까지 한다.

따끔하니 어깨에 이를 박아 넣는 남자를 향해 낄낄대고 웃으며 올이 가는 머리카락을 헝클어트리고 있으려니, 굳게 닫힌 침실 문을 정중하게 노크하는 소리가 들린다.

그건 나른하고 또 조금은 뻐근한 감각에 대충 휘감겨 있던 내가 얼른 현실로 끌려온 순간이었다.

…그래, 그러고 보니 몇 달간 이런저런 관계를 부인했던 이 저택의 주인과 지난밤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소리를 높여 가며 몸을 섞었지. 이 대단한 저택의 방음에 대해 이제껏 한 번도 고민해 본 적 없었는데….

난 그제야 바닥에 굴러다니는 가운을 급히 주워다 걸치며 뻑뻑한 몸을 일으켜 세웠다. 물론, 그러면서 귓가가 울긋불긋한 파트너에게 마지막 장난을 속삭이는 것도 함께다.

“오늘 외출할 일만 없으면 첫 아침 기념으로 빨아 주는 건데. 아쉬워도 참아, 야.”

얼굴이 확 익은 채 뭐라고 외치려다가 가까스로 그걸 삼키는 모습 좀 보라지. 아. 귀여워 죽겠다. 한편, 션은 이번에는 뾰족한 비난 대신 퍽 침착한 대화 시도를 했다.

“……어딜 가는데?”

“잠깐 내 아파트 좀 들르려고. 옷도 가지러 가야 하고, 회사 사람 만나서 사인할 것도 있고.”

“데려다줄게.”

당장 도망쳐도 모자란 상황에서 이상한 표정이 튀어나오고 만 건 거의 반사적인 일이다.

……뭐, ‘데려다줘’?

이모부에게 선물 받은 낡은 중고차로 고등학생 때부터 혼자 등하교했던 신체 건장한 남자가 이 별것 아닌 외출 때 듣기에는-사실 그땐 심각한 저체중이긴 했지만-꽤 근질근질한 표현이 아닐 수 없다.

그런 내 반응의 뜻을 읽어 낸 탓일까. 남자는 그 나름의 이유를 퍽 친절하게 덧붙였다.

“차 배터리 나갔다고 했지 않나?”

“그야 그렇지.”

하긴. 너무 마다해도 모양새가 좀 이상해지는 법이다. 그게 전날 밤 진탕 함께 뒹군 남자라면 더욱 그렇다.

“……그래 뭐, 그러든지.”

결국 나는 졸지에 그 유명한 션 스펜서를 운전사로 매끈하게 빠진 스포츠카 조수석에 간식까지 안고 타게 됐다. 사실 간식까지 들고 올 생각은 없었는데, 저택의 고용인들이 젖은 머리로 쭈뼛쭈뼛 걸어 나오는 나를 보며 하나같이 묘하게 웃으며 챙겨 주는 걸 마다할 타이밍을 놓쳤다.

딱 봐도 범상치 않은 슈퍼카에 초코 크루아상 가루를 흘리면 안 될 텐데.

나는 크루아상을 조심조심 한 입 베어 물면서 한가로운 LA의 풍경을 즐겼다. 이 느긋함은 하나같이 고만고만한 야트막한 건물만 있는 이 도시의 장점 중 하나다.

살면서 뚜껑이 열리는 차에 타 볼 기회가 올 줄은 몰랐는데 이게 웬일인가 싶다. 아니, 애초에 동성의 톱스타와 한 침대에서 일어나게 될 줄은 더욱 몰랐으니 슈퍼카가 대수일까.

난 아직도 어제의 열감이 옅게나마 남아 있는 뒤 때문에 살짝 자세를 둥글게 말았다. 백미러로 그런 내 행동 하나하나를 모두 눈에 담고 있는 내 파트너의 시선이 따갑다.

먼저 침묵 아닌 침묵을 깬 건 션이었다.

“두어트라고 했나.”

“응.”

“그쪽은 처음 가 보는군. 글렌데일은 좋아하는 식당이 있어서 자주 갔었는데.”

“…뭐, 글렌데일이랑 패서디나에 비해 볼 게 있는 곳은 아니지. 게다가 내 아파트는 고등학교 옆이라 종종 시끄러워서 별로야.”

“그런 소리는 좋지 않나? 사람 사는 거 같고. 게다가 애초에 이 동네는 관광으로는 별로야.”

촬영 시작 전부터 해서 벌써 몇 달을 붙어 다니다 보니 션 스펜서의 저런 화법은 이제 꽤 적응됐다. 녀석은 은근히 곧이곧대로 편들어 주는 것에 서툴다.

꼭 한 번은 비틀고 아닌 척해야 직성이 풀린다. 사실 이번에도 그랬다.

그러니 말끔하다 못해 그 서늘한 눈매를 한 번 깜박하지도 않고 빙 에둘러 말하는 문장에 기어코 웃어 버리고 만 건, 그저 내 탓만은 아닐 거다.

물론 션 스펜서는 그런 걸 그냥 두고 넘어가는 사내도 아니다.

“왜?”

“야. 나 처음 만났을 때 기억해?”

누가 들으면 퍽 훈훈한 추억 찾기로 착각할지도 모를 질문이지만, 사실 녀석과 나의 시작은 그렇게 유쾌하지만은 않았음을 우리 모두 잘 안다. 대답 대신 슬쩍 내 쪽으로 눈짓해 그 뜻을 살피는 듯한 남자의 표정은 그걸 뒷받침하고 말이다.

난 아주 오래전부터 꽤 궁금했던 질문을 이어 갔다.

“그때는 왜 그렇게 재수 없게 군 거냐, 대체?”

“…….”

“무명배우라느니, 약쟁이라느니. 일부러 고르고 골라 말했던 것 같은데. 게다가 너 꼭 누구 엿 먹이고 싶을 때 그렇게 웃잖아.”

“……엿 먹이고 싶었던 건 아닌데.”

“어쨌든. 왜 그리 심술이었냐고. 그렇지 않아도 경찰 쪽 오라 가라 하는 거 열 받는데, 네스 새끼가 말한 찌질한 무명이 보이길래 짜증이라도 났던 건가?”

나는 션의 미간이 ‘찌질한 무명’이라는 단어에서 좁혀지는 걸 퍽 즐겁게 구경하며 “뭐. 그렇다면 어쩔 수 없는데….” 하고 보란 듯이 말을 이었다.

결국, 그는 몇 초도 채 가지 않아 어제부터 이어 온 그 문장을 또 입에 담았다.

“-후우. 내가 잘못했어.”

“사과는 원래부터 잘하는 편이었고?”

“…….”

어디 가서 말문 막힐 일 없는 남자가 뭐라고 내뱉으려던 말 대신 긴 한숨을 내쉬면서 애꿎은 운전대만 쥐었다 폈다 하는 모습은, 역시 꽤 재밌다. 나는 남은 크루아상을 털어 먹으면서 낄낄댔다.

뭐, 여러분도 깨달으셨다시피 나는 그가 내 물음에 대한 정확한 답을 교묘하게 피해 갔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자각하고 있다.

하지만 입을 일자로 꾹 다물고 라디오의 흔한 음악 채널 하나를 잡는 내 파트너는 이 이상 말해 줄 생각이 없어 보인다. 나는 그런 션과 눈이 마주치지 않도록 자연스럽게 고개를 돌린 채로 퍽 가볍게 흘러간 의도된 침묵을 되짚었다.

션 스펜서와 네스 바라노프.

오랫동안 합을 맞췄다는 배우와 각본가.

두 사람의 공통점이라고는 나의 친구가 되었다는 것 말고는 찾을 수가 없다.

내가 아는 두 사람은 대척점의 끝에 서 있다. 션과 정반대인 거야 나도 못지않지만, 네스 녀석은 나와도 또 다르다.

…네스 바라노프는 좋은 말로 하면 생생한 녀석이고, 친구로서의 포장을 제하면 너무…, 날것인 녀석이라고나 할까.

한껏 비꼬더라도 마지못한 예의를 한 자락 끼고 입을 여는 션과는 비교 불가다. 오죽하면 녀석의 직업이 드라마 작가라는 걸 처음 알았을 때 “네가 삐- 소리 안 나는 문장을 쓸 수 있기는 하냐?”라고 물었을 정도니 말이다.

살짝 차가 막히는 바람에 거의 한 시간 동안 이어진 드라이브가 끝난 건, 네스 녀석의 걸쭉한 말씨를 떠올리며 목구멍까지 치솟은 한숨을 삼키다가 문득 어떤 지점에 이르렀을 때였다.

-다른 배우들과 내 대본이 다르다면.

그렇다면…….

“도착했어. 여기 맞지?”

나와 션의 대본이 서로 다를 수도 있지 않을까?

순간, 나는 저 스스로가 떠올린 문장에 조금은 놀랐던 것도 같고, 괜한 상처를 만들어 입었던 것 같기도 하다. 저 대단한 남자와 동등한 비중으로 캐스팅되었다는 자부심에 살짝 금이 갔을지도 모른다.

물론, 그런 속을 알 리 없는 션 스펜서는 멍하게 앉아서 내릴 생각조차 잊고 있는 나보다 한발 먼저 차에서 내렸다.

아파트 앞에서 나를 먼저 기다리고 있던 사람 때문이었다.

“……션 스펜서?”

나는 입을 다물지 못하는 브랜든과 악수하는 늘씬한 뒷모습을 멍하게 바라보았다.

“에이전시 분들이 여기까지 와 계실 줄은 몰랐군요. 저번에 뵈었는데. -죄송한데 성함이?”

“우드, 브랜든 우드입니다.”

“아, 이런. 그래요. 오랜만입니다, 우드 씨. 그리고-”

아니, 정정한다. 나를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이다.

“왠지 자주 뵙는 것 같은 바커 씨까지.”

“…설마 같이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별다른 일도 없는데 당연히 모셔다드려야죠.”

얼떨떨하게 있던 내가 정신을 차린 건 웃음기마저 느껴지는 문장 덕분이었다. 나는 허겁지겁 움직이다가 살짝 삐끗하기까지 하며 차에서 내렸다.

“바커 씨까지 여기 웬일이세요? 그냥 사인 하나 할 거 있다고 하지 않았나, 브랜든?”

웬만한 사람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높은 장신의 사내들이 이렇게 묘한 신경전을 하는 걸 보는 것도 벌써 두 번째다.

차이점이라면 그때는 스펜서가 나를 데리러 왔고, 이번에는 데리고 왔다는 것 정도뿐일까.

마찬가지로 잠시 얼이 빠져 있었던 듯한 브랜든 녀석은 한 박자 늦게 호쾌하게 입을 열었다.

“어-, 어쩌다…… 만나서. 같이 오게 됐네. 하하, 하하하, 핫하!”

“사인할 거 줘.”

이 화창한 날씨에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건 눈이 마주친 바커가 왜 여기까지 찾아왔는지 알 것 같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브랜든이 건네는 서류를 대충 눈으로 훑고 이름을 급하게 휘갈기며 괜히 입을 열었다. 손을 움직일 때마다 다니엘 바커의 시선이 왠지 까칠하게 뒤따르는 것 같았다.

하긴, 내가 생각해도 웃기다.

언제는 가장 끔찍한 의심을 들고 와 놓고 희희낙락 슈퍼카 옆자리까지 꿰차고 오는 꼴이라!

심지어 어제는 같이 뒹굴기까지 했다. 다행스럽게도 그걸 알 리는 없겠지만 말이다. 나는 바커의 시선을 피해 괜히 툭 입을 열었다.

“뭐야. 브랜든, 차 바꿨어?”

“어? 어엉. 크리스티나가 중고차 알아보길래. 뭐 겸사겸사.”

“그런 여자친구 또 없어, 인마.”

왠지 정신이 하나도 없다. 하지만 그런 날 알 리 없는 브랜든 녀석은 내게 바짝 붙어서 목소리를 낮춘 채 소곤거렸다.

“나도 알거든! ……그런데 저거 72대 한정인 맥라렌 맞지? 최고속도 400km인 거.”

“내 차 아니어서 모르겠다, 야. 그럼 다음에 보자. 바커 씨도 수고하세요. 안녕! 아, 둘 다 크리스마스 잘 보내고요. 내년에 보자고요!”

비겁하다고 욕할 수도 있지만 나는 션 스펜서와 다니엘 바커 저 두 사람이 같이 있는 걸 보는 게 불안했다. 일부러 시간을 맞춰 두어트까지 왔을 브랜든에게는 나중에 꼭 한턱내야겠다.

따라오는 시선에 왠지 등이 따끔따끔한 건 내 착각이 아닐 테니 말이다.

“뭐가 그렇게 급해?”

“급하긴. 오는 데만 한 시간이면, 갈 때는 출퇴근 시간이랑 겹쳐서 더할걸.”

“밖에서 저녁 먹고 들어가면 되지 않나.”

거의 반쯤 도망치듯 발을 옮기던 내가 처음으로 멈칫한 건, 잡아당기는 대로 별 저항 없이 끌려오는 장신의 남자가 별 망설임조차 없이 내뱉은 말 때문이었다. 심지어 그는 나와 시선이 마주치자 “왜?” 하고 태평하게 되묻기까지 했다.

그래, 애초에 배우라는 직업은 관종이 아니고서야 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나 같은 소심한 관종에게는 션 스펜서와 단둘이 함께하는 고급 레스토랑에서의 식사는 그 횟수가 적을수록 좋다.

“어제는 그렇다고 쳐도- 밖에서는 조심하는 게 어떨까, 션. 그렇지 않아도 네가 내 편 들어 준다고 올리는 글 때문에 없던 파파라치도 생겼는데.”

션이 내 말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다는 건 입을 일자로 다물고 조용해진 것만 봐도 뻔히 알 수 있다. 하지만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라는 건 션 저 녀석이 가장 잘 알 거다. 나는 작게 어깨를 으쓱하며 먼저 몇 걸음 앞서 걸었다.

그러자 왠지 한숨이 섞인 듯한 낮은 목소리가 나를 뒤따라 왔다.

“여기야?”

“응. 작지만 그래도 꽤 열심히 꾸몄다고.”

익숙한 문 앞에 서자 왠지 덜컹거렸던 심장이 좀 잠잠해지는 것 같았다. 오랜만에 열쇠를 꽂아 넣는 이 감각도 왠지 그리울 지경이었고.

하지만, 그건 이 3층 복도 끝의 아담한 아파트에 누가 있는지 깜박하고 만 내 실수였다.

“…….”

“…….”

“……열심히 꾸몄다고?”

사실 처음에는 어제부터 정신이 하나도 없더니 헛것이 보이나 싶었다. 하지만 조금 황당함까지 느껴지는 션의 목소리는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게 분명했다.

내 기억 속에 마지막으로 남아 있는 이 아파트는 분명 이런 모습이 아니었다. 밝은 베이지와 프러시안 블루로 나름 색을 맞춰서 오는 사람마다 “너 의외로 잘하고 산다.”라는 칭찬 아닌 칭찬을 불렀던 게 이 작은 거실이었는데….

대체 사방에 깔린 저 거무튀튀한 털깔개며, 빛이 들어올 만한 곳에는 모조리 붙은 잡지조각과 신문지들은 뭘까? 혹시 저 작은 나무 장식은 설마… 크리스마스트리일까? 완전 저주 받은 것 같은데.

내 사랑스러운 스윗 홈은 마치 오래된 전쟁 영화 속에서나 보던 방공호를 연상하게 했다.

…….

……맙소사.

방공호, 그래!

션의 얼빠진 물음에 뭐라 대답하는 것조차 잊고 있던 나는 그제야 앓는 듯한 한숨을 토해 냈다. 워낙 정신없는 일들이 줄지어 터지던 덕분에, 근 한 달 동안 이곳에 머물던 사람을 완전히 잊고 있었다는 걸 그제야 깨달은 탓이었다.

“헬레에엔!”

망할. 다른 사람도 아니고 중증의 인간혐오에 걸린 총기 애호가, 헬렌 워커 말이다!

나는 헬렌에게 이 아파트의 스페어 키를 빌려주며 “왠지 느낌이 이상하다 싶으면 여기 와서 주무세요. 알겠죠?” 하고 말했었다.

정말, 그뿐이다.

하늘에 맹세하건대 내 아늑한 스윗 홈을 방공호로 만들어도 좋다고는 한 적은 없다!

“대체 이게 무슨 꼴이래! 헬렌, 집에 있어요? 헬렌!”

이 꼴을 한 집을 두고 얼떨떨한 눈으로 방공호-젠장!-와 나를 번갈아 보는 션에게 신경 쓸 여력이 있을 리가. 제발 침실은 멀쩡해야 할 텐데, 하는 생각만 머리를 채울 뿐이다.

나는 차마 어디에 발 디뎌야 할지도 모를 바닥을 얼얼한 허리를 붙잡고 크게 넘어 다니며 거실을 가로질러 굳게 닫혀 있는 침실 문 앞까지는 가는 데 성공했다.

내 마음의 외침이 통하기라도 한 걸까. 불길한 쇠사슬로 칭칭 감겨 있던 문은 내 손이 닿기 전에 한참을 달그락대는 소리를 내더니 끼이익, 하고 딱 손바닥만큼 열렸다.

……다행이다. 침실은 창문 빼고는 세이프다!

“헬렌. 정말 크리스마스 파티 준비 한번 제대로 했네요!”

나는 안도의 한숨과 함께 작은 그 틈 사이로 슬쩍 충혈된 눈만 내놓은 이 사태의 범인에게 따져 물었다. 하지만 헬렌은 대답이 없었다.

좀 더 정확히는, 내 등 뒤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우두커니 서 있었다는 쪽이 더 가깝다.

나는 무서울 정도로 미동 없는 그녀가 바라보고 있는 걸 자연스럽게 따라갔다가, 여전히 상황파악이 안 된 듯한 내 파트너의 의아한 표정과 딱 마주쳤다.

“썩 꺼져! 꺼지라고!”

“헤, 헬렌?”

“그 얄팍한 뱃가죽에 구멍 뚫리고 싶지 않으면 꺼져! 여기가 어디라고! 개자식, 여기가, 여기가 어디라고!”

제 집인데요!

난 쩌렁쩌렁하니 울릴 정도로 고함치기 시작한 헬렌에게 차마 하지 못할 대답을 목구멍으로 삼켰다. 대체 무슨 할머니가 이렇게 목소리가 큰지, 저절로 미간이 찌푸려질 만큼 큰 목소리에 션이 입 모양으로 “누구야?” 하고 묻는 게 보였다.

……하하. 안타깝게도 내 친구, 헬렌 워커시다.

난 그에게 대답하는 것 대신에 그를 향해 나가 보라며 손을 휘휘 내젓는 쪽을 택했다.

“헬렌. 제발 진정해요. 그렇게 소리 지르다가 신고 들어간다고요!”

아니나 다를까 벌써 복도 여기저기가 소란스럽다. 대체 어떤 새끼야, 하는 험상궂은 외침이 들리는 것도 환청이 아닐 거다.

하지만 불행 중 다행으로 지금 이 작은 아파트의 현관에는 든든한 전력이 서 있다.

나는 옆집의 험상한 사내가 션 스펜서 표 싱그러운 웃음에 처치되는 걸 흘끗 보면서 급하게 속삭였다.

“제발 조용히 말해요, 네? 아니, 여기서 대체 뭐 한 거예요. 집 꼴이 이게 뭐….”

“어디 있어?”

침실 문 틈 사이로 한쪽 눈만을 빼꼼 내놓고 있던 헬렌은 그 어떤 때보다 갈라진 목소리로 내 말을 끊었다.

“네?”

“지금 여기 있어?”

얼결에 헬렌의 물음이 닿는 주어가 무엇인지 되물으려던 나는, 마주친 헬렌의 회색 눈을 보며 왠지 말문이 턱 막혔다.

션은 시끄러운 헬렌의 소리에 인상을 찌푸리고 찾아온 사람들을 두세 사람만 모여도 꽉 차는 복도에서 달래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그들에게 붙잡혀 있다는 게 맞다.

예정에도 없는 간이 자선 행사처럼 함께 사진을 찍고 사인을 해 주면서 말이다.

덕분에 나는 헬렌이 묻는 게 무엇인지 되묻는 것 대신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아, 아뇨.” 하고 대답하고 말았다.

무서울 정도로 희번들하게 눈을 굴리던 헬렌은 이윽고 작게 말을 이었다.

“그날 밤에 녀석에게 전화가 왔다고 했던 거, 기억하지?”

벌써 몇 달 전 이야기다.

하지만 내가 헬렌의 물음이 무엇을 말하는지 정확하게 골라낼 수 있었던 건, 그날이 LA답지 않게 우중충하게 비가 왔던 늦은 오후여서만은 아니다.

진담 반 망상 반으로 쏟아져 나왔던 헬렌의 문장 속에 혹시라도 단 한 줄의 진실이 섞여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때때로 그날을 상기시켰기 때문이었다.

분명 헛소리라고 나 자신에게 세뇌해서 오늘까지 오기는 했지만 말이다.

“…네스한테… 전화가 왔었다고 했었죠?”

“그래.”

“녀석이…… 뭐라고 하던가요?”

미친 질문이야.

물어봤자 또 내 속을 뒤집어 둘 헛소리만 할 거라고. 헬렌을 알잖아.

나는 속으로 반쯤 욕이 섞인 자책을 하면서도 멋대로 움직이는 입을 멈추지 못했다.

“뭐라고 했겠어! 헐떡이면서 지가 곧 뒈질 거라고 하지!”

“지금 네스가 죽기 전에 통화를…… 했다는 말이에요? 착각 아니고요? 별다른 연락처도 없으시잖아요.”

“흥, 녀석이 죽고 나서야 얼굴을 비친 네놈이나 그렇겠지!”

“…….”

확실히 헬렌과 네스는 내가 중독자 회복 모임에 처음 참석했을 때부터 친했다.

아니, 그저 친하기만 했을까. 네스 바라노프는 누구도 말 붙이지 못하는 이 괴짜 할머니의 유일한 소통창구나 다름없었다.

헬렌은 모임에서도 모르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정도로 오랜 출석자였지만, 갱단도 건드리지 않고 쉬쉬한다는 말이 돌 정도로 뒤가 켕기는 할머니이기도 했다. 나도 네스가 아니었다면 평생 헬렌의 근처에도 가지 않았을 정도니 더 말할 필요가 있을까.

고등학생 때부터 약에 손댔었다던 네스의 중독회복후원자가 헬렌이니, 그 인연은 내 상상보다 더 깊을 거다.

“망할! 이래서 너희 같은 애새끼들이 싫었어. 아주 늙은이 골수를 뽑아먹지 그러냐?”

……하여간 헬렌은 감상에 빠질 시간 따위 주지 않는다.

나는 걸쭉하게 쏟아지는 헬렌의 욕에 억지로 현실로 끌려왔다. 그래, 지금은 옛 기억에 빠져 있을 때가 아니다. 나는 한숨을 작게 푹 쉬며 문에 기댔다.

“네스한테 정말 전화가 왔다면- 그건 당연히 경찰한테 얘기하지 않으셨겠고….”

“뭐, 그 멍청이들한테 무슨 말을 하라고?! 그렇지 않아도 쥐새끼처럼 여길 노리는 놈이 있는데.”

“맞아요, 맞아요. 멍청이들한테 말해 봤자 골치만 아프죠. 그렇지 않아도 쥐새끼처럼……, 잠깐만. 뭐라고요. 헬렌?”

“대체 일을 얼마나 엉망으로 하고 다니길래 그 망할 형사 놈이 이곳까지 이죽대고 다니냔 말이야! 아주 사방에 이선 박, 이선 박 네 이름을 캐묻고 다녔어!”

망할 형사 하니까 떠오르는 능구렁이 같은 얼굴이 하나 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겠지?

하긴 그래.

그렇게 이를 박박 갈면서 가 놓고 가만히 있을 리가 없지. 나는 왠지 뒷골이 뻐근하게 땅겨 오는 것 같아서 목을 뒤로 젖혔다가 한숨처럼 말을 이었다.

“…후우. 알겠어요. 그런데 갑자기 그 전화는 왜 또 말씀하신 거예요.”

너무 진지하게 들으면 괴로운 건 내 쪽이다.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린다는 마음으로 들어야 한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진짜고, 또 뭐가 가짜인지 알 수가 없다.

헬렌의 말은 늘 그랬다.

모두 다 진담이기도 하고, 때로는 내뱉는 문장 모두가 농담이나 망상이었다.

하지만 내 말에 기다렸다는 듯 한 뼘도 채 안 되는 문틈으로 주름진 이맛살과 눈이 튀어나오도록 고개를 가까이 딱 붙이는 노인의 모습은 왠지 으스스하기까지도 해서, 괜히 입이 마르는 건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네가 여기로 데리고 왔잖아.”

“뭘요?”

“쥐새끼!”

“쥐새끼?”

답답한 스무고개가 시작됐다.

하지만 헬렌을 채근해 봤자 괜히 흥분해서 원래 하려던 말을 다 잊어버릴지도 모른다. 나는 차분하게 헬렌과의 대화를 되짚었다. 다행히도 ‘그 사람’이라는 단어는 머지않아 기억 한구석에서 머리를 들었다.

“그때 말했던 ‘쥐새끼’…… 말이에요? 왜, 비 오는 밤에 네스를 찾아왔다는.”

아, 고개를 크게 끄덕이는 저 충혈된 눈을 보고 있자니 왠지 나도 같이 미쳐 가는 기분이다.

“그걸 어떻게 알아요? 그것도 네스가 말해 주던가요?”

“망할. 녀석들이 알고 지낸 게 하루 이틀 된 일 같아? 아주 서로 별별 꼴을 다 봤다고.”

문밖의 들뜬 소란에 왠지 입이 바짝 말랐다.

나는 저 소란을 만든 남자가 지금 이 순간을 절대 엿듣지 못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괜히 목 뒤가 서늘해지고 솜털이 곤두서서 작게 어깨를 떨면서 간신히 입을 열었다.

“헬렌. 혹시.”

“…….”

“그 사람이, 쥐새끼가- 네스를……, 그렇게 했을까요?”

다 망상이다.

헛소리야.

헬렌은 가끔씩 TV 속 쇼호스트를 보면서 ‘저 새끼는 사실 사람 아냐. 피를 빨고 산다고.’ 같은 말이나 속삭였지 않나.

션 스펜서처럼 눈에 띄는 남자라면 어떤 상상의 주인공인들 안 어울릴까.

나는 이제껏 재깍 대답하던 헬렌이 묘하게 침묵하는 몇 초가 유독 길게 느껴졌다.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심지어 꾹 닫힌 주름진 입이 열리는 순간은 꼭 슬로우 모션처럼 느리게 보이기까지 했다. 나는 헬렌의 말이 곧바로 머리에 꽂히질 않아서 멍청하게 되물었다.

“네?”

“직접 본 것도 아닌데 이 늙은이가 어떻게 아냔 말이야!”

……아니, 이 할머니가 진짜!

아주 이랬다저랬다 쥐락펴락하는 다그침에 잠시 얼이 빠져 있자니, 헬렌이 전보다 빨라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 총을 찾아야 해. 이선. 네스 녀석을 죽인 바로 그 총 말이야. 그 총은 녀석을 죽인 놈에게 있어.”

사실 헬렌이 총 얘기를 꺼내기 시작하면 이게 진심인지, 술에 취한 헛소리인지 구분하기가 어려워진다. 하지만 나는 이 순간만큼은 저 총 어쩌고 하는 말이 이 순간만은 반갑다 못해 빳빳하게 땅겼던 어깨에서 힘이 쭉 빠질 정도로 기뻤다.

“-후우. 헬렌, 제발요. LA 경찰이라면 몇 달 전부터 모두 그 총을 찾고 싶어 했을 걸요!”

“그러니까 경찰 놈들이 머저리 천치 새끼들이라는 거야! 어떻게 그걸 아직까지 못 찾을 수가 있어?!”

“그게 경찰 탓만인가요? 그게 찾을 수 있을 만한 곳에 있을 리가 없잖아요. 진작 버리거나, 없애거나. 뭐 어떻게든 했겠죠!”

“아닐걸. 그걸로 얼마나 해먹었는데. 그건 아주 비싼 보험 같은 거라고.”

똑똑, 하고 노크하는 소리와 헬렌이 킬킬대고 낮게 웃는 소리가 뒤섞였다.

제발 그렇게 웃지 말라고 몇 년을 말했는데 소용이 없다. 저러니 갱단마저 무서워하는 마녀 같은 별명이 붙은 게 아닌가.

“그걸 찾게 되거든 꼭 누가 가지고 있었는지 이 늙은이에게 꼭 말해 주라고. 알겠지?”

“전 총은 까만색, 뭐 이 정도밖에 몰라요. 대체 어떻게 생겨 먹은 건데요? 뭐 특징이라도 있어요?”

사실 난 이 문장을 내뱉고 조금 아차 했었다.

‘대체 그게 무슨 총인데요?’ 라는 질문은 헬렌 워커에게는 절대 해서는 안 될 금지어나 다름없다는 걸 몇 년 동안 톡톡히 배운 탓이었다.

이건 헬렌과의 일방적인 대화에서 화제를 돌려야 할 때 꺼내는 최후의 카드나 마찬가지다. 온갖 총기의 이름과 성능, 그게 사용된 사건을 몇 시간이고 들어야 하는 고행길까지 마다할 상황이 아니면 말이다.

하지만 지금만큼은 달랐다.

내 질문을 들은 헬렌은 꼭 알파벳 하나하나 씹어 삼키는 듯한 표정을 했다.

[대체, 그게, 무슨, 총이냐고?]

분명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는데 그 겹겹이 주름이 잡힌 큰 초록색 눈동자 내게 묻는 것만 같다.

간신히 마주 보며 이야기하던 침실 문이 쾅 닫힌 건 그때다.

덕분에 그 문에 기대고 있던 나는 어떻게 중심을 잡을 새도 없이 크게 휘청했다. 순간적으로 어깨를 붙잡은 힘이 아니었으면 아마 그대로 삐끗해서 그 엉망진창인 바닥에 나자빠졌겠지.

“-큰일 날 뻔했네.”

“…….”

“괜찮아?”

나는 순간적으로 뺨에 더운 숨이 닿을 정도로 가까이 다가온 흠잡을 데 없는 남자의 얼굴 앞에서 잠시 말문이 막혔다. 사실 좀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나를 내려다보는 그 파란 눈동자가 언제부터 이 방에 있었는지 정확하게 짚어 낼 수가 없어서 어떤 단어도 감히 먼저 꺼낼 수 없었다.

“좋은 친구를 뒀군. 이선.”

“…….”

나는 대답 대신 그저 어색하게 웃는 쪽을 택했다.

어쨌거나 크리스마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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