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권-4. cold comfort (9/21)

4. cold comfort
달갑지 않은 위로

직업란에 ‘배우’를 망설임 없이 적게 되기까지 있었던 골치 아픈 일들을 다 말하려면 몇 날 며칠을 써도 부족하겠지만, 오늘은 여러분에게 서운한 점을 털어놓는 거로 이야기를 시작해 보려 한다.

[대체 왜 매번 같은 배역만 맡는 거야? 지겹다. 그냥 저런 연기밖에 못 하는 듯]

혹시 살면서 어떤 불쌍한 배우에게 대고 단 한 번이라도 이런 댓글이나 SNS의 단문을 적어 본 적 있나? 난 여러분들 중 이렇게 잔혹한 사람이 없으리라 생각하겠지만, 혹시라도 한순간의 실수로라도 저런 말을 해 본 적 있다면 부디 지금부터는 그 생각을 털어 내 주길 바란다.

장담하건대, 이름만 다를 뿐인 배역을 계속하기를 원하는 배우는 아무도 없다.

꽤 사견이 들어간 말 같다고 해도 어쩔 수 없다.

나 역시 이제까지 무림 고수만 한 다섯 번 했고, 닌자도 단역과 조연 합쳐서 세 번은 했다. 하나같이 날렵한 몸동작과 잘 단련된 무예를 자랑한 그들 덕분에 했던 고생은 또 어떤가.

발가락뼈에 금이 가는 건 우습다, 우스워.

덕분에 막 이 영화판에 발 디뎠을 때만 해도 근육보다는 뼈 위에 예의상 가죽이 덧대진 것처럼 말랐던 나는 죽기 살기로 운동을 하고 몸을 만들어 언제 무슨 배역이 들어와도 적당히 비빌 수 있는 정도에 다다랐다.

정말이지 그 짓은 두 번 하라면 못 할 일이었지만, 고작 한 입 거리인 아시안 파이에서 내 자리를 차지하려면 뭐든 해야 했다.

그렇게 뭐든 하다 보니 15년을 버텼고 말이다.

하지만 말이다.

무림 고수니 닌자니 하는 역할을 아무리 많이 맡았어도, 그건 몇 달간의 촬영이 끝나면 깨지는 꿈같은 일이다.

영화나 드라마 속에서는 비현실적으로 날아다닌다고 한들, 현실에서의 나는 그들과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다.

모든 촬영이 끝나고 휴대폰의 스케줄이 다 끝나면 나는 한국계 이민자 2세, 미국인이지만 때로는 골 빈 놈들에게 ‘너 어느 나라에서 왔어?’라는 말을 종종 듣는 평범하디 평범한 이선 박이 된다는 거다.

-그건 다시 말해, 발코니에서 아무리 몸을 동글게 말아 웅크린다고 한들…

“솔직히 좀 의욀세.”

“…….”

“그 가엾은 친구가 몇 번이나 이야기했을 땐 듣는 척조차 하지 않았었는데 말이야.”

어쩌고 산맥에서 몇십 년을 수련한 나이를 가늠하기 힘든 무술 고수처럼 내 기척을 완전히 감출 수도, 그림자 속에서 완전히 몸을 감추고 움직이는 닌자처럼 어둠에 스며들 수도 없다는 뜻이다.

하하. 대체 지금 멍청하게 뭐 하고 있는 짓이냐고?

……내가 다 묻고 싶다. 제기랄!

“이제 와서 하는 말이네만 애초에 처음부터 잘해 주면 좀 덧났나 그래. 이렇게 될 거 그 친구가 하는 말도 좀 귀 기울여 들어 주고 말이야.”

“처음 만난 날부터 동공이 반쯤 열린 채로 와서는 ‘이야, 진짜 쌩 도련님 오셨네!’ 하는 사람을 대체 어떻게 좋아할 수 있습니까? 솔직히 데이브, 당신도 좀 대책 없었잖습니까.”

“뭐……. 그야 어쩔 수 없지만. 그래도 재능 하나는 확실하지 않았나.”

“이 도시에서 바라노프 그 사람만 재능 있는 건 아니죠.”

이제 슬슬 상황파악이 됐을 거라고 믿는다.

그래. 난 지금 어설프게 몸을 숨기고 내 인생 최대 반전의 시작을 만들어 준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듣고 있다.

“그때 션 자네는 아니라고 박박 우겼지만, 생각보다 말도 잘 통했었고.”

“전혀요!”

솔직히 작정하고 그러려고 한 건 아니다.

조금은 억울한 구석마저 있다! 이 방에 먼저 와 있던 건 난데, 그저 나갈 타이밍을 놓쳤을 뿐이다. 있어도 되는 방이냐고? 그건 모르겠다. 어쨌든 저 두 사람이 자리에 앉자마자 술을 따르며 이야기를 시작하는데, 도저히 끼어들 틈이 없었다고만 말해 두려 한다.

심지어 그 대화 내용이…….

“그럼 대체 어쩌다 생각이 바뀐 겐가?”

“무슨 생각 말입니까.”

“자네, 박 군을 정말 끔찍하게 싫어하지 않았나.”

“…….”

“절대 박만큼은 상대 배역으로 못 앉힌다고 바라노프 그 친구와 매번 싸워 놓고 말이야.”

-이런 분위기에, 이런 내용이라면 대체 어떻게 넉살 좋은 표정으로 끼어들 수 있겠냐는 말이다! 아, 쿵쾅대고 뛰는 심장 소리가 이 창문 너머의 두 사람에게 들릴까 봐 무서울 지경이다.

이런 상황에 던져질 줄 알았다면 그렇게 호기롭게 굴지는 않았을 거다.

술에 물 탄 듯, 물에 술 탄 듯 언제나처럼 적당히 싱겁게 있다가 발을 빼는 게 나다운 일이었는데 겁쟁이의 말로란 불행하기 마련이라는 걸 왜 몰랐을까.

자, 이 모든 상황을 여러분들에게 설명하려면 우선 3주 전으로 돌아가야 한다.

* * *

“이것 참 의외인데 말이야. 드디어 연락해 줄 줄이야. 이선 박.”

나라고 새해부터 연락하고 싶어서 한 줄 아나!

차마 입 밖으로 내지 못하는 시큰둥한 대답을 속으로 투덜거리며 할 수 있는 건 미지근한 음료를 벌컥벌컥 마시는 것뿐이었다.

나 역시 월링턴이 제 분을 못 이긴 것 반, 촬영장 분위기를 가장 민감한 이유로 엉망으로 만든 죄목 반으로 하차한 이후 갑작스럽게 떨어진 재촬영 분량 덕분에 정신이 없다. 차라리 잠이라도 한숨 더 자고 싶은 와중에 간신히 짬을 내서 만나는 사람이 저 능구렁이 같은 남자인 건 정말 내키지 않았다고.

“솔직히 내 명함쯤은 진작에 구겨 버린 줄 알았는데 말이야. 뭔가 수상쩍은 거라도 찾은 모양이지?”

“아뇨, 전혀 아닙니다만!”

“그래? 스펜서 같은 인간이라면 상상도 못 할 구질구질한 술집에서 만나자고 하더니, 맥주는커녕 반은 썩은 것 같은 라임 에이드나 주문해서 퍼마시길래 당연히 그쪽인 줄 알았는데 말이야.”

“…….”

“내가 괜히 큰 착각을 한 모양이군. 미안해서 이를 어쩌나!”

어쩌면 말 한마디를 해도 저렇게 밉상일까.

나는 능구렁이처럼 웃으며 말을 잇는 남자, 닉 코빗의 얼굴을 한 대 치고 싶은 열망을 간신히 가라앉히며 그 ‘썩은 것 같은’ 라임 에이드를 한 모금 더 마셨다.

나라고 간신히 얻은 쉬는 날 이 꾀죄죄한 술집에서 얼음마저 아낀 오래된 에이드를 마시고 싶었던 건 아니다.

그저 오늘만큼은 술기운에 기대고 싶지 않았을 뿐이지.

“예, 미안해하셔야 하는 건 맞는 것 같군요. 형사님.”

“뭐?”

“왜 남의 집을 얼씬대시는 겁니까? 제 이모부라고 하고 다니셨다고요.”

“흐음. 그런 일 없네만.”

“그럼 저한테 없던 백인 이모부가 생긴 모양입니다. 명의도용은 어느 부서에 신고하면 되는지 궁금한데요. 누구보다도 잘 조언해 주실 것 같으니까요.”

고백하건대 지금처럼 세게 말하는 건 내 인생에서 몇 없는 순간이다. 익히 보셨다시피 나는 갈등을 피하는 데 익숙하지, 그 안으로 뛰어드는 건 전혀 선호하지 않는 인간이기도 하다.

하지만 요 앞의 경험상 이 빙글빙글 웃는 인간은 순진하게 어물대는 모습을 요만큼이라도 보였다간 금세 분위기를 휘어잡고 정신없게 만들 거다. 두 번은 없다.

헬렌이 귀띔해 주지 않았다면 모르고 넘어갈 일이었지만, 나는 눈을 가늘게 뜨는 형사 앞에서 코웃음 치며 허풍을 떨었다. 이 순간처럼 내 직업이 배우라서 다행인 적이 또 없다.

나는 머릿속으로 계속 온갖 종류의 심각한 상상들을 하며 그럴듯한 표정을 유지하려 발버둥 쳤다.

그 묘한 신경전이 얼마나 계속됐을까.

먼저 손을 든 건 형사, 닉 코빗이었다.

“그래, 좋아. 그건 미안하게 됐다고. 하지만 뭐 대단한 일을 한 건 아니야. 혹시라도 살인범 뒤를 봐줄 만한 인간인지 알아본 게 다라고.”

물론 먼저 백기를 들었다고 해서 듣기 좋은 말을 시작했다는 뜻은 아니다.

“…정말 끔찍하게 뻔뻔하십니다. 그래서 알아보니 어떻던가요?”

“그 키를 하고서 갱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어린애 모임 중 말단 녀석이 밤늦게까지 시끄럽게 굴어도 항의 한 번 하기는커녕 귀마개를 사다가 하는 인간이라는 걸 듣고 아, 그런 배짱은 없겠구나, 했지.”

“…….”

“왜. 희소식 아닌가?”

…크흠.

녀석이 말단이든 뭐든 늘어진 후드 뒤로 안에 총을 가지고 다는 모습을 보고 나면 그 누구라도 노크 대신 귀마개에 손이 갈 거다.

하지만 그런 사소하지만 절실한 사정까지 일일이 설명할 생각은 없다.

“이왕…… 다시 만난 김에 확실히 하죠.”

나는 숨을 한 번 크게 삼킨 다음에 천천히 말을 이어 갔다.

“그때 확실한 증거가 있다고 하셨는데. 그게 뭡니까? 아, 물론, 이건 션을 의심한다거나 해서가 아닙니다. 그저- 어설프게 들으니만도 못한 걸 생각하고 있는 게 짜증 나서….”

“크하핫!”

빌어먹을. 살짝 기세에서 밀렸다.

하지만 내게는 다른 길이 없었다.

이걸…… 어떻게든 입 밖으로 끌어내지 않으면, 헬렌이 그날 오후 쏟아내 귀 안으로 꽉 들어찬 문장들이 이내 모든 것을 삼킬 것처럼 시끄럽게 끓어올랐기 때문이었다.

잠들기 전까지 ‘이건 망상이야. 헛소리라고! 제발 신경 꺼, 멍청아.’ 하고 외치는 머릿속 어딘가의 목소리를 닥치게 하려면 이 방법밖에 없다는 걸 깨닫기도 했고 말이다.

“그래. 어디 한번 얘기해 보자고.”

“……뭘요?”

“그때 난, 정확히는 확실한 증거가 ‘있었다’고 했지. 그 뒤에 한 말은 기억하나?”

기억한다.

-‘션이 못 쓰게 만들기 전까지는’이라고 했었다.

하지만 나는 형사의 말에 굳이 대답하지 않는 쪽을 택했다. 하지만 코빗 형사는 그 정도만으로도 만족한다는 듯 씩 웃더니 드디어 말을 이어 갔다.

“CCTV.”

저 형사 앞에서는 절대 떨거나 긴장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겠다고 몇 번이나 다짐하고 나온 자리였건만 지금 내가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지 자신이 없다.

“바라노프의 저택에는 손버릇 나쁜 하인이 조금 있었다더군. 바라노프의 넥타이핀이며, 자잘한 잔돈까지 야금야금 사라지는 일이 잦았다는 거야. 그래서 바라노프가 업자를 불러서 고용인들 몰래 제 집 안 구석구석에 CCTV를 설치했다고 해. 참 별종이지?”

별종이라.

내가 아는 네스라면 백 번이고 천 번이고 그럴만하다.

녀석이 공연히 헬렌과 친했겠는가?

둘 다 뭐 하나에 꽂히면 다른 걸 돌아보지도 않을 정도로 집착하는 성격이다. 둘 다 정신 감정을 하면 편집증은 필수로 낄 사람들이고 말이다.

그런 녀석이 작정했는데 CCTV만 달았을까. 여유도 생겼겠다, 할 수만 있었다면 첩보 영화에 나오는 것들도 달고 설치하고 싶어서 안달이었을 것이 뻔하다.

“바라노프와 가까운 고용인 한 명 빼고는 다른 사람들도 설치된 걸 몰랐던 거라, 저택에 CCTV가 있다는 건 꽤 늦게 알게 됐지.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잘됐다 싶었어. 종일 저택에 붙어 있는 사람들도 모르는 비밀 CCTV라면 누가 그런 짓을 했는지 낱낱이 남아 있을 게 뻔하잖아? 그런데….”

“…….”

“서로 돌아와서 보니까 데이터 하나가 없더군.”

이제껏 여유롭게 히죽 웃기만 했던 형사가 한 문장 한 문장 말을 이어 갈 때마다 스산한 표정을 하는 것을 보고 있자니 왠지 뒷골이 땅기는 느낌이었다.

“그날 밤 바라노프의 사망추정시간, 바로 그때 누가 그 복도를 지나 응접실로 들어가고 또 나갔는지 보여 주는 데이터. 딱 그것만 감쪽같이 사라졌어. 심지어 경찰 쪽의 부주의로 인한 분실이라나.”

“……그, 진짜 잃어버렸을 수도 있지 않나요?”

쭉 입을 다물고 듣기만 하다가 처음으로 꺼낸 조심스러운 가정이었다. 하지만 코빗 형사는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크게 입술 끝을 비틀어 올렸다.

“12년 전에 작은 혈흔 샘플 하나 깨트린 것으로도 뒤집혔는데, 그 이후로 단 한 번도 없던 증거물 분실이 하필 그 스펜서가 얽힌 살인 사건에만 일어났다고? 그것도 딱 그가 현장에 들어가고 나가는 모습이 찍힌 데이터만? …하, 말 같은 소릴 하라고. 그날 늦게까지 있던 하인의 증언이 아니었으면 아예 온 적도 없는 사람이 됐겠지!”

나름대로 각오를 하고 왔다고 자신했는데 사실 이쯤 되면 그 어떤 대단한 마음가짐이라고 해도 물거품이 되고 만다.

나는 형사의 다그침과도 같은 목소리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나중에는 아예 증거품 목록에서 사라지기까지 했어. CCTV 데이터를 담당했던 감식반 직원은 갑자기 사표를 내고 증발했고 말이야.”

“…….”

“덕분에 나만 미친 망상에 빠진 새끼가 됐지! CCTV 파일을 담은 USB를 보면서 같이 션 얼굴을 확인했던 하인이 망할 오천 달러만 주면 증언하겠다고 하길래 돈을 가져갔다가, 그 현장에서 뇌물 수수죄로 동료들에게 잡히는 골 때리는 상황을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뇌물 ‘수수’? 내가? 씨발! 차라리 뇌물을 줬다고 잡아갔으면 억울하지라도 않다고!”

닉 코빗 형사가 스펜서 저택에 왔던 날을 기억한다.

그날 션은 뭐라고 했더라- 그래, 아마도 코빗 형사가 뇌물 수수로 정직된 상태라고 했었다. 나는 식은땀이 어린 손바닥을 서로 비비며 발끝까지 치닫는 긴장을 애써 부정했다.

여러분들에게만 솔직하게 말한다면, 사실 나는 이 순간 감히 닉 코빗 형사에게 연락한 것을 조금은 후회한다.

이건 감히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다.

알량한 정의감과 굳이 따져 묻지 않고 눈감아도 됐을 파트너에 대한 신뢰, 누구보다 가까운 친구지만 때로는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눌 수 없는 편집증을 가진 친구의 망상 때문에 차라리 모르는 게 나았을 것을 알고 말았다는 두려움이 치민다.

나는 술집의 소란에 내 혼란을 숨긴 채로 한동안 침묵했다.

문장을 만드는 법을 잊어버린 사람처럼, 어떤 말을 먼저 꺼내야 할지 잘 감이 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코빗 형사는 그런 내 속내를 다 꿰뚫었는지 격앙된 채 이어 가던 말을 멈추고 커다란 유리잔에 가득 찬 맥주를 크게 들이켰다.

그 다행스러운 공백은 내가 간신히 입을 여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을 주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돕겠습니다. 네스를 그렇게 한 범인을 잡는 거요.”

한 단어 한 단어 입에 담을 때마다 심장이 쿵쾅거린다.

나는 순간 확 반색하며 뭐라고 입을 열려는 형사의 말을 한발 앞서 잘랐다.

“하지만 이게 션을 의심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인정하기 싫지만 나 스스로가 타인에게 쉽게 휘둘릴 인간임이 확실하다면, 방법은 하나다.

바로 미리 선언하듯 내가 믿고 싶은 것을 못 박아 두는 거다.

“이 모든 건 네스 녀석을 위한 겁니다. 게다가 전 션 스펜서가 그런 짓을 할 사람이 아니라고 확신하고요.”

“확신이라니! 대체 이제까지 내 말을 뭐로 들었나? 스펜서, 그 새끼는-”

“증거 가지고 오세요.”

이 말이 꽤 못된 소리라는 자각은 분명히 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나도 살아야 하지 않나.

“한 번만 더 증거 없이 그런 말 늘어놓으시면, 저도 똑같이 미친 소리 취급할 겁니다. 다시는 이런 자리에 나오지 않을 건 당연하고요. 증거 없이는 어떤 말도 다 가정이고 추측이잖습니까.”

“…….”

코빗 형사의 눈에 어린 저 감정이 뭔지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이번만큼은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바라보았다. 증거가 사라져서 곤란을 겪고 있는 사람에게는 정말 미안하지만, 네스의 억울한 죽음을 밝히는 것과 션 스펜서라는 사람을 향한 신뢰는 완전히 다른 선상의 일이다. 적어도 나에겐 그렇다.

션은……, 적어도 몇 달 동안 바로 옆에서 지켜본 션 스펜서는 그런 짓을 할 만한 인간이 아니다.

이게 온갖 흉악범죄자들의 지인들이 가장 흔하게 하는 대사라는 건 안다.

그러니까, 형사를 돕되 션 스펜서를 믿겠다는 거다.

이 말과 행동 사이의 모순을 비난해도 좋다. 이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다.

얼마나 그렇게 있었을까. 먼저 한발 양보한 건 코빗 형사 쪽이었다. 물론 그 안 곳곳에 뼈가 있는 양보이기는 했지만 말이다.

“-좋아. 알겠다고. 적어도 내 말을 들어 주기는 하겠다는 거잖나. 내 다시는 ‘증거 없이’ 스펜서에 대한 내 ‘미친 소리’를 늘어놓지 않겠어.”

“감사합니다.”

“그럼 이제 자네가 아는 걸 다 말해 보라고.”

드디어 올 것이 왔다.

이미 난 돌아갈 수 없는 길 위에 서 있다.

나는 텁텁한 라임 에이드를 괜히 한 모금 크게 삼켜서 바짝 마른 입안을 적시고는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각오를 긁어모아 천천히 입을 떼기 시작했다.

“그 전에 저한테 돈을 주세요.”

“뭐?”

“10달러라도 좋아요.”

“…….”

“제가 정직 중인 형사에게 돈을 받고 한 이야기는… ‘불법으로 받아 낸 증언’이 되는 거죠, 그렇죠?”

닉 코빗의 입에서 신경질적인 헛웃음이 흘러나온다.

밑바닥에서 구른 몇 년이 이렇게 도움이 될 줄은 몰랐지만, 다행이라면 다행인 셈이지.

“그럼 이 증언으로 수집한 증거는 법정에서 쓸 수 없을 거고요. 또, 죄송하지만 형사님은 뇌물 수수에 이어 증언을 듣겠다고 정직 상태로 술집 구석에서 돈을 준 혐의까지 더해지면 이제-”

“정말이지 죽여 버리고 싶군.”

“…….”

무슨 욕을 먹는대도 어쩔 수 없다.

이건 내가 션, 그를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의 대비다.

나는 코빗 형사가 미간을 찌푸릴 대로 찌푸리고는 자신의 주머니에서 달러 몇 장을 꺼내는 것을 곧장 내 지갑으로 넣게 했다.

그 순간 형사가 날 얼마나 찢어 죽이고 싶은 눈으로 노려봤는지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될 거다.

“이제 됐나? 제기랄, 입 한번 더럽게 비싸군!”

“저도 보험은 있어야죠.”

결국, 이 모든 건 날 위해서다.

도저히 마음 한구석에 이 끔찍한 의심과 불안을 안고 살 수 없는 날 위해서 말이다. 션을 위해서라는 위선은 떨지 않겠다.

나는 형사의 지문이 잔뜩 찍혔을 지폐가 담긴 내 지갑을 몇 번 쓸고는 다시 한번 크게 심호흡했다. 돈을 받았으니, 그 대가를 지불할 때다. 나는 천천히 입을 열기 시작했다.

형사의 말을 듣고 몰래 션의 휴대폰을 훔쳐보았을 때 보게 된 ‘그날 새벽’ 데이비드 밀러와의 문자, 그걸 에이전시 사장인 다니엘 바커에게 털어놓은 상황이라는 것까지.

이 의심이 아닌 의심이 시작된 이유를 최대한 장황하지 않게 설명하는 건 생각보다 꽤 어려웠다.

물론 모든 걸 다 말한 건 아니다.

내 사장님이 그쪽을 조사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나,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은 헬렌과의 대화는…… 슬쩍 뺐다.

특히, 내가 형사에게 먼저 연락할 마음을 먹게 한 헬렌은 그 이름조차 말하지 않도록 조심했다. 그건 헬렌의 말이 상상 속의 이야기일 가능성이 있어서만은 아니다.

오히려 혹시라도 그 문장 중 한 줌의 진실이라도 섞여 있을 때가 문제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갈지야 뻔하다.

그 고압적인 LAPD의 사람 중 누가 강박증 노파의 상황을 고려해 주겠는가?

형사는 내 말이 끝날 때쯤 수염이 듬성듬성 난 자신의 턱을 쓸며 생각에 잠긴 듯 한동안 입을 꾹 다물고 있더니 꼭 혼잣말처럼 “데이비드 밀러라……. 그 인간도 뭔가 더 있을 것 같았지.” 하고 중얼거렸다.

그는 갑자기 들이켠 맥주 때문인지 목이 조금 벌겋게 변한 채였다.

그 순간 간신히 얻은 메이저 자리가 물거품으로 돌아가는 건 아닐까, 하는 불길한 생각을 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난 그 모든 불길한 상상을 단 하나의 믿음으로 간신히 찍어 눌렀다.

‘션 스펜서가 그럴 리 없으니 괜찮을 거야’.

“그런데 말이야, 이선.”

“그냥 박이라고 부르시죠.”

“쌀쌀맞기는!”

면도도 꼼꼼히 하지 않은 까칠한 인상의 중년 사내가 투덜거리는 걸 받아 줄 여유 따위는 없었다. 뭐 어디 하나 볼 만한 구석이 있어야 말이지. 나는 이어질 코빗 형사의 말을 상상조차 하지 못하고 그렇게 내심 꽤 태평한 불만을 품었다.

“어쨌든……, 그게 단가?”

“예…, 예에?”

“지금 말한 게 전부는 아닌 것 같은데.”

어디 가서 속내를 모르겠다는 말은 좀 들었어도 이렇게 훤히 읽힌 적은 없었건만, 역시 형사는 형사다. 순간적으로 훅 치고 들어오는 당혹에 저도 모르게 시선을 피해 버린 건 큰 실수임을 알지만 별다른 수가 없었다.

닉 코빗은 그런 나를 보며 낄낄대고 웃었다.

“뭐. 처음부터 다 털어놓을 거라는 기대는 안 했지. 나도 마찬가지니까.”

나는 형사의 말을 멍하게 곱씹다가 한 박자 늦게나마 가까스로 되물어 반응할 수 있었다.

“뭐라고요?”

“그럼 내가 아는 걸 하나 더 말해 주지.”

세상에는 차라리 모르는 게 나은 것들이 있다. 나는 이날 저녁에만 그 사실을 몇 번이나 깨달았는지 모른다.

“션 스펜서는 살인 사건 참고인 조사를 받은 게 이번이 처음이 아니야. 재밌는 일이지?”

하지만, 그 모든 사실은 적어도 지금의 내게는 이 말보다는 견딜 만했었다.

“다음에는 이보다는 더 질 좋은 먹이를 주지. 그쪽도 이번처럼 뭔가를 더 들고 와야 할 거야, 박.”

낮게 끅끅대고 웃는 소리가 꼭 손톱으로 벽을 긁는 소리처럼 듣기 싫게 귀에 박혔다.

* * *

#41. 정원 (저녁)

투박한 구석이라고는 없이 섬세하게 다듬어진 초록 정원, 그곳에도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 머리가 하얗게 센 정원사는 누구보다 그걸 잘 앎에도 몇 번이나 주변을 확인한다.

들리는 건 바람에 부딪히는 나무의 소리. 새의 작은 지저귐뿐이다. 정원사의 이마에는 아주 옅은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다.

늙은 정원사

그래요. 여기라면 괜찮습니다.

어린 S

……하지만.

늙은 정원사

저를 믿으세요. 믿으실 수 있지요?

어린 S는 잠시 망설이다가 크게 고개를 끄덕인다.

잠시 뒤, 어린 S는 천천히 말을 시작한다. 두 사람이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지 들을 수 있는 건 정원의 나무들뿐이다. 어린 S의 말을 듣는 늙은 정원사의 눈에는 여러 감정이 스쳐 지나간다. 경악. 분노. 후회.

그리고 어떤 결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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