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다니엘 바커가 게이라는 거 알았어요?”
이건 내가 은회색의 드레스를 차려입은 해리엇 로스를 보며 그 아름다움을 칭찬하는 것보다 먼저 꺼낸 질문이었다. 해리엇의 반응이 어땠을 것 같나?
“으하하핫, 아, 하핫!”
그녀는 몇 초간 눈만 깜박이나 싶더니 이윽고 주변 사람들이 흘끗 쳐다볼 정도로 호탕하게 웃어젖히기 시작했다. 젠장. 여러분들에게만 솔직하게 말하자면 이건 지금 꽤 가까운 BAA 쪽 사람들에 이어 한 열세 번째로 물어본 거였다.
그리고 그들의 반응은 보시다시피 하나같이 똑같다!
“왜 웃어요!”
“드디어! 어떻게 알았어요?”
“…후우우. 옆에 남자 파트너를 끼고 왔더라고요.”
“그게 이제야 보이던가요? 아, 모르는 눈치인 거 보고 정말 골때린다 싶었지.”
내가 그렇게 멍청한 티를 내고 다녔단 말인가!
정말 이 파티장 안의 사람 중에서 다니엘 바커가 게이라는 걸 모는 건 나뿐이라는 말이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뺨에 열이 올랐다. 파티의 호스트인 다니엘 바커가 잠시 자리를 비운 게 이렇게 감사할 수가 없었다.
…알고 지내면서 실수 한두 번쯤은, 아니 좀 더 솔직해지자면 그 이상은 알게 모르게 했을 것 같다.
왠지 언제였던가 나한테 여동생이 있었다면 당신에게 소개했을지도 모른다는 주책을 떨었던 것 같은 게 내 착각이면 좋겠다. 차별적인 말을 했으면 어떡하지?
그런 말 하는 건 영 질색이긴 하지만…… 왜 사람 입이라는 게 가끔은 뭔 짓을 할지 모르잖나.
나는 올리브 하나가 들어간 도수 낮은 칵테일을 물처럼 한 번에 들이켰다.
그러자 내 옆을 지키고 있던 장신의 파트너가 부드럽지만 단호하게 손에 들린 잔을 빼 간 건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심지어 그는 내가 뭐라 입술을 삐죽이기도 전에 먼저 선수를 쳤다.
“그런데 두 사람은 이전에 같은 작품이라도 했습니까?”
“아니, 이번이 처음이야.”
“아뇨, 이번이 처음이에요.”
오늘따라 나와 해리엇은 꽤 죽이 잘 맞았다.
덕분에 그녀와 나는 괜히 실없는 웃음이 터져서 낄낄대고 웃으며 핑거푸드 몇 개를 같이 집어 먹었다. 거북하고 지루하기만 했던 파티 아닌 파티가 진심으로 즐겁게 느껴질 수 있다니. 정말 사람이 중요하기는 한 모양이다.
하지만 빼앗아 간 내 잔을 손에 들고 있는 션은 마주 웃는 것 대신 그 새파란 눈으로 빤히 바라보고 있는 걸 보니, 좀 더 정확한 대답을 원하는 것 같다.
“음. 아마 같이 술 마시고 나서일까.”
나는 입안에 있는 것을 우물우물 씹어 삼키면서 대충 대답했다.
“……둘이서? 언제?”
“하하. 글쎄. 뭐 그런 게 중요한 것도 아니고.”
솔직히 그 저녁이 언제였는지는 나와 해리엇 로스 둘 다 정확하게 기억할 거다.
그녀는 내 담당으로 배치되자마자 골치 아픈 이슈에 휘말렸고, 나로서는 이 완벽한 조각상 같은 남자와 멋대로 소리치고 싸웠던 날이니 잊으려야 잊을 수가 없었다. 살짝 웃으며 나를 보는 해리엇의 표정에선 그날의 은근한 씁쓸함이 분명하게 짚어진다.
“-중요해.”
솔직히 난 지금도 이게 그렇게까지 번져야 할 주제였는지 잘 모르겠다.
“어?”
“중요하다고, 이선.”
“-어….”
대체 해리엇 로스와 언제 술 마셨는가, 같은 시시껄렁한 대화가 이렇게까지 진지하게 나를 내려다봐야 할 일인가 말이다.
왠지 말문이 막히는 곤란함에 나는 해리엇에게 슬쩍 눈짓으로 SOS를 쳤다.
“어머. 감독님 오셨네. 난 잠시 실례.”
……배신자 같으니!
나는 유유히 빠져나가는 은회색 드레스를 보며 속으로 비명을 삼켰다. 이 거대한 짐승 앞에 혼자 남은 무력감이라니. 심지어 그 인간의 옷을 입은 존재는 퍽 집요하기까지 하다.
“저번 언제?”
“진짜 이게 왜 중요한데.”
“나한테는 중요해.”
그래, 뭐 말한다면 말할 수야 있는데. 내가 아는 저 섬세한 짐승께서는 이걸 듣고 꽤 심란해 할 것이 뻔하다. 그때도 어울리지도 않게 내 눈치를 보면서 떠받들지 않았었나. 말해주기 전까지는 꼼짝도 하지 않을 것처럼 퍽 강경하게 나오는 션 앞에서 나는 괜히 턱을 긁적였다. 전에는 대충 빠져나가게 해 주던 녀석이었는데 이제는 그런 여유가 꽤 줄었다.
“어-, 글쎄다. 꽤 프라이버시인데.”
“…….”
“…흠. 여기 팡파르가 울릴 때쯤 말해줄지도 모르고?”
“뭐?”
난 무슨 말이냐는 듯 미간을 찌푸리는 녀석에게 커다란 전광판을 살짝 턱짓했다.
파티의 이름을 뒤집어쓴 영화인 후원행사답게, 금빛으로 수놓아진 목표는 내 기억 속에 어렴풋이 남아있는 것보다 그 목표 금액이 훨씬 올랐다. 나도 오자마자 큰맘 먹고 200달러나 써냈다.
놀라운 건 그것도 벌써 꽤 차올랐다는 거지만, 어쨌거나 남은 건 40만 달러 정도다. 저건 이 행사가 끝날 즘 박수갈채를 받고 싶은 누군가들이 짊어질 몫임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하, 어쨌든 이 얘긴 그만하고. 우리도 저쪽 가서 인사나-.”
이쯤 되니 어설프게 말을 돌릴 게 아니라 아예 다른 화제로 끌고 가야지 싶었다. 내 손짓은 분명 녀석의 팔을 잡아끌려는 의도였다.
“……션?”
절대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짚으려던 게 아니었다.
나는 이 행사장에 들어온 이후 단 한 번도 빈 적 없는 옆자리를 보며 왠지 머리가 멍해졌다. 정말 잠시 시선을 돌렸을 뿐이다. 그래 봤자 한 10초? …길어 봤자 15초?
사실 그보다 더 길거나 짧을 수도 있지만, 여하튼 우리가 알아야 할 건 찰나의 순간이었다는 거다.
다들 삼삼오오 무리를 짓고 있는 이 광활한 곳에서 혼자 남은 소감까진 말하고 싶지 않다. 특히 가볍게 들뜬 이 기분이 전적으로 한 남자에게 기대서 나온 것임을 깨달은 순간은, 그리 좋지만은 않으니 말이다.
어딜 가나 눈에 띄는 남자다.
애초에 아무리 걸음이 빨라도 멀리 갈 수는 없는 시간이기도 했지.
조금은 급하게 회장을 눈으로 훑던 나는, 머지않아 주위의 사람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올라온 내 파트너를 찾을 수 있었다.
……뭐야, 놀랐잖아. 말도 없이 어딜 가!
나는 속으로 괜히 구시렁대면서 그의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려고 했다.
갑자기 눈앞에서 꽃잎 같은 금빛이 흩날리는 것에 놀라 작게 튀어 오르지만 않았다면, 분명 녀석 못지않은 속도로 성큼성큼 걸어갈 수 있었을 거다.
펑, 퍼엉, 펑.
귀를 얼얼하게 울리는 소리에 순간 보기 싫게 삐끗한 건 누가 봐도 멍청해 보였을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난 이번만큼은 파티 내내 따라오던 시선 속에서 자유로웠다.
이 드넓은 회장을 가득 채운 사람들은 하나같이 금색의 종이가루가 반짝이는 데 정신이 팔려 있었기 때문이다.
우와아, 하는 탄성이 역시 여기저기서 잇따른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이 난데없는 환호성의 이유를 찾는 건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나는 고개를 든 자세 그대로 굳은 채, 눈앞의 거대한 스크린에 담긴 고액 기부자 명단 맨 윗줄의 알파벳이 새로 조합되는 순간을 멍하게 지켜보았다.
/ S. S P E N C E R /
……제발 누군가 여기 스펜서가 한 명 더 있다고 말해 줬으면 좋겠다.
하지만 제게 쏠린 시선 따위엔 코웃음조차 치지 않고 곧장 이쪽으로 뚜벅뚜벅 걸어오는 저 남자의 흉흉한 기세를 보건대, 이 회장의 스펜서는 단 한 명이다.
“이제 됐겠지.”
“…이 미친놈이… 너 지금, 설마-”
“언제. 어쩌다 둘이서 마셨는데.”
힘들게 이 영화업계에 뛰어드는 수많은 지망생과 학도들에게는 미안하게 됐다. 나 역시 그걸 모르는 게 아니다.
하지만 태어나 살면서 남의 돈이 이렇게 아까운 건 처음이다.
정말 내 돈도 아닌데 죽을 만큼 아깝다!
“그럴 돈 있으면 날 줘!”
“너 주라고?”
“아, 아니! …아니…, 어, 음…. 젠장.”
왜 신은 이런 시험에 들게 하는 걸까.
순간 머릿속에 40만 달러가 생긴다면 하고 싶은 일들과 이럴 줄 알았으면 200달러 내지 말 걸 하는 진솔한 후회가 서로 엉겨 붙은 대답 대신, 나는 입을 다물고 녀석의 팔을 질질 잡아끌었다. 금색 종이 가루와 사람들의 박수, 환호, 거기에 40만 달러를 쾌척하자마자 내게 직행한 스펜서의 말이 궁금한 사람들의 쫑긋한 귀까지 사방에 널린 곳에서 대화를 계속하고 싶지는 않아서였다.
40만 달러. 아, 매해 하는 완전 형식적인 기부행사에 40만…….
정말 이 미친놈!
이 새끼는 예전엔 자기 저택에 머무는 돈으로 한 달에 4만 달러를 주라고 해 놓고는, 스타벅스에서 커피를 사는 것보다도 쉽게 40만 달러를 써낸다. 망할. 100만 달러를 안 써낸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하나?
나는 이제 말해 보라는 듯 내게서 눈을 떼지 않는 남자에게 두 손을 들어 보였다. 나름대로 다 저를 배려해서 말 안 하려고 한 거였는데, 저 어마어마한 숫자 앞에서는 도저히 입 닫을 수 없다.
“저번에 너랑 좀…… 싸운 날. 그때 마셨어.”
“…….”
“좀 우울하기도 하고. 하필 딱 해리엇이랑 마주쳐서… 별거 없었어. 젠장, 생각해 보니까 난 그때 다이어트 콜라였네. 그것도 한잔했다면 한잔한 거지만, 좀 너무하잖냐.”
왜 이런 이야기까지 하게 되는 걸까.
아마 그건 날 내려다보는 남자가 내 말 한마디에 휘둘리는 게 고스란히 짚어져서일 거다. 아무 대답 없이 있지만 마주친 눈이, 또 그의 작은 숨소리가 동요하고 철렁 가라앉는 순간이 이제는 뻔히 보인다.
아니나 다를까 션은 한동안 뭐라 입을 떼지 못하고 있다가 한참 만에 간신히 말을 골랐다.
“이선. 그날은….”
하지만 그렇게 조심스레 고르고 고른 문장은, 그와 거의 동시에 내 재킷 주머니 안쪽에서 울린 문자 소리에 끊겼다.
난 단 한 사람의 연락에만 이렇게 소리가 나도록 지정해 두었다.
“……션, 잠깐만. 이거 집에서 온 연락이라.”
거짓말이다.
난 그저 순간적으로 너무 놀란 내색을 한 게 들키지 않았기만을 바라고 있다.
[지금 XXX 호텔 맞지?]
편하게 휴대폰을 확인하라며 곧바로 한 걸음 물러선 배려가 속을 따갑게 찔렀다. 씨발, 씨발, 썅. …젠장!
[우연찮게 나도 같은 곳에 있는 것 같은데.]
[잠깐 보자고.]
표정까지는 그럭저럭 그려 만들 수 있는데 낯빛까지는 내가 어떻게 제어하기 힘들다.
나는 왠지 뺨으로 훅 피가 몰린 것 같아 슬쩍 그늘 쪽으로 고개를 기울인 채 입을 열었다.
“미안한데 나 잠깐… 나가 봐야 할 것 같은데.”
“심각한 일인가?”
“아냐. 그런 건. 조금 사적인 일이라. ……정말 미안.”
어느 순간 내게 사과하는 건 대체로 션 스펜서였다.
하지만, 어떻게 생각해 보면 정말 사과해야 했던 건 내 쪽이었을지도 모른다. 오늘 이 거대한 파티의 누구보다 눈부셨던 남자는, 제대로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내 얼굴선을 그의 손끝으로 살짝 그렸다.
“그럼 됐어. 끝나면 연락하고.”
난 마지막까지 션이 나를 어떻게 눈에 담는지 제대로 마주하지도 못하고 거의 도망치듯 회장을 빠져나왔다. 그제야 목에 딱 맞는 보우 타이가 갑갑하게 느껴진 건 착각만은 아닐 거다. 어딜 가나 사람이 있는 곳에서 한참을 헤매던 나는 회장과 꽤 떨어진 작은 휴게실을 발견했다.
난 그곳에서 급하게 물을 벌컥벌컥 들이켠 다음 곧바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지금 장난합니까?!”
-하핫. 뭘 그렇게 화를 내고 그러시나.
“이제 정말 멋대로 구시는군요. 대체 여길 왜…!”
-난 박, 자네가 하라는 대로 했지 않나. 전화 대신 문자 하라고 한 건 그쪽이었고. 오히려 이렇게 갑자기 전화라니. 속이 다 떨리는군.
솔직히 조금 과민반응일지도 모른다. 나도 안다.
하필 션과 단둘이 함께 있을 때 연락이 와서 신경질적으로 굴고 있다는 자각 정도야 한다. 그래, 이건 어쩔 수 없는 배신자의 숙명 같은 거다. 션 스펜서의 눈앞에서 저 사내와 마주치는 게 두려워진 거지.
닉 코빗은 그런 나를 손바닥 위에 올려 두고 있다는 듯 낄낄대며 말을 이어 갔다.
-뭐. 나라고 사람들 눈에 띄고 싶은 건 아닌데.
“대체 왜 만나자는 건데요?”
-농담이었는데?
아. 신이시여. 진짜 죽여 버리고 싶다.
“……뭐요?”
-아니, 우울하게 집에 처박혀서 휴대폰을 보는데, 우연히 발견한 자네 신수가 워낙 훤하길래 안부나 물을까 싶기도 했고.
사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형사가 이 호텔에 있지 않을 확률이 더 높다는 것쯤이야 뻔했다.
션 스펜서가 요새 묘한 염문을 뿌렸던 동성의 동료 배우 팔짱을 끼고 자선파티에 나타났으니, SNS가 됐든 찌라시 블로그가 됐든 어딘가에 내 멍청한 얼굴이 함께 박히는 것쯤이야 당연한 일이 아닌가.
애초에 초대장도 없을 닉 코빗 그가 이곳에 올 수 있을 리가 없다.
이건 그저 경고다.
션 스펜서와 시시덕대며 단물에 젖어들지 말라는, 뭐 조금쯤은 재미 삼아 던졌을지도 모를 경고 말이다.
“그쪽을 알게 된 걸 이미 후회하기 시작했으니까 두 번 다시 이런 수작 걸지 마시죠.”
-이봐. 박….
나는 형사의 말이 다 이어지기도 전에 전화를 끊어 버렸다.
정말 끝내주게 기분이 좋은 밤이었다. 이제껏 단 한 번도 소속감을 느껴 본 적 없었던 삼엄한 성문을 근사한 파트너와 함께 보란 듯이 지나가기도 하고, 그 안에서 좋은 사람과 웃고, 떠들고.
…어차피 그 모든 게 한여름 밤의 꿈처럼 잠깐 머물렀다 사라질 내 옷이 아니었다는 걸 벌써 알려 줄 필요는 없지 않나.
적어도 오늘 하루 정도는 맘 편하게 있고 싶었는데!
마음속 깊은 곳에서 싹튼 무언가를 참지 못하고 닉 코빗에게 먼저 연락한 건 나였다.
그러니 이런 투정 따위는 감히 혼자 남겨진대도 입 밖으로도 꺼낼 수 없는 것임을 안다. 대체 무슨 염치로 그런단 말인가.
난 기껏 한참을 만져 세팅한 머리를 신경질적으로 쓸어 올렸다.
하지만 안 풀리는 인간은 뭘 해도 안 된다고, 이런 잠시간의 조용한 자책도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오- 그래. 역시!”
조용했던 이 앞 복도가 갑자기 익숙한 누군가의 목소리로 가득 찼다.
“저번에도 여기가 비어 있었다고.”
난 그 목소리의 주인이 누군지 깨닫자마자 나도 모르게 허둥지둥하다 두꺼운 커튼이 달린 발코니 쪽으로 반쯤 뛰다시피 움직였다. 조금 삐끗해서 넘어질 뻔하기는 했지만, 그건 꽤 현명한 선택이었다.
“자네도 한잔할 텐가, 션?”
“됐습니다.”
“오늘은 운전사까지 데리고 왔지 않나. 거 너무 매정하게 굴진 말게나.”
콧노래까지 부르는 데이비드 밀러와 오늘 밤 내 파트너 션 스펜서는, 지금 이 순간만큼은 가장 보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었으니 말이다.
너무 놀라서 심장이 뛰다 못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사실 따지고 보면 굳이 숨을 필요도 없었는데, 이미 늦었다. 이래서 죄를 짓지 말고 살라는 걸지도 모른다. 나는 왠지 입 밖으로 한심한 소리가 나올 것 같아 입을 틀어막은 채로 몸을 최대한 웅크렸다.
“아무리 자네라도 말이야, 이런 자리에서 그렇게 통 크게 수표를 쓰진 말라고. 앞으로 뭔 일만 있으면 자네에게 모금통을 들고 달라붙을걸.”
술과 얼음이 서로 듣기 좋게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보아하니 그 미친 기부의 여파로 저 두 사람도 회장에 쭉 있지 못하고 잠시 도망 나온 모양이었다. 션은 낮은 한숨을 토해 내더니 아주 느릿느릿 대답했다.
“그렇게 바보는 아닙니다.”
“여기서 혼자 40만 달러를 써낸 것만으로도 이미 바보일세. 하하핫!”
…우와. 이 와중에도 진심으로 동의를 표하고 싶은 말이다. 하지만 이어지는 밀러 감독의 말은 내 얼굴에서 웃음기를 싹 가시게 하기 충분했다.
“이선 때문이지?”
“아뇨.”
“왜, 이번엔 또 뭐 때문인가.”
고맙게도 션은 밀러 감독의 말을 곧바로 부정해 줬지만, 뭐 전혀 믿는 기색은 아니다. 내 파트너 역시 그걸 깨달았는지 더는 변명을 덧붙이는 것 대신 밀러가 건네준 위스키를 한 모금 마시는 쪽을 택했다.
“솔직히 좀 의욀세.”
밀러의 눈은 무언가를 회상하듯 가늘어졌다.
“그 가엾은 친구가 몇 번이나 이야기했을 땐 듣는 척조차 하지 않았었는데 말이야.”
왠지 익숙한 대화 같다고?
그래, 이렇게 발코니에 찌그러져 숨어 엿듣는 망할 순간에 드디어 도착한 걸 축하한다.
“인제 와서 하는 말이네만 애초에 처음부터 잘해 주면 좀 덧났나 그래. 이렇게 될 거 그 친구가 하는 말도 좀 귀 기울여 들어 주고 말이야.”
“처음 만난 날부터 동공이 반쯤 열린 채로 와서는 ‘이야, 진짜 쌩 도련님 오셨네!’ 하는 사람을 대체 어떻게 좋아할 수 있습니까? 솔직히 데이브, 당신도 좀 대책 없었잖습니까.”
션 스펜서의 판정승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웬만해서 말로 밀릴 일 없던 저 괴짜 영감이 으하하, 하고 곤란한 듯 웃을 리가 없다.
“뭐……. 그야 어쩔 수 없지만. 그래도 재능 하나는 확실하지 않았나.”
“이 도시에서 바라노프 그 사람만 재능 있는 건 아니죠.”
“그때 션 자네는 아니라고 박박 우겼지만, 생각보다 말도 잘 통했었고.”
“전혀요!”
장담컨대 션 스펜서와 네스 바라노프는 션 그가 말했던 것보다 더 안 맞았던 것이 분명하다. 내 그럴 줄 알았지. 하지만 한편으로는 션의 저런 뚜렷한 감정 표현을 듣고 있자니 왠지… 상황과는 어울리지 않는 태평한 안도가 몰려오기도 한다.
저렇게 말하는 걸 보니 그냥…… 평범한, 조금 안 맞는 친구 같지 않나. 사실 나와 션 스펜서 역시 그렇게 잘 맞는 인간상이라고는 보기 힘든데 말이다.
나는 문자로도 모자라 두 사람의 은밀한 대화를 엿듣는다는 죄책감과 그 내용이 주는 왠지 모를 속 시원함 사이에서 손톱만 잘근잘근 깨물었다.
“그럼 대체 어쩌다 생각이 바뀐 겐가?”
“무슨 생각 말입니까.”
이어진 말에 심장이 바닥 밑으로 떨어질 줄도 모르고 말이다.
“자네, 박 군을 정말 끔찍하게 싫어하지 않았나.”
“…….”
“박만큼은 절대로 상대 배역으로 못 앉힌다고 바라노프 그 친구와 매번 싸워 놓고 말이야.”
땅에 뒹굴어 잔뜩 모래가 묻은 심장을 두 손으로 있는 힘껏 쥐여 짜내는 느낌이었다. 익숙한 낮은 한숨 소리가 들렸다.
“…그럼 데이브. 당신은 왜 그랬습니까?”
호텔의 화려한 조명을 반사하는 빛, 거기에 바람에 살랑이는 커튼까지 더해져 션의 표정은 잘 보이지 않았다. 조금은 피곤한 듯한 눈빛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허어. 거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바라노프가 그렇게 되자마자 괜찮은 다른 배우들의 오디션은 다 퇴짜를 놓고… 일부러 바커와의 미팅을 잡지 않았습니까.”
“…….”
“당신도 이선 그를 그렇게 반기지는 않았던 거로 기억하는데요.”
데이비드 밀러는 한동안 대답이 없었다. 나라면 당장 그의 목을 잡고 그 어떤 말이라도 구걸할 것 같은데, 션은 그를 재촉하지 않고 술만 몇 모금 더 삼켰다.
그 끔찍한 침묵이 얼마나 더 계속됐을까.
밀러 감독은 그 어떤 감정의 고저도 짚어지지 않는 기묘한 목소리로 그의 진심 한 자락을 내보였다.
“글쎄. 그렇게 하면 죽은 그 친구에게 조금 덜 미안할까 싶었을지도 모르겠네.”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그래, 무언가가 내 목을 조르고 있는 것만 같다. 덕분에 나는 어떤 말도, 어떤 한숨도 토해 낼 수 없다.
“션. 그날 밤은….”
“…….”
“그날 밤의 자네는.”
데이비드 밀러가 힘주어 말을 잇는다.
“그저…… 어쩔 수 없었던 걸세. 그렇게 생각하게나.”
“…그러면 뭔가 바뀝니까, 데이비드?”
“최소한 자네 마음이라도 편해지겠지.”
유리잔 안의 얼음이 부딪친다. 션은 대답 대신 그렇게 한참이나 제가 손에 쥔 호박빛 액체를 내려다봤다. 언제나 듣기 좋다 생각했던 낮은 목소리가 귀에 걸린 건, 몇 초 뒤인지 몇 분 뒤인지 모르겠다.
난 이미 평범한 시간 감각을 잃었다.
“마음.”
“…….”
“마음이라.”
“이보게. 션-”
“참 좋은 위로네요.”
복도 밖에서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그들이 기분 좋게 걸어오는 발소리가 들린다. 감독과 배우의 은밀한 밀실 회담도 그걸로 끝이었다.
“이런. 나가 봐야 할 것 같군.”
“……네. 그러죠.”
슬쩍 본 션은 제 휴대폰을 확인하고 있다. 아마 내 연락을 기다리는 것이겠지.
나는 언제나 반듯하고 꼿꼿했던 그의 뒷모습이 조금은 느슨해진 것 같다고 생각하며 축제처럼 밝고 소란스러운 바깥으로 시선을 돌려 버렸다.
내가 웅크린 이곳이 땅이 맞을까. 왠지 붕 떠 있는 것도 같고, 아니면 이미 무너지는 터라 발 디딜 곳이 없는 것도 같다.
* * *
#98. 낡은 집 (저녁)
유독 붉게 타오르는 노을이 낡은 판잣집을 가득 비춘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른 S가 도착한다. 시뻘건 바깥과는 달리 컴컴한 실내. S는 그 오래된 기억 속에 있는 그 낡은 문을 열고 들어간다. 무언가 바뀌었기를 바라는 눈. 이미 이 모든 것이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꿈인지, 현실인지, 아니면 그 무엇도 아닌지.
급하게 판잣집의 가장 깊숙한 거실까지 거의 기어가듯, 휘청거리면서도 멈추지 않고 발을 옮기는 S.
이윽고 S는 마주한다.
S
…안 돼.
모든 것은 여전하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S
(미친 사람처럼 중얼거리며)
안 돼. 안 돼. 안 돼, 안 돼, 안 돼, 안 돼.
…왜 아무것도 바뀌지 않은 건데!
안 돼, 안 돼, 안 돼, 안 된다고.
붉은 노을에 반쯤 걸쳐진 장신의 남자가 웅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