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Up, sword, and know thou a more horrid hent.
거두어라, 칼이여. 보다 끔찍한 순간을 기다리자.
[이선. 32년 전 너를 처음 병원에서 만났을 때가 여전히 생생하구나.
너는 작지만 건강한 아이였어. 사실 네 엄마와 나는 네가 소리에 반응하고 말할 수 있을 거라는 말을 듣고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단다. 그런데 그렇게 주먹만 했던 네가 이제는 장성해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이건 뭐 거의 행운의 편지다.
나는 잘 떠지지도 않는 눈을 깜박이며 아버지의 문자를 더듬더듬 읽었다. 누군가는 내일모레 예순인 아저씨가 주책이라고 할지 몰라도, 난 아버지의 이런 성격이 한 번도 부끄러웠던 적 없다.
짧고 굵게 ‘와우 이 발랑 까진 놈’이라는 메시지 하나만을 보낸 어머니는 또 어떤가.
너무 착해서 남 싫은 말 한마디 못하는 우리 아버지가 어머니 같은 사람을 만나지 않았으면 인생깨나 고달파지셨을 거다.
“뭐 해?”
나는 내 목덜미로 가볍게 떨어지는 부드러운 감촉에 살짝 고개를 젖혔다. 그러자 눈이 마주친 남자가 살짝 나른하게 풀어진 눈을 희미하게 휘며 안녕, 하고 인사했다. 그는 이 저택을 산 이후로 처음 이 동관에서 잤다고 했다.
“아버지 문잔데. 볼래?”
내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뒤에서 날 끌어안고 잤던 남자가 좀 더 본격적으로 날 덮쳤다. 침대에서 나보다 더 큰 누군가가 내려다보는 건 절대 익숙해지지 않을 줄 알았는데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이제 이것도 슬슬 편안해졌다.
가벼운 면바지 하나만 걸친 션의 따뜻한 몸이, 긴 팔이 나를 꼼꼼하게 얽맸다.
“…굉장히 다정다감한 분이시네.”
“가끔은 좀 대단할 정도로. 어렸을 땐 아버지를 흉내 내기도 했어.”
“지금은?”
“뭐, 보시다시피.”
션이 며칠간의 짧은 휴가를 얻은 동안 우리가 이 저택에서 한 일은 꽤 단순하다.
같이 식사를 하고, 정원을 산책하다가- 눈이 마주치면 키스하고, 그러다가 입술이 닿는 대로 움직였다. 가끔 대단한 화제 없이 서로에게 기대 있을 때도 있었지만, 그와는 언제나 할 이야기가 많았다.
가족 역시 그 많은 화제 중 하나다.
그는 굳이 몇몇 단어들을 어려워하지 않았고, 나는 그런 그에게 걸음을 맞췄다. 심지어 션 그는 어머니의 위용담을 몇 개 들은 후에는 우리 가족에게 꽤 관심이 많아지기까지 했다.
교회 사람들과 대판 싸운 후 세탁소 앞에 ‘한국 교민 사절’을 붙여 두고 장사하다가 몇 번인가 인종 차별로 신고를 받은 뒤 온갖 자료를 모아 몇몇 사이 안 좋은 사람에게는 기어코 접근금지 신청을 얻어 내고 말았다는 대목을 들었을 때쯤엔, 정말 입까지 살짝 벌리고 감탄했을 정도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어머니와 이모가 없었다면 이 집안의 남자들은 하나같이 급류에 휩쓸려 가기 딱 좋은 세렝게티의 톰슨가젤들이었다.
나는 내 목덜미에 입을 맞추다 슬슬 단추를 위에서부터 하나씩 풀기 시작한 남자의 단단한 등 근육을 손으로 그리면서 물었다.
“우리 뉴욕 촬영이 언제지. 두 달 뒤?”
“대충 그 정도.”
아침에 눈을 뜨면 션 스펜서가 한 침대 위에서 내 가슴에 입 맞추며 낮게 대답하는 날이 오리라고는 꿈에도 상상 못 했었는데.
“뉴욕 진-짜 가 보고 싶었어.”
“별거 없어.”
“자유의 여신상! 센트럴 파크! 소호! 헬스 키친!”
“130년쯤 된 누구나 아는 조각상, 그저 세로로 긴 공원, 바로 이 앞 로데오 드라이브에 있는 것들의 반복, 식당가.”
“…….”
얘는 뉴욕 출신이면서도 뉴욕을 썩 좋아하지 않는다. 아니 이 정도면 싫어한다고 단언해도 이상하지 않다.
“너 원래 이렇게 비관적이었냐?”
“그럼.”
조금 입을 삐쭉이며 물었더니 션이 작게 웃으며 장난스럽게 이마를 맞댔다.
“난 미시간이 궁금해. 특히 디트로이트.”
“…오….”
“그 반응은 뭐야.”
“넌 살면서 ‘디트로이트 관광객’이라는 표현을 들어 본 적 있어?”
“마찬가지로 굉장히 비관적이신데요, 박.”
그대로 돌려받은 문장에 솔직히 할 말이 없어졌다.
그래. 우리는 올해의 네거티브 어워드 수상을 노리고 있는 미친 커플이다.
나는 션의 키스를 받으면서 그의 어깨부터 허리까지 보란 듯이 손을 움직였다. 그러자 녀석은 감았던 눈을 살짝 뜨며 희미하게 웃는다.
나보다 키도 덩치도 훨씬 큰 남자에게 이런 말을 붙이는 게 이상할지도 모르지만, 저 미소는 정말 예쁘다는 말 외로는 설명이 안 된다.
게다가 가면 갈수록 느끼는 건데, 션 스펜서는 정말 사람을 좋아한다.
그건 꼭 이런 스킨십을 두고서만 말하는 게 아니다.
틈만 나면 조용히 어딘가에 처박혀 있는 걸 선호하는 나와는 달리,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더라도 복작복작한 사람들 사이에 있고 싶어 했다.
생각해 보면 제 주변 사람들의 이름을 두고 조금이라도 줄일 구석이 있으면 꼭 바꿔 부르는 것도 그렇다. 데이브도 그렇고, 가비도 그렇고… 아, 저번에 다니엘 바커에게 ‘대니’라고 부른 건 또 어땠나.
나는 내게로 자꾸 애들 같은 입맞춤을 쪽쪽, 이어 가는 부드러운 입술을 느끼며 창문 밖으로 나른하게 쏟아지는 아침 햇살을 슬쩍 봤다.
오늘은 늦은 오후 촬영 예정이니 못해도 몇 시간은 더 푹 자도 된다.
“흠.”
아니면, 다른 쪽을 선택해도 되고 말이다.
일어난 지 얼마 안 된 터라 답지 않게 머리가 부스스한데도 그게 지저분해 보이기는커녕 일부러 꾸민 것 같은 남자가 보란 듯이 앞에 있는데 그냥 두기도 좀 아깝지 않나.
“……왜?”
내 시선이 자신의 수면 가운 뒤에 있는 가슴팍에 노골적으로 꽂혀 있는 걸 뒤늦게 눈치챈 션의 입에서 심히 조심스러운 물음이 흘러나온다.
슬쩍 웃으며 녀석의 말랑말랑한 귓불로 손을 옮기자 남자의 고개가 내 손이 닿는 곳으로 무의식중에 기울어진다.
내가 올라탄 남자의 몸에서 느슨하게 힘이 빠지는 순간을 정확하게 짚어 낸 것 역시 그때였다.
“-이, 이선?”
“으응.”
나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순식간에 자세를 역전했다.
순식간에 내 아래에 누운 남자가 눈을 깜박이는 것마저 잊은 채 올려다보는 표정을 여러분들과 같이 보고 싶기도 하고, 나 혼자 보고 싶기도 한데 이 심적 갈등을 어쩌면 좋을까. 나는 션이 걸치고 있는 실크 가운의 앞섶 사이로 천천히 손을 밀어 넣었다.
“뭐……해?”
“뭐 하는 거 같아.”
탄탄하게 단련된 남자의 몸이 순간 긴장으로 확 움츠렸다가 아닌 척 다시 가슴을 편다.
다소곳이 얼어붙은 채로 얌전히 눈만 데굴데굴 굴리는 체격 좋은 남자를 내려다보는 뿌듯함은 정말 뭐라 설명하기 어렵다. 잘 때마다 꼬박꼬박 남색 실크 가운을 걸치고 자는 도련님이 이 얼굴에 이 몸이라니 정말 너무하지 않나.
나는 그를 보며 한번 히죽 웃고는 내 밑에 얌전히 누워 있던 녀석의 다리를 가르고 몸을 붙였다.
“-…저, 잠, 깐만, 이선!”
이미 션의 얼굴에서는 나른하게 어렸던 옅은 잠기운 같은 건 완전히 날아간 지 오래다. 나는 그를 보면서 속으로 거의 주술을 외듯 저 자신에게 중얼거렸다.
웃으면 안 된다, 이선. 웃으면 안 돼. 광대 잡아라.
인내 끝에 다디단 과실이 오리니.
나는 바짝 얼어 있는 그의 가운의 매듭을 천천히 풀면서 최대한 ‘어른스럽게’ 연인의 말을 받았다.
“왜. 네가 내 다리 벌리는 건 되고, 내가 네 다리 벌리는 건 안 돼?”
예쁜 눈동자가 어떻게 얌전히 자리 잡지 못하고 난리가 났다.
“응? 션. 나만 너한테 대 줘야 하나?”
“…아니…. 그건.”
“그건?”
“아닌……데.”
어우. 이번에는 좀 위험했다.
나는 푸흡, 하고 터질 뻔한 웃음을 잡아 벌린 그의 발등에 고개를 깊게 숙여 입 맞추면서 간신히 숨겼다.
솔직히 얼굴이 저렇게 잘생겼으면 발이라도 좀 못생겨야 균형이 맞을 텐데, 녀석은 발 곳곳에 운동으로 생긴 굳은살마저도 일부러 새겨 만든 것 같았다.
“나 꽤 잘할 거야. 걱정하지 마.”
이제 션은 한쪽 팔로 눈을 눌러 가린 채로 대답조차 없다.
나는 그의 발등부터 키스하며 쭉 뻗은 종아리로 입술을 옮겼다.
그의 다리는 내심…… 조마조마하게 속을 졸였던 것보다는 훨씬 더 매끈했다.
아니, 오히려 예닐곱 살 때부터 시작되어 그의 청소년기 전체를 지배했을 일 따위는 애초에 있지도 않았던 것처럼 깔끔하기만 했다. 덕분에 왜인지 모를 억울한 마음과 기묘한 안도가 뒤엉켜 속을 들끓게 한다.
나는 그의 종아리에서 무릎으로, 또 허벅지 위로 입술을 떨어트리다가 반쯤 아침 기상을 한 그의 중심 앞에서 일부러 더운 숨을 흘렸다. 그러자 눈앞에 두고 보면서도 종종 비현실적인 생각마저 드는 잘 빠진 복근이 먹음직스럽게 물결쳤다.
인제 보니 얼굴부터 시작된 붉은 기가 아예 온몸으로 번질 기세다.
슬슬 그만 놀릴 때다.
“장난 끝.”
여전히 내 쪽을 보기는커녕 제 다리 사이에 몸을 붙이고 앉은 내게 손가락 하나 대지 못하는 션의 어깨가 작게 움찔했다. 심지어 그는 내 말을 곧장 이해하지도 못했는지 몇 초간 그대로 굳어 있다가 한발 늦게 눈을 가렸던 팔을 내리고 얼떨떨한 목소리로 되묻기까지 한다.
“……뭐?”
“그냥 장난 좀 친 거라고.”
나는 그의 앞섶을 손으로 노골적으로 훑으며 “안 잡아먹으니까 그만 떨어.” 하고 이어 말하는 것으로 마지막 쐐기를 박았다.
그러자 일자로 굳어 얼어 있던 남자의 입에서 뒤늦게 어울리지도 않는 욕이 흘러나왔다.
“…젠장….”
“귀엽긴. 긴장 좀 하셨나 봐?”
“도련님 취급하지 마.”
“이제 말 안 해도 알고, 우리 자기는 똑똑하기도 하지.”
솔직히 살면서 ‘babe’ 같은 단어는 사귀던 누구에게도 해 본 적 없는데, 얘는…… 첫 연애라니까 특별 서비스다. ……뭐. 하다못해 부모님한테도 들어 본 적 없을 거 아닌가? 엄밀히 따지면 나도 그건 마찬가지지만, 어쨌거나 못 들어 봤을 말 좀 해 준다고 손해 볼 게 뭐가 있겠나.
더군다나 그 별거 아닌 호칭에 순식간에 뺨이 벌게져서 좋아하는 티 엄청 나는데 아닌 척 툴툴대는 남자에게는 조금 헤퍼져도 상관없을 거다.
나는 그런 션을 보면서 피식 웃다가 하도 오래 입어 조금은 늘어진 잠옷용 티셔츠를 올려 벗었다.
“이대로 끝내긴 아쉬운데 저번에 끝까지 못 해 본 자세로 해 볼까.”
“…지금?”
“섹스는 밤에만 하는 거라고 누가 그러든.”
“…….”
“왜. 아침부터 발정 나서 달려드니까 좀 식어?”
대답쯤이야 듣기 전부터 알 수 있다.
내 벗은 몸을 보는 게 처음도 아니면서 새삼스러울 정도로 따라오는 시선만큼 뻔한 게 어디 있겠나. 굳이 모닝 섹스의 좋은 점을 찾자면, 어둑한 그림자를 쫓아 섹스할 때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무엇 하나 빠짐없이 눈에 보인다는 거다.
그의 다리 위로 올라타며 키스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허리를 끌어안으며 내 허리부터 엉덩이 깊은 사이의 골까지 손을 움직이는 남자가 순진하리만치 열기를 감추지 못하는 눈이라든지, 목에 팔을 휘감아 끌어안자 그 위로 옅게 소름마저 돋은 귀여운 반응이라든지, 뭐 그런 거 말이다.
“콘돔 네 침실에 있어.”
“아, 그럼-”
“그러니까 오늘은 그냥 젤만 쓰자.”
나는 고용인을 부리는 게 세상 누구보다 익숙한 남자가 집사에게 콘돔 심부름을 시키려는 걸 자연스럽게 잘라 막았다. 가브리엘 씨가 내 이 숭고한 배려를 알아주셨으면 좋……, 아니다, 모르는 게 모두의 평화를 위한 거지.
“안에다 싸는 거 참을 수 있겠어?”
나는 벌겋게 익은 션 스펜서의 귀를 따끔하게 깨물면서 장난스레 말을 이어 갔다.
“안에다가 싸면 그거 빼 줘야 한다던데, 귀찮은 일 없게 하자? 아니다, 네가 할 거니까 상관없으려나.”
“-너 정말…….”
술술 이어지는 야한 농담에 뭐라 날 탓하려는 남자의 입을 자연스럽게 키스로 막자, 결국 어쩔 수 없다는 듯 순순히 입을 벌리고 화답하는 혀가 이제는 퍽 능숙하기까지 하다.
하지만 션, 그가 익숙해진 건 키스만이 아니다.
“흐읏….”
내 연인이 된 남자는 마디마디가 단단한 손가락으로 민감하고 연약한 부분을 건드리는 데도 제법 익숙해졌다. 심지어 종종 차가운 채로 쓰고는 했던 젤을, 이제는 자신의 체온으로 뜨끈하게 한 다음 펴 바르는 여유까지 생겼다.
난 여전히 젤이 처음 내 뒤를 적시는 순간에는 적응하지 못했는데 말이다.
엉덩이의 골 사이가 미끌미끌한 점액으로 부드럽게 적셔지고, 꽉 다물어진 틈새를 단단한 손가락이 천천히 원을 그리듯 간지럽힌다.
손가락이 하나. 두 개에서 또 세 개까지.
맨 처음 그의 무릎 위에 이렇게 앉았을 땐 고작 검지 한 마디에 정신 못 차리고 무너졌으면서 이제는 뒤를 늘리는 손가락 개수가 늘어나는 시간마저 꽤 줄었다.
아니, 시간이 줄기만 했을까.
이제는 퍽 건방질 만치 노골적으로 내벽을 휘젓는 그의 손 때문에 허리를 들썩이자 힘 빼야지, 하고 낮게 꾸중하는 목소리가 조금은 얄밉기까지 할 정도다.
“-넣어도 되겠어?”
누구보다 내 뒤가 흐물흐물하게 풀어졌을 것을 잘 아는 남자다.
나는 대답 대신 그의 목을 더 세게 끌어안는 쪽을 택했다. 몸 안으로 들어오는 그 무식하리만치 든든한 부피감을 아는 구멍이 벌써 깊은 쪽부터 움찔대는 것 같았다.
하지만, 아무리 익숙해진 게 많다 한들 션 스펜서는 이 모든 게 처음인 남자였다.
“…흐읍…!”
앉은 자세로 삽입하는 게 서툰 연인이 곧장 내 안으로 그의 것을 밀어 넣지 못하고 젖다 못해 닿기만 해도 질척대는 소리를 내는 골 사이로 잔뜩 단단해진 기둥을 문지르는 감각이라니.
어쩌면 그건 곧장 밀어 넣는 것보다 더 자극적이었다.
나는 기대감에 차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벌름대는 구멍을 션이 볼 수 없어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한숨 섞인 목소리로나마 간신히 입을 열었다.
“션. 천천히, 잡고…, 그래, 그렇게… 끝부터 맞춰.”
“아프진 않아?”
“……어. 괜찮아.”
무릎 위에 다리를 벌리고 앉아 잔뜩 젖다 못해 흐물흐물하게 풀어진 구멍으로는 남자의 성기를 받고 있으면서 지나간 연인들의 생각을 하는 게 매너 없다는 건 알지만, 왠지 이 순간만큼은 그 뒤늦은 회상을 막을 수가 없다.
……나는 이제껏 누군가를 안을 때 이렇게 상대의 컨디션을 끔찍하게 생각했던가?
분명 정사 후 “오늘 정말 좋았어.” 하는 말을 듣는 괜찮은 섹스 파트너였다는 자신은 있지만, 지금 내 안으로 자신의 흥분한 기둥을 밀어 넣는 남자처럼 섬세한 사람이었으리라는 확신은 얼른 들지 않는다.
흐물흐물하게 벌어진 구멍으로 천천히 굵은 기둥이 밀려 들어오기 시작한다. 나는 그 빠듯한 부피감에 바짝 마른 입술을 혀로 훔치면서 저도 모르게 연인의 허리를 허벅지로 꽉 얽맸다.
하아, 하고 터진 한숨은 내 입에서 나온 것인지, 아니면 그의 입에서 나온 것인지도 잘 모르겠다. 수치심조차 마비시키는 환한 아침의 빛이 흥분으로 불긋하게 물든 연인을 한눈에 들어오게 했다.
나는 거의 무의식중에 그의 숨을 삼키듯 키스하며 보란 듯이 매달렸다.
분명 귀여울 만큼 키스를 좋아하던 건 그였는데, 갈수록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그에게 혀를 섞고 싶어 하는 건 내 쪽 같다.
배 안을 꽉 채우다 못해 마치 턱 끝까지 치밀어 오른 것처럼 빠듯한 부피감에 숨을 헐떡이며 하는 키스가 머리 한구석을 완전히 녹여 버리는 것만 같았다. 뒤를 꿰뚫은 것과는 다른 물컹하고 뜨거운 살덩이가 입안을 간지럽게 오갈 때면 무릎이 옅게 튀었다.
…농담처럼 말했는데, 정말 지금의 난 머리 어딘가가 사고를 멈춘 채로 발정이 난 것일지도 몰랐다. 이 훤한 아침부터 머리끝까지 올라 흥분한 채로 어쩔 줄 모르는 지금의 나는, 정말 그 노골적이고 음탕한 단어로밖엔 설명이 안 된다.
한계까지 벌어진 구멍이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성기를 삼킨 상태로 얼마나 혀를 섞었을까.
잠시 입술이 떨어지며 더운 숨이 훅 뺨에 걸린 순간, 흥분으로 갈라진 목소리를 한 연인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런데, 이선.”
“…으응?”
“이 자세는, 원래……, 후우, 원래 이렇게- 조이는… 건가?”
안다.
정말 음담패설의 목적 따위는 전혀 없는 순수한 질문이었을 거다.
하지만 때로는 작정한 음담패설보다 저런 멋모르고 한숨처럼 내뱉는 말이 더욱 야한 법이다. 게다가 타이밍도 못됐다.
서로의 작은 떨림마저 고스란히 전해질 정도로 빈틈없이 서로에게 매달린 때에 저런 말이라니.
그 열기로 가득한 질문을 이해한 순간 나 자신마저 깨달을 정도로 그의 성기를 세게 물어 버리고 만 건, 정말 내 자의라고는 단 일 퍼센트도 없는 행동이었다. 덕분에 작게 미간을 찌푸리고 숨을 날카롭게 들이켰던 연인은 내 대답을 듣기도 전에 답을 알았다는 눈이 됐다.
“아하.”
“…….”
“꼭 원래 그런 건 아닌가 보군.”
흥분과는 다른 열이 얼굴로 훅 치밀어 오른다.
제일 미치겠는 건, 션이 내 척추를 따라 손가락 끝을 움직이며 그 예쁜 눈을 살랑살랑 접을 때면 자꾸… 물고 있는 그의 성기를 움찔움찔 잡아당기듯 물어 먹는 내 구멍이라는 거다.
“…조용히 하고 빨리…, 박기나 해.”
“괜찮겠어? 지금 엄청 깊게 들어간 거 같은데.”
솔직히 조금만 더 여유가 있었다면, “나도 알아, 이 새끼야!” 하고 욕했을 거다.
하지만-
“넌 조금만 흔들어도 엉엉 울잖아. 손도 안 댔는데 앞으로는 정액까지 줄줄 싸면서.”
“…….”
“아침부터 울리는 건 도리가 아닌 것 같은데. 이를 어쩌나.”
저 빌어먹을 정도로 태연하게 이어진 말 앞에서, 난 방금도 또 엄청…… 조인 거 같다.
진짜 이거 어떻게 해야 해?
순진무구 동정남이 자진해서 머리가 찡할 정도로 야한 농담을 이어 가게 한 건 분명 내 탓이기는 한데, 이건 정말…… 반사적인 거라 어쩔 수 없는 거라고!
나는 억울함에 녀석의 목덜미를 세게 깨물었다. 물론 그 허튼 반항에는 “아야, 아프잖아.” 하고 웃음기마저 머금은 문장만이 돌아왔을 뿐이다.
“제, 제대로 넣지도 못했으면서 잘난 척은.”
“그래서 지금 배우고 있잖아.”
“…….”
“알았어. 이제 안 놀릴 테니까, 조금만… 힘 빼 볼래.”
망할.
더 쪽팔리다.
하지만 민망한 줄도 모르고 자꾸 뒤로 녀석의 기둥을 내벽 가득 머금고 꽉꽉 조여 대고 있는 것 역시 내 쪽이 분명하다. 나는 작게 심호흡하면서 있는 대로 그의 성기를 물고 있는 구멍에서 힘을 빼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후우우, 하고 긴 한숨과 뒤에서 힘을 빼며 깊게 삽입된 허리를 살짝 들었던 순간.
“-흐, 흐아앙!”
나쁜 새끼.
비겁한 새끼.
정정당당한 섹스 따윈 모르는 새끼!
최대한 힘을 빼고 조였던 것을 느슨하게 풀었던 순간에 곧장 깊게 퍽, 하고 그 두꺼운 기둥을 곧장 깊게 쑤셔 박아 버리는 건 정말 세상 교활한 행동 아니냐고!
난 내 입에서 튀어나온 말도 안 되는 소리에 순간 입을 틀어막았다.
하지만 빌어먹을 덩치만큼 말도 안 되는 힘을 가진 남자가 이 이상 깊게 들어갈 수조차 없을 정도로 깊게 처박힌 성기를 앉은 채로 짓누르고 휘저어 대는데, 도저히…… 쏟아지는 자극을 피할 구석이 없었다.
“히익, -아, 잠, 흐윽, 잠깐만, 잠깐, 마안…!”
몸이 퍽퍽 부딪칠 때마다 젤에 푹 젖은 엉덩이가 그의 허벅지와 부딪치며 낯부끄러운 소리가 귀를 때렸다.
까칠한 음모가 닿을 정도로 깊게 삽입된 채 느끼는 부분을 단어 그대로 콱콱 찍어 누르다 넣은 그대로 허리를 돌릴 때마다 눈앞에서 스파크가 튀고, 숨 쉴 겨를조차 없이 목이 막힌다.
분명히 이 뒤로 느끼는 부분이 있다는 건 아는데, 그게 정확히 어느 지점인지는 모르겠다.
“아, 아아- 흐응, 하아앗!”
이 말도 안 되는 굵기의 기둥으로 뒤를 휘젓고 쑤셔 박으면, ‘스팟’ 같은 건 중요하지 않아진다. 그냥 짓누르고 때리는 곳마다 강제로 쾌감을 끌어내 버리니 말이다.
강제로 허리가 단단히 붙잡힌 채로 그가 움직이는 대로 흔들리던 나는, 곧장 침대 위로 비스듬히 눕혀져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다리를 활짝 벌린 채 한심한 소리를 쏟아 내다 급한 대로 그의 목을 끌어당겨 안았다.
빌어먹을 키스라도 하지 않으면 더 심한 교성을 내지를 것 같아서였다.
내 딴에는 급해서 한 행동이었건만, 아, 망할! 키스 애호가인 내 애인께서는 아마도 그 입맞춤에 배는 더 흥분하고 말았다.
“…우응, 음…!”
정말 단어 그대로 숨 막히게 다정한 키스와는 달리 완전히 따로 노는 하반신은 말 그대로 허리를 녹여 버릴 듯한 쾌감을 주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듯이 거칠게 안을 쑤셨다가, 삽입된 채 뭉근하게 휘젓고 짓눌렀다가를 멋대로 반복한다.
그러다 점점 속도가 세게 붙고 내 입안을 멋대로 범하는 혀에 반응조차 할 수 없을 만큼 허리가 튀고 발가락 끝이 확 오므라졌을 때-
“흐으, 후, …너어, 너….”
나는 정신없이 내 입도, 한계까지 열린 아래도 휘젓던 남자가 급히 성기를 빼내는 순간 젤과 섞인 정액이 주르륵 함께 딸려 나오며 허벅지 여기저기에 흩어지는 뜨끈한 감각에 저도 모르게 어깨를 부르르 떨고 말았다.
와.
남자 안에 사정하는 걸 뭐라고 부르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그건 정말이지 단계별 게이 섹스의 최종단계에 어영부영 진입한 느낌과 비슷했을 거다. 같은 사내에게 다리를 벌리고 엉덩이를 쳐든 채 삽입되는 거로도 모자라, 농담처럼 말했던 것처럼…… 저 안에 내지르게까지 할 줄은 몰랐는데.
“-너어, 그거 하나, 흑, 못 끊어?”
“…미안. 좋아서, 깜박해서…. 미안, 미안해.”
애초에 콘돔 없이 뒹굴자고 한 게 내 쪽인 건 차치하고, 열에 헐떡거리는 와중에도 앞뒤가 맞지 않은 변명을 쏟아 내는 당황한 미남을 보고 있자니 왠지 헛웃음이 터질 것 같다.
……저 잘난 션 스펜서가 느긋하게 야한 말을 늘어놓던 것과는 달리 어느 지점부터는 완전히 정신을 놓고 콘돔을 하지 않았다는 것마저 잊고 내게 매달렸다는 것도, 좀 그래.
나는 괜히 그의 이마에 콩, 하고 내 머리를 한 번 찧고는 여전히 살짝 가쁜 숨으로 “옆으로 와서 팔이나 펴.” 하고 작게 명령했다.
환하게 쏟아지는 햇살이 눈가까지 붉게 변한 연인의 흥분을 고스란히 비춘다. 사정감에 축 늘어진 몸을 단단한 근육에 기대자 걱정이 뚝뚝 떨어지는 낮은 목소리가 내 열감 가득한 한숨을 얼른 뒤따른다.
“미안. 정말 미안. …괜찮아? 안 불편해?”
“뭔가가 내 엉덩이골이며 허벅지에…… 잔뜩 있어.”
“…….”
“게다가, 하아, 배고프고, 졸려…. 맛있는 거 먹고 싶다.”
성욕 다음에 식욕, 그리고 수면욕이라니.
내가 생각해도 1차원적인 욕망에 휘둘리다 못해 잠식된 것 같은 문장의 연속이다.
하지만, 날 품에 안은 채 누구보다 부드럽고 조심스럽게 입술을 누르던 남자는 내 단순해 빠진 중얼거림에 곧장 반응했다.
“맛있는 거? 오늘 촬영 끝나고 밖에서 식사할래?”
“좋아. 그…… 뭐지. 산타모니카 아래에, 왜 그 그래피티 엄청 있고.”
사정 후 살짝 촉촉하게 땀이 어린 연인의 단단한 품에 파묻혀 눈을 감고 있다 보면, 정말 말도 안 되는 부유감이 전신을 지배한다. 그러다 보면 나도, 심지어 이 대단한 션 스펜서마저도 사람이니만큼 실수를 하고는 한다.
-뭐 예를 들면, 그 순간 이 저택의 집사장인 가브리엘 씨가 정중하게 두드리는 노크 소리를 놓친다거나.
“…크흠….”
……그의 작은 헛기침 소리를 못 듣는다던가 하는 게 그 대표적인 사례다.
우리는 문을 열고 들어온 집사가 침대에서 저만치 떨어진 문 앞에 깍듯이 서 있다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한 채 한가한 대화를 이어 갔다.
“베니스 비치.”
“맞아. 해리엇이 그쪽에 맛있는 식당이 새로 생겼다던데. -하아암.”
“그래. 거기로 가자. 이선, 자지 마. 혹시 모르니까 욕실 가서 바로 빼자. 응?”
“…5분만, 아니 10분만 더 이렇게 있을래….”
션은 내 어울리지도 않는 어리광에 대답 대신 다시 한번 키스하는 쪽을 택했다.
“--크흐흠!”
집사장 가브리엘 씨 그의 한계가 여실히 드러나는 헛기침 소리를 들었던 순간의 기분을 뭐라고 설명해야 생생하게 전달할 수 있을까.
집 앞에서 애인과 키스하다 부모님에게 걸린 고등학생이 된 기분, 뭐 그 비슷했다고나 할까? 비참하게도 이건 실제로 겪었던 일이다. 그런데 그걸 서른둘이 되어 그 이상의 상황으로 다시 겪을 줄이야.
나이가 몇이 되든 끔찍한 건 여전히 끔찍하다는 걸 이렇게 알고 싶지는 않았다.
혹시 ‘욕실 가서 바로 빼자’를 들었다면, 이 문장의 뜻을 의아하게 느낄 새도 없이 머리에서 지워 줬으면 좋겠는데.
“아. 이런. 미, 미안합니다! 노크한 줄 모르고!”
“……아닙니다. 제 결례였습니다. 하지만 지금부터 준비하셔야 늦지 않으실 것 같아서 그만. 정말 죄송합니다.”
나른하게 션의 품에 늘어져 있던 나는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허둥지둥 이불을 잡아당겨 급한 대로 몸을 숨겼다.
아무리 같은 남자끼리라고 한들 지금…… 그, 내 꼴이.
…특히 허연 것과 투명한 것이 서로 엉망으로 뒤섞여 흐르는 하반신이, 특히….
아니, 솔직히 이렇게까지 말하면, 최소한 나보다야 멀쩡한 쪽은 벌떡 일어나고도 모자라지 않나. 보통의 수치심이나 뭐 그런 걸 가지고 있다면 말이다.
하지만 이 예의 바른 집사의 망할 고용주, 션 스펜서는 달라도 정-말 달랐다.
‘당장 꺼져!’
나는 내 옆에서 움찔하기는커녕 미동조차 하지 않는 남자를 향해 눈을 부릅뜬 채로 필사적으로 벙긋댔다. 그런데 이 망할 애인 새끼는 그런 나를 물끄러미 눈에 담다가, 이내 공손하게 서 있는 자신의 고용인을 흘끗 바라보며 뜸을 들일 뿐이었다.
그다음은 더 기가 찬다.
짧게 한숨을 쉬더니 귀찮다는 듯 내 어깨에 턱을 괴고 내 허리를 끌어안은 채 도로 눕는 게 아닌가!
이런 상황에서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하나다.
“아프잖아.”
바로 이불 밑에서 은밀하게 진행하는 정확하고 신속한 니킥이다.
“하하, 하하핫, 하….”
“좀 너무한 것 같은데, 박?”
“…닥… 치고… 일어나라….”
어금니를 악물고 말한 문장에도 션은 나무늘보 뺨치게 느릿느릿 일어나며 침대 아래 끝자락에서 간신히 추락을 면하고 있던 제 가운을 어기적어기적 걸쳤다.
그다음엔 대충 턱짓하며 “씻고 나갈게. 간단히 요기할 것만 준비해 둬, 가비.” 하는데, 정말 가브리엘 씨가 없었다면 쟤는 나한테 목이라도 졸렸을 거다.
사실 뭐 여기까진 그렇다 쳐도 좋다.
어차피 다 알 만큼 아는 저택의 사람들 아닌가. 세상 싸늘한 얼굴을 하던 이들이 내가 그와 스캔들이 나고 나서부터 급격히 흐뭇한 눈으로 바뀌었던 것이 지금도 생생히 기억난다.
이 거대한 저택의 담을 넘은 다음 쏟아지는 관심이야말로, 진정한 장벽이다.
* * *
나는 가벼운 분장을 마치자마자 이제는 거의 습관적으로 이쪽을 향해 오는 남자에게 크게 손을 휘둘렀다.
“저-리로 가. 저어어어-리로.”
“…내가 파리라도 돼?”
어이없다는 듯한 대답에 촬영을 준비하던 스태프들이 낮게 웃었다.
하지만 난 션이 그러든가 말든가 마지막 확인 사살처럼 크게 팔을 저었다.
어차피 이제 이 촬영장의 사람들은 모두 안다. 이렇게 대놓고 밀어내 봤자 저 고고한 남자는 한 5분쯤 지나고 나면 언제 핀잔을 들었냐는 양 내 근처에서 얼쩡댄다는 걸 말이다.
그러니 쏟아지는 묘한 시선 속에 압사하고 싶지 않으면 눈 가리고 아웅이라고 해도 이 정도는 해야 한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해리엇 로스는 내 옆에서 커피를 홀짝거리며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나한테 뭐라고 했었더라아~?”
“…….”
“별로 안 친한 사이에, 또 뭐랬지. 스펜서는 몰라도 자기는 ‘절대 아니라고’ 펄쩍 뛰었던 거 같은데. 스펜서는 아는지 궁금해 죽겠네….”
“…해리엇. 내가 다 미안합니다.”
정말 못 해먹을 짓이다.
<피투성이 키스>.
이건 나와 션 스펜서의 ‘열애설’을 ‘열애 중’으로 바꿔 준 기사들의 헤드라인이다. 최소한 내 생애 가장 많은 기사가 날 거라면 옷이라도 갈아입고 할 걸 그랬는데, 깜박했지 뭔가.
나는 미간을 좁힌 채 오던 길을 반대로 걸어가려던 남자가 딱 세 걸음 만에 머뭇거리더니 결국 그 자리에 제 보조의자를 펴는 걸 보며 속으로 혀를 끌끌 찼다.
우아하게 다리를 꼰 채 태블릿 PC를 보고는 있지만, 저 순진하고 착해 빠진 연애 입문자는 내 쪽으로 온 신경을 기울이고 있을 게 뻔하다.
해리엇은 그런 션을 보며 내게 다시 한번 소곤댔다.
“사실 둘이서 나란히 파티 왔을 때부터 마음의 준비는 끝냈었어요.”
“그땐 진짜 아니었는데….”
“아, 됐거든요?”
내가 생각해도 썩 들어 먹힐 말은 아니다.
“솔직히 좀 궁금하긴 하네요. 대체 무슨 수로 꼬셨대.”
나는 핀잔을 듣고도 굳이 멀지 않은 곳에 자리를 잡은 션의 옆모습을 보며 해리엇의 말을 곱씹었다. 글쎄, 모르겠다. 애초에 저 고상한 사내는 내가 어떻게 해 볼 만한 상대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사실…… 글쎄. 얼결에 그 반대가 된 것도 같지.
어쩌다 저런 사람이 나와 시선을 마주치고 싶어서 쩔쩔매게 됐을까. 또 나는 대체 언제부터 션 스펜서를 이런 눈으로 지켜보게 됐을까.
쭉 뻗은 발끝부터 천천히 시선을 옮겨 올라갈수록 묘한 기분이 가슴께서부터 스멀스멀 머리를 든다. 갈수록 이 촬영장에서 저 남자의 몸을 이렇게 뜯어 살펴볼 수 있는 게 나뿐이라는 게 대체 어떤 의미인지 새삼 다시 곱씹게 된다.
션이 나를 보지 않는 틈을 타서 멍하게 그를 훑던 나는, 문득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는 손에 한 박자 늦게 정신을 차렸다.
사실 그때까지는 그게 이 노골적인 곁눈질을 넌지시 말리는 해리엇인 줄 알았다.
“아, 알았어요. 그만할게.”
“…….”
하지만 그게 내 착각이라는 걸 깨달은 순간은, 저만치에 앉아 있던 션 스펜서가 이쪽을 보고 조금 놀란 듯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설 때였다. 애초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려고 해도 저만한 장신은 눈에 안 띄기가 어렵다.
나는 그제야 내 어깨에 얹어진 손이 해리엇의 마디마디가 확실한 각진 손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됐다. 그건 굳은살이 곳곳에 단단히 박힌 남자의 손이었다.
“……브랜든?”
바보같이 얼빠진 목소리였대도 어쩔 수 없다.
“이야, 이것 참. 현장이 얼마 만인지……. 어이쿠. 이런! 반갑습니다. BAA의 브랜든 우드입니다.”
“안녕하세요. 해리엇 로스입니다.”
“아! 로스 씨. 익히 이름은 들었습니다.”
나의 담당자 두 명이 화기애애하게 통성명하는 것을 보는데 왜 흐뭇한 기분보다는 마음속 저 깊은 곳에서부터 한기가 올라오는 걸까. 나는 브랜든에게 살짝 고개를 기울인 채로 목소리를 낮췄다.
“뭐냐? 왠지 느낌이 쎄-하다.”
“쎄할 것까지는 없고…. 아니다, 뭐 기가 찰 노릇이기는 하다만.”
“왜?”
마지막 내 목소리는 조금 컸던 모양이다.
브랜든 녀석은 조금 걱정스러운 눈을 한 채로 기어코 5분 안에 이쪽으로 다시 걸어오기 시작한 내 파트너이자 연인인 남자를 흘끗 보더니, 콧잔등을 찡긋하며 말을 이었다.
“두 사람 다 오늘 촬영 끝나고 나랑 좀 바로 같이 가 줘야 할 것 같아서 말이야.”
나는 학창시절부터 가운데 서는 걸 싫어했다.
왜, 여러분들의 앨범을 펼쳐 보면 꼭 얼굴이 반쯤 나온 친구가 한둘 정도 있지 않나.
난 주로 이름도 가물가물하고 신원도 불분명한 반 익명의 A를 선호했다. 인제 와서 ‘당신 배우잖아요?’라고 묻는다면- 뭐 할 말은 없지만…. 버스를 탈 때도 뒤에서 한 세 번째 정도 앞자리 안쪽 좌석에 앉는 걸 좋아한다고 설명을 덧붙이고 싶다.
여하튼 이렇게 긴 설명을 서두에 시작한 이유는 하나다.
적당히 파묻혀 사는 걸 좋아하지, 가운데 자리라면 질색하는 내게 별안간 이 길쭉한 세로 테이블의 중심이 배정된 게 얼마나 끔찍한 사건인지 말하기 위해서다.
“애초에 기사를 막는 건 불가능했습니다.”
나는 오른쪽에 앉은 변호사 하나가 살짝 한숨 어린 목소리로 입을 여는 걸 들으며 괜히 얼굴을 길게 마른세수했다.
“예전 사진이라며 SNS에 올라온 게 시작이라, 확인했을 땐 이미 막을 수도 없을 만큼 퍼졌으니까요.”
오른쪽은 꽤 익숙한 사람들이 앉아 있다.
꽤 익숙한 마크가 찍힌 서류와 태블릿 PC를 들고 있는 이들은, 나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하나같이 터지는 한숨을 굳이 숨기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렇다. 바로 BAA, 그들은 내 에이전시의 사람들이다. 저 변호사 무리 가운데 앉은 저 말쑥한 슈트 차림의 사내가 누구일지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알겠지?
나는 물끄러미 따라오는 다니엘 바커의 시선을 차마 마주 보지도 못하고 물을 크게 들이켰다. 하지만 아직 어퍼컷이 들어올 곳은 하나 더 남았다.
바로 왼쪽에 앉은 낯선 무리다. 날렵한 맵시의 슈트를 입은 누군가가 종이를 넘기는 소리가 왼쪽 귀를 따갑게 찌른다.
“그렇죠. 이번 자선파티 같은 경우는 대놓고 입구에서 사진이 찍히기도 했고, 내부에서 잠시… ‘이야기 나누신’ 것도 알음알음 흘러나갔더군요. 물론 결정타는….”
“…….”
“-가장 최근에 찍힌 사진이 불씨가 됐겠지만요.”
하지만 그 말 한마디가 얼마나 콕콕 꽂힌다 한들, 허리를 꼿꼿이 펴고 조각처럼 앉은 채 시선을 내 쪽에 고정한 ‘최근에 찍힌 사진’ 속 공동 주연의 시선보다야 따끔하겠나.
어차피 남을 이미지 같은 것도 없다.
나는 좌우에서 쏟아지는 그 호기심 가득한 눈들을 무시하고 테이블로 고개를 떨궜다. 그러자 이 삭막한 회의실의 유일한 아군, 브랜든 우드가 가볍게 내 등을 두드려 주었다.
이 정도쯤 되면 문제를 다른 곳에서 찾고 싶은 심정이다.
예를 들면……, 어. 그래, 한국에서 막 태어났을 때 내 이름을 지어 줬다는 용한 점쟁이 같은 사람 말이다. 어머니는 내가 단명할 운이라고 했다던 점쟁이에게 속아-물론 어머니는 절대 인정하지 않으신다-, 그때 돈으로도 꽤 두둑하게 주고 내 이름을 지었다고 했다.
이 이름이면 안 좋은 뭔가를 누르고 운과 장수를 얻는다고 했다나?
덕분에 여기로 이민 와서도 이름을 바꾸지 않고 살았다.
덕분에 나는 살면서 종종 그 말이 떠오를 때마다 “장수는 몰라도 운은 개뿔이!”하고 욕했었는데, 이제는 거기에 새로운 레퍼토리를 추가해야 할 참이다.
……정말 용한 점쟁이면 내 인생이 빌어먹을 남자 운으로 넘친다는 것도 맞혔어야지!
“그래서 지금 상황에서 결정해야 할 건…. 세 쪽 모두 무대응으로 나설지, 아니면 저희 쪽에서만 입장을 발표할지…… 같은 문제인데요.”
BAA의 변호사가 슬쩍 주위를 둘러보며 끔찍한 대화에 방점을 찍었다.
꽤 예전 일인데 혹시 기억하나?
왜, 얄궂게도 촬영 시작하자마자 곧장 잡힌 키스신에 이를 박박 갈면서 나와 다니엘 바커, 그리고 션 스펜서가 함께 식사했던 날 말이다! 난 그게 몇 월이었는지도 이제 가물가물한데 그 고대 적의 순간을 잊지 않고 있는 사람들이 있던 모양이다.
지금 이 할리우드를 불태우고 있는 ‘삼각 게이 스캔들’은, 그때의 사진이 한 SNS 계정에 올라오는 거로 시작됐다.
한 번 불씨가 던져지자 다음은 일사천리였다. 사람들은 시기별로 타임라인을 만들어 이때는 사귀기 전이고, 또 이때부터 좀 스파크가 튀었고, 이건 대놓고 커밍아웃을 결심한 순간이네 어쩌네 하면서 나와 저 두 남자를 그들의 도마 위에 올렸다.
솔직히 정말 어이없는 부분도 있다. 소위 자선 파티장에서의 증언이다.
그냥 서로 몇 분 인사하고 헤어진 게 다인데 망할, 그게 뭐라고! 심지어 그때는 각자 파트너가 있었는데 말이다!
아, 난 정말로 내 생애 좌우로 두 유명인사를 끼고 회의실의 중앙에 죄인처럼 앉을 날이 올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특히 내가 차마 고개조차 들 수 없는 건-
……여기에 입에 담기도 민망한 말도 안 되는 억측이 더해졌기 때문이다.
나는 다리를 달달 떨면서 초조하게 입술만 깨물고 있다가, 결국 긴 한숨과 함께 고개를 들었다. 으. 심장이 오그라들 것만 같다. 이 쥐어짜 낸 한 줌의 용기가 향한 건 테이블의 오른쪽이었다.
“…바커 씨, 정말… 미안합니다. 이렇게 폐를 끼칠 생각은 전혀 없었습니다.”
대답 대신 여느 때와 별다를 것 없이 여유로운 얼굴로 시선을 마주하는 내 사장님을 보고 있자니, 왠지 목소리가 바들거리기까지 하는 것 같다.
“…….”
“제가 어떻게 해결해 볼 수 있는 문제면 정말 백번이고 천 번이고 수습할 텐데, 지금 여기서 입을 열었다가는 더 시끄럽게 얽히실까 봐……. 아. 젠장. 정말 미안해요.”
솔직히 최악의 친구이지 않나.
끊임없이 곁에서 응원하고 지지해 줬는데 세상 사람들 다 알던 그의 생활에는 전혀 관심조차 없었고, 이제는 말도 안 되는 삼각 스캔들에 그의 이름을 오르내리게 한다.
그것도 이선 박은 바커보다는 스펜서라더라, 하는 별…… 시답잖은 표현과 함께 말이다.
망할, 심지어 이것도 차마 인터넷을 떠도는 네티즌들의 원문을 담을 수 없어 순화한 표현이라는 걸 알아줬으면 한다.
바커와 알고 지낸 게 벌써 5년이다.
나는 그동안 다니엘 바커가 할리우드 연예면 기사 그 어디에서도 이런 질 낮은 이야깃거리로 이름 실린 적 없다는 걸 잘 알고 있다. 그는 정중하고 또 다정한 사내였지만 한편으로는 이 에이전시의 가장 꼭대기에 서 있는 존재였다. 대체 누가 BAA의 앞 글자를 딴 남자를 건드린단 말인가.
그런데 그런 바커가 사정 어려운 나를 배려했던 게 ‘뭣도 없는 이선 박에게 쩔쩔매며 다녔는데 결국엔 스펜서에게 갖다 바친 꼴이 됐다더라’, 같은 문장으로 오가는 건….
젠장! 차라리 죽고 말지 싶을 정도로 끔찍하다.
“뭐가 미안한데, 이선?”
심지어 이렇게 되묻는 착해 빠진 남자인데!
나는 벌써 이 회의실에서 몇 번이나 내쉬었을지 모를 한숨이 또 나오려는 걸 간신히 삼키고는 느릿느릿 대답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추문에 휩싸이게 했잖아요.”
“하하, 추문이라.”
조금 묘한 걸 깨달은 게 이때쯤일 거다.
물론, 다니엘 바커는 평소와 다를 것 없이 젠틀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와 태도였다. 하지만 그 근사한 문장 뒤에서 작게 신경을 갉작이기 시작한 실금이 느껴지기 시작한 쪽에 가깝다.
“그럼 저쪽의 스펜서 씨는 뭐라고 이름 붙일 생각이지?”
“…어…. 글쎄요?”
앗차. 왼쪽 뺨에 불이 난 것 같다. 나는 얼른 말을 골라 수정했다.
물론 그건 근사하게 정돈된 문장과는 거리가 멀긴 하다.
“-그으러니까. 어, 으음, 데이트… 하는 사이… 정도면…. 아니, 그러니까, 음, 아마, 이런 걸 남, 자, 크흐으음, 친, 크흠……. 예, 아마, 그렇게.”
아, 진짜 근사하지 못한 고백이라는 건 나도 안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많은 눈 앞에서 대놓고 션 스펜서와의 관계 변화를 공표하는 건 처음이라 자꾸 혀가 얼얼해지고 얼굴로 피가 쏠린다고.
그래도 명색이 인생에 절대 없으리라 생각했던 남자와의 연애를 문장으로 인정하는 첫 순간 아닌가. 좀 봐줬으면 좋겠다.
나는 뜨끈하게 열이 오른 뒷목을 괜히 주무르면서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덧붙였다.
“션…, 그러니까, 스펜서와는 이 정도면, 쌍방이니까, 어어, 추문까진 아니고….”
“말에 별로 자신이 없는 것 같군.”
이 화제로 이어 가 봤자 얼굴만 벌겋게 익을 게 분명하다.
“그, 그럼 기사 정정요청은 이미 들어갔을 테니 더 걱정은 안 해도 되겠죠?”
“정정요청?”
“아, 정정이 아니군요. 조용히 내리게 한다든가. 여하튼 그런 거요.”
나는 괜히 크게 웃으며 말을 돌렸다. 왠지 날 바라보는 저 갈색 눈동자는 이런 얄팍한 속내를 모두 짚어 낸 것 같아서였다. 아니나 다를까, 다니엘 바커는 잠시 내 말을 곱씹는 듯하더니 그의 도톰한 입술을 호선으로 휘었다.
“정정도, 내리라고 한 적도 없는데.”
“……예?”
“데이트 정도야 여러 남자랑 할 수 있는 거잖나.”
자못 경쾌하기까지 한 그의 말을 곧장 이해하는 건 의외로 쉬운 일이 아니었다.
덕분에 나는 고장 난 기계처럼 눈을 깜박이는 것조차 잊은 채 다시 한번 “예?” 하고 얼떨떨한 물음을 던졌다.
하지만 그의 말은 이어질수록 보통 난리가 아니었다.
“보아하니 썩 진지한 관계도 아닌 것 같고. 기회는 열려 있다는 건데.”
이제껏 내 머릿속에서 다니엘 바커는 뭐랄까, 언제나 바르고 우직한 기사 같은 느낌이었다. 미스 멕시코를 제패하고 모델계에서 활약했다던 라틴계 어머니에게 물려받은 듯한 짙은 눈썹과 생기 있는 피부가 더욱 그런 이미지를 더해 줬을지도 모르겠다.
내 앞에서의 행동거지는 또 어땠나.
그는 나와 나잇대가 비슷한 사내라는 게 가끔은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침착하고 또 어른스러웠다. 브랜든이 소개해 줄 사람이 있다며 BAA의 건물로 나를 데려갔던 날이 지금도 생생하다. 디트로이트와 비교하기에는 좀 민망할 정도로 아담한 건물들이 많은 편인 LA에서 BAA는 눈에 띄게 위로도, 또 옆으로도 큰 건물이었다.
다니엘 바커를 처음 만나던 그 날은 아마 앞으로도 평생 잊을 수 없을 거다.
그건 그저 그날이 몇 달간 처박혀 있던 재활원에서 나온 그다음 날이어서만은 아니다.
BAA에서 가장 높은 층에 있는 남자가 기꺼이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손을 내밀며 “안녕하세요, 박. 당신의 오랜 팬입니다.” 하던 순간의 위로는…. 그때 내가 얼마나 볼품없는 꼴이었는지를 회상할수록 사무칠 정도다.
덕분에 지금의 대화가 더욱 난해해진 나는, 조심스럽게 말을 받았다.
“저어. 죄송한데요, 바커. 무슨 기회를 말씀하시는 건지…?”
“5년을 지켜보면서 나름대로 꽤 열심히 대시 했지만 눈 하나 깜짝 안 하길래 정말 남자는 안 되는 줄 알았거든.”
마음 같아서는 무슨 말이냐고 또 묻고 싶다.
하지만 아무리 나라고 해도 이 상황에서는 그게 좀 바보처럼 보이라는 걸 안다. 나는 왠지 얼마 남지 않았을 듯한 내 뻑뻑한 뇌세포를 모두 움직여서 그의 말을 이해하려고 애썼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는 문장은 하나같이 민망하기 그지없다.
“어, 하하, 그거 왠지 좀- 그런데요.”
스스로 떠올린 가정에 훅 밀려오는 더운 기운은, 정말이지 낯부끄러워 죽겠다.
나는 그걸 내색하지 않으려 노력하며 장난처럼 말을 이었다.
“왠지 저한테…… 그, 대시 하셨다고… 하시는 것처럼 들리는데. 하핫, 아시다시피 제가 이해력이-”
“아니. 정확히 이해했어.”
어쩜 이렇게나 산뜻하게 말할 수 있을까.
덕분에 순간 얼빠진 채로 입을 닫는 것조차 잊던 내 입에서는 의식하기도 전에 드문 확신을 담은 혼잣말이 툭 튀어나왔다.
“…하신 적 없는데요…?”
다른 건 몰라도 이건 확실하다.
다니엘 바커가 이제껏 완벽한 파트너쉽 에이전시의 오너였고, 또 섬세한 사장님이었다는 것엔 감히 반론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뭐?
다니엘 바커가 게이였다는 것도 이제 알았는데 그가 나에게 추파를 던졌다고?
그것도 꽤 열심히?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내 기억을 꺼내 이 기다란 테이블 위에 펼쳐 놓는다면, 누구라도 마찬가지로 동의할 거라고. 저도 모르게 미간이 찌푸려진다.
하지만 바커의 표정은 그런 나와는 사뭇 달랐다. 오히려 그는 이제껏 본 적 없는 미소를 걸고 있었다고나 할까.
내 시선이 가볍게 좌우로 펼쳐진 바커의 양손을 따라 움직였다.
“…….”
이 널찍한 회의실에는 거의 열댓 명이 앉아 있는데 그들이 하나같이 기묘하게 고개를 틀거나 턱을 괴고 있는 이유 따위는 상상하고 싶지도 않다. 이미 등줄기를 서늘하게 만든 소름만으로도 충분히 벅차단 말이다.
……하지만 다른 건 몰라도 내 데이트 상대가 굉장히 열 받은 상태라는 것만은 무시할 수 없겠다. 난 디트로이트의, 아니, 가 본 적 없는 시베리아의 혹한보다 더욱 차가울 션의 표정 앞에서 거북이처럼 목을 밀어 넣었다.
여러분들만은 솔직히 말해 줬으면 좋겠다.
나 눈치 없는 편은 아니지 않나?
* * *
나 같은 소심한 관심종자에게 구글링은 꽤 중요한 일과다.
나는 비뚜름하게 턱을 괸 채로 휴대폰 스크롤을 쭉쭉 내렸다.
예전에는 기껏해야 영화 페이지 조금과 한 줌, 아니 한 꼬집의 팬-놀랍게도 나도 팬이 있기는 했다. 정말 요만큼이라 그들의 계정을 다 외울 정도가 될 정도로 몇 안 되기는 하지만-의 글만 떴었는데, 요새는 이래저래 볼 게 많아졌다.
특히 SNS에 내 이름을 검색했을 때가 정말 가관이다.
어디선가 악플 읽는 프로그램 같은 게 있던데, 요즈음의 나는 거길 나가면 꽤 핫한 인사가 되지 않을까 싶다.
[10000퍼센트 영화 홍보임. 웩. 제아무리 스펜서여도 돈 벌기 정말 힘들구나]
이 글을 쓴 놈은 지금 션 스펜서가 침실 발코니 테이블에 마주 앉은 채 날 무시하고 있는 걸 봐야 한다. 나는 휴대폰에 고정했던 눈을 슬쩍 들어 션을 흘겨봤다.
아니, 정말 꼴 보기 싫어 피하려면 내 침실을 빠져나가는 게 맞을 텐데 그건 못 하겠으면서 이야기하기는 싫다는 태도는 또 뭔가.
세상 사람들은 보통 이런 걸 두고 이렇게 표현한다.
“야.”
“…….”
“야아.”
바로 대차게 삐졌다고 말이다.
나는 거의 30분 가까이 나와 마주 보고 앉은 채로 조용히 저녁노을만 볼 뿐 말 한마디 없는 남자를 향해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저기요, 스펜서 씨.”
“…….”
“셔어-언?”
세상에 고집도 이런 쓸데없는 고집이 또 없다.
어차피 계획했던 베니스 비치 데이트는 터진 지 오래고, 슬슬 식사한 다음에 챙겨 보는 케이블 드라마를 보러 내려가야 하는데 이렇게까지 심술을 부릴 필요가 있나. 내가 다른 방으로 가기라도 하면 또 얼마 안 가 주춤주춤 따라올 거면서 말이다.
나는 턱을 긁적이면서 긴 속눈썹을 내리깔고 테이블 아니면 정원만을 노려보는 서른 살의 사춘기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고민했다.
……어쨌거나 빠르면 십 대 초중반에 졸업하고 넘어왔어야 할 연애 입문을 책임진 입장이니 말이다.
고민은 퍽 길었지만, 답은 단순했다.
“허니, 나 안 볼 거야?”
언제였던가 이를 박박 갈면서 씹어 먹을 것 같은 눈으로 온갖 달콤한 말을 쏟아 냈던 션, 그를 따라 하는 거였다.
그건 아니나 다를까 꽤 효과적이었다.
무슨 말을 해도 요지부동인 조각상 같던 남자는, 그 짤막한 단어 하나에 결국 작게 움찔하고 말았다. 물론 곧바로 언제 그랬냐는 양 표정을 고치기는 했지만 아예 코앞에서 턱을 괴고 있는데 그걸 놓치기도 힘들다. 나는 줄줄 말을 이어 갔다.
“자기, 달링, 내 사랑? 고개 좀 들지 그래. -아니면 내가 나갈까?”
션은 말이 이어질수록 자꾸 시선을 한곳에 차분히 두지 못하고 쩔쩔매다가 결국 쐐기 같은 마지막 물음에 휙 내 쪽으로 고개를 쳐들었다. 서늘한 이목구비에는 조금쯤 분하기도 하고, 또 억울하기도 한 듯한 표정이 새겨져 있다.
나는 팔을 쭉 뻗어 기지개를 켜면서 자축했다.
“얍. 성공.”
“……너 지금 태평하게 ‘얍’ 같은 말을 한 거라면-”
“한 거라면?”
“됐어.”
살살 달래야지, 달래야지 생각하면서도 저렇게 나오면 꼭 장난을 걸고 싶어진다.
“왜, 또. 그렇게 입 꾹 다물고 있으려고.”
“멍청한 소리만 할 것 같으니까 됐다는 거야.”
생각보다 꽤 뾰족한 말투라, 난 그제야 조금 눈치를 보며 조심스레 되물었다.
“내가?”
“…아니, 내가.”
솔직히 좀 얄미울 때면 뭐라고 핀잔을 줄 만도 한데 이런 인정 하나는 순순했다.
션 스펜서의 멍청한 소리라. 이건 좀 궁금하다.
나는 의자를 질질 잡아끌어 그의 옆자리로 옮겼다.
“왜. 뭔데. 말해 봐.”
그 높다란 자존심을 자랑했던 고고한 션 스펜서가 내 시선에 괜히 미간을 찌푸리며 속내를 감추려 드는 걸 보는 건 기묘한 뿌듯함을 선사한다. 슬쩍 손등의 뼈를 그리듯 건드리자 그걸 피하기는커녕 주먹에 꾹 힘이 들어가는 걸 보는 건 또 어떤지.
“-이선 너는, 내가 너와 나온 기사를 추문이라고 부를 것 같아?”
그리고 그 고집스레 다물고 있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이 망할, 또 얼마나 앙칼지게 귀여운지, 원.
나는 그 진지하다 못해 조금은 망설이기까지 하면서 내뱉은 질문에 웃음이 터질까 봐 필사적으로 얼굴에 힘을 줬다가 한 박자 느리게 대답했다.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당연히 아닐 거라고는 생각 못 하겠어? 미치겠군.”
고상한 어조에 담긴 내용은 그와 어울리지 않게 꽤 거칠었다.
“그리고 바커도 마찬가지지! 이제 그 사람 게이라는 것도 알면서 왜 그렇게 웃어넘기는 건데?”
“게이라고 세상 모든 남자가 좋은 건 아닐 거잖아.”
“너한테 데이트 신청하는 건 못 봤고?”
아 맞다.
나는 잠시 머릿속에서 밀어내 잊고 있었던 기억에 턱을 긁적였다.
“이제껏 쭉 대시 했다고 하는 걸 들으면서 아무런 생각도 없었다고?”
“어- 그건 나도 예상 못 했던 일인데.”
여기서 너한테 신경 쓰느라 그 말은 잠깐 깜박하고 있었다고 하면 좋아할까, 아니면 속 터져 할까? 난 차마 낯부끄러워서 입 밖으로 꺼내지도 못할 가정을 하며 말문이 트인 션의 다그침을 기꺼이 들었다.
“난 정말 그런 거 받은 기억이 없다고. 그 비슷한 어필도 없어서 게이인 줄도 몰랐는데, 대시는 무슨 대시.”
“그래. 그 점만은 바커가 불쌍하군.”
“…아니이, 그땐, 남자랑 사귀는 거 자체가 나로 대입이 안 됐다니까…?”
조금은 울컥한 예쁜 눈이 나를 흘겨본다.
그런데 아직도 실감이 잘 안 나는 걸 어떡해?
다니엘 바커가 엔터테인먼트 계의 공룡인 회사의 오너인 건 제쳐 놓고서라도, 그는- 뭐랄까. 도저히 내 옆에 나란히 서는 게 그려지질 않는다. 그냥 알고 지낸 지 5년인 정말 좋은 친구이자 에이전시 파트너라고나 할까.
살면서 한 번도 연애 대상으로 보지 않았던 사람이 어느 순간 확 달라 보이는 때가 있다는 건 알지만, 설령 그게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지금은 시기가 영 그렇지 않나?
……하긴 션 스펜서와 이렇게 될 것도 몰랐던 일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왠지 뭐라 둘러댈 변명조차 없어서 조금은 뻣뻣한 뒷목을 주무르면서 입을 다물고 있자니, 그런 내 모습을 뭐라고 해석한 건지 고운 미간이 저절로 좁혀진다.
솔직히 난 이 남자의 사소한 반응들을 눈치챌 때마다 왠지 속이 좀 뜨뜻미지근하고 영 간지러워 죽겠다.
세상에서 가장 연기를 잘하는 사람 중 하나일 남자가 동요를 감추지 못한 채 어쩔 줄 몰라 하는 이유가, 제가 지금 이 관계를 추문 따위의 단어가 붙었다 지나갈 수많은 스캔들 정도로 가볍게 여기는 거로 생각할까 불안해서라니.
저와 같은 남자는 아예 연애 대상으로조차 생각하지 않고 지냈던 내 지난 시간 따위가 뭐라고.
“아하. 우리 도련님. 삐지셨던 이유를 이제 알겠네.”
“도련님?”
“미안. 우리 자기가 왜 토라졌었는지 알겠어.”
“삐진 것도 토라진 것도 아니거든!”
아.
‘우리 자기’는 뭐라고 하지 않고 넘어가는 것에 다시 한번 웃음이 날 것 같다.
지금 여기서 웃음이 터지면 안 되는데. 나는 괜히 한 번 입술을 깨물면서 작은 한숨을 들이마셨다.
적당히 가벼운 욕구에 기꺼이 합의해 그럭저럭 이어 가다 김이 빠지면 자연스럽게 서로를 정리하던 관계가 너무 길었을지도 모르겠다. 어떤 기대도 없이 적당히, 그저 각자 피곤하지 않을 정도만 소모하던 순간에만 익숙해진 내 어딘가가 멋대로 뒤흔들린다.
……아무래도 면역력이 없는 건 션 스펜서, 저 남자뿐만이 아닌 것 같다.
그래도 그걸 곧장 내색하면, 이제껏 신나게 놀려 왔던 체면이 안 서지.
나는 힘이 바짝 들어간 션의 손등을 장난치듯 두드리다가 그 위를 달래듯 쓸며 입을 열었다.
“…들어 봐. 션. 우선 난 바커 씨 덕분에 지금 여기까지 왔어. 그 사람은 내 인생에서 두 번 다시 없는 큰 은인이야. 그건 절대 부정할 수 없어.”
“…….”
“아무리 브랜든이 날 BAA로 데리고 오고 싶어 했어도 그 사람이 날 믿어 주지 않았다면 지금까지 못 왔어. 이 영화를 찍기까지 버티기는커녕 진작 고향으로 돌아갔을지도 모르지. 솔직히 그땐 정말…… 한계였거든.”
묵묵히 내 말에 귀를 기울이는 저 신중한 얼굴이 좋다.
확실히 내가 감독이나 캐스팅 담당자였다면 저 이목구비를 화면에 담지 않고는 못 배겼을 거다. 성직자와 오만한 악의 단어 어딘가를 오가는 섬세한 얼굴에 확 감정이 번지는 순간은 가끔 혼자 보기 아쉬울 정도니.
나도, 그도 서로 몰랐던 서로의 세계를 알아 가는 건 그저 좋다고만은 말할 수 없을 거다.
새로운 건 항상 좋은 것만은 아니다. 가끔은 안락한 단상 위에 서 있던 저 자신이 자각조차 하지 못했던 스크린 밖의 할리우드를 직면해야 하고, 또 어떤 날은 감히 쉽게 코웃음 치며 상상했던 삶 앞에서 속이 먹먹해지기도 한다.
……상대가 상대다 보니 이제 뭐가 남았을지 상상조차 안 간다. 참 내. 어쩌다 이렇게 됐는지 모르겠어.
나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하지만 키스할 상대로는 널 고를까 싶은데.”
눈을 깜박이는 것조차 잊은 듯 멍하게 날 마주 보는 새파란 눈동자가 붉은 노을빛과 섞여 순간 금색처럼 보인다.
“그리고 같이 샤워할 상대로도 말이야.”
“……어?”
“같이 씻을래?”
역시 이런 걸 옆에 가만히 두고 썩히는 건 범죄다.
멍하게 되묻는 섹시한 몸을 가진 순진한 애인에게 차근차근 풀어 설명하는 내 쪽의 썩은 의도는 넓은 마음으로 양해해 줬으면 싶다.
“씻고 저녁 식사 하러 가자. 아니면 여기로 가져다 달라고 해도 되고.”
상대의 말 한마디, 손가락 끝의 움직임 하나에 신경 쓰고 긴장하는 게 어리숙한 취급을 받게 됐던 게 언제부터였는지는 몰라도 이것만은 확실히 알겠다.
그건 정말 한심한 짓이다.
석양 탓을 하기에는 말갛던 뺨에 순식간에 확 홍조가 도는 걸 보는 게 얼마나 기분 좋은지 모르는 허세꾼들이 지어낸 말이라니까.
나는 결국 내내 참아 왔던 웃음을 크게 터트리고 말았다.
“……최소한 좀 작게 웃지 그래?”
“아, 건강하네 싶어서.”
“…….”
이걸 나만 탓하는 건 조금 너무하다.
언제 그렇게 뻣뻣하게 굴었냐는 양 급하게 입술을 찾고, 오늘만 해도 온종일 같이 붙어 있었으면서 그마저도 모자랐다는 것처럼 날 훌쩍 들어 올리는 단단한 팔의 초조함이 자꾸 입꼬리를 올라가게 하는 걸 어떡하라고.
나는 툭툭 풀어지는 단추에 옅게 키득대면서 션의 목을 끌어안았다.
정말이지 32년 인생 단 한 번도 상상한 적 없었던 게이 라이프는, 상담할 사람이 없어도 너무 없다.
다니엘 바커와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난 정말 그와 어려워지고 싶지 않다.
누군가는 이기적이라고 생각하겠지만, 바커가 내게 추파를 던진 적 있다는 말마저 금시초문인데 갓 시작한 연애 앞에서 그와 5년간 쌓아 왔던 신뢰가 무너지는 게- 정말 상상도 안 간다.
평소 같았으면 이런 일이 있을 땐 브랜든을 찾아갔을 거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마저도 좀 곤란하다.
아무리 잔뼈가 굵다 한들 어쨌거나 녀석은 다니엘 바커를 상사로 두고 있고, 내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모두 받아 주던 션 스펜서는 이번만큼은 아예…… 직접 관련된 이해 당사자 중 하나다.
그렇다고 게이인 친구를 새로 사귀기에는 내 파트너의 요란함은 둘째 치고 스스로의 성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 보통 빈약한 게 아니다.
나는 게이일까?
난 이제껏 만나 왔던 여성분들이 ‘여자라서’ 만났던 게 아니다. 그래, 션의 생물학적 성별이 바뀌지 않는 한 내 성 정체성엔 게이도 들어가긴 하겠지. 그런데 또 션 스펜서 말고 다른 남자를 보고도 그럴 수 있냐면…….
‘바커, 미안합니다. 어쩔 수 없이 당신을 예시로 들어야겠어요.’ 가 되고 만다.
다시 한번, 정말 진심으로 미안합니다. 바커.
하지만 만날 수 있다, 없다의 문제가 아니라 그냥 아무 생각이…… 안 드는걸.
보안 문제는 어떻고?
나는 이제 어떤 모임에든 익명으로 참가할 수 있는 자격을 거의 잃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 싱숭생숭한 속을 털어놓고 조언을 구할 수 있는 사람은 정말 손에 꼽는다. 나 혼자 끙끙대 봤자 답이 없는 게, 다니엘 바커가 나를 마음에 뒀던 건 둘째 치고서라도 그가 게이라는 사실조차 모른 채 5년을 보낸 내가 머리를 굴려 봤자 유효타가 나올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죽으란 법은 없다지.
한동안 이어진 고민 끝에 나를 찾아온 해결사들이 있었다.
그건 바로 스케줄이 비어 혼자 쉬고 있는 내게 다과를 챙겨 주러 들어온 집사장 가브리엘 씨와 메이드 줄리다!
아마 그건 꽤 현명한 선택이었을 거다.
“……스펜서 님의 자산 규모를 아십니까?”
“으하핫, 거 너무 절 꿰뚫어 보시네요.”
내가 이 저택의 주인인 션 스펜서와 에이전시의 사장님인 다니엘 바커 사이에서 처신을 고민한다는 말을 듣자마자 세상 심각한 얼굴로 맞은편에 앉아 제 고용주 홍보를-너무 일방적으로 한쪽에 치중된 사람들 아니냐고 묻는다면야, 집주인 찬스 정도로 쳐 두자-적극적으로 하기 시작한 가브리엘 씨만 봐도, 빈말 아닌 진심 어린 조언을 들을 것 같지 않나?
“바커 쪽도 대단한 집안이기는 하지만, 아시다시피 저희 스펜서 님은 배경을 떼어두고서라도 이제 그 자체가 걸어 다니는 기업이나 다름없습니다. 미안한 말이지만 언론의 왜곡만 없었어도 스펜서 님의 상대에게만 충실한 헌신적이고 가정적인 성격은 그 철새 같은 카사노바 놈과 더욱 비교조차….”
“아니, 아니, 아니! 가브리엘 씨. 바커 쪽이랑 비교해서 둘 중 하나 만나겠다는 뜻이 아니었다고요! 바커는 친굽니다. 정말 친구요!”
……어. 듣다 보니 너무 진심인 것 같긴 하다.
‘철새 같은 카사노바 놈’이라니. 세상에 그만큼 다니엘 바커에게 안 어울리는 표현도 또 없을걸? 어쨌거나 기사로는 양팔에 쌍둥이 남매 끼고 호텔 들어가는 사진까지 찍힌 게 지금 그가 밀고 있는 스펜서 님이거늘….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턱을 긁적였다.
저택에 눌러앉은 몇 달 동안 가브리엘 씨와 한 테이블에 앉은 것조차 처음인데, 그가 이렇게 눈에 불을 켠 채 숨도 안 쉬고 장문의 말을 쏟아 내는 사람일 줄은 정말 상상도 못 했다.
한편 그게 놀랍지도 않다는 듯 살풋 웃으며 내 말을 받아 준 건 메이드 줄리였다.
“지금 이선의 고민은 그 바커라는 분이 정말 좋은 친구였는데 자기와도 데이트하자고 하면서 생긴 것 아닌가요?”
“맞아요! 그 비슷하죠. 어휴, 저번에 회의실에서 션까지 있는데 데이트쯤이야 그냥 하면 되는 거지 하는데, 와 정말 속이 철렁했다니까요.”
“스펜서 님과 같이 저울질하실 생각은 전혀 없으신 거고요.”
“…줄리. 여기 션 있었으면 정말 난리 났어요….”
아니 여기도 어째 전개가 심상치 않다.
줄리는 “저울질이라니, 저울질이라니….” 하고 작게 중얼거리는 가브리엘 씨에게는 대꾸조차 하지 않고 우아하게 웃더니, 내 찻잔에 차를 채워 주며 문장을 이어 갔다.
“사실 그럴 때 제일 좋은 건 같이 데이트해 보는 게 맞긴 하죠.”
“네?”
“왜, 바커 씨와는 친구라고 하셨잖아요. 친구 하나 끼고 같이 놀러 나가는 게 무슨 흉인가요. 굳이 이번 경우에 따지자면 적자생존 아니겠어요? 스펜서 님이 잘만 하시면 얼마든지 그쪽 분 마음 정리에 도움이 될 거고. 실패하면……. 뭐.”
적자…… 뭐요?
나는 잠시 할 말을 잃고 줄리의 다정다감한 미소만 얼빠진 얼굴로 바라보았다.
그 소감은 맞은편의 가브리엘 씨도 별다를 바 없는지, 그 역시 언제나 딱 부러진 표정만 했던 표정은 온데간데없고 옅은 황금빛 눈에 경악을 가득 담아 “줄리!” 하고 거의 반쯤 비명에 가까운 목소리를 냈다.
덕분에 이 순간 내 입에서 저도 모르게 가장 궁금한 질문이 흘러나온 건 정말 불가항력이나 다름없었다.
“저 그냥 갑자기 궁금해졌는데요. ……줄리, 혹시 어디 출신이세요?”
“미시간이요.”
미시간의 땅덩어리가 그녀들을 강인하게 만들기라도 하는 걸까? 이건 뭐 놀랍지도 않은 일이다.
나는 그녀에게서 늘 느꼈던 묘한 친숙함의 정체를 찾았다.
다정하지만 절대 호락호락하지 않은 분위기가 자꾸 그녀와 말을 섞게 된 이유였나 보다.
은근히 주변에서 만나기 힘든 동향의 사람을 만나자 왠지 반가워지기까지 한다. 종종 습관처럼 볼 것 없다고 투덜거리기는 해도, 어쨌거나 미시간은 나라는 인간을 만든 땅이니 말이다.
“저도 미시간이요. 디트로이트!”
“제 쪽은 작은 마을이라 아실지 모르겠는데… 전 브리즈빌 출신이에요.”
“어, 왠지 사우스 헤븐 쪽으로 가면서 푯말을 봤던 거 같은데.”
“어머. 맞아요.”
미시간더 만세!
“여기 오신 지는 꽤 됐나 봐요? 아, 전 LA 카운티를 돌아다니며 산 지가 벌써 10년도 넘었는데 아직도 가끔은 이쪽 분위기가 힘들 때가 있어요.”
“네, 3년 정도 됐어요. 그래도 날씨는 여기가 훨씬 좋은 걸요.”
“4월에 눈 오는 거 안 보니까 좋긴 하죠.”
“일교차 20도도요.”
“세상에, 줄리. 무슨 소리예요. 20도면 귀여울 지경이죠!”
대체 이런 수다를 떠는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나와 줄리는 “4월에 눈이 온다고요?” 하고 되묻는 순진무구한 캘리포니아인, 가브리엘 씨의 질문에 동시에 고개를 저었다. 크리스마스에도 민소매를 입고 다니는 사람들이 널린 이곳에서는 쉽게 상상 되지 않는 일이긴 하겠지.
결국, 이때부터 은근슬쩍 내용이 변질된 비밀스러운 티타임은 션이 제 스케줄을 끝마치고 올 때까지 계속됐다.
어쨌거나 이날의 짧은 수다는 앞으로의 내게 여러모로 큰 도움이 됐다.
왜냐고?
……이 티타임 다음 날부터, 그 바쁘다던 바커 아티스트 에이전시의 오너, 다니엘 바커가 이 날만을 기다렸다는 듯이 나와 션 스펜서의 촬영 현장에 에이전시 ‘직원’ 자격으로 출석하기 시작했거든!
* * *
“BAA는 생각보다 한가한가 봅니다.”
누가 듣는다면 퍽 상냥하게까지 들리는 음률의 문장이었다.
하지만 요 며칠 저 나직하고 근사한 목소리에 얼마나 많은 뼈가 담길 수 있는지 코앞에서 지켜봐 온 나로서는, 이제는 저게 선전포고처럼 다가올 뿐이다.
말을 받는 상대 역시 그 사실을 잘 아는지, 놀란 기색조차 없이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그럴 리가요. 너무 잘 돌아가다 보니 이렇게 짬도 낼 수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신선한 해석도 가능하군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데이비드 밀러 감독의 신작에 출연하는 에이전시의 배우가 몇 번이나 불미스러운 기사로 고생했으니 이 정도 신경은 써야 하지 않겠습니까.”
“……지금 ‘불미스러운 기사’라고 했습니까? 하긴, 다니엘 바커의 ‘불미스러운 기사’가 이번이 처음이라는 게 놀랍긴 합니다만.”
“-뭐라고요?
이 대화가 몇 미터 정도 떨어져서 들으면 하하호호 웃으며 다정하게 친목을 다지는 것처럼 보이는 기적이 일어난다는 건 차마 덧붙이고 싶지도 않다.
덕분에 대다수가 “역시 그런 기사는 믿을 게 못 된다니까.”하고 고개를 가로젓게 된 건 다행이라면 다행인 일이다.
하지만, 눈치가 조금만 있어도 이 장신의 두 남자 사이에 도는 기운이 심상치 않다는 건 쉬이 알 수 있을 거다.
애초에 살아 있는 전봇대 수준의 체격들이 아닌가.
결국, 나는 끝도 없이 이어질 것 같은 그들의 미소 가득한 대화를 중간에 가로챘다.
“둘 다 그만 싸우시죠.”
“싸우다니, 그런 적 없어.”
평소처럼 사람 좋게 대답하는 것만 들으면 정말 깜박 속을 정도로 호쾌하기만 한 다니엘 바커다. 나는 왠지 한숨이 나오려는 걸 참으며 이어 물었다.
“바커 씨는 정말 이렇게 오셔도 되는 겁니까?”
“해야 할 일은 다 잘 끝내고 오는 거야, 이선. 아침저녁으로 충분히 시간을 쓴다고.”
살살 빠져나가는 게 자연스럽다 못해 매끄러울 정도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런 물 흐르는 듯한 태도 때문에 바커가 게이라는 것도, 그가 내게 퍽 관심을 보였다는 사실도 몰랐던 게 아닌가 싶다.
화살촉은 이제 다른 편을 향한다.
고운 눈썹 하나를 조금 비뚜름하게 올리고 있는 내 파트너다.
“션, 넌 요새 왜 따로 촬영 가는 게 줄었어?”
“……난 촬영팀 쪽에서 조율한 대로 움직일 뿐이야.”
거짓말은 아닐 거다.
하지만, 이게 온전한 ‘사실’인지를 확인하는 건 어렵지 않다. 나는 우리의 대화가 충분히 들릴 만한 곳에서 애써 휴대폰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는 해리엇을 슬쩍 봤다.
아니나 다를까, 그녀는 눈이 마주치자 꾹 다문 입을 그 꼬리만 올린 채로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뭐라 말을 하는 건 아니라지만 나와 바커를 촬영장에 단둘이 두고 갈 때마다 그 서늘한 이목구비가 어떻게 굳을지 뻔히 그려진다.
아마 그걸 본 촬영팀에서 알아서 스케줄을 조정해 준 거겠지.
평소에는 그렇게 표정 관리를 잘하는 남자가 내가 얽힐 때마다 어찌할 바 몰라 하는 건 꽤 뿌듯한 일이기는 하지만, 업무적으로는 꽤 곤란한 것이기도 하다.
그래. 저 남자들을 무조건 탓하고 싶지는 않다.
특히 바커가 촬영장에 자주 얼굴을 비치기 시작하는 거로 정면돌파하면서 괜한 뜬소문들이 한 번에 정리된 것 역시 사실이다. 오히려 ‘뭐야, 저 세 사람 서로 친했던 거였어?’ 하고 역시 찌라시 기사는 믿을 게 못 된다는 의견이 대다수가 되며 분위기도 환기됐고 말이다.
-하지만, 그 가운데 낀 나는 이제 슬슬 숨이 막힌다.
이 이상 두고 볼 수가 없단 뜻이다.
“따라와요.”
내 말에 자리에서 일어나기는커녕 그저 눈을 깜박이기만 하는 두 남자의 표정이 참 볼 만하다.
“빨리!”
보는 눈이 한둘이 아닌 곳에서 두 고목나무를 이끌고 걸어 나가는 것도 상당한 용기가 필요한 일이라는 걸 꼭 말해 주고 싶다. 나는 세트장을 지나 분장 트레일러들이 줄지어 있는 곳에서 몇 번이나 주변을 확인한 다음에야 간신히 입을 열 수 있었다.
“언제까지 촬영장에서 이렇게 유치하게 굴 수는 없는 거 아닙니까. 그렇죠?”
“난 그저 일하러 나왔을 뿐일 텐데.”
“션!”
따지자면 틀린 말은 아니지만, 굳이 이 타이밍에 입을 열 필요는 없지 않나.
나는 트레일러에 몸을 비스듬히 기대어 알았다는 듯 두 손을 드는 내 파트너를 살짝 째려보다가, 짧은 한숨과 함께 말을 이어 갔다.
“다음 주 수요일에 시간 되십니까?”
“얼마든지.”
바커에게서는 곧바로 즉답이 나왔다.
별 대답 없이 나만 뚫어지라 보고 있는 쪽은 사실 물어볼 필요도 없다. 우리는 서로의 스케줄을 꿰게 된 지 오래다.
“몇 달째 전혀 못 쓰고 있는 무비 패스가 있는데. 같이 영화나 보러 갈까요?”
“뭐?”
“영화요, 영화. 두 분 영화 값까지 제가 낼게요.”
“…….”
“…….”
스펜서와 바커, 두 남자는 드디어 의사소통이 완벽하게 일치하는 단계에 다다랐는데도 전혀 기뻐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자신들이 들은 말을 이해했지만 차마 그걸 인정하기 싫은 듯한 얼굴이었다.
여전히 먼저 반기를 드는 건 션 쪽이었다.
“이선. 굳이 그렇게 해야 할 필요가 있겠어?”
“둘이서 제대로 이야기해 본 적 없잖아. 요샌 맨날 보이기만 하면 서로 못 잡아먹어 안달이고. 그런데 내가 보기엔 그쪽 둘, 꽤 잘 맞을 것 같거든. 오랜만에 영화관도 가고 싶고.”
“이미 저쪽과 대화는 충분히 했어. 그리고 물론 나야 얼마든지 같이 ‘데이트’ 가고 싶지만, ……이 조합으로 괜찮겠어?”
션이 힘주어 말한 데이트라는 단어에 바커가 낮게 코웃음 쳤다.
하여튼, 지거나 양보하는 데 전혀 익숙하지 않은 두 인간이 만나니 말 한마디도 그냥 넘어가는 일이 없고 내뱉은 단어마다 의도가 가득하다.
나는 슬슬 그 새파란 눈동자에 불쾌를 담기 시작한 션을 보며 후다닥 대답했다.
“당연히 안 괜찮겠지. 왼쪽엔 션 스펜서, 오른쪽엔 다니엘 바커를 끼고 어딜 가겠어!”
“그러니까-”
“그러니까! 눈에 안 띄게 하고 나오는 거로 하자고.”
“눈에 안 띄게?”
“걸리는 사람은 바로 집에 가는 겁니다. 나는 남는 사람이랑 그날 같이 영화를 보고, 뭐 시간이 되면 저녁까지 먹을까 싶은데.”
왠지 저 푸르디푸른 캘리포니아의 하늘 위로 번개라도 내리치는 것처럼 느껴지는 건 왜일까. 나는 입을 꾹 다문 두 남자에게 최대한 차분하게 말을 이어 갔다.
“운 좋으면 셋이서 서로 이…… 망할 촬영장을 떠나서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하면서 친해질 수도 있을 거고. 적어도 여기선 안 돼요. 다들 너무 알 만큼 아는 사람뿐이고, 특히 지금 두 사람은 웃는 척하면서 온종일 싸우기만 하잖습니까. 여하튼 지금처럼은 안 돼요.”
“이선, 그건 꽤 희박한 확률인 것 같은데.”
다니엘 바커는 내 마지막 문장에 꿈 깨는 게 좋겠다는 듯 웃었다. 하지만, 그는 션보다야 꽤 순순히 내 말을 따라 줬다.
“뭐. 해 보지. 어쨌거나 이렇게 먼저 만나자고 하는 건 처음이니 말이야.”
솔직히 바커의 말에 조금은 놀랐다.
같이 안 게 몇 년인데, 업무 때문이 아니면 이렇게 개인적으로는 만난 적조차 없었다니. 생각해 보면 같이 식사를 한 적도 꽤 많고, 가든파티 같은 데도 몇 번이고 초대받았던 것 같은데…… 그의 말마따나 먼저 연락한 적은 없는 것 같다.
……아니지, 있긴 하다.
내 파트너의 의뭉스러운 비밀에 대해 상담하려고 에이전시 건물에 찾아갔던 저녁이다.
워낙 이런저런 일이 많아 잊고 있었는데, 이번에 슬쩍 눈치를 봐서 그 오해가 풀린 것도 에둘러 설명하면 좋을 거다.
나는 표정이 굳었을까 싶어 얼굴을 괜히 한 번 크게 쓸고는, 일부러 바커 쪽으로는 고개조차 돌리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마지막 쐐기를 박았다.
“션, 너는?”
“난 손해 보는 조건이지 않나? 왜 내가 저 사람과 같이 그 몇 없는 휴일을….”
“-대신 우린 같이 살잖아, 자기?”
“…….”
“응?”
그리고 한편으로는 바커를 잘 거절하고 싶기도 하다.
그와 내가 함께 보낸 지난 시간들이 그저 데이트를 목적으로 한 관심에서만 비롯된 게 아니라고 감히 믿기 때문이다.
그가 진지한지는 모르겠지만, 좀 냉정할지언정 빨리, 그리고 확실히 선을 긋는 게 모두의 해피엔딩을 위한 길이다. 그러기 위해선 지금처럼 서로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 이 두 남자의 관계는 여러모로 변화가 필요하다.
“그럼 너도 같이 가는 거다?”
물론, 내 말 한마디에 온종일 투덜이 스머프처럼 굴던 남자가 입을 다물더니 은은하게 붉은 물이 든 채로 고개만 크게 끄덕이는 걸 보는 것도 꽤 기껍고 말이다.
* * *
이제껏 동종업계 사람의 열애설을 찾아본 적은 정말 맹세컨대 단 한 번도 없다.
‘뭐, 이 둘이 사귄다고?’하고 커다랗게 뜬 기사를 눌러 훑어본 적은 있지만, 누구누구가 사귄다더라 하는 걸 검색하는 일은 없었다. 그게 매일같이 사귀는 사람이 바뀌는 이 할리우드 관계자라면 더욱 그랬다. 누가 누굴 사귀고, 헤어지고, 결혼하고, 또 이혼소송에 휘말리는 게 일상인 곳이니 더욱 그랬다.
하지만 나와 갓 관계를 맺기 시작한 사람의 데이트 상대가 구글에 치기만 하면 줄줄이 나오는 상태라면?
“…….”
심지어 이름만 쳐도 그 뒤에 가장 먼저 따라오는 단어가 ‘데이팅’이라면?
그걸 어떻게 안 눌러 보고 배긴단 말인가. 심지어 친구가 하나 낀 거라고는 해도, 어쨌거나 일 끝나고 같이 저녁 먹고 들어오는 게 아니라 아예 작정하고 몰래 놀러 가는 걸 앞뒀다면 더욱 신경 쓰일 수밖에 없다. 머리 한구석에서 지난번 파티장에서 본 다니엘 바커의 잘 빠진 파트너가 아른거렸다는 것도 인정한다.
그렇게 찾아본 소감은 어떠냐고?
“내일은 따로 출발하는 거 맞지.”
“…….”
“이선?”
“……그래. 맞아.”
할리우드 행성계의 외곽에서 떠돈 나도 안젤라 테일러는 안다.
뭔 영화에 단역으로 잠깐 출연했을 뿐인데 극장을 나온 사람들이 하나같이 대체 그 미녀는 누구냐고 외치는 통에 인터넷을 벌컥 뒤집은 뒤 순식간에 유명세에 오르게 된 모델 출신의 신성을 어떻게 모를까?
그러고 보니 소피아 클락도 있었지.
사진을 보니까 나도 언제였던가 기사를 눌렀던 기억이 그제야 나더라.
언제나 신경질적으로 인상을 구긴 사진만 남기던 클락이 눈을 반짝이며 시종일관 웃는 얼굴을 한 채 데이트 상대의 팔짱을 꼬옥 끼고 다닌 파파라치 사진은 꽤 뜨거운 화제였다.
아직도 리스트는 더 있지만, ‘여성 데이트 파트너’들에 대한 이야기는 여기까지만 하겠다.
“많이 피곤한 것 같은데. 내일 취소하는 게-”
“아니! 완전 멀쩡해.”
나는 내 안색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말문을 뗀 남자의 제안을 꽤 단호하게 잘랐다. 그리고 미안하지만, 오늘은 그와 머리를 맞대고 이런저런 수다를 떨다가 잘 기분도 아니다.
“오늘은 네 침실 가서 자.”
“……왜?”
“내일 따로 나가기로 했잖아. 나란히 일어나서 씻고 준비할 거야? 페어플레이 하자고, 스펜서.”
이제 화려한 염문설로 얽힌 사내들을 읊어 볼 차례다.
우선 가장 먼저 꼽을 건 찰리 앤더슨이다.
그는 션 스펜서의 허리에 팔을 감고 함께 호텔로 들어가는 사진까지 찍힌 사내다. 아. 크리스 킹은 또 어떻고? 아주 찍힌 사진마다 시선을 떼지 못하는 게 뻔히 보이더라.
릭 콜먼과 제이콥 터커도 빼놓을 수 없겠지.
모르는 분들이 있을지 몰라 첨언하자면, 앞서 말한 저 네 사람은 할리우드에서 유명한 게이 혹은 ‘노 코멘트’의 사내들이다.
…아, 나도 유치해서 미쳐 버릴 지경이라는 거 안다고!
나는 머뭇머뭇 침대에서 일어나는 션에게 대충 손을 흔들었다.
눈치 빠른 남자라 뭔가 평소와는 다른 분위기를 눈치챈 것 같기는 하지만, 난들 어쩌겠나. 최소한 오늘 밤은 표정 관리가 힘드니 떨어트려 놓는 게 제일이다.
션은 문을 닫고 나가는 순간까지도 그 예쁜 파란 눈동자를 굴리면서 “그래, 그럼 잘 자고…, 몸이 안 좋거나 하면 얼마든지 취소할 수 있는 약속이니까 꼭 말하고. 혹시라도 무슨 일 있으면 몇 시가 됐든 메시지나 전화하고….” 등등, 그답지 않게 계속 말을 어물어물 이어 가며 미적댔다.
물론 그 길디긴 당부는 단 두 단어로 정리됐다.
“잘 자!”
그렇게 내보내고 나서 차라리 마음이 편해졌으면 좋았겠다.
나는 침대에 벌렁 드러누웠다가 몇 분도 안 되어 다시 벌떡 일어나 침실을 불안하게 오가다, 결국 살금살금 발뒤꿈치를 세우고 드레스룸으로 향했다.
“…대체 난 어떻게 해야 하는 거냐….”
이건 정말로 근본적인 의문이다.
망할, 나는 누구랑 만나다 헤어지면 관련된 사진부터 싹 정리하는 사람이다.
그러니 션 스펜서가 나와 앞으로 얼마나 관계를 쌓아 가든, 그 길이가 어떻게 되고 깊이는 또 어느 정도가 되든- 최소한 그와 만나기 이전에 내 연인이었던 사람들을 얼굴을 실수로나마 보게 될 확률은 지나온 그녀들이 몰려와 눈앞에 사진을 들이밀지 않는 한 불가능하다 보면 될 거다.
“……진짜 키스도 내가 처음이면서 무슨 데이트 상대는 이렇게 많은데!”
정말 짜증 나고 죽어도 내색하고 싶지 않지만, 차라리 모르면 몰랐지 한 번 알고 나니까 미친 듯이 신경 쓰인다.
션 스펜서는 왜 그렇게 하나같이 예쁘고 잘생긴 사람들과만 데이트한 걸까?
왜 사진 속의 사람들은 하나같이 옷도 잘 입었을까? 응? 대체 왜냐고!
다른 할리우드 스타들은 파파라치 사진 속에서 하나같이 추레하게 입고 다니던데 왜 션 스펜서의 그녀 혹은 그는 다들 꾀죄죄하지도, 없어 보이지도 않을까!
……말하고 나니까 더 짜증 난다. 그녀 혹은 그? 둘 중에 하나만 하든가.
왜 둘 다와 데이트하고 지랄이었니, 이 새끼야!
나는 신경질적으로 옷장을 뒤적거리다가 멍청한 스마일이 그려진 티셔츠를 구석으로 내던져 버렸다. 솔직히 말해서 살며 옷에 신경 쓴 적 없는 내 옷장은 단출하다 못해 빈곤하기만 하다.
아니, 차라리 옷보다 옷장이 더한 날개다.
“…….”
사실 굳이 따지자면 딱 과하게 번쩍이는 게 하나 있긴 하지.
나는 션이 선물한 슈트를 잠시 훑어보다가 속을 답답하게 채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심지어 딱 하나 있는 근사한 옷은 영화관에는 입고 갈 수 없는 옷이라니. 진짜 데이트 한 번 끝내주게 힘들다. 애초에 평소에 내가 어떻게 하고 다니는지 뻔히 아는 남자인데, 낼 줄도 모르는 멋을 부리는 것도 웃기다.
결국, 난 늘 입던 청바지와 티셔츠만 꺼내 두고 다시 침실로 도망쳤다. 최소한 아주 작은 상표명 하나 빼고는 눈에 띌 것도 없는 무지 티셔츠이니 웃기지는 않을 거다.
침대에 머리부터 푹 처박고 엎드려 있자니, 그 답답한 상태로도 한숨이 터져 나온다.
“…무슨 고등학생이냐….”
서른둘에 하는 연애 한번 더럽게 힘들다.
내가 이 사람의 처음이라고 해서 감히 안일해질 수도 없다. 이…… 데이트 상대들의 면면을 보라고.
결국, 나는 잘 차려입고 나가기는커녕 새벽 내내 이불을 뒤집어썼다가, 다시 휴대폰을 켰다가, 또다시 잠들어 보겠다고 발버둥 치는 바보짓을 계속하다가 온 얼굴이 아주 땡땡 부은 채로 느지막이 기상하고 말았다.
“망할, 망할, 망-할, 지금 몇 시야, 대체!”
“아홉 시 반입니다.”
“아홉 시 반… 와, 너무 아슬아슬한데?”
너무 매끄럽게 나온 대답이라 별 위화감도 못 느꼈더랬다. 나는 정신없이 껑충대며 청바지에 다리를 욱여넣다가, 뒤늦게 존재감도 없이 서 있던 누군가를 짚어 냈다.
그는 다름 아닌 집사장 가브리엘 씨였다. 그는 새집 머리를 한 나와는 달리 머리카락 한 올 흐트러지지 않은 말끔한 모습으로 내가 전날 밤 챙겨 둔 티셔츠를 건넸다.
“……가브리엘?”
“오늘 밖에서 보시기로 했다고 들었습니다만. 스펜서 님이 타고 가실 차를 준비해 두고 나가셨습니다.”
“아, 예에. 감사해요!”
저 말을 듣자 하니, 내 애인님은 진작 나간 게 분명한 것 같지?
꾸미고 가기는 무슨! 세수만 하고 뛰쳐나가도 모자라다. 내 이렇게 될 줄 알았지. 하지만 여기서 그냥 곧장 욕실로 뛰어들어 가기에는 좀 찝찝한 게 있다.
바로 보통 할 말만 하고 재깍 방을 나가거나 절대 거슬리지 않는 위치에서 도움만 주던 집사장의 저…… 묘하게 끈덕진 시선이다.
“혹시 뭐 문제 있나요?”
“아뇨! 문제라고 할 건 전혀 없습니다. …그저-”
나는 메이드 줄리라면 모를까, 나는 집사장과 잡담을 나누는 사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기껏해야 션의 자산 규모에 대해 알고 있냐며 고용주를 피력했던 그 비밀스러운 티타임이 그와 처음으로 잡담을 나눈 순간이었을 정도다.
“그…, 잘, 보내고 오셨으면 해서… 말입니다.”
한참을 입술만 달싹이던 가브리엘 씨가 겨우 꺼내 놓은 말은 그게 다였다.
나는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는 정말 말 그대로 간단히 세수랑 양치만 한 다음 그가 스툴 위에 올려 둔 차 키를 두고 급하게 뛰어나갔다.
출근 시간에서 비껴 간 평일 오전이라 다행이었다.
정말 아슬아슬하기는 하지만 어쨌거나 늦지는 않게 도착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약속 장소인 에이전시 건물 근처 공원에 가장 먼저 도착해 있는 사람은, 아무래도 바커 씨였다. 그는 저만치에서 나를 발견하고 작게 손을 흔들었다.
LA가 선글라스 없이 살기 힘든 도시라서 다행이다.
나는 땡땡 부은 눈과 얼굴을 가리는 용도로, 평소에는 본 적 없는 캐주얼한 차림을 한 그는 얼굴을 감출 용도로 자연스럽게 쓸 수 있으니 말이다.
“스펜서 씨는?”
“따로 오기로 해서요. 아직 안 왔습니까?”
“뭐, 보시다시피.”
“이상하네요. 저보다 먼저 나간 거로 아는데….”
평일, 그것도 오전의 공원은 꽤 한가하다.
에이전시의 건물이 관광객들의 방문 스팟과는 살짝 빗나간 곳에 있는 것도 이 느긋함에 한몫 보탰을 거다. 나는 바커와 나란히 앉아 어린아이들과 함께 나온 몇몇 가족들을 멍하게 구경했다.
사실 바커와 이 시간에 나란히 공원에 앉아 있는 건 정말 처음이다.
슈트가 아닌 가벼운 청바지에 셔츠를 받쳐 입은 모습을 보는 것 역시 퍽 낯설다.
내심 그와 내가 이 몇 년간 좋은 협력관계이자 친구라고 생각했던 게 조금 머쓱해진다. 그래도 5년을 알고 지냈는데…… 확실히 나는 꽤 무심한 친구였던 모양이다.
굳이 변명하자면 나에게 다니엘 바커는 처음 몇 년은 연애 대상은커녕 감히 친구라는 단어를 붙이기조차 조심스러운 저 하늘 위의 존재였다고 하면 정상 참작이 될까?
나는 공연히 혼자 “길을 잘못 들었나.” 하고 중얼거리면서 휴대폰을 확인했다.
션에게는 별다른 연락이 없다.
꾹, 전화 버튼을 누르니 신호음만 한참 갈 뿐 도통 받을 생각조차 하지 않고 말이다. 어젯밤만 해도 그렇게 이런저런 말을 덧붙이던 남자가 오늘의 약속을 잊어버렸을 리도 없다.
심지어 가브리엘 씨까지 잘 놀다 오라는 식으로 말했지 않나.
[어디야?]
사실, 이렇게 문자를 보냈을 때까지만 해도 솔직히 바로 답장이 올 거라는 기대는 없었다. 내심 ‘그래, 걔가 혼자 길 찾는 게 흔한 일은 아닐걸’ 같은 한가한 감상을 했을 뿐이다.
하지만 내 연인은 그 모든 예상을 깨고 곧바로 메시지를 읽었다. 심지어 즉답까지 했다.
[오늘의 승리 예상 O:)]
[어디냐고]
뻔히 사람이 기다리고 있는데 아무렇지도 않게 이어지는 딴소리에 곧장 위치를 캐물었던 나는, 작은 호기심도 연이어 전달했다.
[그리고 왜 입이 두 개야]
[입?]
머잖아 션에게서 물음표 세 개가 도착했다. ‘???’.
그러고 몇 초 뒤, 그는 정말이지 6.3피트의 커다란 키와 차가운 이목구비와는 어울리지 않는 귀여운 답장을 이어 보냈다.
[바보야. 링이거든 :(]
[링?]
[천사 링]
…정말… 할 말이 없다.
얘한테 천사 이모티콘 가르쳐 주신 분은, 순순히 자수하기를 바란다.
잠시 휴대폰을 들고 헛웃음을 치고 있으니, 옆에서 바커가 무슨 일이냐는 듯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사실 난 이때까지만 해도 그에게 ‘곧 도착할 것 같네요’ 같은 말을 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션의 메시지는 내 입이 달싹이는 것보다 더 빨랐다.
[참고로 난 너와 대니보다 더 빨리 도착했어]
“……뭐?”
덕분에 최대한 눈에 띄지 않는 게 관건이던 오늘의 목표와는 다르게, 저도 모르게 뾰족하니 높은 목소리가 튀어나와 버렸다.
“이선?”
“아니, 그게. 션이 이미 와 있다는데요. 자기 말로는 제일 먼저 왔다고….”
나는 션이 바커 그를 ‘대니’라고 지칭했다는 건 차마 전하지 않았다.
확실히 그건 잘한 선택이었던 것 같다. 바커는 션의 그 말을 전하자마자 인상을 찌푸리며 썩 즐거워 보이지만은 않는 미소를 걸었으니 말이다.
“글쎄. 그렇게 빨리 도착했으면 기다리게 할 필요도 없지 않나?”
“하하, 하, 그-으게. 얘가 생각보다 장난을 좋아하더라고요. 아마도 이 어디서 보고 있는 것 같은데.”
“그래 봤자 손바닥만 한 곳에서 별짓을 다 하는군.”
바커의 말이 맞다.
에이전시 사무실의 옆에 있는 이 공원은 그렇게 큰 곳이 아니다.
주변 오피스나 아파트에서 사는 사람들이 산책하고 쉬기 딱 좋은 정도의 곳이라고나 할까. 나는 괜히 더욱 크게 웃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언제나 그 존재감을 내뿜다 못해 빛났던 남자는 이 푸르른 잔디가 깔린 곳 어디서도 보이지 않는다. 기껏해야 저쪽에서 작게 피크닉인지, 생일파티인지를 하는 어린 친구들과 나와 별다를 바 없이 벤치에 앉아 있는 사람들 몇이 다다.
그 미식축구 선수 같은 덩치를 하고서 어디에 구겨져서 보고 있을 수도 없을 거고, 대체 어디에 있는 걸까. 나는 괜히 분위기가 더 싸해질까 싶어서 ‘야 너 어디냐고 빨리’ 까지 급히 타이핑 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다니엘 바커는 그렇게 요란법석을 떤 나보다 션 스펜서를 더 빨리 발견했다.
“-으와앗! 바, 바커?”
“조용히.”
나는 바커가 별안간 나를 그의 쪽으로 확 잡아당기는 통에 세상 멍청한 소리를 내며 크게 기우뚱했다. 하지만 바커는 사과는커녕 짧은 단 한 마디 이후 여전히 내 팔을 세게 움켜쥔 채로 내 등 뒤를 뚫어지라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솔직히 그 표정은 조금 무서울 정도로 심각해서 그 순간 조금 쫄고 말았다는 걸 인정한다. 나는 그제야 쭈뼛쭈뼛 힘이 들어가 잘 돌아가지 않는 고개를 슬그머니 기울였다.
그러고 나서, 나는 다니엘 바커가 갑자기 내 팔을 훅 붙잡은 이유를 머잖아 알 수 있었다.
살면서 홈리스나 약쟁이들은 적잖게, 아니 조금쯤은 많이 곁에 두고 살았었지만…… 뭐랄까, 저건 좀 종류가 다르다.
바보가 아닌 이상 그건 누구라도 알 수 있을 거다.
“…….”
이 나라로 막 건너왔을 무렵, 나는 썩 치안이 좋지 않은 동네에서 살았다.
덕분에 부모님은 목걸이로 열쇠 대신 후추 스프레이를 걸어 주셨었고 이모네 부부는 낯설고 수상한 어른이 말을 걸면 대답조차 하지 말고 곧바로 뛰어서 그 자리를 피하거나 다른 어른을 소리쳐 부르라고 몇 번을 신신당부했었다.
그리고 지금.
그 어린 기억으로부터 20년도 더 지난 지금의 나는 후추 스프레이 목걸이도 없고, 소리쳐 부를 누군가도 없는 어른이 되어 버렸다.
솔직히 우리 쪽으로 뚜벅뚜벅 걸어오는 그 사람을 보면서 가장 먼저 떠올린 건 어렸을 때 보고 며칠 동안 잠을 못 이뤘던 범죄자 파일 속 초상화였다.
후드에 얼굴을 반쯤 가리는 선글라스를 쓴 *유나바머 몽타주 같은 거 말이다.
사실 난 그가 남은 거리의 절반쯤 다가왔을 때 바커를 붙잡고 도망쳤을지도 모른다.
“……션?”
-그 남자의 손에 있는 휴대폰이 매우 낯익지 않았다면 말이다.
“뭐?”
“아니, 저기, 저 들고 있는 휴대폰이- 아마도…요.”
LA는 크리스마스마저 눈은커녕 화창한 날씨 덕분에 미국 내에서도 가장 많은 홈리스가 모인 동네답게 사이비도, 또라이도 많다.
구석에서 미동조차 하지 않고 앉아 노트북만 보는 인간 역시…… 뭐. 좀 드물기는 하지만 있을 법하다.
하지만, 민소매와 반바지만 걸치고 조깅 하는 사람도 있는 판국에 두꺼운 후드와 선글라스, 목을 가린 기묘한 무늬의 스카프까지 댄 채 꼼짝 않던 거구의 사내가 불현듯 자리에서 일어나는 건 좀 다른 선상의 이야기다.
심지어 커다란 주머니에 한 손을 집어넣고 이쪽을 향할 때의 본능적인 경계는- 대형마트에서 총을 파는 한 어쩔 수 없이 계속 따라올 일일 거다.
그 다니엘 바커를 순간 긴장하게 하고, 나를 어릴 적의 어두운 골목길로 돌려보냈던 괴한은 순식간에 코앞까지 다가왔다.
-그러고는….
“안녕.”
안녕 같은 소리 하고 있다.
나는 지금 이 순간 LA에서 가장 수상한 몰골일 커다란 보잉 선글라스 앞에서 잠시 할 말을 잃었다가, 한숨조차 쉬지 못하고 얼빠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어떻게… 이 꼴로…, 아니, 대체 그딴 옷이랑 선글라스는 어디서 나서….”
“학교 다닐 때 입던 옷인데.”
“학교?”
“따뜻하고 편해.”
그 예쁜 눈동자도, 근사한 몸도 커다란 후드와 헐렁한 면바지 속에 완벽히 감춘 거대 미국산 회색곰이 그나마 듣기 좋아 다행인 목소리로 믿을 수 없는 말을 늘어놓았다.
테러리스트 양성 학교에 다녔다는 말은 들은 적 없는데 말이지. 저 꼴을 하고 학교에 다녔다면 다른 건 몰라도 보안 하나는 잘 지켜졌겠다. 그와 동시에 교우관계를 내다 버리지 않았을까 하는 합리적인 의심이 드는 건 논외지만 말이다.
“…정말… 션 스펜서, 당신입니까?”
“알아볼 줄 알았는데 눈이 마주치고도 모르더군요, 바커.”
“…….”
와!
하늘에 맹세코 그건 바커의 잘못이 아니다.
난 아직도 눈앞의 이 회색곰이 어젯밤 내 침실에서 한참을 머뭇거리다 나간 그 남자와 매치 되지 않을 정도다.
저 살벌한 선글라스가 문제일까? 아니면 회색 후드?
아니다, 그냥 다 문제다. 심지어 평소에는 그를 더더욱 평범하지 않게 해 주었던 늘씬한 키마저 지금은 거대한 장벽에 편입된 채다.
왠지 아침에 집사 가브리엘 씨가 왜 그렇게 차마 말을 다 하지 못했는지 알 것만 같다.
그렇게나 강력하게 피력했던 자신의 고용주가 저 꼴로 걸어 나가는데 나라도 목이 멨을 것 같다.
세상에. 안 걸리게 하라고는 했지만, 그 얼굴을! 그 몸을! 저렇게 쓰다니!
“후우. 내가 좋아하는 쿠키 가게에서……, 샌드위치 하나씩 먹고 갈래요?”
적막의 이유를 아는지 모르는지, 션 스펜서의 목소리를 내는 회색곰이 되물었다.
“쿠키 가게에서 샌드위치?”
“쿠키 가게인데 비스킷이랑 샌드위치도 팔아.”
솔직히 지금 션은 목소리만 익숙할 뿐이지 그 모습만 보면 같이 다니기 흉흉할 정도라, 내심 구석으로 가서 진짜 내 애인이 맞는지 얼굴을 까 보고 싶을 정도다.
어쨌거나 이 머쓱한 상황을 정리하려면 우선 자리를 좀 피해야 할 거다.
최소한 선글라스라도 내 것과 바꿔 끼게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아니면 저 저주받은 듯한 회색 후드라도 좀 벗게 하든가 말이다.
선글라스를 살짝 내려 션을 확인하는 바커의 눈에는 여전히 황당함이 어려 있지만, 그는 나보다도 빨리 정신을 차렸다.
“-내 차로 같이 움직이는 게 낫겠군.”
맞는 말이다.
저 꼴을 한 운전자가 있다면 누구라도 멈춰 세우고 싶어질 테니 말이다.
하지만 그건 꽤 안일해 빠진 생각이었다.
……대체 걸어서 공원을 빠져나갈 수 있을 거라고 누가 그랬나?
“실례합니다.”
나는 순간 머리가 하얗게 표백된 채로 우리를 불러 세운 이들을 얼빠진 얼굴로 바라보았다. 이것도 직업병일까? 이 순간마저도 그들의 가슴께 있는 바디 카메라에 멍하게 입을 벌린 내 몰골이 어떻게 나올지 궁금하다.
“신고를 받고 왔습니다만.”
“…시, 신고요?”
그렇다.
지금 우리는, 정확히 나는- 경찰한테 잡혔다.
그것도 다니엘 바커와 션 스펜서를 끼고 나온 날에 말이다!
배지를 보여 주는 순간에도 짙은 네이비 색의 유니폼을 입은 경관들의 시선은 예리하리만치 이쪽에 꽂혀 있다. 수상하게 보일 거라는 건 알지만, 그 눈과 마주친 순간 나는 저도 모르게 크게 마른침을 삼키고 말았다.
경관의 질문은 이제 나에게서 바커로 옮겨갔다.
“일행이십니까?”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세 분 모두 신분증 좀 보여 주시죠.”
혹시 아직 이들과 마주쳐 보지 않은 분이 계신다면 내 말을 꼭 기억하라.
경찰이 신분증을 달라고 하면 그냥 얌전히 꺼내는 게 최고다. 적어도 그땐 주머니에 손을 넣는 게 허락된다는 뜻이니 말이다. 괜히 뭐라고 토를 달 필요는 절대, 절대, 절대 없다.
내 옆을 보라고.
그 다니엘 바커마저 순순히 그의 주머니를 뒤적이고 있지 않나.
여러분들이 별다른 사고 친 전적이 없다면 이 단계에서 순순히 따르기만 해도 좀 살만해진다. 그러니 제발 잔말 말고…….
“신분증을 안 가지고 나왔습니다만. 일행의 신분 확인으로 되겠습니까?”
씨발! 신분증도 꼭 가지고 다니길 추천한다!
나는 회색곰…, 아니 내 회색 후드를 뒤집어쓴 내 파트너에게서 흘러나오는 우아한 목소리에 숨이 턱 막혔다. 살며 이러니저러니 경찰의 ‘신분 확인’을 여러 번 받 아본 나로서는 지금의 이 상황이 얼마나 답답할지 여러분들은 상상조차 못 할 거다.
일행의 신분 확인 따위로 될 거 같나?
“…그건 어려울 것 같군요. 잠깐 동행해 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가방도 이쪽으로 주시겠습니까?”
아니나 다를까 션의 말에 경관은 크게 눈썹을 휘더니, 자세가 조금 달라졌다.
덕분에 허리춤의 배지와 총이 유독 잘 보이는 건 내 생각만은 아닐 것 같다. 문장 뒤에 붙는 ‘sir’에 들어간 힘도 심상치 않고 말이다.
“왜입니까?”
제발 조용히 있었으면 싶던 내 파트너의 목소리가 들린 건, 어느새 지갑을 꺼낸 다니엘 바커가 자신의 운전면허증을 들고 대신 뭐라고 입을 떼려는 듯 선글라스를 살짝 벗던 순간이었다.
그 기가 찰 정도로 담담하고 침착한 되물음 덕분에 나와 다니엘 바커는 거의 동시에 움직임이 멈췄다.
그건 경관들 역시 마찬가지인 듯했다.
“……뭐라고요?”
“왜 제 가방까지 드려야 하는지 물었습니다.”
옆에 있는 다른 경관이 뭐라고 고개를 돌리고 뭐라 작게 무전을 치기 시작했다.
아, 느낌이 좋지 않다. 우리와 함께 이야기하던 경관- 그래, 명찰에 고메즈라고 쓰여 있다. 고메즈 경관이 흘리는 헛웃음이 보통 까칠한 게 아니다.
“수상한 사람이 있다는 신고 일곱 건이면 설명이 되겠습니까?”
“…….”
“우선 가시죠. 확인할 게 많을 것 같은데요.”
“-그렇다면, 수상한 사람이 아니라는 신분 확인만 되면 해결되겠군요.”
사실 경찰의 물음에 응대하는 션 스펜서의 말투가 지극히 침착하고 또 우아한 단어로 엮어져 있지 않았다면, 저 경관의 허리춤에 있는 것이 진작에 손에 쥐어졌을 거다.
LA 카운티의 질서를 위해 밤낮으로 뛰는 것도 알고 차별주의자로 몰아가고 싶지도 않지만 왜 전적이라는 게 있지 않나. 선글라스 아래로 보이는 피부색이 달랐다면 저 인내심이 진작 바닥났을지도 모르고 말이다.
“문제가 없다면야 가능하겠지만 이런 식으로 공무집행에 불응하면 강제적으로-”
나와 바커는 거의 동시에 “저, 잠시만.” 하고 입을 뗐지만, 도로 저쪽에서 보이기 시작한 또 다른 경찰차를 확인한 션 스펜서의 행동은 그보다 조금 더 빨랐다.
“불응이라뇨, 경관님.”
그리고 이내 결론이 났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
“…….”
-질 나쁜 갱이 총을 숨기고 다닐 것만 같은 커다란 회색 후드보다는 저 프레임 두꺼운 선글라스가 조금 더 문제였다.
정확히는 저 둘이 만나 최악의 시너지를 낸 것이지만 말이다.
나는 내 옆에 있는 남자가 익히 아는 그 남자, 션 스펜서가 확실하다는 것을 선글라스 하나가 잠깐 사라지는 것으로 확인할 수 있게 됐다. 그건 놀라다 못해 조금 얼이 빠진 듯한 표정으로 입이 열린 두 경관도 마찬가지였다.
흉흉한 것으로 가리고 있던 탓일까. 유독 하늘의 조각 하나를 떼어 둔 듯 파랗게 빛나는 눈동자가 잠시 적막이 휩쓰는 이들의 얼굴을 하나씩 훑었다. 나는 그 황송한 움직임의 가장 마지막에 있었고, 덕분에 션이 다시 선글라스로 그의 얼굴을 가리기 전 마지막으로 살짝 눈웃음치는 것마저 똑똑히 보았다.
“최대한 눈에 안 띄었으면 하는데. 이 정도면 확인이 되었을까요?”
“…아….”
물론 그 마법 같은 순간은 선글라스가 얼굴의 반을 가리자마자 곧바로 끝나기는 했다.
금방이라도 총과 수갑을 꺼내 들고 지원을 요청할 것 같던 흉흉한 기운은 이미 온데간데없다. 나는 얼떨떨한 표정을 채 감추지도 못하고 대답하는 경관들의 목소리에 저도 모르게 슬슬 올라가는 입술을 꽉 맞붙였다.
“예, 뭐어….”
“늘 수고 많으십니다.”
얼굴 하나로 신분 증명이 가능하다는 건 얼마나 멋진 일인가!
* * *
이토 여사의 작은 가게는 내가 이 근방에서 가장 사랑하는 곳 중 하나다.
카페라고 하기에는 음료 선택지는 레모네이드와 콜라뿐이고, 쿠키 가게라고 부르기는 하지만 쿠키뿐만 아니라 비스킷과 샌드위치도 함께 팔아서 좀 더 적절한 표현이 없을까 늘 고민하는 곳이다.
어쨌거나 여기는 LA에서 가장 맛있는 공간 중 하나다. 테이블은 세 개뿐인 작은 곳이지만 이만한 데가 없다.
오늘의 메뉴는 샌드위치 하나에 비스킷 둘, 음료로는 레모네이드 둘, 다이어트 콜라 한 잔이다.
“두 사람 다 오랜만에 왔으니 잘 먹고 가요.”
“흠흠……, 네. 맛있게 먹을게요.”
“고맙습니다.”
이토 여사가 말한 ‘두 명’은 나와 바커다.
바커 역시 내 홍보로 이곳에 몇 번인가 오고, 가끔 에이전시의 다과로도 한 번에 많이 사들인다고 들었다.
온화한 이토 여사의 눈매가 묘하게 의뭉스러워진 건 내 쪽에서 맞은편의 회색곰에게 닿았을 때였다. 이토 여사는 선글라스 뒤의 션 스펜서에게 살짝 웃어 인사하고는 총총 멀어졌다.
물론, 그녀가 멀어지는 순간 나는 다시 테이블에 머리를 박았다.
“……크흡!”
“그만 웃지?”
아, 너무 웃어서 멀미가 난다.
“웃긴 걸 어떡하냐. 가브리엘 씨가 안 말리든?”
“세상이 무너진 얼굴을 하긴 했지. 대체 ‘이게’ 저택의 어디에 있었냐고 그러던데.”
“으하하핫!”
아, 어떻게 참은 웃음인데 한 번 터지고 나니까 종잡을 수가 없다.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션 스펜서의 패션은 온갖 잡지에 실릴 정도로 꽤 유명하다. 애초에 흰 셔츠에 청바지만 입어도 돋보이는 몸이기는 하지만 완벽한 핏의 옷에 딱 어울리는 시계나 클러치백, 센스 있는 신발까지 모두 모여서 그가 걸치는 물건들의 브랜드가 덩달아 뜨곤 했었을 정도니 말이다.
그런데 세상에!
션 스펜서의 그 완벽한 옷차림은 모두 집사 가브리엘 씨의 솜씨였댄다.
다른 사람한테 안 걸리게 나오랬더니 패션 테러리스트도 아니고 정말 ‘테러리스트’로 오해받게 입고 나온 게 션 스펜서의 진짜 취향이었던 거다.
이건 우리끼리의 비밀로 하자.
그렇지 않으면 스펜서 저택에 있는 말끔한 얼굴의 집사장이 정말 울지도 모른다.
“진짜 이렇게 웃는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네….”
농담이 아니라, 정말 졸도 직전까지 웃은 것 같다.
하도 웃어서 땅기는 걸 넘어 얼얼하기까지 한 배는 말할 것도 없다. 그래도 앞에 사람을 앉혀 두고 웃어도 너무 웃었나?
자기주장 강한 이목구비를 가진 두 남자가 내 얼굴을 거의 해부할 기세로 뜯어보는 게 왠지 좀 심상치 않다. 그렇지 않아도 어제 잠을 설쳐서 영 보기 싫게 붓기까지 했는데 말이지.
그제야 좀 진정해야지 싶어진 나는 하도 웃어서 열마저 좀 오른 것 같은 속을 진정시키려 물을 몇 모금 삼킨 뒤 말을 이었다.
“야, 그래도 경찰한테 또 덤비지는 마. 심장 터지는 줄 알았다고.”
“…전부터 마음에 안 들었어. 왜 매번 내 가방을 보겠다는 건데?”
“예전에도 그런 적 있다고?”
“몇 번 정도.”
정말이지 어떤 꼴로 다녔을지 훤히 그려진다.
모르는 얼굴만 보여도 신고를 퍼붓는 부촌에서 가방 검사를 하지 않고는 못 배길 정도로 수상하게 하고 다녔겠지.
대체 저 꼴을 하고 다니다가 어떻게 할리우드 영화 관계자 눈에 들어서 그 열렬한 캐스팅 요청을 받게 됐는지 신기할 지경이다. 왜, 무슨 선글라스를 벗으면 난데없이 등장하는 미남 뭐 그런 거였나.
저렇게 하고 나올 남자를 두고 어젯밤 끙끙 앓으며 열등감과 초조함에 잠 못 이뤘던 걸 생각하니 왠지 허탈하기까지 하다. 조금 뒤늦은 긴장 역시 쭉 풀린다.
나는 결국 다시 한번 작게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그렇게 땅기는 얼굴 근육을 주무르고 있자니 션이 별안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미안. 잠깐 전화 좀.”
“어? 으응. -아, 맞다. 나랑 비스킷이랑 샌드위치 하나 바꿀…….”
녀석은 얼마나 갑자기 성큼성큼 나가던지, 나는 그와 곧잘 하던 음식 교환을 할 타이밍마저 놓쳤다.
그때였다.
갈 곳 없는 내 문장을 받은 건 쭉 별말 없이 있던 바커였다.
“나랑 바꿔.”
그는 나보다 몇 살인가 더 많았던 것 같은데, 늘 슈트 차림만 봤던 남자가 셔츠에 청바지만 걸치니 당장 또래가 된 느낌이었다. 나는 그가 건네주는 비스킷을 보며 작게 고맙습니다, 하고 중얼거리듯 말했다.
-에휴. 단둘이 남으니 전처럼 편하게 눈을 마주치기 힘들다.
“…음. 미안해요. 저 너무 션이랑만 떠들었죠.”
“그렇게 웃는 거 처음 봐서 괜찮았어.”
“…….”
나쁜 사람은 안 되고 싶다는 희망은 버리자.
어쨌거나 이 맥락 속에서 나는 나쁜 인간이 될 수밖에 없다.
뭐가 현명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게 연애라는 건가 싶은 달짝지근한 걸 막 시작하자마자, 5년을 알고 지낸 은인이자 친구인 남자가 사실은 날 쭉 좋아해 왔다는 말을 한다면 대체 무슨 얼굴로 어떤 입장을 해야 하나?
굳이 말하자면, 난…… 희망 고문은 하지 말자는 쪽인데. 이건 굳이 연애가 아니어도 이제껏 살아오면서 겪은 심히 개인적인 가치관이다.
난 공연히 턱을 긁적이다가 지금이 아니라면 하기 힘들 이야기로 화제를 돌리기로 마음먹었다.
그래도 굳이 오늘 이런 분위기에서 더 나빠지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저…, 바커 씨.”
“어.”
“-꽤 전에 제가 가서 했던 이야기 말인데요. 왜, 저녁에 에이전시 건물 가서 했던…. 기억하시죠?”
바커는 잠시 말이 없다.
덕분에 나는 설마 그가 그날 저녁의 말들을 잊었을까 싶어졌다. 하지만 그건 이번에도 내 착각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것도 처음이었군.”
“예?”
다니엘 바커는 잠시 잠잠히 있더니, 살짝 바람 빠진 웃음소리와 함께 혼잣말처럼 툭 입을 열었다.
“그날이 나한테 처음으로 먼저 전화한 날이었어.”
확실히 달라졌다.
늘 여유 가득한 얼굴로 ‘젠틀하다’라는 단어가 어울리게 적당한 거리감을 유지하던 남자가 안전거리 없이 훅 가까이 들어온다. 그를 탓하려는 건 아니다.
바커에게도 어떤…… 심경의 변화가 있다는 뜻이겠지.
“…어, 그랬나요.”
“막 알고 지내기 시작했을 때부터 다니엘이라 부르라고 했었는데, 늘 모르는 척 웃으면서 ‘바커 씨’ 하던 사람이 처음으로 이름을 부른 날이기도 해. 어떻게 잊겠어.”
“…….”
그리고 나 역시.
“좋아요, 다니엘. 아! 저도 대니라고 할까요.”
“정말 너무하는군.”
“하하!”
각자의 의도가 가득한 웃음 속에 그와 나 사이에 쭉 있던 팽팽한 무언가가 조금 누그러졌다.
바커, 아니 다니엘 그가 같은 성별만을 마음에 담을 수 있는 사내라는 걸 알게 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주제에 이런 생각을 하는 건 좀 미안하지만… 차라리 5년 전 그때였으면 그와 내가 어떻게 될지 몰랐을 거다.
지금도 같은 남자와 한 침대에서 일어나는 게 어색할 때가 있기는 하다.
하지만 생각보다 성별이 별 상관없는 거였다면 결국 한없이 다정한 친구인 션 스펜서와 다니엘 바커, 두 사람의 차이를 굳이 꼽자면 거의…… 타이밍과 운이나 다름없지 않았을까.
……물론 이건 내가 그들에게 행운이라는 미친 소리는 절대 아니다.
오히려 운에 걸려 넘어진 쪽은 내 쪽이지.
왠지 멋쩍어진 나는 물로 입을 한 번 더 축인 다음 말을 이었다.
“여튼…… 제가 좀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었잖습니까.”
“그랬지.”
사실 그날 입에 담았던 가정들은 결코 이렇게 산뜻하게 대답할 만한 종류의 것은 아니었건만, 다니엘 바커의 목소리에서는 어떤 그늘도 찾아볼 수 없었다. 덕분에 나는 조금은 용기를 얻어 말을 이어 갔다.
“다른 게 아니고, 그…. 제 오해가 좀 있었어요. 끔찍한 착각이었죠.”
“착각이었다?”
“사적인 문제가 있어서 다 말하기는 어렵지만, 역시 제 망상이었어요. 하하, 정말 지금 생각해도… 말도 안 됐죠. 바보 같은 미친 이야기였는데. 정말 죄송했습니다.”
잠시 자리를 비운 나의 회색곰을 생각하면 왠지 목구멍까지 먹먹하게 열이 오르는 생각이었지.
온갖 심란한 가정을 늘어놓았던 주제에 이제 와 모든 게 실수고 착각이었다고 말하는 게 얼마나 우습고 이기적인가. 아무리 나름의 대단한 이유가 있었다 한들 멋대로 가늠해 떠든 책임이 없어지는 건 아니다.
다니엘 바커의 시선이 따끔따끔하게 내 얼굴에 꽂히는 게 느껴졌다. 지금 저 남자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정말 가지가지 한다고 혀를 찰지도 모른다.
“글쎄……. 사과를 받을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하지만 그의 입 밖으로 나온 건 뜻밖의 문장이었다.
“저번에 말했던 형사, 아마 이름이-”
“닉 코빗이요.”
“그래, 그 사람에 대해 좀 알아보다가 의외의 이야기를 좀 듣게 됐거든.”
나는 호흡법을 잊은 풍선처럼 툭툭 끊어진 숨을 간신히 내쉬었다. 스스로가 들이마셨다가 또 뱉어 내는 숨이 너무나 신경 쓰였다.
“우선 그다지 좋은 방법으로 알아낸 사실이 아니라는 걸 먼저 시인하지.”
언제나 여유롭게 내가 모르는 것들을 쥔 채로 휘두르던 남자의 이야기를 듣는 건 왠지 섬뜩하기까지 한 일이었지만, 나는 바커의 전제를 듣고도 그의 말을 끊지 않았다.
“평이 아주 극과 극인 사내였어. 같은 경찰 내부에도 적이 많은 것 같았지.”
“……그러고도 남을 인간이긴 합니다만.”
“그래?”
“말로 원수를 만드는 작자거든요.”
“비슷한 말을 많이들 하더군.”
하여간 만날 때마다 속을 뒤집던 그 화법은 하루 이틀 해서 나올 만한 것이 아니었다.
나는 형사의 그 끅끅대는 웃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내 말을 듣고 뭔가를 생각하는 것 같던 다니엘 바커의 말이 이어진 건 그때였다.
“그런데 완전히 상반되게 호평인 쪽도 있었단 말이지.”
“누가 그래요?”
“마약 단속 부서.”
……왠지 죽을 만큼 신경을 뒤집어 놓는다 싶더니!
“특히 그쪽에서는 LA 내에서 갱단이며 마약 사건에 가장 정통한 사람이라고 손꼽았어. 그에게만 입을 여는 정보원들도 많아서, 아무리 적이 많아도 쳐 내려야 쳐 낼 수가 없는 사람이라고 말이야.”
먹음직스러운 이토 여사의 샌드위치며 쿠키가 눈앞에 있는데도 왠지 입맛이 뚝 떨어진다. 아니 오히려 좀 체할 것 같은 기분이 들기까지 한다.
이건 뭔가 내 생각과 아주 많이… 다르다.
“이선, 이건 혹시 몰라서 묻는 건데. 예전에 그를 주변에서 본 적 없었어? 아는 사람이 근처에 있었다던가.”
“예전이요?”
“대충 3년 전쯤?”
마약 단속 부서에서 칭송받는 형사가 뜬금없이 화려한 배경을 자랑하는 스펜서, 심지어 그중에서 가장 유명할 남자에게 집착하는 이유가 뭘까?
LA의 갱단들과 그들이 쥐락펴락하는 마약이 하루아침에 사라졌을 리도 없는데 말이다.
나는 왠지 뒷골이 서늘해진 것 같아 괜히 목 뒷덜미를 주무르며 최대한 담담하게 대답했다.
“……아뇨. 왜요?”
“잘은 모르겠지만… 코빗 그 형사가 이번 일에 집중하는 이유와 관련이 있나 싶어서.”
다니엘 바커는 바보가 아니다.
오히려 굉장히 눈치가 빠르고 몇 수 앞을 먼저 보는 쪽이다. 하지만, 가끔은 그렇기 때문에 일부러 모르는 척 기꺼이 제 눈 하나를 감아 주는 사내이기도 하다.
“하하….”
왠지 웃음이 났다.
그는 지금 코빗의 시선이 닿았던 곳이 사실 션 스펜서가 아니라 내 쪽이 아니냐는 말을 몇 번이나 돌려 넌지시 전하고 있다.
세상 모두가 아는 바커 그의 성적 취향은 몰랐더라도, 최소한 이런 의도 정도는 깨달을 수 있을 정도로 멍청하지는 않아 다행이었다.
3년 전쯤에 그 빌어먹을 형사를 보거나 관련된 사람이 있지 않았냐고?
……글쎄, 잘 모르겠다.
최소한 살아 있는 사람 중에 그걸 물어볼 친구는 남지 않은 것 같은데.
“괜한 말을 했군.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아도 돼.”
“아닙니다. 바커- 아니, 다니엘. 말해 줘서 고마워요. 정신이 번쩍 드는데요.”
“…….”
닉 코빗, 닉 코빗, 닉 코빗….
아. 이 개자식은 대체 뭐 하는 새끼일까.
나는 부글부글 끓어오르기 시작한 속을 숨기며 입꼬리를 가까스로 잡아 올렸다. 내 표정을 신중하게 살피던 바커의 입이 약간의 머뭇거림을 머금고 천천히 열린 건 그때였다.
“사실 이런 말을 하면… 어떻게 받아들일지 모르겠는데.”
“다니엘, 제발!”
“…….”
“부탁이니 솔직히 말해 주세요.”
심장이 기분 나쁠 정도로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하지만 다니엘 바커는 내 재촉에도 바로 입을 열기는커녕 무언가를 가늠하듯 잠시 테이블만 노려보며 그의 턱을 쓸면서 한참을 뜸을 들였다. 덕분에 속이 바짝바짝 타들어 갔지만, 그의 표정이 너무 심각해 보여서 뭐라 더 다그칠 수도 없었다.
얼마나 그렇게 있었을까.
꾹 닫혀 있던 단호한 입매가 풀리며, “그래…. 말하는 게 맞겠지.” 같은 무서운 중얼거림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이어지는 문장은 언제나 자신감에 가득 차 있었던 쾌활한 다니엘 그답지 않게 망설임이 뚝뚝 묻어져 나왔다.
“그러니까, 난 무엇보다….”
“네. 말씀하세요.”
“이선 당신이 몇 년간 왕래도 없던 바라노프의 사건에 호출됐던 이유가 그리 좋지 않다고 생각해.”
돌이켜 보면 나는 그 순간 어떤 방해가 있었든 그를 붙잡고 다그쳐 물었어야 했을 거다.
하지만 저 멀리서 들리는 가벼운 라디오 소리가 거슬릴 정도로 온 신경을 집중한 그때, 대뜸 창문 밖에서 훅 가까이 다가온 커다란 검은 것에 놀라지 않기란 불가능한 일이었다.
“……아, 젠장!”
그 검은 것은, 정확히는 거대한 카메라는 나를 곧장 겨냥하고 있다.
최소한 그게 총이 아니었다는 것에 감사해야 할 테지만, 타이밍이 나빠도 너무 나쁘다. 불행 중 다행으로 눈앞의 얼뜨기는 아마 다니엘 바커의 얼굴을 모르는 듯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바커는 제쳐 두고 내게만 이렇게 저 거대한 렌즈를 들이밀 리가 없지.
이렇게 한 사람이 나타나면 다른 꼬리가 물리는 건 쉬운 일이다. 심지어 하필 션이 자리를 비운 순간이라면 더욱 좋지 않다.
나는 급히 선글라스를 도로 낀 채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다니엘. 저 먼저 뒷문으로 나갈게요.”
“뭐?”
“션도 곧 오겠죠. 나와서 연락하세요.”
“지금 혼자 나가겠다는 건가? 잠깐-”
나는 뭐라고 더 말을 이으려는 바커에게 대충 손을 흔들었다.
오늘은 저 파파라치들을 보며 내심 뿌듯해하거나 웃어 줄 정도로 여유롭지 못하다.
사랑스러운 이토 여사 역시 “벌써 간다고?” 하며 눈을 동그랗게 떴지만, 아쉬워도 오늘은 여기까지다. 더 먹으면 체할 것 같기도 하고 말이다.
쓰레기통이 줄지어 있는 곳과 연결된 가게의 뒷문은 다행스럽게도 지나가는 행인 하나 없었다.
한창 심란할 때 다시 잡았다가 요 몇 달 쓰레기통에 처넣었던 담배를 다시 물고 싶은 기분이다. 난 그 생각이 머릿속을 치고 올라옴과 동시에 곧바로 근처 작은 주유소로 직행해서 담배를 하나 샀다.
망할. 딱 한 개비만 피울 거다.
‘션 스펜서’.
나는 불을 붙인 담배를 깊게 빨면서 휴대폰 액정 위에 떠오른 이름을 물끄러미 보다가, 후우, 하고 하얀 연기를 내뱉으며 전화를 받았다.
-어디야?
최소한 ‘여보세요’는 하고 묻는 게 예의 아닌가.
나는 감히 션 스펜서를 향해 속으로 예의를 논하며 최대한 태평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 잠깐 나왔지.”
-그건 나도 알아. 어딘데.
예전에는 담배가 그렇게나 맛있었는데, 이제는 텁텁하니 목이 콱 막힌다.
나는 한 개비만 태우겠다는 그 야심 찼던 다짐을 달성하기는커녕, 결국 얼마 가지 못하고 입에 물던 걸 쓰레기통에 비벼 껐다.
막 포장을 뜯어 반짝반짝한 담배와 싸구려 라이터 역시 곧장 버려졌다.
아, 짜증 나게 돈만 날렸다.
그래도 조금 위안이 되는 건, 자꾸 채근하듯 이어 묻는 연인의 목소리가 오랜만의 담배에 까칠해진 내 쪽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듣기 좋았다는 거다.
-이선?
“…….”
-이선, 무슨 일 있어? …이선!
뭐라도 더 말해 줬으면 좋겠지만 뭐니 뭐니 해도 저 남자가 내 이름을 부르는 게 제일 좋지. 이제껏 살며 단 한 번도 그리 좋아한 적 없는 이름이지만, 그가 몇 번이고 급히 말을 잇는 지금만큼은 퍽 나쁘지 않은 것 같다.
나는 그의 목소리에 걱정이 덧칠해지기 전에 천천히 입을 열었다.
“션. 옆에 바커 씨 있지.”
-그야 당연히….
“둘이서 영화 보고 와.”
나름대로 꽤 고심 끝에 내놓은 해결책이었건만, 통화가 끊어진 게 아닌가 싶은 침묵만이 흐른다. 나는 쓰레기통 옆에 구겨 앉아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휴대폰 너머의 대답을 기다렸다.
-……뭐?
“말했잖아. 걸리는 사람은 탈락이라고. 난 여기서 아웃이야. 꼭 같이 보고 오기다. 내용 물어볼 거야. 작작 좀 싸워. 알겠지?”
입으로 쪽, 하고 소리를 내자 내내 듣기 좋은 목소리만을 냈던 연인에게서 뭐라 설명할 수 없는 한숨이 터졌다. 티격태격하는 두 남자의 대화가 들리기 시작한 것도 그때부터다.
‘무슨 일입니까?’, ‘…당신이랑 같이 영화 보고 오라는데 대체 이게 무슨-’, ‘뭐라고요?’….
나는 휴대폰 너머로 뭐라고 빠르게 대화를 나누는 소리를 들으며 바커보다 두 배는 말이 빠른 듯한 션 녀석이 뉴욕에서 온 애가 맞다는 걸 새삼 다시 느꼈다.
그러다 이내 들려온 경직된 웃음기 어린 목소리는, 전화를 옮겨 받은 다니엘 바커였다.
-하하, 이선. 장난치지 말고….
“장난 같아요? 글쎄. 아닌데.”
한 번 꾹 참았다가 천천히 뱉어 내는 한숨에 온갖 감정이 다 전해진다.
하지만 난 저 둘 사이에서 요 일주일간 이미 치일 만큼 치였다. 둘 중 누구의 손도 놓을 수 없는 내 입장은 온데간데없이, 저 팽팽한 기 싸움 사이에서 발을 동동 구르는 것도 지친다.
특히 오늘은 더 그래.
“뭐, 그러다가 열애설이라도 나면… 음, 나는 좀 편해지려나.”
-…….
“두 사람이라면 세기의 사랑이 될 수도 있겠네요.”
나는 뭐라고 붙잡으려는 듯한 다니엘 바커에게 “파이팅.” 하고 마지막 쐐기를 박은 뒤 전화를 끊었다. 부디 너무 독단적인 행동이 아니냐며 혀를 차지는 말아 줬으면 한다.
“아, 젠장.”
휴대폰을 쥔 손이 한심할 정도로 덜덜 떨린다. 나는 다른 손으로 그 위를 덮어 눌렀지만, 그렇다고 해서 멍청한 떨림이 잦아들지는 않았다.
……이 꼴을 저 두 사람에게 보일 수는 없지 않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