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그렇지 않아도 사람이 많지 않은 평일 이른 오후의 영화관.
차곡차곡 쌓아 왔던 모든 기대가 무너진 두 남자는 그곳에 있는 이들의 시선을 한몸에 받기 충분한 조합이었다. 특히 실내로 들어와서도 선글라스와 후드를 벗지 않은 채로 샌드위치를 먹고 있는 쪽은 그 근처로 오려던 사람들의 발걸음을 돌아가게 하기 충분할 정도로 기세가 흉흉했다.
차마 붙어 앉지도, 또 완전히 떨어지지도 않은 모호한 침묵이 깨진 건, 그렇지 않아도 제게 불리했던 오늘의 ‘더블’ 데이트가 상상도 하지 못했던 식으로 파투난 바커의 질문 때문이었다.
“당신이 불렀습니까?”
솔직히 션 스펜서는 그의 옆에 있는 남자가 지극히 말끔하다 못해 퍽 근사하기까지 해서 이곳에 편히 앉아 있을 수 있는 셈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두둑한 덩치를 자랑하는 경비원이 대놓고 뚫어지라 저를 보고 있으니 편하지만은 않은 상태지만, 최소한 사복경찰에게 끌려 나가지는 않으니 이 정도에 만족해야 한다.
다니엘 바커는 제 물음에 대답은커녕 포장해 온 샌드위치에만 집중하는 우울한 차림의 사내에게 약간의 짜증까지 담아 말을 이었다.
“그 파파라치 말입니다. 어떻게 알고 거기까지 와서 이선을 찍었나 해서 말입니다.”
“…요새 그가 얼마나 자주 연예면에 오르내렸는지는 누구보다 잘 아실 텐데.”
사실 션 스펜서는 이선이 들킨 이유가 제가 빌려준 차 때문일 거라고 짐작하고 있었지만, 굳이 그걸 입 밖에 낼 정도로 친절하지는 못했다. 그 상대가 다니엘 바커라면 더욱이 그랬다.
“생각보다 교활한 면이 있군요, 스펜서.”
“나라고 그쪽과 이렇게 나란히 앉게 될 줄은 몰랐으니 그만 투덜대시지.”
그러니 멋대로 상상하며 열 받게 할 쪽을 택하기로 했다.
션, 그 역시도 무엇 하나 머리로 한껏 그렸던 대로 움직이지 않는 제 파트너 덕분에 초조한 건 매한가지였다. 자랑은 아니지만, 이제껏 LA로 와서 만난 사람들은 하나같이 제게 호의 가득한 눈을 했었다.
진지하게 만나자는 말을 몇 번이나 거절했는지 모르고, 섹스만이라도 즐기자는 제안에는 더욱 단호하게 선을 그어야 했다. 굳이 그게 아니더라도 이 LA 카운티 안에서 만난 모든 이들은 그에게 날씨만큼이나 따뜻한 사람이었다. 변덕스러운 예외 같은 건 없었다. 세상 참 편히 산다고들 생각하겠지만 그래서 이 도시가 더 마음에 들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살며 처음으로 혼자 쩔쩔매고 앓다가 사귀기 시작한 남자는 도통 그 속을 알 수 없다.
헛기침이 반은 섞여 있기는 했지만 어쨌든 공식적으로 저를 부르는 호칭으로 ‘남자친’까지 내뱉은 걸 보면 연인이라는 자각은 확실히 있는 것 같은데.
다니엘 바커 앞에서 우린 같이 살지 않냐며 치고 들어올 때 역시 얼마나 심장이 덜컥였는지 모른다.
사실 솔직히 평소의 좋은 게 좋은 거지, 같은 태도를 떠올려 보면, 그렇게나 가깝게 지내던 다니엘 바커가 모든 걸 내려놓고 달려들면 긴가민가하며 휘둘릴 것 같아 초조하기도 했었다.
그런데 꽤 의외다.
이선은 빙글빙글 웃으면서도 생각보다 꽤 칼 같다.
평소엔 그렇게 발랑 까졌으면서도 이상한 데서 상식적이더니 이마저도 그랬다.
그렇지만, 저라는 인간을 이제 퍽 ‘진지하게’ 생각하기는 해도 ‘심각하게’ 생각하는지는 모르겠다.
정말 그 묘한 차이가 얼마나 속을 얽매는지는 모를 거다.
……다른 건 몰라도 확실히 제 쪽은 갈수록 심각해져 간다. 지금도 그렇다. 그저 코웃음 치며 돌아가면 될 걸, “꼭 같이 보고 와. 내용 물어볼 거야.” 같은 말을 했다고 연적과 나란히 영화관에 오다니.
미쳐도 좀 미친 게 아니다.
연인이 손도 대지 않고 간 샌드위치를 남김없이 먹어 치운 션 스펜서는, 남은 비스킷에도 손을 뻗었다. 이쯤 되니 확실히 입맛마저 비슷해지는 게 아닌가 싶었다.
옆에 누가 있든 말든 먹을 거 하나는 잘 챙겨 먹는 것까지 말이다.
물론, 다니엘 바커는 그걸 가만히 두고 볼 사내는 아니었다.
“뭐. 이선 없이 당신과 하고 싶었던 이야기도 있으니. 잘됐습니다. 스펜서.”
“무슨 뜻이신지.”
“모르는 척하지 마시죠. ‘스펜서가 하는 건 딱 문을 넘는 것까지’. 이제 알음알음 퍼지고 있는 말이잖습니까?”
단어 하나하나가 뱀처럼 유영한다.
“차 문을 열어 주고, 레스토랑의 문을 넘고, 또 호텔의 문을 넘고…. 하지만 딱 거기까지.”
“…….”
“애초에 이쪽에 오래 있지 않을 듯이 굴더니, 멀쩡히 커리어를 쌓고 있는 사람을 왜 흔드는 겁니까. 그렇지 않아도 한 번 걸러져 들어오는 오디션 자리가 게이 딱지가 붙어 더 좁아지길 바라기라도 해서?”
나직하게 쏟아지는 문장의 끄트머리에서, 고소한 버터의 풍미가 확 풍기는 비스킷을 반쯤 뜯던 션 스펜서의 손이 딱 멈췄다.
그는 저를 뚫어지라 보는 바커를 향해 얼굴을 반쯤- 아니 그 이상은 가리던 선글라스를 살짝 밀어 내려서 이제껏 가리고 있던 게 아까울 정도로 새파란 눈을 슥 드러냈다. 바커는 기다렸다는 듯이 말을 이어 갔다.
“아. 남자랑 만나든, 여자랑 만나든 상관없이 골라 가기만 하면 되는 당신이라 그런 건 상상도 못 했으려나.”
“꽤 모욕적인 말이군.”
“그럴 거면 처음부터 그렇게 가볍게-”
“내가 아니라 박에게 굉장히 무례할 소리를 지껄이고 있다는 뜻이지, 대니.”
사실 션 스펜서는 눈앞의 남자에게 이제껏 그 나름대로 꽤 관대했다고 자신한다.
이선은 마지막까지 ‘작작 좀 싸워’ 라고 말했지만 대체 이 정도가 어떻게 싸웠다고 볼 수 있을까. 오히려 이선이 늘 고마워하는 사람이기에, 또 다니엘 바커 그의 서포트가 아니었다면 영영 만나지 못했을 사람일 수도 있기에 이제껏 몇 수나 물러나 주고는 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좀 상황이 다르다.
“박이 이곳에 몇 년이나 있었지? 열일곱에 데뷔했다고 했으니 15년은 됐군. 그 정도 된 사람이 당신이 게이였다는 걸 몰랐다고 해서, 이 바닥이 돌아가는 것조차 모를 것 같나?”
조소 가득한 빈정거림과 예의 바른 단어가 서로 우아하게 섞여 든 문장은 얼핏 들으면 퍽 달콤하기마저 했다.
“당신에게는 꽤 놀랍겠지만 박은 그쪽이 주절대는 걱정은 하지 않더군. 장담컨대 전혀.”
“…….”
“그쪽 말대로 박은 커리어를 잘 쌓고 있었거든. 포스터만 봐도 심란한 영화조차도 대충 넘기는 일이라고는 없이 말입니다. 그래. 나 역시 할 말이 없지는 않았지.”
이선이 눈앞에서 사라지는 순간부터 그가 남기고 간 걸 먹는 게 삶의 목표인 양 무심하게 있던 남자의 목소리가 들뜬 채 빨라진 건 단 한 가지 이유 때문이다. 누군가를 떠올리기만 해도 그렇게 되고 마는 건, 다니엘 바커 그 역시 어떤 감정인지 잘 안다.
하지만 그건 두 사람이 서로 잘 맞으리라는 뜻은 아니다.
“대니, 기껏 그가 만들어 준 자리니 잘 활용해 보자고. 당신은 그가 굳이 BAA가 아니어도 괜찮은 사람이라는 걸- 실은 누구보다 잘 알았지 않나?”
다니엘 바커는 저를 향해 예쁘장한 푸른 눈동자를 가늘게 휘는 사내의 문장에 한발 늦게 대답했다.
“……뭐?”
“처음에는 몰랐는데, 이선 그가 출연한 모든 작품을 하나도 빠짐없이 다 보고 나니까 문득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던데.”
“…….”
“분명 이선은 당신의 에이전시에 들어가고 나서부터 더 많은 일을 맡았지. 그래, 그도 한숨 돌렸을 거고…… 그 점은 나 역시 정말 깊이 감사해. -하지만.”
같은 마음을 품고 있다는 건 이래서 위험하다.
어느 누군가를 같은 눈높이에서 쉼 없이 쫓고 또 쫓다 보면 결국에는 같은 지점에 도달하고 만다. 바커는 또박또박 한 단어씩 제 귀로 파고드는 문장을 들으며 꼿꼿한 목에 힘을 주었다.
“소위 BAA에서 연결해 준 것들과 이선이 직접 오디션을 보고 선택한 그 전 작품이나, 연극 무대 이름을 비교할수록 의아해지는 거야. 뭐라고 해야 할까.”
“…….”
“-아, 그래. 한때는 좁은 풀에서나마 빛나는 작품을 찾아 고를 수 있었던 사람이 5년간 단 하나의 예외조차 없이 ‘이런 역할’만 계속했다니, 싶어졌다고나 할까.”
“무슨 말을 하려는 거지, 스펜서.”
“다시 말하지. 그쪽이 제일 잘 알잖아.”
이건 션 스펜서가 제 연인에게는 결단코 꺼낼 수 없던 가혹한 비밀이다.
바커 아티스트 에이전시, 속칭 BAA에 들어온 이후로 제 인생이 얼마나 나아졌는지, 그 고마움을 매번 말하는 그 신뢰 가득한 얼굴 앞에서 이것만은 앞으로도 영영 꺼낼 수 없을 거다.
자신의 연인이 된 남자가 누군가를 믿기까지 얼마나 조심스러운 사람인지, 또 얼마나 겁이 많고 여린지 이제 누구보다 잘 알게 되었기에.
“당신이 추천했던 <비평가> 속 해커 같은 역할 같은 건 찾아볼 수 없게 된 이선 그의 5년이, 그쪽은 단 한 번도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았다면…… 글쎄. 그게 더 이상한 일인데.”
나락으로 떨어지기 한 걸음 전, 그 앞에서 손을 잡아당겨 준 은인.
션 스펜서는 그 문장을 부정할 생각은 없다. 그렇지만 BAA에 들어온 이후 쌓인 이선 박의 5년간의 필모그래피는 배우라는 통장 잔고에 숨통을 틔워줬을지언정, 배우로서의 수명은 오히려 해마다 차곡차곡 갉아먹고 있는 것 역시 사실이었다.
“나를 유일하게 응원하는 후원자의 달콤한 위치가 마음에 들어서, 그가 어차피 난 할리우드의 뻔하고 흔한 아시안이라는 생각에 충분히 길들도록-”
해커, 식료품점 아르바이트생, 수학자, 회계사, 무술 사범….
어색하게 보이지 않는 연기 정도만 기대하고 마는 일회성, 혹은 스테레오 타입만을 원하는 조연은 분명 전보다 훨씬 더 많이 주어진다.
큰 이야기를 만드는 데 필요한 연결고리나 다름없는 그들의 존재를 부정하려는 건 아니다. 비록 인종이라는 큰 바운더리 안에 갇힌 직업들이 대부분이기는 하지만, 그들 역시 꼭 필요한 이들이다.
문제는 이거다.
“들어오는 시나리오마다 친히 거르다 보니 어느 순간 머리 한쪽이 마비라도 된 게 아니라면 말이지.”
그 어떤 고민도 들어갈 필요 없는 배역들.
그것들이 BAA에 들어간 배우 이선 박에게 주어진 단 한 번, -정말이지 단 한 번의 예외조차 없는 배역들이라는 것이다.
“--닥쳐, 스펜서!”
“그래도 데이비드 밀러의 이름값이 좋긴 하더군. 차마 이번 제안은 마다할 수 없었잖아? 이래서 에이전시란!”
션의 마지막 문장은 쭉 평정을 유지하던 남자의 표정에 쩍 금이 가게 하기 충분했다.
자각하고 했던 일일까?
아니면, 무의식중에 한 일일까. 어차피 이선에게는 그 어느 쪽이든 그리 좋지 않다.
이런 것으로 안심하는 것이 우습긴 하지만, 션은 모욕감에 일그러지는 다니엘 바커의 표정이 그나마 저 남자에게 작심한 악의가 없었다는 걸 증명하는 것 같아 한심하리만치 기묘한 동질감마저 느꼈다.
하지만, 그건 일전에 제 오만에 톡톡히 당했던 션 그의 안도에 불과하다.
애써 입꼬리를 잡아 올리려던 다니엘 바커 쪽의 감상은 그와는 정반대다. 그는 훅 치솟는 열을 참지 못하고 신경질적으로 소리를 높이고 말았다.
“빌어먹을. 당신의 그……!”
물론 그건 아주 잠시간의 일이다. 다니엘 바커는 제가 있는 곳이 보는 눈이 많은 곳이라는 사실을 쉬이 잊을 만큼 순진한 사내가 아니었다. 바커는 크게 숨을 한 번 삼킨 다음 쥐어짜 내듯 목소리를 확 낮췄다.
“…그, 기만이…, 역겹다는 거야. 션 스펜서.”
한 단어 한 단어 뚝뚝 떨어지는 목소리에 담긴 감정이 선명했다. 션 스펜서는 그 선명한 혐오를 새기듯 바라보았다.
바커의 말이 이어진다.
“미안하지만 LA 경찰은 꽤 입이 가볍거든. 그쪽이야말로 경찰 조사에서 참 재밌는 말을 했던데?”
기억도 안 날 정도로 오랫동안 훈련된 얼굴이, 목소리와 몸짓이 지금처럼 유용한 적은 없었다. 그건 배우이기 이전에 스펜서의 이름을 가지게 된 순간부터 습득해야만 했던 것들이다.
하지만 그 말끔한 얼굴이 너무 잘 먹혀들어도 좋지만은 않다.
굳이 더 듣고 싶지도, 알고 싶지도 않았던 문장 앞에 서야만 하니.
“이선 그가 죽은 네스 바라노프와 엮인 게 당신 때문이라는 걸- 그는 알고 있나?”
“……그쪽이 관여할 바가 아닐 텐데.”
“-하하. 그래. 알 리가 있나. 모르겠지. 웃기는군. 그러면서 이선을 위하는 척 굴지는 말라고, ‘션’.”
다니엘 바커가 처음으로 남자의 이름을 입에 담는 순간이기는 했지만, 아쉽게도 이건 이선 그가 그렇게나 바랐던 관계 회복의 순간은 아니다.
“당신이야말로 이선에 대해 뭘 알지?”
“…….”
“지금 그 귀여운 소꿉놀이를 하면서- 이선, 그가 왜 자신의 절친했던 친구와 멀어졌는지 이유를 말하던 적은 있던가?”
비밀은 누구에게나 있다.
션 스펜서는 제 얼굴이 비치는 바커의 선글라스를 보면서, 그 새삼스러운 사실을 문득 곱씹었다. 바커는 손에 쥐고 있던 제 영화표를 찢더니, 저를 물끄러미 따라오는 푸른 시선을 떨쳐 내려는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짧은 데이트나 잘 즐기시지, 스펜서.”
* * *
#.??? 3년 전, 이선의 오래된 아파트
크게 한 번 숨을 들이켰다가, 내뱉고. 그리고 또다시.
이선은 침대에 늘어진 채로 그 커다란 심호흡을 몇 번이나 반복했다. 하지만 숨 대신 터져 나오는 것 같은 알코올은 그런 알량한 행동 몇 번으로 가실 리 없었다. 오히려 목이 찢어지는 것 같은 갈증만 더해졌을 뿐이다.
「씨발…, 내가 또 술 마시면 인간이 아니지.」
그는 지구상 모든 음주가가 살며 한 번쯤은 해 봤을 상투적인 욕을 중얼거리며 일어났다. 이선의 머릿속은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정말 최대한 많이 물을 마셔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사실 이선은 원래 이렇게까지 술에 취하는 편은 아니다.
오히려 딱 기분 좋을 정도만 마신 다음 칼같이 멈추는 편이다. 하지만 어제는 좀 예외가 많았다. 번번이 시나리오를 퇴짜맞던 그의 친구 네스 바라노프가 말도 안 되는 곳에서 연락을 받았고, 또…….
지끈지끈하게 몰려오는 두통에 이선의 입 밖으로 작은 신음이 튀어나왔다.
이선은 타이레놀 약통을 들고 잠시 고민하다가, 왠지 이걸 먹으면 도로 토할 것 같다는 생각에 약 대신 애꿎은 물만 컵에 따르지도 않고 곧장 들이켰다.
조금은 핼쑥한 그의 표정은 안도와 자괴감이 뒤섞여 있다.
‘아직도’!
2년이라는 시간을 두고 그게 긴지, 짧은지에 대한 의견은 누구라도 갈릴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끝도 없는 터널 같을 것이고, 또 누군가에게는 눈 깜박하면 지나갈 순간일 거다.
이선은 대체로 후자를 택했다. 이 천사의 도시에서 하루하루 버티다 보니 어느새 10년이 훌쩍 넘어 있었다. 그에게 대체로 시간은 참 빨랐다.
하지만- 마약 중독자 이선 박에게 2년을 물어본다면 그 소회는 꽤 달라진다.
감히 단언하건대 중독자 회복 모임에서 브랜든 우드를 만나 에이전시 BAA와 계약하기까지의 2년은, 17살에 처음으로 왔던 LA에서 29살의 청년이 된 지금의 모든 순간을 다 더한다고 해도 그보다 더 길 수가 없었다.
왠지 팔다리에 모래주머니를 달고 뛰다가 그걸 풀어 던진 것처럼 사지가 멋대로 흐느적거렸다. 한참을 목을 축인 이선은 조금 전 일어난 것이 무색하게 곧바로 거실의 낡은 소파 위로 제 몸을 내던졌다.
「…아. 속 쓰려….」
거실의 작은 테이블 위에 나뒹구는 맥주캔이 몇 개인지 세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도 나름대로 긍정적으로 생각할 면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술을 잔뜩 퍼마신 게 스스로의 의지라고 표현하는 게 좀 우스울지는 몰라도, 어쨌거나 어젯밤을 무사히 넘겼다는 게 중요했다.
2년 만에 코앞에서 본 약이었다.
이선은 어젯밤을 떠올리기만 해도 왠지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그건 잠자기 전 딱 한 입만 더 먹어야지, 하는 케이크 같은 게 아니다. 저 스스로가 분위기와 기분에 취한 누군가가 권한 걸 호기심에 한두 번 하고 마는 정도로 멈추지 못했다는 걸 끔찍하게 잘 아는 이상, 방법은 하나였다.
이렇게 고꾸라지는 한이 있어도 집에 처박혀 그것에서 완전히 도망치는 것 말이다.
……약 피하려고 알코올 중독이 되는 상황이 오진 않았으면 좋겠네.
이선은 제 낡은 가죽 소파가 얼굴에 달라붙는 것 같아 조금은 짜증스럽게 자세를 고쳤다.
그때였다.
「으으으- 망할! 대체 어디 있는 거야?」
거실 어디선가 휴대폰 진동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소파에 반쯤 녹아 있던 이선은 신경질적으로 쿠션이며 소파 틈을 뒤적이며 소리쳤다.
숙취에 머리가 깨질 것 같은 이른 오전, 귀찮을 만큼 집요하게 이어지는 전화를 무시할 수 있을 만한 사람이면 참 좋았을 거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는 오디션 결과 전화 한 통이 아쉬운 사내였다.
허겁지겁 찾던 휴대폰이 발견된 건 소파 저쪽 뒤 구석이었다. 대체 얼마나 처먹고 뒹굴었으면 휴대폰이 저기에 가 있냐고! 이선은 제 얼굴에 침 뱉기나 마찬가지인 욕을 토해 내며 간신히 팔을 뻗었다.
노력이 가상하다고 칭찬이라도 해 주는 걸까.
액정 위에 떠오른 번호는 마침 모르는 번호였다. 오디션을 보고 그 결과를 기다리는 생활을 하게 된 것도 벌써 햇수로만 열 손가락을 가득 채우고도 넘게 된 배우에게 이런 낯선 번호의 전화만큼 긴장되는 건 없을 거다.
「네, 네에, 박입니다.」
이선은 얼른 전화를 받으며 목소리를 그럴듯하게 고쳤다.
「여보세요?」
-…….
솔직히 제가 생각해도 조금 느끼할 만큼 힘이 들어간 목소리기는 했다.
‘너무 오버했네. 에이 씨.’ 조금 멋쩍은 표정으로 휴대폰 액정을 다시 한번 확인하자, 차곡차곡 쌓여 가는 통화 시간이 보였다. 최대한 담백하게 말을 이으려는 이선의 인사말이 이어졌다.
「실례합니다. 여보세요?」
이번에도 손바닥만 한 기계 너머의 사람은 대답이 없었다.
이선은 잠시간의 침묵 끝에 상대가 듣지 못할 정도의 한숨을 낮게 내쉬며 소파에 머리를 기댔다. 이 정도면 오디션 결과 통보로 보긴 어렵다.
갈수록 인간들이 기본적인 매너가 없다니까!
이선은 속으로 부루퉁하게 누군지 모를 상대를 흉보며 ‘죄송하지만 끊겠습니다.’ 하고 빠르게 덧붙이려고 했다. 그렇지 않아도 속이 안 좋은데 잠이나 한숨 더 자는 게 낫다 싶었다.
하지만, 휴대폰을 귀에서 저만치 떼려고 했던 그 순간이었다.
-…이선.
다행히도 이선은 분명히 낮게 스치는 소리로나마 제게 붙여진 이름을 잡아내었다.
어렸을 땐 내심 이 이름 대신 노아라든가 로건 같은 이름이면 얼마나 좋을까 싶었었는데, 어찌 됐든 서른 해 가까이 불리고 나니 미운 정이라도 든 짤막한 음절이었다.
그는 속으로 제가 ‘박’이라고만 말했던 걸 상기하며 얼른 말을 받았다.
「네, 맞습니다. 말씀하세요.」
-이선. ……이선,
사실 처음에는 잠시 통화 상태가 안 좋았던 걸까 하는 생각을 했다.
좀 더 솔직히는, 잔뜩 쉰 목소리가 꼭… 사람이 중얼거리는 게 아닌 것처럼 제 이름을 읊조리는데, 괜히 조금 으스스해지기도 했다. 이선은 다시 한번 휴대폰 액정을 확인했다. 대체 뭐야?
그는 듣는 이 없는 투덜거림을 속으로 삼켰다.
그런데 그 순간, 이선에게 작은 힌트가 떨어졌다.
-이선. 어떡하지. 씨발, 어떡하면 좋냐고….
사실 두서없이 이어지는 갈라진 목소리 사이에서 들린 작은 욕을 두고 힌트라는 거창한 표현을 쓰는 것이 누군가에게는 우스울 수도 있다.
하지만 이선은 그 속삭이는 목소리가 제대로 귀에 꽂히는 순간부터 숙취로 찡하게 울리던 머리 한구석이 묘하게 서늘해졌다.
「네스?」
시작은 반신반의한 물음이었다. 그건 얼마 안 가 확신이 되었다.
「네스, 너야?」
-이선, 이선…, 이선. 어떻게 해.
「야. 너- 혹시 지금…….」
차마 문장이 끝까지 이어지지도 못했다.
쓸데없는 물음 따위는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아도 됐다. 얼마 안 가 이어진 괴성에 가까운 흐느낌이, 절규가 모든 것을 설명해 주었기 때문이다.
이선 박은 네스 바라노프와 인생의 그 어떤 때보다 길었던 2년을 함께했다. 그리고, 지금 바라노프의 목소리는 그 길었던 2년을 지겨울 만큼 함께하면서 단 한 번도 듣지 못했던 것이었다. 역시 타이레놀은 안 먹는 게 나았다.
어차피 지끈지끈한 두통을 짚어 낼 새도 없다.
너무 놀라면 속이 가라앉다 못해 찢어지는 것만 같다는 걸, 오늘 같은 아침에 알고 싶지는 않았는데. 이선은 작은 바구니를 뒤집어엎어 그곳에 대충 던져둔 자신의 차 키를 찾으면서 급하게 말을 이었다.
「야. 왜 그러는 건데. 너 어디야? …지금 바로 갈 테니까 우선 어딘지 말만 해. 응? 네스!」
-캐시가…, 죽었어.
꺽꺽대는 흐느낌 속에서 무언가가 들렸다.
그건 분명 완성된 문장이었지만, 금방이라도 제 아파트를 뛰쳐나갈 것 같던 이선의 발을 묶을 만큼 기괴한 조합이었다. 복잡할 것 없는 단순한 두 단어가 머리를 맴돈다.
‘캐시가’, ‘죽었어’.
복잡할 것 없는 단순한 단어의 연속이건만 이선은 그 단어들이 나란히 있는 게 얼른 이해되지 않아서 몇 초간 숨 쉬는 것조차 잊고 가만히 서 있었다.
「……뭐?」
-캐시가.
헐떡이는 숨이 금방이라도 멈춘대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격렬해졌다.
네스 바라노프의 갈라지고 쉰 목소리가 그 듣기 싫은 쇳소리 사이에서 간신히 이어졌다.
-…캐서린이… 죽었어. 이선….
* * *
내심 기대했던 세기의 사랑은 아무래도 수포로 돌아갔다.
둘이서 눈만 마주쳐도 티격태격하며 곤란하게 하는 게 아주 조금은 얄미워서 ‘션 스펜서-다니엘 바커의 데이트?! 박은 위장인가?’ 같은 헤드라인으로 온갖 매체를 도배하는 걸 꼭 보고 싶었는데 말이다.
만약 그랬다면 난 기꺼이 내가 쥐어짤 수 있는 모든 즙을 짜낸 극적인 인터뷰를 할 각오도 있었다.
아. 어쨌거나 데이트랍시고 나가서 내가 먼저 들어왔을 때, 그걸 본 집사장 가브리엘의 표정 역시 빼놓을 수 없는 재미였지.
정말 혼자 본 게 아까울 정도였다.
그는 음산한 목소리로 “…빌어먹을 옷… 그놈의 선글라스….” 하고 중얼거리면서 혹시라도 내가 제 고용주를 차고 돌아온 게 아닌가 전전긍긍했다.
물론, 덩치만 컸지 이제는 퍽 귀여워진 션 녀석은 그 몰골을 하고 얌전히 영화를 보고 돌아오더니, 조금은 구겨진 티켓까지 곱게 반납했다. “뻔하지만 그래도 볼 만한 영화였어”, 하는 평까지 함께 덧붙이며 말이다.
덕분에 우울했던 그날 저녁 덕분에 얼마나 웃었는지 모른다.
요새 션은 조금 바빠졌다.
촬영이 빨리 끝나는 날은 나를 자신의 저택이나 내가 원하는 곳에 내려 주고 나서 밤에야 들어온다. 혹시 무슨 일 있어? 하고 슬쩍 물어보니 조금 난처한 듯 웃으며 “이런저런… 사정이 생겼어.” 라고 하는 걸 보면 아마 내게 말하기는 어려운 일일 거다.
스펜서 쪽에 뭐가 있다든가, 아니면 예민한 계약 문제일 수도 있고…….
죽은 듯이 소파에 누워 있던 나는 아무런 알림도 없는 내 휴대폰 액정을 잠시 보다가, 주소록의 한 이름 앞에서 멈춰 섰다.
하지만 곧바로 전화 버튼을 누르기에는 요 며칠 차곡차곡 쌓인 망설임이 컸다.
결국 나는 문자 창을 열었다.
[바커 씨. 혹시]
아, 아니지.
아차 싶어 ‘바커 씨’를 ‘다니엘’로 수정한 나는, 평소보다 배는 느릿느릿 텍스트를 써내려갔다.
[다니엘, 혹시 바쁘지 않다면 그때 하려고 했던 얘기를]
하지만 그 몇 단어 안 되는 문장은 끝조차 맺지 못하고 멈췄다.
다니엘 바커는 그날, 이 말을 몇 번이나 할까 말까 망설였었다. 심지어, 어영부영 헤어진 뒤로는 잘 들어갔길 바란다는 평소와 별다를 바 없는 안부 인사 말고는 별다른 소식도 없다. 시끄러운 기사들이 잠잠해진 이후로는 촬영장에 찾아오던 것도 끝났다.
“…….”
이런 상황에서 내가 굳이 죽은 친구를 먼저 입에 담을 필요가 있을까?
아니, 조금은 냉정하리만치 작정하고 ‘친구’의 거리를 유지하려고 했던 건 내 쪽인데 굳이 무슨 염치로 먼저 연락한담?
나는 이 두 가지 물음 모두에 제대로 된 답도, 그럴듯한 해결책도 찾을 수 없었다. 네스의 이름은 이 별들의 도시를 떠난 지 몇 달이 되었는데도 여전히 그 주변을 떠돈다.
이건 녀석이 좋아할 일일까, 아니면 질색할 일일까.
이 역시도 잘 모르겠다.
“-선. ……이선!”
“아, 네, 네에?”
“죄송합니다. 항상 이 시간에 출출해 하시길래… 드실 걸 좀 가지고 왔는데요.”
멍하게 침잠하던 나를 현실로 쭉 끌어올린 건 어느새 소리 없이 들어와 있던 메이드 줄리였다. 반쯤 넋이 나가 있다가 너무 심하다 싶게 깜짝 놀란 나는, 덩달아 눈을 동그랗게 뜬 그녀의 표정에 그제야 머쓱하게 웃었다.
“죄송합니다. 방해됐다면 나중에……”
“아뇨, 아뇨. 마침 좀 배고프던 참이었어요. 고마워요, 줄리.”
나는 요새 션이 없는 사이 집사장 가브리엘 씨나 줄리와 함께 종종 짧은 티타임을 갖는다.
물론, 그 티타임이 정기화 되는 것에 처음엔 말도 안 된다며 펄쩍 뛰었던 두 사람이지만 이제는 꽤 적응된 눈치다. 게다가 친구가 몇 없는 나로서는, 다른 이들에게는 꺼내 놓기 힘든 톱스타와의 일상을 아주 조금이나마 털어놓으며 웃고 떠들 수 있는 이들이 간절했다.
누구보다 입이 무거운 두 고용인은 그 상대로 제격이다.
“어, 오늘은 가브리엘 씨가 없네요.”
“네. 잠깐 일이 있으셔서 외출하셨어요.”
“아하….”
자세를 바로 하고 테이블 위에 간단한 다과 거리를 차곡차곡 세팅하던 그녀의 말끔한 움직임을 구경하던 나는, 문득 그녀의 신발에 눈이 닿았다.
“바로 퇴근하나 봐요?”
줄리가 신고 있는 건 평소에 저택에서 늘 신던 단정하지만 발이 편한 단화가 아니라 이제껏 본 적 없는 높다란 하이힐이었다. 무슨 말이냐는 듯 고개를 갸웃했던 줄리는, 내 시선이 닿는 곳을 따라가다가 이윽고 “눈치가 빠르네요!” 하고 웃었다.
확실히 평소보다 훨씬 이른 퇴근이다.
“뭐 잘못 버린 것도 없는데 싱크대 배수관이 고장 나서요. 역류하고 난리도 아닌 거 있죠. 아침에 물바다인 걸 대충 닦아 두고 왔어요.”
“이런!”
“사람을 불러야 할 것 같은데… 후우. 자신은 없지만 우선 직접 해 보려고요.”
나는 딱 내 입맛에 맞는 진하고 달콤한 핫초콜릿을 홀짝이면서 영 자신 없이 말하는 줄리의 표정을 살폈다. 보아하니 말은 저렇게 하지만 어디서부터 어떻게 손대야 할지도 모르겠다는 속마음이 훤히 짚어진다.
오후 3시.
션은 요새 주로 8시가 넘어서나 오거나 때로는 그보다 더 늦게 귀가하니까 시간은 꽤 넉넉한 셈이다.
잠시 고민하던 나는 줄리가 들으면 마다할 말을 기어코 내뱉었다.
“줄리. 제가 도와드릴까요?”
확실히 그건 나와 같이 차를 마시는 것조차 몇 번을 거절하다가 간신히 마주 앉게 된 사람에게는 너무 과한 제안이었을지도 모른다.
역시 그녀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펄쩍 뛰었다.
“맙소사, 이선! 아니에요. 어떻게 그런-”
“저 꽤 잘 고쳐요. 일 없을 때 배워서 수리하러 다니기도 했거든요. …그, 제가 댁에 가는 게 불편하지만 않으시면 얼마든지 봐 드릴 수 있는데.”
“…아무리 그래도….”
“당연히 가브리엘 씨한테는 비밀로 하죠. 아, 스펜서한테는 더더욱요. 알죠?”
나 역시 고용인의 입장으로 있어 본 게 하루 이틀 일이 아니다.
당연하다는 듯 술술 이어지는 말에 줄리의 목소리는 갈수록 작아졌다.
씩 웃으며 “요것만 마저 먹고 가죠.” 하고 능청스럽게 덧붙이기까지 하자, 줄리는 처음 만났을 때의 세상 차가운 표정을 떠올릴 수조차 없게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사실 이건 줄리만을 위한 게 아니다.
이렇게 속이 멋대로 날뛰고 헛생각이 삐죽 머리를 들 때면 일상에서 멀찍이 떨어진 것을 하는 게 도움이 된다. 그게 친구를 도와주는 거라면 더욱 좋지 않겠나.
* * *
일전에 션 스펜서는 제 저택에 있는 모든 것들의 가치 운운하며 꽤 선심 쓰듯이 한 달 머무는 비용으로 4만 달러를 불렀다. 뭐라더라, 그게 심지어 하루 가격을 한 달로 쳐 주는 거니 뭐니 했던 것도 같다.
사실 그땐 스크루지가 따로 없다며 속으로 욕을 꽤 했었다.
솔직히 그렇지 않나. 아무리 세다 죽어도 모자랄 정도로 부자라도 사회적 동물인 이상 세상 돌아가는 상식은 있지 않겠나. 물론 그건 션이 내 대답 하나를 듣겠다고 남은 기부금액을 모조리 채워서 써낼 때부터 조금 삐끗하기는 했지만 말이다.
“…와우.”
대체 스펜서 저택에서는 고용인들에게 얼마를 주는 걸까?
줄리의 집은 로스 펠리스의 아담한 주택이었다.
내가 가장 살고 싶은 곳 중 하나가 해변이 가깝고 쇼핑하기도 좋은 산타모니카이고, 그다음이 해변은 멀어도 끝내주게 살기 좋은 이 로스 펠리스였다. 매일 오고 싶은 카페도 있고 말이다.
이 둘의 공통점이라면야 둘 다 내 수준에는 입 벌어지게 비싸다는 거였는데, 정말 가까이 있던 사람이 여기서 살고 있었을 줄이야!
“어서 들어와요. 깨끗하게 하고 산다고 생각했는데 왠지 오늘따라 좀 너저분하네요.”
“아니에요, 줄리. 정말…… 끝내주게 좋은데요. 와!”
혹시라도 배우 일이 꼬이면 작은 가게를 내달라고 할 게 아니라 스펜서 저택에 취직자리를 부탁하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내심 휘파람을 부르며 크지는 않지만 딱 필요한 것들만 보기 좋게 있는 집을 슬쩍 구경하다, 문득 거실의 장식장 안에서 속이 찌르르할 만큼 익숙한 것에 시선이 닿았다.
바로 짙은 남색의 야구 모자다!
“맙소사! 디트로이트 타이거즈 팬이세요?”
“그럼요. LA에는 응원할 만한 팀이 없잖아요.”
“크으, 당연한 소리죠!”
이래서 타지에 오면 동향 사람을 찾게 된다는 걸까.
LA 카운티 안을 전전한 게 벌써 10년도 훌쩍 넘었는데, 이제껏 단 한 번도 생각지 않았던 감상적인 생각마저 드는 걸 보니 이번 촬영이 끝나면 오랜만에 가족들을 보러 가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재작년 크리스마스 때 가고 늘 페이스타임만 했으니 안 간 지도 꽤 됐다.
“여기 간단한 공구는 사 뒀어요.”
“어디 보자. 뭐가 문제인지 좀 볼까요.”
이런 멋진 집의 수리를 해 본 적은 없지만, 싱크대야 다 비슷하다.
심지어 하수구가 막히는 이유는 더 거기서 거기고 말이다. 나는 배수관을 조심조심 분해하며 내부를 확인했다. 곰팡이나 부식 같은 건 없다. 하지만.
“뭔가 부스럭거리는데요.”
“어머, 어머.”
“VONS…… 닭고기?”
“맞아요. 이틀 전엔가 먹었어요. 아, 정말 바보 같네요!”
아마 요리 후 싱크대를 청소하다가 실수로 흘려보낸 비닐 조각이었을 거다.
“하하. 그럴 수도 있죠, 뭐. 그런데 단단히 걸려서 잘 빠지질 않는데…. 혹시 여기 들어갈 만한 집게 같은 게 있을까요?”
“네! 잠시만요. 아마 현관에 있을 거예요.”
정말 고쳐 준다고 하기도 뭐할 정도로 간단한 것인데도 저렇게 화색이 되어 나가는 걸 보니 괜히 뿌듯하다. 나는 흐뭇하게 웃다가 더러워진 손으로 괜히 습관처럼 얼굴을 크게 쓸어 올릴 뻔했다.
다시 더러워질 땐 더러워지더라도 손은 씻고 오는 게 좋을 것 같다. 이쪽 수도를 사용하려면 막힌 걸 빼고 파이프를 다시 연결하고 나서야 가능할 테니 말이다.
“줄리! 저 화장실 좀 가도 될까요?”
나는 현관 쪽으로 나간 줄리를 향해 목소리를 키워 외쳤다.
“주울-리!”
제대로 된 발성을 하는 배우라면 대개는 웬만한 사람들보다 훨씬 더 귀에 쏙 박히는 문장을 내뱉을 수 있다.
물론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다.
심지어, 정확한 발음은 내 강점 중 하나이기까지 하다. 막 배우로 연기를 시작했을 때 영화 단역과 소극단의 연극부터 하고 올라온 탓일까 발성 역시 어디 가서 꿀린 적은 없고 말이다.
“…….”
나는 최대한 고개를 빼꼼한 채로 눈을 끔벅였다.
이 집은 말끔하고 세련된 인테리어가 사랑스럽기는 해도, 부엌에서 현관까지 내지르는 내 목소리를 듣지 못할 정도로 크지는 않다.
그런 게 잘 들리지 않으려면 스펜서 저택은 되어야 할 거다.
아니다. 그 저택이라도 사방이 창문인 탓에 이 정도로 크게 부르는 목소리 정도는 들릴걸.
하지만 이미 옆집에서 시끄럽다고 슬쩍 마당으로 나와 미간을 찌푸릴지도 모를 정도로 소리를 친 와중에도, 이 아담한 집은 기묘할 정도로 고요하기만 하다.
과장 좀 보내서 너무 조용한 나머지 벽이 내 목소리만을 품고 울리는 것 같을 정도라고나 할까.
이건 뭔가…… 기분이 좀 그렇다.
나는 들고 있던 파이프와 공구를 대충 내려놓고 지저분한 손을 티슈로 대충 닦았다. 뒤숭숭한 일들을 겪으며 예민해진 과민반응이라는 걸 잘 알지만, 왠지 목 뒷덜미가 쭈뼛해진 걸 부정할 수는 없다.
현관 쪽을 향해 살금살금 옮기는 발이 가까워질수록 낮은 남자의 목소리가 들린다는 걸 깨달았을 땐, 솔직히 손에 산탄총까지는 아니어도 야구 배트 하나라도 있었으면 좋았겠다는 생각도 좀 했다.
이건 뭐, 밀러 감독을 과민하다 생각할 일이 아니다.
저절로 마른침이 꼴깍 삼켜진다.
“-난 이제 할 이야기가 없다고 했잖아요!”
“허! 할 얘기가 없다고? 미안하지만 내 쪽은 아니거든!”
“대체 여긴 어떻게 알고 찾아온 건데요! 이봐요. 경찰을 불러야 가겠어요?”
“경찰? 지금 경찰이라고 했나?”
‘다른 사람의 싸움에는 절대 끼어들지 마라’.
이건 험한 동네에서 나고 자라 번듯한 회계사까지 된 이모부가 언제나 내게 하던 말이다.
특히 누군지 모르는 사람의 싸움이라면 누가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 한 번 사릴 것을 두 번, 세 번도 사리라고 했다.
난 이제까지 그걸 꽤 잘 지켜 왔노라 자신한다.
하지만 이 순간. 지금만큼은 그 안전 수칙을 지키기가 퍽 어렵다.
이모부의 말처럼 다른 사람, 그것도 모르는 사람의 싸움이라면 잠자코 입을 다물고 있을 수도 있었을 테다.
“깁슨, 다른 사람은 몰라도 당신이 경찰 운운하니 정말 우습군.”
“미안하지만 그마저도 제가 할 말이네요. 전 이제 당신을 보기만 해도…… 소름이 끼쳐요. 아세요? 그날의 당신을 떠올리기만 하면요, 정말이지 지금도 당신이랑 이야기하는 것조차…!”
“하하! 지금 날 비난하는 건가?”
……하지만 싸우는 그 ‘두 사람’ 모두의 목소리가 귀에 익다면 어떡해야 할까?
“나야말로 그쪽이 정상이 아니다 싶었는데. 사람들 많은 곳에선 그렇게나 훌쩍이고 울던 여자가 뒤로는 뭐? 아. 손가락 하나 못 대 본 돈이 억울하다면 지금이라도….”
기가 찬다는 듯 외치던 사내의 말이 뚝 끊긴다.
단 한 순간도 소리가 비는 일 없던 현관이 순식간에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적막으로 가득 찼다. 그걸 가장 먼저 이상하게 느낀 건 줄리였다. “뭐, 뭐예요.” 하고 중얼거리듯 말하는 그녀의 목소리에는 옅은 공포마저 어려 있다.
그걸 깨달은 나는, 잘 움직이지 않는 혀를 그제야 간신히 움직였다.
“……줄리.”
내 인기척을 눈치채지 못했던 그녀가 작게 비명까지 지르며 뒤를 돌아본다.
“미안해요. 놀라게 하려던 건 아니었는데.”
“아, 아니에요. 이선, 그냥 여긴…… 신경 쓰지 말고 들어가요.”
“그래도 되겠어요?”
나는 조금 전까지 절대 잠잠히 물러나지 않을 것 같던 사내가 입을 꾹 다물고 있는 걸 한동안 눈에 담다가, 힘주어 이어 물었다.
“꽤 심각한 상황인 것 같던데.”
“심각하다뇨. 아니에요. …됐어요. 들어가요, 우리.”
사내, 그러니까, 닉 코빗은 왠지 알 수 없는 표정을 한 채 나를 노려보고 있다. 언제나 기분 나쁠 정도로 여유만만했던 형사가 이제껏 내가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표정을 한 채로 얼어 있는 걸 보면 기분이 좋아질 줄 알았는데.
의외로 마냥 그렇지만은 않다.
쾅, 하고 그의 눈앞에서 문이 닫혔다. 나는 굳게 닫힌 짙은 푸른색의 나무문을 잠시 물끄러미 보다가 여전히 긴장이 역력한 얼굴을 한 메이드에게로 천천히 시선을 움직였다.
줄리는 나와 시선이 마주치자마자 곧장 입을 열었다.
“-스, 스토커예요.”
나는 그녀가 내뱉은 그 단어가 얼른 머리에 와 닿지 않아서, 잠시 곱씹어 보다가 천천히 그걸 다시 돌려주었다.
“…스토커요?”
“네. 어쩌다 알게 된 사람인데…… 너무 끈질겨서. 가끔씩 이렇게 종종 찾아와서 행패예요.”
이제껏 찍었던 영화나 드라마에서 눈을 똑바로 바라보지 않고 말하는 사람들은 늘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나는 그걸 그녀에게 덧대고 싶지 않아서, 최대한 여유로운 목소리로 이어 물었다.
“경찰에 신고하지는 않으셨어요? 접근금지 명령이라든가.”
“어- 괜히 시끄러운 일 만들기도 싫고 그래서요. 그래도 이렇게 보내면 잠잠해지기도 하고….”
“…….”
줄리는 내가 그들의 대화를 어디부터 듣기 시작했는지 모른다.
대체 여기는 어떻게 알고 왔냐고 작고 빠른 목소리로 따지던 걸 모른다고 생각하겠지. 싱숭생숭한 속을 달래러 나왔는데 오히려 머릿속이 고장 난 TV에서 나는 잡음으로 가득 찬 것 같은 기분이었다.
갈색 눈동자가 초조하게 나를 흘끗 바라보는 게 느껴진다.
대체 어디서부터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사실 당신의 ‘스토커’라는 닉 코빗은 LAPD라고? 그것도 갱과 마약 수사에 꽤나 빠삭한 남자라고, 그렇게 말해야 하나?
-심지어는 나 역시 그와 악연이 있다고?
결국 그 많은 문장 중 내 입 밖으로 완성되어 나온 건 하나도 없었다. 뭔가 놓치고 있는 것만 같은 꺼림칙함이 내 뒤통수를 잡아당기는 것만 같다.
“괜히 이상한 꼴을 보였네요. 신경 쓰지 않아도 돼요.”
맞는 말이다. 싸움에 끼어들지 말자.
괜한 분란에 발 딛지 말자. 말라비틀어진 이파리나 다름없는 나는 손톱만 한 불씨에도 타고 말 거다. 쓸데없는 고민으로 가지를 치는 건 그만두기로 마음먹었지 않나.
이제야 간신히 좀 평화로워지나 싶었는데.
“아니에요, 줄리. 이상한 꼴이라뇨.”
“여기 집게 찾았어요. 마저 고치고 나서 좀 쉬다가 저녁이라도 같이 드실래요?”
나는 저 자신에게 새기듯 다짐하면서 애써 입꼬리를 잡아 올렸다. 사실 그건 꽤 매끄럽게 흘러나온 문장이었다고 생각한다.
“하하. 고맙지만 아마 그땐 션이 올 것 같아서 들어가 봐야 할…….”
“맞아요. 그렇겠네요. 어쩌죠, 별것도 아닌데 괜히 수고만 끼쳐 드리고.”
“…….”
비록 그 끝은 맺지 못했지만 말이다.
“-이선?”
의아함과 기묘한 불안이 함께 뒤섞인 줄리의 시선이 내가 멍하게 쳐다보고 있는 것을 함께 좇았다. 나와 줄리의 시선은, 이 아담한 집에 막 들어왔을 때 느긋하게 구경했던 장식장을 나란히 향했다.
조금 더 정확히는 그 안의 야구모자이지만.
나는 홀린 듯이 걸어가 그녀의 허락도 받지 않고 장식장의 문을 열었다.
“줄리.”
“네?”
“LA에 온 지 몇 년 되셨다고 했죠?”
스스로도 놀라울 만큼 태연한 목소리에 담긴 물음이었다.
나는 등 뒤로 줄리의 의아한 시선이 꽂히는 걸 느끼면서도, 커다란 ‘D’가 수놓아진 모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그 챙의 깊숙한 안쪽을 확인했다.
거기엔 작은 스마일이 그려져 있다.
살짝 낡아 해진 왼쪽 모서리도 보인다.
그건 이 집에 들어와 웃고 떠들면서도 자꾸 묘하게 머릿속 무언가를 살살 건드리던 위화감의 정체이자, 이 반가울 정도로 낯익은 모자의 주인이 확실해지는 순간이었다.
“…3년… 정도요?”
“그럼 스펜서 저택에서는 얼마나 일하셨어요?”
갑작스러운 내 질문에 얼떨떨한 목소리로 대답하던 줄리가 조용해졌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깔끔한 고동색 머리를 고정해 틀어 올린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살짝 시선을 피했다가, 뒤늦게 어색한 미소를 건 채 말했다.
“……스펜서 저택에서만 쭉 있었어요.”
거짓말이다.
줄리, 그녀는 조금 전부터 내게 거짓만을 말하고 있다.
왠지 헛웃음이 나온다. 뭐가 어떻게 얽히고설켰는지는 아직 알 수 없지만, 반면 덕분에 확실해진 것도 있다.
할리우드의 영원한 외행성, 이선 박은 이번에도, 아니 ‘이번마저’ 철저히 중심에서 소외됐다.
“이건 제가 가져갈게요.”
“네?”
“줄리, 당신 거 아니잖아요. 그렇죠?”
“…….”
이 모자는 내 거다.
……아니. 정확히는 내 거였다.
아주 오래전, 손에서 담배 냄새가 나는 미용사가 머리를 엉망으로 잘라 뒀다며 집 앞 중식당에도 가기 싫어하던 입 거칠고 예민한 친구의 머리에 직접 씌워 주었던 선물이다.
그녀는 대뜸 제 장식장에 있던 모자를 들고 나가는 나를 정원까지는 따라왔다. 뭐라더라. “저어, 이선. 그건 왜….”하고 작게 웅얼거렸던 것도 같다.
하지만 사람은 너무 한 가지 감정에 사로잡히면 주변의 소리 따위는 잘 들리지 않는 법이다. 차마 나에게 손조차 대지 못하고 쩔쩔매는 그 선량한 얼굴에서 놀람을 넘어선 당혹과 긴장, 한 줌의 두려움마저 느껴지는 것에 질릴 정도로 숨이 막힌 탓도 있다.
잔뜩 난도질당한 폐를 멀쩡한 피부 가죽으로 덮어 감춘 듯이 속이 욱신거린다.
덕분에 주머니의 휴대폰이 계속 진동하고 있다는 걸 깨달은 건, 거의 도망치듯 차에 타고 나서의 일이었다.
부재중 전화 19통에 문자 32건.
아니, 심지어 문자는 실시간으로 차곡차곡 쌓이는 중이다.
[대체 어디까지 연결된 거야? 다들 날 가지고 노는 건가?]
[개자식]
[씨발. 역시 너도 한통속이었군. 날 엿 먹여?]
[아무것도 모르는 척 굴더니 아주 보란 듯이…]
그대로 내버려 두면 보는 것조차 인상이 찌푸려질 수위 높은 말들이 쏟아질 것 같은 기세였다. 나는 쉼 없이 이어지는 형사의 살벌한 메시지를 지켜보다가, 그와 마지막으로 연락했던 자선파티의 밤처럼 먼저 전화를 걸었다.
닉 코빗은 연결음이 두 번 가기도 전에 곧바로 전화를 받기는 받았다.
흥분 가득한 괴성이 섞인 욕이 대부분이라 처음은 대부분 이해할 수 없었다는 걸 제외하면, 통화라는 걸 하고 있기는 했다.
“이해할 수 있게 설명해요.”
-이 씹새끼, 박, 네가 제일 역겨운 놈이야. 어떻게 그리 순진한 표정을 하고서 뒤로는…
“이봐요!”
내버려 두면 끝도 없이 격해질 것이 뻔한 살벌한 문장을 끊고 던진 직구였다.
“…당신. 조금 전에 무슨 이야기를 하던 겁니까?”
내 물음에서 모호한 부분은 없었다고 생각한다. 그저 단 하나의 질문인데 말이다. 하지만 휴대폰 너머로는 한동안 대답 대신 거친 씨근거림만이 들려왔다.
사실 지금 그가 눈앞에 없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초조하게 입술을 잘근잘근 씹는 모습은, 이 형사에게만큼은 보여 주고 싶지 않다. 얼마나 그 긴 침묵이 이어졌을까.
이미 익숙해진 빈정거림이 기계음으로 조립되어 내리꽂혔다.
-설마 너…… 줄리 깁슨이 어떤 년인지 모르고 같이 시시덕대고 있던 거야? 맙소사!
그렇지 않아도 빠르게 고동치던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다.
그 짧은 순간 머릿속에 얼마나 많은 문장이 조립되었다가 사라졌는지 모른다. 줄리 깁슨이 누구인지 모르냐고?
안다고 말해야 하나?
아니면, 잘 모른다고 해야 하나?
나는 몇 달간의 기억이 스쳐 지나가는 와중에 애써 단어를 고르고 골라 입을 열었다.
“그녀는… 스펜서 저택에서 날 도와주는 사람이라고요. 거의 몇 달을 알고 지냈는데요.”
그건 말하지 않는 게 나았을까.
내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아하! 그러니 어디에 처박혀 있는지 알 수가 없었군!’ 하고 쉰 목소리로 짜증스럽게 웃는 걸 듣느니, 차라리 그의 망상을 인정하고 화가 나 씩씩대게 할 걸 그랬다는 생각마저 든다.
이 이상 닉 코빗 그가 말하는 것에 휘둘리는 건 사절이다.
모든 패를 다 쥐고 있다는 듯 여유만만한 것도 역겹다. 게다가 이렇게 정신을 못 차리고 있을 때야말로 배배 꼬이지 않은 진실을 들을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 말이다.
난 슬슬 흥미가 떨어진다는 듯 퉁명스럽게 말을 이었다.
“빨리 내가 묻는 거에나 대답해요. 말할 생각 없으면 당장 끊을…”
-요새 내 연락은 다 무시한 주제에 성격 한번 급하군!
“먼저 선을 넘은 건 그쪽이었잖습니까.”
몇 달 동안 단 한 번도 인간관계의 주도권을 잡아 본 적 없는 미천한 내 손에 드디어 가느다란 실이 쥐어졌다.
“할 말 없습니까?”
-젠장! 빌어먹을, 박!
“빨리요.”
마지막 채근은 하지 말 걸 그랬나 뒤늦은 후회가 몰려왔다. 하지만 다행히도 닉 코빗은 내 불안은 짚어 내지 못한 듯했다.
-……그년이 그년이야.
아주 빠르고 작은 중얼거림에 가까운 말이었지만 온 신경을 손안의 작은 휴대폰에만 집중하고 있던 나는 어렵지 않게 그의 거친 표현을 들었다.
손이 떨리기 시작한다. 하지만 휴대폰 너머의 사람은 그걸 알 수 없다. 나는 심드렁한 목소리를 연기했다.
“…뭐라고요?”
-바라노프의 저택에 CCTV가 설치되어 있다는 걸 알았고, 그날 밤 스펜서가 왔던 걸 본 유일한 목격자.
“…….”
-돈을 주면 CCTV 영상에서 션 스펜서를 봤던 걸 증언한다 해 놓고 내게 엿 먹이고 사라졌다던 메이드, 그게 저 빌어먹을 줄리 깁슨이라고!
* * *
사실 션 스펜서는 요즈음을 살아가는 사람답지 않게 휴대폰과는 거리가 꽤 먼 남자다.
“…….”
조금 더 엄밀히 말하자면 먼 ‘남자였다’에 가까울 테지만, 어쨌거나 전자기기에 익숙하기는 해도 그렇게 썩 선호하지는 않는 아날로그 파다. 특히 휴대폰은 번호를 일과 관련된 사람 몇에게만 알려 주고 제 스케줄을 정리하는 용도로만 쓰는 휴대성 좋은 기계에 불과했다.
“…중요한 자리에서는 최대한 안 보시는 게 좋습니다. 스펜서 님.”
“그렇겠지.”
집사 가브리엘은 ‘중요한 자리’에만 함께 비서로 참석하는 션 스펜서의 수족이다.
그리고 웬만해서는 제 고용주에게 나쁜 소리를 하는 일 없는 그가 차 안에서 넌지시 말을 건넬 정도면, 오늘 저녁 션 스펜서가 얼마나 그 작은 기계를 들여다본 건지가 뻔히 그려지는 일이다.
가브리엘은 백미러로 제 말에 대답은 하되 전혀 집중하지 않는 그린 듯한 얼굴을 보며 아주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저 남자가 가라앉는 걸 보는 건 늘 마음이 편치 않다.
중간 선거.
워싱턴에 있는 이들이 그들이 발 디딘 곳에 서서 미합중국을 두고 하는 치열한 땅따먹기의 시기가 왔다. 특히 올해 있을 중간 선거는 하원뿐만 아니라 많은 수의 상원과 주지사가 갈려 나가는 근 몇십 년간의 선거 중 손꼽히는 빅 매치다. 주 지방 검사를 두고 벌어지는 힘싸움은 또 어떤가?
선거는 결국 돈의 게임이다.
그 말인즉슨, 스펜서의 이름을 한 사람들이 가장 바빠지는 기간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그건 촬영 스케줄이 제법 빡빡하게 잡힌 션 스펜서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그는 스펜서 중 가장 유명해진 남자이기에 더더욱 ‘중요한 자리’의 참석을 요구받았다.
“아마 낮잠을 좀 주무셨을 것 같습니다. 아침부터 영화를 보시더군요. 쉬는 날은 주로 그렇게 몰아서 보시다가 주무시고는 합니다.”
결국 제 고용주가 가장 좋아할 만한 화제를 꺼낸 신중한 집사의 말이 이어졌다.
원치 않는 자리라고 한들 그 무게를 모르지 않을 남자가 이제껏 관심도 없던 휴대폰을 몇 번이나 들여다보게 된 건, 아마 지금쯤 저택에서 잘 놀고 있을 한 남자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시종일관 심드렁했던 남자는 곧바로 반응을 보였다.
“…뭘 주로 보던가요.”
“글쎄요. 뭐 하나 고르기가 어렵습니다. 세 시간 전에는 공포 영화를 보던 분이 나중에 가면 틴 에이지 로맨스를 보고 있고, 그다음 날은 액션 영화를 보고 계셔서요.”
“뭐든 좋아하는 것 같기는 하던데.”
“네. 가끔은 애니메이션까지 보십니다. 뭐더라….”
“-리틀 포니?”
현실에서 션 스펜서의 표정이 바뀌는 건 스크린에서의 모습과는 좀 다르다. 어떤 것도 내색하지 않는 게 당연했던 남자는 제 본래 감정을 순수하게 표현하는 걸 습관적으로 누르려고 하는 편이다.
하지만 요즘 그는 조금 달라졌다.
누구보다 잘 다듬어졌지만 언제나 옅은 살얼음이 끼었던 그 근사한 얼굴 위로 훅 더운 기운이 퍼진다. 짙은 흑갈색의 눈썹이 살짝 아래로 휘면서 조금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이 웃는다.
“안 좋아하는 척은 하는데…. 차 키나 저택에 둔 노트에 손톱만 한 리틀 포니 스티커가 붙어 있더군.”
“…아….”
“휴대폰에 있는 사진 중 절반은 펭귄이나 수달 사진일 걸요. 가끔 현장에서 뭐 설명할 때마다 ‘모조 조조 같은 표정으로 하면 되나요?’ 같은 말을 하기도 하고.”
애써 목소리를 담담하게 내지만 끝내 마지막에 덧붙인 “뭐, 본인은 무의식중에 하는 것 같지만.” 하는 중얼거림에 담긴 속내를 감추기는 어려웠다. 가브리엘은 제가 모시는 남자의 저런 순간을 볼 때마다 저 간신히 발 닿은 행복을 지키고 싶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 그는 션 스펜서에 대한 모든 것을 안다.
“가비, 당분간 저녁 일정이 쭉 있을까.”
“아마도 그럴 테지만… 최대한 중요한 인사들 위주로만 만나는 거로 더 추릴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 정리해 주면 고맙겠습니다.”
하지만 이런 매일의 변화에 가장 적응하기 힘든 건 아무래도 그 휘몰아치는 감정 속에 있는 당사자다.
션 스펜서는 요즘 종종 저 자신이 언제부터 이선을 눈으로 좇게 됐는지 가늠해 본다. 이선과 저 자신의 공통점은 성별뿐인 것 같은데 그렇게 모든 게 대척점에 있는 사람을 향해 어쩌다 이런 마음을 품게 됐을까.
“…후우.”
자신도 모르게 작게 한숨을 쉬자 백미러로 슬쩍 살피는 시선이 느껴졌다. 션 스펜서는 그걸 모르는 척 차창 밖에 시선을 고정했다.
인정할 건 인정해야 한다. 사실 그 시작점을 모르는 건 모두 네스 바라노프, 그 사내 탓이다. 그걸 순순히 받아들이고 싶지 않아서 요즘의 저는 괜히 어떤 계기를 찾아 만들고 싶어 할 뿐이다.
네스 바라노프는 가끔은 질릴 정도로 감정 기복이 심한 사내였다.
가끔은 저절로 인상이 찌푸려질 정도로 말본새가 험악한 것도, 억세게 운이 좋았다고밖에 설명할 수 없는 자신의 성공 가도를 자랑스러워하며 제 욕망을 노골적으로 전시하는 걸 거리끼지 않는 것도 차라리 견딜 만했다.
애초에 이 도시에서 어디 그런 게 비단 바라노프뿐인가.
그렇지만 저번 주에는 누구보다도 쾌활한 목소리로 눈을 반짝이며 작품을 이야기하다가, 그다음 주는 까슬하게 자란 수염을 면도하지도 않고 대체 왜 이딴 일에 제가 끼어든 건지 모르겠다며 술에 취해 우는 것만큼은 종종 힘겨운 때가 있었다.
진지한 프로와 술 취한 난봉꾼을 오가는 바라노프는, 제아무리 대단한 재능과 대담한 깡을 가졌대도 데이비드 밀러가 마음에 들어 한 게 아니었으면 함께 작업하지 않았을 거다.
게다가 몇 번이나 의사를 추천해 줄 때마다 ‘내가 알아서 한다고!’ 같은 말을 2년 동안 듣다 보면 딱 이 작품까지만 하고 인연을 끊자는 생각이 먼저 들 뿐이다. 애초에 션 스펜서는 아쉬울 게 없었다.
하지만 바라노프, 그런 그도 묘하게 느슨하게 풀어지는 때가 있었다.
바로 그의 ‘친구’에 관해 이야기할 때였다.
그건 언제나 무언가에 쫓기듯 날이 섰던 사람이 눈에 띄게 여유가 생기고, 저렇게나 밝아질 수 있구나 싶기도 했던 순간이기도 했다. 그래서 가끔 바라노프와 감정이 상할 정도로 부딪히고 나면 일부러 궁금하지도 않은 화제로 돌린 적도 몇 번 있다.
영악한 남자라 일부러 그러는 것임을 뻔히 알 텐데도 바라노프는 늘 그 주제 앞에서 약해졌다. 덕분에 션 스펜서는 그 매서운 사내의 ‘배우 친구’의 존재만큼은 지겨울 만큼 잘 알고 있었다.
본격적으로 캐스팅 얘기를 꺼내기 전까지는 늘 내 친구라는 모호한 지칭을 쓴 탓에, 이선 박이라는 이름을 알게 된 건 꽤 나중의 일이었지만- 바로 옆에 있는 듯 세세하게 그리는 단어들 덕분에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남자를 그리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아이스크림을 좋아해서 몇 개나 탑을 쌓아서 먹어도 흘리지 않고 먹고, 어울리지도 않게 마이 리틀 포니를 좋아하는 남자. 한인타운의 식당에 같이 가면 꼭 뭐라도 덤으로 얻어먹을 수 있다는 남자. 몸 관리 때문에 먹고 싶은 음식 목록을 매일매일 쓰면서 버티다가, 작품이 끝나자마자 너무 많이 먹어서 앓아눕기까지 했다던 남자.
아직 어린애 티도 벗지 못한 채로 저 먼 디트로이트에서 LA로 혼자 와 온갖 고생을 했다는 남자. 한때 마약에 빠졌었지만 그 와중에도 늘 연기는 놓지 않고 있다가, 오디션과 시나리오 투고에서 나란히 미끄러진 날 같이 어린애처럼 울었다는 남자….
-그때 지겨워하지 않고 더 귀 기울여 들었다면 어땠을까.
션 스펜서는 요 몇 달 가장 자주 했지만, 또 가장 의미 없을 후회의 문장을 떠올렸다.
고작 반나절 연락이 없다고 이렇게 쩔쩔매게 된 지금의 저를 바라노프가 보면 누구보다 낄낄대며 웃을 거다.
……아니면 반대로 그답게 벌컥 화를 낼지도 모르고.
저택에 오자마자 가장 먼저 향한 건 이선이, 그러니까, 아직은 조금 익숙하지 않은 단어지만- 제 연인이 된 남자가 요새 주로 시간을 보내는 다용도실이었다.
“이선은?”
“저녁부터 쭉 서관에 계십니다.”
오늘 이선은 오전에 잠시 통화한 걸 빼고는 한 번의 메시지도 없었다.
으레 ‘오늘 좀 늦을 것 같아’ 하고 먼저 연락하면 몇 시쯤 오냐느니부터 이런저런 하루의 일상을 나누고는 했는데, 읽었다는 표시만 뜰 뿐 어떤 답도 없었다.
스펜서는 뭔가를 기다리고 절절매는 데 익숙하지 않다. 특히 그게 누군가를 향한 마음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뭘 하고 있었을까?
못해도 웃옷은 입고 있었으면 좋겠다.
본인은 별생각이 없는 것 같지만, 요새 힘주어 근육을 키우지 않아 유독 늘씬하고 매끈해진 근육이 곳곳에 예쁘게 잡힌 몸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놓는 건 자신의 집이라고 해도 좀 아깝고 아쉽다. 심지어 그런 모습으로 침대에 누워 보는 게 ‘아기 펭귄 형제의 모험’ 다큐멘터리라서 더 좋을지도 모르겠다.
연애 경험이 없어도 이선 박이라는 남자가 그 목소리만으로 적잖은 여자들을 홀렸으리라는 것쯤은 뻔히 짐작할 수 있다.
이선의 목소리는 딱 듣기 좋게 낮으면서 한편으로는 굉장히 나른하다.
단어 하나하나를 정확히 발음하기는 하지만 묘하게 끝이 혼잣말처럼 툭 떨어지는 순간이 있다고나 할까. 정말 끔찍하게 유치해서 말한 적은 없지만, 션 스펜서는 그때 살짝 섞이는 숨소리를 좋아한다.
피곤한 하루 끝에 만나는 남자를 향한 기대감이 묘하게 속을 들뜨게 했다.
발소리를 내지 않고 걷는 데 익숙해진 지 오래였지만, 션은 제 거처에 거의 다다랐을 때는 조금은 뛰다시피 걷는 걸 감출 수 없었다.
하지만 서관에 도착해서 먼저 마주친 건 서로 조금은 난처한 시선을 주고받고 있는 자신의 고용인들이었다.
“-스, 스펜서 님.”
저를 보자마자 일제히 놀라 펄쩍 뛰어오르는 이들을 보고도 뭔가 이상하다는 걸 직감하지 않기는 어렵다. 그게 이선이 있다고 한 제 거처에서라면, 쉽게 최악을 상상하는 오래된 버릇마저 튀어나오게 되고 만다.
“무슨 일 있습니까?”
“무슨…… 일이 있다기보다는. 그게. 저어….”
션 스펜서는 우물쭈물하는 이들의 대답을 기다리는 것 대신 그들을 지나쳐 복도 끝의 방으로 곧바로 발을 옮겼다. 서관의 긴 복도 끝에는 문이 없다. 그 대신 하얀 아치와 함께 이어지는 그의 길쭉한 서재만 있을 뿐이다.
커다란 창문을 통해 한눈에 들어오는 LA의 밤은 여느 때와 별다를 게 없다. 어둠을 밝히는 크고 작은 빛들을 보고 있노라면 그 날씨만큼이나 평화로워 보이기도 한다. 불이 켜져 있지 않지만 환한 복도와 창문 밖의 빛은 서재를 희미하게나마 밝히기 충분했다.
“…….”
그리고 빛 덕분에 이 거대하지만 먼지 하나 없이 말끔했던 공간의 주인은 제 고용인들이 왜 하나같이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는지 머잖아 분명하게 알게 됐다.
지금 그의 서재는 이제껏 살면서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모습이다.
이건 문장 그대로의 의미다.
션 스펜서는 이렇게나…… 제 물건이 엉망진창으로 뒤섞이고 엎어진 채로 있는 걸 본 적이 없다.
그의 기억이 존재하는 때부터 모든 건 제자리에 있었다.
물건도, 사람도 그 정해진 위치를 충실히 따르기만 했었다.
하지만 지금 이곳은 그 질서 정연한 광경과는 거리가 멀다. 책이란 책은 대충 바닥에서 나뒹굴거나 엎어져 있고, 책상 서랍도 무엇 하나 제대로 닫혀 있는 게 없다.
션의 시선이 휑하게 변한 테이블 한가운데 있는 짙은 남색의 야구 모자에 잠시 시선이 닿았다. 그리고 자신의 연인이 그랬듯, 잠시지만 그것이 낯익다는 생각을 했다.
잠시 얼이 빠진 채 서 있었던 것도 같다.
“션 스펜서.”
덕분에 그렇게 듣고 싶었던 목소리에 담겨 나온 단어가 저 자신을 지칭하는 줄도 모르고 있었으니 말이다. 션 스펜서는 자신이 들은 것을 천천히 곱씹듯 중얼거렸다.
“-‘션 스펜서’?”
“나 물어볼 게 있어.”
서재 책장에 비스듬히 기댄 남자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아서 션은 한 걸음 앞으로 다가갔다. 하지만 그것과 거의 동시에 이선은 한 걸음 더 어둠으로 몸을 숨겼다.
기묘한 위화감이 훅 뒷골을 잡아당겼다. 션은 그걸 무시한 채로 최대한 평소 같은 목소리를 내려고 애썼다.
“그 전에 뭘 하고 있었던 건지 물어도 될까.”
“찾을 게 있었어.”
“뭘?”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연인은 대답 대신 책장에 헐겁게 꽂혀 있던 책을 꺼내 가볍게 훑었다. 그가 온종일 상상했던 밤은 이렇지 않았다.
좀 더 다정하게 눈을 맞추고, 떨어져 있던 하루를 듣고, 때로는 바보같이 웃기도 하면서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할 줄 알았다.
“아직 내 질문은 듣지도 않았잖아.”
공이 다시 넘어왔다.
션은 그걸 받는 걸 잠시 주저했지만 결국 이 서재에 발 디딜 때부터 정해진 답을 토해 냈다.
“……그래. 뭔데.”
“이번에는 모르는 척 말 돌리지도 말고, 어정쩡하게 대답하지도 마. 애초에 그렇게 선택지가 넓은 질문도 아니니까. …알았지?”
왠지 끝에 덧붙인 말은 다정한 듯, 힘이 하나도 없이 꺼질 듯한 속삭임에 가까웠다.
션 스펜서는 그 순간 생각했다.
자신은 이미 선택지가 없다. 이선이 그 붉은 기억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저를 잡아당겨 끌어 올렸을 때부터, 아니면 이제껏 그에게는 단 한 번도 허락된 적 없던 날것의 감정들을 내놓아 보여 줄 때부터, 아니면….
“션.”
아니면 내가 언젠간 저런 감정의 끝에 설 수 있을까 싶은 상상에 잠 못 이루게 했던 오디션 때부터.
“…네스를 죽인 거, 너야?”
왠지 바라노프가 그 까칠한 목소리로 낄낄대고 웃는 소리가 귓가를 스치고 지나간 것 같아서, 션 스펜서는 어둠 속에서 저를 뚫어지라 보고 있을 사랑하는 이의 눈을 피해 버렸다.
* * *
#. ??? 그날 밤, 바라노프 저택의 내실
한참을 이어진 건조한 가뭄을 적시는 비는, 대부분에게는 꽤 반가운 소식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네스 바라노프는 3년 전부터 비 오는 날을 끔찍이도 싫어하게 됐다. 비만 오면 손이 저리고 관절 하나하나의 틈이 벌어져 쪼개지는 것처럼 아프다. 그러다 보니 이렇게 날씨가 좋지 않은 날은 누구도 만나지 않고 침실 구석에 처박혀 있고는 했었다.
아마 오늘도 상대가 다른 이였다면 예외는 없었을 거다.
「…몸이 안 좋아 보이는데.」
네스 바라노프는 대답 대신 뜨끈한 열기가 남아 있는 뱅쇼를 홀짝였다.
알코올이 날아가 은은한 풍미만 남은 시나몬 향이 머리 한구석까지 적당히 데워 주니 조금 살 것 같았다. 손바닥만 한 머그잔을 흔들며 「그쪽도 한 잔?」 하고 예의상 권하자, 션 스펜서는 예상했던 대답을 했다.
「고맙지만 사양하지.」
처음에는 저 고상한 말투가 꽤 거슬려서 일부러 비뚜름하게 굴었더랬다.
사실 그땐 잘난 집안의 도련님이 제 앞에서 일부러 잘난 척 구는 거로 확신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건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저 근사한 말투를 한 채로 요만큼도 지지 않고 빈정대는 걸 머잖아 만나게 됐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션 스펜서는 좀 분하기는 하지만 서른 해 동안 학습된 우아함을 두고 뭐라 하는 건 의미 없는 일이라는 걸 몸소 알려 주는 사내이기도 했고 말이다.
바라노프는 푹신한 의자의 등받이에 파묻히듯 등을 기대고 툭 입을 열었다.
「이봐. 저번에 했던 말은 다시 생각해 봤어?」
확실히 션 스펜서가 배우는 배우다, 하고 생각하게 되는 건 이럴 때다.
물론 저 섬세하면서도 또 금욕적인 얼굴을 앞두면 누구라도 혀를 내두르겠지만, 눈썹의 작은 움직임과 작은 턱짓만으로도 제 생각을 고스란히 전하는 걸 보고 있노라면 괜히 새삼스레 감탄하게 되고는 한다. 바라노프는 「-그, 캐스팅 말이야.」 하고 친절한 부연 설명을 덧붙였다.
사실 이때까지는 꽤 나쁘지 않은 분위기였다,
눈치 빠른 스펜서가 영 좋지 않은 컨디션까지 눈치채고 꽤 배려해 주는 것까지 제법 고마운 일이었고 말이다.
「당신의 마약 중독자 친구를 내 상대로 앉히는 걸 말하는 거라면 이제 포기할 때도 되지 않았나 싶은데.」
「중독‘이었지’!」
바라노프는 제 목소리가 순간 뾰족하게 나간 걸 자각하고는, 크게 숨을 한 번 삼킨 뒤 스펜서의 나긋한 어조를 흉내 내듯 한결 누그러진 채로 말을 이어 갔다.
「지금은 멀쩡히 잘 활동하고 있는 녀석이라고. 그때 내가 DVD도 줬잖아. 보긴 한 거야?」
「……보긴 했을 거야.」
약간의 침묵 뒤 흘러나온 대답에 바라노프는 확 반색했다.
하지만 또박또박한 낮은 목소리가 이어지는 게 그보다 조금 더 빨랐다.
「내가 아니라 캐스팅 팀이.」
션 스펜서는 그답지 않게 평소보다 말을 오래 골랐다.
「뭐?」
「그 영화에서 나오는 배우 중 내 상대로 둘 만한 사람이 있는지 확인하라 했고, 나중에 물어보니 대답 대신 그냥 웃더군.」
「…….」
「이 정도면 충분한 대답이 됐을까, 바라노프.」
생각 많은 남자이니 그 나름의 배려를 하는 것일 터였지만, 바라노프는 그 친절이 지금만큼은 전혀 고맙지 않았다. 오히려 영 좋지 않은 컨디션 탓에 참을성 없어진 혀를 더욱 까끌까끌하게 만들었을 뿐이다.
「…아니. 전혀!」
이런 상황에서까지 순순한 대답을 한다면 바라노프의 명성이 아깝다.
「얼굴이 많이 팔리지 않은 사람을 캐스팅하는 건 그쪽도 그렇고 밀러 역시 별 불만 없는 거 아니었어?」
「맞아. 불만 없어.」
「망할! 야, 그럼 왜 걔는 안 된다는 건데?」
「그대로 돌려주지. 왜 그 남자여야 한다는 거지?」
차라리 덩달아 함께 목소리를 높이면 속 시원할 것 같았다.
하지만 오늘따라 션 스펜서는 발열점이 유독 높았다.
아니, 조금 더 정확하게는 머리 꼭대기에 앉은 듯 여유가 넘쳤다. 그 느긋함을 하루 이틀 본 것도 아닌데 왠지 속이 배배 꼬이는 건 오늘이 하필 비 오는 밤이어서일 거다. 컨디션도 최악이고, 온몸이 두들겨 맞은 듯 으슬으슬 쑤시는 것도 조금은 탓할 수 있을 터다.
바라노프는 이를 바득바득 갈고 싶은 것을 참으며 열이 올라 잘 돌아가지 않는 머리를 굴렸다.
「…우선, 이 영화에 가장 잘 맞는 연기를 할 사람이야.」
「연기로 손꼽히는 사람들이 한둘이라고 생각하나?」
「이번 영화의 가장 큰 특징이 뭐냐고. 배우 본인의 살아온 인생을 기반으로 가상의 인물을 만드는 거잖아. 이 영화의 주인공은 너뿐만이 아니라고. 난 그걸 살리고 싶다는 거야!」
네스 바라노프가 소리치고 션 스펜서가 그걸 묵묵히 듣는 건 사실 그렇게 보기 힘든 일은 아니다. 조금만 건드려도 금세 악! 하고 소리를 지르는 게 그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바라노프는 오늘만큼은 평소보다 침착하려고 애쓰는 것 같았다.
「…그래, 확실히 너와 이선은…, 박은, 비슷한 점이라고는 없어. 심지어 나랑도 다르지.」
「…….」
「걔는 겁도 많고 남한테 싫은 소리 하느니 혼자 속앓이 좀 하고 마는 등신이거든. 약을 한 것도 자기가 한 게 약인 줄도 모르고 술집에서 얼굴도 기억 안 나는 개자식이 준 걸 어쩌다 손댄 게 시작이었을 정도니 더 말할 게 뭐가 있겠어.」
평소처럼 울컥해서 목소리를 높이며 벌떡 일어섰던 바라노프가 긴 심호흡을 몇 번 하더니 이내 다시 자리에 앉아 말을 이어 가는 모습은 조금 새롭기까지 했다. 보통 때의 그 기차 화통을 삶아 먹은 듯한 목소리에 비하면 혼잣말에 가깝게마저 보였다.
션 스펜서는 그런 각본가의 모습을 잠시간 보고 있다가, 그 역시 작게 한숨을 내쉬며 말을 받았다.
「바라노프. 솔직히 말하면, 나와 비슷한 사람을 찾아 상대역으로 앉히는 것도 어려울 것 같은데.」
「그야 그렇지만-」
「그리고 마약 중독자의 극복기는 이제 새로울 것도 못 돼. 알잖아?」
조곤조곤 흘러나온 문장 중 반박할 만한 건 아무것도 없다.
바라노프 그가 아무리 고집 센 남자라고 할지언정 그것조차 모를 정도로 안하무인은 아니다. 하지만, 하지만. 바라노프는 속이 탔다. 사실 데이비드 밀러는 큰 문제가 아니다. 투자자들 역시 나중에 생각해도 늦지 않다.
하지만 션 스펜서는 다르다.
스펜서, 그가 오케이 사인을 내지 않는다면 이 영화에 제 친구의 이름이 올라가는 건 영영 불가능하다. 바라노프는 이 영화의 각본을 맡으면서 많은 걸 계획했다.
이 캐스팅은 그중 가장 커다란 조각이다.
「하지만 녀석은 이 영화에 완벽하게 맞아들 거라고!」
「그 말 말고 다른 설득을 해 줬으면 하는데.」
초조해진 입안이 바짝 마르는데 션 스펜서의 표정은 여전히 심드렁하기만 하다. 바라노프는 급하게 말을 이었다.
「커리어는 좀, 아니, 많이 밀리는 게 맞아. 나도 알아. …요 몇 년은 눈에 띄는 영화도 없었고. 하지만 녀석은 정말 웬만한 사람들보다 훨씬 이야깃거리가 많다고.」
「이야깃거리?」
「LA에서 배우로 자리 잡으면서 겪었던 일들로 내놓을 수 있는 표정들도 다양하고, 가정사적으로도 당신과 대척점에 선 채로 또 다른 이야기를 주기도 하겠지.」
「…….」
「그걸 표현할 연기도 충분히 섬세하게 할 수 있는 놈이라는 건 당신이 직접 작품을 봐 본다면 동의하게 될 거야. 아, 아무거나 다 보라는 거 아니야. 저번에 내가 추천한 거 있잖아. 그거라도 봐 보라고. 무조건 안 좋게만 생각하지 말고-」
쫓기듯 말을 하다 보면 아무리 달변가라고 한들 실수를 한다.
그게 상대가 마음에 안 들어 하는 누군가를 변호하기 위해서라면 더욱 그렇다. 심지어 바라노프는 이야기꾼이기는 해도 달변가와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욱하는 성격에 말을 잘못한 적이 더 많다.
심지어 지금도 제가 조금쯤 횡설수설한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말을 이어 갈수록 스펜서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더니, 이윽고 전혀 유쾌하지 않은 웃음을 흘리는 것의 의미를 모를 만큼 눈치 없지도 않았고 말이다.
「왜, 왜애? 젠장. 뭐야. 왜 그러는데.」
「그 남자를 앉히려고 했던 게 단순히 가까운 친구여서가 아니었군?」
「……뭐?」
「차라리 그런 이유였더라면 지금처럼 적당히 웃어넘길 수 있었을 텐데, 바라노프. 그쪽에게 새삼 놀라게 되는데.」
사실 이때까지 바라노프 그는 제 말실수를 자각하지도 못했다.
그리고 불쾌함을 감추려 들지 않는 남자는 훤히 들여다보이는 그 사실에 더욱 짜증이 난 것 같았다. 서늘한 송곳 같은 스펜서의 말이 이어졌다.
「내 ‘가정사’와 그 남자의 ‘가정사’가 서로 정반대라 나란히 놓고 보면 꽤 재밌을 것 같았다고?」
아차, 하는 눈이 됐지만 엎지른 물을 돌이킬 수 없듯이 입 밖으로 문장이 되어 흘러나간 말 역시 마찬가지다.
「왜, 그 남자가 가난하지만 화목한 집안에서 자라나 고초를 겪으며 잠깐 삐끗했다가, 결국엔 불행한 스타와 연인이 되는 마약중독자 그림이라도 바란다고 하던가? 너무 역겨울 만큼 남 좋은 얘기군, 바라노프.」
「이봐! 그런 뜻으로 한 얘기는 아니었어. 그저 너무 그 녀석을 오해하는 것 같아서 설명한다는 게….」
「그래? 그럼 나도 한 번 당신처럼 그에게 관심이 안 가는 이유를 대 볼까.」
제 딴에는 수습하려는 게 오히려 갈수록 엉망이 된다.
하지만 이건 바라노프 그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는 벌써 몇 년간 문자 한 통 용기 내 보내지 못하는 친구의 일 앞에서는 자꾸 초조해지고 작아진다. 특히 오랫동안 도망쳐 온 엉킨 과거를 이제야 풀어내려 마음먹은 지금 같을 때는 더더욱 그렇다.
하지만 션 스펜서가 그것까지 알 수 있을 리 없다.
그들은 몇 년간 작품을 위한 대화는 충분히 했을지언정, 그들 서로를 알아 갈 시간에는 지독히 인색했었다.
「십 년 넘게 연기를 하면서 조금이나마 알 만한 타이틀 하나 없는 배우. 아니, 배우라고는 하는데 심지어 그 커리어 중 몇 년은 마약에 취해 제대로 보내지도 못한 남자. 이제는 하다못해 배역을 자기가 직접 오디션으로 따내기는커녕 친구 이름 뒤에 숨어 얻어먹어 보려고 하는 기회주의자.」
「……이봐!」
「그리고 또 뭐라더라. 그래, 캐스팅 담당자가 BAA의 다니엘 바커가 푹 빠져서 뒤꽁무니를 쫓고 있는 남자라고도 덧붙였던 것 같은데. 정말 갈수록 볼만한 이력이군. 참 할 이야기가 많기는 하겠어. 갱생의 여지조차 없는 거로 말이야.」
이어진 말에 네스 바라노프의 입에서 기어코 걸쭉한 욕이 뽑혔다.
「-씨발, 어떤 개자식이 그따위로 지껄이든? 그리고 방금…, 갱생의 여지가 뭐? 너 다시 말해 봐.」
「누가 말했는가가 중요한 건 아닌 것 같은데. 요점은 그런 인간을 계속해서 밀어붙이는 당신마저 한심해지기 전에 적당히 하라는 말이지.」
「너만큼이나 나에게도 이 영화는 중요하다고, 션 스펜서!」
「그럼 그 문장에 걸맞은 제안을 해 보라고! 이제라도 그 마약중독자한테 약점 잡힌 게 있다고 솔직히 털어놓기라도 한다면, 차라리 진지하게 고려라도 해 보겠어. 대체 무슨 생각인 거야?」
바라노프는 무슨 말을 해도 제 친구를 무심하게 대하던 이유가 고작 누군가의 말 한마디 때문이었다는 것에 더 열 받은 듯 보였다. 솔직히 이쯤 되면 모를 수가 없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어떤 말을 해도 저 단단한 편견은 깨지지 않을 거다.
그저 제게 뒤로 부탁한 마약중독자라고만 생각할 게 분명하다. 그 시간을 어떻게 이겨 낸 사람인지는 중요하지 않은 문제다.
……게다가 이 이상 쩔쩔매며 숙이고 들어갈 기분도 아니다.
뒤통수가 아릿하게 저린다.
「-씨발, 이래서 돈 많은 도련님 새끼란!」
바라노프는 어느새 차갑게 식은 뱅쇼를 쭉 들이켜고는 날을 세우기 시작했다.
「이 영화가 빌어먹을 과거를 떨치고 나오는 첫 시도다, 뭐 그러지 않았나? 아냐? 글쎄다. 아직은 좀 급한 게 아닌가 싶은데, 스펜서.」
「……뭐라고?」
「다른 사람과 요만큼만 비교해도 그 잘난 자존심이 상해 어쩔 줄 모르고 혼자 피해의식에 부들거리는데 잘도 영화까지 찍겠어. 응? 왜, 좋-은 부모님 밑에서 자란 이선과 그쪽이랑 나란히 세울 생각을 하니까 속이 뒤틀리던가?」
내리꽂히는 단어 하나하나가 거슬리는 건 작정하고 독을 품은 문장이어선지, 아니면 바라노프의 말을 웃으며 부정할 수 없는 것인지 잘 구분되지 않았다.
「바라노프. 지금 우린 캐스팅 이야기를 하던 게 아니었나?」
「커리어 박살 난 마약중독자에 에이전시 사장이랑 씹질이나 하는 등신으로 만들어 놓고 어디 이제 와서 캐스팅 운운이야. 어디 끝까지 해보자고.」
「오늘은 그만하지.」
한편, 바라노프 역시 고운 미간을 좁힌 남자의 속내를 훤히 알면서도 입을 놀리는 걸 참을 수 없는 건 마찬가지였다.
「뭘 그만해! 넌 그 녀석을 남창 취급해도 되고, 정작 엿 같은 소리 들으려니 좆 같아졌어? 아니면 왜, 이민 와서 온갖 차별을 다 받으면서도 이선만큼은 하고 싶은 걸 다 하게 하던 어머니와, 너 때문에 가슴 모양이 망가졌다고 욕하는 그쪽의 어머니를 두고 내가 서로 비교라도 할 것 같아서 겁이라도 먹었어?」
「…….」
「아! 다정하다 못해 언제나 ‘내 자랑스러운 아들’로 시작하는 문자를 보내는 아버지도 있군. 깜박할 뻔했는데 말이야.」
사실 바라노프는 이쯤에서 제가 아득히 선을 넘은 문장을 쏟아 내고 있다는 걸 그 스스로도 자각했다.
「이봐. 션 스펜서. 그쪽은, 아무래도 스펜서가 아닌 척하는 스펜서 같은데. 응?」
차라리 제 이름이 오물에 뒹굴었다면 화를 내기는커녕 코웃음 치고 넘겼을 거다. 하지만 네스 바라노프, 그는 이제 몇 년이나 얼굴을 보지 못한 제 친구의 이름만큼은 모욕에 넘실대는 걸 참지 못한다.
특히 오늘처럼 최악의 밤은 더더욱 그랬다.
「거만하고, 오만한- 자격지심 덩어리 그 자체라고!」
「다 지껄였나?」
하지만 아무리 이렇게 가시 돋친 말을 주고받는다고 한들 처음부터 변하지 않은 게 있다.
바로 이 상황의 주도권은 쭉 한 사람에게 있었다는 거다.
정제되지 않은 문장을 내키는 대로 더 쏟아 내려던 바라노프는, 그 담담하다 못해 우아한 어조로 흘러나온 어울리지 않는 표현에 잠시 입술을 씰룩이며 멈칫했다.
그리고 션 스펜서는 그 틈을 놓칠 만큼 느긋한 사내가 아니었다.
「…부디 그랬으면 좋겠군. 이제 그 빌어먹을 약쟁이 가지고 칭얼대는 일은 없을 테니, 어디 지껄이고 싶은 만큼 더 해 봐. 얼마든지 들어 줄 의향이거든.」
* * *
바보 같지만, 솔직히 난 션의 멍한 표정을 보고 조금 안도했다.
그 얼떨떨한 눈이 내 질문이 틀렸다는 걸 증명이라도 해 주는 것 같다는 망상 때문이었을 거다. 언제나 예쁘게 반짝였던 새파란 눈동자는 깜박이는 것조차 잊은 듯이 있다가, 얼빠진 목소리로 되묻는 것 역시 마찬가지였다.
“……뭐?”
여느 때처럼 모든 조각이 맞춰지지 않은 대답을 듣고, 그걸 헐겁게 흘려듣고 넘어갈 수 있을 정도로 여유로웠으면 좋았을 거다. 대충 그러려니 하는 것 정도는 이제껏 잘해 왔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내 뒤에는 이제 한 뼘의 공간도 남아 있지 않다.
궁지에 몰린 나로서는 이제껏 감히 입에 담는 것조차 어려워했던 단어를 다시 한번 토해 내는 것 말고는 다른 수가 없다는 거다.
“말 그대로야. 네가 네스를 죽였어?”
이 끔찍한 물음을 두고 차라리 갑자기 무슨 소릴 하는 거냐며 헛웃음 쳤다면, 난 곧장 긴장이 풀려 주저앉았을지도 모른다.
그런 말을 하려고 제 서재를 뒤진 거냐고 화를 낸다면 차라리 마음이 편했을 것 같기도 하고 말이다.
하지만 션의 반응은 내 어떤 예상과도 달랐다.
“왜 그런 질문을 하게 됐는지 물어도 될까.”
언제 얼굴이 풀어졌었다는 듯 평소의 그… 말끔하다 못해 그려 낸 듯한 표정이 된 션이 따끔따끔 눈에 걸려들었다. 그게 얼마나 마음 한편을 쿵 하고 가라앉게 했는지, 얼마나 순식간에 날 얼음이 뒤섞인 진창에 빠트리는 것이었는지, 눈앞의 남자는 절대 알지 못할 거다.
단 한 순간도 싫어할 수 없었던 낮은 목소리가 지금만큼은 듣고 싶지 않을 지경이었다.
“그렇게 돌려 대답하지 마.”
“…….”
“둘 중 하나잖아. 죽였다, 아니면 안 죽였다.”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조금은 떨리는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이 밖의 고용인들이 들을지도 모른다는 염려가 아예 안 든 건 아니었지만, 여느 때처럼 굴었다간 또 마음 한구석엔 끔찍한 것을 품은 채 간신히 모른 척 지내야 한다는 불안감이 더 컸던 것 같다.
게다가 이제는 이 작품 촬영이 끝나고 나면- 저 남자의 이름이 내 인생에서 없던 것처럼 사라질 수 있으리라는 자신도 없다.
그러니 더욱 확실히 하고 싶었다.
제발, 정말, 제발.
“아니야.”
“확실히 말해 줘. 네가 죽인 게 아니라는 거야?”
션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눈을 하고 있었다. 그의 저런 시선을 한두 번 받은 것도 아니었건만 이 순간이 견딜 수 없게 버거운 건 사실 원하는 대답이 있어서일 거다.
“……아마도.”
이제껏 저 남자와 보낸 시간이 롤러코스터에 탄 것처럼 들썩였다지만, 최소한 지금 이 대답만큼은 그래서는 안 됐다.
대체 저 끔찍한 단서는 뭐란 말인가.
최대한 침착하게 말을 이어 가려던 나는, 순간 훅 짜증이 치민 걸 감추지도 못한 채 목에 핏대를 세웠다.
“야. 너 지금…!”
“그날 밤 바라노프와 싸웠었어.”
그래. 분명 밀러 감독도 저 말을 했었다.
심지어 ‘상당히 격앙된 상태’인 네스 녀석을 두고 나온 것까지만 말할 수 있다느니 하는 모호한 표현과 함께였다. 그게 지금의 ‘아마도’와 일맥상통하는 걸까.
나는 멋대로 얽히고설킨 문장이 쏟아져 나올 것 같아 간신히 입을 다문 채로 연인의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끔찍하게 싸웠지. 서로 해선 안 될 말들도 서슴없이 쏟아 내면서… 다시는 안 볼 사람들처럼 말이야.”
“…….”
“그런데 저택으로 돌아가는 중에-”
션은 부글부글 들끓는 나와는 달리 눈에 띄게 가라앉아 있었다.
“바라노프가…… 죽었고, 아마도 ‘공식적으로는’ 내가 그를 마지막으로 만났다는 걸 알게 됐어. 내게 그를 살릴 기회가… 있었을지도 모르지.”
“네스와는 왜 싸운 건데?”
내 질문이 그리 어려웠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배배 꼬아 생각할 필요 없이 간단명료하지 않나.
내가 던진 질문은 두 개다.
‘네스를 죽였어?’, 그리고 ‘네스와 왜 싸운 건데?’.
대체 이보다 더 쉽게 말할 방법이 있다면 제발 내게 가르쳐 줬으면 좋겠다. 이 질문이 그렇게 어려운 게 아니라면 대체 션 스펜서가 그답지 않게 변명을 고민하기 시작한 지금의 상황이 이해되지 않으니 말이다.
나는 다시 한번 힘주어 물었다.
“뭐 때문에 그렇게 심하게 싸운 거냐고.”
“…조금 의견 차이가 있어서.”
“의견 차이 때문에 몇 달째 마음에 담고 후회할 정도로 싸웠다고? ‘끔찍하게’ 싸웠다는 표현이 그 정도로 되는 말이야?”
찌푸린 미간을 풀지 않은 채로 답지 않게 입술을 깨물고 있다가, 긴 한숨과 함께 제 머리를 헝클어트리는 얼굴에서 낯선 초조함이 보인다.
누군가 다그치는 것에 익숙하지 않을 남자는 잠시 말을 고르듯 희미하게 미간을 좁히고 있다가, 얼마 뒤 아주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덧붙였다. “…모든 게 내 잘못이었어.”
그건 이전에도 들은 적 있다.
션 스펜서, 저 남자는 늘 내게 모든 것이 제 잘못이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지금만큼은 좀 더 제대로 된 설명이어야 한다. 나는 그가 좀 더 제대로 된 문장을 토해 내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이어지는 말들은 그 어떤 것도 제대로 된 영양가 없는, 언제나 같은 모호한 표현의 연속일 뿐이었다.
“그러니까…, 그건. …후우, 이선. 그건, 바라노프를 그렇게 할 만한 이유는 아니었어. 그건 경찰 쪽에서도 인정했고-”
“됐어. 차라리 그냥 말할 생각이 없다고 해.”
“……이선.”
경찰도 알고, 하다못해 밀러조차 아는 걸 왜 나는 알아선 안 되는지.
너는 나를 뭐라고 생각하고 있는 건지. ……유치해질 정도로 진지해진 건 나뿐이었는지.
한껏 비참한 문장이, 물음들이 혀끝까지 걸렸다가 간신히 도로 들어갔다. 그 말을 꺼내면 정말로 비참해지리란 걸 모르진 않는 멍청이라 다행이었다.
“그럼 줄리는?”
나는 머리카락을 거칠게 쓸어 올리며 들썩이는 속을 달래다, 이 평화로운 저녁을 박살 낸 원점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줄리 깁슨. 내 메이드.”
다행히도 이번 질문은 그 역시 소화하는 데 어렵지 않은 듯했다.
아주 잠깐이지만 ‘어떻게?’ 라는 물음보다 ‘드디어’ 같은 소회가 지나갔던 것도 같다.
션은 엉망진창이 된 그의 서재 기둥에 기대더니 한숨처럼 입을 열었다.
“……그가 그렇게 되고 나서 하루아침에 일자리를 잃은 사람들을 내가 고용했을 뿐이야.”
긴장이라도 한 걸까. 늘 매끄럽기만 하던 션의 목소리가 살짝 갈라졌다.
“특히 줄리 깁슨은 바라노프가 믿을 만한 사람이라고 하면서 많이 의지한 메이드였어. …그래서 그와 가까운 친구였던 널 도우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거야. 다른 의미는 없어.”
“맙소사. 션. 이 정도 되면 없던 의미도 생겨나지 않을까?”
“깁슨은 네가 바라노프의 친구라는 것도 몰라. 정말 평범한 메이드야.”
“대체 지금 내가 뭘 믿을 수 있겠어!”
차라리 더 뻔뻔한 얼굴이었으면 좋았을 거다.
그 근사한 얼굴에 보기 좋은 미소를 건 채로 영화를 너무 본 게 아니냐고 장난치듯 말하며 적당히 그럴듯한 문장을 엮어 냈다면, 나란 인간은 정말 사람 보는 눈 없는 등신 새끼라며 도망쳐 나갈 수도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션 스펜서는 내가 아는 그대로다.
약아 빠지기에는 너무 그 단호한 이목구비만큼 꼿꼿한 남자였고,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거짓말을 하기에는 모든 문장을 꺼내지 않아 내 기분을 거스를까 전전긍긍하는 게 너무 티가 났다.
……웃기지 않나.
그 잘나디 잘난 스펜서가 말이다!
“네스가 죽기 전 마지막으로 만난 사람이 너라는 걸 직접 본 유일한 사람이, 심지어 나중에는 CCTV를 두고 형사와 협상까지 했다던 간 큰 하인이… 사실 몇 달 동안 온종일 내 옆에서 웃고 떠든 메이드라는데!”
왠지 눈가가 확 뜨거워지는 것 같아, 나는 애써 멀쩡한 척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저택에 있을 때마다 종일 함께한 메이드가 LA의 그 비싼 곳에서 살면서 심지어- 내가 네스에게 줬던 모자까지 자기가 가지고 있는 걸 보고 내가 무슨 생각을 했을 것 같아? 응? 왜, 왜 자꾸 끔찍한 상상을 하게 만들어.”
머릿속으로 몇 번이나 침착하게 말하는 상상을 했었는데 결국에는 늘 이 모양이다. 질문, 그다음은 책망, 그리고 결국엔….
“있잖아, 션. 나한테도 제대로 말해 주면 안 돼?”
답을 듣지도 못할 애원이다.
“나도 너한테서 직접 듣고 싶어. 응? 그래서 이렇게 부탁하잖아. 이렇게 묻잖아.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줄리는 또 뭐고!”
“…….”
“-션!”
항상 그랬다.
션 스펜서, 내 연인이 되고 만 저 남자가 먼저 내게 말해 준 건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언제나 원치도, 예상하지도 못했던 것에 정신없이 휩쓸려 쏟아져 들어오는 것들을 헐떡이며 삼키기에 바빴었다.
지금도 봐.
“LAPD에서 하필 날 집어 호출한 것도, 사실은 션, 너 때문 아니야?”
“……닉 코빗인가?”
두서없이 튀고 만 문장에 그게 무슨 일이냐는 질문 대신 놀라지도 않은 얼굴로 되묻잖아. 사실 마지막 문장은 다니엘 바커가 준 힌트였지만, 그런 걸 일일이 알려 줄 필요도 없다.
지금 이 순간 이전까지는 감히 바커가 다 건네지 못한 문장이 이 남자와 관련 있을 거라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었으니.
심지어 애초에 션이 꺼낸 이름 역시 완전한 오답은 아니지 않나.
“맙소사. 정말이야? 그래? ……내가 그래서 경찰에 불려갔던 거라고? 뭐, 왜?”
“…….”
“그래, 이것부터 말해 볼까. -닉 코빗.”
나는 이제껏 빌어먹을 닉 코빗이 빙글대고 웃으며 제 손바닥 위에 올려 둔 인형인 양 휘두르거나, 그게 아니라면 대단하신 데이비드 밀러가 선심 쓰듯 건네는 이야기에 고개를 조아려야 했다.
그런데 이제는 몇 달간 나와 붙어 지냈던 메이드마저 이 안개 밖에서 나를 지켜보고 있던 셈이라니.
대체 이제껏 뭘 믿고, 뭘 듣고, 뭘 봐 왔던 거라는 걸까.
바보같이 눈시울이 시큰해진다.
“맞아. 날 찾아왔었어. 서너 번 정도 만났고, 그때마다 참 끈질길 정도로 네 얘기를 했었어. 내게 헨리 씨의 이야기를…… 감독님보다 먼저 꺼낸 것도 그 사람이었고. 네 사정은 몰랐지만, 최소한 헨리 씨가 자살한 게 아니라 살해당했다는 표현을 쓰더라.”
이런 상황에서 미치지 않고 버틸 만한 사람이 얼마나 될까.
나는 이제껏 혹시라도 션에게 들킬까 봐, 좀 더 솔직히 말하면 그가 나에게 실망할까 봐 전화 한 통에도 겁에 질렸던 형사와의 관계를 기세 좋게 토해 놓고도 조금쯤 찢겨 나간 마음 한구석에 몸서리쳤다.
“그래. 내가 잘했다는 거 아니야. 알아. 끔찍하다 싶지?”
션 스펜서가 부정 대신 나를 그 새파란 눈동자 안에 물끄러미 담았다.
결국에 이렇게 될 걸 정말 모르지도 않았을 텐데, 욕심껏 움켜쥔 대가는 이렇게나 처참하다. 나는 멍청하게 떨리기 시작한 손을 세게 말아 쥐며 싸구려 변명을 늘어놓았다.
“그래도 있잖아, 나 정말 최소한, 정말 최소한 널 그렇게 의심하지 않으려고 발버둥은 쳤었어. 죽은 네스랑 이 빌어먹을 영화 사이에서 내가 뭘 해야 인간다운 건지 돌아 버릴 만큼 고민하면서도 너만은 아닐 거라고.”
“…….”
“이건 다 그 미친 형사의 망상이라고, 너는 정말 아무런 관련도 없는데 나만 바보 같은 생각에 빠지는 거 같아서. 정말 그랬단 말이야. 그런데-”
미친 듯이 이어 가던 말에 순간 가슴께의 어느 부분이 콱 막히고 만 나는, 문장을 끝맺지도 못하고 중간중간 컥컥대는 숨만 간신히 들이켰다.
연인의 시선이 내게서 떨어져 엉망진창이 된 그의 서재를 훑는 게 느껴진다.
“이선.”
얼마나 그렇게 있었을까. 듣기 싫은 내 숨소리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이 듣기 좋은 낮은 목소리가 따라온다.
“-너는 내게…… 어떤 사과도 하지 않아도 돼.”
시종일관 나와는 달리 차분하게만 들렸던 나직한 문장에 옅은 떨림이 깃들어 있다는 걸 깨달은 건 그때였다.
내 심장은 그 떨림을 자각한 순간부터 시끄럽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네 생각이 맞아.”
그의 목소리와 내 시끄러운 심장 소리가 서로 엉망으로 얽히고설킨다.
나는 그 시끄러운 소리가 조금은 잠잠해질까 싶어, 저도 모르게 숨마저 참은 채로 사랑해 마지않는 목소리가 이어지기만을 기다렸다.
“LAPD가 널 호출했던 건 내 초기 경찰 조사 때문이었어.”
션의 입에서 길게 떨리는 한숨이 먼저 터져 나온다.
그리고 이내 내 머리 한구석에서 ‘이것만은 아닐 거라며’ 애써 웃어넘겼던 말에 대한 답이 천천히 흘러서 단어 단어마다 정확히 내 심장 어딘가에 내리꽂혔다.
“…내가 이선 너를, 네스 바라노프의 가장 유력한 살인 용의자로 지목했었으니까.”
나를 몇 걸음 지나쳐서 바닥에 굴러다니는 책 몇 권을 주워다 책장에 다시 꽂는 남자의 손이 덜덜 떨리는 걸 차라리 못 봤으면 마음이 조금 더 편했을까?
한 만큼 돌려받는다느니 이게 그건가 보다.
“왜?”
의식하기도 전에 튀어나온 질문에 하나뿐인 연인은 곧장 대답하는 것 대신 들고 있던 책 한 권을 놓치며 나는 소음으로 적막을 채웠다.
나는 참을성 없이 그를 재촉했다.
“왜?”
“…….”
션은 이번에도 답하지 않았지만, 나는 이 질문에 대한 답만큼은 어렵지 않게 곧바로 몇 개나 떠올릴 수 있었다.
몇 년이나 연락을 끊고 지낸 마약중독자. 네스 바라노프가 이상하리만치 영화의 주인공으로 앉히고 싶어 했던 이도 저도 아닌 무명. 또….
하하, 대답 대신 계속해서 서로 이어지기만 하는 질문들이 우리 사이에 이렇게나 많았었나. 대체 이제껏 우리가 밤새워 나누었던 이야기들은 다 어디로 휘발된 걸까.
대체 그와 내가 서로 보고, 말하고, 들었던 것들은 뭐였나?
“…이선, 너는?”
심지어 한참을 기다렸던 연인에게서 돌아온 건, 또다시 답이 아닌 되물음이었다.
“뭐?”
“너는 왜 바라노프와 몇 년이나 연락을 끊고 지냈는지 말해 줄 수 있겠어.”
“그걸 지금 묻는 이유가 뭐야.”
“…….”
“그걸, 왜 지금 묻냐고 물어보잖아!”
마음에 품기 시작했다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푸른 눈동자가 물끄러미 나를 담는다.
이상하다.
내 인생을 뒤흔든 그날의 오디션으로 돌아간 것만 같다. 그 앞에 서 있자니,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쭉 힘이 풀린 헛웃음이 터진다. 션 스펜서는 여전히 나를 심사하듯, 관찰하듯, 내 작은 숨소리 하나까지도 확인하듯 눈에 담고 있다.
“우리 정말… 말도 안 되는 사이였구나.”
단 하나 달라진 게 있다면 데이비드 밀러가 낄낄대고 웃으며 주문했던 그 절절한 감정에 정말로 몸이 잠기기 시작했다는 것 정도겠지.
“나는 너를 의심하고, 너는 나를 의심하고. 우린…… 대체 몇 달씩이나 이렇게 지냈던 거야? 옆에는 죽은 내 친구의 메이드였던 사람을 두고서?”
“…이선, 그건….”
“대체 난 어쩌다가.”
그걸 깨달은 나는 차마 말을 잇지도 못하고 그때처럼 헐떡이듯 떨리는 숨을 간신히 들이켰다.
“아니, 어쩌려고 너를, 난-!”
그림자 속에서도 반짝이는 푸른 눈에는 분명한 당혹과 초조가 어려 있는 게 보인다. 나는 내심 그것에 마지막까지 기대하고 말았던 것 같다.
뭐라고 말을 이을 듯이 거친 호흡을 들이켜는 남자의 숨소리가 유독 날카로웠다.
하지만 그의 날 선 숨은 문장으로, 아니 하다못해 짧은 단어로 이어지기는커녕 익숙한 탄식 같은 침묵으로 변조했다.
언제나 나를 바로 보고 이야기하던 남자가 드물게도 말을 끝까지 잇지 못한 채로 입술을 세게 깨문다.
……그건 꼭 소리 없는 확인 사살 같다.
모든 게 도저히 어떻게 할 수 없을 만큼 망가졌을까 두렵다. 속이 울렁거리기 시작한다.
나는 한참 만에 내게 돌아온 모자를 찾아 푹 눌러썼다.
“이 시간에 어딜 가는데.”
그러자 간신히 뒤따라온 누구보다 근사한 목소리가 왠지 이 순간 조금은 울 것처럼 들렸다고 한다면, 그건 내 사적인 감정이 너무 짙게 칠해진 거겠지.
“…잠깐만 머리 식힐 시간을 줘.”
“이선, 제발. 차라리 내가 나갈게.”
“나야말로 제발!”
“…….”
“제발…… 내버려 둬.”
나는 션의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고 도망치듯 그의 공간을 빠져나왔다.
서관의 앞은 불안한 표정을 한 채로 서 있는 고용인들이 많았다. 심지어 그들의 얼굴 가득 떠오른 물음은 훤히 읽히기까지 한다. ‘뭔지는 몰라도 잘 해결된 거 맞죠?’
그 기대에 부응할 수 없어 참으로 유감스럽다.
“미안해요. 방을 엉망으로 만들었네요.”
“아, 아뇨, 그건 괜찮습니다. 금방 정리하는걸요.”
저 친절한 사람들에게 어떤 말도 더 해 줄 수 없는 건 미안한 일이다.
하지만 나도 어쩔 수 없다.
그들 중에서는 바라노프의 저택에서 일했던 사람이 몇 명쯤 더 있을 거다.
난 지금 당장 그 사실을 견딜 수가 없다. 누구든 붙잡고 당신은 네스의 죽음에 대해 뭔가 아는 게 있냐고 물어볼 것만 같은 미친 상태니 말이다.
결국, 나는 거의 혼자 중얼거리는 목소리로 “내일 아침 식사는 션 것만 준비하시면 될 겁니다.” 하고 덧붙이고는 빠른 걸음으로 차고로 발걸음을 옮겼다.
어딜 가야 할까?
헬렌을 만나면 욱해서 뭐든 쏟아 낼까 봐 내 작은 아파트로도 못 가겠고, 그렇다고 낯선 사람들 사이에서 뭐라도 입에 욱여넣기에는 누구 하나라도 날 알아보기 시작하면 평소에는 웃어넘겼던 말들을 순순히 흘려보낼 수 없을 것만 같다.
……한 가지 확실한 건 적어도 오늘 밤만큼은 이곳에서 지낼 자신이 없다는 거다.
나는 무작정 내 낡은 포드에 올라타 시동을 걸었다.
그 순간 내 머릿속에서는 이 저택을 빠져나가는 것, 그거 하나뿐이었다. 하지만 이 빌어먹을 자동차는 배터리를 고친 지 얼마나 됐다고 또 맛이 가 있었다. 이마저도 다 나를 붙잡지 못해 안달이던 남자와 지내며 생긴 사소한 문제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 헐고, 피부가 접히는 모는 부분이 조금씩은 찢겨 나간 것처럼 쓰리다가도 통각을 잊어버린 것처럼 멍하다.
나는 고철이나 다름없는 차에서 내려 저택의 정문까지 몽유병 환자처럼 한참을 걸어갔다.
불행일까 다행일까.
미정이었던 행선지는 생각보다 빨리 정해졌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스펜서 저택의 정문을 넘어서자마자, 늦은 밤 전혀 예상치 못했던 마중이 날 기다리고 있었으니.
“…….”
“혹시 오늘도 동행인이 있나?”
설마 이제 헛것마저 보이는 건가 싶어 멍하게 서 있으려니, 여느 때와 다름없이 낮고 상냥한 목소리가 귀에 걸렸다.
“…여긴… 어떻게.”
“이 업계에 있으면서 스펜서 저택 위치를 모르기는 좀 어렵지.”
저택 바로 앞에 있는 커다란 나무 앞에 차를 댄 채 있던 다니엘 바커는 씩 웃으며 자연스레 자신의 차 문을 열었다.
“전화를 할까 싶었는데, 이렇게 먼저 나오니 차라리 잘됐어.”
“…….”
“표정을 보니 여기 더 있고 싶은 것 같지는 않은데. 아닌가?”
이미 대답을 알고 있는 것 같은 물음이었다.
나는 잠시 망설인 다음 차에 올라타 조수석 헤드에 머리를 툭 기댄 채 눈을 감아 버렸다.
* * *
사실 밤의 LA는 생각을 정리하러 도망칠 만한 곳이 마땅치 않다.
반은 마약에 취한 노숙자들이, 다른 반은 갱이 차지하고 있는 베니스 해변의 밤산책 같은 건 꿈도 못 꿀 일이고 제일 만만한 술집에 들어서는 건 혼자서나 할 일이다. 그건 옆에 이렇게나 눈에 띄는 남자를 두고 하기엔 절대 내키지 않는 선택지다.
무작정 도망치고 싶어 올라탄 차이기는 했지만, 나는 옆으로 길게 바다가 펼쳐진 1번 국도를 달리는 차가 향하는 행선지조차 알지 못했다. 바커는 내가 “그런데 우리 어디 가는 겁니까?” 하고 물을 때마다 옅게 웃기만 했다.
이윽고 나는 오늘 하루만 해도 벌써 두 번째로 만나는 낯선 곳 앞에 도달했다.
“다니엘. 미안한데 여긴….”
“종종 쉴 때 오는 곳이야.”
나는 당장 오늘까지도 누군가 정성 들여 돌본 듯 아기자기하게 손질된 화단의 노란 꽃들을 보며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솔직히 션 스펜서의 저택처럼 고풍스럽게 으리으리하거나, 아니면 영화세트처럼 말끔하니 웅장했으면 의외로 별 부담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확실히 심심하면 초호화 크루즈나 프라이빗 제트기로 여행을 다니는 바커가의 별장치고는 꽤 아담하다.
조금 더 솔직히 말하면 별장이라고 하기도 뭐 하고, 뭐랄까, 로맨틱 코미디에 여주인공의 단짝 친구 집 같다.
“안 내리나?”
“…글쎄요. 이 시간에 오기엔 조금 부적절하지 않나 싶어서….”
내 말에 다니엘 바커의 갈색 눈썹 하나가 쓱 올라갔다.
“부적절해?”
“음. 제 착각이 아니라면, 우리 지금 약간 애매하지 않았나요.”
“부적절에 이어 애매하다, 라.”
다니엘은 눈을 가늘게 뜨고 내 말을 곱씹듯 중얼거렸다.
괜한 설명을 더 덧붙이고 싶지는 않았다.
뭐든 감정이 커진 다음에는 조금만 삐끗하면 이 모양 이 꼴로 만신창이가 되고 만다.
순간 날 끝까지 좇던 그의 새파란 시선이 떠올라서, 나는 괜히 애꿎은 주먹에 힘을 꽉 줬다. 속이 끔찍하리만큼 이글거렸다.
바커의 말이 이어진 건 그때였다.
“에이전시의 사람이자, 친구가 머리를 식힐 때 오는 곳이라고 하면 괜찮겠어?”
“…….”
“제발, 이선. 눈에 안 띄게 조용히 바람 쐴 수 있는 곳에 왔을 뿐이라고.”
내 앞에 있는 건 다니엘 바커인데 머릿속은 션 스펜서만 숨 막힐 정도로 가득 차 있다.
나는 바커가 내 속을 들여다볼 수 없다는 걸 감사하며 두 손을 들었다. 얼마나 끔찍하게 무례한 일인가.
하지만 밀려오는 생각을 마음대로 잘라 낼 방법은 없다.
“저녁은 먹었나?”
“아뇨.”
“그래. 그럼 좀 늦긴 했지만 파스타 어때.”
“저야 좋죠. 좋은데….”
뒤늦은 허기가 훅 몰려온다.
그러고 보니 오후 일찍 간단하게 간식을 먹은 이후로 이제껏 아무것도 먹지 않기는 했다.
“여기 다른 분이 또 계시나요?”
“아니. 대신 질 좋은 재료들은 있지.”
오, 하지만 이건 좀 부담스럽다.
나는 썩 반갑지만은 않은 말에 저도 모르게 인상을 쓴 채로 되물었다.
“직접 해 준다고요?”
“물론.”
“……세상 담백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이제껏 여럿 꼬시고 사셨겠습니다.”
솔직히 좀 순수한 감탄이었다.
이 시간에 바다가 보이는 작은 집으로 자연스럽게 누군가를 데리고 와서 직접 저녁을 차려 주는 남자라. 성별을 떠나서 이런 분위기라면 누구라도 이런저런 생각이 안 들고는 못 배길 거다.
바커는 작은 집의 불을 하나씩 켜면서 “…뭐. 부정은 않겠어.” 하고 씩 웃었다.
부드러운 주황빛 그림자가 드리운 시원시원한 이목구비를 보자니 왠지 좀 심란해졌다.
이제껏 단 한 번도 이렇게 꼼꼼히 뜯어볼 생각을 하지 않았던 남자다.
솔직히 ‘대체 왜?’ 싶기도 하다. 다니엘 바커는 ‘다니엘 바커’가 아니었다면 어딘가의 지면에서 먼저 반드시 만났을 사내다.
미스 멕시코였던 어머니에게 물려받은 선이 진한 이목구비하며 태닝으로 오묘한 피부색, 여러 각도에서 달라지는 단단한 얼굴선까지 사실 지금도 빌딩 꼭대기의 사무실 책상 앞에만 두기엔 아까울 정도니 말이다.
나는 속으로 쯧쯧 혀를 차면서 최대한 담담하게 물었다.
“스펜서 저택엔 무슨 일로 오셨던 겁니까?”
“저번에 그렇게 헤어지고 나서 조심히 들어갔냐는 문자 말고는 먼저 연락 한 번 없고, 별 소식도 없길래 쭉 기다리다가 홧김에 차를 몰았지.”
“…….”
“-라고 하면, 뭐라고 말할까 궁금한데. 이선.”
“…에이전시 사람이자 친구라면서요.”
“장난도 못 치겠어.”
내가 할 말이다.
다니엘 바커는 내가 알던 요 몇 년간의 태도를 확실히 집어던졌다. 솔직히 그 달라진 태도가 잘 적응이 되지 않을 정도다. 애써 감정적인 화제를 피해 도망치려던 나는, 그게 썩 효과적이지 않다는 걸 인정해야 했다.
“다니엘.”
“응.”
“도대체 언제부터 저를 마음에 들어 했던 겁니까.”
한숨을 반쯤 섞은 질문에 소매를 걷어 올리며 이런저런 조리도구를 꺼내던 다니엘 바커의 눈이 잠시 커졌다. 나는 그의 맞은편에 있는 높은 스툴에 앉아 어깨를 으쓱했다.
“아. 드디어!”
“왜요.”
“평생 안 궁금해할 줄 알았는데 그 정도는 아니어서 다행이군.”
“…….”
처음부터 쭉 궁금하기는 했다.
하지만 그와 몇 년을 다져 온 비즈니스 파트너이자 후원자로서의 신뢰와 든든한 친구의 위치를 잃고 싶지 않아 입을 다물고 다른 곳을 보는 척했을 뿐이다. 술술 말을 받던 다니엘 바커는 잠시 말을 고르듯 조용해졌다.
늦은 저녁 식사는 바질 페스토 파스타인 것 같다. 나는 다니엘 바커가 말끔하게 손질된 새우를 물에 담그고 쿡탑 위에 물을 올리는 걸 보며 느슨하게 턱을 괴었다.
얼마나 그렇게 있었을까.
“정말 어쩌다…… 보게 된 거였어.”
제법 깊은 스테인리스 냄비 안을 채운 물에 작은 기포가 하나둘 생기기 시작했을 때쯤, 낮은 목소리가 귀를 간질였다.
“○○○의 기타리스트가 자기 딸이 음악 감독으로 참여했다며 저녁 식사까지 DVD를 들고 와서 뿌렸거든.”
“아.”
“굳이 거절할 이유도 없어서 받긴 했지만, 쭉 책상 서랍에 넣어 두고 잊은 채로 한두 해는 있었을 거야. 그러다 언제였나. 다른 걸 찾으려다가 구석에서 잊고 있던 DVD를 보게 된 거였지.”
<비평가>가 내 가볍디가벼운 관객 동원율에서 실금만큼이라도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건, 사실 저 유명 기타리스트의 딸 덕을 완전히 제할 수는 없을 거다. 워낙 입김 센 사람이었던 터라 전혀 안 났을 홍보 기사도 몇 번은 났었으니 감사한 일이다.
그런데 그 부녀가 다니엘 바커까지 연결해 준 거나 마찬가지라니.
나는 이제껏 늘 “우연히 봤어.” 정도로 대충 뭉뚱그려졌던 문장의 진실을 들으며 눈만 끔벅였다.
“조만간 ○○○ 쪽과 연락할 일도 있었고, 게다가 마침 오랜만의 쉬는 날이기도 해서 겸사겸사 시간이나 보낼까 생각했었어.”
“…….”
“최소한 그땐 말이야.”
팔팔 끓기 시작한 물에 소금 조금과 저만치서도 향이 훅 풍기는 올리브유가 조금 들어갔다. 나는 바커가 두꺼운 파스타 면을 넣는 것을 멍하게 지켜봤다.
“솔직히 그렇게 자랑했던 음악은 귀에도 안 들어오던데.”
“…왜요. 전 꽤 좋아하는데.”
“커다란 후드를 뒤집어쓰고도 끝장나게 몸이 좋은 게 훤히 보이는 남자가 종일 방에 처박혀 사는 너드라면서 노트북을 쓸 때마다 소매를 걷는 게 정말 섹시한 거야.”
맙소사.
“심지어 멍청한 주인공과 함께 침몰할 뻔한 영화를 몇 번이나 혼자 살리는 건 또 어떻고. 그 화창한 공원에서 혼자 키보드를 두드리다가 멍하게 우는 몇 초는 정말 최고였지.”
“…저기, 다니엘.”
“-그래서 우드를 보냈어.”
도저히 더 들으면 안 될 것 같은 기분마저 들어서 내 쪽이 먼저 한 질문을 기어코 끊고 말았건만, 다행히 바커 역시 거기까지만 할 생각이었나 보다.
“비평가 이후로 제대로 나오는 작품이 없길래, 배우 일은 하는 것 같은데 대체 뭘 하나 궁금했거든.”
아니면 내가 어떤 말을 하든 뻔뻔하리만치 유려한 문장을 이어 갈 심산이었을 수도 있겠다. 나는 그와 만났던 5년 전의 처참한 몰골을 떠올리고는 저도 모르게 혀를 차 버렸다. 그렇게나 좋게 봐주었던 사람이 기껏 만난 상태라는 게, ‘오늘은 정말 끊어야지.’ 같은, 저 자신에게 거는 주술 같은 문장을 반복하던 때였다는 사실을 복기하는 건 절대 유쾌할 수 없는 법이다.
“……타이밍 하나는 끝내주셨네요.”
“사업가의 기본 수완 아니겠나.”
난 이제껏 다니엘 바커의 이 자신만만함을 내심 동경했었다.
제아무리 돈이 많고, 또 뒷배가 든든하다고 한들 이 특유의 태도는 절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는 게 아니다. 조명이 꺼지면 낯선 이에게 말 한마디 붙이는 것조차 어려워하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르는 이들이 알면 놀랄 정도일 거다. 내성적인 것과 카메라 앞에 서는 건 의외로 꽤 다른 선상에 있다.
“그리고 내 보는 눈이 녹슬지 않았다면, 아직 기회가 있다 보고 있기도 하지.”
“…….”
“그 남자가 나보다 더 빨랐던 건 인정해. 내가 너무 생각이 많았지. 게다가 꽤 자만하기도 했고.”
아. 나를 뚫어지라 보는 바커의 시선을 왠지 피하고 싶다.
“시작도 전에 이런 말 하는 건 정말 싫지만, 감정 때문에 공적인 것들이 망가지는 일은 없을 거야. 그게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후우. 다니엘. 난 우리가 지금 같을 때- 더 빛날 수 있는 관계라고 생각합니다.”
다니엘 바커가 살며 누군가에게 저렇게 쩔쩔매며 어르고 달래던 일이 얼마나 있었을까. 그 자신이 우위가 아닌 협상 테이블 위에 선 적조차 별로 없었을 거다.
“난 안 되겠나? 고려해 볼 가치조차 없는 거야?”
“그런 뜻이 아니에요. 그저… 제가 자신이 없을 뿐이죠.”
“뭐가?
“……친구이자 에이전시 소속 배우인 이선 박과, 애인인 저는 많이 다를 겁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이 남자와 이런 대화를 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나는 재깍재깍 말을 잇던 바커가 잠시 입을 다문 걸 보고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솔직히 전 이제껏 누굴 오래 만난 적이 별로 없어요. 사귀고 나선 결국 하나같이 잘 안 됐죠. 그냥 미적지근한 물처럼 지내다가 자연스럽게 끝났어요. 헤어질 땐 대체로 같은 말을 하더라고요. ‘우리는 친구였을 때가 더 좋았을 거 같아.’”
“-이선.”
“우린 꽤 잘 맞는 친구잖아요, 다니엘. 난 이걸 지키고 싶단 겁니다.”
이제껏 만났던 이들과의 관계의 종료가 아마도 내 탓일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된 건 제법 된 일이다. 이 쿨한 척하는 보수 사회에서 연애를 전제로 한 두 사람의 관계란, 대체로 쭉 이어진 문을 연속해서 열어 가는 것과 비슷하다.
저녁 식사 몇 번. 손을 잡고 걷다 헤어질 땐 가벼운 입맞춤.
SNS에 상대의 사진을 올리고 하트 몇 개를 다는 글 몇 개. 서로의 집이, 함께 가는 호텔이 자연스러워지는 몇 달, 그리고 그다음은….
가족을 소개하고 서로의 행사에 얼굴을 비치고, 프러포즈를 고민하며 끙끙대는 나와 저녁에 눈이 마주칠 때마다 상기된 뺨을 한 채 관계의 발전을 기다리는 연인의 시선이 있고는 하다.
그러다 완전히 집을 합치고 동거하는 게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기는 하지만 이 과정은 꽤 자연스러운–현대 사회가 정의하는-애정의 최종 진화다.
나 역시 그 과정을 싫어하지는 않는다.
내 일도 아닌 친구의 연애에 피식 웃어 본 적이 살며 없었다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이제껏 나는 언제나 비슷한 단계에서 고꾸라졌었다. 아예 내 옆에 선 누군가에게 그 문을 노크할 기회를 주는 것조차 감히 엄두를 못 냈다고 하는 게 정확할지도 모르겠다.
다니엘 바커는 뭐라 더 말을 잇지 않는 나를 잠시간 보다가, 긴 한숨과 함께 인덕션의 불을 껐다.
조금은 푹 삶아진 면이 물 안에서 너울대고 있었다. 준비해 둔 재료들이 함께 쏟아졌다. 입맛을 돋우는 먹음직스러운 냄새가 순식간에 부엌을 가득 채웠다. 바커는 익숙하게 재료들을 볶으며 뭔가를 생각하듯 한참을 묵묵히 있었다.
사실 나는 감히 그 순간이 바커가 친구로서의 호감과 연애 대상으로서의 어떤 것을 분리하는 걸 고려하는 것이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럼 최소한.”
다니엘 바커 그는 내 안일한 생각 따윈 한 번에 뛰어넘는 질문으로 한 번에 뛰어올랐을 뿐이었다.
“최소한, 나와 스펜서의 차이가 뭔지라도 말해 줘.”
“……네?”
“미안해. 나라고 이런 말을 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래야 뭔가를… 시도해 볼 수 있을 것 같아서 말이야.”
내가 아무리 뻔뻔하고 양심 따위 찾아볼 수 없는 가공할 쓰레기라고 한들 지금 다니엘 바커에게 저런 말을 하게 했다는 것만으로도 죽어 마땅하다는 것 정돈 알겠다. 나는 잠시 멍하게 있다가 거의 스툴 위에서 펄쩍 튀어 올랐다.
“맙소사. 다니엘!”
“처음엔 그저 호기심으로 촬영 기간에만 가볍게 만나는 거라고, 그렇게 정리할 거로 생각했어. 사실 차라리 그쪽이 마음이 편하기도 했거든.”
하지만 바커는 차마 앉아 있지도 못하고 안절부절못하기 시작한 나와는 달리, 담담하게 말을 이어 갔다. 심지어 그렇게 말하면서 하얗고 동그란 접시 위에 먹음직스러운 바질 페스토 파스타를 덜어 내 능숙하게 세팅하는 것 역시 동시에 함께했다.
“5년을 봤어. 얼마나 쓸데없는 화제에 얽히기 싫어하는지 알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지. 왜, 몇 년 전에는 꽤 유명한 모델이 같이 데이트하자는 것도 부담스럽다는 이유 하나로 거절했었지 않나.”
“…….”
“그런데 션 스펜서라. 다른 사람도 아니고, 스펜서?”
대체 내가 데이트 거절했던 건 어떻게 알았을까. 그건 브랜든한테도 말하지 않았었는데…. 확실히 이 바닥에서 다니엘 바커의 눈과 귀를 피하는 건 쉽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리고 그건 조금은 그를 더 이해하게 해 주는 것이기도 했다.
그럭저럭 유명한 모델과의 데이트조차 부담스러워 마다했으면서, 션 스펜서라! 내가 생각해도 무슨 심경의 변화인가 싶을 것 같다. 심지어 같은 사내이기까지 하지 않나.
작은 별장에 들어온 이후 쭉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말하던 다니엘 바커는, 묘하게도 이 순간만큼은 그가 만든 음식만 거의 째려보듯 노려보고 있었다. 아. 정말이지 그게 못내 미안해 견딜 수 없다.
“쓸데없이 언론이며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면서 얻는 모든 불이익까지 기꺼이 감수하면서, 왜? 정말 이것만큼은 물어보고 싶지는 않았지만, 나도 어쩔 수 없는 것 같아.”
“…….”
“왜 션 스펜서는- 그 남자는 괜찮은 거지?”
사실 바커의 질문은 어느 정도는 나 역시 당사자에게 돌려주고 싶은 것이기도 했다.
“스펜서를 동정이라도 하나?”
“…동정이요?”
“션 스펜서가 뉴욕에 가는 걸 싫어한다는 건 비밀도 아니지. 가까이 지내는 사람이라고는 데이비드 밀러 하나뿐이잖나.”
션 스펜서, 그는 지금 이 순간마저도 혹시 뭔가를 아는 건가 싶어 속이 덜컹 내려앉은 나 따위는 안중에도 없을 새끼인데 말이다.
대체 왜 난 션 스펜서에게 이렇게 멍청할 정도로 빠지게 됐을까.
그렇지 않아도 드문드문 떨어진 징검다리 같은 앞길을 걱정해야 하는 건 내 쪽인데. 끔찍한 과거가 있는 건 그 남자뿐만이 아니었을 텐데.
대체 왜 나는 서로의 기분 좋은 감정이 끝나면 혼자 처참하게 남아 뒹굴 게 뻔한 이 관계에 기꺼이 발을 내디뎠을까.
바커의 말처럼 동정이었을까?
누군가를 동정할 만큼 용감한 인간도 못 되는 주제에, 우습다.
다니엘 바커는 아무 대답 없이 있는 나를 뭐라고 해석했는지 답지 않게 조금은 꾹 막힌 듯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 갔다.
“가까운 사람 하나 만들지 않고 여기 뚝 떨어진 그 남자를 보고 동질감을 느끼기라도 했냐는 거야.”
“…동질감이라뇨. 그런 걸 느끼기엔 너무 다른 세계 사람이죠, 스펜서는. 물론 그건 다니엘 당신도 마찬가지고요.”
“…….”
“글쎄요. 왜… 일까요.”
션.
션 스펜서.
대체 이 곱상한 이름의 무게가 달라진 건 언제부터였을까. 나는 내 오랜 친구이자 지원가인 남자의 질문에 답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 머리를 굴렸다.
“……이제야 하는 말이지만, 확실히 남자를 만난다면 다니엘, 당신 쪽이 더 확률은 높았을 텐데요.”
“확률이라는 게 있긴 했어?”
“뭐… 어쨌든요. 당신도 알다시피 스펜서는 정말 첫인상 하나는 끔찍했잖아요.”
그러고 보면 참 얄궂은 일이다.
스크린 속 션 스펜서가 아닌 이 현실의 그를 처음 만난 그 순간에 다니엘 바커가 하필 함께했었다는 건. 사실 그때만 해도 스펜서라는 인간이 얼마나 치가 떨리도록 싫었나.
이 바닥에 있으면서 오만한 인간을 보는 건 새삼스러울 것도 아니었는데도, 촬영장조차 아닌 그 버거운 장소에서 일방적으로 쏟아진 말에 반박할 길조차 찾지 못했다는 게 더 분했을지도 모르겠다.
정말 그가 나오는 영화조차도 다시는 안 보겠다고 이를 갈았었는데.
나는 어느새 얼떨떨해질 정도로 먼 이야기가 되어 버린 그날을 더듬으며 입을 열었다.
“스카이프로 오디션 보는 것도 이제는 꽤 익숙해졌다 싶었는데, 난데없이 호텔로 갔었죠. 당신이 줬다는 카드를 들고서요.”
“…….”
“다시는 안 볼 거라고 이를 갈았던 션을 거기서 만나고…, 오디션에 붙고. 대본리딩을 하고…. 사실 그때까진 정말 혼자 우아한 척하는 놈이라고 내심 흉도 봤던 것 같은데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요.”
그러고 보면 션 스펜서를 만난 뒤부턴 하루하루가 잠시도 조용한 적이 없었다.
시끄러운 거라면 아파트 근처의 고등학교에서 쏟아져 나오는 녀석들의 웃음소리뿐이던 매일이, 롤러코스터를 탄 듯 치솟았다, 떨어졌다, 또다시 오르기를 반복했다.
그 덕분일까.
션 스펜서는 내가 이제껏 착실히 다져 놓았던 많은 관계의 문을 한꺼번에 뛰어넘어 대뜸 누구에게도 열지 않았던 곳부터 거꾸로 시작하는 게 이상하지 않았다.
어린 기억 속에서 묘한 열등감과 구속으로 남아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조차 죄책감으로 다가오는 가족부터, LA에서 15년을 견디며 아무렇지도 않게 무뎌졌다고 웃어넘겼던 온갖 배제, 입 맞추고 몸을 섞는 섹스….
간질간질한 것과는 거리가 멀지만, 최소한 지금 생각해도 입꼬리가 올라가는 데이트 아닌 데이트가 제일 마지막에 있는 것만 봐도, 그는 나란 인간을 착실히 역주행했다.
사실 처음에 그게 가능했던 건 어차피 션 스펜서는 이 영화가 끝나면 모든 관계가 자연스럽게 흐지부지되어 나란 인간의 인생에서 저만치 멀어질 사람이라는 무의식의 확신 때문이었을 텐데. 역시 사람 사는 일은 감히 함부로 짐작할 수 없는 거였다.
“살면서 저한테…… 바닥까지 보여 준 사람이 없었는데.”
쭉 나를 피하던 다니엘 바커의 시선이 그 순간 내게 훅 꽂히는 게 느껴졌다.
“이제껏 항상… 다들, 제 머리 위에만 있었거든요.”
이번에 피하게 된 건 내 쪽이었다.
나는 바커가 담아 준 파스타를 포크로 괜히 빙글빙글 말면서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듯 말을 이었다.
“그런데 처음으로 저를 올려다보는 사람을 만나서일까요. 그래서 평소라면 시작조차 하지 않았을 것에 호기심이 생겼나. 그래서 그 사람한테는 뭐든 말할 수 있었을까요.”
괜히 목울대가 뜨거워졌다.
입 밖으로 꺼내 문장으로 만드는 게 두려워 이제껏 쭉 모르는 척 얇은 천을 하나 덧대 두고 피하던 것을 마주하는 순간에 션 스펜서가 없어 다행이라는 생각도 조금쯤 들었다. 션은 이런 생각 같은 건 모르는 게 낫다.
“처음에는 그저 그게 다였는데. 언제부터인가 왠지 같은 지점을……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 같기도 하고.”
죽은 친구가 남긴 각본 속에 나 혼자 갇힌 것 같다.
션 스펜서에 대한 어떤 기억도 없으면서 그를 마음에 담고 어쩔 줄 모르는 [E]가 온전히 내가 되는 순간, 이 촬영이 끝나면.
그때 나는 어쩌지?
나는 아직 그와 하고 싶은 게 많은데, 그도 여전히 그럴까?
내가 만든 모든 기준을 멋대로 뛰어넘고 또 부수고 다니다 기어코 연인이 되고 만 남자와의 유효기간이 어느 정도일지 모르겠다.
“이걸 다른 사람들은 뭐라고 부를까요, 다니엘.”
“…….”
처음 만난 날부터 길 잃은 나를 온전한 길로 이끌어 주던 남자는 이 순간 말이 없다.
바커와의 식사는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고요했다. 그 침묵 속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많지 않았다. 나는 부디 그와의 관계가 이 최후의 만찬을 끝으로 어그러지지 않기만을 바라며, 입안에서 감칠맛 가득하게 감기는 파스타를 최대한 느리게 씹어 삼켰다.
말하는 족족 밀어내기만 한 것만으로도 감히 몸 둘 바를 모르겠는데, 그의 요리를 먹고 체하는 일만큼은 없어야 하지 않겠나.
하지만 다니엘 바커.
이 착해 빠진 사내는 그런 내 행동마저도 읽었던 게 분명하다. 언제나 그보다 훨씬 빨리 먹던 편인 내가 한입에 서른 번은 씹겠다는 듯 우물거리고 있는 걸 눈치챘던 거겠지.
“오늘은 왜 그렇게 우중충한 얼굴로 저택에서 나온 거야?”
그래도 하필 화제가 이쪽으로 튀는 건 그리 달갑지 않다.
허술한 테이프로 덕지덕지 붙여서 애써 모양을 유지하던 마음이 그 담담한 물음에 순간 크게 비틀거렸으니 말이다. 다니엘 바커는 순간 입을 꾹 다물고 애꿎은 파스타만 포크로 쑤셔 대기 시작한 내 침묵을 기꺼이 인내해 주었다.
손에서 미끄러진 포크가 몇 번이나 멀쩡한 접시를 두드렸을까. 내 입에서는 조금 삐끗한 목소리가 툭 튀어나왔다.
“알았던 거죠?”
지금 이게 꼭 탓하려는 문장처럼 들리면 안 될 텐데. 나는 괜히 목을 한 번 크게 가다듬었다. 그러자 머잖아 다니엘 바커의 나직한 되물음이 뒤따랐다.
“뭘?”
“저번에 이토 여사 가게에서 하려고 했던 말이요.”
“…….”
돌아온 고요는 무엇을 뜻할까.
바커의 얼굴을 보고 그 의미를 유추라도 해 보고 싶지만, 왠지 고개를 들어 그를 마주 볼 자신이 없다. 난 들이켠 숨의 떨림이 들키지 않기를 바라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거… 션이 경찰 조사에서 절 용의자로 지목했다는 소리였잖아요.”
안 되겠다. 애써 침착하려는 척하는 내 숨소리는 거슬리다 못해 한심하기까지 하다.
나는 포크를 내려 두고 두 손으로 턱을 괴듯 얼굴을 덮었다. 그게 그렇게 현명한 판단이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얼기설기 얽힌 어설픈 틈새로 작은 한숨마저 유독 크게 들리고 말았으니.
“…그것 때문에…, 싸운 건가?”
“뭐. 굳이 그것만은 아니지만…. 최소한 제가 도망쳐 나온 이유에 그게 없다고는 못 하겠네요. ……아. 정말 웃기죠.”
“…….”
“션은 날 용의자로 꼽고, 나는….”
하지만 그렇다고 손을 내려 두지도 못하겠다.
“그가 네스를 죽였을 수도 있다며 당신에게 찾아가기까지 했었으니.”
“-이선.”
눈가부터 시작한 뜨끈한 열기가 얼굴 전체로 번지기 시작한다.
바보 같은 모습은 그만 보이자. 참자. 참을 수 있다.
차라리 멍청하게 헐떡이는 모습을 좀 보이는 게 낫지, 이것만은 안 된다. 나는 다니엘 바커의 부름에 대답하지 않고 한동안 그렇게 손으로 눈가를 짓누른 채로 밭은 숨만 내쉬었다.
하지만 달뜬 속을 진정시키는 건 생각보다 이만저만 어려운 일이 아니어서, 맞은편의 사내는 내가 마음먹었던 것보다 훨씬 더 오래 내 꼴불견을 감상해야 했다. 미안하고 또 부끄러운 일이다.
나는 한참 뒤에야 간신히 얼굴을 크게 마른세수하고 손을 내리며 이제는 떨림을 숨길 시도조차 하지 못하는 목소리로 겨우 웃는 척했다.
“하여튼. 네스 그 녀석만 고생이네요.”
“……아니, 아니야. 이선.”
“아니긴요. 대체 얼마나 혀를 차고 있을지 모르겠어요.”
“요즘은 촬영장에서 불편한 건 없고?”
기껏 입을 열어 하는 말이라는 게 결국 나를 챙기는 말인 것 좀 보라지.
여러분들에게 처음부터 했던 말이지만, BAA는 정말 내 인생 최고의 에이전시다. 다니엘 바커는 그곳을 이끄는 최고의 사장님이고 말이다.
“그럼요. 뭐가 있겠어요.”
“그래. 다행이군. 필요한 게 있으면 바로 나한테 연락해.”
최대한 담담하게 있으려고 했던 표정이 덧붙은 그의 말에 바보처럼 픽 누그러지고 만다. 누가 보면 내가 멋모르고 막 데뷔한 십 대인 줄 알겠다.
“그래서 당신이 날 특별 대우한다는 말이 도는 거 아닐까요, 다니엘.”
“누구나 특별 대우하는 사람은 있기 마련이지. 이건 빈말 아냐.”
“말만으로도 고맙습니다. …정말 너무 신경 쓰지 않아도 돼요.”
나야말로 빈말이 아니다.
저만한 남자가 지나쳐 넘어갈 수 있는 자리에 내 이름을 잊지 않고 한 번씩 추천해 주던 덕분에 나는 이제까지 조금씩 나아질 수 있었다. 그가 브랜든 녀석을 보내 준 덕분에 중독회복 모임에도 나갈 수 있었던 거고, 또 그 모임에서….
멍한 추억 회상으로 빠지려던 내 생각을 끊고, 바커의 말이 이어진다.
“-아니. 고마워할 필요 없어. 정말이야. 그럴 만한 사람도 아닌걸.”
“에이, 무슨….”
“그리고, 이선.”
그의 갈색 눈동자는 왠지 평소보다 더욱 신중해 보였다.
“잘하고 있겠지만 당분간은 더 조심하고.”
“…….”
“그게 누구든, 또 뭐가 됐든.”
“…네에. 뭐….”
아. 조심해야 할 것을 한정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나는 차마 농담처럼 툭 털어놓을 수 없는 생각을 혼자서 속으로 곱씹으며 얼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 * *
션을 다시 만난 건 소꿉놀이 장소 같은 말리부 별장에서 곧바로 향한 촬영장에서였다.
이런 표현을 쓰는 게 맞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어제 하루 ‘외박’했다.
뭐? 바커와 같이 잤냐고? 이보세요들. 정신 차려요!
대체 날 뭐로 보는 건가. 절대 아니다!
그는 나와 저녁 식사 후 나란히 냉장고에 있던 크림 브륄레까지 사이좋게 나눠 먹은 다음 그를 찾아온 비서의 차를 타고 먼저 갔다. 다니엘은 정말 내게 그의 귀여운 안식처를 빌려준 것일 뿐이었다.
거기선 정말 잠만 자고 나왔다고.
지난밤은 도저히 션의 저택으로 다시 돌아갈 엄두도 나지 않았을뿐더러, 나 역시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첫 번째. 줄리는 닉 코빗에게 ‘엿 먹였던’ 그날 밤의 메이드다.
바라노프가 믿었던 사람이라는 션의 말 역시 거짓말이 아닐 거다.
하지만, 그녀가 네스의 저택에 CCTV가 있다는 걸 알았던 유일한 고용인이자 션을 직접 목격한 사람이기도 했으며, 또 그 영상 안에 션이 있었다는 걸 증언하는 대신 돈을 요구한 것 역시 사실이다.
좀 더 정확히는 돈을 요구하는 척한 것에 가깝긴 하겠지.
그 말에 순순히 돈을 들고 왔던 닉 코빗이 오히려 반대로 발목이 잡혔으니 말이다.
“…….”
“…….”
난 저쪽에서 눈이 마주친 연인을 잠시 보다가 슬그머니 고개를 반대쪽으로 돌렸다.
그리고 두 번째.
션은 나를 네스의 살인 용의자로 최초 지목했었고, 당시에도 대체 왜 진행되는 건가 싶었던 경찰의 호출은…… 션, 그의 말 때문이었다.
그가 나를 한때나마 친구의 살인범일지도 모른다 생각했었다는 게 감히 서운하다거나 황당하다는 건 아니다. 내가 지은 죄가 있는데 무슨.
그저 이건 조금 우울한 현실 자각일 뿐이다.
언젠가 파티장에서 엿들었던, 그가 나를 자신의 파트너로 앉히는 걸 끔찍하게 싫어했던 이유를 드디어 알게 된 것 같다고나 할까.
하긴. 내가 그였어도 마찬가지다. 냉정해지자.
경력은 길기만 하고 별 볼 일 없고, 검증된 결과 하나 없는데 마약 전과까지 있는 한국계 미국인 이민자 2세 배우라니. 단순히 마이너인 걸 넘어서, 그에게 무엇보다 중요했을 이 영화에는…… 정말 보잘것없는 할리우드의 먼지 수준이 아닌가.
뭣도 모르고 잔뜩 신이 나서 구름 위를 뛰어다니다가 끝도 없이 추락하고 나서야 주제 파악이 되다니.
나도 아직 멀었나 보다.
“후우…….”
물론 아직 확신하지 못하는 것 역시 있다.
바로, …아마도 아직은 내 연인이기를 바라는 남자와 줄리 사이의 연결고리다.
이 연결고리는 많은 것을 내포한다.
닉 코빗은 계속해서 그 CCTV가 션과 네스 녀석의 죽음을 연결할 수 있을 것처럼 목소리를 높였었다. 그건 션이 찍혔기 때문에 사라진 것이며, 그게 가장 결정적 증거가 될 거라고도 했었다.
션의 말대로 줄리 깁슨이 정말로 아무것도 모르는, 믿음직스럽고 충성스러운 고용인이기만 했다면 좋았을 테다.
하지만 줄리는 왜 받지도 않을 돈을 가지고 닉 코빗을 가지고 논 걸까?
반쯤 이성을 잃을 채로 고함치던 형사의 목소리는 연기 같은 게 아니었다.
그리고 대체 그날 밤 션과 네스 사이에는 무슨 일이 있었을까? 그 표정은, 그저 ‘싸웠다’라는 단어만으로는 다 담기지 않는 게 분명했는데.
이 두 가지 질문만큼은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답을 못 찾겠다.
“…흠, 크흠, 이선?”
“…….”
“이선!”
“…아, 해리엇. 미안해요. 뭐라고 했죠?”
“며칠 뒤 촬영에 조금 변동 사항이 있어서요. 여기.”
망할. 잠시 넋을 빼고 있다가 해리엇의 목소리를 못 들었다.
나는 어느새 촬영장에 있는 스태프들 대부분의 시선이 이쪽으로 쏠린 걸 알면서도 모르는 척 괜히 헤실대고 웃었다.
아, 정신 차려야 하는데.
그걸 못 할 거라면 내게 꽂힌 시선 중에 어제부터 냉전 아닌 냉전 중인 사내의 것도 있다는 걸 모를 정도로 둔하기라도 하든가.
심지어 해리엇 로스는 내가 일부러 꾸며 만든 멍청한 얼굴에 순순히 속아 넘어갈 만큼 호락호락한 사람도 아니다. 꼼꼼히 촬영 일정을 짚어 주던 그녀는 머잖아 자연스럽게 내 팔을 잡아 스태프가 드문 곳으로 이끌었다.
왠지 그 순간은 밖에서 사고 친 다음 혼날 걸 알면서 부모님을 따라 집에 들어가는 어린아이가 된 기분이었다고 해 두자.
“이선. 혹시 오늘- 무슨 일 있어요?”
아니나 다를까 해리엇은 주변에 사람이 없는 걸 확인하자마자 곧바로 직구를 던졌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그녀의 말을 받았다.
“……그렇게 티가 나요?”
“두 사람. 서로 좋아 못 죽겠다는 것도 엄청 티를 내더니, 싸운 것도 엄청 티 내네요.”
“…….”
입이 있으나 할 말은 없다.
게다가 저렇게 눈치 빠른 사람에게는 어설픈 거짓말은 안 하느니만 못한 것이기도 하다. 나는 괜히 운동화 앞코를 바닥에 툭툭 치면서 시선만 빙글빙글 돌렸다.
“왜요. 스펜서가 한눈이라도 팔았어요?”
“예? 에이, 아뇨!”
“감독이랑 싸우고도 표정 하나 안 바뀌었다는 남자가 촬영장에서 숨도 제대로 못 쉬길래 그런 사고라도 친 줄 알았네요. 열애 확정 기사 뜬 지 얼마나 됐다고….”
“…….”
웬만하면 모르는 척 넘어가 줄 해리엇이 이렇게 넌지시 돌려 말할 정도라면 나와 션 사이의 이상기류가 밖에서는 꽤 심상치 않아 보인다는 뜻일 거다. 그것도 온갖 열애설을 달고 기사와 소문을 넘나들다가 아예 대놓고 촬영장에서 ‘티를 냈던’ 두 주연의 불화라면, 누구라도 뒷목이 당길 일일 테다.
어쨌거나, 이미 조연 하나도 갈아 치워진 영화 아닌가.
“촬영에는 지장 없을 거예요. 걱정 마요, 해리엇.”
“…믿어도 되겠어요?”
“네에. 저희 정말 멀쩡해요.”
난 왠지 한숨이 나오려는 걸 참으며 최대한 밝게 웃었다.
잔뜩 기합을 넣은 덕분일까. 촬영은 답답한 속과는 달리 꽤 매끄럽게 잘 풀렸다. 왠지 의뭉스러운 눈을 한 밀러 감독이 컷을 외치기 전까지 덩달아 제법 긴장한 것 같던 스태프들도, [S]의 앞에서 뺨을 벌겋게 물들이고 쩔쩔매는 멍청이를 보며 퍽 안도한 것 같았다.
사실 난 요새 촬영장에서의 연기가 꽤 편해졌다.
그게 션 스펜서와의 관계가 예상치 못한 문을 몇 개 넘어선 이후로 더욱 가속되고 있다는 자각 정도는 한다. 심지어 카메라가 멈추면 말 한마디 하지 않는 오늘마저 그의 시선이 닿기만 하면…… 사랑에 빠진 남자가 될 수 있다.
이건 좋은 일일까, 아니면 가진 패라곤 아무것도 없는 내가 도달할 수 있는 최악의 형태일까.
나는 조금 전 나를 무심하게 내려다보던 [S]의 파란 눈을 떠올리며 속으로 혀를 끌끌 찼다. 촬영 전, 해리엇이 슬쩍 건넸던 말이 내 발치에서 떨어지지 않는 그림자처럼 끈질기게 속을 긁는다.
……촬영장에서 숨도 못 쉬고 있다니.
그게 너한테 어울리기나 하는 표현이냐고!
덕분에 왠지 [S]가 아닌 션 스펜서를 마주하는 게 왠지 껄끄러워진 나는, 누군가의 “수고하셨습니다.” 하는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트레일러로 잠시 도망쳤다.
솔직히 그때까진 온종일 분위기가 분위기였으니 이렇게 먼저 선수 쳐서 갈라져 있으면 어련히 알아서 가겠지 하는 퍽 안일한 생각을 했었다. 심지어 트레일러에서 가볍게 세수를 하고 옷까지 갈아입은 뒤 편히 쉬다가 문을 열고 나온 건 예정된 내 분량의 촬영이 끝나고 한 시간은 더 지난 뒤였는데….
“-으와악, 깜짝이야!”
이미 떠나고도 남았을 거로 생각했던 남자가 촬영할 때 입었던 외투조차 벗지 않고 그 옆에 우두커니 서 있었을 줄이야!
그를 눈치채지 못하고 나왔던 내 어깨를 손가락 끝으로 톡톡 건드렸던 션은, 내가 끼고 있던 이어폰을 빼며 거의 경기를 일으키듯 놀라자 작게 “미안.”하고 사과했다.
난 울렁거릴 정도로 놀라 달음박질치는 가슴께에 손을 댄 채로 잠시 얼이 나가 있다가 뻔하디뻔한 질문을 던졌다.
“안 가고 있었어?”
션의 진한 흑갈색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다.
뭔가 할 말을 찾으려는 듯 한참을 입을 달싹이던 녀석은, 이내 나만큼이나 그 대답이 정해진 되물음을 했다.
“…같이…, 안 가?”
“난 볼일이 좀 있어서. 별말 없길래 당연히 먼저 갔을 줄 알고….”
거짓말이다. 볼일은 무슨!
마음의 준비가 전혀 없던 상태로 만나 생각보다 입이 먼저 주절대고 움직인 것일 뿐이다.
해리엇의 말마따나 감독과 싸우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제 할 일을 한다는 남자다.
하지만 그런 션 스펜서가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손을 내 쪽으로 뻗었다가, 꽉 주먹을 쥐며 다시 거뒀다가, 차마 무슨 말을 해야 내 심기를 거스르지 않을까 싶어 ‘숨도 못 쉬고 있는 걸’ 보고 나면 이성적인 생각을 하는 게 어려워진다.
하지만 나는 최대한 그 동요를 드러내지 않으려 애쓰며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왜. 이제는 나한테 해 줄 말이 생겼어?”
“…….”
“아니면, 미안. 나 약속 시간에 좀 늦어서.”
날 물끄러미 보던 연인이 몇 걸음 뒤로 물러선다.
그 작은 몸짓마저도 꼭 파티의 사교댄스를 보는 듯 우아했다면 눈에 뭐가 끼어도 단단히 낀 거겠지.
여전히 꼼짝도 하지 않고 서 있는 남자의 시선이 등을 따갑게 찌른다.
퍼즐이 다 맞춰지지 않은 파트너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기만 하면 이 끔찍할 정도로 어색한 순간이 끝날 거라고, 그냥 이제껏 늘 그래 왔던 것처럼 눈감으면 된다는 속삭임 역시 머릿속 어딘가에서 달콤하게 날 유혹한다.
이번만큼은 그것에 넘어갈 수 없다. 그 끝이 어떻게 되든지, 이번은 안 된다. 나는 영 익숙하지 않은 렌트카 열쇠를 손에 움켜쥔 채 주차장 쪽으로 미친 듯이 뛰었다.
어정쩡한 시간에 나온 덕일까.
지루한 체증 없이 도로를 미끄러져 나올 수 있어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나는 얼마 안 가 그에게로 곧장 되돌아가는 쪽을 택했을지도 모른다.
빌어먹을. 살면서 단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 기싸움을 션과 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정말 미친 것 같지만 벌써 보고 싶은 주제에.
우습다.
난 자꾸 정상적인 모든 생각을 방해하는 남자의 얼굴을 밀어내며 머릿속으로 갈 만한 곳을 추렸다.
그의 저택에 얹혀산 이후로 회원권을 썩히고 있는 체육관에 가서 운동이나 하고 들어갈까. 아니면 지난번 보지 못한 영화나 볼까.
…그것도 아니라면 간단히 뭐라도 먹으며 시간을 죽일 수 있는 곳이 나을까?
사실 어느 쪽도 마땅히 당기지는 않는다. 사람이 바글거리는 곳에 가는 게 썩 내키지 않는 상태라는 게 정확할 거다.
나는 십 년을 넘게 살고도 조용히 쉬러 갈 만한 곳이 없는 스스로의 빈약함에 혀를 차며 운전대를 신경적으로 두드렸다. 내 머릿속에 있는 가장 촘촘한 지도는 우범지대일지언정 집값은 싼 구역 정보뿐이다.
하지만 죽으란 법은 없다지.
서서히 자기혐오에 가까운 짜증이 몰려오려던 그때, 오전에 해리엇이 짚어 줬던 ‘변경된 스케줄’이 머리 한구석에서 구원처럼 떠올랐으니.
“……흠.”
할리우드에서 몸을 만드는 건 툭하면 무예 고수, 닌자, 어쩌고저쩌고 요원, 못해도 체육관에서 운동하는 남자 A 정도로 출연하는 아시안계 남자 배우의 숙명이다.
살짝 근육을 빼면 과학자나 해커로도 곧잘 캐스팅되기는 하지만, 지금보다 더 자리 잡기 전에는 급전이 필요할 때마다 얼른 오디션 볼 만한 거로는 앞서 말한 역할만한 게 또 없었다.
나는 잠시 신호에 걸려 차가 멈췄을 때 느슨한 티셔츠의 목을 슬쩍 잡아당긴 채로 그 한 겹 천 아래를 훑었다. 요새 좀 신나게 먹기는 했어도 운동을 놓지는 않았던 터라 다행히…… 눈 썩을 정도는 아니다.
하지만 카메라 앞에서 웃통을 깔 때는 내 딴에는 일부러 꼬박꼬박 챙겨 하는 게 있다.
마침 이 LA에서 배우 생활을 시작한 이래로 10년 넘게 찾아가기 시작한 오랜 전문가가 필요한 시기다. 여기서 느긋하게 시간을 때우고 어디 싸구려 모텔이 됐든 어디든 가서 한숨 자면 완벽할 거다.
드디어 목적지를 찾은 나는 망설임 없이 핸들을 꺾었다.
“자기, 오랜만이야. 요새 인터넷에서 자주 봤는데.”
“안녕. 예약 없이 와서 미안해요. 갑자기 일정이 당겨졌대서.”
“걱정 마. 오늘은 파리 날리고 있었다고. 그리고 다른 사람도 아니고, 우리 가게에서 제일 유명해진 자기를 내가 안 받아 줄까 봐.”
“……아, 놀리지 말아요.”
정말 감사하기는 하지만, 언제 들어도 이곳 주인인 마이클의 저 ‘자기’라는 말버릇은 익숙해지지 않는다. 길에서 지나다 만나면 못 알아볼 때가 있을 정도로 험상궂은 인상의 민머리 아저씨가 말씨 하나는 가끔 배우고 싶을 정도로 다정하다.
난 걸쭉한 목소리로 이어지는 간지러운 문장 세례에 작게 어깨를 으쓱했다.
크지는 않지만 허름하거나 불쾌한 느낌은 전혀 없는 이 말끔한 공간은 크랜쇼 대로와 웨스트 애덤스 대로 사이에 있는 오래된 왁싱숍이다.
툭하면 웃옷을 벗어야 하는 배역 특성상 깔끔한 체모관리는 제법 중요한 일이다.
대충 하고 나오는 사람들도 있다지만, 난 평생 남는 영화에 지저분한 모습으로 나오는 건 질색이다. 마이클의 숍은 신인 때 나답지 않게 퍽 깐깐하게 내세운 조건을-남자 왁싱사일 것, 담배를 피우지 않을 것, 합리적인 가격일 것, 가게가 청결할 것, 입이 무거울 것-모두 만족하는 곳이었고, 그때부터 인연이 되어 지금까지 쭉 오고 있다.
“헤일리는 잘 지내요?”
“그럼. 고등학교 들어서 축구부에 들었다고. 완전 에이스라니까.”
“세상에. 벌써 고등학생이라고요!”
“세월 참 빠르지.”
가끔은 혀가 내둘러질 만큼 깔끔한 성격인 마이클은 꼼꼼하게 포장된 가운을 건네줬다. 이제 우리에게는 “씻고 가운 입고 나오세요.” 같은 형식적 말 같은 건 필요 없다. 뭐, 이쯤 되면 대충 눈치챘을 것 같다.
갑작스레 바뀐 촬영 스케줄은 바로 몇 분간의 상의 탈의 장면이다.
솔직히 나라면 옷을 갈아입다 말고 웃옷을 벗은 채로 이야기하는 성격은 절대, 절대, 절대 아니건만 아무래도 네스 녀석이 낄낄대고 ‘서비스라고, 짜샤.’ 하며 넣은 장면 같다. 하여간 각본가가 깡패다.
“늘 하던 대로?”
“네. 그렇죠, 뭐.”
“하하, 그래. 어차피 자기는 체모가 별로 없어서 손도 안 가.”
자꾸 쓸데없이 감상적인 생각이 든다.
나는 괜히 뒷목을 주무르며 탈의실로 발을 옮겼다.
10년을 이 자리에서 하면서 몇 번 크고 작은 공사를 한 이곳은, 겉은 조금 허름해 보일지언정 내부만은 대단한 곳 아쉽지 않게 말끔하다. 못 본 새 생긴 크고 작은 화분들 역시 꽤 고상하고 말이다. 마이클은 깔끔하기는 해도 이런 센스는 없으니, 아마 이 화분은 마이클의 부인이 가져다 둔 것일 테다.
하지만 숍에 새로 생긴 건 비단 화분뿐만이 아니었다.
“저기요. 마이클.”
“으응?”
언제나처럼 들어가던 탈의실 문 앞에서 뚝 멈춰 선 채로 잠시 있던 나는, 정말 백 퍼센트, 아니 천 퍼센트의 순수한 호기심으로 입을 열었다.
“다른 게 아니고, 아주 조금, 정말 정말 조금 궁금한 게 막 생겼는데요.”
“으으응.”
“……남자도 그- 왁싱을 해요?”
무슨 말이냐는 양 저만치에 있는 짧은 복도 끝에서 고개를 삐죽 내민 마이클이 보인다.
나는 그를 한 번 봤다가, 탈의실 문 앞에 붙은 이전에 없던 친절한 ‘왁싱 소개’ 종이를 다시 한번 훑어보고는 머뭇머뭇 말을 이었다.
“왜. 그, 아래요.”
“아래?”
어차피 둘밖에 없는데 이게 뭐라고 큰 소리로 외치기 조금 민망한지 모르겠다.
물론, 전문가 중 전문가인 마이클은 나와 사정이 달랐다. 그는 내 말을 곱씹더니 머잖아 또박또박 커다랗게 정답을 외쳤다.
“-아. 브라질리언?”
그 목소리는 얼마나 크던지 덧붙인 “아니, 그냥. 여기 벽에 설명서 붙은 거 보니까… 궁금해서.” 같은 내 수줍은 중얼거림은 아마 그에게 들리지 않았을 것 같다.
“뭐. 꽤 많이 해. 솔직히 나도 해 주기만 하고 직접 해 본 적은 없지만 말야.”
“…본인은 안 하는 걸 남한테 해 주는 거 안 어색해요?”
“그럼 파란색 머리로 염색해 주는 미용사들은 다 머리가 파랗게? 게다가 혼자 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이 사람아.”
“하긴 그렇네요.”
부위가 부위니만큼 대충 어떤 자세로 해야 할지 그려지는데, 아무래도 그걸 혼자 하기는 좀 힘들 거 같다. 나는 약 0.1초간 혼자 왁싱을 하는 마이클을 상상할 뻔했다가 이어진 그의 말에 오염된 머릿속을 간신히 정화했다.
“처음 받기가 어렵지, 한 번 받은 사람들은 나중에도 쭉 받으러 오더라고.”
“오….”
“여자들이 그렇-게 좋아한대. 왜. 관심 있어?”
아,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 질문에 후다닥 변명했어야 했다.
씩 웃으며 물었던 마이클은, 별안간 저쪽에서 “아!” 하는 괴성 같은 탄성을 내고는 준비하던 도구들마저 던져두고 잰걸음으로 내 쪽을 향해 황소처럼 뛰어왔다.
“자기. 날 믿어.”
“뭐, 뭘요?”
“남자친구는 더, 더, 더어! 좋아할 거야!”
…씨바아알….
“…거…, 참……, 고오맙네요….”
“오늘 하는 김에 한 번 다 해 볼까?”
“아, 아니. 아니요! 에이! 살면서 그런 건 한 번도 생각 안 해 봤어요.”
“지금 하고 있잖아!”
마이클의 눈이 기괴하게 빛난다.
진짜 애초에 물어보는 게 아니었다. 최소한, 관심 있냐는 말에 그냥 여기 붙은 종이를 보고 물어본 거였다고 하고 탈의실로 잽싸게 도망쳤어야 했다고.
“설마 내 실력 못 믿어? 진짜 안 따갑게 잘한다고. 안 아프게 해 줄게.”
“거짓말 마요. 생각만 해도 아파요. …그건, 거긴- 안 아플 수가 없다고요!”
“어허! 이것만 받으러 오는 손님이 내 장부 두 페이지는 돼.”
“돼, 됐어요. 난 그냥 하던 거나 받을게요.”
마이클이 누군가.
사랑에 죽고 사랑에 사는 남자다.
그는 나를 알고 지낸 몇 년 동안 누구 한 명 깊게 만나지 못하는 날 늘 안타까워하며 내가 솔로일 때마다 누굴 소개해 주지 못해 안달이었다. 몇 년 전엔가 내가 마이클의 소개로 만났던 여자와 사귀다 깨진 후로는 그것도 없어졌었지만, 세상 찌질했던 내 과거와 지금을 모두 본 몇 안 되는 사람으로 그는 ‘내 방황’이 사랑이 없어서라며 몇 번 성당도 같이 가자고 했었다.
게다가 휴대폰을 손에서 떼지 않는 십 대 딸을 둔 그에게 대놓고 키스하는 내 사진과 틈만 나면 하트가 오갔던 SNS가 흘러들어 가지 않았을 리도 없다.
“꼼꼼히 씻고 와. 우선 씻고 나와서 이야기하자고.”
“싫어요!”
“아, 자기의 자기가 좋아할 거라니까?”
“-마이클, 당신이 우리 자기에 대해 뭘 알아요!”
“게이가 다 거기서 거기지, 뭐.”
……그, 그런가?
아무래도 약간 편견이 있는 거 같은데요.
하지만 나는 마이클을 향해 끝까지 강하게 반론하지 못했다.
하얗고 가지런한 이를 자랑하며 입꼬리를 한껏 올려 웃는 대머리 아저씨의 파괴력이라니.
한 번 건너면 다시 되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게 이런 기분이 아닐까? 어쩌지. 왠지 벌써 사타구니가 쪼그라드는 것 같다.
션 스펜서, 그 근사한 남자는 지금 뭐 하고 있을까.
…내 쪽은 왠지 자괴감이 드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