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 Up, sword, and know thou a more horrid hent.(3) (13/21)

* * *

션 스펜서는 규칙적인 생활을 꽤 중요하게 여기는 편이다.

배우라는 직업 특성상 촬영할 때는 그게 마음처럼 되지 않는다고는 하지만, 언제나 기본은 지킨다. 아이러니한 일이지만 배우라서 규칙적이기 힘들지만, 배우라서 최대한 신경 써야 한다.

예컨대 그중 기본은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고, 또 정해진 시간에 자는 거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처럼 몸의 상태를 선명하게 파악할 수 있을 때가 또 없다.

근력운동이 주는 뻐근한 근육의 당김부터 피로가 쌓인 어깨의 묵직함이 다른 걸 알아야 짧게는 하루 계획을, 길게는 일주일에서 한 달을 그릴 수 있는 법이다.

하지만 그런 남자가, 지난밤 잠 한숨을 못 자고 꼴딱 새웠다. 이유는 설명할 필요조차 없다.

“…조금이라도 주무시고 가시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가비. 이선에게 온 연락은?”

동문서답도 이런 동문서답이 따로 없다.

집사, 가브리엘은 대답 대신 작게 한숨을 삼키며 고개를 저었다. 한 손에 꾹 쥔 휴대폰에 떠오른 이름이 모든 걸 말해 준다.

스펜서는 어제부터 이 자세, 이 모습 그대로 있었다.

차라리 속 시원하게 전화라도 해 보면 좋을 텐데 그마저도 마음대로 하지 못한 채 액정 속의 이름만 노려보고 있었다.

“씻고 바로 나갈 겁니다. 아침은 됐어요.”

“네. 입으실 옷을 준비해 두겠습니다.”

이선과 지내면서 아침 식사 하나는 든든하게 챙겨 먹고 나가길래 그거 하나만큼은 참 마음에 들었었는데, 그가 없으니 그나마 마시던 커피 한 잔조차도 건너뛴다.

가브리엘은 왠지 그답지 않게 큰 한숨을 내쉬며 저쪽에서 눈이 마주친 줄리 깁슨에게 작게 고개를 저었다. 이선이 저택에 들어오지 않은 지 그래 봤자 고작 이틀이다. 아니, 정확히 하루는 저녁에 뛰쳐나갔다고 하니, 48시간도 못 된다.

스펜서 집안의 일 때문에 가브리엘 그가 잠시 자리를 비운 그 반나절 좀 넘는 시간 동안, 저택은 이 이상 우중충할 수 없을 만큼 심란하게 변해 있었다.

물론 그중 가장 음침해진 건 요 몇 주 누구보다 화사하게 반짝였던 사내다.

“직접 운전하시는 건 추천해 드리고 싶지 않은데요.”

“괜찮습니다.”

“이틀을 제대로 못 주무시지 않으셨습니까. 안 됩니다.”

유순하게 돌려 말하던 말이 결국 강경하게 바뀌었다.

션은 단호한 표정을 한 자신의 집사를 잠시 보다가, 이내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실랑이를 할 기운조차 없기도 했다. 연인과 함께 촬영 장소를 오가던 고용주 때문에 언제나 다른 차로 조용히 따로 움직였던 경호원들이 오랜만에 제 일을 하게 된 셈이다.

[어디야?]

오늘의 촬영 장소로 향하는 차 안에서 조금은 몽롱한 정신으로 휴대폰 액정을 두드려 나온 단어는, 잔뜩 하고 싶은 말들에 비해 단출했다.

션은 제가 입력한 짧은 문장을 잠시 보다가 그걸 도로 지웠다.

사실 그는 제가 이런 질문을 감히 할 권리가 있는지 모르겠다.

줄리 깁슨과 다른 몇 고용인들이 바라노프의 저택에서 일하던 사람이라는 것도, ‘그날 밤’ 있던 일도 말하지 못한, 아니 말하지 않은 이유를 그 자신이 너무나 잘 아는 탓이었다.

정말이지 우습기 짝이 없는 일이다.

바라노프가 살아 있을 때는 귓등으로 듣지 않고 심지어 죽은 그날마저 이선만은 안 된다는 것처럼 온갖 오만한 상상으로 부정하고, 깎아 내리고, 또 밀어내 놓고 이제 와 그가 과거의 저를 보며 얼어붙을까 겁먹은 꼴이라니.

“……후우.”

이제껏 션 스펜서는 제 부모라는 이름을 가진 두 사람을 원망한 적 없었다.

원망이라는 건 애정과 기대가 무너졌을 때 가지는 감정이다. 때문에 머릿속으로 그려 떠올릴 수 있는 최초의 기억부터 지금까지, 어떤 애정도, 기대도 남아 있지 않는 그 두 사람을 향해 원망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지금.

이제 악착같은 혐오만 남았다고 생각했던 오늘에서야, 원망과 결이 비슷한 무언가가 갈 곳 잃은 채 처음으로 머리를 든다.

……더 나은 부모까지는 아니어도, 더 나은 사람일 수는 있었잖아. 최소한 고상한 척이라도 해 주지. 내가 그걸 흉내라도 내는 인간으로 자랄 수 있도록, 조금만….

션은 살며 처음으로 제 부모를 향한 원망 그 비슷한 생각을 하다가, 쭉 힘이 풀린 헛웃음을 터트렸다.

바라노프의 말이 맞았다.

저는 이 와중에도 어떻게든 그 거만하고 오만한 자격지심을 내려놓지 못해 안달이다. 떠올리기만 해도 수치스럽고 두려워질 문장을 쏟아 낸 건 저 자신인데, 또 습관적인 혐오를 이어 간다.

션은 제 얼굴을 크게 마른세수하며 감출 수 없는 피곤을 떨쳐 내려 애썼다.

멍청한 짓이라는 걸 알지만, 최소한 이선에게는…, 아니, 이선에게만큼은 근사한 모습을 보이고 싶었다.

그와 함께한 몇 달.

션 스펜서는 자신의 연인이 된 남자가 어떤 성격인지 잘 알게 됐다.

이선은 웬만한 사람들은 속이 쓰라려 잔뜩 화를 낼 일조차 겉으로는 전혀 내색하지 않고 씩 웃으며 넘어갈 정도로 강하다가도, 한편으로는 종잡을 수 없을 정도로 쾌락에 약하고, 책임이 필요한 일 앞에서는 늘 한발 물러선다.

절대 옆자리를 쉽게 내어 주지 않지만 누구나와 금세 잘 어울리기도 하며, 한참 망설이다 어느 한쪽으로 마음을 먹으면 깜짝 놀랄 만큼 일직선으로 성큼성큼 걸어가는 사람이기도 하다.

그건 제게 다가올 때도 그랬지만, 마음먹기에 따라 그 반대도 마찬가지일 거다.

오늘은 꼭 제대로 말을 걸어 보자.

뭐라도 이야기를 하다 보면, 변명 몇 줄이라도 더 덧붙일 수 있을 거다. 그래도 어제 잠시나마 얘기했을 땐… 표정이 그리 나쁘지 않았으니까.

션은 어떤 상황에서도 가장 최악의 상황을 그려 내는 데 익숙한 머리가 자꾸 불길한 가정만을 쏟아 내는 걸 애써 무시하며 스스로를 달랬다.

하지만 카운티 외곽의 촬영 장소에 도착하자마자 둘러본 곳 그 어디에도 제 파트너가 보이지 않으면 심장이 덜컥 가라앉을 수밖에 없다. 이선은 언제나 눈에 띈다.

가만히 생각에 잠겨 있을 땐 말 붙이기 어려울 정도로 무뚝뚝한 인상인데, 누군가와 시선이 마주치면 습관처럼 입꼬리를 올려 웃는다.

션은 그 순간을 좋아한다.

누군가와 이야기할 때마다 예쁘게 싱긋 웃는 모습에 뒤따르는 질투를 인정하는 것보다 차라리 그 모습을 훔쳐보는 게 더 좋을 정도다.

“로스. 박은 아직입니까?”

“아, 네. 오늘 20분쯤 늦을 것 같다고 조금 전에 연락이 왔어요.”

하지만 해리엇 로스는 아직도 가끔은 ‘너무 친하잖아?’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조금은 눈에 밟히는 여자다.

지금도 그렇다.

제 휴대폰은 미동조차 없는데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이선과 연락을 주고받은 뒤다.

정말 갈수록 가지가지 하는군.

션 스펜서는 이제껏 몇 번이나 탓했을지 모를 그 자신을 다시 한번 욕하며 촬영장 한편에 준비된 커피를 텀블러 가득 채웠다.

이성적인 판단을 못 하니 자꾸 별별 것에 다 휘둘린다.

사실 커피를 마신다고 해서 한심해지지 않으리라는 자신은 없지만, 션은 제 수면 부족에 모든 핑계를 다 떠맡길 셈이었다.

“--세상에, 오늘은 또 무슨 일이에요?!”

거의 비명에 가까운 메이크업 담당자의 외침이 귀에 꽂히기 전까지는 말이다.

션은 그 높은 목소리가 터져 나온 곳으로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가, 거의 반사적으로 간이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익숙한 뒷모습이 보인다. 어젯밤 내내- 사실 지금 이 순간까지도 쭉 듣고 싶었던 듣기 좋은 목소리도 뒤따른다.

“하하, 하…, 그으게. 글쎄요. 얼음은 가지고 왔는데.”

“진짜 못살겠어요. 이건 뭐 전보다 더 심한데! 거기, 차가운 수건 좀 가져다줘요!”

촬영에 들어간 이상 주연 배우의 제1원칙은 컨디션 관리다.

그때부터는 마음대로 아파서도 안 된다. 할리우드의 1분 1초는 모두 돈이다. 이 바닥에서 10년은 넘게 비빈 이선이 그걸 모를 리 없다.

하지만 놀다 다치거나 거나하게 퍼마시고 술병이 난 것도 아니고, 눈이 발그레하게 붓는 걸 어떻게 마음대로 막을 수 있을까.

“죄송해요. 새벽부터 계속 찜질은 했는데….”

……그것도, 바보가 아닌 이상 펑펑 울고 난 다음 날의 얼굴이라는 것쯤은 뻔히 알 수 있는데 어떻게 그걸 두고 뭐라고 할 수 있겠냐는 말이다.

이선의 목소리는 이내 작게 웅얼거리는 혼잣말처럼 변했다.

션 스펜서는 그 속삭임에 가까워진 단어 중 어떤 것도 놓치지 않았다. 놓칠 수 없었다고 말하는 게 더 정확할지도 모른다.

“…….”

그는 스태프들의 관심을 끄는 걸 썩 좋아하지 않는 이선을 잘 안다.

그래서 어제도 어떤 바보 같은 말이라도 늘어놓고 싶은 걸 꾹 참고 몇 번이고 엉망진창인 단어들을 삼켰었다.

거의 넋을 놓고 이선을 뚫어지라 보고 있는 걸 알아챈 스태프들이 서로 눈치를 보는 게 느껴진다.

……침착해야 하는데.

션은 머리로는 그렇게 생각했다.

벌써 몇 명이나 붙어서 찬 수건을 눈에 대 주며 정성스레 보살피는 사람들 사이에 있는 이선을 방해해서는 안 된다. 저 남자는 저번에 잠을 설치고 눈이 부었을 때도 저택에 돌아와서까지 그걸 내심 신경 썼었다.

사람 좋게 웃지만 자기 전에는 꼭 대본을 훑어보고 중얼거리고 자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직업 프라이드 하나만큼은 확실한 남자니까. 당장에 그를 데리고 뛰쳐나가 붉게 물든 눈가를 만지고 싶은 건 꾹 참아야 한다.

이젠 제가 그렇게 해 주는 걸 기꺼워할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이봐. 션. 무슨 일인 건가?”

데이비드 밀러였다.

저만 들을 수 있을 정도로 목소리를 낮추고 슬쩍 다가와 묻는 말에, 션은 대답 대신 손에 든 텀블러를 우그러트리겠다는 것처럼 힘을 주어 움켜쥐었다.

차라리 커피는 안 마시는 게 나았다. 각성 같은 건 필요도 없었다.

은회색 시선이 고집스레 입을 다문 그의 오랜 친구와 저만치에 있는 남자를 몇 번 오갔다.

사실, 밀러 그는 저보다 시선이 한 뼘은 더 높은 남자의 속이 훤히 보인다.

처음 만났던 게 이 남자가 열다섯이었을 때였고 LA로 거의 훔치듯 빼돌려 온 후로는 반쯤 대부처럼 돌보다시피 했다. 아무리 키가 커지고 표정을 만드는 데 익숙한 사내로 무르익는다 한들, 밀러 그에게 션 스펜서는 브룩빌의 오래된 스펜서 저택에서 처음 만났던 꼬마다.

우아하고 고상하기 짝이 없는 식사 자리에서 뭔가를 떨어트려 테이블 밑으로 몸을 숙였던 그 순간이 많은 걸 바꾸었다. 사실 밀러는 이제 그때 제가 뭘 떨어트렸었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짧은 인사 후로는 내내 인형처럼 앉아 있던 스펜서가 도련님의 슬쩍 올라간 바짓단 사이로 보이는 발목과 다리에서 보이는 상처에 잠시 얼이 빠졌던 순간이 너무 선명한 탓이다.

“정말이지 못살겠군.”

“…….”

“내일은 일정을 좀 조정해 보지. 그렇지 않아도 로드게리즈가 부탁한 게 있어서 어렵진 않을 걸세.”

밀러는 속으로 쯧쯧, 저 자신을 향해 혀를 찼다.

자식은 없지만 프롬을 앞둔 딸을 둔 아버지가 꼭 이런 기분이 아닐까 싶단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누가 알면 늙은이가 참 별 주접을 다 떤다고 할지 모르지만 뭐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겉모습이야 이제는 어깨동무조차 힘들어진 단단한 체격의 남자로 완벽하게 다듬어졌다만, 뭐랄까, 밀러에게 션 스펜서는 이제껏 사람에게 마음을 열지 못하고 그 흔한 데이트 한 번 없이 공부와 운동만 하던 어린애다.

사실 전부터 스펜서가 쪽에서 귀찮게 하는 걸 잘라 내겠다고 파파라치들에게 먹잇감을 주는 것도 썩 마음에 들진 않았었다. 하지만 “당신 은근히 꼰대 기질이 있어요.” 같은 말을 듣는 것도 질색이고, 정말 아무나와 자고 다니는 것도 아니니 딱 사진만 찍히고 마는 걸 말리기도 뭐해서 내버려 뒀었다.

똑똑하고 현명한 아이니 언젠가는 정말 괜찮은 사람을 어련히 만나겠지 싶었다. 딱 봐도 뿌듯할 정도로 어디 하나 모자란 거 없는 사내로 자라지 않았나.

좀 더 솔직히 말하자면 가끔은 괜찮은 여자를 보면 답지 않게 소개해 줄까 하는 마음마저 들었더랬다. 저 친구만 좋아하면 누가 됐든 상관없지, 하는 생각을 습관처럼 하기도 했었다.

“…고맙습니다. 데이비드.”

“됐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빨리 잘 해결 보라고.”

……설마하니 드디어 홀딱 반한 상대가 바라노프가 그렇게 입 아프게 말했던 남자가 될 거라고는 꿈에서도 상상 못 한 일이지만 말이다.

솔직히, 밀러 그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마약까지 했던 남자는 좀 그렇지 않나 싶어 처음에는 조금 부루퉁하기도 했다. 어쨌거나 그에게는 한참을 귀하게 키운 친손주 그 이상의 남자니 욕심이 안 들었다면 거짓말이다.

노감독의 시선이 저쪽에서 수건을 눈에 대고 연신 “정말 미안합니다.”를 반복하고 있는 이선을 따라갔다.

사실 정말 의외의 선택을 한 건 션뿐만이 아니다.

이선 박, 저 남자 역시 마찬가지다.

밀러는 내심 저 남자에게 모든 걸 끝까지 감추기 힘들 거라는 생각은 했었다.

바라노프와 가장 가까운 사람 중 하나고, 또 영화의 공동 주연으로 캐스팅된 이상, 바보가 아니면 눈치는 채겠지 싶었다. 아니나 다를까 예상대로 되기는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큰 걱정은 하지 않았었다. 그는 솔직히 저 일순 가벼워 보이는 남자를 조금은 얕봤다.

좀 더 노골적으로는- 모든 걸 알고 나면 가벼운 호기심과 함께 뒤섞인 의심을 이겨 낼 만한 부류가 아니니, 걱정할 필요 없으리라 판단했던 쪽에 가깝다.

무언가를 하기에는 지독하게 생각 많고 또 겁 많은 남자였으니까. 그래서 내심 션 스펜서가 첫사랑의 실연에 힘들어하면 어떤 말로 위로해 줄지 고민도 했었는데….

-이선. 저 남자는 숲에서 모든 진실을 밝혔을 때만 해도 파랗게 질려 있더니 곧바로 전혀 상상도 못 했던 쪽으로 튀었다.

“자, 자. 스펜서의 장면부터 먼저 들어가는 거로 하지. 괜찮겠나? 박, 자네는 천천히 준비하라고.”

“……죄송합니다.”

밀러는 제 한마디에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사람들을 보며 최대한 가볍게 웃었다.

두 주연 배우가 각각의 고민을 안고 있는 것과는 별개로 촬영은 여느 때처럼 물 흐르듯 진행됐다.

성격 좋은 배우 몇은 덕분에 촬영 순서가 앞당겨져서 좋다며 넉살 좋게 웃으며 안절부절못하는 이선을 위로했고, 온갖 돌발 상황에 도가 틀 대로 튼 스태프들은 이선 혼자서는 턱도 없던 눈의 붓기를 잡아내고 남은 붉은 기는 얇은 메이크업 한 겹으로 감쪽같이 감췄다.

사실, 저 때문에 지연된 걸 보상이라도 하듯 NG 한 번 없이 장문의 대사를 쏟아 낸 이선 덕분에 결과적으로는 촬영 자체는 예상보다 조금 더 빨리 끝나기까지 했다.

심지어 어제까지만 해도 심상치 않던 주연 배우이자 연인인 두 남자도 촬영하는 중에는 서로의 연기를 확인하는 평범한 대화를 나눴다.

그래서 몇몇 스태프들은 내심 ‘어휴, 둘이서 싸우고 화해하긴 했나 보네.’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기도 했다.

하지만 그건 장밋빛 착각이다.

이선은 밀러 감독의 ‘컷’ 소리가 나자마자 조금 전까지 입술을 깨물며 애정이 뚝뚝 떨어지는 눈으로 바라보던 남자에게서 고개를 돌려 해리엇 로스에게로 달려갔다.

그다음으로 오늘의 민폐를 사과하는 다정한 목소리가 향한 건 메이크업 담당자였고, 그다음의 다음은 이제 퍽 친해진 미술팀의 막내 스태프였다.

……이제 공식적인 연인이 된 남자, 션 스펜서의 차례는 그 모두를 다 지나고도 한참 뒤였다.

“이선.”

사실, 션 그가 발소리조차 내지 않고 뒤를 쫓지 않았다면 이선은 아마 오늘도 그를 피해 조용히 주차장에 있는 낯선 렌트카 위로 살금살금 올라타고도 남았을 거다.

션은 제 부름에 바닥에서 거의 한 뼘은 튀어 오르는 남자를 보며 순간 표정이 무너질 뻔했다.

“……어, 뭐어?”

“오늘도 볼일이 있는 건가?”

“음. 글쎄. 굳이 그런 건 아닌데.”

저 한 발짝 뒤로 물러선 듯한 표현은 이선의 말버릇 같은 거다.

‘아마 데이트하는 사이’ 라든가, ‘함께 샤워할 상대로는 너를 고르겠다’ 같은 말들은 참 달콤하게 들리지만, 사실은 하나같이 정확한 감정을 한 꺼풀 감추는 것들이다.

하지만 여태까지는 그 거리감에 목마른 것조차 함부로 드러낼 수 없었다.

이선은- 션, 그가 아는 사람 중 누구보다 겁이 많은 남자다.

그 자신이 감정이 깊어지는 것도, 상대의 마음이 깊어지는 것도 쉽게 허락하지 않는다. 아주 조금만 삐끗했다간 “에이. 역시 아닌 것 같아.” 하고 픽 웃으며 고개를 저을 거다.

이상한 고집은 또 얼마나 센지, 한 번 아니라고 마음먹으면 그걸 넘는 건 전보다 더욱 까마득해진다. 그 생생한 증거로 다니엘 바커가 있지 않나.

솔직히 션은 제가 운이 좋았다는 걸 안다.

그렇게 조심스럽고 의심 많은 남자가 먼저 손을 뻗어 줬으니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최대한 조심스럽게, 또 자연스럽게 그 남자의 일부가 되고 싶었다.

그래서 아침마다 한 침대에서 일어나 키스하고 서로의 몸에 매달리는 것부터 시작했다.

그건 이선에게 꽤 잘 맞는 방법이었던 것은 확실했다.

일부러 늦게 일어나는 척하고 눈을 감고 있으면 저를 물끄러미 보는 시선이 느껴졌었다.

가만히 얼굴선을 그리는 조심스러운 손가락은 얼마나 소름 돋게 좋았고, 장난처럼 뺨에 입을 맞추는 감촉에는 심장이 어찌나 크게 뛰었었나.

션은 제 초조함이 드러나지 않기를 바라며 말을 이었다.

“잠깐 이야기 좀 했으면 하는데.”

“-어…, 왜, 굳이…… 지금?”

이틀 전. 이선이 본 적 없는 눈을 하는 걸 보며 저런 표정을 두 번 다시 짓지 않게 하고 싶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건 꽤 성급했던 것 같다.

지금은 차라리 그렇게 뭐라도 뚜렷이 보여 줬으면 좋겠다. 최소한 그땐 서로 눈을 마주하고 대화 같은 대화를 했었는데.

“……그럼 적어도 집에는 같이 들어갈 수 있지 않아?”

“그래. 뭐, 아마도. 아니! 아니다, 그냥 나 따로 혼자 갈게.”

“잠은 잘 자고 온 거야? 이틀이나… 어디서 잔 건데.”

사실 정말 묻고 싶은 건 다른 거다.

왜 아침에는 그렇게 눈이 빨갛게 부어서 온 건데.

하지만 새 티셔츠 목 뒷덜미에 붙은 사이즈 스티커조차 제대로 떼지 않고 입고 온 연인을 보고 있자니 곧장 하고 싶은 말이 나오지 않는다. 심지어 제 별거 아닌 질문 하나에 적당히 둘러대듯 대답하던 말조차 잠시나마 뚝 끊기지 않나.

“이선.”

“자 잠은… 그냥, 뭐. 적당히. 적당히 여기저기서….”

“…이선.”

“진짜 딱 잠만 자고 나왔어. …그리고 또 어젠 다른 친구 하나가 자기 가게에서 자고 가라고 해서….”

이건 대화라는 단어를 붙일 수 없다.

심지어 대답이라고도 할 수 없다. 시선을 공연히 돌리며 거의 혼잣말처럼 하는 말들은 두서조차 없다.

대충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는 알겠다.

아니, 알겠기에 더욱 속에서 뭔가가 울컥 치밀어 오른다.

차라리 제가 나가는 게 나았다. 다른 고용인들이 껄끄럽다면 이선의 근처에 가지 않게 했으면 됐을 텐데.

입을 옷도 없어서 급히 사 입고 올 정도로 여기저기서 떠돌 이유는 뭔가. 게다가 끝까지-

“최소한 날 보고 말해!”

제대로 쳐다보지도 않는다.

고작 며칠 전만 해도 언제나 장난기가 가득 차 반짝이던 예쁜 아몬드형 눈이 지금은 놀라 동그랗게 변해 있다.

처음에는 그저 놀랐다가, 얼마 안 가 천천히 당혹이 확 번진다.

왠지 그걸 보고 있노라니 속이 쓰리기까지 했다.

“이제 난 그것조차 안 돼?”

“…아니…, 진짜 그래서가… 아닌데.”

과장을 조금 보태서 세상 영화 중 90퍼센트는 로맨스다.

그건 대단한 취미도 없고, 배우 일을 시작한 이후로는 괜찮다는 영화는 뭐든 보면서 처음 한 생각이었다. 액션영화라는 간판을 쓰고 있더라도 사랑하는 연인과의 에피소드는 빠지지 않고, 애초에 그 화려한 전투의 이유가 연인과 관련된 게 대부분이다.

다들 그렇게 하나같이 사랑에 죽고 사랑에 산다면, 최소한 귀띔이라도 해 줬으면 좋았다.

“…오늘은 같이 가자. 이선.”

누군가를 마음에 담는다는 건 이렇게 말 한마디에 심장이 바닥까지 떨어지게 되고 마는 거라고. 제아무리 잘난 척 살았어도 결국 그 사람 앞에서는 끔찍하리만치 매달리고 싶은 거라고.

“같이 가 줄래?”

심지어 그렇게 매달리면 정말로 손을 놓아 버릴까 봐 애써 표정을 고치게 되는 것이니, 최소한 각오조차는 단단히 하라고 말이다.

션 스펜서는 탓할 이 없는 원망을 삼키며 주먹을 말아 쥐었다.

잠시 입을 다물고 있다가 이내 “……그래.” 하고 대답하는 목소리는 한없이 작았지만, 그 별거 아닌 작은 긍정에 이제야 조금 숨이 쉬어졌다.

* * *

저택으로 돌아오는 그의 차 안에서, 나는 션 스펜서가 목소리를 키웠던 순간을 간신히 기억해 냈다. 사실 그것도 ‘그나마’라는 단서를 붙여야 할 정도지만… 그래도 호텔에서 두 번째로 만난 날 자신을 놀리는 내게 꽤 짜증을 냈었다.

……아니다. 짜증을 섞어 말하는 거랑 화내는 건 완전히 다른 범주일까?

심심할 땐 라디오를, 대체로는 내 휴대폰을 연동해서 내 취향의 음악을 틀었던 귀갓길은 그 어떤 날보다 조용했다. 뭐라도 들리면 이 끝도 없는 생각의 고리에서 좀 떨어져 나올 수 있을까 싶은데 귀에 걸리는 거라곤 내 숨소리뿐이다.

난 차마 옆자리에 앉은 남자를 흘끗 곁눈질하거나 백미러로 훔쳐볼 엄두조차 나지 않아서 더더욱 몸을 움츠렸다.

젠장. 사실 다 핑계라는 걸 안다.

처음으로 화를 내는 그 눈을, 또 그 목소리 앞에 내던져지고 나니 션 스펜서가 이제껏 내게 얼마나 다정했었고, 또 나는 그 온전한 특별 대우에 얼마나 취해 있었는지 깨달았을 뿐이다.

“…….”

딱 이틀 만에 돌아온 스펜서 저택은 왠지 요 몇 달 내 집처럼 드나들었던 것이 무색하게 훅 거리감이 느껴졌다.

잠시 차에서 내리는 걸 머뭇대고 있으려니 션은 그가 먼저 빠르게 내려 반대쪽으로 다가와 문을 열어 주었다.

“내려.”

“……어, 으응.”

확실히 이제 마법이 풀릴 때가 되긴 했지.

아니 이 정도면 마법이라는 귀여운 단어보다 주술 같은 표현을 쓰는 게 더 알맞을 거다.

사실 모든 게 말도 안 될 정도로 돌아가지 않았나. 최악의 첫 만남 이후로 같은 영화에 출연하는 파트너 배우로, 그다음은 섹스 파트너로, 다음은… 잠시나마 진짜 파트너로 신문이며 잡지도 타고, 같이 파티도 갔다.

연인…… 이라고 생각했다.

웃으며 자기, 허니 하고 불러 보기도 하고 아침에 눈을 뜨면 키스하며 장난을 치는 게 잠시나마…… 당연했었다.

충분히 좋았다.

내 인생에 어떻게 그런 순간이 올 수 있었겠어.

션 스펜서는 내게 그날 밤의 진실을 다 말해 줄 생각이 없다.

그리고 나는 이 이상 베일 뒤에서 대충 눈과 귀를 막은 채 서 있지 못하겠다.

지금 잠시 넘어간다고 해도 결국 얼마 안 가 난 다시 이 사슬 같은 생각에 사로잡힐 거다.

더 감당할 수 없을 만큼 깊어지기 전에 친구가 아닌 연인으로서의 걸음은 여기서 멈추는 게 좋을지도 모른다.

지금도 봐. 등신도 아니고… 겨우 딱 한 번 화내는 모습을 본 거 가지고 속이 철렁 가라앉아 안절부절못한다.

정말이지 난 왜 이렇게 담백하지 못할까. 차라리 이런 꼴은 안 보여 주고 끝났으면 좋겠다.

“오셨습니까.”

“가브리엘. 저녁 식사는 나중에.”

“네.”

차고와 연결된 길을 한참을 걸어 중앙 복도로 나가니 꼭 첫날 이곳에 왔었을 때처럼 굳은 얼굴을 한 고용인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나는 그 줄의 끝에서 줄리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나와 시선이 부딪히자마자 꼿꼿하게 턱을 든 자세 그대로 고개를 앞으로 돌렸다.

이제 와 생각해 보면, 줄리 그녀와 네스의 이야기를 할 수도 있었을 것 같다.

어찌 됐든 그 의심 많은 네스 바라노프가 믿고 저택의 CCTV까지 귀띔했던 메이드 아닌가. 네스가 죽고 그걸 왜 이용했던 건지는…… 제쳐 놓고서라도, 어쨌거나 몇 없는 추억이 겹치는 사람이다.

잠시 줄리를 바라보던 나는, 이윽고 크게 숨을 한 번 삼킨 다음 입을 열었다.

“…그럼 난.”

물론 그 순간 일부러 션 쪽은 쳐다보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음이 편해진 건 아니었다. 가브리엘 씨 역시 여느 때보다 더욱 딱딱한 표정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난 조금 더 마음 편하게 선수 칠 수 있었다.

“짐은 지금 바로 싸고 있을게.”

“……뭐?”

“옷이나 물건이 그렇게 많지는 않아서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야. …미안.”

사실 이선, 하고 다정하게 부르던 목소리가 이제는 정반대의 말을 하는 걸 듣고 싶지 않았던 게 조금 더 큰 이유였지만. 어쨌거나 입 밖으로 흘러나온 목소리는 멍청하게 떨리지도 않고 귀가 인사를 하는 것처럼 퍽 매끄러웠다.

심지어 도망치는 건 내 전문이지.

나는 뭐라고 말을 이으려는 듯한 션과 가브리엘 씨를 피해 이제는 꽤 빠삭해진 저택의 지름길로 반쯤 달리듯이 발을 옮겼다.

빠진 퍼즐의 조각을 션의 탓으로만 돌릴 일도 아니다. 우리의 관계는 아주 기본적인 게 빠져 있었다.

나는 션을 무너트리려던 남자와 뻔뻔하게 교류한 거로도 모자라 그를 믿지 못하고 내 친구를 죽인 흔적을 미친 듯이 찾아 헤맸고, 션은 그날 밤 네스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다른 이에게는 다 말해도 내게는 말하지 않을 만큼 신뢰하지 않는다.

“…빌어먹을….”

동관의 침실의 옆에 딸린 방은 이 몇 달 동안 어느새 내 작은 창고 겸 드레스룸이 되어 있었다. 짐을 다 챙기는 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거라고 자신 있게 말했는데, 야금야금 가지고 온 옷이며 잡동사니들이 꽤 많았다.

역시 이게 맞다.

나는 커다란 트렁크 케이스를 꺼내 연 다음 곱게 정리된 옷들을 손에 잡히는 대로 대충 잡아 넣었다. 그리고 그 트렁크를 반쯤 채웠을 때쯤, 쾅, 하고 침실의 문이 열렸다. 언제나 발소리 하나 없이 우아하게 걷던 남자가 드물게도 소리를 내며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사실 그 소리를 안쪽에서 들었을 땐 혹시 다른 사람일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지금 뭐 하자는 거지?”

“옷 챙기고…… 있는데.”

“이렇게 쉽게, 아무렇지도 않게- 끝이라도 내겠다고?”

내 착각이 아니라면 그렇지 않아도 뚜렷한 이목구비도 유독 진하게 이글거리는 것처럼 보인다.

“이제 썩 꺼지라고 하려고 데리고 온 거 아니었어?”

……그리고 아마 내가 지금 그 활화산에 불을 댕겼고 말이다.

“그럴 리가 있겠어? 대체 왜 생각이 그렇게 가는데!”

“그럼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데.”

“그야 당연히-!”

“괜한 오해가 쌓인 것 같으니 적당히 풀자는 듣기 좋은 말이라면 됐어.”

흔들리면 안 된다.

제발 조리 있게, 이번만큼은 감정에 휩쓸려 빼놓는 거 없이 말하자.

요 이틀 동안 저 남자를 피해 혼자 처박혀 몇 번이나, 아니 몇십, 몇백 번이나 정리한 생각이지 않나.

“난 그냥 아무것도 모른 채로 있는 게 모두가 편하다, 그런 말을 하려는 거라면 아예 하지 마. 다들 나한테 그랬었으니까, 너라도 그러지 마. 이제 지긋지긋해.”

“…….”

나는 크게 한 번 숨을 들이켠 다음 말을 이었다.

“-그래. 백번 양보해서 줄리가 나란 인간이 누군지 몰랐다고 쳐. 그저 네스가 가장 믿은 메이드라고 쳐 보자고.”

“…….”

“전에는 닉 코빗이 뇌물 수수로 정직된 인간이고, 네스는 우리 영화의 각본가라고 했었지. 그런데 사실 그 말에는 꽤 중요한 게 빠졌었어.”

진한 커피를 오랜만에 잔뜩 마신 것처럼 심장이 천천히 달음박질치기 시작한다.

막 롤러코스터에 올라타 천천히 고점을 향해 올라가는 것과도 비슷한 것 같다. 추락할 걸 알면서도 이제 와 멈출 수도, 뛰어내릴 수도 없다.

“션, 넌 코빗 형사가 사실 뇌물을 받은 게 아니라 주려고 했었다는 걸 몰랐어?”

철컹거리며 올라가는 롤러코스터 위에서 올려다보는 파란 하늘마저 션 스펜서의 저 푸름과 비슷하다.

“네스의 저택에서 일하면서 누구보다 바라노프와 가까웠던 줄리가 CCTV 속에 네가 나왔다는 증언을 하는 대가로 돈을 요구했었다는 걸 정말 몰랐냐고. 너와 줄리는 정말 아무 관련 없는, 그저 한순간에 실직자가 된 미시간 출신 메이드를 도와준- 그런 평범한 관계가 맞아?”

“……평범한 관계는 맞아.”

“내 질문은 두 개였어.”

난 이제껏 살면서 질문에 대한 답이 없어도 이해하고 넘어갔었다.

사회에서 질문이 칭찬받는 건 고등학교가 마지막이다.

입을 열 수 있는 건 두 부류의 사람만 가능하다.

그 판을 쥐고 있거나, 막다른 곳에 몰려 잃을 패가 없거나 둘 중 하나다. 판을 쥐고 있지도 않고, 어떻게든 살고 싶었던 게 다인 나는 질문 대신 조용히 수긍하는 데 익숙해졌다.

아니, 사실은 매번 익숙해지지 않고 뭔가가 깎여 나갔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들은 저 멍청한 박쯤은 그래도 괜찮을 거로 생각했을 거다. 심지어 나 역시도 괜찮을 거라고 스스로를 달랬지 않나.

그러니 밀러 감독도, 코빗 형사도 마찬가지였겠지.

“션 스펜서!”

하지만 지금 이 앞에 있는 남자만큼은 제발 내게 답을 줬으면 좋겠다.

내 비명과도 같은 외침에 언제나 흔들림 없던 그 딱 벌어진 어깨가 작게 흠칫하는 게 보였다. 고운 미간이 찌푸려지고, 금방이라도 뭐라도 토해 놓을 것처럼 도톰한 입술이 달싹였다. 나는 초조하게 그의 작은 움직임 하나하나를 모두 눈에 담았다.

그의 망설임만으로도 가장 높은 지점에서 땅바닥으로 곤두박질쳤던 롤러코스터가 간신히 평지에 닿은 것만 같았으니까. 얼마나 그렇게 있었을까.

처음에는 그저 작은 한숨인 줄 알았다.

“-그날 밤.”

하지만, 머잖아 나는 그게 션 스펜서와는 가장 어울리지 않는 작고 힘없는 목소리라는 걸 깨달았다.

“바라노프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하면.”

“…….”

“…그러면…, 여기… 있을 건가?”

분명 그가 꺼낸 카드는 가장 손에 쥐고 싶던 것 중 하나임을 인정한다.

하지만 정확하게 따져야 한다. 내가 달라고 손을 내민 건 그날 밤의 기억이 아니다. 나는 내 입이 열리기만을 기다리는 사내에게 천천히 답을 돌려주었다.

요 며칠 그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휘둘린 건 늘 내 쪽이었으니 이번에는 그 반대가 된 셈이다.

“확답 못 해.”

솔직히 새벽까지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면 ‘대체 난 이 시간까지 왜 이러고 있는 거야?’하는 방향 잃은 원망도 가끔 스멀스멀 기어 나왔었다. 그런데 드디어 내게 주도권이 떨어졌다. 나를 잡고 싶어 안절부절못하는 저 남자 앞에서, 원하는 답이 코앞까지 와 있다.

……하지만 망할. 그 주도권이라는 게 차라리 속 시원하기라도 했으면 좋았을 텐데.

나는 내 짤막한 대답 하나에 빳빳한 긴장이 느껴졌던 너른 어깨에서 그를 조정하던 실이 끊긴 듯 축 힘이 빠지는 걸 보면서 속으로 욕을 집어삼켰다.

“……후우.”

긴 한숨이었다.

그다음은 살짝 헝클어진 것마저 일부러 세팅한 것처럼 보이는 흑갈색 머리를 한 번 초조하게 쓸었고, 이내 다시 한번 또 한숨이 터졌다. 얼마 안 가 꼼짝도 하지 않던 장신의 몸이 크게 휘청이며 둥근 아치형 문에 기대듯 주저앉을 땐, 난 션이 정말 쓰러지는 걸까 봐 저도 모르게 조금 몸이 튀었다.

다행인 일일까?

큰 몸을 웅크려 앉은 남자는 무릎을 세워 고개를 숙인 채 숨을 삼키느라 그런 나를 보지 못했다.

감히 션 스펜서라는 사람의 이런저런 모습을 제법 많이 봤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건…… 정말 처음이었다.

하지만 또 모른다.

이어진 말을 듣기 전에 나도 그를 따라 덩달아 바닥에 앉아 듣는 게 나았을지도.

“바라노프, 그와 나는 상성으로만 보면 최악이었어.”

“…….”

“데이비드가 영화의 각본가를 구했다며 처음 소개해 준 날부터, 바라노프와 나는 제대로 맞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어.”

얼결에 이 남자와 밀러 감독의 대화를 엿들었던 밤이 떠오른다.

처음 만난 날부터 눈이 풀린 채 션을 향해 도련님이라고 낄낄대고 웃었다고 했었던가. 하지만 일전에도 몇 번 이야기했듯이, 션 스펜서와 네스 바라노프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대척점에 서 있는 사람들이다.

난 두 사람 모두 적잖게 안다고 생각하지만, 이 둘의 공통점이라고는 인종과 성별 말고는 다른 걸 딱히 떠올리기 힘들 지경이니 더 말할 것도 없다.

언제나처럼 듣기 좋지만, 한편으로는 평소보다 훨씬 힘이 빠진 나직한 목소리가 느릿느릿 이어져 갔다.

“지금 생각해 보면, 바라노프 그의 예민함만은 아니었지. 나는 꽤…… 여러모로 내가 살아온 세계에 갇혀 있었던 편이라. 그 밖의 것들은, 맞아. 관심도 없었고 신경 써 본 적도 없었어. 나는 늘 내가 지나온 것에만… 집중하고, 매달렸어. 그게 전부라고 생각해서.”

“…….”

“아마 바라노프는 그걸 질색했던 것 같고, 나는 그를… 실력 있고 잘나가지만, 내심 나와는 다른…….”

비교적 차분하게 말을 이어 가던 션이 처음으로 단어를 고르는 걸 망설였다.

하지만 그건 그리 길지 않았다.

“다른, 높이에 있는… 사람으로 대했을 거야. 아니, 대했어. 분명 그때의 내게는 그를 향한 혐오가 쭉…… 깔려 있었어.”

어쩌면 애정보다도 더 인정하기 어려울 저 밑바닥의 감정을 끄집어 올린 남자는, 혼잣말처럼 “그래서 그와 2년을 꼬박 채워 보면서도 마지막까지 친구가 되지 못했겠지.” 하고 나보다도 그 자신에게 말하는 것처럼 중얼거렸다.

나는 그런 션에게 위로일지, 불난 데 부채질일지 모를 말을 툭 던졌다.

“너도 좀… 재수 없기는 했겠지만, 네 잘못만은 아닐걸. 걔도 한 성격 하잖아.”

어쨌거나 처음으로 옅게 웃는 소리가 들렸으니 전자에 가까웠으면 좋겠다.

션 스펜서의 얼굴이 보고 싶다.

그가 어떤 표정을 하고, 어떤 눈을 하고 이 말들을 이어 가는지 알고 싶다.

하지만, 항상 오만하리만치 우아하게 턱을 든 채로 상대를 똑바로 바라보던 남자는 지금 이 순간만큼은 맞은편의 나와 시선을 마주치기는커녕 언제나 그 꼿꼿했던 허리를 제대로 펴지도 못한 채 움츠러들어 있었다.

“바라노프와는 곧장 부딪쳤지만, 그날 밤은… 가장 심했었지.”

손으로 얼굴을 가리다시피 하고 이어 가는 터라 유독 낮게 들리는 목소리가 한 번 거친 숨소리와 함께 끊겼다. 나는 그 날카로운 소리에 왠지 온몸의 솜털이 쭈뼛하게 곤두서는 것만 같아 반사적으로 팔을 쓸었다.

나직한 목소리가 이어진다.

“그날 밤, 나는… 그와 파트너 배역을 두고 심하게 언쟁이 붙었어.”

“지금 내 배역?”

“……그래.”

솔직히 그 순순한 대답을 듣는 순간,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이거다.

‘그렇게나 빙빙 돌려 피해 가던 가장 큰 주제 중 하나가, 겨우?’

물론 나는 이 영화 속 그의 파트너가 결코 적은 비중이 아니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안다.

숨겨진 메시지를 거른 채 로맨스 영화의 외피에만 집중하더라도 [E]는 사랑했던 모든 감정을 잃은 채 기꺼이 제 발로 철옹성에 갇힌 채 살던 [S]에게 처음으로 사람 같은 어떤 것을 알려 주는 존재다.

션 스펜서에게 큰 의미일 이 영화의 공동 주연 정도 된다면, 당연히 중요할 수밖에 없다. 그건 안다.

하지만, 겨우 이 캐스팅을 가지고 말싸움 좀 한 걸 감추며 며칠을 마음고생 했다고 하기엔 좀…….

“정확히는 내가 널, 끔찍할 정도로 모욕했어.”

“…….”

“…그래서 바라노프가 그걸 맞받아쳤고….”

“뭐라고 했었는데?”

대화는 다시 한번 뚝 끊겼다.

하지만 그 침묵은 이번에는 그리 길지 않았다.

다시 한번 땅이 꺼질 듯한 한숨 다음에, 이번에는 꽤 단단히 마음을 먹었다는 듯한 퍽 진지한 단어가 이어졌기 때문이었다.

“마약중독자.”

순간 속이 철렁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 정도면 뭐.’ 하고 안도도 했다.

사실 네스의 추천을 반대하고 날 그의 상대편에 앉히기 싫어했다는 것은 이미 의도치 않은 도청으로 미리 알았던 게 아닌가. 매도 먼저 맞는 게 좋다고, 꼴에 한 번 짓밟힌 적 있는 마음 어딘가가 이 정도면 거뜬히 견딜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니, ‘같았었다’.

“15년을 연기했는데도 딱 들으면 알 만한 영화 하나 없고, 이제는 배역까지 친구를 팔아 사려고 하는 갱생의 여지조차 없는 인간.”

“…….”

“BAA의 다니엘 바커가 반해 있는 걸 믿고 이제는 오디션으로 부딪치려고 들지도 않는 남자를 대체 왜 이 영화에 앉히려 드는 거냐고.”

-그래. 확실히 우리는 요 몇 달간의 단꿈에 푹 젖어 잊고 있었던 게 있었다. 션 스펜서도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한 신랄함 하는 삐딱한 인간이라는 사실 말이다.

“……가난하지만 화목한 집안에서 자란 약쟁이가 결국엔 불행한 스타와 연인이 되는 스토리는 역겹다고 했어. 차라리 약점 잡힌 거라도 있으면 말하라고. …그러면 이해라도 하겠다고….”

“…….”

“…감히 그쪽으로 확신했었어, 그땐.”

정말이지 저절로 입이 딱 벌어지지 않나?

진짜 뒤통수를 후려 맞더라도 이것보다는 덜 얼얼할 거다.

나는 멍하게 션을 내려다보면서 잠시 할 말을 잃었다가, 황당함이라고 해야 할지 먹먹함이라고 해야 할지, 뭐라 이름 붙여야 할지도 모를 감정을 굳이 감추려고도 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혹시 그래서 처음 만났을 때 그렇게 까칠하게 굴었던 거였냐?”

대답 대신 제 무릎에 머리를 기댄 채 고개마저 숙인 남자의 동그란 두상이 위아래로 움직인다.

뭐라 형언할 수 없는 침묵이 흐른다.

나도 그 침묵에 큰 몫을 하고 있으니 이 고요를 탓할 수는 없지만 정말 숨이 턱턱 막히는 건 어쩔 수 없다.

이건 뭐 차마…… ‘괜찮아’, 같은 빈말도 못 하겠다.

아니, 전혀 안 괜찮다.

어떻게 괜찮을 수가 있나?

“월링턴이 울고 가겠다, 야.”

그 큰 덩치로 주저앉은 남자가 어찌나 어울리지도 않게 작은 목소리로 “…미안….” 하는지, 뭐라고 따질 기운마저 빠지는 것 같았다.

아니, 얘도 좀 요령이 없다!

좀 대충 순화해서 말하면 안 돼? 왜 이렇게 솔직한 건데.

나 좋다는 다른 인간은 어쩌다 내 연기에 관심을 두고, 이내 또 반하게 되었는지 절절하다 못해 고마움에 마음이 사무치기까지 하는 고백을 하기까지 했는데, 얘는 뭐…, 갱생의 여지가 없어?

“-가난하지만 화목한 집안에서 자란 약쟁이가 불행한 스타와 연인이 되는 이야기는 역겨워?”

가장 화룡점정인 문장이 저도 모르게 입 밖으로 툭 튀어 나가자, 그렇지 않아도 그 거구를 움츠릴 만큼 움츠린 남자가 이 이상 숙일 수도 없는 고개를 더 숙인다.

그걸 보고 있자니 속은 상하는데, 한편으로는 뜨끈하니 열도 받는다.

“아주 네가 네 무덤을 파다 못해 관뚜껑 위에 흙까지 덮었구나?”

“…….”

“와, ……후우, 진짜 오래 살고 볼 일이긴 하네.”

“…용납이 안 될 말을… 했어. 맞아. 미안하다는 말로도 절대….”

“-후우, 그래. 알았어. 알았다고. ……네스는 이거 듣고 너한테 뭐라든?”

솔직히 말하면 네스의 대답은 그다지 궁금하지 않았다.

그냥 내버려 두면 혀라도 깨물 기세길래-나도 좀 울컥한 속을 진정시켜야 하기도 하고-, “최대한 기억나는 만큼 걔 말투로 해 봐.” 하고 툭 물어본 것일 뿐이었다.

하지만 놀라운 일이 벌어진 건 이 내키지 않는 형식적인 질문에 대한 저 뻔뻔한 연인의 반응이었다.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을 텐데.”

“뭐 인마?”

여전히 고개는 푹 떨군 채라 얼굴이 보이지는 않지만, 귀며 목덜미까지 빨갛게 익은 것 정도는 훤히 보이는 남자는 놀랍게도 아직도 묻는 말에 한 번 토를 달 여력이 남아 있었다.

“장난하냐, 진짜?”

“…아예 틀린 말은 아니었어. 나란 인간이 어떻게 태어나고 자랐는지, …그, 내 끔찍한… 열등감이, 오만이 뭔지 말해 줬을 뿐이라.”

“그러니까 그 틀린 말 아닌 거 들어나 보자고.”

“…….”

“야. 고개 들어.”

이쯤 되니 오기가 생긴다.

이 고상하고 자존심 센 남자가 본인이 했던 말을 다시 반복하는 것만으로도 얼굴이 벌겋게 익을 정도로 쩔쩔맸으면, 그 뒤에 자기가 들었던 걸 말 못 할 이유는 또 뭐람?

나는 옅은 당황을 감추지 않는 연인 앞에 있는 커다란 하드 캐리어를 발로 민 다음, 의자처럼 그 위에 앉았다. 절대 날 마주 보지 않을 것 같던 그가 휙 머리를 든 것도 그때였다.

“말 안 해? 나 짐 마저 싸?”

참 내.

자기 저택에서 내가 걸어 나가는 게 협박이 된다는 것도 좀 어이없긴 하다.

하지만 세상 무서울 거 하나 없는 이 남자는, 이까짓 말 하나가 세상 제일가는 으름장이라도 된다는 양 발갛게 익은 얼굴을 식힐 여유조차 없이 급히 입을 열었다.

“-…나와 이선, 네가 반대니까.”

사실 난 조금 삐끗한 채 흘러나온 이 말까지는 내심 ‘이게 뭐. 틀린 거 하나 없는데.’ 하고 속으로 비뚜름하게 빈정댔었다.

옅은 떨림마저 느껴지는 낮은 목소리로 이어질 문장을 상상도 못 하고 말이다.

“그러니까, 가정사가… 서로 정반대니까….”

“…….”

“…나란히 두고 보면 효과적일 거라고. 피해의식에 빠져서 좋은 부모님 밑에서 자란 너랑… 나란히 세우는 게 싫은 거 아니냐… 는 식으로 말해서.”

조금 머뭇거리기는 했지만, 시작은 내 눈을 보며 말했던 연인은 그 끝에 가서는 말을 흐리며 또다시 애꿎은 바닥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고운 사포에 쓸린 상처처럼 뒤늦게 알싸한 통증이 올라오는 것 같다.

“더 있지?”

한때나마 네스 바라노프와 한 몸처럼 붙어 지냈다.

그 말인즉슨 녀석이 소위 욱해서 온갖 문장을 쏟아 내며 싸울 때마다 그나마 사람 구실 하도록 곁에서 뜯어말리며 산 게 몇 년이나 있었다는 뜻이다. 난 대답 대신 도로 입을 꾹 다물려는 듯한 연인에게 반쯤 진심 어린 짜증을 담아 “야!” 하고 소리쳤다.

-아마 그쯤이 션 스펜서가 온전히 백기를 든 순간이었던 것 같다.

“…이민자로 온갖 차별을 다 겪으면서도 네 모든 걸 응원한 어머니와.”

“…….”

“…나… 때문에 가슴이 망가졌다고 욕하던 어머니를… 두고, 비교라도 할까 봐 겁먹었냐고….”

허리를 굽혀 물건을 줍는 것조차 권하지 않는 게 보통인 교육을 받았다는 남자가 정말 어울리지도 않게 더듬더듬 말을 잇는 모습을 보자니, 나 역시 얼굴로 훅 피가 몰리는 것 같다. 물론 그 뜨끈한 열기는 전혀 긍정적인 의미는 아니다.

“너 지금 장난하냐?”

오히려 아주 엿 같은 쪽이지.

“이상한 데서 호구 기질이 있네! 설마 그 말을 듣고만 있었다고?”

가만히 안 듣고 있었으니 저렇게 물어뜯고 싸웠겠다는 생각이 순간 안 스쳐 지나간 건 아니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나라도 나 같은 건 안 뽑아! 내가 뭐가 있어, 좆도 없는데? 그래. 네가 똑똑한 거지!”

“…….”

“내가 너였어도 약점 잡고 나 꽂아 주라고 하는 줄 알겠다! …아니, 미친 새끼가 무슨 선 넘을 게 있고 안 넘을 게 있지!”

네스가 살아 있었다면 지금 이 말을 듣고 “썅. 이 개새끼가, 기껏 네 편 들어 줬더니 뭐라고?” 하고 걸쭉한 욕을 뽑아냈을 거지만, 알 게 뭐냐. 미친놈. 이딴 식으로 들어 주는 편 같은 건 하나도 안 고맙다.

바닥에 바로 앉아 살짝 눈높이가 낮아진 남자가 그제야 고개를 들고 멍하게 눈을 깜박이는 말간 모습을 보자니 그렇지 않아도 뒤집혔던 속이 아주 저며지기까지 하는 것 같다.

아. 정말이지 난 제명에 살 수 있을까?

무슨 이 이름으로 살면 장수한다고 했으면서, 전혀 아닌 것 같은데! 네스 녀석도 그렇지 않나. 걔도 장수의 신에서 따온 이름이라면서 겨우 30대에 그렇게 되는 게 어딨어.

“하여간 둘 다 그 주둥아리가 문제라고, 어? 아주 물에 내던져 둬도 그 아가리만 동동 떠서 처 싸우겠어!”

“……맞아. 미안해.”

“너도 하필 그러고 나서…… 얼마나 마음이 안 좋았겠냐고!”

처음 보자마자 별 지랄을 다 했던 비밀이 드디어 말끔히 풀렸다.

까놓고 보면 이 바보 같을 정도로 착해 빠진 놈이 이유 없는 적의와 호의를 넘나들던 이유가, 심지어는 경찰에 나를 네스 녀석의 용의자로 지목까지 한 이유가– 근 3년을 서로 코빼기도 비추지 않았던 때문이라니.

네스 바라노프.

……진짜 이 개새끼를 어쩌면 좋지?

“너, 나중에라도 어디 가서 누가 그 비슷한 말이라도 하면 절대 그냥 듣고 있으면 안 돼. 알았어?”

“……응.”

“대답 시원하게 못 해!”

“알았어.”

“언제 그런 말 어디 또 해, 너. 그땐 진짜 끝이야!”

대답 없이 붉게 달아오른 눈가로 날 빤히 바라보는 벽안이 묻는 것 같다.

자신은 여전히 내 곁에 있어도 되냐고. 정말 그래도 되는 거냐고.

……망할. 이 빌어먹을 스펜서 녀석은 정말 상상도 못 했던 방향으로 여러 번 열 받게 한다. 하지만 이걸 따지고 들면 그렇지 않아도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을 저 말끔한 미남이 이번에는 진짜 땅속으로 꺼지다 못해 졸도할지도 모른다.

그래. 참 신기하다면 신기한 일이다.

저렇게까지 오만했던 남자가 지금은 내 앞에서 주저앉아 머리는 엉망진창으로 헝클어지고 뺨은 벌겋게 익은 채로 속눈썹 한 올 끝까지 내 눈치만 본다.

그뿐인가.

가난하지만 화목한 집안에서 자란 약쟁이가 불행한 스타와 연인이 되는 이야기는 역겹다고 빈정대던 남자가, 뭐든 할 테니 가르쳐 주라며 눈조차 마주치지 못한 채 중얼거리게 되기도 하고, 미안하다는 말을 살며 몇 번 안 해 봤을 인간이 이제는 숨만 쉬어도 사과를 줄줄 쏟아 낸다.

나는 크게 숨을 들이켰다 내뱉었다.

“나 이거 생각날 때마다 너 갈굴 거야.”

“……응.”

“가끔은 자다가도 일어나서 때릴 수도 있어.”

“응.”

“더 열 받으면 네 지갑에서 카드 가져다가 마구 긁어 쓸 거야. 아무 때나 아이스크림 심부름도 시킬 거고, 밤마다 자기 전엔 내 발도 주무르게 할 거야.”

“뭐든 해. 다 할게.”

대답 하나는 더럽게 재깍재깍 잘한다. 심지어 그 예쁜 푸른색 눈을 반짝이기까지 하면서 말이다.

-아, 망할. 미안합니다. 수많은 한국계 이민자 여러분.

내가 저 얼굴에 좀 미쳐 있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저렇게 쳐다보니까 열은 받는데 당장 뭐라고 할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정말 생각날 때마다 꼬박꼬박 뭐라고 할 테니 저 남자의 오만한 시절에 대한 분노는 우리 잠시만 함께 가라앉혀 보자고. 특히, 아직 확인할 게 더 남았으니 말이지.

“그리고 또. 너, 마저 말할 거 있잖아. 줄리랑은 뭐야!”

보라고. 어이없을 정도로 순순히 나오던 대답이 언제 좀 멈칫할까 했더니, 아니나 다를까다. 나는 트렁크 케이스를 치면서 그가 얼떨떨한 순간을 몰아붙였다.

“-이거 그대로 들고 나가? 어? 빨리 말 안 해?”

“깁슨의 CCTV 증언 철회는… 내가 부탁한 일은 아니지만, 관계가 없는 일이라고 하기도… 조금.”

나는 ‘집 나갈 거야!’의 전지전능함에 감탄한 주먹을 움켜쥐며 목소리를 높였다.

“-평범한 관계라며! 아주 고해성사 한번 끝도 없네!”

“……그만할까?”

“죽는다!”

션은 미안, 하고 다시 한번 사과했다.

얘는 아마 나를 만난 후 최소 10년 치의 사과는 다 했을 거다.

아마 세상 제일가지 않으면 서러웠을 자존심도 바닥에 나뒹굴다 못해 이쯤 되면 그냥 포기하고 내려놓기로 한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말끝마다 사죄 연발일 리가 없다.

하지만 어쩌겠나.

잘못했으면 사과해야지.

그것도 날 만나기 전부터 쌓아 둔 업보가 이렇게 많은데 사실 이 정도 사과로도 부족하다고. 도끼눈을 뜨고 노려보고 있자니, 잠시 말을 고르던 남자가 그제야 한 문장 한 문장을 아주 신중하게 내뱉어 잇기 시작했다.

“깁슨은, 그녀는 아무 잘못 없어. …최소한 이선 네가 생각하는 나쁜 의도는 아니었어.”

“말이 돼? 애초에 경찰 하나 원한까지 사 가면서 대체 왜 그런 짓을 하는데?”

내 기세에 져 주다 못해 아예 바짝 엎드린 채로 기던 남자의 태도가 순간 달라진 건 그때였다. 나는 짙은 흑갈색 눈썹 하나가 휙 위로 치켜 올라가는 걸 보며 내심 속이 철렁했다.

“경찰 하나가 혹시 닉 코빗을 말하는 건가?”

“그럼 누구겠냐!”

“-이선.”

이 일방적인 고백이 시작된 이후로 무엇 하나 자신 있게 확답하지 못했던 션은, 드디어 내가 익히 아는 단호한 목소리로 돌아왔다.

“그 사람은 위험해.”

그건 얼마나 반박의 여지라고는 없는 단정에 가까운지, 뭐라고 말을 받으려던 나는 그래도- 까지 말을 꺼냈다가 결국 흐지부지하게 말을 흐렸다.

션은 내가 잠잠해진 걸 확인한 다음에도 잠시나마 뜻 모를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사실 코빗 형사 화제로 돌아오면 내 쪽 역시 뭐라 할 말이 없어진다.

그가 내게 모든 것을 다 말하지 않았을지언정, 션을 끌어내리지 못해 안달인 인간과 함께 몇 번이고 단둘이 만나며 그에 대해 엿들은 걸 부정할 수 없다. 물론 저 남자는 자신에게 무엇도 사과할 필요가 없다고 했지만, 기만은 기만이다.

……이걸로 서로 동률인 셈일까.

“다시는 그 남자와 단둘이 만나지 마, 이선.”

코빗 형사가 심상치 않은 사내라는 건 그 능글맞다 못해 가끔은 묘하게 으스스한 눈빛만 봐도 알 수 있다. 왠지 속이 바짝 탄 나는 순순히 “……그럴 거야.” 하고 대답하려 했다.

하지만 어느 때보다 진지해진 연인의 말이 조금 더 빨리 이어졌다.

“닉 코빗, 그는 바라노프가 죽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가장 먼저 달려왔어. …심지어 자기가 이 사건을 맡겠다고 자원까지 해서.”

시간이 지날수록 사람이 발 딛고 서 있는 층을 나누는 건, 확실히 손에 쥔 정보량이 가르는 문제 같다. 덕분에 나는 닉 코빗이 얼마나 내 머리 위에 서 있었는지 이 순간 확실히 깨달았다.

“담당 형사랍시고 현장에 와서는 죽은 바라노프한테는 관심도 없이 유류품만을 미친 듯이 뒤졌다지.”

“……뭐-, 뭐라고?”

나는 저도 모르게 가슴께에 손을 가져다 댔다.

얇은 티셔츠 하나 너머로 미친 듯이 빠르게 뛰기 시작한 박동이 전해진다.

“그 형사는 이상할 정도로 바라노프에게 집착하고 있어.”

“…….”

“이유는 몰라도 정상적인 범주는 한참 넘었어. 기괴하다고밖에 말 못 해. 정직된 것도 말이 뇌물을 핑계 삼은 거지…, 최근 몇 년간 그런 비정상적인 행동으로 몇 번이나 고소 직전까지 갔던 게 터진 거라 보는 게 맞아.”

‘닉 코빗이 정조준하고 있던 게 사실 션 스펜서도, …심지어는 나조차도 아니라면’?

이 가정은 정말 많은 걸 바꿔 놓는다.

사실 바커의 말을 듣고도 긴가민가했었다.

내가 너무 편집증적인 생각을 하는 게 아닌가 싶어, 설마 아니겠지 하며 묻어 두려 애쓴 것도 있다.

이제껏 닉 코빗, 그 형사가 내게 했던 모든 말들은 모두 션 스펜서를 그 끔찍한 일을 한 범인으로 몰아가는 거였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 원래부터 어떤 이유든 그의 혀에서 나오는 문장이 사실은 네스를 향해 있었다면-

내가 아는 닉 코빗의 모든 게 뒤틀린다.

나에 대해 소름 돋을 만큼 잘 알던 것도, 네스와 헬렌, 그리고…… 캐서린에 대해서까지 꿰고 있던 것의 의미가 달라진다는 거다.

나는 내 표정이 이상하리만치 굳지 않았기를 바랐지만, 왠지 입꼬리가 바들바들 떨리는 걸 막기 힘들었다.

다행히도 션은 그 역시 생각이 많은지 그런 날 눈치채지 못한 채 말을 이어 갔다.

“그래서 차라리 줄리, 그녀가 단순히 돈을 노렸다가 지레 겁먹고 포기한 메이드로 착각했으면 싶었던 것일 뿐이었어.”

“……누가 착각하는데. 코빗?”

그렇지만 저도 모르게 목소리가 조금 뾰족하게 튀어나오는 것만큼은 막을 수 없었던 것 같다.

잠시 망설이는 듯했던 션의 커다란 손이 조심스레 내 허락을 구하듯 손등을 덮었다. 나는 그걸 떨쳐 내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이 순간 신경 쓰이는 건 그가 내 긴장과 빨라진 맥박을 눈치챌까 싶은 것뿐이었다.

“여기서부터는…… 경찰에는 말하지 않은 것들이야.”

언제나처럼 차분한 목소리는 왠지 나를 달래는 것처럼 들렸다.

“그래도 듣고 싶어?”

요 몇 달간 나는 꽤 자주, ‘차라리 모를걸.’ 하고 후회했다.

하지만 돌이켜 보면, 깊이 발 딛고 싶지 않다는 그 본능적인- 혹은 습관적인 회피가 결국 나를 여기까지 이끌었다. 이제 다시 선택할 때다. 아예 모르는 척 살아도 괜찮을 정도로 뻔뻔하든가, 아니면 아예 이 진흙탕에 완전히 빠져야 한다.

나는 한번 길게 한숨을 토해 낸 다음, 깔고 앉았던 하드 캐리어를 밀어내고 그와 바로 마주 앉았다.

그러자 내내 죄인처럼 앉아 쏟아지는 물음 앞에 작아지기만 했던 남자가 처음으로 조금은 찡그리듯 웃었다. 그건 정말 영화 속 한 장면을 잘라다 놓은 것처럼 근사한 얼굴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조금쯤 속을 상하게 하기도 했다.

“난 바라노프를 죽인 게 스펜서라는 쪽에 가장 큰… 무게를 두고 있어.”

대단할 거 없는 짤막한 문장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걸 곧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몇 초 정도 멍청하게 굳어 있었다. 낯선 언어를 가르치는 상냥한 선지자 같은 느리고 다정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잘못 짚은 것일 수도 있겠지. 데이비드 역시 이 가정에 동의하지 않는 쪽이고. 하지만 그건… 솔직히, 지금보다 견디기 힘들어 고른 현실도피에 가깝지. 알다시피 그는 지금 촬영 이상으로는 뭔가를 받아들일 여유가 없는 편이라서.”

“…정말…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해?”

“나 역시 이게 내 불행한 상상력이면 좋겠어. …지금도 차라리 그들이었으면 하는 마음과, 제발 아니기를 바라는 마음이 하루에도 몇 번이나 뒤섞이는 중이니까.”

데이비드 밀러에게 여유가 없다는 건 내 쪽도 익히 아는 일이다.

그는 다들 웃고 떠드는 촬영장에서도 경호원을 끼고 살고, 왜, 저번에 몰래 그의 트레일러를 향해 뒤를 밟았다가 산탄총에 몸의 어디쯤 날아갈 뻔마저 하지 않았나.

다시 생각해도 등골이 쭈뼛 선다.

“-하지만 혹시라도 이 영화의 각본가가 누구인지 어떻게든 새어 나간 거라면…, 그리고 바라노프 그를 내게 경고할 대상으로 골랐다면. 현장에 남은 증거라곤 두 개뿐이지.”

“…….”

“바라노프의 머리와 몸에 박힌 총알의 탄피, 그리고 사망 추정 시간에 내가 저택을 오가는 게 찍힌 영상. ……난 그저 운 좋게 날 1급 살인으로 몰아갈 증거를 줄리 그녀 덕분에 조용히, 또 빨리 손에 넣게 된 거였어.”

오늘 이 지구상에서 스펜서 중 가장 유명할 남자는 아무렇지도 않은 목소리로 그 자신을 향한 끔찍한 문장을 덧붙였다. 션은 순간적으로 잔뜩 힘이 들어가 하얀 뼈가 덧그려진 내 손등을 살살 쓸었다.

“그녀는 그저 이 영화를 지키고 싶어 했던 게 다야. 바라노프가 마지막까지 매달려 쓴 각본이라는 걸 아니까.”

“……줄리도 모든 걸 다 아는 거야?”

“아니. 바라노프가 이걸 쓰며 굉장히…… 초조해했다는 것과, 살인범이 이 영화를 탐탁지 않아 하는 쪽일 수도 있다는 가정 정도만. 모르는 사람이 보면 우리 영화는 평범한 로맨스일 뿐이잖아?”

“…….”

“하지만 각본가는 다르지. 알지 않고서는 쓸 수 없는 이야기였으니. 그녀는 형사의 그…… 소름 끼치는 행동을 보고, 뭔가 잘못된 것 같다는 생각에 나조차도 하지 못할 도박을 한 뒤 도망 왔을 뿐이었어.”

네스의 저택에는 직접 가 본 적도 없고, 그날의 참상이 어땠을지 역시 감히 그려지지 않지만, 이거 하나는 알겠다.

죽은 시신에는 관심조차 두지 않고 살인 현장인 저택만을 미친 사람처럼 뒤지는 중년의 형사라.

……아주 혼자 공포 영화라도 찍지 그랬나, 닉 코빗!

대체 이제껏 그 사람과 단둘이 만나 이야기하며 무슨 일이라도 안 난 게 다행으로 여겨질 지경이다. 빌어먹을!

“내가 한 거라곤 그 이후의 상황을 정리해 줬던 게 전부야. 배짱 하나는 그 바라노프가 믿은 사람답지. -그러니까 이선.”

내 이름 끝에 옅은 한숨이 걸린다.

“이제껏, 뭐든 너에게 먼저 말하지 못했던 건-”

“후우. 그래, 알았어. 이해했어.”

삼엄한 저택의 경비.

밀러 감독과 션을 칭칭 옭아맨 경호원. 줄리의 이상할 정도로 근사하고, 또 한편으로는 안전한 위치에 있는 집….

모든 게 정말 싫을 정도로 하나씩 궤가 들어맞기 시작한다. 심지어 이번 역시 같은 이유다.

……‘나도 위험할까 봐’.

그래. 확실히 알면 알수록 아득해지는 이야기이긴 하다.

기껏해야 몇만 달러의 저예산 영화 속에서 살다가 갑자기 눈이 돌아가는 금액의 블록버스터 세계관으로 하루아침에 떨어진다면 아마도 딱 지금 같을 거다.

갑자기 뭐든 조심하라 덧붙였던 다니엘 바커의 말이 스산하게 떠오르는 건 왜일까.

“더 알고 싶은 게 있어?”

실로 다정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였다.

내가 꺼내 달라고 안달복달해서 품에 안게 된 폭탄이라지만, 솔직히 그 크기가 어느 정도여야지. 이건 정말 버겁다.

왠지 가족들이 보고 싶어질 정도라고.

“됐어. 지금은 과부하야, 나도. -대신, 나중에 뭐든 생각나면 또 물어볼 거다?”

“응.”

정말 간지러울 정도로 살살 눈을 휘며 대답하는 걸 보자니 이 뭐 하나 빠지는 것 없는 애가 어쩌다 싶기도 하고, 뭔가…, 감히 내가 그와 같은 입장이었더라면 엄두도 내지 못했을 시도를 묵묵히 이어 가는 데 순수한 감탄도 좀 났다.

……물론 다시 떠올릴 때마다 울컥할 정도로 괘씸하기도 하고 말이다.

아무리 나를 모를 때 온갖 오만과 편견에 찌들어 쏟아 낸 말이라고 해도 좀 너무했지 않나. 고해성사는 고해성사고, 용서는 또 다른 선상에 있다.

나는 이제는 꽤 건방지게 슬슬 올라오기 시작한 션의 손을 보며 그를 조금 흘겨봤다. 그러자 퍽 용기를 찾은 듯한 연인은 그 표정을 뭐라고 생각했는지 내 눈가를 살살 만지기까지 시작한다.

“이선.”

“뭐.”

“…나도 뭐 하나만 물어봐도… 되겠어?”

꽤 퉁명스럽게 나간 대답이었는데, 이제 기죽지도 않는다.

눈도 못 마주치고 쩔쩔매며 말하던 션 스펜서는 그새 어디로 간 건가. 깃털을 만진대도 이보다 더 조심스러울 수 없는 손길이 아니었다면 아직은 조금 부루퉁하게 “싫은데?” 하고 대답했을 거다.

이틀 만에 나누는 그와의 평범한 대화가 왠지 속에 더운 숨을 훅 불어넣는 것도 같았다.

정말이지 이런 건 익숙하지 않다.

“넌 하나만 물어.”

“……그래.”

확실히 션 스펜서는 웃는 게 예쁘다.

무표정하게 있으면 한없이 고전적인 인상이, 순식간에 무슨 하이틴 로맨스에 출연해도 될 것처럼 화사해진다.

망할. 분명히 어렸을 땐 멀리서 보기만 해도 빚어 둔 천사처럼 반짝거렸을 텐데.

나는 새삼스레 치미는 짜증을 숨기며 뭐냐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덕분에 하룻밤 만에 얼마나 수많은 감정을 오가는지 모르겠다. 우리의 거리는 어느새 조금 전보다 약간 더 가까워져 있다.

“오늘 아침 일이 알고 싶은데.”

기껏 얻은 딱 한 번의 질문 기회치고는 영 실없다.

“오늘 아침 일?”

“왜 그렇게… 왔나 싶어서.”

“그렇게 오다니, 뭔 소리야.”

나는 그의 말의 뜻을 짚어 내려 슬쩍 인상을 썼다.

하지만 어느 때보다 신중한 눈을 한 남자는 나를 재촉하는 것 대신 내가 스스로 답을 찾을 시간을 주는 쪽을 선택한 것 같았다. 정말이지 그가 궁금한 건 저 시시콜콜한 질문이 다인 거다.

애초에 오늘 아침 나와 그는 말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대체 뭐가…….

“…….”

“…….”

“이선?”

“…어….”

아니 이걸…… 이렇게 하필 지금, 물어보는 건 좀…….

나는 차마 말을 더 받지 못하고 팽팽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한 머릿속에서 뭔가 둘러댈 핑계가 없을지 쥐어짜 내기 시작했다.

“하, 하하하, 하, 션. 그건, 정말- 별거 아닌 이유로 그런 건데.”

“분장으로도 어떻게 안 될 만큼 엉망이 되어 와 놓고, ……뭐가 별게 아닌지 모르겠는걸.”

아니 하필 이 진지하고, 훈훈하고, 드디어 말끔해진 정갈한 분위기에!

이미 좀 늦었을지도 모르겠지만 나도 좀 덜 쓰레기이고 싶다는 작고 귀여운 욕망이 마음 어딘가에 있기는 했다고. 진짜야!

션은 대답 대신 우물쭈물하는 나를 잠시간 보더니, 퍽 양보 없이 입을 열었다.

“이 대답은 하나로 카운트 못 해.”

“그, 그래. 인정해. 하나 더 물어봐.”

간신히 빠져나가 숨통이 트였다 싶었다.

하지만 될 놈은 뭐든 된다고, 션, 이 녀석은 아주 가는 곳마다 잭팟이었다.

“그럼 좀 전에 촬영장에서는 왜 나와 같이 못 간다고 했던 거였어?”

“……어엉?”

“처음에는 같이 가겠다고 해 놓고 갑자기… 말도 하지 않으려고 하고. 저택에 와서는 뭐 다른 곳에 연락하는 것 같지도 않던데.”

솔직히 이건 빠져나갈 구석이 많은 질문이었다.

사실, 어쩌면 션도 내심 몇 개의 답쯤은 미리 추려 뒀을지도 몰랐다.

예컨대 ‘그냥 그땐 너랑 같이 갈 기분이 아니었어.’라든가, ‘같이 가 봤자 지금처럼 솔직히 말해 주지 않을 것 같았어.’ 같은 종류로 말이다.

솔직히 눈 딱 감고 뻔뻔해질 수도 있었다.

저 자신이 골라 물어보는 것이면서도 혹시라도 제게 질려서 그랬다는 말이 나올까 봐 초조해하는 표정이 아니었다면- 또, 아주 아주 옅은 서운함이 떠도는 목소리만 아니었더라도 별 양심의 가책 없이 둘러댔을 텐데.

대체 내가 뭐라고 이렇게 그 대단한 자존심도 내려놓고 나란히 바닥에 앉아 눈을 마주쳐서는!

“…갈 때 알로에 젤 같은 걸 좀 사 가려고….”

“알로에 젤?”

고작 며칠 가까이서 보지 않았을 뿐인데 밤의 빛을 머금고 예쁘게 반짝이는 푸른빛이 왠지 속이 시릴 만큼 좋았다.

그래, 이렇게 내 손을 만지작거리며 별거 아닌 내 말 한 마디 한 마디, 작은 숨소리 하나까지 다 신경 쓰는 시선이 좋다.

아. 얜 정말 바보다.

오히려 내가 왜 미쳤다고 이런 애랑 사귀었지? 하고 뒤늦게 후회할까 봐 걱정해야 할 쪽은 나인데. 나는 이 순간까지도 요만큼이라도 더 닿고 싶어 하는 남자를 멋쩍게 턱을 긁적이면서 지켜보다가, 툭 혼잣말처럼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어젯밤에, 그…, 제모를 좀…… 했거든.”

그래. 마이클에게는 미안하지만, 확실히 이 막 얼어붙은 시간이 해빙되는 순간에 튀어나오기에는 정말 어울리지 않는 단어다.

나도 이상하다는 걸 안다.

하지만 션의 표정만큼 이상하지는 않았을 거다.

“……제모?”

“응. 제모.”

“설마 내가 아는 그 제모?”

“으응….”

나와 눈도 마주치지 못하며 말을 잇던 남자가 얼마나 전전긍긍했을지는 안 봐도 뻔하다.

오늘 저녁 내게 쏟아 냈던 것들을 몇 번이나 곱씹으며 그 자신을 탓하기도 했겠지. 평소에도 썩 잠이 많지 않은 편인 션 역시 순탄한 밤을 보내진 못했을 거다.

“……이 와중에 제모할 생각이 들었어?”

“아니, 원랜 내일모레 웃옷 벗는 씬 있으니까 그거 땜에 그냥 깔끔하게만 하자 싶어서 간 건데.”

“그 밤중에? 심지어 어제 그럴 생각이 들었다고? 아니. 약속이 있어서 날 두고 가 본다고 한 게 그거 때문이었어? -뭐? 겨우 제모?”

“겨우 제모라니! 이게 얼마나… 프로페셔널한 건데에….”

그래.

그러니까 그 애틋하던 시선의 온도가 뚝뚝 떨어지는 게 실시간으로 보이는 게 새삼스럽지 않다는 뜻이다. 심지어 불과 몇 분 전까지 나를 향해 세상 달짝지근하게 이어 가던 목소리의 톤부터 달라진 채로 우다다 날 선 물음이 쏟아지고 있지 않나.

왠지 저 싸늘한 시선 속의 뜻도 모두 알 것 같다.

‘나는 온갖 마음고생 하면서 끙끙대고 있는데 넌 한가하게 제모 받을 생각까지 했어?’ 싶겠지.

아, 나도 안다고.

“-하, 그래. 참 깔끔하셔서 좋겠군!”

심지어 이 까칠한 반응까지야 익히 예상했던 바다.

암, 그렇고말고. 나는 그가 좀 전까지의 발그레한 홍조와는 다른 느낌으로 열 받기 시작한 걸 빤히 눈에 담다가 아주 아주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좋은지는 아직 잘 모르겠어.”

“뭐?”

“어쩌다 보니까, 그게, 자꾸 해 보면 좋다고 하길래 조금 궁금해서. 진짜 아주 조-금 궁금한 거였는데. 할인까지 좀 해 준다길래.”

정말 저 남자의 반응은 웬만해선 다 예상이 간다. 그런데, 대체 이 말을 듣고 어떤 표정을 할지만큼은… 정말 모르겠다.

“…아래까지 했거든….”

나는 내 말이 곧바로 이해되지 않는지 잠시 그 예쁜 미간을 좁히는 남자를 보며 입술을 혀로 적신 다음 저절로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부연 설명을 덧붙였다.

“웬만하면 그만하라고도 할 텐데 왜 부위가 부위라 정작 시작하고 나니까 움직이기는커녕 말 한마디 하는 것도 좀 쪽팔리고.”

“…….”

“심지어 본격적으로 들어가니까 너무 아픈 거야. 그렇게 아픈 건 줄 알았으면 나도 안 했는데, 자꾸 나한테 엄살 좀 그만 피우라고 하고. ……그래도 다행히 피는 안 봤다? 잘됐지?”

내 나름대로 가장 안심했던 내용을 밝게 덧붙였건만 션은 여전히 별 반응이 없다.

나는 설마 저 도련님이 내 말을 잘 이해하지 못했을까 싶어, 조금 더 친절해지기로 용기 내 마음먹었다.

“-어, 으음. 그러니까 지금의 난, 뭐랄까. 네가 본 게이 포르노 속의 그 상태라고나 할까.”

“그런 거 본 적 없어!”

“…어엇….”

솔직히 난 쟤랑 섹스하고 나서부터 대체 프로들은 어떻게 즐기시나 싶은 마음에 참고용으로 게이 포르노 몇 개 봤는데.

……이마저도 나만 한 짓이었다니. 썩고 고이고 물러 터진 나는, 영원히 저 순수함을 쫓아갈 수 없나 보다.

“어, 어쨌든. 알로에 젤 같은 거 바르면 관리에 좋다길래…… 가는 길에 약국에서 그거나 좀 사려고 했지, 뭐.”

“-그럼 오늘 아침에 눈 부어서 온 것도….”

저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 덕분에 뭐 대충 얼마나 순수하고 폭신폭신한 상상을 했는지는 뻔히 그려진다. 솔직히 나조차도 아침에 거울을 보고 이건 누가 봐도 전날 밤에 대성통곡한 몰골인데, 괜한 이야기가 돌겠다고 혀를 쯧쯧 차기도 했고 말이다.

덕분에 저도 모르게 대답 대신 헤헤, 하는 얼빠진 웃음이 흘러나오고 만다.

“야. 내가 뭐랬냐? 봐. 별거 아니라고 했잖냐.”

“…….”

“아니이. 진짜 더럽게 아프더라고… 나 참. 어떻게 세상 사람들은 이런 걸 받고 사는지 모르겠어.”

“…….”

하나뿐인 연인은 이제 머리를 짚은 채로 또다시 고개를 숙이고 있다.

“션.”

뭐 예상했듯이 별 대답은 없다.

“셔언~?”

“…후우….”

크게 심호흡하던 남자가 이제는 별안간 성큼성큼 창가로 가더니 창문 밖을 보기까지 한다. 나는 그의 뒤를 졸졸 따라가서 등허리를 콕콕 찔렀다.

“왜애.”

“…이선 박, 넌 내가 지난밤에… 정말 온갖 생각을 다 하면서… 있을 때. 대체 어떻게….”

저 목소리로 얼마 만에 듣는 풀네임이람.

사람의 감정이라는 게 눈으로 보이는 거였으면 지금 저 남자의 주변에는 뭐가 떠돌아다니고 있을까? 나는 턱을 긁적이며 한숨과 떨림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목소리로 말을 잇는 연인을 구경했다.

“…너란 사람은, 정말 어떻게… 그러고 있을 수가 있어….”

“아니, 뭐어.”

-설마 아래까지 하게 될 줄은 몰랐다는 말을 다시 한번 할까 싶던 나는, 얼마 안 가 내 쪽을 보지 않고 창밖만을 노려보다시피 하는 남자의 귓가가 손대면 붉은 물이 묻어날 것처럼 벌겋게 변한 걸 그제야 눈치챘다.

확실히 이건, 조금 전에 덜덜 떨며 말하던 때의 색과는 좀 다르다.

“션?”

“…….”

“자기야? 여보? 허니?”

“…….”

“……달링? 또 뭐 있냐. 내, 내 사랑?”

오.

이번에는 확실히 좀 고집이 있다.

웬만해선 자기야에 넘어오고, 못 해도 허니까지만 가도 거의 무장해제까지 가던 남자가 이번만큼은 꼼짝 않는다. 나는 그런 남자를 물끄러미 보다가, 이미 답을 알고 있는 질문을 툭 던졌다.

“이번에도 싫어?”

이건 아마 션 스펜서, 그에게도 꽤 익숙한 문장이었을 거다.

꿋꿋하리만큼 날 무시하던 애인이 그제야 울컥함을 감추지 못하는 눈으로 날 째려봤으니 말이다.

“정말….”

“…….”

“정말, 정말, 정말, 싫어.”

이 역시 일전에 한 번 들었던 말이다.

나는 옅은 장밋빛으로 곱게 뺨이 물든 션을 보며 좀 음흉하게 흐흥, 하고 웃었다. 물론 션은 그 웃음에 더욱 입술을 꽉 깨문 채 나를 노려보았다만, 안타깝게도 하나도 안 무섭다.

제발 저를 버리지 말라며 쩔쩔매고 매달리던 걸 이미 다 봤는걸.

“진짜? 정말 싫어?”

이렇게 묻기만 해도 도로 조용해지고 말 것 역시 뻔하고 말이다.

아 물론, 나도 온종일 곤두섰던 오늘 같은 날 너무 놀리는 건 좀 가혹한 일이라는 걸 모르지 않는다.

그저 고운 입을 일자로 다문 채 억울함이 뚝뚝 흘러넘치는 표정을 한 게 귀여워서 장난을 좀 친 것일 뿐이다. 나도 채찍과 당근 정도는 안다.

게다가 이 당근은 다른 사람이라면 줘도 안 가질지언정, 최소한 눈앞의 이 남자에게는 꽤 괜찮지 않을까?

“나 이거 너 때문에 한 건데.”

“…….”

“그래도 싫어?”

……물론 안 먹히면 “하나도 안 좋아하잖아요!” 하고 마이클에게 찾아가서 따질 거다.

간밤의 고통이 얼만데. 당연하지.

* * *

언제였던가. 주말에 션과 함께 늘어져 영화를 봤다.

그건 스태프 중 누군가에게 재밌다는 추천을 받아서 보게 된 근현대 배경의 미스터리 스릴러였는데, 알고 보니 미국 부유층의 어두운 비밀 어쩌고 하는 내용이었다. 사실 미리 줄거리를 알았다면 굳이 같이 보자고 하지 않았을 텐데, 미리 내용을 알고 보는 걸 싫어해서 제목만 보고 골랐다가 지뢰를 밟은 셈이었다.

어쨌든, 내가 하려던 얘기는 이게 아니고.

그 영화에는 굉장히 깐깐한 얼굴의 가정교사가 나온다.

누가 봐도 노골적으로 B사감에서 영향을 가득 받은 중년의 여성인데, 그녀는 제 고용주의 자식들을 지독하게 엄히 지도한다. 그녀의 교육은 대체로 깍듯한 기품을 우선시했지만 때로는 대체 이게 뭔가 싶은 것들도 있다.

영화를 보며 내가 가장 말도 안 된다고 혀를 내둘렀던 건 이거다.

‘공식적인 자리에서 허리를 숙이지 않는다’.

아니, 고개를 꼿꼿이 들고 우아하게 턱짓하라는 것까지는 이해하겠다.

그런데 세상에 물건이 떨어져도 직접 고개를 숙여 줍지 말란다. 나는 그때 션의 허벅지를 베고 누워 “저게 말이 되냐? 휴대폰 떨어트리면 버리고 갈 거야?” 하고 웃었었다.

하지만 그때 영화보다도 내 머리를 만지작거리는 일에 더 집중했던 남자가 조용히 했던 말이 뭔지 상상이나 가나?

바로 ‘보통 주변에서 먼저 주워 주고, 자리가 중요할수록 버리고라도 가라고 배워’였다.

완벽한 모습을 보이는 게 더 중요하다나 뭐라나.

“……저기요. 나 진심으로 하는 말인데. 안 해 줘도 돼. 정말이야.”

“너도 저번에 이렇게 하지 않았나?”

그리고 지금.

허리를 숙여 땅에 떨어진 것을 줍는 것조차 하지 않는 게 보통인 세상에서 살아왔던 남자는 내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다. 좀 더 정확히는- 욕조 벽에 등을 기대고 걸터앉은 내 다리 사이에 그 우아한 고개를 숙이려 하고 있다.

은은한 백색의 비앙코 카라라 타일 때문일까.

더운물의 샤워로 살짝 달아오른 션의 피부가 유독 대비되어 보인다.

“…그야… 그렇지만.”

“하고 싶어.”

“…….”

세상에, 키스만 해도 벌겋게 익어서 고개가 따라오던 남자는 어디로 간 거야. 내 귀여운 스펜서를 돌려주라고!

늦바람이 무섭다더니, 이제는 뭐 자연스럽게 같은 샤워 부스로 들어오려는 장신의 남자를 따로 씻으라며 밀어낸 다음 한참이나 혼자 온몸을 뽀득뽀득 씻었는데도 이건 좀… 여전히 그렇다.

나는 욕조 안으로 들어간 목욕가운의 끄트머리가 가득 물을 먹고 있는 걸 괜히 꺼내 쥐어짜며 비척비척 말을 이었다.

“난 굳이…, 오늘은 안 했으면 싶은데.”

“왜?”

“…게이 포르노도 안 봤다며.”

“그게 무슨 상관인데.”

“-그니까, 그게- 아무것도 없는…… 걸…… 보는 거 자체가 처음일 거 아니야.”

이런 표현이 어울리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내 앞에 예쁘게 무릎 꿇고 앉아 올려다보는 남자의 단단한 턱선을 나도 모르게 손끝으로 그리며 툭 혼잣말처럼 말을 이었다.

“…좀… 싫을 수도 있을걸…?”

“나 때문에 한 거라면서.”

그 고행의 길에서 소리 지를 때마다 마이클이 “남자친구가 어어엄청 좋아해! 진짜야!”를 귀에 못이 박이게 외쳤으니, 그야 그렇다만….

하지만 아무리 얘가 철벽 동정남에서 발랑 까지다 못해 완전탈피 후 멋대로 날아다니기 직전까지 무럭무럭 자랐대도, 모든 경력이 나와 한 게 전부인 이상 비위가 좋을지는 모르겠다.

솔직히 이렇게 딱 기분 좋을 정도로 열이 오른 분위기가 가운을 벗고 나서 팍 식으면 나나, 녀석이나 좋을 건 없는데.

션의 말이 이어진 건 그때였다.

“전에도 말했었지. 이선, 넌 좀 자기 학대적인 면이 있다고.”

살짝 벌어진 가운 사이로 튀어나온 무릎에 마디마디가 딱딱한 손이 닿았다.

습한 욕실 특유의 공기 때문일까. 나는 그 단정한 손가락이 묘하게 끈적이듯 달라붙는 것 같아 반사적으로 큰 숨을 들이켰다.

낮고 우아한 목소리가 나직하게 이어진다.

“늘 좋은 게 좋은 거라며 대충 넘어가는 편이라는 것도 알아.”

“……내가 그래?”

“쉽게, 또 빨리 데워지는 기분은 편하기는 하지. 생각도 감정도 쏟을 필요 없으니까. 어쩌다 손댔던 약이나 대충 뒹굴고 마는 하룻밤도 결국엔 다 비슷한 선상이었을 거고.”

“…….”

난 내심 눈앞의 남자와 요 몇 달 하루도 빠짐없이 붙어 있으면서 그를 퍽 잘 알게 됐다고 자신했다. 저택 밖의 사람들은 모르는 표정도, 사소한 습관이나 취향도, 션과 함께하는 것이 많아질수록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 순간 깨닫는다.

그건 비단 나만의 일이 아니었다.

내가 션 스펜서라는 인간을 잘 알게 된 것만큼- 상대인 션 역시 나란 인간을 꿰뚫어 보기 시작한 건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나와 진지해지는 것도 무서워했잖아. 아니, 그건 현재 진행형인가?”

“…그야….”

두꺼운 목욕가운을 둘러쓰고 있는데도 왠지 남은 가죽 하나 없이 헐벗게 된 기분이라, 나는 션의 손이 천천히 가운의 매듭을 풀기 시작하는 걸 보며 작게 어깨를 움츠렸다. 아마 이 숨 막히게 다정한 남자는 그마저도 눈치챘을 거다.

내가 그의 조심스러움을 짚어 낸 것처럼 말이다.

“뭐. 사실… 이건 나도 잘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옅은 웃음기를 머금고 느리게 이어지는 말이, 손짓이 슬쩍 지나가는 온기보다 더 간지럽게 다가와 스쳤다.

“내가 하고 싶은 건 잠시 좋고 마는 게 아니라 이선 너와 하는 섹스니까, 그렇게 겁먹을 필요는 없어.”

“…….”

“싫을 리가 없잖아.”

“-언제는 정말 정말 정말 싫다며.”

낮게 터진 웃음소리에 왠지 속이 먹먹해지는 것도 같다.

시릴 만큼 올곧은 말과 지독히 선명한 의도를 품은 손이 함께 움직이는 건 생각보다 더 야했다.

나는 내 허벅지를 잡아 벌리는 연인을 보며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너 정말 내가 처음이라 다행이네.”

“왜?”

“다른 사람한테 먼저 그랬어 봐. 나한테는 기회도 안 왔겠어.”

“그럴 리가.”

나를 올려다보는 남자의 눈이 보기 좋게 휘었다.

하지만 이건 정말 농담이 아니다.

이걸 놓치고 싶은 멍청이가 있을까? 나조차도 운 좋게 쥐어진 걸 놓지 않을 셈인데.

샤워 가운의 도톰한 천이 열리는 순간 나는 허벅지 안쪽으로 훅 와 닿는 뜨뜻미지근하고 습한 공기에 반사적으로 살짝 몸을 들썩였다.

소위 못 볼 꼴을 다 본 사이면 이 정도는 웃어넘길 여유가 생길 줄 알았는데, 순순히 벌어진 내 다리 사이에 션이 앉아 있어서일까.

오늘은 또 평소와는 느낌이 달랐다.

수치와 흥분이 뒤섞인 들뜸에 왠지 입이 바짝 마른다. 매끈하게 정리된 내 중심에 남자의 시선이 닿는 순간 저도 모르게 고개가 다른 쪽으로 돌아간다.

“-흐읏!”

살짝 체온이 낮은 손이 천천히 허벅지 안쪽 부드러운 곳으로 움직일수록 허벅지가 오므라든다. 그건 내 의지로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사람은 자극을 바라면서도 한편으로는 피하고 싶어 하는 게 본능적인 거니까.

하지만 명령에 익숙한 다정한 애인은, 내 그런 당연한 행동마저 순순히 받아 주지 않겠다는 듯 제 손을 가두는 허벅지를 쫙 잡아 벌렸다.

“…….”

살짝 등이 벽에 짓눌리듯 밀린 채로 다리를 벌려 매끈하게 손질된 아래가 부끄러울 틈도 없이 훤히 드러낸 자세에 왠지 벌써 눈앞이 아득해진다.

이제껏 션 스펜서는 나와 섹스할 때마다 민망하리만치 내 얼굴이나 몸을 뜯어 살피기는 했었지만…… 이건 좀 다른 선상의 문제다.

자연스럽게 다리를 벌리고는 남은 음모 하나 없이 훤히 모양을 드러낸 중심을 코앞에서 내려다보는 건, -아.

“……원래도 체모가 많은 편은 아니었지 않아?”

“그, 그야… 그랬지만, -읏!”

이건 민망하다는 수준으로는 표현이 안 된다.

나는 복근 바로 아래를 간지럽히던 다른 손이 천천히 내려오며 부드러운 맨피부를 손가락 끝으로 그리기 시작하는 감각에 이젠 아예 대놓고 입술을 깨문 채로 커지려는 숨소리를 눌러 참았다.

자꾸 애꿎은 발가락 끝만 바짝 곱고, 배와 허벅지에 힘이 들어가 벌벌 떨릴 때마다 흥분을 감출 어떤 것도 없는 중심으로 피가 몰리는 것 같았다.

크고 마디마디가 딱딱한 손이 긴장으로 슬슬 반응하기 시작한 내 중심을 가볍게 쥐었다가, 그 뒤로 연결된 고환과 회음부까지 집요하리만치 섬세하게 움직이기 시작한다.

“…흐으….”

나는 마치 손가락 끝에 닿는 감촉을 무엇 하나 빼놓지 않고 확인하려는 듯, 상냥하고 음탕하게 움직이는 팔을 저도 모르게 세게 틀어잡았다.

허벅지 역시 어느새 반쯤은 오므라든 채였다.

“왜 포르노 속에서 나온다고 했는지 알겠어.”

“…….”

“굉장히… 야하네.”

욕실에서 울리는 웃음기 어린 낮은 목소리에 왠지 쭈뼛하니 소름이 돋는다. 금방이라도 내 아래를 입안 가득 삼킬 것처럼 연인이 고개가 가까워진 것도 신경 쓰였다.

아래로, 자꾸 간지러운 더운 숨이 닿는다. 다정하고 제멋대로인 연인은 내 다리를 잡아 벌리며 말을 이어 갔다.

“이선.”

“……-어, 으응?”

“여기 제모는 어떻게 하는 거야?”

솔직히 난 애써 괜찮은 척을 하고 있었을 뿐이지, 이쯤에서 이미 머릿속이 몇 번이나 하얗게 변한 지 오래였다. 그저 감촉을 확인하려는 듯 성기를 쥐고 살살 만진 게 전부인데 벌써 피가 몰리고 땅기기 시작한 중심만으로도 부끄러워 죽을 것만 같았다고.

그래서 그 나직한 목소리를 따라 술술 입을 열고 말았던 거다.

세상 다정한 은근한 유도신문이었다는 것도 모르고!

“제, 제모? 어…, 앞은 지금 이 자세로 등만 대고 누워서 해.”

“‘앞’은?”

그래도 다행인 건 나란 인간이 생존 위기 하나는 곧잘 눈치챈다는 거였다.

“그럼 뒤는?”

나는 내 말 중 하나를 콕 집어 되묻는 목소리에 몇 초간 멍하게 눈을 끔벅이며 조금 전의 대화를 되짚다가, 머잖아 정신이 퍼뜩 들었다. 샤워하다 손이 닿으면 나조차도 적응이 안 될 정도로 말끔해진 아래를 보는 시선의 온도가 끈덕졌다.

“…그…, 션. 있지. 이런 올누드 제모가 원래….”

“…….”

“-나, 나도 이건 이번이 처음이었다니까아?”

제모의 메커니즘을 생각해 보시라.

……어쩔 도리가 없다.

앞을 할 땐 다리를 벌리고, 뒤를 할 땐 엎드린 채 허리를 쳐들어야 한다.

앞으로 죽을 때까지 션 스펜서에게는 털어놓지 않을 부끄러운 그날의 진실이지만, 사실 난 마이클 앞에서 조금 섰다.

아, 여러분. 잠깐만, 잠깐만, 잠깐만!

제발 날 그런 눈으로 보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건 정말 불가항력이다!

진짜다. 날 변태처럼 생각하지는 말아 줘. 나도 처음에는 긴장 때문에 그런 건 생각도 못 할 정도로 죽어 있었다고.

하지만 세상 아침에 자고 일어나기만 해도 멋대로 자유 의지를 갖는 중심이 누군가의 축축한 손에 계속해서 세상 정성스럽게 만져지면 그게…… 진짜 안 설 수가 없다고. 아, 억울해.

나도 그땐 딱 혀라도 깨물고 죽고 싶었다.

마이클이야 “걱정 마, 걱정 마. 다 그래.” 하고 다정히 날 달랬다지만, 알 게 뭐냐. 십 년을 알고 지낸 친구가 성기를 만지는데 그게 멋대로 서면 딱 뒈지고 싶지 않은 인간 따윈 없다.

……물론 얼마 안 가 실제로도 ‘죽기는’ 했다.

점차 안쪽의 깊은 곳으로 왁싱을 진행할수록 진짜 난 왜 아직도 살아 있나 싶었거든.

마이클은 상처 하나 없이 잘되고 있는데 엄살이라고 했지만, 본인도 받아 보면 그 말을 못 할 거다! 이래서 최소한 본인도 한 번은 해 보고 나서 말해야 한다니까.

속으로 마이클을 흉보고 있던 걸 어떻게 눈치라도 챈 걸까.

내 연인은 곧바로 거짓말쟁이 친구를 집어 물었다.

“누가 했어?”

“어? 그으게. …시, 십 년 가까이 찾아가는 가게의 왁서야. 결혼도 했고, 정말 세련된 부인에 딸도 한 명 있어.”

“…….”

“헤일리라고, 이번에 고등학교 올라가서 축구부까지 들었다는데. 네 팬이래. 그리고….”

사실 마이클은 헤일리가 좀 괜찮다 싶으면 다 게이라고 소리쳤다며, ‘션 스펜서의 팬이었다.’라는 과거형으로 말했지만 이런 선의의 거짓말은 괜찮으리라 믿는다.

망할. 대체 왜 이런 소리까지 주절대는지 모르겠다.

이게 다 보송보송해진 아래를 슬슬 얼굴로 열이 오를 만큼 뜯어 살피는 저…… 시선 때문이다.

“또, 나 말고도 이런 왁싱 받는 사람이 장부의 두 페이지는 넘는다고….”

“-나도 알아.”

하지만 션은 그런 내 헛소리를 뜻 모를 짧은 말로 툭 잘라 냈다.

사실 난 그 말을 곧바로 이해하지 못했다.

뭘 알아? 설마 마이클을 안다고? 아니면 생각보다 올 누드 제모를 받는 성인 남성이 적잖다는 사실을?

잠시간 눈을 깜박이며 그의 대답을 해석하려고 애쓰던 나는, 이윽고 답을 찾아내지 못한 채로 “…응?” 하고 그의 말을 어설피 받았다.

욕조에서 보글보글 거품을 내는 온수의 더운 기운을 한 모금 삼킨 듯한 션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한심한 질문이었다는 거 나도 안다고.”

“…….”

“직업으로, 일로 신경 써 준 사람에게 얼마나 끔찍하게 멍청한 생각을 하는 건지도, 머리로는 다 알고 있어. ……그저 내가 이러는 게 한두 번이 아니라서 짜증 나는 것일 뿐이지.”

사실 나도 되묻고 싶었다.

그의 표현을 빌려, 머리로는 ‘이러는 게 한두 번이 아니라서’의 뜻이 뭔지 꼭 짚고 넘어가고 싶었다고.

하지만 그 낮은 문장을 중얼거리듯 덧붙인 다음, 내 다리 사이에 머리를 파묻은 남자의 부드러운 점막 속으로 중심이 쭉 빨려 들어가는 순간-

“…션, 잠깐만. 흣, 잠, 잠시만!”

우리끼리니 조금 더 솔직해져 보자.

난 오랄을 받는 게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서른 해 넘게 살면서 만났던 이들 중 몇 명과 드물게 했었다.

하지만 딱 그 정도가 다였다. 상대가 먼저 해 주겠다고 하거나 분위기에 취해서 가끔 했던 정도지, 먼저 해 달라고 한 적도 한 번도 없었고 이 행위에 특별히 좋아 죽거나 그러지도 않았다.

……아, 물론 좋긴 하지. 불감증이 아닌 이상 싫기는 어렵다. 그렇지만.

“잠깐만- 션, 우선, 뱉어 봐. 고마운데, 정말 고마운데 말이야. ……응?”

왜 그러냐는 듯 내 성기를 입에 문 채로 올려다보는 완벽한 남자의 모습에 머리가 찡하니 울린다.

이건 정말…… 안 되는데.

“…왜?”

“--마, 말하지, 마아!”

축축하고 부드러운 살덩이에 둘러싸인 채로 전해지는 진동은, 장난감 같은 게 주는 노골적인 자극과는 완전히 다른 선상의 것이다.

나는 션의 몸을 거의 다리로 잡아 조인 채로 녀석의 어깨를 세게 붙잡았다.

다리를 희미하게 떨고 있자니 예민하디 예민한 부분에 곧바로 따뜻한 숨이 닿는다. 그건 음모로 한 꺼풀 덮인 채로 미지근하게 전해지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배 속 깊은 곳을 찌릿하게 한다.

“후우, 제발. 션, 정말, 잠깐만이라도 뱉어. 빨리!”

“…….”

은밀한 부위로 곧바로 쏟아지는 뜨끈한 열기와 축축한 자극에 자꾸 다리가 움츠러든다.

…아. 망할. 나도 내가 이럴 줄 몰랐다.

하지만 거리낄 거 하나 없어진 중심을 션이 그의 입에 머금는 순간 진짜 눈앞이 핑하고 돌았다. 정말 그 표현으로밖엔 설명이 안 된다.

제모하고 나면 션이 좋아한댔지 내가 좋다는 말은 없었지 않나!

아니 설령 좋다고 해도 이건 정말 내가 가장 피하고 싶은 종류의 좋음이다. 제발. 난 단순한 게 좋다고.

이렇게 도망칠 수 있을 것 같으면서도- 실상은 도망칠 수 없는, 저 깊은 곳에서 천천히 열이 간지럽게 올라오는 것 같은 들뜸은 정말 딱…… 질색이다.

“-흐윽, 아, 아, 그만, 하지, 마아, …히이익!”

내 성기를 입에 문 남자의 머리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한다.

이를 세우지 않고 입안 가득 기둥을 물어 삼켰다가 천천히 빠져나가며 축축해진 기둥이 바깥의 공기와 닿을 때마다 온몸에 옅은 전기가 인다. 저절로 발가락 끝이 오므라들고 허벅지가 멋대로 벌벌 떨리는 건 말할 것도 없다.

부드럽고 따뜻한 점막이 다시 한번 크게 내 것을 깊게 감싸자 저도 모르게 헉, 하고 숨이 날카로워지며 허리가 들뜬다.

망할. 성감에 스위치라는 게 있다면 지금의 난 그게 완전히 고장 난 상태일 거다.

션의 혀가 이미 단단해지기 시작한 기둥의 끝을 긁는다. 그건 서툴기 짝이 없었지만, 서툴렀기에 더욱 예상할 수 없게 움직였다.

“아, 아읏, 흐……!”

시각적인 자극은 또 어떤가?

그를 어떻게든 밀어내려는 내게서 우스울 정도로 쉽게 버티면서 고개를 앞뒤로 움직이는 션 스펜서라니.

언제나 우아한 단어로 짜인 문장만 담던 오만한 남자의 입이 같은 남자의 성기를 한껏 머금은 채 힘을 주어 빨면서, 그 긴 속눈썹을 깜박이며 나와 눈을 마주치는 건…….

대체 그 금욕적인 얼굴이 어디로 간 건지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음란하기 짝이 없다.

성직자의 옷을 입고 있던 악마래도 믿겠다.

정말이지 그건 꽤 설득력 있는 가설이다.

“이선.”

“…너, 흐으, 힉, 아, 앗!”

“난 사실 네가 ‘좋아한다’라는 게 어떤 건지…… 솔직히 이제껏 좀 자신이 없었거든.”

“완전히, 빼고, 말해, -션 스펜서!”

몸을 뒤틀며 중심의 자극에서 도망치려는 내 허리를 세게 붙잡고 멋대로 가지고 놀 듯 물고 빨더니, 기어코 성기 끝을 살짝 입술에 댄 채로 말하는 것 좀 보라고.

한없이 예민한 곳에 닿은 부드러운 입술이 전하는 진동에 왠지 옅은 전기마저 통하는 것 같다. 저건 분명히 고의다!

“그런데 이제는 확실히 알겠어.”

마냥 허풍은 아닌 선전포고다.

확실히 그 순진무구했던 션 스펜서는 이제 슬슬 감을 잡기 시작한 것 같다. ……망할. 내 쪽도 문제다. 자극을 기대하는 곳이 기묘하게 간질거리기 시작하는 게, 저절로 허리가 들썩일 만큼… 이상하다.

나는 벌써 사정하는 것만큼은 절대 않겠다고 이를 악물고 버티다가, 달뜬 숨이 조금 가시자마자 억울함을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흐으, 너, 너어! 몇 달 전까지 제대로 키스해 본 것도… 내가 처음이었잖아!”

“맞아.”

대답은 더럽게 잘하지!

“…그럼 아직은 좀 귀여워도 되잖아. 흑, 대체 뭐냐고!”

“원래 뭐든 좀 빨리 배우는 편이라.”

“똑똑해서 좋겠네!”

“말은 바로 해야지. 이선. 너도 좋은 거잖아?”

혹자들은 션 스펜서의 무표정한 얼굴에 열광한다.

하지만 그건 정말 모르는 소리다. 션 스펜서는 웃는 쪽이 훨씬 낫다.

특히 그려 만든 미소보다 지금처럼 정말 진심으로 웃을 땐 정말 하려던 말도 쏙 들어갈 정도로 근사하다.

그래. 지금 살랑살랑 간지러운 미소를 흘리는 저 남자는 꽤 기분이 좋다.

난 그 들뜸이 내가 그의 펠라티오에 쩔쩔매고 더운 신음을 토하며 반응했기 때문이라는 게 숨도 쉬기 어려울 만큼 부끄러웠다.

잠시 할 말을 잃고 있으려니 션은 다시 내 성기를 빨려는 듯 머리를 숙인다. 나는 가까스로 그런 녀석을 붙잡아 급히 물었다.

“-치, 침실 가면 안 돼?”

나 방금 꽤 바보같이 더듬지 않았나?

혀끝까지 열이 올라 발음조차 둔하게 풀렸다.

감히 이유를 찾자면 이건 다 션 스펜서, 이 새끼 때문이다. 단단해진 내 것을 코앞에 두고 날 올려다보는 그의 뺨에 옅은 홍조가 올라 있는 게 질릴 만큼 야한 탓이라고.

그 붉은 기와는 완전히 상반된 푸른 눈이 평소보다 훨씬 짙어 보이는 것도, 다, 정말 다 얘 문제야.

그리고 진짜…… 더 빨리면 큰일 날 것 같다. 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그래.

“좋아. 그러고 보니 무릎이 좀 아픈 것도 같거든.”

“…….”

앞서 했던 말을 정정해야겠다.

나는 허리조차 굽히지 않도록 교육받는 션 스펜서를 내 다리 사이에 무릎 꿇게 한 거로도 모자라, 그의 무릎에 멍까지 들게 한 사람이 되게 생겼다.

왠지 눈을 마주치기 힘들다.

그건 요 며칠 그와의 냉전에서 시선을 피하던 때와는 좀 다르다.

아무리 술을 조금 마셨었다고는 하지만 뻔뻔하게 녀석의 무릎 위에 올라타던 이선 박은 대체 어디로 숨었지. 대체 이제 와서 왜 이렇게…… 창피한 거냐고!

확실히 션의 말이 맞는 것 같다. 난 뼛속까지 부정적인 자기 학대에 찌들 만큼 찌든 인간이다.

“뭐- 뭐 하는 거야?”

…그리고 그런 인간에게 내 쾌락이 기쁘다는 듯 웃는 남자는 정말 위험하다.

난 아무렇지도 않게 나를 쑥 들어 올리는 힘에 파들대고 튀어 오르며 쉰 목소리로 물었다. 물론 그런 내 동요 같은 건 이 장신의 사내에게는 간지럽지도 않은 모양이었겠지만.

“안아서 옮기는 건데.”

“…너 내 키가 몇이고, 몸무게가 몇인 줄은 알아?”

“글쎄. 나보다 작고, 나보다 가볍다는 건 알겠군. 그리고 무엇보다-”

착실히 물을 먹어 더 무거워졌을 목욕가운까지 통째로 나를 안아 올린 션의 말이 이어졌다.

“앞으로 익숙해져야 할 거야.”

기뻐해야 할까?

솔직히 기쁘기는커녕 조금 두렵기만 하다.

익숙해진다는 게, 또 당연해진다는 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 이미 듬성듬성해지고 큰 공백이 몇 개쯤 생긴 내 인생에 누군가를 채워 넣는 게 정말로 잘하는 일일까?

익숙하고 당연한 게 사라졌을 때의 기분을 또 겪기에는, 나란 인간은 이미 이 물 먹은 샤워 가운처럼 늘어진 채라 이겨 낼 자신이 없는데.

왠지 눈이 시큰해질 정도로 따뜻한 남자의 품에서 나는 션의 그 자신만만한 말을 곱씹었다.

한편, 나를 사뿐하게 안은 션은 내가 걷는 것보다 아마 몇 초는 더 빨리 침실에 도착했다.

아래가 완전히 정리되어서 그런지 이상할 정도로 자극이 심해서 잠시 시간을 벌려고 한 거였는데 이 남자의 다리 길이로는 어림없는 수작이었나 보다.

저 푹신한 침대 시트가 스치는 것조차 간지러우면 어떡하지. 어떻게 입이라도 틀어막아야 하나. 나는 눕기 전부터 내심 걱정을 했다.

하지만 그건 참 괜한 기우였다.

“……션?”

“침실로 데려다 달라며.”

틀린 말은 아니다.

침실은 침실이다. 다만, 내 잘난 연인은 침실의 한쪽 벽을 차지한 커다란 창문의 턱에 나를 앉혀 뒀을 뿐이다. 나는 그의 말에 뭐라 대답할 말을 잃고 멍청하게 눈만 깜박였다.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면서 보란 듯이 휘는 눈꼬리 끝에 걸린 희미한 장난기에 심장이 달음박질친다.

“야. 마, 말도 안 돼. 설마? …아니지?”

“뭐가 말도 안 되는데?”

간지러운 대답에 내 시선은 곧바로 창문 밖을 향했다. 저택의 정원은 차분한 어둠이 깔려 있다.

하지만 문제가 없는 건 아니다.

“……저쪽 네 건물에서 사람들 돌아다니는 거 여기서도 보이잖아!”

바로 이 동관의 침실이 서관의 긴 복도와 마주 보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동관과 서관은 충분히 떨어져 있기는 하다. 하지만 사람 마음이라는 게 어쩔 수 없다고! 하지만 날 이 창틀에 앉힌 남자는 보란 듯이 내 다리를 잡아 벌려 내 사타구니를 그의 중심에 붙이며 태연하게 말을 받았다.

“안 보여.”

“아냐. 분명히 보여. 내가 보이는데, 저쪽에서 안 보일 리가 없잖아. 저기 봐!”

“아무도 신경 안 쓰니까 걱정할 필요 없어.”

“허! 난 굉장히 신경 쓰여! 걱정도 된다고! 그렇지 않아도 별꼴을 다 보였는데-”

“하지만, 이선.”

부드러운 것 같지만 힘 있는 어조 때문일까.

머리끝까지 치솟은 열기로 발갛게 물이 든 눈앞의 연인은 영화 속 그 깐깐하지만 기품 있던 가정교사와 닮은 건 하나도 없는데, 순간적으로 그 단호함이 겹쳐 보였다.

“잔뜩 어지르고 간 서재를 몇 시간 동안 치운 사람들에게 젖은 침대까지 부탁하긴 미안하잖아.”

비겁한 새끼!

교활한 새끼!

악랄한 새끼!

나는 악마도 혀를 내두르고 도망갈 션 스펜서의 뻔뻔함에 감탄해 채 입을 다물지 못한 채 녀석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내가 그러든지 말든지, 션은 보란 듯이 웃으며 내 입술을 깨무는 여유마저 보였다.

문장 그대로 실오라기 하나 없이 매끈한 내 몸을 쉼 없이 덧그리고 매만지는 손은 또 얼마나 노골적인지 모른다.

고작 그와 이틀 떨어져 있었을 뿐인데 성적인 의도를 분명히 드러내는 시선이 묘하게 낯설기까지 하다. 1년 전의 이선 박에게 션 스펜서가 내 몸을 보고 흥분하게 될 거라고 하면, 대체 무슨 개소리냐며 얼마나 낄낄대고 웃을까.

“역시 여기서 바로 넣기엔 높이가 안 맞네.”

“알면 침대로….”

“-창틀 잡고 엎드려.”

정말 얜 초보 아니야. 진짜 아니라고.

내 다리를 벌리고 노골적으로 자신의 성기와 내 것을 부딪치게 하던 남자가 내놓은 상냥한 명령에, 난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할 의심 아닌 의심을 되뇌었다.

젠장, 하지만 나도 문제다.

그 말에 뾰족한 항의는커녕 또 시키는 대로 순순히 엎드리고 있지 않나.

“…흣…!”

같은 사내의 것을 물어 드는 것에 익숙해진 뒤가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션의 손가락을 받아먹는다.

멋대로 내 은밀한 사이를 한껏 벌리는 손길은 꽤 거칠게 느껴질 만큼 음탕했다. 따끈한 샤워로 한껏 나른해진 구멍이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기대감 가득한 긴장으로 꿈틀거린다.

“여기도 깨끗하네.”

그걸 살피는 시선 역시, 직접 보지 않아도 전해질 만큼 선명했고 말이다.

“이선 네 말대로 실력은 좋은 사람인 것 같아.”

“…….”

“이제까지 안 아프게 하려고 그렇게 공들인 곳에, 상처 하나라도 있으면 꽤 속상할 뻔했는데 말이야.”

다정한 걱정인지 음담패설인지 모를 문장에 등까지 뜨거워지는 것 같다.

왠지 무릎에 힘이 빠질 것만 같아서 나는 주먹까지 움켜쥐며 힘을 주어 바로 섰다.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지금 내 뒤는 이성이 익히 아는 수치심과는 완전히 따로 놀고 있다.

자꾸 엉덩이가 들썩인다.

션 스펜서에게 키스를, 섹스의 시작을 알려 준 건 내가 맞을 거다.

하지만 이 뒤가 주는 쾌감을 알려 준 건 지금 내 엉덩이골에 자신의 기둥을 애태우듯 비비는 남자다.

이제까지 내 스스로가 그렇게 학습력이 좋은 편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가르쳐 주는 사람이 특별한 탓일까. 아슬아슬한 곳까지 퍽퍽 치닫는 그 감각을 떠올리기만 해도 입이 바짝바짝 마를 만큼 잘 배워 버렸다.

기분 좋은 곳을 아슬아슬하게 빗나가 쑤시다가, 몸이 달아 헐떡이며 이름을 부르면 그제야 입 맞추며 느끼는 부분을 그대로 내리꽂아 휘젓는 순간 같은 건 애초에 모르는 게 나았을지도 모르겠다.

“쓸데없는 말 하지 말고 빨리 넣기나 해….”

기어코 나온 재촉에 션이 낮게 웃었다.

난 사실 그 웃음의 뜻이 나를 놀리려는 것인 줄 알았다.

목욕 후의 물기인지, 혹은 그가 정성껏 핥고 빨아 준 흔적인지, 그것도 아니라면 선액을 흘리기 시작한 그의 것인지 모를 습기 속에서 감질나게 문지르던 기둥이 내 명령을 따르듯 그 순간 한 번에 뒤를 꿰뚫을 줄도 모르고 말이다.

“--히익, 읏, 흐아앗!”

“확실히…, 후우, 이건, 좋은 점이 있어, 이선.”

퍽, 하고 느리고 크게 추잡질 할 때마다 허벅지가 후들거렸다.

“내 것이 들어가서 구멍이 벌어지는 것도, 네 앞이 흔들리는 것도 잘 보여. …마음에 드는데.”

“시, 끄러, -흣, 으응, 아…, 흐윽!”

왠지 느긋한 목소리에 이를 갈며 대답하자 션이 내 어깨를 이를 세워 깨물었다.

망할. 이건 너무 일방적인 판이다.

멋대로 흥분한 뒤로는 두꺼운 기둥이 뿌리 끝까지 처박히며 어느새 들떠 반응하는 지점을 정확하게 찍어 눌렀고, 커다란 손은 그렇지 않아도 닿는 곳마다 예민해진 앞을 멋대로 희롱했다.

흥분해 꺼떡거리는 앞을 자극할 때마다 민망할 정도로 뒤를 조이며 남자를 졸라 대는 나를 스스로도 믿기 힘들다. 심지어는 더 세게 해 달라는 말마저 목구멍까지 올라와 간당거린다.

“아, 아앙, 흣, 아, 아, …히잇!”

하지만 이런 끔찍한 소리를 내는 주제에 그런 말까지 하고 싶지는 않다고!

게다가 갈수록 몸이 밀리는 채로 처박히고 있으면서 더 세게 해 달라고 했다가 무슨 꼴을 보게 될지 무섭기도 하다.

그렇지 않아도 민감해진 뒤로 뿌리 끝까지 성기가 처박힐 때마다 남자의 까슬한 음모가 닿는다. 정말 미친 것 같다. 살다 살다 이 감촉에마저 세우게 될 줄은 몰랐는데.

나는 숨을 헐떡이며 저도 모르게 서늘한 창문에 이마를 기댔다.

그렇게나 질색한 커다란 창문이건만, 몸 안 깊은 곳부터 들끓는 열기 앞에서는 다른 수가 없었다.

-심지어 그게 일방적인 수세에 몰렸던 나를 도와줄 아군이라는 사실까지도 얼마 안 가 깨달을 수 있었고 말이다.

“…이선. 힘들면 그냥 편히 있어. 잡아 줄 테니까.”

내 허리를 휘어잡은 뒤 깊게 삽입된 성기를 뭉근하게 돌리는 남자가 꽤 선심 쓰듯 말했다. 나는 그 낮은 목소리 앞에서 얌전히 헐떡이고 순종하는 척하면서 눈살을 찌푸렸다.

녀석은 아마 내가 모를 거로 생각하며 여유를 부리고 있겠지.

이 널찍한 창문은 내 숨이 부딪치면서 낸 뿌연 입김 말고는 티끌 하나 없이 말끔하다.

그 말인즉슨, 자꾸 뿌옇게 변하는 시야로도 유리에 비치는 남자의 얼굴 정도는 훔쳐볼 수 있다는 뜻이다.

“하, 하아, 하핫, …잘난 척, 하지, …마. 션 스펜서.”

뚝뚝 끊어지는 목소리로 엄포를 놓아 봤자 그다지 위협적이지 않다는 것쯤은 안다.

그렇지만 자꾸 웃음이 나는 걸 어떡한단 말인가.

창문에 비친 남자의 표정은 느긋하게 야한 말이나 하며 연인을 쥐락펴락하려는 쪽과는 완전히 동떨어져 있는 걸.

지금도 그렇다.

벌벌 떠는 내 목소리가 뭐라고, 양 뺨에 발갛게 홍조가 오른 남자가 혹시라도 내가 많이 힘드나 싶은지 제 팔로 내 허리를 바로 고쳐 안는 게 보인다.

언제였던가 그냥 멋대로 박고 움직여도 된다고 말했던 것 같은데, 아무래도 얘는 머리꼭지까지 흥분한 채로도 나를 먼저 볼 거다. 내 어깨와 등에 정신없이 입을 맞추다가도 창틀을 손톱으로 움켜쥐기라도 하면 그 뭉툭하기 짝이 없는 손가락 끝을 곧바로 제 손으로 덮어 쥐면서 무슨, 내 구멍이 어떻고 내 앞이 어떻다는 거야?

-하여간 저 잘난 맛에 살았던 놈 아니랄까 봐 입만 살아서는.

“션. 그만, 해 봐, …그만, 잠깐, 만!”

나는 뻣뻣하게 잘 움직이지 않는 손으로 내게 깊게 자신의 것을 밀어 넣은 남자의 팔을 붙잡았다. 애초에 허벅지가 덜덜 떨려서 이 이상 창틀을 짚고 서 있는 게 어렵기도 했다.

금방이라도 사정할 것처럼 딱딱해진 기둥이 벌어진 구멍에서 빠져나오며 허벅지를 건드리는 것만으로도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왜. 아파?”

그래. 나도 안다. 확실히 이 남자는 내겐 꽤 큰 욕심이다.

하지만 난 가진 게 별로 없어서 운 좋게 내 손에 떨어진 걸 못 놓을 것 같다.

머리끝까지 치솟은 쾌락과 흥분 위로 옅은 걱정을 띄운 남자에게 숨을 고르며 “키스하고 싶어.” 하고 중얼거리자, 잠시 멈칫했던 남자가 숨을 쉴 여유조차 없이 내게 입술을 겹쳐 왔다.

꽤 키스가 늘었다고 생각했는데, 이미 그는 그 적당한 모양새조차 흉내 낼 수 없을 정도로 급해 보였다. 그 조급함이 싫지는 않다.

얼마나 그렇게 정신없이 혀를 섞고 있었을까, 션은 반쯤 흐느적대는 내 허벅지 하나를 들어 올려 받친 채로 다시 한번 깊게 들어왔다.

뿌옇게 변한 시야로도 평소엔 맑은 채도였던 푸른 눈이 유독 짙고 탁해진 게 보인다.

어딜 가서 단 한 번도 작다는 말을 들어 본 적 없었는데, 나보다 눈높이도 체격도 큰 남자가 선 채로 삽입하니 한계까지 당겨진 다리가 벌벌 떨렸다.

“션, 이거, 너무… 깊어서- 아, 흐으, ……읏!”

그저 평범한 성인 남성의 유연함을 가진 몸이건만 선 채로 곧장 빠르게 허릿짓을 시작한 남자의 침입 앞에서는 감히 생각지도 못했던 방향으로 허리가 뒤틀린다.

단단히 몸을 붙잡지 않은 션의 다른 손이 잔털 하나 없이 매끈해진 성기와 회음부 사이를 멋대로 희롱할 때마다 참을성 없는 흥분이 수치를 잃고 울컥 터져 나오는 건 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그보다 더 머리를 찡하게 울리는 건 내 귀를 짓이기듯이 입술을 댄 채 헐떡이며 속삭이는 낮은 목소리였다.

“당장 나랑, 똑같이….”

“흐읏, 아, 아아, 제발, 아, 후으-!”

“…똑같이, 사랑해 달라는 말은… 안 할게. 넌 누구보다 겁이 많은 사람이라는 걸, 잘 아니까.”

사랑이라.

흔하디흔한 단어다.

세상의 모든 영화에서 늘 지겹도록 다루는 말 아닌가. 그래서 가끔은 그 불변의 단어를 입에 담는 영화 속 주인공들을 보며 지겹지도 않아, 하고 생각했었는데.

뭘 몰랐던 건 내 쪽이다. 아마 그들은 이 식상한 단어가 자신을 향하는 순간 모든 의미가 달라진다는 것을- 나보다도 잘 알았었나 보다. 나는 션이 내 귓가에 대고 “또, 그게 싫지도 않고.” 하고 작게 덧붙이는 걸 들으며 저도 모르게 어깨를 떨었다.

깊게 내 안을 헤집고 찌르는 침입 앞에서 결국 간신히 버티던 한쪽 다리마저 힘이 풀릴 것 같아, 나는 크게 헐떡이면서 모든 힘을 끌어모아 날 붙잡던 남자를 간신히 밀어냈다.

하지만 그 뜨끈한 품에서 벗어나 바닥에 주저앉는 건 그리 훌륭한 선택지는 아니기는 했다.

사정까지 한 뒤 한껏 예민해진 뒤로 곧장 서늘한 대리석이 닿자 그마저도 좋은 자극이 되고 말았으니까.

“-흐으….”

조금 전까지 연인의 성기를 뿌리 끝까지 삼키고 있던 구멍이 아직도 더 지독한 침입을 원한다는 듯 벌름거리는 게 느껴진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여기서 더 휘저어지면 안 된다. 정말로 머리가 어떻게 될 것만 같다.

아니, 어쩌면 이미 조금은…… 제정신이 아니다.

수치를 가릴 것 하나 없는 하반신에 그의 숨이 닿을 때마다, 또 손가락이 흥분해 꺼덕대는 성기를 쥐어흔들고 때로는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움찔거리는 구멍을 벌릴 때마다, -또, 이내 단단한 성기가 곧장 꿰뚫어 내벽을 휘젓고 느끼는 부분을 곧장 콱콱 짓눌러 올 때마다….

고장 난 뇌가 그 자극들을 멋대로 부풀려 눈앞을 뿌옇게 만든다.

확실히 이건 정상이라고 보기 힘들다.

나는 일어설 힘도 없는 상태로 이 서늘한 바닥에서 날 구할 침대까지 어떻게든 덜덜 기어서라도 가려고 했다.

-하지만, 정상이 아닌 쪽은 나만이 아니었다.

“흐으읏! 힉…!”

“…왜. 벌써 가면 안 되지, 자기.”

큰일이다.

6.3피트의 최고급 미국산 달링 역시 맛이 가 버렸다.

바들바들 떨면서 침대 쪽으로 가려던 나는, 별안간 땀이 어린 등줄기를 타고 쭉 움직인 우아한 손가락에 크게 허리를 휘면서 날카로운 숨을 삼켰다.

그 어떤 때보다 나긋하게 들리는 목소리가 지금 이 순간처럼 얼마 남지도 않았을 온몸의 솜털을 곤두서게 한다.

나는 그 다디단 애칭을 들으며 순간 속으로 ‘……어떡하지? 집 나가겠다고 너무 협박하는 게 아니었나 봐.’ 하는 뒤늦은 후회를 했다.

“뭐, 그래. 가끔은 무서우면 도망쳐도 돼.”

어깨로, 등으로, 땀이 어린 허리의 움푹 들어간 부분으로 부드러운 입술이, 따뜻하고 축축한 혀가 노골적으로 움직인다.

나는 기어가던 나를 우스울 만큼 쉽게 쭉 잡아당기는 힘에 저도 모르게 구멍을 바짝 조였다. 그 모습을 보기라도 한 걸까. 등 뒤에서 낮은 웃음소리가 들린다.

하지만 난 지금 그 노골적인 시선에 수치스러울 겨를조차 없다.

보지 않고 그저 닿는 것만으로도 크기를 알 수 있는 기둥은, 왠지…… 더 커진 것만 같으니.

와. 지금 이 상태로 저거에 박히면, 난 정말….

“그래도 내가 볼 수 없는 곳은 가지 마, …응? 이선.”

“셔, 셔언, 있잖아, 응, 자기야, 잠깐만. 잠시…… 마안, -아, 흐윽… 아!”

개처럼 엉덩이를 쳐들고 엎드린 자세 그대로 굵은 성기가 꽉 조이는 내벽을 가른 채 밀려 들어온다.

나는 배 속 깊은 곳까지 션 스펜서의 성기를 삼킨 것 같은 그 아찔한 감각에 고개를 저으며 이제는 거의 흐느끼듯 떨었다.

-좋아할 거라고는 했지만, 애가 미쳐 버릴 거라고는 말 안 했잖아!

역시 난 이번에도 사기당했어. 정말 완전… 당했다고.

“힉, 히익, 아, -아앙, 흐으읏!”

“내가…… 다, 잘못했어. 사랑해, 이선, -…사랑해, 그러니까….”

“아, 알았어, -안, 갈게. 제발, 안 갈 테니까아, 흐응, 아, ……힉!”

미안하다와 사랑한다, 그리고 한계까지 벌어진 구멍을 멋대로 휘젓고 퍽퍽 짓눌러 처박고 때리는 행위의 연관성 따위 있을 리 없다.

그 고아한 이성을 완전히 내던진 채 기꺼이 나와 같은 짐승이 된 남자가 그저 입이 열리는 대로 정신없이 중얼거리면서 손이 닿는 모든 곳을 만지고 내 목덜미를 깨물고 있는 것일 뿐일 거다.

“흑, 흐아, 앙, …아!”

분명히 정확히 느끼는 곳을 짓누르는 것보다 깊은 곳 전체를 힘으로 내리누르는 쪽이었던 연인이 이제는 엉덩이로 퍽퍽 치달을 때마다 눈앞을 하얗게 만들게 된 건, 단순히 섹스가 익숙해진 탓일까.

아니면 그의 성기를 뿌리 끝까지 받아먹는 것에 익숙해지다 못해 앞으로 가는 것보다 뒤의 쾌락에 더욱 녹아나기 시작한 내 탓일까.    

나란히 무릎에 멍을 달고 있는 건 질색인데, 이젠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나는 이미 머리 한구석에 마지막으로 간당간당하게 남아 있던 수치마저 잊은 채 날 꿰뚫은 남자의 앞에서 엉덩이를 쳐든 채로 흐느껴 울고 허리를 흔들었다.

“…우웅, 흣….”

벌어진 입으로 그의 손가락이 들어오더니 이쪽의 점막마저 놀게 하지 않겠다는 양 혀를 유린한다. 헐떡이며 그 손가락을 빨다가 내 안에 깊게 들어와 휘젓던 것이 이윽고 날카로운 한숨과 함께 크게 진동하는 순간 저도 모르게 이를 세워 깨물자, 귓가로 내 이름을 부르는 열기 가득한 목소리가 들렸던 것도 같다.

……아. 몰라.

그 뒤로 기억나는 거라곤 눈뜰 때마다 내 몸에 매달려 있던 내 미친 달링뿐이다.

* * *

여러분들은 비행기로 5시간은 떨어진 곳에 사는 가족과 어떤 수단으로 가장 많이 연락하는가? 아마도 전화나 문자가 가장 먼저 나오리라고 본다.

뭐, 나도 그와 비슷하다.

틈만 나면 아버지에게 장문의 좋은 글귀며 행복하고 건강한 삶에 대한 단상들이 쏟아지고, 3시간의 시차까지 딱 맞춰서 오늘은 촬영 뭐 해? 하는 메시지가 아침에 올 때면, 짤막하게나마 시시콜콜한 일상을 나누기도 하고 말이다.

하지만 여러분들도 일전의 일로 아시다시피 우리 가족은 전화로 안부를 묻기는 좀 어렵다.

오히려 부모님에게 부재중 전화가 와 있으면 그게 실수로 건 것일지언정,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서 미친 듯이 다리를 떨며 기다려야 할 정도다.

‘아니. 대체 그 진주 목걸이는 뭐래요?!’

‘요새 계속하던 거야.’

‘와. 거짓말!’

‘몇 년을 미시간 근처도 안 온 애가 말이 많네! 작년도 어머니의 날에 온다더니 오기는커녕 전화도 저녁 다 되어서 했으면서. 이번 크리스마스도 온다더니 결국 안 왔잖아?’

‘이번은 정말 촬영이 앞뒤로 있어서 힘들었어요.’

그런 우리 가족의 주 연락 수단은 오디션을 볼 때나 주로 쓰는 영상통화다.

나이가 드실수록 드문 연락에 서운해하는 아버지를 달래러 작년부터는 회수를 늘려 보려 나도 나름대로 노력하고 있고 말이다.

하지만, 오늘 내 노트북을 가득 채운 내 가족들의 모습은 평소와는 아—주 많이 다르다.

‘그래도 무슨… 90년대 가족사진 같은 옷차림은 진짜 아니잖아요!’

‘어제 사 온 옷인데 무슨!’

정말 눈 뜨고 못 봐주겠다는 말로밖엔 설명이 안 된다.

대체 저 짙은 보라색의 털 재킷은 어디서 얼마를 주고 사신 걸까? 아버지가 입은 한 10년, 아니 20년 전쯤 유행했을 것 같은 품이 넉넉한 하운드투스 체크 반코트는, 설마 돈을 내고 산 게 아니면 좋겠다.

평소같이 살벌하게 빠른 손짓으로 말을 이어 가던 어머니는, 내 옆에서 대리석 조각처럼 굳어 있는 남자와 눈이 마주치자 배시시 웃으며 갑자기 피아니시모의 지휘처럼 손을 곱게 휘저으셨다.

저 예쁜 손짓으로 덧붙여진 ‘아주 오늘 같은 날도 쓸데없는 소리만, 콱!’을 션이 몰라서 참 다행이다.

아니, 사실은 저 수화의 뜻을 션이 알았더라도 별 상관없을지도 모른다.

우리 부모님만큼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주름 하나 없이 빳빳한 셔츠와 완벽한 머리 손질까지 받은 후 석상처럼 옆에 앉아 있던 내 애인은, 우리의 대화를 어색한 미소를 띤 채 지켜보다 눈치껏 고개를 기울여 작게 소곤거리기 시작했으니 말이다.

“이선. 정말 그냥 말해도….”

“괜찮아. 그냥 평소처럼 해. 간단한 건 입모양으로 대충 이해하시거든.”

“그럼 간단하게만 말할까?”

“진짜 평소처럼 하면 된다니까. 내가 옆에서 전해 줄게. 그리고 옆에 이모 가족도 있는데 무슨 걱정이야.”

“…아.”

저것 보라고.

이미 이모와 이모부는 재빠르게 나와 션의 대화를 전해 주느라 바쁘다. 그렇게 썩 훌륭하지 않은 영상통화 특유의 화질로도 아주 광대가 터질 것 같은 게 뻔히 보이지 않나.

하지만 안타깝게도 션 스펜서는 그 화기애애한 분위기에 더 허리에 힘을 주고 굳은 것 같았다.

사실 그 맘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다.

나마저도 화상통화 창이 켜지기 전까진 내심 적잖게 긴장했었으니 말이다.

따지고 보면, 나는 서른 해 넘게 별 기미 없던 커밍아웃 아닌 커밍아웃을 신문과 인터넷을 장식한 스캔들로 알렸다.

사실 이것만으로도 머리가 아픈데 그다음 날 아침 한참을 망설이다 확인한 가족들의 반응은 일전에 보셨다시피 ‘그래, 너의 선택을 지지한단다. 아들아.’하는 눈물겨운 장문의 응원과 ‘션 스펜서의 할리우드 부호 순위’, 이 두 가지였다.

……솔직히 누가 봐도 진짜 괜찮은지 좀 긴가민가한 반응 아닌가?

요새 가족과의 영상통화를 하지 않았던 것도 실은 이 때문이었다.

좀 비겁하다고? 어쩌겠나. 나는 음식의 가장 맛있는 부위를 제일 먼저 먹는 인간이다.

어떤 표정을 만날지 덜컥 걱정부터 되는 건 우선 최대한 미루고 보고 싶었는걸. 하지만 그건 괜한 짓이었던 것 같다.

“안녕하십니까. 스펜서입니다. 인사가… 많이 늦었습니다.”

‘만나서 반가워요. 아니, 뭐, 진작 소식은 듣고 있었지만.’

“…혹시 기사 때문에 곤란하신 일은 없는지 늘 걱정이었는데 이제야 연락 드려서…, 정말, 정말, 정말 죄송합니다.”

“어머나! 그건 걱정 안 해도 돼요. 알음알음 소문이 나서 덕분에 손님만 늘었으니까. 오호호!”

대체 저 과하게 힘을 준 옷들은 다 뭐냐고!

나는 왠지 귓가가 뜨거워지는 것 같아 턱을 괴고 한숨을 삼켰다. 왜, 부끄럽지는 않지만 부끄럽다. 이 문장의 뜻을 여러분들은 알리라 믿는다.

난 진짜 우리 이모가 저런 웃음소리가 가능했다는 게 믿어지지 않는다. 물론 그건 이모부 역시 마찬가지였는지, 나와 이모부는 순간 동질감 가득한 시선을 주고받았다.

제기랄! 왠지 속이 몽글몽글하기도 하고, 괜히 울렁이는 것도 같다.

아마도 이건 션 때문일 거다. 이제껏 그런 걸 신경 쓰는 줄은 몰랐는데.

‘언제 꼭 이쪽에 놀러 와요. 볼 건 없지만 그래도 식사 한 번은 꼭 대접하고 싶으니까.’

‘맞아요, 맞아요. 얘. 스펜서 씨는 뭘 잘 드시니?’

‘웬 스펜서 씨….’

‘그럼 스펜서 씨지! 너 그 집에서 놀고먹는데 미안해서 원.’

‘나 일하거든요? 얘랑 같은 영화 찍는다고요!’

진짜 너무한 거 아닌가? 결과적으로 보면 내가 션을 먼저 술 마시고 몸으로 부딪쳐 꼬신 건 맞지만, 저택에서 나가지 말라고 매달린 건 이 집주인 쪽인데! 심지어 같은 주연이라고.

나는 걱정이 무색하게 션을 ‘스펜서 씨’로 올려 부르는 부모님 앞에서 입을 삐죽거리며 뭐라 좀 더 구시렁대려고 했다. 하지만.

“…….”

아. 이건 확실히 내 실수다.

가족들과 함께하는 이야기에 빠지다 보면 청인들은 이런 숨소리만 나는 대화에 익숙하지 않다는 걸 종종 잊게 되고 만다. 나는 허리를 곧게 편 자세 그대로 굳은 채로 나와 노트북 화면을 번갈아 보는 긴장한 얼굴의 남자를 한 박지 늦게 눈치채고 속으로 혀를 찼다.

나는 목소리를 한 번 가다듬은 다음에 최대한 일상적인 어조로 입을 열었다.

“션. 너 언제 꼭 놀러 오라고, 뭐 잘 먹냐는데.”

“난 뭐든!”

순간 쨍하니 울리는 목소리는 거의 급발진 수준이다.

“뭐든 좋습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꼭 가겠습니다. 제안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얘는 웬 선생님! 제안은 또 뭐래?”

평소에도 종종 쓰는 어휘가 일상과 근현대 도련님의 그 어떤 고풍스러운 것을 오가기는 했지만-지금 생각해 보니 나이 차가 많은 데이비드 밀러와 오래 살아서 그런 거 아닌가 싶다-, 유독 오늘이 더했다. 나는 그 깍듯하다 못해 손대기 어려울 정도의 교양이 뚝뚝 떨어지는 대답을 옮길 엄두조차 나지 않아서, 만면에 웃음을 가득 담은 모니터 속 가족들이 웃으며 떠드는 것만 구경했다.

션은 이후 갑작스레 쏟아진 우리 부모님과 이모 가족의 질문 폭탄마저 시종일관 면접장에 들어선 구직자처럼 힘이 바짝 들어가서 대답했다. 사실 하나같이 시시콜콜한, 어쩌면 충분히 예상 가능했던 얘기뿐이었다.

‘영화는 잘 찍고 있나요?’, ‘바쁜데 이렇게 시간 내서 얼굴 보니까 좋네요’, ‘사실 처음에는 안 놀랐다면 거짓말인데…. 그래도 둘이 좋다면야. 우리는 괜찮아요’….

아, 맞다.

굳이 좀 의외였던 걸 찾자면 신사 중의 신사였던 아버지가 사람 좋게 웃는 얼굴로 ‘우리 애를 만날 땐 다른 사람과 함께하는 기사가 뜨지 않겠죠? 하하!’ 하고 굵직한 뼈가 담긴 돌직구를 던진 것 정도일까.

참고로 션은 내가 이 말을 좀 망설이다 전해 줬을 때 얼굴의 핏기가 싹 가셨었다.

그땐 정말 철저한 기사 노출형 카사노바도 참 사는 게 쉽지 않구나 싶더라. 하지만 뭐 어쩌겠나. 내가 거기서 ‘하하. 걱정하지 마세요, 아빠. 사실 얘한테 키스 가르쳐 준 게 저예요.’ 할 순 없지 않나.

결국, 션은 노트북의 영상통화 종료를 알리는 띠로롱, 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앉아 있던 소파에 그대로 길게 쓰러졌다.

나는 30분도 채 되지 않는 통화에 숨소리조차 내지 않고 뻗은 녀석의 어깨를 콕콕 찌르며 물었다.

“살아 있어?”

션은 대답 대신 그의 어깨를 찌른 내 검지만 힘없이 잡았다.

음. 딱 봐도 빈사다. 그걸 증명하듯, 쿠션에 머리를 파묻고 있던 그는 얼마 뒤 처음 듣는 완전히 늘어진 목소리로 중얼거리듯 답했다.

“……살아 있는 게 기적 같은데.”

“죽지 마. 이제 너 없이 못 사니까. 내 아이스크림 가게도 보장해 줘야지.”

장난처럼 덧붙인 말에 천천히 생기가 도는 걸 보는 건 꼭 다 죽어 가는 식물을 살리는 것과 비슷한 기분이 아닐까 싶다.

내 말에 순간 뚝 하고 움직임을 멈춘 션은, 순식간에 쿠션을 집어 던진 다음 날 제 품으로 끌어당겼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비실비실하던 녀석이 얼마나 세게 끌어안던지 “아. 깜짝이야. 그러다 다친다고.” 하고 투덜거린 건 들리지도 않았을 것 같다.

쪽, 쪽, 하고 이마에 부딪히는 입술이 유독 부드러웠다.

“-그런데 원래 수화가 그렇게 빠른 건가?”

이 말이 왜 안 나오나 싶었다. 나는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좀 전은 평소보다 더 느리게 한 거야. 화상통화로는 종종 딜레이가 있어서 정확히 안 보이니까 일부러 더 또박또박하게 해야 하거든.”

“맙소사.”

“어디 가서는 자랑은 못 하는 4개 언어지. 영어, 한국어 조금, 그리고 미국이랑 한국 수화.”

따뜻하고 단단한 품에 기대 그에게서 나는 좋은 향기를 맡고 있자니 왠지 좀 나른해졌다. 나는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션의 가슴팍에 아예 턱을 기대고 엎드렸다. 그러자 션은 내가 그의 몸 위에 편히 기댈 수 있도록 아예 몸을 고쳐 누웠다. 잘됐다. 그렇지 않아도 아직 허리가 좀 뻐근했다.

우리 가족과 이야기한다고 기껏 예쁘게 머리를 한 게 좀 아깝긴 하지만 나는 내 특권을 기꺼이 누릴 셈이었다.

한편, 션은 조금 놀란 듯한 표정이었다.

“두 개 나라 수화를 다 한다고?”

“응. 우리 부모님도 가족끼리는 은근히 섞어 쓰셔. 예를 들면.”

나는 천천히 손을 움직였다.

“엄마, 아빠, 아들. 이런 건 한국 수화.”

사실 난 처음 수화를 배웠던 순간이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왜, 처음 말을 배웠던 순간을 떠올리지 못하는 것과 비슷하다. 내 기억의 시작은 부모님과 함께 수화 책을 펴 놓고 낡은 교육용 비디오테이프를 늘어지라 돌려 봤던 순간이다.

아, 오히려 영어 알파벳을 처음 배운 순간은 기억난다.

영어 학원에서 처음으로 만들어진 입문반에 들어가 A, B, C… 이렇게 한 시간 배우고 나자, 쉬는 시간에 그 수업 소리를 들은 다른 반에서 우릴 구경 왔었는데. 그 순간의 기묘한 기분이 아직도 아주 조금쯤은 남아 있다.

인종 비하적인 의미가 아니라, 정말 문장 그대로 동물원 원숭이가 된 것 같은 느낌이었으니 말이다.

“이제 나머지는 미국 수화. 약간 습관 같은 거지. 우리끼리만 통하는 그런 거. 한인 농아인 모임 같은 곳 가면 아직도 한국 수화만 쓰는 어르신도 계시니까….”

션의 손이 내 머리카락을 쓰다듬는다.

나는 그 안온함에 기꺼이 늘어졌다.

운동으로 다져진 단단한 몸에서 규칙적으로 전해지는 숨소리가 기분 좋았다.

어쩌면 션에게는 조금 미안하지만, 이 순간 나는 이제껏 션 그가 스펜서여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쭉 해 왔었음을 문득 깨달았다.

이제껏 그건 일종의 보장이라도 되는 것 같았었다.

그깟 이름이 뭐라고, 그만큼은 언제나 안전한 곳에 서 있을 것만 같은 절대적인 믿음 같은 걸 가졌을지도 모르겠다. 습관적으로 내게 없는 어떤 것을 찾으면서 말이다.

나는 머리카락을 사락, 사락, 듣기 좋은 소리를 내며 쓰다듬는 손길을 한참 동안 가만히 받다가, 생각보다, 또 의식보다 먼저 툭 입을 열었다.

“다음 달이 내 친구가 떠났던 날이야.”

미리 연습하거나 하다못해 고민이라도 해 봤었다면 좀 더 나았을 텐데.

사실 난 내가 꺼내 놓은 문장에 스스로가 놀라 심장이 덜컥였다. 미쳤어, 지금 이 얘기를 왜 해? 하는 생각도 몇 초인가 스치기도 했다.

하지만, 어느새 내 머리에서 자연스레 등으로 내려와 꼭 달래듯 등을 토닥이는 남자의 온기가 멋대로 열린 입에 작은 용기를 건네줬다.

덕분에 먼저 말을 꺼내 놓고도 곧장 문장을 잇지 못하던 나는, 숨소리가 들릴 만큼 가까이에 있는 연인만이 들을 수 있는 작은 목소리로나마 간신히 그 이름을 꺼냈다.

“캐서린 에이브리라고….”

“응.”

“…나랑, 네스, 왜 저번에 내 아파트에서 봤던 할머니 헬렌, 그리고… 캐서린. 우린 LA에서 그렇게 함께- 버텼었거든. 그런데 이젠 더 썰렁할 거야. 캐시 가족은 다들 아이오와에 있거든. 애초에 찾지도 않고….”

좀 더 우중충하지 않은 표현을 쓰고 싶었건만, 그들과 함께했던 밤들을 버텼다는 단어가 아닌 다른 것으로는 설명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내가 좀 더 자주 갔어야 했는데. 잘 용기가 안 나서, 맨날… 도망치듯 다녀왔었는데. 그게 항상 너무 미안해서….”

“…….”

“그래서, 그러니까…… 이번에는.”

내가 가까스로 원했던 문장에 다다른 건 횡설수설과 침묵을 몇 번이나 반복한 뒤였다.

“싫지 않으면…… 션, 너도 같이 인사하러 가 줄래?”

최대한 담담하게 말하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목소리가 떨렸다.

대답 대신 살짝 몸을 들어 입 맞춰 주는 짧은 키스 후에 마주친 푸른 눈동자가 조금은 일렁이는 것도 같다.

나는 그런 연인을 향해 이제는 멋있는 척조차 포기한 한심한 목소리로 줄줄 말을 이어 갔다.

“…뉴욕도 같이 가고, 미시간도 같이 가자.”

“응.”

“-윌리엄즈 씨도… 같이 보러 가는 거야. 너, 맨날 혼자 갔었지. 그렇지?”

“……응.”

“좋아. 앞으로는 다 같이하는 거야.”

더운 숨이 뺨을 간지럽힐 만큼 가까이에 있는 연인의 시선이 내 작은 행동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따라오는 게 왠지 속을 울컥하게 한다.

꽉 잡은 그의 손등에 입술을 가져다 대자 조금은 서늘한 기운이 기분 좋게 내 체온을 앗아 갔다. 나는 유독 힘이 들어가 움푹 튀어나온 채로 하얀 뼈가 그려지는 관절 하나하나에 천천히, 하지만 어느 하나 빼놓지 않고 키스했다.

“추수 감사절 때는 우리 집에 가자. …어머니의 날이나 아버지의 날에도 심심하면 나랑 같이 카드 써도 돼. 진짜 엄청 좋아하실걸.”

“……그래?”

“당연하지! 방금 옷차림 못 봤어? 완전 난리도 아니잖아. 네가 보낸 카드가 네일숍 문 옆에 액자로 걸릴 수도 있다고.”

계속 작은 목소리로 간신히 대답하던 남자가 한참이나 기다렸던 웃음을 작게 터트리는 순간, 바보같이 목이 멘 건 내가 쓸데없이 감상적인 탓일 거다.

나는 그걸 들키지 않으려 이번에는 내가 그의 동그랗고 예쁜 이마에 쪽, 크게 소리 내어 키스하며 일부러 목소리를 키웠다.

“-다른 쪽에서 계속 재수 없게 굴면 아예 성을 박으로 바꿔 버려!”

“고맙기는 한데, 내 이름이랑 박이 붙으면 어감이 영 별로인 거 같은데.”

“…그런가. 그럼 미들 네임으로 하는 건? 에드워드 박은 좀 괜찮지 않아?”

“에드워드는 너무 할아버지 같잖아.”

하긴. 그것도 그렇다.

에드워드 박이라니, 왠지 캔자스 외딴 시골집에서 농사지으면서 꼬장꼬장하게 있을 것 같은 노인 같긴 하다. 저 얼굴과 저 몸에 가져다 대기는 많이 아쉬운 작명이지.

우리는 세상에서 제일 실없는 얘기를 하면서 웃음이 터져 어린애들처럼 작게 키득거렸다.

이 유치한 대화의 유일한 어른스러움은 종종 시선이 마주칠 때마다 서로 입술이 닿는 곳마다 키스하기 시작했다는 것뿐이다.

“아니면, 스펜서 중에서 제일 유명한 사람 타이틀을 영영 못 박아 버리는 거야. 왜, 그런 사람들 몇 있잖아.”

션은 내 말을 듣고 잠시 생각하나 싶더니, 오만하리만치 흔들림 없이 “그건 할 만하겠어.” 하고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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