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이 세상은 ‘모든 것에는 때가 있다’라는 말과 ‘도전에는 정해진 때가 없다’라는 상반된 자기계발서의 문장이 상충한다.
사실 나는 이제껏 그 말 두 가지 모두를 꽤 가볍게 웃어넘겼었다. 나란 인간의 인생이 둘 중 어느 한쪽을 편들기에는 너무 멋대로 튀어 온 탓이었다. 하지만 나는 이 순간 저 뻔하디뻔한 두 문장을 감히 섹스에 가져다 대며 ‘그래, 어쨌거나 둘 다 허튼소리는 아니구나.’ 하며 내심 감탄하게 됐다.
우선, 전자를 돌이켜 보자.
“…읍, 으음….”
놀려 먹을 수 있을 때 더 열심히 놀려 먹었어야 했는데. 아무리 봐도 이제…… 텄다.
공식적으로 인정한다.
저만치에서도 곧장 눈에 들어오는 황홀한 얼굴에 보기만 해도 입이 마르는 환상적인 몸을 가졌던 서른 살의 동정, 션 스펜서 씨의 귀여운 시절은 다 갔다.
“입 제대로 다물어야지, 이선.”
서른 살에 키스부터 시작해서 애인을 무릎 꿇리고 입안에 제 성기를 처넣게 하기까지, 수고로움이 없었다고 하면 거짓말이지만, 어쨌거나 이 정도면 실로 엄청난 성공사례라고밖에는 설명할 길이 없다.
한때 중심에 손이 닿은 것만으로도 귀는 물론이고 목덜미까지 벌겋게 물들였던 풋풋한 남자를 만났던 그 소파에서, 이제는 입안을 가득 채우다 못해 목젖까지 치달은 것 같은 커다란 성기를 입에 문 채 헐떡이는 나 자신이 그 증거다.
“…힘들단, 말이야….”
“네가 빨고 싶다고 했잖아.”
그야…… 그렇긴 한데.
나는 션의 성기를 입에 어설프게 문 채로 저절로 들썩이는 숨을 몰아쉬었다.
제 무덤 파 놓고 무슨 약한 소리냐고 하지는 말아 줬으면 한다.
아니, 왜. 호텔 염문설의 단골손님인 션 스펜서답게 체크인을 그나마 조용히 하는 것까지는 성공했다. 거기까진 좋았다.
그런데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오는 얘 눈이 진짜 좀……, 방에 들어가자마자 곧장 달려들다 못해 머리부터 잡아 삼킬 것만 같은 느낌인 거다. 눈이 마주치면 나른하게 웃기도 하고 뺨이 발갛게 물든 것도 아닌데 왠지 등줄기를 타고 쭈뼛 소름이 돋는다고 할까.
누가 봐도 침착하지만, 한편으로는 전에 없이 엄청나게 흥분한 것 같다는 확신 아닌 확신이 들었다.
그래서 내 딴에는 머리를 굴려 먼저 선수를 쳤다.
먼저 적당히 빨아 주면서 당장 불이 붙은 걸 좀 달래고 나면 나아지지 않을까 싶었다고.
“턱 아프다고. …너, 너도 해 봐서 알잖아!”
“난 안 아프던데.”
“……죽고 싶냐?”
-설마하니, 전에 왔던 그 스위트룸을 그대로 또 쓰게 될 줄은 모르고 말이지.
나는 내 머리를 위로 쓸어 올리면서 가늘게 눈을 휘어 웃는 연인 앞에서 애써 동요를 감췄다.
션, 이 남자는 어떨지 몰라도 나한테 이 호텔은…… 그리고 이 스위트룸은 자꾸만 속을 뒤흔드는 공간이다.
누군가는 평소에는 그다지 있지도 않던 감상을 하필 섹스 전에 떤다며 웃을 수도 있지만, 어쩔 수 없다.
“뭐. 이선, 너와 여기 침대를 쓰게 될 줄은 몰랐으니. 온 김에 충분히 써 봐야겠지.”
아무렇지도 않게 내 몸을 일으켜 훌쩍 끌어안아 올리는 팔에 뜨끈하게 열이 올라온 뺨을 누르자, 그 짧은 순간마저 곧장 이마에 부딪히는 입술이 유독 간지러웠다.
모든 게 여기서부터 시작했다.
실수로 찾아왔던 션 스펜서의 스위트룸.
예상하지 못했던 작은 다툼과 장난, 들끓는 자격지심으로 지새운 예민한 밤과 그걸 감히 감추지 못했던 오디션.
-그러다 지금이 되기까지.
모든 것이 그 운 좋은 밤에 널찍한 가든 테라스가 있는 이 근사한 스위트룸으로 잘못 오지 않았더라면 절대 있을 수 없었던 기회일지도 모른다.
그래서일까.
자꾸 필요 이상으로 생각이 많아진다. 더 솔직히 인정하면, 바보 같을 정도로…… 긴장된다.
조심스럽게 안겨 도착한 푹신한 침대가 훤히 벌어진 가운 아래에서 팔다리를 휘어잡는 것만 같다.
그래, 바보 같은 일이라는 걸 안다.
“다물라던 입은 벌리고, 벌려야 할 다리는 다무는 건 무슨 심경의 변화지?”
“내, 내가, 뭘!”
“지금 그러고 있는데, 이선.”
이곳에서 별거 아닌 내 손길에 시뻘겋게 익어서 떨었던 건 분명 지금 나를 내려다보는 남자였는데, 기껏 찾아온 두 번째 방문에서는 꼭 그 반대가 된 것 같다는 게 얼마나 어이없는 상황인지 나도 잘 안다고.
거의 팔에 간신히 달린 수준으로 훤히 벌어진 가운 뒤로 가슴과 복근, 그 아래의 내 중심까지 눈에 담는 시선이 집요하다.
나는 애꿎은 침대 시트만 움켜쥔 채로 그 노골적으로 색정적인 관찰을 견뎌 냈다. 목덜미며 팔뚝으로 쭉 오른 옅은 소름을 제발 션이 몰라야 하는데.
하지만 그건 역시 내 가소로운 희망 사항에 불과했다. 아마 지금쯤 이 세상의 그 누구보다 내 몸의 사소한 변화에도 민감할 남자를 앞에 두고 너무 욕심을 부렸지.
한동안 말없이 내 나신만 뜯어 살피던 연인은, 이윽고 내 가슴 근육 사이의 푹 팬 부분으로 제 손가락 끝을 대더니, 섬세하지만 의도가 분명한 움직임으로 쭉 미끄러트리며 툭 입을 열었다.
“……갑자기 뭐가 그렇게 부끄러워?”
솔직히 말하면, 손이 움직이며 순간적으로 크게 숨을 들이켜느라 쑥 들어갔을 배의 움직임마저… 좀, 부끄럽다.
하지만 그걸 순순히 인정할 수는 없었다.
“-아니거든!”
“맞는데.”
짙고 곧은 흑갈색 눈썹이 살짝 위로 휜다. 나는 그가 흥분으로 짙어진 푸른 눈으로 나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는 것에 괜히 더욱 목소리를 높였다.
“아니야!”
“아니야?”
“아니라고 했잖아.”
“……아하. 그러시겠다.”
벌어진 다리 사이로 션의 몸이 훅 가까워지다 못해 바짝 붙은 건 그때였다. 열이 몰리기 시작한 내 사타구니 사이로 노골적으로 와 닿는 완연한 남자의 흥분에 저도 모르게 무릎이 튀었다.
“왜. 내 거 처음 쥐었던 곳에 오니까 새삼 긴장이라도 돼?”
…그 뻔뻔한 장난을 잘 받아쳤어야 했는데.
별거 아닌 반응 하나하나가 모두 관찰되고, 또 심지어는 훤히 그린 듯이 유도되는 순간이 주는 기묘한 수치와 열기가 순간 입을 틀어막고 말았다. 젠장.
“…….”
“…….”
발가락 끝에 저절로 바짝 힘이 들어가는 침묵만이 흐른다.
대체 난 지금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까.
최소한, 어떤 색일지는 손을 대지 않아도 알 것 같다. 휙 옆으로 돌리며 볼에 닿는 침대 시트가 유독 서늘하게 느껴지니까.
아마, 션은 몇 초쯤 뒤에 작게 한숨 쉬듯 웃었던 것 같다. ‘같다’라는 애매한 표현인 건 정확히 그가 어떤 눈을 하고 있는지 보지 못한 탓이다.
……이건 내 탓이라고만 하기엔 좀 억울하다.
작은 흥분도 감추지 못한 채 쩔쩔맸던 바보가 어느새 머리끝까지 오른 열마저 감춘 채 여유로운 척 구는 게, 온전히 나 때문이라는 걸 알게 된 탓도 있을 거라고.
“…하아, 읏….”
살며 단 한 번도 성감의 대상이 된 적 없었던 가슴의 작은 돌기가 흥분으로 뾰족해질 수 있다는 것도, 그걸 달래듯 빨아들이고 혀로 짓누르면 저절로 고개가 뒤로 꺾인다는 것도 처음 알게 해 준 남자가 조급하게 매달린다.
확실히 섹스는 조금쯤 천박한 구석이 있어야 야해진다.
예컨대, 그 우아한 션 스펜서가 같은 사내의 가슴에 매달려 노골적으로 타액이 부딪치며 빨아들이는 소리를 내는 순간 같은 거 말이다.
“이 세우지 마아….”
“좋아하잖아.”
이제 슬슬 헷갈리기 시작한다.
이 남자와 섹스할 때마다 몰랐던 몸 곳곳의 자극을 알게 된 내가 쉽게 흥분하게 된 걸까, 아니면 키스만으로도 고개가 따라오던 그 순진한 션 스펜서가 나와 하는 섹스에 지나치리만큼 적응을 잘한 걸까.
기왕이면 후자이면 좋으련만.
내 가슴을 한 움큼 물어 기어이 잇자국을 남긴 남자가 천천히 고개를 아래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나는 그의 허리에 다리를 휘감고는 가슴에서 복근의 모양을 따라 움직이는 간지러운 자극에 입술을 깨물었다.
다시 만날 일조차 없기를 바랐던 남자와 최악의 재회를 했던 곳에서 하는 섹스는, 확실히 머리 한구석을 좀 이상하게 한다.
“……후읏!”
내가 내 것을 직접 빨아 본 적은 없지만, 가끔은 겪어 보지 않은 것도 겸허히 인정해야 하는 순간이 있다.
-확실히 션 스펜서는 펠라티오를 잘한다.
놀랍지 않나?
이건 나조차도 받을 때마다 숨을 헐떡이는 와중에 대체 이게 말이 돼, 싶을 정도다. 하지만 정말, 할수록 눈에 띄게 늘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나 따위와는 비교조차 안 될 정도로 능숙해졌다.
아무리 배우라는 직업이 누구보다 신체 모든 부위를 잘 사용해야 하는 일 중 하나라고는 하지만, 거기에 입술과 혀, 그리고 그 안의 축축하고 따뜻한 점막까지 포함되는 일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최소한 션 스펜서는 그 세 가지를 소름 돋을 만큼 모두 다 잘 활용한다.
“흑…, 아, 하아, 응, 거기. 좋아….”
자꾸 하다가 정신이 툭툭 나가서 입에 문 성기를 느슨하게 풀어 버리고 마는 나와는 달리, 션은 꽤 큰 편인 내 기둥을 가득 삼키고는 입술을 둥글게 말아 기분 좋게 조인 채로 머리를 움직인다.
아, 질질 선액을 싸기 시작한 귀두를 제 입 안 부드러운 점막에 문지를 때는 또 어떤가.
정말 그 말랑하고 부드러운 부분에 흥분한 끝이 부딪힐 때마다 눈앞에 스파크가 튄다. 혀로 여기저기를 긁고, 핥는 건 말할 필요도 없다.
나는 내 기둥뿌리까지 비스듬히 들어와 움직이는 그의 입에 꼴딱꼴딱 숨넘어가는 소리를 내며 헐떡였다.
오늘 션, 그는 유독 더 집요한 면이 있었다.
기둥과 연결된 채 늘어진 고환을 혀로 건드리고 쭉 빨면서 움직일 때마다 자꾸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열기로 습해진 곳을 간지럽혔다. 허리가 점점 들리기 시작하는 걸 천천히 위로 눌러 압박할 때마다 아직 들어오지도 않은 성기가 처박힌 것처럼 숨이 턱턱 막힌다.
“……하아, 션, 잠깐만.”
회음부를 간지럽히는 혀가 자꾸 배 속 깊은 곳을 들끓게 한다.
그리고, 그 바로 뒤의…… 기대를 감추지 못할 곳에 서서히 더운 숨이 닿기 시작하는 것 역시 꽤 신경 쓰인다. 다리 사이, 깊숙한 곳으로 연인의 고개가 움직일 때마다 널찍한 어깨 위로 걸린 내 벌어진 다리가 자꾸 튀고 오므라드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션…?”
천천히 가장 민감한 부분으로 움직이던 혀의 움직임이 멈춘 건 그때였다.
아니, 정확히는 멈춘 건지, 순간적인 긴장으로 확 조여진 내 뒤에 그의 시선이 물끄러미 닿은 건지 모르겠다. 어쨌거나 그는 그 순간 밭은 숨을 내쉬는 나를 수치도 모르고 벌어진 허벅지 사이로 살짝 올려다봤다.
……흥분으로 유독 짙어진 푸른 눈이 나를 보고 조금 웃는 것처럼 가늘어졌던 것도 같지.
“-흐, 히이익!”
결과적으로는 ‘왜 그래?’ 하는 질문을 끝까지 잇지는 못했어도, 어쨌든 침대 위에서의 묘한 표정을 하나 더 알게 된 것으로 만족한다.
어차피 꽉 조여든 뒤로 션의 그 능숙해진 혀가 닿는 순간 다른 생각 같은 건 아무것도 할 수 없었으니 말이다.
“하아, 읏, 흐아앙, 뭐어, 뭐, 하는- 히잇, 아!”
크고 마디마디가 딱딱한 손은 보란 듯이 단단해진 성기를 쥐어흔들며 빠르게 부딪치는 소리를 내고, 아직 누구의 침입도 허락하지 않을 것처럼 조여든 뒤로는 말랑말랑하지만 그 끝이 유독 단단하고 힘 있는 뜨끈한 살덩이가 할짝거리며 틈새를 찔러 댄다.
나는 그 말도 안 되는 자극에서 벗어나 보겠다고 뒤늦게 느슨하게 힘을 풀었던 허리를 세게 뒤틀어 몸을 반쯤 뒤집었지만, 그건 내 몸에 단단히 얽매 오는 남자의 집요함 앞에서 오히려 몸을 비스듬히 한 채로 오히려 보채듯 엉덩이를 치켜드는 꼴이 되고 말았을 뿐이다.
“흐앙, 아, 자기야, 하으으- 읏, 으응…!”
간지럽고 찌릿한 전기가 배 속 깊은 곳에서부터 자꾸 들끓으며 천박하게 허리를 흔들게 한다. 내 다른 몸은 꼼짝도 못 하게 얽맸으면서 그 음탕한 움직임만은 허락한 남자가, 습하다 못해 축축해진 뒤로 더운 숨을 흘린다.
그때부터는 이성보다 입이 열리는 대로 튀어나오는 두서없는 단어로 애원했던 것 같다.
싫었나?
그만하라 말하고 싶었던가?
잠시 머리끝까지 치솟는 수치를 접어 둔 채 솔직해져 보면, 그 순간 난 정반대의 생각을 했었다.
낯선 자극과 쾌감에 완전히 이성까지 절어서 입을 여는 대로 헐떡이며 신음했고, 어느 정도 뒤가 풀리자 곧장 손가락이 들어와 느끼는 부분을 정확히 짚어 누르고 아슬아슬하게 빗겨 나가는 척 휘저을 때마다 연인의 품 안에서 자지러지듯 몸을 떨었다.
“-흑, 흐으…, 하아, 아……!”
“너 이거, 진짜… 좋아하는구나.”
그런 게 아니라는 뾰족한 말조차 감히 꺼낼 수 없다.
삽입도 전에 혀와 손가락 몇 개로 휘저은 것만으로도 희뿌옇고 뜨끈한 정액을 내 배 위며, 그의 허벅지까지 줄줄 흐르도록 한가득 쏟아내 놓고 이제 와 느끼지 않은 척 빼는 건 우스운 일이다.
아니, 애초에 그런 변명 따위를 할 여유가 없기도 했다.
나는 내 배와 허벅지를 타고 내려가는 저 자신의 흥분이 주는 감촉에 온몸을 벌벌 떨면서 한계까지 빨라진 숨을 헐떡였다.
눈앞이 뿌옇다가, 또 하얗다가. 그나마 가끔 선명해질 때면 엉망으로 흐느끼는 나를 내려다보는 남자의 탐욕스러운 시선이 입을 바짝 마르게 했다.
후우, 하고 긴 한숨 소리가 들린다.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목소리도 뒤따른다. 그건 약간은 답지 않게 헛웃음 치는 것 같기도 했다.
“상상 이상이기는 한데….”
“하아, 흐, 으응, 션, 셔언-”
“…….”
약을 하고 나서 섹스한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감히 그 쾌감을 상상하자면 지금과 비슷할 거다.
성감이 필요 이상으로 예민해졌다.
그의 손이 닿을 때마다 자꾸 단 숨이 튀어나오고, 눈길이 닿는 것만으로도 주먹에 힘이 들어간다. 침대의 시트가, 이불이 스치는 것만으로도 자꾸 배 속이 땅기고 허리가 흔들린다.
-애초에 섹스가 이렇게까지 자극이 강한 행위였나?
나는 다리로 그를 잡아당겨 조이면서 금방이라도 남자의 기둥을 먹고 싶어 안달 난 뒤를 그의 성기에 비볐다.
“…뭐, 뭐 해애….”
그리고 션은 그런 나를 그저 지켜만 보고 있었다. 심지어, 퍽 뻔뻔한 목소리로 이렇게까지 말한다.
“네가 너무 흥분한 것 같아서.”
……지금 내 엉덩이골 사이에 닿는 이건 뭔데!
자기도 엄청나게 선 채로 끝이 축축해졌으면서, 어떻게 나만 몸이 달아서 쩔쩔매는 것처럼 혼자 잘난 척할 수가 있어. 나는 뒤늦게 몰려오는 수치에 왠지 눈가가 뜨끈해졌다.
하지만, 신체적 반응이 어쨌거나 지금 당장 더… 아쉬운 건 내 쪽이었다. 나는 그에게 따져 묻는 것 대신 숨을 급히 삼키며 자꾸 꽉 메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아니야, 빨리-.”
“빨리?”
귀여운 션 스펜서가 필요하다.
저 망할 좆에 손을 대기만 해도 귀 끝까지 벌겋게 익던, 그 깜찍했던 동정 말이다.
그의 뺨이며 목덜미, 그리고 딱 벌어진 가슴께까지 그때처럼 붉은 물이 올라온 건 여전한데, 저 여유만만한 태도는 뭐야.
나는 잠시 입술을 꽉 깨물었다가 간신히 닿은 내 뒤에서 그가 떨어지려는 것 같자 저도 모르게 툭 입을 열었다.
“넣어……, 넣어, 줘. 빨리. 빨리, 넣고… 해 줘.”
장난처럼 말할 때와 진심으로 매달리며 토해 낼 때의 무게가 완전히 다른 문장을 담는 입술이 옅게 경련했다.
이제 인정하고 싶지 않아도 인정해야만 한다.
한때 이 방에서 션 스펜서를 놀리며 여유를 부렸던 나는, 이제 놀렸던 당사자에게 박히고 싶어서 먼저 뒤를 움찔거리며 안달이 났다.
저 남자의 것이 뒤를 꿰뚫고 들어왔으면 좋겠다. 처음에는 뿌리 끝까지 처넣고 몇 초 정도 가만히 있는 것도 좋을 거다. 깊게 삽입되는 것만으로도 왠지 배가 불룩해지는 것처럼 부피감이 엄청나니까.
하지만, 그다음에는….
나는 구멍이 천천히 벌어지는 걸 느끼며 바짝 마르다 못해 조금은 까칠해진 입술을 저도 모르게 혀로 훑었다.
“……후으, 읏.”
꽉 다물어진 안을 비집고 들어오는 뜨거운 기둥이 깊은 곳을 어떻게 헤집고, 짓누르고, 거칠게 찍어 대는지 아는 허벅지가 벌써 옅게 떨리기 시작한다. 이어질 쾌락을 기대하는 머리 한구석이 흐물흐물해진다.
…솔직히, 여러분들이 생각해도 인간적으로 이쯤 되면-
“흑, 흐으…, 아, 제발. 션. 얼른….”
“하라는 대로 했잖아.”
“……야!”
“한밤중에 다른 남자 차 타고 가는 대범함을 지금도 발휘해 봐, 이선.”
‘착한 스펜서’가 될 때도 되지 않았나?
…정말 그렇지 않아? 이럴 때 뒤끝이라니! 나는 입구에 살짝 그의 귀두만 넣어 걸친 채로 감질나게 내 허벅지 안쪽을 쓰다듬는 손 앞에서 저도 모르게 그의 팔을 잡고 거의 빌듯이 매달렸다.
“이제 안 그런다고 했잖아…, 응?”
“그랬었나.”
“…힉, 흐으…, 그랬어. -정말, 그랬다고, 바보야.”
“글쎄. 기억이 잘 안 나서.”
션의 손이 한번 사정한 터라 무서울 정도로 예민해진 중심으로 향한다.
말도 안 돼. 자기도 숨이 턱턱 막힐 만큼 흥분해 있으면서 어떻게 이래. 간신히 끝만 걸쳐진 기둥을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내벽 가득 삼키며 오물오물 조이는 저 자신의 뒤에 창피함을 느낄 새조차 없다.
나는 션이 내 성기의 끝을 손끝으로 살살 긁을 때마다 깊게 처박히고, 또 짓눌리고 싶어 안달이 난 것처럼 허리를 들썩였다.
마음이 급했다.
-정말이지 믿을 수 없지만, 같은 남자에게 뒤가 뚫리고 엉망으로 흔들리고 싶어 속이 초조했다. 그걸 스스로 뼈저리게 자각해야만 하는 순간이 얼마나 이상한지, 저 못된 연인이 알기는 할까.
나는 한참이나 볼썽사납게 엉덩이를 흔들기도 하고, 후들후들 떨리는 팔로 꼼짝도 하지 않는 남자의 허리를 잡아당겨 보기도 하면서 어떻게든 그의 것을 내벽 깊숙이 받아먹으려 애썼다.
하지만 션, 그가 꼼짝도 하지 않는 이상은 간신히 한 손가락 한 마디 반 정도 들어오는 게 다였다.
한참이나 혼자 몸을 틀던 나는, 내 한심한 꼴을 고스란히 구경하는 시선 앞에서 결국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려 버렸다.
-남자의 성기를 뒤로 물어 든 채로 직접 움직이는 건 나도 처음이었다고.
“……이선?”
나쁜 놈. 쟤가 진짜 제일 나쁜 놈이다.
난, 쟤가 키스도 못하던 때에도 정말 친절하게 잘 가르쳐 줬었는데.
솔직히 뭣도 모르고 내가 손대면 눈만 깜박이던 시절에 내가 그냥 저 잘난 척하는 새끼의 다리를 벌릴 수도 있었다. 먹고 버리는 거 아니냐고 물었을 때 그 상상을 현실로 만들고도 남았어.
“손 내려 봐.”
“…싫어!”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까지는 장난 안 쳤다고.
나는 후끈해진 눈가를 꾹 누르면서 자꾸 빨라지는 숨을 할딱거렸다. 이 나이 먹고 침대에서 울어 재끼는 게 얼마나 끔찍하리만치 한심한 꼴인지 모르는 건 아니다.
그렇지만 저 은혜도 모르는 빌어먹을 애인한테 서러운 걸 어떡해.
“…나도, 이러는 거…, 흑, 이상한데. 자꾸 놀리기만 하고.”
“…….”
“-나도, 나도……, 씨이, 이번만 하고 너랑 안 할 거야!”
이번만이라는 단서가 붙는 게 좀 비굴한가?
…그래도 지금 반은 들어와 있는데, 당장 빼라고 해 봤자 왠지 내 손해 같아서…. 에이 씨, 나는 이래서 문제인 거 같아!
한편 이제껏 내내 여유롭다 못해 즐기기까지 했던 개 같은 션 스펜서 새끼는 뭘 잘했다고 얼굴을 가린 내 손등 위로 뽀뽀나 처하고 있다.
“진심이야?”
“진짜 그럴 거야!”
“장난 한 번에 너무 가혹한데. 자기야. 기껏 가르쳐 주고 수절시키다니, 너무하네.”
“-닥쳐, 흑, 개자식아…. 이제 너랑은, 안 할 거야.”
진짜 어이없어.
이럴 때만 자기야래, 미친놈이.
“흑, -흐윽, 다른 사람하고만, 할 거야. 진짜 짜증 나…, 허엉, 나만, 왜 나만….”
“…….”
하여튼 약아 빠졌어. 뽀뽀는 왜 해? 그리고 인제 와서 그렇게 소곤소곤 달래 봤자 무슨 소용이야. 나는 간신히 좀 달랬나 싶었던 눈시울로 훅 서러움이 고이며 괜히 목소리가 더 커졌다.
“잘못했어.”
“꺼져!”
“내가 미안해. 다른 사람하고는 하지 마. …잘못했어, 응?”
“맨날 미안해, 왜! 미안할 짓을 하지 마! 잘못했단, -흑, 그런 말 할 짓을 하지 말라고 맨날 말해도, 왜 그래!”
“너무 예뻐서 그랬어.”
내 손에 베개를 쥘 힘이 남아 있기만 했어도, 옆에 있는 거로 몇 대는 쳤을 거다.
나는 그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줄줄 쏟아져 나온 말에 손을 휙 내리고 망할 스펜서를 한껏 노려보았다. 물론 그게 썩 위협적이지는 않을 거란 자각은 확실히 있다.
다 큰 남자가 벌겋게 열이 오른 얼굴로 질질 짜면서 소리치고 도끼눈을 떠 봤자 웃음이나 나겠지. 확실히 그 예상이 틀린 것만은 아닌지, 왠지 한참 만에 제대로 얼굴을 보는 것 같은 연인은 나와 눈이 마주치자 조금은 미간을 찌푸리고 웃었다.
너무 문질러서 조금은 벌겋게 일어난 것 같은 눈가를 살살 건드리는 손끝은 또 얼마나 간지러운지. 내내 바보같이 휘둘려 놓고도 학습능력이라곤 없는 마음이 또 멍청하게 흔들린다.
“……유치한 짓 그만할게.”
“애초에 유치한 걸 알면-!”
“이제 네가 좋아하는 거 원하는 만큼 해 줄 테니까.”
애써 이를 악물고 토해 내던 문장을 잘라 내는 목소리가 입이 마르게 다정하고, 또 달콤했다. 션은 이제 얼굴조차 잘 기억나지 않는 재수 없는 양복쟁이에게 내가 했던 것처럼 말랑하고 부드러운 귀를 살짝 따끔하게 깨물면서 나직하게 속삭였다.
“이선, 다리 벌려 볼래.”
처음 키스를 가르칠 때만 해도 그 순진한 미남이 이렇게 될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었는데.
“--아, 흐으윽!”
한참을 애태운 다음에 처박혔기 때문일까.
스스로가 한계까지 벌어진 구멍으로 느낄 수 있을 만큼 굵은 기둥을 기쁘게 받아 물고 조이는 내벽의 진동이 머리까지 울리는 것만 같다.
“히익, 아, 흐앙, 아, 앙, -흑!”
전립선을 정확히 찔렀다가 허리를 뒤로 빼는 순간에는 그의 기둥을 세게 물어 들던 내벽이 함께 딸려 나온다. 남자의 성기가 박히고 문질러지는 모든 곳이 성감대가 된 것처럼 말도 안 되는 쾌감에 엉망으로 휩쓸린다.
눈앞에 보이는 남자의 목덜미를 저도 모르게 세게 깨물어 요란하게 흘러나오는 교성은 막으려고도 해 봤지만, 그 괘씸한 행동은 내 안에 성기를 깊게 처박은 남자가 작게 이를 악물며 뭉근하게 짓누르는 걸 유도한 것밖에 되지 않았다.
“아, 히이잇, 하읏 아, 아, 거기, 아!”
기다렸던 만큼 드세게 밀려오는 마찰에 몸이 퍽, 퍽, 밀리면서 침대 헤드에 닿을 만큼 들썩이자, 정신없이 내 콧잔등이며 목덜미에 키스하던 와중에도 그걸 짚어 낸 남자가 내 머리를 자신의 손으로 감쌌다.
별거 아닌 다정함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사소한 행동은 한 줌 남은 이성을 완전히 짓뭉개기에 충분했다. 어쩌면 그건 저 안까지 처박힌 채 크게 떨리는 연인의 사정보다 더욱 눈앞을 하얗게 물들였을지도 모른다.
나는 게걸스러울 만큼 입맞춤을, 애정을 구걸하며 션 스펜서의 목을 잡아당겼다.
살짝 늦게 빠져나온 성기가 내 안에서부터 뜨끈한 것을 울컥 토해 내더니, 이내 내 위로 보란 듯이 흩뿌려졌다.
내 것인지 아니면 그의 것인지 모를 허연 정액으로 엉망이 된 가슴이 벌겋게 달아오른 채 들썩이는 걸 탐욕스레 눈에 담는 시선이 무서울 만큼 집요했다.
“…더 하자, 괜찮지?”
다시는 안 하겠다고 으름장 놓았던 것 따위는 완전히 머리에서 휘발된 나는, 귓가에 나직하게 떨어지는 열기 가득한 목소리에 숨을 헐떡이며 멍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 * *
어쨌거나 션은 정말 가기 싫어 미칠 것 같은 얼굴을 한 채로도 미리 약속된 시애틀의 일정을 보내러 떠났고, 나는 근 반나절을 ‘말 그대로’ 침대에서 엎어져 지냈다.
온 세상에 션 스펜서와 나란히 호텔을 들어갔다는 걸 알리고 싶지는 않았는데…… 아, 모르겠다. 그런 걸 신경 쓸 상황이 아니었다. 미리 했던 예언대로 다리가 완전히 풀리다 못해 허리가 빠져서 누워 있지 않고 배길 수가 없었다고!
하지만 나 역시 언제까지 퍼져 있을 수만은 없었다.
어쨌거나 미리 한 선약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션에게 이번에는 혼자 가지 않는다고 몇 번이나 신신당부한 다음에야 찾아가게 된 에이전시 사무실 아닌가.
“진짜 죽고 싶냐?”
아. 물론 동행인 당사자의 동의는 없었다는 걸 이제야 말해서 미안하다.
……그래도 뭐. 친구 좋다는 게 뭔가?
물론 브랜든 우드는 이 의견도 동의하지 않을 테지만 이것도 여러분 앞에서 대충 사과하는 바이다.
“내가 오늘처럼 쉬는 날에도 회사에 나와야겠냐고. 어엉? 런던에서 2주를 총총대고 뛰어다니다가 어제 짐 풀었다고. 어제! 그것도 어제! 어어-제에!”
“이야. 수고했다, 인마.”
아주 애가 해가 갈수록 목청만 커진다. 나는 콧구멍을 크게 벌름거리는 친구를 향해 진심 어린 우정을 담아 입을 열었다.
“기념품은?”
“꺼져!”
나는 녀석이 말과는 다르게 옆으로 맨 크로스백을 뒤적거리는 걸 보면서 히죽 웃었다.
대체 출장 가서 동료들 간식거리를 얼마나 챙겨 온 건지 곧 터지기 직전인 가방이 뻔히 보이는데, 하여튼 저 툴툴대는 버릇 하고는!
어차피 기다렸다는 듯 꺼낼 거면서 거 더럽게 튕긴다. “혹시 선택권 있으면 난 초콜릿이 좋아.” 하니 제법 흉흉하게 노려보기는 하지만, 주섬주섬 움직이던 손이 잠시 멈칫하더니 반대 방향으로 움직이는 것도 마음에 들었다.
에이전시에 찾아오는 건 꽤 오랜만이다.
최소한 마지막으로 왔던 때는 정말…… 좋지 않은 이유로 왔었지.
나는 괜히 머쓱하게 턱을 긁적이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고 보니 이번에는 다니엘 씨에게 먼저 연락하지 않고 왔는데, 부재중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그제야 막 들었다.
“다니엘 씨도 잠깐 만나려는데, 지금 있을까?”
“엉? 있을걸. 오늘 매주 회의 있는 날이라… 아! 왜 이렇게 안 나와.”
“가방에 물건을 정리해서 넣어야지, 바보야.”
“이선,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이선 네가 그런 말 하는 건 인정 못 해!”
확실히 브랜든 녀석은 그리 청결을 챙기지 않을 것처럼 생겨서-미안!-, 정말 깜짝 놀랄 만큼 깔끔한 체하기는 한다. 나는 멈춤 없이 직행으로 쭉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녀석이 이를 갈며 펄쩍 뛰는 것에 작게 어깨를 으쓱했다.
……그런데, 차라리 브랜든의 대답이 그 순간 달랐으면 어땠으려나?
예를 들면 ‘아니. 오늘 바커는 회사 출근 안 했을걸. 외부 미팅 있는 거로 알아.’라든지.
-어쨌거나 내가 이 건물의 가장 꼭대기 층까지 오지 않을 그 어떤 말이라도 했었다면, 난 몇 없는 친구를 지킬 수도 있지 않았을까?
“……브랜든.”
그건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단 한 발자국도 떼지 못한 채로 멍청하게 굳은 내가 간신히 내뱉은 이름이었다.
“뭐! 뭐! 뭐!”
“나 눈이 어떻게 된 걸까.”
“뭐어, …뭐라고?”
가방을 뒤적거리고 있는 브랜든은 지금 내가 거대한 유리 벽 너머로 무엇을 보고 있는지 모른다.
“저쪽.”
나는 최대한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내가 보기엔 저거 월링턴인데.”
“…….”
“네가 보기엔 누군 거 같냐?”
제임스 월링턴.
나는 요 정신없는 몇 달간 내 머릿속에서 완전히 휘발된 지 오래였던 이름을 간신히 끄집어냈다. 브랜든이 가방에 처박은 한쪽 손을 빼낼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로 “…대체 이게 무슨….” 하고 멍하게 중얼거리는 게 들린다.
-다행이다. 내 눈이 어떻게 된 건 아닌 모양이다.
“새삼스럽지만 정말 실물이 훨씬 근사하신데요.”
“하하. 감사합니다.”
내가 익히 잘 아는 그 건물의 가장 넓은 방에서 나온 월링턴은, 나오자마자 에이전시 관계자들의 물 흐르는 듯한 문장 속에 휘감긴다. 엘리베이터를 타러 오는지 그들의 목소리가 점차 가까워지는 게 느껴진다.
최소한 그들은 이때까지는 내가 자신들을 엿보고 있다는 걸 몰랐다.
“빈말 아니라고요, 이거. 딱 봐도 분위기가 다르시다고요. 이래서 배우구나 싶은데요. 잘나가는 배우라는 게 참 그런 게 있잖습니까. 어디에 떨어트려 놓아도 딱 눈에 띄는 분위기?”
“어휴. 왠지 등이 근질근질한데요. 어디 가서 그런 말씀 마시죠.”
“왜요? 진심인데요.”
예상하건대 아마 이때부터…….
“모든 배우가 그렇지 못하다는 거 아시잖습니까. 어디서나 딱! 이렇게 월링턴 씨처럼 눈에 들어오는 분이 있는가 하면요.”
저들은 엘리베이터 앞에 석상처럼 서 있는 내 존재를 깨달은 게 분명하다.
“영화 속에 나오는 것보다 그 DVD를 파는 쪽이 더 잘 어울리는 사람도 있고. 뭐 사람은 다양하죠.”
“…하하.”
“고생 많으셨습니다. 신경도 안 쓰셨겠지만. 앞으로 잘해 보죠.”
한때는 월링턴의 이 향수 냄새가 꽤 마음에 든다고 생각했던 적도 있었는데. 나는 성큼성큼 이쪽을 향해 걸어오는 서글서글한 얼굴을 보며 생각했다.
“오랜만입니다. 이선.”
“…….”
별다른 대답은 하지 않았지만, 애초에 월링턴은 내 쪽의 환대를 기대했던 것도 아니었던 것 같다. 그는 내가 타고 온 엘리베이터 스위치를 눌러 곧장 들어가며 BAA의 직원 몇과 다시 시시껄렁한 잡담을 나누기 시작했다.
나는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히는 순간까지 그들의 웃음을 듣고 서 있다가, 목덜미가 벌겋게 변한 친구에게 먼저 입을 열었다.
“-브랜든.”
“젠장, 뭐!”
기껏 끌고 온 건 내 쪽인데, 새삼 이런 꼴을 보여서 미안할 뿐이다.
“그냥 있어. 신경 쓰지 마.”
“그냥 있어? 뭘? DVD를 파는 쪽이 더 잘 어울린다느니 하는 소리를 듣고도 가만있어? 야. 잘됐어. 이참에-”
“아니. 이게 맞을 거야.”
닫힌 엘리베이터를 꼭 금방이라도 걷어찰 듯이 노려보면서 휴대폰을 움켜쥔 브랜든이 무슨 말이냐는 듯 고개를 휙 돌린다. 나는 녀석에게 천천히 말을 이었다.
“다니엘 씨에게, 아니, 바커 씨에게 내가 특별 대우를 끝내 달라고 했어.”
“…….”
“그래. 확실히 이건 생각 못 했던 일이기는 하지만…. 이제껏 특별 대우는 특별 대우였나 보네. 이렇게 곧장 치고 들어오는 건 처음인데.”
이게 아마 그날 밤 다니엘 바커가 말했던 ‘다른 시도’인 모양이다.
그리고 하필 어제 도착한 그의 귀여운 선물은 친구로서 전해 주는 마지막 인사였을지도 모르겠고 말이다. 게다가 당장 마음이 쓰이는 건, 나보다도 벌겋게 익은 채로 횡설수설 입을 여는 브랜든이다.
“-빌어먹을, 이선. 야. 야아, 괜찮아. 우선 내가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볼게. 아마 뭔가 착오가 있을 거야. 아니야. 그런 거 아닐 거라고!”
“브랜든. 이거 바커 씨한테 네가 전해 줄래? 난 그냥 갈게.”
“이선!”
“다음에 또 보자. 푹 쉬어. 피곤했을 텐데.”
나는 들고 온 선물을 거의 떠넘기듯 건네고 맞은편의 다른 엘리베이터에서 작은 도착음이 들리기가 무섭게 도망치듯 올라탔다. 바보 같은 브랜든은 문이 닫히는 와중에도 “기다려 봐. 연락 줄게!” 하고 외치고 있는데 말이다.
여러분들 중에서는 ‘이 정도는 각오했어야지.’ 하고 따끔하게 조언해 주고 싶은 분이 있을 수도 있다. 나도 모르는 건 아니다. 나름 각오했다 생각도 했었다.
하지만, 얼마 있지도 않은 친구가 또 없어지고 나니 왠지…….
-바커는 잘 만나고 나왔어?
“응. 그냥…… 그렇지 뭐. 고맙다고 인사하고 바로 나왔어.”
-그래.
기분이 이상하다.
나는 에이전시 건물을 뛰쳐나오자마자 근처의 작은 공원으로 달려가서 인적 드문 곳에 쭈그리고 앉아서 곧장 휴대폰부터 들었다. 얼마 전부터 촬영 중간중간 틈이 날 때마다 곧장 공항으로 달려가야 할 정도로 바빠진 연인은, 신호음이 세 번 가기도 전에 전화를 받았다.
그리고 딱 한 번 말을 주고받자마자 눈앞에도 없는 내 표정을 그려 낸 것 같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선. 무슨 일 있어?
“아니. 무슨 일은.”
-그럼 목소리가 왜 그러는데?
“맙소사! 과민반응이야. 공원에서 쉬고 있다고. 너나 일 잘 보고 돌아와. 난 오늘 친구랑 놀 거야.”
말이 길어질수록 얄팍한 평온이 무너져 내릴 것만 같다.
나는 급히 말을 잇는 연인의 낮은 목소리를 뻔히 알면서도 일부러 모르는 척 전화를 뚝 끊었다.
그다음은 어땠냐고?
여러분들과 공유하기는 조금 민망하지만, 션은 부재중 전화를 7번쯤 하고 나서 지금까지 분 단위로 메시지를 보내는 중이다.
참고로 난 그걸 15분에 한 번씩 모아 대답하고 있다.
애초에 ‘왜 그래’, ‘무슨 일인데’, ‘미치겠군’, ‘최대한 빨리 갈게’ 이 네 개의 무한 반복이라서 그때마다 즉답할 필요도 없다. 괜히 멀리 가 있는 걱정 많은 남자의 속을 뒤집은 게 아닌가 싶을 뿐이지, 뭐.
사실 정말 그렇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내가 션에게 한 말은 거짓말이 아니다.
……왜, 이제 거짓말하지 않기로 약속도 하지 않았나. 난 정말 오늘은 친구와 놀면서 하나뿐인 연인이 도착하기 전에, 이 처참한 기분을 어떻게든 해 볼 거다.
하지만, 안 놀던 사람이 놀러 나가면 꼭 깜박하는 게 하나씩 있기 마련이다.
“-맞다. 열쇠.”
기껏 도망쳐 오면 뭐 하나?
요새는 늘 누군가 열어 주는 곳에서 지내다 보니 깜박하고 있었을 뿐, 매번 집에서 나올 때마다 열쇠를 깜박하는 건 내 지루한 고질병이었다.
나는 굳게 닫힌 철문 앞에서 멍청하게 눈만 끔벅이다가 작게 푹 한숨 쉬고는 그 앞에 둥글게 무릎을 세워 말고 앉았다. 어째 오늘은 몸도 마음도 이렇게 종일 바닥에 앉아 있어야 하는 날인가 싶기도 했다.
“-우, 우와앗!”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 우울함은 차가운 철문에 등을 기댐과 동시에 앞으로 휙 밀려나며 어디론가 날아가 버렸지만 말이다.
“하여간 하루라도 우중충하지 않은 날이 없지!”
“벨 눌러도 반응이 없길래, 잠깐 어디 나간 줄 알았어요.”
“들어와!”
헬렌은 이제 숫제 이 아파트가 자신의 것인 듯 말했다.
나는 그제야 작게 웃음이 났다.
* * *
일전에 왔을 때 하도 질색을 하고 간 탓일까.
음침한 방공호를 연상케 했던 내 아담한 스윗 홈은 몇몇 부분 빼고는 마지막 방문 때보다 훨씬 더 사람 사는 집 같았다.
“헬렌. 이 곰 깔개…… 가짜 맞죠?”
“…….”
……거실 한가운데에 있는 ‘몇몇 부분’ 중 하나를 조심스럽게 짚어 물었을 때 아무런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 건 그냥 모른 척하는 게 정신 건강에 좋겠다.
“의외로 여기서 되게 잘해 먹고 사시네요.”
“그럼 이 늙은이가 굶어 죽기라도 해야 한단 소리야?”
“아니, 아니. 그냥 잘 드시니까 좋다고요. 왜 이렇게 사람이 부정적이람.”
나는 부엌 여기저기에 가득 있는 시장 봉투를 열어 보며 먹을 만한 것들을 골라 챙겼다. 분명 몇 시간 동안 배고프기는커녕 음식을 보면 속이 안 좋기까지 했는데, 갑자기 뒤늦은 허기가 온다.
망할. 그러고 보니 목도 엄청 마르네.
“요새 별일 없었어요?”
“뭐?”
냉장고에 있던 차가운 물을 곧장 들이켜자 반쯤 탈수 상태였던 몸이 뼛속까지 수분을 움켜쥐는 것 같았다. 나는 물을 몇 모금 더 꿀꺽꿀꺽 삼키고는, 저쪽에서 꽤 험상궂게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 헬렌을 향해 말을 이었다.
“그냥요. 저번에 여기서 저에 대해 묻고 다녔다는 형사라든가. … 뭐 그런, 이상한 사람이 또 꼬였을까 싶어서요.”
“그 쥐새끼는 요즘 뜸해.”
“하하. 다행이네요.”
별거 아닌 지나가는 말이라는 양 물었지만 사실은 퍽 진심이었던 나는, 내심 헬렌의 대답에 안심했다. 무슨 일이 생길까 걱정되어 기껏 이곳에 있게 하는 건데 계속해서 형사가 얼쩡거리면 헬렌의 신경 줄이 남아날 리가 있겠나.
그것까진 정말 다행인 일이었다.
하지만.
“-잠깐. 헬렌.”
……내 쪽은 언제쯤 마음의 평온을 찾을 수 있을까?
“방금 ‘요즘’ 뜸하다고 하지 않았어요?”
“흥!”
“흥은 무슨 흥이에요?! 아, 진짜. 헬레에엔!”
저 고집불통 할머니를 어쩌면 좋담?
나는 챙기던 간식거리를 다 내던져 두고 소파에 앉아 주름진 입을 심술궂게 다문 헬렌에게로 거의 말 그대로 튀어갔다.
“설마 그 형사, 전부터 알고 있었어요?”
“그럼! 왜 모르겠어?”
헬렌의 화법은 마구잡이로 내뱉는 말 중 뭐가 진담이고 뭐가 농담이며, 또 어떤 게 피해망상인지 늘 신경 쓰면서 들어야 하는 장벽이 있기는 하지만, 이제까지의 전적을 돌이켜 보면 저 심통 난 얼굴로 하는 말은 한… 8할은 제정신으로 하는 말이었다.
“확실히 캐시, 고것이 더 배포는 좋았어. 가끔 좀 이상한 데서 질질 짜긴 했어도 영리한 구석이 있었지. 멍청한 사내놈들 머리 위에서 노는 것도 훨씬 잘했고 말이야.”
난 그때까지 헬렌이 말한 ‘멍청한 사내놈들’이 나와 네스를 말하는 줄만 알았다.
“그 형사 놈도 그래. 처음에는 제가 캐시를 써먹는 줄 알았겠지.”
하지만, 누가 그 헬렌 워커 아니랄까 봐 곧장 이해할 수 없는 중얼거림이 덧붙었다.
소위 ‘헬렌 언어’ 해석은 내 전담 분야가 아니다. 넷이서 같이 지낼 때도 헬렌의 저 뒤죽박죽인 말은 네스 녀석이 아니면 다들 아리송해 했다고!
나는 왠지 한숨이 나오려는 걸 꾹 참으며 최대한 나긋나긋하게 입을 열었다.
“지금 무슨 말 하는 거예요. 저는 지금 캐시 사건의 담당 형사였던 닉 코빗을 말하는 거예요, 헬렌. 닉-코-빗이요. 헬렌이 봤다는 형사가 이 사람 말하는 거 아녔어요?”
“그래. 맞아! 그 얼뜨기를 말하는 거라고!”
“얼뜨기요?”
“주변에 약쟁이들을 거느리고 뒷골목 왕인 것처럼 거들먹거리던…… 쭈그러진 형사 새끼!”
대체 뭘 짚어 묻고 어떤 걸 흘려 넘겨야 할까?
우선 ‘쭈그러진 형사 새끼’라고 하는 걸 보면 닉 코빗의 주름지고 능글맞은 얼굴이 떠오르기는 하는데 말이다.
조금 전 물을 한 컵 가득 마셨는데도 왠지 입이 마르고 목이 바짝 탄 나는, 영 속을 알 수 없는 얼굴을 한 헬렌에게 허겁지겁 이어 묻기 시작했다.
“헬렌. 그럼요, 그 형사가 캐시와 아는 사이이기라도 했어요?”
“…….”
“어떻게? 왜요?”
헬렌의 초록색 눈이 기묘하게 빛난다.
모든 걸 다 알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기도 한 주름진 얼굴 앞에서 난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가끔은 침묵이 다그침처럼 다가오는 순간도 있는 법이다.
“…아, 아니면 혹시 네스랑 무슨 일이라도…-”
“크, 크큭!”
……알고 지낸 지 벌써 몇 년째인데, 솔직히 방금은 좀 무서웠다.
헬렌의 기괴한 웃음소리에 완전히 얼어 버린 나는 뭐라 말을 끝까지 잇지도 못하고 그대로 석상처럼 굳은 채 눈을 깜박이지도 못했다.
그렇지 않아도 커다란 눈을 벌겋게 핏줄까지 올라올 정도로 크게 뜬 헬렌의 얼굴이 코앞까지 다가온다.
“잘만 도망쳐 놓고…….”
“…….”
“이제 와 궁금한 게 많아졌나 보지, 네 녀석은?”
“-헤, 헬렌.”
“하여간 멍청하긴. 알 것 없어!”
잠시나마 다른 무언가가 씐 듯 섬뜩하게 흘러나왔던 헬렌의 목소리는, 어느새 익숙한 빈정거림으로 색이 달라져 있었다.
“알아 봤자 네스 그 새끼처럼 뒈지기나 할 거야. 네 녀석이 허우대만 멀쩡하다는 걸 누가 몰라? 조용히, 조용히, 조용히, 쥐새끼들 눈에 띄지 말기나 하라고.”
나는 그 순간 뭐가 진짜고 가짜인지 되짚거나 고민할 필요도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아마도 그게 네스 녀석이 헬렌과 유일하게 제대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이유였으리라는 사실도 알 것 같았다. 그게 내가 네스 바라노프라는 사람을 좋아했던 이유이기도 했으니 더 의심할 것도 없었다.
잠시 실이 끊어진 인형처럼 멍하게 있던 나는, 소파의 등받이에 몸을 푹 숨기듯 기댄 채로 웅얼웅얼 입을 열었다.
“…내가 도망친 건…, 그래요, 맞아. 헬렌.”
바짝 굳었던 어깨에서 뒤늦게 힘이 쭉 풀린다.
“…맞지만….”
“캐시 고것이 왜 일을 그만두고도 매일같이 등신 같은 네 녀석들이랑 같이 어울릴 수 있었겠어?”
등신 같다니. 너무하다.
그땐 좀 잘 안 풀렸을 뿐이지, 나도 네스도 둘 다 할 만큼 하고 있었는데. 나는 변명처럼 질문에 답했다.
“캐시가 모아 둔 돈이 좀 있다고….”
“콱 모가지를 따 버릴 돼지 새끼가 더듬어도 때려치우질 못하던 망할 타코 식당을? 대체 언제까지 그렇게 지랄 난 소리만 지껄일 거야?”
제대로 된 단어 반, 욕 반인 문장이기는 하지만 이해가 어렵지는 않다.
오히려 뜻 모를 말만 빙빙 돌려 말하는 것보다야 차라리 저 모가지를 딴다느니, 어쩐다느니 하는 표현이 훨씬 더 명쾌할 지경이다.
나는 눈을 끔벅이며 헬렌의 말을 다시 처음부터 재조립해 살폈다.
일을 그만두고도 우리와 어울릴 수 있었던 이유?
그러고 보면 그 ‘망할 타코 식당’을 그만두지도 못할 정도로 빠듯했던 캐시가, 갑자기 휴대폰도 바꾸고 우리와 어울리는 시간이 길어지기는 했었다.
난 그때 그게 헬렌이 힘들게 바짝 벌어서 저축한 다음 야금야금 까먹으면서 좋은 일자리를 구하려고 하는 건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면?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와. 씨발.”
그리고 그 끝에 이르렀을 때, 나는 어떻게 자각도 없이 곧바로 툭 입을 열었다.
“설마 코빗 그 개새끼가 우리 캐시한테 손가락 하나라도 댔으면- 아얏! 아, 왜애?!”
“이 썩어 빠진 골 안에 뭐가 든 거야!”
“……아, 아니야? 아니면 다행이죠! 근데 헬렌이 말을 좀 이상하게 했잖아요!”
“그리고 어디 감히 늙은이 앞에서 욕질을 해?”
“헬렌도 맨날 하면서!”
목소리 큰 사람은 못 이긴다는 말은 틀린 게 아니다.
조금 전까지 내게 지랄 난 소리만 한다고 소리 지르던 할머니는, 내 말에 적절한 해명 대신 “시끄러워. 저기서 먹을 거나 챙겨 와!” 하고 윽박지르는 거로 내 입을 막았다.
참 내. 이렇게 헬렌과 빽빽 맞소리를 치며 이야기하는 건 늘 네스의 몫이었건만, 어느새 나는 별 위화감도 없이 어영부영 그 자리를 이어 받은 채였다.
나는 “씨이!” 하고 일어났다가 헬렌에게 정강이를 한 대 더 얻어맞고는 아파서 콩콩 뛰면서 좀 전에 내팽개쳐 둔 간식거리를 다시 집어 왔다.
좀 편하게 말해 주면 좀 좋아?
“잘 들어. 고것은 정보를 팔았어.”
“……정보요? 캐시가?”
헬렌과 나는 과자와 파이 봉지를 있는 대로 뜯어서 테이블 위에 펼치고는 하나씩 쥐어 든 채로 소곤소곤 대화를 이어 갔다.
“그래. 아주 간이 부어서는, 쥐새끼들이 만들고, 사고, 또 파는 걸 살살 긁어냈다고.”
“헬렌. 그러니까 지금-”
그것도 어차피 우리 둘뿐이라는 걸 뻔히 알건만 꼭 누가 엿듣기라도 할세라 목소리까지 잔뜩 낮춘 채로 말이다.
“캐서린이 코빗 형사의 마약… 정보원이었다는 거예요? 그 말을 하는 거예요, 지금?”
“멍청한 놈이 이제야 알아듣는군!”
“……맙소사. 말도 안 돼!”
정말이지 먹던 과자가 목에 걸리다 못해 도로 튀어나오게 생겼다.
난 여전히 웃음기라고는 없는 헬렌에게 벌써 몇 년이나 늦은 탄식을 이어 갔다.
“대체 왜 그렇게 위험한 일을 했대요? 아니, 애초에 저한테는 한 번도 그런 말은-.”
“웃기는군! 약만 봐도 눈깔이 뒤집히던 네놈한테 무슨 얘기를 꺼내라고?”
“…누, 눈깔이 뒤집힐 정도는….”
“흥. 고것도 정말 매번 이번 주까지만 하고 그만두겠다고 조잘대더니 콱 죽어 버리고 말이야. 재활원이 하나같이 엿 같기는 하지만, 캐시 고것은 몇 주는 거기에 더 처박혀 있었어야 했어.”
왠지 뒷골이 빳빳하게 땅긴다.
머리로는 터질 것같이 열이 오르고, 이제껏 내가 듣고 또 보았던 온갖 문장과 상황들이 멋대로 얽히고설키는 게 왠지 눈앞이 띵하고 울리는 것마저 같다. 적어도 내일 다시 션을 만나면 할 말은 생겼다.
닉 코빗이 캐서린을 마약 수사 정보원으로 쓰고 있었다면, 캐서린이… 그렇게 된 다음 네스를 맴돈 상황에 대한 설명은 된다.
네스가 죽고 나서 녀석의 저택을 뒤진 이유도, 또-
……내게 다가왔던 이유도. 모두, 다.
나는 과자를 크게 한 주먹만큼 입에 털어 넣어 대충 허기를 때운 다음 들고 왔던 가방에서 검은 파우치 하나를 꺼냈다.
이 세상에서 총을 제외한 기계라면 영 좋아하지 않는 헬렌의 미간이 저절로 찌푸려지는 게 보인다.
하지만 별수 없지 않은가.
“뭐야?”
“그…… 다른 게 아니고. 네스의 저택에 있었던 CCTV 영상을… 좀 가지고 왔어요.”
“…….”
“그날의 영상이에요.”
왠지 다시 좀 으스스해진다.
그제야 난 헬렌이 네스의 이야기를 꺼낼 때마다 툭 소름이 끼칠 만큼 서늘해진다는 걸 짚어 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고 나자 내 무심한 부재가 못 견디게 쓰라려지기도 했다.
나는 그걸 내색하지 않으려 애쓰며 노트북의 잠금을 풀었다.
spencer0817.
션의 노트북 비밀번호는 저택 와이파이 비밀번호와 같다. 그러고 보니 내일은 이 쉽디쉬운 비밀번호 좀 바꾸라고 해야지.
“혹시 여기서 헬렌은 뭔가 찾을 수 있을까 해서요. 늘 잘 찾잖아요. 특히- 왜, 그…… ‘쥐새끼’ 같은 거라든가.”
“……쥐새끼?”
이건 차마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나만의 ‘망상’이다.
망상 전문가 헬렌이 아니라면, 그게 제아무리 션의 앞이었더라도 차마 입을 열 수 없었을 거다.
자. 다시 한번 명심해 줬으면 좋겠다.
이건 정말 내 망상이다. 이 CCTV 영상을 션과 함께 본 이후로 머리 한구석에서 쭉 싹을 틔운 작은 상상 말이다.
“이날의 영상에… 뭔가 있는 것 같아요. 그냥 곧장 보이는 사람들 말고요.”
“…….”
“정말…… 바로 찾기 어려운 쥐새끼 같은 거요.”
닉 코빗은 왜 이 CCTV 영상에 그렇게 집착했을까?
션을 의심하고, 그를 목표로 삼느라 그러는 거였다면 차라리 이상할 게 없다.
하지만, 그는 내게 접근하면서 가장 먼저 저택에서 CCTV 영상을 찾았냐는 말만을 집요하게 반복했었고 심지어는 자신에게 물 먹인 거나 다름없는 줄리의 이사 간 집까지 끈질기게 찾아내기까지 했다.
그게 그저 그녀가 CCTV 영상 속 ‘션 스펜서의 등장 증언’을 하지 않아서라고?
션이 이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영상 속에서 심히 수상한 모습으로 등장한다는 건 나도 인정한다.
하지만, 녀석의 죽음이 그렇게나 눈물겹게 신경 쓰일 거였으면…… 그는 죽은 네스를 본 척도 하지 않고 미친 듯이 저택을 뒤지는 일 따위는 해서는 안 됐다.
심지어는 그 데이비드 밀러마저도 강박적으로 보디가드를 두르고 다니게 하는 스펜서가의 비밀에 그렇게 가까이 다가가고도- 두려워하거나 당황하기는커녕, 마치 더 잃을 게 없는 사람인 것처럼 계속 나를 몰아붙이며 자꾸 제가 알지 못하는 정보에 목마른 내색을 해서는 안 됐다는 거다.
“아마 여기 뭔가가…… 있는 것만 같아요. 네스에 관련된 무언가가요.”
닉 코빗의 머릿속에는 네스 녀석뿐이었다.
그는 사실 스펜서도, 나도 신경 쓰지 않는다. 시간이 갈수록 그게 명확해진다.
션은 내 눈을 가리기 위한 덫이었다. 먹이랍시고 던져 주었던 션에 대한 의심의 씨앗은 사실 자신의 기괴했던 행동을 모두 알고 있을 그와 나 사이에 불신을 새기기 위한 긴 작업이었을 테다.
-코빗, 그가 내게 했던 말의 문장을 뜯어볼수록 그가 나를 다그친 순간마다 그 끝에 있던 목표가 이제야 선명하게 보인다.
특히, 그가 진짜 바랐던 첫 번째 목표는 이 CCTV 영상이다.
코빗은 줄리를 찾아내면서까지 이 영상을 다시 확인하고 싶어 했다. 그게 법정에서는 사용할 수 없는 불법적인 방법이라고 한들, 그저 ‘손에 넣고자’ 했었다.
그러니, 여기에는 무언가 이유가 있을 거다. 뻔히 보이는 션 스펜서도, 줄리 깁슨도 아닌…… 뭔가가.
하지만 난 그걸 굳이 헬렌에게 다 꺼내지 않고 조용히 영상만을 재생시켜 주었다.
그렇지 않아도 네스 얘기를 하면 눈에 띄게 살벌해지는 헬렌인데, 괜한 설명을 덧붙였다가 괜히 속이 시끄러워지는 건 싫었다.
지금도 저거 봐.
눈빛으로 모니터를 뚫거나 태울 수 있다면 진작 뭔 일이 나고도 남았을걸.
나는 소파의 쿠션 하나를 품에 안은 채로 노트북을 노려보는 헬렌 옆에 편히 자리를 잡았다. 지금의 난 휴식다운 휴식이 필요했다.
몸은 피곤하지 않더라도 정신은 이미 찢길 수 있는 모서리는 모두 다 갈라져 해진 채고, 손에 꼽는 친구 하나도… 왠지 오늘로 그 끝이 보이는 것 같지 않나.
최소한 잠시나마 이 과열된 머리를 식힐 시간이 절실하다.
그때였다.
흉흉한 기세로 노트북 모니터를 노려보던 헬렌의 가느다란 목에서 작은 금색 목걸이 줄이 보였다.
“헬렌.”
“……뭐!”
이미 우리 할머니는 아직 평화롭기 그지없는 화면 속으로 빨려 들어갈 눈을 한 채다.
“그 펜던트, 아직도 하고 있었어요?”
“…….”
“우와. 왠지 좀 감동인데.”
“시끄러워! 잠이나 자! 눈이 반은 풀려서는.”
저 목걸이의 가운데에는 헬렌의 눈 색과 쏙 닮은 작은 초록색 원석이 걸려 있다.
언제였던가, 맨날 생일을 물어봐도 “이 늙은이는 그런 거 없어!” 같은 매정한 소리만 하는 헬렌에게 나와 네스, 그리고 캐서린이 조금씩 돈을 모아 어머니의 날에 선물한 거다.
……아니, 좋은 말 해도 저렇게 난리야, 왜.
나는 모니터 속으로 고개가 빨려 들어갈 것 같은 헬렌에게 “고개 좀 뒤로 해요.” 하고 잔소리 아닌 잔소리를 중얼거리고는, 어느 순간 깜빡 잠이 들었다.
헬렌의 말마따나 눈이 반쯤은 감길 정도로 피로했던 탓이었다.
잠들기 전까지는 머릿속에 사랑하는 연인과 죽은 친구들, 우정의 끝자락에 서 있을 남자와 기괴한 형사까지 뒤섞여 퍽 머리가 복잡했던 것 같은데, 정작 한 번 잠이 들고 나자 오랜만에 어떤 꿈 한 조각조차 섞이지 않을 정도로 깊은 잠을 잤다.
그렇게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휴식을 취한 내가 다시 눈을 뜬 건, 촬영장으로 바로 가려고 맞춰 둔 휴대폰 알람이 울리기도 전의 어둑한 새벽이었다.
“-뭐, 뭐야!”
나는 누군가가 내 어깨를 강하게 붙들어 흔드는 것에 마치 벼락이라도 맞은 양 놀라 얼떨떨하게 그 깊은 잠에서 깼다. 어찌나 푹 자고 있었는지 눈조차 잘 떠지질 않아서 주섬주섬 옆에 있는 휴대폰을 잡아 켜자 희뿌연 시야 너머로 시간이 보였다.
새벽 2시 41분.
해가 훤히 떠 있을 때 왔는데 이 시간인 걸 보면, 씻지도 않고 말 그대로 기절한 채 한참을 잔 거다.
그리고 그건 다시 말해-
우리 강박증 여사 역시 최소한 열 시간 이상을 이 노트북만 붙들고 있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맙소사. 헬렌….”
나는 어느새 콘센트까지 꽂아 본격적으로 영상만 뜯어본 헬렌의 충혈된 눈을 보고 잠시 어안이 벙벙했다.
“설마 안 잤어요? 좀 전에 오후부터 쭉 계속 이것만 본 거예요?”
“…….”
“아니, 좀 봐달라고 했던 내 말은 이렇게 극단적인 뜻이 아니고, 그냥 말 그대로 시간 될 때-”
“찾았다.”
잠결에 횡설수설 말을 잇던 나는 순간 그 갈라지고 쉰 목소리에 말하던 자세 그대로 굳어 버렸다. 하지만 내가 그러거나 말거나, 헬렌은 그런 나를 보며 킬킬대고 뜨끈하게 열이 오른 노트북을 얼굴 앞까지 들이밀었다.
“찾았다, 찾았다, 찾았다, 찾았다, 찾았어!”
잠이 깨는 것도 같고, 그게 아니면 더욱 분명한 꿈속으로 빠져드는 것도 같은 기분이었다.
나는 그 기괴한 목소리에 왠지 소름마저 쭉 올라온 목을 몇 번 크게 저으며 반쯤 기울어진 몸을 일으켜 바로 앉았다. 그러자 내 오랜 친구는 더욱 신이 나서 노트북 모니터 한쪽 귀퉁이를 뾰족한 손톱으로 찍어 댔다.
“그렇게 찍으면 안 돼요, 헬렌! 이거 제 것도 아니라고요.”
“여길 봐!”
“네, 네. 봐요, 봐. …그런데, 어. 이게-”
헬렌의 손가락이 가리키고 있는 건 복도 중간이다.
정확히는 긴 복도 가운데 다른 통로와 연결되는 부분이었다. 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그 부분을 헬렌처럼 노려보았다.
“……뭐죠?”
“멍청한 놈! 눈깔은 장식으로 달고 다니는 거야?!”
“아니, 그건 아닌데….”
“여기! 여길 보라고!”
너무 흥분해서인지 말이 안 통한다.
나는 헬렌에게 제대로 된 설명을 듣는 것 대신, 화면을 재생해서 그 구간을 돌려보는 쪽을 택하기로 했다. 사실 그때까지 난 내심 마음 한구석에서 ‘아무것도 없는데. 헬렌도 참.’ 하고 혀를 찼었던 것 같다.
영상이 멈춘 지점은 션이 긴 복도를 걸어 떠나고, 네스가 내실의 문을 잠시 열기 직전의 몇 분이었다.
사실 얼핏 보면 그 순간은 지루할 만큼 별 움직임도, 내용도 없는 폭풍우가 치는 밤의 흔한 순간에 불과했다.
창문 밖으로는 비가 몰아치고 키가 높은 나무들이 미친 듯이 흔들리며 일렁이는 그림자를 지우는 모습이야 이 CCTV 데이터 안에 이미 몇 시간이고 담겨 있는 걸 나도 이미 보지 않았었나.
하지만.
“……뭐야?”
나는 조금 전과는 다른 의미로 작게 중얼거리면서 키보드 방향키를 왔다 갔다 했다.
헬렌이 손으로 마구 두드려 댄 탓에 잔뜩 지문이 묻어 유독 두드러지는 복도의 구석, 거대한 창문들 사이로 춤추며 너울대는 나무 그림자 사이의 단 1초.
그곳에서 나 역시 무언가를 본 탓이다.
정확히는, 흔들리는 나무 그림자와 번쩍이는 번개 사이로 슬그머니 사라지는 ‘누군가’의 그림자를.
멍하게 얼이 빠진 채로 몇 번이고 그 순간을 돌려 보는 나를 보며, 헬렌이 킬킬대고 말했다.
“보라고. 봐.”
“…….”
“쥐새끼야!”
그날 밤.
아무래도, 내 친구의 저택에는 다른 누군가가 그림자 속에 몸을 숨기고 있었던 것 같다. 션 스펜서와 줄리 깁슨이 자신을 지나쳐 가는 순간을 고요히 기다리면서 말이다.
* * *
#.??? 3년 전, 시작
기쁜 날 마시는 술은 누구라도 쉽게 취하기 마련이다.
특히 그게 꽤 오랜 금주 끝에 마시는 거라면 더욱 그렇다. 여기 세 사람 역시 마찬가지다.
왁자지껄한 펍의 분위기와 어디선가 들리는 누군가의 저질 농담에 같이 낄낄대다가, 어느 순간 눈이 마주치면 이제껏 지나온 힘든 순간을 코를 훌쩍이며 주절대고, 또 그다음은 언제 그랬냐는 양 가득 술을 부어 마신다.
덕분에 이선은 주머니가 꽤 홀쭉해지는 중이지만 적어도 오늘만은 어떤 걱정도 없다.
「하, 야, 나 옷 하나 사야 하는 거 아니냐? 왜. 이렇게 대단한 인간들이랑 만나는 자리는 옷도 보고 그러지 않을까?」
「당연하지. 너 그 거지 같은 파란 줄무늬 셔츠 입고 가기만 해 봐, 아주.」
「맞네. 맞네. 옷, 사, 기.」
딱 기분 좋을 만큼 취기가 오른 바라노프는 그답지 않게 몇 번이나 큰 소리를 내어 웃다가 휴대폰 메모장을 켜서 짤막한 쇼핑 목록을 적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지금의 그를 그래 봤자 미팅 메일 하나로 너무 오버하는 게 아니냐고, 영상화처럼 큰 작업은 언제든지 엎어질 수 있다며 코웃음 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건 배부른 소리다.
당장 내일의 희망은커녕 오늘의 전망조차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밤 속을 걷던 이들에게 뻔하디뻔한 문장으로 엮인 메일 한 통은 무조건 손에 그러쥐고 기어 올라가야 할 사다리다. 그게 사실은 썩어 가고 있는 것이라 언젠간 반드시 고꾸라져 바닥으로 떨어지게 된다 하더라도 다른 선택지는 없다.
-뭐가 됐든 지금보다는 나을 테니까.
이선은 얼음 몇 개가 들어간 차가운 물을 마시며 눈앞을 아득하게 휘감는 취기를 조금 떨쳐 내 보려 애썼다. 따지고 보면 뭐 대단히 마신 것도 아니건만 너무 오랜만에, 또 빨리 들이켠 알코올이 유독 표독스럽게 더운 기운을 내뿜었다.
「야! 나 맥주 하나 더 마신다아?」
특히, 여기 캐서린은 이선이 웃으며 「너 진짜 작정하고 벗겨 먹는구나.」 하고 중얼거리는 말에 혼자 박장대소를 터트릴 정도로 완전히 취한 채였다. 화장실에 다녀오겠다며 팔랑팔랑 걸어가는 걸 보고 좀 깨서 오겠거니 했는데 전혀 아니다.
이선은 슬쩍 휴대폰을 확인했다.
어느새 밤 11시가 넘었다. 보아하니 딱 이거까지만 마신 다음, 여기서 걸어서도 갈 수 있는 오늘의 주인공, 네스의 집에 가서 자는 게 좋을 것 같다.
「캐시?」
「으-으응?」
그런데 그때다.
이런저런 가까운 미래를 그리던 이선, 그의 눈에 무언가가 들어왔다.
그는 저를 향해 헤실헤실 웃으며 대답하는 예쁘장한 얼굴을 보며 다시 한번 고개를 좌우로 젓고 눈도 세게 감았다가 떴다.
-부질없는 행동일지는 몰라도, 지금 제가 발견한 것이 그저 술김에 보이는 멍청한 착시현상이라도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이선은 천천히 이어 물었다.
「그거 뭐야?」
캐서린 에이브리의 손에는 손가락 두 마디 정도 되는 작은 종이쪽지가 들려 있다. 모두가 각자 취해 떠드는 술집 안에서 그 누구보다 화기애애했던 테이블 위로 기묘한 적막이 흘렀다.
네스는 그즈음 제 두 친구가 이상할 정도로 조용하다는 걸 깨달았다. 그는 그나마 이 테이블에서 가장 취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휴대폰 메모장에 준비해야 할 것을 적던 그는, 캐서린이 장난스럽지만 분명 반쯤 풀린 눈으로 저와 이선을 번갈아 보는 걸 보며 왠지 뒤늦게 삐끗한 기분이었다.
「좋-은-거.」
말마따나, 그것도 이렇게 좋은 날에!
「…맙소사. 캐서린. 너 그러면 안 돼.」
「당장 치워!」
「야아, 이건, 진짜, 약도 아냐. 마리화나보다도 못하대. 그냥…, 약간 술맛 돋우는 정도?」
「마리화나보다 못하고 뭐고, 망할, 어디서 난 거야?! 너 설마 아직도 그놈들이랑-」
「아, 아니이, 그게 아니라!」
다른 테이블까지 넘어갈 만큼 커다란 네스의 목소리에 흘끗대는 주위의 시선이 꽂히기 시작했다. 캐서린은 당장이라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날 기세인 네스와, 이제 아예 벽 쪽으로 머리를 기댄 채 고개를 돌려 버린 이선을 번갈아 보며 변명하듯 작게 중얼거렸다.
「저어기, 화장실 갔더니… 저쪽 테이블 언니들이 주던데.」
「저 빌어먹을 러시아 년들이!」
「야! 너도 러시아계잖아, 이 멍청한 러시아 새애-끼야. 이름도 B-A-R-A-N-O-V…. 아하핫, 고마워요, 언니들~!」
「정말 돌아 버리겠네! 인사하지 마. 야! 하지 말라고!」
네스가 곧장 욕을 박은 러시아 테이블에서는 보란 듯이 가운뎃손가락을 든 채 야유하고, 캐서린은 그녀들을 향해 손키스를 보내는 환장할 상황에 멋모르는 취객들이 낄낄대고 웃는다. 가히 난장판도 이런 난장판이 없다.
네스는 제가 한 말이 웃긴지 깔깔대며 웃고 있는 캐서린의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보아하니 여기에 있어 봤자 좋은 꼴은 못 볼 것 같다는 확신이 들어서였다.
그는 여전히 벽에 머리를 대고 있는 제 다른 친구의 어깨를 가볍게 흔들며 급히 입을 열었다.
「망할, 이선. 얘 여기 두면 안 되겠다. 야, 너도 많이 취했어? 안 되겠네. 바로 내 집으로 가자.」
「--아냐!」
웬만해선 목소리를 높이지 않는 느린 템포의 남자에게서 터진 작지만 날 선 반응에 네스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하지만, 바라노프 그보다도 더 놀란 건 그 뾰족한 대답을 한 당사자였다. 이선은 뒤늦게 고개를 바로 돌리고는 유독 횡설수설 말을 이어 갔다.
「난…, 난 그냥 천천히 따로 들어가 볼게, 네스.」
「…….」
「…나도 그렇게 상태가… 좋은 것 같진 않아서. 집에 가서 쉬어야 할 것 같아.」
네스 바라노프는 제 친구의 시선이 취해 늘어진 채로도 고집스레 작은 봉투를 움켜쥔 캐서린의 손에 잠시나마 닿았다 떨어진 것을 분명히 눈치챘다. 하지만 그는 그걸 모르는 척했다. 때로는 적절한 무시 역시 필요한 것이었기에.
「그래. 알았다. 내일 보자고.」
허둥지둥 자리에서 일어나는 이선을 보며, 네스는 속으로 ‘캐서린. 너 술 깨기만 해 봐.’ 하고 목 끝까지 올라온 욕을 삼켰다.
하지만, 오늘 나사가 빠진 친구는 캐서린 한 명이 아니었다.
「-잠깐만. 이선!」
조금 전까지 자리하고 있던 친구의 자리에는 신경질적으로 테두리가 찢어진 티슈들과 함께 그가 늘 가지고 다니던 손때 묻은 작은 잭나이프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다.
네스 바라노프는 작게 혀를 차면서 그걸 통째로 집어 들어 대충 캐서린의 가방에 던져 넣었다.
* * *
무려 그 션 스펜서도 내 문자에는 못해도 몇 분 안에 대답하는데, 고고해도 이렇게 고고할 수가 없다.
[형사님. 우리 좀 볼까요]
[저기요, 코빗 형사님.]
[확인하시면 연락 주세요]
이건 바로 다름 아닌 닉 코빗 형사 이야기다.
나는 요 이틀 그에게 꼬박 매달려 문자와 전화를 쏟아 내는 중이다.
정말이지 연애에서도 이렇게 매달린 적이 없는데 세상에나, 제발 연락 좀 달라고 웬 아저씨에게 이렇게 매달리게 될 줄이야.
차라리 안 읽으면 몰라. 시간 텀을 좀 두기는 했지만 읽기는 꼬박꼬박 읽으면서 거 되게 튕기신다.
물론 그가 내 연락을 무시하는 걸 이해를 못 하는 건 아니다.
션이 그를 질색하듯, 이제 코빗 이 사람도 나와 션이라면 지긋지긋해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난 고집스레 무대응으로 일관하는 이 휴대폰 너머의 사내가 퍽 갈등하고 있는 게 뻔히 그려진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날 캐서린을 만나러 오지는 않았겠지.
[당신이 준 숙제를 다 풀었어요]
닉 코빗은 내게 늘 먹이를 준다고 표현하며 낄낄댔었다.
그리고 아마, 이번은 내가 먹이를 줄 차례일 거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아마도 그가 가장 구미 당겨 할 마지막 문장을 천천히 눌러 적었다. 한 글자 한 글자 액정 위에 새겨질 때마다 왠지 심장이 빠르게 달음박질쳤다.
[그쪽이 CCTV에서 뭘 찾았었는지도 알고요]
사실 이번에는 그 긴장만큼 코빗이 내가 보낸 문자를 곧장 봤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건 빡빡하게 들이찬 촬영 스케줄 때문은 아니다.
다름 아닌 문자 전송 버튼을 누름과 동시에 손바닥만 한 기계를 정확히 잡아채 간 깐깐한 내 연인, 션 스펜서 때문이다.
“오늘은 휴대폰 그만.”
나는 나이 서른둘에 촬영장 한편에 주차된 트레일러에서 휴대폰을 압수당했다. 세상에! 고등학생 때도 겪은 적 없는 잔혹한 처사다.
“저기요, 아빠? 거 너무하시네. 저녁 8시라고!”
“그리고 노트북도 이리 내.”
“-맙소사! 진심이야?”
“최소한 오늘은 이걸로 끝이야. 쉴 땐 제대로 쉬어.”
션은 내가 그를 아빠라고 부른 것에는 아랑곳하지도 않고 내가 한쪽 팔에 끼고 있던 노트북마저 빼앗아 갔다. 새삼 단호한 표정을 보아하니 이건 자기야를 한 백 번쯤 불러도 절대 돌려주지 않을 것 같다.
……아니, 뭐. 나도 인정한다.
어제오늘 나는 촬영장에서 틈만 나면 휴대폰을 붙들고 코빗 형사에게 문자를 보내거나 그의 연락을 기다렸고, 잠깐 제대로 쉴 시간이 생겨서 트레일러로 왔을 땐 이미 셀 수 없이 다시 본 CCTV 녹화본을 돌려 봤다.
세상에 그걸 어찌나 많이 봤던지, 이제는 눈을 감아도 잠시 모습을 드러냈다가 나무 그림자에 겹쳐 사라지는 인영을 뚜렷이 그릴 수 있을 것 같을 지경이기까지 하다. 그래. 확실히 좀 심했지.
나는 내 휴대폰과 노트북을 저만치에 있는 테이블에 올려 두는 연인을 빤히 지켜보다가, 이내 그와 마주쳤을 때 팔을 쫙 벌렸다. 그러자 뭐냐고 묻기는커녕 자연스럽게 가까이 와 기꺼이 날 품에 끌어당겨 안는 품이 단단했다.
“션, 있지. 이 사람은 분명히 CCTV 위치가 어딘지 알아.”
휴대폰과 노트북을 그만 보라고는 했지만, 아예 그 얘기를 꺼내지 말라고는 안 했다. 되게 무드 없다고? 어쩌겠나, 이게 우리의 연애인 것을.
나는 널찍한 소파에 그와 나란히 붙어 누운 채로 귓가에 대고 작게 소곤거렸다.
“여기에 잠깐만이라도 들어가 볼 수는 없을까? CCTV가 있던 각도로 뭐라도 설치해서, 저 쥐새끼가 어디로 어떻게 움직였는지만이라도 알면 좋을 텐데.”
“……쥐새끼? 뭐야. 형사 놀이라도 하고 싶어진 건가?”
“아, 아니이! 그럴 리가.”
이건 그저 헬렌의 말버릇이 옮았을 뿐이다.
그리고 형사 놀이라니!
그런 위험천만한 짓은 내 사전에 없다. 애초에 굳이 내가 직접 해야 할 필요도 없지 않나. 이건 그냥 그렇다는 거다.
“션. 우리 아는 형사 있잖아.”
“…….”
“좀 많이 재수 없고 꺼림칙하기는 한데……. 최소한 네스에게 괜히 집착하는 사이코패스는 아닌 거 같고. 적어도 여기 CCTV에 찍힌 이 그림자에 대해 아는 게 있는지 정도는 물어봐도 되지 않을까?”
직접 주먹다짐을 하지 않았다 뿐이지, 서로 속을 뒤집어엎는 것만큼은 한계까지 한 두 남자다. 나는 닉 코빗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썩 기껍지 않은 표정이 된 션의 눈가에 쪽, 하고 입술을 부딪치며 말을 이었다.
“-또, 나쁜 스펜서 쪽 사람도 아닌 거 같고.”
“‘나쁜 스펜서’?”
“넌 좋은 스펜서 해. 내가 인증이라도 해 줄게.”
“……못살겠군.”
션이 낮게 웃자 베고 기댄 그의 몸이 딱 기분 좋게 울린다.
나는 그 예쁜 얼굴을 보며 덩달아 입꼬리가 올라가려는 걸 꾹 참았다. 대단한 이유는 없다. 그냥 나도 얘처럼 좀 멋있게 웃고 싶거든.
“이선.”
지금도 봐.
매일같이 부르는 내 이름을 부르는 것일 뿐인데 정말 어이없을 정도로 근사하지 않나.
정말이지 얘가 잘나가는 녀석이어서 다행이다.
그렇지 않았으면 여러분들 중 누군가 거 눈에 씐 것 좀 어떻게 하라고 했을 때 할 말이 없었을 테니 말이다. 새삼스레 션의 얼굴을 뜯어보며 내심 좋아하고 있던 나는, 그의 부름에 작게 고개를 까닥였다.
사실 난 그때까지 그가 무슨 말을 할지 한 치의 예상조차 못 하고 있었다.
“다른 게 아니고, 이번 영화 촬영이 끝나면… 저택을 팔고 다른 곳으로 이사 갈까 하는데.”
끽해야 조금 이따 이어질 촬영에 관한 얘기를 하겠거니 하던 내게는 너무나 갑작스럽고 또 엄청난 주제다. 워낙에 태연하게 흘러나온 덕분에 그 엄청난 규모의 말을 곧장 머릿속에 입력하지 못한 나는, 몇 초인가 미간을 좁힌 채로 들은 말을 곱씹었다.
“지금 사는 곳을 판다고? 저택을?”
“어.”
“왜? 할리우드 톱 텐 3위로는 성에 안 차? 너도 저택 안에 교회를 짓고 싶은 거야?”
“아니. 그냥 좀 더…… 괜찮은 곳이 있지 않을까 싶어서.”
“맙소사. 장담하는데 더 괜찮은 데가 그리 많지는 않을걸!”
심지어 션 그 스스로도 한때 싸게 쳐서 한 달에 4만 달러의 숙박비를 부른 저택 아닌가!
나는 생각지도 못하게 튀어나온 그의 놀라운 희망 사항에 잠시 입을 다무는 것마저 잊었다. 그러자 션은 그런 내 당혹을 다 예상했다는 듯 잠시 단어를 고르나 싶더니, 정말 천천히, 단어 하나하나가 귀에 꽂힐 만큼 느리게 말을 이어 갔다.
“그래서 말인데. 이선, 넌 나중에… 어디서 살고 싶어?”
“……응?”
“파파라치나 기자들은 이제 별로 안 좋아하잖아. 쇼핑을 자주 하는 것도 아니고, 살던 아파트는 고등학교가 옆에 있어서 시끄러운 게 별로라고…, 하지 않았었나 해서.”
술술 이어 가던 말이 끝으로 갈수록 그답지 않게 어물어물 작아진다.
나는 언제였던가 내가 지나가듯 했던 소리조차 모두 기억하고 있는 남자의 말에 왠지 속이 간지러워졌다. 게다가, 바보가 아닌 이상 그가 내게 이 질문을 던지는 이유 역시 모르는 척하려야 모르는 척할 수가 없어서…….
“어, 어어. 그- 글쎄.”
제발, 아, 제발, 내 적혈구들아.
얼굴로만 가지 말아 줘. 부탁이니 이번만은 주인의 뜻을 따라 주지 않으련.
나는 속으로 기도 아닌 기도를 하면서 괜히 침을 크게 꼴깍 삼켰다.
“-음, 글쎄. 바다…… 보이는 곳?”
“바다?”
“…그냥. 어렸을 때부터 왠지 그런 곳에서 살고 싶었어. 아침에 눈 떠서 거실로 나가면 바다가 보이는 집 같은 거. ……미시간 호랑 바다는 또 다르잖아. 뭐, 우리 집에서 미시간 호가 보였다는 말은 아니지만….”
젠장. 쿨하게 말하고 싶었는데 왠지 마지막엔 안 해도 될 소리까지 하면서 횡설수설했다.
하지만 나 못지않게 눈에 뭐가 씌어도 단단히 씐 션 스펜서는, 내 대답 따위가 뭐라고 입술을 깨물며 웃음을 참고 있다.
아. 제발 날 품에 안은 이 남자가 점점 빠르게 뛰기 시작한 내 시끄러운 박동 소리를 눈치채지 못했기를.
“그래, 그럼 보란 듯이 말리부로 가 볼까.”
말리부라.
듣기만 해도 소름 돋게 멋진 단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 멋진 단어 뒤로 떠오르는 사람도 하나 있다. 바로 그날 이후 아무런 연락도 없는 다니엘 바커다.
……내 선물은 잘 받았을까?
나는 이제 와 신경 써 봤자 아무 의미 없는 생각을 하면서 션의 가슴팍에 고개를 묻었다. 내 연인인 남자는 눈치가 워낙 빨라서, 내가 조금만 우울해해도 금방 짚어 내고 만다.
“이제 다음 주부터는 뉴욕 일정이니 혹시 이쪽에서 볼일이 있으면 다 처리하고 가는 게 좋을 거야.”
“……벌써 그렇게 됐구나. 시간 진짜 빠르다.”
“빨리 뉴욕 가 보고 싶다며.”
“그야… 그래.”
잘 세팅된 머리카락을 헝클리지 않고 살살 쓰다듬는 그의 손이 유독 부드러웠다.
아, 젠장. 괜히 눈가가 좀 뜨거워지는 것 같다.
정말 내가 이런 소름 돋을 정도로 완벽한 행복에 휘감겨 있어도 되는 걸까? 내일을, 내일모레를, 그다음 달을, 내년을 생각해도 되는 건가?
…나도… 누군가와 함께하는 미래 같은 걸 그릴 수 있는 사람인가, 정말로?
맙소사. 새벽도 아닌데 이른 저녁부터 별 낯부끄러운 감상에 빠진다.
하여튼 한심하게 내가 요즘 좀 이렇다. 이제껏 단 한 번도 상상할 수 없었던 것들에 둘러싸여 있는 탓일까. 어느 순간 포기했던 모든 것들을 다시 욕심내게 되고는 한다.
-똑똑!
이제 슬슬 션에게 들킬까 걱정될 정도로 속이 울렁이기 시작했을 때, 딱 좋은 타이밍에 누군가 트레일러의 문을 두드렸다. 나는 “내가 나가 볼게!” 하고 그의 품에서 벌떡 일어나 신발도 제대로 못 신은 채 총총대고 문 앞으로 달려 나갔다.
트레일러의 문 앞에 있는 건 미술팀의 막내인 벤지였다.
“……저, 저어, 이선.”
“벤지, 촬영 시작인가요? 슬슬 준비할게요.”
“-그게 아니고요…!”
“네?”
……어, 뭘까.
조금… 이상하다.
평소에도 살짝 울상인 남자이기는 하지만, 지금은… 이상할 정도로 안절부절못하고 있지 않나. 심지어 불안은 가장 쉽게 전염되는 감정 중 하나다. 덕분에 방금까지 나른한 기분에 젖어 있던 나는, 별안간 익숙한 현실로 끌려온 기분에 멍청하게 눈만 깜박였다.
심지어 벤지 그는 주변을 휘휘 둘러보더니 별안간 내 쪽으로 고개를 바짝 기울이기까지 했다.
“이선. 큰일 났어요.”
“……뭐, 뭐가요?”
“겨, 경찰이…… 찾아왔어요.”
고양감에 먹먹하게 절여졌던 심장이 습관처럼 철렁, 가라앉는다.
“-이선, 당신을 찾는다고요!”
“아.”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요. 무슨 일인 거예요? …해리엇 씨가 저보고 먼저 알아보라면서….”
“벤지, 괜찮아요. 걱정 마요. 아마도 제가 부른 사람일 거예요.”
“……정말요?”
-빌어먹을. 이래서 죄 짓고 살지 말라고 하는 건데.
뒤늦게 나온 션이 무슨 일이냐는 듯 쳐다보는 것에, 나는 그에게 작은 입 모양으로 ‘닉 코빗!’ 하고 대답해 주었다.
세상에, 그 형사도 진짜!
내가 만나자고 노래를 부르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촬영장으로 곧장 찾아와 스태프 앞에서 들이박으라는 뜻은 아니었는데. 나는 연인의 품에서 있을 때와는 다른 의미로 쿵쾅거리는 가슴께를 누르면서 작게 심호흡을 했다.
“……지금 촬영장까지 그 사람이 왔다는 건가?”
“아마 그런가 봐.”
“제정신이 아니군.”
기껏 완전 사이코는 아닐 거라고 포장해 뒀더니 어째 이건 뭐 다시 한번 정면충돌할 기세다. 나는 여전히 쩔쩔매며 앞서는 벤지의 뒤를 연인과 함께 따라가면서, 눈에 띄게 미간을 찌푸린 남자의 등을 살살 쓸었다.
아무리 내가 발을 동동 구르다 못해 일부러 먹음직스런 말까지 했다고 한들 경찰 배지를 들이밀면서 이 느지막한 저녁, 촬영장으로 찾아와 그 주연 배우를 찾는 건…… 확실히 코빗 그에게도, 내 쪽에게도 절대 보기 좋은 모양새가 아니기는 하다.
게다가 스태프들에게는 뭐라고 둘러대야 하느냐고!
나는 저쪽에 가득 모여 있는 사람들을 보면서 속으로 작게 혀를 찼다.
-하지만.
“…….”
아무래도 나는 스태프들을 향한 변명보다 닉 코빗 그에 대한 사과를 먼저 해야 할 것 같다.
촬영장에 도착하자 마치 모세가 물살을 가르듯 천천히 일렬로 갈라지기 시작하는 스태프들의 기묘한… 불안을 품을 시선 끝에 있는 건, 나도, 내 연인도 아는 얼굴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건 한 명도 아니다.
나는 조금은 느슨한 양복 차림의 낯선 사내 여럿이 나를 보자마자 곧장 걸어오는 것을 보며 멍하게 눈만 깜박였다.
하나, 둘…….
촬영장에는 어울리지 않는 얼굴이 다섯이다.
저쪽에서 나를 바라보는 데이비드 밀러의 시선이 이제껏 본 적 없는 온도로 내리꽂힌다.
그다음은 해리엇이다.
그녀는 밀러 감독의 표정과는 조금 다르지만, 무슨 일에도 호탕하게 웃으며 여유롭던 평소와는 달리 얼굴 가득 초조함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이선 박?”
그 주변의 사람들은 또 어떤가.
“이선 박? 박 씨, 맞습니까?”
“……네?”
나는 그들의 얼굴 하나하나를 얼어붙은 채로 짚어 보다가, 어느새 내 한 걸음 앞까지 다가온 다섯 남자 중 가장 앞에 선 하나가 내게 하는 말을 놓쳤다.
“아. 네, 그렇습니다만. 죄송한데 누구신지….”
“LAPD입니다.”
그건 듣기 전부터 이미 알았다.
벤지가 귀띔해 줬기 때문이 아니다. 내게로 걸어오는 사내들의 허리춤마다, 그리고 누군가는 목걸이로 눈에 띄게 경찰 배지가 걸려 있는데 그걸 어떻게 모를 수가 있겠나.
“이선 박.”
철커덕. 쇠가 부딪히며 움직이는 소리가, 누군가의 큰 숨소리와 함께 뒤섞인다.
나는 마치 슬로우 모션처럼 눈앞에서 장면 단위로 나뉘어 움직이는 익숙한 이들의 움직임을 모두 눈에 담았다.
왜일까, 그 순간 신기할 정도로 모든 게 느리게 보였다.
“당신을 캐서린 에이브리와 네스 바라노프의 살인 혐의로 체포합니다.”
순식간에 사내 둘이 달라붙어 제압당한 내 팔은 옴짝달싹할 수 없도록 뒤로 꺾이고, 이내 손목 사이에 묵직한 쇠가 채워진다. 그건 그리 추운 날씨도 아니건만 혼자 꽁꽁 얼어붙어 있었던 듯 차가웠다.
“당신은 변호사를 선임할 권리가 있고, 묵비권을 행사할 권리가 있습니다. 또한 변호사를 구하지 못하면 주 정부의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권리를 이해하셨습니까?”
“……뭐?”
이건 내가 낸 되물음이 아니다.
얼이 빠진 채로 입술만 달싹거리는 멍청한 나보다, 한발 앞서 날을 세운 건 내가 사랑하는 남자의 외침이었다.
그는 내게로 성큼 다가오려다가 형사 셋에게 둘러싸였다.
촬영장 어디에선가 탄식에 가까운 “어어!”하는 외마디 소리가 터진다.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겁니까!”
“스펜서 씨. 공무집행을 방해하시면 저희도 여러모로 원치 않게 꽤 곤란한 상황을 만들 수밖에 없을 겁니다. 그걸 바라지는 않으실 텐데요.”
“이유가 뭡니까.”
“말씀드렸다시피-”
“이선이 그들을 죽였다는 헛소리 말고!”
고작 몇 분 전까지만 해도 내게 반짝이는 말리부의 바다를 입에 담던 그의 목소리가 조금은 갈라진 채로 이어진다.
나는 이 와중에도 언제나 누구보다 침착했던 그가 눈에 띄게 흔들리는 모습이 생경하다는 생각을 했다.
“제대로 된 이유가 뭐냐고 묻잖습니까!”
딱딱하게 굳은 얼굴을 한 형사들이 서로 시선을 주고받는다. 마치 이 카드를 지금 꺼내도 되는지 확인하려는 듯한 얼굴이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들은 머지않아 답을 냈다.
그건 어차피 난 그들의 손에 떨어졌으니 별 상관없다는 듯한 무심한 어조였다.
“-총격 신고를 받고 출동한 박 씨의 아파트에서 캐서린 에이브리와 네스 바라노프를 살해한 무기가 발견됐습니다.”
“…….”
“각각의 살인 모두에 사용된 같은 9mm 권총, 그리고 잭나이프가 말입니다.”
세상 모든 감정을 담을 수 있는 연인의 얼굴이 그 어떤 마음도 짚어 낼 수 없도록 하얗게 질리는 게 보인다. 필사적으로 나와 시선을 마주치는 그를 보고 있으려니, 내 덜떨어진 머릿속에서도 한발 늦게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아파트에는.”
나는 손목에 이것이 채워진 이후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조금은 떨리기는 했지만, 그래도 듣기 싫을 정도는 아닌 목소리는 왠지 내 성대를 빌려 나오는 타인의 문장 같았다.
“제 아파트에는… 아무도 없었습니까? …키가 작은… 할머니 한 분이, 계셨을 거예요. 형사님. 할머니가 있어요. 헬렌 워커라고….”
“-집은 텅 비어 있었습니다.”
이제껏 살며 단 한 번도 그 어떤 종교도 제대로 믿어 본 적 없는 나는, 최악의 순간에서야 필사적으로 하늘의 존재를 찾았다. 생각해 보면 그건 미련하기 짝이 없는 짓이었다.
“대신, 최소한 바닥의 핏자국을 누구와 대조해 봐야 할지는 알게 됐군요. 자세한 건 서에 가서 이야기하시죠. 박.”
애초에 나는 이 빌어먹을 천사의 도시에 온 이후로 단 한 번도 그 따스한 은총 끝에 걸린 적 없었으니 말이다.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려 크게 휘청이는 팔을 붙잡는 악력은 언제나 날 깨어질 듯 조심히 대했던 남자의 것처럼 친절하지 않다. 나는 제대로 중심조차 잡지 못한 채로 그 억센 힘에 질질 끌려 휩쓸려 갔다.
“--이선!”
사랑하는 남자의 목소리가 심장을 꿰뚫는다.
그건…… 정말 감히, 이제껏 내가 배웠던 그 고통보다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쓰라린 감각이어서, 그 순간 대답 대신 꽉 막힌 듯한 숨이 터져 나오고 말았다.
……언제나처럼 션의 말이 맞았다.
나는 확실히 제대로 된 휴식이 필요하다.
이미 떠들 만큼 떠들지 않았나. 애초에, 찢긴 스크린 밖으로 튕겨 나가진 배우의 마이크는 돌아갈 필요가 없다. 잠시 몸을 숙이고 지켜볼 때다.
관객 여러분, 잠시 안녕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