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 A coward dies many times before his death.(2) (17/21)

* * *

차의 조수석.

그건 션 스펜서가 대중교통만큼이나 살며 탈 일이 손에 꼽을 만큼 없던 자리다.

그의 자리는 높은 확률로 최고급 세단의 뒷좌석이었고, 그게 아니라면 저 자신이 직접 운전대를 잡는 드라이브가 대부분이었다.

그 덕분에 이선이 “내가 운전할게.” 하고 저를 조수석으로 보낼 때마다 퍽 설레기까지 하지 않았나.

사실 그것만으로도 션 스펜서의 인생에서 실로 전례 없는 일이기는 했다.

“미안합니다. 너무 덜컹거렸나요, 방금?”

“아뇨. 아닙니다.”

하지만 그보다도 파트너 배우이자 첫사랑이자 첫 연애의 상대가 영화 촬영 중에 두 건의 살인 혐의로 수갑을 차고 유치장에 들어가 있는 상황은, 아마 전 세계를 통틀어서도 경험해 본 사람을 또 찾기 힘들 거다.

그의 오랜 친구이자 매니저인 사람과 나란히 차를 타고 가는 것 역시 말이다.

브랜든 우드는 왠지 답지 않게 옅은 긴장을 감추지 못하는 남자를 향해 사람 좋게 웃으며 말을 받았다.

“어쩔 수 없잖습니까. 당신 차는 너무 눈에 띄게 좋으니… 이런 곳은 자고로 눈에 안 띄는 채로 가는 게 최고라서요.”

“충분히 멋진 차입니다. 우드 씨.”

“하하, 빈말도 차암!”

이제껏 누굴 태워도 작다는 느낌은 안 들었던 차이건만, 아무래도 세로로는 6.3피트에 가로로는 쿼터백인 양 체격 좋은 남자가 타니 꽉 차다 못해 미어터지는 느낌이었다.

브랜든은 그 와중에도 자세가 흐트러지기는커녕 꼿꼿하게 힘을 주어 앉은 친구의 애인을 흘끗 보면서 내심 혀를 내두르다가, 잠시간의 침묵이 지루해졌을 때쯤 질문을 던졌다.

“그럼, 중독 회복 모임에 대해 얼마나 아십니까?”

사실 션 스펜서는 마약으로 고생깨나 한 사람을 옆에 둘이나 두고 있었던 것치고는 중독 회복 모임에 대해 아는 게 꽤 빈약하다.

물론 그것에 정상참작의 여지가 없는 건 아니다.

먼저 알았던 바라노프는 그에게 모임에 관한 이야기는 2년간 단 한 번도 꺼낸 적 없었고, 연인인 이선은 종종 그때의 이야기를 하기는 했지만, 애초에 바라노프가 죽은 이후 나름 꼬박꼬박 가던 출석일을 헤아리는 것조차 잊을 만큼 모임에 소홀해진 지 오래였기 때문이었다.

결국, 스펜서의 입에서는 뻔하디뻔한 대답 하나만이 조심스럽게 흘러나왔다.

“익명으로…… 운영한다는 거 정도만 압니다.”

“하하, 그렇죠. 그런데 그건 모임마다, 또 사람마다 조금씩 다르긴 합니다. 예컨대 익명도 그걸 고집하는 사람도 있고, 가족에게 말하는 것보다 더 진솔한 사람도 있고… 꽤 다양합니다. 하지만 어디든 비슷한 게 있다면-”

하필 차량 정체에 걸려 조금은 아슬아슬하게 도착한 차가 주차장에 멈춰 섰다.

“모임에 온 신참과 그를 도와주는 선행자가 있다는 거죠. 모임에서는 그 선행자를 ‘후원자’라고 부릅니다.”

“들어 봤던 것 같습니다.”

“그렇죠? 툭하면 어디 영화나 드라마 같은 데도 나오지 않습니까. 먼저 중독을 이겨 낸 쪽이 모임의 잘 맞는 신참과 짝을 이루는 겁니다. 애초에 겪어 보지 않으면 그걸 끊어 내는 과정도 이해하지 못하는 문제라서요. ……뭐, 그마저도 싫어해서 혼자 다니는 사람들이 없는 건 아니지만, 어쨌든 이게 모임의 기본 골조죠. 이 안경이랑 모자 쓰시겠습니까?”

“-아. 감사합니다.”

“그거 쓴다고 뭐 얼마나 가려질지는 모르겠지만…. 오, 여기 후드 집업이 하나 있네요. 이선 건데, 얘는 워낙 이런 거 크게 입는 걸 좋아하니까 얼추 맞을 겁니다.”

누군가는 지금 네가 그럴 때냐고 혀를 찰지도 모르지만, 션 스펜서는 솔직히 이 순간 서로 떨어진 애인의 옷을 받는 것 정도로 괜히 속이 울컥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선의 친구이자 BAA의 사람 앞에서 순식간에 벌겋게 변한 눈가 같은 걸 보여 주고 싶지 않아서, 그는 브랜든이 건네는 것을 주섬주섬 걸치고 입으며 제 동요를 애써 감췄다.

……이미 조금은 들킨 것 같기는 했지만 말이다.

“어디까지 말했더라… 아. 그래, 신참과 원래 있던 사람이 짝을 이룬댔죠.”

브랜든 우드의 목소리가 전보다 퍽 부드럽게 이어졌다.

덕분에 션 스펜서는 저를 순식간에 잡아 삼키려던 감정에서 비교적 빨리 벗어날 수 있었다.

“이선에게 이 말을 들었을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이선을 지금 갈 모임으로 처음 데리고 왔던, 녀석의 ‘후원자’였습니다.”

“……실례지만 우드 씨, 그럼 당신도-”

“실례라뇨. 여기까지 말하면 당연한 건데요. 네. 저도 한땐 약에 손을 댔었습니다. 그리고 브랜든이라고 부르세요.”

브랜든 우드는 씩 웃으며 제 왼손 약지에 걸린 반지를 보란 듯이 내보였다.

“이제는 완전히 깨끗합니다. 정말로요.” 하고 덧붙이는 목소리에는 퍽 든든한 뿌듯함이 묻어났다.

하지만 그렇게 막힘없이 이어 가던 달변가, 브랜든 우드조차 잠시 말문이 막히는 순간이 있었다.

“그럼 이선과는 다른 작품 같은 데서 만나셨던 겁니까?”

“…어….”

바로 5년 전 브랜든 우드, 그가 이선을 처음 만났던 순간에 대한 고백이다.

“솔직히 말하면 이선과 만나는 걸 권유한 건 바커였습니다.”

“…다니엘 바커?”

“그렇죠, 뭐. 제가 모임에 띄엄띄엄이나마 출석하는 걸 알고, 어떤 배우가 있는데 혹시 재활을 좀 도와줄 수 있냐고 해서… 착한 일 한번 해 볼까 싶어 간 게 시작이었죠. 좀 더 정확히는 그 누군지 모를 배우를 좀 도와주면 특별 근무 수당을 넉넉히 챙겨 준다고 해서 간 건데.”

브랜든은 백미러를 통해 흘끗 옆자리 남자의 눈치를 살폈다.

“어디더라. 처음 만났던 곳도 꽤 살벌합니다. 전 정말 사우스 LA, 그것도 하버드 공원 바로 옆에 사는 미친 한국계 남자가 있을 줄은 몰랐다니까요.”

“…사우스 LA? 아마…… 우범지역이 꽤 있지 않습니까?”

“꽤 있다뇨. 많죠! 말도 마십쇼. 저녁 9시엔가 딱 거기 도착해 차에서 내리는 순간, 흰둥이 새끼가 여길 어디라고 기어들어 오냐는 욕이 저쪽에서 곧장 꽂히더군요. 이선이 살던 곳이 제일 험악한 곳 중 하나긴 했지만요.”

뉴욕에서 LA로 처음 왔을 때.

데이비드 밀러는 이 새로운 도시에 적응하지 못하는 션 스펜서를 두고, 어느 날 밤 LA 카운티의 크고 작은 도시가 모두 표시된 지도를 가져와 펼쳤었다.

션은 벌써 10년도 더 된 그날의 기억이 꽤 생생했다.

앞으로 질릴 만큼 가게 될 곳이라며 짚어 준 패서디나. 그 주말에 함께 가기로 한 롱 비치. 크리스마스에는 늦은 밤 알록달록하게 꾸민 집들을 구경 가는 걸 약속했던 산타 클리리타. 빡빡하게 잡힌 밀러의 스케줄이 정리되면 함께 느긋하게 놀러 가기로 한 앤젤레스 국유림의 캠핑장….

하지만 그렇게 하나씩 차근차근 이 낯선 캘리포니아의 땅을 짚어 주던 데이비드 밀러가 잠시 말을 고르다가 “여긴 길눈이 틀 때까지 당분간 가지 말게.” 하고 썩 재미없는 부연 설명을 붙였던 곳이 있었다.

그게 사우스 LA였다.

나중에야 그곳이 몇 블록을 삐끗 잘못 들면 순식간에 분위기가 살벌해지는 우범지역인 데다가 거주민 대부분이 흑인 커뮤니티로 구성된 곳으로 이곳에 어리바리한 백인 애송이가 잘못 갔다간 골치 아파질 수 있다는 걸 알게 됐지만….

어쨌든, 션 스펜서에게 아직도 사우스 LA의 위험한 몇몇 장소는 아무리 지름길이어도 가지 않는 방향이다.

덕분에 브랜든 우드가 말하는 하버드 공원이 어디인지는 모르겠지만 딱 들어도 한인을 찾기 힘든 곳일 거라는 건 알겠다.

덕분에 션은 벌써 5년도 더 되었을 그날을 들으며 괜히 속이 철렁했다.

…정작 그 상대가 지금 살인 혐의로 경찰서 있다는 현실은 잠시 차치하고서 말이다.

“대체 그런 데서 왜-”

“뭐겠습니까. 집이 눈이 커질 만큼 싸서 그랬답니다. 공원이 바로 옆에 있어서 산책하기도 좋다나? 간이 붓다 못해 미쳤죠. 거기에 퀭한 얼굴로 ‘의외로 이쪽 형님들이랑 쏘울이 맞아서….’ 같은 소리를 하는 걸 첫 만남에 들으면, 정말 뒷골이 다 땅깁니다. 겁도 많은 게!”

“…후우.”

“참고로 그 집 렌트비가 유독 저렴했던 이유가 거기서 퍽 안 좋은 사건 사고들이 있어서 그랬다는 건, 이사 가는 날에야 실토하더군요. 정말 소름이 돋아서!”

이선이 늘 말했던 ‘다니엘 바커는 정말 고마운 사람이다’라고 귀에 못이 박이게 했던 말이 거의 최초의 진심을 한 줌쯤 담아 이해 가는 순간이었다.

정말 마음에 들지 않는 남자이기는 했어도 어쨌거나 모든 면에서 한계까지 몰렸던 이선, 그를 구한 것 역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 뭐 저도 그땐 재활원 소개랑 중독 회복 모임 적응 정도만 돕고 끝내려고 했었는데. 어쩌다 지금까지 왔네요.

“……감사합니다.”

“예? 어휴, 아닙니다. 사실 전 이선의 후원자였다고 감히 입을 열기도 부끄러운데요.”

지루한 차량 정체가 이어진다.

브랜든 우드는 작게 혀를 차더니 차량의 오디오를 만졌다.

작고 빠른 비트와 함께 피아노 소리가 시작되고, 남자인지 여자인지 그 성별이 쉬이 짚어지지 않는 노랫말이 브랜든 우드의 목소리와 섞여 든다.

“제가 녀석을 이곳으로 데리고 오기는 했지만, 사실 그때의 전 터무니없이 일에 쫓겨서… 정작 이선이 가장 흔들릴 때 저보다도 먼저 상담하고 이야기 한쪽은 그 셋이었을 겁니다.”

…Oh Sinnerman, where you gonna run to?

Sinnerman, where you gonna run to?…

이선은 술에 취해 입을 맞췄던 그날부터 바라노프에게 들었던 몇 줄의 이야기로는 감히 함부로 상상하거나 짐작할 수 없었던 그의 이야기를 곧잘 털어놓기는 했었지만, 이제 와 생각해 보면 그건 이 도시에 오기 전의 이야기가 대부분이었다.

캐서린 에이브리의 죽음으로 저 자신이 ‘불안정하다’라고 털어놓았던 순간을 떠올려 봐도 그렇다.

그는 그 말을 하기 전까지 몇 날 며칠을 잠을 설치고 한참을 망설이고 또 망설이지 않았었나.

이제 와 되짚어 볼수록 미시간 디트로이트에서의 이선 박이 아닌, 캘리포니아 로스앤젤레스에서의 이선 박이 이곳에서 지나왔던 시간은, 그의 이력이 된 할리우드의 부산물이 아니면… 사실 생각보다 얼른 떠오르는 게 없었다.

그것도 참 이상한 일이었다.

정말 매일같이 서로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며 서로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 가고, 또 쌓아 왔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서로 떨어진 채로 되짚으니 ‘마약중독자였다’, ‘친구들이 있었다’ 같은 모호한 문장이 아니면 그가 이 도시에서 어떤 시간을 보냈는지에 대해 선명히 들은 순간이 많지 않았다.

그나마 가장 뚜렷한 걸 찾아봤자 ‘돈 많은 백인의 속 편한 인종차별 대응법’으로 제대로 혼났었던 때가 다일 정도니, 더 말할 것도 없다.

스펜서는 나직하게 이어지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네스 바라노프의 후원자는 헬렌 워커였습니다. 그 둘은 바라노프가 고등학생 땐가. 그 무렵부터 함께한 사이였다고 하죠.

“가족이나…… 마찬가지였겠군요.”

“뭐. 모임 참석자 서로가 서로에 대해 밖으로 떠드는 걸 금기시하기도 하고, 애초에 본명을 안 쓰는 사람이 한가득한 곳이지만 그 둘은 어쩔 수 없이 유명했습니다. 좀 성격 강한 콤비여야죠.”

…So I run to the Lord, please hide me Lord,

Don't you see me prayin’?…

캐서린 에이브리는 만나 본 적 없지만, 운 좋게 다른 둘과는 교류도 하고 잠시나마 만나 보기까지 했던 그는, 브랜든 우드의 말을 어렵지 않게 이해했다.

지금은 행방을 알 수 없는 노부인이 제 연인의 아파트를 어두침침한 방공호처럼 꾸며 두고 소리를 지르던 기억은 아무래도 쉽게 잊기 어렵다.

바라노프의 성격이야, 그와 마지막까지… 부딪칠 정도로 익히 잘 알고 있었고 말이다.

“그리고, 캐서린 에이브리의 후원자는- 바라노프였고요.”

“……아.”

“그 셋의 관계가 그려지시죠? 작가였던 바라노프와 배우인 이선이 친해지고, 가장 늦게 들어온 에이브리가 이 셋의 그룹에 합류하고. 그런 순서였던 거로 압니다. 에이브리는 아마 그 사고가 났을 때가 모임에 온 지 일 년 정도였나.”

…The Lord said, go to the devil

He said, go to the devil…

새삼 이런 상황에 듣기에는 참 얄궂은 노래였다.

오래된 재즈 선율에 담긴 이야기가 왠지 꺼림칙한 위로처럼도 들렸다. 션 스펜서는 앞 차량에서 깜빡이는 후미등을 보면서 잠시 말을 골랐다.

“우드 씨.”

“편히 부르시라니까요.”

“…아, 네. 브랜든. 혹시.”

연인의 친한 친구라지만, 사실 이선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매니지먼트계 특유의 빈틈없는 싹싹함이다.

물론 그건 저 자신에게도 해당하는 말이기도 했다.

션 스펜서는 백미러를 통해 슬쩍 표정을 확인하던 남자와 처음으로 시선이 제대로 맞닥뜨렸다.

“이선과 바라노프가 왜…… 에이브리 씨가 죽고 난 후부터 서로 왕래를 끊었었는지, 혹 뭔가 아시는 게 있으실까요?”

“…….”

사실 션 스펜서 그는 이선을 만나기 전까지는 할리우드에서의 은퇴를 밀러 감독과 준비하는 이 영화로 장식하리라 생각했었다.

분명, 배우라는 직업은 제게 잘 맞았다.

어쩌면 몇 년의 치유과정이나 다름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거다.

늘 지나온 선택들을 후회했던 제가 카메라 앞에서는 완전히 다른 사람의 인생을 흉내 내어 살 수 있었다.

심지어 무언가 후회할 행동을 해도 ‘이런. 다시 촬영합시다.’ 이 말 한마디로 모든 게 없던 일처럼 원점으로 돌아가기까지 했다.

단 하나의 작품을 만들기 위해 수많은 사람이 함께 호흡하고 집중하는 것도 좋았다. 그들 사이에 둘러싸여 있노라면, 가끔은 숨 막히는 강행군마저 웃어넘길 만했다.

하지만 그 들뜬 시간이 더해질수록 마음속에서 더 커지는 것도 있었다.

바로 모든 촬영이 끝나고 나서 다시 스펜서로 돌아오는 순간의 공허함이다.

그 많은 스태프 사이에서 몇 달을 다른 누군가의 이름을 달고 전력 질주하고 나면, 그 끝에는 늘 또다시 ‘스펜서’가 있었다.

무슨 수를 써도 피할 수도, 잊을 수도, 떨쳐 낼 수도 없는 기억이 따라왔다.

갈수록 그 괴리를 견디기 어려웠다.

늘 불행하고 조금은 뒤틀린 역할만 해 왔던 것도 그 때문이다.

몇 달간 대신 사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저며질 듯이 부러운 누군가가 되고 싶지 않았다. 따뜻한 가족이 있고, 소중한 그 누구도 저 때문에 스스로 머리에 방아쇠를 당길 필요 없는 인생을 맛보고 나면…….

다시 ‘스펜서’로 돌아왔을 때 저 자신이 머리에 그 망할 총을 가져다 댈 것 같았으니까.

“왜 그 두 사람이 에이브리가 죽고 나서부터 멀어졌다 생각하셨습니까?”

“잘은 모릅니다. 그저 지나가듯 들을 때마다 년도가…, 대충. 그리고 두 사람 모두 이맘때가 되면 좀 힘들어하는 것 같아서 말입니다.”

그래서 스펜서로 시작해서, 스펜서로 끝나는 이번 영화야말로 제가 배우라는 이름으로 할 마지막 영화가 되리라 생각했다.

-아니, 생각했었다.

도로 어디선가 신경질적인 클랙슨이 울렸을 때쯤, 브랜든의 입이 열렸다. 반쯤은 한숨이 섞인 목소리였다.

“아마 틀린 건 아닐 겁니다. 뭐. 후우, 이제 와서 뺄 게 뭐가 있을까. 맞습니다. 그랬죠.”

“…….”

“그때부터 이선은 바라노프는 물론 그 누구야, 할머니- 헬렌 워커와도 연락을 끊고 집에 처박혀 있거나, 미친 듯이 오디션만 보러 다니거나 했으니까.”

“바커…, 그러니까, 다니엘 바커는 뭔가 다른 말이 없었습니까?”

“다른 말이요?”

“그는 이선에 대해 아는 게 꽤 많은 것 같아서 말입니다.”

…Sinnerman you oughta be prayin’

Oughta be prayin’, Sinnerman…

션은 제 속내를 가늠해 보려는 듯한 눈을 한 브랜든 우드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묵묵히 받아 내다가, 최대한 문장을 구슬려 말을 이었다.

아무리 이선의 친구라고 한들 어쨌거나, 다니엘 바커는 이 남자의 상사라는 사실을 모르지 않았다.

“바커, 그가 언제였던가 제게 지나가듯 이선과 바라노프가 3년이나 연락을 끊고 지낸 이유가 뭔지 아느냐고 물었던 적이 있습니다.”

“……아, 그랬군요.”

“어쨌든 저보다 이선을 오래 알고 지낸 건 사실이니 혹시 뭔가 도움이 될 게 있을까 싶어서. …그뿐입니다.”

이제껏 나름대로 상황의 심각성에 비해 비교적 온화한 분위기였던 차 안에 잠시 묘한 침묵이 감돌았다.

하지만 션은 바커의 이름을 꺼낸 것을 후회하지 않았다.

내심 그 남자라면 어쩌면 그 이상의 무언가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쭉 머리를 떠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제 상사의 속내를 떠보는 말 앞에서 침묵하는 남자를 두고 그런 시시콜콜한 감상을 더하기는 어려웠다.

이럴 때는 우회가 필요하다.

예컨대, 오늘 회의실에서 저조차도 전해 들을 수 없었던 연인의 근황을 이미 꿰고 있던 BAA의 여유를 돌려 언급하는 것 같은 것처럼.

“-경찰 쪽과도 꽤 연이 두터워 보이던걸요.”

“예? 아아, 뭐. 그야 그렇겠죠. 아무래도요. LA에서 작품을 앞두고 한심한 짓을 하는 배우나 가수들이 얼마나 많은지 아시면 저절로 이해하게 되실 겁니다. 오늘도 그쪽과 만나는 거로 압니다.”

이선의 매니저이자 친구인 남자는 이제야 한숨 돌렸다는 듯 말이 많아졌다.

그런 브랜든 우드를 백미러가 아닌 제 고개를 직접 기울인 채로 물끄러미 보던 남자는, 오늘 내내 몇 번이고 머릿속에서 떠올랐지만, 그때마다 지금은 적절치 않다고 자답하며 덮었던 물음을 툭 입 밖으로 꺼냈다.

“당신에게도 개인적으로 궁금한 게 있습니다.”

“저- 저 말입니까?”

“예.”

애써 스스로를 합리화할 핑계도 있다.

지독한 교통체증을 달랠 화제. 바커에 대해 캐묻는 것보다야 낫지 않겠냐는 썩 대단치 않은 위안.

하지만 사실 그 무엇보다도, 이선에 대한 뭐라도 쏟아 내지 않으면 아슬아슬하게 유지하고 있는 제 마음속 무언가가 흘러넘쳐 버릴 것 같은 게 가장 컸다.

션 스펜서는 온종일 그렇게나 잘 참아 왔던 단어들을 기어코 문장으로 조합한 다음 천천히 혀끝에 담기 시작했다.

냉랭한 이목구비와 듣는 이의 속을 간지럽게 할 정도로 낮은 목소리는, 어울리는 듯 어울리지 않는 나긋한 어조로 흘러나왔다.

“브랜든. 제가 알기로 당신은 에이전시 내에서 ‘공식적으로는’ 이선의 필모그래피를 꾸리는 데 가장 가까운 사람일 텐데요.”

“어어, 예. 하하, 그렇죠. 아무래도 BAA에서는 제가 녀석의 전담이니까.”

“당신은 친구가 아닌 배우 이선 박을 어떻게 생각했습니까?”

“……예?”

얼떨떨한 되물음에 션은 “문장 그대로의 질문입니다.”하고 나직하게 대답했다.

…Don't you know I need you Lord

Don't you know that I need you…

조금 열린 창문 너머로 머리카락을 가볍게 건드리는 바람이 부는 저녁.

오래된 재즈는 클라이맥스를 지나 혼잣말 같은 중얼거림으로 그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이번의 침묵은 유독 길었다.

급할 건 없었다. 스펜서, 그는 이 LA의 교통체증이 얼마나 지독한지 잘 안다.

“……저도 먼저 묻고 싶은 게 있는데요, 스펜서.”

“네.”

“혹시 이 질문을 다니엘 바커에게도 했습니까?”

하지만 이 되물음은 조금 예상하지 못했던 방향이었다.

타닥, 타닥, 운전대를 쥔 브랜든 우드의 손가락이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하지만 대답은 어렵지 않았다.

“방식은 조금 달랐습니다만. 네. 했습니다.”

“…부디 저에게 하신 것만큼 우아하게 물으셨기를 바라는 건 늦은 일일까요.”

“아마도 그럴 겁니다.”

조금은 놀라웠다.

사실 션 스펜서는 밀러 감독을 제하면 이 할리우드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과 이렇게나 오래, 또 사적인 이야기를 나눠 보는 게 지금이 처음이었다.

어설픈 부정은 하지 않는다.

오히려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그 의미를 곧장 파악하지 못할 문장의 뜻을 단박에 짚어 낸 다음 그 중간에 몇 수나 거쳐 나왔을지 모를 질문을 되레 던진다.

모든 생존에는 이유가 있다.

그게 BAA쯤 되는 공룡의 일부로는 더더욱 무게가 다를 것이다.

덕분에 내심 순수한 감탄이 조금쯤 들었다.

하지만 그래서 더더욱 이 남자가 제 질문에 뭐라 답할지 알고 싶어졌다.

차라리 다니엘 바커가 제 연인의 작품 캐스팅을 쥐락펴락하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둔한 남자였다면 마음이라도 편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고작 질문 하나에 담긴 뜻을 곧바로 이해하고, 그걸 돌려주는 남자라면….

“-후우. 뭐. 스펜서 당신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전 이것도 꽤…… 괜찮은 삶의 방식이라 생각했습니다.”

“삶의 방식이요?”

최소가 방조고, 최대가 적극적인 공모다.

이 커리어를 만드는 데 가장 크게 일조한 것이 다니엘 바커라는 생각에는 여전히 변함이 없다.

다니엘 바커, 그가 정말로 배우 이선 박을 끔찍이 아꼈다면 혹 매니저인 이 남자가 한쪽으로만 극단적으로 치우친 작품을 이어 주는 걸 가만 봤을 리 없으니 말이다.

“스펜서 씨. 전형적인 역할. 그 문장에 담긴 뜻이 뭘까요.”

하지만, 션 스펜서는 바커 쪽과는 다르게 침착하기 짝이 없는 브랜든 우드의 목소리를 들으며 제 앞선 생각을 고치기로 했다.

‘최대’는 적극적인 공모가 아니었다.

“결국, 늘 필요한 거라는 뜻입니다.”

최대는, 사상가이자 달변가였다.

행동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남자에게 무의식의 동조를 끌어낼 수 있는 사상가.

이거야말로 이선을 위한 것이라 다니엘 바커가 스스로 확신에 차 움직이게 할 수 있는 달변가.

또, 한편으로는 유일무이한 ‘후원자’의 존재를 누구보다 잘 알고 그 다디단 위치의 고양감을 다니엘 바커에게 알려 준….

위선자이기도 하다.

“……그래서요?”

“늘 필요한 위치에서 기다렸다가 항상 이름을 올릴 수 있는 배우 역시 이 할리우드에 꼭 필요한 부분이라는 겁니다.”

“계속 같은 역할에만 노출되고, 또 소모되다 보면, 언젠가는 반드시 끝이 나겠죠. ‘이 사람은 이런 역할로 너무 많이 나왔으니 제외하자’. -배우 이선 박에게 그 유효기간이 얼마나 남았었다고 생각합니까?”

“유효기간은 갱신하기 나름이죠, 스펜서. 에이전시의 존재 이유가 뭡니까.”

션은 백미러 너머로 부딪친 짙은 갈색 눈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말을 받았다.

“그게 진짜 원하던 거였습니까? BAA의 이름이 아니면 도저히 일을 구할 수 없을 때까지 시간을 끄는 것?”

“…….”

“이미 한 번 더 이상 도망칠 수 없는 곳까지 몰려 본 그에게 안정된 삶이라는 게 뭔지 보여 준 다음, 서서히 내리막길이 보일 즘에는 어떤 위로를 하려고 준비했었습니까.”

브랜든 우드의 눈썹이 살짝 꿈틀했다.

스펜서는 그 작은 불쾌를 분명히 짚어 내고서도 모르는 척했다.

아니, 모르는 척하다 못해 서로 상대의 의중을 살피듯 낮게 포복하던 자세에서 먼저 날카로운 이를 드러내는 쪽을 택했다.

“그리고 조금쯤 인정하시는 게 좋을 것 같군요. -브랜든 우드, 당신은 인종차별주의자입니다.”

“…뭐라고요?”

“물론 나 역시 그 오만에서 자유롭지 않습니다. 신경조차 쓰지 않았던 때가 대부분이라서요.”

지금 제가 하는 말이 위선가가 가장 싫어할 이야기라는 걸, 션 스펜서는 무엇보다도 분명하게 잘 알았다.

하지만 때로는 싫어하리라는 것을 잘 알기에 하게 되는 것들이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걸 자각이라도 하고 나니 의식적인 노력이라는 걸 시작하게 되던데요. 그러다 보면 언젠간 확실히 조금이라도 나은 인간이 되어 있겠죠.”

“……하!”

“당신에게도 추천하고 싶은데.”

“후우, 스펜서. 왜 그렇게 기분이 상했는지는 알겠습니다. 하지만 봅시다. …인종차별주의자가 무엇보다 예민한 문제를 다루는 중독 회복 모임에서 그의 후원자가 됐을 리 있겠습니까?”

할리우드에서 온갖 괴상한 성미를 가진 이들을 달래던 사람답게, 브랜든 우드는 퍽 능숙하게 화제를 제 쪽으로 환기하려고 했다.

하지만, 션 스펜서는 장수의 신보다는 거칠디 거친 냉소의 신의 이름을 따는 게 나았을 네스 바라노프와 만날 때마다 부딪치며 근 2년 동안 단련된 남자였다.

“글쎄요. 최근에 찾아본 어떤 책에서 그러더군요. 당신은 생각보다 꽤 많은 인종차별주의자 백인 남성들이 자신의 관대함을 과시하는 용으로 유색인종 부인을 얻는다는 걸 압니까? ‘난 유색인종과 결혼했어. 나야말로 깨어 있는 사람이지’, 하고.”

“…이봐요!”

“아니면 인종차별 말고 또 다른 이유가 있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것까진 제가 짐작할 수가 없으니…. 신호 바뀌었습니다, 브랜든.”

“…….”

“브랜든?”

그건 다시 말해 작정하기만 한다면 직접적인 욕 한마디 없이 한없이 고상한 단어를 엮어서 상대의 속을 뒤집어 놓는 데 일가견이 있다는 뜻이다.

대놓고 고개까지 돌려 쳐다보는 것에도 눈 하나 깜박하지 않고 예의 그 근사한 목소리로 우아하게 입을 여는 걸 마주한 브랜든 우드의 여유로운 표정이 슬슬 깨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건, 션 스펜서가 기다리던 거였다.

제 속내를 드러내지 않고 웃으며 빠져나가는 데 능한 이 할리우드에 익숙해질 만큼 익숙해진 담당자가 정말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싶었다.

어떤 생각을 하며 제 연인의 곁에서 그리도 다정하게 있었는지 말이다.

“당신은 끔찍한 가난이 어떤 건지 겪어-… 아니 들여다보기라도 한 적 있습니까?”

“아뇨. 없습니다.”

“……그러시겠지! ‘스펜서’잖습니까?”

망설임조차 없이 흘러나온 우아한 대답에 브랜든 우드의 목소리가 더욱 커졌다.

“뻔하디뻔하고 늘 이어져 온 편견을 더하는 배역이기는 하지만 고작 한 줌인 아시안 풀에서 기회가 굴러온 레귤러 자리와, 신선하고 강렬하지만 굶어 죽기 딱 좋은 모험. 둘 중에서 차라리 전자가 낫다는 생각을 할 필요조차 없으니 그런 듣기 좋은 소리나 할 수 있겠지요.”

“…….”

“심지어 그 틀에 박힌 배역이라는 것도 거절을 시작하면 배가 불렀다며 그다음부터는 제안조차 들어오지 않는다는 걸 아시기나 합니까?”

“-그것 역시 몰랐었습니다. 하지만, 그래서 이제라도 묻고 싶어진 겁니다.”

도로를 붉은빛으로 꽉 채웠던 지긋지긋한 정체가 조금씩 풀리기 시작한다.

션 스펜서는 천천히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한 창문 밖의 풍경을 느슨하게 눈에 담으며 말을 이어 갔다.

“왜 이선은 사우스 LA의 그 위험천만한 동네를 떠난 이후에도 제가 연기할 그 어떤 배역도 스스로 고를 수 없었을까.”

“…….”

“어떤 날은 고작 한 줌인 아시안 풀에서 기회가 굴러온 레귤러 자리를, 또 어떤 날은 신선하고 강렬하지만 굶어 죽기 딱 좋은 모험을 할 선택권이 5년 내내 없다는 게 말이 되는 일일까. 한창 재활을 할 때면 몰라도, 이제는 아닌데.”

그건 어떻게 들으면 혼잣말처럼 들리는 질문의 연속이었다.

“왜 이선 그에게 선택권을 줄 수 없었나? 아니면, 주기 싫었던 걸까? ‘선택권조차’ 줄 수 없었던 건 말이 안 되는 일이니. 후자라면 이유가 뭐였을까.”

하지만 그걸 말하는 사람도, 또한 듣는 사람도 이것이 그저 흘려듣기 좋은 중얼거림이 아니라는 걸 잘 안다.

“선택이 권력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겁니다, 브랜든. 그리고 당신들은 분명 의도적으로 이선 박이라는 배우의 권력을 꺾어 왔고 말입니다. 그 비정상적임을 더 말해야 합니까?”

“-이런 상황에서 싸우고 싶지는 않은데요!”

“마찬가집니다.”

“이선은 지금에 꽤 만족하고 있습니다. 언제나 주연만을 맡아 온 그 대단한 스펜서인 그쪽은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만족’.

션 스펜서는 뒤죽박죽으로 엉킨 채 떠오른 제 연인과의 시간을 곱씹었다.

배우라는 이름으로 산 지 15년.

단 한 번도 디트로이트에서 개봉한 적 없던 자신의 영화를 이번만큼은 그곳에 걸리게 하고 싶었던 남자.

그렇게나 겁도 많고 걱정도 많은 사람이 대체 제 문제점이 뭐냐고 묻던 순간에 묻어나던 초조함.

저를 향해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이 떨면서 소리치던 날은 어떤가.

자신을 대체할 사람 정도야 별처럼 많은 이 도시에서 제가 할 수 있는 게 무엇이 남았냐며, 금방이라도 울 듯이 벌겋게 열이 올랐던 얼굴을 어떻게 잊을까.

가끔은 안쓰러울 정도로 내일을 말하는 것에 익숙하지 않던 연인이다.

자신에게 내일이, 그다음의 미래가 있다는 걸 상상하는 것조차 과분하게 여기는 목소리가 벌벌 떨렸었다. 그런 남자가 ‘앞으로는’ 뭐든지 같이하자고 말하기 위해 얼마나 용기를 내야 했을까.

이게 만족인가?

아니면, 선택할 수 있는 의지를 오랫동안 짓이긴 후 정성스레 훈육해 학습된 체념인가.

션 스펜서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오디션에서 그의 연기를 처음 봤던 날, 밤에 잠을 설쳤습니다.”

이제 와 무슨 말을 하냐는 듯 바라보는 브랜든 우드의 눈이 퍽 차가웠다.

하지만 션은 열린 창문으로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들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담담하게 말을 이어갔다.

“그래 봤자 어설픈 단역, 그게 아니면 늘 비슷하기만 한 뻔하고 고민 없는 연기만 줄지어 한 마약중독자라고 생각했었으니까요. 능력이 없어서 잘나가는 바라노프의 약점이라도 잡고 휘두르는 거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바라노프 그가 계속 이선의 이름을 말할 때 듣는 척도 하지 않았었는데.”

“……바라노프요?”

“죽은 네스 바라노프가 지금 영화의 각본가입니다.”

아무렇지도 않게 흘러나온 사실에 브랜든 우드의 눈이 크게 뜨였다.

어쩌면 션 스펜서의 가장 깊은 속내가 드러나는 것일지도 모를 순간이, 그 모든 것을 만든 연인이 가장 최악의 죄목을 단 채 떨어져 있는 때라는 건 꽤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사실 이제 더 이상 네스 바라노프의 이름을 쉬쉬할 이유도 없어지기는 했다. 바라노프, 그가 위험할까 봐 가명을 썼던 거였는데 이제 그는 어떤 수로도 위협할 수 없게 됐으니.

“-그렇게나 비웃었던 남자의 연기를 처음 본 날 밤. …미안했습니다. 이선, 그에게.”

“…….”

“감히 생각했습니다. 그래. 바라노프가 그렇게 원했던 대로 이 영화의 파트너로 저 남자를 앉히자. 그거면 사과로는 충분하다 못해 넘치겠지. 난 거기까지만 해 주면 됐다.”

“그래서 이선의 캐스팅을…… 그렇게 밀었던 겁니까?”

“네.”

조금은 얼빠진 채 흘러나오는 목소리에 대답하는 스펜서의 목소리가 유독 나직했다.

그럴 만도 했다.

바라노프는 죽고, 이제 더 이상 다른 파트너로는 누구도 생각할 수 없게 된 지금.

이선의 아파트에서는 그 각본가를 죽인 총이 나왔다.

“그러던 어느 날, 내가 내 모자란 열등감으로 쉽게 입을 놀렸던 그의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미안하고, 또 부끄럽더군요. 안쓰럽기도 했던 것 같아요.”

“…….”

“이선 그가 이 업계에서 어떻게 버텨 왔는지 들었던 날도 있습니다. 그날은, 정말 이번에야말로 내 생각이 맞다는 생각마저 좀 했던 것 같은데. 머잖아 그가 쏟아 내는 말 앞에 서니까- 미안하고, 부끄럽고, 안쓰럽고, 또 화가 났습니다. 이제껏 그를 둘러쌌던 모든 것에.”

끝에 가까워질수록 조금씩 작아지던 션 스펜서의 목소리는, 잠시 옅은 한숨에 멈췄다가 이내 차 안의 두 사람 정도는 들을 수 있는 정도의 속삭임이 덧붙여졌다. “그리고 나 자신에게.”

사실, 브랜든 우드는 저 남자와 이선 박의 관계를 이제껏 꽤…… 얕봤었다.

제아무리 대단한 미식가라고 해도 가끔은 겪어 본 적 없고 맛본 적 없는 싸구려 인스턴트에서 재미를 느끼는 날도 있을 테니까.

--하지만.

“-그렇게 매일, 아니 매분 매초 마다 하나씩. 새로운 뭔가가 쌓여 갔습니다.”

“…….”

“그러다 보니 어느 날은, 남은 게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뿐이라….”

이 온화하고 또 지독한 도시에서 질릴 만큼 많은 군상을 만나며 사람 하나는 퍽 정확하게 보게 되었다 자신했던 남자는, 아주 오랜만에 제 예상과 달리 움직이는 입술을 보며 이제껏 그가 그려 왔던 많은 생각의 가지를 쳐내기 시작했다.

입 밖으로 사랑을 내뱉는 게 낯부끄러워진 세상에서 아직도 영원을 믿는- 저 모든 것을 손에 쥔 남자가 이 순간 가진 유일한 결핍이, 제 친구가 되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했다.

“언제든 내게 질려 떠나도 이상하지 않았을 이선에게 매달렸습니다. 제발 우리가 함께 있는 이 저택을 떠나지 말아 달라고, 내가 내뱉은 모든 끔찍한 말과 생각을 고백하면서 말입니다.”

“……뭐. 훈훈한 얘기입니다만.”

“그러니 당신들도 최소한.”

파내고 싶을 정도로 예쁜 푸른 눈이다.

“-정말 최소한, 이선에게 미안한 마음은 들어야 하지 않냐는 겁니다.”

“…….”

“대단한 시혜라도 했다고 생각합니까? 분명 고마운 일이라는 걸 압니다. 하지만, 이 LA에서 당신들보다 더 큰 행운도, 감사한 친구도 또 없다고 늘 입버릇처럼 말하는 사람의 덕담을 5년쯤 들으면 그 뿌듯한 마음이 어느 정도는 배불리 찼을 것 같은데.”

“이거 보세요, 스펜서.”

“그를 아끼고 사랑하라는 말까지는 하지 않겠습니다. 그건 내가 하면 되니까. 하지만.”

바커가 질 만했어.

브랜든 우드는 생각했다.

“당신의 말을 빌려, ‘삶의 방식’을 멋대로 만들어 온 걸 조금쯤 미안해하기는 해야 하지 않습니까. 설마 그조차도 어려울까.”

“……후우, 나, 참. 하!”

긴 교통체증 끝에 도착한 조금은 허름한 건물 주차장 옆에서, 브랜든 우드가 긴 헛웃음을 흘렸다.

“정말이지 보통은 아니시군요.”

“감사합니다.”

“이선의 옆에서 보면 깍듯하기만 했던 사람이 왜 이렇게 적도, 아군도 많나 싶었는데. 그 이유가 뭔지 덕분에 잘 알아 갑니다.”

“…….”

“-그러니 그 여지라고는 주지 않던 녀석의 옆을 기어이 차지하신 거 아니겠습니까?”

스펜서는 제 연인의 친구가 어느새 다시 에이전시의 느긋한 매니저로 돌아온 걸 확인하고 작게 어깨를 으쓱했다.

제아무리 저 사람이 자신의 표현법을 탓한다고 해도, 이것이 션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제가 그를 만나기 전, 이 도시에서의 5년을… 언젠가 이선이 했던 표현을 빌려, ‘견디게’ 해 준 사람에게 할 수 있는, 이만하면 퍽 정중하고 또 드문 진심을 담은 토로였으니 내뱉은 말에 대한 후회는 없었다.

……최소한, 이 순간은 그랬다.

“가시죠. 오늘은 사람이 제법 찼나 보군요. 맨 뒷자리에 앉으면 될 겁니다.”

확실히 이 모임이 처음이 아닌지, 들어가자마자 브랜든 우드를 향해 아는 체를 하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허술한 분장이었지만, 모임의 사람들은 설마하니 ‘그’ 션 스펜서가 왔으리라 생각하지 못했다.

스펜서는 모임의 사람들과 낮게 이야기를 나누는 우드와 멀찍이 떨어진 구석 자리에 앉았다.

* * *

생각해 보면 션 그도 살며 딱 한 번 마약을 가까이서 본 적 있었다.

대학생 때였다. 며칠을 딱 기절하기 직전까지 도서관에 처박혀서 공부한 상태로 시험을 보고 나니, 도저히 이 꼴로는 교문 밖을 못 벗어나겠다 싶었다. 그래서 마찬가지로 반쯤 넝마가 된 기숙사생 친구와 함께 처음으로 남자 기숙사에 갔었다.

정말 딱 샤워만 하고 곧장 저택으로 돌아가려고 했었는데, 정작 씻고 나니 도저히 운전대를 잡을 수 없을 만큼 피곤해서 결국 친구의 기숙사 방에서 몇 시간이라도 눈을 붙이고 가기로 했다.

평소에는 꽤 잠자리를 가리는 편이었는데, 괜히 잠을 못 자게 하는 게 고문이 아닌지 그때만큼은 정말 죽은 사람처럼 쓰러져 잤었다.

그렇게 얼마나 정신을 놓았을까. 션은 자꾸 제 신경을 거슬리는 이런저런 말소리에 눈을 떴다. 저와 친구, 단둘뿐이던 방 안은 어느새 길고 끔찍한 시험이 끝난 기숙사답게 적잖은 동기들이 모여 술이며 과자 같은 걸 한창 펼친 채 떠들고 있었다.

…아니, 떠들려고… 하는 것 같았다.

그들은 대화하고 있다기보다는, 조금쯤 혀가 풀린 채로 낄낄대는 것에 가까웠다.

‘뭐야?’ 라고 물으니 마치 과자를 나눠 주듯 ‘오! 스펜서, 스펜서, 일어났네, 왕자님. 너도 할래?’라며 작은 종이쪽지 같은 게 쥐어졌다. 션은 잠에서 다 깨지 않은 몽롱한 상태로 그걸 펼쳤다.

그 안에 있는 건 중간중간 작은 결정이 남아 있는 하얀 가루였다.

그게 션 스펜서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본 마약이었다. 쭉 늘어져 있는 동기들을 발로 밀쳐 내고 뛰쳐나왔던 그때의 막연한 불쾌함은 꽤 오래갔다.

“…….”

하나같이 시작이 너무 쉬웠다.

제가 그 하얀 가루를 처음으로 직접 봤던 그날처럼 기숙사 파티에서 우연히 시작했다는 여자도 있었고, 술집 구석에서 줬다는 사람도 있었고, 10년 만에 모인 동창회에서 하게 되었다는 사람도 있었다. 심지어 도서관에서 복사를 도와주던 사서와 첫 데이트를 하다 얻게 되었다는 이마저 있었다.

쉽게 시작했던 만큼, 쉽게 끊을 수 있었으면 좋았을 거다.

지겨운 교통체증을 뚫고 모인 사람들은 하나같이 자신들이 그걸 잘라 내기까지 겪었던 지옥을, 그리고 드디어 안정을 찾거나 찾아가고 있는 저 자신을 담담하게, 때로는 울거나 웃으면서 입에 담았다.

그중에는 26년째 이 중독 회복 모임에 참석한다는 노신사도 있었다. 사랑스러운 부인과 두 명의 딸을 뒀다는 그 인상 좋은 노신사가 매주 모임에 나오는 이유는 하나라고 했다.

얼마든지 일상으로, 포기했던 내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걸 말해 주고 싶기 때문이라고 했다.

“어땠습니까?”

“…….”

션 스펜서는 브랜든 우드의 물음에 대답 대신 깜깜해진 하늘을 슬쩍 올려다봤다.

-마약중독자 ‘였지’!

이건 너무나 평범한 사람들의 자기 고백에 귀 기울이는 중간중간마다 머릿속을 가장 많이 떠다닌 날 선 외침이다.

‘중독자’가 아닌 ‘중독자였다’라는 그 말이, 얼마나 많은 뜻을 품고 있었는지 조금 더 일찍 알았으면 좋았을 거다. 그랬다면 네스 바라노프가 몇 번이고 화를 내며 제 말을 고쳤던 그 순간의 뜻을 알 수 있었을 거다.

또, 이곳에서 ‘친구들’을 만나 이 도시에서의 삶을 이어 갔다며 겨우 웃었던 연인의 표정을…… 더 빨리 이해할 수도 있었을 테고.

우드는 별다른 대답을 기대하지 않았다는 양 입을 다문 스펜서를 향해 말을 이었다.

“스펜서 저택까지 데려다 드리죠. 아무래도 그쪽 같은 사람이 저택으로 택시를 타고 가는 것보다야….”

“-스펜서 님!”

할리우드의 오래된 담당자답게 술술 흘러나오던 말이 퍽 단호한 목소리에 끊겼다. 사슬처럼 이어지는 생각에 깊게 빠져들던 션 스펜서가 훅 현실로 끌려 나온 것도 이때다.

그는 이곳에서 들으리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목소리에 몇 초간 멍하게 눈만 깜박이다가, 이내 언제부터 조각상처럼 서 있었을지 모를 말끔한 슈트 차림의 남자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가비?”

“모시러 왔습니다.”

문자로 짤막하게나마 행선지를 밝히기는 했었지만, 가브리엘 그가 이런 사적인 일정 때문에 저택을 빠져나와 일일이 데리러 오는 건 정말 굉장히 드문 일이다.

그 때문에 션은 저도 모르게 이어 물었다.

“무슨 일… 있습니까?”

“운전사도 먼저 들여보내셨는데 생각보다 늦으시는 것 같아 모시러 왔을 뿐입니다.”

그래 봤자 저녁 8시 반이다.

생각보다 길어지기는 했지만, 늦었다고 말하기는 귀여운 시간이다. 하지만 깍듯한 목소리는 언제나와 다를 것이 하나 없이 말끔하기만 했다.

“어휴, 이런 데까지. 수고하십니다.”

“오늘 감사했습니다, 브랜든.”

“뭐. 천만에요. 저야말로….”

퍽 사람 좋은 인사에 가브리엘은 제 고용주와 마찬가지로 대답 대신 살짝 고개를 까딱이는 거로 대신했다. 물론, 그나마 이번에는 입을 연 션 스펜서 역시 썩 사근사근한 태도는 아니었다.

하나같이 무뚝뚝한 이들의 뻣뻣한 태도 때문일까. 브랜든 우드가 조금 머쓱한 얼굴로 턱을 긁적이며 대답했다.

하지만 션은 그 표정을 세심하게 짚어 줄 여유가 없었다.

그는 왠지 이 자리에 그대로 주저앉고 싶다는 생각마저 하면서 먼저 도망치듯 건물을 빠져나갔다. 저택으로 돌아오는 길에서는 그 흔한 음악도, 짧은 대화 한마디도 없었지만, 차라리 그 고요가 편했다.

저택에 도착할 즈음에는, 창문을 때리는 비가 오기 시작했다. 오랜만의 비였다.

션은 검은 하늘을 가르는 비를 가만히 눈에 담다가 곧장 저택 복도로 발을 옮겼다.

그리고 그 순간마저 늘 머물던 서관이 아닌 동관으로 발을 옮기는 게 당연해진 것을 깨닫고 조금은 맥 빠진 한숨 같은 웃음이 흘러나왔다.

일분일초가 지날수록 발이 닿지 않는 깊은 물에 잠기는 것 같았다.

이미 목과 코를 넘어선 그 물은 제 눈가 바로 밑에서 시릴 듯이 일렁이고 있다.

분명 저는 제 연인 없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했다. 닉 코빗을 만나 3년 전의 이야기를 들었고, 헬렌 워커의 카라반과 그 숨 막히는 지하 벙커를 찾아냈으며, 조금 전까지는 이선 그가 5년 전 처음 발 디뎠다는 중독 회복 모임에도 찾아갔다.

…그의 친구인 브랜든 우드에게는 조금 때에서 어긋난 화풀이를 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한다. 하지만 이선, 그는 그런 저를 이해해 줘야 했다. 어떤 목소리조차 들을 수 없는 48시간이 이렇게나 길 거라고 말해 준 적 없었으니까.

션은 갈 곳 없는 투정을 삼키며 금방이라도 고꾸라질 것 같은 다리에 힘을 줬다. 하루가 유독 길었다. 지난밤 잠을 아예 못 잔 거나 다름없는 것도 이 불안정한 상태를 더 부추기는 이유이기도 했다.

하지만 오늘, 아무래도 션 스펜서는 종일 소란스러운 사람들 사이에 치일 운세인 듯했다.

“-아, 오셨군요!”

“…….”

“이야, 이거. 실제로 보니 더 근사하신데…. 으하핫, 정~말 반갑습니다! ”

머리가 정상적으로 돌아가지 않는 상태에서 듣는 낯선 이의 환대는, 때로는 그저 말문을 막히게 할 뿐이다. 그게 제 저택의 중앙 계단 앞 거실에서라면 더욱 그렇다.

스펜서는 커다란 검은 가방을 한쪽 어깨에 멘 채로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는 슈트 차림의 남자를 보며 잠시 그답지 않게 눈만 깜박였다. 우렁찬 목소리 다음에 뒤따르는 몇 초의 적막이 얼마나 있었을까.

묵묵히 션의 뒤를 따르던 집사장, 가브리엘이 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스펜서 님. 제가 일정 조정을 잊었습니다.”

“어디서 오신 분이지.”

무표정하지만 아름답게 조각된 유리 조각상처럼 서서 묻는 저택 주인과, 그 담담한 질문에 잠시 미간을 좁힌 채 바짝 마른 입술을 적시는 집사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누구라도 상황이 묘하다는 걸 알 수 있을 거다.

“…고급 주택… 에이전트입니다.”

특히, 자신의 소개를 저렇게 한참이나 망설인 다음에야 덧붙인다면…….

눈치가 없는 사람이 아닌 이상, 앗차 싶어진다. 사실 이건 스펜서 저택의 다른 고용인들의 잘못도, 제 고용주를 데리러 급히 차를 몰고 나갔던 집사장의 잘못도 아니다. 저택의 다른 고용인들은 이선의 체포 소식을 아직 모른다.

심지어 집사장 가브리엘 그는, 당장 어제 낮까지만 해도 화기애애하다 못해 보는 제 마음이 뭉클해질 정도로 설레하며 연인과의 미래를 그리는 남자를 최선을 다해 도우려고 했을 뿐이었고 말이다.

“저, 저어, 제가 날을 잘못 골랐다면. 저는 다른 때 또 와도….”

-그리고 여기, 하루아침에 달라진 스펜서 저택의 사정을 알 리 만무한 부동산 에이전트 디에고 샌더즈 역시 선의의 피해자나 다름없다.

그가 한 것이라곤 약속 시각에서 20분은 더 늦게 온 이 저택의 주인인 톱스타를 일찌감치 와서 기다리다가, 잔뜩 기합을 넣어 밝게 인사한 게 다다.

뭔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깨달은 디에고는, 어깨에 걸친 가방을 세게 움켜쥐며 금방이라도 이 거대한 저택을 튀어나갈 준비를 했다.

“……아닙니다.”

하지만, 낮고 고상한 목소리가 그의 목덜미를 콱 움켜쥐었다.

“션 스펜서입니다. 오래 기다리신 것 같은데, 죄송합니다.”

“아, 아뇨오, 오래 기다리다뇨! 전혀 아닙니다. 저, 저는 디에고 샌더즈입니다. 여기 명함을.”

“감사합니다. 제 일정에 맞춰서 늦게 방문해 주신 것이시니, 들어오시죠. 불편하지 않으시다면 차라도 대접하겠습니다. -가비?”

“…네. 준비해 올리겠습니다.”

그 이름을 모르려야 모를 수 없는 조각 같은 남자와의 통성명은, 그가 같은 사내라는 것과는 별개로 괜히 심장을 들썩이게 한다. 디에고는 다름 아닌 ‘그 스펜서’가 제 코앞에서 자신의 명함을 물끄러미 살피고는 먼저 앞서 안내하는 것을 총총대고 따라가며 괜히 넥타이를 어루만졌다.

……햐, 정말 다르긴 다르네!

이 LA 카운티에서 고급 주택 에이전트로 일한 지 벌써 12년.

그는 꽤 적잖은 유명인사들이 저를 거쳐 갔다고 자부했다.

잘나가는 미식축구 선수부터 정치인, 가수, 사업가…. 사실 그중 영화배우는 뭐 발에 치일 정도로 많은 고객 중 하나였다.

“이 저택은 내놓으실 생각입니까?”

“아직 딱히 정한 건 없습니다.”

하지만, 여기 응접실의 맞은편 소파에 앉는 장신의 남자는 정말 달라도 너무 달랐다. 그 대단한 이름값은 차치하고서라도 뭐랄까, 정말….

8년간 고급 주택을 전담하면서, 집을 사고파는 이야기를 하는 데 이렇게까지 고상한 얼굴을 하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긴 일과에 살짝 헝클어졌을 머리마저도 꼭 당장 화보 속에서 튀어나온 것처럼 근사할 수 있다니.

디에고는 살짝 시선을 내리깐 채로 가볍게 턱을 괸 남자를 보면서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한번 꿀꺽 삼켰다. 정신 차리고 판매에 집중해야 할 때였다.

이 LA 카운티의 모든 고급 주택 에이전트들이 노리는 최고의 고객이 제 앞에 있으니 말이다.

“그럼 별장을 찾으시는지요?”

“별장은…… 아니고. 좀 더 규모를 줄여서 지낼 수 있는 곳으로 갔으면 합니다.”

실로 모호한 요구다.

바쁠 때면 편히 머물 수 있는 위치 좋은 지금의 저택을 굳이 팔 생각도 없고, 별장을 구하는 것도 아닌데 ‘규모를 줄여서 지낼 수 있는 곳’을 찾는다라.

디에고는 제 턱수염을 어루만지면서 우아한 표현 뒤에 숨겨진 속뜻을 찾아 머리를 굴렸다. 그는 지금 이 순간을 위해 어젯밤을 새워 고객에 대한 정보를 머릿속에 구겨 넣고 온 차였다.

…굳이, 규모를 줄여서 지낼 수 있는 곳….

고작 몇 초의 고요였을 거다.

“아, 그럼 위치 좋은 이곳은 그대로 두시되, 좀 더-”

하지만, 수많은 LA 부동산 에이전트 중 스펜서 저택의 호출을 받은 게 그저 괜한 운만은 아니었던 디에고 샌더즈는, 한 꺼풀 뒤에 숨겨진 고객의 니즈를 정확하게 찾아냈다.

“오붓한 방향을 찾으시는 거로군요.”

사실 이건 그리 어렵지도 않은 퀴즈였다.

그저 검색창에 대고 ‘SEAN SPENCER’, 이 두 단어만 적어도 나올 답이나 다름없었다.

공개 데이트는 몇 번이었는지 셀 수도 없던 남자가 처음으로 ‘공개 연애’를 시작했다. 그 묘한 차이는 누군가 정해 준 것도 아니다. 션, 그가 매일매일 직접 새로 갱신하며 직접 알려 주고 있을 뿐이다.

그 전조는 데뷔 이래 7년간 그 흔한 SNS 계정 하나 없던 남자가 처음으로 인터넷에 제 일상을 드러내는 것으로 시작했다.

팔로잉은 단 한 명.

그 경이로운 첫 사진은 제 영화 파트너의 뒷모습이었다. 사실 그때만 해도 다들 영화 촬영 중 이벤트성으로 만든 영화사의 계정이 아닐까 생각했더랬다.

하지만, 그날 밤 올라온 두 번째 영상은, 묘해도…… 정말 묘했다.

-이선. 여기 봐.

-왜애.

-부탁이야. 한 번만.

-왜, 애, 애, ……으와악! 야! 너 언제부터 찍었어!

-조금 전?

션 스펜서가 웃는 소리로 끝나는 영상은 고작 15초 정도가 다였다. 하지만, 그 눈 몇 번 깜빡할 짧은 찰나 속에는 말도 안 되는 것들이 가득 담겨 있었다.

우선 예의 그 유일한 팔로잉의 대상인 이선이다.

슬쩍 보이는 고풍스러운 배경은 어딜 봐도 심상치 않은 게- 그, 베일 속에 가려진 스펜서 저택이 분명한데, 이선 그는- 슬쩍 보이는 션 스펜서와 같은 남색 가운을 입은 채 젖은 머리로 침대에 나른하게 앉아 있다.

그다음도 문제다.

……대체 ‘그’ 스펜서가 왜 이선 박의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말려 주고 있단 말인가?

그리고 그게 얼마나 당연한 일이기에, 오랜 목욕으로 발갛게 익은 얼굴을 한 단정한 얼굴의 남자가 커다란 손에 자연스럽게 기대고 있을까?

그 게시물에는 아직도 ‘???????’ 라는 짧고 굵은 경악을 전하는 코멘트가 가장 많은 하트를 받은 채 상단에 고정되어 있다.

물론, 이제는 추억이 됐다 해도 과언이 아닌 일이다.

션 스펜서와 이선 박. 이 둘은 지금 할리우드에서 가장 요란하게 연애하는 커플이 된 지 오래니.

“혹시 특별히 원하는 조건이라도 있으실까요?”

디에고는 머릿속으로 셀럽 커플이 함께 지내기 좋은 저택을 빠르게 펼치면서 짐짓 다정하기까지 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른아른한 금빛을 받아 반짝이는 푸른 눈동자의 시선이 곧장 얼굴에 꽂히는 게 왠지 좀 낯간지럽기까지 했다.

“……바다.”

거의 혼잣말에 가까운 낮은 중얼거림이었다.

기회를 놓치지 않는 부동산 중개업자는, 너무 조급하게 들리지 않도록 부드럽게 되물었다.

“예?”

“…아침에 눈 떠서 거실로 나가면…, 바다가 보이는….”

여전히 터무니없이 작은 목소리이기는 했지만, 디에고 샌더즈는 그 작은 목소리를 이번엔 놓치지 않고 새겨들었다.

“-아아, 역시! 그쪽이셨군요. 이곳도 위치가 대단하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도심보다 탁 트인 건 해변 쪽이죠.”

“…….”

“바다, 바다, 바다라……. 자. 마침 저번 주에 팔로스버디스에 엄청난 곳이 나왔습니다!”

커다란 검은 가방 가득 짐을 챙겨 온 보람은 이럴 때 나온다.

*9,335스퀘어 피트의 저택입니다. 총 3층이고, 침실은 여섯 개, 마찬가지로 여섯 개의 풀 베스와 두 개의 쓰리쿼터 베스가 있습니다. 하프 베스 역시 두 개가 따로 있으니, 총 10개라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디에고는 한쪽에는 저택의 내외부의 사진을 다각도로 찍은 스크랩북을 펼치고, 또 다른 쪽에는 준비해 온 태블릿 PC에 화면을 띄웠다.

“이렇게, 거실뿐만 아니라 욕조에 앉아서도 바다를 구경하실 수 있죠. 날씨가 좋은 날에는 산타 카탈리나 섬이 바로 보이기까지 합니다. 해변으로 곧장 이어지는 개인 오솔길도 따로 나 있고요. 여기, 발코니도 두 개가 있고, 벽난로는 4개입니다.”

이제 곧 디에고 샌더즈가 이 순간이 가장 설레하는 순간이 온다.

“-가격은, 1100만 달러입니다.”

바로 돈 많은 클라이언트에게 저택의 가격을 부르는 순간 말이다.

디에고는 제 스크랩북을 별 동요조차 없이 내려다보는 남자를 보며 작게 크흠, 하고 목청을 가다듬었다. 가격을 듣고도 눈썹 하나 꼼짝하지 않는 걸 보면 돈이 문제는 아닌 것 같다. 하긴, 돈이 문제겠나.

이 저택이 못해도 네 배 가격은 될 텐데 말이다.

영 반응이 신통치 않기는 하지만, 벌써 움츠러들 필요는 없다. 디에고 샌더즈, 그에게는 나름의 비장의 카드가 있다.

“흠, 흠. 그리고 여기엔… 해안 도로를 따라 7마일 정도만 내려가면, 퍽 귀여운 게 하나 나오는데요. 혹, 산 페드로에 있는 ‘우정의 종각’에 대해 아십니까?”

“……아뇨.”

바로 클라이언트에게 섬세하게 다가가는 것!

디에고는 그것이 계약을 성사시키는 자신의 가장 큰 힘이라고 자부했다.

“독립기념일에 미합중국이 선물로 받은 겁니다. 지도상으로는 여기, 네에. 이쪽인데요.”

지도 위로 콕, 손가락이 움직이는 대로 스펜서의 시선이 묵묵히 따라 움직였다.

“크흠. 시간이 되실 때 애인분과 같이 산책 가 보시는 것도 좋을 겁니다. 여기 뷰도 정말 괜찮거든요. 특히 해 질 녘에 가시면 끝내주죠.”

“…애인…이요?”

“애인분께서 이민자 2세이신 거로 아는데. 그렇죠?”

디에고는 “한국계요. 어릴 때 이민 오시기는 했지만, 그래도 제법 기억하신다고 인터뷰에서 봤습니다.” 하고 너무 힘주지 않는 척 덧붙였다.

“요 종이며, 누각이 거기서 온 거거든요. 그래서 이 근방을 코리안 힐이라고도 부릅니다.”

“…….”

“해안 도로랑도 바로 연결되어 있어서 저택을 한 번 구경 가신 다음에 내려가서 데이트하시면, 왜 정말 별거 아닌데도 신경 쓴 것 같고. 그런 거 있잖습니까? 왜, 애인분 SNS 보니까, 얼마 전에 팬분이랑 이야기하면서 저도 정말 오랜만에 한국 가 보고 싶어요, 하시던데 이런 거로 점수를….”

“…….”

“…따… 보시는 것도….”

물 흐르듯 말을 잇던 디에고 샌더즈의 목소리가 점차 줄어들었다.

이런 반응이 나오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는데.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제 말에 꼬박꼬박 반응하던 남자의 말이 싹 사라졌다. 아니, 말뿐인가. 표정 역시 사라졌다.

……뭔가 분위기가 이상했다.

좀 더 오붓한 곳을 원하지 않느냐 물어봤을 때는 마다하기는커녕 바다가 보이는 저택을 찾지 않았던가. 혹시, 연인의 SNS까지 뒤져서 본 거냐고 기분이 상한 걸까.

뒤진 것까지는 아닌데. 어차피 상대도 몇만의 팔로워가 있는 배우 아닌가.

디에고는 괜히 마른침을 꼴깍 삼킨 다음 애써 화제 전환을 노렸다.

“흠, 흠흠. 그럼 다른 저택도 봐 볼까요. 자아, 오션뷰가 좋은 저택이라…. 그렇다면 여기도 빼놓을 수 없죠!”

팔로스버디스가 싫다고 해도 자신 있게 추천할 다른 곳이 있으니 걱정은 없었다. 1번 국도를 끼고 펼쳐지는 태평양이 한눈에 보이는 LA 카운티의 대표 도시가 남아 있었으니 말이다.

“말리부!”

이 동네에서 해변을 접한 교외 고급 주택지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뭐니 뭐니 해도 말리부다. 높다란 절벽과 푸른 파도가 함께 어우러진 절경을 아침마다 볼 수 있는 저택이라면, 제아무리 까다로운 고객이라도 표정이 누그러지고는 했었다.

디에고 샌더즈는 태블릿 PC의 화면을 얼른 바꾼 다음, 제가 가지고 온 다른 스크랩북을 꺼냈다.

“말리부는 어떠십니까? 오션뷰인 고급 저택 하면 역시 뭐니 뭐니 해도-”

“…….”

“마, 말리부를….”

……정말 그랬는데!

“빼…… 놓을 수가…… 없…….”

그 누구보다 활기찼던 부동산 에이전트는 등줄기를 타고 쭉 식은땀이 배어 나오는 것 같은 느낌에 저도 모르게 스크랩북을 꺼내려던 자세 그대로 굳어서 눈만 크게 끔벅끔벅했다. 누구보다 빠릿빠릿하게 굴러가던 머리가 지금 이 순간만큼은 작동을 멈춘 탓이었다.

하지만 그건 디에고 샌더즈, 그의 프로의식이 부족한 탓이 절대 아니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허억, -죄송합니다!”

지금 이 얼굴 앞에서라면 LA 카운티 어떤 에이전트라도 디에고 그처럼 잠시 얼이 빠졌다가 연신 사과를 쏟아 내게 될 거다.

“제가 눈치 없이, 아, 스펜서 씨. 정말, 이를 어쩌면 좋지. 아, 정말 죄송합니다!”

12년간 에이전트로 일하며 만났던 그 누구보다 완벽하고 고상했던 남자가, 말 한 마디 한 마디 괜히 귓가가 간지러울 만큼 듣기 좋은 목소리로 우아하게 말하던 남자가, 그리고 이제껏 살며 본 그 누구보다 푸르게 반짝이는 눈동자를 가진 남자가-

……운다.

여전히 앉은 자세에서는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고, 표정을 보기 싫게 일그러트리거나 숨을 헐떡이지도 않는데, 그 예쁜 눈에서 눈물이 가득 고여 넘쳐서, 눈치 없이 펼쳐진 팔로스버디스의 스크랩북 비닐 위로 떨어진다.

그래. 그러고 보니 이제야 모든 궤가 맞는다.

오붓한 곳으로 가는 저택을 찾는다는 사람이, 이 크고 화려한 곳에서 함께 산다는 애인은 옆에 앉혀 두지도 않고 혼자 집을 본다는 게 말이 되나. 그러고 보니 저를 처음 봤을 때 저택 집사로 보이는 남자의 반응도 심상치 않았다.

그땐 저도 당황해서 어영부영 넘겼는데, 마치 와선 안 될 사람이 왔다는 것처럼 당혹을 감추지 못하는 얼굴이었지.

디에고 샌더즈는 마침 그 순간 철컥하고 급히 열린 응접실 문 너머로 들어오는 집사가 눈물 나게 고마울 지경이었다.

“-스펜서 님!”

“허억, 헉! 정-말 죄송합니다. 어제까지 SNS 글 잘만 올라오길래 헤어지신 줄, 아니, 아니! 싸우신 줄도 모르고!”

맙소사.

저런 남자도 실연하는구나. ……심지어 그것도 같은 남자에게!

이미 훌륭하게 할리우드 최적화가 끝난 부동산 에이전트의 상상력은 집사장이 어떤 무시무시한 표정을 하든가 말든가 그 결말까지 낸 지 오래였다.

예의가 아닌 것을 잘 알지만, 가브리엘은 더 생각할 겨를도 없이 에이전트를 내보내고 응접실의 문을 쾅 닫았다. 마지막까지 “정말 죄송해요오!” 하고 외치는 남자의 뒤처리는 다른 고용인들이 알아서 잘해 주리라 믿을 수밖에 없었다.

갑자기 응접실 안에서 소란스러운 사과가 들리길래 뜨거운 차라도 엎었나 싶어 급하게 들어왔는데 대체 이게 무슨 난장판인지 모르겠다. 가브리엘은 재킷 안주머니에서 부드러운 손수건을 꺼내 제 고용주에게 얼른 내밀었다.

“저어, 스펜서 님. 이걸….”

“……가비?”

“네. 접니다.”

차가운 이목구비가 묘하게 풀린 채인 남자는, 아직도 저 자신이 울고 있다는 자각조차 없는 것 같았다. 저를 보고 멍하게 입을 여는 모습을 보자니 꼭 현실의 속 꿈에 갇힌 것처럼 느껴질 정도다.

심지어 그의 뺨에 조심스럽게 손수건이 닿고 난 다음에야 저 자신이 지금 어떤 상태인지 깨달은 얼굴이었으니 더 말할 것도 없다.

뒤늦게 멍하게 손수건을 받아 들고 제 얼굴을 꾹 누르는 남자의 손에는 힘이 하나도 없었다.

가브리엘은 어떻게 보면 저 젊은 스펜서에게 드디어 감정다운 감정이 처음 터져 오른 것을 환영해야 할지, 아니면 속상해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생각에 그답지 않은 한숨을 길게 터트렸다.

그저 단 한 사람이 빠졌을 뿐인데 누구의 말 한마디 없는 고요가 익숙해진 응접실 안은, 창문을 때리는 빗소리만이 그 공백을 채웠다.

“왜…….”

잠시 망설이는 듯이 말을 고르던 집사의 입이 열린 건 그때였다.

그는 어제부터 쭉 몇 번이고 삼키고 또 무시하려 애썼던 제 마음속 깊은 곳의 의문을, 제가 준 손수건을 움켜쥐고 꼭 넋이 나간 사람처럼 앉아 있는 남자를 향해 천천히 이어 갔다.

“왜, 이선 님이…, 절대 죽이지 않았다고 생각하십니까?”

초점이 맞지 않던 푸른 눈동자가 천천히 움직인다. 가브리엘은 그 눈이 천천히 목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움직이는 것을 느끼며 그답지 않게 손에 힘을 주어 주먹을 쥐었다.

“어제, 캐서린 에이브리 씨에 대한 건 뭐든 찾으라고 말씀하셨었습니다.”

“…….”

“스펜서 님. 왜 네스 바라노프는 아니었습니까?”

하지만, 이것만큼은 지금 이 순간 확실히 해야 했다.

“이미 죽은 지 3년이나 된 사람보다 바라노프 쪽에 대한 걸 찾으라고 하는 게 더…… 확실하지 않았습니까?”

“…….”

“왜-”

이내 확실히 저를 눈에 담는 시선 앞에서 저도 모르게 목소리가 조금쯤 갈라졌다. 가브리엘은 평소와는 달리 속내를 전혀 읽어 낼 수 없는 시선 앞에서 왠지 모르게 제 몸의 모든 솜털이 곤두서는 것만 같았다.

“왜, 네스 바라노프만큼은, 이선 님이 죽이지 않았다… 이미 확신하시고 계시는 겁니까?”

집사장 가브리엘은 저 젊은 스펜서가 한때 경찰 조사에서 이선을 네스 바라노프의 살인 용의자로 지목했었다는 사실을 안다.

그게 퍽 진지한 의견이 아니었다는 것 역시 안다.

경찰이 ‘혹시 짐작 가시는 데라도 있으십니까?’ 하는 말에 ‘네스 바라노프가 늘 말하던 약쟁이 하나가 있습니다. 이선 박이라고 했던가. 그를 협박하고 있던 것 같던데.’ 하고 까칠하게 말한 정도였다.

그걸 뒷받침하듯, 이선은 단 한 번의 경찰 조사로 모든 것이 마무리되었다. 한때 가까이 붙어 지내기는 했지만 3년간 전화는커녕 형식적인 크리스마스카드 한 번 서로 나누지 않았다는 게 명백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마지막 방문자라는 이유로 서너 번이나 더 불려간 건 오히려 션 쪽이었다.

-이선 박이 네스 바라노프를 죽였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다.

……한, 30시간 전이라면 망설임 없이 이렇게 말할 수 있었을 거다.

“엊그제…… 밤, 저택에서 이선 님을 본 고용인이 아무도 없습니다.”

“…….”

“침실에 계셨을 수도 있겠지요. 맞습니다. 그렇지만, 그렇지만, -스펜서 님. 혹시라는 가정 도 해 보셔야 합니다. 만약이라는 생각도 해 보셔야 한다는 겁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저와 함께 션 스펜서에 대한 연애 상담을 하며 낄낄대고 웃었던 남자의 아파트에서 그의 친구인 두 사람을 죽인 권총이 나왔다. 심지어, 그가 주인인 것이 확실한 3년 전 살인 도구도 덤으로 같이 딸려 나오기까지 했다.

-거실 한가운데 남았다는 핏자국은 어떤가?

카라반 지하 벙커에서 봤던 그 끔찍한… 3년 전 사건 사진들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이선 박이 살인자가 아니라는 증거가 단 하나도 없다.

최소한 그 죽음과 관련 없으리라는 증거가, ……정말이지 망할 단 하나가 없다.

가브리엘은 제 고용주가 그 남자에게 얼마나 매달리게 됐는지 누구보다 잘 안다. 하지만, 그렇게 잘 아는 만큼 제 머릿속으로 쏟아져 들어온 이 모든 것을 모르는 척 무시한 채 있을 수가 없었다.

집사는 제가 참지 못하고 쏟아 낸 최악의 가정에, 저 알 수 없는 눈을 한 션 스펜서가 지난밤처럼 얼굴을 굳히고 차갑게 화를 낼 것을 상상하며 이를 악물었다.

그때만 해도, 가브리엘은 저 남자의 어떤 말이든 견뎌 낼 마음을 먹으리라 자신했다.

“…하….”

“…….”

“하하, …하.”

하지만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저 자신이 우는 것조차 자각하지 못하고 뚝뚝 눈물을 흘리던 남자가, 별안간 고개를 푹 숙이더니 웃기 시작하면….

순간 머릿속으로 온갖 불행한 상상이 스쳐 지나간 집사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솔직히, 이 순간 그는 제 고용주가 정말 조금쯤… 미쳐 버린 게 아닐까 걱정했다.

하지만 그 걱정은 그리 길지 않았다.

왠지 목이 끓는 듯한 웃음을 마지막으로 흘린 스펜서가, 머잖아 평소보다 훨씬 더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기 때문이었다.

“……하.”

“…….”

“가브리엘.”

차라리 따가울 정도로 아프게 바라보던 때가 나았다.

저렇게 푹 고개를 숙이고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는 채로 있는 것보다야, 화를 내든, 질책하든, 뭐라도 하는 게 속 편했다.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됩니다. 모든 건… 다, 내 잘못이니까.”

뭐든 무서울 것이 없을 것 같은 저 완벽한 남자는 생각보다 꽤 부정적이다. 그걸 익히 잘 아는 집사는, 그 나직한 중얼거림 이후에 숨을 쉬지조차 않는 것처럼 고개를 푹 숙인 그대로 굳어 있는 션 스펜서를 보면서 혹시 그가 잠든 게 아닌가 싶었다.

“…뜻을… 여쭤도 되겠습니까, 스펜서 님.”

실제로도, 혹시나 싶어 조심스럽게 꺼낸 문장에도 션 스펜서는 대답은커녕 미동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가브리엘이 제 젊은 주인을 부축하러 조용히 첫발을 옮긴 순간.

“그날 밤. 바라노프를 죽인 게…… 이선이었다면. 그는, 내 옆에 있지 않았을 겁니다.”

스펜서의 입에서 낮게 들끓는 혐오 같은 고백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난, 그 빌어먹을 밤에.”

“…….”

“바라노프를 죽인 범인을 만났었으니.”

* * *

#.??? 그날 밤, 션 스펜서

최악의 밤이다.

션 스펜서는 쏟아지는 빗줄기를 바라보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머리끝까지 치솟았던 열이 식고 나자 찾아온 이 기분은, 대체 뭐라 이름 붙이는 게 좋을까. 그건 꼭 후회 같기도 하고 갈 곳 잃을 짜증 같기도 했다.

-우르르, ……쾅!

저도 모르게 눈살이 찌푸려지는 엄청난 빛이 하늘을 번쩍 밝힌 다음, 그 어떤 때보다 요란한 천둥이 귀를 얼얼하게 했다. 지금 누군가 옆에서 무슨 말이라도 했다면 분명 제대로 듣지 못하고 되물어야 했을 거다.

션 스펜서는 다시 한번 짧은 한숨을 쉬면서 휴대폰을 슬쩍 확인했다.

1시 50분.

벌써 새벽 2시가 코앞이다. 평소 같았으면 진작에 제 저택으로 돌아갔을 시간이었다.

바라노프와 작품 이야기를 하며 사소하게 부딪치는 것 정도야 요 2년간 지겹게 겪었던 일이다. 솔직히 이제 웬만한 말싸움으로는 화도 안 날 지경이 되었으니 더 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이렇게 그냥 돌아갈 수 없었다.

신나게 저며진 속이 쓰리다 못해 시렸다. 제가 내뱉은 끔찍한 문장과 그가 내뱉은 날 선 말들이 서로 뒤섞여 자꾸 숨을 턱턱 막게 했다.

……사과하자.

그래, 바라노프 그의 말이 맞다.

확실히 저는 단 한 번 만나 본 적도 없이 휴대폰 속 사진으로 한두 번 본 게 전부인 남자를 두고 필요 이상의 말을 쏟아 냈다. 열등감 때문이… 맞다.

별 기대조차 하지 않고 산다 해 놓고, 꼴이 우습다.

엉망진창인…, 아니, 그런 단어로는 설명조차 되지 않는 제 환경과는 다른 곳에서 자라나, 마약이니 뭐니 그 어떤 짓을 해도 사랑해 줄 사람들이 있는 남자와 자신이 나란히 섰을 때가 두려워서 해선 안 될 말을 했다.

사과하자. 사과하고, 저택으로 돌아가서…… 바라노프 그가 몇 번이고 말했던 그 남자의 영화 하나쯤을 보고 자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다. 가브리엘은 또 밤낮이 바뀌는 거냐며 싫은 표정을 감추지 못하겠지만, 어차피 오늘은 편히 자기는 글렀다.

션 스펜서는 비 냄새와 섞인 정원 화단의 풀 내음을 크게 들이켜고 나서는 몸을 돌려 어두운 통로를 걷기 시작했다. 저쪽 창문 너머로 다시 한번 크게 번개가 내리쳤다.

그다음은, 또 벽이 울릴 정도로 큰 천둥소리가 저택을 울릴 거다. 션은 오늘따라 날씨가 요란하다는 생각을 하며 작게 혀를 쳤다.

하지만.

-탕!

천둥보다 한발 빨리, 그의 귀를 찢는 소리가 있었다.

뚜벅뚜벅 걷던 남자의 발이 멈춘 것도 그때였다.

……잘못, 들은……, 거겠지. 션 스펜서는 멍하게 생각했다.

발 늦은 천둥이 그제야 저택 전체를 요란하게 울렸다.

기분 나쁠 정도로 큰 저 천둥소리가 아주 잠깐, 찰나의 순간에 말도 안 되는 것으로 들리는 모양이다. 분명히 그렇다. 그럴 거다. 션 스펜서는 조금 신경질적으로 크게 심호흡했다.

크게 숨을 들이켜고, 한계까지 가슴이 올라온 상태에서 잠시 멈췄다가 길게…….

-타앙!

총이다.

총이 맞다. 조금 전도, 지금도, 총이다.

총성이다. 어디서? 아마도 그리 멀지 않다.

아니, 멀지 않다. 이 저택의 안이다. 어디서? 이 저택의 어디서? 누가? 왜? 총이다. 총이 있다. 총을 쐈다. 누가 쐈을까? 누가 다쳤을까?

「-…후우, 하….」

……그 총이 어디 있을까?

걷기는커녕 서 있을 수조차 없다.

션 스펜서는 벽을 짚은 채로 휘청이며 서 있다가 얼마 안 가 그 자리에 그대로 주저앉았다. 머리가 빙글빙글 돌고, 누군가 제 목에 걸린 넥타이를 천천히 잡아당겨 질식시키기라도 하는 것 같다.

분명 제 두 발은 이 서늘한 대리석 위에 붙어 있는데, 닿은 다리로 차가운 기운이 슬금슬금 기어오르다 못해 바닥으로 끌어 내리는 것만 같은데,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과호흡이 온 폐가 쥐어짜 내어지는 것처럼 아팠다.

아니, 아픈지, 아프지 않은 건지, 그것도 잘 모르겠다. 그저 몸통이 으깨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뿐이다. 옅게 경련하기 시작한 사지가 말을 듣지 않는다.

션 스펜서는 숨을 헐떡이며 간신히 제 휴대폰을 움켜쥐었다. 하지만 자꾸 벌벌 떨리는 손이 어떤 유의미한 행동 하나조차도 하는 걸 방해한다.

그때다.

고요한 복도의 소란이라고는 창문을 내리치는 빗줄기와 듣기 싫을 만큼 몰아쉬는 숨소리를 내는 남자뿐이었던 어두운 통로로, 다른 소리가 끼어든다.

션 스펜서의 손에서 움켜쥔 휴대폰이 그대로 떨어져 요란하게 바닥을 뒹군다.

뚜벅.

뚜벅.

뚜벅.

그 일정한 발소리는 여전히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는 션 스펜서의 등 뒤에서 멈췄다.

등 뒤에서, 화약 냄새가 난다.

* * *

“…분명히, 누군가… 내 뒤에 있었습니다.”

이건 고해성사가 아니다.

고해성사는 치유의 과정이다. 자신의 죄를 고하고, 어두운 것을 떨쳐 내는 회복의 시작이다. 하지만 지금 션 스펜서 그가 하는 건 치유도, 회복도 아니다.

“화약 냄새가 나는… 누군가가, 나를 내려다봤지.”

“…….”

“그런데 난 그걸 알면서도.”

굳이 지금 이 순간에 이름을 붙인다면 가장 어울릴 단어는 자해일 거다.

“분명, 내가 조금 전 들은…… 두 발의 총성이, 이 사람에게서 시작됐다는 걸 직감하면서도 뒤돌아보기는커녕, 날 물끄러미 보는 시선에 그대로 얼어서…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고 있었어.”

“…….”

“…하하…, 그게….”

끅끅거리고 웃는 소리가 고개를 숙여 더욱 크게 들리는 호흡과 섞여 기묘한 화음을 만들었다. 집사장 가브리엘은 그 금빛 눈동자를 깜박이는 것마저 잊은 채 멍하게 제 젊은 주인을 바라보았다.

“가브리엘, 그게 얼마나…… 끔찍하게 한심한 꼴이었을지 상상이 갑니까?”

얼굴은 볼 수 없었지만, 손수건을 움켜쥔 손에 얼마나 힘이 들어갔는지 손등으로 푸른 힘줄까지 툭 불거져 튀어나온 채로 하얀 뼈가 덧그려져 있었다.

“단지 그 총이 무서워서.”

“…스펜서 님.”

“숨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주저앉아… 있었다고. 항상 그랬던 것처럼, 또. 그때마저!”

“…….”

“무서워서. 그저 그, 총이 무서워서- 바라노프를 죽인 게 누구인지 알 수 있었을 그 순간에, 하얗게 질려 굳은 채로 벌벌 떨고만 있었습니다, 가비. 그때 나를 내려다보던 게 이선이었을까요? 그게 정말로, 이선이었다면!”

내내 고개를 처박은 채 있던 남자가 드디어 머리를 들었다. 가브리엘은 아직도 옅은 눈물 자국이 남아 있는 푸른 눈이 일렁이는 것을 보면서 뭐든 말을 꺼내 보려고 했던 혀가 곧장 말려 들어갔다.

“그……, 끔찍하게 한심한 모습을 보고도 나를 사랑할 수 있었을까? 그래요? 그럽니까, 가비?”

“…….”

“미안하지만, 그건-”

아닐 것 같아.

갈라진 목소리로 말을 잇던 션 스펜서는, 제 연인이 벼랑 끝에 서고 난 다음에야 입 밖으로 꺼낼 수 있었던 그날의 기억과 감상을 다 끝마치지도 못했다.

--꺄아아악!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 스펜서 저택 어디선가 귀가 찢어지는 듯한 비명이 들렸기 때문이었다.

그저 지나가는 소나기인 줄 알았던 빗줄기가 창문을 더욱 거세게 두드린다.

션 스펜서는 저를 지겹게 따라다녔던 그날 밤의 기억에 갇힌 사람처럼 넋이 나간 채 있다가, 자신의 수족과 다름없는 집사가 저를 차마 잡거나 곧장 따라올 수조차 없게 미친 사람처럼 응접실에서 달려 나갔다.

그날 밤도 이랬었다.

제 등 뒤에 있던 그 ‘누군가’가 저를 한참이나 내려다보다가 왔던 길을 돌아간 뒤, 몇 분인지 모를 시간이 지난 다음 저 찢어질 듯한 비명소리가 들렸었다.

그날 밤, 그 비명의 끝에 있던 건 네스 바라노프였다.

“…스, 스펜서 님…!”

오늘 밤은 누구일까?

션 스펜서는 그 끔찍한 비명이 시작된 곳을 어렵지 않게 찾았다.

허옇게 질린 얼굴의 고용인들이 웅성거리며 모여 있다가 저를 보자마자 놀라 튀어 올랐기 때문이었다.

저택 동관의 입구에는 눈에 익지 않은 차가 비뚤게 주차되어 있다.

아니 사실 그건 주차라고 보기도 어렵다. 그 뒤를 따라온 엉망진창인 바퀴 자국 역시 이 차의 주인이 운전다운 운전을 하지 못했음을 알려 준다.

“줄리! 911에는 신고했습니까?!”

“네, 네에, 5분 내로 도착한다고….”

“빨리 다들, 뭐라도 지혈할 걸 가지고 오세요!”

제 고용주보다 한발 늦게 도착했지만, 그 반응만큼은 앞선 집사장 가브리엘의 목소리가 쏟아지는 빗줄기보다 매섭게 내리쳤다.

션 스펜서는 멍하게 그 차의 운전석에 늘어져 앉아 있는 남자를 향해 걸어갔다.

거센 빗줄기가 머리를, 옷을 서늘하게 적시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런 것 따위는 신경 쓰이지 않는다.

운전석에 앉은 남자의 복부에서 울컥, 붉은 피가 흐른다.

“……코빗?”

션 스펜서는 그 피가 나오는 곳을 제 손으로 틀어막았다.

“…코빗, …형사님. 코빗. 형사님. 이봐요, 닉 코빗!”

머리부터 발끝까지 적시는 차가운 빗줄기와는 달리 두려울 정도로 따뜻한 것이 계속해서 손가락 사이로 흘러나온다. 션은 그것을 어떻게라도 막고 싶어 더욱 힘을 주어 막았다. 고용인들이 건넨 수건을 급히 덧대 눌러 보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다.

오히려 그 하얀 수건 위로 무서울 정도로 붉은 것이 빨리 번질 뿐이다.

“젠장, 911은 언제 도착하는 거야!”

“스펜서…, 하아, 스, -펜서.”

“듣고 있습니다, 코빗. 아니, ……젠장! 움직이지 말고, 정신만 그대로-”

벌벌 떨리는 손을 고집스럽게 들어 션 스펜서의 옷깃을 잡아당긴 형사의 눈이 흉흉하게 빛난다.

션 스펜서는 그 창백한 얼굴을 한 중년의 남자가 마치 저만 들어야 한다는 듯, 쏟아지는 빗소리 사이에 이 비밀을 숨겨야 하는 것처럼 바라보는 것에 저도 모르게 자신의 고개를 형사의 숨이 닿을 정도로 가까이 기울였다.

“…그대로…… 둬야, 해!”

잔뜩 쉬어 갈라진 목소리가 귀가 아닌 머리로 곧장 꽂히는 것만 같다.

“…그를, 나오게 해서는….”

닉 코빗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않았다.

스펜서 저택의 삼엄한 문을 가르고 빗소리보다 더 커다란 사이렌 소리가 차오른다. 그 어떤 낯선 이의 침입도 허락하지 않던 정돈되고 아름다운 공간이 긴박한 목소리로 가득 찼다가, 얼마 안 가 다시 소름 끼칠 만큼 평화로운 고요로 돌아갔다.

이번에도 오로지 하늘에서 쉼 없이 쏟아져 내리는 빗줄기만 그 침묵을 달래 줄 뿐이다.

“…….”

이곳의 주인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전히 비에, 혹은 피에 젖은 채로 고작 어제까지만 해도 연인과 함께했던 동관 저택 입구의 기둥에 기대앉아 있다.

이번에야말로 정말 피투성이가 된 남자의 푸른 눈은 어디를 보는지 쉬이 짐작이 가지 않았다. 모든 것을 다 보고 있는 것도 같고, 그 어떤 것도 보지 못하는 것도 같았다.

제가 모시는 젊은 스펜서와 마찬가지로 성한 곳이 하나 없는 집사장은, 물기가 없는 부드러운 수건을 들고 남자에게로 다가갔다.

가브리엘은 제 목소리에 한숨이 섞이지 않았기를 기도하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스펜서 님. 우선 들어가셔서 연락을 기다리는 게….”

“-살 수 있을까요?”

이제껏 제가 모시는 이 젊은 스펜서에게 언제나 누구보다 훌륭한 조언을 건넸었던 그는, 지금 이 순간 이 질문 앞에서만큼은 어떤 말도 확신을 담아 꺼낼 수가 없었다.

조금 전의 붉은 것 따위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그저 거친 바퀴 자국만이 남은 동관 앞의 흔적만을 눈에 담는 남자의 입에서 혼잣말 같은 말이 이어졌다.

“피가…… 너무 많이 흘렀는데.”

“…….”

“숨이, 약해지는 게 손으로… 전해졌어.”

필사적으로 닉 코빗의 상처를 틀어막았던 손에는 여전히 붉은 핏기가 남아 있다.

가브리엘은 그런 션 스펜서를 묵묵히 바라보다가 자신의 주머니에서 휴대폰 하나를 꺼냈다. 군데군데 거친 흠집이 나 있고 낡은 그것은, 집사장 그의 것은 아니었다.

션 스펜서는 대답 대신 제게로 조심스럽게 건네진 그 작은 기계를 느릿느릿 받아 들었다.

이게 뭐냐느니 같은 질문은 없었다. 그 작고 가벼운 기계를 받는 순간 션 스펜서는 이것의 주인이 누구인지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물에 빠진 생쥐처럼 온몸이 젖은 탓일까.

왠지 모르게 서늘한 기운이 심장을 찌르는 것 같았다.

군데군데 다 닦아 내지 못한 피가 남아 있는 길고 우아한 손가락이 천천히 움직인다.

별다른 잠금 없이 화면을 밀어 움직이면 그만인 화면은, 곧장 휴대폰의 메시지 탭으로 이어졌다.

계속해서 메시지를 정리하는 성격일까, 아니면 일부러 지워 정리한 것일까.

낡은 휴대폰에는 딱 두 명과의 메시지 대화만이 남아 있다. 션 스펜서의 손가락이 먼저 본능적으로 향한 건 제 연인의 이름이었다.

[형사님. 우리 좀 볼까요]

[저기요, 코빗 형사님.]

[확인하시면 연락 주세요]

[당신이 준 숙제를 다 풀었어요]

[뭘 찾았는지도 알고요]

그는 이미 제 연인의 휴대폰에서 확인했었던 그 독백에 가까운 문자 세례를 멍하게 몇 번이고 다시 읽다가, 손을 옆으로 쓸었다.

분명 대화 상대는 한 명 더 있었다.

“…….”

션 스펜서의 시선이 그 작은 화면에서 꼼짝도 하지 않는다.

겨우 단둘뿐이었던 메시지 상대는, 그 단출한 규모 안에서마저 서로 다른 모습을 보였다. 이쪽은 계속해서 메시지를 보냈지만, 쭉 답장을 받지 못한 이선과는 정반대였다.

이곳에는 그저, 형사가 두 시간 반 전에 일방적으로 보낸 메시지만 남아 있을 뿐이다. 상대는 답장하지 않았다.

[이 개새끼]

[네가 나한테 이렇게 엿 먹일 순 없는 거지]

[무슨 짓을 하려는 거야]

아니, 지금 코빗의 이 모습이 그의 답장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션 스펜서는 문자의 수신인을 들여다보다가 헛웃음인지, 후회인지, 분노인지, 그 무엇인지 모를 것을 크게 토해 냈다.

D. Barker


*9,335스퀘어 피트: 약 261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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