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The devil can cite Scripture for his purpose.
악마는 제 목적을 위해 성경을 인용할 수 있다.
세상을 수놓은 사랑 이야기는 수도 없이 많다.
이 지구상에 있는 인류의 유전자는 기억도 안 날 아주 오래전부터 사랑이라는 단어에 반응하도록 설계됐다. 물론, 그 사랑의 종류는 무궁무진하다. 가족 간의 사랑일 수도 있고, 친구를 향한 것일 수도 있으며, 아끼는 동물이나 식물, 심지어는 물건을 향한 사랑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수많은 사랑의 형태 중 가장 대중적인 것을 꼽자면 누가 뭐라고 해도 연인 간의 사랑이 가장 첫 번째에 올 거다.
그렇다면, 그 연인 중 가장 유명한 건 누구일까?
이에 대한 답은 질문에 답하는 사람의 수만큼이나 많이 나올 것이다. 하지만, 그 수많은 답 중에서 꽤 다수를 차지할 커플 정도는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바로 셰익스피어의 가장 유명한 고전 중 하나인 로미오와 줄리엣이다.
15세기 중엽의 아름다운 베로나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몬태규의 로미오와 캐플럿의 줄리엣, 이 두 사람의 처연한 사랑 이야기는 벌써 몇 세기가 지났음에도 여전히 살아 숨 쉬면서 그 생명력을 이어가고 있다.
하지만, 그 유명한 연인의 사랑에 대해 꽤 적잖은 대중들이 모르는 사실이 하나 있다.
서로 원수의 집안에서 태어나 서로의 목숨을 걸 정도로 처절하게 사랑했던 그 빛나는 연인은, 사실 단 5일간의 불나방 같은 사랑을 했다는 거다.
그들은 처음 만난 그날 서로에게 반해 사랑을 고백했고, 그 이튿날에 결혼식을 올렸다.
그러다 사흘째엔 로미오가 줄리엣의 사촌인 티볼트를 죽였으며, 나흘째는 줄리엣이 수면약을 먹고 잠이 들었다. 그 사실을 모르던 로미오는 그녀의 죽음을 비관하며 스스로 세상을 떠난 날이기도 하다.
그리고 마지막 닷새. 줄리엣은 자신의 곁에 싸늘하게 식어 있는 연인을 보며 그녀 자신도 죽음을 택했다.
처음 만나 사랑이라는 단어에 온전히 젖어들기까지- 15세기 중엽의 그들에게는 단 5일이면 충분했다. 그 끝이 다소 비극적일지언정 말이다.
하지만 그로부터 몇 세기나 지난 현대.
“…스펜서, 당신….”
“…….”
“정말 미쳤어요?”
고풍스러운 이탈리아 베로나가 아닌 미합중국의 캘리포니아 로스앤젤레스에 기반을 둔 어떤 연인은, 자신들의 사랑을 세상에 증명하는 데 새로운 기록을 세울 작정인 듯했다.
그걸 증명이라도 하듯 션 스펜서는 벌써 오늘만 해도 두 번째 듣는 말을 들으며 가늘게 눈을 휘었다. 이 늦은 저녁, 검사 록산느 마틴의 사무실을 찾아온 그는 언제나처럼 화려한 주연을 차지하고 있다.
“난 그저 헌법상의 권리를 기꺼이 수긍하겠다는 겁니다, 검사님.”
심지어 느긋함을 넘어 나긋하기까지 한 목소리로 달짝지근하게 웃기까지 한다. 록산느 마틴은 저도 모르게 머리를 짚으면서 긴 한숨을 흘렸다.
“맙소사….”
“-물론 거기에 이 넘치는 애정을 담아서.”
그 손바닥만 한 액정 속을 가득 채운 기사 세례들은 다들 하나같이 하나의 특종을 목 놓아 외치고 있다.
션 스펜서와 이선 박.
어느새 이 할리우드를 매일같이 달구게 된 연인은, 오늘 오후 LA 카운티 클럭 오피스에서 혼인신고와 세레모니를 마쳤다.
그들의 사랑이 세상에 증명받기까지 걸린 시간은 단 3일이었다.
살벌하게 신속한 사랑으로 유명한 로미오와 줄리엣의 기록을, 무려 이틀이나 단축해서 따라잡은 것이다.
“이선은 아직 이 결혼의 비밀을 모릅니다.”
마치 깃털이 뺨을 건드리듯이 간지럽게 눈을 휘는 모습은 어떤 영화 속 모습보다 다디달았다.
순간 저도 모르게 그 그린 듯한 모습을 멍하게 지켜봤던 검사는, 제 손에 쥐어진 휴대폰 화면으로 다시 시선을 옮겼다.
* * *
#. D-3
오랜만이다.
이제 당신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그쪽이 꽤 보고 싶었다.
LA 다운타운의 트윈타워 구치소의 식사는 말도 안 되게 끔찍했거든. 아무래도 상한 오렌지 주스를 준 것도 같아.
5년 만에 찍는 생애 두 번째 머그샷의 소감이 궁금하지 않나?
세상에 머그샷을 영화용 분장까지 마치고 말끔한 얼굴로 찍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거다. 심지어 죄질 역시 감히 비교할 수조차 없게 나빠졌다.
마약 소지에서 두 건의 1급 살인죄라.
인생 꼬이는 소리가 이것보다 더 크게 들릴 수 없다.
그나마 마약 소지는 재활원 치료와 사회봉사로 끝났는데, 1급이 웬 말인가. 배우로도 찍어 본 적 없는 1급 타이틀을 범죄 기록으로 달게 생겼다.
지금도 내가 있는 곳은 독방이다.
와, 세상에. 안 그래도 공간이 부족해서 모범수들은 형기도 다 안 채우고 내보낸다는 와중에 개인 트레일러에 이어 구치소마저 독방을 쓴다. 뭐라더라, 특별보호대상자란다.
내 직업이 배우이기는 하지만 그 이름값이 유명해서는 아니고 아무래도 션 때문이 아닐까 싶다. 비실비실하지는 않아도 스펜서의 애인인데 험악한 형님들 사이에 뒀다가 뭔 일이라도 나면 쏟아질 소송을 걱정한 거겠지.
어쨌거나 그건 감사한 일이었다.
여기 오면서 깜박하다가 나중에 옷 갈아입으면서 깨달았는데, 그, 왜. 내가 지금 조금 자유분방하니 개방적인… 아랫도리를 가지고 있지 않나.
하하, ‘저 게이 새끼를 어쩌면 좋냐’하는 차가운 눈을 하는 건 교도관 정도면 충분하다고.
……이대로 그냥 당하고 말 거냐고?
설마.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을 뿐이지.
내 아파트에서 그 빌어먹을 것들이 나온 이유와 헬렌의…… 끔찍한 실종이 연결되었으리라는 걸 먼저 인정해야만, 어떤 가정이든 시작할 수 있다는 걸 믿고 싶지도 않았고.
“여전히 입을 다물 생각인가요, 박?”
입을 다물고 있으면 당신의 상상보다 더 많은 정보가 밀려온다.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은 그 침묵을 견디지 못해 안절부절못하지만, 나는 침묵 속에서 상대의 단어를 짚어 내는 데 익숙하다.
그게 나를 친구 둘을 죽이고 혼자 남은 힘없는 노파에게마저 끔찍한 짓을 한 사이코패스라고 확신하는 정의감 투철한 검사라면 더욱 그렇다.
“이선 박. 당신에게 떨어질 수 있는 가장 최악의 형량을 계산해 줄까요.”
이름이 뭐라고 했더라. 록산느 마틴?
영 입에 붙지 않는 프랑스계 이름이다. 물론 내가 살면서 만난 가장 입에 안 붙는 이름은, 단연 네스 바라노프였다.
“캐서린 에이브리의 살인에 사용된 탄환이 17발. 거기에 칼로 한 번.”
“…….”
“총 한 발당 15년, 자상 하나당 15년. 캐서린 에이브리만 해도 그 죄질이 악랄해 징역 270년. 거기에 네스 바라노프에게도 두 발이나 쐈군요. 그럼 이쪽은 30년. 도합 300년의 형량이 떨어질 수 있어요.”
밝은 적갈색 눈이 내 속을 꿰뚫어 보려는 듯 빛난다.
“가석방은 형의 3분의 2를 살아야 가능하니… 가석방 심사 명단에라도 오르려면 200년이 필요하군요. 사실상 가석방 없는 종신형이죠.”
“…….”
“그저 침묵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닐 텐데요. 헬렌 워커에 대한 증거가 없다고 해도, 이 둘만으로도 우리 쪽은 충분합니다.”
정말 충분했다면, 저 단호하고 우아한 인상의 검사가 이 우울한 LA 카운티 구치소까지 찾아와 나를 들여다보고 있을 리 없다.
그 부족한 조각 때문에 저 검사는 내가 유죄 협상을 하기를 바랄 거다. 내가 혹시라도 운 좋게 무죄로 법정을 걸어 나가는 것보다 확실히 썩어 문드러지기를 바랄 테니.
그녀는 이제 곧 제안을 할 거다. 장담한다.
“두 건의 살인. 그리고 실종된 헬렌 워커에 대해 자백하는 것으로 45년.”
역시!
와. 300년에서 255년이 줄었다. 실로 엄청난 할인율이 아닐 수 없다.
심지어 “가족력이 없으면 요즘 같은 땐 살아서 나올 수 있을 겁니다. 운 좋게 가석방을 받는다고 하면 누군가의 부축이나 지팡이 없이도 걸어 나오겠네요.” 하고 무서운 말씀을 아무렇지도 덧붙이기까지 한다.
하지만 이유 없는 감형 따위는 없다.
이런 건 변호사가 없을 때 들이밀어 재판까지 가지 않고 유죄 협상으로 처리하는 게 유리하다고 생각하는 거겠지.
나는 테이블을 내려다보며 그녀의 말을 곱씹었다.
마약 중독 회복 모임은 그저 평범한 사람들도 많이 참석하지만, 한편으로는 온갖 크고 작은 범죄 이력을 한둘은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한가득하다는 걸 저런 높으신 분들은 잘 모른다. 그곳에 5년을 다니면 줄줄 꿰게 되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도 말이다.
3년 만에 찾은 내 잭나이프는 도망칠 수 없는 증거다.
하지만, 저렇게까지 형기가 확 줄어들 수 있는 건…… 가장 큰 문제인, 두 건의 살인 모두에 쓰인 권총 때문일 거다.
문득, 언제였던가 헬렌이 했던 말이 떠오른다.
‘그 총을 찾아야 한다’고 했었지. 이렇게 찾게 될 줄은 나도, 헬렌도 몰랐던 일일 텐데 말이다.
살며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빌어먹을 권총이다.
말 한마디 하지 않았는데 최악의 시나리오에서 운 좋으면 살아서 감옥을 나갈 수 있는 정도로 파격적으로 형기가 줄어든 건, 아마도 내 친구 두 사람을 모두 죽이는 데 사용된 그것에 내 흔적이 없기 때문일 거다.
……물론 발견된 위치와 상황이 최악이라 느긋한 꿈은 못 꾸지만 말이다.
그나마 불행 중 다행도 있다.
“-아. 거기에 새로운 논란거리가 하나 더 추가될 수도 있다는 소식은 들었을까요?”
바로 다름 아닌 이 젊고 정의로운 검사는 제법 혈기왕성할지 몰라도 참을성은 좀 부족하다는 사실이다. 날 두말할 것도 없는 범인으로 확신하고 있는 그녀는, 변호사도 없이 앉아 있는 내 초조함을 자극해 보려는 듯 최소한 이 자리에서는 들을 리 없으리라 생각했던 이름을 먼저 꺼내주었다.
“닉 코빗. 아는 이름일 겁니다.”
“…….”
“그는 지금 칼에 찔려 6시간의 수술을 받고 혼수상태고요.”
물론 그게 더없이 효과적이었다는 것 역시 인정한다. 기껏 잘 지켜 오던 굳건한 묵비권의 벽이 한 번에 무너졌으니 말이다.
내 입에서는 오랫동안 입을 다물고 있던 탓에 유독 쉰 것 같은 목소리가 자각할 새도 없이 튀어나갔다.
“…뭐…라고요?”
“구금 상태였다는 걸 다행으로 여기시죠. 그렇지 않으면 체포 직전까지 걸었던 전화 12통의 뜻을 당장 밝혀야 했을 테니 말이에요. 하긴, 그건 지금도 확인해야 할 문제이긴 하네요. 이제껏 ‘남자친구’에게도 그렇게는 안 걸었던데.”
“…….”
“캐서린 에이브리와 네스 바라노프의 담당 형사에게 그렇게나 매달린 게 그저 우연일까요, 박? 닉 코빗이 그 엉망인 상태로 찾아간 곳이 당신의 ‘남자친구’네 저택이었다는데…. 혹, 그 멋진 집에 수색 영장이라도 들고 가야 할지도 묻고 싶군요.”
정말이지 다른 누군가가 듣는다면 코웃음 칠 일이다.
왜, 생각을 해 봐.
어느 누군가의 꿈이나 마찬가지인 남자가 이런 자리에서까지 내 애인으로 지칭되고, 그거로도 모자라 날 압박할 수단으로 쓰일 수 있다는 게 말이나 되는 일인가. 이번에도 가장 현명한 선택은 입을 다무는 거다. 검사에게 괜한 말을 해서는 좋을 게 하나 없다.
머리는 잘 안다.
하지만, 날 미친 살인마로 생각하는 건 괜찮은데…….
“할 수 있다면.”
“…….”
“그저 당장 하시면… 될 텐데.”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말에 검사가 ‘설마 지금 이 새끼가 나한테 한 소린가?’ 하는 표정을 감추지 않는다.
네스 바라노프를 마지막으로 만난 션 스펜서가 콕 집어 살인 용의자로 지목한 나를 불러서 건성으로 형식적인 질문 몇 개 하고 끝냈던 게 어디였나? 심지어 그 질문을 하는 동안에도 다니엘 바커의 표정에만 관심이 있었던 건 누구였고?
……그 대단한 LAPD였다!
그런데 이제 와 잘난 검사님께서는 내 ‘남자친구’가 어떻고, ‘그 멋진 저택’이 어떻다고 슬슬 떠보다니. 검경이 저렇게 손발이 안 맞아서야, 오늘도 이 LA의 치안이 어둡다.
뭐. 새삼스럽지도 않은 일이긴 하다.
심지어 덕분에 스펜서 저택을 뒤질 영장은 지금으로선 진작에 물 건너갔다는 것도 하나 건졌으니 손해는 아니다. 나는 저 꼿꼿한 검사가 기분 상한 얼굴을 감추지 않고 서류첩을 탁 덮는 것을 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하지만 그렇게 여유를 부리는 겉가죽과는 달리 심장은 금방이라도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처럼 빠르게 뛴다.
닉 코빗이 칼에 맞았다고? 뭐, 그 상태로 스펜서 저택을 찾아가?
……대체 이해되는 문장이 단 하나가 없다.
심지어 검사의 말 중 공감을 감출 수 없는 대목도 있다. 바로 내가 이 구치소 밖에 있었다면 닉 코빗을 찌른 죄까지 추가됐을지도 몰랐다는 공포다.
슬슬 파장 분위기를 읽은 교도관의 입이 열린 건 그때였다.
“면회 요청이 ‘또’ 들어왔는데. 이번에도 거절할 생각이라면….”
“-만나겠습니다.”
더 이상 미룰 수 없다.
구치소에 있는 이틀. 변호사 접견 요청이며 면회 신청을 몇 번이나 들었는지 모른다.
오죽하면 유독 문신이 살벌한 떡대 교도관 형님 하나가 “씨발, 게이 새끼들 순애보 한번 눈물겹군.” 하고 욕까지 했다고.
아, 션을 만날 생각을 하니까 머리부터 발끝까지 피가 확 식는 것 같다.
차라리 검사와 이야기할 때는 이렇게 확 솜털이 곤두서는 느낌은 안 들었는데. 이틀간 날 보며 휘파람을 부는 살벌한 인간들 사이에서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생각을 정리하기는 했다. 하지만 아무리 열심히 머리를 굴려 봐도 어차피 내가 꺼낼 수 있는 문장은 정말…… 한 줌뿐이었다.
이런 빌어먹을 상황에서 ‘션, 내가 그런 게 아니야.’ 같은 뻔하고 감흥 없는 말 말고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겠나.
심지어 모든 걸 말할 수 있는 것도 아니지.
어떻게 말할 수 있겠어.
나는 교도관의 뒤를 따라 걸으면서 그를 만나서 지을 표정을 연습했다.
연습이 유의미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건 나를 보며 철창을 흔들고 야유, 혹은 환호하며 차마 당신에게 문장으로 옮길 수 없는 더러운 말을 쏟아 내는 수감자들이 가득한 긴 복도를 걸으면서 할 수 있는 얼마 안 되는 일이었다.
끼이익, 하고 무거운 철문이 끌리는 소리가 났다.
여기서 웃으면서 인사하면 진짜 사이코패스처럼 보일 것 같은데.
그렇다고 해서 우는 얼굴을 하는 것도 비참하고. 어떡하지? 나는 그 끔찍한 소리 앞에서 크게 숨을 들이켰다.
그 수많은 걱정보다도 우선 그의 얼굴을 다시 보고 싶다는 생각이 앞섰으니까.
“…….”
“생각보다 그런 옷도 잘 받네.”
하지만, 나는 그 두꺼운 철문이 열리고 만난 남자의 나직한 목소리 앞에서 열심히 연습했던 그 어떤 표정도 제대로 걸어 내지 못했다.
“……다니엘?”
“얼굴 보기 너무 힘든데, 이선.”
“여긴… 어떻게.”
“어떻게?”
다니엘 바커는 무슨 말을 하냐는 듯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당신이 5년째 속한 에이전시의 이름이 뭐라고 생각해?”
“…….”
그야…… 그렇지만.
나는 얼떨떨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머뭇머뭇 그의 앞에 마주 앉았다. 다니엘 바커의 옆에는 언젠가 회의실에서 봤던 것 같은 딱딱한 표정의 남녀 둘이 앉아 있다. 누가 봐도 바커, 그가 데리고 온 변호사다.
“이선.”
짐짓 태평하게마저 시작된 만남은, 그 나직한 부름에 순식간에 그 무게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세상에서 가장 차가운 표정을 한 변호사들을 옆에 앉혀 둔, 여느 때처럼 따뜻한 눈을 한 사내의 목소리가 나직하게 이어졌다.
“왜 그것들이 아파트에서 나왔는지 설명해 줄 수 있겠어?”
차라리 형사들을 상대하던 때가 나았다.
조금 전 검사에게 잘해야 여든을 앞두고 교도소에서 나올 수 있는 형량 협상에 합의하라는 말을 들을 때가, 그나마 말하는 상대를 마주 볼 엄두가 났던 것 같다고.
“…못… 합니다.”
“…….”
“저도, 저도…… 잘, 모르겠어요.”
“그럼 그 모두 너와 관련 없는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어?”
“…….”
변호사 둘이 서로 시선을 주고받는 표정이 살벌하다.
“이선. 나를 믿어야 해.”
아무래도 날 변호하고 싶지 않은 모양인 변호사들과는 달리, 바커의 목소리는 한없이 다정하기만 했다.
“경찰은 당신의 아파트에서 몇 년, 혹은 몇 달이나 자취를 감췄던 무기가 발견됐다는 사실 말고는 아무것도 찾아내지 못했어.”
“…….”
“잭나이프가 이선 당신 것이었던 건…… 다소 곤란하게 됐지만. 여기에 48시간 이상 잡아 둘 근거는 못 되지. 얼굴이 알려질 대로 알려져서 도주 위험도 없고, 또 당장 나가자마자 총을 들고 LA를 뛰어다닐 사람도 아니잖아? 게다가, 지금 당장 더 급한 건 이쪽이 아니어서.”
가장자리부터 금이 가기 시작한 심장이 조금씩 떨어져 나가는 것 같다.
“경찰은 아직 워커 씨를 발견하지 못했어.”
“-그럼 제 아파트에 있는 핏자국은.”
날 데리고 오자마자 붙잡고 심문하던 형사들은 조용히 입을 다문 내 앞에 사진을 펼쳐 줬었다.
익숙하기 짝이 없는 내 아파트는 말 그대로 엉망진창이 되어 있었다.
책들은 제대로 꽂힌 것 하나 없이 나뒹굴고, 거실의 가구들은 무엇 하나 제자리에 온전히 있는 게 없었다. 오래 쓴 컵과 그릇들이 깨져 그 날카로운 조각이 아무 데나 흩어져 있는 게 터무니없이 위험해 보였다.
형사들이 몇 번이고 말한 ‘핏자국’은 그 위험천만해 보이는 바닥에 늘어져 있었다. 나는 마치 피를 흘리는 채로 질질 끌리기라도 한 듯한 그 긴 자국을 한참이나 들여다봤던 것 같다.
“그, 핏자국들은, 정말로…….”
이 끔찍한 것이 헬렌의 흔적이라는 걸 믿을 수가 없었다.
헬렌은 헬렌이었으니까.
자그마한 자기 키와 비슷할 정도의 장총을 들고 다니면서 그 험한 폐차고를 뛰어다니기도 했고, 자기보다 몸집이 다섯 배는 더 큰 것 같은 껄렁한 녀석이 “뭐야, 할매. 진짜 죽고 싶어?” 하면 조용히 늘어진 스웨터 주머니 안으로 손을 넣은 채 노려봐서 제아무리 커다란 녀석들의 입을 꾹 다물게 했으니까.
가끔은 일주일이고, 보름이고 훌쩍 사라졌다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돌아와 대체 어딜 다녀왔냐고 외치는 우리에게 “다 큰 놈들이 징징거리기는! 시끄러워!” 하고 면박을 주고, 항상 있는 듯 없는 듯 지켜봐 줬으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정말…?”
“…….”
혼자 남은 헬렌을 카라반에 따로 두는 게 마음이 쓰여서 기껏 내 아파트의 열쇠를 건넨 거였는데, 내가 헬렌을 이곳으로 데려와서 검붉게 변한 긴 자국만 남기고 사라졌다는 걸 믿고 싶지가 않아서.
그 사진을 보면서도 헬렌이 아닐 거다, 헬렌이 아닐 거다, 몇 번이고 나 자신에게 세뇌하듯 자신했던 것 같다.
뭔가 착오가 있겠지.
검사를 해 보면 아니라는 사실이 나올걸. 헬렌일 리가 없잖아, 하고. 나는 대답 없는 다니엘 바커를 마주 보는 걸 포기하고 얼굴을 괜히 크게 쓸었다.
“이선. 앞으로는 누가 무슨 말을 하든 변호사 없이는 단 한마디도 하지 마.”
울지 말자. 울지 말자, 이선.
울어 봤자 해결되는 건 하나도 없다. 뭘 잘했다고 울어.
그 시간에 대체 어떤 놈이 내 아파트에 들어왔을지나 생각하자. 대체 어떤 새끼가 내 아파트에 들어와서, 헬렌을 데리고 가고 잊었던 것들을 내 눈앞에 끄집어냈을지나 생각하자.
누굴까? 어떤 놈일까?
대체 어떤 개새끼가 내 아파트를 찾아갔을까? 헬렌에게 무슨 짓을 한 걸까? 그놈이 네스를 죽인 걸까? 그 CCTV 화면 속 쥐새끼일까? 대체 누굴까?
차라리 선명한 원수라도 있었으면 이렇게 고민하지는 않았을 텐데.
이 도시는 내게 단 한 번 상냥한 적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 모든 것을 박살 내려 들 만큼 대단한 적수를 준 적도 없었다.
애초에 사람을 해할 만큼 척을 지고 원한을 사려면 그만큼 부딪치는 인간이었어야 한다. 난 그쪽과는 거리가 멀었다고.
눈을 가리고, 귀를 틀어막고, 입을 꽉 다문 채로 잘 살아왔잖아.
……그런데 나한테 왜 이러는데!
“후우…, 네. 압니다.”
“그래. 잘하고 있었다고 들었어. 면회고, 변호사 접견 요청이고 싹 무시해서 조금 속이 타들어 가기는 했지만 말이야.”
꽉 막힌 목소리로 간신히 꺼낸 짤막한 대답을 받는 목소리가 미안할 정도로 유들유들했다.
“심지어 권리까지 포기한 걸 보고 말하는 대로 휘둘릴 줄 알았는지, 검사가 유죄 협상을 먼저 제안하던데요.”
시종일관 별 표정 변화가 없던 무뚝뚝한 변호사들이 처음으로 눈을 크게 떴다. 나는 그들을 흘끗 보면서 말을 이었다.
“45년이라고 했던가. 285년에서 240년이나 깎아 주겠다면서요.”
오. 변호사들이 처음으로 헛웃음 치며 고개를 젓는다.
나는 그들을 보면서 “그리고….” 하고 조심스럽게 말을 골랐다. 그러자 바커는 곧장 “이선, 네 변호사니까 말해도 돼.” 하고 소심한 내게 용기를 불어넣어 줬다.
“……형사가, 많이 다쳤다고 합니다.”
하지만 왠지 제아무리 내 변호사라고 한들 이 이름을 순순히 입에 담는 건 괜히 망설여졌다. 그래서 나는 일부러 이름을 말하지 않고 빙빙 돌려 표현했다.
“왜, 그… 제가 일전에 말했던 형사요.”
“…….”
“저도 이건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어요. 그런데 크게 다쳐서 수술을 받고 아직 혼수상태라고….”
알아들었을까?
내가 이전에 따로 말한 형사 같은 건 없으니, 분명 알아들은 게 맞겠지? 나는 아무 대답 없는 바커를 보면서 눈만 깜박였다. 아무리 다 얘기해도 된다고 하지만, 왠지 이 자리에서 술술 말하기가 껄끄러운 게 사실이다.
변호사들이 답을 구하듯 다니엘 바커를 슬쩍 보고 있으니 자세한 건 저쪽에서 알아서 이야기하겠지.
나는 이제껏 술술 대답하던 남자가 희미하게 미간을 좁힌 채로 눈조차 깜박하지 않는 것을 보며 괜히 마른 입술만 혀로 적셨다. 갑자기 괜한 소리를 한 것처럼 들리면 어쩌나 싶지만, 어쨌거나 내가 여기 오기 전 형사에게 죽어라 전화했던 게 사실이니 말하지 않고 넘어갈 수가 없다.
……왜 전화했냐고 물어보면, 뭐라고 해야 하지?
아. 벌써 머리가 아프다.
네스가 죽은 그날 밤의 CCTV 영상을 말하면 자연스럽게 션이 따라오게 되어 있는데….
그렇지 않아도 이미 포화상태인 머릿속에 뒤늦게 새로운 고민이 끼어든다. 정말, 죽으라는 건지 살라는 건지 모르겠다. 젠장!
그런 내 고통을 줄여 주려는 걸까. 쭉 조용하던 다니엘 바커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이선. 오늘 중으로 보석 심리가 바로 잡힐 거야. 고생 많았어.”
기분이 싱숭생숭하다.
상냥한 목소리. 다정한 문장. 이렇게만 보면 내가 아는 다니엘 바커, 그가 맞다. 하지만….
이 최악의 소식을 전해 들은 그가 이번에도 또…… 언제나처럼 나를 찾아올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었다.
그 때문일까.
나는 지금 내가 있는 위치도, 내가 입 밖으로 꺼낼 말을 함께 들을 다른 이들의 귀도 잠시나마 잊은 채로 툭 입을 열어 버렸다.
“나 같은 건…… 꺼져 줬으면 하는 거 아니었어요?”
덕분에 낮은 목소리로 뭐라고 나직하게 지시하던 다니엘 바커도, 수첩 위에 뭔가를 적으며 고개를 끄덕이던 변호사들도 잠시나마 행동이 뚝 멈췄다. 그들은 난데없는 내 물음에 잠시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었다.
특히, 내 물음이 향한 남자는 더욱 그랬다.
“……뭐?”
“그냥. 그런 거 아닌가… 막연하게 생각했었거든요.”
제임스 월링턴과 에이전시 계약을 맺는 거야말로 그가 말한 일종의 마음 정리의 일환이라고 생각했는데. 특별 대우를 아끼지 않는 친구에서 이제야말로 그 수많은 에이전시 소속 중 한 명의 비즈니스 관계로 돌아가는 첫 단계라고, 정말 그렇게 생각하면서 몇 번이고 속을 달랬었는데….
“말도 안 되는 소리.”
나는 이 음침한 직사각형의 공간에서 만난 이후 처음으로, 다니엘 바커 그의 대답에 묘한 웃음기가 걸려 있다 생각했다.
“난 누구보다도 가장 열렬한 네 팬인걸.”
지금 이 순간 내 연인의 안부에 관해 묻는 건…… 아무리 나라고 해도 너무한 행동이겠지. 나는 작은 목소리로 “감사합니다.” 하고 대답했다.
* * *
그대로 둬야 한다.
그를 나오게 해서는 안 된다.
닉 코빗이 간신히 내뱉은 문장들은 하나같이 문장 요소가 부실했다. 그렇게나 간신히 와서 하는 말이라고 하기에는 가장 중요한 ‘어디에’, 그리고 ‘누구를’이 빠져 있었으니 말이다.
“큰 혈관이 손상되어 시간이 오래 걸렸다고 합니다. 그러고도 복강 내 출혈이 계속되는데, 그게 어디서 나는지 찾지 못해서 위험하기도 했고요.”
“…….”
“우선 수술 자체는 무사히 끝났는데… 이겨 내는 건 저 형사의 몫이라고.”
온갖 호스를 다 달고 침대 위에 창백한 얼굴로 누워 있는 이 사내를 탓하려는 건 아니다.
비록 그가 남긴 말은 가장 중요한 부분이 빠져 있기는 했지만, 다행히도 그 내용을 유추하는 데는 어려움이 없었으니 말이다.
닉 코빗은, 저 끔찍한 상태로 기껏 제 저택까지 찾아와 말했다.
당장에라도 그 서늘한 곳에서 꺼내고 싶기만 했던 이선, 그를 구금된 상태 그대로 두라고.
그 서늘한 곳에서 나오게 해서는 안 된다고.
-하지만, 그 간신히 이어 간 문장의 뜻만큼은 정확히 알 수가 없다.
지극히 개인적인 감정을 추가했을 때와 그것을 덜어 냈을 때의 해석이 서로 갈리기 때문이었다.
이선이 그 안에 있는 게 더 안전하다는 뜻일까?
아니면…… 그가 반대로 이 바깥의 사람들을 위협할 수도 있으니 안에 두어야 한다는 뜻일까. 션 스펜서는 전자일 것이라 확신하면서도 문득문득 머리 한구석에 떠오르는 정반대의 문장에 모든 생각이 멈추고는 했다.
지금도 그랬다.
“그리고, 바커 측과도 연락되기는 했습니다.”
션 그는 제게 조심스럽게 말을 잇는 가브리엘의 말에 한참이나 늦게 대답했다.
“…뭐라고… 하던가요.”
“‘에이전시에서 해야 할 일을 당연히 한 것일 뿐’이니, 모든 건 자신들 쪽에서 전담하겠다고 합니다.”
“이선과 연락할 방법은?”
“아직은…… 어렵다고만 답변받았습니다.”
다니엘 바커 측에서 이선의 보석 석방 심리를 채 갔다.
정확히는, 저 내부에서 연락이 닿지 않아 이제나저제나 면회 신청을 하며 기다리던 상황에서 다니엘 바커가 먼저 선택됐다. 머뭇거림을 감추지 못하는 집사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아무래도 LA 쪽은 바커가 연을 대고 있는 곳이니까요.”
“-툭하면 가십란에 오르던 애인보다는 에이전시이기도 할 거고.”
“…….”
신랄하기까지 한 자기비판이었다.
가브리엘은 유리창 너머 형사의 모습에서 시선을 떼지 않는 자신의 고용주를 보며 바짝 마른 입술을 혀로 축였다. 저쪽 대기실에서 모여서 하나같이 초조와 분노를 감추지 못하고 있는 이들의 목에, 그리고 허리에 달린 배지가 유독 눈에 띄었다.
“경찰에 신고하는 건 어떨까요.”
“이미 이선의 통화 기록을 확보했을 겁니다, 가비.”
“…….”
“만나자는 연락만 몇 번을 한 상대가 죽은 두 사람의 담당 형사라는 것도 알 테고.”
그리고 그들 중 몇 명쯤은 지금 여기에 꼼짝도 하지 않고 서 있는 션 스펜서를 눈을 가늘게 뜨고 바라보고 있고 말이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션 스펜서의 나직한 문장은 계속됐다.
“캐서린 에이브리와 네스 바라노프의 살인에, 헬렌 워커의 실종, 거기에 누구라도 사주해서 정직 중인 형사를 너덜너덜하게 했다는 혐의까지 덮어씌우려고 준비 중일 텐데 지금 무작정 바커를 건드리는 게 맞는지 모르겠군.”
“하지만… 다니엘 바커와 닉 코빗이라니요, 이 둘은 어딜 봐도 연관이….”
“있기는 하지.”
“예?”
이선과 직접 이야기해야 한다.
형사의 문자를 넘기는 건 그다음의 일이다.
어영부영 갈라지고 만 연인과 직접 이야기를 해야, 닉 코빗 저 사내가 어떻게든 제게 전하려고 했던 말의 뜻을 정확히 알 수 있다. 정확한 것도, 믿을 수 있는 것도 아무것도 없다.
“-스펜서 씨?”
형사를 뚫어지라 눈에 담던 스펜서의 고개가 저를 부른 쪽으로 천천히 움직였다. 그 우아한 턱짓이 향한 곳은 빳빳하게 주름 하나 없는 양복을 입은 남자였다. 많아 봤자 40대 정도인 그는, 눈이 마주치자 가늘게 실눈을 뜨고 웃었다.
누구인지 묻기도 전에 먼저 설명이 뒤따랐다.
“변호사입니다. 이번 일을 두고 새로 맡기게 된 사무실인데, 커다란 로펌은 아니지만 이 방면에서 굉장히-”
“가비. 당신의 선택을 믿어.”
뭐라 입을 열기도 전에 흘러나온 평가와 한편으로는 담담하게, 하지만 흔들림 없이 흘러나온 신뢰에 변호사는 작게 어깨를 으쓱했다.
“케빈 헤르난데즈입니다.”
“션 스펜서입니다. 조용한 곳으로 가서 이야기할까 싶습니다만.”
션 스펜서가 이곳 병원의 아동 병실 증축에 몇십만 달러를 기부한 특급 VIP라는 건 이런 순간에 꽤 도움이 됐다. 그가 왔다고 했을 때부터 안절부절못했던 병원장은, 스펜서가 병원을 나서려다가 “혹시 남는 회의실이 있다면 잠시 써도 되겠습니까?” 하고 지나가듯 물은 말에 곧장 자리를 만들어 줬다.
확실히, 션 스펜서는 그래도 나름 산전수전을 겪었다 자부했던 헤르난데즈 그에게도 여러모로 독보적인 의뢰인이었다.
이 LA에서 가장 몸값 비싼 변호사인 그가 만났던 누구보다…….
“단도직입적으로 이야기하겠습니다, 스펜서 씨.”
젊고, 부유한데 거기에 속으로 저절로 감탄이 나올 정도로 근사한 건 말할 것도 없고 말이다. 헤르난데즈는 꼭 살아 있는 조각상 같은 남자가 속을 읽을 수 없는 표정을 한 채 저를 응시하는 따가운 시선 앞에서 말의 수위를 잠시 고민했다.
“그러니까- 저희 사무실에서도 참 여러 방면으로 캐 봤습니다만. 정말이지 검사 측에서 물어뜯기에 완벽한 조건을 갖췄다고밖에 말 못 하겠습니다.”
“……물어뜯기에 완벽하다?”
“제가 검사가 되어 말해 볼까요.”
물론 그 망설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애초에 케빈 헤르난데즈가 캘리포니아 여기저기의 부호들이 못 불러 안달인 변호사가 된 건, 곱고 상냥한 말 때문이 아니었다.
“이선 박, 그는 사회와 철저히 단절된 소시오패스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보통 상상할 수 있는 범주라는 게 있기 마련이다.
작은 것 하나하나 신경 쓰려야 쓸 수 없는 상황인 고용주를 대신해서 누구라도 손꼽는 변호사를 찾아 고용한 가브리엘의 입이 저도 모르게 벌어졌다.
하지만 그런 집사장의 표정도, 션 스펜서의 짙은 눈썹 하나가 희미하게 꿈틀한 순간도 모두 알고 있을 고집 센 변호사의 말은 멈출 줄 몰랐다.
“그는 가난한 이민자 2세로 미국에 정착한 다음, 열일곱에 LA로 혼자 이사 왔습니다. 거주지를 자주 옮겼던 탓에 이웃과 제대로 교류한 적도 없고, 생활이 불규칙적이니 근처 상인과도 가까워질 일이 없었습니다. 그 흔한 고등학교 동창 같은 것도 모두 미시간에 있고요.”
“…….”
“직업 특성상 직장 동료라고 할 것도 없었습니다.”
연인이 이 도시에서 살아온 시간을 알고 싶다고는 생각했었지만 이런 순간에, 이런 방식으로는 아니었다.
“꽤 다양한 작품에 출연하면서 이런저런 사람들과 잘 어울리기는 했었습니다만, 촬영이 끝나고 나면 그것도 끝이었고…. 뭐라더라. ‘지금은 새해 인사조차 어색하게 나누는 사이’라고들 하던데요.”
“…….”
“가장 오래 다녔던 마약 중독 회복 모임은…… 뭐. 설명할 필요도 없겠지요.”
션 스펜서는 그렇지 않아도 뻣뻣하게 앉은 어깨 위로 무거운 추가 몇 개나 올라오는 것 같아 순간 숨을 참았다.
그 어떤 이의제기도 없는 이 자유 발언을 이선이 듣지 못해 다행이라는 생각마저 조금 들었다.
“이선 박, 그 사람의 인간관계는 이 LA에서 딱 다섯으로 좁혀집니다. -우선, 캐서린 에이브리.”
죽었다.
“네스 바라노프.”
마찬가지로, 죽었고.
“헬렌 워커.”
그의 아파트에서 길고 끔찍한 혈흔을 남기고 실종됐다.
“그리고, 바커 아티스트 에이전시의 매니저 브랜든 우드와 그 수장인 다니엘 바커.”
…….
도톰한 은색 테의 안경을 쓴 변호사는 자신의 안경코를 올리면서 “이 험악한 세상에서 다섯 명의 친구면 꽤 나쁘지 않은 성과죠. 저도 제 아파트의 이웃을 모르는데요.”, 하고 위로 같지 않은 문장을 덧붙였다.
내내 침묵하던 션 스펜서의 입이 열렸다.
“-그래서?”
“그래서, 그 다섯 명 중에서 둘은 죽고, 한 명은 실종인데 그 셋의 신변과 모두 관련되어 있다고 하면 꽤 곤란한 일이지요. 심지어 남은 쪽은 에이전시 사람들뿐인데…… 그쪽에서는 이미 본인들이 박 씨의 변호사를 선임했다고 전하며 선을 그었고요.”
“…….”
“스펜서 씨. 정말- 아무도 없습니다.”
내뱉는 걸 잊고 있던 숨이 천천히, 저 심장 바닥 어디에 선가부터 가까스로 긁히고 상처 입은 채로 터져 나온다. 변호사가 나직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간다.
“그 흔한 이웃도, 친구도, 동료도…. 인간관계가 좋다 나쁘다를 꼽기조차 뭐합니다. 그나마 제대로 안정적으로 이어져 온 관계들은- 다 죽거나 실종이라는 건 누가 봐도 정상이 아닙니다.”
“…….”
“이건 재판에서 절대 좋게 사용될 정황이 아닙니다. 애초에 살았던 곳들도 우범지대 천지죠. 저라면 배심원들에게 그 철저히 소외된 우울한 생활 과정에서 불법 무기를 얻고, 끔찍한 살인 방법을 고안하는 데 영향을 받았을 거라 말할 겁니다. 실종된 헬렌 워커가 무기광이라는 소리도 있던데요? 어려울 것 없는 가정이 아닙니까.”
알고 한 말은 아니겠지만, 마지막에 툭 덧붙여진 문장에 집사장 가브리엘은 괜히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션 역시 그 노부인을 제 연인의 아파트에서 만났던 순간을 잘 기억한다. 아파트에 있는 사람들을 모두 나와서 한 마디씩 거들게 한 히스테릭한 목소리는 아직도 귓가를 울리는 것만 같다. 평화로운 카라반 아래의 지하 벙커는 말해 무엇 할까.
“이곳에서 산 게 15년인데 긍정적인 증언을 해 줄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다는 걸 기괴하지 않게 볼 사람은 드물 겁니다.”
“…….”
“그나마 아는 체라도 해 주는 사람들이… 누구더라. 에이전시 근처 무슨 쿠키 가게 주인이랑, 뭐, 왁싱숍 사장? 하하, 그 사람들이 법정에 앉아 ‘쿠키 사러 오고 왁싱 받으러 오던 그 청년이 누굴 총으로 쏘고 칼로 찔러 죽였을 리 없어요’라고 말하게 하느니, 차라리 아무도 없는 외로운 그림을 만드는 게 낫겠습니다.”
션 스펜서는 저를 보며 턱을 긁적이는 변호사의 시선을 처음으로 피해서 아무런 연락 없이 까맣기만 한 제 휴대폰의 액정을 거의 노려보듯 눈에 담았다. 최소한 지금만큼은 당장에라도 제 연인의 연락을 받고 싶은 마음보다, 그걸 아주 잠시나마… 이 순간만큼은 피하고 싶은 마음이 조금 더 컸기 때문이다.
뭐라 어떤 이름을 붙이기 어려운 감정이 휘몰아친다.
션 스펜서에게 이 도시는 터무니없는 행복의 상징이었다.
커다란 여행 가방을 쥔 저를 보고 그 마지막 날까지 코웃음 쳤던 리차드 스펜서와, ‘감독님’에게 잘해야 한다며 누가 들으면 어머니가 할 법한 말을 몇 번이나 반복했던 나탈리 슬로안을 떠나던 날.
션 스펜서는 비행기 안에서 ‘JFK-LAX’가 인쇄된 비행기 티켓 조각을 몇 번이나 다시 봤었다. 별거 아닌 여행에도 전용기를 타고 다니던 부모가 제 아들의 첫 LA행에는 한없이 무심했다지만, 사실 션 그는 스펜서의 전용기가 아닌 민항기를 타고 떠난다는 사실마저 좋았었다.
뻔히 얼굴을 알면서 종이에 제 이름을 큼지막하게 적어서 들고 있던 데이비드 밀러와 눈이 마주치던 순간을 어떻게 잊을까.
하지만. 이 친절하기만 했던 도시는, 이선에게는- 제 연인인 그 남자에게는 어땠을까?
……스물셋의 제가 스크린에 데뷔했던 7년 전은, 스물다섯의 그가 마약을 시작한 해였다.
이 한 문장이 모든 것을 말해 주는 것만 같다.
“후우….”
션 스펜서는 그 꼿꼿했던 자세를 무너트리고는 이마를 짚은 채로 긴 한숨을 흘렸다.
이 와중에 이미 죽은 네스 바라노프에게 조금 원망이 든다면 너무한 일일지도 모른다. 심지어… 상상도 하기 싫은 끔찍한 짓을 저질렀을지 모를 가능성까지 있는 와중이라는 것도 안다.
하지만 스펜서는 이 순간만큼은 왠지 그 사내에게 따지고 싶어졌다.
그렇게나 귀에 못이 박일 지경으로 입에 담을 친구였으면 최소한 곁에는 뒀어야지. 마지막까지 그를 위해 목소리를 높일 거였으면, 이런 처참한 문장 끝에 걸리지 않도록 해 줘도 됐을 텐데.
…대체 왜 이렇게 혼자서 버티도록….
“-그리고, 여기서부터는 비공식적인 의견입니다만. 들어 보시겠습니까?”
쉼 없이 이어 가던 생각이 툭 잘려 나갔다.
션 스펜서는 별일 아니라는 듯 퍽 가볍기까지 한 어조로 덧붙이는 변호사의 말에 대답 대신 고개만 움직였다. 시릴 듯이 파란 눈동자에 뜻 모를 표정으로 턱을 긁적이는 사내가 담겼다. 케빈 헤르난데즈의 ‘비공식적인 의견’이 이어진다.
“느낌이 별로입니다.”
“……어떤 면을 말하는 겁니까?”
“뭐. BAA의 움직임이 이상하다고나 할까요.”
뒷목부터 어깻죽지까지 긴장으로 빳빳하게 당기기 시작한다.
“스펜서 씨 당신과 이선 박, 그리고 BAA의 다니엘 바커의 삼각 스캔들. 꽤 유명했었죠. 심지어… 다니엘 바커, 그가 박을 이미 전부터 몇 년이나 쫓아다녔다는 건 비밀조차 아니던데요. -그, 왜, 매일같이 올리신 SNS를 보아하니 결국 승자는 당신이 된 같지만….”
“그래서?”
“저라면, 아니, 누구라도 정말 제대로 변호할 생각이 있었다면-”
변호사는 최대한 깍듯하게 예의를 지키려고 노력하던 고용인의 태도가 눈에 띄게 초조하고 날카로워진 것을 짚어 냈다.
“그 누구보다 유리한 증언을 쏟아내 줄 최고의 아군인 연인의 연락을 이렇게 매몰차게 차단하지 않을 겁니다. 오히려 가장 먼저 불러서 옆에 앉혀 둘 걸요. 가능하면 화를 감추지 못한 얼굴로 눈에는 눈물을 그렁그렁 매달아 달라고 부탁까지 하면서요.”
“…….”
“미안하지만, 지금 이선 박 그분의 인간관계에서 멀쩡한 건 당신뿐이라서 말입니다. 솔직히 누구보다 써먹기도 좋고….”
케빈 헤르난데즈를 불러 고용한 당사자인 집사장 가브리엘의 얼굴은 이제 더 창백해지려야 창백해질 수 없을 만큼 허옇게 질렸다.
하지만 그건 이른 충격이다. 막히는 일 없이 줄줄 말을 쏟아 내는 변호사의 입은 아직 닫힐 생각이 없었으니.
“아, 물론 박, 그를 바라노프의 살인 용의자로 지목하셨던 건 좀 걸립니다. 증인석에 앉은 당신에게 뒤늦게 범죄자에 매료라도 됐냐고 물어 따질 수도 있고요.”
“-범죄자한테 매료가 돼?”
“어쩌다 생각이 바뀌게 된 건지 배심원과 판사를 설득할 만한 합당한 근거가 있지 않다면, 뭐. 제가 검사라면 그렇게 몰아갈 겁니다. 비뚤어진 소시오패스와 그에게 빠진… 잘생기고 순진한 스타, 같은 구도로요. 스크린에 데뷔하면서 잠시 유흥에 빠졌던 재벌가 과학도 도련님이 멋모르고 한 철 만나는 연인을 잘못 보는 일이야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니.”
“…….”
“여하튼. 지금 BAA는 아무리 봐도 이선 박 그 사람이 아니라 에이전시와 다니엘 바커의 평판을 지키기 위해 움직이는 느낌이라는 겁니다. 물론 다시 말하지만 이건 비공식적인 의견입니다, 스펜서 씨.”
가브리엘은 이 병원 어딘가에 제가 누워 있을 만한 침대가 있으면 싶어졌다.
“이런 상황에서 제가 이선 박, 그 사람을 위해 더 할 일이 있을까요? 이미 박 쪽은 그리 희망적이지 않아요. 잘해 봐야 …한, 40년 정도로 유죄 협상이 들어오려나.”
“-죄가 없잖습니까!”
“가석방 없는 무기 징역보다야 나으니까요. 솔직히 말하면 전 스펜서 씨, 당신 쪽으로 튈 불똥에나 대비하고 싶은 마음이 더 큽니다.”
지금 이 회의실에서 케빈 헤르난데즈가 ‘죄가 없다’는 션 스펜서의 말에는 대답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모르는 이는 아무도 없다.
심지어, 이선을 위해 데리고 온 변호사마저 이 모양이니 BAA 쪽은 어떨지 굳이 상상하고 싶지도 않다. 어차피 길게 가 봤자 질 소송이라고 생각하는 거다. 아니, 어떤 변호사를 데리고 오더라도 유죄 협상에 응하기를 권할 거다.
재판에 지더라도 션 스펜서의 환심을 사고 싶은 쪽이 아니라면 말이다.
물론 저 변호사는 스펜서의 환심을 살 생각은 없어 보인다. 아니, 차라리 척을 지려고 작정한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
저 젊은 스펜서의 침묵은 뭘 뜻할까?
가브리엘은 제가 추천한 변호사의 얼굴을 별안간 뚫어지라 눈에 담기 시작한 션을 보면서 주먹만 세게 쥐었다, 폈다를 반복했다.
차라리 눈에 띄게 불쾌를 감추지 못하거나 뭐라고 더 말을 잇고 화를 내면 마음이 편할 것 같을 지경인데, 저 그린 듯한 남자는 갑자기 생각에 잠긴 채로 입을 다물고만 있다. 그 따가운 시선 앞에서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인 건 변호사, 케빈 헤르난데즈뿐이었다.
그 긴 적막이 얼마나 이어졌을까.
꾹 닫혀 있던 조금 얇은 듯 도톰한 입술이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제 쪽으로 튈 불똥에나 대비하고 싶다고 하셨습니까?”
“예에. 뭐.”
“……역시 바라노프의 말이 맞군요.”
생각지도 못한 말을 하는 건 변호사뿐만이 아니었다.
그의 새로운 의뢰인인 션 스펜서 역시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그건 아무렇지도 않은 목소리로 흘러나오기에는 다소 위험한 이름이기까지 했다. 어쨌거나 그는 지금 살인 용의자의 연인이었고, 연인의 혐의를 적은 종이 위에서 네스 바라노프는 이선 박의 희생자였으니.
“예?”
“그의 말대로, 스펜서는 스펜서인가 봅니다. -어떻게 이 와중에도 그들의 말이 생각나는지.”
이 병원의 병실 한편에 누워 있는 어떤 형사와는 다르게, 션 스펜서의 말은 따라오는 부연 설명 없이는 이해하기 퍽 어려웠다.
웬만한 사람들은 ‘그들’이라는 단어를 이 역사 짧은 나라에서 드물게도 근사한 가치를 부여하는 호칭과 연결해서 생각하지 못한다. 그걸 잘 알고 있던 션 스펜서는 이어지는 말에 아주 드물게도 그가 좋아하지 않는 단어를 또박또박 발음했다.
“꽤 어렸을 때였죠. 제 ‘부모님’이 당신과 같은 변호사들과 하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
“그때는 그게 그저 그들이어서 할 수 있는 이야기라고 생각했는데….”
시종일관 그 근사한 얼굴을 굳히고 있던 남자의 얼굴에 처음으로 어떤 색이 덧칠해지기 시작한다.
“지금 와서 보니 마찬가지군요. 마냥 끔찍하다고 생각했던 걸 이렇게 기꺼운 마음으로 이용할 생각이 드는 걸 보면 말입니다.”
케빈 헤르난데즈, 그가 이 변호사 생활을 하면서- 아니 예일의 로스쿨에서부터 만났던 그 많고 많은 유형의 의뢰인 중 그 누구보다 듣기 좋고 근사한 목소리가 이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고상한 어조와 단어들이 엮어 내는 문장에 이제껏 단 한 번도 혼란이나 놀람을 드러내지 않던 포커페이스의 변호사가 천천히 눈을 크게 떴다.
사실 그 감정의 동요에는 아주 조금쯤은, 말로만 듣던 그 션 스펜서의 달짝지근한 미소가 힘을 보탰을지도 모른다.
이전과는 다른 온도의 침묵이 회의실을 가득 채웠다. 이제껏 이곳에 들어와 앉은 이후로 단 한 번도 말문이 막힌 적 없는 변호사 역시 그 적막의 깊이를 보탰다.
이제 이곳에서 전과 달리 묘하게 여유로워진 사람은 션 스펜서가 됐다.
“-그러니, 앞으로 좀 더 진지하게…… 재판을 준비해야 할 겁니다, 케빈.”
자리에서 일어나며 앞으로 자신과 그 연인을 맡을 변호사를 향해 나직하게 덧붙이는 목소리가 퍽 간지러웠다. 케빈 헤르난데즈의 입에서 그 자신도 자각하지 못하는 작은 헛웃음 같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스펜서는 그것에 더 이상 말을 덧붙이지 않고 곧장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그 뒤를 뒤따르는 구두 굽 소리는 몇 초쯤 늦게 났다.
집사장 가브리엘이었다.
“-스펜서 님!”
“내 생각은 바뀌지 않을 겁니다, 가비.”
“아뇨. 그게 아니고…. 혹시 지금 어디 가시는지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가브리엘 그도 절대 작은 키는 아니건만, 성큼성큼 빠른 걸음으로 발을 내딛는 6.3피트의 남자는 아무래도 쉽게 따라잡기 어렵다. 션 스펜서는 속도를 늦추지 않은 채 그대로 걸으며 슬쩍 휴대폰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연인에게서는 여전히 그 어떤 연락도 없다.
“이선을 찾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야 그렇습니다만. 섣불리 바커 쪽에 접근했다가 무슨 꼬투리라도 잡히면….”
“압니다. 나중에도 좋을 게 하나 없겠지. 아직 그쪽으로는 안 갈 겁니다.”
“……사, 사실!”
평소에는 서재에 앉아 있거나 트레이너와 운동을 하는 정도로 늘 얌전하기 짝이 없던 고용주가 한 번 마음을 먹으면 얼마나 곧장 직진하는지, 가브리엘은 그는 이미 한 번 겪었다.
사실 지금 말하려고 하는 것도 그날의 일이다.
“스펜서 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뭐죠?”
“워커 씨의 카라반에서-”
웬만해서는 쉬이 멈출 것 같지 않던 션 스펜서의 발걸음이 뚝 멈춰선 건 그때였다. 가브리엘은 앞만 보고 복도를 걸어가던 젊은 스펜서의 푸른 시선이 제게 곧장 꽂힌 것을 느끼며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정확히는, 그…… 벙커에서.”
“…….”
“본… 게 있습니다. 아니, 봤다고 해야 할지. 남겨져 있었다고 해야 할지.”
사실, 누구보다도 충성스러운 집사장은 이걸 하필 지금 꺼내도 되는 건지 확신이 잘 안 섰다. 그 자신도 무엇인지 아직 알아내지 못한 것을 입에 담아서 그렇지 않아도 한계까지 혼란스러울 저 남자를 뒤흔드는 게 아닌가 싶은 걱정이 컸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나오는 션 스펜서를 두고 이 이상 고민하고 잴 여유가 없었다. 가브리엘의 손이 자신의 재킷 안주머니로 향했다.
한참을 망설인 끝에 그곳에서 나온 건 명함보다 조금 더 큰 크기의 작은…… 종잇조각이었다. 스펜서는 그걸 곧장 받아 들었다. 그 작은 메모는 남자의 큰 손에서는 제대로 눈에 들어오지도 않고 넘어갈 껌의 은박지보다 작아 보였다.
그 종이 위에 적힌 건 단 한 문장이었다. 하지만 션 스펜서는 그 짤막한 한 줄의 메모를 곧장 이해하지 못한 사람처럼 고운 미간을 좁혔다.
그도 그럴 것이, 자신의 집사장이 건넨 메모는…….
[주인 옆을 잘 지키라고, 가브리엘]
헬렌 워커의 카라반 지하 벙커에 있을 리 없는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고용주보다 앞서 그 혼란을 겪었던 가브리엘의 목소리가 조심스럽게 따라왔다.
“실종된… 워커 씨의 필체였습니다. 그 근처의 다른 메모들을 보면 아마도요.”
“…….”
“하지만 그저 누군가의 장난일 수도 있습니다. -아니, 애초에 대체 이게 뭘 뜻하는지 알 수가 없어서…. 아무런 증거도 없는데 괜히…… 혼란스러워지시기만 할까 봐.”
언제나 누구보다 침착했던 남자의 목소리가 답지 않게 허둥지둥하며 몇 번이고 고쳐 나왔다. 하지만 션 스펜서는 그 횡설수설에 가까운 문장 속에 담긴 뜻을 어렵지 않게 짚어 낼 수 있었다.
솔직히 스펜서 그 역시 이 문장을 보자마자, 순간 마음 한구석이 쿵 내려앉으면서 그 어떤 확신도, 증거도 없는 기묘한 희망 같은 것이 머리를 들었으니까.
헬렌 워커가 무사할 수도…… 있을까?
이선의 손목에 그 무거운 수갑이 채워지게 했던 밤의 진실을 모두 알고 있을 유일한 사람이, 어쩌면?
“가비.”
……하지만 이 메모는 그럼 대체 무슨 뜻으로, 어떻게?
마치…… 그 공간을 누가 발견할지 알고 있었다는 것처럼. 그렇지 않아도 터질 것처럼 온갖 것이 들어찬 머리에 훅 찬물이 끼얹어진다.
“-혹시 어느 쪽이든 연락이 올 수도 있으니 저택에서 기다려 주겠어.”
“……알겠습니다. 저, 스펜서 님. 하지만.”
“위험한 일은 하지 않을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션 스펜서는 저를 따라오는 그림자에서 도망치려는 듯 빠르게 발을 옮겼다.
* * *
#. D-2
나의 보석 석방에는 두 가지 조건이 붙었다.
첫 번째, LA 카운티 밖으로 나가지 말 것.
이것에는 별 이의가 없다. 가택 연금이 아니라 LA 카운티 정도면 너그럽기까지 한 조처가 아닌가. 사실 가택 연금이 걸렸으면 헬렌의…… 흔적이 있는 아파트로 돌아갔어야 했을 텐데, 그랬다면 정말 미쳐 버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게 만족스러운 건 아니다.
나는 소파에 길게 누운 채로 왼쪽 다리를 들었다.
“…….”
이게 바로 두 번째다.
발목에 달린 GPS 장치를 보고 있자니, 와!
아무리 대형 마트만 가도 이걸 차고 다니는 사람을 대여섯 명은 본다지만, 이게 나한테 달린 건 또 다른 문제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음주운전으로 보일까, 아니면 불법 체류로 보일까?
웬만해선 살인 혐의로는 상상하지 못하겠지.
나도 재벌 누구처럼 여기에 그림이라도 그려 꾸미면 기분이 나아질까.
글쎄. 단순히 술독에 빠진 알코올 중독자들과는 다르게, 내 경우는 이 LA 카운티를 빠져나가려는 듯 굴거나, 이걸 빼내려고 시도하면 순식간에 총알을 한가득 장전한 경찰들이 몰려올 것이 확실하다는 걸 생각하면 뭘 해도 즐겁기는 힘들 것 같다.
여권도 빼앗겼고, 공항 근처 100야드(*약 90m)는 접근조차 하지 못한다.
구치소 독방에 누워서도 와 닿지 않던 현실이 말리부 해변가의 아담한 집에서야 체감된다는 게 좀 웃길 수도 있다.
하지만 꼭 발목의 이 거추장스러운 것이 말해 주는 것 같지 않나.
지금의 이 평화는 끝이니, 마지막 행복을 잘 누리라고 말이다. 나는 소파 옆에 있는 쿠션 하나를 집어다가 끌어안은 채로 몸을 웅크렸다.
요 몇 해 중에서 가장 따뜻한 3월 말이라는데, 왠지 으슬으슬하니 한기가 돌았다.
아. 그러고 보니 당신에게 말하지 않은 것이 있다. 난 지금 ‘보석 석방’ 상태다. 그렇다면, 궁금하지 않나?
친구 둘을 처참하게 죽이고 남은 하나를 피습한 혐의를 뒤집어쓴 한국계 이민자 2세 배우의 보석금이 얼마일지 말이다.
기억을 되짚어 보기를 바란다. 언제였던가, 션 스펜서가 뻔하디뻔한 신년 기부행사에서 별거 아닌 내 대답을 들으려고 목표 금액에서 남은 것을 한 번에 적어 냈던 날을 기억하는가?
그렇다.
대체 아깝게 그 돈을 다 적어 내냐고 발을 굴렀던 게 어제 같은데, 이제 와 돌이켜 보니 그 기부가 백배 천배는 나았다. 맙소사. 최소한 그건 곤란한 상황에 있는 특정한 사람들을 돕는 데 쓰이기라도 할 것 아닌가. 그런데 대체 난 뭐람?
아무리 보석금이라고는 하지만 날 감옥에 처넣지 못해 안달이 난 나라에-
“……40만 달러가 말이 되냐?”
아주 앉아서 돈 먹기다. 이자가 얼마야?
당장 어떻게 손댈 수 없는 끔찍한 혐의를 지고 감옥에서 45년을, 운 좋게 가석방을 받아도 최소한 30년은 썩어야 할지도 모를 상황에 지금 무슨 한가한 생각이냐고 화내고 싶을 거다.
하지만 45년이니 뭐니 하는 비현실적인 숫자보다 고작 나를 재판 동안 구치소에서 빼내기 위해 보증금으로 내건 40만 달러가 더 실감 나는 걸 어떡하냔 말인가.
40만 달러가 대체 어디서 났냐고?
내 보석을 대신 내준 건 다니엘 바커다.
사실 난 보석보증회사의 도움을 받아(*보석금을 다 낼 수 없는 경우 보석보증회사에 전체 보석금 중 10퍼센트 정도의 수수료를 내고 보석금 대납을 의뢰할 수 있음) 동면을 앞두고 열매를 모으는 다람쥐처럼 아기자기하게 모은 내 통장 잔고를 털어 내는 쪽을 선택하려고 했었다.
-그런데, 다니엘 바커가 웃더라. ‘굳이 돈 낭비해야 할 필요 있어?’ 하고 말이다.
하하. 40만 달러를 눈 하나 깜박하지 않고 현금으로 한 번에 예치한 남자가 돈 낭비를 논하니 좀 새삼스럽기는 하더라.
“잠은 좀 잤어?”
나 참. 이렇게 말하기가 무섭게 올 일인가.
소파에 늘어져 있던 나는 저도 모르게 거의 튀어 오르듯 몸을 일으켰다. 다니엘 바커는 커다란 종이봉투에 이런저런 것들을 가득 담아 온 차다. 슬쩍 위로 삐져나온 봉투를 보니 내가 좋아하는 군것질거리가 대부분인 것 같다. 다른 한 손도 작은 종이 가방이 들려 있다.
그러고 보니 저 남자가 저렇게 양손에 뭔가를 가득 들고 있는 건 5년 만에 처음인 것 같지.
그래. 짐작했다시피 나는 지금 이전에 그와 함께 한밤중에 파스타를 먹으면서 노닥거렸던 그곳에 와 있다.
…다시는 간 크게 안 따라오겠다고 몇 번이나 정신없이 약속했던 것 같은데, 션도 지금 같은 상황은 좀 봐주지 않을까.
“냉장고에 대충 먹을 걸 두고 갔는데. 아침은?”
“아, 아직요….”
“그래. 그럴 것 같아서 대충 사 왔어.”
다니엘 바커가 다른 손에 들고 온 작은 종이 가방에서 기다렸다는 듯 커피 두 개와 예쁘게 포장된 음식 상자가 술술 나오기 시작한다. 나는 뒤늦게 코에 걸리는 은은한 커피 냄새를 맡으며 뻣뻣하게 힘이 들어갔던 어깨에서 긴장을 풀려고 노력했다.
괜히 긴장하거나 의식하는 티를 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니엘. 혹시, 크흠, 흠, 혹시, 휴대폰을 좀 쓸 수 있을까요?”
하지만, 그런 노력과는 달리 내 목소리는 좀 멍청할 정도로 살짝 삐끗한 채로 흘러나왔다. 그나마 다행인 건 바커가 그런 내 한심한 꼴 따위는 신경 쓰이지도 않는다는 듯, 테이블 위로 그가 사 온 아침 식사를 세팅하는 손을 멈추지도 않고 담담하게 되물었다는 거다.
“왜?”
“-그으게. 어……. 아무래도, 션…, 그러니까, 스펜서한테… 연락할까 하고요.”
어제는 이 아담한 집 안 어딘가에 어련히 전화기 하나라도 있겠거니 싶어서 별말 안 했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다니엘 바커 저 사람에게 나오자마자 곧장 션 이름을 읊어 대는 것도 좀 예의가 아닌 것 같았다.
또, 보석금 40만 달러까지 대신 내주고 나서 곧장 듣는 말로 그보다 별로인 게 없는 것 같기도 했고 말이다.
하지만 다니엘 바커와 변호사들이 날 이곳에 혼자 남겨 두고 간 뒤 이 아담하고 귀여운 집을 샅샅이 살피고 나자…… 그 냉랭한 얼굴을 한 변호사한테라도 휴대폰을 빌릴 걸 싶어지더라.
여긴 전화기가 없다.
전화기만 없나? 컴퓨터도 없고, 노트북도 없고, 그 흔한 태블릿 PC 하나도 없다.
아, TV도 없다. 한가하게 앉아서 TV를 볼 생각이었다는 건 아니지만, 여하튼- 무언가 연락을 주고받으며 세상이 돌아가는 소식을 들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다.
난 이제껏 내심 스스로가 휴대폰 같은 작은 기계에 그리 연연하지 않는 인간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더라. 휴대폰도, 지갑도 없이 이 안락한 공간에 떨어지자 마음 편해지기는커녕 간밤에 초조함만 가득 커졌다.
그렇다고 나갈 수도 없었다.
-솔직히, 체포 기사가 났을지도 모르는데 마음대로 돌아다닐 깡이 없었다는 쪽이 좀 더 정확하겠다.
다니엘 바커는 내가 끙끙대고 고민했던 것과는 달리 퍽 순순히 제 슈트 재킷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줬다. “가, 감사합니다.” 하고 허둥지둥 그걸 받아 드는 모습이 퍽 별로였으리라는 자각은 있지만, 뭐 어떡하겠나.
솔직히 그 순간에는 다른 생각도 못 했다.
고작 며칠, 목소리를 못 듣고 못 본 게 전부면서 꼭 몇 년을 떨어져 있었던 것처럼 그와 얘기할 생각만으로 심장이 달음박질쳐 터질 것만 같았거든.
“…….”
“…….”
하지만 그 가슴 벅찬 순간은 잠시다.
이제껏 내 인생이 그리 쉽고 만만하게 풀리기만 했다면, 지금 내가 여기서 이러고 있겠어. 나는 바커의 휴대폰을 손에 쥔 채로 잠시 그걸 잠시 멀뚱멀뚱 들여다보았다. 날 잠시 조용히 눈에 담던 다니엘 바커의 입이 열린 건 그때였다.
“…번호를 모르나 봐?”
……젠장.
아, 정말, 씨발, 씨발, 씨발이다.
나는 혹시 하는 마음에 휴대폰 주인의 허락도 없이 연락처로 들어가 스펜서를 쳐 보기까지 했지만, 이 많고 많은 사람 중 션 스펜서는 없었다. 나는 입 밖으로 쏟아질 것 같은 욕을 간신히 삼키며 다니엘 바커에게 휴대폰을 반납했다.
“외, 외울 생각을… 못 했었네요.”
“어차피 연락하는 것도 그리 추천해 주고 싶지 않았어.”
어떻게 속을 들여다보기라도 한 걸까. 다니엘은 ‘죄송한데 혹시 션 연락처 좀 알아다 주실 수 있으세요? 스펜서 저택이라도.’ 같은 뻔뻔한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던 내 말을 이어지는 문장으로 자연스럽게 음소거 시켰다.
“이미 스펜서는 닉 코빗의 일로 경찰 조사를 받기 시작했다더군.”
“코빗이요?!”
“뭐. 예상 가능한 범주잖나. 왜 형사가 칼에 찔린 채로 저택을 찾아왔느냐느니, 또 그 형사가-”
다니엘 바커가 살짝 말을 멈췄다가, 멍하게 입마저 벌린 내 얼굴을 몇 초 정도 뜯어보았다.
“……‘애인’이 가장 유력한 용의자인 캐서린 에이브리와 네스 바라노프 사건의 담당 형사라는 걸 알고 있었느냐느니 하는 이유라던데.”
“…아….”
“뭐. 정확히는 스펜서 그를 압박하려는 게 아니라 이선, 당신 쪽에 대한 정보를 얻으려고 하는 게 목표 같지만. 우선 그 형사는 수술이 잘 끝나기는 했다니까….”
“…….”
“선불 휴대폰이라도 사서 주고 싶기는 한데, 그러면 스펜서 쪽에 수상한 통화 기록이 남게 되는 거라, 그쪽도 별로 같고.”
“그, 그럼 됐어요!”
너무 날카로운 목소리가 흘러나온 게 아닌가 싶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의 난 그걸 하나하나 신경 쓸 마음의 여유가 단 한 뼘도 없었다.
정말이지 난 션 스펜서, 그의 인생에 끼어서는 안 될 이름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누군가는 이제야 그걸 깨달았냐고 혀를 찰 수도 있다. 그래, 내가 생각해도 참 끔찍해.
그 근사한 남자가 기껏 처음으로 사귄 애인이라는 인간이 사람 둘을 죽인 살인 용의자라니! 사실 여부는 상관없다. 가끔은 그저, 그 이름을…… 함께 엮게 하는 것만으로도 몸서리쳐지는 미안함이라는 게 있다.
난 왜 이렇게 형편없는 인간일까.
잠시 잊고 있었던 현실의 모든 것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적시는 얼음물처럼 쏟아진다.
설마하니 형사들이 션을 오해하면 어떡하지? 그렇지 않아도 그가 네스 바라노프의 마지막 목격자라며 조사도 몇 번이나 했었다며.
혹시 내가 그에게 치명적인 문제가 되면? 아니, 이미 난 그 멋진 사람에게 터무니없는 독이다. 잘 알면서 아직도 아니기를 바라는 건가.
LA 촬영은 이제 끝물이었는데, 다 멈춰 있겠지?
영화는 어떻게 되는 걸까?
-그렇게나 오랫동안 준비하면서, 몇 번이고 마음을 다져야 했을 텐데. 고작 내 한심한 선택 때문에…….
나는 한 손으로 눈가를 가린 채로 저도 모르게 거칠어지려는 숨을 간신히 잡아 눌렀다.
“션 쪽에서는, 아직… 별다른 연락이 없나요?”
“……아마 정신없을 테니까. 기다리면 곧 올 거야.”
“그-, 그렇겠네요. 저, 그럼 가족들한테는.”
“놀라지 않으시도록 미리 연락해 뒀어. 작은 오해 때문에 경찰에서 연락이 갈 수도 있다고. …걱정하지 마. 기사는 아직 안 났으니까.”
날 위로하는 듯한 목소리 끝에는 “아마 오래 막기는 힘들겠지만.” 하는 중얼거림이 덧붙었다. 심장이 귀에 가서 붙은 것처럼 시끄럽게 쿵쾅거린다.
“이선. 이제는 말해 줄 수 있겠어?”
다니엘 바커의 나직한 목소리가 이어진다. 하지만 나는 그를 마주 볼 용기가 나지 않아 얼굴을 가린 손을 내리지 못했다.
“당장은 털어놓을 준비가 되지 않은 것 같아서… 가만히 있기는 했지만. 지금은 변호사들도 없고, 이제 둘뿐이잖나?”
“…….”
“네스 바라노프와 3년 전부터 연을 끊었던 이유.”
어차피 언젠가는 무너질 걸 알면서 잔뜩 애정을 쏟으며 만들어 왔던 모래성의 저 밑바닥부터 시릴 듯이 차가운 물이 차오르기 시작한다. 안에서부터 곪기 시작한 그것은, 멀쩡한 내 겉가죽이 아닌 그 안의 깊은 어딘가를 매일 할퀴어 댔다.
“그게 캐서린 에이브리 때문이라는 건 이미 짐작하고 있었어. 하지만…… 에이브리를 찌른 나이프가 이선 당신의 것이라는 게 확실해진 이상, 이제는 그 짐작을 좀 더 명확하게 해 줘야 할 것 같은데.”
이 질문을 션이 똑같이 한다면, 나는 대답할 준비가 됐을까?
“……이선?”
“-저는 말씀하신 대로, 잠깐… 잠깐만, 좀 잘게요. -어제 한숨도 못 잤어요.”
간신히 내뱉은 말에 다니엘 바커가 꽉 억눌린 한숨을 내쉬는 게 들렸다. 나는 머잖아 “그래.” 하고 짤막하게 들린 대답에 끝까지 나를 따라오는 듯한 그의 시선을 피해 곧장 뛰듯이 침실로 도망쳤다.
* * *
#.??? 3년 전, 끝
적잖은 사람들은 고향이 아닌 ‘타지’에서 죽는 것을 비극으로 여긴다지만, 캐서린 에이브리에게는 아이오와에서 1800마일은 더 떨어진 캘리포니아에서의 죽음이 그녀에게 일어난 모든 참상 중 유일하게 다행인 것이 되었다.
「…….」
캐서린의 부모는 둘 중 누구도 그녀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한 사람은 술에, 다른 한 사람은 마약에 너무 취한 채라 비행기를 탈 수 없었다는 게 그 이유였다. 분명 그들의 애도보다야 지금 이 로즈힐의 장례식장에 있는 이들의 슬픔이 더 진정성 있을 거다.
이곳에 그 어떤 연고도 없는 겨우 스물두 살 여자의 죽음에는 그리 많은 사람이 오지는 않았다. 그녀가 잠시 일했던 곳의 동료 몇과 마약 중독 회복 모임의 사람들이 대부분으로, 솔직히 비슷한 나잇대의 사람은 거의 없다시피 했다.
하지만 여기, 너무 울어서 얼얼해지다 못해 따갑기까지 시작해진 눈가를 다시 한번 손으로 훔치며 코를 훌쩍이는 스물아홉 살의 이선은 이들 중 몇 안 되는 동년배였다. 옷장에서 간신히 긁어모아 조합한 듯한 어설픈 검은 정장은 위아래가 따로 놀고 소맷단이 조금 쭈글쭈글하기까지 했지만, 그게 그의 눈물을 빛바래게 하지는 않았다.
「…헬렌.」
어찌나 어린애처럼 울었는지 평소의 나직한 목소리는 어디 가고 걸걸하게 쉰 물음이 간신히 흘러나왔다.
「나 잠깐… 네스랑 따로 이야기 좀 해도 될까요?」
발목까지 내려오는 검은 코트를 입은 헬렌 워커는 대답 대신 이 장례식장의 유령처럼 발소리조차 내지 않고 조용히 그들의 곁을 떠났다.
반면에 꼼짝도 하지 않던 네스 바라노프가 움직이기 시작한 건, 「네스. 잠깐만 우리 저쪽 좀 가자.」 하고 속삭이는 제 친구의 귀엣말이 닿았을 때였다. 장례식 내내 넋이 나간 사람처럼 앉아 있던 그는, 이선이 제 팔을 잡아 이끄는 대로 터덜터덜 움직였다.
하나같이 죽은 이들이 모여 있기에 평화로울 수 있다는 모순이 동시에 존재하는 곳에서, 이선은 퍽 능숙할 만큼 인적 없는 장소를 찾아냈다.
이선, 그의 얼굴이 여러 슬픔 사이에 서 있었을 때와는 묘하게 달라진 건 그 순간이었다. 자신의 친구와 단둘이 남은 남자는, 벌겋게 눈이 익은 채로 초조한 한숨을 토해 냈다. 네스 바라노프는 그런 자신의 친구를 무뚝뚝한 얼굴로 들여다보았다.
「후우……, 있잖아, 네스.」
「…….」
「이게 조금… 이상하게 들릴 수 있다는 걸 알아. 그런데.」
이선은 그 시선에 칼날이라도 박힌 것처럼 창백해진 얼굴로 바짝 마른 입술로 말을 이어 갔다. 사실, 이선 그는 굳이 따지자면 중독 회복 모임의 ‘네 사람’ 중 가장 침착하고 발열점이 높은 쪽에 속했다.
「…나, 캐서린의 사진을 봤어. 겨- 경찰이 보여 주더라고. 뭐라더라. 현장 사진이라면서….」
「…….」
「드라마 촬영할 때나 봤지, 진짜 그걸 다 보여 줄지는 몰랐어. 그냥 막, 보여 주더라고…. 지- 진짜 사진을 말이야, 네스.」
다시 말해, 웬만한 일에 눈에 띄게 허둥지둥하는 쪽은 아니라는 뜻이다.
물론 지금의 이 모든 상황이 보통의 ‘웬만한’ 상황을 아득히 넘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지금 이선은 눈에 띄게 불안해하고 있었다. 헐떡이는 듯한 큰 한숨 뒤에 터지는 문장의 떨림이 그걸 증명해 줬다.
「그러니까, -캐서린의…… 사진을.」
내내 초점이 제대로 맞지 않던 네스 바라노프의 눈에, 그나마 살아 있는 것 비슷한 무언가가 깃들기 시작한 건 그 순간이었다. 이선은 그걸 깨닫지 못하고 무릎에 쭉 힘이 풀리는 대로 주저앉고 말았다.
하지만 그렇게 쪼그려 앉고도 곧장 말을 이은 건 아니었다. 몇 번이나 큰 심호흡이 있었을까. 이선은 한참 뒤에야 꽉 억눌린 한숨에 섞어 토막 난 단어를 입에 담았다.
「너도…… 봤지?」
「그래.」
담담하게 흘러나온 대답은 조금쯤 위로 그 비슷한 것이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럼 캐서린 몸에 나 있던…… 칼, 자국도, 봤어?」
바라노프는 이번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물음을 던진 쪽은 그 침묵을 깨닫지 못한 듯했다. 얼굴 여기저기가 벌겋게 익고 부은 이선은, 신경질적으로 제 머리를 쓸어 올리고는 다시 한번 크게 심호흡했다.
하지만 그 침착하려는 발버둥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그건- 아마도 내 나이프 자국이야.」
「…….」
「아니, 아니다. -분명해. 그건…… 내 거야, 네스. 빌어먹을. 그걸 고등학교 1학년 땐가 선물로 받았다고. 그때부터 지금까지 들고 다녔는데, 그게 내는 자국도 못 알아보겠어.」
갈수록 속도가 붙던 쉰 목소리는, 이윽고 바짝 날카로워진 채로 사납게 터져 나왔다. 한편, 네스 바라노프는 그런 자신의 친구를 기묘하게 빛나는 눈으로 말없이 지켜볼 뿐이었다.
「그런데 제일 좆같은 게 뭐냐면, 지금- 그 나이프가 나한테 없다는 거야. 젠장! 아무리 찾아봐도 없어.」
「…….」
「아무리 생각해도…… 그 나이프를 술집 테이블, 아니면 의자, 여하튼- 씨발. 그 어딘가에 올려 두고 왔던 것 같거든.」
이제는 손까지 덜덜 떨리기 시작하는 걸 감추지도 못하는 이선을 한동안 내려다보던 네스의 입이 열린 건 그때였다.
「이선. 경찰에 무슨 소리 했어?」
「-어? 아, 아니. 아직….」
그 힘없는 목소리를 기다렸다는 듯, 이선의 대답은 재깍 나왔다.
차가운 바닥에 주저앉아 있던 그는 크게 휘청이면서도 기어코 자리에서 일어났다. 요 며칠, 머릿속으로 몇 번을 그리고 생각했던 것을 내뱉어야 할 순간임을 본능적으로 아는 탓이었다.
이선을 내려다보던 네스의 시선이 이윽고 엇비슷하게 맞춰졌다.
「너, 너한테 먼저 물어보려고.」
「……뭘?」
꿀꺽.
저도 모르게 긴장한 탓일까, 마른침을 삼키는 소리가 유독 크게 났다. 이선은 저를 바라보는 친구의 시선이 묘하게 서늘한 느낌이 든다는 생각을 떨쳐 내려 애쓰면서 말을 이었다.
「‘캐서린을 집에 올려다 준 다음 주유소 편의점 다녀오는 사이에 강도가 들었다’.」
「…….」
「…이거… 정말이야, 네스?」
「뭐가?」
「-미, 미안해. 그렇지 않아도 힘들 텐데, 이런 질문 해서 정말 미안해, 너를 의심한다는 뜻이 아니고. 이건 그냥-…. 후우, 네스. 그러니까….」
촬영장에서도 잘 말을 더듬지 않던 남자의 입에서 자꾸 두서없이 떨리는 목소리만이 흘러나온다.
「강도는…… 아니잖아.」
애써 입꼬리를 올리고 웃어 봤자 이미 한껏 울어서 엉망이 된 얼굴로는 별 효과가 없다.
하지만 이선은 그렇게 실없이 웃는 것만이 꼭 제게 닥친 상황에서 도망칠 수 있는 무언가라도 된다는 양, 덜덜 떨리는 목소리에 안쓰러울 정도의 웃음을 섞었다.
「-강도가 그 나이프를…, 가지고 있을 리가 없잖아. 말도 안 되잖아.」
「…….」
「솔직히 말해 줘.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제발. 네스. 응? 나한테는 말해도 돼. 네스, 응?」
이어지는 말은 끝내 옅은 울먹임이 섞였다.
가까스로 멈췄던 눈물을 이렇게 다시 터트리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건만, 이선은 크게 헐떡이는 숨을 쉬이 달래지 못한 채로 꼭…… 무심하게마저 보이는 표정을 한 자신의 친구에게 애원했다.
「제발, 네스!」
죽은 이들만 모여 있는 이곳은, 평화롭기는 하지만 때로는 너무 고요해서 그 무엇도 지나가는 소음에 숨길 수 없다는 게 문제다. 이선은 턱 끝까지 밀려든 숨 때문에 속이 땅겨서, 저도 모르게 콱 무언가에 물어뜯긴 것 같은 자신의 가슴께를 붙잡았다.
거친 숨소리뿐이던 묘지의 구석에서 침묵하던 사내의 입이 열린 건 그때였다.
「-모르는 척해.」
그건, 잔뜩 쉬고 쥐어짜 내어지는 듯한 이선의 것과는 달리, 묘하게 차분하고 또 담담했다. 이선은 그걸 곧장 이해하지 못하고 저도 모르게 미간을 좁힌 채 얼떨떨하게 되물었다.
「……뭐?」
「모르는 척하라고.」
「너 지금 네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어?」
「알고 있어.」
아닐 거다.
네스가 그럴 리 없다. 뭔가, 곧바로 말할 수 없는 그런 곤란한 일이 있었던 게 분명하다.
이선은 한참이나 조사를 이어 가는 경찰들 사이에 몇 번이나 끌려다니면서도, 그렇게 저 자신을 몇 번이고 다독이고 또 세뇌했었다. 어차피 곧바로 네스 바라노프를 찾아갈 수도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그…… 끔찍한 혐의의 가장 끝에 서 있는 제 친구의 근처에 자신이 얼쩡거렸다가 무슨 관심을 끌지 몰라서였다.
그래서 오늘만을 기다렸다. 캐서린의 검시가 끝나고 드디어 그녀를 편안하게 해 줄 수 있는 이날을, 단 하루도 제대로 잠들지 못한 채로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그게 문제였을까?
이선은 제 친구, 네스 바라노프의 저 무표정한 얼굴이 무엇을 뜻하는지 조금쯤 깨닫고 말았다.
저도 모르게 다시 무릎에서 힘이 풀리려는 걸 간신히 버티고 선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저를 바라보는 바라노프의 눈이 이제껏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가 알던 네스 바라노프는 저렇지 않았다.
이선, 그가 알던 네스 바라노프는 입이 거칠기는 하지만 늘 잔정이 많던 남자였다.
중독 회복 모임에 얼른 적응하지 못하고 늘 구석 자리에 처박힌 채던 저에게, 처음으로 커피를 사 줬던 남자이기도 했다.
또, ‘부끄럽지만… 배우 일을 하고 있어요. 별건 아니고. 조연이나 단역.’ 하고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던 자기소개에 ‘뭐? 뭐가 부끄럽다는 건데. 그렇게 치면 난 씨발, 존나 안 팔리는 작간데.’하고 퉁명스럽게 받아 주던- 이 끔찍한 도시에서 만난 첫 친구이기도 했다.
다니엘 바커나 브랜든 우드는 좋은 사람들이었고, 그들 역시 친구였지만, 그 둘은 친구와 동료 사이에 있었다고 보는 게 좀 더 정확할 거다.
하지만 네스 바라노프는…….
「…겨, 경찰에… 갈래. 역시, 경찰에….」
정말로, 이 도시에서 만난 첫 친구였다.
가족과 친구 사이에 있는, 그런 친구 말이다.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닐 거야. 누굴 위한 것인지 모를 속삭임이 머릿속에서 쭉 이어졌다.
하지만 그 희미한 속삭임은 무뚝뚝하게 이어진 목소리에 머지않아 짓이겨졌다.
「경찰에 가 봤자 잡혀 들어가는 건 너니까, 모르는 척하라고.」
뭐, 하고 되물을 여력조차 없었다.
「말하는 순간, 네 지문과 캐서린 피가 묻은 그 나이프가 어디서 나올지 나도 모르니까.」
감히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문장이 매일같이 들어 왔던 날 선 목소리에 담겨 나왔으니.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그 나이프가 권총과 같이 발견되면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건 아니겠지. 그런데도 경찰에 갈 수 있겠어? 갈 수 있으면 어디 가 봐.」
시종일관 침묵하던 남자가 기다렸다는 듯 말을 쏟아 내기 시작한다.
이선은 제게 꽂히는 그 단어의 조합들이 지닌 뜻을 곧장 이해하지 못하고 우두커니 서서, 그 악의 가득한 문장 앞에 고스란히 베여 나가기 시작했다.
「캐서린 에이브리의 배에 깊게 꽂힌 그 칼이, 내 나이프가 분명한 거 같다고. 그런데 내가 그 빌어먹을 밤에 술에 취해 그걸 잃어버렸었다고. 어디 가서 말해 보시지, 이선.」
「…뭐….」
「경찰들이 뭐라고 할까. 매번 열쇠를 두고 나와서요, 늘 집주인한테 연락을 했더니 한 번만 더 전화하면 그땐 집을 빼라고 욕을 퍼붓길래, 고등학생 때 받았던 나이프를 들고 다니기 시작했어요…. -어디 해 보라고!」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무슨 미친 소리를 하는 거냐고!」
「그 새끼들이 믿어 줄 거 같아? 아니지, 그럴 리가 없지. 잘 알잖아!」
기묘할 정도로 침착하던 목소리는 이내 악에 받친 채 터져 나왔다.
「가난한 미시간 디트로이트 출신, 심지어 이민자 2세인 무명 배우의 말을? 아, 마약 전과를 잊었네!」
「네스 바라노프!」
「아직도 모르겠어?!」
더 이상 질릴 수도 없게 창백해진 이선의 입이 저도 모르게 꽉 다물어졌다.
단언컨대 이 LA에서 가장 매서운 문장을 만들 수 있는 남자가 혀끝으로 지닌 무형의 나이프가 이선을 난도질하기 시작한다.
「네가 경찰서로 향하는 순간, 당장 다음 주의 영화 오디션은 날아간다는 거지.」
「너-!」
「나는 어떨 것 같아?! 응? 나는, 나는, 나는- 어떻고? …아니지, 솔직히 난 걱정할 필요가 없네. 거기에 있는 지문은 네 거뿐일걸. 난, 빠져나갈 수 있다고 했어. 오히려 곤란한 건 캐시 쪽이 됐지!」
「…너…, 너 지금, 미쳤어. 알아?!」
「그래, 맞아. 미쳤어, 그래! 왜 미치지 않을까! 하지만 이선, 그건 너도 마찬가지여야 할걸!」
성큼성큼 코앞까지 걸어온 기세에 눌린 남자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치는 것을, 바라노프는 멱살을 잡아 끌어당겨 낮게 속삭였다.
「난, 빠져나갈 수, 있다고.」
「…….」
「그런데 넌?」
캐서린 에이브리가 묻힌 오늘은 유독 해가 뜨거운 날이었다.
셔츠에 넥타이, 거기에 검은 재킷까지 챙겨 입은 채로 곧장 떨어지는 해를 한참이나 맞고 있던 탓일까. 이선의 갸름한 뺨을 타고 땀인지, 눈물인지 모를 것이 흘러내린다.
「이게 알려지면 모든 게 다 끝이야. 정확히는 네가 끝장나겠지. …알아들어, 이선?」
네스 바라노프는 그것을 오늘의 이 태양보다 더 이글거리는 눈으로 새겨 담으며 마지막 칼날을 푹, 내찔렀다.
「그 나이프가 영영 세상에 안 나오길 원한다면 조용히 있어. 넌 아무것도 모르는 거야. 보지도 말고, 듣지도 말고, 입에 담지도 말고!」
축복보다 저주가 더 흔해진 세상이다.
그걸 모를 만큼 순진하지도 않았고, 그것에 상처받지 않을 만큼 세상의 때도 충분히 묻었다. 하지만.
이선은 이 세상에서 몇 없는 제가 사랑하는 사람의 목소리라고 생각했던 남자의 속삭임에 몇 번이고 끊어진 숨을 간신히 토해 냈다. 이제껏 마음대로 되는 것 하나 없는 세상이었다고 하더라도, 이제는 정말 가까스로 행복 비슷한 것에 가까워졌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비슷한 건 비슷한 것일 뿐이었다.
「……네스.」
진짜를 가진 이들과는 절대 비슷해질 수 없었다.
그걸 욕심낸 대가만 혹독하게 치를 뿐이다. 이선은 아주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고 생각했던 사실을 새삼스럽게 곱씹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네가, 캐시를…… 죽인, 거야?」
「…….」
「정말 그래?」
끊임없이 부정하고 부인했던 최악의 생각이 혀끝에 담기기 시작하는 순간의 절망을 누구에게 토로할 수 있을까.
네스 바라노프는 그 물음에는 답하지 않았다.
그가 한 것은, 다시 한번 제 친구에게 다정한 칼날을 들이미는 것뿐이었다.
아니 어쩌면 그건 저주에 가까웠다.
「조용히… 숨죽이고 살아, 이선.」
* * *
이선이 몇 번이나 장난치듯 놀렸던 것이기는 하지만- LA가 만들어 낸 허상 속 카사노바 션 스펜서는 저녁에 쏘다니는 걸 그리 좋아하지 않는 남자다.
아니 조금 더 정확히는, 그는 해 질 녘에는 집에서 편안하게 보내야 한다는 고루한 쪽에 가깝다. 그건 다시 말해 저 자신이 사적인 시간을 방해받는 것을 싫어하는 것처럼, 그 역시 다른 누군가의 저녁에 침입하고 싶지 않아 한다는 거다.
하지만 세상은 예외투성이다.
보통의 삶에서 한참이나 멀어진 시간으로 유년기를 가득 채우고 나니 어느 순간부터인가 언제나 정돈되고 계산 가능한 범주의 삶만을 원하게 됐던 션 스펜서가 예상 못 할 남자에게 반하게 되고 만 것처럼, 오늘 저녁도 그렇다.
이른 오전부터 조금 전까지 몇 시간이나 경찰 조사에 시달린 스펜서는 낯선 집의 문 앞에 서서 조금은 흐트러진 제 머리를 쓸어 올렸다.
그는 이 집의 주소를 고작 한 시간 전에야 제 고용인들을 통해 간신히 얻었다.
사실, 이 LA에서 누군가의 집 주소를 찾는 건 그리 어렵지 않다.
하지만 얼굴도, 성도 모르고 오로지 이름 하나만 안다면 얘기가 조금 달라진다. 전국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카운티에서 흔한 이름 하나로 특정인을 빠르게 찾는 건 생각보다 까다로운 일이다.
심지어 그게 ‘이선 박’ 같은 특이한 이름도 아닌-
“누구세……, 어머, 어머, 어머!”
“당신이 크리스티나군요. 이선에게 이야길 들었습니다.”
“이, 이선요? 어머, 세상에. -브랜든! 얼른 나와 봐, 빨리!”
‘크리스티나’ 같은 많고 많은 이름이라면, 그 난도가 훅 올라가기 마련이다.
그랬다.
지금, 션 스펜서가 긴 경찰 조사가 끝나자마자 곧장 차를 몰고 달려온 곳은 다름 아닌 브랜든 우드의 약혼녀, 크리스티나 미첼의 집 앞이다. 스펜서는 저 안에서 급히 나오는 발소리를 들으며 최대한 느긋한 표정을 걸기 위해 노력했다.
“…자주 보는군요. 브랜든.”
비록 이곳에 찾아온 목적이 그리 가벼운 이유가 아니기는 했지만 말이다.
브랜든 우드는 제 약혼녀의 집까지 찾아온 장신의 톱스타 앞에서 저도 모르게 입을 딱 벌렸다. 아무리 이 할리우드에서 산전수전 다 겪은 우드, 그라고 할지언정 그 유명한 톱스타가 제 연인의 집 앞으로 찾아오는 건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대체 여긴 어떻게 찾아온 겁니까?!”
“에이전시에서는 진작 퇴근했다는 당신의 집을 찾아갔는데 텅 비어 있길래… 혹시 하고.”
‘혹시 하고’ 같은 가벼운 어조로 덧붙이기에는 여러모로 무리가 있다는 걸, 션 스펜서도, 브랜든 우드도 모르지 않는다.
솔직히 말하면, 브랜든 우드는 오늘 에이전시로 걸려 온 션 스펜서의 전화를 무시했다. 정확히는, 뻔히 자리에 있으면서 부재중이라고 둘러댔다.
이윽고 휴대폰으로 걸려 오는 모르는 번호 역시 모르는 척했다.
지금처럼 골치 아픈 상황에 부닥쳐 본 건 처음이지만, 이건 이 바닥에서 질릴 만큼 오래 있었던 그의 본능이 말해 줬다.
살인 용의자가 된 제 친구의 연인과 요즘 들어 매일같이 기묘한 행동을 이어 가는 상사 사이에 어설프게 걸쳐져 있었다간 여기서 치이고, 또 저기서 치일 게 뻔하다는 걸 말이다.
“맙소사……. 티나, 잠시만 들어가 주겠어?”
“-어? 으응, 아, 알겠어.”
하여튼 이 빌어먹을 스펜서는 혹시를 역시로 만드는 이름이었다.
브랜든 우드는 왠지 양 뺨을 발갛게 물들인 자신의 약혼녀에게 살짝 고개를 끄덕여 인사하는 그림 같은 남자를 보며 목젖까지 치달은 한숨을 겨우 삼켰다.
크리스티나가 현관 앞에 있을 때까지는 세상 근사한 표정을 걸고 있던 슈트 차림의 톱스타는, 그녀가 들어가자마자 순식간에 목소리 톤부터 달라졌다.
“이선과 연락이 안 됩니다.”
……이럴 줄 알았지.
“어…. 으음. 보석 석방이 통과된 거로 아는데요. 연락이 안 된다고요?”
“네.”
“녀석의 휴대폰으로는 연락해 보셨습니까? 하긴, 제가 두 시간 전에 했을 때도 안 받기는 했는데….”
“그의 휴대폰은 제가 가지고 있습니다.”
이제 좀 확실히 알겠다.
이 세상 다시없게 근사한 남자는 뭐 하나에 꽂히면 다른 걸 돌아보지 않는다.
한편, 그런 짐작이 틀리지만은 않는다는 듯 션 스펜서는 당혹을 감추지 못하는 브랜든 우드를 향해 온종일 참아 왔던 문장을 쏟아 내기 시작했다.
“제 쪽에서 준비하던 이선의 보석 심리를 BAA 쪽이 가져갔더군요.”
“……예?”
“그 뒤부터 연락이 안 됩니다. 이선에게 연락하려고 해 봤자, BAA 쪽에서는 당장은 곤란하다는 연락만 돌아올 뿐이고 먼저 전화 한 통, 메시지 하나가 안 옵니다.”
“…….”
“-그래서, 당신은 연락이 닿나 싶어 찾아온 겁니다.”
말을 끝맺기는 했지만, 션 스펜서는 대답을 듣기 전부터 저 흐린 인상의 남자의 생각을 알 것만 같았다. 얼이 빠져서 멍하게 입을 벌린 채로 쳐다보는데 BAA에서 보통 잔뼈가 굵을 게 아닌 저 남자도 몰랐던 일 같다.
이어지는 대답 역시 예상을 벗어나지 않았다.
“바, 바커와는 연락해 보셨습니까?”
“비서실에서 만나려면 일주일 뒤에나 시간이 된다고 답변이 온 게 답니다. 이선의 일은 ‘알아서 하겠으니’ 내버려 두라면서 말입니다.”
“그…, 그게 공식 입장이라면, 미안합니다, 스펜서. 나도 정말…… 별다른 소식을 들은 게 없어요. 나는 이선의 보석 석방을 당신이 한 거라고 들었다고요. 정말 난 당장 해 줄 일이-”
“닉 코빗이라는 형사가 있습니다.”
바커에 대한 굳은 충성을 지키던 사내가 흔들리기 시작한다.
션 스펜서는 그 망설임을 분명히 짚어 냈다. 이전에 차에서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대화를 나누었을 때는 굳게 입을 다물었던 남자가 처음으로 동요하는 거다. 션은 저와 시선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한 채로 우물쭈물하는 브랜든을 향해 조금은 급하게 말을 이어갔다.
“그 형사는 캐서린 에이브리와 네스 바라노프의 수사를 맡아 왔는데…. 지금, 심한 자상을 입어 수술을 받고 입원 중입니다.”
“……자상이요?”
브랜든 우드의 목에서 크게 침을 삼키는 소리가 났다.
“칼에… 찔렸다는 말입니까?”
“네. 그 상태로 저택에 찾아왔습니다. 꽤 심각했고, 수술은 잘 끝났다지만 아직도 혼수상태입니다. 그가 이번 사건에 대해 뭔가를 알고 있었습니다. 이선을 나오지 않게 하라는 말만 들은 게 다이지만….”
“-이선을 나오지 않게 하라고 했다고요? 이, 이미…… 보석 석방으로 나왔잖습니까? 첫 공판은 몇 주 뒤나 될 텐데!”
“그러니까 이선을 만나고 싶다는 겁니다. 이선에게 직접 물어봐야 할 것들이 많은데, 묻기는커녕 촬영장에서 체포된 이후 얼굴은커녕 목소리 한 번 못 들었습니다.”
침착하게 말하는 상상을 몇 번이나 하면서 왔었는데, 입 밖으로 문장을 만들어 꺼내고 나자 갈수록 열이 더해지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제 그런 흔들림을 드러낼 수는 없었다.
연인의 친구라기보다는 BAA의 충실한 부속에 더 가까운 저 사내는, 자신이 동요하는 중에 제 쪽이 흔들리는 걸 보면 금방 정신을 차릴 것이 분명했으니 말이다. 션은 작게 심호흡을 한 다음 단어 하나하나 힘을 주어 천천히 말을 이었다.
“거기에 가능하면, 이선보다 에이전시 보호에 급급한 것 같은 그쪽의 변호사도 갈아 치우고 싶고.”
“…….”
“다시…… 부탁하겠습니다. 브랜든.”
애원의 말도, 부탁의 말도, 아니, 어쩌면 그 이상의 것들마저 이제는 하나같이 쉬워졌다.
제가 만든 세상의 유일한 예외인 남자를 두고 못 할 게 없었다. 그 오만한 자존심도, 고상한 언어도, 그리고….
“차라리 바커가 있을 만한 곳을 알려 드리겠습니다. 저, 저에게 들었다는 말은 마시고, 기자나 경찰들을 피해 조용히 움직이시면 어떨까요. 최근 바커는 펜트 하우스를 하나를 샀습니다. 31층인데, 아마 주소가 도헤니 로드-”
“아뇨, 다니엘 바커는 아직은 안 됩니다.”
“예?”
“애초에 이선을 그가 데리고 있기도 하고 무엇보다 그 형사가 제게 찾아오기 직전 마지막으로 연락한 사람이 다니엘 바커, 그이니까요.”
다른 수가 없었다.
이제 이 도시에서 이선의 ‘친구’들은 다 죽거나 그 모습을 감췄는데, 그렇지 않아도 마음에 들지 않던 남은 둘은 이제 곧장 제 연인과 연결될 수 있는 몇 안 되는 길이 되어 버렸다. 정확히는, 한쪽은 이미 저를 완전히 차단하기 시작했으니 한시가 급한 지금으로서는 이 사내만이 이선과 곧장 연결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제 마음에 들고 안 들고는 이제 중요하지 않다.
자신은 이선 박의 ‘후원자’라면서 웃었던 그 얄팍한 위선에 구차하게라도 매달릴 셈이니.
“지금, 무슨 소리를….”
“바커 그가 찔렀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하지만, 형사가 사고를 당하기 직전 연락한 게 그라는 것도 사실이고, 정황상 꽤 오래전부터-”
“맙소사. 잠시만요. 스펜서!”
거의 비명과 같은 외침이었다.
“…그러니까, 정리해 보죠. 최소한 그… 두 사람이 지금 이선의 상황 이전부터 알고 지냈다는 거죠. 캐서린 에이브리와 네스 바라노프의 담당 형사를- 바커, 그러니까, 다니엘 바커가?”
“그렇습니다.”
“그리고 지금 그 형사는 다니엘 바커와 마지막으로 연락한 다음…… 그렇게 되어서, 혼수상태인데, 바커가… 제게는 당신이 보석으로 빼냈다고 한 이선과 연락이 안 된다고요?”
“네.”
불행한 상상에 익숙한 션 스펜서가 가장 먼저 떠올렸던 최악의 가정이 눈치 빠른 사내의 입에서 곧장 흘러나온다.
“-이게 좀 이상한 상황처럼 느껴지는 건… 내 망상입니까?”
스펜서는 저도 모르게 크게 숨을 들이켰다.
…최소한 다니엘 바커가 범인이라는 가정하에선….
닉 코빗과 다니엘 바커가 서로 오랫동안 연락한 정황이 남아 있는 이상 지금처럼 경찰이 벌집인 상태에서 곧장 코빗에게 한 것과 비슷한… 일을 치지는 않을 거다.
애초에 그런 직접적인 일을 벌일 필요도 없는 상황 아닌가.
두 명의 살인과 한 명의 실종에 엉망진창으로 얽힌 이선은 그의 손에 있다.
아직 그 연결고리는 모르겠지만 그 빌어먹을 총과 나이프도 제 연인의 아파트에서 나왔고, 헬렌 워커는 여전히 실종 상태다.
설령 닉 코빗이 정신을 차린다고 해도 일이 잘 풀릴 가능성은 크지 않다.
션 스펜서는 그 사실을 자신의 이름인 ‘스펜서’를 통해 잘 배웠다.
다니엘 바커쯤 되는 남자가 직접 칼을 들었을까? 그럴 리가 없다. 평판 나쁜 정직 형사 하나를 몰아가는 건 이선보다도 쉬울 거다.
“네. 그러니 바커가 개입하지 않은 상태의 이선과 만나고 싶다는 겁니다. 가능한, 당장.”
“…세상에. 대체 뭐가 어떻게 되는 건지….”
하지만 션은 그 모든 것을 입에 담는 것 대신 그저 초조한 눈으로 긍정하는 쪽을 택했다.
“요새 바커, 그가 좀 이상하다 싶었습니다. 갑자기 제임스 월링턴과 에이전시 계약을 맺지를 않나…. 실은 저번에 당신을 중독 회복 모임에 데리고 간 날 했던 회의도, 다니엘 바커 그가 제 대신 직접 오겠다는 걸 변호사들이 말려서 간신히 참석했던 거였거든요.”
“……제임스 월링턴이 BAA와 에이전시 계약을 맺었다고 했습니까?”
“예. 그래서 이선 그 녀석이 꽤 속상해했을 텐데… 모르셨습니까? 아니, 이건 지금 중요한 게 아니죠.”
생각지도 못했던 이름의 등장에 미간을 구길 새도 없이, 늘 허허실실 웃는 상이던 브랜든 우드의 입에서 그답지 않게 초조하고 높은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방금 말한 바커의 펜트하우스에 있을까요? 호텔이나 그런 곳으로 갔으면 진작 기사든, 목격담이든 돌았을 텐데.”
“그렇게 눈에 띄는 곳은 아닐 겁니다.”
“그, 그럼- 아! 보석으로 임시 석방 상태인데, 애인인 당신과 연락이 닿지 않는다고 신고하는 건 어떨까요. 실종 신고를 하는 겁니다!”
“그 생각을 안 해 본 건 아닙니다만, 그렇게 되면 분명히….”
“BAA로 들어오는 확인 절차는!”
션 스펜서는 저도 모르게 얼굴로 안도가 떠오를까 싶어 괜히 크게 한숨을 삼켰다.
“제가 위로 올라가지 않도록 처리하겠습니다. -어쨌거나, BAA에서는 제가 이선 박의 담당이라서요. 특히 지금 같은 퇴근 시간에 오는 연락은 더더욱 제가 처리하기 좋고요.”
“그래도 되겠습니까?”
“…후우, 네. 뭐, 어쩌겠습니까.”
저 눈치 빠른 사내가 발을 뺄까 싶어 차마 제 입으로 먼저 꺼낼 수 없었던 최고의 방법에 드디어 도달했다. 저 말을 먼저 하게 하려고 얼마나 돌고 돌았나.
션 스펜서는 작게 눈인사한 다음 곧장 휴대폰을 들었다.
오래 돌아온 셈이지만 이 길이야말로 이선이라는 사람에게 곧장 뛰어드는 방법이라는 확신이 드는 건, 그저 형편없는 낙관만은 아닐 거다.
* * *
나는 캐서린이 죽고 난 뒤, 몇 달을 말 그대로 잠만 잤다.
당신에게만 처음으로 고백하자면, 그 햇볕이 뜨거웠던 날 네스가 말했던 ‘다음 주의 오디션’조차 침대에서 웅크려 자느라 보러 가지 않았다.
그렇다고 경찰을 찾아간 것도 아니었다. 내가 한 건 그저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쓴 채 웅크려 있다가, 그 가만히 있는 것마저도 계속될 수 없는 한계에 이르렀을 때 냉장고와 찬장을 뒤져 싸구려 통조림을 입에 욱여넣고 또다시 이불을 뒤집어쓰는 거였다.
그렇게 얼마쯤 지나면 숨이 턱 막히는 토기가 올라왔고, 그땐 화장실로 뛰어가 먹었던 모든 것을 게워 내면 됐다.
하지만 그런 내가 일주일에 딱 한 번 집을 나가던 날이 있었다.
바로 매주 한 번씩 있는 중독 회복 모임이었다.
오디션이고 뭐고 다 내버려 두고, 매주 그 단 한 번의 모임에 매달렸다. 그땐 그래야만 살 수 있었다. 브랜든은 제대로 운전조차 하지 못하는 나를 늘 데리고 오가는 걸 반복했다.
그렇게 몇 달을 지냈더니, 놀랍게도 어느 순간 TV를 보면서 웃고 있더라.
네스가 미웠냐고?
모르겠다.
처음에는 미웠던 것도 같은데, 시간이 지날수록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는 게 무서워졌다. 그래, 그래서 나는 모든 것에서 도망쳤다.
우리가 함께했던 카라반에서도.
네스 바라노프에게서도.
또, 그날의 기억에서도.
그렇게 도망치면 살 만했다.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했던 기억을 종종 떠올리면서, ‘그날의 네스 바라노프’를 정말 모르는 척하고 살면 꽤 괜찮아졌다. 딱 그날만 잊으면 됐다. 그럼 내 기억 속의 친구들은 언제나처럼 시시껄렁한 소리를 하며 웃고 있었으니.
하지만 아주 가끔은.
정말 가끔은…… 그날의 기억이 참지 못하고 삐죽 튀어나올 때가 있었다.
보지도 말고, 듣지도 말고, 입에 담지도 말고, 모르는 척하고 살아야 하는데, 아주 가끔은 그날의 말이, 기억이 떠올라 잠 못 이루게 하는 날이 있었다.
해가 더해질수록 그날은 줄어들기는 했지만, 사실 그 순간을 제일 처음 만났던 때 가장 무서웠던 건- 내가 다시 약에 손대지 않을까 하는 공포였었다.
그날 밤, 그 술집에서 종이에 감싸진 것을 보자마자 허둥지둥 달려 나갈 정도로 그렇게나 떨치기 힘들었던 욕구가 나를 삼킬까 무서웠다.
얄궂게도 그 빌어먹을 충동은 내 친구가 떠난 이후 뚝 잘려 나가면서 이제는 농담을 할 지경까지 됐지만 말이다.
…하하. 어찌나 우습던지.
중독의 원리는 대체로 다 비슷하다.
처음에는 가볍게 시작한다. 대단한 걱정을 할 필요도 없다. 그저 입에 떨어진 다디단 사탕을 빨아 먹는 거나 마찬가지인데 무슨 생각을 하겠나. 당장 달고 맛있으니까 잠깐 즐기는 것일 뿐이다. 설령, 어느 정도 자각을 하고 시작하더라도 대체로 이렇게 생각한다.
‘이번만이야’.
이건 굳이 술이나 약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다.
사람 역시 마찬가지다.
“…짜증 나….”
내가 맨 처음 션 스펜서라는 남자에게 손댔던 날을 회상해 보자.
왜, 로스앤젤레스 경찰국에서 만났던 날 말고 호텔에서 만났던 날 말이다. 그래, 내가 반대로 아주…… 따끔하게 당한 그 빌어먹을 곳을 말하는 거다.
뭐. 그땐 정말 아무 생각 없었다. 애인 흉내 좀 내 주라길래 허벅지 좀 만지다가 나와는 다른 수납방향인 녀석의 것을 만진 게 다였다고.
이제 와 말하면 믿지 않을 수도 있지만, 난 정말 그게 살며 처음으로 같은 남자의 것을 손에 쥐었던 순간이었다.
그땐 진짜 놀려 먹는 게 귀여워서 그런 거였는데.
스펜서 저택을 울리던 아버지의 전화를 받고 술을 잔뜩 마셨던 날도 별다를 바 없다. 정말 술김에 한 키스에, 그 잘난 톱스타가 벌겋게 익어서 입술이 떨어질 때마다 고개가 따라오는데 어떻게 안 당기겠냐고.
다른 날도 다 마찬가지다.
너무 무뎌져서 나조차도 신경 쓰지 않던 것에 나보다도 속상해서 귀까지 붉게 변하는 것 때문에 속이 흔들렸던 게 다였고, 가끔 일부러 자는 척하면 한참이나 뺨을 쓰다듬다가 제 무릎으로 내 머리를 옮기는 손이 유독 조심스러운 게 퍽 만족스러웠을 뿐이었다.
그 자존심 센 남자가 내 일이면 무조건 지고 들어오면서 자길 사랑해 달라는 듯 조르는 게 뿌듯했던 것도 부정하지 못하겠지.
혹시, 정말 운 좋게도 이 모든 것이 잘 끝난다면… 나는 맹세컨대 중독 회복 모임에 다시 나갈 거다.
그렇지 않고서야 션, 그가 없는 낯선 곳의 침대가 너무 넓게 느껴져서 굳이 소파의 좁은 구석에서 몸을 쪼그려야만 하는 이 멍청함이 다 설명되지 않을 테니 말이다.
……그래도.
정말 그래도.
“-진짜 짜증 난다고!”
나는 소파 틈새에 그대로 머리를 푹 처박고 발을 구르면서 벌써 몇 번을 했을지 모를 말을 또 했다.
이 평화롭고 지루한 곳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얼마 없다.
마치 캐서린이 죽었던 그때처럼 모든 것에서 도피하듯 잠들고 일어나니, 이 작은 집은 또다시 나 혼자였다. 내게 따가운 질문을 쏟아 내던 다니엘 바커는 식탁 위에 내가 먹을 식사만 포장해 둔 뒤 조용히 떠난 듯했다.
물론, 그래도 그나마- 아주 개미 눈곱만큼이라도 나아진 게 있기는 하다.
“…….”
다니엘 바커가 식사 옆에 선불 휴대폰을 사 두고 간 거다.
당연히 그 안에는 다니엘, 그의 번호 단 하나만이 입력되어 있었다.
사실 이렇게 선불폰을 남겨 두고 갔다는 건, 어쨌거나 다니엘 바커 그가 내게 일종의 선택권을 준 것이나 다름없다는 걸 안다. 원한다면 뭐든 하라는 뜻을 모를 정도로 바보는 아니다.
……하지만, 이 못난 고백을 시작한 김에 어디 계속해 보자.
나는 션, 내 애인인 그 남자에게 곧장 연락할 엄두가 안 난다.
션의 휴대폰 번호를 모른다고 하더라도, 사실 마음만 먹으면 연락할 방법은 많았다. 못해도 브랜든의 번호는 외우고 있었느니 녀석에게 전화하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난 앞서 다니엘 바커가 물은 질문을 션이 똑같이 내뱉을 순간이…… 솔직히, 자고 일어나도 용기가 안 날 만큼 무서웠다.
혐오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지만 아니었던 모양이다.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션, 그가 날 끔찍하다는 눈으로 보는 걸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통째로 뜯겨 얼음물에 담가지는 것처럼 속이 서늘해진다.
그래. 난 겁쟁이에, 찌질이에, 멍청이다.
그런 내가 다니엘 바커가 개통해서 가져다준 선불폰을 들고 뭘 하겠나? 연인에게 “정말 미안해.” 하고 전화를 하겠어?
그럴 리가 없잖아.
“-씨이, …짜증 나, 진짜….”
……이렇게 질질 짜면서 남자친구의 SNS 스토킹이나 하겠지!
나도 안다.
이 나이 먹고- 심지어 이 덩치에 휴대폰 충전기선이 아슬아슬하게 닿는 소파 구석에 웅크려 대성통곡했다가, 그쳤다가, 또 코를 훌쩍댔다가 하면서 종일 하는 일이 여전히 나 하나만을 팔로잉한 그의 SNS 계정을 터는 일이라는 게 얼마나 못나 보일지 모를 리가!
하지만 나보고 뭐 어떡하라고.
“…내가, 또 뭘 어쨌다고, 왜 맨날 나는, 이제야 좀…, 괜찮아지는 줄 알았는데!”
이제야 겨우 제대로 혼자가 됐다.
날 체포한 뒤 으르렁대던 형사들이 얼마나 살벌했는지, 당신은 상상도 못 할 거다.
구치소의 독방 따위, 말이 독방이지 그게 혼자 있는 곳인가? 날 잡아먹지 못해 안달인 검사는 어땠고?
……전혀 날 변호할 생각이 없어 보이는 변호사를 가득 두르고 온 다니엘 바커는 말할 것도 없지!
매일같이 이어 가던 업로드가 뚝 멈춘 연인의 SNS를 보고 있자니 뒤늦게 찔끔찔끔 터져 나오던 눈물샘이 완전히 고장 나기 시작하는 것 같다.
“대체 연락해서 뭐라고 그러냐고오….”
그 다정해 빠진 연인에게는 대체 어디서부터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네스에게 엄청난 제안을 담은 메일이 도착했던 그 순간부터?
아니면 축하주를 마시다가 캐서린이 취한 채로 뭔지도 모를 약을 받아 왔던 그 끔찍한 때부터? 약을 보기만 해도 입이 말라서 도망쳐야만 했던 3년 전의 나부터? …네스가 울면서, 캐서린이 죽었다고 전화했던 아침을 말해야 하나?
-아니면.
내 친구가 믿기지 않던 말을 쏟아 냈던 그 유독 햇볕 뜨거운 날을 꺼내야 해?
난 코 훌쩍임 한 번에 SNS의 사진 하나를 눌러 보면서 자꾸 튀어나오려는 흐끅 대는 소리를 참으려 애썼다.
누가 선불폰 아니랄까 봐, 영 부실한 액정 속에서도 간지럽게 웃고 있는 얼굴은 왜 이렇게 쓸데없이 잘생겼을까.
“…헬렌이 어디 갔는지도, 흑, 모르겠는데, 씨바알! 45년이 말이 되냐고, 흐윽!”
억울해 죽겠다.
살면서 억울함을 느끼는 마음속 어떤 부위가 무뎌질 만큼 무뎌졌다고 생각했는데, 이 순간 다시 그 숨이 꽉 막히는 감정을 다시 배운다.
……왜 내가 얘를 애인으로 두고도 떨어져 있어야 하는데?
얘가 나를 얼마나 좋아해 주는데. 아니 이젠 맨날 틈만 나면 사랑해, 사랑해 노래를 부른다고. 씨발, 어떤 개새끼가 그랬을지 상상도 안 가는 건 어떻고!
이 빌어먹을 집에서 온전히 혼자가 되고 나서야 자꾸 어린애처럼 허어엉, 하고 우는 바보 같은 소리가 터져 나온다.
벌 받는 거다.
진작 마땅히 받아야 했던 벌이 이제야 오는 거다.
3년 전에는 그렇게 겁먹고 도망쳐 놓고서, 이제 와 혼자 행복하려고 해서 멀리 있는 캐서린이 화가 났을지도 모르겠다.
화날 만하다.
이렇게 기껏 손에 떨어진 소중한 것들이 으스러질 줄 알았으면- 그때 경찰을 찾아가 모든 걸 말할 수 있었겠냐고 묻는 내 안의 어떤 물음에, 난 여전히 답하지 못하니까.
바보처럼 울면서 애인의 SNS 이미지 중 하나를 누르니 기다렸다는 듯이 영상이 재생되며 그렇게나 듣고 싶었던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이선. 여기 봐.
-왜애.
-부탁이야. 한 번만.
-왜, 애, 애, ……으와악! 야! 너 언제부터 찍었어!
-조금 전?
어떻게 사람이 웃는 소리가 이렇게 좋을 수가 있을까? 이걸 어떻게 한 번만 들어?
내 한심한 목소리가 거슬리기는 하지만, 내 이름을 부르는 것부터 “부탁이야, 한 번만.” 하는 것까지 뭐 하나 흠잡을 데가 없다.
나는 이제 완전히 고장 난 수도꼭지처럼 뚝뚝 떨어지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못 하고, 충전기선 끝에 아슬아슬하게 꽂힌 휴대폰에서 반복재생 되는 연인의 목소리를 다시 기다렸다.
“이선?”
-이선, 여기 봐.
너무 듣고 싶다 보면, 귀에서 알아서 소리 보정을 하기도 하나 보다. 나는 흐으응, 하고 바보같이 울면서 휴대폰 속에서 내 머리를 말려 주며 웃는 남자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이선.”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다.
휴대폰 액정 속의 우리는 언제부터 찍었냐고 투덕거리면서 웃고 있는데, 내 이름을 부르는 그 듣기 좋은 목소리가 묘하게 겹쳐 귀에 꽂힌다.
아무리 선불폰이라도 그렇지, 어떻게 SNS 염탐 좀 했다고 벌써 맛이 가고 그러냐.
나는 코를 훌쩍이면서 영상 속 소리를 껐다.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난 한 시간 정도 더 이러다가 다시 기절하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어차피 또 자고 일어나면 이번에야말로 다니엘 바커든, 그 무뚝뚝한 변호사들이든 뭐든 몰려와서 그때야말로 지지고 볶고 튀겨질 테니까, 이렇게 잠시나마 혼자 있는 시간을 한심한 바보짓으로 온전히 채우고 싶었다.
“……후우, 이선.”
“-으, 으와아악! 악! 아악!”
물론, 그건 휴대폰 영상 속의 고함보다 열 배는 더 크게 멍청한 소리를 외치며 소파 위에서 경기를 일으키고 싶었다는 뜻은 아니었다.
그리고, 또-
“씨발, 너 뭐야!”
“문이 그냥 열려서… 미안.”
그렇게나 보고 싶었던 연인에게 제대로 내뱉은 첫 단어가 ‘씨발’이 될 줄은 정말 몰랐다. 그런데, 너무 놀라서 제대로 된 말보다 욕이 더 먼저 튀어나왔는걸!
답답해서 잠깐 정원에서 바람 좀 쐬고 들어온답시고 나갔다가 잠그는 걸 깜박했다는 것 역시 뒤이어서 떠올랐다. 하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나는 쉬다 못해 쩍쩍 갈라지는 목소리로 미친 사람처럼 외쳤다.
“너-, 너어, 너! 너어! 언제 왔어!”
“…조, 조금 전에….”
“여기 어떻게 왔어. 바커가 말해 줬어?!”
화소 나쁜 선불 휴대폰에서 갑자기 5K, 아니 그 이상의 입체감을 자랑하며 튀어나온 것 같은 장신의 남자가 그 근사한 얼굴에 뭐라 설명할 수 없는 묘한 미소인지, 뭔지를 걸고서 슬쩍 뒤로 고갯짓했다.
난 그제야 커다란 창문 너머로 깜박이는 붉고 파란 불빛의 교차를 확인했다.
……경찰이다.
내게 채워진 GPS 장치가 있는 한, 저들은 내가 이 LA 카운티 어디에 있든 곧장 내 위치를 알아낼 수 있는 찝찝한 존재들이다.
조금 전까지 혼자 눈물 콧물 다 짜내면서 울던 거로도 모자라, 너무 놀라 머리가 찡해질 정도로 소리를 쳐 대기까지 한 나는, 제 키보다도 더 아담한 현관에 선 장신의 남자를 멍하게 눈에 담았다.
……그래 봤자 며칠 떨어져 있었던 게 다인데.
왠지 몇 주 몇 달은 못 보다가, 절대 만날 리 없다고 생각했던 장소에서 운 좋게 마주친 것 같은 이상한 기분처럼 속이 울렁거리기 시작한다.
하얀 셔츠에 베스트, 거기에 재킷까지 챙겨 입은 건 평소와 같은데 오늘은 넥타이가 답답했었는지 목께는 텅 빈 채로 단추가 몇 개 풀려 있다.
그 보기 좋았던 머리도 조금은 헝클어진 채고, 심지어는 그 역시도… 날 눈앞에 두고 있다는 게 좀 얼떨떨하다는 듯 긴장이 풀린 표정이다.
촬영장에서 갑자기 형사들의 팔에 질질 끌려간 이후- 드디어 만난 션 스펜서였다.
대체 저 남자의 얼굴을 보고서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숨도 제대로 못 쉬게 울면서 고민했었는데.
그가 정말로 코앞까지 오니까, 머리를 터트릴 것처럼 가득했던 고민이 순간 완벽히 휘발됐다. 분명 마땅히 먼저 꺼내야 할 그 많고 많은 변명과 해명보다 먼저…….
코가 시큰거린다.
“셔어어언. 자기야아-!”
그래도 ‘씨발’과 ‘너’에 이어서 이 정도면 꽤 선방이라고 본다.
크게 휘청거리면서도 기어코 달려가 안기자 모로 봐도 가벼울 일 없는 내 몸을 어렵지 않게 안아 드는 팔은 여전히 따뜻하고, 단단하고, 또 포근했다. 어느새 익숙해진 헤어 왁스 향도 다시 속을 울컥하게 한다.
좀 우스운, 아니 아주 많이 우스운 꼴이었다는 걸 인정한다. 아무리 쟤가 나보다 훨씬 크다고 해도 나도 떼 놓고 보면 6피트의 사지 멀쩡한 사내새낀데 폼은 못 잡을지언정 애인한테 질질 짜면서 달려가다니.
“흐으윽, 션, 나 완전, 짜증 났어!”
“그랬어. 고생 많았어.”
“경찰도 그렇고, 구치소에서도 그렇고 자꾸 내가 입만 열면 어디서 작게 호모 새끼, 호모 새끼, 그러고.”
“정말 짜증 나네. 고소할까?”
“…아니, 혹시 모르니까 그러지는 말고….”
날 품에 안은 남자가 입술이 닿는 곳마다 키스한다.
머리카락, 이마, 또 자꾸 찔끔찔끔 눈물이 나려는 눈가, 이미 보기 싫을 정도로 젖은 뺨, 그리고 입술. 왠지 목덜미로 소름이 돋는 것만 같다. 어느 순간 내심 당연하게마저 생각했던 이 간지러운 입맞춤이 이렇게까지 부드러운 것이었을 줄은 몰랐는데.
“대체 뭘 보면서 그렇게 울었어.”
“…네 SNS….”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하자 작게 “맙소사, 왜 그걸 보고 울어.” 하고 입 맞추며 대답하는 목소리에 왠지 서러울 정도로 듣기 좋은 웃음기가 걸려 있었던 것 같다.
“전화는 왜 안 했어?”
“……흑, 휴대폰 번호를 몰라서.”
“번호를 몰랐어? 하긴. 바로 입력된 거 쓰니까.”
심지어 넌 왜 그렇게 멍청하냐고도 안 한다.
뒤에서 시선이 마주친 경관들의 눈이 미시간의 긴 겨울보다 더 차갑게 얼어붙는 게 보인다. 흑. 씨발. 나도 몰라. 알 게 뭐야.
나는 션에게 코를 훌쩍이며 갈라진 목소리로 “근데에, 경찰은 어쩌다 같이 온 거야?” 하고 작게 속삭였다. 이건 아직도 긴가민가한데, 내 이마에 입술을 쪽쪽 부딪치는 그가 “이선 네 실종 신고를 했거든.”, 했을 땐 왠지 저쪽에서 이를 가는 소리가 들렸던 것도 같고….
확실히 저들의 표정은 “아주 지랄 났네.” 하는 짜증이 몇 숟가락 정도 섞인 눈인 것 같긴 하지만, 감히 이 순간만큼은 이해해 주려고 한다.
나는 엄한 표정을 한 경관 하나가 자신의 콧수염을 한 번 쓸면서 다가오는 걸 보며 그제야 내 애인에게서 조금 떨어졌다.
“어쨌든… 실종신고를 하셨었으니 몇 가지 확인해야 할 사항이 있는데요.”
“흑, 후우우, 네.”
“지금 계신 곳이 타의에 의해 강압적으로 감금된 곳입니까?”
……지금 이 말을 입 밖으로 꺼내면, 제아무리 다정한 션 스펜서라고 하더라도 허리에 감은 자신의 팔로 날 으깰 것 같으니 당신에게만 살짝 말하겠다.
최악의 상황에 감옥에 갈 거라면 이런 곳에 갇히는 게 내 소원이다.
나는 포근하기 짝이 없는 작은 집의 현관 앞에서 힘주어 부정했다.
“…아, 아뇨!”
“그렇다면 보석 석방 상태에서 가까운 주변인과 연락을 끊고 도피를 모의한 겁니까?”
“네? 아아뇨! 그럴 리가요! 여기는… 제 에이전시 사장님 별장 같은 건데. 종종 쉬러 오는 곳이라고….”
“에이전시 사장님?”
“그… 왜. 바커요. 다니엘 바커.”
대체 그 망할 게 누구냐는 냉랭한 눈을 한 경관을 누가 뒤에서 잡아당겨 귓속말을 소곤댄다.
나는 저 귓속말이 끝나면 저 무뚝뚝한 경관님의 눈에 짜증을 넘어 어느 정도의 분노가 깃들지 않을까 짐작한다.
……아. 역시.
하지만 빌어먹을 게이 놈들의 치정 싸움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으면 하는데.
사실 생각해 보면 션 입장에서는 속이 탔을 것 같다. 오죽하면 경찰한테까지 내 실종 신고를 해서 여기까지 왔겠나.
션은 자기가 허겁지겁 온 이곳이 어디인 줄도 몰랐을 거다.
그걸 증명하듯, 그는 경관 하나가 “오해 때문이었다고 해도, 보석 석방 상태에서 있었던 일이니 서에 오셔서 공식 서류를 작성하셔야 할 수도 있습니다.” 하면서 집을 빠져나가자마자 곧장 옅은 짜증을 감추지도 않고 입을 열었으니.
“여기가 그 빌어먹을 ‘말리부 별장 같은 곳’이었군.”
“……으응.”
다시는 그렇게 졸졸 쫓아오지 않겠다고 약속했었는데 그걸 지키기는커녕, 이제는 발목에 GPS 장치까지 달고서 자체 감금이나 다름없이 웅크린 채 울던 모습이나 보였다.
하지만 션은 이번에도 그런 나를 질책하는 것 대신 꼭 어린애들이 같이 다니는 것처럼 내 손을 잡고 그 아담한 거실을 둘러보더니, 이내 내가 조금 전까지 그의 SNS를 염탐하며 대성통곡했던 자그마한 기계를 흘끗 바라보았다.
“이건 뭐야. …선불폰?”
“어? 어어. 다니엘이 사다 줘서….”
“자. 네 거 가지고 왔으니 쓰던 거 써.”
그는 기어이 다니엘 바커가 준 걸 빼앗아 가면서도, 절대 잡은 내 손을 놓지 않는다. 아니, 망가지든지 말든지 하는 느낌으로 소파에 털썩 앉은 다음 기어이 날 자신의 무릎에 끌어다 앉히기까지 한다.
그건 누가 보면 유치하다고 혀를 찰지 몰라도 요 며칠 머리카락 한 올까지 긴장으로 땅기는 것 같았던 내게는 무엇보다 필요한 안락함이었다. 션이 작게 혀를 차면서 “뭘 이렇게 울었어.” 하며 내 눈가를 살살 만지는 손이 유독 간지러웠다.
섬세함과는 거리가 멀 것 같은 마디마디가 크고 단단한 남자의 손가락이 이렇게나 상냥하다는 걸 아는 사람이 세상에 또 있을까.
“션. 있잖아.”
“응.”
“-나, 코빗 형사 얘길 들었는데….”
순식간에 무드를 깨는 말이었다는 건 안다.
하지만 아시다시피 우리가 지금 분위기를 따질 만한 상황은 아니지 않나. 나를 물끄러미 보던 션은, 나직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누구한테서?”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록산느인지, 뭔지 하는 검사가 내게 했던 말을 천천히 옮겼다.
그녀가 내게 제시했던 45년형의 형량 거래부터 코빗, 그가 자상을 입은 채로 기어이 스펜서 저택을 향했다는 말을 전했던 것까지, 모두 다.
형량 거래 부분에서는 눈에 띄게 미간을 구긴 채 눈썹을 휘었던 션은, 내가 긴장을 감추지 못하고 말한 코빗의 대목에서는 마치 꼭 나를 달래려는 듯 손등을 쓸어 줬다. 무엇보다 궁금했던 소식을 이어 전해 주기도 했다.
“수술은 잘 끝났고, 오늘 낮에는 아주 잠시나마 정신이 들기는 했었다는데 제대로 된 대화는 힘들었다고 하더군.”
“아….”
“옆에 간병인과 경호원을 붙여 뒀어. 상태가 더 안정되는 대로 곧장 연락 주기로 했고.”
자상이라느니, 여섯 시간을 수술했다느니 해서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었는데 정말 눈곱만큼의 안도가 파도처럼 밀려왔다. 그리고 그 끔찍한 소식을 처음 들었던 순간부터 쭉 하고 싶었던 말도 뒤늦게 따라왔다.
“…많이 놀랐겠다.”
“지금 내 걱정을 하다니.”
“그래도.”
“힘들겠지만, 혹시 예상 가는 사람이라도 따로 있을까?”
가볍게 내리깐 시선 너머로 예쁘게 반짝이는 푸른 눈이 물끄러미 나를 담는다. 나는 그 시선 앞에서 순간 대답을 잊은 채로 조금 멍해졌다.
“이선?”
“…아, 아냐.”
사람이 궁지에 몰리면 별거 아닌 것에 다 의미를 부여한다 싶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옥 같았던 요 며칠간, 처음으로 있으나 마나 한 ‘무죄 추정의 원칙’을 지켜 준 사람을 만나면 내심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꽤 슬프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이미 깨닫고 있지 않았나. 날 이곳으로 데리고 온 다니엘 바커와 그의 변호사들도 나를 믿는 눈치는 아니었다는 걸 말이다.
…오히려 유죄인 나를 어떻게 무죄로 만들까, 하는 느낌이었지.
신기한 일이다. 날 끔찍하게만 볼 것 같았던 남자가, 그저 날 팔로 안은 채 물어봤을 뿐인데…….
며칠간 내 입을 열게 하려 했던 그 누구의 앞에서도 나오지 않던 말들이 이상할 정도로 술술 나오기 시작한다. 나는 크게 숨을 한 번 삼킨 다음 말을 이었다.
“나도 그걸 계속 생각했는데, 진짜 모르겠어. 정말 후보조차 없다고. 솔직히 이제껏 혼자 담아 두면 담아 두고 살았지, 원한 사고 다니지는 않았는데. 바보 같지만, 그럴 깡 없어, 나! …젠장, 헬렌도 어떻게 된 건지 짐작도 안 되고. 정말 죽겠는데 사방에서 난리지…!”
얼마나 참고, 참고 또 참던 문장들이었는지, 입 밖으로 내뱉는 순간 속에 얹혔던 돌덩어리가 비로소 으깨져 나가는 것 같은 기분마저 들 정도였다.
…맙소사. 이 한심한 소리를 묵묵히 들어 주는 연인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최악의 상상만을 갱신하던 머릿속이 좀 나아진 기분이었다.
내 말을 묵묵히 새겨듣듯 있던 남자가 자신의 재킷 주머니에서 아주 작은 메모 하나를 꺼낸 건 그때다.
처음에는 그게 뭔가 싶었다. 하지만 난 “그게 뭐야?” 하고 묻기도 전에, 최소한 그 쪽지를 적은 사람이 누군지는 곧장 알 수 있었다. 알파벳 하나하나를 흘리듯 거칠게 적는 저 필체는 다른 누구의 필체일 수가 없다.
저건-
“……헬렌?”
“네가 보기도 확실해?”
“으, 으응. 헬렌이 쓴 거 맞아. -그런데 뭐야. 무슨 소리야? …‘가브리엘’?”
쓴 사람이 누군지 알아도, 고작 짤막한 한 줄밖에 안 되는 문장을 곧장 이해할 수 없다니. 나는 션이 건넨 쪽지를 멀뚱히 보면서 눈만 끔벅거렸다. 도저히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날 도우려는 것인지, 나직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워커 씨의 카라반에 갔었어.”
하지만 그게 나를 잘 도왔다는 건 아니다. 나는 그 담담한 목소리를 몇 초 늦게 이해하고는 목소리를 빽 높였다.
“너, 너 혼자?! 너 거기가 어딘 줄 알고. 거기가 얼마나 위험한 곳인데!”
“아니. 가브리엘도 같이.”
“그, 그런데?”
“그런데 그 카라반 지하에서 이걸 발견했어.”
……아.
“-그 지하에 뭐가 있는지는 이선, 너도 알 것 같은데.”
왠지 뒷골이 쭉 땅기는 건 왜일까.
그 화려하고 살벌한 수집품의 주인은 따로 있건만 그걸 발견한 사람이 사람인지라 왠지 습관적인 변명부터 하고 싶어진다. “헬렌이 그걸 모으기는 했어도 쓰지는 않았을 거야, 아마도.” 같은 하나 마나 한 소리라도 말이다.
하지만 난 내 친구의 수집력에 대한 해명 대신, 션이 그 지하를 알게 됐다는 말을 듣는 순간 속을 철렁하게 했던 것을 짚고 넘어가기로 했다.
“거기 내가 내려가도 좀 무섭던데. …괜찮았어?”
“또 내 걱정이야?”
…당연히 걱정할 수밖에 없잖아.
거기 밑에 있는 총이며 이런저런 것들이 정말…… 몇백 정은 될 텐데. 나는 헬렌의 필체가 분명한 쪽지를 손가락 끝으로 그리면서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헬렌은… 대체 어떻게 된 걸까. 괜찮은 걸까.”
“반드시 그랬으면 좋겠다고 바라고 있지만, 솔직히 이 뜻은 잘 짐작이 안 되더군.”
왠지 다시 눈가가 시큰해지는 것만 같다.
뜻 모를 헬렌의 행동을 곧장 해석할 수 있었던 건 네스 바라노프뿐이었다.
나는 내게 3년 전 그날에 대해 묻지 않은 유일한 남자에게, 이제껏 누구에게도 꺼내지 않았던 그…… 햇볕 뜨거웠던 날의 기억을 꺼내기 시작했다.
“…캐서린을 찌른 건, 맞아. 분명히… 내 나이프였어.”
요 며칠 내내 상상했던 것과는 다르게 숨을 헐떡이지도, 울지도, 떨지도 않으면서… 말이다. 물론 기껏 시작한 고백이 이내 약간 두서없이 이어졌다는 것도 인정한다.
“캐시의 몸에 남은… 모양만 봐도 알 수 있었어. 아, 물론, 직접 봤다는 건 아니지만. 사진이 그랬어. 그런데 난 정말 안 그랬어.”
“…….”
“진짜야. 정말이야, 믿어 줘. 난 정말 그날, 곧바로 집에 가서 맥주만 엄청 마셨어. 술집에서 나도 약을 보기는 했는데, 그땐 보는 것만으로도 힘들어서. 그래서….”
“-이선, 네가 아니라 바라노프였나?”
……하지만 어떻게든 끝은 잘 맺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나는 ‘어떻게’ 하고 그 흔한 되물음조차 하지 못한 채, 그의 품에서 순간 숨 쉬는 것조차 잊었다. 그런 날 달래기라도 하려는 걸까. 뺨에 쪽, 하고 입술을 부딪친다.
솔직히 그 순간에는 내 자신이 어느 순간부터 미쳐 있는 건 아닌가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내가 떠올렸던 그 수많은 시뮬레이션 중에서 이건 없었다. ‘그걸 어떻게 믿겠어.’, ‘다른 할 말은 없는 거야?’…. 이런 게 아니라, 뭐.
……웬 뽀뽀야?
그리고 대체 어떻게 션의 입에서 저 이름이 지금-
“네가 체포되고 나서 휴대폰을 보다가, 코빗 형사에게 보낸 문자를 보게 됐어.”
“…응.”
“그 형사라면 뭔가 알 것 같아서 그날 밤 이야기를 했었고. 그때 3년 전 바라노프가 받았던… 혐의를 들었어. 캐서린 에이브리를 죽인 모든 정황이 바라노프를 향했지만, 결국은 무죄로 풀려나게 됐다고. ……하지만 코빗 그는 그걸 믿지 않는다고도 했지.”
이 품에 안겨 있는 동안 꼭 진정제를 맞은 것처럼 느슨하게 풀렸던 어깨로 나도 모르게 힘이 들어가기 시작한다. 남자는 그런 나를 더 세게 끌어당겨 안았다. 이어지는 말은 없었다. 질문도 없었고, 다그침도 없었다.
그는 그저 내게 설명해 줬을 뿐이다.
이걸로 내 머리부터 발끝까지 가득 찬 의문이 조금이라도 풀리면 됐다는 듯이. 그거면 그만이라는 듯이. 나는 그 다정한 푸른 눈을 마주 보다가,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그런 거… 같아.”
“‘그런 거 같다’라는 게 무슨 뜻인지 물어도 될까?”
내가 상상했던 끔찍한 기억을 고백하는 순간은 이렇게 다정하지 않았는데.
“캐서린의 장례식날. 네스한테 그랬어.”
“…….”
“그, 칼자국은… 내 거라고. 아니, 내 나이프로 만든 거라고. 그러니까… 경찰에 갈 거라고.”
션의 숨이 뺨을 간질인다.
덕분에, 머리꼭지가 열을 받아 뜨끈뜨끈하던 그날로 돌아간 것 같다. 모두가 침묵하는 평화가 당연한 그곳으로. 지금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게 네스 바라노프가 아닌 션 스펜서라는 것만 다르다.
“대체 무슨 일이냐고도 물었어. 제발 말해 달라고 빌었어. 그런데.”
“…….”
“네스가 경찰에 가면 나는 끝장날 거라고… 그러는 거야.”
그렇다면 션은 뭐라고 할까?
이 끔찍한 순간을 전하는 게 끝날 때쯤에, 이 남자마저 나를 보는 시선이 달라질까?
“말하는 순간, 발견 안 된 권총이랑 그 나이프가, 어디서 어떻게 나올지 자기도 모른다고. 그러니까 그냥 조용히, 죽은 듯이….”
-살라고 해서.
기껏 잘 이어 가던 목소리가 순간 삐끗해서 그저 입만 벙긋거리는 모양새가 되고 말았다. 나는 크게 심호흡을 한 다음, 마저 말을 이었다.
“어떻게든 시간이 지나니까 괜찮은 날이 많아졌어. 그래서 그냥, …조용히 모르는 척, 눈감고 살면 될 줄 알았어. 그러면 정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될 줄 알고. ……그런 거 같아. 네스인 거 같아. 맞아. 그래. 그랬어. 하지만 그걸 알면서도 도저히… 경찰을 찾아갈 자신이 없었어.”
“…….”
“브랜든이랑 바커한테도 말할 수 없었어. 그 둘은 바보같이 집에 처박혀서 잠만 자는 나를 챙겨 주기에 바빴거든. 헬렌한테도 찾아가지 못했어. -헬렌은, 네스… 편일 것 같아서. 젠장. 애도 아니고.”
한심해.
정말 끔찍하리만큼 한심해. 나는 내 얼굴에 꽂히는 연인의 시선을 알면서도 그와 눈을 마주치는 걸 포기했다. 그러려면 그 품에 안겨 있지라도 말든가, 무릎에 앉아서 뭐 하는 건지 몰라.
내 심장이 빨리 뛰기 시작한 걸 들켰을까?
분명히 들켰을 거다. 내 별거 아닌 말에도 꼬박꼬박 대답해 주던 그의 침묵이 기묘하게 긴 것만 봐도 분명하다.
긴 침묵을 깨고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목소리가 느릿느릿, 단어 하나하나씩 흘러나온다. 나는 그의 예쁜 입술이 움직이는 걸 머릿속으로 상상하며 손가락만 꼼지락거렸다. 너무 긴장한 탓일까. 왠지 머리로 피가 몰리는 것 같다.
“이선, 넌 정말 내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지나치게 비관적이구나.”
내 정신과 의사가 언제였던가 했던 말이다.
“또 굉장히 회피적이고.”
이 역시 들었었다.
“진지한 걸 못 견뎌 하고, 사람에게 기대는 법도 모르고, 포기에 익숙하고. …또 필요 이상으로 겁이 많다고는 늘 생각했었는데.”
날 해부라도 할 생각일까? 물론 그보다 더 속에 콕콕 박히는 건 ‘늘 그랬다’는 부분이다.
“뭐. 가끔은 경박하기도 한데. 이건 상관없으려나.”
“……나 경박해?”
“그렇지 않고서야 한밤중에 성인용품을 넣은 채로 침실로 와서 빼 달라고 하지는 않지.”
“아니, 그건… 정말 사고였는데- 아얏!”
웅얼거리듯 변명하고 있었건만, 별안간 귀로 따끔한 통증이 밀려왔다. 나는 그제야 푹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고 내 말랑한 귀를 이를 세워 깨문 남자에게 소심하게 항의했다.
“아프다고….”
입을 열면 그 밖으로 내 심장이 튀어나올 것만 같다.
나는 속을 알 수 없는 얼굴로 내 얼굴을 가만히 뜯어보는 연인의 눈앞에서 영혼이 발가벗겨진 채로 숨을 참았다.
그래.
비관적이고, 회피적으로, 진지한 걸 못 견뎌 하고, 사람에게 기대는 법도 모르고, 포기에 익숙하고, 또 필요 이상으로 겁이 많은 데다 경박하기까지 한 나는 이 순간마저도 도망치고 싶기만 하다.
그걸 션이 몰라서 다행이다. 그걸 알았다면, 그는 지금보다 더더욱 나를….
난 네스 바라노프를 알았다.
그날, 그 순간 내게 말하는 녀석의 눈이, 표정이 진심이라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그건 이 오랜 시간 동안 캐시를 죽인 진짜 범인을 감춘 변명은 되지 못할 거다. 나는 션이 뭐라고 더 말을 잇기 전에 먼저 선수를 쳤다.
“나 때문에 네가 엉망진창으로 물어뜯기면 어떡하지?”
“왜?”
“아직…, 아직은 기사가 안 떴다지만 분명히 너도 걸고넘어질 게 뻔하잖아. 역시 내가 그때 경찰에 갔었어야 했는데. …알아. 정말 가야 했는데, 정말로 다 뒤집어쓸 것 같아서. 그땐 그게 무서워서…. 빌어먹을!”
“…….”
“진짜 어떡하지. 미안해. 나 때문에 영화도 엉망진창이 됐어. 네가,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다들 얼마나 신경 쓴 건데. 나 하나 때문에-”
“정말 미안해?”
드디어!
드디어, 예상했던 따끔한 말이 나오려나 보다.
줄줄 사과를 이어 가던 나는 그 날카로운 송곳에 대번에 심장을 찔려서 저도 모르게 큰 헛숨을 들이켰다. 이제껏 온갖 최악의 상황을 상상했었으면서 겨우 이 정도에 등줄기로 식은땀이 다 나다니.
정말 나란 인간은 어디까지 형편없어질 셈일까.
“……미안해.”
나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사과했다.
미안하다고 할 거면 애초에 그럴 짓을 하지 말라고 그에게 짜증 냈던 건 나면서, 사실은 어떤 사과로도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끔찍한 인간은 정작 나였다.
무슨 말이 나오든 담담하게 받아들이리라.
도저히 더 이상은 안 되겠다고 해도 괜찮다.
괜찮지 않아도 괜찮아.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인간이면 그래서는 안 됐다고 비난해도 고개를 끄덕이자. 틀린 말 아니잖아. 이미 그는 내가 살면서 단 한 번도 상상한 적 없는 애정을 쏟아 줬다.
처음으로… 캐서린에게도 같이 갔었다.
감히 캐서린에게 저 사람을 소개했었다. 감히 속으로 이기적인 용서를 구했다. 아마 이 모든 건 캐서린이 내 뻔뻔함에, 비겁함에, 그녀를 두고 도망쳤던 겁쟁이인 나를 향해 뒤늦은 단죄를 하는 거다.
좋아. 이번에야말로 어떤 말이 나오든 받아들일 준비가 됐다.
나는 폐가 아플 정도로 크게 숨을 들이켰다.
“그럼 나랑 결혼해.”
-그리고, 그렇게 들이켠 숨을 뱉는 걸…… 잠깐 깜박했다.
“뭐, 라고?”
“결혼하자고 했어.”
나는 인생의 절반에 가까운 시간을 영화와 드라마 속에서 보냈다.
그건 다시 말해 인류 대부분의 공감대인 온갖 종류와 형식의 러브스토리들을 일로든, 연구를 위해서든 쉼 없이 접해야만 하는 위치였다는 뜻이다.
그런데 그 많고 많은 러브스토리 속 ‘나랑 결혼해’는 절대… 이런 상황에 흘러나오지 않았다.
왜, 그건 못해도 좀 더 로맨틱하거나….
아니. 로맨틱하지 않더라도 최소한 극적인 상황에서 서로 그 말만으로도 눈물이 고일 정도로 찡하게 흘러나오는 게 ‘나랑 결혼해’다.
최소한 그건 연인이 오랫동안 감춰 왔던 끔찍한 사건에 대한 진실을 고백했을 때, ‘정말 미안해?’ 다음에 나올 만한 문장은 아니다. 정말 그렇다.
나는 이 순간 가장 그럴듯하고 합리적인 질문을 조심스럽게 꺼냈다.
“…혹시 지금… 많이 힘들어?”
“뭐가?”
“그, 왜……. 정신이, 아니, 아니. 마음이. 충격이 너무 커서….”
“백 퍼센트 제정신인데. 어제 변호사 상담도 했어.”
물론 그렇게 물어 놓고 새삼스럽게 깨달은 건, 정신과 마음에 충격이 큰 사람에게 그걸 짚어 물었을 때 순순히 인정하는 쪽은 없다는 사실이었다.
“아. 무릎이라도 꿇고 해야 하나. 반지가 없는 것도 문젠가.”
“션. 이건 그런 문제가 아니야. ……여기서 결혼이 왜 나와?”
“미안하다며.”
“마, 맞아. 당연히 미안해. 미안한 건 맞는데!”
바로바로 흘러나온 문장에 망설임이라도 있었다면 얘가 날 만나러 오기 전에 진정제라도 먹었나 싶었을 거다. 약효가 늦어도 한참 늦기는 하지만, 어쨌든 그래서 헛소리를 하는 거로 생각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션 스펜서는 언제나처럼 또박또박하다 못해 발음이 뭉개지는 곳 하나 없는 목소리로 말을 이어 갔다.
“그 미안함의 진정성을 알고 싶어.”
내가 방금 무슨 말을 들은 걸까.
“…진정성이라는 게, 션. 그렇게 뭔가로 표현되는 게 아니고….”
“왜 아니지?”
“……후우, 야, 진짜 미치지 않고서야! 장난 그만 쳐!”
“미쳤냐니. 나랑 결혼하는 게 미친 짓이야? 그리고 지금 같은 상황에 장난이라니?”
“야. 그런 말이 아니고.”
“후우, 이선. 정말 미안한 건지 의심스러운데.”
왜일까?
왜 살면서 처음으로 청혼을 받았는데 뒷목이 땅기고 가슴이 콱 막힌 느낌일까?
“…아니, 자기야. 그게! 겨, 겨, 겨얼혼은, 야아…. 그건 우리 둘 좋다고 할 수 있는 게 아니지.”
“우린 성인이야. 그 정도는 직접 선택할 수 있어.”
“아니야! 못 해!”
“왜?”
난 이제껏 살며 이런저런 취객이 많은 곳에서 짬짬이 아르바이트를 한 게 하루 이틀 일이 아니다. 막 이 도시로 이사 온 다음에는 솔직히 배우 일보다 술집에서 일한 날이 더 많았을 거다.
덕분에 말 안 통하는 사람 하나는 정말 이 LA에서 줄 세우면 꽤 앞에 설 만큼 질리도록 만났다고 자신했었는데!
정말이지 그건 바보 같은 자만이었다.
그 별처럼 많은 취객은 지금 눈앞의 이 미친 스펜서한테 대면 아무것도 아니다.
“…나, 나 LA 오는 허락 받으면서 부모님이랑 약속했단 말이야!”
“무슨 약속.”
“왜, 무슨… 로맨틱 코미디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대뜸 ‘우리 결혼했어요!’ 하고 통보하는 일은 절대 없을 거라고!”
“……15년 전에 그런 약속을 하고 왔다고?”
“그래!”
“열일곱 살 때부터 우유부단했었나 보군. 까딱 잘못하면 아무한테나 잡혀서 결혼할 것 같았던 거지.”
가끔은 맞는 말이라서 괜히 더 욱하기도 한다.
내 부모님이 나를 혼자 LA로 보내면서 했던 말은, 좀 더 정확히는 이거였다. ‘이선. 라스베이거스는 가면 안 된다. 알겠지?’….
그래. 가족들은 내가 그 환락의 도시에서 누군가에게 붙잡혀 어? 하는 사이에 단돈 몇백 불을 내고 결혼이라도 할까 봐 진심으로 걱정했었다. 나란 녀석은 워낙 귀가 얇아서 누가 옆에서 살살 꼬시면 밑천까지 다 내놓을 녀석이라고 말이다.
……그런데, 살살 꼬시는 게 아니라 이렇게 ‘미안하면 결혼하든가!’로 나오는 건, 정말 내 잘못이 아니지 않나? 얘가 뻔뻔한 거지!
지금도 그래!
“뭐. 난 아무나가 아니니 드디어 해결된 셈이네. 심지어 공식적으로 인사까지 드린 사이기도 하고.”
“노트북 화상통화가 어떻게 공식이냐?”
“비공식이라고 하기에는 그 정도면 꽤 격식 있었지. 아닌가?”
“…….”
그 격식이 혹시 화상통화 할 때 내 부모님이 입었던 옷을 말하는 거라면… 젠장, 변명할 여지가 없다. 진주 목걸이까지 하셨었다고. 덕분에 잠시 말문이 막혔던 난, 숨이 닿을 정도로 가까이서 나른하게 고개를 기울이는 션을 보며 뒤늦게 확 정신을 차렸다.
은은한 주황색 조명을 머금은 그의 눈이 꼭 반짝이는 구슬이라도 박아 둔 것처럼 반짝였다.
“-션. 내, 내가 널 정말 많이 좋아하지만.”
“좋아만 해?”
“그러니까! 나도 널 정말 많이……, 그, 그으, 왜. 사랑, 해. 사랑하는데!”
으아아악.
말도 안 되는 표정으로 웃지 말라고!
“우, 우리 결혼은 너무 일러. 그것도 감옥에 가네, 마네 하면서 기소까지 된 와중에 무슨 결혼이야!”
꿀이 뚝뚝 떨어질 것만 같은 해사한 미소를 건 교활한 악마가 방법을 바꾸기 시작한다.
“내가 정말 잘할게.”
“하하, 션. 지금도 엄청 잘하고 있기는 해, 그렇지만!”
“결혼하자, …응?”
“너 나 이런 거에 약한 거 알고 이러지!”
“부정은 안 할게.”
날 무릎에 앉힌 채 뒤로 안았던 남자가 내 어깨에 턱을 괴고는 귓가에 대고 간지럽게 속삭인다.
“내가 엉망진창으로 물어 뜯길까 봐 겁이 난다며? …아. 정말 무서운데.”
“…야, 너….”
“그런 끔찍한 시간을 어떻게 ‘혼자서’ 버텨 낸담.”
“아니, 야아! 왜 혼자야?”
“알다시피 난 부모다운 부모도 없고… 그 있으나 마나 한 인간들이 날 얼마나 물어뜯을까. 그렇지 않아도 남자랑 사귄다고 이 갈고 있다는데. 아무하고나 뒹굴다 못해 이제는! …하면서.”
이제껏 내 앞에서 대충 포장이라도 했었던 속내가 이제는 뭐 그냥 물 흐르듯이 나온다.
“……그, 그랬대?”
“그렇다는데. 심지어, 앞으로 무슨 기사라도 나기 시작하면 반대로 그걸 잡고 날 또 여기저기 끌고 다니려고 들 텐데. …이렇게 된 거 아무하고나 결혼시키려고 들 수도 있지. 맙소사. 그 길고 긴 시간을 무슨 핑계로 빠질 수 있을까.”
아…, 아예 불가능한 말은 아닌 거 같기는 하다.
지금도 영화 촬영 중이든 말든 워싱턴까지 1박 2일로 왕복하게 하는 미친 사람들 아닌가. 아니, 그렇다고 결혼하겠다는 건 아니다. 그냥 그렇다고. 아무리 내가 귀가 얇아도 이런 말에 홀랑 넘어가는 바보는 아니다.
“이선. 원한다면 아이스크림 가게로 안 끝내고, 체인이라도 차려 줄게.”
…나, 날 뭐로 보고….
“……체인?”
“체인.”
“체인이…… 몇 개 정도를 말하는 거지. 한 세…, 세 개 이상?”
“당연히 세 개 이상이지.”
콧잔등에 부드럽고 도톰한 입술이 와 닿는다.
나는 그 낯간지러운 키스 덕분에 한발 늦게 정신을 차렸다. 체인 개수는 왜 물어보고 있냐, 이선!
“-야. 너는 이제 내가 대놓고 아이스크림 가게 체인 개수 물어봐도 아무렇지도 않아?”
“내가 먼저 꺼낸 말인데 뭘.”
“왜, 맨날 하는 말 있었잖아. ‘대체 너란 인간 어쩜 그래!’ 해야지. 무슨 당연히 세 개 이상이니 뭐니 하고 있어!”
“난 네 그런 면이 좋아.”
“속물인 게 좋다고?”
“매우 현명하게 세속적이라고 표현을 바꿔 볼까, 자기.”
얼굴 위로 올라가는 피를 다 막고 있다가 한 번에 그 혈류를 확 연 것처럼 갑자기 뺨이 간지럽다.
그런 날 아는지 모르는지, 이 바보 스펜서는 뒤로 안았던 내 몸을 슬쩍 틀어 그의 무릎 위에서 마주 보게끔 했다.
“넌 아이스크림 체인 말고도 내 재산을 다 뜯어 갈 수도 있어, 이선.”
“……나 그렇게까지는 쓰레기 아니야!”
진짜야!
“좀 다른 쪽으로 프러포즈 못 해? 왜 다 돈이야? 너 날 그렇게밖에 안 봐?”
지금 보니 이때부터 약간 방향이 어긋나고 말았던 것 같다. 따지고 보면 ‘결혼은 말도 안 돼!’ 에서 나도 모르게 ‘왜 프러포즈가 그따위니?’로 바뀐 거 아닌가, 빌어먹을! 분명 션은 그 변화를 눈치챘었을 거다.
살짝 헝클어졌던 흑갈색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면서 나른하게 눈웃음치던 그 모습은, 그걸 모르는 사람이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고.
“이선, 너는 날 공식적인 네 편으로 만들 수 있어.”
“-뭐, 뭐어?”
“네가 아프면 가장 먼저 연락이 오는 건 내가 될 거야.”
“…….”
“가끔은 네가 혼자 해야 했던 서명이며 서류 처리를 내가 대신할 수도 있겠지. 내가 내년에도 이 사람이랑 같이 있을까 고민할 필요도 없을 거고, 하고 싶은 게 생기면 뭐든 같이 할 사람을 옆에 두게 될 거야.”
마치 내 안에 있는 찢긴 빈 조각들을 모두 가지고 있었다는 것처럼 숨 쉴 틈도 없이 이어지는 문장들은 달다 못해 무서울 지경이었다.
“네 턱짓 한 번에 무릎 꿇을 거고, 말 한마디에 고개 숙일 거야. 자다가 일어나서 잠꼬대로라도 원하는 걸 말하면 그게 무엇이든 코앞에 가져다줄 거고, 당장 보고 싶다고 말하면 어디에 있든 당장 무릎으로 기어서라도 가겠지.”
차라리 저 올곧게 쏟아지는 말들 사이에 단 한 줌의 장난기라도 있었으면 늘 그랬듯 실실 웃어넘길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 이마에 그의 머리를 살짝 댄 채로 나직하게 이어 가는 목소리는, 이제껏 내가 알던 그 어떤 어휘보다 명확한 프러포즈였다.
덕분에 나는 내 쪽을 똑바로 보는 연인을 마주 보지도 못하다가, 한참 뒤에야 약간 떨리기까지 하는 목소리로 간신히 투덜대기만 했다.
“…노예 계약이라도 한다는 거야, 뭐야.”
“해?”
안 되겠다.
얘를 말릴 방법을 모르겠다.
정말 그렇다. 이렇게 일직선으로 곧장 엑셀을 밟고 달려오는 걸 피해 도망치기에는, 피해 도망칠 구석이라고는 없는 고속도로나 마찬가지다. 불로 치자면 발화지점 따위 의미 없어진 화마나 다름없다고.
나는 “아, 네가 요새는 차 잘 타지도 않는데 돈만 낸다고 투덜댔던 운전자 보험도 더 싸지겠어.” 하고 태평하게 덧붙이는 션의 말을 끊고, 얼른 부실한 소화기를 움켜쥐었다.
“우, 우선. 우리 부모님께- 영상통화로라도 말하자. 어때?”
이건 저번에 션 그가 내 부모님과 노트북으로나마 인사를 했을 때 숨도 제대로 못 쉴 정도로 긴장했던 걸 떠올리며 꺼낸 나름의 얄팍한 임시방책이었다.
하지만, 그땐 그렇게나 귀엽게 바짝 얼었던 션 스펜서는 내가 간신히 찾아낸 도피로 앞에서 묘하게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좋아.”
“와. 무슨 자신감이래? 너 우리 가족들이 완-전 반대할 수도 있거든!”
심지어 내가 애써 코웃음 치며 대꾸한 말에, 그 고운 미간을 잠시 좁히면서 들으란 듯이 중얼거리기까지 했고 말이다!
“……나를?”
아, 좀 다시 짜증이 나려고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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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는 행복해진다.
E는 행복해진다.
E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