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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1
혹시 당신이 이 나라의 혼인 제도가 익숙하지 않다면, 최대한 간단히 설명해 주겠다.
미합중국에서의 혼인 제도란, 물론 주마다 조금씩은 다르지만 혼인 신고 후 24시간이 지난 뒤 반드시 법적 권한을 가진 판사나 목사 앞에서 웨딩 세레모니를 해야 한다.
세레모니라고 해서 대단한 건 없다. 그저 결혼의 신성함과 서로의 믿음에 대해 짤막하게 형식적인 말을 하는 것에 대답하는 게 전부인, 일종의 법적 절차의 하나라고나 할까.
뭐, 그래서 결혼식 본식 주례를 법적 권한이 있는 사람에게 맡기는 일도 있지만, 본식은 따로 하고 세레모니는 카운티나 시 사무소에 딸린 예배당에서 말 그대로 후다닥 끝내고 판사의 사인을 받는 경우가 많다.
애초에 혼인신고서 원본 자체가 그 세레모니까지 한 다음에야 완성되는 거라서 말이다.
그래. 이쯤 되면 내가 왜 이런 설명을 구구절절 하는지 궁금할 거다.
“……이선 스펜서 진짜 완전 구려. 션 박 못잖게 끔찍해.”
“전부터 생각했지만, 역시 성은 각자 쓰는 게 낫겠군.”
“이선이나 션이나, 이름 어감은 비슷한데 왜 이래?”
“빌어먹을. 대체 ‘부모가 태어난 곳’ 같은 걸 왜 물어보는 거지?”
“-뭐? 어디? …진짜네. 나도 우리 부모님 태어난 곳 모르는데.”
어쩔 수 없지 않나.
이렇게 혼인 신고서 신청 양식에 서로의 인적사항을 적으면서 쉼 없이 투덜거리는 중에는 당신에게나마 잡담하고 싶다고.
-아. 내가 믿었던 마지막 소화기, 불길의 최후방어선인 내 가족들은 어떻게 됐냐고?
지금 그걸 질문이라고 하나?
모자와 선글라스로 칭칭 얼굴을 가리고 아침 업무가 열리기 30분 전부터 카운티 오피스 문 앞에 와서 줄 서 있다가, 첫 번째로 혼인 서류를 작성하고 있는 우릴 보며 한 마디쯤 열린 입을 다물지 못하는 저 공무원의 표정을 보고도 정말 그게 궁금한가?
……후우.
우리 아버지 한 30분 우셨다.
정말이지 여기까지만 설명하고 싶다.
한편, 아침부터 구시렁대며 혼인 서류를 작성하고 있는 대책 없는 게이 커플을 얼떨떨한 표정을 감추지 못한 채 거의 ‘구경’하고 있던 공무원은, 조금은 머뭇거림마저 묻어나는 목소리로 슬쩍 도움을 보태 주었다.
“저어. 부모님의 태어난 주는, 국내 출신일 경우에만 적으시면 됩니다.”
“아.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야, 난 안 써도 되겠다.”
“젠장.”
난 션이 어울리지 않게 욕을 중얼거리며 가브리엘 씨에게 문자 하는 걸 보면서 혀를 끌끌 찼다. 확실히 어제 저 남자가 했던 말은 아예 틀린 소리는 아니었다.
어떤 사람들은, 정말이지 이런 순간마저 도움이 안 되는 있으나 마나 한 존재일 수도 있었다. 다행히도 션은 몇 분 뒤 가브리엘 씨가 전해 준 정보를 제 부모님의 공란에 신경질적으로 옮겨 적었다.
빈칸의 정답은 뉴욕과 테네시였다.
“세레모니는 내일 오후 4시가 비어 있는데. 괜찮으신가요?”
“네.”
…정말이지 서류를 내면서도 실감이 안 난다.
너무 대책 없는 거 아니냐고?
그래. 나도 그 지적을 백 번이고 천 번이고 인정한다.
끔찍하리만치 잘 휩쓸리는 성격이기는 했지만, 다른 것도 아니고 혼인신고를 이렇게 라스베이거스에서 취한 채로 하는 실수처럼 ‘어?’ 하는 사이에 할 정도로 막가지는 않는 사람이긴 했다고.
하지만 구치소 독방에 있을 때는 반쯤 정신이 나가서 제대로 짚지 못했던 것들이, 션의 팔을 베고 누워 있을 때면 하나씩 뒤늦은 자각처럼 떠오르더라.
인정해야 한다.
내 보통의 나날은 이미 끝났다.
‘끝날지도 모른다’가 아니다. 이미 끝났다.
발목에는 내가 어딜 가든지 깜박이며 지도를 그리는 GPS 장치가 있고, 검사는 45년간 감옥에서 썩는 유죄 협상을 제안했으며,-차마 아직 부모님에게는 말 못 했다. 내가 마약중독자 친구의 사건에 살짝 휩쓸린 정도로 알고 계시더라-첫 공판일이 다가오면 아마 어찌어찌 막고 있는 내 재판 소식도 온 도시를 들끓게 할 거다.
아니지. 재수 없으면 당장 내일, 아니 오늘 밤에 터져도 놀랍지 않다.
한때 내 인생을 바꿀 잭팟이라 생각했던 영화 촬영은 어떤가?
내가 구치소에 있는 동안 해리엇에게 온 메일을 보면, 주연 배우인 내 체포와 그 혐의의 잔혹함 때문에 멈춘 채로 첫 공판을 ‘우선’ 지켜보겠단다. …미친. 살인으로도 모자라 손해배상 소송까지 같이 걸리게 될 판이다. 심지어 난 차마 그녀에게는 뭐라 말할 용기도, 염치도 안 나서 전화도 못 했다.
쭉 늘어놓고 나니까 진짜 답이라는 게 없지 않나?
망할. 세상 누구라도 이 정도쯤 되면 그나마 수갑 없이 돌아다닐 수 있는 이 보석 석방 기간에 할 수 있는 건 다 해 보자 싶어질걸!
그래서 아침에 카운티 오피스에 가서 서류를 적을 때까지만 해도, “하하, 그래. 까짓거 해, 결혼! 살인 혐의로 재판받는 기사랑 션 스펜서랑 결혼하는 기사랑 같이 뜨면 볼 만하겠네!” 하고, 뭐랄까, 좀 멋대로 굴 수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런 나라도 망설이게 되는 순간이 오기 마련이더라.
* * *
“정말 탁월한 선택이십니다, 스펜서 님!”
“남은 과정도 잘 부탁합니다.”
“하하, 물론입니다!”
나는 푸른 바다가 한눈에 들어오는 한 고급 주택 앞에서 부담스러울 정도로 싱글벙글 웃는 부동산 에이전트를 흘끗 보면서 애써 한숨을 삼켰다.
션은 나와 함께 일찌감치 카운티 사무소에서 혼인신고 서류를 작성하자마자 같이 맛집 데이트를 하고, 그다음은 이곳 팔로스버디스로 왔다.
솔직히 나는 그때까지 그와 트레일러에서 나눴던 잡담 같은 건 떠올리지도 못하고 있었다. 속 답답하니까 드라이브나 할까 싶었지. 그런데 그런 눈치 없는 날 두고, 션 저 남자가 여기 와서 한 일이 뭔지 아는가?
-바로 이 널찍한 3층짜리 주택 계약서에 사인한 거다!
‘아침에 눈 떠서 거실로 나가면 바다가 보이는’ 이 빌어먹을 집을 샀다고. 망할!
부동산 에이전트를 따라 구경하는데, 그렇지 않아도 어제의 부기가 희미하게 남아 있는 눈이 얼마나 뜨끈해졌는지 상상도 못 할 거다. 나는 하얀 건치를 자랑하던 부동산 에이전트가 날듯한 발걸음으로 우릴 두고 가는 걸 확인한 뒤에야 툭 입을 열었다.
“대체 이 집은 언제 본 거야?”
“이선 네가 체포된 그 다음 날.”
“…….”
“말리부는 영 별로라 여기로 골랐어. 마음에 들어?”
……아, 젠장. 나야 ‘아, 몰라. 할 거 다 해 보지 뭐, 씨발’의 상황이라지만!
션 스펜서는 그 근사한 목소리로 변명처럼 덧붙이기까지 시작했다.
“왜. 별로야? 역시 이선 넌 말리부가 마음에 드는 건가?”
“-아니, 아니! 세상 누가 여길 싫어하겠어.”
“지금 쓰는 곳을 팔까도 했는데, 아무래도 거기가 도심이랑은 더 가까우니까…. 그대로 두는 게 좋을 것 같았는데. 넌?”
좋아. 솔직히 말하겠다. 지금 내 마음속에서 소리를 내는 건 양심이라는 녀석이다.
정말 이 순간 내 앞에 담배가 있었으면, 오랜만에 한 대 잡지 않고는 못 배겼을 거라고. 나는 세상 누구도 신경 쓰지 않을 내 말 한마디에 눈에 띄게 안도하는 바보 같은 남자를 보며 속이 턱턱 막혔다.
“왜? 솔직히 말해도 돼, 이선.”
“후우, 그래. 알았어. 솔직하게… 말해 볼게.
봐.
쟤는 심지어 좀 긴장까지 하는 것 같지? 좀 전에 이 근사한 곳을 계약한 주제에!
쏟아지는 햇빛을 받아 말 그대로 반짝반짝하는 남자를 보면서 자꾸 말려 들어가는 혀를 움직이는 건, 정말이지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었다.
“후우, 그러니까, 션, 사실 난…… 손해 보는 게 없어서 오늘 아침까지 에라 모르겠다, 하고 있었거든.”
“뭘?”
“끝까지 들어.”
얘가 아주 조금만 덜 다정하고, 아주 조금만 덜 완벽한 남자였어도 좀 더 뻔뻔하게 굴 수 있었을 텐데. 그러면 늘 그래 왔던 것처럼 입을 다물고 있을 수 있었을 거다.
하지만 난 이제까지 너무 오래- 많은 것을 말하지 않고 삼켜왔다.
그래서 이렇게 날씨는 터무니없이 좋고 뒤로 물러설 곳조차 없는 날 정도는, 특히 내 앞에서 말갛게 눈을 깜박이는 남자 앞에서만큼은 그리 있지도 않은 용기를 긁어모아야 한다고. 제발, 좀!
나는 크게 숨을 삼킨 다음 천천히 말을 이었다.
“-야. 너 정말 백 퍼센트 후회해.”
“……뭐?”
“게다가, 진짜 설마 내가 감옥에라도 가면 어떡하려고 혼인신고부터 하겠다고 그러는 거야?”
이건 내가 벌써 저 끔찍한 협상을 받아들이기라도 하겠다는 소리가 아니다.
대체 자기가 뭐가 아쉽다고 번갯불에 콩 볶아 먹듯 나랑 혼인신고를 곧장 하려고 안달인지 모를 남자가 이제라도 ‘아, 확실히 결혼까지는 너무 갔나?’ 하는 생각을 할까 싶어 던지는 가장 최악의 말일 뿐이다.
-그러니까, 나라면 이 정도 들으면 포기한다, 싶은 거 말이다.
“심지어 유죄 협상이 45년이었다니까? 가석방 받아도 30년이라고. 솔직히… 나한테 유리한 재판이 아닐 거라는 건 뻔하잖아.”
“…….”
그랬다. 난 오늘 온종일 말도 안 되는 일들을 하면서 양심이 따가웠다.
션 스펜서는 내가 첫 연애다.
당연히 첫 연애 상대인 내가 좋아서 미칠 것 같을 거다. …대체 어디에 미칠 구석이 있는지는 차치하고서 말이다. 난 그걸 안다.
그걸 알면서…….
대뜸 혼인 신고부터 하겠다는 애를 내버려 둬도 된다고 생각하나?
빌어먹을. 정말이지 난 아쉬울 게 없다고.
심지어 세레모니 시간을 예약하는 순간마저 이 잘난 스펜서가 내 것이 됐다고 알리고 나면 나와 사귀는 걸 뻔히 알면서도 추파를 던지는 이들이 사라질까, 하는 이기적인 생각을 그 찰나에 했을 정도로 욕심도 많다고!
내가 지금보다 더 나쁜 놈이었으면, 쟤는 정말 나한테 뼛속까지 털렸다. 통장의 마지막 1달러까지 긁어 갔을걸! 나한테 홀딱 반한 저 순진한 도련님은 슬슬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
-물론 션 스펜서는 그걸 꽤 마음에 안 들어 하는 것 같지만 말이다.
이 하늘도, 바다도 끝도 없이 푸른 팔로스버디스의 정경을 뒤로한 연인은 내가 기껏 꺼낸 으름장에 움찔하기는커녕, 따가운 햇볕에 차 안에서 꺼내 끼려고 했던 선글라스를 손에 든 채로 그 짙은 눈썹 하나를 휘기만 한다.
“운 좋게 나한테 무죄가 떨어진다고 해도- 그렇다고 해도, 션. 아마 그쯤 되면 무슨 이야기가 밖에서 나돌지 누가 알아. 어느 누군가는, ‘사실은 쟤도 연관 있을걸’ 하고 수군댈 거고.”
“-그래서?”
입을 꾹 다물고 있던 연인이 드디어 내 말에 대답했다.
“너 그때 가서 후회하면 어떡할 건데?”
모르는 척 안 꺼내려고 했던 말을 기어코 꺼내는 순간의 후련함 같은 건 없었다.
망할. 나 자신이 미래를 함께할 사람으로는 영 좋지 않다는 걸 스스로 인정해야 하는 순간은 퍽 우울하기만 하다고.
대체 내가 뭐라고, 그 최악의 날에 했던 말을 기억하고 있던 바보같이 착한 도련님이 내게 눈이 멀어 무서운 줄도 모르고 서류로 묶이는 것을 입도 벙긋 안 하고 내버려 뒀다간 도저히 두 다리 뻗고 못 잘 거다.
……앞으로 무슨 꼬리표를 달고 살지도 확실하지 않은 주제에 말이다.
그림 같은 풍경을 배경으로 한, 그보다 더 그림 같은 남자의 흑갈색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날린다.
내 말 하나에 기분이 좋아졌다가, 또 나빠졌다가….
그 속이 선명하게 보이던 남자의 생각이 잘 보이지 않기 시작한 건 이때쯤부터였다. 사실 이런 순간에 내 처참한 바닥을 보여 주는 건 그리 좋은 선택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보통 때라면 나는 이 정도에서 대충 말을 흐리는 쪽을 택했다.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들 필요 없잖아, 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앞서 말했다시피 지금의 내겐 소위 또 다른 플랜 B 같은 게 없다.
오늘이 아니면 하지 못할 수도 있는 것에 쫓기고 있는 도망자와 비슷한 처지라는 거다.
나는 뜨끈뜨끈하게 열이 오른 바람을 한 모금 삼키고는 마음속 어딘가에서 처박혀 있던 가장 솔직하고 또 노골적인 내 일부를 감히 내놓기로 마음먹었다.
…최소한 이번에는, 나중에 말 한마디 벙긋하지 않았던 걸 후회하고 싶지 않아서 말이다.
“션. 난 막 울면서 ‘널 위해서 우리 헤어지자.’ 이런 거 못 해.”
“…….”
“더 솔직히 말하면, 너 같은 애가 지금처럼 나 좋다고 쩔쩔매는 이런 운 좋은 상황 같은 거 말릴 생각도 없다고. 오히려 잘됐다 싶어서… 모르는 척 지켜보면 모를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너무 솔직했나?
내가 그런 인간인 걸 어떡하겠어.
느슨하게 고개를 기울인 채 나를 바라보는 연인은, 정말이지 오늘따라 유독 속을 모르겠다. 덕분에 나름대로 기세 좋게 말을 이어 가던 나는 막판에 가서는 영 멋없게 말을 조금 더듬고 말았다.
“-빌어먹을. 원래 첫 연애가 좀 그래, 션. 내 상황이 엄청 엿 같기는 한데 그렇다고 안타까운 마음이랑 착각하면 안 되는 것도 있다고.”
“안타까운 마음?”
“아니, 그게 아니더라도. 어쨌든! 잘 생각해 보라는 거지. 당장 내 처지가 좀… 많이 그래서, ‘아, 결혼이라도 해서 위로해 주자! 그럼 감동하겠지?’ 이런 생각에 휩쓸린 건 아닌지 말이야.”
“…….”
“무, 물론 나도 널… 그…, 사랑해. 진짜 사랑하는데…. 젠장! 그래서 하는 소리야. 솔직히 나 두 번은 안 말릴 거 같다고!”
아마 이건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사랑 고백이 아니었을까?
지나가는 바람 역시 그것에 동의한다는 듯, 거의 양심선언처럼 토해 낸 외침 다음으로 귀를 스치며 지나간다. 션 역시 그 소리를 들었을까?
그는 그 말끔한 미간을 살짝 구긴 채로 나를 노려보듯 눈에 담고 있다.
나는 눈앞의 그 어떤 것보다 푸르른 연인의 시선 앞에서 애써 담담한 척 어깨를 으쓱했다. 션은 한참이나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사실 그때쯤엔, 난 그가 정말로 내 제안을 받아들여 고집스레 오늘 아침부터 작성한 서류를 돌이키고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선. 넌 참 이상한 데서 물러 터졌어.”
한참 뒤에나 혼잣말처럼 흘러나온 목소리는 평소보다 조금 낮은 것도 같고, 쉰 것도 같이 들렸다. 내심 엄청 긴장이라도 하고 있었을까. 나는 웃길 정도로 삐끗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내, 내가 그래?”
“그래. 가끔은 그걸 이용하는 내가 역겨울 정도로, 그래.”
“…….”
“그러니까 주변에 개자식들이 그렇게 많겠지.”
기껏 속 모를 얼굴로 한 게 그런 생각이었다니 다행으로 여겨야 할까.
나는 세상에서 가장 고상한 어조로 흘러나온 과격한 단어에 눈을 몇 번 끔벅였다.
맨날 나한테 말 예쁘게 쓰라고 하던 도련님이 누구신가. 바로 저 깐깐한 션 스펜서다. 심지어 그는 슬쩍 찌푸린 인상을 풀 생각도 없어 보였다.
심지어 션이 말하는 개자식이 누군지도 모르겠다. 내 인생의 개자식들이 어디 한둘이었나.
내심 그가 특정한 개자식이 누군지 슬쩍 묻고 싶기는 했지만, 살짝 속도가 붙은 그의 목소리는 내가 어설피 끼어들 틈도 없었다.
“어제부터 하는 말이지만, 이선 넌 네 걱정 좀 해. 제발 좀 더 이기적으로 굴어.”
“……”
“넌 손해 보는 거 하나 없을 거라고? 아니. 이건 날 위한 거야. 심지어 휩쓸리는 건 너인데 내가-”
대충 받아 주고는 있는데 사실 지금 션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겠다.
아니, 굳이 최악을 가정하자면 언젠가 션 스펜서가 나한테 이혼서류를 들고 와도 하늘을 우러러 마음에 걸릴 것 하나 없이 “거봐. 난 말렸다?” 하려고 기껏 용기 내서 내 인생 최고의 기회에 직접 재를 뿌린 건데.
…어째… 내가 혼나는 거 같지 않나?
하지만 그것에 부루퉁해 하거나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냐며 캐물을 수는 없었다.
그리고 다른 건 몰라도, 지금… 저 남자가 꽤 속상해하고 있는 것 같아서였다. 심지어 언제나처럼 꼿꼿하기 짝이 없는 내 연인은, 스스로 시작한 말을 다 잇기도 전에 혼자 길게 심호흡을 몇 번 하며 입을 다물었다.
그러더니 몇 초 뒤에는 머잖아 언제 그랬냐는 양 멀쩡한 목소리가 됐고 말이다.
“……됐어. 내가 한 말은 잊어.”
대체 이 감정 기복은 뭘까?
딴에 걱정해 주다가 괜히 한 소리 들어 먹은 나는 눈만 데굴데굴 굴리면서 션의 눈치만 봤다.
그러다, 갑자기 한 단어가 머리를 스친 건 막 계약서에 사인한 고급 주택의 벤치에 엉거주춤 앉아서 드문드문 저 멀리 해안 도로로 지나가는 차를 구경하고 있을 때였다. 그건 내가 떠올리고도 설마 싶기는 한 가정이기는 했지만, 한편으로는 저 섬세한 션 스펜서라면 분명 가능성이 없지 않았다.
슬금슬금 눈치를 보던 나는, 혼자 속을 달래듯 입을 다문 남자의 옆으로 딱 붙은 채로 슬쩍 허리를 끌어안았다.
작게 힘이 들어가는 단단한 복근의 물결침이 팔 아래로 전해지는 게 퍽 좋았다.
“션.”
“…….”
“나 여기 진짜 마음에 들어.”
날 안 보고 버틸 것만 같던 남자가 언제부턴가 슬쩍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게 느껴진다.
“진짜…… 더할 나위 없어. 정말 늘 상상만 하던 그런 곳이야. 그러니까, 혹시라도 재판이 다 끝나고도 내가 다시 여길 올 수 있게 되면.”
짧게 심호흡 한 번 하자.
“인심 썼어. 그때 결혼반지는 내가 살게!”
“…난 싼 건 안 끼어.”
“그러니까 전 재산을 다 털어서라도 내가 산다고.”
“그건 좀 궁금하네. 이선 네 전 재산이 얼만데?”
그 무서운 형사들의 빈정거림보다, 날 살인자로 확신하는 검사의 매서운 형량 제안보다 더욱 따끔한 질문이 내 입을 틀어막는다.
어, 얼마 있더라, 나?
…나름대로 야금야금 오래 모으기는 했는데 어째 얘 앞에서 말하기는….
나는 션의 허리를 끌어안은 자세 그대로 입술을 꽉 오므리고 눈만 데굴데굴 굴려서 내 잔고를 셈했다. 내 짓궂은 연인의 입에서 작은 웃음이 터진 건, 이것저것 다 끌어오다 못해 몇 달 전 브랜든에게 빌려주고 나서 잠시 잊고 있던 천 달러까지 떠올렸을 때쯤이었다.
“됐어. 안 궁금해.”
드디어 평소의 션 스펜서다.
다행이다.
역시 일상에서 삐끗하는 건 나만으로도 충분하다. 나는 그제야 실없이 웃으면서 내 커다란 연인에게 장난을 걸었다.
“헤헤. 그래서, 혼전 우울증은 좀 풀렸냐?”
“……뭐?”
“어휴. 언제 풀리나 했네. 아주 그냥 혼자 기분 좋다가, 갑자기 화내다가, 갑자기 없던 감정 기복이 있는 것 같, -아야, 아퍼어!”
억울해 죽겠다. 당신이 봐도 틀린 말은 아닌 거 같지 않나?
이건 어딜 봐도 혼전 우울증인데! 아니 물론, 내 뺨을 쭈우욱 잡아당기고 나서 어울리지도 않게 발을 굴러 성큼성큼 걸어가는 저 커다란 뒷모습이 귀엽기는 한데….
난 그런 션의 뒤를 허둥지둥 쫓아가며 외쳤다.
“자기야, 어디 가니!”
* * *
#. D-0
[션 스펜서랑 이선 박이 카운티 오피스 예배당에서 세레모니했음 WTF]
미쳤다!!
둘이 좀 전에 LA 카운티 오피스에서 웨딩 세레모니 했어.
영화 촬영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어! 찐이래!!! 와아아아아아우.
둘이서 줄 서서 기다리고 나서 얼마 뒤부터 기자며 파파라치며 오고 난리라, 경비까지 붙었어. 하도 정리가 안 되어서 결국 예배당 문 열고 함.
박은 청바지에 운동화 신었던데 스펜서는 혼자 스크린 찢고 나왔더라.
키스도 무슨 진짜…… 엄청 진하게 함. 미친.
기다리는 사람 많아서 빨리 끝나기는 했어. 한 7~8분 걸렸나.
아. 심지어 증인은 데이비드 밀러였어.
근데 증인 서명할 때 표정 완전 썩었던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