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네스 바라노프
…….
…….
…….
이건 꿈인가?
네스 바라노프는 생각했다.
확실히 이건 현실보다는 꿈에 가까운 모양새였다.
창문이 열린 것도 아닌데 아랫집에서 들리는 커다란 노랫소리가 바닥을 진동하게 하고, 그걸 견디지 못한 이웃의 누군가가 욕을 하며 싸운다.
-쾅, 쾅, 쾅, 쾅.
그럴 만도 하다.
중간중간 목을 긁는 절규 같은 외침이 섞인 전자음은, 벽을 통해 건물 전체를 울리기 시작하면서 음악의 위치를 상실했다. 네스 바라노프는 잘 떠지지 않는 눈을 다시 한번 크게 깜박였다.
마치 그렇게 하면 자꾸 시야를 방해하는 붉은 무언가가 사라지기라도 할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뇌를 녹진하게 적셨던 몽롱함이 천천히 그의 몸을 떠나갈수록 점점 선명해지는 바닥의 진동이, 이 모든 것이 꿈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 줬다.
「…….」
네스 바라노프는 잠들었다가, 혹은 기절했다가 깨어난 바닥에서 일어날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로 제가 나뒹구는 현실을 멍하게 눈에 담았다.
약에 취했다.
「마리화나보다도 못하대.」
그 말을 믿었던 걸까? 아니다. 아니라는 걸 알았다.
캐서린의 작은 손에 쥐어진 그 말린 종이를 펼치자마자 알 수 있었다. 어쨌거나 네스 바라노프 그는 중독 회복 모임을 벌써 10년은 더 다닌 남자였다.
저번 주까지만 해도 「약을 끊은 지 오늘로 20일째예요」하던 사람이 그다음 주에 와서는 구석에 앉아 침묵하는 것을 보는 게 두 손가락으로 헤아릴 수 없게 되다 보면 「요즘은」 뭐가 인기를 얻는지 정도는 눈 훤히 꿰게 된다.
최소한 두 개는 섞여 있었다.
…요즘 유행한다는 거네. 빌어먹을 것들.
자극을 확 높인 대신 반감기가 짧다는, 기숙사 샌님들 사이로 퍼지고 있다는 약 정도야 우스웠다.
하여튼 줘도 이딴 걸 주지.
기껏 공짜 약을 주려면 더 제대로 된 걸 줘야지. 무슨 애들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바라노프는 취한 채로 코웃음 쳤었다.
그리고 그 옅은 오만이 네스 바라노프 그가 그나마 온전히 가지고 있는 마지막 기억이었다. 그 뒤로는 마치 꿈을 꾸는 것처럼 뒤죽박죽이다.
쾅, 했던가.
아니면 탕, 했던가? 때로는 그 두 개가 동시에 섞이기도 했을 거다. 그의 기억 일부를 온전히 도려내 버린 악마처럼 말이다.
네스 바라노프는 제 아파트 바닥에 크게 고인 붉은 피가 바닥에서 전해지는 진동에 울리는 것을 넋이 나간 사람처럼 바라보았다.
「……캐시.」
에이브리는 대답하지 않는다.
「캣?」
그녀의 눈은 제대로 감기지도 않은 채로 번쩍 뜨여 있다. 하지만 무엇을 보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생기 있게 반짝이던 눈동자는 정확한 초점을 지니는 것 대신 그저 멍하게 천장을 바라만 보고 있을 뿐이니.
네스 바라노프는 미동조차 하지 않는 그녀를 향해 엉금엉금 기어가기 시작했다. 자꾸 힘이 풀려 늘어지는 기어감 한 번마다, 그의 숨 역시 빨라졌다. 마치 에이브리가 쉬어야 할 숨마저 탐욕스레 그가 쉬겠다는 것처럼.
「캐서린. …캐서린?」
그녀는 아직 따뜻했다.
바라노프는 움직이지 않는 그녀의 몸을 바라보았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일곱…….
17개의 자국이 있다.
이 작은 몸이 난 자국이, 17개다.
그는 그제야 제 친구의 옆에서 나뒹구는 익숙한 권총을 발견했다.
침대 옆 작은 협탁 옆, 세 번째 칸. 저것이 원래 있어야 할 자리다. 크게 삼켰던 숨이 툭툭 끊어지며 흘러나온다. 바라노프는 그 순간 제 손이, 팔이, 몸 전체가 떨리기 시작했다는 걸 깨달았다.
제 얼굴을 타고 흐르는 것을 반사적으로 문지르자, 그 시작은 맑았던 것이 손을 적신 피와 함께 섞여 붉어졌다.
-쾅, 쾅, 쾅, 쾅.
바라노프는 건물을 울리는 굉음에 숨어 길게 절규했다.
제아무리 목이 찢어지는 것 같은 외침이라도 상관없었다. 지금, 건물에 있는 누구도 그의 목소리 따위는 들을 수 없었으니.
살며 이 순간처럼 답을 원한 적 없던 남자의 목소리가 이어지건만, 캐서린 에이브리는 그런 제 친구의 말에 대답하기는커녕 무표정한 얼굴로 지켜보고만 있을 뿐이다.
……그때였다.
대답하지 않는 그녀에게 차마 손가락 하나 대지 못하고 헐떡이던 바라노프의 몸이 크게 튀어 올랐다. 의도했던 것은 아니지만, 덕분에 그는 아직도 뜨끈한 것만 같은 붉은 것 사이에서 몸서리친 꼴이 됐다.
하지만 그 참혹함에 신경 쓸 여력 같은 건 없었다.
아파트 전체를 울리는 굉음 사이에서, 순간 귀에 들어온 낡은 마룻바닥의 소리가….
「…….」
「…….」
-천천히 고개를 돌리는 순간, 눈이 마주쳤다.
네스 바라노프는 저를 멍한 얼굴로 바라보는 남자의 손에서, 긴 종이백이 떨어지는 순간이 유독 느릿느릿하게 보였다. 이내 요란한 소리가 들리며 제가 뒤집어쓴 것과는 다른 진한 붉은 것이 바닥에 번졌다.
「-잠깐만, 제발, 잠깐만! 제발, 제발, …이봐!」
「가…, 가까이 오지 마!」
「아, 알았어. 알았다고. 여기. 봐, 여기 있을게. 제발, 우드.」
「……빌어먹을!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허옇게 질린 브랜든 우드의 외침에 답할 길고 긴 변명이 순간 혀를 스치고 지나갔다.
하지만 바라노프는 그것을 제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다. 「무슨 짓을 한 거냐」는 저 물음에 대한 답은, 사실 단 한 줄이면 끝난다는 것을 누구보다 그가 가장 잘 알고 있어서였다.
-캐서린을, 제 손으로.
「이선은 어디에 있어?! 이 개자식, 너, 이선에게 무슨 짓이라도 했다면!」
「…녀석은, 여기 없어….」
「이선! 여기 있어?! 이선!」
작은 대답이었지만 듣지 못했을 리가 없었는데도 브랜든 우드는 그의 답을 믿지 못한다는 듯 계속해서 목소리를 키웠다. 건물을 울리는 음악 소리 때문에 한껏 목청을 키워 외치는 대화 아닌 대화 역시 갈수록 커졌다.
「녀석은 여기 없다고, 브랜든 우드!」
「거짓말 마, 오늘 밤 내내 그쪽이랑 같이 있을 거라는 전화가 왔었어! …이선!」
「-씨발, 보라고!」
「…….」
「여긴 나와… 캐서린뿐이야!」
피를 흘린 것은 캐서린 에이브리건만 네스 바라노프는 마치 제게 있는 모든 생기를 쏟아 낸 것처럼 창백했다. 그 때문일까, 그렇지 않아도 신경질적인 인상은 더욱 날카로워 보였다.
우드는 그렇게 질릴 만큼 질린 남자의 눈이 기괴할 정도로 빛나는 걸 보면서 천천히 제 주머니에 있는 휴대폰을 움켜쥐었다.
「젠장, 가까이 오지 말라고!」
「아, 알았어. 알았으니까. 우드! 이봐, 잠깐만. 내 말을…… 들어 봐.」
네스 바라노프가 한 걸음 다가서면, 브랜든 우드는 한 걸음 물러섰다. 그때마다 끼이익, 끼이익하고 낡은 마룻바닥이 움직였다.
「…신고… 할 건가?」
「-바라노프, 정말 미쳐 버린 거야, 당신?!」
「흐, 하아, 알아, 알아, 안다고, 알아…, 알아, 아는데!」
「가까이 오지 마. 씨발, 분명히 가까이 오지 말라고 했어! 꺼지라고!」
「--제발!」
건물을 울리는 아래층의 노랫소리가 잠시 멈춘 순간의 고요와 네스 바라노프의 고함이 정확히 맞물리며 방 안을 울렸다. 그 매서움에 우드는 잠시 제 목젖에 걸린 침을 마저 삼키는 것마저도 잊은 채 붉은 피투성이가 된 창백한 남자를 마주 보았다.
바라노프의 덜덜 떨리는 목소리가 천천히 이어졌다.
「이제야…, 기회가, 왔다고.」
「뭐?」
「이봐, 제발. …제발. 우드. 그쪽도 알잖아. 응? …제발.」
「맙소사…….」
「뭐든지 할게. 응? 제발, 제발. 이렇게 부탁할게.」
제가 들은 걸 믿을 수 없다는 듯한 브랜든 우드의 긴 탄식이 터졌다.
바라노프는 저와 눈조차 마주치려고 하지 않는 우드를 보면서 덜덜 떨리는 주먹에 힘을 주었다. 내뱉는 단어 단어에 새겨진 역함에 자꾸 토악질이 올라오는데도, 그걸 맘대로 쏟아 낼 수조차 없었다.
어떡하지?
어떡해야 하지?
머릿속으로 온갖 단어가 떠올랐다가 뭉그러진다.
그 순간이었다. 네스 바라노프의 뇌리로 언제였나 스치듯 들었던 제…… 다른 친구의 목소리가 떠오른 건. 바라노프는 그걸 떠올리자마자 저도 모르게 외치듯 입을 열었다.
아래층에서 다시 음악이 시작된 것도 그와 동시였다.
「-첫 계약금을 모두 당신에게 줄게!」
「…뭐?」
「분명히 적지 않을 거야. 응? 첫 계약금을 모두 그쪽에게 줄게. 우선 지금… 내 통장에 있는 것도 모두 줄게. 무, 물론 이건 많지는 않지만…. 젠장! -이봐. 제발… 나한테 기회를 줘. 응?」
언제였던가.
같이 영화를 보러 가자고 하는 것을 거절한 채 카라반에 함께 누워 빈둥거리던 이선은 이렇게 말했었다. 「요새 브랜든이 좀 힘들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어제 들어온 돈을 곧장 빌려줘서…, 나 다음 주까지는 졸라매야 해. 못 가.」
다시 시작된 빠른 박자만큼 바라노프의 목소리가 빨라진다.
「그다음이 잘 풀린다면, 더…, 더… 줄 수 있을 거야. 정말이야. 그러니까 제발, 기회만 줘. 이번 기회만 나에게 줘. 우드, 제발. 내가, 내가 이렇게 빌게.」
「……이선이, 그러던가?」
「어? 어어, 어!」
사실 이 순간 네스 바라노프는 제가 뭐라 대답했는지도 제대로 자각하지 못했다.
그저 금방이라도 손에 쥔 휴대폰으로 이 모든 것을 알릴 것만 같은 남자의 비위를 맞추려고 미친 사람처럼 헐떡이듯 고개를 끄덕인 게 다였다.
-사실 우드, 그는 바라노프의 코앞까지 다가왔다는 엄청난 기회가 무엇인지… 당사자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요 몇 주 전부터 웬 신인의 시나리오를 두고 대형 케이블 방송국에서 몇 번이나 이야기가 나오는 걸 빈번하게 들어 왔었다. 하지만 당사자인 바라노프 그에게 연락이 가기도 전에 괜한 헛바람을 불어넣기 뭐해서 입을 다물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오늘.
같이 저녁이나 하자며 이선에게 전화를 걸었을 때- 축제 분위기가 따로 없는 세 사람의 목소리를 들으며, 그제야 지지리도 운 없던 네스 바라노프에게 연락이 간 걸 내심 확신하게 됐었다.
…분명 이 늦은 밤의 방문은 그들을 위한 축하주를 큰맘 먹고 사 들고 온 특별한 선물이었어야 했는데….
「……어떻게.」
최소한, 이날의 브랜든 우드는 자신이 내뱉는 문장 앞에서 떨며 입을 열었었다.
「어떻게…… 믿는데, 당신을? 씨발…. 지금 이 상황에서 그딴 말을 어, 어떻게 믿냐고! 언제 날 찾아와서, -저, 저 꼴을, 만들 줄 알고!」
제 손에 피가 묻었다는 걸 잊기라도 했는지 네스 바라노프가 신경질적으로 자신의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지하에서 울리는 음악은 전보다 더 커진 듯이 건물을 울려 대고, 붉은 기운이 만들어 낸 기괴한 기운이 두 사내 사이를 넘실대기 시작했다.
「그, 그래, 우드! -이… 총을 가져가면 되잖아. 내, 내가 그쪽에게 돈을 주지 않으면, 언제든지 이걸 들고 경찰에 찾아가면….」
「그래 봤자 나도 똑같이 살인을 감춘 게 되겠지!」
달음박질한 것도 아닌데 호흡이 거칠어진 그들의 숨이, 이미 모든 것이 멈춘 에이브리에게 단 한 번이라도 닿을 수 있었으면 좋았을 거다.
하지만 브랜든 우드의 시선은 커다란 카펫 위를 붉게 물들인 캐서린 에이브리가 아닌, 바닥에 널브러진 그녀의 가방에서 삐죽 튀어나온 눈에 익은 물건에 고정되었을 뿐이었다.
급하게 숨을 몰아쉬던 바라노프는, 한참 뒤에야 제 목숨줄을 움켜쥔 사내가 보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그건….」
「…….」
「……왜?」
못 박힌 시선이 움직이지 않는 이유를 믿을 수 없다는 듯한 목소리가 어느 때보다 억눌린 채 새어 나왔다.
「…안 돼, 안 돼, 안 돼, 안 돼, 안 돼, …우드, 제발, 이건 내-!」
바라노프의 목소리가 낡은 건물을 울리는 시끄러운 굉음과 뒤섞인다.
누군가가 복도를 낄낄대고 뛰어다니는 소리가 들리는 3월의 밤은, 끔찍하리만치 화창한 날씨였다.
* * *
“아니. 평소에는 그렇게 깔끔한 체하던 놈이… 차 상태 왜 이래?”
“잔소리는! 너처럼 개판으로 하고 사는 놈한테 듣고 싶진 않거든!”
개판이라니. 좀 말이 심하잖아. 게다가 저건 정말 날 모르고 하는 소리다.
브랜든 이상으로 깔끔한 션과 같이 지내면서, 아무리 고용인들이 있다고 해도 양심상 치우는 흉내라도 내기 시작한 지 좀 됐다고. 나는 뭔지 모를 먼지가 붙은 조수석의 문을 인상을 구긴 채 열다가, 정말 혹-시 싶어서 입을 열었다.
“브랜든.”
“뭐, 인마.”
“혹시 나 뒷좌석 앉아도 돼? 계속 앉아 있었더니 다리 좀 펴고 싶은데.”
둥글둥글한 눈을 삐죽하니 세모로 뜨는 게 영 내키는 얼굴은 아니다. 하여간, 녀석은 누가 제 차의 뒷좌석에 앉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알았다고. 그렇지만, 오늘은 뒤나 앞이나 그게 그거로 난장판인데….” 하고 구시렁대면서 다시 조수석으로 몸을 돌리려 했다.
“……오늘만이다, 너.”
“돼? 진짜 돼?”
“이 새끼, 오늘 결혼 안 했으면 허락 안 했다.”
“-컥, 결, 혼….”
거의 다섯 시간 넘게 진행된 조사에 진이 빠진 나는, 10분 안에 끝난 데다가 그 흔한 반지 같은 것도 없어서 잠시 잊기까지 했던 서른둘 인생의 대형 사건을 뒤늦게 떠올렸다.
아니, 그래, 결혼이지.
프러포즈까지 받았고 판사 주례에 그 정도 하객이면 모로 봐도 결혼이 맞기는 하다. 하지만 그걸 꼭…… 다른 사람도 아니고 브랜든 녀석이 콕 집어서 말하니 뭐랄까, 정말 기분이 묘했다.
나는 괜히 크게 헛기침을 하면서 차 뒷좌석의 문을 열었다.
얼른 운동화 끈도 좀 느슨하게 하고, 종일 GPS를 달고 다니느라 살짝 피부가 쓸린 것 같은 왼쪽 발목도 확인해야겠다 싶어서였다.
그런데 이게 웬일이람.
“……브랜든. 너 진짜 무슨 일 있어?”
“뭐.”
“뭐는 무슨 뭐야. 여기 왜….”
“싫으면 앞에 앉든가! 말이 많아.”
“아, 알았어. 이거 대충 옆으로 밀고 앉으면 되는 거지?”
오늘따라 시큰둥한 녀석은 내가 묻는 말에 대답도 않는다.
나는 차의 뒷좌석으로 어영부영 몸을 밀어 넣었다.
솔직히 그러다가 작게 아야, 하고 소리가 나올 뻔하기도 했는데, 왠지 녀석이 영 저기압인 것 같아 겨우 참았다.
지금, 내가 아는 깔끔왕 2위-물론 1위는 션이다- 브랜든 우드의 자동차 뒤편은 그저 좀 지저분하다는 말로 표현이 안 된다.
세차야 바빠서 타이밍을 놓쳤다고 쳐도, 저 녀석이 차 안을…… 이렇게 하고 다니는 건 정말이지 녀석을 알고 지낸 5년간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일이다. 그것도 뽑은 지 그리 오래되지도 않은 차 아닌가.
나는 대충 욱여넣은 엉덩이 밑에 깔린 물건들을 대충 밀어내며 간신히 자리를 만들었다. 이럴 거면 앞에 앉았을 걸 싶은데, 또 지저분하다고 펄쩍 뛰면 기분 상해할 것 같아서 말도 못 하겠다.
……아니, 진짜 무슨 일이람.
턱을 긁적거리며 백미러를 통해 녀석의 얼굴을 흘끗 살폈지만, 브랜든은 평소보다 몇 배는 심드렁한 얼굴로 운전대를 잡고 있을 뿐이었다.
“브랜든.”
“뭐.”
목소리만 들으면 별다를 게 없는데….
나는 턱만 긁적이면서 브랜든의 눈치를 봤다. 녀석은 세상 무던해 보이다가도 종종 꽤 예민해져서, 가끔은 입 밖으로 꺼내지 않는 속내를 짐작해야 한다. 하지만, 정말 오늘은 좀… 속을 종잡기가 힘들다.
우리가 아무리 연락 없이 있다가 만나도 어색한 거 하나 없는 사이라지만….
그래도 온갖 고생 하고 나온 친구한테 유독 쌀쌀맞지 않나. 왜, 못 해도 ‘고생했다, 인마.’ 같은 말 정도는 해 줘도 되는 거 아닌가. 인색하게 굴기는.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브랜든, 이 녀석은 내가…… 캐서린이나 네스, 그리고 헬렌에게 입에 담기도 싫은 짓을 했다는 게 정말 억울한 누명이라는 걸 잘 안다. 애초에 캐서린이 세상을 떠났을 때도 집에 틀어박혀 잠만 자는 나를 매주 중독자 회복 모임에 꼬박꼬박 데려다주고, 데려온 게 녀석이었는데 말이다.
앞 좌석 두 개의 틈에서 빼꼼히 고개를 내놓은 채로 눈만 데굴데굴 굴리던 나는, 브랜든 녀석을 다시 한번 불렀다.
“야.”
이제 브랜든은 백미러로 나를 한 번 흘깃 보기만 할 뿐 대답도 안 해 준다. 분명히 뭔가 이유가 있는데….
“너 혹시 삐졌냐?”
“……뭐?”
앞서 대답했던 ‘뭐’와는 왠지 느낌이 퍽 다른 거 같지.
나는 녀석의 무뚝뚝한 목소리에 잠시 고민하다가, 지금 같은 상황에서 그나마 가장 장난스러운 답을 꺼내 보았다.
“아니. 오늘- 세레모니 말야.”
“…….”
“밀러 감독만 부르고 넌 안 불렀잖아. 혹시 내 역사적인 순간에 증인 서명을 하고 싶었나 해서.”
“지랄하고 있다, 진짜.”
“야. 나름대로 배려한 거라고. 정말이야. 괜히 같이 얼굴 팔려서 돌아다니면 피곤하잖아. 감독님이야 뭐, 길만 걸어도 패션 어쩌고 사이트에 올라오니까 상관없지만….”
브랜든의 차는 오늘따라 흔한 음악 하나도 흐르지 않는다. 나는 왠지 축축 가라앉는 것만 같은 분위기를 띄울까 싶어 계속 주절주절 말을 이었다.
“그런데 나 여기 LA 중앙경찰국에 있는 건 어떻게 알고 왔냐?”
“어제부터 계속 시끄럽게 연락 왔어.”
“아~.”
그러고 보니, 형사가 에이전시에도 쭉 연락했었다는 말을 했던 것도 같다.
뭐. 차라리 잘됐다.
어제 하루, 다른 누구의 방해도 없이 조용했던 덕분에 정말 오랜만에 내 앞에 늘어진 모든 처참한 상황을 잊고 션과 함께 바다만 원 없이 봤다. 뭐랄까. 이 날씨 좋은 LA에서 왠지 오랜만에 가득 햇빛을 받은 것 같은 날이었다.
물론 지금처럼 해가 지고 사방이 컴컴해지고 나면 자꾸…….
헬렌 생각이 나서 속이 울렁거리고 초조해지기는 하지만.
나는 그걸 눈치 빠르고 또 잔소리 많은 브랜든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최대한 거스르지 않게 심호흡한 다음, 쭉 눈치 보며 하지 못했던 가벼운 불평불만을 꺼내 들었다.
“아이 씨, 진짜 뒤에 뭐가 이렇게 많아! …너 무슨 수리공으로 전직이라도 할 거냐? 이게 다 뭐래. 예전에 아르바이트하던 곳 소개라도 해 줘?”
“거기로 굳이 가겠다고 우겨 놓고 말이 많아.”
“당연히 평소처럼 먼지 하나 없을 줄 알았지. 이건 뭐. 쇠 냄새 나서 눕지도 못하겠고….”
“더 심한 곳에서도 잘만 잤으면서 배가 불렀네, 아주.”
-아니 뭐, 그야 그렇다.
하지만 기계용 기름이 칠해진 크고 작은 공구들 옆에 있으려니 왠지 좀 눈이 매운걸.
나는 왠지 따끔따끔한 코를 괜히 훌쩍이고는, 구시렁댔던 것과는 다르게 빈틈으로나마 좀 뻣뻣하게 땅기는 게 담이라도 올 것 같은 다리를 폈다.
어쨌거나 정신없는 하루였다.
……아직은, 션 스펜서와 법적으로, 또 공식적으로 묶이게 됐다는 것도 잘 실감이 안 나고.
나는 전원이 꺼진 까만 휴대폰 액정 위의 흠집을 괜히 손톱 끝으로 긁으면서 고작 몇 시간 안 본 게 다인 내 연인의 얼굴을 그렸다.
그러고 보니 인터넷도 난리일 거다. 차라리 이렇게 휴대폰이 꺼진 게 다행일지도 모른다.
어차피 내 휴대폰 배터리를 빠르게 잡아먹은 이유 중 8할은- 라스베이거스도 아닌 LA에서 펼쳐진 톱스타와의 돌발 혼인 세레모니로 연락이 폭주했기 때문이겠지만, 여하튼 그렇다.
왠지 뒤늦은 피로가 훅 몰려온 나는, 한참을 투덜거린 것이 무색하게 딱딱한 쇳덩어리 공구들 위로도 머리를 잘 받치고 비스듬히 누웠다. 다리를 완전히 쭉 펼 수는 없지만, 이 정도가 어딘가.
긴 하루였다.
살짝 열린 창문 틈새로 스쳐 들어오는 바람 소리만이 차 안의 적막을 달래 줄 뿐이다.
잠깐 그렇게 멍하게 누워 있던 나는, 이번에는 브랜든을 먼저 부르거나 하지 않고 쭉 궁금했던 화제로 곧장 질문을 던졌다.
“내가 바커 씨한테 대신 주라고 했던 선물은…… 잘 전해 준 거 맞아?”
그게 정답이었을까?
하긴. 브랜든도 어제 내내 경찰 쪽에서 온 연락에 시달렸을 텐데.
아니 비단 어제뿐이었겠나. 어쨌거나 에이전시 내의 다른 부서를 거치지 않고, 곧장 전담으로 날 챙겨 주는 녀석인데 모르긴 몰라도 적지 않게 괴롭힘당했을 거다.
나는 이렇게 고생하고 있는데,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션 스펜서와 대놓고 혼인 세레모니니 뭐니 하는 기사나 흩뿌리는 내게 울컥 짜증이 났을 수도 있지. 백번이든 이해한다.
여하튼 브랜든은 이 차에 탄 이후로, 내 물음에 처음으로 날 선 기운 없이 대답해 줬다.
“……왜?”
“아니, 그냥. 만났을 때 아무 말도 없길래. …내가 그날 찾아간 것조차 모르는 것 같아서.”
“네 상황이 그런 한가할 소리 할 때냐?”
“…그야 그렇지만….”
물론, 그 끝까지 혼나지 않았다는 건 아니다.
“선물이 뭐였는데?”
“아. 뭐어. 별거 아냐.”
“뭔데, 인마.”
진짜 별거 아니긴 한데. 나는 작게 덜컹, 하는 도로 위의 유영을 느끼며 잠시 말을 골랐다.
“5년 전에……. 너 따라 에이전시 건물 처음 갔을 때.”
가끔은 떠올리기만 해도 발가락 끝까지 힘이 들어가는 순간이 있기 마련이다. 내게 그 순간은, 처음으로 대형 에이전시를 찾아갔던 순간이다.
사실 그건 일반적인 에이전시 첫 미팅과는 많이 다르다는 걸 나중에 알게 됐지만……. 뭐. 추억에는 그런 게 그리 중요하지 않다.
“바커 씨 사무실에서 먹었던 과자.”
나는 멍하게 차 천장을 바라보면서 말을 이어 갔다.
“…지금 먹어도 맛있긴 한데. 그땐 진짜, 얼결에 한입 무는 순간에 ‘와, 세상에 이렇게 맛있는 과자가 있다고?’ 싶었거든.”
“…….”
“그래서 바커 씨가 나한테 뭐 할 말 있냐고 물어봤을 때 나도 모르게 했던 말이 ‘이 과자 어디 건가요?’였어. 엄청 긴장하고 있었는데, 바커 씨가 그거에 엄청 웃음이 터져서 그때부터 좀 살 만했었어.”
“아주 느긋했네 그래. 다른 사람은 그렇게 속 편하게 만나려야 만날 수도 없는 바커인데.”
“아. 나도 안다고. 그래도 나름…… 우리끼리 추억이 있는 거니까, 싫어하지는 않을 줄 알았지. 아예 기억 못 할지는 몰랐지만.”
참고로 그 과자, 틴 케이스에 담긴 50달러 정도 하는 거라고.
나도 이번에 사면서 손 좀 떨렸다. 혼자 웅얼대며 말을 끝내자, 운전대를 잡은 브랜든이 드디어 낮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우리끼리’?”
“스펜서한테는 비밀이다, 너.”
잘 아시다시피 지구상에서 가장 쿨하게 생겨서는 의외로 그쪽과는 거리가 먼 게 우리 자기 아닌가. 아, 왠지 쭉 기지개 켜고 싶은데 뭉친 걸 제대로 풀지 않고 하면 그대로 담이 올 것 같다.
“이선. 그거 알아?”
“뭐어.”
나른하게 눈을 감은 채로 유독 뻣뻣한 목이며 어깨를 주무르고 있자니, 저쪽에서 브랜든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나는 녀석이 내 한가한 감상을 탓하기라도 할 줄 알았다. 하지만 그 일상적인 어조로 시작된 문장은 내가 이 순간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쪽으로 이어졌다.
“닉 코빗이 깨어났어.”
덕분에 말을 듣고도 곧장 반응이 안 나오더라.
“……정말?!”
“어. 병실 문 앞에서 꼼짝도 안 하던 경호원이 갑자기 허겁지겁 움직이길래 무슨 일인가 했더니, 깨어나서 그렇다더라고. 그 바쁜 의사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뛰어오던데. 션 스펜서라는 이름이 참 대단하긴 대단해. 그렇지.”
“맙소사. 신이시여! 여섯 시간 수술하고 그랬대서, 정말… 큰일 나는 줄 알았다고! 빌어먹을. 정말 다행이다. 와.”
“그러니까 말이야. 다섯 번이나 찔렸는데 누가 살 줄 알았겠냐. 어휴.”
“…뭐라고, -다…, 다섯 번?”
운전대를 잡은 팔뚝만 보이는 브랜든이 살짝 어깨를 으쓱하는 게 보인다.
태평하게 굳은 곳을 주무르고 있던 나는, 손이 닿은 곳부터 쭉 소름이 돋는 것 같아 벌어진 입을 다물지도 못했다.
사실 션은 내가 코빗 형사의 상황을 슬쩍 물을 때마다 자세한 말을 해 주는 걸 피했다.
물론 그걸 이해는 했다. 내가 구치소 있지만 않았어도, 누군가 코빗 형사까지 내가 찔렀다고 우겨도 놀랍지 않을 상황이었으니까.
그런데 이제야- 그가 계속 곤란한 듯 눈썹을 휘면서 “좋은… 연락이 오기를 기도하자고.” 하고 얼버무렸던 이유를 좀 알 것 같다.
다섯 번을…… 찔려?
맙소사. 정말… 다행이다.
횟수로 따지려는 건 아니지만, 갑자기 이 순간 록산느인가 뭔가 했던 검사가 한 말이 떠오른다. 칼로 한 번 찌르는 데 15년을 부를 수 있댔지. 그만큼 끔찍한 걸, 다섯 번을 했단 소리다.
그게 사람이 할 짓이야!
심지어 그런 놈이 당장 멀쩡하게 이 도시를 활보하고 있다는 소리 아닌가. 나는 왠지 속이 안 좋아지는 것 같아 창문을 조금 더 내렸다.
“이선. 그런데 넌 닉 코빗이라는 사람을 언제부터 알고 있었던 거야?”
“……어?”
“알아보니까 그 형사는 바라노프 수사가 시작되고 한 달인가 뒤에 정직당했다고 하거든. 언제 마주칠 일이 있었어?”
“-아. 뭐어….”
이래야 브랜든 우드다.
하여튼 얘한테는 무슨 말을 못 하겠다. 심지어 난 코빗이 정직당한 시기가 언제인지도 몰랐는데. 덕분에 잠시 말문이 턱 막혔던 나는 버벅대며 대답했다.
“어쩌다 보니까. 션네 저택에서도 만나고…. 뭐. 그냥 몇 번 만난 정도야, 나도.”
“몇 번이나? 그 사람이 캐서린 에이브리와 네스 바라노프 사건의 담당 형사라던데. 아냐?”
“그, 그으렇다더라! 그런데 하필 그런 사람이… 그런, 일을 당하다니.”
당신도 알겠지만, 사실 난 이제껏 브랜든에게는 모든 걸 숨겼었다. 내게 션에게 처음 품었던 의심부터 시작해서 괜히 이 사람 저 사람 알아 봤자 좋은 일이 하나도 없다고 생각해서였다. 역시 그 선택은 맞았던 것 같기는 하다.
상황이 이렇게까지 됐는데 나와 가장 가까운 저 녀석을 가만히 뒀겠나.
차라리 아무것도 모르는 게 나았을 거다. 좀 지지고 볶았겠어?
그러니 내가 구치소에 있을 때도 단 한 번 면회 신청을 하러 오지 않고, 내가 나와도… 문자 한 통 없었겠지. 이제야 저 녀석이 왜 이렇게 시큰둥한 저기압인지 잘 알겠다.
……쭉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는 걸 알게 됐구나.
“-하하, 야. 너 나 구치소 가 있는 동안 꽤 바빴겠다, 인마.”
“솔직히 내가 담당하는 사람 중에서 수갑 찬 게 너만 있는 건 아니다만, 살인으로 잡혀간 건 네가 처음이기는 하지.”
변명도 못 하겠다.
나는 왠지 바짝 마르는 입술을 혀로 적시며 브랜든에게 변명할 문장을 찾았다. 아니 대체 어떤 놈이 녀석한테 저렇게 떠들었나. 다니엘은 아닐 거고….
경찰일까?
아니, 아무리 멍청해도 그렇지. 나도 참고인 조사가 어떻게 진행되는지 모르는 게 아닌데, 코빗 그 사람이 캐서린과 네스의 담당 형사였다는 건 그렇다고 쳐도 어떻게 그 평범한 사람한테 사람이…….
칼에 다섯 번이나 찔렸다느니 같은 소리를 해? 미친 게 아닌 이상 말이다.
-아, 빌어먹을. 듣기만 해도 으스스한데!
나는 팔뚝에 돋은 소름을 손으로 휘휘 쓸면서 긴 한숨을 내쉬었다. 다시금 적막에 휩싸인 차 안에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사실 널 위해서 그런 거야.’, ‘혹시 서운했으면 마음 풀래?’….
괜히 다리를 건들거리면서 멍청한 한숨을 삼키고 있자니 마음 한구석에 드는 안도가 조금쯤 역겹다. 하지만 좀 봐주라고. 최소한 내가 형사를 사주해서 찔렀다는 의심 정도는 완전히 떨칠 수 있는 게 어딘가.
그리고 정말 이번에는 닉 코빗, 그 형사와 제대로 이야기를 해 볼 수 있겠지.
그 사람이 캐서린의 담당 형사였고, 그다음에는 네스가 죽자마자 달려갔던 거라면, 뭔가 이유가 있을 거다.
정말, 정말 운이 좋다면.
3년 만에…….
경찰에게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뭐. 정직 중이기는 하지만, 그것도 경찰이라고 쳐 주자. 최소한 나 자신에게는 그렇게 말해 보자.
그것부터 시작하자. 모든 걸 말이다. 왠지 이제 어떻게든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감히, 처음으로 말이다.
우리 30년 동정남은 만에 하나 내가 정말, 정말, 정말…… 재수 없게 되더라도, 가석방이 가능한 30년 정도는 또 기다려 줄 수 있지 않을까. 나는 결혼한 첫날밤을 경찰서에서 보내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냐고 삐죽대던 그의 목소리를 떠올리며 작게 웃었다.
나는 긴 한숨을 내쉬면서 몸을 옆으로 웅크렸다.
그때였다.
의자 아래, 저쪽에서…….
뭔가가 잠깐이나마- 반짝, 했다. 나는 운전대를 잡은 브랜든을 한번 흘끗 바라보고는, 몸을 그대로 한 채로 팔만 쭉 뻗었다. 그건 닿을 듯 말 듯 하며 쉽게 닿지 않더라. 하지만.
--끼이익!
“씨발! 저 개자식은 왜 운전을 저따위로 하는 거야?”
브랜든의 입에서 걸쭉한 욕이 터졌다. 세상에는 운전대를 잡으면 거칠어지는 사람이 적지 않다지만 브랜든 우드는 그들을 일렬로 줄 세우면 확실히 꽤 앞에 서 있을 녀석일 것이다.
그렇지만, 뭐.
사실 내 쪽은 조금 전의 급정거가 꽤 고맙기까지 했다. 덕분에 의자 시트 밑에 있던 ‘이것’을 움켜쥘 수 있었으니 말이다.
긴 금색 줄 끝에 작은 초록색 보석이 달린 펜던트가 어두컴컴한 차 안에 있는 모든 빛을 머금고 빛난다.
“…….”
나는 헬렌의 눈동자 색을 쏙 빼닮은 그것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면서, 난폭한 누군가가 지나간 이후로도 한참이나 욕을 중얼거리는 브랜든을 향해 그게 무슨 대수라는 양 달래는 목소리를 냈다.
“-LA잖냐, 인마. 그게 뭐가 새삼스럽다고.”
장담컨대 그건 꽤…… 그럴듯했다.
* * *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하는 건 무시하자.
그 대신, 내가 깔고 누운 것들을 찬찬히 둘러보는 게 좋겠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구겨진 옷과 대충 먹고 나서 뒤로 던져두면서 오래된 찌꺼기가 눌어붙은 통조림 캔 몇 개다. 텅 빈 물병도 있고, 왠지…… 후텁지근한 날씨에 곰팡이가 떠다니는 것 같은 오렌지 주스도 저 아래에 처박혀 있네.
듣기만 해도 싫다고?
나도 대충 봤을 땐 저런 게 있는 줄 몰랐다고. 게다가, 지금 문제는 저런 것들이 아니지 않나.
……당장 눈앞에 보이는 것만 해도 망치와 스패너다.
바로 발을 넣는 곳 옆에는 크고 작은 니퍼가 있고, 지금 내가 등허리를 비스듬히 베고 있는 커다란 공구함에는 뭐가 들었는지 알고 싶지도 않다.
“창문 좀 더 열게. 답답하네.”
차가 막히지 않아 쌩쌩 달리는 도로를 흘끗 살피니, 우리는 폭이 넓은 4차선 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해가 져서 혹시라도 스쳐 지나갈 푯말까지는 보이지 않았지만, 우선은 이 정도로도…… 충분하다고 할 수 있을 거다.
LAPD 중앙 청사에서 베벌리 힐스로 향하는 길은 2차선이니 말이다.
나는 열린 창문 틈으로 더 시끄럽게 스치며 들어오는 바람 소리에 한숨을 감췄다. 피곤한 척 딴청을 피우고 있자 백미러로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진다. 마주 보고 있지는 않지만, 브랜든은 분명히 이쪽을 보고 있다.
-분명히 막 차를 타고 나서 몇 분은…… 맞는 방향으로 가고 있었는데.
이쪽 도로를 타기 시작했다면 갈 수 있는 곳은 어딜까?
빌어먹을! 누군가 내게 “넌 대체 왜 이렇게 길치야?”라고 물을 때마다 길치인 게 죄냐며 소리를 높였었는데, 덕분에 할 말이 없어지게 생겼다.
선택을 해야 한다.
하지만, 어느 쪽이 맞는지 잘 모르겠다. 나는 손에 쥔 헬렌의 펜던트를 만지작거리면서 자꾸 침착한 생각을 방해하는 시끄러운 심장을 누른 채로 입을 열었다.
“야, 브랜든. 너무 뭐라 하지 마. 아무리 내가 속 편해 보여도, 생각보다 그렇게 막 느긋하지는 않았어.”
“교도소도 아니고 구치소에서 바쁠 게 뭐가 있어? 일이라도 시키든?”
“검사가 찾아와서 유죄 협상까지 하라고 했다고! 유죄 협상, 영화에서만 보던 그거!”
“유죄 협상?”
속으로는 아무리 떨려도 멀쩡한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십여 년을 훈련한 보람이 있다. 하지만 아쉬운 게 아예 없는 건 아니다.
“뭐라던?”
이쪽이 멀쩡한 척할 수 있다 보니, 상대 역시 마찬가지일 거라는 불길한 상상이 자꾸 들거든. 나는 브랜든이 내 얼굴을 볼 수 없도록 여전히 뒷좌석에 몸을 비스듬히 해 누운 채로 말을 이었다.
“총으로 쏘는 거 한 번, 칼로 찌르는 거에 한 번에 각각 15년씩이라고 하더라고.”
“…….”
“그래서 뭐라더라. 200년까지 부를 수 있으니까, 그냥 45년형으로 자백하고 합의 보자는 거야. 아니 합의도 할 게 있어야 하지. 안 그래?”
브랜든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 대신 열린 창문으로 들어오는 바람 소리가 조금 더 커졌을 뿐이다.
나는 그 덕분에 그 몇 초간 머릿속을 미친 듯이 꽉 채웠던 고민을, 선택을 끝냈다. ‘브랜든. 이거 뭐야? 이게 왜 여기 있어?’ 하는 순진한 질문보다는…… 휴대폰도 켤 수 없고, 뒷좌석도 이 모양인데 더더욱 뭐가 있을지 모를 저 앞의 불안을 믿기로 한 거다.
세상에 쉽게 믿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걸 앞서 알려 준 친구가 있어 다행이다. 그리고, 일찍이 ‘나를 찾는 법’을 써먹은 내 연인도 빼놓을 수는 없겠다.
완전히 헛발질하는 것일 수도 있다. 나도 안다.
이번에는 열두 시간 조사를 받을지도 모르고, 검사가 이걸로 꼬투리를 잡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뭐 하냐?”
“어, 잠깐 신발 끈이 풀렸길래.”
쭉 속도를 내 달리던 차가 휙 코너를 꺾는다.
빌어먹을, 대체 내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건가 하는 생각과 달음박질치는 심장 소리가 함께 뒤섞인다.
하지만 이내…… 차가 멈추는 순간에는, 그런 한가한 생각을 할 만한 여유조차 남지 않았다.
왜, 그런 게 있어. 그런 게 있다고.
집 밖을 나가면 하늘에 해가 훤히 떠 있는데도 왠지 으스스한 느낌이 드는 동네에서 오래 살다 보면 이상한 직감 같은 게 생긴다. 초저녁도 아니고 겨우 오후 다섯 시쯤 됐는데도 왠지 저 위의 창문 어디선가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있는 것 같은 곳에서 20년 이상은 살아 보라고.
그럼 당신도 이렇게 될걸.
머릿속에서 온갖 목소리가 떠돈다.
‘이 병실 문 앞에서 꼼짝도 안 하던 경호원이 갑자기…’
‘션 스펜서라는 이름이 참 대단하긴 대단해’.
‘……그러니까 말이야. 다섯 번이나 찔렀는데 누가 살 줄 알았겠냐’.
브랜든의 한숨 소리가 들린다. 입술이 바짝 마르고, 혓바늘이 돋아난 듯 까끌까끌하다.
녀석이 차 문을 열고 나간다. 이쪽으로 한 바퀴 빙글 돌아 걸어오는 소리가 들린다. 그래 봤자 몇 초다.
뚜벅, 뚜벅, 뚜벅.
나는 그 소리에 맞춰 미친 사람처럼 속으로 중얼거렸다.
빨리, 빨리, 빨리!
“이선?”
“잠깐만. 거의 다 했어.”
“…….”
--빨리!
내 옆쪽의 차 문이 열린다.
어둠 속에서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곧장 꽂힌다. 차라리 지금이라도 “뭐 하냐고, 인마.” 하면서 웃었으면 좋겠는데.
“그대로 멈추고….”
“…….”
“손 올려.”
……어째 분위기가 그렇지만은 않지?
입술을 열면 그 밖으로 심장이 튀어나올 것만 같다.
나는 천천히 푹 숙였던 허리를 일으켰다. 물론 브랜든의 말처럼, 얌전히, 얌전히… 손을 올리면서 말이다.
흐린 가로등 빛에 걸쳐 보이는 녀석은 이제껏 본 적 없는 무뚝뚝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속을 알 수 없는 눈이 내 손에 있는 것에 고정된다.
“그건 뭐야?”
“-뭐겠어. 우리 자기한테 줄 선물이지.”
“…….”
“어, 목걸이긴 하지만… 꽤 괜찮잖아. 한두 번쯤 감으면 팔목에 할 수 있지 않을까?”
나름 가볍게 던진 장난이었건만, 브랜든은 그걸 받아 주는 것 대신 차 문을 더욱 활짝 열었다.
나는 헬렌의 펜던트를 다시 움켜쥐면서 그걸 든 손이 떨리지 않기를 바랐다.
어둠 속에서 보이는 회색 시멘트 바닥만 봐도 이곳이 로데오 드라이브를 끼고 있는 휘황찬란한 동네가 아닌 건 잘 알겠다.
나는 그제야 목적지를 알 수 없던 이 드라이브가 어디에서 멈췄는지 눈치챘다.
“…뭐야. 갑자기 너까지 추억 여행하고 싶어졌어?”
“내려.”
긴 공원 옆의 공터. 이곳은 나와 브랜든 우드가 5년 전 처음 만났던 곳이다. 한창 내가 궁지에 몰렸던 때 살던 동네이기도 하다. 난 입꼬리에 힘을 주어 올린 채로 괜히 크게 기지개를 켜며 차에서 내렸다.
“인마. 갑자기 여긴 왜 온 거야?”
“…….”
“아니, 뭐 감상 떠는 건 좋은데 오늘은 좀 날이….”
나는 애써 가볍게 이어 가던 말을 채 다 잇지도 못했다.
그 문장을 다 잇기도 전에 브랜든이 세게 닫은 차 문 때문이었다. 그 덕분에 인적이라고는 찾을 수 없는 길이 덩달아 같이 울린 것 같았다.
몇 시일까?
경찰서에서도 너무 오래 있었고 휴대폰도 보지 못해서 시간 감각이 사라진 머릿속이 의미 없는 숫자를 나열한다.
밤 11시쯤 됐을까? 자정은 아닌 것 같은데.
혹시, 늦은 밤 약을 사고파는 누군가라도 이 근처에 있으면 좋겠다. 아니면 주차된 차의 유리창을 부수는 강도라도 말이다. 솔직히 이 근방은 사소한 도둑질이나 싸움이 하루가 머다고 일어나는 곳인데.
나는 하늘에 맹세컨대, 태어나 처음으로 이 늦은 밤 그들과 마주치고 싶어졌다.
그늘 속에서 표정이 잘 보이지 않는 친구보다야 차라리 그쪽이 더 나을 것 같다니, 내가 생각해도 우울한 발상이다. 어둠 속에서 목소리가 들린다.
“네 중얼거리는 연기를 코앞에서 본 게 5년이야. 5년이라고, 이선. 꽤 잘하기는 했는데, 나한테 그러면 안 되지.”
“……뭘?”
“-그거.”
브랜든이 뭘 향해 턱짓하는지 정확히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바보가 아닌 이상 알 수 있지. 녀석이 가리키는 건 이 어두운 밤에서도 흐린 빛을 모두 머금고 반짝이는 펜던트다.
“그래, 그거, 그거, 그거.”
“…….”
“네가 지금 들고 있는 거. 그거 말이야. -나한테 물어봤었던 건 기억 안 나? ‘브랜드은, 헬렌한테 줄 선물을 고르고 있어. 너는 목걸이가 나아, 팔찌가 나아?’”
내가 저렇게 나사 하나 풀린 멍청이처럼 말하던가.
‘도저히 믿을 수 없어.’, ‘아냐. 거짓말일 거야. 브랜든, 왜 그러는 거야.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너’….
보통의 달짝지근한 이야기 속 주인공들은 이 순간 이런 외침을 토해 낼 거다. 하지만 걱정하지 않아도 좋다. 나는 그 절망을 3년부터 시작한 터라 이 순간 그들보다 좀 더 나은 반응을 할 수 있을 거다.
…아마도….
자신은 못하지만.
브랜든이 어둠에서 나온다. 눈이 마주친 그의 표정이 꼭 마지막으로 봤던 네스와 비슷한 것처럼 보이는 건 내 상황이 극한에 몰려서만은 아닐 거다.
“아무것도 모르는 척 구는 건 오늘은 안 되지. …뭐, 씨발. 총으로 쏘는 거 한 번, 칼로 찌르는 거 한 번에 각각 15년?”
“…….”
같은 일이 한 번 더 반복되는 걸까?
네스가 캐서린의 죽음에 입 다물라고 했던 그날처럼, 이번에는 브랜든이…….
네스를?
그리고 헬렌을?
저 녀석은 이유를 말해 줄까. 네스는 내가 묻고 소리쳐도 대답 대신 그저 입 다물고 살라는 말만 반복했을 뿐이었는데, 불행인지 다행인지 이제 난 그걸 걱정할 필요가 없어졌다. ‘왜’라는 질문보다 더 먼저 해야 할 말이 있으니.
나는 내 얼굴을 뚫어지라 바라보는 브랜든을 마주 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헬렌 물건이 여기 왜 있어?”
“그건 또 어디서 찾은 거야. 뒷좌석? 아니면 시트 틈새? 그걸 줍기라도 했나 봐? 빌어먹을, 별 지랄을 다 떨더니….”
“브랜든 우드!”
“씨발! 어디서 뒈져 있거나 하겠지!”
브랜든의 날 선 목소리가 귀를 찌른다.
“아직도 그 한심한- 정신 나간 미친 할매 걱정을 하다니. 맙소사. 넌 정말 빌어먹을 정도로 한결같네!”
어디서 뒈져 있거나 하겠지.
어디서 뒈져 있거나… 하겠지.
그건 ‘죽었다’라든가, ‘죽였어’가 아니다.
“살아…… 있어?”
“그 좆 같은 형사보다 몇 번이나 더 찔렀으니 죽었겠지! 그년이 살았으면 뭐가 걱정이었겠어, 씨발! 그런 정신병자 사이코 말을 누가 믿느냐고, 젠장… 젠장, 젠장!”
이어지는 빠른 욕의 뜻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차라리 그년이 살고, 그놈이 죽어야 했는데.’
한동안 거칠어진 숨을 삭이던 친구의 익숙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먼저 걸어.”
“…….”
“걸으라고. 산책하면서 이야기해도 되잖아? 너도 그 바라노프처럼 총을 봐도 눈 하나 깜박 안 하는 성격이라면 모르지만. 아니잖아? -걸어. 걸으라고!”
나는 브랜든의 손이 자신의 허리 뒤로 가는 걸 보며 천천히 몸을 돌렸다.
내 운동화가 바닥에 쓸리는 소리가 앞선 다음 익숙한 구두 소리가 이어진다. 아주 멀리서 누군가 이 늦은 밤 경적을 울리며 거칠게 차를 모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목덜미의 솜털이 곤두설 정도로 주변의 모든 소리에 신경을 집중한 채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브랜든.”
그 교차하는 발소리 사이에 자연스럽게 끼어드는 건 어렵지 않았다.
“네가 캐서린을 죽인 거야?”
“-씨발. …뭐?”
바로 뒤에 녀석이 있다는 걸 알지만, 나란히 걷는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흐리고 탁한 가로등 몇 개만이 어둠 속에서 깜박일 뿐이다.
“아닌가 보네.”
“…….”
“그럼 캐서린은 네스가 죽인 게 맞구나.”
“…뭐야. 이제 너까지 그 사이코 할매처럼- 어떻게 머리가 돌아 버리기라도 한 거냐, 그래?”
감히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담담하게 흘러나온 목소리가 나 역시도 이상한데, 브랜든에게는 어떻게 들렸을지는 굳이 고민할 필요도 없는 일이다. 그걸 증명이라도 하듯 등 뒤에서 짜증을 한 움큼 섞은 물음이 나를 찔렀다.
나는 녀석의 말을 느릿느릿 받았다.
“왜?”
“…….”
“내가 너무 생각보다 멀쩡해서? 브랜든 네가 아는 이선은 이런 상황에서 벌벌 떨면서 ‘브랜든, 왜 그러는 거야. 그러지 마.’ 하고 울기라도 해야 하는데 안 그래?”
아마 지금쯤 브랜든 우드는 나를 앞장서게 한 걸 조금 후회하면서 내 뒤통수를 노려보고 있을 거다. 심장이 귀 옆으로 가서 붙은 것처럼 시끄럽게 뛴다.
……아직은 그걸 브랜든이 눈치채서는 안 된다.
“그냥 너도…… 3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같은 생각을 하면 나처럼 될걸, 브랜든.”
“…무슨 생각?”
“정말 네스가 캐시를 그렇게 한 걸까? 네스한테서 캐서린이랑 같은 마약이 나왔다는데. 그 모든 게 약 때문이었을까. 내가 그날 혼자- 나만, 나만 혼자 도망치는 게 아니었는데. 그 생각을 끔찍하리만치 많이 해 보라고. 이 정도야 우습지.”
차에서 내린 이후 몇 분이나 흘렀을까?
한참이나 흐른 것 같다가도, 사실은 그건 내 단순한 희망 사항 같기도 하다.
나는 브랜든이 “저기 옆으로 꺾어.” 하고 무뚝뚝한 목소리로 날 이끄는 걸 순순히 앞서 따르면서, 이 늦은 밤의 산책에 침묵이 흐르지 않도록 노력했다. 가면 갈수록 이름 모를 누군가 이 늦은 밤 약을 하고 있을 것 같은 길로 가는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할지, 불행으로 여겨야 할지 모르겠다.
“그럼 캐서린을 죽인 건 역시 네스였어?”
“그래.”
브랜든은 이제야 정답을 말했다는 듯 내 말에 전보다 나은 말투로 대답했다. 나는 그런 녀석을 가만히 두지 않았다. 브랜든 우드는 수다쟁이라, 자꾸 말을 할 기회를 주는 걸 좋아한다. 특히 그가 주인공이 되는 쪽이면 더더욱.
“-그럼 브랜든 너는?”
“…….”
“이것 봐. 지금 입 다물어 봤자 무슨 소용이야? 어차피 닉 코빗도 깨어났다며. 그 형사는 정말 죽이려고 해도 안 죽을걸. 아마 눈 뜨자마자 자길 이 꼴로 만든 사람의 이름을-”
“씨발, 닥쳐!”
분명히 등 뒤에서 뭔가 철컥하는 소리가 들렸다.
……살살 건드리는 건 좋은데 선은 넘지 않도록 노력해야겠다. 나도 이런 상황은 처음이라 조금 서툴렀다. 심지어 이 부분에서만큼은 브랜든이 나보다 좀 더 나은 것 같다.
“그래, 네스 바라노프, 그 새끼도 꼭 너처럼 입이 살아서 마지막까지 헬렌, 헬렌, 주절거리더니. 마지막까지 둘 다 똑같군! 하여간 쓰레기들이란.”
“그럼 내 나이프는 뭐야?”
“뭐?”
“브랜든 네가 아파트에 그 빌어먹을 총이랑 같이 가져다 둔 내 잭나이프. 3년간이나 안 보이다가 튀어나온 그거.”
찍찍 바닥을 긁는 내 운동화 밑창이 듣기 싫은 소음을 낸다. 나는 운동화 앞코를 노려보며 연인에게조차 입 밖으로 내지 못했던 끔찍한 가정을 처음으로 꺼내기 시작했다.
“캐시는 총에 열일곱 발이나 맞았다고 했었어. 나이프가 쓰인 건… 이미 죽은 상태에서 쓴 거라고도 했고, 3년 전에 형사들은 그게 무슨 변태 살인마의 자기만족용, 뭐 그런 거라도 되는 듯 말했었는데.”
“…….”
“하지만, 아니잖아. 그냥 총으로 죽였으면 끝인데 괜히 쓸데없는 수고를 더한 것일 뿐이지. …차라리 그때 나한테 바로 뒤집어씌웠으면 몰라. 그것도 아니고.”
아직도 그 뜨거운 햇살이 쏟아지던 날이 생생한데, 돌아오는 반응은 등 뒤에서 들리는 헛웃음뿐이다. 나는 퍽 힘주어 말을 이었다.
“--대체 왜?”
“보험이었지.”
“보험?”
“그래.”
묘하게 익숙한 단어다.
나는 그 단어를 들은 순간을 머릿속으로 초조하게 되짚었다. 다행히도 아예 죽은 건 아니었던 내 기억력은, 머잖아 그 순간을 찾아냈다.
헬렌이다.
헬렌이 말했었다.
내 아파트를 방공호처럼 꾸미고 있던 헬렌이…, 침실 문으로 눈 하나만 바짝 붙여 드러낸 채로 그랬었다. ‘그 총’을 찾아야 한다면서, ‘그걸로 얼마나 해먹었는데. 아주 비싼 보험 같은 거라고’…….
-아. 빌어먹을.
그렇다면, 그날 헬렌이 말했던 ‘지금 여기 있냐’고 물었던 사람은 션이 아니라 주차장에 있던 브랜든이었던 걸까.
이미 늦어도 한참은 늦었을 회상에 이를 악물고 있으려니 등 뒤에서 옅은 웃음소리가 섞인 목소리가 이어진다.
“하, 하하, -그 빌어먹을 친구라는 단어를 다 떼고 보면 말이야. 너라면 사이코 할매랑 붙어사는 약쟁이 말을 믿을 수 있겠어? 다른 것도 아니고 사람을 반쯤 걸레짝으로 만든 걸 묻어 주는데. 나까지 끌고 들어갈지도 모르는 걸 어떻게 알고? 그러니 나도….”
모든 게 다 거슬린다. 브랜든이 입에 담은 ‘걸레짝’이라는 단어와 헬렌이 말했던 ‘비싼 보험’이 머릿속에서 멋대로 뒤엉킨다.
나는 브랜든의 말을 툭 자르고 들어갔다.
“협박이라도 했어?”
“뭐?”
“사이코 할매랑 붙어사는 약쟁이 말을 믿을 수 없어서. 그래서- 날 걸고 협박이라도 했냐고.”
대답 대신 옅게 낄낄대는 목소리가 귀에 걸린다.
그건 어떤 친절한 대답보다 정확한 설명이나 다름없었다.
총을 쏜 건 네스다.
역시, 네스였다. 네스가…… 캐서린을 죽였다.
3년간 지겨울 정도로 끊임없이 이어져 왔던 끔찍한 생각이 드디어 하나 맞았다.
하지만 다른 것도, 아니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것도 하나 생겼다.
그날 밤, 나이프를 든 건…….
왠지 어떻게 할 수 없는 일렁임이 속을 멋대로 할퀸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브랜든처럼 손에 총을 쥐기는커녕 그 흔한 휴대폰조차 없고, 날 이 수렁으로 끌고 오는 데 제법 든든하게 일조한 잭나이프 비슷한 것도 없다.
이 순간, 내 손에 있는 건 헬렌의 펜던트가 전부다.
작은 페리도트가 붙은 금색 목걸이 하나가 다라고!
침착하자. 침착해야 한다.
그리고 생각하자. 브랜든은 5년을 함께 보내며 나를 꿰고 있다고 생각할 거다. 그래. 아예 틀린 건 아니다. ……반대 역시 마찬가지이니 말이다.
나는 목구멍까지 치밀어 오른 거친 단어들 대신 브랜든처럼 웃는 쪽을 택했다.
“-뭐. 이렇게 된 거 다 좋은데….”
녀석이 나를 잘 알듯이, 나도 녀석의 지난 5년을 잘 안다.
게다가 저 새끼가…… 손에 쥔 저걸 쏘지 않을 정도로만 건드리면서 시간을 끌어야 하기도 하다.
“브랜든 우드. 부탁이니 돈 때문이었다고만 하지 말자.”
“…….”
“난 개인적으로는 숨겨진 가족이나 불륜 같은 게 더 마음에 들거든. 돈은, 그건 내가 떠올릴 수 있는 이유 중에서 가장 후지고-, ……윽!”
불시에 등을 걷어차인 나는 그대로 시멘트 바닥을 뒹굴었다.
총을 쏘게 하지는 않았는데, 걷던 등을 발로 걷어찰 정도는 되었나 보다.
길게 긁힌 팔에 훅 쓰라린 통증이 올라온다. 하지만 그보다 더 내 신경을 잡아채는 건, 바닥에 뒹구는 꼴이나마 마주 보게 된 브랜든이 손에 쥔 작고 검은 총구가 이쪽을 똑바로 향하고 있는 거다.
“-하, 하하, 씨발, 뭐? 뭐라고? 사람이 몇 명쯤 죽어서 아무도 안 사는 집이나 골라 다니면서 살던 새끼가, 펍에서 일하면서 에이전시 사람들한테 술이나 서빙 하던 새끼가, 뭐? 빌어먹을 네 잘난 애인한테 뒤 좀 대 주고 나니까 너까지 뭐라도 된 거 같아? 그래?”
주택가에서 몇 블록 떨어진 탓일까.
전에 본 적 없는 얼굴을 한 친구의 목소리가 더욱 커진 채로 터져 나온다. 나는 이 순간 나올 리 없다고 생각했던 ‘내 빌어먹을 잘난 애인’의 이름 앞에서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이 침묵을 뭐라 해석했는지 모를 브랜든의 목소리가 더욱 커졌다.
“자고 일어나니까 머리 옆에 벌레가 죽어 누워 있는 아침의 그…… 끔찍함을 몰라? 있는 모든 잔고를 긁어모아서 집세를 내고 나면, 당장- 밤늦게 마트에 가서 할인 스티커가 몇 개나 붙은 싸구려 빵조차 살 돈이 없을 때의 그 막막함을, 그걸 몰라?”
“…….”
“산더미처럼 쌓이는 고지서는? 아! 직장으로 사람이 찾아온 적은 없으니, 홈리스들 사이에 숨어 자면 그만이던가? 하하, 하, 이선, 이봐, 이선! 다른 새끼라면 몰라도, 네가 감히, 네가 감히 나한테-”
“그런 끔찍하게 감상적인 말을 하기 전에 최소한 나한테 한 짓은 제외하고 생각해 보라고, 브랜든 우드!”
나는 브랜든이 그의 손에 쥐어진 총의 방아쇠를 금방이라도 당길 듯이 겨누는 것을 보며 덩달아 큰 소리로 받아쳤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갈수록 근사해지던 브랜든의 집과 반년에 한 번씩은 바뀌던 자동차며, 심심하면 새로 채워지던 온갖 기계들의 새것 냄새도 함께 아른댄다.
그게.
겨우 그게…….
“넌 죽은 캐서린을 칼로 찌르고, 네스를 총으로 쏴 죽이고, 헬렌과 코빗에게마저 칼을 휘둘렀어. 백번 양보해서 처음에는 날 팔아서 협박하려고 그랬다고 쳐도- 그다음은 다 뭔데?”
낮 동안의 열을 머금고 있는 듯이 뜨끈한 시멘트 바닥에 주저앉아 소리치는 꼴이 그리 멋져 보이지는 않으리라는 걸 잘 안다.
그렇지만 지금 내겐 몇 분 아니, 제발 몇 분으로 끝나길 바라는 시간이 더 필요하다.
그걸 위해서는 브랜든 우드가 내게 정신이 팔려야만 했고 말이다. 그 작전 아닌 작전은 최소한 지금까지는 퍽 성공적이었다.
“그것도 돈 때문이야? 그런 거 같아? 차라리 사람 하나 죽이고 나니까 눈에 뵈는 게 없다고 솔직해지지 그래!”
“-맙소사. 이선. 드디어 멍청한 척하는 걸 그만두기로 한 건가? 이걸 션 스펜서가 못 보다니 아쉽네. 네 그…… 역겨울 정도로 근사한 ‘자기’는 널 그저 순진하게만 보고 애달파 어쩔 줄 몰라 하던걸!”
-하지만, 젠장.
어떻게든 그럴듯하게 말을 이어 가다가도 지금 이곳에 없는 연인의 이야기가 나오기만 하면…… 자꾸 혀가 뻣뻣하게 굳고 마는 건 정말 어쩔 도리가 없는 일이었다.
무서운 것일지도 모르겠다.
아니. 무섭다. 당장 저 총구가 나를 향하는 것보다도 브랜든의 입에 그의 이름이 나오는 것만으로도 뒷목이 뻣뻣해질 만큼 덜컥 겁이 난다.
끔찍하리만큼 눈치 빠른 브랜든 우드가 그걸 짚어 내지 못할 리 없었다.
녀석은 겨우 그 순간의 침묵 속에서 션 스펜서가 화제로 올라올 때마다 어찌할 바 몰라 하는 나를 간파했다는 듯 작게 헛웃음 쳤다.
“이선. 네가 구치소에 처박혀 있을 때… 스펜서, 그 새끼가 아주 잘난 척 훈계를 했었지.”
차라리 날 비웃고 조롱했으면 최소한 놀랍지는 않았을 거다.
하지만, 브랜든은 션의 이름 앞에서 쩔쩔매는 나를 보며 왠지…… 이제까지와는 다른 부류의 동요를 감추지 못했다.
덕분에 나는 긴장감이라고는 없는 조금쯤 삐끗한 목소리로 물었다.
“…뭐?”
“스펜서 그 새끼가 말이야, 왜 이선 너에게 캐스팅 선택권을 줄 수 없었느냐느니, 아니면 주기 싫었던 거 아니냐느니 하면서…. 아주 날 가르치시던데?”
“…….”
“뭐라더라, 나를 보고 인종차별주의자라더군. 내가 네 삶의 방식을 멋대로 만들었다나? 정말 웃긴 일이지! 솔직히, 그땐 그 새끼를 더 살살 꾀어서 입을 열게 해야 했으니까 가만히 있었는데…… 씨발! 어디 억울해서 참을 수가 있어야지!”
이 순간, 션 스펜서가 미친 듯이 보고 싶기도 하고 지금만큼은 절대 보고 싶지 않기도 하다. 브랜든은 순간 멍하게 표정이 풀린 나를 내려다보며 악다구니를 쓰듯 외쳤다.
“사실 너도 다 알았잖아! 다 알면서 가만히 하란 대로 하면서 멍청하게 웃었잖아, 이선!”
“…….”
“정말 그걸 인정해 버리면 에이전시에도 더 못 있을 게 뻔하니까. 네 그 빌어먹을…… 모임 친구들도 없이, 정말 아무도 없이 혼자 남으니까. 뻔하지! 그래서 다니엘 바커가 네 손끝만 닿아도 좋아 죽는 걸 모른 척한 거 아니었나? 아, 아니네. 모른 척한 것보다는….”
브랜든 우드와 나는 서로를 너무 잘 안다.
정말이지, 끔찍할 정도로.
“넌 그래서 다니엘 바커를 안 믿었던 거지. 절-대-로.”
“…….”
“그러니 그가 쩔쩔매며 네 주위를 맴돌고 저녁마다 데이트 신청을 해도, 그게 호감으로 이어질 거라고는 감히 생각 못 했잖아. 아냐? -보라고. 너도 우릴 이용했어, 이선!”
‘우리’.
브랜든의 ‘우리’는 누구를 말하는 걸까?
“그렇네. 이선. 네 말이 맞아. 이 모든 건 돈 때문이 아니야. 어떻게 돈 때문이겠어?”
“…….”
“너 때문이지!”
큰 목소리를 쭉 내는 데 익숙하지 않은 걸까. 브랜든의 목소리는 벌써 반쯤은 쉬어 있었다.
“어차피 대단히 챙길 자존심 따위도 없는 주제에, 그냥- 다니엘 바커가 너한테 끔벅 죽는 거, 대충 알면서도 속으면 됐잖아! 응? 너만……, 빌어먹을, 너만 아니었어도, 오늘, 여기까지 오지는 않았어!”
“…혼자 고생한 척하지 마, 브랜든.”
“뭐?”
“바커가 귀찮게 떠맡긴 이선 박과 친하게 지내느라 고생 많다며 에이전시 사람들이 치켜세워주는 거 좋아했었잖아.”
나는 브랜든이 들이민 총구를 바라보면서 녀석의 말을 받았다.
“-그런데, 나랑 같이 붙어 다니면서 바커와 독대하는 시간이 늘어서… 더 빨리 승진했다는 건 아무도 모르지? 근사한 에이전시에 다니는 백인인 내가, 가난하고 자리 못 잡은 아시안 무명 배우를 편견 없이 ‘키우는’ 것 같아 뿌듯해했었으면서.”
“…….”
“회복 모임 후원자도 그래. …원래는 서로 같은 인종끼리 많이 하는 거, 내 옆에 서서 마치 난 그런 건 신경조차 안 쓴다는 것처럼 신사 흉내 내는 걸 크리스티나가 보고….”
“그 이름 입에 담지 마, 씨발!”
아무리 세상이 불합리하다지만 이건 좀 억울하다.
총을 쥔 쪽이 하란 대로 다 해야 하는 건 나도 아는데, 자기는 션 스펜서의 이름에 대고 이 새끼, 저 새끼 하며 별소리를 다 해 놓고 나는 크리스티나를 입에 올리지도 못하다니. 하지만 그저 서러워할 필요는 없다.
……이 우연히 던진 돌은, 그저 헛발질만은 아니었으니.
“에이전시 건물로 션 스펜서가 처음 찾아온 날 얼마나 떨렸는지 모를걸, 이선. 그가 날 알아보나 싶어서 손까지 내밀었는데.”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는 걸 깜박했다는 듯한 브랜든의 얼굴 가득 떠오른 웃음기는 보아하니 내게 못 해도 몇 분의 여유는 더 줄 것 같다. 그 화제가 내가 아닌… 션이라는 게 죽을 만큼 거슬리는 것만 빼고는, 그리 나쁘지만은 않을 거다.
“…알아봐?”
“오. 맙소사. 이선. 아무래도 네 그 ‘자기’가 아무 말 안 한 모양이네.”
브랜든의 고개가 비뚤게 기울어진다.
나는 그 순간 녀석이 꼭 삐걱거리며 움직이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다른 건 어떻게든 버틸 수 있는데, 저 녀석이 션의 이야기를 하는 것만큼은 너무 싫었다.
그건 아마 이 도시에서 내가 사랑한 사람을 다 앗아 간 사내가, 이제 단 하나 남은…… 나보다 소중한 것을 입에 담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자, 두려움일 거다.
녀석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션 스펜서는 말이야. 이선.”
“…….”
“바라노프가 죽던 날 밤, 스펜서는 그 저택의 복도 구석에서 나를 만났었어. 뭐.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내가 바닥에 웅크린 채로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는 그 대단한 남자를 내려다봤었지.”
CCTV 영상을 앞에 두고 어찌할 바 몰라 하면서 초조해하던 션이 떠오른다.
반짝이던 석양을 가득 머금었던 푸른 눈은 어땠나?
언제나 흔들림 하나 없이 든든하기만 남자가 나와 시선조차 제대로 마주하지 못하고 쩔쩔맸었다. 간신히 내 손을 잡고 나서야 진정하던 모습도 뒤따른다. 또…….
그렇게 쭉 이어 가던 내 생각의 연쇄를 끊은 건, “둘이서 침대에서 뒹굴면서 그 얘기는 안 하던가?” 하고 낄낄대는 브랜든의 웃음소리였다.
“분명히 총성도 들었고, 내가 자기 뒤에 있다는 걸 알면서도- 어째 그 대단하다는 션 스펜서가 덜덜 떨면서 아예 돌아보지도 못하는 거야, 이선. 그땐 씨발, 그 션 스펜서가 무슨…… 비밀스러운 지병이라도 있는 줄 알았거든?”
“…….”
“그런데 그게 아예 틀린 건 아닌 모양이더라고.”
이 순간 울컥하고 뒤늦은 화가 치솟는 걸 그 착하고 근사한 연인이 안다면 꽤 속상해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촬영장에서 촬영하다가 갑자기 쓰러졌다는 거야. 뭐더라, 그게 무슨…… 사격신이었다고. 그걸 내가 듣고 정말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말이야.”
“…….”
“-이봐, 이선. 혹시, 네 ‘자기야’는 이걸 꽤 무서워하시나? …그래?”
하지만 손에 쥔 총을 쥐고 흔들며 장난치듯 웃는 브랜든을 보고 있자니 이 와중에도 마음속 어느 한구석이 문드러지는 것만 같다.
진짜 바보야?
네스와 싸우며 나를 향한 독설을 퍼부은 것으로도 귀 끝까지 벌겋게 익은 채로 울려고 했으면서. 혼자서. 그렇게 쭉 혼자서…….
맨날 그렇게.
“너 다음에는 다시 그 잘난 척하는 스펜서를 찾아가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은데. 아주 나만 보면 네 얘기를 하면서 끔벅 죽거든. …씨발. 그렇게 덜덜 떨던 새끼가 잘난 척 어쩌고저쩌고할 땐 얼마나-”
“닥쳐.”
저 엉망으로 쉬고 거칠어진 목소리가 신이 나서 빨라지는 걸 더 듣고 있으면 이 귀가 썩어 문드러질지도 모른다.
아마 이 정도는 당신 역시 동의할 거다.
“그래서 네가 그래서 도박장에 갈 때마다 크리스티나 몰래 그렇게 돈을 꼴아 박고도 건져오는 거 하나 없었던 거야. 등신아.”
“뭐?”
“그 위에 붙은 걸 언제쯤 쓸래. 그리고 걔는 잘난 척하는 게 아니라 잘난 거지. 그거 하나 못 알아보는데 무슨 에이전시 중간관리자네, 뭐네…. 뒤에 총을 든 네가 있는 걸 뻔히 알면서 덜덜 떨면서 모르는 척 안 돌아봤다고? -그게 뭐?”
“…….”
“꺼져. 그런 상황에서 너나 돌아보지그래. 그다음에 네 살찐 목 위에 붙은, 그 있으나 마나 한 걸 총으로 떼 버리든가. 그럼 최소한 혈액순환은 잘되겠어.”
-하지만 이 정도까지 오면 아마 당신은 나를 거하게 탓하고 싶어질지도 모르겠다.
‘상대는 총을 들었다고!’ 하며 이미 비명을 질렀을지도 모르고, 아니, 이미 뻣뻣해진 뒷목을 잡은 채로 ‘대체 왜 저러는데!’ 하며 여느 영화의 간이 배 밖으로 나온 주인공들과 마찬가지인 나를 향해 욕을 시작했을지도 모른다는 걸 잘 안다.
“…하, 하하. 이선…. 뭐야. 너야말로 이제 완전히 미쳐 버린 거 같은데.”
비틀비틀 일어서는 나를 향해 총구를 겨눈 브랜든 우드 역시 당신과 별반 다를 것 없는 반응을 보이고 말이다.
하지만…… 귀를 기울여 보길 바란다.
그럼 미친 듯이 뛰는 내 심장 소리 말고 다른 것이 들리기 시작할 거다.
좀 더 고개를 든 다음에 저 먼 하늘을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다. 그렇게 하면, 제 쩌렁쩌렁한 목소리에 취한 브랜든 우드가 아직 듣고, 보지 못한 것을 당신은 먼저 볼 수 있을 거다.
“브랜든. 사방에 칼이나 쑤시고 다니던 너는 몰랐겠지만… 내 보석 석방의 조건은 두 개였어.”
“……뭐?”
“당연히 조건이 있겠지. 아무리 40만 달러를 보석금으로 걸었어도 미친 살인마를 그냥 놔줬겠냐?”
조금 전까지 마치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것처럼 총을 흔들며 웃던 브랜든의 얼굴이 기묘할 정도로 텅 비기 시작한다.
나는 그런 녀석을 똑똑히 바라보면서 말을 이었다.
하지만 브랜든은 내 말을 끝까지 들을 생각이 없어 보인다. 드디어 내 마이크가 잡음 없이 제대로 켜진 순간인데 조금 아쉽게 됐다.
“LA 카운티에서 벗어나지 말 것. 그리고 또-.”
“…씨발. 저거, 설마….”
“24시간 GPS 기계를 착용하고 있을 것.”
지금 내 친구였던 사내는 하늘 저편에서 거창한 조명을 켠 채 이쪽으로 점차 가까워지는 헬기를 보고 있다. 공원 건너편 멀리에서 요란하게 깜박이는 붉고 파란빛이 가까워지는 건 아직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지만,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다.
나는 헬기가 우리 쪽으로 가까워지기를 기꺼이 기다리며, 저 소음이 내 목소리를 빼앗기 전에 마지막 배려를 전하기로 했다.
필사적으로 시간을 끈 보람을 이럴 때 누려야 하지 않겠나.
“차에서 네 물건 몇 개를 빌려서 그 기계의 끈을 잘랐어, 브랜든. 왜, 너도 알다시피 모임 사람들이 GPS 한두 번 차 본 위인들이 아니잖아? 누가 웃으면서 그러더라고. 기계를 강제로 절단하면, 곧장 모니터하는 쪽으로 경보가 간다나.”
“…….”
“생각해 봐, 브랜든.”
등줄기로 식은땀이 쭉 흐른다.
“사람을 죽이고, 늙은 노인을 행방불명으로 만들고, 형사를 칼로 다섯 번이나 찌르도록 사주한 미친 사이코패스가 도망치면 다들 얼마나 놀라 달려오겠어?”
“씨발! 너, 너, 이선, 이 씨발, 네가 어떻게-”
“난 절대 못 죽어. ……안 죽어.”
코앞까지 가까워진 총 앞에서 꺼내는 말로는 너무 희망적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건 내가 살면서 내뱉은 몇 안 되는 용감한 선언이라는 걸 알아줬으면 한다.
“네스한테 이미 두 발 쐈으니 못해도 30년에, 노인 하나는 행방불명. 거기에 형사를 칼로 쑤시기까지 했으니 넌 형량 협상을 해도 암담할걸. 독방에서 줄곧 썩다가 시체로 나오고 싶지 않거든 머리 잘 굴리는 게 좋을 거야, 브랜든.”
“너만 아니었어도!”
헬기의 소리가 바로 머리 위까지 가까워지자 그 요란한 소음에 브랜든의 목소리가 뭉개져 들린다. 어두운 밤을 가르는 눈부신 조명이 꼭 연극 무대 위의 스포트라이트처럼 머리 위로 쏟아졌다.
긴 그림자가 진다.
나는 바닥에 늘어진 그 검은 것을 내려다보며, 눈에 새길 듯이 반복했던 CCTV 영상 속 그 찰나를 겹쳐 보았다.
“이선, 너만 아니었어도, 나는…… 평범하게 살 수 있었어!”
아무래도 브랜든은 발성 연습을 조금 더 해야겠다.
저렇게 악다구니를 쓰면서 외치는데도 겨우 이 정도로 들리다니, 문제가 적잖다.
“5년 전 널 여기서 처음 만나지만 않았더라도! 씨발, 너 같은 거, 고작 너 같은 거 때문에 내 인생이 꼬였어! 알아?! 너만 아니었어도! 나도 처음에는 그러지 않았어. 애초에 너만 아니었으면 그날 밤 난, 그 미친 짓을 하지도 않았을 거고, 그랬으면 난 지금…!”
“-내 탓 하지 마.”
날 보라고. 그래도 15년 경력이 허투루 쌓은 건 아닌지, 이 소란에서도 브랜든은 내 목소리를 확실히 알아들은 표정이다.
아. 맙소사.
둥그렇게 진을 만든 채로 브랜든 우드의 이름을 외치며 달려오는 사람들 너머로, 저쪽에서…… 주변 이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남자가 있다. 션 스펜서다. 나는 순간 그쪽으로 시선을 빼앗긴 채 눈을 깜박이는 몇 초마저 아까워했다.
헐떡이며 숨을 몰아쉬는 브랜든의 총구가 정확히 이쪽을 향한다.
아쉽지만 이런 빌어먹을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단 하나다.
“난 최소한 술집에서 나한테 처음으로 코카인 줬던 사람 원망은 그만뒀어.”
…바로 시끄러운 헬기 소리와 뒤섞인 경찰의 경고음에 속에서, 지금 이 순간이 마지막 대사가 되지 않기를 기도하는 것 말이다.
--타앙!
* * *
#.??? 그날 밤, 네스 바라노프
「…아, 씨. 할멈. 안 자고 깨어 있다는 거 뻔히 알거든. 전화 받아놓고 말 안 하는 건 뭔데?」
네스 바라노프는 제 전화를 곧장 받아 놓고도 말 한마디 없는 상대를 향해 작게 구시렁댔다. 스마트폰형 선불폰이 넘쳐나기 시작한 요즘 같은 때, 바라노프의 손에 들린 건 정말 단순하기 짝이 없는 모델이었다.
대놓고 포장지에 ‘시니어용’ 같은 게 적힌, 딱 기본만 하는 것 말이다.
하지만 이 고작 8시간 통화할 수 있는 20달러도 되지 않는 선불폰은, 네스 바라노프가 매주 꼬박꼬박 사는 물건 중 하나였다.
할멈이라는 애칭으로 부른 상대인 헬렌 워커가 제게 전화를 거는 상대가 자신과 같은 선불폰을 쓰지 않으면 절대 번호를 알려 주지 않는 기인이었기 때문이다.
바라노프는 정확히 얼마가 날지 모를 몇십 년의 나이 차에도 누구보다 친한 친구가 된 노부인에게 이제는 「대체 왜 그렇게 귀찮게 살아?」 하고 따질 의욕조차 잃었다. 아마도 한평생을 이렇게 지낸 고집 센 친구를 바꾸는 것보다 제가 적응하는 게 더 빨랐다.
「밖에 비바람 엄청 부는데…. 차고는 멀쩡하나 해서 전화했어. 막 폐차 부품이라도 날아다니는 거 아니야? 제발 나오지 말고 카라반에 있어요, 헬렌. 알았지?」
빠른 속도로 줄줄 쏟아지는 쇳소리 섞인 목소리는 그 까칠한 말투와는 달리 걱정이 뚝뚝 묻어났다. 네스 바라노프의 이런 점 때문에, 회복 모임 사람들은 암암리에 그를 ‘그랜마 보이’ 같은 별명으로 부르고는 했다.
바라노프는 자신을 그런 별명으로 부르는 걸 어쩌다 들을 때마다 「뭐, 이 새끼야?」 하고 삐죽대기는 했지만, 사실 저 자신도 그 표현이 아예 틀린 것만은 아니라는 걸 잘 알기는 했다.
「후우우. 헬렌.」
오늘 밤만 봐도 그렇다.
성인 남자가 고작 8시간짜리 선불폰을 붙잡고, 대답조차 하지 않는 헬렌 워커에게 무작정 혼잣말이나 다름없는 투정을 늘어놓는 건 솔직히 누가 봐도 그랜마 보이의 정석이기는 했다.
「한심한 말이라는 거 알아. 그런데….」
하지만, 오늘은 좀 예외를 둬도 될 거다.
「있잖아, ……씨발. 솔직히 나 요새 좀 무섭다?」
밖으로는 거센 폭풍우가 몰아치고 널찍한 저택을 몇 번이나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천둥 번개가 귀를 때리는 밤이라면 그 어떤 냉혈한이라도 자신과 가까운 사람에게 어리광을 부리고 싶어질 거다.
그 입 거친 네스 바라노프 역시 예외가 아니다.
「요 몇 년간 내가 하고 싶은 건 다 해 봤어. 할멈은 상상도 못 할걸. 알면 또 ‘하여튼 이 한심한 새끼!’하고 욕할 정도로 별별 쓸데없는 짓 다 했어. 정말 약 빼고는 다 했다고.」
「…….」
「그런데, 이렇게까지 했는데……. 아직도 좀 무섭네. 젠장….」
대답이 없기는 했지만, 저 너머로 노인의 숨소리가 들리는 걸 뻔히 알기에 외롭지는 않았다. 바라노프는 다리를 덜덜 떨면서 조금은 두서없는 혼잣말 같은 중얼거림을 이어 갔다.
「…자수하면…, 후우우, 이미 난 무죄판결까지 받았는데 자수하는 거라 끽해야 10년 정도 부를 거 같대. 얌전히만 잘 지내면 가석방 대상도 될 거고. 그럼……. -씨, 망할. 그 정도는 살고 나와야지 않겠어.」
「…….」
「빌어먹을. 그래도…… 감옥에는 별별 놈이 다 있다니까. 어떻게 문신이라도 하고 들어갈까? 아오, 젠장. 이 얘기는 그만하자, 할멈. 정말 좆같네.」
바라노프는 이미 차갑게 식은 뱅쇼를 크게 몇 모금 들이켰다. 머리가 영 몽롱한 것이 아무래도 이번에 찾아온 감기 기운은 영 심상치 않은 것 같았다.
하지만 이런 날일수록 평소에는 낯간지러워서 다 하지 못했던 속말을 하기 딱 좋다.
이런 폭풍우와 천둥 번개에 숨어서라면, 더더욱.
「혹시…… 이 영화를 거절하면 어떡하지?」
「…….」
「걔는 대체 내가 얼마나 역겨울까. 알아. 아는데…. 그래도, …후우…, 시도는 해 봐야겠지. 젠장. 솔직히 감옥 가는 것보다 이게 더 떨리는 것 같기도 해. 사실 이것도 존나 배부른 소리야. ……나 조금 전도 이 영화에 걔 못 앉힌다는 새끼랑 대판 싸웠거든.」
「…….」
「--아, 썅! 대체 이선 걔는 왜 주변에 멀쩡한 새끼가 하나도 없는 거야!」
솔직히, 바라노프는 제가 신경질적으로 토해 낸 이 문장이 얼마나 위선적인지 잘 안다.
그 ‘멀쩡하지 않은 새끼’ 중 가장 앞에 서 있을 제가 이런 걱정을 하는 게…… 제가 지옥 속으로 밀어 넣었을 친구에게 얼마나 역겨운 것일지도 안다.
그는 혼자 남은 제 친구를 조용히 지켜봤다.
그 햇살 뜨거웠던 장례식장의 그날부터. 쭉.
이선, 그가 아파트에 처박힌 채로 몇 달이나 오디션은커녕 그 좋아하는 영화관 근처도 가지 않는 것도, 간신히 하는 일이라고는 일주일에 한 번 모임에 참석하는 게 전부인 것도 봤다.
……그래도 몇 달이 지나고 나자 많이 나아졌나 싶기도 했었다.
완전히 세상의 모든 것에서 단절되기를 바라는 것처럼 굴었던 이선은, 어느 날부터 발길을 끊었던 오디션에 얼굴을 비치기 시작했다. 제대로 된 음식을 먹으면서 운동도 다시 시작했고, 얼핏 보면 주변 사람들과 잘 어울리는 것 같기도 했다.
잠시나마 다행이다 싶었다. 정말 제가 말한 대로 다 잘 잊고 지내는구나, 안도했었다.
하지만…….
혼자 남은 친구가 자신이 쏟아 낸 저주 속에 살아가는 걸 깨닫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자신이 들어가 있는 게 비뚤어진 울타리라는 걸 뻔히 알 남자가 그것에서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으니까. 마치 다니엘 바커와 브랜든 우드의 기대와 관심에서 벗어나면 안 된다는 것처럼 그들의 뜻대로 제 인생을 소모하기 시작했으니까.
……바보 같을 정도로 사람을 믿던, 그래서 더욱 좋았던 선하디선한 어떤 부분이 정말 돌이킬 수 없게 짓이겨진 걸 모르기에는 함께 웃고 떠들며 내일을 꿈꿨던 밤이 너무 길고 많았다.
「우선…. 이 영화에 확실히 캐스팅 되게 할 거야.」
「…….」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유명해지고 봐야 하지 않겠어? 빌어먹을. 유명해지기까지는 어렵더라도 최소한… 얼굴도장은 제대로 될 거야. 후우, 그럼 방송국 사람들한테도 슬슬 귀띔할 수 있겠지. …빌어먹을 해커니, 닌자니 하는 거 말고 다른-.」
이 얼마 안 되는 통화 중에 한숨을 몇 번이나 쉬었을 바라노프의 움직임이 뚝 멈춘 건 그때였다.
유독 귀가 밝은 그는, 창문을 때리는 빗소리 속에서도 정원 복도와 곧장 연결된 내실 구석의 문고리가 돌아가는 소리를 분명히 들었다.
「젠장. 안 가고 다시 왔나 보네. 새끼.」
「…….」
「헬렌. 끊지 말고 있어 봐. 아마 스펜서일 거야. 그 새끼가 얼마나 재수 없는지, 할멈도 들어 보라고. ……아니다. 스펜서 알긴 알아? 션 스펜서라고.」
바라노프는 제가 말해 놓고도 퍽 우스운 물음에 영 피곤하고 늘어졌던 오늘 밤 처음으로 흐린 웃음을 흘렸다.
알 리가 없지.
이선이 나온 영화도 보는 건지, 마는 건지 모를 할멈인데.
팔다리가 축 처지고 무겁다. 아무래도 오늘은 션 스펜서와 캐스팅을 두고 티격태격할 상태는 아닌 게 분명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둘 다 바닥까지 보인 거 이왕이면 어떻게든 끝장을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진짜 끝까지 싫다고 그러면 무릎이라도 꿇고 빌자.
……션 스펜서, 그 반지르르한 도련님은 그러면 진짜 넘어올지도 모른다니까.
바라노프는 속으로 못된 확신을 하면서 어느새 바닥을 보이는 머그잔을 내려 뒀다. ‘이번에는 정말 말 좀 잘하자, 멍청아.’ 하는 자책도 조금쯤 했다.
하지만, 이 자정이 넘은 시간의 방문객은 아직 떠나지 않은 션 스펜서가 아니었다.
그걸 확인한 네스 바라노프의 입에서는 그 자신도 자각하지 못했던 얼빠진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뭐야?」
「…….」
「만나자고 한 건 오늘이 아니잖아. 당신이 이 시간에 여긴 왜-.」
「‘이제 돌려받고 싶어’는 문자가 무슨 뜻인지 알아야 할 것 같아서 말이야.」
내실 전체를 번쩍 밝히는 번개가 내리친 후, 머잖아 저 자신의 숨소리마저 감출 정도로 요란한 천둥이 뒤따랐다. 바라노프는 저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사내의 무표정한 얼굴 앞에서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 긴장을 눈치채기라도 한 걸까.
검은 레인코트를 뒤집어쓰고 있던 상대가 낮게 웃었다.
「멋대로 시작하더니, 이제는 멋대로 끝내시겠다? 왜, 마지막 목표이던 이 저택을 사고 나니 이제 다 됐다 싶던가? 아쉬울 거 하나 없이 즐겼다 싶어졌어? 그거 한 번…… 더럽게 부럽군.」
「-들어와.」
네스 바라노프는 제가 모르는 척 테이블 위에 올려 뒀던 검은 선불폰을 소파의 쿠션 뒤로 슬쩍 숨기면서 말을 이었다.
생각보다는 조금은 이르지만, 이쪽 역시 부딪쳐야 할 산이었으니.
「우선, 들어와서 이야기하자고. …우드.」
끔찍하게 늦었지만, 하나씩 해결하면 될 거다.
하나씩 천천히 바로잡으면…….
네스 바라노프는, 그날 밤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