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logue
세상에 쉬운 일은 하나도 없다.
정말이지 뻔하디뻔한 말이다. 심지어, 훈계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은 입에 담아 봤을 당연한 진리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렇게 오래된 격언에는 다 이유가 있기 마련이다. 제아무리 당연한 것이라도 직접 겪어 보고 나서야 몸소 깨닫는, 나 같은 사람이 줄어들지 않고서야 저 흔한 말은 앞으로도 계속 그 생명을 잃지 않을 거다.
“솔직히,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한때, 중독자 회복 모임에 꼬박꼬박 출석했다면 그 누구라도 쉽게 주절댈 수 있다고 자신했던 자기 고백을 두고 바짝 얼어 말을 고르고 있는 이 한심한 모습을 보라지.
열 명도 되지 않는 청중 앞에서 자꾸만 목이 먹먹해진 나는, 마이크 앞이라는 것도 잊고 목을 가다듬었다가 “죄송합니다.” 하고 사과했다.
……빌어먹을.
정말 생각보다 훨씬, 훨-씬 어렵다니까!
“여기에 서 있는 저를 보고 내심 미친 거 아니냐고 혀를 차고 계실지도 모르고, 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보자, 하고 팔짱을 끼고 계신 분도 있겠죠.”
나는 저쪽에서 눈이 마주친 내 연인을 너무 오랫동안 바라보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괜히 시선을 크게 한 번 돌렸다.
작디작은 교회 내부는 겨우 그 가벼운 눈짓만으로도 한 번에 다 들어왔다.
좀 더 정확히는 내 말을 듣는 그 몇 안 되는 사람들의 표정 하나하나가 선명하게 새겨지기까지 하는 것 같았다.
나는 그들을 보며 크게 숨을 삼킨 채로 말을 이었다.
“솔직히 저도…… 제가 하는 말이 얼마나 위로가 될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
“녀석과 함께했던 몇 년을… 저는 아마 앞으로 평생 잊을 수 없을 겁니다.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말이에요. 참 별거 아닌 말을 간신히 한다 싶을 수도 있지만… 쭉 기억한다는 건 생각보다 쉬운 일만은 아니더라고요. 참 볼품없는 경험담입니다만.”
마이크가 아니었다면 마지막에 가서는 거의 혼잣말에 가까운 중얼거림이 채 전해지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삼켰던 숨을 내뱉으며 가까스로 마지막 문장을 함께 토해 냈다.
“-어쨌거나 녀석은 제 후원자였으니까요.
브랜든 우드가 죽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은 모두 죽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끔찍했던 몇 년을 살면서도 단 한 번도 코앞에서 누군가 죽는 걸 본 적은 없었는데.
나는 가히 인생을 뒤흔들었다고 회고해도 좋을 그날의 마무리를 가까운……. 아니, 최소한 가깝다고 믿었던 친구의 죽음으로 끝냈다.
그리고 오늘.
사우스 LA의 체포 작전이니, 할리우드의 신성 작가를 죽음으로 몰고 간 사이코패스니 뭐니 하면서 쉼 없이 뉴스에 오르내렸던 브랜든 우드의 죽음은 지금 이 순간을 기점으로 사람들의 지독한 관심에서 천천히 멀어질 준비를 하는 중이다.
네스가 죽었을 때, 브랜든은 앞으로 한 달이면 손바닥만 한 기사 하나 보기 힘들 거라고 예언했었다.
그건 정말 놀랍게도 퍽 정확하게 적중했었으니 아마 이번도 크게 다르지 않을 거다. 심지어 브랜든의 죽음은 살인범을 특정하지 못한 것마저 그때와 똑같으니 말이다.
그렇다.
그날 밤, 브랜든 우드는 경찰의 발포가 아닌 어디선가 날아와 정확히 관통한 총알 하나에 곧장 머리가 뚫려 죽었다.
사실 내 기억은 그쯤부터 꼭 약에 취했던 것처럼 오락가락한다.
제아무리 험한 동네에서 지냈다고 한들 죽기 직전까지 저주를 쏟아 내던 사람의 목소리가 굉음과 함께 끊어지는 걸 본 건 그때가 처음이었던 터라, 정확한 순간을 전해 줄 수 없는 걸 부디 이해해 줬으면 좋겠다.
나 역시 브랜든의 머리를 정확히 관통한 그 살벌한 총알이 시작된 게 대구경 저격 총인 M82로 추정된다는 말 정도만 간신히 들은 게 전부다.
……M82라!
“이선. 수고했어.”
멍하게 넋을 놓고 있던 나는, 귓가에 닿는 나직한 목소리에 뒤늦게 눈을 깜박였다.
“수고는 무슨. …나 진짜 별로였지?”
“아니. 그 정도면 충분했다고 생각하는데.”
사실 션의 저 단호한 태도를 뭐라 탓하기는 어렵다.
그는 내가 오늘 이곳으로 오는 걸 정말이지… 끔찍하게 싫어했었다.
심지어는 교회 앞에 차를 댄 다음에도 “지금 당장 돌아서 가도 돼.” 하고 무뚝뚝하게 말했을 정도니 더 말할 것도 없을 거다.
이해한다.
나 역시 브랜든이 션 스펜서의 이름을 들먹였을 때 머릿속이 몇 번이나 하얗게 변한 채로 깜박였었으니까. 그렇지 않아도 나를 싸고돌지 못해 안달인 저 남자의 속이 얼마나 문드러졌을지 감히 예상할 수 있다.
하지만, 사실 난….
시간에 딱 맞춰 도착한 다음 일부러 몇 분 늦게 들어선 교회 안에서 정말 아주 조금쯤은… 그래도 이 마지막에 발 딛길 잘했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션의 손을 깍지 끼어 잡아 쥐면서 느릿느릿 입을 열었다.
“…그래도, 에이전시 쪽에서도 한 명도 안 왔고, 회복 모임에서도 경찰이 얽혔다고 하니까 거의 안 왔잖아.”
“…….”
“덕분에 후련하게 떠난다고 생각하자. 어때?”
대답 대신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여 내 콧잔등에 입을 맞추는 쪽을 택하는 남자의 다정함에, 왠지 단상 위에 올랐던 것처럼 다시 목이 멨다.
“저녁 7시 비행기니까 시간은 넉넉해. 뭐라도 좀 먹겠어?”
“아니. 아직은 별로 안 배고파. 뭘 먹더라도 짐부터 싸고 나서 먹고 싶고.”
우리는 오늘 LA를 떠나 뉴욕으로 간다.
그건 영화 촬영 때문만은 아니다.
영화는 내가 겪은 일련의 사건을 고려해서 최소 한 달의 휴지기를 둔 다음 다시 시작될 거라고 했다.
브랜든의 이름과 함께 얽힌 채 쉼 없이 뉴스를 달구는 두 주연을 두고 과열된 관심을 식히는 쪽을 택하기로 한 거다. 뭐, 애초에 내 정신과 주치의가 눈앞에서 살인사건을 본 내가 곧장 영화 촬영 현장으로 돌아가는 걸 강력하게 반대한 탓도 있다.
“나 무조건 일주일은 관광하면서 쉴 거야. 데이트도 많이 하자. 네 이름 뒤에 데이팅 붙이면 앞으로는 내 사진만 뜨게 할 거야.”
“……그래. 얼마든지.”
“그다음 일주일은 침대에서 뒹굴뒹굴하기만 해야지. 아. 그래도 헨리 씨는 같이 보러 가.”
슬쩍 백미러로 나를 보는 연인의 푸른 눈에 희미한 웃음기가 걸렸다.
아, 뉴욕 얘기를 하기 전에 중요한 이야기를 하는 걸 깜박했다.
난 이제 LA 카운티를 마음껏 백 번이고 천 번이고 벗어날 수 있는 자유의 몸이 됐다.
맙소사, 운 좋아서 가석방으로 30년 살고 나오는 거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했었는데! 솔직히 나한테 유리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코빗 형사가 눈을 뜬 다음, 브랜든이 그를 찌른 건 어찌어찌 증언했다고 하더라도, 어쨌거나 브랜든도, 네스도 죽은 이상 형사 그가 쥐고 있는 건 실질적인 용의자가 모두 죽은 뒤 내놓는 정황증거나 다름없었고, 난 여전히 알리바이를 증명해 줄 사람 하나 없는 운 나쁜 바보였다.
브랜든이 단둘이 있을 때 술술 자백을 털어놓으면 뭐 하나?
그걸 들은 건 이 모든 사건의 피고인인 나뿐인데 말이다.
제아무리 헬렌의 목걸이와 DNA가 브랜든의 차에서 나왔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실종 상태인 이상, 사실 난 검사가 마음만 먹으면 최소한 살인 방조나 협력 정도로는 잡혀 들어갈 수 있었을 거다.
하지만 말이다.
허옇게 질려서 또다시 경찰서로 끌려간 내 앞에서, 그 깐깐한 록산느 어쩌고 하는 검사가 종이 한 장을 내밀면서 딱 한마디 하더라.
‘무조건적인, 완벽한 면책권이에요. 솔직하게 증언하기만 하세요.’
-맙소사. 그 순간 얼마나 팔뚝 위로 소름이 올라왔는지 상상도 못 할 거다! 솔직히 한평생 욕만 하고 살아온 이 나라의 사법제도가 처음으로 달리 보이는 순간이었으니 말이다.
어쨌든, 중요한 건 난 언제나 LA를 오갈 수 있는 자유의 몸으로 돌아왔다는 거다.
잠시 차창 밖을 보며 바람을 쐬고 있자, 션의 듣기 좋은 목소리가 꼭 노랫말처럼 들려왔다.
“뉴욕 일정 다 끝나고 나면 미시간도 갈까.”
“오. 용감한데. 마음의 각오는 다 된 거야? 너 영상통화로도 그렇게 긴장해 놓고, 우리 가족들 실제로 보는 거 감당할 수 있겠어?”
“제대로 된 결혼식은 해야 할 거 아냐. …뉴욕에서 전 재산 다 털 준비나 하고 있는 게 좋을텐데, 자기.”
한없이 다정하고 달콤한 어조에 담긴 세상에서 가장 살벌한 으름장 앞에서 멍하게 눈을 끔벅이던 나는, 한 박자 늦게 그의 말을 깨달았다.
-반지.
재판이 잘 풀리면 얼마가 됐든 내가 산다고 했었지….
“……아.”
“누누이 말하지만 난 아무거나 안 끼어.”
그래. 다 좋다.
설마 션 스펜서가 아무거나 낄 거로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대체 그…… 결혼반지라는 녀석이 얼마 정도 하는 물건인지 예상이 안 된다. 나도 결혼은 처음이라고! 심지어 외동아들이기까지 해서 위아래로 먼저 해 본 사람도 없어!
하지만 여기서 좀스럽게 뺄 수는 없다.
머릿속으로 통장 잔고를 셈하며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자니, 아침부터 영 기분이 안 좋아 보였던 연인이 그제야 보조개가 쏙 들어가는 미소를 걸었다.
……그래. 뭐.
앞으로 저런 남자를 옆에 둔다는데, 내 작고 귀엽고 요만한 통장을 탈탈 터는 게 대수일까. 나는 이제 슬슬 입 밖으로는 꺼낼 수 없는 민망한 생각이 아무렇지도 않게 들기 시작하는 저 자신에게 혀를 내두르면서 괜히 덩달아 실실 풀린 표정을 걸지 않으려 노력했다.
어느새 차는 긴 도로를 지나 익숙한 동네로 접어들고 있었다. 바로 내 아파트가 있는 두어트의 어디쯤이다.
션은 아파트 앞 주차장에 차를 멈춰 세우자마자 금방이라도 같이 내려서 내 경호원을 자처할 듯이 굴었다.
“짐 금방 챙겨서 내려올게. 어차피 가지고 갈 것도 별로 없어.”
“같이 올라가.”
“아니, 괜찮아. 나 혼자 할 수 있어.”
짙고 곧은 눈썹이 살짝 찌푸려진다.
그렇지만, 난 오늘을 저 남자에게 굳이 고집을 부리는 날로 정해 볼까 한다. 대신 뉴욕 가서 말 잘 들어주면 되지 않을까?
“나 혼자… 올라가 보고 싶어, 션.”
“……그래.”
내 친구, 헬렌은 LA 그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았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단지 그뿐만이 아니라…….
5년, 그 이상을 한 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았던 차고 구석의 카라반마저 오래된 바퀴 자국만 남기고 원래 이 도시에 없던 신기루였다는 것처럼 완전히 자취를 감췄다.
경찰도, 나도, 심지어는 션마저 브랜든 우드의 자동차를 마지막으로 흔적이 사라진 헬렌을 찾기 위해 동분서주했지만, 낡고 오래된 흰 카라반을 본 목격자를 이 도시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물론 카라반 지하에 있던 그… 은밀한 비밀 장소 역시 텅 비어 있었고 말이다.
“……후우.”
왠지 한없이 오랜만에 오는 것 같은 아파트의 계단을 올라가 철컥, 하고 열쇠를 집어넣는 느낌이 괜히 생경했다. 그건 아마도 이제 이곳이 포근한 거처라기보다는 이 도시에서 단 하나 남은 친구가 마지막으로 있었던 장소로 다가오기 때문일 것이다.
“…….”
경찰의 수사가 모두 끝난 뒤 션은 이곳으로 사람 몇을 보내 미리 청소했다고 했었다.
…그래, 인정한다.
그 사람들은 확실히 꽤 괜찮은 실력의 고용인들이었던 것 같다.
내심 마음 한구석 깊은 곳에서 남아 있는 걱정을 눌러야 했던 것이 무색하게, 내 작은 아파트는 사진 속에서 봤던 끔찍한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오히려 꾸미며 살았던 때보다 훨씬 더 보기 좋은 모습인 걸 보니 말이다.
-아니. 심지어는 단순히 괜찮은 정도를 넘어서 당장 소박한 오픈 하우스를 한다고 해도 부끄러울 게 하나 없겠다. 나는 왠지 어색할 정도로 말끔해진 아파트 안으로 머뭇머뭇 발을 내디뎠다.
이제 이곳은 그 어디에서도 그 괴팍한 할머니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왠지 불길하기까지 한 곰 깔개도 없고 창문에 덕지덕지 붙어 있던 신문지도 없다. 그저 모든 것이 원래 있어야 할 자리로 돌아가고, 청소한 지 며칠이나 지났을 바닥은 여전히 먼지 하나 보이지 않고 반짝반짝한다.
어깨를 뻐근하게 잡아당겼던 괜한 긴장이 풀리자, 긴 한숨이 기다렸다는 듯 튀어나온다.
역시 얼른 짐이나 챙겨서 내려가야겠다. 옷가지 몇 개와 신발 두어 개만 챙겨 가면 될 거다.
나는 왠지 터덜터덜 힘이 빠지는 무릎에 힘을 준 채로 곧장 침실로 걸어갔다.
말끔하다 못해 사방에서 빛이 감도는 거실과 마찬가지로, 침실 역시 갓 호텔 방에 들어온 것처럼 말끔한 새 베딩이 되어 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같이 올라오자고 할 걸, 괜히 눈물 쏟을까 싶어 따로 오자고 한 건데.
나는 속으로 혀를 끌끌 차면서 침대 옆의 옷장 문을 벌컥 열었다. 조금 전에 한 생각이 곧장 1초 만에 번복될 순진한 착각이라는 것도 모르고 말이다.
“…….”
아무리 내가 줏대 없는 인간이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한 말을 곧장 고치는 건 그리 자주 있는 일은 아니다. 정말이야.
-그렇지만 지금 이건 확실히 다시 말해야겠다.
“혼자 올라오길… 잘했네.”
입 밖으로 저도 모르게 튀어나온 중얼거림에 놀란 나는, 곧바로 입술을 꽉 깨물고는 나 말고는 아무도 없는 침실 안을 괜히 휘휘 둘러봤다. 작은 아파트 안은 옆집의 소음조차 없이 고요하기만 하다.
이 순간 슬슬 거슬리기 시작하는 건 옷장 안, 내가 좋아하는 스웨터 위에 예쁘게 얹어진 손바닥보다 작은 물건이 무엇인지 깨달은 순간부터 서서히 빠르게 뛰기 시작한 심장 박동 소리뿐이다.
나는 작게 숨을 들이켰다 뱉은 다음에 조심스럽게 그것을 움켜쥐었다.
단순하다 못해 20년 전쯤에나 썼을 것 같은 구형의 선불 휴대폰은, 내 주변에서 단 한 사람만이 즐겨 쓰는 물건이다. 나는 그 휴대폰의 폴더를 툭 열었다.
배터리는 98퍼센트.
저장된 연락처는 단 하나다. 나는 그 흑백 액정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왠지 식은땀마저 나는 것 같은 손가락에 힘을 주어 통화 버튼을 눌렀다.
맙소사. 신호가 가기 시작한다.
한 번, 두 번, 세 번….
그 건조한 기계음을 초조하게 곱씹고 있자니, 입술이 바짝 마르고 목이 탄다. 별거 아닐 수도 있다. 그냥 헬렌이 두고 간… 그 많고 많은 선불폰 중 하나일 수도 있지.
그래도 그냥 한 번 해 보는 거다. 알잖나?
그냥. 정말 그냥….
“……여보세요?”
나는 당신이 비밀을 지켜 주리라고 믿는다.
<할리우드 타입 머더러> 끝.